게임 마켓 1983 - 손인성 본 글은 픽션입니다. 인물과 회사명은 일절 사실과 관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자네.. 만약에 시간을 돌릴수 있다면 언제로 가고 싶나?' 허름한 게임가게에서 만난 노인의 말에 2015년의 게임 개발자 강준혁은 23살의 청년이 되어 패밀리가 등장한 1983년. 레트로 게임 시대로 날아가게 되는데.. 게임계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춘추 전국 시대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EP. 1 : 허름한 게임가게 (1) “그럼 이번에 진행 중인 프로젝트. 모바일 쪽으로 방향을 잡는데 모두 이의 없는 거지?” ‘아니. 이의 있다. 망할놈아..’ 하지만,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마음속으로 말을 삼킨다. 빌어먹을.. “그런데 이번 프로젝트. 최종 클라이언트 기간은 언제까지 입니까?” “베타 서비스 진행이 내년 3월이니까 적어도 2월말까진 해야 하지 않겠어?” ‘뭐?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뒤엎고 다시 시작하라는데 고작 6개월 준다고 장난하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대표이사란 녀석은 상석에 앉아 아까부터 코나 후비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저 녀석 대가리 속에는 2월에 게임이 말끔하게 나와서 한 달 정도 마케팅 한 뒤에 서비스 개시하면 돈이 막 굴러들어 올 줄 아나 보지? 천만에 말씀이다. 이번 프로젝트 무조건 폭망하는데, 내 열손가락 다 걸어도 좋다. 그때 한 팀장이 내 표정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나를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거기 준혁씨?” “네.” “뭐 불만 있어? 아까부터 표정이 왜 그래?” “저기 한 팀장님. 이번 프로젝트는 애초에 목표하던 기획이랑은 컨셉이 너무 다른데요. 이건 유저 과금 체계가 심각할 정도인데, 이렇게 게임을 출시하면 유저들에게 엄청 반발을 살 겁니다. 회사 이미지에도 좋지 않구요.” 그러자 한규현 팀장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자기 프로젝트에 조금이라도 토를 달면 저렇게 한쪽 눈썹을 찡그리는 것이 그의 버릇이다. “그래서 준혁씨 말대로 지난번 프로젝트 밀어 줬잖아. 그거 결과가 어땠는지 본인이 더 잘 알지 않아?” ‘씨발. 그것도 네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다 갈아엎었잖아!!’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다. 하지만 그걸 굳이 입 밖에 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해봐야 저기 한 구석에서 코딱지나 파고 있는 대표가 알아들을 리도 만무하고, 한 팀장이 내 생각에 찬성해줄 위인도 아니니까. “너희도 잘 알고 있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게임 시장은 치킨 게임이야. 천년만년 갈 줄 알았던 PC 온라인 시장도 엎어지고, 지금은 무조건 모바일에 치중해야할 때란 말야. 한때 우리랑 비슷한 매출 수준이었던 넷블루 역시 모바일 게임 하나로 현재는 업계 5위 안의 대기업이 되어 버렸어. 너희들은 이런 사례를 보면 뭔가 느끼는 게 없냐? 막 회사를 위해 어떻게 하면 대박을 터뜨릴지 고민이 안돼?” “그렇지, 그렇지.” 대표이사는 팀장의 말에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넷블루.. 그래 모바일 게임으로 부루마불 하나 베껴서 아주 돈을 쓸어갔지만 시즌을 거듭하면서 더러운 과금 체제로 유저들이 다 떨어져 나갔지.. “그리고 우리 하청 기업이었던 게임타운도 요새는 분기마다 계속 신작을 쏟아내고 있단 말야. 그런데 우리 회사는 올해 전반기가 다 지나도록 신작하나 낸 게 없어. 이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그렇지, 그렇지.” 참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 막히다. 그러니 맨 처음 기획으로 타겟을 잡았으면 지난 4월엔 완성이 됐을 텐데, 자꾸만 이것저것 돈 뽑아낼 궁리로 기획을 건드리니 당연히 늦춰질 수밖에.. 거기다가 이번엔 아예 모바일로 플렛폼 자체를 바꿔 버렸으니 작년 11월부터 해왔던 모든 업무는 허사가 되어 버렸다. 한 팀장은 옆에서 계속 맞장구를 쳐주는 대표 이사 덕분에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상태였다. “그래서 말인데, 메인 디렉터 담당 강준혁 과장은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빠지는 게 좋을 것 같아. 당분간 고객 만족팀으로 부서를 옮기는 건 어때? 너 유저들이랑 농담 따먹기 하는 거 좋아하잖아?” “네?” “당신 기획은 너무 유저 친화적이야. 도저히 돈벌이가 안 돼. 우리가 무슨 자원 봉사자도 아니고 무료로 게임을 풀었으면 어떻게든 돈 뽑아낼 궁리를 해야지 무과금 새끼들한테 뭘 그렇게 아이템을 쳐 발라줘. 이번 프로젝트는 내가 직접 진두지휘 할 테니까. 이번엔 빠져있어. 아님 평생 고객 만족팀에서 유저들이랑 놀던가.” 아니.. 딱 봐도 거지같은 결과물이 나올게 뻔한데, 네 녀석이 싸지른 똥을 나보고 치우라고? 거기다 게임 기획이나 프로그램에 관해선 쥐뿔도 모르는 디자인 팀장이 이번 프로젝트 메인 디렉터라니.. 회의실에 모여 있던 이번 프로젝트 담당자들의 표정이 팍하고 찌그러졌다. “다들 표정이 왜 그래? 불만이 있으면 지금 말을 해. 준혁씨랑 같이 고객 만족팀으로 보내 줄 테니 가서 댓글이나 달어.” 회의실은 조용했다. & “아~ 씨발.. 과장님. 저 진짜 못 해먹겠습니다. 한 팀장 그 자식 밑에서는 같이 일 못해요.” 퇴근 시간. 평소 나와 친분이 깊은 이 대리가 툴툴거리며 말을 붙였다. 손목시계를 보니 어느새 시간은 오후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후.. 부서 변경 마지막 날까지 야근이라니.. 나는 책상 위에 내 소품을 박스에 정리 한 뒤 제 2 개발팀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과장님 정말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물러나실 겁니까?” “말을 하면? 들어나 주겠어?” “그래도 최소한 발버둥은 쳐보셨어야죠.” “됐다~ 나도 이젠 지쳤어. 지금 대표이사는 전 대표랑 마인드가 너무 달라.” “너무 하십니다. 과장님. 같이 좋은 게임 만들자고 저 꼬드겨서 데려오셨으면 끝까지 데리고 가주셨어야죠~” “그럼 너도 나 따라서 고객 만족팀으로 갈래?”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미안하다. 나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과장님도 기분이 많이 안 좋으실 텐데 화가 나서 그만 주제넘게 나댄 것 같네요.” “그래도 너라도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한 팀장이랑 조율 잘해서 프로젝트 잘 이끌어 가고..” “네, 알겠습니다.” “혹시 시간 되면 술이나 한 잔할까?” “아, 요새 마누라 눈치 보는 중이라 술은 좀..” “쩝. 그래 알았다. 그럼 나 먼저 갈게.” “들어가세요. 과장님.” 이 대리와 헤어지고 회사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저녁 공기가 느껴졌다. 벌써 가을이 오려나? 나는 주차장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잠시 멈춘 채 회사 건물을 돌아보았다. 올해 나이 34살. 개발자 경력만 15년인데, 내일부턴 고객 만족팀 과장이라니.. 참 어이가 없다. 게임 회사에 들어가면 내가 원하는 게임 마음 것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첫 입사 후 8년 간 다른 사람이 기획한 게임을 만들기 바빴고, 그것은 메인 디렉터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 였다. 내가 만드는 게임이 어떤 점에서 재밌는가에 대해 어필하기 보단 대표이사에게 이만큼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라고 설명해야 하고, 가장 적은 인력과 개발비로 몇 배 만큼의 수익을 증대 시킬 수 있다는 프리젠테이션을 해야만 했다. 결국 내가 만든 게임은 소위 대박을 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더니, 개발 중인 프로젝트에 이 사람 저 사람이 끼어들며 애초에 기획했던 형태와는 너무나 다른 결과물이 나와 버렸다. 거기다 빠른 자금 회수를 위해 제대로 테스트도 거치지 않은 게임은 출시 후 연일 버그과 서버 불안정에 시달려야 했으니 당연한 결과지.. 최근 모바일 게임의 트렌트는 무조건 스피드다. 빠르게 출시하고 딱 2주 정도 지켜 본 뒤에 뜰지 안 뜰지를 판단하고 바로 서비스를 접어 버리곤 했다. 뭐하나가 뜬다 싶으면 곧바로 그걸 베끼기 바쁘고 살짝 형태만 다른 게임이 출시되고 나면 서로 자기네 걸 베꼈다고 아우성 치는 아비규환.. 지금 나는 모바일 게임의 한국판 아타리 쇼크를 보는 듯하다. 1980년대 미국의 게임 시장 주도했던 아타리 사는 게임계의 흑 역사 중에 하나다. 개발 툴을 공개한 뒤 너도 나도 게임을 만들어 찍어내자 제대로 검증도 되지 않은 게임이 홍수처럼 터져 나왔고 연일 쏟아지는 저급 게임에 정점을 찍은 것은 그 이름도 유명한 E.T였다. E.T가 개봉되고 난 후 그 해 크리스마스 시즌 발매를 맞추기 위해 단 5주 만에 만들어낸 정체불명의 괴작은 전량 리콜 사태를 맞으며 미국의 뉴멕시코 주 사막 한 가운데에 묻혀 버렸다. 당시 30억 달러에 육박하던 게임 산업을 1억 달러로 줄여버린 아타리 쇼크.. 지금 모바일 게임 시장은 그때와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집에 가봤자, 아무도 없을 테고 집 근처에서 술이나 한잔 할까?” 주머니 속에서 차 키를 꺼내 들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올해 나이 34살. 아직까지 나는 미혼이다. ──────────────────────────────────── ──────────────────────────────────── EP. 1 : 허름한 게임가게 (2) & 솔로라 좋은 점이 이런 걸까? 집에 차를 대놓고 근처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 2병을 깐 나는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그래 이런 날 술이라도 안마시면 어찌 버티겠어~ 킥킥 나는 취기에 혼자 킬킬 거리며 거리를 걸었다. 내일부터는 이제 게임 개발이랑은 완전 동떨어진 곳에서 일을 하겠구나. 빌어먹을.. 어릴 때부터 동경해온 게임 기획자의 꿈도 결국 이렇게 끝나는 건가? 뿅뿅뿅~ 그때 어디선가 귓가를 때리는 비트음에 나는 비틀거리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삐비삐삐비빕삐.. 마치 레트로 게임에서나 들을 법한 정감 어린 사운드..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아도 주변은 모두 문 닫은 상점가들 뿐이었다. 뿅~ 뾰뵹~ 하지만 분명히 들린다. 이건 갤러그 미사일 쏘는 소리인데.. 너무나 추억어린 사운드에 나는 미친 놈 마냥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소리를 쫒았다. 뚱~ 뚱~ 이번엔 슈퍼마리지가 점프할 때 나는 효과음? 혹시 주변에 오락실이 있는 건가? 하지만 내가 알기로 오락실은 90년대 말에 거의 다 사라졌을 텐데? 혹시 게임 파는 가게가 주변에 있나 싶었던 나는 간헐적으로 울리는 비트음을 쫓아 걸음을 옮겼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그 단조로운 비트음은 나에게 있어 오래된 팝송처럼 추억어린 효과음 이었다. 그렇게 자정이 넘은 밤거리를 얼마나 해맸을까? 어느 구석진 골목에 환하게 불이 켜진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낡은 브라운관 TV와 유리 진열대. 그 안에는 회색빛의 게임 카트리지가 즐비하게 놓여있었다. “어서오슈..” 가게 안에는 백발의 노인이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어르신..” “젊디 젊은 녀석이 왜 이리 표정이 죽을상이누? 무슨 일 있는가?” “그냥 회사 일에 좀 치여서요. 그런데 어르신 어디서 이 많은 레트로 게임을 모으셨나요? 이정도면 거의 박물관 수준인데?” 그도 그럴 것이 좁은 상가 안에는 온갖 게임 관련 상품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그러나 현재 인기가 많은 차세대 게임은 전혀 없고 모두 8~90년대에 유행했던 레트로 게임들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온 것처럼 묘한 흥분감에 사로 잡혔다. 어릴 적에 클리어하기 위해 밤을 지새웠던 닌자용검전 시리즈부터 파이널 프론티어, 드래곤 오더등 카트리지는 먼지 하나 없이 새것처럼 놓여 있었다. “끌끌끌~ 어때? 탐나나?” “이거 파시는 거 맞죠?” “물론 팔려고 내놓은 것들이니 사가는 사람이 임자지~” “얼만데요?” “개당 2천원씩 만 주게.” “이.. 이 천원이요!? 어르신 이런 물건들은 요새 인터넷에 올리면 개당 몇 십 만원도 받을 수 있어요. 특히 이거!!” 나는 진열 되어 있던 게임 카트리지 중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녀석 하나를 꺼내들었다. 한때 우정파괴 게임의 대명사로 불리었던 패밀리의 근육맨. 이 황금 패키지는 일본에서 딱 8개만 만들어진 초 레어 아이템이다. 이게 일본 옥션 경매에서 낙찰가가 30만엔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것뿐이냐, 패밀리 여름 캠프에서 지급된 전 세계에 100개 밖에 없다는 한정 미니카 게임도 버젓이 진열되어 있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게임들은 옥션 경매 가격으로 따지면 엄청 초 고가에 거래될 물건들뿐이었다. “자네, 게임을 참 좋아하는군.” “물론이죠. 그래서 제가 이 나이에도 게임을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자네, 게임을 만드나? 허어~ 그거 대단하군.” 어제까지였지만요. 나는 속으로 말을 삼키며 노인에게 베시시 웃어보였다. 노인 역시 그런 내가 마음에 드셨는지 주름살이 깊게 패이며 껄껄 웃으셨다. “아, 그립다. 이 시절에 나온 게임들 참 좋았는데..” 나는 한쪽에 꽂혀져 있는 카트리지 하나를 집어 올리며 쓴웃음 지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전 민텐도 사장 ‘카와타 사토시’가 젊은 시절 만들어낸 명작. 벌룬 파이트였다. 3개의 풍선을 이용해 공중을 날아다니며 상대방의 풍선을 터뜨리는 게임은 패밀리 시절 친구가 집에 놀러오면 밤을 새서 즐겼던 게임 중에 하나였다. 한번은 이걸로 친구랑 엄청 싸워서 한 달 동안 말도 안 붙이고 살았었는데.. ‘가속에 의한 관성’ 이라는 효과를 처음으로 적용한 게임. 그것은 이후 슈퍼마리지의 달리기 모션에서도 차용이 될 만큼 흥미로운 효과였다. “벌룬 파이트~ 그것 참 명작이지. 자네 보는 눈이 제법이야.” “조금만 구경 좀 해도 되겠습니까. 어르신?” “그러게나 어차피 손님도 없으니 천천히 둘러보게.” “감사합니다.” 나는 비좁은 매장에 들어서 이것저것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찮게 한 게임기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이건?” 나의 반응에 유리 진열대에 두 팔을 기댄 채 나를 바라보는 노인의 얼굴에도 묘한 웃음이 그려졌다. 내가 집어든 그것은 게임 & 워치라는 물건이었다. “허.. 내가 이걸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나는 내 손에 들린 게임&워치를 보물 다루듯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휴대용 게임기 시장의 시초라 불리는 이것은 지금 민텐도 사가 만드는 휴대용 게임기의 롤 모델이라 볼 수도 있었다. “허허~ 그게 마음에 드나?” “그럼요. 그런데 어르신 이 게임 & 워치는 처음 보는 모델인데요? 어릴 적에 부모님 졸라서 시리즈를 다 모은 적이 있어서 기억하는데, 이 모델은 처음보네요.” “그야 그럴 수밖에.. 그건 전 세계에 딱 한 대뿐인 녀석이거든.” “네!? 딱 한 대라고요? 그렇게 귀한 물건이 어떻게 여기에.. 아니, 어르신 가게를 무시하는 건 아니고 단 한 대만 있다면 보통 민텐도 본사에서 기념으로 가지고 있을 법해서요.” “누가 뭐랬나? 젊은이가 호들갑은~ 껄껄~” “아하하.. 그런데 정말 멋지네요. 전 세계에 딱 한 대뿐인 게임 & 워치라니.. 이거 한번 해볼 수 있나요?” “건전지는 들어가 있으니 바로 해볼 수 있지. 한번 해보게.” “아, 감사합니다.” 나는 어르신의 허락에 곧장 뚜껑을 열고 게임을 켜보았다. 딩딩딩딩~~ 단조로운 비트음과 함께 게임 플레이가 시작되었다. 나는 게임 화면을 잘 보기 위해 형광등 쪽으로 향했다. 스톱 애니메이션 기법의 게임&워치는 백라이트 기능이 없었기에 어두운 곳에서는 플레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회사원 게임- 그것이 이 게임 & 워치의 이름이었다. ──────────────────────────────────── ──────────────────────────────────── EP. 1 : 허름한 게임가게 (3) -회사원 게임- 그것이 이 게임 & 워치의 이름이었다. 게임 & 워치는 1997년 교통사고로 사망한 니세코이 군페이의 작품이었다. 그 당시 게임이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완구 수준의 물건이었기에 동킹콤이나 카린의 전설, 드래곤볼 같은 어린이 취향의 게임이 상당히 많았는데, 이 녀석은 아이들 취향의 게임이라기엔 제목부터 수상한 물건이었다. “어떻게 플레이 하는지는 알겠나?” “딱 감이 오네요.” 게임 & 워치는 개발부터 5~6세 어린이용으로 만들어 졌기에 플레이 방식이 극히 단조롭다. 좌우의 방향키와 확인 버튼 하나. 게임은 회사원인 주인공이 바이어와 만난 후 책상에서 보고서를 작성하고 오너에게 결재를 맡는 시스템이었는데, 이 모든 액션은 한칸 한칸 움직일 때마다 캐릭터가 표시되는 스톱 애니메이션 기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즉 좌우로 빠르게 왔다갔다하며 바이어와 오너의 중계자 역할을 하는 것이 플레이 내용이었는데, 재밌는 것은 바이어와 만나는 시간이 딜레이 되거나 갑자기 오너가 자리를 비워 결재를 못 받는 상황을 연출하여 묘하게 긴장감을 고조 시키고 있었다. ‘이거 꽤나 잘 만들었잖아?’ “자네 제법 센스가 있구먼~” “어릴 때 정말 많이 했었거든요. 대략적인 시스템은 이미 이해하고 있어서.. 그런데, 이 게임을 하다 보니 주인공 캐릭터가 꼭 저랑 같네요.” “직장인들이 다들 그렇지. 끌끌..” “그러게요. 게임에서까지 이렇게 시달리니 우울하네요.” “그런가? 허허~” 나는 어느 정도 게임을 플레이하다가 뚜껑을 덮어 어르신에게 돌려 드렸다. 그러자 노인은 물끄러미 내가 내민 게임 & 워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자네. 게임을 만든다고? 그럼 어떤 게임을 만들고 있나?” “지금까지 만들어온 건 PC용 온라인 게임인데, 요즘엔 하도 모바일 게임이 많이 나오다 보니 예전처럼 큰 그림을 그리긴 힘들어요. 무조건 플레이 시간은 5분 내외로 즐길 수 있어야하고, 노가다 플레이를 강요하고 있죠..” “그래도 그것이 시대의 흐름이란 게 아니겠나? 유저의 취향을 맞춰가는 거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릴 때 패밀리가 유행했던 것처럼 지금도 콘솔을 이용해 패키지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들은 전 세계에 얼마든지 있지요. 공짜로 푼다고 유저들이 너도 나도 플레이 하진 않아요. 중요한 건 게임의 질입니다.” 내가 지금 백발의 노인에게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람? 하지만 몇 달 전부터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았던 응어리가 한 번에 터져 나가는 것처럼 좀처럼 열변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지금의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즐기는 게임이 모바일 게임이라는 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유저들에게 다양한 장르의 선택권은 줘야지요. 매번 비슷비슷한 게임을 쏟아내면서 공짜니까 한번 해 봐. 대신 엔딩 따윈 없고,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으면 돈을 내. 이 따위로 운영하는 게 과연 맞는 걸까요? 모든 일에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말이죠.. 엔딩도 없는 쓰레기 같은 게임들이 세상에 넘쳐 나고 있다 구요. 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돈이 안 되면 그냥 서비스를 종료하고 죄송하다. 한마디로 끝. 이게 말이나 됩니까?” “거.. 젊은이 말 한 번 잘하네..” “하아.. 하아.. 아닙니다. 제가 너무 흥분했네요. 죄송합니다. 어르신.” “아냐, 아냐. 나도 아주 간만에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네. 그렇지 모름지기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그런 신념은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지.” “그래도 어르신께 말씀 드리고 나니 속이 시원하네요.” “그래? 껄껄~ 이 봐 젊은이. 만약에 말이야. 자네가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느 시대가 좋겠나?” “네? 아, 글쎄요. 별거 아닌데 거참 은근히 고민 되는데요? 그래도 만약에 돌아갈 수 있다면 1983년이 좋겠죠.” “왜 그런가?” “그야 아타리 쇼크가 끝나고 2세대 콘솔인 민텐도의 패밀리가 발매 되던 시기 아닙니까. 열정과 꿈으로 똘똘 뭉친 젊은 개발자들이 넘쳐 나던 시기니까요.” “그래? 허허~ 그렇군. 그 시대가 참 재밌었지. 어쩌면 진정한 게임이란 콘텐츠 자체가 막 꿈틀대던 시기이기도 하고~ 그러면 말이야. 정말로 그 시대로 갈 수 있다면 자네는 무얼 하고 싶은가? 지금처럼 또 다시 게임 개발자가 되고 싶은가?” 나는 어르신의 말에 잠시 동안 깊이 생각해 보았다. 마치 체스를 두듯 상대방의 반응을 즐겁게 살피고 있는 어르신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아니요. 개발자가 되지 않겠습니다.” “허어? 어째서? 이제 게임이 싫어진 건가?” “아니요.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게임을 만드는 것은 개발자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요.” “음? 그게 무슨 말인가?” “만약 지금의 지식을 그대로 가지고 그 시대로 갈수 있다면 전 콘솔을 만들고 싶습니다. 지금의 민텐도와 센소니에 버금가는 콘솔 기업을 만들어 개발자가 되고 싶습니다.” “아하~ 스스로 오너이자, 개발자가 되겠다는 거로군? 좋은 생각이야~ 훌륭해.” “그런가요? 하하.. 하긴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네요.” “그런가? 허허~ 젊은이가 좋아하니 나도 참 오랜만에 즐거워지는군. 그래.. 맞아. 게임은 그런 거였지..” “어르신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뭔가 여태 것 혼자 끙끙 않고 있던 게 풀린 기분이 들어요.” “왜? 벌써 가보려구?” “내일 또 출근해야 하니까요. 직장인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군. 나도 이제 그만 들어가 볼까? 시간이 너무 늦었어.” “지금 들어가시게요? 그럼 제가 가게 정리 좀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래? 젊은 사람이 예의도 바르군. 그럼 저기 밖에 있는 가판대 좀 안으로 옮겨 주겠나?” “네, 물론이죠.” 나는 가게를 나서다가 무의식중에 내 손에 들린 게임 & 워치를 바라보았다. 아이쿠, 혹시 훔치는 걸로 오해 받으면 안 되니까. 가게 안에 놓아야지. 전 세계에 하나뿐이라던데 얼마나 소중하시겠어. 그렇게 고개를 돌린 순간.. “어..?” 내 눈앞에는 굳게 닫혀진 셔터가 보였다. “뭐지? 어르신? 어르신~!!” 마치 꿈을 꾼 듯 한 느낌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밝게 전등이 켜져 있던 게임 가게는 잠깐 내가 등을 돌린 사이 허름한 폐건물 상가로 변해 있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살짝 볼을 꼬집어보았지만, 감각은 확실히 살아 있었다. 여우한테 홀린 것도 아니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하지만 분명 내 오른손에는.. 나는 고개를 돌려 여전히 내 손에 들려 있는 게임 & 워치를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 ──────────────────────────────────── EP. 2 : 게임 & 워치 (1) 쏴아아~~ 집에 돌아온 나는 먼저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쳤다. 대체 방금 전에 나에게 일어난 일은 무얼까? 그냥 내가 술에 취해 이상한 몽상을 한건 아닐까 싶었지만, 샤워를 마치고 나온 거실 탁자에는 여전히 어르신에게 받은 게임 & 워치가 놓여 있었다. “이상하네..” 나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탁자 위의 게임 & 워치를 집어 들었다. 시간은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일 출근을 위해서라면 빨리 자는 게 좋겠지만, 황당한 일을 겪고 나니 쉽게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달칵. 게임 & 워치의 뚜껑에 달린 경첩이 기분 좋게 열렸다. 지금도 휴대용 기기의 왕좌로 군림하고 있는 민텐도 3GS의 더블 스크린 채용은 바로 이 게임 & 워치의 디자인에서 가져 왔다는 이야기는 이미 유명할 정도였다. “확실히 간단하지만 재밌어. 그래 이런 게 바로 게임이란 거지.” 띡. 띡. 띠딕. 단조로운 효과음이 거실에 울렸다. 티비도 켜지 않고 어느새 나는 온 신경을 게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슬로우한 진행 방식이지만 점수가 10만점에 이르자 조금씩 스피드가 빨라졌다. 바이어는 자꾸만 약속시간을 딜레이 시키고 오너는 어딜 그리 뺀질 나게 다니는지 자꾸만 자리를 비워대고 있었다. “여기 나오는 오너는 꼭 우리 회사 대표이사 같구만, 킥킥.” 곧이어 여유 있게 등장하는 바이어를 바라보면서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 새끼는 딱 봐도 한 팀장이네. 맨날 회의 시간도 제 멋대로 정하고 늦게 들어오는..” 질수 없지. 질 수 없어. 나는 손가락이 저릴 정도로 미친 듯이 주인공을 움직여 일을 날랐다. 생전 처음해보는 게임임에도 아무런 튜토리얼 없이 곧바로 게임에 적응해 나갈 수 있게 제작 된 레벨 디자인에 나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삑삑삑!! 삑삑!! 삑! 삐비빅!! 내가 놀리는 손놀림의 속도에 따라 효과음이 점점 빠르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어느새 30만점이 넘어 가고 게임속의 주인공은 이제 마치 분신술을 하는 홍길동처럼 좌우로 미친 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삐이이익.. GAME OVER. 결국 부장의 잦은 자리 비움에 쌓여 있는 결재 서류를 넘길 수 없던 나는 결국 52만점이라는 스코어를 세우고 게임을 종료 시킬 수밖에 없었다. “아, 손가락 아파.. 지금 몇 시지?” 자는 저린 손가락의 마디를 풀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2시 반!? 미친 이걸 내가 1시간 반 동안 하고 있었다고!?” 좋은 게임은 마치 타임머신과도 같다. 게임에 집중하는 동안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가 버리는 느낌. 나는 황당한 기분에 쓰게 웃으며 게임 & 워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위쪽 화면에 게임 스코어에 따른 랭킹 표시가 나와 있었다. 총 528,200점을 얻은 나의 랭킹은 3위였다. 2등은 80만점. 1등은 90만점. 이걸 어떻게 1등을 하냐~ 나는 확인 버튼을 누른 채 화면을 넘겼다. 그러자 위쪽 화면에 다른 표시가 떠올랐다. -당신이 획득한 스코어를 급여로 환산합니다. 이번 플레이에서 당신이 얻은 급여는 5,282,000엔입니다.- “어라? 급여..? 아~ 맞다 이거 회사원 게임이었지. 스코어를 따면 그걸 환산해서 급여로 표시해주는 거구나. 재밌네~” 스코어 표시 아래쪽에는 누적 급여 표시가 있어 내가 플레이한 스코어에 따라 계속 플러스를 시켜주는 듯 했다. “한 시간 반 만에 5천만원을 넘게 벌었네. 허허~” 비록 소중한 새벽 잠 한 시간 반을 투자 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래도 게임 안에서는 부자가 된 기분에 나는 게임 & 워치를 덮고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게임가게에 있었던 일이 여전히 신경 쓰이긴 했지만, 게임에 집중하다보니 정신 적으로 피로감을 느낀 나는 곧 잠이 들었다. &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일하게 된 개발팀의 강준혁 과장입니다.” 새로운 부서에서의 첫 인사. 고객 만족 팀은 개발 부서와는 전혀 동떨어진 곳에 있어서 그런지 직원들과 안면은 있지만, 딱히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 업무 시간 내내 개발실에 틀어박혀 있던 나였으니.. 아무래도 다른 부서 직원들과 친해지기가 힘들긴 했지.. 어색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나는 비어 있는 과장 자리에 소품을 내려놓았다. “우선 난 신경 쓰지 말고 평소 하던데 일들 보세요. 저도 적응을 좀 해야 하니까. 하하..” 그러자 좁은 사무실에 직원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가 ‘좌천’이란 말도 들린 듯하다. 좌천.. 그래 맞는 말이지. 개발실 팀장에서 고객 만족 팀 과장이면 귀향살이도 이런 귀향이 없을 정도니까. 아직은 딱히 바쁠 게 없는 오전 업무시간. 나는 조금 직원들과 가까워져볼까 하는 마음에 회사 밑에 커피숍에 들렀다. “아메리카노 8잔이요.” 커피를 주문 한 나는 커피가 나올 동안 의자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커피 8잔에 36,000원이라. 웬만한 식비보다 금액이 더나오네. 이번 달 잔고가 얼마나 남았더라? 혼자 살고 있어도 은행 융자금 갚느라 월급이 들어오는 데로 퍼 나가는 마당이라 36,000원도 크게 느껴졌다. 어쩌면 직원들에게 돌린 이 커피 때문에 난 몇 일 동안 점심을 굶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잠시 후. 스마트 폰으로 통장 조회를 한 나는 나도 모르게 헉하고 마른 숨을 삼켰다. “뭐, 뭐야 이거?” 잔액 5,300만원? 내 통장에 5천만원이 넘게 있을 리가 없는데? 뭐지, 신종 사기인가? 나는 서둘러 거래내역을 살펴보았다. 새벽 2시 32분. 입금자. 게임 & 워치 52,820,000원. 나는 멍하니 스마트폰을 바라보다가 눈을 비벼 보았다. 하지만 통장에 들어온 금액은 정확히 어제 내가 클리어한 게임 스코어 점수와 같은 금액이었다. 단지 엔화가 원화로 바뀌었을 뿐. “저기~!! 손님.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종업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카운터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몇 번이나 불렀는지 종업원의 표정에 살짝 짜증이 섞여 있었다. “아, 죄송해요. 잠깐 딴 생각 좀 하느라..” 나는 서둘러 커피를 받아든 뒤에 커피숍을 나왔다. 하지만 아직도 놀란 가슴이 진정 되지 않았던 나는 잠시 벤치에 앉아 쉬었다. 진정해라.. 강준혁. 지금 너에게 굉장히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 하지만 침착해야 해. 침착해야 한다. 잠시 후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나는 커피를 들고 고객 만족 팀 사무실에 돌아왔다. “커피들 마셔요.” “아, 네.. 감사합니다.” 아직까지는 친해지지 못한 부서 직원들에게 손수 커피를 하나씩 들려주자 그나마 어색했던 분위기가 조금은 누그러드는 듯했다. & 그날 점심시간. 부서 직원들이 모두 식사를 가고 혼자 사무실에 앉아 있던 나는 가방에서 게임 & 워치를 꺼내들었다. 출근할 때 어제 일을 떠올리며 챙겨 오긴 했는데, 막상 이렇게 다시 보니 굉장히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급여를 꽂아주는 회사원 게임이라 이거지?’ 달칵. 나는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기 위해 게임 & 워치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 ──────────────────────────────────── ──────────────────────────────────── EP. 2 : 게임 & 워치 (2) ‘실제로 급여를 꽂아주는 회사원 게임이라 이거지?’ 달칵. 나는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기 위해 게임 & 워치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삑, 삑, 삑. 조용 한 사무실 안에 단조로운 효과음이 울리고, 이내 나는 배고픔조차 잊어버린채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라? 과장님 식사 안하셨어요?” 삐비빅.. GAME OVER. 약 한 시간 가까이 플레이 한 결과 내가 얻은 스코어는 37만점 이었다. “아. 나래씨? 벌써 왔어요? 천천히 식사해도 되는데.” “충분히 천천히 먹고 왔는데요? 그런데 식사도 거르시고 괜찮으세요?” “전 괜찮아요. 잠깐 확인 좀 할 게 있어서..” 나는 게임 & 워치의 확인 버튼을 누르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살짝 눈을 돌려 아래를 살피니 랭킹은 5위를 기록한 뒤 스코어를 급여로 환산 중이었다. 자~ 그럼 어디보자.. 나는 스마트 폰을 꺼내 들고 은행 어플을 실행해 보았다. 입금자. 게임 & 워치 37,453,000원.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단 한 시간 만에 3700만원을 벌어들이다니 웃음이 안 나오고 베기겠는가? 거의 하루 만에 1억에 가까운 돈이 들어왔다. & 그날 오후. 나는 새하얀 봉투를 들고 대표이사 실을 찾았다. “들어 와.” 끼이익.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서자 비좁은 사무실 가죽 의자에 앉아 코를 후비던 대표이사가 나를 바라보았다. “강 과장? 무슨 일이야?” “대표님. 저 회사 그만 두겠습니다.” “뭐!?” “어차피 어제 부로 부서 이동된 거 인수인계 할 필요도 없겠죠? 그러니 사표 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이, 강 과장. 자네 지금 이번 인사 건에 불만 있다고 시위하는 거야?” “아니요. 그랬으면 어제 당장 그만 뒀겠죠. 그냥 하루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이 회사는 더 이상 비전이 없어 보입니다.” “뭐라고? 허~ 이거 참.” “지난 15년 동안 다닌 회사입니다. 대졸은 아니었어도 아등바등 여기까지 올라오긴 했는데, 더 이상은 못 참겠네요.” “알았다. 알았어. 강 과장. 원하는 게 뭐야? 다시 개발실로 부서 이동 시켜줘?” “아뇨. 그냥 퇴직을 원합니다.” “이 사람. 아주 작정을 하고 왔구만.” “네. 그만 두고 싶습니다.” “대체 나가서 어디로 가려고? 그래 봤자 이 바닥에서 자네 게임 반겨줄 만한 곳은 이제 없어.”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그래서.. 제가 한번 게임을 만들어 보려구요.” “뭐라고..?” 그것이 15년간 몸담았던 회사 대표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 “자~ 그럼 이제 시작 해볼까?” 회사를 그만두고 5일이 지난 저녁. 나는 뜨거운 물로 사워 후에 몸과 마음을 가능한 편하게 릴렉스 시켰다. 난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어. 잠시 동안 마음을 다 잡으며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마치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부드럽게 움직인다. 좋아~ 시작하자. 달칵. 경건한 마음으로 자세를 고쳐 앉은 채 나는 게임 & 워치를 손에 들었다. 오늘 내가 노리는 것은 이 망할 게임의 1위 탈환이었다. 모든 끝장을 봐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나였기에 지난 5일 동안 거의 내내 이 게임에만 매달렸다. 그래서 현재 내 통장 잔고는 약 200억에 가까운 돈이 들어와 있었다. 어젯밤 랭킹은 2위를 탈환했지만 아쉽게 1위와 300점이 모자라 탈락한 나는 야밤에 괴성을 질러 대었다. 깜짝 놀란 아래층 사람이 초인종을 누를 정도였다. “후우.. 할 수 있어.” 긴 한숨과 함께 스타트 버튼을 누르자 지난 5일 동안 지겹게 봐왔던 회사원 게임이 시작되었다. 시작은 가볍게 삑. 삑. 삐빅. 춤을 추듯이 움직이는 손가락. 이미 50만점 따위는 가볍게 돌파해 나간다. 문제는 80만점부터였다. 이 빌어먹을 바이어와 오너는 마치 게임속의 주인공을 일부러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듯 했다. 하지만 포기 할 수 없지. 이제 85만점. 5만점만 더 얻으면 1위 탈환이다!! 삐비비빅. 삐비빅. 삑삑. 삐비비빅. 삐비빅. 내 평생 이 토록 하나의 게임에 집중해 본적이 있을까? 실 급여가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게임이지만 대체 1위를 하게 되면 뭐가 나올지가 더 궁금했다. 랭킹 표시의 1위 옆에는 왕관이 그려져 있었는데, 정말 뭣도 아닌 그 왕관이 너무나 탐이나 미칠 지경이었다. 안 돼지. 안 돼. 잡생각은 하지 말자. 여기서 부턴 작은 실수 하나로 곧바로 게임오버에 이어지니까.. 기계처럼 정확하게 이동 시켜 포인트를 벌어내자!! 삐빅. 삑!. 삑삑삑!!. 89만점.. 좋아!! 얼마 안 남았어!! 나는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채 미친 듯이 게임에 몰두 했다. 손가락은 이미 감각을 잃은지 오래였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 할순없어. 포기 하면 다시 처음부터 해야 돼!! 삑! 삐비빅!! 야이 오너 이 개새끼야!! 어디 갔어!!! 삐비비빅!! 바이어 이 미친놈아 빨랑 안 튀어와!! 으아아아!!! 뚜두두둔 뚜둔~!!! 넘었다.. 넘었어. 90만 2천점.. 그래 1등이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 할 순 없지 아예 999,999점을 찍어 주마!! 이미 1위를 탈환했어도 나는 손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이젠 숨조차 쉬는 것도 잊은 단계. 지금 버튼을 두드리는 게 내 손가락이 맞는지를 모르겠다. 그리고 모든 스코어에 9가 찍힌 그 순간.. 뚜두두두두두두..... GAME CLEAR. “응? 클리어라고?” 게임 & 워치에 클리어가 어딨어? 에라 모르겠다~ “푸하~~~” 나는 소파에 몸을 뉘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깼다. 끝났어..” 뚜두두둔 두둔~!! 경쾌한 효과음 소리에 게임 & 워치를 바라보니 흑백 디스플레이에 폭죽이 터져나가고 있었다. 하하.. 이렇게 보니 정말로 게임이 끝이 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이 게임을 깨버렸으면 이제 더 이상 급여가 들어오지 않는 건가? 어라? 그러고 보니 그 생각을 못했네!? “에이.. 이미 200억이면 평생을 쓰고도 남을 돈이지..” 거기서 1억 더 얹어 봤자 거기서 거기다. 아무튼 클리어 한 보람이 크니까 됐어. 그렇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디스플레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컬러..?” 그렇다. 스톱 애니메이션을 표현해 주던 흑백 액정 디스플레이가 싹 하고 컬러풀한 디스플레이로 바뀐 것이다. “뭐야 이게? 아직 뭐가 더 남은 건가?” 그 순간 새하얀 화면 위에 한 가지 문구가 떠올랐다. -당신이 돌아가고 싶은 연도를 정해주세요.- 그 문구를 보는 순간. 게임 가게의 어르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봐 젊은이. 만약에 말이야. 자네가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느 시대가 좋겠나?’ ──────────────────────────────────── ──────────────────────────────────── EP. 2 : 게임 & 워치 (3) ‘이 봐 젊은이. 만약에 말이야. 자네가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느 시대가 좋겠나?’ 설마 그 대화의 의미가 이런 것이었나? 나는 잠시 동안 화면에 깜박거리는 연도 표시를 움직여 보았다. 그 시작은 1983년. 미국에서 시작된 아타리 사의 몰락부터 시작 되고 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한 시대를 이끈 아타리 기종의 몰락과 동시에 일본에서 새로운 희망이 탄생했는데 그것이 바로 민텐도사의 패밀리였다. 재밌는 것은 연도 표시를 움직일 때마다 그 해에 주목을 받은 게임계의 유명 인사들이 하단부 화면에 표시 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아직도 현장에서 뛰고 있는 개발자도 있었고, 고인이 된 인물들도 여럿 있었다. 나는 그중에 지금 내가 손에 들고 있는 게임 & 워치의 창시자인 니세코이 군페이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민텐도 3GS의 조작 방식이 떠올라 버릇처럼 하단부 화면을 터치하자 그에 대한 간단한 소개 페이지가 떠올랐다. “터치인식이라니.. 아예 기기 자체가 최신 트렌드로 바뀌어 버렸네?” 나는 손가락으로 하단부의 소개 페이지를 슥슥 넘기던 중 재밌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1983년 당시 그의 스케쥴 표였다. 각 도시의 이동 경로와 시간까지 자세히 기록 된 터라 만약 그 시대로 가더라도 그 사람을 만나 볼 수 있는 일종의 네비게이터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었다. “이거 잘만 사용하면 우연을 가장해 엄청난 인물들을 만나 볼 수도 있겠는데? 사실 돌아 갈수 있다면 조금 더 게임 산업이 안정화된 슈퍼 패밀리 시대가 좋긴 하겠다만, 진정한 게임 매체의 태동기를 느껴보고 싶었던 나는 노인에게 이야기 했던 대로 1983년의 시대에서 확인 버튼을 눌렀다. -당신이 가고 싶은 나라는 어디입니까? 기기 하단 부의 마이크에 대고 말씀해 주세요.- “마이크?” 화면에 표시된 명령에 따라 기기 밑을 유심히 살펴보니 좌측 하단 부에 작은 구멍이 보였다. 하긴 지금 게이머들은 잘 모르겠지만, 한때 패밀리의 컨트롤러에는 마이크가 달려있었던 적이 있었다. 비록 패밀리에서 마이크를 지원 하는 게임은 없었지만, 분명 기능은 달려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잠시 게임 & 워치의 마이크에 대고 후 하고 바람을 불어보았다. -무슨 말씀을 하신건지 잘 모르겠네요.- 마치 스마트 폰의 음성 인식 시스템을 보는 듯하군.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일본.” -어느 도시로 이동하시겠습니까?- 도시라.. 민텐도 본사는 교토에 있지만, 만약 그 시대로 간다고 해서 당당하게 본사에 쳐들어갈 수는 없겠지? 어떻게든 연결 고리를 만들어야하는데.. 그러려면 방법은 한 가지. 차후 민텐도사의 중역이 될 사람과 우연을 가장해 만나도록 하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게임 & 워치의 질문에 홀가분하게 대답했다. “도쿄” -1983년 일본 도쿄로 설정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의 나이는 몇 살입니까?- 분명 1980년대는 민텐도의 천하지만 90년대로 넘어가서 센소니의 기어 스테이션에 의해 큰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그 모든 위기를 헤쳐 나가려면 아무래도 젊은 게 좋겠지? 하지만 너무 젊게 설정해 버리면 군대에 발목을 잡힌다. “군대를 전역한 23살.” -일본 나이 21세로 맞춰졌습니다. 동의하십니까?- “그래.” -그곳에서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일단은 혼자 일본에 온 한국인 유학생 정도로 할까? -습득하고 싶은 외국어를 두 가지 선택해주세요.- “영어, 일본어.” 이정도만 해도 일본에서 살기에 큰 무리는 없겠지? -모든 설정을 마쳤습니다. 이제 당신은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과 함께 1983년 도쿄에 거주하는 21세 한국인 유학생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에 동의하십니까? 질문 사항이 있으시다면 마이크를 사용해 물어보실수 있습니다.- 어쩌지? 정말 여기서 내가 동의해 버리면 1983년으로 돌아가 버리는 건가? 나는 깜박거리는 YES와 NO의 표시등 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미혼이기에 돌봐야할 가족은 없었지만, 그래도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을 떠올리니 쉽게 YES 버튼을 누르기가 힘들었다. “내 1983년으로 가게 되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당신이 과거에서 현재 이 시간으로 돌아올 때까지 당신의 시간은 멈추게 됩니다. 그때 당신은 한 가지 선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선택? 무얼 선택해야한다는 거지?” “과거로 시간여행을 거쳐 온 당신과 지금의 당신 중 어떠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선택하셔야합니다.” ‘과연.. 1983년에 23살인 채로 2015년에 돌아오면 55세니까. 이런, 완전 늙어 버리잖아!!’ 나는 잠시 어지러움 증을 느끼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어쩌지? 잠시 게임 & 워치를 앞에 두고 망설이던 나는 핸드폰을 들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동안 신호음이 울리고 반가운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이니?” “네, 어머니..” 아무것도 모른 채 반가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시는 어머니의 반응에 괜스레 목이 매어왔다. “잘 지내시죠?” “그럼~ 아빠가 술만 안마시면 아주 잘 지낼텐데 말이다.” “요새도 아버지 약주 많이 드세요?” “말해 뭐하니. 내 입만 아프지..” “하하.. 여전하시네요.” “그런데 갑자기 왠일이니? 우리 아들이 전화를 다하고?” “저 사실 지난주에 회사 그만 뒀어요.” “뭐? 왜..? 무슨 일 있었어?” “음.. 그냥 좀 새로운 일을 해보려구요. 잘 될지 모르지만, 당분간 여행을 좀 다녀올까해요..” “여행 좋지.. 그래 네 나이도 34살인데, 알아서 잘 결정했을 거라 믿는다.” “고마워요. 어머니.. 아~ 있다가 통장 확인해보시면 돈이 좀 있을 거예요. 이번에 퇴직금 받은 걸로 좀 많이 넣었어요.” “그래? 그냥 뒀다가 여행갈 때 쓰지 그러니?” “아녜요. 15년 동안 다닌 회사라 그런지 퇴직금이 좀 나와서 충분할 거 같아요.” “그래, 고맙다. 매달 용돈 보내주는 것도 고마운데, 아들~ 여행 조심히 다녀오고 돌아오면 집에 한번 들러~ 맛있는 거 해줄게..” “네, 어머니..” “올 때 며느리도 데려오면 더 좋고~” “하하.. 노력해 볼게요.” “그래.. 우리 아들 여행 잘 다녀오렴..”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는 것만 같은 어머니의 따스한 목소리에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더 이상 통화했다간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킬 것 같아, 나는 어머니께 몸 건강하시라는 인사를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만약 시간 여행을 하고 돌아온 내게 선택지가 있다면 그때 가서 생각을 해보자. 과연 돌아온 나와 지금의 내가 어떻게 다를지.. 어떤 걸 이루게 되었을지.. 나는 모바일 계좌로 어머니께 퇴직금에 해당하는 금액을 송금해드렸다. 너무 많은 돈을 보내면 오히려 출처를 캐물어 보실 테니 적당히 금액을 떼어 보내드린 나는 이윽고 게임 &워치의 확인 버튼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래!! 한 번 가보자. 게임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시대로.. 스마트 폰은 고사하고 핸드폰조차도 없는 시대지만, 가장 빛나던 그 시기로 조금 긴 여행을 다녀오자..’ “부모님.. 제가 돌아올 때까지.. 항상 건강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게임 & 워치의 확인 버튼을 누르자 눈앞에 부옇게 흐려졌다. 그리고 잠시 후 내 방 거실의 모든 사물이 2D 도트로 표시가 되며 마치 레트로 게임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와.. 신기 한데?”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도트 덩어리는 마치 벽돌처럼 나를 향해 쏟아져 날아오기 시작했다. 처음 한 두개야 어떻게든 피할 수 있었지만 점차 그 수가 많아지자 피할만한 공간이 없었다. 어? 어어? “으아아아!!!” 날아오는 도트 덩어리에 쫄아서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안내음성이 들려왔다. 삐리리리리~ -잠시 후 우에노. 우에노로 향하는 열차가 들어올 예정입니다.- “아?” 주변을 둘러보니 나는 한 지하철역에 서있었다. 난데없이 소리를 지른 탓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 같이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 이런 나 정말 와버린 거냐? 1983년으로..?” 멀리서 들어오는 전철은 오래된 한국영화에서나 보아왔던 꾀죄죄한 모양의 그것이었다. 아무런 디자인도 없이 오로지 교통수단만을 위해 투박하게 제작된 열차는 잠시 후 내 앞에 멈춰서 더니 문이 열렸다. 잠깐의 헤프닝이 있었지만 내 주변의 일본인들은 이내 나를 무시한 채 전철에 오르기 시작했다. 2015년과는 판이하게 다른 촌티 나는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에 현실 적응이 어려웠지만 나는 그들과 함께 전철에 올랐다. 나리타 국제공항이라.. 1983년에도 나리타공항이 있었구나. 신기한 기분에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아까부터 나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던 일본인들의 눈빛이 더욱 가느다랗게 떠졌다. “흠흠..” 너무 튀는 행동은 하지 말자.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비어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러고 보니 가방을 매고 있군. 혹시 필요한 것이 들어 있을까 싶던 나는 의자에 앉아 등에 맨 백팩을 열어보았다. 유학 비자 도장이 찍힌 여권이랑 도쿄JBC은행의 통장 하나. 그렇지 돈이 중요하지.. 나는 내가 가진 재산을 확인하기 위해 통장을 펼쳐 보았다. 그리고 표시 된 금액을 바라보며 빙긋 웃음을 지었다. 2015년에 있었던 200억 가량의 돈은 고스란히 지금 시대로 옮겨져 있었다. “21억엔이라.. 출발이 빵빵한데? 이정도면 아예 회사를 차릴 수도 있겠다.” 나는 여권과 통장을 다시 가방 안에 넣은 뒤 안쪽을 좀 더 살펴보았다. 그러자 묵직한 느낌의 플라스틱 기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나와 함께 시공을 초월해서 날아온 게임 & 워치였다. “그래도 너와 함께 오니 든든하구나.” 나는 슬쩍 미소 지으며 가방 안에서 게임 & 워치를 꺼내들었다. 그 순간 전철에서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작은 기계로 옮겨졌지만 이내 관심을 돌렸다. 사실 전철 안에는 이미 나와 비슷한 게임기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이 플레이 하고 있는 것은 1980년 최초로 출시된 게임 & 워치 BALL이었다. BALL 역시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굉장히 간단한 게임 방식을 차용하고 있었는데 단순히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화면에 표시된 볼을 옮기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겐 그 것 마저도 훌륭한 게임이었다. 물론 내가 가진 회사원 게임이 그것보다 훨씬 진보된 시스템이긴 하지만 겉보기에는 그들이 가진 게임 & 워치와 별반 다를 게 없었기 때문에 금방 관심을 꺼버린 듯했다. 달칵. 일단 자세한 연도를 확인하기 위해 게임 & 워치를 펼쳐 들었다. 기기 이름에서 대변하듯 이 모델은 당연히 시계 기능을 겸하고 있었다. -1983년 6월 15일.- 일본에서 패밀리가 출시되기 딱 한 달 전이로군.. 딱 좋은 시기다. 덜컹거리던 전철은 이내 어두운 터널을 뚫고 밝은 햇살이 비추는 밖으로 나와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창밖에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이런 2015년에 살다보니 이런 클래식한 느낌도 나쁘지가 않구나.. 그러고 보니 1983년이면 내가 원래 82년생이니까 태어나고 다음해였어야 했는데, 바로 23살이라니.. 살짝 손해 보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어제 나이보단 11년이 젊어졌기에 퉁치기로 하자~ 일본에서 맞이하는 새로운 삶.. 이번엔 좀 재미있게 살아보자꾸나~!! ──────────────────────────────────── ──────────────────────────────────── EP. 3 : 민텐도라는 장난감 회사. (1) & 그 후로 한 달 간 나는 일본에 놀러온 관광객처럼 살았다. 도쿄의 풍경은 1990년대 서울과 많이 닮아 있었다. 하긴 그 당시엔 우리나라보다 유행이 10년은 앞서갔다고 하니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하지도.. “흐음~ 그래도 휴대폰이 없으니 심심하긴 하네..” 아 그러고 보면 현재 일본은 헤이세이가 아닌 쇼와 시대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굉장히 또 느낌이 다르네? 나는 길거리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은 채 아키하바라 역에 도착했다. 아직 오타쿠 문화가 발생하기 전이라 그런지 메이드 카페도 코스프레도 없는 순수한 전자상가의 모습에 나는 묘한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2013년에 방문했던 아키하바라는 어딜가나 게임 포스터와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건물에 가득 그려져 있었고, 몇 걸음마다 게임이나, 만화책을 판매 하는 상가들이 즐비한 정신없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PC관련 제품(그것도 퍼스널 컴퓨터.)이나 소형라디오.(라고 해봤자 머리통만한 크기였지만) 그리고 테이프가 들어가는 주먹만 한 크기의 워크맨이 진열되어 있었다. “패밀리 출시 행사는 아직 인가? 분명 오늘로 알고 있었는데?” 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주말 아키하바라를 거닐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게임 콘텐츠 사업도 활성화되기 전이었기에 2000년대처럼 게임 전문 매장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냥 게임 가게나 차려볼까? 그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아니지? 고작 민텐도에서 물건이나 떼어다 팔려고 여기까지 시간을 거슬러 여기까지 왔다면 게임 가게 어르신이 날 뭐라 생각 하겠어?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만난 그 어르신은 ‘신’이란 존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쓰러져 가는 게임 산업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도록.. 미래에 대한 모든 트렌드를 읽고 있는 나라면 먼 훗날 다시 맞이하게 될 2015년에 보다 멋진 게임을 유저들에게 선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 나는 지금 무얼 해야 할까? 나는 우선 패밀리의 발매 정보를 얻기 위해 게임 & 워치를 꺼내 들었다. -민텐도사의 패밀리. 1983년 7월 15일 출시..- “오늘 맞는데..” 손가락으로 페이지를 넘기며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데, 어디선가 묘한 비트음이 울려왔다. “어라? 방금..?” 뿅.. 뿅.. 찾았다!! 나는 쓰레기통에 아이스크림을 던져 넣고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은 먼 훗날 게임 중고 거래 기업 소프트맙이 들어서게 될 부지 앞이었다. 지금이야 조그만 상가들이 줄지어 있지만 90년대 후반이 되면 줄지어 빌딩이 들어설 곳이었다. 그리고 난 거기서 아타리의 뒤를 이어 1980년대를 주름 잡을 위대한 게임기를 만났다. 한 가지 깨는 점이 있다면.. 그 위대한 게임기의 첫 판매점이 길거리 좌판 일 줄은 몰랐네.. “이랏샤이마세~ 이랏샤이마세~” 딱 봐도 전문 판매직원이라기 보단 민텐도 본사 직원들이 와이셔츠를 걷어붙이고 홍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열의와는 정 반대로 대중들의 반응은 엄청나게 썰렁했다. 그래도 게임 & 워치를 발매한 민텐도라면 초반부터 어느 정도 불이 붙을 줄 알았는데, 이건 기대랑은 완전 정반대네.. 그만큼 아타리 쇼크가 남긴 게임 산업 붕괴는 어마어마했다. 물론 초창기 아타리사에서 오픈소스 툴로 누구나 자유롭게 게임을 만들 수 있는 시장을 형성했을 때는 모두가 반겨했지만, 그것도 잠시, 눈 앞의 이익만 노리고 채 완성 되지도 않은 저질 게임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자 유저들의 반응은 급속도로 식어갔다. 하지만 그 여파가 이렇게 빨리 태평양을 건너 일본에 까지 미치고 있을 줄이야.. “어서오세요~ 저희 민텐도사에서 직접 만들어낸 차세대 8비트 게임기 패밀리입니다. 모두 한번 즐겨보세요~” 나는 좌판에서 호객행위 중인 한 사원 앞에 다가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물론 내 앞에는 빨간색과 흰색이 섞인 다소 투박한 디자인의 패밀리 한대가 놓여 있었다. “많이 팔리나요?” “네? 아, 손님 어서 오세요. 일단 한번 플레이 해보시겠어요? 이번에 저희 민텐도에서 새로 개발한 최신형 8비트 게임기입니다.” 왜 이렇게 8비트라는 단어가 웃기지? 나는 직원이 건네주는 컨트롤러를 받아 들었다. 헐.. 컨트롤러 줄이 너무 짧아!! 2015년대의 콘솔은 블루투스 무선 기능이 활성화되어 멀리서 소파에 앉아 게임을 즐기는데 전혀 무리가 없었지만, 패밀리 초창기 모델은 게임기 본체에 1P와 2P 컨트롤러가 강제로 결합되어 있었다. 결국 브라운관 티비 코앞에서 게임을 즐길 수밖에 없도록 설계가 되어 있었다. 어느 정신 나간 놈이 이 따위로 만들었는지 정말 이해가 안 되는 구조네. 하긴 이 때만해도 이 녀석이 전 세계로 7천만대 가까이 팔려나가게 될 괴물 머신이라는 걸 인식하지 못 했을 테니까. 단순히 게임 & 워치가 흥행하자 그 이윤으로 제작된 가정용 콘솔이라 민텐도에서도 초기 기대치는 높지 않았던 모양이다. 패밀리는 총 3개의 게임과 함께 런칭 되었는데, 뽀빠이와 동킹콤 시리즈 2개가 런칭 작이었다. 이 시기의 일본에서도 게임을 만드는 서드 파티 게임회사는 NEGA 라던가 CAMCO등 다수 존재 하였지만, 이들은 모두 아케이드 시장용 기판을 제작하고 있던 터라 신생 게임기인 패밀리는 주목 받지 못하던 시기였다. “지금까지 몇 대나 팔렸나요?” “아, 그게, 아직 한 대도..” 허~ 지금 시간이 오후 1시가 다되어 가는데 아직 한 대도 안 팔렸다고? “이게 지금 얼마죠?” “네. 14,800엔입니다.” 비싸다. 1983년에 14,800엔이라니.. 하긴 검증 안 된 1세대 콘솔에 이정도 금액을 덜컥 주고 살리가 만무하지. 나는 일단 야외에 비치된 조그만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그러자 주변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동킹콤 좀 틀어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직원은 카트리지 삽입구의 뚜껑을 열어젖히고 검은색 카트리지를 꽂은 후 전원을 올렸다. 빰빠바바밤~ 빰밤~ 피코 피코. 화면 아래에는 빨간 모자를 뒤집어쓴 이탈리아인 마리지가 거대한 쇠망치를 들고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게임 방식은 위에서 킹콩이 던지는 나무통을 피하거나 망치로 부수며 꼭대기까지 올라가 킹콩을 물리치면 끝이다. 나는 빙긋 웃으며 좌우로 마리지를 움직여 점프를 시도하였다. 통나무를 하나씩 넘을 때마다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오오..” 뾱뾱. 띠용~ 띠용~ 점프의 효과음 소리에 반가운 미소가 지어졌다. “오오오~!!” 손쉽게 첫 스테이지를 클리어 하고 나니 민텐도 직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굉장히 잘하시는데요?” “게임 센터에 많이 해봐서 그런지 금방 적응 했네요. 패밀리랑 같이 뽀빠이랑 동킹콤도 구입하겠습니다.” “저희 민텐도 패밀리의 첫 구매 고객. 감사합니다~!!” 내가 이 전설의 게임기의 첫 구매 고객이라니.. 참 기분이 묘하군. 그때 한 직원이 카메라를 들고 오더니 나에게 물었다. “저기 괜찮으시면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되겠습니까?” 역사적으로 기념할만한 사진 한 장이라~ 나쁘지 않은데? 그때 내 등 뒤로 한 꼬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나도 저거 사줘~!!!” “안 돼. 타카시 잠깐 구경만 한다고 엄마랑 약속했잖니?” “그래도.. 내가 저 형보다 더 잘할 수 있단 말야~!!” 어쭈? 꼬맹이가 아주 당찬데? 나는 피식 웃으며 아이에게 물었다. “꼬마야 너 이름이 뭐니?” “토시유키 타카시에요.” 토시유키 타카시라..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나는 잠시 게임 & 워치를 꺼내들어 토시유키란 사람의 정보를 살펴 보았다. 아!! 그렇구나, 이 녀석이 설마 훗날 타카시 명인이라 불리게 될 최초의 프로게이머인가? 1994년 출시되는 원더보이라는 게임에서 스피드 클리어의 달인이 될 슈퍼 플레이어. 나는 유심히 아이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너 게임 좋아하니?” “네!! 완전 좋아해요!!” “그래? 그럼 내가 너에게 선물할게. 저기 이 아이 것도 같이 하나 더 주세요.” 그러자 타카시의 어머니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말렸다. “저기 안 그러셔도 되는데..” “괜찮아요. 제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괜찮으니 받아주세요.” 나는 민텐도 직원이 가져온 게임기 하나를 타카시에게 안겨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재밌게 해라.” “형 고마워요. 진짜, 진짜 고마워요~!!” “저기.. 고객님 사진은?” “첫 구매 기념사진은 이 아이랑 찍어주세요. 나중에 민텐도에서 이 아이에게 더 감사한 일이 생길 겁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냥 그런 일이 있을 테니 알아두세요.” 나는 그날 민텐도의 좌판에서 게임 & 워치 몇 가지를 더 사들고 내가 머무는 호텔로 돌아왔다. 다음 날 호텔에서 주는 아침 조간신문 한 귀퉁이에는 패밀리 박스를 손에 들고 활짝 웃고 있는 타카시의 사진이 작게 실려 있었다. ──────────────────────────────────── ──────────────────────────────────── EP. 3 : 민텐도라는 장난감 회사. (2) 패밀리의 런칭 행사로부터 며칠 뒤 나는 교토로 향하는 신칸센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묵직한 내 가방 안에는 몇 가지 종류의 게임 & 워치가 들어 있었다. “아직 30분 정도 여유가 있군..” 꼬르륵.. 열차 시간 맞추려고 아침을 거르고 나왔더니 배가 고프다. 2015년 때야 출근 때문에 아침 굶는 게 다반사였는데, 이곳에 온 후로는 호텔에서 꼬박 조식을 챙겨 먹다보니 버릇이 된 건가? 남들이 보기에 한 달이 넘도록 호텔에 사는 게 사치처럼 느껴지겠지만, 지금은 1983년. 모든 물가 수준이 엄청 내려가 있었고, 내가 묵고 있는 4성급 호텔만 해도 2015년에 비교하면 하루 숙박료가 모텔 대실료보다 저렴했다. “그래도 교토로 가게 되면 슬슬 집을 구하긴 해야 할 텐데, 막상 호텔을 나가자니 귀찮고..” 이미 교토의 호텔을 예약해둔 터라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도쿄역을 거니는 중이었다. 그때 내 코를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쪽 길목에 도시락을 파는 식당가가 줄지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신칸센은 안에서 도시락을 먹을 수 있지. 좋아~ 그럼 남은 시간에 도시락이나 하나 사야겠다.’ 생각을 마친 나는 천천히 식당가로 걸음을 옮겼다. 6~70년대의 경제 활성화를 거쳐 버블 경제의 끝을 향해가는 일본은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활기에 넘쳐 있었다. 세계 경제 순위 2위에 빛나는 자부심이 느껴졌지만, 나에겐 그저 전 세계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전범국이라는 인상만 강하게 남아 있었다. 특히 뉴스를 틀 때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히로시마 피폭에 대한 피해를 호소하며 징징대는 꼴이 너무 보기 싫었다. 참 2011년에는 후쿠시마 원폭 피해도 있었지.. 그러고 보면 일본은 방사능이랑 참 인연이 깊네.. 아주 그냥 정들겠어. “어서오세요~ 손님 무슨 도시락을 드릴까요?” “여기서 가장 인기 좋은 게 뭔가요?” “저희야 새우랑 치킨 도시락이 제일 많이 나가죠~” 새우랑 치킨이라.. 역시 1980년대에도 치느님의 인기는 여전하군. 나는 인상 좋은 아주머니에게 300엔 동전을 내밀며 치킨 도시락을 주문했다. 그러자 뒤이어 다가온 한 중년의 남성이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저도 치킨 도시락 하나 부탁드립니다.” “아, 고객님 죄송하지만 치킨 도시락은 방금 이 분이 마지막 걸 구입하셔서 금방 다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아, 얼마정도 걸리죠?” “한 10분 정도인데 괜찮으세요?” 그러자 남자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톡톡 두드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 이 사람 설마.. “아, 그럼 기차 시간이 너무 촉박한데..” 이 집 치킨 도시락이 그렇게 유명한가?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 눈앞의 남자에게 더 관심이 가고 있었다. 신칸센 안에서 만날 줄 알았는데, 여기서 만나다니. 이건 생각지 못한 우연인데? “저기 괜찮으시면 제 걸 양보해 드릴게요.” “네? 아~ 아닙니다. 안 그러셔도 됩니다.” “괜찮아요. 사실 새우냐 치킨이냐 망설이던 차여서 아주머니. 치킨 도시락은 이 분에게 주시고 전 새우로 주세요.” “아,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손님~ 저희 새우 도시락도 정말 맛있어요. 제가 서비스로 새우 하나 더 넣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결국 우리는 서로 WIN WIN 하는 방향으로 도시락 값을 지불했다. “아,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남자는 나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뒤 서둘러 신칸센 탑승장으로 달렸다. 그러고보니 나도 시간이 만만치가 않네? 우선 나도 빨리 가야겠다!! 그렇게 잠시 후. 나는 신칸센에 오르는 플렛폼에 도착해 있었다. “A-17, A-17. 여기다.” 탑승칸을 확인한 나는 살짝 떨리는 마음을 추스르고 기차에 올랐다. 교토까지 3시간 반 동안 편하게 갈수 있는 비즈니스 석은 내부가 깔끔하게 정돈 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내 자리를 찾아 다가가자 창측 좌석에 익숙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저기. 옆에 좀 앉겠습니다.” “아, 네 그러.. 어!?” “아,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이거 재밌는 우연이군요. 자, 어서 앉으세요.” 나에게 자리를 권하는 이 남자는 니세코이 군페이씨.. 휴대용 게임기 게임 & 워치의 아버지이자, 2015년까지 민텐도 휴대기기를 왕좌로 이끈 겜보이를 만들어낸 사람이었다. 나는 살짝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옆자리에 앉았다. 사실 이 모든 건 미래에서 가져온 게임 & 워치로 군페이씨의 위치를 파악한 뒤 티켓 창구에서 그의 옆자리를 부탁한 내 계획 중에 하나였다. 도시락 집에서 만난 건 정말 우연이긴 했지만, 덕분에 그와의 첫 만남이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아까 도시락 집에선 정말 감사했습니다.” 한 번의 호의에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하는 건 역시 일본인답다. 잠시 후 열차가 출발하고 우리는 사이좋게 도시락을 까먹고 있었다. 한 입 먹다가 눈이 마주치면 계속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하는 통에 먹다가 사례 걸릴 뻔했다. 자판기에서 구매한 녹차로 입가심을 하고 나서 딱히 할 게 없던 나는 슬슬 작전을 실행해 보기로 했다. 그건 바로 가방 안에 게임 & 워치를 꺼내는 것이었다. 우선 첫 번째로 내가 꺼낸 게임기는 BALL이었다. 그러자 게임 & 워치를 만들어낸 창시자답게 군페이 씨는 흐뭇한 눈으로 내손에 들린 게임기를 바라보았다. 자기 자식 같은 게임기를 온 국민이 즐겨주고 있으니 즐겁기도 하겠지. 뾱. 뾱. 화면 안의 작은 공이 왔다갔다 거리자 작은 비트음이 객실내에 울렸다. “죄송합니다. 시끄러우시죠?” 나는 재빨리 볼륨 키를 내리며 군페이씨에게 사과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계속해도 괜찮아요.” 자기가 만든 게임기를 플레이하고 있어서 인지 군페이씨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역으로 그에게 게임 & 워치에 대한 불평을 쏟아냈다. “이왕 휴대용으로 만들 거라면 이어폰 잭 정도는 넣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안 그렇습니까?” “네? 아, 하긴 그렇군요. 확실히 공공장소에서 사운드를 즐기려면 이어폰 잭이 필요한 거 같긴 하네요.” “그쵸? 아무리 게임이 화면으로 즐기는 거지만, 사운드도 중요한 거잖아요.” 군페이 씨는 나의 불평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후 작은 수첩을 꺼내들고는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저기, 혹시 그 기계를 쓰면서 다른 불편한 점은 없나요?” “아주 많죠.” “그, 그렇게 많아요??” “우선. 기계 자체가 비효율, 비양심적이에요.” “네?” 나를 바라보던 군페이씨의 표정이 팍하고 구겨졌다. ──────────────────────────────────── ──────────────────────────────────── EP. 3 : 민텐도라는 장난감 회사. (3) “우선. 기계 자체가 비효율, 비양심적이에요.” “네?” “전 민텐도사의 게임을 좋아합니다. 지금까지 나온 게임 & 워치를 전부 구입했고 얼마 전에 발매한 패밀리도 출시 당일 아키하바라에 가서 구매했죠.” “아? 감사합니다.” “네? 왜 아저씨가 감사하다고 하세요?” “아? 아, 아닙니다. 말이 헛 나왔네요. 계속 해보세요.” 군페이씨는 굉장히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가방 안에서 세 가지의 게임 & 워치를 꺼내 들었다. 물론 그 안에 2015년에서 가져온 게임 워치는 없었다. “정말 모두 가지고 계시는군요.” “네, 그런데 가장 최근에 발매한 GUNMAN 조차 이어폰 잭이 없어요. 이건 서부극의 카우보이가 주인공인 만큼 총을 쏘는 효과음이 매우 중요하다 생각하는데, 이거 한번 소리 없이 무음으로 플레이 해보셨나요?” “아, 아뇨..” “한번 플레이 해보세요.” 군페이씨는 내가 건넨 GUNMAN을 받아든 뒤에 소리 없이 플레이를 해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나에게 게임기를 돌려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BALL이랑은 다르게 박진감이 확 떨어지네요.” “그렇죠?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만든 건지 원..” 자기 자식 같은 게임기를 신랄하게 까대니 군페이 씨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거기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게임기 한 대당 하나의 게임 밖에 즐길 수 없다는 점이죠.” “아..?” “카트리지 교환 시스템은 70년대 아타리 때부터 시작했으니 나온지가 꽤 된 기술인데도 게임 & 워치는 출시하고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 카트리지 시스템을 차용 안하고 있죠. 이건 게임과 함께 기계까지 같이 판매해서 판매 단가를 올리려는 개수작으로 밖에 안보여요.” “개.. 수작? 하지만 스톱 애니메이션은 다양한 동작표현이 불가능해서..” “그게 바로 마지막 문제점이죠. 그렇기 때문에 게임들이 다 비슷해요. 스톱 애니메이션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단순히 빠른 조작의 노가다를 강요하죠. 그래서 이 게임은 끝이 없어요. 그냥 플레이어가 죽으면 끝이죠. 간단히 시간 죽이기엔 좋지만 성취감은 제로라는 겁니다.” “성취감이 없다고..?” 군페이씨의 안색은 이미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이쿠.. 너무 채찍질만 했나? 그럼 이제 슬슬 당근을 줘볼까? 군페이씨는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훔치며 애써 나에게 웃어 보이고 있었다. 1941년생인 그는 1965년 민텐도에 취직하여 여러 가지 완구 제품을 만든 사람이었다. 민텐도는 우리가 흔히 명절에 자주 즐기는 화투를 최초로 만들어낸 곳으로 트럼프 카드역시 일본에서 가장 먼저 수입해온 카드 회사로 유명하다. 신입이었던 군페이씨는 그곳에서 일정한 크기로 카드를 자르는 설비기계를 점검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업무가 너무 단순하여 자투리 시간에 남은 부품을 이용해 만든 장난감이 지금도 기념품 장난감 가게에 가면 자주 보이는 울트라 핸드였다. 지그재그로 이루어진 철재의 손잡이 부분을 움켜쥐면 앞으로 길게 뻗어나가는 장난감을 완구점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데, 그걸 만든 게 바로 이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아낸 건 내 나이가 서른이 될 즈음이었다. 그가 만든 게임 & 워치는 정확히 말해 게임기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화면이 달린 장난감을 만든 것이었다. 스펙이나 효율성보단 아이들이 즐겁게 갖고 놀면 그만이라 생각했는데, 꽤나 유저층이 넓어져 지금은 전 국민의 장난감이 되어버렸다. 게임 & 워치의 성공으로 회사에서도 칭찬 일색이었을 테고, 어딜가나 자기가 만든 게임기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흐뭇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나를 만나 자기가 만든 물건이 가루가 되도록 까이자 심히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장난질은 여기 까지만 하기로 하고.. “하지만 여기서 몇 가지만 손보면 엄청난 물건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요? 그럼 어떤 부분을 손보면 좋겠습니까?” “우선 스톱 애니메이션 방식의 이 액정을 버려야 해요. 그리고 좀 더 다양한 게임을 즐기기 위해 유동적인 표시가 가능한 디스플레이와 카트리지 방식을 채용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나는 가방에서 공책 한권을 꺼내 연필로 도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1989년에 출시될 민텐도 겜보이의 원형 디자인이었다. 군페이씨는 내 손에서 그려지는 휴대용 겜보이의 입체도면을 바라보며 점점 입이 벌어지고 있었다. “자, 잠깐.. 이 액정 뒤에 비어 있는 거대한 공간은 무엇입니까?” “카트리지를 넣을 공간입니다.” “아, 그럼 이 밑은 전원부와 스피커 군요. 컨트롤러는 지난주에 출시한 패밀리와 같고.. 아? 그런데 왜 버튼이 수평이 아니고 사선으로 넣은 거죠?” “실제로 게임 & 워치를 플레이 하는 중에 느낀 건데, 일직선 배열보다는 사선 배열이 플레이하기가 더 쉬워요. 버튼을 잘못 누르는 경험도 적고요.” “과연..” “만약에 게임 & 워치의 뒤를 따르는 새로운 형식의 휴대용 게임이 제작이 된다면 이러한 형태가 좋을 것 같네요.” “4:3 비율의 유동 표시 액정화면에 카트리지 교환 방식이라.. 하지만 이걸로 과면 몇 가지나 게임이 나올 수 있을까요? 민텐도는 그렇게 큰 회사가 아닙니다. 모든 직원이 게임 개발에만 매달릴 수도 없고.. 이러한 기기를 만들면 적어도 몇 년 동안 꾸준히 게임이 나와 줘야 할텐데요?” “민텐도는 지금처럼 동킹콤 같은 상징적인 게임만 몇 개 내주면 됩니다. 이 기기의 수요가 지금의 게임 & 워치만큼 늘어나게 된다면, 아마 현재 아케이드 쪽에 주력하고 있는 대부분의 게임 회사들이 서로 게임을 출시하기 위해 몰려들 테니까요.” “아, 그럼 당신이 생각하는 건..” “물론 그들로부터 로열티를 얻어내는 거죠. 소프트 판매 수익의 절반을..” “아~!!” 군페이씨는 감탄사와 함께 무릎을 탁 내려쳤다. 벌어진 그의 입은 다물어질 줄은 몰랐고, 연신 식은땀을 훔치며 연습장에 그려진 도면을 살피고 있었다. 현재 그에게 있어서 그 도면은 미래와의 조우와 다름없는 혁신이었다. “놀라워..” 판매 수익의 절반이면 거의 폭리나 다름없는 로열 티지만, 아직 아무도 뛰어 들지 않은 휴대용 시장에 대해선 얼마를 부르든 부르는 게 값이다. 그만큼 경쟁 기기가 생기기 전에 시장의 선점은 중요한 것이었다. 아마 90년대로 들어서면 NEGA와 KNS, 반자이에서 독자적인 휴대용 콘솔을 제작하게 되겠지. 하지만 오늘을 계기로 본래 89년에 등장해야할 이 물건의 탄생이 조금은 앞당겨 질 수도 있겠는데? 우리는 교토로 향하는 동안 새로운 휴대용 콘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제법 친해졌다. 군페이씨는 내가 한국인 유학생이라는 것에 대해 크게 놀라워했다. 너무나도 능숙한 일본어 발음에 일본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저희 열차는 곧 종점 신오사카, 신오사카 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열차 도착이 가까워지자 군페이씨는 굉장히 아쉬운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강군. 혹시 교토에 머무른다면 어디에 있을 건가?” “글쎄요? 일단은 호텔에 머물며 관광지나 다녀오려구요. 도쿄는 딱히 볼게 없었는데, 오사카는 먹거리도 많고 볼거리도 많다고 들어서 기대가 되네요.” “그래? 확실히 오사카 지역 사람들이 훨씬 붙임성도 있고, 맛있는 것도 많지. 혹시 말야.. 호텔이 정해지면 이쪽으로 전화를 주지 않겠나?” 나는 군페이상이 건네주는 명함을 받아든 채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 여기선 약간의 액션이 필요하긴 하지. 군페이씨는 내 반응에 활짝 웃고 있었다. “사실은 내가 바로 그 게임 & 워치를 만든 니세코이 군페이라네. 오늘 강군의 이야기를 듣고 깨달은 점이 많아. 그래서 꼭 다시 한 번 강군과 만나고 싶다네. 우리 회사는 교토에 있으니 언제든 편할 때 연락 주게.” “아, 제가 니세코이씨를 몰라 뵈고 큰 실수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냐, 오히려 오늘 강군을 만난 게 나에게 큰 행운이었어. 덕분에 맛있는 치킨 도시락도 먹었고 말야~ 하하~” “그렇다면 조만간 한번 연락드리겠습니다.” “기다리겠네.” “네, 그럼~” 우리는 서로에게 작별인사를 건넨 뒤 각자의 행선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후의 뜨거운 햇살이 내리 쬐는 오사카역을 빠져 나온 나는 미리 짐을 부쳐둔 호텔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이곳에서 한 달을 넘게 생활했어도 통장의 20억엔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예치한 은행 이자 만으로도 연이률 8%로 환산한 금액이 달마다 들어오다보니 내 통장은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마냥 돈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아~ 빨리 신용카드가 보편화 되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 맨날 현금 들고 다니니 귀찮아 죽겠네.. ──────────────────────────────────── ──────────────────────────────────── EP. 4 : 두명의 천재 (1) 맴~ 맴~ 맴~ 맴~ ‘아오.. 시끄러. 잠 좀 자자..’ 맴~~ 맴맴~ 맴~ 빌어먹을 매미 새끼들. 잠시 후 호텔 침대에 누워 있던 나는 이불을 걷어 부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1983년 8월 17일 한 여름. 연간 기온 중 가장 정점을 찍는 폭염의 기간이었다. 그래도 내가 묵고 있는 호텔은 지어진지 얼마 안 된 신식이라 그런지 방마다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동안 나라와 고베, 교토 지역의 관광 명소를 실컷 즐긴 나는 지갑에 넣어 두었던 한 사람의 명함을 꺼내 보았다. “한 달 동안 즐길 건 다 즐겼고, 이제 슬슬 전화를 걸어볼까?” 나는 니세코이씨에게 받은 명함을 손에 쥐고 전화기의 다이얼을 돌렸다. 차라라락 소리와 함께 숫자가 적힌 다이얼이 원래자리로 돌아가고 잠시 기다리자, 상냥한 목소리의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민텐도 휴대용 장난감 개발 파트입니다.” “아, 실례합니다. 혹시 니세코이 군페이씨가 계신가요?” “니세코이님이라면 자리에 계십니다만, 어디라고 전해드릴까요?” “한국인 유학생 강준혁이라고 하면 아실 겁니다.”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심심한 기분에 목재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니 방안에 기분 좋은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잠시 후 흥분에 가득한 니세코이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는 반가움에 가득차있었다. “강군!? 자넨가? 이 사람아 왜 이제야 전화를 한 건가. 내가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니, 그거야 내 마음이지. 다음 날 홀랑 전화 걸어서 만나자고 하면 무게감이 떨어져 보이잖아. “잘 지내셨나요? 여기 저기 좀 둘러보느라 연락이 늦었습니다.” “자네 지금 어디에 있나?” “지금은 오사카 니혼바시 근처에 있는 리쿠텐 호텔에 묵고 있어요.” “잘 됐군. 안 그래도 내일 오사카 쪽에 볼일이 있어 가볼 참인데 잠깐 볼 수 있나?” “그러죠. 어디서 볼까요?” “자네가 묵고 있는 호텔 연락처 좀 알려주겠나? 내가 도착하기 전에 연락을 주지.” “네, 알겠습니다.” & 다음 날 아침. 조식을 마치고 방으로 올라오니 호텔 프론트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내용은 니세코이씨와의 전화 연결이었다. “강군. 한 시간 뒤에 도착할 예정이네만, 혹시 시간이 괜찮은가?” “네, 그런데 어디서 뵐까요?” “장소는 걱정 안 해도 되네. 지금 자네 호텔로 가고 있으니까.” “네!?” “어제 자네 전화를 받고 한숨도 못 잤다네, 바로 오늘 두 명의 천재가 만나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대가 돼서 말이야.” 두 명의 천재? 누구랑 같이 오는 건가? 그로부터 약 한 시간 후 나는 호텔 로비에 앉아 군페이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 약속에 철저한 사람들답게 얼마 안 있어 호텔 앞에 멈춰선 택시에서 두명의 남자가 내렸다. 한명은 익히 알고 있는 군페이씨였고, 그를따라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머쓱한 표정으로 군페이씨와 함께 호텔로 들어왔다. “강군~!!” “니세코이씨~ 안녕하셨어요?”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군. 그래 오사카 여행은 잘했나?” “네. 역시 도쿄보다 볼게 많더군요. 그런데 같이 오신 분은?” “아, 그렇지. 어이 쿠마모토. 인사하게 일전에 내가 이야기한 신칸센의 그 청년일세.” “안녕하십니까. 쿠마모토 시게루라고 합니다.” “쿠마모토 시게루씨!?”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외치자 쿠마모토씨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절 혹시 아세요?” “아, 죄송합니다. 직접 본건 처음이지만, 동킹콤을 만든 디렉터 분 아니세요?” “네. 맞아요. 동킹콤을 즐겨주셨군요. 감사합니다.” 나는 악수를 청하는 쿠마모토씨의 손을 맞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세상에 전설의 디렉터를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적어도 군페이씨를 엮어서 민텐도에 들어갈 때까지는 힘들 줄 알았는데, 설마 군페이씨가 여기로 데리고 올 줄이야.. 쿠마모토 시게루. 비록 게임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슈퍼마리지라는 콧수염 난 배관공 캐릭터는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카린의 전설과 동물의 마을. 폭스스타 등 민텐도를 대표하는 이 모든 게임이 앞으로 이 사람에게서 탄생할 작품들이었다. “강 준혁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쿠마모토씨.” “군페이 형님이 무조건 꼭 만나보라고 해서 따라왔는데,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 실례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쿠마모토 시게루씨는 내가 살던 2015년에는 62세의 나이로 꽤나 딱딱 이미지였는데, 1983년에서 만난 그는 갓 서른을 넘긴 열정이 넘치는 젊은이였다. “자~ 여기서 계속 이야기하기도 뭐하니, 자리를 옮기지. 조금 이르지만 점심 식사라도 함께하는 건 어떤가?” “네, 그러죠.” 호텔에서 나온 우린 근처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간단한 식사를 주문 한 뒤 나는 미소와 함께 쿠마모토씨에게 말을 걸었다. “현재 미국 아케이드 시장에서 동킹콤이 엄청난 인기라던데 축하드려요.” “저도 이렇게까지 제가 만든 게임이 성공할 줄은 몰랐네요. 민텐도 미국지사에서 게임센터에서 돌릴 롬 기판 하나를 요청했는데, 마침 제가 한가했던 터라 간단히 만들어 본건데..” 그 이야기는 나도 알고 있지.. 1980년 미국 아케이드 시장에 진출해있던 민텐도는 게임센터에서 가동 시킬 새로운 롬 파일을 요청했다. 하지만 ‘수익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사업에 쓸데없는 인력을 소모 시킬 순 없다’ 고 해서 차출된 것이 바로 당시 민텐도 내에서 일거리가 없던 쿠마모토씨였다. 공학 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프로그래밍에 대해선 완전히 문외한 이었지만 스스로 캐릭터를 만들고 도트를 찍어내는 일은 혼자서도 할 수 있었기에 간단한 레벨 디자인으로 만들어 낸 것이 바로 킹콩에게 붙잡혀간 미녀를 구해내는 동킹콤이었다. 그 게임은 미국 시장에 진출한 뒤 어마어마한 흥행을 불러 일으켰고 침체기로 들어서던 아케이드 시장에 한줄기 희망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동킹콤의 플레이 캐릭터였던 마리지를 소재로 한 마리지 브라더스가 출시되었고, 그리고 1985년.. 대망의 슈퍼마리지가 패밀리에 등장하며 민텐도는 아케이드 사업을 철수하고 오로지 가정용 게임기 산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100명의 범재보다 1명의 천재라는 사상으로 시작된 민텐도의 게임 사업을 2015년까지 먹여 살릴 능력자가 바로 눈앞에 있는 청년이었다. “그런데, 80년에 출시한 동킹콤의 후속작은 언제쯤 개발 예정인가요?” “사실 거의 다 제작이 완료 되었고, 곧 출시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래요? 혹시 어떤 게임인지 여쭤 봐도 되나요?” 아직은 게임에 대한 저작권이 빈약했던 시절이라 그런지 쿠마모토씨는 자신이 개발한 게임에 대해 술술 풀어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살짝 발상을 뒤집어서 전작의 동킹콤에서 미녀를 구하던 주인공 캐릭터로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 봤습니다.” 역시 지난달에 출시한 패밀리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벌써 완성이 되어 있었군. 군페이씨는 그런 우리들의 대화를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쿠마모토씨의 마리지 브라더스는 동킹콤과 같이 하나의 스테이지 안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버섯 병사와 거북이를 물리치는 2인용 게임이었다. 나는 쿠마모토씨와 마리지 브라더스에 대해서 이야기 하던 중 그에게 한 가지 제의를 했다. “그런데, 말이죠. 쿠마모토씨.” “네. 마리지 브라더스에 대해 뭔가 의문점이라도 있나요? “아뇨. 사실 이미 출시를 앞두고 있는 완성 된 게임에 대해 이야기하기 보단 이 마리지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네요.” “다음 작 말씀이십니까? 아직 이 새로운 게임이 유저에게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장담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차기작 준비는 조금 부담스러운데..” 상대적으로 차기작의 발매 텀이 길었던 1980년대. 2015년에서는 하나의 게임을 만드는 도중에도 이미 신규 IP를 제작하는 마당이었기에 쿠마모토씨의 여유 있는 발언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껴졌다. “마리지라는 캐릭터는 현재 제가 보기엔 동킹콤을 거치며 굉장히 친숙한 이미지가 되었죠. 따라서 당신이 만든 마리지 브라더스는 어느 정도 중박 이상을 치게 될 것을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차기작에는 이 마리지라는 게임에 새로운 방식을 적용해 보는 건 어떨까요?” “새로운 방식이요?” 쿠마모토씨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그 옆에서 팔짱 끼고 있던 군페이씨는 마치 ‘시작되었군..’ 이란 듯한 묘한 미소와 함께 안경을 쓸어 올렸다. & 횡스크롤. 화면이라는 사각의 틀에서 구원할 마법의 단어. 2015년에는 흔하디흔한 플레이 방식 중에 하나지만 지금은 1983년이다. 이 시기의 모든 게임은 모니터라는 사각 틀에 갇혀 있었다. 모든 플레이의 시작과 끝은 한 화면에 표시가 되어야만 했고, 그것은 그 유명한 겔러그와 동킹콤도 마찬 가지였다. 마치 인류가 달에 첫 발자국을 남기듯이 나는 여기서 게임 계의 큰 변화를 줄 발자국을 남기려 하고 있었다. “배경을 스크롤시키는 겁니다.” ──────────────────────────────────── ──────────────────────────────────── EP. 4 : 두명의 천재 (2) “배경을 스크롤시키는 겁니다.” “네? 뭘 한다구요?” 처음엔 쿠마모토씨와 군페이씨는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깨달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단번에 횡스크롤 방식을 이해 하긴 힘들겠지. 나는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어 쿠마모토씨 앞에 놓고 펜을 들었다. “자. 보세요. 이 사각틀이 게임이 표시되는 디스플레이입니다. 그리고 이 안에 쿠마모토씨의 마리지가 서있죠. 그리고..” 나는 펜을 화면 바깥으로 뻗어 내며 길게 줄을 그었다. “그리고 이게 스테이지입니다.” “아!!!” 그 순간 쿠마모토씨는 무릎을 탁 치며 탄성을 질렀다. 하지만 군페이씨는 아직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 채 우리를 번갈아 살피고 있었다. “그렇군요!! 맞아요. 꼭 시작과 끝을 한 화면에 표시할 필요가 없지요. 마치 영화관의 영사기를 돌리듯 길다란 배경을 옆으로 흘리며 캐릭터가 마치 앞으로 나아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거로군요.” 역시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안다는 것이 이런 걸까? 단지 힌트만 주었을 뿐인데, 쿠마모토씨는 단번에 횡스크롤의 개념을 이해 해버렸다. “군페이 형님. 형님 말씀이 맞았습니다. 강준혁 군은 천재에요!! 천재라구요!!” “이.. 이 봐 시게루군. 난 아직 무슨 얘기인지 도통 모르겠네. 모니터 밖으로 삐져나온 이게 스테이지 라니 대체 무슨 소린가. 화면 밖에 스테이지를 어떻게 보여주냔 말일세..” 그러자 쿠마모토씨는 조금 더 군페이씨가 알기 쉽게 설명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몇 번 고개를 끄덕이던 군페이씨는 입이 쩍 벌어진 채 나를 바라보았다. “대체 자넨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가? 이건 지금까지 생각해온 게임의 틀을 완전히 바꿔버리는군.” “이걸로 플레이어는 좀 더 게임 안에서 모험하는 기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쿠마모토씨는 내가 그려낸 횡스크롤 방식을 보며 주문을 외우듯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뭐야, 갑자기 왜 저러지? 잠시 동안 그는 무언가를 상상하듯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뜬 쿠마모토 씨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음 차기작에 대한 간단한 구상을 해보았습니다.” 벌써? 그 짧은 시간 안에 차기작이 떠올랐다고? 쿠마모토씨는 탁자에 놓인 펜을 들고 무언가를 정신없이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벽돌과 물음표 상자. 버섯과 깃발.. 그것 들은 차후 슈퍼 마리지에 등장 할 기본 소스가 되는 아이템 들이었다. “공주를 구하는 마리지입니다.” “공주?” “지금까지 공주를 구하는 건 기사였지만, 마리지는 현대인입니다. 현대인을 대변하는 그가 버섯 왕국의 공주님을 괴물에게서 구출해내는 거죠.” 쿠마모토씨의 말에 군페이씨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호오.. 이번에도 재미있는 발상이로군. 계속 해보게..” “우선 마리지라는 캐릭터는 배관공입니다. 항상 어둡고 축축한 곳에서 일을 하죠. 그러니 괴물은 음.. 차갑고 축축한 느낌의 파충류 형태가 어울릴 듯 하군요. 이 괴물이 버섯 왕국에서 공주를 납치해 가고, 우연히 버섯 왕국에 떨어진 현대인 마리지가 공주를 구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며 적과 싸우는 겁니다.” 뭐야 이 사람. 그 짧은 시간에 게임 하나 다 만들었네? 과연 천재는 천재구나. 나는 팔짱을 낀 채 의자에 기대어 쿠마모토 씨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30년 동안 게임계에 커다란 임팩트를 주게 될 희대의 명작의 탄생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손끝이 저릿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군페이씨는 흥미로운 미소를 띄우며 쿠마모토씨에게 물었다. “그럼 그 괴물과 공주 캐릭터도 이름이 있어야겠군.” 그러자 쿠마모토가 나에게 물었다. “강군. 강군이 한국에서 즐겨 먹는 음식이 뭐가 있습니까?” “저요? 글쎄요.” 그 순간.. 지금까지 일본을 돌며 돈까스나 덮밥같은 느끼한 것들만 먹다보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음식이 하나 있었다. 뜨끈한 뚝배기 안에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고깃국.. 거기에 밥 한 공기를 딱 말아서 김치 한 조각 올려 먹으면~ 캬~~ “국밥이요.” “쿡팟?” “국. 밥. 이요.” “굽. 박?” 아무래도 둘 다 받침이 있는 글이다 보니 일본인이 발음 하긴 좀 힘들겠지.. 그러자 몇 번 국밥을 발음해보려고 노력하던 쿠마모토씨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강군의 아이디어가 추가된 작품이니 파충류 괴물 이름은 쿳파로 하죠.” 뭐라고!? 야 인마. 그렇게 쉽게 결정하는 거냐!? 그리고 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30년 동안 마리지한테 고통 받아야 할 악당인데!! 그러자 옆에 있던 군페이씨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공주 이름은 뭘로 할 텐가?” 그때 때마침 식사 후 디저트를 내오던 여종업원이 과일을 올리며 말했다. “후식으로 나온 복숭아입니다.” 그러자 핑크빛으로 물든 복숭아를 바라보던 쿠마모토씨가 입을 열었다. “피치 공주라고 하면 되겠네요.” 이것이 앞으로 30년간 괴물 쿳파에게 납치 될 운명을 가진 피치 공주의 탄생이었다. 뭐가 이따위야~!!! & 그로부터 2주가 흐르고, 나는 정장차림으로 민텐도 본사 건물 앞에 서있었다. “하아.. 결국 여기까지 와버렸군. 지난 두 달 동안 잘도 쉬었으니까, 이제 다시 일을 시작해볼까?” 길게 한 숨을 내쉰 나는 천천히 본사 건물로 들어섰다. 9월 이지만 아직도 폭염이 지속 되던 탓에 정장을 입기엔 더웠지만, 본사 건물 내부는 한기가 들 정도로 냉방이 엄청났다. 아직 냉방병에 대한 별다른 주의가 없던 시기라 그런지 거의 최저 온도로 냉방을 가동 시키고 있었다. “추.. 추워!!” “무슨 일로 오셨나요?” 로비에 있던 안내 직원이 건물에 들어온 나에게 물었다. “아, 니세코이씨와 쿠마모토씨의 추천으로 면접을 보러왔습니다만..” “아? 그렇다면 혹시 강준혁님이 되시나요?” “네, 맞아요.” “한국인이시라 길래 걱정했는데, 일본어를 굉장히 잘하시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전 어디로 가야하나요?” “음, 강준혁씨는 이번에 특별 면접 대상이라 사장실에서 직접 면접을 보시면 될 것 같아요.” “네?” 인사과나 그런게 아니고 사장실에서 직접 면접을 본다고? 민텐도 사장인 카마우치씨랑?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 거리며 직원에게 재차 물었다. “사장님께서 직접 면접을 보신다구요?” “네, 저희 민텐도는 카마우치 사장님이 직접 한 분 한 분 면접을 보고 그에 맞는 부서로 배속시키고 있습니다.” 게임회사라기 보단 장난감 회사로서의 이미지가 더 부각되어 있던 민텐도는 아직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이미지를 갖추고 있진 않았다. 나는 데스크 직원의 안내에 따라 건물의 가장 높은 층에 있는 사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기 전 나는 살짝 마른 침을 삼킨 뒤 가슴을 진정 시켰다. 이것도 면접이라고 떨리긴 하네.. “들어가 보세요.” 직원이 문 안쪽으로 공손이 손을 내밀자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사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 테이블에 나를 앉힌 후 물었다. “흠.. 자네가 한국에서 왔다는 강준혁 군인가?” “네, 그렇습니다.” “군페이군과 시게군이 어찌나 칭찬을 하던지. 자네를 꼭 데려오고 싶다고 나에게 사정하더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죠.” “나는 사실 게임이란 매체가 그리 탐탁치는 않네만, 그들이 이야기하길 앞으로 아이들이 가지고 놀 장난감에 게임 산업이 큰 축을 맡게 될 것 같다고 하더군.”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그런 생각을 하는 건가?” 이 사람은 들어오자마자 뭔 질문이 이리도 많은 거냐? 하지만 이미 예상했던 질문이었기에 나는 곧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질리기가 않기 때문이죠.” “질리지가 않는다?” “하나의 기기로 다양한 게임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혼자서도 충분히 즐길 수가 있구요.” “게임기 하나로 혼자서 질리지 않게 놀 수 있다라.. 재밌군. 하지만 장난감이란 모름지기 쉽게 질려야 새로운 물건이 나가지 않겠나?” “게임기는 장난감이 아닙니다.” “뭐?” “장난감을 어른들이 갖고 놀진 않지요. 이미 일본은 많은 아이들과 어른이 함께 게임을 즐기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가까운 게임 센터에만 해도 아이들을 데리고 게임 하러온 어른들이 많이 있죠. 그만큼 게임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다양한 연령대를 아우르는 산업이 될 것입니다.” “그래? 하지만 미국에서 일어난 아타리 쇼크로 70년대와는 달리 게임 산업이 침체되고 있는 와중에 현재 우리가 게임 산업에 뛰어드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군.” “모두가 물러설 때 오히려 한 발짝 다가가 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허? 나보고 오히려 이 지옥 바닥에 뛰어 들어보라고?” “아무도 뛰어 들지 않았으니 뛰어 들기만 한다면 민텐도의 독점 시장이 될 겁니다.” “독점이라~ 하하 그거 참 장사하는 사람으로서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소리군.” 카마우치 사장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호탕하게 웃어 제쳤다. “군페이 녀석 말대로 자네 참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군. 나이가 어리지만 마치 미래를 꽤 뚫어 보는 것처럼 확신이 담긴 목소리야.” 카마우치 사장의 말에 나는 가슴 한 구석이 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나이는 허투루 먹은 게 아닌가 보군. 나이가 들면 시력을 잃어도 혜안을 얻는다더니.. “하지만 말야.. 일본 내에서 성공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조그만 섬나라에 갇혀 있는 인구보다 미국 시장에서 통해야 진정한 성공이라 할 수 있지.” “민텐도는 현재 미국에 지사를 두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 하지만 게임 산업보다는 장난감 산업에 더 주력하고 있지. 현재 미국의 게임 시장은 아타리 쇼크의 타격으로 완전 죽은 사업이 되어 버렸어. 현재 어떤 완구점에서도 우리 패밀리 게임기를 받아주질 않고 있단 말이지.” 미국 역시 1980대에는 게임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곳보다 장난감 가게에서 게임기를 매입하여 판매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즉 아무리 훌륭한 게임기라도 장난감 가게를 뚫지 못하면 진열해 놓고 팔 데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게임기가 아니라고 하면 되잖아요.” “뭐!? 게임기를 게임기가 아니라고 하고 팔라고? 자네가 아직 젊어서 뭘 모르나 본데, 그런 짓은 상품 판매 규정에 위배되는 짓이야.” “박스 안에 대충 앞 뒤로 움직이는 로봇이라도 하나 끼워 넣고 장난감이라고 파세요.” “뭐...?” 나의 대답에 얼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나를 바라던 카마우치 사장은 테이블에 놓여 있던 수화기를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해외 영업부냐? 지금 당장 내 방에 올라와서 신입 사원 데려가.” 그래서 난 그날로 게임 개발 파트도, 그렇다고 콘솔 제작 파트도 아닌 민텐도 사의 해외 영업 파트에 배속 되었다. 이거 뭔가 좀 꼬여가는 기분이 드는데? 야 인마들아!! 나 게임 개발자라고!! 너희 지금 큰 실수 하는 거야!! ──────────────────────────────────── ──────────────────────────────────── EP. 5 : 슈퍼 마리지 (1) 그 다음 날. 나는 민텐도 사에서 제공해준 기숙사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흐음.. 호텔보다 별로긴 한데, 그래도 회사에서 제공해주는 숙박시설이라~ 나쁘지 않은데? 무엇보다 회사도 가깝고, 살짝 사육당하는 기분이 들긴 하지만 그건 그냥 기분 탓이라 생각하자. 1980년대 회사 업무의 시작은 국민체조부터 일 줄이야.. 지금 나는 회사 사옥 앞의 마당에 서서 구령에 맞춰 체조를 하고 있었다. 설렁 설렁 하려고 해도 주변 직원들이 너무나도 열심히 하는 탓에 나 역시 뻣뻣한 자세로 체조를 따라 하였다. “오늘도~!! 힘차게!!” “와아아아~” 마지막 구호를 마치자 민텐도의 직원들은 마치 적진으로 돌격하는 병사들 마냥 뜀걸음으로 달려나갔다. “미치겠네..” 나는 한국말로 중얼 거리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1980년대는 개인주의 보다는 단체주의 사상이 중시되는 묘한 시대였다. & “사장님. 어째서 강군이 해외 영업 파트인 겁니까? 제가 추천했으니 당연히 휴대용 콘솔 제작 파트에 넣어 주셨어야죠..” “아니 군페이 형님. 형님이 강군 만나보라고 해놓고 자기 개발 파트로 쏙 빼가려하면 어떻게 합니까? 제가 대화를 나눠 보니 강군은 게임 소프트 개발 파트로 와야 합니다.” “시끄러!! 모든 면접은 나를 통해 내가 적임이라고 생각하는 부서에 배속시킨다. 강준혁 군은 무조건 해외 영업 파트야. 저 녀석 이력서에도 특기가 영어로 되어 있었다고, 더구나 이놈은 미국 시장에서 크게 한방 먹여줄 녀석이란 말이다!!” 민텐도를 이끌어갈 세 우두머리가 나를 두고 싸우고 있었다. 내 부서가 해외 영업 파트로 발령이 나자 공고문을 본 군페이씨와 시게루씨는 동시에 사장실로 득달 같이 올라와 나를 데려가기 위해 난리법석을 피웠다. “야 이 자식들아!! 내가 사장이라고!!” 카마우치 씨는 사장의 호통에 결국 군페이씨와 시게루씨는 조용히 입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한구석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 하나를 두고 서로 자기가 원하는 부서에 배속시키겠다고 싸우고 있는데 당사자 입장에서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하지만 계속 이 상태로 둘수도 없었기에 나는 조심스레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저도 한마디 해도 될까요?” “뭐? 신입 사원이 윗사람들 얘기하는데 깡도 좋군. 좋아 어디 얘기나 들어보자.” “계속 이 상태면 결론이 안날 것 같아서 간단히 교통정리를 해드리려는 거죠.” “교통정리? 이 녀석 비유가 좋은데? 하하~” 카마우치 사장은 호탕하게 웃어넘겼다.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굉장히 성격이 급하고 결단이 빠른 남자였다. “우선 니세코이씨. 일단 저는 이미 차세대 휴대용 게임기의 초안을 전부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픽을 유기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디스플레이와 카트리지 시스템만 있다면 이미 다음 휴대용 기기로서의 골짜는 완벽합니다. 성능은 현재 8비트 패밀리 수준은 어려울 테니 최소한 의 사양으로 우선 판매가에 중점을 두어 보세요. 현재 패밀리 가격이 14,800엔이니 적어도 그보다는 저렴해야 사람들도 납득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단돈 1,000엔이라도 금액을 낮출 수 있는 방향이 있다면 그렇게 진행을 해보세요.” “흠.. 확실히 그렇겠군. 카트리지 시스템은 우리 쪽 인력을 사용하면 되겠고, 그렇다면 유기 표현 디스플레이 단가를 얼마에 맞추느냐가 관건이군.” “일단 제작이 들어가면 대량 발주가 예상 되니 공개 입찰을 해보세요. 그 편이 좋은 물건을 좀 더 저렴한 단가에 구입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자 카마우치 사장은 나를 바라보며 중얼 거렸다. “이 놈 보소? 나이도 어린 게 경영에 빠삭한데?” 나는 카마우치 사장을 향해 빙긋 웃으며 바라보았다. “다음은 사장님. 저를 해외 영업부에 배속 시켜주신 것에 대해 큰 불만은 없습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패밀리를 미국 시장에서 성공시켜 보이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무기도 없이 전쟁터에 나가 총알받이 하라는 말씀은 마세요.” “뭐라고라?” “현재 패밀리는 일본에서도 시작 단계입니다. 미국에서 통할만한 타이틀이라고는 동킹콤 하나뿐입니다. 이대로라면 미국인들에게 그저 ‘동킹콤 머신’으로 불리며 다른 타이틀은 팔려나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우리가 혼자 기계와 소프트를 독자 공급하고 있지만, 조금만 기다리시면 분명 아케이드쪽 게임 회사들도 우리 패밀리에 눈길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순 없지 않은가?” “물론 그렇죠. 그래서 시게루씨가 필요한 겁니다. 현재 시게루씨가 구상 중인 타이틀은 아마 발매와 동시에 대히트를 기록할 녀석으로 생각됩니다. 현재는 그 타이틀에 주력하여 최단 시간 내에 발매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가능하면 기판 제작을 먼저 해서 미국의 게임 센터에 공급을 하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미국 시장에서 패밀리를 판매할 때 엄청난 무기가 될 것 같습니다.” 자~ 내 교통정리는 여기서 끝.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내가 민텐도 사장질 하면서 이렇게 따박따박 말로 치고 들어오는 직원은 처음 본다. 어이 군페이. 한국인들은 원래 이래?” “그, 글쎄요?” “성격 하난 시원해서 좋구만~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시게루. 오늘부터 강군 데리고 그놈의 마리진지 머시긴지 그것 좀 빨리 만들어 봐.” “네, 알겠습니다~!!” 시게루씨는 사장의 결정에 만족한 듯 힘차게 대답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같이 만들어 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릴 전설의 게임을.. & “이게 아닌데.. 왜 이렇게 어색하지?” “뭔가 잘 안되세요?” “아, 강군 마침 잘 왔어. 새로운 마리지 게임에 횡 스크롤 도입은 괜찮은데 말이야. 뭔가 움직임이 좀 어색해 보이지 않아?” “아~ 그래요?” 시게루씨와의 공동 작업은 나에게 있어서 참 재미있는 일이었다. 이미 슈퍼마리지에 대한 기본적인 진행 구조는 시게루상과 나의 아이디어로 인해 미친 속도로 제작이 되어 가고 있었지만, 벌써 며칠째 시게루씨는 아무것도 없는 비어있는 스테이지 위에서 마리지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가 고심하고 있는 정답에 대해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지만, 굳이 알려주진 않았다. 마치 수능 시험 답안지를 손에 쥔 채 테스트 중인 학생을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내가 정답을 공개하면 슈퍼마리지가 더욱 빨리 제작이 될 수 있었지만, 나는 지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11월의 어느 날. “시게루씨. 패밀리 게임용 데모 디스크가 도착했는데요?” “아, 지금은 좀 바쁘니 거기 테이블 위에 놓아두세요.” 여전히 마리오의 움직임에 대해 연구 중이던 시게루씨는 직원이 가져다준 소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었다. 아타리 쇼크를 교훈 삼은 민텐도는 양질의 게임을 판매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패밀리에 출시될 게임들을 검수하고 있었다. 검수는 개발부서인 우리가 직접 플레이를 해보고 그 가치를 판단하여 합격이 되면 카트리지로 생산하는 시스템이었는데, 2015년에 비유를 하자면 어플리케이션을 만든 제작사가 앱스토어에 출품하기 전 검수 받는 것과 비슷한 작업이었다. 나는 바쁜 시게루씨를 대신해 테이블 위에 놓인 소포를 집어 들었다. 발신자는 HEG 연구소 라는 다소 묘한 이름의 회사명이었는데, 그 밑에 쓰여 있는 담당자 이름을 본 나는 손끝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왔다. 드디어 왔어!!’ 카와타 사토시라는 담당자 이름에 나는 서둘러 소포를 뜯어보았다. 조그만 플로피 디스크에 쓰여 있는 게임 이름은 ‘벌룬 파이트’ 였다. ──────────────────────────────────── ──────────────────────────────────── EP. 5 : 슈퍼 마리지 (2) ‘왔다. 드디어 왔어!!’ 카와타 사토시라는 담당자 이름에 나는 서둘러 소포를 뜯어보았다. 조그만 플로피 디스크에 쓰여 있는 게임 이름은 ‘벌룬 파이트’ 였다. 그래 난 지금까지 이것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강군? 왜 그래..?” “시게루씨 우리 기분 전환 겸 이거 검수나 같이 해볼래요?” “그럴까? 아~ 진짜 도저히 모르겠네.. 분명히 조작하는 대로 좌우로 움직이고 있는데, 왜 횡스크롤만 씌우면 이렇게 이질감이 느껴질까?” “너무 깊게 생각는 것보다 이거라도 하면서 잠시 머리 좀 식히죠~” “이런 기분에 쿠소(쓰레기) 게임 하게 되면 더 기분 잡칠 것 같은데?” “그래도 어차피 검수는 하셔야 하잖아요.” 나는 시게루 씨와 함께 탁자에 앉아 HEG 연구소에서 보내온 플로피 디스크를 틀어보았다. 경쾌한 음악과 함께 타이틀 화면이 등장하자 우린 기본적으로 아래위로 십자 방향키를 움직여 보았다. 1P, 2P로 나뉘어 있는 게 둘이서도 즐길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음~ 첫 느낌은 나쁘지 않은데? 시작해 봐.” 나는 2인용 모드에서 스타트 버튼을 눌러 게임을 시작했다. 잠시 후 화면에는 3개의 풍선에 매달린 파란색 과 빨간색 캐릭터가 양쪽 끝에 놓여 있었다. “보기엔 평범한데?” 나는 살짝 A 버튼을 눌러 캐릭터를 공중에 띄워 보았다. 그러자 캐릭터는 마치 정말로 풍선에 매달린 것처럼 살짝 날아오른 뒤 착지 했고, 연속으로 버튼을 누르자 뽈뽈 거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주어진 화살로 몰려오는 적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슈팅 게임이군.. 그런데 이거 왜 이렇게 움직이기가 어렵지?”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마치 정말 풍선에 매달린 것처럼 조작이 쉽지 않은데요?” “왜 방향키를 눌러도 제대로 움직이질 않는 거야!? 으아~~” 팡~!! 결국 적에게 부딪힌 시게루상의 캐릭터는 풍선 하나를 잃고 말았다. “풍선 하나를 잃으니 조작이 더 어려워 졌잖아~!!” 팡~~!! 하지만 나는 요리조리 적들을 피해 다니며 화살로 적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어릴 때 많이 해봤기 때문에 조작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벌룬 파이트의 묘미는 버튼을 연타해서 캐릭터를 높이 띄우는 것보다 적절한 시기에 풍선버튼을 이용해 통통 튀기듯 움직이는 것이 포인트였다. “강군은 조작이 어렵지 않아!?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잘하는 거야?” 시게루씨의 물음에도 나는 그저 웃으며 캐릭터를 조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날린 화살이 빗나가며 시게루씨의 마지막 남은 풍선을 관통했다. 팡~!! 삐로로로로... “뭐야!? 아군 화살에도 맞고 터지는 거야? 이런 게 어딨어!!” “음~ 저 같은 경우엔 오히려 더 재밌는데요?” “뭐!? 안돼!! 강군~!! 오지마!! 오지마아~!!!” 팡~!! 팡~!! 나는 시게루씨가 쏘아대는 화살을 요리조리 피한 뒤 몸통을 부딪혀 풍선을 터뜨렸다. 그 결과 눈 깜짝할 새에 시게루씨는 GAME OVER가 되었다. “야, 한판 더해. 아군을 죽이다니 치사한 놈.” 이게 바로 벌룬 파이트의 묘미지.. 그 날 오후 우리 개발 파트 사람들은 돌아가며 벌룬 파이트를 즐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군의 풍선을 터뜨릴 수도 있다는 것이 묘한 재미를 주고 있었다. 결국 게임은 적을 무찌르는 대신 공격해 들어오는 아군 캐릭터를 피해 누가 살아남느냐가 관건이 되어 버렸다. “아~ 이거 진짜 재밌는데? 조작감만 조금 손보면 훌륭한 게임이 되겠어~!!” 개발 부서 직원 중에 하나가 벌룬 파이트를 즐기며 감탄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전 오히려 이 조작감 덕분에 게임의 재미가 배가 되는 느낌인데요?” 그러자 옆에서 게임을 지켜보던 시게루씨가 턱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조작은 불편한데 말이야. 굉장히 자연스러워. 정말 실제로 풍선을 조작하는 느낌이랄까? 왜 이런 거지?” 그 순간 나는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 빠르게 버튼을 연타했다. 그러자 풍선에 매달린 캐릭터는 재빨리 하늘 높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시게루씨의 눈이 번뜩였다. “가속계?” 드디어 알아 내셨군.. 그러나 함께 있던 개발진들은 시게루씨가 한 말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지 못하고 있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캐릭터의 움직임에 가속도을 도입한 거야!! 그래 맞아. 속도가 정점에 올랐을 때 반대 방향으로 키를 입력하면 당연히 관성에 의해 튕겨 나갈듯한 느낌이 들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이 조작이 불편하다는 느낌이 든 거야. 이런 세상에 설마 관성 작용을 프로그래밍 해내다니. 이 게임 만든 곳이 어디지!?” “HEG 연구소의 카와타 사토시라는 분인데요??” “지금 바로 찾아가 봐야겠어. 강군 나랑 같이 좀 가지.” 이번엔 카와타 사토시를 만나다니 이건 생각지도 못한 행운인데? 나는 시게루씨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재빨리 외투를 챙겨 입었다. & 카와타 사토시. 내가 1983년으로 돌아오기 얼마 전 별세한 이 남자는 2002년부터 민텐도의 4번째 사장이 될 사람이었다. 민텐도의 CEO이자 개발자로서 그는 2000년대 자만에 빠진 민텐도를 위기에서 구해준 영웅이었고, 또한 민텐도를 영원한 휴대기기의 강자로 자리매김 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가 만들어낸 벌룬 파이트와 달의 카비, 파더.. 라는 작품은 민텐도 게임 중 명작의 반열에 올랐고 이후 시게루씨와 함께 수많은 게임을 만들어낼 인물이었다. “그런데, 시게루씨. 이거 주소를 보니 도쿄 치요다구에 사무실이 있는데요!?” “상관없어 저녁에 신칸센으로 이동하자!!” 시게루씨는 그동안 마리지를 조작하며 자신이 고민했던 문제의 해답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나는 열의에 찬 그의 뒤를 따라 교토 역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약 6시간 뒤인 오후 11시.. 우린 찬바람이 쌩하니 불어오는 신주쿠 역 앞에 서있었다. “그냥 일찍 자고 내일 올 걸 그랬나?” “그러게 말입니다..” 때론 누군가의 열의가 사람을 이토록 생고생시키기도 하는구나.. & 다음 날. 호텔에서 밤을 지새운 우린 아침 일찍 HEG 연구소라는 소프트웨어 개발 사무실을 찾았다. 쿠마모토 시게루씨를 사로잡은 벌룬 파이트의 제작 사무실 치고 굉장히 딱딱한 분위기인 이곳은 주로 전자계산기나 복사기에 들어가는 간단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곳이었다. “누구를 찾아 오셨다구요?” “카와타 사토시라는 분인데 혹시 안계시나요?” “카와타? 카와타.. 어이, 혹시 카와타 사토시라는 사람이 우리 사무실에 있나?” 사무실 직원으로 보이는 덩치큰 남자가 옆에 있는 남자 직원에게 물었다. 그러자 사무를 보고 있던 직원이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 그 시간제 아르바이트생 있잖아요.” 그러자 덩치 큰 남자는 그제야 생각났는지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제 아르바이트 생 이라고? 그럼 이곳의 정식 직원도 아니라는 말이군. 고개를 돌려보니 시게루씨 역시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제 아르바이트 라구요?” “네, 아마 오후 2시쯤 출근할 겁니다.” “아, 그럼 저희가 오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이럴거면 정말 오늘 아침에 출발할 것을 뭐 하러 어제 밤에 와서 이 고생을 하는 건지. 우리는 사무실을 빠져나온 우린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제 2시까지 어디 가서 시간을 때운담? 그때 20중반의 젊은 남자가 우리를 스쳐 지나 HEG 연구소 사무실로 향했다. 어라? 방금 그사람은 굉장히 낯이 익은데..? 5:5 가름마의 점잖아 보이는 인상은 내가 기억하는 2015년 그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저기 혹시 카와타씨!?” “네??” “카와타 사토시씨 맞아요?” “네, 그런데요? 누구세요?” 찾았다!! 시게루씨는 잠시 나와 카와타씨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카와타씨에게 물었다. “혹시 저희 민텐도에 벌룬 파이트를 보내주신 카와타 사토시씨 맞으세요?” “아~ 그게 벌써 그쪽에 갔나요. 하하~ 어땠어요? 재밌었나요?” 굉장히 점잖은 이미지지만 톡톡 튀는 경영 센스 덕에 카마우치 사장의 가족, 혈통이 아닌 외부인 최초로 민텐도의 사장을 역임하게 될 카와타 사토시. 이렇게 차후 민텐도를 이끌어 갈 24살의 천재를 또 한명 만나게 되었다. & “아~ 그러니까, 버튼을 입력 할수록 캐릭터 이동을 더욱 빠르게 한 뒤에 플레이어가 역 방향으로 움직일 경우. 강제로 반응을 느리게 하여 과부하를 거는 게 포인트였군.” 프로그래밍은 현실의 움직임을 숫자로 환산하는 것과 같다. 만약 마리지가 1의 속도로 달리기 시작한다면 2초 뒤에는 2의 속도, 3의 속도로 속도를 올린다. 그 상태에서 점프를 하게 될 경우 현재 스피드 수치와 점프력의 수치를 합산 하여 점프 했을 때의 거리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플레이어가 중도에 역방향으로 움직일 경우 숫자 3에서 –1로 곧장 향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나아가 숫자 4부터 차례로 3, 2, 1, 0 –1 이것이 관성에 대한 사토시의 기본 설명이었다. “이제야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이 드는군. 카와타군.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네. 그리고 자네가 만든 벌룬 파이트 말인데, 혹시 우리 회사로 들어와 함께 제작해보는 건 어떤가? 분명 좋은 작품이 될 거야.” “말씀은 감사하지만, 일단은 HEG 연구소에 남아 있는 일이 있어서요.” “그래? 정말 아쉽군. 하지만 언제든 생각이 있다면 이쪽으로 연락을 주게.” 시게루씨는 카와타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네주었다.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시게루씨는 어서 돌아가 마리지의 움직임을 완성 시키고 싶은 마음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이로서 슈퍼마리지를 만들어낼 모든 요소는 충족 되었다. 제작은 곧 완료 되겠지만 카트리지 생산 기간이 있으니 아마 슈퍼 마리지는 1984년 초 즈음 출시하게 되겠지? 본래라면 85년도에 나왔을 작품인데, 1년 정도 앞당겨 지게 되었구나.. 군페이씨의 휴대용 겜보이 역시 예상보다 빨리 출시가 될 듯하고, 이곳에 내가 온 이후로 내가 알던 역사보다 일이 빠르게 진행 되는 느낌이 들었다. 과연 이것이 맞는 것인지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나 봐야 알겠지만.. ──────────────────────────────────── ──────────────────────────────────── EP. 6 : 미국 시장을 공략하라!! (1) & “다들 수고 했다. 슈퍼 마리지 완성을 축하하며 건배~!!” “건배~!!!” 1983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비디오 게임 최초의 횡스크롤 게임 슈퍼 마리지가 완성이 되었다. 지난 9월에 출시된 전작 마리지 브라더스는 둘이서 즐기는 독특한 게임 방식으로 이미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기에 이번 슈퍼 마리지에 거는 기대감이 더욱 커져가고 있었다. 동킹콤과 마리지 브라더스 덕분에 패밀리 역시 아이들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불티나게 팔린다는 소식에 카마우치 사장도 크게 기뻐했다. 오죽하면 개발팀 축하 파티에도 직접 찾아와 저렇게 신나게 떠들어 대고 있을까? “이봐 시게루 이번에 자네가 만든 게임은 얼마나 팔릴 것 같나!? 응? 100만개!? 200만개?? 으하하하~~” 전 세계적으로 1000만개가 나갈 녀석입니다. 나는 속으로 빙긋 웃으며 맥주를 홀짝였다. “사장님. 저 혼자 만들어낸 게 아닙니다. 솔직히 강 준혁군이 없었다면 이렇게 빨리 슈퍼 마리지를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지, 그렇지. 이~봐 강군~!! 어딨어!?” “여기 있습니다.” “옳지, 옳지~ 그래 거기 있어 내가 갈게~!!” 카마우치 사장은 벌써부터 얼큰하게 취해 덩실덩실 춤을 추듯 내게 달려왔다. “크하하~ 어디서 이런 보물 같은 사원이 들어와서 나를 기쁘게 해주는 거냐~!!” 크~ 이정도면 완전 주정뱅이가 따로 없군.. 나는 술 냄새를 풍기며 들러붙는 카마우치 사장과 살짝 떨어지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강군.. 그를 만난 건 우연이었습니다. 그때 만약 신칸센에 오르기 전 도시락을 사기 위해..” “시끄러 군페이!! 그 말은 내가 백번도 더 들었다!!” 민텐도 입사 후 3개월. 나는 1983년에 잘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개발실 직원들도 매우 친절 했고, 나에게 적대감을 갖는 사람도 없었다. 일을 하다 보니 돈쓸 시간이 없어서 통장의 잔고는 계속해서 차오르는 중이었다. 만사가 형통하니 걱정이 전혀 없군. 이대로 분위기 좋게 연말을 보내고 1984년을 맞이하자~ 그때 내 옆에 있던 카마우치 사장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강준혁군.” “네. 사장님~” “이제 총 들려 줬으니까. 미국 가야지?” “네..?” 그로부터 약 한 달이 흐르고.. 1984년 1월 25일. 나는 슈퍼 마리지의 카트리지 생산 작업을 시게루씨에게 일임한 뒤 군페이씨와 함께 미국에 와있었다. “아오!!! 씨발!!! 추워!! 적어도 겨울은 보내고 여길 보내던지 카마우치 개새끼야!!” “음? 강군? 지금 뭐라고?? 얼핏 사장님 이름이 들린 것 같은데?” “한국말로 혼잣말 좀 했습니다.” 나는 눈에 파묻혀 잘 굴러 가지도 않는 여행용 캐리커를 끌고 뉴욕 한복판을 걷고 있었다. & 끼이익.. 우린 민텐도 미국지사에서 예약해준 허름한 호텔에 들어왔다. 샤사삭.. 뭐지? 방금 바닥에 뭐가 기어간 거 같은데? 아니 일본에서 온 본사 직원 숙소를 이딴 곳에 잡아두다니. 카마우치 사장이 조금 제멋대로긴 해도 직원들 복지는 신경 쓰는 편인데. 내 옆에 서있던 군페이씨 역시 표정이 좋아보이진 않았다. “미국 호텔은 다 이런가? 일본에 비해 너무 시설이 좋지 않군..” “그럴리가요. 여기 사람들이라고 숙박업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가장 싼 숙소로 예약한 거겠죠” “에이, 설마.. 미국 지사를 담당하는 야마시타씨는 카마우치 사장님의 사위일세. 그런 분이 설마 우리를 이렇게 대접했을까?” “아무튼 군페이씨. 전 여기서 못자요. 우리 호텔을 옮기죠.” “뭐!? 하지만 다른 곳에 숙소를 잡으면 회사 돈이 아닌 사비로 해야 할 텐데?” “저 그 정도 돈은 있거든요? 우리가 여기서 몇 달을 있을지 모르는데, 어떻게 여기서 계속 생활해요!?” 결국 나는 군페이씨를 잡아끌고 호텔 앞에 서있던 택시에 올랐다. “Please take me to the best hotel around here.” “Yes. sir~” “이봐, 강군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 “이 근처에서 가장 좋은 호텔로 가달라고 했어요.” “뭐!? 이, 이봐.. 강군. 정말 괜찮은 거야?” 잠시 후 우린 휘황찬란한 조명에 빛나는 거대한 호텔 앞에 서있었다. 확실히 변두리에 있던 호텔과는 달리 번화가엔 온통 신년을 축하하는 메시지들로 가득했다. 이제야 좀 사람 사는 곳 같군.. “그래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잘 만하겠지?” “여긴 너무 비싸 보이는데? 어? 강군!? 강군!!” 뒤에서 들려오는 군페이씨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나는 캐리어를 끌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 당장 추워 뒈지겠는데, 돈은 이럴 때 쓰는 거지. 혹시나 해서 환전 많이 해오길 잘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호텔 로비를 지나 프론트에 다가가자 푸른 눈동자의 금발 미인이 나에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How may I help you, sir?”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손님?) “I'd like a room please.” (방을 빌리고 싶은데요.) “Did you make a reservation?” (예약은 하셨나요?) “No. I didn't.” (아니오.) “Ok. would you like a single or double?” (알겠습니다. 방은 싱글과 더블 중 어느 쪽을 원하십니까?) “I'm staying for a month. I'd like the best room you have.” (한 달 정도 머무를 생각입니다. 이 호텔에서 가장 좋은 방을 주세요.) “Yes. sir~” (알겠습니다. 손님~) 군페이씨는 멍하니 내 곁에 서서 우리의 대화 내용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하.. 한 달!? 강군 혹시 지금 이 호텔에서 가장 좋은 방을 한 달 동안 쓴다고 한 게 맞나?” “네.. 일단은 최소 한 달 잡고 상황을 봐서 늘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우린 출장을 온 거지 놀러온 게 아니라구!!” “누가 뭐랍니까. 일은 일이고, 휴식은 휴식이죠. 잘 쉬어야 일도 열심히 할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스위트룸을 빌리다니..” “헉.. 군페이씨 설마 싱글 룸에서 저랑 한 침대에 주무시려고 하셨어요!?” “아니, 내 말 뜻은 그런 게 아니라~!!” 하지만 이미 게임은 끝났다. 우리가 옥신각신 하는 사이에 프론트 직원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우리에게 열쇠를 건네주었기 때문이다. “Thank you. Happy New year~” 나는 열쇠를 받아들며 프론트 직원에게 인사를 건넨 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나 참. 이거 사장님께는 뭐라고 보고 해야 하나?” “군페이씨야 말로 걱정도 태산입니다. 회사 경비 말고 내가 내 돈으로 호텔에서 묵겠다는데 뭐가 문제에요?” 1983년 뉴욕 최고의 호텔의 스위트 룸 가격은 하룻밤에 149달러였다. 물론 한 달로 치면 450만원 이라는 어마 어마한 금액이긴 하지만, 그 정도 금액쯤이야. 내 통장의 예치금 수수료조차도 안 되기 때문에 나는 마음 편히 캐리어를 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강군은 한국인이라 잘 모르나 본데, 일본 사회에서는 말이야. 주변 사람들의 인식이 중요하다네.. 이런 고급 호텔에서 묵었다고 하면 일본에 있는 직장 동료들은 분명 놀고먹고 있다고 생각할 거야.” 흔히 일본인에게는 혼네 (본심) 와 타테마에 (겉으로 드러내는 마음)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본심은 무슨 꿍꿍인지 모르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점잖고 배려가 깊은 척을 한다고 할까? 그만큼 겉과 속이 다른 민족이라 그런지. 일본인은 주변 시선에 참 신경을 많이 쓰는 듯했다. “일만 잘 처리하고 가면 되지. 뭐 하러 피곤하게 그런 것까지 따진 답니까?” 아~ 몰랑. 거의 15시간을 날아와서 피곤해 죽겠는데, 그런 것까지 신경 쓰기도 귀찮아!! 어서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잠이나 자야겠다. ──────────────────────────────────── ──────────────────────────────────── EP. 6 : 미국 시장을 공략하라!! (2) & “강군. 역시 돈이 좋긴 좋구만~” 푹신한 침대에서 일어난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깬 군페이씨의 첫 마디였다. 어제 그렇게 찡찡 거리며 따라 오더니 결국 푹 자고 일어나 한다는 소리가 저건가?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침대에서 내려와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젯밤에는 너무나 피곤한 나머지 방에 들어오자마자 캐리어를 던져두고 곧장 샤워 룸으로 향했었기에 방 한구석에는 여전히 내 캐리어가 나뒹굴고 있었다. 슬쩍 반대편을 바라보니 군페이씨의 짐은 일본인답게 정갈하게도 정리 되어 있었다. 사람이 치사하게.. 여유가 있으면 내 캐리어도 좀 똑바로 놔주지. &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마친 군페이씨는 호텔 로비에 앉아 담배를 태우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흡연에 대한 규제가 약했던 1980년대에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코트와 가방을 챙겨 들고 로비로 나오자 나를 본 군페이씨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우선 미국 지사 사무실로 가볼까?” “그러죠.” 우리는 택시에 올라 민텐도 미국지사의 사무실로 향했다. & “아, 당신들이 일본에서 왔다는 군페이씨와 강준혁군인가?” 미국에서 처음 만난 야마시타 지사장의 첫인상은.. 폐인 그 자체였다. 이른 시간 임에도 사무실에선 아무런 활기를 찾아 볼 수 없었고, 무엇보다 야마시타씨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위스키 냄새가 지독하게 풍겨왔다. “당신들이 미국에 왔다고 해서 변할 건 아무 것도 없어. 이미 미국 시장에서 콘솔 게임 사업은 완전히 끝물이니까.” 그의 말에는 아무런 희망도 담겨 있지 않았다. 도쿄대까지 나왔다던 카마우치 사장의 사위는 미국 사무실에서 완전히 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사실 그 이유에는 아타리사가 남긴 게임 산업 붕괴 현상도 있었지만 컴퓨터 산업이 번창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게임기는 자녀의 학업을 망치지만, 컴퓨터는 자녀를 대학에 보내드립니다.- 오늘 아침 호텔 신문에 실려 있던 한 컴퓨터 회사의 마케팅 광고. 그것은 겨우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던 콘솔 시장의 숨통을 완벽히 끊어 내는 것만 같았다. 사실 나도 몰랐던 사실이 있었는데, 카마우치 사장은 민텐도가 일본에 출시하기 이전부터 미국에 승부수를 띄우고 있었다. 일본에서 7월 15일에 출시했던 패밀리는 이미 미국에서 4월부터 판매처를 알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게임 산업이 완전히 죽어 버린 탓에 전자제품이나, 장난감 회사. 어디에서도 패밀리를 받아 주지 않았고, 단 한 대도 팔리지 못한 패밀리는 창고에 그대로 쑤셔 박혀 있었다. 처음엔 열의에 차있던 야마시타씨도 점점 자신감을 잃어 매일 술을 마시는 모양이었다. 여기선 더 있어 봤자 이득 될 게 없겠어..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군? 어디로 가려고?” “일단 시장 조사를 해봐야죠.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몸소 체험해보러 갑니다.” “큭큭.. 그래 어디든 가 봐~ 아 참, 가기 전에 약국에 들러 반창고라도 사가는 게 좋을 걸? 괜히 가게주인 신경 건드려서 두들겨 맞으면 그거라도 붙이라고. 킥킥킥~” “일단 야마시타씨. 샘플용 패밀리 하나만 가져갈게요.” “마음대로 해.” “어이, 강군. 나도 함께 가세나~!!” 미국지사 사무실에서 나온 우리는 또 다시 택시를 타고 근처에서 가장 유명한 장난감 가게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사람이 변했군. 미국에서 고생을 많이 한 모양이야.” “완전 폐인이나 마찬가지던데요?” “카마우치 사장이 엄청 신뢰하던 젊은이였는데, 어쩌다 저런..” 실패는 사람을 점점 소심하게 만든다. 인생의 성공가도를 달리며 단 한 번도 실패를 겪어보지 않았던 사람일수록 단 한 번의 실패에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다. 바로 현재의 야마시타씨처럼.. & “내 가게에서 당장 나가!!!” “사장님 그러니까 잠깐 얘기라도~” “꺼져~!! 내 가게에 게임기 따위 들고 오지마!!” 반응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그것은 전자제품 상가든 장난감 가게든 모두 마찬가지였다. 친절했던 사장님도 상자에서 게임기를 꺼내는 순간 무슨 귀신 보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당장 집어넣으라고 소리칠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이거 참.. 야마시타군의 말이 사실 이었군. 설마 이토록 문전박대를 당할 줄이야..” 주인장에게 멱살까지 잡혔던 군페이씨는 넥타이를 고쳐 매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게임 산업 자체가 완전 망가졌구나.. 이러면 살짝 작전을 바꿔야겠는데? 나는 일단 지하철 코인 라커에 패밀리를 숨겨둔 뒤 맨손으로 장난감 가게를 살피러 다녔다. 일단 영업사원인 티를 내지 않고 장난감을 구경하자, 적어도 가게 직원들에게 제지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가게 내부를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가게 한 구석에 아무렇게나 쌓여져 있는 게임 카트리지 더미를 발견했다. “저건 뭔가요?” “아, 아타리용 게임 카트리지입니다. 재고가 너무 많이 남아서 개당 1달러에 팔고 있어요.” 헐.. 1달러면 하나에 천원 꼴이라고? 천원이면 카트리지에 들어가는 반도체 생산 단가도 안 나오겠다. 진짜 얼마나 추락한 거냐. 장난감 가게 사장들이 치를 떨 만도 하군. 나는 군페이씨와 함께 여러 곳의 장난감 가게를 살펴보았지만 모두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거 참.. 바늘 하나 들어갈 틈조차 없군.” “그러게요. 우선 배고픈데 우리 뭐 좀 먹으면서 생각할까요?” 나는 택시에 올라 이번에는 가장 비싸고 맛있는 레스토랑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나처럼 능숙하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 영어를 할 줄 알던 군페이씨는 혀를 차며 나에게 말했다. “어떻게 자네는 툭하면 가장 비싼 것부터 찾나? 사람은 자고로 아껴야 잘 사는 거야.” “그럼 중간에 햄버거 가게에 내려드릴까요?” “어? 아, 아니야. 같이 가세.” 어차피 따라올 거면서 애초에 그런 말을 말던가. 나는 창밖으로 흘러가는 시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역시 예상을 웃도는 시장 침체가 일어나고 있군. 카마우치 사장에게 로봇트 장난감을 만들어 달라고 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겠어.. 그때 뒷좌석에 앉아 있는 우리를 향해 택시 기사가 말을 건네었다. “당신들은 일본인인가?” “저는 한국인, 그리고 왼쪽은 일본인이에요.” “한국? 한국은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일본 사람도 있다는 거지?” “제가 일본인입니다.” 어설픈 영어로 군페이씨가 대답하자 택시 기사는 웃으며 군페이씨에게 물었다. “오~ 사무라이~~!! 일본인은 아직도 길거리에 칼을 차고 다니나!?” “풉..” 아직 해외여행이 활발한 시기는 아니라 그런지 몰라도 80년대에는 저런 오해가 종종 있곤 했다. 한국을 모른다는 택시 기사의 말에 조금 씁쓸해지긴 했지만, 아직까지 세계인의 주목을 받을 만한 이슈가 없으니 당연한 걸까? 적어도 88년 올림픽이 개최되기 전까지 완전 쩌리 취급 당하겠네.. 하지만 웃자고 한 소리에 군페이씨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가 않았다. 왠지 자신이 모욕당한 기분이 들었는지 군페이 씨는 어설픈 영어 실력으로 반박했다. “지금은 20세기입니다. 일본은 더 이상 칼을 차지 않고, 미국과 동등한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택시 기사는 웃으며 대답했다. “미안, 미안. 그냥 조크 였어. 조크. 킥킥” 그러나 군페이씨는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일본어로 중얼거렸다. “우리가 칼 차고 다니면 너흰 다 총 들고 다니냐.” 거참 중년의 남자가 뒤 끝 보소. 그런데 맞는 말이긴 하다. 일본도나 닌자가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상징인 것처럼. 미국하면 말을 타고 달리는 카우보이가 떠오르니까. 가만? 총? 카우보이??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번개같이 추억의 게임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은 최초로 가정용 TV를 이용해 사격 게임을 즐겼던 ‘오리 사냥’ 이라는 게임이었다. 이거다!! 이거야!! ──────────────────────────────────── ──────────────────────────────────── EP. 6 : 미국 시장을 공략하라!! (3) “총을 만들어 달라고?” 부드러운 쇠고기 스테이크를 잘라내던 군페이씨가 칼질을 멈추며 나에게 물었다. “네. 전자총 좀 만들어주세요.” “전자총?” 군페이씨는 무슨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냐는 듯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다시 연습장을 꺼내어 대충 펜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래 차라리 그림으로 그려주는 게 쉽구나.. “요렇게 생긴 총입니다. 다행히 우리 패밀리에는 전원 공급이 가능한 외장 포트가 있으니 이용하면 될 거 같아요. 브라운 관 티비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면 화면에 표시되는 과녁이 떨어지는 겁니다.” 본래라면 본체에 달려 있는 패드가 고장 났을 경우에 사용하는 비상 포트였지만 아무튼 이렇게 따로 설계 해두었으니 이걸 사용을 해야겠지.. 군페이씨는 나의 설명에 구미가 당기는지 스테이크 접시를 옆으로 치우며 바싹 다가왔다. “총을 쏘는 새로운 컨트롤러라 굉장히 흥미롭군. 그런데 이건 어떤 방식으로 조작 되는 거지?” “그건 군페이씨가 생각하셔야죠.” “뭐라고..?” 자고로 새로운 전자기기의 탄생은 아이디어 한 스푼과 공돌이를 갈아 넣으면 만들어지는 법이거든. 솔직히 나도 어떤 방식으로 브라운관 TV에 총을 쏘면 그 안에 타격 판정이 생기는지 몰라. 하지만 내가 어릴 적 분명 플레이 해봤고 원래 당신이 실제로 만들었던 물건이니 어떻게든 만들어 주시겠지~ & 그로부터 삼일 후. 나는 군페이씨와 국제공항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미국 시장의 돌파구는 그 총입니다. 군페이씨. 부디 일본에 돌아가서 힘내 주세요.” “강군에게 이야기를 듣고 계속 생각해 보았는데, 대충 실마리가 잡힐 듯도 해. 전자총이 완성 되면 곧바로 연락 하겠네. 그런데, 그 과녁을 맞추는 프로그램은 누구한테 맞기지? 시게루군에게 맡길까?” “아뇨. 지금은 카트리지 검수도 해야 해서 시게루씨도 바쁠 거예요.” “그럼 누구한테 맡기지?” “그건 제가 여기서 만들겠습니다.” “뭐!? 여기서 만들겠다고?” “시장 조사도 하면서 설렁 설렁 만들어보죠 뭐.. 데모가 완료 되면 국제 우편으로 보내드릴테니 시게루씨랑 같이 완성해주세요.” “설렁설렁? 진짜 자네는 가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군. 말만 꺼냈다하면 온갖 기상천외한 것들이 튀어나오니 종잡을 수가 없어~” “칭찬이라 듣겠습니다.” “물론 칭찬 일세. 자네를 만나고 회사 생활이 점점 재밌어 지는군. 그럼 부디 야마시타씨를 도와 미국 시장을 부탁하네.” “걱정 마세요~” 그렇게 군페이씨를 떠나보낸 나는 잠시 후 홀로 공항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장 민텐도 미국 지사 사무실로 향했다. 조용한 사무실 문을 벌컥 얼어 젖히자 안에서 위스키를 따르고 있던 야마시타씨가 깜짝 놀라 술을 흘렸다. “거~ 사람 조심조심 좀 다닐 수 없나?” “어차피 테이블에 앉아 술이나 퍼마시는 주제에 바쁜 직원한테 잔소리까지 하진 마세요.” 그러자 야마시타는 내가 지금 뭘 잘 못들은 건가? 싶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거기 앉아서 술만 퍼마신다고 창고에 쌓여있는 저 게임기들이 하나라도 나가겠습니까? 어떻게든 활로를 열어 봐야죠.” “나라고 뭔들 안 해본 줄 아나!? 어느 매장에서건 물건을 깔아 줘야 마케팅이라도 해보지 이건 아예 되지가 않는 사업이야!! 미국에서 콘솔은 끝났어. 기기 마진을 최대한까지 낮춰서 물건을 준다고 해도 다들 콧방귀만 뀔 뿐이라고!!” “그럼 기기 만 받아 주면 돈 준다고 해봤어요?” “뭐?” “그냥 진열만 해도 진열비로 돈을 줘봤냐고요.” “미친놈아!! 그저 매장에 물건을 깔뿐인데, 왜 우리가 돈을 줘야 하는데!?” “깎아줘도 안받아주면 돈을 주면 되죠. 어차피 기계 하나 팔아봐야 14800엔에서 1800엔 남겨 먹을 뿐이에요. 우리가 고작 1800엔 벌자고 미국까지 와서 이 짓거리 하는 건 아니잖아요. 우선은 게임기가 판매 되어야 카트리지가 나가서 수익을 창출하죠. 그리고 그렇게 게임기에 대한 인식이 안 좋으면 이름을 바꿔버려요. 이건 게임기가 아니라고!!” “뭐? 게임기를 게임기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하고 팔아!?” “음.. MINTENDO Home Entertainment System.. 줄여서 M.H.E.S. 어때요?” “민텐도 홈 엔터테이먼트 시스템..?” “일단 게임 콘솔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해 보자구요.” 그리고 민텐도 미국지사 MHES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 “드디어 야마시타 녀석이 제대로 일을 벌려보려는 모양이군. 그래~ 그래야 내 사위답지.” 당신 사위 술과 대마초에 꼴아서 폐인 꼴이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직접 전화통 붙잡고 이러고 있지.. 나는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그래서 야마시타 사장님과 묘책을 짜본 결과. 저희는 새로운 지사명으로 미국 시장을 재공략하기로 했습니다.” “좋아~ 좋아. 지사명이야 엎어치나 매치나 민텐도인건 민텐도 인거지. 그래서 어떻게 공략하려는 건가.” “다행히 지난주에 출시가 완료된 슈퍼 마리지가 엄청난 속도로 팔려나간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으하하~ 그것뿐인가? 슈퍼마리지와 함께 동킹콤과 전작인 마리지 브라더스가 세트로 나가고 있어!! 기기 견인 효과까지 더불어 지금 공장이 풀가동 중인데도 모자랄 지경이지.” “그렇군요. 전 일본의 돈을 다 긁어모을 기세로군요~” “역시 강군은 비유법이 좋군~ 그래 네 말대로 아주 다발로 긁어모으고 있지~ 창고에 물건 좀 더 만들어 놓을 걸 매우 아쉬워하는 중이라네.” “잘 됐네요~ 그럼 저희 미국 지사 창고에 있는 기계를 가져가 주세요.” “뭐라고!? 그걸 왜??” “M.H.E.S.로 새롭게 스타트하는 시기에 이전과 똑같은 기계를 들고 영업할 순 없지 않습니까? 미국인의 취향을 맞춰 새롭게 기계를 디자인 하겠습니다.” “뭐!? 야, 인마. 이미 완성품이라 공장에서 찍어 내기만 하면 되는데, 디자인을 바꾼다고??” “야마우치 사장님. 그동안 게임 & 워치와 패밀리의 성공으로 보유 자금도 엄청 나실 텐데, 미국 시장을 노리신다면 투자를 하셔야죠. 현재 패밀리의 디자인은 미국시장에서 너무 좋지 않은 이미지입니다. 그리고 동양인 표준에 맞춰져 있기에 컨트롤러 크기도 너무 작아요. 조금더 크고 튼튼하게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끄응.. 그래도 뭔가 생돈 나가는 기분인데..” “제가 지금까지 사장님께 실망 시켜드린 적은 없지 않습니까. 절 믿고 여기로 보내주셨다면 지원 사격을 해주셔야죠.” “크으.. 알았다. 그럼 일단 미국 창고에 있는 물량은 전부 회수 하지. 어차피 일본에서는 기기가 모자라서 못 팔고 있으니.” “감사 합니다. 아.. 그리고 이건 야마시타 사장님과 합의한 거긴 한데..” “또 뭔가?” “미국에서 저희 패밀리를 진열해주는 매장에게 진열비를 주기로 했습니다.” “진열비? 그게 뭔가?” “간단히 저희 물건을 매장에 깔아 주면 그 위치에 따라 소정의 감사비를 드리는 거죠. 한달동안 가게 전면이면 1000달러를 후방이면 300달러.” “뭐? 매장에 물건을 깔아주는 것만으로 돈을 주자고? 그건 또 누구 대가리에서 나온 미친 발상이냐!?” “하하.. 사장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물론 이걸 계속해서 하자는 게 아니고 딱 2달만 이벤트 식으로 해보죠. 마침 군페이씨에게 들어보니 전자총 문제가 해결 되어 생산 단계에 들어갔다고 하던데, 예전에 제가 말씀 드린 컨트롤 로봇은 이미 완성된 거죠?” “그래. 다 완성 됐다. 네가 만들었다는 전자 사격 게임 역시 평이 매우 좋아. 요즘 휴게실에 가보면 전 직원들 모두 즐기고 있더군.” “그럼 미국판 모델에는 그 로봇트와 전자총도 같이 세트로 넣어서 포장해주세요.” “뭐? 그러면 14800엔에 단가를 맞추기가 힘든데?” “괜찮아요. 미국에서는 199달러에 팔 거니까요.” “뭐!? 149달러에 팔아도 안 나가던걸 오히려 가격을 올리겠다고?” “149달러에 팔아도 안 나간 이유는 진열을 못해서 안 나간거지 결코 기계의 퀄리티가 나빠서 안 나간 건 아니죠.” “끙.. 이거 참. 그렇게만 팔린다면야 진열비를 회수하고도 남을 것 같긴 한데.. 어쩌지..” “사장님..” “응? 자꾸 그렇게 나 부르지 마. 또 네 녀석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 나올지 두렵다.” “총을 들려 보내주셨으면, 총알도 같이 주셔야죠. 그냥 눈 딱 감고 시원하게 쏘세요.” “으.. 진짜 준다 줘!! 대신 너 실패하면 다시는 일본 땅 못 밟을 줄 알아라..” 헹~ 실패 하면 한국 땅 밟아야지~ ──────────────────────────────────── ──────────────────────────────────── EP. 6 : 미국 시장을 공략하라!! (4) & 내가 미국에 온지도 어느새 4개월째가 되어 가고 있었다. 지난 달 사장님과 통화 후 창고 안에 있던 캐캐묵은 패밀리는 전량 일본으로 회수가 들어갔고, 오늘 오전 새롭게 디자인 된 M.E.S라는 녀석이 들어왔다. 이전의 패밀리는 딱 봐도 카트리지를 세로로 꽂아서 즐기는 게임기 이미지였던데 반해, 새로 디자인 된 녀석은 마치 컴퓨터 디스켓처럼 널찍한 카트리지를 전면부에 밀어 넣는 스타일로 바꾸었다. 또한 좁은 일본 가정집과는 다르게 넓은 거실을 즐기는 서양인 취향에 맞춰 컨트롤러 줄을 더 길게 늘이고 크기도 키웠다.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디자인 되었군. 그런데 이렇게 겉모습을 바꿨다고 사람들이 믿어줄까?” “어차피 전 모델은 쳐 다도 안 봤을 정도니까 괜찮을 거예요.” 야마시타씨는 지사명을 바꾸고 새롭게 시작하는 동시에 술과 대마를 끊었다. 창고에서 먼지만 쌓여가던 패밀리를 전부 치우고 나자, 야마시타씨는 그제야 숨통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아무래도 팔리지 않는 부진 재고를 떠안고 있던 게 야마시타씨에겐 큰 스트레스로 작용했던 것 같다. “자~ 그럼 이제 새롭게 공략을 하러 가볼까요?” 나는 샘플용 M.E.S 머신을 들고 야마시타씨를 향해 웃어보였다. & 잠시 후 우린 뉴욕에서 가장 큰 장난감 가게 토이월드 앞에 서있었다. “이거 원 또 멱살 잡혀 끌려 나오는 건 아닐지..” 야마시타씨는 벌써부터 긴장했는지 넥타이 끈을 느근하게 풀어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 역시 일전에 험한 꼴을 당해봐서 마른침을 삼키며 어색하게 웃어보았다. “설마.. 이번엔 잘 될 거예요.” 딸랑~~ 가볍게 정문을 밀어 젖히며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점원들이 웃으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하지만 딱 봐도 영업사원 티가 나는 복장이었기에 잠시 후 담당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어떤 일로 오셨죠?” “안녕하세요. 저희는 M.H.E.S라는 업체 쪽 사람입니다. 새로운 장난감을 개발하여 오너와 상담을 하고 싶은데요?” “M.H.E.S? 처음 들어보는데?” “이번에 새로 미국에 등록한 일본계 회사입니다. 움직이는 로봇과 전자총 장난감을 개발 했지요.” 그러자 매니저는 전자총에 대해 살짝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전자총? 저흰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취급합니다. 사람을 다치게 하는 장난감을 판매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매니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빨리 전자총을 꺼내어 보였다. 회색빛깔의 투박한 권총은 아무리 보아도 위협용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가져온 총은 총알이 나가지 않습니다.” “흐음.. 일단 오너실로 모시겠습니다.” 뭔가 미식쩍은 표정의 매니저는 우리를 데리고 가게 안쪽의 사장실로 안내했다. 좋아, 이제부터가 진짜 승부다. 사장실 안에는 전형적인 미국인 체형의 뚱뚱한 남자가 서류뭉치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추운 겨울이 지나 봄인데도 그는 마치 한여름 복장을 하고 있었다. “스미스? 그 사람들은 누군가?” “그게 새로운 장난감을 개발했다는 M.H.E.S라는 업체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장난감? 장난감이 다 거기서 거기지. 새로울 게 뭐가 있나?” 굉장히 퉁명스레 반응하는 오너에게 나와 야마시타씨는 최대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 “일본인인가? 재밌군. 그래도 노란 원숭이 녀석들이 장난감 하나는 잘 만드니까. 어디 한번 구경이나 해볼까?”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을의 입장이었던 우리는 테이블 위에 새로운 장난감을 올려두었다. “로봇? 그리고 총? 이게 뭐가 새로운 장난감이라는 거지?” “이것들은 여기 있는 기계에 연결하여 사용하는 전자동 장난감입니다.” “기계? 뭐야 이거? 이거 혹시 게임기 아냐?” “아뇨. 이것은 홈 엔터테이먼트 컴퓨터입니다.” “컴퓨터라고?” “네 이걸 이용해 이 로봇을 움직일 수 있고, 총을 쏠 수 있죠. 잠시 연결을 해볼까요?” “흐음.. 일단 해봐.” 사장은 조금이라도 허튼 수작을 부리면 나를 던져 버릴 기세로 노려보고 있었다. 야마시타씨 역시 긴장했는지 무릎을 세운 채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우선 외부 포트에 로봇을 연결시키고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패밀리 패키지에 포함된 로봇은 별도의 카트리지 없이 조작이 가능했기에 나는 곧장 컨트롤러를 쥐고 로봇을 조작해보았다. 다행히도 카마우치 사장은 내가 처음에 알려준 힌트를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로봇에 팔을 만들어 물건을 들어 올리는 기능도 추가 해두었기에 나는 테이블에 올려져있던 전자총을 들어 올려 보았다. 로봇의 양팔이 집게처럼 좁혀지며 전자총을 집어 올리자 그것을 지켜보던 사장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호오.. 재밌군. 그런데 그 총은 뭐지?” “아, 이것은 TV를 사용해야 하는 총인데요.” “TV!? 왜 장난감 주제에 TV를 사용하지? 이거 게임기 아냐?” “아뇨. 이건 가족끼리 즐겁게 사격 연습을 할 수 있도록 제작된 오락 프로그램입니다.” 내가 해놓고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게임은 게임인데 게임이 아니라고 하니.. 홍길동 호부호형하는 소릴 하고 앉아있군. 사장이 굉장히 미심적은 표정을 하고 있었기에 나는 슬슬 눈치를 봐가며 사장실 한구석에 있는 TV에 케이블을 연결했다. 행여 카트리지를 꽂는 걸 보이면 확실히 트집 잡힐 것 같았던 나는 미리 게임기에 카트리지를 꽂아둔 상태였다. 외부포트에서 로봇을 제거 하고 전자총으로 바꿔 낀 나는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그러자 TV에서 덕헌트 (오리사냥) 라는 문구가 떠오르고, 그와 동시에 사장과 매니저의 표정은 심히 불편해 졌다. 불안했던 나는 전자총의 방아쇠 부분을 딸각 거리며 빨리 메인화면이 넘어가길 바랬다. 그리고 잠시 후 화면에는 녹색의 수풀이 그려진 화면이 등장하자 사장의 이마에 핏대가 굵어졌다. “이거 게임기 맞잖아!!” 타앙~!! 그 순간 나는 TV 화면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고 그러자 화면 안에 날아오르던 오리 한 마리가 꽥하고 떨어졌다. “어? 뭐야 방금??” 피요오오옹~ 타앙~ 펑~!! 피유우웅~ 타앙~ 펑~!! 화면 안에 날아가는 오리들은 내 전자총에 의해 차례차례 추락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저 총으로 TV안의 오리를 떨어뜨릴 수 있는 거지?” ──────────────────────────────────── ──────────────────────────────────── EP. 6 : 미국 시장을 공략하라!! (5)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저걸로 TV안의 오리를 떨어뜨릴 수 있는 거지?” 물론 이해할 수가 없겠지. 그들에게 있어서 지금 상황은 마치 4D영화를 처음 체감한 것과 같은 충격일 것이다. 전자총의 총구에선 아무 것도 발사 되지 않았지만, 확실히 한발 한발 TV 속의 오리를 상쾌하게 격추 시키고 있었다. 사장과 매니저는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내 플레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군페이씨는 천재야. 단기간 안에 아주 훌륭한 걸 만들어 주셨군. 일본에 돌아간 군페이씨는 게임에 사용하는 새로운 컨트롤러를 위해 밤을 새워 수많은 연구를 거듭했다. 그러던 중 그는 TV화면의 주사율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가 만들어 낸 전자총은 단 한순간이지만 TV의 주사율을 강제로 조작할 수 있었다. 전자총의 방아쇠를 당기면 화면 전체가 일순간 깜빡이며 검은색이 되는데 워낙 순간이라 사람의 눈으론 확인이 불가능 했다. 그리고 날아오르는 오리의 오브젝트를 흰색으로 표시하며 전자총이 하얀색 오브젝트를 인식하게 만들도록 제작 되었다. 이게 뭔 말이냐고? 사실은 나도 몰라. 아무튼 전자총에 티비를 강제로 제어하는 기능을 넣어 날아가는 오리를 인식 시키는 거라는데, 군페이씨도 이걸 성공하고 오죽 기뻤으면 시차 생각도 안하고 새벽에 전화 해 생난리를 치셨으니.. 그때 작동 방식에 대해 뭔가 주저리주저리 하셨던 것 같긴 한데, 잠결이라 나도 잘은 모르겠더라.. 그냥 아~ 드디어 만들어졌군. 하고 다시 잠들긴 했지만.. “확실히 재미있는 장난감이군.” “마음에 드시나요?” “그래. 하지만 말이야.” 토이 월드 사장은 두꺼운 시가에 불을 붙이며 히죽 거렸다. 대놓고 사람을 무시 하는 듯 한 표정을 읽은 나는 이 계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눈이 빠른 그는 M.E.S의 카트리지 뚜껑을 열어젖히며 안에 들어 있는 덕헌트의 게임팩을 확인했다. “내 눈은 속일 수 없지. 이건 누가 봐도 비디오 게임기야. 장난감이라고 애둘러 표현한 뒤에 어떻게든 우리 매장에 이걸 납품하려는 모양인데, 아무튼 좋아~ 우리 가게에 받아주지.” 토이 월드 사장의 말에 야마시타씨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하지만.. “단, 덕 헌트 전용 머신으로 만들어줘. 다른 카트리지는 필요 없으니까. 그럴싸한 게임 하나 끼워주고 나서 나중에 쓰레기 게임들을 유통 하려는 너희 속셈을 내가 모를 거 같아?” 덕헌트 전용 머신을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소프트웨어의 판매로 부가 수익을 노리는 콘솔 사업에서 그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 민텐도는 게임의 퀄리티 유지를 위해 모든 게임을 본사에서 검토 후에 출품하고 있습니다. 사장님이 걱정하시는 것 같은 저급 게임은 저희 기기에 출시 될 수 없을 겁니다.” “웃기지마!!” 결국 나와 야마시타씨는 점원들의 손에 이끌려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저희와 계약하고 싶으면 덕 헌트 전용 머신을 만들어 오세요. 저희 토이 월드는 더 이상 게임 콘솔을 취급하지 않습니다.” 매니저는 M.E.S가 담긴 박스를 거칠게 바닥에 던져두고는 가게 안으로 돌아갔다. 아오.. 삭신이야. 아무튼 미국 놈들 힘도 좋아. 수틀리면 같은 사람이고 뭐고, 그냥 길바닥에 내동댕이 치는구만.. “역시 힘들군.. 사람의 인식이란 게 이렇게나 무서울 줄이야.” “역시 배떼지 부른 매장부터 찾아오는 게 아니었어.” “배떼지? 그게 무슨 말인가?” “배가 부른 녀석들이란 한국말입니다. 아무튼 장소를 옮기죠. 여긴 더 이상 볼 거 없으니.” 나는 바닥에 나뒹구는 컨트롤러를 정리한 뒤에 몸을 일으켰다. 토이 월드를 떠나기 전 나는 뒤돌아 매장 입구를 바라보며 중얼 거렸다. “돼지 새끼. 두고 봐라. 제발 우리 매장에 물건 좀 넣어 달라고 벌벌 기게 만들어 줄 테니까..” & 야마시타씨와 나는 결국 뉴욕 상점가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장난감 가게에 들렀다. 중심가와는 달리 사람도 한적했기에 상대적으로 조용한 분위기인 이 가게의 이름은 ‘토이 박스’ 장난감 상자라는 아기자기한 이 가게는 점원도 없이 사장 혼자 가게를 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M.H.E.S 라는 회사의 영업 담당들인데 새로운 장난감을 납품하러 왔는데요..” 그러자 카운터에 있던 중년의 남자가 웃으며 우리를 맞아주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저희 가게는 다음 달에 문을 닫을 예정인데, 괜찮으세요?” “문을 닫으신다구요?? 어째서..” “실은 최근에 번화가 쪽에 장난감 가게가 많이 생긴 탓인지 저희 쪽에 손님이 많이 줄어서 가게 운영이 어렵거든요..” “아, 저런.. 현재 저희는 아직 아무 장난감 가게와도 계약을 하지 않은 상태인데, 혹시 괜찮으시다면 한번 봐주시기라도 하시는 건?” “그건 어렵지 않죠. 안으로 들어오세요.” 토이월드와는 확실히 대비되는 친절함에 나와 야마시타씨는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따로 사장실은 없었기에 우리는 가게 한 구석에서 토이 월드에서 시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로봇과 덕헌트를 시연해보았다. “아, 굉장히 새로운 조작 방식이네요. 하지만, 게임.. 이군요?” 역시나 덕 헌트의 조작은 흥미를 당겼지만, 게임이라는 것에 토이 박스의 사장님도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 그로 그럴 것이 토이박스의 매장 절반은 아타리 사의 게임 카트리지로 가득 차 있었다. “저도 게임을 좋아하지만, 보시다 시피 아타리 게임을 너무 신용한 탓에 가게 운영이 더욱 어려워 졌거든요. 그래서 선뜻 이 기계를 매입한다는 게 두렵습니다.” “그 마음 십분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희 M.E.S는 결코 아타리와 같은 불행을 안겨드리지 않을 겁니다.” 나는 준비해 왔던 가방에서 슈퍼 마리지와 마리지 브라더스를 꺼내 들었다. 사실 토이월드에서 분위기가 좋다면 밀어보려고 가져온 녀석들이었는데, 시연해 볼 기회조차 없이 쫓겨난 탓에 이곳에서 처음 시연 해볼 수 있었다. 토이박스의 사장님은 기본적으로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기에 순식간에 슈퍼 마리지의 시스템에 적응하며 횡 스크롤 형태의 새로운 진행 방식에 굉장히 놀라워했다. “이건 정말 대단하군요!!” “이 게임은 곧 미국 지역의 게임센터에도 들어갈 예정입니다.” “그렇군요. 이 정도 퀄리티의 게임이라면 분명 미국에서도 통할 것 같습니다. 특히 기존 아케이드처럼 화면 안에 묶여 있지 않다는 점이 대단하네요. 완전히 새로운 방식입니다!!” 토이박스의 사장님은 마치 아이처럼 슈퍼 마리지를 즐기며 행복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타리에서.. 이런 게임이 나왔더라면 내 가게도 계속해서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이제와 슈퍼 마리지를 만난 게 억울했는지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야마시타씨 조차 안쓰러운 표정으로 토이박스 사장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장님은 게임을 좋아하시는군요. 만약에 가게 문을 닫지 않는다면 저희 민텐도의 게임기를 받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하지만 저는 더 이상 가게를 운영할 수 없어요. 또한 이 게임기를 매입할 만한 자금도 없구요.” “좋아요. 사장님. 그럼 저희가 사장님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저희 민텐도의 M.E.S를 무상으로 100대 지급해드리지요. 그리고 이 가게의 월세 3개월분도 선 입금으로 미리 드리겠습니다. ──────────────────────────────────── ──────────────────────────────────── EP. 6 : 미국 시장을 공략하라!! (6) “저희 민텐도의 M.E.S를 무상으로 100대 지급해드리지요. 그리고 이 가게의 월세 3개월분도 선 입금으로 미리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나를 지켜보던 야마시타씨의 표정에 경악이 스치며 일본어로 말을 걸어왔다. “이봐.. 강군. 아무리 이곳 사장님의 사정이 딱하다고는 하나 무상으로 기기를 100대나 줄 수는 없어!!” 하지만 나는 야마시타씨의 말을 뒷등으로 흘려버리며 멍하니 컨트롤러를 붙잡고 있는 토이 박스의 사장님에게 재차 설명했다. “저희 민텐도에서는 저희 기기를 쇼윈도에 전시해 주는 것만으로도 1000달러의 인센티브를 지급해드리는 제도를 시행중입니다.” “이봐, 강군!! 그건 아직 카마우치 사장님의 결재가 안 떨어진 사항이야!!” “하지만 사장님의 사정이 있으시니 그보다 더 높은 3개월 치의 월세를 인센티브로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3개월 동안 이 가게 쇼 윈도우는 저희 민텐도에서 관리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내 가게를 3개월 더 운영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군요. 좋아요.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저야 당연히 오케이입니다!!” “그렇다면 내일 당장 이 가게에 저희 기계를 들여 놓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사장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그렇게 민텐도 M.E.S 모델의 역사적인 첫 계약이 성사 되었다. 그리고 2주 뒤 일본에서 넘어온 슈퍼 마리지는 새로운 진행 방식 덕분에 빠른 속도로 미국 게임 센터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 “위.. 윌슨씨.. 거기 좀 잡아 주세요.” “미스터 강. 여기 말인가!?” “네~!! 거기 맞.. 으우아악!!!” 쿠당탕~!! 퍽 와르르르.... “헉!! 미스터 강!! 괜찮나!?” “괘.. 괜찮아요. 괜찮아. 아으..” “아직 젊어서 쌩쌩하구만, 나라면 뼈가 부러졌을 거야~ 하하하~” 토이박스에 민텐도의 M.E.S를 전시해 놓은 지 한 달째. 나는 토이박스 가게 앞 쇼윈도에 현수막을 거는 중이었다. 쇼윈도에 있던 다른 모든 장난감은 치워버린 나는 M.E.S 하나만을 프리미엄 모델처럼 전시해 놓은 뒤 슈퍼마리지의 플레이영상과 함께 아이템 박스라던가 벽돌 모양의 모빌을 공중에 걸어 두었다. 마치 슈퍼 마리지의 스테이지를 연상 시키는 모습에 지나가던 사람들은 모두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오우~!! 슈퍼 마뤼지~!!” 지나가던 꼬마 아이가 쇼윈도 안에 TV를 가리키며 탄성을 내질렀다. 나는 그에 호응하듯 ‘이예~!!’ 라고 외치며 주먹을 흔들어 보이자, 꼬마는 웃으며 박수를 쳐주었다. 현수막을 걸고 나서 토이박스의 사장인 윌슨씨와 함께 가게 내부로 돌아오니 창고 안에서 재고를 정리 중이던 야마시타 씨가 구슬땀을 흘리며 나오고 있었다. “벌써 정리 다 하셨어요? 고생하셨습니다.” “미스터 윌슨. 추가 200대. 모두 넣어 두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거라도 드세요.” 윌슨씨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는 야마시타씨에게 음료수를 건네며 웃어 보였다. “지사장님도 밑에 직원들 시키면 되지 굳이 나와서 고생을 하십니까.” “아냐 아냐, 강군 덕분에 이제야 조금씩 활로가 열리게 됐는데, 나만 편히 앉아 있을 수 없지. 지난 8개월 동안 어두침침한 사무실에만 틀어 박혀 있었더니, 이젠 진절 머리가 난다네. 차라리 이렇게 몸을 움직이니 일하는 기분이 들어 좋구만~” 야마시타씨는 처음 만난 그날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첫인상은 완전 폐인이더니 이제야 좀 사람다워졌네. 나는 피식 웃으며 음료수를 삼켰다. 딸랑~ 그때 가게 문이 열리며 꼬마아이와 함께 온 엄마가 우리에게 물었다. “저기 혹시 밖에 보이는 M.E.S 라는 물건을 여기서 취급하나요?” “어서오세요~ 고객님. 방금 물건이 입고되어 바로 구매 가능하십니다~!!” 사람이 달라진 건 야마시타씨 뿐만이 아니었다. 윌슨씨 역시 민텐도의 공격적인 마케팅에 일조하여 엄청난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본래 게임을 좋아했던 그였기에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에게 손쉽게 조작법을 알려 주었고, 그로 인해 매장에 들리는 손님 대부분은 그에게서 M.E.S를 바로 구입해갔다. 초도 물량 100대는 슈퍼 마리지가 아케이드 센터에 들어섬과 동시에 하루 만에 동이나 버렸다. 윌슨씨는 아예 자기 매장의 절반을 우리 물건으로 채워 넣었고, 우리는 그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오늘. 우리는 이 조그만 가게에서 초도 물량 천 대 가까이 M.E.S를 팔아 제끼고 있었다. 그때 시연대에서 슈퍼 마리지와 덕헌트를 플레이 하던 꼬마가 엄마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외쳤다. “Mommy, I wan't that pleeeeaaaase!” (엄마 나 저거 사줘!!!!!!) 그 모습에 나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만큼 슈퍼 마리지는 M.E.S를 구매하는 고객마다 필수로 구매해 가는 타이틀이 되었고, 덕헌트와 함께 마치 쌍두마차처럼 미국 시장에서 M.E.S를 이끌어 가기 시작했다. 지금 엄마를 조르는 저 아이를 보니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나는군.. 진정 게임을 좋아한다면 저 아이도 언젠가 훌륭한 개발자가 될 수 있겠지.. 나 역시 그래왔으니까. & 작은 틈. 꽁꽁 얼어붙은 미국의 게임 시장에 작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M.E.S는 뉴욕의 한 작은 장난감 가게를 시작으로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윌슨 씨는 아예 덕헌트를 거리 밖으로 꺼내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무료 시연을 펼쳤다. 그러자 처음엔 그저 신기하게 바라보던 사람들도 하나둘 전자총을 손에 들고 신나게 TV에 대고 쏘기 시작했다. 특히나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덕 헌트는 직관적인 플레이 방식 때문인지 반응이 매우 좋았다. 근처의 게임 센터에서는 슈퍼마리지의 기판 마다 사람들이 들러붙어 게임을 즐기고 있었고, 미국 내에 슈퍼 마리지는 금세 민텐도의 상징적인 캐릭터가 되었다. 아이들은 미국의 오리지널 캐릭터인 뽀빠이보다 마리지를 더 익숙해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몇몇의 가게로부터 M.E.S의 수주 문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카마우치 사장에게 부탁한 전시 인센티브는 2달만 진행하기로 했지만, 나는 다시 한 번 카마우치 사장을 설득하여 M.E.S를 최초 전시하는 매장에 한에 무조건 두 달간 인센티브를 지급해주기로 합의를 보았다. 또한 직원들에게 충분이 게임 방식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고, 따로 판매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매뉴얼도 작성해 넘겨주었다. 처음에는 작은 임대 사무실이었던 민텐도 미국 지사는 조금 더 평수를 넓혀 쾌적한 사무실로 이사를 하였고,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던 나는 엘리스라는 여자 비서를 채용했다. 그녀는 게임에 대해 잘은 몰랐지만, 물건을 납품하고 장난감 가게와 딜을 하는데 능숙한 면이 있었다. 어차피 이 시대에서 게임이란 매체는 신종사업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잘 아는 사람이 드물었고, 면접에서 가장 똑 부러지게 대답하는 면이 마음에 들었다. 시장 조사를 위해 함께 가게를 둘러볼 때면 항상 수첩과 펜으로 무언가를 메모하는 모습도 보기가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시장 조사를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엘리스씨가 조심스럽게 나에게 제안했다. “과장님. 매장에 물건을 납품하고 진열을 가게에 맞기니 가게마다 전시하는 스타일이 너무 다른 것 같아요. 조금 통일 된 느낌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가게 전면에 진열 한다고 해놓고는 인센티브만 챙겨가는 매장도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직접 관리를 해줘야할 것 같은데..” “저도 최근에 매장이 늘어가면서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정확히 보셨네요. 비서님.” “배송 기사님들에게 따로 교육을 해서 물건을 납품하면 곧장 진열까지 해드리는 게 저희도 가게도 편할 것 같긴 한데..” “그럼 또 배송 기사님들 사이에 불만이 생기겠죠?”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아요.” “매장 진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진열 후에도 지속 적으로 관리될 수 있어야하니 따로 매장을 꾸며주는 관리팀을 만드는 게 좋겠네요.” 그후로 우리 상품을 받아주는 매장엔 납품과 동시에 직원들이 직접 매장에 방문하여 가게의 디스플레이를 도와주었고, 각종 캐릭터 상품으로 매장을 예쁘게 꾸며 주었기에 그 반등 효과로 장난감 업계 사이에 좋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물론 초기에는 어느 정도 자본이 투입되었지만, 민텐도에서 물건을 받아주기만 하면 인센티브는 물론 가게까지 예쁘게 꾸며 준다는 소문이 업계에 퍼지며 발주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일단 매장에 M.E.S를 들여 놓는데 성공 하면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빠르게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아타리 쇼크로 주춤했던 미국 콘솔 시장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하루 종일 전화벨이 울려대는 사무실에 있기보단 평상복 차림으로 시장 조사를 나가는 걸 좋아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는 다르게 거리의 장난감 가게에서는 어디서나 쉽게 슈퍼 마리지와 M.E.S를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단 한 군데. 이 거리에서 가장 큰 장난감 가게인 ‘토이 월드’에서는 아직 민텐도의 M.E.S를 찾아볼 수 없었다. ‘아직까지 버텨보겠다. 이거지?’ ──────────────────────────────────── ──────────────────────────────────── EP. 6 : 미국 시장을 공략하라!! (7) ‘아직까지 버텨보겠다. 이거지?’ 토이 월드는 이곳 말고도 다른 도시에서도 거대한 점포를 몇 개나 가지고 있는 체인점이었다. 덩치가 큰 만큼 사람도 많이 찾는 곳이었기에 모든 장난감 회사는 이곳에 물건을 들여 놓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일까? 토이 월드가 직접 장난감 회사에 수주를 넣는 일은 드물었고 보통은 영업 담당이 직접 샘플이나 카달로그를 들고 찾아가 물건 발주는 부탁하는 형편이었다. 나는 잠시 토이월드의 매장을 둘러본 뒤에 슬쩍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화려하네..” 가게안의 모습은 반년 전에 비해 더 호화로워진 분위기였다. 영화에서 보던 장난감 왕국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랄까? 하지만 가게 안에서는 여전히 비디오 게임 코너를 찾아볼 수 없었다. “여전하군.” 나는 쓰게 입맛을 다시며 가게를 살피기 시작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과 함께 장난감을 고르고 있었는데, 행복해 하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니 나조차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때 한 아이가 엄마 손을 흔들며 물었다. “마미~ M.E.S랑 슈퍼 마리지는 어디 있어요?” “글쎄.. 워낙에 매장이 넓다 보니 잘 모르겠네? 그래도 이렇게 큰 매장이니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우선 점원에게 물어봐야겠구나.” 어라? M.E.S를 사러 온 고객인가 보구나. 가게 한켠에서 장난감을 살펴보던 중 호기심이 동한 나는 아이 엄마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들의 뒤를 쫓았다. “저기, 이곳에 슈퍼 마리지를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기를 팔고 있나요?” 아이 엄마는 M.E.S에 대해 잘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자 가게 점원은 살짝 안경을 치켜 올리며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음? 내가 알기로 토이월드에는 민텐도 기기가 들어가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저 점원은 무엇을 소개해주려는 거지? 나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그들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후 매장 직원이 안내한 곳은 가게의 가장 구석에 위치한 아타리 사의 부진 재고들이 즐기한 곳이었다. “현재 저희는 미국 최대의 게임회사인 아타리의 콘솔기기를 매우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또한 카트리지 역시 개당 1달러 수준에 판매하고 있지요. 기기 가격이 비싸고 아직 게임이 많이 나오지 않은 M.E.S 보다 훨씬 나으실 겁니다.” ... 저 새끼가 지금 고객을 호구로 보나? 나는 기가 차서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때 엄마 손을 잡고 있던 꼬마아이가 지원에게 물었다. “저는 M.E.S를 원해요. 덕헌트랑 슈퍼 마리지가 하고 싶다구요.” “꼬마야~ 어차피 게임은 다 비슷한 거야. 민텐도 역시 게임 회사니 조금만 기다리면 아타리 전용으로 카트리지를 내어줄 거란다.” “어? 정말요?” “누가 망해버린 아타리 2600 기기에 저희 슈퍼 마리지를 발매해 준다고 했나요?” 결국 참다못한 내가 그들에게 다가가자 깜짝 놀란 점원은 휘둥그레 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어물거렸다. “누.. 누구세요?”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며 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아이 어머니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전 M.E.S 기기를 판매하고 있는 본사 직원입니다. 아이가 원하는 게임과 기계는 여기 점원이 추천하는 아타리 사에는 발매 계획이 없습니다. 여기서 조금 거리가 떨어져 있지만, 3블럭 정도 내려가시면 토이박스라는 작은 장난감 가게가 있어요. 그곳에서 이 명함을 보여 드리면 가게 사장님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실 겁니다.” “아, 감사합니다.” 아이 엄마는 나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아이와 함께 매장을 나섰다. 그러자 나 때문에 고객을 놓친 점원은 나를 노려보며 따지기 시작했다. “당신이 뭔데 남에 가게에 와서 손님을 채갑니까?” “그러는 당신은 뭐 길래 근거 없는 소리로 손님을 현혹 시킵니까?” “뭐라고? 이 노란 원숭이 새끼가 지금 나한테 대드는 거냐?” “지금 제가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는 겁니까? 여긴 손님을 이런식으로 대하나요?” 점원의 호통에 내가 더 큰소리로 외치자, 주말에 가게를 둘러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 사이로 전에 나와 야마시타씨를 내동댕이쳤던 스미스라는 직원이 서둘러 다가와 우리를 진정 시켰다. “무슨 일인가? 제이슨” “이 사람이 제가 응대 중이던 고객에게 다가와 다른 가게를 알려주며 그쪽에서 물건을 구매하라고 유도했습니다. 이건 명백한 영업 방해입니다.” 그러자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 스미스씨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신은..?” “안녕하세요. 스미스씨 잘 지내셨나요?” “M.H.E.S 직원 이었던?” “기억력이 좋으신데요? 그때 딱 한번 봤었는데” “성함이 미스터 강 이셨죠?” “네, 맞아요.”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저희 사장님이 다시 보고 싶어 하시는데, 시간 좀 내주실수 있나요?” 얼씨구..? 내가 그 인간을 왜 다시 봐야하지? 나는 잠시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스미스씨에게 대답했다. “아쉽지만 제가 현재 미팅이 잡혀 있어서 바로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혹시 급하시면 저희 M.H.E.S 사무실에 연락을 주세요.” ‘너희가 과연 머리 숙이고 전화를 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말이지~’ 나는 스미스씨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네준 뒤에 매장 문을 나섰다. 그 후로 며칠이 지나도 결국 토이 월드에서 연락은 없었다. 아마도 아타리의 부진 재고를 털어내느라 고객 눈탱이 치기만 바쁜 거겠지.. 그럴수록 기업은 신용을 잃어가기 마련인데, 토이월드의 사장도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백치인 모양이다. & 한번 외근을 나갔다 돌아오면 내 책상에는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들이 넘쳐흘렀다. 대부분 신규 입점 매장의 인센티브와 진열비에 대한 계약 서류들이었는데, 엘리스가 결재 서류를 시간대 별로 차곡 차곡 모아 책상위에 가지런히 올려 두면 검토후 사인을 마치는게 본사에서 주된 업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과장님. 이건 어느 고객한테서 온 문의 사항인데 읽어 보시겠어요?” “음? 고객한테서요?” “최근에 제품의 판매 가격이 매장 마다 판이하게 다르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어요.” “그럴리가요. 저희가 관리하는 매장에서는 무조건 정찰제를 도입하고 있는데?” “그게 물건 수급이 부족해서 프리미엄 현상이 일어나고 있나본데요?” “하아, 이런 너무 잘 팔려도 탈이군.”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객에게서 온 편지를 펼쳐 들어 보았다. -M.H.E.S 영업 담당자님께- 저는 게임을 좋아하는 한 아이의 엄마입니다. 우리 아이는 슈퍼 마리지를 너무나 좋아해요. 언제나 학교에서 돌아오면 슈퍼마리지와 마리지 브라더스. 그리고 덕헌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친구들과 함께 즐기고 싶다고 종종 조르곤 합니다. 이 세상에 아이를 이길 수 있는 부모가 몇이나 될까요? 아이의 학업이 걱정 되지만, 너무나 간절히 원하는 바람에 지난주에 토이월드에서 M.E.S를 구매하였습니다. 잠깐만 토이월드에서 M.E.S를 샀다고? 이게 뭔 소리야. 뭔가 좀 이상한데? 아시다시피 토이월드는 굉장히 규모가 큰 장난감 매장으로 다양한 회사의 물건을 취급하기로 유명하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만큼 신용도도 높은 편이에요. 하지만 그곳에서 M.E.S를 구입한 저는 너무 높은 가격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전자총과 로봇이 포함되었다고 하더라도 299불라는 가격은 너무 높게 잡혀 있는 것 같아서요. 299불라니.. 2~30불도 아니고 100불을 더 붙여 팔았다고!? 나는 어이가 없어 편지를 자세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이가 워낙 졸라서 사주긴 했지만, 제가 알기로 M.E.S의 가격은 199불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가격의 차이가 생길 수 있는지 매장 직원에게 물었지만, 납득할 만한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주변에 다른 상가들 역시 M.E.S를 판매하고 있었지만, 가격은 토이월드와 비슷한 수준이었어요. 이것은 제가 생각하기에 분명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M.H.E.S에서 이 부분을 확실히 조사하여 더 이상 소비자들이 피해보는 일이 없도록 관리를 부탁드립니다. “하아.. 미치겠네..” “저도 읽어 봤는데, 정말 화가 나더군요. 어떻게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장난감 회사에서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할 수 있죠?” “돈이 되니까요..” “네?” “전 일단 여기 적혀 있는 토이월드 매장에 좀 다녀올게요. 엘리스는 일단 현재 각 매장으로 출고 준비 중인 모든 기기의 배송을 일시적으로 중단해 주세요.” “과, 과장님.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 사태가 해결 될 때까지 재고 수급을 멈추란 말입니다.” 나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은 뒤 사무실 문을 열고 나섰다. 그리고 회사 앞에 대기 중이던 택시에 올라 토이 월드 매장으로 달렸다. 그리고 잠시 후 문제의 토이 월드 체인점 앞에 선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가게 문을 열어젖혔다. “Good afternoon, Ladies and gentleman. Welcome to Toyworld! A land full of joy and wonder.” (안녕하세요. 고객님 즐거움이 가득한 토이월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환영은 개뿔 용팔이 같은 새끼들이!!”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환영 인사를 건네는 직원을 향해 한국말로 대답하자, 직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네?” 나는 잠시 헛기침을 한 뒤에 영어로 물었다. “M.E.S를 사러왔는데요. 여기서 팔고 있나요?” “아~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점원은 내가 영어를 할 줄 알자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카운터로 안내했다. 잠시 후 카운터 밑에서 M.E.S게임기를 꺼내든 점원은 밝은 미소로 원하는 게 이게 맞냐고 물었다. 내가 대충 고개를 끄덕인 뒤에 가격을 묻자, 그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299불입니다.” “... 이 새끼가 장난치나?” ──────────────────────────────────── ──────────────────────────────────── EP. 6 : 미국 시장을 공략하라!! (8) “감사합니다. 299불입니다.” “... 이 새끼가 장난치나?” “네?” 나는 안주머니에서 명함 꺼내서 카운터 위에 올려두었다. 점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내 명함을 살펴보다가 M.H.E.S라 쓰여 있는 사명을 발견하곤 두 눈을 꿈뻑 거렸다. 뭘 그렇게 쳐다봐 확 목젖을 후려갈겨 버릴까보다. “보시다시피 민텐도 직원 강준혁 이라고 합니다. 저희가 199불에 판매하는 M.E.S가 왜 여기서 299불에 팔고 있는지 설명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의외로 점원의 표정은 담담했다. “저희가 매입해온 물건에 대해 얼마들 받던 그쪽이 무슨 상관이시죠?” 어라? 지금 무릎 꿇고 사과해도 모자를 판에 이 뻔뻔한 태도는 뭐지? 나는 기가 차서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우리 물건을 정가보다 100불을 넘게 받고 팔고 있는데, 상관이 없다니요!!” “저희가 귀사에 물건 발주를 요청한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팔고 있는 물건은 모두 이 근처의 가게에서 199불에 매입한 물건입니다. 우리는 그걸 다시 고객에게 판매하는 것일 뿐이구요. 당연히 장사하는 사람으로서 이윤은 남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처음부터 저희 쪽에 발주요청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카달로그를 들고 저희 쪽과 가격 협상을 하셨어야지요.” 와~ 진짜 말이 안 통하네, 뭐 이딴 놈들이 다 있냐.. 카운터가 시끄러워지자 매장을 관리하는 점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여기 이분이 M.H.E.S 직원인가 본데, 저희가 이 기계를 299불에 팔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모양입니다.” “그래? 거기 남자 분 가게에서 소란을 피우면 다른 고객들에게 폐가 되니 그만 나가 주시겠습니까?” “점장이고, 점원이고 양심을 팔아 치웠네. 나참 어이가 없어서..” “자꾸 행패를 부리시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오늘은 조용히 돌아가도록 하죠. 대신 그냥은 안 넘어갈 테니 두고 보세요.” “뭐~ 마음대로 해보세요.” 점장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기분 나쁘게 웃어보였다. 잠시 그들을 번갈아 노려보며 가게 문으로 향하자 뒤에서 나를 비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숭이 새끼가 주접떨기는 어차피 아무 짓도 못할 거면서~ 하하~” 그래, 이렇게 나왔다 이거지? 나는 가게 손잡이를 움켜쥔 채 힘껏 밀어 젖혔다. 토이 월드.. 내가 맹세코 미국에 있는 동안 너희 매장을 전부 문닫게 만들어주마.. 뿌드득. 악다문 입 안에 비릿한 피내음이 느껴질 정도로 나는 무척이나 화가나 있었다. & “음!? 패키지 디자인을 또 바꾼다고?” “네. 지금 도안의 빈 곳에 대문짝만하게 가격을 박아 넣을 겁니다.” 그러자 야마시타씨가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이봐. 이게 무슨 아이들이 먹는 과자 부스러기도 아니고, 무슨 패키지에 가격을 고지하나..” “전자 제품에는 소비자 가격을 고지하지 말라는 법 있습니까?” “아니.. 물론 그런 법은 없지만, 그렇다고 나중에 단가 조정 때마다 패키지를 교체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리고 뭐요?” “일단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시장이 커지고 있고, 토이 월드 쪽에서도 일반 가게에서 기기를 사들이는 것뿐이니 우리랑은 상관없지 않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렇게 되면 미국 게임 시장에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어요. 100불을 올려 파는 것에 대한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들에게 돌아가는데, 100불이면 카트리지가 2개입니다. 우리도 손해라구요.” “아.. 그렇지, 그렇지..” 이 새끼 동경대 나왔다더니 완전 허당이네? 카마우치 사장 사위에 지사장이랍시고, 대우 좀 해줬더니 이딴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니, 대 실망이다. 그때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엘리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현재 출고 대기 중인 물건들은 어떻게 할까요? 소매점에서 언제 물건이 도착하냐고 문의가 계속 오는데..” 그러자 야마시타씨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우선 수금이 완료된 품목들이니까, 서둘러 출고 시키세요.” “네, 알겠..” “출고 시키지 마세요.” 내 말에 엘리스는 화들짝 놀라 결재 서류를 끌어안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수금 했던 돈 전부 다시 매장에 돌려주고, 계약 위반시 위약금도 같이 전달해주세요.” “가.. 강군!!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지금부터 단 한 대의 M.E.S도 제 허락 없이는 출고 될 수 없습니다. 엘리스씨는 즉시 포장업체 문의 해보고, 현재 패키지 디자인의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199불이라는 가격을 고지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엘리스는 내 말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 뒤 지사장실 문을 나섰다. 그러자 야마시타씨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나에게 물었다. “강군 대체 어쩔 생각이야. 물건을 납품하는 회사 쪽에서 거래를 틀생각은 않고 도리어 끊어버리다니!? 우리가 지금까지 얼마나 고생했는데!!” “어차피 수요는 충분합니다. 현재 시장에 뿌려져 있는 M.E.S로는 한 달도 못가서 전부 사라질 거예요.” “그 다음엔?” “우리는 물건이 바닥나는 한 달 동안 민텐도 멤버쉽 클럽을 만들 겁니다.” “멤버쉽 클럽?” “정식 루트로만 우리기기를 판매할 수 있는 믿을 만한 가맹점을 만드는 거죠.” 그렇게 단 하나의 게임기로 거대한 토이 월드를 고립시키는 작전이 시작되었다. & 다음 날 나는 우리 M.E.S를 가장 먼저 받아준 토이 박스의 사장 윌슨씨를 찾아 갔다. 전후사정을 들은 윌슨씨는 나의 계획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긴 토이월드의 횡포가 심하긴 심하지. 비단 M.E.S 뿐만 아니라 인기 있는 장난감 역시 무조건 돈으로 사재기해서 나중에 비싸게 올려 받지.. 소비자들은 달리 구할 곳이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구입하는 셈이고.. 그런데 가맹점? 그건 대체 뭔가??” “윌슨 사장님처럼 저희 M.E.S에 협조적인 사람들만 모아서, 하나의 클럽을 형성하는 겁니다. 저희 본사와 직통 라인으로 유통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죠.” “아~ 그거 좋은 생각이로군.” “멤버쉽에 가입된 가게 중에 만약 토이 월드에 기기를 대주는 것이 적발될 경우. 더 이상 그 가게와 거래를 트지 않을 생각입니다. 재고로 남아있는 기기는 모두 회수하여 다른 멤버쉽 가게에 분배될 것입니다. 또한 월별로 판매 순위에 따라 특별 인센티브를 차등 지급할 예정이에요.” “그러면 우리야 정말 좋지~!!” 윌슨씨는 나의 제안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박수를 쳤다. 이거 아직 본편은 시작도 안했는데 너무 좋아하시는데? 이러다가 다음 이야기 듣고 까무러치시는 거 아냐? 같이 시장조사를 나와 있던 엘리스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인지 활짝 웃어보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사장님께 제안을 드릴게 남아 있습니다.” ──────────────────────────────────── ──────────────────────────────────── EP. 6 : 미국 시장을 공략하라!! (9) “그리고 한 가지 더. 사장님께 제안을 드릴게 남아 있습니다.” “음?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 돕겠네.” “지금 가게를 정리하시고, 저희 민텐도 프리미엄 매장 1호점의 점장님이 되어주세요.” “뭐라고..?” &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돈은 참 편리한 역할을 한다. 때 마침 토이월드의 맞은편에 임대 건물이 비어있던 터라 계약은 순조로웠다. 어마어마한 인력을 투입시켜 단기간에 심플한 화이트톤으로 인테리어를 마친 우리는 일본에서 동킹콤과 마리지의 캐릭터 상품을 대거 공수하여 민텐도 캐릭터들도 꾸며진 예쁜 전용 매장을 만들었다. 카마우치 사장은 기존에 장난감을 만들어 내던 공장 라인으로 캐릭터 사업에 뛰어들었고, 슈퍼 마리지의 흥행에 힘입어 캐릭터 상품 역시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었다. 나는 열쇠고리부터 인형에 이르기까지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악세서리와 장난감 지식을 모두 동원 해 일본에 요청했으니 앞으로 품목이 점점 늘어나겠지? 시장은 이미 M.E.S의 재고가 모두 동이 난 상태라 어딜 가도 기기를 구할 수가 없어 난리가 난 상태였다. 지난 한 달 동안 홍길동처럼 여기저기 쏘다니며 협조적인 업체만 컨택 한 결과 매장 갯수는 예전 보다 적어졌지만, 각 점포의 충성도가 더욱 높아진 상태였다. “이렇게 예쁜 가게를 가져보다니.. 정말 꿈만 같군. 내가 강군을 만난 건 진짜 행운이야.” “사장에서 점장으로 직위는 강등 되었지만, 수입은 훨씬 나으실 거예요.” 야마시타씨는 내일 오픈을 준비 중인 프리미엄 매장을 바라보며 입이 떡 벌어진 상태로 윌슨씨에게 물었다. “뉴욕 한가운데에 이만한 규모의 프리미엄 매장이라니.. 윌슨씨 굉장히 부자셨군요..” “네? 아니요~ 이게 다 미스터 강..” 나는 윌슨씨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윙크를 보냈다. “미스터 강을 만난 인연 덕분이죠~ 하하하~” 사실 이 프리미엄 매장에는 내 자본이 대거 투입되었다. 카마우치 사장에게 부탁하여 회사 돈으로 매장을 낼 수도 있었지만, 그 짠돌이에게서 돈을 뜯어내기란 쉽지 않을 테고, 또 뉴욕 한가운데에 내 매장 하나를 가지고 있다면 미래에도 큰 도움이 될 거란 생각에 투자하기로 했다. 물론 나는 외국인이기에 윌슨씨와 공동명의로 소유권을 내었고 증인으로 엘리스를 세웠다. 적어도 미국에서 이 두 명이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길 건너편에는 불편한 심기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토이월드 직원들과 사장이 나란히 서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일부러 활짝 웃어 보이며 먼저 인사를 건네자, 그들은 침을 탁 뱉은 뒤에 매장으로 돌아가 버렸다. 어디 한번 제대로 붙어봅시다. 당신들이 원하는 돈지랄 나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지. & 프리미엄 1호점의 오픈은 그동안 쟁겨 두었던 모든 재고를 폭발시키는 순간이었다. 오픈 2주전부터 신문에 거대한 광고를 한 탓에 기다렸던 고객들은 모두 프리미엄 매장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와 엘리스 역시 윌슨씨를 도와 매장에서 판매직을 겸해야 할 정도였다. 길게 늘어선 행렬을 따라 계속 해서 결제를 해주고 있는데, 낯익은 얼굴의 남자가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길 건너 토이월드의 점원 스미스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고객한테 눈탱이를 치던 제이슨도 보였다. 순간 울컥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최대한 웃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M.E.S를 구입하러 오셨나요?” “네. M.E.S 100대를 주문하려는데요?” “아~ 100대요? 그런데 고객님 이거 안보이세요?” 나는 턱짓으로 슬쩍 옆에 있는 작은 팻말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저희 M.E.S는 보다 많은 유저분들이 즐길 수 있도록 한 분당 최대 2대까지만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지금.. 물건을 안 팔겠단 말입니까?” “아뇨~ 팝니다. 대신 한 사람당 딱 두 대까지 만요. 스미스씨도 저희 민텐도 게임의 팬이실지도 모르는데, 판매를 안 할 순 없지요.” “크으... 일단 두 대를 주시오. 다시 찾아오지..” “하루에 두 대 씩이니 매일 오시겠네요~ 감사합니다.” 나는 카운터 뒤에 쌓아둔 M.E.S를 꺼내어 카운터에 올려두며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398불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하지만 패키지를 본 스미스씨의 돈을 건네줄 생각조차 못하고, 상자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뭐야? 언제부터 상자에 이런 게 쓰여 있었지?” -M.E.S는 199불입니다. 그 이상의 가격을 지불하고 구입하셨다면 고객님은 사기를 당하신 겁니다. 만약 그런 매장이 있다면 아래 연락처로 신고해주세요. 곧바로 차액을 지급해 드리고, 매장에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저희 민텐도는 고객님들의 편입니다.- 문구 아래에는 패키지에 대문짝만하게 199불이라 쓰여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스미스씨에게 물었다. “저기 손님? 구입하실 건가요? 뒤에 손님들이 기다리고 계시는데..” “빌어먹을 원숭이 새끼가!!” “안 살거면 꺼져. 병신아.” 한국의 욕은 참 신비하다. 굳이 언성을 높이지 않아도 어감만으로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만들 수 있달까? 결국 스미스와 제이슨은 M.E.S의 구입을 포기하고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미국 내의 소비자 단체가 토이 월드를 상대로 들고 일어섰다. 우리의 대대 적인 광고 효과로 인해 분개한 고객들이 법원소송과 토이월드 불매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 역시 초기 대안으로 소송을 걸어볼까 생각했지만, 미국내 인지도가 높은 대기업을 상대로 고소했다간 가뜩이나 미국 내 신생 기업인 민텐도의 이미지에 좋지 않을 것 같았기에 내버려 두었다. 대신 패키지에 가격과 문구를 넣어 소비자를 자극 시키자는 내 생각이 멋지게 들어 맞았고,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토이월드는 미국 시민들의 힘으로 신용도가 바닥에 떨어지게 되었다. 쌤통이다. 이 자식들~ & 그로부터 다시 4개월이 흐르고, 점점 늘어가는 멤버쉽 가맹점 덕분에 점심조차 먹을 시간이 없던 나는 늦은 시간 사무실에서 맥도널드 햄버거로 끼니를 떼우고 있었다. 따르릉~~ 그때 퇴근을 앞두고 있던 엘리스가 전화를 받더니 나에게 물었다. “저기 강준혁 부장님. 토이 월드 사장님이 전화를 걸어왔는데요?” ──────────────────────────────────── ──────────────────────────────────── EP. 6 : 미국 시장을 공략하라!! (10) “저기 강준혁 부장님. 토이 월드 사장님이 전화를 걸어왔는데요?” “음?? 잠시만.”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긴 제 발로 걷어찬 게임기가 미국에서 1년 동안 대박 히트를 치고 있는데, 더 이상 매입을 안하고 베기겠어? 오히려 이 정도까지 버텼으면 오래 버틴 거지. 나는 콜라 한 모금으로 씹고 있던 햄버거를 삼킨 뒤 전화를 받았다. “네, M.H.E.S의 강준혁입니다.” “미스터 강? 혹시 날 기억하나?” 낯 익은 목소리였지만, 나는 짐짓 모른척 되물었다. “누구시죠? 그렇게 물어선 잘 모르겠는데요?” “미국에서 가장 큰 장난감 가게와 점포수를 운영하는 토이 월드 사장. 톰 왓슨일세.” “아~ 안녕하세요. 톰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아, 그게 실은 음..” 톰 사장은 자신이 이렇게 굽히고 들어가는 게 영 마음에 걸리는지 자꾸만 말을 어물 거렸다. 안 그래도 식사시간을 방해 받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라고 하시는지 잘 모르겠는데, 제가 이제 곳 다른 매장 계약 건으로 나가봐야 해서요. 별일 아니면 끊겠습니다.” “아니, 저기!! 잠깐!!!” “뭡니까. 전화를 하셨으면 말씀을 하세요.” “그게 계약을..” “아~ 드디어 토이 월드에서 저희 물건을 받아주시는 겁니까!? 이거 참. 뉴욕에서 가장 큰 장난감 가게에서 이렇게 먼저 전화를 주시다니 영광이네요.” “어흠~ 흠~ 알아주니 고맙군.” 어쭈? 조금 띄워줬더니 이것 봐라? 톰 사장은 잠시 헛기침을 한 뒤에 나에게 물었다. “우선은 300대 정도 주문을 넣고 싶은데, 언제까지 가능하겠나?” “아~ 300대요? 죄송하지만, 저희는 최소 납품은 500대부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잘 모르시나본데, 저희는 가맹점에만 물건을 납품하기 때문에 멤버쉽 클럽에 등록을 해주셔야합니다.” “이 봐. 미스터 강. 지금 나한테 민텐도 멤버쉽인지 뭔지에 가입을 하라고? 토이 월드가 미국 곳곳에 얼마나 많은 점포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가!?” “알고 있죠. 그리고 4개월 전에 소비자 보호 단체에 고발당해서 벌금도 깨나 물으신 것도 알고 있구요. 현재 사업이 좀 휘청휘청 하시죠?” “크으...” “일단 저희도 다른 업체들과 함께 규정해 놓은 사항이기에 가입은 필수입니다. 어떻게, 멤버쉽 가입을 하시고 500대 발주를 하시겠어요?” “좋아.. 그럼 그렇게 하고 500대를 주문하지. 지금 주문하면 언제쯤 받을 수 있나?” 어쭈? 이번엔 명령조까지? 영어에 경어와 평어에 큰 경계는 없지만, 그래도 상대방을 예우하는 단어는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톰 사장의 단어 선택은 마지 자기 부하 직원에게 오더 내릴때 쓰는 듯한 명령조였다. “흐음.. 죄송하지만 사장님. 현재 다른 매장에서 주문이 쇄도해서 좀 기다리셔야 할듯합니다. 적어도 석 달 정도는 걸리겠는데요?” “무슨.. 석 달씩이나, 그럼 크리스마스 시즌을 넘겨 버리잖아!!!” “그렇죠.. 애석하지만, 저희는 신용을 중요시하는 회사라 아무리 작은 매장의 약속도 철저히 지키고 있습니다. 저희 역시 뉴욕에서 가장 큰 장난감 매장인 토.이.월.드의 크리스마스 시즌 납품을 놓치게 되어 매.우. 안타깝습니다.” 하~ 그러고 보니 한 달 뒤면 크리스마스네, 벌써 내가 이곳에 온지도 1년이 다 되어가고 있구나. 그동안 민텐도의 패밀리는 불티나게 팔려나가며 일본과 미국시장은 거의 점령하고 있었다. 뒤늦게 게임 산업이 아직 죽지 않은 걸 눈치 챈 NEGA에서 신형 게임기 NEGA 디스크의 제작이 발표 되었지만, 이미 게임 시장 자체는 민텐도의 패밀리가 휩쓸고 있기에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저기.. 미스터 강. 정말 미안하지만, 어떻게든 본사에 연락하여 추가 주문을 넣어 줄 수는 없는가? 부탁이네..” “흐음.. 그런데 사장님. 제가 정말 죄송한데요. 지금 저희 멤버쉽 클럽 규정을 확인해보니 고객에게 물의를 일으킨 매장에 저희 M.E.S를 납품 할 수가 없게 되어 있군요.” “뭐..라고..?” “거듭 죄송하지만 뭐 아직 계약서를 작성한건 아니니 그냥 없던 일로 하죠?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나중에 토이 월드의 신용을 회복한다면 그때 다시 연락을 주세요~ 그럼 감사합니다.” “저.. 저기!!” 왓슨 씨는 내 말에 떨리는 목소리로 뭔가 말을 꺼내는 듯싶었지만, 나는 그대로 수화기를 내려버렸다. 미쳤냐? 내가 너희 때문에 얼마나 열이 뻗쳤었는데, 사과 몇 마디 했다고 물건 주게? 이미 신용도가 바닥을 쳐 수장되기 일보 직전인 기업에 재고를 넣어줄 필요는 없지. “부장님도 대단하시네요. 그래도 아직까지 내수 시장에 토이 월드의 입김은 어느정도 있는 편인데 그걸 단칼에 거절하시다니..” “부자는 망해도 3년은 먹고 산다잖아요. 뭐 다시 회생할지 모르지만, 미국 시민들이 그 정도로 멍청하지 않기를 바래야죠~” “정말 부장님같이 무서운 사람은 처음이네요. 지사장님이라면 금방 지난 일을 잊고 일단 돈 이 될테니 물건을 보내줬을 텐데, 부장님은 그렇지 않네요. 같은 동양인이라도 일본인과 한국인의 차이인가?” 금발의 미인인 비서 엘리스씨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민텐도 미국지사인 M.H.E.S는 1년 만에 미국시장을 점령하는 쾌거를 이루어 내었다. 그 덕분에 회사 규모도 커져 나는 반년 전 부장으로 승진을 하였고, 영민한 비서 엘리스는 가맹점을 총 관리하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엘리스씨.” “네, 부장님.” “지난 6개월 동안 저를 쫓아다니면서 고생 많이 하셨죠?”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정말 부장님만큼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하하~ 그거 칭찬이죠?” “음~ 반 정도는요? 호호” “제가 일하는 걸 누구보다 가까이서 봐오셨으니, 아마 제가 자리를 비워도 잘하실 수 있겠네요.” “그럼요~ 물론이죠.” “그럼, 엘리스씨께서. 내년부터 저를 대신해 부장 좀 해주세요.” “네..? 뭐라구요!?” “전 다시 일본으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본의 NEGA에서 새로운 게임기를 개발해서 곧 출시를 앞두고 있거든요.” “부장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일본으로 돌아가신다니요. 그럼 미국 지사는 어쩌구요!?” “당신이 있으니까. 저도 마음 편히 가는 겁니다.” “부장님!!! 안돼요! 절대 안돼요!!!” 안되는 게 어딨어. 1년 동안 느끼한 햄버거만 먹으며 고생만 실 컷하고, 그리고 내가 지금 일본에 가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 “강군. 그.. 정말 가려는 건가?” “하하~ 저도 출장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네요. 처음 여기 왔을 때는 한 달 정도 있을 줄 알았는데, 설마 크리스마스까지 보내고 가게 될 줄이야.” 공항으로 가는 길. 야마시타씨는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며 내손을 맞잡았다. “그래도 강군 덕분에 이만큼 해왔다 생각하는데, 내가 너무 아쉬워서 그래..” “이미 기초공사는 잘 닦아 놨으니, 미국에서는 걱정 없을 겁니다. 윌슨씨에게도 안부 전해주세요. 못보고 가서 미안하다고..” “윌슨씨가 많이 서운해 할 거야.” “그렇겠죠? 하하~ 뭐 영원히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자주 연락하지.” 공항에 도착하니 어디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장님~!! 부장님!!!” “엘리스씨?” “야이 나쁜 자식아!! 말도 안하고 이렇게 갑자기 일본에 가버리면 어떡해!!!” 헐..? 지금 쟤가 나보고 뭐라는 거야? “엘리스씨 어디 아파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좋아했는데!! 떨렁 승진만 시켜놓고 일본으로 가버리면 나 혼자 어떡하라고!!” 눈물에 화장이 번진 엘리스는 나에게 달려와 가슴을 퍽퍽 쳐대었다. 몇 대 맞아 주던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은 뒤 곧바로 입술을 덮쳤다. “흡!!” “어, 음.. 저기 강군..? 허허..” 야마시타씨는 볼을 긁으며 잠시 시선을 돌렸고, 나는 그렇게 짜릿한 키스를 마친 뒤 엘리스의 볼을 감싸 쥐며 말했다. “잘 있어요. 비서님~ 혹시 휴가 받으면 일본에 놀러 와요. 내가 맛있는 식사 대접할 게요~” “안녕히 가세요. 부장님..” 나는 마지막 작별 인사를 마친 뒤 티켓을 들고 출국장으로 향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미국인들은 박수를 치며 휘파람을 불어댔고, 창피했던 나는 서둘러 캐리어를 끌고 출국장 문으로 들어갔다. 아~ 이거 참. 금발의 미녀와 찐한 키스도 해보고 좋은데~? 미국에 온 보람이 있었어~!! & 1985년. 이 시기는 게임 역사상 참 특별한 시기 중에 하나이다. 본래는 슈퍼 마리지가 발매되었던 해. 그러나 내가 1년 앞당겨 출시한 바람에 조금 김이 새어버린 감이 있지만, 이 시기에 무엇보다 빛났던 것은 바로 RPG게임의 진화였다. 흔히 TRPG라 불리며 테이블 위에서 주사위를 굴리던 놀이에서 벗어나 진정한 판타지 세계를 모험하는 RPG가 본격적인 모습을 갖추었던 것이 바로 이 1985년이었다. “어서 오게, 강군~!!” “이 녀석 미국 물 좀 먹었더니 더 훤칠해 진 것 같은데!?” 내가 소속되어 있던 주식회사 민텐도는 패밀리의 대히트와 함께 장난감 회사로서의 이미지를 버리고 진정한 게임 회사로 거듭났다. 회사 규모도 더욱 커지고, 건물도 새로 들어서 있었다. “와우.. 회사가 엄청 커졌네요?” “그렇지? 모두 우리가 힘을 합쳐 열심히 일한 덕분이지.” 군페이씨는 흐뭇한 미소로 새하얀 민텐도 본사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우리 뒤에서 앙칼진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훌륭한 인재를 모은 내 혜안 덕분이다. 이놈들아~!!” “아~ 카마우치 사장님. 안녕하세요.” “너 이 녀석 회사에 왔으면 사장인 나에게 빨리 와서 보고를 해야지. 여기서 농땡이를 피우는 거야? 듣자하니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내내 최고급 호텔에서 아예 전세내고 살았다면서!!” “사장님. 그건 제 사비로 충당하지 않았습니까?” “얼씨구 이놈보소? 1년이 지나도 네 녀석 말버릇 하난 여전 하구나.” “하하, 그런가요? 아무튼 건강해보이시니 다행입니다.” “인마~ 나 아직 안 죽었거든? 난 2000년까지 사장질 해먹을 거야~!!” 그래요. 당신은 2002년까지 사장질을 하시더라구요. 그때 군페이씨가 안경을 쓸어 올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사장님께 진언했다. “저기 사장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는 1999년 지구가 멸망할거라고..” “야~이 미친놈아!! 그게 지금 나한테 할 소리냐!!” 음.. 역시 공돌이는 센스가 부족하군. ──────────────────────────────────── ──────────────────────────────────── EP. 7 : 카린의 전설 (1) & “그래서 가고 싶은 부서는 정했나?” “네, 저는 차세대 콘솔 개발 파트로 가고 싶습니다.” 그러자 카마우치 사장은 고개를 갸웃 거리며 군페이씨에게 물었다. “우리 회사에 그런 부서가 있었나?” “아, 현재 휴대용 겜보이 진행을 맡고 있는 제가 파트장이긴 한데, 강군은 그럼 내 밑으로 오고 싶다는 건가?” “아뇨. 제가 말씀 드리는 건 패밀리의 뒤를 이를 차세대 거치기 개발 파트입니다.” 카마우치 사장은 나의 대답에 기묘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음!? 패밀리의 후속기? 그건 아직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한창 잘나가는 게임기인데 벌써 후속기를 만들 순 없잖나?” “물론 지금 당장 만든 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NEGA라는 경쟁사가 나타났고, 그들이 NEGA 디스크를 출시하면 강력한 하드웨어를 강점으로 내세울 겁니다. 그렇기에 슬슬 생각은 해보셔야할 것 같습니다. 시대가 발전할수록 컴퓨터의 발전 속도도 빨라지고, 그렇게 되면 패밀리는 민텐도에 있어 한순간의 영광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흐음.. 후속기라. 하긴 강군 말도 맞는 말이야. 시대에 맞춰 강력한 하드웨어를 개발해야 게임의 퀄리티도 올라갈 테고..” “맞습니다. 사장님. 그래서 새로운 부서로 발령을 부탁드린 겁니다. 그곳에서 차세대 콘솔을 제작하며 게임 개발도 함께 하겠습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군페이.” “저도 강군과 같은 생각입니다. 현재는 우리가 업계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지만, 게임 산업이 돈이 된다는 걸 알게 된 회사들이 요 근래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어요. 그들과 차별화를 두기 위해 지금 차세대기 제작을 생각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좋아. 그럼 그렇게 진행을 하지.” “네. 감사합니다.” 어라? 생각보다 쉽게 말이 통했네? 저 짠순이 카마우치가 곧바로 승낙도 다해주고? 아무래도 미국 시장 공략에 성공한 것이 회사 내에서 내 입지를 꽤나 세워준 모양이었다. 덕분에 나는 새로운 개발 부서의 부장으로써 일본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때는 1985년 내 나이 23살이 된 해였다. & “시게씨. 혹시 드래곤 워리어 해보셨어요?” 시게씨는 쿠마모토 시게루를 줄여 부른 별명이다. 그는 요새 한 게임의 개발에 열중하고 있는 상태였다. “몰라, 인마.” 퉁명스러운 그의 목소리는 신경이 곤두 서있다는 걸 뜻했기에 그에게 질문을 했던 사원은 뻘쭘 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커피를 마시며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누가 보면 굉장히 버릇없는 자세라고 욕하겠지만, 미국 시장에 활로를 개척하고, 차세대 거치기 개발 파트 부장을 맞고 있는 나를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어쭈? 이 녀석 주머니에서 손 안 빼? 미국 물 거하게 먹더니 아주 자세가 남달라졌어? 미스터 강?” “아, 사장님. 안녕하세요.” “안녕 못하다. 이놈아.” “하하, 개발실엔 어쩐 일이세요?” “시게 녀석 좀 보러왔지.” 그러나 시게루씨는 카마우치 사장이 온 것도 모른 채 모니터 화면만 응시 하고 있었다. 그런 시게루씨를 향해 카마우치 사장은 넉살 좋은 표정으로 물었다. “야, 시게야 너도 드래곤 워리언지 뭔지 그 게임 해봤냐?” 그러자 시게루씨의 눈썹이 꿈틀 거리더니 책상을 박차고 일어섰다. “몰라 이놈아!! 드래곤 워리언지 뭔지 왜 자꾸 나한테 물어보고 지랄들이야!!” “...” 카마우치 사장은 마치 금붕어처럼 입 주변을 뻥긋 거리며 벙찐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주.. 젊은 녀석들을 부장에 앉혀 놨더니, 회사가 미쳐 돌아가는구만..” “아, 사장님!?” “내가 아무리 프리 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지만, 요새 내가 너무 편하게만 대해줬지?” “아, 제가 잠시 다른 생각을 좀 하다가..” 시게루씨는 당황한 표정으로 몇 번이고 사장님께 사과를 드리고 있었다. 질투심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더니 드래곤 워리어라는 게임 하나가 시게루씨를 미치게 하는 구나. 나는 커피를 홀짝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요 근래 나는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게임업계의 역사가 미묘하게 틀어졌다는 걸 눈치 챘기 때문이다. 본래 내가 알던 흐름이라면 시게루씨의 카린의 전설이 드래곤 워리어 보다 세달 정도 먼저 나왔어야 했는데, 드래곤 워리어가 이렇게 빨리 나올 줄이야.. 슈퍼 마리지의 횡 스크롤 시스템이 1년 먼저 세상에 나오는 바람에 게임 장르의 바리에이션이 굉장히 넓어 졌다. 그로 인해 드래곤 워리어는 단 5개월 만에 제작을 끝내 버리고, 시리즈 최초의 1탄을 출시해버린 것이다. 드래곤 워리어가 출시된 날. 나 역시 하루 연차를 써서 도쿄의 아키하바라에 다녀왔다. 패밀리의 성공과 네가 디스크의 활약으로 아키하바라는 요새 전자 제품과 게임기가 짬뽕이 되어가고 있는 판국이었다. 피닉스라는 일본 게임 회사에서 민텐도 패밀리용으로 출시한 드래곤 워리어는 출시 전부터 게이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만큼 출시 당일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도 그럴게 여태까지 게임이라면 단타 위주의 아케이드 형식을 띄고 있었는데, 슈퍼 마리지 역시 횡 스크롤이라는 독특한 게임 방식으로 게임 장르의 저변을 넓혔지만, 엄밀히 말해 아케이드 액션의 한 축에 속해있던 슈퍼 마리지는 ‘완벽히’ 새로운 장르는 아니었다. 하지만 드래곤 워리어는 발매와 동시에 일본 최초의 RPG게임이라는 타이틀을 가져가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사실 시게루씨 역시 같은 시기에 일본 최초의 RPG라는 타이틀을 위해 초록 모자를 뒤집어 쓴 요정을 테마로 게임 하나를 만들고 있었는데, 문제는 본인의 욕심이 화를 불러 일으켰다. 스토리에 너무 이것저것 쑤셔 넣는 바람에 제작 기간이 길어 진 것이다. 처음엔 요정족 소년이 공주를 구하는 심플한 내용이었지만, 어디서 삼각형 세 개가 뭉쳐진 트라이포스인지 뭔지 희안한 엠블렘을 만들어 내더니 그것에 대한 세계관을 짜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제작 기간은 3개월에서 6개월로.. 6개월에서 9개월로 점점 늘어만 갔고, 그 틈에 피닉스 사는 ‘공주를 구하는 용사’라는 심플하고 동화 같은 이야기로 게임 하나를 뚝딱 만들어 냈는데, 그것이 바로 드래곤 워리어였다. & “끙.. 아, 짜증나..” 나는 휴게실에 있던 시게루씨에게 캔 커피 하나를 건네주며 물었다. “괜찮아요? 시게씨? 그러게 뭘 그리 스트레스 받아요~ 이제까지처럼 편하게 제작하면 되지.” “아~ 땡큐. 그러게 말이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드래곤 워리어가 주목 받을수록 은근히 신경이 쓰여서 말이지. 최초의 RPG장르~!! 탐났었는데..” “욕심도 과합니다. 드래곤 워리어 덕분에 지금 다른 게임 회사들은 난리도 아니에요. 요새는 아케이드가 아니고 패밀리나 NEGA 디스크용 게임만 전문으로 만드는 회사도 많이 생겼더군요.” “드래곤 워리어가 대박을 치고 있으니, 비슷한 RPG 작품들이 엄청나게 파생되겠지? 아~ 그러면 내가 만드는 카린의 전설도 그 안에 묻혀 버릴 거 아냐~~!!!” ‘카린의 전설’은 현재 시게씨가 제작 중인 게임의 제목이었다. 정작 주인공 이름은 엘크라는 녀석인데, 붙잡혀간 공주 이름을 게임 타이틀로 붙이다니 뭔가 게임 제목에서도 유저들에게 수수께끼 내는 걸 좋아하는 그 다운 성격이 묻어나 있었다. 나는 그의 외침에 피식 웃으며 한마디를 던져보았다. “그럼 그 안에서 다시 최초를 만들어 봐요.” ──────────────────────────────────── ──────────────────────────────────── EP. 7 : 카린의 전설 (2) “그럼 그 안에서 다시 최초를 만들어 봐요.” “음? 그게 무슨 말이야?” “가령 RPG긴 RPG인데, 슈퍼 마리지처럼 필드에서 직접 적이랑 부딪혀 싸우는.. 굳이 장르를 붙여 보자면 액션 RPG? 뭐 그런 거라면 확실히 눈에 띄지 않을까요?” “좋아!! 강군!! 그거 좋아!! 완전 좋아!! 딱 내 스타일이야!! 역시 넌 천재야!!” 아, 네.. 감사합니다. 시게루씨는 단숨에 캔커피를 비워 버리고는 개발실로 달려갔다. 어휴~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뱅글뱅글 돌아가는 모양인가보군.. 휴게실에 혼자 남아 있던 나는 캔 커피를 마시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뭐 드래곤 워리어도 카린의 전설도 일본 게임 역사상 가장 큰 인기를 끌 녀석들이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 역시나 내 예상대로 드래곤 워리어의 발매이후 일본 게임 업계는 RPG의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기존 액션 게임과는 다르게 장대한 모험을 그리고 있는 RPG장르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가 좋아하는 장르였고, 그로 인해 패밀리의 판매량은 더욱 늘어 NEGA 디스크는 시장 어디에도 발붙일 만한 틈이 없었다. 고 사양 차세대 게임기라는 이름으로 출범하였지만, 모든 게임 회사는 이미 보급이 깔릴대로 깔린 패밀리를 선호했고, NEGA 디스크는 몇몇의 자사 게임으로 고군분투 중이었다. “껄껄껄, 역시 NEGA 따위는 우리 민텐도의 발치에도 따라오지 못하는군.” 요근래 자신감이 폭발한 카마우치 사장은 연일 오르는 주식가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군페이씨 역시 웃으며 카마우치 사장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다.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도 단연 드래곤 워리어가 1위입니다. 덕분에 다소 침체 되었던 패밀리의 판매량이 다시 한 번 크게 늘었습니다.” 콘솔이란 참 묘하다. 막말로 지금 시기의 콘솔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기계 장치였다. 내가 살던 2015년처럼 인터넷을 이용해 게임을 다운로드 할 수도 없기에 콘솔의 판매는 무조건 소프트와 묶여서 나간다는 공식이 성립되었고, 그것은 곧 민텐도에 얼마만큼의 로열티 수익이 돌아온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제 시게루의 카린의 전설을 취재해간 게임 잡지 기자도 극찬하며 기사를 잘 써준다고 하니, 기대가 되네요.” “시게 녀석이 이번에도 제대로 한 건 터뜨려 주겠지. 그런데 게임 잡지라.. 요새는 그런 책도 생겼나?” “네, 게임 업계 소식이나 신작이 출시될 때마다 마케팅으로 활용하기가 좋을 듯합니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아 매월 발행하는 부수가 꽤 되는 듯하더군요.” 인터넷이 없다 보니 새로운 정보는 잡지를 통해서만 공유되는 아날로그 시대. 나 역시 PC통신이나 인터넷이 활발해지기 전에는 매월 게임 잡지가 출시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추억이 있었다. “그럼 이번 카린의 전설에 그 잡지 회사를 이용한 새로운 마케팅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음? 강군. 뭐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내가 말을 꺼내자, 사장님과 군페이씨가 두 눈을 번뜩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카마우치 사장은 또 내 입에서 어떤 말이 튀어나오는지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때마침 그 패미통신이라는 잡지가 다음 달 카린의 전설 카트리지 생산이 시작 되고 1주일 후가 발행일이더군요.” “오~ 강군도 그 잡지에 대해 알고 있었군. 그래서?” “이번 카린의 전설은 저희 민텐도에서도 기대가 큰 타이틀이니 프리미엄 전략을 짜보는 건 어떨까요?” “프리미엄 전략? 어차피 찍어내면 똑같은 게임인데? 차별화 시킬게 있나?” “초회 생산 500개분은 카트리지를 황금색으로 한다거나..” 그러자 군페이씨가 먼저 탄성을 내지르며 대답했다. “아!! 카트리지 색상을 바꾸자는 건가?” “같은 게임에도 희귀성을 두는 거죠. 패미통신 기자에게 실물을 먼저 보이면 그것에 대한 기사를 써줄 테고, 그로인해 카린의 전설을 기다리는 유저들의 기대감을 증폭 시키는 겁니다.” “같은 게임이지만, 초회 생산분 카트리지에 특별한 컬러를 도입시킨다. 그거 괜찮은데요. 사장님?” “나쁘지 않아. 헌데 500개는 너무 수량이 적은 게 아닐까? 적어도 1만개 정도는 해야..” “아뇨. 딱 그 정도 수량이 좋습니다. 두고 보세요~” 이것이 바로 2015년까지 게이머의 호주머니를 털어갈 ‘한정판’ 마케팅의 시작이었다. & 카린의 전설의 발매일인 1985년 12월 17일 아침. 시게루씨와 나는 도쿄의 아키하바라에 도착해 있었다. 카마우치 사장과 군페이씨 역시 오후에 행사장을 둘러보러 오신다고 하셨으니 슬슬 출발했겠군.. 내 옆에는 수면 부족으로 퀭한 표정의 시게루씨가 연신 하품을 쩍쩍 해대고 있었다. “강군. 과연 기대만큼 잘 나갈까? 벌써 몇 번째 게임 출시를 하고 있지만, 항상 발매일 전 날에는 잠을 잘 못자겠더군.” “지지난 달에 카린의 전설에 대한 패미통신 기사도 잘나가서 시장 반응은 좋은 것 같던데? 일단 한번 가볼까요?” 내가 웃으며 발걸음을 옮기자 시게루씨는 살짝 불안 한 표정으로 내 뒤를 쫓았다. 일부러 토요일로 발매일을 맞춘 우리는 역을 빠져나와 지정된 행사장으로 향했다. “토요일인데 왜 이리 한적하지? 막 사람들로 붐벼야 하는 거 아닌가?” “시게씨.. 지금 토요일 오전 9시거든요? 이 시간에 사람이 붐빌 리가 있나요?” “아, 그런가? 역시 그런 거지? 하하~” 이 사람 아주 정신 줄을 놔버렸군. 나는 잠시 찡그린 얼굴로 시게씨를 바라보다가 다시 행사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간만에 아키하바라에 들르니 게임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매장도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향하고 있는 행사장 역시 아키바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게임 전문 매장이었다. 슈퍼 마리지와 드래곤 워리어 같은 양질의 게임 덕에 아키바 거리는 더 이상 아타리 쇼크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게임이 성행하고 있었다. 나는 마치 갓난아이의 태동을 느끼는 것처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기 바빴다. 그렇게 얼마 쯤 걸었을까.. 거의 행사장 근처에 도착했을 즈음 나는 기이한 풍경과 마주했다. 토요일 오전 7시. 보통이라면 텅텅 비어있어야 할 스트리트에 젊은 남자 몇몇이 길바닥에 앉아 있었다. 신주쿠의 가부키쵸 라던가 시부야라면 조금은 이해가 가는 풍경이지만, 술집 하나 없는 이곳에 주저앉은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까지 받을 수 있을까? 한정 수량이 500개라던데..” “바~보. 민텐도가 설마 여기 매장 한군데에 500개를 다 풀겠냐? 전국에 이미 뿌려졌겠지. 그나마 행사장이니 200개정도는 들어올 거 같은데, 그 정도로 우리까지 받기엔 턱도 없지. 그러니까 내가 어제 저녁부터 와서 기다리자고 했잖아!!” “나라고 신작 게임 출시에 이렇게 사람들이 모일 줄 알았겠냐!?” 뭐지 한정 수량 500개? 그럼 카린의 전설을 사러 온 건가? 그런데 왜 행사장이랑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이러고 있지? 골목 끝 쪽에서 중얼 거리는 녀석들을 지나친 나와 시게루씨는 행사장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들어서자마자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가.. 강군?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지?” “아마도 저랑 같은 생각 중이신가 보네요.” 대박이다.. 행사장까지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은 끝이 안보일 지경이었다. ──────────────────────────────────── ──────────────────────────────────── EP. 7 : 카린의 전설 (3) 대박이다.. 행사장까지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은 끝이 안보일 지경이었다. 아무리 줄서기 좋아하는 일본인들이라지만, 설마 이정도일 줄이야. 카린의 전설 판매는 오후 2시부터 시작이라고!! “가, 강군. 나 갑자기 숨쉬기가 힘들어. 부축 좀 해줘.” “정신 차리고 빨리 와요. 행사장 직원들도 시게씨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길고 긴 행렬을 지나 판매점으로 들어가기 전 나는 행렬 맨 앞에 대기 중인 내 또래의 남자 손님에게 물었다. “추운 날씨에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민텐도 직원 강 준혁이라고 합니다만, 혹시 언제부터 기다리셨나요?” “어제 오전 10시부터 기다렸습니다. 하하.. 패미통신 기사를 보고 이번 카린의 전설 초회 한정판이 너무나 갖고 싶어서..” 세상에 12월 강 추위에 24시간을 기다렸다고!? 환장하겠네.. “열의에 감사드려요. 제가 사장님께 따로 말씀드릴 테니, 이따가 괜찮으시면 기념 촬영 한 장 부탁드립니다.” “아, 네~!! 혹시 옆에 계신 분이 쿠마모토 시게루씨인가요!? 동킹콤 때부터 완전 팬입니다. 이번 카린의 전설도 기대하고 있어요!!” 그러자 시게씨는 어색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이번 카린의 전설도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 시간이 흐를수록 행렬은 점점 길어지더니 오후에 접어들자 행사장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 모두가 카린의 전설을 구매하러 온 유저들이라니 정말 소름끼치는 광경이었다. 이 현상은 방송국까지 귀에 들어가 지금은 취재를 나온 기자가 시게씨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행사장 앞에 혼란을 막기 위해 행사 도우미 몇 명을 대동해 곳곳 마다 피켓 배치시킨 뒤 돌아오자 카마우치 사장과 군페이씨가 행사장에 도착해 있었다. “야, 인마~!! 강부장!!” 입이 귀에 걸린 카마우치 사장이 덩실덩실 춤을 추듯 나에게 달려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응!? 방금 연락 받았는데, 오사카와 교토, 그리고 후쿠오카까지 카린의 전설 판매가 장난 아니라는군. 오늘 하루 만에 초도물량으로 준비한 3만개가 전부 나갈 기세라고!!” 하~ 진짜 내심 기대는 했지만, 이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인데? 보통 일반적인 타이틀. 거기다 신작일 경우에 초도 카트리지 생산 수량은 보통 5천개 정도로 잡는다. 그리고 그것을 매장에서 모두 소화하기까지는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편이었는데, 이번 카린의 전설은 우리 민텐도에서도 어느 정도 기대를 거는 타이틀이었기에 한정 수량 골드 색상을 전면에 내세워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쳐보았다. 메인 디렉터는 이미 마리지 브라더스와 슈퍼 마리지등으로 민텐도 게임의 간판스타가 된 쿠마모토 시게루였기에 유저들의 기대심리가 증폭 되었고, 패미통신 역시 게임계의 트렌드를 소개하는 최초의 잡지사로서 발행부수를 늘리기 위해 호화로운 특집 기사를 내었다. 그렇게 삼박자가 고루 갖춰진 카린의 전설은 출시 전부터 많은 화제를 낳았고, 드래곤 워리어의 붐이 조금 수그러든 틈을 타 엄청난 반등 효과를 등에 업었다. 그리고 대망의 오후 2시.. 행사 매장에 카린의 전설 오프닝 송이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차례차례 대기표를 들고와 게임을 구입해가기 시작했다. 행사장에 준비한 150개의 황금 카트리지는 이미 행사 개시 15분 만에 동이 나버렸다. 물론 행사 개시 전에 고지해두었기에 큰 혼란은 없었지만 아쉬워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그러자 계산대를 지켜보던 카마우치 사장 역시 유저들과 함께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봐. 그러니까 내가 한 1만개 정도 준비하자고 했잖아.” “아뇨. 만약 1만개를 준비했다면 결코 이런 효과는 보지 못했을 겁니다. 한정판이라는 그 수량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 가치를 인정받아 사람을 불러 모으는 것이니까요.” “강군.. 넌 무슨 만능선수냐? 처음엔 콘솔 하드 기획자인줄 알았더니, 게임도 만들고, 미국에 보내봤더니 영업을 다하질 않나, 거기다 이젠 마케팅까지 하고 있군. 아, 그러고 보니 군페이 녀석이 여기 행사장에서 무슨 발표를 한다며? 사장인 나한테까지 비밀로 하고 군페이랑 진행한 게 대체 뭐야?” 카마우치 사장은 궁금해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 거리며 모른 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건 나와 군페이씨, 그리고 시게루씨의 합작 프로젝트였는데 카린의 전설에 어느 정도 사람이 모일 걸로 예상한 나의 치밀한 계획 중에 하나였다. “앞으로 한 시간 뒤에 발표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나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 하며 싱긋 웃어보였다. 그러고 보면 행사장 내부에는 ‘3시 33분 최초 공개’ 라고 쓰여 있는 문구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유저들은 저마다 3이라는 숫자가 카린의 전설에 나오는 3개의 보석을 암시하는 거라며 벌써 후속작이 나오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 돌고 있었다. 이미 카린의 전설을 구매한 사람들 역시 3시 33분에 대한 궁금증으로 쉽게 행사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일부러 큰 행사장을 잡아 놔서 다행이군.. 우리는 어제 아침부터 장장 28시간을 대기한 첫 번째 구매 고객에게 시게루씨의 사인이 들어간 게임 타이틀과 마리지 캐릭터 인형등 소정의 사은품을 지급하였고 함께 기념 촬영을 마쳤다. 그리고 모두가 기다렸던 3시 33분. 행사장에 있던 군페이씨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잠시 행사장 내부가 어두워지는 듯싶더니 준비 된 작은 단상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졌다. “뭐야? 뭐지!?” 게임을 구입하던 사람들마저 수근 거리며 단상을 바라보자 군페이씨가 슬쩍 단상 위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흠.. 우선 저희 민텐도사의 카린의 전설을 구매하러 오신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께 새로운 휴대용 기기의 탄생을 알려 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군페이씨의 발표에 행사장은 금세 사람들의 환호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군페이씨 앞에 있던 한 유저가 외쳤다. “휴대용 기기? 설마 새로운 게임 & 워치를 발표하는 건가요?” “오~ 눈치가 빠르신데요? 바로 맞췄습니다.” 군페이씨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녹색의 게임 & 워치 기계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카린의 전설를 테마로 한 게임 & 워치 기계였다. 그러자 내 곁에서 단상을 지켜보던 카마우치 사장이 말했다. “뭐야? 저건 내가 이미 승인해준 건이잖아. 이게 무슨 나조차 놀랄 깜짝 발표라는 거냐? 물론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는 완전 빅뉴스긴 한가보군. 반응이 나쁘진 않네~” “글쎄, 잠깐만 더 기다려 보세요.”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단상을 바라보았다. 단상 위의 군페이씨는 새로운 게임 & 워치를 펼쳐 보이며 유저들에게 설명을 하고 있었다. 아직 프로젝터가 없던 시기여서 그런지 앞에 있는 유저들에게 간단히 기기를 만져보게 하던 군페이씨는 다음 달 패미통신에서 자세한 정보를 알게 될 것이라고 소개를 마친 뒤 다시 품안에 게임 & 워치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여러분께 깜짝 발표가 남아있습니다.” 군페이씨는 회심의 미소와 함께 뒷주머니에서 묵직한 기계 하나를 꺼내 들며 외쳤다. “세계 최초로 카트리지 교환 방식을 채용한 휴대용 콘솔 겜보이입니다.” “우와아아아!!!!!!!!!!” ──────────────────────────────────── ──────────────────────────────────── EP. 8 : 스폰서 게임 (1) “세계 최초로 카트리지 교환 방식을 채용한 휴대용 콘솔 겜보이입니다.” “우와아아아!!!!!!!!!!” “이건 아직 개발 중인 새로운 휴대용 콘솔 모델의 프로토 타입입니다. 휴대용 게임기지만 뒤쪽에 게임 카트리지를 넣을 수 있게 되어 있어 하나의 기계로 수많은 게임을 교환하여 즐길 수 있습니다. 또한 스피커와 이어폰 방식 둘 다 채용하여 사람들이 많은 공공장소에서도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즐기며 게임을 플레이 할 수 있습니다.” “우와아아아!!!!!” “이 기계는 흑백 디스플레이지만 여러 그래픽을 유기적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만들어진 이 카트리지를 이용해 플레이를 해보겠습니다.” 군페이씨는 미리 만들어진 데모용 카트리지를 기기에 꽂은 채 단상 앞에 있는 한 소년에게 보여주었다. “슈퍼 마리지다!!! 슈퍼 마리지에요!!” 소년은 흑백의 작은 화면 안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슈퍼 마리지를 보며 감탄사를 내뱉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 역시 게임 안의 화면을 보고 탄성을 내질렀다. “지.. 진짜다. 정말 슈퍼 마리지가 돌아가고 있어!!” 비록 뒤에 있는 사람들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앞에서 지켜본 사람들의 반응에 자기도 보고 싶다 아우성 치고 있었다. 군페이씨는 그러한 유저들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며 겜보이를 다시 뒷주머니에 넣었다. “내년 연말을 목표 제작 중인 이 겜보이 역시 다음 달 패미통신에서 자세한 정보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저희 민텐도의 깜짝 발표회를 마치겠습니다.” “으우와아아아아아아!!!!!!!” 발표회는 성공적이었다. 사람들은 발표장을 떠나면서도 충격이 채가시지 않았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박이라는 소리만 중얼 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아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분 하나가 이벤트 회장 뒷편으로 달려가며 소리치고 있었다. “우와아앙~ 군페이 이 귀여운 새끼~!! 어딨어!!” 아마 가장 감동 먹은 사람은 카마우치 사장인 듯 싶었다. & 카린의 전설은 내 예상대로 엄청난 흥행을 일으켰다. 행사장의 전경은 뉴스에 보도 되었고, 게임 매체의 사회적 현상이라는 주제로 특집 다큐멘터리가 방영 될 정도였다. 물론 그 중심에는 민텐도가 있었고, 1983년 7월 15일부터 판매한 패밀리는 3년 만에 전 세계 7천만대 가량이 판매되며 민텐도는 명실상부한 게임 왕국의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일까? 거의 모든 게임 회사가 민텐도 패밀리용 게임을 제작하는 바람에 기존에 개발실 인력으로는 도저히 게임 퀄리티에 대한 검수까지 맡을 수가 없었기에 카마우치 사장은 특별히 인력을 더 늘려 1986년 2월. 퀄리티 검수부서를 만들었다. 나 역시 3년 동안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때론 게임 개발자로서 때로는 영업 사원으로서 민텐도를 대표하는 실권자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실질적인 업무를 보는 부서는 차세대 콘솔 개발 부서였지만, 요즘 나는 그것 보다 외근이 더 잦았다. “강 부장님 또 어디 가십니까?” “아, 잠깐 외근 좀 다녀올 게요~” 아래 직원들에게도 항상 경어를 쓰는 나는 내가 속한 부서 말고도 회사 내에서 인기가 꽤 많은 편이었다. 그것은 2015년 개발실에 틀어박혀 게임만 만들어 내던 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할까? 2015년에서 고객만족 팀으로 좌천됐던 나는 아직도 그때의 어색한 분위기를 잊을 수가 없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해. 그러려면 단 한사람이라도 내 편으로 만들고 회사 안팎으로 입지를 키워야지. 지금은 비록 카마우치 사장 밑에서 일하고 있지만, 언젠가 그와 대등한 조건에서 싸워야 할 때를 대비해야해.’ 나는 최근에 뽑은 토요타 승용차를 끌고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나는 오사카의 한 게임 회사 건물 앞에 도착해 있었다. 꽤나 규모가 큰 이 회사는 아케이드 게임을 주로 만드는 FOX SOFT였다. 실은 지난달 여기서 발매한 슈팅 게임 하나가 굉장한 반응을 얻고 있었다. 그 게임의 이름은 ‘트윈디’ 나 역시 어릴 적 친구와 함께 즐겁게 플레이하곤 했었지.. 트윈디는 기존의 슈팅 게임과는 분위기부터 매우 독특한 작품이었다. 세상에 슈퍼 마리지가 등장한 이후로 횡스크롤 시스템은 다른 게임 에서도 급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특혜를 입은 장르를 꼽자면 슈팅이랄까? 비행기를 주로 조종하는 슈팅 게임은 횡스크롤를 살짝 변형시킨 종스크롤 이용하고 있었다. 좌우가 아닌 위에서 아래로 배경이 내려오는 방식을 이용해 적군이 쏘아대는 탄막을 피해 날아다니는 상쾌함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흔히들 슈팅 게임이라면 머릿속에 1945를 많이 떠올리는데, 그중에 트윈디는 조금은 독특한 세계관으로 유저를 사로잡았는데, 서로가 죽고 죽이는 전쟁터가 아닌 판타지 세계를 주제로 하고 있었다. 또한 2인 플레이까지 지원하여 여차하면 서로 합체 하여 적을 물리칠수 있었는데, 문제는 이 게임 역시 벌룬 파이트처럼 아군끼리 싸움을 붙일 수 있는 요소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미사일 파워업 시키는 아이템 역시 1P와 2P. 서로 다른 것을 모아야 하는데, 서로 원하는 아이템을 먹기 위해 상대방이 아이템을 먹을 때 미사일을 쏘아 방해 할 수 있었다. 적이랑 싸우기도 바빠 죽겠는데, 아군이 방해까지 해대니 몇 번 하다보면 실제로 치고받고 싸우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고 보면 그 때부터가 현피(현실 PK)의 시작인가? “이 게임 때문에도 친구랑 진짜 많이 다퉜었는데..” 나는 씁쓸한 미소로 고개를 저으며 폭스 소프트 로비로 향했다. 폭스 소프트는 트윈디 이전부터 아케이드 게임을 전문으로 만들어온 회사라 그런지 80년대 회사 치고는 상당히 규모가 큰 편이었다. 오늘 내가 이곳에 방문한 이유는 폭스소프트의 개발실에서 기술 자문을 얻기 위해 개발자 한명을 보내주기를 원했고, 현재 민텐도 내에서 딱히 하는 일이 없던 내가 시게씨의 부탁으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민텐도 직원 강준혁이라고 합니다. 오늘 패밀리 게임 개발부서와 미팅이 있어서 왔는데요.” “아,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이쪽에 방문자 명단에 소속 회사와 성함. 연락처를 남겨 주시겠어요?” 생각보다 까다로운 방문 절차에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 거리며 방명록을 작성했다. 데스크 여직원은 내가 건네준 명함을 복사해서 서류철에 보관한 뒤에야 나를 안내해주었다. 누가 보면 청와대라도 방문한 줄 알겠네.. 이미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이렇게까지 보안을 철저히 할 필요가 있나? 거대한 규모의 건물이지만, 회사내부 복도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마 다들 개발실에 틀어박혀 일만 하는 모양인가 본데, 폭스 소프트는 직원들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기 위해 곳곳마다 천정에 CCTV를 설치해두고 있었다. “흐음, 폭스 소프트는 상당히 보안이 철저하군요.” “그렇죠? 그래서 저희 직원들끼리 ‘찰리와 초콜렛 공장’ 같다고 부르기도 해요. 사장님이 워낙에 보안에 철저하셔서 출 퇴근 할 때 직원들 소지품에 디스켓 한 장이라도 있으면 난리가 나거든요.” “하하.. 그렇군요.” 잠시 후. 나는 로비 직원의 안내로 패밀리 게임 개발 부서에 안내되었다. 그곳은 이곳까지 지나오며 보았던 아케이드 게임 개발실에 비하면 꽤나 구석진 자리에 규모도 작은 편이였다. 개발실 안에 들어가니 업무중이던 4명의 개발자들이 일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기술 자문 요청으로 방문한 민텐도 차세대 콘솔 기획과 부장인 강준혁이라고 합니다.” 나름 그래도 밝은 분위기를 만들어 보고자 웃으며 인사까지 건넸건만 직원들의 표정은 영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강준혁? 그게 누구야.. 민텐도에 한국인 직원이 있었나?” “쿠마모토 시게루씨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벌룬 파이트의 카와타 사토시씨 정도는 보낼 줄 알았더니 민텐도도 너무하네.. 기술 자문을 얻을 수 있는 인력을 보내 줘야지, 콘솔 기획과 사람을 보내다니.” 어라.. 나 지금 완전 무시당하고 있는 건가? ──────────────────────────────────── ──────────────────────────────────── EP. 8 : 스폰서 게임 (2) 어라.. 나 지금 완전 무시당하고 있는 건가? 4명의 직원들은 싸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수근 거린 뒤에 다시 자기 작업으로 돌아갔다. “그럼 전 이만.” 로비에서 안내해준 직원은 나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뭐야 이거? 분위기가 왜이래? 개발실의 어색한 분위기 속에 던져진 나는 일단은 작업중인 직원들을 둘러보았다. 2015년에야 게임 하나 만들 때 몇 거대한 프로젝트에는 백명 정도의 인원이 투입 되기도 했지만, 1980년대의 게임 개발 환경은 코딩을 짜는 프로그래머 한명과 도트를 찍을 그래픽 디자이너, 그를 책임지는 디렉터겸한 팀장이면 충분했다. 나머지 한명은 배경이나 아이템의 도트를 찍어내는 보조사원. 뭐 이정도 랄까? “흐음..” 나는 잠시 헛기침과 함께 프로그래머의 코딩 화면을 힐끗 바라보았다. ‘코딩이 지저분하군.. 플래그와 판정이 어떻게 동작하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도야.’ 다음으로 나는 캐릭터 일러스트 도트를 찍고 있는 디자이너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모니터 안에는 회색 군복에 검은색 머리끈을 질끈 동여맨 캐릭터가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쟁물인가? 하긴 작년에 람보2가 개봉한 뒤로 특전사 출신의 밀리터리물이 한창 인기를 끌고 있긴 한데..’ 그때 내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를 불렀다. “저기 이봐요. 강준혁씨? 라고 부르면 되나? 전 요리모토라고 합니다.” “아, 그냥 편하게 강군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래요? 아무튼 강군. 혹시 소프트 개발은 해보셨나요? 대표작이라던가.. 우리가 알만한 것들로?” “일단은 덕헌트(오리 사냥)는 들어보셨죠?” 나의 대답에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리며 눈을 부릅떴다. 하긴 전자총을 이용해 가정에서 건 슈팅 게임을 구현한 최초의 게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그때 사무실 한구석에 보조 직원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거야 군페이씨가 만든 전자총이 유명한 거지. 실상 오리가 날아다니는 구현은 초보 프로그래머도 할 수 있습니다.” 얼씨구? 젊은 것이 대놓고 비아냥거리네? 그러자 팀장 역시 젊은이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하긴 그야 그렇지. 확실히 군페이씨의 전자총은 대단했어.” 헐.. 그 아이디어 제안도 내가 한 거구만, 사람들이 참 간사하네.. 할 수 없이 나는 슈퍼 마리지의 보조 디렉터를 겸임했다는 걸 소개에 덧붙일 수밖에 없었다. “슈퍼 마리지의 역시 횡 스크롤과 점프의 쾌감이라는 시게루씨의 독특한 발상이 빛을 발했던 명작이죠.” 젠장!! 그 횡 스크롤에 대한 기본적인 골자도 내가 알려줬거든!! 하지만 나는 이내 생각을 고쳤다. 사실 횡 스크롤이건 전자총이건 본래는 그들이 실제로 만들어 낸 것들이니까. 미래를 알기에 촉진제 역할을 한 걸 빼버리면 실상 내가 이룬 부분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아니 대체 저 구석에 처박혀 있는 보조 담당은 얼마나 잘난 녀석이 길래 내가 하는 말마다 태클인거야? 나는 간신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직원에게 물었다.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아직 저는 제 이름 석자로 낸 게임은 없고 보조 디렉터 역할만 해왔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의 기술 자문을 답해드릴 정도는 가능하기에 시게루씨 대신 오게 된 것이니 양해 부탁드려요. 혹시 저로서도 정말 불가능한 기술 자문이라면 본사로 돌아가 시게루씨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크흠.. 일단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소.” 팀장은 헛기침을 하며 프로그래머인 마사키를 불렀다. 28살의 마사키씨는 목이 늘어난 헐렁한 티셔츠를 입은 배불뚝이였다. 나를 향해 안경을 치켜 올리며 힐끗 거리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참아보기로 했다. “어이, 마사키 우리가 지금 만들고 있는 게임에 대해 설명 드리고, 자문 좀 드려봐.” “일단 이쪽에 앉아보시죠.” 나는 사무실 테이블에 놓여 있는 게임 기획서를 바라보았다. 두꺼운 종이 뭉치 위에는 -Never Die Soldier- 라는 다소 유치찬란한 제목이 쓰여 있었다. ‘확실히 람보의 영향을 제대로 받고 있는 모양이군. 이건 제목만 봐도 무슨 내용인지 딱 감이 오네..’ 내가 기획서에 관심을 보이자 마사키라는 프로그래머는 다소 진중한 표정으로 안경을 쓸어 올리며 내게 말했다. “일단 우리가 만드는 게임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 드리죠.” ‘굳이 말 안 해도 알 것 같은데?’ 내 예상대로 그들이 만들고 있는 네버 다이 솔저라는 게임은 홀로 적진에 침투한 특수부대 출신의 용병이 전장을 휩쓸고 다니는 밀리터리 장르였다. 그와 이야기를 하며 알게 된 내용이 몇 가지 더 있었는데, 우선 이 네버 다이 솔저라는 게임의 최초 기획안은 놀랍게도 저 사무실 구석에 있는 보조 직원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아쉽게도 이 촌스러운 제목은 마사키씨가 직접 지은 듯하지만.. 이 무렵에는 보통 프로그래머가 게임 기획까지 겸하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코딩 역량에 따라 게임을 만들 수 있는지 없는지 한계를 미리 정해놓고 제작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물론 프로그래머가 자신의 역량을 알고 게임을 제작한다면 되도 않는 기획에서 쳐낼 건 쳐내고 빠르게 게임을 제작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톡특한 게임성이 나오긴 어렵지.. 잠깐 훓어본 기획서 역시 기본적인 게임 방식은 그냥 비행 슈팅 게임을 사람으로 바꾼거나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적이 쏴대는 총탄을 피해내며 막강한 화력으로 적을 무찌르면 그만인 단순한 게임 방식에 딱히 흥미가 일진 않았다. “사실 저는 밀리터리 매니아입니다. 그렇기에 네버다이 솔저로 유저들에게 전장의 생동감을 느끼게 하고 싶은데 기술 구현이 어렵더군요.” 마사키씨의 기술 자문 내용은 어떻게 하면 화면 내에 수많은 오브젝트를 띄워 놓을 수 있냐는 아주 단순한 질문이었다. 수많은 적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치열하게 살아남는 용병의 모습을 그리고 싶은 것 같은데.. 그럼 나도 간단하게 대답해 줘야지. “무리입니다.” “네?” 마사키씨는 민텐도 직원인 내 입에서 너무 간단하게 답이 튀어 나오자 황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사키씨가 기획하는 게임은 현재 패밀리로는 가동이 불가능합니다. 마사키씨도 프로그래머라면 패밀리의 한계 범위를 알고 계실 겁니다. 저희 패밀리는 커스텀 CPU를 사용하여 어느 형식의 게임에서든 광범위하게 대응 할 수 있도록 제작이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음원 재생까지 도맡아서 하고 있는 CPU이기에 그래픽 연산에 모든 힘을 쏟기에는 무리가 있지요. 물론 VRAM을 장착 하여 연산에 도움을 주고 있지만 고작 2KB에 불과하거든요.” “그래서 그 부분을 해소하기 위해 민텐도에 기술 자문을 요청한 게 아닙니까? 작년 말에 출시된 시게루씨의 카린의 전설 역시 하나의 맵에 다양한 오브젝트를 띄워 놓으시던데, 민텐도에서 따로 독자 기술을 숨겨둔 건 아니신가요?” “아뇨. 저희 역시 패밀리의 초기부터 게임을 제작해 온 터라 노하우가 쌓인 거지. 딱히 저희 게임을 만들 때 기기 성능 제한을 풀거나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럼 카린의 전설에서 보여준 그 수많은 오브젝트들의 움직임은 뭡니까?” “그야...” 나는 잠시 한 템포 말을 늦춘 뒤에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눈속임이죠. 카린의 전설의 전투 맵을 살펴보시면 아시겠지만, 끊임 없이 적들이 등장하는 것처럼 보여도 잘 헤아려 보시면 실제로 주인공 과 싸우는 적의 수는 한정 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적들은 공간을 비집고 나오려는 연출을 미리 깔아두어 플레이어에게 긴장감을 주려는 의도된 연출이죠. 그러다가 주인공이 적 하나를 없애버리면 그 즉시 연출 중인 오브젝트 하나를 적으로 바꿔치기 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연속으로 적이 등장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겁니다.” 하지만 마사키씨는 내 말을 못 알아들었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이런, 이런.. 이 사람 정말 프로그래머 맞아? 생각이 유연하질 못하군.. 할 수 없이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또 하나의 힌트를 알려주었다. “꼭 적의 수가 많다고 전장의 긴장감이 느껴지는 건 아닙니다.” “음?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생각을 전환 시켜야죠. 한정된 오브젝트를 이용해 플레이어에게 재미와 긴장감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디렉터가 해야 하는 일 아닙니까? 예를 들면..” “예를 들면..?” “잠입? 이라던가..” ──────────────────────────────────── ──────────────────────────────────── EP. 8 : 스폰서 게임 (3) “잠입? 이라던가..” 그 순간 이때까지 조용히 사무실 한 구석에 처박혀 있던 보조 직원이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속마음을 들킨 아이처럼 놀란 토끼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청년은 그때부터 우리의 대화에 귀 기울여 듣기 시작했다. 대체 저 녀석은 누구지? 마사키씨와 상담 중이었던 나는 고개를 돌려 보조 직원에게 물었다. “혹시 그쪽 분은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아, 제 이름은 호우지마 히데키입니다.” 뭐라고!! 당신이 호우지마 히데키라고!? 역시 폭스 소프트에 이미 근무를 하고 있었군. 그런데 카와타씨도 그렇고, 호우지마 역시 보조 직원이라니, 천재 디렉터들의 시작은 원래 다 이렇게 시작했나?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마사키씨에게 물었다. “혹시 브레인 스톰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브레인 스톰? 그게 뭐지? 캐릭터 기술 명인가?” 대체 이놈은 뭐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네.. 내가 한심한 표정으로 마사키를 바라보자, 호우지마의 입에서 정답이 튀어 나왔다. “하나의 화제에 대해 각자 다양한 의견을 내고, 그것을 종합하여 최선책을 이끄는 방식 말이군요.” “빙고~ 맞아요. 본래 게임을 만들 때는 다양한 의견을 들어두는 게 좋지요. 저희 민텐도 역시 시게루씨와 함께 개발실에서 자주 하고 있구요. 카린의 전설도 브레인 스톰을 이용한 수많은 아이디어에서 탄생한 작품이죠. 호우지마씨 제가 말씀드린 잠입이란 요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지금까지 멍하게 있던 그의 눈에 생기가 비치기 시작했다. 내가 살았던 2015년에 호우지마 히데키는 이미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유명한 게임 디렉터 중에 하나였다. 냉전 시대에 단신으로 핵무기 개발국에 침투하여 수많은 경비를 뚫고 임무를 완수하는 ‘스네이크’라는 캐릭터는 풀 메탈 기어라는 제목으로 출시되어 일본은 물론 미국에서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게 될 게임이었다. “적을 무찔러서 앞으로 나가는 게 아닌 숨어서 적에게 들키지 않고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건가요?” “바로 그겁니다. 오히려 적을 하나도 죽이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하는 게 게임의 백미가 되는 거죠. 아까 이곳에 오는 길에 복도마다 설치되어 있는 감시 카메라를 보다가 생각난 건데, 적군의 기지에 잠입하여 병사와 감시 카메라를 피해 플레이어에게 긴장감을 전달하는 방식은 어떨까요?” “굉장히 독특한 방식인데요? 적에게 들키지 않고 클리어 하는 게임이라~ 사실 저도 비슷한 느낌으로 게임 하나를 기획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준혁씨가 이야기한 잠입이란 말에 깜짝 놀랐죠. 설마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니..” 그러나 마사키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헹~ 웃기고 있네. 그런 게임 방식이 재밌을 리가 없잖아. 남자라면 당연히 적에 맞서 싸워야지 호구처럼 피해 다니면 주인공의 멋이 떨어지잖아” 아.. 그러신가요? 불의를 보면 제일 먼저 도망가게 생겨 가지고 가오 잡기는.. 결국 이 밀리터리 게임에 대해 저녁까지 이야기를 나눈 결과 두 개의 게임을 제작하는 방향으로 갈리게 되었다. 이 때만해도 2D 그래픽을 활용한 게임은 4~5명이서 석 달 정도 달라붙으면 게임 하나가 완성 될 만큼 제작 방식이 단조로웠기에 동시 작업이 가능했다. 하긴 이벤트 컷 신이 있길 하나 3D 그래픽에 텍스쳐를 입히길 하나.. 그냥 도트나 찍어서 오브젝트만 가동 시키면 땡이니까~ 거기다가 호우지마씨는 그동안 홀로 구석에서 풀 메탈의 기본적인 시안을 만들어온 터라 일단 기회가 열리자 둑이 터지듯 다양한 기획안이 쏟아져 나온 것도 한몫했다. 기획서란 프라모델 조립을 예로 들자면 일종의 조립 설명서와 같은데, 그가 제시한 기획서는 이미 풀 메탈의 기본 골짜를 전부 완성한 상태였다. 결국 팀장인 요리모토는 나의 조언과 호우지마의 열정에 고개를 끄덕이며 새로운 장르인 잠입 액션 게임 풀 메탈의 데모 제작을 허락했다. 그러자 메인 프로그래머였던 마사키의 입장이 난감해졌다. 자신이 메인이였던 밀리터리 게임의 진로가 완전히 바뀌어 버리자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도트 작업까지 완성된 게임인데 이대로 두기엔 아깝네.. “마사키씨의 게임도 그다지 나쁜 기획안은 아니에요. 현재 람보2가 개봉 되고나서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마초적인 성향의 밀리터리 게임도 충분히 먹혀들어 갈 것 같습니다.” “그.. 그렇죠?” 마사키는 내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자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의 기획안을 보며 어린 시절에 했던 게임 하나가 떠오른 나는 그에게 한가지 제안을 했다. “대신 마사키씨의 게임은 스케일이 큰 편이니 먼저 아케이드 시장을 노리기로 하죠. 한 가지 조건만 수락해 주신다면 제가 이곳에서 호우지마씨와 마사키씨의 초기 게임 제작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무슨.. 조건으로?” “타이틀 명을 좀 바꾸죠.. 네버다이 솔저라니.. 너무 이름이 직관적이에요.” “그럼 뭐가 좋을까요?” “마사키씨가 남자의 뜨거운 혼을 워낙에 좋아하시니. 흐음, 혼두라(魂斗羅)는 어떨까요? 먼저 성능 제약이 없는 아케이드 판으로 스케일을 크게 키워 만든 뒤에 패밀리용으로 이식을 해보죠.” “혼두라.. 혼두라라.. 어? 그거 괜찮은데요?” 2015년. 어릴 때부터 게임 조금한다 했던 30대라면 모두가 기억할만한 명작. 우리가 어릴 때 흔히 람보와 코만도라 불렀던 전설의 게임 하나인 혼두라의 기획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결국 늦은 밤이 돼서야 회의가 끝나고, 본사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가방을 챙겨 들자. 나를 따라 개발실에 있던 모든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혹시나 또 궁금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요새 기술 자문이 많아 외근이 잦지만, 개발실에 시게루씨도 있고, 최근에 카와타 씨도 민텐도 소속이 되어 어느 정도의 질문은 전화로도 충분히 알려드릴 수 있을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준혁씨 덕분에 새로운 장르의 게임과 기존의 게임까지 두 마리 토끼를 다잡은 느낌이네요.” 팀장인 요리모토씨는 거듭 나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잠시 후 나는 처음에 개발실에서 무시당했던 것과는 다르게 정문까지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폭스 소프트를 떠나게 되었다. & 1986년 가을 무렵 나는 너무나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 날도 회사에 출근 도장만 찍은 나는 토스트 하나를 입에 물고 허겁지겁 달려 나가고 있었다. “야~!! 강군. 오늘은 어디로 가냐!! 또 폭스 소프트인가 거기 가냐?” 지난 한 달간 폭스 소프트에서 내가 할 일은 전부 끝난 상태였다. 일단 호우지마에게는 잠입 액션 장르의 틀에 맞게 시게루씨가 카린의 전설에서 사용했던 탑뷰 방식의 노하우를 전달해 주었고, 그렇게나 스케일을 주장하는 마사키씨에게는 횡 스크롤 스테이지와 종 스크롤 스테이지. 슈팅 스테이지를 포함해 여러 가지 액션을 활용할 수 있게 해두었는데, 아무래도 마사키씨의 머리가 딸려 제작 기간이 좀 길어질 듯해 보였다. “오늘은 피닉스 소프트에 갑니다~!!” “오~ 피닉스!! 드래곤 워리어의 제작사였지.” “네, 맞습니다. 다음 달부터 후속편 2탄의 카트리지 제작에 들어간다고 검수 요청을 해왔는데, 아무래도 콘솔 견인 효과가 있는 메이저급 회사다보니 직접 가서 검수 확인을 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시게씨가 제안해서요.” “그렇지, 그렇지~ 그래야 3편도 우리 패밀리로 내줄테니, 얼굴 도장 찍어서 나쁠 건 없을 거야. 그럼 잘 다녀오게나~” 카마우치 사장은 매달마다 쏟아져 들어오는 게임 제작사들의 로열티에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최근 민텐도 주식회사는 업종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더 이상 완구를 만드는 장난감 회사가 아닌 모든 생산 라인을 패밀리로 바꾸어 게임 회사로 전향한 것이다. 이미 패밀리가 런칭하고 3년이 지난 지금 민텐도의 패밀리는 일본 내에 점유율 30%를 유지하고 있었다. 즉 쉽게 말하면 동네에 뛰어 노는 꼬맹이들 셋 중에 하나는 패밀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너무나 큰 인기에 웃지 못 할 해프닝도 몇 가지 있었는데, 넘쳐나는 수요에 출고 후 일주일이면 몽땅 팔려나가는 패밀리는 지방의 도시에서는 꽤나 구하기 힘든 물건 중에 하나였다. 아이들이 원하는 건 패밀리였지만, 그걸 잘 모르는 어른들이 비교적 구하기 쉬운 NEGA 디스크를 선물하곤 했는데, 그게 도리어 아이의 화만 불러일으키는 역효과를 낳기도 하였다. 그래서 현재 NEGA 디스크는 점점 늘어만 가는 반품 재고로 골머리를 안고 있었다. 하긴 멀리 볼 거 없이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께서도 그러셨지. 어른들 눈에는 둘 다 같은 게임기로 보이셨을 테니까. 그 당시 NEGA 디스크를 선물 받았던 나는 황당함과 서러움에 게임기를 눈앞에 두고 눈물만 뚝뚝 흘렸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민텐도의 패밀리를 사달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부모님께서 사오신 건 국내 대기업이 정식으로 수입한 NEGA 디스크 국내버전. 겜보이였다. 분명 내가 기뻐할 거라는 기대감에 비싼 돈 주고 사오셨을 텐데, 보여드린 게 짜증과 눈물 뿐이라 이제 와서 생각하니 참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와서 3년째. 문득 부모님이 그리워지네.. 잘 지내시려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카마우치 사장에게 인사를 마친 뒤 본사 건물을 나왔다. 피닉스는 도쿄에 회사를 두고 있어 신칸센으로 이동해야했다. 내 차를 끌고 가기엔 운전하느라 피곤하기도 하고, 시간도 오래 걸려 보통 장기출장에는 신칸센을 많이 이용하곤 했다. 경제가 활성화 시기라 그런지 최근에 새로운 게임회사들은 대부분 도쿄에 적을 두고 있었다. 덕분에 교토에 본사를 두고 있는 나는 거의 이틀에 한번 꼴로 도쿄에 출장을 가는 편이었다. 민텐도 본사를 도쿄로 이전하면 편하겠지만, 카마우치 사장의 증조부 때 세워진 민텐도는 1889년에 설립되어 이제 곧 100년을 맞이할 판국이었다. 그런 회사의 사옥을 옮기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지.. 신칸센에 오른 나는 평소와 같이 점심 도시락을 까먹은 뒤 소화나 할 겸 열차 휴게실을 찾았다. 흡연을 즐겨하진 않지만 가끔 식후 연초로 한 대씩 태우곤 했는데, 왠지 모르게 신칸센에 오르면 꼭 담배가 태우고 싶어진단 말이야? 아직 휴대폰이 나온 시기도 아니라, 가만히 앉아서 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최근에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드래곤볼 역시 내용을 다 알고 있으니 재미가 없었다. 나에게 있어 1980년대의 유행과 흥행작은 딱히 신기할게 없었다. ‘부장님은 옷을 굉장히 잘 입으시는 것 같아요.’ 언젠가 본사 여직원 흘리듯 말을 꺼낸 적이 있다. 하긴 그러고보니 미국에 있을 때 엘리스도 비슷한 소리를 했었지.. 내 기준에는 나름 2015년에 즐겨 입던 스타일대로 입었을 뿐인데, 센스가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곤 했다. 80대의 세일즈맨이라면 항상 각이 잡힌 검은 정장과 넥타이 차림이 정석이었는데, 나는 약간 밝은 톤의 세미 정장을 즐겨 입는 터라 어디서나 눈에 띄는 면이었다. 카마우치 사장도 초반에는 다른 직원들과 맞춰 정장을 입으라 지시 했지만, 최근에 외근도 잦아지고, 무엇보다 실적 위주로 사람을 대하는 카마우치 사장은 더 이상 내 옷차림에 대해 태클을 걸지 않았다. 뭐 그렇게 요란하게 입는 편은 아니니까~ 다른 직원들도 미국 지사에서 일하다 와서 그런지 특별 케이스로 인식하는 경향도 있고.. 찰칵. 나는 휴게실 테이블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른 아이할거 없이 모두 양손에 게임 & 워치를 손에 들고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현재 그들이 즐기고 있는 게임은 한 달 전에 발매한 카린의 전설 게임 & 워치 판이었다. 휴대용 겜보이 프로젝트가 무사히 잘 마무리 된다면 아마도 카린의 전설이 게임 & 워치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겠지.. 그때 문득 내 머릿속에 게임가게 어르신에게 받았던 게임 & 워치가 떠올랐다. 만일을 대비해 항상 들고 다니긴 하지만, 거의 플레이 해본 적이 없었다. 굳이 ‘회사원 게임’을 플레이 하지 않더라도 통장엔 이미 죽을 때까지 펑펑 써도 될 만큼 돈이 있었고, 회사내 중역들과 친분이 있다 보니 자연스레 인맥도 확장되어가고 있어 딱히 네비게이터 역할의 게임 & 워치를 플레이할 이유가 없었다. ‘심심한데 간만에 한번 플레이 해볼까?’ 카린의 전설 게임 & 워치와 색상만 다를 뿐이니 크게 눈에 띄진 않겠지.. 행여 들킨다 해도 민텐도 시험 기기라고 둘러대면 그만이다. 그렇게 돈보다는 시간이나 때울 겸 게임 & 워치를 펼쳐든 나는 잠시 후. 게임 화면을 바라본 채 멍한 표정으로 굳어 버렸다. ‘게임이.. 바뀌었어..’ 일본으로 건너오기 전 터치스크린과 3D화면 등 최신 트렌드로 모습이 바뀐 게임 & 워치의 화면에는 ‘스폰서 게임’ 이라는 문구가 떠올라 있었다. -게임을 시작하시려면 스타트 버튼을 눌러주세요.- ──────────────────────────────────── ──────────────────────────────────── EP. 8 : 스폰서 게임 (4) -게임을 시작하시려면 스타트 버튼을 눌러주세요.- 스폰서 게임? 전에 내가 즐겼던 회사원 게임과는 완전히 형태의 게임인데? 묘한 기대감 속에 스타트 버튼을 누르자 간단한 프롤로그가 시작됐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이 게임 속의 주인공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프롤로그 내용은 미래에서 타임슬립 한 주인공이 넘쳐나는 자금으로 위기에 빠진 게임 회사의 경영을 지원한다는 줄거리였다. 재미있는 것은 이곳에 등장하는 모든 게임 회사가 실제로 존재하며 그것을 클릭할 시에 회사의 경영 상태와 자본금. 그리고 현재 개발 중인 게임 타이틀이 쓰여 있었다. 시험 삼아 현재 내가 향하고 있는 피닉스 사를 클릭하자 드래곤 워리어 2 발매를 위한 마지막 검토 중이라는 표시가 떠올랐다. 회사 재정 상태도 매우 안정적이고, 직원들의 사기도 높다. 역시 메이저급 게임 개발사라 이건가? 직원들의 충성도도 높아 이직 권유는 거의 불가능 하다는 메시지가 떠오르는 걸 보니 외교적인 사안으로 써먹을 만하겠는데? 폭스 소프트의 풀 메탈의 개발 진척도는 52%에 달하고 있는 걸 보니 그럭저럭 순항중이군.. 호우지마씨가 메인 디렉터로 발탁 되고 나서 확실히 개발속도가 빨라졌어.. 나는 다음으로 최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트라이앵글 소프트를 살폈다. -카와구치 디렉터의 킹즈 퀘스트. 5200개 판매 중. 현재 개발 중인 게임 없음.- 5200개면 완전 적자군.. 트라이앵글 사의 희대의 명작인 파이널 프론티어를 만들기도 전인데, 출시한 게임들의 연이은 판매부진으로 회사 재정이 많이 힘든 상태였다. 하지만 이렇게 회사 재정 상태를 살펴보니 차후에 출시될 파이널 프론티어에 마지막이라는 의미의 ‘FINAL’를 붙인 절박한 심정이 이해가 가는구나.. 내가 아는 미래에서 파이널 프론티어는 시대를 주도하는 호화로운 그래픽의 선두주자였다. 센소니의 기어 스테이션에서 발매했던 파이널 프론티어 7의 테그 데모를 보는 순간. 심장이 얼어버릴 것만 같았지.. 모든 것에 ‘원조’란 참으로 대단한 효과를 지닌다. 최초로 패밀리용 RPG 게임을 만든 ‘드래곤 워리어’는 이미 국민 게임이라는 칭호를 손에 넣고 현재 2탄의 카트리지 생산을 앞두고 있다. 1편에서는 용사 혼자 공주를 구했다면 이번 2탄에서는 파티 시스템이 도입 되어 동료들과 함께 마왕을 무찌르는 여정을 떠나게 되었다. 또한 전편과 시나리오가 이어져 이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전작에서 마왕을 무찌른 용사의 손자 손녀라니.. 1편을 즐겁게 플레이한 수많은 유저들이 2편의 발매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상태로 라면 출시가 되어도 드래곤 워리어2의 파급에 휩쓸려 묻혀버리겠군. 사실 지금이라도 내가 가서 그들을 도울 수도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야.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무릇 바닥을 쳐본 자만이 재도약의 기회를 얻는다고 하던가? 누군가의 만화처럼 추진력을 위해 무릎을 꿇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튼 스폰서 게임이라.. 업계 정보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니.. 이거 참 재밌는데? 어차피 내게 필요한 건 이제 돈이 아니라 사람이니까.. & 그날 오후 피닉스 사에 도착한 나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드래곤 워리어2 개발 파트를 찾았다. “안녕하세요. 민텐도 직원 강준혁이라고 합니다.” “아~ 준혁씨!! 반가워요~” 폭스 코리아와는 다르게 피닉스의 개발실은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이미 개발도 모두 끝난 상태라 카트리지 제작을 목전에 두고 있어서 그런지 사무실 분위기도 매우 한가했다. “이렇게 직접 검수를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수고가 덜었네요.” “아닙니다. 드래곤 워리어 같은 경우는 저희 패밀리 매출의 견인 효과까지 겸하는 타이틀이다 보니 카마우치 사장님께서 흔쾌히 출장 검수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민텐도에서 저희 회사를 신경 써주시는 게 느껴지는 군요.” “물론이죠. 저희 역시 이번 드래곤 워리어2에 거는 기대가 큽니다. 이번에도 전국 게임 매장에 유저들이 줄을 서겠지요?” “그러고 보니 카린의 전설 때는 정말 진풍경이었습니다. 한정판 마케팅은 강준혁씨 아이디어라고 들었습니다만, 젊은 나이에 정말 대단하시네요.” “과찬이십니다.. 하하..” 대체 이놈의 인사치례는 언제까지 할 거냐!! 결국 개발팀과 돌아가며 10분 정도 대화를 하고 나서야 검수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운 타이틀곡과 함께 드래곤 워리어의 로고가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그려졌다. “전작에서도 느꼈지만, 드래곤 워리어는 사운드 부분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시는 듯하네요. 단조로운 비트음이지만 웅장함이 느껴집니다.” “그야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시는 분께 직업 사운드 검수를 받고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카트리지 케이스의 일러스트도 지금 드래곤 볼을 연재중인 토리야마씨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1편을 출시할 때부터 계속 토리야마씨에게 캐릭터 일러스트를 맡기고 있지요. 아직까지는 게임화면에서 미려한 그래픽을 표현하기가 힘드니 최대한 유저들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은 토리야마씨에게 일러스트를 부탁드렸습니다.” 이때만 해도 드래곤 워리어의 게임 그래픽은 매우 단조로운 컬러표현을 기용하고 있었다. 특히 1편의 용사는 필드에서 온통 파란색으로 칠해진 전사였으니까.. 그것은 2에 와서도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마법 표현은 전투화면이 붉은 색과 노란색으로 깜빡거릴 뿐이었고, 전투씬 역시 어두컴컴한 화면에 몬스터만 덩그러니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어릴 때 드래곤 워리어 4를 처음 접해보았을 때 진짜 동화 속을 모험하는 기분이었는데, 아무래도 내 추억 보정이 좀 심했나보다.’ 나는 초기 캐릭터를 이름을 짓는 곳에서 ‘아아아아’를 클릭한 후 재빨리 게임을 시작했다. “준혁씨는 용사의 이름을 짓는 것에 대해 별로 고민을 안 하시는군요.” 용사의 이름이 ‘아아아아’가 된 것에는 너희들이 모르는 슬픈 전설이 있지.. 인터넷이 존재하지 않는 80년대에도 국내에서 드래곤 워리어를 즐기는 유저는 있었다. 흔히 보따리 상인이라고 부르는 업주들이 일본에서 패밀리와 게임 몇 개를 사들고 한국에 돌아와 큰 이윤을 남기고 팔아먹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게임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 부족했을 때. 우리가 게임 내용에 대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게임팩에 그려진 그림이 전부였다. 91년이었나? 불법 복제인 해적판으로 국내에서도 드래곤 볼이 큰 인기를 끌고 있었을 무렵의 어느 날. 동네에 있는 게임 가게를 지나가던 길에 게임팩에 그려진 낯익은 일러스트 한 장이 나를 완전히 사로잡은 기억이 있었다. 딱 보아도 드래곤 볼과 비슷한 느낌의 그림체에 한 눈에 혹한 나는 그 날 밤 흥분과 기대에 잠을 설칠 정도였다. 드래곤 볼 캐릭터가 그려진 그 게임이 과연 어떤 형식의 게임일지 너무나 기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몇날 며칠 어머니를 졸라 겨우 구입한 드래곤 워리어는 나에게 대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때 까지만 해도 RPG 게임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나는 액션 게임 말고는 딱히 할 줄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 당시에는 액션 장르만이 게임의 전부였다. 그게 사람이든 비행기든 자동차든 뭔가 움직여서 적을 부숴야 하는데, 이 게임은 마을을 왔다 갔다 하다가 밖에 나오면 몬스터와 싸우는 게 끝이었다. 그것도 더럽게 어려워 필드 밖으로 조금만 나가면 강한 몬스터에게 당해 금방 게임 오버가 되곤 했다. “뭐 이 따위 게임이 다 있어!!” 그 당시 굉장히 화가 난 나는 그 후로 두 번 다시 드래곤 워리어4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멋진 일러스트에 배신당한 기분이 들어 짜증이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뒤 나는 드래곤 워리어를 들고 다시 게임 가게를 찾았다. “이거 다른 게임으로 교환하고 싶어요..” 동네 PC 조립을 겸하는 게임가게 아저씨는 내가 내민 드래곤 워리어 4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잠깐만 기다려 보거라.” 잠시 후 아저씨는 흑백 프린터기를 이용해 무언가를 출력하기 시작했다. 조용한 게임 가게 안에 시끄러운 프린터 음이 꽤 오랫동안 울렸던 걸로 기억한다. “원래 이만큼 프린터하면 돈을 받아야 하는데, 너에겐 그냥 공짜로 주마. 그 게임은 말이다. 아저씨가 지금까지 해본 패밀리 게임 중 가장 즐겁게 한 게임이란다. 하지만 아직 어린 네가 플레이하기엔 어려운 점이 많았을 거야. 무엇보다 일본어를 모르니까. 하지만 이 공략집을 참고하면서 천천히 다시 해볼래? 그러면 네가 이때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진짜 재밌는 게임이었다는 걸 알게 될 거다.” 아저씨에게 드래곤 워리어4의 공략집 한 뭉텅이를 받아온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패밀리에 드래곤 워리어를 꽂고 전원을 넣어보았다. 굉장히 웅장하고 멋진 타이틀 곡이 흘러 나오고 나는 아저씨가 준 공략집을 대조하며 천천히 게임을 즐겨 보기 시작했다. ──────────────────────────────────── ──────────────────────────────────── EP. 8 : 스폰서 게임 (5) 굉장히 웅장하고 멋진 타이틀곡이 흘러나오고 나는 아저씨가 준 공략집을 대조하며 천천히 게임을 즐겨 보기 시작했다. 먼저 이 게임은 레벨이란 게 존재했다. 즉 무턱대고 마을 근처의 동굴 안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마을 주변에서 약한 몬스터를 잡으며 레벨을 올려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주변 몬스터를 잡는데 익숙해지면 동굴에서도 처음처럼 죽지 않고 버틸 수가 있었다. 레벨이 오를수록 점점 강해지는 캐릭터. 그리고 마을에서 사라진 아이들을 찾아 탑으로 향하는 전사의 이야기에 나는 금세 흠뻑 빠져들었다. 드래곤 워리어 4의 이야기는 그 당시 RPG로서는 굉장히 특이한 옴니버스 식 스토리를 구현하고 있었는데, 1장은 전사 라이안. 2장은 산마리아 왕국의 격투가가 꿈인 공주님의 이야기. 3장은 무기상인 톨네코의 이야기. 4장은 무녀 자매의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 최종장인 5장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나오는 스토리였다. 그중 5장 초반에서 용사를 살리기 위해 여자 친구가 마법을 이용해 용사의 모습으로 변신한 뒤 대신 죽음에 이르는 스토리를 보고는 방에서 혼자 대성통곡을 한 적이 있었다. 그 후로 주인공 마을에 나오는 BGM이 너무나 슬퍼 가끔 게임을 플레이 하다가 폐허가 되어 버린 주인공 마을에 들러 한동안 가만히 있어 보기도 하고, 폐허가 된 공간에서 동료들과 주인공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상상을 해보기도 하였다. 빈약한 그래픽의 시대에는 그렇게 상상력으로 커버하는 소소한 재미가 있었는데.. 아, 잠깐 이야기가 딴 곳으로 빠졌군.. 아무튼 그렇게 일본어 까막눈이었던 시절에 주인공의 이름은 다들 ‘아아아아’로 통일 되었다. 왜냐하면 일어의 첫행 시작이‘아’로 시작했기 때문이지. 어차피 무슨 글인지 읽지도 못하는데, 이름이 뭔 상관이었겠냐 만은.. 그때 개발실 문이 열리며 30대 초반 정도의 남성이 들어왔다. “아이쿠, 안녕들하십니까~” “아~!! 토리야마 선생님!! 오셨군요.” “드래곤 워리어 2의 검수를 여기서 한다고 해서 잠깐 들러 보았습니다.” 음!? 드래곤 볼 작가인 토리야마씨가 왔다고? 나는 재빨리 패드를 탁자에 내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와 눈이 마주친 토리야마씨는 단번에 내가 민텐도에서 나온 직원임을 알아보고 악수를 청해왔다. “아~ 당신이 민텐도에서 나온 직원분이시군요. 성함이..?” “강준혁이라고 합니다. 민텐도 내에서는 신규 콘솔에 관한 부서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젊어 보이시는데, 벌써 한 부서를 담당하는 관리자라니 대단하군요.” “작가님의 드래곤볼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사실 슬램덩크를 더 좋아하지만,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에 낼 필요는 없지. 1986년도에 토리야마씨는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상태였다. 이후로 모든 드래곤 워리어 시리즈의 일러스트를 맡게 되고, 나중에는 직접 캐릭터 검수까지 하게 될 그는 앞으로도 캐릭터 디자이너로서 피닉스사와 인연이 깊었다. 이런 인물도 하나 알아두면 나쁘지 않겠지? 토리야마씨와 악수를 마친 나는 다른 개발자들과 함께 다시 검수작업에 들어갔다. 사실 이미 1편이 대 히트를 친 마당이라 2편의 검수는 하나마나 상관이 없었다. 민텐도의 검수란 이 게임의 버그까지 샅샅이 찾아내는 게 아니라. 이것이 게임으로 플레이할만한 틀을 갖추고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파악이었기 때문이다. “버그는 다 잡으신 거죠?” 그러자 메인 디렉터였던 유우지씨가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카트리지 생산 후 진행 불가 버그 있을 경우 전량 리콜 사태를 맞이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어느 회사든 버그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다. “전작에는 주인공 혼자였는데, 이번 작부터는 파티플레이가 가능 하군요. 덕분에 전투가 쉬워질 줄 알았는데, 적들이 상향 조정 되어 그런지 은근히 긴장감이 넘치네요.” “동료 개개인에도 스토리를 넣어 유대감을 더 높혔죠. 아마 유저들도 좋아할 거라 생각합니다.” 역시 게임 개발자라면 유저를 먼저 생각해야지. 그 점에서 드래곤 워리어의 메인 디렉터 유우지씨의 그런 면에서 굉장히 철저한 기획자였다. “패미통신 리뷰에서도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으니 발매 후 대박 터질 일만 남으셨네요.” “어느 정도 기대는 하고 있지만, 과연 카린의 전설 만큼의 진풍경을 연출 할 수 있을까요. 저도 그 때 현장에 있었는데, 정말 유저들의 반응이 어마어마 하더군요. 특히 한정판으로 내놓았던 500개의 황금 카트리지는 암암리에 2~3만엔에 거래가 되고 있다고 하던데 알고 계세요?” “몇몇 비양심적인 가게 사장들이 제때 물건을 판매 안하고 따로 빼놓은 거겠지요. 그런 매장은 적발과 동시에 저희가 납품을 아예 끊어 버리곤 하죠. 그 어떤 경우라도 유저를 엿 먹이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으니까요.” 토리야마씨와 유우지씨는 내 말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약 2시간 정도의 시스템 검수를 마친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유우지씨는 기대에 찬 눈초리로 나에게 물었다. “이렇게 직접 검수해주시러 온 준혁씨께는 실례 되지만 간단히 소감을 여쭤봐도 될까요?” 이 사람도 아까는 별로 기대 안한다더니, 검수 끝나자마자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 어쩌자는 거야? 나는 잠시 “흐음.. 솔직히 말씀 드려도 되요?” “아, 네. 물론입니다.” “전작에 비해서 딱히 재밌는 점을 모르겠어요.” “네?” “음~ 물론 동료시스템도 좋고, 배를 탈 수 있어서 바다로 나아가는 면도 새롭지만, 1년 동안 준비한 것에 비해 결과물이 풍성하진 않네요.” “아, 그런가요..” “설마 3편에서도 2 주인공의 후손들이 나오진 않겠죠? 드래곤 워리어의 메인 스토리는 마왕을 무찌르는 용사의 이야기가 전부 인지라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흥미가 떨어질 수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냥 드래곤 워리어를 재밌게 즐긴 게이머로서 첨언을 드리자면.. 음 스토리의 진행 방식을 옴니버스로 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요.” “옴니버스 형식..?” “가령.. 모두가 기다린 3편의 이야기는 실은 1보다 훨씬 오래된 이야기.. 용사 전설의 시초와 같은 느낌으로?” “아!! 그것 괜찮네요~!! 비슷한 세계관이지만 마지막 엔딩을 기점으로 다시 1의 스토리가 이어진다!! 기발합니다~!! 아주 좋아요~!! 시게루씨에게 들은 대로 독특한 감각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참고가 되었습니다.” 뭐야? 시게루와 유우지씨가 서로 알고 지내온 사이였구나.. 사실 이번 출장 검수에 대한 최초의 의견도 시게씨의 제안이었다. 다들 바쁜 시기라 내가 간다고 했을 때 묘한 표정을 짓더니만 이런 의미였군.. & 교토로 돌아오는 신칸센에서 나는 옆자리의 남자가 곤히 잠든 틈을 타 게임 & 워치를 열어보았다. 스폰서 게임의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각종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토리야마님과 지인 관계가 생성 되었습니다.- -유우지님과 지인 관계가 생성 되었습니다.- -유우지님의 호감도가 3포인트 올랐습니다. 10포인트 달성 시 교우 관계가 랭크 업 합니다.- 미연시 게임이냐!! 남자한테 호감도가 상승하다니 생각만 해도 닭살이 돋는다. 갑작스런 한기에 온몸을 부르르 떨며 나는 지금까지 내가 만나온 사람들을 차례차례 살펴보았다. 역시나 군페이씨와 시게씨가 친분 관계 중에 제일 높은 랭크를 유지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죄다 남자들 뿐이네..’ 하긴 80년대에 여성 프로듀서가 몇이나 있겠냐만은.. 나는 입맛을 다시며 페이지를 넘기던 중 카마우치 사장의 얼굴에서 페이지를 멈추었다. 그곳에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얼굴 옆에 말풍선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2015년에 스마트폰에서 즐겨 사용했던 카톡의 상태 메시지를 보는 것 같군..’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카마우치 사장의 말풍선을 클릭해보았다. -강준혁은 능력이 뛰어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위험한 녀석이다. 너무 키워줘선 안 되겠어.- ──────────────────────────────────── ──────────────────────────────────── EP. 8 : 스폰서 게임 (6) -강준혁은 능력은 뛰어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위험한 녀석이다. 너무 키워줘선 안 되겠어.- 그렇군.. 이 말풍선은 상대방이 나에게 느끼는 감정을 코멘트화 시킨 건가? 재미있군. 그나저나 아침엔 웃는 얼굴로 보내주더니 속으론 이런 생각을 감추고 있었다니, 역시 속을 알 수 없는 일본인답네.. 나는 게임 & 워치 가방에 넣어 둔 뒤에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었다. 한국인인 내가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그들에게 있어선 그냥 외국인 노동자 중에 한명일 뿐일테지.. 나 역시 그 점은 언제나 가슴에 품고 있었기에 카마우치 사장의 코멘트를 읽어도 그렇게 놀랍진 않았다. 그러나 아직 발톱을 드러낼 순 없지. 조금만 더 참아 보자.. & 우리가 알고 있는 CD라는 매체는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사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1986년에도 CD는 존재했다. 아직 보편화가 안 되어 있을 뿐이지.. 오사카에 위치한 덴덴 타운이라는 전자 상가 거리. 한 레코드점에서 열린 CD 음질의 청음회를 방문한 나와 군페이씨는 밝은 조명아래 무지개 빛으로 빛나는 동그란 디스크를 바라보았다. “허어~ 이게 바로 콤팩트 디스크라 불리우는 물건이로군. 빛깔이 참 곱네~” 어느덧 중년에 접어든 군페이씨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CD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콤팩트 디스크라.. 확실히 LP에 비하면 콤팩트하긴 하지만, 마이크로 SD카드나 USB에 익숙해 있던 나는 그저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사실 별 관심도 없었는데, 군페이씨가 새로운 매체는 될수록 빨리 접하는 게 낫다고 강제로 끌고 오는 바람에 나는 지금 이곳에 서있었다. “아, 네.. 참 신기하네요.” “자네는 이 기적 같은 물건을 보고도 아무런 감흥이 없나? 이런이런 젊은 사람이 감정에 이리 매말라서야. 흠흠~ 아무래도 내가 보충 설명을 해줘야겠군.” 으악!! 공돌이 군페이씨의 제품 설명이 시작됐다!! 낌새를 느낀 나는 서둘러 다른 곳으로 피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 CD라는 물건은 말이지. 다른 말로 광학 디스크라고도 하는데, 기존에 카세트 테이프나 LP 같은 아날로그 방식이 아닌 디지털 방식으로 원음을 기록할 수 있는 새로운 매체지. 덕분에 언제 어디서든 잡음이 섞이지 않은 깨끗한 음질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새로운 오디오 규격이라네. 수명이 무려 100년이라지.. 정말 대단 하지 않나?” ‘100년은 얼어 죽을 부족한 용량 때문에 20년도 못가서 휴대용 저장매체의 등장에 사장될 위기에 처할 텐데.. 하지만 음악 CD로서는 꽤나 수명이 길게 가긴 하겠구나..’ 하지만 군페이 씨의 설명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 물건은 우리 일본의 센소니와 네덜란드 회사 필립스가 공동 개발한 녀석이지. 현재 기존 아날로그 방식의 제품을 밀어내고, 새로운 음반 매체로 부상 중이야. 한 번에 녹음할 수 있는 시간은 총 74분이라네.” “음.. 좀 애매하네요. 60분도 아니고 왜 하필 74분이죠?” 그러자 군페이씨는 안경을 치켜 올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뭐지..? 그냥 한번 물어봤을 뿐인데, 괜히 물어본듯한 느낌이 든다. “아주~ 좋은 질문이야. 강군. 현재 CD의 규격은 지름 12cm로 나와 있다네. 하지만 최초로 필립스가 제안한 CD의 크기는 11.5cm였다네. 더 콤팩트 해질 수 있었지. 또한 60분을 조금 초과하는 시간이었으니까. 시간도 적당했고 말이야.” “그런데 왜 시간을 늘렸죠?” “그건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 때문이지.” “CD의 용량이 클래식 음악 때문이라구요?” “물론 기존의 60분의 시간으로도 기존에 LP에 수록된 모든 음악을 담을 수 있었지만, 센소니의 부사장이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하나의 디스크에 넣고 싶다고 제안했지.. 그 당시 베토벤 9번 교향곡 중에 가장 긴 연주 시간을 기록하고 있는 건 그 유명한 카라얀의 지휘였고 말이야.” “그래서 카라얀의 연주 시간에 따라 CD의 재생시간이 정해졌다는 말인가요?” “맞아~!!” 흐음.. 이건 나도 몰랐던 사실이군. 안타까운 건 딱히 몰라도 상관없는 정보인 게 문제지만.. 아무튼 그래서 청음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죄다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었구나.. 군페이씨는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잠시 음악을 들어보고는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세상이 점점 좋아지는군.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변해가는 느낌이랄까? 지금은 오디오 매체지만, 저장 방식을 변환하면 데이터를 인식 시킬수 있는 장치로도 사용이 가능하다고 하더군. 용량이 무려 650MB 라니 대단하지 않은가!?” “하하.. 네. 650메가 용량이라니, 엄청나네요..” “강군이라면 굉장히 놀라워할 줄 알았는데, 반응이 별로군. 실망이야..” 그거야 당신 같은 공돌이에게나 혁명이지.. 2015년에는 테라바이트를 이용한다고 이 사람아.. 나는 좌우로 고개를 내저으며 군페이씨에게 식사나 하자고 청했다. 그때 CD를 유심히 살펴보던 군페이씨가 중얼거렸다. “이 매체로 게임 카트리지를 대신해볼까?”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겠지만, 나는 군페이씨의 말에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내려앉았다. CD를 사용하는 건 적어도 2세대가 더 지나야 보편화 될 텐데, 처음 디스크를 보자마자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다니.. 그러나 군페이씨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용량의 낭비가 심하군. 거기다 기기 단가도 높아질 테고..” “그, 그러네요.. 하하..” 패밀리의 게임은 고작해야 4MB정도.. 아직 스케일이 큰 게임을 만들기에는 콘솔의 성능이 따라주지 않는 시대였다. 만약에.. 군페이씨의 지금 이 생각이 9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면, 민텐도는 절대 쓰러뜨릴 수 없는 괴물 같은 기업이 되어버렸겠지.. &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흘러 카트리지 생산이 끝난 드래곤 워리어 2의 발매일. 나는 시게씨와 함께 민텐도를 대표해 발표 회장을 찾았다. 도쿄의 행사장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로 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 광경이 카린의 전설이 발매 되었을 때와 꽤나 유사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다시 도쿄를 찾아오니 감회가 새로운데?” 최근에 개발 업무를 쉬고 있는 시게씨는 길게 늘어선 행렬을 바라보며 우수에 젖어 있었다. 아무래도 카린의 전설이 발매 되었을 때를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잠시 후 시게씨와 함께 행사장에 들어서자 인터뷰 중이던 유우지씨가 반가운 얼굴로 달려 나왔다. “준혁씨와 시게루씨가 함께 와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행사장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니 역시 드래곤 워리어가 국민 RPG게임이란 걸 실감하겠네요.” “시게루씨의 카린의 전설에 비하면야 아직 멀었죠.. 하하” 또 나왔다!! 이놈의 끝도 없는 덕담 인사!! 가만히 있다간 또 10분간 저 인사를 계속 들어야하기에 나는 적정선에서 먼저 치고 들어갔다. “초도 물량은 어느 정도로 잡으셨나요?” “에.. 전작이 약 150만개 정도 팔려 나갔으니까, 50만개 정도로 뽑았습니다. 일주일 동안 반응을 지켜보고 카트리지 추가 생산을 하려구요. 소프트 가격은 전작과 동일하게 5,500엔으로 했습니다.” 민텐도에 로열티를 지불해야하는 서드 파티의 작품들은 민텐도에서 나오는 게임 보다 가격이 높게 설정 되있는 편이었다. 최근에 카마우치 사장이 민텐도 카트리지의 로열티를 올리는 바람에 다른 회사들의 소프트 가격이 조금 올라간 편인데, 피닉스는 가격을 그대로 유지했구나.. “드래곤 워리어 정도면 5,900엔 정도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가격을 올리지 않아서 놀랐어요.” “솔직히 회사 내부에선 가격을 조금 올리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전 편을 즐겨주신 유저들에게 감사한 마음도 있고 해서 힘들게 결정했습니다.” “음.. 그렇군요. 좋은 결정이라 생각합니다.” 잠시 후. 드래곤 워리어의 웅장한 타이틀 음악과 동시에 행사장이 오픈하자, 밖에 줄지어 있던 사람들이 카운터로 사람들이 줄지어 몰려오기 시작했다. “여러분 순서를 지켜주세요~!! 4군데의 카운터에 한 줄씩 서주시기 바랍니다~!!” 대기표와 게임 타이틀을 교환하고 계산을 마친 사람들은 어서 빨리 플레이 하고 싶은지 뒤도 안돌아 보고 행사장을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저 마음 충분히 이해하지..’ 카운터 뒤에 있던 나는 빙긋 웃으며 드래곤 워리어 카트리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토리야마씨의 일러스트가 그려진 종이 케이스 안에는 간단한 메뉴얼이 들어있고,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고정대 안에는 검은색 카트리지가 곱게 박혀 있었다. “저도 하나 계산해주세요.” “아, 준혁씨도 구입해주시는 겁니까?” “저도 이 게임 팬이라서요. 게임을 즐길 여유는 없지만, 그래도 사두려구요.” “감사합니다~!!” 기분 좋게 계산을 마치고 행사장을 둘러보던 중 묘한 시선을 느껴 고개를 돌리니 행사장 바깥쪽에 한 남자가 매장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깡마른 체형에 콧수염이 인상 깊던 그 남자는 드래곤 워리어 행사장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곧장 발걸음을 돌렸다. “쳇..” “음..?” 저 남자 약간 낯이 익은데.. 설마!? 파이널 프론티어의 디렉터 카와구치 히로노부!? 나는 행사장과 멀어지는 남자를 잡기 위해 재빨리 달려 나왔다. ──────────────────────────────────── ──────────────────────────────────── EP. 9 : 볼 품 없는 회사 (1) “카와구치씨!!” 역시나 이름을 외치자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과 함께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트라이앵글 사의 카와구치 히로노부씨 맞죠!?” “절 아세요?” “킹즈 퀘스트의 디렉터 분 아닌가요?” “마, 맞긴 한데.. 어떻게 절..?” “저는 민텐도 직원 강준혁이라고 합니다. 전에 패미통신에 실린 디렉터 소개 코너를 봤어요.” “아, 그렇군요..” 그제서야 카와구치씨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에 대한 경계를 풀며 입을 열었다. “역시 잘나가는 제작사의 출시 행사에는 민텐도 직원도 직접 나와 축하해주는 군요.” “아, 뭐 그야 드래곤 워리어의 파급력이 워낙에 크니까요. 하하~” “그에 비해 제가 만든 킹즈 퀘스트는 이제 겨우 6천개 정도가 나갔는데, 민텐도에서 서드 파티의 로열티를 올리는 바람에 완전히 적자를 보았죠.” “아, 그래요?” “아~ 그래요?? 뭡니까. 그 불쾌한 대답은 지금 저를 놀리는 겁니까?”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헌데 그 로열티를 제가 올린 건 아니잖아요? 솔직히 저한테 화를 내실 일이 아닌 것 같은데?” “크윽..” 카와구치씨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는 게 억울한지, 신음을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사실 최근에 카마우치 사장의 횡포가 점점 심해지는 추세긴 하다. 멋대로 카트리지 생산 단가를 높인 것도 모자라 생산 수량까지 멋대로 상향하다보니, 최근에 게임 회사는 게임이 뜰지 안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 초도 수량 1만개를 찍어내야만 했다. 다시 말해 카와구치씨가 만든 킹즈 퀘스트가 발매 3개월이 지나도록 6천개 정도가 판매된 거라면 더 이상 팔리긴 어렵다. 지금도 새로운 신작이 쏟아져 나온 마당에 별다른 인기를 끌지 못하는 게임은 금새 잊혀지기 마련이니까.. 트라이앵글은 나머지 4천개의 부진 재고를 떠안고 적자 폭탄을 맞았겠지.. 아타리 쇼크를 잊기 위해 양질의 소프트를 제공하는 건 좋지만, 민텐도의 독점 시장은 게임 회사에게는 별다른 이득을 얻기 힘든 구조가 되어 있었다. “트라이앵글 사의 사정이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이군요?” “원래 초도수량은 2천개로 잡고 팔리는 것에 봐서 더 늘리려고 했지만, 민텐도에서 받아주질 않더군요. 덕분에 우리 회사는 지금 망하기 일보직전입니다.” “그 정도인가요? 이런.. 혹시 그럼 현재 개발 중인 게임은 없습니까?” “하나 생각해둔 게 있긴 한데.. 본사에서 게임 사업을 완전히 접으려는 추세라..” 뭐라고!? 안 돼!! 당신이 파이널 프론티어를 만들어야 내 계획이 제대로 실행 될 수 있다고!! 카와구치 씨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딱 한 번만.. 마지막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게임이 있었는데..” “마지막이라.. 어떤 장르를 생각해고 계시죠?” “일단은 RPG입니다. 사실 오늘 드래곤 워리어를 구입해 참고해볼까 했는데, 행사 오픈과 동시에 어마어마하게 팔려나가는 드래곤 워리어를 보니.. 솔직히 기가 질려 버렸어요. 새로운 게임을 만든다 해도 이미 국민 게임이 되어버린 드래곤 워리어를 이길 수 있을까. 의문이 들더군요.” “무리에요. 카와구치씨가 지금 어떤 게임을 만든다 해도 ‘현재’ 유우지씨의 드래곤 워리어 시리즈를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저긴 이미 3편의 제작이 들어갔거든요.” “크윽.. 그 말은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게임마저 반드시 드래곤 워리어에 패배 할 거라는 이야기로 들리는군요.” “네, 맞아요. 그만큼 ‘현재’ 일본에서 파급력이 가장 큰 RPG게임이니까요. 하지만 아직 2등석은 비어 있습니다. 우선은 거기부터 노려보는 게 어때요?” 나는 내손에 들려있던 쇼핑백을 카와구치씨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뭡니까..?” “방금 전 행사장에서 구입한 드래곤 워리어2입니다.” “이걸 왜 저한테..?” “카와구치씨가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시나본데, 저는 분명 ‘현재’로서 드래곤 워리어를 이길 수 없다고 했지. 앞으로도 이길 수 없을 거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적이 만든 게임이 얼마나 훌륭한지. 배울 점은 배우셔야죠.” “됐습니다. 어차피 차기 작품의 개발 승인도 나지 않을 텐데요..” “그 부분도 제가 대표님을 만나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그러니 일단 쉬시는 동안 플레이 해보세요. 아~ 그리고 이거 클리어 하시면 반납하셔야 되요. 저도 오늘 사서 아직 플레이 안 해봤으니까.”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카와구치씨에게 억지로 쇼핑백을 들려주고는 다시 행사장으로 향했다. & 며칠 후. 나는 도쿄에 있는 트라이앵글 사를 찾았다. 주소지 하나로 겨우겨우 찾아간 트라이앵글은 한눈에 보기에도 허름한 4층 건물의 2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1층에 붙어 있는 낡은 전단지에는 사원모집 공고가 붙어 있었는데, 무려 시급이 1500엔에 해당했다. 평균 도쿄의 아르바이트 시급이 480엔에서 500엔인데 반해 3배에 달하는 파격적인 시급에 나는 깜빡 놀란 나는 다시 한 번 건물을 올려다보며 중얼 거렸다. ‘아무리 봐도 시급을 1500엔이나 줄만한 회사로 보이진 않은데..’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 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2층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나를 반겨준 것은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는 골판지 박스들이었다. ‘설마.. 이것들은?’ 불길한 예감에 옆에 있는 박스를 살짝 열어 보니 게임 타이틀이 가득 담겨 있었다. ‘팔리지 않고 회수된 타이틀 들이구나.. 세상에 뭐가 이리 많아?’ 나는 박스들 사이로 보이는 작은 사무실 문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몇 개의 박스를 옮기며 틈을 비집고 사무실 앞에 선 나는 잠시 옷차림을 정리한 뒤 노크를 해보았다. “들어오세요.” 끼익.. 경첩에 기름칠도 하지 않았는지 기분 나쁜 소리가 문틈에서 세어 나오고, 사무실 안으로 한걸음 들어 선 나는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는 상자들에 또 한 번 기겁하게 되었다. “누구세요?” 그렇게 물어볼 거면 출입구에 상자들 좀 치워두지 그랬어!? 나는 다시 한 번 상자들 틈을 가로지르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아, 그게 사장님 좀 뵈러 왔는데요.” 그러자 안쪽에 앉아 있던 40대정도의 남자가 얼굴에 화색을 띄며 대답했다. “아~ 오늘 오기로 했던 면접생이로군. 이쪽으로 와요.” 면접생? 이건 뭔 개소리야!? 하지만 상자 틈 사이에 끼어 버린 나는 미쳐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아, 아니 그게..” “사무실이 좀 복잡하죠? 곧 정리 될 테니까, 안심하고 이리와요.” 그게 아니라니까 이 사람아~!!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되도 않는 트라이앵글 사무실 안에서 사장인 쿠도씨와 마주 앉아 면접을 치르고 있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면접생인 척해서 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 좀 해볼까? ──────────────────────────────────── ──────────────────────────────────── EP. 9 : 볼 품 없는 회사 (2) “반갑습니다. 저는 트라이앵글 소프트의 사장을 맡고 있는 쿠도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강준혁이라고 한국인 유학생입니다.” “한국인?” “네, 그런데요? 뭔가 문제라도?” “아닙니다. 유학생 면접은 저도 처음이라 조금 당황한 것뿐입니다. 일본어를 굉장히 잘하시네요. 이곳에 오래 계셨나요?” “네, 뭐 그럭저럭 3년 정도?” “과연.. 그런데 준혁씨. 프로그래밍은 조금 하실 줄 아십니까? 저희가 뽑고 있는 인력은 패밀리용 게임을 제작할 프로그래머를 모집 중인데..” “물론 가능합니다. 그런데 전단지에서 보았던 시급 1500엔이 사실 인가요?” 그러자 쿠도씨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흠~ 역시 뭔가 꼼수를 숨기고 있나보군. “아.. 네, 하하 시급 1500엔 말이군요.” “다른 곳보다 월등히 시급이 높던데..?” “물론 가능합니다. 한 가지 조건만 충족 한다면요.” “조건이요?” “준혁씨가 만든 게임이 5만개 이상 팔려 나갈 때 인센티브 지급으로 충분이 1500엔. 아니, 그 이상의 시급을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뭐..라고?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일단 게임을 만들어서 팔아본 후에 수익금을 분배시켜주겠다는 건가? 나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만약 5000개도 안 팔린다면요?” “그럴 경우엔 급여 지급이 조금 힘이 드는데.. 준혁씨는 자신이 만든 게임에 자신이 없나 보군요?” 이거 봐라? 살짝 속을 긁어서 어떻게든 꼬드겨 보겠다는 거냐? “그럼 인센티브를 제외 하고 기본 시급은 얼마입니까?” “280엔입니다.” 지랄하고 앉아있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주무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면접 자리에서 이런 태도는 굉장히 예의 없는 태도이지만, 내가 진짜 면접 보러 온 것도 아니고, 회사 상태 좀 보러 온 것뿐인데 이건 사장 마인드부터 완전 썩어 문드러졌네.. “저기 쿠도씨.. 사실 전 면접 보러온 사람이 아닙니다.” “네? 그럼..?” 나는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쿠도씨에게 건네주며 다시 인사를 드렸다. “민텐도 차세대 콘솔 개발 부서를 맡고 있는 강준혁이라고 합니다.” “미.. 민텐도 직원!?” “제가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쿠도 사장님를 만나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왔는데, 본의 아니게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네요.” “아니, 민텐도 직원분이 왜 이곳에..?” 나는 대답 대신 사무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상자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 이 상자들은 트라이앵글 소프트에서 개발한 저희 패밀리 게임들입니까?” “네.. 맞습니다. 아직 흥행작은 없지만, 벌써 패밀리로 4번째 타이틀인 킹즈 퀘스트까지 발매했지요.” 타이틀을 4개나 만들고 흥행작이 없으니, 이렇게 재고를 떠안고 있는 거겠지.. 그런데 어째서 게임 개발 사무실에 사장 혼자 달랑 있는 걸까? “그런데 다른 직원 분은 없나요? 평일인데 왜 사장님 혼자 계시는지?” “원래라면 킹즈 퀘스트를 만든 카와구치라는 기획자겸 프로그래머가 있었지만, 최근에 출근을 안 하고 있네요.” “왜죠?” “그게, 킹즈 퀘스트가 생각보다 팔리지가 않아, 급여가 조금 밀려 있는 상태라..” 첩첩산중이군. 답이 안보이네.. “그런 상황인데, 아르바이트를 또 뽑으신다구요?” “일단은 게임을 만들어야 수익이 생길 테니까요. 아니 그런데 정말 무슨 일로 저희 회사를 찾아오신 겁니까?”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쿠도 사장에게 내가 찾아온 것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제가 오늘 이곳을 찾은 이유는 사장님을 뵙기 위해서 입니다.” “저를요?” “현재 트라이앵글 소프트의 재정 상태가 좋지 않은 듯해서요. 저희 패밀리 타이틀을 4개나 제작해 주셨지만, 히트작이 없으니 기술 자문을 조금 해드리려고 찾아와 보았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하지만 제가 게임 개발 쪽은 문외한이라 기술 자문을 얻기에는 좀.. 이럴 때 카와구치 녀석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 말은 게임 개발에 대해 전혀 모르신다는 말씀이세요? 그런데 소프트 회사의 사장님이란 말입니까?” “하하, 민텐도의 카마우치 사장님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그저 게임 소프트를 만들 수 있는 인재를 모아 개발비만 대고 있는 거죠.” 이 사람 완전 마인드가 도둑놈 심보인데? 그러니까 지는 가만히 앉아서 직원들이 게임하나 만들면 카트리지 제작비용만 대준다는 거 아냐?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게임 시장이 그리 호락호락해 보였나? “지금 쿠도 사장님이 말씀하신 게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알고 계십니까?” “네..? 아니 그러니까 그런 건 카마우치 사장 역시 비슷하게..” “쿠도 사장님은 돈이 많으신가 봐요? 적어도 한 회사의 대표를 맡고 있다면 아래 직원들이 만드는 게임이 시장성이 있는지 없는지 검토는 해보셔야죠. 지금 사무실 곳곳에 꾸역 꾸역 쌓여 있는 카트리지들 보면 답답하지 않으십니까?” “게임 사업이라는 게 한방에 대박이 터질 수도 있으니까요. 하나만 터져주면 지금까지 손해 봤던 것들 전부 메우고도 남지 않겠어요? 피닉스 사의 드래곤 워리어처럼.” 맙소사.. 게임 개발이 무슨 전철역 앞에 빠칭코도 아니고 터질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저 자세는 대체 뭐냐? 더 이상 이야기 했다가는 나까지 머리가 이상해 질 것 같아..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두 눈을 감았다. 이미 이곳에 오기 전 게임 & 워치로 살펴본 결과. 트라이앵글의 재정은 무너질 대로 무너진 상태였기에 나는 허심탄회하게 말을 던졌다. “사장님 제2 금융권에 빚 있으시죠?” “..!?” 정곡을 찔린 건지 쿠도 사장의 안색이 대번에 굳어졌다. 사실 트라이앵글 소프트의 보유 자본은 마지막으로 출시한 킹즈 퀘스트 이전부터 무너져 있었다. 쿠도 사장은 거의 로또 당첨의 심정으로 제 2금융권에서 빚까지 내어 킹즈 퀘스트의 카트리지를 제작 했지만, 결국 흥행에 실패하여 이번에도 재고를 떠안게 된 것이었다. “그걸.. 어떻게?” “사무실에 쌓여 있는 재고만 파악해도 딱 답이 나오는데요? 이런 상태에서 차기작을 제작할 여력이 남아 계신지도 의문입니다.” “그게..” “왜요. 제 2금융권이 막히면 사채라도 쓰시려구요?” “헉..” “사장님. 제가 보기에 그건 정말 아니라고 보는데..” 결국 쿠도 사장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잠시 동안 그를 내버려둔 채 사무실을 살펴보았다. 사무실의 상태를 보면 그 회사의 사풍을 느낄 수 있지.. 거대한 카트리지 생산 공장까지 떠안은 채 수많은 직원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민텐도의 본사. 그리고 비교적 자유로운 가족 같은 분위기의 피닉스 소프트. 군대처럼 직원 하나하나를 감시하는 폭스 소프트 등등 수많은 게임 회사의 풍경이 그려졌다. 그중에 트라이앵글은 내가 둘러본 회사 중 가장 최악을 달리고 있는 부실기업이었다. ‘하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 회사지..’ ──────────────────────────────────── ──────────────────────────────────── EP. 9 : 볼 품 없는 회사 (3) ‘하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 회사지..’ 나는 쿠도 사장의 표정을 잠시 지켜보다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사장님. 그럼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떨까요?” 대화의 주도권은 이제 나에게 완전히 넘어 왔다. 대출 빚에 허덕이며 침울한 표정의 쿠도 사장은 이미 반쯤 포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회사를 저한테 넘기시죠.” “뭐라구요?” “아차피 쿠도 사장님은 더 이상 게임 소프트를 개발할 여력이 없지 않습니까?” “그.. 그래도 회사를 넘긴다는 건 조금..” “이건 어때요? 트라이앵글 소프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채무를 제가 대신 갚아드리지요. 그리고 쿠도 사장님에게 삼천만엔을 더 얹어 드리겠습니다.” “사.. 삼천만엔 씩이나!?” 3천만엔이면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3억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1980대에 3억이면 어마어마한 돈이지. 내가 알고 있기로 현재 트라이앵글이 지고 있는 은행 빚이 2천만엔 정도니까. 약 5천만엔에 회사 하나 꿀꺽하는 셈이지. “하지만 민텐도 직원에다 유학생인 당신에게 그만한 돈이 있나요?” “돈은 있지요. 대신 회사를 차리는 게 유학생 신분으로는 너무 까다로워서요.” “허어..” 사실 1980년대의 일본으로 왔을 때 나는 두 가지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은 바로 나이를 너무 젊게 설정했다는 점. 그리고 이제 갓 일본에 유학을 왔다고 설정한 점이었다. 바로 이 두 가지 요소 때문에 나는 20억엔이라는 돈을 가지고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왜냐고? 첫 번째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일본에 거주하는 기간이 짧아 사업자를 낼 수 없다. 외국인이 일본에서 새로운 기업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최소 5년 이상 일본에 거주해야 하는 사항이 있었고, 관련 업체에 종사 경력이 필요하다. 거기에다 사업 아이템 역시 일본 정부가 승인을 내줄지 말지도 미지수였기에 이제 갓 21살의 한국인 유학생인 나에게 아무리 돈이 많아도 덜렁 사업 승인을 내주지 않을게 뻔했다. ‘어차피 당장 콘솔 사업을 시작한다고 해도 아타리 쇼크를 거친 시기에 한국인이 일본에서 설립한 기기가 성공할 수 있을까? 아무런 준비 없는 시작은 패망의 지름길이지.. 우선은 누구도 태클을 걸수 없을 정도로 커리어를 쌓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군페이씨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를 이용해 우선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게임업계를 일으킬 민텐도에 입사한다. 생각보다 입사 기준이나 공채가 까다롭지 않은 시기여서 그런지 일단 게임 & 워치의 흥행으로 어느 정도 민텐도 내에 입지가 있는 군페이씨와 친해지자, 입사는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또한, 그가 시게루씨를 데려온 건 나에게 있어 커다란 행운으로 작용하였다. 그 둘 덕분에 카마우치 사장에게 어느 정도 신용을 얻게 되었으니까.. 이로써 나는 관련 업체 종사자라는 신분을 얻었고,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였다. 그런데.. 이놈의 카마우치 사장이 뜬금포로 나를 미국으로 날려 보낼 줄은 몰랐다. 결국 미국에서 1년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지만, 그것도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민텐도 내에서 군페이씨와 시게씨에 버금가는 핵심 인물이 되었고, 조금은 방향이 수정되었지만 결국 신형 콘솔 기획까지 하게 되었다. 신형 콘솔 개발 부서는 현재는 기기 스펙 상한선에 대해 시장 조사 중이었는데, 역시나 기존 패밀리를 만들어낸 인력 중에 고급 엔지니어가 선출 되어 나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즉, 가장 핵심 기술을 제대로 빼낼 부서를 내 스스로 만들어 그 자리에 앉아 버린 것이다. 만약 카마우치 사장과 군페이씨 시게씨와 함께 포커를 두고 있다면 내손에 들려 있는 카드는 로열 스트레이트에 버금가는 패를 손에 쥐고 있는 셈이었다. “어때요? 제 제안이 마음에 드십니까? 사장님이라면 그 돈으로 지금과 비슷한 회사를 차릴 수도 있지 않나요?” “조.. 좋습니다. 그 정도 금액이라면 저희 트라이앵글 소프트를 준혁씨에게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런데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 조건이요?” 내 말 한마디에 사색이 되어가는 쿠도 사장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동안 재정 때문에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었나보군. 나는 그를 향해 살짝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서류 작성 후에 어디 해외로 여행 좀 다녀오시겠어요? 음~ 한 1년 정도? 아, 그에 대한 여행 경비 역시 제가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가.. 갑자기 해외는 어째서..?” “카게무샤라고 아시죠? 사실 쿠도 사장님께서 앞으로 1년 정도는 유령 사장으로 등록이 되어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림자 무사. 에도 시대 때 적의 암살을 방지하기 위해 영주와 똑같은 옷차림과 생김새를 가진 가짜 영주를 지칭하는 말이다. 만약에 일본인이 설립한 회사를 양도 받을 경우에는 외국인이라도 상관없다. 단지 일본 내 거주 기간이 3년이 넘으면 돈으로 살 수 있으니까.. & 1987년 1월. 나는 골판지 박스로 가득 차 있던 트라이앵글 소프트의 사무실을 말끔하게 치워냈다. 그리고 새로운 사명을 사무실 앞에 걸어두었다. -펜타곤 소프트- 나는 기존에 트라이앵글이라는 이름에서 점 두 개를 더 찍어 오각형이란 뜻의 펜타곤으로 사명을 바꾸었다. 나는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반듯하게 걸어진 사명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밀린 임금을 지불해 줬으니,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그때 등 뒤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누구신지?” 고개를 돌리니 카와구치씨가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혹시 드래곤 워리어 행사장에서 만났던 민텐도 직원분?” “안녕하세요. 카와구치씨.” “여긴 어떻게..?” “기술 지원을 나왔습니다. 트라이.. 아니지. 펜타곤 소프트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도와드리려 구요.” “쿠도 사장님은 안에 계신가요?” “아~ 사장님은 당분간 해외여행을 떠나신다고 해서.. 실질적으론 카와구치와 저 둘 뿐입니다.” 쿠도 사장은 지난달에 지급한 선금으로 채무를 정리하고, 함께 변호사를 만나 계약 서류를 작성한 뒤 유럽으로 떠났다. “뭐라구요??” “그래서 당분간은 카와구치씨가 이 펜타곤 소프트를 맡게 되셨습니다.” “제가요..?” 카와구치씨는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가볍게 사무실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서자 뒤따라온 카와구치씨는 달라진 내부 인테리어에 혀를 내둘렀다. “여기가 정말 트라이앵글 소프트입니까?” “아뇨. 펜타곤 소프트입니다. 상위 사회를 조장하는 삼각형이 아닌 사장과 사원 모두가 동등한 오각의 틀 안에서 개발자 입장으로 최고의 게임을 만들어 내는 곳이죠. 물론 당분간 이곳을 맡아 주실 분은 메인 디렉터인 카와구치씨입니다.” “쿠도 사장님은 언제 돌아오십니까?” “그게 좀 길어질 듯하네요.. 한 1년? 아니면 그보다 조금 더 걸리려나?” “저는 단지 밀린 급여가 입금 돼서 회사 사정이 조금 나아졌나 찾아왔을 뿐인데..” “기존에 있던 악성 재고는 전부 처분했습니다. 이제 펜타곤으로서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 낼 여력은 충분히 있다고 하더군요. 어때요? 당신이 마지막으로 만들어 보고 있었던 판타지 게임. 이곳에서 한번 만들어 보시는 건 어때요? 저 역시 있는 힘을 다해 도와 드리겠습니다.” “파이널.. 프론티어.” “네?” “새로운 게임의 제목을 파이널 프론티어라고 정했습니다. 게임 기획자로서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실어 보겠습니다.” 파이널 프론티어. 그렇게 게이머라면 누구나 기억할만한 시대의 명작이 그 탄생을 알렸다. & 그 후로 나는 카와구치와 함께 파이널 프론티어의 제작을 서둘렀다. 물론 도쿄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기에 매일 들를 순 없었지만, 적어도 도쿄에 출장을 올 때면 꼭 한 번은 들렀다. 카와구치씨는 내가 빌려주었던 드래곤 워리어를 플레이 후 나름 돌파구를 찾은 모양이었다. 그 당시 게임 제작사는 BGM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카와구치씨는 게임의 재미를 배가시키기 위해서 극적인 연출에 어울리는 BGM이 필수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게임 타이틀을 키자마자 웅장한 대서사시 느낌이 나는 드래곤 워리어의 BGM은 마치 유저에게 모험을 떠날 준비가 되었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필드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역시 실제로 동료들과 모험을 떠나는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거기에서 영감을 카와구치씨는 아예 게임 음악을 전문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신인 작곡가를 회사에 입사 시켰는데, 황당하게도 그가 뽑은 작곡가는 클래식. 그중에서도 피아노를 전공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토리야마 아키라라는 일러스트 작가에 맞서 우리에겐 ‘독수리 오형제’로 유명한 타츠노코 프로덕션의 아마노 요시타카의 그림을 기용했다. “파티 구성을 보니 카와구치가 노리는 연령대가 감이 오네요.” 파이널 프론티어의 기획서를 검토하던 내가 카와구치씨를 바라보며 살짝 웃어보였다. “드래곤 워리어에 시비 거는 게 너무 티 나나요?” “뭐 나쁘지 않은 작전입니다. 드래곤 워리어가 아이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단순한 스토리라면, 파이널 프론티어의 연령대는 그보다 조금 더 높은 중고생부터 어른들의 취향이군요.” “바로 맞았습니다. 전투 씬은 적과 마주해 싸우는 느낌으로 캐릭터와 몬스터를 한 화면에 등장 시켜봤는데 어떤가요? 얼마 전 NFL (미식축구) 을 보는데, 쿼터백에게 공을 넘기기 전에 마주보는 선수들의 긴장감이 어마어마하더군요.” “긴장감이라.. 단순히 마주보기만 해서 전투에 긴장감이 극대화 되진 않을 텐데..” “그래서 이런 식으로 전투를 꾸며 보았습니다.” 카와구치씨가 나에게 보여준 몬스터와의 전투는 엑티브 배틀 시스템을 차용하고 있었다. 몬스터와 플레이어 캐릭터 간에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게이지를 두고, 그 게이지가 차오르는 순서에 따라 몬스터와 플레이어가 번갈아 공격하는 전투 방식은 앞으로 파이널 프론티어의 근간을 이룰 획기적인 전투 방식이었다. “그런데 준혁씨. 전부터 궁금했는데, 게임 기획과 코딩에 대해 엄청 독특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덕분에 파이널 프론티어의 개발이 굉장히 순조로웠습니다.” “그래요?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이정도 실력이라면 민텐도의 시게루씨와도 견줄만한 센스인데, 어째서 게임 개발은 하지 않으시나요?” “음.. 실은 취미 삼아 하나 만들고 있긴 해요.” “취미삼아 게임을? 대체 어떤 형식의 게임입니까?” “아직은 비밀이라. 말씀 드리기 곤란하네요. 하하” 나는 카와구치씨를 향해 웃어 보이며 대답을 피했다. 작년 초 미국에서 돌아오고 나서 조금씩 만들어 왔던 게임이 곧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이 게임을 민텐도 이름으로 낼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 ──────────────────────────────────── EP. 10 : 기묘한 게임 (1) & 1987년의 어느 봄 날.. 파이널 프론티어라는 게임이 소리 소문 없이 출시되었다. 크리스탈의 가호를 받아 어둠을 물리치는 전사에 대한 이야기는 발매 초기엔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게임 발매 후 1주일 동안 파이널 프론티어는 야마노 요시타카의 일러스트에 힘입어 약 3천개 정도가 팔려 나갔다. 물론 전작인 킹즈 퀘스트의 판매량에 비하면 만족할 만한 성과였지만, 카와구치씨의 마음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역시 디렉터로서 제 자질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침울한 목소리가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나 역시 본사에서 일이 바빠 최근에 도쿄 출장을 자주 가는 편은 아니었기에 지금 나는 퇴근 후 기숙사에서 카와구치씨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이제 고작 일주일 지났는데, 너무 그렇게 침울해 하실 필요는 없다고 봐요. 이번 달에 출간 될 패미통신의 리뷰도 있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그래도 제가 준비했던 마지막 게임을 끝까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준혁씨. 정말로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그 동안 출시 준비로 고생하셨는데, 며칠 마음 비우고 푹 쉬세요.” “안 그래도 바다낚시나 며칠 다녀올까 생각중입니다.”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먼 바다에 나갔다 돌아오면 좋은 소식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정말 그랬으면 소원이 없겠네요. 그럼 다녀와서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카와구치씨와 연락을 끊은 나는 곧바로 패미통신 기자인 준페이에게 연락을 넣었다. 이전에 카린의 전설 황금 카트리지에 대한 정보를 미리 언질해 준 덕에 지금에 와서는 나와 꽤나 가까운 친구 중에 하나였다. 인터넷이 없는 시기에 유일한 게임 정보는 오직 잡지사를 통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게임의 마케팅 역시 마찬가지 방식을 통해야만 했다. 잠시 후. 한 남성의 목소리와 함께 연신 타자를 쳐대는 소리가 수화기 넘어도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패미통신의 이시모토 준페이입니다.” “준페이냐? 아직 퇴근 안했네?” 나와 동갑인 준페이는 항상 무언가에 쫓기 듯 말을 빨리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 덕분에 준페이의 말은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잘 못 알아듣는 경우가 허다했다. “마감 날짜 때문에 죽겠다 죽겠어. 해야 할 게임은 산더미인데, 이걸 언제 다 해보고 리뷰기사를 써야할지 돌아버리겠다.” “많이 바쁘구나, 혹시 10일 전쯤에 출시한 파이널 프론티어 리뷰 점수 나왔어?” “파이널 프론티어? 글쎄.. 나만 리뷰 기사를 쓰는 게 아니니까. 아마 다른 사람이 해보지 않았을까?” “해보지 않았을까? 라니.. 무슨 대답이 그래?” “너도 알다시피 요즘 패밀리로 나오는 게임이 한 두 개냐? 내가 지금 몸이 3개라도 모자라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정도라니까?” “고양이가 썼든 강아지가 썼든 아무튼 파이널 프론티어 리뷰 작성이 들어갔는지 좀 알아봐줘.” “지금?” “응. 지금.” “야야, 나 좀 봐줘라~ 응? 나 지금 이틀째 집에도 못 들어갔단 말야~” “저런, 저런.. 그러니 어서 확인 좀 해주고, 집에 들어가 쉬어~” “독한 새끼.” “칭찬 고맙다.” 곧 이어 준페이가 다른 직원들에게 파이널 프론티어 리뷰를 작성한 사람이 있냐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아니. 아직 쓴사람이 없다는데? 이번에 출시된 게임이 많아서 파이널 프론티어 리뷰는 다음 달로 미뤄야겠다.” “뭐!? 야 방금 나온 최신 게임을 다음 달 리뷰로 밀어버리면 그게 무슨 게임 잡지야?” “방금 나온 최신 게임이 한 두 개여야 말이지. 나야 리뷰어지만 게임 공략 팀 애들은 거의 반 시체 상태나 다름없어. 쟤네 2주 동안 집에도 못 들어가고 게임만 하고 있다니까?” “그럼 나를 봐서 네가 파이널 프론티어 리뷰 좀 써줘라. 그리고 어떻게든 이번 달 최신호에 좀 실어 봐.” “으잉? 뭐라구!?” “너 전에 카린의 전설 한정판 기사 대박 터져서 나한테 빚 하나졌지? 그거 갚는다고 생각해.” “준혁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부탁한다. 준페이. 친구 잖냐~ 응?” “아~ 진짜 오늘은 집에 좀 가려고 했더니만..” “그래도 플레이 해 봐. 내가 추천 하는 녀석이니 재밌을 거야.” “네 말이니까 바로 해보긴 할텐데, 너 쓰레기 게임이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마감 끝나면 좋은데 가서 술 한 잔 살테니 힘 좀 써봐~!!” “조.. 좋은데? 그래 알았어. 너 그 약속 꼭 지켜라~!!” “알았다. 인마~ 수고해.” 그로부터 1주일이 지난 뒤 나는 오사카의 한 대형 서점에 들렀다. 잡지 코너에는 교복을 입은 남학생들이 줄지어 서서 패미통신을 읽고 있었다. “와~ 이번에도 신작이 엄청 많이 나왔네. 용돈도 다 떨어졌는데, 뭘 사지?” “오래할 수 있는 거 사. RPG 같은 거~” “안 그래도 드래곤 워리어 2 지난주에 다 깼는데, 확실히 재미는 있는데.. 스토리가 좀 유치해.. 새로 나온 것들 중에 할만한 게 있으려나?” 그러자 옆에서 리뷰 기사를 읽고 있던 한 학생이 대답했다. “파이널 프론티어.. 이거 괜찮을 거 같은데? RPG 전문 준페이 기자가 40점 만점에 36점 줬어.” “진짜? 드래곤 워리어 2가 38점이었잖아.” 친구들의 관심이 몰리자. 남학생은 그들에게 리뷰 기사를 대신 읽어주기 시작했다. “파이널 프론티어. 펜타곤 소프트라는 새로운 회사의 첫 작품. 빛의 전사 주인공이 크리스탈의 가호를 받아 어둠의 세력을 홀로 무찌르는 내용. 아름다운 BGM과 아마노 요시타카의 일러스트가 언 듯 보기에 드래곤 워리어 1과 비슷한 느낌이 나지만 파이널 프론티어 만의 독특한 전투씬이 발군. 드래곤 워리어와는 또 다른 매력의 판타지를 느낄 수 있다.” “묘한데? 결국 드래곤 워리어의 아류작이라는 소린가?” “일단 전투가 재밌다고 하잖아, 리뷰 점수도 괜찮으니 해볼만 할 거 같은데?” “음~ 고민 되네. 일단 게임 샵에 가서 아저씨한테 재밌냐고 물어봐야겠다.” 그때 한쪽 편에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학생 하나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희.. 혹시 드래곤 엠블렘이라는 게임 알아?” 그 순간 그들 곁에서 책장을 넘기던 내 손끝도 멈추었다. “드래곤 엠블렘? 그게 뭐야, 처음 들어보는데?” “맞아. 어디서 만든 건데? 그것도 RPG 게임이야?” 친구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학생은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입주변을 어물거리며 이야길 할까 말까 망설이던 녀석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자신 없는 말투로 말했다. “아.. 아냐. 모르면 됐어.” “뭐야~ 치사하게 비밀이냐? 무슨 게임이길래 그래?” “그래~ 재밌으면 같이 해보게 좀 알려줘 봐~” 본래 사람이 궁금한 것이 있으면 못 참는 법. 이야기를 꺼내다 말은 학생은 친구들에게 갖은 질타에 못 이겨 결국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사촌 형한테 들은 이야기야. 그저께 전화가 왔는데, 자기가 엄청난 게임을 손에 넣은 것 같다고 자랑했어. 그 외엔 나도 잘 모른다구..” “게임이 출시 됐으면 잡지에 실렸겠지. 언제 나온 건데?” “몰라.. 그냥 도시괴담처럼 도는 소문인데, 그 게임은 출시된 적이 없데..” 여유롭게 책장을 넘기던 나는 그 학생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음~ 뭐 틀린 말은 아니네. 친구들은 아리송한 친구의 말에 호기심이 동했는지 본격적으로 캐묻기 시작했다. 그중에 한명은 서점 안에 있는 게임 잡지들을 뒤적거리며 패밀리 게임의 발매 일자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 게임 없는데?” “그러니까 아까 출시된 적 없다고 했잖아..” “뭐야 그게? 그런데 너희 사촌형은 출시도 안 된 게임을 어떻게 해봤데!?” “그게.. 중고 게임 샵에서 구했다던데?” “출시되지도 않은 게임을 중고 게임 샵에서 구입했다고!? 도대체 무슨 게임이야? 장르가 뭔데?” “그게 그 형도 처음해보는 장르래. 배경은 판타지인데, 화면 안에 캐릭터들이 체스판 같은 맵 위에 서 있고 그것들을 움직여서 적과 싸우는 게임이라는데. 문제는..” “문제는..?” “캐릭터가 적에게 당해 사망하면 그 게임 안에서 데이터가 사라진데..” “뭐?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캐릭터가 죽으면 아예 사라져 버린다는거야?” “그렇지..” 그러자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친구가 콧방귀를 끼며 비웃었다. “그럼 기계를 껐다 키면 되지. 아님 세이브지점으로 로드해서 다시 하던가.” “그게 로드해도 마찬가지로 그 캐릭터가 없다고 하더라구..” “뭐라구!? 그럼 아예 처음부터 하는 건?” “그것도 안 돼. 모든 캐릭터가 죽으면 그냥 게임 오버야. 그리고 다시는 플레이 할 수 없어.” “미친.. 제작자가 어디야? 그딴 게임을 만들어 놓고, 돈 받아먹고 팔고 있다는 거야? 당장 항의해야지.” “제작자는 안 써있데.. 그래서 항의할 고객센터도 없어. 아까 말한데로 그 게임은 중고 샵에서 케이스 없이 알 팩으로 구입한 게임이고, 가격은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1000엔이었데..” “천엔!? 그렇게 싸? 말도 안 돼. 너희 사촌형이 거짓말하는 거 아냐?” “그럴 사람은 아닌데, 아무튼 그 형은 모든 캐릭터를 잃어서 결국 게임 오버 당했어.. 그래서 최근에 각 중고샵을 돌아다니며 드래곤 엠블렘이라는 게임을 찾고 있나 봐..” “헐.. 쩌네.. 혹시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도 한번 찾아볼까. 그 게임?” 곧이어 아이들이 우르르 서점을 몰려나가자, 서점 주인은 아이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놈들아!! 서점에선 조용해야지!! 나는 서점 밖으로 나서자마자 골목길로 달리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책을 덮었다. 아무나 플레이 해볼 수 없는 신비한 게임. 드래곤 엠블렘.. 아까 학생이 말한 게임의 설명은 나름 정확한 편이었다. 마치 체스판처럼 줄이 그어져 있는 판타지 배경의 맵에서 아군을 한명씩 움직여 적들과 싸우는 방식의 이 게임은 훗날 시뮬레이션 RPG라 불리 우는 장르였다. 드래곤 엠블렘이란 타이틀은 타임 슬립 이후 내 이름 석 자를 걸고 단독으로 만들어낸 첫 타이틀이었다. 그리고.. 현재의 게임 역사상 최악의 난이도를 자랑했다. 물론 클리어는 할 수 있게 만들어 두었다. 하지만 절대 단 한 번에 클리어를 할 수는 없었다. 캐릭터가 단 하나라도 사망하는 순간. 드래곤 엠블렘은 절대로 클리어 할 수 없는 게임이 되어 버렸으니까.. 나는 이 게임을 민텐도의 카트리지 공장의 손을 거치지 않고 시장에 뿌릴 수가 있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 했냐고? 우선 첫 번째로 정식 유통망을 사용하지 않았다. 아까 학생의 말처럼 나는 이 게임을 개당 500엔이라는 비교적 저렴한 금액으로 중고 샵에 넘겼다. 그리고 그들은 두 배로 금액을 올려 천 엔을 받고 유저에게 판매를 한 것이다. 주말 오사카를 중심으로 눈에 띄는 각 게임 매장마다 2~3개 정도의 카트리지를 팔았다. 처음 약 200개 정도의 타이틀을 뿌린 나는 입소문이 돌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서두를 건 없었다. 나도 일하느라 바빴으니까. 가끔 퇴근 후에 게임 샵에 들러 내가 판매한 드래곤 엠블렘이 남아 있는지 확인만 해볼 뿐 별다른 조치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씩 장소를 오가며 드래곤 엠블렘을 뿌린 결과.. 이상한 도시 전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악마 같은 난이도를 자랑하는 환상의 게임..- 나는 주말마다 조금씩 카트리지를 모아 소량으로 중고 게임 샵에 팔았다. 대체 어디서 민텐도의 게임 카트리지를 손에 넣었냐고 묻는다면.. 설마, 내가 트라이앵글에서 거둬들인 부진 재고들을 전부 버렸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 ──────────────────────────────────── EP. 10 : 기묘한 게임 (2) & 준페이의 호평을 시작으로 파이널 프론티어는 유저들 사이에서 좋은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준페이는 패밀리 유저들 사이에서 꽤나 신뢰도가 높은 리뷰어 중에 하나였다. 아무리 전작이 뛰어났던 게임이라도 깔건 까는 성격이었던 탓에 드래곤 워리어2 조차 만점을 주지 않았다. 그런 그가 신작 게임에 36점의 리뷰 점수를 내자 호기심이 동한 유저들은 파이널 프론티어를 구입해 보았고,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첫 주에 3천개가 나갔던 파이널 프론티어는 패미통신이 발간되고 한 달이 지나자 주당 3만개씩이 팔려 나갔다. 바다낚시에서 돌아온 카와구치씨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 상황에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준혁씨.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그러게 제가 조금 더 기다려 보라고 했잖아요. 좋은 게임은 유저들이 먼저 알아본다고~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으니 순풍에 돛을 단 듯이 불티나게 팔려나갈 겁니다. 재고가 다 떨어지기 전에 민텐도에 추가 카트리지 생산에 대해 문의 넣으시구요.” “감사합니다. 언제 도쿄에 오시면 꼭 저희 사무실에 들러주세요. 준혁씨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습니다.” “알겠습니다. 들리기 전에 연락드릴게요.” 바다낚시를 떠나기 전에는 곧 죽을 사람처럼 빌빌거리더니, 아주 신이 나셨구만.. 나는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수화기를 내려두었다. 그러자 동시에 전화기가 요동치며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준혁이냐!? 나 준페이다. 퇴근했냐?” “퇴근했으니까. 전화를 받지..” “그럼 오사카로 나와.” “오사카!? 너 오사카 왔어? 언제??” “방금. 네가 전에 좋은데 한번가자 했잖아~ 빨리 튀어 나와. 형님 기다리신다.” “그거 얻어먹자고 도쿄에서 여길 와!?” “이번 달 기사 때문에 너한테 물어볼 것도 있고, 이번엔 네가 날 좀 도와줘라.” “알았다. 곧 갈테니 기다려.” 잠시 후. 차를 몰고 오사카 도톤보리에 도착한 나는 약속 장소를 둘러보았다. 핸드폰이라도 있으면 쉽게 만날 수 있을 텐데.. 뭐 이런 게 80년대의 불편한 점이기도 하면서 묘하게 향수를 자극하는 면이 있긴 하지만.. “어이~ 여기야 여기!!” 준페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모자를 눌러쓴 채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누가 기자 아니랄까봐 녀석은 전문가용 필름 카메라를 어깨에 늘어뜨린 채 다가오며 말했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뭐~ 그럭저럭. 오사카에 오기 전에 연락이라도 한통하고 오지 그랬어?” “그러면 네가 일 생겼다고 핑계대고 도망갈까 봐.” “... 눈치 빠른 새끼.” “킥킥, 일단 뭐라도 먹자. 오늘 네가 쏜다고 했지? 오늘 한번 오사카의 풍속에 맞게 죽을 만큼 먹어볼까~” “알았다. 알았어~” 도톤보리는 오사카 남부에 흐르는 도톤보리 강 주변에 생긴 유흥가이다. 에비스바시부터 센니치까지 500m가량 길게 이어진 이곳은 노점가게와 음식점들의 화려한 간판이 마치 테트리스처럼 복잡하게 엉겨 붙어 있었다. 준페이 녀석은 음식점을 향하는 와중에도 오사카에 오면 꼭 먹어야 한다며 타코야키를 입에 물고 나를 쫓아왔다. “아~ 뜨거~!! 허어~ 뜨어~!!” “그러다 입천장 다 데어봐야 정신 차리지..” 나는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입안에 타코야키를 굴리는 준페이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실 일본에 온 이후로 군페이씨나 시게씨를 제외하곤 전부 업무 차 만났던 사람인지라 내 또래에 친구라 할 만한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이 녀석 만이 이 시대에서 유일하게 말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랄까? 우리는 잠시 후 거대한 꽃게가 요동치는 특이한 간판의 횟집에 들어가 작은 방을 빌렸다. “네가 말한 좋은 데가.. 여기였냐?” “왜? 마음에 안 들어? 다른 데 갈까??” “아니다.. 내 마음에 잠시 음란마귀가 씌었었나보다. 네가 그러면 그렇지..” “녀석, 풍속 업소라도 데려가는 줄 알고 신이 나서 왔나 보구만..” “시끄러~!! 맨날 일만해서 여자 만날 시간도 없단 말이다.” “뭐 누군 놀고먹는 줄 알아?” 가볍게 술잔을 들어 올리자 준페이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잔을 마주 들었다. 그렇게 횟감으로 속을 채우며 게임 업계의 소식들을 주고받던 중 준페이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오늘 내가 여기 찾아온 이유는 너한테 직접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온 거야.” “그래?” 내가 회 한 점을 집어 들며 건성으로 대답하자. 준페이는 살짝 표정을 찡그렸다. “알았다. 진지하게 들을게 대체 뭔데 그래?” “너 혹시 드래곤 엠블렘이라는 게임 알고 있냐?” 뭐야, 결국 그거였어?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알고 있지. 왜? 너도 그 게임에 관심 있냐?” “명색이 게임 잡지 기자인데, 그럼 관심이 없겠냐? 그런데 너 그거 해본 적 있어?” “응, 해봤어.” “뭐라고? 어디서 구했는데!?” “소문대로 중고 게임샵에서 샀지.” “거기 게임 샵 어디냐? 나 좀 알려줘.” “거기 교토에 있는데, 지금 거길 어떻게 가. 술도 마셨는데.. 그리고 내가 살 때도 하나 밖에 없었어. 운이 좋았지..” “역시 소문이 사실이었어!! 도쿄보단 교토나 오사카 쪽의 중고 샵에 가끔 나타난다더니!!” 그거야 내가 여기 사니까. 이 근처에 뿌리는 게 당연하지.. “근데 그 게임 은근히 비싸던데? 중고샵에서 8천엔이나 주고 샀어. 소문으론 천엔이라 들었는데..” “가격이 치솟는 게 당연하지~!! 그 게임이 지금 패밀리 게임 매니아들 사이에서 엄청 화젯거리인데!!” 준페이의 말대로 초기 500엔 매입으로 시작한 드래곤 엠블렘이 현재는 6천엔까지 매입을 받아주고 있었다. 물론 게임 데이터가 사라지지 않은 신품 가격에 한해서지만.. 나는 술잔을 목구멍에 털어 넘긴 뒤 품 안에서 게임 카트리지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러자 준페이 녀석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입을 열었다. “어..? 너 그거 설마..” “안 그래도 네가 이거 물어볼 거 같아서 며칠 전에 하나 더 구했다.” 실은 집에 있던 거 하나 들고 왔을 뿐이지만.. “준혁아아~!!! 이 자식~ 아오!! 이 사랑스러운 것!!” 준페이는 감격에 겨운 듯 눈물까지 글썽이며 내가 건네준 드래곤 엠블렘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뭐 겉보기엔 일반 패밀리 카트리지랑 다를 게 없는데도 준페이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계속 카트리지를 살피고 있었다. “카트리지 빵꾸 나겠다. 인마. 그만 보고 술이나 마셔~”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건데, 이렇게 실물을 만나게 되니 감격스러워서 그런다.” “괜찮아. 아마 3일 뒤에 날 원망하게 될 테니까..” “음? 왜??” “그 게임 한 번에 클리어 한 사람 없대, 아니 아직 클리어한 사람 조차 나오지도 않은 거 같은데? 너 게임 안 풀리면 성격 나오잖아.” “그럼 진짜로 게임 안에 캐릭터가 죽으면 데이터가 삭제된다는 거야?” “더구나 게임 오버 당하면 다시는 플레이가 불가능하지. 그러니까 신중하게 플레이 해봐.” 사실 드래곤 엠블렘에는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이 하나 있다. 뭐 언젠가 밝혀지긴 하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냥 이대로 유저들의 반응을 즐기고 싶었던 나는 비워진 잔에 술을 채우며 싱긋 웃음 지었다. & “대체 누가 우리 허락도 안 받고 카트리지를 납품한 거야!?” 주간 회의에서 카마우치 사장의 호통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자 군페이씨가 살짝 안경을 치켜세우며 대답했다. “아마도 최근에 성행하고 있는 중국의 불법 복제 업체인 듯합니다.” “불법 복제 업체에서 게임을 만들어서 팔아!? 그게 지금 말이 되냐 인마?” 그러자 뭔가에 홀린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시게씨가 입을 열었다. “맞아요. 그만큼이나 훌륭한 게임을 불법 복제 업체가 만들어 유통하다니 말이 안 되죠.. 아~ 나의 카트리나..” “시게, 저 자식은 아까부터 왜 저래?” 카마우치 사장은 아까부터 흐리멍텅 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게씨를 향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시게씨 옆에 앉아 있던 나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카마우치 사장에게 대신 대답했다. “아, 그게 어제 시게씨가 플레이 하던 드래곤 엠블렘에서 여주인공이 사망했대요..” “끝까지 보호하려고 후방로 밀어놨는데, 설마 적군이 뒤치기를 할 줄이야. 으으.. 대체 어떤 괴물 같은 디렉터 놈이 이런 잔인한 레벨 디자인을..” 시게씨는 어제 일을 떠올랐는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이고~ 정신 좀 차리세요. 하지만 그래도 유명한 게임 디렉터인 시게씨가 이렇게 홀딱 빠져 플레이 할 정도라니 흐뭇하긴 하네.. “하지만, 드래곤 엠블렘이 정식 유통망이 아닌 중고 시장에 안착한터라 도대체 어느 누가 제작을 한 건지 알아 낼 방도가 없습니다. 아마도 게임을 만들어낸 건 아마추어가 아닐까 싶은데..” “누가 드래곤 엠블렘이라는 게임을 만들었는지는 알고 싶지 않아. 내가 알고 싶은 건 어떻게 우리에게 로열티를 제공 하지도 않은 게임이 암암리에 유통이 되고 있냐 이거야!!” 카마우치 사장은 진심으로 빡 돌았는지 고래고래 소리쳤다. 회의실 안에는 나와 군페이씨, 시게씨를 제외하고도 카트리지 생산 공장을 맡고 있는 공장장님이나 보안담당이나 재무팀의 부장들까지 전부 참석 중이었다. ‘그런데, 차세대 콘솔 개발 부서인 나는 왜 여기 있는 거냐구..’ 내가 드래곤 엠블렘을 중고시장에 뿌린지도 두 달이 흘러가고 있었다. 처음에 소문을 접한 시게씨와 군페이씨는 그냥 패밀리 게임에 대한 도시 전설이라 흘려 넘겼다. 그러나 점점 커져가는 유저들의 소감과 민텐도 본사에도 제작사를 알고 싶다며 문의가 들어오기 시작하자 시장조사에 나섰고, 중고 게임 업체 몇 군데를 둘러본 결과 드래곤 엠블렘은 실제로 존재함을 믿게 되었다. 현재 일본에서 최고의 게임 개발자라 불리는 시게씨는 새로운 게임 형태에 흥미가 동했는지 며칠 동안 게임을 구하러 다닌 끝에 드디어 드래곤 엠블렘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극악의 난이도에 5 스테이지에서 모든 캐릭터가 전멸을 맞이했고, 겨우 구한 드래곤 엠블렘을 단 하루 만에 플레이 불가능한 물건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 게임은 좀 독특한 면이 있어요.” 드디어 정신을 차린 시게씨가 입을 열자, 회의실 안에 있던 직원들의 눈이 전부 그에게 향했다. “제가 체험한 드래곤 엠블렘은.. 거의 유저를 한계로 몰아붙이는 서바이벌 게임이나 마찬가지더군요. 한번 게임 오버를 당하면 다시는 게임을 플레이 할 수 없어요. 그런데 그렇게 끝장나버린 게임 카트리지를 다시 꽂으면 어떤 메시지가 나옵니다.” “메세지?” “hjk0615@raon.co.kr 대체 이게 무얼 뜻하는 걸까요?” ──────────────────────────────────── ──────────────────────────────────── EP. 10 : 기묘한 게임 (3) -야후로 되어 있던 이메일 주소를 차후 스토리에 변경이 있어 수정하였습니다.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 “hjk0615@raon.co.kr 대체 이게 무얼 뜻하는 걸까요? 그리고, 절대로 이 게임을 버리지 말라는 메시지가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To Be Continue.. 즉 후속 작을 암시하고 있다는 거죠. 아마 저 알파벳 기호는 차기작에서 사용할 수 있는 패스워드 같은데, 후속작과 이런 연결 고리를 만들어 버리면 쉽게 중고로 되 팔수도 없지요. 누군지 모르지만, 게임 시장에 대해서도 굉장히 전문적인 느낌이 들 정도의 마케팅 실력입니다.” 그때 군페이씨가 시게씨의 말한 알파벳을 중얼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건.. E-메일 주소 같은데?” 역시, 민텐도 최강 공돌이답다. 1987년도 시기에 E-메일 주소 형식을 알고 있다니.. 소름끼친다. 아직 인터넷이라 불릴 만한 통신망은 군사 활용 목적의 인트라넷 정도밖에 없던 시기라 민간인이 저 뜻을 이해할 순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군페이씨도 나처럼 미래에서 온 거 아냐? “E-메일? 군페이씨는 이 알파벳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겁니까?” “아니.. 그건 나도 모르네. 저 형식은 이를테면 통신망에서 사용하는 자네의 집주소와도 같은 것이야. 편지가 배송 될 주소를 보고 내용까지 알 순 없지 않은가?” 캬~ 비유보소. 감탄을 금치 못하겠네.. 나는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을 정도였지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군페이씨가 하는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통신망? 집주소? 군페이씨.. 제가 게임만 개발해봐서 잘 모르겠는데 알기 쉽게 설명을 좀..” 음.. 저것보다 더 쉽게 설명이 가능 하려나? 나는 답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군페이씨를 대신해 시게씨에게 답해주었다. “시게루씨 집에 전화기 있죠?” “그럼 있지. 요새 집에 전화기 없는 사람이 어딨어?” “전화기는 통신기기 잖아요. 멀리 있는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그렇..지?” “군페이씨가 말하는 건 저 알파벳이 전화번호라는거에요. 컴퓨터를 통해 멀리 있는 사람에게 저 주소로 전자우편을 보내는 거죠.” “그래!! 강군!! 맞아~!! 내말이 그 말이야~ 역시 강군이라면 알아줄 것 같았어~!!” 제 입장에선 그 형식을 이미 알고 있는 당신이 더 괴물 같아 보입니다만.. 그때 카마우치 사장은 시게씨의 말에 두 눈을 감으며 물었다. “끄응.. 아무튼 결론은 그런 게임의 후속작이 또 나올 수 있다는 거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시게루군. 지금 그 게임 가격이 얼마라 그랬지?” “음.. 처음에 1000엔 으로 시작했던 가격이 현재 프리미엄이 붙어 15000엔 가까이 치솟고 있어요. 굉장히 비상식적인 가격이지만 여전히 수요는 대단합니다. 아직 클리어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유저들의 도전욕을 자극하는 면이 있고, 보통 방법으론 구할 수 없다는 희귀품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인 듯한데..” “어디서 굴러먹던 녀석인지 모르지만, 한번 만나 볼 수만 있다면 억만금을 줘서라도 채용하고 싶군. 그만큼 군중심리를 이용할 줄 아는 개발자라니..” 이미 채용중이십니다만.. 카마우치 사장의 러브콜에 묘한 기분 들어 볼을 긁적이고 있는데, 군페이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게임 개발에 대해 시게루나 강군 만큼 잘 아는 건 아닌데, 시게루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상한 점?” “네. 저희가 만드는 카트리지는 흔히 롬 팩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아, 카마우치 사장님 롬 팩이 뭐냐면..” 그러자 카마우치 사장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군페이씨의 말을 받아쳤다. “아오.. 그 설명하는 버릇 좀 버리고, 본론만 좀 얘기해보게..” “아니. 이건 설명을 꼭 해드려야 이해가 가실 겁니다. ROM 이란 Read only memory. 즉 읽기만 가능한 메모리라는 겁니다. 제가 알기로 ROM 형식의 카트리지에 또 다른 데이터를 쓰거나 삭제, 변형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야기하는 드래곤 엠블렘은 플레이 방식에 따라 데이터 자체를 삭제 시키고 있어요.” 그 순간 탁자 밑에서 펜슬을 돌리던 내 손놀림이 멈칫했다. 어라..? “시게루군. 자네 혹시 그 드래곤 엠블렘이라는 게임 혹시 지금 가지고 있나?” “네, 개발실에 있습니다. 안 그래도 저도 구조 좀 파악해 보려는데, 시스템에 강력한 LOCK이 걸려있더군요..” “그렇군. 그럼 회의가 끝나고 잠깐 볼 수 있을까? 그 카트리지의 내부를 좀 봐야겠어.” & 결국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한 회의는 카마우치 사장의 한마디로 종결이 났다. -드래곤 엠블렘과 비슷한 게임을 만들어. 정식 유통 시킨다.- SRPG 장르의 매력과 시장성을 고려해 최단 기간 내로 새로운 게임을 만들라는 지시였다. 하지만, 드래곤 엠블렘이라는 게임을 표방했다는 인식을 안고 가야하는 입장에서 시게씨는 카마우치 사장의 개발 지시를 거절했고, 나 역시 최근에 신형 콘솔 제작으로 외주 업체와 접선이 잦았던 탓에 개발에 참여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우리는 민텐도에 가장 협조적인 하청기업중 하나인 인텔릭 시스템즈에 외주 요청을 넣어 새로운 엠블렘 시리즈 개발을 맡기게 되었다. 내가 아이디어를 따온 게임이 본래 원작을 만들었던 회사로 외주 요청이 들어가다니.. 이야기가 재밌게 흘러가네? 잠시 후. 나와 시게씨 그리고 군페이씨는 개발실에 둘러 앉아 드래곤 엠블렘 카트리지를 개봉하게 되었다. 군페이씨가 직접 뜯어본다면 나만 알고 있던 비밀하나가 공개 되겠군. 일자 드라이버로 게임 카트리지를 뜯어내고 ROM 카트리지를 이루고 있는 칩이 모습을 드러내자 시게씨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군페이씨에게 물었다. “뭔가 좀 특이한 게 있나요?” 그러자 군페이씨는 갑자기 식은땀까지 흘려대며 중얼 거렸다. “시게루군. 이 게임의 초기 중고 샵 가격이 천엔이었다고?” “음.. 소문으로는 그렇더군요. 지금은 희소성에 프리미엄이 붙어 있지만..” “이런, 어느 미친놈이 이걸 천엔도 안 되는 가격으로 중고샵에 팔아넘긴 거지?” “왜요? 뭔가 특이한 점이 있나요?” “우선은 이 카트리지는 드래곤 엠블렘 전용으로 제작 된 게 아냐. 다른 게임 카트리지를 공수해 와서 그 안에 다른 칩을 박아 넣어 개조한 모조품일세.” “허~ 그 말은 지금 이미 제작 되어 출시된 게임 안에 다른 게임을 넣었다는 건가요? 그런데 군페이씨 말대로 ROM 카트리지는 데이터 삭제가 불가능하잖아요?” “데이터를 읽어 들이는 경로를 교묘히 바꾸었어. 기존의 게임이 아닌 커스텀 칩에 있는 데이터를 읽을 수 있도록..” “커스텀 칩? 그건 또 뭔가요?” “데이터를 읽고 쓰기가 가능한 작은 저장 장치야.. 24kb 용량 안에서 마음대로 내부에 데이터를 변경할 수 있지. 그래 이거라면 플레이 방식에 따라 데이터를 아예 삭제해버리는 게 가능하지. 그런데 굳이 완성된 게임에 어째서 이런 기능을 넣었는지 의도를 알 수 없군..” 군페이씨는 내부에 달려 있는 칩을 바라보며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음.. 사실 의도랄 건 없는데? 굳이 의도를 물으신다면, 플레이어들에게 캐릭터를 잃은 상실감. 이라는 걸 전달하고 싶었다. (이건 카트리나를 잃은 시게루씨의 반응으로 성공을 확신했다.) 그리고 극한의 난이도를 클리어하는 것에 대한 도전 의식? 그런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 현재의 기술인 ROM 형식의 데이터 칩으로는 플레이 형식에 따라 캐릭터나 게임 데이터 아예 삭제해 버리는 극단적인 연출이 불가능했다. 그러다 문득 나는 어릴 때 용산에서 보았던 신기한 롬팩을 떠올렸다. 흔히 UFO라 불리던 이것은 게임 카트리지를 복사할 수 있는 장치였다. UFO 장치에 커스텀 팩이라 불리던 팩을 앞에 꽂고, 복사하고 싶은 게임을 뒤에 꽂아서 카피 버튼을 누르면 게임팩 안에 있는 데이터가 커스텀팩에 복사가 되는 형식이었는데, 롬팩 불법 복제의 시초라 볼수 있었다. 재밌는 건 복사된 게임을 지우고, 다른 게임을 또 입힐 수가 있었기에 혹시나 그런 기술이 현재에도 있는지 궁금했던 나는 게임 & 워치를 통해 아키하바라 전자 상가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첸드라라는 이름의 인도인을.. 복잡하게 얽힌 아키하바라의 상가 골목에서 컴퓨터용 주변 기기를 판매하던 그는 겉으로는 PC용품을 판매하고 있었지만 그건 위장일 뿐. 내부에 따로 패밀리용 복사 팩을 만들어 불법 유통을 하고 있었다. 며칠간 그의 주변을 맴돌며 꼬리가 밟히길 기다리다가 업자에게 물건을 넘기는 결정적인 순간에 치고 들어간 나는 경찰에 신고를 빌미로 그의 약점을 잡는데 성공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됐느냐? 뭐 그야 뻔하지.. 인도산 공돌이를 갈아 넣어 커스텀 칩을 기존의 카트리지에 이식하는 작업을 맡겼다. 처음엔 비협조적이었던 첸드라와 그 동료들에게 불법 복제 카트리지를 판매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안겨주자 일은 쉽게 풀렸다. 덕분에 초기 자본은 꽤나 많이 들어갔지만, 상품의 희소성으로 가치가 점점 올라 최근에 와서야 손익 분기점을 넘기 시작했다. “이제야 드래곤 엠블렘이 왜 중고 시장의 틈새를 파고들었는지 이해가 되는군.” 군페이씨는 의문이 풀렸는지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전에 슈퍼마리지를 개발 할 때와는 다르게 이번엔 시게루씨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 전혀 이해를 못하겠는데요. 왜 이만한 게임을 정식 루트를 통하지 않았는지 군페이씨는 아시겠습니까?” “정식 루트를 통과해버리면 드래곤 엠블렘은 특유의 게임성을 잃어버리고 말테니까. 생각해보게 정식 유통망을 이용한다면 게임의 가격을 정해버리지 않나? 이 안에 쓰인 커스텀 칩의 가격만 8000엔이라네. 우리 민텐도는 소비자 보호법상 게임 카트리지 개당 가격을 최대 6000엔으로 정하고 있어. 만약에 이 커스텀 칩을 그대로 달고 출시했으면 어마어마한 적자를 보았을 테지.. 그리고 초도 물량 1만개를 풀어버리면 지금과 같은 희소성을 얻기도 힘들었을 거야. 그래서 가격 형성이 자유로운 중고 시장을 노린 거겠지. 드래곤 엠블렘은 철저하게 우리 민텐도 카트리지 생산 방식의 허점을 제대로 뚫고 들어간 게임이로군..” 군페이씨의 설명에 시게루씨와 주변의 개발자들까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물론 나 역시 군페이씨의 추리력에 실제로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세상에 커스텀 칩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간파해 내다니,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로군. & 이 달 발매한 최신호 패미통신에서 참 재밌는 일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드래곤 엠블렘을 플레이한 유저들을 한데 모아 공략에 나선 것이다. 이벤트 이름이 뭐라더라..? 그.. 켠김에 왕까지였나? ──────────────────────────────────── ──────────────────────────────────── EP. 10 : 기묘한 게임 (4) 이 달 발매한 최신호 패미통신에서 참 재밌는 일이 일어났다. 드래곤 엠블렘을 플레이한 유저들을 한데 모아 공략에 나선 것이다. 이벤트 명이 뭐라더라 켠김에 왕까지..랬나? 총 25스테이지까지 준비한 드래곤 엠블렘의 공략을 위해 공문을 내걸자, 유저들이 자발적으로 행사에 참가의사를 밝혔고, 그런 유저들의 반응을 조사를 위해 민텐도 대표로 나와 시게씨가 참석하게 되었다. “내가 벌써 게임 개발만 5년차이지만, 이런 진귀한 행사는 처음 본다.” 아침을 거르고 온 탓에 제과점 빵과 우유를 삼키며 시게씨가 중얼거렸다. 그의 곁에 있던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행사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유저들은 저마다 비장한 표정으로 행사장에 마련된 각자의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이번 행사를 위해 패미통신에서 준비한 드래곤 엠블렘은 총 100대.. 전국에 중고 매장을 싹쓸이 해서 얻어낸 패미통신 최대 행사였기에 나와 시게씨를 포함한 100명의 유저들이 드래곤 엠블렘을 클리어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플레이어는 대부분 남자였지만, 중간중간 여성유저도 섞여 있었는데 성비로 치면 9:1 수준이랄까? 그래도 이 시기에 여성 유저는 거의 천연 기념물 수준이었기에 남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기 충분했다. “안녕하십니까~ 유저 여러분. 이번 드래곤 엠블렘 토벌대의 참가자겸 사회를 맡게 된 패미통신 기자. 이시모토 준페이입니다.” 토벌대라니.. 이름 한번 살벌하네..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분들이라면 드래곤 엠블렘의 극악무도한 난이도에 몇 번이고 무릎을 꿇은 용사중의 용사라고 생각합니다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가지 저희 패미통신에서 알아낸 정보를 알려드리고 곧바로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이쪽을 봐주세요!!” 군페이가 행사장 벽면을 가리키자 프로젝터를 이용한 간단한 게임 소개가 펼쳐졌다. “드래곤 엠블렘을 개발한 회사와 제작자는 아직까지 비밀에 묻혀 있습니다. 아마도 게임을 클리어 한다면 스탭롤이 나타나는 게 일반적이니 오늘 여러분들 중에 누군가가 이 게임을 클리어 한다면 우리는 이 게임이 대체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그 수수께끼가 풀리게 될 것입니다~!!” “우오오오!!!!!!!” 드래곤 엠블렘이라는 마왕을 타도하기 위해 모여든 병사들의 사기가 대단했다. 중간 중간의 여성 유저들까지도 목청껏 소리치는게 뭔가 악에 바친듯해 보일 정도였다. 하긴 초기에 천엔에 구입했다가 나중엔 20000엔가량 주고 사도 클리어를 못했으니 악에 바칠만 하지..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들의 외침에 동조했다. 준페이는 회장을 둘러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운 뒤 설명을 계속했다. “여러분 떠올려 보십시오.. 저는 이 게임을 5개나 구입했습니다. 최고로 오래간 스테이지는 18스테이지. 암흑룡의 성전에서 무릎을 꿇어야했습니다. 5개중 1개는 지인의 도움으로 플레이를 시작했으나, 그 이후 구입한 4개의 카트리지의 가격만 7만엔의 돈을 꼴아 박았습니다. 그리고 그 금액은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도 비슷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전 20만엔이나 썼다구요!!!!” 한 유저가 진심으로 빡친 목소리로 소리치자, 준페이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건 그쪽이 게임에 소질이 없는 것 같은데?” 얼굴이 붉어진 플레이어는 굳게 입을 다물었지만, 주변의 분위기는 웃음바다가 되었다. 일본 예능 프로그램을 봐도 게스트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거나, 인신 모독하는 발언이 공공연했기에 약간의 비꼼은 일본인들 특유의 문화가 아닌가 싶다. “자~ 진정들 하시고, 방금 이야기 하신 유저 분처럼 이 게임의 시스템을 잘 모르는 분도 있기에 간략하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게임 안에서 적에게 사망한 캐릭터는 그래도 데이터가 삭제된다는 것은 다들 알고 계실 테니, 그건 넘어 가도록 하고 병사의 클래스에 관한 상성 관계를 간략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창병은 기병에게 효과 적이고, 기병은 검사한테 효과적입니다. 그리고 검사는 창병에게 효과적인 가위바위보 시스템을 차용하고 있죠. 궁수는 두 칸 뒤에서 적을 공격하는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며 용기사에게 효과 적입니다. 하지만 방어력이 낮으니 조심하세요. 용기사는 모든 클래스에 효과적인 공격을 하지만 화살엔 쥐약입니다. 딱!! 여기 까지만 알고 주의하시며 플레이 하시면 우리는 오늘 분명 이 게임의 끝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우와아아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게임을 클리어 하신 유저가 있으시다면, 저희 패미통신에 카트리지를 기증해 주시는 분에 한해 10만엔의 상금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부디 꼭 이 자리에서 최초 클리어 유저가 탄생하길 바랍니다. 그럼~!! 게임을 시작해 주세요!!” “오우!!!” 영화 300의 스파르타 전사들과도 같은 함성과 함께 행사장 곳곳에서 게임에서 게임의 시작을 알리는 프롤로그의 서곡이 흘렀다. “크흐~ 이번에야 말로 끝장을 보자.” 아까부터 묘하게 불타오르고 있는 시게씨의 모습에 웃음을 삼키며 나 역시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그럼.. 이제 클리어를 해볼까? 행사가 시작하고 약 1시간이 흐르고, 스테이지 5장쯤에서 20명의 유저가 대거 탈락했다. 최초에 등장하는 거대 괴수의 공격을 단 한 명의 캐릭터도 잃지 않고 6장으로 넘어가는 게 포인트인 5장에선 나 역시 신중하게 주인공 캐릭터를 앞장 세워 적의 눈길을 끌며 궁수로 지속 적인 데미지를 가한 결과 첫 번째 난관을 클리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1명이라도 캐릭터를 잃은 유저는 8장부터 서서히 적군의 공세에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10장에서 약 30명의 유저가 또다시 대거 탈락했다. “아~ 여러분. 조금 더 힘을 내주세요. 이 게임은 체스와 마찬가지입니다. 캐릭터 이동 하나하나에 신중하지 않으면 금방 벨런스가 붕괴되기에 캐릭터를 하나라도 잃는 순간 이미 클리어가 불가능 합니다. 혹시 10장까지 캐릭터를 하나도 잃지 않은 유저 분이 있다면 손을 들어주세요.” 그러자 나와 시게씨를 포함한 약 20명가량의 유저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좋아요!! 아직 가능성은 있습니다. 할 수 있어요!! 여러분 부디 이분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힘내라~!! 우와아아!!” 응원하는 플레이어 들 중에는 예전에 서점에서 보았던 학생들도 섞여 있었다. 저 녀석들도 게임을 구해서 해봤구나. 10장부터 드래곤 엠블렘은 스토리상 적군의 마왕이 깨어나며 난이도가 대폭 상승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골고루 캐릭터를 키우지 않았다면 슬슬 적의 공세에 버티기 힘들어진다. 옆에 앉아 있는 시게루씨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이 게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적의 파상 공세에 맞서 최대한 적을 뭉쳐둔 뒤에 마법사의 공격으로 범위공격을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15장.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 성검을 찾아 나서는 스테이지에서 시게씨는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다. 상점에서 회복 지팡이의 보급을 깜빡하고 스테이지를 시작해버린 것이다. 드래곤 엠블렘은 스테이지 시작과 동시에 기존 세이브 데이터를 지워버리는 오토세이브 방식을 차용했기에 되돌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으아아아!!!! 실수했다!!” 시게씨의 비명이 행사장에 길게 울려 퍼졌다. 그는 최대한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카트리나가.. 카트리나가!!!!! 으아아~!!” 또 다시 여주인공을 잃고 말았다. 카트리나는 대사제이기에 체력은 약하지만 아군의 회복을 담당하기에 전력에 큰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녀를 15장에서 잃었다는 것은 이미 게임 클리어는 물 건너갔다고 볼 수 있었다. 패닉에 빠진 시게루씨는 냉정함을 잃고 소극적인 플레이를 펼친 결과 18장 암흑룡의 성전에서 참패를 맛보게 되었다. “비.. 빌어먹을.. 결국 여기까진가..” 아침 9시에 시작한 행사는 오후 6시가 되어가고 있었고, 100명의 유저들 중에 나를 포함한 11명이 스테이지 20장에 돌입하고 있었다. 그중에 아직까지 단 한명의 캐릭터도 잃지 않는 유저는 4명. 놀랍게도 그중엔 여성 유저도 한명이 끼어있었다. “아아~ 치열합니다. 극악무도, 흉악무도한 드래곤 엠블렘의 클리어를 위한 여정에 11명의 플레이어가 고군분투중입니다. 아~!! 방금 말씀 드린 순간.. 2명의 플레이어가 게임오버를 당했네요. 이제 9명!! 여러분들의 응원이 필요할 때입니다~!!” 이미 19스테이지에서 게임오버 당한 준페이는 사회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 역시 21장에 들어서자 욕이 나올 정도로 게임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디자인한 레벨이지만, 이건 좀 심하긴 하다.’ 최전방에는 빛의 검을 장착한 주인공의 절대적인 공격력과 중 장갑으로 탱커 역할을 담당하는 보병 기사는 이미 최종 클래스 단계로 진화한 상태로 보스와 마주하고 있었고, 그들 뒤의 카트리나 역시 대 사제에서 신의 사자로 마지막 클래스에 달한 상태였다. 궁수는 매의 눈 스킬을 입수해 10칸 밖에서 초장거리 저격으로 주인공 일행을 돕고 있었고 어느 정도 레벨이 되는 캐릭터들은 적군의 조무래기가 방해하지 못하도록 커버를 치고 있었다. “대체 이 게임의 끝은 어디 일까요? 100명의 유저들에게 조사 결과 20장이 최종장을 예상했지만 이미 게임은 23장을 향해가고 있습니다. 시간은 벌써 오후 9시.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유저들 모두 단 한분도 돌아가지 않고 숨죽여 게임의 결과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23장에 마침내 등장한 마왕!! 그리고 남은 유저는 5명!! 그중에 놀랍게도 아직까지 모든 캐릭터를 잃지 않고 돌입한 유저가 두 분이 있습니다. 바로 민텐도 소속 직원인 한국인 강준혁씨와 미모의 여성 플레이어 유키씨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 두 명 중에 한분이 이 게임의 끝장을 볼 것만 같은 데요~!!” 23장.. 마왕 쓰러지다. 편은 오히려 최종장인 25장보다 훨씬 어렵다. 그 이유는.. “아!! 마침내!! 마왕이 쓰러졌습니다!! 드디어 주인공 일행을 그토록 고생 시킨 마왕이 지금 방금 사토시라는 플레이어의 손에 최초로 쓰러졌습니다~!!” “우와아아앙~!!” 마왕이 쓰러졌다는 소식에 흩어져서 생존자들의 게임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우르르 사토시쪽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가 마왕의 침몰에 안심하는 와중에 게임 안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때 화면 안에 메시지 창이 떠오르며 암흑신의 등장을 예고한 것이다. “아.. 암흑신!? 설마 지금? 이런!!”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마왕의 몸 안에서 암흑신이 깨어남과 동시에 주변에 있던 캐릭터들에게 크리티컬 데미지가 들어갔다. “안 돼!!!” 일격에 사토시라는 플레이어는 아무것도 모른 채 반수 가까이의 캐릭터를 모두 잃었다. 그리고 깨어난 암흑신의 마법 한방에 플레이 화면에는 붉은 표시로 GAME OVER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이런 젠장 맞을!!!” 콰앙!! 뒤통수를 얻어맞은 레벨 디자인에 화가 난 사토시는 게임 패드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의 숭고한 희생 덕에 남아 있는 플레이어는 마왕을 죽이기 전 아군을 최대한 뒤로 물러서게 하는 전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나 역시 두 명의 궁수로 초장거리 저격을 이용해 마왕을 물리친 덕분에 암흑신 강림까지 한명의 캐릭터도 잃지 않았다. 23장에서 주인공 일행에게 타격을 입은 암흑신은 최종전쟁을 예고하며 사라지고, 드래곤 엠블렘의 스토리는 클라이막스로 치닫고 있었다. “후우... 피곤하네..” 무사히 23장을 돌파한 플레이어는 유키씨와 나 단 둘 뿐이다. 하지만 유키씨 역시 23장에서 궁수 한명과 사제 하나, 탱커 하나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24장에 돌입하기 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벤트 회장의 관계자 역시 탈락한 플레이어 들이 게임 화면을 좀더 잘 볼 수 있도록 전면에 설치된 거대한 프로젝터에 게임 화면을 비추기 시작했다. 화질 열화가 심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유저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자~ 거의 다 오게 되었습니다. 유키씨와 강준혁씨. 100명의 유저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두 분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힘내라~!! 우리에게 이 게임의 끝을 보여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응원 소리와 함께 한차례 나와 눈이 마주친 유키씨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24장에 돌입하였다. 암흑신과의 최종 결전은 24장과 25장. 두 스테이지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미 23장에서 중요 전력을 잃어버린 유키씨는 초반부터 적의 공세에 밀려 힘겨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나는 25장의 결전에 대비해 신궁의 클래스에 도달한 두 명의 궁수를 이용해 밀려오는 적들을 가볍게 쳐내고 있었다. 결국 신궁 캐릭터가 한 명뿐인 유키씨는 전력에 구멍이 생기며 적군의 공격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아... 24장에서 유키씨가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그녀 역시 분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는 군요. 대체 이 빌어먹을 게임을 만든 제작자가 누구길래 이토록 아름다운 미인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걸까요~!!” 저거,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 나는 준페이의 어이없는 해설에 헛웃음을 삼키며 게임에 집중했다. 그때 게임을 마치고 회장을 벗어나던 유키씨가 나에게 다가왔다. “부디 끝까지 힘내주세요..” “아, 네..” 나는 몰려드는 적군을 차례차례 커버 하며 적의 공격이 멈추길 기다린 끝에 드디어 적군 모든 병사가 쓰러지고 암흑신만을 남겨 두었다. 이미 최종 클래스에 마지막 레벨을 찍은 주인공과 그 동료들은 암흑신을 둘러쌓은 채 파상공격을 펼치기 시작했고, 회장 안의 사람들 손에 땀을 쥐며 나의 플레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24장의 마지막.. 최후의 일격을 날리려던 주인공 앞에서 암흑신이 2차 변신을 시도했다. 그 순간 시게루씨가 그토록 사랑에 마지않던 여주인공 카트리나와 또 다른 여주인공 격인 마법사 미레아가 암흑신을 막아서며 게임이 멈추었다. 그리고 떠오른 상태 메시지에 나는 속으로 빙긋 웃음을 지었다. -카트리나와 미레아.. 둘 중에 누구를 희생 시켜 주인공을 지키겠습니까?- “뭐라고!!!!!!!!!!!!!!!!!!” “씨발!!! 안 돼!!!” “으아아!!! 개발자 개새끼야!!!” ──────────────────────────────────── ──────────────────────────────────── EP. 10 : 기묘한 게임 (5) -카트리나와 미레아.. 둘 중에 누구를 희생 시켜 주인공을 지키겠습니까?- “뭐라고!!!!!!!!!!!!!!!!!!” “씨발!!! 안 돼!!!” “으아아!!! 개발자 개새끼야!!!” 회장 안에 모여 있던 플레이어는 일동 패닉에 빠졌다. 그렇다.. 드래곤 엠블렘을 클리어 하기 위해서는 여주인공 한명의 희생이 무조건 필요했던 것이다. 아군의 회복을 담당하는 최고 사제와 범위 공격의 최강자인 마법사.. 이 두 명의 미녀 중에 한명의 희생으로 25장에 돌입할 수 있는 시스템. 하지만 현재 25장에 돌입할 수 있는 플레이어는 나 혼자 뿐이었다. “이런.. 이러언~!!!! 정말 흉악하기 그지없는 스토리입니다!! 최고의 힐러냐, 최고의 마법사냐.. 우리는 지금 선택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제작자는 우리더러 저 둘 중에 한명을 선택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하라는 걸까요. 정말 이 게임을 만든 놈은 빌어먹을 디렉터입니다~!!” 최후의 선택지를 앞에 두고 드래곤 엠블렘을 만들어낸 나는 회장에 모인 유저들에게 욕이란 욕은 다 쳐먹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참 들어도 기분 좋은 욕이군.. 그만큼 두 명의 캐릭터는 1장부터 주인공과 함께 수많은 전장을 누벼온 진정한 동료였기에 누구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최종장을 앞두고 회장 안에서 재밌는 일이 벌어졌다. 두 명중 누구를 희생시키느냐에 즉석에서 투표가 열린 것이다. 유저들끼리 상의를 하는 와중에 나는 잠시 음료수를 삼키며 쉬고 있었다. 그러자 시게씨가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카트리나를 살려라. 제발 준혁아. 그녀는 죽게 두면 안 돼.. 최종장에서 힐러는 꼭 필요하다니까?” “시게씨.. 이거 그냥 게임이에요.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세요..?” 시게씨는 감정 이입이 제대로 됐는지 눈물까지 글썽이며 나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그때 준페이 역시 나에게 슬쩍 다가와 입을 열었다. “남자라면 섹시 마도사 미레아지. 회복이고 나발이고 단박에 그녀의 마법으로 제압해버려~ 난 미레아에 한 표다. 준혁아.” “하하.. 그래?” “아, 글쎄 카트리나를 살리라고!!” “미레아 라니깐요!!!” 난리가 났네, 난리가 났어. 그때 나와 함께 마지막까지 플레이 하던 유키씨가 다가왔다. “준혁씨..? 라고 불러도 되죠?” “네. 편하신 대로 부르세요~” “제가 보기엔 다음 스테이지가 최종장 같은데, 부디 클리어할 수 있도록 준혁씨가 전력에 도움이 되는 캐릭터를 선택해주세요.” 그녀의 말에 회장 안이 조용해졌다. 그렇다. 중요한건 게임 클리어다. 지금까지 내 플레이를 본 유저들라면 다음번에 드래곤 엠블렘을 손에 넣었을 때 분명 클리어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자 회장 안에 있던 유저들은 나를 응원하며 선택권을 나에게 넘겼다. “일단 유저들의 투표 결과는 52:48로 미레아의 희생을 선택하였습니다만, 우리는 마지막 남은 플레이어 강준혁씨의 선택에 모든 걸 맡기기로 했습니다. 제 마음 같아선 고추 달린 주인공을 희생 시키고 싶지만, 정말 잔인한 플레이 방식이 아닐 수 없군요.. 자~!! 강준혁씨 선택하세요~!! 누구를 희생 시키겠습니까!?” 회장 여기저기서 마른침을 삼키며 집중하는 유저들을 한번 둘러본 나는 잠시 후 카트리나를 선택했다. 아직은 섹시 보다 숭고한 이미지의 여성상이 선호 되는 시기였기에 그녀의 희생을 선택하는 편이 유저들에게 좀 더 감동을 안겨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내린 결론이었다. “안 돼에~!!!!” 시게씨의 비명과 함께 주인공 앞을 막아선 카트리나는 암흑신의 공격을 대신 받아 사망하고 주인공은 쓰러진 카트리나를 끌어안은 채 최종 각성 클래스 신성의 검투사가 되어 암흑신과 맞서기 시작했다. 여기서 재밌는 건 누굴 희생 시키느냐에 따라 각성 상태가 달라진다는 것. 카트리나 대신미레아를 희생 시켰다면 주인공은 폭풍의 광전사로 돌변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둘 다 사망한 상태라면 어떻게 되냐구? 그러면 각성은 없다. 따라서 클리어가 굉장히 힘들어 지고, 운이 좋아 클리어 한다고 쳐도 진 엔딩 따위는 없다. “우오.. 주인공이 분노했어. 어마어마한 공격력이다.” 몸주변에 푸른 오오라를 띄고 있는 주인공이 게임 안에서 화려한 검격을 펼치자 유저들이 환호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이 시대의 남자들이라면 ‘각성’, ‘변신’, ‘합체’에 미치도록 열광하는 특징이 있지.. 아니다. 21세기에도 남자는 별반 다를 게 없긴 하구나.. “가라~!! 암흑신을 없애버려!!!” 주인공의 각성 탓에 최종장은 오히려 23장이나 24장보다 쉬운 편이었다. 거의 1:1로 암흑신과 맞붙은 주인공은 엄청난 공격력으로 암흑신을 몰아붙이기 시작했고, 완전이 감정이 이입된 유저들은 고래고래 소리치며 나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암흑신은 주인공의 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우와아아아~!!!!! 끝났다~!! 엔딩이다!!!” “후우.. 끝났네..” 나 역시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는 혈투를 마치니 전신에 힘이 쭉 빠지는 것만 같았다. 회장의 거대한 프로젝터에서는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카트리나의 장례식이 거행되자, 유저들은 마지막 선택의 강요에 분개하며 눈물로 그녀의 장례식을 지켜보았다. 엔딩은 숭고한 그녀의 희생과 주인공의 각성에 감탄하며 유저들은 저마다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훌륭한 게임이었어. 진짜 대단한 스토리야..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본 것만 같군..” 시게씨 역시 먹먹한 표정으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유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감동에 젖어 있었고, 준페이는 후련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하나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드래곤 엠블렘을 즐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패밀리 게임을 즐겨하는 한국인 개발자입니다. 드래곤 엠블렘은 제가 1년이란 시간 동안 혼자서 만들어낸 게임입니다.- “하.. 한국인 개발자라고!?” “저 드래곤 엠블렘을 혼자서 만들었다고!?” 최초의 메시지에 회장 안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연히 일본의 게임 회사가 만들어낸 게임일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외국에서 만들어낸 게임이라니.. 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여러분께 최초로 선보인 이 게임의 장르는 시뮬레이션 RPG입니다. 극단적인 연출을 위해 유저 분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는 점에서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지금 이 메시지를 보는 분이라면 지금까지 플레이 해왔던 어느 게임보다 감동과 성취감에 젖어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 게임의 클리어 데이터는 차후 이어지는 후속편에서 추가 요소로 사용이 가능합니다. 부디 카트리지를 잘 보관하시어 새롭게 이어지는 스토리를 즐겨주세요. 감사합니다.- “우와아.. 역시 후속편이 나오는구나!!! 우오!!” 내가 보낸 메시지를 내가 최초로 읽게 될 줄이야.. 나는 싱긋 웃으며 패드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사회를 보던 준페이가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저기.. 강준혁씨? 혹시 이 드레곤 엠블렘의 카트리지를 저희 패미통신에 넘기실 생각은 없나요? 10만엔의 상금을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행사장에 있던 한 유저가 외쳤다. “저한테 파세요!! 제가 12만엔 드릴께요~!!” “아뇨!! 저한테 파세요!! 15만엔 드리겠습니다~!!!” 헐.. 즉석 경매냐? 나는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입찰가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드래곤 엠블렘의 유저 층은 어린이들 보다 2~30대의 어른들이 훨씬 많았다.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춘 유저들이다보니 가격은 순식간에 30만엔까지 올라가고 있었다. “저기.. 잠시만요.” 내가 그들을 진정 시키자, 가격을 입찰한 유저들은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민텐도 직원입니다. 경매를 유도해서 이 게임을 넘기고 싶지 않아요. 저는 여러분들과 패미통신에서 제공한 이벤트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생각합니다. 이 드래곤 엠블렘의 클리어 카트리지는 마지막에 안타깝게 떨어진 유키씨에게 증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옆에 있던 유키는 나의 말에 깜짝 놀라 동그란 눈을 더욱 크게 떴다. 나는 살짝 웃으며 패밀리에서 카트리지를 뽑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받아요. 유키씨는 충분히 자격이 있습니다.” “아.. 이걸 제가 받아도 될지..” “소중히 보관해 주세요. 나중에 연결되는 요소가 있다고 하니까..” “감.. 사합니다.” 유키씨는 나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활짝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던 준페이의 옆구리를 쿡 찌르자, 녀석은 깜짝 놀라 어버버 거리며 사회를 이어갔다. “이.. 이로써 드래곤 엠블렘의 토벌 미션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강준혁씨의 플레이 데이터는 다음 달 패미통신에 기재하여 유저 분들 모두가 클리어 할 수 있도록 자세히 수록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지금까지 사회의 이미모토 준페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두의 박수 속에 패미통신의 이벤트가 막을 내렸다. 내가 클리어한 드래곤 엠블렘의 카트리지가 유키에게 전달되었지만, 아무도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그녀의 게이머로서 훌륭했기 때문이리라.. 뭐 그녀의 미모 역시 일조한 게 있고.. “저기..” 행사를 마치고 시게씨와 함께 돌아가는 길에 등 뒤에서 유키씨가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곤 조그만 메모지 하나를 건네며 수줍게 입을 열었다. “이거.. 제 연락처인데, 괜찮으시면 연락주세요.. 그럼 실례 했습니다~!!” 그녀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후다닥 달려가 버렸다. 메모지를 손에 든 채로 멀리 사라져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시게씨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아주 한건 제대로 터뜨리셨네요~ 강준혁군? 킥킥” “놀리지 마세요. 시게씨..” “저 외모에 게임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잘해 봐 인마~ 요새 저런 여자가 어딨어~” “하하.. 글쎄요..” “그런데, 대단하긴 대단하다. 드래곤 엠블렘.. 어떻게 플레이어에게 그런 선택권을 넘겨줄 수 있지? 거기다 모든 레벨 디자인을 혼자 만들어 내었고 말야..” “그러게요.. 저도 24장에선 진짜 놀랐어요.” “뭔가 게임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느낀 하루인 것 같아. 한국에 그런 엄청난 녀석이 숨어 있다니. 놀랍기도 하고..” 당신 바로 옆에 있습니다..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풀죽어 있는 시게씨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우리 라멘이나 하나 먹고 갈까요?” “네가 쏘는 거냐?” “아~ 진짜 직장 상사가 쪼잔하게..” “너랑 나랑 월급 차이 얼마나 난다고 그래 강부장~!!” “알겠습니다. 제가 살게요~” “교자(군만두)도 사줭~~~” “으이구~ 진짜..” & -드래곤 엠블렘 본격 해체!! 이제 당신도 클리어 할 수 있다!!!- 나의 플레이 데이터를 등에 업고 대대적인 홍보에 나선 패미통신은 역대 최다 발행 부수를 순식간에 돌파하며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올리기 시작했다. 특히나 준페이는 드래곤 엠블렘에게 40점 만점의 리뷰 점수를 내주면서도 오히려 리뷰 점수가 40점이 한계인 게 안타까울 정도라며 극찬 했기에 그 효과는 대단했다. 그렇군. 이제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클리어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수요가 더 늘어 가겠지? 돈을 버는 건 좋지만, 너무 중고 가격이 치솟아 버리면 다양한 유저가 플레이 할 수 없다. 다음 수를 준비해야겠어.. 도쿄 출장 중에 아키바 뒷골목에 들린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본 뒤에 장막을 걷고 첸드라의 작업장에 들어갔다. “강~ 강~ 강이 왔다.” “오~ 강이다. 우리 열심히 일한다. 보.. 보수 원한다. 마니 원한다.” 오랜만에 작업장에 들리자 첸드라의 동료들이 나를 바라보며 인사하였다. 아직 일본어에 서투른 그들은 말을 버벅이며 히죽 웃어보였다. ──────────────────────────────────── ──────────────────────────────────── EP. 11 : 케이스 바이 케이스 (1) “강~ 강~ 강이 왔다.” “오~ 강이다. 우리 열심히 일한다. 보.. 보수 원한다. 마니 원한다.” 오랜만에 작업장에 들리자, 첸드라의 동료들이 나를 바라보며 인사했다. 아직 일본어에 서툰 그들은 말을 버벅이면서도 기분좋게 웃어 보였다 “알았어요. 알았어. 그런데 첸드라는 어디 갔어요?” “첸드라 밥 먹으러 갔다. 일본 밥 맛있다. 카레랑 섞어 먹으면 최고다.” 음.. 카레라이스 좋지. 나도 배고픈데 밥이나 먹으러 갈까? “어디 식당이에요?” “요기 앞에 있는 메가 카레다. 거기 양 많다. 엄청 배부르다. 그런데 난 두 그릇 먹는다~ 하하” 다른 사람보다 덩치가 커다란 인도인 푸말라가 사람 좋은 인상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이름은 굉장히 왜소한 느낌인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에 첸드라가 식사중이라는 카레집으로 향했다. 가게안으로 들어서니 매콤한 향신료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며 시장기를 돋구기에 충분했다. 그때 가게 구석에 있던 첸드라가 나를 발견하고 양손을 흔들었다. 인도인 특유의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거대한 콧대는 언제 봐도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강준혁이 왔구나~!!” 첸드라는 다른 인도인 친구들보다 일본어가 조금 더 나은 수준이다. “첸드라 오랜만이야~” “우리 열심히 일했어.. 준혁이가 말한 대로 엄청 만들었다. 드래곤 엠..” “쉿!! 쉿!!” 내가 손가락을 입에 대자 첸드라는 서둘러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안녕하십니까. 손님 뭘로 드시겠습니까?” “메가 카레하나 주세요.” “하이~ 메가 카레 보통으로 하나~” 시원시원한 주인장의 목소리에 주방에 있던 직원들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강준혁이 오늘은 무슨 일이야? 카레 먹으러 왔어? 여기 카레 맛있어. 첸드라 좋아한다.” “설마 내가 카레 먹으려고 왔겠냐. 너 보러 왔지?” “첸드라 보러 왔어? 첸드라 일 잘 하고 있는데? 하루에도 친구들과 200개씩 만들고 있다.” “응.. 그걸 이제 하루에 30개만 만들어 줬으면 해.” “3... 30개? 그건 너무 적다. 그럼 강준혁은 우리 이제 필요 없는 거냐? 다른 일본인처럼 우리 버리는 거냐?” “내가 너흴 왜 버려. 대신 다른 걸 좀 만들어 줬으면 해.” “그럼 다행이다. 다시 카레가 맛있어졌다~ 그런데 또 무얼 만드려고 하는 거냐? 나 준혁이랑 일하는 거 재밌다. 뭔가 비밀공작원이 된 느낌이다.” “확장팩을 만들자.” “확장팩.... 음.. 그게 뭐냐?” 그래. 내가 또 그려준다 다 그려줘.. 일본에 와서 말이 안 통하는 건 전부 그림으로 그리다 보니 그림 실력이 나날이 일취월장 하는구나~ 나는 대충 드래곤 엠블렘의 카트리지를 꽂은 공간을 하나 만들어 두고 다시 그 밑에 패밀리에 꽂을 카트리지를 다시 만들었다. “이 위에 DE(드래곤 엠블렘)을 꽂아 넣고, 이걸 통째로 다시 패밀리에 끼우는 거야. 이 확장 카트리지에 기존 게임의 데이터 복구 시스템을 넣어줘.” 현재 드래곤 엠블렘의 시중가격은 2만엔이 넘어 간다. 단일 게임 치고는 너무나 가격이 높다보니 다양한 유저들이 즐길수가 없는게 최대 단점이었다. 하지만 이제 패미통신에서 공략이 나왔고, 공략집을 참고 하면 거의 클리어가 가능할 테니 이제는 카트리지 단가를 낮출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오~ 신기방기하다. 삭제된 데이터를 되살려주는 장치로군~ 알겠다. 이거 쉽다. 발가락으로도 할 수 있다.” 나는 잠시 첸드라가 발가락으로 기판 제작 하는 장면을 상상하다가 속이 미식거려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 그리고 후속편에서 이어지는 작은 시나리오 8편도 함께 넣을 거야. 유통은 전과 마찬가지로 네 친구들을 이용해 중고 시장에 뿌리면 돼.” “오케 오케. 첸드라. 100% 알아들었다. 걱정 마라~” 인도산 공돌이는 그림을 유심히 바라보며 고개 끄덕이더니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착수금을 달라는 뜻이다. 나는 품안에서 돈뭉치가 들어간 흰 봉투를 꺼내어 첸드라에게 건네주었다. “강준혁은 신용이 확실하다. 그래서 첸드라는 강준혁이 좋다.” “자~ 손님 메가 카레 나왔습니다~!!” 투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내 앞에는 세숫대야만한 그릇에 담긴 카레가 놓였다. 뭐냐.. 이 어마어마한 카레 량은? “저기, 전 보통으로 시켰는데요?” “네~ 메가 카레 보통입니다. 오오모리(곱빼기)는 저건데..” 나는 옆에서 식사중인 사람의 그릇을 바라보고 식겁했다. 그가 고개를 파묻고 수저질을 하고 있는 그릇은 내거보다 1.5배는 더 커보였기 때문이다. 잠시 숟가락은 든 채 이 음식의 어디서부터 공략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 첸드라가 킥킥 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거 하나만 먹으면 하루종일 배가 고프지 않다~ 푸말라는 이거 두 그릇 먹는다. 얼른 먹어라 강준혁.” 아.. 당분간 카레가 싫어질 것 같아.. & 인도산 공돌이가 만들어낸 확장 카트리지로 인해 한없이 치솟아 오르던 드래곤 엠블렘의 가격이 내가 원하던 적정선까지 떨어지기 시작했다. 최종적으로 중고 거래에서 판매하는 가격은 9800엔. 안에 들어간 커스텀 칩의 가격 때문에 일반적인 게임 가격 보단 높게 형성 되었지만, 패미통신에서 드래곤 엠블렘 가격의 비밀까지 공개하는 바람에 오히려 소비자들의 납득을 살 수 있었다. 물론 그대로 가격이 계속 치솟았다면 문제가 있었지만, 첸드라가 만들어낸 확장 카트리지를 이용해 게임 샵에서 300엔의 가격으로 게임 데이터를 초기화 시켜주고 있었다. 초기에 게임 샵은 단일기기로 플레이가 불가능한 드래곤 엠블렘의 확장 카트리지를 못미더워 했지만, 지금까지 플레이 데이터를 잃고 보관 중이었던 플레이어들이 너도나도 데이터 복구를 위해 찾아 들자 부수입이 짭짤했는지 무리 없이 확장팩을 받아주었다. 그리고 게임 클리어 이후 부가적인 시나리오를 즐길 수 있다는 것에 비교적 저렴한 가격의 확장 카트리지가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나와 군페이씨, 그리고 시게루씨는 또다시 카마우치 사장 앞에 불려 와야 했다. “대체 이게 뭔 사단이야!!! 이건 완전 우리 민텐도가 한국인 개발자 녀석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꼴이잖아!!” 그러자 언제나처럼 안경을 쓸어 올리며 군페이씨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드래곤 엠블렘의 효과로 저희 패밀리의 판매량이 크게 증가한건 사실입니다. 특이 이번에 나온 확장 카트리지는 같은 엔지니어로서 감탄할만한 확장 장치였습니다.” “맞아요. 그런 방식으로 출시된 게임의 수명을 더 늘릴 줄이야.” “내가 지금 그 한국인 개발자 칭찬하라고 너희 불러 모은 줄 알아!? 대책을 세워야 할 거 아냐 대책을!?” 그때 가만히 서있던 내가 입을 열었다. “굳이 대책이 필요한가요..?” “뭐? 그럼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자고? 우리한테 로열티를 지불하지도 않은 게임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데, 그걸 그냥 두 눈 뜨고 멍하니 지켜만 보자고?” “이제와 대책을 세우기에 드래곤 엠블렘은 너무 깊숙이 치고 들어왔죠. 이미 중고 유통이 활성화된 마당에 그 게임의 제작자를 찾아내어 도려내기 보단 오히려 보호해야하는 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오히려 그 녀석을 보호하자고? 우리가 왜!?” “그러다 드래곤 엠블렘이 NEGA 디스크로 가버리면 어쩝니까?” 내가 꺼낸 말 한마디에 카마우치 사장을 비롯해 모두 입이 쩍 벌어졌다. 아무래도 모두들 거기까진 상상을 해보지 못한 모양이었나 보다. ──────────────────────────────────── ──────────────────────────────────── EP. 11 : 케이스 바이 케이스 (2) “그러다 드래곤 엠블렘이 NEGA 디스크로 가버리면 어쩝니까?” 내가 꺼낸 말 한마디에 카마우치 사장을 비롯해 모두 입이 쩍 벌어졌다. 아무래도 모두들 거기까진 상상을 해보지 못한 모양이었나 보다. 솔직히 이건 드래곤 엠블렘의 개발자로서 카마우치 사장에게 전하는 일종의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시게씨는 내 말을 이해하고는 서둘러 카마우치 사장을 말렸다. “새.. 생각해보니 강군 말이 옳아요. 그런 마케팅 실력과 개발 능력이라면 언제 NEGA 디스크 쪽으로 옮겨가도 이상할 게 없죠. 물론 저희 민텐도에서 만드는 퍼스트 파티 게임들이 훌륭하지만, 최근에 서드 파티 제작사를 무시할 수는 없어요. 카와타의 벌룬 파이트나 이얼 쿵푸, 서커스. 특히 드래곤 워리어나 파이널 프론티어 같은 메이저급 회사들의 반발도 생각해 둬야합니다..” “그러니까 괜히 이름 있는 서드 파티 게임 하나 잘 못 건드리면 우리 민텐도의 이미지를 되려 해칠 수도 있다는 말이로군.. 이런..” “드래곤 엠블렘은 이미 다른 게임 회사에서도 최고의 게임이라 극찬을 받고 있어요. 시대를 앞서간 게임이라고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우리 민텐도에서 노골적으로 배척하는 모습을 보이면 좋을 게 없을 듯합니다.” “드래곤 엠블렘은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았지만, 그 것으로 인해 패밀리 게임의 퀄리티가 굉장히 올라갔다는 평도 있어요. 일단 우리 패밀리를 통해 드래곤 엠블렘이 나온 것만으로도 축복이라 생각해야합니다.” “끄응, 제기랄.. 모른 척 눈 감아줘야 하다니..” 그때 시게씨가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오히려.. 홍보를 해주는 건 어떨까요?” “응..? 눈 감아 주는 것도 모자라 홍보를 해주자고??” “사실 최근에 카트리지 초도 수량이나, 로열티를 올린 것에 대하여 서드 파티로부터 조금씩 불만이 새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오히려 다른 게임 제작자들과 함께 드래곤 엠블렘을 같이 지지해 준다면 게임 업계를 알아주는 콘솔 기업으로 인식이 확고히 될 것 같은데..” & 그로부터 며칠 뒤.. “패미통신 기자. 이시모토 준페이입니다. 오늘 카마우치 사장님께서 인터뷰를 요청하셨는데요. 드래곤 엠블렘의 제작자에게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고..?” “네, 그렇습니다. 최근에 플레이 해본 게임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게임이 아닐까 싶네요.” “아~!! 사장님께서도 드래곤 엠블렘을 즐겨 보셨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리고 드래곤 워리어와 파이널 프론티어도 재밌게 즐겼죠. 최근에 드래곤 엠블렘을 플레이 하며..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우리 패밀리를 이끄는 게임의 힘은 퍼스트 파티가 아닌 서드 파티의 몫이라는 걸 말이죠. 현재 일본을 대표하는 게임인 드래곤 워리어 역시 우리 민텐도가 아닌 피닉스사에서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최근에 화제인 드래곤 엠블렘도 마찬가지지요.” “그렇습니다. 슈퍼 마리지와 카린의 전설을 만든 민텐도의 퍼스트 파티 게임은 훌륭하지만, 최근에 서드 파티에서 개발 된 게임들의 퀄리티도 무시 못 할 수준이긴 하지요.” “그렇습니다. 저희 민텐도와 게임 회사는 앞으로도 함께 게임계를 이끌어갈 공생 관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 민텐도는 카트리지 초도 물량의 폭을 절반으로 낮추고 로열티의 지불 건도 일부 낮추기로 결정했습니다.” “이건 게임 업계 쪽에서 엄청 반가워할 소식이군요.” “더 많은 유저들이 드래곤 엠블렘과 같은 좋은 게임을 즐겨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힘든 결정을 내렸습니다. 또한 훌륭한 게임을 만들어 주신 드래곤 엠블렘 개발자님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꼭!! 후속작도 저희 민텐도의 패밀리로 내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카마우치 사장은 우리를 대할 때완 다르게 굉장히 엄숙한 분위기에서 인터뷰를 마쳤다. 특히나 드래곤 엠블렘을 NEGA에 빼앗길까봐 덧붙인 마지막 멘트는 가관이었다. 나와 시게씨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인터뷰를 끝까지 지켜 본 뒤에 동시에 본사 뒷마당으로 튀어 나갔다. “으하하 너 사장님 표정 봤냐!? 크킥킥킥~!!” “아~ 저도 웃겨 죽을뻔했어요.” “진짜 드래곤 엠블렘이 대단하긴 대단하다. 사장님이 저 정도로 간곡히 부탁하게 만들 줄이야.” “그러게요. 덕분에 카트리지 초기 물량 배급도 원활해 졌고, 로열티도 줄었으니 게임 업계도 좋아하겠군요.” “그만큼 경쟁이 더 치열해지겠지. 나도 슈퍼 마리지3의 개발을 서둘러야겠어..” “2가 꽤나 저조했었죠..?” “그건.. 내가 좀 미친 짓을 하는 바람에..” 비운의 게임 슈퍼마리지 2. 모두가 알고 있는 슈퍼 마리지 시리즈 중에 최고를 꼽으라면 패밀리로 나왔던 1과 3를 최고로 치는 올드 유저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속에서 2는 의외로 기억이 모호하다. 나오긴 나왔던 건지, 나왔다면 어떤 식의 게임이었는지.. 사실 1의 성공에 힘입어 상승세를 몰아 개발한 슈퍼 마리지2는 결과적으로 보면 최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스트레스 제조기였다. 당시 게임이 너무 쉽다는 말에 자극을 받은 시게루씨는 고난이도 슈퍼 마리지 제작에 들어갔는데 그래픽의 변화도 거의 없고, 거기에 난이도 조절까지 실패하는 바람에 일본 유저들로부터 차갑게 외면 받고 만 것이다. 한편 민텐도 미국지사에서는 슈퍼 마리지2의 발매를 손꼽아 기다리던 중이었는데, 일본에서는 반응이 좀 밋밋하고, 자기가 봐도 이건 아니다 싶었던 시게루씨는 자신이 만든 슈퍼마리지에 엄청난 짓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쌩뚱 맞은 게임에 마리지의 캐릭터만 입혀 버린 것이다. 그 쌩뚱 맞은 게임이 대체 어떤 게임이냐면.. 아라비안 나이트 분위기 속에서 사막의 무를 뽑아 적에게 던지는 호키호키 패닉이라는 게임이었다. 결국 슈퍼 마리지 USA라는 이름으로 출시했지만.. 유저들은 대체 왜 적을 밟아 죽이던 마리지가 무를 뽑아 적에게 던지게 된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이건 시게루씨가 만든 게 아닐 거라는 루머가 나돌 정도로 흑 역사에 남게 되었다. “뭐 이번에는 다른 게임 개발도 없으니 3는 진짜 확실히 만들어 봐야지..”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크으~ 강군이 도와준다면야 최고지~!! 우리 점심으로 우동이나 먹으러 갈까? 거기 가서 후속작 얘기 좀 해보자.” “어? 그럼 이번엔 시게씨가 쏘나요??” “... 너 은근히 뒷 끝 있다.” “교자도 사줘요~” “알았다. 알았어~!!” & 회사 근처의 우동집에서 나와 시게씨는 주인장이 내어준 따듯한 물로 목을 축였다. 조그만 가게지만 상당히 고풍스러워 보이는 인테리어에 내부를 둘러보자 벽면에 3명의 남자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아무래도 3대째 가업을 이어서 하는 전통 어린 우동 집인 모양인데, 제법 맛이 기대가 되는군. 그때 시게씨가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 연락은 해봤냐?” “음? 무슨 연락이요?” “으이구.. 이 일벌레야.. 유키씨 말야. 유키씨!!” “아아..” “아아..? 너 연락 안 해봤지?” “네. 요새 도쿄 갈 일이 없어서..” “야이~ 미친놈아. 넌 손가락이 부러졌냐. 전화를 여기서 하면 되지 꼭 도쿄까지 가서 하려고 그래!? 그럴 거면 그 연락처 나 줘~!! 나도 장가 좀 가자.” “에이~ 딱 봐도 시게씨랑 나이차가 몇 살인데, 그런 소리를~” “그러니까 연락이나 한번 해보라고~ 드래곤 엠블렘 행사 이후로 벌써 1주일이나 지났다. 연락처 주고 기다리는 사람 생각도 해줘야지.” “일이 바쁘니까 그렇죠. 안 그래도 드래곤 엠블렘 건은 한숨 돌렸으니 전화 해볼까 생각 중이었어요.” “그래 잘 생각했다. 일도 일이지만, 자기 생활도 중요한 거니까~ 그럼 이제 슈퍼 마리지 3 얘기 좀 해보자.” 젠장.. 자기 생활도 중요하단 사람이 또 일 얘기네.. “저기 식당에 왔으니 주문은 좀 하고 얘기 하죠.” “아, 맞다. 주인장~ 여기 뭐가 맛있어요? 키츠네? 타누키?” “우리 가게 간판 메뉴는 타누키지~” “그럼 타누키로 2개 주세요~” 뭐지? 나에게 선택권은 없는 건가? 나는 서둘러 주인장에게 외쳤다. “아뇨 전 키츠네로 주시고, 교자도 같이 주세요~!!” “허이~ 여기 타누키 하나, 키츠네 하나 교자 하나~!!” 주인장의 외침에 주방에서 우렁찬 대답이 흘러나왔다. 일본의 우동은 면발이 매우 쫄깃해서 나도 즐겨 먹는 편이었다. “이런 내가 교자를 깜빡했군. 강군은 타누키(너구리) 인줄 알았더니 은근히 키츠네(여우)였구만~” 타누키는 우동 위에 튀김 부스러기 얹은 우동이었는데, 내 입맛에는 별로 맞지가 않았다. 차라리 간장과 미림으로 간을 하고 유부를 얹어 주는 키츠네 우동을 더 좋아했다. 시게씨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살짝 웃어보이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강군이 생각하기에 슈퍼 마리지의 최대강점이 뭐라 생각하나?” “음.. 일단 무만 안 뽑으면 절반 이상은 히트칠거 같아요.” 그러자 시게씨의 얼굴이 팍하고 찌그러졌다. “이제 무 안 뽑아.. 평생 안 뽑을 거야. 내가 그것 때매 오뎅 먹을 때 무도 일부러 빼고 먹고 있다고!!” 아무래도 슈퍼 마리지 2의 충격이 컸나보군. 나는 속으로 킥킥 거리며 대답했다. “슈퍼 마리지야 점프죠. 동킹콤에서 마리지의 별명도 점프맨이었잖아요.” “그렇지. 점프.. 점프를 더 극대화 시켜야해.” “어떤 식으로?” 시게루씨는 항상 들고 다니는 노트에 간단하게 마리지를 그려 넣은 뒤에 연필로 캐릭터를 톡톡 쳐대며 말했다. “가령 어떤 물체를 밟으면 더 높이 뛸 수 있다던가.. 그 왜~ 공터에 애들이 하는 봉봉이처럼. 덤블링을 할 수 있는 요소라던가.. 아니면 이런 식으로 하얀 천사 날개를 달아서 파닥 거리면서 내려온다던가.” “음.. 콧수염 난 이탈리아 아저씨한테 새하얀 날개라니.. 심히 변태스럽네요.” “... 그렇지? 강군은 아닌 건 아니라고 돌 직구처럼 얘기해줘서 이해하기가 참 쉬워. 가끔 가슴이 아프기도 하지만..” 그때 주인장이 우동 두 그릇을 우리 앞에 내려놓았다. “자~ 타누키와 키츠네 우동입니다. 맛있게들 드시오~” “아, 네 잘 먹겠습니.. 헐~ 어르신 우동에 들어간 고명이 엄청 귀엽네요.” “그치? 우리 손녀가 우동을 좋아해서 오뎅을 너구리 모양이랑 여우 모양으로 잘라 줬는데, 반응이 좋더라구~ 어때? 귀엽지?” “애들이라면 완전 좋아할만 하네요. 아저씨 머리 좋으신데요?” “먹고 살려면 끊임 없이 머리를 굴려야하지. 이런 우동 가게도 벌써 100년이 다되어 가고 있어. 그동안 변화하는 손님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2대 째에는 카레우동과 튀김우동이 나왔지. 더 이상 소박한 우동 하나만으론 먹고 살기 힘들거든? 자~ 식기 전에 어서들 드시게~” “네~ 잘 먹겠습니다.” 나무젓가락을 쪼갠 뒤에 면발을 휘젓고 있는데, 옆에 있던 시게씨가 가만히 우동을 들어다 보며 혼자서 무언가를 중얼 거리고 있었다. “타누키.. 타누키.. 마리지.. 타누키.. 마리지..” 그리고 잠시 후 노트위의 마리오 뒤에 뭉실뭉실한 너구리 꼬리를 하나 그려 넣더니 외쳤다. “너구리 마리지다!! 어때!? 버섯 말고 나뭇잎을 먹어서 둔갑하는 거야. 여기 이 꼬리를 막 흔들어서 하늘을 날수도 있고~!!” 전에 내가 좋아하는 국밥을 파충류 악당으로 만들어 버리고, 복숭아 디저트를 피치 공주로 둔갑시켜 버리더니, 이번엔 우동 집이냐.. 아무튼 이 사람이랑은 밥도 잘 못 먹겠네.. & 그날 밤. 회사에서 퇴근 한 나는 내 방 전화기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전화기 앞에는 유키씨의 연락처가 적힌 종이 한 장이 놓여있었다. ──────────────────────────────────── ──────────────────────────────────── EP. 11 : 케이스 바이 케이스 (3) 그날 밤. 회사에서 퇴근 한 나는 내 방 전화기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전화기 앞에는 유키씨의 연락처가 적힌 종이 한 장이 놓여있었다. “와~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 되냐!?”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전화기 앞에서 찌질 거린다고 생각하겠지만, 2015년에 살았던 나에게 남에 집에 전화를 건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핸드폰이라도 있었다면 먼저 문자를 보내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이렇게 다짜고짜 전화부터 해야 하다니.. 잠시 수화기를 들고 망설이던 나는 천천히 전화기에 달린 다이얼을 돌려 보았다. 차르륵 소리와 함께 태엽이 감아 돌아가는 소리가 울리고, 이윽고 수화기에서 신호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이.. 일단은 젊은 여성의 목소리다..!! 나는 잠시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저기 유키씨.. 인가요?” “아, 유키요? 전 유키 언니인데, 잠시만요~” 윽.. 언니가 있었구나.. 잠시 수화기 너머로 유키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이시카와 유키입니다.” “아.. 저.. 그게 전에 드래곤 엠블렘 행사장에서 봤었죠? 강준혁이라고 합니다.” “아~!! 준혁씨군요~ 안녕하세요.” “네, 일이 바빠서 연락이 늦었네요.” “그랬구나.. 전 연락이 없어서 그냥 잊어버리신 줄 알았어요.” “아.. 아뇨 잊은 건 아니고, 갑작스레 받은 연락처라 좀 어색하기도 하고..” “저도 그때 엄청 용기 내서 연락처 드린 거거든요?” “미안해요. 대신 다음에 도쿄 가면 밥 한 번 살게요.” “언제 오시는데요?” 보통 일본인이라면 이런 말에는 그냥 ‘아니에요~ 괜찮습니다’라고 할 법한테 의외로 스트레이트로 물어보는군. 마침 파이널 프론티어의 차기작으로 펜타곤 소프트에 볼일이 있던 터라 나는 다음에 도쿄에 가기 전에 연락하겠다고 약속 한 뒤에야 수화기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아.. 이거 참 83년으로 넘어와도 여자랑 대화하는 건 은근히 긴장되네.. 본사의 여직원들이랑 대화하는 건 상관없는데.. 참 희한해..”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컴퓨터의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삑~ 디리리리릭~~ 이 시대의 컴퓨터는 참 재밌다. 나도 처음에 윈도우 형식이 아닌 프롬프트 형식의 PC를 사용했을 때에는 모든 게 굉장히 어색하게 느꼈지만 지금은 완벽히 익숙해졌다. 프롬프트 명령으로 현재 작업 중인 코딩을 불러온 뒤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드래곤 엠블렘의 확장 시나리오 계획은 이미 발매 전부터 생각해두었던 터라 무리 없이 확장 카트리지에 이식을 완료했고, 최근에 나는 또 다른 게임을 만들고 있었다. 이번 장르는.. 탄막 슈팅 대전 액션? 정도라 정해두었다. 드래곤 엠블렘은 내가 만들었지만 내 이름까지 공표된 것은 아니었기에 이번에 만드는 작품은 민텐도 라이센스로 내 이름을 걸고 개발할 생각이었다. & 며칠 후. 민텐도 본사 회의실에서 새로운 게임 제작에 대한 프리젠테이션이 열렸다. 발표회에는 민텐도 직원뿐만 아니라 패미통신에서 나온 기자들도 몇몇 참석해 있었다. 최초 발표는 시게씨의 슈퍼 마리지 3였다. 게임의 배경 디자인은 단막극의 커튼콜을 차용해 한편의 연극을 보는 듯한 독특한 연출을 선보였다. 특히나 저번에 우동 사건 이후로 너구리 꼬리를 달고 등장한 슈퍼 마리지의 모습은 발표회장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도 귀엽다는 평이 자자했다. 너구리 마리지는 일정 스피드 이상 달린 뒤에 점프 버튼을 연타하면 하늘 높이 날아갈 수 있었는데, 깜짝 시연을 보이자 다들 날아오르는 마리오의 모습에 자지러지듯 웃어대었다. 시게씨는 이 요소를 이용해 각 스테이지의 랜드마다 숨겨진 루트를 만들어 다른 스테이지로 건너뛰거나 특이한 아이템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차후 마리지 시리즈의 근간을 이루는 아이템은 3에서 죄다 쏟아져 나오는구나.. 너구리로 변신하는 나뭇잎이라던가, 스테이지 마다 숨겨진 루트라던가..’ 마지막으로 너구리의 변신 묘기로 불상으로 변하는 마리지를 끝으로 시게씨의 프리젠테이션이 종료 되었다. “좋아~!! 아주 좋아. 그래 이런 게 슈퍼 마리지지~!! 시게 녀석이 드디어 정신 차렸군.” 카마우치 사장은 흡족한 표정으로 연신 물개 박수를 쳐대었다. 프리젠테이션 사회를 맡고 있던 군페이씨는 잠시 좌중의 분위기를 진정 시킨 후 다음 게임을 소개하였다. 다음 게임은 현재 아케이드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게임인 혼두라의 패밀리 버전. 그리고 더블 드래곤이 소개 되었다. 둘 다 2인용 플레이가 가능하고 현재 아케이드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작품이었기에 회장의 분위기는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패미통신의 기자 준페이가 군페이씨에게 물었다. “혹시 예전에 카린의 전설에서 발표하신 신형 휴대용 게임기의 발매는 언제입니까? 가격은요!?” 그러자 군페이씨는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번 연말 크리스마스 시즌에 발매를 검토 중입니다. 유저들의 기대치가 높은 만큼 저희 민텐도에서도 최선을 다해 가격을 조정 중입니다만 아직 확실히 정해진 가격은 없습니다. 아마 다음 달 정도즈음 자세한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을 듯하군요.” “오오오!!!” “그럼 다음 게임을 마지막으로 이번 신작 발표회를 마치게 되겠는데요. 이번 신작 게임을 담당하는 디렉터는 저 역시 매우 기대가 큰데요.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는 오리사냥의 아이디어를 최초로 제안 했고, 시게씨와 함께 여러 민텐도 게임의 보조 디렉터로 활약해온 저희 민텐도의 숨겨진 개발자. 강준혁 군을 소개합니다.” “오오~!!! 덕 헌트의 최초 아이디어 제공자라고?” “시게씨 말로는 굉장히 유능한 친구라던데, 한국인이라더군요.” “한국인..? 그러고 보면 드래곤 엠블렘의 기획자도 한국인이라고 했었지?” 군페이씨의 소개에 회장 안이 수근 거렸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플로피 디스켓을 꺼내들고 단상에 올랐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많은 분들이 와주신 가운데 저의 첫 작품을 소개할 수 있어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군페이씨의 소개대로 저는 아직까지 보조 역할만 수행해 왔을 뿐 메인 디렉터로서 실적을 올릴만한 게임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최근에 드래곤 엠블렘이 큰 화제가 되었지요? 저 역시 그와 같은 한국인으로서 패밀리 게이머들을 만족할만한 게임을 만들고 싶어 기획한 게임입니다. 장르는 ‘탄막 슈팅 대전 액션’이라는 다소 생소한 장르입니다.” “탄..막 슈팅.. 대전 액션? 뭐지 그게? 슈팅인가?” “액션 아냐? 그런데 대전이면 둘이서 싸우는 건가?” 애매모호한 장르 명에 사람들의 수근 거림이 들려오자, 나는 플로티 디스켓을 시연 장치에 꽂은 뒤에 전원을 올렸다. “혹시 직접 체험해 보실 분 계신가요?” 그러자 뒤에 앉아 있던 준페이가 재빨리 손을 번쩍 들었다. “이시모토 준페이씨. 앞으로 나와 주세요.” 준페이는 머쓱한 표정으로 웃으며 단상으로 나왔다. 사실 행사 전 준페이를 만났을 때 사전에 고지해 두었다. 단상에서 체험자를 부르면 제깍 손들고 튀어 나오라고.. 물론 다른 사람도 괜찮긴 하지만, 너무 쉽게 죽어버리면 재미가 없기에 어느 정도 난이도에도 시연을 해보일 수 있는 준페이가 제격이었다. “앞에 놓여 있는 패드를 들어 주시고, 우선 데모로 만든 첫 번째 스테이지를 즐겨주세요. 아~ 게임의 제목은 사이킥 배틀입니다.” “사이킥 배틀? 초능력 싸움이라.. 뭐 나쁘지 않은데?” 민텐도의 로고가 지나고 사이킥 배틀이라는 문구와 함게 경쾌한 BGM이 흐르자 회장안의 사람들의 관심이 점점 오르기 시작했다. 준페이가 스타트 버튼을 누르자 매력 적인 3명의 여 주인공들이 떠오르며 캐릭터 선택이 이어졌다. “여자!? 슈팅 게임이라 하지 않았나?” “파일럿일 수도 있잖아.” “아.. 그렇구나..” 이때만 해도 슈팅 게임은 1945나 트윈디의 영향으로 무조건 비행기를 타고 싸워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는데, 뜬금없이 미모의 여성들이 나오자 파일럿으로 인식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준페이가 고른 캐릭터는 그대로 멋진 컷신과 함께 푸른 하늘을 날아올라 스테이지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아!! 이래서 초능력자라는 거군!!” 사이킥 배틀은 횡 스크롤 타입의 슈팅 게임이었다. 굳이 비교해 보자면 오락실에서 한번 쯤 플레이 해보았던 ‘텐가이’가 롤 모델이랄까? 준페이는 스무스하게 앞 뒤로 움직이는 캐릭터를 조작하다가 A버튼을 누르자 푸른 빛깔의 미사일이 적에게 날아갔다. “흐음.. 스테이지로 진입하는 연출은 색다른데, 내용은 평범한 슈팅 게임이군요.” 역시 이 녀석은 친구가 만든 게임도 대놓고 까는구나. 하긴 그래서 더 믿음이 가긴 하지만.. “조금 더 플레이 해보세요.” 슈팅 게임은 딱히 공략이랄 게 없다. 적이 쏘아대는 미사일을 피함과 동시에 격추시키면 그만인 단순한 플레이 방법으로 누구나 손쉽게 적응이 가능했다. 주인공을 노리는 적들 역시 초능력자들도 화면은 순식간에 여러 초능력자들이 몰려와 수많은 탄막을 쏘아 대고 있었다. “어... 흐어어..!?” 처음에 한 두 개 날아오는 탄막을 가볍게 피해내던 준페이는 점점 화면 가득 차오르는 탄막을 바라보며 이상한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하긴 전에도 게임 센터에서 이런 신음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었지. 준페이 녀석은 무언가 한 가지에 엄청 몰입하게 되면 저도 모르게 희안한 신음 소리를 내었다. 내 프리젠테이션은 한 남자의 괴이한 신음소리를 제외하고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사이킥 배틀의 모든 탄막의 속도는 일정치가 않았다. 어떤 탄막은 빠르게 치고 들어오는가 하면 어떤 탄막은 숨 막히게 느리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게 화면 가득 차오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으어어!!! 으어아아아!!!!” 준페이는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자신에게 날아오는 모든 탄막을 기가 막히게 피해내고 있었다. “오~~ 저거 대단한데? 저 사람 패미통신 기자랬나? 게임 내용도 훌륭하지만 어떻게 저 수많은 탄막을 피할 수 있지?” “그.. 그러게? 난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인데..?” “으아아~!! 폭탄!! 폭탄!! 이거 폭탄 없어요?” 더 이상 피할 공간을 찾지 못하자 준페이는 나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슈팅게임에서 폭탄은 순간 캐릭터에게 무적시간을 내려주는 긴급 회피 용도로 자주 사용되었다. “십자키를 한바퀴 돌리면서 B버튼.” “시.. 십자키를 한바퀴?” 그렇다.. 사이킥 배틀은 최초의 커멘드 입력 슈팅 게임이었다. ──────────────────────────────────── ──────────────────────────────────── EP. 11 : 케이스 바이 케이스 (4) “십자키를 한 바퀴 돌리면서 B버튼.” “시.. 십자키를 한바퀴?” 그렇다.. 사이킥 배틀은 최초의 커멘드 입력 슈팅 게임이었다. 내 조언에 따라 준페이가 커멘트 입력을 마치자. 파앙!! 경쾌한 효과음이 터지며 캐릭터 주위로 생성된 푸르스름한 베리어가 적들의 탄막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우와아!!” 기대 이상의 연출에 게임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잠시 한숨 돌린 준페이는 재빨리 비어있는 공간으로 빠져 나와 다시 게임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또 다시 밀려드는 탄막에 둘러싸인 준페이는 이상한 신음소리를 내며 탄막을 피해내기 시작했다. 사이킥 배틀 1스테이지의 탄막은 작고 동글동글한 것과 얇고 길다란 것 두 가지가 각기 다른 스피드로 플레이어에게 향하고 있었다. 준페이 역시 처음 해보는 플레이에 모든 탄막을 전부 피할 순 없었기에 부분부분 날아오는 탄막은 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그때 게임을 바라보던 한 직원이 말했다. “적의 공격을 받아도 쉽게 죽지 않네? 화면 상단에 있는 게 체력 표시인가?” “사이킥 배틀은 일반적인 슈팅 게임과는 다르게 적의 공격을 한번 맞았다고 폭사하는 건 아닙니다. 격투 게임처럼 HP가 있고, 특수 공격을 사용하는 SP 게이지가 있습니다. SP게이지는 적을 격추시키거나 아이템을 먹어 회복할 수 있어요. 준페이씨 십자키를 앞 뒤 앞 뒤로 이동한 뒤에 B버튼을 눌러 보세요.” 준페이는 나의 조언에 따라 캐릭터를 앞뒤로 움직이며 B버튼을 눌러보았다. 그러자 캐릭터 주위로 여러 다발의 레이저 빔이 기괴한 각도로 꺾어져 나가며 적들을 일순간에 소멸 시켜버렸다. “오오!!! 멋진데!?” “다음은 상 하 상 하 B버튼” 쩌엉!!! 캐릭터에서 뿜어져 나온 빛과 함께 화면 가득 매워져 있던 탄막들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준페이의 플레이를 지켜보는 사람들까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정도 플레이 감각을 익힌 준페이는 이후 능숙하게 SP를 채워나가며 스테이지 첫 번째 거대한 곤충 모양의 보스와 대적하게 되었다. 탄막을 피해야하는 슈팅게임에서 거대한 보스가 주는 위압감 타 게임과 비교를 불허할 정도였다. 보스의 몸집이 커진 만큼 플레이어가 피해야할 공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 보스는 좀 사악한 게.. “커헉!! 이게 뭐야!!!” 미사일이 알을 까거든.. 처음엔 서서히 플레이어의 숨통을 조여 오듯 날아오던 거대한 탄막은 일정 지점에서 사방으로 퍼지게 설계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시연용 컴퓨터 CPU에 엄청난 과부가가 걸리며 급속도로 플레이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작은 탄막이라도 날아가는 궤도를 설정하고, 플레이어에 닿았을 경우 데미지를 깎아내야 하는 타격 판정이 존재했기에 수많은 탄의 표현은 시스템에 커다란 무리를 주었기 때문이다. 준페이는 이를 악물은 상태로 천천히 탄막을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답답하게 느껴지면서도 짜릿한 스릴로 다가오고 있었다. “오오.. 마치 슬로우 모션 같군..” 그리고 더 이상 탄막 수의 표현이 불가능 한 한계에 달한 시점. 표현 가능한 탄막의 수를 벗어 날 경우를 대비해 나는 한 가지 장치를 해두었다. 거대한 곤충 보스의 입이 쩍하고 벌어진 것이다. “뭐야!?” 콰오오옹~!!! 화면 절반 이상을 삼켜 버리는 거대한 레이저 포로 인해 탄막은 말끔히 사리지고, 덤으로 어느 정도 HP를 유지했던 쥰페이의 캐릭터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의 비명소리와 함께.. “그으아아아!!” 퍼엉~~!!! GAME OVER. 결국 준페이는 첫 번째 보스를 클리어 하지 못하고, 게임을 종료 당했다. 이 게임은 HP가 있는 대신 한번 목숨을 잃으면 그대로 끝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슈팅 게임에서 첫 스테이지도 클리어 하지 못하다니..” 준페이는 꽤나 충격을 먹었는지 허탈한 표정으로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준페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어보였다. “충분히 잘하셨습니다. 솔직히 보스를 깨셨으면 좀 곤란 했거든요. 아직 개발 진행이 첫 스테이지만 준비한터라 저도 설마 클리어 하는 줄 알고 조마조마 했습니다.” 그런데 시연이 끝났는데 왜 이리 조용하지? 나는 그래도 박수나 환호 정도는 나올 줄 알았는데, 살짝 고개를 돌려 참석자들은 바라보니 다들 하나 같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기.. 그럼 이상으로 사이킥 배틀의 발표회를 마치겠..” “우와아아아아!!!!!!!!!” 마치 정지되었던 시간이 풀린 듯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시연대 앞에 앉아 있던 준페이 역시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박수를 쳐대고 있었다. “이게 처음으로 만든 게임이라니 믿을 수가 없군!!” “완전히 새로운 슈팅 게임을 보는 것 같았어!!” 사회를 보고 있던 군페이씨 마저도 나에게 다가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강군이 만드는 거라면 엄청난 녀석이 나올 줄 알았지. 대단해. 깜짝 놀랐어~!!” “하하.. 감사합니다. 군페이씨.” 하지만 그렇게 모두가 환호하는 가운데 단 한명은 웃고 있지 않았다. 의자에 기댄 채 무뚝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시게루씨는 잠시 후 발표 회장을 나섰다. 민텐도의 신작 게임 발표회는 대성공이었다. 카마우치 사장은 슈퍼 마리지 3와 사이킥 배틀을 본 참석자들의 반응에 성공을 직감했는지 매우 흡족해 하고 있었다. 이어서 참석자들이 자유롭게 신작 게임을 시연해 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는데, 재밌는 것은 초기에 큰 호흥을 얻었던 슈퍼 마리지 3보다 사이킥 배틀 쪽에 시연자가 더 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빗발치는 탄막 슈팅이 참가자들의 도전 의식을 자극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사이킥 배틀 첫 스테이지의 반도 채 못가서 게임 오버를 당하기 일 수 였다. “이거 봐~!! 내가 못한 게 아니라니까? 이 게임이 더럽게 어려운거지..” 준페이는 무너지는 플레이어들을 바라보며 보스랑 대적 했던 자신이 자랑스러운지 생글 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래서 너한테 시연하라고 한 거야. 플레이어가 너무 쉽게 죽어버리면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전에 끝나버리니까.” “너 이 녀석. 날 이용 했구나~!!” “뭐 친구끼리 돕고 사는 거지. 그걸 또 이용했다고 생각 하냐? 너도 재밌게 했잖아.” “음~ 솔직히 짜릿하긴 하더라. 사람들 반응도 좋고.. 내가 보기엔 처음에 발표한 슈퍼 마리지3보다 호흥도가 더 나은 것 같은데..?” 그러자 근처에 있던 민텐도 직원 몇몇이 준페이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민텐도 내의 개발자들에게 쿠마모토 시게루씨는 거의 신과도 같은 존재였으니까.. 준페이는 따가운 눈총에 애써 고개를 돌리며 나에게 말했다. “바.. 밖에서 바람이나 좀 쐴까? 담배나 한 대 태울겸?” “그래. 커피나 한잔 하자.” 잠시 후 본사 건물 바깥으로 나오자 준페이는 이제야 살 것 같다는 표정으로 긴 숨을 내쉬었다. “푸하~ 분위기 살벌하네.” “그러게 왜 그런 소리를 했어~ 킥킥” “아니, 솔직히 말해 그렇잖아. 내 눈이 옹이구멍도 아니고, 딱 봐도 이렇게 티가 날 정도인데?” “그만 해라. 누가 듣겠다.” 자판기 커피를 건네자. 준페이는 툴툴거리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런데 준혁아. 네가 만든 사이킥 배틀 말인데, 네가 소개할 때는 대전 액션이라 했잖아. 그런데 플레이 스타일은 일반적인 슈팅이랑 크게 다른 점은 없던데? 커멘드 요소는 신기 하긴 했지만..” “아, 그게.. 아직 구현단계지만, 캐릭터 두 명이서 대전도 가능하게 만들 거거든” “아~ 그렇군. 그런데 그러면 너무 캐릭터 수가 적지 않나? 고작 3명뿐이잖아.” “두번째 스테이지 부터는 보스 캐릭터가 주인공처럼 초능력자라 클리어 하면 사용할 수 있게 배치해두려고, 최종적으로 6명까지 늘어 날거야.” “조작 캐릭터가 늘어나는 클리어 요소 구만~!! 기똥찬데?” 준페이는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그때 자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시게씨였다. “강군. 게임 개발자가 유저들에게 거짓말을 해선 안 되지.” “여기 계셨군요. 시게씨. 그런데 제가 거짓말을 하다뇨?” “네가 만든 사이킥 배틀.. 그 정도 탄막 구현이 현재 패밀리 성능에서 돌아갈 리가 없잖아. 안 그래?” 준페이는 갑작스레 나타난 시게씨의 모습에 손으로 입을 가리다가 담뱃불에 데일 정도로 깜짝 놀랐다. 그거 봐라.. 옛 말에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엔 쥐가 듣는다고 하지 않았냐.. 시게씨는 평소와는 달리 굉장히 표정이 상기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시연장에서 참석자들의 반응이 조금 껄끄러웠던 모양이다. “만들 수 있어요.” “뭐라고..?” “조금 시간은 걸리겠지만,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음.. 그건 지금 당장 알려드릴 수 없지만, 기필코 패밀리 기종에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그래? 그럼 우리 내기 하나 할까?” “무슨 내기를..?” “네가 만든 사이킥 배틀과 내가 만든 슈퍼 마리지 3 둘 중에 어느 게 더 많이 판매 될지?” 헐.. 이건 또 뭔 집안싸움이냐.. ──────────────────────────────────── ──────────────────────────────────── EP. 11 : 케이스 바이 케이스 (5) & “너 그때 사이킥 배틀 해봤냐? 강 부장님 게임 진짜 어마어마하더라. 완전 스케일이 달라..” “그래봤자 슈팅 게임이잖아. 내가 보기엔 이번에 나온 슈퍼 마리지3가 최고야. 이번에도 완전 대박 히트 칠 것 같아.” “그래봤자 슈팅 게임? 너 사이킥 배틀 안 해봤구나? 몰입도가 장난 아니라니까?” 간만에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 직원 두 명이 들어왔다. “아, 강부장님..” 둘은 나를 보고선 흠칫 놀라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커피 드시러 오셨어요?” “아.. 네. 휴게 시간이라..” “저도 마찬가지에요. 앉아요. 제가 커피 한잔 뽑아 드릴게요.” “아, 아뇨. 안 그러셔도 됩니다.” “뭐 직원들끼리 커피 한잔 할 수도 있지. 별거 아니니까 드세요.” 두 남자는 내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건네자 앉았다 일어섰다는 반복하며 어정쩡한 자세를 취했다. 뭘 이리 쫄아.. 신입사원인가? “둘 다 신입이에요?” “네? 아, 저희는 두 달 전에 입사한 동기입니다.” “두 달이나..? 미안해요. 외근이 잦은 편이라 얼굴을 익힐 시간이 없어서.. 하하” “괜찮습니다. 신형 콘솔 기획도 준비 중이시고 거기다가 이번엔 게임 개발까지.. 엄청 바쁘시겠죠.” 괜히 내가 여기 있으면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아까운 휴식 시간만 날리겠군.. 나는 짧게 몇 마디를 더 건네다가 수고하라는 말을 남기고 휴게실을 나섰다. 그러자 슬쩍 닫힌 문 너머로 남자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캬~ 강부장님 멋지다. 저 여유.. 나이는 나랑 비슷하신 거 같은데 완전 엘리트 느낌이야.” “들어 보니 미국 지사에서 일할 때 크게 한건 올렸다더라. 시게루님이나 군페이님이 랑도 친해 보이고~ 실력과 인맥.. 같은 또래에선 이미 따라갈 수가 없지..” ‘음~ 신입 직원들에게 나에 대한 이미지는 저렇구나..’ 신작 게임 발표 이후 민텐도 내부에서 묘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얼마 전만 해도 나와 시게루씨의 게임에 대해 어떤 작품 더 나은가에 대해 토론이 벌어질 정도였으니까. 같은 회사에서 출시할 퍼스트 게임끼리 이러는 건 별로 좋지 않은데, 선의의 경쟁이라기 보단 파벌 싸움 느낌이군. 더 이상 같은 개발실에서 양 쪽의 게임을 개발하기에 무리가 있다 판단한 나는 최소한의 인원을 꾸려 차세대 콘솔 개발 부서에 배치 시켰다. 덕분에 내가 일하는 사무실은 다른 부서에 비해 조금 난잡한 편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신형 콘솔의 컨트롤러를 담당하는 기무라가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저기 부장님 이번에 새로나온 컨트롤러 컨셉트인데, 한번 봐주시겠어요?” “네, 그러죠.” 기무라에서 건네받은 신형 컨트롤러의 초안은 내가 알고 있던 슈퍼 패밀리의 컨트롤러 보다는 NEGA 쪽 컨트롤러 이미지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지금도 나쁘진 않은데, 조금만 더 수정해보시겠어요? 아직 시간 여유는 있으니 디자인 팀에서 조금 더 다양한 컨셉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보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부장님께서 따로 요청하실만한 사항이 없으신가요?” “버튼은.. 조금 더 늘려 볼까요?” “버튼이요? 안 그래도 개발진과 의논한 결과 기존에 2버튼에서 4버튼으로 늘리긴 했는데..” “앞으로 게임은 좀 더 복잡해질 거예요. 지금이야 점프나 공격 같은 단조로운 형식이지만, 게임의 장르가 발전할수록 다양한 요구사항이 나올 수 있으니까요.” “그럼 혹시 생각해 두신 버튼 개수가 있으신가요?” “6버튼 시스템은 어떨까요? 최근에 게임센터에 가보니 조금 골 때리는 격투게임이 하나 있더군요.” “골 때리는 격투 게임이요?” 1987년. 게임센터에 업주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문제작이 하나 출시되었다. 왜 문제작이냐? 그것은 기존에 게임 센터에서 암암리에 세워둔 룰을 깨부쉈기 때문이었다. 게임 센터란 일반인들이 게임을 즐기기 위해 찾는 곳으로 우리나라에선 흔히 ‘오락실’이라고 불렸다. ‘오락’이라는 유쾌하고 기분 좋은 단어를 섞은 것에 비해 우리나라에서의 이미지는 비행 청소년이 흡연을 하고 아이들 코 묻은 돈을 빼앗는 불량한 곳으로 낙인 되어있었다. 그럼에도 게임이 좋아 몇 백원만 수중에 있다면 쫀듸기도 포기하고 달려갔던 그 곳이 오락실이었지만.. 아무튼 1987년 말 즈음에 일본 게임센터 업주들은 하나의 게임 출시에 굉장히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바로 최초로 6버튼을 이용한 대전 격투 게임 ‘스트리트 파이어’의 등장 때문이었다. 어째서 그들은 코인회수가 용이한 대전 격투 게임에 불편한 기색을 보였을까? 그것은 바로 버튼의 개수 때문이었다. 기존의 아케이드 게임은 버튼수가 많아봐야 4개가 전부였다. 아니, 보통은 2~3개면 충분했기에 4개도 솔직히 꺼려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등장한 격투 게임이 6개의 버튼을 사용하는 바람에 업주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기판을 개조하거나 전용기기를 들여 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거지같은 커맨드 조작 방식 덕분에 스트리트 파이어는 출시 후 금세 인기가 사그라 들었다. 분명 커맨드에는 장풍 기술과 어퍼컷 기술이 명시되어 있었지만, 아무리 레버를 돌려 보아도 기술은 나가지가 않았다. 또한 강, 중, 약으로 따로 설정된 팔과 다리 버튼을 플레이어들이 잘 소화하지 못한 탓도 컸다. 결국 골치 덩어리로 전락한 이 게임은 차후 2에서 기존에 모든 스타일을 버리고 거듭나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을 것이 분명 했다. “부장님. 혹시 스트리트 파이어 하나 때문에 6버튼을 하시자는 건 아니요?” “왜요? 그러면 안 되나요? 하하..” “물론 조작 버튼 추가가 안 될 건 없지만, 전면에 여섯 버튼을 배치할 경우엔 상대적으로 크기가 커져서 아이들이 쓰기엔 조금 불편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꼭 버튼 6개를 전면에 둘 필요가 있나요?” “네? 그럼 나머지 버튼은 어디에..?” 마침 내 책상 위에 패밀리용 컨트롤러가 놓여져 있었기에 나는 그것을 기무라에게 건네며 말했다. “한번 쥐어 보세요.” “네..? 아, 네..” 그러자 내게서 컨트롤러를 받아든 기무라의 양쪽 집게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컨트롤러의 윗부분을 향했다. 나는 빙긋 웃으며 뒤에 말을 이었다. “스톱~! 바로 거기. 기무라씨가 집게 손가락을 대고 있는 그 부분에 버튼을 만들죠.” “아~~~!!!! 여기구나..” 기무라는 아무 대답도 못한 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로 돌아갔다. 자~ 그럼 한 건은 끝났고, 다음은 사이킥 배틀인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신 도트 찍기에 집중하고 있는 모리타씨를 찾았다. “모리타 일러스트 작업은 어때?” “순조롭습니다. 작업도 즐겁구요. 사이킥 배틀의 주인공 캐릭터를 전부 여자로 배치한 부장님의 과감함에 경탄할 지경입니다~!!” “그.. 그래요?” “전 믿어요. 언젠가 미소녀나 섹시 컨셉의 캐릭터들이 게임계를 지배하는 그 날이 올 거라는 걸~!!” 묘하게 항상 하이텐션을 유지하는 일러스트레이터 모리타는 어떤 의미에선 시대를 앞서나가는 진정한 선구자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여성 캐릭터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 (그는 절대로 남자 캐릭터를 그리지 않는다.) 조그만 도트 안에서도 캐릭터의 특징 강조하여 게임안의 캐릭터와 일러스트의 위화감을 최대한 배제 시킨 것도 그의 도움이 크게 작용 했다. “이봐 모리타 조금 조용히 좀 할 수 없나?” “미안 하야시. 코딩 짜는데 방해가 됐구나..” 모리타의 사과에 일절 대꾸도 없이 다시 작업에 몰두 중인 하야시는 코딩 작업에선 따라올 자가 없을 만큼 실력파였다. 하지만 신경질 적인 성격 탓에 대인 관계에 문제가 좀 있지.. 조금은 설렁설렁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농담 따먹기를 즐기는 시게씨의 개발 환경은 그와는 맞지가 않았다. 모든 작업이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걸 원하는 하야시는 다른 직원들이 농땡이 치는 꼴을 보지 못했고, 그랬기에 개발 1팀과 잦은 불화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두 명의 상등품 오타쿠를 내 밑으로 데려왔다. 한명은 미소녀에 관해서는 멈출 줄 모르고 미친 듯이 도트를 찍어내는 도트 머신. 그리고 그 오브젝트를 넘겨받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코딩을 짜내는 코딩 머신.. “그런데 부장님. 이거 정말 부장님께서 주신 스크립트 대로 구현해도 됩니까? 이거 용량 초과인데? 절대 현재 패밀리로 못 돌립니다.” “상관없어요. 뒷일은 저한테 맡기시고 코딩 작업만 제대로 해주세요.” 그러자 뒤이어 모리타가 나에게 물었다. “부장님. 전에 말씀 하신 그거.. 진짜 하실 겁니까?” “왜요? 자신 없어요?” “아, 아뇨~!!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책임 소재가 떨어지면 조금 골치 아파져서..” “되려 지금이니까 할 수 있는 겁니다. 나중에 법률 적으로 제재 당하면 답도 없으니까 실행하세요. 모든 책임은 제가 맡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모리타.. 목소리가 너무 커..” “아, 미안. 하야시..” 저 두 명의 오타쿠가 만들어 낼 희대의 슈팅 게임이 나도 기대가 되긴 하는 구나.. & 그 후. 나와 시게씨는 이따금 복도에서 마주쳐도 별로 말이 없었다. 예전에 드래곤 워리어 때도 그랬지만, 시게씨는 게임에 대해서 라면 굉장히 신경이 날카로워 지곤 했다. 발표회가 있었던 그날에도 모두가 환호하는 가운데 홀로 의자에 기대어 나를 바라보던 시선은 직장 동료보다는 라이벌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사실 그런 시게씨의 반응에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어떻게 보면 현 민텐도 최고 개발자가 나를 라이벌로 인정한 것이니까.. 그런데 슈퍼 마리지 3가 얼마나 팔려 나갔더라? 퇴근 후에 집에서 혼자 있던 나는 궁금증에 게임 & 워치를 펼쳐 들었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경쾌한 효과음이 터져 나왔다. -빠밤~ 숨겨진 도전 과제. 비밀의 게임 개발자 미션을 클리어 하셨습니다. 차후 당신이 정체를 드러냈을 경우 게이머들 간에 당신에 대한 인지도가 200% 향상됩니다.- -빠밤~ 첫 게임 타이틀 사이킥 배틀의 제작이 시작되었습니다. 개발 팀원의 상태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빠밤~ 당신의 회사인 펜타곤의 야마구치님이 파이널 프론티어 2 제작에 들어갔습니다.- -빠밤~ 민텐도사의 쿠마모토 시게루님이 당신에 대해 경쟁의식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그 간에 게임업계에 일어났던 작은 사건 사고가 전부 알림으로 들어와 있었다. 몇가지 중요한 알람을 체크 한 뒤에 검색창에 슈퍼 마리지 3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슈퍼 마리지 3 : 민텐도 패밀리용으로 제작된 아케이드 게임으로 전 세계를 통틀어 4천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이것은 순수하게 민텐도에서 출하된 정품 카트리지의 판매 개수입니다.> 미친.. 정품만 4천만장이라니, 기절초풍하겠네.. 나는 슈퍼 마리지 3의 어마어마한 판매량에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잠시 신호음이 들린 후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시오?” 여보시오라니.. 이 무슨 건방진 전화 예절이냐? 나는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푸말라씨. 첸드라 있나요?” “첸드라 일한다. 바꿔 줄까?” “네.” 잠시 후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인도어가 잠시 오간 뒤 첸드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이냐? 약속했던 확장 카트리지 다 만들어서 요즘 너무 한가하다. 우리들 고향에 돈 보내려면 일을 해야 한다. 일 거리 없냐?”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전화했어. 첸드라. 부탁 하나만 하자.” ──────────────────────────────────── ──────────────────────────────────── EP. 11 : 케이스 바이 케이스 (6) “준혁이냐? 약속했던 확장 카트리지 다 만들어서 요즘 너무 한가하다. 우리들 고향에 돈 보내려면 일을 해야 한다. 일 거리 없냐?”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전화했어. 첸드라. 부탁 하나만 하자.” “부탁~? 첸드라 강준혁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뭔가 또 재밌는 일을 꾸미는 거냐?” “일단 들어보고 할 수 있는지 없는지만 알려줘.” “좋다. 말해봐라.” 그리고 잠시 후. 내 설명을 모두 들은 첸드라는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거 가능하다~!! 첸드라 할 수 있다.” “그래? 그거 다행이군.” “그런데 강준혁 문제가 있다. 네가 말한 그런 방식은 대량 생산이 힘들다. 첸드라의 작은 작업장에서 민텐도의 발주 수량을 맞추는 건 너무 힘들다.” 하긴.. 제대로 환기도 안 되는 그런 닭장 같은 골방에서 소수 인원으로 처리할만한 작업량이 아니겠지. 생각보다 조금 이르지만, 계획을 추진하기에 나쁘지 않은 시기다. 나는 재빨리 메모지를 꺼내든 후 수화기를 어깨에 걸친 채 펜을 들었다. “첸드라. 네가 작업에 필요한 설비 기계들 목록 좀 불러봐.” “응? 그건 갑자기 왜?” “어, 그냥 아예 공장을 하나 사두려고..” “뭐라고!?” 1987년에 일본의 경제 상황은 이미 커질 대로 커진 거품 경제의 끝으로 치닫는 중이었다. 사실 본격적인 직격타는 1985년에 달러 안정화 명목으로 체결된 ‘플라자 협약’에서부터였다. 기존에 엔화고정 환율제를 유지하던 일본 정부가 ‘달러를 안정화 시켜야 세계 경제가 활성화 된다’는 미국 측의 어이없는 요구에 승낙하며 단 1년 만에 엔화의 가치가 반으로 줄어드는 환상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다. 한국 전쟁을 등에 업고 신흥 수출 제조국으로 떠오른 일본은 여러 우방국가의 지원에 힘입어 6~70년대 세계 2위의 강대국이 되었지만, 플라자 협약에 의해 엔화의 금전 가치가 달러에 비해 떨어지는‘엔고현상’이 일어나며 작년부터 해외 수출 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갑작스레 침체된 경기를 회복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또 한 번 악수(惡手)를 두게 되는데, 기존 5%를 유지하던 금리를 2.5%로 후려쳐 기업들에게 돈을 뿌려대었다. 하지만 기업에게 뿌려진 자본은 안정적인 투자를 위해 전부 부동산으로 향하게 되고, 갑자기 몰려든 수요에 집값이 어마무시하게 오르는 사태가 벌어져 버렸다. 낮은 금리에 서민들까지 대출을 받아 부동산 시장에 뛰어든 탓에 플라자 협약체결 2년 만에 1억이었던 부동산이 3억까지 치솟은 희대의 병크 (병신 같은 크리티컬 효과)가 터져버렸다. 낮은 금리로 언제까지나 돈을 뿌려 댈 것만 같았던 은행은 늘어가는 대출금액에 위기감을 느끼고, 기업 간의 신용 대출을 거부하기 시작하자, 이제껏 신나게 돈을 빌려 갔던 기업들은 갚을 길이 막막해지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최근에 들어서 하나 둘 제조 공장 자체가 문을 닫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 나는 도쿄의 치바 구역에서 도산 위기에 놓인 제조 공장 하나를 트라이앵글 소프트와 비슷한 방식으로 손에 넣었다. 사실 이곳은 민텐도 카트리지 생산 보조를 맡고 있던 하청 기업 중에 하나인 곳이었는데, 카마우치 사장 역시 회사가 완전히 붕괴되어 폐업하기를 기다리고 있던 기업 중에 하나였다. “뭐!! 라이텍스 공장이 인수 됐다고!? 누가!! 어떤 놈이!!” “글쎄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라이텍스의 사장이 자기는 더 이상 사장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제기랄!! 조금만 더 기다려서 완전히 폐업했을 때 매수하려고 했는데~!!” “그러게 제가 너무 기다리는 것보다 적정가가 나왔을 때 인수하는 편이 좋다고..” “시끄러!!!!” 콰앙!! 카마우치 사장은 진심으로 화가 났는지 책상위에 있던 재떨이를 집어 던지고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군페이씨는 그런 카마우치 사장을 말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런.. 이런.. 사이킥 배틀 건 때문에 군페이씨좀 만나러 왔는데 분위기 한번 살벌하군. 물론 나 때문에 일어난 사단이긴 하지만.. “안되겠어..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나머지 공장까지 넘어가기 전에 매수를 해둬야겠군.” “저기 사장님 그게..” 군페이씨의 난처한 표정에 카마우치 사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서.. 설마..” “네.. 우리가 생각해두었던 공장 두 군데 역시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이런~ 제기랄!!! 대체 누구야!? 그 빌어먹을 놈이 누구인지 당장 찾아내!!” “아, 알겠습니다.” “후우.. 후우..” 카마우치 사장은 끓어오르는 속을 식히려는지 벌컥벌컥 물을 삼킨 후에도 연신 씩씩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중에 다시 찾아오는 게 좋겠군.. 나는 살짝 고개를 내저으며 사장실을 빠져 나왔다. 잠시 후. 신형 콘솔 개발 부서를 찾아온 군페이씨는 굉장히 피곤한 안색이었다. 나는 그런 군페이씨에게 모른 척 차가운 물을 건네며 물었다. “카마우치 사장님은 왜 저리 화가 나셨어요?” “화가 나실 만도 하지. 공들여온 먹잇감을 돈 몇 푼 아끼려다가 눈앞에서 놓쳤으니..” “먹잇감이요?” “패밀리 게임 카트리지가 대성공을 거두는 바람에 우리 민텐도 공장만으로는 수요에 맞출 수가 없게 되었거든, 그래서 몇 군데 외주를 맡기던 제조공장이 있었는데, 최근에 경기가 어렵다보니 문을 닫는 공장 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네..” “아.. 카마우치 사장님은 그 공장들이 문을 닫을 때를 기다렸던 거군요.” “그래야 헐값에 매입할 수가 있으니까..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 “이상한 일이요?” “거의 쓰러지기 일보직전인 회사를 누군가가 사들인 거야. 그것도 사장들이 안고 있던 채무까지 탕감해주면서 사들이는 바람에 아주 신이 났더군. 어마어마한 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문제는 공장을 통째로 사들인 주제에 운영을 기존 사장들에게 맡기고 있어. 누구에게 팔았냐고 물어도 사장들이 약속이나 한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원..” “그 것 참 큰일이군요..” 그거야.. 내가 바빠서 거기까지 관리 할 수는 없으니까.. 사실 공장의 사장들조차 나를 만난 것은 아니었다. 모든 건 지난번 트라이앵글 사를 넘겨받았던 법률 사무소의 나카무라 변호사가 나를 대신해 회사를 사들이고 있었다. 나카무라씨는 그냥 나둬도 쓰러질게 뻔한 공장에 너무 많은 돈을 투자하는 건 좋지 않다고 조언해 주었지만, 어차피 문 닫은 공장에 새로 인력을 채워 넣어봐야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을 게 뻔했기에 기존에 근무하던 인력과 사장까지 통째로 매수해버렸다. 덕분에 근 한 달 새에 3억엔에 달하는 돈이 빠져 나갔지만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그중에 1억은 곧 다시 회수될 예정이니까. 어떻게 다시 돌아 오냐고? 바로 이렇게 돌아오는 거지. “그런데 강군 아까 상담하고 싶다던 내용은 뭔가?” “아, 그게 사이킥 배틀 때문에 군페이씨에게 물어 볼 게 있어서요.” “아~ 발표회 마지막을 장식했던 게임 말이로군. 얼핏 봐도 정말 대단한 게임이더군. 그런데 개발실 직원들 말로는 현재 패밀리에서 절대 구동이 불가능 하다고 장담 하던데, 사실 인가?” “음~ 반 정도는 맞아요.” “역시 내가 알고 있는 강군이라면 무턱대고 일을 벌이진 않았을 거라 생각했네만.. 반 정도라니. 그건 무슨 의미인가?” “부족한 패밀리의 성능을 끌어 올려줄 특수 칩이 필요해요.” “특수 칩? 그걸 어디에 박으려고?” “물론 카트리지에 넣는 거죠. 패밀리의 연산 능력을 분산 시켜줄 장치를 카트리지 안에 넣으려고 합니다.” “흐음~ 과연..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일이야. 하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데..” “괜찮아요. 그 특수한 칩을 제조하는 업체를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정말인가? 그곳이 어디지?” “라이텍스라는 곳입니다. 그곳에 첸드라라는 직원이 카트리지 성능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특수 칩을 만들어 냈다고 하더군요.” “라이텍스!?” “군페이씨라면 이미 알고 계시지 않나요? 저희 민텐도 하청 업체 중에 하나인데..?” “라이텍스는 이번에 카마우치 사장이 인수하려던 회사들 중에 한 곳이라네.. 이런 조금만 빨리 손을 썼다면 그 기술까지 가져올 수 있었을 텐데..” 결국 민텐도는 라이텍스가 제조한 카트리지 성능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는 특수칩 대량 생산을 위해 1억엔의 돈을 지불 할 수밖에 없었다. 군페이씨는 라이텍스에서 들여온 특수칩 제조 기술을 복사하기 위해 몇 날밤을 지새웠지만, 인도산 공돌이의 선방에 의해 결국 칩의 복사는 실패하였다. 카마우치 사장은 초기 기존 카트리지로 생산할 수 없는 사이킥 배틀의 출시에 대해 반대 입장을 내세웠지만, 이미 패미 통신에 보도되어 유저들의 기대치가 한껏 고조된 탓에 이제와 쉽게 개발 취소를 명할 수도 없었다. “강군. 너 이거 정말 히트 칠 자신 있냐? 네가 특수칩인가 뭐시긴가를 원하는 바람에 제작 단가가 너무 높아졌어. 이대로라면 적어도 밀리언셀러 이상은 쳐줘야 손익 분기점이 넘는단 말이다.” “카마우치 사장님..” “응? 뭐냐..” “제가 언제 사장님 실망 시켜드린 적 있습니까?” “하긴 그렇지.. 발표회 때 분위기도 좋았고, 시게 녀석도 너에게 자극 받아 요새 엄청 열심히 만들고 있으니까. 분명 히트칠거라 예상은 하고 있지만..” “그렇게 걱정이 되시면 제가 그 걱정을 좀 덜어 드릴게요.” “음? 어떻게?” “슈퍼 마리지 3의 마케팅 비용의 10분의 1만 사용하겠습니다.” “마케팅 비용을 줄인다고? 사이킥 배틀은 신규 타이틀이라, 홍보가 덜하면 많이 안 팔릴 텐데.. 진짜 괜찮겠어?” “그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이 녀석 또 뭘 꾸미고 있는 건지.. 내심 또 기대는 된다만..”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걱정 말고 돈셀 준비나 해두세요.” 그리고 다시 라이텍스 쪽에 특수칩 추가 생산 문의도 좀 해주시구요. 나는 속으로 싱긋 웃으며 회의실을 나왔다. “강준혁..”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맞은 편 복도에서 시게씨가 걸어오고 있었다. ──────────────────────────────────── ──────────────────────────────────── EP. 12 : 기묘한 마케팅 (1) “강준혁..”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맞은 편 복도에서 시게씨가 걸어오고 있었다. 시게씨 역시 카마우치 사장에게 보고를 위해 결재서류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내 손에 들려있는 결재 화일을 힐끗 바라보더니 나에게 물었다. “보고는 끝났냐?” “방금요. 슈퍼 마리지 3 개발 상황은 어때요?” “네가 걱정 안 해도 될 만큼 순조롭다. 듣자하니 사이킥 배틀 전용 카트리지를 만든다면서?” “네.. 시게씨 말대로 현재 카트리지 방식으론 구현이 불가능하니까요.” “징그러운 녀석. 진짜 너한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어? 벌써 항복인 겁니까?” “누가 항복이래~!! 두고 봐. 세계 최고의 슈퍼 마리지를 선보여 줄 테니까. 패밀리에서 내는 마지막 슈퍼 마리지인 만큼 외부 마케팅도 철저히 준비하고 있거든~!!”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시게씨라면 분명 굉장한 게임을 낼 거라 믿어요.” “흥~ 칭찬해도 소용없어. 모든 건 결과로 이야기 하자~!!” “그래요~ 그럼 최종 발표 때 뵈요.” 나는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인 뒤에 사장실 복도를 빠져 나왔다. &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사이킥 배틀의 홍보용 일러스트 몇 가지를 들고 게임 잡지사를 찾았다. 2년 전만 해도 패미통신 하나뿐이던 게임 전문 잡지가 조금씩 늘어나 벌써 4개가 되어 있었다. “후우.. 일단 하나씩 들러볼까?” 묵직한 서류 가방을 움켜쥔 채 나는 가장 인지도가 낮은 게임 잡지사인 게임챔프를 찾았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너구리 소굴을 방불케하는 매캐한 담배연기로 숨쉬기조차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 시대만 해도 사무실에서 흡연은 거의 일상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어느 건물이나 담배 찌든 냄새가 나긴 했지만 여긴 좀 심하네.. 대체 얼마나 펴대는거냐. ‘옷에 냄새 베겠다. 빨리 끝내고 나가야지..’ 사무실에 들어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머리가 반쯤 벗겨진 풍채 좋은 남자가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계절이 초겨울에 접어 들고 있었지만, 땀을 많이 흘리는 체질인지 푸른 와이셔츠의 겨드랑이 부분에 땀이 가득 차있어 속이 미식 거렸다. “어디서 오셨죠?” “아, 안녕하세요. 민텐도 직원 강준혁이라고 합니다. 곧 발매 될 게임에 홍보차 들렀는데요.” “아니.. 민텐도에서 직접 저희 잡지사까지? 저는 게임 챔프의 편집장인 무라사키라고 합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아무래도 민텐도라는 네임 벨류가 있다 보니 쉽게 접근이 가능하군. 그런데 무라사키(보라색)라니 희안한 성이네. 물론 한자를 읽는 법에 따라 뜻이 다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무라사키 편집장을 따라 응접실로 안내를 받았다. “민텐도에서 나오는 게임이라면 저도 참 좋아하는 편인데, 어떤 게임의 홍보차 오신건가요? 설마 현재 개발 중이라는 슈퍼 마리지 3 입니까?” “아.. 슈퍼 마리지 3는 시게씨가 워낙 비밀리에 작업 중이라 그건 아니구요. 사이킥 배틀이라는 게임입니다.” “사이킥 배틀이라.. 전에 패미통신에서 최초로 알려졌던 민텐도의 새로운 IP군요.” “네, 맞아요. 저는 사이킥 배틀의 메인 디렉터 강준혁이라고 합니다.” “들어본 적 있어요. 민텐도에 유능한 한국인 직원이 있다고..” 예전 폭스 소프트 때와는 다르게 요새는 어느 업체를 가서 내 이름만 대어도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걸 보니 확실히 내 인지도가 좀 오르긴 했나보네. “아닙니다. 과찬이십니다..” 아무튼 인사는 이제 그만하고 빨리 좀 나가고 싶군. 숨쉬기가 괴로워.. 나는 서둘러 서류 가방에서 홍보용 일러스트가 담긴 서류봉투를 꺼내 무라사키씨에게 내밀었다. 갈색 봉투에는 일러스트 말고도 한 가지가 더 들어있었는데, 무라사키씨 역시 궁금했는지 서류 봉투를 집어 들며 나에게 말했다. “꺼내 봐도 되나요?” “네, 그러세요.”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서류 봉투에서 홍보용 일러스트 두 장을 꺼내 들었다. 무라사키씨가 집어든 첫 번째 메인 일러스트에는 모리타가 특별히 신경 쓴 사이킥 배틀, 세 번째 캐릭터 푸른 머릿칼의 초능력자 ‘아오이 츠바사’가 그려져 있었다. “오호.. 이거 참 엄청난 퀄리티 군요. 캐릭터가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무라사키씨는 굉장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음 일러스트를 넘긴 순간.. “허억~!!” 두 번째 일러스트에서는 적에게 상처입고 쓰러진 아오이 츠바사가 힘에겨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첫 번째 페이지에서 그녀의 몸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던 파츠들 역시 전부 부서지고 옷이 찢어져 전체적으로 아슬아슬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이, 이건..” “어디까지나 그냥 홍보용 일러스트입니다. 하하.. 괜찮은가요?” 사이킥 배틀은 어린이들 보단 성인을 주 타겟 층으로 삼고 있었다. 왜냐하면 특수칩이 들어간 탓에 카트리지 단가가 7480엔이라는 민텐도로서는 조금 이래적인 가격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라사키는 계속해서 두 장의 일러스트를 번갈아 바라보며 오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 편집장에게 이정도 반응이라면 잡지에 실리는 건 일도 아니겠군.. “이제껏 한 번도 본적이 없는 파격적인 선전이 되겠군요. 다음 호 메인 표지로 삼아도 되겠군요~!!” “그래주시면 저야 좋죠~ 가능하면 메인 표지를 넘기자마자 곧바로 상처 입은 아오이 츠바사를 볼 수 있도록 세팅해주세요.” “오~ 알겠습니다. 그런데 표지에 대한 기사를 쓰려면 저희도 이게 어떤 게임이지 정확하게 알아야 리뷰를 작성할 수가 있는데..” “서류 봉투 안에 동봉 되어있는 카트리지를 꺼내보세요.” 내 말에 무라사키씨는 서둘러 봉투 안에 담긴 물건을 꺼내보았다. 서류 봉투에 함께 동봉한 게임은 사이킥 배틀의 카트리지였는데, 이제까지 흔히 보아왔던 민텐도 카트리지와는 다르게 세로로 1.5배 정도 길쭉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아..? 설마 이 게임 벌써 완성이 된 겁니까!?” “아뇨. 굳이 설명하자면.. 체험판이랄까요? 잡지사 리뷰 기자님들에게만 드리는 특별 카트리지입니다. 2 스테이지까지 게임을 즐길 수 있어요.” “오오~!! 세상에 이런 서비스가!!” “뭐 그 카트리지는 이곳에서 보관하셔도 좋고, 우수 독자에게 선물용 이벤트로 지급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대신 꼭 플레이 해보시고, 다음호에 사이킥 배틀의 리뷰 기사를 실어주세요.” “알겠습니다. 직원들과 함께 플레이 해보고 기사를 올리도록 하지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나는 한시라도 빨리 이 너구리 소굴을 빠져나가기 위해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깜빡 잊어버린 게 있어 무라사키씨를 불렀다. “저기 편집장님. 실례지만 게임 챔프가 한 달에 판매부수가 어느 정도 되죠?” “아직 신생 잡지라 월 2천부 정도 찍고 있습니다만..” “다음 달에는 그 두 배정도로 찍으셔도 될 겁니다.” “네?” “게임을 플레이해보시고 절 믿으시면 발행 부수를 좀 늘려보세요. 분명 엄청 나갈 테니까요.” “허어?” 나는 그렇게 묘한 말을 남긴 채 서둘러 게임챔프 잡지사를 빠져나왔다. “푸하~~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이 시대로 넘어와 내가 가장 잘한 것은 흡연량을 줄인 거랄까? 가끔 군페이씨나 업무상 대화를 제외하면 거의 담배를 태우지 않았으니까.. 나는 잠시 옷에 베인 담배냄새를 털어낸 뒤에 전철역으로 향했다. 아침도 거르다시피 도쿄에 와서 이제 잡지사 하나를 들렀을 뿐인데.. 갑자기.. 격하게.. 허기가 지는군. 나는 지금 너무나 배가 고파졌다. 뚱~ 뚱~ 뚱~ ... 갑자기 2015년에 즐겨보던 ‘고독한 미식가’라는 드라마가 생각나는 이유는 무얼까..? 아무튼 배가 고프니 뭐라도 먹고 움직이자.. & 점심식사 후. 두 군데의 잡지사에 들러 게임챔프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업무를 반복하고 아니 슬슬 오후 4시에 접어들고 있었다. 내가 서있는 곳은 오늘의 마지막 행선지인 패미통신. 미리 준페이 녀석과 약속을 잡아둔 탓에 나는 여유롭게 잡지사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 준혁아~ 왔냐?” “물 좀 줘.. 목말라 죽겠다.” “그러게 그냥 우편으로 보내지 뭔 고생을 사서 하냐.” “그래도 직접 찾아다니면 신용이 쌓이잖아. 그냥 우편하나 보내는 것보다 훨씬 낫지.” “뭐~ 그렇긴 하지만.. 민텐도 정도라면 우편물 하나만 보내줘도 감지덕지지~” “그런가? 하하..” “그런데 그건 뭐야?” “아, 패미통신용 홍보 일러스트..” “홍보 일러스트면 홍보 일러스트지, 패미통신용은 뭐냐?” “그게, 사실 4군데 잡지사 일러스트가 전부 다르거든.” “뭐라고!?” “대가리좀 굴려봤지.” “미친.. 다른 잡지사는 뭐래?” “일러스트가 마음에 든다고, 메인 표지로 실겠다 던데?” “뭐!? 그럼 우리도 실을 수밖에 없잖아~!! 그래도 민텐도랑 우리 사이인데, 차라리 우리 잡지사에 다 주지 그랬어~!!” “그래.. 너희랑 우리라서 패미 통신에는 특별히 주인공 캐릭터를 준비했지.” “엥?” 준페이가 꺼내든 일러스트는 사이킥 배틀의 메인 캐릭터인 ‘아즈사 렌’이 매혹적인 포즈로 그를 유혹하듯 그려져 있었다. “자.. 잠깐 코피 좀 닦고..” “그래? 그럼 이왕 코피 쏟은 김에 다음 장도 보고, 마저 닦고 오던지..” “다음.. 장? 푸헉~!! 야!! 이거 너무 위험한 거 아냐?” 다른 잡지사에 건네준 푸른 머릿칼의 아오이 츠바사나 금발의 헬레나가 모리타가 특별히 신경 쓴 거라면 ‘아즈사 렌’은 그야말로 한 땀 한 땀 혼을 실었다고나 할까? 물론 이정도 퀄리티의 일러스트가 현재 패밀리에서 표현할 수 없지만, 모든건 상상력이다. 8비트 게임의 부족한 그래픽 효과는 모두 유저의 머릿속에서 그려질 테니까.. 아직까지 게임이라는 매체에 섹스어필이 어디까지 규제해야하는지 법률적인 근거가 없었던 시 였기에 실질적인 성관계 묘사나 극심한 노출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 선에선 넘어가는 추세였다. 그래서 그런지 드래곤 볼이나 3X3 아이즈 같은 청소년 만화에서도 독자들의 눈을 끌기 위해 가끔씩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가령 무천도사가 끊임없이 여자들에게 속옷을 보여 달라고 섹드립을 치거나, 드래곤볼을 얻기 위해 팬티를 보여주려던 부르마가 사실은 노팬티였다던가..) “그만 봐라. 종이에 구멍 나겠다. 인마..” “기가 막히네.. 잠깐? 그런데 다른 잡지사가 각 캐릭터 별로 메인 표지에 올린다는 건..?” “그래. 다음 달 모든 게임 잡지 메인 표지는 사이킥 배틀이다.” ──────────────────────────────────── ──────────────────────────────────── EP. 12 : 기묘한 마케팅 (2) “그만 봐라. 종이에 구멍 나겠다. 인마..” “기가 막히네.. 잠깐? 그런데 다른 잡지사가 각 캐릭터 별로 메인 표지에 올린다는 건..?” “그래. 다음 달 모든 게임 잡지 메인 표지는 사이킥 배틀이다.” “와~ 진짜 너.. 잔대가리 끝내준다.” “잔대가리라니~!! 훌륭한 마케팅 실력이지~!!” 거기다가 이런 꼴릿한 일러스트를 전부 모으려면 독자들은 할 수 없이 4곳의 잡지사 책을 전부 구입해야 할 테니까~ 잡지사는 잡시사 대로 좋고, 나는 알아서 유저들끼리 입소문이 터질테니 좋으니 상부상조 하는 게지.. 나는 준페이에게서 받은 물 컵을 삼키며 싱긋 웃어보였다. “어라? 이건 게임 카트리지네?” “체험용 데모 카트리지다. 2 스테이지까지 즐길 수 있을 거야.” “오~ 그것 참 반가운 소식이군. 안 그래도 다른 리뷰어 들도 사이킥 배틀에 대해 궁금해 하던 차였는데.. 그런데 뭔가 좀 다른 카트리지보다 크네?” “안에 패밀리의 연산을 도와줄 특수 칩을 박아 넣었거든..” “아~ 그래서 이렇게 무식하게 크구만.. 그래도 뭔가 더 특별하게 느껴지긴 하네~ 그럼 잠깐 플레이 좀 해볼까?” “벌써 해보게?” “뭐 어때 다른 기자들에게 홍보도 할 겸~ 괜찮지?” “마음대로~” 준페이는 응접실을 나서자마자 작업 중인 동료들에게 외쳤다. “어이~!! 내가 전에 입이 닳도록 칭찬했던 사이킥 배틀의 체험판 카트리지가 왔다!! 그때 나한테 첫 스테이지에서 죽었다고 비웃었던 놈 나와!!” “오~? 사이킥 배틀~!? 나~!! 나 한번 해볼래!!” 체험용으로 들고 온 사이킥 배틀은 순식간에 패미통신 직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잠시 후 조그만 티비 앞에 둘러앉은 그들은 사이킥 배틀의 엄청난 탄막 연출에 혀를 내두르기 시작했다. “거기서 십자기를 한 바퀴 돌리면서 B버튼!!” 준페이는 첫 스테이지 절반도 채 못가 죽어나가는 동료들에게 커맨드를 알려주며 비웃었다. “씨.. 씨발 뭐가 이렇게 어려워..” “신작 발표회 때도 유일하게 보스까지 간 사람은 나밖에 없었거든? 내가 겁나게 어렵다고 그랬지? 비켜 봐 내가 해볼라니까!!” 준페이는 패드를 던지며 포기하는 동료직원을 밀어 내고 자리에 앉았다. “자~!! 봐라 나의 환상의 플레이를!!” 준페이는 다른 직원들에 비해 센스가 있는 편이었다. 한곳에 오래 머무를수록 탄막이 집중 된가는 것을 파악하고 넓은 스테이지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탄막을 피해내었다. 프로그램 상 탄막이 일정수치 이상을 넘지 않게 조율하고 있었지만, 간혹 프레임이 느려지는 부분이 존재하긴 했지만, 플레이하는데 큰 지장은 없었다. “전보다 더 안정적인 것 같은데? 프레임이 엄청 떨어지진 않네.” “당연하지. 코딩도 더 단조롭게 했으니까. 가끔 가변 프레임 구간이 있긴 하지만, 최대한 억제했다.” 잠시 후. 준페이는 첫 번째 곤충 보스와 또 다시 조우하게 되었다. “전에 진 빚을 오늘 갚아주마!!” 준페이 녀석은 같은 수에 두 번 당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탄막이 뿌려진 후 프레임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보스의 필살기가 날아올 것을 직감한 그는 재빨리 화면 끝으로 캐릭터를 이동 시켜 레이저 빔을 피해내었다. 결국 준페이의 플레이에 첫 번째 보스가 쓰러지고, 준페이는 기세를 몰아 두 번째 스테이지로 돌입했다. “으라차!!!” 적절히 베리어 스킬을 펼치며 응전했지만, 2 스테이지는 일정 범위를 뱅글 뱅글 돌아가는 탄막이 추가 되며 더욱 어려워졌다. 아무리 날고 기는 녀석이라도 두 번째 보스에 다다를 때 즈음에는 HP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과연 클리어 가능할까?” 또 다른 거대보스가 나타날지 몰라 잔뜩 긴장한 준페이 앞에는 의외로 주인공과 비슷한 크기의 초능력자 캐릭터가 등장했다. “두 번째 보스는 같은 초능력자로군~!! 해볼 만하겠어!!” 첫 번째 스테이지의 거대 보스와는 달리, 같은 인간형 보스의 등장에 준페이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피할 공간이 많아서 쉬워 보이나보지? 준페이의 여유 넘치는 표정에 내 입가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어디 다음호 나올 때까지 2 스테이지 클리어 하는 자가 나오나 보자.’ 준페이는 가볍게 적의 공격을 피해냄과 동시에 커맨드를 입력하여 적을 일점사격 시키는 유도 레이저 빔을 날렸다. 그 순간.. 슈슉!!! 매력적인 보스 캐릭터가 레이저 빔이 닿는 순간 사라졌다. “순간이동!!!!” 순식간에 보스에게 뒤를 잡힌 준페이는 서둘러 거리를 벌리려하였으나 염력을 이용해 자석처럼 주인공을 끌어 들이는 보스의 손아귀를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보스의 거대한 레이져 공격에 주인공인 ‘아즈사 렌’이 직격타를 맞는 순간.. “허억!!!!!!!!” 화면 가득 상처 입은 아즈사 렌의 위험천만한 포즈가 튀어 나오자, 모두 컥하고 숨을 들이 마셨다. 물론 아까 준페이에게 건네준 일러스트에 비하면 조금 조악한 수준이지만, 이미 준페이의 머릿속에선 아까 본 일러스트가 오버랩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보스한테 필살기를 맞아 사망하면.. 파츠가 벗겨진다. 반대로 보스를 필살기로 없애면..” 그러자 옆에 있던 기자 하나가 내말을 자르고 준페이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준페이 부탁이다. 꼭 두 번째 보스만은 필살기로 없애줘!!!” “우오오!!!!” 수컷들의 취향 저격은 참 쉽구나.. 파츠가 날아간 일러스트 한 장이 뭐라고.. 사실 파츠가 날아가는 컨셉은 이미 게임센터에서 유명한 ‘황금의 성’이라는 게임에서 최초로 등장했다. 날아오는 적의 마법을 방패를 이용해 상, 중, 하로 막아내며 앞으로 나아가는 게임이었는데, 실수로 마법에 맞으면 갑옷 파츠가 부분 별로 하나씩 날아갔다. 문제는 그게 남자 캐릭터라는 게 문제였지만.. 그래도 적으로 등장하는 여기사의 파츠를 다 벗기기 위해 한마음으로 응원했던 게임 센터 플레이어들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터져나왔다. 물론 현재 패밀리의 스팩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부분 파츠가 날아가는 연출은 무리였기에 일러스트로 대체했지만, 아무튼 여기서도 효과는 굉장하군.. & “벌써 가려고?” “응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어서 가봐야 돼. 플레이 잘하고 기사나 잘 좀 써줘라.” “기사는 맡겨둬라~ 내가 끝내주게 써줄 테니까~!!” “그래, 고맙다.” “그런데 말야.. 준혁아” “응?” 평소답지 않게 볼을 긁적이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 준페이의 모습에 내심 불안해졌다. 뭐지? 내가 만든 사이킥 배틀에 무슨 문제가 있나? “너 여기 오기 전에 잡지사 네 군데에 각기 다른 캐릭터 일러스트를 줬다고 했지?” “어.. 맞아. 왜??” “메인 캐릭터는 3명인데 나머지 하나는 설마 두 번째 스테이지 보스였던 염동력자 캐서린 이냐?” “맞아. 그게 왜?” “그 일러스트는 어디 줬어?” “여기 오기 전에 게임 월드에 넘겼는데..” “으아아~!! 차라리 그걸 주지!!!” “... 그쪽이 취향이었냐?” 뭐야.. 겨우 그것 때문에 그런 심각한 표정을 지었던 거냐..? 이 녀석 보기보다 여왕님 취향이었군.. 나는 괴로워하는 준페이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걱정 마라. 내가 우리 직원한테 얘기해서 너한텐 특별히 4종 세트 전부 보내주마.” “지.. 진짜냐?” “그래~ 인마.” “오케이~!!! 조금 사심이 섞이긴 했지만, 워낙 게임도 훌륭하니 리뷰 잘 써주마~!! “그럼, 진짜 간다~” 손목시계를 바라보니 벌써 약속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기에 나는 서둘러 전철역으로 걸음을 옮기며 준페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교토에 오면 연락해라~” “그래 인마. 수고해라~” & -잠시 후 이 전철은 시부야.. 시부야 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딱딱한 안내 음성 대신 직접 전철을 운전하는 기사님의 걸걸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나왔다. ‘몇 번을 들어도 참 정감 어리네..’ 나는 가벼워진 서류 가방을 들고 전철에서 내릴 준비를 서둘렀다. 늦지는 않았지만, 아슬 아슬 한데? 약속시간까지 5분 남았군.. 치익.. 나는 전철 문이 열리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계단을 향해 달렸다. 오후 6시의 시부야역은 전철을 이용하는 사람들로 엄청 붐비고 있는 상태였다. ‘엄청 복잡하네.. 출퇴근 시간이라 그런가?’ 시부야 역의 대표적인 약속 장소라면 자기 주인을 구한 명견 하치공 동상이 있다. 이 시대에 누군가와 약속을 하고 만나는 건 묘한 설레임이 있었다. 정확한 시간과 장소까지 정하고 그 장소에서 상대방을 기다리는 두근거림이랄까? 핸드폰은 고사하고 삐삐도 없던 시기였기에 상대방이 어디쯤 오는지도 알 수 없지만, 그런 불편함 속에서 오는 기대감과 설레임이 되려 기분이 좋았다. 지금은 내가 조금 늦긴 했지만.. 나는 다시 한 번 손목시계를 힐끗 바라 본 후에 역을 빠져 나왔다. 만남의 장소로 유명한 하치공 동상 앞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시계를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 속에서 어렵지 않게 유키를 찾을 수 있었다. ──────────────────────────────────── ──────────────────────────────────── EP. 12 : 기묘한 마케팅 (3) 만남의 장소로 유명한 하치공 동상 앞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시계를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 속에서 어렵지 않게 유키를 찾을 수 있었다. “아~!! 준혁씨~” 유키는 스치는 사람들 속에 나를 발견하곤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드래곤 엠블렘 행사 때 잠깐 스친 것뿐인데, 한 번에 알아봐 주니 왠지 기분이 좋은데? “오랜만이에요~” “아.. 네. 잘 지내셨어요?” “정말 처음 연락주시고 나서 한동안 또 연락이 없으셔서 절 잊어버리신 줄 알았어요. 전화번호도 못 물어봐서 전화도 못해보고..” “미안해요. 일이 너무 바빠서..” “그래도 잊지 않고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친절하게 고개까지 숙이며 인사하는 바람에 나 역시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여기 계속 있기도 뭐하니 우리 따듯한거라도 먹으면서 이야기 할까요?” “그러죠. 근데 제가 시부야는 잘 몰라서 어디가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흠~ 뭐 일단은 상점가에 가볼까요?” 나와 유키는 시부야의 상징이라 불리 우는 교차로에 서서 서로를 바라보며 빙긋 웃어보였다. 유키는 1980년대의 여성치고는 굉장히 세련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요즘 여성들 사이에 유행하는 과한 파마머리 대신 긴 생머리를 새하얀 머리끈으로 정리한 후에 끝에만 살짝 웨이브를 주어 단정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또한 웃을 때마다 양 볼에 보조개가 살짝 들어가는 것도 하나의 매력 포인트랄까? “와~ 시부야는 역시 사람이 많네요.” “준혁씨가 있는 교토랑은 다르게 좀 복잡하죠?” “어? 제가 교토에 있는지 어떻게 아셨어요?” “민텐도 직원이시라면서요. 민텐도 본사는 교토에 있지 않나요?” “아.. 잘 알고 계시네요.” 딩동~ 딩동~ 잠시 후 신호등에서 소리가 울리며 초록불로 바뀌자 거대한 횡단보도에 대기 중이던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신호등을 건너기 시작했다. 우리 뒤에 있는 시부야 역을 향해 바글바글 몰려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2000년대에 가끔 심심할 때 즐겼던 게임인 삼국 무쌍을 떠올리게 하는군. 일기당천 홀로 수백의 적을 무찌르는 게 백미였던 게임인데, 그런 게임을 구현 시키려면 아직 시대가 한참 더 흘러야 가능하겠지? 그 게임이 아마 센소니가 만들어낸 기어 스테이션2에 등장했으니까.. 앞으로 15년은 더 흘러야 첫 작품이 나올 텐데.. 잠깐. 아니지, 꼭 그렇게 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잖아..? “준혁씨?” “아, 네?” “저기.. 이쪽 길로 가야하는데?” “아, 죄송해요. 잠시 딴 생각 좀 하다가..” “흐음..” 유키는 잠시 뾰루퉁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런.. 자나깨나 게임 생각만 하다 보니 이러다가 미움 받겠는데? 나는 슬금슬금 올라오는 개발 욕구를 억누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 잠시 후. 유키씨가 나를 데리고 온 곳은 시부야에 있는 한국 음식점이었다. 가게의 이름은 어머니 밥상? 조금 묘한 이름인데? “여긴..?” “준혁씨가 한국인이니까. 혹시 좋아하실까 해서 친구들한테 물어봤더니, 여기가 도쿄에서 가장 맛있다고 해서..” “아~” 나는 유키의 배려에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아무 생각도 못하고 약속시간에만 신경쓰고 달려온 내가 바보 같기도 하고, 만나고 나서도 계속 차기작 생각만 하다니.. “한식은 별로세요?” “아뇨~ 오히려 엄청 반가운데요? 교토엔 한국 음식점이 잘 없어서 매번 우동이나 라멘만 먹었는데,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자 유키는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다행이다..” 유키와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된장찌개 냄새와 함께 고기를 볶는 연탄 불고기의 냄새가 위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점심 때는 잡지사와의 약속 때문에 간단히 국수로 떼웠기 때문에 상당히 배가 고픈 상태였다. “어서오세요~” ‘어머니 밥상’은 특이하게도 손님맞이 인사를 한국어로 하였는데, 반가운 마음에 카운터에 있는 아주머니께 나 역시 한국말로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어마~!! 한국인이네~” “네, 이 친구가 이 집이 도쿄에서 가장 맛있다고 소개해줘서 같이 왔어요.” “아이고~ 고마워라~ 이국땅에서 한국사람 만나니 참말로 반갑네이~ 내 불고기 많이 챙겨 줄라니까. 맛있게들 드시소~”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우리가 한국말로 대화하자 멀뚱멀뚱 우리만 바라보고 있던 유키는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주머니가 절 만나서 반갑데요~” “아~ 그렇구나. 아주머니도 좋아하시는 것 같네요.” 식탁에 마주 앉은 우리는 서로의 잔에 물을 따라 준 뒤에 불고기 백반 2개와 된장찌개를 주문했다. 생각보다 간단한 주문에 유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식사는 안 모자라 시겠어요? 오늘 국수 밖에 안드셨다면서요.” “유키씨 한국 요리점은 처음이죠?” “네. 사실 친구들한테 듣기만 하고 오늘 처음 와 봐요.” “기다려 보세요~ 깜짝 놀랄 일이 벌어 질테니~” 잠시 후. 식탁을 가득 메울 정도로 차려지는 밑반찬들의 모습에 유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빙 직원에게 말했다. “저.. 저희 이것들은 안 시켰는데요?” “이건 그냥 오카즈(밑반찬) 에요. 음식을 주문하면 기본적으로 나오는 것들이니, 걱정 마세요~” “이.. 이게 전부 오카즈?” 음.. 주인분이 전라도 분이신가? 확실히 전라도 음식이 맛도 좋고 한끼를 먹어도 반찬이 풍성해서 좋긴 하지~ 식탁위에는 금세 김치와 도토리묵을 비롯해 김치전과 떡 갈비등등이 조금씩 접시에 담겨 나오기 시작했다. “와아.. 한국 사람들은 매번 이렇게 먹나요?” “아.. 뭐 매번 이렇진 않지만, 기본적으로 일본보다는 반찬 가짓수가 많기는 하죠.” “신기하다~ 음식도 엄청 맛있어요~!!” 다행히 유키 입맛에도 잘 맞았는지 그녀는 곧 잘 음식을 집어 먹었다. 일본에 미소시루와 비교해 조금 칼칼한 맛의 된장찌개를 먹을 때는 사레가 들어 서둘러 물을 건네주었다. “매.. 맵다.” 확실히 일본 된장국이랑은 격이 다르지~ 유키는 켈룩거리면서도 꿋꿋하게 참아내고 있었다. 이윽고 연탄불에 지글지글 구워 나온 불고기까지 올라오자, 식탁은 빈자리 없이 빼곡히 채워졌다. “이렇게 많이 나오는데, 1인분에 겨우 380엔이라니..” “원래 한국 사람들이 인정이 많아서 그래요~” 나는 오랜만에 느끼는 한국의 맛에 감동하여 허겁지겁 밥을 삼켰다. “아주머니~ 여기 밥 한 공기 더 주세요~” “옴마? 벌써 다먹었는가? 내 퍼뜩 가져다 줄께” 사투리를 쓰는 서빙 담당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문을 받았다. & “아~ 배부르다~” “너무 과식 하신건 아녜요? 밥을 세 그릇이나..?” “한식을 오랜만에 먹다보니 너무 욕심 부렸나봐요..” “그래도 잘 드시는 거 보니 저도 막 기분이 좋던데요?” “고마워요. 신경써주셔서 이런 데까지 알아봐 주시고, 저녁은 제가 사겠습니다.” “네? 준혁씨가 왜요?” “음..? 아니 뭐.. 그냥..” “저도 돈 있는데요? 아주머니 여기 계산 나눠서 해주세요~” 내가 미쳐 말릴 틈도 없이 유키는 계산서를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음.. 보통 첫 만남에서 남자가 밥을 사는 건 일종의 관례라고 생각했었는데, 조금은 사고방식이 다르구나. 결국 저녁 식사비용을 반으로 나눠 계산한 뒤에 밖으로 나오니 밖은 벌써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이미 배는 부른데, 밥만 홀랑 먹고 가버리긴 뭐하니.. “우리 커피 한잔 할래요? 소화도 시킬겸? 커피는 제가 살게요.” “네? 왜 자꾸 다 사주시려고..” “제가 밥 세 그릇 먹었잖아요~ 그걸 반으로 나눠서 계산 했으니 유키씨가 손해 봤잖아요. 그러니까 커피는 제가 사게 해주세요~” 그러자 유키는 풋하고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 참 커피 한잔 사주기도 힘들네.. 그렇게 우리는 근처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 “그럼 좋은 시간 되세요~” 커피를 가져다준 웨이터는 쟁반을 품에 안고 돌아갔다. 흐음.. 이런 고급스러운 커피 잔에 커피를 담아 직접 서빙까지 해주다니.. 2000년대 카페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냥 진동 벨 울리면 찾으러 가던 때와는 달리 뭔가 품격이 느껴지는 군.. 또한 일반 종이컵이 아닌 근사한 사기잔에 담겨진 커피를 바라보니 확실히 1980년대라는 게 실감이 나긴 하는구나.. “요새도 많이 바쁘세요? 처음 전화가 오고 나서 한동안 또 연락이 없으시길래..” “아.. 요새 게임 하나를 개발 중이거든요.” “게임이요? 와아~ 어떤 게임인가요?” “아, 그게.. 저기..” 안돼!!! 절대 말할 수 없어~!! 섹시한 여자 캐릭터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필살기 맞으면 반쯤 옷이 벗겨져 쓰러진다는 걸 어떻게 말해~!! ──────────────────────────────────── ──────────────────────────────────── EP. 12 : 기묘한 마케팅 (4) 안돼!!! 절대 말할 수 없어~!! 섹시한 여자 캐릭터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필살기 맞으면 반쯤 옷이 벗겨져 쓰러진다는 걸 어떻게 말해~!! 결국 나는 가장 무난한 캐릭터 디자인 (그나마 가장 많이 가리고 있는) ‘류화영’의 이미지를 꺼내 보였다. 그녀의 설정 자료는 아직 누구에도 보여주지 않았기에 유키에게 최초로 공개하는 셈이었다. 류화영은 전신에 검은색 슈트와 얼굴 절반을 가면으로 가리고 있는 비밀의 캐릭터였다. 가면 아래 도톰한 입술과 타이트한 차림에서 돋보이는 훌륭한 몸매가 인상적인 류화영은 내가 사이킥 배틀중에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이다. 사이킥 배틀의 메인 주인공 캐릭터 세 명은 불꽃술사 ‘아즈사 렌’, 전격술사 ‘헬레나’, 폭풍술사 ‘아오이 츠바사’로 최종 결정 되었지만, 최종장까지 게임을 클리어하면 스토리 모드와 배틀 모드에서 적으로 등장했던 초능력자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2번째 스테이지 보스 염동술사 ‘캐서린’, 5번째 스테이지 기폭술사 ‘제니퍼’ 그리고 마지막 8스테이지 최종 보스 캐릭터인 ‘류화영’ 특히 류화영의 컨셉과 설정은 내가 직접 만들어 모리타에게 전해주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주인공 ‘아즈사 렌’보다 훨씬 애착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였고, 특수 성능 역시 최종 보스답게 사기 캐릭터 수준으로 세팅 될 예정이다. “캐릭터가 굉장히 예쁘네요? 여 주인공인가요?” “사실 이 게임의 조작 캐릭터들은 전부 여자입니다. 초능자들의 싸움을 메인으로 하고 있는 슈팅 게임입니다.” “아, 그렇군요. 슈팅 게임이라면 막 날아다니면서 미사일을 쏘는 거죠?” “음, 뭐 대충은 맞아요.” “저 비행기 게임 엄청 좋아하는데~ 게임 센터에 있는 1942도 자주 하거든요. 준혁씨가 만든 게임이 출시되면 꼭! 해볼게요.” 나를 바라보며 단호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에게 나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하하.. 그렇게 꼭 해보진 않으셔도 되는데..” “네?” “아니에요. 혼잣말입니다. 그런데 전에 제가 드린 드래곤 엠블렘은 잘 가지고 계시나요?” “아~ 맞다.” 유키는 가방에서 드래곤 엠블렘과 함께 확장 카트리지를 꺼내 탁자에 올려두었다. “준혁씨 덕분에 재밌게 했어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확장 카트리지 안에 들어 있는 추가 시나리오도 덕분에 재밌게 즐겼습니다. 확장 카트리지는 제가 답례로 드리려고 샀어요.” “다시 저한테 주시려구요?” “네, 너무 즐겁게 했던 게임이라~ 혹시 바빠서 못해 보셨을까봐.” “괜찮아요. 저도 이미 확장 시나리오까지 클리어 한 상태입니다. 제가 선물 했던 거니까 그냥 소중히 간직해 주세요.” 반지나 목걸이도 아니고, 게임 카트리지를 소중히 간직해 달라고 부탁하니. 왠지 기분이 이상하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유키씨는 무슨 일을 하고 계세요? 전에 보니 게임도 굉장히 잘하시던데? 그때 행사장에서도 얼마 없던 여성 유저 가운데 마지막까지 살아 남으셨잖아요.” “어릴 때부터 체스 두는 걸 좋아해서 아버지랑 자주 두곤 했는데, 드래곤 엠블렘이란 게임을 보는 순간 혹해서 사버렸지 뭐예요. 아~ 그리고 저는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어요.” “방송국이요??” “네, 아직은 심야 방송 프로그램의 보조 작가지만요.” “실례지만 나이가..?” “열 아홉이요. 지난주에 생일이 지났거든요.” “아, 늦었지만 생일 축하드려요.” 열아홉이면.. 한국 나이로 치면 21살인가? 분명 성인이긴한데, 19살이라는 나이가 굉장히 당혹 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 잔을 입으로 옮겼다. “준혁씨는요?” “저는.. 스물다섯이요.” 나는 얼추 머릿속으로 내 나이를 다시 계산해보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일본 나이 21살로 세팅하고 83년에 온 후로 4년의 시간이 흘렀구나.. 세월 참 빠르네. “와아.. 생각보다 어리시네요?” “풉.. 제가 나이가 많아 보여요?” “뭔가 느낌이 제가 아는 20대랑은 조금 달라서..” “어떻게 다른데요?” “본래 20대라면 대학을 갓 졸업해서 뭐든 어리숙한 사회 초년생 느낌인데, 준혁씨는 굉장히 어른스럽다고 할까? 솔직히 말해 아무리 젊어도 20대 후반이실 줄 알았어요.” 아무래도 2015년 때의 말투나 습관이 그렇게 보이게 하는 건가? 겉으론 25살이어도 속으론 38살이니. 유키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네,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도 12월 한 달밖에 안 남았네요. 내년에는 한국에서 88 올림픽이 열리는데, 혹시 한국에 돌아가시나요?” “글쎄요. 직장이 일본에 있으니 아주 돌아가는 건 아니고, 잠깐 휴가차 다녀올 생각입니다.” “부모님은 한국에 계시는 거죠?” 유키의 물음에 커피잔을 들어 올리던 내 손이 멈추었다. 부모님. 잘 계시려나..? 내년에 휴가를 내면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에 가보는 건 어떨까? 88년도에 7살이었으니까.. 아마도 서울 서대문 쪽에 살았던 것 같은데.. “준혁씨..?” “네. 부모님은 한국에 계세요. 내년에는 한번 만나 뵈러 가야겠네요. 서울 올림픽도 보러갈 겸..” 대답을 흘리며 싱긋 웃어 보이자. 유키는 더 이상 가족에 관해선 묻지 않았다. 대신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내어 무언가 적기 시작했다. “그건 뭐예요?” “잠시 아까 다녀온 음식점에 대해 써두려 구요. 잊어버리기 전에..” “잊어버리기 전에?” “이번에 신입 작가들 대상으로 정규 프로그램 아이디어 공모전이 있거든요.” “공모전이요?” “네, 새로운 방식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나 2~30분 정도의 짧은 드라마 기획이긴 한데, 공모전 출품작으로 음식을 소재로 하려고 하거든요.” 음식? 2010년대에 유행하던 먹방 드라마 같은걸 말하는 건가? 유키는 다이어리를 반듯하게 펼쳐 놓고는 식당에서 먹었던 음식들을 하나씩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탁자에 몸을 기댄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후. 유키는 식당 테이블에 놓여있던 음식들을 순서대로 하얀종이 위에 옮겨담기 시작했다. “굉장하다. 그 많은걸 한 순간에 기억했어요?” “어릴 때부터 기억력이 좋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유키는 베시시 웃으면서도 쉬지 않고 손을 놀렸다. 어느정도 그림이 완성되자 유키가 내게 물었다. “준혁씨. 아까 우리가 먹은 시루(국)는 뭔가요?” “된장찌개요.” “덴잔치게.. 고기는요?” “그건 연탄 불고기라고 해요.” “욘탄 부루고기..” 굉장히 신중한 표정에 비해 발음이 엉성한 게 너무 귀여워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유키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 발음 이상하죠? 헤헤” “아니에요. 귀여워요.” 이윽고 각각 밑반찬의 이름들까지 전부 써내려간 유키는 개운한 표정으로 다이어리를 덮었다. “그거 잠깐 봐도 되요?” “부끄러운데, 아직 누구한테 보여줄 만한 게 아니라..” “아이디어는 나눌수록 좋아진다는 거 모르세요?” “그런 게 아니라..” 유키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나에게 다이어리를 내밀었다. 유키에게서 다이어리를 넘겨받은 나는 한 장씩 넘기며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다이어리 안에는 도쿄 곳곳의 음식점이나 디저트 전문점의 요리들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입안에 군침이 돌 정도로 특색 있게 그려져 있었다. 어떤 것에는 참고용으로 사진까지 오려 붙여 놓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런데 이 시대에 필름 카메라로 음식 사진 찍는 사람이 흔치는 않을 텐데? 어떤 파르페의 그림에는 재료와 컵의 모양, 아이스크림의 높이까지 자세히 쓰여 있어 굉장한 참고 자료가 될 것만 같았다. 그중에 재밌는 것은 모든 음식 옆에는 삶은 달걀 모양의 캐릭터가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기묘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와.. 진짜 자세히도 적혀 있네요.” “그만 돌려 주세요~ 네?” “잠시 만요. 조금만 더..” 그렇게 그림을 넘기다가 나는 한 장의 그림에서 손을 멈추었다. 거기엔 음식 대신 민텐도의 카트리지가 그려져 있었다. 게임의 제목은 ‘드래곤 엠블렘’ 그 옆에는 깜짝 놀란 표정의 달걀 캐릭터와 말풍선이 그려져 있었다. -만든 사람 진짜 천재~!! 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이 게임을 클리어 한 준혁씨도 굉장해~!!- “아~!! 그건!!” 유키는 내가 보고 있던 다이어리를 재빨리 낚아채 가방에 도로 넣어 버렸다. “뭘 그리 놀라요?” “그냥 부끄러워서요. 아~ 덥다.” 유키는 얼굴이 화끈 거리는지 빨개진 얼굴에 부채질을 하였다. “그림을 굉장히 잘 그리시네요? 음식들마다 옆에 그려진 계란형 캐릭터는 유키씨가 직접 만든 건가요? 뭔가 표정이 여러 가지던데?” “아~ 타마고상(달걀씨)이에요. 제가 만든 캐릭터인데, 표정으로 음식 맛을 평가해주고 있는 거예요. 어때요?” “재밌어요. 독특한 방식인데요?” 소위 이모티콘처럼 표정으로 맛을 평가해주는 거였구나, 지금 시대에선 굉장히 독특한 방식인데? 그러나 유키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가 않았다. “유키씨. 혹시 무슨 고민거리 있어요?” “사실, 공모전이 며칠 안 남았는데, 프로그램 컨셉에 대한 구상이 아직 덜 끝났거든요. 장르는 도쿄의 맛 집 탐방으로 정했지만, 그냥 가게를 소개만 하는 건 너무 밋밋해 보여서..” “맛 집 탐방이라..”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아까 점심때쯤 떠올린 드라마 한편이 생각났다. 80년대에 과연 그런 컨셉이 먹힐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번 시도는 해보는게 좋지 않을까? 어차피 정규 편성도 아니고 공모전인데, 나는 두 손을 턱에 괸 채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키에게 말했다. “유키씨. 혹시 이런 컨셉은 어떨까요..?” ──────────────────────────────────── ──────────────────────────────────── EP. 12 : 기묘한 마케팅 (5) “유키씨. 이런 컨셉은 어때요..?” “네? 어떤..?” 유키과 관심을 보이자 이번엔 내가 서류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들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유키의 다이어리에 비해 다소 투박스럽고 너저분했지만, 나 역시 간간히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정리하기 위해 항상 노트를 들고 다니는 편이었다. (주로 첸드라나 군페이씨의 이해를 돕기 위해 스케치를 하는 용도로 쓰이기로 했지만..) “와아.. 뭔가 굉장히 복잡해 보이네요. 준혁씨의 아이디어 노트 같은 건가요?” “유키씨 만큼 깔끔하게 정리는 못하지만, 가끔 무언가 떠오르면 써두곤 해요. 안써두면 금방 까먹는 체질이라..” “맞아요. 생각 날 때 써두는 게 가장 좋죠.” “일단 제가 생각한 컨셉은 이런 스타일이에요.” 나는 노트의 빈 페이지에 정장차림의 직장인 하나를 대충 그려 넣었다. 그러자 내 그림을 보고 있던 유키가 조그맣게 말했다. “간단한 그림이지만, 포인트를 잘 잡으시네요. 딱 봐도 셀러리맨 테가 나는데요?” “그래요? 유키씨 그림 보다는 못하지만, 우선은 이 캐릭터가 중요해요.” “이 캐릭터가요?” “네, 이 사람은 항상 배가 고픈 사람이거든요. 이름은 적당히 오나카 스이타상(배가 고프다씨)으로 하죠.” “풋..” 유키는 나의 작명 센스에 웃음을 터뜨렸다. “적당히 지은 것 치곤 제법 그럴듯한 이름인데요? 킥킥” “이름은 뭐 나중에 작가님들이 따로 생각하시면 되고, 이 캐릭터를 맡은 배우분이 실제로 가게를 돌아다니며 음식을 주문해 먹어보는거죠.” “아~!! 가게를 소개하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배우가 음식을 먹어보는 거군요.” “약간 드라마 형식으로 컨셉을 잡으면 괜찮을 거예요. 영업 사원인 주인공이 업무차 도쿄시를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배가 고파지는 거죠.” “그래서 가게를 찾아가 음식을 주문해서 먹는 건가요?” “맞아요. 심야 티비를 보는 시청자들이 실제로 찾아가 먹어볼 수도 있고, 가게 홍보도 될 테니 주인들도 좋아할 듯한데?” “딱딱한 음식점 소개보다는 조금 더 자연스럽게 시청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촬영 장소의 마케팅 효과도 있을테고 1석 2조네요~” 유키는 내가 말한 컨셉을 제대로 파악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1987년에 일본에서는 컬러 TV의 보급이 거의 다 완료된 상태라 다양한 방송이 쏟아져 나오는 시기였다. 그중에 요리 프로그램은 기존에 흑백 TV와는 달리 음식의 색까지 표현 해내는 컬러 TV 덕분에 아침에 주부들이 즐겨보는 프로그램으로 자주 순위에 오를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음식을 맛깔나게 먹는 모습을 전문으로 소개하는 프로그램은 없었기에 유키는 내 컨셉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 “굉장히 새롭고 독특한 소재라, 잘 될지는 모르지만 한번 기획서를 써볼게요.” “거 봐요. 혼자 생각하는 것보단 둘이 생각 하는 게 더 낫죠?” 유키는 내 말에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조금 더 대화를 나누다가 커피 집을 나온 우리는 늦가을의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시부야 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시간은 오후 9시가 조금 지난 상태. 이 시간이면 교토로 향하는 신칸센도 거의 막차 밖에는 없을 것 같은데, 어차피 도쿄에 온김에 근처 호텔에서 한숨 자고, 내일 펜타곤 사무실에 들러볼까? 카와구치씨가 만든 파이널 프론티어 1은 발매직후 지금까지 20만장을 팔아제낀 대형 타이틀이 되어 있었다. 실패하면 게임 디렉터를 관두겠다고 ‘파이널’이라는 문자까지 붙여서 발매한 타이틀이 대성공을 거두며 2제작에 들어간 상태였다. 안 그래도 며칠 전 통화했을 때 2는 조금 더 타겟층을 높혀 어른 취향의 RPG를 만든다고 했는데.. 설마 사이킥 배틀처럼 아슬아슬한 컨셉 구도로 가는 건 아니겠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옆에서 걷고 있던 유키가 나에게 물었다. “이제, 우리 뭐할까요?” “네? 아.. 집에 돌아가시는 거 아녔어요?” “지금 9시 밖에 안됐는데요? 준혁씨는 다시 교토로 돌아가시나요?” “아뇨. 내일 잠깐 도쿄에 볼일이 있어서 근처 호텔에서 자고 가려구요.” “음~ 그럼 아직 시간 많네요.” “그렇긴 한데, 어디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어요?” 그러자 유키는 나를 올려다 본 채로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남녀가 밤에 만나 갈만 한 곳이 어디가 있을까요?” “네..?” 헛.. 설마 이제 두 번 봤는데? 청순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저돌적인 타입인가? 난 결국 유키씨의 손에 이끌려 다시 유흥가 거리로 향했다. &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형형색색의 네온사인과 시끄러운 음악이 뒤섞인 건물 앞에 서있었다. “여긴.. 그.. 에휴~~” “준혁씨 무슨 상상을 하신 거예요? 혹시 응큼한 생각 하신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자기가 응큼 충만한 생각 다 들게 해놓고, 이 건 아니잖아요.. 내가 푹 고개를 숙이자 유키는 키득거리며 ‘게임 센터’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내가 서있는 곳까지 온갖 게임들의 BGM이 뒤섞여 흘러 나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들어 2~3층에 모텔이라도 있나 찾아봤지만, 전혀 그런 업소는 보이지 않았다. 하긴 미치지 않고서야 1층에 오락실이 있는데 윗 층에 모텔 방 만들 업소가 어딨겠어~ 중간 중간 건물 안쪽에서 귀에 익은 테트리스의 BGM이 흘러나오는 와중에 유키가 나를 불렀다. “저 준혁씨 오면 꼭 같이 해보고 싶었던 게임 있는데 도와주실 거죠?” “아, 네. 하하.. 기꺼이..” 나는 억지로 유키를 향해 웃어 보이며 게임 센터 안으로 들어섰다. 유키는 그런 내 반응이 재밌는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계속해서 웃고 있었다. 처음엔 속아 넘어 줬지만, 다음번엔 어림도 없을 것이야. 나는 속으로 꿍한 마음을 털어내고 가볍게 센터 내부를 둘어 보았다. “엄청 크네. 교토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규모다.. 특히 NEGA에서 나온 체감용 기기들을 전부 들여 놓았군.” 최근 일본의 게임 업계는 어마어마한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가정에서는 민텐도의 패밀리가 번화가 지역에서는 이러한 거대 규모의 게임센터가 들어서 어디서든 게임 매체를 접할 수가 있었다. 이 당시 게이머들은 화려하고 그래픽이 좋은 액션 게임을 즐기고 싶다면 무조건 게임 센터로 가야만 했다. 집에서 즐기는 패밀리 기기는 스펙상 게임 센터에서 사용하는 전용 기판 형식의 그래픽을 따라잡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2000년대에 들어서며 가정용 콘솔이 게임 센터의 그래픽을 능가하기 시작하며 서서히 망조가 들긴 하지만.. 현재 가정용 콘솔은 드래곤 워리어 같은 RPG나 어드벤처 장르가 성행하며 플레이 타임이 긴 독자 노선을 타기 시작했기에 아직까지 게임 센터 업주들와 큰 충돌은 없었다. 그러나 이 시대 게이머들의 꿈은 게임 센터용 게임을 집에 있는 가정용 게임기로 플레이하는 것이 소원이었을 정도로 화려한 이펙트 효과가 일품이었다. 전에도 느끼긴 했지만, 유키는 게임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마침 ‘행온’이라는 체감형 오토바이 게임이 비어있었는데, 유키는 재빨리 가디건을 벗어 허리춤에 묶더니 훌쩍 오토바이 위에 올랐다. “이거 하려구요?” “네, 준혁씨도 같이 할래요?” “아뇨. 전 그냥 보기만 할게요.” 그녀는 자신의 가방을 옆에 있는 바구니에 두고 동전 투입구에 100엔짜리 동전을 넣었다. 체감형 게임기는 일반 게임기보다 이용 금액이 좀 비싼편이다. NEGA의 코인 회수률이 좋은게 이해가 가네.. 실제 오토바이와 흡사하게 제작된 슬로틀을 돌리자 곧이어 게임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 옆에서 팔짱을 낀채 유키의 플레이를 지켜보았다. 흐음~ 체감형식의 게임이라.. 확실히 NEGA가 아케이드에서는 잘나가는군. 사실 NEGA 디스크 보급률의 실패에도 NEGA가 쓰러지지 않은 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아케이드 게임 시장 덕분이었다. 플레이어가 직접 운전석에 탑승하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설계 제작한 최초의 회사가 바로 NEGA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형 뽑기에 주로 사용되는 UFO 가챠 머신 역시 그들이 만들어 낸 기계였기에 매달 벌어들이는 코인 수익이 어마어마하다고 들었다. ‘과연 카마우치 사장이 탐낼만한 시장이긴 하군. 하지만 기기 제작 단가가 너무 높기도 하고, 군페이씨와 시게루씨의 조언대로 언젠가 가정용 콘솔이 성장하면 고속으로 하락할 시장이었기에 무리한 투자를 하지 않은 게 다행이랄까?’ “아~ 아깝다.. 조금만 더 가면 체크포인트였는데..” 이런 체감형식의 레이싱 게임은 정해진 시간까지 체크포인트에 도달해야 다음 트랙을 돌수 있도록 설계 되었기에 코인 회전율이 빠른 편이다. 나는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유키에게 가방을 건네주며 물었다. “그래도 잘하는데요? 스코어 순위가 8위 정도면 대단한 건데?” “저 제법이죠? 아~!! 저기 자리 비었다.” 유키는 이번엔 레버 조작형식의 평범한 기판 쪽으로 쪼르르 달려가더니 나를 불렀다. “우리 이거 같이 해볼래요?” “음?” 딩~ 딩~ 딩~ 빰빰빠바 빰빰빠바 빰빰빠밤빰~ 빠라밤빰.... 최근에 누구나 거리를 거닐며 버릇처럼 흥얼거리던 BGM이 하나 있었다. 이 중독성 있는 BGM은 온 동네 게임센터 출입구 쪽에서 새어 나왔는데, 누구나 한번 들으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독특한 리듬감이 있었다. 이 미친 BGM의 주인공은 바로 일본의 다이도 소프트에서 만든 버블보블.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보글보글이라 불렸지? 떡하니 타이틀에도 버블보블이라 써있구만.. 조그만 공룡의 입에서 어째서 불이 아니고 거품이 나가는지 이유는 몰라도 아무튼 이 게임은 그 거품으로 적을 가둔 후에 밟아서 터뜨려야만 완전히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너무 시간을 오래 끌면 고래 모양의 유령이 나타나 플레이어를 잡으러 오는데, 그와 동시에 갑자기 빨라지는 긴박한 BGM은 절로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였다. 특히 신발과 사탕 등 아이템을 먹어 캐릭터를 강화 시킬 수가 있었는데, 서로 먹기 위해 1P, 2P의 우정 파괴를 유도하는 요소도 가득했다. 유키는 가디건으로 치마를 가린 채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할 수 없이 내가 2P쪽에 앉자 유키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 이거 스코어 내기 할래요?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어때요?” 어라? 이건 예상치 못한 도전인데? 뭐 그럼 나도 어린 시절 추억삼아 어울려줘 볼까? 우리는 사이좋게 50엔 동전 하나씩 집어넣고는 게임을 시작했다. ──────────────────────────────────── ──────────────────────────────────── EP. 13 : 다가오는 16비트 시대 (1) “우리 이거 스코어 내기 할래요?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어때요?” 어라? 이건 예상치 못한 도전인데? 뭐 그럼 나도 어린 시절 추억삼아 어울려줘 볼까? 우리는 사이좋게 50엔 동전 하나씩 집어넣고는 게임을 시작했다. 이윽고 거품을 타고 온 두 마리의 공룡이 스테이지 양쪽에 위치하고 게임이 시작 되었다. 총 100판이 준비 되어 있는 이 게임은 레벨 디자인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솔직히 50판이 넘어가면 좀 질리는 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우리는 서로 더 많은 적을 물리치기 위해 열심히 버튼을 두들겨 대기 시작했다. “어?” 유키의 플레이는 교활했다. 내가 애써 적들을 거품에 가둬두면 귀신같이 달려와 일순간에 터뜨려 모조리 처리해 버렸고, 스테이지에 떨어진 바나나와 딸기를 독식하며 스코어를 키우고 있었다. “유키씨.. 이거 많이 해본 솜씬데요?” “저희 동네 1등 스코어가 바로 저 거든요~” 게임센터에 온 게 첫 번째 함정이라면 이건 두 번째 함정이냐? 그렇다면 더더욱 질수 없지!! 나는 플레이 방식을 바꿔 유키가 처리하는 적들을 밟아 죽이며 스테이지를 누비기 시작했다. 버블보블의 공룡은 1프레임 안쪽으로 타이밍만 잘 맞추면 거품을 밟고 뛰어 오를 수도 있었기에 나는 거침없이 점프 버튼을 눌러대었다. 그때 마침 타이밍 좋게 내 머리 위로 신발 아이템이 떨어졌다. 이걸 먹으면 스피드가 1.5배 향상 되지~!! 유키 역시 신발을 먹기 위해 서둘러 달려왔지만 내가 더 빨랐다. “아, 치사해~!!” “스코어 내기에 양보가 어딨습니까~” 재빨리 신발을 낚아챈 이후 나의 스피드는 더욱 빨라져 유키가 가둔 적들을 모조리 터뜨려 대었다. 와~ 나도 이젠 다 잊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보글보글 완전 재밌네~!! 어릴 때 오락실에서 50원 넣고 100판까지 가다가 주인아저씨한테 쫒겨 날 뻔했었는데 킥킥.. 갑자기 떠오른 어린 시절의 추억에 나는 혼자 웃음을 터뜨렸다. “아!! 사탕~!!” “내꺼.” “아아악!!” 이미 신발을 먹은 상태였기에 유키보다 늦게 출발했지만 순식간에 그녀를 앞질러 사탕을 주워 먹었다. 사탕은 거품이 쏘아지는 비거리를 늘려주는 효과가 있지~!! 그렇게 사탕과 신발까지 먹고 나자 내 푸른 공룡은 거의 무적이나 다름없었다. 20 스테이지에서 이미 유키와 나의 스코어는 만점이상 벌어지고 있었다. “그만 포기 하시죠~ 유키씨~” “흥, 절대 포기 안 해요. 두고 보세요. 반드시 이겨줄 테니~!!” 원래 이런 성격이셨나? 마치 운전대를 잡으면 성격이 달라지는 사람처럼 레버를 잡은 그녀의 성격은 180도 달라져 있었다. 그때 스테이지 위로 한 켤레의 신발 아이템이 사뿐히 떨어졌다. “아!! 신발!!” “내꺼.” “준혁씨는 이미 먹었잖아요!!” 신발을 먹은 상태에서 또 먹으면 스코어가 1000점이 추가되니까~ 나는 잽싸게 달려가 유키의 신발을 뺏어 먹었다. 이거 내가 봐도 좀 얄밉긴 한데? 설마 게임 가지고 화내진 않겠지? 슬쩍 고개를 돌려 유키를 바라보니 그녀 역시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뭔가 싸한 느낌이 드는데? 그때 30스테이지에서 유키가 묘하게 레버를 조작하더니 비밀의 문을 열었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단숨에 50 스테이지로 넘어갈 수 있었다. “아직 포기 안했거든요?” “아이템 없이 50스테이지는 힘들 텐데?” “두고 봐요.” 이를 앙다문 채 화면에 집중하는 그녀를 바라보니 굉장히 귀여운 느낌이 들었다. 비단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주변에 지나가던 게이머들도 열심히 레버를 조작하고 있는 유키의 모습을 슬쩍슬쩍 흘겨보거나 아예 대놓고 뒤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와~ 남자가 게임을 엄청 치사하게 한다.” “혼자서 아이템 다 처먹네. 뭐 저런 놈이 다 있냐. 양보를 몰라 양보를..” “나라면 저런 여자랑 게임 하면 아이템 몰빵 해줄 텐데..” 남이사 아이템 다 쳐 먹고 배 터져 죽던 말건~ 이쪽은 진검 승부중이란 말이다~!! 그런데.. 내가 이기면 소원으로 뭘 해 달라하지? 생각해보니 별로 해달랄 게 없는데, 굳이 소원을 말하라면 아까 내가 생각해둔 그 곳에 가는.. 에이, 에이~ 오늘로 두 번째 만나서 뭔 생각을 하는 거냐.. 잠시 딴 생각에 빠져 흐름을 놓친 그 순간 정말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다. “십자가다!!” 뒤에서 들려온 남자의 외침에 깜짝 놀라 화면을 바라보니 유키의 캐릭터 4칸 위로 푸른색 십자가가 떨어졌다. “와, 진짜네. 나 버블보블에서 십자가 처음 봐~!!” 젠장!! 안 돼~!! 나는 재빨리 거품을 밟고 뛰어 올라 십자가를 향해 달렸다. 저걸 내가 먹어야 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성분 힘내세요! 빨리 점프!!” 누가 보면 내가 무슨 대악마라도 되는 줄 알겠네!! 나는 이를 악문 채 레버를 기울여 십자가를 향해 달렸지만 간발의 차로 유키가 십자가를 먹어버렸다. 그러자 유키를 지켜보던 주위에 남성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우와아~!!” 버블보블에서 가장 엄청난 마스터 피스 아이템중 하나인 십자가는 무려 4782 분의 1 확률로 등장하는 극악의 레어 아이템이었는데, 저걸 먹으면 지금까지 거품만 뿜어대던 고자 공룡이 불을 뿜을 수 있게 되었다. 불은 단 한방으로 적을 쓸어버리는 강력한 무기였기에 따로 적을 가둬서 거품을 터뜨려야하는 나의 플레이에 비해 효율이 엄청났다. 결국 십자가의 은총으로 유키는 순식간에 나의 스코어를 따라 잡았고, 마지막 보스까지 유키는 단 한 번도 죽지 않고 클리어 시켜버렸다. 최종 점수는 92만점 대 89만점. 물론 후자가 내 점수였다. “이겼다아~” 스탭롤이 흐르는 화면에서 손뼉까지 치며 좋아하고 있었다. 거의 한 시간 가까이 플레이하고 나니 허리 아파 죽겠네. 소원이고 뭐고 어서 들어주고 호텔가서 잠이나 자야겠다. 결국 10시가 넘어 게임센터에서 나온 우리는 이제 정말로 집으로 가기 위해 역으로 향했다. 거의 막차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서둘러 역으로 달려가는 이들이 하나둘 보였다. “원하는 거 말해보세요. 소원 들어주기로 했잖아요.” 그러자 유키는 가방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어 수줍게 나에게 내밀었다. “전화 번호 알려 주세요.” “소원이 이거에요?” “네..” 아까 보글보글 하다가 음란 마귀 씌었던 게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로 소박한 소원이군. 나는 수첩을 받아들고 내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보통 5시쯤 퇴근하고 나면 집에 있으니까 언제든 전화해요.” “오늘 정말 재밌었어요. 준혁씨.” “저도요. 내일 교토로 돌아가기 전에 괜찮으면 식사나 같이 할래요?” “네~ 전화 기다릴게요.” 어느새 시부야 역 앞에 도착한 나는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유키에게 말했다. “전 그냥 여기 근처에 호텔에서 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조심히 들어가요. 유키씨.” “네, 근데 준혁씨 한테 하나 궁금한 게 있긴 한데..” “뭔데요?” “만약 준혁씨가 이기면 어떤 소원을 빌려고 했어요? 뭔가 굉장히 필사적이시던데?” “아.. 그.. 음.. 비밀입니다.” “아~ 그~ 음~ 비밀이군요. 하지만 대충 뭔지 알거 같아요.” “흐음.. 흠..” 내가 모른 척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하자, 유키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오늘 푹 쉬시고, 내일 뵈요.” “네, 조심히 들어가요.” 잠시 후. 유키가 시부야 역 안으로 사라지자, 나는 새빨개진 얼굴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아~ 덥다. 더워..” & “으~ 역시 돈을 좀 더 쓰더라도 호텔은 고급 호텔이 좋군.” 간만에 호텔방에서 깨어난 나는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고 샤워실로 향했다. 반쯤 수면 상태로 입안에 칫솔은 물은 채 치카치카를 마치고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자 조금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호텔 테이블 위에는 찌그러진 캔 맥주 몇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무료함에 티비를 보며 캔 맥주 몇 개 뜯은 게 조금 과음한 모양이다. 조금 늦잠을 자버린 나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은 후 체크아웃을 마치고 호텔을 빠져 나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카와구치씨를 만나기 전에 잠깐 식사라도 할까?” 나는 혼자서도 부담 없이 식사가 가능한 덮밥 집에서 규동 한 그릇을 비우며 호텔에서 챙겨온 신문을 펼쳐 보았다. 이 시대의 정보 매체라곤 뉴스나 신문밖에 없었기에 아침마다 틈틈이 챙겨보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조금 재밌는 뉴스거리가 있었다. -NEGA 첫 가정용 콘솔 머신 NEGA 디스크. 민텐도에 패배 인정. 차세대 16비트 게임기 NEGA 드라이브 선보여!!- ‘결국 기다리다 못해 먼저 16비트 시장을 선점하려는 거로군?’ ──────────────────────────────────── ──────────────────────────────────── EP. 13 : 다가오는 16비트 시대 (2) 수정 사항이 있습니다. 작중에 등장했던 트라이앵글 소프트 -> 스퀘어에서 트라이앵글 소프트 -> 펜타곤으로 변경했습니다. 아무래도 실명 언급이 좀 거슬려서 양해 부탁드립니다. -------- & 도쿄 펜타곤 사무실에서 카와구치씨를 만나고, 오후 무렵 느긋한 마음으로 교토에 돌아왔지만, 민텐도 본사의 분위기는 엉망진창이었다. “강준혁 부장님. 왜 이제야 오셨어요. 오늘 아침부터 카마우치 사장님께서 얼마나 찾으셨는데요.” 본사 로비에서 인포메이션을 담당하는 직원이 나를 보자마자 호들갑을 떨어 대었다. “아니, 출장계 보면 도쿄에 간다고 떡하니 쓰여 있을 텐데, 뭐 하러 찾아요?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떨어지나?” “지금 그런 말씀 하실 때가 아녜요~ 아무튼 어서 사장님 방으로 가보세요.” 장시간 동안 신칸센 타고 와서 피곤해 죽겠는데, 또 무슨 일이람..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사장실로 향했다. 똑. 똑. 가볍게 노크를 두드리자 안에서 신경질 적인 카마우치 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 와!!” 어이쿠.. 이거 화가 잔뜩 나셨군. 이젠 목소리만 들어도 알겠네. 나는 잠시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문고리를 돌려 사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사장실 안에는 군페이 씨와 시게씨를 비롯한 주요 경영진들이 모여 있는 상태였다. 그때 상석에서 이마를 주무르고 있던 카마우치 사장이 나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강준혁~!! 너 인마. 어딜 갔다가 이제 와~!!” “출장계 못 보셨어요? 도쿄에 잡지사에 홍보용 카트리지랑 전단 돌리러 갔다 왔는데요?” “야 인마. 넌 부장씩이나 돼서 뭘 그렇게 뻔질라게 도쿄를 쏘다녀. 그냥 홍보물 따위 우편으로 보내면 땡이지~!! 매달 네 녀석이 청구하는 출장 교통비가 직원 한명 분 월급이여~!! 아주 신칸센 자리하나 전세를 내지 그러냐?” “아니, 이제까지 출장 다닐 땐 조용하시다가 갑자기 왜 이러세요?” “너 오늘 아침 신문 봤냐?” “봤지요. 설마 지금 NEGA 드라이브 발표 한 것 때문에 이러고 계신겁니까?” “그래 이 녀석아. 경쟁사인 NEGA가 먼저 차세대기를 발표 해버렸는데, 넌 아무렇지도 않냐?” “그게 뭐 어떠세요? 오히려 우리한테는 더 좋지 않나요?” “뭐라고?” 아무렇지 않게 툭하고 내뱉은 말에 사장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일순간 팍 하고 찌그러졌다. 그때 카마우치 사장 옆에서 나를 바라보던 군페이씨가 말했다. “우리한테 더 좋은 일이라고?” “물론이죠. 아직 검증이 안된 16비트 시장에 자기네 돈 써가서 상황보고를 해주겠다는데,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딨어요?” “강군. 하지만 시장의 선점 효과를 무시할 수 없지 않은가? 이대로라면 우리 패밀리용 게임들이 NEGA의 새로운 게임들과 스펙의 격차가 너무 커져버려..” “군페이씨. 한 세대가 바뀔 때 콘솔의 본래 스펙은 언제 나온다 생각하세요? 초창기 시절부터 콘솔의 성능을 100% 끌어낼 소프트 회사는 없어요. 적어도 스펙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하고, 그 연구를 바탕으로 어디까지 오브젝트를 활용할 수 있는지 한계점을 조사해야 합니다.” “그렇지. 그려려면 적어도 1~2년 정도의 기간은 필요하지. 예를 들어 초창기에 시게루군이 만든 슈퍼 마리지 1과 지금 만들고 있는 3는 같은 콘솔이라도 그래픽 자체가 다르니..” “맞아요. 제가 현재 만들고 있는 사이킥 배틀도 초창기에 패밀리에선 절대 구현이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런 게임들을 만들고 있고, 곧 출시를 앞두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내년에 NEGA 드라이브가 출시한다고 해도 초기엔 현재 게임과 별 다를 게 없을 겁니다.” 그러자 회의실에 모여 있던 자들의 고개가 절로 끄덕거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NEGA 드라이브는 현재 차세대기를 만들겠다고 발표만 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빨라도 1년 정도 후에나 출시가 되겠지요. 저는 오히려 그것이 NEGA의 목을 더 조이는 효과를 가져 올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자 시게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째서..?” “지금 시게루씨가 만들고 있는 슈퍼 마리지3 거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지요?” “그래. 맞아..” “그런데 만약 1년 뒤 우리 회사에서 새로운 콘솔을 내겠다고 오늘 발표해 버리면 기분이 어떨 것 같습니까? 지금 출시해 봐야 1년 후에 새로운 콘솔에 묻혀 구세대 기종의 게임이 되어 버릴 텐데? 두 달 뒤에 카트리지 생산 작업까지 마치고 나면 남은 시간은 고작 10개월입니다. 그런 시기에 새 콘솔을 기다리는 게이머들이 슈퍼 마리지 3를 사줄까요?” “개발자 입장에선 그 보다 뒤통수 맞는 일이 없지. 차라리 새 기종의 스펙을 연구해서 새 콘솔용으로 개발을 돌리는 게 낫지.” “그럼 기기 보급률은 어쩌구요? 지금 현재 우리 패밀리 보급률이 일본에서만 3천만대에 달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신형기기가 나오면 곧바로 3천만대 사줄 것 같나요? 어림없죠. 첫 출시 한 달간 잘 나가봐야 10만대입니다. 그런데 또 거기서 10만대 사간 분들이 슈퍼 마리지 3를 반드시 사줄까요? 물론 마리지의 네임 벨류가 있으니 잘나가긴 하겠지만 절반 정도가 고작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또 슈퍼 마리지의 판매량은 반으로 줄어들죠?” “젠장.. 구형 기기로 출시하기도 뭐하고, 신형으로 내기도 뭐하군..” “바로 그겁니다. 오늘까지 NEGA 디스크 게임을 만들던 서드 파티 회사들이 딱 그 기분일겁니다. 그럼 여기서 문제 하나를 내보죠. 그렇게 자사의 게임 출시를 앞두고 있던 서드 파티들이 다음 중 어떤 행동을 취할까요? 첫 번째. 에라~ 모르겠다. 그냥 출시하자. 두 번째 1년 뒤에 내자. 하지만 이 경우는 웬만한 메이저급 아니곤 못하겠죠? 1년 동안 완성된 게임이 자금 회수가 안 될 테니까요. 그럼 마지막으로 세 번째. 최대한 NEGA 디스크와 비슷한 스펙을 가지고 있는 타 기종으로 이식 시켜 출시한다. 자~ 다음 중 그들은 어떤 것을 선택할까요?” “그럼 설마..” “때마침 저희에겐 라이텍스에서 만들어낸 특수칩으로 인해 패밀리의 기기성능이 기존 보다 업그레이드 된 상태입니다. 본체 성능으로만 따진다면 NEGA 디스크보다 떨어지지만, 특수칩을 달게 되면 NEGA 디스크용 스펙을 그대로 코딩해오는 건 무리가 없을 겁니다. 이때는 도리어 카마우치 사장님이 서드 파티 쪽에 활로를 열어줘야 할 때죠.” “설마 로열티 가격을 더 낮춰주자고?” “라이텍스의 특수칩을 구입해야할 자금이 필요한 때에 민텐도가 카트리지에 대한 로열티를 낮춰 준다면 NEGA에 붙어 있던 세컨드 파티들을 단숨에 우리 쪽으로 기울일 수 있죠. 상대가 강수를 두었다면 우린 초강수로 맞서면 됩니다.” 내 말은 여기서 끝이다. 뭐 할 말들 있으면 더 해보던지? 하지만 그들은 마치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오늘 NEGA 드라이브의 발표가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경영 타이밍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카마우치 사장은 미간을 좁히며 내 의견에 파고들 곳을 찾아보려했지만, 결국 포기했는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 녀석은 정말이지. 말로 이겨먹을 수가 없네. 무슨 보고서라도 작성한 것 마냥 저렇게 따박 따박 치고 들어오니 할 말이 없다.” “NEGA 드라이브가 차세대 콘솔 네임을 발표했지만, 우리가 이런 순간을 예상 못한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제가 미국에 돌아오고 나서부터 신형 콘솔 기획 부서를 만들어 달라고 한 거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네 담당인 패밀리의 후속기종은 어떻게 진행되어 가고 있냐?” “현재 컨트롤러는 최종 디자인이 완료되어 제작 중에 있어요.” “컨트롤러라면 게임 패드? 본기기 말고 패드부터 만들었다고?” “기기 스펙보다는 컨트롤러가 중요합니다. 게임기에서 가장 튼튼하게 만들어야할 부분이라 신경을 많이 썼어요. 아마 다들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그것보다 NEGA에서 한건 터뜨려 주었으니 우리도 내일 자 조간신문에 하나 터뜨려보죠?” “무엇을 이슈로..?” “군페이씨의 역작 휴대용 겜보이 발매일을 좀 앞당겨 보죠. 지금 우리가 선점해야할 건 16비트 콘솔 시장이 아니라 휴대용 게임기 시장이니까요.” 그러자 군페이씨가 난감한 표정으로 카마우치 사장의 눈치를 보았다. “아.. 하지만 휴대용 겜보이는 아직 최종적 소비자 가격에 대한 결론이 안 나있는 상태라..” “지금 최종 가격이 어느 정도죠?” “디스플레이 제조를 맡긴 샤프 쪽에 들어간 비용이 커서 14,800엔으로 잡아두긴 했지만, 과연 소비자 들이 그만한 가격을 이해해줄지 모르겠어.” “그럼 1주일 앞당겨서 크리스마스에 12,800엔으로 판매하죠. 그리고 내년 1월 1일부터는 14,800엔으로 판매하는 겁니다. 초기 출하 한정판 형식으로 어때요?” “1주일 동안 손해를 보고 장사를 하자는 건가?” “저희가 언제는 패밀리 팔아서 돈 벌었나요? 카트리지 팔아서 돈 벌었죠. 패밀리 카트리지에서 낮춘 로열티는 휴대용 겜보이가 보급만 잘되면 얼마든지 벌어들일 수 있을 겁니다.” “사장님. 강군의 제안이 나쁘지 않은데요? 어떻게 할까요?” “뭘 어째? 당장 조간 신문사에 전화 돌려!!” 카마우치 사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장실에 모여 있던 경영진들은 순식간에 사장실을 빠져 나가며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긴 가격 때문에 출시 타이밍만 잡고 있던 휴대용 겜보이의 출시일이 갑자기 결정이 나버렸으니 마케팅 부서가 뒤집어 지겠군. 어느새 사장실에는 나와 카마우치 사장 둘만 남아 있었다. 대충 한 건 처리한 것 같으니 나도 이만 돌아가 볼까? “그럼. 전 이만 퇴근을..” 그때 탁자 위로 두 손을 깍지 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카마우치 사장이 입을 열었다. “강군. 잠깐 자리에 좀 앉지?” ──────────────────────────────────── ──────────────────────────────────── EP. 13 : 다가오는 16비트 시대 (3) “강군. 잠깐 자리에 좀 앉지?” “네?” 평소 때와는 다른 무게감 있는 목소리에 깜짝 놀란 내가 카마우치 사장을 바라보자, 그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맞은 편 자리를 권하였다. 뭐지? 살짝 불길한 느낌이 드는데..? 설마 내가 라이텍스를 인수한 걸 들킨 건가? 아니면 드래곤 엠블렘의 개발자 정체가 나라는 게 까발려 진건가? 아냐, 그럴 리가 없는데.. 대체 왜 이러지? “강준혁군.” “네, 사장님.” “우리가 같이 일한 게 얼마나 됐지?” “4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래 올해도 거의 끝나가니 햇수로 따지면 5년이 되어 가는군.” “그러게요. 시간이 참 빨리 흘러가네요. 하하..” “맞아. 그 5년 새에 우리 민텐도는 장난감 가게에서 게임 회사로 업종 자체를 바꾸어 버렸지. 또한 미국 게임 시장에서도 압도적인 성과를 이루고 있어. 이미 나는 내 증조부님이 세운 민텐도 그 이상을 해냈다고 생각하네.” 뜬금없이 웬 자기 자랑이지? 카마우치 사장은 테이블위에 올려져 있던 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업적에는 군페이 녀석과 시게 녀석. 그리고 강준혁 자네의 도움이 컸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말인데..” “네, 사장님.” “요즘 나에게 큰 고민 거리가 하나 있다네..” “고민이요?” 현재 일본 게임 산업 부분에서 부동 1위를 지키고 있는 그가 고민이라니? 대체 뭘까? 하지만 고민이라면 오히려 같은 일본인인 군페이씨나 시게씨한테 이야기 하는 편이 나을텐데, 왜 하필 나를 지명했지? 잠시 동안 뜸을 들이던 카마우치 사장은 품 안에서 한 장의 사진을 꺼내 보였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사진 안에는 결코 빈말이라도 예쁘다는 말이 안 나올 정도로 못생긴 여성이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내 조카일세. 어떤가?” “아, 그.. 아름.. 다우.. 십니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거짓말을 해본 적은 처음이다. “마음에 드나?” 좆까. “네? 하하. 그게.. 그런데 갑자기 조카분 사진을 왜 저에게..?” “이 녀석이 혼기가 찼는데, 아직 짝을 찾지 못해서 말이야.” 못 찾지. 이정도 외모라면 이분의 인연은 아마 다음 생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다. 하지만 대놓고 그렇게 말할 순 없잖아!? 83년으로 타임슬립 이후 최대의 위기다. 이건 누가 봐도 카마우치가 중매 서는 거잖아!! 어떡하지!? 카마우치 사장은 사진을 바라보며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이쁜데, 어째서 남자들이 아직까지 가만 놔두고 있는 거지? 열도의 젊은이들 눈깔이 어떻게 된 거 아냐?” 당신이나 병원 가서 시력 측정 좀 해보시지? 지금 나랑 장난 하냐? “그래서 우리 회사에서 마땅한 녀석을 소개시켜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군페이는 이미 결혼을 해버렸고, 시게 녀석은 스미레를 소개해 주기엔 나이가 너무 많아. 그래서 말인데..” 나는 카마우치 사장이 마지막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치고 들어갔다. “실례지만 조카님 나이가..?” “올해로 24살이라네. 참 꽃다운 나이지.” 꽃은 무슨 개뿔이.. 시베리아 빙하 한복판에 잡초가 피어나도 이 꽃보단 예쁘겠다. 일본 나이로 24살이면 한국에선 26살. 1980년대에는 결혼을 좀 빨리하는 추세니까 결혼 적령기인 것은 맞지만, 왜 그 상대가 나냐고!! “강군이 올해로 25살이지? 이거, 이거~ 스미레랑 나이도 비슷하니, 어울리기도 쉬울 테고” “이분 성함이 스미레(제비꽃)입니까?” 제비꽃에게 지금 당장 사과하라. 카마우치.. “그래 이름도 예쁘지? 내 동생의 딸이라네. 어때 마음에 들면 한번 만나보는 거 어떤가?” “전...” “그래, 말해보게.” “저는..” 카마우치 사장은 잔뜩 기대에 찬 표정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머리를 굴려라 강준혁!! 이 위기를 헤쳐 나가야해!! 그런데 어떻게 빠져나가지? 차라리 평생 골방에 갇혀서 게임이나 만들고 말지 죽었다 깨어나도 이 분은 못 만나겠다. 생각해내라 강준혁.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던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이 위기를 빠져 나가!! “독신 주의자입니다.” “뭐..?” 이런 미친.. 내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그 순간 카마우치 사장은 번개같이 의자 등받이에 바싹 기대며 나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독신 주의? 그 말은 여자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허~ 이 녀석 밤낮으로 일만하다보니. 여자에 대한 매력을 모르는군. 모름지기 남자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려야 진짜 남자가 되는 거야.” 그말은 내가 군대 갈때도 들어봤다. 대체 그놈의 진짜 남자는 언제 되는 건데? “됐고, 그깟 독신 주의 우리 스미레를 만나면 단번에 생각이 달라질 걸?” 아니요. 더 확고해 질 것 같은데, 하지만 카마우치 사장은 내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하다. “안그래도 내년 초 사내 파티 때 스미레도 참석할 예정이니 그때 정식으로 소개 시켜주지.” “아뇨. 사장님 전 정말 연애할 생각이..” “자네? 정말 내가 연애 좀 해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 스미레를 소개 시켜주는 거라 생각하나?” "네?" "앞으로 사내에서 좀 더 중역을 맡으려면 지금 한국인 신분으론 무리가 있다는 거 모르겠나? 난 지금 자네를 가족으로 맞으려는 것이야. 우리 카마우치 가문의 사람으로 말이지." "하지만 저는.." "아무튼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이만 돌아가도 좋아. 숙소에 가서 내가 한말의 뜻을 잘 생각해보게."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카마우치 사장에게 인사를 드리곤 사장실을 빠져나왔다. 창밖을 바라보니 늦은 오후 산 너머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차라리 유키랑 사귄다고 할걸 그랬나? 하지만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그런 말을 거짓으로라도 입에 담을 순 없었다. 2015년에도 그랬지만, 여자 관계쪽에서는 꽤나 고지식한 편이랄까.. 아무튼 내년 초에 사내 파티기간에 어디 출장 계획좀 잡아야 되겠군. & 다음 날. 민텐도 본사는 휴대용 겜보이의 발표와 함께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2000엔의 가격 할인 한정 행사 덕분에 대형 판매점부터 소매상까지 민텐도 본사에 문의 전화가 쇄도 한 것이다. 덕분에 출하 목표로 잡아두었던 초기 생산 수량 30만대가 모조리 예약이 잡혀버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현 가정용 콘솔 왕좌에 군림하고 있는 민텐도의 휴대용 게임기 발매소식에 차세대 NEGA 드라이브는 발표 하루 만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버렸다. 1년 뒤에 나올 차세대기 보다 당장 다음 달에 출시하는 기기에 관심이 몰리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군페이씨가 나를 찾아왔다. “강군. 자네가 부탁한 대로 2인용 대전을 위한 추가 커넥터를 부착하긴 했다만, 과연 이 포트가 나중에 쓸모가 있을까? 내가 보기에 휴대용 게임기는 1인용 게임들만으로 충분할 것 같은데?” 완성 된 겜보이에는 다른 기기와 유선으로 연결하며 대전을 할 수 있는 추가 포트가 달려 있었다. 원가 절감을 위해 모두가 반대 했지만, 내가 꿋꿋하게 대전용 포트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력히 피력하여 얻어낸 결과물이었다. 나는 군페이씨의 물음에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필요해요. 반드시.” “허~ 평소에 조용하던 자네가 대전 포트에 관해서 유독 고집을 부리길래 편을 들어주긴 했지만, 정말 괜찮은 걸까?” “글쎄 두고 보세요. 그 포트가 군페이씨가 만들어낸 겜보이를 희대의 괴물 머신으로 만들어 줄 겁니다.” 아무리 형제가 있다고 해도 값 비싼 휴대용 게임기를 두 대나 사주진 않을 거라 판단한 경영진은 휴대용 겜보이가 잘 나가봐야 100만대 정도 팔릴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이 휴대용 겜보이는 한 RPG 게임의 등장으로 전 세계 1억 1869만대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세우게 될 녀석이었다. 대체 그 RPG가 뭐냐고? 그 왜 90년대에 띠부띠부 실이라는 스티커 때문에 스티커만 갖고 빵은 버려서 뉴스에 화제가 되었던 몬스터가 그려진 빵 기억하나? 그래도 모르겠다면 조금만 기다려 봐라. 그게 뭔지 내가 기억나게 해줄 테니.. ──────────────────────────────────── ──────────────────────────────────── EP. 13 : 다가오는 16비트 시대 (4) & 1987년 12월 20일. 크리스마스 5일 전. 도쿄 아키하바라. 늦은 오후부터 내린 기록적인 폭설로 소복하게 눈이 쌓인 거리 위에는 쓰레기 봉다리가 끝없이 줄지어 있었다. 웬 쓰레기 봉지가 거리 위해 이렇게 일렬로 늘어져 있냐고? 미안, 정정한다. 사실 사람이다. “저기요. 이봐요.” “네에..?” “민텐도 직원입니다. 이거 따듯한 커피인데, 이거라도 좀 드세요.” 나는 보온병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따라 그에게 건네주었다. 오리털 파카에 얼굴까지 파묻고 있던 청년은 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가..감하삽니다..” 감하산다니. 강추위에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 모양이네, 그러게 뭐 하러 이 시간에 나와 생고생들을 하시는지.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폭설이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나와 함께 현장에온 민텐도 직원들이 손님들에게 커피를 나눠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진짜 온라인 쇼핑몰이 혁신은 혁신이야. 따듯한 집에서 클릭질만 몇 번하면 집으로 물건을 배송해주니까. 물론 인기 상품들은 단 몇 십초 만에 광속 판매 되어 허탈감을 주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얼어 죽을 만치 고생 안 해도 되잖아? “저.. 저도 커피 좀 주세요.” 마치 인간의 살점을 갈구 하는 좀비마냥 여기저기서 손을 뻗쳐오는 바람에 보온병 안에 담긴 커피는 금세 바닥이 나버렸다. 나는 행사 임시 본부로 지정한 봉고차로 달려가 커피를 보충하려고 했지만, 이미 준비해온 커피는 모두 바닥난 상태였다. “으~ 강 부장님. 너무 추워요..” 80년대 봉고차에 히터가 빵빵하면 얼마나 빵빵하겠냐.. 나는 파카를 두른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직원에게 주머니 난로를 던져 주었다. “그거라도 손에 꼭 쥐고 있어요. 동상 걸릴라..” “감사해요. 부장님.” “예보에도 없던 폭설이라 준비가 너무 미흡한데..” “그래도 저거 보세요. 역 앞까지 줄이 엄청 길어요. 부장님 말씀대로 한정 기간 가격 할인 효과가 큰 거 같아요.” “젠장 2000엔 아끼려다가 약값이 더 들겠네. 괜히 우리 직원들 고생만 시키고, 미안해요. 미나씨.” “아, 아뇨~!! 괜찮아요. 제가 자원해서 온 건데요. 뭐..” 그때 뒤에서 나를 부르는 군페이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군~!! 혹시 커피 남았나!?” 나는 멀리 있는 군페이씨를 향해 두 팔을 X자로 교차하며 소리쳤다. “다 떨어졌어요!! 그게 마지막 입니다!!!” 이번 행사 총괄 담당인 군페이씨는 비어있는 보온병을 들고 털레털레 걸어왔다. 옷깃은 물론 눈썹까지도 눈이 하나 가득 쌓여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매우 밝아 보였다. “경영진 회의에서는 값 비싼 휴대용 게임기 제작에 대해 반응이 신통치 않았었지만, 일단 출발은 좋아 보이는군. 10일정도 가격 할인 행사로 초도 수량이 완판 되면 아이들을 통해서 추가로 광고 효과를 볼 수 있겠지?” “아마 학교에 가져가는 아이들이 있을 테니까. 한 반에 한명씩만 구입한다면 자동으로 50명 정도에게 알려지겠지요.” “그래 맞아. 그게 휴대용 게임기의 이점이지. 게임 & 워치처럼 전철에서 플레이하는 사람들에게도 효과가 있을 테고, 딱히 마케팅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알아서 퍼져나가게 될 거야.” 하긴 내가 국민학교 때에도 같은 반 친구 하나가 가져와서 자랑했던 적이 있었지. 한판만 시켜 달라면 그거 가지고 얼마나 유세를 떨었는지 못 봐줄 수준이었는데, 결국 3일도 못가 누가 훔쳐가 버리는 바람에 교실이 난리가 났었지.. “저기, 커피 더 없나요? 대기 중인 손님들이 찾으시는데..” 거리에서 커피를 나눠주던 홍보팀 사원 하나가 빈 보온병을 들고 와 우리에게 물었다. “이런, 아직 행사가 시작하려면 10시간이나 남았는데, 새벽에 강추위를 어쩌지?” “그렇다고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고, 큰 사고가 안 나게 잘 대처 할 수밖에요.” 그러자 홍보팀 사원이 꽁꽁 언 손에 임김을 불며 말했다. “편의점에서 핫 팩을 좀 사다가 돌릴까요?” “핫 팩?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이 많은 사람들에게 핫 팩을 돌리려면 편의점 몇 군데는 돌아야 할 텐데?” “뭐 어쩔 수 없죠. 이대로라면 내일 아침 뉴스 기자들도 대거 몰려올 텐데, 손님 중에 동상이라도 걸려 봐요?” “그렇군. 아무래도 할 수 있는 최대한 조치를 취해 봐야지.” 결국 우리는 봉고차를 이용해 최대한 몸을 데울 수 있는 물품을 찾기 위해 편의점이란 편의점은 전부 들러 핫 팩을 공수해 뿌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의 강추위는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크으.. 정말 대단들 하군. 나라면 그냥 포기하고 집에 갔을 거야..” 군페이씨는 빨개진 코를 부비며 봉고차에 올랐다. 그러나 구석에서 온몸을 떨고 있는 미나씨가 간절한 목소리로 군페이씨에게 말했다. “저기 부장님 행사장에 미리 얘기해서 들여보내달라고 하면 안 될까요?” “미안하지만, 장소가 너무 협소해서 저 인원이 다 들어오기도 힘들 거야. 누구는 들여보내고 누구는 밖에 놔둘 순 없지 않은가..” “그래서 지금 우리도 여기서 이러고 벌벌 떨고 있는 거구요.” 내 마지막 말에 군페이씨는 껄껄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래도 강군이 함께 와줘서 참 든든하군. 이것도 지나면 다 추억이 될 테니까. 다들 조금만 힘내게.” 도쿄 행사장으로 지원을 나온 사람은 나와 군페이씨를 포함해 5명. 그나마 봉고차 안에서 추위를 버티고 있었지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진짜 얼마나 추울까? 차량의 틈 사이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 소리에 결국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날이 밝았다. “으.. 개추워.” “네에? 강 부장님 뭐라고 하셨어요?” “아닙니다. 얼어 죽을 것 같다는 한국말 이예요.” 가만히 있어도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와 차라리 몸을 조금 움직이고 싶었다. 봉고차 뒷문을 열어젖히자 대로에 불어오던 칼바람이 봉고차 안쪽을 헤집기 시작했다. “부.. 부장님 문 좀!!” “알았어요. 금방 닫을게요.” 쿵~!! 밤새 몸을 웅크리고 있었더니 키가 5센티는 줄어든 느낌이 들었다. 나는 팔을 이리저리 돌리며 근육을 풀어주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다행히 눈은 그쳤네.” 뽀득.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길 위로 거의 발목까지 눈이 쌓인 상태였다. 새벽까지 엄청 내렸나 본데 사람들은 괜찮을까? 고개를 돌려보니.. “허억!!” 행사장으로부터 역으로 이어지는 대로에는 둥근 눈뭉치가 나란히 이어져 있었다. 그들 중에는 나처럼 굳어진 근육을 풀기 위해 서로 어깨를 주물러 주는 모습도 보였다. 영하의 강추위에 다들 살아있으니 다행이다.. “대단하다. 진짜..” 사실 보통 사람이라면 그깟 2000엔 더 내고 나중에 구입하겠지만, 지금 현장에 모인 이들은 결코 그 2000엔 때문에 모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도 사람인데 이런 폭설에 자기 몸을 희생하며 이렇게까지 휴대용 겜보이를 사려하진 않았겠지. 하지만 누구보다 먼저 새로운 기계를 경험해 보고 싶다는 얼리어답터의 정신으로 강추위를 이겨낸 것이다. 그들에게는 어쩌면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보다 초도 물량이 떨어져 재생산 될 때까지의 기다려야하는 고통이 더 크게 와 닿을 인종들이니까. 이들은 90년대 중반에 하나의 칭호를 얻게 되는데, 보라색 로봇에 죽어도 타기 싫어하는 아들 내미에게 가차 없이 돌아가라고 하는 내치는 아버지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에 열광하며 ‘오타쿠’라는 별호를 얻게 될 사람들이었다. & 원래대로라면 휴대용 겜보이는 1989년 4월에 발매된 제품이다. 당시 민텐도는 1988년 여름에 출시 목표를 잡고 있었지만, 내부 사정상 출시 연기를 한번 거친 게임기였다. 그러나 오늘은 1987년 12월 21일. 최초의 교환식 카트리지를 탑재한 휴대용 게임기가 행사매장의 진열대에 올랐다. “우와아~!!!” 카린의 전설과 드래곤 워리어2에 이어 발매당일 구매 행렬은 이제 더 이상 희귀한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콘솔기기로서는 최초로 구매 행렬 유도에 성공하였고, 값비싼 기기임에도 불구하고 오픈과 동시에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런칭 타이틀로 준비한 겜보이용 슈퍼 마리지 랜드 역시 열에 아홉은 반드시 구입하는 타이틀로 기기 견인 효과를 톡톡히 수행하고 있었다. 단순히 호기심에 행사장을 찾은 사람 역시 슈퍼 마리지의 퀄리티를 보고 대기 줄을 설 정도였으니까.. 총 4가지 런칭 타이틀 중 슈퍼 마리지 다음으로는 야구게임이 잘나갔다. 넉넉히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한나절 만에 준비한 초도 물량의 5분의 1이 사라지는 기현상을 겪자 군페이씨는 식사도 거른 채 여기저기 행사장을 누벼 다녔다. “좀 쉬엄쉬엄 하세요. 나이도 있으신데..” “오랜만에 현장에서 뛰니까 아주 기운이 펄펄 나는데?” “그래요?” 군페이씨는 내가 건네준 캔 음료수를 받아 들고 뚜껑에 손을 대었다. 하지만 떨리는 손끝에 그는 음료수 뚜껑조차 제대로 따지 못하고 있었다. 틱.. 틱.. 식사까지 거른 상태에서 온종일 뛰어 다녔으니 손끝에 힘이 들어가겠나.. 나는 군페이씨의 손에 들린 음료수를 뚜껑을 따서 건네주었다. 그러자 군페이씨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마우치 사장님이 그러던데, 자네 독신주의자라면서? 사실인가?” “푸흡~!! 아~ 진짜..” 입안에 담겨 있던 음료수를 반쯤은 뿜어낸 나는 서둘러 손수건으로 입 주위를 닦으며 말했다. “그런 거 아녜요. 사장님이 갑자기 조카 분을 소개 시켜주신다 길래. 거절하려다가 말이 헛 나왔을 뿐입니다.” “사장님의 조카? 설마 스미레양??” “어? 군페이씨도 알고 계세요?” “알고 있지. 실제로 만난 적도 몇 번 있고..” “그러시군요. 전 사진으로만 봤는데.. 그게.. 참..” “미인이라기엔 거리가 너무 멀지?” 미인까진 바라지도 않아. 그냥 평범하기만 했어도 내가 이러진 않지.. “카마우치 사장님 성격상 어떻게든 엮어보려는 의도가 보여서 그만..” “뭐 우리 사장님이라면 설령 자네가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무조건 만나보라 밀어 부쳤을 거야. 그만큼 끔찍하게 조카인 스미레를 아끼거든,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뭐가 또 있나요?” “어릴 때부터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들어주며 오냐오냐 키운 스미레양은 포기를 모르지.” 군페이씨의 말에 등 뒤로 한줄기 소름이 스쳤다. “차라리 조금 더 강경하게 나가지 그랬나? 내가 보기엔 독신주의자라는 변명으론 부족해보이는데, 년초에 사내 파티때 어떻게 하려고?” “안그래도 내년 연초에 미국 지사쪽으로 출장 계획 잡아놨습니다.” “역시 강군 답게 철저 하군. 하긴 옛 말에 이런 말이 있지. 아무리 뛰어난 미인도 5년만 같이 살면 쉽게 질린다고..” “제가 너무 사람의 외적인 모습만 본다고 꾸짖어 주시는 건가요?” “아니.” “그럼?” “못생긴 여자를 만나면 그 5년조차 없다는 거지. 그냥 처음부터 질려.” ... 인생 명언 터졌네.. ──────────────────────────────────── ──────────────────────────────────── EP. 13 : 다가오는 16비트 시대 (5) & 군페이씨와 잠시 휴식시간을 가진 뒤 행사장으로 돌아오니 아직도 대기 줄은 행사장 바깥으로 끝없이 이어져있었다. 체험용 기기를 올려둔 진열대조차도 최신형 휴대기기를 만져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부장님. 저 좀 살려 주세요~” 새벽에 봉고차 안에서 추위에 오들오들 떨어대던 미나씨는 이번엔 손님들의 응대로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제가 응대할 테니 좀 쉬고 와요.” “감사합니다.” 하긴 하이힐 신고 하루 종일 서있으려면 다리가 아프기도 하겠지. 미나와 업무를 교대한 나는 행사장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중에 체험대에서 겜보이를 만져보던 학생이 놀라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진짜 가벼워..” 음.. 솔직히 까놓고 가벼운 무게는 아닐 텐데? 솔직히 디자인만 따지면 벽돌이랑 별반 다를 게 없고, 무게역시 220g라고 기록해 놓았지만, 건전지를 제외한 무게이다 보니 건전지 4개를 추가하면 약 300g 가까이 나가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이 시대에 초소형 전자기기인 센소니에서 만들어낸 ‘워크맨’에 비교하자면 컴팩트한 크기이긴 하다. 내 눈에는 우습게 보여도 그들에겐 혁신적인 물건이란 거겠지.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사이킥 배틀 행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새벽까지 함께 커피를 돌렸던 홍보팀 남자 직원 카시와바씨가 나에게 달려 왔다. “겜보이도 흥행이지만, 사이킥 배틀을 체험해보기 위해 행사장을 찾아오신 손님들도 무시 못 할 수준인데요?” “당연히 잘 돼야죠. 이것 때문에 쓸데없는 것에 돈 낭비한다고 카마우치 사장님한테 한 소리 들었으니까요.” 휴대용 겜보이의 런칭 행사도 행사지만, 내가 굳이 이 행사장에 직접 지원을 나온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날을 위해 소량으로 제작한 데모용 카트리지는 현재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왜냐고? 그건 바로 저 문구 때문이지. -화제의 신작 사이킥 배틀에 도전하라!!- 1. 첫 번째 스테이지 클리어 시 원하시는 캐릭터의 일러스트 증정. 2. 두 번째 스테이지 클리어 시 사이킥 배틀 체험판 카트리지 증정. 사은품은 간단했지만, 그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지난 달 네 군데의 게임 잡지사 메인표지를 장식한 만큼 인지도가 확 올라간 상태에서 게임에 대한 리뷰 기사도 제법 잘 뽑혀 나왔다. 덕분에 이번 달에는 처음으로 슈퍼 마리지3의 기대순위를 앞질러 1위를 차지할 정도였으니.. 하지만 난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이번 달에 출간한 패미통신의 사이킥 배틀 기사에 하단부에 체험일자와 장소를 기재한 것이다. 내가 제안한 이벤트 기획에 군페이씨 역시 콜라보 효과를 기대하며 승낙해 주었다. 덕분에 행사장 한 켠에서는 군페이씨의 겜보이가.. 그리고 반대편에선 나의 사이킥 배틀이 어마어마하게 사람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행사장 앞을 지나던 사람들도 걸음을 멈추고 사이킥 배틀의 플레이를 멍하니 바라볼 정도로 숨막히는 탄막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 아깝다!!” 1스테이지 보스의 체력을 얼마 안 남겨 두고 게임 오버당한 플레이어가 고개 떨구자, 곧바로 다음 도전자가 나섰다. “아직까지 사은품으로 체험용 카트리지를 받은 분은 없군요.” “첫번째 보스 클리어는 몇 분이 나왔는데, 난이도가 워낙 높다보니. 하지만 그런 점에서 도전 의식을 자극하는지 계속 대기 줄이 늘어가고 있어요.” “어느 정도 감을 익히면 조금씩 나타나겠지요. 이제 행사 첫날이니까. 너무 빨리 소진 되어 버리면 재미없잖아요.” “그렇겠죠? 잡지사 메인 표지로 나왔던 일러스트들도 인기라 4종을 다 모으기 위해 몇 번이나 반복해서 도전하시는 분도 계셔서 조금 곤란합니다.” “너무 심하면 카시와바씨가 제제 좀 해주세요. 다양한 유저들이 체험해 보기 위해 마련한 자리니까.” “네, 알겠습니다.” ‘과연 행사기간 동안 체험판 카트리지가 몇 개나 나갈지 나도 기대가 되는군..’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행사장을 둘러보았다. & 겜보이의 성공적인 런칭 행사는 개시 후 단 4일 만에 전량 소진 되어 버렸다. 이것은 우리가 예측한 재고 소진 예상일보다 6일이나 빨랐다. 아무래도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보니 아이들 선물용으로 많이 구입한 모양인데, 재밌는 것은 이 4일 동안 판매한 30만대 초도 수량은 민텐도의 패밀리와 NEGA 디스크를 모두 합친 판매량보다 더 많았다. 아이들 장난감 치고는 너무 비싸 실패할거라고 예측했던 민텐도 경영진은 이 놀라운 판매량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추가 재생산 분이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지만, 소비자들의 어마어마한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당분간 무리가 따를 것 같았다. 휴대용 겜보이의 흥행에 더불어 가장 득을 많이 본 곳은 흑백 액정화면을 만들어 민텐도에 납품한 ‘샤프’였다. 겜보이의 액정을 단독으로 납품하게 된 샤프는 일본의 경기 침체로 기울어 지던 경영상태가 일순간에 복구가 될 만큼 큰 수익을 누렸다. 샤프의 사장인 마치다씨와 민텐도의 카마우치는 굉장히 막역한 사이였기에 서로 윈윈하는 방향으로 액정을 공급한 모양이었다. 휴대용 겜보이는 전력소비량과 가격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STN 반사식 흑백액정을 사용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AA건전지를 4개로 최대 5시간(연속 플레이시) 정도 밖에 플레이가 불가능했다. 거기다 STN 액정은 빛 반사에 취약했기에 대낮에는 햇빛에 의한 난반사로 화면 자체가 거의 보이지 않았고, 백라이트 기능도 없었기에 밤에 불을 꺼놓고 플레이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TV를 사용하지 않고도 혼자서 얼마든지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메리트 하나에 이 모든 단점을 뒤엎고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었다. 8비트 콘솔 게임의 시대가 막을 내리려는 찰나에 그 유지를 휴대용 겜보이가 이어 받은 셈이었다. “야!! 나도 한판만 시켜주라~ 응?” “싫어~ 정하고 싶으면 너도 엄마한테 사달라고 조르던가~” “치사한 놈.” 개인적인 약속이 있어 역으로 가기 위해 길을 걷고 있는데, 학교 가방을 매고 귀가중인 꼬맹이 두 명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아무래도 통통한 체형의 꼬마 녀석 옷차림을 보아 조금 사는 집 아이 같은데, 친구가 시켜달라면 한판 정도 양보해 줄 수도 있지. 욕심도 많네. 마치 도라에몽에 나오는 퉁퉁이와 비실이를 보는 듯 하군. 나는 피식 웃음을 던지며 아이들 곁을 스쳐 지났다. 겜보이 런칭 행사가 종료된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군페이씨를 비롯한 다른 직원들은 방금 전 행사장을 철수한 뒤에 교토로 금의환향하였지만, 나는 아직 도쿄에 남아 있었다. ──────────────────────────────────── ──────────────────────────────────── EP. 13 : 다가오는 16비트 시대 (6) 겜보이 런칭 행사가 종료된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군페이씨를 비롯한 다른 직원들은 방금 전 행사장을 철수한 뒤에 교토로 금의환향하였지만, 나는 아직 도쿄에 남아 있었다. 왜냐고?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거든. 서둘러 전철에 오른 나는 그대로 도쿄 외각 치바에 위치한 라이텍스 공장으로 향했다. 모든 커플들이 기다리는 1년 중 가장 로멘틱 하다는 밤에 나는 인도산 공돌이를 만나러가는 중이다. “첸드라!!” “오~!! 강준혁이다.” 저녁 식사 중이던 첸드라와 그 친구들은 나를 보자마자 웃으며 손을 흔들어 대었다. “다들 신수가 훤해졌는데?” “이게 다 강준혁 덕분이다. 푸말라 고향에 보내는 돈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푸말라 이제 결혼할 수 있다.” 투실 투실한 푸말라는 숟가락을 입에 물은 채로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러자 다른 인도인 친구들이 모국어로 중얼거리며 푸말라를 놀려대었다. 대충 오가는 어감을 듣자하니 푸말라는 상당히 공처가 타입인듯하다. “그런데, 강준혁. 웬일이냐? 여기 드나드는 거 비밀 아니었나? 어차피 다른 직원들은 전부 퇴근했지만.” “뭐 비밀까지는 아니지. 어차피 사이킥 배틀에 들어갈 특수칩 확인 차 왔다고 둘러대면 되니까. 그보다 전에 내가 부탁한 건 구해왔어?” “물론이지!” “그럼. 식사 중에 미안하지만, 잠깐 볼 수 있을까?” “어차피 나는 다 먹었어. 문제없으니까 따라와라.” 잠시 후. 나는 첸드라의 안내를 받아 라이텍스 공장 내에 연구실을 찾았다. 그의 연구실은 아키바의 좁은 작업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최신 설비와 쾌적한 공간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차세대 슈퍼 패밀리에 쓰일 CPU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이게 차후에 슈퍼 패밀리에서 사용될 리코5A22 16비트 CPU칩인가..” “현재 미국에서도 꽤나 고사양 PC로 평가받는 애플II GS의 WDC65816 CPU를 슈퍼 패밀리에 맞게 커스텀 화 시킨 거다. 미국 출시하고 2년 정도 흐른 모델이지만, 가성비면에선 그만한 녀석이 없다고 본다.” “물론 나도 그 부분에는 동감하긴 하는데, 그래픽 처리 속도가 너무 느리지 않나?” “그건 어쩔 수 없다. 태생부터 빠른 연산을 처리하게 위해 나온 녀석이 아니니까. 16비트 CPU인 만큼 전체적인 퀄리티는 안정적으로 오르겠지만, 속도 부분에는 한계는 있다.” 아마 1990년대에 나와 비슷한 어린 시절을 경험한 게이머라면 그 시절 슈퍼 패밀리와 NEGA 드라이브를 비교하면 의아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어째서 슈퍼 패밀리에는 NEGA의 간판 게임인 ‘소니크’처럼 무지막지한 스피드를 체감시켜 주는 게임이 없었을까? 분명 NEGA 드라이브보다 더 후에 나온 기기이고, 가격도 더 비싼 모델인데 가끔은 좀 답답한 기분이 들은 적이 있었다. 반면 골목 친구네 집에 있던 ‘소니크’는 가슴이 뻥 뚫리는 스피드로 슈퍼 마리지와는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해주었기에 가끔 서로의 게임기를 통째로 교환해서 플레이하기도 했었다. ‘슈퍼 패밀리가 NEGA 드라이브 보다 느렸던 이유를 이제 알겠군.’ 민텐도는 절대로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는다. 본래 콘솔 사업이란 초기 발매일로 부터 향후 5~6년을 바라볼 수 있도록 조금은 무리를 해서라도 고성능 모델을 맞추려 노력한다. 그게 아니라면 변화하는 게임 시장에 맞춰 1~2년 마다 새로운 콘솔을 내 놓아야 할 테니까. 기기 보급률과 게임의 개발 기간을 따져보면 하나의 콘솔은 적어도 5년을 버텨내야 한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기기의 성능이 올리기 위해 막대한 자본이 들어가게 되는데, 물론 시간이 흐를수록 단가가 낮아져 나중엔 이익이 생기겠지만, 초기엔 아예 기기 하나를 팔 때마다 적자를 보고 팔아야한다. 기기 한 대의 순수한 제작비가 17,000엔이지만, 소비자들의 주머니 사정에 맞추어 14,800엔 가량으로 판매를 한다. 한 대를 팔 때 마다 생기는 2,200엔의 손실은 게임 카트리지 판매로 메꾸는 것이 콘솔 업계의 기본적인 판매 구도였다. 하지만, 민텐도는 달랐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기기를 팔 때도 이익을 남겨먹을 수 있도록 어중간한 성능의 저렴한 부품을 이용했다. 나머지는 게임의 퀄리티로 승부한다. 그렇게 해서 내린 결론이 바로 눈앞에 있는 CPU였다. ‘차세대 패밀리에서 사용할 칩으로 요즘 자주 컨텍 제의가 들어오기에 첸드라에게 부탁해서 구해본건데, 역시 쓰레기 칩이네. 하긴 그 시절에도 성능으로만 따지면 NEGA 드라이브가 훨씬 훌륭했었지..’ 그때 첸드라가 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모든 건 프로그래머의 실력에 따라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하긴 하다.” “그야 그렇지만 기기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없잖아.” “기기의 한계라.. 킥킥 마침 잘됐다. 사실 첸드라. 강준혁 오면 꼭 보여주고 싶은 게 있었다.” “보여 주고 싶은 거? 그게 뭔데?” “글쎄 따라와 보면 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앞장서서 걸어가던 첸드라는 이번엔 직원용 휴게실로 나를 안내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지만 라이텍스의 직원용 휴게실에는 민텐도의 패밀리도 설치되어 있었다. “강준혁이 만든 사이킥 배틀 우리 직원들도 즐겨하고 있다. 그림이 좀 선정적인 게 흠이지만, 내용 자체는 매우 흥미롭다.” “재밌게 하고 있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나한테 보여 주고 싶다는 게 뭐야?” “그게 조금 아쉬운 점이 있어서 첸드라가 손을 좀 보았다.” “뭐라고..? 너 프로그래밍도 할 줄 알아?” 그러자 어느새 우리를 따라온 푸말라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첸드라 못하는 거 없다. 이 녀석은 천재니까.” 첸드라는 푸말라의 칭찬이 기분 좋은지 웃으며 아무런 스티커도 붙어 있지 않은 새하얀 카트리지를 패밀리에 꽂아 넣었다. 잠시 후 익숙한 사이킥 배틀의 타이틀 로고가 떠오르고, 캐릭터 선택화면이 떠올랐다. ‘음.. 아직까진 똑같은데, 달라진 건 게임성인가?’ 첸드라는 캐릭터를 고르기 전 내 눈치를 살피며 입꼬리를 올리더니 주인공인 아즈사 렌을 골랐다. 그리고 이어진 첫 스테이지.. “뭐야 이거?” 나도 모르게 화면을 보자마자 중얼거렸다. ‘게임이 훨씬 빨라졌다.’ 첸드라가 플레이하는 사이킥 배틀은 내가 만든 것보다 게임 스피드가 약 1.5배는 더 빨라보였다. 또한 주인공을 노리는 탄막 역시 기존보다 빠르고 매끄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한 거야?” 그러자 첸드라는 가볍게 코를 훔치며 어깨를 으쓱 거렸다. “기존에 코딩 배열은 깔끔했지만, 너무 복잡해서 첸드라가 다시 손봤다. 그래서 CPU에 걸리는 과부하가 현저히 줄어든 거다. 기존에 사이킥 배틀도 괜찮았지만, 날아다니는 상쾌함이 덜하다고 느껴서 배경 스크롤을 1.5배 속도로 바꿔봤는데, 어때? 맘에 드나?” 그 배열이 복잡하다고? 민텐도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프로그래머인 하야시와 내가 둘 다 달려들어 만들어 낸 게 기존에 사이킥 배틀이었는데, 그걸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키다니 첸드라 이 녀석. 생각보다 엄청난 놈이잖아!? 기존에 사이킥 배틀을 플레이 하며 뭔가 2% 정도 아쉽게 느껴졌던 부분이 완전히 해소 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잠시 팔짱을 낀 채 첸드라의 플레이를 감상하다가 입을 열었다. “첸드라.” “응? 왜?” “내가 아무래도 널 과소평가 한 거 같다.” “그치? 나 잘했지?? 준혁한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마음에 드나?” “응. 완전 마음에 들어. 그래서 말인데..” “응..?” “너 투 잡을 좀 뛰어야겠다.” “투 잡? 그게 뭐냐?” “그런 게 있어. 우선은 아까 나에게 보여준 리코5A22 CPU 복제 가능하지?” “물론 가능하다.” “네가 할 수 있는 만큼 약간이라도 좋으니 성능을 높여줘. 차세대 패밀리의 CPU는 리코가 아닌 우리 라이텍스에서 가져가야해.” “오케이. 푸말라 준혁이 말 알아 들었지?” “푸말라. 100% 알아들었다.” 좋아. 이로서 인도산 공돌이들의 효용가치가 늘어났다. & “이게.. 무슨!? 부장님!! 대체 어떻게 이런..” 내가 건넨 사이킥 배틀의 코딩 자료를 검토하던 하야시는 말도 안 되게 줄어든 수식 판정을 살피며 감탄 중이었다. 그 반응 십분 이해한다. 나 역시 처음 자료를 건네받고는 기겁했을 정도니까. “정말 눈앞에서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군요. 이런 수식을 생각해 낼 수 있다니..” 컴퓨터와 대화하는 코딩이란 참 묘한 언어다. 간단하게 예를 들자면 말이다. 길가다가 어떤 사람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고 치자. 마침 난 그곳을 알고 있기에 그분에게 이렇게 설명을 드렸다. 저기 앞에 슈퍼마켓 보이시죠? 저 가게를 지나면 횡단보도가 나오는데, 그 횡단보도를 건너서 조금 더 가시면 세탁소가 나와요. 그 세탁소를 오른쪽으로 끼고 조금만 걸어가시면 말씀하신 장소가 나옵니다. 하지만 첸드라는 이렇게 설명했다고 보면 된다. 직진으로 두 블럭 더 가서 오른쪽으로 꺾어지세요. 같은 설명이지만 내용 전달이 훨씬 짧다. 그리고 컴퓨터는 짧고 정확한 설명을 좋아한다. 그래야 다른 명령도 쉽게 처리 할 수 있으니까. 첸드라는 그 여유 용량을 배경 스크롤에 쏟아 부었고, 그 결과 사이킥 배틀은 완전한 게임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슈퍼 마리지 3랑 붙어볼만 하겠는데?’ ──────────────────────────────────── ──────────────────────────────────── EP. 14 : 미국산 공돌이들 (1) & 1988년. 1월 1일. 신정 휴무일로 집에 있던 나는 간만에 게임 & 워치로 업계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패밀리가 출시된 후 5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 패밀리는 전성기보다 화려한 황혼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출시되는 게임들마다 어느 정도의 퀄리티는 유지 되어 있었고, 게임센터와는 노선이 다른 RPG류나 초고난이도 게임이 대거 등장하며 기존에는 가볍게 휴식 겸 즐기던 게임들이 약간의 스트레스 작용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드래곤 엠블렘을 시작으로 플레이어의 도전 욕구를 자극 하는 게임으로는 캡코에서 나온 횡스크롤 액션 게임 ‘로크맨’과 ‘마계기사’도 유명했는데 둘 다 짜증을 일으킬 정도의 극악 난이도를 자랑했는데. 특히나 ‘마계기사’는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BGM과 끝없이 튀어나오는 좀비 때로 1스테이지 조차 넘지 못하고 포기 한 유저가 수두룩할 정도였다. “마계기사. 하긴 그 게임도 더럽게 어렵긴 했었지..” 로크맨이야 어느 정도 보스의 패턴을 익히면 클리어 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지만, 마계기사는 진짜 패드를 부숴버리고 싶을 정도로 짜증을 유발하는 게임 중에 하나였다. “그나저나 슈퍼 마리지 3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난데없이 드래곤 워리어3 발매일까지 잡혀 버렸네..” 이미 국민 RPG게임으로 왕좌에 올라있는 초대형 타이틀의 컴백이 결정되었다. 슈퍼 마리지 3와 드래곤 워리어 3, 사이킥 배틀의 발매일이 얼추 비슷하게 잡히면서 게임 업계는 전란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물론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에게야 축제와도 같겠지만, 3개의 타이틀 모두 판매량에 기대를 걸만한 대형 타이틀이라 그런지 좀처럼 발매시기를 잡지 못하던 찰나. 드래곤 워리어 3가 가장 먼저 선제공격을 펼쳐왔다. 1988년 2월 10일 발매결정. 지난달까지만 해도 1988년 봄 예정이었기에 4~5월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2월 10일이라니.. -따르르릉~~ 따르르릉~- “음? 누구지..?” 갑작스레 울려온 전화에 수화기를 들어 올리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씨~!! 저예요.” “유키?” 그녀는 뭔가 좋은 일이 있는지 목소리가 굉장히 격앙되어 있었다. “저 됐어요!” “뭐가요?” “신인작가 공모전이요. 준혁씨가 저에게 얘기했던 아이디어가 당선됐어요!” “아, 진짜요?” 헐.. 이 시기에 먹방 컨셉이 통했다고? 이거 참. 그냥 2015년에 즐겨보던 드라마를 얘기해 준 것 뿐인데, 덜컥 당선이 되 버리다니 황당함을 넘어 신기하게 느껴지네. 안 그래도 크리스마스 때 방송국일이 바빠서 만나지 못해 아쉬웠는데, 그래도 이렇게 좋은 일이 생기자마자 바로 전화해주는 그녀가 굉장히 고맙게 느껴졌다. “그럼 곧 TV에서 유키씨가 만든 방송을 볼 수 있는 건가요?” “아, 그건 아니에요. 이건 그냥 새로운 프로그램 편성을 위한 아이디어 공모전인 뿐이라. 당선작이라고 바로 방송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거든요.” “그렇구나. 그건 좀 아쉬운데요?” “그래도 신인 작가로서 타이틀을 하나 얻은 셈이죠. 심사위원분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아서 조금만 더 노력하면 드라마 제작도 가능할 거 같긴 한데.” “굉장하네요. 올해는 유키씨에게 더 좋은 일이 많이 생기길 바래요.”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새해 인사도 못 드렸네요. 준혁씨. 그게.. 음.. 세헤 봇 마니 바드세요?” 봇 많이 받으라니.. 유키는 따로 한국의 새해 인사말을 적어두었는지 국어 책처럼 읽어 내려갔다. 예상치 못한 기습적인 새해 인사에 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수화기 너머로 부끄러운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음이 많이 이상하죠? 한국어 너무 어려워요.” “요새 한국어 배워요?” “네. 그런데 배울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어서 힘들어요. 따로 학원도 없고 그냥 서점에서 한국어 회화책으로 공부하고 있어요.” “독학은 많이 힘들텐데, 나중에 궁금한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요.” “네. 그럴게요. 그런데 준혁씨. 오늘도 집에 있는 거예요? 신년인데 한국에 안가봐도 되요?” “음.. 그게 요새 좀 마무리 지을 일이 많아서..” “그렇구나.. 그럼 혹시 이번 주말엔 뭐하세요?” “주말에 딱히 할 일은 없는데요?” “그럼 저 주말에 교토에 놀러 가도 돼요?” “아, 뭐.. 안될 건 없는데.” “그럼 이번 공모전에 신세 진 것도 있고, 제가 교토에 가서 식사라도 대접할게요.” “교토까지 직접 오셔서요?” “실은 교토 구경도 하고 싶어서요. 도쿄보단 오사카 지역이 볼 것도 많으니까요.” “하긴 그렇긴 하지만..” “싫으.. 세요?” “아니요. 싫긴요. 오히려 다행이네요..” “다행이요?” “네. 사실 다음 주에 미국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거든요.” “미국으로요? 왜요? 얼마나요?” 한꺼번에 3개를 물어보면 뭐부터 대답해야지? 나는 잠시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 한뒤에 입을 열었다. “새로 발매하는 게임에 대해 홍보 차 한 달 정도 체류할 것 같아요.” “한 달이나요?” “그래도 다행히 유키씨는 보고 갈 수 있겠네요.” “그럼 이번 주말에 꼭 갈게요. 기다려요.” “네. 오실 때 연락 주시면 역 앞에 마중 나가 있을게요.” “네~ 그럼 푹 쉬세요.” 유키와 통화를 종료한 후. 나는 책상 위에 놓아둔 여권을 바라보았다. 이번 미국 출장은 군페이씨와 함께 휴대용 겜보이의 시장 조사와 사이킥 배틀의 홍보가 주목적이었기에 지난번처럼 길진 않을 것이었다. ‘엘리스랑 윌슨씨.. 다들 잘 지내려나?’ 잠시 옛 생각에 빙긋 웃어 보았다. 물론 가끔 통화를 하긴 했지만, 실제로 얼굴을 보는 건 3년 만이었기에 나름 설레이는 마음도 없진 않았다. 엘리스는 그동안 일본어가 많이 늘어 거의 일본인 수준으로 유창하게 일어를 구사하게 되었다. 야마시타씨 말로는 풍기는 뉘앙스가 언젠가 본사로 발령을 내달라고 할 것 같다 던데, 어떻게 되려는지. 사실 이번 미국행에서 게임의 홍보도 중요하지만, 나름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고 있는 부분도 있었다. 그래서 조금은 일정을 길게 잡아두었는데, 다행히 군페이씨는 시장조사는 길면 길수록 좋다고 흔쾌히 승낙해주었다. 뭐, 군페이씨 에게 있어 나랑 다녀서 나쁠 건 없으니까. 내가 또 원채 잠자리가 까다로워서 호텔은 개인 사비로 끝내주는 곳에 다닐 걸 알고 있는 거겠지. ‘첸드라도 훌륭하지만, 나에겐 더 많은 공돌이가 필요하다. 얼마를 줘서라도 내 쪽으로 끌고 와야 할 사람이 미국에 널렸지..’ & “끙.. 미국이라고? 그래도 사내 연초 파티는 참석하고 가지 그러냐. 너랑 군페이가 빠져 버리면 테가 안 나잖아.” “시게루씨가 있잖아요. 그리고 저희 본사 직원들끼리만 하는 사내 파티인데, 굳이 제가 꼭 있을 필요도 없구요.” “이 녀석아. 스미레가 오기로 했단 말이야~!!” ‘사실 미국에 가는 이유 중에 약 절반가량이 그 아가씨 때문입니다.’ 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억지로 삼키며 옆에 있는 군페이씨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주변이 실룩이는 것을 보니 카마우치 사장 앞에서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할 수 없군. 스미레는 나중에 천천히 소개해주기로 하고, 우선은 일이 먼저니. 다음주에 간다고 했지? 잘 다녀오게.”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사장님.” ──────────────────────────────────── ──────────────────────────────────── EP. 14 : 미국산 공돌이들 (2) & “와아~ 여기가 치쿠린이구나!!” 싸아아아~ 바람에 나부끼는 대나무 소리에 나도 모르게 절로 미소가 그려지는 곳. 나와 유키는 지금 교토 아라시야마의 대나무 숲인 ‘치쿠린’에 와 있었다. 유키 역시 이곳이 처음 인지 오솔길 좌우를 가득히 매운 대나무 숲길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역시 도쿄보다는 교토가 훨씬 멋진 것 같아요. 도쿄에도 이런 곳이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은은한 대나무향을 느끼며 유키가 두 눈을 감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곁을 함께 걸으며 주말의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가끔 머리 식히러 오는 곳인데,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요.” “준혁씨도 이곳에 자주오세요?” “혼자서 생각하기 좋잖아요. 좋은 길이 있고, 대나무 향기도 좋고..” “그러네요. 킥킥. 좋은 길이라니 왠지 할아버지 같아.” “크흠..” 뭐 속은 이미 훌륭한 중년이지만, 나는 유키의 놀림을 가볍게 웃어넘기며 걸음을 옮겼다. “그럼, 월요일에 미국으로 가는 건가요?” “네. 한 달 정도 체류하다 올 것 같아요.” “와아. 전 아직 한 번도 외국을 나가본 적이 없어서 준혁씨 말만 들어도 엄청 설레네요.” 자기가 가는 것도 아닌데? 왜? 잠시 후에 유키는 굉장히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준혁씨.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뭔데요?” “그게.. 음 친구한테 들은 얘긴데, 비행기 탈 때 정말 신발 벗고 타야하나요?” 헐.. 이 개그가 이 시대에도 존재했다니.. 나는 유키의 진지한 표정에 그만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그러자 유키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나를 보며 얼버무렸다. “노.. 농담이에요~!! 물론 신발 신고 타아죠!!” 그 순간 나는 웃음을 딱 멈추고 정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에요. 유키씨.. 당연히 신발 벗고 타야죠.” “아..!! 그렇죠? 사실 아, 알고 있었어요~ 흥!!” 유키는 훽하고 고개를 돌린 채 혼자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아 진짜 귀엽긴 귀엽네. 올해로 스물이라. 내 원래 나이를 생각 한다면 천벌 받을 나이구나.. 그래서 그런지 연인이라는 느낌보단 조카 같은 느낌이랄까? 으이구. 이렇게 생각하니 유키가 할아버지라고 하는 게 정말 틀린 말은 아니네. 저만치 걸어가던 유키는 내가 천천히 따라가자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뭐 해요. 빨리 안 오구~!!” “하하. 가고 있어요.” 대나무 숲과 오솔길. 그리고 미소녀라.. 단어 하나하나가 심금을 울리는구나. & 유키와 함께 치쿠린을 빠져나와 다시 차에 오른 우리는 슬슬 배가 고팠기에 식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80년대에 일본은 도로에 차가 별로 없었기에 어딜 가든 매끄럽게 달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길게 뻗은 도로에서 엑셀에 힘을 가하자 내 차는 싸늘한 겨울바람을 가르며 쏜살처럼 달려 나갔다. “300m 전방에서 좌회전입니다. 좌측 차선에 붙어 주세요.” 30년쯤 후에나 들를 법한 네비게이션 안내 음성이지만, 이건 교토의 맛 집을 찾아 나에게 길 안내중인 유키의 목소리였다. “킥킥..” “아까부터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저도 알려 주세요. 같이 좀 웃게~ 네?” “아뇨. 아무 것도 아니에요.” “치이~ 치사하게 자기만 계속 웃고, 나는 하나도 안 가르쳐주고..” 당신이 지금 하는 행동이 30년 뒤에 네비게이션 기계에서 나온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나는 뾰루퉁하게 삐져 있는 유키를 바라보며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삐진 것 같아 보여도 실상 유키는 그런 성격이 아니다. 잠시 내가 이렇게 아무 말도 없으면.. “그래도 이렇게 제가 안내 해드리니까 편하죠? 막 귀에 쏙쏙 들어오지 않아요?” 이렇게 치고 들어오니까. 사실 심심할 틈이 없었다. 네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에는 초행길에 들어서면 누구나 이렇게 지도를 펼쳐가며 조수석에 있는 사람이 길을 알려주곤 했는데, 이것도 나름 쏠쏠한 재미가 있네. 나는 잠시 후 유키의 안내로 한 음식점에 도착했다. 아무리 맛 집이라지만 교토에서 고베까지 오다니 솔직히 나 혼자라면 절대 혼자 올 리가 없는 곳이다. 고베는 교토에서 오사카를 거쳐 가야하는 곳으로 와규라는 일본산 소고기가 유명한 지역이었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횡성 한우와 비슷한 곳이었다. “와아~ 가게가 엄청 커요!” 벽면에 거대한 소가 그려져 있는 가게 앞에서 유키는 마치 놀이동산에 온 어린 아이처럼 신나하고 있었다. 그녀는 집에서 가져온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2000년대라면 가게 앞에서 사진 찍는 게 일상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가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건물 외관을 찍고 있는 유키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지금 무얼 하시는건가요?” 결국 보다 못 한 가게 지배인이 건물 앞까지 나와서 유키에게 묻자. 그녀는 금세 얼굴을 붉히며 사정을 설명했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작가인데요. 제가 전국에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다니는 프로그램을 기획 중이거든요.” “오호.. 음식점을요?” “네. 그래서 자료 조사차 고베에서 소고기가 가장 맛있다는 가게 사진을 찍고 있었어요. 미리 말씀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러자 가게 지배인은 잠시 고개를 갸웃 거리다가 불현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소리쳤다. “그런 일이 있으면 미리 말씀을 하셨어야죠!!” 그리곤 쏜살 같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더니 순식간에 옷을 쫙 빼입은 채 주방장과 함께 달려 나왔다. “자~ 이제 찍으시죠.” “저는 좀 더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고 싶은데..” “그럼 기념으로라도 한 장 찍어주세요. 혹시 나중에 그런 프로그램이 생긴다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고베산 와규하면 저희 가게가 떠오를 수 있도록~!!” “네. 감사합니다.” 찰칵. 유키가 사진을 찍자 지배인은 유키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두 분 연인이시죠? 카메라 주세요. 제가 사진 한 장 예쁘게 찍어 드릴게요. 이래 뵈도 제가 사진학 전공이거든요.” 여, 연인이라고? 뒤에 서 있던 내가 손 사례를 치려 하자, 유키가 얼른 지배인에게 카메라를 넘기며 말했다. “네, 맞아요. 감사합니다~” 지배인에게 카메라를 넘긴 유키는 재빨리 나에게 돌아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웃어요~ 준혁씨.” “아.. 네. 하하..” & 지배인의 서비스 덕에 점심부터 배부르게 소고기로 배를 채우고 나자, 바로 차에 올라타기보단 조금 걷고 싶어졌다. 다행히 가게 옆으로 산책로가 있어 유키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숲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 너무 배불러요.” “그러게요. 너무 과식한 거 같은데..” “그래도 진짜 맛있었어요.” “그런데 너무 비싼 거 얻어먹은 거 아녜요?” 공모전 상금을 탄 걸로 한턱 쏜다고 일부러 교토까지 찾아와 준 것도 고마운데, 비싼 소고기를 얻어먹을 줄이야.. 그러나 유키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저도 한 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거든요. 직장 선배 언니가 고베 출신인데, 여기 가게 고기가 맛있다고 어찌나 자랑하던지. 그래도 준혁씨 덕분에 편하게 왔네요. 역시 차가 있으니 좋긴 좋구나~” 가볍게 뒷짐을 진채로 겨울 숲길을 걸으니 조금은 쌀쌀하지만 기분이 상쾌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준혁씨.” “네?” “미국 잘 다녀오세요.” “아.. 고마워요.” “그리고 돌아오시면.. 그때는 유키‘씨’ 말고 그냥 유키라고 편하게 불러줬으면 좋겠어요.” 나를 올려다보며 활짝 웃는 유키의 얼굴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 그래요. 그럴게요.” & 1월 7일. 미국행 비행기 안. 비지니스 클래스에서 기지개를 켜던 나는 마침 내 앞을 지나던 스튜어디스에게 물었다. “도착까지 얼마나 남았죠?” “30분 정도 남았습니다. 손님. 긴 여행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뇨. 스튜어디스님이야 말로 수고 하셨어요.” “무척 잘 주무시던데, 좋은 꿈이라도 꾸셨나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그랬던 것 같아요. 저기, 미안한데 물 한잔만 주시겠어요? 목이 좀 마르네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스튜어디스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밝은 미소로 대답하고는 물을 가지러 떠났다. 칼칼한 목을 다듬으며 가려진 창문을 위로 젖히자 우린 이미 미국 한복판 위에 도착해 있었다. 잠시 후. 뉴욕의 JFK 공항에 착륙한 비행기는 곧 우리를 내려 주었고, 나는 착륙하는 그 순간까지 잠들어 있던 군페이씨를 흔들어 깨웠다. “군페이씨. 도착했어요. 공항이에요.” “벌써..?” 벌써라니.. 이 사람아. 거의 20시간을 비행기 안에서 보냈는데, 누가 보면 교토에서 도쿄 가는 버스 탄 줄 알겠네. 나는 비몽사몽인 군페이씨를 일으켜 짐을 챙겨 드린 뒤 출국장으로 향했다. 물론 간단한 입국 심사와 비자 문제가 있었지만, 이미 일본에서 취업하여 비즈니스 비자를 가지고 있던 터라 문제가 될 건 없었다. 1년 동안 미국에서 체류한 경험도 있고.. 기내식도 거의 먹지 않고 잠만 자던 군페이씨는 허기가 지는지 지친 기색이었다. 결국 군페이씨의 캐리어까지 대신 끌고 출국장으로 나오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장님~!! 여기에요!!” 엘리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야마시타씨와 함께 윌슨씨까지 공항에 마중 나와 있었다. 3년 만에 만나는 그리운 얼굴에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윌슨씨! 야마시타씨!! 엘리스!!” 그러자 옆에 있던 군페이씨가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강군은 역시 미국에서도 인기가 좋은데?” “가시죠. 배고프실 텐데 우선 식사부터해요.” “그러지. 사실 엄청 배가 고파.” “그러게 누가 기내식도 안 먹고 잠만 자래요?” “이상하게 비행기에서 뭐만 먹으면 속이 좋지 않아서 말이지.” “어련하시겠습니까. 가시죠.” 군페이씨는 웃으며 묵묵히 내 뒤를 따라왔다. ──────────────────────────────────── ──────────────────────────────────── EP. 14 : 미국산 공돌이들 (3) & 미국에서의 일정은 딱히 내가 손댈 일은 없었다. 이미 미국 전역에 패밀리의 인기를 따라올 콘솔이 없었기에 휴대용 겜보이는 패밀리 때와는 달리 굉장히 안정적으로 미국 시장을 안착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패밀리와 함께 길바닥에 내던져지던 3년 전 과는 달리 미국 시장에서 게임에 대한 인식도 매우 좋아져 산업이 다시 활성화 되어 가는 중이었다. “3년 전에 비하면 완전 대 호평이군..” 군페이씨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식사 후에 담배를 입에 물며 중얼 거렸다. 식사를 하며 우리는 한 달간의 일정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두 개의 조를 짰다. 먼저 3개월 뒤 미국에 있을 휴대용 겜보이의 런칭 계획은 야마시타씨와 군페이씨에게 맡기기로 하고 사이킥 배틀에 대한 홍보는 나와 윌슨씨, 그리고 엘리스가 맡기로 했다. 윌슨씨는 민텐도 프리미엄 매장의 점포수를 늘려가며 민텐도 기기에 관해선 토이월드를 훨씬 웃도는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밑에 직원도 어마어마하게 늘어 예전에 작은 장난감 사장에서 6개의 점포를 운영하는 오너가 되어 있었다. “윌슨씨도 몰라보게 출세하셨네요.” “이게 다 미스터 강 자네를 만난 덕이지. 아직도 가끔 기억한다네. 내 작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와 긴장한 표정으로 패밀리를 꺼내 보였던 한국인 청년을..” “아~ 부끄럽게 왜 그러십니까.” “아냐. 언젠가 내가 죽고 신께서 내가 살아온 인생 중에 최고의 순간이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 날이라고 대답할 테야.” 윌슨 씨는 눈가에 잔주름을 깊게 패이며 웃어보였다.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서로 대화중인 두 일본인의 눈치를 살핀 뒤에 윌슨씨에게 말했다. “프리미엄 매장은 제가 말씀드린 대로 늘려가는 중이시죠?” “물론. 점포를 늘릴 때마다 미스터 강이 송금해주는 돈에서 절반씩 보태 자네와 내 명의로 사업장을 늘리고 있지.” “잘하고 계시네요. 계속 그렇게 해주세요.”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대체 그 많은 돈은 어디서 나는 건가? 아무리 잘나가는 민텐도의 부장이라도 그렇게 많은 돈을 받는 건 아닐 텐데..” “제가 돈이 좀 많은 편이에요. 그리고 민텐도 본사에선 모르지만 카트리지 공장도 몇 개 소유하고 있고 소프트웨어 개발도 하고 있거든요.” “뭐라고!? 그걸 혼자서 어떻게 다 운영한단 말인가?” “실제로 제가 미국에 없어도 윌슨씨가 잘 해주시는 것처럼 모두 그런 식으로 섭외해두었습니다.” “허~ 이거 참 젊은 사람 인맥이 대단하군. 그 정도의 인력과 자본이라면 스스로 회사를 세워 콘솔기기를 만들어 볼 생각은 없는가?” “그렇게 할 겁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에요.” “왜지..?” “아직은 서드 파티와 유저. 모두가 민텐도를 좋아하거든요. 워낙에 기기 보급률이 뛰어나니 이 시기에 콘솔 사업에 뛰어들어봤자 본전도 못 찾을게 분명해요. 그렇게 성능이 뛰어나다고 어필하던 NEGA도 결국엔 손 털고 차세대기 제작 발표했잖아요. 이번 세대에선 이미 결판이 났죠.” “그럼 다음 세대는 어떤가?” “이번 세대에서 유저들에게 신용을 얻은 만큼 민텐도는 더욱 치고 올라가겠죠. 패밀리의 다음 기종에는 거의 전 세계에 모든 유저가 몰릴 겁니다.” 윌슨씨는 확신에 차있는 내 말에 크게 놀라며 반박했다. “그렇다면 다음 세대에서도 민텐도의 독점이 유지 된다는 말인가?” “왜요? 윌슨씨에게는 기쁜 소식 아닌가요?” “물론 지금의 내 입장에서야 좋은 소식이지만, 모든 시장이 그렇듯 한 기업의 독점 체제는 결국 화를 부르지. 아타리 쇼크 때처럼 말이야. 솔직히 나는 아직도 그 시기가 다시 올까 두렵다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적어도 다음 세대까지 민텐도가 무너질 일은 없을 테니까.” “다음 세대까지? 그렇다면 자네가 노리는 건?” “네. 바로 그 다음 세대입니다.”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차세대기의 그 다음 세대를 노린다고?” “왕좌에 너무 오래 앉아있다 보면, 세상 모든 일이 너무 쉽게만 느껴질 때가 있지요. 분명히 작은 틈이 생길 거예요. 그리고 그때가 오면 지금 우리가 즐기는 게임은 아마 엄청난 엔터테이먼트 사업이 되어 있을 겁니다.” “이거 참. 누가 얘기하면 헛소리 하지 말라고 엉덩이를 걷어 차줄 텐데. 자네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니 묘하게 믿음이 가는군.” “그때가 오면 현재 가지고 계신 모든 점포에서 민텐도에 관한 물건을 미련 없이 버리셔야할 겁니다. 예전에 아타리 쇼크 때처럼 한구석에 쌓아두지 마시구요.” “그래도 패밀리에는 재밌는 게임이 많으니 놔둬서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카트리지야 놔둬서 썩는 것도 아닐 테니?” “그때가 되면 카트리지는 더 이상 아무도 쓰지 않을 거예요. 킥킥..” “뭐라고..?” 윌슨씨는 내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때 가게에서 계산을 마친 엘리스가 차를 끌고 나오며 우리에게 외쳤다. “지사장님. 그리고 부장님들. 우선 호텔로 이동하시죠. 짐 먼저 풀으셔야죠.” 어라? 호텔을 벌써 예약해 뒀다고? 설마 예전처럼 또 쥐 나오는 3류 호텔 예약한 거 아냐? “엘리스씨 호텔은 제가 따로..” “걱정마세요. 강 부장님 취향에 맞게 5성급 호텔 비지니스 룸으로 한 달 예약 잡아 뒀어요. 3년 전에 쓰시던 스위트 룸 만큼은 아니지만, 한 달 체류하실 동안 불편한 건 없을 거예요.” “헐.. 웬일이래?” 그러자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야마시타씨가 나에게 말했다. “그래도 민텐도 미국 지사를 일으켜준 영웅인데, 초라한 곳에서 재울 순 없지 않은가?” “감사합니다. 그럼 신세 좀 질게요.” 트렁크에 짐을 실은 우리는 그대로 뉴욕 중심가의 호텔로 향했다. & 다음 날. 윌슨씨의 가게 오픈 전. 나는 스토어 직원들과 함께 영문판으로 컨버젼 된 사이킥 배틀 시연을 선보였다. 곧이어 화면을 가득 메우는 탄약의 향연에 입이 떡 벌어진 직원들은 경악스러워 했지만, 커맨드와 게임의 요령을 알려주자 이내 곧 즐겁게 플레이하기 시작했다. 챈드라의 코딩으로 더욱 스피디해진 사이킥 배틀은 초반부터 직원들에게 아주 반응이 좋았다. “이거 정말 기가 막힌데?” “어떻게 8비트 게임기에서 이만한 연출을 할 수 있는 거지? 나로선 이해가 안 되는군.” 윌슨씨 역시 한번 패드를 잡아보고는 첫 스테이지 절반도 채 못가 쓰러지고 말았다. “이거 참. 이렇게 어려운 게임이 과연 팔릴까?” “일본에서는 최근 초 고난이도 게임이 유행이거든요. 사이킥 배틀 말고도 전체적으로 게임의 난이도가 많이 올랐어요. 이곳에서 정식 발매 전까지 체험판으로 고객들에게 홍보를 부탁드립니다. 1번째 보스를 클리어하는 플레이어에겐 원하는 일러스트 한 장을 드리면 되고 두 번째 스테이지까지 클리어 하면 체험판 카트리지를 드리세요. 아마 몇 번 죽다보면 요령이 생겨서 엄청 도전 할 겁니다.” “알겠네. 직원들에게 그렇게 전하지. 그런데 자네는 어디가나?” “잠시 엘리스와 다녀올 데가 있어서요. 사이킥 배틀 홍보야 프리미엄 스토어 직원들에게 맡겨도 충분하겠죠?” “그래. 오랜만에 미국에 왔으니 가보고 싶은 곳도 있겠지. 여긴 나에게 맡기고 천천히 다녀오게” “고맙습니다. 윌슨씨.” 나는 스토어의 직원들에게도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를 남긴 뒤 서둘러 매장을 나왔다. 가게 앞에는 미리 차를 대기하고 있던 엘리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부장님?” “우선 보스턴 MIT공대로 가죠.” ──────────────────────────────────── EP. 14 : 미국산 공돌이들 (4) & 메사추세스 공과 대학. 미국의 하버드와 함께 손에 꼽히는 명문대학으로 하버드가 엘리트들을 위한 대학이라면 MIT는 천재들을 위한 대학이라 볼 수 있었다. 한국의 카이스트처럼 이공 계열에 천재 적인 소질을 가진 괴짜들의 집합소지만, 교수나 졸업생 가운데 노벨상 수상자를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많이 배출한 MIT 대학은 우스갯소리로 노벨 사관학교로도 불리고 있었다. “그런데 MIT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거예요?” “엘리스씨. 혹시 최초의 게임을 어디서 만들었는지 알아요?” “최초의 게임이요? 글쎄요. 그런 걸 생각해 본적이 없는데. 어디서 만들었는데요?” “우리가 가고 있는 곳에서요.” “네에!? MIT에서 게임을 최초로 만들었다구요?” “1962년에 MIT 공대생들이 만들어낸 스페이스 워가 그래픽 기술이 사용된 최초의 게임이에요. 당시에 MIT의 해커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던데, 상업화에는 실패했죠.” “그렇군요. 헌데 제가 알기로 MIT는 아타리 쇼크 이후 게임에 대해선 완전히 손을 뗀 것 같던데, 괜찮을까요?” “딱히 게임 개발자를 찾으러 MIT에 가는 건 아녜요.” “그럼 왜?” “MIT라면 컴퓨터를 이용해 재밌는 발상을 많이 하는 곳이니까. 혹시 참고 할만 인재가 있나 찾아보려는 거죠.” “민텐도로 스카웃 하시 게요?” “글쎄요.” 내가 묘한 웃음으로 대답을 회피하자, 엘리스 역시 살짝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역시 이번에도 윌슨씨의 가게처럼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군요?” 엘리스는 민텐도의 소속이지만, 미국에서 윌슨씨와 같이 내 비밀을 조금은 알고 있는 직원 중에 하나였다. 민텐도 프리미엄 스토어를 늘릴 때마다 윌슨씨와 함께 법적 증인을 행사해 주고 있고, 그로인해 나는 엘리스에게 매달 수수료의 명목으로 일정 금액을 지급해주고 있었다. 3년 전에 나와 같이 민텐도 미국지사가 커가는 과정을 겪어온 그녀는 이후에도 야마시타씨를 도와 민텐도가 미국시장에 완전히 자리 잡을 때까지 힘써 주었다. 나는 엘리스의 말에 그저 웃으며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 잠시 후 우리는 미국 캠브릿지 시의 MIT 공과대학 근처에 도착했다. 방학시즌이긴 했지만, 거리에는 관광객들과 학생들도 북적이고 있었다. “방학이라 조금 한적할 줄 알았더니, 다행인건지 불행인건지..” 차에서 내린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손목시계를 바라보니 시간은 오후 1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뉴욕에서 이곳까지 약 3시간 반 정도를 달려온 탓에 엘리스도 피곤한지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바로 들어가기도 뭐하니 먼저 식사라도 할까요?” “좋아요. 안 그래도 배고팠었는데~” 우리는 대학 근처에서 학생들이 가장 많이 식사를 하고 있는 햄버그 집에 들어갔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진하게 풍겨오는 고기 굽는 냄새에 나도 모르게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여기 굉장히 유명한 곳인가 봐요.” 엘리스 역시 마음에 드는지 얼굴에 하나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잠시 출입구에서 대기하자 웨이터가 다가와 자리를 안내해 주었고, 나와 엘리스는 각자 함박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잠시 후 철판에 지글 거리는 함박스테이크가 나오자 식탁에 앉아 있던 나는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웬 카메라에요?” “일본의 친구가 부탁해서요. 미국에 가면 식당에서 먹는 음식들 사진 좀 찍어달라고.. 잠시만요.” 나는 유키의 부탁대로 방금 나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음식 사진을요? 별난 친구네요. 혹시 여자친구?” “네. 방송국에서 보조작가로 일하는 친구에요.” “부장님 여자 친구 있었어요!?” “음.. 좋은 감정으로 만나는 친구가 있긴 한데..” “와~ 축하드려요. 저는 부장님이 일만 하느라고 여자엔 별 관심도 없는 줄 알았는데.” “일이 바쁘긴 한데, 잘 이해해주는 친구에요.” “좋은 사람이군요. 나중에 일본에 가게 되면 꼭 소개 시켜줘요.” 의외로 쿨 하게 축하해주는 엘리스의 모습에 3년 전 공항에서 헤어지던 때가 생각났던 나는 은근 슬쩍 그녀에게 물었다. “엘리스씨는 애인 없어요?” “저요? 물론 있죠~!! 이래봬도 엄청 인기 많거든요?” 하긴 저만한 미인이 3년 동안 솔로로 나를 기다려줄 리가 없지. 나는 내 어이없는 망상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기를 썰었다. 그때 건너편 테이블에 있던 두 남자에게서 재밌는 대화가 들려왔다. “어때? 어제 내가 준 파일 실행해 봤어?” “응. 처음에 화면만 봤을 때는 감이 잘 안 왔었는데, 방향키를 움직여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킥킥. 재밌지? 실제로 미로에 갇힌 기분이 들지 않았어?” “아니 어떻게 모니터 안에 ‘공간’을 만들 생각을 한 거야?” 공간? 나이프로 함박 스테이크를 썰어내던 나는 남자의 대화에 칼질을 멈추었다. 그 모습에 엘리스가 나에게 물었다. “부장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쉿. 잠시만요.” 나는 천천히 고기를 썰어내며 건너편 청년들의 대화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본래 내가 만들려던 다각도로 내부를 살펴 볼 수 있는 집이었어. 그런데 지난 번 미술 수업을 들으면서 재밌는 사실을 깨달았지.” “미술 수업? 아~ 그 삼각형 석고상 그렸을 때 말하는 거야?” “그래 맞아. 그 삼각형 석고상을 만들기 위해선 4면체가 필요하지. 그것을 컴퓨터로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쉽더라고.” “그걸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 봤다고?” “못 만들건 또 뭐야? 일종의 종이접기랑 같아. 3개의 버텍스(점)를 이어서 4개의 삼각형 도형만 만들면 돼. 나머진 그것들을 이어 붙일 뿐.” “그게 말이야 쉽지.” 맞는 말이다. 지금 시대에 3D MAX같은 툴(TOOL)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연산 작업으로 3D효과를 내려고 하다니. 완전 미친 공돌이잖아? 저 녀석 대체 누구지? “어이, 존. 그래서 결국 그 다각도로 살펴볼 수 있는 입체도면은 만들었어?” “아니. 결국 완성하지 못했어.” “왜?” “지금 내가 가진 컴퓨터 성능에서는 삼각형 하나를 표현하는 게 고작이야. 그 이상을 표현하려고 하면 엄청나게 과부하가 걸리더라고, 그래서 우선 버텍스만 엮어서 단순한 미로를 만들어 본거야.” 버텍스로만 엮어서 모니터 안에 미로를 만들어 냈다고? 지금 저 녀석이 말하는 걸 종합해 보면 전형적인 FPS의 기본 구조인데? 나는 눈앞에 놓인 스테이크가 식든 말든 아예 포크를 내려놓은 채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였다. “그래서 말인데, 내 생각에 나중에는 지금의 CPU처럼 전문적으로 그래픽 연산을 보조할 장치가 꼭 필요할거 같더라고. 예를 들어 GPU? 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거라면 VGA카드가 있잖아.” “VGA카드는 단순히 CPU에서 처리된 명령을 모니터에 출력해주는 것 뿐이 못하잖아. 내가 말하는 건 CPU를 도와 그래픽 부분의 연산을 직접 제어해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거지.” 그 순간 나는 속으로 '빙고'를 외치며 두 눈을 감은 채 미소 지었다. 포인트를 정확히 짚어 주었군. “부장님? 아까부터 왜 그러세요? 식사도 안하시고..” “엘리스씨..” “네?” “굳이 학교 안에 들어가 볼 필요가 없겠는데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벌써 제가 원하던 사람을 찾았거든요.” ──────────────────────────────────── ──────────────────────────────────── EP. 14 : 미국산 공돌이들 (5) “굳이 학교 안에 들어가 볼 필요가 없겠는데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벌써 제가 원하던 사람을 찾았거든요.” 그렇다. 사실 내가 원하는 건 게임 개발자가 아니었다. 우리가 흔하게 인식하고 있는 폴리곤을 활용한 게임은 1994년에 등장한 NEGA의 버추어 파이터였다. 분명 그것은 우리에게 비쥬얼 적인 쇼크를 안겨주었지만 사실 88년에도 폴리곤을 이용한 게임은 있었다. 그것은 미국에서 거의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아타리가 발표한 레이싱 게임 ‘하드 드라이빈’과 일본의 반코사에서 만들어낸 ‘위닝 런’이 있었다. 이 시기에 폴리곤을 이용한 레이싱 게임은 보기엔 신기했지만, 게임성은 꽝이었다. 차라리 도트로 표현한 그래픽이 훨씬 좋아 보였고, 치명적인 단점이 지면을 달리는 느낌보다는 자동차가 허공에 붕 떠서 날아다니는 느낌이 들어 이질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거기다 폴리곤에 텍스쳐를 입히는 기술도 없었던 시기여서 단조롭기 그지없던 3D 그래픽은 결국 빛의 속도로 게이머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적어도 NEGA의 버추어 파이터가 등장하기 전까진 말이다. “엘리스씨. 먼저 식사하고 있어요. 잠깐 저기 학생들이랑 이야기 좀 하고 올게요.” “저기 부장님? 부장님!?”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건너편에서 대화중인 학생들의 테이블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누구세요?” “식사 중에 미안합니다. 엿들으려고 한건 아닌데,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시 길래 관심이 생겨서요.” “우리 이야기를 엿 들으셨다구요?” 존이라고 불린 남자가 조금은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멋대로 그들의 대화에 끼어든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지갑에서 한 장의 명함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자 명함을 집어든 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민텐도라면 게임기를 만드는 회사 아닌가요?” “맞아요.” “저희는 게임 얘기를 하고 있지 않았는데요. 건축 공학에서 쓰일 입체 도면에 대한 이야기 중이었는데..” “그것도 들었어요. 제가 흥미를 느낀 건 바로 당신이 말한 GPU라는 장치에 대해서입니다.” “저기 아직 그건 정식적인 명칭도 아니에요. 그냥 중앙처리장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무심결에 나온 이야기에요.” “이름 따윈 상관없어요. 문제는 그걸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실제로 입체 도면은 결국 만들지 못했잖아요.” 가볍게 상대방의 아픈 부위를 쿡하고 찔러보자 곧바로 반응이 왔다. “그건 내 구현방식이 틀린 게 아니고 컴퓨터의 성능이 모자라서입니다.” “당신이 말한 방식은 현재 슈퍼컴퓨터에서도 구현이 어려워요. 일반적인 화면에서 x와 y로만 구현 되던 세계에 z축을 도입하는 건 괜찮은 방식이에요. 당신은 게임이랑은 상관이 없다고 하지만, 당신이 만들어낸 입체 도형을 기반으로 집을 지어 사람이 살 듯이 그 안에 게임 캐릭터가 움직일 수도 있죠. 오히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 낼 수 있어요.” “입체 도면 안에서 플레이하는 게임..?” 존은 잠시 손톱을 물어뜯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격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반박했다. “말도 안돼요. 그렇게 되면 MAP 자체를 어마어마하게 크게 만들어야하는데, 고작 폴리곤 4개로 버벅거리는 판국에 무슨 게임을 만듭니까.” “그러니까 더욱 필요한 겁니다. 당신이 말한 GPU라는 장치가. 전 당신한테 게임을 만들어 달하고 하지 않았어요. 제가 필요한건 CPU를 도와 그래픽 연산을 처리해줄 장치거든요.” “그러니까 당신 말은 그걸 지금 저보고 만들라는 말입니까?” 당연한 걸 뭘 물어.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말 꺼낸 사람이 만들어야지. & 2015년이라면 2D부터 3D를 넘어서 입체 영상까지 구현이 가능한 단일 그래픽 카드가 일반적이지만 3D 그래픽의 초창기 시절에는 따로 VGA 카드에 단자를 물려 3D 그래픽에 대해서만 연산을 도와주는 가속 장치로 만들어지던 시기가 있었다. 내가 지금 존 커티스에게 부탁하는 것은 VooDoo에서 만들어낸 3Dfx와 방식이 비슷한 보조 장치에 대한 의뢰였다. 식당에서 자리를 옮긴 우리는 MIT 대학에서 유명한 동아리 모임인 ‘hack’를 찾았다. 나를 따라 함께 대학 안으로 들어온 엘리스는 불안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부장님? 저희 괜찮은 건가요? 뭔가 어마어마한 곳에 온 기분인데..” “어마어마한 곳이긴 하죠. 여긴 천재들의 놀이터 같은 곳이니까.” “놀이..터? 라구요.” “하긴 일반적인 놀이터랑은 분위기가 조금 다르지만..” 존과 마이클의 안내를 받아 우리가 도착한 곳은 푸르스름한 모니터 조명만이 비추는 어두컴컴한 실내였다. 벽 쪽에는 2층 침대 몇 개가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가끔 꿈틀거리는걸 보니 누군가가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이 다들 좀 일어나 봐.” 존이 동아리방에 들어서며 실내등을 키자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야, 존. 너 미쳤어? 이 시간에 불을 왜 켜대고 지랄이야. 어제 새벽에 파트타임 때문에 몇 시간 못 잤단 말이야.” “지금 아르바이트가 문제가 아냐 일어나 봐.” 존의 말에 침대에서 곤히 잠자던 공돌이 몇몇이 침낭을 거두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서양인들이라 그런지 다들 한 덩치 했지만, 내 눈에는 마치 잠에서 깨어나는 꼬마요정들처럼 하나같이 귀여워보였다. 판타지 세계에 도구를 만드는 장인인 ‘드워프’가 있다면 현실 세계에 드워프는 이 들일지도 모른다. “존.. 무슨 일이야?” 막 잠에서 깨어나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있던 후덕한 인상의 남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수염 난 공돌이 하나’ “뭐야 존. 밥 먹으러 간다더니 내 건 안 사왔어?” ‘앞니가 튀어나온 키가 작은 공돌이 둘.’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냐?” ‘손가락으로 건드려도 툭하고 쓰러질 것 같은 스켈레톤 공돌이 셋.’ 우리를 안내한 존과 마이클까지 다섯 명의 공돌이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내 뒤에 숨어 있던 엘리스가 살짝 고개를 내밀며 인사를 건네었다. “안녕하세요. 민텐도 미국지사에 근무하는 엘리스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여자다!!! 오 마이 갓!!” “왜지? 왜 우리 동아리실에 여자가 있지!?” “누구야!? 누구 여친이냐!! 다들 움직이지 마!! 움직이는 놈이 범인이여!! 씨벌!! 배신자 새끼!!” 잠에서 깬 세 마리의 공돌이들은 엘리스의 모습에 색다른 반응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조금 창피한지 존과 마이클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나에게 친구들을 소개해주었다. “저 끝에 있는 삐쩍 마른 녀석부터 톰, 행크, 롭이에요. 원래 몇 명 더 있는데, 방학 때는 보통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모아 컴퓨터 부품을 사고 있어서 학교에는 밤에만 와요.” “음? 옆에 있는 동양인 남자는 누구야?” 뭐야? 저 녀석들 눈에는 엘리스만 보이고 나는 안중에도 없었나? 하긴 뭐 남자들한테 관심 받는 것도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미국에 올 때 첸드라도 데려왔으면 좋았을 걸. 녀석이랑 같이 왔으면 얘기가 아주 잘 통했었을 텐데.. 잠시 동안 존과 마이클은 친구들에게 식당에서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간략하게 전달해주었다. 어느 정도 대화가 오가자 대충 알아들었는지 후덕한 털보 롭이 입을 열었다. “존. 그러니까 네가 말하는 건 CPU의 그래픽 연산을 도울 가속 장치를 만들자는 거야?” “맞아. 주 메모리를 건드리지 않고 따로 그래픽 연산을 위한 메모리 설계를 할 수 있다면 충분히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뭐 공장에서 찍어내는 양산 제작이 아니라면 한 두 개 정도는 만들 수 있겠지. 하지만 문제가 있어.” 피곤한 표정의 롭은 덥수룩한 수염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잖아. 우리가 하는 일에는 응당 보수가 따라야하지 않겠어?” 그러자 존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한 발 뒤로 물러나 나를 바라보았다. “롭의 말이 맞아요. 연구비 지원에 대한 당신의 제안은 달콤하지만, 아무런 수익도 없이 움직여 줄 녀석들이 아니거든요.” 흐음.. 이제 내 차례인가? 나는 롭이라는 남자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저 역시 게임 업계에서 일하는 만큼 여러분이 하는 작업 자체가 굉장히 어렵고 시간이 많이 들 거라는 걸 알아요. 그렇기에 매달 지급 되는 연구비에는 여러분의 한 달 봉급이 포함될 예정입니다. 말씀해 보세요. 얼마를 원하시죠?” 그러자 롭은 내 말에 코웃음을 치며 씨익 웃어보였다. “부르는 대로 얼마든지 줄 것처럼 이야기 하시네? 나이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데?” 어라? 세게 나오는데? 하지만 여기서 주눅 든 모습을 보일 순 없기에 나는 오히려 담담이 웃으며 대답했다. “뭐 턱없이 높은 금액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는 수용해 드리죠.” 말도 안 되는 금액이라면 이론만 취득해서 첸드라에게 보여줘도 어느 정도는 해결할 수 있겠지.. 그때 손가락을 굽히며 열심히 대가리를 굴리던 롭이 기분나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우선 우리도 나름 개인 시간 투자를 해야 하는 거라. 보통 수업이 끝나고 밤에 작업을 할 텐데, 그러다보면 배도 고플 테고, 필요한 부품을 조달할 때 쓸 기름 값이랑 부품 구입비용에다가 각자 아르바이트도 포기하고 매달려야하니까..” 꼼꼼하게도 계산하네. 그래서 대체 얼마나 달라는 거냐.. 롭은 잠시 뜸을 들인 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적어도 인당 500달러씩은 더 줘야겠..” “오케이~ 딜!!!” 나는 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딜을 외쳤다. 난 또 무슨 두당 10만 달러라도 달라는 줄 알았네. 소소한 녀석 같으니.. 이거면 오히려 내가 제시하려던 금액 보다 훨씬 싸네. “엘리스씨. 계약서 챙겨오셨죠?” “물론이죠. 부장님.” “우선 계약서 작성하고 계좌 받아 놓으세요. 다음 달부터 이분들 급여랑 같이 송금해 드릴 테니 잘 좀 챙겨 주시구요.” “알겠습니다. 부장님.” 다음 달 일본에 돌아가면 첸드라 녀석 비자 좀 확인해 봐야 겠군. 나는 바쁘게 펜을 움직여 계약서에 싸인중인 공돌이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 EP. 14 : 미국산 공돌이들 (6) & MIT 공대에서 뉴욕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창가로 저무는 태양을 바라보며 피식 피식 웃고 있었다. 나름대로 신나게 대가리를 굴려 제시한 금액이 고작 500달러라니.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장치는 단순하게는 CPU의 연산을 도와주는 보조 부품이었지만, 게임 산업에 있어서 인류가 달에 발자국을 남긴 것만큼이나 위대한 업적을 이루게 될 녀석이었다. 물론 그것은 건축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건축물의 모든 투시도를 그려내는 것보다 훨씬 손쉽게 내부구조를 다양한 각도로 돌려보고 확대 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3D의 활용도는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것이 진정으로 나에게 가장 큰 돈을 안겨줄 아이템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현금성 자본은 약 22억엔이었다. 83년으로 타임슬립 했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자본금. 하지만 뉴욕의 민텐도 프리미엄샵을 기준으로 약 6개의 점포에 대해 절반 이상의 투자를 하였고, 매달 그 돈은 엘리스에게 한번 건너간 후 나에게 회수되었다. 그리고 드래곤 엠블렘은 대히트를 기록했지만, 게임성을 위해 카트리지 제작 단가에서 손해가 컸던지라 큰돈을 만지기는 힘들었다. 그나마 현재 나에게 돈을 벌어다 주고 있는 건 첸드라가 만들어 낸 패밀리의 성능을 높여주는 특수 칩으로 어느 정도 수익을 챙길 수 있었다. 손에 든 자본금은 비슷하지만, 83년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사업장과 인맥이 형성 되어 돈이 돌기 시작하는 와중에 거의 헐값으로 MIT 공대생들의 기술을 손에 넣을 수 있다니.. 기분이 안 좋고 베길까? “부장님 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녜요?” “티나요?” “아주 많이요.” “아~ 사무실에 돌아가면 표정 관리 좀 해야겠는데, 엘리스씨 오늘 일은 야마시타씨와 군페이씨에겐 비밀로 해주세요.” “もちろんです. 部長” (물론이죠. 부장님.) “오~ 발음이 굉장히 자연스러운데요?” “부장님이 일본에 돌아가시고, 혼자서 일본어 엄청 연습했었거든요~” “지금도 본사에서 근무하고 싶어요?” “물론이죠. 일본어도 배웠으니 한 1~2년 정도? 근무하고 싶긴 하네요. 야마시타 지사장님이랑 제임스만 아니라면..” “제임스?” “아, 제 애인이에요. 안 그래도 제임스랑 저녁 약속이 있는데, 부장님도 같이 가실래요?” “제가요? 에이~ 괜찮아요. 괜히 연인 사이에 끼어든 눈치 없는 놈 되고 싶진 않아요.” “저도 그렇지만, 제임스도 전혀 그런 거에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라 괜찮은데요?” 아니. 내가 안 괜찮다구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엘리스의 제안을 재차 거절하자, 엘리스도 포기 했는지 더 이상 권유 하지 않았다. & “그럼 내일 봬요. 부장님~” “조심히 들어가요. 엘리스씨. 데이트 잘 하시구요.” 부우웅~ 윌스씨의 가게 앞에 나를 내려준 엘리스는 곧바로 차를 몰아 복잡한 퇴근길 차도에 합류했다. 나는 잠시 동안 엘리스의 차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윌슨씨의 가게를 바라보았다. 방학 중이라 그런지 윌슨씨의 가게에는 많은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다행히 오전에 설치해 두었던 사이킥 배틀의 반응이 나쁘지 않은지 쇼윈도 건너편에는 많은 사람들이 게임을 플레이 중이었다. 그중에 몇몇은 스테이지 클리어 상품으로 지급된 일러스트를 손에 쥔 채 환호하고 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리타의 일러스트는 인기가 좋군. 일본에 돌아가면 모리타 녀석이 좋아하겠어. & 다음 날 새벽. 나는 야마시타씨에게 차를 한 대 빌려 MIT에 방문하였다. 뉴욕에서 보스턴까지의 거리는 약 350km. 거의 서울에서 부산거리라 가까운 편은 아니었지만, 작업 진행상항을 봐두는 편이 나중에 첸드라에게 설명하기에도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MIT는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금하는 대학이 아니었기에 수월하게 어제 방문한 ‘hack’ 동아리 실에 방문 할 수 있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동아리실에는 어제 5명을 포함한 총 7명의 학생들이 탁자에 둘러 앉아 회의를 하고 있었다. 하긴 하나의 컴퓨터 부품을 새로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 우선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기술 구현에 대한 아이디어 회의가 먼저다. “오셨어요?” 내가 동아리 실에 들어오자 8명의 시선이 나에게로 꽂혔다. 그 중에 몇몇은 고개를 길게 빼서 내 뒤를 살피고 있었다. 혹시 엘리스는 같이 안 왔나 살펴보는 건가? 아쉽지만 엘리스는 오늘 야마시타 사장과 함께 근무 중인데? “저 사람이 의뢰인이야? 나이는 우리랑 비슷해 보이는데? 영어 할 줄 알아?” “응. 걱정 마. 굉장히 잘해.” 존은 나를 친구들에게 다시 한 번 소개를 시켜 주었다. 학생들의 나이는 보통 20대 초반이었기에 내가 조금 더 많긴 했지만, 몇 마디 대화를 나누자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다시 본격적인 회의로 돌아가 나는 한 쪽에 앉아 그들의 대화를 메모하기 시작했다. “아까 존이 말 한 대로 CPU의 부담을 줄이려면 새로 만드는 가속 장치에도 독립적인 메모리가 필요하다는 것에 나도 찬성이야. 기존처럼 하나의 메모리를 CPU와 VGA가 나눠 쓰게 되면 과부하가 걸릴 수밖에 없으니까” “단가가 높아지겠지만, CPU의 부담을 줄이려면 그 방법 밖에 없지. 그럼 우선 도면을 그려보기 전에 구동 원리 좀 살펴보자.” 롭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되물었다. “벌써? 아무 장비도 없는데?” “뭔 소리야 장비는 널렸지.” 롭은 한구석에 잔뜩 쌓여진 컴퓨터 부품을 바라보며 씨익 웃어보였다. 의외로 그들이 생각한 방식은 단순했다. 나는 MIT를 천재들의 집합소라 부르길래 기상천외한 방식을 생각해 낼 줄 알았는데, 롭이 가장 먼저 제안한 방식은 두 대의 컴퓨터를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다소 무식한 방법이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두 개의 메인보드를 하나로 연결 시켜 한쪽은 CPU를 한쪽은 그래픽 작업만을 위해 메모리를 구동시킨다. 이렇게 되면 양쪽에서 독자적으로 1MB의 메모리를 온전히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만사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 있을까? 아무리 두 개의 하드웨어를 연결시킨다 하더라도 여분의 메모리를 그래픽카드가 사용할 수 있도록 설정하는 ‘드라이버’가 필요하다. 우선 그들의 첫 번째 난제는 이것이었다. 두 대의 PC를 활용하되 각각 독립된 메모리를 쓸 수 있도록 바이오스 세팅을 다시 만들어야했다. “이거 쉬운 일이 아니네. 일단 바이오스 셋업을 다시 한 상태에서 구동원리를 파악한 다음에 설계를 짜는 게 좋겠어.” 롭의 말에 다른 공돌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 업무를 분담하기 시작했다. 첸드라도 함께 있었으면 서로 배울 점이 많았을 텐데 참으로 아쉽구나. & 그렇게 약 10일 정도가 흐르고.. “야.. 된다.” 잭의 말에 침대 속에서 꿈틀대던 공돌이들과 나는 침낭을 거두며 부스스 눈을 떴다. 10일 동안 함께 먹고 자면서 그래픽 드라이버를 만들다보니 나도 어느 틈에 이들과 똑같은 생활을 즐기는 중이었다. “된다!!! 씨발!!” “뭐, 뭐냐!? 뭐가 돼?” 갑작스러운 잭의 함성에 깜짝 놀란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조금은 버벅 거리지만 그런대로 봐줄만한 피라미드 모양의 폴리곤 2개가 시계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오!! 씨발!! 지저스 크라이스트!!”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오며 침대 밖으로 튀어 나왔다. 서로 연결된 두 대의 PC는 완벽하게 독립된 메모리를 가지고 하나의 PC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는 마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처럼 얼싸 안고 춤을 추며 발광을 해대었다. 남들이 보기엔 비록 초라한 그래픽 쪼가리 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들에게 있어선 굉장히 큰 한 걸음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한 창 웃고 떠들던 롭이 정색한 표정으로 그래픽 담당으로 활용 중인 PC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제 이걸 어떻게 칩셋 하나로 줄이지..” 그리고 아무도 말이 없었다. 이런.. 공돌이들의 사기가 꺾였다. 이쯤에서 공돌이 전용 마법의 단어인 성과금 이야기를 꺼낼때가 온건가..? ──────────────────────────────────── ──────────────────────────────────── EP. 14 : 미국산 공돌이들 (7) & 다시 약 2주 정도가 지나고.. 저녁 식사 후 소화도 할 겸 나는 3:3으로 공돌이들과 함께 농구를 즐겼다. 일단 3D 가속 장치의 구동 원리에 대해서는 대충 파악했지만, 해야 할 것은 너무나 많았다. 설계도 짜야하고, 교수님들에게 자문도 구해야했기 때문이다. “다음 주에 일본으로 돌아간다고 했지?” 그 동안 같이 운동도 하고 맥주도 마시며 친해진 잭과 롭은 내가 귀국하는 날이 다가오자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나 사이킥 배틀을 매우 즐겁게 플레이한 롭은 게임이 정식으로 출시되면 꼭 친필 사인해서 기숙사로 보내달라는 부탁까지 할 정도였다. 내가 아무 것도 모르고 오직 돈으로만 그들을 이용하려 했다면 이렇게까지 친해지진 못했을 것이다. 프로그래머들은 나름대로 자신 만의 코딩 방식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이해 해주지 못하는 족속에게는 마음을 여는 일이 없었다. 바이오스 셋업부터 함께 머리를 굴려온 나를 그들 딴에는 어느정도 인정을 해준 모양이었다. 탕~ 나는 농구공을 바닥에 튕기며 바운드 패스로 롭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약속은 지킨다. 사이킥 배틀 친필 사인~!!” “그렇지~ 기억해 주니 고맙다. 그런데 그 사이킥 배틀 메인 프로그래머가 누구야?” “나.” “정말!?” “뻥이야.” “그럼 그렇지. 너도 코딩 배열이 단순하고 깔끔한 편인데, 사이킥 배틀 수준까지는 아니거든~” “중간까지는 분명이 내가 짰는데, 알고 지내는 친구 하나가 코딩을 완전히 갈아엎었어.” “남이 짠 코딩을 갈아엎었다고!?” 하나의 코딩에는 프로그래머 개개인의 버릇이 그대로 녹아 있는 경우가 흔하다. 각자 자기 방식대로 판정이나, 플래그 규칙을 남발하는 경우도 있었고, 혹은 자신만 알고 있는 은어로 표기해두는 게 다반사라 다른 사람이 짠 코딩의 구조를 파악하고 그것을 마음대로 바꾸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하야시 같은 경우엔 워낙에 깔끔한 성격이라 그런지 플래그 동작에 대한 표시를 일일이 표기 해두었기에 어쩌면 첸드라도 손쉽게 바꾼 것일 수 도 있었다. “안 믿기지? 그런데 사실이야. 내가 아는 녀석 중에 엄청난 천재가 하나 있거든.” “일본인이야?” “아니 인도인.” “그렇군. 언젠가 나도 한번 만나보고 싶네.” “여름에 너희들 다 같이 일본에 한번 와. 내가 호텔 잡아둘게.” “진짜? 오~ 역시 사회인은 다른데?” “나이도 조금 더 많거든?” 롭의 패스를 받자마자 공을 한번 튕긴 나는 무릎을 굽히며 3점 라인에서 슛을 쏘았다. 슉~!! 그물을 빠져 나가는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공이 높이 튀어 올랐다. “하나씩 천천히. 서두를 거 없으니까. 여름에 일본 올 때에 설계도면만 챙겨와.” “천천히 하라면서 여름까지 도면을 준비하라니. 양심도 없구나~” 어느새 바닥에 튕겨진 공을 받아낸 잭이 다시 나에게 공을 되돌려 주었다. “자신 없어? 그럼 뭐~ 성과금 5만 달러 날아가는 거지~ 돈 굳었네.” “재수 없는 새끼~ 킥킥” “억울하면 너도 돈 많이 벌던가~ 하하~” 우린 서로에게 욕을 해대며 밤새도록 맥주를 비웠다. & 다음 날. 미국에서 판매 허가 자격을 취득한 군페이씨의 겜보이는 윌슨씨의 프리미엄 스토어 한 켠에 시연 모델을 설치하고 있었다. 아직 매장이 오픈 전임에도 잡지를 보고 찾아온 아이들이 문밖에서 빼꼼히 가게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내가 겜보이 하나를 들고 괴상한 표정과 함께 흔들어 보이자 밖에서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엘리스가 웃음을 터뜨리며 나에게 말했다. “부장님.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세요?” “가게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꼬맹이들 귀엽지 않아요?” “보니까 방송 매체에서도 온 것 같은데? 부장님 그러다가 뉴스에 나와요. 킥킥” 그러자 창밖을 슬쩍 바라본 윌슨씨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음.. 그리고 토이 월드 직원들도 몇 명 있는 것 같군.” 윌슨씨의 말에 고개를 돌려보니 토이 월드 쪽 사람으로 추정되는 몇몇 사람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모른 척 시선을 피하며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결국 민텐도의 패밀리는 토이월드의 공급을 거절하였기에 3년 전부터 쭈욱 불화가 이어져 오고 있었다. 이윽고 가게 문이 열리자 밖에서 기다리던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와 체험대 앞에 섰다. 나는 한 꼬마 아이에게 겜보이를 건네주며 간략하게 사용법을 알려 주었다. 윌슨씨는 가게 오픈과 동시에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에 정신이 없었고, 군페이씨는 본사에 제출할 보고서 작성을 위해 몰려드는 아이들을 향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때 은근슬쩍 한 아이가 가지고 놀던 겜보이를 빼앗아 든 젊은 남자가 옆에 있는 친구와 함께 게임기를 살펴보며 말했다. “어이쿠.. 액정에 잔상이 너무 심해서 눈이 너무 아파!! CPU도 너무 느리고, 이래서야 스피디한 게임은 무리겠는데? 보고만 있어도 시력이 저하되는 느낌이야..” “그것뿐이야? 건전지가 4개나 들어가서 그런지, 들고 있기만 해도 손목 아파 죽겠다.” “아이들이 가지고 놀 때 손목에 무리가 가면 안 되지. 이렇게 무거우니 실수로라도 바닥에 떨어뜨리면 아작이 나겠는데?” 뭐지? 저 영혼 없는 발 연기는? 겜보이를 손에든지 3초 만에 저렇게 단점만 줄줄이 뱉어 내기도 힘들겠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매장을 방문한 부모님들의 표정은 남자들의 말에 조금씩 굳어지기 시작했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이렇게 조그만 화면을 계속 보다보면 눈이 나빠질 만도 하지.” “150달러가 넘어가는 비싼 게임기가 너무 쉽게 고장 나면 안 될 텐데. 우리 아이가 장난감 갖고 노는 게 너무 험해서..” 저질 연기치고는 효과 한 번 대단하네. 하지만 확실히 일리 있는 불안요소인 건 확실하기에 윌슨씨와 인터뷰 중이던 기자들도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에휴..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는데.”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체험대로 다가가 겜보이를 들고 있던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계 좀 잠깐 줘보시겠어요?” 민텐도 직원인 내가 공손히 요청하자 남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겜보이를 건네주었다. “이게 무거우세요? 이 휴대용 겜보이는 4개의 건전지를 장착했을 때 300g입니다. 고작 300g이 무겁게 느껴지면 평소에 운동을 좀 하셔야할 것 같은데요. 이 게임기는 결코 가볍진 않습니다. 하지만 손목이 나갈 만큼 무겁지 않아요. 그리고..” 내가 손에 들고 있던 겜보이를 위아래로 던졌다가 받기를 반복하자 매장 안에 있던 사람들의 고개가 겜보이를 따라 위아래로 움직였다. 어느정도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나는 겜보이를 매장 천장에 닿을 만큼 높이 던진 뒤에 한발 뒤로 물러섰다. “놀라지 마세요?” “어.. 어어!?” 쿠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공중에 있던 겜보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계는 바닥에 부딪히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안에 꽂혀 있던 카트리지와 건전지가 죄다 튕겨져 나올 정도로 강한 충격이었다. 모두가 얼빠진 표정으로 바닥에 떨어진 겜보이를 지켜보는 가운데 매장 안에선 군페이씨만이 희미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카트리지가.. 어디로 갔지?” 나는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튕겨져 날아간 카트리지와 건전지를 찾아 겜보이에 다시 꽂아 넣었다. 그리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자에게 겜보이를 돌려주며 말했다. “확인 해보세요.” “설마~ 완전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는데 이게 되겠어요?” 매장 안에 있던 모두가 숨죽이며 남자를 지켜보는 가운데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짓던 남자가 전원 스위치를 올리자. 띠링~ 맑은 효과음 소리와 함께 사운드가 들려왔다. “멀쩡하네..?” 당혹스러워하는 남자를 무시한 채 나는 한 아이가 들고 있던 겜보이를 잠시 빌린후 측면의 다이얼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보시면 두 개의 다이얼이 있습니다. 하나는 음량 조절용이고 나머지 하나는 ‘콘트라스트’입니다. 즉 명암 조절할 수 있다는 겁니다. 건전지 수명이 조금 짧아지긴 하지만, 이 다이얼을 조절하면 좀 더 선명한 화면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분들 말이 틀리진 않아요. 너무 장시간 게임을 하다보면 눈이 피로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학교 교과서를 볼 때도 마찬가지예요. 하나의 사물을 오랫동안 집중해서 보면 당연히 눈이 피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너무 게임만 하지 않도록 가정에서 부모님이 지도해주셔야 합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겜보이를 다시 아이한테 건네주며 말했다. “착한 아이는 하루에 딱 한 시간만 하는 거야.” “네. 감사합니다~” “대답도 잘하고 똑똑한데?” 나는 아이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준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아까 보니까 다른 아이가 가지고 놀던 걸 거의 뺏다시피 힘으로 가져가시던데, 어른이 돼서 창피하지도 않습니까?” “당신 지금 우릴 무시하는 거야?” 그러자 한 아이의 엄마가 남자들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 사람들 아까 매장 앞에서 줄서고 있을 때 새치기한 남자들이에요. 멋대로 새치기하고는 줄서면서 어찌나 여기 매장 욕을 해대던지. 아이들도 듣고 있는데 듣는 제가 다 얼굴이 화끈할 정도로 저질스런 욕을 하더군요.” 그러자 매장 안 분위기는 단숨에 반전되었다. 누가 봐도 명백히 영업방해를 행사하고 있던 두 남자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더니 후다닥 매장 정문으로 달렸다. 나는 도망치듯 사라지는 그들에게 두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외쳤다. “톰 사장님 보시면 안부 좀 전해주세요~!! 강준혁이라고 하면 아마 아실 겁니다!!” & 약간의 헤프닝이 지나간 뒤 휴대용 겜보이 체험 행사는 계속 되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온 윌슨 사장님은 나를 보자마자 식은땀을 훔치며 입을 열었다. “자네 어쩌자고 겜보이를 바닥에 내친건가?” “물론 소비자들의 오해를 풀어드리기 위해서죠.” “그러다 정말 박살이라도 났으면 어쩌려고!!” 그러자 어느새 우리 곁에 다가온 군페이씨가 윌슨씨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절대 안 부서집니다. 사실 프로토 타입이 완성된 직후 저희 카마우치 사장님이 멀쩡한 게임기를 시멘트 바닥에 집어 던지셨거든요.” “뭐라구요?” “여기야 카페트라도 깔려 있지만 거기는 그냥 완전히 돌바닥이었어요. 당연히 프로토타입은 산산조각이 나버렸죠. 그랬더니 카마우치 사장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애들이 가지고 놀 장난감이다. 집어 던져도 멀쩡해야 돼.- “허어..” 윌슨 사장은 군페이씨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그때는 나도 깜짝 놀랐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기계를 바닥에 내동댕이를 쳐버렸으니.. 그날 얼빠진 군페이씨의 표정이 떠오른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 ──────────────────────────────────── EP. 15 : 그리고 전설로.. (1) & 며칠 후. 미국에서의 일정을 모두 소화한 나와 군페이씨는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마지막까지 우리를 배웅해준 엘리스와 야마시타씨. 그리고 윌슨씨는 우리가 출국장을 떠날 때까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한 달이라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금방 지나가 버린 느낌이군.” “그래도 미국 내에서도 겜보이 반응이 괜찮던데요? 정식으로 발매하면 기대해볼만 하겠어요.” “강군이 만든 사이킥 배틀의 인기도 만만치 않던데? 발매 시기만 잘 맞추면 분명 흥행할거야.” “어? 군페이씨에게 말씀 안 드렸었나요? 사이킥 배틀 발매일 잡혔는데요.” “뭐라고? 언제로?” “2월 10일이요.” “뭐!? 일본에 도착하고 3일 뒤잖아? 아니 그것보다 2월 10일이면..” “네. 드래곤 워리어 3랑 발매일이 같아요.” 드래곤 워리어 3의 부제는 ‘그리고 전설로..’ 정말 말 그대로 1,2의 판매량을 씹어 먹는 전설의 게임으로 기억될 타이틀이었다. “아무리 그동안 홍보를 했더라도 신규 IP인 사이킥 배틀로는 무리가 있어 보이는데? 분명 판매량에 영향을 끼치게 될 거야.” “괜찮아요. 어차피 사이킥 배틀은 특수칩 때문에 대량 생산이 불가능 하거든요. 하지만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 점도 있지요.” “소비자의 수요를 만족 시킬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이 점?”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열망이랄까..?” 그래.. 누구나 돈 만 있으면 플레이 할 수 있는 타이틀 보다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극 소량의 마케팅.. 예를 들면 83년으로 타임 슬립하기 전에 전국을 뒤 흔들었던 ‘허니버터칩’처럼 ‘못’ 파는 게 아니라 ‘안’ 팔아보자. & 1988년 2월 10일 수요일. 도쿄 아키하바라로 가는 전철 안.. 평범한 사람들에겐 별다를 게 없는 하루의 시작이었지만, 게이머. 특이 드래곤 워리어의 발매를 손꼽아 기다린 자들에게 오늘은 아주 특별한 하루였다. 학교로 등교하던 아이들 중에 10명중 한 두명은 등굣길에 모습을 감추고, 성실히 직장을 다니던 직원도 2월 10일에는 연차를 썼다. 출근 중으로 보이는 회사원도 아까부터 자꾸 손목시계를 힐끗 거리며 노선도를 확인하는 걸 보니 머릿속으로 은근히 고민중인 듯 하다. ‘지금.. 아키바에 가서 드래곤 워리어3를 사야할까?’ ‘퇴근하고 갔는데 다 팔렸으면 어쩌지?’ ‘아냐 수량은 충분할거야.’ ‘그런데 2도 발매일 첫날에 완판 됐었잖아!?’ ‘그러니까 3는 더욱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았을까?’ ‘지금 아키바에가서 게임을 사고 출근하는 건 어떨까?’ ‘도착하자마자 살수나 있을까?’ 전철 안에 있던 남자들의 고민하는 표정에 나는 웃음을 삼키며 의자에 좌석에 몸을 기대었다. 그러자 내 옆에 앉아 있던 시게루씨가 말을 걸어왔다. “야, 넌 긴장도 안 되냐?” “뭐가요?” “네가 만든 사이킥 배틀도 오늘 발매잖아.” “아.. 그렇죠.” “아.. 그렇죠? 이 녀석 반응이 왜 이리 무덤덤해? 드래곤 워리어3랑 상대한다고 벌써 포기 한 거냐?” “그럴리가요? 사이킥 배틀은 홍보 방식이 좀 독특한 편이라 첫날 판매량은 별로 기대 안하고 있어요.” 쿠마모토 시게루의 슈퍼 마리지3는 1988년 가을로 출시를 연기했다. 나의 사이킥 배틀과 판매량 대결을 선언하였지만, 특유의 장인 정신이 발동한 탓에 시스템 적으로 손 볼 구석이 꽤 되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나야 애초부터 시게씨의 내기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터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지만, 조금 싱거운 결말이랄까? 그래서 나는 오히려 사이킥 배틀의 발매 일을 앞당겨 드래곤 워리어 3에 타겟을 맞추었다. 물론 초기에는 반대여론이 있었지만, 일본의 국민 RPG 게임이라는 전설의 타이틀과 한번쯤 맞대결을 해보고 싶었던 내 오기가 발동했다고나 할까? 잠시 후. 우리를 태운 전철이 아키하바라에 도착하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주변에 학교도 없는데, 교복을 입은 남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리질 않나. 열려진 전철의 문을 바라보며 고민하던 회사원 하나가 닫히는 전철 문을 비집고 빠져 나오자 그를 따라 몇몇의 회사원이 그를 따라 내린 뒤 재빨리 계단을 내려갔다. “저거 설마 다들 드래곤 워리어3 때문에..?” “일단 내려가 볼까요?” 설마 하는 마음에 아키바 역을 빠져 나오자 역 앞 광장은 어마어마한 인파로 뒤섞여 있었다. “히익.. 세상에 오늘 평일 아냐?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아!?” “그.. 그러게요.” 역 주변의 게임 가게마다 길게 늘어선 줄. 그리고 가게 앞 스피커에는 계속 드래곤 워리어의 타이틀 음악이 흘러나와 축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역 앞 광장에는 뉴스 기자로 보이는 여성 리포터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현재 아키바의 상황을 보도 중이었다. “민텐도 패밀리용으로 출시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드래곤 워리어 3편의 발매일이 다가왔습니다. 지금 도쿄 아키하바라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는데요.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 다수가 가게 앞에서 게임이 판매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한 직장인들도 많이 보이는데요. 잠시 한 분과 인터뷰를 좀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다들 TV에 얼굴이 나오는 게 부끄러운지 그녀가 내미는 마이크를 피해 범죄자 마냥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어차피 게임 하나 사러 온 거 뭘 그리 부끄러워하지? 아, 혹시 학교나 직장 땡땡이 쳤는데, 뉴스에 나올까봐 그러나? 여성 리포터는 아무도 자신의 인터뷰에 응해주지 않자 곤란한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나와 시게씨를 발견하더니 우리 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내 곁에 서있던 시게씨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와.. 저 리포터 엄청 예쁘네. 딱 내 스타일이다.” “저기요. 거기 두 분 직장인이시죠!?” 어라? 설마 지금 우리한테 인터뷰 요청을 하려는 건가? 그리고 내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리포터는 자신을 찍고 있는 카메라맨에게 손짓하며 우리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예상 밖의 전개에 시게씨는 얼굴이 빨개지며 나에게 외쳤다. “야!! 도망치자!!” “네? 왜요??” “응? 어.. 그러니까 저 카메라가 우릴 찍으려고 하잖아.” “찍히면 어때서요?” 오히려 나에게는 엄청난 기회인데? “안녕하세요. 후지TV의 카츠라기 미사토라고 합니다. 잠시만 인터뷰에 응해주시겠어요.”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 정도 외모에 이름이 카츠라기 미사토라니.. 당신 1995년 되면 아마 인기가 하늘을 찌를지도.. “저기요? 인터뷰 좀..” “네? 인터뷰라면 제 옆에 있는..” 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시게씨는 어느 새 저 멀리 인파 속에 섞여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이, 무슨 드래곤볼도 아니고, 순간이동이냐?? ──────────────────────────────────── ──────────────────────────────────── EP. 15 : 그리고 전설로.. (2) “저기요? 인터뷰 좀..” “네? 인터뷰라면 제 옆에 있는..” 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시게씨는 어느 새 저 멀리 인파 속에 섞여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이, 무슨 드래곤볼도 아니고, 순간이동이냐?? “보아하니 직장인 같으신데, 평일 아침에 이곳엔 어쩐 일로 오셨나요? 역시 대인기 RPG 게임인 드래곤 워리어 3를 구입하러 오신건가요?” 미사토씨는 인터뷰가 급한지 곧바로 본론부터 치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대답 했다. “아니오.” “네?” 예상했던 대답이 빗나가자 미사토씨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광장에 모여 있던 게이머들은 인터뷰하는 내 모습이 신기한지 조금씩 주변에 모여들고 있었다. 어쩌면 리포터인 미사토씨의 미모 때문일 수도 있고~ 직접적인 인터뷰는 싫지만, 남이 하는 걸 구경하는 건 상관없나보군. 미사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밝게 웃으며 재차 질문했다. “그럼 오늘 아키하바라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시장 조사를 나왔습니다. 사실 전 민텐도 소속 직원이거든요.” “아~ 그러시군요. 그럼 드래곤 워리어 3의 반응을 살펴보시기 나오신 거로군요~” 이 아가씨가 건수만 있으면 무조건 드래곤 워리어랑 엮어버리려고 하네.. 그래서 대답했다. “아니오.” “네?” 그녀의 한쪽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미사토는 자신의 생각대로 인터뷰가 잘 안 풀리자, 은근히 짜증이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사실 그녀가 노리는 인터뷰 대상은 학교나 직장을 땡땡이 치고 드래곤 워리어를 사러온 사람들이었을 테니까. “그, 그럼 어떤 시장 조사를 위해 나오셨나요?” “사실 오늘 발매하는 게임은 드래곤 워리어 3 하나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아, 그렇군요. 그 게임은 제목이 뭔가요?” “사이킥 배틀이라는 제목의 게임입니다.” 그때 등 뒤에 모여 있던 사람 중에 수근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 사이킥 배틀이 오늘 발매라구!?” “난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 지난 달 패미통신에도 봄 발매 예정이라고만 쓰여 있어서..” “그치? 이러면 구입해야할 타이틀이 겹치잖아!?” “그럼 뭐부터 사야하지!? 미치겠네..” “뭘 고민해. 그냥 둘 다 사면되지!! 둘 다 사고 이번 달은 컵라면으로 때운다.” “오오!! 정답이다!! 진정한 남자라면 일단 사이킥 배틀은 사고 보자!!” “우오오!!!” 마지막 남자의 말에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너나 할 거 없이 동시에 함성을 질렀다. 그렇지. 고민 따위 할 거 없이 지르는 거다. 물론.. 지를 수 있을 만큼 물량이 널널 하다면 말이지.. 나는 주변의 반응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미사토씨에게 물었다. “이거 지금 생방송인가요?” “아뇨. 녹화라 편집한 뒤에 저녁 뉴스에 나갈 건데요?” “그럼 제가 한마디만 해도 될까요?” “아, 네. 그러세요.” 미사토씨의 허락에 나는 품안에서 황금색 티켓을 꺼내 보였다. 살짝 흐린 날씨 탓에 번쩍 거리는 느낌은 없었지만 주변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이건 사이킥 배틀의 패키지 안에 랜덤으로 들어가 있는 골든 티켓입니다. 수량은 총 500개. 이걸 가지신 분은 올 여름 민텐도에서 주최하는 사이킥 배틀 행사에 자동으로 참가 자격이 주어집니다.” 그러자 뒤에 있던 한 남자가 나에게 외쳤다. “무슨 행사입니까!? 그 티켓이 없으면 참가할 수 없는 행사입니까!?” “아뇨. 티켓이 없어도 참가할 수 있습니다. 참가 방법은 사이킥 배틀의 올 클리어 세이브 데이터가 저장되어 있는 카트리지를 가져오시면 됩니다. 사이킥 배틀 행사에서는 다양한 굿즈를 구입할 수도 있고, 참가자 분들끼리 대회를 열어 상금을 수여할 생각입니다. 자세한 건 이번 달 말에 발매하는 패미통신을 봐주세요.” “올 클리어 한 카트리지 자체가 입장권이구나.. 신기한데?” “나 저번에 행사장에서 체험판 해봤는데, 그 게임 장난 아니게 어려워. 2스테이지까지 클리어하면 체험판 카트리지 준다길래 3번 정도 도전해 봤는데, 첫 판도 못 깼다니까..” “진짜 그 정도야? 아씨.. 드래곤 워리어 말고 사이킥 배틀 살까? 돈 얼마 없는데..” 내가 꺼내 보인 골든 티켓을 확인한 게이머들을 시작으로 사이킥 배틀에 대한 소문이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미사토는 잠시 주변의 살피다가 화들짝 놀라며 나에게서 몇 걸음 떨어졌다. “당신. 지금 뭐하는 거예요?” “뉴스 매체를 통해 제가 만든 게임을 홍보중인데요?” 그녀는 자기가 나에게 이용당했다는 걸 깨달고는 금방 얼굴이 새빨개졌다. 표정을 보니 무척이나 화가 난 모양이다. “마음에 안 드시면 리포터님이 그냥 편집해 주세요.” “당연하죠!! 뉴스 통해서 자사 게임 홍보를 하시다니, 진짜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오네요.” “하하~ 미안해요. 그럼 전 이만 일하러 가보겠습니다.” 나는 씩씩 거리는 미사토를 뒤로 하고 아직도 인파에 섞여 있는 시게씨를 불렀다. “시게씨!! 빨리 와요.” “어? 응. 그래~” 시게씨는 힐끔힐끔 미사토씨를 바라보며 나에게 달려왔다. “야, 너 안 떨렸냐?” “뭐가 떨려요? 생방송도 아닌데.” “저렇게 커다란 카메라를 눈앞에서 들이대고, 미녀 리포터가 옆에 바싹 붙어서 물어보는데, 하나도 안 떨렸다고!?” “그보다 배고픈데, 어차피 시간도 남았고 아침이나 먹으러 갈래요?” “넌 이 상황에 밥이 넘어 가냐? 난 슈퍼마리지 처음 출시한 날에 물도 한 모금 못 마셨는데..” “어차피 사이킥 배틀 개점하고 10분만 지나면 전량 소진이에요. 밥이나 먹고 드래곤 워리어 행사장 구경이나 가죠.” “10분 만에 전량 소진이라고?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그리고 그 골든 티켓은 또 뭐고!?” “식당가서 알려드릴게요.” & 나와 시게씨는 장소를 옮겨 역 근처의 요시노야에 들어섰다. 요시노야는 소고기 덮밥인 규동을 전문으로 하는 체인점인데, 전국 어딜 가도 역 근처에 하나쯤은 꼭 있는 음식점이다. 가격이 싼 대신 맛은 그냥 그럭저럭.. 솔직히 요즘 유행하는 맥도널드처럼 규동을 패스트 푸드화 시켰다고 보면 된다. 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규동을 헤집으며 시게루씨에게 말했다. “200개에요.” “뭐가?” “오늘 아키하바라 지역에 나간 사이킥 배틀 초도 물량이요.” “푸웁!!” 컵에 물을 따라 마시던 시게씨는 내 말에 삼키던 물을 도로 뿜어냈다. “아이.. 식사하는데, 더럽게..” “야!? 말이 돼? 그럴 거면 아예 팔지를 말던가..” “그래서 따로 발매일 고지 없이 깜짝 출시한 건데요?” “그래도 그렇지. 200개면 진짜 오픈하고 10분만에 다 팔리겠다. 그럼 매일 200개만 풀 거야?” “아뇨. 삼일 뒤에 100개 풀 건데요.” “쿨럭.. 쿨럭..” 시게씨는 아예 사래가 들었는지 물 컵을 부여잡은 채 계속 기침을 해대었다. 나는 괴로워하는 시게씨의 등을 몇 번 쳐 주고 다시 식사에 집중하였다. “그럼 그 골든 티켓은 뭐야?” “말 그대로 골든 티켓이에요. 시게씨 혹시 찰리와 초콜릿공장이라는 소설 알아요?” “알지. 어린이 동화잖아?” “동화라뇨. 훌륭한 마케팅 서적이지.” “마케팅 서적?” “전 세계 수 백 만개의 초콜릿을 납품하면서 공장 안을 견학 할 수 있는 황금 티켓은 딱 5장밖에 없잖아요. 윌리 웡카에 비교하면 일본 국내에서 500개인 나는 완전 관대한 거죠.” 내 말에 시게씨는 할 말을 잃은 듯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긴 게임 개발자라면 누구나 자신이 만든 게임을 많은 사람들이 즐겨주길 바란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사겠다는 사람에게도 안 팔고 배짱을 부리고 있으니 그의 입장에선 기가 막힐 만도 했다. 잠시 후 시게씨는 규동을 깨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사실 신작 발표회 때 사람들 반응이 하도 좋아서 질투가 조금 나긴 했었다. 그래서 좀 찌질해 보여도 슈퍼 마리지 3랑 판매량 내기를 제안했던 거고, 그런데 말이야.” 시게씨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재차 물었다. “너 혹시 슈퍼 마리지 3가 이번에 나왔어도 똑같이 하려고 했었냐?” “네.” “무서운 녀석..” “어차피 사이킥 배틀은 특수칩 때문에 일반 카트리지보다 생산 속도가 느려서 시게씨랑 판매량 대결을 했어도 제가 졌을 거예요.” “판매량은 앞서겠지만, 정작 유저들이 원하는 건 사이킥 배틀이었겠지.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가 없으니까..” 정답이다. 시게씨의 해석은 정확히 내가 노린 핀 포인트였다. 많이 만들 수가 없다면 아예 적게 풀어 인기를 꾸준히 지속 시켜 나가는 것이다. 출하가 될 때마다 하루만에 완판이 되는 게임 타이틀.. 얼마나 매력적인 수식어인가?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올라가는 통에 나는 서둘러 돈부리(규동이 담긴 그릇) 으로 얼굴을 가린 채 밥을 삼켰다. & 식사 후. 아키바에 다시 나오니 인근 게임 샵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제가 4번째로 줄섰는데, 왜 사이킥 배틀이 없어요!?” ──────────────────────────────────── ──────────────────────────────────── ──────────────────────────────────── EP. 15 : 그리고 전설로.. (3) & 식사 후. 아키바에 다시 나오니 인근 게임 샵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제가 4번째로 줄섰는데, 왜 사이킥 배틀이 없어요!?” “그게 저희 가게엔 사이킥 배틀이 딱 3개만 들어와서, 대신 드래곤 워리어 3는 충분히 있습니다.” “일단 드래곤 워리어3 하나 주세요.” 나와 시게씨는 가게 안을 기웃거리며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규모가 작은 매장에는 사이킥 배틀이 2~3개 밖에 입고가 안 되었기에 거의 오픈과 동시에 팔려나가고 있었다. 역 근처에서 사이킥 배틀을 구하지 못한 유저들은 비교적 멀리 떨어진 가게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 나와 시게씨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저기 사이킥 배틀 남았나요!?” “아뇨. 방금 다 팔렸습니다.” 하지만 어디를 가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아직은 게임을 전문으로 판매 하는 초대형 매장이 등장하기 전이기에 아키바의 골목마다 사이킥 배틀을 찾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거의 간발의 차고 구입에 성공하거나. 아니면 아예 없거나. “혹시 사이킥 배틀 남았나요!?” “방금 고객님이 구입하신 게 마지막 수량이라.. 죄송합니다.” “으아아아!!!!!” 그때였다. 나와 시게씨가 다음으로 들리려던 가게 안에서 탄성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내부를 들여다보니 교복을 입은 학생 하나가 패키지 안에서 골든 티켓을 손에 들고 있었다. 얼씨구? 벌써 하나 건진 사람이 나왔네? “황금 티켓?” “저게 뭐지?” 그러자 방금 사이킥 배틀을 구입한 걸로 보이는 다른 손님도 패키지를 뜯어 거꾸로 흔들어 보았다. 하지만 패키지 안에는 카트리지와 매뉴얼 말고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기에 그는 곧 허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난 그런 거 없는데?” 한편 골든 티켓을 손에 쥔 남학생은 카드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티켓에 쓰여 있는 글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여름에 열릴 사이킥 배틀의 특별 행사 초대권에 당첨 되셨습니다. 본 티켓은 행사장에 출입증으로 쓰일 수 있으며 전국에서 사이킥 배틀을 즐긴 유저들과 함께 게임 대회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상품이 준비 되어 있으니 즐겁게 플레이 하시고 행사에서 뵙겠습니다. 사이킥 배틀 메인 디렉터. 강준혁 올림.” “행사 초대권!? 오오..” 남학생이 의외의 선물에 크게 기뻐하며 환호성을 질러 대자.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부러운 눈길로 학생을 바라보았다. 그때 한 남자가 지갑을 꺼내들며 학생에게 말했다. “학생, 혹시 그 티켓 나한테 팔 생각 없나? 1만엔에 내가 사지. 어때?” “싫어요.” 역시나 단칼에 거절하는군. 하긴 한 달 정도 흐르면 가격이 엄청 뛰어 오를 티켓이니 어리지만 현명한 판단이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가 흐르자, 각 매장의 입구에는 사이킥 배틀 포스터 밑에 ‘완판. 예약 접수 중’이라는 문구를 달았다. 아무래도 너무 문의가 많아 영업에 방해가 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졌다. -사이킥 배틀 비싸게 삽니다.- 아키하바라의 역 앞에 사이킥 배틀 구매를 호소하는 피켓이 등장했다. 예상은 했지만 설마 당일부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는데? 피켓을 들고 있는 남성은 매장을 다 뒤져 보았지만 결국 물건을 구하지 못하자. 가장 극단적인 방법을 행사한 것이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건.. 시간이 흐를수록 비슷한 문구가 실린 피켓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나 참. 내가 살다 살다 이런 광경은 또 처음보네.. 게임 하나를 웃돈까지 얹어서 사려하다니..” 역 앞에 설치된 흡연소에서 담배를 태우고 온 시게씨가 중얼거렸다. “손꼽아 발매일을 기다려 왔는데, 돈이 있어도 못 사면 억울하겠죠. 집에 가면 더 생각날 테고.. 어느 정도 웃돈을 얹어서라도 꼭 플레이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허~ 그런 배려심이 있으면 물건 좀 더 풀지 그랬냐?” “사이킥 배틀의 판매는 프리오더로 진행할 거예요.” “프리오더? 그게 뭐야?” “꼭 살 사람에게만 일부 예약금을 받아 주문 제작하는 방식이죠. 사이킥 배틀은 특수칩 때문에 재고가 남으면 골치 아파지니까요. 하지만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오긴 할겁니다. 그래서 소매점에 따로 예약을 받아두라 했죠. 아마 한 달 정도 지나면 예약한 사람은 거의 누구나 구매가 가능할겁니다.” “히익.. 저 상태로 한 달을 기다리게 한다고? 아주.. 사람 피 말리는 마케팅이네. 저기 있는 사람들 한 달 뒤에 미이라 되는 거 아냐?” 뜬금없이 미이라라니 이건 또 무슨 부장님 개그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시게씨를 데리고 드래곤 워리어 3의 행사장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나를 따라 발길을 돌리던 시게씨가 갑자기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어이, 준혁아..” “또 왜요?” “아니.. 저기 역 앞에..” “네?” 심상치 않은 시게씨의 목소리의 고개를 돌리자, 다른 것들과 비교해 엄청 거대한 피켓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문구를 확인한 순간 나는 두 눈을 의심했다. -사이킥 배틀 5만엔에 삽니다. 골든티켓 20만엔.- 거대한 피켓 아래에는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 전체를 가렸지만, 체구로 보아 겨우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사이킥 배틀에 엄청난 거금을 제시한 것이다. 녀석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고개를 푹 숙인채로 피켓을 붙잡고 서 있었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참 세상 말세다 말세야.” 시게씨는 피켓을 들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쯧쯧 혀를 차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단번에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자.. 잠시 만요. 시게씨. 저 잠깐 화장실 좀..” 시게씨를 내버려두고 근처 화장실로 달려간 나는 서둘러 가방에서 게임 & 워치를 꺼내 들었다. 하나의 인물을 검색했다. ‘사카이 마사히로.’ 그와 동시에 게임 & 워치는 재빨리 인명 검색에서 일본의 유명 연예인 소속사인 쟈니스에 대한 정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에 대한 스케쥴 정보를 찾던 중 1988년 2월 10일에 있었던 사건을 찾아냈다. “역시.. 맞았어.” & 드래곤 워리어 3 –그리고 전설로..- 이 타이틀은 1년 동안 일본에서만 380만장을 팔아 치우는 패밀리 초대형 타이틀 중에 하나였다. 나 역시 어릴 적 청계천 전자 상가에서 구입해서 즐겨 본 적이 있었는데, 이야기를 즐기다 보면 분명히 전작과 똑같은 세계관인데도 용사의 전설을 모르는 NPC의 반응에 플레이어는 고개를 갸웃 거리게 되지만, 이내 게임을 클리어 하고 나면 모두가 탄성을 지르게 되었다. 드래곤 워리어 3는 전작들의 무대에서 약 100년 전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옴니버스 형식의 스토리를 차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게씨와 함께 행사장에 들어서자, 그 인기를 증명하듯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드래곤 워리어의 마스코트 격인 파란색 슬라임들이 행사장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고, 모형으로 만든 ‘왕자의 검’과 갑옷이 행사장 한가운데 설치되어 있었다. “아따~ 화려하네.” “뭐 전 국민이 즐기는 RPG니까요. 이정도 구색은 갖춰줄만 하죠.” 그래야 빈약한 그래픽에 상상력을 더해줄 테니까.. 전작의 행사 때와 마찬가지로 아련한 추억에 계산대에서 드래곤 워리어 3를 구입하고 나오던 중에 행사장 건너편에 한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아! 당신은 아침에!!” 그녀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마이크를 손에 든 채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내 옆에 있던 시게씨는 다시 만난 그녀의 모습에 반색하며 나에게 물었다. “저 리포터 아침에 그 여자 아냐?” “맞아요. 카츠라기 미사토씨.” “오~ 그새 이름도 외웠어?” 그거야..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이름인지라. 어색한 기분에 그녀를 바라보며 살짝 웃어보이자 그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드래곤 워리어 사러 오신 거 아니라더니 여기서 또 보네요?” 어째 살짝 비꼬는 듯한 말투인데? 나는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오전에 제가 한 인터뷰 때문에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은데?” “누.. 누가 화를 냈다고 그래요.” “어라 화 안 나셨어요? 기분이라도 풀어 드릴 겸 특종거리 하나 드리려고 했는데..” “특종이요? 뭔데요!? 뭔데요!!” 역시 이쪽 업계 사람들이란 특종이란 말만 들으면 곧바로 반응이 오는군. 고작 게임 발매 때문에 아키하바라에 취재를 올 정도라면 그녀는 아마 유키처럼 신입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유키보다 나이는 좀 있어 보이지만, 고작해야 나랑 비슷한 정도려나? “뭘 그리 빤히 쳐다봐요? 빨리 특종이나 말해 봐요.” “성격도 급하시네. 그럼 잠시 귀 좀 빌려줄래요?” “뭐라구요?” “특종이라니까요. 혹시라도 비밀이 새어나가면 안 되니까.” “진짜 혹시라도 또 이상한 소리하기만 해봐요?” 미사토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한쪽 귀를 내밀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미사토는 간지러운지 작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사카이 마사히로가 지금 아키하바라에 있어요.’ “네..?” ‘쟈니스 소속의 사카이 마사히로가 지금 아키하바라에 있다구요.’ “무슨 소리에요. 사카이군이 왜 여길..” “진짜라니까요. 제가 봤어요.” “진..짜? SMEP의 사카이군이 지금 아키바에 있다구요?” “네. 아직 안 늦었다면 역 앞에 피켓 들고 서있을걸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미사토는 행사장 내부를 취재 중인 카메라맨의 목덜미를 잡아채고는 바람같이 사라졌다. 이거 참.. 행동력 하나 끝내주는데? 사카이 마사히로는 SMEP이라는 아이돌 그룹의 리더이다. 그가 속한 SMEP은 아이돌 가수를 전문으로 키워내는 쟈니스라는 연예 기획사 소속이었는데, 주로 중고등학생 아이들을 섭외하여 스타로 키우는 스타 양성소 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지금 그 SMEP의 리더인 사카이 마사히로가 사이킥 배틀을 사기 위해 방송까지 펑크 내고 역 앞에서 피켓을 들고 있었다. 게임을 좋아하는 고등학생인 사카이는 본래 드래곤 워리어의 광팬이었다. 그래서 3가 나온 오늘 매니저 몰래 방송국에서 빠져나와 아키하바라에 온 것이다. 본래라면 드래곤 워리어만 구입하고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갑작스런 사이킥 배틀의 발매로 인해 구입을 못하자, 역 앞에서 저러고 있는 것 같은데.. 일본의 인기 아이돌 그룹 리더가 그토록 사고 싶어했던 게임 사이킥 배틀.. 이거 잘하면 오늘 저녁에 9시 뉴스에서 공짜로 홍보 할 수도 있겠는데? ──────────────────────────────────── ──────────────────────────────────── EP. 15 : 그리고 전설로.. (4) & “아이돌 그룹 SMEP의 리더. 사카이 마사히로 군이 소속사의 스케쥴을 무시하고 아키하바라의 역 앞에서 게임 구매를 위해 거액의 금액을 제시한 것이 알려져 화제입니다. 사카이군이 구입하려던 게임은 민텐도에서 개발한 ‘사이킥 배틀’이라는 슈팅 게임으로 사카이군은 정가 6980엔의 게임을 5만엔에 구입하겠다는 피켓을 내걸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자세한 소식은 현장에 취재를 나가있던 카츠라기 기자가 전해 드리겠습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숙소에서 캔 맥주를 마시던 시게씨가 멍한 표정으로 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에서는 미사토씨가 사카이 군을 쫓으며 끊임없이 그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사카이군? SMEP의 사카이 마사히로군 맞죠? 대답 좀 해주세요!!” 와, 미사토씨도 대단하네. 피켓을 버리고 도망치는 사카이군을 전력 질주로 쫓아간 미사토씨는 결국 그의 정체를 밝혀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쟈니스 소속의 매니저가 올 때까지 그녀는 사카이와의 단독 인터뷰에 성공했다. “방송 활동 때문에 게임을 할 시간이 없지만 꼭 사고 싶었어요.” 뉴스는 연이어 사카이군이 5만엔이라는 금액을 제시했던 게임에 대해 다루며 짤막한 게임 영상과 함께 오전에 내가 한 인터뷰를 그대로 이어 붙였다. 왜냐하면 5만엔과 더불어 20만엔을 내건 황금 티켓에 대한 정보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으니까. 홍보한다고 뭐라 하더니 결국엔 편집 없이 그대로 내보냈네? 뉴스를 보던 시게씨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그럼 우리가 역 앞에서 봤던 미친놈이 사카이군이었던 거야?” “몰랐어요? 난 딱 보니까 알겠던데, 연예인이니까 그렇게 얼굴을 전부 가리고 서있었겠죠.” “아, 사인이라도 한 장 받아둘걸?” “남자 아이돌 사인은 받아서 뭐하시게요?” “어? 나중에 여자 아이돌 사인이랑 바꾸게..” 처.. 천잰데?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내며 시게씨의 비상한 잔머리에 감탄하고 있는데, 숙소 안에 전화벨이 울렸다. -따르르릉. 따르르르릉.- “누구지? 이 시간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화기를 집어 들자 귀가 따가울 정도로 큰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강군이냐!? 으하하하~!! 나 카마우치야~ 너 지금 뉴스 보고있냐?” “물론 시게씨와 함께 보고 있죠. 사장님. 술 한 잔 하셨어요?” “암~!! 마셨지!! 오늘 같은 날엔 한 잔 마셔줘야지~!!” “저희도 숙소에서 간단히 캔 맥주 마시고 있습니다.” “뭐!? 캔 맥주? 야!! 당장 숙소 나가서 비싼 술 마셔, 그리고 영수증 청구해!!” “괜찮아요. 시게씨랑 하루 종일 걸었더니 좀 쉬고 싶기도 하고 내일 또 본사에 들어가 봐야죠.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으세요? 혹시 뉴스 때문에 그러세요?” “인마!! 네가 말한 프리오던지 뭔지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물건 달라고 난리가 났다.” “아.. 벌써 발주요청이 왔어요? 몇 건이나 들어 왔는데요?” “오늘 하루만 10만개다. 그런데도 발주 요청이 끊이질 않는다. 이 사랑스러운 녀석아!” 히익.. 첫날에 10만!? 나는 고작해야 3~4만 건 정도 될 줄 알았는데, 기대 이상의 수확이군. 사실은 이게 모두 미사토씨의 재빠른 행동력 덕분이랄까? “아무튼 네 녀석. 운도 좋구나. 어쩌다 매스컴까지 타게 됐는지는 모르겠다만.” “사장님. 그게 정말 운이라 생각하세요?”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냐.” “물론 약간의 운이 적용된 것도 있지만, 방송국 리포터에게 사카이가 있다는 걸 알려준 게 저예요.” “뭐!? 진짜냐? 그럼 너..” “제가 SMEP의 사카이군와 방송국 리포터를 만난 건 확실히 우연이긴 하지만, 그 둘을 엮은 건 우연이 아니란 거죠.” “너란 놈은.. 진짜..” “그래서 말인데요. 사장님. 이왕 이렇게 된 거 사카이군을 좀 더 이용해 보죠.” “어떻게?” “지금 한창 인기를 올리는 아이돌 그룹이니. 일단 사이킥 배틀의 골든 티켓과 함께 무료로 전해주는 겁니다.” “호오.. 그래서?” “사이킥 배틀을 좋아하고 골든 티켓을 얻었다면 사카이군이 어떤 행동을 취할까요?” “설마..” “그래요. 사이킥 배틀의 여름 행사에 찾아오겠죠. 행여 오지 않더라도 게임을 건네주는 시점에서 홍보 자체는 충분히 될 겁니다.” “그렇지. 맞는 말이야. 네가 말 한대로 진행해 보도록 해.” “그럼 내일 쟈니스 엔터테이먼트 사무실에 들렀다가 본사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래. 푹 쉬어라. 시게 녀석한테도 수고했다 전해주고.” “네. 알겠습니다.” & 다음 날 쟈니스 사무실에 방문한 나와 시게씨는 사카이군을 만나고 싶다고 소속사 대표를 설득한 끝에 겨우 사이킥 배틀과 골든 티켓을 전해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사카이군은 민텐도의 깜짝 선물에 크게 기뻐하였다. 물론 초반에 소속사 대표는 우리의 방문을 탐탁치 않아 했으나, 차후 게임 매체 성장할 시에 얻게 될 반사 이득에 대해 설명하자,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SMEP 매니저를 불러 들였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뉴스에 보도 된 이후 사이킥 배틀은 게임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까지도 크게 이름을 떨쳤다. 소속사 역시 사회적으로 이슈거리가 된 사카이군을 더 이상 나무라지 않고, 연예인이기 전에 게임을 좋아하는 평범한 고등학생의 철없는 행동으로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그 날 사카이군의 행동은 먼 훗날에도 가끔 우스겟 소리로 회자되곤 했다. 철없던 데뷔 초기 때 생방송 펑크 내고 아키하바라로 달려간 남자 아이는 그렇게 일본 아이돌 계에 다시없는 ‘전설’적인 일화로 남았다. ──────────────────────────────────── ──────────────────────────────────── EP. 16 : 모리타와 하야시. (1) 사이킥 배틀은 런칭 이후 연일 순조롭게(?) 판매가 진행 되고 있었다. 특히나 체험판과는 달리 정식 버전에서는 첸드라의 코딩으로 인해 더욱 스피디해진 연출로 모든 잡지에서 호평 일색이었다. 여전히 물량 수급에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동시대의 게임과는 차별화된 연출과 그래픽으로 유저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사이킥 배틀 카트리지는 비싼 가격 임에도 입고와 동시에 전부 판매가 완료 되었기에 카마우치 사장은 ‘프리오더’라는 주문 방식에 매우 흡족함을 표했다. 하지만 웃는 자가 있다면 우는 자도 있으니.. “야. 장난 하지 말고, 우라 코드(치트 키) 내놔.” “천하의 준페이도 결국 패드 던지고 항복한 거냐?” “야~이 미친 놈아. 게임 클리어는 할 수 있게 해줘야지!! 이거 정말 클리어 가능 한 거 맞아?” “물론. 그러니까 엔딩과 함께 클리어 특전으로 보스 캐릭터들도 사용 할 수 있게 해두었지.” “으아아!! 잔인한 자식아. 나는 류 화영을 사용해 보고 싶단 말이다!!!!” 류 화영. 사이킥 배틀의 최종 보스인 그녀는 최근에 사이킥 배틀 유저들 사이에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지만, 워낙 사기적인 전투 능력에 애증의 캐릭터로 불리 우고 있었다. 순간이동, 체술 회피, 상대방의 공격을 모조리 튕겨내 다시 되돌려 버리는 강력한 베리어와 화면을 가득 메우는 다 연발 레이저 빔. 특히나 순식간에 파고 들어와 뒤돌려 차기 한방으로 플레이어를 즉살시켜 버리는 순각살(瞬脚殺)이란 기술은 게이머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악명이 높았다. “혹시 누군가 클리어 했다는 제보는 없어?” “이거 공략이나 좀 빨리 내달라는 제보 밖에 없는데? 그러니까 빨리 우라 코드 달라구!! 나 유저들한테 잡혀 먹는 꼴 보고 싶어?” 실망이네. 그래도 죽자고 파고들었다면 한 두 명은 나왔을 줄 알았는데. 나는 피식 웃음을 삼키며 준페이를 다독였다. “알았다 알았어. 그러면 치트 대신 내가 힌트 하나 알려줄게.” “정말? 뭔데?” “류화영 스테이지는 원래 초반에는 이길 수가 없어.” “뭐!?” “무조건 버텨야 돼. 10분 동안 섣불리 공격하지 말고, 잘 피해 다녀 봐. 그럼 내가 말한 의미를 알게 될 거야.” “흐음.. 뭔가 이벤트가 있는 건가?” 이래서 눈치 빠른 게임 기자들은 싫다니깐.. “그래. 한번 죽어라 버텨 봐라.” “악마 같은 자식.. 알았다. 클리어 하면 다시 연락할게.” 준페이는 툴툴 거렸지만, 이벤트에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아무래도 무슨 이벤트 인지는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사실 8~90년대의 게임은 참 불친절하다. 2000년대의 게임이야 ‘튜토리얼’ 시스템이 워낙에 활성화 되어 있었기에 게임 초반에 어떤 버튼이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고, 지도에는 어디로 가야 이벤트가 발생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표시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시대의 게임은 그렇게 스스로 난이도를 낮추는 짓은 하지 않는다. 진행 도중 난관에 부딪힌 플레이어가 스스로의 힘으로 클리어 했을 때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이 느껴질 테니까. 그래서 류화영과의 보스전에 10분을 버티면 무슨 일이 벌어지냐고? 특정 이벤트가 발생하면서 조작 중인 캐릭터를 제외한 2명의 아군이 지원을 나오게 된다. 본래 이 시나리오는 기기의 성능 상 포기한 부분이었는데, 첸드라의 코딩 능력 덕분에 실현이 가능해졌다. 모리타는 자신이 개발에 참여한 게임임에도 마지막 이벤트 장면에서는 눈물을 줄줄 쏟아내며 나와 함께 디버그 검사를 마쳤다. 여태까지 내가 개발한 게임 중 가장 거대한 프로젝트였던 사이킥 배틀의 발매가 끝나고, 함께 개발을 담당했던 모리타와 하야시도 본래 자신들이 속해 있던 부서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 식사 후 사무실로 돌아가던 중에 휴게실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모리타를 보았다. “모리타씨?” “아.. 부장님. 안녕하세요.” “왜 이 시간에 휴게실에 있어요? 식사는 했어요?” “아뇨. 그냥 입맛이 없어서..” 모리타는 나를 향해 힘없이 웃으며 자판기 커피를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잠시 그와 이야기라도 할 겸 휴게실에 들어온 나는 자판기에 동전을 밀어 넣으며 모리타 에게 물었다. “요새 일은 어때요? 부서 사람들은 잘해 줘요?” 그러자 모리타는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부장님이랑 일할 때가 훨씬 좋았어요. 제가 속한 개발 2팀에서도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 중이긴 한데, 아무래도 제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요. 더구나 플렛폼도 휴대용 겜보이로 잡아가고 있고..” 휴대용 겜보이라면.. 화려한 미소녀 캐릭터를 좋아하는 모리타에겐 완전 쥐약이긴 하지.. 그의 일러스트 능력은 발군이지만, 미소녀 캐릭터에 한정된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우리 민텐도는 미소녀나 섹시 코드보다는 귀엽고 아기자기한 캐릭터 위주로 게임 개발을 이끌어가는 편이었다. 그런 입장에서 내가 만든 사이킥 배틀은 민텐도로서 굉장히 의외의 결과물이 아닐 수 없었다. 하긴 나 역시 초반엔 너무 선정적이다는 이유로 경영진에서 반발이 꽤 심했었으니까. “아직 구상 단계긴 하지만 시게씨의 슈퍼 마리지 3 개발이 끝나는 대로 겜보이용 동킹콤 개발에 들어갈 것 같아요.” 이런.. 사이킥 배틀 공헌도 1위에 빛나는 미소녀 전문 일러스트레이터에게 고작 축생이나 그리라고 시키다니.. 이게 말이나 돼? “이거 참..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 “부장님. 혹시 사이킥 배틀 2 만드실 생각 없으세요?” “사이킥 배틀 2? 물론 만들 생각이야 있긴 하지만.. 패밀리로 2를 낼 생각은 없어요. 아마 차세대 기종으로 개발할 생각이긴 한데..” “하아.. 그렇다면 적어도 몇 년은 더 걸리겠네요.” “그렇겠죠? 하하..” “오전에도 잠깐 펜을 들어 보았는데, 도저히 그리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더군요. 류 화영이나 아즈사 렌을 그릴 때는 그렇게 잘 그려졌었는데, 덕분에 팀장님에게 오전 내내 뭐했냐고 엄청 깨졌습니다.” 사이킥 배틀 때는 하루에 4~5장씩 고 퀄리티 일러스트를 뽑아내더니 역시 취향이 문제인가.. “그런데 하야시씨는 잘 지내고 있어요?” “그 녀석은 슈퍼 마리지 3의 마무리 작업을 위해 개발 1실에 들어간 걸로 아는데..” 그때 양반은 못되는지 하야시가 휴게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하야시는 우리를 보지 못했는지 휴게실에 들어오자마자 거칠게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하야시씨?” “아!? 부장님!!” “무슨 일 있어요?” “그게.. 에휴.. 아닙니다.” 안 봐도 뻔하지. 하야시 성격에 개발 1팀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 여간 힘든 게 아닐 테니까. 그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뒤 한숨을 내뱉으며 나에게 물었다. “부장님. 혹시 사이킥 배틀 2 만드실 생각 없습니까?” ... 아니 이 사람들이 둘이서 짰나.. 대체 왜 이래? “역시 하야시도 나랑 같은 생각이구나. 부장님!! 진짜 저희 좀 살려 주세요. 미소녀를 그리고 싶어요. 이대로 동킹콤을 그리느니 차라리 다른 직장을 알아봐야 하나 생각중입니다.” “저 역시 개발 1팀이랑은 절대 같이 일 못합니다. 오늘 오전 중에만 발견 한 디버그가 수두룩한데 너무 태평해요. 시 덥지 않은 농담이나 해대 길래 몇 마디 충고했더니, 완전히 사람을 이상한 취급하고 말야.. 시게씨도 그런 면에선 부장답게 따끔하게 한마디 해주셔야 하는데, 그런 성격도 아니시고.. 차라리 부장님이랑 일했을 때가 훨씬 편했어요. 배울 점도 많았고..” 역시나.. 하야시 성격에 개발 1팀 분위기는 전혀 안 맞을 것 같더라니.. 나는 커피를 홀짝이며 모리타와 하야시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미소녀 전문 일러스트레이터와 코딩 머신이라.. 이 두 명의 조합이 그렇게 나쁘진 않은데.. 나는 잠시 동안 그들을 바라보다가 입을 떼었다. “모리타씨와 하야시씨. 두 분 다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네요. 함께 사이킥 배틀을 만들어낸 팀원이라 그런지. 안타까운 마음도 있지만, 현재로선 사이킥 배틀 2를 제작 할 마음은 없어요..” “이런...” “하아...” 내 대답에 두 사람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떨까요?” ──────────────────────────────────── ──────────────────────────────────── EP. 16 : 모리타와 하야시. (2) & 며칠 뒤. 나는 모리타와 하야시를 데리고 도쿄의 펜타곤 소프트를 찾았다. “부장님? 여기는 어디 인가요?” “파이널 프론티어를 제작한 펜타곤 소프트입니다.” “아니 그건 알겠는데, 저희가 왜 여기에..” “음.. 현재 펜타곤 소프트는 파이널 프론티어를 제작한 카와구치씨가 맡고 있는데, 여러분 이야기를 했더니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하셔서요.” “네에?” 달칵. 펜타곤 소프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깔끔한 인테리어의 게임 개발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선 하야시는 펜타곤 소프트의 개발실 자체가 굉장히 마음에 든 모양이다. “까.. 깔끔해.” 하야시는 성격상 주변이 더러운 꼴을 못 보는 스타일이다. 그 외 책장에 책 하나만 거꾸로 뒤집혀 있어도 신경이 쓰여 제대로 잠도 못자는 그런 사람. 하야시의 성격 자체는 내가 보기엔 사카구치씨와 제대로 맞아 떨어졌다. 그때 원화 작가인 아마노 요시타카씨와 상의 중이던 카와구치씨가 나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준혁씨. 오셨어요?” 그러자 내 곁에 있던 모리타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 아마노 선생님!!” “오~ 모리타 오랜만이로구나!!” 음? 뭐야 둘이 아는 사이였나? 모리타는 아마노씨를 보자마자 서둘러 달려가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캐릭터 디자이너가 되었어요.” “그래 나도 보았다. 사이킥 배틀이란 게임을 보는 순간 네가 그렸다는 걸 확실히 느꼈지. 여전히 손끝이 살아 있더구나!!” 헐.. 둘이 사제 사이였어? 이건 또 의외네.. 사정을 들어보니 모리타가 고등학교 시절 아마노씨의 문하생으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노씨는 여성의 특정 포인트를 이용해 이목을 끌어내는 모리타의 재능에 감탄하여 그에게 캐릭터 디자이너의 길을 제시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 하나 더 있었으니.. “그런데 사토시 군은 요새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계시나요?” “그 녀석은 일러스트 집만 내다가 최근에 한 업체에서 러브콜이 왔다더군. PC-FX용 콘솔 게임을 만드는 회사였는데.. 이름이 데사이야였나? 아무튼 그쪽에서 데려갔다고 하더구나.” 데사이야라면 성검 란그릿사로 유명한 그 데사이야!? 그럼 사토시란 사람은 설마..? 결국 궁금함을 못이긴 내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 들었다. “혹시 모리타씨가 말한 사토시라는 분이 요시하라 사토시씨인가요?” “어? 부장님도 사토시군을 아세요?” “아 직접적으로 알고 있는 건 아니고.. 그 사람 일러스트를 본적이 있어서..” “그 녀석도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대는 천재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죠. 어쩐지 제 그림을 알아봐주신 부장님의 눈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더니 사토시 군의 그림체를 알고 계셨군요.” 하하.. 이 업계 인간관계가 원체 좁긴 하지만, 진짜 한 다리 건너 다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구나.. 요시하라 사토시라면 크윽.. 모리타에게 미안하지만 여성 캐릭터에 대해선 거의 발군의 센스를 가진 일러스트 작가였다. 반들반들하고 매끈해 보이는 피부 표현으로 성검 란그릿사 시리즈의 일러스트를 도맡아 그려내는 사토시는 훗날 19금 일러스트 작가로 상당히 므흣한 명성을 얻게 될 인물이었다. 어쩐지 모리타의 그림에서 가끔 사토시의 느낌이 든다고 생각했더니. 역시나 한솥밥 먹던 사이였구만.. 잠시 후 나는 카와구치씨에게 하야시와 모리타를 소개해 주었다. 최근에 파이널 프론티어 2의 막바지 작업으로 굉장히 인력이 부족한 상태였던 카와구치씨는 하야시의 코딩 능력에 감탄했다. “코딩이 굉장히 깔끔하시네요. 저도 코딩 사이에 플러그 표시 해두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저희 펜타곤 소프트 역시 프로그래머들끼리 하나의 규칙을 정해두고 코딩을 짜고 있죠.” 예상대로 하야시는 카와구치씨와 제법 죽이 잘 들어맞았다. 하야시 역시 카와구치가 만든 파이널 프론티어를 즐겨 본 적이 있던 터라 둘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칭찬을 해대며 대화중이었고, 모리타는 간만에 만난 스승과 즐거운 담소를 나누었다. 나는 한쪽 테이블에서 직원이 가져다준 커피를 마시며 펜타곤 소프트 내부를 둘러보았다. 파이널 프론티어의 성공과 함께 나는 펜타곤 소프트가 임대중인 건물 2층을 전부 사들여 개발실과 직원용 휴게실을 나누어 두었다. 개발팀은 1팀과 2팀으로 분리해 두었으나, 현재 파이널 프론티어 2의 막바지 작업으로 개발실은 하나만 운영 중이었다. 나는 아무도 없는 개발 2팀을 둘러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1988년은 향후 게임 컨텐츠를 이끌어 갈 명작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던 해였다. 올해 초에 발매한 드래곤 워리어 3를 시작으로 칼콤 사의 이스 시리즈 역시 큰 인기를 힘입어 곧 속편을 출시할 예정이었고, 펜타곤 소프트의 파이널 프론티어2 와 시게씨의 슈퍼 마리지 3 역시 연말 출시를 목표로 개발 중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초 인기 작가 반열에 올라선 토리야마씨의 드래곤 볼이 게임화 발표가 되었는데, 그 기사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어릴 적에 ‘격신 프리저’ 라 불리던 카드 게임 정말 재밌게 했었는데, 갑자기 그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만큼 현재 패밀리는 차세대 기종으로 넘어가는 게 아쉬워질 만큼 매달 대작 게임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럴수록 카마우치 사장 역시 패밀리 카트리지의 로열티를 버리기 아쉬웠는지 쉽게 하위 호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지만.. “그렇다 해도 또 다시 신작을 민텐도에 내줄 순 없지..” 사실 나는 더 이상 민텐도의 밑에서 게임을 만들어 출시할 마음이 없었다. 아마 사이킥 배틀이 민텐도에게 건네준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 될지도 몰랐다. 하나의 게임을 만들기 위해선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게임을 출시해 버리면 회사는 너무나 쉽게 그 게임에 대한 저작권을 모두 가져가 버리며 자회사의 로고를 입힌다. 그것은 어쩌면 하나의 낙인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게임을 만들어낸 디렉터가 차후에 회사를 옮기더라도 같은 이름으로 후속 편 제작은 불가능하니까. 시게씨처럼 영원히 민텐도에 뿌리를 내릴게 아니라면 게임을 내면 낼수록 나에겐 손해 보는 장사였다. “모리타씨와 하야시씨가 결정만 내린다면 새로운 게임은 이곳에서 만들어 볼까?” 우선 모리타가 그려내는 캐릭터 성향으로 봤을 때 떠오르는 장르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캐릭터 일러스트를 메인에 두고 조금씩 영역을 확장 시키는 땅따먹기라던가.. NANPA.EXE라는 실행 파일로 유명한 동X생이라던가.. 아니면 귀여운 딸아이를 키워 결혼까지 해먹었던 무시무시한 ‘공주 만들기’ 게임이라던가.. (아무리 친딸이 아니라지만 이건 좀 너무 하단 걸 깨달았을 때 나는 비로소 성인이 되었다..) “아니야. 아무리 머릿속에 수많은 명작 게임들이 있어도 그걸 똑같이 만들어 낼 수는 없지.” 현재까지 드래곤 엠블렘과 사이킥 배틀을 만들어 내면서도 나는 기존에 만들어진 작품과 똑같은 게임을 만들진 않았다. 비록 장르 선택은 앞서 갔어도 지킬 건 지키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화이트 보드에 수성팬을 꺼내 들어 텅 빈 개발실에 무언가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우선은 장르다. 내가 알고 있는 최초의 미연시 게임은 90년도에 PC로 등장한 X급생이 최초의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이 시스템을 폭스 소프트에서 가져가 만들어 낸 것이 ‘두근두근 메모리얼’ 이라는 게임인데, 고교생인 주인공이 마음에 드는 여자 캐릭터를 골라 고교 3년 동안 특정 이벤트를 거친 뒤 고백풍풍권을 날리면 여자가 OK하고 졸업 후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로 끝나는 이야기. 그 외에 생각나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은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며 씨앗을 뿌리고 다니던 ‘센티멘탈 그래피티’나 한때 일본에서 패밀리 레스토랑 아르바이트 붐을 일으켰던 ‘피아캐롯’ 시리즈가 있긴 한데.. 뭐 생각하다 보면 더 있겠지만, 일단은 이정도로 해두고.. 나는 화이트보드를 톡톡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의 흐름은 대충 이렇다. 굉장히 우유부단한 주인공이 호구처럼 모든 여성에게 친절을 베풀다가 정해진 날짜의 시간에 맞춰 어떤 장소에 나가면 특정 이벤트가 발생하고, 그 이벤트 수가 쌓이면 100% 고백에 성공하는 구멍 난 치즈 같은 허접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83년으로 회귀 전에 제대로 연애조차 해본 적이 없던 모태 솔로였던 내가 그렇게 쉽게 주인공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차라리 반대로 가보는 건 어떨까?” 고백해서 행복해지는 이야기는 많지만 이별을 준비하는 미연시는 없었잖아? 어라? 생각해 보니 좀 괜찮은 것 같기도 한데..? 여주인공과 헤어짐을 준비하는 미소녀.. 이별.. 시뮬레이션.. 그 순간 내 머릿속에 한편의 시나리오가 촤라라락 하고 넘어가기 시작했다. ──────────────────────────────────── ──────────────────────────────────── ──────────────────────────────────── EP. 16 : 모리타와 하야시. (3) &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뒤 다시 개발 1팀으로 돌아온 나는 잠시 카와구치 씨를 따로 불러 휴게실로 향했다. “어떤가요? 카와구치씨가 보기에 저 두 사람은?” “두 분 다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모리타씨는 이미 우리 아마노씨가 인정하는 캐릭터 디자이너이고, 하야시씨 역시 이야기가 잘 통하는 군요. 역시 현업에 계신 분들이라 그런지 배울 점도 많았습니다.” “그렇죠? 저와 함께 사이킥 배틀을 만든 귀중한 인재들이니까 실력은 저도 보증합니다.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나요?” “그게 저희 민텐도가 나아가는 방향과 잘 맞지 않아서 걱정입니다. 모리타씨는 뛰어난 소질을 가지고 있지만, 그 실력이 여성 캐릭터에 국한 되어 있고, 하야시씨는 훌륭한 코딩 실력을 갖추고 있지만, 직원들 간에 인간관계가 좋지 못하죠. 할 말은 꼭 하고 넘어가는 성격이랄까요?” “아~ 무슨 말씀이신지 알거 같아요.” “그래서 일단 카와구치씨에게 먼저 물어 보고 싶습니다. 단도직입 적으로 저 둘을 펜타곤 소프트에 들이는 건 어떨까요?” “네?” “이대로 민텐도에 두기엔 아까운 실력들이에요. 현재 민텐도는 시게씨를 중심으로 수많은 프로그래머들과 캐릭터 디자이너 들이 있어요. 저대로 두면 분명 실력이 녹슬 겁니다. 모리타씨만 해도 다음 달 부터는 동킹콤 프로젝트에 소속 될 예정이라..” “아마노씨가 극찬하는 캐릭터 디자이너가 동킹콤을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카와구치씨 생각도 저와 같군요.” “현재 저희로서는 파이널 프론티어의 막바지 작업 중이라 손이 정말 부족하긴 한데..” “그렇다면 서로에게 더 좋은 기회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저야 두 분 모두 펜타곤으로 오신다면 두 팔 벌려 환영입니다. 다만 사장님도 안 계신 와중에 제 마음대로 직원 수를 늘려도 될까 싶기도 하고..” “사원 영입은 전처럼 담당 변호사측에 일임하시면 됩니다. 파이널 프론티어 2 역시 곧 출시 예정이라 수익이 생길테니 너무 걱정 하실 건 없을 것 같아요.” “음..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들 의사도 들어 봐야하지 않을까요? 민텐도라는 대기업을 두고 저희 펜타곤에 만족 할지..” “그건 제가 따로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개발실에 돌아가시면 하야시씨와 모리타씨 좀 이쪽으로 불러주시겠어요?” “네. 그렇게 하죠.” 카와구치씨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개발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모리타와 하야시씨가 함께 휴게실로 들어왔다. “부장님 여기 계셨군요. 저는 갑자기 사라지셔서 저희를 두고 돌아가신 줄 알았어요.” “설마 제가 그럴리가요. 펜타곤 소프트는 어떠셨나요?” 그러자 모리타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대답했다. “최고입니다. 아마노 선생님까지 뵙게 돼서 정말 좋았어요. 다른 직원들도 친절하시고, 작은 회사지만, 민텐도에는 없는 가족 같은 동료애가 있더군요.” 그거야.. 당신은 스승이 이곳에 있으니 가족 같은 느낌이 들겠지. 나는 모리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하야시씨에게 물었다. “하야시씨는 어떤가요?” 나의 물음에 하야시는 안경을 쓸어 올리며 잠시 뜸을 들였다. “적어도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주고받는 업무 분위기는 아니더군요. 카와구치씨가 분위기도 잘 잡아 주는 것 같고, 무엇보다 사무실이 정리된 느낌이라 일에 집중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거.. 요약하면 펜타곤 소프트가 마음에 든다는 얘기죠?” “뭐.. 요약 하면 그렇습니다.” “좋아요. 방금 카와구치씨랑 이야기를 해보았는데, 그 역시 두 분이 마음에 꼭 드는 모양이더군요. 펜타곤 소프트는 민텐도 랑은 달리 작은 회사에요. 내세울만한 성공작은 현재로선 파이널 프론티어 시리즈 단 하나뿐입니다.” 그러자 모리타와 하야시씨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설마 지금 부장님 말씀은.. 저희에게 이직을 제의 하시는 건가요?” “네. 맞아요.” “그래도 이건 좀..” 그들의 이런 반응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나이 차이는 별로 안 나지만, 그래도 같은 직장의 상사가 다른 직장에 이직을 건의하는 일은 절대로 흔치 않으니까. 특히나 교토에서 도쿄의 펜타곤 소프트에 입사 하려면 집도 옮겨야하니 문제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둘 다 아직 미혼이니 집을 옮기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을 듯한데.. 민텐도처럼 펜타곤 소프트 역시 사원들을 위한 오피스텔의 월세를 절반씩 부담해주고 있으니까. 나머진 그들의 각오 뿐. 그때 모리타가 특유의 느린 말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옮기겠습니다.” “어이, 모리타.. 너..” “사실 이전부터 느끼고 있었어요. 저는 민텐도의 취향에 맞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어렵게 들어간 회사였지만, 매번 저에게 돌아오는 일은 그저 자잘한 아이템이나 배경 작업뿐이었습니다. 그래도 틈틈이 캐릭터를 그리다보면 언젠가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제가 속한 팀에선 저질스런 그림만 그린다고, 변태 취급 받다보니 자연스레 동료들과도 거리가 생겨서 포기할까도 생각했어요. 그러던 중에 부장님께서 함께 사이킥 배틀을 만들자 했을 땐 솔직히 엄청 기뻤습니다. 드디어 저를 인정해주신 분이 나타났다고 생각했거든요. 민텐도에서 일하는 4년 동안 사이킥 배틀을 만들었던 작년이 가장 즐거웠습니다. 조금은 가능성이 열렸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제가 돌아간 곳은 본래 있던 자리였어요.” “모리타씨의 캐릭터 디자인은 훌륭합니다. 사이킥 배틀이 이만큼 인기를 얻은건 다 모리타 씨 덕분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감사해요. 부장님. 이번 사이킥 배틀을 계기로 역시 저는 제가 원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펜타곤 소프트는 제 스승인 아마노 선생님도 계시니 이곳에서 일하며 좀 더 제가 원하는 캐릭터를 그리고 싶습니다..” 좋아.. 우선은 발군의 캐릭터 디자이너 하나는 포획 했고, 다른 한명인 이 깐깐한 코딩 머신은 어떻게 데려오지?“ 모리타와는 달리 하야시는 민텐도 내에서도 실력하나 만큼은 인정하는 프로그래머였기에 그가 이직을 정하는 건 쉽지 않을 듯 했다. “모리타씨는 그럼 결정 되었고.. 하야시씨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저는 잠시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요. 저도 지금 당장 펜타곤 소프트로 옮기라 권하는 건 아녜요. 천천히 생각해보시고 따로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펜타곤이 민텐도에 비해 작은 회사긴 하지만, 결코 복지 수준이 나쁘지 않아요. 더구나 민텐도에서 데려 오는 만큼 대우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하야시씨 현재 펜타곤 소프트 개발 2팀 비어 있는 거 아세요?” “개발 팀 하나가 비어있다 구요?” “하야시씨 실력이라면 차기 소프트 개발이 들어갈 시에 팀장도 맡아 볼 수 있겠죠.” “제가.. 팀장을?” 오케이. 흔들린다. 흔들려.. 하야시씨는 냉철한 성격이지만 그렇다고 야망이 없는 편은 아니었다. 항상 대인 관계에 시달리는 하야시의 업무는 차라리 혼자 독방에 가둬두고 코딩을 짜라고 시키거나 아예 높은 자리에서 밑에 직원을 두는 편이 나을 수도 있었다. 물론.. 그의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좀 불쌍하긴 하지만, 하야시는 자기 할 일만 잘하면 딱히 간섭하는 편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대로 저희가 옮긴다고 해도 막바지 작업 중인 파이널 프론티어에 끼어들기는 좀 힘들지 않을까요?” “그 점은 걱정하지 마세요. 두 분 다 이곳에 오면 새로운 프로젝트에 바로 투입 될 테니까요.” “펜타곤 소프트의 새로운 프로젝트요?” “음.. 아직 프로젝트 명은 미정이긴 하지만..”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뒤에 말을 이었다. “혹시 두 분.. 연애 해보신적 있으세요?” 그러자 모리타와 하야시는 둘 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쯧쯧.. 내가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이들을 보니 타임슬립하기 전에 내 인생이 떠오르는군. ──────────────────────────────────── ──────────────────────────────────── EP. 16 : 모리타와 하야시. (4) “혹시 두 분.. 연애 해보신적 있으세요?” 그러자 모리타와 하야시는 둘 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쯧쯧.. 내가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이들을 보니 타임슬립하기 전에 내 인생이 떠오르는군. “사실 새로운 프로젝트는 그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게임과는 달리 스토리에 굉장히 신경을 써야하는 만큼 쉬운 작업은 아닐 거예요.” 그러자 일단 ‘연애’라는 말을 들은 모리타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연애라면 그럼 분명히 여성 캐릭터가 필요하겠군요!!” “필요한 수준이 아니라. 말 그대로 메인이 되어야합니다. 유저들에게 연애 감정을 이입시켜 주는 대리만족 게임이랄까요? 굳이 장르를 붙이자면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이라고 해야 하나?” “미.. 미소녀 연애 시뮬..? 무슨 장르 이름이..” 하긴 지금까지 들어본 장르라곤 액션, 롤플레잉, 어드벤쳐, 시뮬레이션, 슈팅이 전부인 지금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이라는 장르명이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질 만도 하다. 하지만 내가 넘어온 시대에는 말이야. ‘폭유 하이퍼 배틀’이란 장르도 있었거든? 상상이나 가는가? ‘폭유’ 하이퍼 배틀이라니.. 나도 처음엔 그 장르 명을 보고 눈을 의심했었지.. “부장님. 그 장르 저는 찬성입니다. 결론은 제가 그린 캐릭터와 연애를 하는 게임이란 말이죠?”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저도 모리타씨의 캐릭터 디자인을 보고 떠올린 장르라서 아직 구체적으로 어떤 형식이 될지는 몰라요.” “부장님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손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겠는데요?” 이거 이거.. 예상대로 모리타는 완전히 불이 붙었구만, 하지만 초기 미연시부터 너무 섹시 컨셉으로 들이대면 반감을 살수도 있으니 유키 같은 여성 유저도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도록 순애보적인 스토리 구성이 중요하다. 그때 우리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만 있던 하야시가 입을 열었다. “저는.. 잠시 생각을 해봐야겠습니다.” 역시나 냉철한 그의 성격답게 득과 실을 꼼꼼히 따져 보려는 건가? 카와구치씨 뿐인 펜타곤 소프트에 힘을 실어줄 기똥찬 프로그래머가 될 거라 생각하는데, 과연 잘 넘어올런지.. &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네. 모리타씨와 하야시씨도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카와구치씨는 모리타와 하야시에게 악수를 청하며 빙긋 웃어보였다. 아무래도 둘 다 카와구치씨의 마음에 꼭 들은 모양이었다. “저는 강준혁 부장님의 이직 제의에 동의하기로 했습니다. 교토로 돌아가면 민텐도에 사직서를 낼 생각이에요.” “아마노 선생님의 제자인 모리타씨가 와주신다면 영광이죠. 사이킥 배틀의 게임성도 게임성이지만, 무엇보다 그 게임을 돋보이게 만든 건 모리타씨의 캐릭터들이니까요. 우리 회사 직원들 중에 모리타씨 팬도 있는 걸요~” 맞는 말이다. 장담하건데, 사이킥 배틀에 근육 마초 남들이 튀어 나와 장갑이 하나씩 벗겨졌다면 판매량이 절반은 줄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확실히 남자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여성 캐릭터가 중요하지. “그리고 그렇게 어려운 탄막 작업을 정교하게 코딩해준 하야시씨의 실력도 굉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펜타곤 소프트는 프로그래머가 부족한 형편이라, 하야시씨도 부디 좋은 방향으로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카와구치씨가 먼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요청하자 하야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주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마쳤다. 이렇게 상급자가 먼저 나서서 하야시의 면을 세워주니 그 역시 싫진 않은 표정이었다. & 펜타곤 소프트는 회사 차를 이용해 신주쿠 역까지 바래다주었기에 돌아가는 길은 굉장히 수월했다. “오늘 부장님 덕분에 새로운 가능성을 찾은 것 같아요.” 돌아오는 내내 싱글벙글한 표정과 고심하는 하야시의 표정이 상당히 대비되었지만, 하야시 역시 어느 정도 이직 생각을 염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씨~!!” “어? 유키..씨” 아직은 유키라고 이름만 부르는 게 어색해 뒤늦게 ‘씨’를 붙이자 다가오던 유키의 표정이 팍하고 찌그러졌다. “그냥 유키라고 부르기로 했잖아요.” “미안,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 그런데 벌써왔어? 아직 약속 시간 한 시간 전인데?” “뭐 좀 살게 있어서 왔는데, 먼저 와 계실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뒤에 계신 분들은..?” “아,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야. 모리타씨와 하야시씨.” “안녕하세요. 이시카와 유키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아.. 그.. 저..” 연애 경험 제로라더니. 실제로 여자 앞에 서니 둘 다 티가 확 나는구나. 이래서야 이 둘을 데리고 미연시를 만들 수나 있을지 심히 걱정이 되는군. “모리타 신페이라고 합니다.” “하야시 요스케입니다.” “모리타씨와 하야시씨로군요. 잘 부탁드려요~” 눈웃음을 살포시 지으며 미소 짓는 그녀의 모습에 모리타와 하야시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다 같이 저녁 식사라도 할까?” “와~ 좋아요.” “저희도요? 두 분이 그 뭐냐.. 데이트 약속 있으셨던 거 아녜요?” 도쿄에 올라온 김에 유키를 만나기로 한건 사실이지만,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유키 역시 괜찮아 보이는 듯하고, 가끔은 부하 직원에게 식사 대접하는 것도 상사의 미덕중에 하나니까.. “어차피 교토로 내려가기 전에 밥이라도 살까 생각했던 차였어요. 유키도 괜찮지?” “네. 전 괜찮아요.” 간만에 데이트라 그런지 붉은 코트를 예쁘게 차려입고 나온 그녀는 신주쿠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띠었다. “혹시 신주쿠 쪽에도 알고 있는 맛 집이 있나?” 맛있는 음식점에 관해서는 어중간한 가게에 들어가는 것 보다 그녀에게 확실히 묻는 편이 나았다. 그러자 그녀는 센스 있게 다이어리를 꺼내들고 신주쿠 지역을 살피기 시작했다. “꽤 여러 가지 가게가 있는데, 어떤 음식을 좋아하세요?” 그녀는 센스 있게 내 의사보다는 모리타와 하야시에게 먼저 물었다. 나하고만 대화를 한다면 그들이 불편함을 느낄 테니 그녀 나름대로의 배려랄까? “저.. 저흰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음~ 그렇게 두리뭉실하게 말하는 것보단 확실히 메뉴를 정해주는 게 좋아요. 고르기 어려우시면 제가 선택지를 드릴게요. 일식이 좋으세요? 아님 양식이 좋으세요?” 그러자 하야시가 두 개의 선택지에서 하나를 골랐다. “그럼 일식으로..” “밥이 좋아요? 면이 좋아요?” 이번엔 모리타가 대답했다. “면보단 밥이 낫겠죠? 아무래도 저녁이니..” “그럼 준혁씨는 정식이 좋겠어요? 아님 전골이 좋겠어요?” “음.. 난 전골.” “오케이~ 그럼 모두 저를 따라 오세요.” 이것 참. 아무도 불만을 제기할 수 없는 방법이로군.. 그때 뒤따라오던 모리타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부장님이 말씀 하신 연애 시뮬레이션이라는 게 대충 어떤 건지 감이 올 것 같아요.” “그.. 그래요?” 그것 참 다행이로군.. 잠시 후 우린 유키를 따라 나베(냄비) 전골 요리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복잡한 신주쿠 골목을 요리조리 헤쳐 나가며 손쉽게 음식점을 찾아내었다. GPS를 이용한다 해도 찾기 어려운 위치였지만, 그녀는 다이어리에 적힌 약도를 참고해 근처 사람들에게 물어 금세 식당을 찾아낸 것이다. 유키는 식당 안에서도 내 옆에 앉아 모리타와 하야시가 어색해 하지 않도록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 말이죠~ 행사가 끝났는데, 준혁씨가 저한테 드래곤 엠블렘을 주는 거 있죠?” “유키씨는 게임도 좋아하시는군요.” “네~ 좋아해요. 이번에 민텐도에서 나온 사이킥 배틀도 벌써 샀는걸요.” “푸흡!! 쿨럭.. 쿨럭. 사이킥 배틀을 샀다고?” “준혁씨도 진짜.. 게임 발매하면 저 하나만 미리 연락 좀 주시지. 제가 그거 사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아니 그게.. 흐음..” 컨트롤이 조금만 미숙해도 파츠가 다 날아간 므흣한 일러스트가 튀어나오는데.. 그걸 유키한테 자랑하긴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지.. “쪼금 야하긴 하지만, 캐릭터들이 굉장히 매력 적이더라구요. 플레이 하는 내내 즐거웠어요.” “그 캐릭터 전부 모리타씨가 디자인 한 거야. 옆에 하야시씨는 사이킥 배틀 프로그램 짠 프로그래머고..” “와아~ 그럼 이렇게 세 분이 사이킥 배틀을 만든 거군요~!!”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대단하다.” 진심으로 감탄하는 유키의 목소리에 모리타와 하야시는 붉어진 얼굴로 괜스레 냄비 전골을 휘휘 저어 대었다. “아~ 그릇 주세요. 제가 담아 드릴게요.” 유키는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작은 그릇에 요리를 맛있게 담아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행동 하나 하나에 모리타는 부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중얼 거렸다. “부장님께서 다음 프로젝트를 왜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으로 하자고 했는지 알겠네요.” “모리타씨 그건 오해에요.” 그때 모리타의 이야기를 들은 유키가 나에게 그릇을 건네주며 물었다.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그것도 게임이에요??” “그냥 구상 중이야..” “와아~ 그거 재밌겠는데요?” 게임을 좋아하는 그녀는 장르에 대한 이야기만 듣고도 급격히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건 제쳐두고 일단 ‘게임’ 이라는 공동된 관심사가 생기자, 모리타와 하야시 그리고 유키는 금세 미연시를 화두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인공 지능을 넣어서 플레이어의 판단에 따라 실제로 여자 친구처럼 행동하는 건 어때요?” “그거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아요!!” 유키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는 모리타의 아이디어에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자 옆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던 하야시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인공 지능이래 봤자. 어차피 그런 종류의 게임은 어드벤쳐랑 비슷해. 선택지에 따라 결말이 갈리게 되어 있다고. 인공 지능이라고 해봐야. 내가 짜놓은 코딩 안에서 일어나는 0,1의 선택지 중에 하나일 뿐이다.” 꿈도 희망도 느껴지지 않는 하야시의 말에 불타오르는 중이던 모리타와 유키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하야시씨.. 무섭다.” “아니 전 그냥 현실을 얘기한 것뿐입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느새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주변이 어둑해져 있었다. 잠시 손목시계를 살피던 하야시는 열차 시간이 다가오는지 서둘러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곧 열차가 올 시간이 돼서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네. 다음 주에 회사에서 봐요.” “부장님 여러 가지로 감사했습니다. 유키씨도 만나서 반가웠구요. 어이~ 모리타 서두르자. 열차 늦겠다.” “잠깐만..” 음? 언제나 하야시의 말이라면 재깍 재깍 응답하던 모리타가 웬일로 하야시를 불러 세웠다. 그리곤 유키를 바라보며 할 말이 있는지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저한테 할 말 있으세요?” “그게.. 저기 혹시 말이죠. 유키씨만 괜찮으시다면..” “저요?” 모리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뜸을 들이자, 옆에 있던 하야시가 답답한지 그를 재촉했다. “뭔데? 모리타 빨리 말해. 이번 열차 놓치면 2시간 기다려야한다고.” 그러자 모리타는 결심이 섰는지 이를 악문 채 외쳤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희 차기작 미연시 게임에 유키씨의 이미지를 참고 해도 될까요?” ... 난 솔직히 모리타가 유키한테 첫눈에 반해서 고백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유키 역시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긴장했었는지 잔뜩 움츠렸던 어깨를 풀며 대답했다. “네. 전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대신 예쁘게 그려주세요~” “물론이죠~!!” “야이~!! 난 또 뭐라고 모리타 빨리 와. 너 때문에 달려야하잖아!!” “미안, 하야시. 부장님 그럼 다음 주에 회사에서 봐요~!!!” “네.. 하하..” 모리타를 끌고 번개 같이 사라지는 하야시를 바라보며 유키 재밌는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재밌네요. 저 두 사람. 뭔가 굉장히 잘 어울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모리타씨가 제 모습을 게임 주인공으로 그려준다니 기대가 되는데요? 하지만..” 유키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뒤에 말을 이었다. “사이킥 배틀처럼 너무 야하게 그리면 안 되는 데에..” 이거 괜히 가슴이 찔리네.. “뭐 그건 준혁씨가 잘 컨트롤 해주세요. 너무 높은 수위는 안돼요~!!” “알았어. 그렇게 전할게.” “킥~ 그럼 방해꾼들은 물러갔으니 이제 우리 데이트 할까요?” “뭐하고 싶은데?” “사실 예전부터 보고 싶은 영화가 있어서 미리 예매해 뒀거든요. 오빠가 좋아할 진 모르겠지만..” “제목이 뭔데?” “라 밤바요..” ... 그거 참 오랜만에 듣는 제목이로구나.. ──────────────────────────────────── ──────────────────────────────────── EP. 17 : 한국으로.. (1) & La Bamba는 실존 인물이었던 리치 발렌스의 삶을 조명한 영화로 불의의 사고로 숨진 록앤롤의 황제의 짧은 생애와 그의 음악을 그린 청춘 영화였다. 영화의 스토리는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미국의 이민촌 출신인 주인공이 가수의 꿈을 키워 나가며 할리우드에서 음반 발표로 성공하게 된다. 부잣집 딸인 아름다운 다나와 사랑에 빠진 리치는 그녀의 아버지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사랑을 키워 나가며 La Bamba와 Donna를 잇달아 발표해 록앤롤의 정점에 서게 되지만, 마지막 악천후에서 순회공연을 위해 올라탄 비행기가 추락하며 안타깝게도 죽음에 이르는 내용이었다. Donna Oh Donna, oh Donna, oh Donna oh Donna (오, 다나, 오 다나, 오 다나, 오 다나) I had a girl. (여자 친구가 하나 있었지) Donna was her name. (그녀의 이름은 다나.) Since you left me. I've never been the same (그대가 떠난 후 난 전과 같지가 않아.) 'Cause I love my girl (왜냐하면 나만의 그녀를 사랑하기에)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친구 다나에게 공중전화 부스에서 들려주었던 이 곡은 뭇 여성들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는데, 그것은 유키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오~ 다나~ 오~ 다나~ 오~~ 다나~ 리치 발렌스 정말 너무 멋지지 않아요? 결말이 슬프긴 했지만 너무 재밌었어요.” 영화관을 나오던 중에 유키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말했다. 솔직히 나는 We Belong Togeter가 더 좋았지만 굳이 입 밖에 내진 않았다. 사실 라 밤바에서 나오는 모든 음악은 단 한곡도 버릴 게 없을 정도로 훌륭했으니까. 하지만 이 영화를 개봉 시기에 맞춰 영화관에서 볼 줄이야. 그것 하나만으로도 나에겐 감회가 새로웠다. 바쁜 일상에 잠시 잊고 살았던 1988년의 향취가 진하게 느껴진 하루였다. 거기다가 ‘라 밤바’를 본 덕에 새로운 아이디어도 하나 얻었으니.. ‘음.. 이별이 테마인 연애 시뮬레이션에서 남자 주인공의 사망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겠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은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꽤나 잘 먹이는 새드 엔딩이니까. “무슨 생각해요?” “응? 아.. 새로 만들 연애 시뮬레이션 스토리 좀 생각하느라.” “진짜.. 조금은 몸 생각해서 쉴 때도 있어야죠. 어떻게 하루 종일 게임 생각만 하세요?” “그야 뭐.. 직업병? 이라고 해야 하나.” “음~ 그럼 저도 같이 고민해 줄까요?” “뭐?” “새로 만드는 게임 스토리.. 제가 잘 아는 시나리오 작가 선생님 계신데, 소개 시켜드릴까요?” “시나리오 작가?” “네. 드라마 작가님인데.” 하긴 그녀는 방송 쪽에 일하는 보조 작가니 그쪽 계통에 사람들을 좀 알겠구나. 하지만 가끔 TV를 봐도 딱히 끌리는 스토리를 가진 드라마는 없던데.. 차라리 한국 드라마가 훨씬 낫지. 아니면 미연시 좀 한다는 게이머들에게 ‘백색 마약’이라 불리던 ‘화이트 메모리’의 스토리를 따오는 것도 나쁘지 않고.. 잠깐.. 한국 드라마? 그 순간 걸음을 멈춘 내 머릿속에 타임 슬립하기 전 정말 재밌게 보았던 드라마 제목이 떠올랐다. 그래.. 내가 생각하기엔 그 스토리가 정말 딱 일 거 같은데.. “저기요? 진짜 자꾸 그렇게 저 내버려두고 딴 생각만 할 거예요?” “미안하다.” “흠.. 진짜 오랜만에 데이트라고 잔뜩 긴장하고 나왔는데..” “사랑한다.” “네? 아.. 저기 그렇게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아무 생각 없이 떠오른 대로 내뱉은 말에 유키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나 방금 엄청 희한한 방법으로 고백 아닌 고백을 한 거 같은데? & 다음날. 교토로 돌아가기 위해 신주쿠 역에 다시 들린 나는 아까부터 훌쩍 거리는 유키를 돌아보았다. 항상 교토로 돌아갈 때면 그녀는 아쉬운 표정으로 역까지 배웅해 주었다. “다음엔 언제와요?” “음.. 글쎄. 다음 주말엔 가볼 데가 있어서.” “그럼 다 다음 주에나 보는 거예요? 다음 주말엔 어디 가시는데요?” “한국에 잠깐 다녀오려고.” “한국에요?” “금요일에 출발해서 일요일쯤 돌아올 거야.” “흐음.. 몇 시 비행기인데요?” “오사카에서 오후 2시 비행기. 뭐 한국은 가까우니까 한 시간 정도면 도착할거야.” “전 아직 한 번도 해외 나가본 적이 없는데, 부럽네요.” 하긴 지난달에 미국에 출장 갔을 때도 엄청 부러워 했었지.. 그때 찍어다준 사진을 받고 엄청 좋아했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직 열차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기에 우리는 근처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기로 하였다. 그때 커피숍으로 오는 내내 초조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무언가 결심한 듯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도 같이 가요.” “음? 교토에? 내일 출근은 어쩌고?” “아뇨!! 한국에요!!” “뭐라고!?” “저도 나리타에서 비행기표 끊을 테니까. 한국에서 만나요!!” “아니 저기..” “저도 준혁씨가 태어난 한국에 꼭 가보고 싶어요. 여행비용 대달라는 말은 안 할 테니까. 같이 가요~ 네?” 사실 이번 한국행은 사무적인 일도 있지만,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를 찾아가보려던 차였다. 그렇기에 나를 따라다닌다 해도 놀러가는 게 아니니 그다지 재밌어 할 것 같진 않은데.. 하지만 그녀의 눈빛을 보아하니 이대로 말린다 해도 쉽게 들어 줄 것 같지 않았다. “놀러가는건 아닌데 괜찮아?” “네. 괜찮아요.” “사실 어릴 때 살던 동네에서 만날 사람이 있어 가는 거라. 관광지 같은 곳에는 못가 볼 텐데?” “준혁씨가 살던 동네요? 오히려 그럼 더 좋아요~!!” ... 오히려 그게 더 좋다는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하긴 그런 면이 오히려 그녀답다고 할까? 나는 잠시 동안 그녀와 눈을 맞춘 채로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같이 가자.” & 그로부터 일주일 후. 나는 비행기 티켓을 나리타공항으로 바꿔 유키와 함께 공항에 도착했다. “아.. 저 너무 떨려요. 아까부터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는 거 있죠.” “별거 아냐. 비행시간도 한 시간 정도면 도착할 테니까. 너무 그렇게 긴장 안해도 돼.” “어젯밤부터 떨려서 잠도 설친 걸요. 어릴 때 학교에서 소풍 가기 전날에도 그랬는데.. 참 오랜만인거 같아요. 이런 기분..” “혹시 모르니 멀미약이라도 마실래?” “벌써 마셨는데요.” “준비가 철저하네..” 유키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가끔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가 귀여워 몇 번 쓰다듬어 주었는데, 그럴 때면 유키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강아지처럼 좋아했다. 잠시 후. 면세점에서 간단한 쇼핑을 마치자 슬슬 비행기 시간이 다가왔다. “저희 빨리 가봐야 하는 거 아녜요?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괜찮아. 어차피 비행기 안이 좁아서 사람들 다 타려면 시간 좀 걸리니까 맨 나중에 타면 돼.” “그래도 빨리 타보고 싶어요.” 유키는 첫 해외여행이 무척이나 설레이는지 내 팔을 끌며 재촉했다. 결국 평소보다 일찍 탑승 게이트에 도착한 우리는 탑승 대기가 풀리자마자 가장 먼저 비행기에 올랐다. 통통 거리는 이동식 통로를 지나 비행기의 탑승구에 다다르자 주변에는 우리를 환영하는 한국인 스튜어디스들이 나란히 줄지어 예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와아.. 한국 미인~!!” 다소 키가 작긴 하지만, 유키의 외모도 그녀들에 비해 꿀리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키는 늘씬한 그녀들의 키가 부러운지 나와 그녀들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어릴 때 우유 많이 마실걸..” “어서오세요. 고객님. 자리 안내도와 드리겠습니다.” 우리를 향해 미소 지으며 손을 내미는 스튜어디스에게 티켓을 보이자 그녀가 허리를 숙이며 윗층 계단을 가리켰다. “비지니스 클래스 이용 고객님은 위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짧은 비행시간이라 이코노미를 탈까도 했지만, 어차피 쓰라고 있는 돈이었기에 나는 유키 몫도 함께 비즈니스 클래스로 뽑아 두었다. 그때 뒤따라오던 유키의 목소리에 무심코 돌아보니 어느새 신발을 벗어든 그녀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스튜어디스에게 물었다. “신발은 그냥 가지고 올라가면 되나요?” “…….” 설마 그때 교토에서 했던 농담을 진짜로 믿었단 말야? 순간 주변에 모여 있던 스튜어디스들이 고개를 돌려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아, 손님 신발은 그냥 신고 타셔도 되요.” “네!?” 스튜어디스의 말에 얼굴이 빨개진 유키는 창피했는지 그대로 신발을 손에 든 채 후다닥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아, 저 아가씨 엄청 귀여워 어떡해~” ──────────────────────────────────── ──────────────────────────────────── EP. 17 : 한국으로.. (2) “아, 저 아가씨 엄청 귀여워 어떡해~” 스튜어디스들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계단을 오르니 구석 쪽 의자 앉아 고개를 파묻고 있는 유키가 보였다. “저기 유키..”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지금 엄청 창피하거든요~!!” “아니 그게 아니라..” “글쎄, 지금은 말 걸지 말아달라니까요..” “아니.. 거기 네 자리 아니거든? 빈자리라고 아무데나 앉으면 안 돼.” “아..” 결국 슬쩍 고개를 내밀어 내가 가리키고 있는 자리로 자리를 옮긴 그녀는 다시 고개를 파묻었다. “화났어?” “아뇨.. 단지 너무 창피해요.” “미안. 그때 교토에서 너무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 보길래 장난 좀 친 건데, 진짜로 믿을 줄은 몰랐어.” “스튜어디스 언니들 얼굴을 못 보겠어요..” “걱정 마. 요새 비행기 타는 사람 한 두 명은 꼭 그래. 별 거 아냐.” “진짜요?” 빼꼼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유키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서야 유키는 기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와아.. 근데 비행기란게 생각보다 사람을 별로 안태우네요? 여기 끽해야 12명 정도 타겠는데요?” “음.. 그게 궁금하면 아래층에 한 번 다녀와 볼래?” “아래층이요?” 내 말에 고개를 갸웃 거리며 계단 아래쪽을 살피러 간 유키는 잠시 후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에게 달려왔다. “아래층에 사람 엄청 많아요. 의자들도 빽빽하고, 그런데 여기는 왜 이렇게 널널해요?” “시외버스 타본 적 있지?” “네.” “버스로 치면 우등 좌석이라 생각하면 돼. 가격이 좀 쎄지만..” “얼만 데요?” “아래층 좌석이랑 비교하면 1.5에서 2배 정도?” “네에!? 한 시간이면 도착한다면서요.” “뭐 그냥 편하게 가는 거지. 이코노미는 좌석 간격이 좁거든.” “전 버스에서도 우등 좌석표 끊어본 적이 없는데..” “왕복 비행기 표는 내가 부담하는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편히 앉아. 곧 이륙하겠다.” 그러자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스피커에서 안내음성이 들려왔다. -승객 여러분께 알립니다. 잠시 후 이 비행기는 목적지인 서울 김포 국제공항을 향해 곧 이륙합니다. 승객 여러분은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착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긴장한 표정으로 옆자리에 앉아 좌석벨트를 착용한 유키는 비행기가 활주로를 향해 이동하자. 마른침을 삼키며 나에게 물었다. “하늘로 날아가면 기분이 어때요?” “음.. 놀이기구 탈 때랑 비슷해. 나름 재밌어.” “저 놀이 기구 타는 거에 굉장히 약한데..” 이윽고 이륙을 위해 활주로에 도착한 비행기가 천천히 속도를 높이자, 유키가 나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저기.. 나 손 좀 잡아줘요.”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나는 살짝 웃으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비행기가 둥실 떠오르자, 나를 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떴다.. 어떡해..” 우리를 태운 비행기가 순식간에 상공을 날아오르자 조그만 창가를 통해 일본 열도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와아..”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 사람만이 느끼는 황홀한 풍경에 유키는 창밖을 바라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잠시 후. 비행기가 구름 위로 날아오르자, 새하얀 구름바다가 펼쳐졌다. “회사 동료들이 해외여행 다녀올 때 사진으로 봤었는데, 실제로 보니 훨씬 더 예쁜 것 같아요.” 어느새 긴장도 풀렸는지 유키는 방긋 웃으며 창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나도 처음 비행기를 탔을 땐 지금의 그녀랑 비슷한 반응이었지. 중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제주도를 가면서 처음 비행기를 탔던 순간을 떠올리자, 옛 추억에 나도 모르게 빙긋 웃음이 새어 나왔다. 유키는 한 시간 동안 질리지도 않는지 연신 창밖을 바라보다가 때때로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눌러 데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유키는 필름 카메라 조작이 굉장히 뛰어 났다. 디지털 카메라처럼 바로 사진을 체크해 볼 수도 없는데도 그녀는 곧 잘 필름 카메라의 조리개 수치를 바꿔가며 한 장씩 사진을 담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곧 비행기 착륙을 알리는 안내음성이 흘러나왔다. & 김포 국제공항에 무사히 착륙한 비행기에서 내린 유키의 첫 소감은.. “어.. 엄청 추워요. 원래 한국은 이렇게 춥나요?” 김포 공항은 나리타 공항 처럼 비행기를 연결해주는 이동식 통로를 대어 주는게 아니라 계단식 탑차가 와서 활주로에 승객을 내려주는 시스템이었다. 때는 2월 말에서 3월로 이어지는 꽃샘추위. 유키는 얇은 코트 자락을 움켜쥐며 덜덜 떨고 있었다. 하긴 한국이 일본보다 좀 춥긴 하지. 나는 코끝을 훔치며 가방에서 목도리를 꺼내 그녀에게 둘러주었다. “한국은 좀 추울 거라고 미리 말해주는 걸 깜박했네. 이거라도 두르면 좀 나아질 거야. 조금 있으면 공항 안으로 데려다 줄 터미널 버스가 올테니까 조금만 참아” “고마워요.” 길고 지루한 입국 심사를 마치고 출국장을 빠져 나오자. 김포공항에는 수많은 외국인들로 붐비고 있었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88올림픽의 익숙한 선전 문구가 여기저기 붙어 있는 걸 보니 한국에 온 게 슬슬 실감이 나고 있었다. “와~ 호도리다. 귀여워~!!” 공항을 둘러보던 유키가 88올림픽 마스코트인 호돌이를 향해 셔터를 눌러대었다. 아.. 기억난다. 저 녀석.. 어릴 때 호돌이 모양의 아이스크림을 동네 슈퍼에서 팔아서 몇 번 사먹었는데, 그 당시엔 몰랐지만, 호돌이 머리를 분리해서 숟가락으로 안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퍼먹어야하는 다소 싸이코 패스 적인 디자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다 먹으면 저금통으로 쓸 수 있었는데, 먹기도 불편하거니와 동네 아이들 하나씩 들고 다니며 너도 나도 호돌이 대가리부터 따고 봤으니..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누가 그런 디자인을 생각해 낸 건지. 얼굴 한 번 보고 싶다. “우선 호텔에 가서 짐부터 맡겨 놓고 이동하자.” “네~” 유키는 처음 와보는 해외여행이라 그런지 행여 나를 잃어버릴까 서둘러 나를 쫓아왔다. 공항에 대기 중인 택시에 올라 호텔이 있는 명동을 부탁하자, 중년의 기사 아저씨는 친절히 유키의 짐까지 트렁크에 실어 주었다. “전 버스도 괜찮은데, 택시 요금 비싸지 않아요?” “괜찮아. 한국은 일본이랑 달리 택시 기본요금 600원이라 저렴한 편이야.” “600원이요? 엔이 아니라?” 결론은 이대로 명동까지 가도 5000원도 안 나온다는 거지. 그나저나 정말 오랜만이다. 타임 슬립이후 거의 5년이 흘러서야 이곳에 오게 되다니.. 사실 조금 일찍 오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너무 어릴 적에 살았던 곳은 집 주위와 골목길은 기억이 났어도, 자세 한 위치까지는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나마 지금 내가 가려는 동네가 오래된 기억 속에 정확한 위치를 기억할 수 있었다. 그곳에 가면 과연 누가 살고 있을지. 혹시 젊은 시절의 부모님이 계신다면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 조금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안색이 별로 안 좋네요? 어디 아파요?” “아니. 그냥 조금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혹시 저 때문에? 제가 괜히 따라온 건 아닌지..” “너 때문에 이러는 건 아냐. 오히려 같이 오니 마음이 한결 나은 것 같아.” 그건 진심이었다. 혼자 이곳에 있는 것보다 유키와 함께 있는 편이 나에겐 위로가 되고 있으니까. 유키는 창밖으로 흘러가는 낯선 서울의 풍경에 두려움 반 설레임 반의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 김포에서 호텔이 있는 명동까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기에 우린 곧 예약해둔 호텔에 짐을 풀 수 있었다. 테라스 정면으로 남산 타워가 한눈에 들어오는 스위트룸은 전망이 훌륭했다. 이곳에서도 유키는 조그만 두 손에 카메라를 꼭 쥐고 셔터를 눌러대었다. “미안하지만 바로 가볼 곳이 있는데, 피곤하면 호텔에서 쉴래?” “아뇨. 저도 같이 가요.” 추운 서울 날씨에 두툼한 회색 코트로 갈아입은 유키는 한쪽 어깨에 카메라를 둘러매고 호텔을 나섰다. 마음 같아선 함께 명동이라도 한 바퀴 돌며 서울 구경을 시켜주고 싶었지만, 우선은 내가 살던 동네가 먼저였다. “미안. 되도록 일찍 끝내고 저녁에는 서울 구경 시켜줄게.” 그러자 유키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으음~ 전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요. 오히려 준혁씨가 살던 동네가 더 궁금한데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나는 한 차례 유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에 호텔 앞에 대기중인 택시에 올랐다. “남가좌동 명신대 쪽으로 가주세요.” “명신대요?” “네. 왜요?” “아뇨.. 그.. 오늘이 금요일이라 학교 앞까지는 못갈 거 같은데, 일단 근처까지 가볼게요.” 음? 금요일이랑 대학교 앞이 무슨 상관이지? 이윽고 명동을 빠져나온 택시는 신촌을 지나 성산회관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어릴 적 어머니와 자주 시장을 보러왔던 모래내 시장을 지나 택시는 북가좌동의 커다란 언덕을 넘어 남가좌동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손님. 명신대는 내리막길 끝에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가시면 되거든요. 더 이상 차가 들어가기 힘들 것 같아서 여기 내려드릴게요.” “아.. 감사합니다.” 요금을 지불하고 유키와 함께 택시에서 내린 나는 왜 택시 기사 아저씨가 학교 앞까지 가는 게 무리라고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이런.. 오늘 대학생들 금요 집회가 있는 날이었구나.. “준혁씨.. 여기 왜 이렇게 경찰들이 많아요?”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도 부딪혀오는 거센 억압에도 우리는 반드시 모이었다. 마주 보았다.. 살을 에는 밤. 고통 받는 밤. 차디찬 새벽서리 맞으며 우린 맞섰다. 사랑 영원한 사랑 변치 않을 동지여 사랑 영원한 사랑 너는 나의 동지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도 우리가 먼저 죽는다 해도 그 뜻은 반드시 이루리라. 승리 하리라.. ──────────────────────────────────── ──────────────────────────────────── EP. 17 : 한국으로.. (3) 곧이어 붉은 머리끈을 동여맨 학생들이 거리로 우르르 몰려나오며 ‘동지가’를 열창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길거리에 개미새끼 하나 안 보이더라니,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준혁씨.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거예요?” “쉿. 괜히 말려들었다간 골치 아파지니까 조용히 지나가자. 혹시 모르니 내 손 꽉 잡고..” 유키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꼭 움켜쥐었다. 잠시 후. 우리는 전경과 대치중인 학생들의 눈치를 살피며 최대한 멀리 떨어져 걷기 시작했다. 제발 우리가 사라질 때까지 조금만 버텨라. 괜한 짓 하지 말고.. 하지만 그런 나의 바람은 시위 중인 학생이 던진 화염병 하나에 산산 조각 나 버렸다. “개새끼들이!! 다 잡아 들여!!!” “우와아아아아~!!!” 펑!! 탁!! 쿵~!! 와직!!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하는 혼란 속에 나는 유키의 손을 꽉 잡고 달렸다. 화염병과 시작으로 전경이 대응한 최루탄이 날아오르고, 우리가 걷고 있던 대로변은 금세 새하얀 최루탄 연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준혁씨. 켈룩 켈룩. 목이랑 눈이 너무 따가워요.” “조금만 참아. 여기 골목으로 들어가자.” 결국 큰길을 포기하고 외진 골목으로 들어왔지만, 이미 최루탄 연기를 잔뜩 뒤집어 쓴 유키는 빨개진 눈으로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윽고 전경들을 강제 진압을 피해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고, 그중에 몇몇은 우리가 피한 골목으로 냅다 달려 들어왔다. 이러다 전경이라도 만나면 한패로 몰릴 수도 있겠는데? 즉시 주변을 살핀 나는 살짝 열려있는 대문으로 들어가 장독대에 몸을 숨겼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분위기에 휩쓸려 아주 영화를 찍는구나. 잠시 후. 전경들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 가자, 나는 마당 설치된 수돗가에서 유키의 얼굴을 씻겨주었다. 난생 처음으로 최루탄 가스를 맡은 유키는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좀 괜찮아?” “네.. 그런데 이렇게 남의 집에 막 들어와도 괜찮아요?” “그게 워낙 급하다보니. 주인 분 만나면 사과 드려야겠지..” 그런데 여기 마당 왜 이리 낯이 익냐? 수돗가도 알아서 척척 찾아내고.. 그때 계단 위쪽에 현관문이 열리며 아주머니 한분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학생 괜찮아요?” 얼굴에 묻은 물기를 털어 낸 나는 서둘러 아주머니에게 사과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네? 아.. 저흰 괜찮아요. 지나가는 길에 갑자기 시위에 휘말려서 얼굴 좀 닦느라. 죄송합니다. 멋대로 들어와서..” 그런데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 목소린..? 세상에 누리네 아주머니잖아!? 어쩐지 마당이 겁나게 낯이 익다했더니.. 잠시 주변을 둘러보자, 이곳은 어릴 때 친하게 지내던 김 누리라는 친구네 집이었다. 골목길에서 얼음땡 하다가 목이 마르면 마당에 들어와 수돗물 마시고 다시 뛰쳐나가곤 했었는데, 설마 여길 찾아 들어올 줄이야.. 그때 내 옆에 있던 유키가 눈을 부비면서 아주머니를 향해 어리숙한 한국어로 사과했다. “제손하므니다.” “아휴.. 아가씨. 그거 그렇게 손으로 비비면 안돼요. 수돗물도 엄청 차가울 텐데 잠깐 들어와 봐요.” “네? 아니.. 저..” 내가 알고 있는 누리네 아주머니는 아주 착하고, 인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시위대를 피해 멋대로 들어온 우리를 내쫓기는커녕 들어오라 하시다니.. 1988년의 온정이 그대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아주머니가 뭐라셔요?” “그게 잠깐 들어오래.” “네!? 마당에 멋대로 들어온 것도 죄송한데, 집에 들어오라니.. 혹시 준혁씨 아시는 분이세요?” 이걸 안다고 해야 하나, 모른다고 해야 하나..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유키와 함께 현관에 들어서자, 부엌 쪽에서 아주머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거기 계세요~ 누리야!! 엄마 수건 좀 다져다 줄래?” “네에~” 이윽고 작은방 문을 열리며 맬빵 바지를 입은 귀여운 꼬마 아이가 현관 앞에서 서있는 우리를 향해 90도로 인사했다. 야.. 김누리!! 너 진짜 오랜만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누리라고 합니다.” 귀여운 녀석. 유치원에서 배운 대로 행동 하는군. 한손에 장난감을 들고 나온 누리 녀석은 그새 아주머니가 부탁한 걸 까먹었는지 총총 걸음으로 우리에게 달려왔다. “안녕. 누리야.” “우와.. 예쁜 누나다!!” “야!! 김누리 엄마 수건 가져다 달라니까~!! 또 엄마 말 안 듣지?” “아!! 맞다.” 엄마의 불호령에 누리 녀석은 화들짝 놀라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 모습에 유키는 퉁퉁 부은 눈으로 쿡쿡 거리며 웃었다. 잠시 후 누리에게서 받은 수건을 따듯한 물에 적셔온 아주머니는 유키에게 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 “닦지 말고 두 눈에 꾹 누르고 있으세요.” “아리가토우 고자이마스. 정말 간사해요.” “일본분이시네? 남자분도?” “아뇨. 저는 한국인이에요. 이쪽은 여자 친구인 유키라고 합니다. 도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마슨니다.” 아직은 발음이 어리숙하지만 유키 나름대로 아주머니에게 감사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옆에서 유키를 올려다보던 누리가 말했다. “예쁜 누나 한국말 되게 웃기다~ 또 해봐요.” 그러자 누리 아주머니는 아들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며 되려 우리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우리 애가 아직 어려서..”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이가 굉장히 귀엽네요.” “최루탄 때문에 목도 칼칼할 텐데, 쥬스라도 드릴 테니 들어와요.” “아뇨.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지금 나가면 또 최루탄 뒤집어쓸지도 모르니. 잠깐만 들렀다가세요.”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지금은 누리네 아주머니 말씀을 듣는 게 나아보였다. “그럼,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거실은 바닥이 차가우니까, 저쪽 안방에 들어가 있어요.” 아주머니는 친절히 안방까지 내주시며 쥬스를 가지러 부엌으로 향하셨다. “와.. 준혁씨 바닥이 따끈따끈해요.” 다다미 몇 장과 고타츠라는 난방기기로 겨울을 나는 일본인들에게 온돌방은 신세계이긴 하지. 유키는 뜨끈한 바닥에 손바닥을 짚으며 신기해했다. 그때 누리 아주머니께서 쟁반에 쥬스 병을 담아들고 안방으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그 쥬스 병을 본 순간. 나는 또 한 번 아련한 추억에 사로잡혔다. ‘부잣집의 상징.. 델몬트 유리병이네..’ 어린 시절. 친구네 집이 부자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이 바로 이 델몬트 유리병이었을 때가 있었다. 쥬스를 다 마시고 나면 물병으로도 사용했었는데, 솔직히 어린 아이가 물병으로 쓰기엔 엄청 무거웠던 걸로 기억한다. 가끔 누리네 아주머니께서 모아두었던 델몬트 병을 상자에 담아 주시면 누리랑 같이 슈퍼로 달려가 과자로 바꿔 먹었던 기억이 나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감사합니다.” 두 손으로 자기 얼굴만 한 머그잔을 꼭 쥔 채 쥬스를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 누리를 보니 이제라도 한국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나 대롱 대롱 먹어도 돼요?”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누리의 말에 쥬스를 마시던 나는 그대로 뿜어낼 뻔했다. 델몬트 오렌지 쥬스에 이어 대롱 대롱이라니.. 아련한 추억의 원투 펀치로구나.. 과일 셔벗 형식의 아이스크림인 대롱 대롱은 나 역시 어린 시절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중에 하나였는데, 과일 모양의 플라스틱 용기 위에 스푼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잎사귀가 달린 귀여운 디자인이었다. 가끔 너무 얼어서 플라스틱 용기가 깨져 끈적끈적한 녀석들도 있었지만.. “금방 쥬스 마셨잖아. 그리고 겨울에 차가운 거 먹으면 배탈 나요.” “그래도 하나만 먹고 싶어요. 대롱대롱~ 대롱대롱~” 저기 아주머니.. 그 대롱대롱 저도 먹어 보고 싶네요.. &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주머니.” “오랜만에 한국 왔는데, 하필 시위 하는 날이라니.. 같이 온 아가씨는 무슨 고생이람.” 안타까운 표정으로 유키의 안색을 살피는 아주머니의 모습에 나는 지갑을 열어 지폐 몇 장을 꺼내들었다. “저기.. 제가 그냥 이렇게 돌아가긴 마음이 불편해서요. 이걸로 누리 과자라도 좀 사주세요.” “아휴~ 괜찮아요. 이러지 않으셔도..” “폐만 끼치고 가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큰 돈 아니니 받아주세요.” 결국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억지로 아주머니 손에 돈을 쥐어 준 나는 유키를 데리고 서둘러 집을 나왔다. 그러자 아주머니도 포기했는지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외쳤다. “고마워요. 잘 쓸게요.” 우리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시 한 번 꾸벅 인사드린 뒤 걸음을 옮겼다. “굉장히 친절한 분이셨어요. 누리도 정말 귀엽고..” “그렇지?” 나는 유키의 눈가에 묻은 먼지를 닦아낸 뒤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조금은 무서운 경험 이었지만, 누리 아주머니 덕에 많이 진정이 됐는지 유키는 밝은 얼굴로 내 손을 맞잡았다. “근데, 준혁씨.” “응?” “아까 누리가 말했던 데론 데론이 뭐예요?” “아.. 그거 내가 엄청 좋아했던 아이스크림.. 이따가 호텔에 돌아가는 길에 사줄게.” “진짜요? 먹어보고 싶다.” “처음 와본 해외여행인데, 많이 놀랐지?” “괜찮아요. 덕분에 누리네 아주머니도 만났고, 굉장히 독특한 경험이었어요.” “같이 와 줘서 고마워.” “저야 말로 데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 ──────────────────────────────────── EP. 17 : 한국으로.. (4) & 누리의 집에서 내가 살던 집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걸어서 15분 정도? 사실 누리는 이 시기의 내가 모르던 친구였다. 그 녀석을 처음 만난 게 국민 학교 2학년 때였으니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2년 정도가 더 흘러야 어린 시절의 내가 만날 수 있었다. 그런 내가 다 큰 어른으로 7살의 누리를 만나다니. 타임 슬립이 가져다준 묘한 인연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대로를 지나면 금방이겠지만, 보통 대학생들의 집회는 흩어졌다가도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에 모여 다시 집회 활동을 시작했기에 안심할 순 없었다. 그래서일까? 오후 시간임에도 동네 골목은 조용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거리에 있는 문방구와 슈퍼마켓이 점점 눈에 익어 보이기 시작했다. 거의 다 와간다. 저기 앞에 있는 모퉁이 만 돌면.. 내가 살았던 집 근처까지 다가가자 심장이 급격하게 빨리 뛰기 시작했다. “준혁씨? 손이..” “아, 미안..” 나도 모르게 유키 손을 너무 꽉 쥐었나보다. 평소답지 않게 손바닥까지 땀이 차올라 나는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괜찮아요?” “거의 다 왔어. 저기 앞에 모퉁이만 돌면 돼.” “저기가 예전에 준혁 씨가 살았던 집이군요. 빨리 가 봐요~!!” “아, 자.. 잠깐..”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됐단 말이야!! 결국 유키의 손에 이끌려 모퉁이를 돌아 서자, 회색빛 담장 골목에 파란 대문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요? 집이 굉장히 크네요?” “여기는 주인아저씨네 집이고.. 정확히는 이 집 셋방살이를 했었지.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 건 뒤편의 작은 문으로 들어가야 했고..” 고개를 돌려보니 골목에 꼬맹이들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안개 속에~ 바람인가~ 검은 별, 검은 별, 검은 별~ 나타났다. 잡히고, 잡혔다가 사라지네~ 뒤를 쫓는 그림자는 명탐정, 명탐정, 바베크~ 정의는 이기지요. 힘을 내요 바베크~ 시계를 바라보니 오후 5시. 곧 있으면 모여라 꿈동산 시간인가?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에 희미한 기억을 떠올린 나는 조금 더 걸음을 옮겨 회색빛 담장에 설치된 조그만 철제문으로 향했다. 바로 여기가 우리 집이다. 현관문을 열면 바로 부엌이 있었고, 미닫이문을 열면 부모님과 함께 자던 비좁은 단칸방이 있었다. “지금도 누가 살나본데요?” 철제 현관에 설치된 유리 너머로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는 걸로 보아 사람이 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내가 궁금한 것은 과연 그게 우리 부모님이냐는 거지.. 그때 부엌 안에서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이 이 녀석 밥 때가 다 되가는데, 또 안 들어오네.. 해떨어지기 전에 돌아오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이건 분명 어머니 목소리였다. 그 순간 머릿속에 어머니와의 마지막 통화 내용이 떠올랐다. -우리 아들.. 여행 잘 다녀오렴..- 오랜만에 듣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잠시 동안 문 앞에 가만히 서서 창문 너머로 분주히 움직이는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덜덜 거리며 돌아가는 환풍기에서 된장찌개 냄새가 구수하게 풍겨오던 중. 어머니는 안 되겠는지 급하게 문을 열어젖히며 밖으로 나오셨다. “얘는 대체 또 어디로 간.. 어라? 누구세요?” 워낙 갑자기 일어난 돌발 상황에 나와 유키는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아.. 저기.. 집을 착각했나 보네요. 죄송합니다.” 나는 재빨리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린 후. 유키 손을 붙잡고 다시 골목을 돌아 나왔다. 유키 역시 놀랐는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아~ 깜짝이야. 갑자기 나오실 줄은 몰랐어요.” “그러게..” “어라? 준혁씨? 울어요?” “아니. 안 울어.” “눈이 빨간데?”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래.” “제가 호하고 불어줄까요?” “괜찮아.” 그때 골목 안쪽에서 나를 부르는 어머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어린 시절의 내가 어머니 말을 안 듣고 어디로 놀러나간 모양이었다. “준혁아~ 강준혁~” 애타게 내 이름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순간 ‘네’하고 달려 나갈 뻔했다. 그때 옆에 있던 유키가 묘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어라? 저 분 준혁씨 부르는 거 아녜요?” “아마 아들 이름이 나랑 같은가 보지..” “동명이인? 와~ 신기하다. 어떻게 어릴 적 살던 집에 똑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가 살 수 있죠?” “그러게.. 하하..” 나는 태연한 척 웃으며 애타게 나를 찾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뒤로했다. 어릴 때부터 밖에서 놀기를 좋아했던 나는 얌전히 집 앞에서 놀라는 어머니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친구들과 정신없이 놀다보면 어느새 해가 저버리고, 서둘러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께선 매타작 용도로 빗자루를 들고 계셨지.. 어린 준혁이는 오늘도 어머니에게 혼나겠구나.. 하지만 이렇게라도 잠시 어머니 얼굴을 보니 반가움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이 당시 내가 어디 가서 놀았더라..?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유키에게 물었다. “잠깐 몇 군데 들려 볼 데가 있는데. 괜찮아?” “네?” 사실 내가 한국에 온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중 첫 번째가 내가 살던 집에 찾아가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지 확인할 것. 그리고 만약 어린 시절의 나를 발견한다면 일본에서 준비해온 휴대용 겜보이를 건네줄 것. 두 번째 일정은 내일 오후에 따로 만나 볼 사람이 있었다. “네. 전 괜찮아요. 준혁씨도 오랜만에 찾아온 동네니 보고 싶은 게 많겠죠.” 유키는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내 의견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처음 와 본 한국에서 보고 싶은 것도 많을 텐데, 내 일정을 따라와 주는 그녀가 너무나 고맙게 느껴졌다.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이 시절 내가 놀러다니던 곳이 몇 군데 없거든..’ & 나는 우선 명신대 근처에 엄마손 떡볶이 집을 찾았다. 단돈 300원으로 배터지도록 떡볶이를 내어 주시는 이곳은 나중에 대를 걸쳐서 떡볶이를 팔아 근처에 건물을 세울 정도로 인기가 많은 곳이었다. 아주머니의 푸짐한 인심덕에 얼마 안 되는 돈으로도 배부르게 한 끼를 때울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어린 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뽀빠이 문방구인가?’ 다음으로 나는 떡볶이 집 근처에 있던 문방구를 찾았다. 어린 시절 장난감을 살만큼 부유한 편은 아니지만 새로 나온 장난감을 구경하러 자주 들리던 곳 중에 하나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쯤이었나? TV 애니메이션 ‘달려라 부메랑’으로 전국에 미니카 붐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타미야에서 나온 미니카가 갖고 싶어서 몇 일 동안 진열대 앞에서 물끄러미 미니카를 바라보았던 적도 있었는데.. 아마도 어린 시절에 나라면 이곳에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여기도 없네..” 진짜 만약에 아직까지 집에 돌아간 게 아니라면 어머니에게 엄청 두들겨 맞을 텐데 어쩌지? 이 시간이면 놀이터에서 같이 놀던 친구들도 다 헤어졌을 시간이고, 이 시기에 내가 가볼 만한 곳은 다 가봤는데? 또 어디가 있더라? 설마 친구네 집에 놀러갔나? 그때 내 옆을 지나가던 중학생 정도로 보이던 학생 하나가 친구와 나누던 대화가 유난히 내 귀에 박혔다. “너 트윈 드래곤 해봤냐? 명랑 오락실에 들어왔던데, 진짜 재밌더라.” ‘명랑.. 오락실?’ 문방구에선 좀 거리가 있었지만 어릴 때 부모님 몰래 자주 들락거리던 오락실을 떠올린 나는 긴 한숨과 함께 이마를 어루만졌다. 그러자 곁에 있던 유키가 나에게 물었다. “왜 그래요?” “그 녀석 어디 있는지 알거 같아..” “네? 그 녀석이라니.. 누구요?” “아무 것도 아냐.. 일단 가보자.” ‘정말 거기 있는 거라면, 나한테 좀 실망할거 같은데..’ 이미 해가 떨어진 터라 어두운 골목에 주황색 가로등이 켜지고 나는 급히 대로변을 지나 찻길을 건너 허름한 건물의 지하실로 들어섰다. “여긴 어디에요?” “응? 그게.. 한국식 게임 센터라고 할까나?” “이런 지하실에 게임 센터가 있다 구요?” ... 하긴 일본에서처럼 결코 깨끗한 환경이라고 볼 순 없지.. 그런데 내가 7살 때부터 오락실을 다녔었나? 설마 아니겠지. 아무리 어릴 때부터 게임에 미쳐 살았어도 7살은 너무 어리잖아. 지금쯤 집에서 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고 있을 거야.. 속으로 나 자신을 위로 하며 지하실 문을 열자, 매캐한 담배 냄새가 문틈을 비집고 풍겨 나왔다. 우와.. 어릴 땐 몰랐는데, 이거 완전 지하 던전이 따로 없네.. 나는 정신없이 들려오는 오락기의 BGM 속에서 어두컴컴한 오락실 안을 훓터 보았다. 다행이도 오락실 안에는 덩치 큰 중고생들뿐이라 어린 꼬맹이는 보이지 않았다. 역시 그럼 그렇지. 겨우 7살에 오락실은 무슨.. 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오락실 한 구석에서 ‘딱따구리’라는 액션 게임을 즐기고 있는 어린 꼬맹이 두 명이 보였다.. ‘설마.. 저거..’ 고개를 갸웃 거리며 가까이 다가가자, 비쩍 마른 꼬맹이 두 명이 레버를 붙잡고 신나게 버튼을 두들겨대고 있었다. 옆에 있는 녀석은 유치원 때 만난 용민이인가? 둘이 아주 잘들 논다.. 파란색과 빨간색 딱따구리는 주먹을 휘두르며 열심히 적들을 때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내 입에서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미치겠다. 여기 있네.. 야, 너희들!!” 꼬맹이 들은 BGM 소리에 묻혀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화면에 온 정신이 팔려있었다. 나는 잠시 동안 그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슬쩍 다가가 말했다. “너희 지금 몇 신 줄 아니?” “우악!! 깜짝이야. 아저씨 뭐예요!?” ──────────────────────────────────── ──────────────────────────────────── EP. 18 : 만트라 컴퓨터. (1) “너희 지금 몇 신 줄 아니?” “우악!! 깜짝이야. 아저씨 뭐예요!?” 마음 같아선 꿀밤이라도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뒤에서 유키가 보고 있었기에 나는 끓어오르는 속을 내리 누르며 입을 열었다. “너희 엄마가 보내서 왔다. 이놈아. 얼른 집에 안 들어가?” “진짜요!? 지금 몇 신데요? “벌써 밤이다..” “난 엄마한테 죽었다.” 어린 준혁이는 밤이라는 말에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같이 있던 용민이도 울상인 걸 보아 이 녀석들 게임에 정신 팔려 시간 가는 줄도 몰랐나보다. “용민아. 빨리 집에 가자!!” 준혁이는 옆에 있던 친구의 손을 붙잡고 서둘러 오락실을 출입구로 달렸다. 그리고 나와 유키 역시 그 녀석들을 따라 오락실을 빠져나왔다. “야!! 꼬맹아. 잠깐 기다려!!” 용민이와 함께 막 달려 나가던 어린 준혁이는 내 말에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러세요?” “이 돈으로 집에 갈 때 정육점에 들러서 고기 좀 사가라.” “아저씨 누구신데요? 우리 어머니가 모르는 사람한테 이런 거 받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괜찮으니까 받아. 대신 다른데 쓰지 말고, 꼭 집에 고기 사가. 집 근처에 엄마랑 가던 정육점 알지? 거기 가서 소고기로 구이용이랑 국거리용 따로 5만원 어치만 달라 그래.” “소고기.. 구이용이랑 국거리용.. 5만원..” 준혁이는 내 말을 기억하려는지 몇 번이나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그런 준혁이를 부러운 눈길로 보고 있는 용민이에게도 같은 금액의 돈을 쥐어 주며 심부름을 시켰다. “심부름 잘하면 아저씨가 내일 선물 줄 테니까. 약속 꼭 지키는 거다?” “선물이요?” “그래. 아저씨가 내일 너희 집 근처로 찾아갈 테니까. 내일 오후 5시에 너희 집 앞에 영남 슈퍼에서 보자.” 준혁이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경계했지만, 바로 집 앞에 있는 영남 슈퍼에서 보자는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둘 다 빨리 들어가 봐. 어머니 걱정하시겠다.” “네~!!” 개구쟁이 두 녀석은 두 손을 꼭 잡은 채 집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유키가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아는 아이들이에요? 무슨 이야기 하셨어요?” “아니.. 그냥 늦은 시간까지 오락 하지 말고 일찍 다니라고 했어. 왠지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준혁씨도 어릴 때 저랬어요?” “빼다 박았지..” 나는 멀어져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꼬르르륵.. 음? 이게 뭔 소리야?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유키가 내 시선을 피하며 중얼 거렸다. “사실 아침에 기내식 말고 아무 것도 먹은 게 없다보니.. 너무 배가 고파요..” 아차.. 너무 내 일에만 신경 쓰다 보니 식사도 제대로 못했구나. 집을 찾기 전까지 잔뜩 긴장한 탓에 배가 고픈 줄도 몰랐는데, 나 역시 급격하게 허기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미안. 내가 다른데 정신이 팔려서 신경을 못 썼네.. 배고팠으면 얘기하지..” “으음.. 뭐 한 끼 굶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요 뭐~ 근데 다리는 좀 아프네요.. 헤헤..” 내가 미안해하자, 조그만 혀를 쏙 내밀며 베실베실 웃어 보이는 유키의 미소가 지금 나에겐 큰 위안이 되고 있었다. “오늘 볼일은 다 끝났으니 우리도 저녁 먹고 호텔로 이동하자.” “네에~ 근데 뭐 먹어요. 우리?” “글쎄..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이 근처라면 준혁씨가 잘 알지 않아요?” “음.. 나도 너무 오랜만에 와봐서 뭐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럼 준혁씨가 어릴 때 자주 먹던 걸로~” “내가.. 자주 먹던 것?” 하긴.. 그렇게 말하니 그게 먹고 싶긴 한데.. 힘들게 고생하며 따라 다닌 유키에게 너무 초라하진 않을까? & “여기 떡꼬치 먼저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흰 반점이 섞여 있는 녹색 플라스틱 접시 위에 빨간 양념이 묻은 떡꼬치 5개가 올라왔다. 꼬치하나당 200원.. 다해서 천원이다. 이 녀석이 바로 어릴 적에 등장해 간식 계에 지각 변동을 일으켰던 요물 ‘떡꼬치’였다. 유키는 무지하게 배가 고팠으면서도, 방금 나온 따끈따끈한 떡꼬치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이 음식은 이름이 뭐예요?” “떡꼬치. 꼬치에 떡을 꽂아서 기름에 튀긴 다음 양념을 바른 거야.” “아.. 이거 매워요?” “아니 그냥 매콤한 정도?” “흐음..” 새빨간 양념장에 긴장한 유키는 잠시 후 꼬치에서 떡 하나를 빼물더니, 굉장히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후와.. 마.. 맛있어~!! 겉은 바삭한데 속은 쫄깃해요. 양념도 맵지 않고~!!” “그렇지?” 헌데 200원짜리 떡꼬치 하나에 너무 과분한 반응 아닌가? 그때 분식집 아주머니께서 쟁반에 음식들을 담아 가져오셨다. “꼬마김밥이랑 떡볶이 나왔어요. 그리고 이건 서비스인 오뎅 국물~” 테이블은 금세 여러 가지 음식들로 가득 찼지만, 모두 합친 금액은 3천원 정도? 나 때문에 한국까지 와서 하루 종일 고생한 유키에게 대접하기엔 너무 미안한 금액이었다. 맛이야 있긴 하지만.. “준혁씨 이 떡볶이라는 건 많이 매울 것 같은데요.” “그래도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이야. 너무 매우면 거기 오뎅 국물에 씻어 먹어도 돼..” “흐음..” 잠시 고민 하던 유키는 포크로 떡볶이 하나를 집어 살짝 입에 대어보았다. “꽤나 맵지만, 이것도 맛있어요.” 포크를 든 채로 유키는 만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는 떡볶이 국물이 쫄지 않게 계속 해서 젓고 있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옛 추억을 떠올렸다. &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계산 후에 나를 향해 방긋 웃는 아주머니를 바라보던 나는 유키를 먼저 내보낸 뒤 아주머니를 불렀다. “손님 계산이 잘 못 됐나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아주머니.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병원에 한번 가보시는 게 좋겠어요.” “네? 병원이요? 저 건강한데?” “실은 제가 의과대 출신인데요. 아주머니 안색을 보니 몸이 안 좋아 보여서요.” “제가요?” “가게 일이 바쁘시겠지만, 제 말 흘려듣지 마시고 꼭 병원에 가보세요.” “아.. 네. 그럴게요..” “그럼 떡볶이 잘 먹었습니다..” 어릴 때 내가 자주 들렀던 이곳은 매콤한 떡볶이 국물과 친절한 주인아주머니 덕에 장사가 매우 잘됐다. 눈이오나 비가 오나 쉬지 않고 일하시던 아주머니는 91년도에 어린 내 눈앞에서 갑자기 쓰러지셨다. 다행히 일찍 병원에 옮겨 정신을 차리셨지만, 간암 말기 판정으로 얼마 후 세상을 뜨셨다. 어릴 적 나에게 있어 매일 같이 보아오던 아주머니의 죽음은 큰 충격으로 남았었기에 이번 한국에 오면 꼭 아주머니를 만나 뵙고 이 말을 전하고 싶었다. 다행히 지금은 1988년이니 병원에 가서 조기 검진을 받으시면 분명 치료할 수 있으시겠지.. 분식집을 나온 나는 저녁의 찬바람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유키에게로 달렸다. & 다음 날.. 호텔 침대 위에서 부스스 눈을 뜬 나는 내리 쬐는 햇살에 눈 깜박이며 고개를 돌렸다. 유키 역시 많이 피곤했는지 내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혹시나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는 장면이긴 하지만, 어제 나와 유키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다. 어제 저녁. 나 역시 하루 종일 걸어 다니다보니 곧바로 호텔에서 쉬고 싶었지만, 낮과는 전혀 다른 화려한 명동의 밤거리에 시선을 빼앗긴 유키의 호기심 어린 표정에 지고 말았다. 길거리 노점 중에 한겨울의 별미인 붕어빵을 본 유키는 일본에 ‘타이야키’와 똑같이 생겼다며 매우 좋아라했고, 결국 밤 늦게까지 명동 거리를 구경한 그녀는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먼저 씻고는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나는 유키가 깨지 않도록 살짝 침대를 빠져나와 세면실로 향했다. 잠시 후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내며 나오니 유키는 이불로 몸을 감싼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치가 굉장히 좋네요. 저기 산위에 있는 탑이 남산 타워라는 거죠?” 서울 수도권 지역에 TV방송과 라디오 방송을 송출하는 전파탑이면서 동시에 전망대를 겸하는 남산 타워는 민영 방송국 3사의 협력으로 1975년에 세워졌다. 1980년부터 일반인에게 공개 되어 서울의 관광명소가 되었는데, 사실 나도 이 시기에 남산 타워는 올라본 기억이 없던 터라 그런지 문득 80년대의 서울 야경이 궁금해졌다. “오늘 일찍 일을 마치면 한번 올라가 볼까? 그래도 위에서 보는 야경이 제법 볼만 할걸?” “정말요? 음~ 준혁씨 일이 빨리 끝나면요. 괜히 저 때문에 일 제대로 못 보는 건 싫으니까.” “걱정 마. 오늘은 어제처럼 많이 돌아다니진 않을 거거든.” “그럼 저도 씻고 나올게요.” 유키는 잠옷 바람이 창피한지 이불을 돌돌 말은 채 그대로 세면실로 향했다. 유키가 씻을 동안 옷을 갈아입은 나는 테라스에서 담배 한 대를 태우며 혹시 잊은 물건은 없는지 가방을 살펴보았다. 묵직한 가방 안에는 어린 준혁이에게 건네줄 휴대용 겜보이와 특별한 메시지가 담긴 카트리지 하나가 담겨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의 나에게 줄 선물로 게임을 만들 줄이야.” 나는 준혁이에게 건네줄 게임 카트리지를 바라보니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녀석이라면 좋아해주겠지.” “준혁씨~ 테라스에 있어요?” “아, 다 씻었어?” “잠깐!! 나 옷 갈아입을 테니까 춥겠지만 잠깐 거기 계세요.” ... 제길 모른 척 그냥 들어가 버릴 걸. ──────────────────────────────────── ──────────────────────────────────── EP. 18 : 만트라 컴퓨터. (2) & 호텔에서 조식을 마치고 택시에 오른 우리는 다시 명신대 근처로 향했다. 쾌청한 날씨 속에 광화문의 넓은 대로를 통과하자, 현재는 국립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과거 조선 총독부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철거될 건물이었기에 나 역시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건물이었다. 그 당시 본래는 부분 부분을 떼어내 철거할 예정이었지만, 자신들이 지은 건물이니 통째로 옮기고 싶다는 일본의 요청에 다음날 김영삼 대통령은 대회의실을 비롯해 조선 총독부 건물 자체를 폭파 시키는 영상을 전 세계로 송출했다. 일본인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고 폭탄발언을 날렸던 김영삼 대통령은 IMF사태로 국가 부도의 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이긴 하지만, 저 건물을 없앤 것만큼은 탁월한 선택이라 생각한다. 그때 나와 함께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유키는 과거 일제시대의 잔재에 서둘러 눈을 돌렸다. “지금은 저 건물이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죠?” “응.. 저 건물 뒤는 조선 시대의 왕이 살았던 궁이고..” “어떻게.. 한 나라의 왕이 기거 하는 곳 앞에 저런 건물 세웠는지. 같은 일본인으로서 부끄럽네요.” “…….” “부모님께 준혁씨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일본이 한국에 큰 실례를 범했다고, 아마도 그건 한국이란 나라에 평생을 사죄해도 모자랄 만큼 큰 죄이기에 준혁씨를 만날 때도 꼭 그 걸 기억해 두라고 당부하셨거든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다니. 유키네 부모님은 상당히 깨어있는 분이시구나.” “사실.. 준혁씨에게 아직 말을 안했는데. 저희 어머니가 한국분이시거든요.” “진짜?” “네. 아버지도 그래서 어머니와 결혼하시면서 가족들과 의절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저희 아버지는 준혁씨 이야기만 들어도 굉장히 좋아하세요.” ... 나도 모르는 새에 유키 아버님에게 점수를 따고 있었군.. 그런데 유키가 올해로 20살이고 거기다 언니까지 있다고 했으니, 지금으로부터 23~4년 전이면 그 당시 한국인과 결혼한다는 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유키네 아버님이 가족과 의절했다는 게 자연스럽게 이해가 될 정도였다. 유키 아버님도 정말 대단하시구나.. & 잠시 후. 택시 기사님께서 내려준 곳은 명신대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대로변 이었다. 이대로 쭉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어린 시절 가끔 오르내리던 백련 산이 있었다. 하지만 추억 여행은 어제로 끝이 났으니, 백련 산을 보러온 건 아니고.. 택시에서 내린 다는 묵직한 가방을 한쪽 어깨에 둘러매었다. “그런 뭐예요?” “이거? 흠.. 장사도구?” “네? 장사요?” 사실 이 시기에 한국 땅에서 내 인맥이란 손톱만큼도 없었다. 아직까지 한국은 ‘게임’에 대해선 걸음마 수준인 단계였으니까. 물론 S기업을 통해 정식 라이센스를 받은 NEGA 디스크가 겜돌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었지만, 대중적으로 알려진 건 오히려 민텐도의 패밀리였다. ... 아니지. 민텐도 패밀리의 기판을 복제해서 만든 가짜 오락기가 강세였다고 해야 하나? 사실 대만에서 만들어낸 짝퉁 패밀리는 어떻게 보면 진짜 패밀리보다 훨씬 더 튼튼한 부분도 있었다. 차후 한국에서 만드는 제대로 된 게임이라면 아마도 94년에 들어서 솜놀이에서 만든 ‘어크토니시아 스토리’라던가 미래내 소프트에서 만든 ‘피와 기티’, ‘프린세스 메이크’을 정식 출시했던 만트라가 있었다. 특히나 만트라는 일본의 칼콤사에서 이스 시리즈의 라이센스를 취득해 국산 게임 형태로 리메이크한 ‘이스 2 스페셜’로 큰 인기를 끌었다. 원작 시나리오를 재구성해 오리지널 스토리를 만들어 낸 ‘이스 2 스페셜’은 한국 게임 산업에 길이 남을 명작이자 망작으로 기억되는데.. 왜 ‘망작’이냐고 기억하냐면 아마추어 개발자들의 경험 부족으로 진행 불가능 버그를 해결하지 못한 채 출시해 버렸기 때문이다. (차후 패치를 계속 내어 엔딩을 볼 수 있었지만 통신 환경이 불안정 했던 탓에 패치를 완료해서 엔딩을 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더구나 이 게임엔 골 때리는 이벤트가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한국의 ‘단군신화’를 접목시켜 무려 ‘단군의 검’이라는 아이템도 습득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만트라 라는 게임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거냐고? 사실 지금 만나러 가는 사람이 바로 그 만트라의 창립 멤버 중에 하나가 될 사람이거든.. 유키와 함께 명신대 근처의 상점가에 들어서자 옛 기억에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PC 판매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만트라 컴퓨터- 여기가 바로 드래곤 워리어4의 공략집까지 뽑아 주시며 나를 게임의 길로 인도한 아저씨네 가게다. 조그만 구멍가게나 다름없는 이 가게는 별다른 인테리어도 없이 쇼윈도에 패밀리용 카트리지 몇 개만 놓아둔 상태였다. 그때 쇼윈도를 들여다 보던 유키가 흥분한 목소리로 나에게 외쳤다. “준혁씨 여기도 드래곤 엠블렘이 있어요!!” 헐.. 진짜네. 쇼윈도 한구석에 진열된 드래곤 엠블렘은 일본 희귀품이라는 네임 텍 아래 무려 10만원이라는 금액이 적혀있었다. 뭐 일본에 중고샵에서도 현재 그 정도 금액으로 판매중이긴 하지만, ‘0’이 하나 더 붙으니 엄청 비싸 보이긴 하네.. 나는 한국 땅에서 만난 드래곤 엠블렘을 잠시 바라본 후에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걸걸한 목소리와 함께 가게 안에 커튼을 열어젖히며 30대 중반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만트라 컴퓨터는 절반은 게임 가게이면서 절반은 아저씨의 작업실로 이용 중이었다. 식사 중이셨는지 가게 안에는 자장면 냄새가 가득했는데, 가게 안에서 담배도 태우시는지 홀아비 향기와 자장면 냄새가 끔찍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패밀리용 게임을 좀 팔고 싶어서 왔는데요.” “아.. 그러세요? 지금 막 오픈해서 현금이 많지는 않은데, 일단 좀 볼까요?” 묵직한 가방을 풀어 탁자 위에 올리자, 쿠웅 소리가 좁은 가게 안에 울렸다. “... 얼마나 가져 오셨길래..” “서른 개 정도?” “서른 개 나요? 이거 참.. 곤란한데. 전부 매입 할 수나 있을지..” “한번 물건을 보시고 고려해주세요.” “그러도록 하죠.” 나는 아저씨의 깜짝 놀랄 표정을 기대하며 가방 안에서 카트리지 하나를 꺼내 보였다. 그것은 일본에서 알 팩으로 판매된 것과는 다르게 검은 종이 패키지로 포장까지 되어 있는 드래곤 엠블렘이었다. 무심결에 나에게 카트리지를 받아든 아저씨는 잠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는지 두 눈을 꿈벅거리며 패키지를 살폈다. “드래곤 엠블렘? 그런데 이건?” 익숙한 드래곤 엠블렘의 로고에 이토록 아저씨가 놀라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이거 한글판이거든.. ──────────────────────────────────── ──────────────────────────────────── EP. 18 : 만트라 컴퓨터. (3) “드래곤 엠블렘? 그런데 이건?” 익숙한 드래곤 엠블렘의 로고에 이토록 아저씨가 놀라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이거 한글판이거든.. “이거? 정말 패키지에 적힌 대로 한글판인가요?” “의심되시면 한번 틀어보세요.” 주인아저씨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가게 한켠에 마련된 패밀리에 카트리지를 꽂았다. 유키는 내 가방에서 나온 드래곤 엠블렘 카트리지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TV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익숙한 타이틀 로고 밑에 한글로 적혀 있는 드래곤 엠블렘이라는 문구를 보자 아저씨는 기절 할 듯 놀라며 외쳤다. “하.. 한글이다!! 한글이야~!! 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어린 아이처럼 방방 뛰며 좋아라하는 아저씨의 모습에 나 역시 어린 시절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이 아저씨 덕분에 드래곤 워리어 시리즈의 진정한 재미를 알게 되었고, 차후에 자신이 만든 게임이라며 공짜로 주신 ‘이스 2 스페셜’ 뛸 듯이 기뻐한 적이 있었다. (물론 플레이 도중 버그 때문에 몇 번이나 찾아갔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나를 이용해 공짜로 베타 테스트를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드래곤 엠블렘의 제작자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국어로 내주지 않은 것에 대해 조금 서운한 마음이 있었는데, 이렇게라도 한글화된 드래곤 엠블렘을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롭네요. 헌데 한글화 작업은 직접 하신 겁니까?” “물론이죠..” 나는 아저씨의 말에 대답하며 잠시 유키를 한번 바라본 후 천천히 말을 이었다. “드래곤 엠블렘은 제가 만들었으니까요.” 하지만 내 대답에 가장 먼저 반응 한 것은 주인아저씨가 아닌 유키였다. 아무래도 한국어를 공부한 덕에 어느 정도 짧은 문장은 해석이 가능했던 모양이었다. “뭐라구요!!??” “준혁씨가 드래곤 엠블렘을 만들었다니 진짜에요?” “응. 사실이야. 그동안 숨겨서 미안..” “그럼 그때 행사장에서 한 번에 게임을 클리어 한 것도..?” “뭐.. 레벨 디자인을 내가 한 거니까 어떻게든 클리어 할 수 있었지.” “맙소사..” 유키는 말문이 막혔는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주인 아저씨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당신이 드래곤 엠블렘을 만든 개발자란 말입니까?” “소개가 늦었네요. 강준혁이라고 합니다. 현재는 민텐도 소속 직원이구요. 최근에 낸 게임은..” “설마 사이킥 배틀..?” “네. 맞아요. 잘 알고 계시네요.” “그럼 알고 말구요!! 민텐도 소속의 한국인 개발자가 만든 게임이라 길래 일본까지 가서 힘들게 구입해 온 타이틀인데!! 오~ 맙소사.. 그런 사람이 어떻게 우리 가게를.. 가만 내가 이럴게 아니라 어디 보자 싸인 펜이..” 아저씨는 흥분 된 목소리로 주변을 살피며 펜과 종이 찾기 시작했다. “저기.. 그렇게까지 안하셔도 되는데..” “혹시 그 안에 들어 있는 서른 개의 카트리지가 전부 드래곤 엠블렘입니까?” “네.. 사이킥 배틀은 민텐도 게임이라 한글화 작업이 어려워서요.” “크으~ 그렇군요. 조금 아쉽지만, 드래곤 엠블렘이 한글화 된 것만으로도 큰 축복이랄지.. 그런데 이것도 설마 캐릭터 삭제 시스템이..?” “물론 들어가 있지만, 자체 카트리지만으로 데이터 복구가 가능한 새로운 모델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매입을 해야 할지.” “사실 사장님을 찾아온 건 중고 매입 거래를 위해서가 아니에요.” “그럼..?” “사장님. 혹시 국내 최초로 게임 퍼블리싱을 해볼 생각 없으세요?” “퍼블..? 뭐라구요?” & 내 계획은 간단했다. 우선은 어린 시절 그나마 연이 닿아 있는 만트라 컴퓨터의 가게 사장님과 함께 국내 최초의 게임 퍼블리싱 사업을 벌인다. 퍼블리싱이란 해외에 발매된 게임을 현지화 작업을 거쳐 국내용으로 재판매하는 유통 구조였는데, 현 시대에 한국은 게임 개발은커녕 보따리 장사꾼이 너무 많아 게임 산업이 지지부진 하던 시기였다. 한국의 게이머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일본어를 공략 집과 대조해 가며 플레이할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사정이 조금 나은 거라면 영문판 게임을 즐기는 정도랄까? 적어도 슈퍼 패밀리 시대가 와서야 ‘태권도’ 라던가 드래곤볼 초무투전 3같은 한글 자막 게임이 최초로 등장했으니, 드래곤 엠블렘 한글판에 감격스러워 하는 아저씨의 반응이 결코 과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준혁씨 말은 일본에서 나오는 게임을 한글화 하여 정식 유통하는 사업을 함께 하자는 말인가요?” “네, 맞아요.” 사실 이 아이디어는 내가 먼저가 아니라 1991년에 아저씨가 먼저 생각해낸 사업 구도였다. 당시 프로그래머 동호회 수준이었던 팀 만트라의 아마추어 개발자들이 일본의 카이낙스에서 출시한 ‘프린세스 메이크’라는 게임의 라이센스를 정식으로 얻어 한글화하는 업적을 세웠다. “사실 준혁씨 만큼 뛰어나진 않지만,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아는 동생들이 있습니다.” 네. 사실 그들을 노리고 찾아왔습니다. 나는 속으로 빙긋 웃으며 잠자코 아저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유키 역시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분위기를 읽었는지 조용히 날 기다려 주었다. “솔직히 제안해주신 사업이 솔깃하긴 한데, 걱정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어떤 점이 걱정되시나요?” “우선은 한국 시장이 문제죠. 시장 자체가 너무 열악한 환경이라 한글화 한다고 해도 기대만큼 판매량이 나올지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 점은 저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 저희 쪽에 선뜻 라이센스를 대어줄 소프트 회사가 있을까요?” “적어도 한군데는 있어요.” “웬만한 메이져 급이 아니면 쉽지 않을 텐데, 거기가 어딥니까?” “펜타곤 소프트입니다.” “설마, 파이널 프론티어를 만든 펜타곤 소프트 말인가요?” “네. 맞아요.” “에이~ 농담이 심하시네요. 일본과 미국에서 150만장을 팔아치운 소프트 회사가 뭐가 아쉬워서 천개도 팔릴까 말까한 한국에 라이센스를 대줍니까?” “제가 펜타곤 소프트의 높은 분과 좀 알고 지내는 사이거든요.”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 해도 그렇게까지 지원을 해주진 않을..” 하지만 중간에 내 미소를 눈치 챈 아저씨는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나에게 되물었다. “혹시 사장이라도 알고 계세요?” “뭐 비슷해요.” 실은 내가 사장이지만.. 유키는 우리 대화를 잘 알아듣지 못했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와 주인아저씨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주인아저씨의 표정은 이제 놀람을 넘어서 두려움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업 자금 역시 걱정 하시 않으셔도 됩니다. 어느 정도 인지도를 얻을 때까지 충분히 지원해 드릴 수 있으니까요.” “이거 참. 어젯밤 돌아가신 아버지가 꿈에서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 하시더니, 이런 홍두깨 같은 일이 있나..” 이후의 대화는 순조로웠다. 아저씨는 최대한 자신이 알고 있는 개발자와 일어 능력자를 모집한 뒤 나에게 따로 연락을 주기로 하였다. “만약에 일이 잘 풀린다면 펜타곤 소프트 말고 다른 회사와도 계약을 진행 할 수 있겠죠? 예를 들어 피닉스사의 드래곤 워리어 시리즈라던가, 칼콤사의 이스 시리즈라던가..” “물론 못할 것도 없지요.” 돈만 쥐어 줘봐라. 안되는 게 어디 있나. 세상만사 돈이 문제지.. 기대 수익 이상의 라이센스 비용을 준다고 하면 아마 너도 나도 달려들 것이다. 물론 돈 꽤나 깨질 사업이긴 하지만,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나는 실현해보고 싶었다. 어린 시절 내가 즐겨본 수많은 명작들의 한글화 프로젝트를.. 어쩌면 나의 이 작은 행동 하나로 미래의 게임 업계가 뒤집어 질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럼, 이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새로운 시작은 설레임과 함께 불안감을 동반 하는 법. 아저씨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사실 아저씨가 동료들과 만든 만트라 소프트는 1998년. 한국 유저들의 불법 복제로 인해 프린세스 메이크 3 출시를 끝으로 게임 업계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최후에는 자금 회수를 위해 게임 잡지에 부록까지 실었지만 끝내 위기를 이겨 내지 못하고 부도가 난 것이다. 좋은 게임은 분명 유저들도 알아볼 것이라던 아저씨의 희망은 몇 번의 좌절 끝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고.. 그후론 나도 아저씨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나는 잠시 아저씨의 얼굴을 살피다가 입을 떼었다. “혹시 현재 한국에도 게임 전문 잡지가 있나요?” “아뇨.. PC 잡지라면 있지만 아직 게임 전문 잡지는..” 하긴 내가 알기로도 국내 최초의 게임 잡지는 90년도부터 나왔던 걸로 알고 있으니, 아직은 시기가 이르긴 하지.. 하지만 올바른 정보를 유저에게 전해주는 것이야 말로 이 시대의 정보 매체가 해야 할 일이니까. 우선은 거기서부터 시작하자.. ──────────────────────────────────── ──────────────────────────────────── EP. 18 : 만트라 컴퓨터. (4) & “그렇다면 저희가 최초로 게임 전문 잡지를 만들어 보죠.” “그럼 방금 전에 말씀하신 퍼플리싱이 아닌 출판 사업을 먼저 하자는 말씀인가요?” “아니요. 둘 다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선은 게임에 대한 인식 자체를 바꿔야 해요. 솔직히 까놓고 사장님도 PC를 판매할 때 공짜로 게임 깔아 드리죠?” “어, 그게.. 창피하지만 그렇습니다. 그거라도 안 해주면 아예 팔리질 않으니까요.”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가 되는 거예요. 반대로 게임기 산다고, 카트리지를 공짜로 주진 않잖아요. 결국엔 인식이 중요한 겁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장사를 해보시면 알겠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소비자들에게 올바른 게임 구매에 대한 인식을 심어 줘야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사장님의 만트라 컴퓨터를 잠시 접어야 하겠지요.” “허.. 그거 참.. 하루아침에 업종을 바꿔야하다니..” “대체 언제까지 공짜 게임이나 깔아주며 소비자 비위를 맞춰 주실 겁니까? 차라리 저와 함께 한국 게이머들의 꿈을 위한 사업을 시작하는 건 어떠세요?” 이거 내뱉고 나니 애플의 스티븐 잡스가 펩시콜라 부사장에게 한말이랑 얼추 비슷하잖아? 하지만, 만트라 컴퓨터 사장님의 표정을 보니 내 말에 깊은 감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크흑.. 게이머들의 꿈이라니.. 좋아요. 준혁씨처럼 실력이 좋은 개발자가 함께해주신다면 못해볼 것도 없지요. 그런데 게임 전문 잡지라니 뭐부터 시작해야할지 감이 잡히질 않네요.” “게임 잡지라고 특별한 건 없어요. 혹시 일본의 패미통신이라는 게임 잡지를 아시나요?” “아, 그거야 물론 알고 있죠.” “최대한 그것과 비슷하게, 신작 출시에 대한 정보와 출시된 게임의 리뷰와 공략. 그리고 게임 업계 소식을 위주로 다루면 됩니다. 만트라 컴퓨터는 이제부터 패밀리 게임 퍼블리싱과 함께 대한민국 최초의 게임 전문 잡지 회사로 거듭나게 될 겁니다.” “그런데, 이 만큼 사업을 벌이려면 그래도 초기 자금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출판업 종사자들이나, 게임 리뷰를 위해 일본어가 가능한 직원들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거기다 출판 인쇄를 위한 시설도 필요할 테고..” “다음 주 일본으로 돌아가면 초기 사업 자금으로 천만 원을 송금해드리겠습니다. 우선은 그 돈으로 새로운 사무실과 출판에 필요한 설비를 갖추세요.” “천만 원씩이나? 그렇게 쉽게? 대체 저의 무얼 믿고 그렇게 큰돈을 맡기신단 말입니까? 제가 그 돈을 들고 사라지면 어쩌시려고..?” “더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고작 천만 원 때문에 버리신다면, 사장님은 고작 천.만.원짜리 인간일 뿐이죠. 시간이 걸리겠지만, 저는 다른 사람과 얼마든지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또박또박 내뱉는 나의 말에 사장님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조금은 강압적으로 들리셨겠지만, 사실 어린 시절 제가 알고 지내던 아저씨의 인성을 믿습니다. 사업이 힘들었을 때 모두 회사를 떠나도 아저씨는 혼자 꿋꿋이 남아 계셨잖아요.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런 일 없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출판업을 시작한다면, 초반에 독자들의 이목을 확 끌어당길 만한 아이템이 필요할 텐데. PC 잡지에도 창간호 때 발행 부수를 늘리기 위한 사은 행사를 하잖아요.” “사장님은 이미 충분한 레어 아이템을 가지고 계시잖아요.” “네? 저한테요? 우리 가게 물건 중에 그만한 아이템은 없는데..” “아뇨. 방금 제가 전해 드렸잖아요.”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드래곤 엠블렘을 가리키며 슬쩍 웃어보였다. “저걸..?” “창간호부터 6개월간 응모권을 넣어서 추첨 방식으로 드리는 겁니다. 수량은 매달 30개씩.” “아~ 확실히 드래곤 엠블렘이라면 게이머들의 이목을 끌만하죠. 거기다 한글판이니..” “6개월 이후에는 파이널 프론티어 1의 한글판을 보게 되실 겁니다.” 확신에 찬 나의 목소리에 만트라 컴퓨터의 사장님은 내 두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준혁씨..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오후 4시. 새로운 사업 구상에 대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사장님과 대화한 나는 잠시 유키를 만트라 컴퓨터에 두고 어린 준혁이를 만나기 위해 영남 슈퍼를 찾았다. 드르륵. 유리로 되어있는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비좁은 슈퍼 안에는 갖가지 과자 봉지가 즐비했다. 개중에는 2015년까지 장수할 녀석들도 눈에 보였다. 새우킹이라던가 감자킹.. 가끔 우유를 부어 먹던 인디언들의 밥. 바나나 펀치가 그런 것들이었다. 물론 기억에서 사라졌다가 오랜만에 만난 녀석들도 있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게 최고지..’ 나는 가게 한 쪽에 줄줄이 쌓여있는 어린이 종합 선물 상자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저기요~” 아무도 없는 카운터에서 주인을 부르자, 가게와 함께 이어진 방 안에서 아주머니가 나오셨다. “어서 오세요.” “어린이 종합 선물 세트 6호로 주세요.” 나는 선물 세트 중에 가장 커다란 녀석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보통 선물 세트가 2~3천원이었던 것에 비해 무려 5천원이었던 녀석은 다들 선물 세트보다 구성이 다양한 편이었다. ‘내가 좋아했던 걸 고르니 선물하기도 편하네.’ 영남이네 아주머니는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웃으며 선물 세트 하나를 꺼내 들었다. “다른 건 더 필요하신 거 없으세요?” “아.. 그리고 스팸 세트 있나요?” “물론 있죠~” “그것도 제일 큰 걸로 하나 주세요.” 1년에 한번 먹을까 말까 싶었던 스팸 세트는 당시에도 굉장히 비싼 편이라 잘 사먹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이 정도면 아버지 도시락 반찬으로도 충분하시겠지. 계산을 위에 지갑을 꺼내들고 있는데 방안에서 꼬마 여자아이 하나가 쪼르르 달려 나오더니 대뜸 치토스 한 봉지를 집어 들었다. “영남이 너. 엄마가 가게 물건 함부로 손대지 말랬지!!” “아까 먹은 치토스에서 ‘당첨!! 한봉지 더’ 나왔단 말야~” 그게 슈퍼집 딸내미인 너한테도 통용이 되는 거였냐..? 쿨하게 자기 엄마에게 치토스의 보너스 카드를 내미는 이 녀석이 바로 내 어린 시절의 천적 ‘조영남’이었다. 여자아이지만 워낙에 강골이라 함부로 덤비면 위험하다. 가수 조영남이랑 이름이 같다고 놀렸다간 지구 끝까지 쫓아와 주먹을 날렸으니까. ‘여전하네..’ 나는 오랜만에 만난 꼬마 아가씨 영남이를 바라보며 빙긋 웃음을 지었다. 잠시 후. 계산을 마친 나는 가게 앞에 설치된 평상에 앉아 준혁이에게 줄 선물 세트의 포장지를 조심스레 뜯어냈다. 그리곤 미리 준비해 두었던 휴대용 겜보이를 과자들 틈사이로 집어넣었다. 꼼꼼히 재 포장을 마친 나는 이어서 스팸 선물 세트 안에 돈 봉투와 함께 부모님께 드릴 편지 한통을 넣어두었다. 그때 건너편에 작은 현관문이 끼익하고 열리더니 준혁이 얼굴이 빼꼼 튀어 나왔다. “어? 아저씨 진짜 왔네요?” “약속했잖아. 그런데 너 어제 아저씨랑 한 약속은 지켰냐?” “물론이죠. 소고기 구이용 3만원어치랑 국거리용 2만원어치. 그런데 어디서 난거냐고 엄마한테 혼났어요.” 하하.. 아들이 대뜸 소고기를 5만원 어치를 들고 나타났으니. 의심많은 우리 어머니라면 그럴 만도 하시지. 나는 시무룩한 표정의 준혁이를 향해 손짓했다. “잘했다. 약속대로 선물이야.” “어린이 종합세트다!! 그것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6호!!” “그리고 이 스팸은 어머니 가져다 드리고..” “고맙습니다. 그런데 아저씨는 누구세요? 어제 엄마한테 물어봤더니 그런 사람 보낸 적 없다고 하시던데..” “음.. 그냥 먼 친척이야.” “아.. 그럼 엄마한테 이거 친척 아저씨가 줬다고 하면 되나요?” “그래. 그럼 아저씬 이제 가볼게.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라.” “어? 벌써 가시게요? 우리 엄마 집에 계신데..” “괜찮아. 그럼 건강히 잘 지내라.” 영문을 모른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준혁이의 몇 번 쓰다듬어준 나는 유키가 기다리고 있을 만트라 컴퓨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 에고, 만트라 사장님이랑 사업 얘기만 하다 보니 오늘도 점심을 건너뛰었네. 한국에 온 유키에게 제대로 식사 대접도 못해준 게 마음에 걸린 나는 서둘러 만트라 컴퓨터 문을 열어젖혔다. “미안. 유키 배 많이 고프지?” “아.. 준혁씨 오셨어요?” 만트라 사장님과 함께 앉아 있던 유키는 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밝게 웃는 그녀의 입 주위에 검은 자장면 소스가 군데군데 묻어나 있었다. “사장님이 시켜 주셨는데, 이거 엄청 맛있는데요!? 이름이 뭐더라.. 자잔묜이랬나? 준혁씨도 먹어 본적 있어요?” “어이쿠,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아가씨가 배고픈 거 같아서 시키는 김에 같이 시켰는데, 한 그릇 더 시킬까요?” 어제는 동네 분식에 오늘은 중국 요리라니.. 맛있다니 다행이긴 하다만,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 ──────────────────────────────────── EP. 19 : -미연시 프로젝트- 내가 없는 거리. (1) 어제는 동네 분식에 오늘은 중국 요리라니.. 맛있다니 다행이긴 하다만,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유키를 바라보았다. “아저씨 차라리 탕수육까지 시키고, 군만두 서비스로 달라하세요.” 마침 배가 고팠던 터라 나는 사양치 않고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중국집 배달부가 자장면 한 그릇과 탕수육을 싣고 가게 문을 두드렸다. “신기해. 전화 한통에 음식을 배달해주다니..” 배달 음식을 처음 본 유키는 배달부의 철가방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윽고 테이블 위에 탕수육이라는 또 다른 음식이 올라오자, 자장면 그릇을 손에 든 유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사장님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자장면 까지 얻어먹고 있던 거야?” “그냥.. 배를 쓰다듬으면서 불쌍한 표정을 지으니 시켜주셨어요. 이렇게?” 아랫입술을 삐쭉 내밀며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그만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사장님이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 저런 눈으로 저를 계속 바라보는데, 안 시켜 드릴수가 없던데요.” 진짜 어디 내놔도 굶고 다니진 않겠네.. 그때였다. 뜨거운 탕수육 소스의 비닐을 벗겨낸 사장 아저씨는 나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그대로 소스를 탕수육에 들이 붓는게 아닌가!! 으악!! 바삭한 튀김 요리에 뜨거운 소스를 들이 부어 버리다니!! 이건 튀김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하지만 부어먹기의 진수를 보여주신 아저씨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역시 탕수육 소스는 부어 먹어야 제 맛이죠.” 그 순간 나는 아직 소스가 묻지 않은 녀석들을 다른 그릇으로 재빨리 구출해 내었다. “흠!?” 나의 빠른 행동에 흠칫 놀란 사장님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우린 지금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사람 안 되겠네..’ “와.. 이건 무슨 음식이에요?” 묘한 긴장감 속에서 유키는 소스가 묻어 난 탕수육 하나를 입에 물더니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젓가락을 든 손을 부들거리며 말했다. “준혁씨. 한국에는 맛있는 음식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방금 아가씨가 맛있다고 한 거죠? 그 봐요~ 탕수육을 부어먹는 게 최고라니깐~” 아뇨. 전 그 말에 절대 동의 할 수 없습니다. & 잠시 후. 사장님에게 저녁까지 얻어먹고 가게를 나오니 밖에는 벌써 짙은 어둠이 내려 앉아 있었다. “그럼 일본에 돌아가 연락드리겠습니다. 건네 드린 드래곤 엠블렘은 당분간 사은품으로만 운용해주세요.” “네, 잘 알겠습니다.” 사장님은 우리가 택시에 오를 때까지 가게 앞에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 배부르다. 그런데 어디 다녀오신 거예요?” “음, 그건 비밀인데..” “치, 드래곤 엠블렘 만든 것도 여태 숨기고, 혹시 저한테 또 숨기는 거 없어요?” “아니, 이젠 진짜로 없어.” 그때 우리를 태우고 이동하던 운전기사가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레 나에게 물었다. “저기 어디로 모실까요?” “아.. 죄송합니다. 남산으로 가주세요.” “알겠습니다.” 퇴근길이라 그런지 도심을 달리는 택시는 의외로 멈춰서기를 반복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니 사람들로 가득 찬 시내버스 뒷좌석에 할아버지 한분이 창문을 열고 담배를 태우고 계셨다. 세상에.. 아무리 담배에 대한 제제가 없던 시절이지만, 저렇게 사람이 많은 버스에서까지 담배를 태우고 싶으실까? 8~90년대는 진짜 흡연자들의 천국이었구나. 그러고 보니 택시 뒷좌석의 좌석 시트에도 담뱃불에 타들어간 자국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이 시대에 담배가 얼마였더라.. 200원? 300원? 어릴 때 아버지 술, 담배 심부름도 자주했었는데.. 나는 새삼스레 느껴지는 옛 추억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무슨 생각해요?” “그냥. 옛날 생각.” “흐음..” 유키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 이왕이면 택시를 타고 남산 중턱까지 오르려고 했지만, (이 시대엔 차를 타고 정상까지 오르지 못했기에..) 소화도 시킬 겸 조금 걷고 싶다는 유키의 말에 남산 밑에서 내린 우리는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으~ 한국은 다 좋은데, 너무 추운 것 같아요.” “한국에 비하면 일본은 따듯하지.” “진짜, 그런 것 같아요. 그래도..” “그래도?” “정말 재밌었어요. 역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본에 돌아가면 엄마한테 잔뜩 이야기 해드리고 싶어요. 내가 본 한국은 너무 좋았다고, 그러니까 다음에는 나랑 꼭 같이 오자고..” 솔직히 이곳에 와서 제대로 보여준 것도 없는데도 유키는 아무런 불평 없이 나를 따라와 주었다. 사실 어젯밤. 피곤에 지쳐 잠이든 그녀를 대신해 캐리어를 정리하던 중. 여행 가방에서 가이드북을 발견한 나는 탁자에 앉아 그것을 펼쳐보았다. 가이드북은 주로 서울 근교의 관광지로 체크가 되어 있었는데, 한강 시민공원이라던가 63빌딩, 남산 타워가 소개 되어 있었다. 1985년도에 완공된 63빌딩은 서울의 랜드 마크로 인기가 많았기에 그 위에는 유키가 그려 넣은 타마고상(달걀군)이 별 5개를 힘겹게 떠받치고 있었다. “이 캐릭터 되게 귀엽네. 상품화해도 괜찮겠다.” 그 다음 장에는 남산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야경이 소개 되어 있었는데, 밤에 오르는 등산로와 도심의 야경에 대해 자세히 기술이 되어 있었다. “이건 무려 별이 7개네.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인가?” 가이드북을 덮은 나는 테라스 밖으로 보이는 남산 타워를 한번 바라본 뒤 잠들어 있는 유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 1988년에 남산에 오르는 길은 내가 알던 2015년 길과는 전혀 달랐다. 도로포장은 중턱까지만 되어 있었고, 그 이외는 일반 야산이나 다름없는 등산로를 이용해야했기 때문이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63빌딩을 가는 건데, 엘레베이터 타고 전망대까지 편하게 올라갔을 테니 얼마나 좋아.’ 초저녁이지만 가로등도 드문드문 설치되어 사방이 어두운 판국에 나는 숨을 몰아쉬며 남산을 올랐다. 그때 내 머리 위로 오르는 거대한 물체가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남산 케이블 카였다. ‘이런 멍청한!! 저걸 두고 여길 걸어 올라오다니!! 내가 왜 저 생각을 못했지?’ 속으로 스스로를 탓하며 울부짖고 있는데, 같이 걷던 유키가 내 손을 움켜쥐었다. “좀 힘들어도.. 같이 걸으니 좋네요.” “아.. 그래?” 이렇게까지 말하면 또 참고 올라가야지.. 남자가 돼서 힘들다고 징징 거리는 모습을 보일 수 없던 나는 묵묵히 그녀의 손을 붙잡고 산을 올랐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올랐을까? 드디어 눈앞에 남산 타워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 왔다..” 나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니 타워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야경을 보기 위해 난간에 모여 있었다. 발아래 펼쳐진 명동의 네온사인과 도심의 수많은 불빛들이 별빛처럼 반짝이는 가운데 유키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준혁씨.” “응?” “우리.. 사귀는 사이 맞나요?” 갑작스러운 그녀의 물음에 나는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녀와 나의 관계는 아직 딱 부러지게 애인이라 정해놓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나 역시 눈치 없는 바보도 아니고, 어느 정도 그녀의 행동에서 나에 대한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이곳에서 유키와 사귀게 되고 언젠가 결혼까지 하게 된다면.. 2015년이 돌아왔을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왜 아무 말도 안하세요?” 내가 머뭇거리자, 유키는 불안한 표정으로 다시 되물었다. 그 순간 유키를 처음 만났던 날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그녀와 함께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내가 뜸을 들일수록 유키의 표정은 불안감에 점점 굳어 가고 있었다. “준혁씨?” “미안..” ──────────────────────────────────── ──────────────────────────────────── EP. 19 : 내가 없는 거리. (2) “준혁씨?” “미안..” 미안하다는 나의 말에 나를 바라보던 유키의 눈동자에 불안감이 스쳤다.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빙긋 웃으며 입을 떼었다. “안 그래도 내가 먼저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네..” 그러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유키는 자신의 이마를 내 가슴에 대고 중얼 거렸다. “거절하는 줄 알고, 가슴이 무너지는 줄 알았잖아요. 이 바보가..” 내 가슴에 기댄 채 작은 어깨를 들썩이던 유키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이거 참.. 울릴 생각은 없었는데,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보며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때였다. “어.. 눈 온다.”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서 새하얀 눈이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유키는 자신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는지 더욱 파고들며 대답했다. “거짓말..” “아니.. 진짠데?” “안 속아요.” 하지만 그녀의 말이 무색하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금세 시끄러워졌다. “함박눈이다~” “와~ 이 정도면 금방 쌓이겠는데?” 유키는 주변 사람들의 환호성에 빼꼼 고개를 내밀더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빨갛게 부어 오른 눈이 내 눈과 마주치자, 부끄러운지 다시 고개를 푹 숙이는 그녀의 행동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턱 끝을 부드럽게 끌어 올렸다. 자연스레 두 눈을 감는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살짝 벌려진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 “유키 탑승 시간 다됐어..” “잠깐만요. 거의 계산 끝났어요.” 공항 면세점에서 부모님 선물과 직장 동료들의 선물을 사들고 나온 유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저희 아직 안 늦었죠?” “지금 내려가면 터미널 버스 탈 수 있을 거야.” 나는 그녀의 쇼핑백을 나눠든채 재빨리 터미널로 달렸다. 유키 역시 나를 쫓아 있는 힘껏 달렸고, 결국 우리는 터미널 버스가 출발하기 1분 전. 비행기 탑승장으로 향하는 터미널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하아.. 하아.. 다행이에요. 전 비행기 놓치는 줄 알고..” “아침 비행기인데 너무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큰일 날뻔했네..” “치.. 밤새도록 잠 못 자게 괴롭힌 게 누군데..” 어.. 그러게, 그게 누구더라.. 유키는 모른 척 하는 나를 잠시 흘겨보다가 방긋 웃어보였다. 나를 향해 웃고 있는 그녀의 목에는 조그마한 열쇠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그 것은 흔히 남산에 온 커플들이 철조망에 채우는 자물쇠를 채우고 버리는 열쇠였다. “그거 진짜 차고 다닐 거야?” “네.” “그거 원래 난간 밑에 버리는 건데..” “그래도 전 가지고 있을래요. 나중에 혹시라도 준혁씨랑 헤어지면 한국에 와서 자물쇠 풀어 버리려구요.” “그게 지금 사귀고난 다음 날에 할 소리냐?” 가볍게 그녀의 이마에 알밤을 날리자, 그녀는 이마를 문지르며 혀를 쏙 내밀었다. “하긴 그것도 그러네. 미안해요.” 잠시 후. 활주로에 대기 중인 비행기까지 그녀를 바래다준 나는 유키에게 나리타행 티켓을 건네며 물었다. “잘 갈수 있지?” “물론이죠.” “집에 도착하면 연락할게.” “기다리고 있을게요.” 가능하면 함께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녀가 사는 도쿄에서 또 다시 내가 사는 교토까지 신칸센을 타는 건 매우 비효율 적이었기에 나는 유키를 먼저 나리타로 보내기로 했다. 내가 탈 비행기는 한 시간 뒤에 오사카 공항으로 이륙할 예정이었다. “한국에 데려와 줘서 고마웠어요.” “뭘 제대로 구경시켜준 것도 없는데..” “그럼 나중에 제대로 구경하러 다시 오면 되죠.” “그래. 그러자..” 나는 유키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자, 그녀는 강아지 처럼 두 눈을 꼭 감은 채 살포시 웃어보였다. & 다음 날. 금요일 연차 이후로 3일 만에 출근한 나는 책상에 올려진 결재 서류를 살피던 중.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모리타가 들어왔다. 예전에 휴게실에서 봤을 때완 달리 홀가분한 표정의 모리타는 나를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를 걸어왔다. “부장님. 한국은 잘 다녀오셨어요?” “아.. 마침 잘 오셨네요. 안 그래도 떠나기 전에 식사나 같이 할까했는데.” 그러자 모리타는 특유의 어색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한국에서 돌아오시면 컨셉 일러스트를 보여주신다고 하셔서..” 아무래도 새로운 프로젝트가 미소녀 관련 게임이다 보니 모리타는 개발 초기 단계임에도 엄청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모리타는 이번 달 말일을 끝으로 민텐도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사이킥 배틀의 성공으로 그의 퇴직을 아쉬워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적극 적으로 회유하는 이는 드물었다. 그 이유는 민텐도에서 개발하는 게임 타이틀에 비해 개발자 수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시게씨는 양질의 게임을 제작하기 위해 개발기간을 점차 늘리고 있었고, 현재 민텐도 퍼스트 게임은 슈퍼 마리지, 동킹콤, 카린의 전설로 압축 되고 있었다. 그러한 라인업에서 미소녀 전문 일러스트 작가인 모리타가 설 자리는 극히 드물었다. 그리고 그건 모리타 자신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곧 점심시간이니 같이 식사나 하죠. 자료는 거기서 보여드릴게요.” “아, 네~!!” 잠시 후 서류를 정리하고 모리타와 함께 본사 건물을 나서는데,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모리타!! 강 부장님~!!” 다급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중앙 로비에서 하야시가 우릴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인사드리러 갔더니. 식사 가셨다고 하셔서..” “하야시씨도 같이 가실래요?” “물론이죠. 부장님께 드릴 말씀도 있고..” 급하게 달려오느라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쓰고 있는 하야시의 표정에는 묘한 결의가 담겨있었다. & “뭐? 너도 그만 둘 거라고!?” 회사 근처에 내가 자주 이용하는 라멘 집에서 모리타의 외침이 울려퍼졌다. “쉿!! 인마. 여기 본사 직원들 있으면 어쩌려고!!” “아, 미안. 너무 놀라서.. 그럼 너도 펜타곤 소프트로 옮길 거야?” 그러자 하야시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부장님. 저 아직 갈 수 있죠? 자리 남아 있는 거죠?” “물론. 갈 수 있지만, 왜 이렇게 갑자기? 저번 주에 아무래도 이직은 힘들 것 같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시게루씨가 위에 있는 한 개발 팀장은 꿈도 못 꿀 것 같기도 하고..” 하야시는 옆에 있던 모리타를 바라보며 뒤에 말을 이었다. “그래도 처음으로 마음이 맞아서 같이 사이킥 배틀을 만든 친구인데, 이 녀석까지 나가버리면 쓸쓸할 거 같아서요.” 결국 말은 이러쿵 저러쿵 해도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네.. 하지만 나에겐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아무래도 파이널 프론티어의 막바지 작업 중인 인원을 끌어 오기 보단 한번 팀을 맞춰 보았던 이 들과 작업을 하는 게 한결 수월했기 때문이다. “그럼 두 분 다 마음은 정해지신 것 같으니, 그럼 시작해 볼까요?” 나는 가방에서 컨셉 일러스트가 담인 기획서 한부를 꺼내 탁자에 올려두었다. 아직 초안에 불과하여 10페이지 내외이긴 했지만, 모리타는 기획서를 보자마자 두 눈을 번뜩이며 집어 들었다. 그러자 하야시 역시 모리타의 손에 들려있는 기획서 첫 장을 바라보며 중얼 거렸다. “내가.. 없는 거리? 부장님 이거 제목이 너무 우울한 거 아닙니까?” 나는 가게에서 나온 따듯한 녹차를 한 모금과 함께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 한 번 살펴보세요.” 조금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기획서를 살피던 하야시는 잠시 후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거렸다. “부장님. 여기 배경이랑 캐릭터 스프라이트 구현이 딱 봐도 수십가지가 넘는데.. 이건 아무리 특수 칩을 쑤셔 박아도 패밀리 스펙으론 불가능 할 거 같은데요..” 그러자 모리타 역시 배경 원화를 살피며 하야시의 말을 덧붙였다. “이거.. 실제 도쿄 거리를 컨셉으로 잡으신 거 같은데, 패밀리의 색조 표현으로 이런 자세한 배경에 캐릭터까지 심을 수 있을까요? 거기에다 그리는 거야 쉽지만, 이걸 도트로 찍어내려면.. 배경 하나 작업하는데만 며칠은 걸릴 것 같은데..” 역시나 둘 다 현업 종사자라 그런지 10페이지 내외의 기획 컨셉만 보여줘도 불만사항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이 사람들. 중요한 걸 안 봤네.. “저기.. 플렛폼 부분은 보셨어요?” “플렛폼이요?” 나의 물음에 다시 첫 장을 살핀 두 사람은 대응 기종을 뜻하는 플렛폼 표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 거렸다. “SFC..? 처음 들어보는 플렛폼인데?” “오늘 오전에 새로 만든 약칭입니다. 풀 네임은 슈퍼 패밀리 컴퓨터. 최초의 미연시 게임인 '내가 없는 거리'는 민텐도 차세대 개발기기의 런칭 타이틀로 만들 계획이니까요.” “네에??” ──────────────────────────────────── ──────────────────────────────────── EP. 19 : 내가 없는 거리. (3) & 만약에 말이다. 갑작스런 시한부 판정으로 죽음 앞에 헤어진 커플이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 떠나는 쪽이 더 슬플까? 아니면 남겨진 쪽이 더 슬플까? ‘내가 없는 거리’의 기획 의도는 그러한 작은 물음에서 시작한다. 아직 본격적인 줄거리는 잡히지 않았지만, ‘내가 없는 거리’는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보다는 고퀄리티 일러스트 작화가 더해진 비쥬얼 노블의 형태에 더 가까웠다. 그렇기에 데이트 시간에 맞춰 온 동네를 쏘다니며 여자들을 격추 시키는 동X생과는 태생부터가 완전히 다른 녀석이었다. 함께 엔딩으로 향할 수 있는 건 아름다운 세 명의 여성 캐릭터 중에 단 한 명뿐. ‘내가 없는 거리’는 크게 3부로 나뉘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는데, 첫 번째는 플레이어가 시한부 판정을 받기 전. 크고 작은 이벤트를 통해 세 명의 여자들 중 히로인이 될 한 명을 선택해야하며, 두 번째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후. 이 시기에는 히로인으로 선택 받지 못한 캐릭터는 사라지고, 주인공이 선택한 그녀와 추억을 쌓아가게 된다. 그리고 세 번째는 플레이어가 사라진 엔딩. 그 이후.. ‘내가 없는 거리’의 최대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 세 번째 ‘엔딩 그 이후’가 메인이 되는데.. 왜냐하면 플레이어가 사망한 시점에서 주인공은 플레이어가 사랑했던 히로인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동안 쌓아왔던 추억의 총량에 따라 거리를 거닐며 플레이이어를 추억하는 그녀의 반응이 조금씩 달라진다. “부장님. 이거 스토리가 너무..” 기획 의도만 보고도 모리타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지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언제나 냉정해 보였던 하야시도 자꾸만 눈을 꿈뻑거리며 신경질 적으로 종잇장을 넘기고 있었다. 츤데레 같은 녀석. 감동 받았으면 순순히 받아들이지 왜 종잇장에 화풀이냐.. 하야시는 1부와 2부에서 이어지는 3부의 시퀀스를 살펴보고는 진저리가 나는지 기획서를 툭 던지곤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어우.. 조명이 어두워서 그런지 갑자기 눈이 침침하네.” 결국 하야시 마저 안경 밑으로 눈물을 훔치며 괜히 가게 조명을 향해 툴툴 거렸다. “어떤 거 같아요?” 내 물음에 티슈로 눈물을 훔치던 모리타가 나에게 물었다. “부장님 이거 시나리오 누가 쓴 겁니까?” “왜요? 마음에 안 드세요?” “아뇨. 이거 진짜 기획 의도대로만 진행하면 초대박 칠거 같은데요? 그런데 히로인이 세 명에게 각각 이벤트 씬을 도입하고, 2부에선 시간이 흐른 뒤니까 3명의 모습을 바꿔야 하고, 3부에서는 플레이어를 잃고 초췌한 느낌으로 다시 작화를 하면.. 세 명의 캐릭터니까 기본 원화만 9장에.. 표정 별로 작화를 더하면, 헉.. 거기다 시간이 흐른 배경 작화까지 더하면.. 어억..” 모리타는 대충 자신이 할 작업량을 떠올리더니 얼굴이 사색이 되어 갔다. 나는 여전히 녹차를 홀짝이며 모리타를 향해 물었다. “걱정 마세요.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작업하시면 됩니다. 왜 이전에 저랑 사이킥 배틀 작업할 때 죽는 순간까지 미소녀 도트 찍고 싶으시다면서요.” “아니.. 부장님 그건..” “그 소원 접수 하겠습니다. 하지만 맡으신 도트는 다 찍어주고 가시길 바래요.”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하야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하야시 역시 자신이 처리할 작업량을 살피는 중이었다. 사실 그래픽 노블은 코딩을 짜내기가 다른 게임 보다 쉬운 편이었다. 아무래도 격투 게임이나 슈팅 게임처럼 타격 판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적들이 등장하지도 않기에 패턴 A.I를 넣을 필요도 없다. 그냥 선택 분기점을 잘 찾아내 스크립트 연결만 시켜주면 된다. 물론 ‘내가 없는 거리’는 그 선택 분기점이 겁나게 많은 게 문제지만.. “이거? 얼핏 봐도 스토리랑 이벤트 분기가 장난 아닐 거 같은데요?” “꼼꼼한 하야시씨 성격이라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거미줄처럼 엮어 주실 거라 믿습니다.” “아뇨.. 부장님. 그게..” “잠깐. 사실 두 분 다 무얼 고민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딱 봐도 도저히 혼자서 해낼만한 작업량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저 역시 여러분과 같습니다. 그 많은 이벤트와 시나리오. 결국 누가 만들어야 할까요?” 그러자 방금 전까지 이의를 제기하던 두 사람은 내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설마 부장님이 직접?” 내가 슬쩍 고개를 끄덕이자 모리타와 하야시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없었다. 아무리 코딩이 복잡하고 작화가 힘들어도 그 모든 메인 스토리를 잇는 건 나에게서 나오는 시나리오였으니까. 난 무려 1,2,3 부의 시나리오를 각각 캐릭터 별로 해야 한 단 말이다!! 나는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웃으며 입을 떼었다. “우리 조금만 길게 봅시다. 어차피 차세대 런칭까지 1년 이상은 걸린다고 보니까요.” “그렇죠? 하긴 패밀리 제작도 아니고 이제 막 개발에 들어간 차세대기 런칭 타이틀인데..” ‘물론. 조금 앞당겨 질수도 있긴 하지만..’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미소에 나는 서둘러 녹차를 입에 대었다. 그때 라멘집 종업원이 우리 앞으로 라멘이 담긴 쟁반을 가져오며 말했다. “라멘 나왔습니다.” 때마침 타이밍 좋게 나온 라멘 세 그릇에 우리는 각자 젓가락을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모리타는 식사를 하면서도 내가 넘긴 기획서를 계속 해서 살피고 있었다. 아무래도 벌써부터 히로인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모양이었다. “모리타씨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이번에는 섹시 캐릭터는 안돼요.” “물론이죠. 조금은 슬픈 눈을 가진 미소녀가 좋겠지요?” “히로인이 세 명이니 연상, 동갑, 연하. 이렇게 가도록 하죠.” “크으~ 역시 부장님은 뭔가를 아십니다. 그럼 혹시 연상은 약간 성숙한 느낌이 좋겠군요.” “너무 과하지 않게만 가주세요.” “참고 하겠습니다.” 그때 후루룩 라면을 삼키던 하야시가 조금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부장님 이 ‘내가 없는 거리’라는 게임 말인데요. 게임적인 요소가 있나요? 가령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변화하는 무언가가 있어야하는데, 너무 단일적인 스토리가 되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음.. 물론 게임 적인 장치가 있죠.” “그게 뭔데요?” “여러분이 보기에는 이 게임의 세 가지 단계 중에 어느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합니까?” 그러자 두 명은 젓가락을 입에 물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기었다. 그리고 잠시 후 먼저 이야기를 꺼낸 건 하야시였다. “아무래도 시한부 판정을 받기 전인 1부 아닐까요? 세 명의 히로인 중 누구를 선택하느냐가 중요하니까.” “음.. 그 부분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 3부 인가요? 아무래도 주인공이 사망하고 난 이후라, 히로인의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 테니..” “음.. 그것도 맞는 말씀이지만, 정답은 아닙니다. 사실 이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시나리오는 플레이어가 시한부 판정을 받고 난 후. 즉 2부 스토리입니다. 왜냐하면..” 모리타와 하야시는 내가 잠시 뜸을 들이자, 답답해 죽겠는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2부의 주인공의 행동으로 3부에서 여주인공의 행동이 완전히 달라지거든요. 만약에 모리타 씨라면 자신이 시한부 판정을 받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음.. 저는 좀 더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을 것 같아요. 많은 추억을 쌓고 떠난 다면 제가 없더라도 그 추억에 기대어 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자 옆에 있던 하야시가 모리타의 말에 불쑥 끼어들었다. “멍청아. 그럼 그 사람은 네 추억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아가란 말이냐? 이 녀석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이기적이네?” “그럼 넌 어쩔 건데?” “나? 나라면 안 만나. 병에 대한 것도 안 알려주고, 나한테 정 떨어지게 엄청 차갑게 굴 거야.” “와~ 혼자서 쓸쓸히 최후를 맞겠다는 거냐? 너답다. 너다워..” 과연 내 예상대로 둘의 대답은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다. 나는 그쯤에서 그들을 중제하며 입을 열었다. “사실 어느 쪽이 틀렸다 할 수 없어요. 하지만.. 하야시씨의 방법대로 2부를 진행한다면 3부에서 이어갈 스토리가 전혀 없습니다. 히로인은 플레이어를 잊은 채 하루를 살아가겠죠. 그리고 함께 쌓은 추억이 없으니 슬퍼할 이유도 없습니다. 물론 하야시씨 같은 플레이 방법은 2부의 히로인에게 큰 상처가 됩니다. 도리어 2부에서 너무 냉정하게 대하면 3부로 가기 전에 그녀를 잃을 수도 있어요.” “그녀를 잃는 다구요?” “완전히 플레이어를 떠나 버리는 거죠. 이 경우에는 세 번째 엔딩 이후 시나리오가 열리지 않을 겁니다.” 그러자 모리타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하야시를 꾸짖었다. “그것 봐 하야시. 너처럼 극단적인 성격은 결국 화를 불러온다니까. 골방에서 병마와 싸우며 쓸쓸히 떠나겠구나..” “야, 진짜로 죽이지 마. 인마.” “아, 미안..” 내 앞에서 둘이 무슨 만담 하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이번엔 모리타를 바라보았다. “모리타씨는 떠나기 전 많은 추억을 쌓고 싶다고 했죠?” “네..” “음.. 그러면 그렇게 많은 추억을 쌓았다 치고, 우리가 지금 만드려는 게임 제목을 떠올려 보세요.” 그러자 모리타는 천천히 내 물음에 대답했다. “내가.. 없는 거리.” “모리타씨가 없는 거리에서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할까요? 당신이 쌓아준 추억만큼 어딜 돌아 다녀도 당신만 보일 텐데?” “아.. 그건..” “이게 바로 ‘내가 없는 거리’가 게임으로 있을 수 있는 요소입니다. 여러분이 말씀해주신 대로 2부에서 플레이어는 선택을 해야 하죠. 자신의 병을 그녀에게 알리고 좋은 추억을 쌓느냐. 아니면 슬퍼할 그녀를 위해 억지로 그녀를 떼어 놓느냐.” 그러자 하야시가 여전히 조금 미심쩍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하지만 아까 부장님 말로는 너무 거절해 버리면 3부 시나리오가 아예 없을 수도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결국 게임 진행을 위해 좋은 추억을 쌓을 수밖에 없지 않아요?” “음.. 물론 3부를 보기 위해 그녀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건 중요합니다. 하지만 만약에 모든 이벤트 씬을 채워 2부에서 그녀와의 추억을 100% 달성하게 된다면..” “... 달성 하게 된다면?” “플레이어를 못 잊은 그녀는 결국 그 추억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겠지요.” “뭐라구요!?” 드래곤 엠블렘과 사이킥 배틀에 이어 내가 만든 게임들은 유저들에게 단 한줌의 꿈도 희망도 허락치 않는걸로 유명하지.. 물론 그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 ──────────────────────────────────── EP. 19 : 내가 없는 거리. (4) “그럼,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진짜 잔인하다.. 부장님 혹시 제가 그리는 히로인에 악감정 있으세요?” 여 주인공 사망 설에 충격에 빠진 모리타와 하야시는 손에 쥐고 있는 젓가락으로 나를 찔러 죽일 기세였다. 역시나 ‘내가 없는 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다소 충격적인 스토리 전개방식 이었기에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었다. 나는 극도로 흥분한 그들을 진정 시킨 뒤 대답했다. “모든 것은 2부에서 플레이어의 선택에 달려있어요. ‘내가 없는 거리’는 멀티 엔딩 시스템이라 그녀의 죽음 역시 하나의 엔딩에 속하게 될 겁니다.” “그.. 그럼 그 안에 혹시 해피 엔딩도 있나요?” 한 조각의 희망을 품은 채 조심스레 말을 꺼낸 모리타는 거의 울어버릴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아뇨. 그런 엔딩은 계획에 없습니다.” “으아아~!!” 대놓고 울리자고 만든 게임에 도망칠 구멍 따위 만들어 놓을 것 같으냐? 그딴 거 없을 거라고 전해라~ & 그로부터 며칠 뒤.. 모리타와 하야시는 함께 민텐도를 퇴사했다. 이미 마음속으로 펜타곤 소프트로 이직을 결정한 그들은 인수인계를 끝내자마자, 곧장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들은 잠시 휴식기를 가진 뒤 4월부터 펜타곤 소프트에서 미연시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 들이 떠나는 주말. 함께 이삿짐을 날라준 나는 모리타가 건네는 음료수를 받아들고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힘들다..” “부장님께서 직접 짐을 날라주실 필요까진 없는데..” “뻔히 아래층 직원이 짐 빼는데, 가만히 있기도 뭐해서..” 내가 살짝 웃으며 음료수를 삼키고 있는데 하야시가 다가왔다. “이 자식. 자기 짐 다 뺐다고, 여기서 농땡이 치고 있네. 어? 부장님도 계셨어요?” “이거 마시고, 네 짐도 마저 빼자.” “땡큐.” 하야시는 모리타가 건네주는 음료수를 받으며 입가에 담배를 물었다. “다들 주말이랍시고 놀러 가던데, 부장님은 어디 안가십니까? 유키씨는요?” “안 그래도 있다가 교토역에 도착한다고 해서 마중 나가보려구요.” 그러자 그들은 ‘역시 그러면 그렇지..’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때는 3월 중순. 차가웠던 겨울이 지나고 봄의 계절이 오고 있었다. 숙소 근처의 벚나무에는 꽃망울들이 잔뜩 몸을 웅크린 채 만개할 준비를 하고, 우리들은 이삿짐 트럭이 세워진 숙소 앞 계단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때 하야시가 새하얀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나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부장님은 언제쯤 오실 겁니까?” “네?” “저희만 쏙 빼내서 펜타곤 소프트에 박아두신 건 부장님도 언젠가 펜타곤 소프트로 넘어 올 생각이 있으셔서 그런 게 아닌가요?” 역시 하야시가 모리타보다 눈치가 빠르긴 하군. 그러자 모리타가 깜짝 놀라 나에게 물었다. “부장님도 그럼 이직하실 계획이 있으신 건가요?” “뭐.. 사실 계속 민텐도에 있을 생각은 없어요.” “그래도 부장이라는 직급도 있으시고, 미국 시장 성공 경력에 게임 디렉터까지 앞길이 탄탄대로인데, 그걸 버리고 이직 하신다구요?” 모리타의 물음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모리타씨. 전 한국인이잖아요.” “그게 어때서요?” “카마우치 사장은 능력을 중시 하지만 직계가족 외에 사장직을 주진 않아요. 군페이씨만 봐도 거의 10년간 부장 직에 멈춰 있잖아요.” 특히나 내가 알고 있는 미래에서 카마우치는 2002년이 돼서야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는데, 차기 사장직으로 오른 인물이 바로 벌룬 파이트를 만들어 시게씨에게 영감을 주었던 카와타 사토루씨였다. 이 인사는 민텐도로서는 최초로 친족 승계가 아닌 외부인을 사장 자리에 앉힌 최초의 사례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분이 휴대용 게임에 장착한 터치펜 하나로 위기에 몰린 민텐도를 구원하겠지..’ 그때 모리타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카마우치 사장님도 불사신은 아니니 언젠가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을까요?” “뭐 그렇기야 하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 자리가 나에게 올 확률은 희박하죠. 차라리 내가 나가서 직접 회사를 세운다면 모를까?” “부장님께서 직접 회사를요!?” “왜요? 제가 못할 거 같아요?” “아뇨. 그런 뜻은 아니라..” “사실 민텐도를 떠나는 건 다른 이유도 있어요. 저번 사이킥 배틀을 제작 할 때도 느꼈지만, 민텐도는 전 연령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을 원합니다. 현재 기획중인 ‘내가 없는 거리’ 역시 민텐도가 원하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죠.” 그때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하야시가 재떨이에 담배를 비비며 나에게 물었다. “부장님. 전부터 궁금했던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이번에 ‘내가 없는 거리’의 컨셉을 보면서 느낀 건데, 혹시 드래곤 엠블렘.. 부장님이 만드신 것 아닙니까?” “…….” “뭐!? 하야시 그게 무슨 말이야?” “그곳에서도 마지막에 두 명의 여주인공을 한 명을 희생 시키는 시나리오와 플레이어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난이도로 유명했죠. 사이킥 배틀은 캐릭터의 사망은 없지만, 역시나 클리어한 사람이 극히 드물 정도로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합니다. 사실 여기서 조금 긴가민가했지만, 이번에 ‘내가 없는 거리’에 대한 컨셉을 보는 순간. 어느 정도 확신이 서더군요. 다른 곳에 까발릴 생각은 없습니다. 어차피 민텐도도 퇴사했으니까. 속 시원히 말씀해 주세요.” “이거 참..” 나는 얼마 안 남은 음료수를 마저 비워낸 후 캔을 찌그러뜨리며 하야시를 바라보았다. “맞아요.” 그러자, 모리타는 기겁한 표정으로 나와 하야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야시는 나의 대답에 싱긋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사실 이 세 가지 게임 전부 현재 시장에 없는 새로운 장르였으니까요. 이제 속 시원히 펜타곤으로 넘어갈 수 있겠네요. 진심으로 부장님 같은 분과 함께 일해서 영광이었습니다. 저 드래곤 엠블렘 팬이거든요.”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죽을 때까지 부장님 쫓아다닐 테니까. 후딱 정리하고 펜타곤으로 넘어 오세요.” “때가 되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쓰레기통에 캔을 던져 넣었다. “자~ 그럼 마저 짐 옮길까요? 사실 유키가 올 시간이 다 되어서 좀 서둘러야 해요.” “네. 알겠습니다.” 모리타와 하야시는 나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그 후로.. 반년의 시간이 더 흘렀다. 1988년 9월 17일. 대한민국에서 88올림픽이 개최되고 역사상 길이 남을 비둘기 화형식을 시작으로 온 세계가 축제 분위기였지만, 나는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잠시 지난 날을 살펴보자면 지난 8월에 도쿄에서 열린 사이킥 배틀의 유저 초청 행사가 있었다. 500장을 뿌린 사이킥 배틀의 골든 티켓은 행사가 다가올수록 가격은 천정부지로 솟아올랐고, 당일 현장에서도 암표 거래가 있을 정도였다. 소문으로 사이킥 배틀의 골든 티켓은 10만엔 정도 거래 되었다고 하는데, 그만큼 사이킥 배틀은 일본에서 대박을 터뜨렸다. 올 클리어 데이터를 인증하고 들어선 유저는 약 천 명 정도로 행사장은 약 1500명의 유저로 가득 찼다. 이미 회사를 그만둔 모리타였지만, 자신의 캐릭터를 사랑해준 유저들에게 보답의 의미로 여러 굿즈를 만들어준 덕에 사이킥 배틀의 행사는 성공적으로 진행 할 수 있었다. 행사장에서 판매한 캐릭터 상품만 해도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렸고, 카마우치 사장은 아예 해마다 이런 행사를 여는 것은 어떻겠냐며 수선을 떨었다. “민텐도 게임쇼 어때!? 응? 해마다 우리 민텐도에서 출시하는 게임을 가지고 이런 행사를 여는 거야?” 취재를 나온 기자들 앞에서 호들갑을 떠는 통에 나와 군페이씨는 카마우치 사장의 입단속을 하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또한 실력 있는 참가자들끼리 토너먼트로 진행한 사이킥 배틀 대전 역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컨트롤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다. 특히나 마지막 결승 장면에서 맞붙은 류 화영과 아즈사 렌의 대결은 게이머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명장면을 남겼는데, 아즈사 렌의 체력 게이지가 1도트 남은 상황에서 가드 데미지를 노린 류 화영의 필살기를 패링이라는 특수기술로 막아낸 것이다. 패링이란 아즈사 렌이 가지고 있는 특수 베리어로 날아오는 탄막이나 공격을 타이밍에 맞추어 가드 버튼을 누르면 데미지를 입지 않고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는데, 이 미친 플레이어는 류 화영이 날린 연속 공격을 전부 패링으로 쳐낸 뒤 마지막 일격에서 카운터를 노려 한방에 역전해 버린것이다. 캉캉캉!! 캉캉캉캉!! 캉캉캉캉!! 류화영의 연속 난무를 죄다 받아치는 소리가 회장에 울리자 화면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전부 그 자리에서 얼어 붙어버렸다. “뭐야? 저거!? 설마 패링이야?” “미친 저게 가능해?” 이윽고 마지막 일격으로 승리자가 결정되자, 거대한 화면에서 그들의 플레이를 지켜보던 게이머들은 회장이 떠나갈 듯이 소리를 질러내며 난리 법석을 떨어대었다. 대회 우승자 시상을 위해 단상에 오른 우승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갸웃 거리며 물었다. “혹시 한 5년 전쯤에 저한테 패밀리 사주신 분 아니세요?” 어? 설마.. 이 녀석? “혹시 타카시군?” “아!! 역시 맞죠? 설마 사이킥 배틀을 만든 사람이 형이었어요?” 생각지 못한 우연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우승 축하한다.” “제가 그때 형보다 게임 잘할 자신 있다고 했잖아요. 골든 티켓이 없어서 올 클리어 하느라 엄청 고생했거든요?” 상패를 받으면서도 툴툴 거리는 타카시와 함께 기념 촬영을 마치고, 단 하루뿐이었던 사이킥 배틀의 성대한 행사가 막을 내렸다. ──────────────────────────────────── ──────────────────────────────────── EP. 19 : 내가 없는 거리. (5) & ‘내가 한 5명 있었으면 좋겠다..’ 최근에 자주 드는 생각이다. 83년으로 타임 슬립까지 했는데, 분신술은 불가능하려나?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 들어 나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기엔 업무량이 너무나 많게 느껴졌다. 민텐도에서는 슈퍼 패밀리 개발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 중이었고, 퇴근하고 돌아오면 ‘내가 없는 거리’의 시나리오 작업에 열중해야했다. 토요일에는 도쿄에서 모리타와 하야시를 만나거나 첸드라를 만나 업무를 조율한 뒤, 일요일엔 잠시 유키를 만나고 교토로 돌아오기를 몇 달째 반복 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불평할 수도 없는 것이 이 모든 게 내가 좋아 벌인 일이라는 거다. 결국 내가 짊어지고 가야한단 말이지.. 최초의 톱니바퀴인 나를 굴려야 펜타곤이건 라이텍스건 나머지 모든 톱니를 굴릴 수 있다. 오직 그 생각하나 만으로 이를 악문채 버티는 나날들이 연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금요일 저녁. 퇴근 후 저녁도 거른 채 ‘내가 없는 거리’의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컴퓨터에 전원 스위치를 누르는데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수화기를 들어보니 유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씨 괜찮아요? 목소리가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응? 아, 요새 일이 좀 많아서, 오전부터 몸이 좋지 않더라고..” “약은 먹었어요?” “응. 아까 저녁 먹고 챙겨 먹었어..” 저녁을 굶었지만, 괜스레 사실 대로 이야기하면 그녀가 걱정할까 봐 거짓 말로 둘러대었다. “준혁씨. 바쁜 건 알지만 내일은 그냥 집에서 쉬는 게 어때요?” “그러고 싶지만, 모리타씨랑 약속을 잡아두어서 가봐야 할 거 같아. 이번 주에 작성한 시나리오도 넘겨 줘야하고, 하야시씨가 전달할 사항도 있다고 하고..” “아무리 일이 좋아도 몸은 챙겨가면서 해야죠. 목소리만 들어도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잔뜩 불안이 섞인 그녀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수화기 건너에서 들려왔다. “걱정 마. 이번 주만 버티고, 다음 주엔 집에서 쉴 테.. 우욱..” 어라? 갑자기 왜 이렇게 어지럽지. 속도 메스껍고.. 나는 잠시 어지럼증을 진정 시키기 위해 이마에 손을 얹은 채 세차게 고개를 휘저었다. 열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식은땀도 흐르고.. 역시 무리 한 건가? 그 순간. 방안이 나를 중심으로 한 바퀴 빙글 돌더니 쿵 소리와 함께 모든 사물이 기울어졌다. “준혁씨?? 준혁씨!! 무슨 일이에요? 대답 좀 해요!! 준혁씨!?” 아.. 젠장. 아침부터 영 몸이 안 좋더니.. 나는 눈앞에서 데롱 데롱 흔들리는 수화기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어 보았지만,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하긴 요새 너무 무리하긴 했지.. 부옇게 흐려지던 시야에 어둠이 찾아오고, 수화기 너머로 내 이름을 부르는 유키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아련하게 느껴졌다. 119라도 불러야하는데, 이런.. & 사방이 깜깜한 가운데, 어둠속에 몸이 둥둥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얼핏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냥 편히 쉬고 싶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정기적으로 울리는 기계음 소리와 함께 오른손에 따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뭐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 내 방은 아닌 것 같은데? 살짝 고개를 돌리니 내 손을 꼭 붙잡은 채 이마를 대고 있는 유키가 보였다. 뭐 도쿄에 있을 그녀가 왜 여기 있지? 꿈인가 싶었던 나는 살짝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유키?” 그러자 내 목소리에 퍼뜩 놀란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준혁씨? 정신이 들어요!?” “응.. 근데 여기는 어디야?” “병원이에요. 전화하다가 갑자기 쿵하는 소리가 들려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설마, 그 소리 듣고 여기까지 온 거야?” “그럼, 어떡해요!! 유일하게 알고 지내는 모리타씨도 하야시씨도 전부 도쿄에 있는데!!” “그럼 병원은 어떻게 온 거야?” “모리타씨한테 연락해서 민텐도에 알고 있는 직원 있으면 대신 119좀 불러 달라고 했어요. 준혁씨가 이상한 것 같다고..” 굉장히 똑똑한데? 내 이름 부르면서 울고만 있을 줄 알았더니.. 굉장히 빠른 판단력이다. 사건의 정황은 내가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아무 대답이 없자, 유키는 재빨리 모리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모리타는 유키의 연락을 받자마자, 다시 민텐도 직원 숙소 경비실에 연락했다고 한다. 모리타의 이야기를 듣고 비상키를 가지고 올라온 경비실 직원은 내가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한 뒤 곧바로 119에 전화를 걸어 구급차를 불렀고, 나는 급히 후송되어 인근 병원 응급실에 실려 오게 되었다. 그 사이 유키는 서둘러 짐을 챙긴 뒤 신칸센을 타기 위해 역으로 달렸고, 자정이 되어 교토역에 도착한 그녀는 모리타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있는 병원을 알아낸 뒤 택시를 타고 곧바로 달려왔다고 한다. 이 모든 게 단 6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도쿄에서 교토까지 가까운 거리도 아닌데, 한걸음에 달려와 준 그녀가 고맙게 느껴지는 순간 이었다. 잠시 후.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당직을 서던 의사가 다가와 나에게 말했다. “과도한 업무로 인해 많이 몸이 많이 지친 상태입니다. 독감 증세가 있지만 그 외에 다른 큰 병은 없어요. 그저 잘 쉬시고, 건강관리를 지속 적으로 해주셔야 해요. 보통 하루 몇 시간 정도 주무십니까?” “그게.. 3시간 정도?” “그 것 봐요. 하루 3시간 자는데 몸이 배겨 나겠어요? 젊다고 몸을 혹사 시키면 나중에 고생합니다. 영양제 주사 놔드렸으니 여기서 한숨 푹 주무시고, 내일 오전에 퇴원하세요.” “네.. 주의할게요.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이 돌아가자 유키는 새침한 눈으로 나를 흘려보며 말했다. “준..혁씨.. 제가 뭐랬어요. 그러게 일 좀 쉬엄쉬엄하라고 그랬죠!!” “어어..? 나 환자야.” “진짜, 아픈 사람 한 대 때려줄 수도 없고, 얄미워 죽겠네!!” “미안..” “됐어요. 그래도 크게 큰 병은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고마워.” “얼른 한숨 더 자요. 의사 선생님이 많이 피곤해서 그런 거라잖아요.” “넌 어쩌고?” “저도 여기 밑에 간병인 침대에서 잘게요.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으니까..” 살짝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니 시간은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새벽 2시까지 내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던 건가.. 그녀는 자신의 외투를 이불 삼아 덮은 뒤 바닥에 설치된 간이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잠시 후. 색색 거리는 그녀의 숨소리에 마음이 놓인 나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다음 날. 오전에 퇴원 수속을 마치고 병원을 나온 우리는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 미터기 위에 설치된 시계를 힐끗 거리자, 유키는 살짝 비꼬는 말투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준혁씨. 설마~ 지금 신칸센 기차시간 생각하는 건 아니죠? 혹시나 지금이라도 출발하면 모리타씨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귀신같이 내 마음을 알아챈 유키는 내 손을 꽉 잡은 채 기사 아저씨에게 서둘러 숙소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그녀의 손에 이끌려 집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게 된 나는 어제 하지 못한 시나리오 작업이라도 계속 하기 위해 컴퓨터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스톱!! 거기 딱 멈춰요.” “어? 저기.. 나 이제 괜찮은데? 병원에서 잠도 많이 잤고, 영양제 주사도 맞았으니까..” 하지만 택도 없는 소리란 게 이런 걸 두고 나온 말일까? 유키는 손끝으로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장 저기로 들어가요.” “뭐? 설마 지금 또 자라고!?” “의사 선생님이 집에 돌아가도 당분간은 안정하는 게 좋다고 하셨어요. 얼른!!” “네. 알겠습니다.” “진짜, 상황 봐서 오늘 저녁쯤 도쿄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이대론 안 되겠다.” “설마, 자고 가려고?” “제가 없으면 또 컴퓨터 켜고 작업할 거잖아요.” 거 당연한 말씀을.. 입 아프게.. “왜 아무 대답이 없어요?” “알았다. 알았어. 내가졌다.” 그녀의 단호한 표정에 나는 결국 침대에 몸을 뉘었다. 이번 주말엔 정말 잠 한 번 늘어지게 자는구나. 그런데 병원에서 그렇게 많이 잤는데 잠이 오긴 오려나? 하지만 그런 나의 예상을 깨고, 의외로 이불을 덮자마자 졸음이 몰려왔다. 설마 내가 이 정도로 피곤했을 줄이야.. & 까악~ 까악~~ 창밖에서 까마귀 우는 소리에 감았던 눈을 뜨자 내가 가장 먼저 찾은 건 시계였다. ‘대체 내가 얼마나 잔거지?’ 탁자위에 놓인 알람시계를 바라보니 오후 6시가 다되어가고 있었다. 세상에 병원에서 그렇게 자 놓고, 내리 6시간을 또 잔거야? 하지만 덕분에 몸이 굉장히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역시 20대가 좋긴 좋네, 겁나게 몸이 아파도 푹 자면 다 나으니.. 살짝 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리니 유키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한 손으로 키보드를 톡톡 두드리며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내가 일어난 줄도 모른 채 계속해서 컴퓨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해?” “꺅!!” 조용한 가운데 들려온 나의 목소리에 유키는 깜짝 놀라 의자에서 펄쩍 뛰었다. “갑자기 말 걸어서 놀랐잖아요!!” “그럼, 예고하고 말하는 법 좀 알려줄래?” “치, 농담 하는 걸 보니 좀 괜찮아졌나보네요.” “응.. 몸이 개운해~ 근데 내 컴퓨터로 뭐하고 있었어?” “준혁씨가 쓴 글 보고 있었어요.” “뭐? 설마!?” “작업 디렉토리에 '내가 없는 거리' 라는 텍스트 파일이 있길래, 심심해서 그만..” 나는 잠시 부끄러움에 그녀에게서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이게 전에 모리타씨가 말한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이라는 게임인가요?” “응. 맞아.” “이거 잠깐 봤는데도 스토리가 진짜 좋은 데요? 지금 주인공이 시한부 판정을 받은 것 까지 봤는데, 이거 다음 스토리가 어떻게 돼요?” “어.. 음.. 그게 말이지.”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유키의 순진무구한 눈동자 앞에서 둘 다 죽는다고 어떻게 말하지?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결국 그녀에게 모든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사실 모리타와 하야시를 제외하고 ‘내가 없는 거리’에 대한 시나리오를 보여준 적이 없었기에 여성 유저에 대한 감상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방송 작가인 그녀라면 분명히 다른 일반인들보단 내 시나리오에 대한 문제점이나 수정사항을 알려줄 수도 있을 거란 생각도 한 몫하고 있었다. 유키는 처음에는 기대감을 가지고 나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결국 주인공이 사망한 부분에서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준혁씨. 그건 너무 불쌍해요..” 저기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데요. ──────────────────────────────────── ──────────────────────────────────── EP. 19 : 내가 없는 거리. (6) & 잠시 후. 일단 C루트 엔딩으로 히로인의 죽음에 대한 엔딩을 들은 그녀는 감정조절이 쉽지 않은지 울먹거리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솔직한 평을 듣고 싶었던 나는 잠시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린 후에 물었다. “어떤 것 같아?” “준혁씨가 만든 시나리오에 토를 달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엔딩이 달라지는 거라면 혹시 이런 끝맺음은 어떨까요?”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유키는 나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가 정해 놓은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묘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이야기를 모두 전해들은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나쁘지 않아. 오히려 내가 만든 극단적인 시나리오 보다 어쩌면 유저들에게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요? 만약에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 놓고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저는 그 사람을 위해 이렇게 하고 싶은데..” 유키가 제시 한 시나리오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나는 웃으며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상당히 괜찮은데? 사실 너무 극단적인 스토리라 유저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지 않을까 걱정한 부분도 있었거든.” 사실 이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걱정이 되는 부분이 몇 가지 있었다. 올해 초. 극장에서 개봉한 ‘역습의 샤아’라는 건담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 아무로와 그 라이벌인 샤아의 죽음에 건담 팬 몇몇이 슬픔을 못 이겨 자살했다는 루머가 나 돌은 적이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황당한 소식이겠지만, 꼭 게임 뿐 만 아니라 좋아하는 영화배우나 스타의 죽음에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는 과거에도 몇 차례 신문에서 본적이 있었다. ‘너무 극단적인 스토리는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지만, 자칫 화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주인공과 히로인의 슬픈 감정을 그대로 유저들에게 주입 시키면서 좋은 마무리를 이끌어 낼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았기에 최근에는 시나리오 작업이 지지부진 한 상태였다. “유키. 미안하지만 부탁이 하나 있는데.” “네? 뭔데요?” “네가 말한 엔딩. 혹시 시나리오로 써줄 수 있어? 다음에 모리타에게 시나리오를 건네줄 때 같이 전해주고 싶은데.” 그러자 유키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 그로부터 일주일 뒤. 모리타를 만나기 위해 신주쿠역에 도착하니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씨~!!”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멀리서 손을 흔드는 유키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자 쪼르르 달려와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몸은 좀 괜찮아요?” “응. 그 날 이후로는 잠을 많이 자두는 편이거든.” “다행이네요.” “그런데 벌써 작업이 끝난 거야?” “음.. 전부 끝난 건 아니고, 마지막에 연결되는 부분만 써두었어요. 모리타씨에게도 빨리 보여드리고 싶어서.. 그런데 과연 모리타씨도 제가 쓴 시나리오를 좋아할까요?” “아마 모리타씨는 엄청 좋아할 걸? 하지만 하야시씨는 작업량이 늘어서 싫어 할 수도 있겠지만..” “하야시씨는 조금 무서운데..” 일주일 전 ‘내가 없는 거리’의 시나리오 복사본을 가져간 유키는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엔딩을 기획했다. 집에 돌아가 시나리오를 처음부터 꼼꼼히 살펴본 그녀는 표현이 거친 문체를 부드럽게 다듬어 퇴고 작업까지 도와주고 있었다. “하지만 게임을 만든다는 것은 참 매력적인 것 같아요. 드래곤 엠블렘이나 사이킥 배틀 때는 플레이하는 입장이라 잘 몰랐는데, 이렇게 직접 시나리오까지 쓰고 나니 유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너무 궁금하고 기대돼요.” 우리는 모리타와 하야시를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주말에 신주쿠 일대는 쇼핑을 하러 나온 사람들이라던가, 연인들로 북적였기에 나와 유키는 수많은 인파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거리에는 유키가 관심 있어 하는 맛있는 디저트 가게라던가 옷가게가 즐비했지만, 유키는 나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애써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모리타씨에게 시나리오를 넘겨주고 시간이 좀 비면 저녁엔 디저트 가게라도 들러볼까? 나는 속으로 빙긋 웃으며 그녀의 손을 붙잡고 열심히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윽한 분위기를 가진 찻집 안에서 모리타와 하야시를 만날 수 있었다. “어라? 유키씨도 같이 오셨네요?” 모리타는 나와 함께 온 유키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안녕하세요. 모리타씨. 지난 주엔 감사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부장님 지난주에 유키씨랑 통화하다가 쓰러지셨다면서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러게 제가 너무 무리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유키씨는 무슨 일로?” “사실 지난주부터 ‘내가 없는 거리’에서 시나리오 퇴고 작업을 비롯해 또 다른 엔딩 루트를 같이 기획하게 됐거든요.” “또 다른 엔딩 루트? 설마.. 유키씨가 직접?” 그러자 모리타의 물음에 유키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드려요. 모리타씨.” “아!! 네. 저야말로!!” 하지만 하야시의 반응은 그렇게 썩 좋지는 않았다. “엔딩 루트가 또 늘어났다 구요? 루트 하나가 늘면 엔딩이 3개가 더 추가 돼야 하는데, 아무리 텍스트 분량이라지만, 모리타 녀석 작화 때문에 용량이 남아나질 않아요.” “죄송해요. 하야시씨..” “아뇨.. 그.. 유키씨가 사과할게 아니라. 모리타 너 인마. 작화 용량 좀 안 줄일래?” “미안, 최대한 줄여볼게.” 차마 유키를 나무랄 수 없었던 하야시는 괜히 모리타에게 화풀이를 하며 툴툴거렸다. 하야시는 카트리지 시스템의 부족한 용량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는지라 엔딩 루트 하나에도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 하고 있었다. 차라리 CD 매체였다면 이런 문제는 없었을 텐데.. 모리타 역시 그런 하야시의 눈치를 봐가면서도 16색 스프라이트로 가히 절정의 작화를 뽑아내고 있었다. 사실 여기까지 오다보니 모리타와 하야시중 누가 더 괴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새로운 엔딩 루트라면.. 역시나 또 다른 새드 엔딩인가요? 부장님 이젠 더 이상 정신적으로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유키는 자신의 가방에서 갈색 서류 봉투를 꺼내어 모리타에게 내밀었다. “제가 생각한 또 다른 엔딩 루트인데, 한번 봐주시겠어요?” 모리타와 하야시는 유키가 내민 시나리오를 받아들었다. 센스 있게 따로 말하지 않았는데도 유키는 나와 모리타, 하야시를 위해 각각 한부씩 시나리오를 준비해둔 상태였다. 유키에게 받은 시나리오를 넘기려던 찰나, 마치 시험을 치르는 학생처럼 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준혁씨? 뭐 좀 마실래요..?” “아, 그래. 뭐 마시고 싶어? 내가 주문하고 올게” “아뇨!! 제가 주문 할래요. 눈앞에서 제가 쓴 시나리오를 읽으니 얼굴이 화끈거려서.. 준혁씬 커피 맞죠?” “응.. 부탁할게” 이윽고 유키는 시나리오를 살피는 모리타와 하야시를 두고 서둘러 주문대로 향했다. 그리고 유키는 아예 음료수가 나올 때까지 자리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 셋은 의자에 기대어 유키가 준비한 시나리오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선 메인 시나리오 자체를 바꿀 수가 없었기에 시나리오는 주인공이 사망한 시점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부장님.. 이 시나리오. 저는 무조건 찬성입니다.” 가장 먼저 시나리오를 전부 읽은 모리타가 입을 열자, 아직 다 읽지 못한 하야시가 소리쳤다. “안 돼!! 아직 나 다 못 봤어. 아무 말도 하지 마!!” 이윽고 유키가 커피와 함께 과일 쥬스를 가져올 때까지 나와 모리타는 숨죽인 채 하야시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유키 역시 분위기를 읽고 가만히 하야시씨가 시나리오를 전부 읽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아, 젠장.. 가게 조명이 너무 어두워..” 하야시는 또 다시 조명을 탓하며 안경 밑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두 분은 어떤 것 같아요?” 그러자 모리타와 하야시는 잠시 서로를 바라본 뒤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말했다. “솔직히.. 부장님 시나리오 보다 나은 것 같습니다.” “…….” 나도 인정하고 있었지만, 살짝 빈정 상하려 하네.. 나는 잠시 유키가 건네준 시나리오를 살피며 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공이 사망한 후 혼자 남은 그녀를 위해 천국에서 오는 편지라.. 하긴 그러고 보니 예전에 한국 영화중에 비슷한 스토리가 있었던 것 같은데.. 제목이 ‘편지’였던가? 나도 그거 보고 많이 울었었지..’ ──────────────────────────────────── ──────────────────────────────────── EP. 19 : 내가 없는 거리. (7) 그 후로 우리는 유키가 만든 엔딩을 어떤 부분에 속하게 할지 토의를 하였다. 시나리오 상으로 문제는 없었지만, 만약에 이 스토리를 노멀 엔딩으로 둘 경우 ‘내가 없는 거리’에 대한 임팩트가 상당히 줄어드는 단점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내가 없는 거리는 히로인과의 이벤트 달성률에 따라 엔딩이 달라진다. 하지만 유키가 제안한 시나리오는 이벤트 달성과는 별개로 편지라는 아이템이 가장 중요했다. “아무래도 유키가 만든 엔딩은 히든 엔딩으로 둘까합니다.” “히든 엔딩이요?” “어떠한 조건이 충족 되었을 때만이 볼 수 있는 엔딩이죠.” “그럼 일단 지옥을 한번 경험해야 볼 수 있는 해피엔딩인 건가요?” “유키의 엔딩은 특성상 히로인의 죽음을 경험한 이후에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더 크게 와 닿을 것 같아요.” “그럼 어떤 식으로..?” “가령.. 히로인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엔딩 이후 2회 차에 돌입하면 ‘그녀를 위해 편지를 쓴다.’ 라는 선택 항목을 주는 거죠.” “그러니까 부장님 말씀은 유키씨의 엔딩 자체를 2회차 요소로 두자는 말씀이군요.” “네. 맞아요.” 그러자 하야시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부장님 잠시만요. 전 지금까지 스크립트를 1회차 용으로 짜두었는데, 그런 요소가 들어가면 2회차 스크립트는 완전 별개로 작동돼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물론이다. 작게는 엔딩이후 이벤트하나 추가하는 것뿐이지만, 선택사항이 하나 더 추가됨에 따라 2회 차에서 또 다른 스크립트 구성을 불러와야 하니까. 생각보다 문제가 복잡해진다. 그리고 그로인해 내가 없는 거리는 또 하나의 문제점에 봉착하게 되는데.. “카트리지 용량이 부족한 거죠?” “네.. 맞아요. 솔직히 이 상태에서 유키씨 엔딩을 넣을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거기다 BGM도 생각하셔야죠.” 그렇지 이러한 스토리엔 배경음악도 중요한 요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모리타씨에게 작화의 퀄리티를 더 떨어뜨리라 할 수도 없고 미쳐 버리겠네.. “애초에 히로인 하나만으로 3부까지 발생하는 이벤트 수가 너무 많아요. 이거 조율이 좀 필요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똑같은 이벤트를 3명의 캐릭터로 돌려쓰던가..” “아뇨. 히로인들의 연령대가 다른 만큼 이벤트씬 마다 분위기를 바꿔줄 필요는 있어요. 오히려 작품의 퀄리티만 더 낮춰 보일 겁니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하야시의 물음에 나는 잠시 탁자에 손을 올린 채 생각에 잠겼다. 캐릭터의 퀄리티를 더 낮추고, 이벤트 씬을 살리는 게 맞는 것인지, 이벤트 씬을 포기하고 작화를 올리는 게 맞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때 모리타가 가져온 캐릭터 일러스트를 바라보던 유키가 입을 열었다. “와.. 히로인이 세 명이나 되네요? 이 캐릭터들이 1부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죠?” 그러자 유키의 질문에 모리타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왼쪽부터 연상, 동갑, 연하의 히로인들이에요.” 그중에 동갑내기로 그려진 히로인의 모습이 어딘가 묘하게 자신과 닮아 있는 걸 눈치 챈 유키는 모리타를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이 캐릭터.. 저를 모티브로 삼아 주신 거예요?” “아, 네. 사실 그렇습니다. 주인공과 소꿉친구인 미유키라는 캐릭터입니다.” “정말요? 에이~ 저보다 훨씬 예쁜데, 거기다..” 유키는 잠시 캐릭터의 가슴과 자기 가슴을 살짝 번갈아 비교하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왜 2D 캐릭터랑 자기 가슴을 비교하는 거야?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던 나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올뻔했다. “아무튼 세 명 다 굉장히 예쁘네요. 특히 연상으로 나온 히로인은 안경이 무척 잘 어울려요.” “크으~ 유키씨야 말로 안경이 가진 매력을 바로 알아보시다니. 감격입니다.” “연하는 굉장히 귀엽고, 사실 이 세 명 모두 다른 작품에서 히로인을 해도 될 정도인데요? 왠지 세 명이 전부 한 작품에 모여 있으니 아까운 느낌이 들어요.” ‘세 명이 한 작품에 모여 있으니 아깝다고?’ 유키의 말을 들은 그 순간 내 머릿속에 겁나게 단순하면서도 사악한 마케팅 하나가 스쳐 지났다. ‘그래.. 스토리와 작화 그리고 BGM이 전부인 이 게임에 그 무엇 하나 포기할까보냐?’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모리타와 하야시씨에게 말했다. “우리 작품 퀄리티를 더 올리죠.” “네?” 내 대답에 모리타와 하야시는 벙찐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용량이 부족하다고 난리를 피웠는데, 뜬금없이 퀄리티를 더 올리자니 저런 표정을 지을 만도 하지.. “모리타씨 앞으로 작화의 비트맵 용량을 더 올려도 됩니다.” “네? 그러면 저야 작업하기 수월하겠지만, 부장님 대체 어쩌시려구요?” “우선 하야시씨에겐 죄송하지만, 1부에서 히로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대폭 수정할 계획입니다.” “뭐라구요!?” 일명 디렉터의 초필살기인 밥상 뒤집기를 시전하자, 하야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긴 그것도 그럴 것이 여태까지 자신이 작업한 코딩들이 일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버릴게 뻔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나의 선택은 하야시씨에겐 히로인이 자살하는 엔딩보다 더 무섭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항상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던 하야시의 얼굴은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다. “부.. 부장님? 갑자기 저한테 왜 그러세요?” “모리타씨의 고 퀄리티 작화를 노리면서 용량에 타협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미안합니다. 하야시씨.. 하지만 분명히 저희들 뿐만 아니라 유저들에게도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거라 확신합니다.” “그럼 설마 1부, 2부, 3부를 카트리지 별로 따로 발매 하실 생각인가요?” “아뇨.. 그러면 스토리 구성에 지장이 생겨서 안돼요.” “그럼? 대체 뭘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유저들에게 처음부터 히로인을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을 드리려고 합니다.” 내 말에 모리타와 하야시 그리고 유키는 동시에 고개를 갸웃 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유저에게 처음부터 히로인을 선택하게 한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전혀 감이 안 잡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그들의 반응을 지켜보다가 뒤에 말을 이었다. “펜타곤 소프트에서 출시하는 ‘내가 없는 거리’는 각 히로인 버전 별로 발매하려 합니다. 즉 카트리지 하나당 한명의 히로인만 들어있는 거죠.” “네!? 설마 그럼 히로인 하나하나를 카트리지 별로 따로 팔자는 말씀이세요? “네. 맞아요.” “허어..” 이왕 이렇게 된거 이번에는 한정판으로 3명의 히로인 묶음 버전을 기획해 볼까? 모리타에게 한정판 특전으로 화보집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한 다음에 천천히 한정판 구성을 기획해보자. ──────────────────────────────────── ──────────────────────────────────── EP. 20 : 슈퍼 패밀리의 탄생까지 (1) & 한 달 후. 일단 히로인 별로 세 가지 카트리지 제작이 결정 되자, 내가 없는 거리의 개발은 순풍에 돛을 단 듯 수월하게 제작되기 시작했다. 하야시 역시 처음에는 탐탁치 않아했지만, 일단 첫 번째 캐릭터인 하세가와 미유키의 작업을 시작하자, 굉장히 빠른 속도로 작업을 진행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우선 카트리지 하나에 한명의 캐릭터가 들어감에 따라 1부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던 세 히로인의 이벤트 스크립트를 단일화 할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기존 보다 캐릭터 수가 줄어든 만큼 카트리지의 여유 공간이 충분했다. 이로서 모리타의 작화 퀄리티와 BGM 사운드팀의 퀄리티가 상대적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전에도 말했듯이 웃는 자가 있으면 우는 자도 있으니.. 후자는 바로 나였다. ‘젠장. 똑같은 시나리오로 돌려막기 할 수도 없고, 아예 캐릭터 마다 새로운 시나리오를 준비해야 하잖아!!’ 따라서 극히 초반의 전개를 제외하곤 1부 스토리를 전부 갈아엎어야 할 판이었다. 한명의 히로인에 집중하지만, 다른 버전의 구매의욕을 자극하기 위해 배경 인물로 또 다른 히로인들의 인연을 조금이나마 풀어 주어야 하기에 신경써야할 부분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마냥 죽으란 법은 없다고, 나에게 굉장한 구원 투수나 나타났으니.. 그 이름은 내 여자 친구이자 현 방송국 보조 작가인 ‘이시카와 유키’님 이셨다. “준혁씨만 괜찮다면 여기 연하 히로인으로 나오는 나나세의 이야기는 제가 써도 될까요?” 이미 마지막 시나리오 작업에서 필력을 검증 받은 그녀의 제안에 우리들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유키는 살짝 혀를 내밀며 말했다. “대신 공짜는 아니에요~ 저도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만큼 정당한 보수를 요구할 거예요.” “그야 물론이지.” 모리타는 유키와 함께 작업하는 게 마냥 기쁜지 웃으며 내 말을 덧붙였다. “마지막 스탭 롤에도 넣어 드리겠습니다.” “우와~ 그거 좋은데요?” 제작 스탭 롤에 자기 이름이 올라가는 게 기분이 좋은지 유키는 우리를 향해 밝게 미소 지었다. 그때 커피를 마시던 하야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저기 부장님.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되는 게 정말 이런 판매 방식이 먹힐까요?” 역시나 하야시는 현재까지 게임 역사상 유래 없는 ‘내가 없는 거리’의 판매방식이 조금은 불안한 모양이었다. “걱정 마세요. 아마 없어서 못 팔 겁니다. 일단 하나를 물기 시작하면 줄줄이 낚일 테니 두고 보세요.” “뭐 드래곤 엠블렘도 그렇고 사이킥 배틀 역시 성공적인 마케팅을 보여주셨으니 이번에도 믿고 달려 보겠습니다.” 그렇게 나와 유키, 그리고 모리타와 하야시가 제작하는 ‘내가 없는 거리’는 민텐도 슈퍼 패밀리의 런칭 타이틀을 목표로 집중 제작 기간에 들어갔다. & 1988년 10월 29일 일본에 새로운 신형콘솔인 NEGA 드라이브가 발매되었다. 모토로라에서 개발한 자일로그 8비트 CPU 2개로 구성한 16비트 콘솔인 NEGA 드라이브는 차후 한국의 대기업을 통해 ‘알라딘 보이’라는 희한 한 작명센스로 출시될 녀석이었다. 고급스러운 블랙 색상으로 디자인 된 NEGA 드라이브는 발매 당시 컨트롤러 1개를 포함하여 정가 21,000엔이라는 초고가로 출시되었는데, 주목할 만한 타이틀은 NEGA에서 만든 ‘수왕기’ 하나뿐이었다. 수왕기는 그리스 신화풍의 게임으로 악마에게 납치당한 아테나를 구하기 위해 근육이 불끈불끈한 수인족 남자의 모험기를 그린 액션게임이었다. 아케이드 센터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던 녀석이 가정용 콘솔로 이식되어 출시된 탓에 초기 NEGA 드라이브를 견인하는 효과를 누리고 있었다. NEGA드라이브의 컨트롤러가 3버튼인 것은 바로 이 수왕기의 영향이 컸는데, 주먹과 발, 점프라는 3가지 액션을 사용하기 위해 3버튼 시스템을 차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3버튼 체제는 후에 NEGA 드라이브용 게임 개발에 상당히 골치 아픈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장본인이 되었다.) ‘하긴 이 때만해도 버튼 3개면 충분한 게임들이 많았으니까..’ 또한 수왕기의 컨셉은 세기말 구세주 전설이라 불리우던 만화 ‘북두의 권’을 연상시키는 걸로도 유명했는데, 스피릿 볼이라는 아이템을 계속 먹다보면 주인공의 근육이 점점 부풀어 오르고, 최종적으로 수인으로 변신하여 호쾌하게 적을 때려 부수는 (정말로 산산조각 부숴버린다.) 연출로 큰 인기를 끌었다. ‘지금 보니 연출이 상당히 고어 한데? 이걸 내가 그렇게 재밌게 했었다니, 기가 막히네..’ 민텐도 회의실에 설치된 NEGA 드라이브를 플레이하던 나는 잠시 후 게임 컨트롤러를 내려놓았다. “어떤가? 강군이 보기에 NEGA 드라이브 콘솔은?” “확실히 16비트답게 연산처리속도가 빠르네요. 헌데 콘솔을 이끌어 갈만한 타이틀이 없는 게 아쉽습니다.” 그러자 회의실 상석에서 경쟁사 기기를 바라보던 카마우치 사장이 입을 열었다. “음, 결국엔 기기 견인효과를 끌어낼 수 있는 런칭 타이틀이 중요하다는 말이군.” “거기다 현재로서 NEGA 드라이브를 보조해 줄만한 서드 파티가 없는 것도 큰 문제구요.” “으하하~ 그거야 우리 패밀리가 너무 잘나가니까 그렇지. 어느 소프트 회사가 비싼 제작비 들여서 NEGA 드라이브용 게임을 만들겠어? 다음 달에 슈퍼 마리지3만 출시되면 NEGA 드라이브 따위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겠지.” 아주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시는군. 그만큼 1988년도는 민텐도 패밀리에서 수많은 명작이 쏟아져 나온 시기였다. 올 초에 출시한 드래곤 워리어 3가 사상 최대의 판매 기록을 경신하며 현재까지 일본에서만 200만장을 넘게 팔아치우고 있었고, 내가 만든 사이킥 배틀 역시 특수 칩을 사용해 제작이 더딘 상황에서도 미국 시장과 동시 발매 효과 도합 300만장 이상을 팔아치우고 있었다. 거기다 지난달에는 펜타곤 소프트의 파이널 프론티어 2가 주인공 파티가 전원 사망하는 충격적인 오프닝이 화제가 되어 발매 한 달 만에 50만 카피라는 대히트를 기록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전 세계인들이 기다리는 쿠마모토 시게루의 슈퍼 마리지3가 대기 중이었으니 NEGA 드라이브는 가장 최악의 시기에 런칭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 나라면 런칭 타이틀을 좀 더 확보하기 위해 기기 출시 일을 뒤로 미루던가 했을 텐데, NEGA는 자사 게임은 참 잘 만드는데 반해 마케팅 실력은 영 꽝이라니까..’ 적어도 음속을 달리는 푸른 고슴도치 녀석이 출시 될 때까지 말이다. 그때 카마우치 사장이 조금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나와 군페이씨를 향해 물었다. 대게 사장님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헛소리를 많이 하던데? “내가 보기에 말이지. 차세대 콘솔 런칭도 나쁘지 않지만, 패밀리 콘솔에 출시 된 수많은 명작 타이틀을 내버려 두기엔 너무 아까운 것 같아.. 거기다 새로운 기기를 런칭하면 분명 초반에 타이틀 부족 현상에 시달릴 테고..” 그러자 사장님을 바라보던 군페이씨가 입을 열었다. “사장님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신가요?” “내년 말에 발매할 슈퍼 패밀리에 하위 호환 기능을 넣는 건 어떨까?” “하위 호환이요?” 카마우치 사장의 말에 회의실에 있던 나와 군페이씨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이미 CPU부터 메모리 설계까지 다 끝내놓은 판국에 저건 또 무슨 어이없는 개소리냐.. ──────────────────────────────────── ──────────────────────────────────── EP. 20 : 슈퍼 패밀리의 탄생까지 (2) 하위 호환이란, 기존에 제작된 콘솔의 카트리지를 차세대 모델에도 플레이할 수 있는 일종의 팬 서비스용 기능이다. 카마우치 사장의 의도는 신규 콘솔 출시에 겪게 되는 타이틀의 부재를 해소 하면서 기존의 유저들도 자연스레 끌어 올 수 있기에 얼핏 좋은 생각 같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 기술이 단지 ‘우리 하위 호환 하자!!’ 라고 해서 ‘네!!’ 하고 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작업이 아니란 말이지.. 새로운 콘솔을 만든다는 것 전 세대보다 훨씬 업그레이드 된 스펙으로 유저들에게 새로운 게임을 체험시켜주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당연히 기존보다 해상도가 늘어나고, 스프라이트 기능도 좋아져 그래픽이 월등하게 좋아진다. 하지만 그것은 차세대 기종으로 출시되는 게임들의 이야기고, 기존에 출시된 패밀리 게임들은 본래 가지고 있는 소스의 한계를 벗어 날수 없었다. 거기다 달라진 콘솔의 스펙으로 인해 기존에 없던 버그가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도 생각해야한다. “사장님. 지금 시기에 하위호환을 결정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왜?” 나는 카마우치 사장의 너무나 간결한 대답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내 곁에 있던 군페이씨 역시 나를 돕기 위해 나섰다. “사장님. 그건 강군 말이 옳습니다. 하위호환이란 콘솔 제작 초기 단계부터 면밀히 검토하여 기존의 게임을 구동시키기 위한 로직을 따로 설계해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패밀리용 카트리지를 인식할 수 있는 카트리지와 CPU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현재 슈퍼 패밀리는 그 단계를 훨씬 지나 있는 상태입니다.” “그럼 다시 개발 초기로 돌아가면 되잖아?” “설마 슈퍼 패밀리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자구요!?” 카마우치 사장의 정신 나간 대답에 공돌이 1호인 군페이와 3호인 나는 환장할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 시기에 슈퍼 패밀리를 새로 제작한다면 스펙이 달리질 확률이 있었고, 그것은 ‘내가 없는 거리’의 개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다. 거기다 첸드라가 리코사의 CPU를 복제 생산하여 납품한 라이5A22 역시 하위호환이 가능한 성능에 맞춰 다른 업체로 바뀌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 것 만큼은 절대로 안 돼..’ 군페이씨는 계속해서 하위호환의 문제점에 대해 사장님에게 피력하고 있었지만, 카마우치 사장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 뜻을 굽힐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기존 유저에 대한 배려? 신형 콘솔의 타이틀 부재를 해소 시키는 장치? 말이야 번지르르 하지만, 사실 카마우치 사장이 노리는 건 단 하나. 패밀리 카트리지 제작에 대한 로열 티였다. 드래곤 엠블렘 이후로 서드 파티의 로열티를 줄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보았지만, 거의 독점 체제로 들어간 민텐도 패밀리의 카트리지 공장은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드 파티의 수요는 줄어들지 않았고, 민텐도는 서드 파티의 카트리지 제작 로열티 만으로도 매출에 어마어마한 금자탑을 쌓아가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카마우치 사장은 최근에 서드 파티의 카트리지의 생산 수량과 소프트 가격까지 직접 손을 대기 시작했다. 내가 운영하는 펜타곤 소프트나 드래곤 워리어의 피닉스 소프트, 폭스 소프트와 같이 대형 개발사들이야 자금력을 바탕으로 카트리지 제작의 우선권을 따낼 수 있었으나, 10명 이하의 소규모 개발사는 게임을 완성 시켰어도 민텐도에 로열티를 지불한 돈이 없어 게임을 발매 못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이럴 때 그들의 선택은 단 하나. 자신들이 만든 게임을 헐값에 대형 개발사에 팔아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억울하더라도 어쩔 수가 없다. 아예 게임을 폐기 시키는 것 보단 그 편이 조금의 수익을 더 챙겨 갈 수 있었으니까.. 군페이씨는 어떻게든 카마우치 사장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하위호환의 문제점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지만, 애초에 돈에 눈이 먼 카마우치 사장의 마음을 돌리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방법은 하나 있긴 한데.. 나는 잠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다가 카마우치 사장에게 말했다. “사장님. 정 그렇게 하위 호환을 고집하신다면 제가 맡아 보겠습니다.” “옳지~!! 역시 강군. 그렇게 나와야지.”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일단 슈퍼 패밀리는 지금 스펙 그대로 진행하게 해주세요.” 그러자, 군페이씨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음? 그러면 패밀리용 카트리지 슬롯은 어쩌려고?”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댑터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어댑터?” “일종의 변환 장치죠. 슈퍼 패밀리용 카트리지 위에 패밀리용 슬롯을 만들어 에뮬레이팅 하는 장치입니다.” 그러자 군페이씨가 나의 발언에 손가락을 딱하고 튕겼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확실히 별도로 보조 장치를 만들면 굳이 카트리지 슬롯을 늘리지 않아도 되겠군.” “호오.. 나야 패밀리용 카트리지만 사용하게 할 수 있다면 상관없지.” “하지만, 사장님. 이 어댑터는 차후에 슈퍼 패밀리를 발매하고 나서 유저들의 반응을 보고 제작할지 결정하겠습니다.” “음? 어째서??” “하위 호환은 분명 기존에 게임 카트리지를 가지고 있던 유저들에겐 매력적인 기능일 수 있지만, 차세대 게임들이 늘어날수록 점점 사용하지 않게 될 게 뻔합니다. 차세대 게임으로 높아져 버린 눈 덕분에 구세대 게임을 플레이할 가치를 점점 잃게 되는 거죠. 차라리 동시 발매되는 런칭 타이틀 개발에 힘을 쏟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일 겁니다.” 카마우치 사장은 나의 말에 회의실에 설치된 NEGA 드라이브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NEGA의 킬러 소프트라고 불렸던 수왕기도 저 모양인데, 과연 발매 초기부터 슈퍼 패밀리를 견인 해줄 만한 타이틀이 뭐가 있을까?” “수왕기는 조금 별개죠. 콘솔을 견일 할 수 있는 건 독점 타이틀입니다. 수왕기는 이미 아케이드용으로 발매된 게임을 가정용 콘솔로 이식한 것에 불과하죠. 유저들에겐 친숙하지만, 가정용 콘솔 게임으로선 메리트가 많이 떨어집니다.” “흐음..” “생각해보세요. 저희 패밀리 역시 초반에는 동킹콤이나 마리지 브라더스를 이용해 게임센터용 아케이드 게임을 집에서 즐길 수 있다고 선전했지만, 결국 패밀리를 성공으로 이끈 건 아케이드 게임이 아닌 드래곤 워리어와 같은 가정용 RPG 게임이었습니다.” “하긴 듣고 보니 그렇군. 일리가 있어. 우리야 이제 아케이드 산업에서 완전히 손을 땠으니 NEGA와는 다르게 슈퍼 패밀리만의 독점 타이틀을 내세울 수 있지..” “최근에 업계에서 들은 소식인데, 이미 슈퍼 패밀리의 스펙을 기반으로 여러 서드 파티에서 게임을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올 초에 펜타곤 소프트로 이직한 모리타씨에게 들은 정보입니다.” “그래? 그것 참 반가운 소리군. 그들도 런칭 타이틀을 노리고 있는 건가?” “아마도 그렇겠죠. 전 민텐도 소속이었으니까 시장 상황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거기에서 그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손가락 빨고 있을 수 없지. 우리 민텐도도 슈퍼 패밀리에서만 즐길 수 있는 최고의 타이틀을 함께 런칭 해야 하지 않겠어?” 카마우치 사장의 질문에 나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근데, 이 자식은 왜 아직까지 안 오는 거야? 회의 시작한지가 언젠데..” “글쎄요. 며칠 전부터 해외로 휴가 계획 준비한다고 여행사를 알아보던데..” “여행?” 그때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회의실 문이 덜컥 열리며 시게씨가 들어왔다. 어이구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최근에 슈퍼 마리지 3개발을 끝내고 카트리지 제작에 들어간 시게씨는 굉장히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사장님~ 저 왔습니다.” “시게 너 인마. 지금이 몇 신데 이제 회의실에 기어들어와!?” “슈퍼 마리지3 생산 공장을 들렀다오는 길에 차가 좀 막혀서요. 하하~” “벌건 대낮에 뭔 차가 막혀. 혹시 여행사 다녀온 거 아냐? 너 휴가 낼 계획이라며” 그러자 시게씨는 뜨끔한 표정으로 우리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에이~ 사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아, 그래? 그럼 다행이네.” “네? 뭐가 다행인지?” “너 슈퍼 패밀리용으로 새로운 슈퍼 마리지 좀 만들어 봐라.” “네!?” “제작 기간 1년. 동시 발매 타이틀이니까 기간 짤 없으니 열심히 만들어야 할 거야.” “아니 저기 사장님!! 저 이제 막 슈퍼 마리지 3를 끝냈는데요..?” “그래서 새로 나오는 슈퍼 패밀리엔 마리지 안낼 거야?” 카마우치 사장의 말에 시게씨는 벙찐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테이블 밑으로 두 손을 모아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하긴 런칭 타이틀로 슈퍼 마리지 시리즈만한 게 없긴 하지. 일해라 공돌이 2호기 ──────────────────────────────────── ──────────────────────────────────── EP. 20 : 슈퍼 패밀리의 탄생까지 (3) & 그 날 이후. 민텐도 대표 디렉터인 공돌이 2호기는 슈퍼 마리지 3 발매 행사조차 참석하지 못하고 새로운 개발 프로젝트에 매달려야 했다. 슈퍼 패밀리용으로 새로 시작 되는 프로젝트의 이름은 슈퍼 마리지 월드. 새로운 차세대 기종에서 마리지는 새로운 스프라이트 기능에 힘입어 더욱 역동적이고 또렷한 2D 그래픽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너무 타이트 한 제작 일정 때문이었을까? 슈퍼 마리지 월드는 기존에 발매된 슈퍼 마리지 3와 굉장히 닮아 있었다. 3에서 대호평을 받았던 랜드 형식의 스테이지 구성은 이번 월드에서도 그대로 차용 되었고, 잠시 동안 하늘을 날 수 있는 너구리 꼬리는 망토로 바뀌어 상쾌하게 공중을 날아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자기가 보기에도 전작인 슈퍼 마리지 3와 너무나 비슷한 플레이 방식에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가능하면 시게씨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사실 나와 군페이씨 역시 카마우치 사장 덕에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니.. 매주 계속 되는 카마우치 사장의 변덕 때문이었다. 분명히 지난주에 제대로 컨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주에는 수주 단가가 높다는 이유로 재검토 보류가 반복되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게 대체 몇 번째냐..” 반려당한 결재 서류를 내던지며 머리를 벅벅 긁고 있는데, 마침 군페이씨가 내 방을 찾았다. “강군. 자리에 있었군.” “군페이씨. 어쩐 일이세요?” “잠시 머리나 식힐 겸 차나 한잔 할까?” “좋지요. 안 그래도 지금 머리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거든요.” “하하~ 자네에게 말은 안했지만, 겜보이를 만들 때 나 역시 지금 자네랑 똑같았지.” “어휴.. 진짜 군페이씨도 대단 하십니다. 저 변덕스러운 사장님 비위를 어떻게 맞추셨어요?” “아무래도 오랫동안 사장님을 모시면서 조금 요령이 생겼다고 할까?” “요령이요?” “따라오게, 나머진 차라도 마시면서 얘기하지.” “알겠습니다.” & 잠시 후 나와 군페이씨는 점심 식사 후 근처 찻집에 들렀다. 그에게 안내 받은 찻집은 최근에 들어서고 있는 커피 전문점이 아닌 일본 전통 차와 다과가 함께 나오는 와가시 전문점이었다. “요새 젊은이들은 커피 전문점에 자주 간다던데, 나이가 들다보니 그런 곳보단 이런 곳이 더 취향에 맞더군.” 나는 다다미가 깔려 있는 조그만 방에서 군페이씨와 마주 앉았다. 잠시 후 종업원이 뜨거운 엽차와 함께 와가시가 담긴 예쁜 그릇을 내 앞에 올려두었다. 와가시란 일본의 전통 과자로 한문을 풀이하면 우리말로 ‘화과자’라고 불렸다. 화과자는 첫 맛은 눈으로 끝 맛은 혀로 즐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시각적으로 즐거움을 추구하는 일본식 디저트였다. 주요 재료는 찹쌀과 팥, 밀가루와 천연색소를 사용해 형형색색의 빛깔을 표현한다. 군페이씨가 데려온 와가시 전문점은 교토에서도 제법 알아주는 유명한 곳이었기에 내 앞 접시에 담긴 화과자는 실로 먹기가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만약에 유키랑 함께 왔었다면 굉장히 좋아했을 텐데.. ‘내 평생 과자가 이렇게 섹시해 보이긴 처음이다.’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는데 군페이씨가 뜨거운 엽차를 한모금 삼키며 입을 열었다. “카마우치 사장님에게 직접 결재를 받다보니 문제가 한 두가지가 아니지?” “사실 그래요. 무슨 변덕이 그리 심하신지..” “하하.. 사실 카마우치 사장님이 겉으로 보기엔 굉장히 호탕해 보이지만, 실은 겁이 좀 많으시거든.” “네? 아니 금고랑 계좌에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뭘 그렇게 두려워하신 답니까?” “젊었을 때부터 실패를 많이 경험했으니까. 지금은 패밀리가 거의 일본의 콘솔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 전만 해도 사장님이 벌인 사업의 대다수가 실패했지.” 허어.. 그래서 결재 서류 하나에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건가? “21살에 조부께서 급작스러운 병으로 쓰러지고 나서, 너무 이른 나이에 민텐도라는 회사를 짊어지게 되었지만, 그 시절 진정으로 사장님이 원한 건 회사 경영이 아니었다네. 하지만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으로 민텐도 회사를 물려받게 되었지.” “…….” “자네는 모르겠지만, 최초로 민텐도 골패당의 문을 연 ‘카마우치 후사히로’님부터 대대로 민텐도는 자식 복이 없는 걸로 유명하지. 가업을 물려줄 아들이 없어 선대와 후대까지 데릴사위를 들여 민텐도라는 카드 사업을 물려 왔다네. 그러던 중 처음으로 가업을 이을 아들이 태어난 게 현재 사장님이야. 그래서 어릴 때부터 후계자 교육을 엄격하게 받았다고 하더군.” ‘어쩐지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완전 독불장군 수준이더라니. 그냥 어릴 때부터 금수저 제대로 물고 태어났구나.’ “초반에 카마우치 사장님은 세계 최초로 플라스틱 카드 제질의 트럼프를 제작하며 승승장구 했지만, 곧 한계에 부딪혔지. 역시나 카드 제조업만으론 회사 성장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사장님은 그 후로 모텔 숙박업, 라면 제조업, 택시 회사까지 운영했지.” “라면이요?” 카마우치 사장님이 직접 요리사 복을 입고 면발을 뽑아내는 상상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인스턴트 라면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대실패였지. 62년에 처음으로 민텐도가 주식시장에 상장됐을 때 980엔이었던 주가가 60엔까지 떨어졌으니. 거의 회사가 망하기 일보직전 이었어.” 완전 지옥 밑바닥까지 기어 들어가서 악마랑 하이파이브 한번 치고 올라온 격이로군. “그런 상황까지 갔는데 용케도 여기까지 올라왔네요.” “그게 우연찮게 내가 만든 장난감을 재밌게 봐주신 사장님 덕에 민텐도는 장난감 회사로 완전히 노선을 틀어버렸지.” “아~ 그 울트라 핸드?” 내가 양손으로 무언가를 움켜쥐는 제스쳐를 취해보이자, 군페이씨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공장에 남아도는 폐자재로 재미삼아 만든 게 그렇게 인기를 끌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네.” “그 당시에 아이들 눈에는 신기한 장난감이었을 테니까요.” “사실 패밀리 사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도 카마우치 사장은 반대가 심했다네.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 하던 패기 넘치던 젊은이가 세상 풍파를 다 겪고 나더니 한없이 두려운 겁쟁이가 돼버린 거야. 어쩌면 지금 이 시기에 안주하고 싶어 하는 사장님의 마음도 모르는 건 아니지. 새로운 콘솔이 또다시 우리에게 큰 기회가 될지 아니면 독이 될지 장담할 수 없으니까.” 군페이씨는 쓸쓸히 웃으며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찻잔을 손에 쥐었다. &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카마우치 사장에게 차세대기 개발에 관련하여 독대를 청했다. 스쿠루지 영감 마냥 언제나 신경질 적인 성격의 카마우치 사장조차도 조금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사장실로 불러들였다. “강군이 별일이군. 나와 따로 대화를 하고 싶다고 청하다니.” “그러게요. 언제나 군페이씨나 아니면 시게씨랑 함께 있었는데 둘만 보니 좀 어색한데요?” “녀석. 입담 하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 구만.” “사실 신형 기기 개발에 대해서 사장님께 몇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 문제가 있나?” “사실 한 두 개가 아닌데, 몇 개만 추려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요 녀석 말 버릇보소? 좋아 해 봐.” “한국말 중에 싼 게 비지떡이란 말이 있습니다.” “음? 그게 뭔 말이냐.” “두부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인 ‘비지’라는 것에 쌀가루나 밀가루를 넣고 부친 떡이죠.” “호오. 그거 맛있겠군.” “한국에서는 이 비지떡을 보잘 것 없는 것에 비유해 쓰곤 하죠. 다른 떡에 비해 가격이 싼 만큼 허기도 금방지고, 잘 상하기도 하거든요.” “그래? 그런데 왜 그런 얘기를 나에게 하는 거지?” “지금 우리 슈퍼 패밀리가 딱 그 짝이 나게 생겼거든요.” “뭐라고!?” “사장님께서 계속 원자재 단가를 낮추고 계시니까요. 물론 단가를 낮추는 만큼 회사에 이익이 생기는 것은 맞지만 이대로 간다면 사후관리에 굉장히 신경을 써야할 겁니다. 휴대용 겜보이를 만들 때 사장님이 말씀 하셨듯이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게임기잖아요. 고장 없이 튼튼해야합니다.” “그러게 개발 초기부터 뭔 놈의 컨트롤러에 그렇게 돈을 쏟아 부었냐..” “아니 사장님. 콘솔 스펙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왜 또 이미 개발 완료까지 끝마친 컨트롤러 이야기를 꺼내십니까.” 슈퍼 패밀리보다 먼저 만들어진 6버튼 시스템의 게임 패드는 셀렉트 버튼과 스타트 버튼까지 합치면 총 8개의 버튼과 네 방향의 십자키가 달려있었다. 카마우치 사장은 초기의 컨트롤러 컨셉을 보고 아이들이 가지고 놀기엔 너무 복잡하다고 반대했지만, 나는 무조건 6버튼 체제의 컨트롤러를 고집했다. 컨트롤러란 단순히 화면 안에 캐릭터를 움직이는 조종간이라 생각하겠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컨트롤러의 버튼이 하는 일은 굉장히 많았다. 단순하게 ‘눌렀다 떼면 동작한다.’ 라는 것 말고도 버튼은 게임을 만들 때 수많은 변수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A버튼을 눌렀다 땐다. 아니면 A버튼 누르고만 있는다. 아니면 A버튼을 연속으로 누른다. A버튼과 B버튼을 함께 누른다와 같은 수많은 변칙이 버튼 안에 숨어 있다. 그래서일까 슈퍼 패밀리의 개발부서는 나의 6버튼 시스템 제안에 초기부터 난항을 겪었다. 그 당시만 해도 여러 버튼을 함께 누른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던 시기였기 때문이리라. 컴퓨터 키보드만 해도 동시 입력이 안 되는 것들이 수두룩했으니까. 그런 복잡한 시스템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닐 테지.. “알았다. 알았어. 대체 얼마를 원하는 거냐?” “사장님께서는 콘솔마진을 최저가로 두고, 카트리지에서 로열티를 받아내는 마케팅을 어디서 고안하셨습니까?” “면도기 회사인 질렛에서 따왔지. 기본 면도기를 저렴하게 판매하는 대신 면도날로 수익을 창출하는 로스 리더 마케팅 방식이라고 하더군.” “덕분에 카트리지 판매로 수익이 많이 오르셨죠? 저번에 신문에서 보니 일본 상위 기업 10위 안에 들어가셨던데”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군. 확실히 이번 콘솔 사업에서 그 동안의 실패를 만회하고도 남을 정도로 벌어들였으니.” “이미 지난 5년 동안 수천억 이상을 벌어 들이셨을 텐데, 사장님은 언제나 실패했을 때의 생각뿐이시군요.” “이 녀석아. 돈이란 있을 때 움켜쥐어야하는 거야. 그리고 단단히 지켜야해.” “사장님은 남은 평생 얼마정도 돈을 쓰실 생각입니까?” “뭐?” “한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놀고먹는다고 가정하면 과연 얼마정도의 돈을 쓸 수 있을까요? 100억? 천억? 물론 욕심에 따라 금액은 무한으로 늘어가겠지만, 그냥 평범한 사람이 가끔 여가를 즐기고 먹고 자는 데만 사용한다면 100억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저라면 오히려 100억도 남겠네요.” “너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냐?” ──────────────────────────────────── ──────────────────────────────────── EP. 20 : 슈퍼 패밀리의 탄생까지 (4) “너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냐?” “그 돈을 전부 저승 길 노잣돈으로 삼으려는 게 아니라면 제품의 완성도에 투자가 중요하다고 말씀 드리는 겁니다. 만약 이대로 저가 제품 구성으로 콘솔을 만든다면 분명 발매이후 불량률이 증가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소비자들은 불만을 품겠죠. 제품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고 그것은 곧 민텐도의 이미지를 해치게 될 겁니다. 수리가 몇 번 반복되다보면 자연스레 제품 자체의 결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테고, 까다로운 소비자들이라면 전량 리콜을 요청하거나 민텐도 제품에 대해 불매운동을 벌일 수도 있겠지요.” 이거 너무 세게 나갔나? 하지만 카마우치 사장은 저승 길 노잣돈이란 말보다 전량 리콜, 불매 운동이라는 말이 더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불매 운동이라고?” “극단 적인 예시이긴 하지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이미 전 세대와는 다르게 콘솔 업계의 판이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거 못 느끼시겠습니까? NEGA는 16비트 게임기 출시와 함께 얼마 전 풀 컬러 휴대용 게임기를 만들 예정이라고 발표했고, 이제까지 아케이드 게임만 만들던 SMK 역시 가정용 콘솔 업계에 뛰어들기 위해 눈치를 살피고 있어요.” “흐음.. 그 소식은 나도 듣긴 했다만..” “저는 조금만 더 사장님이 욕심을 부렸으면 합니다. 그리고 저를 믿어 주신다면 기필코 슈퍼 패밀리를 성공적으로 런칭 해보이겠습니다.” “너 이 녀석. 그렇게 자신 있단 말이지?” “물론이죠.”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 카마우치 사장에게 나는 빙긋 웃음을 던졌다. 당신들은 모르겠지만, 타임 슬립을 거친 나에게 실패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아예 감을 잡을 수 없을 만큼 현재 시장의 궤도가 틀어진 것도 아니고, 패밀리의 시대 끝나는 오늘까지 나는 너무 큰 혁신 보다는 게임 시장의 궤도를 유지하는데 노력했다. 그 결과 적어도 앞으로 몇 년 후의 미래 정도야 쉽게 예측이 가능하지.. “알았다. 그럼 이제부터 네 녀석이 올리는 보고 사항에 일체 손을 대지 않겠다.” ‘됐다.’ 카마우치의 대답에 나는 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군페이씨의 조언대로 카마우치 사장은 자신의 실패를 두려워하기에 타인을 통한 확신을 갈망했다. 그것은 카마우치가 나를 신용하는 것은 민텐도의 사명으로 내걸은 100명의 사원보다 1명의 천재를 귀히 여기는 사상과도 닮아 있었다. “실망 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미국 시장에서도 그렇고 군페이와 시게 녀석이 칭찬하는 것만큼 네 녀석은 항상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어왔으니까.” 카마우치 사장은 굳은 표정을 풀고 나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이렇게 면대 면으로 이야기를 들으니 속이 후련하군. 매일 올라오는 결재 서류를 들여다보며 혼자서 끙끙 앓던 게 허무할 정도야.” “저 역시 생각했던 것 보다 사장님과 이야기가 잘 풀려서 마음이 놓이네요. 하마터면 민텐도에서 마지막으로 맡은 프로젝트가 실패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요 며칠 잠을 좀 설쳤거든요.” 테이블 앞에 서류를 정리하며 굉장히 스무스하게 퇴직에 대한 말을 내뱉자 카마우치 사장은 잠시동안 내 말 뜻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두 눈을 꿈뻑 거렸다. “강군? 너 방금 뭐라고 했냐. 마지막 프로젝트라고?” 나는 아무렇지 않게 정리된 서류를 한쪽으로 치워두고 웃으며 대답했다. “네. 이번 슈퍼 패밀리가 완성을 끝으로 민텐도를 떠날까 합니다.” “뭐라고!?” 카마우치 사장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사장실 안에 크게 울렸다. 하긴 현재 민텐도를 떠받치고 있는 서까래 중 하나가 쑥하고 뽑혀져 나가는 기분일 테니 충분히 놀랄 만하지. “사실 퇴사에 대해선 이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제가 맡은 차세대 콘솔의 개발 프로젝트를 제대로 끝마치고 싶었을 뿐이죠.” “안 돼.” “네?” “가지마라.” 떠나지 말라는 카마우치 사장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지난 5년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참담한 그의 표정에 나는 미소를 거두었다. “우리 회사를 떠나서 어디로 가려는 것이냐.” “글쎄요. 딱히 가고 싶은 회사는 없습니다.” “뭐라고? 그럼 가고 싶은 회사도 없는데, 멀쩡히 다니는 회사를 왜 그만 둬!?” “따로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안 된다. 다른 사람은 다 그만 두더라도 너랑 군페이, 시게 녀석은 안 돼.” 얼라? 사장님 성격상 굉장히 쿨하게 보내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나올 줄이야.. 하지만 나 역시도 물러설 수 없었다. 민텐도에서 지난 5년동안 일해 왔던 것은 바로 슈퍼 패밀리를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차세대 콘솔을 만들어낸 개발자로 이름을 알리기 위해 지난주에는 준페이와 따로 인터뷰까지 진행해 두었다. 아마 다음 달이면 정식으로 잡지에 소개가 될 것이고, 사이킥 배틀의 개발자이자, 슈퍼 패밀리 개발을 담당했다는 정식 커리어를 쌓게 되었다. 거기다가 해외를 빙빙 돌며 일본 귀국을 기다리는 전 트라이앵글 사장도 돌아오라고 해야지. 두 달 전에 통화할 때는 이제 그만 일본에 돌아가고 싶다고 울고불고 매달리는 통해 굉장히 난감한 적이 있었다. 아무튼 이제야 겨우 온전히 펜타곤 소프트가 내 손에 들어오려는 찰나에 더 이상 민텐도에 붙잡혀 있을 순 없지. “말리셔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제 마음은 정해졌거든요. 그리고 굳이 제가 이곳에 남아있지 않아도, 군페이씨나 시게루씨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밑에는 뛰어난 인재들이 있구요. 왜 저를 그렇게 아쉬워하세요?” “네 녀석이 그들을 뛰어 넘는 천재이기 때문이다.” “네..?” “어린 시절에 나는 스스로 굉장히 머리가 좋다고 생각했지. 그건 대학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천재라 불리 우는 족속은 아니었지. 그저 일반인들 사이에서 공부를 조금 잘하는 그런 부류였다고 할까? 하지만 군페이 녀석과 시게루, 너는 달랐지. 너희를 처음 본 순간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깨달았다. 이런 녀석들이 천재라는 놈들이구나. 일반인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영역을 비집고 파고드는 비범함. 네 녀석이 처음 면접 자리에 앉아 패밀리에 로봇을 끼워 넣고 장난감이랍시고 팔라고 했을 때, 난 분명히 느꼈다. 네 녀석이 군페이와 시게루. 아니 어쩌면 그들보다도 뛰어난 어떤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 “그것이 내가 널 놔줄 수 없는 이유다. 물론 네가 미국에서 돌아와 시게 녀석과 군페이의 작업을 도와주었을 때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혹시나 그들의 작업을 도와주며 기술을 빼가려는 스파이는 아닐까 하는 의심을 했었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네가 도운 작업들은 모두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럼에도 너는 항상 똑같이 너의 자리를 지켜왔다. 내가 의심했던 게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마. 그러니..” “사장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만, 사장님 역시 지난 5년 동안 저를 겪어 오셨다면 제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정말로 결국 떠나려는 거냐?” “맡은 일 처리는 확실히 끝내겠습니다.” 나를 바라보던 카마우치 사장은 입술을 실룩거리며 무언가 말을 덧붙이려 했지만, 결국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1989년 1월 말. 카마우치 사장은 약속대로 슈퍼 패밀리의 개발진행을 전부 나에게로 일임했기에 굉장히 순조롭게 작업이 진행되던 중 미국에서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부장니임~~~!!!” 입국장에서 나를 발견하자마자 큰소리로 나에게 달려오는 금발의 미녀 엘리스는 끌고오던 캐리어를 내팽겨 치고 나에게로 달려왔다. “엘리스!! 자, 잠깐만!!” 갑작스러운 보디어택에 말릴 틈도 없이 내 품에 안겨온 그녀는 웃으며 내 양 볼에 사정없이 뽀뽀를 날려대었다. “전에 찻집에서도 그렇고 우리 준혁씨는 여직원 분들에게 인기가 차~암 많네요.” “오랜만에 보다보니.. 인사가 좀 격하네..” “흥!!”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는 유키의 표정에 나는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준혁~!! 우리의 지갑~” 엘리스의 등 뒤로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에 눈을 돌리니 MIT 대학 식당가에서 만났던 존과 마이클, 그리고 롭이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존과 마이클은 처음 만났을때와 별반 다를게 없었지만 롭은 덩치가 더 커진 느낌이 들었다. 수염도 이제는 산타클로스 저리가라 할 정도로 풍성해져 있었다. 저게 나보다 3살이나 어리다니 누가 믿을까? “롭 너는 털갈이 하냐? 수염이 그게 뭐야?” “말도 마라. 어제까지 hack 동아리 방에 틀어 박혀 이걸 만들었거든? 면도할 시간도 없었어.” 롭은 검은색 가방을 들어 올리며 살짝 윙크를 날렸다. 그러자 내 옆에 어색하게 서있던 유키가 어설픈 영어로 그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준혁씨 ‘걸 프렌드’인 유키 이시카와 라고 합니다.” “오우!! 마이!! 갓!! 미스터 강 여자친구 완전 귀여운데?” 그들의 반 토막만한 키에 동글동글한 유키의 얼굴을 보는 순간 미국산 공돌이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일본에 왔음을 인식한 모양이었다. 나는 입국장에서 난리법석을 떨어대는 그들을 이끌고 재빨리 공항을 빠져 나왔다. 미리 첸드라에게 빌려둔 9인승 차량에 짐과 사람을 모두 실고나서 엑셀을 밟자, 묵직한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근데 준혁 우리 배고파. 어디로 가는 거야?” 비행기에서 내린지 얼마나 됐다고 롭이 배를 쓰다듬으며 나에게 물었다. “식사는 준비해 두라고 했어. 짐 풀기 전에 너희들에게 소개 시켜줄 사람이 있어서.” “누군데?” “내가 전에 미국에서 말했지? 사이킥 배틀의 제작 중에 내가 짠 코딩 배열을 바꾼 미친 공돌이가 하나 있다고.” “아, 그 인도인 친구? 우리도 보고 싶었는데, 여름에 계절학기 듣느라 시간이 안 나서..” “그러게 누가 학점 빵꾸 맞으래?” “이게 다 네가 던지고 간 GPU 작업 때문에 날밤 까다가 수업 놓친 거거든!?” “아, 그래? 미안하다. 대신 보수는 넉넉하게 챙겨줬잖아.” “덕분에 부모님에게 손 안 벌리고 등록금 다 댈 수 있었지만..” “그럼 된 거지 뭐.” “재수 없는 자식.” “억울하면 너도 돈 많이 벌던가~ 킥킥” MIT 대학에서 마지막 날 나누었던 대화를 주제로 시끄럽게 떠들어 대자, 맨 뒷좌석에 유키와 엘리스는 그런 우리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있었다. & “어!? 강이다! 강 왔다!! 강 왔으면 이제 이거 먹을 수 있냐?” “기다려 푸말라. 손님들도 같이 온댔어.” 라이텍스의 휴일. 공장에 들어서자 첸드라를 비롯한 인도산 공돌이들이 나를 반겼다. “준혁이가 아주 떼거지로 데려왔구나.” “음식은 넉넉해?” 그러자 첸드라는 롭을 힐끗 바라보며 대답했다. “글쎄. 거기 일행 중에도 푸말라 만 한 덩치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설마 모자르는 거 아냐?” “모자르면 더 시키면 되고, 일단 들어가자.” 잠시 후 나는 공장 안에서 인도산 공돌이와 미국산 공돌이들을 정식으로 소개시켜 주었다. 각 진영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롭과 첸드라가 악수를 하고 준비 된 음식과 캔 맥주를 뜯으며 우리만의 환영회를 시작하였다. 처음엔 어색했던 두 나라의 엔지니어들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금세 친해졌다. 특히나 롭이 가져온 GPU 장치는 첸드라와 푸말라가 보기에도 굉장히 흥미로운 장치인 모양이었다. 다행히 첸드라는 영어도 할 줄 알아서 의사소통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때 준혁? 굉장하지? 네가 말했던 대로 그래픽 카드를 도와주는 3D 연산 장치라고~!!” “아.. 그래?” “너 어째 반응이 영 시원치 않다?” 그도 그럴게 롭이 꺼낸 장치는 어른의 팔뚝만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래픽 연산 장치 주제에 데스크 탑 안에도 들어가지 못할 녀석을 어떻게 쓰란 말이야? 나는 작게 한숨을 내 쉬며 근처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담배 몇 갑을 옆에 가져다 대었다. “좋아. 구조는 이제 대충 알겠지? 그럼 이번에는 딱 여기 담배 네 갑만 한 크기로 줄여보자.” “뭐 이 미친놈아?” “생각을 해봐라 롭. 데스크 탑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그래픽 장치를 누가 쓰겠냐? 응?” 그러자 그 모습을 바라보단 첸드라가 내 말에 동의 했다. “하긴 준혁이 말이 맞지. 나라면 아마 두 갑만 한 사이즈로도 가능할 거 같다.” “뭐!?” 그 순간 고개를 떨구고 있던 롭의 두 눈이 번뜩 뜨였다. “방금 이 녀석이 뭐라고 했냐? 담배 두 갑? 그럼 나는 한 갑만 한 크기로 만들어 주지.” “뭐 인마? 그럼 나는 반 갑만 한 걸로 만들 수 있다!!” “이 쪼그만 인도산 원숭이 새끼가!!” “디룩 디룩 살찐 미국 돼지 새끼가!!” 방금 전만해도 서로의 기술을 칭찬하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단숨에 180도 뒤집혔다. 나는 그들 틈에 섞여 속으로 빙긋 웃었다. 이거 생각보다 반응이 빨리 찾아왔는데? “흠흠. 저기 잠깐만 진정들하고 이 것 좀 볼래?”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첸드라와 롭은 내 말에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들에게 각각 종이 한 장을 내밀며 설명을 덧붙였다. “일단 진정들 하고, 맥주라도 마시면서 들어. 내가 너희 싸움 붙이려고 부른 건 아니니까. 서로 부족한 부분을 배우라고 만나게 해줬는데 싸워선 곤란하지.” “강준혁. 이 미국 녀석들 말버릇이 왜 이리 싸가지 없냐?” “뭐라고? 누가 먼저 시비 걸었는데?” “자자 그만들 하라니까. 꼭 그렇게들 싸우고 싶으면 주먹 말고 기술로 싸워.” “기술?” “거기 종이에 적혀 있는 부품들은 민텐도 슈퍼 패밀리에서 사용될 스펙들이야.” 그러자 첸드라는 내가 건넨 쪽지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그렇군. 그런데 이런 거 우리한테 막 보여 줘도 되냐?” “저번에 민텐도에서 저작권 법안이 통과 돼서 정식 라이센스를 통하지 않으면 게임기 복제는 이제 불법이야. 그리고 기기 단가도 워낙 비싸서 예전에 패밀리처럼 복제품이 나돌아 다닐 걱정이 없지. 슈퍼 패밀리를 복제 하느니 차라리 카트리지 복제해서 파는 게 훨씬 이득일 거다.” “흐음 그렇군. 근데 그럼 이걸 왜 우리한테 보여주는 거야?” “거기 쓰여 있는 부품을 기반으로 새로운 콘솔의 프로토 타입을 만들 거야. 그리고 그래픽 처리 장치는 롭이 가져온 이 녀석을 사용한다. 담배 한 갑이 됐건 두 갑이 됐건 이 그래픽 장치는 무조건 콘솔 안에 포함 시켜야 한다. 프로토 타입 개발 기간은 딱 1년. 먼저 성공한 팀에게 성과급 1억엔 쏜다.” “1.. 1억엔!!!??” ──────────────────────────────────── ──────────────────────────────────── EP. 20 : 슈퍼 패밀리의 탄생까지 (5) “1.. 1억엔!!!??” 성과급 1억엔이라는 말에 롭과 첸드라를 비롯해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롭은 대충 현재 환율을 계산해보더니 경악스러운 표정과 함께 입을 열었다. “어이, 미스터 강. 농담이지?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거의 100만 달러에 가까운 돈을..” 물론 성과급으로 지급하기에 너무나 파격적인 조건이긴 하다. 하지만, 나는 이들에게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였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왜? 액수가 너무 커서 무섭냐?” “그 정도로 돈이 많다면 우리보다 훨씬 나은 인력을 뽑아서 직접 제작을 의뢰하면 되잖아?” “물론 찾아보면 너희보다 나은 인력이 있겠지. 하지만..” “하지만?” “너희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인재들이니까. 만약에 돈에만 관심이 있었다면 내가 보내주는 개발비로 놀고먹으며 시간을 질질 끌었겠지. 그런데 너흰 그렇지 않았고, 결국엔 스스로 만들고 싶었던 GPU 장치를 만들어 냈잖아? 물론 조금 크긴 하지만.. 킥킥” “원래 초창기에 만들어진 컴퓨터도 집채만 했었거든?” “나도 알아. 먼저 단순한 형태로 구조를 파악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크기를 줄이며 동시에 성능을 높혀 나간다.” “쳇.. 그럼 새로 만들어 달라는 GPU장치는 어디에 쓰려고?” “새로운 콘솔에서 사용될 그래픽 가속 장치라고 해야 하나? 너희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 나는 잠시 롭과 첸드라를 따로 불러내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복도를 가로 질러 파티장과 조금 떨어진 휴게실에 도착한 우리는 푹신한 소파에 마주 앉았다. 롭은 자리에 앉자마자 휴게실을 두리번거리며 나에게 말했다. “그런데, 여기 무슨 공장 같은데, 이렇게 막 돌아다녀도 되냐?” 그러자 롭의 곁에 앉아 있던 첸드라가 웃음을 터뜨리며 내 대신 대답해주었다. “걱정마라. 강준혁은 여기 공장 주인이다.” “뭐라고?” 나는 피식 웃으며 자판기에서 음료수 3개를 뽑아 하나씩 던져 주었다. 라이텍스의 자판기는 전 사원이 누구나 부담 없이 뽑아 마실 수 있도록 무료로 운영 중이었다. “미스터 강. 전에 만났을 때는 민텐도 직원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직 민텐도 소속이긴 하지.” 차가운 음료수 캔의 뚜껑을 뜯어낸 나는 음료수를 삼키며 대답했다. “민텐도 직원 이면서 이 공장의 사장이라고? 대체 몇 가지 일을 하는 거야?” “이 공장의 주인은 맞지만 사장은 아냐. 실제 경영자는 따로 있지.” “강준혁 말이 정확하다. 강준혁 실제로 라이텍스에 관한 일은 하고 있지 않으니까.” 롭의 어이없는 표정에 첸드라는 킥킥대며 음료수를 마셨다. “내가 너희를 따로 부른 이유는 아까 전에 내가 말한 신형 콘솔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두고 싶어서야.” “첸드라 벌써부터 기대 된다. 이번엔 대체 어떤 기발한 물건을 만들려는 거냐?” 첸드라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생글거렸다. 나는 그런 첸드라와 마주 웃으며 축하고 말을 내뱉었다. “스스로 진화하는 게임기.” “엥?” “향후 10년 동안 일본.. 아니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 받을 콘솔을 만들 거야.” “대체 어떤 형식으로 만들려는 거냐? 스스로 진화하는 게임기라니.. 감이 잘 안 온다.” 롭 역시 첸드라와 마찬가지로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런 둘의 반응을 즐기며 가방에서 기획서 한부를 꺼내 보였다. “이게 바로 내가 기획 중인 신형 콘솔의 초안이야.” 첸드라와 롭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테이블에 놓인 기획서로 손을 뻗었다. 1억엔의 성과급이 걸린 프로젝트가 눈앞에 놓여 있으니 너무나도 당연한 반응 속도였다. “잠깐!!” 새로운 기획서를 막 손에 집어 들려던 첸드라와 롭은 나의 외침에 그대로 손을 멈추었다. “아무리 너희와 내 사이지만, 그 안에 쓰여 있는 기획은 기밀 사항이니까. 절차는 밟아야겠는데?” 나는 롭과 첸드라에게 내가 작성한 기획서에 대해 절대 발설하지 않을 것에 대한 서약서를 받아내었다. “어차피 우린 그걸 만들어 낼만한 자본도 없거니와, 다른 회사에 팔아넘긴다고 해도 100만 달러를 줄 거 같진 않은데?” “그래도 이런 건 확실히 하는 게 좋으니까. 자 그럼 이제 봐도 돼.” 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첸드라와 롭은 잽싸게 기획서를 낚아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소파에 기대어 천천히 변화해가는 그들의 표정을 즐겼다. 잠시 후. 기획 초안을 모두 살펴본 첸드라와 롭은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게? 정말 가능하냐?” “발매 후 10년 동안 콘솔 시장에 군림 할 녀석이니까. 그 정도는 되어야하지 않겠어?” “그것보다 이 작업을 1년 만에 하라는 게 말이 돼?” 물론 힘들겠지. 사실 나 역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초안을 작성한 나조차 초기에는 이게 정말 가능 할지 고개를 갸웃 거릴 정도였으니까. 나는 롭의 질문에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분명 가장 먼저 성공한 ‘팀’에게 100만 달러의 성과급을 줄 거야. 1년이 지나면 달마다 성과급은 5%씩 차감될 계획이니 가능하면 1년 안에 프로토 타입을 만들어 내는 게 서로에게 좋겠지?” “재수 없는 녀석. 차라리 이럴 거면 성과급 얘기는 꺼내지나 말지.” “그래도 충분한 보상이 있어야 힘이 나지 않겠어?” 그러자 첸드라가 한심한 눈으로 롭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미국 팀은 포기하는 거냐? 그럼 이 프로젝트는 우리가 가져가겠다.” “무슨 헛소리야 누가 포기한데, 그리고 우리가 없으면 그 안에 있는 GPU 모델은 누가 만들냐.” “아, 그렇지? 나 잠깐 파티장에 돌아가서 GPU라는 것 좀 분해해봐야겠다.” “뭐? 누구 맘대로!!” “첸드라 예전에 패밀리 모델 복제 해본 적 있다. 콘솔도 못할 거 없다고 생각한다. 성과급 1억엔은 우리 거나 다름없다.” 마치 톰과 제리를 연상케하는 롭과 첸드라는 파티장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서로에게 으르렁 거렸다. 나는 그런 그들을 뒤따라 걸으며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경쟁의식도 나쁘지 않지만, ‘팀’이라는 내 말 뜻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나 보군. 일단 롭 일행이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이대로 둘까? 일본에 있는 동안에 저들 스스로 깨달을 수도 있고, 아니면 불붙은 경쟁 의식으로 인해 전혀 새로운 재밌는 물건이 탄생할 지도 모르니까.. ──────────────────────────────────── ──────────────────────────────────── EP. 21 : 진화하는 게임기 (1) & 1990년대는 게임의 역사가 격변하며 섣불리 콘솔 산업에 뛰어든 몇몇 기업들이 쓰디쓴 참패를 겪고 사라지는 혼돈의 시대였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이 만큼이나 재미있었던 시기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90년대 초에는 스프라이트 기술의 발전과 함께 비약적으로 2D 그래픽이 상승하게 되었고, 중반에서 부터는 가정용 콘솔로도 3D 그래픽을 활용한 게임이 줄지어 출시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최초로 3D 그래픽을 사용한 RPG게임인 ‘파이널 프론티어 7’이 있었고, ‘아이언 피스트’ 와 ‘리얼 파이터’ 같은 3D 대전 격투 게임이 큰 인기를 끌었다. 게이머들에겐 황금의 시기였지만, 90년대 중반 콘솔을 만드는 기업들은 제법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기존에 만들어진 틀에 안주하기 위해 2D의 성능에 주력 하느냐, 그것이 아니면 새로운 3D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새로운 그래픽 칩셋을 설계하느냐에 대한 딜레마에 빠졌기 때문이다.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기에는 기기의 제조 단가가 너무나 높았고, 어느 한 가지를 포기하자니 격변하는 시장의 상황이 너무나 불안했을 것이다. 내가 롭과 첸드라에게 보여준 새로운 콘솔은 1991년 발매를 목표로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2000년이 될 때까지 시대를 관통하는 콘솔을 만들고 싶었다. 2D와 3D기술을 전부 아우를 수 있는 스펙을 가진 새로운 콘솔. 그것은.. “준혁씨?” “응?” “신호 바뀌었는데요.” “아, 미안..” 잠시 딴 생각 하는 사이에 신호가 바뀐 줄도 몰랐네.. 방금 전. 엘리스와 롭 일행이 한 달 동안 묵을 호텔에 내려준 나는 이번엔 유키를 바래다주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아~ 오늘 너무 재밌었어요. 마치 국제 교류회 다녀온 느낌이랄까?” “재밌었다니 다행이네. 전부 모르는 친구들이라 어색해 할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처음엔 좀 어색했는데, 엘리스 언니가 너무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엘리스씨에겐 지금도 신세를 지고 있긴 하지. 미국 쪽에서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은 대신 해주고 있거든..” “어라? 엘리스 언니는 준혁씨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고 하던데요?” ‘그건 뭐 내가 고용주니까.’ 나는 유키의 말에 피식 미소를 지으며 저녁의 도쿄 거리를 달렸다. 유키가 사는 곳은 도쿄에 중산층이 많이 거주하는 키치죠지라는 곳이었는데, 신주쿠를 지나쳐 도쿄의 서쪽 외각에 있는 터라 라이텍스 공장이 있던 치바에서는 거리가 조금 있었다. 전에 몇 번 가본 적이 있었는데, 동네 자체가 거의 개인 주택들로 이루어져 있어 굉장히 단정하고 예쁜 이미지였다. “전 그냥 신주쿠 역에 내려주셔도 되는데..” “그냥 오랜만에 드라이브도 할 겸 바래다줄게.” “아이쿠~ 감사합니다.” “아이고~ 무슨 말씀을~” 그렇게 소소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그녀의 집으로 향하던 중 유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준혁씨. 아까 보니까 첸드라라던 분과 롭이라는 분께 무슨 부탁을 한 거예요?” “새로운 게임기의 제작을 부탁했어. 만약 1년 안에 만들어 내면 성과급으로 1억엔을 준다고 했지.” “정말로 1억엔을 준다구요!?” “왜?” “아니 준혁씨에게 그렇게 큰돈이 있어요?” “어... 응. 맞아.” “세상에 저번에 비행기 탔을 때도 돌아와서 언니한테 얘기했더니 아무나 타는 좌석이 아니라고 부자들만 타는 좌석이라 그러던데, 그것도 진짜에요?” 나는 유키의 질문에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저랑 나이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돈이 그렇게 많아요?” 나이랑 돈이 무슨 상관있지? 어떤 대기업의 손주는 태어나자마자 회사 지분의 5%을 가지고 있다던데, 그나저나 타임 슬립하기 전에 죽도록 노가다 게임을 해서 돈을 긁어모았다고 할 수도 없고.. 결국 나는 유키가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범위 안으로 말을 돌렸다. “예전에 드래곤 엠블렘을 판매한 수익이랄까? 하하..” “아~ 하긴 중고 값이 엄청 비쌌었죠. 그거.. 거기다가 캐릭터가 죽으면 데이터가 사라져서 또 사게 만들고, 진짜 악마가 따로 없다니깐..” ‘사실 그거 카트리지 안에 들어가는 부품 단가가 너무 높아서 얼마 챙기지도 못했거든..’ 나는 속으로 말을 삼키며 유키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럼 대체 얼마나 가지고 있는 거예요? 1억엔이란 거금을 성과급으로 내놨다는 건 그 보다 훨씬 더 돈이 많다는 뜻이잖아요.” “나도 몰라.” “네?” “음.. 유키, 너 지금 저축 통장에 얼마나 가지고 있어?” “저요? 전.. 한 200만엔 정도?” “오.. 그 나이에 200만엔이라니, 월급타면 꾸준히 모으는 모양이구나.” “물론이죠. 항상 검소하게 생활해야한다고, 어머니가 말씀해 주셨으니까. 그런데 제 통장은 왜요?” “너는 네 통장 안에 있는 돈이 얼마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지만, 나는 내 통장에 돈이 얼마만큼 들어있는지 잘 몰라.” “왜 요? 준혁씨 돈이잖아요.” “음.. 당장 운용할 수 있는 현실 적인 자금은 5억엔 정도? 그 외로는 전부 주식이거든. 그래서 난 내가 현재 얼마를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 몰라. 대충 가늠 해보라면, 아마 120억 조금 넘게 있을 걸?” “120억이요!?” 전에도 내가 말했지만, 회귀 자는 실패하지 않는다. 아니 실패할 수가 없다. 더구나 나에게는 게임 & 워치가 있지 않은가? 게임 & 워치가 내 손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에게 투자 실패란 있을 수가 없었다. 일본 전역에 위치한 소프트 회사의 정보를 속속들이 알려주는 스폰서 게임. 나는 그 것을 이용해 수중에 5억엔이라는 돈만을 남긴 뒤 대박을 칠 소프트 회사들의 주식을 미리 매입해 두기 시작했다. 드래곤 워리어의 피닉스 소프트와 메탈기어, 혼두라의 폭스 소프트, 킹 오브 플레이어의 SMK와 스트리트 파이어의 CAMCO 같은 메이저 회사들과 함께, 소프트 긴코우(은행)와 같은 유명 기업의 주식도 미리 매입해 두었다. 그리게 돈을 묻어 둔 채로 시간이 흐르자, 각 업체에서 게임 발매 할 때 마다 내가 가진 주식들은 시한폭탄이 터지듯 차례차례 주가가 뛰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돈’이라는 인식보단 그냥 시간 마다 오르내리는 숫자로 밖에 보이질 않았다. 한순간에 몇 천만엔이 사라졌다가도 점심을 먹고 나면 억 단위가 불어난다. ‘이미 내가 혼자서 제어 할 만 한 액수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지..’ “돈이 많다는 건 그런 거구나. 자기가 얼마를 가지고 있는지 조차 정확히 알 수 없을 만큼의 돈이라니.. 잘 상상이 안가요~” “그래..?”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항상 제가 생각하는 부자의 이미지는 굉장히 남을 깔보고, 욕심쟁이에다가 늙고 뚱뚱한 남자인줄 알았는데..” ... 너 부자랑 웬수졌니? 무슨 쌍 팔년도 시절 사고방식을.. 아, 지금 89년이지.. 내가 잠시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유키는 ‘푸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쭈?” “아, 믿을 수 없어. 준혁씨가 마치 딴사람 같아요. 꼭 스쿠루지 영감 같아. 킥킥~” “뭐? 스쿠루지?” “미안해요. 근데, 준혁씨가 부자라니까, 왜 이렇게 웃기지?” 이거 내가 너무 티를 안내고 다녔나.. & 다음 날부터 롭과 첸드라 일행은 1억엔의 성과급을 목표로 서로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롭 일행이 일본에 머무르는 기간은 약 한달. 나는 천천히 그들의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프로젝트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고, 남은 기간은 충분하기 때문이다. 우선 첸드라 녀석은 그동안에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빠르게 설계 도면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카트리지 공장에서 첸드라는 내가 건네준 슈퍼 패밀리의 스펙과 자신이 알고 있는 데이터를 수집해 단 일주일 만에 슈퍼 패밀리에 근접한 내부 도면을 완성하였다. “어떠냐? 강준혁?” “일주일 만에 이 정도까지 해낼 줄은 몰랐네.. 대단한데?” “그렇지? 킥킥 이대로 라면 1년 뒤에 성과급은 우리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GPU 장치는 어디에 설계하게?” “어? 어.. 그건..” “롭이랑 이야기는 해봤어?” “하지 않았다.” “푸말라와 다른 인도인 친구들만으론 조금 힘들 텐데? 내가 원하는 건 카트리지 시스템 콘솔과 새로운 미디어를 인식할 수 있는 부가 기기 둘 다거든.” “사실 나 역시 그 부분이 궁금하다. 카트리지 콘솔을 만들어 내는 건 알겠는데, GPU장치와 함께 아래쪽에 추가하는 두 번째 콘솔은 대체 무슨 역할을 하는 거냐?” “내 예상대로라면, 90년대 중반부터 카트리지 시스템의 용량 부족으로 CD로 이동하는 시대가 올 거야.” “CD? 그 음악을 듣는 광디스크 말이냐? 말이 안 된다. CD는 한번 데이터를 저장하면 다시 지울 수 없다. 거기다가 속도가 너무 느려서 데이터를 읽어 들이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 될 텐데.” “알고 있어. 그래서 카트리지 콘솔을 먼저 선 발매한 후에 나중에 CD 롬을 탑재한 업그레이드 콘솔을 추가로 연결시키는 거니까.” “그 말은 여기 나온 두 기기가 차후에 서로 합체 한다는 말이냐..?” 첸드라의 질문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EP. 21 : 진화하는 게임기 (2) & 사실 두 개의 콘솔을 병합하는 것은 딱히 새로운 발상은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과거에서 NEGA 드라이브의 주변기기로 NEGA CD를 개발해 하드웨어 성능을 높이는 방법을 92년도에 실행한 바가 있었다. NEC의 PC-엔진 듀얼 이라는 고성능 슈퍼 CD-ROM을 장착한 모델에서 영감을 얻은 NEGA는 기존에 NEGA드라이브 우측에 CD롬을 장착하는 추가 콘솔 모델을 제작했다. 두 대의 기기를 연결하는 것으로 CD-ROM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 하드웨어의 성능의 파워 업을 노렸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대 실패했다. 당시 NEGA는 일본에서는 아니더라도 북미와 유럽 시장을 꽉 잡을 만큼 잘나가고 있었는데, 해외에서 벌어들인 수입을 바로 이 NEGA CD라는 헛발질로 어마어마한 적자를 보았다. 그 후로 콘솔 역사상 합체기기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가만히 사태를 주시하던 민텐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NEGA의 자폭에 비웃음이 담긴 선전 문구를 내보내는 등 네거티브 광고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을 계기로 민텐도 역시 카트리지에 대한 신뢰감을 더욱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는데..) CD는 카트리지에 비해 데이터를 읽어 들이는 속도가 현저하게 낮았기 때문에 보통 스테이지 하나를 불러오는데 10초에서 15초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물론 상향된 BGM과 카트리지와 비교가 안되는 용량으로 최고의 그래픽을 보여주었지만, 게임 한판 하려는데 한판마다 10초 이상 기다리는 건 좀 무리가 있었지.. 그때 다시 한 번 기획서를 살펴보던 첸드라가 나에게 말했다. “강준혁. 그럼 이 CD를 사용하는 보조 장치는 먼저 카트리지 형식의 콘솔을 출시 후에 나중에 내려는 거냐?” “맞아. 그런데, 보조 장치란 표현은 좀 틀린 것 같은데?” “응? 그게 무슨 말이냐.” “정확히 말하자면 보조 장치를 뜻하는 대상이 뒤바뀌었다는 거지.” “뭐라고? 그럼 설마 이 카트리지 시스템을 가진 장치가?” “맞아. 그게 보조 장치야.” 첸드라는 나의 대답에 더욱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대체 무엇이 메인이고, 무엇이 보조 역할을 하는 장치인지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좋아. 잘 들어 봐.” 나는 음료수로 목을 축이고는 첸드라에게 신형 콘솔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내가 기획한 신형 콘솔은 첸드라가 말한 대로 두 대의 기기가 차후에 서로 연결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90년대 초반에 런칭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그 시기의 게임들은 대부분이 2D 스프라이트를 사용하는 게임들이 태반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CD 형식의 게임을 출시해 봤자, 기나긴 로딩은 플레이어들을 지치게 만들 뿐이었기에 이 시기에는 확실히 카트리지 형식의 게임들이 인기를 끌 것이 뻔했다. 그렇기에 나는 카트리지를 인식하는 신형 콘솔의 ‘보조 장치’를 먼저 출시하기로 했다. 이 보조 장치는 독자적으로 카트리지를 인식해 최대 64Megabit (이 시기 게임 업계는 Byte 수치보다 Bit 수치 더 많이 사용했다.) 의 게임 용량을 사용하는 롬 칩을 읽어 들일 수 있었다. 슈퍼 패밀리보다 약 1~2년 늦게 출시하는 만큼 초고속 연산이 가능한 CPU와 슈퍼 패밀리의 두 배 이상의 스프라이트 성능을 낼 수 있는 그래픽 모듈을 찾고 있었다. 대표 런칭 타이틀은 물론 슈퍼 패밀리를 왕좌로 자리 매김 하였던 펜타곤 소프트의 ‘파이널 프론티어 4’를 예상 중이었다. 그리고 ‘내가 없는 거리’ 프로젝트가 종료 후 다음 프로젝트로 기획 중인 게임 하나를 생각 중이었다. 제목은 ‘시계탑의 살인마’라는 호러 장르랄까? 그리고 약 1~2년의 텀을 두고 등장하는 CD와 3D 그래픽을 사용하는 메인 기종은 사실 단일기기로도 사용이 가능하다. 단일 제조 단가가 있는 만큼 3D 게임을 즐기기 위해 기존에 카트리지 기기까지 구입을 하게 되면 확실히 소비자들에게 부담을 주기도 하고 나 역시도 손해가 크기 때문이었다. CD를 사용하는 매체는 롭이 만들어낸 3D 가속 장치를 이용해 폴리곤을 활용한 독자적인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발생한다. 그럼 왜 이 두 기종을 합칠 수 있는 기능이 굳이 필요한 거냐고.. 첸드라 역시 예상대로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걸어왔다. “둘 다 독립적으로 사용이 가능한 기기에 뭐 하러 연결 요소를 넣으려는 거냐. 솔직히 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카트리지 시스템을 가진 콘솔은 보조 장치라고, 네가 말한 대로 CD만을 읽어 들이는 장치는 데이터를 읽어 들이는 속도가 너무 낮다며. 그렇다면 그것을 커버 할 수 있는 보조 RAM 카트리지가 필요하지 않겠어?” 나는 보조 장치 콘솔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자 첸드라는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나에게 외쳤다. “설마 이 콘솔 자체를 램 팩 역할을 하게 만들자고!?” “응.” 내 대답이 너무 간단했는지 첸드라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무리다 강준혁. 기존에 모델에 램팩 기능을 넣는다고 해도 그것을 원활히 연결 시켜줄 디바이스 즉 OS가 필요하단 말이다.” “물론, OS (Operation System) 까지 생각해 뒀지. 내가 그렇게 허술해 보이냐?” “뭐라고? 대체 어디에다 OS 시스템을 넣을 수 있는 거냐?” 그러자 이번에 내 볼펜은 보조 장치 콘솔의 카트리지 삽입구로 향했다. “말도 안 돼. 카트리지에 OS를 넣자고? 기술적으로 그게 가능한 거냐?” “이론 적으론 가능해보이는데? 첸드라 1억엔 벌기가 그렇게 쉬울 줄 알았어?” 물론 나는 쉽게 벌었지만, 미안하다 첸드라. 하지만 첸드라에게 말한 램팩 카트리지 시스템이 완전히 별나라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이 시스템도 NEGA사의 32비트 콘솔 ‘쥬피터’에서 실현 돼었던 기능이거든.. 당시 NEGA는 3D 폴리곤 게임에 대해 굉장히 불안한 기색을 표하고 있었다. 혹시나 3D라는 기술이 잠시 스쳐가는 유행일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이 유행이 끝나면 다시 본래대로 2D의 시대가 열리는 게 아닐까하는 모호한 환상에 빠진 NEGA는 신형 게임기 ‘쥬피터’의 성능을 2D 성능으로 잡았다. 하지만 자사에서 발매한 ‘리얼 파이터’의 흥행에 아예 3D의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는지, 결국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이란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극강의 2D 성능을 갖추었지만, 빈약한 3D 성능으로 결국 희대의 명작 ‘파이널 프론티어 7’을 놓치게 되는데.. 그것을 계기로 센소니의 기어 스테이션과 격차가 더욱 벌어지며 차세대 콘솔 전쟁에서 또다시 2인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 NEGA 쥬피터에서 칭찬할만한 요소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부족한 CD 매체의 기능을 파워업 시켜주는 RAM 카트리지라는 요소였다. 4MB의 램팩은 기기와 별도로 구매해야 하지만, 바로이 4메가 램팩을 이용해야만 구동되는 게임들이 다수 존재했었다. 몇 가지를 예로 들자면 SMK의 희대의 명작 ‘더 킹 오브 플레이어’라는 2D 대전 격투 게임이나 호혈사 일족의 마지막 작품인 ‘그루브 온 파이트’ 그리고 32비트 기종에서 유일하게 이식 된 CAPCO의 ‘던젼 & 드래곤’이 있었다. 특히나 마지막 던전 드래곤은 4인용에서 2인용 게임으로 하향 이식이 되었지만, 그래도 이식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기념할만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게 바로 RAM 카트리지 덕분이라 볼 수 있었다. 그럼 다시 이야기를 돌려 내가 만드는 콘솔에 대해 결론을 내리자면.. 카트리지 시스템을 가진 콘솔과 CD롬 시스템을 가진 콘솔은 둘 다 독립적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하지만 기존에 카트리지 시스템 콘솔을 가진 유저가 새로운 CD롬 콘솔에 기존 모델을 장착하게 되면 데이터 연산의 상호작용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단지 두 개의 콘솔을 붙이는 걸로는 파워 업이 불가능하며 두 기기의 디바이스를 소프트웨어로 풀어주는 OS 카트리지를 이용해야 만한다. OS 카트리지는 CD 롬 콘솔과 함께 필수로 동봉 되어 발매되며 차세대 유저는 답답한 로딩에 방바닥을 뒹굴다가 결국엔 기존의 보조 장치 콘솔을 찾게 될 것이라는 것이 내가 생각 한 시나리오다. 그리고 이 방법으로 완벽한 하위호환과 함게 차세대 기기의 게임도 동시에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아.. 갑자기 머리가 아파온다.” “그러니까 혼자서 끙끙대지 말고 롭과 상의 해봐.” “롭이랑..?” “내가 그랬잖아. 처음으로 프로토 타입을 만들어 내는 ‘팀’에게 성과급을 주겠다고..” “그랬지. 그래서 지금 우리들이 서로 견제를.. 어라?” “생각보다 간단하잖아? 너희 둘이 함께 단일 팀을 만들어 버리면 되지 않겠어? 1억엔은 큰돈이야. 너희만으로 부족하면 너희가 알고 있는 인력을 전부 모아. 1/N로 나눈다 해도 한 사람당 몇 백만엔의 돈을 가져갈 수 있다고.” “강준혁 너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거냐..” 첸드라의 질문에 나는 빙긋 웃으며 음료수를 삼켰다. ──────────────────────────────────── ──────────────────────────────────── EP. 22 : 순례자들.. (1) & “그럼 돌아가서도 잘 부탁한다.” 내 작별 인사에 롭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솔직히 말해. 네가 말한 컨셉을 100% 수용할 수 있다고 장담은 못하겠다. 첸드라랑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우리는 GPU쪽 성능에만 집중하기로 했으니까.” “알았다. 혹시 개발 중에 필요한 게 있으면 엘리스한테 얘기하면 될 거야.” 그러자 내 곁에서 함께 롭을 배웅해주던 첸드라가 입을 열었다. “잘 가라.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전화해도 된다. 첸드라 항상 라이텍스에 있으니까.” “오케이. 이왕 손잡은 거, 같이 멋진 물건 한 번 만들어 보자구~!!” 처음엔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더니, 한 달 동안 라이텍스 공장에서 함께 구르며 꽤나 친해진 모양이네.. 보편적으로 콘솔에 익숙한 첸드라는 자신이 모르는 영역인 그래픽 카드 부분을 롭에게 맡기기로 하고 나머지에 대해선 자신이 맡기로 하였다. 이미 첸드라는 기존에 리코 CPU를 복제해본 경험이 있었기에 콘솔 지식은 아무래도 첸드라가 더 높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와 미국은 성과급을 정확히 반으로 나누는 것에 합의를 보았다. 롭은 3D 가속 장치 뿐만 아니라 카트리지 형식에 들어가는 그래픽 카드 제조를 위해 미국에 돌아가면 기술 자문을 얻을 곳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물론 그것을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지만, 어느 정도 돈이 깨질 것은 각오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나는 롭 일행이 떠나기 전 그에게 쪽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혹시 MIT 졸업자나 아는 인맥 중에 IBM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을 좀 찾아볼래? 아마 많은 도움이 될 거야.” “프리먼 커티스? 잭슨 황? 누구야 이 사람들은?” “사실 나도 만나본 적은 없어. 대신 그래픽 기술로는 IBM에서도 꽤나 알아주는 인물들이라고 전에 잡지에서 봤거든. 아마 너희가 만든 GPU 장치를 보여주면 관심을 가질 거야.” “그래? 흐음.. 미국에 돌아가면 한 번 알아볼게.” 내가 롭에게 알려준 프리먼 커티스와 잭슨 황은 차후에 엠비디어라는 그래픽 카드 회사의 창립자들이었다. 만약 그들과 어떻게든 끈을 댈 수만 있다면 많은 도움을 얻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잠시 후. 비행기 시간이 다가오자, 엘리스와 롭 일행은 작별인사와 함께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각자의 위치에서 미래를 위한 1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1년 안에 나는 민텐도의 슈퍼 패밀리의 개발이 잘 마무리 될 수 있도록 바쁜 시간을 보냈다. 무려 6년의 세월을 버텨온 패밀리의 성능을 한계까지 뽑아내는 명작들과 함께 패밀리의 자기 세대의 끝을 알리고 있었고, 슈퍼 패밀리에 왕좌를 넘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만트라 소프트가 89년 1월에 국내 최초로 게임 전문 잡지를 발간해 내었다. 내가 한국에 방문했던 때가 88년 초반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거의 11개월 만에 창간호가 나온 것이다. 물론 나와 만트라 사장님은 조금 더 빨리 일을 추진하고 싶었지만, ‘게임’을 주제로 한 잡지 자체가 황당하게도 불 온전 도서라는 낙인이 찍히며 이것을 조율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결국 타협을 위해 출판 업계를 손에 쥐고 있는 문화부 쪽에 뒷돈이 조금 들어갔고, 그러고 나서야 국내 최초의 게임 전문 잡지 ‘게임 월드’가 발행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만트라 소프트는 이미 파이널 프론티어 1과 칼콤의 YS 1의 성공적인 한글화 런칭으로 국내에서 유일한 퍼블리셔도 명성을 쌓아나가고 있었기에 그들이 만들어낸 ‘게임 월드’는 초판 발행 10만부를 2주 만에 전부 팔아치우는 기염을 토해냈다. 물론 그만한 성공에는 ‘드래곤 엠블렘 한글판’ 응모권이 일조한 부분도 있지만.. 만트라 컴퓨터의 사장님이셨던 김한석씨는 장사 수완이 좋은 편이었다. 파이널 프론티어 한글판 역시 섣불리 카트리지를 전국에 뿌리기보다 만트라 소프트를 소비자 들에게 알리기 위해 직접 유통을 관리하는 전문 매장을 만들어 큰 효과를 보았다. 한국의 게이머들 역시 처음 보는 카트리지의 패키지 디자인에 좋은 반응을 얻어 기대 이상의 판매를 올렸다. (그래봐야 2만 카피를 살짝 넘기는 것에 불과했지만..) 김한석 사장님은 큰 수익을 내지 못한 것에 대해 나에게 사과했지만,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파이널 프론티어와 YS의 한글판을 한국에 선 보인 것만으로도 나에겐 큰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펜타곤 소프트에서는 패밀리에서의 마지막 작품인 ‘파이널 프론티어 3’의 제작과 동시에 ‘내가 없는 거리’의 프로젝트가 동시에 진행 중이었다. 모리타와 하야시는 완성된 시나리오를 가지고 그것을 게임화 시키는데 일조 했고, 유키 역시 자신이 맡은 ‘나나세’의 시나리오에 온갖 애정을 쏟고 있었다. 초반엔 비슷하지만, 중반부터는 확연히 다른 세 히로인의 이야기는 펜타곤 소프트 내에서도 굉장히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3개의 카트리지를 따로 사용하는 만큼 히로인 개개인 마다 각기 다른 3개의 엔딩과 이벤트 들을 준비해두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장님? 이거 용량이 조금 남는데요?” “용량이 남아요?” “뭐 아주 크진 않지만, 30kb정도? 모리타에게 부탁해서 일러스트라도 한 장 넣을까요?” “이미 엔딩 일러스트까지 다 넣은 마당에 또 추가하긴 좀 그런데.. 이벤트를 추가하자니 그건 용량이 부족하고..” “그럼 그냥 비워둔 채로 출시할까요? 딱히 추가할 부분도 없을 듯한데..” “아, 잠깐만요. 그 부분은 일단 비워두세요. 제가 나중에 따로 추가할게 있으니.” “부장님이 직접 손보시게요?” “네. 일단은 그냥 비워 두세요.” 하야시는 내 요청에 잠시 고개를 갸웃 거리더니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따로 뭔가 꾸미고 계시는 게 있나보군요.” “조금 재밌는 생각이 들어서요.” & 그리고 1989년의 11월. 민텐도 슈퍼 패밀리의 런칭 일이 다가왔다. 6버튼 게임 패드 2개를 포함해 정가 25000엔에 출시된 민텐도의 슈퍼 패밀리는 출시 당일 엄청난 인파를 불러 모았다. NEGA 드라이브의 런칭 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몰려든 인파에 민텐도 마케팅 부서 인력을 전부 동원해도 모자를 판국이었다. 라이벌 회사인 NEGA는 슈퍼 패밀리의 발매 일에 맞추어 NEGA 드라이브를 할인행사로 맞받아 쳤지만, 대중의 관심은 모두 민텐도의 슈퍼 패밀리로 향해 있었다. “역시 슈퍼 패밀리가 처음부터 선전하는 군요~!!” 함께 행사장을 지켜보는 인물은 슈퍼 패밀리에서 사운드 칩 개발에 일조한 센소니의 직원 쿠라카기 켄타로씨였다. 그는 고단가의 PCM 사운드 칩을 슈퍼 패밀리 만을 위해 따로 제작해줄 정도로 민텐도의 게임 사업에 열정적으로 편을 들고 있었다. 카마우치 사장과 나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자신이 만든 사운드 칩의 장점을 피력한 끝에 결국 카마우치 사장은 쿠라카기 씨에게 사운드 칩 납품을 허락했다. ‘차후에 서로 물고 뜯을 쿠라카기씨와 카마우치 사장이 나란히 함께 웃고 있다니 이거 참 아이러니 하군..’ 나는 캔 커피로 목을 축이며 건너편 펜타곤 소프트의 행사장을 바라보았다. 민텐도 행사장의 맞은편에는 슈퍼 패밀리의 런칭과 함께 ‘내가 없는 거리’의 거대한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저는 아직도 당신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단 한 줄의 선전 문구와 아름다운 여성의 뒷모습이 그려진 일러스트 하나로 단번에 시선을 휘어잡은 펜타곤 소프트는 민텐도와 조율하여 오후에 행사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미려한 캐릭터의 뒷모습에 슈퍼 패밀리를 구입한 유저들은 곧장 펜타곤 소프트의 행사장으로 달려가 일대에 큰 혼잡을 빗어내고 있었다. “대기 줄은 이쪽으로 한 줄로 서주시기 바랍니다. 보행자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일렬로 서주시기 바랍니다~!!” 슬쩍 민텐도의 행사장을 빠져나와 펜타곤 소프트를 바라보자 카와구치씨와 함께 펜타곤 소프트 전 직원이 행사 도우미를 서고 있었다. 그 안에서 나는 어렵지 않게 모리타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다른 펜타곤은 분주히 움직이는 가운데 모리타 만은 쌀쌀한 가을 바람을 맞으며 조그만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 또다른 줄이 길게 서 있었는데, 줄을 서있는 사람들 마다 사이킥 배틀의 타이틀이나 일러스트를 들고 서있었다. 그렇다. 오늘은 ‘내가 없는 거리’의 런칭과 동시에 일러스트레이터 모리타 신페이의 팬 싸인회 날이기도 했다. ──────────────────────────────────── ──────────────────────────────────── EP. 22 : 순례자들.. (2) & - 발매 당일 ‘내가 없는 거리’ 를 구입한 어느 대학생 유저의 일기 - 1989년 11월 20일 월요일. 드디어.. 드디어 내일이다. 1년 동안 내내 기다려 왔던 슈퍼 패밀리의 발매일!! 정가 25000엔. 예상했던 것보다 비싼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반드시.. 반드시 손에 넣고 말리라.. 더구나 내일은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일러스트 작가. 모리타 신페이씨의 펜 싸인회가 있다고 한다. 사이킥 배틀 류화영과, 아즈사 렌을 만들어 낸 신의 손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가슴이 설레인다. 아무래도 오늘 밤에 편히 잠들긴 힘들 것 같다. 빨리 내일이 왔으면.. 1989년 11월 21일 화요일. 온몸이 녹초다. 사실 지금이라도 침대에 누워 잠들고 싶지만, 일기를 마치고 슈퍼 패밀리를 세팅 해야지~ 대학교 휴학 중인 내가 아침 일찍 찾아간 아키하바라는 평일인데도 엄청나게 사람이 많았다. 자주 다니는 단골 가게 아저씨도 오늘만은 뭔가 남다른 각오가 느껴졌다. 혹시 내가 없는 거리가 들어왔냐고 물어 보았지만, 오늘은 펜타곤 소프트 행사장에서만 판매할 예정이란다. 잠시 한숨을 내쉬며 행사장 쪽을 살펴보니 민텐도 슈퍼 패밀리 런칭으로 인해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 있었다. 어떻게든 행사장 대기 줄을 찾아 맨 끝에 섰지만, 그것도 잠시 후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며 건물을 한 바퀴 휘감아 끝도 없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민텐도 카마우치 히로시 사장의 인사와 함께 행사장 문이 열리고, 대기 줄은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에 긴 대기 줄이라 그런지 중간 정도에 서있었음에도 내 차례가 오기까지 2시간은 걸린 것 같다. 다들 빨리 빨리 좀 사라고.. 대기 줄에 선채로 사람들이 구입해 가는 타이틀을 살펴보니 태반이 ‘슈퍼 마리지 월드’를 함께 구입하고 있었다. 슈퍼 마리지 월드의 노란색 패키지는 패밀리 때보다 두 배는 더 커보였고, 두 배는 더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거기다 직 사각형의 슈퍼 패밀리 패키지는 보는 이로 하여금 기분 좋은 설레임을 가져다 주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내 차례가 다가왔다. 계산대에 예쁘게 생긴 여직원이 나를 보며 방긋 웃어보였다. 너무 친절한 미소에 혹시 나에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닌지 괴상한 망상도 해보았지만, 여직원은 다음 사람에게도 똑같은 미소로 반겨주었다. 쳇. 제기랄.. 가식적인 웃음으로 이몸을 홀리다니.. 슈퍼 패밀리와 슈퍼 마리지 월드를 구입하는데 31,200엔이나 들었다. 너무 비싸다. 순식간에 한 달 동안 아르바이트 한 금액의 절반이 사라졌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1차 목표는 완수했으니까.. 이제 2차 목표. ‘내가 없는 거리’를 사러 가자. 펜타곤 소프트의 행사장은 슈퍼 패밀리 구입 유저를 배려하기 위해 바로 앞에 행사장을 준비해 두었는데,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대기 줄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제기랄.. ‘내가 없는 거리’를 먼저 살걸 그랬나? 설마 모자르진 않았지? 건물 하나를 빙빙 돌아 겨우 행사장 끝에 서게 된 나는 무거운 슈퍼 패밀리를 내려놓고 어서 행사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그때 엄청나게 귀여운 여성분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기, 여기가 ‘내가 없는 거리’ 구매 대기줄인가요?” 나이는 내 또래 정도? 긴 생머리에 살짝 젖살이 남아 있는 게 굉장히 귀엽게만 느껴졌다. “아, 네. 맞습니다.” “다행이다. 맞게 찾아 왔네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내 말에 방긋 웃으며 내 뒤로 줄을 섰다. 세상에 이렇게 예쁜 여자도 게임을 하는 구나. 긴 대기 시간이었지만, 등 뒤에 느껴지는 그녀의 숨소리만으로도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이런 저런 망상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데 뒤에 서있던 그녀가 나를 불렀다. “네~!?” “게임 좋아하시나 봐요? 슈퍼 패밀리 구입하셨네요?” “무.. 물론이죠~!! 게임 좋아합니다!!” “저도 엄청 좋아해요~” 커헉.. 내 심장. 내 심장이.. 머릿속에서 그녀의 ‘좋아해요’라는 말이 계속해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 여자.. ‘내가 없는 거리’에 히로인중 하나인 ‘미유키’와 묘하게 닮았는데? 아아.. 게임을 좋아하는 예쁜 여자라니 이 무슨.. 그래. 이건 신이 나에게 내려준 기회야. 21살까지 모태 솔로로 살아온 내 인생을 불쌍히 여기신 신께서 그동안의 외로움에 대한 보답으로 그녀를 보내주신 거야!! 용기를 내자.. 용기를 내자.. 그런데 뭐라고 말하지? 갑자기 좋아한다고 고백할 순 없잖아. 그래, 이름이다. 이름부터 물어보는 거야. 두 주먹을 불끈 쥔 채로 마음속으로 몇 번 예행연습을 거친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기..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네?” 역시 대놓고 이름 먼저 물어보는 게 아니었어! 자연스럽지 못하잖아. 바보 멍충이!! 하지만 그녀는 잠시 후. 웃으며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이시카와 유키에요.” 유키라니.. 내가 없는 거리의 여주인공 미유키와 닮은 것뿐만 아니라. 이름까지 비슷하다니!! 운명이다. 이건 운명이야. 이 운명을 손에 넣으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내 이름을 그녀에게 알려야 해.. “제.. 제 이름은..” 그때였다. “유키!? 너 왜 여기 서 있어!?” 뭐지? 고개를 돌려보니 정장 슈트를 입은 남자 하나가 감히 유키씨의 이름을 함부로 낮춰 부르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더 슬프게 하는 건. 그녀의 반응 이었다. “아, 준혁씨~!!” 그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들며 웃는 그녀의 미소는 나에게 보여준 미소 그 이상의 것이었다. 남자는 유키씨에게 달려와 다그치듯 물었다. “바람도 많이 부는데, 여기서 뭐하는 거야?” “저도 이 줄에 서서 내가 없는 거리를 사고 싶어서요.” “뭐 하러 줄까지 서서 이러고 있는 거야. 너도 참 대단하다..” "그래도 꼭 여기서 기다렸다가 사고 싶어요~" 이 남자는 게임을 사기 위해 줄을 서는 우리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게임을 좋아하는 그녀의 마음을 몰라주는 어리석은 녀석. 너 따위에게 유키씨는 너무나 아까운 사람이다! 남자는 바쁜 일이 있는지 다시 어디론가 떠나 버리고, 혼자 남은 유키씨는 찬바람에 오들 모들 떨며 우리들과 함께 했다. 이미 주변에서 슬쩍슬쩍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느껴졌다. 나는 조금 발걸음을 옮겨 그녀 옆에서 묵묵히 찬바람을 막아주었다.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으면 내가 꼭 남자친구인 것처럼 보이겠지? 크큭 지루한 시간이 지나고, 내가 존경하는 모리타씨의 인사 멘트와 함께 펜타곤 소프트의 행사가 시작 되었다. ‘내가 없는 거리’는 발매 전 예고대로 3명의 히로인을 별개의 카트리지에 담아 출시되었는데, 행사가 시작되자 입구에 윗쪽에 설치된 전광판에 세 히로인의 재고 갯수가 떠올랐다. 왼쪽부터 주인공이 아르바이트하는 패밀리 레스토랑의 선배인 오오타니 세츠나. 주인공과 어릴 때부터 소꿉친구인 하세가와 미유키. 마지막으로 주인공이 다니는 대학의 신입생 오기소 나나세. 히로인 각각의 재고 개수는 1000개씩이었다. 도합 3천개의 재고라니. 너무 작은 것 같지만, 새로운 신형 기기의 런칭 당일이니 만큼 재고 수량을 조정한 듯하다.. 젠장. 내 앞에 적어도 1500명은 서있는 것 같은데, 설마 미유키가 그전에 전부 동이 나진 않겠지? 제발.. 남아 있어주세요오.. 아.. 이런 일기를 너무 오래 썼군. 현장에 있던 내 마음을 간절히 담아 써 내려갔더니 굉장히 실감나게도 썼구나.. 아직 다쓰지 못했지만, 옆에 놓인 슈퍼 패밀리와 내가 없는 거리 패키지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TV에 연결하고 와서 다시 써야지~ ──────────────────────────────────── ──────────────────────────────────── EP. 22 : 순례자들.. (3) & 잠깐 TV연결만 하고 다시 일기를 쓰려고 했는데, 한 시간이 흘러 버렸다. 잠시 기계에 문제는 없는지 슈퍼 마리지 월드를 플레이해 봤는데, 다행이도 기계와 컨트롤러 전부 이상이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없는 거리는 피곤한 상태에서 플레이 하는 것보단 내일 아침 맑은 정신으로 겸허히 플레이에 임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다시 발매 현장의 이야기를 써내려보자면 우선 히로인당 1000개씩의 도합 3000개의 수량과 히로인 3명을 전부 구입할 수 있는 한정판 패키지 500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히로인 별 카트리지의 가격은 개당 8,600엔. 한정판 가격은 3개의 카트리지가 전부 들어 있는 만큼 22,000엔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발매 되었다. 장난도 정도가 있지. 22,000엔이면 슈퍼 패밀리 한 대와 거의 맞먹은 가격이다. 아무리 게임이 3개라도 저 가격에 과연 살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나의 예상은 멋지게 빗나갔다. 한정판으로 세 여인의 뒷모습이 그려진 특수 제작된 패키지와 함께 모리타씨의 일러스트 집이 함께 동봉되어 있었는데, 행사 시작과 동시에 한정판의 잔여 개수가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500개의 한정판이 전부 팔려 나가는데 걸린 시간은 약 10분. 그 사이 개별 패키지는 1개 내지 2개 정도 줄어들었을 뿐. 어젯밤부터 줄을 서서 기다렸다던 사람들이 한정판 패키지를 들고 가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고개를 돌려 민텐도 행사장을 바라보니 아직도 긴 대기 줄이지만, 판매에 여유가 있어 보였다. 젠장. 차라리 ‘내가 없는 거리’를 먼저사고, 슈퍼 패밀리를 샀어야하는 건데, 뒤늦게 후회가 들었다. “와아.. 진짜 저 가격에도 살 사람은 사는구나. 준혁씨 말 대로네..” 내 뒤에 있던 유키씨가 빠르게 줄어드는 전광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잠시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녀에게 물었다. “저.. 저기 이시카와 씨는 어느 히로인을 구매하실 건가요?” “저요? 음~ 저는 오기소 나나세 시나리오요. 그런데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우치무라 히로키입니다.” “아.. 우치무라씨는 어느 히로인을 구입하실 건가요?” “전.. 미유키쨩을..” “아하~ 소꿉친구 시나리오군요.” 이런.. 이미 시나리오까지 알고 있다니. 이 정도 미모에 게임에 대해서도 박식하다니. 정말로 보기 드문 처자구나.. 통 성명을 하고나니 조금은 말문이 트였달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가 없는 거리’ 말고 좋아하는 게임을 묻자. 유키씨의 입에서 사이킥 배틀과 함께 드래곤 엠블렘에 대한 이야기가 튀어 나왔다. “혹시 그러면 드래곤 엠블렘 행사장에도 오셨었나요?” “네~ 그때 마지막 시나리오까지 살아남았었는데, 결국 최종화에서 실패했어요..” “그럼 그때 민텐도 직원에게 드래곤 엠블렘 클리어 카트리지를 받아갔던 사람이?” “네, 바로 저예요. 그때 행사장에 계셨었군요.” “그럼요~!! 드래곤 엠블렘은 패밀리 게임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이니까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이렇게 말이 잘 통할 줄이야. 잠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니 대기 줄에서 유키씨와 대화를 나누는 내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크큭.. 부럽냐 이것들아~ “그런데, 우치무라씨.” “네?” “저기, 괜찮으시겠어요?” “뭐가요?” “전광판에 미유키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는데..” 뭐라고!? 이런 젠장!! 세츠나와 나나세가 아직 900대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미유키의 잔여 수량은 700대 초반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아직도 줄이 한참 남았는데, 설마 저 인간들 전부 미유키쨩을 사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파오후.. 파오후.. 아직은 괜찮다. 아직은..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지만, 미유키의 잔여 재고가 줄어들수록 심장이 쿵쾅 거렸다. 군중 심리다. 이건 군중 심리야.. 세츠나나 나나세를 구입하러온 사람들도 미유키가 가장 인기가 좋으니 너도 나도 사기 시작한 거야.. 줏대 없는 녀석들.. 감히 나의 미유키쨩을 선점하려 하다니!! 애초에 너희가 선택한 히로인을 구입하라고!! 그렇게 심장을 쥐어 뜯는 기분으로 계산대 앞까지 돌고 돌아왔지만. 미유키의 재고 수량은 이제 21개 밖에 남지 않았다. 세츠나는 602개. 나나세는 약 491개 수량이 남은 반면 미유키는 21개라니.. 이대로라면 미유키쨩과 함께 집으로 돌아갈 수 없잖아!! 나는 까치발로 내 앞에 서있는 이들의 머릿수를 살폈다. 약 30명. 기적이 일어난다면 난 미유키쨩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몸의 바램을 비웃기라도 하 듯 전광판의 숫자가 18을 가리켰다. 3개의 계산대에서 동시에 미유키쨩을 구매한 것이다. “아.. 안 돼..” 나도 모르게 전광판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뒤에 있던 유키씨 역시 불안한 눈으로 유키의 전광판을 살피며 중얼 거렸다. “안 돼는데.” 설마.. 유키씨. 저의 걱정을 함께 해주시는 겁니까? 신이시여.. 부디 우리의 바램을 들어주소서. 그렇게 눈물까지 찔끔 나올 정도의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닿았던 걸까? 세츠나와 나나세의 카운트가 동시에 줄어들며 내 차례가 다가왔다. 내 앞에 전광판의 숫자는 영광의 1. 무려 마지막 하나가 남은 것이다. “잘됐네요. 우치무라씨~!!” 유키씨는 손뼉을 치며 미유키의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이게 다 이시카와 씨가 기도해주신 덕분입니다.” 그때 우리 차례를 알리는 안내요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다음 세분 결제해 드리겠습니다. 계산대 앞으로 나와 주세요.” 앞 사람들의 결제가 끝나고 퇴장하자 나는 유키씨와 함께 계산대로 향했다. “어서오세요. 고객님. 어떤 타이틀로 준비해 드릴까요?” “아.. 그.. 저는 미유..” 그때였다. “하세가와 미유키 주세요!! 빨리!!” 나와 유키씨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어온 남자가 세 번째 계산대에서 미유키를 외쳤다. 당황한 나는 깜짝놀라 안내 직원에게 외쳤다. “저.. 저도 미유키 주세요!!” “네? 아.. 저기..” 순간 세 번째 카운터에 있던 직원이 마지막 남은 하세가와 미유키의 타이틀을 가져가 버렸다.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방금 미유키의 시나리오가 전부 매진 되었습니다. 혹시 다른 캐릭터의 시나리오는 어떠세요?” ... 나의 하늘이 무너졌다. ──────────────────────────────────── ──────────────────────────────────── EP. 22 : 순례자들.. (4) “손님. 죄송합니다. 방금 미유키의 시나리오가 전부 매진 되었습니다.” ... 나의 하늘이 무너졌다. “손님..? 손님? 소오오온뉘니이임?” 하늘이 빙빙 돈다. 노래지는 하늘 너머로 미유키쨩이 나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다 끝이야. 망했어.. 나만의 미유키쨩을 눈앞에서 가로채간 자식 저주 할 테다. 평생 저주 할 거야!! “우치무라씨? 괜찮으세요?” 유키씨의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온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크흑.. 빌어먹을 조금만 더 일찍 말했더라면.. 마지막에 방심했어요.” “우치무라씨..” 그때 내 옆에 있던 행사 관계자 하나가 확성기로 대기 줄에 있는 사람에게 알렸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방금 하세가와 미유키의 카트리지 판매가 완료되었습니다. 미유키의 시나리오를 기다려 주셨던 고객님들께 진심으로 죄송한 말씀을 드립니다. 조속히 2차 판매 수량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뭐야!? 말도 안 돼!! 2시간을 기다렸다고!!” “맞는 말이야!! 빨리 수량 더 풀어라!!” “죄송합니다. 고객님. 미유키 시나리오는 더 이상 남아 있지가 않은 관계로..” 군중의 분위기는 금방이라도 행사장을 씹어 삼킬 분위기로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미 재고는 떨어졌기에 행사 진행자 입장에서도 사과 말고는 달리 조치를 취할 방법이 없었다. 이윽고 행사 관계자와 펜타곤 소프트 직원 전원이 사죄하고 나서야 어느 정도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기 열을 떠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잠시 행사장 바닥에 주저앉았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내 곁에는 유키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좀 괜찮으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현재 남은 재고는 세츠나와 나나세 시나리오인데, 어떤 걸로 준비해 드릴까요?” “아뇨. 전 미유키 시나리오를 꼭 구매하고 싶었거든요. 그냥 나중에 따로 구입하겠습니다.” 이제 와서 행사 사정에 맞춰 다른 히로인의 시나리오를 선택하고 싶진 않았다. 결국 바닥에 놓인 슈퍼 패밀리를 들고 쓸쓸히 행사장 밖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뒤에서 유키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잠깐 만요!!” “네..?” “잠깐만 행사장 옆에서 기다려주세요.” 유키씨는 비장한 표정으로 어디론가 후다닥 달려 나갔다. 결국 나는 영문을 모른 채 행사장을 빠져나와 근처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왜 그래? 대체 어딜 가는 거야?” 남자 목소리? “글쎄, 잠깐이면 된다니까요.” 이번엔 유키씨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란스러움에 고개를 돌리니 유키씨는 아까 전 대기 열에서 보았던 남자의 손을 잡아끌고 나에게로 달려왔다. “준혁씨 솔직히 말해요. 미유키 시나리오 행사 사무실에 한 두개 정도 남아 있죠?” “물론 혹시나 해서 몇 개 더 챙겨 오긴 했는데, 그건 정말 비상용이야. 판매 수량이 아니라고.” “그럼 그중에 하나 만 이분에게 팔아주세요. 네?” “뭐? 안 돼. 혹시라도 알려지면 행사장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난리가 날거야, 방금 펜타곤 직원들 전원 무릎 꿇고 사과하고 내려온 거 너도 봤잖아..” “그러니까 하나 만요. 네? 준혁씨~ 제발..” “아.. 미치겠네..” 남자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 사람도 펜타곤 소프트의 관계자였나? 대충 상황을 파악한 나는 준혁이라 불린 남자를 향해 90도로 인사를 드렸다. “부탁드립니다. 1년 전부터 오늘만을 기다렸어요. 꼭 미유키의 시나리오를 해보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로 알리지 않을 테니 꼭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남자는 당황한 듯 서둘러 내 어깨를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저기 여기서 이러시면 안돼요. 네?” “제발!! 부탁드립니다!!” “준혁씨 저도 부탁드릴게요..” “진짜.. 환장하겠네. 알았다. 알았어. 손님 계속 그러시면 너무 티 나니까, 일단 이쪽으로 오세요.” 나는 강준혁이라는 남자와 함께 행사장 뒷편의 사무실로 향했다. 준혁씨와 유키씨를 따라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방금 행사장에서 유저들에게 사죄 후에 대기 중이던 모리타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라? 부장님. 어디 다녀오셨어요?” “아, 그게 모리타씨. 비상용으로 챙겨온 미유키 카트리지 하나만 줄래요?” “네? 근데 이거 불량품 교환용으로 준비한 건데.. 판매하시게요?” “그게 사정이 좀 생겨서 이분께서 꼭 미유키 시나리오를 구입하고 싶으시다고 하셔서..” “아~ 혹시 마지막에 구입 실패하신 분?” 행사장에 함께 있던 모리타씨는 나를 기억했는지 말을 걸어왔다. “네.. 네!! 모리타님. 저 사이킥 배틀부터 작가님 팬입니다.” 나는 서둘러 가방을 풀어 사이킥 배틀 굿즈와 화보집을 꺼내보였다. 그러자 모리타씨 뒤에 있던 인상이 날카로운 남자가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여~ 모리타 인기 좋네~ 남자한테만, 킥킥” “놀리지 마 하야시. 내 그림을 좋아해주시는 분이시잖아.” “아~ 이거 실례.” 잠시 후. 모리타씨는 사무실 안쪽에서 ‘내가 없는 거리’의 미유키 편을 꺼내어 들었다. “여기 있습니다. 계산은 그냥 저희한테 주시면 돼요.” “저, 저기.. 모리타씨. 패키지에 싸인 좀 해주실 수 있으세요?” “어? 이거 새 건데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오히려 영광입니다!!” “아.. 네 그럼.” 잠시 후. 모리타씨는 패키지 전면에 싸인을 마친 뒤 나에게 건네주었다. “재밌게 플레이 하세요.” 그러자 또다시 옆에 있던 하야시 라는 남자가 끼어들었다. “재밌게? 킥킥킥. 말이 되는 소릴 해라..” 그의 반응이 의아했지만 지금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지금은 미유키짱의 뒷모습이 그려진 패키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죽을 때까지 간직하겠습니다.” “저기.. 대신 여기서 구입하신 건 비밀 꼭 지켜주세요.” “그럼요!! 물론이죠!!” “잘됐네요. 우치무라씨.” “감사합니다. 이시카와씨. 정말 감사해요.” 나는 몇 번이나 사무실 직원들에게 인사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겨우 겨우 얻은 모리타씨의 싸인판 ‘내가 없는 거리’는 지금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자 그럼 이제 내일 맑은 정신으로 플레이를 해볼까? & 1989년 11월 22일 수요일. 낮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는 내내 집에 있는 ‘내가 없는 거리’ 생각만 하다가 점장님에게 혼났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렇게 집에 와서 방금 전까지 미유키쨩과 함께 했으니까~ 주인공과 소꿉친구인 그녀는 굉장히 활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약간 유우부단한 면이 있는 주인공은 내 성격과 굉장히 닮아 있었다. 게임 안에서 주인공은 대학 수업을 마치면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세츠나씨와 함께 일했다. 세츠나씨는 연상인 만큼 굉장히 상냥하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특히나 세 명의 히로인 중 가장 어른스러운 몸매를 소유하고 있었다. 대학 수업 중에는 나의 히로인 미유키와 함께 나나세 쨩이 ‘선배~’ 라고 부르며 달려올 때마다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귀.. 귀여워..” 모리타님의 초 고 퀄리티의 작화와 더불어 슈퍼 패밀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음질의 BGM으로 나는 단 번엔 ‘내가 없는 거리’의 시나리오에 빠져들었다. 항상 아르바이트가 끝날 때마다 기다려주는 히로인 미유키와 함께 귀가 길에 나누는 이야기가 이벤트가 쌓일수록 조금씩 달라지는 걸 느낀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흐를 정도였다. 정말로 여자친구를 사귀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 이 게임은 정말로 나 허전한 마음 한구석을 채워주는 행복한 이벤트로 가득했다. 초반부를 조금 넘기자 본격적으로 미유키와 교제를 시작하면서 주말엔 그녀와 함께 오다이바에 가거나, 도쿄 타워에서 주말을 보낼 수 있었다. 작화 하나하나가 도쿄의 거리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눈에 익은 장소가 나올 때 마다 나는 탄성을 내질렀다. 오늘도 미유키 쨩과 함께 데이트를 즐기고 방금 게임을 종료했다. 이제는 나를 완전히 믿어주는 미유키쨩.. 꿈속에서 봐요~ 1989년 11월 23일 목요일. ... 이 게임. 뭔가 크게 잘 못 되어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미유키 쨩과 즐거운 데이트를 나누었는데, 게임속에서 주인공의 상태가 이상하다. 작화가 흔들리거나 그래픽이 깨져 보일 때가 있어 혹시 슈퍼 패밀리가 불량품이 아닌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것은 모두 게임 안에서 일어나는 연출의 한 부분이었다. 오늘 게임 안에서 찾아간 병원에서 주인공이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 ──────────────────────────────────── EP. 22 : 순례자들.. (5) 오늘 찾아간 병원에서 주인공이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그 순간 마치 내 안에 무언가가 쩌억하고 갈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뭐지? 왜? 그 순간부터 게임 속의 주인공은 미유키와 정상적인 연애를 할 수 없었다. 정말로 아픈 사람처럼 눈앞이 갑자기 흐릿해지거나, 어느 순간에는 미유키의 모습이 심하게 일그러져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화면에는 버튼을 연타하거나, 간단한 커멘드를 입력해 주인공의 정신을 온전히 유지 시켜야 했다. 나는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이대로 미유키에게 병을 숨겨야 할지. 아니면 그녀에게 병에 대하여 사실대로 말을해야 할지.. & 어두컴컴한 내 방에서 나는 컨트롤러를 부여잡고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화면 안에는 미유키가 주인공의 집으로 찾아온 상태였다. 어쩌지? 지금 몸상태가 굉장히 안 좋은데.. 이상태에서 커멘드 표시가 나오면 단숨에 게임이 끝날지도 몰라..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나서 화면에 나타난 상태 게이지에 붉은 빛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붉은 빛이 반짝이면 주인공의 시야는 급격히 흐려지며 사물을 제대로 볼수 없었다. “우치무라군.. 안에 있지?” ‘그녀의 목소리를 무시한다.’ 라는 선택지를 고르자, 미유키는 현관문을 두드리며 내 이름을 불렀다. “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우치무라군. 내가 싫어진 거야?” “크흡.. 미유키.. 난.. 크흑.. 이제 널.. 으읍..” 억지로 울음을 찾아내며 버튼을 누르자 미유키는 현관문 앞에 주저앉은 채로 계속 해서 내 이름을 불렀다. “으헝헝헝 나보고 어쩌라는거야아~~ 으아아아!!!” “우치무라군. 혹시 우리가 처음 사귀기로 했던 공원 기억나?” 미유키는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계속 해 나갔다. “나 어릴 때부터 우치무라군을 좋아했어.. 유치원 때 집에 돌아오는 길에 언제나 내 손을 잡아 주었잖아. 그런 우치무라군이 나에게 고백했을 때.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었는데..” [문을 열고 미유키를 만나겠습니까?] 나는 떨리는 손끝으로 방향키를 이동해 버튼을 눌렀다. [아니오.] “나 너무 힘들어... 상냥했던 네가 갑자기 왜 이렇게 날 차갑게 대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헤어지긴 싫어. 제발 우치무라군.. 대답 좀 해줘.. 응?” “어윽.. 으으윽..” 잘 못했어요.. 제발.. 미유키가 아프지 않게 헤어질 수 있도록 해주세요.. 으윽.. 제가 걸린 병을 알고 슬퍼할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이 잔인한 게임은 절대로 이 가슴 아픈 이벤트에서 나를 놓아 주지 않았다. 게임 속의 계절은 12월.. 굉장히 추운 날씨에 미유키는 거센 바람을 맞으며도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점점 조그맣게 잦아드는 그녀의 목소리와 언제부터인지 몰랐지만 새차게 불어 닥치는 눈보라에 퍼뜩 그녀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치.. 무라.. 군.. 하아.. 하아..” [문을 열고 미유키를 만나겠습니까?] 안 돼.. 미유키. 안 돼!! 내가 잘 못했어!! “미유키이이이!!!” 거의 주인공과 혼연일체가 된 나는 다급하게 패드를 연타하며 좁은 내방에서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그 순간 현관문으로 향하던 주인공의 시야가 급격히 어두워지며 그래픽이 뭉게지기 시작했다. 젠장!! 하필 이럴 때에.. 나는 빠른 속도로 화면에 지나가는 커멘드를 입력 하며 주인공을 현관문으로 이동시켰다. 끼이익.. 두터운 현관문을 열어젖히는 소리와 함께 화면 안에는 눈을 맞은 채 쓰러져있는 미유키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내 눈에 이미 다 흘려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또다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미유키에게 병에 대한 사실을 알렸고, 미유키는 주인공의 가슴을 때리며 왜 아직까지 말을 안했냐며 울면서 매달렸다. 진짜.. 이 게임 누가 만들었는지. 면상 한번 보고싶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잔인한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지.. 그리고 그 후.. 나는 다시 미유키쨩과 함께 남은 인생을 보낼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비틀거릴 때마다 내 손을 붙잡아 주었고, 어딜 가든 나와 함께해 주었다. 함께 했던 오다이바의 해변가.. 후지 TV 방송국.. 도쿄 타워 전망대.. 우에노 공원.. 수많은 곳은 함께 걸으며 그녀와의 추억이 쌓여간다. 차라리 애초에 처음부터 내 병에 대해 알렸으면 좋았을 걸.. 점점 작별의 순간이 다가 올수록 내 오기 때문에 그녀와 조금 더 오래하지 못했다는 것에 너무나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이 게임이 진심으로 잔인하다고 느끼는 것 중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대체 내가 언제 죽을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처음 이 게임을 플레이 했을 때 체력이라는 수치를 보고 고개를 갸웃 거렸는데, 초반에 이 체력이란 스텟을 대체 어디에 쓰는지 알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 수 있다. 체력으로 버티는 거다. 의사가 말한 기간이 다가오면 체력의 수치에 따라 한달을 더 살지 아니면 그 전에 죽어 버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마치 지옥 불길에 타죽어 마땅할 악마가 써내려간 시나리오. 덕분에 나는 적어도 그녀 곁에서 쓰러지지 않도록 항상 긴장한 채로 플레이에 임해야했다. 난생 처음 해보는 연애 시뮬레이션이란 장르가 이토록 지옥 같은 난이도를 경험하게 할 줄이야.. 편하게 A 버튼만 누르면 될 줄 알았는데, 함정에 빠진 기분이다. 통수도 이런 통수가 없다.. 다행히 초반에 멋 모르고 체력을 어느 정도 올려둔 덕에 나는 의사가 예고했던 시간보다 조금 더 오래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어느 날 그녀와 함께 한 유원지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러 그녀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주인공에게 죽음이 찾아왔다. 그것은 마치 잠에 빠지듯 잔잔한 죽음이었다. 벤치에 쓰러지듯 기대어 숨을 거둔 주인공의 체력은 0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벤트 컷신으로 미유키가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안녕.. 함께 있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마지막 주인공의 대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비추며 천천히 스탭롤이 올라왔다. “으윽... 끄윽... 으으윽..” 마치 뇌가 푸딩에 된 느낌이다. 으깨진 두부처럼 바스러져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저 패드만 부여잡고 한참을 울었다. TV에서 흘러 나오는 잔잔한 BGM은 내 아픈 마음을 더욱 후벼 파고 있었다. 정말 중반부터는 패드를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시간은 어느새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자야하나. 어쩌지..” 왠지 이대로는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때 모든 스탭 롤이 지나고 마지막으로 도움을 준 사람을 표시하는 곳에서 나는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이시카와 유키?’ 그리고 그 옆에는 오기소 나나세의 시나리오 디렉터라고 적혀 있었다. 그 순간 대기열에서 유키씨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요? 음~ 전 오기소 나나세 시나리오요.- 설마.. 자신이 직접 쓴 시나리오 카트리지를 구입하러 왔던 건가? “에이.. 설마..” 그런데 관계자들이 랑도 아는 사이인 것 같고, 설마!? 그때 모든 스탭롤이 지나간 후. 새로운 시나리오를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하세가와 미유키의 후일담? 이건 뭐지?” 이건 또 뭐지? 나는 새로운 이야기를 알리는 메시지 버튼을 눈앞에 두고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 뇌가 녹아내리는 이야기를 견뎌낸 것에 대한 보답인가? 후일담이라면 주인공인 내가 사라진 후의 이야기잖아? 그렇다면 혼자 남은 그녀에 대한 이야기란 말인가? 이건 위험하다. 정말 위험해. 후일담이라는 메시지를 보는 순간 두부처럼 으깨진 정신력이 강력하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이걸 누르는 순간. 대체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너무나 두려웠다. 하지만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확인 버튼을 눌렀다. 그래 어디, 갈 때까지 가보자. 끝까지 버텨내 주겠어!! 그리고 그것이 정말 어리석은 선택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 ──────────────────────────────────── EP. 22 : 순례자들.. (6) & 후일담의 시작과 함께 등장한 미유키의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주인공이 사망하고 2년 뒤. 우선 긴 생머리였던 그녀의 헤어스타일이 짧은 단발로 바뀌어 있었다. 생기를 잃은 눈동자와 수척해진 모습에 정말로 내가 알고 있던 미유키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내가 없는 거리’의 후일담은 이 게임의 제목 그대로 내가 없는 거리에 혼자 남은 그녀에 대한 이야기였다. “…….” 미유키의 후일담은 남자 주인공으로 플레이 했을 때와는 다르게 전혀 선택지가 없었고, 다른 누군가와 대화조차도 없었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지?” 처음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상황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독백으로만 표현되었고, 그녀는 주인공을 무척 그리워하고 있었다. 지도에 표시된 붉은 표시는 모두 나와 함께 걸었던 거리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했던 거리를 하나씩 걸어가며 나는 깨달았다. “실어증에 걸린 거구나..” 주인공의 죽음에 대한 쇼크로 말을 잃어버린 그녀는 중간에 꼬마 아이와 부딪히는 바람에 아이 손에 들려있던 풍선을 놓치는 이벤트가 있었는데, 그녀는 아이에게 사과 한마디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내가 원한 건 이런 이야기가 아닌데..” 주인공 없이도 예전 모습 그대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이게 뭐야.. 후일담의 스토리 진행은 그녀와 함께 했던 이벤트 순서 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처음 사귀게 된 계기였던 언덕길.. “그래 여기서 내려오는 자전거를 피하려다가 미유키가 다쳤었지.. 나는 그녀를 업어 줬었고..” 두 번째로 항상 같이 거닐던 귀가 길. 우리가 처음으로 손을 잡았던 곳. 세 번째.. 용기를 내어 고백 한 그녀 집 앞의 공원.. 바로 이틀 전만 해도 즐거운 마음으로 플레이 했던 거리 하나하나가 이제는 전부 나에게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나와의 추억을 회상할 때마다 살포시 웃으며 미소지었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깨달은 미유키는 눈물을 글썽이며 다음 장소로 이동하였다. “그만.. 진짜 더는 못 보겠다.” 이제 남아 있는 추억의 장소는 단 3군데.. 그중에 마지막 장소는 바로 주인공이 숨을 거둔 유원지를 향해 있었다. “저기까지 가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화면에 집중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정신적으로 피로한 상태였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도저히 게임을 종료 시킬 수가 없었다. 결국 마지막 데이트 장소였던 도쿄 타워에서 아경을 바라보고 다음 날 찾아간 유원지. 그녀의 손에는 한통의 편지가 들려있었다. 그리고 다른 손에는 갈색 유리병이 하나.. “뭐야!? 뭐야!! 뭔데 저거!!”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자살’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미친 그것만은 안 돼!!” 나는 마지막 장소로 이동 중인 미유키의 캐릭터를 다른 장소로 이동 시키기 위해 방향키를 눌렀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 웃긴 일이 벌어졌다. “방향키가 안 먹혀...” 그랬다. 바로 전 이벤트만 해도 맵에 표시된 장소로 직접 캐릭터를 이동시킬 수 있었는데 반해 추억의 장소가 하나만 남게 되자 그녀는 알아서 자동으로 마지막 장소로 걸어가고 있었다. “설마.. 안 돼. 제발!!” 그녀는 결국 주인공이 숨을 거둔 벤치에 앉아 편지지에 무언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불길한 예감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애써 울음을 삼켰다. 대체 어제 밤부터 날이 새도록 이게 뭐하는 짓이냐.. 그리고 잠시 후.. 편지를 모두 적고 나자, 그녀의 옆모습 클로즈 업 되며 도톰한 입술이 보였다. 이어서 그녀의 독백이 떠올랐다. ‘모두가 시간이 지나면 잊을 수 있을 거라고, 괜찮아질 거라고 위로해주셨지만.. 세츠나씨. 그리고 나나세.. 이런 선택을 하게되어 죄송합니다.’ 그때였다. 멍하니 바라보던 TV에서 그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전.. 아직도 그 사람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 어?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게임 캐릭터가 말을 하다니, 설마.. 생전 처음 들어보는 캐릭터 음성에 얼떨떨한 기분이들었다. 환청? 그러자 보란 듯이 두 번째 대사가 들려왔다. -지금.. 당신을 만나러 갑니다.- 그때 느껴지는 전율이란.. 진짜 온몸에 소름이 돋아날 지경이었다. “음성 데이터!!? 말도 안 돼!!” 환청이 아니다. 이 미친 시나리오를 쓴 디렉터 놈이 카트리지 안에 음성 데이터를 심은 게 틀림없었다. 여태까지 상상 속으로 느껴왔던 그녀의 목소리가 실제로 들려오자 내 가슴은 또 한 번 무너졌다. 긴 대사도 아니고 딱 저 두 문장뿐인데도 그 어떤 대사보다 치명적이었다. “으아아아!!!” 나의 비명에 옆집에서 시끄러웠는지 벽을 쿵쿵 쳐대었다. 결국 나는 이불을 악문채로 울음을 삼키며 끅끅 댈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화면에는 벤치에 기대어 쓰러진 그녀의 손에서 갈색 병이 굴러 떨어져 있었다. “자살이라니.. 말도 안 돼. 미유키가 죽다니.. 이건 게임이잖아.. 응? 이런 게 어딨어.. 이런 게 어딨어!!” 잠시 후 후일담의 엔딩 스탭롤이 지나고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다시 한 번 패드를 쥐어 들었다. “그래 맞아.. 내가 잘 못 플레이 한 거야.. 내가 잘 못해서 가장 최악의 엔딩을 본 걸 거야.. 다시 처음부터 해보자. 다시 처음부터 해보면 분명히 해결책이 있을 거야.”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병원부터 가볼까? 조기에 병을 알아차리면 치료가 가능할 수도 있잖아. 그래.. 그거야. 그게 해피엔딩으로 가는 길일지도 몰라.. 하하.. 스스로 정신을 차리기 위해 양쪽 볼을 수 차례 쳐대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좋아. 다시 처음부터 해보자.” 스탭 롤이 끝나고 나는 메인 화면에서 NEW GAME 란에 커서를 대고 확인 버튼을 눌렀다. “어..?” 그리고 난 이제야 깨달았다. 내가 없는 거리의 세이브 파일이 왜 하나 밖에 없었는지.. 결국 다시 처음부터 플레이하기 위해선 기존의 세이브 파일을 지우는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지. 미유키를 살리려면 이방법 밖엔 없어.” 나는 이를 악물고 세이브 파일의 삭제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잠시 후. 정말로 세이브 파일을 삭제할 거냐는 선택지 화면을 보고 난 후..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이거 만든 디렉터 녀석.. 천벌 받을 거다. 너..” 화면의 선택지에는 그동안 나와함께 했던 이벤트씬이 폴라로이드 사진화 되어 수북히 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하세가와 미유키와의 추억을 잊으시겠습니까? 이벤트 클리어 95%] .... 이걸 어떻게 지워!! ──────────────────────────────────── ──────────────────────────────────── EP. 22 : 순례자들.. (7) -준페이의 직장. 패미통신 편집실 - 새벽에 오오타니 세츠나씨의 시나리오의 모든 루트를 끝마친 나는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대체 이 게임의 리뷰를 어떻게 써내려갈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게임 발매 후. 1주일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모든 루트를 이 잡듯이 뒤지며 해피엔딩을 찾아보았지만, 무슨 수를 써도 이 게임에 해피엔딩이란 없었다. 이벤트 달성률 95% 나머지 5%에 희망을 걸고 데이터를 승계시켜 다시 게임을 시작한 것이 어제 초저녁이었다. 그리고 내가 얻어 낸 결과는 딱히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없었다. 대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감동만이 존재했다. “편지라니..” 데이터 승계 후에 주인공이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시점에서 하나의 이벤트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편지쓰기’ 라는 커멘드가 떠올랐다. 그리고 각 장소에서 주인공이 느꼈던 감정을 편지로 옮겨 적으며 주인공은 그렇게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플레이한 오오타니 세츠나는 굉장히 성숙한 이미지의 여인이었다. 미유키나 나나세의 시나리오처럼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담담히 받아들였다. “있잖아.. 준페이군. 원래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 너무 슬퍼하지 말자. 그냥 어쩔 수 없는 헤어짐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일찍 찾아왔다고 생각하자.” 그녀는 주인공의 죽음 앞에도 초연했다. 세츠나씨의 시나리오에서 서브 캐릭터로 등장하는 미유키와 나나세를 위로하며 자신의 슬픔을 결코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난 그녀가 괜찮은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역시 전.. 아직도 그 사람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약간의 음질 열화가 있지만, 세츠나씨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정말 온몸이 얼어붙을 정도로 충격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대체 이 게임을 누가 기획 한 걸까?” 치밀어 오르는 궁금증에 작화를 맡은 모리타씨에게 직접 물어도 시나리오 작가 ‘K’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하고 있었다. 나름 친하게 지내는 펜타곤 직원 하나를 붙잡고 협박하듯이 캐물었지만, 개발 2팀에서 제작된 ‘내가 없는 거리’는 모든 게 비밀에 휩싸여있다고 했다. 목소리 녹음은 카트리지 제작 단계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모리타씨도 몰랐던 요소라고 한다. “대체 누구냐. 누가 이런 어마어마한 시나리오를..” & 며칠 동안 편집부에 쇄도하던 또 다른 공략 루트의 문의 전화도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이쯤 되면 모두 깨달았을 것이다. 이 게임에 도망갈 구멍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걸. 그럴 거라면 세이브 파일 지우는 것에 추억을 잊겠냐는 말 따위 써놓지도 않았겠지.. 처음부터 아주 작정을 하고 치고 들어온 일격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일까? 게임이 발매 후 며칠이 지나자 어마어마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중에 차마 웃어넘기기도 힘들었던 사연 하나가 있었는데, 어느 날 편집부로 날아온 독자 투고 일러스트 한 장을 보고 우린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우치무라 히로키라는 독자에게서 온 사연이었는데.. 미유키의 시나리오를 끝마친 날을 기일로 정해 자기 방에 신단(神壇)을 모신 것이다. 게임 캐릭터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신단을 모시다니 이 무슨 어이없는 일인가.. “이 사람 장난 아닌데? 완전 진심모드야..” “편집장님 이거 잡지에 실어도 될까요? 문제 생길지도 모르는데?” “준페이.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다는 건 그만큼 대박이라는 말 아니겠어? 내가 책임질테니까 이번 독자 투고 사연 전부 실어. 아!! 그래 아예 ‘내가 없는 거리’에 대한 독자 투고 사연만 전문으로 칼럼을 하나 만들자!!” “네에?” 그것은 신규 게임 타이틀에 있어서 한 번도 시도해 본 적 없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고작 발매 2주 된 타이틀에 따로 칼럼을 만들어주다니.. 하지만 편집장님의 말도 틀린게 아닌게 현재 슈퍼 패밀리의 하드 캐리를 하고 있는 타이틀은 민텐도의 대표 게임 ‘슈퍼 마리지 월드’가 아니었다. 각 캐릭터 별로 3개의 카트리지로 제작 되었지만, 초회 수량으로 준비한 3500개의 타이틀이 행사장에서 순식간에 팔려 나가고, 그것도 지금은 재고 부족으로 구입하지 못한 유저들은 방바닥만 긁고 있는 실정이었다. 편집부에 도착한 타이틀 역시 각 히로인 별로 하나씩만 전달되었는데, 이 게임의 공략을 신청한 직원이 10명이 넘을 정도였다. 물론 짬밥 순대로 선택권이 있었기에 나는 세 개의 타이틀 중에 오오타니 세츠나씨의 시나리오를 선택했다. 리뷰어인 내가 공략을 자처하자, 게임 공략 팀의 몇몇 직원이 원망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그런 시선 따위 싸그리 무시해 버렸다. 이미 내 돈 주고 사고 싶어도, 시장엔 재고 한 톨 안남아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렇게 라도 플레이 해볼수 있다는게 기적이었다. ‘차라리 슈퍼 패밀리 행사장 말고, 펜타곤 행사장을 맡았으면 담당자에게 얘기해서 재고 하나라도 뺄 수 있었을 텐데..’ 현재 ‘내가 없는 거리’의 중고 샵에서 매입으로 제시한 금액은 카트리지 하나당 13,000엔이었었다. 판매가격은 18,000엔.. 그런데도 물건이 없다. 아주 골 때리는 상황이지.. 슈퍼 마리지 월드는 널리고 널려서 슈퍼에서 과자 사먹듯 구입할 수 있는 반면 이건 사고 싶어도 살수가 없었다. 한정판 가격이 나왔을 때 22,000엔이라는 가격이 제시 되었을 때 편집부 몇몇은 누가 그 가격에 게임을 사냐며 비웃었지만, 그 사람들 지금 완전 계탔다. 단 500개의 수량으로 제작된 한정판의 현재 가격은 약 10만엔에 달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파는 사람이 없다는데, 그 안에 들어 있는 사운드 트랙이 정말 어마어마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왜냐고? 총 2장으로 구성된 사운드 트랙의 마지막 보너스 트랙이 가관이었는데.. 이 보너스 트랙에 히로인 세 명의 마지막 대사가 무려 ‘풀 보이스’로 실려 있었다. 게임을 끝까지 플레이한 게이머들은 이 한정판을 신물(神物)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러니 가격이 저렇게 올라도 파는 사람이 없겠지.. 결국 우리는 편집장님이 말씀하신대로 이번호 패미통신은 ‘내가 없는 거리’의 특집을 맡게 되었다. 대충 회의를 정리하고 편집부로 돌아가려는데, 편집장님이 나를 불렀다. “어이 준페이 군.” “네.” “잠깐, 이리 와 봐.”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이번에 나온 내가 없는 거리 말이야. 들어보니 실제로 도쿄에 있는 거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고 하더군. 독자들 사연에도 우리 동네랑 비슷한 거리가 보인다는 것 같고..” “가상의 도쿄지만, 몇몇 군데에서 정말로 존재하는 거리인 것 같다는 생각은 저도 해보았습니다.” “네 생각도 그렇지? 그래서 말인데, 이 거리들을 특집으로 구성해 보는 건 어떨까?” “게임 그래픽만으로 그려진 장소를 실제로 찾아가 보자구요?” “내가 사진에 관심이 좀 있는데 말야. 내가 보기에 여기 나오는 장소는 실제로 카메라를 촬영한 후에 그것을 바탕으로 작화를 맡긴 게 틀림없어. 분명히 찾아가 보면 어느 포인트에서 찍었는지 각이 나올 거라니깐?” “그 말씀은 저보고 직접 가보라는 말씀이세요?” “너 이번에 리뷰도 다 끝냈잖아. 또 할 거 있어?” “뭐.. 슈퍼 마리지 월드나 리뷰하려고 했죠.” “그건 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네가 카메라 하나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진 좀 찍어봐. 우선 우에노 공원이나 도쿄 타워는 쉽잖아.” “흐음..” 게임 속 장소를 직접 찾아가 본다라.. 나름 재밌겠는데? 나는 빙긋 웃으며 편집장님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 ──────────────────────────────────── EP. 22 : 순례자들.. (8) & “야~이 미친..” 편집장님의 제안에 사무실에서 곧장 카메라를 챙겨 들고, 가장 가까운 도쿄 타워를 찾은 나는 입에서 ‘미친’이란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미 우리가 한발 늦었다. 도쿄 타워는 한가로운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주말 관광객들을 연상 시키듯 빼곡하게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그것도 전부 ‘남자’들로만.. 다들 하나 같이 우수에 젖은 표정을 보니, ‘내가 없는 거리’를 플레이한 유저들이구만.. 진짜로 게임에 나온 장소를 성지 순례하듯 돌고 있는 걸 보니 머리가 이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더구나 이미 게임에서 등장했던 포인트의 한 가운데에는 그녀들을 기리는 추모용 국화가 가득 놓여 있었다. ‘대박이다.. 이건 진짜 대박이야..’ 도쿄 타워의 전망대는 마치 장례식장을 연상 시키듯 엄숙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기념품 판매원이 슬쩍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저기, 대체 오늘 무슨 날인가요? 며칠 전부터 손님들이 다 저 자리에 국화를 놓고 가시던데..” “아.. 그게..” 이유야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차마 게임 캐릭터와 연관이 있다고 말하기가 겁이 났다. 모르는 사람들에겐 헛짓거리로 보일 수 있지만, 저 사람들은 지금 완전 진지하단 말이다. 그리고 잠시 후. 어느 한 유저의 행동에 좌중의 사람들이 탄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오오오!!” “그래~!! 바로 이거야!! 뭔가 허전 하다 싶더라니!!” “미유키쨩~!! 으허헝” 그 유저가 조심스럽게 들고 온 물건은 미유키의 영정 사진이었다. ‘하다하다.. 이젠 영정 사진이냐..’ 물론 사진이 아닌 일러스트였지만, 일러스트레이터 모리타의 그림을 거의 베껴내듯 그려낸 미유키의 모습은 주인공이 죽기 직전 발랄한 모습 그대로였다. & “아, 글쎄 진짜라니까요!!” “얌마!! 뻥도 정도껏 쳐야지 뭐? 국화? 거기다 영정 사진이라고??” “아무튼 사진 찍었으니까, 나중에 인화해서 보여드릴게요. 지금 여기 분위기 장난 아니거든요? 여기서 그거 보고 쳐 웃었다간 맞아 죽을 분위기에요.” “진짜 그 정도냐?” “못 믿으시겠으면 한번 와보세요.” “야, 그거 다 촬영해서 다음 주까지 넘겨 이번호에 바로 실을 거야.” “지금 저보고 다음 주까지 이걸 촬영하라구요?” “이 녀석 까라면 까는 거지 뭔 말이 그리 많아.” “네.. 알겠습니다.” 나 저 사람들 계속 쫓아다니다간 나까지 머리가 이상해 질 것 같아.. 하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어디서 얻은 정보인지 귀신같이 ‘내가 없는 거리’의 장소를 찾아내는 어마어마한 정보력에 그들의 뒤를 밟는 것만으로도 거의 대부분의 장소를 촬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날 하루 종일 그들을 쫓아다닌 결과 유명한 장소의 사진은 대부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의 시간이 더 지나자. 이벤트가 있었던 거리에는 이제 세 히로인의 영정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각 거리마다 영정 사진을 들고 찾아오는 유저.. 이 그림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분명히 원작을 그린 모리타씨의 그림체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분명 그때 도쿄 타워에서 미유키의 영정 사진을 가지고 온 그 남자일 거야. 다음 날부터 나는 아직 사람들이 찾지 못한 거리를 이 잡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 중에 아직 영정 사진이 없는 곳을 발견한 나는 그곳에서 한 남자를 기다렸다. 히로인들의 영정 사진을 들고 다니는 유저를.. 우연하게도 그날 저녁. 수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는 신주쿠 근처의 거리에서 그 남자가 나타났다. 근처 카페에서 몸을 녹이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그를 지켜 보았다. 사람들은 또다시 나타난 그를 응원하며 박수를 보내었고, 그는 잠시 후 경건한 자세로 국화가 헌정 된 곳에 세 사람의 영정 사진을 내려놓았다. “저기, 잠시 만요!!” 나는 간단히 참배 후 돌아가려는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네?” “패미통신의 잡지 기자입니다. 잠깐 인터뷰 가능할까요?” “아뇨.. 전 그냥..” “우치무라 히로키씨 맞죠?” “네? 어.. 그걸 어떻게?” “저희 잡지에 독자 투고 보내셨잖아요. 신단 세우셨다고..” “아.. 네, 맞아요.” “잠깐이면 되는데 몇 가지 질문해도 될까요?” 우치무라씨는 나의 제안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우치무라씨 와의 인터뷰를 끝마치고, 모든 자료를 편집부에 넘긴 뒤 뉴스를 틀어 보니 이미 사회현상으로 확산이 되어가는 ‘내가 없는 거리’에 대해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다. “최근 민텐도의 슈퍼 패밀리로 발매된 게임 타이틀 ‘내가 없는 거리’가 큰 화제가 되며 기이한 사회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요. 취재 기자 카츠라기 미사토씨가 현장을 전해드립니다.” “허~ 이거 참. 뉴스도 나오는 거야?” 잠시 후. 화면 안에는 약간 성격이 있어 보이는 인상의 미녀 리포터가 우에노 공원의 한 장소를 비추고 있었다. 카메라가 비추는 장소에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두터운 점퍼를 입고 호숫가에 모여 있었다. “여기는 최근에 발매한 슈퍼 패밀리용 게임 ‘내가 없는 거리’의 실제 배경이 되었던 장소입니다. 보시다시피 오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국화를 내려놓고 참배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는데요. 잠시 한 분을 모시고 간단한 인터뷰를 진행해 보겠습니다.” 잠시 후 리포터는 두 손을 모아 참배 후 돌아가는 한 유저의 팔을 붙잡고 거의 반강제로 인터뷰를 시도했다. 깜짝 놀란 남자는 갑작스런 인터뷰에 도망치려 했지만, 리포터는 남자의 점퍼를 꽉 틀어쥔 채로 방긋 방긋 웃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후지 티비의 카츠라기 미사토입니다. 지금 저 곳에 참배를 하고 나오셨는데요. 혹시 내가 없는 거리라는 게임의 장소를 찾아 오신건가요?” “네? 아.. 그게.. 네..” 굉장히 자신 없는 말투로 고개를 푹 숙이는 게이머는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 싶어 했지만, 마치 낚시 줄에 걸린 물고기 마냥 리포터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게임을 하게된 계기와 좋아하는 캐릭터. 이곳에 참배하러 온 이유까지 전부 털어 놓은 후에야 겨우 풀려난 게이머는 얼굴을 붉히며 도망치듯 사라졌다. “쯧쯧.. 차라리 그냥 당당히 얘기를 하지. 남자답게 말야..” 하지만, 만약에 내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당당히 세츠나씨의 참배를 하러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이런.. 말이 안 돼지.. 왠지 그런 말 했다간 사회에서 매장 당할 것 같아.. 하지만 그 말이 안 되는 짓은 패미통신의 발매이후 더욱 늘어났다. 내가 찍은 사진과 게임속의 배경을 비교하며 실제 거리의 포인트를 공략(?)해 놓은 덕에 잡지 기사를 보고 실제로 거리를 찾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난 것이다. 우리는 은연중에 그 모습을 ‘성지순례’라 표현하였고, 그들을 ‘순례자들’이라 칭했다. 처음엔 영정사진과 국화로 시작되었지만, 유명한 거리엔 각종 팬아트와 촛불이 놓이게 되었고, 하나의 문화가 되어 갔다. ‘내가 없는 거리’는 그 인기에 힘입어 애니메이션 화가 진행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온 것은 1990년의 봄이었다. 그리고 내가 없는 거리의 성지순례 소동은 후일 ‘오타쿠’ 문화라 불리 우는 시초가 되었다. ──────────────────────────────────── ──────────────────────────────────── EP. 23 : 카게무샤 (1) 내 예상대로 민텐도의 슈퍼 패밀리는 출시와 동시에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슈퍼 패밀리는 그 성능에 반해서 판매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사회적으로 미친 듯이 이슈가 되고 있는 ‘내가 없는 거리’를 플레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게임기’로서 팔려나가고 있었다. “대체 펜타곤에서 무슨 짓을 벌인 거야? 어떻게 우리가 만들어낸 슈퍼 패밀리의 스펙을 정확히 읽어내고 그게 맞게 제작할 수가 있는 거지?” 덕분에 시게씨가 만든 슈퍼 마리지 월드는 같은 날에 출시한 런칭 작품이었지만,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민텐도에게 있어 꽤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분명 기기는 확실하게 잘 팔리는데, 그 이유가 불순하다. 딱 이런 반응이랄까? 시게씨는 자신이 만들어낸 슈퍼 마리지 월드가 찬밥 신세에 놓이자, 펜타곤 소프트를 찾아가 ‘내가 없는 거리’ 사내 보관용 카트리지 하나를 직접 구입해 왔다. “대체 어떤 게임인지 내가 플레이 해봐야겠어!!!” 그리고 이틀 뒤.. “나나세쨩... 크흑.. 어흐흑” 섣불리 달려들었다가 심각한 내상을 입고 돌아왔다. 어이.. 그런데 나나세라뇨. 당신 그쪽 취향이었습니까..? 사태가 애매한 방향으로 흐르자, 결국 민텐도는 펜타곤 소프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얼 인정했냐고? 그야 물론 카트리지 수수료 협상이지. 펜타곤 소프트를 뒤에서 움직이던 나는 3차까지 물량을 배포한 이후. 4차 재고를 풀지 않고 있었다. 민텐도와 펜타곤의 신경전이 펼쳐진 것이다. 현재 펜타곤 소프트가 민텐도에게 지급하는 카트리지의 수수료는 개당 3000엔 가량이었다. 하드 견인의 칼자루를 거머쥔 펜타곤은 민텐도에게 그들이 제시한 수수료의 절반인 1500엔으로 협상을 제안했다. 하지만 카마우치 사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차피 슈퍼 패밀리의 기종으로 발매된 것 팔지 않으면 너희만 손해라는 전형적인 배짱 장사였다. 그래서 며칠 후 우리는 내가 없는 거리의 NEGA 드라이브용 코딩 파일을 민텐도에 보냈다. 작화 열화가 있지만 카트리지 세 개를 이용한다면 어느 정도 비슷한 수준으로 이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미 ‘내가 없는 거리’는 모리타의 작화와 더불어 ‘시나리오’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고 있었기에 펜타곤 소프트로 NEGA 드라이브 유저들의 이식 요청이 쇄도 하고 있었다. 펜타곤 소프트는 ‘서드파티’ 게임 개발사다. 다시 말해 민텐도 산하의 ‘퍼스트 파티’가 아니기에 어느 콘솔로 게임을 발매를 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현재 민텐도 입장으로선 제대로 하드를 견인해 줄만한 타이틀이 부족했다. 시게루씨의 ‘슈퍼 마리지 월드’는 분명 뛰어난 명작이었지만, 미소녀 3인방의 어마어마한 존재감에 이번 달 판매 순위 4위를 기록했다. 1, 2, 3위는 당연히 내가 없는 거리의 세 히로인 미유키, 나나세, 세츠나가 차지했다. 재밌는 것은 이 판매 순위에서도 이 시대 남자들의 취향이 들어났는데, 가장 인기가 좋은 것은 역시나 동갑내기인 미유키였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판매량이 좋은 것은 아무래도 상대하기 편한 연하. 나나세. 이 두 사람에 비교해 세츠나의 매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오히려 나는 세 캐릭터에서 하나를 꼽으라면 무조건 세츠나 였다.) 아무래도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자신보다 연상인 여성에게 약간 거부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츠나의 판매량마저 슈퍼 마리지 월드를 가볍게 뛰어 넘으며 각 캐릭터당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고 있었다. 대체 왜 ‘내가 없는 거리’ 재고가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 건지. 게임가게마다 문의 전화가 계속해서 걸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카마우치 사장이 백기를 들었다. “새로운 콘솔의 런칭 초기니까.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밖에..” 카마우치 사장의 결정과 동시에 ‘내가 없는 거리’의 4차 판매 수량이 전국에 쏟아졌다. 그동안 입소문만으로 시나리오를 들어왔던 유저들은 가뭄에 단비 내리듯 폭발적으로 구매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드래곤 엠블렘, 사이킥 배틀, 내가 없는 거리까지 내가 만들어서 출시한 게임은 초반에 제대로 물량 풀린 적이 한 번도 없네..’ 문득 든 생각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때 카마우치 사장이 나에게 물었다. “강군은 이번 주가 마지막 근무였나?” “네, 사장님.” “조금만 다시 생각해보는 건 어떤가? 자네가 만들어낸 슈퍼 패밀리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려는데, 부모가 떠나서야 되겠나?” “어차피 저 혼자서 만들어낸 건 아닌 걸요. 사운드 칩 부분은 센소니의 쿠라카기씨에게 도움을 받았고, 커스텀 CPU는 라이텍스에서 제작한 것을 그대로 사용했을 뿐입니다. 제품 설계는 군페이씨와 함께했고, 지난주에 인수인계도 마친 상태입니다.” “정말 깔끔하게도 정리했구나.” 카마우치 사장은 못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그것은 회의실에 함께 있는 군페이씨와 시게씨도 마찬가지였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마케팅이나 해외영업 본부 등 여러 부서의 직원들도 나의 퇴직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지난 일주일동안 신세졌던 직원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작별 인사를 고했다. 카마우치 사장은 특별히 송별회를 마련해준다고 했지만, 나는 사장님의 제안을 한사코 거절하였다. 떠나는 사람은 그냥 떠날 뿐이다. 박수를 받으며 떠나는 화려한 이별보단 담담한 악수로 헤어지고 싶었다. 그렇게 슈퍼 패밀리가 발매되고 약 4개월 뒤인 1990년 3월 말.. 나는 약 7년을 몸 담았던 민텐도를 떠났다. 카마우치 사장은 언제든 돌아오면 재입사를 허락해주겠다며 끝까지 허세를 부렸고, 군페이씨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시게씨와 마지막으로 담배 한 대를 태우고 나서 나는 천천히 차에 올랐다. “이제 뭐 할 거냐?” “글쎄, 뭐 할까요?” “미친 놈. 할 거 없으면 내일부터 다시 출근해 인마.” “킥킥. 우선 도쿄로 집을 옮기고 천천히 생각해보려구요. 어차피 배운 게 도둑질이니, 게임 업계에 있다 보면 또 만날 수 있겠죠?” “그래. 그동안 너랑 같이 일 해서 즐거웠다. 가능하면 민텐도에서 끝까지 함께 했으면 좋았을 걸.” “빈 말이라도 감사하네요.” “빈 말 아냐~!!” “어차피 시게씨랑 저는 같은 회사에 못 있어요.” “왜?” “일전에 사이킥 배틀 제작 발표회 때 기억나시죠? 저랑 판매량 내기 하자고 했었던 날.” 그러자 시게씨는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민텐도 만의 게임 철학이 있는 한 제가 만드는 게임은 민텐도에선 제작이 힘들 것 같아요.” “너 정말 그 이유 때문에 떠나는 거냐?” “흠~ 글쎄요.” 나는 시게씨의 질문에 미소로 답한 뒤에 말을 이었다. “금방 복귀 할 겁니다. 그럼 그때 봬요.” “잘 가라.. 강 준혁.” &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오랫동안 신세를 지고 있는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오셨군요. 준혁씨..” “안녕하세요. 후세씨. 잘 지내셨나요?”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내비치는 50대 중반의 남자는 반가운 미소로 나를 반겼다. 트라이앵글 소프트를 위임 받은 1986년부터 지금까지 라이텍스와 더불어 부도 위기의 공장 몇 군데를 인수하는데 도움을 주셨고, 그 외로도 자잘한 법률 문제를 상담해주곤 하셨다. “준혁씨를 만나고 벌써 5년이 흘렀군요.” “그러게요. 시간 참 빠르죠? 그런데 카와구치씨는 아직 안 오셨나요?” “글쎄요. 오실 시간이 됐는데..” 그러자 때마침 변호사 사무실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똑똑.. 끼이익 카와구치씨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변호사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준혁씨? 준혁씨가 왜 여기에?” “안녕하세요. 카와구치씨.” 그러자 내 앞에 앉아 있던 후세씨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카와구치씨에게 인사를 건넸다. “일전에 전화 드린 후세 타츠지입니다.” 카와구치씨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후세씨에게 물었다. “저는 사장님이 여기 계시다고 해서 온 건데..” “물론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자 카와구치씨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사무실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비좁은 사무실안에는 나와 후세씨 둘 밖에 없는데도 카와구치씨는 전 사장인 ‘쿠도’씨를 찾는 모양이었다. 아~ 쿠도 씨라면 먼 이국땅을 해매다가 지난 달 일본에 돌아왔다. 나의 무리한 부탁으로 인해 약 5년가량을 반강제로 해외에서 살다온 쿠도씨는 굉장히 초췌해져 있었다. 아마도 당분간 게임 개발 사업은 꿈도 꾸지 않을 듯했다. 나는 수고해준 쿠도 사장에게 약속한 대로 3천만엔을 건네주었다. 그래도 해외에서 놀고먹으면서 5년에 3천만엔이면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고 생각한다. “저기 쿠도 사장님이 어디 계시다고 말씀하신 건지.” 결국 후세씨는 껄껄 거리며 카와구치씨에게 진실을 이야기 해주었다. “눈앞에 계시지 않습니까. 86년부터 펜타곤 소프트를 만들어 내고 뒤에서 묵묵히 지원 해준 건 바로 여기 있는 강 준혁씨입니다.” “네..?” ──────────────────────────────────── ──────────────────────────────────── EP. 23 : 카게무샤 (2) “눈앞에 계시지 않습니까. 86년부터 펜타곤 소프트를 만들어 내고 뒤에서 묵묵히 지원 해준 건 바로 여기 있는 강 준혁씨입니다.” “네..?” 후세씨의 말에 카와구치씨는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속일 생각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민텐도 직원이면서 대놓고 회사를 운영하기가 힘들어서요.” “그러니까.. 실제로는 강준혁씨가 이때까지 펜타곤 소프트에 자금을 대주고 계셨단 말씀입니까? 그럼 쿠도 사장님은요?” “쿠도 사장님은 현재 일본에 돌아와 계십니다. 86년 당시 트라이앵글 소프트는 이미 부도직전에 놓여 있었거든요. 저는 그때 쿠도 사장님에게 채권을 모두 갚아주는 조건으로 회사를 양도 받았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서 계시지 마시고, 이쪽에 앉으세요.” 나는 옆에 있는 의자를 빼내주며 카와구치씨를 자리에 앉혔다.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군요. 하지만 이제야 준혁씨가 그토록 저희 펜타곤 소프트에 관심을 가져 주셨는지 이해가 가네요. 그리고 어째서 파이널 프론티어의 한글화 작업까지 추진 하셨는지도 이제 명확해졌습니다.” “사실 제가 한 건 딱히 없어요. 그저 전 펜타곤 직원들이 아무 걱정 없이 게임을 제작 할 수 있도록 자금만 지원해 줬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만, 그럼 저는 이제부터 무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카와구치씨의 질문에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펜타곤 소프트 대표이사가 되어주세요.” “네!? 제가요?” “왜요? 싫으세요?” “아니 그것보다 준혁씨는 지난주에 민텐도를 그만두지 않으셨나요? 그럼 이제 펜타곤 소프트를 직접 운영하셔도 괜찮지 않나요?” “아니요. 오히려 그랬다간 카마우치 사장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신이 데리고 있던 부하 직원이 회사를 그만두자마자 메이저 기업의 대표이사로 올라간다면 누가 봐도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거기다 여기서 펜타곤 소프트의 사장이란 직함으로 발이 묶일 순 없었다. 지금이야 일본이 최고의 게임 시장을 가지고 있지만, 90년 중반을 넘어서면 한국 역시 온라인 게임의 강국으로 높은 수익을 올리게 되고, 미국 역시 마찬가지로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차라리 이쯤에서 카와구치씨에게 정체를 밝히고 대표 자리에 앉혀 놓는 게 나에겐 훨씬 이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사 듣고 보니 그렇네요. 그럼 이제 어쩌실 겁니까?” “펜타곤 소프트에 개발 2팀의 부장 자리를 비워두세요.” “설마 저희 회사로 이직을 하시려는 겁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구요. 조만간 큰 선물을 가지고 돌아가겠습니다.” “큰 선물이요?” “일단 지금은 그렇게만 알아 두세요.” 그리고 며칠 뒤. 게임 업계 소식에 따르면 펜타곤 소프트의 대표로 카와구치가 취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동안 펜타곤 소프트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갔던 리더는 카와구치씨였기에 회사 내에선 아무도 불만을 제기 하지 않았다. 카와구치 대표의 취임식에서 나는 게스트로 참석해 박수를 보내주었다. 나는 축하 꽃다발을 건네며 카와구치씨를 향해 살짝 미소지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카와구치씨는 내 말 뜻을 바로 이해하였는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아~ 이제 좀 사람 사는 집 같네..” 이래저래 손 볼 일이 많아 이삿짐 박스를 그대로 쌓아두었던 나는 오늘에서야 모든 짐정리를 마쳤다. 그 동안 비좁은 민텐도 숙소에서만 생활하다보니 답답하게만 느껴졌었는데, 전망이 확 트인 멘션으로 이사 오니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집이 앞으로 부동산 투기로 인해 집값이 5배 정도는 뛰겠지?’ 1990년 봄.. 일본의 버블 경제는 이제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은행에서 흘러나온 어마어마한 대출 금액은 서민들의 내 집 마련을 부추기고 있었고, 그로인해 조만간 집값은 천정부지로 솟아오를 예정이었다. 기업들은 너도나도 안정적인 부동산 사업에 투자를 시작하려는 시기었기에 나는 도쿄 록폰기에 위치한 고층 멘션을 현찰로 구입했다. 현재 시가 약 8천만엔에 달하는 고급 멘션을 일시에 송금시키고 나서 계약서에 사인을 마치자, 부동산 매매 업자가 굳어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기사 집하나 사는데 10분도 안 걸렸으니까. 순식간에 하늘에서 돈이 떨어진 기분이었겠지.. 딩동~ 맑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현관문을 열어 젖히자 눈앞에 유키가 서있었다. “왔어?” “확실히 가까이 있으니 좋네요. 교토까지 안가도 돼고~” “들어 와. 방금 정리 마쳤어.” “실례 할게요~” 유키는 집들이 선물로 무언가를 바리바리 싸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건 뭐야?” “음식이에요. 아무래도 혼자 있으면 식사 제대로 안 할 테니까.” “그냥 나가서 사먹으면 되는데..” “그래, 내가 그럴 줄 알았지.” 유키는 집에 오자마자 식탁 위에 음식을 차곡차곡 쌓은 뒤 냉장고에 넣어 두기 시작했다. “잘 상하는 건 위에 둘 테니까. 이건 빨리 먹어야 해요.” “응. 고마워..” 나는 잠시 그런 유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거다 네가 만든 거야? 힘들었겠다.” “이거 다 우리 엄마 작품인데요? 준혁씨가 한국인이라니까 좋아할 거라고 이것 저것 챙겨주셨어요.” “그럼 너는 요리 안했어..?” “저는 사랑과 정성을 듬뿍 담아..” “듬뿍 담아?” “그릇에 옮겨 담았죠. 예쁘게.” “아~ 예쁘게..” 유키는 나를 향해 애교 섞인 눈웃음을 지으며 살짝 혀를 내밀었다. 잠시 후 텅텅 빈 냉장고가 유키 어머님께서 만들어주신 음식들로 가득 차고, 우리는 거실에서 함께 커피를 마셨다. “그런데 집 엄청 크네요? 몇 평이에요?” “글쎄.. 몇 평이더라. 한 80평정도 될 걸?” “80평이요? 이렇게 넓으면 청소하기도 힘들겠다..” “일주일에 한 번씩 관리사 분이 오시기로 했어.” “가정 도우미까지 부르신다구요? 진짜 사치스럽다. 사치스러워. 혼자 살면 청소정도는 알아서 하세요. 백수라 맨날 놀면서..” “아냐, 사실 나 겁나 바쁘거든?” “호오~ 그러세요? 킥킥” 유키는 내 말에 키득 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커피 한 모금을 삼켰다. “그런데 방이 너무 썰렁해요. 가구가 없어서 그런가..” “일단 숙소에 있던 짐만 옮겨 왔으니까. 이제 이것저것 들여놔야지.” “그럼 준혁씨. 우리 쇼핑하러 갈래요? 준혁씨 집에 놓을 가구들 사러~” “지금?” “네. 집에 있으면 어차피 응큼한 생각만 할 거 잖아요.” ... 아따, 귀신이네.. ──────────────────────────────────── ──────────────────────────────────── EP. 23 : 카게무샤 (3) & 그녀가 가져온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마친 우리는 잠시 후 차를 타고 시부야의 한 백화점으로 향했다. 내 옆에서 안전벨트를 착용한 그녀는 활짝 웃으며 외쳤다. “응큼한 악마의 소굴에서 무사히 탈출에 성공했다. 출발하라~!!” “네이~ 네이~ 알겠습니다.” 칫, 누가 들으면 난 맨날 그 생각만 하고 사는 줄 알겠네.. 나는 입을 삐죽 내민 채 툴툴거리며 엑셀을 밟았다. 내가 사는 록폰기는 도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유키와 자주 만나는 신주쿠라던가 시부야로 이동하기에 가까운 편이었다. 유키는 아까부터 창문을 열은 채 눈을 감고 불어오는 봄바람을 만끽하고 있었다. “아~ 기분 좋다.” “그러게 날씨 정말 좋네..” “이게 곧 있으면 벚꽃이 필 테니 같이 꽃놀이 가요. 모리타씨도 부르고 하야시씨도 불러서 함께 어때요?” “뭐 유키가 부탁한 거라고 하면 둘 다 바로 튀어 나올 걸?” “도시락 싸올 테니까. 요요기 공원에서 꽃놀이도 하고, 하나비(불꽃축제) 축제가 열리면 거기도 같이 가고~” “할 게 엄청 많네.” “이제 같이 도쿄에 있으니까..” 유키는 살포시 웃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시부야의 마루이찌 백화점에 도착한 우리는 근처 공영 주차장에 차를 대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뭐부터 볼까요?” “글쎄. 우선은 침대부터 고를까?” 그러자 유키는 잠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흐응~ 침대 말이군요.” “…….” “왜 하필 침대부터 보실까..?” “너 아까부터 자꾸 그런 쪽으로 몰아갈래?” 유키는 나를 놀리는 게 재밌는지 깔깔대며 백화점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때마침 엄마와 함께 쇼핑을 하고 나오던 아이 손에 슈퍼 패밀리가 들려있었다. 꼬맹이는 엄마가 대신 들어주겠다는데도 용케도 바닥에 질질 끌며 게임기를 들고 가고 있었다. “저 녀석 오늘 밤 잠은 다 잤네..” 낑낑거리며 두 손으로 게임기를 들고 가는 아이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유키도 내 곁에서 함께 아이들 바라보았다. “귀여워. 뒤뚱거리면서 걸어가는 것 좀 봐.” “신났겠지. 얼른 집에 가서 게임 할 생각에..” 그만큼 슈퍼 패밀리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어마어마하게 팔려나가고 있었다. 최근에는 백화점 완구 코너에도 게임 타이틀을 판매하고 있다던데.. “우리 게임 파는데, 먼저 가볼까?” “여기도 ‘내가 없는 거리’를 팔고 있을까요?” “글쎄.. 요새는 구하기 쉬우니까, 아마 있지 않을까?” “한 번 구경 가 봐요. 우리.” 보통 여자라면 쇼핑하러 와서 게임코너 가자고 하면 질겁했을 텐데, 아무래도 게임을 좋아하는 여자는 조금 다르구나.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자신이 참여한 게임에 대한 유저들의 반응이 궁금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누구든 자신이 만들어낸 작품에 대한 결과물엔 관심이 쏠리는 법이니까. 안내데스크 직원을 통해 게임을 판매하는 곳에 위치를 파악한 우리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4층에 올랐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게임 소프트를 취급하는 코너를 찾을 수 있었다. “아~ 저기에요.” 유키는 게임 코너를 보자마자 종종 걸음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나를 향해 승리의 브이 싸인을 그리며 웃어보였다. “준혁씨~ 여기 있어요. 그런데, 나나세 카트리지만 품절이에요~” “정말? 최근엔 나나세가 더 판매량이 좋다더니, 사실이네..” 아직까지 종합 판매량은 미유키가 최고이긴 했지만, 이번 달에 들어서 세 히로인의 시나리오중 나나세의 엔딩이 가장 마음에 든다는 평가와 함께 그녀의 인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주인공의 죽음으로 인해 함께 다니던 대학을 포기하고, 의대를 선택하는 그녀의 모습에 감동했다나 뭐라나.. 확실히 나도 다 읽고 나서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긴 했지만.. “이게 다 훌륭한 시나리오 작가 덕분이죠~” “역시 방송 작가님 다운데?” “그냥 글을 쓰면서 만약에 제가 히로인들과 같은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마음으로 적다보니 저절로 글이 나오던데요? 사실 그거 쓰면서도 너무 많이 울었어요. 그러다가 플레이 하면서 또 울고..” “나도 솔직히 쓰면서 힘들긴 했어. 슬픈 글을 쓰다보면 감정이 이입 되다보니..” “그래도 마지막에 목소리 녹음은 정말 좋았던 것 같아요. 성우 분들도 좋은 경험이었다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불러달라고 하셨어요. 저는.. 조금 창피 했었지만..” 하야시씨가 말했던 남은 30kb의 용량을 어떻게든 채워보려다가 나온 아이디어는 바로 목소리 녹음 이었다. 비록 용량이 작아 전체 대사를 실지는 못했지만, 게임에 가장 메인이 되는 대사를 한 토막을 넣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것은 작지만 게임업계에 어마어마한 반응을 불러왔다. 목소리 녹음 같은 경우엔 대전 격투 게임에서 기합소리나 기술이름을 외칠 때 사용되긴 했지만, 이렇게 하나의 문장 자체를 플레이어에게 전달하는 시도는 ‘내가 없는 거리’가 최초였다. 하지만 그 한 문장을 따내기 위해 오디션을 개최하는 건 굉장히 오버하는 느낌도 들었고, 비밀을 유지하기가 힘들었기에 나는 유키에게 몰래 부탁을 했다. 방송국에서 네가 생각하는 세츠나와 나나세의 목소리와 가장 어울리는 성우 분을 소개 시켜달라고.. 그런데 왜 두 명 뿐이냐고? 그야 물론 ‘하세가와 미유키’라는 캐릭터 자체가 유키에게서 영감을 얻은 캐릭터니 목소리 역시 그녀의 목소리로 하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유키는 자신의 목소리가 게임 안에 녹음 된다는 것에 처음에는 불편해 했지만, 결국 성우 언니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녹음을 마쳤다. 나는 성우분들의 목소리를 사용한 만큼 게임 출시 후 소정의 개런티를 지급해 주었다. “헌데 그러고 보니, 왜 제 개런티는 정산 안 해주세요?” 유키는 불현 듯 떠올랐는지 나에게 물었다. “글쎄.. 정산하는데 좀 시간이 걸리네. 나나세 스토리에 대한 지분도 가지고 계시고, 미유키 음성에 대한 지분도 가지고 계시고~” “많이 주세요~” “그러지요. 섭섭하지 않게 챙겨줄게~” 우리는 함께 게임코너를 둘러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순간에도 여러 사람들이 다녀가며 슈퍼 패밀리와 내가 없는 거리를 구입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본래 목적에 따라 자리를 옮겨 가구 코너로 올라온 우리는 침대 코너를 살펴보았다. 그중에 유키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원목 재질의 침대에 몸을 뉘이더니 웃으며 말했다. “와~ 푹신푹신해~ 기분 좋다.” “그럼~ 기분 좋겠지. 100만엔 짜리 침대니까..” “헉, 100만엔이요!? 무슨 침대 가격이.. 어쩐지 엄청 푹신하더라..” 잠시 전시용 침대에서 누워 있던 유키는 내 말에 후다닥 일어나 침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손님 괜찮습니다. 그냥 두시면 저희가 정리하겠습니다.” 유키의 행동해 직원이 달려와 정리를 대신해주었다. “죄송해요. 멋대로 누워서..” “아뇨. 원래 침대란 누워보시는 게 맞아요. 침대 알아 보고 계시는 군요. 참고로 방금 누워보신 이 침대의 재료는..” “이거 주세요.” “네?” 아직 제품에 대한 설명은 시작도 안 했는데 결재해 달라고 하자, 직원은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유키도 마찬가지였다. “준혁씨 이거 사게요??” “편하다며?” “준혁씨가 쓸건데 준혁씨가 누워보고 판단해야죠!!” “아니, 그냥 네 기준에 맞출래 킥킥..” 그러자 잠시 후 내 의도를 파악한 유키는 나에게 바싹 다가와 옆구리를 꼬집었다. “끄아아악!!” “손님 왜 그러세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기 이 카드로 결제해주세요..” “손님 정말 아무 설명도 없이 그냥 구매하시게요?” “네. 빨리 어서!! 끄아악!!” 잠시 후. 나는 유키의 손가락에 쥐어뜯긴 옆구리를 부여잡고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진짜, 내가 창피해서 못살아.” “괜찮아. 못 알아 들으셨을 거야.” “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100만엔짜리 침대를 누워보지도 않고 덜컥 사는 사람이 어딨어요?” “여기 있네. 네 눈앞에..” “으휴~ 진짜..” 능글맞은 미소지어 보이며 그녀를 놀리자, 유키는 내 가슴팍을 밀쳐내더니 씩씩 거리며 걸어갔다. “알았어. 미안. 내가 잘못했어.” 그때 갑자기 먼저 걸어가던 그녀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리곤 어느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시선을 따라간 곳에는 TV를 판매하는 코너가 있었다. “나 TV는 바꿀 필요 없는데?” “그게 아니라, 준혁씨. 뉴스에..” “뉴스가 왜?” -속보입니다. 현재 아키하바라의 한 건물 옥상에서 한 남성이 자살를 시도 하려는 것이 발견 되었는데요. 다행히 남성을 먼저 발견한 시민이 경찰에 알려 현재 그를 설득 중에 있습니다. 자세한 소식은 현장에 나가 있는 리포터에게 듣겠습니다.- “준혁씨. 저 사람..” 유키는 TV 화면에 나오는 남성의 모습에 깜짝 놀랐는지 입을 가린 채 나에게 기대었다. TV안에 건물 옥상에서 무언가 소리치고 있는 남자는 나와 유키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저 사람 그때.. 행사 사무실에서 미유키 시나리오를 사갔던 그 사람아냐?' ──────────────────────────────────── ──────────────────────────────────── EP. 23 : 카게무샤 (4) “준혁씨 저 사람 그때 행사장에서 만난 그분 아니에요?” “그치? 나도 방금 그 생각했는데..” “저 사람 어떡해요.” 갑자기 진행된 뉴스 속보에 백화점을 지나던 사람들이 하나 둘 가던 길을 멈추고 뉴스를 보기 시작했다. “뭐야? 저 사람 왜 저런데?” “아, 글쎄.. 무슨 게임을 하고 나서 저러고 있다는데요?” “헐.. 별 미친놈을 다보겠네. 고작 게임 때문에 죽네 마네 하는 거야? 허이구~ 말세다. 말세야.” 사람들은 TV를 바라보며 저마다 한 마디씩 툭툭 내뱉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얼마 전 뉴스에서 추모행렬을 볼 때부터 언젠가 이런 사단이 일어날 줄 알았지. 유명한 영화배우가 자신의 역할에 심취해 배역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메소드’라는 단어가 있다. 가슴에 깊이 남는 슬픈 소설의 마지막 한 장을 넘겼을 때의 그 아쉬움과 여운에 다시 처음부터 읽어 본 경험이 누구나 한번 쯤 있을 것이다. 아마 저 남자 역시 몇 번이고 ‘내가 없는 거리’를 반복적으로 플레이한 매니악 한 유저일지도.. “준혁씨 우리, 지금 당장 저기로 가요.” “뭐라고?” “빨리요. 지금 생방송으로 중계 되고 있으니까. 서둘러 가면 끔찍한 사고를 막을 수도 있어요.” “우리가 어떻게?” “저한테 생각이 있어요.” 마치 119 소방대원 마냥 단호한 결의가 느껴지는 유키의 표정에 나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결국 백화점을 빠져나와 서둘러 주차장으로 달려온 우리는 곧장 아키하바라로 향하기 시작했다. 유키는 아키바로 향하는 중에도 라디오 중계를 들으며 혹시나 사고가 나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하고 있었다.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그렇겠죠? 저희가 만든 게임 때문에 사고가 나면 안 돼는데..” 일단 유키에게 무슨 생각이 있는 것 같으니 서둘러 가보자. 나는 엑셀에 힘을 더 하며 이를 악물었다. 만약에 진짜로 몸을 던져서 사고라도 일어나면 ‘내가 없는 거리’는 그 즉시 판매 중지 처분이 내려질 수도 있었다. 제발, 허튼 생각하지 마!! 아직 예정은 없지만 언젠가 나올 속 편도 해봐야지~!! 그리고 앞으로 당신 가슴을 후벼 파낼 게임들이 얼마나 많을 텐데, 그거 다 해보고 가야하지 않겠어!? 그때 후방에서 소방차의 싸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왜애애앵~ 왜애애앵~ “준혁씨 설마?” “꽉 잡아!! 소방차 뒤로 따라 붙을 테니까.” 나는 소방차가 내 차를 스치자마자 재빨리 그 뒤에 붙었다. 예상대로 소방차는 아키바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나는 정체되는 구간을 소방차를 이용해 빠져 나온 뒤 전속력으로 사건 현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굳이 어디서 사건이 일어났는지 찾지 않아도 역앞 대로변에 위치한 한 건물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유키와 함께 건물 옥상을 올려다보니, 그곳에는 한 남자가 옥상 난간에 걸터앉은 채 누군가의 영정 사진 품에 안고 있었다. 아마도 하세가와 미유키겠지만.. “역시 전에 봤던 그 사람 맞지?” “네. 우치무라 히로키씨..” “이름도 알어?” “대기 줄 섰을 때 제 앞에 서있던 분이거든요.” “그렇구나. 그런데 일단 네 말대로 오긴 했는데, 어쩌지? 건물도 일단 출입을 봉쇄한 거 같은데..” 그때 바리케이트 안 쪽에 있던 경찰 한분이 확성기에 대고 소리쳤다. “무모한 생각은 버리고, 어서 난간 안쪽으로 들어가세요!! 위험합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 역시 웅성거리며 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건물 위의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으아~ 저 사람 울고 있어.” 때마침 쌍안경을 들고 있던 남자 하나가 건물을 올려다보며 중얼 거렸다. “저기 잠시만 그것 좀 빌려주세요.” 어느새 유키는 남자에게 다가가 쌍안경을 빌려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치무라씨가 확실해요. 영정 사진은 미유키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계속 울고 있어요..” 유키는 쌍안경을 들여다보며 자세한 상황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때였다. 난간에 걸터앉아 있던 남자가 비틀 거리며 일어서기 시작했다. “어!? 어어!!” 남자의 돌발 행동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다급한 목소리로 위를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어이~!! 지금 뭐하는 거야! 당장 뒤로 물러서!!” 그러나 남자는 사람들의 외침을 무시한 채 난간 위에 올라섰다. 불어오는 바람에 ‘체크무늬 남방’이 팔락 거리며 나부끼고, 그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손에 받치고 있는 영정사진에 하염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젠장.. 어떡하지? 대체 어떡해야 이 상황을 말릴 수 있지? “우치무라씨..” 그 순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어..?” 갑자기 들려온 한 여성의 목소리에 시끌벅적 했던 분위기가 확 가라앉았다. 난간 위에 서 있던 남자조차 깜짝 놀랐는지 영정사진을 꽉 움켜쥔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우치무라씨..” “이거 미유키 목소리 아냐?” “진짜다!! 진짜 미유키 목소리야!!” 과연 아키하바라의 용사들. 그 열화 된 저 음질 녹음 파일을 토대로 실제 목소리의 주인공을 단번에 알아차리다니.. 내 옆에 있던 유키는 어느새 경찰이 들고 있던 확성기를 낚아채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우치무라씨.. 그러지 말아요. 제발..” 유키는 우치무라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아주 천천히 그의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다. 그러자 난간 위에 서 있던 우치무라씨는 펑펑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나는 단지 그냥 미유키에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을 보여 주고 싶었을 뿐인데..” 뭐라고..? 그 말은 즉.. “자.. 자살할 생각은 없어요.. 그냥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에 그녀와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올라온 건데..” 그러니까.. 영정 사진 들고 아키하바라의 전경을 보여 주기 위해 거기서 그러고 있었던 거냐? “우치무라씨..?”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이 모여들고, 계속 뛰어 내리지 말라고 하니.. 겁이 나서 내려가지도 못하겠고..” 그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향해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음료수가 담긴 깡통을 건물 위쪽으로 집어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야~이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영정 사진 들고 거기 올라가 있으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그게 뭐하는 짓이야!!” “난간에 걸터앉아 있어서 하마터면 자살 하려는 줄 알았잖아!!” “너 빨리 안 내려와!?” “그래!! 너 때문에 미유키쨩의 이미지가 안 좋아지잖아!!” ... 저기 그렇게 막말하다가 저 사람이 홧김에 진짜로 떨어지면 어쩌시려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욕설에 난간 위에 있던 남자는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만은 달랐다. “괜찮아요. 우치무라씨.. 우치무라씨가 그런 나쁜 마음을 먹은 게 아니라면 전 그걸로 다행이라 생각해요. 그러니까 이제 천천히 내려오세요..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거예요.” “크흑.. 으윽.. 미유키..” “그래. 아무튼 용서 할 테니. 빨리 내려와라~!!” “감동이다. 미유키의 목소리 진짜 감동이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유키의 행동을 칭찬하기 시작하자, 우치무라를 욕하던 사람들도 어느새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우치무라는 영정사진을 받쳐 든 채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는 건물 안쪽으로 돌아섰다. “와아아~!!” 이윽고 유키의 따듯한 말에 감동한 사람들은 그녀를 향해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건물 입구에서 우치무라씨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에게도 안도의 박수를 보내주었다. 유키는 경찰 아저씨에게 확성기를 돌려준 뒤 우치무라에게 다가갔다. “우치무라씨~” “유.. 유키씨..”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으극.. 끄으윽.. 으헝헝 고맙습니다아~ 정말 고마워요.. 마치 미유키쨩이 저를 위로해준는 것만 같았어요..” 결국 우치무라의 자살 소동은.. 자살 의도가 아닌 혼자만의 ‘이별 여행’을 조금 과하게 한 것으로 끝이 났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아키바의 풍경을 자세히 보여주고 싶었던 탓에 난간 위로 올라간 것뿐인데, 일이 어마어마하게 커진 사례랄까? 하지만 사건 경위를 조사 받아야했기에 우치무라는 곧바로 경찰서로 향해야했다. 멀리 사라지는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를 바라보던 유키는 그제서야 마음이 놓이는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대단한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거야?”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미유키를 굉장히 좋아했으니까. 그녀의 목소리로 부탁하면 어떻게든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때 우리 등 뒤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후지TV의 리포터 카츠라기라고 합니다만, 혹시 실례가 안되시면 간단히 인터뷰를 요청해도 될까요?” 어라? 후지TV의 카츠라기라면? 내가 먼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 역시 나를 기억 했는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그때 민텐도 직원이셨던?” “오랜만이네요. 카츠라기씨. 하하..” 유키는 처음 보는 여자가 나에게 아는 척을 하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와 카츠라기씨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괜한 오해를 사기 전에 유키에게 설명을 해주려던 찰나 이번에는 옆에서 익숙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준혁아? 네가 왜 여기 있냐?” “준페이?” ──────────────────────────────────── ──────────────────────────────────── EP. 23 : 카게무샤 (5) & 잠시 후.. 우리는 역 근처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카츠라기씨와 함께 행동하는 근육질의 카메라맨이 굉장히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아무튼 우치무라씨의 소동에 방송국까지 달려올 정도라니, ‘내가 없는 거리’에 대한 언론 매체의 반응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그때 준페이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 분이 게임 안에서 미유키의 목소리를 담당했던..” “이시카와 유키입니다. 그런데 저 모르시겠어요? 그때 드래곤 엠블렘 행사 때 진행 맡으셨잖아요.” 그러자 준페이는 불현 듯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소스라치게 놀라며 나와 유키를 번갈아 보았다. “억!! 어억!! 맞아. 그때!! 준혁이에게 카트리지 받아 가셨던 여성 유저 분!!” “오랜만이에요.” “아, 네!! 그런데, 준혁이 녀석이랑은 무슨 관계신지..” “사귀는 사이인데요?” “으아아~!! 이 배신자!! 나한텐 지금까지 여자 친구 없는 척 다해놓고!!” 그러자 나를 바라보던 유키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준혁씨가 다른데서 여자 친구 없는 척 하고 다녀요!?” 준페이의 말에 당황한 나는 마시던 커피를 뿜어내며 소리쳤다. “야, 인마!! 무슨 근거 없는 헛소문을.. 내가 너랑 한 달에 몇 번이나 만난다고!!” “킥킥킥. 부러워서 장난 한 번 쳐봤다. 너 이 자식. 감히 미유키의 성우분이랑 사귀다니. 지금 일본 열도에서 목소리 하나로 휘어잡으신 분인데~!!” 준페이의 장난이라는 말에 상처받은 유키는 그의 칭찬에도 입을 삐쭉 내밀며 준페이를 다그쳤다. “저 그런 장난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미안해요. 요새는 바빠서 잘 못 만나지만, 그래도 저 녀석이랑 제법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여자 친구라니 질투가 나서.” 그러자 담담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카츠라기씨가 입을 열었다. “전 그냥 잠깐 인터뷰만 했으면 하는데, 제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상당히 딱딱한 말투에 그녀 옆에 있던 준페이가 나에게 소곤 거렸다. “이 분 방송국 기자 아냐? 저번에 TV에서 봤는데 성격 장난 아니더라.. 아주 인터뷰 싫다는 사람 멱살을 틀어쥐고..” “저기 다 들리거든요?” “히이익!!” ... 아주 둘이 쇼를 해라. 나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으며 준페이에게 물었다. “그런데 카츠라기씨는 취재기자니까 이해하겠는데, 너는 여기 무슨 일이야?” “아.. 그게.. 사실 우치무라씨를 전에 한번 만났거든. 갑자기 뉴스속보에 나오길래 서둘러 달려왔지.” “네가 우치무라씨를 만났다고?” 이건 또 무슨 우연이냐? “최근에 우리 편집장이 ‘내가 없는 거리’의 실제 거리를 조사하라고 해서 며칠 전까지 도쿄 바닥을 이 잡듯이 해매고 다녔거든. 그러다가 만났지. 히로인들의 영정사진을 거리마다 놓고 다니는 게이머를..” 그러자 카츠라기씨는 준페이의 말에 흥미가 이는지 그에게 물었다. “그 게이머가 아까 전에 연행된 우치무라씨라는 거예요?” “네. 맞아요. 마침 그를 찾던 중에 신주쿠 거리에서 만나게 되서 따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어떻게 만난 거예요?” “지난 달에 발매한 패미통신 독자 투고 사연에서 미유키의 신단을 모신 유저가 있었는데..” 그러자 준페이의 말을 들은 카츠라기씨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집에 신단을 모셨다고요!?” 하긴 그 사연은 나도 처음 보고 기겁했으니 카츠라기씨의 저런 반응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아무래도 거리에 놓인 영정 사진들의 그림체가 신단에 놓여있던 사진의 그림체랑 너무 똑같은 거야. 그래서 일부러 찾아 다녔지.” “그걸 또 눈치 채고 찾아다녔다고? 너도 참 대단하다.” “그래서 따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어요?” 유키는 준페이가 만난 우치무라의 이야기가 궁금했는지 다그치듯 물었다. “그게.. 진짜 완전 뼛속까지 골수 게이머더라고, 모든 루트를 전부 클리어 한 것도 모자라 한 루트를 반복해서 플레이한 모양이더라. 아주 어떤 거리에서 무슨 대화를 했는지 조차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던데? 그래서 도저히 일상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고 이제 그만 놓아주고 싶은데, 너무 힘들다며 내 앞에서 펑펑 울던데.. 이야~ 내가 다 오글거려서..”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정 그렇게 못 잊겠으면, 같이 여행이라도 떠나라했지.” “뭐!? 여행?” “그 왜 있잖아. 헤어지고 나서 마음 정리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 이별 여행이라고 하던가? 그렇게라도 하고 나면 마음이 좀 편해지지 않을까 해서 추천해줬지. 설마 진짜로 할줄은 몰랐지만, 하하~” ... 결국 이 소동의 범인은 너였냐.. 준페이의 말에 나와 유키. 카츠라기씨 조차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다들 눈빛들이 왜 그래?” “그걸 몰라서 물어!!” & 한 차례 소동이 끝나고 카츠라기씨는 유키와 간단한 인터뷰를 따낸 뒤 짐을 챙겨 들었다. “우치무라씨의 행동이 사실은 한 잡지 기자의 조언과 연결 되어 있었다니, 이거 재밌는데요? 덕분에 좋은 기사 내용도 얻었고, 커피도 잘 마셨어요.” 그녀는 우리를 향해 빙긋 웃음을 지으며 가방을 크로스로 둘러매었다. 그러자 가방끈이 그녀의 명치를 지나며 유난히도 가슴이 도드라져 보였다. 준페이는 그런 그녀의 가슴을 너무 노골적으로 바라보고 있었기에 나는 탁자 밑으로 녀석의 정강이를 걷어 차주었다. “끄악~!!” “잘했어요. 준혁씨~ 내가 할 것 대신 해주셨네요. 그럼 전 이만.” 그러자 정강이를 쓰다듬던 준페이가 떠나는 뒷모습을 향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저.. 저기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식사라도 하고 가시지..” “네? 아뇨. 8시 전까지 편집실에 촬영 테이프를 넘겨야 해서 지금 좀 바쁘거든요. 다음에 또 인연이 닿거든 봐요.” 철벽녀 카츠라기씨는 쿨하게 손을 흔들고는 카메라맨과 함께 카페를 나섰다. 준페이는 못내 아쉬운 듯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차라리 당당하게 연락처를 따지 그랬어.” “아, 그럴까? 유키씨 연락처 좀 알려주세요.” “싫은데요.” “뒈질래?” “1분 사이에 두 명한테 까였군.” 우리는 간만에 만난 기념으로 자리를 옮겨 저녁 식사 겸 맥주를 마셨다. 물론 나는 차를 끌고 왔기에 무알콜인 우롱차를 마셔야했지만.. 술이 약한 준페이는 맥주 500cc 하나를 비우고 나자 기분이 좋아져서는 최근에 플레이한 ‘내가 없는 거리’에 대해 주절주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진짜, 내가 말이야~ 이 바닥에서 패밀리가 등장할 때부터 일해 왔지만, 보다보다 그런 악독한 게임은 처음 본다. 세상에 어떻게 그 많은 엔딩 중에 해피엔딩이 하나 없냐..” “그래서 별로란 거야?” “아니~ 그게 또 게임 성 하나는 기가 막혀요. 특히나 주인공이 아프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의도적으로 캐릭터 일러스트를 짓 뭉게는데, 난 처음에 카트리지가 불량인 줄 알았다니까. 진짜 어떤 놈 대가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인지 진짜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러자 유키는 풉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슬쩍 입 꼬리를 올리며 준페이의 반응을 살폈다. “넌 누구로 했었는데?” “나? 나는 세츠나였지. 다른 캐릭터에 비해 바디라인이 끝내주잖아.” 하긴 이 녀석 드래곤 엠블렘 행사 때도 섹시 마도사를 살리라고 발악했었지. 사이킥 배틀 때는 여왕님 캐릭터인 두 번째 스테이지 보스를 더 좋아했었고.. 녀석 일관성 있는 거 보소? “준페이씨는 섹시한 여성을 좋아하시는 구나.” “물론입니다. 아, 그런데 유키씨..? 라고 불러도 되나요?” “네, 괜찮아요.” “혹시 미유키의 성우를 맡으셨다면 세츠나씨의 목소리를 담당했던 분도 알고 계시겠네요?” “네, 제가 일 하는 방송국에서 자주 보는 언니에요. 애니메이션 성우신데..” “혹시 어떤 작품의 성우셨는지..”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 마리 앙투아네뜨 역을 맡으셨던 분인데..” “혹시 가장 최근 작품은?” “지구방위대 후레쉬 맨에서 ‘앨로우 후레쉬맨’ 사라의 성우셨어요. 애니메이션은 아니지만, 특촬물에서도 목소리 더빙을 주로 사용하거든요.” 그 순간 방심하던 나는 ‘앨로우 후레쉬맨’ 사라에서 마시던 우롱차를 뿜어내며 유키에게 외쳤다. “그때 만난 그 분이 앨로우 후레쉬 성우셨다고!?” 그 순간. 나는 큰 실수를 저지른 걸 깨달았다. 갑자기 떠오른 어린시절의 추억에 너무 놀랐다. 아차 싶은 마음에 준페이를 바라보니 그 녀석 역시 어이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유키씨가 말한 성우 분을 어떻게 알고 있냐?” 간만에 바보 짓했네.. 방심하다가 후레쉬 맨에게 당할 줄이야.. “아, 그게..” “솔직히 말해라. 나 지금 좀 열 받으려고 한다?” “에휴.. 그래 나다 나. 내가 시나리오를 맡은 k야.” “너.. 너, 너!! 너 너!!” 그러자 준페이는 맥주잔을 꼭 쥔 채로 ‘너’만 반복해서 중얼 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친구야.. 한정판 하나만 팔아라..” “…….” “제발..” “대신 잡지사엔 비밀이다.” “물론이지.” 잠시 후. 술집은 나온 나는 준페이와 유키를 태우고 집에 바래다주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트렁크에 넣고 다니던 ‘내가 없는 거리’ 한정판을 받아든 준페이는 거리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기뻐했다. “으하하~ 나처럼 운 좋은 녀석은 없을 거야~ 으하하하~~” “그렇게 좋냐?” “그럼 물론이지. 내가 이거 못 구해서 여태까지 방바닥을 얼마나 긁었는데, 너도 진짜 나한테까지 숨기지는 마라. 진짜 한편으로는 완전 섭섭했다.” “내가 시나리오 맡은 거 아는 사람 한손에 꼽을 정도 밖에 몰라. 가뜩이나 좁은 업계인데 조심해야지.” “알았다. 내가 이 비밀은 꼭 지키마.” 준페이는 연신 생글거리며 집에 도착할 때까지 한정판 패키지를 마르고 닳도록 쓰다듬었다. “아~ 오늘 하루 너무 재밌었어요. 다행히 우치무라씨도 훈방조치 될 거 같고..”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지..” 유키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빙긋 웃으며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내들었다. “오늘은 준혁씨네 집에 처음으로 가보고, 같이 ‘침대’도 골랐고, 우치무라상도 만나고, 카츠라기씨랑 준페이씨까지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네요.” “그러게.. 덕분에 하루가 무지 길었던 것 같아.” “전 내일부터 출근해야 하거든요? 백수면서 엄살은~” “백수가 싫으면 다시 일벌레로 돌아가서 병원에 또 실려가 볼까?” “아주~ 그러기만 해보세요.” “농담입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유키는 어두운 차안에서도 연필을 꺼내 무언가를 슥슥 그리기 시작했다. “뭐해?” “타마고상 그려요. 오늘은 많은 일이 있었으니 별 10개짜리 타마고상입니다.” 타마고상은 한국어로 하면 ‘달걀씨’ 정도 되려나? 한국에 갔을 때도 그녀의 가이드북에서 본적이 있었기에 잘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녀가 타마고상을 전부 그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떼었다. “사실 전부터 말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음~ 뭔데요?” “그 타마고상이라는 캐릭터. 나한테 팔지 않을래?” “네에?” “조금 재밌는 생각이 떠올라서..”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키를 살짝 바라보며 씨익 웃어보였다. & 다음 날. 어제 있었던 우치무라씨의 자살 헤프닝이 각종 뉴스에 보도 되면서 ‘내가 없는 거리’에 대한 신드롬은 더욱 확산 되었다. 덕분에 민텐도의 카마우치 사장과 펜타곤의 카와구치 대표는 기자회견을 통해 대 국민 사과를 감행했고, 차후 ‘내가 없는 거리’의 카트리지 안에는 다음과 같은 주의 문구가 들어갔다. -본 작품의 이야기는 모두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스토리에 너무 심취하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아침에 뉴스를 보던 나는 햇살이 들어오는 테라스에 기대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만약에 내가 펜타곤 대표로 있었으면 꼼짝 없이 저기로 끌려갔을 텐데, 이럴 땐 대리 사장을 두는 게 참 편하구만..’ 우치무라씨의 사건은 일본 방송국을 통해 해외까지 전달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그 반동으로 ‘내가 없는 거리’는 영문판을 메인으로 각국의 번역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 안에는 물론 ‘한국어’도 들어 있었다. 따로 요청하지도 않았는데도, 카와구치 대표가 알아서 지시한 모양이었다. 다음 달부터는 애니메이션도 방영할 예정이니 앞으로도 ‘내가 없는 거리’의 인기는 꽤나 오랫동안 지속 될 것 같다. ‘그럼 이제 슬슬 다음 작업을 시작해야지..’ 나는 남아있는 커피를 마저 비우고 겉옷을 챙겨들었다. ──────────────────────────────────── ──────────────────────────────────── EP. 24 : 악마의 달걀 (1) & 집에서 나온 나는 곧장 라이텍스 공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붉은 신호등에 서서히 차를 멈춘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다음 작품으로 이미 ‘시계탑의 살인마’의 기획을 잡고 있었지만, 슈퍼 패밀리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더 이상 게임은 소수의 인원이 1~2개월 만에 뚝딱 만들어낼 만큼 단순한 작업이 아니게 되었다. ‘내가 없는 거리’ 역시 초반 기획부터 제작 기간만 거의 2년 가까이 걸렸으니 ‘시계탑의 살인마’ 역시 제대로 만들기 위해선 최소 1년 이상의 제작 기간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죽어라 하나에만 매달리는 건 또 성미에 안 맞고..’ 좀 더 심플하면서 사람들의 구매욕을 자극할만한 게임이 없을까? 기왕이면 언제 어디서나 즐길 수 있는 휴대용 포맷으로 말이다. 그러던 중 떠오른 게 유키의 타마고상이었다. 우선 그녀가 그린 타마고상은 달걀을 모티브로 한 만큼 남녀노소할거 없이 모두가 좋아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친근하고 귀여운 이미지니까.. 하지만 그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달걀이 부화한다면..?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군..’ 마침 파란 신호등에 불이 켜지며 나는 미소와 함께 엑셀에 발을 옮겼다. 반쯤 열어 놓은 창문에서 봄날의 포근한 바람이 코끝을 자극 했다. & 라이텍스 공장은 민텐도의 카트리지 하청 기업 중에 상위 1~2위를 다툴 만큼 성장했다. 그 성장의 바탕에는 첸드라가 만들어낸 패밀리용 ‘특수칩’의 공이 컸다. 이미 슈퍼 패밀리가 출시되었지만, 아직까지 패밀리는 일본 내에서 가장 많은 보급된 기종으로 현역을 달리고 있었다. 거기다 지난 2월 패밀리용 드래곤 워리어의 마지막 시리즈인 4탄이 출시되면서 또 다시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민텐도는 가능 하면 슈퍼 패밀리의 빠른 성장을 위해 차세대 기종으로 드래곤워리어4를 컨버전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피닉스사에서 돌아온 대답은.. -저희는 무조건 가장 많이 보급된 기종으로만 드래곤 워리어를 출시할 겁니다.- ...였다. 그것은 후에 드래곤 워리어 시리즈의 판매의 모토가 되었다. 지난 달에 발매한 드래곤 워리어4는 패밀리에서 발매한 마지막 시리즈인 만큼 여러모로 그래픽이나 시스템이 파워 업 된 상태였다. 거기다가 총 5장으로 구성된 옴니버스식 스토리 구성은 유저들에게 호불호가 갈리긴 했지만, 현재 패밀리 게임 중에선 가장 빠른 속도로 팔려나가는 타이틀이었다. 그리고 그런 드래곤 워리어 4의 대항마로 카와구치씨의 파이널 프론티어 3 역시 4월에 출시 예정이었다. 카마우치 사장은 패밀리를 이끄는 양대 RPG 타이틀이 둘 다 패밀리로 출시하는 것에 대해 매우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솔직히 까놓고 말해 슈퍼 패밀리의 카트리지 로열티는 칼만 안 들었지 거의 날강도나 다름없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아직 보급이 원활하지 않은 최신 기기에 게임을 내는 것은 마치 스스로 자폭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뭐 내가 없는 거리는 차세대 성능이 아니면 구동이 불가능 했으니 별개로 치지만, 드래곤 워리어나 파이널 프론티어는 현명한 선택이라 볼 수 있지..’ 아무튼 그렇기에 슈퍼 패밀리의 타이틀은 민텐도에서 제작하는 게임들을 빼고는 거의 정가가 8000엔을 넘어서고 있었다. 현재 슈퍼 패밀리로 나온 게임은 ‘내가 없는 거리’를 포함해 약 6종류. 그중에서 민텐도에서 나온 슈퍼마리지 월드와 F-ZERO 그리고 펜타곤의 내가 없는 거리를 제외 하곤 다들 판매량이 그리 높지 않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일까? 지난 연말부터 상대적으로 휴대용 겜보이의 판매량이 눈에 띄게 오르고 있었다. 슈퍼 패밀리보다 상대적으로 카트리지 단가가 저렴하고, 어디서든 플레이 할 수 있어 어른, 아이할거 없이 최근에는 전철에서 겜보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현재 생각하고 있는 게임은 바로 이 겜보이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 강. 강이 왔다. 첸드라 강준혁이 왔다.” ... 우연일까? 이상하게도 라이텍스에만 오면 반드시 푸말라가 나를 먼저 알아보곤 했다. 마치 내가 올 걸을 미리 알기라도 했다는 듯이.. “오~ 강준혁. 무슨 일이냐?” 나는 오는 길에 제과점에서 사온 빵을 푸말라에게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첸드라. 혹시 달걀 좋아해?” “달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거리는 첸드라에게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생긋 웃어보였다. & 잠시 후. 어느 정도 새로 만들어질 휴대용 게임기의 컨셉을 전해들은 첸드라는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타마고 몬스터?” “응. 말 그대로 달걀이 컨셉인 게임기야.” “35x35 사이즈의 흑백 디스플레이를 사용하는 휴대용 게임기라.. 이 정도라면 쉽게 만들 수 있겠는데.. 한 가지 거슬리는 게 있다.” “뭔데?” “외부의 충격을 인식하는 센서가 필요하다니.” “달걀이니까. 충격에 약한 게 당연하지.” “물론 그렇긴 하지만, 충격을 감지해내는 센서는 단가가 매우 비싸다.” “누가 그 비싼 센서를 사용한데?” “음? 그럼 무얼 사용할 거냐?” 첸드라의 물음에 나는 주머니에서 작은 쇠구슬을 꺼내들었다. “이걸 쓸 거야.” “쇠구슬?” 외부의 충격을 인식하는 것에서는 그 충격을 감지할만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렇닥 아이들이 가지고 놀 저렴한 장난감에 고가의 센서를 집어넣는 건 어불 성설이니 나는 가장 저렴하게 충격을 인식하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처음엔 ‘핀’을 이용해 어느 정도 충격에서 핀이 이동하게 되면 ‘판정’에 영향을 주게 되어 키우던 몬스터가 죽게 되는 설정을 넣으려했으나, 너무 강한 충격에 안에서 핀이 부러지거나 먼지가 끼어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 다면 고장의 원인이 되기에 나는 조금 방식을 바꾸었다. 일정한 공간 안의 고무 밴딩을 걸어 내부에 쇠구슬을 반동을 일으키면 몬스터가 사망하는 것으로 말이다. 첸드라는 나의 아이디어에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이거라면 괜찮을 것 같다.” “그렇지?” 타마고 몬스터는 3가지 버튼을 이용한 굉장히 단순한 컨셉의 육성 시뮬레이션 기기였기에 제작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듯했다. 캐릭터 디자인 역시 유키가 가지고 있던 다이어리 안에서 거진 다 완성 되어 있었기에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타마고상은 달걀 자체가 몸체는 단순하지만 여러가지 표정 변화를 가지고 있었고, 내가 만드는 타마고 몬스터는 그런 타마고상을 잘 키우는 게 1차 목표로 정해져 있었다. 맨 처음 전원 버튼을 누르면 타마고 상은 여러 가지 패턴이 그려져 있는 작은 달걀에 불과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달걀이 흔들거리며 눈을 뜨게 되었다. 그 후로는 데굴데굴 굴러다니게 되는데, 플레이어는 그런 타마고상에게 음식을 주거나 같이 놀아 줄 수도 있고, 훈련을 시킬 수도 있다. 달걀은 시간이 지날수록 손과 발을 갖게 되고, 성장기를 거치게 되면 몸을 일으켜 세우게 되어 조금 더 세분화된 훈련을 시킬 수가 있었다. 그렇게 현실로 약 7일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타마고상은 드디어 자신을 가두고 있었던 알을 깨부수고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데, 플레이어가 애정을 쏟은 만큼 훌륭한 캐릭터로 진화 하게 되었다. 어떤 것은 사람의 모습으로 검과 방패를 들고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뾰족 모자를 쓴 마법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는 음식의 배분에 따라 타마고상은 몬스터로도 진화할 수 있었는데, 어린이들에게 친근한 개나 고양이부터 환상의 생물까지 다양하게 준비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걸 다 키워서 뭘 어쩌냐고..? 뭘 어쩌겠는가? 캐릭터를 만들었으면 싸우러 가야지. 그럼 어디서 싸우냐고? 그거야 당연히 휴대용 겜보이 안에서지. 타마고 몬스터의 기기는 휴대용 겜보이가 가진 데이터 케이블을 인식할 수 있게 만들 거거든. 그 좁아터진 액정과 허접한 사양 안에서 몬스터들의 싸움이 제대로 표현이 가능 하겠어? 어림도 없지.. ──────────────────────────────────── ──────────────────────────────────── EP. 24 : 악마의 달걀 (2) & 첸드라를 만나고 며칠 지난 1990년의 4월 초. 나는 펜타곤 사무실을 찾았다. 때마침 펜타곤 소프트는 파이널 프론티어 3 발매를 목전에 두고 사무실 분위기는 꽤나 한가로웠다. “아, 부장님. 오셨어요?” 마침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던 모리타가 나를 반겼다. “에이, 이제 그 부장님 소리 좀 그만 하세요. 저도 이제 민텐도 사원도 아니고..” “어차피 저희 개발 2팀으로 오시면 또 부장직 달고 오실 거잖아요.” 하긴 그것도 그러네? 나는 모리타의 말에 피식 웃음을 던지며 펜타곤 식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미 예전부터 자주 들락거리며 얼굴을 익혀서 그런지 다들 나를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부장님도 커피 드실래요? 어차피 한잔 더 내리면 되는데?” “아,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모리타씨.” 잠시 후. 대표이사 실에서 카와구치씨와 인사를 나누는 중에 모리타가 커피를 들고 왔다. “모리타씨 잠깐 앉으세요. 하야시씨도 불렀으니 곧 올 겁니다.” “음? 저희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하야시씨가 오면 같이 말씀 드릴게요.” 그러자 카와구치씨가 미소 지으며 나에게 물었다. “또 제 2개발팀 인원으로 뭔가를 꾸미시는 건가요?” “일전에 펜타곤 소프트에 들어갈 때 제가 큰 선물을 가지고 오겠다던 말 기억하시죠?” “아, 네. 물론..” 그때 문밖에서 노크소리가 울리며 하야시가 들어왔다. “사장님. 부르셨습니까? 어? 부장님.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셨어요?” 그러고 보니 모리타도 하야시도 저 부장님 소리는 끝까지 붙이는구나.. 나는 하야시에게 비어 있는 의자를 권했다. 그럼 주역들이 다 모였으니,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나는 가방에서 며칠 간 정리한 휴대용 게임기 ‘타마고상’의 기획안을 한부씩 건네주었다. “타마고상?” “이 캐릭터는 누가 그린 건가요? 뭔가 동글동글한 모습이 엄청 귀여운데요?” “아, 그건 이 게임의 메인 캐릭터인 타마고상입니다. 유키가 직접 디자인 했어요.” “네에!? 유키씨가 직접? 센스가 굉장한데요.” 카와구치과 하야시 역시 모리타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타마고상의 진화과정을 보면서 이 게임의 시스템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가장먼저 기획서의 검토를 마친 카와구치상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요컨대 전자기기를 이용한 애완동물 기르기네요.” “비슷합니다. 타마고상이 몬스터로 진화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확실히 먹이의 배합이라던가 훈련의 강도에 따라 마지막에 본 모습을 드러내는 게 흥미가 당기는 군요. 분명 아이들이 좋아할 요소입니다. 나쁘지 않은데요?” 이번에는 하야시가 검토를 마치고 소감을 이야기했다. “굉장히 심플한데요? 이 정도라면 일주일 만에 코딩 작업 끝낼 수도 있겠습니다. 먹고, 자고, 훈련하고, 부장님이 생각하신 것 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단조로운 구성이네요?” 그래?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가방에서 두 번째 기획서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민텐도의 휴대용 게임보이 카트리지로 제작 예정인 ‘타마고 몬스터’의 기획안이었다. “이것은 타마고상의 데이터를 이용해 즐길 수 있는 또 다른 게임의 기획서입니다.” 그러자 그 순간 하야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타마고.. 몬스터? 그런데 부장님. 방금 뭐를 이용한다구요? 타마고상의 데이터?” “일단 한 번 천천히 읽어 보세요.” 하야시는 불안한 표정으로 내가 건네는 기획서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첫 장을 넘긴 순간.. “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타마고상 안에서 진화가 완료된 몬스터는 데이터 케이블을 이용해 카트리지 안으로 옮겨지게 되어 있었다. 플레이어는 이 몬스터 데이터를 이용해 자신만의 부대를 만들 수가 있었고, 그 부대를 이용해 게임 안에 마련된 스토리를 즐기며 싸워나갈 수 있었다. 특히나 카트리지 안으로 옮겨진 몬스터는 스토리 안에서 최종 진화를 한 번 더 거듭하게 되는 요소가 있어 타마고상을 즐긴 유저라면 반드시 카트리지 게임을 즐길 수밖에 없도록 설계 되어 있었다. 특히 휴대용 겜보이의 데이터 케이블을 친구의 겜보이에 연결해 몬스터들끼리 배틀 할 수 있는 요소에선 카와구치씨 역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겜보이가 발매되고 아직까지 제대로 데이터 케이블을 사용한 게임이 드문 시기였기에 ‘타마고상’이 보여준 데이터 연계 요소는 굉장히 큰 충격으로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이런 데이터 교환 방식이 가능한가요?”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자신이 키운 몬스터로 친구와 대결하는 요소는 ‘타마고 몬스터’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조금 어려울지 몰라도 반드시 구현해야 합니다. 저도 같이 도울 테니 열심히 해봐요.” 하야시는 내 말에 기획서로 얼굴을 가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이제까지 조용히 기획서를 살피던 모리타가 굉장히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부장님.. 문제가 있어요.” “네? 무슨 문제가..?” 모리타는 기획서 안에 그려진 유키의 동글동글한 그림체를 살피며 울상을 지었다. “작화 스타일이 저랑 너무 안 맞을 거 같은데요. 몇 가지라면 괜찮지만, 딱 봐도 수십종이 넘어가는 몬스터를 전부 디자인하기엔 너무 벅차 보여요..” 아.. 맞다. 당신은 미소녀 전문 작가였지.. 민텐도에서도 동킹콤 그리기 싫어 나온 사람에게 수십종의 몬스터를 그리라는 건 굉장히 고역이 아닐수 없겠지. 하지만 이번 타마고 몬스터에서 모리타가 걱정할 부분은 전혀 없었다. “걱정 말아요. 모리타씨.” “네?” “모리타씨는 모리타씨가 가장 자신 있는 캐릭터 몇 개만 그려주세요.” “그럼 나머지 몬스터들은?” “이번 타마고 몬스터에 출연하는 몬스터들은 아마추어 작가들부터 프로 작가들까지 섭외해 콜라보레이션 형식으로 진행될 거거든요.” “콜라보레이션이요?” “이 부분은 저보단 카와구치씨께서 조금 도와주시면 좋겠는데, 도쿄 내에 있는 ‘일러스트 전문학교’를 대상으로 캐릭터 공모전을 개최해보는 건 어떤가요?” “캐릭터 공모전이요?” “아무래도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다양한 몬스터의 기획이 나오긴 어려우니까요. 파이널 프론티어와 내가 없는 거리를 발매한 펜타곤 소프트에서 직접 학생들을 대상으로 공모전을 개최하는 겁니다.” “과연.. 좋은 생각입니다. 숨은 인재도 발굴할 수 있고, 다양한 컨셉의 몬스터 기획도 받아 볼 수 있고, 아마 학교 측에서도 요즘 같은 시기에 적극 환영할 겁니다.” “거기서 하나 더 부탁드릴 게 있는데..” “뭔가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파이널 프론티어에 등장했던 몬스터들도 이 타마고 몬스터에 같이 참전 시켜 주셨으면 합니다.” “네에?” “전부는 아니고, 파이널 프론티어를 대표할만한 몬스터들로요. 예를 들어 환수종의 바하무트라던가, 소환수의 시바 같은 개성 있는 캐릭터들로..”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대체 어떤 걸 기획 하시는 건가요?” 카와구치씨의 물음에 나는 마지막으로 타마고상과 타마고 몬스터를 이용한 유통 구조 기획안을 꺼내들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작성한 세 가지의 기획서는 굉장히 많은 고민을 거듭한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효과는 끝내줄 거야.’ 마지막 기획서를 받아든 카와구치씨의 표정은 기획서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조금씩 얼굴이 굳어져 갔다. “파이널 프론티어의 타마고..?” 기획서 마지막 장에 그려진 달걀의 표면에는 파이널 프론티어라는 문자가 표면에 도르르 말려있었다. ──────────────────────────────────── ──────────────────────────────────── EP. 24 : 악마의 달걀 (3) & 카와구치 대표는 나의 기획안을 곧바로 통과 시키며 어마어마한 행동력을 보여 주었다. 다음 날로 언론사를 통해 공모전을 기획을 발표한 카와구치는 곧장 제 1회 타마고 몬스터 ‘캐릭터 공모전’의 포스터 제작을 모리타에게 맡겼다. -거기 너!! 도전하지 않겠는가!?- 라는 파격적인 선전 문구와 함께 포스터에는 타마고상을 들고 있는 여교사 이미지를 그려 넣었다. 또 다른 디자인의 포스터에는 파이널 프론티어의 대표 환수 ‘바하무트’가 브레스를 뿜어내며 공모전 일정을 알리고 있었다. 두 번째 포스터는 파이널 프론티어의 전속 디자이너인 아마노 선생님의 그림체였다. ‘둘 다 진짜 쩐다. 거의 화백 수준이네..’ 나는 포스터를 살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결코 아마추어 공모전에서 쓰일만한 퀄리티가 아닌데? 카와구치씨 역시 공모전 포스터의 디자인이 굉장히 마음에 드는지 연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디자인 전문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제1회 타마고 몬스터의 캐릭터 공모전이 시작되었다. & “준혁씨. 여기에요.” 벚꽃이 만개한 어느 화창한 봄날의 요요기 공원. 이른 아침부터 자리를 잡아둔 모리타 덕분에 우리는 굉장히 좋은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묵직한 박스를 손에 든 채 땀을 뻘뻘 흘리며 그들에게 다가가자 하야시가 서둘러 달려와 내 짐을 받아 들었다. “어이쿠 부장님. 뭘 이렇게 많이 싸오셨어요. 안 그래도 유키씨가 도시락 엄청 싸오셨는데, 이러다 배 터져 죽겠네요.” “아, 그래요? 다행이다.” “네?” 잠시 후. 내가 들고 온 박스 안을 열어본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잠시 헛기침을 하며 애써 그들의 시선을 외면했다. “준혁씨. 진짜 사람이 어쩜 여기까지 일거리를 들고 올 수 있어요?” “화창한 야외에서 꽃구경도 하고, 공모전 작품 1차 심사도 하고 1석2조 아냐?” 모리타와 하야시는 내 말에 질렸는지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한마디씩 내뱉었다. “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그러게, 진짜 꽃놀이까지 와서 이럴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일단 박스를 개봉한 뒤 서로 그림을 돌려보자 금세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야, 모리타 이거 어떠냐?” “음? 오~ 확실히 멋진데, 하지만 타마고 몬스터에 쓰기엔 디테일이 너무 세밀한데..?” “하긴 그것도 그렇네..” 도쿄 도내의 전문학교에서 쏟아져 들어온 공모전 출품작은 어마어마했다. 일인당 최대 3개의 몬스터까지 출품할 수 있었는데, 최근에 펜타곤 소프트의 입지가 상당히 오르면서 많은 학생들이 공모전에 참가한 것이다. 상자 안에는 ‘몬스터’라는 주제에 걸맞게 보기에도 흉측한 괴물들의 일러스트가 엄청나게 쌓여 있었고, 나는 빠르게 일러스트를 넘기며 타마고 몬스터의 분위기와 얼추 맞는 것들을 추려내기 시작했다. 어느새 유키 역시 학생들이 보내온 그림을 하나씩 감상하며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와.. 대단하다. 어떻게 이렇게 그릴 수가 있지? 정말 학생들이 그린 것 맞아요?” 유키는 늙은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괴수의 일러스트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멋지긴 한데, 아이들이 플레이 하는 게임에 등장하기엔 너무 충격적인 모습이군. 나는 세밀한 디테일을 살리는 실력 있는 몬스터의 일러스트는 따로 추리며 다시 몬스터 분류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드디어 내가 원하던 스타일의 몬스터 디자인을 찾았다. ‘이거다..’ 전체적으로 동글동글 한 이미지에 커다란 눈망울.. 몬스터라기보다는 애완동물의 이미지에 가까운 친근한 느낌.. 거북이를 모티브로 했는지 등껍질에 물대포를 달고 있는 녀석은 내가 익히 알고 있던 ‘몬스터 볼’ 게임의 캐릭터 디자인과 흡사했다. “이런 디자인 어때요?” 나는 정신없이 그림을 살피고 있는 모리타와 하야시, 그리고 유키에게 내가 본 몬스터 디자인을 보여주었다. “어.. 엄청 귀여워요.” “타마고 몬스터 이미지랑 딱 들어맞는데요?” “호오.. 저도 찬성입니다.” 세 명은 내가 보여준 몬스터 이미지에 굉장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특히나 유키가 엄청 좋아하는 걸 보면, 여성 유저한테도 어느 정도 먹힐만한 이미지라는 거겠지? “좋아. 그러면 이런 컨셉을 가진 그림들을 따로 모아보자.” 잠시 후. 일본도를 들고 있는 애꾸눈 고양이와 전기를 뿜어내는 노란 햄스터의 이미지까지 일단 귀여워 보이는 몬스터들의 이미지를 총 집합 시키자 얼추 50가지의 몬스터가 추려졌다. “일단 타마고상에 하나 들어가는 몬스터 데이터는 최대 20종이니까. 오늘은 여기까지하고, 따로 모아둔 거에서 나중에 2차 심사를 하도록 하죠.” 그러자 하야시씨는 손에 들고 있던 일러스트를 간추리며 피곤한지 두 눈을 부볐다. “아, 드디어 우리 점심 먹을 수 있는 건가요?” “배고프다. 꽃놀이 구경 와서 일 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네..” 모리타와 하야시는 툴툴 거리면서도 일러스트를 꼼꼼히 정리해두었고, 모든 일을 마치자 유키가 싸온 6첩 도시락이 빈자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우와~ 유키씨 음식 솜씨가 장난이 아닌데요?” “그러게, 이걸 다 언제 준비 하셨어요?” ... 속지 마. 이번에도 사랑과 정성을 다해 ‘옮겨’ 담았을 거야. 그들에게 진실을 전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나를 바라보는 유키의 싸늘한 눈빛에 나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흩날리는 벚꽃을 바라보며 유키가 준비해온 음식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던 중 모리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부장님. 이번에 기획중인 타마고상 말인데요.” “네. 말씀하세요.” “기획 의도와 컨셉은 정말 감탄을 자아내지만, 아이들을 상대로 너무 가혹한 마케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러자 옆에 있던 하야시도 그에 동의했다. “저도 그건 동감합니다. 아이들이 경제력이 있을 리도 없고, 그 부담이 고스란히 아이 부모에게 갈 텐데, 타마고상을 구입하면 휴대용 겜보이와 카트리지가 꼭 필요하잖아요. 아이들이 가지고 놀기엔 너무 금액이 커지는 게 아닐까 싶은데..” 맞는 말이다. 모리타와 하야시가 걱정하는 부분은 나 역시 기획 초기부터 고민하던 부분이었다. ‘이렇게 만들면 예전에 내가 싫어했던 뽑기 시스템과 별 다를 게 없잖아?’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나는 아이와 어른까지 모든 연령이 쉽게 즐길 수 있는 하나의 트렌드 장치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어차피 늦더라도 언젠가는 누군가가 만들게 될 악독한 상술의 아이템.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그 표본을 만들어 보자.’ 그 생각 하나로 나는 이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나는 차가운 음료수를 들이켜 입안을 헹궈낸 후 모리타와 하야시에게 대답했다. “맞는 말입니다.” 내가 순순히 동의하자. 하야시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그럼 이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 타마고상을 만들려고 하신건가요? 마지막 유통 구조 기획을 보니 파이널 프론티어에 등장하는 몬스터가 들어가 있는 타마고상도 있던데?” “맞아요. 앞으로도 점점 콜라보레이션을 늘려가면서 다양한 타마고상을 준비할 계획입니다.” “네에? 파이널 프론티어의 타마고가 끝이 아니라구요?” 나의 마케팅 전략에 그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유키 역시 그건 좀 아니라는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계속해서 타마고상을 늘려가는 건 아이들 교육에도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이번엔 내가 질문을 던졌다. “왜 다들 한 아이가 똑같은 타마고를 몇 개씩 구매할거라 생각하지?” 그러자 모리타가 대답했다. “그야 당연한 거 아닐까요? 보통 타마고가 있고, 한정판인 파이널 프론티어 타마고가 있으면 둘 다 가지고 싶은 게 아이들 마음이잖아요? 그리고 타마고 하나만으론 아이들과 어울릴 수 없으니 결국엔 카트리지와 겜보이도 갖고 싶을 테고..” “현재 휴대용 겜보이의 보급률을 낮은 건 아녜요. 동네 아이들 중에서도 겜보이 하나쯤 없는 집이 없죠. 특히나 최근에는 슈퍼 패밀리가 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겜보이의 판매량이 더욱 늘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겜보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아이들도 있는 건 맞아요. 그 아이들도 물론 타마고상을 플레이하고 싶을 겁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쯤 만들어 보려고 해요.” “네? 무얼요?” “겜보이가 없는 아이들도 즐겁게 타마고상을 즐길 수 있는 놀이터를요.” “네에..?” & 1990년 7월 초 여름 아키하바라의 역 근처에 거대한 샵이 들어섰다. NEGA에서 직접 운영하는 아케이드 게임 센터 앞에 만들어진 이 샵은 건물 1층을 전부 사용하는 만큼 굉장히 규모가 거대했다. ‘아이들이 뛰어 놀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지.’ 나는 바쁘게 움직이는 인부들 사이로 인테리어 업자와 상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쪽이 배틀존? 이라는 곳이고 이쪽이 어드벤쳐 존이라는 거죠?” “네. 맞아요.” 그때 밖에서 간판을 올리는 업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잠깐!! 스톱!! 오른쪽 더 올리고, 그래~!! 스톱!!” 인테리어 업자는 나의 요청에 고개를 끄덕인 뒤 인부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물러났고, 나는 매케한 먼지가 흩날리는 매장을 빠져 나와 건물 외부에 설치되는 간판을 바라보았다. -타마고 몬스터 샵- 거대한 달걀의 모습을 한 전사가 검과 방패를 들고 파이팅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나와 함께 보고 있던 하야시가 담배를 입에 문 채 떨리는 목소리로 옆에 있던 모리타에게 물었다. “이게 진짜..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모리타?” “샵을 차리신 다길래, 동네 게임샵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건.. 맞은편에 게임 센터 보다 규모가 더 크잖아..” 얼빠진 표정으로 간판을 바라보는 그들에게 나 역시 담배 한대를 물며 미소 지었다. “이거라면 누구나 찾아와서 타마고 몬스터를 친구들과 즐길 수 있겠죠? 배틀존과 어드벤쳐 존에는 겜보이가 설치되고 모두 무료로 운영 될 겁니다. 아이들은 자기 몬스터를 담아 둘 카트리지만 있으면 되죠.” “이거 참.. 실제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네.. 그런데 이만한 규모의 샵을 운영하려면 직원들도 만만치 않게 필요하겠는데요? 타마고상을 구입하는 고객들이 몰리면 계산대도 정신없을 것 같고..” “계산대라..” 그때 때마침 거대한 트럭이 들어오며 가챠폰 업체 직원들이 우르르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트럭 문이 열리자. 달걀 모양의 갸챠폰 기계가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부장님 저건 뭔가요?” “보면 몰라요? 타마고상을 판매할 자동판매기입니다. 뽑기 몬스터답게 모든 판매는 이 기계에서만 판매가 될 겁니다. 이로서 판매를 도와줄 직원도 필요가 없지요.” “허어..” “그리고, 타마고상에서 키워낸 몬스터는 친구들과 몇 번이고 교환이 가능합니다. 타마고상의 데이터를 초기화 하지 않는 한 자기가 키운 몬스터는 데이터 케이블을 이용해 여러 친구들의 몬스터를 전해 줄 수 있어요. 혼자서 키우는 것보다 여럿이 함께 몬스터를 기르는 게 훨씬 더 강한 부대를 빨리 만들 수 있겠죠?” “그럼 파이널 프론티어 타마고를 얻은 친구의 데이터도 같이 데이터를 교환할 수 있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그냥 타마고는 하나만 있어도 그것을 즐기는 친구가 늘어날수록 여러 몬스터를 양도 받을 수 있어요. 물론 자신의 수집 욕으로 인해 억지로 무리하게 타마고 상을 모으는 사람만 아니라면 누구나 타마고상 하나로도 즐거운 플레이를 할 수 있을 겁니다.” 모든 가챠 기계에는 6:4비율로 파이널 프론티어의 타마고와 일반 타마고가 섞여 있었기에 약간의 운만 따르면 누구나 손쉽게 파이널 프론티어의 몬스터가 들어있는 타마고상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쓸데없는 수집 욕을 줄이기 위해 배려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타마고상을 가진 모든 유저가 편하게 데이터를 교환하고 즐길 수 있는 거대한 놀이터를 만드는 것이었다. ──────────────────────────────────── ──────────────────────────────────── EP. 24 : 악마의 달걀 (4) & 타마고 몬스터 샵은 오픈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속도로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개발 초기부터 패미통신을 이용해 타마고상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계속해서 홍보한 덕분이었다. 그 효과로 발매당일 뽑기 머신의 레버들은 쉴 새 없이 돌아갔고, 5대를 준비한 판매용 가챠 캡슐은 아무리 기계에 쑤셔 넣어도 채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동이 나기 시작했다. 정가 1980엔짜리 휴대용 미니 게임기는 아이들 장난감으로서 충분히 납득할만한 가격으로 정말 어마어마한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타마고 몬스터 샵은 연일 사람들로 붐비며 매일이 축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부모님과 함께 온 아이들은 장내를 뛰어 다니며 마스코트인 타마고 인형과 놀기 바빴고, 배틀 존에서 사회를 보는 진행자는 목소리가 갈라질 때까지 ‘자~ 친구들 함께 외쳐요. 몬스터 배틀~ 파이트!!’를 외쳐댔다. 휴대용 겜보이가 없는 아이들은 판매대에서 카트리지만 구입한 뒤 30대의 겜보이가 설치된 어드벤쳐 존이라는 놀이방에서 무료로 한 시간씩 스토리 모드를 즐길 수 있었다. (물론 놀이방을 나갈때는 기기를 반납해야한다.) 사실 배틀 요소를 갖춘 타마고 몬스터에는 절대적으로 강한 몬스터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현재 타마고 몬스터에서 최강으로 설정된 몬스터는 파이널 프론티어에 등장하는 환수종 바하무트였지만, 그마저도 카운터를 칠 수 있는 몬스터는 존재했다. 저마다 약점이 존재했고, 상대방이 어떤 몬스터 종류로 치고 들어오느냐에 따른 심리전 요소와 손쉬운 배틀 방식이 아이들의 흥미를 제대로 자극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돈 냄새를 맡기 시작한 개인업주들이 펜타곤 소프트에 직접 발주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카와구치 대표는 자신이 만든 파이널 프론티어 3의 판매량 검수도 잊은 채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달걀의 판매 수치에 넋을 놓고 있었다. “준혁씨. 대체 지금 일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무슨 일이 벌어지긴.. 앞으로 몇 십 년을 울궈 먹을 희대의 컨텐츠가 탄생한 거지. 현재 라이텍스를 비롯해 내 수중에 있던 3개의 공장들은 전부 타마고상의 제조만으로 풀가동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자 정가 1980엔 짜리 미니 게임기는 초반에 품귀현상으로 1만엔에 거래된다는 소식에 초반에 물품을 사재기해서 비싼 가격에 되팔이를 하는 악습까지 생겨나고 있었다. 자판기 앞에 한 사람당 1개씩만 구매해 달라고 안내 문구를 써 붙여 두었지만, 지방에서 온 업자들은 몇 번이나 줄서기를 반복해서 대량으로 구매해 가는 모양이었다. ‘역시 샵 하나 만으론 버티기가 힘들겠어.. 판매 방식을 더 늘려야 해.’ 결국 나는 원활한 제품의 공급을 위해 하청 기업까지 수주를 맡겨 단말기 제조에 더욱 열을 올렸다. 그렇게 약 한 달이 지난 시기부터 일본 열도 전역에 타마고상의 미니 자판기가 배급되기 시작했다. 자판기는 아이들이 자주 드나드는 문방구나 동네 게임 샵들이 자체적으로 관리한다는 조건 하에 무상으로 선착순 배급 되며 그 영역을 조금씩 넓혀 나가기 시작했다. & 삐릭. 삐리릭. 최근에 카페에 앉아 있다 보면 심심치 않게 타마고상의 전자음이 들려오곤 했다. 작고 귀여운 달걀 모양의 미니 게임기는 악세사리처럼 가방에 매달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미래의 스마트 폰 게임처럼 걸어 다니면서 플레이하는 사람도 종종 보였다.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유키 역시 아까부터 타마고상에게 밥을 먹여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무래도 이번 타마고상은 성격이 ‘까칠’ 인가 봐요.” “괜찮아. 그 정도면 양호한 거야. 내가 키우는 녀석은 ‘도도’거든.. 배고프다고 해서 밥을 줘도 자기가 원하는 게 아니면 먹지를 않으니. 굉장한 편식 쟁이야..” 타마고 상의 성격은 여러가지가 있다. 물론 처음에는 성격 자체를 드러내진 않지만, 키우다 보면 알 수 있었다. 온순한 녀석, 까칠한 녀석, 비겁한 녀석부터 겁쟁이나 용감무쌍한 성격도 있었다. 최근에 나 역시 한 마리 키워볼까 해서 파이널 프론티어의 타마고 하나를 까서 키우고 있는데, 이 자식 성격이 더럽게 도도하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재미나게 놀다가도 어느 순간 토라져서 알로 돌아가 잠을 자버릴 때도 있고, 그러다가도 지가 심심하면 놀아달라고 알람을 울린다. 조금은 짜증나는 시스템이지만, 바로 이 성격이라는 것 때문에 타마고상은 단순한 미니 게임 형태의 영역을 훨씬 뛰어 넘을 수 있었다. 만약 모든 몬스터가 똑같이 온순하고, 정해진 시간에 밥을 달라하며, 그것을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면 아마 단숨에 최강의 몬스터를 만드는 공략이 떠돌았을 것이다. 어쩌면 너무나 단순한 게임 방식에 한 순간의 유행으로 사라질 수도 있었다. 거기서 내가 제안한 아이디어가 바로 성격이라는 ‘A.I 시스템’ 이었다. 말은 거창하게 A.I라 설정했지만, 사실은 단순하기 그지없는 명령 불복종 판정 형식을 기기마다 제 멋대로 나열한 것뿐이지만.. “준혁씨 저기 테이블에 앉아 있는 커플도 타마고상을 같이 키우나 봐요.” 유키의 말에 살짝 고개를 돌려보니 유키가 가리킨 테이블 말고도 연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는 타마고상이 한 두 개씩은 놓여 있었다. 무언가를 키워서 서로 데이터를 공유한다는 것에서 ‘타마고상’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연인들에게도 무척이나 인기 있는 아이템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일까? 근처에서 들려오는 대화중에 간혹 ‘타마고상’이라는 단어가 섞여 들려왔다. 아무래도 자기가 키우고 있는 몬스터에 대해 자랑 중인 모양이다. 나는 마시던 음료수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뒤 여전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유키를 향해 입을 떼었다. “아마 다음 주 중으로 타마고상에 대한 판매금액의 일부가 입금될 거야.” “정말요? 이번엔 얼마나 들어오나요?” “전에 내가 없는 거리의 나나세 시나리오 작업 인세로 준 돈이 얼마였지?” “50만엔이요.” 유키는 테이블에 양손을 올린 채로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나와 함께 작업한 모리타와 하야시는 각각 성과급으로 150만엔 씩 넣어주었다. 물론 내가 없는 거리에 대한 흥행도와 판매량을 따진다면 그들에게 건네준 성과급이 적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착각해선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 ‘내가 없는 거리’가 엄청난 판매량으로 인해 수많은 이익을 내었다 해도, 그 돈이 전부 내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펜타곤 소프트라는 회사를 운영하는 금액이었고, 차기작을 마련할 개발금이나, 사원들의 복지에 쓰였다. (사실 내가 사이킥 배틀을 만들고 민텐도에서 받은 성과급에 비하면 다들 어마어마한 금액이지..) 전에도 한 번 느꼈지만, 유키는 돈에 대해 큰 욕심이 없어 보였다. 내가 없는 거리의 성과급도 받은 즉시 통장에 입금했을 정도니까. 그녀는 또래와는 달리 물건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었다. (대신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창가로 들어오는 밝은 햇살에 살짝 눈을 부비던 그녀에게 나는 툭하고 말을 던졌다. “거기서 5배정도라 생각하면 돼.” “네?” “250만엔.” “……. 히끅.” 유키는 250만엔이라는 금액에 깜짝 놀랐는지 나를 보며 딸꾹질을 하였다. “준혁씨. 히끅. 250만엔이면 제 연봉이랑 거의 비슷한데요.. 히끅.” “이번에 타마고상이란 캐릭터는 전적으로 네 아이디어니까.” “전 그냥 제가 그렸던 타마고상이 게임으로 나온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유키는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키려는지 찬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너무 부담 안 가져도 돼. 그동안 벌어들인 수익의 정말 일부일 뿐이니까.” “이렇게 큰 금액을 한 번에 벌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데 공모전에서 수상한 학생들은 어떻게 됐어요?” “아.. 그 학생들?” 지난 5월 나는 공모전에서 입선 한 몬스터 디자이너들을 모두 불러 모아 간담회를 가졌다. 그중에서 펜타곤 소프트에 취직을 원하는 이들은 따로 타마고 몬스터 관련 디자인 팀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받아 들였다. 물론 학교를 졸업하고 입사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인센티브 제도를 이용해 자택에서 그림을 그려 펜타곤 소프트로 송부하는 것으로 다양한 디자인을 얻어낼 수 있었다. “몇몇은 펜타곤 소프트에 입사해서 타마고 몬스터의 디자인을 맡고 있어.” “잘 됐다. 사실 궁금한 게 있는데, 처음 준혁씨가 우리한테 보여줬던 그 귀여운 몬스터를 그린 사람은 누구에요?” “아, 코부기 디자이너? 그림 만큼이나 굉장히 생기가 넘치던데? 덕분에 펜타곤 소프트 분위기가 굉장히 밝아졌어. 하야시한테도 막 엉겨 붙어서 후배니까 밥 사달라고 어찌나 조르던지..” “하야시씨한테도요? 나도 구경하고 싶다.” “언제 시간 되면 놀러와. 아마 타마고상 캐릭터 디자이너라고 하면 다들 반겨줄 거야.” “준혁씨가 회사에 있어야 놀러가죠. 저 혼자 거기 가서 뭐해요.” 하긴 타마고상 기획하고 샵 만드느라고 정신이 없다보니 아직까지 펜타곤에 정식 입사를 미루고 있었다. 그때 옆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커플의 대화중에 재밌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너 혹시 전설의 타마고라고 들어봤냐?” “전설..?” “내 친구가 들은 이야기라는데, 캡슐에 들어 있는 타마고 중에 굉장히 신기한 것이 있다더라?” “정말? 그거 2종류뿐이라고 하지 않았어?” “글쎄.. 혹시 모르지. 밀봉 캡슐 안에 특이한 타마고가 몇 개 섞여 있을지도..” “에이~ 요즘에 이거 없는 사람이 없다던데, 그런게 섞여 있으면 벌써 알려졌겠지. 그냥 도시전설 아냐?”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그 녀석 평소에도 뻥이 심한 편이니까.” 커플은 서로를 향해 킥킥 거리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타마고상을 집어 들었다. “아, 얘 똥쌌다.” “카페에서 그런 소리 하지 마.” “미안..” 유키 역시 커플의 대화를 들었는지 나를 바라보며 중얼 거렸다. “전설의 타마고? 정말로 그런 게 있어요?” “음..? 아,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수상한데? 설마 뭔가 또 숨기고 있는 거 아녜요?” 내가 드래곤 엠블렘을 만든 개발자였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그녀는 내가 만든 게임들에 대해 살짝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유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머그잔을 들어 커피를 삼켰다. 솔직히 나는 ‘이스터 에그’ 라는 깜짝 쇼를 좋아라하는 편이다. 유저의 예상을 깨부수는 것만큼이나 개발자에게 그보다 더 큰 희열은 없을테니까. 물론 나의 장난질은 이번에 타마고상에서도 계속되었다. ──────────────────────────────────── ──────────────────────────────────── EP. 25 : 신의 손 우치무라 (1) &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할까? 유리 장식장 안에서 나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수영복 차림의 미유키쨩을 바라보면 저 것 만큼은 꼭 사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가격이 문제다. 17,800엔.. 유명한 피규어 제작자인 호토부키아에서 여름 한정 특판으로 나온 ‘내가 없는 거리’ 세 히로인의 수영복 버전.. 피규어의 제조와 도색은 모리타씨가 직접 검수했기에 그야말로 극강의 퀄리티를 자랑하고 있었다. 최근에 게임이란 컨텐츠가 점점 더 발전해 나가자, 아키하바라에는 게임뿐만 아니라 피규어와 브로마이드 같은 캐릭터 상품을 함께 판매하는 대형 샵이 들어섰는데,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아도 한곳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어서 우리 같은 게이머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한 여름이지만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 놓아 사람이 많이 몰려도 전혀 덥지가 않다. 현재 내가 있는 코너는 펜타곤 소프트에서 내놓은 희대의 명작 미소녀 게임. ‘내가 없는 거리’ 전용 코너였다. 지난 5월에 출시한 OVA (Original Video Animation) 전편은 이미 소장하고 있고, 최근에 부모님께서 보내주신 생활비와 아르바이트 월급의 절반을 투자해 겨우 손에 넣은 ‘내가 없는 거리’ 한정판은 나의 보물 1호이다. 그것들만 구하면 더 이상 부러울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일 뿐이었다. 이렇게 내 눈 앞에.. 그녀가 있잖아.. 17,800엔짜리.. 초 고 퀄리티 피규어가.. 3개나.. ‘사.. 사고 싶다.’ 하지만 이젠 수중에 돈이 없다. 월세와 기타 관리비를 제하고 남은 돈은 약 2만엔 남짓.. 저걸 사버리면 2,200엔으로 한 달을 버텨내야 할 판이다. 그러면서도 무서운 것은 남은 2,200엔으로 컵라면 몇 개를 살 수 있을까? 계산을 돌리고 있는 내 머릿속이었다. ‘아쉽지만 포기하자..’ 이미 집에 있는 브로마이드로도 충분하잖아.. 쉽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매장을 빠져나가려는 찰나. 등 뒤에서 한 무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와~ 진짜 퀄리티 죽인다..” “커헉.. 17,800엔? 비싸!! ..그런데 사고 싶다.” “여름 한정. 수영복 버전이라니.. 그럼 다 팔리면 이제 안 나오는 거잖아.” 이제.. 안 나온다고? “이것도 분명 시간 지나서 구하면 몇 만 엔은 가격이 뛸 거야. 차라리 지금 정가로 사는 게 싼 편이지.” 그래 저 녀석 말이 맞아.. 분명히 나라면 나중에 반드시 손에 넣고 말겠지. 하지만 그때가 되면 대체 저 피규어 가격이 얼마나 오를지 상상 조차 가지 않았다. “그럼 그냥 살까?” “질러~ 나중에 되팔아도 남는 장사라니깐~ 킥킥~” “그럴까? 그럼 일단 하나만 사보자. 뭘로하지..?” 너희 같은 녀석들 때문에 순수한 우리 콜렉터들이 피해를 보는 거다. 결국 그들의 대화에 분노한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점원을 불렀다. 너희들처럼 불순한 자들에게 미유키 한정 피규어를 넘길 순 없어!! &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사.. 샀다. 사버렸어.’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내 오른손에는 미유키 여름 한정판 피규어가 들려있었다. 오늘이 8일인데!! 수중에 남은 돈이 2,200엔이라니, 큰일 났다!! 하지만 그런 불안한 마음도 오른손에 들려 있는 피규어 박스를 바라보면 눈 녹듯이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아르바이트 장소가 덮밥집이라 하루에 밥은 한 끼 먹을 수 있겠군..’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역으로 향하던 중 최근에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타마고 몬스터 샵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서는 것만으로도 가게안의 열기가 후끈 느껴질 정도로 정신없어 보였다. 특히나 몬스터 배틀 존에서는 게임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코스튬 플레이를 하고 있는 사회자가 배틀 중인 아이들의 사기를 올려주고 있었다. “자!! 이것으로 마지막 배틀. 도전자가 꺼내든 몬스터는 과연 무엇일까요!?” 주말마다 진행 중인 타마고 몬스터 토너먼트. 휴대용 겜보이에는 영상을 출력하는 OUT PUT 단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배틀존의 무대에서는 특수 장비를 이용해 방송용 카메라로 겜보이의 화면을 직접 촬영해 가운데 있는 거대한 프로젝터로 영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 플레이어는 영상 장비가 세팅 되어 있는 단상 위에 게임기를 올려두고 플레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잠시 구경 좀 해볼까?’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순 없기에 나는 슬쩍 타마고 샵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가게 안에 들어서자, 배틀존과 어드벤쳐 존에 우글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여전히 가챠 기계 앞에는 줄을 서서 타마고를 뽑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달걀 모양의 자동판매기의 지폐 투입구에 1,000엔짜리를 두 장을 넣고 가운데 레버를 돌리면 새하얀 프라스틱 캡슐이 굴러 떨어졌다. 밀봉 비닐을 벗긴 뒤에 캡슐을 돌리면 안에는 간단한 설명서와 함께 다양한 색상의 타마고상이 들어 있었다. 그중에 눈처럼 새하얀 타마고는 ‘파이널 프론티어의 타마고’라 하여 펜타곤 소프트에서 제작한 파이널 프론티어의 환수종 몬스터 데이터가 들어있었다. 방금 가챠를 돌린 사람들에게서도 5명 중에 2명은 새하얀 타마고를 뽑은 걸 보니 한정 수량이라기 보단 파이널 프론티어 홍보를 위한 특별판이라고 보는 게 좋을 듯하다. 그때 내 눈에 행사장 전면에 붙어 있는 전단 문구가 보였다. -제 3회 타마고 몬스터 최강의 몬스터를 찾아라!! 도전자들의 몬스터 배틀을 10회 방어 시 상금 2만엔.- 어? 상금?? 그것도 2만엔이나!? 방금 전 미유키의 한정 피규어를 구입하느라 써버린 생활비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 다행히 아키하바라에 오는 동안 심심할 것 같아 휴대용 겜보이를 들고 온 나는 재빨리 게임기를 꺼내어 데이터를 살펴보았다. 그 순간.. 삐빅 소리와 함께 어제부터 진화 상태에 들어간 타마고상이 알람을 울려대었다. 삐빅 삐비빅~!!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한 후에 발매 당시부터 플레이 해 온 타마고상을 움켜쥐었다. 내가 가진 타마고상은 ‘파이널 프론티어의 타마고’ 잘하면 이번엔 환수종이 등장할 수도 있었기에 마치 포커에서 카드를 쪼듯이 천천히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내려 보았다. 화면 상단에 보이는 것은 뾰족한 무언가.. 조금 더 손가락을 내려 보자 그것이 날개에 돋아난 용의 발톱이라는 걸 느낀 순간 등줄기가 시원할 정도로 소름이 몰려 왔다. ‘설마.. 설마..’ 마른침을 삼키며 손가락을 끝까지 내리자, 타마고상의 화면 안에는 거대한 날개를 회치고 있는 검은 드래곤의 모습이 보였다. ‘바..하.. 무트다.’ ──────────────────────────────────── ──────────────────────────────────── EP. 25 : 신의 손 우치무라 (2) ‘바..하.. 무트다.’ 할 수 있다. 이거라면 가능해!! 세상에 이런 타이밍에 바하무트가 나올 줄이야. 이것은 분명 미유키가 무리해서 피규어를 구입한 나에게 행운을 내려준 거야!! 나는 혹시라도 타마고상을 떨어뜨려 데이터가 삭제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근처에 직원에게 다가갔다. “저기.. 혹시 데이터 케이블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손님. 이쪽으로 오세요.” 친절하게 웃으며 카운터 쪽으로 나를 인도하는 여직원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잠시 후 여직원이 가져온 데이터 케이블을 이용해 안전하게 ‘바하무트’를 카트리지 안으로 옮긴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케이블을 돌려주었다. 현재 내가 가진 병력은 총 5마리.. 몬스터 종류에선 물속성의 코부기와 불속성의 퐈이야. 인간에선 방패 보병과 이도류를 사용하는 여검사. 그리고 마지막 최강의 환수종 바하무트. 나쁘지 않은 조합이다. 나는 타마고샵의 한쪽 구석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새로 등장한 바하무트를 키우기 시작했다. 지금 막 태어난 바하무트는 아무런 스킬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 레벨 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최강의 스킬 ‘메가 플레어’까진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쓸만한 스킬을 손에 넣어야한다. 그 순간에도 배틀 존에서는 참가 희망자가 줄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기에 조금은 초조한 마음이 일었다. “주말 이벤트 참가 종료 10분 전입니다~” 뭐라고!? 참가 시간이 정해져 있었단 말인가? 하긴 무작정 사람을 받아 하루 종일 이벤트를 할 수도 없었기에 어쩌면 당연한 조치일 수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바하무트의 레벨을 8정도까지 올린 후 대회 참가 신청표를 작성했다. 타마고 몬스터의 배틀은 총 5:5 배틀로 3번을 먼저 이긴 사람이 승자가 된다. 배틀 시작 전에 상대방의 타마고 몬스터를 잠시 볼수 있었고, 이윽고 배틀이 시작되면 상대방의 몬스터 정보를 참고해 몬스터를 배치시킨다. 그리고 차례대로 등장한 몬스터끼리 1:1로 겨뤄 승부해 나가는 방식이었다. 도전자로서 승자와 겨룬 후 10연승을 해야 했기에 총 11번의 승리를 거두면 누구에게나 상금 2만엔을 지급해주었고, 방어에 성공한 우승자는 그 달의 챔피온 쉽에 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할 수 있다. 고작 레벨 8이지만, 내가 가진 몬스터는 최강의 환수종 바하무트. 11연승이야 문제없다.’ 바하무트가 아니더라도 물속성의 코부기나 이도류 여검사 역시 꽤나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데미지 딜러였기에 가능성은 충분했다. “자~ 여러분 함께 외쳐요. 몬스터 배틀~ 파이트!!” “파이트!!” 어느새 대기 줄에 서있는 아이들과 하나가 되어 감을 느낀 나는 주먹을 불끈 쥔 채 ‘파이트’를 외쳤다. 5:5의 배틀이더라도 경기 진행은 굉장히 빠르게 진행 되었다. 역시나 아직 몬스터 배틀의 깊이를 모르는 꼬맹이들의 놀이라는 것이지.. 크큭 상대방의 몬스터 배열을 미리 보여준다는 것은 서로의 몬스터를 보여줌으로서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라는 뜻이다. 어떠한 속성의 몬스터를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상대방이 몬스터를 꺼내는 등장 타이밍에 카운터를 칠 수 있는 몬스터를 등장 시키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 하지만 아이들은 그저 자기가 키워낸 몬스터를 자랑삼아 내세울 뿐 그 속에 숨어있어야 할 전략이란 눈꼽 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건 정말 식은 죽 먹기야. 2만엔은 무조건 내꺼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초반에는 흥미롭게 바라보던 배틀 장면도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할 때쯤 사회자가 내 이름을 불렀다. “다음 도전자는 우치무라 히로키씨!! 배틀존 위로 올라와주세요~” 현재 올라와 있는 승자는 방금 전에 도전해서 겨우겨우 1승을 챙기고 첫 방어전을 치루는 애송이였다. 일단 사뿐히 즈려 밟고 시작해 볼까? “자~ 그럼 양쪽 모두 몬스터를 배치해주세요~!!” 훗 그 누구와도 데이터 교류를 하지 않은 나는 어차피 5마리의 몬스터 밖에 없다. 꼬맹이들이야 친구들끼리 데이터 교류를 통해 수십마리를 모았겠지만.. 나는 이를테면 소수 정예라고 할까? 어디 나의 최강의 5마리를 버텨 보거라. 어차피 내가 고를 수 있는 몬스터는 5마리뿐이었기에 순식간에 등록을 마치자, 회장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 사람 몬스터가 다섯 마리밖에 없어.” “그런데 방금 마지막으로 선택한 몬스터 환수종 바하무트 아냐?” “뭐? 정말?” “검은 드래곤 모습이었는데..” 나는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상대편 꼬맹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회장에서 술렁거리는 ‘바하무트’라는 단어에 바짝 긴장한 모양이었다. 걱정마라 초반부터 바하무트를 내세우진 않을테니까. ‘왜냐하면 레벨 8짜리 바하무트라는 걸 들키면 후반에 갈수록 그에 대한 대응 법이 나올 수 있으니까. 무조건 바하무트는 마지막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도류 검사를 가장 최전방에 내세웠다. 이도류의 여검사는 두 자루의 검을 들고 있는 만큼 한번에 2회 공격이 가능했고 내가 가장 애정을 가지고 키운 녀석이기에 발군의 성능을 자랑했다. “자~ 그럼 모두 함께 외쳐요. 몬스터 배틀~ 파이트!!” “파이트!!” 사람들의 외침과 동시에 화면 안에는 이도류 검사와 동물계 몬스터 샤갈 타이거가 등장했다. 긴 갈기를 휘날리는 제법 위력적인 몬스터 중에 하나였다. ‘제법인데? 하지만..’ 나는 히죽 웃음을 흘리며 도전자로서 선제공격을 날렸다. ‘동물계 몬스터는 인간형에게 약하지!!’ 파팟!! 시작부터 최강의 스킬을 사용한 이도류 검사의 화려한 검격에 샤갈타이거의 체력 게이지의 절반이 통째로 날아가며 스턴을 일으켰다. 스턴은 기절 공격으로 적에게서 한 번의 공격 턴을 빼앗아 올수 있었다. 5%확률로 터지는 기절이 여기서 걸리다니 출발이 좋군. “우와!! 이도류 검사가 강하다고는 들었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샤갈 타이거는 단한번의 공격도 해보지 못한 채 이도류 검사의 칼에 무릎을 꿇었다. 허무하게 첫 번째 몬스터를 잃은 꼬맹이는 재빨리 다음 몬스터를 등장시켰다. “번개속성의 동물계 몬스터 비카츄가 두 번째 몬스터로 등장했습니다! 여기서 도전자 우치무라씨는 두 번째 몬스터는!? 아!! 불속성 몬스터 퐈이야가 등장하는군요!! 우치무라씨 상대방의 몬스터 배열을 꿰뚫고 있습니다!” 당연하지, 비카츄는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몬스터. 분명 애정을 갖고 키웠으니 앞쪽에 두었을 거라 예상했기에 최악의 상성인 물속성의 코부기는 4번째로 미뤄두었지. 크큭.. 역시 난 대단해. “두 번째 몬스터 배틀~ 파이트!!” 불속성의 퐈이야와 번개속성의 비카츄. 이번에는 꼬맹이의 비카츄가 선제공격을 할 차례였다. 하지만 불속성의 퐈이야에게 치명타를 입히긴 어려웠고, 서로 스킬을 주고받는 난전 끝에 퐈이야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손쉽게 두 번의 승리를 거둔 나는 여유 있게 다음 배틀에 임했고 3차전에서 뛰어난 방어력으로 적의 공세를 막아낸 방패 기사의 활력으로 여유 있게 승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뒤이어 나에게 도전한 꼬맹이들에게도 마찬가지 승리 공식이 도입되었다. ‘크큭.. 너무 쉽군. 이건 거의 학살 수준이잖아. 굳이 바하무트를 꺼내지 않아도, 3~4차전에서 다 무릎을 꿇으니 하품이 나올 지경이군.’ 이대로라면 챔피온 쉽에 도전해서도 가뿐히 이길 수 있겠어. 그때가 되면 나의 바하무트도 최종 진화로 궁극의 바하무트가 되어 메가 플레어를 뛰어 넘는 기가플레어를 사용할 수 있겠지?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쿡쿡 거리며 배틀에 임했다. “아아~!! 우치무라씨 강합니다. 적절한 몬스터의 배합으로 다섯 마리의 몬스터를 가지고 모든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습니다~!! 자~ 이제 마지막 한 번의 방어만 성공하면 챔피온쉽 도전 자격과 함께 상금 2만엔을 거머쥐게 될 텐데요. 과연 마지막 도전자가 그의 연승 행진을 멈출 수 있을까요?” 이 짓도 피곤하군. 빨리 아무나 올라와라. 2만엔 타고 집에 돌아가 조금 쉬어야겠어. 저녁엔 아르바이트도 나가야하니까.. “도전자 토시유키 타카시군~ 배틀존으로 올라오세요.” 마지막으로 올라온 상대는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이었다. 꼬맹이들만 상대하다가 마지막은 고등학생이라~ 조금은 날 즐겁게 해줄 수 있을까? 왕좌의 기분에 취한 나는 가볍게 버튼을 눌러 다섯 마리의 몬스터를 출격시켰다. “아~ 토시유키군. 몬스터 배합에 굉장히 신중한 모습인데요.” ‘어차피 너에게는 죽음뿐이니 순순히 받아들이거라~’ 하지만 고등학생은 몬스터의 선택만으로 거의 5분 가까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자식.. 무의미한 짓을 하고 있군. 이 몸은 어서 집에 돌아가고 싶단 말이다. 빨리 집에 돌아가서 나의 미유키쨩을 쓰담쓰담.. 응..? ..... ... 없다..? 분명 아까까지 내 발 밑에 있었는데? 미유키쨩? ──────────────────────────────────── ──────────────────────────────────── EP. 25 : 신의 손 우치무라 (3) 미유키쨩? 머릿속이 새하애지고,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뭐지? 잠깐만, 설마 아까 바하무트를 키우던 곳에 놓고 온 건가? 아니야 분명 대기 줄에 섰을 때까진 내가 들고 있었어. 그리고 난 배틀 존에 올라왔고, 그 다음은.. 그 다음!? 갑자기 손끝이 차가워지며 피가 통하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없다. 미유키쨩이 없어..” 정신없이 대기 줄 쪽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봤지만, 쇼핑백은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분한 마음에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조금이라도 눈을 깜박거리면 폭포수처럼 눈물이 쏟아져 흐를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샵 내부를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에 사회자에게 말을 걸려는 찰나. “방금 도전자 토시유키군이 몬스터 출전을 마쳤습니다~!!” 빌어먹을.. 마지막 경기가 곧 시작하려는데 여기서 그만 둘 수도 없고, 미치겠네.. 피규어가 사라졌다는 걸 인식하고부터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경기에 집중해야하지만 자꾸만 나의 눈은 대기줄 쪽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이번엔 우치무라씨가 몬스터 배치에 시간이 걸리는 군요. 역시 마지막 방어전이라 긴장하고 있는 걸까요?” “네?” 사회자의 말에 겜보이 화면으로 고개를 돌리니 이미 서로간의 몬스터를 파악하고 출전 순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젠장. 정신이 없다보니 녀석이 어떤 몬스터를 내보냈는지 파악 하지 못했어!! 진정해라. 우치무라. 우선은 대회에 집중하자. 마지막 한번만 이기면 2만엔의 상금을 얻을 수 있어. 그러면 다시 피규어를 사면 돼. 수중에 2,200엔이 남아 있고, 상금으로 받은 2만엔으로 다시 구입하면 내 수중에는 도합 4,800엔이 남게 된다. ...뭔가 계산이 이상하지만, 어쨌든 처음보다 2,200엔 이득이지 않은가!? 문제는 저 녀석이 어떤 몬스터를 꺼낼지 보지 못했다는 것인데, 이럴 때는 역시 정공법으로 상대하는 게 좋겠지? 데미지가 높은 녀석들을 앞에 두고 순식간에 배틀을 종료시킨 후에 가게안을 둘러봐야겠어. 어쩌면 내가 바하무트를 키우던 벤치에 두고 온 것일 수도 있으니까. 파앗!! 이윽고 나의 이도류 여검사가 화면에 모습을 드러내자, 상대방의 몬스터가 화면에 등장했다. ‘로열 가드!?’ 젠장. 상성이 좋지 않다. 로열 가드는 방패 보병의 최종 진화 단계로 온몸에 철갑을 둘러 무시무시한 방어력을 가진 녀석이었다. 카앙~!! 역시나 이도류 여검사의 칼이 통하질 않는다. 녀석은 거대한 방패로 여검사의 이도류를 막아내며 방어와 동시에 상대방에게 데미지를 입히는 방패치기 스킬을 구사하고 있었다. 이런 녀석한테는 퐈이야의 불꽃이나 비카츄의 전격 공격과 같은 원거리 마법 공격이 약점인데, 내가 출전시킨 여검사에게는 그러한 특수 기술이 없었다. 이를 악 문 채 최후의 수단으로 최강의 스킬인 열십자 베기를 시전 했지만, 로열가드는 절대 방어 스킬로 데미지를 상쇄시키며 여검사를 더욱 코너에 몰아넣었다. 결과적으로 녀석과의 1차전은 나의 완벽한 패배였다. ‘강하다. 이 녀석.. 지금까지 싸워온 꼬맹이들이랑은 격이 달라. 전술을 아는 녀석이야.’ 한 순간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직 이 몸에겐 4마리의 몬스터가 남아있다. 팟!! 곧이어 2차전으로 돌입하며 내가 꺼낸 몬스터는 물속성의 몬스터 코부기였다. 거북이 모양의 귀여운 이미지와는 달리 등딱지에서 장착한 물대포로 강력한 일격을 먹일 수 있었는데, 심각한 문제가 터졌다. 그것은 바로 저쪽에서 꺼낸 몬스터가 천둥의 신 ‘오딘’이라는 것.. 환수종 중에서도 바하무트 다음으로 탑 클래스를 자랑하는 천둥의 신이라니.. 나의 코부기가 쏘아댄 물대포는 천둥의 신에게 아무던 데미지도 입힐 수 없었다. 그리고 완벽하게 수를 읽힌 나는 두 번째 전투 역시 그의 뿜어낸 번개 한방에 무릎을 꿇어야했다. 순식간에 2연패라니 뼈아픈 타격이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한번이라도 지면 나의 패배다.’ “아~!! 토시유키군. 독심술이라도 사용한 걸까요? 어쩌면 저렇게 잔인하게 상대방의 약점을 파고드는 몬스터를 연이어 내놓을 수 있을까요!!” 사회자는 흥분했는지 점점 목소리를 높이며 회장 분위기를 끌어 올렸다. 배틀존을 구경하던 아이들은 토시유키의 이름을 외치며 응원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꼬맹이들을 상대로 너무 손쉽게 연승해 나갔던 내가 희대의 악당으로 비춰졌겠지.. 하지만, 지금 나에게 있어 토시유키는 마왕 그 이상으로 악랄한 존재였다. ‘한번만 더.. 딱 한번만 더 이기면 상금을 받을 수 있다 말이다!!’ 속으로 내지른 간절한 외침과 함께 화면 안에는 세 번째 몬스터가 등장했다. 내가 꺼낸 몬스터는 방패 보병. 원거리 마법 속성의 몬스터만 아니라면 방어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팟!! 다행히 녀석이 꺼낸 몬스터는 사무라이였다. 토시유키의 표정을 바라보니 퐈이야가 등장할 줄 알았는데,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사무라이’는 일본도 한 자루만 들고 다니는 ‘낭인’이다. 공격력은 이도류의 여검사와 비견하지만, 방패 보병이라면 해볼 만한 상대였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주의 할 점이 있다면 녀석의 스킬. ‘일섬(一閃)’ 단 한 순간. 30% 확률로 적을 즉사 시킬 수 있는 사무라이의 스킬이다. 3번째 배틀은 나의 선제공격이지만, 나는 혹시 모를 스킬에 대비해 방패 보병에게 방어를 명령했다. 카앙~!! 방패 보병의 체력은 73. 방금 공격을 방어한 덕에 6의 데미지를 입었지만, ‘방패치기’의 스킬이 발동하며 사무라이 역시 5의 데미지를 입었다. 비슷한 데미지를 주고받은 것 같지만, 방패 보병의 체력이 훨씬 높았기에 결과적으론 나에게 유리한 전술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녀석이 노리는 건 한방에 결과를 뒤집을 수 있는 ‘일섬’ 나는 거북이가 등딱지에 몸을 숨기듯이 방어 일변도로 녀석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결코 가드를 열어주지 않겠다. 이대로 라면 넌 결국 지게 되어 있어!!’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사무라이의 ‘일섬’은 아무리 기다려도 발동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이번에도 방패치기 버튼을 누르려던 내 손끝이 멈추었다. ‘이 자식 설마!! 가드 데미지를 노리고 있는 건가!?’ ‘일섬’은 30확률로 적을 즉사를 시킬 수 있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적에게 굉장히 큰 데미지를 입힐 수 있었다. 지금까지 방패치기로 입힌 타격만으로도 사무라이의 체력이 간당간당 할 텐데, 이렇게까지 일반 공격에 고집하는 이유. 그것은 내 남은 체력을 뛰어 넘는 스킬을 구사하려는 것이다. 나는 재빨리 방패치기 스킬을 누르려던 손가락을 멈추고, 방향키로 스킬을 ‘절대 방어’로 바꾸어 시전했다. 그리고 나의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일섬(一閃)- 화면을 가득 一閃이라는 글자와 함께 사무라이의 비장의 스킬이 발동된 것이다. 카아아앙!!!! “우와아아아!!” 호캐한 연출에 화면을 지켜보던 아이들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사무라이의 비장의 스킬!! 일섬이 터져 나왔습니다! 우치무라씨의 방패 보병의 스킬은 과연!? 아아앗!!! 절~대 방어!!!!” “우와아아아아!!!!” 콰아아앙!! 잠시 두 가지 스킬이 번뜩인 순간 화면 안에는 우직하게 방패를 들고 서있는 나의 방패 보병이 보였다. 절대방어의 효과로 데미지는 0. 토시유키의 얼굴에 패색이 짙어졌다. 사무라이의 체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나는 가드를 풀고 공격에 집중했다. 그 결과 어렵게 3차전을 승리로 마칠 수 있었다. ‘아직이다. 아직 안 끝났어..’ “그야말로 명 배틀입니다.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는군요. 그럼 4차전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사회자의 멘트가 끝남과 동시에 화면 안에 불속성의 몬스터 퐈이야가 나타났다. 그리고 상대방이 꺼내든 몬스터는 전격계 몬스터인 비카츄였다. ‘이 녀석 4번째로 방패 보병이 나올 줄 알았나보군.’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4번째 배틀이 임했다. 신중하게 공격과 방어 스킬을 섞으며 비카츄의 데미지를 깎아 내리자, 토시유키 역시 미간을 좁히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번 턴을 넘기면 어떻게든 바하무트를 꺼낼 수 있다.’ 그 순간. 약간의 운이 나에게 작용하며 퐈이야의 불꽃이 크리티컬 표시와 함께 적에게 큰 데미지를 입히는데 성공했다. ‘좋았어!!’ 한 번 수세에 몰리자 토시유키는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비슷한 성능을 가진 몬스터였기에 4차전 역시 나의 승리로 끝이 났다. “결국 숨 막히는 공방이 5차전에 돌입하는 순간입니다. 자~!! 여기서 우치무라씨의 비장의 몬스터. 바하무트가 등장합니다!!” “우와아아!! 나 바하무트 실제로 처음 봐!!” “블랙 드래곤 바하무트. 대박 멋지다. 저기 우치무라란 사람이 이기겠는데?” 바하무트의 등장에 관중들에게서 나의 승리를 예감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해냈다. 해냈어.. 환수종인 바하무트에게는 약점이 없는 완전체 몬스터에 가까웠기에 내 승리를 예견하는 관중들의 반응도 무리는 아니었다. “최강의 환수종에 대적하는 토시유키의 몬스터는!! 아? 포로리스..?” “에에엑!? 포로리스라니. 잘나가다가 막판에 왜 저런 허약한 몬스터를 배치시켰지? 4차전까지 승부를 보려고 했던 걸까?” 바하무트의 상대로 도토리를 들고 있는 다람쥐 캐릭터가 튀어 나오자, 관중들은 상대적으로 허약한 몬스터의 등장에 경악했다. 물론 서로 몬스터 배치를 확인할 때 포로리스가 있는 걸 본 사람도 있었겠지만, 지금가지의 배틀로 포로리스의 존재를 완전히 잊었던 모양이었다. ‘다행히 마지막엔 일이 쉽게 풀리는군..’ 나는 얼빵한 표정으로 도토리를 만지작거리는 포로리스를 바라보며 히죽 웃음을 지었다. ──────────────────────────────────── ──────────────────────────────────── EP. 25 : 신의 손 우치무라 (4) 그오오오.. 화면의 절반가량을 메우고 있는 바하무트의 위용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기분 좋은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두 번의 패배를 딛고 일어나 연승으로 5차전까지 버텨온 나의 근성에 스스로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자~ 덤벼라. 어떤 공격이든 받아주마.’ 5번째 전투는 도전자인 토시유키의 선공이었다. 그런데 포로리스의 스킬이 뭐가 있더라? 타마고 몬스터의 공략집은 봐두었지만, 포로리스는 게이머들 사이에서 거의 애완동물 취급 받는 녀석이었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긴 어떤 공격이 튀어 나온들 어떠리. 환수종 바하무트 앞에서 하급 몬스터의 모든 공격은 거의 무의미하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마지막 배틀!! 다소 맥이 빠지는 전개이긴 합니다만, 과연 저 작고 귀여운 포로리스의 공격이 최강의 몬스터 바하무트에게 통할까요?” 사회자의 멘트와 함께 토시유키의 포로리스가 움직였다. -나 때릴 거야?- 음..? 아무런 공격이 없다. 뭐지.. 공격 스킬이 아닌가? 다람쥐 모습의 동물계 몬스터 포로리스는 요상한 스킬만 사용한 채 아무런 효과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온 턴에 공격을 시도했다. 우선은 기본 공격인 용의 발톱이다!! 그때였다. -포로리스가 너무나 귀여워 바하무트는 공격을 할 수 없었다.- 뭐라고!? 이런 미친.. “여기서 포로리스의 스킬이 발동 됩니다!! 바하무트 포로리스를 공격하지 못 하는군요~!!” “왜지? 다른 몬스터는 공격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등장한 메시지에 배틀존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진행자 역시 어째서 바하무트가 공격을 할 수 없는지 궁금해졌기에 직접 토시유키에게 스킬의 효과를 물어 보았다. “토시유키군.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설명을 좀 부탁 드려도 될까요?” “아, 그게 포로리스의 ‘나 때릴 거야?’ 스킬은 자신보다 레어도 랭크가 3이상 차이가 나는 몬스터의 공격을 2턴 간 무효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자 회장 안에 보여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뭐라고!? 대박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포로리스를 꺼낸 거구나..” 희귀도 랭크가 1인 포로리스와 5인 바하무트는 확실히 3이상의 차이가 벌어져 있었다. 당했다.. 설마 이런 패를 준비해 두었을 줄이야.. 다음 턴에 포로리스는 깡총 거리며 뛰어와 일반 공격을 날렸다. 3의 데미지. 간지러운 공격이었지만, 고작 레벨 8인 바하무트의 최대 체력은 42에 불과했다. 그리고 다음 턴. 토시유키는 다시 한번 포로리스의 ‘나 때릴 거야?’ 스킬을 시전 했고, 바하무트는 꼼짝도 하지 못한 채 포로리스의 일반 공격을 계속해서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굉장합니다. 포로리스. 그 누가 이 상황을 예견이나 했을까요? 포로리스 배틀의 주도권을 완전히 잡아가고 있습니다!!” “우와아아아!!!!” 누구도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던 포로리스가 일순간 사람들에게 영웅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일단은 버텨야 한다!! 작은 공격이라도 계속해서 받다보면 쓰러질 수도 있으니까. 결국 나는 공격을 포기하고 방어를 선택했다. 어차피 저 스킬을 영원히 쓸 수는 없을 테니까. 저 포로리의 레벨이 몇인지 모르겠지만, 끝까지 성장 시켰어도 하나의 스킬은 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6번이 한계였다. 그때부터 토시유키와 나의 묘한 심리전이 펼쳐졌다. 공격을 멈추고 방어로 전략을 바꾸자 토시유키는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계속해서 일반 공격으로 도발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아주 나를 가지고 노는 구나!!’ 화가 난 나는 다음 턴에서 라이트닝 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나 때릴 거야?’ 스킬이 발동되며 그것을 무효화 시켰고, 토시유키는 손쉽게 두 번의 공격을 더 성공시켰다. 스킬의 남은 횟수는 앞으로 세 번. 바하무트의 체력은 28로 줄어들어 있었다. “와~ 저러다가 진짜로 포로리스가 이기는 거 아냐?” 사람들은 점점 깎여나가는 바하무트의 체력을 바라보며 압도적으로 끝날 줄 알았던 5차전을 숨죽여 감상하고 있었다. 만약에 나 역시 밖에서 이 경기를 지켜보는 입장이었다면, 감탄사를 내보낼 정도로 짜릿한 전율을 느꼈겠지만, 지금 나에겐 이 모든 상황이 절망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큰 맘 먹고 구입한 미유키의 피규어도 잃어버리고, 마지막엔 이런 거지같은 몬스터에게 발목이 잡히다니..’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머릿속이 온통 저 다람쥐 새끼 때문에 뒤죽박죽이 되어가는 기분이다. 그리고 그걸 조종하는 토시유키라는 고등학생은 심리전의 달인이랄까? 그는 아직까지 단 한번도 바하무트에게 공격을 허용시키지 않고 있었다. 방어만 계속하면 언젠가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공격으로 패턴을 바꾸면 스킬이 바하무트의 공격을 상쇄 시킨다. 그 순간 타마고 몬스터의 스토리에서 한 NPC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약한 몬스터 강한 몬스터 따위는 사람들이 정하는 것이다. 타마고 몬스터의 세계에 약한 몬스터는 없다!!- 그 말대로다. 완벽한 벨런스로 짜여진 몬스터 배틀 시스템.. 최강의 환수종 조차 꼼짝도 할 수 없도록 묶어 버리는 ‘천적’이 존재하다니.. 그리고 그 모든 정보를 꿰뚫고 몬스터를 부리는 괴물 같은 플레이어 토시유키.. 실소가 터져 나왔다. 적어도 바하무트의 레벨이 10을 넘겼다면 이렇게 허무하게 지진 않았을 텐데.. -우오오오......- 검은 드래곤은 포로리스의 마지막 공격에 절규하며 산산히 흩어져 버리고.. 배틀존은 토시유키의 플레이게 감탄한 유저들의 함성이 쏟아져 내렸다. “우와아아아~!!!” “나 소름 돋았어..” “미친.. 진짜로 이겨버렸네..” “우치무라씨 안타깝게 마지막 방어전에서 패배하고 맙니다. 하지만, 5마리의 타마고 몬스터만으로 훌륭한 배틀을 펼쳐 보인 우치무라씨에게도 박수를 부탁 드립니다~!!” 짝짝짝~ “아까웠어요~” “바하무트 진짜 멋지다..” 쓸쓸한 발걸음으로 배틀존을 내려온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하무트를 키웠던 테이블에 가보았지만, 역시나 그곳에도 미유키쨩의 피규어는 찾을 수가 없었다. ‘크흑. 망했다...’ 배틀존에서는 새로운 승자 토시유키에게 도전하는 참가자들의 배틀이 진행 되었고, 나는 사라진 피규어를 찾기 위해 계속해서 가게 안을 살피고 다녔다. 그때마다 배틀존에 있던 꼬맹이들이 달려와 나에게 말을 걸었는데.. “형. 혹시 바하무트 데이터 좀 교환해 주시면 안돼요?” “형. 저도요~ 저도 바하무트 갖고 싶어요~ 네?” “아니.. 내가 지금은 좀 바빠서 다음에 해줄게..” “다음 언제요? 형 여기 언제 또 오세요?” 안 그래도 미유키쨩 때문에 정신이 없는데 꼬맹이들까지 들러붙어서 데이터 교환을 해달라고 졸라대니 슬슬 짜증이 몰려왔다. 그때 등 뒤에서 또 다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그러니까 지금은 내가 바쁘다고!!” 한껏 신경질을 부리며 고개를 돌리니 아까 나에게 데이터 케이블을 빌려주었던 여직원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손에 낯익은 쇼핑백 하나가 들려 있었다. “저기, 아까 배틀존 신청자 테이블에 이걸 두고 가셔서 카운터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렇구나. 신청 서류를 빨리 제출하려다가 깜빡 잊었던 거구나.. “흑.. 으윽.. 감사합니다.” “죄송해요. 바로 돌려드리려고 했는데, 카운터에 손님들 챙기다가 정신이 없어서..” “아니에요. 전 누가 훔쳐간 줄 알고, 크윽.” “내가 없는 거리 저도 굉장히 좋아하는 게임이에요.” 나에게 쇼핑백을 건네며 살포시 웃어 보이는 직원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멍하니 쇼핑백을 받아든 채 그녀의 명찰을 바라보니 ‘미야자키’ 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미야자키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진짜 고마워요.” “다음부턴 조심해주세요. 도난 사고가 일어 날 수도 있거든요.” “네. 조심. 또 조심하겠습니다.” 그때 미야자키씨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저기, 답례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부탁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네? 아, 그럼요. 뭐든지 말씀만 하세요.” “괜찮으시면, 저랑 타마고 몬스터 데이터 교환 안하실래요?” “네..?” “사실 아까 데이터 케이블 빌려드리면서 가지고 계신 몬스터를 봤거든요. 저도 타마고 몬스터를 하고 있는데, 바하무트가 너무 멋져서..” “네! 지금 당장 해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근처에 배회 하고 있던 꼬맹이들이 득달같이 나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뭐예요. 형!! 아까 내가 부탁할 때는 바쁘다고 다음에 해준다더니~!!” “어머, 바쁘세요..?” “아닙니다!! 너희도 지금 다 데이터 교환 해줄게.” “정말요? 우와!! 친구한테 자랑해야지~” 미야자키씨는 웃으며 친구들한테 달려가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쿡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우치무라씨는 친절하시네요~” ──────────────────────────────────── ──────────────────────────────────── EP. 25 : 신의 손 우치무라 (5) 미야자키씨의 칭찬에 기분이 들뜬 나는 근처에 있던 서른 명 가량의 아이들에게 데이터를 옮겨준 후에야 집으로 향하는 전철에 오를 수 있었다. 피곤하다. 집에 가서 짐만 내려놓고 바로 아르바이트 장소로 향해야겠군. 그래도 미유키쨩도 무사히 돌아왔고.. 미야자키라는 분도 알게 되었으니. 오늘은 복이 넘치는 날이다. 17,800엔이라는 거금을 들였지만, 몬스터 배틀에서 패배하였지만, 오늘은 기쁜 날이다. 무조건 기쁜 날이다~ 잠시 후. 전철에서 내린 나는 촉박한 시간 쫓겨 서둘러 달리기 시작했다. 직장인들의 퇴근시간이었기에 역 안은 굉장히 붐비고 있었다. 바쁘다 바뻐~ 그렇게 역 안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스치며 계단을 내려오던 도중. 중년의 아저씨와 정면으로 맞닥 들였다. 사람과 마주치면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오른쪽으로 빠져 나가려고 하면 나와 똑같이 움직이고, 다시 왼쪽으로 빠져 나가려고 하면 또 다시 내 앞을 가로 막는.. 그 순간 전철이 들어온다는 신호음이 울리자, 아저씨는 거칠게 나를 밀치며 계단을 뛰어 올랐다. 하지만 그 바람에 피규어가 담긴 쇼핑백이 내 손을 빠져나가며 계단을 굴렀고, 때마침 계단을 내려가던 아가씨가 그대로 쇼핑백을 밟아 버렸다. 파악~!! 와그작.. 듣기만 해도 굉장히 불길한 소음에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아아아악!!!” “죄.. 죄송합니다. 갑자기 발밑에 떨어져서..” “아.. 아닙니다.” 바로 박스를 열어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나 역시 시간이 촉박하다. 부디 미유키쨩에게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며 쇼핑백을 챙겨들고 무작정 역을 빠져 나온 나는 헉헉 거리며 집으로 달렸다. 그렇게 거의 집에 도착했을 때쯤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치무라형!!” “어? 요다 무슨 일이냐? 나 지금 좀 바쁜데..” 나를 부른 녀석의 이름은 요다 준이치.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포스 마스터 ‘요다’를 떠올리게 만들지만, 일본에서는 반에 한 두명 정도 있는 조금 특이한 ‘성’씨 중에 하나이다. 그런 요다 녀석은 내가 사는 3층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웃집 꼬맹이였다. “대체 어딜 갔다 이제 오는 거야. 내가 오늘 하루 종일 형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날? 왜??” “엄마가 타마고 몬스터 뽑아도 된다고 허락해주셨어~!! 드디어 5연속으로 파이널 프론티어 타마고를 뽑아낸 형의 실력을 보여줄 차례야~” “지금 뽑아 달라고?” “응!! 그것 때문에 학교 끝나고 여기서 형만 기다렸단 말야.” “그런데 형이 아르바이트 때문에 좀 바빠서..” “뭐야~ 지금 가버리면 언제 뽑아주려고?” “그게.. 내일은 안 될까?” “내일? 나보고 내일까지 참으라고?” 요다는 내 말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만 같은 얼굴로 울먹거렸다. 그냥 돈 넣고 뽑으면 되는 걸, 왜 굳이 내가 뽑아주길 바라는 건지.. 우연히 동네 아이들 대신 레버를 돌려주다보니 파이널 프론티어의 타마고가 연속으로 나온 것뿐인데,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나에게 ‘신의 손’이라고 경탄하고 있었다. 기가 막힌 건 내 도움을 받지 않고 타마고를 뽑은 녀석들은 전부 일반 타마고가 나와서 이 동네에는 미신처럼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도는 모양이었다. “그깟 레버 하나 돌리는데, 얼마나 시간 걸린다고~” 그 순간 왠지 모르게 내 머릿속에 미야자키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치무라씨는 참 친절하시네요.-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 나는 요다의 고집스러운 표정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다. 알았어. 대신 일반 타마고가 나와도 날 원망하기 없기다.” “아싸~ 신난다~” 내 대답에 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내 뒤를 따랐다. “서둘러. 형 오늘 진짜 바쁘니까. 레버만 돌려주고 바로 갈 거야.” 다행이도 근처 문방구에 타마고 몬스터를 취급하기에 돈만 넣고 레버를 돌리는데 1분도 걸리지가 않았다. 그래도 요다 녀석이 원하는 타마고를 뽑아주기 위해 잠시 돈을 이마에 얹혀 놓고 기도를 드린 뒤 지폐 투입구에 1,000엔짜리 두장을 집어 넣었다. 기이잉 소리와 함께 레버 위에 녹색 불이 들어오고 나는 잠시 마른 침을 삼킨 후. 힘차레 레버를 돌렸다. ‘나와랏!! 파이널 프론티어의 타마고여~!!’ 도르르르~ 이윽고 상품을 꺼내는 배출구로 새하얀 캡슐이 굴러 나왔다. 원래라면 레버만 돌려주고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래도 결과가 궁금했던 나는 캡슐을 요다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자~ 열어 봐.” 한 껏 기대에 찬 눈으로 캡슐을 비틀어 연 요다는 잠시 후. 시무룩한 울상을 지었다. “왜..? 안 나왔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요다는 내게 자신의 타마고상을 보여주었다. “괜찮아. 요다. 형이 오늘 아키바에 있는 타마고 샵에 다녀왔는데, 일반 몬스터를 가지고도 굉장한.. 어?” “굉장한 뭐? 뭔데 왜 얘기를 하다가 말어?” “아니.. 그 굉장한 플레이어를 만났는데.. 잠깐 그 타마고 좀 줘 볼래?” “왜?” “아니 그게 좀 이상해서..” 내가 알기로 타마고상 중에 ‘검은 색’은 없다. 하지만 요다 녀석이 나에게 내민 타마고는 온천 달걀처럼 검은색을 띄고 있었다. 설마 새로운 버전의 타마고상이 들어온 건가? 요다에게 타마고상을 건네받은 나는 좌우로 타마고상을 살펴 보았다.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는데.. 음!?’ 그 순간 손가락 끝으로 음각으로 파인 무언가가 느껴졌다. 주변이 어두워지고 있어 타마고상을 가까이 대고 음각의 문장을 살펴 본 나는 하마터면 요다의 타마고상을 떨어뜨릴 뻔했다. ‘이건.. 드래곤 엠블렘의 문장이잖아?’ 아니 어떻게 펜타곤 소프트의 물건에서 드래곤 엠블렘의 문장이.. “뭐야? 왜 그래 형?” “요다야. 너 파이널 프론티어의 타마고가 갖고 싶다고 했지?” “응. 왜?” “형 거랑 바꿀래? 형 타마고에 환수종 ‘바하무트’ 데이터가 들어있는데..” 그러자 요다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재빨리 내손에서 검은 타마고상을 낚아 채갔다. “싫어~ 베에에~~” 요다는 유치한 꼬맹이답게 눈 밑을 손가락으로 끌어 내리며 메롱을 내뱉더니 후다닥 집으로 달려갔다. ‘젠장.. 이래서 눈치 빠른 꼬맹이들은 싫다니까..’ & 다음 날. 새벽에 덮밥 집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끌고 집에 돌아온 나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몸을 뉘었다. “피곤하다..” 내가 일하는 덮밥 집은 24시간 오픈인 매장으로 나는 저녁 8시부터 새벽 4시까지 심야조를 맡고 있었다. 규동이라 불리 우는 불고기 덮밥은 한 그릇에 210엔. 싼 가격에 한 끼 배부르게 먹기엔 충분한 녀석이었다. 내가 일하는 곳 근처는 ‘풍속업소’가 많아서 새벽에도 손님이 끊이질 않았기에 현재 난 굉장히 피곤한 상태였다. “드래곤 엠블렘의 타마고라니, 설마 그런 게 존재할 줄이야.” 아르바이트 내내 요다의 타마고상이 신경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대체 그 안에 들어있는 몬스터 데이터는 무얼까? 어쩌면 ‘성녀 카트리나’로 진화하거나, ‘폭염술사 미레아’가 나올 수도 있어. 아니면 드래곤 엠블렘에서 성검을 휘두르던 ‘용사 크로엘’이 나올 수도.. 나는 피곤했지만, 지난달에 발행된 패미통신을 꺼내어 펼쳐보았다. 혹시나 내가 놓친 공략에 ‘드래곤 엠블렘의 타마고’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타마고 몬스터에 공략을 찾아보아도 그런 정보는 실려 있지 않았다. ‘혹시 내가 어두워서 문장을 잘못 본 게 아닐까?’ 그러면 그 검은 외관은 대체 뭐란 말인가? ‘생각만 해도 미치겠군. 나중에 요다 녀석에게 물어서 자세히 알아 봐야 해야겠다.’ 일단 지금은 중요히 할 일이 있으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에 놓여진 쇼핑백을 바라보았다. 푸른 쇼핑백의 한 가운데 선명히 찍힌 발자국이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어제는 바쁘기도 하고, 차마 열어보기 두려워 상태를 살피지 않았는데.. ‘와그작’ 소리가 어찌나 불길하게 들렸는지.. “괜찮지? 괜찮을 거야.” 심호흡을 하며 조심스레 상자를 꺼내어 보는 순간. 안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는.. 설마 아닐 거야. 그래~!! 분명 수영복 패키지에 포함 되어 있는 수박 모형이 안에서 굴러가는 소리일 거야. 나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신께 기도하며 패키지를 전부 꺼내어 보았다. “으아아악!!!!!!” 쿵쿵쿵쿵!! 내 비명 소리에 옆집에서 벽을 쿵쿵 쳐대었다. 조용히 좀 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이 광경에 나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끄윽 끄윽’ 거리는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토막 살인이다.’ 발 뒷꿈치의 강한 압력을 견디기에 미유키쨩의 몸은 너무나 가냘팠던 걸까? 그녀의 몸은 패키지 안에서 산산히 부서져 있었다. “미유키쨩. 어떻게 이럴 수가..” 침착하자. 우치무라. 이럴수록 냉정해져야 해.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그녀를 박스에서 꺼내 보았다. 허리와 다리. 그리고 팔과 목이 어긋난 미유키의 피규어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해 있던 나는 잠시 후 한가지 결단을 내렸다. ‘고쳐 보겠어!!’ 그 순간 나의 머릿속에 얼마 전 TV에서 보았던 맥가이버의 테마곡이 울려퍼졌다. ‘우선 내가 구입한 미유키의 피규어는 수영복 버전이다. 매끄럽게 인체를 표현한 피규어 이기에 옷자락 같은 거추장스러운 표현은 없다. 그것은 즉!! 색을 모두 배제해 버리면 알몸과도 같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상처 부위를 감쌀 수 있는 옷으로 커버할 수 있다.’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철저히 내가 상상했던 모습의 그녀를 만들어 보이겠어!! 일단 결심이 서자, 나는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비록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머리는 비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일단은 도색을 다시 하자. 그러려면 뭐가 필요하지? 아세톤!! 그래 아세톤이다. 대량의 아세톤이 필요해.’ 정신없이 옷을 챙겨 입은 나는 얼마 안 남은 돈으로 근처 화장품 가게에서 아세톤을 구입해 정성스레 미유키의 피규어를 닦아 내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참아. 내가 신의 손을 빌려서라도,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너의 모습을 완성 시켜줄 테니..’ 그 날 이후. 나는 아르바이트 시간을 제외하고는 피규어의 복구 작업에 매달렸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는 소질이 있다는 이야기는 곧 잘 들어 보았다. 내가 그린 히로인들의 일러스트도 다들 좋아해 주지 않았던가?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드디어 미유키의 도색을 모두 벗겨낸 나는 양 손에 착 감기는 얇은 고무장갑을 착용하고 여러 색의 에나멜 도료를 준비했다.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시작한다.” 긴 숨을 몰아쉬며 작업을 시작하려는 찰나. 딩동~!! 내 방에 초인종이 울렸다. “우치무라형~!! 안에 있어?” 요다 녀석인가? 고개를 갸웃 거리며 고무장갑을 곱게 벗어두고 문을 열자. 굉장히 심통 난 표정의 요다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 타마고상이라는 게 이렇게 키우기 힘든 거야?” “갑자기 찾아와서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다른 애들 거는 멀쩡히 잘만 키우는데, 왜 내 것만 진화도 해보기 전에 죽어 버리냐구~!!” “뭐라고..?” “형. 저번에 내 거랑 타마고상 바꾸자고 했었지? 혹시 지금도 바꿀 수 있을까?” “어? 어어. 뭐 괜찮아.” “진짜? 그럼 아직 안에 바하무트가 들어있는 거야?” 그때 이후로 새로운 타마고를 키우지 않았기에 아직은 데이터가 살아 있을 터였다. 내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요다는 나에게 검은색 타마고상을 내밀며 말했다. “바꾸자. 내 거랑.” < EP. 18 : 신의 손 우치무라 (5) - 여기부터 유료연재 입니다.- > 잠시 후. 요다는 내가 건네준 파이널 프론티어의 타마고를 받아들고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약간 정신이 없지만, 그때 요다 대신 뽑아주었던 검은색 타마고는 내 손에 돌아왔다. 요다 녀석이 여기저기 떨어뜨렸는지 외관에 기스가 잔뜩 생겨나 있었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다시 타마고상을 뒤집어 보자, 햇살에 비치고 있는 음각의 문장은 드래곤 엠블렘의 문장이 확실했다. ‘대박이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왔어.’ 마치 머릿속에서 ‘우치무라는 드래곤 엠블렘의 타마고를 손에 넣었다.’ 라는 메시지가 떠오르는 느낌이다. 끼이익. 쿵. 현관을 걸어 잠그고 방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검은 타마고상의 버튼을 눌러보았다. 그러자 화면 안에 잠들어 있는 ‘알’ 하나 보였다. “일단 기존에 타마고상이랑 별 다를 건 없어 보이는데?” 일단 ‘알’ 상태인 타마고상은 부화할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 현실의 시간으로 2시간 정도니까. 일단 이 상태로 두고 피규어 작업을 계속해 볼까? 나는 타마고상을 책상에 올려둔 채 곱게 접어둔 얇은 고무장갑을 다시 착용했다. ‘좋아 시작하자.’ 그때 책상 위의 타마고 상에서 요란한 알람이 울렸다. 삐삐삐삐삐삐. “뭐야? 벌써 깨어날 리가 없는데?” 고개를 갸웃 거리며 책상 위에 타마고 상을 집어 들어보니 방금 플레이를 시작한 타마고상이 게임 오버 상태가 되어 있었다. “뭐야? 왜??” 어이가 없네.. 뭔가 잘못했나 싶었지만, 게임 스타트에 잘 못하고 뭐 고가 어딨어? 다시 스타트 버튼을 누르니 다시 ‘알’ 상태로 게임이 시작되었다. 이젠 괜찮겠지 싶었던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피규어의 다시 부분을 집어 들었다. 에나멜 염료를 적절하게 배합하여 최대한 살색에 가깝게 만들고 조심스럽게 붓을 집어 들려는 찰나. 삐삐삐삐삐삐. “아~ 왜!!” 자꾸 중요한 순간에 왜 저러는 거야? 하는 수 없이 다시 타마고상을 확인해보니 이번에도 역시나 게임 오버 문구가 떠올라 있었다. “이상하네. 고장 났나?” 하지만, 뭘 해도 삼세번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다시 게임을 플레이 시키고 이번에는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일단 타마고상이 죽기 전에는 ‘다잉 메시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만약에 기기를 바닥에 떨어뜨릴 경우에 잠간 동안 ‘아파!!’ 라는 메시지가 나온다. 나는 대체 왜 타마고상이 시작하자마자 죽는 건지 이유가 궁금해졌다. 만약에 아무 짓도 안했는데 ‘아파!!’란 메시지가 나온 다면 아마도 충격을 인식하는 센서 부분이 고장 났을 확률이 컸기 때문이다. 잠시 후. 계속 타마고상에게서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난 그 메시지를 보자마자 기겁한 듯 숨을 틀어막았다. “더워...” 삐삐삐삐삐삐.. 덥다니? 뭐가!? 내 방이? 당연하지!! 지금은 한 여름인 걸! 에어컨 따위 없는 걸!! 아니, 그것보다 이게 어떻게 내 방이 더운걸 아는 거야? 이런 타마고상 본적도 없다고!! 나는 타마고상을 손에 쥔 채로 잠시 동안 바라보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 방에 시원한 곳이 있을 턱이 없는데, 그렇게 두리번거리던 내 시선에 들어온 곳이 하나 있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저기는 좀.. “괜찮을까?” 잠시 고민 하던 나는 결국 싱크대 옆에 설치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덥다면 시원하게 해줘야지. 어쩌겠어? 게임을 스타트 시킨 나는 냉장실 문짝에 위치한 계란을 넣어두는 곳에 타마고상을 세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 같지만, 누가 뭐랄 사람은 없으니까..” 행여 냉장고 문이 닫히는 충격에 타마고상이 또 죽을까봐 나는 조심스레 문을 닫아 주었다. “작업 좀 하자. 작업 좀..” 다시 자리로 돌아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냉장고를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알람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미유키의 다리를 집어 들었다. 길고 매끈한 미유키의 다리를 바라보던 나는 잠시 후에 커터 칼을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엉덩이로 이어지는 라인이 조금 매끈하지 않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리가 이렇게 뒤로 가면 엉덩이 밑 부분이 살짝 접히는 게 정상이잖아.’ 어차피 차후에 옷을 입히면 보이지도 않는 부분이지만, 나는 쓸데없는 곳에 디테일을 살리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결국 커터 칼을 들고 몇 십 분을 소비한 끝에 살짝 엉덩이 살이 접히는 주름을 표현해낸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괜찮은데? 의외로 나 이쪽 계통에 소질이 있을지도?’ 스스로의 업적에 경탄하며 다시 붓을 집어 든 나는 미유키의 한쪽 다리 작업만 거의 몇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미켈란젤로가 ‘피에타’ 조각상을 만들 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마치 자신의 혼을 한 줌 떼어내어 빗어내는 이 느낌. 만들다보니 재미가 붙은 나는 채광에 의한 그라데이션 기법까지 이용해 그녀의 매끈한 한쪽 다리를 살려냈다. 꼬르르륵.. 몰려드는 허기에 시계를 바라보니 벌써 점심때가 훌쩍 지나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아르바이트 가기 전에 잠은 좀 자둬야하는데..” 끈적끈적 한 에나멜이 묻은 장갑을 벗겨 내고, 장시간의 양반 다리로 인해 저릿저릿한 다리를 주무르며 일어선 나는 냉장고를 바라보다가 잊고 있던 무언가가 생각났다. “아차, 타마고상!!” 피규어에 집중하느라 알이 깨어난 시간도 잊어 버렸네. 냉장고 문을 조심스레 열어 타마고상을 꺼내보니 화면엔 게임 오버가 떠있었다. “또 죽었네. 대체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냐..” 하지만 잠시 생각을 정리해보니 어쩌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아직은 시중에 알려지지 않은 희귀한 달걀. 거기다가 패밀리 게임 중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드래곤 엠블렘’의 문장을 등에 달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이 녀석 역시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타마고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타마고상에게는 각각의 성격이 있다. 오늘 오전 요다 녀석이랑 교환했던 파이널 프론티어 타마고는 ‘위풍당당’ 무얼 먹여도 잘 먹고 놀때는 신나게 노는 씩씩한 녀석이었다. 그 녀석에 비교하면 요 검은 달걀의 성격은 ‘극악의 까칠함’ 인 듯하다. 더구나 다른 타마고상에게선 한 번도 본적 없는 체온 시스템이라니.. 아무래도 이 녀석을 키워내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정성이 필요할 것 같았다. ‘지금은 미유키의 피규어를 완성 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네 녀석을 부화시키는 것은 그 이후로 미루겠어.’ 나는 게임이 종료된 타마고상을 일단 서랍에 넣어두었다. & 그리고 다시 일주일의 시간이 흐르고.. “돼.. 됐다!!” 본래 모습. 아니 그 이상의 아름다움으로 눈앞에 서있는 그녀의 모습에 절로 탄성이 새어나왔다. 다시 나를 향해 활짝 웃고 있는 미유키의 미소를 마주하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산산히 부서졌던 팔 다리와 허리는 감쪽같이 붙여 놓았다. (거기에 살짝 추가 적인 기믹까지 포함해서..) 거기다 의상에 더욱 버전 업을 시켜 비키니 수영복 차림이던 그녀의 복장을 리페인팅 하여 속옷으로 바꿔놓았다. ‘그런데, 뭔가 미유키 보다는 행사장에서 보았던 유키씨를 더 닮은 느낌인데? 아무튼 다음 주에 월급이 들어오면 예쁜 옷을 입혀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줘.’ 그날 밤. 아르바이트 휴일이었던 나는 미유키가 완성 된 기념으로 ‘내가 없는 거리’ OVA를 처음부터 끝까지 돌려보았다. 오리지널 비디오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된 내가 없는 거리는 모리타씨가 직접 작화 검수에 들어간 만큼 굉장한 퀄리티로 제작 되었다. 애니메이션의 메인 히로인은 유저들의 앙케이트 조사를 통해 이루어졌고, 최종적으로 미유키로 결정 되었다는 기사를 보았을 때 나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2위인 나나세와 200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거둔 미유키의 승리였다. “역시 몇 번을 돌려 보아도 명작이구나.. 역시 소장하길 잘했어.” 총 5편으로 제작 된 내가 없는 거리의 비디오 테잎을 다시 케이스에 넣어 둔 나는 책상 서랍을 열어 드래곤 엠블렘의 타마고를 꺼내보았다. ‘기다려라. 조만간 제대로 키워줄 테니. 어디 누가 이기나 해 보자구.’ & “이번 달도 수고했다. 우치무라. 자~ 이번 달 급료다.” “감사합니다. 점장님.” 점장님이 내민 흰 봉투 안으로 빳빳한 지폐의 감촉이 느껴졌다. 심야 알바는 주간보다 급료가 조금 더 높았기에 이렇게 일주일에 4번씩 한 달 동안 일해서 버는 돈은 약 16만엔에 달했다. 하지만 월세 4만엔과 기타 관리비. 그리고 교통비를 제하면 내게 남는 돈은 약 10만엔 가량? 미유키의 피규어를 구입한 이 후 매일 같이 컵라면으로 연명하던 지난날이 떠오르자, 꽉 막혔던 숨구멍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세츠나씨와 나나세의 한정 피규어도 질러 버릴까?’ 왠지 미유키 혼자 있으니 쓸쓸해 보이기도 하고, 역시나 히로인 세 명이 뭉쳐 있어야 든든하겠지? 새벽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잠깐 눈을 붙인 뒤 아침에 눈을 떴다. 그리곤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는 곧장 전철역으로 향했다. 오후에 아키바에 들리기 전에 먼저 가봐야 할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내가 도착한 곳은 도쿄의 명품 거리라 불리 우는 ‘긴자’ 였다. 일본의 전통 의상을 판매하는 매장이 즐비한 이곳에서 나는 미유키의 의상을 만들어 낼 컨셉을 찾고 있었다. 수첩을 손에 들고 거리를 둘러보면서 쇼윈도에 전시된 의상들을 빠르게 스케치해 나가던 중. 나는 미유키에게 꼭 어울릴 만한 밝은 연 분홍색의 원단을 찾아냈다. 하지만 굉장히 고급스러운 매장의 인테이어에 기가 죽은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가게 문을 열었다. “저기, 원단을 좀 구입하고 싶은데요..” 가게 문을 열고 조심스레 말을 건네자, 직원은 친절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옷 맞추시게요?” “아, 그게..” 차마 피규어에 입혀줄 옷을 맞추러 왔다고는 못하겠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전통 의상에 대해 공부 중인데, 샘플이 필요해서요. 혹시 조금만 구입할 수 있을까요?” 그러자 가게 점원은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원단이 필요하세요?” “저기 쇼윈도에 진열된 기모노와 같은 색상의 원단을 원하는데..” “아, 저건 전통 방식으로 제작 된 최고급 기모노인데요. 주 원단은 ‘비단’이예요.” “비단이요?” 그럼 엄청 비싼 거 아닌가? 갑자지 점원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걸 보니 굉장히 불길하다. “한 마에 얼마.. 인가요?” “네. 가격은 16,000엔입니다. 만져보시면 아시겠지만, 최고급 원단이에요. 봄에 피어오르는 벚꽃을 연상케 해서 인기가 좋은 색상입니다.” 커헉. 90cm x 110cm 사이즈에 16,000엔!? 그렇다면 한정판 피규어 하나랑 맞먹는 가격이잖아? 엄청나게 비싸다. 실패할 것도 생각하면 적어도 두 마는 필요한데, 무리무리. 절대 무리다. 하지만 발길을 돌리려 해도 자꾸만 저 원단이 눈에 밟히던 나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점원에게 말했다. “저 색상으로 한 마 만 주세요.” “한 마요? 흐음.. 원래 저희 가게는 한 마 단위로는 안 파는데, 그래도 공부하는 학생이라니까 이번에만 특별히 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잠시 후. 원단 가격을 지불하고 가게를 나오며 나는 생각했다. ‘기회는 오직 한 번. 절대 실패는 없다.’ < EP. 18 : 신의 손 우치무라 (5) - 여기부터 유료연재 입니다.- > 끝 < EP. 18 : 신의 손 우치무라 (6) > & 그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나는 오늘 구입한 물건들을 바닥에 깔아둔 채 한숨을 내쉬었다. ‘저질러 버렸다. 월급 받고 하루 만에 5만엔 가량을 써버렸어.’ 바닥에 놓인 물건은 일단 피규어의 옷을 제작할 원단과 따로 옷을 꾸며줄 악세서리들. 그리고 내가 없는 거리 히로인들의 여름 한정 피규어 3세트.. 한정판 피규어를 3개나 구입했는데, 왜 가격이 5만엔도 안되냐고? 그것은 이게 도색 전 모델이기 때문이다. 도색이 입혀지지 않은 미완성 피규어는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편이니까.. 저번에 망가진 피규어의 도색 작업을 하던 중 나는 뭔가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인 느낌이 들었다. 본래는 나나세의 한정 피규어를 구입하기 위해 아키바를 찾아갔지만, 자세히 보니 도색이 완료 된 것 중에도 조금씩 아쉬운 부분이 눈에 띄었다. ‘나라면 저기서 조금 더 디테일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마음으로 매장을 살피던 중. 내 눈에 들어 온 것이 바로 이 도색 전 피규어들이었다. 오히려 완성 된 제품을 구입하는 것보다 애정을 가지고 하나씩 만들어 가는 것에 재미를 붙인 나는 결국 세 히로인의 한정 피규어를 전부 구입해 버렸다. ‘이번 달에도 생활비가 빡빡하겠지만, 후회는 없다.’ 우선은 수첩을 꺼내 들고 오전에 긴자 거리를 걸으며 스케치 해둔 기모노 중에 미유키에게 어울릴 만한 것을 찾아보았다. ‘역시 이게 제일 낫겠군.’ 잠시 후. 하나의 대상을 고른 나는 우선 값싸게 구입해온 천을 잘라 작업을 시작했다. 비싼 원단을 함부로 소비할 수 없었기에 고안한 방법 중에 하나였다. ‘우선은 이걸로 연습을 하고, 비단은 가장 마지막에 도전한다.’ 그렇게 또 다시 수 일이 흐르고.. “와.. 완벽하다!!” 미유키는 내가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 책상 위에서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위험해. 내가 만들었지만, 너무 잘 만들었어!!’ 생각해보니 현재 내가 입고 있는 천 쪼가리보다 미유키에게 만들어준 비단의 원단이 훨씬 비싸다. 절대 실수 하지 않기 위해 한 땀 한 땀 공을 들인 미유키의 기모노는 정말로 피나는 노력 끝에 얻은 결과물이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피규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성취감이 느껴졌지만, 왠지 모르게 허전함과 동시에 묘한 감정이 일어나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다..’ & 그러던 어느 주말. 나는 많은 고민 끝에 책상 위에 올려진 미유키의 피규어를 조심스레 포장해 가방에 집어넣었다. 기모노 버전 미유키에 대해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했던 나는 내가 자주 들르던 피규어 샵에 전시장 하나를 빌리기로 마음먹었다. 가끔 피규어 장인들이 개인 소장 물품을 진열해두면 피규어 샵에 방문한 손님들 중에 경매에 붙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고생해서 만들어낸 첫 번째 작품을 아무에게나 팔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단지 어떤 반응이 올 것인가? 얼마까지 입찰가가 붙을 것인가? 그것이 너무나 궁금했다. 잠시 후. 피규어 샵에 들른 나는 직원에게 문의해 입구 쪽에 위치한 조그만 진열장 하나를 빌리는데 성공했다. ‘나쁘지 않은 위치다. 가게 안으로 들어오면 바로 보이겠어.’ 직원이 내민 계약서에 사인을 마치고, 진열장을 빌리는 금액을 지불하자. 잠시 후 내가 만든 피규어가 진열장에 올랐다. 진열대 내부에 설치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니, 마땅히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을 찾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어마어마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누구 작품이지?” “뭔데? 응? 헉!! 쩌.. 쩐다!!” 피규어 샵을 둘러보던 손님들은 새롭게 등장 한 기모노 버전의 미유키를 보자마자, 감탄사를 내뱉기 시작한 것이다. “이거 아직 입찰 등록 아무도 안했는데? 파는 거 맞나?” 일단 판매등록은 해두었지만, 차후에 일정 부분 수수료를 지불하고 거절할 수도 있었기에 상관은 없었다. 자~ 그럼 어디까지 올라가나 구경이나 해볼까? 그때 어느 정도 눈썰미가 있는 녀석들은 미유키의 모형이 여름 한정 수영복 버전과 같다는 걸 깨달았다. “이거 이미 완성 된 피규어를 다른 버전으로 커스텀 한 것 같은데? 수영복 버전이랑 포즈가 비슷해. 그런데 이 미칠 듯 한 퀄리티는 뭐지?” 내가 만들어낸 피규어 주변에는 금세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첫 번째 입찰자가 나왔다. -25,000엔- 최초 입찰가 치고 나쁘지 않은 금액이지만, 그 걸로는 재료값도 안 나오거든? 피규어 샵 한구석에서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보던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를 삼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입찰자가 나타났다. -35,000엔- 10분 만에 1만엔이 더 붙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피규어에 들어간 재료값의 본전치기 수준이랄까?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하면 저 금액도 싸게 느껴졌다. 하지만 전시 하자마자 채 30분도 안되어 35,000엔까지 금액이 오르다니.. 기적이다. 기적이야.. 일요일인 다음 날. 아르바이트를 마친 나는 설레이는 마음에 잠도 자지 않고 아키하바라로 향했다. 조급한 마음에 미처 피규어 샵이 오픈하기도 전에 도착한 나는 근처 패스트 푸드점에서 간단히 아침을 떼우고 다시 가게에 들렀다. ‘자~ 그럼 얼마까지 올랐을지 구경이나 해볼까.’ 그렇게 웃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선 나는 미유키의 진열대에 적힌 금액을 확인하자마자, 선채로 굳어 버렸다. -189,000엔- 어라?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189,000엔이면 내가 한 달 동안 일한 급여보다 더 많잖아!? 고작 하루 만에 가격이 이렇게 뛰어 오를 줄이야. 갑자기 평온했던 심장이 쿵쾅거리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거 뭐지? 팔아야 하나? 그래도 심혈을 기울려 만든 첫 작품인데, 고작 돈 따위에 넘어갈 수는.. 하지만 가격이 189,000엔이라니..’ 한 7~8만엔 정도까지 오르면 준수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초 레어 아이템이 되어 버렸잖아? 아니지. 전 세계에 하나뿐이니 초 레어 아이템이 맞구나.. 그리고 그 순간.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사악한 생각이 스쳐 지났다. “저기, 기모노 버전 미유키 피규어를 제작한 사람인데요. 잠시 피규어를 조정할게 있어서 그런데, 장식장 좀 열어 주시겠어요?” “아, 네. 알겠습니다. 손님.” 점원은 진열대에서 미유키의 피규어를 꺼내 나에게 돌려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어제 하루 동안 손님께서 전시한 피규어 때문에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엔 손님들끼리 싸움까지 붙을 정도였다니까요.” “정말요?” “진짜 엄청난 인기였습니다. 대체 어떻게 이런 피규어를 만드실 생각을 하셨어요?” “하하.. 그게 우연찮게..” 피규어가 박살나는 바람에.. 나는 대충 말을 얼버무리며 기모노의 옷깃을 벗겨 미유키의 바깥 어깨 쪽으로 걷어부쳤다. 그러자 눈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점원의 입에서 절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손님!? 이건..!! 이건!!!” 최초에 부서졌던 미유키의 팔과 다리를 이어 붙이며 나는 한 가지 기믹을 만들어 두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 흘러내린 기모노 버전이었다. 흘러내린 기모노 사이로 탐스러운 그녀의 브래지어가 드러나자, 점원은 콧바람을 훅훅 거리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뭐 이정도 갖고 그러지? 나는 자연스럽게 풀어 진 기모노의 옷자락을 반대로 돌려 기모노 버전 미유키의 최대 감상 포인트인 접혀진 엉덩이 살을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푸억!! 이런 세상에!! 디테일 보소..” 나는 점원의 열렬한 반응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미유키를 다시 장식장으로 돌려보냈다. “아, 그리고 이거 카메라 촬영은 금지 시켜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잠시 후 매장에 방문한 손님들은 어제 와는 또 다른 미유키의 모습에 경악했다. “뭐야 이거!? 수영복을 아예 속옷으로 바꿨잖아!!” “쿨럭.. 천재다. 일부러 기모노가 걸리게 제작 하다니.. 완전히 노렸구나.” 하지만 어마 어마한 입찰가 때문일까? 아무도 선뜻 새로운 입찰 금액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카메라를 들고 있던 한 손님이 피규어를 향해 렌즈를 들이밀자, 그것을 지켜보던 점원이 급히 제시했다. “손님!! 사진 촬영은 안 됩니다!!” “아..” 점원의 외침에 손님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카메라를 내려두었다. 사람들은 눈으로라도 미유키의 모습을 실컷 담아 두려는지 진열대 주변을 빙빙 돌며 구석구석 살피고 있었다. 그때 한 남자가 아까부터 노골적으로 미유키의 엉덩이를 살피던 중에 ‘유레카’를 외쳤다. “여기다. 여기 이 부분!! 살이 접힌 표현까지 구현 되어 있어!! 미친 진짜 돈만 있으면 당장 살 텐데!!” “그런데 이거 왜 안 팔지? 189,000엔이면 신인치곤 엄청난 금액인데, 설마 팔려고 내놓은 게 아닌가?” ‘안 그래도 지금 그것 때문에 겁나 고민 중이거든!?’ 그때 가게 안으로 느끼하게 생긴 중년의 남자가 들어 와 점원에게 물었다. 굉장히 부담스러워 보이는 인상의 남자는 새로운 모습의 미유키 피규어를 바라보더니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여기 기모노를 입고 있는 미유키 피규어 판매자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습니까?” 그러자, 점원은 힐끗 내 쪽을 바라보았다. 불길한 느낌에 세차게 고개를 좌우로 내저어 거부하자, 점원은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그게 아직까지는..” “이따 오후에 다시 들릴 테니 혹시라도 판매자가 방문하면 꼭 전해 주시오. 내가 얼마를 내든 사고 싶다고.” 중년의 남자는 유리 진열대를 톡톡 두드리며 기분 나쁜 미소와 함께 사라졌다. ‘아.. 안되겠다. 저런 놈에게 돈을 받고 미유키를 넘겨주느니 도로 가져가야겠어.’ 나는 결심을 굳히고 몰래 점원에게 다가갔다. “저기, 아무래도 미유키 피규어를 가져가야 할 것 같아요.” “네? 손님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이게 지금 가격이 얼만데요!?” “원래부터 팔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얼마까지 가격이 오르나 확인만 하고 싶었을 뿐인데..” “뭐라구요!? 손님. 그런 의도로 입찰을 유도하시면 곤란합니다. 하지만, 본래 주인께서 판매를 원하지 않으시니 이번만큼은 취소 시켜 드릴 수밖에 없네요. 입찰가에 10% 금액을 내주시면 취소 시켜 드리겠습니다.” “네? 10%요?” “아무래도 판매하려던 제품을 다시 가져가지면 저희 매장 이미지에 손해가 가기 때문에, 부득이 하게 10%의 수수료를 받고 있습니다.” 잠깐만, 189,000엔의 10%면 18,900엔을 내야 도로 가져갈 수 있는 거잖아!? 크.. 큰일이다. 지금은 그만한 돈이 없다구!! < EP. 19 : 노블리스 오블리주 (1) > & “이상으로 지난 달 타마고상 매출에 대한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지난달보다 300% 매출이 오르다니. 훌륭하네요. 수고하셨어요. 미야자키씨” 가게 오픈 전. 지난 달 마감에 대하여 깔끔하게 보고를 마친 미야자키씨에게 고마움을 전하자, 주변에 있던 직원들이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녀 역시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 역시 이곳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게 되어 정말 좋은걸요.” “저도 여러분들과 일하게 되어 매우 기분이 좋습니다. 매장 오픈부터 많이 고생하셨네요. 본사에 이야기하여 이번 달 급여에는 특별 인센티브를 추가 지급하도록 건의 하겠습니다.” “오오오!!” 인센티브 지급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스탭들은 일제히 탄성을 지르며 환호했다. 열심히 일해 준만큼 그에 대한 보상을 철저히 하는 게 내 경영 방식이니까. 나는 미야자키씨가 가져다준 녹차를 마시며 그녀가 건네준 차트를 살펴보았다. 10월의 첫 번째 주 주말. 전국을 달구었던 뜨거웠던 더위만큼이나 타마고상에 대한 열기도 무시무시했던 여름이었다. 지난 7월 중순에 매장을 오픈한 이래로 8월과 9월동안 타마고샵의 매출은 어마어마하게 오르고 있었다. 비단 타마고상 뿐만 아니라 인기 캐릭터 인형이 타마고 샵에 놀러온 아이들에게 불티나게 팔려나가며 매번 재고를 채워 넣어도 수량이 모자랄 지경이었으니까. 역 근처에 위치한 타마고 샵은 오픈과 동시에 아키하바라의 명물이 되어 지방에서도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을 정도로 대 성황을 이루었는데, 그에 반해 인력이 너무나 부족했다. 아무리 급여를 많이 준다고 해도, 사람에게는 개인 생활이란 것이 있다. 즉. 근무 시간과 휴일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돈을 안겨준다 한들 사람은 지치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나는 직원 모집공고를 더욱 확대해 아키바 내에서 가장 높은 시급을 제시하였다. 덕분에 판매 경력이나 서비스 직에 있던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었지만, 어줍잖은 마음으로 타마고샵의 문을 두드렸던 사람들은 채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오픈 3개월째에 접어든 오늘. 현재 이곳에 모여 있는 이들은 나에게 있어서 ‘역전의 용사들’이나 다름없는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 스탭 중에 가장 어린 나이로 입사하여 지옥 같은 오픈 행사를 버텨온 미야자키씨는 활기한 성격으로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도, 그리고 매장을 방문하는 손님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일반적인 스탭들과는 달리 그녀는 타마고 몬스터를 키우는 한명의 플레이어로서 손님들과 데이터를 교류하거나 아이들에게 타마고상의 육성법을 알려주는 도우미 활동으로 나 역시 전부터 눈여겨보고 있는 직원이었다. “여러분은 타마고샵의 직원이면서 동시에 펜타곤 소프트의 얼굴이기도 합니다. 힘드시겠지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부분이라곤 이렇게 인센티브를 챙겨드리는 것밖에 달리 해드릴게 없네요. 하지만, 혹시 샵에 대해 개선점이나 불만사항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무엇보다 현장에 있는 여러분들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특별 인센티브 지급 소식에 직원들의 사기가 단번에 오른 느낌이 들었다. 역시 돈이란 단순하지만 가장 효율이 좋은 아이템이니까. 오픈 준비를 위해 모두가 해산하고, 나는 테이블에 앉아 마저 차트를 살피던 중 미야자키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강준혁 부장님..” “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아, 그게.. 샵에 대한 건 아니구요.” “괜찮아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나는 잠시 차트를 테이블 위해 올려두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직원이 이야기를 청할 때는 그와의 대화에 집중하는 게 상대방에 대한 예의니까. 미야자키씨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나는 재촉하지 않고 그저 편안히 웃어보였다. “실은 어제 제가 퇴근하고 피규어 샵에 갔었거든요.” “피규어 샵이요?” “네. 혹시 저희 매장에 없는 타마고상에 대한 피규어나 인형 같은 악세서리가 있나 해서요.” 호오.. 그녀 나름대로의 시장조사인가? 업무가 끝난 직원이 스스로 시장 조사까지 할 정도라니, 미야자키씨는 타마고 샵에 굉장히 애정을 갖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피곤하셨을 텐데, 대단하네요. 회사를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아, 아뇨.. 꼭 칭찬 받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니고, 저 역시 타마고상을 굉장히 좋아하니까요.” “그렇군요. 그런데 피규어 샵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게, 타마고상에 대한 건 아니고, 펜타곤 소프트가 만든 ‘내가 없는 거리’에 대한 건데요.” “내가 없는 거리요?” “저도 그 게임을 굉장히 좋아해서 시리즈 전부 가지고 있거든요.” “아, 그래요?” 미야자키씨도 유키처럼 게임을 좋아하는 구나. 나는 왠지 모를 뿌듯함에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없는 거리는 슈퍼 패밀리 발매 이 후에도 유명한 피규어 업체와 캐릭터 제작에 관련한 계약을 맺어 펜타곤 소프트에 큰 수익을 내주는 일등 공신이 되었다. 또한 게임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되어 비디오 렌탈 샵에서도 큰 인기를 끌어 개인 소장용 비디오까지 출시가 되었으니 현재 일본을 살아가는 젊은이들 중에 ‘내가 없는 거리’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런 사회 현상에 우치무라씨가 뉴스 속보에 뜨며 일조한 부분도 있긴 했지만.. 우치무라씨의 사건 다음날 조간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쓰여 있었다. -게임 속 여 주인공의 성우가 한 생명을 구하다!!- 덕분에 내가 없는 거리는 ‘게임’이라는 영역을 넘어서 하나의 문화 컨텐츠가 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유키 말로는 방송국에서도 드라마 화를 추진하자는 말이 나오곤 한다는데, 아직까지 펜타곤 소프트에 정식적인 계약 요청은 없었다. “그런데 내가 없는 거리는 왜..?” “아, 그게 어제 피규어 샵에 조금 희귀한 피규어가 나왔거든요.” “희귀한 피규어요?” “하세가와 미유키의 피규어 인데, 굉장히 톡특한 컨셉이었어요. 기모노를 입고 있는 피규어 였는데, 실제 옷감으로 피규어에 기모노를 만들어 캐릭터에게 입혀 놨던 걸요?” “오.. 그거 굉장한데요? 헌데 제가 알기로는 그런 피규어는 계약한 적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개인 소장품인가 보군요.” “네. 얼마 전에 출시한 여름 한정판 모델 피규어를 이용해서 만든 것 같은데, 아무튼 정말 엄청 났어요. 거기 피규어 샵에 있던 사람들이 너도 나도 사고 싶다고 경매에 붙였는데, 가격이 순식간에 올라갔거든요.” “개인 소장용으로 커스텀 화 시킨 거라면 지구상에 하나밖에 없을 테니 그럴 만도 하죠. 그런데 얼마였어요?” “제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110,000엔이요.” 그녀의 대답에 잠시 할 말을 잃은 나는 혹시나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닌가 싶어 되물어 보았다. “... 11만엔이요?” “네.” 아니 대체 얼마나 대단한 피규어 길래. 피규어 하나에 백 만원을 넘게 쓰는 거냐? 기가 막혀 헛웃음이 튀어 나왔다. 그러자 미야자키씨가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헌데, 그 피규어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네? 뭐가요?” “그게.. 제가 알고 있는 하세가와 미유키 랑은 조금 다른 사람 같달까? 미유키 보다는.. 오히려 부장님이랑 같이 다니시는 유키씨를 더 닮은 것 같아요.” “네?” 이건 또 무슨 소리람? 하세가와 미유키가 유키를 모티브로 한 건 사실이지만, 미야자키씨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뭔가 좀 이상한데? “미야자키씨.” “네. 부장님.” “그 미유키의 피규어를 본 가게. 어디 있는지 안내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 잠시 후. 미야자키와 함께 피규어 샵에 들린 나는 어렵지 않게 그녀의 피규어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189,000엔!?” “어제 보다 가격이 훨씬 올랐네요..” 하지만 가격은 둘째 치고, 미유키의 피규어는 미야자키의 말대로 이시카와 유키를 더 닮아 있었다. 그런데, 저 괘씸한 복장 상태는 뭐냐!? 미야자키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그녀가 입고 있던 기모노는 반쯤 벗겨져 새하얀 속살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피규어의 주변에는 그녀의 모습을 구경하기 위한 사람들로 붐비고 있어 더 이상 다가가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돌아버리겠네. 다음부터 유키를 모티브로 하는 설정은 좀 피해야겠다. 그런데 저 피규어를 만든 녀석은 대체 누구길래, 유키의 얼굴과 판박이로 피규어를 만든 거지?’ 아무튼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저걸.. 내가 사야겠어. 괜히 엄한 사람한테 넘어가는 꼴을 볼 수 없지.’ 나는 이따금 카메라를 꺼내드는 손님을 제지 중인 가게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입찰 좀 하고 싶은데요.” “오오오!! 나왔다!! 189,000엔을 깨부수는 입찰자가 나왔어!!” “네~ 손님. 이쪽에 입찰 금액을 적어 주시고 사인 부탁드립니다.” 나는 직원이 건네주는 용지에 250,000엔을 적어 그에게 돌려주었다. “소.. 손님? 250,000엔 맞으신가요..?” “네. 맞아요.” “가.. 감사합니다~!! 자~ 기모노 복장의 하세가와 미유키 피규어에 새로운 입찰 금액이 나왔습니다.” 점원은 새로운 입찰 가격을 들고 손님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러자 잠시 후.. “2.. 25만엔!? 미친 거 아냐??” ... 그래, 확실히 미친 금액이긴 하지. 부정하지 않겠어. 하지만 입장 바꿔 생각 해 봐. 네 여자 친구랑 꼭 닮은 피규어가 반나체로 전시장에 들어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는데, 그걸 그럼 보고만 있겠냐? “히익.. 부자 새끼.. 그런데 나도 돈 만 있으면 사고 싶다.” 샵에 몰린 사람들은 새로운 입찰 가격에 웅성거리며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러자 내 곁에 있던 미야자키씨가 조심스레 나에게 물었다. “부장님. 괜찮으세요?” “뭐가요?” “아니. 너무 큰돈을 쓰셔서..” “아.. 뭐 이 정도는 괜찮아요. 하지만 확실히 미야자키씨 말대로 하세가와 미유키보다는 유키를 더 닮았네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그쵸? 저도 어제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그나저나 마지막 입찰자가 재입찰만 안하면 좋겠는데..” 점원에게 알아보니 마지막 입찰자가 입찰을 포기하고 3시간 후에 판매가 된다고 하니, 오늘 내로 끝장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저 피규어를 진열대에서 끄집어내고 싶은데,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네. 아예 원하는 금액을 제시해준다면 바로 쏴줄 수도 있는데, 제기랄.. 그때 피규어 샵 입구로 한 중년의 남자가 기분 나쁜 미소를 흘리며 들어왔다. 남자는 여유 넘치는 느끼한 미소로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미유키의 피규어가 담긴 진열대를 톡톡 두드리더니 혓바닥을 날름 거렸다. 저건 또 뭐하는 놈이야? “저 사람이 어제 제가 본 입찰자인데, 11만엔을 부른 사람이에요.” “아? 그래요..?” 남자는 아직 내가 제시한 입찰가를 눈치 채지 못했는지 잠시 동안 피규어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입찰가를 확인했다. 그 순간 그의 표정이 팍하고 구겨졌다. “어.. 어떤 새끼가.. 감히..” < EP. 19 : 노블리스 오블리주 (1) > 끝 < EP. 19 : 노블리스 오블리주 (2) > “어.. 어떤 새끼가.. 감히..” 남자는 분노했는지 주먹을 부들거리며 점원을 찾았다. “여기 입찰 서류 가져 와!!” “네~!! 손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남자는 여기 피규어 샵의 단골손님인지 점원은 입찰 서류를 챙겨들고 부리나케 달려 왔다. 직원이 넘겨준 펜을 들고 잠시 고민 하던 그는 결국 서류에 사인을 마쳤다. “자~ 기모노 타입의 미유키 피규어에 새로운 입찰 금액이 떠올랐습니다~!!” “우와!! 25만엔을 깨부수는 입찰가가 또 나왔다~!!” “이야~!! 저 신인 누군지 몰라도 계 탔다. 계 탔어!!” “얼마야!? 얼마에 올라온 건데?” “3... 350,000엔..” “미쳤다. 10만엔을 더 얹었어!!” “뭐? 10만엔!? 이젠 고민조차도 해볼 수가 없는 가격이구나. 피규어 하나에 35만엔이라니..” 아이고 머리야. 10만엔이라니 화끈하게도 쏘셨네.. 중년의 남자는 후련한 기분이 드는지 다시 한 번 유리 케이스를 톡톡 두드리며 흐뭇해하고 있었다. ‘저 제스쳐.. 굉장히 마음에 안드네..’ 나는 잠시 그를 지켜보다가 나를 바라보던 점원과 눈이 마주쳤다. 상위 입찰을 하겠냐고 묻는 듯 한 저 눈빛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받아주마’ “입찰 서류 좀 주시죠.” 내 말 한마디에 입찰에 대한 이야기로 웅성거리던 샵 내부가 싸늘하게 식었다. 나는 조용해 진 틈을 타 나에게 서류를 가져오려던 직원을 제지 시키며 입을 열었다. “귀찮게 서류 끄적거리지 말고, 그냥 구두로 입찰가 공개 하겠습니다.” “어.. 얼마를..?” “50만엔.” “우와아아아!!!!!!! 미쳤다!! 진열 된지 하루 된 피규어가 50만엔이래!!” 어차피 찌질하게 만 엔, 이 만 엔 올려봤자, 상대방에게 괜한 경쟁심만 부추길 뿐이다. 아예 따라오지 못 할 큰 액수로 떨쳐내 버리는 게 좋겠지. “50만엔.. 확실하십니까. 손님?” 내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점원은 이번에는 중년의 남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상위 입찰하시겠어요?” “…….” 중년의 남자는 멍한 표정으로 나랑 점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자.. 잠깐만 기다려줘. 전화 한통만 하고 올 테니.” 살짝 떨리는 목소리를 보아하니, 여기까지인가? 남자는 잠시 나를 노려보더니 황급히 가게를 나섰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지? 내 옆에 있던 미야자키씨는 피규어 하나에 상상 이상의 금액이 왔다갔다 하는 걸 보고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거 판이 너무 커지는 데요?” “부장님. 괜찮으세요? 50만엔이라뇨..” “저도 인형 하나에 이렇게까지 돈을 써본 건 처음이라 황당하긴 하네요. 50만엔 이라니.. 하하..” 나는 피규어 주변의 손님들이 조용해진 틈을 타 피규어를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일단 유키랑 닮았다는 것만 확인하고 엄청난 액수를 부르긴 했는데,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본 피규어의 디테일은 정말 기가 막힌 수준이었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고풍스런 느낌의 기모노는 진짜 비단 원단을 사용한듯했다. 멀리서 볼 때는 한 겹만 걸쳐 입은 ‘유카타’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총 세 겹으로 구현된 기모노는 정말로 전통 의상 그대로를 재현하고 있었다. ‘대체 피규어에 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특히나 가장 겉옷 부분에는 얇은 붓을 이용해 벚꽃 무늬의 화폭까지 그려 넣었는데, 그 느낌이 꼭 비단 위에 그려진 수묵화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한마디로 정말 어마어마하게 공을 들인 작품임에 틀림없었다. ‘이렇게 보니, 없던 욕심도 생길만 하구나.. 아, 그래서 매니아들이 이런 재미로 피규어를 사 모으는 건가?’ 살짝 주위를 둘러보니 굉장히 부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이거 모리타가 실제로 본다면 기절초풍 할만한 디테일인데? 그때 내 등 뒤에 있던 미야자키가 가게 안쪽을 힐끔 바라보더니 깜짝 놀라 외쳤다. “우치무라씨..?” 잉? 우치무라? 왜 그 이름이 여기서 튀어 나오는 거냐? 미야자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매장 한구석에 서있는 우치무라씨가 보였다. 우리와 눈이 마주친 우치무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한손을 들어 보이며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당신은 그때 ‘내가 없는 거리’의 행사장에서 만났던 우치무라씨?” “아!! 유키씨가 데려오셨던 남자 분!!” 이것도 인연인가? 어떻게 세 번이나 우연으로 만날 수 있지? 아무런 약속을 잡지 않고 세 번을 만난 사람이랑은 목숨을 나누어도 좋다던 옛말이 떠올랐다. 왜냐하면 어디에 있던 또다시 만나게 될테니까. 원수를 지기보단 친구가 되란 뜻이겠지.. 그런데 이번엔 미야자키씨랑도 알고 있다니. 저 사람의 정체가 슬슬 무서워졌다. “우치무라씨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아, 그게.. 저..” 그러자, 옆에 서있던 피규어 샵 점원이 자랑스레 그를 소개해 주었다. “이분이 바로 기모노 타입 미유키 피규어의 제작자이십니다.” “네에!? 정말이세요?” 미야자키의 물음에 우치무라씨는 어색하게 웃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지끈 거리는 이마를 어루만지며 잠시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그러니까.. 행사장에서 유키를 만나고, 자살 소동까지 겪으며 유키의 목소리에 감명 받은 우치무라씨가 저 피규어를 만들었다는 건가?’ 그렇다면 저 피규어가 어째서 그토록 유키를 닮은 것인지 납득이 간다. 디테일이 과한 건 조금 화가 나지만, 그가 개조한 피규어는 작품이라 부르기에도 손색이 없었다. 대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주변 분위기가 시끌벅적 해지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미유키 피규어를 개조한 사람이래!!” “정말? 대박이다. 하루만에 50만엔 벌었네..” “피규어 하나씩 만들어서 내다 팔아도 저 정도 디테일이면 개당 10만엔 씩은 팔리겠다.” 뭐? 개당 10만엔? 하긴 이번에는 경매가 좀 과열되어 엄청나게 높은 금액이 붙었지만, 솔직히 디테일만 따져본다면 보통 1~20만엔 사이 정도에 충분히 거래가 될 만 한 작품이었다. 그 순간. 아까까지만 해도 순혈 오타쿠로 보이던 우치무라가 이제는 고퀄리티 피규어를 빗어내는 장인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거 모리타랑 엮으면 엄청난 콜라보레이션 효과를 거둘지도 모르겠는데? 일단 저 유키 피규어를 손에 넣고 따로 불러서 이야기를 좀 해봐야 겠다. 그때 아까 전 가게를 나섰던 중년의 남자가 가방을 끌어안고 들어오더니 새로운 입찰 금액을 고지했다. “8.. 80만엔!!” 80만엔? 저 사람 진짜 제정신인가? 50만엔을 부른 나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 제정신 박힌 놈으로 보일리 없겠지만.. 남자가 부른 엄청난 금액에 피규어 샵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진짜 해도 너무하는 구나 저 사람.. 사방이 조용한 가운데, 상상의 초월하는 금액에 깜짝 놀랐는지 우치무라의 딸꾹질 소리만 들려왔다. 입찰가를 공개하는 점원조차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사.. 상위 입찰 나왔..” 그때였다. “여봇!!!” 가게 밖에서 엄청나게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사람들은 모두 가게 바깥으로 눈을 돌리자, 그곳에는 화가 잔뜩 난 아주머니 한분이 서계셨다. 여보라고 부른걸 보아, 부부 사이인 듯한데.. 아주머니는 잠시 남편을 바라보며 씩씩거리더니 힘차게 가게 안으로 들어와 남편의 등짝을 거세게 내려치기 시작했다. “미쳤어. 미쳤어!! 아주~!! 응? 왜 사니? 왜 살어!! 이자가 싸다고 대출까지 받아서 저걸 사려고? 80만엔이 뉘 집 개 이름인 줄 알아!?” ... 설마 저 아저씨 피규어 사려고 은행에 대출 받으러 갔던 건가? 꺼져가는 거품경제를 어떻게든 살려보기 위해 최근에 은행에서 저금리 대출은 많이 권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여보!? 잠깐만 기다려 내 말 좀 들어 봐. 응?” “기다리긴 뭘 기다려!! 빨리 안 따라와?” “당신이 몰라서 그래.. 저 피규어는 말야 나중에 엄청나게 가격이 오른 다니까? 날 믿어 봐!! 응? 미유키!! 미유키이이!!!!!” 글쎄.. 처음 입찰한 가격에서야 오를지 몰라도, 우리가 부른 금액만큼 가격이 오를 것 같지는 않은데? 결국 부인의 손에 이끌려 남자의 목소리를 멀어지고, 중간 중간 찰진 등짝 스매싱의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럼.. 제가 최종 입찰자 인가요?” “아.. 네. 그렇습니다만, 우치무라씨. 아까 전에 판매를 물리고 싶다고 하셨는데, 괜찮으신가요?” “네? 아.. 그게..” 그때 미야자키씨가 어물거리는 우치무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치무라씨. 우리 잠깐 얘기 좀 해요.” “네?” 잠시 후. 우리는 피규어 샵 근처에 있는 커피숍에 들렀다. 얼떨결에 미야자키에게 끌려 우치무라는 어색한 분위기에 우리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일단 이것도 인연인데, 정식으로 소개부터 하죠. 저는 강준혁이라고 합니다.” “우치무라 히로키입니다.” 굉장히 심플하게 자기소개를 마친 우치무라는 내 시선을 피해 주변으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 하시는 일이..?” “학생입니다. 현재는 휴학 중이구요.” “아, 네..” 서로에 대한 정보교류가 끝나자, 내 옆에 있던 미야자키가 바로 본론을 꺼내들었다. “우치무라씨. 혹시 이시카와 유키라는 분을 알고 있어요?” “네? 아, 네. 알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피규어 샵에 온 이유는 그 분 때문이에요.” “유.. 유키씨 때문이라구요? 어째서..?” “우치무라씨가 만든 피규어가 저희가 알고 있는 유키씨랑 너무 닮았으니까요.” 그러자 우치무라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치무라씨가 어떤 의도로 그런 피규어를 만들었는지는 잘 몰라요. 하지만, 같은 여자 입장으로서 저와 똑같이 생긴 인형이 그렇게 사람들 앞에 구경거리가 되는 걸 원치 않아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미야자키씨는 차분한 목소리로 우치무라를 타이르듯 말을 걸었다. 그러자 우치무라는 굉장히 놀란 표정으로 미야자키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유키의 입장에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이제라도 알아주시니 고마워요. 그래서 가급적이면 경매를 취소하시는 게 어떨까 해서요.” “사실은.. 아까부터 취소하고 싶었는데..” “그래요? 그럼 왜..” “10%의 취소 수수료를 낼 수가 없어서..”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숨을 내쉬는 우치무라를 바라보던 나는 잠시 탁자를 두드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저.. 우치무라씨. 우리 그럼 이렇게 하죠?” “네?” & 방법은 간단했다. 내가 그냥 취소 수수료를 줘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생돈 5만엔이 그냥 날아가 버렸지만, 50만엔을 날리는 것 보다는 나았기 때문에 내린 결론이었다. 잠시 후. 미유키의 피규어를 소중히 들고 돌아온 우치무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나에게 피규어를 내밀었다. “이거.. 유키씨에게 전해주시겠어요?” “네? 왜 이걸?” “미야자키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유키씨 입장에선 굉장이 불쾌한 일 일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부끄러워서요. 유키씨에게는 신세만 졌는데, 그녀를 구경거리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뭐.. 다른 사람들이야. ‘하세가와 미유키’라고 생각했을 테니 괜찮긴 하지만.. 그러자 내 옆에 앉아있던 미야자키가 우치무라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역시 우치무라씨는 친절하시네요.” “다음에 피규어를 만들 때는 좀 더 신중히 생각하고 만들겠습니다.” 나에게 피규어를 전해준 우치무라는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사과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기 잠시만요.” 돌아가려던 그를 멈춰 세운 건 나였다. 나는 지갑에서 20만엔의 돈을 꺼내 우치무라의 손에 들려주었다. “우치무라씨가 만든 피규어는 제가 꼭 유키에게 전해주겠습니다. 그리고 그 돈은 당신이 만든 작품을 제가 구입한 값이라고 생각하세요. 그 돈.. 충분히 받을 만큼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 하거든요.” “가..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혹시 게임 좋아하시죠?” “무.. 물론이죠!! 펜타곤 소프트 광팬입니다!!” 우치무라의 대답에 나는 가방에서 명함 한 장과 게임 카트리지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펜타곤 소프트 제 2 개발팀 부장 강준혁입니다. 이 카트리지에 담긴 게임은 펜타곤 소프트에서 내년 상반기를 목표로 제작중인 게임의 체험판입니다. 버그가 약간 있을 수 있지만, 한번 플레이 해 보시고, 저에게 연락 한 번 주시겠어요?” 우치무라는 새로운 게임이라는 말에 내가 건넨 카트리지를 조심스레 받아 들었다. “발렌타인 데이..? 혹시 ‘내가 없는 거리’ 같은 미연시인가요?” 우치무라의 질문에 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뇨.” < EP. 19 : 노블리스 오블리주 (2) > 끝 < EP. 19 : 노블리스 오블리주 (3) > & 게임 카트리지를 받아 든 우치무라가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미야자키와 함께 타마고 샵으로 돌아가던 중 같이 식사를 하기로 했다. 어차피 가게에 돌아가도 점심시간 곧 다가오니 직원들과 식사 교대 해주려면 간단히 먹고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신주 단지 마냥 정성스럽게 포장된 ‘하세가와 미유키’의 피규어를 들고 아키바를 활보하니 여기저기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적어도 쇼핑백이라도 좀 싸서 줄 것이지.’ 내가 들고 있는 가방은 서류 가방이기에 피규어를 넣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부장님. 귀여우신데요.” “하하.. 저기 어디든 좋으니까. 빨리 가게 안에 들어가죠.” 결국 타마고샵 근처의 소바집에 들른 나는 테이블 위에 미유키의 피규어를 올려놓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부터 피규어 하나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네. “저기, 저도 그 피규어 잠깐 봐도 되요?” 미야자키의 말에 나는 차가운 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피규어에 도르르 말린 비닐을 벗겨 내고, 미유키를 꺼내 들었다. “와아.. 이렇게 보니 진짜 잘 만들긴 했네요. 색조 표현도 좋지만, 어떻게 피규어에 기모노를 입힐 생각을 했을까? 유키씨가 받으면 좋아하시겠어요.” “글쎄.. 차라리 나나세 였으면 더 좋아했을 텐데.” “아,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미야자키는 유키와 동갑내기로 둘이 굉장히 친했다. 타마고 샵을 오픈하고 첫 번째 주말에 유키는 새하얀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타마고 샵을 찾아왔다. 비록 판매 경험이 없어 서툴렀지만, 매장을 방문한 아이들에게 타마고 몬스터에 대해 설명을 해주는 유키의 모습에 때마침 직장을 구하던 그녀는 이곳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미야자키씨.” “네?” “혹시 요 며칠 사이에 조금 특이한 타마고상을 가지고 온 플레이어가 있었나요?” “특이한 타마고상이요? 아뇨, 그런 건 본적 없는데요?” 흐음. 지금쯤이면 한 두 개 정도 나타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하네. 그러자 미야자키는 내가 한 말이 신경 쓰였는지 나에게 되물었다. “혹시 새로운 타마고상이 출시 됐나요?” “아, 그건 아니구요. 하긴 미야자키씨는 아이들에게 타마고상을 설명해주는 직원이니 미리 알아두셔도 괜찮겠네요. 사실 지난달에 굉장히 소량으로 한 종류의 타마고상이 풀렸어요.” “정말요? 그것도 콜라보레이션 타마고 인가요?” 어라? 미야자키씨도 촉이 좋은데? “네. 맞아요.” “안 그래도 파이널 프론티어의 타마고만 있어 조금 아쉬웠는데, 이번엔 어느 게 임과 콜라보했나요?” “음.. 혹시 드래곤 엠블렘이라는 게임 알아요?” “아.. 들어본 적은 있어요.” 하긴 드래곤 엠블렘도 출시한지 벌써 4년이 흘렀으니, 그녀가 모르는 것도 이해가 간다. 특히 드래곤 엠블렘은 ‘유통 구조’가 굉장히 독특했기에 최근에는 아는 사람만 아는 전설의 게임이 되어 버린듯하다. 중고로 풀었던 카트리지들은 다들 그대로 소장중인지 지난 해 부터는 아예 시장에서 찾아볼 수 조차 없었다. 그래서일까? 드래곤 엠블렘은 지난달 패미통신에서 현재 가장 구하기 힘든 레어 아이템 중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녀석의 중고 거래 금액은 데이터를 복구 시켜주는 추가 확장팩을 포함해 부르는게 값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물이 전혀 없는 희귀품이 되었다. 2위는 ‘내가 없는 거리’의 히로인 카트리지 전부 수록된 초회 한정판. 3위는 뭐냐고? 조금 황당하겠지만, 사이킥 배틀의 초회 데모 카트리지 였다. 시중에 발매된 게 아니고, 소량으로 제작 하여 비매품으로 증정했던 물건이었기에 사이킥 배틀의 매니아들에게 고가에 거래되는 중이라나? 모름지기 콜렉터라면 1부터 10까지 모든 것을 손에 넣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법. 그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괜히 섭섭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이거 모으려고 한 사람들 돈 깨나 깨졌겠다. 어느 하나 쉽게 구할 만한 것이 없네..’ 현재 드래곤 엠블렘은 슈퍼 패밀리 유저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차기작에서 만나고 싶은 기대 타이틀 1순위를 매달 기록하고 있었다. 아직 인터넷이 보편화 되지 않은 시기였기에 유저들과 개발자의 소통은 이렇게 잡지의 설문 조사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유저들의 바램을 담아 제작 한 것이 바로 ‘드래곤 엠블렘의 타마고’였다. 까칠스러움에 극을 달리는 성격과 주변에 적정 온도를 맞춰주지 않으면 제멋대로 사망하는 ‘검은 타마고상’은 지금쯤이면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을 것이다. 부디 그 타마고상이 ‘드래곤 엠블렘’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이에게 닿았기를 바란다. ‘안 그러면 당장 내다 버리고 싶을 만큼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니까.’ 나는 미야자키씨와 식사하며 ‘드래곤 엠블렘의 타마고상’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러니까 기존의 타마고상이랑은 육성법이 완전히 다르네요. 좀 더 매니악하다고 할까?” “맞아요. 혹시나 검은색 타마고에 대해 물어보시면 제가 알려드린 대로 설명하면 될 거예요.” “하지만, 이렇게 되면 드래곤 엠블렘 타마고상을 구하기 위해 경쟁이 과열 되지 않을까 걱정 되네요.” 미야자키씨의 물음에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 부분은 제가 따로 생각해둔 부분이 있어요.” 그러자 그녀는 쿡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정말로 부장님은 유키씨한테 들은 대로네요.” “네?” “뭔가 항상 꿍꿍이 속을 감추고 계시다고 들었거든요.” “유키가 그런 말을 하던가요?” “저번에 같이 밥 먹다가 부장님 이야기가 나와서..” 미야자키씨는 부끄러운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아, 그런데 아까 전에 우치무라씨에게 준 카트리지는 뭐예요? 제목이 좀 특이 하던데.” “발렌타인 데이 말인가요?” “저도 펜타곤 소프트 소속이다 보니 신작이라니까 조금 신경이 쓰여서요.” 그러고 보니 미야자키씨도 게임을 좋아한댔지. 스스로 키워낸 타마고 몬스터로 샵에 놀러오는 아이들을 상대로 몬스터 배틀을 플레이하는 그녀의 모습을 종종 본 적이 있었다. 아직 내 가방 안에는 여분의 카트리지가 하나 더 준비 되어 있었기에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괜찮으시면 미야자키씨도 플레이 해보실래요?” “정말 저도 해볼 수 있어요?” “휴게실에 슈퍼 패밀리가 있으니 퇴근하고 플레이 시켜드릴게요.” & 발렌타인 데이. 얼핏 들으면 우치무라의 예상처럼 미연시 물이 아닐까 착각이 들겠지만, 사실 이 게임은 내가 어렸을 때 플레이 했던 ‘시계탑의 살인마’라는 게임과 국산 게임 중 하나에서 영감을 얻은 ‘호러물’이었다. 이 게임의 주인공은 사랑하는 연인끼리 카드를 주고받는 날인 발렌타인 데이의 취지에 입각해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고백을 시도하려는 내용인데, 게임의 내용은 굉장히 심플하다. 발렌타인 데이의 전날 밤인 2월 13일 밤.. 친구들 몰래 그녀에게 고백하기로 한 주인공이 편지를 들고 학교에 숨어들어 그녀의 책상에 편지를 넣고 돌아오면 된다. 달랑 그게 끝이냐고? 물론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면 말이지.. 그 날 밤. 모두가 퇴근한 뒤 미야자키씨가 기대에 찬 얼굴로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장님. 모두 돌아갔어요.” “수고 하셨어요.” “그런데 휴게실이 왜 이리 어둡죠? 전등이 나갔나?” “미야자키씨.” “네?” “혹시 공포영화 좋아해요?” 내 물음에 미야자키씨는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갑자기 공포영화는 왜요?” “그냥 궁금해서요.” 나는 대답과 동시에 카트리지를 슈퍼 패밀리에 꽂아 넣으며 그녀에게 소파를 권했다. “저기 앉으세요. 저는 옆에서 미야자키씨의 플레이를 보고 있을게요.” 잠시 머뭇거리던 미야자키씨가 천천히 패드를 집어 들자. 나는 살짝 웃으며 전원 버튼을 올렸다. 딩~ 딩딩딩딩~ 딩딩딩딩~ 딩딩딩딩~ 딩딩딩딩~ 발렌타인 데이의 체험 카트리지는 타이틀 화면 없이 소름끼치는 BGM과 함께 그대로 게임이 진행 되었다. 본래라면 고백하고 싶은 여성 캐릭터에 따라 등장하는 ‘귀신’이 달라지지만, 체험판 패키지에서는 히로인을 택하는 프롤로그 스토리를 배제하고 곧바로 학교로 들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부장님.. 이거 설마 공포물인가요?” 옆에 서있던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미야자키씨는 울상을 지으며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속았다..” 하지만 때는 늦었지.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그녀의 플레이를 지켜보았다. 우선 ‘발렌타인 데이’는 2D 횡스크롤 형식을 따르고 있었다. 즉 왼쪽과 오른쪽으로 밖에 움직일 수가 없기에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선 달리기 버튼 밖에 사용할 수가 없었다. 불이 꺼진 아무도 없는 학교에 대한 공포. 어렸을 때 흔히들 들어본 학교의 7대 불가사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입이 귀까지 찢어진 빨간 마스크. 아무도 없는 음악실에 혼자서 울리는 피아노 소리. 어두운 교실에 혼자서 공부중인 학생. 전교 2등의 질투로 인해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전교 1등이 거꾸로 뒤집힌 채 머리를 찍으며 학교를 배회하는 이곳이 바로 ‘발렌타인 데이’의 무대였다. 미야자키씨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으스스하지만 낯익은 BGM에 고개를 갸웃 거리다가 퍼뜩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부장님.. 이거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 아닌가요?” “맞아요. 사운드 템포를 굉장히 느리게 늘린 거예요.” “어쩐지 많이 들어봤다 싶었더니..” 이윽고 주인공이 학교 운동장에 들어서고, 미야자키씨는 조심스레 남자 주인공을 앞뒤로 움직여 보았다. 주인공의 조작은 좌우 방향키를 사용하고, 책상 밑으로 숨을 수 있었다. 그리고 버튼 조작에서는 달리기 버튼과 물건 사용하기가 있었는데, 독특한 것은 ‘숨참기’라는 버튼이 있었다. Y버튼을 누르면 주인공은 숨을 멈출수 있었는데, 그 상태에서는 귀신의 눈을 피해 숨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호흡 게이지가 있어 계속 숨을 참을 수 없게 장치를 만들어 두었다. 잠시 후. 나의 설명을 모두 들은 미야자키씨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구 교사 건물로 향하기 시작했다. 발렌타인 데이에는 구 교사와 신 교사 두 개의 건물이 있었는데, 어드벤쳐 장르답게 퍼즐 요소도 준비해 두었다. 끼이이익..... 듣기에도 굉장히 거북스러운 경첩소리가 울리고, 어두운 구 교사에 발을 들인 미야자키씨는 불을 켜기 위해 스위치부터 찾았다. 삐걱거리는 발자국 소리를 울리며 벽에 설치된 스위치를 찾은 미야자키는 선택 버튼으로 불을 켜 보았다. 어두운 복도에 불이 켜지자, 미야자키씨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콰아아앙!!!!!! 천둥소리와 함께 복도에 설치 된 전등이 깜박 거리더니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반복해서 울리던 BGM도 어느새 잦아들고, 어두운 복도는 번개가 내려칠 때마다 잠시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하나요..?” 미야자키씨의 물음에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2층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녀는 잔뜩 몸을 움츠린 채로 방향키를 조작해 주인공을 이동 시켰다. 화면 위에 보이는 미니 맵으로 계단의 위치를 파악한 미야자키씨가 다시 한걸음을 떼려는 찰나. 화면이 새하얗게 번쩍이더니 화면의 왼쪽 끝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저게..? 뭐죠?” 밧줄에 목이 걸린 채 좌우로 흔들거리는 그 것은 누가 봐도 정상 적인 캐릭터로는 보이지 않았다. < EP. 19 : 노블리스 오블리주 (3) > 끝 < EP. 19 : 노블리스 오블리주 (4) > “저게..? 뭐죠?” 밧줄에 목이 걸린 채 좌우로 흔들거리는 그 것은 누가 봐도 정상 적인 캐릭터로는 보이지 않았다. “저 녀석을 지나갈 때는 숨을 참고 지나가야 돼요. 들키면 골치 아플 테니..” 나의 충고에 미야자키는 호흡 게이지를 체크한 뒤에 천천히 녀석에게 다가갔다. 다행히도 밧줄에 목이 매달린 녀석은 등을 돌리고 있어, 주인공이 다가가는 걸 모르고 있었다. 끼이익... 끼이이익..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복도 가운데서 흔들리는 녀석을 스쳐 가면서 플레이 중인 그녀도 함께 호흡을 멈추고 있었다. 그 순간. -어디 가..?- “꺄아아악!!!” TV에서 흘러나온 소름끼치는 음성에 깜짝 놀란 미야자키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주인공의 호흡을 담당하는 Y버튼에서 손이 떨어졌다. “달려요!!” 이미 귀신에게 들킨 순간 다시 호흡을 멈춰 봤자 소용이 없다. 미야자키는 나의 외침에 B버튼을 눌러 주인공을 복도 끝으로 빠르게 이동시켰다. 그 순간 목을 맨 시신이 바닥으로 툭하고 떨어지더니.. 영화 ‘엑소시스트’의 한 장면처럼 몸을 뒤집은 채 네 발로 기어오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꺄아아악!!!” 기괴한 몸짓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물체에 놀란 미야자키는 계속해서 비명을 내지르며 달리고 있었다. “거기 계단!! 빨리 2층으로 올라가요!!” 미야자키씨는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서도 내 말은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주인공을 조작해 계단을 올랐다. 그 순간 화면이 바뀌며 어두컴컴한 2층 복도가 나타났다. 하지만 여전히 주인공을 쫓아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어떡해요?” “교실에 들어가 숨어요.” 그녀는 눈앞에 있는 교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일렬로 줄지어 있는 교실로 장소가 바뀌었다. “일단 방향키를 조작해서 숨어요. 위를 누르면 책상 위로, 밑으로 누르면 책상 밑으로 숨을 겁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판단은 책상 밑이었다. 어라? 그건 별로 안 좋은 생각인데? 하지만 이미 늦었다. 드르르륵.. 교실의 문이 열리자 미야자키씨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호흡을 멈추고 있었다. 탁.. 탁.. 탁... 주인공이 숨어 있는 책상으로 가까이 다가온 귀신은 잠시 그 앞에서 왔다갔다 맴돌기 시작했다. “흡.. 흡..” 게임 속의 주인공처럼 숨을 멈춘 채로 어깨만 들썩이던 그녀는 잠시 후. 귀신이 교실 밖을 빠져나가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Y 버튼에서 손을 뗀 순간.. 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 미칠듯한 효과음과 함께 녀석이 교실 안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책상 밑에 숨어 있던 주인공과 눈이 마주친 순간. -찾.. 았다..- 거꾸로 뒤집힌 채 피 눈물을 쏟으며 웃고 있는 여성의 얼굴이 클로즈 업 되며 화면이 붉게 물들었다. -GAME OVER.- “어때요? 미야자키씨..?” 하지만 그녀는 내 질문에도 양 손에 패드를 꽉 움켜쥔 채 아무 대답이 없었다. “미야자키씨?” 그녀를 부르며 어깨에 손을 올리자.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그녀의 몸이 스르르 소파 옆으로 쓰러졌다. 허억!! 기절했어!? “미야자키씨!? 미야자키씨!!” “부장님.. 으윽.. 흑.. 어누앵요..” “네??” “너무하다구요!! 이런 게임에 어떻게 ‘발렌타인 데이’라는 제목을 붙여 놓을 수 있어요!?” 그야.. 재밌으니깐.. 딩~ 딩딩딩딩~ 딩딩딩딩~ 딩딩딩딩~ 다시 처음 화면으로 돌아가 프롤로그 도입부의 테마음이 울리자, 미야자키는 서 둘러 슈퍼 패밀리의 전원 버튼을 내려버렸다. 아무래도 충격이 좀 큰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진짜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럼 제가 의도한 바는 성공이네요.” 휴게실 불을 환하게 켜자, 미야자키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슈퍼 패밀리에서 카트리지를 뽑아내 가방에 챙겨 넣은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퇴근하셔야죠?” “부장님. 우치무라씨는 괜찮을까요?” “아마.. 몇 번 하다보면 내성이 생길 테니 괜찮겠죠?” “제가 보기엔 겁이 좀 많아 보이던데..” “아.. 그러고 보니 그 얘기를 깜박했네.” “네? 무슨 얘기요?” “이 카트리지.. 계속 슈퍼패밀리에 꽂아두면 안 되거든요.” “왜요?” “카트리지 안에 전격 송출 장치가 있어서.. 장시간 꽂아두면 조금 재밌는 일이 벌어져요.”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음.. 그러니까. 전원이 꺼져있는 슈퍼 패밀리가 자동으로 켜진다고 해야 하나?” “히익..” “정식 판에서 넣을까 말까 하는 기능인데, 일단 체험 판에는 넣어 두었거든요. 우치무라군. 정말 괜찮으려나..?” 그날 밤. 결국 나는 미야자키씨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발렌타인 데이의 괴기스런 일러스트는 타마고 몬스터 공모전의 영향이 컸다. (모리타에게 일러스트 한 장을 맡겨 봤는데, 남자의 양기를 다 빨아 먹게 생긴 굉장히 색기 넘치는 요괴의 모습에 일찌감치 포기했다.) 타마고상에 필요한 귀여운 디자인의 몬스터 말고도 괴기스런 몬스터 그림을 별도로 취합해두었던 나는 공모전이 끝난 후 따로 그들을 찾아가 보았다. 그중에서도 발군의 센스를 지녔던 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그린 ‘뒤집힌 여자’라는 작품은 일러스트 한 장만으로 꽃놀이의 분위기를 와장창 깨부술 만큼 충격적인 일러스트였다. 그리고 그것을 모티브로 만든 귀신이 바로 미야자키씨를 기절하게 만든 녀석이었다. 학교라는 누구에게나 친숙한 장소를 통해 온갖 괴담을 뒤섞어 만들어낸 이 작품은 특히나 사운드에 굉장히 공을 많이 들인 작품이었다. 빈약한 슈퍼 패밀리의 사운드 칩을 어떻게든 쥐어 짜내어 녹음했지만, 역시나 퀄리티 유지가 힘들었던 탓에 나는 일부러 사운드를 뭉게 버리기로 결심했다. 그 결과.. 일부 잡음이 섞여 있는 ‘발렌타인 데이’의 사운드는 중간 중간 지직 거리는 잡음이 섞여 더욱 괴기 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소 뒷 걸음 치다가 쥐 잡은 격이지. 뭐..’ 다음 날. 펜타곤 소프트에 도착한 나는 담배 한 대를 입에 문 채 높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지난 여름. 허름한 4층 건물의 전체를 사용하던 펜타곤 소프트는 신식 빌딩으로 이사를 완료했다. 타마고 몬스터 디자이너들의 합류로 직원도 기존보다 3배가 늘어났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조금 더 쾌적한 환경에서 직원들과 일하고 싶다는 생각. 어찌 보면 한 회사를 이끄는 대표로서 가장 먼저 해야하는 생각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전문 학원과 대학교를 대상으로 한 ‘입사하고 싶은 회사 베스트 10위’ 안에 펜타곤 소프트가 들어가게 되었다. 펜타곤 소프트는 굳이 직원들의 출근을 강제하지 않았다. 출근 시간도 직장인들의 러시아워를 피해 오전 11시로 잡아 두었다. 점심시간은 1시부터 2시 반까지 한 시간 반 동안 여유 있게 먹을 수 있었고, 회사 근처에 지정된 식당을 이용할 때는 모든 식대는 회사에서 결재한다. 퇴근은 오후 5시 30분. 그 이후에는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회사에 남아 있을 수 없다. 모두 반드시 퇴근을 해야만 했다. 물론 직원이 원할 경우엔 작업 계를 신청하고 업무를 연장할 수 있었는데, 그에 따른 추가 수당도 확실히 지급되고 있어 직원들은 자율적으로 자신의 퇴근 시간을 조절할 수 있었다. 일부 직원들은 퇴근길에 러시아워도 피하면서 돈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늦게까지 남아있는 경우가 있지만, 가정이 있는 직원들은 대부분 정시에 퇴근하는 편이었다. 8시 이후에는 점심시간과 마찬가지로 회사 근처의 식당에서 저녁을 해결 할 수가 있었기에 집에 돌아가 혼자서 밥을 차려먹는게 싫은 직원들은 일부로 남는 경우도 있었지만.. 물론 이 제도를 시행하기 전에 직원들의 복지에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니냐고 카와 구치 대표가 걱정했지만, 현재 펜타곤 소프트가 벌어들이는 총 수익과 근무하는 직원들의 수를 비례해보면 그들은 한 명당 회사에 천만엔 이상의 수익을 올려주고 있었기에 나는 전혀 그 돈이 아깝지 않았다. 민텐도. 아니.. 1983년으로 타임리프하기 전부터 만약에 내가 한 회사를 이끄는 오너라면 꼭 이루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런 부분이었다. 억지로 회사에 앉혀놓아도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면 그 직원을 쉬게 해주어야 한다. 강압적으로 쥐어 짜내는 결과물은 유연한 사고방식을 저해 시킨다. 그래서일까? 작년보다 직원이 3배가 늘었어도 펜타곤 소프트는 사내 분위기는 굉장히 부드러웠다. 굉장히 엄숙한 직장 분위기를 지향하는 일본의 풍토와는 조금 맞지 않지만, 그래서 인지 몰라도 펜타곤 소프트는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ID카드를 체크하고 사무실에 설치된 자동문이 열리자 카와구치씨의 비서를 겸하는 사유리씨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강준혁 부장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사유리씨.” “아, 부장님. 방금 전에 민텐도에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카와구치 대표님께서 부장님이 출근하시면 대표이사실로 꼭 와달라고 부탁하셨어요.” “손님이요? 혹시 누군지 알고 계시나요?” “민텐도 소속의 니세코이 군페이씨입니다.” 으잉? 군페이씨가 펜타곤 소프트에? 나이도 있으신데 먼 길 오셨군. 하긴 이쯤 되면 민텐도에서 뭔가 연락이 올 것만 같았기에 그다지 놀랄 것도 없었다. 올해 초에는 ‘내가 없는 거리’ 그리고 여름에는 ‘타마고 몬스터’가 대 히트를 기록하며 펜타곤 소프트는 현재 게임 업계에서 절대로 무시 할 수 없는 한 ‘축’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얼 노리고 찾아 왔는지 대충 감이 오긴 하는데..’ 나는 사유리씨에게 알려줘서 고맙단 인사를 건네고, 내가 근무하는 제 2 개발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좋은 아침.” “아~!! 부장님!!” 개발실에 들어오자마자 예상대로 모리타와 하야시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부장님. 지금 대표이사 실에 누가 와계신지 아십니까?” “알고 있어. 군페이씨가 오셨다며?” 펜타곤 소프트에 입사 후 나는 모리타와 하야시에게 말을 놓았다. 상사가 존칭을 써주는 건 고맙지만, 자기들 마음이 불편하다나? 사이킥 배틀 이후로 내가 없는 거리까지 셋이서 어울려 다닌 것도 벌써 3년째가 되다보니 이젠 그냥 친구 같은 느낌이 들지만.. “알고 계셨어요?” “응. 들어오는 길에 사유리씨가 알려줬어.” “그렇구나.. 근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군페이씨 같은 중역이 직접 찾아오다니 대체 무슨 일 일까요?” “뭐 별거 있겠어? 카마우치 사장이 꼬투리 좀 잡아오라 시켰겠지.” 민텐도 입장에서 펜타곤 소프트는 현재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마찬가지니까. 뭔가 딜을 걸어오지 않을까? 일단 카와구치씨에게는 최종 결정권이 없으니 이야기를 질질 끌고 있을게 뻔하다. “그럼 대표이사 실에 좀 잠깐 다녀올게.” 나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야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는 대표이사 실로 향했다. 제 2개발 팀과 대표이사 실은 복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꽤나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나는 잠시 목을 가다듬고 가볍게 노크를 시도하려는 찰나. 방 안에서 군페이씨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뿌아아아악!!!” ... 보통 ‘으악’이나, ‘으아악’ 아닌가? ‘뿌아아아악’이라니 내 살다 살다 저런 비명소리는 처음 들어 보는군. 군페이씨의 비명소리만 들어도 안에서 대충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것 같아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 EP. 19 : 노블리스 오블리주 (4) > 끝 < EP. 19 : 노블리스 오블리주 (5) -4권 끝- > 똑. 똑. 가볍게 노크를 마치고 대표이사 실의 문을 열어젖히자, 내 눈앞에는 새하얗게 질린 표정의 군페이씨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군페이씨.” “어? 어어, 강군. 오랜만이군.” 슈퍼 패밀리의 게임 패드를 내려놓으며 식은땀을 훔치는 군페이씨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카와구치씨 역시 입주변이 실룩거리는 걸보니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번에 펜타곤 소프트에서 제작중인 게임이라고 해서 플레이 해봤는데,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네.” 비서가 가져온 음료수를 삼키던 군페이씨는 TV에서 흘러나오는 소름끼치는 BGM에 치를 떨면서도 한편으론 감탄하고 있었다. “고음질의 사운드를 포기하고 일부러 사운드를 뭉게 뜨려 놓음으로서 분위기를 더 긴장시키다니. 민텐도에서도 느꼈지만, 역시 강군의 아이디어는 항상 기발하군. 시게군도 플레이해보면 분명 깜짝 놀랄 거야.” 군페이씨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슈퍼 패밀리의 전원을 내린 후.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카마우치 사장님이나 시게씨는 잘 지내시나요?” “물론이지. 지난 여름에 출시된 타마고 몬스터 덕분에 현재 휴대용 겜보이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거든. 최근에 카마우치 사장님조차 타마고상을 플레이하고 계시더군.” “카마우치 사장님도요? 그 것 참 의외네요.” “자네가 만든 작품이라니까 굉장히 좋아 하시면서도 한 편으론 굉장히 서글퍼 하시더군. 자네를 끝까지 붙잡지 않은 걸 굉장히 후회하시는 모양이야.” “하하.. 말씀만으로도 감사하네요.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찾아오신 건가요?” “아, 그렇지. 사실 이번에 민텐도 내부에서 회의를 한 결과. 펜타곤 소프트에 굉장히 좋은 소식을 전하러 왔네.” “좋은 소식이요?” 그러자 군페이씨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펜타곤 소프트가 우리 민텐도의 세컨드 파티가 되어 주었으면 한다네.” “네에!?” 카와구치 사장도 군페이씨의 말에 깜짝 놀랐는지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세컨드 파티.. 이 용어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하자면 콘솔 게임 업계에는 ‘퍼스트 파티’와 ‘세컨드 파티’ 그리고 ‘서드 파티’가 존재한다. 그 외로는 1인 개발이나 2~3명이서 제작하는 인디 게임도 있지만, 이것은 논외로 치고.. 우선 퍼스트 파티는 콘솔을 제작한 업체가 자사 브랜드로 출시하는 게임을 말한다. 예를 들자면 시게씨가 만드는 슈퍼마리지와 카린의 전설. 동킹콤 등이 이에 해당된다. 콘솔을 만드는 회사에서 직접 게임을 만드는 만큼, 퍼스트 파티의 게임이 다른 콘솔로 컨버젼 되어 출시할 확률은 0%다. 어릴 적 슈퍼 패밀리를 가지고 놀면서 왜 NEGA 드라이브의 ‘슈퍼 소니크’가 출시되지 않는 것에 대해 궁금해 한 적이 있었다. 그것만 나와 준다면 최강의 게임기가 될 수 있을 텐데.. 그 당시에 슈퍼 패밀리의 인기를 정말 하늘을 찌를 정도였기에 언젠가 ‘슈퍼 소니크’가 출시 될 거라 기대했지만, 결국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두 번째로 ‘서드 파티’ 왜 세컨드 파티가 아닌 서드 파티를 먼저 설명 하느냐고 묻는다면 보편적으로 게 임을 만드는 회사들은 바로 이 ‘서드 파티’에 소속 되어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드 파티는 퍼스트 파티와는 달리 어느 회사의 콘솔로든 자유롭게 게임을 출시할 수 있었다. 여건과 기술력만 받쳐준다면 슈퍼 패밀리와 NEGA 드라이브용 게임을 동시에 제작해 출시할 수도 있었다. 또한 유저들의 요청에 따라 차후에 다른 회사의 콘솔로도 비교적 자유롭게 게임을 출시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서드 파티였다. 물론 90년대 초반인 이 시대에는 민텐도의 독주체제라고 해도 될 만큼 모두가 민텐도에 충성하던 시기였기에 서드 파티라곤 해도 거의 대부분 슈퍼 패밀리로 게임을 출시하곤 했었다. 하지만, 서드 파티의 단점이 있다면 게임을 출시할 때마다 민텐도에 엄청난 금액의 로열티를 지불해야 했기에 손익분기점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만약에 큰 돈을 투자한 게임이 흥행에 실패한다면, 그 모든 책임을 혼자 짊어지고 망해 버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래서일까? 패밀리 시대 때 엄청나게 생겨났던 게임 회사들은 이제 준 메이저급 이상만 남기고 거의 모두 사라져버렸다. (이런 와중에 새로 생겨나는 소프트 회사도 넘쳐 나긴 하지만..) 현재 펜타곤 소프트의 위치는 위에 두 가지 부류 중 ‘서드 파티’에 속해 있었지만, 민텐도에서 출시한 콘솔 게임만 제작하고 있었다. 드래곤 워리어를 제작하는 피닉스 소프트처럼 서드 파티 치고 민텐도에서 만드는 콘솔에 꽤나 충성도가 높은 편이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세컨드 파티’가 남았는데.. 여기까지 들었으면 누구나 예상했겠지만, ‘세컨드 파티’란 서드 파티인 회사가 퍼스트 파티의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회사명을 그대로 유지 하되 그 회사에서 출시하는 게임은 무조건 퍼스트 파티가 만들어낸 콘솔용으로만 제작해야하며 다른 콘솔로 컨버젼이 불가능하다. 대신 민텐도에게 건네는 로열티를 최소화 시킬 수 있고, 민텐도의 이름과 함께 출시되는 만큼 인지도가 생겨 어느 정도 판매수익이 보장되어 있었다. 현재 수많은 게임 회사들이 바로 이 민텐도의 세컨드 파티가 되고 싶어 했는데, 그 이유는 어차피 ‘서드 파티’로 남아 있더라도 제작하는 게임은 전부 슈퍼 패밀리용을 제작 중이기 때문이다. 일본 내에서 최고의 인지도와 보급률을 가진 ‘슈퍼 패밀리’의 파급력을 무시 할 수 없었기에 얼핏 군페이씨의 제안이 굉장히 달콤하게 느껴질 수 있었다. 카와구치씨 역시 군페이씨의 솔깃한 제안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그것은 다시 민텐도 밑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세컨드 파티가 되면 민텐도로부터 투자나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제작기간이라던가 게임의 스토리, 컨셉, 장르에 대해 일일이 보고 해야 하는 강제성을 띄게 된다. ‘즉 발렌타인 데이 같은 게임의 출시는 꿈도 못 꾸게 되겠지.’ 카와구치씨는 군페이씨의 제안에 고심하는 척하면서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나는 그런 카와구치씨를 향해 살짝 코끝을 문지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의 제안을 거절하라는 사인. “펜타곤 소프트가 저희 민텐도의 세컨드 파티가 되어 준다면 카마우치 사장님께서도 그에 상응하는 최고의 대우를 해드리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이번 체결은 현재까지의 게임 역사상 가장 유래가 없는 최고의 파트너 쉽이 될 것이니까요.” 하지만 이미 내 사인을 알아차린 카와구치 대표는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민텐도의 제안에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때였다. -끼야야야야아아아아악!!!!!!!!- “으어어억!!” “뿌아아아아아악!!!!!” “씨발!! 깜짝이야!!” (나도 모르게 한국어가 튀어 나왔다.) 슈퍼 패밀리에 꽂혀 있던 발렌타인 데이의 체험판 카트리지를 제거하는 걸 깜빡한 결과. 자동으로 슈퍼 패밀리의 전원이 켜지며 화면에 뒤집힌 여자의 끔찍한 얼굴이 튀어나온 것이다. “어휴.. 놀래라..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나는 서둘러 슈퍼 패밀리 슈퍼 패밀리의 전원 버튼을 올렸다 내린 뒤 카트리지를 뽑아 내었다. 그러자 카와구치 대표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주.. 준혁씨. 아무래도 저 기능은 그냥 빼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럴까요? 하하.. 제가 만들었지만, 이건 좀 심한 것 같네요. 심장 마비 걸리는 줄 알았네. 죄송해요 군페이씨.” 하지만 군페이씨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군페이씨?” “…….” “큰일 났다. 대표님 빨리 119 불러요!! 군페이씨!!! 정신 차려요!!” 나는 넋이 나간 군페이씨를 서둘러 소파에 눕히고 힘차게 가슴을 내리 누르며 심폐소생술을 실시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커헉!! 쿨럭.. 어억!!” 다행히 군페이씨의 정신이 돌아왔다. 우와.. 이 정도로 놀랄 줄이야. 하마터면 살인자가 될 뻔했어.. & 삐뽀.. 삐뽀.. 삐뽀.. 제정신을 차렸지만,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리에 힘이 풀린 군페이씨는 결국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나와 카와구치씨 역시 사태가 이 지경이 된 책임(?)이 있었기에 차를 타고 그 뒤를 따랐다. 병원으로 향하던 중에 내옆에 타고 있던 카와구치씨가 나에게 물었다. “어째서 군페이씨의 제안을 거절하신 겁니까? 현재 모든 서드 파티가 원하는 것이 민텐도의 세컨드 파티가 되는 것인데, 준혁씨의 결정에 조금 이해가 안가는 군요.” “카와구치씨가 궁금해 하시는 부분. 저 역시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 더 멀리 봐야 해요.” “조금 더 멀리?” “지금의 민텐도는 아무도 손을 댈 수 없는 최고의 콘솔 기업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시대가 영원히 가진 않을 거예요.” “네? 그 말은 설마 민텐도가 무너질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왕좌에 오랫동안 앉아 있다 보면 말이죠. 세상의 모든 게 하찮게만 느껴질 때가 옵니다. 민텐도는 너무 오랫동안 왕좌에 머물러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현재의 게임 시장에 아무런 긴장감도 느끼지 못하고 있죠.” “하지만, 마땅히 그들과 대적할만한 기업이 없지 않습니까?” “맞아요. 현재는 민텐도가 최고의 콘솔 기업입니다. 하지만 몇 년 뒤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 올 겁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새로운 흐름을 놓치지 않는 겁니다.” “새로운 바람이라..” 카와구치씨는 나의 말에 고개를 갸웃 거렸지만,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하긴 내 말을 들어서 손해 본 적이 없으니깐.. & “니세코이 군페이씨 보호자분?” “아, 네!!” 간호사의 목소리에 의자에 앉아 대기하고 있던 나와 카와구치씨가 서둘러 달려갔다. “환자분께서 굉장한 쇼크를 받으신 것 같아서 일단 진정제 놓아 드렸습니다. 오늘 하루 푹 쉬시고 내일 퇴원하시면 되실 거예요. 그런데 환자분이 쇼크를 받은 원인이 무엇인가요?” “네? 아, 그게 게임 때문에..” “게임이요?” 간호사는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거리더니 차트에 무언가를 작성하고 돌아갔다. 다행히 별 이상이 없다는 말에 나와 카와구치씨는 크게 안도하며 문을 열고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군페이씨. 몸은 좀 괜찮으세요?” “허허.. 이거 참 창피하군. 그깟 게임 화면 하나 보고 혼절하다니. 그런데 그 슈퍼 패밀리 전원을 꺼두지 않았었던가?” “맞아요.”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게임화면이 나온거지?” “그게, 카트리지 안에 전격 송출 장치를 넣어 두었거든요. 시간이 흐르면 카트리지 안에서 발생한 전기 쇼크로 저절로 슈퍼 패밀리에 전원이 들어오도록..” “그런 것이 가능한가?” “눈으로 직접 보셨잖아요.” “허허.. 직접 봤지만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군. 이것도 강군 자네의 아이디어인가?” “네. 그런데 아무래도 그 기능은 제거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군페이씨처럼 기절 하면 어떡합니까..” “그래. 장난 치곤 조금 심하더군.. 하하하~” 그래도 나와 오래 알고 지내온 사이라 그런지 군페이씨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음에도 그저 웃어넘기려는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냐. 역시 강군은 지금도 재밌는 생각을 하고 있군.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유저들의 약을 바싹 올려 볼 수 있을까?’ 하고 말이야 하하~ 그래.. 아마도 그때부터겠지? 드래곤 엠블렘을 만들어 냈을 때부터 말이야..” “네?” “강군. 이 내 눈이 옹이구멍으로 보이나? 내가 비록 나이는 먹었어도 바보는 아니라네. 드래곤 엠블렘에 사용된 커스텀 칩. 그리고 그 의문의 이 메일 주소.. 숫자는 모르겠지만, kjh라는 한국인 개발자가 자네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네.” “아..” “자네가 힌트를 너무 많이 주었지.” “그런가요? 하하.. 그럼 혹시 시게씨나 카마우치 사장님도?” “아니. 내가 보기에 그들은 거기까진 모르는 것 같더군.” “하긴 알았으면 카마우치 사장님이 가만 놔 둘리 없으셨겠죠.” 군페이씨는 빙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비록 나이차가 많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오랫동안 함께 일을 해오다보니 그간 많은 정이 쌓인 느낌이었다. 나는 잠시 동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군페이씨. 아까 병원에 오면서 카와구치씨와 이야기 해보았는데, 저희 펜타곤 소프트는 민텐도의 제의를 거절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 어째서? 현재 모든 게임 회사들이 우리 민텐도의 세컨드 파티가 되기를 원하던데..” 군페이의 질문에 나는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그야 민텐도로 가버리면..” 잠시 뜸을 들이던 나는 결국 빙긋 웃으며 뒤에 말을 이었다. “발렌타인 데이 같은 게임을 만들 수 없잖아요.” 그러자 군페이씨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하긴 그것도 그렇군..” “저는 좀 더 다양하고 새로운 장르의 게임을 만들고 싶거든요.” < EP. 19 : 노블리스 오블리주 (5) -4권 끝- > 끝 < 단편 : 발렌타인 데이 in 우치무라 > -펜타곤 소프트 제 2 개발팀 부장 강준혁.- 전철 안에서 나는 명함을 가방 안에 쑤셔 넣으며 생각에 잠겼다. 비록 미유키의 피규어를 강준혁이라는 사람에게 건네주게 되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아마 그 사람이라면 유키씨에게 잘 전달해 줄 것이 분명 하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방이 허전하지만, 대신 항상 빈곤했던 지갑만큼은 웬일인지 두둑하다. 설마 내가 만든 피규어 하나가 덮밥집 아르바이트 한 달 월급보다 더 많은 수익을 가져다 줄 줄이야.. 거기다 그 사람에게 받은 새로운 게임의 카트리지도 있다. 그것도 아직 일반인에게는 공개되지 않은 펜타곤 소프트의 최신작!! 그 이름도 아름다운 ‘발렌타인 데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아름다운 미소녀들이 초코렛을 들고 나에게 달려올 것만 같았다. 슈퍼 패밀리의 카트리지는 전작인 패밀리의 카트리지 보다 훨씬 더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회색빛의 카트리지의 전면은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슈퍼 패밀리에 카트리지를 장착해도 전면 부착된 타이틀 스티커를 가리지 않아 보기 만해도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전철에서 내린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자주 들리는 도시락 집에 들렀다. 오늘은 지갑도 두둑하니 조금 비싼 도시락을 사볼까? “어머, 우치무라군. 오랜만이네. 오늘도 돈까스 도시락 하나?” 언제나 제일 싼 돈까스 도시락만 먹다보니 이젠 물어보지 않아도 알아서 챙겨 주시는 구나. 하지만 오늘 만큼은 다른 메뉴를 선택해야지. “아뇨. 훈제 연어와 소고기 스테이크 도시락으로 주세요.” “오늘 월급날이야? 그래~ 가끔은 돈까스 말고 고기랑 생선도 먹어야지. 아줌마가 반찬 많이 담아 줄게~” “감사합니다~” 곧이어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진한 소고기의 풍미가 나의 코끝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조금이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 어서 빨리 발렌타인 데이를 플레이 해볼 생각뿐이었다. “자, 여기 1,480엔~” 항상 480엔짜리 돈까스 도시락만 먹다가 천 엔이 더 붙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이 정도 사치쯤이야. 지금 내가 가진 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나는 빳빳한 1만엔짜리 지폐로 계산을 마친 뒤, 묵직하게 전해져오는 도시락 비닐을 손에 든 채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어~!! 우치무라형이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집 앞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던 요다 녀석이 나를 보자 마자 달려와 재잘 거리기 시작했다. “형, 형~!! 나 형이 준 바하무트로 이 동네 애들이랑 배틀 해서 다 이겼다. 굉장하지?” “어, 그래. 대단하구나.” 어서 집으로 가고 싶었던 나는 요다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발길을 돌렸다. “뭐야~ 오늘따라 왜 이리 차가워?” “형이 오늘 좀 바빠서 그래.” “저번에도 배틀 한번 해달라니까 요상한 인형 옷 만든다고 안 놀아줬잖아~!!” ‘솔직히 내가 너랑 놀아줄 나이는 지났지.’ 나는 자꾸만 내 팔에 엉겨 붙은 요다 녀석의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음에 놀아줄게.” 크으~ 방금한 손동작은 내가 봐도 멋지군. 쿡쿡쿡.. 쿨하게 녀석을 스쳐 지나 집으로 올라가는데, 뒤에서 요다 녀석의 벙찐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형 요즘 이상해..” & 저녁에 아르바이트를 나가려면 지금부터라도 눈을 붙여 둬야하지만, 새로운 게 임을 이대로 방치해 두는 건 ‘죄악’이나 다름없기에 나는 서둘러 TV를 켜고 슈퍼 패밀리의 카트리지에 발렌타인 데이를 꽃아 넣었다. ‘아차차.. 게임도 좋지만, 소고기 스테이크가 식어버리면 맛이 없어지잖아. 안 그래도 배가 고프니 밥을 먹고 시작하자.’ 우선 식사를 먼저 하기로 생각을 바꾼 나는 곧 조그만 1인용 밥상을 가져와 상다리를 펼쳤다. “이거 참. 정리 좀 하고 살아야지.. 피규어 만들기 시작하고 부턴 집이 완전 난장판이네..” 그도 그럴 것이 바닥에는 어제부터 도색을 기다리는 나나세의 피규어 부품들이 스티로폼 위에 촘촘히 박혀 있었다. 나나세 피규어도 어서 작업을 시작해야하는데.. 최초로 만든 하세가와 미유키의 피규어가 어마어마한 가격에 입찰되었을 때 느낌 쾌감을 떠올리자, 눈앞에 있는 피규어 들이 갑자기 돈 줄로 보이기 시작했다. ‘잘 만 하면 덮밥 집에서 밤새워 아르바이트 하는 것 보다 더 큰 돈을 만질 수도 있겠어. 그러려면 다음 피규어도 빨리 제작해야겠지?’ 결국 나는 도시락을 바닥에 내려놓은 채 식사와 동시에 나나세의 도색 작업을 시작했다. 이미 어떤 식으로 그녀의 옷차림을 꾸밀지 생각해두었기에 밥알을 씹어 삼키면서도 작업은 매우 순조로웠다. 최근에 캐릭터 상품의 인기가 치솟아 오르며 다양한 종류의 피규어가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모두 공장에서 도색을 입혀서 그런지 제품들의 퀄리티가 각양각색이었다. 아무리 원작자가 직접 감수를 한다고 해도 그 많은 제품을 일일이 손볼 수 없겠지. 하지만 이렇게 직접 피규어 도색 작업을 해보니 생각보다 만족도가 매우 높다. 그래서인지 최근에 나는 이 작업에 커다란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없는 거리’의 주제가를 흥얼거리며 가느다란 붓으로 나나세의 눈썹을 그린 나는 에나멜을 굳히기 위해 차가운 입김을 불었다. 그때.. 바람에 스치듯 조그만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 -거기서 뭐해...?- “보면 몰라? 피규어 도색하고 있잖…….” 헐.. 뭐지? 방금 무슨 목소리가? -여기 좀 봐 봐..-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TV 화면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순간. 심장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끼야야야아아아악~!!- “우으아어으라어아아아아아악!!!!!!!!!” 입안에 있던 밥알이 다 튀어 나오며 손에 들고 있던 붓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아아아! 으아아아!!” ‘기철초풍’이라는 말이 이런 걸 두고 한 말일까? TV에 나온 귀신의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비명만 지르고 있는데, 옆집에서 쿵쿵 거리며 벽을 쳐대었다. 결국 당황한 나는 TV의 전기 코드를 잡아 뽑아버렸다. 그러자 틱 소리와 함께 TV가 꺼지고 조용한 적막이 찾아왔다. “허억.. 허억.. 뭐지?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TV에 귀신이 씌었나? 아마 평생토록 트라우마가 남을 것만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주변을 살피고 있는데, 분명히 전원을 내려둔 슈퍼 패밀리의 전원부에 녹색 빛이 들어와 있었다. “이게 왜 켜져 있지? 고장 났나?” 고개를 갸웃 거리며 전원 버튼을 올렸다가 내리자, 다시 전원부의 불빛이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혹시 고장 난건가 싶어 TV의 전원 코드를 다시 꽂아 넣고 스위치를 올리자, 잠시 후 TV 스피커에서 소름끼치는 BGM이 흘러 나왔다. 딩~ 딩딩딩딩~ 딩딩딩딩~ 딩딩딩딩~ 딩딩딩딩~ “설마 이 게임. 공포물인가?” 그런데 이거 제목이 왜이래!? 순간 방안의 공기가 싸늘해지는 기분에 나는 서둘러 전원을 끄고 게임 카트리지를 뽑아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주변을 둘러보니, 바닥에 내려놓았던 도시락을 비명을 지르다가 발로 걷어 차버렸는지 한쪽 구석에 뒤집어져 있었고, 나나세의 얼굴은 차마 봐주기 힘들 정도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에게 게임 카트리지를 건네며 실실 웃던 강준혁 부장의 말이 떠올랐다. ‘발렌타인 데이’라는 제목만 보고 미연시냐고 물어본 나의 질문에 ‘아니오’라고 대답했던 이유가 바로 이거라니, 용서할 수 없다. 난 놀이공원 가면 귀신의 집에도 못 들어간다고!!! & 사람의 호기심이란 말이다. 참으로 대단하다. 때로는 두려움과 공포심보다 호기심이 더 크게 작용할 때도 있으니까. 대충 걸레로 방안을 치우고, 나나세의 얼굴을 아세톤으로 말끔히 닦은 나는 긴 한숨을 내쉬고 다시 슈퍼 패밀리에 카트리지를 꽂아 넣었다. “그래. 고작해야 게임이야. 그것도 체험판.” 양쪽 뺨을 몇 차례 내려친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곧이어 예상대로 잡음이 섞여 있는 소름끼치는 BGM과 함께 게임이 시작되고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공포’라는 장르에 도전해보았다. 물론 이전에도 비디오 가게에서 무서운 영화를 빌려본 적은 있지만, 게임과 영화는 엄연히 다르다. 왜냐하면 영화야 정해진 스토리를 따라 영상물을 ‘감상’하면 그만이지만, 게임은 정해진 스토리를 따르기 위해 직접적인 ‘조작’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국 제작자가 준비한 온갖 공포요소를 다 겪어 내야지만 이야기의 끝인 ‘엔딩’에 도달할 수가 있다. ‘일단 달리기 버튼과 숨 참기. 그리고 사용하기 버튼이군.. 좌우로 움직일 수 있고, 상하키를 이용해 몸을 숨길 수 있다. 좋아 시작하자.’ 나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두었지만, 이 게임은 정말 시작부터 플레이어의 심장을 콱 움켜쥔 채 놓아 주지 않았다. 거꾸로 몸이 뒤집은 채 파닥거리며 지나다니는 귀신은 어찌어찌 책상 위로 몸을 숨겨 피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정말로 시작에 불과했다. 어두컴컴한 학교 안에는 정말 온갖 종류의 귀신들이 기괴한 각도로 비틀거리며 걸어 다니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무서운 귀신은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귀신이었다. 그 녀석이 근처에 다가오면 특이한 효과음이 들리는데.. 쿵. 쿵. 쿵. 쿵. 바로 이 소리!! 처음엔 나도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정체를 알고 까무러칠 뻔했다. 옥상에서 머리부터 떨어진 그 귀신은 거꾸로 몸을 꽂꽂히 세운 채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녀석이 나타나면 무조건 높은 곳으로 도망쳐야 했는데, 플레이어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 소리가 더욱 빨라져 미쳐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약 20분 정도 시간이 흘러 겨우 구교사를 빠져나오자, 저 멀리 흔들거리는 불빛이 보였다. ‘사람인가?’ 비교적 자연스럽게 걸어오는 모습에 일반인이라는 걸을 확신한 나는 서둘러 주인공을 조작해 불빛으로 달렸다. 게임 안에서라도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공포심이 덜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것은 푸른색 경비 복을 입고 있는 수위 아저씨였다. 그는 잠시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다시 몸을 돌려 반대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일단은 후레쉬라도 들고 있으니 더 이상 어두운 복도는 안 걸어 다녀도 되겠다 싶어 말을 건네자. 주인공을 돌아보는 수위아저씨의 목이 180도로 꺾여 돌아가며 화면 가득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었다. -여기 있었구나..?- "...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세요.." & 다음 날. 새벽에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서랍에서 ‘발렌타인 데이’의 카트리지를 꺼내들고 강준혁이라는 사람이 했던 말을 떠올려보았다. -플레이 해보시고, 저에게 연락 한 번 주시겠어요?- 평생 기억에 남을 무서운 경험이었지만, 정말로 대단한 게임이었다. 그리고 이런 게임을 만들어 낸 펜타곤 소프트라는 회사가 굉장하게 느껴졌다. 최근에 친구들 말을 들어보면 펜타곤 소프트라는 곳에서 인력을 많이 뽑는다고 하던데.. 어쩌면 어제의 인연으로 이곳에 취업할 수도 있잖아? 그곳에는 나의 우상인 모리타씨도 있으니까. “연락을 해볼까..?” < 단편 : 발렌타인 데이 in 우치무라 > 끝< EP. 20 : 제작 발표회 (1) > 1990년 10월 중순. 도쿄 우에노 공원 안에 위치한 이벤트 홀. “부장님. 그럼 조명 켜보겠습니다.” “오케이. 그럼 왼쪽부터 켜 보세요.” 나의 사인이 떨어지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져 내리며 어두컴컴했던 이벤트 회장 안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러자 함께 이벤트 홀을 꾸며온 펜타곤 소프트 직원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큰 규모의 이벤트 홀은 아니지만, 펜타곤 소프트 게임의 제작 발표회를 하기엔 충분한 공간 이었다. “왼쪽은 문제없고, 다음 오른쪽이요.” 철컥!! 위이잉~ 양쪽 천정에 전부 불이 켜지자, 회장 안이 대 낮처럼 밝아졌다. 양쪽에 들어온 라이트를 모두 확인한 나는 멀리 배전판에 있는 사람들에게 양팔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외쳤다. “오케이!! 양쪽 다 문제없어요. 그럼 다시 불 끄고 준비한 영상 재생 시켜보죠.” 파팟. 천장의 불이 동시에 꺼지며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찾아왔다. 그리고 잠시 후. 전방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서 타마고 몬스터의 홍보 애니메이 션이 재생되었다. “세계 최초로 열리는 몬스터 배틀의 세계에 여러분을 초대 합니다~!!” 낭낭한 여성의 목소리와 함께 타마고상에 등장하는 수많은 몬스터들이 자신 만의 스킬 동작을 뽐내며 빠른 속도로 화면을 메우기 시작했다. 곧이어 어두컴컴한 화면에서 최강의 환수종 바하무트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공중에서 거대한 입을 벌리며 ‘메가 플레어’라는 최강의 기술을 시전했다. “그오오오!!!” 모든 몬스터들을 집어 삼키려는 바하무트의 브레스에 잔뜩 긴장한 몬스터 들이 전투태세에 돌입하자, 그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며 그들 앞에 천둥의 신 오딘이 바하무트의 브레스를 막아내었다. 그러자 영상을 지켜보던 하야시가 감탄사를 내뱉으며 안경을 쓸어 올렸다. “캬아~ 퀄리티 장난 아닌데요. 부장님?” “그럼 이게 얼마짜리 홍보영상인데..” “그런데 부장님. 제가 그린 코부기는 언제 나와요?” 타마고 몬스터 전속 디자이너인 카오리가 손가락 하나를 입에 물고 나에게 묻자, 옆에 있던 하야시가 나를 대신해 대답해 주었다. “아까 처음에 지나갔잖아, 0.1초 만에 캐릭터들에 묻혀서 사라지던데?” “윽.. 정말요?” 그 순간 카오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딘의 등 뒤에서 코부기와 비카츄가 뛰어 오르며 바하무트에게 번개와 물대포를 난사하기 시작하고, 수많은 몬스터 들이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타마고 몬스터의 메인 캐릭터인 저 녀석들이 빠질 수 없지. 팔짱을 낀 채 물이 흐르듯 매끄럽게 진행되는 홍보 영상을 바라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마지막으로 거대한 날개를 회치며 날아오르는 바하무트를 향해 오딘이 지팡이를 치켜들자, 하늘에서 거대한 번개가 떨어져 검은 드래곤을 강타했다. “크오오오!!!” 고통스러워하는 드래곤의 포효와 함께 녀석의 표피가 찢겨져 나가고, 그 순간 바하무트는 탈피와 동시에 최종 진화 형태인 ‘궁극의 바하무트’로 진화하며 화면 가득 그 위압감을 뽐내었다. 잔뜩 긴장한 몬스터 대군이 바하무트를 지켜보는 가운데 벼락의 신 오딘의 지팡이가 다시 한번 움직이고, 바하무트는 오딘을 향해 최강의 스킬인 ‘기가 플레어’를 발사하는 것으로 장대한 홍보영상의 끝을 알렸다. -1991년 봄 애니메이션 방영 예정- “와아아~” 숨죽인 채 타마고 몬스터의 홍보영상을 바라보던 펜타곤 직원들은 저마다 탄성을 내지르며 박수를 쳐대기 시작했다. 역시 돈을 쳐 바른 만큼 퀄리티 하나는 기가 막히게 뽑아주는구나.. 그 후로 몇 가지 내일 열리는 펜타곤 소프트의 제작발표회 영상을 몇 편 더 돌려본 우리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회장을 빠져 나왔다. “이야~ 이거 내일이 기대되는데요?” 늦은 저녁까지 수고해준 직원들을 보내고 돌아오자 모리타와 하야시. 그리고 카오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오리 아직 안 갔어?” 단발머리에 아직 젖살로 채 빠지지 않은 18살의 그녀는 하야시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여기서 팀장님들이랑 같이 기다리고 있으면 부장님이 맛있는 저녁 사주실 거라고 하시던데요?” “간단하게 맥주나 한잔 하시죠? 카오리 말은 농담이고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에 기가차서 웃음이 나왔다. “그래 가자.” 잠시 후. 역 근처의 꼬치 집으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작은 테이블에 둘러 앉아 건 배를 나누었다. “크으~~ 이 맛에 일하지.” “하야시 너 요새 술이 좀 는 거 아냐?” 단숨에 500cc 맥주잔의 반을 비워내는 하야시를 바라보며 모리타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네 녀석이 술을 못하니까 나라도 마셔야 하지 않겠냐?” 처음에 만났을 때는 약간 신경질 적인 성격이었던 하야시도 펜타곤 소프트에 들어와 성격이 많이 변했다. 모리타는 술을 전혀 못하는 체질이기에 언제나 회식자리에서는 우롱차로 대신하는 편이었다. 그때 맥주 한 모금에 금세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카오리가 입을 열었다. “전 오히려 내일이 걱정이에요.” “응? 왜?” “발렌타인 데이 홍보 영상 말이에요. 저 진짜 그거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거든요?” “하긴 그건 나도 장난 아니게 무섭긴 하더라.” 카오리의 말에 우롱차를 마시던 모리타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발렌타인 데이의 홍보 영상물은 게임 화면이나 애니메이션이 아닌 특수 분장을 한 실제 배우들이 폐교에서 직접 촬영한 영상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화장실에 숨어 든 주인공이 자신을 쫓아오는 귀신을 살피기 위해 바닥의 문틈으로 내다보았을 때 거꾸로 뒤집힌 귀신과 눈을 마주치는 장면이었다. 벌건 대낮에 펜타곤 소프트의 회의실에서 프로젝터를 통해 봤을 때도 다들 비명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지.. 갑자기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피식하고 웃음을 흘리던 중에 하야시가 나에게 물었다. “그 영상 TV 광고로도 쓰인 다면서요.” “부분 부분으로 잘라내서 3편정도?” “그거 방송 심의에 통과 될까요?” “안 그래도 유키한테 그 부분에 대해 물어봤는데..” 아무래도 현장에서 일하는 유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셋 다 고개를 쭉 내민 채 이어지는 내 말만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좀 힘들 것 같다던데?” 그러자 카오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것 봐요. 그럴 줄 알았어요.” “뭐 그래도 조금씩 내용을 수정해서 심의 통과 될 때까지 내보려고..” “아무튼 내일이 기대되네요. 타마고 몬스터에 발렌타인 데이. 그리고 제 1 개발팀에서 개발한 파이널 프론티어 4에다가 마지막엔..” 그 순간 옆에 앉아있던 하야시가 재빨리 그녀를 제지 했다. “쉿.. 근처에 있는 사람들 듣겠다.” “아, 죄송합니다.” 역시 술자리에서도 일처리 하나는 깔끔하군. 빙긋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맥주잔을 들어 올리자 다들 나와 잔을 부딪히며 내일의 선전을 기원했다. & 다음 날. 오전 11시. 행사 진행을 위해 펜타곤 소프트의 마케팅 직원들은 본사 대신 이벤트 홀로 출근했다. 1시부터 진행되는 제작 발표회의 스케줄을 점검하던 중 한 직원이 나를 찾았다. “부장님. 타마고 샵에 미야자키씨에게서 전화가 왔는데요?” “미야자키씨가요?” 나는 중요 일정 부분 몇 개를 체크해 직원에게 확인해보라고 전달해 주고는 스탭실로 향했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아, 부장님. 발표회 준비로 바쁘실 텐데 죄송해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런데 매장에 무슨 일 있나요?” “아, 그게 매장에 관련된 일은 아니고, 우치무라씨가 찾아왔거든요. 부장님을 뵙고 싶다고..” “우치무라씨가 저를요?” “네, 어떡하죠? 오늘은 제작 발표회가 있으니 다음에 오시라고 전할까요?”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에 미야자키씨의 물음에 답했다. “미야자키씨 혹시 지금 우치무라씨를 데리고 이쪽으로 오실 수 있으세요?” “네? 오늘 발표회는 게임 업계 관련 종사자들만 들어갈 수 있지 않나요?” “괜찮아요. 발렌타인 데이에 대한 소감도 들어보고 싶고, 저 역시 따로 전할 얘기가 있거든요. 그럼 이따가 행사장에서 봐요.” 타마고 샵 본점이 있는 아키하바라에서 우에노는 전철로 몇 정거장 걸리지 않아 굉장히 가까우니 금방 도착하겠지.. & 잠시 후. 12시 30분부터 초대장을 발송한 업계 종사자들이 행사장 방문을 시작했다. 그중에는 예전에 민텐도에서 기술지원을 나가며 안면을 튼 반가운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폭스 소프트의 호우지마씨라던가, HEG 연구소의 카와타씨. 피닉스 소프트의 유우지씨 등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하지만 일전에 세컨드 파티 제안을 거절했던 탓일까? 초대장을 발송했지만, 민텐도 소속의 직원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여~ 준혁아~”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오늘도 야구모자를 뒤집어쓰고 나온 패미통신 기자 준페이가 멀리서 나에게 다가 오고 있었다. “이야~ 이런 곳에서 보게 되니 예전에 민텐도 제작 발표회 때 생각나는데?” “그때보다 훨씬 쾌적하거든? 여기 이벤트 홀 빌리는데 돈이 얼마나 들었는데.” “하긴 그때랑 비교하면 분위기가 멋지긴 하네. 스크린 시스템도 굉장히 좋은 것 같은데?” “다과회도 준비해 두었으니 배고프면 알아서 챙겨 먹어라.” “그래. 발표회 기대하마.” 그 후로 행사장을 방문한 업계 종사자들과 악수를 나누며 인사를 하던 중 행사장의 조명이 살짝 어두워지며 제작 발표회의 시작을 알리는 사회자의 멘트가 들려왔다. “이제 곧 펜타곤 소프트의 제작 발표회가 시작될 예정이니 방문하신 손님들께서는 자리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이제 곧..” 피닉스 소프트의 유우지씨와 슈퍼 패밀리에서 발매 될 드래곤 워리어 5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는 양해의 구하고 펜타곤 소프트 임원들 자리로 향해다. 이벤트 홀에 준비 된 원형 테이블의 가운데에는 각 회사의 이름이 걸려 있었고, 민텐도나 NEGA 소속의 관계자들은 참석하지 않았지만, 거의 모든 테이블이 관계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만큼 현재 일본의 게임 업계에서 펜타곤 소프트가 차지하는 부분이 압도적이라는 반증이었다. 잠시 후. 본격적으로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파이널 프론티어의 테마곡이 흘러나 오며 무대 오른쪽 편에 설치된 단상 위로 카와구치 대표가 올라섰다. “바쁘신 와중에 저희 펜타곤 소프트의 제작 발표회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희 펜타곤 소프트는 1986년 파이널 프론티어 1으로 시작해 작년 말에는 민텐도 슈퍼 패밀리의 런칭 타이틀 ‘내가 없는 거리’ 그리고 올해 7월 중순부터 판매를 시작한 타마고 몬스터를 런칭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타마고상이 출시한지 정확히 100일이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카와구치씨의 멘트에 홀에 모인 업계 종사자들로부터 많은 박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잠시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멘트를 한 템포 쉬어가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많은 박수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이 박수는 받아 마땅한 사람이 따로 있다는것은 이미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오래 전부터 이 분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왔고, 현재는 저희 펜타곤 소프트의 제 2 개발팀 부장으로서 내가 없는 거리와 타마고 몬스터를 기획한 저희 회사 최고의 디렉터. 강준혁씨를 소개합니다.” “오오오~!!” 이미 이쪽 업계에선 나름대로 유명 인사였기에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나는 깊게 호흡을 삼키고는 천천히 단상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카와구치 대표는 단상에 오르는 곳까지 마중 나와 내 손을 맞잡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진짜 사장님.” 카와구치 대표를 대신해 단상위에 오른 나는 잠시 박수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린 후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보니, 민텐도 시절에 제가 기술 지원을 많이 나가긴 했었나 보네요. 얼굴이 익숙한 분들이 너무 많아서 꼭 반상회에 참석한 기분이 드는군요.” 긴장을 풀기 위한 멘트에 군데군데서 키득거리는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개인적으로 저를 알고 계시는 분들이라면, 제가 지지부진 말을 끄는 성격이 아니란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그것은 이번 발표회도 마찬가지랍니다. 모든 질문은 발표회가 끝난 후에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마음 껏 즐겨 주세요. 아~ 그리고 한 가지. 혹시 심장 질환이 있으신 분들은 두 번째 홍보 영상인 ‘발렌타인 데이’ 가 시작 될 때 테이블에 준비해드린 안대와 귀마개를 착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 EP. 20 : 제작 발표회 (1) > 끝 < EP. 20 : 제작 발표회 (2) > "그럼.. 시작합니다." 나름 짧고 굵게(?) 인사를 마친 내가 단상에서 내려오자, 무대 위의 조명이 어두워지며 타마고 몬스터의 홍보 영상이 재생되었다. “오오~!! 굉장한데?” "귀여워~" 어제 직원들과 함께 보았던 애니메이션 홍보 영상이 종료되자, 곧이어 타마고 몬스터의 탄생 100일을 기념하며 타마고 샵에서 10회 방어에 성공한 챔피언들의 명경기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 단연코 최고의 명승부는 바로 바하무트와 포로리스의 대결이었다. 이 극한의 심리전을 보여준 두 명의 플레이어가 우치무라와 타카시 라는 사실에 나는 다른 의미로 깜짝 놀랐다. 역시 극 강의 플레이어끼리 붙여 놓으면 알아서 명장면이 탄생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리에 앉는 대신 행사장의 한쪽 구석에서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기로 하였다. 카와구치 대표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인지 어느새 내 곁에 서서 회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다들 경쟁사들인데도 게임을 좋아하는 마음은 다 똑같은 것 같군요.” “그러니 다들 게임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겠죠. 너무나도 좋아하니까. 자신이 만든 게임을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말이죠.” “그렇게 보면 준혁씨는 여기모인 사람들 중에 가장 행복한 사람이겠군요.” 나는 카와구치 씨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더라도 지금의 내가 굉장히 행복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잠시 후. 타마고 몬스터의 홍보 영상이 끝나고 내년 봄 애니메이션 방영 예정이 란 문구가 떠오르자 모두들 어느 정도 예상했는지 작은 박수를 보내주었다. “전작인 내가 없는 거리는 OVA로 제작 되었지만, 타마고 몬스터만큼은 TV 애니로 제작 될 거 같더라니..” “타마고상의 브랜드 콜라보 우리 회사도 나가볼까? 수익금 분배도 확실하다던데..” “그보다 팀장님. 우리 회사에 저 자리에 낄만한 캐릭터가 있습니까..? “아, 그것도 그렇네..” 어디선가 들려온 대화 내용에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타마고 몬스터의 콜라보레이션은 현재 파이널 프론티어의 타마고와 비밀리에 출시된 드래곤 엠블렘의 타마고 이 두 종류뿐이다. 하지만 홍보영상 종료 후 관계자들에게 타마고 몬스터의 수익 분배에 대한 영상물을 보여주자, 조금씩 생각이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타마고 몬스터는 판매 금액의 원자재비와 기타 생산비를 제하고 나면 약 500엔 정도의 순수익이 남는다. 현재는 500엔에 대한 수익을 모두 펜타곤에서 챙기고 있지만, 만약에 다른 회사에서 콜라보레이션을 제의 할 시에 해당 타마고의 생산 대수에 대해 개당 200엔의 수익을 가져갈 수가 있었다. 단지 타마고 몬스터에서 자사의 캐릭터 사용을 허가해 주는 것으로도 부가적인 수익과 홍보효과를 얻을 수 있으니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반대편 쪽 문이 슬쩍 열리더니 미야자키씨와 우치무라군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예상 보다 조금 늦었지만, 타이밍이 나쁘지 않네.. 그들은 회장의 분위기에 눈치를 보며 비어 있는 테이블 쪽으로 서둘러 달려가 자리에 앉았다. 그럼 이제 시작해볼까? 잠시 주위를 둘러보는 척하며 조명을 담당하는 직원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오케이 사인을 그리며 조명 스위치를 모두 내렸다. 팍하는 소리와 함께 짙은 어둠이 깔리자 사람들이 깜짝 놀라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 뭐지?” “정전인가? 아무것도 안 보여..” 나는 어둠속에서 바닥에 표시해둔 야광 스티커를 확인하고 단상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지금부터 내년 상반기 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는 펜타곤 소프트의 최신작. 발렌타인 데이의 홍보 영상을 재생하려고 합니다. 다소 충격적인 영상일 수 있으니 모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두시기 바랍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나는 단지 그녀에게 고백하고 싶었다..- 피처럼 붉은 글씨가 스크린에 떠오르자, 다른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벤트 홀에 있는 일부 여성들은 스크린에서 새어나오는 빛에 의지에 서둘러 안대와 귀마개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그 아이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끼이익.. 끼이이익.. 끼기긱.. 끼익.. 신경을 내리 긁는 것만 같은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화면이 전환 되며 어두운 복도의 천장에 목을 맨 시신 한구가 좌우로 흔들거리고.. “아우.. 난 못 보겠다..” 좌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혀를 차며 안대에 손을 내민 순간. 스크린 안에 시신이 툭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 순간 옆 사람의 숨소리조차 들려올 정도로 정막이 흘렀다. 3.. 2.. 1.. 스타트. “끼야야아아악!!!!!!!” 특수 분장한 여성의 소름끼치는 얼굴이 스크린을 가득 메우자, 동시 다발 적으로 온갖 종류의 비명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으어어아아악!!” “뜨어억!!” “어억!!” “흡!!” 그중에는 안대를 착용한 사람들은 주변에서 비명을 내지르자, 덩달아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비좁은 이벤트 홀은 삽시간에 사람들의 비명으로 가득 차오르고, 그와 중에 나를 비롯한 펜타곤 직원들은 어둠속에서 배를 움켜쥔 채 웃고 있었다. 우리야 한 번 봤으니 이 상황이 웃길 수밖에.. 다들 고개를 숙인 채 키득거리는 모습이 내 눈에 훤히 보인다. 보여.. 킥킥.. -너만 없으면 내가 전교 1등이야!!- -그래서 날 죽였니?- -널 좋아해..- -그러니까 어서 나와 함께 죽어줘..- 각종 소름 끼치는 영상들이 순식간에 지나간 후. 또다시 긴 정적이 찾아왔다. 끝났나 싶어 사람들이 스크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기괴한 걸음걸이로 천천히 다가오는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보였다. 까드드득.. 까드드득... 쿵.쿵.쿵.쿵. 까드득.. 까득.. 쿵.쿵.쿵.쿵 정체를 알수 없는 기분 나쁜 소리와 심장 박동소리가 거대한 스피커를 통해 회장 안을 가득 메우고.. 그 순간 멀리서 천천히 걸어오던 귀신이 순식간에 스크린 앞으로 다가오자, 테이 블의 앉아 있던 사람들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 들었다. -여기 숨어 있었구나? 히히히히- -1991년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 출시..- -발매 기종 : SFC (슈퍼 패밀리 컴퓨터)- 출시일에 대한 문구가 지나고, 조명 팀에서 전원 스위치를 올리자, 회장 안이 다시 밝아졌다. 그제 서야 긴장을 놓은 사람들이 저마다 긴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와.. 진짜 놀랐다.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어..” “연출 진짜 장난 아닌데, 오줌 지릴 뻔했네..” “아.. 심장 떨려..” 그때였다. “우와아아아악!!!” “뭐야!? 갑자기 왜 그.. 허어어억!!” “꺄아아악!!!” “끄아아악!!” 밝은 조명 아래 비명을 내지르는 사람들의 표정이 아주 가관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냐고? “초코렛 받으세요..” 귀신 분장을 한 채로 사람들에게 초콜렛을 나눠 주는 저 분 덕분이지.. 상냥한 목소리와 대조되는 섬뜩한 분장에 사람들은 초코렛을 받으면서도 영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아직 충격과 공포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사람도 더러 있었기에 행사 직원은 조심스레 사람들에게 초코렛을 나눠주고 있었다. “발렌타인 데이 초콜렛입니다~ 초코렛 받으세요~” 귀신 분장을 하고도 저 발랄한 걸음걸이를 보아하니.. 카오리인가? 그녀가 속으로 얼마나 웃고 있을지 상상하자, 나도 모르게 ‘쿡’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많은 사람들을 패닉에 빠뜨려 놓고 사악하시네요.” “그런 대표님도 웃고 계시잖아요.” “아, 그런가요? 이거 표정 관리 좀 해야겠네.” 그 순간 타이밍 좋게 스피커에서 파이널 프론티어의 메인 테마곡이 흘러나왔다. 혼비백산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따듯한 음색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씩 누그러들고 있었다. “파이널 프론티어다.” “드디어 SFC로 나오는 건가?” “피닉스사의 드래곤 워리어5 보다 먼저 출시하려나?” 사람들의 반응에 피닉스 소프트 테이블을 바라보니 유우지씨의 표정이 살짝 굳어 있었다. 파이널 프론티어 1이 출시되었을 때만 해도 드래곤 워리어의 ‘아류작’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별로 선전하지 못했지만, 시리즈를 거치며 파이널 프론티어는 드래곤 워리어와는 확실히 다른 자신만의 색(色)을 지닌 대작이 되어 있었다. 팬 층도 상당히 두텁고 어떤 의미에서는 드래곤 워리어보다 그래픽이 뛰어 나다는 세간의 평가에 일본의 국민 RPG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유우지씨 조차 긴장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내년 여름을 목표로 제작에 들어간 카와구치씨의 파이널 프론티어 4는 굉장히 카리스마가 넘치는 ‘용기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물론 시리즈의 메인이 되는 크리스탈에 대한 이야기로 굉장히 거대한 스토리 구조를 다루고 있었다. 이윽고 순백의 화면에 FINAL FRONTIER IV 라는 문구가 떠오르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캬~ 드디어 나오는구나!!” 일본 RPG의 양대 산맥중 하나인 최고의 타이틀은 그 이름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기 충분했다. 차세대 기종의 스프라이트 기능을 충분히 활용한 덕에 파이널 프론티어 4는 패밀리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 2D 그래픽 성능이 올라가 있었다. 새들과 함께 창공을 날아오르는 비공정의 모습.. 그리고 뱃머리에 우뚝 서있는 검은 용기사의 카리스마는 순식간에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래픽이 장난 아닌데?” “패밀리 때와는 비교가 안 되는군..” “그래픽도 그래픽이지만 BGM이 진짜 끝내주는 구나..” 사람들은 저마다 감탄사를 내뱉으며 파이널 프론티어 4의 아름다운 그래픽을 감상하고 있었다. 이미 그들 머릿속에 발렌타인 데이에서 겪었던 공포는 사라진 듯 해보였다. “이거 출시만 되면 하드 캐리 제대로 하겠는데?” “역시 이번 세대도 민텐도가 다 움켜 쥐는 구나. 보나마나 드래곤 워리어도 슈퍼 패밀리로 나올 거 아냐? 그럼 끝이지 뭐..” 제국군 용기사들의 투쟁과 우정. 그리고 사랑을 그리고 있는 파이널 프론티어 4의 홍보 영상이 거의 마지막에 이르자, 곧이어 새하얀 화면에 출시일 발표 문구가 떠올랐다. -1991년 여름 발매 예정- “여름? 생각보다 늦게나오네?” “지금이 90년 가을인데, 언제 기다리지?” 하지만 그 다음 화면에 떠오른 문구에 아쉬워하던 좌중의 분위기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출시 기종 : 미정.- “뭐라고!!?” “미정? 설마 슈퍼 패밀리가 아닌 건가?” “에이 설마.. 저 그래픽은 NEGA 드라이브론 불가능할 텐데?” 당연히 슈퍼 패밀리로 출시할 거라 믿었던 모두의 예상이 뒤집어지자, 회장 안은 다시 또 패닉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온통 물음표뿐이었지만, 나와 카와구치씨는 준비된 모든 영상을 마칠 때까지 단상에 오르지 않았다. 나는 점점 과열되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서둘러 다음 영상을 진행 시켰다. 그러자, 바람 찢어내는 소리와 함께 스크린 속에 펼쳐진 하늘에서 묵색의 부러진 검신이 떨어져 내렸다. 쐐애애액!!! 카아앙!!! “뭐지. 저건? 설마 출시 예정작이 또 있는 건가? 대체 내년에 게임 몇 개를 출시하려는 거야?” 그때 화면 속의 부러진 검신을 용케도 알아본 남자 하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친구인 준페이였다. “저거!! 저건!!” 놀라움에 차마 다음 할 말은 떼지 못한 채 ‘저건!!’ 만 반복 하던 녀석의 입에서 겨우 다음 대사가 터져 나왔다. “드래곤 엠블렘 크로엘의 검이다..” 촤아앙!! 녀석이 말을 마치자, 두 개의 검격이 서로 맞부딪히며 새하얀 스크린에 타이틀명 떠올랐다. -DRAGON EMBLEM II- < EP. 20 : 제작 발표회 (2) > 끝 < EP. 20 : 제작 발표회 (3) > “드래곤 엠블렘 크로엘의 검이다..” 촤아앙!! 녀석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두 개의 검격이 서로 맞부딪히며 스크린에 타이틀명이 떠올랐다. -DRAGON EMBLEM II- “으어아아어억!!” “세상에.. 드래곤 엠블렘이라고!?” 아니 ‘발렌타인 데이’ 홍보 영상도 아닌데, 왜 다들 비명을 지르고 난리지?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 같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1986년 유령처럼 등장해 게임 업계에 광풍을 일으킨 희대의 타이틀을 설마 이 자리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겠지..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또 하나의 검격이 드래곤 엠블렘이라는 타이틀 명을 산산히 깨부수며 다음 문구가 떠올랐다. -그녀의 희생으로 되찾은 이 세계의 평화를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신 서력 28년. 성왕 크로엘. 패배하다.- 전작에 등장한 주인공의 패배를 알리는 문구가 먼지처럼 흩어지고, 구슬픈 엔딩곡과 함께 미리 준비해두었던 짧은 애니메이션이 재생되었다. 가슴에 박힌 검을 부여잡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중년의 크로엘 그리고 그의 앞에 다시 나타난 최강의 적. 상처 입은 크로엘은 부러진 성검을 휘두르며 암흑 신에게 맞서보지만, 결국 최후의 일격을 허락하며 대지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DRAGON EMBLEM II 부러진 성검과 암흑신의 부활.- -With PENTAGON soft- -1991년 겨울 발매 예정.- -출시 기종 : 미정- “출시는 내년 겨울인가.. 끝내주네..” “어라? 벌써 끝이야? 플레이 영상은 없는건가?” “너.. 너무 짧아. 더 보고 싶다!!” “세상에.. 펜타곤 소프트가 드래곤 엠블렘의 IP까지 가져갈 줄이야..” 그때 모두 끝난 줄 알았던 스크린 화면에 새로운 홍보영상이 떠올랐다. 그것은 지금까지 보여준 영상들에 비하면 볼품없는 캐릭터 디자인이었지만, 방금 드래곤 엠블렘 2를 보고 난 사람들은 금세 이 영상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아 차렸다. “어? 카트리나다.” “캬.. 오랜만이다.” “마지막 장에서 카트리나 희생시켰을 때 진짜 슬펐는데, 저 그래픽이 벌써 4년 전이라니..” 스크린 안에 나타난 카트리나는 사제의 지팡이를 들고 전투자세만 취하고 있었을 뿐인데, 그 모습만으로도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하기엔 충분했던 모양이다. 패밀리의 낮은 스펙으로 저 해상도 도트로 표현된 그녀의 캐릭터는 솔직히 지금에 와선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어? 뭐지? 움직인다.” 단순한 도트 디자인으로 표현되어 있던 조그만 캐릭터가 갑자기 상체를 좌우로 움직이더니 두 손으로 힘차게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지팡이 끝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며 화면 전체를 감싸고, 잠시 후 다시 모습을 드러낸 카트리나는 늘씬한 캐릭터 디자인으로 변해 있었다. 3등신으로 표현된 캐릭터의 옷차림은 단순히 하얗게만 보였던 전작과는 달리 화려한 도트 그래픽으로 세세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우와앗!!!!” “설마.. 전작을 리메이크 한 건가!?” 사람들의 함성과 함께 카트리나의 주위로 전작에서 함께 싸웠던 동료들이 차례차례 등장하기 시작했다. “으아아!!! 폭염술사 미레아!! 완전 섹시해!!” “오우~ 크로엘이다~!! 그럼 신궁(神弓) 녹티스도 나오려나? 난 그 캐릭터가 제일 멋지던데” 새로 디자인 된 동료가 한명씩 늘어갈 때마다 자신이 좋아했던 캐릭터의 이름을 외치며 열광하는 모습에 나의 가슴 한구석이 찡하게 울려왔다. 이미 4년이나 흘러 다 잊어버린 줄로만 알았는데, 아직도 드래곤 엠블렘은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었구나, 이렇게 다들 기다리고 있었구나.. -DRAGON EMBLEM I 전설의 성검. 리메이크作- -1991년 가을 발매 예정.- -출시 기종 : 미정.- 드래곤 엠블렘에 대한 소식은 펜타곤 소프트 직원들에게도 비밀리에 제작된 영상이었기에 회장에 모여 있던 직원들도 혼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오직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단 네 사람. 카와구치씨와 모리타. 그리고 하야시 뿐이었다. 그때 스크린을 가득 메운 드래곤 엠블렘의 영웅들 머리 위로 괴상한 녀석이 떨어져 내렸다. 새하얀 달걀 모양의 캐릭터는 공중에서 떨어져 내린 충격에 껍질에 금이 가 있었다. 좌우로 데굴거리며 아파하는 달걀에게 대사제 카트리나가 회복주문을 외워 주자, 상처가 말끔히 사라졌다. “설마.. 저거 타마고상?” 잠시 후. 카트리나 주위를 방방 뛰며 좋아하던 녀석은 갑자기 멈춰 서서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더니 이번에는 손뼉을 치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녀석의 이상한 행동에 캐릭터들의 머리 위에 물음표 표시가 하나씩 떠오르고.. 그 순간 달걀 녀석이 드래곤 엠블렘의 캐릭터를 향해 이상한 빛을 쏘았다. 그러자 펑 소리와 드래곤 엠블렘의 캐릭터들이 흑백의 귀여운 2등신 캐릭터로 변모하였다. 모두가 당황한 가운데 영웅들은 타마고상의 빛에 흡수되어 전부 빨려 들어갔고, 모든 캐릭터를 집어 삼킨 타마고 상은 ‘꺼억’ 소리와 함께 자신의 배를 두들기더니 새하얀 달걀이 검은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곧이어 ‘용의 문장’이 새겨진 크로엘의 망토를 착용한 타마고상이 어디론가 날아가며 홍보영상이 종료됨을 알렸다. -타마고상의 두 번째 콜라보레이션 작품. 드래곤 엠블렘의 타마고. 현재 판매 중.- 그때 회장 안에 있던 사람 중에 한 명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나 저거 있는데..” 그 순간 회장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돌아갔다. 나 역시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우치무라군과 미야자키씨가 어색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때 궁금함을 참지 못한 준페이 녀석이 우치무라에게 물었다. “저기, 지금 그거 가지고 있어요?” “네.. 여기..” 우치무라가 주머니에서 검은색 타마고 상을 꺼내 보이자, 회장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 나왔다. “진짜네.. 나는 지금가지 두 종류 뿐인줄 알았는데, 새로운 버전이 출시 됐구나. 나도 갖고 싶다.” “그럼 저 타마고상에는 드래곤 엠블렘 캐릭터가 들어 있는 건가? 우와..” 세상에 저걸 뽑은 사람이 우치무라라니.. 이런 우연이 있나? 초기 생산으로 전국에 딱 100개만 뿌린건데.. 하하.. 이윽고 드래곤 엠블렘까지 모든 홍보영상이 종료되자, 스크린에 한 줄의 문장이 떠올랐다. -hjk0615@raon.co.kr- “아, 저건 드래곤 엠블렘 때 나왔던 메시지 아냐?” “맞아. 저거 엄청 궁금했었는데 무슨 뜻이지? 설마 이것도 오늘 밝혀지는 건가?” 그 순간 사람들의 바램대로 @ 뒤에 있던 알파벳이 사라지고, 화면에는 hjk0615라는 문자만이 남았다. 뒤이어 0615이란 숫자 역시 사방으로 흩어져 버리고, hjk라는 문자만 남게 되자. 알파벳은 좌우로 순서가 뒤바뀌며 ‘Kang Jun Hyeok.’ 이라는 문자가 완성 되었다. “강..준..혁..?” “드래곤 엠블렘의 한국인 개발자가.. 펜타곤 소프트의 강준혁 부장이라고!?” 수많은 사람들로 모인 회장 안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이윽고 우리가 준비한 제작 발표회가 모두 끝났다는 걸 알리기 위해 회장 안에 조명이 굉장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숨죽인 채로 나를 지켜보는 가운데, 단상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렸다. 뚜벅.. 뚜벅.. 뚜벅.. 잠시 후. 단상에 오른 나는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긴 한숨을 내쉬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 역시 기가차긴 마찬가지 일 것이다. 어쩌면 민텐도 쪽 사람이 아무도 오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르겠군.. “후... 물어보고 싶은 게 많으시죠? 그럼 이제부터 오늘 공개된 홍보영상들에 대한 질문을 받겠습니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아무도 선뜻 질문을 걸어오지 않았다. 아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는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때 패미통신 관계자 테이블에서 손이 번쩍 올라왔다. ‘첫 번째 질문자는 준페이 너냐?’ 나는 빙긋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말씀하세요. 준페이씨.” “저.. 그냥 단도직입 적으로 몇 가지 질문 좀 하겠습니다.” “그러세요.” “혹시 내가 없는 거리의 시나리오 작가로 알려진 ‘K’가 준혁씨의 성씨인 ‘강’을 뜻하는 겁니까?” ... 와~ 이 녀석이 친구랍시고 명치부터 때리고 시작하네.. 그래. 오늘 이 자리에서 내 모든 걸 다 까발려주마. “네. 맞습니다.” 나의 대답에 회장 안이 또 다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악마’란 이야기도 얼핏 들린 것 같다. 어떤 이는 ‘배신자’란 말도 거침없이 내뱉었지만, 사이킥 배틀까지 포함해 희대의 명작들을 만들어낸 ‘현 세대 최고의 디렉터’라는 찬사도 아끼지 않았다. “그럼 두 번째 질문입니다. 드래곤 엠블렘을 제작할 당시 민텐도 소속의 직원이었을 텐데, 어째서 정식으로 민텐도의 이름으로 게임을 내지 않고, 중고 시장을 노린 겁니까?” “당시의 기술력으로 제가 만들고 싶었던 시스템을 구현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중고 시장을 이용해야만 했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이라면 모두가 아실 겁니다. 드래곤 엠블렘이 어떤 방식의 시스템을 차용하고 있는지. 동료가 실제로 사망하는 시스템을 넣기 위해선 ‘커스텀 칩’이라는 읽고 쓰기가 가능 한 데이터 칩이 필요 했지요. 하지만 단가가 굉장히 비싼 칩이었기 때문에 아마 기획서를 낸다고 해도 제조 단가 때문에 통과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자 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하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냐. 처음 중고시장에 돌아 다녔을 때 아는 사람을 통해서 물어봤는데, 어떤 미친놈이 그 가격에 팔았냐고 황당해 하던데?” ... 저기 미친놈이라니요. 그러고 보니 군페이씨도 처음 카트리지를 열어보고 비슷한 소리를 했었지.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다음 질문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피닉스 소프트의 유우지씨가 손을 들었다. “질문 하세요.” “파이널 프론티어와 드래곤 엠블렘의 출시 기종이 어째서 전부 미정인 겁니까? 설마 슈퍼 패밀리 말고 다른 기종으로 출시 할 예정입니까?” 유우지씨의 질문에 나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이 부분은 저희 회사 대표인 카와구치씨가 설명해드리는 것 맞지만, 이왕 단상에 올라온 김에 제가 대신 답해드리겠습니다. 우선 여러분께 보여드린 파이널 프론티어 4와 드래곤 엠블렘의 포팅은 슈퍼 패밀리용으로 제작 된 것이 아닙니다.” < EP. 20 : 제작 발표회 (3) > 끝 < EP. 20 : 제작 발표회 (4) > “이 부분은 저희 회사 대표인 카와구치씨가 설명해드리는 것 맞지만, 이왕 단상에 올라온 김에 제가 대신 답해드리겠습니다. 우선 여러분께 보여드린 파이널 프론티어 4와 드래곤 엠블렘의 포팅은 슈퍼 패밀리용으로 제작 된 것이 아닙니다.” “뭐라구요? 그럼 설마 NEGA 드라이브?” “음.. NEGA 드라이브로 구현하기에는 그래픽 스트라이프가 너무 과하다 생각하지 않으세요? 물론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굉장히 힘들겠지요?” “그럼 대체 어느 플렛폼으로 출시하려는 겁니까?” “말 그대로 아직 ‘미정’입니다. 사실 저희가 출시하려는 콘솔 자체가 아직 출시되지 않았거든요.” 그 순간 테이블에 앉아 있던 개발자들의 표정에 경악이 스쳤다. 방금 내가 한 말은 공식석상에서 현재 슈퍼 패밀리와 NEGA 드라이브를 제외한 또 다른 콘솔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힌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준혁씨 말대로라면 민텐도와 NEGA 말고도 현재 개발 중인 또 다른 차세대 콘솔이 있다는 말입니까?” 유우지씨의 질문에 나는 잠시 주변의 반응을 살핀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전에 먼저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들을 초대한 이유를 설명 드려야겠군요. 어째서 게임 제작 발표회에 일반 유저들이 아닌 같은 게임 업계 종사하시는 여러분들에게 비공개 초대장을 발송했는지 말이죠..” “사실 그 부분도 궁금하긴 합니다. 이정도의 제작 발표회면 유저들에게 엄청난 반응을 얻어 낼 수 있을 텐데, 어째서 우리를 부른 겁니까.” “아이러니 하게도 오늘 저희 발표회에 민텐도와 NEGA 측의 직원 분들은 참석을 거부하셨습니다. 뭐.. 워낙에 좁은 업계다보니 여러분들도 소문을 들어 아시겠지만, 현재 민텐도 측과 저희 펜타곤 소프트에 약간의 불화가 있긴 합니다.” “그렇다면 펜타곤에서 민텐도의 세컨드 파티 제의를 거절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나의 대답에 회장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펜타곤 소프트의 선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콘솔 개발 업체인 민텐도의 제안을 거절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나는 잠시 동안 사람들의 대화가 잦아들기를 기다린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오늘 이곳에 여러분들을 모신 이유는 현재 게임업계를 이끌어가는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비즈니스를 제안하기 위해서입니다. 잠깐 조명 좀 어둡게 해주시겠어요?” 나의 요청에 회장을 비추던 조명의 밝기가 두 단계 가량 낮아지며 새하얀 스크린에 현재 게임 업계의 수익 구조 그래프가 떠올랐다. “업계 종사자 분들이시라면 이 그래프만 봐도 무얼 의미하는지 잘 아시겠죠?” 그러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한 직원이 대답했다. “민텐도와 NEGA에서 제공하는 서드 파티에 대한 수익 분배 구조 아닙니까?” “맞습니다. 이 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퍼스트 파티와 서드 파티의 수익 구조는 판이 하게 다르단 걸 알 수 있지요. 물론 유저들이 구입하는 게임의 가격도 완전히 다릅니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퍼스트 파티에서 만드는 게임은 로열티 부분을 제할 수 있고, 카트리지 제작 단가도 훨씬 저렴할 테니..” 나는 남자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정확합니다. 바로 거기서부터 퍼스트 파티와 서드 파티간의 괴리가 생겨나지요. 조사한 바에 의하면 민텐도가 슈퍼 패밀리와 동시에 출시한 슈퍼 마리지 월드의 카트리지 가격은 4,800엔입니다. 하지만 지난달 캡코 소프트에서 아케이드용 ‘파이널 파이트 89’를 슈퍼 패밀리용으로 이식해서 발매한 카트리지 가격이 8,700엔이네요. 슈퍼 마리지 월드의 정가와 약 4,000엔 가량 차이가 나는군요. 그럼 여기서 발생하는 4,000엔의 이익은 누가 가져가는 것일까요? 여러분들이 가져가나요? 물론 아니겠죠. 현재 민텐도는 슈퍼 패밀리의 흥행에 힘입어 카트리지 생산 단가와 로열티를 조금씩 올리고 있습니다. 차세대 기종에 들어와 예전과는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그래픽이 늘어나며 카트리지의 용량 역시 고용량을 요구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지금이야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내년은 어떨까요? 그리고 그 다음해는요?” 내 말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서드 파티지만, 하는 일은 민텐도 퍼스트 파티나 다름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민텐도 말고 타 회사 콘솔로 개발 준비 중인 게임회사가 있다면 손 한번 들어보세요.” 그러자 이번에도 역시 아무도 손을 들지 못했다. 비싼 로열 티를 지불하고서라도 현재 유저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콘솔로 출시해야만 그래도 본전 이상은 건지게 될 테니까. 여기까지 듣고 보면 서드 파티란 참 불쌍한 회사구나.. 라고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서드 파티들이 민텐도에 지불하는 로열티를 전부 부담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그들도 돈 벌기 위해 하는 사업인데, 설마 손해를 보고 팔을까? 그럼 결국 누가 로열티 비용을 지불 하느냐.. 그건 바로 소비자다. 그렇기 때문에 퍼스트 파티와 서드 파티의 게임 가격이 4,000엔이나 차이가 벌어지게 되는 것이니까.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서드 파티가 발매하는 타이틀 하나당 1만엔의 가격이 생성 되겠지요. 하지만 그만큼 단가가 올라도 여러분이 가져가는 수익은 똑같을 겁니다. 어차피 그 돈을 벌어들이는 회사는 따로 있으니까요.” “맞는 말이야. 유저들이 우리 사정을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슈퍼 패밀리에 들어서면서 게임 가격에 대해 불만이 높아지고만 있으니..” 지난달에 ‘파이널 파이트 89’를 발매한 캡코 쪽 테이블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자, 썩은 낙엽위에 불씨가 번지듯 여러 테이블에서 비슷한 불만사항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소프트 가격을 민텐도 게임만큼 낮출 수도 없잖습니까. 결국 욕을 먹어 가면서도 그렇게 낼 수밖에 없는 시장 구조니까요.” “가격이 높아지면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중고 시장이 더 커지겠지. 게임 카트리지는 중고품이라도 프로그램이 닳거나 하지 않을 테니.. 결국 이대로라면 자멸밖에 없다.” 정확한 해석이다. 이미 슈퍼 패밀리의 중고 소프트를 찾는 유저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였으니까.. 그때 여태까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폭스 소프트의 호우지마씨가 손을 들었다. “질문 하세요. 호우지마씨.” 전에 폭스 소프트에 방문 했을 때도 느꼈었지만, 상당히 까다로운 성격의 호우지 마에게서 과연 어떤 질문이 나올지 내심 기대가 되었다. “저희 폭스 소프트 역시 민텐도의 불합리한 로열티에 반발해 NEGA 드라이브와 MSX쪽으로 ‘풀 메탈 기어’ 라는 게임을 출시하였지만, 꽤나 저조한 판매량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만큼 콘솔기기의 보급률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콘솔을 내는 회사가 무슨 생각으로 이 시기에 콘솔 시장에 뛰어들려는지 모르지만, 단지 성능이 좋다고 서드 파티들이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만큼 기기 보급률이 받쳐 줘야하고, 콘솔 회사의 브랜드가 가진 시장성도 중요하죠. 그래서 묻겠습니다. 펜타곤 소프트가 신작을 출시하려는 콘솔회사는 유저들에게 그 만큼의 인지도가 있습니까?” 호우지마의 발언에 모든 개발자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이거, 여기서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간 돌 맞아 죽겠는데? “호우지마씨가 걱정하시는 부분에 대해선 저 역시 공감 합니다. 아직 새로운 차세대 콘솔에 대해서 자세히 밝힐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나는 잠시 한 템포 쉬어가며 뒤에 말을 이었다. “저희 펜타곤 소프트가 전폭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 “펜타곤 소프트가 콘솔 사업에!?” “그렇구나!! 그래서 민텐도의 세컨드 파티 제의를 거절했던 것인가?” “확실히 펜타곤 소프트가 나서준다면 인지도만큼은 확실할 수도.. 잠깐 그럼 펜타곤 소프트에서 나오는 게임이 새로운 콘솔의 퍼스트 파티가 되는 건가?” 아무래도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끼리 모아 놓으니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알아채는군.. 그때 호우지마씨가 다시 나에게 물었다. “펜타곤 소프트가 차세대 콘솔 회사에 전폭적인 지지를 하고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자세히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예상하신 바와 같습니다. 현재 펜타곤 소프트에서 벌어 들이는 수익의 일부를 그쪽 회사에 투자하고 있고, 홍보영상에서 보셨듯이 앞으로 펜타곤 소프트에서 나오는 메인 소프트를 전부 투입할 계획입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발상이.. 꼭 NEGA의 판매 전략과 같군요. 결국 자 회사의 소프트만으로는 아무런 인지도를 얻을 수가 없을 겁니다. 현재 NEGA 드라이브와 마찬가지로요.” 호우지마의 냉철한 분석에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지만, 겉으로는 여유 있게 웃어보였다. “어째서 NEGA 드라이브와 똑같은 전철을 밟을 거라 예상하시는 건가요?” “하나의 회사에서 1년에 낼 수 있는 타이틀 개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죠. 퍼스트 파티들은 항상 저희 서드 파티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대중의 입맛을 모두 맞추기 위해서 저희 들의 도움이 절대 적이라는 것을 설마 모르시진 않겠죠?”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민텐도에서 저만큼 타사의 기술 지원을 다녀본 직원이 없을 테니까요.” 그러자, ‘폭탄맨’으로 인기가 높은 허드손 테이블에서 한 직원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준혁씨에게는 정말 도움을 많이 받았지. 패밀리용 게임을 제작할 때도 전화해서 물어보면 친절히 대답해주었고, 그래도 모르겠다고 하면 다음날 곧바로 회사에 찾아와 해결해 주었을 정도니까.. 아마 여기 모인 사람들 중에 게임 개발 기간 중에 준혁씨 한번 못 본 사람 없을 걸?” “맞아. 그건 그래.” 아.. 5년 전부터 뻔질나게 기술 지원 다닌 성과가 이제야 나타나는 구나.. 나는 사람들의 대화 내용을 엿들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궁금증을 풀어 주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호우지마씨의 말이 맞습니다. 어떤 점을 걱정하시는지도 알겠구요. 그래서 바로 그것 때문에 오늘 비공개 제작 발표회에 각 회사를 대표하는 여러분을 부른 것입니다. 민텐도의 슈퍼 패밀리에 대항하는 새로운 콘솔은 저희 펜타곤 소프트와 여러분들이 함께 공생(共生) 할 수 있는 제 3의 길을 제시해 줄 것입니다.” “제 3의 길..?” 나의 비즈니스 제안에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퍼스트 파티의 이점을 버리고 서드 파티와 공생의 길을 걷겠다는 콘솔 회사는 이제껏 한 번도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피닉스 소프트의 유우지씨가 나에게 물었다. “그 말은 즉 새로운 유통 구조를 만들겠다는 겁니까? 대체 어떤 방식의..?” “저희 펜타곤 소프트도, 그리고 여러분들도, 그리고 우리들의 게임을 구매해주시는 유저들에게도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새로운 솔루션을 제시해드리죠.” 그 순간 내 등 뒤에 있던 스크린에 새로운 유통 구조 방식 설명하는 기획서가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무대 한가운데로 걸으며 여태까지 슈트 안쪽 주머니에 숨겨왔던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여러분과 저희가 함께 공생 할 수 있는 새로운 저장 매체입니다.” < EP. 20 : 제작 발표회 (4) > 끝 < EP. 20 : 제작 발표회 (5) > “이게 바로 여러분과 저희가 함께 공생 할 수 있는 새로운 저장 매체입니다.” 그러나 잠시 후. 내가 손에 든 물건을 바라본 사람들은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난 또 뭔가 대단한 게 나올 줄 알았더니.. 그냥 카트리지잖아?” “슈퍼 패밀리용보다 조금 작긴 하지만, 누가 봐도 카트리지네..” “카트리지 치곤 꽤나 슬림한데? 3.5인치 디스켓 3개정도 두께는 되려나?” 나는 카세트 테이프 크기만한 차세대 카트리지를 손에 들고 여유롭게 웃어보였다. “결국 펜타곤도 카트리지 장사를 하려는 겁니까? 이러면 민텐도나 NEGA랑 다를 바가 없는데요?” 누군가의 질문에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띠운 채 답했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이 건 차세대 기종에 쓰일 게임 카트리지입니다. 하지만, 민텐도와 NEGA에서 사용하는 일반적인 롬(ROM) 카트리지가 아닌, 데이터를 읽고 쓰기가 가능한 플래시 메모리 카트리지입니다.” “뭐!? 데이터를 읽고 지울 수 있다고!?” 나는 손에 들려 있는 카트리지를 사람들 앞에 흔들어 보이며 부가적인 설명을 이었다. “여러분. 현재 게임 개발 중에 가장 많은 비용이 소모되는 비용이 무엇입니까.” “그야. 당연히 카트리지 생산 단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반도체를 사용하는 롬 카트리지의 단가는 굉장히 비싸죠. 그렇기 때문에 값 비싼 카트리지 단가에도 불구하고 저희가 가져가는 수익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 펜타곤 소프트는 바로 그 카트리지 제작에 소모되는 단가를 없애 버리려고 합니다.” “뭐라구요? 그럼 대체 어떻게 게임을 유통시키려는 겁니까?” “흐음.. 그럼 지금부터 그 차세대 콘솔의 새로운 유통 구조 방식에 대해 설명해 드리죠.” & 잠시 후. 차세대 콘솔 게임의 유통 방식에 대한 설명을 모두 들은 사람들은 어이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정말 가능합니까?” “전 그렇다고 봅니다. 물론 초기에는 약간의 적응기가 필요하겠지만, 데이터 판매 방식의 이점을 알고 나면 많이들 이용하겠지요?” “아니.. 어떻게 그런 유통 구조 방식을 생각해 낼 수 있지?” 차세대 콘솔 게임은 이들에게 설명한대로 조금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데이터 다운로드 방식. 물론 인터넷이 보편화 되지 않은 이 시대에 데이터를 다운받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생각했다. 오프라인 데이터 다운로드 방식. 이게 대체 뭔 소리냐고? 그러니까.. 전국에 있는 게임 샵 마다 단말기를 설치해 소비자가 직접 카트리지를 들고 가서 게임을 다운 받는 형식이라고 하면 이해가 쉬우려나? 마치 비디오 대여점에 공 테이프를 가져가 일정 금액을 주고 비디오를 복사해 오는 것처럼 말이다. 방식은 매우 단순했다. 하지만 아무도 회사도 시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처음에는 얼핏 복잡해 보이는 이 유통 방식에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 거렸지만, 비디오 대여점 방식에 비유하니 단번에 알아들은 모양이다. “정말로 그런 방식이라면 더 이상 카트리지 제작비용을 댈 필요가 없군요.” 새로운 유통 방식에 허드손의 직원이 흡족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미소와 함께 좌우로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아뇨. 일반적인 소프트 판매도 병행할 겁니다.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있고, 그중에는 이러한 판매방식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니까요.” “아니 대체 누가 저렴한 가격에 소프트를 판매한다는 것에 거부감이 들겠습니까?” “소위 매니아 층이죠. 게임을 수집하는 수집가들 말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여러분께서도 어느 정도 자신이 만족한 게임에 대해 평생 소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신가요? 자~ 여기서 솔직하게 자신의 집에 아직도 드래곤 엠블렘의 카트리지를 가지고 있으신 분? 손 한 번 들어주세요.” 그러자 거의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주위를 살피며 손을 들었다. 그중에는 웃기게도 나에게 질문했던 허드손 직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미 클리어 하셨을 텐데, 왜 아직도 가지고 계시죠?” “그게.. 너무 재미있게 플레이 했던 게임이라..” “바로 그겁니다. 플레이를 하고 나면 분명 소장하고 싶어지는 타이틀이 있지요. 그건 소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단 게임뿐만 아니라, 감명 깊게 읽은 책이나 영화도 평생토록 소장하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죠.” “저기.. 그러면 이야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소비자를 만족시킬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롬 카트리지 생산수량에 대해서 저희쪽에 지급하는 로열티는 없으며 제작 수량 역시 일절 손대지 않겠습니다. 1,000개든 10,000개든 직접 시장을 조사하시고, 원하시는 수량만큼 제작하시면 됩니다.” “로열티가 없다구요?” “로열티가 없는 대신 게임 소프트의 판매 가격은 6,000엔을 넘어선 안됩니다. 소비자들을 위해 저희 역시 양보해 드리는 부분이니까요.” 카마우치 사장이 이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면 거품 물고 쓰러졌겠지? 하긴 그게 아니더라도 오늘 발표회 소식을 듣는다면 조만간 펜타곤으로 전화를 하든, 직접 찾아오든 뭔가 액션을 취하겠지.. 절대 그냥 넘어 갈 사람이 아니니까. 나는 무대 위에서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며 다음 질문을 기다렸다. 다행히 서드 파티 관계자들은 새로운 유통 방식에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패밀리 때부터 민텐도에 휘둘려온 설움들이 봇물 터지듯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오던 중. 호우지마가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읽고 쓰기가 가능한 플래시 메모리라면, 복제에 대한 위험성은 없을까요? 가령 카트리지끼리 복사하는 장치가 생기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그러자 화기애애하던 회장의 분위기가 일순간 날카로워졌다. 사실 카트리지 단가도 단가지만, 게임 개발자들에게 가장 민감한 문제가 바로 불법 복제에 대한 것이었기에 이렇게 태도가 일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호우지마 녀석 예전부터 날카로운 질문을 하는 것에는 정말 일가견이 있구나.. 나는 잠시 단상 위에 놓인 음료수로 목을 축인 뒤 마이크를 손에 들었다. “물론 그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자세히 설명해주시죠.” 좀만 기다려라.. 한다 해. 나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뒤 호우지마의 질문에 답했다. “게임 샵에 설치된 단말기에는 일종의 판별장치가 들어갈 예정입니다. 데이터 복사의 흔적이나 추가된 프로그램은 없는지. 카트리지의 정보를 매번 탐색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게임이 출시 될 때마다 새로운 해킹 락(LOCK)을 업데이트 할 예정입니다. 만약에 불법 복제에 대한 흔적이 발견 된다면 단말기가 알아서 카트리지 내의 정보를 모두 지운 후 아무 게임도 설치 할 수 없는 소위 ‘벽돌’ 상태로 만들어 버리겠죠.” 사람들은 나의 ‘벽돌’이라는 표현이 재밌는지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상한가? 2000년대에는 많이 사용했던 단어인데.. 아무튼 사람들은 나의 대답에 만족했는지 회장 안은 다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돌아왔다. 호우지마 역시 더 이상 트집 잡을 거리가 없는지, 만족한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때 여태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이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준혁씨.” 그는 민텐도 소속의 세컨드 파티. HEG 연구소의 ‘카와타 사토루’ 씨였다. 일전에 시게씨가 슈퍼 마리지의 달리기 모션에 큰 고민을 하던 중 그가 보낸 ‘벌룬 파이트’로 게임 안에서 관성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어낸 바가 있었다. 정식 민텐도 소속은 아니지만, HEG 연구소라면 민텐도에서 꽤나 밀어주는 세컨드 파티였기에 거의 민텐도 쪽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오랜만이네요. 카와타씨. 잘 지내셨나요?” “덕분에요. 준혁씨가 설명한 새로운 유통 방식.. 참 흥미롭게 잘 들었습니다. 서 드 파티를 생각 해주면서도 굉장히 유저 친화적인 독특한 방식이군요.” “카와타씨께서도 새로운 유통 방식에 궁금한 점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없습니다. 대신.. 준혁씨라는 사람에 대해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서요.” “저라는 사람이요?” “제작 발표가 끝난 뒤 패미통신의 기자님의 질문에 준혁씨가 내가 없는 거리의 시나리오 작가 K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카와구치 대표님이 준혁씨를 소개할 때 내가 없는 거리의 ‘기획자’라고 말씀하셨지요.” “네. 그렇습니다.” “내가 없는 거리의 발매일은 슈퍼 패밀리의 런칭일이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준혁씨는 민텐도에 소속 되어 있는 동안 타 회사에서 자신의 게임을 제작한 것이나 다름없군요? 이에 대해 하실 말씀 없으신가요?” 하하.. 민텐도 소속 직원이 없어서 그냥 넘어가나 싶었더니, 설마 카와타씨에게 덜미를 잡힐 줄이야.. 나는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 한 뒤 그의 질문.. 아니 이 자리에 모인 모두를 향해 대답했다. “어느 날 여러분의 머릿속에 굉장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고 가정해 봅시다. 게 임을 개발하는 여러분들이라면 한번 쯤 느껴보셨을 겁니다. 어느 날 머릿속이 번뜩 뜨이며 ‘아~ 이런 게임 어떨까?’ 하는 생각. 다들 해보셨죠?” 그러자 테이블에 앉은 몇몇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의 했다. “아.. 가끔 그런 적 있지.” 나는 그들의 동조에 살짝 미소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그때 떠오른 생각은 여러분 것일까요? 아님 소속된 회사의 것일까요?” 그러자, 사람들의 얼굴에 미묘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내 꺼.. 긴한데, 그게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그럼 여러분들이 떠올린 그 아이디어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고 치고,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행동할까요?” “뭐 회사에 기획서를 제출해보겠지요. 아, 그것보다는 하던 프로젝트 마저 끝내 야하나? 하지만 같이 제작할 팀도 꾸려야하고..” “저는 내가 없는 거리를 처음 기획할 때, 함께 사이킥 배틀을 만들었던 모리타씨와 하야시씨를 떠올렸습니다. 제가 만들어낸 기획서대로 완벽하게 게임을 만들어줄 사람들은 그 당시 민텐도에는 없었죠. 그래서 전 저의 아이디어와 틈틈히 써둔 시나리오를 그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러자 카와타씨가 입을 열었다. “그건 변명 아닌가요?” “맞습니다. 민텐도에 소속된 기간 중에 타 회사인 펜타곤 소프트에 기획서를 넘겼고, 그로인해 펜타곤 소프트에서 내가 없는 거리가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이번엔 제가 한가지 묻겠습니다. 제가 펜타곤 소프트를 이용해 내가 없는 거리를 만든 것으로 민텐도는 손해를 입었나요? 아니면 이득을 얻었나요?” 그러자 카와타씨는 잠시 동안 머뭇거리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슈퍼 패밀리가 발매되고, 초창기부터 하드 판매를 이끈 것은 내가 없는 거리 덕분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인정하시나요?” 카와타씨는 나의 물음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인정합니다. 사실 저 역시 준혁씨를 나무라기 위해 이런 질문을 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카마우치 사장님은 다를 거예요. 그건 준혁씨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나는 잠시 마이크를 떼어내고 긴 한 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매우 잘 알고 있지요.” & 다음 날.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진짜로 게임 업계가 발칵 뒤집혔다. 준페이가 소속된 패미통신은 어제 제작 발표회에서 들은 내용만 따로 실어 아예 본 잡지가 발행되기도 전에 특집호를 내었다. 거기다 대체 누구 아이디어 인지 굉장히 자극적인 선전 문구를 넣었는데, 특집호의 제목이 바로.. -역습의 펜타곤.- ... 누가 보면 새로운 ‘건담’ 물인 줄 알겠다. 얼마나 서둘러 발표했는지, 패미통신의 특집호인 ‘역습의 펜타곤’은 조간 신문사를 이용해 특보로 오늘 새벽에 배포가 되었다. 덕분에 출근길에 들른 편의점에서 나는 이 괴상한 특보를 만날 수 있었다. “진짜 빨리도 발표했네, 이거 회사 올라가면 난리도 아니겠는데?” 그리고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회사 출입문부터 들려오는 수많은 전화 벨소리에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잠시 머뭇 거렸다. 그러자 사무실 안에서 나를 발견한 사유리가 서둘러 달려나왔다. “부장님 큰 일 났어요.” “네, 전화기 소리만 들어도 그런 것 같네요. 하하..” “농담하실 때가 아니라니까요. 지금 민텐도에서 저희 펜타곤을 고소하겠다고 난 리도 아니에요.” 이미 예상 했지만, 역시나 그렇게 나오는 건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장님. 여기 전화 좀 받아 주세요.” “부장님. 여기도 급해요.” “부장님~!! 벌써 세 번째 전화입니다. 저 좀 살려주세요.” 어차피 각종 언론 매체와 어제 참석하지 못한 서드 파티 회사들. 그리고 민텐도에서 걸려오는 전화들이겠지.. 나는 잠시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콘센트 근처에 앉아 있는 직원에게 말했다. “전화선 뽑으세요.” “네?” “업무에 방해되니까. 전화선 뽑으시라구요.” “아, 네..!!” 당황한 몸짓으로 헐레벌떡 콘센트에 다가가 전화 코드를 뽑아내자, 사무실 안이 고요해졌다. “자, 됐죠? 나머진 제가 처리 할 테니, 하던 일들 보세요. 아, 인사를 깜박했네, 다들 좋은 아침입니다~” 고개를 돌리며 인사하는 나의 모습에 직원들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이어 나는 개발 2팀으로 향하는 대신 대표실의 문을 두드렸다. “아, 준혁씨 오셨군요.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뭘 그리 당황해 하세요? 이정도 사태는 저희도 예상했었잖아요.” “물론 그렇긴 한데, 민텐도에서 생각보다 강하게 나와서요.” “뭐라고 하는데요?” “일단 준혁씨와 대화를 요구하고는 있는데, 산업 스파이 혐의로 고소하겠다는데요?” “네에!?” 헐.. 생각보다 초강수로 나오네? 그래도 그간의 정이 있는데, 적어도 나랑 대화는 한 번 해봐야 하는 거 아냐? 진짜 오랜만에 외치고 싶다.. ‘카마우치 개새끼야아아아!!!’ < EP. 20 : 제작 발표회 (5) > 끝 < EP. 21 : CEO 게임 (1) > & 산업 스파이.. ‘자신이 속한 기업이나 타 기업의 기술 관련 기밀 정보를 고의로 유출시켜 기업에 피해를 입히는 자.’ 라고 알고 있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저부분에 해당 될 만큼 민텐도에 엄청난 손해를 입혔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물론 저 예문은 산업스파이에 대한 핵심일 뿐이고, 좀 더 넓게 보자면 내 죄목은.. 그래, ‘이중 공작’ 이라고 해야 하나? 타임 슬립하기 전인 2015년에도 회사 몰래 아르바이트로 다른 회사의 코딩을 짜주는 직원들이 있었는데, 그거야 소소한 용돈 벌이로 끝나는 일이지만, 내 경우는 스케일이 좀 남다르긴 하지.. 그래서 일까? 내 앞에 앉아 있는 담당 변호사 후세씨 역시 굉장히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거 참.. 미묘하군요.” “그렇죠?” “어떠한 행위가 있다면 그에 대한 손해가 있어야하는데, 이건 도리어 이익이 발생하는 부분이 있다 보니 굉장히 까다로워요. 민텐도 측에서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었는데, 이 정도까지 밖에 못 벌었다.’ 라고 물고 늘어지면 할 말이 없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더 큰 이득을 보장한다고 장담하기도 힘든 문제라.. 이 경우에는 아무래도 준혁씨의 근로 계약서 사항을 살펴볼 수밖에 없군요.” “제 근로 계약서요?” “회사 규정 중에 재직 중인 사원의 창작물에 대한 소유권에 대한 사항이 명시 되어 있다면 조금 곤란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 그리고 드래곤 엠블렘이라는 게임을 만들 당시 혹시 민텐도의 카트리지 공장이라던가, 민텐도 소유의 기물을 이용한 적이 있습니까?” “아뇨. 카트리지는 후세씨도 아시다시피 트라이앵글 소프트를 인수하는 와중에 손에 넣은 부진 재고 카트리지를 이용했습니다.” “그건 잘 됐군요. 민텐도의 설비를 전혀 이용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빈틈 하나는 발견한 셈이니까요. 그럼 가장 문제가 되는 건 민텐도 재직 중에 펜타곤으로 출시한 ‘내가 없는 거리’ 군요.” “그 부분을 빠져 나갈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민텐도의 근로 계약서 조항 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일단 자택으로 돌아가 민텐도 재직 당시의 근로 계약서를 한번 살펴보길 권해드립니다.” 후세씨의 조언에 나는 지끈 거리는 관자놀이를 꾸욱 누르며 물었다. “후세씨.. 혹시 쉽고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지금 제작에 들어갈 게임이 한 두 개가 아닌데..” “있습니다.” “정말요? 그게 뭔가요?” “깔끔하게 민텐도의 제안에 따라 세컨드 파티로 들어가는 거죠. 그럼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 있습니다.” “…….” “물론, 그건 싫으시겠죠? 사실 이건 개인 적인 소견이지만, 왠지 제 느낌은..” 눈가에 주름을 깊게 패이며 인자한 웃음을 지어 보이던 후세씨는 탁자에 양손을 올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민텐도의 카마우치 사장은 준혁씨와 대화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네?” “사실 민텐도가 정말로 준혁씨를 고소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런 경고조차도 하지 않았겠죠. 내용을 전해들은 즉시 곧바로 실행에 옮겼을 겁니다.” 하긴 듣고 보니 후세 씨의 말도 일리가 있다. 카마우치 사장이 성격 하나는 대쪽 같으니까. 나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책상위에 있는 전화기만 바라보았다. “저기, 전화 한통만 써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마침 점심시간이기도 하고, 원하신다면 자리를 피해 드릴 테니 얼마든지 사용하세요.” “그럼 잠시만 자리 좀..” 잠시 후. 후세씨가 식사를 위해 사무실을 비우고, 혼자 남게 된 나는 괜스레 문 쪽을 한번 살핀 후에 가방에서 게임 & 워치를 꺼내들었다. “후우.. 요새 하도 바쁘다 보니 너도 참 오랜만에 본다. 그런데 이거 배터리는 남아 있으려나?” 마지막으로 시장 정보나 살펴 볼 겸 열어봤던 게 두 달 전.. 게임 & 워치는 시계방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수은 건전지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단 배터리 시간이 굉장히 오래가는 편이었다. 83년도로 넘어와 지금까지 사용하면서 배터리 교환 해본 게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였으니.. 살짝 불안한 마음에 덮개를 열고 전원 버튼을 누르자, 잠시 후 화면에 푸르스름한 빛이 들어왔다. 다행이다. 제대로 작동하는군. 음.. 어라? 전에 봤던 스폰서 게임이랑은 조금 다른데..? 잠깐만, 이 인터페이스 화면은.. ‘마치 삼국지 같잖아..’ 그랬다. 게임 & 워치 안에는 거대한 가상의 대륙이 떠올라 있고, 그 안에는 현재 발매된 콘솔들이 가상 대륙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그중에서 가장 많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회사는 민텐도였다. 패밀리와 슈퍼 패밀리, 그리고 휴대용 겜보이까지 가상의 대륙에 2/3를 거머쥐고 있는 모습이 그야말로 삼국지의 위나라를 연상케 했다. (그러고 보면 카마우치의 행동이 조조를 닮은 같기도 하고..) 그리고 오른쪽 아래 부분에는 민텐도 만큼은 아니더라도 제법 거대한 영토를 갖추고 있는 콘솔 업계 2위인 NEGA는 삼국지의 오나라와 이미지가 겹치는군.. 마지막으로 촉나라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PC-엔진이라던가, MSX같은 저물어 가는 콘솔 회사의 기종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아직 이쪽은 군웅 할거의 시대인가.. -CEO 게임을 시작하겠습니까?- 회사원 게임으로 시작해, 각 업체들의 고민을 파악하고 도와주었던 스폰서 게임을 거쳐, 이제는 CEO 게임인거냐? 황당함에 기가 찼지만, 이미 스폰서 게임으로 진화 과정을 한번 겪어본 터라 그리 놀라울 것은 없었다. 피식 웃음을 흘리며 스타트 버튼을 누르자, 대륙의 끝자락에 펜타곤이라는 아주 작은 영토가 생겨났다. 이번 CEO 게임은 인터페이스 자체가 예전에 많이 즐겨보았던 삼국지와 닮아 있었기에 적응하기가 더 쉬웠다. 잠시 동안 게임을 살펴본 나는 이내 흥미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삼국지에서 군주가 부하장수의 능력치를 살피듯 스폰서 게임에서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능력을 한눈에 살펴 볼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험 삼아 모리타 녀석을 클릭해보니 직업란에 캐릭터 디자이너라는 표시와 함께 다양한 정보가 표시 되었다. ‘몬스터 디자인 Lv.2에 미소녀 디자인 Lv.8 그리고 섹시 디자인 Lv.10이라.. 아주 정확하군..’ 그때 모리타의 능력에 대해 살피던 중 스킬 옆에 깜박거리는 레벨 업 버튼이 신경 쓰이던 나는 호기심에 그것을 눌러보았다. -모리타의 섹시 디자인 레벨을 올리기 위해선 다음과 같은 아이템이 필요 합니다. ‘요시하라 사토시의 성검 란그릿사 캐릭터 일러스트 Vol. 2’- 어라? 요시하라씨의 일러스트 북? 지금 서점에서 팔고 있는 그거? 아이템이라 길래 뭔가 어마어마한 것이 필요할 줄 알았더니, 이건 무슨 공부하는 학생에게 참고서 사다주는 것 같잖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번에는 첸드라를 클릭해 보니 모리타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스킬 정보가 떠올랐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먼저 살핀 것은 첸드라의 다른 능력보다 이것이었다. -플래시 메모리 개발 연구 Lv.1- “아!!” 순간 나도 모르게 혼자 남은 사무실에서 탄성을 내질렀다. ‘이거다!! 이거야!!’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모든 정보가 이 안에 담겨 있었다. 나는 흥분된 마음을 잠시 억누르고 일단은 게임을 좀 더 살폈다. 이 가상의 대륙이 콘솔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분명히 게임 소프트를 의미하는 장소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시 후. 게임화면에서 나는 게임 소프트를 의미하는 것으로 의심이 가는 아이콘을 찾아내었다. -지저 세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이콘을 클릭해보니 가상의 대륙을 떠받치는 지저 세계가 펼쳐졌다. 수많은 게임 소프트 개발 업체들로 거미줄처럼 엮여있는 이곳은 한눈에 봐도 가상대륙의 기반을 다지는 곳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단번에 알아 낼 수 있었냐고? 그거야 지저세계의 80%에 해당하는 회사들의 연결표시가 가상대륙에서 민텐도를 떠받치고 있었기 때문이지.. 그중에 우리 펜타곤은 지저세계에서 꽤나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민텐도를 떠받치는 가장 큰 줄기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나 민텐도의 휴대용 겜보이는 타마고 몬스터 덕분에 가장 큰 공헌도를 자랑하고 있었고, 두 번째 슈퍼 패밀리에서 내가 없는 거리 역시 적지 않은 공헌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말은 즉슨.. 이 두 개의 줄기가 민텐도와의 교섭 포인트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책상위의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게임 & 워치를 다시 가방 안에 넣은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그것은 카마우치 사장의 비서를 통하지 않은 직통 전화 번호였다. 잠시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고 수화기 너머로 카마우치 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군이냐? 안 그래도 10분만 더 기다렸다가 전화 한통 없으면 곧바로 고소장 넘으려고 했는데, 운이 좋구나.” 전화를 받자마자 나란 것을 알아챘는지 카마우치 사장의 목소리에 여유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되려 잡아먹힐 수 있다는 걸 느낀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타이밍이 좀 기가 막히죠?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사장님.” “녀석. 어제 발표회장에서 그딴 발언을 하고 잘 지내냐고 물어보다니. 네 녀석의 그 입심과 뻔뻔함은 여전하구나.” 다행히 카마우치 사장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후세씨의 말대로 카마우치 사장은 나와 대화를 원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내가 뒷공작으로 라이텍스 공장을 인수했던 것까진 모르는 것 같군. 하긴 그것까지 알았으면 대화고 나발이고 무조건 고소장부터 넣었겠지.. “그래도 건강해보이시니 다행이네요.” “당연하지. 고작 그딴 발표 내용에 흔들릴 만큼 우리 회사가 부실하진 않거든?” “맞는 말씀입니다.” 그때 수화기 너머로 카마우치 사장의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조금 가슴이 아픈 건 사실이다.” “저도 민텐도를 떠나 이런 소식을 전해드려 안타까운 심정이긴 하네요. 일단 전화로 이런 중요한 대화를 하는 것보다 직접 찾아뵙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겠죠?” “그렇지. 역시 뭘 좀 아는 구나. 그럼 기다리고 있으마.” “그럼 내일 오전 중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스케쥴 비워 두세요.” 카마우치 사장과 전화를 마친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만만치 않은 사람이네. 나이가 들었어도 특유의 강단이 있어.. 그때 마침 식사를 마치고 후세씨가 사무실로 돌아왔다. “아, 오셨어요?” “네, 혹시 제가 식사하는 동안 민텐도 측과 이야기는 해보셨나요?” “네. 후세씨 말대로 카마우치 사장님은 저와 대화를 원하시더군요. 내일 오전에 교토의 민텐도 본사에서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요? 흐음 잘 해결 됐으면 좋겠건만..” “음.. 어쩌면 쉽게 해결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일단 내일 오후 쯤에 사무실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전화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후세씨에게 상담에 대해 감사 인사를 마친 뒤 사무실을 나섰다. & 다음 날. 새벽 첫차로 신칸센에 오른 나는 오전 10시 교토의 민텐도 본사를 앞에 두고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여기도 오랜만이네..’ < EP. 21 : CEO 게임 (1) > 끝 < EP. 21 : CEO 게임 (2) > & 다음 날. 새벽 첫차로 신칸센에 오른 나는 오전 10시 교토의 민텐도 본사를 앞에 두고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여기도 오랜만이네..’ 담배 한 대를 모두 태우고 본사로 들어서자, 분위기는 생각했던 것보다 그렇게 살벌하진 않았다. 떠날 때 직원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작별 인사를 전했던 터라 그런지 오히려 나의 방문에 반가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저기 걸어오는 저 사람처럼.. “어머, 부장님!!” 로비를 지나가던 길에 맞은편에서 마케팅 담당 직원인 미나씨와 마주쳤다. 예전에 휴대용 겜보이를 런칭한 날에 함께 눈보라 맞아 가며 고생했던 기억이 떠올라 빙긋 웃어보였다. “여기 그만둔 게 언젠데 아직도 부장님이라뇨. 누가 들으면 오해할까 겁나네요.” “아, 그렇네요. 반가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그만..” “잘 지냈어요?” “진짜 부장.. 아니지. 강.. 준혁씨..?” “그냥 편하게 준혁이라고 부르세요.” “아, 네. 아무튼 준혁씨 때문에 그저께 난리가 났었거든요?” “그래요? 그런 거 치고는 평소와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 “그게 어제 사장님께서 준혁씨가 직접 방문할 예정이니 내색하지 말라고 엄포 하셔서.. 아무튼 카마우치 사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테니 올라가 보세요.” “네, 그럼 돌아가기 전에 인사차 들리겠습니다.” 나는 미나씨와 헤어진 뒤 사장실이 있는 건물 가장 윗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중에 묘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나를 바라보던 직원들이 서둘러 고개를 돌리는게 너무나 부자연스러웠다. 어떤 이는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는 이도 있었지만, 어떤 이는 대놓고 적개심을 보이는 직원도 있었다. 내가 떠나온 이후 직원들도 꽤나 늘었는지 생소한 직원들도 제법 보였다. 잠시 후. 내가 탑승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혹시나 우연처럼 시게씨라도 안에 있을까 싶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최근 업계 정보에 의하면 현재 시게씨는 내년에 슈퍼 패밀리용으로 ‘카린의 전설’ 신작을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부제는 ‘신들의 트라이포스’ 슈퍼 패밀리 최고의 명작 RPG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 중에 하나였다. 일단 제작 기간에 돌입라면 옆에서 건물이 무너져도 묵묵히 게임만 만들 사람이니, 펜타곤 소프트의 제작 발표회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았을 수도 있고.. 땡~ 엘리베이터의 벨소리가 울리고 적막한 복도에 들어서자, 복도 끝에 카마우치 사장이 기다리고 있는 사장실이 보였다. ‘자~ 그럼 어디 체스 한 판 두러 가볼까?’ 똑똑. 가볍게 사장실의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카마우치 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뒤 사장실의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천천히 열리는 문틈 너머로 카마우치 사장이 소파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네가 무슨 닌자냐? 뭘 그리 살금살금 들어와? 어젯밤부터 네 녀석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다.” “뭐, 여전하신데요. 건강해 보이십니다.” “망헐 놈.” 카마우치 사장은 피식 웃음을 새며 맞은편 의자를 권하자, 나는 차가 준비된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입을 열었다. “이렇게 뵈니 83년도에 면접 볼 때가 생각이 나네요.” “내가 널 해외 영업부로 발령 냈을 때 말이냐? 솔직히 그 날 면접은 나에게도 잊을 수 없는 날이지. 새파랗게 젊은 녀석의 입에서 미국 시장을 거머쥘 열쇠가 튀어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그 말은 저의 공적을 어느 정도 인정해 주신 다는 뜻입니까?” “왜? 이제 와서 인정에 호소할 생각이냐?” “호소하면 들어주시나요?” “택도 없지.” “그러면서 뭘 물으십니까. 사람 설레이게..” 가볍게 농을 주고받는 것으로 탐색전을 마친 우린 잠시 서로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이 사람. 애초에 전혀 고소할 생각 따윈 없구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제법 강단이 있구나. 역시 내 방에 들어오면 설설 기는 다른 녀석들과는 격이 달라.” “칭찬 감사합니다. 하지만, 너무 입에 발린 말만 하다가 정들면 서로 곤란하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그러자 이제까지 안부 차 농을 던지던 때와 달리 카마우치 사장이 정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것만으로 방안의 공기가 차갑게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먼저 말해 보거라.” 쳇. 선수(先手)를 빼앗겼군. “오히려 제가 묻고 싶네요. 대체 무얼 노리시는 겁니까?” “카와타를 통해 너희 펜타곤이 새로운 콘솔을 제작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주 재미난 유통 방식을 가지고 있더군. 그래서 군페이를 불러 네가 얘기한 유통 형식에 대해 가능성이 있는지 검토해 보았지.” “군페이씨는 뭐라고 하던가요?” “전.혀. 성공할 수 없는 유통 방식이라고 하더군. 플래시 메모리 카트리지를 이용한 소프트 판매는 얼핏 듣기에는 새로운 유통 구조를 창조해낸 것 같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허점투성이야. 애초에 플래시 메모리 카트리지를 생산하는 것부터가 단가에 맞지 않아. 거기다 게임 소프트를 복사해줄 단말기 장치까지 개발해 전국에 뿌린다고? 그만큼의 자본을 들여 언제 수익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고작 펜타곤 소프트 게임들만으로 말이다. 아마 NEGA와 똑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이야.” “어째서 저희 펜타곤 소트프가 NEGA와 똑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시는 거죠?” “그럼, 정말 네 말대로 우리 쪽에 소속되어 있는 서드 파티들이 움직일 거란 이야기냐?” “사장님. 말씀이 좀 이상하네요. 민텐도에 소속된 ‘서드’파티라뇨. 서드 파티들의 개발 우선순위는 좀 더 쉬운 개발 툴과 좀 더 나은 수익 분배입니다.” “그 수익 분배를 우리가 먼저 유리하게 맞춰준다면?” “지금 민텐도라는 대기업에서 처음 콘솔 사업을 하는 펜타곤을 상대로 돈 장사를 해보겠다는 말씀입니까?” “못 할 것도 없지. 본래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는 법이니까.” 이거 참. 환장하겠군. 펜타곤 소프트에서 나온 게임들은 유저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지만, 카마우치 사장의 말대로 서드 파티가 제대로 따라와 주지 않으면 상당히 곤란해진다. 현재 가정용 콘솔에서 유저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장르는 RPG. 플레이 시간도 길고 유저들에게 간접적으로나마 판타지 세계를 여행하는 듯 한 느낌을 전해주는 롤플레잉은 스토리 보드부터 시작해 제작기간이 상당히 긴 편이었다. 그렇기에 파이널 프론티어와 같은 게임 하나를 만드려면 적어도 8개월에서 1년 이상의 제작 기간을 둬야하는데, 그 안에 생기는 공백기를 메워주는 것이 바로 서드 파티에서 출시하는 게임들이었다. 생각해보라. 누가 일 년에 게임 1~2개 출시하는 게임기를 비싼 돈 들여 사고 싶겠는가? 아마도 퍼스트 파티 게임의 광팬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시기에서 민텐도가 서드 파티에게 수익 분배를 열어 주게 되면 당연히 이쪽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치졸하게 나오시는군. 하지만 반대로 나라도 같은 입장에 놓였다면, 똑같이 행동했을 수도.. 나는 잠시 탁자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들이키며 카마우치 사장과의 대화를 한차례 쉬었다. “그러니 그만 고민하고 카와구치씨를 설득해 우리 회사의 세컨드 파티로 들어 오거라.” 결국 노리는 게 그거였군. “그 이야기는 일전에 군페이씨를 통해 거절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너 정도 되는 녀석이 그때랑 지금이랑 상황이 달라진 걸 모르겠느냐?” 첫 번째 체크 인가? 나는 카마우치 사장의 공격적인 발언에 왕을 한 칸 옆으로 비켜 세우듯이 대답했다.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아니 제가 꼭 그렇게 만들 테니까요. 소송을 걸으셔도 상관없어요. 몇 번이고 항소할 겁니다. 그러니 피차 쓸데없이 시간 끌지 말고 진짜로 원하는 걸 말해보세요.” “좋아. 그렇다면 내가 없는 거리와 드래곤 엠블렘의 라이센스 일체를 넘겨라.” “뭐라구요?” “뭘 그리 놀라나? 네가 민텐도에 재직 당시에 개발했던 라이센스를 우리가 다시 되찾아 가는 것뿐이다.” “좋아요. 내가 없는 거리에 대한 라이센스는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드래곤 엠블렘은 안되겠네요.” “뭐?” 카마우치 사장의 대답에 나는 품에서 한 장의 문서를 꺼내 보였다. “우리 회사의 근로 계약서?” “워낙에 꼼꼼하게도 작성해 두셔서 허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여기에 이런 말이 있더군요. ‘재직 중인 사원은 그 어떤 경우라도 타 업체에 본인의 창작물이나 사내 기밀을 유출해서는 아니 된다.’ 라고 말이죠.” “그래서?” “드래곤 엠블렘은 순수하게 저의 아이디어로 인해 아무런 회사도 통하지 않고 개인으로 만든 창작물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민텐도는 드래곤 엠블렘에 대한 소유권을 요구 할 수 없다는 것이죠.” “너.. 이 녀석..” “아, 그리고 내가 없는 거리에 대한 소유권을 원하신다면 정식으로 피해 소송을 거시고, 되찾아 가시길 바랍니다. 이것 역시 펜타곤 입장에서 본다면 저 하나 때문에 벌어진 대기업의 일방적인 계약 파기와 마찬가지기에 적절한 대응을 할 예정이 니까요. 조금 길고 지루한 싸움이 될 수 있겠네요. 뭐 계속해서 소송을 걸다보면 언젠가는 되찾아 가실 수 있을 겁니다. 어차피 ‘내가 없는 거리’에 대한 후속작은 저에겐 별 의미가 없거든요. 사람들은 단 한 번의 새드 엔딩을 기억합니다. 같은 작품의 두 번째, 세 번째가 이어져 봐야 첫 번째와 같은 반응은 절대 얻을 수 없죠.” “강준혁.. 너..” “가능하면 이렇게까지 민텐도와 척을 지고 싶지 않았지만, 사장님께서 이렇게 나오신다면 저희 역시 가만히 당하진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카마우치 사장의 입술이 실룩이더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그렇다면 어디 끝까지 가보자꾸나. 새로운 콘솔이 나오기도 전에 슈퍼 패밀리는 일본.. 아니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급된 가정용 콘솔이 되어 있을 테니까.” & 그후로 카마우치 사장은 일본 시장을 제압하기 위해 엄청나게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기 시작했다. 우선적으로 슈퍼 패밀리가 출시된 1주년을 맞아 기기 가격을 25,000엔에서 21,800엔으로 3,200엔 가량을 낮추었다. 또한 서드 파티에게 받은 로열티 부분을 슈퍼 패밀리 매출에 기여한 공헌도에 따라 순차적으로 낮춰주는 새로운 정책을 제시했다. 민텐도의 결정에 따라 서드 파티 회사들은 환호성을 내질렀고, 그 효과는 1990년 크리스마스를 맞아 절정에 달했다. 일본 내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보급률을 기록한 것이다. 자신의 살을 도려내면서까지 혼신을 다하는 민텐도의 모습에 나와 카와구치씨는 연일 신문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1991년의 새해가 밝고 10일이 지난 어느 날.. “와.. 카마우치 사장이 준혁씨가 두렵긴 한가 보네요. 설마 준혁씨의 선전포고에 이 정도까지 공격적인 투자를 할 줄은 몰랐거든요.” “덕분에 민텐도의 압력에 눌려 있던 서드 파티들의 숨통이 많이 트인 듯하네요. 여러모로 게임 업계에는 좋은 일이긴하죠.” 나의 대답에 카와구치씨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내일 패미통신에 실릴 차세대 기기 ‘라온’에 대한 기사를 보면 카마우치 사장 기절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새로운 차세대 콘솔의 이름은 ‘라온’으로 정해졌다. 라온이란 ‘즐거운’ 이란 뜻의 순수 한국말로 나의 제안에 따라 이름이 정해졌다. 그리고 다음 날.. 1991년의 시작을 알리는 패미통신의 신년호에 지난 가을부터 비밀에 휩싸여 있던 차세대 기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이 세계 최초로 제작된 16비트 풀 컬러 ‘휴대용’ 게임기 라온의 등장이었다. 음? 차세대 콘솔은 TV 거치기가 아니었냐고? 난 발표회에서 차세대 콘솔이 거치형이라는 말 한마디도 안했었는데..? < EP. 21 : CEO 게임 (2) > 끝 < EP. 21 : CEO 게임 (3) > & -차세대 16비트 콘솔 ‘라온’ 드디어 베일을 벗다. 그 정체는?- -슈퍼 패밀리 최초의 호러 게임 ‘발렌타인 데이’ 발매까지 초읽기- -차세대 콘솔은 휴대용? 게임 업계의 공룡기업 민텐도를 농락한 펜타곤.- 새로운 콘솔의 출시 소식에 열도의 게이머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이번 달에 발매된 게임 잡지들은 온통 자극 적인 선전 문구로 도배되어 있었다. “뭐야? 라온이라는 게임기가 휴대용 게임기였어?” “거기다 16비트에 성능은 슈퍼 패밀리랑 동급이나 그 이상이라는데?” “대박이다. 근데 이거 비싸지 않으려나?” “일단 가격이 미정이니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비싸겠지..” 신주쿠의 대형 서점에서 유키를 기다리던 나는 잡지를 들여다보는 학생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거기다 동시 발매 소프트로 파이널 프론티어4가 먼저 나오고 한 달 후에 드래곤 엠블렘 1 리메이크가 나온데, 와~ 이건 진짜 사고 싶다.” “진짜? 나 드래곤 엠블렘 너무 비싸서 못해봤는데, 잘됐다.” 나는 학생들이 보고 있는 잡지와 똑같은 녀석을 집어 들고 펼쳐보았다. 이번호는 어느 잡지들마다 온통 라온에 대한 소식들뿐이어서 몇 장 넘기니 곧바로 라온에 대한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 -기획 특집. 신형 콘솔 ‘라온’ 파이널 프론티어4, 드래곤 엠블렘 리메이크와 동 시 출시!!- 이 글을 쓰고 있는 본 필자는 아직도 펜타곤 소프트의 제작 발표 당일을 잊을 수가 없다. 현재 장난감 업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타마고 몬스터의 화려한 홍보영상으로 시작해, 참석자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발렌타인 데이의 CF 영상은 너무나 충격적인 영상미로 얼마 전 각 방송사에서 방송 중지처분이 내려진 걸로 전해 들었다. 이유는 게임의 광고가 너무나 소름끼치기 때문에 아이들이나 심장질환 환자가 있는 가정집에서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고 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에 대한 반등 효과일까? 현재 ‘발렌타인 데이’는 현재 슈퍼 패밀리 기대 신작 1위를 달리고 있다. 모두를 공포에 떨게 한 발렌타인 데이의 제작 발표가 끝나고, 이어진 파이널 프론티어 4의 플레이 동영상은 차세대 기종답게 기대 이상의 그래픽을 보여 주었는데, 하단의 스크린샷을 참고 해보면 패밀리로 출시했던 전작에 비해 월등한 퀄리티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파이널 프론티어 4는 발매 기종에 대하여 ‘미정’으로 표시해 업계 관계자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는데, 오늘 차세대 휴대용 게임이 ‘라온’의 발표와 더불어 정식 출시일이 잡혔다. 라온의 정식 출시 일정은 8월 15일. 펜타곤 소프트의 강준혁 부장은 새로운 휴대용 콘솔은 한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에서 동시 발매 될 예정이며, 아직 정확한 가격은 공지 할 수 없지만, 소비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가격을 생각해 두고 있다고 답했다. 덧붙여 다음 달에 슈퍼 패밀리로 출시되는 호러 게임 ‘발렌타인 데이’의 메인 디렉터이기도 한 그는 앞으로도 거치기 콘솔의 1인자인 민텐도와 좋은 관계를 이끌어 나가고 싶다는 입장을 발표하였는데, 과연 그의 인터뷰에 대해 민텐도에서 어떻게 대처할지. 잡지 기자를 떠나 한 사람의 게이머로서 민텐도와 펜타곤의 앞으로의 행보가 굉장히 궁금하다. 콘솔 업계의 경쟁사가 되었긴 하지만, 라온의 포지션이 ‘휴대용’인 만큼 펜타곤 소프트가 앞으로도 슈퍼 패밀리용 게임을 만들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글쎄.. 그건 카마우치 사장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렸지..’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잡지를 다시 가판대로 돌려놓은 뒤 잡지 코너를 벗어났다. 이곳에 더 있다간 연신 새로운 콘솔에 관심을 가지는 학생들의 목소리에 귀가 간지러워 미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서점 안을 지나던 길에 창밖을 바라보니 아침부터 꾸물꾸물했던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도쿄에 눈이 내리는 경우는 조금 드문 일이었기에 서점 안에 있던 사람들도 작게 탄성을 내뱉고 있었다. 유키와의 약속시간은 아직 여유가 있었기에 나는 일러스트 화집이 모여 있는 코너로 걸음을 옮겼다. 최근에 내가 재미를 붙이고 있는 일과는 바로 CEO 게임을 이용해 직원들의 능력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이었다. 일전에 민텐도에서 카마우치 사장을 만나고 돌아오던 길에 모리타에게 요시하라 사토시의 ‘성검 란그릿사’ 일러스트 집을 사다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모리타는 예상과는 달리 굉장히 서운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부장님께서도 설마 제 일러스트가 사토시 녀석의 그림체를 베꼈다고 생각하시나요?” 나의 말이라면 지옥 불구덩이라도 함께 뛰어들 모리타에게서 그런 대답이 나오자, 당황한 나는 함께 펜타곤에서 근무 중인 모리타의 스승 아마노씨에게 모리타에 대해서 몇 가지 물어 보았다, 그리고 그가 대답하길, 사실 모리타는 자신의 라이벌인 사토시의 일러스트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했다. 안 그래도 그림체가 비슷하다는 평 때문에 괜한 오해를 사기 싫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차마 내가 건네는 선물까지 거절할 수 없었던 모리타는 그 후로 간간히 사토시의 일러스트 화보를 꺼내보곤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내 방을 찾아왔다. “확실히 사토시의 일러스트는 훌륭합니다. 하지만 뭐랄까.. 녀석의 일러스트를 살펴보며 나라면 어떻게 표현했을까를 비교하다보니, 뭔가 머리가 맑아진 느낌이 들어요. 사토시 녀석만큼 남자와 여자를 자유자재로 그릴 수 없지만, 적어도 미소녀 캐릭터만큼은 절대지지 않을 자신 있습니다.” “어..? 어어.. 그래.” -모리타의 섹시 캐릭터 디자인 레벨이 11로 올랐습니다.-... 뭔가 능력 말고, 멘탈도 올라간 거 같은데? 그 후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직원들의 능력 향상을 위해 힘을 쏟았다. 하야시의 코딩을 능력을 향상 시켜주기 위해 첸드라를 소개시켜주었지만, 둘의 성격 차이로 이 부분은 실패했다. & 서점 안에서 나는 이번에 새로 나온 요시하라 사토시의 일러스트 북을 찾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 NEGA 드라이브용 ‘성검 란그릿사’를 발매한 데사이야의 캐릭터 디자이너이자, 18금 일러스트레이터. 그리고 애니메이션 원화 작가로 많은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유키가 오기 전에 빨리 찾아야해..’ 사토시씨의 일러스트 집에 나오는 여성 캐릭터들은 모두 반들반들한 피부에 풍만한 가슴과 골반.. 그리고 애로틱한 표정이 압권이었기에 괜히 유키한테 걸리면 골치 아파 질 수도 있다. “아, 이거다. 러브 비너스!!” 나는 아이들 손에 닿지 않게 가장 높은 곳에 꽂혀 있는 18금 일러스트집을 꺼내들었다. ‘어라? 이건 밀봉이 아니네, 설마 누가 뜯어 본건가?’ 꿀꺽..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며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화보집 코너에는 나말곤 아무도 없었기에 나는 슬쩍 화보집을 열어 보았다. 커헉.. 어릴 때 봤을 때도 충격적이었지만, 이 사람의 그림체는 정말 대단하다. 약 100 페이지 가량의 화보집에 그려져 있는 여성 캐릭터 중에 옷을 제대로 입고 있는 여자가 단 한명도 없다니.. 거기다 재밌는 점은 마치 기름을 바른 듯 유들유들한 피부 결을 자랑하는 그의 그림체에서 여성의 가슴만은 굉장히 디테일하게 표현되어 있었는데, 특히 한쪽으로 살짝 찌그러져 있는 유두의 표현이 정말.. “준혁씨 거기서 뭐해요?” 팍!! 등 뒤에서 유키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펼쳐뒀던 화보집을 기도하듯 반으로 접었다. 잠시 선채로 굳어 있던 나는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음? 뭐예요? 뭔데 내가 오자마자 덮어요?” “어? 응. 아무것도 아냐. 생각보다 일찍 왔네?” 밖에 내리는 함박눈 때문인지 그녀의 어깨와 머리에 새하얀 눈이 묻어나 있었다. “뭐지? 수상한데? 그 책 잠깐 줘 봐요.” “뭐? 무슨 책?” “준혁씨가 손에 들고 있는 그 책이요.” “이거? 아~ 이거 암 것도 아냐. 그냥 참고 자료랄까?” 나는 유키의 손에 닿지 않은 높은 곳에 책을 꽂아 넣으며 베시시 웃어 보였다. 그러자 유키는 책장 쪽을 빤히 바라보더니 중얼 거렸다. “러브 비너스? 제목도 수상한데? 점원한테 꺼내 달라고 해야지.” “배고프지? 우리 나가서 뭐라도 먹을까?” 나는 유키의 조그만 등을 떠밀며 서둘러 서점을 나섰다. 그러자 서점에 들어왔을 때랑 전혀 다른 새하얀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와아.. 눈 엄청 많이 내리네. 일본에 살면서 이렇게 눈 많이 오는 거 처음 보는 거 같아.” “그죠? 10년 만에 기록적인 폭설이래요.”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렇게 함박눈이 내리니 88년도에 다녀왔던 서울이 생각나네요.” 혹시나 거절당할까봐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던 그 날의 유키가 떠올라나 역시 피식 웃어보였다. “아, 내 정신 좀 봐. 준혁씨 우리 빨리 밥 먹고 영화 봐요. 제가 오는 길에 미리 예매해 두었거든요~” “영화?” “네. 요번에 보고 온 친구가 엄청 재미있다고, 꼭 극장에서 보라고 추천하던데요?” “그래? 제목이 뭔데?” “나홀로 집에요.” ... 회귀 전 매해 크리스마스마다 틀어주던 그 케빈을.. 여기서 또 보게 될 줄이야.. & 그날 밤. 크리스마스 이브에 빈집 털이 두 도둑을 때려눕히는 케빈의 재치에 유키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안에서도 눈물을 찔끔 거리며 웃고 있었다. “아~ 도둑들 너무 웃기지 않아요?” “어? 응. 재밌더라..” “준혁씨는 별로 재미없었나 봐요? 전 엄청 웃었는데, 잘 웃지도 않고..” ‘그게.. 너도 스무 번쯤 보게 되면 알게 될 거야..’ 나는 다른 의미로 슬쩍 웃어 보인 뒤, 잠시 후 그녀의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조심히 들어가..” “요새 많이 바쁘죠? 그래도 식사 잘 챙겨 먹구요.” “그래. 잘 자~” “네. 준혁씨두요..” 내 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는 유키를 백밀러로 확인 한 나는 잠시 후 골목을 꺾어 차도로 빠져 나왔다. 나는 얼마 전 내 차에 설치한 카폰을 손에 들고 능숙하게 번호를찍어 첸드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달리는 차안에서는 통화감도가 별로 좋지 않았기에 근처에 차를 멈춰 세우자 때 마침 첸드라가 전화를 받았다. “첸드라. 라온에 탑재 될 저전력 디스플레이 준비 됐냐?” “프로토 타입은 완성 했다. 이제 자잘한 문제만 고쳐 양산 하면 된다.” “좋아. 지금 바로 갈게.” 첸드라와 통화를 마친 나는 카폰을 내려놓은 뒤 힘차게 엑셀을 밟았다. 휴대용 게임기에서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부분은 디스 플레이와 배터리, 그 둘 중에 하나가 방금 해결 되었다. 그런데 90년대 초반에 어떻게 저 전력 디스플레이를 완성 했냐고? 그건 말이지.. & 잠시 시간을 되돌려서 1990년의 어느 여름 날. 나는 홀로 거실의 테이블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었다. 오른손에는 작고 얇은 드라이버 하나.. 그리고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왼손은 어느새 흥건히 땀이 베어나 있었다. 날이 더워서? 그건 아니다. 단지 지금 내가 행하려는 짓에 대해 조금 긴장했을 뿐이다. “후우.. 좋아. 뜯어보자.” 조립은 분해의 역순. 이것만 기억하자. 지금 내가 하려는 짓은 어찌 보면 굉장히 멍청한 짓 일수도 있었다. 아니. 멍청한 짓이 맞다. 하지만, 새로운 ‘휴대용’ 게임기의 제작을 위해 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미래에서 가져온 게임 & 워치를 분해해 보기로.. 당연하겠지만, 완전히 못쓸 정도로 분해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어떤 칩셋을 사용하는지 그 구조와 배열은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물론 나는 전문적인 엔지니어가 아니기에 구조를 본다한들 이것이 어떤 형식으로 작동이 되는지 잘 모르지만, 적어도 사진을 찍어 첸드라나 롭에게 보여준다면 큰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훌륭한 엔지니어들은 기기 내부에 구현된 칩셋의 구조와 배열에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하던가? 2000년대에 미국의 애플에서 만들어낸 MP장치와 휴대폰의 구조가 엔지니어들에게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현재.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혁신적인 물건이라 치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게 임 & 워치 말고는 없었기에 나는 도박을 거는 심정으로 십자 드라이버를 나사구멍에 맞췄다. ‘근데 이거 정말 괜찮으려나?’ < EP. 21 : CEO 게임 (3) > 끝 < EP. 21 : CEO 게임 (4) > ‘근데 이거 정말 괜찮으려나?’ 하지만 나사구멍이 있다는 것은 열어볼 수 있다는 뜻이잖아? 일단 뚜껑만 열어보고 뭔가 아니다 싶으면 도로 덮어 놓자.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조심스레 게임 & 워치의 뒷면을 열어보았다. 일단 겉 케이스를 열어본 내 소감은... ‘딱히 특별한건 없네?’ 일단 전력을 담당하는 배터리 동선을 시작으로 메인보드 형식의 녹색 기판이 달려있었다. 사실 모든 전자기기는 컴퓨터의 기판을 베이스로 하기에 크게 다른 점은 없다. 메인 보드에 붙어 있는 CPU와 그래픽, 사운드 장치. 휴대용 게임기에는 디스플레이까지 달려있기에 배열이 조금 더 복잡하긴 하지만... 나는 양쪽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메인보드의 나사까지 제거한 후, 드라이버를 이용해 조심조심 기판을 들어올렸다. “어..?” 1/3 정도 기판을 들어 올렸을 때기기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미한 빛이 보였다. 호기심에 조금 더 기판을 들어보고 싶었지만, 이 부분부터는 뭔가 뻑뻑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이래선 내부를 들여다보기엔 각도가 너무 좁아.. ‘이러다 부러지는 거 아냐?’ 혹시나 미처 제거하지 못한 나사가 있나 싶어 다시 살펴보았지만, 딱히 메인 보드를 고정하는 다른 장치는 보이지 않았다. 잡아 뜯는 다면 뜯어 볼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랬다간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날 것만 같아 결국 나는 그만두기로 했다. 괜히 망가뜨렸다가 2015년에 원래 시간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면 어쩌냐.. 사실 지금에 와서는 타임슬립 하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큰 메리트를 느끼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사람이란 또 모르는 것이니까. “아~ 결국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내는 건 무리였나?” 쉽게 풀리는 게 없네. 탁자 위 공구함에 드라이버를 던져 넣은 나는 의자에 기대어 두 눈을 부볐다. 차세대 콘솔을 휴대기기용으로 전향하게 된 것은 사실 첸드라의 의견 때문이었다. 두 대의 거치기를 결합시키는 기존의 방식은 부피가 너무 커질뿐더러 CD를 사용하는 거치기가 나오면 기존의 카트리지 방식 콘솔이 굉장히 거추장스러워지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던 중 타마고상에 들어가는 액정 표시 디스플레이를 연구하던 첸드라가 신형 게임기의 제작 방향을 휴대기기 쪽으로 제안했다. 두 장의 얇은 병열 유리판 사이에 액정을 주입해 전류 압력으로 액정 분자의 배열을 바꾸는 이 방식은 주로 전자계산기에 사용 되었으나, 군페이씨의 아이디어로 인해 게임 & 워치가 만들어 졌고, 휴대용 겜보이에서 부터는 유동적인 액정 표시가 가능해졌다. 첸드라의 제안은 당시에선 굉장히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휴대용 겜보이가 1987년 겨울에 판매가 시작되면서부터 액정 표시 장치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늘어나는 추세였기에 최근에는 컬러 액정 디스플레이가 개발 되며 미래 산업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첸드라의 의견을 100% 수용하기에는 처리해야할 문제가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실은 이 시기에 풀 컬러 휴대용 게임기를 제작 중인 회사가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NEGA사에서 개발 중인 ‘플레이 기어’가 그것이었다. 8비트 CPU에 160x144의 해상도를 가진 액정화면은 풀 컬러인 것도 기가 찬데, 한발 더 나가 백라이트 기능까지 덧씌워 버렸다. (어찌보면 진정한 혁신이 여기서 시작 될 수도 있었던 시대를 앞서간 기능이긴 하지만...) 덕분에 건전지를 6개나 사용하는 배터리 귀신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는데, 문제는 6개의 배터리를 사용하고도 플레이 시간이 3시간을 넘지 못해 유저들의 불만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건전지가 6개가 들어간 순간부터 이미 휴대기기라 부를 수 없는 무게긴 하지..’ 나는 미래에서 가져온 게임 &워치의 분해 작업을 잠시 쉬며 새로운 휴대기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민텐도의 겜보이와 NEGA의 플레이 기어에서 필요한 기능과 필요 없는 부분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선 첫 번째로 휴대기기에서 백라이트 기능이 있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베터리 문제가 너무 심해지니 1세대에선 패스.. 두 번째로 16비트 CPU 이 부분은 라이텍스를 이용해 슈퍼 패밀리에 박아 넣은 CPU를 커스텀 화시켜 재사용하기로 했다. 그렇게 사운드 부분과 배터리 부분까지 전부 체크를 마치고 나니 새로운 차세대 기종의 형태가 어느 정도 잡혀 있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겠는데?’ 하지만 가장 거대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는데, 바로 가격이었다. 아무리 싸게 잡아도 민텐도의 휴대용 겜보이처럼 이윤을 추구할 수가 없잖아.. 그 순간 번뜩 내 스스로의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본래 콘솔이란 적자 안고 판매하는 기기다. 콘솔에서 이윤을 얻기 위해 기기의 성능을 제한하는 것은 민텐도의 방식이잖아? 무얼 위해 타임 슬립을 해온 건지 잊어버린 거냐?’ 카마우치 사장한테 저승길 노잣돈 얘기까지 꺼내면서 투자 좀 하라던 게 작년이었는데,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딱 그 꼴이잖아? 창피한 줄 알아라. 강 준혁. 현재 내가 가진 모든 자본을 쏟아 부어서라도 최고의 기기를 만든다. 이제부터 내가 걸어가는 길은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콘솔의 역사와는 달라지 게 될 것이다. 당연히 실패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나 자신에게 부끄러운 짓은 하지 말자. 거대한 콘솔의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니까... 나는 체크해둔 서류를 한쪽으로 치우고 게임 & 워치의 조립을 위해 다시 드라이 버를 꺼내들었다. 메인보드 자체를 뜯어본 것도 아니었기에 몇 번 나사를 조이자, 게임 & 워치는 금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 녀석 기판만 뜯어 볼 수 있었다면 오버 테크놀러지의 극한을 맛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경첩을 열어 전원 버튼을 누르니 화면에 빛이 들어오며 정상적으로 기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별 이상 없네.. 어라? 잠깐만.. ‘이거 화면이 두 개잖아? 그럼 메인 보드가 안 달려 있는 위에 화면은 탈착이 되려나?’ 나는 재빨리 게임 & 워치의 전원을 끄고 이번에는 상판 케이스를 뜯어보았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역시 사운드와 메인 화면을 담당하는 윗부분은 탈착이 가능하다!!’ 나는 일자형 드라이버로 조심스레 경첩을 통해 전달되는 링크 단자를 뽑아내고 게임 & 워치의 디스플레이를 들어내었다. ‘됐다!! 됐어!!’ 그렇게 나는 미래에서 가져온 게임 & 워치에 오버 테크놀러지 중에 하나를 손에 넣었다. & 끼이익. 잠시 후. 라이텍스 공장 앞에 차가 멈춰 서고, 나는 어스름 불이 밝혀져 있는 라이텍스의 본사 건물 쪽으로 걸음을 떼었다. 첸드라를 비롯한 인도 친구들은 라이텍스 공장 안에 있는 숙소에서 지내고 있었기에 늦은 밤에도 그들을 만나는 것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강준혁 왔구나.” “수고 많았다. 첸드라.” “사실 내가 한 것은 별 거 없다. 이게 전부 네가 가져다준 액정 디스플레이 덕분이니까. 하지만 아직도 궁금하긴 하다. 대체 어떻게 그런 물건을 손에 넣은 건지. 정말로 그것과 같은 기술을 이용해도 별 문제가 없는 건가? 이미 특허를 내었어도 이상할 게 없는 기술이던데?” “걱정 마. 특허 소송은 없을 테니까. 오히려 우리가 기술 특허를 내야지.” “정말 그래도 괜찮은 거냐?” 라이텍스에서 만들어낸 저 전력 액정 디스플레이는 비록 백라이트 기능이 없기에 빛 반사에 약하지만, 320 x 280의 해상도로 인해 민텐도 겜보이 보다 가독성과 그래픽이 뛰어 났다. 테스트용인 프로토 타입 액정을 실제 슈퍼 패밀리에 연결하여 구동 시키자, 잠시 후 내가 없는 거리의 타이틀 화면이 떠올랐다. “훌륭한데?” “화면이 작아 졌지만, 도트 배열까지 작아져서 그래픽이 더 좋게 보이는 이점이 있다.” 이정도 그래픽이 휴대기기에서 돌아가는 것 자체가 게이머들에겐 미치고 환장할 일이지.. 타마고 몬스터 역시 풀 컬러로 즐길 수 있을 테고, 서드 파티 몇 군데에서 제대로 도와준다면 해 볼만 하겠어. & 다음 날. 펜타곤 소프트에서 차세대 휴대용 콘솔 발표가 있고 난 후. 게임 업계가 뒤집어 졌다. 그중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곳은 다름 아닌 민텐도였다. 새로운 콘솔의 싹을 짓밟기 위해 작년 가을부터 서드 파티에 대한 로열티를 대폭 감소하고, 카트리지 단가까지 낮추며 견제 하였는데, 막상 발표한 기계가 휴대용 기기였다니.. 회의실에서 불같이 화내고 있을 카마우치 사장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라온이 휴대 기기라는 것 발표한 시기는 1991년 1월 12일이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새로운 한해의 시작을 알리는 중대 발표쯤으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 이 날짜는 민텐도에게 굉장히 치명적인 외통수도 작용했다. 왜냐고? 그래야만 2월 14일에 발매될 ‘발렌타인 데이’의 출시에 차질이 없을 테니까. 슈퍼 패밀리 게임의 카트리지 제작은 약 한달 정도의 기간이 소요되었기에 만약에 그전에 라온을 발표해 버리면 민텐도에서 카트리지 제작을 거부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발렌타인 데이는 1991년 1월 4일 무사히 민텐도의 승인을 얻고 카트리지 제작에 돌입된 상태이기에 현재 상황에서 민텐도는 발렌타인 데이의 카트리지 제작을 일방적으로 취소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라온의 발표가 얼마 지나지 않아. 1991년의 1월 말. 민텐도에서 굉장한 악수(惡手)를 두게 되는데, 일단 라온이 휴대기기라는 것이 확실해 지자, 민텐도는 1991년 2월을 기점으로 그동안 서드 파티들의 숨통을 풀어 주었던 로열티 부분을 다시 올리기 시작했다. 많은 회사는 민텐도의 새로운 조건에 반발했지만, 민텐도는 서드 파티와의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한정기간을 들먹이며 특유의 고압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만일 새로 출시한 라온이 별다른 호응이 없을 경우 다시 로열티를 올리기 위해 한정기간 운용이라는 말을 명시해 두었던 모양이다. 서드 파티들은 민텐도의 횡포에 굉장히 불만을 토로했지만, 이미 개발 중인 게임의 플렛폼을 바꿀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재계약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타이밍에 새로운 휴대기기인 라온의 개발 툴이 담긴 킷(kit)을 서드 파티에 무료로 배포해 주었다. 민텐도의 횡포에 당황하던 서드 파티 회사들은 자연스럽게 펜타곤에서 개발한 라온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제법 서드 파티들 중에서 알아주는 거대 기업이 움직였다. 게임 잡지 기자들은 가장 먼저 펜타곤과 손을 잡은 서드 파티의 발표에 굉장히 놀라운 반응을 보였고, 그것은 2월 12일 발렌타인 데이 출시 이틀 전에 유저들에게 공표 되었다. -횡스크롤 액션 게임 ‘파이널 파이트 89’로 유명한 캡코사. 새로 출시하는 라온의 런칭 타이틀에 ‘파이널 파이트 89’ 이식과 더불어 ‘스트리트 파이어 2’ 가정용 콘 솔 최초 이식 결정!!!- < EP. 21 : CEO 게임 (4) > 끝 < EP. 22 : 대전 격투의 시대 (1) > 1991년에는 장소를 불문하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골목에서 울려 퍼지던 목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뿐만 아니라 내 어릴 적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도우겐!!” “소우류켄!!” “타츠마키 센뿌가크!!” (속칭 아따따뚜겐 이건 지역마다 명칭이 좀 다르다.) 형보다 나은 동생은 없다는 옛 말에 귀싸대기라도 날리 듯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한 ‘스트리트 파이어2’는 현재 게임 센터에서 파급력이 가장 센 타이틀 중에 하나였다. 혼자서 게임을 플레이 하다보면 반대편 기계에서 누군가가 동전을 넣어 싸움을 걸어온다. 그리고 긴장감 넘치는 3판 2선승제의 격투가 시작되고, 판정에 따라 승자는 남고 패자는 말없이 떠날 수밖에 없다. 이토록 단순 명쾌한 격투 방식은 다른 게임들보다 동전 회수률이 높은 덕에 게임 센터를 운영하는 사장들이 가장 좋아하는 게임이었다. 1에서 잘 나가지 않던 필살기 커맨드의 딜레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고, 무조건 류와 켄으로만 선택해야 했던 전작과 달리 개성 넘치는 8인의 캐릭터를 마음대로 고를 수 있었다. 또한 중간 중간 보너스 스테이지를 넣어 차량 부수기와 통나무 부수기와 같은 쉬어가는 요소와 플레이 캐릭터 말고 4대 천왕이라는 보스급 캐릭터의 출현은 유저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리고 그런 희대의 타이틀이 라온 쪽으로 넘어온 것은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야!! 방금 오늘 나온 패미통신에서 봤는데, 스트리트 파이어2가 8월에 라온이랑 같이 나온데!!” “진짜!?” 아키바의 타마고 샵에 방문한 나는 매장 안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가 번뜩 뜨였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 잡지 발매일이었구나... “그럼 스파2를 휴대용 게임기로 할 수 있다는 말이야?” “거기다가 통신 케이블인가? 그걸 연결하면 타마고 배틀처럼 두 명이서 대전도 가능하다는데?” “우와.. 그럼 오락실 다 망하겠네..” 아이들의 대화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아케이드 시장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칠 수 있어도, 고작 스파2 하나 때문에 시장이 망해버릴 만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91년부터 아케이드 센터에는 소위 ‘대전 격투의 시대’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게임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데, 스파2는 시대의 포문을 연 기념비 적인 타이틀이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곧 SMK에서 ‘사무라이의 투혼’이라던가 ‘이리의 전설’ ‘용격의 권’ 과 같은 어마 무시한 격투 게임들이 쏟아져 나올 테니까, 게임 시장이 더 활성화 되겠지.. 특히나 SMK는 격투 게임의 묘사가 상당히 잔인했는데, 사무라이의 투혼에서 강 베기로 끝을 내면 캐릭터의 몸이 잘려나가는 연출로 격투 게임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수작을 많이 출시했다. 그런 효과는 용격의 권에서도 이어져 필살기로 끝을 내면 여성의 옷이 찢어지는 연출 덕에 마지막만큼은 왕 장풍으로 끝내려고 발악했던 기억이 떠오른 나는 피식 웃음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83년부터 시간이 흘러 이렇게 추억과 마주하는 순간이 다가 왔구나.. 아무튼 스파2의 라온 출시 소식은 유저들에게 새로운 콘솔의 기대감을 한층 더 증폭시키기에 충분한 타이틀이었다. ‘파이널 프론티어 4와 희대의 대전 격투 게임인 스파2가 런칭 작이라면, 라온에게 이보다 좋은 출발은 없겠지’ 아니... 사실상 최강의 라인업이다. 파이널 프론티어와 같은 장대한 스케일의 RPG를 즐기다가 피곤할 때는 카트리지를 교체하여 격투 게임을 즐긴다. 또한 스파와 같은 격투 게임은 타인과 대전 할 수 있는 요소가 있으므로 휴대 기기의 이점을 살려 언제 어디서나 친구와 격투 게임을 즐길 수 있다. 거기다 파이널 파이트 89라는 걸출한 횡스크롤 액션 게임도 준비 되어있으니, 캡코 덕분에 유저들이 선택할 수 있는 장르의 폭이 굉장히 넓어졌다. 어렸을 때 꽤나 부자였던 친구네 집에서 슈퍼 패밀리를 처음 만났던 날 가장 놀란 것은 바로 오락실에서나 플레이 할 수 있었던 스파2를 집에서 플레이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비록 캡코가 사용하는 아케이드 기판 보다는 성능이 달린 탓에 캐릭터의 열화와 프레임이 조금 딱딱한 느낌이 들지만, TV에서 돌아가고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분명한 스트리트 파이어였다. 그런데 지금 그 스트리트 파이어를 조그만 휴대용 게임으로 즐길 수 있다니, 라온이란 콘솔을 만들어낸 나조차 기대감에 손가락 끝이 저려왔다. 그때 결재 서류를 들고 사무실에 들어온 미야자키씨가 나에게 물었다. “부장님. 그럼 다음 달에 ‘스트리트 파이어의 타마고’가 나오는 거죠? 오늘 잡지를 보고 온 손님들에게 문의가 끊이질 않아서..” “네. 정확하게는 3월 27일부터 들어올 예정이에요. 아, 그리고 타마고상을 모으는 콜렉터들을 위해서 5일 동안 스트리트 파이어 전용으로 판매할 수 있도록 자판기 한 대만 비워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2D로 그려진 스트리트 파이어 캐릭터들을 이용할 수 있는 타마고상이라... 일단 이것만으로도 타마고상에 대한 수익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전에 제작 발표회에서 차세대 기종인 라온은 서드 파티가 제작하는 롬 카트리지에 대해 별도로 로열티를 받지 않는 다고 공식 발표를 했다. 그러자 나의 결정에 대해 카와구치씨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우리가 자선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서드 파티에게서 수익을 얻어낼 수 있는 로열티 부분을 감소시키면 콘솔을 만든 것에 대한 제작비를 뽑아내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물론 게임샵에서 플래시 메모리 카트리지를 이용해 다운로드 받는 것에 대해서는 일정 금액을 로열티를 받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큰 수익을 이끌어 내기에는 부족했다. 거기에서 타개책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타마고상이었다. 라온용으로 게임을 출시하는 서드 파티들은 ‘선택적’으로 타마고 몬스터의 콜라보레이션을 등록 할 수 있었는데, 자사의 캐릭터를 타마고상과 콜라보 하는 조건으로 롬 카트리지의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다. 덕분에 펜타곤은 타마고상의 이익을 더 끌어 올릴 수 있었고, 서드 파티들은 자사 캐릭터의 홍보효과와 더불어 부가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강제적인 것이 아니기에 콜라보 제안을 거절할 수 있지만, 그럴 경우엔 대신 롬 카트리지의 로열티를 지불해야만 했다. 캡코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제시한 조건에 대해 처음엔 의아해 했지만,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자, 굉장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롬 카트리지의 로열티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타마고 상을 이용해 부가 적인 수익까지 챙겨주니 그들로서 손해 볼 것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타마고상은 그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기기라 여길 수 있지만, 이렇게 다양한 캐릭터들을 모아 두면 언젠가 새로운 형식의 배틀 게임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수많은 캐릭터들이 한 장소에 엉겨 붙어 싸우는 대 난투 배틀 스타일의 게임을 말이다. 스트리트 파이어와 드래곤 엠블렘의 캐릭터들이 한 공간 안에서 배틀을 펼치다니 상상만으로도 짜릿하지 않은가?’ 나는 미야자키씨가 내민 결재 서류에 사인을 마치고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부장님. 우치무라씨는 요새 어떻게 지내요? 작년에 타마고 몬스터 대회에서 챔피언이 된 이후로 요새는 샵에도 잘 안 오시더라구요.” “아.. 우치무라씨는 지난 달 부로 저희 펜타곤 소프트에 입사했어요. 하지만 조금 특별한 부서에 배치 돼서 회사에는 잘 안 나와요.” “네? 대체 어떤 부서길래..?” “우치무라씨의 특기를 살린 굉장히 멋진 일을 하고 있답니다.” 미야자키씨는 내 미소에 잠시 고개를 갸웃 거렸다. 우치무라는 작년 말에 열린 타마고 몬스터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쥔 챔피언이다. 우연히 손에 넣은 드래곤 엠블렘의 타마고를 열심히 키워낸 우치무라는 주말에 열린 방어전에서 기어이 출전권을 따내어 챔피언 전에서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그가 챔피언 쉽에서 뽑아낸 캐릭터는 아직까지도 유저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대사제 카트리나, 폭염술사 미레아, 신궁의 녹티스까지 뽑아내는 몬스터마다 최강의 성능 자랑하는 초 레어 캐릭터들이었다. 한 마리 키워내기도 까다로운 드래곤 엠블렘의 타마고에서 영웅을 3마리나 꺼내다니, 대회를 참관하던 나조차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대회에서 우승한 우치무라는 명예의 전당에 오르며 50만엔의 상금과 함께 최초로 타마고 몬스터 공유기에 몬스터를 기증한 자로 기록 되었다. 타마고 몬스터의 공유기란. 특정 이벤트 기간이나 대회 우승 시에 자신이 키운 타마고를 기증하고 배포할 수 있었는데, 몬스터의 레어도에 따라 타마고 샵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상품권으로 교환을 해준다. 그리고 기증된 몬스터는 몬스터 공유기를 통해 5명에게 재배포가 가능한데, 이럴 경우엔 현금이나 상품권을 이용해 몬스터를 얻어 낼 수 있었다. 즉 드래곤 엠블렘의 타마고나, 파이널 프론티어의 타마고가 없는 사람도 몬스터 공유기를 통해 얼마든지 새로운 몬스터를 분양 받을 수가 있게된 것이다. 분양 받을 수 있는 데이터화 된 몬스터는 공유기 이용료 200엔으로 누구나 손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 동전을 넣으면 몬스터 공유기의 화면에 현재 기기가 보유하고 있는 몬스터들을 보여주었고, 플레이어는 자신이 원하는 몬스터 5마리를 고른 뒤에 공유 버튼을 누르면 5마리의 몬스터 중에 한 마리를 랜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주로 타마고 몬스터를 키우는데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나, 친구끼리 데이터 공유가 힘든 직장인 같은 경우에 몬스터 공유기를 제법 많이 이용하는 편이었다. “그보다 모레가 벌써 발렌타인 데이네요.” “그러게요. 올해 발렌타인 데이는 유난히 더 기대가 되는데요? 킥킥” “기대가 된다니, 미야자키씨도 은근히 사악하시네요.” “그야 타이틀을 구매하러 온 유저들에게도 특별한 경험이니까요.” 하긴 그렇긴 하지. 미야자키의 대답에 나는 마주 웃어 보였다. & “초콜렛 받아 가세요~” “발렌타인 데이 초콜렛입니다~” “마음을 담아 직접 만들진 않았지만~ 아무튼 초콜렛 받아가세요~” 손님에게 초콜렛을 건네는 카오리의 멘트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슨 멘트가 그래? 아무튼 초콜렛 받아가라니. 거기다 사족까지 붙여서..” “어?? 부장님 언제 오셨어요?” “방금.” 나는 카오리 뒤쪽으로 길게 늘어선 구매 행렬을 바라보며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오늘은 2월 14일.. 연인들에겐 축복의 날이지만, 게이머들에겐 새로운 게임의 발매일에 지나지 않았다. 간간히 대기열 중에 여성들도 눈에 띄긴 했지만, 거의 대부분이 남자인걸 보니 슬퍼지잖아... “곧 행사 시작할 예정이니 부장님도 어서 분장하세요.” “난 망토만 걸치면 돼. 흡혈귀 컨셉이거든.” “그럼 공중에 거꾸로 매달려 있겠네요? 박쥐처럼..” “…….” “농담입니다~ 하하하” “하야시는 어딨니?” “팀장님이라면 이미 좀비 분장하시고 들어가 계시죠~” 카오리의 대답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슈퍼 패밀리 최초의 호러게임인 발렌타인 데이가 발매 하는 날이다. 길게 늘어선 행렬은 오늘은 500명까지 대기줄을 끊었다. 발렌타인 데이는 주변에 게임 샵에도 동시 출시를 했기에 10분 뒤면 어느 샵에 서든 구매할 수 있었다. 음? 그런데 이 사람들은 대체 왜 이러고 있냐고? 그야 특별 한정판 구매를 위해 도전하러 온 사람들이지.. 이번 발렌타인 데이의 행사장 컨셉이 귀신의 집이거든~ < EP. 22 : 대전 격투의 시대 (1) > 끝 < EP. 22 : 대전 격투의 시대 (2) > & 잠시 후 직원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3층으로 올라선 나는 어두컴컴한 계산대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폐쇄된 학교를 컨셉으로 2층에 숨어있는 온갖 귀신들을 만나고, 3층으로 올라와 야만 계산대가 있는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준혁씨. 이제 곧 시작하려나 봐요.” 그때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피 묻은 소복 차림의 유키가 계산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분명히 처녀 귀신 컨셉인데, 키가 작아서 그런가? 되려 귀엽기만 하네... 유키는 목요일인 오늘 발렌타인 데이 출시 행사에 꼭 참여하고 싶다고 해서 연차까지 내고 내 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걸?” 딩~ 딩딩딩딩~ 딩딩딩딩~ 딩딩딩딩~ 딩딩딩딩~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음산한 타이틀곡이 실내에 흐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끄으아아악~!!!” 첫 번째 구매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나와 유키는 동시에 마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참 재밌네. 오늘의 행사 미션은 귀신의 집 빨리 통과하기. 제한 시간 내에 시간을 재서 5분 이내에 통과한 사람은 ‘내가 없는 거리’의 한정판을 선물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험 삼아 어제 시간을 재어보니 귀신이고 나발이고 다 쌩 까고 달려와야 4분 30초다. 즉 한번이라도 귀신과 마주쳐서 멈칫 거린다면 바로 아웃이라 볼 수 있지.) 비좁고 컴컴한 외길을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돌다보면 곳곳에 숨어 있던 펜타곤 직원들이 손님들을 놀래 켰다. 좀비 분장을 한 하야시나, 전기톱 살인마 분장을 한 모리타는 당연하고 카와구치 대표까지 손수 나서서 목이 돌아간 경비 아저씨 역할을 대신해주었다. 첫 번째 들어온 손님은 거의 10초마다 한 번씩 비명을 내지르며 나와 유키를 즐겁게 해주었다. 2층의 끝 무렵에는 사신으로 분장한 직원에게 들고 있던 손전등마저 반납해야했기에 3층부터는 바닥에 붙어 있는 야광 표시에 의지해 이곳까지 걸어와야 했다. “어억!! 으어어억!!!!” 3층에 올라온 손님의 비명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리자, 나와 유키는 서서히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잠시 후. 새하얗게 질린 표정의 첫 손님이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여.. 여기가 계산대 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어휴.. 다행이다. 그런데 저 얼마나 걸렸나요?” 그 순간 계산대 밑에서 숨어 있던 유키가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나타났다. “끼야아아아아!!!!!” “으아아아!!!!!” 비명을 내지르며 뒷걸음치는 고객을 바라보며 유키는 카운터에 ‘발렌타인 데이’ 한정판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9분 48초 걸리셨습니다.” “으어어... 으어어허헝..” 첫 손님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허리를 숙인 채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발렌타인 데이의 첫 구매 감사드립니다.” 카운터 위에는 초콜렛 상자 모양으로 만들어진 한정판 패키지가 놓여 있었다. 한정판 패키지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발렌타인 데이 스토리 콘티 북과 함께 작년 제작 발표회에서 공개했던 홍보영상이 담겨있는 오리지널 비디오. 그리고 게임 속에 나오는 모든 BGM이 담긴 OST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건 10분 내로 통과하신 고객님께 드리는 파이널 프론티어 4와 드래곤 엠블렘의 홍보영상이 따로 담긴 비디오입니다. 펜타곤 이벤트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객님.” “아, 네. 수고 하세요.” 계산을 마친 첫 번째 손님은 쇼핑백을 들고 계산대 뒤에 있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근데 준혁씨 한 사람당 10분 정도 걸리는 거 같은데, 괜찮을까요? 밖에 500명 정도 서있던 거 같은데.. 시간당 계산하면 한 시간에 6명 정도밖에 도전하지 못해요..” “음.. 밖에 가판대에서도 한정판을 판매하고 있으니까, 기다리기 지친 사람들은 그곳에서 사가지 않을까?”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무전기를 통해 물어보니 은근히 도전자 수가 많은 듯 했다. 나는 행사 담당자에게 일단 두 명씩 짝을 지어 5분 간격으로 올려 보낼 것을 지시하자, 그래도 조금 수월하게 행사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억!!” “으악~!!” “꺅!! 엄마!!” 행사가 무르익을수록 아래층에선 각양각색의 비명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유키는 끊이지 않고 계산대로 밀려오는 손님들을 향해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대었지만, 채 100명도 되지 않아 목이 쉬어버렸다.. “그러게 어째 무리한다 싶더라니..” “콜록 콜록.. 초반부터 너무 크게 소리쳤나 봐요.” 나는 연신 기침하는 유키에게 음료수를 건네며 말했다. “잠깐 쉬고 와. 레지는 내가 보고 있을 테니까.” “괜찮아요. 어차피 조금 있으면 교대 직원들이 올라올 테니까. 그때 같이 쉬어요.” “고집은..” 유키는 입구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로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초시계를 돌리며 베시시 웃어 보였다. & 오전 10시부터 시작한 발렌타인 데이의 판매 행사는 오후 7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직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진행된 오늘 행사는 우리 직원들 그리고 유저들에게도 좋은 추억거리가 되었다. 귀신분장을 하고 초콜렛을 나눠주던 카오리와 유키에게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하는 유저들도 있었고, 쓸떼 없이 고 퀄리티로 분장한 모리타의 전기톱 살인마 역시 유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다들 즐거워 보이는 군요.” 아이들처럼 서로의 분장에 대해 웃고 떠드는 직원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웬 경비복 차림의 아저씨가 내 곁에 다가와 물었다. 묘하게 느껴지는 이질감에 고개를 돌리니 경비복 상의를 거꾸로 돌려 입은 채 목이 돌아간 경비 아저씨를 연출 하고 있던 카와구치 씨였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물론이죠. 오늘 하루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만큼 재밌었습니다. 겨우 500개 판매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기 있는 직원들도 저와 같은 심정이겠지요.” 카와구치는 행사장 앞에서 유저들과 같이 사진을 찍어 주고 있는 직원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결국 오늘 행사에도 민텐도 쪽 직원은 한사람도 오지 않았군요.” “아무래도 지금 시기에선 서로 안보는 게 속편할지도 몰라요.”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그보다 이제부터가 정말 중요해요.” “라온의 런칭 말이시군요. 스파2와 파이널 파이트 89의 추가로 인해 성공적인 런칭이 될 거라 기대됩니다.” “물론 그렇겠지만, 기사화된 이벤트만으로는 임팩트가 부족하지 않을까요?” “네? 그야 뭐 깜짝 발표가 있다면 좋긴 하겠지만, 지금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요?” “런칭 행사는 단 한번 밖에 없는 중요한 이벤트입니다. 그곳에 오는 유저들의 관심도 어마어마할 테구요. 휴대용 겜보이와 슈퍼 패밀리 두 번의 런칭 행사를 겪어보면서 절실히 느꼈지요.” “뭔가, 따로 생각해 두신 게 있으신 모양이군요.” “음... 아직까진 구상만 하고 있어요.” “준혁씨가 하는 일이라면 뭔가 또 특별하고 기발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 기대가 되는 군요.” 목이 돌아간 경비 아저씨와 흡혈귀는 서로를 마주 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 발렌타인 데이는 호러 장르의 특성상 공략집을 보게 되면 그 재미가 반감된다. 따라서 우리는 각 잡지사에 발렌타인 데이의 공략을 향후 3달간 기재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아직까지는 통신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잡지사만 잘 막아 둔다면 게임의 스토리라던가 결말 부분의 스포일러가 확산 되는 것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다. 물론 지금 시기에도 모뎀을 이용한 PC통신 기술이 있긴 했지만, 아직 보급화가 이루어 지지 않아 PC를 보유하고 있는 집이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특히나 일본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PC 보급화가 굉장히 느리게 진행 되었는데, 2000년대에도 집에 PC를 가지고 있는 집이 그렇게 많지 않을 정도였다. 대신 핸드폰을 이용한 통신 기술이 발달해 90년대 후반부터 인터넷이나 메일은 거의 휴대폰으로 해결하는 추세였다.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휴대폰이 보급화 될 시기구나. 나오면 당장 사야지..) 그렇게 발렌타인 데이가 출시되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저녁.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모뎀을 이용해 PC 통신에 접속했다. 최근에 콘솔 게임 커뮤니티 하나가 제법 활성화 되면서 PC 통신을 사용하는 유저들끼리 여러 정보를 교류 하고 있었기에 자주 들여다보는 편이었다. 물론 이 커뮤니티 안에서도 최근에 발매된 발렌타인 데이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고 있었다. “어이구, 오늘도 대화방이 장난 아니네..” 나는 미리 가져다 놓은 따듯한 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대화방에 입장했다. -Mr. k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오~ Mr. K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가볍게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나는 그들의 대화를 눈팅하기 시작했다. 최근에 이 방의 화제 거리는 ‘발렌타인 데이’였기에 개발자 입장에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는 재미가 꽤나 쏠쏠했다. -저 오늘 거꾸로 서서 쫓아오는 귀신 처음 봤는데, 기절할 뻔 했습니다. 효과음 듣고 오줌 지릴 뻔..- -그 녀석이랑 마주치면 무조건 위로 올라가세요. 괜히 무섭다고 책상 밑에 숨으 면 좆됨..- -윗분 말이 정답. 나 눈 마주치는 일러스트 보고 기절하는 줄..- -그 귀신 말고 경비 아저씨도 겁나 무서움. 마주치면 목을 빙글빙글 돌리며 쫓아올때, 완전 그로테스크 함..- -한정판 구매행사 다녀온 1人. 귀신의 집에서 실제로 목 돌아간 경비 아저씨 쫓 아오는데, 주먹 날릴 뻔..- -한정판 행사~!! 그거 5분 이내에 주파하면 ‘내가 없는 거리’ 한정판 준다던데, 가져간 사람 있나요?- -한 명 있었음.- -오!! 대박. 그 사람 계 탔네. 나도 도전 했지만, 좀비가 발목 잡고 늘어져서..- -계산대에서 처녀 귀신 보신 분 그 분 귀엽지 않나요?- -아, 마지막에 놀래 키는 귀신 말이죠? 나중에 행사 끝나고 실물 봤는데, 엄청 귀여운 아가씨입니다. 남자친구 있으시려나?- 뜬금없이 튀어나온 유키의 이야기에 나는 마시던 커피를 도로 뱉어낼 뻔했다. -그 분도 귀여우시지만, 2층 복도에서 피 묻은 블라우스 입고 계시던 여교사. 장담하건데 분장 지우면 엄청 미녀일 듯!!- -아!! 누군지 알거 같아요. 키 크시고 몸매 좋은 분 맞죠!?-음? 키가 크고 몸매가 좋다면.. 로비 안내직원 사유리씨인가? 대화방은 그 후로도 펜타곤 행사장에 나타났던 여직원들에 대해서 이야기가 계속 되었다. 유키와 사유리씨 말고도 행사장 앞에서 초콜렛을 나눠주던 카오리에 대한 이야기까지 대화방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이거 아직까지 끝판 깬 사람 없나요?- -그러게 보통 이 쯤 되면 클리어 하신 분 나타나기 마련인데..- -이 게임 잡지 공략에도 안 실려서 시간이 좀 걸리나 봅니다. 퍼즐도 좀 어려운 편이고..- -‘노래 따위 끊은지 오래다’님이 입장 하셨습니다.- -오~ 노래 따위님.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세요. 그 동안 발렌타인 데이 클리어 하느라 한동안 접속 못했습니다.- ‘뭐!? 벌써 클리어 했다고!?’ ‘노래 따위 끊은지 오래다’ 라는 요상한 닉네임을 사용하는 이 사람은 커뮤니티 내에서도 상당한 게임 고수로 알려져 있었다. 뭐 게임을 발매 하면 누군가 클리어하기 마련이긴 한데, 생각보다 빠르네.. 대화방은 노래 따위님의 클리어 소식에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노래 따위님 발렌타인 데이 클리어 하셨다구요!?- -네. 한시간전에 클리어 완료했습니다.- -우오오!! 대박이다. 그럼 노래 따위님. 1층에 과학실 문 어떻게 여는 건가요? 그냥 지나치자니 찝찝해 죽겠는데, 여는 법 좀 알려주세요.- -아, 그거 원래 안 열려요. 엔딩 이후에 열 수 있습니다.- -그래요? 젠장 괜히 고생했네.- -그 과학실이 대박입니다.- -왜요? 뭔가 비밀이 있나요?- -와.. 진짜 말해 드리고 싶은데, 그냥 클리어 해보세요. 진짜 겁나게 충격적인 엔딩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도 클리어 하고 바로 들어오려고 했는데, 한 시간 동안 멍때리고 있었어요.- -아악!! 궁금해!!- -뭡니까? 그냥 말해주세요.- -안돼요!! 아직 클리어 안했어요. 말하지 마요!!!- 나는 시끄러워지는 대화방을 눈팅하며 차갑게 식은 커피를 홀짝였다. 호오.. 노래 따위 이 사람. 매너 있네.. < EP. 22 : 대전 격투의 시대 (2) > 끝 < EP. 22 : 대전 격투의 시대 (3) > 나는 시끄러워지는 대화방을 눈팅하며 차갑게 식은 커피를 홀짝였다. 호오.. 노래 따위 이 사람. 매너 있네.. 아직 스포일러에 대한 인식이 미약했던 시기라 그런지 노래 따위가 흘린 과학실에 대해 대화방이 시끌벅적 해졌다. 그때 ‘노래 따위 끊은지 오래다’ 님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내일 오전에 스케쥴이 있어서 이만 나가봐야 하지만, 혹시 ‘발렌타인 데이’ 가지고 계신 분들은 꼭 스스로의 힘으로 플레이 해보세요. ‘내가 없는 거리’의 엔딩 같은 거대한 감동은 아니지만, 진짜 충격적인 반전이 있습니다.- -으악!! 그렇게 얘기하시니 더 궁금해지잖아요.- 하지만 노래 따위님은 그 말을 끝으로 대화방을 나가버렸다. 주인공이 사라진 대화방에서 남겨진 유저들은 과학실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이 제시했지만, 대부분의 의견은 굉장히 무서운 유령이 숨어 있을 것으로 내용이 흘러갔다. 그러던 중 어떤 한 유저의 명탐정 코난 급 추리가 시작됐다. -그러고 보니, 게임 속에서 발렌타인 데이가 다가오기 전에도 과학실 문 잠겨 있 지 않았음?- -어? 그래요? 그전에는 과학실 안 가봐서 모르겠는데..- -맞아요. 발렌타인 데이 오기 전에 과학실에 들어가려고 하면, 며칠 전에 화재 사고가 있었다고 못 들어가요.- -화재 사고?- -그러고 보면 홍보 영상 중에 ‘너를 좋아해. 그러니 나와 함께 죽어줘...’ 이런 대사도 있지 않았나?- ‘얼씨구? 이거 다들 왜이래? 게임 클리어도 안하고 결말부터 들출 셈인가?’ 나는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자, 서둘러 키보드를 두드렸다. -저기, 여기 아직 클리어는 고사하고 게임 시작도 안 한 분들도 계실 텐데, 이야기가 너무 엔딩에만 치중 되는 것 같은데요?- -맞아요. 저도 결말을 알고 플레이하고 싶지 않아요.- -Mr. k님이 적절히 끊어 주셨네. 다들 그냥 즐기자구요. 엔딩에 대해 얘기하고 싶으신 분은 따로 대화방 파세요.- 커뮤니티의 대화방은 나의 의견에 찬반이 갈리며 시끄러워 졌지만, 내용을 미리알고 싶지 않았던 유저들이 대화방을 빠져나가며 오늘의 대화가 끝이나 버렸다. “휴.. 어떻게든 엔딩 까발려지는 건 막았네. 뭐 며칠 더 지나면 거의 다 알게 되겠지만..” 나는 얼마 안 남은 커피를 마저 훌쩍 삼키곤 대화방을 빠져 나왔다. 사실 여기까지 들었다면 얼핏 눈치 챘겠지만, 발렌타인 데이의 주인공은 이미 ‘죽은 사람’이다. 단지 좋아하던 아이에게 편지를 전해주고 싶었던 마음에 자신이 죽었다는 것조차 인지하고 있지 못 하고 있을 뿐이지... & 다음 날.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직원들을 데리고 본사 건물을 나서는데, 회사 앞에 반가운 얼굴이 찾아 왔다. 언제나 모자를 눌러쓴 채 커다란 카메라를 어깨에 걸치고 다니는 내 친구 준페이였다. “어이쿠, 조금만 늦었으면 못 만날 뻔했네.” 준페이의 갑작스런 방문에 나는 하야시에게 먼저 직원들 데리고 식사하라고 이야기 한 뒤에 따로 자리를 가졌다. “전화라도 하고 오지. 갑자기 무슨 일이야?” “뭐긴 인마. 게임 잡지 기자가 게임 회사에 뭐 하러 왔겠냐?” “취재냐?” “그놈의 신비주의 좀 때려 치고, 이제 그만 공개 좀 하지 그러냐. 발매까지 5개월 남짓인데, 슬슬 실물 나올 때 되지 않았어?” 하여튼 귀신같은 놈일세. 나는 준페이의 당당한 말투에 헛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특종 하나 따가고 싶어서 예감 하나 믿고 찾아온 거야?” “왜? 아직 안 나왔어?” “아니, 나왔어.” 그러자 준페이 녀석이 손가락을 튕기며 미소 지었다. “거 봐. 그럴 줄 알았지.” “보여 줄 수는 있는데, 아직 기사화는 하지 마라. 수정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으니까.” “오케이. 나도 게임 잡지 기자를 떠나 한 사람의 게이머로서 라온이란 녀석이 굉장히 궁금하거든.” 준페이 녀석은 밥알을 거의 들이 붓다시피 식사를 마치곤 아직 식사중인 나를 재촉했다. “밥알 세어가며 먹냐. 빨리 빨리 좀 먹어라!!” “시끄러!! 너 때문에 체하겠다!!” 결국 반 정도 밥을 남긴 채 준페이에게 끌려나오다시피 가게를 나온 나는 식후 연초도 태우지 못하고 회사로 복귀해야만 했다. “어라, 부장님 벌써 오셨어요?” “사유리 씨는 식사 안 해요?” “전 도시락 파라서, 아까 휴게실에서 직원들이랑 먹었어요.” 그러자 준페이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귓속말을 하였다. ‘저 퍼펙트 한 몸매를 가지신 분은 누구냐. 완전 내 이상형인데?’ ‘저 퍼펙트 한 몸매를 가진 분이 설마 솔로 일거라 생각하니?’ ‘…….’ 준페이는 시무룩 해졌다. 하여튼 이 녀석도 눈은 겁나게 높아요. 맨날 몽둥이 하나 들고 마왕한테 돌격하니 아직까지 여친이 없지... 사유리씨는 자신을 앞에 두고 남자 둘이 귓속말을 하자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 거렸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녀석이 사유리씨 남자 친구 있냐고 물어 봐서..” “야!! 인마!!” “아~ 죄송해요. 전 만나는 사람 있어요.” “아, 네. 물론 그러시겠지요. 실례했습니다.” 준페이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나를 재촉했다. 잠시 후. 제 2 개발실에 들어온 준페이가 나에게 소리쳤다. “얌마. 거기서 그렇게 얘기해 버리면 내가 뭐가 되냐.” “그러게 거기서 그런 건 왜 물어봐.” 그러자 준페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런 준페이 에게 서랍에서 라온의 프로토타입 모델을 꺼내보였다. “억? 설마!?” “그래. 이게 라온의 초기 모델이다.” “세상에 이렇게 작아?” 음? 작다고? 그렇게 까지 작지는 않은데, 내 손에 들려 있는 라온은 어른의 손바닥보다 조금더 큰 사이즈라고 해야하나? 기본적인 디자인은 미래에서 보았던 센소니의 포터블기기인 GSP보다 닮아 있었다. 비록 화면 크기가 훨씬 작긴 했지만... 준페이는 나에게서 라온을 받아 들고 양손에 쥐어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굉장히 쥐기가 편한데? 손바닥 안에 착 감기는 느낌이야..” “바닥 부분을 곡선 처리해서 그래. 아무래도 휴대기기다 보니 그립갑에 신경을 좀 썼지. 혹시 떨어뜨릴 수도 있으니까. 거기 끝에 달린 스트랩을 손목에 걸어서 쓰는 게 좋을 거야.” “아하~ 그렇구나. 난 게임기에 왠 스트랩이 달려있나 했네..” 준페이는 바깥에 달려있는 손목 스트랩을 손목에 끼우고 다시 라온을 움켜 쥐었다. 아무 것도 없는 화면에서 버튼을 누르던 준페이는 매끄럽게 유광 처리된 블랙 바디를 살피며 감탄사를 뱉어내었다. “초기 모델 치고 굉장히 세련된 디자인인데? 민텐도에서 나온 휴대용 겜보이가 애들 장난감처럼 보이네.. 거기다가 슈퍼 패밀리랑 똑같이 6버튼이라니.. 이거 정말 휴대용 게임기 맞냐?” “마침 잘됐다. 너 스파 할 줄 알지?” “그야 물론이지.” 준페이의 대답에 나는 서랍에서 라온을 하나 더 꺼내 들었다. “설마? 스파2가 벌써 나왔어!?” “아니. 아직 테스트용이라, 캐릭터는 3개 밖에 못 골라.” “3개라도 어디냐!! 나도 사실 이게 제일 궁금하더라. 휴대기기에서 스트리트 파이어2가 어떻게 돌아갈지..” ‘뭘 어떻게 돌아가? 똑같이 돌아가지.’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준페이의 기기와 데이터 케이블을 연결했다. 그러자 잠시 후. 어느 화창한 날 거대한 빌딩을 배경으로 카메라 앵글이 천천히 내려오더니 길거리에서 파이팅 포즈를 취하고 있는 두 남자가 보였다. 노란 머리의 남자가 건들거리며 어깨를 움찔 거리더니 강력한 스트레이트로 상대를 쓰러뜨리자, 곧 조그만 화면 안에 STREET FIRE II 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씨..발.. 똑같네?” 데이터 연결로 인해 VS 모드가 열리자 나는 커서를 대고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바라바라바라바밤~!! 기기 양쪽에 달린 스테레오 스피커에서 상쾌한 효과음이 터지며 화면이 넘어가고, 곧이어 플레이어를 고르는 화면이 나타났다. 일단 8명의 캐릭터가 있긴 하지만, 베타 버전에서 고를 수 없는 캐릭터는 흑백으로 표시 되어 있었다. 현재 우리가 고를 수 있는 캐릭터는 주인공 캐릭터인 류와, 카일, 그리고 쟌기에 프가 전부 였다. 어째서 이 세 명의 캐릭터로 정했냐면, 이 세 명의 필살기 커맨드 입력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었다. 장풍 계열과 승룡권 계열의 류와 같은 경우는 가장 기본적인 커맨드 조작을 필요로 했고, 카일 같은 경우에는 뒤로 모았다가 레버를 앞으로 당기는 모으기 커맨드를 주로 사용하였다. 마지막으로 프로 레슬러 캐릭터인 쟌기에프 같은 경우는 레버를 한 바퀴 돌리거나 주먹 버튼 3개를 동시에 누르는 독특한 커맨드를 사용하고 있어. 최종적으로 이 3명이 베타 테스트 캐릭터로 잡혀 있었다. 준페이는 시작과 동시에 류를 선택했다. 이럴 경우에 나는 류를 고를 수가 없다. 스파2의 초기작에서 같은 캐릭터는 선택이 불가능 하거든.. 어차피 내 주력 캐릭터는 카일이었기에 나는 준페이 녀석을 향해 슬쩍 웃어 보이며 카일을 선택했다. 캐릭터 선택이 끝나자, 화면이 넘어가며 거대한 전투기가 세워져 있는 공군 기지 스테이지가 나왔다. “캬.. 카일 스테이지. 이거 완전 오락실이랑 똑같네? 이젠 신기함을 넘어서 감동이 밀려오는 구나” -ROUND 1 FIGHT- 시작과 동시에 준페이 녀석은 류의 날아 차기를 시도했다. 가볍게 방향키를 뒤로 하여 녀석의 공격을 막아내자, 빈틈을 노리고 다리를 걸어왔다. 재빨리 대각선 밑으로 방향키를 입력해 하단 공격을 막아 낸 나는 방향키를 위로 쓸어 올리며 썸머솔트 킥을 시전 했다. 그러자 파동권을 날리려던 류는 카운터를 맞고 뒤로 나가 떨어졌다. “어쭈? 좀 하는데?” 준페이는 재빨리 캐릭터를 뒤로 물러서며 파동권으로 견제를 시도했다. 류의 장풍은 약손과 강 손으로 쏠 때 날아오는 속도가 달랐기 때문에 은근히 까다롭다. 좋다고 팔짝 팔짝 뛰어 들었다간 승룡권 한방에 훅 갈수도 있기에 최대한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했다. 상대적으로 커맨드 입력이 쉬운 류의 장풍은 연속으로 쏘아댈 경우 모으기 캐릭터인 카일은 장풍 싸움에서 질 수밖에 없었기에 나는 묵묵히 방어에 집중했다. “생각보다 기술이 잘나가네? 그런데 왜 십자키가 아니고 원형 버튼으로 방향키를 대신한 거야?” “십자키는 민텐도가 특허를 내서 다른 콘솔 업체가 쓸 수가 없거든.” “아, 그렇구나..” 나는 날아오는 장풍을 살짝 뛰어 넘으며 류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그러자 귀신같이 타이밍을 재고 있던 류의 승룡권이 날아왔다. ‘이 녀석이..’ 나는 이를 악 문채 일어서자마자 날아오는 장풍을 막아내었다. 당시 류의 승룡권은 진짜 똥 파워를 자랑했기에, 데미지가 상당히 들어갔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질것이 뻔했던 나는 다시 한 번 녀석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다시 승룡권을 날린 타이밍을 재기 위해 녀석이 물러서는 순간.. 묘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멀쩡히 서있던 류가 뒤로 나가떨어진 것이다. “뭐야, 갑자기 왜이래!?” ‘역시.. 버그도 그대로 이식 되었구만..’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누워 있는 녀석에게 다시 한 번 ‘그림자 던지기’를 시전 했다. 그러자 누워있던 류가 또 한 번 뒤로 나가 떨어졌다. “이거 왜이래!?” “카일 버그야. 일명 그림자 던지기. 게임 센터에서도 사용할 수 있을걸?” “진짜? 어떻게 하는 건데?” 카일의 그림자 던지기는 굉장히 악질적인 버그중에 하나로 상대방이 어디에 있던간에 집어 던지기가 가능했다. 사용법도 굉장히 쉬웠는데, 그냥 서서 강 킥을 누르면 리버스 스핀킥이라는 기술이 나가는데, 이게 모션이 사실 좀 길다.. 이 리버스 스핀킥이 들어가는 사이에 레버를 뒤로 당겨두었다가 10프레임 내외에서 앞으로 재끼며 강 펀치를 누르면 카일 혼자서 던지기 모션이 들어가면서 멀리 있는 캐릭터가 혼자서 뒤로 나가 떨어졌다. 어릴 때 이 기술을 오락실에서 쓰면 기기 꺼버리거나 실제 의자로 체어샷 날리는 걸 본적이 있었는데.. “야!! 치사하게 버그 쓰지마!!” 이미 데미지가 상당히 들어간 준페이는 더 이상 견제만으로 승기를 잡을 수 없자.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녀석이 거의 다가 온 순간. 카일이 기묘한 포즈을 취했다. 리버스 스핀 킥을 시전 하던 중에 갑자기 멈춰버린 카일은 류의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 “뭐야 이건?” “학 다리. 처음보냐?” < EP. 22 : 대전 격투의 시대 (3) > 끝 < EP. 22 : 대전 격투의 시대 (4) > “뭐야 이건?” “학 다리. 몰라?” “몰라!! 인마!!” 결국 준페이는 버그를 이용한 나의 플레이에 의해 패배했다. 혹시나 해서 옛 기억을 더듬어 써본 건데, 똑같이 나가네. 나중에 캡코에 얘기해서 수정해달라고 해야겠다. 그때 개발실 문이 열리며 식사를 나갔던 직원들이 돌아왔다. 이제 제 2 개발팀 소속만 해도 모리타와 하야시를 포함해 12명이다. 이제는 부서별로 축구경기를 해도 될 정도의 인력이구만, 여름에 야유회 가면 재미나겠는데?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하야시가 내 옆자리에 앉으며 준페이에게 물었다. “어라? 준페이씨. 부장님이랑 벌써 식사 끝내고 오신 거예요?” “신형 게임기가 너무 궁금해서 후딱 먹고 올라왔죠.” 그 덕분에 나는 아직도 속이 더부룩하거든? “어떤 것 같아요? 화면이 조금 작긴 하지만, 그런대로 봐줄만 하죠?” “놀랐습니다. 설마 휴대용 게임기에서 스파2를 하게 될 줄이야. 진짜 끝내주네요.” 솔직히 그건 나도 준페이의 말에 동감하는 바이다. 민텐도에 대한 반발 심리 덕분인지 캡코에서도 이번 이식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써준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때 어느 정도 스파2를 경험해본 준페이가 나에게 물었다. “그럼 혹시 지금 파이널 파이트 89도 플레이 해볼 수 있나?” “아, 그런데 파이널 파이트는 아케이드용이랑 느낌이 좀 다를 거야” “그래? 어떻게 다른데?” “일단 한번 해봐. 나도 상당히 놀랐거든.” 나는 준페이에게서 라온을 받아 들고 기기 상단 부분에 달려 있는 이젝트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마치 3.5인치 디스켓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검은색 카트리지가 안에서 밀려 올라왔다. “오~ 깔쌈한데? 그런데 그거 고장 나진 않으려나?” “일단 스프링 형식이 아니고 버튼을 누르면 카트리지를 밀어 올려주는 형식이라 고장률은 최소화 하긴 했는데, 또 모르지. 워낙에 험하게 쓰는 아이들도 있으니.” 나는 스파2의 카트리지를 뽑아내고, 서랍에서 파이널 파이트 91를 꺼내어 다시 꽂아 넣고는 준페이에게 돌려주었다. 게임 잡지 기자답게 별다른 추가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라온을 작동시킨 준페이는 기대에 찬 눈으로 화면에 집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커헉.. 귀.. 귀여워!!” 화면 안에 등장한 똘망 똘망 한 눈빛의 가이와 코디, 그리고 해거의 모습에 준페이가 탄성을 내질렀다. 보통 이 시기의 진리 캐릭터는 상대적으로 플레이하기가 쉬운 ‘코디’였기에 준페이는 망설임 없이 코디를 선택했다. 그러자 SD캐릭터에 맞게 올망졸망 하게 꾸며진 첫 번째 스테이지가 나타났다. 마치 플레이어를 약 올리듯 눈앞에서 히로인을 옆구리에 낀 채 도망치는 노란 머리의 보스는 당시 와리가리라는 기술이 없었다면 굉장히 클리어하기 어려운 보스 중에 하나였는데, 타격 후 적이 경직할 때 레버를 반대로 돌려 헛손질을 한 후 다시 잽을 날리는 이 동작은 파이널 파이트를 플레이 해본 유저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기술 중에 하나였다. “기본 베이스는 파이널 파이트랑 비슷한데, 캐릭터랑 배경을 완전히 새로 만들었네? 아주 작정을 하고 만든 느낌이야.” “원래는 기존에 아케이드판을 그대로 이식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일단 거치기 보다 화면이 작다보니까. 캡코에서 라온 전용으로 그래픽을 아예 바꾸었나봐. 덕분에 동시 발매는 물 건너가고 가을쯤에 낸다던데?” “발매 연기인가? 하긴 아예 게임 하나를 새로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가을도 빨리 나오는 편이지. 그럼 라온의 런칭 작품은 파이널 프론티어 4랑 스파2로 정해진 건가?” “일단 현재까지는 그래.” “현재까지는 이란 말이 심히 거슬리는데?” “이젠 내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질 못하는구나.” “워낙에 뒤통수를 많이 맞아서. 나중에는 네가 ‘사실은 펜타곤 소프트도 내꺼야.’ 라고 할까봐 겁난다.” “…….” 이 녀석 잡지 기자 관두고 어디 가서 돗자리나 깔라고 할까? 준페이가 플레이하는 SD 파이널 파이트는 본래 1993년에 ‘마이티 파이널 파이트’라는 이름을 달고 따로 나왔어야 할 작품이었다. 물론 라온은 패밀리보다 훨씬 상위에 있는 기종이었기에 내가 플레이 했던 작품이랑은 그래픽부터 달랐지만, 게임성이 상당히 흡사했다. 패밀리의 거의 끝 무렵에 출시했던 이 작품을 내가 만들어낸 휴대용 게임기에서 본 순간. 내가 알고 있던 게임의 역사가 어느 정도 틀어졌다는 걸 인식 할 수밖에 없었다. “이야.. 이거 진짜 물건인데? 기본은 파이널 파이트지만, 느낌이 완전히 색달라. 출시하면 유저들에게 반응이 좋을 것 같은데?”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때 준페이를 바라보던 하야시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캡코에서 보여준 SD 파이널 파이트를 보면서 느낀 점이 많아요. 설마 라온 전용으로 게임의 틀을 전부 바꿔버리다니, 이런 걸 두고 초월이식이라 하나요?” 90년대에 캡코는 서드 파티 중에서도 상당히 개념이 잡혀있는 게임 회사로 유명했다. 물론 이 당시에도 스파2 하나로 여러가지 시리즈를 울궈먹기는 했었는데, NPC로만 등장했던 4대 천왕을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넣은 ‘스트리트 파이어2 대쉬’ 그리고 T. 호크나 캐미등 4명의 신 캐릭터를 넣은 ‘슈퍼 스트리트 파이어 2’, 마지막으로 ‘고우키’라는 최강의 적을 등장 시키며 좀 더 스피디 한 움직임을 보였던 ‘슈퍼 스트리트 파이어2 터보’ 가 있었다. 하나의 게임에서 4개의 파생작이 나왔지만, 이 당시에는 상술이라는 생각 보다는 새로운 캐릭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설레임에 학교가 끝나면 오락실로 달려가곤 했었는데.. “서드 파티가 이렇게 나온 이상. 우리가 제작하고 있는 드래곤 엠블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당연하죠. 퍼스트 파티의 자존심이 있지.” 현재 드래곤 엠블렘 리메이크 작업을 하고 있는 우리 팀은 내 말에 자극을 받았는지 여기저기서 파이팅을 외쳐 댔다. (사실 이미 드래곤 엠블렘은 전작의 그래픽을 초월한 상태긴 하지만 서도..) 그때 하야시와 함께 제 2 개발팀의 캐릭터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는 모리타가 입을 열었다. “부장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음?” “잠깐만 이쪽에 와주시겠어요?” 이미 SD 파이널 파이트를 플레이 하느라 정신이 팔려있는 준페이를 내버려 두고 모리타의 작업대로 걸음을 옮겼다. “어라? 이건.. 류화영이잖아?” “뭐!? 류화영이라고!!” 사이킥 배틀 광신도인 준페이 녀석은 내 말에 두 눈을 번뜩이며 후다닥 달려왔다. “어라? 류화영이랑 이미지가 조금 다른데?” “준페이씨 말이 맞습니다. 류화영을 컨셉으로 해서 분위기를 조금 다르게 바꿔보았거든요. 사실 며칠 전부터 조금씩 따로 작업을 해둔 일러스트입니다.” “며칠 동안 퇴근 할 때도 혼자 남아 있더니, 이걸 그린거야?” “사실 그린 것뿐만이 아니에요.” “응?” 모리타는 잠시 망설이다가 모니터에 도트 작업을 해준 캐릭터를 띄웠다. 그러자, 거의 셀화 수준으로 그려진 미려한 캐릭터들이 다양한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모션들은.. 설마? 그 순간 내 옆에 있던 준페이가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 해주었다. “헉. 쩌.. 쩐다. 설마 대전 격투 게임인가?” “일단은 대전 격투긴 합니다. 최근에 스파2를 해보았는데, 여성 캐릭터가 하나 뿐인 것이 너무 아쉽더라구요. 그래서..” “설마 여성 캐릭터들만 나오는 격투 게임인거야?” 내 말에 모리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업대에 그려져 있는 류화영을 닮은 여자는 확실히 사이킥 배틀 때와는 달리, 갑옷을 담당하는 파츠 대신 가죽 재킷에 탄탄한 허벅지가 돋보이는 라이더 복장을하고 있었다. “물론 저작권 때문에 더 이상 사이킥 배틀을 제작 할 수 없지만, 제가 처음 만든 작품이다 보니 가끔씩 생각이 나네요.” “게임 컨셉을 한번 설명해 봐.” “그게 아직 생각만 해본 건데, 이번 작품은 오로지 대전에만 신경을 쓰고 싶어요. 예전에 사이킥 배틀 행사 때 타카시군이 보여준 플레이를 보고 나서 만약에 한 번 더 사이킥 배틀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조금 더 대전 격투에 치중해 만들고 싶었거든요.” “나쁘지 않은데? 카메라 앵글을 사용하면 좀더 박진감 넘치는 전투도 할 수 있을것 같고..” “카메라 앵글을요?” “가령 캐릭터가 서로 붙어서 싸울 때는 대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캐릭터를 크게 확대시키는 거야. 그리고 캐릭터가 서로 멀어 질수록 작아지면서 적의 뿌리는 탄막을 피해내는 슈팅 게임으로 전환 되는 거지. 어쩌면 패밀리 성능의 한계에 부딪혀 활용할 수 없었던 아이디어들도 사용이 가능할지 몰라.” “부장님. 그거 괜찮을 거 같은데요?” 내 말에 모리타는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어느새 우리 곁에 다가온 하야시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장님. 헌데 이거 문제 있을 거 같은데요? 현재 사이킥 배틀의 저작권은 온전히 민텐도 소유잖아요. 함부로 캐릭터를 갖다 쓰면 진짜 난리 날거 같은데.. 안 그래도 민텐도랑 분위기가 안 좋은 판국이라 괜히 꼬투리 잡힐 것 같은데..” “물론 그렇지. 하지만 캐릭터만 완전히 겹치는 게 아니라면 방법은 있어.” “네? 대체 어떻게 하시려구요?” “걱정 마. 나한테 다 생각이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너희들이야. 현재 우리 팀이 맡고 있는 드래곤 엠블렘과 함께 병행 작업을 할 수 있냐는 거지.” “전 하고 싶습니다. 부장님.”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리타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민텐도에 두고 온 사이킥 배틀에 대한 미련이 현재 모리타를 자극하는 모양이었다. 하야시는 모리타의 대답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녀석이 저렇게 열의를 불태우는데, 제가 모른 척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드래곤 엠블렘은 거의 막바지 단계니까, 조금 빡쎄게 가볼까요?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하야시가 제 2개발팀의 팀원들에게 의사를 묻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한 두마디씩 내뱉기 시작했다. “캬~ 저도 사이킥 배틀 재밌게 했었는데, 다음 작업은 그 후속 개념인가요?” “전 팀장님들 의견에 찬성입니다.” “버그 테스트 보다야 신작 개발이 훨씬 재밌긴 하죠~” 하야시는 직원들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렇다는데요?” “좋아. 대신 야근 수당이랑 성과급은 두둑하게 챙겨주마.” “와아~!! 역시 부장님이셔~” 당연히 고생한 만큼 대가가 있어야하니까. 직원들에게 이 부분 만큼은 확실하게 챙겨주는 것이 펜타곤 소프트의 룰이니까. “야.. 원래 게임 개발이라는 게 이렇게 쉽게 결정 되는 거였냐?” “직원들이 만들고 싶어 하는 게임은 만들게 하는 게 좋으니까. 다들 실력이 없는것도 아니고.” “그건 그렇지만..” “준페이 일단 오늘 본건 기사화 시키지 마. 나중에 적절한 타이밍을 봐서 따로 이야기 해줄게.” “알았다. 입 다물고 있으마. 대신 라온에 대한 부분은 조금만 실을게 스파2 위주로~” “SD 파이널 파이트 부분만 아니라면, 뭐 그건 알아서 해.” “역시 내가 친구 하나는 잘 뒀다니까~ 아주 옆에 붙어있으니 기사 거리가 알아서 쏙쏙 튀어나오는구만~” 나는 준페이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흘러 1991년 8월 14일. 세계 최초의 16비트 휴대용 게임기 라온의 런칭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 EP. 22 : 대전 격투의 시대 (4) > 끝 < 단편 : 사이킥 포스 in 우치무라. > 딩동~ 벨이 울린다. “음식 배달 왔습니다.” 12시 15분. 오늘도 정확한 시간이다. 그렇다는 것은 가게가 근처에 있다는 뜻이겠지? 새하얀 종업원 차림의 남자는 내가 문을 열어주자, 능숙한 손길로 나무로 된 배달통에서 우동 한 그릇과 야끼교자(군만두)를 꺼내어 내 손에 들려주고는 휑하니 돌아가 버렸다. 계산은 할 필요 없다. 이미 펜타곤 소프트에서 이 달치 분을 전부 결제 해두었을 테니까. 뜨거운 우동 그릇을 식탁 위에 내려놓은 나는 서둘러 그릇에 씌워진 랩을 벗겨 내었다. “역시 여기 우동이 가장 맛있는 것 같아.” 우동을 먹기 전에 바삭하게 튀겨진 야끼교자를 한입 베어 물자, 안에서 기름기를 잔뜩 머금은 육즙이 툭 터져 나왔다. “어뜨~~ 후훕~ 허어~ 뜨거” 내가 생각하기에 만두란 계란에 비견할 만 한 완전식품이다. 어떻게 얇은 피안에 고기를 넣을 생각을 했을까? 만두란 그저 쪄도 맛있고, 끓은 물에 넣어도 맛있지만, 그중에서 최고는 바로 이 야끼교자(군만두)가 아닐까 생각한다. 바삭바삭한 식감과 더불어 뜨거운 육즙을 고기와 함께 씹다보니 예전에 조그만 단칸짜리 아파트에서 컵라면만 먹던 시절이 떠올랐다. 잠시 고개를 돌려 내 방 안을 바라보자,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밝은 햇살이 거실 가득 들어와 있었다. 어느새 봄이 지나고 밖은 초여름에 접어들고 있지만, 내 방은 에어컨으로 인해 늦가을처럼 선선하기만 하다. 이게 다 펜타곤 소프트의 강준혁 부장님을 아니지.. 내가 없는 거리 행사장에서 유키씨를 만난 게 큰 행운이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나는 현재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윤택하게 살고 있다. 시간이 되면 정확하게 배달이 오는 음식과 쾌적하고 넓은 작업 공간. 이곳의 월세도 펜타곤 소프트에서 절반을 내주고 있다. 1LDK라는 형식으로 1개의 방과 거실 그리고 키친으로 나뉘어져 있는 오피스텔 구조는 독신인 나에게 천국이 따로 없었다. 매주 새로운 작업물들이 소포로 배송이 오면 나는 그것을 하나하나 뜯어 정성스레 작업에 임한다. 모든 작업이 끝나고 본사에 전화 한통만 넣으면 전문 수거 반이 찾아와 내가 만든 피규어를 상자에 잘 포장해서 가져가는데, 그에 대한 수당은 매월 중순에 통장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강준혁 부장님은 피규어 제작에 대해 굉장히 새로운 유통 방식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독자들에게 일정 기간 동안만 프리미엄 피규어에 대한 홍보를 한 뒤에 전액을 선 결제하고 예약 티켓을 받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고객에게서 수주가 들어가면 전문 피규어 조형사가 색이 입혀지지 않은 물건을 나에게 보내주고 나는 그때마다 조금씩 수정하여 채색을 입혀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 하나의 제품이 완성 되는 시간은 대략 7~10일 정도. 하지만 이게 또 솔 찬하게 예약이 들어와, 아직도 작업할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현재 내가 치중하고 있는 피규어 작업은 ‘내가 없는 거리’ 히로인들. 작년 가을 이후로 민텐도와 법적 공방에 들어간 상태지만 아직 지적 소유권은 우리 펜타곤 쪽에 있으므로 프리미엄 피규어를 만드는 데에 아무런 법적 제제가 없었다. 프리미엄 피규어는 타마고 샵 바로 옆에 생겨난 펜타곤 캐릭터 샵에 전시하여 예약을 받는데, 한 종류의 피규어 마다 딱 20개만 만들고 있어, 콜렉터들 사이에 굉장히 경쟁이 심하다고 들었다. 가격은 피규어의 퀄리티에 따라 개당 60,000엔에서 150,000엔 선이라는데, 이마저도 일단 생산이 종료되고 나면 가격이 어마어마하게 오른다나? 확실히 소량 생산이라 그런지 도색이 되지 않은 기본 조형 자체도 따로 손볼 곳이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배달 온 우동을 국물까지 깨끗이 비운 나는 마지막 하나 남은 교자를 입에 털어 넣으며 작업실로 향했다. 보통 침실로 이용하는 이곳은 햇빛이 들어오지 않기에 피규어를 도색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태양의 직사광선은 피규어의 변색을 유도하기에 피해야할 기피대상이니까.. “후우.. 그럼 밥도 먹었으니 작업을 시작해볼까?” 부장님은 원하면 회사 안에 따로 작업실을 마련해 준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회사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어색했던 나는 차라리 이곳에서 도색 작업을 하고 싶다고 하자, 그는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직원이 가장 편하게 작업할 수 있는 곳이라면 그것이 설령 자택이어도 상관이 없는 모양이었다. “작년 여름에 비하면 천국이구나..” 더구나 여기는 내가 비명을 지르더라도 방음 시설이 완벽했기에 괜히 옆집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작업대에 앉아 최근에 도색 작업을 시작한 12인치 미유키의 피규어를 파츠 별로 꺼내어 정리해 두고 있는데, 밖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딩동~ ‘누구지? 배달부가 그릇을 벌써 찾으러 왔나? 아직 설거지도 안했는데?’ 배달을 시켜 먹을 땐 편하지만, 그릇은 꼭 씻어서 내놓는 것이 예의였기에 조금은 귀찮을 때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찾으러 올 리가 없는데? 고개를 갸웃 거리며 현관문을 열어젖히자,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미야자키씨?” 그녀는 자기 몸집만한 검은 색 박스를 양손에 받쳐 들고는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우치무라씨~” “어라? 여긴 어쩐 일이세요?” “강준혁 부장님께서 우치무라씨에게 특별히 부탁하신 일이 있어서요.” “저한테요?” “잠깐 들어가도 되요?” “아, 뭐..” 나는 미야자키씨가 들고 있던 검은 색으로 포장된 박스를 대신 받아 들었다. 순간 내 예상을 벗어난 박스 무게에 허리에 힘이 번쩍 들어갔다. ‘뭐야. 이거 엄청 무겁잖아.’ 전혀 힘든 내색 없이 들고 있던 터라 가벼울 줄 알았더니, 그렇다고 남자인 내가 모양 빠지게 낑낑 거릴 수는 없었기에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박스를 거실의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나를 따라 들어온 미야자키씨는 식탁에 놓인 그릇들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보통 점심은 시켜 드세요?” “회사에 얘기했더니 그렇게도 가능하다 길래 근처에 음식점에서 한 달 치를 미리 끊었어요.” “헉 한 달 치나? 질리지 않아요?” “뭐 그냥 밥 차려 먹긴 귀찮고, 편의점 인스턴트식품 보다는 나으니..” “뭐, 그것도 그렇네요.” “그런데, 이 검은 박스는 뭔가요?” “아, 피규어에요. 강준혁 부장님이 특별히 우치무라씨에게 부탁하신 물건입니다.” “네에? 대체 무슨 피규어 길래, 이렇게 무거운 건가요?” “글쎄요. 저도 내용물은 모르고, 뭐라더라. 디, 디오... 아!! 디오라마!! ...라던데요?” “디오라마라구요!?” “근데 디오라마가 뭐예요? 우치무라씨는 알고 계세요?” 디오라마는 피규어보다는 영화 세트장에서 쓰는 단어였다. 흔히 특촬물이라 불리 우는 ‘고지라’ 라던가, 지구방위대 후레쉬맨(초신성 플래시맨)을 보다보면 거대 괴수와 싸울 때 도시를 조그맣게 꾸며 그 위로 사람이 직접 괴수의 탈을 쓰고 연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디오라마는 그런 조그만 미니어쳐들로 만들어진 세트장이라 볼 수 있었다. 나는 궁금해 하는 미야자키씨에게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활용해 설명을 해주었고, 그녀 역시 후레쉬 맨의 전투장면을 본 적이 있는지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디오라마라면, 대체 무슨 게임의 디오라마지? 설마 이제 와서 내가 없는 거리의 디오라마를 만들었을 리는 만무하고, 설마 발렌...타인 데이인가...?’ 발렌타인 데이는 이곳에 이사 온 직후 펜타곤 소프트에서 보내준 정식판을 플레이 해본 적이 있었는데, 게임의 연출도 연출이지만, 특히나 마지막 반전이 어마어마했던 작품이었다. 마지막 초콜렛 상자를 주고 학교를 빠져 나올 때. 게임 속에서 내내 잠겨있던 과학실 문이 열려 있길래 들어가 보니, 그곳에는 방금 초콜렛 상자를 놓고 온 자리의 주인인 히로인이 직접 쓴 편지가 남겨져 있었다. 과학실에서 일어난 화재 사고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부디 좋은 곳으로 가라는 내용을 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 그럼 나도 귀신이었던 거야?’ 그 순간 화면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표정이 굉장히 섬짓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박스도 시커먼 게 뭔가 불길해. 그렇다고 안 열어 볼 수 도 없고, 미야자키씨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자.’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사람 몸통만한 거대한 박스를 열어 보았다. 그러자, 반대편에 서있던 미야자키씨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 나왔다. “와아~” ‘와아~ 라니.. 그럼 발렌 타인 데이가 아닌가?’ 살짝 감았던 눈을 뜨고, 검은 상자 안을 들여다 본 순간. 정말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세상에.. 이게 다 뭐야?” 우선 디오라마의 내용물이 담겨 있던 검은색 박스는 그 자체가 세트장 바닥 역할을 하는지 아스팔트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박스를 바닥으로 옮겨 모서리의 고정 장치를 제거 하자 상자가 열십자로 펴지며 하나의 교차로를 만들었고, 상자의 뚜껑 부분에는 4장의 교차로 주변에 건물을 세울 수 있는 바닥 틀이 들어있었다. “허어.. 대체 이게 뭐지?” 나는 잠시 뚜껑을 한 쪽에 치워 두고 우선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아직 도색 작업이 되어 있지 않은 부서진 오토바이의 잔해와 박살나 버린 자동차가 한 대. 그리고 반쯤 무너진 건물들(이것 때문에 더럽게 무거웠구나..)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떠올리게 만드는 물건들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람의 체형으로 보이는 조형물이 담긴 봉지가 8개씩이나? 이거, 공들인 티가 너무 나는데? “여기 안에 뭐가 들어 있는 것 같아요.” 박스 안에 담겨 있는 높은 빌딩 안에서 들려오는 달그락 소리에 미야자키씨가 입을 열었다. 나는 미야자키씨에게서 건물 모형을 넘겨받은 후 밑바닥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뭔가 밖으로 열어젖힐 수 있을 뚜껑이 눈에 들어왔다. 조심스레 뚜껑을 열어 보니 안에는 부직포 재질로 만들어진 족자가 담겨져 있었다. 아마도 디오라마의 완성 씬을 나타내는 일러스트 인 모양이다. 촤락 하고 말려있던 족자를 펼쳐 본 순간 나와 미야자키씨는 동시에 탄성을 내질렀다. “사이킥 포스?” 처음 들어보는 제목이다. 설마 펜타곤 소프트에서 또 다시 신작을 출시하려는 건가? 족자에 그려진 일러스트에는 가죽 재킷에 라이더 복장을 한 숏컷 머리의 여성이 부서진 오토바이에서 굴러 떨어졌는지 옷이 여기저기 찢겨져 있었다. 공중에서 몸을 비튼 상태로 바닥을 등진 채 양 손에 들고 있는 권총은 하늘로 향해 있었다. 그 위에는 혓바닥을 길게 내밀고 있는 변태 같은 녀석이 폭발 직전인 자동차에서 뛰어 올라 그녀를 쫓고 있었다. “멋지다.” 족자에는 그들 말고도 무너진 건물 끝을 받쳐 들고 있는 거한이나 그 틈을 노리고 파고들고 있는 미모의 여 닌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 그림체는 모리타 선배님의 솜씨인데?” 건물마다 담겨진 족자에는 하나의 공간을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본 일러스트가 실려 있어 총 8명의 캐릭터가 사거리에서 난투극을 펼치고 있는 장면을 담고 있었다. ‘아, 건물에 들어 있는 족자마다 앵글이 달라지는구나.’ 모리타 선배님이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 대충 감이 온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모든 부품을 도색해서 일러스트처럼 꾸며 달라 이거군. “아, 맞다. 이건 부장님께서 드리는 메시지에요.” “메세지?” 미야자키씨가 건네는 편지 봉투를 열어보니 안에 편지가 한통 담겨 있었다. -우치무라씨에게- 무리한 부탁인 건 알지만, 라온의 런칭 전까지 부탁 좀 드려요. 펜타곤 소프트의 이름으로 첫 출시하는 아케이드용 대전 액션 게임입니다. 라온 런칭 시에 홍보할 예정이니 멋진 작품 기대하겠습니다. ‘사이킥 포스.. 어딘가 패밀리의 사이킥 배틀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다. 거기다 일러스트를 보아하니 이 능력 배틀 물인가? 재밌겠는데?’ < 단편 : 사이킥 포스 in 우치무라. > 끝 < EP. 23 : 라온 출격 (1) > 1991년 8월 14일 오전 10시. 그래도 아침이라면 조금 선선할 줄 알았는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8월에 푹푹 찌는 여름 날씨는 아침 해가 나자마자, 도로를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안그래도 불쾌지수가 오르는 마당에 타마고 샵 앞에는 며칠 전부터 노숙자로 보이는 사람이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인 채 길가에 앉아 있었다. 혹시나 행사 진행 작업 중에 다칠지 몰라 조금 피해 계시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도 묵묵부답이었기에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일단 거기서부터 장막을 세우죠. 몇 개나 설치될 거 같아요?” “다른 샵에 양해를 구하면 대략 6~7개 정도 설치 가능할 거 같습니다.” “그 걸로는 부족할 거 같은데요.” 하필이면 라온의 런칭 일인 내일 비가 온다니, 하늘이 원망스러울 지경이다. 혹시나 일기예보가 빗나가기를 바랬지만, 습기를 잔뜩 머금은 채 떠다니는 축축한 공기는 당장이라도 비가 안 내리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내일 라온의 런칭 행사로 인해 타마고 샵 내부 구조를 변경하고 온 하야시가 얼굴을 찡그리며 내게 말했다. “아침인데도 날씨가 끈적끈적하네요. 당장 오후부터라도 비가 내릴 거 같은데요?” “그러게..” 그때 우리 앞을 지나가던 젊은 남자가 걸음을 멈추더니 나에게 물었다. “혹시 여기가 라온을 판매할 대기 줄 인가요?” “네? 아, 맞아요. 그런데 오늘이 아니고 내일부터 판매 시작입니다.” “알고 있어요. 지금부터 기다리려구요.” “네!?” “라온 발표 때부터 오늘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꼭 먼저 사고 싶습니다.” “그래도 아직 24시간이 넘게 남았는데...” “상관없어요.” 청년은 내말에 빙긋 웃으며 가방을 바닥에 깔고 앉았다. 그러자 이때까지 조용히 계단에 앉아 있던 노숙자가 소리쳤다. “내가 먼저야!!!! 나는 일주일 전부터 기다렸다고!!” “히이익!!” 노숙자 아저씨의 박력 넘치는 목소리에 나와 하야시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럼 며칠 전부터 타마고 샵 앞에 계시던 게 설마 라온 때문이었단 말인가? 환장하겠구나,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흐르는 한 여름에 제 정신인가? 일사병으로 쓰러졌으면 어쩔 뻔.. 흡!! 일주일 전부터 비 한 방울 안 내리고 푹푹 찌던 날씨 때문일까?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고약한 악취가 풍겼다. 대기 1번에 서있던 청년은 대놓고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멀리했다. “저기 손님. 제가 일주일 전부터 여기서 기다리신 거 인정해 드릴 테니, 잠시 집에라도 다녀오시는 게 어떠세요?” 하지만 아저씨는 귓등으로도 내말을 듣지 않았다. 고집도 장난 아니네. 하긴 저 정도 고집이 아니면 누가 이 더위에 발매 일주일 전부터 가게 앞에서 죽치고 앉아 있겠냐 만은.. 결국 우리는 임시로 대기 줄 하나를 만들어 두고 위에 천막 하나를 설치해두었다. 길거리 한복판이기에 그늘도 없어서 오후가 되면 엄청 더울 텐데, 괜찮으려나? 하지만 그런 나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작업 중에 가끔 뒤를 돌아보면 사람이 하나 둘씩 늘어나고 있었다. 대기 줄에서 서로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게임 소프트의 발매와는 다르게 콘솔의 발매는 게이머들에게 굉장한 설레임을 가져다준다. 특히나 출시 전부터 먹음직스러운 떡밥을 계속 해서 뿌려대었으니, 현재 라온을 기다리는 게이머들의 기대치는 최고조에 다다른 상태였다. 이것이 모두 준페이를 비롯해 먼저 라온을 플레이해본 기자들 역시 새로운 휴대기기의 성능에 대해 극찬하며 분위기를 끌어 올린 덕분이었다. 잠시 후. 타마고샵 건물 외벽에 거대한 현수막이 걸리자, 아키바의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91년 8월 15일 종전의 날. 콘솔 시장의 종전을 알릴 최고의 휴대용 게임기. 라 온 출시!!- 다소 자극적인 선전문구로 느껴질 수 있지만, 그 만큼 임팩트 있는 소개이기도 했다. 하긴 지금쯤이면 한국과 미국에서도 비슷한 행사를 진행 중일 것이다. 한국에선 당연히 만트라가 라온을 들여와 자사의 잡지를 통해 홍보했고, 미국에서는 윌슨씨가 기존의 민텐도 프리미엄 샵에 대한 계약을 해지하고, 지난 달부터 새로운 휴대기기인 라온을 메인으로 홍보 전략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런칭 타이틀은 파이널 프론티어 4와 스파2 단 두 개뿐이었지만, 파급력이 상당한 녀석들이기에 지난달 패미통신의 앙케이트 조사에서 기기와 함께 두 가지 타이 틀 모두 구매하고 싶다는 유저가 절반 이상을 기록했다. 어느 정도 건물 외관 준비를 마친 나는 함께 수고해준 직원들과 교대로 식사를 나섰다. 날이 더워 그런지 입맛이 없던 우리는 행사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건너편 건물 2층의 소바 가게로 향했다. “후우.. 덥다. 더워..” 가게에서 내어준 차가운 물수건을 얼굴에 대자, 벌겋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식으며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 마주 앉은 직원들을 살펴보니 모두 나랑 똑같은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목이 많이 말랐는지. 모리타가 연신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삼켜대자, 그를 지켜 보던 하야시가 핀잔을 주었다. “너 그러다 배탈 난다.” “더워 죽을 거 같아..” “그러게 평소에 운동을 좀 해..” “그럴까? 맨날 책상에 앉아서 그림만 그리다보니 몸이 많이 굳었나 봐.” 나는 차가운 물을 삼키며 둘의 대화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수고가 많았다. 외부 행사준비는 얼추 끝냈으니, 오후엔 에어컨 들어오는 실내에서 작업하자.” “오오~!!” “그런데, 모리타. ‘그 거’ 아직 안 들어왔지?” “아까 연락 받았는데, 거의 도착했다고 합니다. 아!! 저기 오네요.” 모리타가 창밖을 가리키자, 직원들이 길게 목을 빼며 행사장 쪽을 내려다보았다. 행사장 앞에는 작은 트럭 하나가 검은 색 휘장으로 무언가를 가린 채 대기하고 있었다. 곧 조수석에서 우치무라가 내리고, 타마고 샵에 안에서 대기 중이던 미야자키씨를 비롯한 직원들이 우르르 달려와 트럭 뒤에 실린 무언가를 조심스레 옮기기 시작했다. 때 마침 도착했구나. 조금 늦어질 수도 있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우치무라가 막판에 분발해준 모양이다. “그런데, 저거... 원래 저렇게 컸었나?” 나의 질문에 모리타가 대답했다. “안 그래도 한 달 전에 우치무라군한테 연락을 왔었는데, ‘사이킥 포스’의 디오라마를 조금 수정해도 되냐고 해서, 전체적인 이미지만 해치지 않는 다면 상관없다고 했는데...” “조..금이 아닌 거 같은데?” “빨리 식사하고 내려가 봐야겠네요.” “아냐, 천천히 먹자. 우치무라군 실력이라면 절대 실망 시키지 않을 테니까. 뭔가 따로 생각해둔 게 있겠지.” 우치무라군은 피규어 업계에선 현재 거의 초신성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추앙받고 있다. 이미 ‘내가 없는 거리’ 기모노 버전으로 장인의 반열에 들어선 그는 새로운 피규어를 제작 할 때마다 독특한 아이디어를 제공했기에 모리타와 제법 죽이 잘 맞았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콜렉터들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호토부키아 같은 전문 제작사들의 피규어의 퀄리티가 조금씩 떨어지는 추세이지만, 우치무라의 피규어는 반대로 계속해서 퀄리티가 오르고 있었다. (그에 따라 우치무라군이 만드는 피규어의 가격도 점점 올라가고 있지만...) 나는 우치무라의 피규어를 처음 보고 미래의 피규어 회사 중에 하나인 핫토이의 주문 방식을 떠올렸다. 다소 비싸고 제작 기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소비자가 만족할만한 퀄리티의 피규어를 소량으로 제작한다. 그것은 사실 큰 이익으로 돌아오진 않았지만, 콜렉터들에게 굉장히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그래서 일까? 식사를 하며 행사장 쪽을 살피니 아까보다 대기 줄이 더 길어진 느낌이다. 다들 정말로 하루를 꼬박 여기서 보내기로 한 건가? & 식사를 마치고 매장으로 돌아오니, 한창 디오라마의 설치작업 중이었다. 그런데 이거 왜 이렇게 크지? 당초 생각 했던 크기보다 2배는 더 커진 느낌인데? “거기 A-5번 건물은 저한테 주세요. 제가 따로 설치할게요.” 우치무라는 분리 되어 있는 디오라마의 파츠들을 하나씩 받아 들어, 직접 설치를 돕고 있었다. 최초 기획에서 교차로에서의 부분 전투를 그려두었던 것과는 달리, 현재 완성된 디오라마는 아예 교차로를 중심으로 넓게 확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캐릭터 사이의 거리를 띄워두니 일반적인 격투 게임 보다는 사이 킥 포스가 갖고 있는 슈팅 대전액션의 특색이 더욱 돋보여 보였다. 그렇게 약 한 시간가량의 설치 작업이 모두 끝나고, 마지막으로 유리 케이스를 덮어 두자, 박진감이 넘쳐흐르는 사이킥 포스의 캐릭터들이 건물 사이사이에 배치되어 묘한 현장감을 전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우치무라의 마법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자.. 잠시만요.” 우치무라가 디오라마의 밑바닥을 살피더니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파앗. 그 순간 주변에 모여 있던 직원들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헉!!” “뭐야 이건?” 나는 놀라운 광경에 당황하는 직원들에게 일단 휘장을 덮어 두라고 지시하였다. 기대 이상의 연출에 흥분한 직원들은 우치무라를 향해 박수를 보내주었다. ‘좋아. 일단 첫 번째 히든카드는 기대 이상으로 완성 되었군.’ & 라온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생각보다 엄청 났다. 오후 3시가 되자, 구매 행렬은 준비해 두었던 천막을 벗어나기 시작했고, 그 후로도 조금씩 뻗어나가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펜타곤 직원들은 점점 늘어나는 구매 행렬에 대기 줄을 유도하며 안전사고에 대비했다. 그렇게 오후 5시가 지났을 무렵.. 툭.. 툭툭.. “어? 비다..” “아.. 결국 내리네.” 여기저기 사람들의 불평이 터져 나오며 천막을 벗어나 있던 사람들은 하나 둘 우산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가거나 자리를 뜨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천막에 있던 사람들이 조금씩 자리를 양보해 모든 사람이 천막 안에 들어 올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이다. (하지만 최초 구매자의 주변은 모세의 기적처럼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좁은 천막 안에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비 내리는 날에 런칭 행사라니, 타임 슬립하기 전에 디아블로 사겠다고 왕십리 갔던 날이 떠오르네..’ 그때도 밤새도록 비가 내렸지만, 한정판 하나 사보겠다고 회사에 연차까지 내고 달려갔었는데.. 지금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도 그때의 나와 같은 기분일까? & 비는 밤이 새도록 계속 내렸다. 무더운 날씨에 달랑 티셔츠 한 장 입고 온 사람들은 계속해서 내리는 비에 체온이 많이 뺏긴 상태였다.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였지만, 새벽이 되자 다들 오기로 버티는 분위기였다. 나를 비롯한 펜타곤 직원들 역시 유저들과 함께 밤을 지새우며 기나긴 밤을 버텨 내었다. “비가.. 조금씩 잦아드는 거 같은데?” “그러게요? 하긴 어제 초저녁부터 엄청 내렸으니, 이제 그만 좀 내렸으면 좋겠는데..” 그런 하야시의 마음이 하늘에 닿았는지 동쪽에서 빌딩들 사이로 한줄기의 태양이 내리 쬐었다. “아침이다.” “아, 너무 길었어.. 빨리 사서 집에 가고 싶다..” “10시부터 판매 시작이니, 아직 3시간 더 남았네..” 함께 아침을 맞이한 게이머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웃어보였다. 어느 정도 비가 잦아들자, 나는 근처 도시락 업체 몇 군데를 연결해 대량 주문을 마쳤다. 밤새 비를 맞아가며 추위를 견뎌온 사람들은 펜타곤에서 제공해주는 도시락을 받아들고 거리에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다 드신 도시락은 이쪽에 버려주세요.” 평소보다 일찍 출근한 미야자키씨의 활기찬 목소리가 거리에 울리고, 나는 잠시 집으로 돌아와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쳤다. 미리 세탁소에 맡겨두었던 정장으로 갈아입은 나는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고쳐 멘 후에 다시 행사장으로 향했다. 잠시 집에 다녀오는 동안 라온의 구매 행렬은 두 배 이상 늘어나 있었다. 전철역 안쪽까지 길게 늘어진 대기 줄 덕분에 역무원이 우리에게 다가와 사정할 정도였다. 결국 우리는 타마고 샵 안쪽으로 구매 유도 줄을 세우고 일부 유저들을 행사장 안으로 받아 들였다. 사람들은 실내에 들어오자 라온 런칭작들의 포스터를 바라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우와.. 스트리트 파이어2~!! 크으~ 저거 하나만 있어도 1년은 즐기겠다.” “난 드래곤 엠블렘. 잡지에서 리메이크된 캐릭터 보고 완전 뻑 갔지..” “음? 그런데 저 가운데 검은 천은 뭘 덮어 둔 거지?” “그러게? 뭔가 또 깜짝 쇼하는 거 아냐? 예전에 제작 발표회 때 게임 업계 사람들 다 뒤집어 졌다 잖아.” 실내에 모인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중얼거리며 검은 천에 대해 궁금해하자, 직원들의 표정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리고 오전 10시 유저들에게 익숙한 파이널 프론티어의 테마곡과 함께 라온의 소개를 위해 카와구치 대표가 단상에 올랐다. “악천후 속에서도 밤을 지새우며 라온의 런칭을 함께 기다려주신 유저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라온은 최초의 16비트 CPU를 사용하는 풀 컬러 휴대용 게임기로서 언제 어디서나 유저들끼리 데이터 케이블을 이용해 게임을 즐길 수 있습니다. 현재 게임 센터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스트리트 파이어2 역시 여러분의 친구들과 언제 어디서든 호쾌한 배틀을 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오오~” “물론 저희 펜타곤 소프트에서 만든 파이널 프론티어 4 역시 기존에 패밀리 때 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장대한 스토리와 BGM. 그리고 미려한 그래픽으로 만반의 준비를 하였으니 부디 즐겁게 플레이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대기줄에 있던 유저 하나가 외쳤다. “기다리다 목 빠지겠습니다. 빨리 좀 파세요!!” 유저의 목소리에 카와구치 대표는 마이크를 잡은 채 슬쩍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저 역시 곧바로 판매를 시작하고 싶지만, 그 전에 여러분께 저희 펜타곤에서 준비한 새로운 소식 몇 가지를 더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오? 새로운 소식?” “런칭 일에 또 다른 신작 발표인가?” 카와구치 대표의 말에 유저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단상 아래에서 준비하고 잇던 나는 잠시 넥타이 끈을 살짝 풀은 뒤 길게 심호흡을 하였다. “새로운 소식은 저희 펜타곤 소프트를 대표하는 게임 디렉터 강준혁씨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카와구치 대표의 소개에 나는 천천히 단상위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카와구치 대표가 한발 뒤로 물러서고 수많은 게이머들과 마주한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이거.. 제작 발표회 때랑은 느낌이 또 다르네..’ 과연 내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기대에 찬 눈빛을 바라보니 입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잠시 목을 가다듬은 뒤에 바짝 마른 입을 떼었다. “안녕하세요. 펜타곤 소프트의 강준혁입니다. 음.. 저는 우선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것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드래곤 엠블렘, 사이킥 배틀, 내가 없는 거리, 발렌타인 데이 같은 게임들 처럼 말이죠.” 그게 나의 첫인사였다. < EP. 23 : 라온 출격 (1) > 끝 < EP. 23 : 라온 출격 (2) > “안녕하세요. 펜타곤 소프트의 강준혁입니다. 음.. 저는 우선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것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드래곤 엠블렘, 사이킥 배틀, 내가 없는 거리, 발렌타인 데이 같은 게임들 처럼 말이죠.” 그게 나의 첫인사였다. 그러자, 행사장에 모인 유저들은 나의 황당한 인삿말에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야.. 하나씩 플레이 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저렇게 한꺼번에 모아 놓으니 뭔가 굉장히 열 받는데?” “그러게, 저거 4개 다 클리어 하느라고 피 똥 싼 기억 밖에 없다.” “아우~ 저는 내가 없는 거리하고 혼자서 질질 짜다가 어머니한테 엄청 혼났습니다.” “나는 여친한테 등짝 맞았지. 그래서 직접 해보라고 빌려주니까 자기도 울더라. 걔도 울고 나도 울고 아주 그냥 방안이 눈물 바다였어.” “전 라온 사는 이유가 드래곤 엠블렘 때문인데, 동시 발매가 아쉽네요. 발매 일까지 파이널 프론티어4 하나로 버텨야죠.” “저는 펜타곤 소프트 게임은 아니지만, 사이킥 배틀이 어렵긴 했어도 진짜 재미있었는데, 대전 모드도 그 당시엔 상당히 신선해서 동생이랑 밤 새워서 했던 기억이 나네요. 후속작 안나올라나..” “그건 힘들 걸요? 저작권이 민텐도에게 있으니.” “하긴 그렇네요.” 준비된 인사말에 몇 문장만 읊었을 뿐인데, 유저들은 알아서 내가 만든 게임에 대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린 후에 말을 이었다. “우선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라온은 휴대용 기기치고 저렴한 편이 아닙니다. 기기 가격으로만 쳐도 29,800엔. 민텐도의 슈퍼 패밀리보다 비싼 가격이죠. 대신 서 드 파티와 조율해 카트리지 가격을 대폭 낮출 수 있었습니다. 동시 발매되는 파이널 프론티어 4와 스트리트 파이어2는 각각 5,300엔으로 타사의 소프트 가격보다 약 3~4천엔 가량 저렴한 편이지요. 앞으로 라온으로 개발되는 롬 카트리지 타이틀 들의 가격은 6,000엔이 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오오~!! 그건 좋은데?” “그래 차라리 기기가 조금 비싸더라도 소프트 값이 저렴한 게 훨씬 낫지. 최근에 슈퍼 패밀리 카트리지 값이 거의 1만엔에 가까워지던데..” “그러게요. 발매 이후로 카트리지 가격이 계속 올라가고 있으니, 이제는 게임 하나 사기도 무섭더라구요. 혹시나 샀는데, 지뢰 작이면 어떡합니까?”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최근에 민텐도에서 발매되는 게임들은 소비자 가격이 너무나 비싸게 책정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일본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한국 같은 경우는 아직 슈퍼 패밀리용 게임이 정식 발매가 되지 않아, 일본에서 건너온 타이틀은 약 18만원 상당에 팔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인기가 좋은 타이틀 같은 경우엔 20만원을 훌쩍 넘길 때도 많았다. 어릴 적에 친구를 따라서 파이널 프론티어 6 사보겠다고, 용산에 갔다가 무서운 형들에게 끌려가 돈도 뺏기고, 그나마 숨겨두었던 비상금으로 파이널 프론티어를 사러갔더니, 카트리지 하나에 24만원을 달라 길래 포기하고 돌아왔던 기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이어서 새로운 카트리지 방식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또한 차후에 드래곤 엠블렘과 함께 발매될 플래시 메모리 카트리지는 내용을 읽고, 쓸 수 있는 만큼 전국의 각 게임 샵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다운로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운로드? 그게 뭐지?” PC 통신을 함께 즐기는 유저가 아닌 이상 다운로드라는 단어가 굉장히 생소하게 들려오는 모양이었다. 결국 나는 추가적으로 다운로드 방식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을 더해 주었다. 그러자 내 이야기를 모두 들은 한 유저가 외쳤다. “어? 그럼 다른 게임을 받기 위해 안에 들어 있는 게임을 지우면 나중에 다시 사야하는 겁니까?”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카트리지 안에 담긴 코드와 고객님의 개인 정보를 설정해 일치 할 경우에는 언제든지 무료로 다운로드가 가능합니다.” “오~” 하지만 탄성도 잠시, 이번엔 다른 쪽에서 질문이 들려왔다. “만약에 플래시 카트리지에서 한 가지 이상의 게임을 하고 싶을 때는 어떡하나요? 기존의 게임을 삭제해야 하나요?” 꽤나 날카로운 질문에도 나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게이머들 앞에서 개발자가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니까.. “플래시 메모리 카트리지는 두 가지 버전으로 출시 될 예정입니다.” “두 가지 버전?” “네. 게임을 하나만 저장할 수 있는 저용량 버전과 게임 두 개를 저장할 수 있는 고용량 버전이죠. 물론 저용량 모델로 구입하신다면, 방금 유저님께서 질문하신 것처럼 다른 게임을 하기 위해 안에 설치 된 게임을 지워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아, 그건 좀 아쉽다.” “그래도 뭐 나중에 다시 받을 수 있다니까. 그건 다행이네..” 데이터를 읽고 지울 수 있는 플래시 메모리의 단가는 굉장히 비싸다. 나 역시 맞춘 다고 맞춰 본 단가가 저용량은 11,800엔. 그리고 고용량은 19,800엔이었다. 이마저도 판매할 때마다 조금씩 손해를 볼 수밖에 없어서 차후에 다운로드가 활성화 된 다면 거기에서 수익을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술은 점점 발전할 테니 내년 이 맘 때쯤이면 플래시 메모리의 카트리지 단가를 조금 낮출 수도 있고, 보다 더 큰 용량을 출시할 수도 있겠지? 콘솔은 한번 출시하면 적어도 5~6년가량 시장을 주도하기에 그 안에 기술의 발전에 따라 조금씩 기기의 단가를 낮출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하지만 플래시 메모리 카트리지를 이용한 다운로드의 소프트의 판매금액은 약 4,300엔 정도로 롬 카트리지 소프트보다 1,500엔 가량 더 저렴하게 책정 될 예정입니다.”? 그러자 회장은 어느 정도 내 말에 납득하는 형태로 분위기가 흘러가기 시작했다. ??“요즘 같은 시기에 게임 소프트 하나가 4,300엔이면 진짜 싼데?” ?“그렇다고 한번 지우면 못 받는 것도 아니고, 확실히?펜타곤이 유저들에게 신경을 더 쓰는 것 같아.” ?“펜타곤 소프트에서 나온 게임은?구입해서 한 번도 후회해 본적이 없으니까. 난 무조건 롬 카트리지로 소장해야지.” ?“같은 게임이지만, 어느 정도 우리에게 선택의 폭을 주는 건가?” ?나는 유저들이 술렁이는 대화 속에서 중요한 내용 몇 가지를 빠르게 캐치해 대답해 주었다. ?“기존처럼 게임을 모으시는 유저 분들은 전과 마찬가지로 롬 카트리지를 구매하셔도 됩니다. 플래시 메모리 카트리지 같은 경우는 아이에게 게임 소프트를 계속해서 구입 해주는 것에 대해 꺼려하시는 부모님이나 학생들을 위한 정책이니까요. 여러분께서 원하시는 형태로 게임을 구매해 주시면 됩니다.” ?그렇다보니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 거리던 유저들조차 점점 환호하는 분위기로 물들어갔다. ?어느 정도 행사장의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나는 프로젝터를 담당하는 직원을 향해 사인을 보냈다. 직원은 나의 사인에 고개를 끄덕이며 배틀존 중계에 뿌리는 프로 젝터를 가동시켰다. ?“그럼 이제 여러분들이 기대하시는 저희 펜타곤 소프트의 신작에 관련해 전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여러분께 소개시켜 드릴 게임은 바로 이 작품 입니다~!!” ?“핫!!” ?짧은 기합소리와 함께 등장한?미모의?여성이 낮은 자세로 미끄러지듯이 달리 자,?유저들은 갑작스럽게 재생된?애니메이션 영상에 대해 술렁이기 시작했다. ?“오오~~!! 뭐지? 설마 펜타곤의 완전 신작인가?” ?슈슉!! ?그 순간?땅을 박차고?높이 뛰어오른 여성은 새하얀 달빛 아래 타이트한 몸매를 드러내며 공중제비를 돌더니?건물 외벽을 그대로 밟고 달리기 시작했다. 영상 속의 카메라 앵글은?마치 영화처럼 360도로 경쾌하게 돌아가며 그녀의 전신을 비춰주었고, 마지막에 그녀의 얼굴이 클로즈 업 된?순간, 유저들의 입에서 똑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즈사 렌!?” ?“뭐야!? 말도 안 돼!!” ?“잠깐, 생김새가 비슷하긴 한데, 헤어스타일이나 복장이 아예 다른데?” ?“설마 사이킥 배틀 2!? 라거나? 그런데 그럴 리 없는데?” ?그순간 영상이 바뀌며 이번엔 가죽 재킷을 입은?숏컷의 여성이 바이크를 타고 등장했다. ?거대한 바이크를 타고?도심을 질주하던 그녀는 높은 빌딩들이 둘러싸인 교차로를 힐끔 바라보더니 강하게 슬로틀을 당기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뒤를?쫓는 자동차에서?붉은 레이저가 쏟아져 나가고, 그녀는 좌우로 바이크를 이동하며?간신히 피해냈다. 그리곤 거대한 바이크를 지면에서 한 바퀴 회전 시키며 자동차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그때?다시 한 번?클로즈 업 된 그녀의 얼굴에 회장 안에 경악이 스쳤다. ?“컥!! 이번엔 류화영!?” ?“맞네, 사이킥 배틀이네!!” ?“우와아아앙!!!!!!?이젠 다시 못 볼 줄 알았는데에~!!!!” ?“으어억...?내 돈 다 가져가라, 펜타곤?이놈들아~!!” ?단 두 명의 출연에 회장 안이 발칵 뒤집혔다. 그것은?그만큼 사이킥 배틀을 기다려온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류화영을 닮은 캐릭터는 집요하게 자신을 쫓아오는 자동차를 뿌리치기 위해 어마어마한 속도로 도심을 달렸고, 영상을 보는 이마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추격전이 계속 되었다.? 초호화 퀄리티로 제작된 ‘사이킥 포스’의 오프닝은 차후 ‘공각타격대’로 명성을 날릴 호시이 마모루 감독에게 직접 부탁한 작품이다. ?단 8분가량의 영상에 제작비가?천만엔 가까이 들어갔으니, 그 퀄리티야 현장의 분위기가 증명해주고?있었다. ?형형색색으로 표현된 도심의 야경을 화려한 색채로 담아내고, 그 안에서?어딘가 사이킥 배틀을 떠올리게 하는 주인공들이 도심을 박차며 서로 싸우고 있었다. ?4명의?여성과 4명의 남성은 서로를 적대시 하며 목숨을 노리고 있었고, 이윽고 자동차에서 쏘아진 레이져가 류화영의 오토바이에 명중하자,?가벼운 그녀의 몸이 관성에 의해 튕겨져 날아갔다. 그때였다. ?“캬아아악!!!” ?긴 혓바닥을 내밀며 파손된 자동차의 앞 유리로?뛰어오른 괴한이?등 뒤에서 창을 꺼내들었다.?그 순간 그의 이마 정중앙에 붉은 반점이 표시 되었다. ?오토바이에서 튕겨져 나간 류화영이 이를 악 문채 몸을 비틀어 권총으로 그를 겨눈 것이다. “아이스 불렛~!!” 파아앙~!! 이마에서 얼음의 꽃이 피어오르며 목이 꺾어져 날아간 괴한은 지면에 착지 하자마자, 덜렁 거리는 자신의 목뼈를 고쳐 끼웠다. “쩌.. 쩐다..” 유저들의 굉장히 빠른 스피드로 진행되는 배틀씬에 감탄사를 내뱉으며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사이틱 포스의 장르명은 ‘초 스피드 하이퍼 배틀’ 마치 드래곤 볼을 연상케 하듯 거대한 건물을 때려 부수는 화끈한 배틀에 쉽사리 눈을 떼지 못하는게 당연했다. ‘확실히 돈 들인 만큼 단기간에 어마어마하게도 만들어 주셨네..’ 이윽고 무너지는 건물을 한 손으로 떠 받친 거한을 향해 아즈사 렌을 닮은 여 닌자가 그의 품안에 뛰어들며 선전 문구가 떠올랐다. -사이킥 배틀의 정신적(精神的) 후속작.- -초 스피드 하이퍼 배틀. 사이킥 포스. 올 겨울 게임센터 가동.- “뭐야!? 아케이드 게임이라고!?” “으아아아!! 설마 대전 액션인가!? 대박..” 이곳에 모인 모두가 홍보영상 한방에 충격에 휩싸인 그 순간. 유저들의 한 가운데 있던 검은 천막이 위로 솟아올랐다. “허억!!” 마치 방금 본 애니메이션의 정지 영상처럼 우치무라가 만든 거대한 디오라마는 ‘사이킥 포스’의 긴장감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었다. “헐.. 겨울까지 언제 기다리냐..” 나는 피규어를 구경하느라 정신없는 유저들을 바라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린채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감사합니다. 이곳에는 저희와 함께 밤을 새느라 피곤하신 유저분들도 있기에 곧바로 두 번째 게임을 소개 할까 합니다.” “오오~ 뭐가 또 있나 보다.” 나는 잠시 좌중을 둘러 본 후에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최근 드래곤 볼과 함께 일본에서 선풍적인 농구 붐을 일으키고 계신 작가님을 소개합니다. ‘슬램덩크’의 이노시타씨. 단상에 올라와 주시겠어요?” “스.. 슬램덩크?” 슬램덩크라는 농구만화의 원작자인 이노시타씨는 단상에 올라와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저 역시 오늘까지 이 타이틀의 존재를 숨기느라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펜타곤 소프트에서 제 작품을 게임화 하고 싶다고 하셨을 때. 조금 어리둥절했지만, 조금 더 다양한 분들에게 제 작품을 알리고 싶어. 이렇게 게임으로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우와아아아!!” “젠장.. 파이널 프론티어랑 스파2만 사면 될 줄 알았는데, 돈이 모자라!!!” “오늘 대체 얼마를 쓰게 만들려는 거냐..” < EP. 23 : 라온 출격 (2) > 끝 < EP. 23 : 라온 출격 (3) > “오늘 대체 얼마를 쓰게 만들려는 거냐..” 이노시타씨의 발표와 함께 프로젝터에는 붉은 머리의 주인공이 볼을 튕기며 골대를 향해 높이 뛰어 올랐다. 콰지직!! 골대가 부서질 정도로 강렬한 덩크 씬에 유저들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흘러 나왔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중반까지 일본 만화 산업을 이끌어간 양대 산맥이라면 누구나 드래곤볼과 슬램덩크를 꼽을 것이다. 하지만 패밀리 때부터 게임화가 활발히 이루어졌던 드래곤 볼과는 달리 슬램덩크는 아직까지 한 번도 게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이 시기에 스포츠 게임이라 치면 ‘열혈’시리즈가 꽉 잡고 있던 때라서 그런지, 난투극과 마구가 없으면 뭔가 심심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서 일까? 슬램덩크만이 가지고 있는 그 독특한 캐릭터 성을 이용해 게임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90년대 중반에 출시한 아케이드 '슬램덩크 슈퍼슬램'이라는 게임은 캐릭터들의 인기에 힘입어 대히트를 기록했다. 농구 포지션을 잘 모르는 사람도 캐릭터에 비유해 알려주면 고개를 끄덕거렸을 정도니까.. 라온용으로 제작된 슬램덩크는 아케이드 형태의 게임을 3등신으로 SD화 시켜 특유의 귀여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삐익~!!- 경기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쇼호쿠(북산) 와 료난(능남)의 경기가 시작되자, 행사장 안은 기대와 설레임으로 가득 차올랐다. “오~ 귀여운데?” “미쯔이 히사시(정대만) 표정 좀 봐~” 점프 볼에서 선공을 따낸 쇼호쿠의 볼이 곧바로 미야기(송태섭) 쪽으로 흐르자, 전원 속공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만화의 한 장면과 겹쳐 보여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순간 안쪽으로 파고들던 미야기(송태섭)의 앞에 센도(윤대협)가 막아서자, 볼이 외각으로 흐르며 노마크 상태인 미쯔이(정대만)에게 흘러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미쯔이의 3점 슛이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골대로 빨려 들어가자, 화면에 미쯔이의 얼굴이 클로즈 업 되며 컷인이 표시 되었다. “크으~ 역시 불꽃남자!!” 슬램덩크의 데모 역시 사람들의 뜨거운 환호 속에서 중계가 계속 되었고, 라온의 런칭 행사는 점점 축제 분위기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일부러 저희 행사장까지 찾아와주신 슬램덩크의 원작자 이노시타씨에게 큰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부디 게임도 많이 즐겨주세요~” “자~ 그럼 이상으로 신작 발표회를 마치며 정식으로 라온 판매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오오오!!!” 행사장에 모여있는 게이머들은 마치 전장으로 향하는 용사들처럼 큰 함성으로 대답했다. 아직 행사장 안까지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인 모양이다. 잠시 후. 판매 행사가 공식적으로 시작되며 총 8개의 계산대에서 새로운 휴대기기 라온은 급속도로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라온이랑 스파2 주세요~!!” “전 라온이랑 파이널 프론티어 4, 그리고 슬램덩크 주세요!!” “아, 어쩌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슬램덩크가 튀어나와서 고민되네..” “뭘 고민해. 그냥 다 사. 어차피 살거잖아~!!” “그치? 나중에 물건 없어서 끙끙 대는 것보다. 그게 낫지.” “RPG, 대전 액션, 거기다 스포츠 게임이라니, 환상의 라인업이다!!” “거 고민하지 말고 빨리 좀 사요. 피곤해 죽겠네...” 마치 미국의 추수감사절을 연상케 하듯 행사장은 라온의 구매 고객으로 가득 차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밖에 있다가 시원한 실내로 들어온 손님들은 뒤늦게 알아챈 사이킥 포스 영상과 슬램덩크의 발매소식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하니 영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펜타곤이 이젠 아케이드 게임도 만드는 구나..” “슈팅 게임인 사이킥 배틀에서 대전 부분만 떼어내 업그레이드 시킨 건가? 게임 영상이 없으니 좀 답답한데, 오프닝 무비는 진짜 끝내 주네.. 무슨 극장 상영판 같아.” “겨울!! 겨울이다!!” “저거 나오면 사이킥 배틀 때 우승자인 타카시도 또 나오려나?” “아~ 그때 결승전 나도 봤지. 겁나 멋있었는데, 마지막에 전탄 방어. 크으~” “아직도 그 생각만하면 소름 돋아..” 나는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아직까지 사이킥 배틀을 기억해주는 유저들의 열정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타카시의 결승전 보다 훨씬 박진감 넘치는 배틀이 될 겁니다.’ 궁극의 배틀 스피드를 자랑하는 사이킥 포스는 순수히 모리타의 기획안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기존에 슈팅에 치중되어 있던 장르를 대전 격투로 바꾼 ‘사이킥 포스’는 캐릭터의 이미지를 최대한 살리는 방향에 입각해 아케이드 기판으로 제작을 진행하였다. 라온이 아무리 뛰어난 기기라 해도 모리타의 일러스트를 감당할 만큼 고사양은 아니었기에 아쉽지만, 어설프게 내는 것보단 그 편이 훨씬 좋은 결과물을 보여줄 것이 분명했다. 또한 90년대 초반은 게임 센터의 절정기인 만큼 코인 회수 량을 따지면 상당히 득을 보는 장사다. 앞으로 튀어 나올 수많은 대전 격투 게임들 속에 펜타곤 소프트의 이름을 알릴 격투게임 하나정도 필요치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제안해 봤는데, 결론은 모두가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지난 3월부터 서둘러 제작에 들어간 사이킥 포스의 현재 개발 진행도는 약 60%. 이미 어느 정도 대전 격투의 모양새를 잡아가고 있었다. 며칠 전에 모리타와 함께 시험 삼아 테스트용 캐릭터로 플레이 해보았는데,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빠른 배틀 방식이었다. 상당히 이동반경이 넓은 도심 속에서 두명의 캐릭터가 쏟아내는 탄막에 의해 주변 건물이 무너지는 연출이라던가, 자신에게 날아오는 탄막을 ESP 게이지를 이용해 쳐내거나 되돌려 주거나, 순간이동으로 피해낼 수 있었기에 ESP 게이지 틈틈히 모아두어야 하는 것이 배틀의 포인트였다. 특히나 아직 초 필살기에 대한 확립이 제대로 안된 시기였기에 체력이 30% 이하로 줄어들었을 때만 쓸 수 있는 ‘일발 역전기’가 직원들 사이에서 굉장히 인기가 높았다. (어쩌면 초필살기를 쓸 때 캐릭터가 클로즈 업하며 보여주는 바스트 모핑에 흥분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가까이 붙어 화끈하게 주먹으로 겨루는 스파2와는 달리 사이킥 포스는 화면에 넘쳐나는 탄막을 피해내거나 서로의 필살기로 장풍 대결을 하는 것에 포인트를 두었기에 같은 대전 격투라도 느낌이 많이 달랐다. ‘하지만 코인 회전률은 이쪽이 더 빠르겠지. 게임 스피드도 빠르고 스파보다 훨씬 다양한 연계기로 인해 잘못 걸리면 진짜 눈 깜짝 사이에 승패가 결정 날 테니까.’ 걸음을 옮겨 계산대 뒤편으로 향하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모리타와 하야시가 함박 웃음을 짓고 있었다. “대박입니다. 부장님께서 기획하셨던 저가 소프트 정책이 제대로 통했어요.” “이게 다 민텐도에 대한 반발 심리 덕분이지. 캡코에서 스파2를 이식한 게 신의 한수였으니...” “확실히 판매되는 걸 보면 스파2가 가장 먼저 줄고 있어요.” “아무래도 현재 게임 센터에서 가장 인기가 높으니까. 거기다 휴대용이라 어디서나 대전까지 할 수 있으니 당연한 선택일 수도...” 하야시의 말대로 계산대로 몰려드는 사람 중 열에 아홉은 거의 다 스파2를 구입하는 편이었다. 성격이 급한 사람들은 게임을 사자마자, 매장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곧바로 플레이해보는 사람도 있었다. 데이터 케이블은 기본으로 포함하고 있었기에 친구랑 함께 온 유저는 곧바로 기기를 연결해 스파2를 즐겼다. “와~ 오락실이랑 똑같네..” “그러게, 설마 이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감격스러워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세상에 휴대용으로 스트리트 파이어2를 할 수 있다니. 앞으로 전철에서 심심하지 않겠네.” 그렇게 행사가 시작되고 약 3시간 만에 라온은 거의 2000대 가량이 팔려 나갔다. 첫날 준비한 5000대의 수량이 3시간 만에 절반가량 줄어든 것이다. 직원을 교체 해가며 계산대를 돌리고 있지만, 밖에까지 이어진 대기 줄은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런칭 행사 분위기를 촬영하기 위해 아침부터 나와 있던 준페이가 피곤한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슈퍼 패밀리 때보다 속도가 더 빠른 거 같은데?” “약간 더 앞서고 있긴 해.” “기기 자체가 제법 고가정책이라 유저들 반응이 궁금했는데, 진짜 어마어마하네.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기기는 어차피 한번만 사면되잖아, 중요한 건 카트리지 가격이지.” “들어보니 피닉스의 드래곤 워리어도 라온용 소프트로 제작의도가 있었던 거 같은데, 뭐 알고 있는 거 없어?” “여기까지 와서 취재 인터뷰냐?” “이미 업계에 소문이 자자하거든? 실제로 이미 서드 파티 몇 군데는 라온으로 넘어가겠다고 발표했잖아.” “헛소문이야. 피닉스 소프트의 드래곤 워리어는 현세대에서 가장 보급률이 높은 콘솔로만 제작한다고 발표했으니까. 다섯 번째 시리즈는 이미 슈퍼 패밀리로 제작 되고 있을 거야.” “아쉽다.” “민텐도에서도 드래곤 워리어 만큼은 안 뺏기려고 필사적인 모양이니, 쉽지 않을 거야.” 준페이 말대로 대형 소프트 회사인 캡코가 움직이고 난 뒤 은근히 라온 쪽으로 개발 노선을 바꾼 서드 파티가 여럿 있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회사가 ‘악마성’ 시리즈로 유명한 폭스 소프트. 그리고 최근에 건담이나 마징가를 이용해 SRPG 게임을 계획 중인 윙크 소프트였다. “글쎄, 미안하지만 더 이상은 영업 비밀이라. 자세히는 못 알려줘.” “쳇. 치사하다.” “치사... 하다고? 내가 지금까지 너한테 알려준 정보만 몇 갠데?” 그러자 준페이는 대충 웃음으로 때우며 화제를 돌렸다. “야, 배고프다. 밥 먹으러 안가냐?” “우리 직원들도 아직 식사 못했는데, 어떻게 나만 달랑 가서 밥을 먹냐.” 그때 행사장 내부에 있던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 나왔다. 목소리 톤으로 보아 미야자키씨 였다. “라온을 구매하기 위해 런칭 행사에 방문해 주신 고객님들께 알립니다. 현재 캡코에서 출시한 스트리트 파이어2의 카트리지가 전량 매진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알려 드립니다.” “뭐라구? 벌써!?” “안 돼~!! 그거 사러왔는데..” 역시 예상대로 스파2의 수량이 가장 먼저 동이 나버렸구나. 하지만 아직 슬램덩크과 파이널 프론티어는 여유 수량이 많이 남아 있었기에 유저들은 아쉬운 대로 다른 소프트를 구매하기 시작했다. 사실 세 가지 타이틀 모두 훌륭한 작품이었기에 유저들에게 큰 불만은 터지지 않았다. 만약에 파이널 프론티어와 스파2 만이었다면 조금 위험했을 수도 있겠지만.. & 그날 오후 5시. 한 여름에 날씨처럼 뜨겁게 타올랐던 라온의 런칭은 마지막 판매자를 끝으로 전량 완판을 달성하였다. "라온. 완판을 축하하며 건배~!!" 펜타곤 직원들은 첫 콘솔 기기의 완판을 자축하며 캔맥주로 목을 축였다. 하루종일 고생했지만 다들 표정이 매우 좋아보였다. 준페이 녀석은 은근 슬쩍 나와 친구라는 연줄로 펜타곤의 자축 행사까지 참여하며 직원들과 신나게 웃고 떠들어 대었다. 저 녀석도 붙임성 하나는 기가 막히다니까.. 피식 웃음을 흘리며 캔맥주를 들이키는데 나를 부르는 미야자키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장님. 한국의 만트라 소프트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아, 한국도 런칭 행사가 끝났나보군.. 나는 미야자키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스탭 사무실에 놓여진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잔뜩 흥분한 김한석 대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씨가 기획한대로 한국에서 광복절 런칭행사가 제대로 먹혀 들었습니다!!" < EP. 23 : 라온 출격 (3) > 끝 < EP. 23 : 라온 출격 (4) > “준혁씨가 기획한대로 한국에서 광복절 런칭 행사가 제대로 먹혀들었습니다!!” “그거 반가운 소식이네요. 전에 유저 간담회에 다녀간 보람이 있는데요?” 라온은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에서 동시 발매 된 만큼 각 나라에 맞게 마케팅 문구를 따로 작성하였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그동안 현대에서 유통한 훼밀리나 삼송 겜보이, 대우의 재미스와 같은 외산 콘솔을 사용했던 것을 겨냥해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휴대용 게임기에 대한 이미지를 적극 적으로 활용했다. 만트라는 그동안 잡지를 통해 올바른 정품 구매를 유도하고, 파이널 프론티어 시리즈를 비롯해 드래곤 엠블렘등 패밀리용 한글화를 계속해서 추진해온 회사였기에 국내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가 쌓여 있는 상태였다. 또한 한국에서 아직 정식으로 슈퍼 패밀리의 유통이 시작하기도 전에 ‘내가 없는 거리’의 한글화 소프트를 유통하여 유저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현재 슈퍼 패밀리는 한국의 대기업인 ‘미래상사’와 계약이 채결된 상태라 이르면 내년쯤 정식 발매가 시작될 터였다. 하지만 라온의 출시가 한 발 먼저 성사되며 상황이 조금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미래상사는 이미 라온의 발표 때부터 우리와의 계약을 눈독 들이고 있었지만, 민텐도와의 관계 때문에 살짝 눈치를 보는 중이었고, 삼송 같은 경우는 NEGA와 연결 되어 있었기에 그쪽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소리 소문 없이 만트라에서 라온의 계약 체결 발표를 터뜨리자, 둘 다 벙찐 상태로 서둘러 연락을 걸어왔다. 하지만 예상한대로 나의 대답은 NO. 어차피 그런 대기업들에게 ‘게임’이란 한낱 여흥에 지나지 않으니까... 특히나 삼송 같은 경우엔 PC판으로 파이널 프론티어 7 한글화 발표로 잔뜩 기대감을 올려놓고는 결국 흐지부지 넘어가 나에게 빅 엿을 안겨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곤 사과의 뜻으로 발매 몇 달 뒤에 충실한 ‘대사집’을 안겨주었지. 이미 엔딩 봤다. 이놈들아!!) 하지만 만트라 소프트의 대표 김한석 사장님은 달랐다. 행동파인 그는 우리가 상영했던 제작 발표회 영상을 따로 요청해 한국에서 게이 머들을 대상으로 유저 간담회를 열었다. 바쁜 일정 속이었지만, 나 역시 하루 정도 시간을 내어 깜짝 게스트로 간담회에 모습을 드러내자, 유저들이 환호의 박수를 보내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라온은 한국에서 약 198,000원이라는 굉장히 저렴한 금액으로 출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시장 경제에선 꽤나 고가품에 해당했지만..) 런칭 수량 역시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현저히 낮은 1500대로 이익 보다는 손해가 큰 장사였지만, 나는 이곳에서 한 가지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었다. ‘PC 불법 복제로 인해 완전히 죽어버렸던 한국의 게임시장이 라온의 출현으로 어떻게 움직이게 될까?’ 물론 그 효과를 볼 수 있는 건 적어도 1~2년이 지난 후가 되겠지만... 그 날 밤. 윌슨씨에게도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민텐도 프리미엄 샵의 간판을 내리고 ‘RAON’이라는 새로운 휴대기기 전문 스토어를 오픈한 윌슨씨는 오픈이후 몰려드는 손님으로 정신이 없을 지경이라고 전했다. 한 가지 재밌는 점이 있다면, 똑같은 런칭 타이틀에 대해 세 나라가 각각 독특한 반응을 보였다는 점이다. 일본 같은 경우엔 세 가지 타이틀이 골고루 판매 된 것에 비해 미국에서는 압도 적으로 스파2와 파이널 프론티어 4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북미 만화 시장에서 아직 슬램덩크의 인기가 물오르기 전이고, 이미 PC로 NBA JAM이라는 걸출한 농구 게임이 있어서 그런지 큰 인기는 끌 수가 없었다. (이 시대에 마이클 조던이 안 나오는 게임은 성공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반대로 한국에서는 슬램덩크의 인기가 폭발적이었다. 만트라 사장님의 말을 빌리면 오직 슬램덩크를 위해 라온을 구입하러 왔다는 유저들도 있었으니까. 유난히 한국에서는 슬램덩크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시기였기에 라온의 런칭 한 달 전. 만트라에서 발매하는 게임 잡지에 살짝 정보를 실은 게 엄청난 화제가 된것 같았다. 출시와 동시에 한,미,일에서 선풍적인 일으킨 휴대용 게임 라온. 그 날을 기점으로 CEO게임 안에 라온이라는 새로운 영토가 생겨났다. & 라온이 출시되고 한 달이 지난 뒤. 일본에 새로운 사회 현상이 일어났다. 그 현상은 곧 뉴스에서도 만나볼 수 있었는데, 전철 안에서 데이터 케이블을 연결해 스파2를 즐기는 유저들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전철뿐만 아니라. 공원, 카페등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라온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민텐도에서 개발한 다소 투박한 휴대용 겜보이에 비해 고급스러운 디자인을 채 택한 덕분인지 라온은 2~30대 유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보통 라온을 즐기는 유저들은 혼자 있을 때는 파이널 프론티어를 즐기고, 밖에서는 친구들과 스파2나 슬램덩크를 즐겼는데, 단판 승부인 스파에 비해 슬램덩크가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스포츠에서 만 느낄 수 있는 짜릿한 역전의 순간에 매료된 유저들 덕분에 슬램덩크는 만화연재와 더불어 엄청난 인기를 얻어내고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현재까지 연재 된 스토리가 카이난(해남)전까지였기 때문에 만화책에 등장하는 고교는 쇼호쿠(북산), 료난(능남), 쇼요(상양), 카이난(해남) 이 4개뿐이었다. 아무래도 등장 팀이 너무 적다는 생각에 오리지널 팀 2개를 넣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 & “아!! 뺏겼다~!!” 조그만 카페 안에 유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재빨리 볼을 스틸한 나는 속공으로 달려 텅 빈 골대에 풋내기 슛을 시전 했다. 하지만... 태액!!! “꺄하하~ 만화랑 똑같아~” 사쿠라기(강백호)의 슛 능력치를 너무 적게 주었나? 어떻게 노마크 상황에서 저게 안 들어가지? 쇼호쿠(북산) VS 쇼요(상양) 슬램덩크를 좋아하는 유키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후지마 켄지. (김수겸) 선수 겸 감독까지 수행하는 꽃미남 플레이어로 유명하다. 쇼호쿠와의 경기에서 패배하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울컥해서 펑펑 울었다던데, 외모뿐만 아니라 경기 흐름을 파악하는 센스와 현란한 드리블. 그리고 슛 감각까지 다재다능한 천재 플레이어로 등장한 횟수는 짧지만, 임팩트가 강한 캐릭터였다. 유키는 내가 실패한 볼을 재빨리 주워 역습을 시도했다. 농구의 룰을 슬램덩크로 배웠다는 그녀는 회사로 오가는 전철 안에서도 곧 잘 플레이 하곤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열심히 게임을 플레이하는 도중 눈앞에 데이터 케이블이 쑥하고 들어와 고개를 들어보니 웬 모르는 남자가 유키 앞에 서있었다고 한다. “며칠 전부터 출근길에 쭈욱 지켜봤는데, 슬램 덩크... 좋아하세요?”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결국 차마 거절하지 못한 유키는 그 남자와 한 경기를 플레이 했다고 한다. 게임이 끝나고 연락처를 물어 오길래 거절하고 후다닥 출근했다고 하는데, 그 분이 같은 방송국에 일하는 직원이었다나? “아~ 졌다. 치사해. 좀 봐주지...” 유키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카페 테이블에 늘어지며 칭얼거렸다. 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라온의 전원 버튼을 내리며 유키를 향해 피식 웃어 보였다. “악!! 방금 피식 거렸어. 더 열 받아.” “그래도 지난 번 보단 훨씬 잘 하는데?” “준혁씨를 이길 때까지 연습하려구요.” “그건 좀 어려울 걸?” “두고 봐요.” 유키는 이를 앙다문 채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조그맣게 미소 지었다. “준혁씨 덕분에 세상이 많이 바뀐 거 같아요.” “음? 그게 무슨 소리야?” “주위를 둘러봐요. 우리뿐만 아니고 어느 테이블이고 라온을 즐기고 있잖아요. 준혁씨야 차를 타고 다녀서 잘 모르겠지만, 전철은 더 심해요. 통학중인 학생들은 아예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서 게임을 즐기는데, 가끔은 보기 민망할 정도라니까요.” “안 그래도 전에 뉴스에서 본적이 있어. 데이터 케이블 때문에 대중교통 안이 혼잡할 지경이라고..” 그렇다고 현재 시기에 무선 통신 기술은 단가도 비쌀뿐더러 굉장히 불안정한 기술이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개발자 입장에서 좋든 나쁘든 이슈화 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긴 하지. 방금 유키의 말대로 여기 카페만 해도 라온을 즐기고 있는 커플들이 대부분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슬램덩크는 정말로 기가 막힌 한수가 아닐 수 없었다. 아무래도 스파2는 남자들을 위한 격투기 게임이란 인식이 강했으니, 애인과 같이 즐기려면 슬램덩크가 무난하긴 하지. “요즘 많이 바쁘죠? 드래곤 엠블렘 두 편에 사이킥 포스? 라는 게임도 제작 중이 잖아요.” “바쁘지만, 그래도 다들 잘 따라와 주고 있어서 즐겁게 작업하고 있어.” “저 역시 준혁씨가 만드는 게임의 팬으로서 기대하고 있어요~” “그렇게 말해주니, 은근히 어깨가 무거운데?” “에이, 그래도 잘 할 거면서~” 유키는 테이블에 놓인 쥬스를 한 모금 삼키곤 베시시 웃어보였다. 나와 그녀를 이어준 드래곤 엠블렘의 리메이크작은 이미 개발 완료가 되었기에 플래시 메모리 카트리지의 대량 생산만 끝내면 곧바로 투입될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현재 우리 팀이 열중하고 있는 작업은 아케이드용 게임인 ‘사이킥 포스’였다. 아니, 사실은 이마저도 거의 끝을 보이고 있는 작업이긴 했지만, 거의 끝까지 와서 뭔가 2%가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보류 상태에 놓여 있었다. 지난번 첸드라가 조정해주었던 전체적인 게임 스피드 때문은 아니다. 현재 사이킥 포스는 기존의 사이킥 배틀보다 게임 속도가 1.5배는 더 빨라졌기에 실로 어마어마한 하이 스피드 배틀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뭔가 하나 빼먹은 듯 한 느낌에 나와 모리타 그리고 하야시는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상태였다. 분명 이대로 기판을 만들어도 충분히 인기를 쓸 자신이 있긴 한데, 뭔가 임팩트가 부족하다고 할까? 그때 유키가 나에게 물었다. “근데, 준혁씨. 슬램덩크는 2인용만 플레이가 가능한가요?” “응? 어.. 맞아.” “아, 그렇구나. 혹시나 데이터 케이블을 확장하면 5명이서 한 팀이 되어 경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물어봤어요.” 그 순간. 내 머릿속에 한줄기의 섬광이 내비치는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머리가 맑아지며 자욱한 안개 숲속에서 드디어 빠져 나갈 길을 찾아낸 느낌. “5명이 한 팀이라..” “음? 갑자기 왜 그래요. 준혁씨?” “아냐. 덕분에 굉장히 좋은 생각이 떠올랐거든~” “으휴.. 또 게임 아이디어 생각했죠!?” “미안..” “으이구, 쉴 때는 그냥 푹 쉬어요. 안 그래도 라온 때문에 몇 달 동안 정신없었으면서..” “응. 그럴게.” “아~ 맞다. 저도 좋은 소식이 하나 있어요.” “뭔데?” “준혁씨는 비밀을 좋아하니까. 저도 비밀로 할래요. 집에 돌아가면 자정에 저희 방송국 채널을 돌려보세요.” “음? 뭔가 새로운 프로그램이라도 맡은 거야?” “흐흥~ 글쎄요~” 유키는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 그 날 밤. 유키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오는 길에 나는 모리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라? 부장님. 어쩐 일이세요?” “모리타 지금 잠깐 만날 수 있을까?” “네? 지금요?” “그 동안 사이킥 포스에서 부족했던 점이 무엇인지 깨달았거든.” < EP. 23 : 라온 출격 (4) > 끝 < EP. 24 : 동전을 집어 삼키는 귀신 (1) > & 일단은 집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택시를 불러 펜타곤 소프트의 숙소 근처에 도착한 나는 편의점 앞에 설치된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그렇게나 무더웠던 여름 날씨도 한풀 꺾여 이젠 제법 가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밤공기가 굉장히 기분이 좋게 느껴졌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캔 맥주를 먼저 마실까 말까, 고민하던 중에 모리타와 하야시가 함께 숙소에서 나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부장님.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냐.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쉬는데 갑자기 불러내서.” 최대한 상냥한 미소를 유지하며 모리타와 하야시에게 캔 맥주를 건네자, 눈치 빠른 하야시가 미심적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부장님 또 무슨 어마어마한 일을 벌이시려고 이렇게 친절하세요?” “아, 눈치 챘어? 역시 하야시는 눈치가 빠르네..” “부장님이랑 저희가 어디 하루 이틀입니까, ‘내가 없는 거리’ 때도 갑자기 불러내시더니 뜬금없이 히로인 별로 시나리오 만든다고 작업량을 3배로 늘리셨잖아요.” 하야시의 일침에 나는 괜스레 가슴이 뜨끔했다. 모리타는 아까부터 뭐가 그리 즐거운지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부장님이 이렇게 불러내실 땐 재밌는 아이디어가 있으신 게 분명하니 저는 기대가 됩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하야시가 모리타를 노려보았다. “그 아이디어 때문에 매번 죽어나는 게 나거든?” “투덜거리면서도 어차피 다 할 거면서 엄살은...” “어쭈? 내가 요새 좀 덜 까칠하게 굴었더니, 네가 아주 기가 살았구나?” 한솥밥 먹은 지 3년이 지나니, 둘 다 성격이 조금씩 닮아간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이번엔 대체 어떤 기획을 짜신 겁니까?” 손에 들린 캔 맥주의 뚜껑을 젖히며 하야시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맥주 한 모금을 더 삼킨 뒤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모리타와 하야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지난번 회의 때 한번 이야기 했었지? 사이킥 포스의 배틀 시스템은 거의 완벽한데,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든다고 했었지?” “그렇죠. 스피드를 더 올려보기도 하고, 반대로 낮춰보기도 하고, 탄막 궤도까지 다 수정해 봤는데, 영~각이 안 나오더라구요. 분명히 대전 요소는 확실한데, 스파2 처럼 직접 붙어서 싸우는 게 아니다보니, 멀리서 장풍만 쏘아대는 게임이 되 버린것 같기도 하고,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뭔가가 부족해요.” “근접전 타격의 변수가 부족하지.” “맞아요.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이렇게 한 번 만들어 보면 어떨까?” 내 말에 하야시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켜보였다. “어.. 어떤 식으로?” “꿈의 8인 배틀.” “히이이익!!!” “우와아~~” 역시 예상대로 캐릭터를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와 그 꿈을 실현 시키는 프로그래머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 “그거 정말 멋진 생각인데요? 일대일 대전만으로도 정신없는데, 8인 배틀이라니 진짜 어마어마 할거 같습니다.” “자.. 잠깐 만요. 부장님. 제가 보기엔 3~4명 배틀. 아니 솔직히 그것도 어려운데, 8인이라뇨? 굳이 기기를 8대나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게임 센터에서도 너무 많은 기기를 사용하면 반가워하지 않을 것 같은데..” “흐음. 하야시. 혹시 WWF 보나?” “헐크호건이나 워리어가 나오는 미국 프로 레슬링 말입니까?” “맞아. 지난 88년도부터 로얄 럼블이라는 이벤트가 열렸는데, 30명의 레슬러들이 순서대로 링에 올라가 마지막에 링 위에 선 자가 승리하는 룰이지.” “어차피 그거 짜고 치는 연출 아닙니까? 전 헐크랑 워리어가 맞을수록 더 강해지는 지 이해가 안 되는데요?” 그러자 조용히 하야시의 말을 듣고 있던 모리타가 흥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 연출 아냐!! 실제 격투기라고!!” “지랄. 실제 격투기 선수가 다잡은 적을 눈앞에 두고 관중석을 향해 옷을 왜 찢냐? 그리고 뭔 다 죽어가던 녀석은 카운트만 외치면 손을 번쩍번쩍 들어? 그게 말이 되냐?” “격투가의 퍼포먼스와 투혼이지!!” “…….” 나는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자, 그 쯤에서 그들을 제지시켰다. “지금 로얄 럼블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냐 아니냐. 그걸 이야기 하자는 게 아니라, 사이킥 포스 역시 로얄 럼블처럼 8대의 기기에서 게이머들이 끝도 없이 도전에 올 거라는 이야기야. 한명의 승자가 오랫동안 기기를 지킬 확률이 희박하고, 누구든지 바로 대전에 참여 할 수 있으니 동전 회전률이 기가 막히겠지. 결론은 게임 센터 사장이라면 두 손 들고 반길 기판이라 이거야.” 모리타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운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8대의 기기에서 플레이어들이 곧바로 대전에 참가한다. 그거 진짜 엄청난데요?” “그러기 위해선 지금보다 맵의 구성이 더 커져야 해.” “자.. 잠깐 만요. 부장님. 지금 8명의 캐릭터가 싸우게 되면 카메라 앵글은요? 거기다 탄막에 대한 궤도도 수정해야하고...” “일단 캐릭터가 늘어난 만큼 탄막 수 조정을 다시 해야겠지.” 내가 입만 열면 늘어나는 무시무시한 작업량에 하야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릴 때 쯤. 나는 다 마신 캔 맥주를 살짝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손목시계를 바라보니 어느새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유키가 자정에 방송을 보라고 했으니 이제 슬슬 들어가 봐야겠는데? “자~ 그럼 오늘은 이만 늦었으니, 내일 출근하면 대책을 마련해 보자.” “네. 저도 일단 들어가서 뭐부터 수정해야 할지 생각을 좀 해봐야겠네요.” “부장님. 택시 불러 드릴까요?” “응, 부탁 좀 할게. 모리타.” “네. 알겠습니다.” 모리타와 하야시가 숙소로 돌아간 뒤, 10분쯤 지났을까? 나는 편의점 앞에 멈춰선 택시에 올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너무 즉흥적으로 생각을 한 게 아닐까 망설여졌지만, 8인 대전이라는 컨셉을 떠올린 순간. 내 머릿속에 ‘사이킥 포스’에 대한 모든 구도가 퍼즐처럼 정확히 맞아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케이드 시장은 가정용 콘솔 시장과는 달리 기기를 들여와 수익을 얻는 구조이기에 오직 단 하나의 게임을 위해 만들어지는 아케이드용 기판은 제작 단가 만해도 굉장히 가격이 비쌌다. ‘지금 시기에 대 난투 형식의 배틀 방식이 과연 통할까?’ 의문이 들었지만, 왠지 실패할 거라는 예감은 들지 않았다. 동시에 8대를 전부 구매하는 게임센터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8인 대전의 틀을 만들어 두면 업주들이 알아서 2세트든, 4세트든 자유롭게 구매하게 두면 되는 것이다. ‘일단 아케이드 시장은 지금부터 10년 동안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릴 테니. 제대로 안착만 한다면 큰돈이 될 것이 틀림없다.’ 거기다 잘하면, 대전 액션물에 한 축을 세울 수도 있을 테고... 잠시 후. 집으로 돌아온 나는 뜨거운 물로 샤워 후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거실에 나왔다. “아, 벌써 자정이네..” 나름 최신식 브라운관 TV를 향해 리모콘으로 전원 버튼을 누르자, 서서히 TV 화면이 밝아졌다. “후지 티비가 몇 번이더라..” 채널을 돌려가며 방송을 확인하던 중. 오른쪽 위에 후지 티비의 로고를 확인 한 나는 리모콘을 내려두고 거실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맨션에 들어오기 전 건물 밑에 있는 편의점에서 캔 맥주를 몇 개 더 사온 나는 티비를 바라보며 캔 맥주를 입에 대었다. -오늘은 어디가요? 오나카 스이타(배가 고프다) 상.- “푸웁!! 컥!! 켈룩, 켈룩..” 슈트 차림의 중년의 남자가 허기진 표정으로 배를 움켜쥐고 있는 모습에 마시고 있던 맥주를 뿜어낸 나는 황급히 전화기를 들어 유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수화기 너머로 곧장 유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준혁씨 TV 봤어요? 킥킥” “아, 진짜 놀랐어. 내가 알려준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 쓴거야?” “네. 가명 치곤 너무 웃겨서.. 그대로 밀어부쳤어요. 방송국 PD님들도 좋아하시던데요? 센스가 좋다고 칭찬 받았어요.” “그... 그래?” 방송국에도 취향이 이상한 사람들이 있나보군. “총 12편으로 기획한 드라마인데, 보다보면 준혁씨랑 들렀던 음식점들도 몇 군데 등장할 거예요.” “그래? 몇 편인데?” “그건 비밀~ 일주일에 한편씩 방송될 예정이니 매주 기대해주세요~” 약간은 졸린 듯한 유키의 달콤한 목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혔다. 보통 10시면 잠자리에 드는 그녀인데, 아무래도 본인이 기획한 심야 드라마의 첫 방송 날이라 그런지 무리하는 모양이었다. “축하해. 그런데 언제부터 촬영이 들어갔던 거야? 미리 말 좀 해주지. 스탭분들에게 사식이라도 넣어 줬을 텐데..” “어이구~ 제 남자친구 부자라고 공개방송 할 일 있어요?” “뭐하면 익명으로 보내 줄 수도 있는데?” “됐네요~ 촬영은 지난여름부터 시작했는데, 그때는 준혁씨도 라온 출시로 바빴으니까. 일부러 말 안했어요.” 유키는 이런 면에서 참 속이 깊은 아이다. 나와 함께 기획했던 드라마가 정식으로 촬영해 들어갔을 때, 얼마나 설레었을까? 분명 나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고 싶어 안달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바쁜 시기에 입을 꾹 다문 채 묵묵히 방송이 시작되는 오늘까지 참아준 그녀가 참 기특하게 느껴졌다. 그때 유키가 나에게 물었다. “준혁씨. 혼자 잠들면 외롭지 않아요?” “음... 글쎄, 외롭다기보다는 그냥 조금 허전하다고 해야 할까? 역시 혼자 살기엔 집이 너무 큰 것 같아.” “그러게 제가 뭐랬어요. 준혁씨네 집은 혼자 살기엔 너무 크다니까..” 나는 잠시 동안 아무 대답 없이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그럼, 네가 들어와서 같이 살래?” “…….” 맥주를 너무 마신 탓일까? 갑자기 얼굴이 너무 뜨겁다. 역시 프로포즈라고 하기 엔 너무 형편없었지? 유키도 어이가 없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기, 무슨 말이라도...” “…….” “노, 농담이야. 화났어?” “쿠우... 쿠우...” “응?” 자, 자는 거냐... 매일 규칙 적인 생활을 하는 유키에게 자정을 넘긴 시각은 아무래도 무리였나?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수화기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마침 TV에서는 중년의 오나카 스이타 상이 배를 움켜쥐며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배가... 고파졌다. 서둘러 가게를 찾아야겠어.” 나는 소파에 기대어 맥주와 함께 오랜만에 먹방 드라마를 시청했다. ‘이거 괜히 나도 배가 고프네... 컵라면을 사다둔 게 남았나?’ &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하니 사무실에는 온통 ‘오늘은 어디가요? 오나카 스이타상’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와~ 어제 야키토리(닭꼬치) 보는데 진짜 먹고 싶더라. 참다 참다가 결국 새벽에 튀어 나와서 근처 호프집에 갔더니, 세상에 맨날 남아 있던 야키토리가 다 팔렸데. 드라마 보고 손님들이 엄청 몰려 왔다나?” “저도요. 어제 드라마 끝나자마자 달려 나갔더니, 야키토리 집에 사람이 꽉찼더라구요. 결국 포장해 와서 집에서 캔맥주랑 마셨지요~” “아~ 진짜 재밌더라. 진짜 사람 배고픈 시간대에 악마 같은 방송이야.” 나는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대화에 피식 웃음을 삼키며 제 2 개발팀의 문을 열어 젖혔다. “다들 좋..은 아침...?” 언제나 밝게 웃으며 내 인사를 받아주었던 개발팀 식구들의 표정에 살짝 살기가 내비친 것은 기분 탓일까? 그때 화이트 보드 앞에 서있던 하야시가 나에게 말했다. “일단 어제 부장님 들은 내용을 간단히 전달해주었습니다.” “수고했어. 따로 설명할 일은 줄었네.” “부장님. 어제 집에 들어가 잘 생각을 해봤는데, 사이킥 포스는 현재 개발 진행이 80%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굳이 여기서 8인 대전 룰을 추가할 필요가 있을까요? 차라리 차기작에 8인 대전 요소를 추가하는 게 어떨지...” 하야시의 대답도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물론. 그것도 좋은 생각이긴 한데, 그럼 8인 대전 사이킥 포스는 내 후년에 나와야 되겠지. 아케이드 게임에도 상도덕이 있는데, 2인 대전 사이킥 포스를 내고 몇 개월 뒤에 8인 대전 모드만 넣으면 게임 센터에서 좋아할까?” “그렇긴 하지만, 이 상태에서 8인 대전 모드를 넣게 되면 추가해야할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분명 엄청난 버그가 발생할 거예요. 그걸 수정하는 것만 해도 1년은 족히 걸릴 겁니다.” “그래. 맞아.” 하야시는 내가 너무 순순히 자신의 말에 응하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출시를 연기 하자는 말씀이세요?” “아니. 그럴수는 없지.” “그럼 무슨 방법이라도...?” 나는 잠시 제 2 개발실에 앉아 있는 직원들을 향해 잠시 목을 가다듬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하야시 팀장 말대로 지금 상황에서 8인 대전 모드를 넣게 되면 버그 수정으로 개발 기간이 끝도 없이 늘어나겠지. 하지만.” 나는 잠시 한 박자 쉬며 직원들의 얼굴을 살핀 뒤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새로 만들면 3개월 안에 만들 수 있다.” “히이익!!!” < EP. 24 : 동전을 집어 삼키는 귀신 (1) > 끝 < EP. 24 : 동전을 집어 삼키는 귀신 (2) > & 그 날. 우리는 개발 진척도 80%에 달하는 사이킥 포스의 코딩 작업을 전부 갈아엎어 버렸다. 하야시는 농담조로 부장님께서 ‘밥상 뒤집기’ 스킬을 시전 했다며 일전에 ‘내가 없는 거리’ 때 자신이 당한 사례를 직원들에게 설명하자, 개발 인력들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마 그날부터였나? 업계에서 나에 대해 ‘펜타곤의 하얀 악마’ 라는 별명이 생겨난 게... 하지만 하야시를 비롯한 제 2 개발팀 직원들은 나의 선택이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프로그램의 코딩이라는 것이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 마냥 옆구리부터 쑤셔 넣는 다고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을 테니까.. 오히려 코딩보다 더 짜증나는 것은 버그를 잡아내는 ‘디버깅’ 작업이다. 이미 80% 진행도를 거쳐 얽히고설킨 플래그와 판정 사이에서 새로운 시스템을 집어넣으면 당연히 버그가 발생한다. 그리고 그 버그 하나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쇄적으로 발생하기에 차라리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것이 도리어 속 편할 수도 있었다. 이미 캐릭터의 이미지는 전부 나온 상태였기에 나와 하야시를 비롯한 프로그래머들은 한 번 갈아엎어 본 경험을 바탕으로 미친 듯이 작업에 몰두 했다. 펜타곤 소프트에서 프로그래밍 실력이라면 손에 꼽을 만한 나와 하야시가 직접 진두지휘를 시작하자, 잠시 혼이 나가있던 직원들의 사기가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이왕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 거 보다 더 완벽을 추구하고 싶었던 나는 모리타와 상의하여 거대 보스급 캐릭터를 만들 것을 지시했다. 캐릭터와의 전투 중 갑작스레 등장하는 이 녀석은 서로간의 배틀에 집중하던 플레이어들에게 하나의 거대한 적을 던져주어 변수를 발생시키는 역할을 주도했다. 거대보스를 깨부수고 나면 능력을 향상 시켜주는 특정 아이템이 스테이지 곳곳에 퍼져 나가는데, 이때 플레이어들은 각지에 퍼진 아이템을 습득하기 위해 게거품 물고 달려들 것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 1991년 11월 21일. 목요일. 선선한 공기가 기분 좋게 느껴지는 늦가을의 어느 날. 아침 일찍 찾은 아키하바라는 기대와 설레임을 잔뜩 품은 표정을 짓고 있는 유저들이 몰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올 가을 유저들이 가장 기대 중인 두개의 타이틀이 동시 발매 되는 날이기 때문이지. 하나는 휴대용 라온으로 출시한 4번째 타이틀 드래곤 엠블렘의 리메이크 판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민텐도의 슈퍼 솔져. 쿠마모토 시게루씨의 ‘카린의 전설. 신들의 트라이포스’가 출시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전설의 슈퍼 마리지 시리즈와 동킹콤 시리즈. 그리고 카린의 전설을 만들어낸 그는 명확하게 따지면 아버지 빽으로 민텐도에 입사한 낙하산 직원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카마우치 사장의 친분 덕에 입사했다고 들었는데, 낙하산을 타고 들어온 직원 하나가 회사를 먹여 살리는 슈퍼 솔져 일 줄이야...) 카린의 전설은 패밀리 때 두 작품을 거쳐 차세대 콘솔로 세 번째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1이나 2 같은 넘버링을 포기하고 ‘신들의 트라이포스’라는 부제를 선정해 전작과 아무 연관성이 없는 신작으로 발매하였다. 현재 TV를 사용하는 거치기 콘솔의 1인자는 당연히 민텐도의 슈퍼 패밀리였다. 지난 여름 라온의 등장으로 잠시 주춤하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패밀리 때부터 쌓아온 두터운 팬심으로 여전히 모든 콘솔 기기 중 가장 높은 보급률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보급률을 받쳐주는 거대한 기둥 중에 펜타곤 소프트의 ‘내가 없는 거리’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민텐도와 저작권을 놓고 벌인 길고 지루했던 법적 공방은 펜타곤이 지적 저작권을 모두 가져가는 것으로 최종 결론이 났다. 내가 민텐도에서 7년 동안 이뤄낸 공적과 더불어 ‘내가 없는 거리’가 슈퍼 패밀리의 판매를 이끌어낸 수익성을 고려해 민텐도 측에서 너무 억지 조건을 내밀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카마우치 사장은 법원의 판결에 매우 불쾌한 심정을 토로했지만, 공방이 길어질 수록 민텐도의 이미지에도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했기에 더 이상의 추가 항소는 없었다. 현재 민텐도는 캡코와 스트리트 파이어2에 대한 라이센스 계약만으로 정신이 없을 테니까. 라온이 NEGA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고 비웃었던 카마우치 사장은 런칭과 동시에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16비트 휴대용 게임기의 위력에 질겁했다. 그리고 그 원인이 바로 스파2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뒤늦게 캡코와 로열티를 조율 중이었다. 하지만 기본 카트리지의 단가 덕분에 생각보다 쉽게 일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현재 슈퍼 패밀리의 성능은 미묘한 차이로 라온보다 조금 낮은 상태이다. 사실 이 정도 차이라면 스트리트 파이어2를 이식하는데 큰 무리가 없을게 분명 했지만, 문제는 개발 툴이었다. 하드웨어 단가를 고려해 쥐어 짜내듯이 만들어낸 슈퍼 패밀리는 개발자 입장에서 보기에는 최악의 기기임에 틀림없었다. 그래픽의 표현 능력은 좋은데, 상대적으로 메모리가 부족하다거나.. NEGA의 소니크처럼 스피디한 감각을 살린 게임을 만들고 싶은데, CPU의 연산 능력이 부족하다. 어떤 부분에서는 도리어 패밀리보다 못한 성능을 보여줄 때도 있어 슈퍼 패밀리로 게임 하나는 만드는데 상당히 골치 아픈 요소로 작용했다. 하지만 제작사들이 그런 걸로 또 불평할 수가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쿠마모토 시게루의 게임들이었다. 도저히 같은 콘솔로 만들어냈다고 보기 힘든 그의 작품들은 하나 같이 콘솔이 가지고 있는 본래 성능을 120% 끌어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민텐도에서 퍼스트 파티만을 위한 여분의 메모리 코드 쓰고 있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지만, 결국 모두 헛소문으로 결론이 났다. 그런 그가 심혈을 기울여 2년 동안 제작한 카린의 전설 신작은 발매 전부터 유저들에게 엄청난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나 패밀리 시절 카린의 전설은 북미 시장에서도 꽤나 잘 먹힌 타이틀이었기에 민텐도에서도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일본의 대표 RPG인 드래곤 워리어 시리즈가 북미 시장에선 흥행 참패를 기록했던 시기였기에 카린의 전설 신작은 더욱 가치 있는 타이틀이라 볼 수 있었다. ‘겁나 재밌긴 하지. 이후 카린의 전설의 교과서 적인 작품이니까.’ 던전의 퍼즐을 풀 때마다 울리는 효과음이 그렇게 기분 좋게 느껴지는 게임도 드무니까. 카린의 전설이 평범한 액션 RPG에서 벗어 날 수 있었던 것은 기가 막힌 벨런스를 자랑하는 던전들의 레벨 디자인이다. 수많은 아이템들은 어느 하나 버릴게 없을 만큼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었고, 그것들을 이용해 퍼즐을 풀 때마다 플레이어는 일종의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나 역시 후에 그가 만든 ‘카린의 전설 몽환의 모래시계’라는 게임을 플레이 하던 도중 상하로 나 뉘어진 스크린에서 위에 있는 그림을 아래로 베끼라는 말에 별짓을 다하다가 포기하고 경첩을 닫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뭔가 분이 풀리지 않아 다시 도전하기 위해 뚜껑을 열었을 때. 상단에 있는 그림이 하단의 스크린에 옮겨져 있었다. 즉 게임기 자체를 열었다 닫는 행위조차 게임 플레이의 한 방법으로 써먹었다는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천재다. 이 사람.’ 그 때 내 머릿속에는 온통 이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랬던 내가 도리어 그에게 천재 소리를 듣고, 지금은 그가 만든 게임과 정면 대결을 준비하고 있다니. 참..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타마고 샵 바깥으로 길게 늘어선 구매 행렬을 바라보았다. 펜타곤 소프트는 현재 어느 회사보다 유저들에게 팬심이 두터운 회사로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오늘 드래곤 엠블렘 리메이크가 처음 발표되는 이 자리에 특별 게스트를 초대했다. 그들이 누구냐고? 바로 지난 86년 패미통신에서 주최한 ‘드래곤 엠블렘 토벌대’에 참가한 인원 중 최후의 10인들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물론 유키도 포함되어 있었다. “와아~ 밖에 사람들이 엄청나네요?” “최근에 유저들에게 반응이 좋은 게임은 첫날에 1차 수량이 모두 동이나 버리거든. 초 인기작 같은 경우엔 거의 3차 수량까지는 완판이 되고 나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으니까. 조금이라도 빨리 플레이하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거지.” “그래도 평일인데, 이정도로 사람이 몰리다니..” “주말이면 더 심하니까 일부러 평일로 잡고 있는데, 저녁에 퇴근하고 오는 사람들도 꽤 많아. 물론 그때까지 물건이 남아 있을 확률이 희박하긴 하지만...” “진짜 열의가 대단한 거 같아요.” 그때 뒤에서 나를 부르는 미야자키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장님. 준비 다 됐어요.” “특별 게스트들은요?” “전부 대기실에 모여 계십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먼저 잠깐 인사 좀 나눠야겠네요.” 유키와 함께 대기실 문을 열자, 다소 긴장된 표정의 유저 9명이 살짝 엉덩이를 떼어 나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여러분.” 그러자 다들 반가운 표정으로 나에게 인사를 걸어왔다. 단 한사람만 제외하고는.. 팔짱을 낀 채 소파 끝에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사람은 드래곤 엠블렘 행사 때 마왕을 쓰러 뜨린 후 특별 이벤트인 마신의 출현과 함께 캐릭터를 전부 잃는 이벤트를 최초로 겪은 플레이어였다.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바탕으로 나머지 유저들은 멀리서 원거리 사격으로 마왕을 쓰러뜨리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 날 성적이 가장 우수한 플레이어였기에 나도 참 안타까웠는데, 그 역시 아직까지 그날의 분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또 부르니 이렇게 참석한 것은 무슨 심보람?’ 나는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최대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행사 진행의 식순에 대해 설명했다. “사실 게임 개발자로서 당시 행사에 참여해 게임을 클리어 한 것에 대해 여러분께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사죄의 의미를 담아 여기 계신 9분께 드래곤 엠블렘의 로고가 박힌 특별 한정판 라온과 함께 드래곤 엠블렘이 담긴 플래시 메모리 카트리지를 지급해 드릴 예정입니다.” “오.. 오오오!!!!!”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유저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500대 한정 생산된 드래곤 엠블렘의 로고가 박힌 라온은 기존의 블랙 색상과는 달리 화이트 색상에 뒷면에 블랙 드래곤의 문장이 박혀 있는 진짜 한정판이었다. 거기다 플래시 메모리에 담긴 드래곤 엠블렘 카트리지까지 포함 되면 한 사람당 도합 5만엔 가량의 선물을 얻는 셈이었다. “크흐~ 그냥 넘어가도 될 텐데,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시다니..” “드래곤 엠블렘은 제 인생 최고의 게임입니다. 그저 그 행사에 참여해 유저들과 함께 엔딩을 보며 환호한 것만으로도 좋은 추억으로 남았으니까요.” “감사합니다. 이번에 새로 제작된 리메이크 판도 재밌게 즐겨 주세요.” 그러자 맨 끝에 팔짱을 끼고 있던 유저도 다소 기분이 풀렸는지 입꼬리를 실룩 거리고 있었다. 나는 화기애애하게 물들어 가는 대기실 분위기를 잠시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대신 여러분들께서 한 가지 해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음? 뭔가요?” “다음 달 말에 아케이드용으로 발매 되는 ‘사이킥 포스’의 시연을 좀 부탁드릴까 하는데요.” “어억!! 사이킥 포스!!” “합니다!! 무조건 할게요!! 오히려 영광입니다!!” 대기실에 모인 사람들은 다들 펜타곤 소프트 게임의 열렬한 팬을 자청하며 너도 나도 시연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들을 진정 시킨 뒤 입을 열었다. “걱정 마세요. 사이킥 포스의 시연은 동시에 8분이 진행할 겁니다.” “8명?” “네. 사이킥 포스는 세계 최초의 8인용 배틀 게임이거든요.” “허억!!” 두 눈을 휘둥그레 떠 보이는 유저들의 반응에 유키가 쿡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저도 시연에 참가할 테니, 다 같이 함께 즐겨요.” “우오오오!!!!” < EP. 24 : 동전을 집어 삼키는 귀신 (2) > 끝 < EP. 24 : 동전을 집어 삼키는 귀신 (3) > & 잠시 후. 행사장 오픈과 동시에 밖에서 대기 중이던 사람들이 물밀 듯이 달려왔다. “라온 드래곤 엠블렘 한정판 세트 주세요!!” “저도요!!” 플래시 메모리 카트리지 포함 49,800엔짜리 한정판이 오픈과 동시에 미친 듯이 팔려나갔다. 달랑 게임기 하나와 카트리지 하나치고 엄청나게 비싼 금액이지만, 사실 이 제품은 굉장히 싼 편이었다. 왜냐하면 드래곤 엠블렘이 들어있는 플래시 카트리지가 고용량 버전이기 때문이지.. 라온은 기기 가격만 29,800엔이다. 그리고 고용량 플래시 카트리지는 19,800엔. 둘이 합쳐 49,600엔이니 드래곤 엠블렘은 그냥 덤으로 들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드래곤 엠블렘 한정판 기기만이 가지고 있는 화이트 버전 덕분에 행사 개시 후 30분 만에 완판을 이루었다. “젠장!! 젠자앙~!! 9시부터 줄 서있었는데!!” 한끗 차이로 한정판을 손에 넣지 못한 유저가 작은 소란을 피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추가 수량은 있었지만, 그것은 혹시 모를 기기 불량에 대한 교환용이기에 함부로 판매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첫차를 타고 4시간 가까이 기다려 구매한 사람도 있었기에 뒤쪽이 소란스러워지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입맛을 다시며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한정판을 구매한 사람은 마치 세상을 다가진 표정으로 한정판용으로 따로 제작된 쇼핑백을 끌어안고 즐거워했다. “크흐~ 초회판 안사고 기다린 보람이 있구나~” “진짜 펜타곤이 장사 겁나 잘하네. 설마 기기를 드래곤 엠블렘 한정판으로 낼 줄이야.” “이미 라온을 가지고 있지만, 하.. 하나 더 사겠어.” “이러다가 나중에 드래곤 엠블렘 II 한정판 또 나오는 거 아냐?” “아.. 안 돼. 내 지갑이...” 어디선가 들려온 대화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알던 미래에서는 흔히 쓰는 마케팅 기법 중에 하나인데, 90년대 초반에도 이렇게 잘 먹혀들 줄이야. 확실히 인간의 소유욕이란 끝이 없는 법이지. 그때 어디선가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오늘 정말 사이킥 포스 시연 하는 거 맞나?” “그런 거 같은데? 언제 시작하지?” 드래곤 엠블렘의 판매 행사에서 사이킥 포스에 대한 정보를 미리 흘려 놓은 탓에 제품을 구매한 고객들도 집에 가지 않고 행사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 행사장에 사람들이 가득 차오르자, 나는 준비된 단상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오늘 드래곤 엠블렘을 구입하기 위해 찾아와주신 여러분들께 먼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그러자 내 등 뒤로 유키를 포함해 10명의 시연자들이 천천히 단상에 올라섰다.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제 뒤에 계신 분들은 지난 1986년 패미통신에서 주최한 드래곤 엠블렘 행사 때 최후까지 남아 계셨던 유저 분들입니다.” “와~ 그게 벌써 5년 전인가? 세월 빠르네..” “어? 저기 여자분 기억난다. 마지막 보스 전에서 패배했는데, 우승자가 저 분한 테 카트리지를 넘겨줬지.” “음? 진짜? 왜??” “나도 작년 말에 잡지를 통해서 봤는데, 글쎄 그때 우승자가 드래곤 엠블렘을 만든 개발자였거든. 지금 저기서 마이크 잡고 있는 사람.” “뭐야? 자기가 만들고 자기가 최초로 깬 거야?” “그 당시에 진짜 더럽게 어려웠거든. 카트리지 자체도 구하기 힘들었고, 오죽하면 행사 이름이 드래곤 엠블렘 토벌대였겠냐. 진짜 5년 전에 나온 게임이지만, 지금도 인기가 장난 아니지. 너 지금 드래곤 엠블렘 오리지널 카트리지 가격이 얼마에 거래 되는지 알아?” “얼만데?” “리메이크 출시랑 2 제작 소식까지 겹쳐서 시리즈를 모으는 콜렉터들 사이에서는 카트리지 상태에 따라 20만엔이 넘어간다나?” “허억... 내 한 달치 월급이잖아.” “그래도 없어서 못산다더라. 아무튼 그래서 저 개발자가 지난 행사 때의 사죄의 의미로 저 열 명의 사람들을 초대해서 직접 드래곤 엠블렘 한정판을 주기로 했데.” “우와~ 통 크네, 사실 이제와 딱히 뭐라 할 사람도 없을 텐데.” “원래는 민텐도 직원이었는데, 작년에 펜타곤으로 이직했다더라. 작년 말에 저사람 때문에 게임업계가 한번 발칵 뒤집혔었어.” “호오, 그렇구나.” 단상에 올라선 사람들에게 한 사람 한사람 악수를 청하며 쇼핑백을 건네주던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잠시 후. 마지막으로 대기실부터 팔짱을 낀 채 퉁명스럽게 반응하던 남자까지 사은품을 모두 지급한 나는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이렇게 5년전 드래곤 엠블렘의 행사에 참여해 주셨던 유저 분들과 함께 행사를 진행하게 되어 참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5년 전 드래곤 엠블렘 토벌대에 참여 하셨던 유저 분들이 계시다면 손 한번 들어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행사장 안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3분의 1 가까이 되는 사람들의 손이 번쩍 들렸다. 그들 중에는 혹시나 자기도 드래곤 엠블렘을 받을 수 있을지 기대에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도 있었다. “감사합니다. 꽤 많은 분들이 드래곤 엠블렘 리메이크를 기다려 주신 것 같아. 개발자로서 참 뿌듯하네요. 그런 여러분들을 위해 이 자리에 특별 게스트 한 분을 모셨습니다.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당시 사회를 보았던 월간 패미통신의 리뷰기자. 이시모토 준페이씨를 소개합니다~” “우오~ 준페이씨다!!” 나의 소개와 함께 언제나처럼 야구 모자를 눌러쓴 준페이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단상에 올라와 유저들을 향해 기운차게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패미통신의 이시모토 준페이 입니다!!!” “우와아아아~~” 준페이 녀석은 꽤나 오랫동안 게임 기자 노릇을 해 와서 그런지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꽤나 유명인에 속해 있었다. 나를 통해 꽤나 펜타곤의 신선한 정보들만 족족히 물어다 기사를 쓰니 인지도가 오를 만도 하지... 나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준페이에게 마이크를 넘겨주며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괜히 게임 개발에 관련된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아줘.” “당연하지~” 준페이는 내가 건네는 마이크를 뺏어 들다시피 가로채가더니 회장을 향해 소리치며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시작했다. “여러분 저 자식이 우리에게 카트리나와 미레아 둘 중에 하나를 희생 시키라 강요했던 희대의 악마입니다~!!” “우와아아~~~”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이킥 배틀 때 그 잔인했던 난이도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 내보세요~!! 저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우와아아아~~” “그러더니 내가 없는 거리에선 순진한 여러분의 눈에서 폭포수 같이 눈물을 쏟아내게 만들었던 개발자입니다~!!” “옳소!!!” 역시 분위기 띄우는데는 도가 텄구나. 나는 미소와 함게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준페이는 자신을 향해 열광하는 사람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웃으며 입을 떼었다. “그런 사람이 제 가장 친한 친구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녀석의 말 한마디에 뒤에 서있던 내 가슴을 찡하게 울렸다. “여러분이 이렇게 반응했다는 건 저 녀석이 만든 게임이 정말 즐거웠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래서 오히려 제 친구에게 감사합니다. 덕분에 정말로 새롭고 재밌는 경험을 해보았다고, 지금 것 수많은 게임을 플레이하며 기억에 남는 게임 다섯 가지를 고르라면 저는 단연코 드래곤 엠블렘과 내가 없는 거리를 꼽을 겁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꼽으라면...” 행사장에 모인 사람들은 준페이의 빨려 들어가는 듯 한 행사 진행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오늘 소개 시켜드릴 이 게임이 될 것 같습니다. 이곳에 모인 분들이라면 다들 알고 계실만한 작품. 바로 사이킥 배틀의 정신적(精神的) 후계작이라 소개된 바 있는 ‘사이킥 포스’입니다.” “우오오오오!!! 이걸 기다렸다!!” “크흐~ 라온 런칭 때 오프닝만 보여줘서 대체 어떤 게임일지 감조차 안 잡혔는데, 오늘에서야 실물을 보는 구나!!” 사실 정보를 공개하려던 찰나. 8인 배틀 아이디어로 인해 개발을 전부 갈아엎으면서 묘하게 신비주의 컨셉이 되어 버린 사이킥 포스는 그동안 일절 외부에 공개 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이 자리에 모인 유저들은 준페이의 소개에 뜨거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준페이 역시 자신을 따라와 주는 사람들의 열의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 갈 것이 있습니다.” “음? 뭐지?” “최초의 사이킥 포스 시연은 제 뒤에 서계신 열 분의 유저들이 함께 해주실 겁니다. 그럼 여기서 잠시 지난 드래곤 엠블렘 토벌대에서 안타깝게도 마지막 스테이지에서 무릎을 꿇고만 이시카와 유키씨와 간단한 인터뷰를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으잉!? 잠깐 저건 식순 예정에 없었잖아?’ 하지만 당황한 내가 말릴 새도 없이 내 옆에 서있던 유키가 준페이에게로 다가섰다. 그 순간 유키를 반기던 준페이가 살짝 나에게 윙크를 날리며 미소 지었다. 설마... 둘이 짰나? “안녕하세요. 드래곤 엠블렘 토벌대 행사에 참가했던 이시카와 유키라고 합니다.” “우오~!! 게임 좋아하는 여자라니~!! 거기다 귀여워!!” “남자의 취미를 이해해주는 여자라니.. 그런 생명체가 실존했단 말인가!?” “저 분이 그때 유저들중에 가장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이지? 대박...” “그런데, 분명히 처음 뵙는 분인데 목소리가 왜 이렇게 낯이 익지?” “그러게? 나도 그래.” 유키는 사람들의 반응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마이크를 꽉 잡고 있었다. “제 목소리가 익숙하다고 하시는 분들이 몇몇 계시네요. 그럼 이렇게 말씀 드리면 조금 더 확실히 알아들으실 수 있을까요?” 유키는 잠시 목을 가다듬은 후 조그마한 입술을 마이크에 가까이 대었다. “역시 전.. 아직도 그 사람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그러자 그렇게 떠들썩하던 행사장이 유키의 목소리에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우으아아아!!!! 하세가와 미유키다!!!” “진짜다!! 진짜가 나타났다!!” “맙소사 그럼 저 분이 내가 없는 거리 성우였어!?” “실제 목소리로 들었더니, 시.. 심장이 멎어 버리는 것만 같아..” “저 목소리는 심장에 해로운 목소리다.” 충격의 도가니에 빠진 행사장에서 유키와 준페이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어보였다. 저 것까진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거 한방 제대로 먹었는데? 유키는 나를 향해 보란 듯이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며 미소 지었다. “내가 없는 거리의 팬들에게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대사죠? 그런데 이시카와씨 이곳에 나와 하실 말씀이 있다고 들었는데 무엇인가요?” “아, 실은 얼마 전 사귀고 있는 남자 친구에게 프로포즈를 받았습니다.” ……. 자.. 잠깐 지금 유키가 뭐라고 한 거지? “오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시모토씨. 하지만 프로 포즈를 받고 나서 그 사람에게 너무 실망했어요.” “네? 아니 대체 어떻게 프로포즈를 했길래..” “글쎄, 중대한 프로포즈를 제 얼굴도 안보고 전화로 한 거 있죠?” 그와 동시에 행사장에 나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심하네..” “누구냐. 누가 감히!!” “하세가와.. 아니지 아무튼 유키씨!! 그 사람 말고 저랑 결혼해주세요!!” 유키는 잠시 사람들의 분위기가 가라 앉기를 기다린 뒤 다시 마이크에 대고 입술을 떼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프로포즈 받으려구요.” “그 말은 지금 남자친구 분이 이곳에 있다는 말입니까!?” 준페이는 다 알고 있으면서도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그게 누구 인지 물어 봐도 될까요?” “드래곤 엠블렘 행사 때 처음 만나 지금까지 제 곁에 함께 있어준 소중한 사람은... 뒤에 계시는 드래곤 엠블렘의 개발자 강준혁씨입니다.” “어억!!” “커헉!! 저 사람이 유키씨의 남자친구라고!?” “아 갑자기 환불받고 싶어진다.” “에라이~!! 젠장!! 내 돈도 여자도 다 가져가라~ 대신 죽을 때까지 게임을 내놓아라.” “부... 부러워..” “제기랄. 부러우면 지는 거야!! 부러워하지 마!!” 행사장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 꽂힌 가운데, 나는 잠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유키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때 잠자던 거 아녔어?” 그러자 그녀는 나를 향해 조그만 혀를 쏙 내밀며 대답했다. “아니거든요~ 너무 황당하게 고백해서 잠든 척 한 건데요~” “너, 진짜...” 그 순간 준페이가 잽싸게 마이크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그럼 여기서 제가 깜짝 이벤트를 하나 열겠습니다. 지금부터 시작될 사이킥 포스의 시연에서 준혁씨와 유키씨를 대전에 함께 참가시키도록 하죠.” “음? 함께? 저게 무슨 소리지? 같이 싸운다는 말인가?” 아직 사이킥 포스의 배틀 시스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유저들은 준페이의 설명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준페이는 그런 유저들의 반응에 피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사이킥 배틀은 전 세계 최초의 8인 배틀 시스템이니까요. 따라서 준혁씨와 유키씨를 포함해 8명의 플레이어가 함께 대전을 즐길 수 있습니다.” “우오오오!!!” “최초 배틀에 참가하지 못한 세 분과 저는 다른 플레이어가 사망시 교체 투입 되도록 하겠습니다.” “오오~ 대박!! 그럼 8명이서 쉴 새 없이 대전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힘내서 저 커플을 박살내주세요!!” “마음 깊이 응원합니다!!!” 준페이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함성에 응답했다. “물론입니다. 제가 솔로부대의 최전방에 서서 기필코 저 두 명을.. 처리하도록 하지요.” 그리고 잠시 후.. 얼떨결에 분위기에 휩쓸린 나는 사이킥 포스의 시연 모델 앞에 앉아 있었다. ‘뭐.. 뭐냐 이거..’ 그때 내 옆에 유키가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이렇게 개발자와 또 함께 플레이하게 되었네요. 그럼 이번에도 잘 부탁해요. 준혁씨.” < EP. 24 : 동전을 집어 삼키는 귀신 (3) > 끝 < EP. 24 : 동전을 집어 삼키는 귀신 (4) > & 어쩌다 내가 이 자리에 앉게 된 건지... 유키와 준페이 녀석 덕분에 사이킥 포스 시연이라기 보단 나라는 인간의 처형식이 된 거 같은데? 살짝 고개를 돌려 건너편을 바라보니, 방금 전까지 나와 화기애애하게 라온 한정판을 주고받던 시연자 들의 눈에 불꽃이 타올랐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대기실에서 사이킥 포스의 시스템을 파악한 그들은 어느새 한마음이 되어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거 완전 6:2 핸디캡 매치가 되어 버렸잖아? 나는 가볍게 레버를 몇 번 돌리며 심호흡을 하였다. 일단 테스트 플레이는 질리도록 해보았으니, 잠깐 연습해본 초심자들에게 질 수는 없지. 나는 묘한 긴장감 속에 살며시 웃으며 화면을 응시했다. “자~ 시연자들의 모든 준비가 끝난 가운데 드디어 최초의 8인 대전 게임 사이킥 포스의 중계가 시작 되겠습니다.” “우와아아~~!!” “빨리 좀 진행해주세요~ 현기증 납니다!!” 어느새 시연 기판 근처에 가득 모여 있는 사람들은 서로 엉기고 붙으며 고개를 쭉 내밀고 있었다. 그 순간 내 등 뒤에 설치된 카메라가 돌아가며 프로젝터에 화면을 쏘아주었다. 천장에 매달린 프로젝터 스크린에 게임 화면이 떠오르자,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위로 향했다. ‘완전 공개 처형이네...’ 내가 피식 웃음을 흘리자, 나를 지켜보던 준페이가 마이크를 통해 외쳤다. “아~ 강준혁 선수 여유 있는 미소를 보여줍니다. 마치 올 테면 와보라는 표정인데요~” “…….” 젠장 마음대로 웃지도 못하겠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자리에 앉은 8명의 플레이어가 동시에 스타트 버튼을 누르며 게임에 접속했다. ‘일단은 다들 어느 정도 시스템을 파악했겠지만, 대전 격투에 서툰 사람도 있을 테니까. 머릿수를 빨리 줄여야한다. 그렇다면 한방에 제대로 데미지를 넣을 수 있는 캐릭터가 필요한데..’ “아, 그러고 보니 제가 자세한 이벤트의 내용을 설명 드리지 못했네요. 뭐~ 방식은 간단합니다. 시연에 참가한 플레이어 중 이시카와씨나 강준혁씨의 캐릭터를 가장 먼저 처치하시는 분께 패미통신 1년 정기 구독권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오~~ 정기구독권. 하지만 펜타곤에 비하면 상품이 뭔가 좀 초라한데?” 유저들의 시큰둥한 반응에 준페이가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야, 뭐 줄 거 없냐?” “너 인마, 나를 이 꼴로 만들어 놓고 선물까지 뜯어가려고!?” “서비스라 생각해~ 기사 좋게 써줄게. 덕분에 일반 시연보다 분위기가 훨씬 달아올랐잖아.”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게거품물고 덤벼들게 해주지.’ 나는 잠시 상품에 대해 머리를 굴려 보다가 준페이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자 준페이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힐끔 상품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괘... 괜찮겠냐?” “물론. 내가 질 거 같냐?” “…….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널 꼭 없애줄 테니 그때까지 살아 있어다오..” “그래보시던가.” 준페이는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행사장 인원을 향해 소리쳤다. “자~ 방금 악마의 디렉터 준혁씨가 시연자들에게 새로운 선물을 제시했습니다. 그를 물리친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상품은 바로...!!!!” 사람들의 기대에 찬 눈이 일제히 그를 향하자, 준페이는 손가락으로 행사장 한쪽 구석에 있는 사이킥 포스의 디오라마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 안에서 원하는 캐릭터 피규어 하나를 가져갈 수 있습니다!!” “우와아아악!!!!!!!!!!” “아악!! 그런 게 어딨어. 저도 참가 시켜줘요!!!!” “저도요!! 저도 제발요~!!!” “으헝헝!! 부러워!! 라온 한정판도 부러워 죽겠는데, 개발자 죽이면 피규어 까지!!” 헐.. 그래도 죽인다는 표현은 듣기가 좀 그런데? 하지만 이것으로 나머지 6명의 어그로를 제대로 끌었겠지? 다시 한 번 벽에 걸린 거울을 이용해 반대편을 바라보니 다들 흥분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 상품은 정해졌습니다. 준혁씨를 물리친 플레이어는 사이킥 포스 피규어를 가져가고, 유키씨를 물리치는 플레이어는 패미통신의 정기 구독권을 가져가게 되었습니다.” “왠지. 시작부터 준혁씨만 노릴 거 같은데요?” “응. 그러라고 일부러 큰 거 건 거야.” 유키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캐릭터 선택 창에서 류화영을 닮은 캐릭터인 ‘휘린’을 선택했다. 그녀는 조작이 까다로워도 속성 탄을 이용해 가장 다양한 연계 스킬을 보유하고 있는 캐릭터 중에 하나였다. 유키는 8명의 캐릭터들 중에 체력이 가장 많은 근육질 남성을 선택했다. 오프닝 영상에서 붕괴되는 건물을 한 손으로 떠받칠 정도로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포텐킹’의 모습은 육중한 장갑차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유키가 은근히 마초 취향이었나?’ 잠시 후. 모든 이의 캐릭터 선택이 끝나자, 화면이 전환되며 휘린이 오토바이에 오르는 출격 영상이 흘렀다. 애니메이션을 이용해 탄탄한 그녀의 허벅지를 비추던 카메라 앵글은 이윽고 360도로 그녀의 주위를 비추자 화면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 나왔다. “이야.. 퀄리티 끝내주는데?” 이윽고 도심을 질주하던 휘린을 향해 어딘가에서 붉은 레이저가 날아오자, 그녀는 오토바이를 박차고 뛰어 올라 대로변의 가로등을 박차고 하늘로 뛰어 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정말 스무스 하게 도심의 야경으로 파고든 휘린의 앞에 캐릭터 중 가장 빠른 스피드를 자랑 하는 쿠노이치(여닌자) 사쿠라가 나타났다. ‘유키가 포텐킹이니 이 녀석은 적이지!!’ 순간 일말의 견제도 없이 나는 레버를 앞으로 두 번 움직여 사쿠라를 향해 대쉬를 감행했다. “뭐야? 저게 실제 플레이 화면이야? 완전 애니메이션이잖아!?” 도트 장인 모리타의 혼이 실린 휘린의 부드러운 모션에 사람들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쿠노이치 사쿠라는 자신을 향해 파고 들어오는 휘린을 향해 더욱 빠른 스피드로 파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두 명의 캐릭터가 가까워지며 화면이 캐릭터 위주로 클로즈 업 되었다. 나는 사쿠라가 뻗어 오는 주먹을 회피 동작으로 피해낸 후, 강 킥을 눌러 회피 모션에서 파생되는 뒤돌려 차기를 날렸다. 콰앙!! 카운터 히트로 인해 가볍게 화면이 흔들리며 사쿠라가 뒤로 물러서자, 나는 레버를 앞으로 두고 다시 한 번 강 킥으로 그녀를 걷어찼다. 뻐걱 소리와 함께 90도로 허리가 접힌 사쿠라가 뒤로 튕겨져 나가고, 추가타를 위해 레버를 돌리며 그녀가 나가떨어지는 자리에 총탄을 뿌렸다. “아이스 불렛!!” 카아앙!! 그녀가 떨어지는 착지 지점에 피어난 거대한 얼음의 꽃은 다시 한 번 사쿠라를 공중으로 날려 보냈다. “아아!! 멋진 연계기가 펼쳐졌습니다.” 휘린은 공중에 띄워진 사쿠라를 향해 권총을 난사 하며 추가 공격을 감행했지만, 사쿠라의 플레이어는 공중 대쉬로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휘린의 발밑으로 붉은 반점이 떠올랐다. “치잇!!” 재빨리 레버를 뒤로 당겨 그 자리를 벗어나자, 동시에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홍련의 마술사 저스틴인가!!’ 아직 위치 파악도 안 된 상태인데, 어디 숨어 있지? 나는 화면 위에 표시된 맵(MAP)을 살피며 사쿠라와 더욱 거리를 벌렸다. 그 순간 이번에는 휘린의 몸에 록온 마크가 떠올랐다. 아마 어딘가에 저격술사 쉐도우 프레셔가 나를 노린 모양이었다. 군인 출신인 녀석의 총탄은 맵에 위치한 사물을 이용해 튕겨져 괴상한 각도로 날아오는지라 나는 록온 마크가 떠오름과 동시에 텔레포트로 자리를 이탈했다. 그렇게 나를 노리는 플레이어들과 더욱 거리를 벌리자, 앵글이 멀어지며 맵의 전체적인 구도를 그려주었는데, 보아하니 6명의 캐릭터가 나를 향해 빠르게 거리를 좁혀 오는 게 눈에 확 들어왔다. ‘젠장 이러라고 만든 게임이 아니라고!!!’ 나는 재빨리 건물의 간판을 딛고 방향키를 아래, 위로 빠르게 입력함과 동시에 점프 버튼을 누르며 건물 옥상으로 슈퍼 점프를 감행했다. 순간 건물 옥상에 숨어 있던 쉐도우 프레셔의 플레이어가 나의 등장에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헉!! 어느새!!” 쉐도우 프레셔는 원거리에서 발군의 기량을 자랑하지만, 근접전 타격에 취약한 캐릭터 였기에 나는 아이스 불렛으로 녀석의 발을 묶은 뒤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혔다. “휘린!! 여기서 쉐도우 프레셔를 노립니다!!” ‘야, 인마!! 내가 뭘 하는지 일일이 떠벌리지 마!!’ 나는 얄미운 준페이 녀석을 한번 흘겨 본 뒤, 쉐도우 프례셔를 향해 강하게 앞차기를 날렸다. 그리고 동시에 레버를 앞으로 두 번 튕겨 날아가는 녀석의 몸을 공중에서 붙잡아 복부에 수발의 총탄을 쑤셔 넣었다. “우와아아아!!!!” 퍽퍽퍽퍽!!! 결국 건물 바닥으로 나가떨어지는 쉐도우 프레셔의 몸을 짓밟고 뛰어 오른 나는 반대편 건물에 발을 딛었다. 그 순간. 콰아아아앙!!!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휘린의 주위로 대폭발이 일어났다. ‘빌어먹을!! 이번엔 폭탄마 로이 인가!?’ 로이는 맵 곳곳에 함정 폭탄을 설치하고, 원거리에서 그것을 발동 시키는 캐릭터로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하기 까다로워지는 캐릭터 중에 하나였다. 사이킥 포스의 체력은 게이지가 아닌 퍼센트로 표시 된다. HP는 도합 200%라는 숫자로 표현 되는데, 방금 전 공격으로 48%의 데미지를 입었다. “크윽!!” 나는 정신없이 손을 움직여 다시 본래의 건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이미 그곳에는 어느새 나를 쫓아온 사쿠라가 스킬을 준비하고 있었다. “젠장맞을!!!” 그녀에게서 쏘아지는 수리검을 SP 게이지를 사용한 베리어로 튕겨내자, 사쿠라의 수리검이 다시 주인을 노리며 되돌아갔다. “이건 사이킥 배틀에서 류화영이 사용하던 카운터 베리어 군요!!!” “우오오오!! 멋지다!!” 사쿠라의 수리검을 되돌려 줌과 동시에 두정의 권총에서 얼음과 불의 총탄이 그녀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자 사쿠라의 모습이 순간 통나무로 바뀌며 본체가 내 등 뒤를 잡았다. 닌자의 기술인 바꿔치기의 술법. ‘짧은 시간 안에 별 기술을 다 익혔네..’ 재빨리 가드 버튼으로 사쿠라의 연계기를 막아낸 나는 사쿠라가 결정타를 날리려는 순간 레버를 앞으로 밀어 넣으며 가드 버튼을 눌렀다. 카앙!! 그러자 휘린의 몸이 황금색으로 빛나며 오른쪽 화면에 ‘저스트 블로킹’이라는 문자가 떠올랐다. 강한 공격 “어어? 뭐야!?” 아직 피니쉬 동작을 끝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품안에 파고든 휘린의 몸은 여전히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저스트 블로킹에 성공하면 1초 동안 무적시간이 발동하지!!’ “우선 한 명!!” < EP. 24 : 동전을 집어 삼키는 귀신 (4) > 끝 ⓒ < EP. 24 : 동전을 집어 삼키는 귀신 (5) > “우선 한 명!!” 나는 가볍게 콤보 한 세트를 먹여 준 뒤, 마무리로 승룡권 커맨드를 입력함과 동시에 강 킥으로 사쿠라를 높이 찍어 올렸다. 그리곤 내가 가진 SP 게이지를 소모해 공중에 머무른 캐릭터를 향해 권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공중에서 빗발치는 총탄에 사쿠라의 몸이 붉게 물들자, 나는 공중에서 그녀를 붙잡고 건물 밑으로 떨어져 내리며 계속해서 총탄을 쑤셔 박았다. 그리고 착지 직전에 점프로 자리를 이탈하자, 사쿠라는 추락 데미지와 함께 이름 그대로 벚꽃 잎을 휘날리며 사라졌다. “우와아!! 쩐다..” “아~!! 여기서 사쿠라를 선택했던 플레이어가 한 분 탈락 하셨습니다!! 대기 중인 플레이어는 곧바로 교체 투입을 준비해주세요~” ‘젠장 숨 돌릴 틈이 없네.’ 하지만 그것은 나를 쫓은 플레이어도 마찬가지였다. 스피드라면 사쿠라 다음가는 휘린이기에 맵 전체를 오가며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포텐킹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유일하게 내 편이라고 볼 수 있는 포텐킹이었기에 슬쩍 유키의 화면을 바라보자 그녀는 금발의 마녀 록시와 대치중이었다. 다른 캐릭터에 비해 상대적으로 텔레포트에 대한 SP 게이지를 적게 사용하는 록시는 포텐킹과 상성이 매우 훌륭했다. 하지만 반대로 유키가 사용하는 포텐킹에게는 최악의 상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가 도와줘야겠어..’ 휘린을 쫓는 한 무리의 암살자들과 함께 나는 빠른 속도로 건물을 넘나들며 포텐킹을 향해 달렸다. 다행히 방어력 하나 끝내주는 유키의 캐릭터는 록시의 연속 공격에도 꿈쩍도 않고 방어에 치중하고 있었다. “준혁씨 이 캐릭터 너무 느려요..” “딱 봐도 빠른 캐릭터로는 보이지는 않잖아.” “적의 공격이 마무리 될 때 타이밍에 맞춰서 가드 버튼을 눌러봐.” 그러자 아까 휘린이 보여준 것처럼 황금색으로 빛나는 무적 판정은 아니어도 록시의 공격에 대한 가드 데미지가 확 줄어든 것을 느낀 유키는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가 도착 할 때까지 조금만 참아.” “아~ 여기서 개발자인 강준혁이 이시카와씨를 독려하는군요. 정말 누가 이 커플 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그 순간 새로 난입한 플레이어가 유키와 같은 캐릭터인 포텐킹을 고르며 내 앞을 막아섰다. 그와 마주치기 직전 대각선으로 레버를 가볍게 튕기며 점프 버튼을 누르자 휘린의 뒤로 푸른색 잔상이 떠오르며 거구의 포텐킹을 단번에 뛰어 넘었다. 당황한 포텐킹이 나를 향햐 레버를 돌린 순간 나는 역방향으로 레버를 입력하며 발차기를 날렸다. 퍼억!! “어라? 분명히 가드 했는데?” 역 가드. 2D 격투 게임에서 초심자를 무너뜨리는 방법으로 공중 발차기의 타이 밍을 조금 늦게 발동시켜 타격을 입히는 기술은 레버를 반대로 입력해야만 가드가 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추가타를 고려하지 않고 재빨리 유키를 향해 휘린을 이동시켰다. 곧이어 유키가 조작하는 포텐킹이 화면에 들어온 순간. 슬라이딩으로 포텐킹의 다리 사이를 빠져 나오며 건너편에 위치한 록시를 노렸다. 당연히 점프로 파고 들어올 줄 알았던 록시의 대공 마법이 허무하게 빗나가고, 허점을 보인 순간 나는 유키에게 외쳤다. “지금이야!!” 이제껏 방어에만 열중해 있던 포텐킹의 거대한 주먹이 록시의 캐릭터에 제대로 꽂히자, 순식간에 절반의 체력이 날아갔다. ‘좋아. 추가 타는 나에게 맡겨라!!’ “아아앗!! 포텐킹의 아이언 피스트가 명중!! 단방에 그로기 상태로 날아가는 록시... 를!! 휘린이 따라 붙습니다!!” “우와!! 연계 공격이다!!” 록시가 날아가는 방향 반대편에 아이스 불렛을 날려 내가 있는 쪽으로 다시 튕겨지게 만든 뒤. 나는 다시 한 번 유키의 포텐킹을 향해 뒤돌려 차기를 날렸다. “한번 더!!” 콰아아앙!!! 또 다시 포텐킹의 아이언 피스트가 작렬하며 록시는 순식간에 빛이 되어 흩어졌다. “어억!!! 파워가 무슨.. 단 두 방에 즉사네..” “방금 태그 기술 겁나 멋지다!!” “무슨 애니메이션 보는 줄 알았네..” 그때였다. 화면의 절반 가까이 붉게 물드는 위험 표시와 함께 후방에서 거대한 불길이 날아왔다. 이미 피하기엔 늦었음을 깨달은 나는 재빨리 포텐킹 쪽으로 가까이 붙으며 유키에게 외쳤다. “가드 해줘!!” 쿠와아아앙!!! 휘린보다 몸집이 3배는 큰 포텐킹은 날아오는 불길을 온몸으로 막아내 주었다. 다행히 불길은 녀석의 몸집에 가로 막혀 휘린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가자!!” 내 말과 동시에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5명의 캐릭터와 대접전이 시작되었다. 나는 최대한 포텐킹의 근처에서 그를 방패로 두고 주변의 적들을 향해 권총을 난 사했다. 가끔 유키의 조작 미스로 나에게 주먹이 날아올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적진 한 복판에 뛰어 들어서 다구리 당하는 것 보다는 낫지. 나는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는 플레이들이 상대하기 껄끄럽도록 좌우로 빠르게 이동하며 권총을 쏘아댔다. ‘아, 간만에 버튼을 너무 심하게 두드렸더니, 손가락이 아파오네..’ 그 순간 다시 한 번 나와 포텐킹이 서있는 바닥에 붉은 반점이 떠올랐다. 홍련의 마법사 저스킨의 불기둥이 다시 한 번 쏘아진 것이다. 나는 재빨리 방어를 굳힌 포텐킹의 머리를 밟고 슈퍼 점프를 이용해 자리를 이탈했다. “끈질기다!!” 나는 새로 참전한 포텐킹를 향해 아이스 불렛을 날려 움직임을 묶은 뒤 다시 한 번 녀석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와, 아주 그냥 날아다니네?” “나도 해보고 싶다. 겁나 재밌을 거 같아..” “강준혁의 휘린이 거침없이 맵을 헤집고 다니는 군요. 도저히 그를 막아설 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그의 체력 게이지는 120%를 유지하고 있네요. 아!! 말씀 드리는 순간 휘린의 연속기에 쉐도우 프레셔가 말려듭니다. 체력이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요!? 아~ 여기서 쉐도우 프레셔가 안타깝게 탈락!! 어느새 3명의 플레이 어를 탈락 시켜버린 악마의 디렉터 강준혁!! 쉽게 목숨을 내놓지 않습니다! 사이킥 포스의 피규어가 아까운 걸까요?” ‘저 녀석이 나를 뭘로 보고!?’ 나는 속으로 준페이 녀석에게 욕을 한마디 날려주며 휘린을 다시 유키에게로 이동시켰다. 그 순간.. 콰아아앙!! “아~!! 여기서 폭탄마 로이가 설치 해둔 함정이 발동합니다!!” ‘제길 이번 건 좀 크다. 53%라니 데미지를 너무 많이 먹었어..’ 거기다 게임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플레이어들이 시간차를 두고 연계 공격을 펼쳐오자, 내 체력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아직인가? 조그만 더 버티면 나타날 거 같은데?’ 나는 이를 악 물고 최대한 방어에 집중했다. 그때 나에게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 접근을 시도하던 플레이어 하나가 포텐킹의 주먹에 제대로 걸리며 단방에 즉사했다. “와~!! 저도 한분 탈락 시켰어요~” “일단 가드를 굳히고 조금만 버텨 곧 회복 아이템이 나올 거야.” “에? 회복 아이템이요?” 나와 유키라는 공공의 적에 맞서 플레이어들은 여러 방향에서 공격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식적인 팀 매치가 아니었기에 서로 쏘아낸 탄막에 같은 편이 맞을 때도 종종 있었다. “저기 홍련의 마법사 저스틴 플레이어님 불기둥 좀 잘 좀 쏘세요. 우리 편도 맞잖아요.” “우리가 팀이었나요? 분명 상품은 개발자 캐릭터를 탈락 시키는 사람에게만 돌아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래도 이런 식으로 싸우면 우리 다 죽는 다구요!!” “저는 휘린만 맞히면 됩니다. 그러니 알아서들 피하세요.” 슬슬 저쪽도 분열이 생기는구나. 그런데 이 목소리는 행사 시작부터 팔짱끼고 툴툴대던 그 남자 목소리잖아? 그 사람이 저스틴을 이용하고 있는 건가? 나는 유키의 포텐킹에 기대어 강펀치와 강 킥을 동시에 눌러 SP 게이지를 틈틈히 모아 두었다. 그러자 잠시 후. 휘린의 SP 게이지가 100% 차올랐다. “유키. 약손으로 나한테 펀치 한 방만 날려줘” “네?” “빨리!!” 퍼억!! 나는 일부러 유키의 포텐킹에게 주먹 한방을 얻어맞은 뒤 체력 게이지를 30% 이하로 떨어 뜨렸다. 그러자 휘린의 캐릭터가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 이제 개발자의 캐릭터인 휘린의 체력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준페이의 중계에 주변에 모여 있던 적들이 득달 같이 나에게 모여들었다. 유키의 포텐킹이 내 곁에서 가드를 굳히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사방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버터 낸 포텐킹도 체력이 거의 바닥나 있었다. 나는 모든 플레이어가 한군데에 모이는 순간을 기다렸다. 내가 가진 체력은 23% 기술 한방만 제대로 맞출 수 있다면 곧바로 절명할 수치였다. 그 때 그 아까처럼 화면의 절반이 붉게 물들었다. 거기다 추가적으로 불기둥을 예고하는 바닥까지.. 온 화면을 새빨갛게 물들인 주모자는 홍련의 마법사 저스틴의 소행이었다. “역시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나는 모든 캐릭터가 한꺼번에 모인 순간 유키의 포텐킹을 박차고 슈퍼 점프를 감행했다. 콰아아앙!!! 저스틴의 어마어마한 화력과 더불어 각자 최강의 기술을 날린 이들은 즉사에 이르는 데미지를 입히고 사라졌다. 그리고 내가 조작하는 휘린이 향한 곳은 이때까지 멀리서 마법만 쏘아대던 홍련의 마법사가 숨어 있는 건물 옥상이었다. “찾았다!!” 그동안 원거리 마법으로 스트레스가 조금 쌓였던 터라 나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콤보 한 세트를 먹여주자, 저스틴은 데미지를 입으면서도 거리를 벌리기 위해 백스탭을 시도했다. “어딜 도망가!” 키이잉!! 그 순간 휘린의 눈이 붉게 빛나며 저스틴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체력이 30%이하시 SP 게이지 80%를 소비해 사용하는 휘린의 초필살기였다. “우와!! 빠르다!! 저건 뭐지!?” “아아앗!!! 여기서 휘린의 초 필살기가 터집니다!!” 화려하게 출렁이는 바스트 모핑과 함께 잠시 그녀의 컷인이 스쳐 지나자, 행사장에 모신 사람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뭐야!? 방금 휘린의 가슴이.. 가슴이!!” “나도 봤어!! 움직인다!!” 단지 화면 안에 여자 가슴이 조금 출렁인 것만으로 이렇게 난리법석이 일어날 줄이야.. 뭐? 가슴에 손을 얹고 나는 안 그랬냐고...? 물론 나도 슈퍼로봇결전에서 등장한 2D 캐릭터의 바스트 모핑에 박수를 보낸 적이 있긴 하지만, 크흠... 화면 안에서는 휘린은 좌우로 저스틴의 주위를 돌며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화기를 사용해 난무를 펼치고 있었다. 마지막 발차기로 공중에 뜬 상대에게 저격 총으로 헤드샷을 날린 그녀는 자신의 키와 엇비슷한 길이의 총을 쿨 하게 바닥에 내던졌다. 결국 휘린의 초필살기에 대비하지 못한 저스틴은 전세를 역전하지 못하고 불꽃이 되어 흩날렸다. “아~ 여기서 탈락자가 대거 발생하는 군요!! 팀워크의 실패입니다. 그럼 이제 저 준페이도 사이킥 포스의 배틀에 참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맞다. 저 녀석도 참가자였지!?’ 준페이는 어느새 유키의 옆자리에 앉아 캐릭터를 고르고 있었다. 실실 웃는 모습을 보니 어부지리로 나를 죽여 피규어를 득템하려는 속셈인거 같은데, 제기랄 이젠 정말 체력이 없다. 나는 준페이가 나타나기까지 최대한 SP 게이지를 모아두었다. 현재 게임에 남아 있는 플레이어는 유키의 포텐킹. 그리고 교체 투입된 플레이어가 고른 또 다른 포텐킹. 그리고 내가 플레이 중인 휘린과 폭탄마 로이 뿐이었다. 나는 어딘가에 숨어 있는 로이를 경계하며 SP 게이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유저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월간 패미통신의 자존심을 걸고!! 제가!! 반드시!! 기필코!! 개발자 강준혁의 숨통을 끊어 놓겠습니다.” ‘그냥 피규어가 갖고 싶다고 말해!!’ 준페이는 얼마 안남은 나의 HP를 확인하며 입이 찢어져라 미소짓고 있었다. 그가 고른 캐릭터는 류화영을 닮은 휘린.. 사이킥 배틀 때부터 류화영을 좋아했던 녀석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선택일지도 몰랐다. “준페이. 이~키마스~~(갑~니다~)” 그때였다. 준페이의 캐릭터가 한 건물의 옥상에 등장함과 동시에 화면 중간에 ‘WARNING’ 이라는 붉은 경고 메시지가 나타났다. “어? 뭐지!?” 예상치 못한 이벤트에 준페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하던 중. 건물과 건물 사이로 거대한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이 준페이의 짧았던 플레이의 마지막이었다. < EP. 24 : 동전을 집어 삼키는 귀신 (5) > 끝 ⓒ < EP. 24 : 동전을 집어 삼키는 귀신 (6) -5권 끝- > “우와아아악!!” 미처 몸을 풀어볼 겨를도 없이 거대 보스의 레이져 한방에 순식간에 절명한 준페이는 레버를 움켜쥔 채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잠시 화면이 새하얗게 변한 뒤. 가운데 있던 건물이 주저앉으며 보스 몬스터가 출현했다. 거의 건물하나와 맞먹는 크기의 몬스터는 불교신 천수보살(千手菩薩)의 모습을하고 있었다. “허억!! 저게 뭐야!?” 혹시 어릴 적 오락실에서 꽤나 이름을 날린 게임 중에 ‘서유항마록’이라는 게임을 기억하는가? 일부 오락실에서는 영문판 제목인 ‘차이나 게이트’ 기판을 돌리기도 했다. 방금 등장한 천수보살(千手菩薩)은 그곳에서 모티브를 따온 몬스터였다. 물론 스케일 자체가 엄청 크긴 하지만.. 녀석은 등장과 동시에 사방으로 탄막을 쏘아 대며 공중을 부유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보스의 출현과 함께 그동안 숨어 있던 폭탄마 로이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보스급 몬스터에게는 그의 특수 스킬인 ‘은신’이 통하지 않았기에 제법 노련하게 플레이를 주도하던 폭탄마 로이는 스킬을 해체하고 스테이지 외각으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천수관음은 근처에 있던 로이를 쫓는 과정에서 그가 설치한 폭탄들을 모조리 건드리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상당히 큰 타격을 입었다. 스테이지에 남겨진 우리 넷은 각자 가지고 있는 원거리 탄막을 이용해 천수보살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게임의 형태가 자연스레 대전 액션에서 슈팅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화려하게 치고 박던 캐릭터 들이 공통의 적을 향해 탄을 쏘아대자, 행사장의 모인 사람들의 수근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와아... 스케일 대박이다..” “이런 게임 본적도 없어..” “아~ 시연 모델에 자리 비었는데, 나도 한 판만 해볼 수 없나.” 나는 천수보살이 쏘아대는 레이저 빔을 요리조리 피해내며 위급할 때는 카운터 베리어를 이용해 녀석이 날린 탄막을 되돌려 주었다. ‘조금만 더...!!’ 어느새 주변에서 수근 거리던 유저들의 소리도 차츰 잦아들고, 모두가 천장에 걸 린 스크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두 명의 포텐킹은 느린 이동 속도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천수보살에게 달라붙어 주먹을 날렸다. 그러자 천수보살의 몸 여기저기에 금이 가며 파편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콰과광!! 로이는 보스 몬스터에게서 도주하면서도 끈임 없이 폭탄을 뿌려대고 있었다. ‘지금이다!!’ 나는 레버를 앞으로 두 번 튕겨 휘린에게 대쉬를 걸은 뒤 건물 끝을 박차고 힘차게 점프를 시도했다. 아슬아슬하게 천수관음상 머리 꼭대기에 올라탄 휘린은 녀석의 머리에 대고 총구를 난사하기 시작했다. 온화했던 천수관음상의 얼굴 파편이 벗겨지고, 흉측한 몰골이 드러나자 나는 보스 몬스터의 체력이 얼마 안 남았음을 직감했다. 쩌어엉~!! 이윽고 천수관음의 두개골이 갈아지며 스테이지 여기저기에 아이템이 쏟아져 나왔다. ‘회복!! 회복 아이템은 어디냐!?’ 나는 녹색으로 호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보석을 향해 재빨리 캐릭터를 이동시켰다. 천수관음상이 무너짐과 동시에 게임은 다시 4명의 각축전으로 전환되었다. 회복아이템을 이용해 체력을 140%까지 채운 나는 또 다시 모습을 감추려는 로이를 향해 저격총을 꺼내들었다. 손가락에 착용된 반지를 이용해 자유롭게 화기를 소환하는 휘린의 능력은 각 커맨드에 따라 발동 시키는 무기가 달라졌다. 카아앙!! 순간 은신을 시도하던 로이는 생각지 못한 원거리 사격에 데미지를 입으며 난간 밑으로 떨어졌고, 그 밑에는 유키의 포텐킹이 대기 중이었다. 그 순간 나는 옆에 있던 그녀에게 외쳤다. “지금이야!!” “네!!” 보스 전에서 겨우 살아남은 유키의 체력은 21% 온몸이 붉게 물든 상태에서 떨어져 내리는 로이를 향해 초필살기를 시전 했다. 건틀렛에 장착된 폭탄의 스위치를 올리는 포텐킹의 컷인과 함께 폭탄마 로이의 최후가 결정됐다. “헐.. 대박이다.” 가장 까다로웠던 상대가 사라지자, 남은 상대는 교체 투입된 시연자의 포텐킹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 역시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모든 SP 게이지를 쏟아 부어 초 필살기를 날린 유키의 뒤를 잡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에겐 더 이상의 체력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나는 재빨리 건물 밑으로 뛰어 내린 뒤 그녀에게도 달렸다. 유키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또 다른 포텐킹에게서 도망치려 했지만, 그녀가 있는 공간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스테이지의 가장 외각이었다. 유키를 향해 아이언 피스트를 준비하는 포텐킹을 향해 아이스 불렛으로 움직임을 멈추려는 찰나.. 녀석의 방향이 나를 향해 돌아섰다. ‘함정이었나!? 이대로는.. 멈출 수가 없는데!!’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레버를 한 바퀴 돌리며 카운터 베리어 발동시킨 나는 포텐킹의 아이언 피스트와 정면으로 맞섰다. 콰아아앙!!! 잠시 서로간의 충돌로 인해 포텐킹이 뒤로 주욱 밀려난 반면 휘린은 빛의 속도로 나가 떨어졌다. ‘허억!! 한방에 체력이 3%남았다..’ 아무래도 녀석을 향해 돌진하던 가속력 덕분에 카운터가 제대로 적용이 된 모양이었다. ‘이대론 스치기만 해도 죽을 거 같은데?’ 그때 유키의 포텐킹이 움직였다. 콰아앙!! 나의 카운터 베리어에 대한 충격으로 뒤로 밀리는 포텐킹을 향해 아이 언 피스트가 작열한 것이다. 사이킥 포스에서는 적의 배후를 공격할 경우 120%의 데미지가 들어갔기에 순식간에 체력이 30% 이하로 떨어졌다. 마지막 남은 플레이어는 유키의 근접 공격과 나의 원거리 사격에 제물이 되어 쓰러졌다. “끝났다...” 긴 전투를 끝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내가 레버를 내려놓자, 사방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이야~!! 멋지다. 진짜 혼자서 다 해치웠네. 나도 정식 출시되면 휘린 써봐야지.” “시연 팀이 팀워크만 중시했으면 이겼을 텐데 아쉽네..” 그러자 플레이 시작과 동시에 목숨을 잃은 준페이 녀석이 드디어 제정신을 차렸는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손에 들었다. “아, 최고의 팀플레이를 보여준 준혁씨와 이시카와씨에게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와아아~~” 짝짝짝~ 나는 쏟아지는 유저들의 박수 속에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인사를 마쳤다. 그 때였다. 어느새 휘린에게 다가온 유키의 포텐킹이 가볍게 주먹 한방을 날리자, 체력이 3% 남아 있던 그녀는 포텐킹의 주먹 한방에 두 자루의 권총을 바닥에 남기고 사라졌다. “어!? 뭐지? 포텐킹이 휘린을 없애 버렸어?” -WINNER IS POTENKING- 유키의 돌발행동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유키는 순진한 표정으로 유저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음? 저도 엄연히 시연 팀 중에 한 사람인데, 모르셨어요?” “어라? 듣고 보니 그러네?” “헐.. 완전 어부지리(漁夫之利)네? 반전이다.” 아니 잠깐, 이건 어부지리 보다 토사구팽(兎死狗烹)아냐? 예상치 못한 상황에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유키는 혀를 반쯤 쏙 내밀며 나에게 말했다. "혹시, 사이킥 포스 피규어 말고 다른 거 부탁해도 되요?" 유키의 밝은 미소에 웬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마른침을 꿀꺽 삼킨 나는 바짝 마른 입술을 떼었다. “뭔...데?” “여기에서 저에게 정식으로 프로포즈 해주세요.” “…….”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 “우와아아아아~~~” 유키의 대담한 부탁에 행사장에 모인 사람들의 함성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야~ 그러고 보니 저 두 사람 드래곤 엠블렘 행사장에서 처음 만났다며? 그런데 이번엔 리메이크 행사장에서 결혼 발표하는 거야?” “인연이네~ 인연이야.” “캬~ 여자가 저렇게 정식으로 프로포즈를 청하다니, 뭔가 뭉클한데?” “그러고 보면 저 분 하세가와 미유키 성우기도 하잖아? 왜... 왠지 내 여자 친구를 빼앗긴 기분이...” 그때 어느새 내 곁에 다가온 준페이가 나에게 말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 생각은 했지만, 막상 눈앞에서 보니 부럽다 자식아. 결혼식 사회는 내가 봐줄게.” “나... 꼭 여기서 프로포즈 해야 하나?” “응. 멍석 다 깔아 놨는데, 유키씨에게 창피 줄 셈이야? 지금 그녀는 여기 보인 사람들에겐 여신이나 마찬 가지야. 성격 착하지. 게임 좋아하지. 든든한 직장도 있지. 거기다 하세가와 미유키의 성우라고.” 마지막에 설득 포인트가 살짝 빗나간 느낌이 드는데? 하지만 행사장에 빼곡히 모인 유저들을 바라보니, 여기서 유키의 요청을 거절했다간 밟혀 죽기 딱 좋은 각이다. ‘그래.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나는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오오~” “좀 조용히 좀 해 봐요.” “쉿. 쉬잇..” 그 순간 수근 거리던 소리가 차츰 잦아들더니 주변이 고요해졌다. 이 사람들. 단결력 좀 보소.. 펜타곤 소속 여직원들은 두 손을 꼭 모은 채 부러운 눈길로 유키를 바라보았다. “유키씨 부러워..” 어디선가 미야자키씨의 목소리가 들린 거 같은데? 유키 역시 막상 이 순간이 다가오니 조금은 창피한 모양인지, 두 볼에 발그레 홍조를 띄고 있었다. “워낙 갑작스러운 청혼이라. 반지도 준비 못했는데...” “괜찮아요. 그런 격식보다 준혁씨가 해주는 말이 더 소중하니까. 그러니 어서 말해줘요.” 그녀는 두 손을 뒤로 깍지 낀 채 나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후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항상 내 곁에 네가 함께 있어줬으면 좋겠어. 사랑해.. 나랑 결혼 해줄래?” 그러자 유키는 살포시 한쪽 발을 뒤로 빼내고, 손가락 끝으로 치마의 양쪽 끝을 살짝 들어 올리며 나에게 허리를 숙였다. “기쁜 마음으로 당신의 청혼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야아아~~” “축하 합니다~” “뭔가, 방금 굉장히 가슴이 찡했어..” “부럽다. 정말 부러워.. 어디서 저런 여자를..” 1991년 11월 21일. 드래곤 엠블렘으로 인해 맺어졌던 유키와의 인연이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 -유저를 괴롭히는 악마의 게임 디렉터. 천사에게 청혼하다!!- “하하~ 준혁씨 이거 봐요~ 준페이씨가 패미통신에 우리 기사를 실어줬어요~” “이 녀석이..” “왜요~ 아주 정확한 표현인데? 준혁씨도 라온 발표 때 스스로 인정했잖아요. 유저들 괴롭히는 거 즐긴다고~” 데이트 장소로 나오던 중 서점에서 패미통신을 사온 유키는 빙글 벙글 웃으며 잡지를 펼쳐보았다.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테이블에 놓인 커피를 한모금 삼켰다.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에 순백으로 빛나는 다이아가 영롱한 빛을 발했다. 그것은 가느다란 그녀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는 끼워진 반지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반지는 마음에 들어?” “마음에는 들지만, 그래도 너무 비싸서 부담스러워요..” “그래도 디자인은 그게 가장 세련 됐더라.” “그건 그렇지만..” 유키는 자신의 손가락에 걸린 반지와 내 손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이번 주말에 저희 부모님 뵈러 오실 거죠?” “그래야지. 사이킥 포스의 시연도 성공적(?)으로 끝났고 현재 공장에 기판 제작을 의뢰한 상태니까. 당분간은 괜찮을 거야.” 덕분에 개발팀 인력이 죽어나긴 했지만, 사이킥 포스는 그들의 숭고한 희생 덕에 탄생한 희대의 명작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때 유키가 궁금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어라? 그럼 드래곤 엠블렘 II 는요? 그것도 올 겨울 출시 아니었어요?” “아, 그게 말이지...” 나는 유키가 사온 패미통신을 펼쳐 라온 관련 소식란을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드래곤 엠블렘 II 더 나은 퀄리티를 위해 내년 봄으로 발매 연기.- < EP. 24 : 동전을 집어 삼키는 귀신 (6) -5권 끝- > 끝 ⓒ < EP. 25 : NEGA의 반격 (1) > & 1991년. 12월 13일 금요일. 유키의 부모님을 찾아뵙기 하루 전 날.. 내일 일정을 위해 유키와 통화중이었던 나는 재차 약속 시간을 확인했다. “그럼 내일 오후 1시 맞지?” “네, 엄마가 점심 식사 준비 해놓으신다고 하니까. 너무 늦지만 말아요.” “으, 으응.” “준혁씨. 긴장했어요?” “당연하지. 그래도 처음으로 찾아뵙는 건데...” 가끔 유키의 집 근처에 바래다 줄 때 몇 번 인사드리긴 했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찾아뵈려니 은근히 부담감이 느껴졌다. “괜찮아요. 제가 그동안 준혁씨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설명했으니까. 엄마는 준혁씨가 온다니까 굉장히 좋아하시던데요?” “그.. 그래? 미리 인사 좀 드릴 걸...” “준혁씨가 그동안 바빴다는 것도 잘 설명해 드렸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우리 부모님 그렇게 빡빡하지 않으시거든요. 전 오히려 준혁씨가 우리 가족을 보고 너무 놀랄까봐 걱정이에요.” ‘음...? 그게 무슨 소리지?’ 담담한 목소리로 나를 안심시켜주는 그녀의 말에 긴장됐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다음 날. 오전부터 세탁소에 맡겨두었던 슈트를 찾아온 나는 서둘러 옷을 차려 입고 차에 올랐다. 12월이지만 날이 그렇기 춥지 않았기에 옆자리에 코트를 던져두고, 백미러를 통해 헤어스타일 체크를 마친 나는 유키네 집 쪽을 향해 핸들을 돌렸다. 잠시 후. 유키가 사는 키지죠지에 접어들자, 나는 근처 공용 주차장에 차를 대어두고 역 근처의 상점가로 향했다. ‘그래도 정식으로 인사드리러 가는데, 빈손으로 갈수야 없지.’ 나는 상점가를 둘러보던 중 꽃가게에서 예쁜 꽃다발 하나와 근처 화과자 점에서 선물용 화과자를 구입하고 서둘러 유키네 집으로 달렸다. 약속시간 10분 전 유키네 집 문 앞에 도착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초인종을 누르자, 집안에서 요란한 소리다 들려왔다. “왔다!!! 왔어!? 어쩌지? 어떡해!!” “일단 문부터 열어줘요!!” “여보. 당신이 대신 가면 안 될까? 사위를 맞아보긴 처음이라 긴장된 단 말야!!” “난 요리 하잖아요!! 그리고 나도 사위 맞아보는 건 처음이 거든요!?” “아악~!! 유코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네가 유키보다 먼저 시집 갔었으면 이렇게까지 긴장하지도 않았을 거 아냐!!” “아빠!! 그게 무슨 억지논리에요!?” “…….” 뭐지? 내가 상상하던 분위기랑은 좀 다른데?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누르기도 뭐해서 꽃다발을 손에 든 채 머뭇거리고 있는데, 철컥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결국 나를 먼저 반겨준 것은 유키였다. “준혁씨 어서 와요~” “아, 응. 고마워.” 새하얀 현관문을 지나 거실 안으로 들어서자, 안에서 나를 기다리던 유키의 부모님과 언니가 나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우리 딸을 잘 부탁드립니다.” ‘허억.. 빨라..’ “아빠. 첫 인사가 그게 뭐에요.” “이거 아냐?” 유키의 아버지인 이시카와씨는 생각보다 굉장히 젊어 보였다. 유키 나이를 감안 한다면 40대 중후반 정도일 것 같은데, 그는 30대 중반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엄청난 동안의 소유자였다 “아하하~ 아빠가 긴장해서 그래.” “인사 드려요. 준혁씨 이쪽은 우리 아빠, 그리고 엄마. 여긴 우리 언니 유코에요.” “안녕하세요. 진작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빈손으로 오긴 뭐해서 화과자좀..” “으하하~ 예의바른 청년이구만~ 마음에 든다. 아빤 합격!! 결혼해라. 딸 2호기!!” ‘딸 2호기..?’ 이쯤 되니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유키의 아버지는 굉장히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셨다. 직접 만나 뵙기 전까지만 해도 흔히 TV에서 보던 것처럼, ‘장인어른 딸을 저에게 주십시오. 저는 유키를 사랑합니다.’ ‘크흠.. 자네 바둑 좀 두나?’ 이런 식의 대화를 생각했는데... “자네 게임 만든다면서? 그럼 게임 좀 하나? 스파2 어때!?”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유키가 게임을 좋아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군...’ 결국 식사 후. 저녁까지 내내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해가 떨어졌다. 어라? 나 오늘 결혼에 대한 이야기하러 온 거 아녔나? 그 날 밤. 차를 세워둔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나를 바래다주기 위해 함께 걷고 있던 유키가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정신없었죠?” “아냐. 딱딱한 분위기를 상상했는데, 오히려 너무 즐거웠어.” “어젯밤. 아빠도 긴장되는지 잠을 잘 못 주무시더라구요.” “정말? 전혀 안 그래 보이시던데..” “일부러 그런 척 하신 거겠죠. 오늘은 그냥 식사 초대였으니까. 준혁씨도 너무 부담 갖지 않았으면 해요.” “응.. 앞으로 종종 찾아뵙는 게 좋겠다.” “맞아요.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나를 향해 밝게 웃어 보이는 유키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유키 부모님를 만나고 며칠 뒤.. 나는 타마고 샵에서 이달에 발간된 게임 잡지를 살펴보고 있었다. 드래곤 엠블렘 ?리메이크- 판은 발매와 동시에 패미통신 집계에서 한 주간 가장 많이 팔린 게임 타이틀로 등재 되었다. 그것은 각 도시를 대표하는 전문 게임 샵 마다 설치된 다운로드 공유기의 역할 덕분이었다. 플래시 메모리 카트리지를 처음 접해보는 게이머들은 처음엔 플래시 카트리지의 구입을 꺼려했다. 이제까지 게임 샵을 통해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원하는 카트리지를 구입했던 것과는 달리 마치 자판기처럼 가게 앞에 설치된 게임 공유기에서 다운 받는 것이 게임에 대한 소장 가치를 떨어뜨리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실제로 아군 캐릭터가 사망하는 드래곤 엠블렘의 특수한 게임 성을 이용하기로 했다. 사실 드래곤 엠블렘의 카트리지에는 저용량 버전에도 일부 데이터를 담을 수 있는 빈공간이 존재했는데, 그 덕분에 드래곤 엠블렘을 구입한 이들은 호기심에 게임 샵에 설치된 공유기를 조금씩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유저들의 입소문을 타고 플래시 메모리의 카트리지의 판매량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왜냐고? 플래시 카트리지는 단순히 게임을 담아내는 용도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지. 먼저 공유기 안에 최초로 플래시 카트리지를 밀어 넣으면 데이터를 읽어 들이며 자신의 ID와 패스워드를 입력 할 수 있었다. 자신이 등록한 정보는 공유기와 카트리지 안에 그대로 남아 있어, 차후에는 간단히 비밀번호만 입력하면 자기가 구입한 게임 타이틀의 목록을 손쉽게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한 가지. 펜타곤 소프트에서는 플래시 메모리 카트리지를 구입한 유저들을 대상으로 격주로 특정 게임 소프트를 할인해주거나, 미니 게임을 공짜로 주는 이벤트가 있었는데, 드래곤 엠블렘의 출시 기념으로 한정 기간 동안 드래곤 엠블렘 II의 홍보영상을 무료로 배포해주었다. 그렇게 플래시 메모리 카트리지는 단지 게임 소프트를 저렴하게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펜타곤 소프트 타이틀의 홍보라던가, 특정 게임의 ‘체험판’을 미리 즐겨 볼 수 있는 필수 아이템으로 작용되기 시작했다. 바로 지금처럼... “우와~!! 내년 1월 1일에 공유기에서 드래곤 엠블렘 II 체험판 배포한데~!!” “진짜? 아씨.. 나도 플카 하나 사야하나..” 플카는 최근에 라온 유저들 사이에서 생겨난 유행어다. 플래시 메모리 카트리지의 줄임말이라나? “그냥 하나 사. 나도 처음에는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했었는데, 설마 이런 용도로 사용할 줄은 몰은 몰랐거든. 2주 뒤에는 슬램덩크 행사 기간이라 4,300엔짜리 다운로드 타이틀을 3,500엔에 할인해서 판데.” “진짜? 거의 반값이네?” “나도 그냥 돈 좀 더 들여서 고용량 살 걸 후회중이다. 아, 너 혹시 내꺼 안 살래? 너한테 팔고 고용량 사고 싶은데, 싸게 줄 테니까 어때?” “생각해볼게.” 나는 두 고등학생의 대화내용에 피식 웃음을 삼키며 종이컵에 담긴 커피 한 모금을 삼켰다. 최근에 사이킥 포스 시연회에서 프로포즈 사건이 터지며 얼굴이 꽤나 알려지는 바람에 가끔씩 내게 사인을 요청하는 게이머들도 여럿 생겨났다. ‘예전처럼 순수하게 게이머들의 반응을 듣고 싶은데, 이젠 그러기도 힘들겠네. 얼굴이 너무 알려져 버렸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타마고 샵에 나오는 것이 좋았다. 이곳에 있으면 최근의 게임 동향을 생생히 전해들을 수 있고, 유저들의 대화를 듣다보면 앞으로 펜타곤 소프트가 나아갈 방향을 유추해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타마고 샵 옆에는 사이킥 포스만을 취급하는 전문 게임 센터가 인테리어 공사 중이었다. 다음 달 기판 제작이 완료됨과 동시에 오픈 예정인 아케이드 센터를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유저들이 많이 보였다. 아키하바라의 상징이라 불리는 ‘라디오 회관’ 바로 옆에 위치한 빌딩 1층 타마고 샵을 중심으로 점점 더 넓게 확장 되어 가고 있었다. 전 연령층에 폭넓은 인기를 얻고 있는 타마고 샵와 더불어 펜타곤 게임의 캐릭터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펜타곤 굿즈 샵. 그리고 이제는 사이킥 포스 전용의 아케이드 센터까지... 이 빌딩은 펜타곤 팬들에게 일종의 ‘성지화’가 진행 되어가는 중이었다. ‘젠장, 차라리 처음에 타마고 샵을 오픈 할 때 빌딩 전체를 통째로 사버리는 건데, 생각을 잘 못했어...’ 나는 매 달 빠져 나가는 월세 고지서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정도 금액이면 적어도 직원 5명 분 급여는 나오겠네.. 하지만 초 역세권에 위치한 이 빌딩의 건물주에게 아무리 돈을 안겨준다 한들 홀랑 팔아 줄 거 같지도 않고, 일단 딜을 한번 걸어보고 지켜보기로 할까? 이미 펜타곤에 대한 이미지 홍보는 충분히 해둔 터라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최근 일본의 경제상황은 그야말로 아수장이 따로 없는 상태였다. 80년대 말부터 조짐이 보였던 버블 경제가 90년대에 접어들며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5년 전만해도 대학 졸업 후.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청년들은 급격하게 좁아진 취업문을 통과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단기적인 경제 침체 일 뿐이며 곧 회복세로 전환 될 것이라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바빴지만, 바로 이 시기가 일본인들이 흔히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르는 바로 첫 번째 해였다. 작년에 대비해 일본의 경제 성장률은 0%. 하지만 국민들은 정부의 발표를 믿었다. 이것은 일시적인 경제 침체 효과일 뿐이라고... 그러나 면밀히 상황을 살펴보면 이상한 것이 한 두군데가 아니었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길목의 대규모 토목 공사. 미친 듯이 폭등하기 시작하는 부동산 가격. 80년대 말에 대규모로 뿌려진 은행들의 저금리 대출이자로 인해 한때 ‘지금 대출 안 받는 사람은 바보’라고 놀려댈 정도로 너도 나도 은행에서 대출을 끌어다 썼을 정도였다. 기업들이 회사 운영을 핑계로 은행에서 어마어마한 돈을 끌어다 쓸 때부터 내가 이 사단이 날 줄 알았지.. 플라자 합의 이후 찾아온 엔고 현상의 경제 불황으로 은행들은 채권 회수가 어려워지며 크고 작은 기업과 더불어 은행들까지도 줄줄이 부도를 겪은 것이 바로 작년이었다. 그와 중에 은행에서 한 푼도 끌어다 쓰지 않은 펜타곤 소프트는 현재 일본의 10대 기업 중에 9위에 꼽히며 일본의 젊은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직장 1위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직장 내 인기투표에서 같이 일하고 싶은 상사 1위와 피하고 싶은 상사 1위를 모두 차지한 것이 바로 나였지. 아무튼 졸업 예정자들에게 취직 희망 기업으로 인정받은 것은 매우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 많은 사람들의 면접 보는 일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왠지 내년에는 올해보다 취업 희망자가 더 늘어날 것 같단 말이야... 이토록 극심한 취업난과 경제 불황에도 불구하고 게임 업계는 점점 파이가 커져가는 추세였다. 현재 업계 1위를 달리는 민텐도는 일본의 10대 기업 중 4위를 차지하였는데, 패밀리부터 기반을 다져 놓은 탓에 쉽게 왕좌에서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최근 들어 재밌는 사건이 하나 터졌다. NEGA 드라이브 발매 이후 이렇다 할 히트작이 없던 탓에 유저들로부터 외면 받아오던 NEGA가 민텐도를 상대로 대반격에 나선 것이다. ‘드디어 NEGA가 북미 시장을 잡기 위해 검을 빼들었군.’ < EP. 25 : NEGA의 반격 (1) > 끝 ⓒ < EP. 25 : NEGA의 반격 (2) > ‘드디어 NEGA가 북미 시장을 잡기 위해 칼을 빼들었군.’ 1991년. 민텐도에 ‘쿠마모토 시게루’가 있다면 이 시기의 NEGA에는 천재 프로 그래머 ‘스즈키 류’ 와 ‘타카 유지’ 가 있었다. 이 둘은 8~90년대에 게임을 좀 했다 싶은 게이머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명작 ‘리얼 파이터’ 와 ‘소니크 더 헤지혹’이라는 걸출한 게임을 만들어낸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 이 시기의 스즈키 류는 ‘리얼 파이터’ 보다 체감 형식의 아케이드 게임을 주로 만들었는데, 일전에 유키와 첫 데이트 때, 게임 센터에서 그녀가 올라탄 오토바이가 바로 그가 만든 ‘행온’이라는 체감형 레이싱 게임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부터 내가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스승인 스즈키 류가 아닌 그의 제자 ‘타카 유지’에 대해서 인데, 현재 그가 만들어 낸 음속을 달리는 고슴도치 ‘소니크’가 아케이드 시장에서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소니크의 탄생 배경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작년 그러니까 1990년의 NEGA는 슈퍼 패밀리의 등장으로 상당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민텐도보다 1년이나 먼저 16비트 콘솔시장에 뛰어 들었지만, 이렇다 할 히트작이 없던 NEGA는 자사를 대표 할 만 한 마스코트 캐릭터를 만들고 싶어 했다. 민텐도 하면 콧수염난 이탈리아인 마리지가 자동으로 떠올랐지만, NEGA는 아케이드와 콘솔을 비롯해 수많은 게임들을 만들었어도 대표적인 게임 캐릭터가 확 떠오르진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1984년. 소니크의 개발자 타카 유지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무려 2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NEGA에 입사에 성공해 꽤나 실력 있는 프로그래머로 이름을 날렸는데, 88년에 메인 디렉터 자리를 꿰찼을 때의 나이가 무려 22살이었다. 이 젊은 디렉터가 만든 판타지 스타 2는 NEGA 드라이브의 전 세대인 마크3 시스템으로 만들던 중 NEGA 드라이브가 출시되며 플렛폼 변경 요청이 들어왔다. 거기에 당초 보다 NEGA 드라이브 출시가 앞당겨지며 개발 기간이 엄청 단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6개월 만에 훌륭한 RPG게임을 출시해 경영진으로부터 상당히 신임 받는 존재로 성장했다. 그런 타카 유지에게 NEGA는 ‘PM 8’이라는 프로젝트 팀의 팀장자리를 안겨주며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하게 된다. -슈퍼 패밀리보다 훨씬 빠른 연산 속도를 자랑하는 NEGA 드라이브의 CPU 성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슈퍼 마리지보다 몇 배는 더 빠른 캐릭터를 만들 것.- 타카 유지는 NEGA 요청을 수용해 즉각 자신의 팀원들과 아이디어 회의에 들어갔다. 초기에는 빠른 스피드라는 점 때문에 주로 강아지라던가 토끼 같은 귀엽고 발 빠른 동물위주로 캐릭터가 만들어 졌었는데, 그중에 한 디자이너가 만든 토끼 캐릭터가 그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호응을 얻기 시작하자, 타카 유지는 디자이너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빨리 달리는 캐릭터라고 토끼나 강아지를 활용하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발상이 다.- 그는 기획서를 반려 시켰다. 어린 나이치고 굉장히 패기 있는 행동이었다. 그러던 중 판타지 스타 제작 때부터 친분이 있던 오오시마라는 동료가 타카 유지에게 새로운 캐릭터의 원안을 들고 왔는데, 그것이 바로 ‘소니크’ 였다. 굼뜨기로 유명한 캐릭터가 음속의 스피드를 달린다. 타카 유지는 그 고슴도치 캐릭터에게 NEGA를 대표 하는 색상인 파란색을 입혀주고 포인트로 붉은 신발을 신겨주었다. 그리고 탄생한 캐릭터가 음속를 달리는 푸른 고슴도치 소니크였다. 캐릭터가 정해지자, 타카 유지는 ‘PM 8’이라는 팀명을 ‘소니크 팀’ 으로 개명하고 정식으로 게임 개발을 시작했다. 점프를 이용해 적을 죽이거나 스테이지를 클리어 하는 방식은 슈퍼 마리지의 정석을 그대로 옮겨 왔지만, 거대한 맵을 종횡무진 쏘다니는 녀석의 대쉬는 마리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빨랐다. 또한 맵 구성 자체도 슈퍼 마리지처럼 한 갈래가 아닌 양 갈래 때로는 세 갈래까지 갈라지며 맵 클리어에 대한 자유도를 유저들에게 부여해 주었는데, 덕분에 마리지의 시스템을 사용하고도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마리지와는 달리 까칠한 성격의 소니크는 플레이어가 조작을 하지 않고 있으면 건방진 자세로 팔짱을 낀 채 발을 까딱거리며 플레이어를 재촉했고, 하나의 롤러코스터처럼 구성된 맵 디자인은 당시 게임 업계를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그로인해 소니크는 단번에 NEGA를 대표하는 마스코트 캐릭터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거 옛날에 오락실에서 했을 때 제한 시간이 되면 기계에서 삑삑 거리면서 동전 더 넣으라 했을 때 굉장히 짜증났었는데, 그 당시에 기기 안에 실제로 NEGA 드라이브가 들어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지...’ 갑자기 떠오른 추억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소니크가 발매 된 이후 게임 잡지에는 꽤나 자극 적인 선전 문구가 실리기 시작했다. -마리지가 결코 따라 올 수 없는 초스피드의 세계를 경험하라.- 이 당시에는 타사의 성능을 비방하는 네거티브 마케팅도 무리 없이 통과 됐었으니까 별로 특별할 건 없었지만, 민텐도 입장에서는 만년 2위였던 NEGA의 도발이 상당히 신경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카마우치 사장은 공식 회장에서 ‘소니크는 슈퍼 마리지를 베꼈다. NEGA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가 견제해야 할 상대는 오직 펜타곤의 라온 뿐이다.’ 라고 밝혔는데, 당시 그가 한 말을 NEGA 소닉 팀의 개발실에 걸어두고 승부욕을 불태웠다는 일화도 있었다. 소니크의 인기는 NEGA 드라이브를 통해 순식간에 퍼져 나갔고, NEGA는 그 흐름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북미과 유럽시장에 공격적인 마케팅을 시도 했다. 무려 콘솔 구매시 ‘소니크 더 헤지혹’을 번들로 끼워 주는 초강수 마케팅을... 민텐도 그런 NEGA의 마케팅을 미친 짓이라 폄하했다. 콘솔 판매를 이끌어 나가줄 최고의 타이틀을 공짜로 끼워주다니, 슈퍼 패밀리로 치면 콘솔을 구매할 때 슈퍼 마리지를 하나씩 끼워주는 것과 마찬가지인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제 불황으로 인해 민텐도와 NEGA는 북미 시장을 노리고 있었는데, 올 크리스마스 시즌에 NEGA가 제대로 사활을 걸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이 정신 나간 마케팅은 미국과 유럽에서 제대로 먹혀들었다. CF광고에서는 마지리와 소니크를 나란히 놓고 달리게 하는 비교 광고까지 만들어 NEGA 드라이브만이 가지고 있는 스피드 감각을 제대로 보여주자, 북미와 유럽 시장에서 NEGA 드라이브가 미친듯이 팔려나가고 있다는 정보가 나돌고 있었다. “부장님... 강준혁 부장님?” 나는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미야자키씨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미야자키씨 무슨 일 있어요?” “그게, 펜타곤 본사에서 부장님을 찾아서요.” “저를요?” “스탭 사무실에 가셔서 전화를 받아 보셔야 할 것 같은데..” 무슨 일이지? 나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사무실로 향했다. “네. 강준혁 전화 바꿨습니다.” “아, 부장님. 잠시 만요. 대표님과 연결 시켜 드릴게요.” 카와구치씨가 나를 찾은 건가? 잠시 수화기를 든 채 기다리자 카와구치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씨. 방금 NEGA에서 신형 콘솔에 대한 제작 발표회에 대한 초대장을 받았는데요.” “신형 콘솔이요?” “NEGA 쪽에서도 민텐도의 겜보이와 라온을 겨냥해 새로운 휴대용 콘솔 제작을 완료했다는 군요.” 아, NEGA GEAR가 완성 됐구나... 나는 대략적인 기기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초대장에 라온의 대표로 저와 준혁씨가 꼭 참석 해주셨으면 한다고 적혀 있어서요.” “제가요?” 거치기에서 민텐도를 제쳤으니, 이번엔 휴대기기 발표로 라온의 발목을 잡아보겠다 이건가?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카와구치씨에게 물었다. “대표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비록 우리 펜타곤의 제작 발표회에는 참석 하지 않았던 NEGA지만, 굳이 우리도 불참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새로운 휴대기기에 대한 게임 업계종사자들의 반응도 궁금하고요.” “그럼 같이 가도록 하죠. 행사가 언제입니까?” “그게 조금 촉박하군요. 돌아오는 금요일입니다.” “12월 20일이라. 크리스 마스 이브에 출시로 알고 있으니, 뭐 그쯤이 적당하겠네요.” “요새 결혼 준비로 바쁘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아니면 저 혼자 가도 상관 없을 것 같습니다만.” 카와구치씨의 말에 잠시 유키네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라 웃음이 터질 뻔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같이 가도록 하죠.” “그럼 20일에 본사에서 함께 출발하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카와구치 사장과 통화를 끝내는 나는 다른 직원들의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수 화기를 내려놓은 뒤 사무실을 나섰다. ‘소니크 하나 대박 쳤다고 우리가 만만히 보이나 본데, 기대해라. 발표 회장을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어 줄 테니..’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아키바의 거리에서 나는 담배 한대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 1991년 12월 20일. NEGA의 제작 발표 현장에 도착한 나는 우선 지난 펜타곤 제작 발표회 때와 다르게 넓은 이벤트 홀의 인테리어에 감탄했다. 행사 시작 전 마련된 만찬회에서 각종 업계 사람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던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모자를 눌러쓰고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 친구 하나를 만났다. “준페이. 너도 왔냐?” “오~ 왔구나. 펜타곤에선 아무도 참석 안할 줄 알았는데?” “초대장까지 받았는데, 안 오는 건 예의가 아니지.” “민텐도에서는 아무도 안 왔던데? 일전에 카마우치 대표가 NEGA한테 모욕적인 발언해서 그런지. 둘 다 요새 신경전이 장난 아니더라.” 그때 나와 카와구치씨의 등장으로 행사장 분위기가 조금 어수선 해지기 시작했다. “어라? 저기 카와구치 대표랑 강준혁 부장아냐?” “그러게? 펜타곤이 NEGA의 제작 발표회에는 무슨 일이지?” 사람들의 수근 거리는 소리에 준페이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나에게 말했다. “역시 펜타곤 사람들이 등장하니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구만~” 준페이의 과장된 표현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 지난여름에 출시 된 라온은 런칭작인 파이널 프론티어4, 스파2, 슬램덩크와 더불어 최근에 마이티 파이널 파이트, 드래곤 엠블렘 리메이크 판까지 단 5개의 타이틀을 거느리고 무서운 속도로 치고 올라오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시장 자체를 씹어 삼키고 있다고 표현해도 결코 과한 표현은 아니리라. 나는 준페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고는 우리를 초대해준 NEGA 관계자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잠시 후. 서드 파티 인력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스즈키 류와 타카 유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 역시 우리가 설마 진짜로 찾아올 줄은 몰랐는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스즈키씨.” “펜타곤에서 저희 NEGA GEAR의 정식발표회에 참가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아무래도 저희 라온과 라인업이 겹치다보니 도저히 궁금해서 가만히 있을 수 있어야죠.” 능글맞게 인사를 건네자. 스즈키씨는 살짝 입 꼬리를 올리며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기대 하셔도 좋으실 겁니다.” 응. 당신도 기대하는 게 좋을 거야... < EP. 25 : NEGA의 반격 (2) > 끝 ⓒ < EP. 25 : NEGA의 반격 (3) -추가본 수정- > “기대 하셔도 좋으실 겁니다.” 응. 당신도 기대하는 게 좋을 거야... 나와 스즈키씨는 양손을 맞잡은 채 서로에게 싱긋 웃어보였다. 잠시 후. NEGA의 제작 발표회는 굉장히 호화로운 분위기 속에 시작되었다. 가정용 콘솔 업계에서는 민텐도에 많이 뒤처져 있고, 최근에는 라온에게 2인자의 타이틀까지 내줘야 할 판이지만, 아직 아케이드 산업만큼은 아무도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로 굳건히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NEGA의 자존심이 느껴질 정도였다. 나와 카와구치씨는 펜타곤의 명판이 세워진 테이블에 앉아 회장의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호화로운 장내 분위기와는 다르게 서드 파티의 참석률이 저조한 편이네요.” “아무래도 민텐도 쪽에 충성하는 회사가 많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저조할 수밖에요.” “우리도 서드 파티 회유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진 보급률이 민텐도에 한참 못 미치는 터라. 선뜻 넘어오는 회사가 드물더군요.” 런칭 이후, 2년이 지나고 슈퍼 패밀리의 기기 보급률은 차세대 콘솔 중 85%라는 경이적인 수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2위인 NEGA 드라이브가 9%. 라온은 그 뒤를 이어 6%로 3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로열티가 비싸더라도 이 쪽 업계는 기기 보급률이 모든 걸 말해주는 세계이니까. 이미 일본에서만 100만대가 넘게 깔린 슈퍼 패밀리로 게임을 출시하느냐, 이제 갓 태어나 8만대를 겨우 넘긴 라온으로 게임을 출시하느냐... 이미 답은 뻔히 나와 있었다. 그때 장내 조명이 살짝 어두워지며 NEGA를 대표하는 게임 디렉터인 스즈키씨가 단상에 올라왔다. 흐음, 슬슬 시작하는 건가? “안녕하십니까. 바쁘신 와중에 저희 NEGA의 게임 제작 발표회에 참석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장내를 둘러보던 스즈키씨는 잠시 나와 눈을 마주친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현재 우리 게임 업계는 큰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고객인 게이머들은 그것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민텐도라는 공룡 기업의 횡포를 말이지요.” 음.. 시작부터 저런 식으로 공감대를 얻어 내려는 발상은 좀 위험한데? 게임 회사는 오직 게임으로만 승부해야한다. 재미있는 게임이 있다면 오직 그 게임 하나만 바라보고서라도 콘솔을 구매하는것이 게이머들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더욱 퍼스트 파티가 발매하는 독점 게임들이 중요한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먼 미래에서도 모든 서드 파티을 잃은 민텐도의 콘솔을 오직 마리지와 카린의 전설 시리즈만 믿고 콘솔을 구매하는 팬 보이들이 있었을 정도니까. “현재 민텐도는 서드 파티들에게 어마어마한 로열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비디오 게임을 사랑하는 게이머들에게 고스란히 피해가 돌아가고 있지요. 이 악순환의 연쇄 고리를 끊기 위해선 이 자리에 계신 모두가 힘을 합쳐 민텐도에 대항해야 합니다.” 하지만 회장의 분위기는 펜타곤 때와는 달리 굉장히 차갑게 식어 있었다. 왜냐고? NEGA의 행사장에 참여한 서드 파티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지.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NEGA의 세컨드 파티들이다. 그것도 여차하면 그 자리마저 박차고 민텐도 쪽으로 붙고 싶어 하는 회사들도 더러 보였다. 그만큼 훌륭한 게임을 만들어 놓고도 판매량이 저조한 작품들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현재 NEGA의 세컨드 파티를 유지하고 있지만, 차후 민텐도로 넘어가는 ‘성검 란그릿사’의 제작사 ‘데사이야’가 가장 대표적인 피해자라 볼 수 있다. 펜타곤 소프트의 제작 발표회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누구도 펜타곤에서 새로운 기종의 콘솔 발표를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저 조금 잘나가는 게임 회사의 제작 발표회인 줄로만 알고 있었기에 수많은 서 드 파티들은 아무 부담 없이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만약에 펜타곤이 발표회 전에 콘솔을 만들고 있다고 대놓고 선전 했다면, 민텐도의 눈치를 보는 서드 파티들이 그 만큼 모였을 리 만무하다. 스즈키씨는 자신의 예상보다 차가운 회장의 반응에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내 옆에 있던 카와구치씨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거 잘 못하다간 되려 역풍 맞겠는데요?” “오늘 이 자리는 단순한 제작 발표회가 아니니까요. 세컨드 파티들 입장에서 오늘은 주주총회나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도 NEGA 드라이브를 믿고 계속 게임을 만들어도 될지 판단하는 자리라는 생각이 드네요.” 스즈키씨는 싸늘한 행사장의 반응을 환기시키기 위해 서둘러 프로젝터의 스위치를 올렸다. 그와 동시에 무대 중앙의 새하얀 스크린에 현재 북미와 유럽 시장의 NEGA 드라이브의 판매 수치가 떠오르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헐... 소니크 껴주더니 많이도 팔아 재꼈네...’ “북미에서 NEGA 드라이브가 저 정도일 줄이야..” “그러게.. 한 몇 만대 더 나간 줄 알았더니, 슈퍼 패밀리랑 거의 동급 수준이잖아. 아니, 오히려 조금 더 앞서고 있는 건가!?” 그제서야 스즈키씨의 표정은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다시 자신만만한 미소로 돌아왔다. “보시다시피 이번 크리스마스 시즌 동안 NEGA 드라이브는 어제까지 약 250만 대가 팔렸습니다. 사실 경쟁사인 민텐도의 슈퍼 패밀리 판매량보다 조금 더 앞서고 있지요.” “오오.. 굉장한데?” “이런 판매 수치가 가능했던 것은 NEGA 드라이브의 정가를 낮추며 현재 아케이드 센터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소니크 더 헤지혹’을 번들 타이틀로 제공했던 공격적인 마케팅 덕분이었습니다.” NEGA 드라이브의 판매 그래프는 확실히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동안 민텐도의 슈퍼 패밀리가 이토록 판매 경쟁에 밀려 본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카와구치씨 역시 NEGA 드라이브의 판매량에 혀를 내두르며 감탄할 정도였다. “이거.. NEGA에서 은근히 치고 나가는데요?” “…….” 나는 묵묵히 팔짱을 낀 채 스즈키씨의 발표 내용에 집중했다. 곧이어 그는 술렁이는 장내는 진정 시킨 뒤 말을 이었다. “NEGA 드라이브의 반격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그럼 이어서 뛰어난 연산 처리 CPU의 이점을 살린 새로운 게임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먼저 만나보실 게임은 바로 이 작품입니다.” 스즈키씨가 인사와 함께 단상에서 물러서자 본격적인 신작 발표회가 시작되었다. 먼저 화면에 등장한 게임은 NEGA 드라이브를 대표하는 게임 중에 하나였다. 샤이닝 프레셔 ?신들의 유산- 전작에서 던전 탐험 RPG로 큰 인기를 끌었던 샤이닝 프레셔의 두 번째 작품은 장르가 SRPG로 바뀌어 있었다. 게다가 전투 시 주인공 캐릭터의 뒷모습을 사선으로 비춰주며 적과 대치중인 원근감을 표현해내 박진감 넘치는 전투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라? 샤이닝 프레셔가 원래 SRPG였나?” “그러게 장르를 바꾼 것 같은데?” 새롭게 단장한 샤이닝 프레셔의 모습에 장내의 분위기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저 전투 구도를 보니 어릴 때 PC로 즐겼던 용의 기사2 가 생각나네.. 나는 천천히 턱을 쓰다듬으며 말없이 샤이닝 프레셔의 데모 영상을 감상했다. 이윽고 준비된 데모 영상이 끝나고 발매일에 대한 메시지가 떠오른 순간.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발매일 1992년 3월 22일.- ‘이거 드래곤 엠블렘 2와 발매일이 얼추 비슷하겠는데?’ 뒤이어 내가 익히 알고 있던 NEGA 드라이브 전용 게임들의 데모 영상 몇 편 더 흘러 나왔다. 그중에 반응이 좋았던 것은 게임 센터에서도 상당히 인기를 끌고 있는 ‘베어 너클’ 과 NEGA의 대표게임 중에 하나인 ‘시노비’였다. 소수 정예라고 표현할 수 있는 민텐도 퍼스트 게임과는 달리 아케이드 게임의 이식을 통해 수많은 자사 게임을 거느리고 있는 NEGA는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게임이 꽤나 많았다. 특히 마지막에 NEGA 드라이브용 ‘황금 도끼2’ 가 공개 되었을 때는 행사장 안의 분위기가 최고조로 달라 올랐다. “NEGA가 내년에 크게 한번 터뜨려줄 모양이군.” “이거 기대 되는데?” 스즈키씨는 회장 분위기에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무대를 밝혔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내년에 출시될 게임들의 데모 영상이었습니다.” 환호성과 함께 박수 소리가 회장을 뒤덮자, 나 역시 묵묵히 스즈키씨에게 박수를 보내주었다. “사실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깜짝 발표를 하나 하려 합니다.”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행사장은 스즈키의 발표에 또 한 번 함성이 쏟아졌다. “최근 저희 NEGA와 협의 중인 새로운 서드 파티 게임에 대한 정보입니다. 아직 그들과 최종 협의가 끝나지 않은 상태라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어떻게든 저희 NEGA로 끌어 들이기 위해 노력중인 작은 소프트 회사의 작품입니다. 지난 달 패미통신에게 간단히 소개 된 적이 있죠?” 그러자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준페이가 엉덩이를 들썩 거리며 외쳤다. “설마!? 트라이포스 소프트?” 그러자 스즈키씨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역시 패미통신 기자 분이시군요. 제목은 아직 미정입니다만 즐겁게 감상해 주세요.” 스즈키의 멘트가 끝남과 동시에 장내가 어두워지자, 옆에 있던 카와구치가 나에게 귓속말을 걸어 왔다. “이건 좀 충격인데요? 저희도 트라이포스 소프트와 협의 중이었는데, NEGA에서 미리 손을 써두었을 줄이야..” 나는 카와구치씨의 말에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일단 지켜보죠.” 잠시 후. 화면에 밝은 햇살이 비치며 비가 내리는 마을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판타지 분위기의 RPG 게임은 지금까지 등장했던 게임들과 별로 다른 점은 없었다. 단지 조금 더 그래픽이 화사하달까? 하지만 잠시 후. 전투 장면에서 회장에 모인 사람들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뭐야, 저거?” “설마 전투에서는 캐릭터를 직접 조작할 수 있는 건가” 방패와 검을 들고 있는 기사가 좌우로 움직이며 직접 적과 부딪혀 싸우는 모습에 사람들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렇게 전투시에 횡스크롤을 이용해 대전을 하는 게임은 전에도 여러 차례 본적이 있었지만, (예를 들어 카린의 전설2 라던가) 이토록 깔끔하게 전투씬을 구현한 게임을 본 적이 없었다. 화면 안에 등장한 전사는 손에 든 검을 연격으로 휘두르며 독특한 전투씬을 선보이고 있었다. “우와아아아아!!!!” 몬스터를 향해 달려든 전사가 점프와 함께 힘껏 검을 내려치자, 동료로 보이는 빗자루를 타고 있는 여마법사가 뒤에서 파이어 볼을 날리며 그의 공격 보조 해주었다. 자신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골렘의 공격을 방패로 막아낸 전사가 데미지를 입자, 이번엔 승려복을 입은 여사제가 곧장 그의 HP를 회복 시켜주었다. 이 모든 전투 애니메이션이 횡스크롤 기법으로 하나의 전투 씬에서 모두 이루어지자, 회장에 모인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흔히 이시대의 RPG 게임이라면 드래곤 워리어나 파이널 프론티어와 같은 턴제 형식의 전투가 일반적이었는데, 지금 화면에 보여주는 전투 모션은 그냥 액션 게임이라고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특히나 아케이드 게임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음성 시스템의 도입은 사람들을 다시 한 번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점프 공격과 함께 연격으로 오른쪽 구석으로 적들을 몰아세우던 전사가 왼쪽에서 다가오는 떨어진 적에게 검기를 쏘아내며 외쳤다. “폭풍검!!” “오오오!! 음성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RPG지만 독특한 전투씬을 선보인 작품은 천천히 화면이 페이즈 아웃 되며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이상으로 트라이포스 소프트에 대한 깜짝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그러자 패미통신 기자 준페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스즈키씨에게 물었다. “트라이포스 소프트가 확실히 NEGA 드라이브 플렛폼으로 제작 발표를 한 것입니까?” 스즈키씨는 준페이의 질문에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대답했다. “아직 트라이포스 소프트에서 확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보여드린 영상은 확실히 NEGA 드라이브용으로 포팅 된 실기 영상임을 알려드립니다.” NEGA 드라이브용으로 포팅 되었다는 스즈키씨의 대답에 사람들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모양이었다. 카와구치씨 역시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미 저 정도 배틀씬을 완성 했을 정도라면 트라이포스 소프트는 거의 NEGA 드라이브 쪽으로 넘어갔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글쎄요. 그건 아직 모르죠.” 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스즈키씨를 향해 살짝 손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스즈키씨.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 질문 좀 해도 될까요?” < EP. 25 : NEGA의 반격 (3) -추가본 수정- > 끝 ⓒ < EP. 25 : NEGA의 반격 (4) > 지난화에 분량을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참고해주시고 읽어 주셨으면합니다. ------------------------- “스즈키씨.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 질문 좀 해도 될까요?” 내 목소리에 행사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단번에 나에게로 향했다. “네. 그러세요.” “방금 보여 주신 게임. 확실히 NEGA 드라이브용으로 제작된 포팅 맞나요? 제가 알기로 NEGA 드라이브는 CPU연산 속도는 높지만, 그래픽 부분에선 스프라이트 기능이 슈퍼 패밀리와 비교해 떨어지는 걸로 알고 있는데, 방금 보여주신 영상은 NEGA 드라이브의 그래픽 성능을 훨씬 웃도는 것으로 보이던데요?” 그러자 스즈키씨는 나의 질문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듣고 보니, NEGA 드라이브 치고는 그래픽 퀄리티가 너무 높은 것 같은데?” 당시 NEGA 드라이브의 그래픽 성능은 슈퍼 패밀리의 반도 못 따라가는 수준에 불과 했기에 전체적인 색감의 톤이 한 단계씩 어두웠다. 그래서일까? 대부분의 게임이 화사한 색감보단 조금 칙칙한 색을 띄고 있었다. 이것은 차후 NEGA 드라이브 용으로 제작되는 게임들의 게임성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베어 너클이나 마이클 잭슨 같은 게임이 밝은 대 낮보단 밤이나 어두운 실내 스테이지가 많았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를 바탕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즈키씨는 당황하지 않고, 여유 있게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준혁씨의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으로 설명을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러자 잠시 후. NEGA 측 직원 하나가 단상 위로 무언가를 들고 올라왔다. 행사장 안의 사람들은 크고 묵직한 기기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 거렸다. 직원은 스즈키씨에게 기기를 넘겨주고는 서둘러 단상을 내려갔다. “여러분은 지금부터 새로운 시대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들고 있는 이 장치는 머지 않은 미래에 게임 업계에 가장 큰 혁신을 가져다 줄 물건입니다.” 저거 설마.. 그건가? 스즈키씨는 직원에게 넘겨받은 검은색 기기를 자랑스럽게 우리에게 내밀며 소개했다. “소개드립니다. NEGA 드라이브의 새로운 주변기기인 NEGA CD입니다.” “…….” 드디어 저 희대의 망작이 튀어 나오는구나.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신기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게 뭐지?” “설마 CD를 사용하는 건가?” 놀라워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즐기듯 스즈키씨는 천천히 단산 한 켠에 마련된 NEGA 드라이브 밑에 손에 들고 있던 기기를 장착 시켰다. 그러자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NEGA 드라이브와 NEGA CD가 마치 하나의 기기처럼 합체했다. “우와아아!!!!” 그래... 나도 어릴 적 친구네 집에서 처음 저 물건을 봤을 땐 선채로 오줌 지리는 줄 알았지. 전자기기의 합체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리고 먼 미래까지도 남자들의 로망이니까. “앞으로 우리들은 카트리지 용량에 대한 규제에서 벗어나 누구나 650메가의 방대한 데이터를 자유롭게 쓸 수 있습니다.” 650메가의 방대한 데이터라... 하긴 이 90년대 초반에는 씨디 한 장의 용량이 웬만한 하드 드라이브 보다 용량이 더 컸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저 극악의 로딩 속도에 대해선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구나. 스즈키씨는 이어서 NEGA 드라이브를 NEGA CD에 장착 할 시 향상되는 시스템의 성능을 어필하며 개발자들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런 성능의 개선으로 방금 트라이포스에서 제작 중인 게임의 그래픽을 개선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답변이 좀 되었나요? 강준혁씨?” “아주 훌륭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 되는 점이 있군요. 분량 고용량의 CD를 사용하는 것은 좋은 정책이긴 한데, 아무래도 카트리지 보다는 데이터를 읽어 들이는 속도가 떨어질 것 같은데, 그에 대한 대비는 있나요? 아까부터 로딩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으시던데...” 마치 명치를 세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잠시 머뭇거리던 스즈키씨는 내가 물은 질문에 전혀 엉뚱한 답을 내놓았다. “그것은 프로그래머의 코딩 능력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부분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대답해 드리기가 힘들네요.” ‘그래서 너희가 만든 소니크 CD 버전은 한판 할 때마다 10초씩 기다리게 만들었냐..?’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 같지만, 어차피 내가 NEGA 드라이브용 게임을 포팅 할것도 아니기에 그만 두기로 했다. 행사장의 분위기는 기기의 성능을 끌어 올려주는 새로운 주변기기의 탄생을 굉장히 반기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NEGA CD의 가격이 공개 되자, 행사장의 분위기는 한순간에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NEGA CD 정가 49,800엔.- “…….” 주변 기기 하나가 본체보다 비싸면 어쩌라는 거지? NEGA는 항상 시대를 앞서 나가는 독특한 기술을 잘 이용했는데, 문제가 있다면 그것들이 시대를 너무 앞질러 나간다는 점이다. CD 매체의 게임들의 보편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90년대 중반부터 인데 반해 NEGA CD는 그들 보다 약 4년 정도 빨리 나온 편이다. 내가 알고 있는 NEGA CD의 최후는 고용량의 데이터를 사용할 만 한 게임조차 없는 마당에 CD의 비어있는 용량을 써보겠답시고, 고음질의 BGM이나 캐릭터에 음성을 추가하며 게이머들의 구매욕을 자극 했지만, 워낙에 비싼 가격과 극악의 로딩 속도로 인해 보급에 실패한 것으로 알고 있다. NEGA CD 전용으로 나온 게임 타이틀의 개수가 열 손가락 안에 꼽혀질 정도면 말 다한 거지.. 이윽고 새로운 주변기기에 대한 설명이 모두 끝나고 마지막으로 등장한 녀석은 바로 NEGA GEAR라는 휴대용 게임기였다. 이미 민텐도의 겜보이와 펜타곤이 만든 라온의 등장으로 독자적인 콘솔 노선을 만들어낸 휴대기기 시장은 NEGA에게도 상당히 먹음직스러운 시장이 아닐 수 없었다. NEGA의 세컨드 파티 역시 휴대기기가 가진 파급력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던 상태라 NEGA GEAR에 거는 기대가 몹시 컸다.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만든 라온으로 인해 NEGA GEAR의 성능에 어느 정도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닌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나의 기대는 잠시 후 거대한 실망이 되어 돌아왔다. 8비트의 CPU 스펙.. 소니크의 빠른 움직임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잔상을 남기는 플레이 화면. 여러모로 부족한 부분이 많이 들어나 보이자, 실망한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와구치씨. 전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벌써 가시게요?” “더 이상 여기 있는 건 시간 낭비인 듯하네요.” 나는 의자에 걸어두었던 외투를 챙겨들고 유유히 행사장 밖을 빠져 나왔다. 차를 세워둔 주차장으로 향하던 길. 잠시 발걸음을 멈춘 나는 NEGA의 제작 발표회가 있었던 이벤트 홀을 바라보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NEGA에 대해 너무 기대했나? 이 정도 수준이면 준비해 두었던 패를 미리 공개 할 필요도 없지.’ 잠시 후 나는 휴대용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는 차에 올랐다. & 1991년 12월 24일. 흥겨운 캐럴과 함께 거리마다 알록달록한 조명이 빛나는 크리스마스 이브. 해 마다 아이들에 대한 여론 조사로 크리스마스 선물로 가장 받고 싶은 선물 꼽으라면 TOP 3 안에 반드시 들어가는 것이 바로 게임기였다. NEGA는 바로 이 크리스마스의 특수성을 노리고 2개의 새로운 제품을 출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제작 발표회에 나왔던 NEGA CD와 휴대용 콘솔인 GEAR 두 모델이었다. NEGA는 발매 이전부터 CD를 통해 이루어지는 고화질과 고음질의 게임 환경에 대해 어마어마한 마케팅 비용을 쏟아 부었지만, 결과는 글쎄... “무슨 주변기기 가격이 5만엔이나 해?” “갖고 싶어~ 사줘~~” “안 돼. 얘가 미쳤어. 무슨 선물로 5만엔짜리 게임기를 사달라고 해?” 오늘따라 어머니에게 등짝 스매싱을 당하는 꼬맹이들이 거리에 넘쳐나는 구나.. 타마고 샵에서 소비자들의 반응을 지켜보던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동시 발매한 게임은 NEGA의 대표 게임인 소니크 더 헤지혹 CD 단 하나. CD라는 새로운 매체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의 반응은 굉장히 싸늘했다. 이것이 만약 3~4년 전쯤 출시되었으면 상황이 조금 나았을지도 모르나 지금은 대 불황의 시대. 아무리 기기 성능이 올라간다고 해도 요즘 같은 시기에 5만엔이라는 거금을 고작 주변기기에 쓸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일까? 내가 보기엔 수많은 마케팅 비용을 쏟아 부은 NEGA CD보다 오히려 NEGA 드라이브가 훨씬 더 반응이 좋아 보였다. 한편 펜타곤의 타마고 샵 역시 크리스마스 기간 중 수많은 고객들로 발을 디딜 틈이 없이 붐볐다. 그것은 크리스마스 전후로 원하는 타마고를 곧바로 손에 넣을 수 있는 자판기를 운영한 덕이 컸다. 이미 타마고 몬스터만 해도 ‘스트리트 파이어2의 타마고’ 라던가 ‘파이널 파이트의 타마고’가 추가되어 총 5종류의 타마고 몬스터 기기가 있었기에 새로운 타마고 몬스터를 원하는 아이들이 손쉽게 기기를 뽑아가곤 했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값비싼 게임기를 사주는 것 보다 타마고 몬스터 하나가 오히려 싸게 먹혔기에 부담 없이 아이들에게 여러 개의 타마고 몬스터를 사주는 사람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미야자키씨를 비롯한 수많은 펜타곤 직원들은 크리스마스 기간 중에 몰려드는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다들 힘을 내서 서로를 격려 하며 무사히 크리스 마스 이브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부장님. 수고 하셨습니다.”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 타마고 몬스터는 자판기를 이용하는 판매 방식이지만, 역시나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나는 수고해준 직원들에게 격려차 금일봉을 전달해 준 뒤, 곧장 차에 올랐다. “부장님. 이제부터 유키씨 만나러 가시나요?” 타마고 샵에서 공개 프로포즈를 한 덕에 몇몇 직원들은 가끔 유키의 안부를 묻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본사에 갑니다.” “네?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인데요?” “크리스마스 이브에 본사에서 야근 중인 사람들이 있거든요.” “네? 정말요?” “그럼, 먼저 갑니다.”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타마고 샵을 떠난 나는 곧장 펜타곤 사무실로 향했다. 회사 근처에서 야식 거리를 사들고 사무실에 들어서니 한적한 사무실 안에 어디선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긴 곳은 내가 관리하는 제 2 개발팀이었다. 끼이이익 “어라 부장님 오셨어요?” “다들 수고한다. 이거 먹고들 해.” 테이블 위에 야식 거리를 올려두자, 허기졌는지 직원들이 성난 맹수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봉투에서 캔커피를 꺼내어 하야시와 모리타에게 하나씩 건네주자, 그들은 한숨 돌리려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굳은 허리를 풀었다. 사이킥 포스의 완료 이후 거의 곧바로 드래곤 엠블렘 2 작업에 들어간 직원들은 다들 피곤에 절어 있었다. “다들 미안하다. 가급적 야근 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자 내가 사온 샌드위치를 입에 우겨 넣던 직원 하나가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재밌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아뇨. 정말입니다. 부장님이 기획하신 게임은 만들 때마다 유저들의 반응이 머릿속에 그려져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거든요. 모두가 기대중인 드래곤 엠블렘 2의 장르가 SRPG가 아니라니 다들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 EP. 25 : NEGA의 반격 (4) > 끝 ⓒ < EP. 26 : 태동(胎動) (1) > & 1992년 1월 1일. 보통 신년 초하루는 가까운 신사에 들러 참배를 드리는 것이 일본인들의 문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인들의 신년 문화일 뿐이고, 게이머들에게 1992년의 1월 1일은 기다리고 기다렸던 드래곤 엠블렘 2의 체험판 배포 날이었다. 거기다 바로 어제인 12월 31일. 전국 최초로 오픈 식을 거행한 사이킥 포스 전용 아케이드 센터는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사이킥 포스 ‘전용’ 이라는 문구에 맞게 모든 기기를 사이킥 포스 기판만으로 가득 채운 이곳은 그동안 기다림에 목말랐던 게이머들의 갈증을 단번에 해소 시켜주었다. 게임 잡지계에서 나름 인지도가 높은 준페이는 시작과 동시에 보스에게 목숨을 잃은 자신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소설화하여 리뷰 코너에 실었고, 그것은 게이머들에게 굉장히 좋은 반응을 얻었다. ‘준페이 녀석한테 이런 글재주가 있을 줄이야...’ 녀석의 글을 본 나는 너무나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문장 표현력에 잠시나마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그래도 사회 좀 보라고 시켰더니, 디오라마 피규어에 눈이 멀어 가지곤..’ 어찌보면 인과응보다. 괘씸한 녀석. 감히 유키랑 몰래 짜고 나를 공개 프로 포즈로 밀어 넣더니. 쌤통이구나. 건물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워둔 나는 언제나와 같이 서류 가방을 챙겨들고 계단을 올라왔다. 매장에 방문하기 전 담배나 한 대 태울 겸 입가에 연초를 가져가던 나는 눈앞에서 벌어 진 광경에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헐... 드래곤 엠블렘 2를 기다렸던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았나?’ 단지 체험판 배포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다운로드 대기 줄은 건물을 한 바퀴 휘감고도 모자라 전철역 앞의 광장까지 뻗어나가 있었다. 하지만 예전과 조금 다른 풍경이 하나 있다면, 다들 손에 라온 하나씩을 붙들고 데이터 케이블을 이용해 통신 대전을 즐기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스트리트 파이어2를...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슬램덩크를... 혼자 온 고객은 이어폰을 귀에 꽂은 파이널 프론티어나 드래곤 엠블렘을 즐기고 있었다. 덕분에 기다리는 시간도 즐거운지 다들 대기 줄을 유지한 채 신나게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부장님!? 벌써 오셨어요?”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오늘부터 타마고 샵 부점장으로 승진한 미야자키씨가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긴 하지만, 내방 고객들의 인기투표에서 항상 ‘이 달의 사원’ 1위를 여러 번이나 차지한 그녀였기에 그녀의 부점장 발탁에 이의를 제기라는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미야자키씨. 승진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이게 다 부장님께서 저를 좋게 봐주신 덕분이죠~”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유저 분들이 미야자키씨를 선택한 거나 마찬가지인데요” 그러자 그녀는 쑥쓰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내 시선을 피했다. “그나저나 오늘도 엄청 바쁠 것 같은데요? 혹시 데이터 다운로드에 대한 공유기 사용법은 숙지 하셨어요?” “물론이죠~ 어젯밤 폐점 후 펜타곤 직원 분들이 공유기 업그레이드를 해주시자 마자, 제가 1등으로 받았는 걸요~” 미야자키씨는 유니폼 안주머니에서 플래시 메모리 카트리지를 꺼내 나에게 흔들어 보였다. 그때 우리를 바라보던 대기 중인 사람들 입에서 수근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있는 여 직원 분 벌써 체험판 다운로드 받았나 봐?” “그러게, 펜타곤 직원인가 본데? 부럽다...” 사람들의 목소리에 창피했는지 그녀는 혀를 쏙 내민 채 스탭실로 후다닥 사라졌다. 잠시 후. 타마고샵 한 켠에 마련된 데이터 공유기의 검수가 모두 끝나고 개장 개점을 알리는 벨소리와 함께 셔터가 올라가자, 미처 인사를 건 낼 틈도 없이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손님. 각 공유기 앞으로 한 줄씩 줄을 서주세요.” 이미 여러 번의 행사를 경험해본 직원들은 능숙하게 손님들 사이를 파고들어 줄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손님들간에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직원들의 도움으로 드래곤 엠블렘 2의 체험판은 순조롭게 배포되기 시작했다. 데이터 공유기 옆에 각각 배치된 직원들은 손님이 건네주는 플래시 메모리 카트리지를 받아 드래곤 엠블렘 2 체험판 복사를 도와주었다. 그때 행사장 내부에서 드래곤 엠블렘의 장대한 테마곡이 흐르자, 다운로드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와~ 진짜 타이틀곡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인다.” “그러게 이번엔 어떤 잔학한 스토리를 보여주려나...” 대기 줄에 서있던 두 남자의 대화에 괜스레 가슴이 뜨끔한 나는 잠시 뒤로 물러나 그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한 사람 당 드래곤 엠블렘의 체험 판을 다운 받는 시간은 약 3분에서 4분 남짓. 처음으로 체험판을 배포 받은 유저들은 어느새 샵 안에 마련된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체험판을 돌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 거리기 시작했다. “뭐지? 이거??” “장르가 바뀐 것 같은데?” 유저들은 화면에 버젓이 나타난 캐릭터 생성 창에 의아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정도 게임에 정통한 플레이어 몇몇이 재빨리 캐릭터 생성을 마치고 본편에 돌입했다. “이 인터페이스는 마치 육성 시뮬레이션 같잖아?” “으잉!? 진짜 그러네?” 그러자 다운로드를 기다리고 있던 대기 줄에서 몇 가지 질문이 그들에게 쏟아졌다. “육성 시뮬!? 진짜에요??” “장르가 바뀐 건가? 육성 시뮬레이션이면 프린세스 메이커??” 이 시기의 게이머들에게 육성 시뮬레이션은 생소한 장르가 아니었다. 작년 가을. ‘카이낙스’ 라는 곳에서 ‘공주 만들기’라는 작품으로 육성 시뮬레이션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 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전에도 프린세스 메이커와 비슷한 형식의 캐릭터 육성 게임은 존재했지만, 하나의 캐릭터를 유저의 취향대로 키워낸다는 것에서 카이낙스의 프린세스 메이커는 육성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 부분에서 그 초석을 다진 기념비 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던 전략 RPG 게임인 드래곤 엠블렘이 뜬금없이 육성 시뮬레이션으로 장르를 바꾼 것에는 제 작년 펜타곤이 주최한 제작 발표회 때 보여준 ‘성왕 크로엘’의 패배와 관련이 있었다. 성왕이 쓰러지고 부활한 마왕이 다시 인간계를 지배하는 드래곤 엠블렘 2부의 시대는 프롤로그부터 굉장히 암울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게임을 시작하면 플레이어는 캐릭터의 성별부터 시작해서 나이, 직업, 특기에 대해 정해진 파라메터 안에서 초기 수치를 부여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RPG의 시초라 할 수 있는 TRPG인 던전 & 드래곤과 매우 닮아 있었다. 그렇게 캐릭터 생성이 끝나면 간단한 프롤로그에서 유저들은 또 한 번 충격을 맛보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 앞에 던져진 세계는 ‘성왕 크로엘’이 패하고 이미 200년이란 시대였기 때문이다. 전작 주인공의 패배로 복수심에 불타올랐던 유저들은 다시 한 번 마왕 타도를 외치며 달려들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그런 상황에서 플레이어의 이야기는 어느 작은 산골 마을에서 시작한다. 전사나 마법사로 직업을 선택했다면 몬스터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용병단으로서... 사제를 선택했다면 마을의 병자를 돌보거나 포션을 제조하는 약사로서... 음유 시인을 선택했다면 마을 사람들에게 편안한 안정을 가져다주는 음악사로서... 각 직업을 선택 할 때마다 마을의 구성원 중에 하나가 되어 캐릭터를 키워나갈 수 있었다. 이 시대의 게이머들은 참 재밌는 점이 있다. 굳이 미래에서처럼 게임 초반에 튜토리얼을 만들지 않아도, 알아서 스스로 게임의 시스템을 파악해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올드 게이머들의 고집이다. 이 시대에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은 먼 훗날 ‘올드 게이머’라는 계층으로 불리게 되는데, 복잡해지는 게임 플레이 속에서도 튜토리얼 따위는 그냥 스킵 해버리는 버릇은 먼 미래에도 마찬가지였다. ‘하기사.. 나만 해도 화염병만 던지면 쉽게 깰 수 있는 보스를 죽자고 검만 휘둘러 5번 죽고 겨우 깼었지... 그러고 보면 올드 게이머들은 게임 아이템을 진짜 아낀단말야? 죽을 때 싸가지고 갈 것도 아닌데, 언젠가 위급할 때 써야지. 위급할 때 써야지 하다가 엔딩까지 싸짊어지고 간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었지...’ 나는 커피 한모금과 함께 피식 웃음을 삼키며 점점 늘어나는 드래곤 엠블렘 2의 플레이어들을 바라보았다. “캐릭터 키우는 게 한명 밖에 안되네... 무슨 직업으로 키우지?” 그때 묘하게 눈치 빠른 플레이어 하나가 기묘한 가설을 내놓았다. “전사, 마법사, 사제, 궁수, 음유시인. 이거 모두 전작에서 나왔던 영웅들의 초기 직업이잖아? 그럼 나중에 클래스 체인지가 가능 하단 말인가?” “어억!! 진짜 그러네?” “이거 말고도 전작이랑 이어지는 뭔가가 있을 것 같은데...” “그럼 난 궁수 해야지. 신궁의 녹티스... 난 솔직히 크로엘 보다 녹티스를 더 좋아했거든.” “그럼 난 여 마법사. 언젠가 미레아처럼 폭염술사로 전직 할 수 있으려나...?”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장르가 바뀌어 어리둥절해 하던 사람들은 곧 기대에 찬 눈으로 드래곤 엠블렘 2를 즐기기 시작했다. 사실 캐릭터를 하나 밖에 생성하지 못하는 이유 역시 전작에서 가져온 시스템 중에 하나인데, 아직 그것까진 눈치 채지 못했나...? 그때 가장 먼저 마을 밖에 몬스터 퇴치를 의뢰 받은 플레이어 하나가 입을 열었다. “어? 이거 전투 시스템이 장난 아닌데?” “뭐? 왜??” “공격 할 때 타이밍이 나와서 그것에 맞춰 누르면 연격할 수 있고, 적이 공격 할 때 타이밍을 잘 맞추면 방어 할 수 있어.” “뭐야? 그럼 RPG 게임인가?” “아니, 분명히 초기화면은 육성 시뮬인데, 의뢰를 받으면 RPG처럼 마을 밖으로 돌아다닐 수가 있네? “난 약사 의뢰 받았더니, 재료를 구해서 아이템을 만들라는데?” “으잉?? 대체 뭐야 이거...” “아무래도 안되겠어. 집에 가서 천천히 플레이 해봐야지.” 혼란에 휩싸인 유저들은 서둘러 가방을 챙겨 행사장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대체 왜 눈앞에 게임을 만든 디렉터가 있는데, 아무도 플레이 방법에 대해 물어보질 않는 거야~!!’ 하는 수 없이 나는 사람들이 행사장을 빠져 나가기 전에 준비해 두었던 영상을 플레이 시켰다. 갑작스레 재생된 영상에 걸음을 옮기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멈춰서 천장에 걸 린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어...? 뭐지?” 화면 안에는 드래곤 엠블렘의 테마곡과 함께 간단한 플레이 방법에 대해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캐릭터의 육성과 그에 따른 시나리오의 변화에 대해 눈치 챈 유저들의 입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초반에 캐릭터를 만들고 그것을 키워내는 것은 그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내가 어릴 적 재밌게 즐겼던 게임 중에 말야... 블리저드에서 만든 ‘워 크레셔’ 라는 게임이 있었지. 인간과 오크족의 대규모 전투를 그린 전략 시뮬레이션은 완벽하고 세밀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대규모 온라인 RPG를 만들었었는데.. 드래곤 엠블렘 2를 통해 내가 이루고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완벽하고 치밀한 세계관. 우선은 그것부터 만든다.. 스크린에 재생되던 영상은 이윽고 마지막에 단 한 줄의 문장을 남기고 종료 되었다. -거대한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쥔 마지막 플레이어가... 드래곤 엠블렘 2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우... 우와아아아아!!!!!" < EP. 26 : 태동(胎動) (1) > 끝 < EP. 26 : 태동(胎動) (2) > -거대한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쥔 마지막 플레이어가... 드래곤 엠블렘2의 주인공이될 것입니다.- "...우...우와아아아아!!!!" 저 말은 차후에 잡지를 통해 정식으로 알리겠지만 사실이다. 나는 드래곤 엠블렘2의 모든 시나리오를 가장 먼저 끝장낸 최초의 플레이어를바탕으로 엔딩을 구상중이니까. 음...? 방금 뭔가 좀 말이 좀 이상하다는 걸 느끼지 않았나? 이미 만들어진게임에 대해 엔딩을 구상중이라니, 말이 안되잖아. 하지만 이렇게 설명하면 누구나 단번에 알아들을 것이다. -드래곤 엠블렘의 두 번째 이야기는 총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 이제 대충 감이 오지 않나? 유저들에게 드래곤 엠블렘의 서계관을 정확하게어필시키기 위해서는 스토리 중심의 게임보다 유저들이 직접 그세계를 착실히탐험하는 느낌을 전달해 주어야 했다. 그러기에 단 한편의 이야기로 모든것을 설명하기에는 카트리지의 용량이 턱없이부족하다는 것을 느낀 나는 드래곤 엠블렘의 두번째 이야기를 3부작으로진행 시켰다. 우선 첫 번째 드래곤 엠블렘2의 기본적인 인터페이스는 방금 전 어느 유저의 말처럼 '육성 시뮬레이션'과 매우 흡사했다. 게임의 시작과 동시에 플레이어가 만들어낸 캐릭터는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린 설정으로 어느 작은 마을의 외각에 위치한 통나무집에서 몇 년 동안 마을을 도우며 살아가고 있다. 유저들이 초반에 선택한 직업에 따라 배정되는 마을의 의뢰를 수행하며 캐릭터를 성장 시켜 나간다. 그리고 레벨 업을 하며 얻는 능력치 포인트를 직접 배분해서 자신만의 캐릭터를 키워 낼 수 있는데, 배분하는포인트에 따라 여러 갈래의 직업으로 전직이 가능 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물론 내가 준비한 히든 클래스도 숨겨져 있지.' 드래곤 엠블렘2는 마왕군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인간의 영토를 다시 되찾는 것에서 시작한다. 조그만 마을을 번영 시켜 나가고, 플레이어는 마을 사람들의 퀘스트를 수행해 나가며, 힘을 키운뒤 마왕의 직속부하가 지배하고 있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지역을 탈환하는 것이 드래곤 엠블렘2 첫번째 이야기의 목표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바로 지역 탈환 미션인데, 싱글 스토리를 즐기는 도중 얻을 수있는 특정 아이템을 이용하여 마왕군이 주둔하고 있는 마성의 탑에 들어설 수가 있었다. 그리고 플레이어들은 자신이 키워낸 캐릭터를 이용해 총 4인 파티를 구성하여 마성의 탑 붕괴 미션을 수행할 수 있었다. '50층 높이의 지옥 같은 난이도를 자랑하는 2개의 탑을 말이지...' & 드래곤 엠블렘2의 체험판 배포되기 시작하고 보름정도가 흐르자, 라온은 이번에도 사회적으로 큰 이슈거리가 되었다. 새해 첫날부터 게임을 다운 받기 위해 수많은 유저가 아키바 타마고 샵에 몰려든 것처럼 펜타곤과 계약 중인 전국의 게임 가게들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유저들로 인해 북새통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어떤 지역은 펜타곤과 계약한 가게가 한 군데 뿐이라 사람들이 심해게 몰려 곤욕을 치룬 곳도 있었다. 그래서 일까? 체험판 배포와 함께 라온의 구매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전국 어느 곳에서도 라온 본체와 소프트를 찾아 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최근에 아키바에 위치한 게임 샵 문 앞에는 하나같이 다음과 같은 문구가 붙어 있었다. -RAON 완판 되었습니다.- 하긴 펜타곤 소프트의 본점이라고 할수 있는 타마고샵에도 물건이 없는데 어디라고 있을까만은... "손님 죄송합니다. 라온은 다음 주에 입고 예정입니다." "얼마나 들어오나요? 그날 오면 살 수 있나요? "수량은 아직 미정이지만, 연초부터 예약하신 고객님들이 있어 확답을 드리기 힘듭니다. 죄송합니다." "왜 돈이 있는데 사지를 못 하냐구요!!!" 심금을 울리는 한 유저의 절규에 부점장님 미야자키씨는 몇 번이고 거듭 고개숙여 사과했다. 어느 정도 손님이 빠진 시간. 나는 근처에 도너츠 전문점에서 갓 나온 녀석들을 잔뜩 사들고, 매장으로 돌아왔다. "안 그래도 달달한 게 땡겼었는데 감사합니다. 부장님." 미야자키씨는 한 입 가득 도넛을 베어물며 나를 향해 활짝 웃어보였다. "힘들죠? 미안해요. 디스플레이 생산에 시간의 좀 걸리다보니, 하나가 걸리니까 공장 자체가 지금 거의 올 스톱 상태라..." "작년에도 많이 나가긴 했었는데, 드래곤 엠블렘2 이후엔 정말 폭발적으로 수요가 늘어난 것 같아요." "예약 하시면 따로 연락을 드린다고 말씀 드려도 매일 같이 찾아오시는 손님도 계실 정도라니까요." "다음 주 정도면 그래도 어느 정도 물건이 풀릴거 같은데..."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가끔은 엄청 화내고 가시는 손님들도 계셔서..." "미안해요. 라이텍스에 연락해서 조금만 더 빨리 부탁한다고 전할게요." "감사합니다. 부장님." "그럼 전 일단 본사로 돌아가 볼게요. 요새 너무 타마고 샵에만 있었더니, 하야시가 시끄럽게 해서..." 가방을 챙겨든 나는 직원들에게 수고하라는 인사를 남긴 뒤 지하 주차장드로 향했다. & 라온이 이렇게 폭발 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 것은 드래곤 엠블렘2의 체험판 역할이 굉장히 컸다. 사실 이 시기에 체험판은 오히려 본편보다 귀한 대접을 받는 물건이었다. 간단히 예를 들어 '사이킥 배틀 체험판'이 좋은 사례인데,발매 전 스테이지 클리어를 해낸 유저들에 대한 보상으로 배포된 이 물건은 워낙에 극소량으로 배포되어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물건이 되어 있었다. 또한 본편에서 첸드라가 조정해준 게임성과는 달리, 살짝 느껴지는 미완성의 느낌이 더욱 소장욕구를 자극 하고 있었다. 하지만 라온은 플래시 메모리 카트리지만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체험판을 다운로드 받아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더구나 본편에 대비한 우밍업 수준의 체험판이라도 그 구성이 상당히 알찼기에 유저들에게 큰 호응을 얻어 가고 있었다. 그날 밤. 평소와 같이 나는 책상 위에 따듯한 차 한 잔을 준비 해둔 뒤 PC통신에 접속을 시도했다. -Mr.k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안녕하세요. Mr.k님~- -반갑습니다.- 커뮤니티 대화방에 접속한 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오늘의 대화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1년 전만 해도 발렌타인 데이의 이야기로 큰 화제가 되었던 이곳은 최근에 배포를 시작한 드래곤 엠블렘 체험판으로 인해 뜨겁게 달아오르는 중이었다. 잠시 인사를 나누고 난 뒤, 대화는 순식간에 다시 드래곤 엠블렘을 주제로 이야기가 흘러가기 시작했다. -보름 동안 붙잡고 플레이 했는데, 이제 레벨5라니... 이 게임 진짜 경험치가 너무 짠 거 아닌가?- -마을 주변 몬스터 토벌만으로는 레벨이 잘 안 오르는 느낌입니다.- -그것보다... 벌써 20번째 캐릭터라는 게 문제입니다.- -괜찮아요. 전 38번째 캐릭터거든요.- -젠장. 고작 체험판인데, 뭐가 이렇게 어려운거지? 애초에 캐릭터가 사망하면 그대로 게임 끝이라니... 본편 생각하면 토나올거 같아요..- 나는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다가 마지막에 답 글을 달았다. -그렇게 말하셔도 드엠2 출시 날 되면 제일 먼저 달려가 구입하실 거면서...- -물론입니다!! 하지만 지금 라온 본체도 물건이 없는 걸 보니, 드엠2 나오면 또 한바탕 전쟁 치러야 할 듯...- -무조건 1차 수량때 사야합니다. 요새 라온 엄청 팔려서 운 나쁘면 2, 3차 수량때까지 기다려야 할 거 같아요.- -그러면 또 프리미엄 붙겠네... 저는 라온 게임 정가 주고 사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빌어먹을 되팔이 녀석들. 어차피 플레이 할 것도 아니면서 물건 떨어지면 바로 3~4천엔씩 더 받고 팔더군요. 여기 커뮤니티 장터 게시판만 봐도 진짜 그런 사람 수두룩해요.- -회원을 조금 쳐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 합니다.- -자자~ 진정들 하시고, 질문 하나만 하겠습니다. 혹시 이 대화방에 드엠 체험판 10레벨 찍으신 분이 계신가요?- -10레벨이요?? 저는 안 죽고 5레벨 넘어보는 게 소원입니다.- -이건 뭐 죽으면 곧바로 캐릭터부터 다시 만들어야 하니...- 그때 이제껏 가만히 있던 유저 하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 지금 9에요. 퀘스트 몇 개만 더 하면 레벨 10찍을 것 같습니다.- -전 8이요. 아직 경험치는 중간 정도지만, 그런데 10레벨은 왜요?- -아마 드엠 체험판은 레벨 10이 마지막인 것 같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혹시 10 찍으셨어요?- -네. 한시간 전쯤에 10 달성했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 동안 몬스터를 아무리 잡아도 경험치 퍼센트가 오르지 않아요.- -진짜요? 그래도 대단하십니다. 캐릭터 뭐 키우세요?- -전사입니다. 헌데 좀 특이한 전사에요.- -특이한 전사?- -몇 번 죽으니 짜증나서 이번 캐릭터는 레벨 업 할 때마다 스탯을 전부 방어력에 투자했더니, 레벨 10에서 전직 했어요.- -어? 레벨 10찍으면 전직 할 수 있나?- -저기 무슨 직업으로 전직하셨어요? 직업을 선택할 수 있나요?- -아뇨. 그냥 레벨 10이 되자마자, 알림창이 뜨고 방패 기사라는 직업으로 자동으로 바뀌던데요. 그리고 인터페이스에서 공란으로 표시되던 곳에 '탱커라고 적혀 있더군요'- -탱커? 그게 뭐지..- -포지션 설명에는 '최전방에서 아군을 지키는 수호자'라고 쓰여 있더군요.- -아군을 지키는 수호자? 캬~ 멋있다.- -잠시만요. 저도 이제 마을로 돌아가면 곧 레벨 업 할 거 같거든요.- -오오!! 축하드립니다. 직업은 뭘로 하셨어요?- -아, 저도 전사에요.- -그럼 같은 전사니까 탱커가 되시는 건가?- -저는 방어력보다 공격 쪽에 치중했는데, 아!! 방금 전직 알림이 떴습니다.- -아, 부럽다. 나도 전직하고 싶어...- 하지만 전직했다는 남자는 그 후로 아무 말이 없었다. 덕분에 대화방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재촉하듯 계속해서 전직에 대해 많은 질문을 걸어왔다. 그리고 잠시후.. -저는 양손검사로 전직했는데요?- -으잉? 양손검사? 그게 뭐지? 포지션은 뭔데요?- -그게... 저는 딜러입니다. 포지션 설명은 '적의 목숨을 앗아가는 검투사'라고...- -멋지다, 딜러... 혹시 캐릭터 어떻게 키우셨어요?- -저는 공격력이랑 손재주요.- -손재주? 손재주 올리면 뭐가 좋아요?- -적을 때리거나 막을 때, 타이밍 베리에이션이 좀 넓어지더라구요. 그래서 연격을 넣거나 방어가 좀 수월해요. 대신 방어력이 약해서 방어 타이밍에 실패하면 무지 아픕니다...- -아!! 그럼 레벨 업 후에 스탯에 따라 직업이나 포지션이 달라지는 건가?- -그런 것 같네요. 방어를 치중하신 분은 '탱커'라는 포지션이고, 공격력을 극대화하신 분은 '딜러'라는 포지션이 되었으니...- 그러자 대화방에 있던 사람들 몇몇이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악!!! 나는 모든 스탯이 들어올때 마다 모든 능력치를 순서대로 하나씩 올렸는데, 심지어 지력마저...- -헐... 전사한테 지력이 필요할까요?- -아, 그럼 다시 키워야 하나?- 그때 탱커로 전직했다는 방패 기사유저가 딜러가 된 유저에게 물었다. -저기.. 혹시 방금 전직하셨으면 홉 고블린 던전 퀘스트 열리셨나요?- -아,네. 방금요. 그런데 설마 이거...?- -왜요!? 뭔데요? 전직하면 새로운 퀘스트 창이 열리나요?- 그러자 잠시 후, 양손검사로 전직한 유저가 말을 이었다. -이거 혼자서는 퀘스트 실행이 안 되는데요? 레벨 10을 달성한 4명의 유저가 필요하다고 나옵니다.- 대화방을 바라보던 나는 허브차를 한 모금 삼키며 피식 웃어 보였다. < EP. 26 : 태동(胎動) (2) > 끝 < EP. 26 : 태동(胎動) (3) > -이거 혼자서는 퀘스트 실행이 안 되는데요? 레벨 10을 달성한 4명의 유저가 필요하다고 나옵니다.- 대화방을 바라보던 나는 허브차를 한 모금 삼키며 피식 웃어 보였다. -어? 그런데 어떻게 4명이 될 수 있죠? 동봉된 데이터 케이블은 2인용인데?- 아차차.. 나는 한 유저의 질문에 서둘러 키보드를 두드렸다. -아, 오늘 타마고 샵 직원들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 주말에 샵에서 4인용 케이블을 따로 판매 한다고 합니다.- -진짜요? 우와아아~!! 그럼 진짜로 4명이서 던젼을 공략할 수 있는 건가?- -대박이다. 4명이 모여서 같이 게임 할 수 있다니, 상상만으로도 끝내주네...- -4인 파티라... 그러고 보니 사이킥 포스도 요새 클랜원 모집하던데?- -8인 배틀이지만, 태그 형식으로 2:2나 4:4로 플레이하는 유저들도 많더라구요. 그래서 그런지 최근에 게임 센터에서 사이킥 포스 인기 장난 아닙니다. 몇 달 전만 해도 스파2나 소니크가 인기 가장 많았는데...- -스파2도 재밌지만, 최근에 SMK에서 나온 ‘이리의 전설’ 도 재밌더군요.- -그 빨간 모자 쓴 주인공 나오는 거 말 하시는 거죠? 테리였나?- -스파2에 비해 캐릭터 마다 나름 스토리도 있고, 기술 쓰는 게 조금 어렵긴 하지만, 캐릭터가 커서 그런지 시원시원한 맛이 있더라구요.- 어느새 대화의 주제가 자연스레 대전 격투 쪽으로 넘어가자, 나는 잠시 의자에 기대어 굳어진 뒷목을 주물렀다. “나도 잠깐만 플레이 해볼까?” 커뮤니티 회원들과 대화를 중단한 나는 허브차 옆에 놓아진 라온을 집어 들었다. 띠링~ 기분 좋은 효과음과 함께 RAON이라는 글자가 화면 정중앙에 떠오르고, 잠시 후 회색 화면에 현재 플래시 카트리지에 담겨 있는 게임 정보가 떠올랐다. 슬램덩크와 드래곤 엠블렘 II 체험판이라 쓰여 있는 목록 중에서 드엠 2를 선택한 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쥐었다 펴며 게임에 집중했다. 일단 내가 사용하는 캐릭터는 복사(服事)라고 하는 사제로 올라가기 전의 예비 보조사였다. 현재 내가 플레이 중인 캐릭터의 레벨은 9. 퇴근 후에 집에서 짬짬히 플레이한 결과였다. 성직자 계열의 캐릭터는 전투로 경험치를 쌓기가 너무 어려워 보통은 채집 퀘스트를 통해 경험치를 벌어들인다. 그래서 다른 직종 보다는 레벨 업이 매우 더딘 편이었다. 사실 드래곤 엠블렘의 그래픽 수준은 아직 내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과거 내가 플레이했던 게임들 중에 비슷한 느낌의 그래픽을 찾아보라면, 글쎄... 오거 택틱스(Ogre Tactics) 정도가 되려나? 물론 조그만 화면 안에 오밀조밀 표현된 도트 그래픽은 확실히 경쟁 기종의 그래픽과는 비교를 달리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월등하게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래픽 부분에서만 따져 보자면... 그래 슈퍼 패밀리의 황혼기 시절에 등장했던 게임들과 흡사한 그래픽이랄까? 드래곤 엠블렘2에서 싱글 플레이시에는 이벤트 동료나 용병을 고용하지 않을 경우 적과 1대 다수로 전투를 진행 해야 했기에 사제는 언제나 용병을 거느리고 다녀야 했다. 드래곤 엠블렘 2는 직업에 따라 플레이 방식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플레이 중인 사제 캐릭터는 정말로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직종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파티 플레이에서는 없어선 안 될 캐릭터지...’ 전투 맵에서 사제는 버튼을 누르는 타이밍에 따라 스킬의 회복 량이 달라지기에 어느 정도 컨트롤을 요하는 부분도 있었다. ‘퀘스트 한 두개 정도면 나도 레벨 10 찍겠는데?’ 나는 어느 정도 경험치를 보장해 주는 중급 퀘스트를 수주한 나는 재료를 찾기 위해 요정의 숲을 헤매었다. 적과의 전투 시에는 나는 내가 고용한 용병들의 뒤에 숨어 그들을 회복 시켜주기 바빴다. 직접 캐릭터를 이동시켜 곁에 다가가 Y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회복 스킬을 사용 할 수 있었는데, 아차 하는 순간에 용병 하나라도 죽으면 그대로 전멸에 이를 수 있었기에 나는 아군의 HP를 계속 주시하며 체력이 절반이상 달지 않도록 꾸준히 회복 스킬을 넣어 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의뢰 받은 퀘스트 아이템을 모두 채집한 나는 용병들을 이끌고 마을로 돌아가 퀘스트를 완료했다. 빠바바밤~!! 퀘스트 종료와 함께 레벨 업을 알리는 효과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화면 위에는 새로운 직업으로 전환되었음을 알리는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마커스가 회복술사로 전직하였습니다.- 나는 캐릭터 레벨 10을 찍자마자, 다시 커뮤니티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도 방금 레벨 10 찍었습니다.- -오오!! Mr. k님. 무슨 캐릭터로 전직 하셨나요.- -회복술사입니다. 포지션은 힐러네요.- -대체 복사(服事) 어떻게 키우셨어요? 매번 퀘스트 마다 용병을 고용해야 해서 키우기 엄청 어렵던데...- -그럼 이 방에만 레벨 10을 찍은 유저가 셋이나 있다는 거네요. 아씨... 나도 빨리 키워야지.- 그때 방패기사로 전직한 유저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Mr. k님. 혹시 도쿄 거주자시면 이번 주말에 시간되시나요?- -네. 뭐 별다른 일은 없습니다만?- -이번 주말에 데이터 케이블을 구입할 겸 타마고 샵에 가려고 하는데, 만약에 시간이 되신다면 함께 홉 고블린 던젼에 도전해 보시겠어요?- 그러자 양손검 전사가 서둘러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도 도쿄에 살고 있습니다. 저도 참가하고 싶네요.- -엇... 벌써 3인 파티가 결성 된 건가요? 그럼 아직 한자리 남아있는 거죠?- -우와~ 혹시 구경 가도 되나요?- -저도요. 저도 구경하고 싶습니다.- 대화방 분위기는 즉석에서 파티를 꾸리는 우리들 덕분에 다시 드래곤 엠블렘에 대한 이야기로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모모이로’라는 닉네임의 유저가 대화방에 있던 사람들에게 색다른 혜안(慧眼)을 제시했다. -그런데 구경이고 자시고, 저희들 이번 주말에 당연히 타마고샵 가야하는 거 아닌가요? 이러다 4인용 데이터 케이블도 다 팔리면 어떡해요? 일단은 하나라도 사서 들고 있어야 나중에라도 파티 결성해서 도전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헐... 그 생각은 못했네. 모모이로님 천재 신 듯.-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이번 주말에 타마고샵에서 정모합시다. 시간은 타마고 샵 오픈 시간. 어때요?- -오? 그럴까요? 사실 이전부터 어떤 분들인지 궁금했었는데~- -전 찬성입니다. 검은색 아디다스 가방에 흰색 모자 쓰고 가겠습니다.- -전 그럼 눈에 잘 보이게 빨간 점퍼에 녹색 비니 쓰고 있겠습니다.- 하긴, 아직 핸드폰이 없던 시절에 온라인 모임은 보통 이렇게 진행 했었지. 그 날 입고 갈 옷이나 악세사리를 미리 알려 준다던가, 아니면 자신의 체형을 알려준다던가... 그때 방패 기사 유저가 나에게 물었다. -Mr. k님은 어떤 복장으로 오실 건가요?- -저는... 타마고 샵 앞에 모여 계시면 알아서 찾아가겠습니다.- -아, 하긴 뭐 입구에 3~4명만 모여 있어도 금방 알아 볼 수 있겠죠?-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그말에 동의를 표했다. -재밌겠네요. 기대 됩니다!! 혹시 그 날 드래곤 엠블렘 레벨 10까지 맞추고 오신 분들은 따로 파티 만들어서 도전 하죠.- -현재 레벨 8인데, 분발 하겠습니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그러다 죽으면 슬프잖아요.- -그런데 우리 커뮤니티에 여자 분도 계신가요?- 거침없이 발랄한 그의 질문에 거짓말처럼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 그리고 며칠이 지나 운명의 날이 밝았다. 샤워를 마치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나는 집을 나서기 전 준페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 신호음이 지난 뒤 잠에 취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지금 바로 타마고샵으로 나와.” “으.. 응? 준혁이냐?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다짜고짜 타마고 샵으로 나오라니...” “오늘 타마고 샵에 재미난 이벤트가 열리거든. 그러니 잘 촬영해서 잡지에 좀 실어줘.” “지금...? 안 돼. 네 녀석이 만든 드래곤 엠블렘 2 때문에 연초부터 계속 야근 해서 피곤해 죽겠다.” “아, 그렇구나. 알았어. 그럼 다른 잡지사에 연락해볼게. 푹 쉬어라.” “······잠깐.” “응?” “대체 무슨 이벤트인지 들어나 보자.” “아, 오늘부터 타마고 샵에서 라온에서 사용하는 4인용 데이터 케이블을 팔 거거든.” “케이블? 고작 케이블 때문에 나를 부르는 거냐?” “아니. 그걸로 드래곤 엠블렘 체험판에서 레벨 10 찍은 유저들이랑 파티 플레이 할 건데?” “나도 어제부로 레벨 10 찍었다. 지금 당장 갈게.” “······.” 참 다루기 쉬운 녀석이야... 잠시 후. 차를 끌고 타마고 샵 지하주차장에 도착한 나는 아직 오픈 전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게 정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붉은 점퍼에 녹색 비니를 쓰고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가게 오픈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왔네.’ 나는 곧바로 아는 척하기 보단 일단은 타마고 샵 직원용 출입구를 통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아, 강준혁 부장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부장님~” “모두 좋은 아침입니다. 혹시 배틀존 세팅은 끝났나요?” “네. 어제 저녁에 폐점하고 준비해두었습니다.” 미야자키씨 옆에 서있던 남자 직원이 자신있게 웃으며 배틀존을 가리켜 보였다. 직원의 손길을 따라 눈을 돌리니, 어제까지 배틀존으로 쓰이던 장소는 드래곤 엠블렘 전용으로 4개의 좌석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훌륭하네요.” “테이블 마다 소형 카메라를 연결해 놓아서 플레이 화면을 곧바로 스크린에 송출할 수 있게 세팅해 두었습니다.” “좋네요. 그런데 이거 참 이런 행사 한번 할 때마다 배틀존 디스플레이를 계속 바꿀 수도 없고...” 그러자 어느 새 내 곁에 다가온 부점장 미야자키씨가 나에게 말했다. “드래곤 엠블렘 2의 파티 시스템이 활성화되면 더 큰 공간을 필요로 하게 될 거 같은데 어쩌죠?” “안 그래도 방법을 모색중이예요. 이곳은 역이랑 가까워 목도 좋고, 인테리어 공사를 한지도 얼마 되지 않아 깨끗하니, 차라리 조금 떨어진 곳에 드래곤 엠블렘 전용으로 분점을 내는 것도 좋을 듯하네요.” “드래곤 엠블렘 전용 샵이라, 왠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 두근 설레이네요.” 그런가...? 난 거기서 레이드 뛰다가 까딱 잘못해서 파티가 전멸하면 서로 멱살 잡고 싸울까봐 겁나는데...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박수와 함께 직원들을 독려 했다. “자~ 그럼 이제 오픈을 시작하죠.” “네~ 부장님.” 직원들의 힘찬 대답과 함께 굳게 닫혀 있던 셔터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밝은 아침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가게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 손님들이 벌써 기다리고 계시네요?” 미야자키씨의 말에 나는 빙긋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제 손님들이에요.” 나는 셔터가 올라가자마자, 가게 내부를 두리번거리는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걸어가 정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말했다. “게임 커뮤니티 ‘크리티컬’ 회원님들이시죠?” 나의 질문에 붉은 점퍼를 입은 20대 초반의 남자가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나는 그의 질문에 여유롭게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Mr. k입니다.” “아~ Mr. k님이셨... 네에!?” “반갑습니다. 크리티컬 회원님들.” < EP. 26 : 태동(胎動) (3) > 끝 < EP. 26 : 태동(胎動) (4) > & 잠시 후. 나는 크리티컬 회원들을 따로 모아 타마고 샵 내부의 스탭 휴게실에서 간단한 다과회를 가졌다. 정모에 참석한 회원은 나를 포함해 총 8명으로 다들처음만나서 그런지 어색한 표정들을 짓고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내 소개와 함께 오늘 우리가 플레이하게될 '홉 고블린 던전'의 파티플레이에 대해 따로 이벤트 존을 마련 했다고 설명하자, 모두가 깜짝 놀라 나를바라보았다. "그러니까.. Mr.k님이 드래곤 엠블렘의 개발자 강준혁씨고, 오늘 우리가 플레이 하기로 했던 던전 공략을 직접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연해 달라는 말씀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이 자리에 레벨 10 찍으신 분이 몇 명이나 계시죠?" 그러자 5명 정도가 손을 들었다. 그럼 나랑 준페이까지 7명이네.. 그럼 한명이 부족한데? 그때 내 뒤에 있던 미야자키씨가 살짝 손을 들며 말했다. "부장님.. 저기 저도 레벨 10 캐릭터가 하나 있는데요." "아, 그래요? 마침 잘됐네요. 그렇치않아도 파티 플레이를 한 번만 보여주고 끝내기엔 아쉬웠는데, 적어도 두 번은 시연해볼 수 있겠네요." 그러자 '크리티컬'회원 중에 하나가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아직 우리가 이벤트에 참여한다고 확답을 드린 건 아닌데요?" 그래서 나도 똑같이 퉁명스럽게 대답해주었다. "그래요? 오늘 이벤트에 참여해주신 분들께는 차후 드래곤 엠블렘2 정식판은 무료로 드리려고 했는데, 안타깝네요." 그러자 크리티컬 회원들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단지 게임을 플레이 하는 것만으로 그냥 게임을 주신다구요?" "저희 펜타곤 역시 여러분들의 플레이 덕분에 충분한 홍보효과를 볼 수 있을 테니까요. 따라서 당연히 보상을 해드리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만?" 회원들은 나의 대답에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회원들의 마음이 약간이나마 흔들린 틈을 타 나는 다시 한번 그들에게 제의 했다. "자~ 그럼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벤트에 참여 해주실 건가요? 물론 강제성은 없습니다. 원치 않으시는 분은 그저 구경만 하셔도 되니까요. 하지만 한가지 약속 드릴 수 있는 것은..." 잠시 동안 호기심어린 표정을 짓고있는 회원들과 눈을 마주치다가 뒤에 말을 이었다. "분명히 재밌는 경험이 될 겁니다. 여러분은 드래곤 엠블렘 최초로 '몬수터 레이드'를 플레이한 유저들로 기억될 테니까요.." "아..." 최초.최고.최강.이 만큼 남자의 마음을 설레이게 만드는 단어가 또 있을까? 단지 소소하게 모여 함께 게임을 즐기려던 크리티컬 회원들은 내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모두 참석 의사를 밝혔다. '그래. 당연히 이렇게 나와야지.' &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사람들이 모여드는 오후 시간대. 타마고 샵 내부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갑자기 드래곤 엠블렘의 테마곡에 흘러나오며 깜짝 이벤트를 알렸다. -잠시 후 배틀 존에서 드래곤 엠블렘 캐릭터 레벨 10을 달성한 유저들의 몬스터 레이드가있겠습니다. 드래곤 엠블렘의 파티 플레이가 궁금하신 유저분들께서는 지금 바로 배틀 존 앞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음? 몬스터 레이드? 그게 뭐지?" "글쎄... 드래곤 엠블렘2 에 관련한 이벤트인가?" "파티 플레이를 레이드라고 하는 건가?" "뭔지 모르지만 일단 가보자." 미야자키씨의 안내 방송에 매장 안에 있던 사람들은 우르르 배틀 존 앞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미 배틀존 위에서 크리티컬 회원들과 함께 시연준비를 하고 있던 나는 마치 밀물처럼 밀려오는 사람들의 모습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배틀존 앞이 금세 손님들로 빼곡하게 둘러 싸이자, 방패 기사 플레이어인 타야마씨가 긴장된 표정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근처에 서있던 나는 살포시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응원해주었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신경 쓰지 마시고, 타야마씨는 게임에만 집중해주시면 됩니다." "아,네. 저희 파티는 두 번째로 플레이 하는 거 맞죠?" "네. 일단은 크리티컬 회원 분들 만으로 이루어진 첫 번째 파티의 레이드가 끝난 후. 타야마씨와 저. 그리고 아까 만난 미야자키가 한 팀입니다." "어라? 그럼 세 명 아닌가요? 레이드 플레이는 4인 파티로 알고 있는데?" "그게, 아직 한명이 덜와서..." 그 순간 내 등 뒤로 미야자키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장님!! 준페이씨 방금 오셨어요." "늦어서 미안하다." "왜 이렇게 늦었어? 아침에 바로 전화 줬더니만..." "너야 자가용이 있으니 금방 오겠지만, 난 아니거든? 너 우리 집에서 아키하바라가 전철로 얼마나 걸리는 줄 알아? 안 그래도 어제 새벽까지 야근해서 피곤해 죽겠구만.." 나는 툴툴거리는 준페이의 불평을 한 귀로 흘려버리며 대답했다. "너랑 나는 두 번째 파티로 참가할 예정이니까. 일단 잠시 쉬고있어." "뭐야, 파티가 두개나 있어?" "너랑 나까지 총 8명." "헐, 이 지옥 같은 난이도에 레벨 10을 찍은 사람이 여덟 명이나 있어? 나는 그게 더 신기하네..." "나도 클리어는 가능하게 만들어 놓거든?" "어이구~ 꼭 고양이가 쥐 생각 해주는 것 같네." 준페이는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놀려대었다. 하긴 지금까지 내가 만들어 온 게임들 중에 뭐하나 편하게 즐길만한 게임이 없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게임들은 굳이 펜타곤 소프트가 만들지 않더라도 다른 제작사에서 충분히 나오고 있으니까... 예를 들어 펜타곤과 반대 되는 성향을 가진 민텐도의 게임들은 모든 연령층이 웃으며 즐길 수 있는 작품을 많이 출시하곤 하지... 게임을 만드는 회사는 저마다 자신 만의 색깔이 있기 마련이다. '발렌타인 데이' 같은 호러라는 장르를 이용하더라도 2000년대에 민텐도에서 만든 '루이지 맨션' 같은 경우엔 아이들이 즐겨도 무리가 없을 만큼 귀여운 유령들과 웃음코드가 숨어 있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펜타곤이 가지고 있는 색깔은 굉장히 하드하다. 드래곤 엠블렘2라는 타이틀만 발표한 것만으로도 매니아 층 유저들은 손에 땀이 베이는 기대와 흥분을 느끼곤 했다. 그들 역시 슈퍼마리지를 플레이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모든 사람들이 조금만 노력하면 클리어 할 수 있는 게임 대신, 조금 고생하더라도 그 고행(苦行)을 견뎌내고 클리어 한 순간. 느껴지는 카타르시스는 플레이어에게 굉장한 만족감을 전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드래곤 엠블렘에 대한 정보를 처음 풀었을 때 사람들이 지어 보이던 표정을 아직도 난 잊지 못한다. -이번에 출시되는 작품은 나에게 어떤 극한의 난이도를 보여줄 것인가, 대체 이번엔 어떠한 반전으로 내 뒤통수를 후려 쳐줄 것인가?- 바로 이것이 유저들이 펜타곤 소프트의 게임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들의 심리를 잘 이용할 줄 알았다. 잠시 후. 언제나 배틀존에서 '몬스터 배틀~ 파이트!!'를 외치던 사회자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긔의 뒤에는 긴장감 으로 얼굴이 굳어진 4명의 커뮤니티 회원들이 천천히 테이블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자신의 라온을 꺼내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오늘은 특별히 여러분들께 드래곤 엠블렘 체험판에서 즐길 수 있는 파티 플레이에 대해 알려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올랐습니다." "우와아아아~~~" "하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저 역시 지금까지 한 번도 4인 파티 플레이를 하는 RPG게임을 플레이 해본 경력이 없기에 중계가 조금 어설프더라도 양해 부탁드리기 바랍니다." "어라? 그럼 사회자님도 그럼 파티플레이를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가요?" "네.그렇습니다.그렇기에 어쩌면 우리는 지금 드래곤 엠블렘 시리즈의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지켜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랍니다." "오오오~" "그럼 우선 최초로 몬스터 레이드에 도전하는 플레이어 분들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소개 시켜드릴 분은 첫 번째 파티의 리더를 맡으신 나카무라상입니다." 사회자의 소개에 자리에서 일어난 나카무라씨는 유저들의 박수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꾸벅였다. "안녕하세요. 나카무라씨. 유저들에게 간단히 자신이 키우고 있는 캐릭터의 직업과 포시션을 말씀해 주시죠." "캐릭터 직업은 창기사입니다. 포지션은 탱커입니다." "여기서 나카무라씨가 말씁하시는 '탱커'란 파티의 선봉에서서 동료들을 지키는 포지션입니다. 타 직업보다 방어력이 강하기에 적의 시선을 끌면서 공격을 버텨내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이곳에 적혀 있군요~" 사회자는 자신이 들고 있는 대본 쪽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밝게 웃어 보였다. 이어서 나머지 플레이어까지 차례차례소개를 마친 사회자는 첫 번째 파티의 직업과 포지션에 대해 다시 한 번 정리해 설명해 주었다. "이로서 홉 고블린의 던전에 최초로 입장하는 파티는 창기사와 각(角)궁수,도적과 약(藥)술사입니다.포지션으로 치면 탱커,딜러,딜러,힐러.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RPG으로 비교하자면 기본에 충실한 파티 구성이라 생각합니다." 사회를 보는 직원 역시 게임에 대해 정통한 편이었는지.친절한 설명을 덧붙여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그럼, 이제 여러분들께서 기다리셨던 드래곤 엠블렘의 첫 번째 레이드를 시작 하려고 합니다. 이벤트에 참여해 주신 게임 커뮤니티 '크리티컬'의 회원님들께 힘찬 박수 부탁드립니다," "우와아아아~ 잘해라~" "저도 크리티컬 커뮤니티 회원입니다~ 일부러 이거 보려고 나고야 에서왔어요~!!" "오오~!! 시작이다!!" 참가자들은 은근히 긴장되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곤 라온의 전원버튼을 올렸다. 혹시나 중간에 게임이 꺼질 수도 있기에 베터리 체크는 이미 완료해 두었고, 데이터케이블 역시 빠지지 않게 단단히 고정시켜 두었다. 이윽고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라온에 드래곤 엠블렘의 소형 카메라는 그것을 천장에 설치된 4개의 프로젝터에 영상을 뿌려주었다. "자~ 드디어 드래곤 엠블렘.. 아니 휴대용 게임기 역사상 최초로 4명의 플레이어가 한자리에 모여 게임을 즐기게 되었는데요. 여기서 여러분께 깜짝 이벤트를 하나 더 알려드리겠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모이신 유저 분 중에서 캐릭터 레벨 10을 달성하신 분이 계신가요?" 사회자의 질문에 몇몇 유저의 손이 번쩍 들렸다. "아~!! 방금 손드신 분들도 원하신 다면 '홉 고블린의 던전'이벤트에 참여 할수 있습니다. 지금 즉시 카운터로 가셔서 레벨 10짜리 캐릭터를 인증 하시고 참가 신청서를 써주세요. 오늘 이벤트에 참여해 주신 유저 분들에 한해 차후 드래곤 엠블렘2 를 무상으로 증정해 드립니다." "우와아아!!대박!!" "저기 제가 지금 레벨이 8인데,여기서 레벨 업 하고 바로 행사에 참여할 수 있나요?"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사회자는 은근슬쩍 내 눈치를 살피기 위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에게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주자, 사회자는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가능합니다~!!" 사회자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지자,그 순간 이벤트 존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라온을 꺼내들기 시작했다. 모두가 한마음 한 뜻으로 똑같은 행동을 취하는 바람에 당황한 나는 사회자를 불러 이벤트 참가 시간을 조정했다. "레벨 10을 달성한 캐릭터를 이용해'홉 고블린의 던전'에 도전하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지금부터 딱 한시간 동안 참가 신청 받고 있으니 카운터에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단 신청부터 해야겠다. 혹시나 같이 퀘스트 할 사람 없나 해서 와봤는데, 이게 웬 떡이냐!!" 드래곤 엠블렘2를 공짜로 얻을 수 있다는 말에 레벨 10짜리 캐릭터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너도 나도 카운터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자~ 이제 그럼 진짜로 '홉 고블린의 던전' 이벤트를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참가자 분들 모두 준비 되셨나요?" 사회자의 질문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유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천장에 매달린 하얀 스크린에는 4명의 캐릭터가'홉 고블린의 던전'퀘스트창을 모두 띄운 상태였다. "그럼~!! 시작해주세요!!" 첫 번째 파티원들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동시에 A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스크린 속의 게임 화면에 플레이어 캐릭터들이 올라탄 마차가 '홉 고블린의 던전'을 향해 출발했다.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로딩 화면이 지나고,던전의 첫 번째 스테이지로 화면이 전환 되자, 화면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헉'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벤트를 진행해야 하는 사회자 마저,익숙한 게임 화면에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쳤다. "아아!!! 화면속의 이것은!! 이것은!!!!" 사회자는 감격에 겨운 나머지 안면 근육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시뮬레이션 RPG형식이군요~!! 드래곤 엠블렘의 시스템은 살아 있었습니다~!!" "우와아아아아!!!!!" "이거지~!! 역시!!" 수많은 사람들의 함성 속에 괜히 머쓱한 기분이든 나는 슬쩍 코를 훔치며 웃어 보였다. 앞으로 10년은 후에나 등장할 MMORPG의 레이드 시스템. 물론 화려한 그래픽도 아니고, 여러 파티들과 거대보스가 우글거리는 느낌도 아니지만, 현재 내가 살아가고 있는 레트로 시대에 걸맞게 드래곤 엠블렘 만의 레이드 시스템을 꾸며 보았다. 턴이 돌아 올때마다 스스로 키운 캐릭터를 움직여 적과 싸워 나가는 '택틱스류 시뮬레이션 RPG'시스템을... < EP. 26 : 태동(胎動) (4) > 끝 < EP. 27 : 몬스터 레이드 (1) > 나는 전투가 시작하기 전.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사회자에게서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무대에 올라 간단히 인사를 마치고, 아직 아군을 배치하기 전에 주의할 점을 시연자들에게 알려 주었다. “일단 전투가 시작하기에 앞서 여러분께 몬스터 레이드 시스템에 대해 몇 가지 알려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오늘 레이드에 참가하지 못한 유저 분들 중에 이런 질문이 있었는데요. 4인 파티 퀘스트는 무조건 다른 플레이어와 함께 진행해야하는지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여럿 계셨습니다. 이것에 대한 저의 대답은 NO.입니다. 4인 멀티 플레이는 순전히 유저들의 선택사항입니다. 현재 체험판 버전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차후 정식 버전에서는 레벨 10짜리 용병을 고용할 수 있으며 그들을 이용해 1인 레이드를 즐길 수도 있습니다. 가끔 마을 주점에서 히든 캐릭터를 동료로 얻을 수 있는 퀘스트도 준비되어 있으니, 정식 판에서 즐겨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보다 어려운 던전에 도전하기 위해선 NPC 캐릭터보다 플레이어를 중심으로 한 멀티 플레이가 난이도 면에서 훨씬 수월할 수 있으니 참고해 주세요. 그럼 다음은 몬스터 레이드에서 사용하는 전략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함께 전투 맵을 살펴보실까요?” 드래곤 엠블렘 2의 레이드 모드는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광활한 평야 지역이 아닌 던전의 한 공간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전투 맵 상에는 계단이라던가, 바위 같은 상하단차가 발생되는 지역이 섞여 있었다. “맵의 구조에서 느껴지듯 드래곤 엠블렘 2는 조금 더 전략 적인 요소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기본 적인 틀은 캐릭터의 이동과 공격이지만, 지형을 이용해 높은 곳에서 적을 공격할 때 추가 데미지를 입힐 수 있으며, 반대로 낮은 위치에서 공격을 받을 때는 그 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드래곤 엠블렘에서 캐릭터의 전사(戰死)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다소 오싹하게 느껴지는 나의 마지막 멘트에 참가자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작에서 소중한 동료를 잃었을 때의 절망감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이번 드래곤 엠블렘 2의 레이드 시스템은 실제로 플레이어가 키워낸 캐릭터가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그 긴장감의 수준이 달랐다. ‘4명중에 한사람이라도 삐딱 선 타면 그대로 다 같이 골로 가는 거야...’ 그 후로 몇 가지 더 전투에 대한 추가 설명을 마친 나는 시연자들에게 게임 플레이를 지시했다. 그러자 리더 격인 창기사의 나카무라가 파티원 들과 협의 후 아군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RPG게임에 익숙한 첫 번째 파티는 탱커 포지션인 창기사를 선봉에 두고 약술사를 후방에 배치해 마름모 형식의 전술 형태를 펼쳤다. 이윽고 화면 한가운데에 두 개의 검이 교차하며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BATTLE START- 카아앙!!! 조그만 아이콘으로 표현 되었던 전작과는 달리 이번엔 플레이어가 직접 키운 캐릭터가 맵 위에 등장하자, 플레이를 지켜보던 사람들 얼굴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깜짝 이벤트 발표로 인해 본인의 레벨 업을 위해 빠져나간 인원도 다수 존재했지만, 그런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플레이 할 수 있는 인원이 많아질수록 이벤트를 더 오래 끌 수 있고, 관련 영상자료도 더 뽑아낼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단언컨대, 여기서 레벨 10을 찍은 인원들 중에 절반가량은 허무하게 캐릭터를 잃게 될 것이다. 우선 첫 번째 레이드인 ‘홉 고블린의 던전’은 총 3 스테이지로 이루어진 단촐한 미션이었다. 이렇게 플레이어들과 조그만 협동 퀘스트를 클리어 해나가며 이야기의 중반에 다가서면, 첫 번째 마성의 탑에 도전할 수 있는 전개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 배틀의 시작은 도적의 이동으로부터 시작했다. 몬스터 레이드는 아군과 적이 번갈아 가며 턴을 교환하는 방식이 아닌 액티브 턴 방식을 차용하고 있었기에 행동력이 높은 캐릭터 순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기에 도적 같은 경우는 가벼운 몸놀림을 이용해 누구보다 먼저 지형을 선점할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궁수와 함께 창기사의 좌우로 포진 되어 있던 도적은 가까운 바위 위에 올라 대기 버튼을 눌렀다. 다음은 궁수. 화살은 높은 지형으로 올라갈수록 사거리가 늘어나며 장애물을 넘어 공격하는 곡사(曲射) 기술을 겸하고 있기에 다각도에서 적을 노릴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궁수는 근처의 계단 위로 올라서서 대치중인 고블린 한 마리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그러자 궁사 캐릭터의 머리 위로 타이밍 룰렛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투웅~!! 퍼어억!! 궁사의 손을 떠난 화살이 정확하게 고블린을 맞추자, 녀석은 ‘키엑’ 소리와 함께 18의 크리티컬 데미지를 입혔다. 궁사를 사용하는 플레이어는 손재주에 스킬을 많이 투자했는지 타이밍 룰렛의 성공 범위가 꽤나 넓은 편이었다. “오오..” 그 순간 상대적으로 행동 수치가 낮은 창기사와 약사를 건너뛰고, 총 6마리의 고블린들이 아군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키륵, 키르륵!!” 녹색 피부의 몬스터들은 허름한 검과 방패를 들고 침입자를 향해 돌격 했지만, 나카무라씨의 파티는 첫 도전자 치고 굉장히 전술을 잘 활용하고 있었다. 특히나 창기사 같은 경우엔 방패를 들지 않아 탱커 중에서 방어력이 낮은 편에 속하지만, 긴 창을 이용해 두 칸정도 떨어진 거리에서도 공격이 가능했고, 혹여 적이 한 줄로 뭉쳐 있을 경우엔 꼬챙이를 꿰어 내듯 적을 관통시켜, 뒤에 있는 적까지 한 번에 공격 할 수 있는 이 점이 있었다. 궁사는 자신에게 턴이 돌아올 때마다 계단을 올라서며 장거리 공격을 시도했고, 약사는 파티의 가장 후열에서 창 기사에게 회복 물약을 계속 던져 대었다. 약(藥)술사는 회복 스킬을 가진 힐러 계열 중. 가장 미약한 회복 수치를 가지고 있지만, 약병을 던져 멀리 있는 아군의 체력을 회복시킬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신의 몸을 확실히 지킬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가운데에서 창 기사가 몬스터의 주위를 끌어 주고 이미 던전의 꼭대기에 올라선 궁수가 사방으로 화살을 날려 대자 적들의 수는 순식간에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정도면 해 볼만 하다!!” 파티원들은 첫 번째 스테이지에서 승기를 잡아 나가며 긴장이 풀렸는지 여유롭게 플레이 해 나가기 시작했다. “두 마리 남았으니 약사님은 다음 스테이지를 위해 일단은 회복 약 사용을 아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나카무라는 양 옆에 두 마리의 고블린에 둘러싸인 상태에서도 꽤나 높은 체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화면 곳곳에 보물 상자가 출현했다. “어? 아이템 상자다.” 드래곤 엠블렘은 자신의 레벨도 중요하지만, 어떤 장비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캐릭터의 능력이 조금씩 달라지기에 아이템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더구나 나카무라씨의 파티에는 모든 보물 상자에 대해 락 픽(Lock Pick)이 가능한 도적이 있지 않은가!? 일반적으로 상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만능열쇠’가 없다면 보물 상자가 나와도 그림의 떡이지만, 도적은 만능열쇠가 없어도 모든 보물 상자를 전부 열수 있기에 공격력이 약한 딜러라도 파티플레이에서 인기가 많을 걸로 예상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파티의 균열이 생겨났다. “몬스터 주의 좀 끌어 주세요. 보물 상자를 회수하겠습니다.” “혹시 추가 몬스터가 나올 수도 있으니, 조금만 더 지켜보죠?” 하지만 생각보다 낮은 난이도에 도적은 리더의 명령을 무시한 채 맵 주변을 돌며 빠른 속도로 보물 상자를 회수해 나가기 시작했다. 도적 같은 경우는 이동 후에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대기 명령을 내리면, 턴이 더욱 빨리 돌아오는 직업이었기에 그는 순식간에 보물 상자를 회수해 나가기 시작했다. 다음 턴에 궁사가 쏘아낸 화살이 고블린 한 마리를 쓰러뜨리며 맵에는 오직 한 마리의 몬스터만 남게 되었다. 그때였다. “키긱!! 키에엑!! 키에에엑!!!” 한 마리 남은 고블린이 요란한 괴성과 함께 발을 구르자, 순식간에 맵 곳곳에 몬스터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이런!! 뭐지?” 갑자기 땅위에서 기어 올라온 몬스터는 고블린이 아닌 좀비와 스켈레톤 무리들이었다. “엇!! 여기도?” 궁사는 자신의 등 뒤에서 튀어나온 좀비의 공격에 독(毒) 상태에 빠지며 데미지를 입었다. 드래곤 엠블렘은 전술적인 플레이 방식을 추구하기에 뒤에서 당하는 공격에는 추가 데미지와 함께 크리티컬이 터지면 캐릭터가 한 칸 뒤로 밀려 나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이 바로 딱 그런 경우였다. 한 칸뒤로 밀려난 곳이 하필 다른 지점 보다 3칸 위의 절벽이었기에 궁사는 추가 데미지를 입으며 맵의 최상위 지점을 빼앗겼다. 하지만 지금 벌어진 문제는 궁사가 아니었다. 보물 상자 회수를 위해 맵 끝까지 달려간 도적이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여 고립 상태에 놓였기 때문이다. 창기사는 또 다른 몬스터들을 불러낸 고블린을 처리한 뒤 도적을 살리기 위해 적진으로 돌격했다. 타 직업에 비해 회피력이 좋은 도적은 연속으로 회피 룰렛의 타이밍을 맞추며 적의 공격을 피하는데 성공했지만, 이것이 2번째 3번째 연속으로 공격을 받을 경우엔 룰렛의 성공 판정 폭이 점점 줄어든다. 결국 3번째 좀비에게 뼈아픈 타격을 입은 도적은 머리 위로 보라색 거품이 떠오르며 독(毒) 상태에 빠졌다. 그토록 단단했던 파티 벨런스가 단번에 무너져 버리자,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헐.. 저거 어쩌지?” “첫 스테이지부터 추가 몬스터라니, 역시 드래곤 엠블렘이 빡쎄긴 빡세네...” “도적이랑 궁수가 위험한데,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네. 이거 여기서 한 명은 죽겠는데?” “히익!! 첫 스테이지에서 한명 탈락이냐?” 도적은 다음 턴에서 몬스터와 거리를 벌렸지만, 사정은 더욱 안 좋아졌다. 파티원이 있는 쪽은 이미 몬스터가 가로 막고 있어 오히려 맵의 더 끝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독 상태에 걸린 도적은 추가 행동으로 해독약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보물 상자는 조금 기다렸다가 회수하자고 했잖아요.” 창기사의 나카무라씨는 도적의 독자적인 행동에 파티가 위험에 빠지자, 말투에 짜증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한편 약술사를 사용하는 유저는 몬스터에게 둘러싸인 도적을 도와주는 것은 엄두를 못 낼 일이었기에 궁수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파티 리더인 창기사가 소리쳤다. “아!! 약사님!!! 약사님은 저를 따라오시면서 회복 시켜 주셔야죠!!” “아, 그게 궁수님이 깜빡하고 해독약을 안 챙겨 오셨다고 해서...” “뭐.. 라구요!?” 그 순간 도적은 고립된 상태에서 적에게 둘러 싸여 연속으로 데미지를 입고 있었다. 이미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갔다면, 저 도적은 살 가망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카무라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때로는 동료를 버리는 결단도 필요한 법인데...’ 이거 엉망진창이네... < EP. 27 : 몬스터 레이드 (1) > 끝 < EP. 27 : 몬스터 레이드 (2) > ‘때로는 동료를 버리는 결단도 필요한 법인데...’ 이거 엉망진창이네... 준페이는 고작 첫 스테이지에서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첫 번째 파티를 바라보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그런 녀석의 귓가에 대고 귓속말을 속삭였다. “잘 보고 배워. 네 녀석이 저러면 그냥 없는 동료인 셈 치고 버리고 갈테니, 그런 줄 알아라.” “기대도 안했거든? 그리고 어차피 내 캐릭터는 저렇게 앞으로 나가지도 못해~” “너... 마법사냐?” “물론~ 캐릭터도 여자고, 이름으로 미레아라고 지었지~” 전작인 폭염술사 미레아에서 컨셉을 따온 건가? 누가 섹시녀 매니아 아니랄까 봐... 나는 준페이의 미소에 좌우로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게임 화면에 집중했다. ‘개발자 입장에서 보기에 지금 상황에서는 차라리 창기사가 후퇴해서 약술사와 궁사를 지키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대체 어쩌려는 거지?’ 하지만 창기사는 느린 기동력에도 불구하고 단신으로 도적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도적은 회피와 물약을 통해 어떻게든 버텨나가는 상황이었지만, 이대로는 많이 힘들 듯 해보였다. 그때 궁사가 자신의 앞에 놓인 몬스터를 뒤로하고 창기사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언데드 몬스터 계열은 기동력이 낮기 때문에 궁사는 맵의 중심 쪽으로 후퇴하며 적에게 화살을 쏘아댔다. “약술사님은 몬스터가 없는 쪽으로 돌아서 일단 도적님이 계신 쪽으로 가주세요.” 나카무라씨는 현재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파티원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렸고, 위기에 빠진 도적을 제외한 궁사와 약술사는 그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크흐어억!!” 창기사와 약술사가 거의 도적에게 가까이 다가갔을 때쯤. 도적은 스켈레톤이 휘두른 검을 제대로 회피하지 못하고,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아직 빈사 상태일 뿐입니다. 5턴 안에 부활시키면 살릴 수 있어요. 제가 몬스터를 유인할 테니 그때 약술사님이 부활 아이템을 사용해 주세요.” 창기사의 지시에 약술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카무라씨는 뒤를 돌아보고 있는 좀비 하나를 두 칸 뒤에서 공격해 자신 쪽으로 꿰어냈다. 그와 동시에 도적이 쓰러져 목표를 잃어버린 언데드들은 곧장 창 기사에게 달려들기 시작했고, 창기사와 궁수는 다음 턴에서 조금씩 뒤로 물러서면서도 언데드을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크르르륵...” 창기사와 궁수는 한 마리의 공통된 적을 타겟으로 계속해서 원거리 공격을 펼친 결과. 효과적으로 적의 주의를 끌어 올수 있었다. 간혹 약술사 쪽으로 향하는 몬스터는 궁사가 멀리서 화살로 데미지를 입혀 자신 쪽으로 끌어왔다. 그렇게 빈사 상태에 빠진 도적에게 세 번째 턴이 돌아왔을 때즈음 약술사는 천사의 날개라는 부활 아이템을 이용해 도적을 살려내었다. “오오!!! 됐다. 살렸다~!!” 자신의 잘 못된 판단으로 파티 전원이 위험에 빠졌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던 도적 플레이어는 동료들에게 거듭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도적이 부활함과 동시에 불리했던 전황은 단숨에 뒤집어졌다. 약술사는 곧바로 체력이 많이 소진된 창 기사에게 원거리로 회복약을 투척하여 HP를 채워주었고, 궁사는 계속해서 맵 구석으로 빠지며 활시위를 당겼다. 그렇게 거의 포기 직전에 놓여 있었던 몬스터 레이드는 나카무라의 용병술로 인해 다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이야 저 파티장 대단한데? 그래도 동료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네, 멋지다.” 이윽고 마지막 남은 좀비가 궁수의 화살에 쓰러지며 몬스터 레이드의 첫 번째 스테이지가 종료 되었다. “우와아아~~” 쉽게 풀려나갈 줄만 알았던 첫 번째 스테이지가 도적의 돌발 행동에 전멸 위기까지 흘러갔지만, 그것을 다시 뒤집은 것은 순전히 나카무라씨의 전략 덕분이었다. 플레이를 지켜보던 유저들은 창기사의 활약에 감탄하며 박수를 보내주었다. -STAGE 1 CLEAR.- -VIP PLAYER : 네라이우츠- 네라이우츠(저격하다.)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번 스테이지의 최고 수훈 플레이어는 궁사에게 돌아갔다. 게임을 무사히 승리로 이끌어낸 플레이어는 창기사의 전략 덕분이지만, 몬스터를 처리한 숫자는 궁사가 압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이다. VIP 보상으로 착용자의 기동력을 올려주는 레어 아이템 ‘신속의 부츠’를 손에 넣은 궁사는 놀랍게도 이 아이템을 리더인 나카무라씨에게 넘겨주었다. “저 역시 아이템을 제대로 챙겨오지 않아 팀을 위기에 빠뜨렸네요. 이 아이템은 리더인 나카무라씨가 갖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자 도적 역시 보물상자에서 얻은 아이템을 파티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몬스터 레이드는 한 스테이지가 끝날 때마다 모닥불에 둘러 앉아 개인 정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리더의 판단에 따라 레이드를 중단할 수도 있었다. 이럴 경우에는 파티원 모두가 스테이지 1의 클리어 훈장을 얻게 되고, 차후에 플레이시 스테이지 2부터 바로 시작할 수가 있었다. 물론 레이드 중간에도 살아남은 플레이어들은 퇴각할 수 있었는데, 이 경우에는 파티원 전원의 경험치가 상당히 깎여 나가는 리스크를 감당해야만 했다. 첫 번째 스테이지에서 부활 아이템인 천사의 날개와 다량의 회복약을 소비한 탓에 다음 스테이지 이동에 부담을 느낀 나카무라씨는 파티원들에게 이곳에서 후퇴를 제안했다. 어차피 그들은 이벤트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 차후에 드래곤 엠블렘 2의 정식판을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니까. 괜히 무리하여 캐릭터를 잃으니 마을로 돌아가 재정비를 하는 편이 현명한 판단이었다. 고작 첫 번째 스테이지 뿐이었지만, 상당히 인상 깊은 전투를 보여준 나카무라씨의 파티는 유저들의 박수를 받으며 이벤트 존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다음 도전자로 우리 차례가 다가왔다. & “압도적입니다. 강준혁씨를 주축으로 모인 두 번째 파티. 굉장한 스피드로 첫 번째 스테이지를 클리어 합니다.” “우오오!!” “팀워크만 잘 맞으면 진짜 순식간인데?” “그것보단 파티 밸런스가 더 나은 것 같아. 탱커가 둘이니까 몬스터가 막 붙어도 별로 타격이 없잖아.” “그것보단 범위공격이 가능한 마법사가 더 좋은 거 같은데? 탱커 2명이 전방에서 몬스터를 몰아오면 파이어 월(Fire wall)로 그냥 녹여 버리면 되니까.” “그게 파티 밸런스가 좋은 거 아냐?” “아, 그런가?” 고블린과 언데드 무리가 튀어나오는 첫 번째 스테이지를 손쉽게 끝마친 우리는 간단히 개인 정비를 마친뒤 두 번째 스테이지에 돌입했다. 첫 번째 스테이지에서 몰살 수준의 강력한 화력으로 VIP 플레이어가 된 준페이는 새로운 마법 지팡이의 위력에 감탄하며 헤실 거리며 웃고 있었다. “탱커가 두 명이나 되니 딱히 내가 할 일이 없네...” 똑같이 방패기사를 키워낸 타야마씨와 미야자키씨는 번갈아 몬스터의 주의를 끌어내며 방어를 취한 결과. 그들은 파티를 지켜주는 튼튼한 철벽이 되어 단 한 마리의 몬스터조차 통과시키지 않았다. 준페이 역시 오랫동안 게임을 즐겨온 매니아답게 몬스터가 어느 정도 몰리면 광역 마법을 이용해 효율적으로 적을 처리했다. 그리고 이 패턴은 두 번째 스테이지 까지 통했다. 하지만 세 번째 스테이지에 들어서자 상황이 급변했다. “저게 홉 고블린이냐.. 어마어마하게 큰데?” 기본의 녹색 피부를 가진 조그만 고블린들과는 달리 누런 피부에 터질 듯 한 근육질을 자랑하는 변종 고블린은 덩치가 큰 만큼 모든 공격에 광역 스킬이 달려있었다. 알게 쉽게 설명하자면 한 번의 공격으로 타야마씨와 미야자키씨에게 동시 타격이 가능하달까? 거기다 크리티컬 한방이라도 터지는 날에는 캐릭터 자체가 뒤로 한 칸 밀려나며 그로기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로기 상태에 걸리게 되면 캐릭터를 움직일 수 있는 행동 턴이 뒤로 밀리며 적에게 또 한 번의 공격을 허용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다. 그 덕분에 이번 스테이지에서 가장 바쁜 캐릭터는 나의 회복술사였다. 회복술사는 준사제로서 아군의 회복과 언데드 몬스터에게 턴 언데드를 시전 할 수 있었기에 어느 정도 전투에도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준페이는 파티의 가장 후열에 서서 홉 고블린을 향해 계속해서 불꽃 마법을 시전 했다. 카아앙!!! 카아아앙!!! 두 명의 방패기사는 나의 지시에 따라 아예 공격을 포기하고, 방어에만 전념하고 있었기에 홉 고블린의 공격을 튼튼히 막아내 주었다. 나의 회복술사는 주위에 다가오는 좀비들을 턴 언데드로 즉사 시키며 틈틈히 탱커들의 HP를 회복 시켜주자, 어느새 주변에 있던 잡 몬스터들은 모두 사라지고 보스 몬스터인 홉 고블린 만이 남게 되었다. 그때 준페이 녀석이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혹시 마나 물약 있는 사람...? 나 MP가 다 떨어졌는데...” “그러게 내가 첫 스테이지에서 마법 아껴 쓰랬지?” “하하하... 준혁아 마나 물약 좀 남았냐?” “잠깐만 기다려 봐. 다음 턴에 넘겨줄게.” 잡 몬스터의 처리로 준페이와의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던 탓에 나는 서둘러 준페이가 있는 방향으로 캐릭터를 이동 시킨 순간. 퍼어억!! -고블린들이 던전에 설치해둔 함정에 빠졌습니다. 소지 중인 마나 물약 X2를 잃었습니다.- “어억!!!” 우리 파티에는 도적이 없었기에 사전에 맵에 설치된 함정을 탐지할 수 있는 캐릭터가 없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마나 물약을 두 개나 잃다니, 이 건 좀 치명적인데? 홉 고블린의 체력은 아직도 절반가량이 남았건만 파티의 유일한 딜러인 준페이의 공격이 멈추자, 녀석에게 큰 데미지를 입힐 캐릭터가 없었다. “아!! 쾌속으로 보스몬스터를 공략 중이던 두 번째 파티가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젠장 맞을.. 마나 물약이 하나밖에 안남았는데, 탱커들 HP를 채워주려면 이것도 부족하다.’ 그때 방패로 홉고블린의 공격을 막아내던 미야자키씨가 입을 열었다. “저한테 마나 물약이 있어요.” “으잉? 미야자키씨는 전사 캐릭터인데 마법 물약을 들고 오셨어요?” “혹시나 해서, 다른 플레이어들의 아이템도 몇 개 챙겨두었거든요.” “사랑합니다. 미야자키씨..” 준페이는 다음 턴에서 미야자키씨에게로 캐릭터를 이동시켰고, 그녀는 잠시 자리를 이탈하여 준페이에게 마나 물약을 건네주자, 그 사이 홉 고블린의 공격을 타야마씨가 홀로 막아내었다. “워... 팀웍보소..” “아, 혹시 저런 일도 있으니, 다른 플레이어의 아이템도 같이 챙겨두는 게 좋겠구나...” 유저들은 우리의 플레이에 감탄하며 열화와 같은 함성으로 응원해 주었다. 미야자키씨에게 물약을 넘겨받은 준페이는 다음 턴부터 모든 마법을 쏟아 붓기 시작했고, 나는 뒤에서 탱커들의 HP를 보존 시키며 힘을 실어 주었다. “이게 마지막이다!!” 준페이의 외침과 함께 바닥에서 솟아난 불꽃이 홉 고블린을 태우자, 거대한 비명과 함께 화면이 부르르 떨리며 거대한 녀석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쿠웅....!!! “우와아~!! 보스 몬스터를 클리어 했어!!!” “팀웍만 잘 맞으면 몬스터 레이드도 문제없겠는데?” “혹시나 플레이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경험치는 좀 잃겠지만, 퇴각할 수 있으니...” “그래도 아차해서 죽으면 캐릭터를 처음부터 다시 키워야 하는 건 마찬가지잖아. 나는 그게 좀 마음에 걸려... 게임은 스트레스 풀려고 하는 건데, 요 며칠 드래곤 엠블렘 체험판 하다가 암 걸리는 줄 알았다.” “하긴 그건 좀 그러네...” “쉿!! 잠깐만 조용해 봐. 클리어 화면에 뭐가 나온다.” 어느 유저의 외침에 회장 안이 단숨에 고요해졌다. 스크린에 체험판의 엔딩을 알리는 영상과 함께 화면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드래곤 엠블렘 2의 하드코어 모드를 클리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EP. 27 : 몬스터 레이드 (2) > 끝 < EP. 27 : 몬스터 레이드 (3) > -드래곤 엠블렘 2의 하드코어 모드를 클리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재 여러분이 즐겨주신 체험판은 드래곤 엠블렘의 최상위 난이도인 하드코어 모드입니다. 하드코어 모드란 단 한 번의 플레이로 엔딩까지 향하는 극한의 모드입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시는 동안 여러분은 수많은 죽음을 바탕으로 드래곤 엠블렘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법을 숙지하셨을 것입니다.- “하드코어 모드? 설마, RPG 게임에 난이도가 존재하는 건가?” 이 시대의 RPG게임이라면 보통 ‘드래곤 워리어 시리즈’나 ‘파이널 프론티어 시리즈’처럼 정해진 스토리를 따라가는 일자진행형 플레이를 떠올리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드래곤 엠블렘 2는 현재까지 그들이 즐겨온 RPG 들과는 그 형식을 좀 달리하는 편이었다. 몬스터 레이드 시스템에서 느껴지듯 드래곤 엠블렘의 두 번째 이야기는 미래에 온라인 게임이 가지고 있는 RPG 성향을 띠고 있었다. ‘극한의 난이도를 뚫고 올라온 자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보상을 줘야지. 영원히 드래곤 엠블렘의 세계에 머무를 수 있는 특권을 말이야...’ 작년.. 그러니까 드래곤 엠블렘 2의 기획 초안을 넘겨받은 제 2개발팀 직원들은 놀라울 정도로 거대한 세계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초안을 검토한 하야시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안경을 고쳐 쓰며 나에게 물었다. “부장님.. 이 정도로 거대한 세계관을 대체 어떻게 만드시려는 겁니까? 드래곤 엠블렘은 이제 고작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했을 뿐입니다. 이 정도의 세계관을 구축하려면 적어도 10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릴 거 같은데요? 더구나 유저들이 가상의 공간에서 각자의 세력을 만들어 싸운다는 이 부분은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당연히 이해가 되지 않겠지.. 그들에게 넘겨준 기획서 중에 몇몇 초안 부분은 향후에 MMORPG에서나 사용될 시스템들이었으니까...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야시에게 당연하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걱정 마. 정말로 10년을 내다보고 기획한 거니까.” “네에...?” “지금은 드래곤 엠블렘의 세계관을 유저들의 머릿속에 각인 시키는 것에만 집중하도록 하자. 그러기 위해선 우선 게임의 장르부터 바꿔야겠지?” “어라? 그럼 전에 말씀 하신 상하단차를 이용한 택틱스 기반의 던전 맵은 안 쓰시는 건가요?” “아, 그건 나중에 따로 쓸 일이 있을 거야. 이번에 드래곤 엠블렘을 즐기는 플레이어들은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어야만 해. 그러기 위해선 아무래도 육성 시뮬레이션이란 장르가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 중이야.” “육성... 시뮬레이션이요?” 장대한 판타지 세계관 설정에 당연히 RPG를 떠올렸던 직원들은 뜬금없이 터져 나온 생소한 장르 명에 고개를 갸웃 거렸다. 하지만 점점 게임이 제 모습을 갖춰나가기 시작하자, 직원들의 얼굴에 생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부장님. 예전에 드래곤 엠블렘을 혼자 만드셨을 때 이런 기분이셨군요?” “음...?” “게임이 완성 되어 갈수록, 이 게임을 플레이 할 유저들의 모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네요.” “······.” 유저들을 괴롭히는 내 변태 성향이 우리 팀 직원들에게도 점점 묻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체험판 제작이 결정된 순간. 나는 배포되는 게임의 난이도를 하드코어 모드로 초점을 맞춰 두었다. 그러자, 개발팀의 몇몇 직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체험판부터 하드코어 모드를 배포시키면 라이트 유저 같은 경우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직원의 질문에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 이건 돈을 주고 사는 게 아닌 무료로 게임을 즐기는 체험판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드래곤 엠블렘과 더불어 그 동안 우리가 만들어온 게임들의 아이덴티티를 생각하면 유저들 역시 어느 정도 각오를 다지고 플레이에 임하게 되겠지. 이건 펜타곤이 만든 게임이다. 결코 호락호락하진 않을 거야.” “아, 하긴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오히려 라이트 버전을 체험판으로 배포한다면, 잔뜩 기대 했던 것과 달리 살짝 싱거운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거야. 더구나 캐릭터가 사망하지 않는다면 다양한 캐릭터를 만들어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도 없어질 테고 말야. 하지만 반대로 하드코어 모드를 먼저 플레이하고 나면 되려 이 정도면 해볼만하다고 느껴질 걸?” “아아...” 그리고 그렇게 모든 과정을 거쳐 지금 이 순간. 유저들은 화면에 흘러나온 메시지에 엄청난 환호성을 보내고 있었다. “저 메시지대로 라면 이번 시리즈에 내가 만든 캐릭터가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거잖아?” “대박이다..” “이제야 드래곤 엠블렘 2의 시스템이 왜 육성 시뮬레이션인지 이해가 가네...” “결론은 게임이 너무 어렵게 느껴지면 노멀 모드로 플레이하면 되고, 만약에 차기작에 자신의 캐릭터를 등장 시키고 싶다면 하드코어 모드로 클리어 하라는 건가?” “와... 내가 진짜 반드시 하드코어로 클리어 하고 만다.” “뭐, 파티 멤버만 제대로 맞추면 몬스터 레이드라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은 것 같은데?”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다음으로 몬스터 레이드에 도전한 파티들의 모습을 보고 산산히 부서져 버렸다. 이벤트 참가만을 목적에 두고, 급조된 파티는 그 구색부터가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첫 번째와 두 번째 파티의 레이드가 쉽게 느껴졌던 것은 ‘힐러’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는데, 다른 직종에 비해 더욱 키우기가 힘들다보니 꼭 필요하면서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인력이었다. 결국 전사 넷이서 닥치고 돌격한 세 번째 파티는 첫 번째 스테이지에서 소지한 회복 물약을 다 써버리고도 무리하게 두 번째 스테이지를 도전한 탓에 전멸을 맞이했다. 네 번째는 무려 궁수가 셋에 양손검사가 하나인 극딜 파티로 어느 파티보다 빠르게 스테이지를 클리어 해나갔으나, 결국 세 번째 스테이지의 보스 전에서 홉 고블린을 중심으로 포위망을 형성했지만, 잡 몬스터이 등장한 순간부터 화망(火網)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그 와중에 양손 검사는 자기 혼자 살겠다고 전투에서 이탈하여 구경 중이던 유저들에게 욕을 엄청나게 먹었다.) “비겁한 놈.” “자기 혼자 살겠다고 동료를 버리다니, 쓰레기다.” “와~ 진짜 첫 번째 파티랑 비교된다. 최악의 팀웍이었어...” 양손 검사 플레이어는 유저들의 원성에 재빨리 가방을 챙겨들고 행사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총 4번의 몬스터 레이드 이벤트가 종료 되고, 나는 유저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묵묵히 단상에 올라섰다. “오늘도 저희 타마고 샵에 방문해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희가 준비한 몬스터 레이드 이벤트는 즐거우셨나요?” 생각보다 다들 만족한 표정에 나는 웃으며 뒤에 말을 이었다. “드래곤 엠블렘 2 –부러진 성검과 암흑의 시대- 는 다음 달 2월 20일 정식 발매 예정입니다. 최대한 많은 유저분들께서 동시에 게임 즐겨 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충분한 수량을 준비하고 있으니 부디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오오~!!” “마지막으로 게임 출시와 더불어 드래곤 엠블렘 전용 샵 또한 계획 중이니 차후 파티 플레이에 어려움을 느끼시거나 동료를 원하시는 분은 언제나 편하게 방문해주길 바랍니다.” 마이크를 내려놓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타마고 샵에 모여 있던 유저들로부터 박수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한 유저가 무대에서 물러나려던 나에게 물었다. “이번에도 히로인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시나리오가 있나요!?” 그러자 단숨에 박수소리가 줄어들더니 모두가 숨죽여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거 참. 질문이 좀 날카로운데? 나는 다이렉트로 날아온 질문에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미리 밝혀드리자면 이번 드래곤 엠블렘 2는 총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부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게임을 클리어 하신 분들은 한 가지 선택을 하게 되실 겁니다.” “그, 그것도 하드코어 모드를 클리어 한 유저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인가요?” “아뇨. 라이트 유저분도 엔딩을 보고나면 선택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단.. 하드코어를 클리어 한 플레이어와 차이가 있겠지요.” “아... 이러면 하드코어 모드 도전을 안 해볼 수가 없잖아...” “모든 선택은 여러분에게 달렸습니다. 너무 맹목적으로 하드코어만을 노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충분히 노멀 모드를 즐기신 후 나중에 하드코어 모드에 도전하셔도 늦지 않으실 겁니다. 그럼 전 이만...” 마지막 멘트를 마친 나는 최대한 유저들 입장에서 의미심장해 보이도록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여유 있게 웃어 보인 뒤 무대에서 내려왔다. &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 드래곤 엠블렘 발매를 목전에 둔 어느 날.. 유키네 집의 저녁 식사에 초대된 나는 오랜만에 그녀의 집을 찾았다. 그래도 처음 인사를 드리던 날과는 다르게 어느 정도 진정된 분위기에서 즐거운 식사를 마친 나는 유키 어머님께서 후식으로 내온 과일을 먹으며 담소를 즐겼다. “그렇군. 자네도 여러모로 바빴구만~ 난 또 그 후로 우리 집에 안 와서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나 했지~” 굉장히 밝은 성격인 유키의 아버지 이시카와씨는 호탕하게 웃어 제쳤다. “아빠도 참..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준혁씨는 그런 사람 아니래두요.” “알았다. 알았어~ 역시 딸 2호기가 나를 닮아 사람 보는 눈이 있구만, 그에 반해 초호기는 영...” 초호기와 2호기라니 전에도 느꼈지만, 딸들을 저렇게 부르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이시카와씨가 뜨거운 녹차를 삼키며 곁눈질로 유키의 언니인 유코씨를 흘겨보자, 옆에서 과일을 깎고 있던 어머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그 말은 유코가 날 닮아서 사람 보는 눈이 부족하다는 말인가요?” “풉!! 아니 여보.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러자 유코의 어머니는 나를 향해 살포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많이 들어요~ 과일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아, 네 감사합니다..” “어떻게 인연이 닿아 이번에는 내 딸아이가 한국인과 사랑에 빠진 건지. 이런 것도 유전인가?” 유키는 어머니의 말에 얼굴이 빨개지며 내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허이구~ 이 녀석아 준혁군이 그렇게 좋아?” 유키는 어머님의 물음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를 지켜보던 아버님이 두 눈을 훔치며 입을 열었다. “이 녀석. 시집 안가고 평생 나랑 살겠다더니, 순 뻥쟁이였구나.” “아이~ 아빠 또 왜 그래요~” “그냥 갑자기 네가 시집간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 막 허전하고..” “유키야, 네 아빠 또 운다.” 그러자 옆에 있던 유키의 눈에도 금세 눈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까까진 그렇게 밝고 해피하더니 순식간에 새드물로 바뀌었네... 전에도 느꼈지만, 이 가족은 상황 전개가 너무 빨라. & 그날 밤. 전과 마찬가지로 차를 세워두었던 주차장까지 유키가 나를 배웅해 주었다. “미안해요. 식사 초대해 놓고 아빠랑 같이 울기만 했네요..” “괜찮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하아~ 그러고 보면 나중에 준혁씨네 부모님도 어서 만나 봬야 할 텐데. 한국에 언제 갈 건가요? 지금은 너무 시기가 바쁜가?” < EP. 27 : 몬스터 레이드 (3) > 끝 < 단편 : 드래곤 엠블렘 in 우치무라 (상편) > 1987년의 어느 봄날... 까아앙~!! 얄루미늄 배트를 휘둘러 공을 때리는 소리가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커텐 너머에서 들려왔다. “내가 처리 할게!!” “꺄아~~ 이치로군~ 파이팅~!!” 창 밖에 들려오는 계집아이들의 꺄꺄 거리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귀가 거슬린다. ‘저 녀석들은 지치지도 않나? 학교가 끝났으면 집에 가야지. 부 활동은 얼어 죽을...’ 묵묵히 가방을 둘러매고 교실을 나서려는데, 같은 반 친구인 아베가 나를 불러 세웠다. “어이~ 우치무라. 너 약속 있냐?” “아니, 왜?” “조금 있다. 마에다 녀석이랑 서점 갈 건데, 같이 갈래? 오늘 패미통신 나오는 날이 잖아.” 훗... 이 녀석 뭣도 모르고 이 몸과 어울리려 하다니.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나의 왼팔에 잠들어 있는 흑염룡이 깨어나면, 너희들의 목숨이 위험할지도 몰라. 그러니 나랑은 가까이 지내지 않는 게... “나 오늘 용돈 받았어. 가는 길에 타코야키 쏜다~” 아베 녀석의 말에 나는 가만히 왼팔을 주물러 보았다. 그래. 아직은 흑염룡이 잠들어 있는 상태니까. 괜찮을지도 갑자기 녀석이 날뛰지 않기를 바래야지. “······그래~ 가자.” 결코 타코야키 때문에 마음을 돌린 것은 아니다. 아베 녀석도 마에다 녀석도 이 야구와 축구 밖에 모르는 거지같은 고등학교에서 그나마 게임에 대해 조금은 아는 녀석들이기에 어울려 줄만하니까. & 학교를 나선 우리는 전철에 올라 난바 역으로 향했다. 오사카의 중심인 이곳은 니혼바시까지 상당히 큰 번화가를 이루고 있었기에 친구들과 자주 들르는 곳이었다. 대형 서점의 좋은 점은 일반 편의점이나 작은 서점에 비해 신간 잡지를 눈치 보지 않고 서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부모님께서 주시는 용돈으로 매달 한권씩 사보긴 하지만, 최근에 용돈이 다 떨어져서 오늘은 서서 보는 걸로 만족해야만했다. 학교가 끝나고 곧바로 와서 그런지 잡지 코너는 생각보다 한적했다. 웬 젊은 남자 하나가 우리 근처에서 잡지를 뒤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아베 녀석은 진열대에 걸려 있는 패미통신 최신호를 꺼내들며 외쳤다. “아~!! 나왔다.” 마에다 녀석도 잡지를 펼쳐든 채 기사를 뒤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와~ 이번에도 신작이 엄청 많이 나왔네. 용돈도 거의 떨어졌는데, 뭐 사지?” “그럼, 오래할 수 있는 거 사. RPG 같은 거.” “안그래도 드래곤 워리어 2 다 깼으니, 중고 점에 팔고 사면되겠다. 확실히 재미는 있는데, 스토리가 조금 유치하달까? 새로 나온 것 중에 할만한 RPG가 있으려나...” 그러자 같이 잡지를 살펴보던 아베 녀석이 대답했다. “파이널 프론티어. 이거 괜찮을 거 같은데? RPG 전문인 준페이 기자가 40점 만점에 36점 줬어.” “진짜? 드래곤 워리어 2가 38점이었잖아?” 아베는 마에다의 질문에 리뷰 기사 전문을 읽어 주었다. 새로운 게임 회사인 펜타곤 소프트라는 곳에서 만들어낸 파이널 프론티어는 얼핏 듣기에 전투씬을 제외하면 드래곤 워리어 시리즈와 스토리가 꽤나 닮아있었다. “묘한데? 결국 드래곤 워리어의 아류작이라는 소린가?” “일단 전투가 재밌다고 하잖아, 리뷰 점수도 괜찮으니 해볼 만 할 거 같은데?” “음~ 고민 되네. 일단 게임 샵에 가서 아저씨한테 재밌냐고 물어봐야겠다.” 드래곤 워리어와 파이널 프론티어라... 이 녀석들 요새 패밀리 게임 좀 한다싶은 사람들 입에서 조금씩 돌고 있는 ‘드래곤 엠블렘’이라는 게임을 모르는 건가? 여태까지 녀석들의 이야기를 듣고 만 있던 나는 아베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희들. 혹시 드래곤 엠블렘이라는 게임 알아?” 그 순간 우리 곁에서 책장을 넘겨 보던 남자의 손끝이 멈췄다. “드래곤 엠블렘? 그게 뭐야, 처음 들어보는데?” “맞아. 어디서 만든 건데? 그것도 RPG 게임이야?” 최근에 패밀리를 구입해 게임에 대해 관심이 많아진 아베와 마에다가 동시에 나에게 물었다. 녀석들의 반응에 왠지 이제까지 나만 알고 있던 비밀이 밝혀지는 것만 같아, 어물거리던 나는 고개를 내 저었다. “아, 아냐. 모르면 됐어.” “뭐야~ 치사하게 비밀이냐? 무슨 게임이길래 그래?” “그래~ 재밌으면 같이 해보게 좀 알려줘 봐~” 본래 사람이 궁금한 것이 있으면 못 참는 법. 내가 이야기를 꺼내려다가 도로 삼키자, 아베와 마에다 녀석은 궁금해 미치겠는지, 계속해서 드래곤 엠블렘이라는 게임에 대해 끈질기게 물어왔다. “사실 나도 사촌 형한테 들은 이야기야. 그저께 전화가 왔는데, 자기가 엄청난 게임을 손에 넣은 것 같다고 자랑했어. 그 외엔 나도 잘 모른다구..” “게임이 출시 됐으면 잡지에 실렸겠지. 언제 나온 건데?” “몰라. 그냥 도시괴담처럼 떠도는 소문인데, 그 게임은 원래 출시된 적이 없데..” 그러자, 내 말에 아베와 마에다 녀석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리 옆에 서있던 남자조차 내 말이 장난처럼 들렸는지, 피식 코웃음을 흘리며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아베 녀석은 내말이 믿기지가 않는지, 패미통신에 기재된 역대 패밀리 게임의 출시 일 코너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 게임 없는데?” “그러니까 내가 아까 전에 출시된 적 없다고 했잖아..” “뭐야 그게? 그런데 너희 사촌형은 출시도 안 된 게임을 어떻게 해봤데!?” “그게, 중고 게임 샵에서 구했다던데?” 그러자 이번엔 마에다 녀석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물었다. “출시되지도 않은 게임을 중고 게임 샵에서 구입했다고!?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그 게임 장르가 뭔데?” “그게 그 형도 처음해보는 장르래. 배경은 판타지인데, 화면 안에 캐릭터들이 체스판 같은 맵 위에 서 있고 그것들을 움직여서 적과 싸우는 게임이라는데. 문제는..” “문제는..?” “캐릭터가 적에게 당해 사망하면 그 게임 안에서 데이터가 사라진데..” “뭐?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캐릭터가 죽으면 아예 사라져 버린다는 거야?” “그렇지..” 그때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베가 콧방귀를 끼며 비웃었다. “그럼 기계를 껐다 키면 되지. 아니면 세이브 지점으로 로드해서 다시 하던가.” “사촌형 말로는 로드해서 스테이지를 새로 시작해도 이미 그 캐릭터는 사라진 상태라던데?” “뭐라구!? 그럼 아예 처음부터 하는 건?” “그것도 안 돼. 모든 캐릭터가 죽으면 그냥 게임 오버야. 그리고 다시는 플레이 할 수 없어.” “미친.. 거기 제작자가 어디야? 그딴 게임을 만들어 놓고, 돈 받아먹고 팔고 있다 는 거야? 당장 항의해야지.” “제작자는 안 쓰여 있데, 그래서 항의할 고객센터도 없어. 아까 말 한대로 그 게임은 중고 샵에서 케이스 없이 알 팩으로 구입한 게임이고, 가격은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1000엔이었다나?” “천엔!? 그렇게 싸? 말도 안 돼. 너희 사촌형이 거짓말하는 거 아냐?” “흐음~ 그럴만한 성격은 아닌데, 아무튼 그 형은 결국 모든 캐릭터를 잃고 게임 오버 당했어. 그래서 최근에 중고샵을 돌아다니며 드래곤 엠블렘이라는 게임을 찾고 있나 봐..” “헐~ 쩐다. 혹시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도 한번 찾아볼까?” 동시에 서로 눈을 마주친 우리는 다음 순간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가장 가까운 중고샵을 향해 서점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이놈들아!! 서점에선 조용해야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서점 아저씨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지만, 우리는 아무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잠시 후. 난바 역 근처의 전사상가인 덴덴 타운에 도착한 우리는 서둘러 눈에 보이는 중고 게임 샵을 향해 달렸다. “아저씨 혹시 드래곤 엠블렘이라는 게임 있어요?” “음? 그게 뭐냐? 새로 나온 게임이냐?” 역시나 입소문만으로 돌고 있는 게임이라 그런지 게임 가게 아저씨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가게를 나온 우리는 흩어져서 게임을 찾아보기로 했다. “난 전가 상가대로의 로드 샵을 찾아 볼 테니까, 너희는 골목에 있는 중고 샵 위주로 한번 찾아 봐.” 아베의 말에 나와 마에다는 고개를 끄덕이곤 30분 뒤에 다시 이 자리에서 만날 것을 약속했다. 나는 우선 내가 알고 있는 중고 샵 위주로 찾아다니며 게임에 대해 물어 보았지만, 대부분 드래곤 엠블렘이라는 게임 자체를 아예 모르는 가게가 많았다. 혹시 사촌형이 나한테 거짓말을 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덴덴 타운에 있는 유명한 중고 게임 샵은 죄다 둘러보았지만, 결국 허탕을 치고 말았다. 하지만, 약간의 희망은 있었다. 마지막에 들러본 중고 게임 샵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드래곤 엠블렘을 찾고 있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너희들 대체 그 게임에 대해 어디서 듣고 온 거니? 오늘만 그 게임을 찾는 사람이 너희까지 5명인데, 패밀리 게임 발매 리스트를 찾아봐도 그런 게임은 안보이던데..” 마지막 가게 주인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드래곤 엠블렘은 분명히 존재한다.’ 확신을 얻은 나는 덴덴 타운의 조금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약속 시간에 맞춰 돌아가려면 슬슬 대로변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왠지 이대로 돌아가 봤자 아베 녀석도 마에다도 허탕을 쳤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잠시 주위를 살피던 나는 덴덴 타운 뒤쪽에 위치한 주택가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전자 상가랑 거리가 멀어지며 급격히 가게가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드문 드문 가게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낡고 허름한 중고용품 판매점 들이었기에 주로 고장난 세탁기나 냉장고가 가게 밖에 진열 되어 있었다. “이런데 게임 가게가 있을 리가 없잖아. 그만 돌아 갈까...?” 흐르는 땀을 닦아 내리며 혼잣말을 중얼 거리던 나는 그만 지쳐 발길을 돌리고 싶어졌다. 그 순간. 어디선가 슈퍼 마리지의 메인 테마곡이 내 귓가에 들려왔다. “슈퍼마리지의 BGM....?” 빰빰빰~ 빠바밤빠바~ 빠바바밤빠밤빠바바~ 희미하게 들려오는 슈퍼 마리지의 배경 음악에 홀린 듯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눈 앞에 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게임 가게가 보였다. ‘우와... 기둥 하나라도 건드리면 가게가 폭삭 주저앉을 것 같은데? 이런 곳에 드래곤 엠블렘이 있을 리가 없어...’ 가게 규모에 실망한 내가 발길을 돌리려던 순간 뒤에서 나를 부르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렴. 혹시 찾고 있는 게임이 있니?” “네...? 아, 저 그게...” “편하게 말 해 보거라. 가게는 허름하지만, 이래 뵈도 없는 게임이 없으니까.” “혹시... 드래..곤 엠블렘이라는 게임도 있나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할아버지에게 말을 건네자, 그는 입에 물고 있던 곰방대를 재떨이에 톡톡 털어내며 대답했다. “있지.” “어어억!! 정말요!?” “그래. 딱 하나 남아 있지만, 줄까?” “네!? 아, 네!! 제가 살게요!!! 그런데 얼마죠?” “1,000엔.” 다행이다!! 이번 달 용돈 딱 1,600엔 남았었는데, 앞으로 10일 동안은 600엔으로 먹고 살아야하겠지만, 드래곤 엠블렘을 구할 수만 있다면야~!! 잠시 후. 할아버지는 가게 안에서 검은색 롬팩을 하나 꺼내 오더니 나에게 내밀었다. 아무런 일러스트도 그려져 있지 않고, 단지 드래곤 엠블렘이라는 문자만 적혀 있는 롬 카트리지는 사촌 형한테 들은대로 패키지나 매뉴얼이 포함 되어 있지 않았다. “자~ 마지막 남은 드래곤 엠블렘이다. 어서 가져가거라.”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정말 감사해요.” “끌끌끌. 녀석 게임을 좋아하는구나...” “그럼요!! 제 인생의 낙입니다.” “쯔쯧. 이 녀석 앞날이 창창한 놈이 벌써부터...” “여기 1,000엔이요.” “그래. 고맙구나. 그런데 너.. 만약에 말이다. 미래에 출시될 게임들을 미리 즐겨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어떻게 하겠니?” “미래의 게임들이요?” “먼 훗날에 발매 될 게임들을 말이다. 해보고 싶지 않으냐?” “물론 하고 싶죠!!” “그래? 그럼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우선 빨리 집에 돌아가 드래곤 엠블렘부터 하고 싶네요~!! 할아버지 감사했습니다.” “아니,, 저기 잠깐만!! 헐...” 뒤에서 할아버지의 중얼 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아무 상관없었다. 지금은 내 손안에 들린 이 드래곤 엠블렘이란 게임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런데 저 할아버지 무슨 게임 회사 직원이랑 아는 사인가? 드래곤 엠블렘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렇고, 뜬금 없이 미래에 나올 게임들을 미리 해보고 싶냐니, 설마 발매일 전에 게임 회사에서 불법으로 몰래 빼내오는 분인가? 아무튼 나중에 다시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 어느새 해가 지고 초저녁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지는 골목길을 달려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것이 나와 드래곤 엠블렘이라는 게임의 첫 만남이었다. 그리고 내일 드디어 기다려 왔던 드래곤 엠블렘 2의 정식 발매일이 다가왔다. < 단편 : 드래곤 엠블렘 in 우치무라 (상편) > 끝 < 단편 : 드래곤 엠블렘 in 우치무라 (후편) > 오사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에 올라온 나는 대학을 휴학 중이지만, 어엿한 직장인 이었다. 경기 불황으로 인해 취직의 문턱이 높아진 요즘 같은 시기에도 불구하고, 내 나이 또래의 학생들이 가장 입사하고 싶어 하는 회사 1위로 꼽히는 펜타곤의 정사원이라니 생각만 해도 꿈만 같은 일이다. 거기다 평번한 샐러리맨처럼 회사에 묶여 있는 것도 아닌 무려 자택 근무원. 사실 펜타곤 직원은 자신의 복지 포인트를 이용해 본사에서 발매되는 게임을 무료로 지급 받을 수가 있다. 하지만 직원에게 지급 되는 시기는 초기 물량이 다 빠져 나간 뒤 3~4차 수량에서 쯤에서 받을 수가 있기에 성질 급한 나 같은 인간은 그걸 참지 못하고 유저들 틈에 섞여 게임을 구입하곤 했다. 본래 진정한 게이머란 ‘소장용’과 ‘플레이용’ 카트리지를 따로 구입해두어야 하는 법. 나는 집을 나서기 전 거실 벽면 한쪽을 전부 차지하고 있는 유리 장식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내가 만든 피규어부터 시작해 펜타곤에서 출시한 게임들이 장식장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다녀오겠습니다.” 텅 빈 거실을 향해 인사를 마치고 두꺼운 철문을 열어젖히자, 눈부신 아침 햇살이 복도에 설치된 창을 통해 내 눈에 파고들었다. “크윽, 빌어먹을 태양권...” 펜타곤 본사가 있는 신주쿠에서 아키하바라 까지는 야마노테센이라는 JR노선을 타면 쉽게 이동할 수가 있었다. 잠시 후. 아키바에 도착해 서쪽 출구로 빠져 나오자, 반가운 얼굴들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어~ 직장인~”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아베와 마에다 녀석. 이 녀석들도 고등학교 졸업 후에 나와 같이 도쿄로 올라와 자취 중이었다. 아베는 고등학교 때부터 제과제빵에 취미를 가져서 전문학교를 졸업 후 동네의 작은 빵집에서 견습 중이고, 마에다 녀석은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여행사에 취직해 벌써 직장인 5년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야~ 작년에 동창회에서 봤을 때만 해도 마에다랑 네 걱정 많이 했었는데, 설마 네가 펜타곤에 입사할 줄은 몰랐다.” 아베는 반갑게 내 손을 마주잡으며 웃어 보였다. “연락 좀 자주해 인마. 같이 도쿄에 살아도 얼굴보기 진짜 힘드네.” “미안. 회사일 때문에 좀 바빴어. 앞으로는 자주 연락 할게.” “캬~ 내가 살면서 우치무라한테 회사일 바쁘다는 이야기도 들어보고, 진짜 시간이 흐르긴 흘렀네...” “그러게 말이다. 고등학교 때 드래곤 엠블렘 찾는다고 덴덴타운 뒤적거리던 게 어제 같은데, 이렇게 후속편이 발매 되다니.” “맞아. 그때 너 혼자 드래곤 엠블렘 구하고 돌아와서 겁나 자랑했잖아. 치사하게 어디서 샀는지 알려주지도 않고 말야...” “아냐. 그 때 정말 너희를 데려갔던 그 가게에서 샀었다니까.” “야, 벌써 6년이 지났는데, 이제는 솔직히 털어 놓지 그래?” 6년 전 그 날. 드래곤 엠블렘 카트리지를 들고 약속 장소로 돌아오자, 아베와 마에다 녀석은 깜짝 놀라 나에게 물었다. “야, 이거 어디서 샀어?” “덴덴타운 외각에 허름한 게임 가게에서 웬 할아버지가 팔고 있던데?” “진짜? 거기가 어디야?” “근데 이게 마지막 남은 드래곤 엠블렘이라고 하셔서...” “아, 정말? 그럼 이 기회에 예약이라도 걸어둬야겠다. 안내 좀 해줘 봐.” “뭐 그건 어렵지 않지.” 하지만 친구들과 다시 찾아간 곳은 아무것도 없는 버려진 상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방금 전 드래곤 엠블렘을 구입할 때만 해도 그렇게 깔끔한 인상의 가게는 아니었지만, 내 눈앞에 있는 상가는 한 눈에 보기에도 오래전에 폐업했는지 가게 곳곳에 거미줄이 끼어 있었다. “어!? 이상하다. 내가 골목을 착각 했나?” 고개를 갸웃 거리며 근처의 골목을 찾아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할아버지가 앉아 있던 게임가게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우치무라. 너 일부러 혼자만 하려고 게임 가게 안 알려주는 거 아냐?” “아냐. 진짜 여기 있었다니까!!”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만, 나를 따라 몇 번이나 골목을 돌라다닌 아베와 마에다 녀석은 점점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야, 알려주기 싫으면 싫다고 하지. 왜 사람을 데리고 빙빙 돌아 다니냐.” “그러게 진짜 실망이다.” 그 후로 녀석들은 나에게 실망했는지, 한 동안 학교에서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뭐~ 얼마 지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화해 하긴 했지만, 그 날 일은 아직도 나에겐 미스테리 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도쿄로 올라오기 전까지 가끔 생각이 날 때면 찾아가 보았지만, 도쿄로 올라오기 며칠 전 그 자리에 비디오 가게가 새로 오픈 하면서 나는 더 이상 할아버지 가게를 찾는 것을 포기했다. 그 후로 6년이 지나 우리 셋은 모두 사회인이 되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게임을 좋아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라온 같은 경우는 휴대기기라 그런지 출 퇴근에 시간이 걸리는 직장인들 사이에서 굉장히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야, 잡담은 일단 대기 줄에 서서 하자. 저기 사람 장난 아니게 모인 거 같다.” “저게 뭐야, 세상에... 이러면 연차까지 써서 온 보람이 없잖아.” “그러게 무슨 디즈니랜드 입장 줄도 아니고...” 역 앞에 위치한 타마고 샵에서 약 50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드래곤 엠블렘 전용 매장은 정식판 출시에 맞춰 오픈을 예정하고 있었다. “이거 무슨 게임 못 사서 죽은 귀신들이 박혔나...” “진짜 인기 게임 한 번 살 때마다 매번 이게 뭐하는 짓인지.” 아베와 마에다는 길게 늘어선 줄을 바라보자, 온몸에 힘이 빠지는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고 돌아갈 순 없기에 우리 셋은 서둘러 달려가 대기 열의 맨 끝에 나란히 섰다. 그리고 잠시 후. 매장의 오픈을 알리는 축사와 더불어 드래곤 엠블렘 샵의 문이 열리고, 대기 열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샵의 점장으로 발령 받은 미야자키씨는 정문에서 드래곤 엠블렘에서 등장하는 마법사 복장을 하고 웃으며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마침 정문을 통과해 들어 가던중 사람들 무리 속에서 나를 본 그녀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어머, 우치무라씨~!!” “안녕하세요. 미야자키씨.” “드래곤 엠블렘 구입하러 오신 거예요?” “아, 네. 복지 포인트로 신청 하긴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저두 그래요.” 그녀는 드래곤 엠블렘 2의 카트리지를 들어 보이며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렸다. 워낙에 빠르게 대기 열이 줄어드는 탓에 몇 마디 나누지 못했지만, 미야자키씨의 미소를 볼 때마다 왠지 가슴이 두근거린단 말이야? “야, 저 분 누구냐? 우리랑 나이 비슷해 보이는데?” “펜타곤 직원 분이셔. 드래곤 엠블렘 샵의 점장이기도 하고...” “진짜? 대박. 너랑 친하냐?” “그... 글쎄..” 나는 아베의 질문에 대답을 얼버무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우리 셋은 거의 동시에 드래곤 엠블렘을 구입한 뒤 점심을 먹을 겸 샵 근처의 패스트푸드 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가방에서 라온을 꺼내들었다. “체험판 캐릭터 승계한 뒤에 셋이서 레이드 한판 달려볼까?” “레이드는 4인 파티잖아. 한사람 부족하지 않아?” “뭐, 일단 3명이 맞춰졌는데, 설마 저들 중에서 한 사람 안 걸리겠어?” 아베 녀석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자, 가게 안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라온을 즐기고 있었다. 샵과 가까운 위치에 있다 보니 게임을 구입한 사람들이 식사 겸 이곳을 찾은 모양이었다. 하긴 햄버거 하나 시켜 놓고 게임을 즐기기에 이곳만큼 마음 편한 곳도 없으니까.. & 그 후로 우리는 매주 주말 마다 정해진 시간에 모여 레이드를 즐겼다. 한 명이 모자란 탓에 인원 보충을 위해 PC통신의 드래곤 엠블렘 커뮤니티 안에서 길드를 개설했더니, 비슷한 레벨 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모두가 마성의 탑을 무너뜨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행사했지만, 드래곤 엠블렘의 레이드 시스템은 그렇게 만만히 볼 것이 아니었다. 레벨이 올라갈수록 키운 캐릭터가 한 순간에 잃을까 두려워 던전 공략이 더뎌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 나와 친구들의 캐릭터 레벨은 48. 중간에 파티 전멸로 인해 레벨 39짜리 캐릭터를 잃고 난 뒤, 멘탈 부서진 우리는 너무나 큰 상실감에 한 때 드래곤 엠블렘을 접을까 고민한 적도 있었다. 드래곤 엠블렘 샵에는 1위부터 100위까지 명예의 전당에 올라간 캐릭터의 레벨은 보통 70대를 유지하고 있었고, 현재 톱 랭킹에 올라 있는 플레이어는 최근에 레벨 80대에 올라섰다. 그러던 어느 날. 현재 드래곤 엠블렘에서 최고 랭킹 길드라 일컬어지고 있는 ‘광전사’ 길드가 펜타곤 소프트의 초청을 받아 최초로 마성의 탑 최상층에 도전하는 이벤트가 열렸다. 드래곤 엠블렘의 유저들은 이 악랄한 게임의 끝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벤트 관람 신청을 내었다. 나와 친구 녀석들은 점장인 미야자키씨에게 부탁해 행사 도우미 자격으로 이벤트 홀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이벤트 당일 마에다 녀석이 약속시간에 늦는 바람에 조금 늦게 회장에 도착한 우리는 미야자키씨가 열어준 스탭 출입문을 이용해 이벤트 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오오오!!!” 회장에 들어서자마자 터져 나오는 함성에 고개를 돌리자... ‘히이익!! 블랙 드래곤...?’ 맵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드래곤에 맞서 4명의 캐릭터가 고군분투 중이었다. 각 직업별 최종 클래스로 무장한 파티는 드래곤의 맹공 앞에서도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용자와 신궁(神弓) 그리고 두 명의 현자로 이루어진 파티는 발군의 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파티의 수장인 용자의 레벨은 83. 파티중 레벨이 가장 낮은 캐릭터가 79레벨이었기에 3명이 80대 레벨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박이다. 이러다 정말 끝판 깨는 거 아냐?” “와.. 진짜 현자라는 클래스. 동료에게 버프 걸어주는 게 장난 아닌데?” 마성의 탑을 지키는 두 마리의 드래곤. 첫 번째 마성의 탑의 주인인 화이트 드래곤과 두 번째 마성의 탑의 주인인 블랙 드래곤. 이 들은 두 동강 나버린 성왕 크로엘의 성검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기에 이번 스테이지를 클리어 한다면 최초로 크로엘의 성검을 완성 시키는 파티가 될 것이 분명했다. “크오오오!!!” 화면 가득 박력 넘치는 용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광전사 길드의 파티원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각자의 턴에서 최선의 역할을 수행해 내고 있었다. “조금만 더!!” “할 수 있다!!!” 대체 저 궁사 어질리티를 얼마나 처박은 거야? 다른 파티에 비해 거의 1.5배 속도로 턴이 돌아오는 신궁은 광활한 맵을 누비며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관통 속성이 붙어 있는 신궁의 화살은 거대한 덩치의 드래곤의 몸을 뚫고 들어가 연속으로 타격 데미지를 입히고 있었다. “우와 개 쩐다...” 용자는 파티의 선봉에 서서 드래곤의 타격을 모두 자신에게로 돌리고 있었다.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다!!” “와.. 진짜 이거 두 달 만에 끝장을 보는 건가?” 역대 RPG 게임 중 플레이 시간 2달을 버텨낸 게임이 존재하기는 했을까? 보통 길어야 1~2주면 끝장을 보았지만, 드래곤 엠블렘은 역대 모든 게임의 플레이 시간을 갈아 엎고 있었다. “크워어어어어어!!!!” 그 순간. 블랙 드래곤은 기나긴 비명 소리와 함께 바닥에 몸을 뉘었다. “끝... 난 건가?” “진짜?” 광전사 길드의 파티원 역시 지쳤는지, 의자에 기대어 구슬땀을 닦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마지막 스테이지를 공략한 파티원들의 게임 화면에 작은 메세지가 떠올랐다. < EP. 28 : 용자의 무덤. (1) > “하아~ 그러고 보면 나중에 준혁씨네 부모님도 어서 만나 봬야 할 텐데. 한국에 언제 갈 건가요? 지금은 너무 시기가 바쁜가?” “어...? 아, 글쎄...” “전에도 한국에 갔을 때 준혁씨네 집부터 들를 줄 알았는데, 그때 얼굴이라도 뵀으면 어색하지도 않았을 테고...” 유키의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잊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준혁씨?” “우리 부모님에 대해선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 해줄게. 그러니 너희 부모님께도 일단은 그렇게 말씀 드려줄래?” “아, 준혁씨. 설마...?” 유키는 조그만 입술을 떼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다물었다. “나중에 때가 되면 준혁씨가 말해줘요. 기다릴게요.” “고마워...” 나를 이해해 주는 고마운 마음에 그녀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어 준 나는 주차장에 세워준 승용차에 올랐다. “운전 조심해요.” “응. 고마워.” & 1992년 2월 19일. 수요일. 드래곤 엠블렘 발매 하루 전. 이 날은 드래곤 엠블렘 2의 출시 일이자, 새로운 매장의 오픈 일이기도 했다. 펜타곤을 대표하는 명물인 타마고 샵과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긴 했지만, 마침 아키바에 새로 들어선 빌딩의 1, 2층 전부를 드래곤 엠블렘 전용으로 꾸밀 예정이기에 내부 인테리어가 굉장히 쾌적하게 꾸며져 있었다. 근 한 달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 된 드래곤 엠블렘 전용 매장은 카와구치 대표를 비롯한 모든 펜타곤 직원들의 노력과 열정으로 만들어 졌다. “이번에 드래곤 엠블렘 2가 발매 되면 그럭저럭 한숨 돌리는 시간이 다가 오겠군요.” “일단은 재작년에 발표했던 게임들이 모두 발매 되었으니, 아무래도 그렇겠죠?” 카와구치씨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매장을 둘러보았다. 매장의 중심에는 성왕 크로엘과 성녀 카트리나 그리고 폭염술사 미레아의 새하얀 석고상이 유리관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때 함께 매장을 둘러보던 카와구치씨의 비서 사유리씨가 말했다. “이렇게 보니까, 무슨 박물관에 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1층 절반은 드래곤엠블렘의 게임 타이틀과 관련 굿즈를 판매하는 스토어로 꾸며두었습니다.” 곳곳에 전시 되어 있는 드래곤 엠블렘 관련 상품을 바라보던 그녀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이며 물었다. “2층은 아직 공사 중이라고 하셨죠?” “워낙에 스케쥴이 빡빡한 상태였기에 일단은 1층만 운영이 가능한 상태로 두었습니다. 차후에 오픈 예정인 2층은 카페를 테마로 하여 드래곤 엠블렘 유저들 간의 만남의 장소로 운영할 계획 입니다.” “그것 참 기대 되네요.” 카와구치 대표는 나의 구상을 듣고는 흡족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중 사유리씨가 집게 손가락을 입에 물으며 나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1층의 나머지 절반은 어떻게 사용하실 생각인가요?” “아, 그 부분은 유저들이 얼마나 빨리 드래곤 엠블렘을 클리어 하는지에 따라 차후에 운영 될 예정입니다.” “흐음~ 제 2 개발팀 말대로 이번에도 뭔가 꾸미시는 모양이네요. 그래도 대표님 앞에서까지 꽁꽁 싸매두시다니. 너무한대요?” 그러자 사유리의 말에 당황한 카와구치 대표가 서둘러 그녀의 말을 잘랐다. “커흠~!! 어흠~ 이거 목이 좀 마른데, 사유리씨 물 좀 한 잔만 가져다주시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카와구치 대표의 말이라면 불구덩이라도 뛰어들 그녀였기에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곤 직원들이 모여 있는 카운터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멀리 떨어지자, 카와구치 대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준혁씨. 이제 펜타곤 소프트도 안정을 찾았으니, 이제 그만 펜타곤의 진짜 대표로 나서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저 역시 가끔 직원들이 준혁씨에게 함부로 말을 할 경우에는 마음에 걸려서...” “싫은데요. 대표님께서 마음에 걸려 할 일이 뭐가 있나요. 잘 생각해보면 펜타곤을 처음부터 이끌어 온건 대표님 당신입니다. 그러니 조금 더 자신을 가지세요.” “하, 하지만 그래도 저는 영...” “대표님은 충분히 잘 해주시고 있습니다. 마음이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주세요. 사실은 제가 펜타곤에 남아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네에!?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준혁씨. 펜타곤 소프트를 떠나기라도 하신다는 말입니까?” 카와구치씨의 질문에 나는 그저 살짝 입 꼬리를 올려 웃어보였다. “나중에 천천히 말씀 드릴게요.” & 다음 날. 드래곤 엠블렘 2는 전작의 명성과 체험판에 힘입어 호조(好調)의 스타트를 보였다. 행사 첫날에는 미야자키씨의 깜짝 아이디어로 직원들 모두 드래곤 엠블렘 2에 등장하는 직업군 코스튬 이벤트를 실시하였다. 아침 일찍 행사장에 방문한 나와 카와구치씨 조차 그녀가 준비한 이벤트에 깜짝 놀라, 우리는 새로운 매장 오픈 전에 한바탕 크게 웃을 수 있었다. “마법사이자 점장이신 미야자키님. 그럼 펜타곤의 두 번째 로드샵인 드래곤 엠블렘 스토어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해진 오픈 시간에 맞춰 정문 셔터가 천천히 올라가자, 미야자키씨는 두근거리는지 두 볼이 빨갛게 달아 올랐다. “여러분.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점장이 먼저 함께 일 할 직원들에게 고개 숙이자, 당황한 직원들은 그녀와 마주 인사하며 소리쳤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파이팅~” 철컹. 정문 셔터가 모두 올라가고 굳게 잠긴 문을 열어젖히자, 마치 폭포수처럼 손님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와!! 대박이다. 크로엘의 조각상이 있어.” “뭔가 새로운 피규어도 출시된 거 같은데?” “커헉, 직원들 옷 좀 봐. 저기 서 있는 여 궁사(弓士) 코스프레 한 직원 엄청 귀엽다.” 다행히 미야자키의 아이디어가 제대로 통했는지, 손님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드래곤 엠블렘 2의 첫 날 판매량의 공식 기록을 세우기 위해 직원들은 몰려드는 손님들에게 붙어 빠르게 응대하기 시작했다. 아직 드래곤 엠블렘 2에 관련한 컨텐츠가 모두 준비 되지 않았기에 스토어에는 굿즈나 장식품이 놓여진 공간을 제외하곤 모두 타이틀 판매를 위한 계산대로 활용하고 있었기에 줄은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각 판매대 옆에 타이틀이 판매될 때마다 카운트를 세어주는 직원들의 엄지손가락이 쉴새없이 움직이고, 나는 끊임없이 몰려드는 손님들의 대기 줄을 살피며 직원들을 응원해 주었다. 그렇게 정가 6,800엔짜리 게임 카트리지는 전국의 게임 샵을 통해 첫 주에만 약 10만장에 달하는 판매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이것은 현세대에 모든 기종이 발매한 게임 타이틀 중에 가장 최단 기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체험판을 통해 선보인 친구와 함께 즐기는 레이드 시스템으로 인해 드래곤 엠블렘이 가져온 기기견인 효과는 정말로 어마어마했다. 첫 주에만 소프트 판매량의 반을 뛰어넘는 6만대가 추가로 판매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창 전성기를 달리던 민텐도의 패밀리와 거의 동급인 판매 속도였다. 다소 불편하게 느낄지 모르는 강제 4인 파티 레이드 시스템으로 인해 라온은 소비자들 사이에서 거미줄 같이 엮여 팔려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1992년의 4월에 접어들자. 일본 내 콘솔 업계의 순위가 갈렸다. 차세대 기종 중에 가장 후발대로 출발한 라온이 NEGA 드라이브를 꺾고 보급률 2위로 올라선 것이다. 물론 업계 1위인 민텐도와의 격차는 아직도 어마어마했지만, 발매이 후 채 1년도 되지 않아 업계 2위로 올라선 것은 경탄할 만한 일이었다. 덕분에 소니크로 무장한 NEGA는 일본의 내수 시장에서 완전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갓 태어난 휴대용 콘솔에게 2인자의 자리 마저 빼앗긴 것은 그 들에게 있어 굉장히 치욕스러운 일로 남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냥 NEGA 드라이브만 잘 챙길 것이지, 뭐 하러 NEGA CD를 만들어서 스스로 목을 졸라맨 것인지..’ 작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새롭게 등장한 NEGA CD는 역대 일본에서 발매된 콘솔 중에 가장 최악의 판매량을 기록하였다. 약 4개월 동안 판매된 NEGA CD는 최근에 들어서야 1,000대를 겨우 넘는 수준으로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누가 이런 혹독한 경기 불황 속에서 정가 49,800엔짜리 주변기기에 지갑을 열어줄 것이란 말인가? 물론 게임이 훌륭하다면 소비자의 구매욕을 자극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기기와 함께 동시에 발매된 소니크의 그래픽을 보면 기존의 NEGA 드라이브에 비해 딱히 달라진 점을 느끼지 못했다. 거기다 게임 한판을 할 때마다 극악의 로딩에 시달려야 했기에 단 한번이라도 플레이를 체험해본 유저들은 모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패드를 내려놓았다. 아키바에서 체험 플레이를 하던 유저는 기계가 멈춘 줄 알고, 계속 껐다 켰다를 반복 했을 정도니 말 다했지... 하지만 그런 NEGA에게 기쁜 소식도 있었다. 소니크를 번들로 끼워준 NEGA 드라이브가 북미와 유럽에서 엄청난 반응을 보이며 최근에 민텐도의 슈퍼 패밀리 판매량을 앞서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거기서 번 돈을 NEGA CD의 부진으로 모두 날려 버리긴 했지만... 그렇게 1992년은 콘솔 업계에 지각 변동이 꿈틀거리던 시기였다. 라온의 발 빠른 추격으로 인해 대폭 늘어난 기기 보급률을 앞세워, 그 동안 민텐도에 충성하던 서드 파티 몇몇이 우리 쪽으로 넘어왔다. 그중에서 우리가 두 손 들고 반긴 소프트 회사가 있었으니, 바로 ‘실황 풀 파워 프로야구’와 ‘악마성 시리즈’로 유명한 폭스 소프트였다. 그들이 만들어 낸 실황 풀파워 프로야구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었는데, 일본 프로야구 선수 중에 ‘이가와 산케이’라는 선수가 있었다. 그는 고교 때부터 실황 풀파워 프로야구에 선수로서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것이 꿈이었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한센 타이거즈에 입단할 수 있었다. 한센의 쟁쟁한 투수 라인업에서 이가와는 항상 주전에서 밀려났지만, 그래도 다음해에 출시한 풀파워 프로야구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간 것에 대해 큰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기쁨도 잠시.. 분명히 자신의 이름이 올라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친 동생은 게임 속에서 조차 이가와를 기용해 주지 않았다. 왜 자신을 사용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동생은.. “형은 능력치가 너무 낮아.” “······.” 이 한 마디에 그는 특훈에 특훈을 거듭하여 최고의 투수에게 주어지는 ‘사와무라’상까지 얻게 되었고 수상소감에서 기자에서 게임상의 능력치를 올리기 위해 열심히 연습했다고 대답해 일본열도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물론 이것은 1999년에 벌어지는 미래의 이야기긴 하지만...) 이렇듯 폭스 소프트는 일본 게임 회사 중에서 스포츠를 중심으로 다양한 게임을 많이 내었는데, 특히나 그들이 아케이드 용으로 만든 88년 올림픽 게임을 시작으로 스포츠 장르에 대해선 이 시기에 따라올 회사가 없을 정도였다. -저희가 지향하는 스포츠 게임의 형식과 휴대기기 라온의 조합은 최상의 시너지 효과를 불러올 것입니다.- 패미통신 최신호를 넘기던 나는 폭스 포스트 관련 기사에 피식 웃음을 삼켰다. ‘기본만 충실한 다면 축구와 야구 게임은 팬심 때문에라도 절대 무너질 리가 없는 독특한 장르지’ 폭스 소프트 말대로 우리 라온과 궁합도 좋고 말이야.. 고개를 끄덕이며 신문을 살피듯 다음 장을 넘기자, 나도 모르게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광전사 길드!! 최강의 멤버. 두 번째 마성의 탑 도전~!!- 적어도 3~4개월은 버틸 줄 알았던 드래곤 엠블렘의 하드코어 모드를 최단 시간에 돌파하고 있는 최강의 플레이어들이었다. “벌써 두 번째 탑에 도전한다고?” 이거 광전사 길드 때문에 생각보다 2부 진행 시기가 더 빨라 질수도 있겠는데? 드래곤 엠블렘 발매 후. 명예의 전당의 꼭대기에 랭크되어 있는 자들로 최근에 유저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었다. 나 역시 유저들의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해주는 그들의 플레이에 뭐라 할 생각은 없지만, 이 파티 리더 라는 사람. 캐릭터 이름 좀 어떻게 할 수 없나..? 하지만 그로부터 보름이 지나 드래곤 엠블렘 전용 샵 2층. 두 번째 마성의 탑 주인인 블랙 드래곤이 용사 오시리의 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런 제기랄 전설의 용사 이름이 엉덩이(오시리)라니.. 끝장이다.’ < EP. 28 : 용자의 무덤. (1) > 끝 < EP. 28 : 용자의 무덤. (2) > “우와아아아!!!” “설마, 진짜로 클리어 할 줄이야!!” 이벤트에 모인 유저들은 광전사 길드의 최정예 파티에 환호를 내질렀지만, 나의 심정은 매우 복잡했다. ‘엉덩이라니, 위대한 영웅의 이름이 엉덩이라니..’ 그때 옆에 있던 하야시 역시 나와 같은 심정인지, 비음 섞인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부.. 부장님. 이러면 2부에 등장하는 영웅 클래스 캐릭터 이름이..” “그래. 엉덩이다.” “히이익!! 진짜로 그렇게 하실 겁니까?” “뭐, 약속은 약속이니까.” 하지만 아직 작은 희망은 남아있었다. 용사가 되느냐 마느냐의 근소한 차이일 뿐이지만... “크워어어어!!” 용사의 마지막 일격에 블랙 드래곤 마지막으로 괴성을 내지르며 바닥에 몸을 뉘었다. “이제.. 진 엔딩이 나오려나?” 노멀 모드를 클리어 하고 나면 무너지는 탑에서 도망치는 이벤트가 재생되고, 하드코어 모드에 도전해달라는 메시지와 함께 다소 싱겁게 끝나버리지만, 하드코어 모드의 엔딩은 조금 다르게 진행 되었다. 블랙 드래곤을 쓰러뜨린 용사들 앞에 성왕 크로엘을 쓰러뜨린 마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라!? 마신이다!!” “오!! 엔딩이 달라!! 역시 하드코어 모드에 진 엔딩이 숨겨져 있었구나!!” “설마, 곧바로 이어서 최종 결전인가?” -훌륭하구나. 나의 드래곤을 쓰러뜨린 용사들이여.- 광전사 길드의 파티원들은 갑작스레 등장한 마신의 모습에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에 이대로 전투에 돌입한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전투인 줄만 알았던 마성의 탑 최상층에 마신이 나타날 줄이야. 되짚어 보면 전작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마왕을 죽이고 나서 갑작스레 등장한 마신으로 인해 뼈아픈 타격을 입었던 플레이어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드래곤을 물리친 파티원들 앞에 나타난 마신은 플레이어들에게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 대안에 따라 레이드 파티의 리더 ‘오시리’의 화면에 새로운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마신의 제안에 응해 ‘마왕’으로 전직하시겠습니까?- 화면에 떠오른 메시지에 이벤트 홀에 모인 유저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뭐야.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영웅이 될 수도 있고, 마왕이 될 수도 있는 건가!?” “대박이다. 여기서 마왕을 선택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뭐긴 뭐야. ‘엉덩이’ 마왕이 되는 거지!! 아무튼 저 빌어먹을 이름 때문에 뭐가 되어도 진지함이 떨어진다. 그래도 용사 이름 보단 마왕 이름이 나으려나? 에라.. 이젠 나도 모르겠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옆을 바라보자, 나와 함께 앉아 있던 유키는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으로 웃고 있었다. “마왕의 이름이 엉덩이라니. 킥킥킥.” 그래.. 웃어라 웃어.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피식 웃으며 무대로 고개를 돌리자, 광전사 길드의 플레이어들은 굉장히 심각한 표정으로 상의 중이었다. 드래곤 엠블렘 2 최초의 영웅으로 기록 되느냐. 아니면 희대의 마왕으로 기록 되느냐. 그 어느 쪽도 그들에게 있어서 매력적인 선택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용사 클래스인 오시리가 마왕으로의 전직을 제안 받은 순간. 함께 파티를 이루고 있던 신궁과 현자 클래스들에게도 마찬가지 제의가 들어왔다. 그리고 광전사 파티는 이곳에서 꽤나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 4명의 파티에서 용사와 현자 하나는 각각 마왕과 타락한 현자로... 그리고 나머지 인원은 심판자와 대 현자로 클래스 체인지를 마친 것이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네.’ 그들의 선택에 유저들 역시 흥미로운 반응을 보였다. “동료가 두 패로 갈라졌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마신은 새로운 전쟁을 예고하며 자신의 수하가 된 두 명을 데리고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무너지는 탑에 남겨진 심판자와 대 현자가 탈출하는 긴박한 이벤트 영상이 흐르고, 마성의 탑이 모두 붕괴 됐음을 알리는 스토리 영상이 끝나자. 화면에 또 다른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드래곤 엠블렘 ‘프롤로그’ 부러진 성검과 암흑의 시대를 즐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롤로그라고!?” “지금까지 플레이 한 스토리가 드래곤 엠블렘 2의 프롤로그였다니, 대체 세계관이 얼마나 큰 거야?” 당연히 엔딩인 줄만 알았던 유저들은 화면에 떠오른 메시지에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지금까지 이벤트를 지켜보고만 있던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에 올랐다. “안녕하세요. 드래곤 엠블렘의 개발자 강준혁입니다.” 이벤트 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나에게로 향하며 일순 고요해졌다. “먼저 드래곤 엠블렘 하드코어 모드를 끝까지 클리어 해주신 광전사 길드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솔직하게 말씀 드리자면 드래곤 엠블렘 2 출시 후. 하드코어 모드의 클리어까지 적어도 3개월 이상은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언제나 개발자의 예상은 빗나가기 마련이군요.” “그런 것까지 예상하고 있었다니, 사악하다...” 어딘가에서 들려온 유저의 혼잣말에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본래 디렉터란 그런 겁니다. 유저들이 느끼기에 플레이 타임이 너무 짧게 느껴진다면 컨텐츠를 조금 더 늘리고, 너무 많다 싶으면 가지를 쳐내듯 불필요한 이벤트를 잘라내기도 하죠. 길고 지루한 스토리는 여러분을 지치게 할 테니까요. 그래서 드래곤 엠블렘 2의 첫 번째 이야기는 굉장히 단순 명쾌합니다. 동료와 함께 탑을 지키는 드래곤을 쓰러뜨려라. 안 그런가요? 광전사 길드 여러분?” 그러자 마지막 클래스 체인지에서 심판자로 전직한 궁사 플레이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긴 그러고 보면, 자잘한 퀘스트를 클리어 하며 캐릭터가 성장하거나 마을이 번성 하는 건 좋은데, 전작에서 느꼈던 장대한 스토리의 흐름은 없었던 것 같아요.” “정확하게 짚어 주셨네요.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즐겨주신 이야기는 드래곤 엠블렘 2의 극 초반인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내용이었으니까요. 일전에 보여드린 드래곤 엠블렘의 홍보영상에서 마지막에 떠오른 문구.. 혹시 기억하시는 분계신가요?” 나의 질문에 이벤트 홀에 모여 있던 유저들 중에 몇몇이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설마..?” 그렇다. 방금 전직한 유저들은 드래곤 엠블렘의 다음 에피소드인 ‘용자의 무덤’의 메인 스토리에서 영웅 클래스로 등장할 거거든. 드래곤 엠블렘의 영웅 클래스는 각 직업별로 8개. 마왕군의 진영까지 합치면 총 16종류.. 광전사 길드의 클리어 정보는 곧바로 각 잡지사와 PC통신 커뮤니티를 통해 퍼져나갔다. 그러자 유저들은 남아 있는 12종류의 영웅 클래스를 차지하기 위해 마성의 탑 공략을 서둘렀다. 자신이 키운 캐릭터가 다음 에피소드의 주역이 될 수 있다. 물론 16종류의 영웅의 등록이 끝나더라도, 드래곤 엠블렘 2를 클리어한 유저라면 자신의 캐릭터를 다음 에피소드에서 승계 할 수 있었기에 카트리지가 중고 시장으로 흘러가는 범위를 최소화 시킬 수 있었다. 유저와 함께 만들어 가는 새로운 형태의 게임은 소비자들에게 굉장히 좋은 반응을 이끌어 내며 발매 후 약 3개월 만에 일본 내에서만 100만장을 팔아 치우는 기염을 토해내었다. & “드래곤 엠블렘 밀리언셀러 달성을 축하하며 건배~!!” 카와구치 대표의 건배 제의와 함께 여기저기서 잔을 부딪치는 소리 울려 퍼졌다. 그는 연신 드래곤 엠블렘의 성과를 극찬하며 펜타곤 직원들의 박수를 유도하였다. “그럼 이번엔 우리 펜타곤 소프트의 자랑이자, 다음 달에 결혼 예정인 강준혁 부장을 단상에 불러 볼까요?” 갑작스런 대표의 멘트에 샴페인를 삼키던 나는 손을 내저으며 답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자 내 곁에 앉아 있던 모리타와 하야시가 억지로 나를 일으켜 세우며 입을 열었다. “아이~ 그러지 마시고, 다음 달에 결혼도 하시면서 어서 올라가서 한 말씀 해주세요. 야~ 다들 뭐 하냐. 부장님 빨리 안 모시고~!!” 결국 제 2 개발팀원들의 손에 떠밀리듯 단상에 올라선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직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제 1개발팀을 비롯한 마케팅과 회계 팀 직원들까지 큰 박수를 보내 주었다. 10명 내외였던 작은 회사가 이제는 본사에서 일하는 직원 수만 150명에 달하는 거대한 회사가 되었다. 나는 직원들의 박수 소리가 잦아 들 때까지 마이크 손에 쥔 채 파티장을 바라보았다. “우선은 저와 함께 고생해준 제 2 개발팀 직원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먼저 전하고 싶네요. 새로운 휴대용 콘솔을 런칭 하고 약 10개월 정도로 흐른 지금. 라온은 일본 내에서 NEGA를 제치고 보급률 2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업계 1위인 민텐도랑은 격차 크긴 하지만, 모두가 지금처럼만 열심히 해준다면 언젠가 민텐도를 뛰어 넘는 것도 꿈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아타리 쇼크로 인해 유저들에게 신뢰를 잃었던 게임 업계는 민텐도의 패밀리를 시작으로 현재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앞으로 콘솔 시장은 굉장히 큰 변화를 맞이할 것입니다. 그 속에서 전혀 새로운 형태의 장르가 파생 되겠지요. 드래곤 엠블렘 2의 프롤로그는 그 변화를 준비하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아마 이 자리에서 내가 한 말 뜻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나는 마이크를 고쳐 쥐며 빙긋 웃어보였다. & 그로부터 며칠 후. 한국의 만트라 소프트에서 몇 종류의 데모 카트리지가 펜타곤 본사로 넘어왔다. 그것은 PC 게임을 주력으로 개발하는 한국의 게임 회사에서 콘솔 기종인 라온으로 게임 출시를 희망하는 데모 게임들이었다. 90년대의 한국 PC게임 산업은 불법 복제로 인해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였기에 정품을 구입하는 유저가 극히 드물었다. 그러던 중 91년에 출시한 라온이 한국에서 꽤나 큰 인기를 거두기 시작하며 보급률이 늘어나자, 콘솔 게임 사업으로 노선을 변경하는 소프트 회사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였다. 펜타곤과 만트라는 쌍방향으로 서로에게 협조하고 있었기에 펜타곤에서 나오는 게임은 대부분 한글화를 거쳐 출시되었고, 드래곤 엠블렘 시리즈와 더불어 파이널 프론티어는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중에서 몇몇 게임은 오히려 일본어로 컨버젼 되어 출시하는 작품도 있었는데, 만트라에서는 일본시장에서도 충분한 가능성을 보이는 몇몇 작품을 펜타곤으로 보내주곤 하였다. “부장님. 한국에서 새로운 데모 카트리지를 보내 왔는데요?” 우편 보관소에서 갈색 종이 상자 받아온 하야시는 소포를 뜯어내며 내게 말했다. 드래곤 엠블렘의 새로운 에피소드의 포팅 작업 중이던 나는 잠시 한숨 돌릴 겸 하야시가 내민 카트리지를 받아들었다. “최근에 한국에서도 라온용 게임을 많이 개발하네요.” “PC 보급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반해, 게임이 전혀 안 팔리니까. 콘솔기기인 라온 쪽으로 눈길을 돌리는 거지.” “불법 복제 말이군요. 그거야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문제인데요. 애초에 PC는 콘솔에 비해 데이터 복제가 쉬우니 어쩔 수 없죠.” “그러게 말야..” 나는 몇 가지 게임 카트리지를 살펴보던 중 반가운 제목이 쓰여 있는 카트리지 하나에 눈길을 멈추었다. “음? 아시는 게임입니까?” “얼마 전 만트라 대표가 나에게 전화해서 극찬한 게임인데, 한번 해볼래?” 하야시는 나에게서 받아든 카트리지의 제목을 읽으며 중얼 거렸다. “어크토니시아 스토리...? 제목 멋진데요?” “그렇지?” 하야시의 칭찬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빙긋 미소가 그려졌다. < EP. 29 : 하얀 악마의 한국상륙. (1) > 1987년 ‘전설의 신검’을 시작으로 한국의 게임 산업은 단기간에 급속도의 성장을 이루었다. 일본과 미국의 경우는 콘솔 시장의 발전으로 게임 산업이 성장했다면, 한국은 PC의 보급화로 인해 게임 산업이 성장할 수 있었는데, 게임 소프트의 불법 복제에 대한 이렇다 할 법률적 제제가 미흡했던 탓에 걸출한 명작을 개발하고도 판매부진으로 무너지는 소프트 회사가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소름 끼치는 사실은 이 판매가 부진 했던 게임 소프트를 당시 PC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겨 봤다는 것이다. 즉. 게임을 즐겨본 유저의 절반이라도 아니 단 3분의 1이라도 정품 게임을 구입해 주었다면, 한국의 패키지 산업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텐데... 어크토니시아 스토리는 그 유쾌하고 장대한 스토리와는 다르게 나에겐 슬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타이틀이었다. 게임의 불법 복제는 사실 소비자 보다는 그 당시 중간 유통을 맡고 있던 소매점의 탓이 컸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정품을 팔기보다, 오히려 유저들에게 불법 복제 소프트를 권했을 정도니까. 어린 시절 유명 PC 잡지에 소개된 ‘어크토니시아 스토리’를 본 나는 드디어 한국에도 일본의 드래곤 워리어나 파이널 프론티어에 비견 할 만 한 대작이 출시되었다 고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그 당시 일본 게임 보다 그래픽이나 게임성이 더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필드에 돌아다니는 몬스터와 부딪혔을 때 전투에 돌입하는 ‘심볼 인 카운트’ 전투 방식. 그리고 전투에 돌입하면 시뮬레이션 RPG 시스템으로 바뀌며 두 가지 장르의 결합이라는 당시로선 굉장히 획기적인 전투 방식을 만들어 내었다. 푸른 하늘 아래 말을 타고 달리는 기사가 다리를 지나며 시작하는 오프닝을 처음 본 순간. 나는 게임 가게 앞에서 선 채로 굳어 버렸다. ‘세상에 이런 게임이 존재했다니.’ 콘솔 게임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더구나 알아먹지도 못하는 일본어가 아닌 한글이라니, 손끝이 저릿하게 느껴질 정도의 전율을 느낀 순간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당시 나는 컴퓨터가 없었다. 아니, 나만이 아니라 친구네 집 어딜 가도 PC는 없었다. 당시 컴퓨터는 굉장히 비싼 가전제품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웃을 지도 모르지만, 당시 기준 286 PC는 한 대에 약 2~300만원에 해당하는 초 고가품이었다. 더구나 인터넷이 보급화 된 시기도 아니었기에 가정용 PC가 할 수 있는 역할은 그저 단순한 문서 작업이나 베이직을 통한 그래픽 작업뿐이었다. 한국 정부의 미래 개발 산업으로 전국의 국민학교 마다 컴퓨터실을 설치하고, 1가정 1PC 라는 슬로건을 내밀며 컴퓨터의 보급화를 추진했지만, 여전히 PC 한 대의 가격은 웬만한 직장인의 한 달 월급보다 비싼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런 값비싼 가정용 PC를 구입하고도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보니, 어른들 눈에 PC란 300만원 짜리 게임기나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그런 물건을 11살짜리 꼬마에게 덜컥 사줄 만큼. 우리 집은 부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어이 ‘어크토니시아 스토리’를 사고야 말았다. 어린 나의 몸집만한 패키지는 패밀리용 소프트들과는 다르게 굉장히 거대했다. 마치 판타지 세계에나 나올 법한 두꺼운 마법서를 떠올리게 만드는 정품 패키지는 한가운데 그려져 있는 의인화된 태양의 얼굴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새뱃돈으로 무리해서 게임 패키지를 사긴 했지만, 정작 게임을 돌려보지 못했기에 나는 패키지 안에 들어 있는 매뉴얼만 마르고 닳도록 본 기억이 떠올랐다. ‘정작 그 걸 돌려본 건 2년이 지나 13살이 되던 해였지...’ 하지만, 그렇게 2년을 신주단지 모시듯 했던 게임을 처음 플레이한 나에게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버그’였다. 특히나 심했던 버그는 시뮬레이션 RPG를 표방한 전투에서 적 캐릭터가 나무들 사이에 끼어 때릴 수가 없거나, 혹은 내가 끼어서 움직일 수 없을 때가 있었다. 몇몇 이벤트 같은 경우엔 이벤트 시작과 동시에 DOS로 튕겨져 나올 때도 있었기에 게임을 플레이하는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깜빡하고 SAVE를 하지 않았을 때, 게임이 멈추거나 튕겨나가기라도 한다면 정말 머릿속이 새 하애지는 기분에 모니터에 주먹 한방 날리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저거... 버그는 다 해결 하고 보내긴 한 건가? & 다음 날 아침.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하야시가 나에게 다가왔다. “부장님. 이 게임 진짜 대박입니다. 데모 버전이라 전체적인 스토리는 모르겠지만, 적에게 빼앗긴 성스러운 지팡이를 찾아야 한다는 목적의식과 SRPG의 게임성을 그대로 가져온 독특한 전투 방식까지. 정말 재밌게 플레이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불안한 느낌에 하야시의 마지막 말을 번복했다. “하지만...?” “버그 덩어리입니다. 디버깅 작업을 충분히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럴줄 알았다... “하지만, 버그만 제대로 잡는 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요? 팀장님 그거 저도 좀 해볼 수 있나요?” 깐깐한 하야시의 호평에 개발팀 직원 몇몇은 호기심이 이는지 어크토니시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결국 한가로운 오전 시간. 제 2 개발팀 직원들은 어크토니시아의 데모 버전을 복사하여 다함께 즐겨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거 재밌는데?” “특히 패스맨인가? 이 캐릭터 엄청 웃긴데? 뭔가 불법 복제에 대해 한이 서린 느낌이 아주 좋아.” “킥킥. 아~ 이거 중간 중간에 개그 코드가 은근히 내 취향인데?” 역시 좋은 게임은 국경을 초월하는 법. 특히나 어크토니시아의 플레이 방식은 휴대기기인 라온에서 큰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PC로 플레이 했을 때보다 더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랄까? 그 날 오후. 오랜만에 카와구치씨와 점심식사를 하던 도중 나는 한국의 만트라에서 보내온 어크토니시아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런 좋은 게임이 있다면, 라온으로 출시해도 좋지 않을까요?” “하지만, 기술적인 문제가 좀 있어요. 아무래도 개발 환경이 열악하다보니, 콘솔 버전으로 상품화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부분적인 패치가 가능한 PC 게임과는 달리 콘솔 게임에서 버그란 치명적이다. 만약에 스토리 진행이 불가능 한 버그라도 터진다면, 판매된 카트리지 자체를 전량 리콜 해야 하는 일이 벌어 질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민텐도에서 근무했을 당시 진행 불가 버그로 인해 리콜 사태가 벌어지며 회사하나가 폭삭 주저앉는 사례도 몇 번 경험했기에 이 부분에선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 끝에 결심했다. “카와구치씨. 잠시 한국에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네에!? 아니, 준혁씨. 회사 일이야 그렇다 치고, 결혼식은 어쩌시려구요.” 아차.. 그렇구나. 잠시 옛 추억에 사로 잡혀 결혼식이 2주 앞으로 다가온 줄도 몰랐네... < EP. 29 : 하얀 악마의 한국상륙. (1) > 끝 < EP. 29 : 하얀 악마의 한국상륙. (2) > 아차.. 그렇구나. 잠시 옛 추억에 사로 잡혀 결혼식이 2주 앞으로 다가온 줄도 몰랐네... 아무리 내가 일에 미쳐 살아가는 워크홀릭(workholic)이라 해도 결혼을 앞둔 상태에선 어쩔 도리가 없다. 안 그래도 프로포즈를 한 뒤에 사이킥 포스와 드래곤 엠블렘의 출시가 겹치며 거의 혼자서 결혼 준비를 도맡은 유키에게 굉장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준혁씨는 일본의 결혼 문화를 잘 모를 테니 제가 알아서 잘 준비해둘게요.’ 내가 난처해 할 때마다 살짝 혀끝을 내밀며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 보이는 그녀. 난 어쩌면 그녀의 따스한 배려를 바쁘다는 핑계로 너무 당연스럽게 느껴온 것이 아닐까? & 타임슬립 하기 전에도 독신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연애를 아예 안하고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잦은 야근과 뻑 하면 터지는 클라이언트 문제. 디버깅 작업. 위에서 내려오는 개발 진행 상황에 대한 독촉과 더불어 온갖 스트레스 속에서 내 곁에 있는 사람까지 소중히 대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주제에 나는 그저 내가 처한 상황을 한없이 이해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원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살아있는 부처님을 찾고 있었구나...’ 유키는 굉장히 밝은 성격의 소유자이다. 타인의 부탁을 잘 거절 못하는 게 흠이지만, 그만큼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깊다. 일에 관해선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내가 바쁜 시기엔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해서도 괘념치 않았다. 라온 런칭 이후 잠시 주말에 짬을 내어 만났을 때. 조심스럽게 내뱉은 나의 사과에 그녀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준혁씨가 한가할 땐 함께해서 좋고, 준혁씨가 바쁠 땐 새로운 게임이 기대 되서 좋던데요? 저는 준혁씨의 여자 친구이며, 펜타곤 소프트를 사랑하는 열혈 팬이니까요.’ 퍼팩트. 딱 이 한마디로 그녀에 대한 정리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호의를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 순간. 우리 사이에 ‘트러블’이 시작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회귀자는 실패하지 않는다. 에 이런 부분도 적용 시킬 수 있는 건가?’ 하긴 그러고 보면 34살 83년으로 돌아왔으니, 92년인 현재 나의 정신 연령은 얼추 43살에 해당하고 있었다. 거기서 유키 나이가 올해로 24살이니.. ‘완전 도둑놈이네.’ 정신 나간 사람처럼 혼자 피식거리며 웃어대자, 식사 중이던 카와구치씨가 고개를 갸웃 거리며 내게 물었다. “준혁씨. 저기 괜찮으세요?” “아, 잠시 딴 생각 좀 하느라. 카와구치씨 말대로 한국은 식을 올린 뒤에 다녀와야겠네요.” “잘 생각 하셨습니다. 식을 올린 후라면 얼마든지 다녀오셔도 괜찮습니다.” 나의 대답에 카와구치씨 역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 1992년의 6월의 첫째 주 주말. 나와 유키는 근처 교외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일본의 결혼식에는 총 네가지 종류의 결혼식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신전식(神前式) 이라고 신사나 호텔에서 치루는 가장 전통적인 혼례방식이 이었다. 이 경우에는 전통 의상부터 시작해 진행해야 할 일정이 너무 많아서 패스. 두 번째는 불전식(佛前式) 으로 절이나 신사에서 승려를 초대해 치루는 결혼식으로 앞서 설명한 신전식과 비슷한 방식이기에 패스. 세 번째는 기독교식으로 교회에서 치루는 결혼식이 있었는데, 이것이 흔히 한국에서 치루는 결혼식과 가장 흡사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90년대 초의 일본에서는 신랑과 신부가 모두 기독교인이어야만, 교회에서 식을 치루는게 가능했기에, 이것도 자연스럽게 패스. 그리하여 남은 방식이 바로 네 번째 방식인 인전식(人前式) 이었다. 인전식은 종교에 구애받지 않고 가까운 친인척을 불러 모아, 그 앞에서 결혼 선서를 낭독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결혼식이었다. “정말 괜찮아? 보통 여자들은 좀 더 화려한 결혼식을 꿈꾸지 않나?” “저를 키워주신 부모님과 함께 자란 언니. 그리고 준혁씨의 부모님을 대신 해줄 훌륭한 동료 직원들과 소중한 친구. 더 필요한 사람이 있나요?” “아니. 완벽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 나를 올려다 볼 때 마주치는 자애로운 눈매와 웃을 때다 살포시 보이는 보조개가 아주 매력적인 그녀.. 초여름의 햇살이 따스하게 느껴지던 그날. 향긋한 풀내음이 가득한 교외의 정원에서 나와 유키는 평생을 함께할 것을 약속했다. 결혼식 사회자는 나의 절친한 친구인 준페이가 나서 주었다. 펜타곤 직원 중에서는 대표로 카와구치씨와 모리타 그리고 하야시가 참석했고, 라이텍스에서는 첸드라와 푸말라가 찾아왔다. 함께 손을 잡고 결혼 선서를 낭독 하는 것으로 짧은 식이 끝나고, 이어서 진행된 피로연에서는 지구 반대편에서 찾아온 손님들도 있었다. 이제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엘리스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이젠 미국에서 가장 큰 장난감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윌슨씨의 가족이었다. “결혼 진심으로 축하하네. 미스터 강.” “와주셔서 감사해요. 윌슨씨.” “다른 사람은 아니어도, 자네 결혼식이라면 꼭 와야지. 그게 사람 된 도리니까.”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세월의 흐름에 눈매와 입가에 잔주름이 생겨난 윌슨 씨는 내 손을 마주 잡고 흐뭇하게 웃어보였다. 엘리스는 라온이 출시된 후. 민텐도의 미국 지사를 그만두고, 윌슨씨의 비서이자, 라온 스토어의 총괄 책임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거 참. 미안하네. 나는 엘리스씨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었는데, 이렇게 와주다니...” “그럼요. 당연히 미안해 하셔야죠~ 제가 결혼 했던 날 혹시라도 짠하고 나타나지 않을까 얼마나 목을 빼고 기다렸었는데요.” 그러자 엘리스 곁에 있던 제임스가 한 바탕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뭐야~ 그럼 그때 네가 기다렸던 사람이 바로 이 분이였어?” “왜? 질투 나?” “조금?” 엘리스는 제임스의 반응에 옆구리를 쿡 찌르며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 안겼다. “엘리스 언니~!!” 신부 쪽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온 유키가 어느 틈에 달려와 엘리스에게 안겼다. “축하해요. 유키씨~” 일전에 롭이 일본에 방문했을 때 만난 엘리스와 유키는 오랜만에 만났어도 친자매 마냥 서로를 부둥켜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언제 왔어요?” “방금. 조금 늦었지? 미안해.” “아니에요. 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유키는 6월의 햇살 아래 누구보다 밝게 빛나 보였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다른 하객들에게 인사를 나누려던 찰나, 나는 하객들 좌석 한쪽 끝에 앉아 있는 노인의 모습에 걸음을 멈추었다. 처음엔 유키의 하객인 줄로만 알았던 그를 자세히 살피니, 노인은 나에게 처음으로 게임 & 워치를 건네준 게임 가게의 할아버지셨다. “어.. 어르신? 어떻게?” “끌끌끌. 이 녀석. 과거로 오더니, 아주 물 만난 고기가 되었구나.” “어르신...”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를 바라보자, 노인은 자신의 옆에 있는 플라스틱 의자를 빼내어 나에게 권하였다. “그래. 이곳에서의 생활을 보아하니, 2015년이 다가온다 하여도 다시 그 쪽 생활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구나.” “수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랬겠지. 이곳에서의 삶을 포기하기엔 너무 많은 걸 이뤄냈으니까.” “지난 1988년에 한국을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에 저를 보았죠. 그리고 어머니를 뵈었습니다.” “독특한 경험이었겠군. 그래 어땠나?” “처음엔 무척이나 놀랐지만, 한편으론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건 자네를 대신 해줄 또 다른 자네를 만나서인가?” “그렇습니다.” 나의 대답에 노인은 주름을 깊게 패이며 웃어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의 회귀는 조금 특별한 점이 있다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보통 누군가에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면, 자신이 큰 실수를 범했던 시기나 그게 아니라면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 할 수 있는 시기를 기점으로 삼고는 하지. 그 말은 즉 자신의 과거로 돌아간다는 뜻일세. 하지만 자네는 어땠나?” “저는... 아, 설마!?” “그래. 자네는 온전히 한 사람의 인생을 새로 만들어낸 것이나 다름없지. 자네가 좋아하는 게임을 예로 들자면 아예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을까? 그것은 매우 적절한 비유였다. 82년생이었던 내가 83년으로 돌아왔다면 나는 고작 첫돌을 지난 갓난아기에 불과 했을 것이다. 물론 그 상태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나는 83년의 내 나이를 만 21살로 맞춰 버렸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부터 시간의 축이 비틀리며, 또 다른 나를 만들어낸 것이다. “저는 단지 게임이라는 콘텐츠가 성장하던 시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습니다.” “그랬겠지. 그렇게 당황하진 말게나, 자네를 꾸짖기 위해 이곳에 찾아온 것이 아니니까. 오히려 이곳에서 자네가 벌이는 일들에 나 역시 하루하루가 즐겁거든?” 노인은 품안에서 라온을 슬쩍 꺼내 보이며 한쪽 입 꼬리를 올려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드래곤 엠블렘인가? 그거 아주 재밌더군. 앞으로도 기대함세.” “그런데 어르신. 전에는 워낙에 갑자기 사라지셔서 여쭤볼 수가 없었는데, 도대체 정체가 무엇 입니까?” “에끼. 이 녀석. 젊은 사람이 그렇게 감이 없나?” “설마 그럼. 진짜로.. 시... 신이 십니까?” “좋을 대로 생각하게.” ······ 뭐지? 마치 드라마 아이리스에 나왔던 전설의 석상 드립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 대답은? 그때 멀리서 나를 부르는 유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씨!! 거기서 뭐 해요? 우리 다 같이 사진 찍어요~!!!” “아, 미안. 잠깐 여기 계신 어르신이랑 대화 좀 하느라. 어르신 잠시만 다녀...” 그 순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는 내가 잠시 고개를 돌린 사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전에도 아무런 설명 없이 게임 & 워치만 달랑 안겨 주고 사라지시더니.. “원래 신이란 항상 이런 식인가?”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혼잣말을 중얼 거리며 그가 앉아 있던 텅 빈 의자를 바라보았다. “준혁씨~!! 빨리 와요. 손님들 기다리세요.” “아, 미안.” 멀리서 나에게 손짓하는 무리를 향해 빙긋 웃으며 걸음을 달렸다. 이곳에 와서 생긴 소중한 인연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그녀.. 처음 1983년으로 넘어 올 때만 해도 2015년이 되면 다시 34살의 나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저들을 남겨두고 어떻게 돌아갈 수 있겠어...’ 무리 한가운데에 뛰어 들어 유키 옆에 서자, 그녀는 귓속말로 나에게 물었다. “혼자 벤치에 앉아서 무슨 생각 했어요?” “음... 부모님 생각?” “아, 해외여행 중에 실종 되셨다고 하셨죠...?”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서도 멀쩡히 살아계신 두 분을 차마 돌아가셨다고 하긴 힘들어 둘러댄 결론이었다. “준혁씨네 부모님이 이 자리에 계셨다면, 저를 마음에 들어 하셨을까요?” “물론이지. 아마 엄청 좋아 하셨을 거야.” 그때 사진사가 우리를 바라보며 외쳤다. “자~ 하나, 둘, 셋. 하면 찍습니다.” “아, 준혁씨 앞에 봐요.” “어, 그래.” “자~ 하나~ 둘~” 그때였다. 본래라면 우리 부모님이 앉아 계셨을 텅 빈 의자에 어느새 두 분이 앉아 계셨다. 어머니는 가볍게 팔짱을 낀 채로 아버지의 어깨에 몸을 기댄 채 살며시 웃고 계셨다. 이건.. 환영일까? 아니면 신의 선물? “아들.. 결혼 진심으로 축하해. 우리 며느리 너무 이쁜데~?” “어머니...” “축하한다. 내 아들. 그 곳에서도 항상 몸 건강하고, 아버지 닮지 말고 술은 적당히 하거라...” “아버지...” “셋~!!” 찰칵!! “자~ 그럼 이제 신랑 신부 마주 보시고 준비 되셨으면 시작 하세요.” “네? 뭘요?” 그러자, 유키가 나를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거 말예요.” 방심한 순간. 그녀의 입술이 나의 입술 위에 포개어졌다. < EP. 29 : 하얀 악마의 한국상륙. (2) > 끝 < EP. 29 : 하얀 악마의 한국상륙. (3) > “잠시 후. 이 비행기는 김포 국제 공항에 도착하겠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자리에 앉아 안전 밸트를 착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88년도에 한국에 왔을 때는 겁나 추운 한 겨울이더니, 이번엔 아주 푹푹 찌는 한 여름이구나. 그래도 뭐, 만트라의 김한석 대표님이 직접 공항까지 마중 나와 주신다 고 했으니, 호텔까지 편하게 이동할 수 있겠지? 1992년의 7월 13일. 라온의 런칭 1주년을 한 달 정도 남겨두고, 나는 혼자서 한국을 찾았다. 착륙 준비를 위해 안전 밸트를 채우던 중, 어제 저녁 여행용 가방에 짐을 싸면서 유키가 중얼거리던 말이 떠올랐다. “신혼인데, 한 달씩이나 출장이라니...” 사실 그 한 달도 타이트 하게 잡은 일정이긴 하지만, 결혼 초기라 그런지 약간 서운한 감정이 드는 모양이었다. 가능하면 나와 함께 가고 싶었지만, 신혼여행까지 다녀온 마당에 회사에 또 다시 휴가를 올리는 것이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혹시 다음 주말에라도 괜찮으면 한국에 올래?” 너무나 침울해 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예의상 물어 보았을 뿐인데, 기다렸다는 듯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유키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대신 혼자서도 잘 올 수 있지?” “물론이죠!!” “그래 비행기 표 준비해 둘 테니, 한국에서 보자.” “만세~” 방금 전만 해도 풀죽은 강아지처럼 기운 없어 보이던 그녀는 나의 허락에 거실을 방방 뛰어 다닐 정도로 기뻐했다. 그러면서도 오늘 아침 공항으로 떠나는 내 옷깃을 붙잡고 펑펑 울긴 했지만... 비행기는 김포 공항의 하늘 위를 한 바퀴 선회한 뒤 천천히 활주로에 바퀴를 대었다. 으~ 공중에서 슬금슬금 밑으로 내려 갈 때마다 느껴지는 이 느낌. 정말 싫다. 그리고 잠시 후. 활주로에 멈춰선 비행기의 문이 열리자.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뜨거운 공기가 온 몸에 느껴졌다. 가벼운 캐쥬얼 차림이었기에 망정이지, 괜히 예의 차린다고 정장 입고 왔었다면 작열하는 태양에 타죽었을지도 모르겠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는 아름다운 스튜어디스의 미소에 나 역시 고개를 숙이며 화답하고 돌아서는데, 스튜어디스가 나를 불러 세웠다. “아, 저기 이거...” 수줍은 표정으로 그녀가 내미는 차가운 캔 음료를 받아 들자, 손끝에 종이쪽지가 함께 걸렸다. 어라? 눈을 질끈 감은 채 얼굴이 붉어진 그녀를 뒤로 하고, 계단을 내려온 나는 캔 음료 바닥에 붙어 있는 쪽지를 펼쳐 보았다. 그곳엔 스튜어디스들이 자주 이용하는 호텔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헐... 나 방금 헌팅 당한건가?” 고개를 돌려 계단 위를 바라보자, 나에게 쪽지를 건넨 스튜어디스는 내 눈길을 피해 후다닥 비행기 안으로 사라졌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도 할 건 다 하고 살았다는 뜻이지... 그녀의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쪽지를 활주로에 버리기도 뭐했기에 나는 바지 뒷주머니에 쪽지를 넣은 순간 주머니 안에 또 다른 쪽지가 만져졌다. “어라..?” 고개를 갸웃 거리며 또 다른 쪽지를 꺼내어 보니 그것은 오늘 새벽 유키가 나 몰래 넣어둔 편지였다. 그녀의 편지는 첫 번째 줄부터 준혁씨라는 글에 X표시를 그리며 시작되었다. 준혁.. 아, 이제 아니지. 내가 사랑하는 당신에게.. 지금 당신은 내 옆에서 쌔근거리며 잠들어 있어요.. 무슨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잠들어 있는 내내 웃고 있네요. 나는 내일부터 이렇게 커다란 집에 혼자 남게 된다는 생각에 잠도 잘 안 오는데... 이럴 땐 당신이 참 얄미워요. 미운 마음에 볼을 살짝 꼬집어 주고 싶지만, 꾹 참아 볼게요. 이 글을 언제 볼지 모르지만, 지금 한국도 엄청 덥다죠? 너무 오랫동안 바깥에 있지 말구. 가방에 빈 물병을 넣어 두었으니, 식당이라도 가면 자주 담아 마셔요. 다음 주에 제가 한국에 갈 때까지 아프지 말고, 몸 건강하길 바랍니다. 저녁엔 꼭 전화 줘요. 밥도 안 먹고 전화기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유키의 마음이 가득 묻어난 편지지를 곱게 접어 코끝에 대자, 기분 좋은 향기가 묻어났다. 그녀가 자주 사용하는 향수를 뿌려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먼 한국 땅에서 그녀의 배려를 느끼며 미소 지었다. & “강준혁씨. 오랜만입니다.” 캐리어를 끌고 출국장을 빠져 나오자, 김한석 대표의 곁에 있던 만트라 직원들이 서둘러 달려와 짐을 대신 들어 주었다. “오랜만입니다. 준혁씨.”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대표님?” “아, 이거 준혁씨에게 대표님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어색하네요.” “그렇게 신경 쓰실 건 없습니다. 직원들 눈도 있고, 저도 이게 편해요.” 내가 먼저 직원들 앞에서 김한석 대표의 체면을 세워주자, 그는 흡족한 미소를 띄우며 직원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너희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만트라 소프트를 있게 해준 은인 같은 분이니, 잘 모셔야 한다.” 그러자, 몇몇 직원이 눈이 휘둥그레 뜨며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이 분이 드래곤 엠블렘 시리즈의 개발자인...” “네, 맞아요.” “여.. 영광입니다. 패밀리 시절부터 팬이었습니다. 나이가 굉장히 많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엄청 젊으시네요.” 현재 내 나이가 만으로 서른이었기에 만트라 소속의 직원들이랑 비교하면 조금 위거나 비슷한 연령대로 보였기에 그가 하는 말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김대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직원이 함부로 내뱉은 말에 마음이 상하진 않았는지, 내 눈치를 살피던 그는 곧장 직원에게 주의를 주었다. “대표님. 그러지 마세요. 제가 어린 건 맞는 말인데요.” “직원들 교육이 부족했습니다. 모두 제 탓입니다.” 내 앞에서 자기 회사의 대표가 숙이고 들어가자, 직원들은 뭔가 낌새가 이상한 걸 느꼈는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상상한 것은 아니었는데... 잠시 후. 김포 공항 앞에 대기 시켜 놓은 검은색 그렌저에 김대표와 함께 오르자, 우리를 태운 승용차는 미끄러지듯 공항을 빠져 나와 김포 시내로 접어들었다. “바로 호텔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본사로?” “본사로 가죠. 라온에 대한 리서치 조사도 들을 겸.” “네. 그렇게 하죠.” 콘솔 전문 게임 잡지로 시작한 만트라는 일본의 여러 게임 회사와 퍼블리싱을 맺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게임 업체로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1988년 드래곤 엠블렘 한글판과 파이널 프론티어 1의 한글화를 추진했고, 이듬해에는 파이널 프론티어 2와 칼콤사의 영웅 전설 시리즈를 한글화 하여 국내 유저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어 내었다. 그러던 중 작년 여름. 펜타곤에서 출시한 ‘라온’의 동시 발매를 성사시키며 국내 게임업계의 중심에 성큼 다가간 만트라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게임 산업 쪽으로는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시 서대문구에서 조그맣게 시작했던 출판 회사는 어느새 사옥(社屋)을 강남의 높은 빌딩 안으로 옮긴 상태로 직원만 80명을 거느린 중견회사로 성장해 있었다. “김 대표님. 사업 수완에 감탄이 흘러나오네요.” “이 모든 것이 저 혼자만의 힘이었겠습니까? 준혁씨의 도움이 컸지요. 지난달에 결혼 하셨다고 들었는데, 마침 돌아가신 아버님의 기일이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무실 안으로 드시죠. 미스 리. 여기 커피 한잔만 타다 줘.”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미스 리’ 라니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재 멘트에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이 90년대라 다행이지. 대표님. 자기 부하 직원을 다방 레지에게나 붙일 법한 그런 호칭으로 부르면 나중엔 진짜 큰일 납니다... “자~ 준혁씨 이쪽에 앉으시죠.” 대표실 중앙에 있는 소파에 몸을 기대자, 김한석 대표는 웃으며 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사무실이 굉장히 멋진데요? 전망도 좋고...” 나는 창문 너머로 아스라이 보이는 한강의 모습에 싱긋 웃어 보였다. 잠시 후. 대표실 문 밖에서 노크가 울리고, 쟁반에 커피 두 잔을 받치고 온 미스 리가 테이블로 다가왔다.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단정한 헤어스타일에 옅은 화장이지만, 젊은 세대답게 유행에 민감한지 붉은 립스틱을 바른 그녀는 나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이윽고 김 대표에게도 뜨거운 커피 잔을 내어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고마워. 미스 리~” 윽, 또 저 오글거리는 멘트를... 살작 고개를 들어 그녀의 표정을 살펴보니, 그녀 역시 미스 리라 불리는 것이 썩 기분이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저기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아, 저는 이 소연이라고 합니다.” “고맙습니다. 소연씨 커피 잘 마실게요.” 그제서야 소연씨는 딱딱하게 굳어 있던 표정을 풀며 밝게 웃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대표님도 여직원에게 ‘미스’ 라는 표현 보다는 차라리 성함을 불러 주세요. 사람의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은 듣는 이에게도 참 기분 좋은 일이거든요. 그리고 가급적이면 직원들에게도 존칭을 써주셨으면 합니다. 대표부터 직원을 존중하기 시작하면 사내 분위기가 굉장히 좋아지거든요.” “아, 듣고 보니 그렇네요. 미안해요. 미스.. 아니지 소연양. 커피 잘 마실게요.” “감사합니다. 대표님.” 우리에게 커피를 가져다준 여직원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나는 김 대표에게 넘겨받은 보고서를 살피기 시작했다. 김한석 대표는 한 회사를 대표하는 오너 이기 이전에 게임을 사랑하는 한 사람의 게이머였다. 그리고 그것은 만트라의 실적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나는 서류를 살피며 동시에 그에게 물었다. “라온은 한국에서 반응이 어떻습니까?” 그러자 0.1초의 딜레이도 없이 곧바로 대답이 날아들었다. “최고입니다.” “······.” “무적이지요.” “······.” 내가 지금 한 회사를 대표하는 사람이랑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지나가던 라온 팬보이를 불러 세워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내가 지금 라온에 대한 칭찬을 듣자고 한국에 온 것은 아닌데? 황당한 그의 대답에 보고서를 살피던 내 눈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향했다. “대표님.” “네?” “보통 이렇게 묻는다면 판매 실적을 말씀해주셔야죠.” “네? 아, 네. 그게...” 나의 일갈(一喝)에 김한석 대표는 허둥지둥 테이블 위에 놓인 다른 차트를 펼쳐들기 시작했다. “아.. 그게 지난 8월 15일 런칭 이후. 지금까지 약 40만대 가량 판매 되었습니다.” “경쟁사인 민텐도의 슈퍼 패밀리는요?” “네?” “경쟁사 민텐도에 대한 판매량 조사는 안하셨나요?” “아, 아닙니다. 했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김 대표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들어오는 사무실 안에서도 진땀을 흘리며 서류를 뒤적거리다가 외부 인터폰을 연결했다. 삐-- “저기 미스.. 아니지 소연양. 잠깐 대표실에 다시 와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인터폰에서 대답이 들려온 뒤 곧바로 대표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울리며 소연씨가 들어왔다. “소연양. 혹시 경쟁사인 민텐도의 판매 실적을 알고 있나?” 그러자 소연씨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곧바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슈퍼 패밀리는 올해 1월 22일 국내 대기업 중 하나인 ‘미래상사’를 통해 국내에 정식 유통이 되었으며 지난 달 기준으로 약 32만대를 판매하였습니다. 가격은 189,000원으로 저희 라온 보다 약 9천원 더 저렴하게 출시되었습니다.” “우리보다 5개월이나 늦게 출시했는데도 불구하고 거의 따라 잡혔군요. 대표님 말대로 ‘무적’은 아닌 거 같은데요?” 김한석 대표는 나의 말에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아직 보급률은 우리가 앞서고 있고, 펜타곤으로 넘어오는 서드 파티가 많이 있으니 장기적으로는 우리가 더 유리한 싸움이 될 것입니다.” “누가 그걸 보장하죠?” “네? 아, 그게...” 그때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소연씨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실례지만 강준혁 부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호오.. 갑작스런 김대표의 질문에도 똑 부러지게 대답하더니, 이번에는 의견 제시까지? “어허~ 소연양. 자네가 함부로 대화에 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예요.” “아뇨. 괜찮습니다. 전 그런 거 상관 안하니까요. 편하게 말씀해 보세요.” 소연씨는 내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잠시 목을 가다듬은 후 나에게 말했다. “현재 우리가 주력 판매하고 있는 라온은 국내에서 판매하기엔 가격이 너무나 비쌉니다.” ... 이제껏 부하직원인 나에게 한 소리씩 듣던 민텐도의 카마우치 사장이 이런 느낌이었나? < EP. 29 : 하얀 악마의 한국상륙. (3) > 끝 < EP. 29 : 하얀 악마의 한국상륙. (4) > “저기, 소연양. 지금 무슨 엉뚱한 말을 하는 거야. 이 분이 대체 어떤 분인지 알기나 하는 거야?” “일본의 펜타곤 소프트에서 오신 강준혁님 아니신가요? 민텐도에서 근무하며 슈퍼 패밀리 제작을 주도 하셨고, 드래곤 엠블렘 시리즈와 내가 없는 거리의 메인 디렉터이며 펜타곤에서 출시한 휴대기기 라온 역시 개발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음. 아주 훌륭한 세줄 요약이군. 나는 소연씨가 가져다준 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그녀의 대답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에 대해 정확히 알고 계시네요. 따로 제 소개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감사합니다.” 너무나 당찬 그녀의 어투에 김 대표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평소랑은 느낌이 좀 다른데, 소연씨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무례하게 느껴지셨다면 죄송합니다. 대표님. 단지 조금 답답한 마음에...” 이 소연. 그녀는 시대를 너무 앞서서 태어난 신여성(新女性) 이었다. 사내에서 여성의 발언권이 특히나 약한 시대였기에, 회사 내부에선 프린트나 복사, 차대접등 잡일을 도맡아 하는 이 시대의 사무직 여직원들과는 확연히 느낌이 달랐다. 하지만 그런 부분에 있어서 오히려 그녀는 내 흥미를 굉장히 자극 시키고 있었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튀어 나온 못은 정을 맞기 마련. 어영부영 넘어갔다간, 어쩌면 호된 꾸지람을 얻을 수도 있기에 나는 소연씨를 바라보며 최대한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김 대표는 혹시나 내가 기분이 상하지 않았는지, 눈치를 보다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준혁씨. 입사한지 1년도 안 된 신출내기입니다. 회사 사정을 잘 모르고 한 말이니,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소연양. 회사 경영 문제에 대해 일반사원이 함부로 그렇게 끼어드는 게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알겠나?” “대표님께서 그렇게 말씀 하시니 더욱 흥미롭네요. 대표님 말대로 입사한지 1년도 안된 신출내기 직원이 저에 대해 이렇게 잘 알고 있다니, 기분이 좋은데요?” “아이고~ 준혁씨께서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다행입니다.” “헌데, 방금 전 라온이 한국에서 팔기에 너무 비싸다고 말씀 하셨죠? 혹시 어떤 점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물어도 될까요?” 그러자, 그녀는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며 대답을 망설였다. “전 정말 괜찮아요. 소연씨를 통해 한국의 사정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면 그에 대응 하는 마케팅을 시도해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기탄없이 말씀해 주세요.” 소연씨는 나의 말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굳어 있던 표정에 한 순간 생기가 비쳤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입이 열렸다. “저는 우선. 라온의 소비자 가격이 한국 국민의 소득 수준에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는 게임이란 문화가 아이부터 어른까지 골고루 퍼져있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거든요. 한국에서 라온을 즐기는 연령층은 약 10세에서 20세까지입니다. 사실 이마저도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낮아지지요. 아직 한국에서는 게임 컨텐츠에 대한 인식 자체가 그렇게 좋지 않으니까요.” 나는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하세요.” “일본이나 미국에 비해 현재 한국 사회의 직장인 평균 월급은 대략 100만원 사이를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라온은 기기 본체만으로 직장인 평균 월급의 5분의 1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소프트를 한 두 개 정도 구입한다면, 거의 한달 수입의 절반가량을 게임기에 쏟아 부어야 합니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부모님이라면 아이의 장난감 하나에 이정도 금액을 쏟아 붓지는 않지요.” 반박할 틈이 없는 완벽한 시장조사로군. 나는 그녀의 말에 감탄하며 박수를 보내주었다. 김한석 대표 역시 소연씨의 똑 부러진 대답에 멍한 표정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제가 한국으로 오면서 고민했던 부분과 정확히 일치하네요.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올해로 24살입니다. 학력은 K대 경영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이거 사무보조로만 두기엔 아까운 인재인데요. 김대표님?” “저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일본의 펜타곤의 도움으로 어떻게든 회사를 꾸려나가고 있긴 하지만, 제가 워낙에 이쪽으로 배운 것이 없다보니...” 작년에 라온 런칭 이후. 매달 한국에서 날아오는 매출 보고서를 살펴보면, 확실히 김한석 대표는 한 회사를 대표하는 경영자의 마인드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리 이 시대의 데이터베이스가 모두 수기로 이루어 진다하더라도 그가 나에게 보여준 서류들은 너무나 중구난방이니, 정확한 집계를 산출해 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김한석 대표에게 말했다. “대표님. 제가 한국에 있는 동안 소연씨 좀 데리고 다녀도 될까요? 반드시 대표님께 도움이 될 만 한 인재가 될 것입니다.” “네? 아, 예. 그러시죠.” 좋아. 그럼 바로 일을 시작해볼까? 하지만, 아무래도 여기서 업무에 대한 이야기하기엔 그녀도 불편해 할 거 같고... “대표님. 차 한 대만 준비해 주시겠어요?” “네. 바로 준비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소연씨는 오늘부터 저와 함께 이동하도록 하죠. 현장에서 바로 퇴근시켜 드릴 테니 가방 챙겨서 나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본사 건물 밑에 대기 중인 차량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자, 얇은 민소매 블라우스 차림의 소연씨가 건물을 빠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일단 타요. 이야기는 이동하면서 할 테니.” 그녀는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보조석에 올라탔다. 한국으로 넘어 오기 전 국제 면허증을 미리 발급 받은 상태였기에 운전에는 무리가 없었다. 시동키를 돌린 후. 엑셀에 힘을 가하자, 우릴 태운 승용차는 미끄러지듯 강남 대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 “그런데 저희 어디로 가는 건가요?” 오늘 처음 만난 낯선 남자의 옆자리가 영 어색한지. 소연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나는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대답했다. “호텔이요.” “네에!?” “먼저 짐 좀 내려놓을까 해서요. 저 한국 도착한지 2시간 밖에 안 지났거든요.” “아아..” 소연씨는 놀란 토끼 눈으로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네. 얼마든지요.” “아까 대표실에서 저에게 한국 시장에서 라온은 너무 비싸다고 했죠?” “네. 그렇습니다.” 교차로 앞에서 빨간 신호등에 걸린 나는 속도를 줄이며 횡단보도의 정지선 앞에 차를 세웠다. “본래 콘솔 판매는 이윤이 잘 안 남는 장사에요. 오히려 판매할수록 적자를 보는 구조랄까요? 나 역시 한국의 소득 수준을 맞추고 싶지만, 단지 가격이 비싸다는 이유로 무작정 기기의 가격을 낮출 수는 없습니다. 역수입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니까요.” “저기 우선 강 준혁... 님? 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냥 편하게 부장님이라고 불러주세요. 그게 펜타곤에서 저의 직급이니까.” “아, 네. 부장님. 부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얼 의미하는지 저도 알 것 같아요. 하지만 이대로라면 라온은 한국 시장에서 빛을 보기 힘들 것입니다. 라온이 출시되고 1년 현재 기기 안에 들어가는 부품도 대량 생산으로 인해 원가 절감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상태 아닌가요?” 이야.. 이 분 진짜 보통 내기가 아닌데? 마치 민텐도에 갓 입사했을 때의 나를 보는 것 같군. 그래서 일까? 나는 민텐도의 카마우치 사장과 처음으로 면접 보았을 때를 떠올리며 그녀에게 비슷한 질문을 던져 보았다. “소연씨가 잘 몰라서 그런데, 콘솔이란 만드는 부품의 가격이 떨어졌다고 해서 곧바로 원가 절감효과가 오진 않아요. 혹시 하나의 콘솔이 만들어지기까지, 생산 공장에서 유통라인까지 얼마나 많은 인력이 동원되는지 알고 계신가요? 사실 기기에 들어가는 부품의 단가보다는 인건비에 더 많은 자본이 흘러가게 되죠. 물론 소연씨의 말대로 시간이 흐를수록 부품의 대량 생산으로 가격이 내려가지만, 반대로 직원에게 지급되는 급여 역시 함께 오르게 됩니다. 더구나 라온에서 사용하는 디스플레이는 전문 제작 업체에서 외주를 통해 만들어 지고 있고, 반도체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떼어 오고 있구요.” 그러자 나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그녀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부장님. 왜 제조 공장을 인건비가 비싼 일본에 두시나요? 한국이라면 그 절반도 안 되는 돈으로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할 수 있습니다.” “······!?” “한국은 90년대에 접어들며 일본과는 반대로 경제 부흥의 효과를 보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라면 차라리 한국 쪽 기업과 손을 잡는 것이 펜타곤에 더 유리한 조건... 아닌가요?” 순간 운전대를 잡고 있던 팔뚝에 소름이 돋아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왜 여태까지 그 생각을 못했지? 그녀의 명쾌한 대답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빵, 빵!!! 빠아앙!!! 갑자기 들려오는 경적 소리에 당황한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부장님. 신호등.” “아, 미안해요.” 나는 재빨리 기어를 넣으며 엑셀을 밟아 차를 출발시켰다. 1992년의 서울 도심은 확실히 88년에 왔을 때보다 승용차가 훨씬 늘어나 있었다. 잠시 좌우 사이드 미러를 살핀 나는 호텔이 있는 잠실 쪽으로 차를 몰며 생각에 잠겼다. 소연씨의 말을 종합해보자면, 그녀는 지금 한국을 이용해 라온의 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 제조방식을 제안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드래곤 엠블렘과 사이킥 포스로 인해 사업 쪽으론 크게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방금 전 그녀의 대답으로 인해 머릿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 땅에 복룡(伏龍)이 숨어 있었군. 그것도 이제 겨우 24살 밖에 되지 않은 빛나는 인재가 말이야.’ 잠시 후. 잠실 로테 호텔 입구에 차를 세운 나는 발레 파킹을 위해 달려오는 호켈 직원에게 차키를 넘겨주었다. “저는 여기서 기다릴까요?” “로비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금방 짐 정리하고 내려올 테니.” “네. 알겠습니다.” 90년대 초반의 한국에는 잠시 들러 이야기를 나눌 만한 커피 전문점이 매우 드물었다. 적어도 이런 특급 호텔 정도는 되어야 내부에 커피를 제공하는 비지니스 룸이 준비 되어 있는 실정이었다. 나는 호텔 로비에 그녀를 남겨두고는 카운터에서 키를 받은 뒤 방으로 올랐다. 가능하면 편하게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처음 만난 남자의 호텔방에 들어오라고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고, 다음 주말에 유키가 한국에 왔을 때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캐리어에서 옷가지를 꺼내어 옷장에 걸어둔 뒤, 편한 청바지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이번 일정 동안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은 라온의 국내 보급률을 늘리는 것과 어크 토니시아 스토리를 개발한 솜노리 소프트의 대표. 이원승씨를 만나는 것이었다. 그중에 후자인 솜노리는 내가 사무실에 방문해 어떻게 해볼 수 있지만, 전자인 보급률 문제는 비행기 안에서도 은근히 골머리를 썩고 있었기에 이 소연씨와의 만남은 나에겐 굉장한 행운으로 작용했다. ‘역시 젊은 사람이랑 대화하니 머리가 팽팽 도는구나. 이래서 역시 사람은 늙을수록 젊은 사람 옆에 있어야 한다고 했던가? 민텐도에서 시게씨에게 천재 소리를 듣고, 펜타곤의 하얀 악마라 불리우던 내가 여기서 한방 먹을 줄이야.’ 나는 피식 웃음을 삼키며 그녀가 기다리는 로비로 향했다. < EP. 29 : 하얀 악마의 한국상륙. (4) > 끝 < EP. 30 : 드래곤 마운틴. (1) > & 그 후로 몇 시간 호텔의 비즈니스 룸에서 그녀와 단둘이 대화를 나눠본 결과. 그녀는 기대 이상으로 회사 경영에 대해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K대 총학생회 부회장 출신인 그녀는 아마 남자로 태어났다면, 분명 회장 자리를 탐하고도 남았을 정도로 생각이 깊고, 두뇌 회전이 빨랐다. 거기다 외모 역시 시원시원한 콧대와 눈매로 약간 서구적인 느낌이 드는 미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나이에 이 정도의 사업수완을 가지고 있는 거지?’ 그녀가 말한 OEM 판매 방식에서 한국은 지금 시기에 있어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다. 좀 더 미래를 바라본다면 중국이나 동남아 쪽에 공장을 두는 게 현명해 보일지 몰라도, OEM 제조 역시 어느 정도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가능한 사업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최근에 한창 기술력이 성장하고 있는 추세라 그녀의 주장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민텐도와 센소니, 파라소닉, 니코르 같은 눈치 빠른 대 기업들 역시 장기전을 바라보고 태국 쪽으로 손을 뻗어가고 있던 시기었기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 기억에 똑같은 민텐도에서 출시한 슈퍼 패밀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한 친구네 집에는 made in japan. 이라고 적혀 있던 것에 반해, 한 친구네는 made in thailand. 라고 적혀 있어 짝퉁이다 아니다.로 실갱이를 벌인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일부러 made in japan인 물건을 소매점에서 더 비싸게 올려 팔기도 했었지.’ 나는 만트라에서 들고 나온 서류를 직접 정리하며, 커피를 마시고 있던 소연씨에게 말했다. “내일부터 소연씨는 여기 호텔 비즈니스 룸으로 출근하세요.” “네? 여기로요?” “불행히도 저에게 시간이 많지 않아 단기 속성 반으로 운영할 테니, 단단히 각오 하세요. 아, 그리고 혹시 외국어 좀 할 줄 알아요?” “영어는 어느 정도 할 수 있습니다.” “가능하면 일본어도 배워두세요. 앞으로 소연씨는 펜타곤 측과 이야기 할게 많아 질 수도 있으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챙겨 들었다. “그럼 수고했어요. 퇴근하세요.” “네? 벌써요? 아직 오후 4시 밖에 안됐는데...” “소연씨가 오늘 할 일은 다 끝났습니다. 돌아가서 푹 쉬시고, 내일 오전 9시에 여기서 다시 보죠.” “네. 알겠습니다.” & 다음 날. 그녀는 9시 10분 전에 정확히 호텔로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일과로 비즈니스 룸에서 라온에 대한 한국 유저들의 반응을 소연씨에게 전해들은 나는 생각보다 심각한 국내 시장의 상황에 고개를 갸웃 거렸다. “한국 콘솔 시장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은 저 역시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건 좀 문제가 심각한데요?” 소연씨의 말대로 라면 현재 라온은 한국에서는 거의 죽어가는 분위기나 마찬가지였다. 일본과 미국에서는 없어서 못 파는 기기가 한국에서는 초반 런칭 때를 제외하고는 빠른 속도로 판매가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태가 발생 하게 된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 첫 번째 이유는 전용 소프트의 부재(不在)였다. 현재 일본과 미국에서 라온 전용으로 발매된 소프트는 약 23가지.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10개 소프트뿐이었다. 그것도 런칭과 동시에 발매된 스파2, 슬램덩크, 파이널 프론티어4를 제외하면 1년 동안 발매된 정발 게임이 고작 7개뿐이었다. 그와 반대로 겨우 올해 초에 정식 출시된 슈퍼 패밀리 같은 경우에는 이미 한국 시장에 나온 정식 유통 게임만 14가지가 넘었다. 민텐도와 정식으로 슈퍼 패밀리의 판매 계약을 체결한 ‘미래상사’는 빠른 보급화를 위해 일본에서 들여온 게임들의 케이스에 국내 정식 판이라는 스티커만 붙여서 판매했을 뿐. 게임 자체에 한글화를 추진하진 않았다. 그들은 일부러 한글화가 필요 없는 액션 위주의 타이틀을 주력으로 들여왔기에 한글화가 아니더라도 판매에 큰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하지만, 라온은 퍼스트 파티인 펜타곤을 제외하면 한글화를 추진하는 서드 파티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었다. 아무리 퍼스트 업체인 펜타곤이라고 해도 다른 서드 파티 회사에게 한글화를 강제할 수는 없었기에 나 역시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이런 젠장.. 이래놓고 뭐가 ’무적‘입니까. 김대표님.. 까딱하다간 숨넘어가는 판국이었구만...’ 그리고 두 번째. 한국 시장의 여건상 전국적으로 대형 샵을 내기가 굉장히 애매했다. 현재 라온의 보급률은 국민 학교 한 반에서 1~2명 있을까 말까한 수준이다. 말 그대로 부잣집 아이들이나 즐기는 초호화 게임기 중에 하나랄까? 기기의 보급률이 저조하면 대형 매장을 낸다 하더라도 내방객 역시 저조할 것이 분명하다. 김한석 대표는 보급률이 늘어 날 때까지 라온 프리미엄 매장 오픈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상태라고 했다. ‘그래. 헛돈을 공중에 뿌리느니, 그게 안전하긴 하지만... 적어도 보급률을 늘리기 위해 마케팅에 대한 노력은 했어야지...’ 긴 한숨과 함께 지끈거리는 이마를 움켜쥔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김한석 대표는 일본에서 발매하는 인기 게임을 컨텍 하는 퍼블리셔의 재능은 있다. 좋은 게임을 골라 국내에 정식 유통 하는 것에는 나 역시 아무 불만이 없지만, 사업적 수완에서 보면 이대로 김 대표의 말을 믿고 계속 기다려 줄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시장 상황을 살펴봐야겠어.’ & 그 날 오후. 호텔에서 나와 함께 식사를 마친 소연씨가 화장실을 다녀오는 사이. 나는 호텔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다. 캐쥬얼 정장 대신 청바지 차림에 모자를 눌러쓰고 온 내 모습에 소연씨가 고개를 갸웃 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어라? 부장님. 어디 가시게요?” “네. 소연씨도 같이 가죠.” “네? 어딜요?” “소연씨 역시 서류에 적힌 라온의 출고 대수와 판매 수량보다는 현실을 경험해 보는 게 도움이 될 거예요.” “현실이요?” “한국 최고의 전자 상가라 불리는 용산. 현재 한국의 게임 시장을 살피기에 거기보다 현실적인 곳이 또 있을까요? 밖에 차 대기 시켜 놓았으니 같이 가시죠.” 나는 식사 후. 아직 소화도 못시킨 그녀를 데리고 호텔 문을 나섰다. & 잠시 후. 용산 역 근처의 한 공영 주차장에 차를 세운 나는 차문을 열자마자, 훅하고 느껴지는 뜨거운 공기에 얼굴을 찡그렸다. ‘아이고, 막상 나오니 겁나게 덥구나...’ 그때 차에서 내린 소연씨가 PC 부속품 전문 판매점인 선인상가와 나진 상가를 바라보며 나에게 말했다. “여기가 용산전자상가군요.” “그러네요. 저도 굉장히 오랜(?)만에 와 보긴 하는데...” 90년대 초반의 용산 풍경이 이토록 엉망이었나? 그래도 나름 국내 최고의 전자 상가였던 터라 내 머릿속에 추억 보정이 조금 심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과거의 용산과 다시 마주한 나는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부장님. 빨리 가요.” 소연씨는 용산에 처음 와보는지, 마치 놀이동산에 놀러온 것처럼 굉장히 설레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긴 이때의 용산전자상가에서 여자라곤 토스트 파는 아주머니 밖에 본적이 없었으니까. 그녀에게도 놀랍지만, 여기서 일하는 직원들에게도 놀랄 일이지. 나는 벌써 저만치 떨어져 상가로 향하고 있는 그녀의 뒤를 서둘러 쫓았다. 잠시 후. 게임 골목이라 불리 우는 나진 상가 입구에 도착한 우리는 길게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터널 안을 바라보았다. “와아.. 게임 가게가 잔뜩 있네요.” 2000년대에 들어서며 휴대폰 판매의 붐이 일어나자, 게임 매장은 지하의 두꺼비 상가로 단체로 쫓겨났지만, 이 시기에 게임 상가는 나진 상가 쪽에 많이 상주해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가게 앞 진열대에 수많은 게임 카트리지들이 형형색색으로 놓여 있었고, 최신 기종인 슈퍼 패밀리와 라온, 그리고 NEGA 드라이브의 패키지 상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평일이라 그런지 터널 상가 안쪽은 한가로운 편이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상가에 들어서자, 가게 앞을 지키고 있던 업주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한가로이 뛰어 놀던 임팔라 한마리가 펄쩍거리며 맹수의 아가리로 들어온 꼴이나 마찬가지니까. 아니나 다를까 채 몇 걸음도 걷기 전에 사방팔방에서 우리를 부르는 업주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손님.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손님. 잘 해드릴게요. 여기로 와보세요. 손님. 손님!?” 소위 삐끼라 부르는 호객 행위가 만연하다. 평일이라도 손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기에 나는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매장들을 살폈다. “거기 이쁜 아가씨. 뭐 사러 왔어요? 제가 싸게 해드릴게요. 네? 이리 들어와 보세요.” “헐.. 저 새끼는 뭔데, 여자 친구를 달고 게임을 사러왔지? 은근히 열 받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리에 긴장했는지, 소연씨가 내 곁에 바싹 붙으며 귓속말을 걸어왔다. “여기 진짜 장사하는 사람들 맞아요? 왜 다들 조폭 같이 손님을 끌어들이려고 하죠?” “뭐, 지역 특성상 가게 주인들도 남자들로만 모여 있고, 손님 역시 남자를 주로 상대하다 보니 아무래도 다른 곳 보다는 좀 거칠죠.” 실제로 이 시기에는 날치기나, 깡패들도 많아서 용산에 오면 돈 조심하라는 풍문(風聞)도 있었으니, 이 지역의 치안이 얼마나 흉흉한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약 200미터 정도 되는 나진상가의 긴 터널의 한족 라인을 훓으며 통과한 나는 다시 몸을 돌려 반대쪽 라인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슈퍼 패밀리 재고 입하. 18만원!!- -휴대용 게임기 라온 19만원!!- -긴급 입수. 슈퍼 패밀리 최신 게임 다수 입고!!- 가게마다 붙어 있는 선전 문구를 바라보던 중 나는 어느 가게에 붙어 있는 선전 문구에 걸음을 멈추었다. -슈퍼 패밀리용. 드래곤 워리어 V 예약 받습니다.- 다음 달에 출시 예정인 피닉스사의 드래곤 워리어 시리즈는 한국에서도 인기가 굉장히 높았다. 더구나 이번 5 같은 경우에는 슈퍼 패밀리가 출시되고 2년 반 만에 나온 신작인지라, 일본에서도 현재 기대 순위 1위로 꼽혀 있는 작품이었다. 보통 이 시대의 용산 게임가게 업주들은 흔히 ‘보따리 장수’라고 불렀는데, 일본에 자주 오가며 중고 게임이나 신작게임을 사들여와 한국에서 비싸게 팔아 이윤을 남기는 족속들이었다. 물론 장사라는 것이 이윤을 남기기 위해 하는 것인데 하필 ‘족속’이라는 저급한 명칭을 갖다 붙이냐고 묻는 다면, 그 이윤 자체가 상도(常度)에 크게 어긋나는 폭리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가게 앞에 멈춰서자, 역시나 기다렸다는 듯이 호객행위가 따라왔다. “손님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습니까?” 비쩍 말라 족제비처럼 생긴 남자가 앞니를 세우며 나를 향해 웃어보였다. 나는 그의 미소에 화답하며 물었다. “드래곤 워리어 5. 예약 받고 있나요?” “아~ 네. 물론이죠. 예약하시게요?” “네. 얼마죠?” 그러자 업주는 나와 내 등 뒤에 있는 소연씨를 슬쩍 바라보더니, 한쪽 입 꼬리를 치켜 올리며 대답했다. “얼마까지 알아보셨는데요?” “······.” 손님의 질문을 질문으로 대답하는 건 이 시기도 마찬가지네..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삼키며 그의 물음에 답했다. “얼마까지 해주실건데요?” 그러자 업주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리더니 대답했다. “일단 드래곤 워리어 시리즈는 슈퍼 패밀리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게임이고 일본에서도 굉장히 구하기 어려운 타이틀이 될 거 같습니다.” 구구절절 설명을 붙이는 걸 보니 결코 싸게 줄 거 같지는 않고, 그 후로도 그는 드래곤 워리어가 얼마나 구하기 힘든 타이틀인지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늘여 놓은 뒤, 맨 마지막에 가격을 제시했다. “18만원입니다.” ······. 지금 환율이 100엔당 7~800원 정도인데, 9200엔짜리 게임이 어떻게 계산기를 돌리면 18만원이 되는 거냐? 끝이에요 -ㅍㄱㅍㄱ < EP. 30 : 드래곤 마운틴. (2) > “선금은 5만원입니다. 예약하시겠어요?” “됐습니다.” “어차피 다른 가게 가보셔도 다 마찬가지에요. 물건도 손님들 서비스 차원으로 한 두 개 겨우 떼어 오는 거라. 사실 저희도 남는 게 없어요.” 하~ 구라도 어느 정도껏 쳐야 미끼를 물지. 9200엔을 현재 원화로 바꾸면 약 73,000원 정도다. 그런데 18만원이라니, 2.5배를 더 받아먹으면서 남는 게 없다니 말이 되나? 나는 기가 차서 가게 앞에 걸린 슈퍼 패밀리 가격표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게임 하나 가격이 콘솔 한 대랑 똑같네요?” “아유~ 이것도 미래상사에서 국내 정식 발매해서 싸진 거지, 작년만 해도 38만원이었어요.” 자랑이다. 이 자식아. 나는 속으로 욕을 날려주곤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소연씨는 내 곁에 바싹 붙어 따라왔다. “원래 게임 가게가 이렇게 불친절한가요?” “저건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나는 다음으로 터널 상가에서 제법 규모가 큰 매장을 들렀다. 그러자 풍채 좋은 아저씨가 가게 안에서 부채질을 하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서옵쇼. 아이구~ 연인끼리 게임 사러 오셨구만, 여기선 참 드문 일인데. 아가씨 게임 좋아해요?” “아, 네. 좋아합니다.” 가게주인은 소연씨의 대답에 껄껄 웃으며 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펄럭 거렸다. 이렇게 일상적인 대화로 자신에 대한 경계심을 낮추면 아무래도 판매가 용이하다보니, 어느 정도 판매 경력을 가진 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 중에 하나였다. 주인은 다음으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젊은이는 무얼 찾나? 물어보는 게 더 빠르니까. 어여 물어 봐.” “라온을 좀 구입하려고 왔는데요.” “새 걸로 찾나? 중고로 찾나?” “새 건 얼마고 중고는 얼마입니까?” “얼마까지 알아 봤는데?” “······.” 이 사람들이 진짜... 나는 순간 울컥했지만, 최대한 평온한 표정으로 답했다. “가게 앞에는 19만원이라고 쓰여 있던데, 아닌가요?” “맞아 19만원.” 주인은 비좁은 카운터 안쪽을 뒤적거리다가 라온의 패키지 박스를 꺼내어 진열대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나는 그 부분에서 다시 할 말을 잃었다. 내 앞에 놓여진 박스는 제대로 보관이 안되어 여기저기 긁히고 구겨진 박스였기 때문이다. “저는 새 걸로 말씀 드린 건데요?” “그거 새 거 맞아. 열어서 확인해보게.” 주인은 좁은 카운터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연신 부채질을 해대었다. 결국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패키지 상자를 열기 전에 개봉 부분을 살펴보았다. 역시 당연하게도 ‘밀봉씰’이 손상 되어 있었다. 하마터면 급한 마음에 밀봉씰을 뜯어내기라도 했다면, 그대로 덤태기를 쓸뻔 했군. 칼로 잘라낸 것은 아니지만, 조심스레 스티커를 제거 한 흔적을 발견한 내가 주인을 바라보자, 그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얼버무렸다. “원래 제품을 인도 받을 때 안에 내용물이 잘 들어 있나, 우리 소매점에서 확인을 해보게 되어 있어. 혹시나 팔았는데, 손님이 내용물이 안 들어 있다고 우기면 우린 방법이 없으니까.” 장사를 하는 사람이 물건의 하자보다 손님을 먼저 의심하다니, 점점 기가 막히는구만.. 그때 보다 못했는지, 소연씨가 주인아저씨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러면 판매하실 때 직접 개봉해서 손님이랑 같이 확인 하면 되잖아요.” “어허~ 아가씨가 어려서 뭘 모르나 본데, 그 순간에 이 제품은 곧바로 중고가 되는 거야. 만약에 손님이 변심하면 못 파는 물건이 된다고.” 전형적인 꼰대 마인드로 무장한 이 사람에게는 어떤 말도 통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저씨가 한 말을 그대로 이용하기로 했다. “그럼 일단 이 제품은 아저씨께서 한번 열어 봤다는 뜻이네요?” “그렇지. 내용물에 하자가 없는지 확인해야하니까.” “전 아저씨가 확인한 제품은 필요 없습니다. 새 상품을 열어서 꺼내 봤다는 것은 이미 그 시점에서 중고나 다름없으니까요.” “어허... 젊은 사람이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군.” 대체 누가 누구에게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네. 이 사람 새 것과 중고의 차이를 모르나? 그때 주인장이 불쾌한 표정과 함께 다시 허리를 숙여 선반 아래에서 새로운 라온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제법 상태가 온전한 녀석이 튀어 나왔다. “22만원이네.” “네? 아까는 새 거가 19만원이라고...” “그저께 새로 들어온 물건이야. 밀봉씰에 손상이 없는 완전한 신품은 22만원이네.” 어차피 똑같은 기기인데 매장에 들어온 기간이 무슨 소용이지? 이 아저씨랑 계속 말을 섞다보니, 굉장히 헷갈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 후로 게임 소프트에 관해서도 물어보았지만, 게임 역시 이런저런 말도 안되는 이유로 정가보다 조금씩 더 붙여 팔고 있었다. 결국 안되겠다 싶어 구매를 포기하고 가게 밖에 나서려는데, 등 뒤에서 대놓고 들으라는 듯이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도 더운데, 별 미친년 놈들이 찾아와서 귀찮게 하네. 아~ 짜증나.” 그 이후 몇 군데 매장을 좀 더 둘러보았지만, 다른 곳 역시 단가는 거의 비슷비슷했다. 때때로 가게 주인은 우리가 아닌 건너편 매장의 업주와 눈빛을 교환하며 사인을 주고받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결국 다시 처음의 터널 상가의 입구로 돌아온 나는 푹푹 찌는 더위 속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한 패스트 푸드 점을 찾았다. “일단 저기에 들러서 목이라도 좀 축이죠.” “네...” 소연씨는 처음 느껴본 소매 현장에 대해 상당히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 가지였다. 다음 차세대기의 매체가 CD로 접어들게 되면 이곳 용산은 복제 CD의 총본산지가 될 터였다. MOD 칩이라는 개조용 칩을 들여와 정품을 구매하러 온 유저를 꼬드겨 기기를 개조 시키고, 그 과정에서 렌즈나 부품을 바꿔치기하는 악덕 업주가 늘어나며 용산은 국내 최고의 전자상가에서 비도덕적인 상인들이 모인 상가로 이미지가 추락하게 된다. 비단 게임뿐만 아니라 CD 플레이어, 카메라, PC 부품 역시도 조금만 방심하면 소비자를 호구 취급하며 바가지를 씌웠으니, 망해도 이상할 게 없지... 하지만 지금은 1992년. 적어도 인터넷 쇼핑몰이 활성화되는 2000년대 초반까지는 최신 게임이나 PC 부품을 구하기 위해선 울며 겨자먹기로 용산을 찾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전 정말 이해가 안돼요. 어떻게 제품이 들어온 시기에 따라 돈을 더 받을 수 있죠? 거기다 밀봉 스티커를 소매점에서 일일이 뜯어 내용물을 미리 확인하다니, 물론 공장에서 출하할 때 미스로 인해 불량인 제품도 있긴 하지만, 이건 명백히 공공 거래에 어긋난 행동이라구요.” 나는 불 같이 화를 내는 소연씨를 진정 시키며 입을 열었다. “아마 밀봉씰이 뜯어져 있던 것은 반품 제품일 겁니다.” “반품이요?” “손님의 단순 변심이거나, 아님 기기에 이상이 있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진열대에 있던 제품이겠죠.” “어떻게 그런걸 알고 계세요?” “우선은 박스의 구김 상태죠. 딱 봐도 그 박스는 빈 박스로 상당히 오랫동안 보존 되었을 거예요. 안에 내용물이 들어 있었다면, 절대 그런 식으로 구겨지진 않았을 겁니다. 흔히들 하는 수법이에요. 소비자들에게 실물을 보여주기 위해서 진열품은 필수니까요.” “그럴리가요. 저희 만트라에서는 분명 손님들에게 보여드릴 진열용 데모킷을 드리고 있는데...” “그것마저 팔아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새 상품을 꺼내 손님들에게 보여주고, 너무 오래됐다 싶으면 잘 닦아서 패키지 상자에 다시 넣어 두는 거죠. 그리고 정상가에 팔고 나서 다른 새 상품을 진열합니다.” 나 역시 이 수법에 한 번 속아 고등학교 때 매장에 진열된 MD플레이어를 비싼 가격에 산 기억이 있었다. 나는 침울한 표정으로 음료수를 삼키고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많이 놀랐어요?” “놀라기 보단 굉장히 실망했어요. 소매점에서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결국 소비자들이 피해를 볼 수밖에 없잖아요.” “맞아요. 그래서 올바른 유통 라인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또한 그것을 알리는 마케팅도 중요하죠.” “하지만 저희 회사에는 아직 그런 부서가 없어요.” 만트라의 직원은 70명이나 되지만, 굉장히 여러 가지 일을 하는 회사였다. 콘솔 전문 잡지를 만드는 편집부와 게임을 퍼블리싱 하는 영업부가 나뉘어 있어 마케팅 쪽은 매달 발간되는 잡지에 실어 나르는 것으로 최소화하고 있는 상태였다. 90년대 초반에는 중소기업뿐만 아니라 대 기업 조차도 제품을 홍보하는 것에는 그렇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을 때니까... “곧 만들어질 겁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소연씨는 중요한 역할을 맡아 주셔야 하구요.” 소연씨는 내 말에 고개를 갸웃 거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대답 대신 그저 웃어 보이며 테이블 위에 놓인 탄산음료를 들이켰다.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양심적인 가게가 한 두 개 쯤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떻게 죄다 똑같은 사람들만 모여 있지? 분명 내가 어릴 때 만해도 구석진 곳에 잘만 찾아다니면 괜찮은 매장이 몇 군데 있었던 것 같은데...’ 가만, 구석진 곳이라고? 그러고 보면 그들은 왜 장사 목이 좋은 터널 상가가 아니고, 일부러 찾지 않으면 절대 모를 깊숙한 골목에 있었을까? 어쩌면 그들에게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 잠시간의 휴식을 취한 후 나와 소연씨는 이번에는 게임 가게가 모여 있는 터널 상가가 아닌 외진 곳을 위주로 찾아 다녔다. 주고 전기 배선를 다루고 있는 가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도 간간히 게임 가게가 한 두 개씩 보였는데, 그곳은 그래도 비교적 정상적인 가격에 판매하고 있었다. “왜 터널 상가 쪽이랑 여기랑 가격 차이가 나는 거죠?” 나의 질문에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가게 주인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일단 게임을 사러오는 사람들은 매장이 다 그쪽에 몰려 있으니, 용산에 오면 보통 그쪽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보니 유동인구부터 차이가 꽤 나죠. 그쪽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다 따로 따로 매장을 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사람이 여러 개의 매장을 가지고 있어요. 업주처럼 보여도 실상은 대부분이 월급을 받는 바지 사장입니다.” “아...” “가게를 관리하는 업주들은 한 달에 한 두 번 씩 일본에 넘어가서 게임을 사오는데, 세관만 잘 통과하면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어요. 그렇게 들여온 게임은 초반엔 부르는 게 값입니다. 업주들은 자신이 관리하는 바지 사장들에게 2배가량의 금액으로 판매가를 제시해주고, 바지사장들은 거기서 0.5%의 이득을 취해 자기 월급을 챙겨가는 형태지요.” 허... 무슨 단란주점 운영하는 조폭들도 아니고, 이 무슨 거지같은 유통 방식이냐. 설명을 듣고 나니 정말로 기가 차는 행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니 소비자 가격이 정해져 있는 라온은 뒷전으로 밀리고, 슈퍼 패밀리용 게임들이 치고 들어올 수밖에... 그날 저녁. 강남에 위치한 요정에서 나는 만트라의 김한석 대표와 따로 자리를 가졌다. “한국에 들어 오시자마자 숨 돌릴 틈이 없으시군요. 소연양에게 들어보니 오늘은 용산 전자 상가에 방문 하셨다고 하던데, 어떠셨나요?” “한마디로 엉망이었습니다.” “그렇죠. 저 역시 4년 전에 PC 게임 소매점을 운영해보았지만, 만만치가 않더군요. 양심적으로 장사해서는 성공하기 어려운 사업입니다.” “일단. 내일 부터는 저 역시 솜노리 소프트의 이원승 대표와 약속을 잡아 두었기에 바빠질 듯하군요. 애초에 제가 한국에 온 목적은 솜노리 쪽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였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시장 형태라면 솜노리와 원만하게 이야기가 진행되더라도 라온의 부진은 계속 될 것입니다.” “하아..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아뇨. 대표님. 아직은 도저히 손을 써보지 못할 만큼 늦지는 않았으니까. 괜찮습니다.”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저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아 주는거죠.” < EP. 30 : 드래곤 마운틴. (2) > 끝 < EP. 30 : 드래곤 마운틴. (3) >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이 행한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아 줘야죠.” “똑같은 방식이요?” “유동인구가 별로 없는 외지에 가게를 둔 사장님의 말로는 이미 용산에서 목이 좋은 구역은 몇몇 대형 업주들이 모두 차지한 상태라고 하더군요.” “네. 그렇습니다. 일전에 저희도 그 곳 근처에 샵을 하나 내려고 알아보았지만, 마치 업주들이 단합이라도 했는지 텃세가 너무 심해 포기한 적이 있었지요.” 그야 그렇겠지. 그런 곳에 라온 전문 매장이 들어섰다간 그들이 이루어 놓은 비도덕 적인 유통망이 산산이 부서질 테니까. “그런데, 그 나진 터널 상가. 사실 어떻게 보면 장사하기 좋은 위치는 아니지 않나요?” “음... 확실히 좋은 위치는 아니지요. 역에서도 거리가 있는 편이기도하고...” 그렇다면 적당한 거리의 저렴한 상가를 통째로 사들여 게임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지역으로 만든 거구나. 나는 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비워낸 뒤. 김대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럼 우리가 그 판을 바꿔보죠.” “네에?” “8월 15일 라온 1주년 런칭 행사는 용산에서 열겠습니다.” & 다음 날. 서울 마포구에 온 나는 마땅히 차를 세울 곳을 찾지 못해 같은 지역을 뱅뱅 돌고 있었다. ‘빌어먹을 차를 세울 만한 곳이 이렇게 없나?’ 그렇게 주변을 몇 바퀴를 돌아 겨우 주차에 성공한 나는 투덜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김 대표를 통해 알아본 결과 솜노리는 따로 회사 사무실 없이 대표인 이원승씨의 자택에서 게임을 만들고 있었다. 1992년의 한국의 게임 개발 환경은 마치 10년 전의 일본을 보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비좁은 골방에 캐릭터 디자이너 하나와 프로그래머 하나. 그리고 이 둘을 조율하는 메인 디렉터 하나. 어크토니시아 스토리를 만들어 낸 솜노리 역시 이와 비슷한 인원으로 구성된 아마추어 게임 제작사 중에 하나였다. 내가 알기로 어크토니시아 스토리는 1994년. 이원승 대표의 지인 5~6명의 인원이 모여 만든 게임으로 1여년동안 총 개발비는 약 300만원정도로 만들어진 게임이었다. 보통 인디 게임 제작사 같은 경우엔 게임을 판매 이후, 팀원끼리 수익을 분배하는 형식이기에 본업이 아닌 부업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누군가는 총 개발비 300만원이라면 말도 안 된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따로 사무실은 낸 게 아니니 임대료는 없고, 작업용 컴퓨터는 모두 개인 물품을 들여와 작업을 한 것이니 따로 시설비도 없다. 오직 최소한의 식비와 경비를 이용해 게임을 제작한 뒤 판매한 수익금을 팀원들끼리 분배한다. 이것이 90년 대 초반 한국의 인디 게임 개발의 시초였다. -딩동~ 메모지에 적인 주소를 따라 한참을 해맨 끝에 찾은 주택 건물의 초인종을 누르자, 인터폰에서 걸걸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어제 연락드린 강준혁이라고 합니다. 혹시 솜노리의 대표 이원승씨 되시나요?” “아, 네. 잠시만요.” -띠익~ 찰칵 조그만 마당이 딸려있는 개인주택. 90년대 초반 일반적인 중산층 가정이 많이 거주하는 붉은 벽돌집과 마주서자, 유리로 된 현관문이 열리며 초췌한 모습의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만트라에서 오신 분 맞으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피곤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에게 나는 살짝 입 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집이 좀 지저분한데, 일단 들어오시죠.”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원승 대표의 권유에 따라 집안의 작업실로 들어서자, 퀴퀴한 홀아비 냄새가 내 후각을 자극했다. 책상 위에는 다 먹은 컵라면 용기가 종류별로 겹쳐져 있었고, 그 옆에 놓인 1.5L 페트병에는 꽁초가 가득 담겨 기괴한 색을 띠고 있었다. 채광이 별로 좋지 않은 작업실 구석의 2층 침대에서 꿈틀거리는 인영(人影)을 보아하니 누군가가 작업을 마치고 오침을 취하고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아... 여기서 일 얘기하기엔 너무 어수선한데?’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앉을 만한 공간도 딱히 없어 작업실을 두리번거리자, 뒤에 있던 이원승 대표가 쑥스러운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그냥 거실 식탁에서 이야기할까요?” “그게 낫겠네요. 하하...” 잠시 후 거실 식탁으로 자리를 옮기자, 이원승 대표는 냉장고에서 쥬스 병을 꺼내 들었지만 마땅히 담을 만한 컵이 없었다. 싱크대 안에 넘쳐흐를 것만 같은 설거지 더미를 보아하니, 그것은 어떠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전 괜찮습니다.” “직접 여기로 찾아오실 줄은 몰라서 준비가 미흡했네요.” “아뇨. 제가 너무 급하게 방문 일정을 잡아서 그렇죠. 어차피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온 것이라, 차 대접 같은 건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이원승 대표와 식탁에 마주 앉은 나는 다시 한 번 내 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어제 저녁 연락드렸던 강준혁입니다. 사실 만트라 소속은 아니고, 일본의 펜타곤 소프트 소속이긴 합니다만...” “그럼 설마 드래곤 엠블렘의 개발자이신..!!” “아... 네, 맞아요.” 나의 대답에 화들짝 놀란 이원승 대표는 두 눈을 부릅뜨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어쩐지. 어제 성함을 듣고 설마설마 했는데, 진짜로 강준혁씨 일 줄이야..” ······. 내 이름이 한국에서도 그렇게 유명했나? 왠지 어색한 느낌에 나는 볼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알아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물론이죠. 준혁씨가 만든 게임은 저희도 모두 플레이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준혁씨 같은 분이 저희 솜노리에는 어쩐 일로?” 순간 이원승 대표의 질문에 ‘어린 시절 어크토니시아를 엄청 재밌게 해서요.’ 라고 답할 뻔했다. 그만큼 솜노리가 만들어 낸 어크토니시아 스토리는 한국 게임 업계에 한 획을 그은 명작으로 기억되고 있었으니까. ‘카이난의 지팡이’라는 신물(神物)을 호위하던 중 적의 기습에 탈취당한 기사 로이드는 지팡이를 되찾기 위해 현자 레자일과 그 손녀 일레느를 동료로 맞아 여행을 떠나는 스토리를 그리고 있었다. 이야기의 흐름은 당시 JRPG의 영향을 받아 일자진행형 스토리 구성을 가지고 있었고, 마을에 들어 새로운 무구를 구입하고, 레벨 노가다를 반복하는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크토니시아 스토리가 유저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것은 당시 국산게임에선 찾아 볼 수 없었던 놀라운 그래픽과 스토리의 개연성. 그리고 SRPG를 표방한 특유의 전투 시스템 덕분이었다. 비록 처음에 확 떠오른 것은 아니었지만, 어크토니시아는 PC 유저들의 입소문을 타고 점점 판매량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8만 카피를 넘어선 순간 판매 속도가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당시 어크토니시아 스토리는 게임에 대한 불법 복제가 굉장히 팽배하던 시절에 발매되었다. 물론 무단복제를 막기 위해 스토리 중간에 총 세 번 등장하여 유저들에게 암호를 묻는 패스워드 캐릭터를 등장 시켰지만, 그 노력을 허사로 만드는 ‘크랙 파일’이 등장하면서 판매량이 급속도로 고꾸라진 것이다. 그렇게 제 1회 한국 게임 진흥원. 대상에 빛나는 게임은 10만 카피 이후로 더 치고 나가지 못하고 불법 복제에 무릎을 꿇고 말았는데... 그래도 이런 소규모 인원으로 국내 시장에서 10만 카피에 달하는 흥행을 불러온 것은 절대 무시하지 못 할 수확이긴 했다. ‘다만 돈을 못 멀어서 그렇지...’ 10만 카피라면 소프트 한 개당 인센티브로 천원만 붙여도 1억이다. 하지만, 솜노리의 이원승 대표는 당시 판매 옵션 계약을 생각지 못하고, 완성된 게임을 ‘소프트 레이’라는 회사에 헐값에 넘겨버리는 큰 실수를 하게 된다. 그로인해 어크토니시아의 모든 판매 수익은 ‘소프트 레이’ 쪽으로 넘어가고, 정작 이원승 대표는 정말로 얼마 안 되는 푼돈을 손에 쥐었다고 한다. 희대의 명작 어크토니시아의 모든 수익을 가로챈 소프트 레이에 대해 조금 설명을 덧붙인다면, 그들은 자체적으로 ‘게임 스쿨’ 이라는 업계 종사자를 양성하는 학원을 운영하며 포인세티아, 천하무적등의 게임을 만들었으나 그다지 흥행치 못했고, 차후엔 ST엔터테이먼트로 사명을 바꾸고 몇가지 게임을 더 제작했으나 ‘협객 푸른매’라는 괴작을 남기고 회사 문을 닫았다. 어크토니시아의 배급을 제외하고 단 한 번의 성공도 거두지 못했으며, 그들 역시 게임 불법 복제의 폐해에 묻혀 한순간에 잊혀져 버렸다. 나는 무슨 일로 찾아왔냐는 이원승 대표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만트라에 보내주신 어크토니시아의 데모 버전을 플레이해 보았습니다.” “아, 직접 해보셨나요?” “네. 자잘한 버그가 있긴 하지만, 확실히 재미있었습니다.” 나의 호평에 이원승 대표는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실은 어크토니시아의 전투 시스템은 드래곤 엠블렘의 SRPG 방식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디어를 제공하신 분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이거 참...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모르겠군요.” “만트라의 김한석 대표의 말로는 투자자를 찾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 그렇습니다. 저희 솜노리는 아마추어 게임 제작사이긴 하지만, 다들 열정만큼은 대단 하거든요. 하지만 그 열정을 쏟아내기 위해선...” “자금이 필요하겠죠.” “네. 다들 직장 일을 제쳐두고 일에 매진하다보니, 생활비 조차 부족한 형편이거든요. 그래서 일단 프롤로그 부분을 만들어 여러 회사에 투자 유치를 받기 위해 보내 보았습니다.” “답은 왔나요?” “아, 다행히 몇 군데서 연락이 왔습니다. 만트라와 소프트 레이, 그리고 전설의 신검으로 유명한 미리네 소프트에서도 긍정적인 답이 왔습니다.” “소프트 레이... 라구요?” “네. 요즘 PC 잡지에 많이 이름이 알려진 곳인데, 혹시 알고 계세요?” “아, 네... 조금.” “하지만, 이렇게 사무실까지 직접 찾아와 주신 것은 준혁씨가 처음이네요.” “저 역시 어크토니시아 스토리에 큰 관심이 있으니까요.” “아,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음?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그게... 실은 지난주에 소프트 레이와 계약을 해버렸거든요.” “네에!?” “실은 좀 급하게 돈이 필요해서...”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이원승 대표는 나에게 미안한지 눈길을 피했다. 나는 잠시 주먹을 감싸 쥔 채 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소프트 레이와의 계약서를 잠시 볼 수 있을까요?” “네?” “잠깐 체크 좀 해드리려고 합니다. 혹시나 솜노리에 부당한 계약 사항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부당한.. 계약이요?” 부당 계약이라는 소리에 깜짝 놀란 이원승 대표는 잠시 후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프트 레이에서 건네준 계약 서류를 들고 왔다. “저도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딱히 별 이상은 없었습니다. 선금으로 300만원을 받고, 게임이 완료되면 그 후에 소프트 레이에서 700만원을 더 송금해 주기로 했습니다.” ‘어이구, 많이도 받으셨네요. 어크토니시아가 얼마나 팔릴지도 모르고...’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키며 그에게서 건네받은 계약 내용을 살펴보았다. ‘역시 차후 인센티브에 대한 계약사항은 없군.’ 그리고 나는 그 즉시 이원승 대표에게 이 사실을 전해주었다. 그러자 이원승 대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일반 가정에 PC 보급도 제대로 안된 시기인데, 팔아 봤자 얼마나 나가겠어요. 2~3천장 나가면 잘나간 거겠죠.” 이 사람.. 지금 자신이 만든 어크토니시아를 완전히 과소평가 하고 있군. 나는 그의 장난기 섞인 대답에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만약 10만장이 넘게 팔린다면요?” “네에...?” “단돈 천원만 인센티브로 붙여도 1억원입니다. 포기하실 겁니까?” “어, 아, 그게...” 이 시기에 1억원이란 돈은 당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큰돈이었기에 이원승 대표는 갑자기 식은땀까지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게, 그만큼이나 팔수 있을까요?” “100만장 팔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소프트 레이에 계약 취소하고 저희랑 하시죠.” “네!? 100만장이요!!” 이원승 대표의 비명과 같은 외침에 작업실 안쪽에서 쿵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무.. 무슨 일입니까!? 형님.” 오침 중이었던 프로그래머가 이원승 대표의 외침소리에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원승 대표는 신경쓰지 않고 그저 내 손에 들린 계약서와 내 얼굴만 번갈아 바라보면서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게 정말 가능한 판매량입니까?” “가능합니다. 계약 불이행에 대한 파기금 역시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하지만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요?” “어크토니시아 스토리는 PC용으로 발매하지 않습니다. 펜타곤의 휴대기기인 라온 전용으로 발매해주세요.” 그러자 방금 깨어난 프로그래머가 이원승 대표에게 말했다. “형님!? 저 사람 뭡니까? 대체 뭔데 형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겁니까?” 그러자 흥분한 동생을 말리며 이원승 대표가 입을 열었다. “너 인마. 조용히 못 있겠냐. 손님 앞에서 무슨 짓이야.” “형님. 제가 지금 가만있게 생겼습니까!? 형님 대답에 따라 지금 난리가 나게 생겼는데?” “너 대체 왜 그래? 뭐가 불만이야?” “당연히 불만이죠!! 지금 저 사람이 말한 대로 어크토를 라온 전용으로 개발한다고 하면...” 프로그래머인 남자는 길게 숨을 몰아쉬며 숨을 고르더니, 거의 울상이 되어 입을 열었다. “다시 처음부터 작업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어이, 그렇게 쫄지마. 이번엔 나도 함께 참전해 줄 테니까 < EP. 30 : 드래곤 마운틴. (3) > 끝 < EP. 30 : 드래곤 마운틴. (4) > & 다음 날.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마포 근처에 임대 사무실을 빌리는 것이었다. 라온의 1주년 기념행사는 이제 한 달 남짓. 성공적인 이벤트 개최를 위해선 솜노리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원활한 개발환경이 필수적이었다. PC에서 라온으로 플랫폼을 변경하며 현재까지 만들었던 모든 개발 상황은 다시 0% 바뀌었다. 사실 몇 가지 건질 수 있다면 전에 만트라에서 보내준 라온용 어크토니시아의 데모 버전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솔직히 있으나 마나한 수준에 불과했다. 왜냐고? 내가 설마 여기까지 와서 과거의 어크토니시아를 그대로 포팅 하겠는가? 어크토는 분명 당시 게임 업계 상황에 빗대어 보자면 수작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어마어마한 대작은 아니었다. 분명히 고쳐야 할 점이 있었고, 조금 더 보완해야 할 부분도 있었다. 우선은 첫 번째로 SRPG의 표방한 전투. 이 부분은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다. 레벨 노가다가 주가 되는 고전 RPG에서 어크토니시아는 전투의 템포가 굉장히 느린 편이었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등장하는 아군과 적군 수에 비해 전투 맵의 크기가 너무 넓게 설정 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차피 치고 박고 싸워야하는 시점에 일단은 적을 만나러 가는 것에만 2~3턴을 소모해야했는데, 이 부분이 굉장히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이거 전투 맵이 왜 이렇게 넓지요?” “그건 전장의 광활함을 주기 위해서...” “겨우 잡다한 몬스터를 3~4마리 잡는데, 전장으로 표현하기에는 좀... 맵 크기는 3분의 1 사이즈로 줄이죠. 전투가 시작하자마자 적과 마주하고 있는 상황으로, 전장의 광활함도 한 두 번이지 매번 전투를 치러야하는 RPG 게임에서 이런 식으로 레벨 노가다를 하다보면 금방 질려요.” 그리고 두 번째. 각 캐릭터의 직업에 맞는 고유한 설정을 부과해 주었다. 사실 어크토니시아에서 마법은 굉장히 쓸데없는 계륵(鷄肋)과도 같은 존재였다. 검과 마법이 난무하는 판타지 세계에서 마법이란 세계관에 큰 영향을 끼치는 존재이다. 하지만, 어크토에서는 마법 하나의 MP 소모량이 너무 큰 탓에 한 두 방만 날리고 나면 더 이상 마법을 쓸 수 있는 포인트가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스토리를 제외한 시스템 부분을 최초 기획서에서 절반가량을 뜯어고치자, 이원승 대표를 포함해 얼마 안 되는 솜노리의 팀원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대표님. 대체 저 분은 누굽니까?” “일본 펜타곤 소프트에서 온 강준혁씨야.” “아, 펜타곤 소프트...” “······.” “아니, 잠깐. 펜타곤 소프트의 강준혁이라면!?” “그래, 인마.. 드래곤 엠블렘 시리즈 메인 디렉터란다.” “허어억...” 최초 솜노리에서 어크토니시아 스토리를 만들어낸 개발진들은 사실 전문적으로 게임을 만들어 본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저 게임이 좋아하던 사람들 몇몇이 모여 취미로 게임을 만드는 인디 게임 집단에 불과 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갑자기 전문적인 게임을 만들라면 당연히 혼동이 오기 마련이고, 그런 혼란은 반발 심리를 가져오기 마련이었다. “저기, 저는 정말 간단한 롤플레잉 게임을 만드는 줄 알고 이원승 대표님을 찾아온 건데.. 여기에 투자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생업이 곤란해요.” 기획서를 살피며 불필요한 부분을 걸러내던 중에 빼빼마른 프로그래머 하나가 조심스레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계속 해서 어크토의 기획서를 살피며 그의 질문에 답했다.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시죠?” “아, 그게.. 조그만 회사에서 아이들 영어 교육용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습니다.” “월수입은 어느 정도신데요?” “뭐 작업이 끝나면 성과금은 그쪽 사장님이 알아서 챙겨주신다고 하셨지만, 기본적으로 달에 100 정도 받고 있습니다.” 프로그래머의 대답에 나는 이원승 대표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오후에 만트라 쪽에서 계약금이 들어 올 거예요. 이따가 점심식사 하시고 통장 확인해보세요. 작업 인원에 대해선 이 대표님 권한이니 제가 끼어들진 않겠습니다. 단 하기 싫은 인원까지 억지로 설득해 끌고 갈 만큼 시간이 널널하지 않다는 것을 염두 해두세요. 그리고...” 개발팀 쪽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뒤에 말을 이어 붙였다. “장담 하건데,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면 여러분 모두 지금보다 실력이 몇 단계씩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몇 달간은 다니던 직장. 집에 있는 가족, 친구. 그 모든 걸 잊고 이 일에만 매달려야 할 거예요. 그만큼 각오가 되신 분에게 게임이 완료될 때까지 월 200만원의 월급을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이.. 이백!?” 90년대 초. 월 200만원의 고정 수입은 웬만한 중소기업의 부장급 월급과 맞먹는 정도였기에 그들이 이렇게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때요. 할 수 있겠어요?” 나의 질문에 사무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천천히 위 아래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 1992년 8월 14일. 한 달 전부터 소연씨를 비롯한 만트라의 직원들이 용산역 주변을 위주로 대규모 홍보를 진행해온 결과 현재 용산 터미널 상가 1층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용산역 출구에서 긴 복도를 따라 건물 내부로 바로 진입할 수 있게 되어있는 터미널 상가는 손님들 유입이 많은 대신 다른 곳보다 월세가 턱없이 높은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초반의 기선 제압을 위해선 이만한 자리도 없지.’ 나는 점점 늘어만 가는 사람들의 행렬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난 한 달 동안 정말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유키가 한국에 방문했던 주말을 빼고는 거의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쁘게 지내왔으니까. 부족한 인력은 둘째로 치더라도 기본적인 코딩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아마추어들을 데리고 강행군을 하자니, 답답해 미쳐버릴 것만 같았지만 나는 최대한 분노를 억누르며 우는 아이를 달래는 심정으로 천천히 작업을 진행시켰다. 결국 게임의 개발 진척 보다는 프로그래머들을 가르치는 마음으로 항상 업무가 끝나면 따로 교육 시간을 가졌다. 그 결과 내가 생각했던 진척도 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단계까지는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나머지는 유저들의 반응에 달렸지.’ 그때 2층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점점 행사장에 차오르는 유저들을 바라보던 내 눈에 몇몇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어라? 저 사람들은 나진 터널 상가의 업주들이잖아? 아무래도 라온에서 대규모 행사를 진행한다는 소식과 함께 돌고 있는 흉흉한 소문이 용산 게임 상가의 업주들의 기분을 언짢게 만든 모양이었다. 그들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흉흉한 소문. 그 전말을 밝히기 위해 나는 남아있는 커피를 비워내곤 종이컵을 구겼다. “잠시 후. 만트라에서 준비한 라온 1주년 기념행사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오늘 행사에서는 사전에 예고 드렸다시피 드래곤 엠블렘 시리즈와 휴대기기 라온을 개발한 펜타곤 소프트의 강준혁씨가 특별 게스트로 초빙될 예정입니다.” “오오...” “또한 순수 우리 기술로 만들어진 라온 전용 RPG게임 역시 오늘 행사가 끝난 뒤 체험판을 배포할 예정이니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와아아~” 이번 행사는 라온의 1주년을 기념하는 행사 겸. 차후 한국에서의 라온의 행보를 발표하는 자리였기에 이곳에 모인 유저들의 반응이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2층에서 계단을 통해 내려온 나는 무대 뒤에서 사회자가 부를 때까지 천천히 숨을 골랐다. 벌써 몇 번이나 겪어 왔지만, 항상 무대에 오르기 전에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게 느껴질 정도로 긴장이 되곤 했다. 더구나 이번에는 한국에서의 첫 발표회. 어쩌면 오늘 이 이벤트를 기점으로 한국 유저들에서 라온이라는 기기가 재평가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럼 이제 본격적인 행사 진행을 알리며 먼저 강준혁씨를 무대로 모시겠습니다.” 무대 위에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와 함께 무대 위로 향하는 장막이 걷혔다. 행사 도우미의 안내에 따라 무대 위로 올라서자, 무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아~ 역시 드래곤 엠블렘 시리즈와 내가 없는 거리의 메인 디렉터인 강준혁씨의 인기가 한국에서도 굉장하다는 것을 또 한 번 느끼게 됩니다. 먼저 한국의 유저들에게 인사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펜타곤 소프트의 강준혁입니다.”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박수들 보내는 유저들을 빙 둘러보았다. 어떤 이는 패밀리용 드래곤 엠블렘 정품 케이스를 손에 들고 흔들고 있었고, 어떤 이는 손수 환영 피켓을 만들어 흔들고 있었다. “이렇게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진즉에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어야 하는데, 라온의 발매 1주년이 돼서야 이렇게 찾아뵙게 되어 죄송한 마음뿐이네요.” 나는 유저들의 반응에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사과를 올린 뒤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유저들 사이로 보이는 몇몇 나진 상가 업주들의 표정이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심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그때, 여자랑 같이 왔던..” 아무래도 여자랑 함께 나진 상가에 다니는 손님이 극히 드물었던 때라 그런지 한눈에 나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나는 유유히 미소를 띄운 채 그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직접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한 달 전쯤에 한국에 도착한 저는 그동안 라온이 판매되는 유통 라인을 살피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안타까웠던 유통 시장은... 바로 여기. 용산이었습니다.” 뒤이어 나의 긴 한숨이 스피커를 통해 사방에 울려 퍼지고 나는 무대 중앙으로 한걸음 내딛으며 말을 이었다. “용산 전자 상가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커다란 유통라인을 가지고 있는 게임 산업의 심장부라고 할 만한 곳입니다. 국내에서 발매되는 게임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판매 중인 게임 역시 이곳을 통해서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죠. 여러분 혹시 라온의 정가가 얼마인지 알고 있으십니까?” 그러자 무대에 모인 사람들의 입에서 각기 다른 가격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19만원 아닌가?” “아냐, 원래 198,000원이야.” “뭐라구요? 전 22만원 주고 샀는데?” “전 23만원이요. 뭐야 이거 가격이 왜 다 달라?” 낱낱이 밝혀지는 각기 다른 라온의 가격에 유저들 틈에 섞여 있던 업주들 표정이 조금씩 굳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착잡한 표정으로 무대 밑에서 대기 중인 소연씨에게 사인을 보내자, 그녀는 양손에 두 개의 라온을 들고 무대 위로 올라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이것은 방금 저희 직원을 통해 용산 ‘나진’ 상가에서 구입한 라온입니다. 여기 영수증도 있네요. 8월 15일 오후 1시 10분. 불과 20분 전에 구입해온 상품입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라온 하나를 손에 들어 보였다. “보통 저희 제품은 제품의 개봉 여부를 살피기 위해 이렇게 밀봉 스티커를 붙여둡니다. 하지만 이 제품은 이 스티커가 한번 뜯어진 흔적이 보이네요. 그럼 한번 뜯어볼까요? 참고로 이 제품은 가게 사장님이 직접 새 상품이라고 밝혔고, 내용물에 이상이 없다고 하더군요.” 나는 잠시 마이크를 내려놓은 뒤 박스를 개봉했다. 그러자 안쪽에 비닐에 싸여있는 라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 보시다 시피 구성품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잘 살펴보시면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먼저 제품을 감싸고 있는 비닐 상태가 묘하게 구겨져 있네요. 그리고 어댑터 선 역시 뭔가 얼기설기 대충 묶여져 있군요. 그럼 다른 제품을 한번 개봉해 보겠습니다. 이 제품은 용산의 외곽에 위치한 상점에서 정가 그대로 198,000원을 주고 사온 제품입니다. 먼저 이 상품에는 밀봉 스티커에 어떠한 파손흔적도 없네요. 즉 단 한 번도 열어 보지 않았다는 뜻이겠죠.” 이번에도 나는 마이크를 내려놓은 뒤 새 상품을 개봉했다. 그리고 방금 전에 개봉한 박스와 나란히 세워 보였다. “이번에는 제품 본체를 비교해 볼까요? 다행히도 라온은 화이트 색상이라 새상품과 비교하면 그 색감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죠.” 소연씨는 나의 요청에 따라 상자 안에 있는 두 개의 라온을 꺼내 양손에 들어 보였다. “아, 오른쪽이 훨씬 깨끗하다.” 한눈에 보기에도 왼쪽은 사용감이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살짝 노란색을 띄고 있었다. 그것은 기기 내부의 열로 인해 변색 되는 화이트 플라스틱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아, 씨바.. 어쩐지 새 걸로 사서 처음 깠는데, 뭔가 찜찜하더라니...”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마이크를 손에 쥔 채로 잠시동안 말을 아꼈다. “물론 모든 업체가 이런 식으로 영업을 하지 않겠지만, 실질적인 피해는 여기 모여 계신 유저님들이 지고 있는 부분이고, 저는 여러분들께 그에 합당한 보상과 대책 마련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결정했습니다.” 행사장에 모인 유저들은 나의 발언에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두 눈을 치켜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현시간부로 더 이상. 나진 터널 상가에 라온에 관련한 모든 제품을 일체 유통시키지 않겠습니다.” “어억!!” “뭐라고!!!” 이것이 바로 나진 상가 업주들사이에서 돌고 있던 흉흉한 소문의 전조였다. < EP. 30 : 드래곤 마운틴. (5) > “현시간부로 더 이상. 나진 터널 상가에 라온에 관련한 모든 제품을 일체 유통시키지 않겠습니다.” “어억!!” “뭐라고!!!” 이것이 바로 나진 상가 업주들 사이에서 떠돌던 흉흉한 소문의 전조였다. 그리고 그 효과는 유저들 사이에 끼어 있는 업주들에게서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우리한테 물건 아예 안주겠다고!?” “나 참 어이가 없네. 아예 물건 팔 생각이 없구만.” 그 순간 생각 없이 말을 내뱉은 업주들에게 유저들의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바보가 따로 없군. 여기서 저런 소리를 내뱉었다는 건 자폭이나 마찬가지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들의 말을 무시한 채 다시 무대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러분이 용산 전자 상가를 이용하는 이유는 뭘까요? 여러분이 사는 동네에 게임 샵이 없어서? 아니죠. 있습니다. 지방이라면 몰라도 서울 근교에 거주 하신다면 요즘 같은 시기에 PC 판매점 한 두 군데쯤 없을 리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곳에서도 분명 게임을 팔고 있습니다. 그것이 불법 소프트웨어든 아니면 정품 소프트웨어든 말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여러분이 서울의 중심가에 위치한 이 용산을 찾는 이유는 게임 타이틀의 다양성과 더불어 조금이라도 더 싸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겠죠. 물론 그렇습니다.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게임 상가는 이곳 용산과 청계천 세운상가뿐이니까요.” 행사장에 모인 유저들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하자, 인파속에 섞여 있던 업주들이 붉어진 얼굴로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모두 밖으로 빠져 나가기 전에 서둘러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용산은 변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죠. 하지만 게임이란 시장이 점점 더 커지며 유저들에게 못 된 상술을 부리는 매장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자 내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한 유저가 번쩍 손을 들며 질문을 걸어왔다. “그래도 드래곤 워리어 5 같은 일본에서만 발매된 게임들을 구하려면 결국 나진 상가를 이용할 수밖에 없잖아요.” “하긴, 그건 그래. 달리 구할 곳이 없으니.” 나는 유저들의 목소리에 짧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아직 우리나라는 일본과의 정식 수입이 가능한 협상 품목에 게임과 애니메이션이 빠져 있지요. 그렇기에 여기 만트라의 김한석 대표님은 유저분들을 위해 지난 한 달간 직접 직원들과 용산 전자상가를 돌며 양심적인 가게와 비양심적인 가게를 분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이 달 말에 만트라에서 발간하는 게임 월드에 사례를 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여러분께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소비자의 권리는 소비자가 찾아야합니다. 지난 달 제가 용산을 방문했을 때, 여러 매장에서 드래곤 워리어 5의 예약을 받고 있더군요.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시리즈이고, 슈퍼 패밀리의 카트리지 단가가 워낙에 비싸다 보니 9200엔이라는 다소 높은 가격에 출시될 예정입니다. 현재 환율로 약 73000원 가량 나오는 금액이죠.” “하지만 제가 알아본 바로는 용산에서 이 소프트의 구매 가격은 18만원이었습니다. 최근엔 거의 20만원까지도 받고 있더군요. 물론 그 분들이 일본에서 들여오는 노고를 무시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두 배 이상의 금액을 받는 것은 명백한 폭리죠. 그래서 여러분께 소비자의 권리에 대해 더더욱 강조해 말씀 드리는 겁니다. ‘비싼 건 비싸다.’, ‘이 가격엔 구매할 수 없다.’ 왜 말을 못합니까? 좋아하는 게임을 조금이라도 빨리 즐기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판매자의 편을 들어주다보면 끝도 없을 것입니다.” 나의 말에 방금 전 질문을 걸어온 유저가 또 다른 질문을 걸어왔다. “그럼 대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조건 하면 안 된다고 하기 보단 방법을 알려주셔야죠.”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여러분께 그 방법을 알려드리도록 하죠. 방금 전에 말했다 시피 이 달 말에 발행되는 ‘게임 월드’에 용산 게임 상가에 대한 새로운 코너가 게시될 예정입니다. 첫 달은 만트라의 직원분들이 직접 발로 뛰어 다니며 수고해주셨지만, 아마 몇 번 더 순회를 돌고 나면 직원들의 정체가 드러나겠지요. 그래서 이제부턴 여러분들께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이 다녀간 매장의 친절도와 판매되는 게임의 가격이 적절한지에 대해 잡지사에 투고해 주세요.” “이곳 용산에도 분명 좋은 가격에 친절한 매장이 다수 존재합니다. 하지만, 대형 업주의 횡포에 밀려 구석진 자리로 밀려나 있지요. 비단 게임뿐만 아니라 다른 전자 제품에도 이러한 형태의 횡포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소비자의 가장 큰 힘은 매장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부당하다 느끼는 가격에 억지로 구입하기 보단 정보 공유를 통해 올바른 소비를 해주길 부탁드립니다. 이상입니다.” “······.” 짝... 짝짝..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 된 박수 소리가 조금씩 넓게 퍼지며 금세 터미널 상가 1층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와아... 진짜 속이 다 시원하다!!” “이번 달에 게임 월드 발매하면 꼭 사야하지. 거기 기재된 매장만 갈 거야.” “아오, 젠장. 듣고 보니 내가 겁나 호구였네. 당장 취소하러 가야겠다.” “진즉에 누가 이런 것 좀 해줬으면 좀 좋아...” 그동안 쌓여 있던 불만이 여기저기서 들려오자, 아직 행사장에 남아 있던 업주들은 굉장히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걸로 얼마나 용산이 바뀔지 모르지만, 일단 최소한의 고삐하나는 걸어둔 셈이네...’ 나는 마이크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가 저희 펜타곤과 만트라의 대책입니다. 하지만 사태가 이렇게까지 흘러간 것에 대한 것은 관리가 미흡했던 저희의 책임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여러분께 그 보상에 대해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보상? 뭐가 또 있는 건가?” 보상이라는 말에 시끌벅적하던 행사장이 일순간에 고요해졌다. 그 순간 내 등 뒤에 있던 스크린에서 말을 타고 다리를 건너는 기사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곧이어 웅장한 배경음악과 함께 한 게임의 오프닝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어? 뭐지? 라온의 새로운 게임인가?” 나는 스크린이 가려지지 않도록 무대 가장자리로 물러서서 유저들과 함께 새로운 게임의 오프닝을 감상했다. 기사가 말을 타고 지나간 다리 위로 찬란한 태양이 비치고 푸른 하늘에 그려진 타이틀은 ‘어크토니시아 스토리’였다. 모리타가 있었다면 좀 더 근사한 오프닝을 만들 수도 있었지만, 순수하게 국내 개발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국산 RPG라는 타이틀이 가져오는 효과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대신 오프닝은 게임의 초반 이벤트 장면을 짜깁기 하여 조금 더 분량을 늘려 놓았는데, 이게 생각보다 반응이 상당히 괜찮았다. “국산 RPG?” “오? 뭐지. 느낌은 상당히 괜찮은데?” 특히나 카이난의 지팡이의 호송식 장면에서는 그 엄숙한 분위기에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조금 허전 했을지 모르는 호송식 이벤트에서 스프라이트 효과를 더하니 제법 괜찮은 그림이 그려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투 씬에서 행사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표정에 경악이 스쳤다. “저건 드래곤 엠블렘 2에서 나온 전투 방식이잖아!?” 그렇다. 기존에 밋밋했던 SRPG의 전투 방식을 개선해 좁은 맵에서 전술적인 행동이 가능한 택틱컬 형식을 도입시키자, 게임성이 180도 다르게 느껴졌다. “우와아... 국산 RPG가 이 정도 퀄리티까지 발전한 건가?” 어딘가에서 드래곤 엠블렘의 레이드 방식을 따라했다는 비난이 들려왔지만, 곧이어 배틀 시스템 디렉터에 내 이름이 떠오르자, 유저의 일갈(一喝)은 곧장 환호로 바뀌었다. “오오!!! 드래곤 엠블렘의 제작자가 참여했어!?” “대박이다!! 그럼 이 게임은 펜타곤과 합작이라도 봐도 되는 건가!?” 짧은 오프닝 영상은 마지막에 어크토니시아 스토리라는 타이틀을 다시 한 번 유저들에게 각인 시켜주며 끝을 맺었다. 나는 새로운 게임의 소개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저들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어크토니시아 스토리는 한국의 솜노리라는 인디 게임 개발 업체에서 만든 순수 국산 게임입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어크토니시아에서 전투 시스템을 파트를 맡아 작업을 도와드렸습니다.” 한국에서도 제법 내 이름이 먹히는 터라 그런지, 유저들은 환호성과 함께 큰 박수를 보내주었다. 왠지 이대로는 솜노리의 이원승 대표의 공을 가로채는 느낌이 들어 나는 서둘러 그를 무대 위로 불러들였다. 나에게서 마이크를 넘겨받은 이원승 대표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 속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유저들에게 첫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방금 봐 주신 어크토니시아 스토리의 메인 디렉터인 이원승이라고 합니다.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재미로 시작한 어크토니시아 스토리가 이렇게 콘솔용 게임으로 발매 된다고 생각하니 굉장히 뿌듯하고 설레이기도 합니다. 아직 국내 게임 개발은 일본이나 미국에 비해 미흡한 점이 많지만, 강준혁씨와의 인연으로 이렇게 훌륭한 게임을 만들게 되어 굉장히 기분이 좋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여러분께 한 가지 말씀을 올리자면 저희 솜노리 소프트는 이번 어크토니시아를 시작으로 한국 게임의 건승을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아,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콘솔 게임 전문 개발 업체가 탄생하는 건가!?” “감동이다. 파이널 프론티어나 드래곤 엠블렘이 한글화 됐을 때랑은 또 다른 느낌이야...” “응원합니다~!! 좋은 게임 많이 만들어 주세요!!” 유저들의 응원에 이원승 대표는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 숙여 인사를 드렸다. 나 역시 한국 유저들의 응원에 가슴이 뭉클 해지는 순간이었다. 이원승 대표에게서 마이크를 다시 넘겨받은 나는 살짝 미소 지으며 어크토에 대한 추가 설명을 덧붙였다. “어크토니시아는 현재 올 겨울 발매를 목표로 열심히 작업 중에 있습니다. 더불어 이 게임은 라온 1주년 발매 기념과 그동안 라온을 사랑해 주신 유저 여러분들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잠시 후. 내가 발표를 마치고 무대를 내려오자, 어마어마한 함성과 박수 소리가 1층 홀을 가득 메웠다. & 라온의 1주년 기념행사가 끝난 후. 나는 김한석 대표와 함께 일전에 만난 요정에서 조졸한 술자리를 가졌다. “아무리 그래도 어크토니시아 스토리 번들 패키지 발표와 무료 배포는 저희도 깜짝 놀랐습니다. 미리 말씀 좀 해주시지...” “사전에 이야기 못 드려서 죄송해요. 그저께까지 솜노리에서 작업에 열중하느라, 미리 말씀을 못드렸네요.” “하지만, 반응은 엄청 좋았습니다. 한시적 배포니 플래시 카트리지의 판매도 더 늘어나겠지요?” “미리 시장 조사 완료하셔서 펜타곤 쪽에 수주해 주세요. 아마 소연씨에게 시키면 잘해낼 겁니다.” “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나이가 어리지만, 소연씨는 경영 쪽에 남다른 재능이 있더군요. 일반적인 사무 보조 보단 김대표님의 비서로 두시는 편이 더 유용할 거라 생각합니다.” “확실히 지난 한 달간 준혁씨에게 많은 걸 배운 모양이더군요. 앞으로가 기대되는 사원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부탁 드려도 될까요?” “네? 어떤 부탁을...” 김대표에게 차후 라온의 생산 라인에 대한 내 생각을 전해주자 그는 놀란 토끼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준혁씨. 그 곳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황무지일 뿐이에요. 그런 곳에 생산 공장을 만드신다니, 저는 이해할 수가 없네요.” “어차피 10년 정도를 바라보는 일시적인 생산 공장일 뿐입니다. 차후에는 다른 나라로 생산 라인이 변동 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전에 그 땅의 부지를 전부 매입해둘 생각입니다.” “허어... 뭐 저야 상관없지만, 괜히 헛돈을 쓰시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되는군요..” 김대표는 나의 선택이 영 마음에 걸리는지 술잔을 비우며 혼잣말을 되뇌었다. “분당의 판교라. 그곳에 뭐가 있다고... 허~ 참...” < EP. 30 : 드래곤 마운틴. (5) > 끝 < EP. 31 : 새로운 바람. (1) > & 라온의 1주년 행사가 끝나고 한 달이 지난 뒤. 용산역과 바로 이어지는 터미널 상가 3층에는 만트라가 직접 운영하는 게임 샵이 새로 생겨났다. 소연씨는 새로 오픈한 매장의 사진을 찍어 국제 우편으로 나에게 보내주었다. 그중엔 만트라 소속 직원들도 몇몇 보였는데, 이렇게 사진으로 다시 보니 참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일본의 펜타곤 샵과 비슷하게 꾸며진 만트라 샵은 오픈 첫날이라 그런지 수많은 고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아도 당일 현장의 분위기가 어땠을지 생생하게 느껴진 달까? 한국에서 라온 전용샵을 오픈하기에는 시장 규모가 너무 작았던 탓에 만트라는 PC쪽 타이틀도 함께 운영하는 게임 전용 멀티샵이 되어있었다. (물론 국내 정식 발매 타이틀 위주긴 했지만...) 소연씨가 보내온 사진을 한 장씩 넘기다 보니,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때 하야시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한국에서 온 사진들입니까?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났으니까.” “한국에는 미인이 많다던데, 유키씨네 어머님도 한국인이라면서요. 이럴 줄 알았으면 부장님 한국 갈 때 저도 같이 따라가는 거였는데, 괜히 아쉽네요.” 그러자 반대편 책상에 앉아 있던 모리타가 고개를 갸웃 거리며 하야시에게 물었다. “디자인 팀의 카오리씨랑 잘 되가는 거 아녔어?” “카오리는 마냥 여동생 같은 느낌이라.. 영...” “저 역시 팀장님 같은 오빠 둔 적 없는데요~” 노크도 없이 개발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디자인팀 소속의 카오리는 하야시 쪽으론 눈길조차 주지 않고, 나를 향해 살포시 웃어 보였다. 그러자 곧이어 그녀 뒤로 하야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무슨 육백만불의 사나이에 나오는 소머즈도 아니고, 우리 사무실 방음이 이렇게 취약했나?” “제가 청력이 좀 좋거든요. 강준혁 부장님. 회의 참석 하실 시간입니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그런데 왜 카오리 네가 왜 여기에?” “글쎄요.. 카와구치 대표님께서 새로운 신작의 몬스터 디자인에 저를 비롯해 타마고 몬스터 팀 몇몇을 포함 시켜 주셨던데요?” “그래?” “아마도 이번에 대표님께서 기획 중인 새로운 파이널 프론티어 시리즈는 조금 특별할 것 같아요.” 카오리의 기대에 찬 목소리에 제 2 개발실 팀원들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 그녀가 말한 새로운 파이널 프론티어 시리즈는 차기작인 5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이 이야기를 하자면 작년 라온과 함께 동시 발매된 파이널 프론티어 4로 이야기가 돌아가게 되는데, 당시 새로운 차세대 기종으로 파이널 프론티어 4의 기획 단계에서 제 1 개발팀 내에서 의견이 엇갈린 적이 있었다. 기존에 파이널 프론티어가 가지고 있는 RPG 형식을 유지하자는 보수적인 의견과 새로운 차세대 기종의 출시에 맞춰 모든 걸 새롭게 만들어 보자는 진보적인 의견이 양립하던 시기. 메인 디렉터인 카와구치씨는 기존의 파이널 프론티어가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JRPG의 진행 방식에 손을 들어 주었고,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용기사의 이야기를 다루는 파이널 프론티어 4였다. 하지만, 이렇게 따로 회의까지 하는 걸 보면 그 역시 새로운 파이널 프론티어의 기획안이 굉장히 아쉽긴 했던 모양이다. “오늘 회의 내용은 전에 말씀 드린 대로 파이널 프론티어 시리즈의 파생 작에 대한 안건입니다.” 회의실에 모인 인원은 나를 포함해 제 1 개발팀에서 최초 안건을 내었던 직원들로 구성 되어 있었다. 카와구치 대표는 잠시 나와 눈을 마주 친 뒤, 프로젝터의 스위치를 눌러 새하얀 스크린에 기획안을 투영시켰다. “우선 이 안건은 작년에 올라왔던 새로운 파이널 프론티어에 대한 기획서를 토대로 만들어 졌음을 알립니다. 당시 제 1 개발팀 소속이었던 노무라 디렉터는 캐릭터 자체를 움직여 필드에서 싸워나가는 액션 RPG 기획안을 발표 했었는데, 당시에는 파이널 프론티어 특유의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이견(異見)이 엇갈렸던 작품 중에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파이널 프론티어 라는 제목을 제쳐두고 생각한다면 노무라가 기획한 이 게임은 상당히 독특한 방식의 게임성을 지니고 있어. 이대로 두기엔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새로운 게임의 기획서를 펼쳐 보았다. 그리고 첫 장에 들어난 게임의 제목을 바라본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혹시나 했었는데, 역시 이거였나?’ 파이널 프론티어 시리즈와 더불어 내가 알고 있던 과거에서 참 재미있게 즐겼던 게임 중에 하나였지... “일단은 계속해서 파이널 프론티어라는 가칭을 사용할 수 없기에 따로 타이틀을 붙여 보았습니다. 새로운 프로젝트의 제목은 ‘신검 전설2 –시크릿 오브 마나-’입니다.” 그러자 내 옆에 있던 카오리가 손을 번쩍 들며 입을 열었다. “어라? 2라구요? 그럼 1은 뭔가요. 대표님?” “카오리씨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 저희 펜타곤에서 액션 RPG 게임을 하나 만든 적이 있습니다.” “정말요? 라온으로 나왔나요?” 카오리의 질문에 옆에 있던 내가 입을 열었다. “민텐도의 휴대용 겜보이 용으로 만들었던 신검전설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네, 그렇습니다. 당시 RPG가 부족했던 휴대용 겜보이에서 나름 성공한 IP중에 하나였죠. 아이러니하게도 그 작품 역시 최초 파이널 프론티어의 기획안으로 파생 되었던 작품이기에 나름 인연이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래서 새로운 게임의 제목을 신검 전설2로 정했습니다.” 회의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카와구치씨의 자세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최근 일본의 RPG 게임 시장은 조금 미묘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기존의 드래곤 워리어 라던가 파이널 프론티어 같은 정통 RPG 와는 다르게 액션이 가미된 새로운 RPG 게임이 기대 순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탑 클래스를 달리고 있는 작품은 트라이포스에서 제작 중인 ‘테일즈 오브 일루션’ 이라는 게임이었다. NEGA의 제작 발표회에서 굉장한 반응을 이끌어낸 이 작품은 최근 NEGA 드라이브용 플렛폼으로의 개발을 포기했다는 발표가 있었다. 개발 취소의 이유로는 추가적인 그래픽 향상을 이루기 위해 NEGA 드라이브 성능이 부족하다고 개재되어 있었으나, 사실 그것은 누가 봐도 핑계에 불과 했다. 작년 크리스마스 시즌 이후로 NEGA 드라이브의 보급률이 확실히 늘어났지만, 그것이 자연스럽게 NEGA CD의 구매로 연결이 되지는 않았다. 겨우 콘솔 시장에서 흑자 반열에 올라섰던 NEGA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NEGA CD로 인해 굉장히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사건을 계기로 민텐도는 자신 만의 고집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되는데, NEGA CD의 실패를 똑똑히 지켜본 민텐도의 카마우치 사장은 카트리지 시스템이야 말로 가정용 콘솔기기에 가장 적합한 매체라고 발표하며 완전히 ‘롬 카트리지 신봉자’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뭐 민텐도 입장에서야 카트리지 생산을 포기할 이유가 없지. 그로인해 받고 있는 로열티가 어마어마하니까. 아무튼 트라이포스는 그렇게 NEGA를 떠나 현재 발매 기종 ‘미정’인 상태로 돌아왔고, 기기 보급률과 판매량 고려해 민텐도 쪽과 이야기를 진행 중이라는 소문이 업계에 돌고 있었다. 사실 이 만큼 신규 게임이 인기가 오른 것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테일즈 오브 일루션은 지금까지 RPG 게임을 즐겨 해온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한번 쯤 꿈꿔왔을 이상향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지... ‘전투가 재미있는 RPG 게임.’ 이것이 현재 RPG 게임의 트렌드였다. 슈퍼 패밀리와 라온에 비해 상대적으로 RPG 게임이 부족한 NEGA 에서는 이번에 ‘테일즈 오브 일루션’을 잃고 나서 새로운 액션 RPG 게임 하나를 발표했는데, 그것이 바로 NEGA 드라이브용 게임 중에서 최고의 명작이라 일컬어지는 ‘스토리 오브 토르’ 였다. 이미 다양한 RPG 군단을 거느리고 있는 민텐도와 복수심에 불타 새로운 액션 RPG를 제작 중인 NEGA. 그러한 RPG의 홍수 속에서 우리 펜타곤 역시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다. ‘왜 나는 여기에 있는가?’ 새로운 IP인 신검전설은 제 2 개발팀 부장인 내가 관여할 사항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의 이런 궁금증은 카와구치씨의 말 한마디에 말끔히 풀려 버렸다. “저는 이 새로운 액션 RPG 게임에 조금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준혁씨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음? 설마 카와구치씨 당신...? 불길한 느낌에 카와구치씨를 향해 입을 열려던 순간. 그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띄우며 먼저 운을 떼었다. “저는 신검 전설의 메인 디렉터를 준혁씨가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 순간 회의실에 모여 있던 제 1 개발팀 인원들의 표정이 동시에 싸늘하게 굳어 버렸다. 하하... 이 사람들 내가 데리고 있는 팀원들에게 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나보군. 사람들의 반응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카와구치 대표에게 물었다. “왜 굳이 저를 선택 하신 거죠? 이 자리에는 최초 기획자인 노무라씨가 있는데, 그를 선택하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 까요?” “사실 이것은 노무라 개인의 부탁이었습니다. 준혁씨 밑에서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네?” 내가 앉은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노무라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부장님. 저 역시 부탁드립니다.” 흐음.. 새로운 신검전설이라. 나 역시 어릴 시절 굉장히 좋아했던 게임인 신검 전설 시리즈는 당시 액션 RPG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최고의 재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특히나 차후에 발매될 3 같은 경우는 슈퍼 패밀리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최고의 명작이라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게임을 내 손으로 직접 만들 수 있는 기회라 이거지...’ 물끄러미 회의실 안에 모인 개발팀 직원들의 표정을 살핀 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대표님. 신검전설의 메인 디렉터 자리는 제가 맡기 어려울 것 같네요. 노무라씨 역시 이미 펜타곤에서 잔뼈가 굵은 기획자이고, 이번 프로젝트는 그가 메인이 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결국 노무라씨를 메인으로 새로운 프로젝트의 개발팀이 열리는 것으로 회의를 끝낸 나는 대표실에서 카와구치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내 눈에 노무라는 메인 디렉터로서 아직 부족해 보여 준혁씨가 맡아 주셨으면 했는데, 혹시 따로 준비하고 계시는 프로젝트라도 있으신가요?” 카와구치씨의 물음에 나는 입가에 커피 잔을 옮기며 대답했다. “최근에 민텐도와 센소니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더군요. 그리고 NEGA 역시 주변기기로 발매되었던 NEGA CD를 기반으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는 소문이 있구요.” “콘솔 기업들의 새로운 움직임이라니, 설마...?” “대표님이라면 대충 눈치 채셨겠지요. 새로운 콘솔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 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어쩌면 벌써 시작된 걸지도 모르죠.” 나는 테이블 위에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어 붙였다. “차세대 콘솔의 스펙과 사용될 매체에 대한 기업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 EP. 31 : 새로운 바람. (1) > 끝 < EP. 31 : 새로운 바람. (2) > & 1988년 말에 출시된 NEGA 드라이브를 시작으로 16비트 게임기 시장이 열린지 어느덧 햇수로만 5년이 흘렀다. 그리고 1992년 가을에 접어든 현재. 가정용 콘솔 산업의 주도권은 완전히 일본으로 넘어온 상태였다. 더 이상 실패의 위험 부담을 안고 새로운 게임기를 만들어 내는 해외 기업은 없었기에 현 세대의 가정용 콘솔은 민텐도의 슈퍼 패밀리와 NEGA의 NEGA 드라이브. 그리고 펜타곤의 라온. 3강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번외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콘솔 기기도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SMK에서 만들어낸 ‘지오 네오’라는 이름의 초고가 콘솔이었다. 지오 네오는 1990년에 출시되어 초반에는 사업장이나 가정용 임대기기를 목적으로 콘솔 사업에 뛰어 들었으나, 용격의 권과 이리의 전설이라는 대전 격투 게임이 기대 이상의 흥행을 거두며 최근에 가정용으로도 어느 정도 수요가 생겨난 모양이었다. 16비트 모토로라 6800 CPU와 8비트 자일로그 CPU까지 두 개의 CPU도 모자라, 비디오 칩셋은 동시에 4096 색에 380개의 스프라이트를 표시할 수 있도록 설계 되었다.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기기에 내장된 사운드 칩은 7개의 디지털 채널까지 포함해 총 15개의 사운드 채널을 지원하는 야하마 제품을 사용하는 이 제품은 간단히 말해 슈퍼 패밀리의 약 4~5배 가량의 성능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락실 기판 자체를 거의 통째로 꽂아 넣는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지오 네오’는 카트리지 하나당 가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쌌다. 최근에 발매 되어 호평을 받은 용격의 권 같은 경우에는 게임 카트리지 가격만 약 3만엔 정도에 달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태생 자체가 가정용으로 개발 된 기기가 아니고 업소에서 사용할 제품이었지만, 카트리지 단가를 고려하지 않았기에 지오 네오는 웬만큼 돈이 많은 부잣집 도련님이 아니고서는 가정에서 찾아보기 힘든 콘솔기기 중에 하나였다. 스트리트 파이어2를 시작으로 활짝 열린 2D 격투게임 시장의 인기를 그대로 이어 받은 SMK는 격투 게임의 명가로 인정받으며 유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가정용 콘솔의 판매량은 너무나 비싼 카트리지 가격으로 인해 SMK에서 만든 게임만 출시되었던 비운의 게임기로 기억 되었다. 이런 시기에 가장 먼저 새로운 콘솔을 제작 중이라 밝힌 제작사는 이번에도 전과 마찬가지로 NEGA였다. NEGA CD를 발매하며 현세대에서 조금 더 승부를 끌어볼 계획이었지만, 기대 이하로 판매량이 폭삭 망한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신기종의 출시가 앞당겨진 사례라고 할까? “이번에도 NEGA가 먼저 움직였군요.” 본사 근처에서 함께 식사를 나누던 중 카와구치 대표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따스한 엽차를 한 모금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새로운 기종 이름이 NEGA 새턴 이랬나요?” “네. 그렇습니다. 현재 발표한 예상 스펙만으로는 엄청난 2D 스프라이트 성능을 자랑하는 괴물 머신이 탄생 할 것 같군요.” 카와구치의 말대로 최초 NEGA 새턴의 발매 컨셉은 최고의 2D 그래픽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NEGA 새턴의 개발이 시작된 시기에는 아직 3D 게임이 굉장히 빈약한 시기였으니까.. 당시 NEGA는 점점 높아져만 가는 아케이드의 대전 격투 게임을 그대로 가정용으로 이식 할 수 있는 최강의 콘솔을 만들고 싶어 했다. 앞서 말한 SMK의 격투 게임이라던가 캡코의 게임은 꽤나 높은 2D 그래픽 성능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편협한 선택이 NEGA 새턴의 발목을 끝까지 잡게 될 줄이야... “그뿐만 아니라 센소니 역시 최근 민텐도와 잦은 교류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민텐도는 묵인 하고 있지만, 센소니 측에서 먼저 차세대 슈퍼 패밀리의 게임 매체는 CD 라고 발표했다더군요.” “기어 스테이션 프로젝트인가...” “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혼잣말입니다.” 센소니의 발표에 민텐도가 묵인 하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부터 흔들거리고 있다는 증거. 슈퍼 패밀리의 사운드 칩을 설계해주며 민텐도와 친분을 쌓은 센소니의 쿠라카기 켄타로가 최근 민텐도 본사에 자주 들락거린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나는 천천히 다가오는 32비트 시대의 전조에 살며시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런 나와는 반대로 카와구치씨는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이렇게 된다면 저희 펜타곤도 나름의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미국의 롭군이나 엘리스에게선 아직 아무 연락이 없나요?” “너무 걱정 하지 마세요. 라온은 태어난지 이제 갓 1년을 넘긴 신출내기지만, 1989년 슈퍼 패밀리의 런칭 때와 비교하면 거의 동급의 속도로 판매량이 오르고 있으니까요. 현재는 라온의 마케팅이나 게임 발매에 더욱 주력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하긴 차세대 전쟁은 아직 시작 단계일 뿐이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겠군요.” 카와구치씨는 이제야 한시름 놓이는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노무라 디렉터가 만들어 낸 신검전설 2는 카와구치씨의 우려와는 달리 이듬 해 8월 굉장히 빼어난 퀄리티로 완성 되었다. 특히나 라온의 데이터 케이블을 이용해 3명이서 함께 게임을 즐기는 협동 플레이 모드가 굉장히 인기를 끌었는데, RPG 게임을 친구와 함께 즐길 수 있다는 그의 발상이 라온의 컨셉과 제대로 맞아 떨어지며 적지 않은 인기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준혁씨 이 게임 진짜 재밌는 것 같아요.” RPG 게임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유키는 주말이면 이미 한번 클리어 한 신검전설 2를 시간이 날 때마다 함께 플레이하자고 조르곤 했다. ‘음... 작년에 드래곤 워리어 5랑 파이널 프론티어 5가 거의 연달아 발매했을 때는 몇 달 동안 조용하더니, 이젠 신검전설이냐...’ 사실 이 시기의 게임은 나에게 있어선 영 감흥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과거에 즐겨본 작품들을 이제와 다시 플레이한다고 해도 초반의 향수를 자극 하는 것 말고는 딱히 즐겁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에 와서는 80년대 게임보다 그 향수가 더욱 옅게만 느껴진 달까? 우리는 가끔 주말마다 데이트를 겸해서 함께 아키바에서 게임 가게를 둘러보거나 도쿄의 맛집을 찾아다니곤 했는데, 유키는 항상 아키바에 올 때마다 뭐가 그리 신기한지 가게를 둘러보며 활짝 미소 지었다. “아!! 우치무라씨가 만든 피규어 가격이 또 올랐어요~!!” “그래? 이번엔 얼만데?” “19만엔이요.” “······.” 이미 저쪽 업계에선 알아주는 인사(人士)니까···. 아무리 해마다 계속되는 불황이라고 메스컴이 떠들어 대어도 고가의 피규어가 판매되는 걸 보면 참 신기 하단 말야...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오는 동안 잠시 피규어 매장을 구경하고 온 미유키는 서둘러 내 쪽으로 달려오더니 나에게 물었다. “우리집 거실에 있는 미유키 기모노 버전은 여기에 올리면 얼마에 팔릴까요?” “그게 한때 입찰가가 80만엔까지 갈 뻔했었지.” “지금도 그 정도 가격이 나올까요?” “뭐, 그때는 좀 미묘한 경쟁이 붙어서 그랬지만, 지금 내놔도 한 30만엔이상은 받지 않을까? 최근에는 미연시물이 많이 등장해서 내가 없는 거리의 인기가 좀 사그라 든 느낌이 들긴 하지만...” “하긴 그러고 보면 내가 없는 거리도 발매 된지 벌써 3년이나 지났네요. 그런 의미에서 혹시 내가 없는 거리의 후속작을 만들 계획은 없나요? 강준혁 디렉터님.” 그녀는 마치 인터뷰를 하듯이 나에게 주먹을 가져다 대며 빙긋 웃어 보였다. “그건 곤란해. 솔직히 전편 이상의 감동을 줄 자신도 없고, 지금은 미연시 게임의 추세가 조금 묘하게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아~!! 저도 알아요. 소문의 동급!! 읍!! 으읍!!!” “야, 주변에 사람들도 있는데...” 잠시 후 자리를 옮겨 예전에 첸드라가 일했던 작업장 쪽으로 걸어온 우리는 밝은 햇살아래 높이 서 있는 빌딩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여기에 빌딩이 들어섰구나. 예전엔 첸드라가 패밀리용 복사팩을 만들던 작업장 골목이었는데...” “어머, 첸드라씨가 그런 일도 했었어요?” “어라? 내가 말 안했었나?” “네. 처음 들어요.” 나는 잠시 길가에 서서 목을 축이며 첸드라를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해 유키에게 이야기 해주었다. “와~ 결국엔 거기서 꼬투리가 잡혀서 지금의 인연이 된 거네요.” “뭐, 첸드라에게도 나에게도 당시엔 서로 윈 윈 할 수 있었지.” “그렇게 드래곤 엠블렘이 만들어져서 저는 준혁씨를 만난거구요.” “어라, 그게 또 그렇게 흘러가나?” 나는 첸드라의 작업장 위로 우뚝 솟은 빌딩을 바라보며 빙긋 웃음 지었다. ‘설마 이 자리에 게임 소프트웨어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소프맵 건물이 세워질 줄이야...’ 일본 게임 유통 산업을 대표하는 소프맵은 1층부터 5층까지 한 건물을 통째로 게임이란 컨텐츠를 판매하는 매장이었다. 보통 1층 같은 경우엔 현 세대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기종을 전문으로 판매하였기에 현재 신규 오픈한 소프맵의 1층은 민텐도의 슈퍼 패밀리가 차지하고 있었다. “와, 매장이 엄청 크네요. 펜타곤 샵 말고도 이런 전문 매장이 들어설 줄이야...” “그러게, 최근에 오픈 했나 본데 한번 들어가 볼까?”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유키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슬쩍 가게 안으로 걸음을 옮겨 내부를 둘러보니 새로 만들어진 매장답게 진열이 굉장히 깔끔해 보였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게임 가게라 치면 비좁은 가게 안에 게임 카트리지가 잔뜩 쌓여 있는 이미지가 떠올랐지만, 이곳은 마치 백화점처럼 종류 별로 모든 카테고리가 나뉘어져 있었다. 또한 자체적으로 인기 순위 집계와 더불어 기대작 순위까지 걸어 놓고 예약을 받고 있는 터라 뭔가 전문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매장 안의 이미지는 간판과 더불어 파란색으로 통일하여 일체감을 주었는데, 아무래도 큰매장이다 보니 가게 안에는 수많은 인파들로 북적거렸다. “1층은 민텐도 뿐이네요. 라온은 어딨지...?” 그러자 옆에 지나가던 사원이 유키의 혼잣말에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손님. 펜타곤에서 출시한 라온 관련 제품은 2층에 준비 되어있습니다. 저쪽에 보이시는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시거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즐거운 쇼핑 되세요.” “준혁씨 여기 마치 게임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백화점 같아요. 에스컬레이터도 있고, 직원 분들도 친절하시고...” 유키는 처음 방문한 소프맵이 굉장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잠시 후. 유키와 함께 2층에 도착하자 라온 전용 플로어라는 느낌이 물씬 들 정도로 곳곳에 체험용 라온 기기들이 많이 보였다. 그중엔 현재 최고의 인기를 달리고 있는 신검전설 2를 즐기고 있는 유저들이 많이 보였다. 아무래도 함께 할 수 있는 RPG 게임이다 보니 라온 유저들 사이에서 신검전설 2는 스파2와 같이 라온 유저라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기본 소양 아이템이 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재미는 있지만 한편으론 씁쓸하네...’ 유키와 함께 2층 라온 플로어를 둘러보던 나는 쓰게 입맛을 다시며 게임들을 둘러보았다. ‘라온의 출시로 분명히 내가 알던 과거는 바뀌었을 텐데...’ 응당 그에 따른 게임 시장의 변화가 미묘하다. 모든 게임은 내가 알던 시기와 거의 비슷하게 출시가 되었고, 게임의 내용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실 이번엔 노무라에게 신검 전설 2의 제작을 맡긴 것도 라온이란 플렛폼을 이용해 기존에 내가 알던 게임에서 조금 달라지는 점이 있을까 기대했지만, 결과는 멀티 시스템이 조금 더 편리해졌을 뿐 딱히 달라진 점은 없었다. 보통 하나의 훌륭한 게임이 만들어지면 그에 대한 시너지 효과로 인해 새로운 게임이 파생되기 마련인데, 아직까지 내 가슴을 뛰게 해줄 색다른 게임은 단 한 번도 출시되지 않았다. ‘내 자극이 부족했던 걸까? 그게 아니면 현 시대의 게임 컨텐츠를 확 끌어 올려줄 인재가 부족한 걸까?’ 고심 중에 바닥만 살피며 걸음을 옮기던 중 내 옆에서 팔짱을 끼고 걷고 있던 유키의 발걸음이 한 대형 TV 앞에 멈춰 섰다. “응? 갑자기 왜 그래?” “준혁씨... 저 게임은 무슨 게임이에요?” 유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TV 화면에는 왠지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다크 판타지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번에 내 시선을 사로 잡아버렸다. ‘어라? 폭스 소프트의 악마성? 아닌데... 뭐지?’ -깨어진 관 틈으로 붉은 달빛이 스며들 때. 백성을 제물로 바친 타락한 왕이 깨어날지니...- “······.” 뭐지 오프닝부터 심장을 콱 움켜쥐는 듯 한 이 느낌은... < EP. 31 : 새로운 바람. (2) > 끝 < EP. 31 : 새로운 바람. (3) > -깨어진 관 틈으로 붉은 달빛이 스며들 때. 백성을 제물로 바친 타락한 왕이 깨어날지니...- “······.” 뭐지? 오프닝부터 심장을 콱 움켜쥐는 듯 한 이 느낌은... 거대한 나무에서 뻗어 나온 가지마다 목을 맨 시체가 싸늘한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고, 잠시 후.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랜턴에 불을 지피던 노파는 화면 건너편에 있는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곳은 로드릭. 불꽃의 의지를 이어온 장작의 왕들의 고향이기도 하지...- 이어지는 문장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유키를 잡고 있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순례자들은 북쪽으로 향하며, 예언의 의미를 찾으려 하는 거야...- -하지만 불꽃은 사그러들고, 더 이상 옥좌 위에 왕이 자리할 수 없으니...- -계승의 불이 꺼질 때. 어둠 속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 옥좌를 잃어버린 왕들이 관 속에서 다시 몸을 일으킬 테지...- -깊은 곳의 성자... 모드 리치.- -펄론의 불사대. 어둠의 감시자들.- -그리고 심연의 제물로 자신의 백성을 모두 바친 고독한 왕...- -그래도 말이야. 결국 왕들은 자신의 옥좌를 찾을 수 없을 거야...- -이제는 그저 잿더미만이 남았으니까.- -너 역시 이름도 없이 장작조차 되지 못한 저주 받은 불사의 몸.- -하지만 너와 같은 잿더미는 언제나 작은 불씨를 갈구하지...- -다시 타오르게 될 그 날을 기다리며...- 오프닝만으로도 처절한 느낌을 전해주는 노파의 이야기에 나와 유키는 그 자리에 선채로 가만히 영상을 지켜보았다. ‘뭔가 색다른 느낌이다. 이제까지의 게임과는 확연히 달라.’ 이윽고 검은색 배경에 붉은 글씨로 타이틀 명이 떠오르며 짤막한 데모영상은 끝이 났다. -블러디 소울.- 블러디 소울이라, 처음 들어보는 제목인데? 이 시대에 이런 게임이 존재 했었나? 이정도 퀄리티의 오프닝이라면 내가 기억 속에 분명 남아 있을 법도 할 텐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새로운 게임이다.’ 물론 나 역시 어린 시절 슈퍼 패밀리로 나온 모든 게임을 해본 것은 아니었던 터라, 확실히 장담은 못하겠지만 말이지... 블러디 소울은 일본의 팬텀 소프트에서 만든 다크 판타지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액션 게임이었다. 얼핏 ‘베르세르크’라 불리 우는 만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암울한 분위기로 데모영상을 바라보는 내내 굉장히 마음이 설레었다. 아마 83년으로 회귀한 이 후. 처음으로 다른 회사에서 만든 게임을 보고 흥분한 작품이랄까? 그날 이 후. 나는 프론 소프트에서 ‘블러디 소울’이 발매되기는 손꼽아 기다렸다. 여차하면 펜타곤에서 기술 지원을 나왔다는 빌미로 팬텀 소프트를 직접 찾아가 볼 수도 있었지만, 딱히 그렇게 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번쯤은 개발자 입장에서 한 발짝 떨어져 순수한 게이머로서 게임을 즐겨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블러디 소울을 만든 팬텀 소프트는 초반에는 게임 업계에서 그리 주목 받지 못했지만, 발매일이 다가올수록 유저들의 입소문을 타고 고속 행진으로 기대 순위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3년의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던 초겨울. 어둠이 내리 깔린 오후 7시에 블러디 소울의 타이틀이 발매되었다. 퇴근 길.. 신주쿠의 대형 쇼핑센터에 들르자, 게임 코너에서 수많은 유저들이 똑같은 게임 카트리지를 들고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가끔은 이렇게 게이머 기분을 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유키 역시 블러디 소울의 암울한 분위기에 한눈에 반한 터라, 자기 것도 함께 사올 것을 부탁했기에 가판대에 들르니 마침 딱 두 개의 카트리지가 남아 있었다. ‘반응이 나쁘지 않은 모양인데? 그래도 두 개가 남아 있어 다행이다.’ 라온 공유기를 이용한다면 손쉽게 다운로드가 가능하지만, 나 역시 올드 게이머 성향이 커서 그런지 아직까진 카트리지로 소장하는 편이 마음에 들었다. 신규 IP 게임이라 그런지 그동안 명성을 쌓아온 시리즈물과 비교해 폭발적인 판매량을 보이진 않았지만, 특유의 분위기 때문일까? 발매 첫날의 분위기가 그렇게 나쁘지 않은데? 에스컬레이터는 타고 내려오던 중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맞은편에서 하야시와 카오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어라? 부장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블러디 소울 사고 돌아가는 길이야.” “억!! 그거 위에 좀 남았나요?” “아니. 내가 마지막 남은 거 사가는 길인데?” “으악!! 젠장. 역시 저녁 먹고 오는 게 아니었어!!” “그러게요~!!” 괴로워하는 하야시와 카오리의 모습을 마주 바라보며 에스컬레이터를 스쳐 내려온 나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는 여동생 같다고 싫다더니, 같이 저녁까지 먹고 왔다 이거지? 내일 출근하면 놀릴 거리 하나 생겼네.’ 피식 웃음을 흘리며 좌우로 고개를 내저은 나는 쇼핑몰을 빠져나와 차를 세워둔 주자창으로 향했다. & 집에 도착해 벨을 누르자, 저녁을 준비 중이던 유키가 웃으며 나를 맞아주었다. 유키와 결혼 후 좋은 점을 꼽으라면 바로 이 순간이 아닐까 싶다. 더 이상 불 꺼진 어두운 거실에 형광등을 켜지 않아도 되고, 싸늘했던 집안 공기 대신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된장찌개 향기가 거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니양~” 유키와 함께 살기 시작한 날부터 키우기 시작한 고양이 ‘하루’가 혹시나 자기를 위한 간식거리가 없는지 내가 들고 있던 쇼핑백을 툭툭 쳐보더니, 생각보다 가벼운 무게에 실망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준혁씨~!! 사왔어요?” “물론~” 앞치마 차림으로 국자를 손에 든 채 반대편 손을 내미는 유키의 모습에 슬쩍 쇼핑백을 들어보이자, 그녀는 신이 난 표정으로 거실을 깡총깡총 뛰어 다녔다. 보통은 쇼트케이크라던가, 달달한 디저트에 보이는 여자들의 반응을 유키는 게임이라는 조금 색다른 아이템에서 보여주는 게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1인용 소파에 웅크리고 앉은 하루 녀석은 뒷다리로 머리를 긁적이며 혓바닥을 날름 거리며 유키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평소보다 조금 서둘러 저녁 식사를 마친 우리는 서로 마주 앉을 수 있는 1인용 소파에 기대어 서로의 라온을 꺼내들었다. 평소처럼 내 무릎 위에 다리를 올린 유키는 게임 카트리지를 라온에 꽂아 넣으며 말했다. “새로운 게임을 카트리지에 꽂으면 왠지 살짝 설레이지 않아요?” 이윽고 스산한 바람소리와 함께 팬텀 소프트의 로고가 떠오른 뒤 음산한 BGM이 깔리자, 그녀는 긴장되는지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내 복부를 만졌다. “준혁씨 요새 살 좀 찐 거 같은데요?” “그런가? 하긴 요새는 거의 사무실에만 있다 보니, 몸이 좀 늘어지는 것 같긴 하네.” “니양~” “아이쿠, 우리 하루쨩 왔쪄요~” 어느새 유키의 허벅지에 앉아 완벽한 식빵 자세를 취하는 하루는 유키의 품이 그렇게나 좋나 보다. 유키 역시 라온을 플레이 할 때면 손목 거치대 겸 하루를 자주 이용(?)했기에 둘은 완벽한 공생 관계라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간단한 캐릭터 설정을 마치고 게임에 돌입하자, 제법 묵직한 느낌을 전해주는 기사가 화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블러디 소울의 전체적인 게임 방식은 좌우로 움직이는 횡스크롤 방식이었는데, 독특한 점이 있다면 캐릭터의 장비가 압도적으로 세밀하게 표현 되어있다는 점이었다. 게임 전반에 흐르는 무거운 세계관에 맞게 캐릭터의 움직임도 실제 갑옷을 걸친 느낌을 제대로 표현해주고 있었다. 나는 몇 번 허공에 검을 뿌리며 조작 타이밍을 읽힌 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보았다. 드래곤 워리어나 파이널 프론티어처럼 세계를 구하라는 장황한 설명은 없었다. 마치 사막에 홀몸으로 내던져진 부랑자처럼 명확한 목적도 없이 페허가 된 절벽을 거닐자, 눈앞에 방패 하나와 횃불을 들고 서있는 적이 나타났다. ‘흠.. 잡 몬스터인가?’ 나는 대충 녀석과 거리를 재며 가벼운 마음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태앵~!! 별 볼일 없어 보이던 몬스터의 나무 방패가 나의 검을 튕겨내며 곧장 횃불을 덮쳐왔다. 뭐야!? 깜짝 놀란 나는 서둘러 구르기 버튼으로 몬스터와 거리를 벌렸으나 몬스터는 내가 구르는 타이밍까지 읽고 거리를 좁히며 곧장 치고 들어왔다. 하는 수 없이 방패를 들어 녀석의 횃불 공격을 막아낸 뒤 검을 내지르려는 찰나. 방금 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또 다른 몬스터가 내 등 뒤를 덮쳐왔다. “헉..!!” 겨우 초반에 등장한 두 마리의 몬스터를 잡기 위해 나는 정신없이 방향키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블러디 소울에는 스테미너 게이지가 있어 한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게이지가 깎여 나가는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게 플레이어에게 은근한 스트레스를 주고 있었다. 너무 막 사용했다가는 적의 공격을 막아낼 힘이 부족해 방패가 튕겨져 나가거나 최후의 일격을 날릴 수가 없었고, 한번 스테미너 게이지를 모두 사용해 버리면 다시 차오를 때까지 구르기나 검을 휘두를 수도 없어 굉장히 막막한 느낌을 주었다. 적과 거리를 벌리는 도중 슬쩍 유키 쪽을 바라보니 그녀 역시 극악의 게임 난이도에 고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젠장. 뭐가 이렇게 어려워...’ 악마성이나 마계촌이 좌우에서 끈임 없이 나타나는 몬스터들로 플레이어에게 스트레스를 준다면 블러디 소울 같은 경우는 잡 몬스터 하나가 보통 게임의 중간 보스 급 난이도로 설정되어 있었다. “YOU DIED.” 1 스테이지의 중반 정도에 다다르는 동안 유키가 들고 있는 라온의 스피커에선 플레이어의 죽음을 의미하는 으스스한 음성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아악!! 또 죽었어... 히잉..” “냐앙~” 그녀의 무릎 위에서 눈을 꿈뻑거리며 졸고 있던 하루가 한심하다는 듯이 길게 하품을 끄적거리곤 다른 소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날 밤. 첫 번째 스테이지를 클리어 할 때까지 유키는 총 16번의 죽음을 맛보았고, 나 역시 첫 스테이지의 보스에서 5번의 죽음을 맛보았다. 미치고 팔짝 뛰겠는 것은 이 게임의 경험치 획득 방법이었는데, 몬스터를 죽이고 얻는 경험치는 레벨 업 포인트에 도달하기 전까지 사용할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만약 레벨 업 포인트에 도착하기 전에 캐릭터가 죽어버리면 그동안 자신이 모아두었던 경험치를 모조리 바닥에 떨구게 되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선 되살아난 캐릭터로 자신이 사망한 지점까지 무사히 도달해야했다. 하지만 이게 또 경험치를 회수하러 가는 길이 만만치가 않아, 도중에 캐릭터가 사망하기라도 하면 전에 떨군 경험치가 전부 날아가 버리니, 그 압박감이 어마어마할 수밖에... &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하고 나니 게임 좀 한다하는 개발실 직원들의 입에선 온통 블러디 소울에 대한 이야기가 번져 나가고 있었다. 타사의 게임에 대해 칭찬이 인색한 하야시 마저 블러디 소울에 대해선 극찬을 쏟아낼 정도였으니, 잡지에 실린 게임에 대한 평은 이루 말할 것도 없이 훌륭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는 그 동안 조용히 잠들어 있던 나의 개발 의욕을 고조 시키는데, 큰 역할을 해주었다. ‘드래곤 엠블렘 2 두 번째 에피소드인 용자의 무덤의 발매 시기도 거의 잡혔겠다. 슬슬 차기작에 대한 제작 발표회를 준비해야할 시기가 다가오는군.’ 나는 개발실 벽면에 붙어 있는 ‘내가 없는 거리’의 포스터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자연스레 일전에 아키하바라에서 유키가 나에게 해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가 없는 거리의 후속작을 만들 계획은 없나요?’ “흐음, 후속작이라...” 물론 내가 없는 거리 2라는 촌스러운 이름의 후속작을 만들 생각은 없다. 전작의 타이틀을 빌려온다는 것은 어느 정도 흥행은 동반시킬 수 있지만, 그 이상의 감동을 전해줄 수는 없을 테니까. 전작에서 일본의 게이머의 눈에서 홍수처럼 눈물을 뽑아냈었다면, 이번엔 피눈물을 쏟아내게 해야만 할 텐데, 그러려면 과연 무엇이 좋을까? 잠시 동안 그에 대해서 생각하던 내 입가에 묘한 미소가 그려졌다. < EP. 31 : 새로운 바람. (3) > 끝 < EP. 32 : 신의 선물. (1) > &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펜타곤 소프트의 사운드를 담당하는 우에노 상을 찾았다. 파이널 프론티어 시리즈의 다섯 번째 이야기까지 거치며 이미 게임 업계 사운드 부분에선 거장이라 평가받고 있는 그는 게임 안에 한편의 오케스트라와도 같은 서정적인 음악을 담아내기로 유명한 작곡가 중에 하나였다. “어라, 준혁씨 스튜디오에는 웬일이세요?” 딱히 게임을 개발할 때가 아니면 자주 찾는 곳은 아니었기에 우에노씨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물었다. “새로운 게임을 하나 기획중이긴 한데, 그에 관해 우에노씨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저에게 게임에 대해서 말입니까?” 보통 게임이 만들어질 때 사운드 부분은 게임이 모두 완성 되고 난 후. 기획자와 작곡가가 스토리의 분위기에 따라 함께 상의하여 제작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렇게 게임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작곡가인 그를 찾아오는 경우는 매우 드문... 아니 전례에 없던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 거리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다시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우에노씨는 혹시 뉴에이지 장르의 음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뉴에이지라면 쿠라모토 유우키씨와 같은 음악 장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맞아요.” 우에노씨가 말한 쿠라모토 유우키는 뉴에이지 장르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뮤지션 중에 한사람이었다. Like Louise라던가 Romance를 작곡한 그는 서정적인 음악으로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사랑받는 뮤지션 중에 한 사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비브리 스튜디오의 히사이시 조의 음악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 우에노씨의 음악적 취향은 쿠라모토 유우키 쪽인 모양이다. 사실 기획 중인 게임에서 가장 이상적인 뮤지션은 한국의 ‘이루’씨가 최고라 생각했지만... 1993년인 현재. 79년생인 그는 너무나 어린 나이였다. “그런데 갑자기 뉴에이지 장르는 왜 물으시는 거죠?” “사실 이번에 기획 중인 게임의 주인공의 직업이 피아니스트거든요.” “피아니스트 라구요?” 피아니스트라는 주인공의 직업에 작곡가인 우에노씨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 과거 ‘내가 없는 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이별을 준비하는 이야기였다면, 이번에 기획중인 게임은 그 반대편에 서있는 스토리를 담고 있었다.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한 내용은 펜타곤 내부에서 외부에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표인 카와구치씨와 작곡가인 우에노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게 진행 되었다. 그렇게 펜타곤을 대표하는 초 인기 컨텐츠이자, 사회적인 이슈란 이슈는 모두 거머쥐었던 ‘내가 없는 거리’의 후속작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개발이 진행 되었다. 나는 어깨에 무겁게 내려앉는 신작에 대한 중압감을 떨치기 위해 따로 집필실을 두고 시나리오 작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나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펜타곤 소프트의 모든 사운드 부분을 맡고 있는 우에노씨였다. 주인공의 직업이 뮤지션인 만큼 그의 역할이 굉장히 크게 작용 했기에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우에노씨와 함께 보내곤 하였다. 새로운 신작이 제작 되는 공백 기간 동안 팬텀 소프트가 만들어낸 블러디 소울은 유저들과 잡지사의 호평 속에 엄청난 속도로 팔려나가고 있었다. 발매 초기에 카마우치 사장이 비웃었던 것과는 반대로 더 이상 라온은 펜타곤 소프트 게임만 출시되는 반쪽짜리 게임기가 아니었다. 라온 플렛폼으로 출시를 원하는 서드 파티가 있다면 언제든 회사에 방문하여 개발킷은 물론 어떠한 기술 지원도 아끼지 않았기에 매월 어마어마한 물량은 아니어도 굉장히 내용이 탄탄한 소프트가 1~2개씩은 꼭 발매가 되었다. 그 중에서 블러디 소울과 더불어 1993년 라온으로 출시된 게임 중에서 유저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작품은 다름 아닌 삼국지 시리즈의 제작사 고에이에서 만든 ‘대해적시대2' 였다. 어린 시절 PC 게임을 즐겨본 유저라면 누구나 기억할만한 초 명작 타이틀인 이 작품은 그저 바다를 항해하며 교역을 하거나 적과 싸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선사해준 어마어마한 타이틀이었다. 실제 역사를 비롯해 경도와 위도를 바탕으로 장대한 스토리를 그려낸 이 게임으로 인해 당시 게임을 플레이하던 학생들은 모두 ‘사회과부도’ 라는 교과서를 꺼내 들었고, 그것을 게임 플레이에 어마어마한 도움이 된다는 소문이 돌며, 잠시 동안 서점의 베스트셀러 순위에 중학교 교재인 ‘사회과부도’가 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파장은 일본에서도 비슷한 수준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라온 전용으로 발매된 대해적시대2는 친구와 보물 지도를 교환할 수 있는 데이터 교류 기능을 추가해 다른 플렛폼과 차별성을 두었고, 그 아이디어는 휴대기기의 이점으로 작용 되어 판매에 큰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나는 초조함을 떨치고 편하게 작업에 열중 할 수 있었다. & “그러니까... 부장님의 말을 종합해보면 이 게임은 내가 없는 거리의 뒤를 잇는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입니까?” “음... 아니.” “그러면...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의 탈을 쓴 피아노 건반 게임입니까?” “······.” 아무리 그래도 피아노 건반 게임이라니... 리듬 게임이란 장르가 만들어지기 전이라 그럴까? 하야시는 내 설명을 모두 듣고도 게임에 대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지 기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모리타가 시놉시스 자료를 내려놓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감수성이 남다른 모리타의 눈가에는 어느새 촉촉하게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내가 없는 거리에 대한 연결점은 전혀 없지만, 이번에도 역시 스토리가 독특하네요.” 하야시는 모리타의 감상에 혀를 차며 자신의 생각을 보태었다. “그리고 난 또 다시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하네, 이제 겨우 드래곤 엠블렘의 두 번째 에피소드 작업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테이블에 고개를 파묻는 하야시를 대신해 모리타가 나에게 물었다. “어쩐지 부장님이랑 사운드팀의 우에노씨가 작년부터 굉장히 자주 만나시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까? 솔직히 섭섭합니다. 부장님. 그래도 함께 내가 없는 거리를 만들었던 팀인데, 이렇게 저희들한테까지 비밀로 하시다니...” “미안하다. 나도 제대로 된 시나리오를 세우기 전까진 함부로 공개하기가 굉장히 부담스러웠거든...” ‘신의 선물’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새로운 프로젝트는 천재 피아니스트라 불렸던 주인공이 교통사고를 당하며 시작하게 된다. 어지러운 사이렌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소리. 그 속에서 주인공의 손을 감싸 쥔 여주인공 얼굴은 구급차의 헤드라이트 빛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다만 주인공을 살리기 위해 도와달라고 소리치는 그녀의 메시지만이 화면에 가득 뿌려질 뿐. “제발.. 이 사람 좀 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 신이시여.. 제발... 제발...”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애달픈 목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잃은 주인공에게 기이한 일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바로 사고가 나기 1년 전으로 시간이 되돌아 간 것이다. 여기서 ‘신의 선물’의 이야기는 바로 이 1년이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엔딩이 달라지는 멀티 엔딩 시나리오를 사용하고 있었다. 음? 생각 보다 시나리오가 너무 간단하다고? 그럼 이런 이야기는 어떨까? 1년 전으로 되돌아간 주인공의 앞에 4명의 히로인이 등장하는데, 히로인과 사귀기 전으로 돌아온 주인공은 자신이 죽기 전 곁에서 자신의 손을 잡아 주었던 그녀가 누군지 모르는 거지. 어때? 이번엔 좀 감이 오나? 하지만, 신의 선물의 이야기는 단지 그녀를 찾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리고 이 스토리의 다음 이야기는 어느 날 저녁 유키와 함께 산책 하던 길에 우연히 그녀가 내뱉은 말에서 시작된다. & “음... 합격입니다~!!” 신의 선물에 대한 시놉시스를 전부 읽어본 유키는 흡족한 표정으로 나에게 시나리오를 돌려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긴 한숨과 함께 식탁에 늘어지듯 고개를 파묻었다. “아~ 억울하다.” “뭐가?” “어느 사람보다 먼저 시나리오를 받아본 건 좋은데, 이 스토리를 알고 게임을 즐기는 거랑, 모르고 즐기는 거랑 재미가 천지 차이일거 아녜요.” “하긴 그것도 그렇네. 그럼 다음 이야기는 그냥 보여주지 말까?” “으윽.. 왠지 그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네요.” “······.” 그럼 뭐 나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나는 탁자 위에 올려둔 시놉시스를 정리해 다시 가방에 넣어 두었다. “준혁씨. 차라리 이참에 방송국에서 드라마 스토리 작가를 해보는 건 어때요? 내가 없는 거리도 그렇고 이번에 신의 선물도 스토리가 상당히 괜찮은데?” “나는 게임 하나 제대로 만들기도 벅찬데? 신의 선물의 드라마 화는 게임이 성공하면 방송국 작가님에게 맡기는 게 낫겠지.” “그 방송국 작가가 저 거든요?” “혹시 후지 TV에서 컨텍이 오면 네 얼굴을 봐서 긍정적으로 생각해볼게~” “어이구~ 감사합니다. 신랑님~” “그런데, 정말 시나리오 괜찮아?” “그대로 게임을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단지...” “단지?” 그러자 유키는 혀를 쏙 내밀며 대답했다. “뒷내용이 궁금하다면 같이 산책 나가서 녹차 맛 아이스크림을 사준다면 알려드리죠.” “뭐...? 이 밤에?” “겨울도 지나 날도 풀렸고, 밤바람에 흩날리는 벚꽃 잎은 언제나 봐도 질리지가 않으니까요. 내일은 비가 온다니까 어쩌면 오늘이 벚꽃을 보는 마지막일 수도 있어요.” ‘신의 선물’의 기본 시나리오를 완성한 때는 1994년의 어느 봄날이었다. 유키와 함께 가벼운 스웨터를 걸치고 맨션을 나서자, 자정의 차가운 공기가 굉장히 기분 좋게 느껴졌다. “아~ 기분 좋다.” “바람이 많이 부는 걸보니, 정말 내일 비가 오긴 오려나보네.” 그래서 일까 맨션 앞에 하나 가득 피어난 벚꽃이 마치 춤을 추듯 바람결에 흩날리고 있었다. 유키는 그 풍경이 마음에 꼭 드는지 보조개를 깊게 패이며 나를 향해 방긋 웃어보였다. “거봐요. 나오길 잘했죠?” “그래~ 그러니까 어서 시나리오에 대해 다음 얘기 좀 해봐.” “에이~ 아직 아이스크림도 못 얻어먹었는데~ 맨입으로요?” “일단 사러 나왔잖아. 그게 중요하지.” “아뇨. 내 입에 아이스크림 들어가기 전까진 죽어도 말 못합니다.” 그리곤 보란 듯이 내 쪽으로 길게 목을 빼내는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준혁씨도 바빠서 이런 산책도 못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잠깐 일 얘기는 접어두는 게 어때요? 편의점 갈 때까지만...”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유키를 바라보자, 그녀는 살며시 팔짱을 끼며 내 어깨에 기대었다. “그럼 갈까요?” “그래. 가자...” 기분 좋은 바람결에 흩날리는 꽃잎을 맞으며 우리는 편의점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걷던 중. 나는 혹시나 이런 사태가 또다시 벌어질지 몰라 은근슬쩍 그녀에게 물었다. “가서 네가 좋아하는 녹차 아이스크림 한 30개 정도 사올까? 냉장고에 넣어 두고...” “어우~ 진짜!!!” 퍽!! 그래... 내가 결국엔 등짝 스매싱 한대 맞을 줄 알았지... < EP. 32 : 신의 선물. (1) > 끝 < EP. 32 : 신의 선물. (2) > & 편의점에서 녹차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돌아오는 길. 아이스크림 한 스푼을 입에 넣고는 마치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마냥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풋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 맛있다.” “자정에 바람도 부는데, 아이스크림이라. 그러다 감기 걸리는 거 아냐?” “그러게요. 하지만 요새 자꾸 달콤하고 쌉싸름한 게 당기는데 어떡해요.” 투정 부리듯 입을 삐죽 내미는 그녀를 향해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그녀 앞에 보이며 중얼 거렸다. “그래도 농담 삼아 한 말인데, 진짜 10개나 살줄은 몰랐네.” 편의점 냉장고에 들어 있던 마지막 하나까지 알뜰히 챙겨왔으니, 혹시 더 있었다면 진짜 30개 채웠을지도... “이거 사재기 아냐?” “음... 너무 욕심 부렸나?”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유키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우리는 천천히 맨션으로 걸음을 옮겼다. 새하얀 가로등 아래로 흩날리던 벚꽃 잎이 그녀의 머릿결 달라붙었지만, 그 것조차 하나의 악세사리처럼 유키와 곧 잘 어울렸다. “맛있어?” “응응.” 스푼을 입에 문 채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유키의 표정을 보니 한입만 달란 소리도 못하겠다. “그런데 준혁씨. 궁금한 게 있는데, 이번 작품의 제목은 대체 어떤 의미에요?” “신의 선물?” 나의 대답에 유키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을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잠시 대답을 망설이다가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스토리를 구상하다가 여주인공의 간절한 기도가 신의 귀에 닿았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간절한 기도라, 로맨틱하네요.” “신의 선물의 스토리. 언 듯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한 이야기 같지 않아?” “음... 사실 조금 그래요. 분명 새로운 느낌인데, 내용 전개가 그렇게 낯설지가 않다고 할까? 혹시 모티브를 얻은 작품이 있어요?” “물론 있지. 그것도 굉장히 유명한 작품이라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걸?” “정말요? 그 작품이 뭔데요?” 나는 유키를 애간장을 태우는 재미에 말을 빙빙 돌리다가 결국 등짝 스매싱을 한 대를 더 맞고 나서야 실토했다. 작은 고추가 맵다더니, 저 조그만 손바닥이 얼마나 맵게 느껴지는지. 그와중에 그래도 저 손으로 뺨은 안 맞아 봐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인어 공주야.” “인어공주요?” “그래.” 나는 아직도 따끔거리는 등 한가운데를 긁적이며 그녀 향해 피식 웃어보였다. “사랑하는 왕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지만, 왕자는 인어공주를 몰라주잖아. 그리고 결국엔 이웃나라의 공주와 결혼하지..” “아... 그럼 이번 이야기에서 선택을 잘못하면...?” “음. 전혀 엉뚱한 히로인과 이어질 수도 있겠지?” “아, 진짜 이번에도 너무하네. 음~ 그래도 제가 생각한 시나리오 보다는 임팩트가 덜한데요?” 어느새 아이스크림 한 컵을 싹 비운 그녀는 스쳐가는 길에 놓여진 쓰레기통에게 종이컵을 밀어 넣었다. 하지만 컵을 버리고도 그녀의 오른손엔 여전히 갈색 플라스틱 스푼이 들려있었다. “어라? 스푼은 왜 안 버려?” “하나만 더 먹으려구요.” 삭~!! 먹이를 노리는 맹수 마냥 비닐봉지로 뻗어오는 그녀의 손길에 나는 재빨리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는 봉지를 뒤로 빼내었다. 간발의 차로 허공을 가른 그녀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라?” “이제 슬슬 시나리오에 대해 풀어 보시지? 약속대로 아이스크림 먹었잖아.” “치~ 알았어요.” 그녀는 못내 아쉬운지 플라스틱 스푼을 입에 문 채로 꽤나 그럴듯하면서도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풀어 놓았다. 그리고 잠시 후. 유키로부터 새로운 시나리오에 대해 전해 들은 나는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춘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때요? 나쁘지 않죠?” 이래서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던가? 유키의 아이디어로 인해 자칫 느슨해질 뻔했던 이야기 구조와 캐릭터 설정이 훨씬 디테일 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제법인데?” “그럼요~ 제가 이래봬도 방송 작가 7년차거든요?” 나를 향해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려 보이던 유키는 멍하니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정리 중이던 내 곁에 살금살금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가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는 봉투에 손을 내민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봉투를 뒤로 빼내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오늘은 그만. 진짜 감기 걸리겠다.” “치사하다. 모든 걸 말하면 아이스크림 주기로 했잖아요.” “영화에 나오는 악역들은 모든 정보를 실토하게 만든 뒤 결국 방아쇠를 당기지.” “윽...” “너의 건강을 생각해 주는 나의 고마운 배려라고 생각하렴.” “하긴, 이제 좀 춥긴 하다.” 결국 내게서 아이스크림을 빼앗는 걸 포기했는지, 그녀는 내 팔을 꼭 끌어안은 채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 기본 스토리와 캐릭터 설정이 끝나자 ‘신의 선물’ 프로젝트는 급속도로 개발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신의 선물’은 기존의 내가 없는 거리처럼 누군가와 인연을 맺기 위해 스케줄을 짜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연애를 하는 시뮬레이션 요소 보다는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마치 소설을 읽어 내려가는 듯한 비쥬얼 노블 형식을 띄고 있었다. 덕분에 간단한 분기 선택만 지정해 준다면 책처럼 편안하게 이야기를 즐길 수 있었다. 이런 느긋한 시스템을 선택한 이유는 라온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하기에 전철 이동 간에 편안하게 즐길 만한 게임을 제작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게임은 챕터를 시작하기 전에 그 시나리오의 메인이 되는 곡을 연주하며 시작했는데, 독특한 점이 있다면 피아노 연주의 클리어 등급에 따라, 교통사고 직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챕터에서 발생하는 시나리오의 단서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하야시는 작곡가 우에노씨와 함께 게임 업계 최초로 리듬 게임이라는 장르에 도전하게 되었다. 물론 기본적인 게임의 골격은 내가 알고 있던 리듬 게임의 형식을 빌려왔다. 게임 화면을 반으로 나누어 위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도트 블럭이 일정한 타이밍 라인 안에 들어왔을 때 버튼을 입력하면 마치 피아노를 연주하듯 음을 조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연속으로 음을 놓치지 않으면 콤보가 발생 되었는데, 콤보를 연결 하는 스코어에 따라 화면의 오른쪽에 교통사고가 일어나기 전 기억의 단편들이 한편의 뮤직 비디오처럼 재생되는 형식이었다. 최초의 리듬 게임인 ‘신의 선물’은 바로 이 영상과 클리어 후의 챕터 이벤트를 통해 주인공의 기억을 유추하여 진정한 스토리에 다가가는 진행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 음악을 통해 게임의 스토리를 즐길 수 있다는 설정에 작곡가 우에노씨는 모든 열정을 쏟아내 작업에 열중했다. 게임의 챕터는 총 6개. 하지만 엔딩 후 2회 차에 돌입하면 새로운 시나리오가 열리며 그에 맞게 새로운 곡을 연주 할 수 있게 된다. 덕분에 우에노씨는 안그래도 빡빡한 제작 기간 속에서 총 12개의 메인 곡과 더불어 기본 BGM까지 작곡해야만 했다. BGM 같은 경우는 외부에 맡겨도 된다고 했으나, 전체적인 게임의 이미지를 해치고 싶지 않다는 그의 고집에 따라 사운드에 대해선 모두 그에게 맡기기로 했다. 사운드와 함께 시스템 적인 부분을 해결하고 나자, 이제 남은 것은 이 게임의 중요요소라 할 수 있는 캐릭터 일러스트가 뿐이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언 듯 보기에 음악을 이용한 서정적인 스토리 게임이라 여긴 ‘신의 선물’이 얼마나 지독한 캐릭터 설정의 게임인지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어쩌면 유키는 나보다 더 한 스토리 작가일 수도 있겠는데? 내가 없는 거리에서도 결국엔 나나세의 판매량이 미유키를 앞질렀으니까... 아니 그것보단 유키가 결혼한 게 판매량에 영향을 끼친 건가?’ 사회적 현상까지 번졌던 ‘내가 없는 거리’에서 유키가 성우를 맡았던 것은 사이킥 포스의 발표회 행사에서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알게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 일어난 프로포즈 사건으로 인해 게이머들은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반사 효과는 내가 없는 거리의 판매량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다. 갑자기 중고 시장에 내가 없는 거리의 미유키 시나리오의 카트리지가 넘쳐나기 시작했고, 덕분에 새 상품에서도 판매량이 급격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아직 이 시대의 게이머들은 착한 편이라. 내가 알던 미래에서 일어난 사건 중에 여주인공의 ‘비처녀’ 논란에 만화책을 불태우거나, 발기발기 찢어 출판사에 보내는 비상식적인 일은 다행이도 없었다. “일단은 부장님께서 말씀하신 설정대로 4명의 히로인을 그려봤습니다.” 나는 모리타에게서 건네받은 히로인의 설정 자료를 살펴보았다. 첫 번째로 금발의 혼혈 캐릭터인 미모의 바이올리니스트. 유키노조 카오리. 활동적이고 생기발랄한 성격인 그녀는 주인공과 어릴 때부터 친구로 주인공의 천재성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절대 음감의 소유자이다. 두 번째로는 주인공의 피아노 레슨을 담당하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사츠키 노리코. 차분한 성격의 그녀는 어른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성숙미로 인해 특정 연령대에선 절대적인 인기를 얻을 가능성이 엿보이는 캐릭터 였다. 세 번째로는 주인공의 대학 후배이자, 첼리스트 오오타니 하루카. 연하 캐릭터답게 주인공 앞에선 항상 수줍어 하지만, 첼로 연주만큼은 수준급 실력을 갖추고 있다. 그녀 역시 사츠키 노리코와는 반대되는 성향의 연령층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인공과 카오리와 함께 어릴 때부터 소꿉친구인 이가와 레이.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피아니스트 지망인 그녀는 주인공의 빛에 가려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숨은 실력파 중에 하나이다. 주인공 보다 먼저 피아노를 시작했지만, 주인공의 타고난 실력 앞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연습하는 노력파 캐릭터였다. 조금은 병약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남성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이렇게 두 명의 동갑내기와 한명의 연상, 연하. 4인 4색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완벽하게 짜여진 캐릭터 디자인에 나는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오케이. 이대로 가도 좋겠는데?”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모리타는 나의 ok 사인에 한시름 놓았는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며칠 뒤. 아키하바라의 게임 매장 곳곳에 4명의 히로인의 뒷모습을 담은 포스터가 전시되기 시작했다. -당신이 기억하는 거리에서 또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전작인 ‘내가 없는 거리’의 광고 전단을 기억하는 게이머들은 갑작스레 등장한 새로운 게임 포스터에 엄청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설마 내가 없는 거리의 후속편인가!?” “어억!! 이 구도와 홍보 문구에서 유추해보면 후속작 맞는 거 같은데?” 타마고 샵 앞에 나란히 붙여 놓은 네 명의 히로인들의 뒷모습에 아키하바라의 거리를 거닐던 게이머들이 하나씩 걸음을 멈추며 매장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로 포스터를 살피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나는 여유 있게 커피 한 모금을 삼켰다. ‘저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이 게임을 클리어 하고 나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일전에 유키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돌아오던 그 날이 떠올랐다. 그때 유키는 새로운 시나리오로 나에게 이런 제안을 했었다. ‘만약에... 주인공의 사고가 누군가에 의해 고의적으로 일어난 교통사고였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 범인이 네 명의 히로인 중에 한명이라면 준혁씨는 기분이 어떻겠어요?’ < EP. 32 : 신의 선물. (2) > 끝 < EP. 32 : 신의 선물. (3) > 전편에 마지막 부분에서 포스터를 붙일때 유저들의 반응 부분이 약간 수정되었습니다. ---- & 1994년 여름. 유키와 벚꽃이 흩날리던 밤거리를 함께 걸었던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여름이라니... 확실히 본격적인 게임 개발에 들어가면 시간이 엄청 빨리 지나가는 느낌이 든다. 아키바 역 앞에 위치한 타마고 샵은 지난 주에 가게 이름을 펜타곤 프리미엄 샵으로 바꾸었다. 또한 가게 내부의 타마고 몬스터 전용 공간 역시 간소화 하여 유저들끼리 간단히 배틀을 즐기는 공간 말고는 전처럼 휴대용 겜보이를 대여해 주는 서비스가 사라졌다. 일부 유저들은 타마고 몬스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 했지만, 사실 이 이유에는 민텐도 측과 펜타곤의 작은 불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달. 타마고 몬스터 덕분에 그나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민텐도에게서 카트리지의 재생산에 대해 갑자기 턱없이 높은 로열티를 제시하였다. 이유로는 본인들이 제시했던 계약 기간이 만료되었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카와구치 대표는 민텐도의 부당한 처우에 대해 퍼스트 파티의 횡포라 분개했지만, 오히려 나는 담담하게 받아 들였다. 민텐도가 이렇게 나온 이유는 그들 나름대로 훌륭한 대비책을 준비해 두었기 때문이겠지. ‘포켓 몬스터볼이 벌써 나오려는 건가? 생각보다 빠르네...’ 민텐도라는 브랜드를 떠받치는 게임 타이틀 중에는 슈퍼 마리지 시리즈 말고도 카린의 전설이라던가 동킹콤 시리즈 같은 양질의 소프트가 준비 되어 있었다. 이 소프트 들은 거치기인 슈퍼 패밀리뿐만 아니라, 휴대용 겜보이에도 출시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세 종류의 타이틀 모두 한번 클리어 하고나면 2회 차 요소가 부족해 오랫동안 즐기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펜타곤 소프트가 만들어낸 타마고 몬스터는 원 소스 멀티 유싱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준 선례가 되었다. 펜타곤은 휴대가 용이한 악세사리용 단말기를 제작하고, 그것을 민텐도가 만든 휴대용 겜보이에 연동시켜 비로소 본격적인 게임을 즐길 수 있는 타마고 몬스터는 얼핏 보기에 민텐도와 펜타곤가 서로 윈윈 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물론 발매 초기에는 민텐도의 겜보이나 타마고 몬스터의 게임 카트리지가 없어서 못 파는 지경이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겜보이의 보급량이 늘어나면서 민텐도 보다는 작은 단말기를 위주로 판매하는 펜타곤의 수익이 어마어마하게 증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제서야 민텐도는 아차 싶었는지 수익 분배를 다시 재조정하려 했지만, 이미 계약서에 사인을 마친 상태였다. 카마우치 사장은 하는 수 없이 휴대용 겜보이 만을 이용해 친구와 데이터 통신을 즐기는 게임을 만들 것을 지시했지만, 시게루씨는 이미 카린의 전설과 동킹콤 시리즈의 제작 만으로 벅찬 시기였기에 민텐도는 새로운 게임의 제작을 세컨드 파티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등장한 것이 바로 ‘프리크 소프트’ 라는 IT 기업이었다. 흔히 포켓 몬스터볼은 민텐도가 만들어낸 게임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엄밀히 따지면 포켓 몬스터볼은 프리크에서 제작한 게임이었다. 뭐 포켓 몬스터볼의 흥행 덕분에 민텐도의 1등공신이 되어 나중에는 거의 퍼스트 파티에 해당하는 위치에 올라섰지만... 그때 아직 오픈 전인 펜타곤 샵의 스탭 출입문으로 모리타와 함께 본사 직원이 들어왔다. “부장님 히로인들 포스터랑 등신대 POP 나왔습니다.” “오~!!” 모리타의 말에 펜타곤 샵을 청소 중이던 직원들이 우르르 카운터로 모여들었다. 펜타곤 샵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이곳에 일하기 전부터 펜타곤 소프트의 열렬한 팬임을 자부해 왔기에 새로운 게임이 발매 될 때마다 펜타곤을 사랑하는 순수한 게이머로 돌아가 환호하곤 했다. 면접 때 펜타곤에서 출시하는 게임을 가장 먼저 구입하기 위해 입사했다는 사람도 있었으니, 일본 내에서 펜타곤 소프트의 인기는 게이머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드래곤 엠블렘 2 에피소드 1편 이후로 이렇다 할 게임 발매가 없어 다들 조금 아쉬워 하던 찰나에 내가 없는 거리의 후속작 발매 소식은 가뭄 속 단비와도 같은 흥겨운 발표였다. 기대에 찬 눈으로 홍보 전단을 바라보는 이들 앞에 POP 물이 담긴 상자를 내려놓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머니에서 커터 칼을 꺼내들었다. “비켜 봐. 이건 내가 먼저 뜯어 봐야겠어.” “줄을 서!!” “내가 없는 거리의 후속작이라니, 슈퍼 패밀리 런칭 때 동시 발매했으니까 햇수로만 벌써 5년이 지났구나. 크으윽...” 직원들은 감격어린 탄성을 쏟아내며 서둘러 등신대 POP물을 꺼내 들었다. “어디 보자~ 이번 히로인 과연 어떤 모습일까나~ 어라?” 두 손으로 자신의 키만 한 POP 물을 받쳐 든 직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른 POP 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른 직원들 역시 홍보 전단물을 손에 들고는 묘한 눈으로 다른 전단 물을 살펴보고 있을 뿐이었다. “부장님.. 설마 이거?” “응? 아, 히로인들 얼굴은 아직 비공개 사항이거든...” 그랬다. 오늘 도착한 POP들은 전부 히로인들의 뒷태만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금발 머리의 포니테일을 하고 있는 아가씨를 첫 번째로, 약간 붉은 기가 감도는 웨이브진 머릿결에서 왠지 모를 성숙함이 느껴지는 여성이 두 번째 캐릭터. 그리고 갈색 단발에 누가 봐도 귀여운 인상을 하고 있을 것만 같은 키가 작은 아가씨가 세 번째 였고, 마지막으로 청초한 느낌을 가진 검은 생머리의 여성이 마지막 히로인이었다. 그녀들은 모두 뒷짐을 진 채로 자신을 뜻하는 악기를 하나씩 들고 있었는데, 금발의 포니테일은 바이올린을 그리고 갈색 단발머리를 한 꼬마 아가씨는 챌로의 목 부분을... 피아노를 전공으로 하는 다른 두 명의 캐릭터는 좌우로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아, 뭔가 뒷모습만 보고도 반할 것만 같습니다.” “젠장!! 본사에 소문이 돌 때부터 오늘만을 기다려 왔는데 뒷모습라니!! 미소녀의 뒷모습이라니!!!” “신의 선물이라... 제목부터 심장이 싸늘하게 조여지는 느낌이군요.” “설마 나중에 얼굴 공개 했는데, 울고 있는 모습은 아니겠지?” 순진한 직원들의 미소에 시나리오의 전말을 알고 있는 모리타는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혹여 모리타의 표정이 직원들에게 들킬까, 박수로 분위기를 환기 시키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자~ 매장 오픈 시간 얼마 안 남았습니다. 다들 청소 서둘러 주시고 홍보물 매장 쇼윈도에 전시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오픈 전까지 설치할 홍보물이 제법 많았기에 나는 박스에서 포스터를 꺼내 직접 쇼윈도를 돌자, 모리타 역시 직원들을 돕기 위해 팔을 걷어 부치고 전단지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추 오픈 전에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이미 메인 쇼윈도에 설치한 등신대 포스터를 보고 가게 앞으로 몰려드는 손님들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한 편의 좀비 영화가 따로 없군...’ & 1994년 8월 12일. 지난 달 잡지사를 통해 깜짝 발표 후. 전 일본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겨우 게임 하나에 이 정도 반응이 올까 싶었지만, 그 만큼 내가 없는 거리의 스토리가 대단하긴 했던 모양이다. 펜타곤 본사에 방송국 기자까지 와서 취재해갈 정도였으니까. 혹시나 미사토씨가 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런 기막힌 우연은 일어나지 않았다. 가끔 TV 뉴스에서 보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아쉬웠달까? 신의 선물의 발매일은 1994년 12월 24일. 아직까지 4개월이나 남았건만, 8월의 무더위를 뚫고 저렇게 광분하는 이유는 한 가지... 바로 10월에 배포 되는 선행 체험판의 다운로드 코드를 오늘 배포하기 때문이지. 그리고 잠시 후. 문이 열리자마자 가게 앞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은 파도와 같이 안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질리도록 경험해본 펜타곤 샵의 고참 직원들은 빠르게 손님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체험한 배포 코드 수량은 충분합니다. 일렬로 줄을 서주세요.” “차례를 지켜주세요. 직원들 통제에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아비규환으로 배포 코드 전단지를 찾아 해매던 유저들은 수량이 충분하다는 말에 안심이 되는지 그제서야 직원들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대기줄에 서 있던 일부 게이머들은 매장 가득 히로인들의 뒷모습만을 보여주는 홍보 방식에 허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래도 가게 안으로 들어오면 히로인 들의 얼굴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게, 엄청 기대했는데. 허무하다.” “난 괜찮은데? 뭔가 더욱 기대감이 든 달까? 특이 금발의 포니테일은 완전 내 취향이야...” “포니 테일은 진리지... 분명 엄청 착하고 활동적인 성격일거야.” “하긴 뒷모습만 봐도 이 캐릭터가 어떤 성격일지 딱하고 감이 오는 것 같아.” “여자 캐릭터에 한에서는 현재 모리타씨와 견줄 만한 사람은 란그릿사의 요시하라 사토시 밖에 없을 걸?” “글쎄... 나는 모리타씨가 훨씬 나은 것 같은데?” “나도 그래. 요시하라씨 일러스트는 확실히 멋지긴 한데, 너무 현실성이 없다고 할까? 그에 반해 모리타씨의 캐릭터는 뭔가 서정적이면서 특유의 호소력이 있지. 그리고 이 사람 이제 남자도 꽤 잘 그리더라...” “그래. 맞아. 내 말이 딱 그거거든~!!” 타이밍 좋게 내 곁에서 손님들의 말을 엿들은 모리타는 얼굴이 벌개져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그런 모리타의 어깨를 툭 치고는 씨익 웃어보였다. “라이벌을 뛰어 넘은 소감이 어때?” “라, 라이벌 이라뇨.” “너 이전에 유저들이 요시하라 사토시랑 비교한다고 내 사무실에 와서 징징 거렸잖아.” 그러자 모리타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며 나에게 말했다. “부장님.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허... 그럼 그때 난 누구랑 대화한 거냐?” “그, 글쎄요...” 모리타의 기어 들어가는 대답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행사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그 날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나는 집 근처 편의점 앞에 차를 세웠다. -딸랑~- “아, 지금 퇴근 하는 길이세요?” “······.” 이제 19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알바생은 내가 가게에 들어오자 ‘어서 오세요’ 라는 인사 대신 ‘이제 퇴근하세요?’ 라고 물었다. 그 만큼 퇴근길에 이 편의점을 자주 들린다는 뜻이지... “네. 오늘도 일하시네요?” 답인사와 함께 아이스크림이 있는 냉장고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학생이 나를 불러 세웠다. “저기 이미 카운터에 준비해 두었어요. 녹차 맛 아이스크림 한 박스 맞죠?” 역시 한 두 번 들리는 게 아니다보니 제법 죽이 척척 맞는군. 나는 냉장고 쪽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그녀에게로 향했다. “사모님은 요새도 이것 만 드세요?” 알바생의 질문에 나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람이 입덧이 심해서요. 하하...” < EP. 32 : 신의 선물. (3) > 끝 < EP. 32 : 신의 선물. (4) > “와이프가 입덧이 심해서요. 하하...” “그래도 아이스크림은 싸게 먹히지 않나요? 이 한 여름에 귤이나 붕어빵이라도 먹고 싶다고 하면 어떡해요. 상상만해도 난감하지 않으세요?.” “음... 학생 말을 들으니 그것도 그렇네요? 왠지 힘이 나는데?” “아내를 위해 3일에 한번 씩 아이스크림을 사러오는 남자. 저희 편의점에선 손님 요즘 엄청 인기 쟁이에요. 너무 로맨틱하다고.” 아이스크림 결제를 마친 나는 알바생의 농담에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흐음... 이 시기에 아내에게 잘해 주어야 후에 남편 대접 받고 산다고 하더라구요.” “와아, 그건 누가 한 말이에요? 수첩에 적어 두고 나중에 남자친구한테 알려줘야지.” “······.” 글쎄.. 1983년으로 오기 전에 다니던 회사의 부하 직원에게 들었는데? 흐음... 본의 아니게 알바생의 남자 친구에게 굉장한 짐을 얹어 주었네. 너무 절 원망하진 마시길.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건, 지구의 평화를 지키는 거랑 똑같은 거니까요. 잠시 후. 편의점에서 나온 나는 알바생이 준비해준 30개들이 상자를 보조석에 내려두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이걸 3일 만에 다 먹는다니. 어떤 의미로 대단하군. 녹차맛 아이스크림이라... 설마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면 녹색 피부를 가진 그린 고블린이 태어나는 건 아니겠지?’ 핸드 브레이크를 내리며 가볍게 고개를 내저은 나는 서서히 엑셀을 밟아 집으로 향했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우하하하~!! 내가 보기엔 아들이야, 강군을 쏙 빼닮은 똘똘한 녀석이겠지.” 음? 장인어른이 오셨나? 딩동~ 초인종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자, 통통통 발소리가 울리며 앞치마를 두른 유키가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오늘도 수고했어요. 와~ 아이스크림이다. 때마침 다 떨어졌었는데, 고마워요.” “혹시, 장인어른 오셨어?” “어라? 어떻게 알았지?” “문 밖에서 목소리가 다 들리던데?” “어휴... 진짜요?” 그때 유키 등 뒤로 장인어른과 함께 유키의 언니까지 나를 맞아 주었다. “강군 오랜만이군~!!” 나를 보자마자 유쾌하게 인사를 건네는 장인어른의 얼굴은 언제보아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올해로 46세인 그는 무려 18살(한국 나이로는 20살)에 결혼하여 19살에 첫 딸인 유코를 낳았고, 20살에 유키를 낳았으니, 얼마나 초 스피디한 인생을 살아온 것인지... 거기다 올해로 46세지만 거의 사기에 가까운 동안의 소유자였기에 나이차가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로 83년으로 넘어온지도 11년이 되었으니, 회귀 전 내 나이랑 합치면 나도 정신연령은 45세구나...) “안녕하세요. 장인어른. 어라? 유코씨도 왔네요?” “부모님께서 대신 운전 좀 해달라고 하셔서...” 아... 결국 억지로 끌려온 건가? 잠깐? 부모님이라면 장모님도 같이 오신건가? “어머, 우리 사위 왔네.” 나긋한 목소리로 나를 맞아 주시는 어머님은 요리중이였는지 유키와 같이 앞치마를 두르고 계셨다. “다 같이 오랜만에 저녁 먹고 싶다고 했더니, 글쎄 남편이 지금 당장 쳐들어가자고 해서... 연락도 없이 미안해. 퇴근하고 와서 피곤할 텐데.” “아닙니다. 넓은 집에 유키랑 둘만 있어서 썰렁했는데, 훈훈하네요.” 그러자 발밑에서 나를 보고 있던 고양이 ‘하루’가 갸르릉 거리며 울었다. 자기를 잊지 말라달라는 뜻일까? 유키는 그런 하루를 품에 안으며 가볍게 목을 긁어 주었다. “아구~ 우리 하루쨩. 준혁씨가 너를 쪽 빼놔서 섭섭했구나~” 아무튼 한바탕 유키네 가족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거실 식탁에 아이스크림 상자를 내려놓은 나는 아이스크림 박스의 포장을 뜯어내 냉동실에 옮기기 시작했다. 장모님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무슨 똑같은 아이스크림을 서른 개나 샀어?” “요즘 유키의 주식이거든요. 입덧이 심해서...” 유키는 식탁에 앉아 양손을 턱에 괴인 채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엄마, 우리 준혁씨 착하죠?” “아침부터 지금까지 힘들게 일하고 온 신랑한테 이런 거나 사오라고 시키고, 너 그러면 못 써~” “치~ 나중에 아기 낳고, 준혁씨한테 열배로 잘하면 되죠.” “그 말 꼭 지키렴. 그리고 강군도 너무 우리 딸 오냐오냐 해주지 말구.” “하하.. 뭐 별로 힘든 것도 아닌데요.” 이래서 사위사랑은 장모라고 하던가? 오랜만에 왁자지껄 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 준비를 마치고 식탁에 둘러앉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유키는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의 식사가 즐거운지 아까부터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이런 자리 좀 가질 걸 그랬나?’ 오늘의 메뉴는 스키야키. 일본의 전통 가족 요리인 스키야키는 커다란 냄비에 각자 좋아하는 야채과 고기를 넣고 끓이는 대표적인 전골 요리 중에 하나였다. 겉모습은 샤브샤브와 비슷하긴 한데, 각자 개인 접시에 생달걀을 풀어 푹 끓여진 고기와 야채를 찍어 먹는 요리랄까? “우리 사위 많이 들어요~” 작은 그릇에 고기와 육수를 담뿍 담아주시는 어머님의 극진한 대우에 유코씨가 새침한 목소리를 내었다. “우리 엄마 준혁씨 진짜 좋아하신다. 완전 우린 찬밥 신세네.” “그러니까 너도 빨리 시집가서 멋진 사위 데려 와.” “아, 진짜 또 그 소리.” 그러자 묵묵히 자기 그릇에 고기를 담아내던 장인어른이 아내의 말을 거들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강군만큼 돈 벌어오는 사위를 데려 오거라. 그럼 두 말 않고 시집 보내주마.” “그냥, 아빠랑 살게요. 평생토록...” “이거 이렇게 되면 완전 나가린데...” 마치 영화 신세계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두 사람의 만담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이어졌고, 유키와 나는 저녁식사 내내 배를 잡고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유키네 가족은 나에게 있어 이 세계에서 만난 가장 소중한 인연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식사 후 나는 맨션의 베란다에서 장인어른과 같이 식후 연초를 즐겼다.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와 다르게 손위 어른과 함께 담배를 태우는 것에 대해 딱히 예의를 차리지 않았기에 상관은 없었다. “아직 내가 손주 볼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벌써 할아버지가 되다니. 뭔가 기분이 묘하군. 이것도 일찍 결혼한 벌인가?” “벌 보다는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하긴 아이를 갖는 것은 신께서 내려준 선물이라고도 하지. 나도 유코를 처음 안아 들었을 때 세상에 이렇게 작은 아이를 내가 잘 키워낼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는 거기까지 말한 뒤 슬쩍 거실에 앉아 있는 유코씨를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첫 아이라고 너무 오냐오냐 키웠더니. 콧대가 너무 높은 아이가 되어 버렸어.” “그래도 유코씨는 성격이 똑 부러지잖아요. 유키는 너무 순둥이라 가끔 걱정이 될 때가 있어요.” 그러자 장인어른은 깊게 담배를 빨아들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우리 유키가 겉으로는 그렇게 보여도 속으론 우리 가족들 중에서 가장 고집이 셀걸?” “정말요?” “나도 그것 때문에 유키가 어렸을 때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지금에야 덜하지만, 오히려 어렸을 땐 유코가 훨씬 얌전하다고 느꼈을 정도였다니깐?” 흐음... 하긴 유키 같은 경우는 내성적인 성격인 것 같으면서도 때때로 나를 확 잡아 끌어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유키와의 인연도 그녀가 먼저 건네주었던 연락처에서 시작된 것이고, 프로포즈 역시 준페이 녀석과 짜고 친 함정에 걸려들어 공개망신(?) 당했었지. 갑자기 떠오른 옛 기억에 나 역시 웃음 짓자, 장인어른은 재떨이에 담배를 털어내며 내가 모르는 옛 이야기 하나를 꺼내었다. “그러니까 그게 언제였더라, 한 6~7년 전쯤이었나? 어느 날 유키가 저녁 늦게 집에 돌아오더니, 나한테 그러더라고 굉장히 멋진 남자를 만났는데, 그 사람도 한국인이라고 하더군. 아무래도 제 엄마 덕분에 그런지 어릴 때부터 한국인에 대한 호감이 남달랐거든. 유치원에 다니는 조막만한 어린애가 자기는 커서 무조건 한국인 남자랑 결혼할 거라고, 얼마나 떠벌리고 다녔는지...” 유치원 모자를 쓰고 있는 유키의 어릴 적 모습을 상상하니 굉장히 귀여운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럴수록 나의 2세가 딸이길 바라는 마음이 더욱 확고해졌다. “아무튼 그 한국인을 만났다는 그 날부터 퇴근하면 내내 전화기만 뚫어져라 바라보는데, 전화벨이 울리면 가장 먼저 달려 와서 받질 않나. 하지만 원하는 상대방에게서 전화가 안 오니 굉장히 답답했던 모양이야. 하루는 자기 분에 받쳐 펑펑 울다가, 하루는 완전히 저기압 상태. 그러다가 어느 날엔 모든 걸 포기한 것 마냥 방실 방실 거리다가 다시 또 저기압으로 돌아서고...” “하하... 힘드셨겠군요.” “어느 놈의 새끼가 내 딸을 울리는지. 만나면 아주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려고 했었지.” 장인어른의 으름장에 나도 모르게 오른쪽 다리를 주물럭 거려보았다. “유키 말을 들어보니 연말에 출시 예정인 새로운 게임을 만들고 있다면서?” “아, 네. 신의 선물이라는 제목의 작품입니다.” “그것 참 기가 막힌 우연이군.” “네? “유키의 출산 예정일도 12월쯤이라던데, 자네의 아이 역시 신이 내려준 선물이 아닌가?” “아... 듣고 보니 그렇군요.” “다시 한 번 축하하네. 그리고 내 딸과 잘 살아 줘서 고마워.” “감사합니다. 아버님.” “그런데 말이야.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 하나 있는데...” “네. 말씀 하세요.” “그... 드래곤 엠블렘 두 번째 에피소드는 대체 언제 출시하는 건가?” “아, 그게...” 깜빡 잊었던 부분인데, 유키가 게임을 좋아하듯. 장인어른 역시 펜타곤 소프트의 광팬 중에 하나였지... < EP. 32 : 신의 선물. (4) > 끝 < EP. 33 : 국제 전자제품 박람회. (1) > & 1994년 9월 6일. 8월의 불볕더위가 아직까지 기승을 부리고 있는 9월의 어느 날. 나는 묵직한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럼 다녀올게.” “조심히 다녀와요. 준혁씨.” 나의 출장 준비로 오늘 하루 연차를 낸 유키는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나에게 작별인사를 건네었다. 그녀를 앞에 두고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나는 현관에서 머뭇거리는 유키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흐음. 정말 내가 없어도 괜찮겠어? 지금이라도 출장 못가겠다고 할 수도 있는데..” “물론 나야 준혁씨가 옆에 있으면 좋지만, 이번에는 꽤 중요한 행사라면서요. C.. 뭐더라?”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국제 전자제품 박람회.)” 그러자 유키는 황한 미소와 함께 손뼉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아, 맞다. 그거... 전자 제품 박람회였나?” 유키의 대답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열리는 이 행사는 아직 게임 전용 박람회가 없던 이 시기에 각 기업들이 전 세계인들에게 자사의 콘솔을 홍보하는 자리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전자제품 박람회인 만큼 게임기 말고도 TV나 냉장고, 에어컨등 생활가전이 주를 이루었지만, 게임 콘솔도 전자제품의 카테고리 안에 속하기에 해마다 행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다른 때라면 카와구치씨와 펜타곤 인력 몇 명을 딸려 보내면 되었지만, 올해 열리는 CES는 어떤 의미로 민텐도와 NEGA, 그리고 펜타곤의 엄청난 각축전이 예상 되는 글로벌 행사였다. “오늘부터 언니가 회사 퇴근하면 당분간 우리 집에서 자기로 했으니까 괜찮아요.” “흐음... 다녀올 때 유코씨 선물 좋은 걸로 사와야 겠는데?” 아쉬운 마음에 캐리어를 잠시 세워둔 나는 유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아빠 출장 다녀올 테니까. 엄마랑 같이 잘 있어.” 그 모습에 유키는 웃으며 내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조심히 다녀와요. 엘리스 언니랑 윌슨씨 만나면 대신 안부 전해주시구요.” “응. 그럴게...” 잠시 후. 캐리어를 끌고 맨션을 나서니 밝은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비쳐 내려와, 눈을 찔렀다. 맴~ 맴~ 맴~ 맴~ 매에에에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시원한 매미의 울음소리에 나를 따라 내려온 유키가 기분 좋게 미소지었다.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결국 유키는 주차장까지 마중을 나와 주었다. 아무래도 해외 출장이다 보니 그녀 역시 괜찮다고는 했지만, 아쉬운 마음이 큰 모양이다. 백미러 너머로 열심히 손을 흔드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가족이란 참 좋은 거구나...’ 맨션을 빠져나와 대도로 핸들을 꺾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잠시 후. 나리타 국제공항에 도착하자. 티켓 발권소 앞에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부장님 여기에요.”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카오리의 모습에 캐리어를 끌고 오던 나는 그녀를 향해 살짝 손을 들어 보였다. 그녀의 옆으로는 하야시와 모리타. 그리고 카와구치 대표와 그녀의 비서인 사유리씨가 웃으며 나를 반겼다. “유키 언니랑 작별인사는 잘 하고 오셨나요?” 카오리의 질문에 내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옆에 있던 하야시가 그녀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고작 보름짜리 출장에 작별인사라니, 우리가 어디 먼 길 떠나냐?” “먼 길이죠!! 지구 반대편인데!!”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에휴.. 됐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니.” 하야시와 카오리의 대화에 항공사 발권소 앞에서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 우리는 각자의 캐리어를 손에 쥐었다. “그럼 다 온 건가요?” 나의 질문에 사유리씨가 대답했다. “아뇨. 아직 펜타곤 샵의 점장인 미야자키씨와 피규어 디자인의 우치무라씨가... 아 저기 오네요.” 사유리씨의 말에 고개를 돌리니 우리 쪽으로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는 그들이 보였다. “하아.. 하아.. 늦어서 죄송합니다.” 미야자키씨는 그렇다 치고, 우치무라는 거의 숨넘어가기 일보직전이네... 그들은 이번 CES의 행사에서 진행 보조로 발탁되어 이번 출장에 함께 하기로 했다. 그때 옆으로 쓰러지려는 미야자키씨의 캐리어를 대신 받아준 나는 손끝에 전해져오는 묵직한 느낌에 깜짝 놀라 그녀에게 물었다. “뭘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요?” “해외 출장은 처음이라. 일단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겨 왔거든요.” “거기도 생필품은 다 팔고 있는데...” “그... 그렇죠?” 하야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야자키의 캐리어를 살짝 들어보더니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거 무게가 오버되어 추가 챠징 붙겠는데...” 하지만 그에 반해 우치무라의 짐은 달랑 배낭 하나였다. 너 지금 2박 3일 수련회가니...? “저기 우치무라.. 설마 짐은 그게 끝이야?” “네? 아, 네. 필요한 것은 거기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 얘는 또 왜 이렇게 태평해?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지나가던 공항 직원에게 혹시 여행용 캐리어를 파는 곳을 물어보니, 다행이도 지하에 쇼핑센터가 있다고 대답해 주었다. “우리 아직 시간 있지?” “네.” 카오리의 대답에 나는 재빨리 지하 쇼핑몰에서 새 캐리어 하나를 구입해 미야자키의 짐을 나누어 넣었다. 짐을 나누는데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렇게 우린 무사히 티켓팅을 마치고 탑승 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간단히 출국 심사를 마치고, 형형색색의 면세점들이 늘어서 있는 쇼핑구역으로 빠져 나오자, 난생 처음 해외를 나가보는 카오리는 숨을 크게 들이 마시며 외쳤다. “면세!! 면세점이다!!” 카오리의 외침에 카와구치 대표가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거 시간이 좀 아슬아슬 한데요?” 나 역시 탑승 시각을 체크 중이었기에 카와구치 대표의 말에 동의 했다. “어차피 돌아오는 길의 라스베가스 공항에도 면세점이 있으니 쇼핑은 거기서 하는 게 어때?” “히잉... 공항 면세점 기대했는데...” 카오리가 울상을 짓자, 미야자키씨가 미안한지 얼굴을 붉히며 그녀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제가 짐을 너무 많이 챙겨서...” 그러자 우치무라도 미야자키를 위해 한마디 거들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짐을 너무 조금 가져와서...” “······.” 이 사람들이 지금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지? 우치무라의 말에 모두가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카와구치 대표 곁에 있던 사유리씨가 박수로 분위기를 환기 시켰다. “자, 일단 탑승구 근처에도 간단한 면세점이 있으니까, 일단 이동하죠.” 여자 일행 중에서도 맏언니를 맡고 있는 그녀의 말에 우리는 단체로 탑승 게이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중 카와구치 대표가 내 곁에 붙으며 입을 열었다. “준혁씨. 일전에 미국에서 진행 된 건은 어떻게 됐나요? 무사히 도착할 것 같답니까?” “롭의 말로는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것 같다고 하긴 하는데, 확답은 안주더군요.” “이번 컨퍼런스에서 가장 하이라이트는 ‘그 것’인데, 아직도 완성이 안됐다면 조금 곤란한데요?” “그렇게 돼버리면 신형기기 발매를 코앞에 두고 있는 NEGA가 가장 큰 수혜를 보겠죠. 그게 아니면...” “그게 아니라면...?” “민텐도나 센소니가 합동으로 준비한 신형기기에 귀추가 주목 될 겁니다.” “네에!? 설마 이번 CES에 신형 기기 발표를!?”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요..” 아니, 사실 이건 확실하다. 민텐도와 센소니는 이번 CES에 신형기기인 ‘기어 스테이션 프로젝트’를 발표한다는 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지. 이미 작년부터 센소니의 쿠라카기씨가 거의 매일 같이 민텐도에 들락거리고 있다는 사실은 민텐도 근무 시절 친했던 직원을 통해 전해들은 바가 있었다. 카와구치 대표는 민텐도의 발 빠른 움직임에 깜짝 놀랐는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NEGA 새턴과 기어 스테이션 프로젝트가 발표된다면, 이번 CES에서 우리 펜타곤은 하드웨어에서 아무 것도 보여줄 것이 없었다. 지금은 단지 롭이 시간에 맞춰 CES 행사장에 도착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 여기서 잠시 1994년의 게임 산업에 관련해 살짝 짚어 보자면, 스트리트 파이어 2에서 시작해 사이킥 포스로 이어진 90년대 초반의 격투 게임 붐은 94년에 들어서 대 흥행을 거두고 있는 중이었다. 그중에 93년 12월에 출시된 NEGA의 리얼 파이터는 당시 게이머들에게 엄청난 컬쳐 쇼크를 안겨 주었다. 물론 이전에도 간간히 3D 그래픽 기술을 접해보았긴 했지만, 이토록 세밀하게 사람을 표현한 작품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폴리곤 기술로 만들어진 파이터들은 기존의 2D 게임과는 달리 축 이동과 횡 이동을 선보이며 가상의 공간에서 차원이 다른 싸움을 보여주었다. 특히 주인공인 아키라에게 철산고 라도 맞으면 그 아픔이 마치 플레이어가 직접 느끼는 것처럼 호쾌한 타격감이 일품이었다. 정말 제목 그대로 리얼리티 함을 추구하는 멋진 작품이었다. 리얼파이터는 특유의 자비 없는 기술 데미지 덕분에 초보자부터 숙련자 역시 긴장의 끝을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초보자가 레버를 빙빙 돌리다가 우연히 나간 기술 하나로 숙련자가 골로 가는 경우도 허다했고, 섣불리 달려들었다가 장외로 떨어지면 그대로 패배로 인정 되었기에 NEGA 리얼 파이터는 최초이자, 최고의 격투 게임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이 NEGA를 대표하는 최고의 격투 게임 덕분에 차세대 기기 개발에 제동이 걸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왜냐고? NEGA 새턴은 기획 단계부터 철저하게 2D 기반을 위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지. 차세대 기종인 NEGA 새턴이 노린 수는 현재 아케이드 센터에서 절대적인 동전 회수율을 자랑하는 SMK의 대표 게임들과 미려한 일러스트를 바탕으로 최고의 미소녀 게임을 만들어내 코어 유저층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콘솔 매니아 하나가 게임을 사들이는 연평균 구매건 수는 라이트 유저의 약 5배에 달했다. 순식간에 클리어하고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는 하드코어 유저층을 겨냥한 새턴은 전작의 실패를 만회라도 하듯이 미친 듯이 2D 기술에 집착했다. 그런데... 다른 회사도 아니고 자사가 대표하는 메인 디렉터인 ‘스즈키 류’가 혁신적인 3D 게임인 ‘리얼 파이터’를 개발해낸 것이다. 그것은 NEGA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왜냐하면 불행하게도 NEGA 새턴은 ‘리얼 파이터’를 돌리기엔 3D 성능이 너무나 빈약했기 때문이다. 결국 NEGA는 3D 격투 게임 하나 때문에 천문학 적인 개발비를 들여 완성을 코앞에 두고 있는 NEGA 새턴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조금씩 3D 기술 쪽으로 기울고 있었고, 그 현실을 완전히 외면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NEGA는 이에 대한 답을 찾았다. 언제나 그랬듯 최악의 수법으로... 어떻게? 다 만들어진 2D 전용 콘솔에 강제로 3D 성능을 쑤셔 박는 최악의 방법으로 말이지... < EP. 33 : 국제 전자제품 박람회. (1) > 끝 < EP. 33 : 국제 전자제품 박람회. (2) > & 면세점 쇼핑도 포기하고 다 같이 서두른 탓에 그래도 여유 있게 탑승 게이트에 도착한 우리는 숨을 몰아쉬며 대기실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그냥 천천히 와도 되는데, 뭐 하러 이렇게 다 뛰어 온 거지.’ 비행기 한 두 번 탄 것도 아닌데, 초보자들이 섞이다보니 나도 모르게 당황했네... 뒤 늦게 쫓아와 의자 등받이를 부여잡고, 헛구역질을 해대는 우치무라는 벌써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괜찮아? 짧게 숨 쉬지 말고 크게 들이마셔...” “네? 아, 네... 스읍 하~ 스읍 하~” 비행기 두 번만 태우다간 송장하나 치우겠네... 곧이어 스튜어디스가 대기 중인 승객들에게 탑승을 알리자, 우리 일행을 포함해 대기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천천히 줄을 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등 뒤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군...?”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으니,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은... “군페이씨?” “허허~ 이거 참. 혹시나 했지만, 이렇게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가게 될 줄은 몰랐는걸?” 군페이씨 곁에는 시게씨와 이제는 민텐도의 세컨드 파티 소속인 HEG 연구소의 카와타 사토시씨가 나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민텐도 역시 이번 CES에서 새로운 프로젝트 발표를 할 거라 예상하고 있었기에 행사장에서 마주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설마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건강해보이셔서 다행이네요. 군페이씨.” “건강하다네. 자네가 만든 게임 덕분에 죽다 살아나긴 했지만..” 발렌타인 데이의 기억을 떠올렸는지 군페이씨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띄워 보였다. “그때는 본의 아니게 죄송했습니다.” “아닐세. 나 역시 색 다른 체험이었으니까.” 과거의 직장 동료에서 이제는 경쟁사의 중임을 맡고 있는 나에 대해 그들의 태도는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슈퍼 마리지와 카린의 전설.. 별의 커비등 앞으로 민텐도는 게임 산업에 있어서 하나의 큰 축이 되어 움직이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니까. 잠시 그들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카마우치 사장이 없다는 사실에 군페이씨에게 물었다. “카마우치 사장님은 이번 컴퍼런스에 참여 안 하시나요?” “뭐 이번에는 미국 지사의 야마시타에게 모든 걸 일임한다더군. 아무래도 이제 나이가 있으시니까...” 그건 군페이씨도 마찬가지로 보입니다만.. 처음 만났을 때보다 부쩍 나이 들어 보이는 군페이씨의 모습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당연히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손님. 비행기에 탑승해주시기 바랍니다.” 대화가 길어지자, 스튜어디스가 우리 쪽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비행기 안에서 하도록 하지.” 일본에서 CES가 열리는 라스베가스까지는 약 13시간 정도가 소요되기에 카와구치씨와 상의한 나는 최대한 직원들의 편의를 위해 퍼스트 클래스 위주로 좌석을 배정시켰다. “와아, 누워서 갈수도 있어!!”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보는 카오리와 미야자키는 마치 캡슐처럼 꾸며진 개인 공간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군페이씨 역시 손녀 딸 같은 그녀들이 귀여운지 눈가에 주름을 잡고선 환하게 웃어 보였다. “펜타곤 소프트의 직원 복지가 유명하다더니 설마 일반 사원들까지 전부 퍼스트 클래스를 이용하는 건가?” “장거리 비행은 아무래도 직원들의 컨디션도 중요하니까요.” “대단하군.” “그러고 보니 예전에 군페이씨와 미국에 갔었을 때는 둘 다 비즈니스 클래스를 이용했었죠? 그때 이코노미 태우려던 카마우치 사장님 설득하느라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그래도 요새는 많이 나아지셨지..” “그런 것 같네요.” 군페이씨는 떠오르는 옛 기억에 쓴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비행기 기장의 간단한 안내 멘트와 함께 거대한 비행기가 천천히 움직이자, 긴장되는지 카오리가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설마 첫 비행기 체험에서 추락하거나 그런 일은 안 일어나겠죠?” 그러자 그녀 옆에 앉은 하야시가 준비 되어있는 안대를 뒤집어쓰며 중얼 거렸다. “안 그래도 어제 늦게까지 작업해서 피곤해 죽겠는데, 재수 없는 소리하지 마.” “치.. 아무튼 팀장님 입에서 좋은 소리 나오는 걸 못 봤네요.” & 일본 나리타에서 미국의 라스베가스까지는 직항이 없었기에 중간에 LA 공항까지 장시간 비행을 감당해야했던 펜타곤 직원들은 비행기가 공중에 떠오르자, 각자의 가방에서 라온을 꺼내들기 시작했다. 사실 장거리 여행에서 게임만큼 시간 때우기 좋은 컨텐츠가 또 있을까? 나 역시 잠깐이나마 무료함을 덜기 위해 라온을 꺼내들자, 내 옆 좌석에 앉아 있던 군페이씨가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언제 봐도 라온은 참 간결한 디자인이군. 마치 게임 패드에 화면이 붙어 있는 것만 같아.”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면 강군은 휴대용 게임기를 디자인 하는 것에 대해 천재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군. 우리가 처음 만났던 신칸센에서도 나에게 겜보이의 아이디어를 전해주었지 않았는가...” 군페이씨는 가방에서 나와 함께 만들었던 휴대용 겜보이를 꺼내 보이며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 “시.. 심심해..” “그럼 나처럼 잠을 자.” “팀장님 지금 9시간 동안 자고 계시거든요? 사람이 그렇게 오래 잘 수 있는 건가요?” 뒤에서 들려오는 카오리와 하야시의 대화에 잠에서 깬 나는 굳게 닫혀 있던 창가의 슬라이드를 위로 올려 보았다. 눈부신 햇살에 잠시 얼굴을 찡그린 나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체크했다. 일본 시각으로는 저녁 11시 반. 하지만 해를 따라 이동 중인 비행기는 여전히 밝은 햇살 아래를 비행중이었다. “마실 것 좀 드릴까요?” 센스 있는 스튜어디스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 한잔을 부탁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푸석푸석하게 느껴지는 피부를 매만지며 고개를 돌려 군페이씨를 바라본 순간. “히익..!!” 마치 시체처럼 고개가 90도로 꺾여 자고 있는 그의 모습에 깜짝 놀란 나는 슬쩍 팔을 뻗어 군페이씨의 고개를 똑바로 고정 시켜주었다. 얼추 10시간은 날아온 거 같은데, 아직 멀었나? 아무리 퍼스트 클래스라 해도 미국행 비행기는 굉장히 지루하다. 살짝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안대를 쓰고 자고 있거나 다음 주말에 열리는 CES의 관련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 올해로 53세인 군페이씨 역시 CES 자료를 살펴보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지 손아귀에 서류를 쥔 채로 잠들어 있었다. 잠시 후. 나는 물을 가져온 스튜어디스에게 얇은 이불을 가져와 군페이씨에게 덮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자 그녀는 나를 향해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친절하시네요. 고객님. 같은 일행 분이신가요?” “전 직장에서의 상사였습니다.” 군페이씨와 함께 미국 시장을 잡아보겠다고 토이월드에 패밀리를 들고 찾아갔다가 문전박대 당하던 시절을 떠올린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밝은 햇살이 내비치는 창가를 바라보았다. “배고파요... 팀장님.” “너 기내식 먹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배가 고프냐?” “아...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시원한 녹차 아이스크림.” 뒤쪽에서 들여온 카오리의 목소리에 나는 문득 우리집 냉장고가 떠올랐다. ‘녹차 아이스크림... 넉넉히 사뒀었나?’ & -잠시 후. 우리 비행기는 라스베가스 공항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자리에 앉아 좌석 벨트를 착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으아~ 다 왔다.” 중간에 LA공항을 경유하여 장장 14시간만에 라스베가스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저마다 기지개를 켜며 굳어진 몸을 풀었다. 특히 카오리는 장시간 비행에 완전 녹초가 되었는지 하품과 함께 입을 열었다. “하암, 비행기가 이렇게 지루한 교통 수단일 줄이야...” 그러자 그녀 곁에 앉아 있던 하야시가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루? 네가 첫 비행기에 퍼스트 클래스를 타서 잘 모르나 본데, 이코노미에 타보면 생지옥을 경험할 걸...” 미야자키씨와 카오리는 하야시의 말에 고개를 갸웃 거렸지만, 비행기 착륙 후 이코노미 쪽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을 확인하곤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각자의 짐을 챙기고 비행기에서 내린 우리는 공항 입국 심사대에서 간단히 미국의 방문 이유를 설명한 뒤 공항으로 빠져 나왔다. “Mr. 강~!!” 입국 게이트를 통화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들려오는 윌슨 씨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엘리스와 함께 우릴 마중을 나온 그가 보였다. “윌슨씨.” 유키와의 결혼식 이 후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잠시 동안 재회의 악수를 나누려는데, 뒤에서 군페이씨와 시게씨가 인사를 건네 왔다. “그럼 우리도 가보겠네. CES 행사장에서 만나지.” “펜타곤에서도 여러 가지 준비 했겠지만, 이번에 우리 민텐도가 준비한 컨퍼런스는 만만치 않을 거야. 각오해라.” 자신있는 표정으로 입을 여는 시게씨의 표정에 나는 빙긋 웃어 보이며 답했다. “저희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오실 때 구심(일본의 청심환)이라도 하나 삼키고 오세요. 기절 할 수도 있으니.” “녀석. 배짱은 여전 하구나.” 시게씨는 가볍게 내 어깨를 두드리곤 군페이씨를 쫓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나는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를 재촉하는 엘리스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돌렸다. & 공항에 대기 중인 차량에 직원들이 오르자, 조수석에 탑승한 엘리스가 카와구치 대표에게 말했다. “호텔로 먼저 모실까요? 아님 행사장을 먼저 둘러보시겠어요?” 그러자 카와구치씨는 슬쩍 내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우선 행사장...” 까지 말한 뒤 슬쩍 주변 반응을 살피니 다들 시차 적응이 안 되었는지 퀭한 표정으로 카와구치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살려달라고 울부짓는 듯 한 그들의 표정에 할 수 없이 나는 카와구치씨와 눈짓으로 사인을 마쳤다. “호텔로 가죠.” “와아~ 사장님 최고예요. 감사합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일단 짐을 먼저 풀고, 저랑 대표님이 먼저 행사장을 둘러보는 게 좋겠네요.” “그게 좋겠네요. 행사장 규모는 우리가 체크해도 되니 직원 분들은 호텔에서 대기하고 계세요.” 그러자 어느 정도 나와 함께 펜타곤의 눈칫밥을 먹은 모리타와 하야시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섰다. “저희도 함께 가도록 하겠습니다.” 모리타와 하야시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리했다. “좋아. 그럼 팀장급들까지만, 나머진 호텔에서 대기.” “알겠습니다.” 시차 적응으로 피곤하긴 하지만, 행사장 규모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나는 조금 무리하기로 했다. 창가에 몸을 기댄 채 환락의 도시라 불리 우는 라스베가스의 석양을 바라보던 나는 하나 둘 켜지는 네온사인의 불빛에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강준혁 부장님.” “네. 엘리스씨.” “공항에 도착하시기 전에 롭에게서 전화를 받았는데, 부장님께서 부탁하신 담뱃갑 미션은 완료했다고 하던데, 그게 뭔가요?” 엘리스의 말에 내 옆에 앉아 있던 카와구치 대표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잘됐네요. 롭에게 수고했다고 전해주세요.” < EP. 33 : 국제 전자제품 박람회. (2) > 끝 < EP. 33 : 국제 전자제품 박람회. (3) > &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국제 전자제품 박람회.) 1967년 1회를 시작으로 해마다 열리는 이 행사는 라스베가스 컨벤션 센터나 힐튼 호텔에서 번갈아 가며 개최되었다. 올해의 개최 장소는 라스베가스 컨벤션 센터로 이미 전 세계 200여개의 회사에서 컨퍼런스 등록을 마쳐두었고, 관람객 역시 역대 최대급 규모가 될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설마 우리 펜타곤이나 민텐도 같은 게임 업체 때문에 이 많은 사람이 모이는 거라면 그것은 착각이 지나치다. 물론 NEGA에서 신형기기인 새턴을 CES에서 발표할거라고 공식적으로 밝혔기에 기대 중인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1994년의 CES에서 가장 주목 받는 품목은 바로 ‘휴대폰’이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휴대폰은 생각보다 상당히 역사가 깊다. 80대 초반에 사용된 드랜스 포터블 전화기는 무게가 무려 4kg에 육박해 어깨에 지고 다녀야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던 것이 그나마 손에 들고 다닐 만한 사이즈로 바뀐 게 88년에 모토로라에서 출시한 ‘TEC8000’이었다. 당시 240만원에 판매된 최초의 휴대폰은 771g으로 굉장히 무거웠다. 집어 던져도 웬만해서는 부서지지 않았고, 방수처리 기술까지 가지고 있어 물에 빠뜨려도 사용할 수 있었던 이 제품은 실제로도 취객이 휴대폰을 이용해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는 상해 사건도 많이 일어나 ‘흉기’로 취급 될 정도였다. 그랬던 물건이 92년에 모토로라에서 출시한 마이크로텍2 부터 플립을 달고 무게를 219g으로 줄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핸드폰의 기초가 되었다. 물론 이 제품도 당시 상황에선 어마어마한 고가 모델이었기에 기업인이나 사회 고위층이나 사용하는 한정 모델이었는데, 차츰 그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이 94~95년 딱 지금 시기부터였다. “부장님. 이번에 모토로라에서 새로 나온 휴대폰 보셨어요?” “응. 봤어.” 모토로라 전시장을 다녀온 카오리가 호들갑을 떨어대며 나에게 말을 붙였다. 최근 일본 통신사에서도 휴대폰의 보급화를 위해 기기단가를 무이자 할부로 진행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기본 통화료가 원체 비싼지라 미미한 수준에 그쳤다. 오늘은 CES의 행사 첫 날. 이 날은 일반 관람객은 출입이 허가 되지 않았기에, 주로 방송 관계자나 기업인들을 상대로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덕분에 드넓은 회장을 마음대로 다녀도 딱히 붐비거나 행사장 특유의 갑갑한 느낌이 없었다. 나 역시 오전 동안 천천히 행사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각 기업의 부스를 방문해보았다. 영어가 짧아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카오리와 미야자키는 이제 좀 행사장 분위기에 익숙해졌는지 새로운 물건을 볼 때마다 탄성을 지르며 달려가 담당자에게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하여 기기를 체험해보았다. “와~ 진짜 마치 미래에 와있는 것만 같아요. 여기서 본 것들이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 안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생각 하니 소름 끼치는데요.” 그녀들에게 이번 컨퍼런스는 미래 가전제품의 총 집합소 일지 몰라도 나에겐 마치 오래된 전자기기 박물관에 들어온 듯 한 느낌을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함께 감격해 줄 수 없다는 것이 좀 슬프긴 하네..’ 나는 그녀들을 데리고 그대로 행사장을 가로 질러 가장 끝 쪽에 위치한 게임 카테고리 전용 구역에 들어섰다. 이번 CES 행사에 참여한 비디오 게임 콘솔기업은 총 4군데였는데, 우선 가장 큰 부스는 현재 게임 업계 매출 1위를 달리고 있는 민텐도였다. 노란색 휘장으로 부스 전체를 가리고 있는 장막의 한가운데에는 도트로 표기된 물음표가 그려져 있어, 마치 슈퍼 마리지에 나오는 아이템 박스를 연상시켰다. 이미 미국 내에서도 민텐도의 입지가 굳건한 편이었던 터라 많은 사람들이 부스 주변에 몰려 있었다. “민텐도에서 깜짝쇼를 준비하고 있는 건가?” “설마 새로운 신형기기를 발표하려나?”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신문에서 읽었는데, 민텐도랑 센소니가 공동으로 새로운 콘솔을 만들고 있다는 기사를 본적 있어.” “아냐, 센소니가 새로운 민텐도의 저장 매체를 CD로 발표하고 나서 불화가 생겼다고 하던데?” “정말이야? 그럼 민텐도는 CD를 쓰지 않으려는 건가?” “뭐 컨퍼런스에서 공개를 해봐야 알겠지만, 현재까지 민텐도 쪽에선 신형기기에 대해 일체 답변을 안 하고 있으니...”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 주변을 둘러보니, 민텐도 부스와 가까운 위치에 센소니 부스가 세워져 있었다. 워크맨을 시작으로 AV기기와 방송장비. TV까지 영역을 확장해 나간 센소니의 브랜드 파워는 이미 세계 최고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거치형 콘솔과 TV는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콘솔기업이 모여 있는 부스 바로 옆에는 센소니와 더불어 미츠바시, 그리고 한국의 은성과 대후 같은 디스플레이를 전문으로 하는 기업 부스가 들어서 있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전자 제품 개발도 활발해진 탓에 국제 박람회에서도 종종 한국 기업들이 눈에 띄기 시작해 괜스레 반가운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한편 모든 게 비공개인 탓에 조용한 민텐도 부스와는 달리 NEGA 쪽 부스는 관람객들에게 상당히 반응이 좋은 편이었다. 작년 말에 아케이드 기판 ‘MODEL1’으로 제작된 ‘리얼 파이터’가 미국 시장에서도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오며 많은 인기를 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 끝내준다. 세상에 이런 3D 그래픽으로 게임을 해보게 될 날이 오다니...” NEGA 부스에서 리얼 파이터를 플레이 중인 유저가 감탄사를 내뱉으며 레버를 움직이고 있었다. 화면 안에 캐릭터는 플레이어의 조작에 따라 3D 공간을 빙빙 돌며 상대의 빈틈을 노렸고, 때로는 묵직한 한방으로 장외로 날려버리는 호쾌함에 옆에서 구경 중이던 사람들마저 열광케 했다. 일본에서 연말에 발매 될 예정인 NEGA 새턴은 리얼 파이터의 엄청난 인기 속에 본래는 출시 예정이 없었으나, 유저들은 새턴이 출시만 된다면 당연히 이 게임을 집에서 즐길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리얼 파이터는 새턴으로 출시 예정이 잡혀있지 않습니다.’ 라는 말을 꺼냈다간 유저들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일까? 새턴의 발매일은 94년 연말로 잡아 두었지만, 아직 가격과 동시 발매 타이틀은 아직까지 확실한 발표는 하지 않고 있었다. ‘뭐 내일이 되면 하기 싫어도 공개할 수밖에 없겠지...’ 나는 잠시 동안 NEGA 부스를 둘러본 뒤에 펜타곤 부스 쪽을 걸음을 옮겼다. 민텐도부스와 대칭으로 서 있는 펜타곤 소프트 부스는 민텐도와 마찬가지로 비공개 컨퍼런스를 준비 중이었다. 새하얀 장막으로 행사장을 가린 탓에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림자가 얼핏 스쳐 보였다. 휴대기기라는 이점을 등에 업고 북미 시장에서도 나름 선방 중인 라온은 이번 컨퍼런스에서 혹시 TV 거치기에 대한 발표가 나오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와아, 우리 쪽에서 사람들이 엄청 많아요.” “일본에만 있을 때는 몰랐는데, 미국에서도 라온의 인기가 굉장한데요?” 펜타곤 샵의 점장인 미야자키씨는 카메라를 들고 펜타곤 부스에 몰려든 사람들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아마도 일본으로 돌아가면 펜타곤 샵의 직원들에게 보여주려는 모양이었다. & 다음 날. 아침부터 컨벤션 센터로 몰려든 일반 관람객으로 인해 행사장 안은 금세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행사장의 모습에 살짝 부스를 열어 밖을 확인한 카오리는 새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우리에게 다가 왔다. “바.. 밖에 사람들이.. 엄청 모여 있어요.” 카와구치 대표와 함께 행사 진행을 체크 중이던 나는 카오리의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은 현재 이보다 더 큰 글로벌 행사가 없으니 관람객이 넘치는 게 당연하지.” 그러자 내 곁에 서있던 모리타가 내 말에 동의 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그렇긴 한데, 올해는 콘솔 쪽이 더욱 관심을 가지는 듯하네요. 아무래도 차세대 기종에 대한 소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진행하는 컨퍼런스는 오후 3시에 예정되어 있지?” “네. 일단 NEGA가 오전 11시에 프리젠 테이션이 예정 되어 있고, 민텐도가 오후 1시. 3DO가 오후 2시. 저희가 마지막으로 3시입니다.” “흐음. 일단 발표회 준비는 끝내 놓았으니, NEGA 쪽 상황을 좀 보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오후에 있을 발표회 준비로 긴장 되는지, 카와구치 대표는 짧게 숨을 들이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대리 사장을 세우니 이럴 때 참 편하단 말이지. 나는 행사 진행 서류를 모리타에게 넘겨 준 뒤, 부스 뒤쪽에 설치된 장막을 살짝 걷어내고 행사장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NEGA 부스 쪽으로 이동하기 위해 코너를 돈 순간. 바글 거리는 인파에 숨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카오리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것도 이해가 되네...’ 수많은 유저들과 함께 밤을 지새웠던 라온의 런칭 행사도 이 정도까지 사람이 모이진 않았는데... 카와구치 대표의 말대로 차세대 기종의 발표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까? 올해 CES는 일반 관람객 보다는 게이머들이 더 많이 찾아온 것만 같았다. “잠시 후 11시부터 NEGA 새턴에 대한 프리젠테이션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다시 한 번 알려 드립니다. 잠시 후 11시부터...” 안내 방송을 들으며 손목시계를 바라보니 시간은 어느새 10시 5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리얼 파이터의 흥행으로 차세대 게임이란 무엇인가를 톡톡히 보여준 NEGA는 비록 홈그라운드인 일본에서 슈퍼 패밀리에 밀려 ‘참패’를 기록했지만, 북미와 유럽 시장에서는 ‘소니크’ 덕분에 상당한 매니아 층을 확보한 상태였다. 나는 어렵사리 사람들 틈을 비집고 프리젠테이션이 진행되는 NEGA 부스 근처로 이동했다. 그리고 잠시 후. 살짝 어두워지는 조명 아래 NEGA의 대표 게임 디렉터 스즈키씨가 무대에 올랐다. “오오~!! 스즈키 류!!” 수많은 아케이드 게임 개발과 최초의 3D 격투게임을 구상한 그는 이미 민텐도의 쿠마모토 시게루씨와 같이 게임 산업의 한축 담당하는 최고의 디렉터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무대에 오른 것은 NEGA의 사장 야마나카 하야오였다. 간판 디렉터와 사장이 함께 진행하는 NEGA의 프리젠테이션은 스타트부터 굉장한 기대를 불러 일으켰다. 강력한 3D성능을 지닌 MODEL1 아케이드 기판을 토대로 ‘리얼 파이터’ 뿐만 아니라, ‘데이토나 3D’ 라는 혁신적인 오프로드 레이싱 게임을 발표하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대박이다!! 저건 진짜 대박이야.” “차세대 기종 전쟁은 NEGA가 제대로 준비 한 것 같은데?” “저런 그래픽을 집에서도 즐길 수 있는 건가!?” NEGA 유저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 속에 사장인 야마나카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 미소가 조금 딱딱하게 느껴지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한 것 분위기가 달아 오른 상태에서 사람들은 곧이어 발표 될 NEGA 새턴의 가격에 대해 매우 기대하기 시작했다. “대체 그래서 저게 얼마란 거지?” “전작인 NEGA 드라이브가 249달러였으니, 그 정도 가지 않을까?” “가정용 게임이라면 그 정도 가격이 적당하긴 하지.” 작년에 출시되었던 최초의 32비트 게임 3DO가 699달러라는 정신 나간 가격에 출시했다가 어마어마한 후폭풍을 맞은 걸 생각하면, 소비자들에게 가격 공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잠시 후 NEGA에서 준비한 홍보영상이 종료되고 야마나카 사장은 마이크를 손에 쥔 채 조심스레 무대 가운데로 향했다. CES에 방문한 유저들을 향한 짤막한 인사와 함께 그는 한 장의 종이를 펼쳐 들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신형 콘솔인 NEGA 새턴의 출시 가격은...” 드디어 다가온 운명의 순간... 옆에 있는 외국인의 침이 넘어가는 소리마저 들려올 정도로 고요함이 찾아오고, 드디어 야마나카 사장의 입이 열렸다. “399달러입니다.” “······.” 그와 동시에 회장안의 분위기가 굉장히 미묘해졌다. < EP. 33 : 국제 전자제품 박람회. (3) > 끝 < EP. 33 : 국제 전자제품 박람회. (4) > “399달러입니다.” “······.” 그와 동시에 회장안의 분위기가 굉장히 미묘해졌다. 엔화로 따지면 44800엔. 아이들이 즐기는 가정용 콘솔치고는 상당히 비싼 금액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NEGA 새턴은 기획초기만 해도 이렇게까지 비싼 콘솔은 아니었다. 새턴의 모태라 할 수 있는 NEGA CD의 참패 원인이 비싼 가격과 로딩이었다는 점을 감안한 개발자들은 극한의 2D 기능을 표현할 수 있는 스프라이트 머신을 비교적 적당한 가격 선에 만들어 냈다. 하지만, 불행히도 폴리곤을 이용해 3D 게임의 가능성을 보여준 ‘리얼 파이터’의 인기 덕분에 게임 산업에 판도가 바뀌어버렸다. 리얼 파이터를 즐겨본 게이머들은 정식 발표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리얼 파이터’가 새턴으로 이식 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갈수록 부풀어 오르는 유저들의 기대치에 야마나카 사장은 새턴의 출시를 1년여 남겨두고 기술 개발자들을 불러 모아 과제 하나를 내려주는데, 그것은 바로 ‘새턴에서 리얼 파이터를 돌아갈 수 있게 만들어라.’ 였다. 이것은 차라리 ‘기계를 다시 만들어라’ 보다 더 흉악한 명령이었다. 남은 개발 기간은 1년 남짓한 상황.. 한정된 자원에서 새로운 칩을 생산해낼 시간이 부족했던 개발자들은 굉장히 단순 무식한 방법으로 새턴의 성능을 끌어 올렸다.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새턴의 추가된 3D 성능을 보완하기 위해 동일 CPU 두개 때려 박기. 굉장히 심플한 해결책으로 보이지만, 이 방식은 새턴의 생산 단가를 뻥튀기 시키며 개발자들에겐 굉장히 난해한 개발 환경을 안겨주었다. 내가 알던 미래에야 듀얼 CPU를 넘어서 쿼드 CPU까지 생산이 되었지만, 그것은 CPU 칩 안에 이미 알고리즘이 포함되어 있으니 상관없었지만, 이 시대의 듀얼 CPU는 말 그대로 CPU가 두 개 붙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NEGA는 새턴 게임을 개발 중인 서드 파티에게 ‘처리할 연산을 각 CPU에 나눠주기만 하면 된다.’ 라고 설명했다. 이게 말이 쉽지. 각각 CPU의 싱크를 맞춰주는 건 웬만큼 개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상급 프로그래머에게도 힘든 과제였다. 한쪽 CPU가 연산을 끝 마쳤어도 다른 한쪽의 연산 작업이 아직 남아 있으면 전체적으로 프로그램이 딜레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역시 최악의 한 수는 주로 최고 경영자의 욕심에서 튀어 나오는 법이지.’ 나는 피식 웃음을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한편 야마나카 사장은 새턴의 가격 공개와 동시에 싸늘해진 유저들의 반응을 끌어올리기 위해 앞서 선보인 리얼 파이터와 데이토나 3D는 새턴의 런칭과 동시에 발매될 거라고 서둘러 덧붙였다. 그러자 유저들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분명 399달러는 유저들이 예상한 것보다 높은 가격이지만, 리얼 파이터를 가정에서 즐길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확답을 얻은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참고 넘어가려는 분위기가 형성 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야마나카 사장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나를 알아본 스즈키씨의 두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그리고 곧장 사장에게 귓속말을 넣었다. 아마 나에 대해 야마나카 사장에게 언질을 하는 모양인데, 이렇게 많은 유저들 앞에서 나를 무시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어딘가에서 나를 알아본 한 유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나 저 사람 잡지에서 본 적 있어.” “누군데?” “펜타곤 소프트 소속 직원인데, 그 전에는 민텐도에서 슈퍼 패밀리를 만들고 펜타곤으로 넘어와서는 라온을 만들었다더라.” “엄청나네. 그럼 저 사람 콘솔 개발자인거야?” “콘솔 개발자겸 게임도 만들고 있지. 드래곤 엠블렘의 메인 디렉터에 내가 없는 거리도 저 사람이 만들었다더라.” 역시 이 정도 규모의 행사이다 보니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한 두 명 정도는 있구나... 하지만 어딘가에서 들려온 한 유저의 목소리가 나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엄청 하드코어한 게임만 만들어서 변태 같이 생겼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평범하네...?” ... 변태 같이 생긴 건 대체 어떻게 생긴 거지? 순간 ‘목에 노란 수건을 둘러맨 츄리닝 차림의 아저씨’가 떠올랐지만, 그건 그냥 잊어버리기로 하자.. “흠... 질문이 있으십니까?” 야마나카 사장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떼었다. “지금 보여주신 리얼 파이터의 플레이 화면은 아케이드용입니까? 아니면 실제로 새턴에서 구동한 영상입니까?” 그 순간 야마나카 사장과 스즈키 씨는 미간을 좁히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 보였다. 지금 저들의 시선에 내가 얼마나 얄밉게 비춰지고 있을까? 하지만 나의 질문에 주변에 있던 유저들까지 웅성이기 시작하자, 스즈키씨는 할 수 없이 질문에 응했다. “현재 보여드린 리얼파이터의 홍보 영상은 아케이드용입니다. 현재 새턴용 리얼파이터는 아직 개발 중입니다. 하지만 완벽 이식을 위해 리얼 파이터를 만든 VM팀 전원이 열심히 작업에 임하고 있으니,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그래. 나도 저 말을 믿고 새턴을 샀었지... 하지만, 내가 플레이 해본 새턴용 리얼 파이터는 ‘완벽 이식’ 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나 멀었다. 풀 폴리곤을 사용하지 못해 배경은 2D 텍스쳐 한 장을 붙여 놓았고, 캐릭터 역시 부족한 3D 성능을 끌어 쓰다 보니 조작 중에 그래픽이 깨지거나 아케이드 버전과는 달리 굉장히 지저분하게 느껴졌다. 그때 느꼈던 배신감이란... 안 그래도 정가가 자체가 비싼 가격에 책정 되었던 터라 새턴은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당시 보따리장수들로부터 약 6~70만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이 형성 되었다. 어떻게든 정을 붙이고 플레이 해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참아줄 수 없었던 나는 결국 그로부터 몇 달 후 새턴을 팔고 기어 스테이션으로 교환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NEGA의 신작 발표는 기존에 아케이드용으로 발표한 게임들의 대부분을 이식하는 정도에서 그쳤다. 그것에 대해 CES에 참석한 유저들은 다소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래도 차세대 기종이다 보니, 그에 걸 맞는 퍼포먼스를 보여줄 만한 신작이 발표될 거라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게임은 고사하고 기기부터 다시 만들고 있는 시기에 신작 발표는 현재의 NEGA로선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하지만 CES의 컨퍼런스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현재 게임계의 제왕이라는 민텐도의 컨퍼런스가 오후 1시부터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지. 또한 센소니와 합작으로 만들어 지고 있는 소문의 프로젝트의 진상을 알 수 있게 될 거라는 생각에 유저들은 식사조차 거르고 민텐도 컨퍼런스에 모여들고 있었다. “역시 민텐도가 이름값 하나는 끝내주네요.” 행사 준비를 마쳤는지 모리타와 하야시. 그리고 카와구치 대표가 어느새 내 곁에 다가와 있었다. 나는 NEGA의 발표회를 놓친 그들에게 간단하게 내가 느낌 소감을 전해주었다. “NEGA는 준비가 조금 미흡했던 것 같아요. 차세대 기종인 새턴의 실기 영상조차 없었고, 가격 역시 유저들의 예상을 넘어서는 바람에 다소 싱겁게 끝난 느낌입니다.” 내 말을 전해들은 카와구치 대표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되물었다. “정식 발매까지 약 3개월 정도 남지 않았나요? 그 정도라면 새턴의 홍보를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실기를 보여줄 만도 할 텐데, 뭔가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는 걸까요?” “글쎄요. 거기까진 저도 모르겠군요. 내부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민텐도에 대한 견제일 수도 있고...” 카와구치 대표는 팔짱을 낀 채로 민텐도 부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다가오는 차세대 전쟁에 민텐도는 센소니와 함께 어떤 카드를 꺼낼지가 궁금하군요.” “일단 간단하게 식사나 하고 올까요?” 나의 의견에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배가 고팠는데,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 “며칠 째 행사 준비로 핫도그만 먹으니 이것도 물리네요. 밥 먹고 싶다. 밥!!” 겨자소스를 충분히 바른 핫도그를 한입 베어 물은 하야시가 투덜거리며 콜라를 삼켰다. 그러자 곁에 있던 모리타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왜?? 나는 좋기만 한데?” “너는 타고난 인스턴트 체질이잖아. 난 며칠 동안 밀가루 음식만 먹었더니, 소화가 안돼서 죽겠다.” 오늘로 미국에 온지도 10일째 슬슬 이런 불만이 나올 법도 하지. 오랫동안 인스턴트로 단련된 우치무라와 모리타를 제외하고는 다들 집에서 해먹는 밥이 그리운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유키가 해준 음식이 좀 그립긴 하네...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펜타곤 부스에 핫도그를 사들고 돌아오니, 정장을 차려입은 롭이 나를 반겼다. 덥수룩한 수염 역시 말끔히 정리한 그는 내가 알던 롭과는 이미지가 너무나 달랐다. “너, 롭 맞지?” “그래. 인마. 그런데 말이야. 내가 꼭 프리젠테이션까지 해야 되겠냐?” “네가 만들었으니, 당연히 구조 설명은 네가 해야 하지 않겠어?” “이런 자리를 나가보는 건 처음이라 그런지, 무지하게 떨리네...” “걱정할 거 없어. 그냥 너는 우리가 만든 VRAM 칩에 대해 스펙만 말해주면 돼. 나머진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퍼포먼스 영상은 준비 했지?” 롭은 나의 물음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 오후 1시. 띠링~!! 슈퍼 마리지가 코인을 먹을 때 울리는 효과음과 함께 드디어 민텐도 부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오~!!” 민텐도의 프리젠테이션을 위해 미국지사장인 야마시타씨와 시게씨가 함께 무대에 오르자, 부스 주변에 모여든 사람의 함성이 회장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NEGA의 컨퍼런스에 실망한 만큼 민텐도에서 그것을 보상 받으려는 심리가 더욱 크게 작용한 모양이었다. 슈퍼 마리지의 아버지인 쿠마모토 시게루는 유저들의 함성이 잦아들 때까지 웃으며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야마시타씨의 모습에 나는 회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박수를 보내 주었다. “국제 전자제품 박람회에 찾아오신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10년 전 미국에 패밀리를 발매할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게임 시장이 커지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저희 민텐도는 그동안 패밀리에서 슈퍼 패밀리로 한 세대를 거쳐 오며 여러분에게 보다 즐겁고 유쾌한 게임을 전해 드리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야마시타씨는 미리 적어둔 환영 인사말을 건넨 후에 작게 숨을 들이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금. 시대는 또 한 번의 변화를 맞이하려 합니다. 바로 저희 민텐도가 만들어낸 새로운 콘솔로 말이죠. 흠... 많은 분들이 16비트 게임 시장의 다음은 32비트 시장이라 예상하곤 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것이 틀린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야마시타씨의 연설에 회장 안에 모인 사람들은 점점 그의 언변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군가는 그보다 한발 앞서서 생각해야 합니다. 16비트의 다음이 꼭 32비트 일 필요는 없죠.” 야마시타씨의 자신만만한 미소에 유저들의 입에서 ‘설마.’ 하는 탄성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동안 이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센소니와의 협력으로 새로운 차세대 기종을 개발하던 중. 저희는 여러분이 원하는 진정한 게임의 매체는 CD가 아니라고 생각 했습니다. 게임은 항상 직관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선 CD는 터무니없이 느린 매체라는 것을 깨달았죠. 우리는 선택해야만했습니다. 거액의 자본을 들여 센소니와 공동 개발한 프로젝트를 포기하면서 까지 우리는 여러분이 원하는 게임. 그 이상을 만들겠다고...” “오오오!!!”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민텐도의 차기 콘솔은 64비트 체제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여러분께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게임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EP. 33 : 국제 전자제품 박람회. (4) > 끝 < EP. 34 : 티라노 사우르스. (1) >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민텐도의 차기 콘솔은 64비트 체제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여러분께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게임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와아아아!!!!” 한 세대를 뛰어넘겠다는 야마시타 지사장의 발언에 유저들로부터 회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미 32비트 세대에서 리얼 파이터를 경험해 본 유저들은 그 이상을 보여주겠다는 야마시타의 발언은 그만큼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뭐야? 그럼 민텐도는 다시 독자 노선을 타는 건가?” “64비트 콘솔을 위해 센소니와의 공동 개발 프로젝트를 포기했다고 했으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64비트 때문이 아니라 CD라는 저장 매체를 포기한 게 맞는 표현이겠지.. 하지만 지금 이곳에 모여있는 유저들에게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사실 이 때까지만 해도 CD를 이용해 성공한 콘솔이 하나도 없었거니와 NEGA CD의 대실패로 인해 광디스크 매체에 불신만 쌓인 상태였기에 어떻게 본다면 롬 카트리지의 선택한 민텐도의 선택이 옳다고 느끼는 유저들도 있었다. 친구끼리 CES를 구경하러 왔는지 내 앞에 있는 미국인 친구도 환호하는 표정으로 야마시타 씨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맞는 말이야. 나도 차세대 매체라고 해서 사용해 봤는데, 무슨 게임 한판 할 때마다 10초씩 걸리더라. 무슨 커피한잔의 여유도 아니고...” “진짜 그 정도야?” “말도 마. NEGA CD로 소니트 몇 판 하다가 성질이 나서 그냥 꺼버렸지...” “역시 민텐도가 게임에 대해선 빠삭하구나..” “아무튼 난 카트리지를 계속 이용하는 것에 찬성이야.” 센소니에게는 단 한마디의 사과도 없이 굉장히 스무스하게 발표된 프로젝트 64는 발매이후 모든 게임에 대해 3D를 도입할 거라는 당찬 포부와 함께 무대 뒤에 설치된 스크린에 거대한 슈퍼 마리지의 얼굴을 띄웠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탄성이 새어 나왔다. “허억... 지저스 크라이스트!!” 모든 것이 3D로 표현된 붉은 모자를 뒤집어 쓴 콧수염난 이탈리아인은 동그란 눈으로 유저들을 바라보며 ‘맘마미아’를 외쳤다. 리얼 파이터에서 보았던 어설픈 텍스쳐가 아닌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은 마리지의 얼굴은 표정까지 그려내고 있었다. 유저들의 반응에 시게씨는 흡족한 미소를 띄우며 설명을 덧붙였다. “보시다시피 완전히 3D로 표현된 마리지의 얼굴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캐릭터의 감정까지도 전달 할 수 있는 프로젝트 64 성능의 일부분이라고 말씀 드릴 수 있겠습니다.” “끝내준다.” 3D로 표현된 슈퍼 마리지의 등장은 다소 미지근하게 느껴졌던 NEGA의 컨퍼런스에 대한 기억을 한 큐에 날려 보냈다. 그리고 한눈에 보기에도 자신들이 만들어낸 차세대 기종보다 월등히 뛰어난 성능을 보여주는 프로젝트 64의 발표에 야마나카 사장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NEGA 입장에서 민텐도는 언제나 따라잡았다 싶으면 멀찌감치 도망가는 얄미운 존재였다. 그리고 그 패턴은 이번에도 똑같이 유지 되었다. “준혁씨... 이거 어째 분위기가 너무 달아오르는데요?” 환호하는 유저들의 반응에 카와구치 대표가 얼굴을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카와구치 대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아직 우리 쪽 컨퍼런스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회장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개발 중이었던 프로젝트를 갈아엎은 이상 민텐도가 발표한 프로젝트 64는 빠른 시기에 출시 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잠시 후. 내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야마시타 이사장은 새로운 슈퍼 마리지 시리즈에 대한 홍보를 마친 뒤 프로젝트 64는 1995년 연말 출시를 예고한 것이다. 아직 1년 이상 기다려야한다는 발표에 유저들은 약간 실망한 기색을 보였지만, 슈퍼 마리지의 퀄리티가 워낙에 뛰어났던 탓일까? 어느 정도 수긍하는 분위기 속에 차세대 기종의 발표회를 마쳤다. 하지만 민텐도의 컨퍼런스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뒤이어 ‘포켓 몬스터볼’ 이란 제목의 게임을 발표하며 그와 동시에 더 작고 가벼운 ‘휴대용 겜보이 포켓’을 함께 발표한 것이다. 이것은 프로젝트 64의 출시가 뒤로 밀려난 것에 대한 차선책이 분명했다. 새로운 ‘겜보이 포켓’은 기존의 무겁고 둔탁한 형태에서 가볍고 슬림한 형태로 변화되었다. 액정 또한 누런색에서 흑색으로 바꾸어 가독성을 향상 시켰기에 새로운 ‘겜보이 포켓’은 외관만 놓고 봐서는 라온과 크기와 무게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물론 내부 성능에선 차이가 꽤나긴 하지만... 야마시타 사장의 바톤을 이어받아 무대에 올라온 군페이씨는 새로운 겜보이의 장점을 열거하며 자연스럽게 유저들의 관심을 이끌어 냈다. 특히 신 모델과 함께 발표한 ‘포켓 몬스터볼’이 아이들에게 어마어마한 반응을 이끌어 냈다. 얼핏 보기엔 우리 펜타곤에서 만든 타마고 몬스터와 비슷해 보이지만, 단지 몬스터를 육성해 서로 싸우는 것과는 달리 RPG 형식의 스토리 라인을 따라가며 몬스터를 포획해, 동료로 만드는 시스템은 유저들에게 또 다른 흥미요소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와, 저거 재밌겠다...” “타마고 몬스터랑 비슷해 보이는데, 별도의 단말기 없이 겜보이 만으로 즐길 수 있는 거구나...” “몬스터 종류가 151종이라니, 수집 요소도 충분한데?” 비록 프로젝트 64의 발매일은 멀었지만, 새로운 겜보이와 포켓 몬스터볼은 당장 다음 달부터 출시 될 것이라는 발표에 유저들은 환호의 박수를 보내주었다. 만족스럽게 프리젠테이션을 끝낸 군페이씨는 꽤나 멀리 떨어져 있던 나를 향해 살짝 윙크를 날리며 미소 지어보였다. 그것은 나쁜 의미라기 보단 함께 겜보이를 만들었던 전 동료에 대한 감사의 제스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짝짝짝짝~!! 제법 만족스러운 컨퍼런스 내용에 발표자인 군페이씨가 무대 뒤로 사라졌음에도 박수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과연 2년 뒤의 미래에서도 이 박수소리를 계속해서 들을 수 있을까?’ 나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으며 민텐도 부스에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다음 컨퍼런스는 3DO차례인가? 하지만 3DO는 별로 기대할만한 기종은 아니었다. 물론 32비트 게임시장의 포문을 열은 기념비적인 콘솔이긴 하지만, 그게 전부라고 해야 하나? 사실 3DO는 개발 초기에 세간에 큰 관심을 불러 모은 기종이었다. 왜냐하면 3DO를 기획한 니들과 미칼은 90년대 초반 ‘아타리 링스’ 라는 휴대용 게임을 만들어낸 경력이 있고, 그 경력을 바탕으로 32비트 CPU와 CD-ROM을 장착한 차세대 콘솔을 처음으로 고안해낸 실력파 엔지니어들이었기 때문이다.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다가 냅킨에 휘갈겨쓴 신모델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니들과 미칼이 최초로 찾아간 회사는 다름 아닌 NEGA였다. 당시 NEGA의 미국지사장은 니들과 미칼의 기획서를 굉장히 긍정적으로 생각해 일본 본사에 연락을 넣었다고 한다. 하지만 야마나카 사장의 대답은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 당시에 NEGA 드라이브는 ‘소니크’로 인해 북미와 유럽시장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가던 중이었기에 괜한 차세대기기의 소문으로 판매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기에 때문이다. 또한 센소니에서 CD-ROM 기술을 도입해 새턴의 초안도 기획하던 때이기도 하고... 여차저차 여건이 따라주지 않았던 두 공돌이는 이번엔 미국 최고의 게임 회사인 AE사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트립 호킨스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당시 AE사의 회장이었던 호킨스는 두 공돌이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AE 회장 자리를 내차고 3DO를 설립했다. 3DO는 일반 게임기 치고는 조금 기괴한 형태로 제작이 들어갔는데, 그것은 3DO 자체에서 콘솔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전제품을 만들어 내는 기업에게 수주를 맡기고 차후에 수익을 분배하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일까? 각 제조사에 따라 3DO의 디자인이 천차만별이었는데, 그중에는 한국의 ‘은성’도 3D 얼라이브라는 이름으로 콘솔제작에 참여했다. (디자인은 각 업체 중 최악이었다.) 트립 호킨스는 자신의 3DO사업이 게임 시장에 어마어마한 혁명을 가져다 줄 것이라 믿었다. 왜냐하면 3DO는 단순한 게임기가 아니라, VCD를 이용해 동영상 플레이까지 가능하게 제작 되었기에 VHS (비디오 테이프) 시장이 망하면 시장의 흐름은 당연히 VCD가 가져올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3DO를 게임기가 아닌 가정용 멀티미디어 기기라고 생각한 호킨스는 작년에 3DO를 발표하면서 콘솔 가격을 699달러에 붙였다. 그러자... 아무도 3DO를 사지 않았다. 게임기도 아니고, 동영상 플레이어도 아닌 어중간한 기기를 그 가격에 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신기기랍시고 무조건 게거품 물고 구입할 만큼, 소비자들도 바보는 아니었던 거지... 아무튼 3DO 발매 후 1년이 된 오늘 호킨스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새턴과 민텐도의 프로젝트 64가 발표된 시점에서 3DO의 운명은 이미 결정이 난 듯하지만,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3DO의 컨퍼런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저 사람은 무슨 세상의 온갖 불행을 전부 지고 있는 표정이네...” 컨퍼런스 시작 전. 무대장치와 마이크를 점검하고 있는 호킨스의 표정을 살핀 하야시가 중얼거렸다. “그럴 만도 하지. 잘나가는 AE 회장 자리를 박차고 나왔는데, 일이 더럽게 꼬여가고 있으니.” 카와구치 사장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의 했다. “아마 이번 CES에서 파격적인 가격 인하가 있을 거라는 루머가 돌더군요. 하지만 과연 그게 유저들한테 통할지가 의문이네요.” “최근에는 3DO의 보급량이 너무 낮아 AE에서도 독점 게임 출시를 꺼려하고 있다던데, 그렇게 되면 자신이 키운 자식한테까지 뒤통수를 얻어맞는 꼴이니...” “단지 기기 고 스펙이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 다는 단적인 예이죠.” 그리고 잠시 후. 트립 호킨스 사장은 목을 가다듬으며 3DO 컨퍼런스의 시작을 알렸다. 하지만 민텐도의 컨퍼런스가 끝난 뒤 행사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늦은 점심식사를 하려는지 여기저기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유저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 받고 있는 3DO의 컨퍼런스는 그렇게 쓸쓸하게 시작되었다. “안녕하십니까. 3DO의 대표 트립 호킨스입니다. 3DO는 지난해 32비트 게임 시장의 첫 포문을 열며 지금까지 코어 유저님 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다소 높게 설정된 기기 가격으로 인해 라이트 유저님들의 진입 장벽에 높다고 느낀 바... 이번에 저희 3DO에서는 과감한 가격 혁명으로 여러분에게...” 하지만 트립 호킨스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센소니에서 새로운 콘솔기기에 대한 컨퍼런스를 시작한데!!” 어디선가 들려온 한 유저의 외침에 그나마 부스 앞에 모여 있던 4~50명의 유저들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뭐라고!?” “센소니가 게임 콘솔을!?” “우와아아아~!!” 갑자기 센소니 쪽으로 몰려가는 유저들의 반응에 호킨스씨는 당황했는지, 말을 버벅이기 시작했다. “그... 과감한.. 가격 혁명인데...”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뭐 결과만 살짝 알려준다면 호킨스씨는 3DO의 가격을 499달러까지 낮추었지만, 여전히 개념이 출타한 가격으로 인해 차후에 발매된 새턴과 기어스테이션의 원투 펀치를 맞고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졌다나? 한편의 깜짝쇼를 방불케한 센소니의 차세대 콘솔 발표는 굉장히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센소니의 부스 앞에는 어느새 수많은 유저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콘솔 게임을 처음 발표하는 센소니가 이토록 수많은 유저들을 모은 데에는 국제 시장에서 통하는 브랜드 파워와 민텐도와 함께 공동 개발 중이었던 ‘기어 스테이션’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카와구치 대표는 다음 컨퍼런스의 준비로 인해 함께 자리하지 못했지만, 모리타와 하야시는 폭발적인 유저들의 반응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센소니가 게이머들에게 이렇게 인기 있는 회사였나요?” 모리타의 질문에 하야시가 무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니 그것보단 브랜드 파워인거지. 가전 제품 부분에선 콘솔만 제작하는 민텐도 보다 훨씬 더 높은 글로벌 기업이니까.” 나는 하야시의 말에 동의 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무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새하얀 스포트라이트가 내리 꽂히는 조명 아래 한 남자가 회색 빛깔의 기기를 들고 서있었다. “저건 설마!? 차세대 콘솔이 벌써 완성된 걸까요?” 하야시의 질문에 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센소니 정도의 기술력이라면 어느 정도의 노하우만으로도 단숨에 기기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유저를 향해 미소 짓고 있는 쿠라카기씨.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회색 빛의 물건은 분명 내가 알고 있던 기어 스테이션 이었다. < EP. 34 : 티라노 사우르스. (1) > 끝 < EP. 34 : 브라키오-♪ 사우르스~♬ (2) > 유저를 향해 미소 짓고 있는 쿠라카기씨. 그리고 그 손에 들려 있는 회색빛의 물건은 분명 내가 알고 있던 기어 스테이션 이었다. “세계인이 함께하는 뜻깊은 이곳에서 여러분들께 센소니가 만들어낸 첫 번째 콘솔을 소개하게 되어 매우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예상치 못한 깜짝 발표에 기어 스테이션을 들고 있는 쿠라가키씨에게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이기 시작했다. 정말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전개. 민텐도에게 버림받은 센소니가 이렇게나 빨리 콘솔 시장에 진입할 줄이야. 하지만 누구보다 충격을 받은 이는 NEGA의 나카야마 사장이었다. 준비가 조금 미흡하긴 했지만, NEGA의 전략은 32비트 시장에 빠르게 뛰어 들어 민텐도 보다 먼저 시장을 선점하려 했는데, 설마 센소니에서 실기기를 들고 발표회장에 나올 줄이야... 쿠라카기씨는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 기어 스테이션을 카메라를 향해 흔들어 보이는 여유까지 부리고 있었다. “먼저 기어 스테이션을 성능을 소개하기 전에 기기 개발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민텐도’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실 기어 스테이션은 민텐도와 공동으로 준비 중이던 프로젝트 명이었습니다만, 민텐도와의 인연을 생각해 기기 명칭으로 그대로 가져다 쓰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민텐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쿠라카기 켄타로... 그는 만능 엔지니어라 불리 우는 그는 현시대에서 내로라하는 엔지니어들이 모인 센소니의 개발부서에서도 단연 톱클래스에 위치한 뛰어난 인재였다. 그는 80년대 당시 자신의 아들이 민텐도에서 만든 패밀리를 즐겁게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고 앞으로 센소니가 가야하는 길이 게임이라 확신했다. 성질이 급했던 그는 자신의 계획을 곧장 실행에 옮기며 슈퍼 패밀리에는 사운드 칩을 NEGA에는 CD-ROM 기술을 전파해주었다. 그렇게 그가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황당한 짓거리를 해도 마냥 내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가진 뛰어난 실력 덕분이었다. 결국 센소니의 회장인 오우가 노리오는 쿠라카기에게 그렇게 자신 있다면 한번 해보라는 식으로 프로젝트를 실행 시켰고, 그렇게 민텐도와 센소니는 ‘기어 스테이션’이라는 이름 아래 차세대 기기의 개발을 서둘렀다. 하지만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이 두 회사의 관계는 순탄치가 않았다. 왜냐고? 그야 각자 사용하고 싶어 하는 저장 매체가 달랐으니까... 민텐도에게 있어 롬 카트리지는 많은 수익을 가져다주는 매력적인 저장 매체였고, 센소니는 CD-ROM을 이용해 현재 민텐도가 얻고 있는 카트리지 제작에 대한 로열티를 자기네 쪽으로 돌리길 원했거든... 저장 매체를 무엇으로 정하느냐에 따라 두 회사의 이익 구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에 민텐도는 절대로 롬 카트리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게임이라는 매체에 있어선 민텐도가 센소니 보다 10년 정도는 앞서있는 상태이기에 함부로 억지를 부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쿠라카기씨는 오랜 기간 동안 직접 카마우치 사장을 만나 CD라는 매체가 가져다주는 장점에 대해 피력하며 그의 생각을 돌리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쿠라카기는 엔지니어로서의 실력도 뛰어 났지만, 그에 못지않은 화술도 겸비하고 있었기에 카마우치 사장을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저장 매체에 대한 로열티는 적정선에서 센소니와 타협을 보았다. 그렇게 민텐도의 차세대 기기의 저장 매체가 CD 쪽으로 기울어지는가 싶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NEGA CD가 발매되었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발매 직후 처참하게 망했지... CD 매체의 완전한 실패를 직접 두 눈으로 지켜본 카마우치 사장은 차세대 기종의 저장 매체를 다시 롬 카트리지로 정해 버렸다. 쿠라카기에게 있어선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지만, 이미 완전히 마음이 돌아선 카마우치 사장을 설득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선 잘 모르는 이도 있겠지만, 슈퍼 패밀리의 하단 부분을 살펴보면 의미를 알 수 없는 슬롯이 하나 달려있다. 그리고 이 비어있는 슬롯으로 인해 쿠라카기가 얼마나 치밀한 인간인지를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차후 슈퍼 패밀리를 센소니에서 만든 CD-ROM과 연결하기 위한 예비 슬롯이었다. 아직 기어 스테이션의 프로젝트가 제대로 성사 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던 그 시절에 그는 이미 차세대 콘솔의 전쟁에 센소니를 참전 시킬 예정이었다. (물론 이 작전도 MEGA CD 덕분에 프로젝트가 공중분해 되었지만...) 그리고 지금...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민텐도의 프로젝트 64 컨퍼런스가 종료됨과 동시에 센소니는 곧바로 완전히 새로운 차세대 기종을 발표했다. “뭐지? 설마 저거 센소니에서 만든 차세대 기종인가?” “그... 그런 거 같은데?” “와.. 진짜 환장하겠네. 올해 CES 중에서 가장 소름 돋는 순간이다. 사전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당장 컨퍼런스에 실물을 들고 나타났으니, 게이머들의 반응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과연 세계에서 손꼽히는 글로벌 기업이라 그런지 마케팅 실력 하나는 끝내주는 구나.. 모리타와 하야시 역시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입을 크게 벌리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들 그리 넋이 나갔어?” “그.. 그런 부장님은 왜 이렇게 태연하세요? “이 정도는 당연히 예상했으니까. 설마 센소니가 민텐도한테 까였다고 ‘네. 알겠습니다.’ 하고 물러설 만큼 호락호락한 기업도 아니고, 안 그래?” “그거야, 그렇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빨리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만큼 자존심이 상한 거겠지.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통하는 몇 안 되는 기업인데, 민텐도한테 뒤통수를 맞고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냐.” 민텐도의 카마우치, NEGA의 야마나카, 센소니의 오우가는 모두 굉장히 다혈질에 극단적인 성격의 보유자였다. 한 마디로 지고는 못사는 성미인거지... 보통 유명한 정치인이나 CEO의 성향은 고집이 세고, 주변인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경향이 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위에 열거한 세 명 역시 그런 부류에 속하는 자들이었으니 오죽 하겠는가? 처음에는 기어 스테이션 프로젝트에 대해 미적지근하게 반응하던 오우가 회장은 민텐도의 일방적인 계약 파기에 대해 회의실에서 불같이 화를 내었다는 이야기는 꽤나 유명하다. 마치 시집보냈던 딸이 파혼 당하고 돌아온 듯 한 찝찝한 기분에 오우가 회장은 독자적으로 기어 스테이션을 개발하는 것에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얼마를 들이든 상관없다. 업계 최고의 콘솔을 만들어라.’ 이것이 오우가 회장의 오더였고, 쿠라카기는 오우가 회장을 등에 업고, 평사원에서 센소니 컴퓨터 엔터테이먼트 사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쿠라카기는 카메라의 플래시 세례를 충분히 받고 나서야 천천히 마이크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저희 센소니에서 개발한 기어 스테이션은 현존하는 모든 게임 콘솔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성능을 자랑합니다. 그리고 그 성능을 바탕으로 여러분에게 새로운 경험을 안겨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제가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여러분에게 기어 스테이션이 최고라고 말씀 드리는 이유는 이 안에 들어가 있는 R3000A이라는 초고속 연산 장치 때문입니다. 단순히 모델명으로만 설명을 드리면 잘 모르실 것 같아, 추가 설명을 드리자면 R3000A는 최고급 업무용 컴퓨터인 ‘워크 스테이션’에서 사용하는 CPU입니다.” “어억!! 워크 스테이션용 CPU라고!?” “말도 안 돼. 어떻게 가정용 게임기에 워크 스테이션 CPU를 박을 생각을 했지?” “역시 센소니가 대 기업은 대 기업이네. 부품 사용에 자비가 없구나...” 현존하는 최고급 CPU를 사용했다는 말에 센소니 부스에 모여든 유저들은 경악하였지만, 반대로 NEGA와 민텐도 쪽 직원들은 발표된 CPU 모델명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이어서 쿠라카기씨는 기어 스테이션에 사용된 3D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현재 게임 시장은 10년 전과 달리 또 다시 큰 변화를 맞이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폴리곤이라는 3D 기술의 도입이죠. 기어 스테이션은 개발 초기부터 게임 시장의 변화를 직감하고 3D 성능을 극대화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 결과물입니다.” 카아앙!!! 쿠라카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무대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며 화면에 타이틀 명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타이틀을 보자마자 입가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이야, 저거 진짜 추억 돋네...’ -투신전.- 얼핏 NEGA에서 만든 ‘리얼 파이터’ 와 비슷한 그래픽이지만, 캐릭터마다 고유의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격투 게임 투신전은 초기 3D 대전 게임의 3대장이라 불리 우는 타이틀이었다. 비록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특유의 게임성을 잃어 3에서 더 이상 후속작이 나오지 않았지만, 1같은 경우는 동시대의 리얼 파이터나, 아이언 피스트에 비해 절대로 부족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캐릭터만 놓고 따져보면 리얼 파이터 보다 그래픽이 좋았으니까... 그리고 그 사실을 반증하듯 유저들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멍한 눈으로 화면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투신전은 리얼 파이터가 전해주었던 묵직한 느낌과는 달리 굉장히 스피디한 격투방식을 추구하고 있었다. 캐릭터들의 무기가 교차하고 횡 이동으로 적의 공격을 피해내며 검을 휘두르는 모션 역시 물이 흐르듯 부드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 대박이다.” “그런데 저런 게임이 아케이드 센터에 있었나?” “글쎄. 투신전이라, 난 오늘 처음 보는데...?” “그치? 나도 본적 없어. 그렇다는 건 설마... 기어 스테이션 오리지널 게임이란 건가?” “그럼 지금 저게 기어 스테이션에서 돌아가는 실기 영상이란 거야?” 그러자 쿠라카기는 유저들의 반응에 고개를 끄덕이며 마이크를 손에 들었다. “현재 여러분이 보고 계시는 투신전은 완성된 기어 스테이션을 이용해 직원들이 직접 시연 중입니다.” 쿠라카기는 자신 있는 말투로 무대 왼편에 설치된 커튼을 가리키자, 검은색 커튼이 좌우로 갈라지며 그 안에 기어 스테이션의 게임 패드를 잡고 있는 두 직원이 유저들을 향해 손짓했다. “우와아아!!!” 그리고 이어진 쿠라카기의 다음 발언은 유저들을 또 한 번 놀래켰다. “더불어 투신전은 업계 최초로 가정용 게임기에서 역으로 아케이드 센터로 이식되는 최초의 작품이 될 것을 알려 드립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게임 업계에서 지켜오던 룰 자체를 깨부수는 발언이었다. 보통 지금까지의 게임은 아케이드 센터에서 발매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가정용 콘솔로 이식 되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 이식에 대한 발언은 가정용 콘솔이 아케이드 센터의 게임의 퀄리티에 거의 근접했음을 뜻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유저들이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하지만 쿠라카기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유저들의 정신줄을 놓아 주지 않았다. “투신전은 올해 12월 4일 기어 스테이션과 함께 발매될 예정입니다.” “······.” 잠시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는데, 3초 정도 정적이 흘렀다. “뭐야, 그럼? 지금 기어 스테이션이 올해 12월 4일에 발매한다는 거야?” “새턴이 11월인데, 저게 12월에 발매 한다고!?” 메인인 기어스테이션의 런칭을 소프트웨어 발매 날짜를 이용해 발표하자, CES 회장 안이 온통 비명에 휩싸였다. 10초마다 한 번씩 터지는 관람객들의 환호성에 게임을 잘 모르는 이들도 센소니 부스에 달려와 회장 앞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기 시작했다. ‘역시 언변 하나는 끝내주는 구나...’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팔짱을 낀 채로 센소니의 컨퍼런스를 계속 지켜보았다. 이어서 쿠라카기씨는 기어 스테이션에 활용된 ‘워크 스테이션’용 CPU와 3D칩의 한계를 보여주겠다는 말과 함께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무대에 설치된 거대한 스크린에 한 장의 데모 샷이 떠올랐다. “허억...!!” 그 단 한 장의 이미지만으로 유저들에게 전해진 충격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티라노 사우르스...” 기어 스테이션의 모든 성능을 쥐어 짜내어 만들어낸 3D 공룡은 작년에 극장에서 개봉한 ‘쥬라기 공원’을 떠올렸다. 당시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컴퓨터 그래픽으로 마치 살아 숨 쉬는 듯한 공룡을 표현해낸 쥬라기 공원은 관람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쿠라카기는 그 점을 이용해 기어 스테이션의 마케팅에 활용했다. 기어 스테이션의 환상적인 그래픽은 유저들에게 어마어마한 충격을 안겨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이렇게 훌륭한 그래픽을 보여준 콘솔이 결코 싸게 나올 리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모든 발표를 마친 쿠라카기씨의 입에서 충격적인 컨퍼런스의 하이라이트인 결정타가 흘러 나왔다. “기어 스테이션은 299달러에 발매될 예정입니다.” 끝. 사람들의 비명과 같은 함성에 나도 모르게 두 귀를 틀어막았다. “맙소사 저게 299달러라고!?” “새턴이 399달러인데?” “센소니가 아주 작정을 했구나!!” 믿을 수 없는 성능과 충격적인 가격으로 센소니의 부스는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였다. 쿠라카기는 무대 위에서 유저들의 반응에 흡족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관람객들은 아직까지 흥분이 가시지 않는지 쿠라카기씨가 퇴장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 “도대체 센소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모리타와 하야시를 데리고 펜타곤 부스로 돌아오자, 컨퍼런스 위해 옷깃을 정리하던 카와구치 대표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센소니에서 기어 스테이션이라는 차세대 기종 발표를 했어요. 워크 스테이션급 성능을 지닌 물건인데, 가격이 299달러입니다.” “2... 299달러 라구요?” “덕분에 관람객들이 아주 난리가 났네요. 민텐도를 뛰어 넘는 성공적인 컨퍼런스였습니다.” “하아....” 카와구치 대표는 나의 보고를 듣고선 쓰러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하긴 이제 곧 컨퍼런스를 시작하려는 판국에 센소니에서 어마어마한 뉴스를 터뜨렸으니,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그때 대기실의 커튼이 걷히며 미야자키씨가 우리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대표님. 행사 부스 앞에 사람들이 모이고 있어요. 곧 시작해야할 것 같습니다.” “아... 아아...” 떨리는 손으로 패트병에 담긴 물을 삼킨 카와구치씨는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렇게까지 긴장해서야, 제대로 컨퍼런스를 진행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된 나는 회장으로 향하려는 카와구치씨의 손을 잡았다. “대표님. 잠시만요.” 대본을 챙겨들고 행사장으로 발을 옮기던 카와구치 대표는 나의 행동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손끝에 전해져 오는 떨림에는 그가 느끼는 두려움이 묻어나 있었다. “무대에는 조금 있다 올라오세요.” “네?” “일단은 제가 먼저 올라가 분위기를 바꿔 보겠습니다.” 행사 시작 3분 전 나는 진행 보조를 맡고 있는 우치무라를 급하게 불러 들였다. 그리곤 컨퍼런스 진행에 따른 홍보영상의 순서를 체크한 뒤 각각 따로 번호를 매겨 그에게 돌려주었다. “카와구치 대표 대신 내가 먼저 올라간다. 홍보 영상 자료는 방금 내가 맞춘 대로 올려줘.” “네? 아, 네!!” “잘 부탁한다.” 나는 서둘러 내 목을 감고 있던 넥타이 끈을 풀어낸 뒤 슈트의 재킷을 의자에 던져 버렸다. 가벼운 남색 와이셔츠 차림에 소매 깃을 풀러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나는 회장쪽을 한번 둘러보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와아아아~!!!!” 기존의 컨퍼런스 진행자들과는 달리 프리한 차림으로 올라온 나는 가볍게 마이크를 손에 쥔 채로 빙긋 웃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방금 전 센소니에서 아주 훌륭한 성능의 신기종을 발표했더군요. 기어 스테이션. 저 역시 동종 업계의 경쟁사보다는 한 사람의 게이머로서 굉장히 흥미로운 컨퍼런스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펜타곤 부스에 모인 유저들은 내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환호했다. “이렇게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여러분들에게 펜타곤의 신작을 발표하게 되어 저 역시 센소니 측에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네요.” 나는 잠시 마이크를 손에 쥔 채로 센소니 부스를 향해 박수를 보내주었다. “일단 먼저 여러분께 제 소개를 드리자면 저는 펜타곤의 제 2개발 팀을 맡고 있는 강 준혁이라고 합니다. 이름만으로는 제가 만든 게임에 대해 잘 모르실테니 대표작을 말씀드리자면 드래곤 엠블렘 시리즈와..” “오오...” “내가 없는 거리.” “오오오...” “발렌타인 데이.” “오오~!!” “사이킥 포스.” “와우~!!” “그리고 타마고 몬스터가 있습니다.” 내가 만들어낸 작품들을 하나씩 열거 할 때 마다 사람들의 반응이 점점 끓어오르고, 동시에 나의 심장 역시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처럼 쿵쾅 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서 두 편의 신작을 더 소개 하려 합니다.” “이예~!!!” 새로운 신작의 발표에 사람들의 표정이 환해진 순간. 나는 마이크를 붙잡고 그들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저희 펜타곤 소프트에서 준비한 최고 인기 시리즈의 최신작을 먼저 선보이려 합니다. 여러분... 혹시 오페라 좋아하시나요?” 나의 질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유저들을 바라보며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선 후에 입을 열었다. “이 영상으로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시길 바라며 펜타곤의 컨퍼런스를 시작하겠습니다.” 고개를 돌려 우치무라 쪽을 확인하자 그는 손가락으로 ok사인을 보내었다. 살작 고개를 끄덕이자. 무대에 준비된 스크린에 익숙한 타이틀 명이 떠올랐다. -FINAL FRONTIER VI- “오오오!!!!” 북미 내에서 4와 5의 대히트를 기록한 덕에 해외에서는 드래곤 워리어 보다 훨씬 인지도가 높은 파이널 프론티어의 최신작. 그 여섯 번째 타이틀이 스크린에 떠오르자, 사람들은 기대감에 탄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새하얀 스크린에는 아름다운 배경음악과 함께 드레스를 입은 여성 캐릭터가 테라스로 걸어 나오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역대 최고의 이벤트 씬이라 불리 우는 파이널 프론티어 6의 오페라 장면이 그 시작을 알렸다. < EP. 34 : 티라노 사우르스. (3) > & 파이널 프론티어 6의 오페라는 스토리 도중에 등장하는 이벤트 중의 하나로 세리스라는 제국의 여기사가 배우로 분장해 무대에서 열연하는 씬이었다. 본래대로라면 미디 음원으로 만들어졌을 이벤트였지만, 나는 라온의 성능과 그동안의 노하우를 이용해 실제 뮤지컬 배우의 목소리를 게임 속에 입히는데 성공했다. 잠시 후. 스크린 속에 펼쳐진 밤하늘 아래. 고운 드레스 차림으로 나온 그녀의 머리 위로 간단한 스토리 나레이션이 흐르고... -적군에 침공 당해 적군의 왕자에게 결혼을 강요당하는 여주인공은 매일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신의 연인을 그리워하는데...- 사랑스런 당신은~ 머나먼 곳에~ 빛바래지 않는 영원한 사랑, 맹세한지 얼마 안됐는데~ 슬플 때에도, 괴로울 때에도... 밤하늘에 빛나는 저 별을, 당신이라 여기고~ 원치 않는 언약을, 해야만 하나요? 난 어떡하죠. 당신? 대답해줘요... 간주. (이 부분에서 플레이어는 실제로 캐릭터를 움직여 사랑하는 연인의 환영과 함께 춤을 추고, 남자는 꽃다발을 남긴 채 사라진다.) 고마워요. 나의 사랑하는 이여~ 한번이라도 이 마음 흔들렸던 나에게... 조용하고 다정하게, 대답해주어서...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당신을 기다릴게요. 피날레로 꽃다발을 밤하늘에 던지는 장면에서 펜타곤 부스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멍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우... 우리가 지금 뭘 본거지?” “뭔가 가슴 한 구석이 뭉클해지는 느낌이야..” 파이널 프론티어는 여섯 번째 시리즈를 거듭하며 현세대 2D 그래픽의 극한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대는 폴리곤을 이용한 3D 게임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아직은 초기 단계라 그런지 섬세한 감정 표현을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 역시 좋다. 3D 그래픽도 나쁘지 않지만, 역시 게임은 2D지...” “지난 5때도 상당히 그래픽이 좋았다 생각했는데, 6는 진짜 장난 아닌데?” 2D RPG에서 보여준 모든 요소의 집약체라 볼 수 있는 6는 캐릭터마다 고유의 특기를 붙인 덕에 색다른 전투를 즐길 수 있었다. 가령 현재 화면에 나오는 ‘매슈’라는 캐릭터처럼 말이지... “헉!! 커맨드 입력 방식으로 특기를 사용한다고?” 스트리트 파이어2에 나오는 파동권 커맨드를 입력하자, 적을 향해 장풍을 쏘는 매슈는 어릴 적 나 역시 굉장히 좋아하던 캐릭터였다. 특히나 파이널 프론티어 6의 주인공들은 저마다 하나의 사연을 안고 있었는데, 그렇게 등장하는 캐릭터만 해도 총 12명에 달하기에 유저에게 들려주는 방대한 스토리는 플레이타임만 20시간을 훌쩍 넘기는 초호화 컨텐츠로 무장해 있었다. 아마 이때부터였을까? 파이널 프론티어의 홀수 시리즈는 새로운 시스템에 중점을 두고 짝수 시리즈는 그 시스템을 바탕으로 스토리에 중점을 둔다고 했던 루머가 돌던 것이? 세리스의 오페라 씬은 민텐도와 센소니의 컨퍼런스로 한껏 달아오른 유저들의 마음을 달래주기에 충분했고, 파이널 프론티어의 홍보영상이 끝나자 관람객은 차분한 박수로 응원해 주었다. “여기서 펜타곤 소프트의 대표이자 이번 파이널 프론티어 6의 개발을 총 담당한 Mr. 카와구치를 무대에 모시겠습니다.” “와아아아~!!” 유저의 성원에 쑥쓰러운 표정으로 무대에 오른 카와구치씨는 다행이 아까보다는 많이 안정된 표정이었다.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카와구치 히로노부입니다.” 카와구치씨는 행사장에 모여든 유저들에게 허리 숙여 정중히 인사를 올린 뒤 마이크를 손에 들었다. “사실은 이렇게 큰 무대에 오르는게 처음이라 그런지, 굉장히 떨리네요. 이렇게 세계적인 무대에서 제가 만든 파이널 프론티어 6를 소개할 수 있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카와구치씨가 인사를 마치자, 나는 관람객들을 바라보며 현재 CES의 컨퍼런스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덧붙였다. “민텐도의 프로젝트 64와 센소니의 기어 스테이션에서 보여주었듯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강렬한 임팩트를 전해주는 3D 게임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NEGA와 센소니가 연말에 새로운 신기종을 출시할 거라 발표하였고, 현재 게임 산업의 1위를 달리고 있는 민텐도 역시 시대의 흐름에 맞게 폴리곤 기술을 이용한 3D 게임에 초점을 두고 있지요. 하지만 조금은 생각을 달리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멘트에 회장에 모인 관람객의 고개가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그들이 보기엔 폴리곤으로 표현된 캐릭터들 자체가 더 이상 화려해 질수 없다고 느낄 정도로 훌륭하게 인체를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기술이란 것이 발전하고 발전 할수록 이 이상의 그래픽은 보기 힘들 것 같다고 확신하지만, 세대를 거듭할수록 게임 그래픽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발전을 거듭해 나가기 시작할 테니까. 그 만큼 사람의 눈은 간사하기가 그지없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음 관람객들을 향해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폴리곤 기술은 이제 막 새롭게 태어난 신기술입니다. 물론 이전부터 영화 산업에서 일명 CG라 불리 우는 컴퓨터 그래픽이 활성화 되었지만, 그 기술을 게임에 적용한 것은 이번 세대가 처음이니까요. 하지만, 그에 반해 2D 그래픽 기술은 지난 10년 동안 어마 어마한 발전을 해왔습니다.” 그러자 어느 정도 내가 말하려는 의도를 눈치 챈 관람객 몇몇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파이널 프론티어 6는 여러분이 눈으로 확인 하셨다시피 어두운 세기말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세계관을 훌륭하게 완성하였습니다. 그런 파이널 프론티어의 개발 상황을 지켜보던 어느 날..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궁금해 미칠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관람객들의 표정을 즐기듯 나는 한 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뒤에 말을 이었다. “2D일러스트와 3D 폴리곤... 이 둘을 합치면 어떻게 될까?” “어...?” “음!? 저 사람이 지금 뭐라는 거지?” 사람들은 내가 한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지 아리송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폴리곤과 일러스트. 얼핏 들어도 전혀 매치가 안 되는 극과 극의 성향을 띄고 있는 이 둘을 합친다니, 이제 막 리얼 파이터를 보아온 현 시대의 게이머들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묘한 조합이었다. “제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확 와 닿지 않으신 모양이네요. 하지만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미국에선 잘 모르겠지만, 제가 좋아하는 동양 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지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즉 ‘100번 듣는 것보다 차라리 한번 보는 게 낫다.’라는 뜻입니다. 어떤가요? 굉장히 심플하면서도 정확하죠?” 유저들의 반응을 살피며 대기실 쪽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어느새 우치무라 대신 롭과 모리타가 동시에 ok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의 메시지에 살짝 고개를 끄덕인 나는 카와구치 씨와 함께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뒤에 말을 이어 붙였다. “그럼 천천히 감상해 주시길. 이것이 바로 저희 펜타곤에서 준비한 새로운 폴리곤 기술입니다...” -You're not here with me anymore. but I always have you in my heart.- (비록 이제는 내 곁에 없지만, 저는 아직도 당신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이 대사는...” “oh... my... god... The street I have left...?” (말도 안 돼. 내가 없는 거리라고!?) “저건 안 돼. 그만 둬...” “또 내 눈에서 얼마나 눈물을 뽑아내려고!!”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를 향해 내뻗는 가녀린 손가락... 그리고 차가운 바람에 흩날리는 머릿결... 1990년 최고의 명작이라 불리었던 ‘내가 없는 거리’ 의 오프닝 영상에 펜타곤 부스 앞에 모여든 사람들의 표정이 일제히 굳어 버렸다. 넋이 나간 그들의 표정에 미소 짓던 나는 살짝 마이크로 입가를 가린 채로 입을 열었다. “펜타곤에서 새롭게 준비한 거치형 콘솔 프로젝트 ‘컴플리트 라온’의 사양으로 제작된 태그 데모를 소개합니다.” 내가 없는 거리의 영문 제목인 The street I have left가 화려한 필기체로 화면에 그려지고, 잠시 후. 이어서 떠오른 다음 문구에 사람들 입에서 또다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우오오오!!” -The full voice.- 단지 이 문장 하나로 CES의 관람객들에게 폭발적인 찬사를 얻을 수 있었다. “푸.. 풀 보이스 라니!!” “그럼 히로인들의 대사를 전부 실제 음성으로 들을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아직도 당신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라는 한 줄의 대사에서 전해졌던 그 아련함을 내가 없는 거리를 플레이해보았던 유저들이라면 기억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잠시 후에 나타난 히로인 미유키의 모습이 사람들을 또 한 번 경악 시켰다. 조금은 어색해 보여도 플레이어를 향해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분명 3D로 만들어진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분명 3D 캐릭터인데, 뭔가 2D 일러스트를 보는 느낌이야...” “아까 본 리얼 파이터랑 투신전 보다 이쪽이 훨씬 보기 좋은데?”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나는 무대 중앙으로 자리를 옮기며 말했다. “이것은 컴플리트 라온으로 발매되는 내가 없는 거리에서 사용하는 보너스 모드 중에 하나입니다. 새로이 리메이크된 ‘내가 없는 거리’는 모든 히로인의 대사에 음성 데이터를 집어 넣을예정입니다.” “허억... 정말로 풀 보이스란 말인가?” “그리고 다시 한 번 ‘내가 없는 거리’를 즐겨주신 여러분께... 게임의 클리어 이후 그녀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새로운 모드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드에선 저희 펜타곤이 최초로 개발한 2D와 3D의 융합을 보여주는 카툰 렌더링 방식과 360도 카메라 앵글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오오... 일종의 팬서비스 모드인가?” “풀 보이스 기능 하나 만으로도 난 이미 쌀.. 아니 살 거야..” 화면 가득 보이는 풀 폴리곤으로 표현된 미유키의 모습에 관람객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나는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을 이어 붙였다. “보너스 요소 말고, 기본 스토리에 들어가는 캐릭터 일러스트와 이벤트 씬 역시 원작의 모리타씨가 새로운 플렛폼에 맞게 리메이크 하고 있으니까 모쪼록 기대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바로 이어서 다음 발표작을 소개 하겠습니다.” 슝... 슝슝슝슝~!!! 카아앙!!! 하늘에서 떨어지는 부러진 검이 바닥에 박히는 영상이 흘러나오자. 컨퍼런스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황당함이 묻어난 비음이 새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구도는 펜타곤 소프트의 게임을 즐겨본 유저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장면이었으니까... 나는 홍보 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와중에 마이크를 입에 가까이 붙였다. “참으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래곤 엠블렘 2의 두 번째 에피소드.” “어...!? 어어어!?” “서.. 설마!?” “용자의 무덤을 소개 합니다.” 키이이잉~!! 이제는 드래곤 엠블렘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린 검격 음이 울리고, 새하얀 스크린에 익숙한 타이틀 문구가 떠올랐다. “우와아아아!!!!” “그래!!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뭐야, 뭐야!? 진짜 드래곤 엠블렘이냐!!” 갑작스러운 드래곤 엠블렘의 후속작 발표에 오페라 이벤트와 내가 없는 거리로 차분하게 가라앉았던 회장의 분위기가 일순간에 치솟아 올랐다. < EP. 34 : 티라노 사우르스. (3) > 끝 < EP. 34 : 티라노 사우르스. (4) > “뭐야, 뭐야!? 진짜 드래곤 엠블렘이냐!!” 갑작스러운 드래곤 엠블렘의 후속작 발표에 오페라 이벤트와 내가 없는 거리로 차분하게 가라앉았던 회장의 분위기가 일순간에 치솟아 올랐다. 펜타곤 소프트의 팬들은 스크린을 향해 일제히 어마어마한 함성을 보내기 시작했다. 귀청이 떨어져 나갈듯한 함성 소리에 나와 카와구치씨는 잠시 귀를 막으며 서로를 향해 웃어보였다. 유저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속에 카와구치씨와 나는 서로에게 귓속말을 건네었다. “역시 해외에서도 드래곤 엠블렘의 인기는 대단하군요.” “이번 파이널 프론티어 6 역시 게이머들의 반응을 보아 대히트를 거둘 것 같습니다.” 이윽고 홍보 영상은 절벽 위에서 피리를 불고 있는 가냘픈 여성을 비추고 서정적인 플룻의 멜로디가 사그러들 때 즈음, 바닥에 박혀 있는 조각난 검을 들어 올리는 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있었으니... 그는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검에 부러진 칼날을 끼워 맞추곤 송곳니를 드러내며 피식 웃어 보였다. 전형적인 쾌남아 스타일의 그가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말에 올라 고삐를 틀어쥐자, 거대한 흑마(黑馬)는 투레질과 함께 앞발을 들어 올리며 석양이 지는 초원을 달렸다. 잠시 후. 가까이에서 그를 비추고 있던 카메라 앵글이 그가 바라보는 1인칭 시점으로 뒤바뀌자 붉은 석양은 사실 불타오르는 전장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드래곤 엠블렘 용자의 무덤의 짧은 오프닝 영상이 끝이 났다. 그리고 이어진 플레이 화면에서 사람들은 또 다시 생전 처음 보는 새로운 장르의 세계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시뮬레이션 RPG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였던 드래곤 엠블렘 1. 캐릭터 육성 요소와 멀티 플레이로 택틱스 SRPG라는 신 요소 도입한 드래곤 엠블렘 2의 첫 번째 에피소드. 부러진 성검과 암흑의 시대. 그리고 드디어 긴 시간 끝에 공개된 두 번째 에피소드 용자의 무덤의 장르는 ‘턴제 전략 시뮬레이션’ 이었다. 비슷한 장르를 따져 보자면... 그래 ‘워리어스 오브 마이트 앤 매직’ 시리즈와 비슷하달까? 플레이어는 드래곤 엠블렘 세계의 기사가 되어 자신의 영지를 번성 시키고,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숨어 있는 아티팩트를 수집 할 수가 있었다. 검은색으로 표시된 미개척 지역은 플레이어가 지나다닐 때마다 미려한 2D로 그려진 맵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엔 아예 월드 맵을 돌아다닐 수가 있게 되었구나...” “영지가 업 그레이드 되는 건 꼭 삼국지 시스템 같은데?” 지금까지 수많은 장르를 거쳐 온 게이머들은 플레이 화면만으로도 얼추 드래곤 엠블렘의 새로운 시스템을 이해하는 듯 보였다. 전작에서 두 개의 탑을 지키는 드래곤을 최초로 물리친 유저들은 이번 에피소드에서 강력한 영웅으로 등장할 예정이었는데, 오프닝에서 등장한 붉은 머리칼의 사내가 바로 버서커 길드의 리더이자, 용사가 아닌 마왕의 길을 선택한 플레이어. ‘흑마왕 오시리스’ 였다. 버서커 길드 리더의 변태 같은 네임 센스 덕분에 마왕의 이름이 오시리(엉덩이)가 될 뻔했지만, 고대 이집트에서 사자(死者)의 신이라 숭배 되었던 오시리스의 이름으로 극적인 합의를 보아 현재의 이름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 역시 장난삼아 지은 캐릭터 이름이 차기작에서 영웅 캐릭터로 오를 줄은 몰랐겠지... 새로운 드래곤 엠블렘의 차기작은 본래 휴대용 라온으로 제작 하려 하였으나, 전작에 비해 턱없이 넓어진 세계관을 모두 담기엔 용량이 너무나 부족했다. 애초에 현 시대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던 내 꿈이 너무 컷던게지... 드래곤 엠블렘의 세계를 조금 더 디테일하고 폭넓게 그리고 싶었던 나는 용자의 무덤을 개발 중, 현재 라온에서 사용하는 카트리지의 용량이 한 없이 부족하다는 것 을 느꼈다. 현재 라온에서 사용하는 카트리지 용량은 끽해야 64메가 정도... 물론 이것만으로도 슈퍼 패밀리의 롬 카트리지의 2배 용량이긴 하지만, 내가 기획한 게임은 이미 그 용량을 훨씬 초과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두 번째 에피소드를 또 다시 쪼개어 낼 수 없었던 나는 결국 두 번째 에피소드를 차세대 기종으로 발매하기로 정한 것이다. 애초부터 용량과 성능 문제로 지지부진 하던 개발 속도는 그 제한을 풀어 버리자, 순풍을 맞은 돛단배처럼 시원하게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용자의 무덤의 기본 베이스는 ‘마이트 앤 매직’의 턴제 시뮬레이션과 비슷하지만, 일단 대륙에 돌아다니는 적이나 다른 영웅과 맞붙게 될 경우엔 3D로 표현된 택틱스 전투 방식을 사용해 드래곤 엠블렘의 게임성을 그대로 유지 시켰다. 폴리곤을 사용해 입체감 있게 표현된 전투 지형은 전작과는 달리 맵을 360도 회전 시킬 수 있었기에 숨겨진 보물이나 함정을 탐색할 수 있어, 유저들에게 꽤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전투 맵은 3D인데, 캐릭터는 2D라... 생각보다 위화감 없이 굉장히 잘 어울리는데?” 드래곤 엠블렘의 전투 맵은 차후에 발매될 ‘파이널 프론티어 택틱스’와 그 구조가 같았기에 3D 필드 위에서 싸우는 캐릭터들의 전투 장면은 유저들에게 깊은 인상을 안겨 주었다. “와, 진짜 3D 효과 하나로 게임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건가?” 넋을 놓은 채 드래곤 엠블렘의 전투 장면을 바라보는 이들 속에는 민텐도의 시게루씨와 NEGA의 스즈키씨도 함께 섞여 있었다. 내가 없는 거리 리메이크 버전에서 보여 주었던 카툰 렌더링 방식과 드래곤 엠블렘에서 기존 게임 시스템을 그대로 답습한 새로운 표현 방식에 현재 최고의 디렉터라 할 수 있는 그들조차 홍보영상에 흠뻑 빠져든 모양이었다. 새로운 월드 맵과 전투 방식으로 관람객의 반응을 끌어 올린 그 순간. 어둠속에서 홀로 무릎 꿇고 있는 한 사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청초한 모습으로 신께 기도를 올리고 있는 여사제의 모습에 멍하니 영상을 바라보던 시게씨가 가장 먼저 반응 했다. “대사제 카트리나?” -전란에 휩싸인 이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신이시여. 부디 그에게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천천히 눈을 감는 그녀의 눈가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바닥에 떨어지자, 잠시 후. 철컥이는 금속음과 함께 건틀렛을 착용하는 젊은 남자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어...? 설마 저거? 성왕 크로엘의 젊은 시절?” “아, 진짜.. 대박이다..” 생각지도 못한 이벤트 장면에 온몸이 떨리는지. 유저들은 숨죽여 스크린을 바라만 보았다. 이윽고 기도를 마친 카트리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성왕 크로엘은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그녀에게 말했다. -오랜만이야. 카트리나..- -성왕이시여...- “우와아아!!!!” 성왕 크로엘의 부활을 알리는 쿠키영상에 컨퍼런스에 모인 사람들은 감동 했는지. 저마다 한마디 씩 내뱉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어쩐지 전작의 주인공을 너무 쉽게 죽어 버리더라...” “아아... 그럼 1편에 등장했던 영웅들도 에피소드 2에 추가돼서 나오는 건가?” “아, 소름 돋는다. 내가 없는 거리랑 드래곤 엠블렘이 차세대 기종으로 나온다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돈 주고 살 가치가 있지...” 두 개의 영상을 마치고 나는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무대 한가운데로 걸음을 옮 겼다. “이로써 차세대 기종과 동시 발매 예정인 두 개의 작품에 대한 홍보를 마치겠습 니다. 다음으로 라온의 신작게임을 소개하기 전. 32비트 거치형 콘솔 프로젝트인 ‘컴 플리트 라온’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전에 NEGA와 센소니가 기기를 먼저 소개하고 게임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면, 펜타곤의 컨퍼런스는 민텐도와 마찬가지로 신기종의 성능을 먼저 보여주고 차후에 발매될 기종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진행 되었다. 무대 위에서 나는 잠시 관람객들과 눈을 맞춘 뒤 차세대 기종에 대한 설명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여러분도 느끼셨겠지만, 올해 CES는 앞으로의 게임 역사에 길이 남을 컨퍼런스가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민텐도와 NEGA, 그리고 센소니와 저희 펜타곤. 이렇게 총 4개의 기업에서 동시에 신기종을 발표했으니 말입니다.” “가장 먼저 3D 게임의 지평을 열은 NEGA의 리얼 파이터를 시작으로 최근 게임 업계는 이제까지 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그래픽을 활용해 게임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저희 펜타곤이 선택한 것은 2D와 3D의 융합이었습니다.” “작년에 극장에서 개봉한 ‘쥬라기 공원’은 컴퓨터 그래픽의 극한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은 게임 업계에 동사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나 프로그래머들에게도 굉장한 충격을 전해주었죠. 하지만 냉정히 말해 현재 콘솔로 ‘쥬라기 공원’ 만큼의 그래픽을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자 내 말을 듣고 있던 한 유저가 내 말에 반박했다. “하지만, 센소니 기어 스테이션은 쥬라기 공원에 나오는 티라노 사우르스와 거의 흡사한 그래픽을 보여 주던데?” 그의 말에 나는 여유 있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그 티라노 사우르스는 쥬라기 공원에 나오는 공룡들처럼 움직이던가요?” 그러자 유저는 작게 탄성을 내뱉으며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게임에서 사용되는 그래픽은 영화에서 보여주는 컴퓨터 그래픽과 조금 다릅니다. 감독의 의도대로 정해진 규칙에 따라 영상을 제작 하는 것과 실제로 여러분들의 조작에 반응해야 하는 게임은 만들어 지는 과정에 큰 차이가 있기 마련이죠. 알기 쉽게 설명을 덧붙여 드린 다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무대에 설치된 스크린에 거대한 티라노 사우르스가 떠올랐다. “헉!! 펜타곤 컨퍼런스에서도 똑같은 티라노 사우르스가 나왔어...” 폴리곤과 텍스쳐로 정밀하게 표현된 3D 그래픽의 티라노 사우르스는 센소니에서 보았던 것과 비교해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공교롭게도 저희가 준비한 자료와 센소니에서 준비한 자료가 겹치는 부분이 있네요. 그만큼 작년에 개봉한 ‘쥬라기 공원’이 보여준 3D 모델링의 파급효과가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파급효과.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만, 사실 그것보다 센소니의 쿠라카기가 티라노 사우르스의 모델링으로 구라칠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CES에 오기 전 롭에게 따로 부탁한 자료였다. “센소니와 마찬가지로 라온의 차세대 모델에서도 이정도의 그래픽 표현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정도 퀄리티의 모델링을 직관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은 생각보다 엄청난 CPU 사양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센소니가 티라노 사우르스를 실제로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죠.” 관람객들은 나의 설명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센소니 부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까까지만 해도 3D로 표현된 티라노 사우르스를 보여 주었던 스크린이 3D 격투 게임인 투신전의 데모 화면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렇죠. 실제로 유저의 컨트롤에 직관적으로 반응하기 위해선 현재로선 저 정도 그래픽이 기어 스테이션의 성능에 맞을 겁니다.” 그러자 이번엔 다른 유저가 내 말에 반박했다. “그럼 민텐도에서 보여주었던 움직이는 3D 마리지는 어떻게 설명하실 건가요?” 잠시 아무 대답도 없이 관람객을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마이크를 들어 올린 채 입을 열었다. “저 역시 저희가 만들어낸 티라노 사우르스가 성능이 부족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 적은 없는데요?” 그와 동시에 마치 살아 움직이듯 입을 크게 벌린 티라노 사우르스는 관객을 향해 굉음을 내지르며 발을 굴렀다. “크오오오!!!!” < EP. 34 : 티라노 사우르스. (4) > 끝 < EP. 35 : 바람의 동경. (1) > & 티라노 사우르스를 이용한 ‘컴플리트 라온’의 3D 성능 시연은 결과적으로 유저들에게 엄청난 인상을 각인 시켜주었다. 단순히 움직인다. 움직이지 못한다는 수동적인 사실 관계를 떠나 일단 펜타곤이 만들어낸 차세대 기종이 다른 기업의 콘솔보다 월등히 뛰어날 거라는 인식을 제대로 심어준 것이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선 나 역시 한 가지 꼼수를 부린 게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단일 오브젝트하나에 컴플리트 라온의 모든 성능을 몰빵 시켰다는 점이다. (내가 없는 거리의 보너스 모드에서 보여준 미유키를 표현해낸 미려한 카툰 렌더링 기술도 사실은 이런 방법으로 만들어 졌다.) 만약 동일한 퀄리티의 공룡을 한 마리 더 출현시켰다면 기기성능의 오버로 프레임 레이트(frame rate)가 현저하게 떨어져 아마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버벅 거렸을 게 분명했다. 게임이란 하나의 오브젝트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무리 멋지게 표현된 검사가 검을 휘두른다 해도 그걸 맞아줄 적이 없다면 게임이라는 콘텐츠는 성립될 수 없을 테니까. 슈팅게임에서 적이 쏘는 탄막. 대전 격투에서의 상대편. RPG 게임을 이루는 필드와 전투 시스템. 플레이어 움직임 하나에 정말 무수한 판정과 수식이 교차하는 것이 바로 프로그래밍의 세계이다. 물론 내가 한 성능 퍼포먼스를 두고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국제적인 컨퍼런스에서는 어느 정도 기기 성능을 뻥튀기 시키는 것은 어찌보면 사기에 가까울 수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차후에 발매될 NEGA의 ‘리얼 파이터’에 비해 굉장히 귀여운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사기란 그런 퀄리티로 발매를 승인 했다는 것 자체부터가 사기인거지.) 나는 티라노 사우르스의 역동적인 움직임에 대한 부연 설명을 위해 롭을 무대 위로 불러내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조금 껄끄러운지 상기된 표정으로 컨퍼런스 자리에 올라온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라온에 들어간 3D 가속 장치의 성능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지만, 사실 일반 관람객은 롭이 발표하는 전문적인 설명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과거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오직 게이머의 관심은 단 하나. 알았어. 닥치고 사줄 테니, 쩔어 주는 게임이나 내놔라. 였으니까... 파이널 프론티어 6 와 내가 없는 거리의 리메이크 버전. 그리고 드래곤 엠블렘의 새로운 에피소드로 한껏 기세가 오른 라온의 컨퍼런스는 끝으로 조용한 뉴에이지 장르의 피아노 음악과 함께 미국에서는 내년 봄 발매 예정인 ‘신의 선물’을 홍보하며 끝을 맺었다. 이번 CES에도 신의 선물에 등장하는 4명의 희로인의 얼굴은 공개 되지 않았고, 일본과 마찬가지로 그녀들의 뒷모습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마지막 신의 선물의 주인공이 연주하는 피아노의 아름다운 선율에 흠뻑 취한 관람객들은 ‘그래픽 노블’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대해 한껏 기대를 품으며 큰 박수를 보내 주었다. &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어떻게 되긴 갑자기 공룡이 소리를 지르니, 다들 놀라서 뒤집어 졌지..” “진짜요? 아~ 재밌었겠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날 밤 오후 8시. 국제 박람회의 일반인 관람 1일차가 끝나고, 행사장을 정리하던 중. 나는 일본에 있는 유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롭을 만나고, 그가 만든 3D 가속 장치에 대한 성능을 기반으로 티라노 사우르스와 미유키의 캐릭터 모델링을 재구성하느라, 일주일 동안은 모리타와 하야시.. 그리고 롭이 데려온 디자이너들을 데리고 죽을 둥 살 둥 매달린 결과. 컨퍼런스는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지만, 유키와 마음 편히 제대로 통화한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이제 그만 나도 들어가 봐야겠다. 직원들 기다리겠어.” “그래요. 저도 낮잠 한숨 잘래요. 갑자기 너무 졸립다.” “원래 임신했을 때는 잠이 많아진다고 하더라.” “그런 건 또 어디서 들었어요?” “그냥 저냥 오다가다?” 사실은 이것도 83년도로 넘어오기 전에 들은 거지만... 그때 수화기 너머로 유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펜타곤 소프트의 우에노씨에게서 소포가 왔어요.” “소포...? 작곡가 우에노씨 한테서?” “네. 쪽지 하나랑 CD가 들어있던데요?” 그 순간 나는 우에노씨가 우리집으로 CD를 보낸 의도를 알아 차렸다. 신의 선물에 들어갈 모든 음악 작업이 끝났다는 뜻이겠지... 파이널 프론티어 6에서 들려준 그의 음악은 비단 오페라씬 뿐만 아니라 모든 시리즈를 통틀어 최고의 OST라는 찬사를 얻었다. “아마 그 CD는 신의 선물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일거야.” “OST라구요? 어디 한번 들어 봐야지.” 수화기 너머로 CD를 꺼내는 듯한 딸깍거리는 소리가 들려온 뒤. 잠시 후. 거실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잔잔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와... 우에노씨의 음악 굉장히 좋은데요?” 첫곡부터 그의 음악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지, 처음 들어보는 음악임에도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음을 쫓았다. 나는 잠시 눈을 감은채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목소리 들으니까 보고싶다.” “나두요. 그러니까 빨리 돌아와요.” “응. 내일이 행사 종료니까 끝나는대로 바로 넘어 갈게.” 그렇게 유키와 통화를 마치려던 순간. 행사 정리가 끝났는지 미야자키가 나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부장님. 대표님이 찾으시는데요?” “네. 바로 갈게요.” “알겠습니다. 부장님.” & 유키와 통화를 마치고 미야자키가 알려준 대기실로 향하니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이 나를 반겼다. “토리야마씨?” 그동안 작가로서의 관록이 붙어서일까? 7~8년 전 피닉스 소프트에서 봤을 때보다 풍겨오는 위감감 자체가 다르게 느껴졌다. 그는 한눈에 나를 기억했는지 반가운 미소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준혁씨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아, 네. 선생님도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그때 토리야마씨의 옆에 있던 유우지씨 역시 나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해왔다. “어라? 유우지씨까지? CES에는 웬일이세요?” 더구나 펜타곤의 스탭실인 이곳에 피닉스 소프트의 간판 디렉터와 만화계의 거장 토리야마씨가 함께 찾아오다니, 굉장히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나 유우지씨 같은 경우는 드래곤 워리어 시리즈로 인해 민텐도와 연이 깊은 사람이었던 터라 그의 방문은 더욱 의외로 느껴질 수밖에... “이번 컨퍼런스에서 펜타곤을 포함한 많은 기업들이 새로운 차세대 기종을 발표한다고 하여 관람차 방문하였습니다. 과연 일본을 대표하는 콘솔 기업들이라 그런지 무엇하나 놓칠게 없던 발표회더군요.” 유우지씨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내 손을 흔들며 뒤에 말을 덧 붙였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센소니와 펜타곤의 컨퍼런스가 굉장히 인상에 남더군요. 또한 가장 기대되는 차세대 기종이었습니다.” 거대한 공룡을 이용한 성능 퍼포먼스와 더불어 가장 현실적인 성능을 보여준 센소니와 펜타곤의 컨퍼런스는 이번 CES에 출시한 수많은 가전기기 중 최고의 이벤트 부스로 손 꼽히고 있었으니 유우지씨의 말도 그냥하는 인사치례는 아닐 것이 분명했다. 민텐도가 보여준 프로젝트 64의 풀 폴리곤 슈퍼 마리지 역시 반응이 굉장했지만, 확실히 언제쯤 차세대기기를 발매한다는 것인지 추가적인 설명이 없어. 유저들의 아쉬움을 자아내었다. “그런데, 저희 펜타곤 스탭실에는 무슨 일로...?” 나의 직설적인 물음에 유우지씨는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오래 전부터 펜타곤 소프트가 만들어낸 라온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드래곤 엠블렘이라던가 내가 없는 거리는 저 역시 상당히 감명깊게 플레이한 기억이 있거든요. 조금 취향을 타긴 하지만, 발렌타인 데이에서 느꼈던 특유의 오싹한 느낌은 저 역시도 배울 점이 많다고 느꼈으니까요.” 나는 구구절절 펜타곤에 대해 좋은 말만 해주는 유우지씨를 잠시 바라보았다. 해외 수출로 만화 시장에 전례가 없던 대흥행을 일으킨 만화계의 거장 토리야마 아키라와 일본 내수에서는 이미 따라올 상대가 없는 국민 RPG 드래곤 워리어 시리즈의 메인 디렉터. 호리이 유우지. 그리고 드래곤 워리어와 더불어 정통 일본식 RPG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우는 파이널 프론티어의 메인 티렉터 카와구치 노부히로... 딱 이 셋만 봐도 머릿속에 그려지는 게임이 하나 있기는 한데... 잠시 세명을 둘러보며 묘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유우지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토리야마씨를 데리고 이곳을 찾은 이유는 카와구치씨와 준혁씨에게 한가지 제안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어라...? 잠깐. 나까지 포함시키려고? 이 프로젝트는 원래 당신들 셋이 하는 거잖아... & 드래곤 워리어 시리즈. 국민 RPG라고 까지 불리우는 이 작품은 일본 내에서 아이부터 어른까지 전 연령층이 함께 즐기는 최고의 게임 중에 하나이다. 가장 최근에 발매된 다섯 번째 시리즈까지 전 시리즈가 연속으로 대히트를 거두며 누계 판매량만 해도 1000만장을 눈앞에 두고 있어, 일본 게임 업계의 자존심과 같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내수 시장과는 다르게 해외 시장에서 드래곤 워리어의 반응은 굉장히 차가웠다. 해외 유저들은 그저 한편의 동화책 같은 이 게임을 어느 포인트에서 재미를 찾아야 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였다. 드래곤 워리어의 전통이라 할 수 있는 1인칭 전투 시스템의 이팩트는 그들의 눈에는 너무나 초라해 보였고, 마왕과 싸우기 위해 떠나는 용사의 모험은 너무나 유치하게만 느껴졌다. 또한 엎친데 덥친 격으로 피닉스 소프트는 간판 게임인 드래곤 워리어 말고는 이렇다 할 히트작이 별로 없었는데, 드래곤 워리어를 출시한 해와 그렇지 않은 해를 비교했을 경우 회사가 벌어들이는 수익이 극과 극을 달렸다. 물론 그 안에 나온 드래곤 워리어의 파생작인 ‘토루네코의 대모험’은 어느정도 인기를 끌긴했지만, 드래곤 워리어 시리즈 하나로 점점 덩치가 불어나는 회사를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는 다르게 해외 시장에서 발매 족족히 흥행을 거두고 있는 파이널 프론티어와 드래곤 엠블렘 시리즈를 보유한 펜타곤은 유우지씨의 눈에 보기엔 참 신기해 보였을 것이다. 과연 내가 만든 드래곤 워리어와 저들이 만드는 게임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대체 어떤 요소로 유저들의 마음을 휘어 잡는 것일까? 이대로 두었다간 언젠가 국민 RPG라는 타이틀 마저 펜타곤에 넘겨주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애써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온갖 불안한 감정이 그를 괴롭히고 있을게 뻔히 보였다. 아마 그는 선택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대로 우물안 개구리로 남아 있어야 하는가... 그게 아니라면 전례 없는 최고의 이슈 거리를 만들어 현 게임 업계에 돌풍을 일으키던가... 그리고 지금. 피닉스 소프트의 메인 디렉터. 호리이 유우지는 주저 없이 후자를 택했다. “카와구치씨. 그리고 준혁씨. 저는 여러분과 라온용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 EP. 35 : 바람의 동경. (2) > & 펜타곤과 피닉스 소프트는 어떤 의미로는 일본의 게임 산업에서 서로 라이벌과 같은 존재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카와구치는 파이널 프론티어 1을 제작하고 한창 인기가 오르고 있을 당시 패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적이 있었다. -드래곤 워리어 시리즈를 플레이 해보며 내가 만든 게임에 대해 어떤점이 부족했는지 깨달았다. 차기작에서는 드래곤 워리어를 뛰어 넘는 최고의 게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드래곤 워리어를 바탕으로 파이널 프론티어를 만들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론 피닉스 소프트를 라이벌로 선포한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발언에 대해 일부 드래곤 워리어 매니아들은 불편한 기색을 보였지만, 파이널 프론티어는 실제로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드래곤 워리어와는 다른 독특한 게임성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단지 세상을 파괴하려는 마왕을 저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악역을 맡고 있는 캐릭터에게도 저마다의 사연을 주어 주인공과 대립하는 개연성을 확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무엇이 옳은 선택인가에 대한 질문을 플레이어에게 묻는 시네마틱 스토리 기법은 어른들이 즐기기에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매끄러운 스토리 라인을 보여주었다. 현재 드래곤 워리어와 파이널 프론티어는 시리즈의 누계 판매량은 거의 비등비등한 수준이었기에 반드시 어느 한쪽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쉽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시기에 유우지씨의 발언은 굉장히 신선한 제안이었다. 업계 1,2위를 다투는 메인 디렉터들이 한데 뭉쳐 새로운 RPG게임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발표 만으로도 업계에 광풍을 몰고올 희대의 콜라보레이션이었다. & 다음 날. CES의 마지막 날인 일반인 관람 2일 차. 이미 모든 발표를 1일차에 쏟아냈기에 민텐도와 NEGA를 비롯한 모든 기업은 어제 내용을 바탕으로 유저들에게 시연을 펼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전쟁과도 같았던 어제의 컨퍼런스에서 NEGA는 뼈아픈 타격을 입은채 고전 중이었다. 콘솔 기업 중에서도 가장 빠르게 차세대 모델을 발매할 NEGA였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시연해 볼만한 게임이 없으니, 유저들 역시 실망이 큰 모양이었다. 반면 센소니 같은 경우는 동시 발매 예정인 3D 격투게임 ‘투신전’으로 인해 어제에 이어 굉장한 반응을 이끌어 내고 있었다. 풀 폴리곤으로 제작 된 투신전의 캐릭터는 가정용 콘솔 치고는 NEGA의 ‘리얼 파이터’에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깔끔한 수준의 그래픽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와.. 직접 플레이해보니 느낌이 또 완전 다르네.” “그래픽 면에선 확실히 뛰어난 것 같은데, 리얼 파이터에 비해 움직임이 너무 가벼워서 나는 좀 별로...” “나는 오히려 스피디해서 좋던데? 커맨드 입력도 쉬워서 기술도 잘 나가고, 리얼 파이터는 기술 하나 쓰기도 너무 벅차더라.” 저 말은 나도 동감하는 바이다. 새턴 패드로 리얼파이터2에서 ‘붕격운신쌍호장’ 쓰려다가 손가락에 굳은 살이 박혔던 걸 생각하면 리얼 파이터의 기술 커맨드가 쉬운건 아니었지. 갑자기 떠오른 옛 기억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펜타곤 부스를 바라보니, 우리 행사장에도 제법 많은 관람객이 모여 있었다. 그들이 주시하는 것은 다름 아닌 미유키의 3D 모델링. 2D 일러스트와 다르게 3D는 모델링을 한번 정해 놓으면 복장을 추가 하는 게 어렵지가 않았다. 내가 없는 거리의 리메이크 버전에서는 게임의 클리어 특전으로 보너스모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코스튬’을 선물로 주었는데, 계절 별로 입고 나왔던 의상을 보너스 모드를 통해 그녀에게 입혀 볼 수 있었다. 단지 의상을 바꿀 수 있는게 뭐가 그리 특별하냐고 묻는 다면 딱히 반박할 말은 없지만, 미래에는 그 캐릭터 의상을 분기마다 따로 발매하여 본편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득을 챙긴 게임 회사도 있었으니까. 오히려 나는 양반이지... 이렇게 단일 컨텐츠를 상품화 하는 전략은 현재에는 잘 없지만, 미래엔 꽤나 돈이 되는 사업이긴 하다. 만약 미유키의 특전 의상으로 크리스마스 기간동안 산타 복장을 100엔에 판다고 친다면? ‘그거 안 사고 베길 사람이 있을까?’ 단지 몇키로 바이트도 채 되지 않는 데이터를 구입하기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100엔을 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수십개로 나뉘어 진다면 어떨까? 욕을 하더라도 살 사람은 사기 마련이다. 특히나 이런 미소녀를 인질로 삼은 게임에서는 더욱 더... & CES의 컨퍼런스의 2일차 오후. 슬슬 끝을 향해 달려가는 글로벌 행사에서 유저들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콘솔 부스에 제법 몰려 들었다. 대형 브라운관 TV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통신 기술의 집약체인 핸드폰. 각종 오디오와 냉장고, 세탁기 같은 생활 가전까지 수많은 전자 제품이 전시 되어 있지만, 단지 게임이란 컨텐츠만 바라보고 CES를 찾아오는 게이머들이 제법 많았기에 오늘도 회장은 만원 사례였다. 그리고 가장 사람들로 붐비는 오후 2시에서 4시 사이. 펜타곤은 유저들 앞에 또 다른 발표회를 예고했다. “뭐지? 신작 발표는 어제로 끝난거 아니었나?” “설마 2일차 관람객을 위해 숨겨 놓은 발표가 더 있었던 일지도...” 갑작스러운 신작 발표회에 유저들의 기대치가 점점 오르기 시작했다. 멍때리고 있던 센소니와 민텐도의 행사 진영도 펜타곤의 갑작스러운 신작 발표에 묘한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이윽고 펜타곤 부스의 무대 위에 설치된 스포트 라이트가 켜지고, 나는 조심스럽게 다시 무대 위에 올랐다. 사람들의 기대에 찬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자니, 살짝 긴장이 되었지만 이제는 이런 자리도 익숙해져서인지 큰 떨림은 없었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 다시 올라온 이유는 어제 저녁 갑작스럽게 결정된 신작에 대한 소식 때문입니다.” 내 입에서 터져나온 ‘신작’이라는 단어에 사람들은 벌써부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먼저 작품에 대한 소개 하기 전에 여러분들게 한 가지 말씀을 드리자면, 이 작품은 일찍이 전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최초이자, 최고의 콜라보레이션이 될거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 깊은 작품을 저희 펜타곤의 라온으로 출시 할 수 있게 되어 매우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먼저 여러분들게 소개 시켜드릴 분은 새로운 RPG 게임의 시나리오를 담달하게 될 피닉스 소프트의 메인 디렉터 호리이 유우지씨입니다.” 그러자 관람객들 중 몇몇이 그의 이름을 듣고 경악했다. “호리이 유우지가 라온 게임을 만든다고!?” “드래곤 워리어가 라온으로 플랫폼을 옮기는 건가?” “설마, 피닉스 소프트랑 민텐도가 어떤 관계인데...” “신작이랬으니까 드래곤 워리어가 아닌 다른 게임 아닐까?” 라이벌 회사의 메인 디렉터가 참여했다는 소식에 펜타곤 컨퍼런스를 참관 중이던 업계인들도 당혹스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중에서 가장 얼굴이 볼만 한 것은 민텐도 쪽 사원들이었다. 자신들에게 있어 큰 기둥이 되어주는 하나의 축이 무너지는 느낌에 서둘러 보고를 위해 자리를 이탈하는 사람들도 이었다. 이거 참... 진짜 깜짝 놀랄 인물은 아직 소개도 안했는데, 벌써부터 쫄아 가지곤...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다시 마이크를 입가에 옮겼다. “드래곤 워리어 시리즈로 유명한 유우지 씨는 이번 작품에서 시나리오 부분을 맡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게임에 시스템을 담당하게 될 사람은 파이널 프론티어 시리즈의 메인 디렉터 카와구치씨가 되겠습니다.” “뭐라고!?” “말도 안 돼!!” 게임 업계에 있어서 물과 기름이라 여기던 두 회사의 메인 디렉터가 새로운 신작을 위해 손을 잡는다니 관객들에게 있어선 충격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직접 귀로 듣고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관람객 앞에 보란 듯이 두사람이 손을 잡고 무대 위에 오르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허억!! 진짜네?” “와~ 실제로 보고 있지만, 실감이 안나네...” “그런데 메인 디렉터가 둘이면 게임이 잘 만들어지려나?” “글쎄, 사공이 많은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하던데...” 몇몇 우려섞인 목소리도 들려왔지만, 대체로 둘의 조합이 나쁘게 느껴지지만은 않는지 관람객들은 그들에게 환호를 보내주었다. 나는 잠시 그들의 함성 소리가 멈출때까지 기다린 후에 조용히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럼 마지막으로 새로운 게임의 캐릭터 작화를 맡게 될 분을 소개하기 전에 그 분께서 직접 그린 주인공을 먼저 공개하겠습니다. 아마 주인공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누가 캐릭터 디자인을 맡게 됐는지 바로 감이 오실 듯 합니다만, 그럼 스크린을 봐주세요.” 손을 들어 올리며 스크린을 가리키자, 화면에 칼을 들고 있는 붉은 머릿칼의 남자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화면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이 쩍하고 벌어지며 비명 섞인 함성이 터져나왔다. “드.. 드래곤 볼!?” “토리야마다!!” “우와아아!!!!!” 현재 일본... 아니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만화라면 단연코 드래곤 볼이었다. 거의 전세계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아이부터 어른까지 절대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희대의 베스트 셀러... 마치 그의 작중에 등장하는 초사이어인을 연상케하는 주인공의 캐릭터 디자인에 부스가 흔들릴 정도로 기대 이상의 함성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그 함성에 응하듯 무대 뒤의 커튼이 열리며 그가 마이크를 들고 걸어나왔다. “안녕하세요. 드래곤 볼의 원작자. 토리야마입니다.” “오오오!!” “토리야마씨가 캐릭터 디자인까지 이건 진짜 완벽한 조합이다.” 여기 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극찬 속에서 게임을 잘 모르는 사람이 옆에 있는 친구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야?” “시나리오, 게임 시스템, 캐릭터 디자인이라는 분야에서 끝판왕들이 모인거라 볼 수 있지.” “아아... 그렇구나. 하긴 나도 드래곤 볼은 알아.” 단행본을 발매할 때마다 연일 신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드래곤 볼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만화책으로 유명하다. 정식 유통작만 해도 2천만부 이상이 팔려 나갔으니, 해적판까지 포함한다면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만화가 아닐까 싶은데 그래서 일까? 게임은 몰라도 그의 그림체는 이미 전세계 적으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아직 게임에 대해서 제대로 발표 조차 하지 않았지만, 이 세명이 함께 모인 것만으로도 역사에 길이 남을 한 페이지가 완성된 것이나 다름 없으니까... 그들이 만들어갈 새로운 신작의 이름은 ‘크로노스 트리거’ 놀랍게도 유우지씨는 우리와 상담하기 전부터 토리야마씨와 함께 시나리오와 캐릭터를 완성 시켜두었던 터라 카와구치씨의 승낙만을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다. 카와구치씨는 평소 자신이 동경했던 유우지씨와의 합작을 흔쾌히 승낙했고, 토리야마씨 역시 파이널 프론티어에서 원화를 맡고 있는 아마노 씨와 친분이 있던터라 그와의 공동 작업을 매우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들 중에 왜 나는 포함이 안 되어있냐고? 분명 그들이 함께 만들어 낸 ‘크로노스 트리거’가 시대의 획을 그은 역사적인 작품이란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작품에 굳이 내 이름까지 편승해 올리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들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신의 선물과 용자의 무덤의 개발을 거의 끝내고 이제좀 한숨 돌리려는 찰나에 또다시 일에 빠져 살순 없지. 출산을 앞두고 있는 유키를 볼 면목도 안서고 말야... 더구나 최근에 신의 선물을 만들며 머릿속에 떠올린 장르가 하나가 있었으니... 차세대 성능에 맞춰 새로운 육성 시뮬레이션 하나를 계획 중이다. 이번엔 대체 무얼 육성하느냐 묻는 다면... 글쎄... 아이돌이라고 해야하나? < EP. 35 : 바람의 동경. (2) > 끝 < EP. 35 : 바람의 동경. (3) > & CES에서 발표된 펜타곤의 신작 게임 ‘크로노스 트리거’에 대해 일본 현지의 반응은 전세계 어디보다 뜨거웠다. 일본에 돌아오자마자 쏟아지는 잡지 회사의 문의 전화에 펜타곤 본사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으니까... “아오... 맹장염만 아니었어도 내가 그 자리에 갔어야 했는데~!!” 미국에서 돌아온 다음 날 유키와 함께 준페이가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은 나는 간단한 먹거리를 테이블에 올려 두며 말했다. “그래도 수술은 잘 됐다며 방귀도 제대로 나왔으니, 이 참에 푹 쉬는 것도 좋지.” 투덜 거리는 준페이에게 나는 라온용 게임 카트리지 하나를 던져 주었다. “뭐냐 이건?” “신의 선물 피아노 파트 데모. 심심할 때 플레이 해 봐. 심신 안정에 도움이 좀 될걸?” 하지만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준페이는 이미 라온에 데모 카트리지를 집어 넣고 있었다. 그 모습에 유키가 어이가 없는지 쿡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누가 준혁씨 친구 아니랄까봐.” “내 친구 아냐.” “아니. 맞아요.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 어느새 이어폰까지 귀에 꽂아 넣고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준페이의 모습에 나 조차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CES를 위해 공항으로 이동중 갑작스런 복통으로 병원에 이송되는 바람에 게임계 최고의 이벤트를 놓쳤다며 얼마나 억울해 하던지. 현지를 다녀온 기자들의 반응에 안그래도 불편한 속이 얼마나 쓰렸을까 생각하면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다. 나 역시 알게 모르게 준페이에게 빚진 것도 있고 해서 그런지 미국에서 소식을 듣고 많이 걱정했는데, 건강해 보이니 다행이네... 괜히 걱정해서 손해본 느낌이 들 정도로 맹렬히 손가락을 움직여대는 녀석의 모습이 조금 얄밉기도 하다. 잠시동안 플레이 데모를 즐겨본 준페이는 귀에서 이어폰을 뽑아내며 놀라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대단한데? 버튼 뿐만이 아니라 십자키까지 전부 피아노 건반으로 사용할 수 있다니...” “작곡도 파이널 프론티어로 유명한 우에노씨가 담당한터라. 굉장히 서정적인 느낌을 잘 살린 거 같아.” 준페이는 내 말에 동의 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파이널 프론티어 6에 신의 선물. 거기다 차세대 기종으로 드래곤 엠블렘과 내가 없는 거리 리메이크라니, 너도 엄청 바쁘겠구나.” “뭐 사실 딱히 내가 바쁠 건 없어. 그 네 가지 게임을 전부 나혼자 만드는 것도 아니고, 이미 파이널 프론티어랑 신의 선물은 개발이 거의 끝난 상태라, 오히려 인력은 남아 돌 정도지.” “흐음... 그렇다고 마냥 놀고 있을 강준혁이 아닐텐데?” 역시 오랫동안 알고 지내 와서 일까? 준페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시치미를 땐 채로 내 곁에 있는 유키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일단 신의 선물이 발매 될 때까지는 쉬려고, 곧 아이도 태어날 거 같고...” 그러자 유키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이며 부풀어 오른 자신의 배를 쓰다듬어 보였다. “준혁씨 닮은 건강한 사내 아이였으면 좋겠어요.” “음~ 나는 널 닮은 귀여운 딸이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그냥 너희 둘 다 어디로 좀 가줬으면 좋겠는데?” “······.” 우리를 바라보는 준페이의 눈가는 어느새 촉촉이 젖어 있었다. & 일본에 돌아오고 나서 카와구치씨는 유우지씨와 함께 크로노스 트리거 제작을 위해 새로운 개발 인원을 추렸다. 역대급 디렉터가 서로의 손을 잡은 최고의 게임에 자진해서 참여하는 개발 인원들도 어마어마했는데, 게임 업계에서 일하기 전 만화 잡지에 스토리 투고를 하던 프리랜서 작가 호리이 유우지는 시간여행을 소재로 기가막힌 스토리 라인을 구성한 상태였다. 더욱이 캐릭터 작화에 토리야마씨의 이름이 올라온 것부터 이 작품의 히트는 이미 예견된 사실이었다. 하지만, 메인 스토리와 캐릭터 작화. 그리고 독특한 배틀 시스템. 어느 하나 빠질게 없는 이 작품에 사운드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부분이 아닐 수 없었다. 자칫 작품의 분위기를 모두 망칠 수도 있기에 외주를 맡기기도 영 껄끄러운 부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나의 추천으로 선별된 사람이 바로 신의 선물의 사운드를 맡았던 우에노씨였다. 신의 선물의 OST와 파이널 프론티어의 오페라씬을 감상한 피닉스 제작팀은 그의 합류를 만장일치로 찬성했고, 우에노씨는 카와구치씨의 제안을 받아 들여 크로노스 트리커 사운드 개발팀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탄생한 음악이 바로 RPG 게임 역사상 손가락에 꼽히는 명곡 중에 하나인 ‘바람의 동경’ 이었다. 전 세계를 통틀어 230만장이라는 더블 밀리언을 기록 할 크로노스 트리거가 라온으로 나와준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있어선 굉장히 가슴 설레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1994년 11월 22일. 조금은 바람이 쌀쌀하게 느껴지는 늦가을 무렵... 아키하바라엔 약 500명 가량의 게이머들이 한 행사장 앞에 밤새 굳어진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풀어대고 있었다. 어제 저녁부터 대기 행렬이 조금씩 늘어가더니, 생각보다 많이 모였네. 시장 조사를 위해 행사장에 나와 있던 나는 취재를 위해 현장에 나와 있던 준페이와 다시 만났다. 일전에 맹장 수술을 받은 준페이는 내가 병문안을 다녀온 이튿 날 퇴원 수속을 밟았다. 퇴원 초기에는 죽만 먹으며 골골 거리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완전히 평상시의 페이스를 되찾은 기색이었다. “몸은 좀 괜찮냐?” “퇴원 전 날에 너랑 유키씨 덕분에 염장이 좀 꼬이긴 했는데, 그럭저럭 견딜만해.” “그렇게 억울 하면 장가가던가.” “장가는 나 혼자 가냐? 짝이 있어야 가지!!” “그럴 때가 좋을 지도 몰라. 퇴근 할때마다 아이스 크림 배달하기 싫으면...” “아이스크림 배달? 그건 뭔소리냐?” “그런게 있어. 아무튼 유저들 반응은 좀 어때?” “뭐 나쁘지 않아. 아무리 비싸다, 비싸다 해도 결국에 살 사람은 산다 이거지.” “44,800엔이라. 소비자들 입장에선 결코 저렴한 가격은 아닐텐데?” 그러자 준페이는 손끝으로 코를 훔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NEGA 입장에선 결코 저렴한 것도 아닌가 봐. 전에 취재차 NEGA 본사를 한번 찾아갔었는데, 가격 정책에 대해 어찌나 어필을 해대는지.” “뭐, 그거야. 처음부터 잘 못 만들어진 기계니까...” “응? 방금 뭐라고...?” “아냐. 혼잣말이야.” 그리고 잠시 후 오전 11시. 세계 최초의 32비트 게임기인 NEGA 새턴이 발매를 시작했다. 동시 발매된 타이틀로는 유저의 바램대로 최고의 3D 격투 게임 ‘리얼 파이터’가 출시 되었다. 하지만 아케이드 센터에 출시된 이후 1년 가까이 지나 드디어 가정용으로 모습을 드러낸 ‘리얼 파이터’는 유저들에게 엄청난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이게 뭐야...?” 준페이 역시 행사장에서 시연 중인 새턴용 ‘리얼 파이터’의 그래픽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케이드 기판에서 보여주었던 깔끔한 3D 그래픽은 어디로 가고,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자글자글한 계단현상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센소니의 기어 스테이션과 비교되는 하드 성능 탓에 막바지 단계에서 서둘러 병렬 형식으로 CPU 하나를 더 때려박은 새턴은 이론상으론 굉장히 뛰어난 성능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 두 개의 CPU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디렉터는 이 시대에 거의 없었기에 개발자들에겐 지옥 같은 경험을 안겨주었다. 그들의 간판 디렉터라 할수 있는 스즈키 역시 초기에 고안된 듀얼 CPU의 벽을 넘지 못한 탓에 새턴의 첫 번째 작품인 리얼 파이터는 정말 처참한 수준으로 발매 되었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 45,000엔에 달하는 거금을 주고 구입한 콘솔에서 기대 이하의 그래픽을 보여주자, 유저들은 격분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콘솔 개발에만 몇 년이나 걸렸다는 차세대 기종이 런칭 타이틀로 꼴랑 ‘리얼 파이터’와 ‘데이토나’라는 레이싱 게임. 단 두 개만 들고 나온 것도 열받아 죽겠는데, 이따위 퀄리티로 뽑아져 나오다니 화가 날만도 하지... 더구나 가정용 게임이라면 응당 혼자서도 즐길 수 있을 때를 감안 하여 캐릭터마다 스토리를 넣던가 적절한 엔딩 요소를 넣어주는게 일반적이었는데, 리얼 파이터는 말그대로 아케이드 시스템 자체를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것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선택할 수 있는 메뉴라곤 ‘아케이드 모드’ 와 ‘VS 모드’ 단 두 개 뿐... 준페이는 새턴용 리얼 파이터의 리뷰 점수에 40점 만점에 10점이라는 수치스러운 점수를 안겨주었다. 그래도 런칭작에 이런 점수는 너무 하지 않냐는 주변 기자들의 만류에 준페이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야이 씨... 솔직히 10점도 아깝다.” & 새턴 발매 후 일본열도가 시끌벅적 했던 어느날 저녁. 나는 도쿄의 한 공영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12월 24일 발매 예정인 ‘신의 선물’은 이미 카트리지 제작에 들어간 상태였기에 한시름 놓은 나는 최근들어 젊음의 거리라 불리우는 하라주쿠를 자주 찾았다. 신주쿠와 시부야 사이에 위치한 하라주쿠는 다케시타토오리라는 번화가를 중심으로 뮤지션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 중에 하나였다. ‘이젠 나도 마냥 젊다곤 할 수 없네...’ 21살의 나이로 1983년으로 날아온 나는 어느새 32살의 나이가 되어 있었다. 더구나 오늘은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정장을 입고 왔더니, 평소보다 더 나이가 들어보이기도 하고... 씁쓸한 기분에 휴대용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비벼 끈 나는 천천히 중심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좀 수확이 있으려나?” 혼잣 말을 중얼거리며 인디 밴드가 자주 모이는 장소를 찾은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거리를 걸었다. 현재 일본의 아이돌은 쟈니스라는 소속사를 중심으로 SMEP이라는 남성 아이돌 그룹이 인기를 끌어가는 추세였다. SMEP은 드래곤 워리어 3와 사이킥 배틀 출시 당일 방송 펑크로 소동을 일으켰던 사카이군이 리더를 맡고 있는 그룹이었는데, 그 일이 있고나서 오히려 드래곤 워리어 전속 모델로 발탁 되어 게이머들에게도 제법 인기를 얻고 있는 아이돌 그룹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대중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초인기 그룹이라 해도 남자 아이돌은 필요 없다. 현재 내가 원하는 것은 전 일본의 게이머를 들썩이게 만들어 줄 여성 아이돌 그룹이니까. 어째서 아이돌 육성 게임을 만드는 것에 실제 거리의 인디 밴드를 찾아다니냐고 묻는다면, 첫 번째로 누구나 인정할 만한 가창력을 가지고 있는 가수 지망생을 기용하는 것이 그녀와 나. 서로에게 좋기 때문이지. 물론 대중의 취향을 따르는 것이라면 현재 오리콘 차트 1위를 달리고 있는 JARD의 사카이 이즈미씨에게 부탁하는 것이 최고긴 하지만, 나는 오히려 대중들에게 알려진 최고의 뮤지션 보다 미숙하지만, 내가 만드는 게임과 함께 성장해 나갈 신인 아이돌 그룹을 만들고 싶었다. 기왕이면 곧장 게임 캐릭터로 삼아도 문제가 없을 만큼. 미모와 가창력을 소유한 그런... 그때 어디선가 내 귓가에 독특한 음색의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로등 켜질 무렵. 네 한 쪽 어깨에 기대어~ 바라본 저 하늘 위에 노을 빛에 물든 구름이 두둥실...” 어쿠스틱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굉장히 앳되 보이는 얼굴과 청순한 미소. 그리고 호소력 짙은 그녀의 음색은 나를 비롯해 거리를 지나던 모두의 발걸음이 그대로 멈추었다. “와아... 목소리 좋다..” “누구지? 이 거리에서는 처음 보는데?” “저 정도면 데뷔해도 되지 않을까?” 어느새 주위로 모여든 사람들은 그녀의 목소리를 칭찬하며 기타 케이스에 동전을 넣어 주었다. 잠시 후 한 곡의 노래가 끝난 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청중들에게 허리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 잠시동안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다음 곡을 준비하는 그녀의 앞에 다가가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저랑 계약하고 아이돌이 되어주지 않겠습니까?” < EP. 35 : 바람의 동경. (3) > 끝 < EP. 36 : 싱어송라이터. (1) > “저랑 계약하고 아이돌이 되어주지 않겠습니까?” “네?” 나의 질문에 당황했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떠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빙긋 미소를 그렸다. 이런 너무 앞 뒤를 잘라먹고 질러 버렸나? 하지만 그만큼 그녀의 목소리는 사람을 사로 잡는 힘이 있었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그녀 정도 실력이라면 언젠가 매니지먼트에서 제의가 왔을 테니까. “저기... 일단은 오늘 공연을 마무리 해야해서..” “아, 실례했습니다. 공연이 끝날때까지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살짝 고개 숙여 그녀에게 사과한 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녀의 공연을 지켜 보기로 했다. 작은 의자에 기대앉은 그녀는 보온병에 담긴 따듯한 차로 목을 축인 뒤 아까와는 또 다른 음색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스쳐 지나는 매일매일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지만, 서로의 마음 만은 언제나 곁에 있다고 생각해 함께 하지 못 해도 괜찮다면서 강한 척 이야기 해 봐도 한숨만 섞이는걸 지나가는 계절 속에 놓아두고 온 보석 그것은 소중한 조각을 잃어 버린 미완성 된 퍼즐... 하얀 눈이 거리를 새하얗게 물들이는 것 처럼 추억으로 이 앨범을 가득 채울수 있도록~ 마이크를 입가에 대고 두 눈을 감은채 열창하는 그녀의 모습은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더욱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다가오는 겨울을 위한 그녀의 발라드 곡은 새하얀 눈처럼 포근하게 우리를 감싸 주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또 한 곡의 노래가 끝나자, 사람들은 환호와 함께 박수를 보내며 그녀를 응원해주었다. 뒤이어 그녀는 직접 자신이 작곡한 곡들을 연달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나서야 후련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향해 웃어보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그녀의 매혹적인 목소리로 어느새 주변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녀의 기타 케이스 안에는 얼추 세어보아도 제법 커보이는 액수의 돈이 들어 있었다. 단지 동전 하나라고 해도 엔화는 금액이 쎈 편이었으니까... 접이식 의자를 반으로 포개며 자리를 정돈 중인 그녀는 내가 다가가자, 허리를 일으켜 세우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헛... 자세히 보니 또 엄청 귀염상일세? “아직... 계셨네요?” “빈 말이 아니니까요. 아까는 너무 두서없이 질렀는데, 정식으로 제 소개드리자면...” “아뇨. 전 그냥 노래 하고 싶었을 뿐. 가수가 되려던 것은 아니라서요.” 어라? 칼 같이 내 말을 잘라낸 그녀는 서둘러 바닥에 놓여진 기타 케이스를 둘러 매었다. “아니, 그게...” “죄송합니다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뭐지...?” 내가 뭘 잘 못 했나? & “음? 그래서 도망쳤다구요?” “응. 뭔가 굉장히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어...” 저녁 식사 후. 유키가 건네 주는 커피를 받아든 나는 따듯한 머그잔을 감싸 쥐었다. 그녀는 나의 반대편 소파에 앉아 컵 뚜껑에 묻어난 아이스크림을 할짝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의라 당황한게 아닐까요?” “냐앙~” “아쿠~ 우리 하루 왔쪄요~” 유키는 그녀의 다리 사이를 비비적 거리는 하루를 안아 올려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 두었다. 유독 그녀한테 만은 절대로 발톱을 세우지 않는 녀석은 유키의 허벅지 위에서 완벽한 ‘식빵 자세’를 취해보였다. 얇은 손가락으로 꼬리 근처를 어루만져주자, 기분이 좋았는지 살랑거리는 꼬리로 그녀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하하, 간지러~” 나는 따듯한 커피 한모금을 삼키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무리 애완동물이지만, 임산부한테 위험한거 아냐?” “안그래도 의사 선생님 한테 물어봤는데, 특별히 나쁠건 없데요. 그래도 준혁씨 출장 다녀오는 동안 하루가 옆에서 얼마나 애교를 떨어주던지, 하루종일 웃겨서 혼났어요.” 그녀의 무릎위에서 두 눈을 감고 있는 하루는 어느 날 친정에 다녀온 그녀가 데리고 온 길냥이다. 유키의 본가가 있는 키지죠지는 거리에 유난히 고양이가 많기로 유명한 지역이다. 동네 주민들도 길냥이의 존재를 하나의 일상처럼 여기고 있어 녀석 들을 위해 가끔 담벼락에 먹이를 놓아 주곤 했다. 유키네 어머니 역시 작은 마당에 항상 고양이 사료를 한그릇씩 놓아 두었는데, 어느 날 새끼고양이 한 마리가 어미와 떨어졌는지, 한참을 마당에서 서성였다고 한다. 한창 비가 내려 흠뻑 젖은 새끼 고양이를 할 수없이 집으로 들인 어머님은 아이를 잘 씻긴 뒤 다음 날 햇빛이 쨍 할 때 마당에 놓아 두었지만, 새끼 고양이의 어미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마침 친청에 들린 유키의 눈에 새하얀 새끼 고양이가 얼마나 이뻐 보였을까? 당시 야근도 잦았던 터라 주말에도 회사에 나가면 텅빈 집에서 혼자 지내는게 외로웠던지, 유키는 당장 고양이를 안아들고 우리집으로 돌아왔다. 그 날 저녁.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생전 처음보는 새하얀 새끼 고양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넌 누구니...?” “아, 준혁씨. 이쪽은 고양이 하루. 오늘 친정에 갔다가 데려왔어요.” “어라? 어머님께서 고양이를 키웠던가?” “아뇨. 키지죠지의 길냥이에요. 어미 고양이가 버리고 갔는지 혼자 정원에서 바들거리고 있어서 그만...” “흐음... 그래서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그냥 데려 오셨다?” “우리가 키우면 안... 될까요?” “아니 뭐 안 될건 없지만서도... 흐음...” 잠시 무릎을 굽힌채 새끼 고양이와 정면으로 마주본 순간.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녀석의 손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캬앙~!!” 퍼억!! “꺅!! 하루야!!” 첫 만남부터 내 면상에 고양이 펀치를 날린 녀석은 예상대로 ‘숫놈’ 이었고... 그후로도 유키한테는 껌뻑 죽지만, 유난히 나한테 만큼은 차가운 녀석이 바로 고양이 하루였다. 그때 어느새 아이스크림 하나를 전부 비워낸 유키가 탁자에 빈컵을 올려 두며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하라주쿠의 인디 밴드는 왜 찾아 다니는 거예요?” “음~ 조금 재밌는 생각이 떠올라서...” “또 새로운 게임을 구상하고 있는 건가요?” 유키의 물음에 나는 머그잔을 입가에 옮기며 빙긋 웃어 보였다. “아니, 이번에 구상중인 프로젝트는 꼭 게임에 대한 것 만은 아니야.” 알 듯 말 듯한 나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키는 하루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또 우리 서방님 전매특허 나왔네~” & “가수 오디...션 말입니까?”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한 프리젠테이션을 마치자, 회의실에 모인 직원들은 하나 같이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레이저 포인터를 슈트 안에 집어 넣으며 카와구치씨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각 지역별로 대표를 뽑아서 최종적으로 한 9명쯤...?” “네에!? 9명이나요?” 전례에 없는 9인 체제로 이루어진 여성 아이돌 그룹 발표에 회의실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대체 강준혁 부장님은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지? 이젠 감도 안잡히네...” “그러게 말야. 우리가 무슨 매니지먼트 사업체도 아니고, 가수 오디션은 대체 왜...?” 웅성거리는 대화 속에서 몇몇 이야기를 캐치한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자신있게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일단 오디션을 마치고 나면 본격적인 게임 제작에 들어갈 겁니다.” “게임이라구요?” 내 말이 잘 이해가 안되는지 회의실 상석에 앉아 있던 카와구치 대표가 나에게 되물었다. “물론이죠. 저희 펜타곤은 게임 회사니까요. 다만 이번 프로젝트는...” 다음 말을 잇기 전 잠시 뜸을 들이자, 회의실 직원들은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살짝 허리를 숙여 양손으로 테이블을 짚은 채 뒤에 말을 이었다. “현실과 가상의 중간점에 있는 게임을 만들어 볼 예정입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 하나로 향후 10년간 게이머들에게 엄청난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을거라,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당당한 나의 발언에 카와구치 대표를 포함한 펜타곤 직원들은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말야... 막상 이 게임을 만들면 장르를 뭐라고 해야하지? 가상현실 아이돌 게임? 아냐, 아냐.. 뭔가 더 체계적이고 확 끌어 당길 수 있을 만한 장르명이어야 하는데... 직원들이 넋이 나간 동안 머릿속으로 게임의 장르명을 구상하던 나는 잠시 후. 테이블 위에 올려둔 손에 힘을 더하며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그래. 굳이 이 게임에 장르를 붙여 보자면 ‘리얼 아이돌 육성 프로젝트’라고 하는게 좋겠군. & 다음 날 저녁. 퇴근 후 나는 지난 번에 만났던 거리의 싱어송라이터를 찾기 위해 다시 하라주쿠의 다케시타토오리를 찾았다. 이틀 전에 그녀를 만났던 곳 근처에 도착한 나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타 소리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어째 기타 소리가 영 이상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벤치가 설치된 모퉁이를 돌아 거의 뛰다 싶히 도착했지만, 노래의 첫소절을 듣자마자 나는 그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아니다.’ 젠장. 헛걸음 했네. 오늘은 안 나온건가...? 전에 그녀가 노래했던 자리에는 괴랄한 코스튬으로 무장한 인디 밴드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후지산을 살해하라!! 도쿄 타워를 범해라~!!” ... 저건 대체 무슨 노래냐? 후지산을 왜 죽이고, 도쿄 타워는 왜 범해? “크오오오~!!!!!” “이야아아아아~!!!!” 이곳에 더 있다간 정신이 이상해 질 것 같은 느낌에 곧장 자리를 떠난 나는 혹시나 그녀가 자리를 빼앗겨 다른 곳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을까 싶어 거리 곳곳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도 그녀와 비슷한 음색을 가진 싱어송 라이터는 보이지 않았고, 결국 깜깜한 밤이 되고야 말았다. 꼬르르륵... 이미 저녁 식사시간을 한참 넘긴 탓에 허기가 졌던 나는 잠시 길가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체 어디까지 온 거냐. 이대로 돌아가기도 그렇고, 일단 뭐라도 먹을까?” 나는 최근에 개통한 휴대폰으로 유키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 식사 하고 들어간다고 전해주었다. “으구... 맛있는거 해주려고 장 봐왔는데...” “미안. 여기서 간단히 먹고 들어갈게.” “알았어요. 너무 늦지 않게 돌아와요.” “응. 이따 봐.” 유키와 통화하며 거리를 걷던 도중 골목 끝에 노란색으로 빛나는 간판이 보였다. ‘키시모리 라멘?’ 보통 이런 동네에서 자기 이름을 걸고 하는 라멘집은 보통 평타 이상은 치는 법이지. 허기짐에 서둘러 메뉴를 정한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노란 간판이 있는 골목 끝으로 달렸다. 끼이익. 철제로 된 미닫이 문이 뻑뻑하게 걸렸지만, 코끝을 자극 하는 구수한 돼지 사골 냄새에 속으로 빙고를 외치며 가게에 발을 들여 놓자 안에서 맞이 인사가 들려왔다. “어서오세요~~” 나긋한 여성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가게 안으로 들어오려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손님...? 어디 불편하세요?” 갑작스런 돌발 행동에 내 곁으로 다가온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가슴께에 끌어안고 있던 쟁반을 콱 움켜 쥐었다. “아, 당신은 설마!?” “아하하... 오해 하지 마세요. 단지 배가 고파서 찾아 왔을 뿐입니다.” < EP. 36 : 싱어송라이터. (1) > 끝 < EP. 36 : 싱어송라이터. (2) > “아, 당신은 설마!?” “아하하... 오해 하지 마세요. 단지 배가 고파서 찾아 왔을 뿐입니다.” “어서오십쇼~ 손님. 어이 칸나 뭐하고 있는 거야? 손님이 오셨으면 어서 자리에 모셔야지.” 요리사 복장을 하고 있는 덩치 큰 남자의 목소리에 퍼뜩 놀란 그녀는 나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나에게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한창 바쁠 시간에 넋 놓고 있으면 안된다.” “죄송해요. 아빠.” 허억!! 아빠!? 주방에 서있는 골리앗을 닮은 저 남자가 그녀의 아빠라고? 하지만 바쁘다는 그의 말처럼 좁은 가게 안은 손님들로 꽉꽉 들어차 있었다. 주방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뜨거운 육수의 증기가 가게 안을 가득 메우고 있어 꼭 한증막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잠시 후. 물수건과 함께 차가운 물을 가져다준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나는 허기짐에 일단 메뉴판을 펼쳐 들었다. “뭘로 하시겠습니까. 손님~” 경쾌한 주방장의 목소리에 나는 돈코츠(돼지뼈) 라멘과 교자. 그리고 하이볼이라는 가벼운 주류를 주문했다. 종업원인 칸나씨와 주방 인원까지 도합 4명으로 이루어진 조그만 라멘집은 마치 달리는 증기기관차에 석탄을 집어 넣듯 힘차게 메뉴를 외치며 각자 조리에 들어갔다. 지글거리는 기름 튀는 소리와 사람들의 수다... 이곳은 하루를 마감하는 직장인들의 휴식 공간과도 같은 곳이었다. “주문하신 돈코츠 라멘과 하이볼 나왔습니다~ 교자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라멘의 면발을 휘적 거리다 후루룩 면발을 집어 삼킨 나는 입안 가득 진하게 느껴지는 육수의 맛에 빙긋 미소가 그려졌다. “와아. 이 라멘 진짜 맛있는데요?” “감사합니다~ 저희 가게는 처음이신가요?” “네. 저는 록폰기쪽에 살고 있거든요. 일본에 오랫동안 살았지만, 하라주쿠는 자주 오질 않아서...” “잘 오셨습니다. 사실 저희 가게가 하라주쿠에서 꽤나 유명한 라멘집이거든요.” “아, 그래요? 어쩐지 라멘 맛이 아주 좋네요.” “손님. 혹시 ‘오늘은 어디가요? 오나카 스이타상’이란 프로그램 알고 계시나요?” 음? 오나카 스이타 상이라면 유키가 제작년에 맡았던 심야 먹방 드라마? “아... 네. 알고 있어요. 설마?” “으하하~ 맞습니다. 실은 저희 가게가 거기 5화에 소개 됐었거든요. 그 이후로 점점 손님이 늘어나더니, 지금도 이렇게 많이들 찾아와 주시고 있죠. 역 앞 상점가도 아니고, 이런 외진 골목의 라멘집까지 찾아와 주시는 손님들 덕에 바쁘지만, 하루하루가 너무 즐겁습니다.” 어쩐지 가게 안이 좀 낯이 익다 싶더라니... 시원한 얼음이 들어있는 하이볼을 삼키며 천천히 가게안을 둘러보니, 과연 가게 안에 드라마 주인공과 주인장이 함께 찍은 사진이 이곳저곳에 걸려 있었다. 그러던 중 모퉁이에 걸려 있던 사진 한 장을 바라본 나는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주인장은 고개를 갸웃 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아는 분인가요?” “여기 사진 속에 있는 여자... 드라마 작가죠?” “어? 맞아요. 손님이 어떻게 그걸?” 그때 카운터 쪽에서 계산을 마치고 돌아오던 칸나씨가 입을 열었다. “저 분 방송 관계자시거든요.” “허억!! 정말이십니까?” “네...? 아니 저는...” 으잉... 이거 어째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네? & 결국 서비스랍시고 교자에 카라아게(닭튀김) 까지 얹어주신 덕에 속이 더부룩해진 나는 식사를 마치고 입가심 겸 하이볼을 한잔 더 주문하였다. “식사는 입에 맞으셨습니까?” “아, 네.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하하~ 설마 유키씨의 남편 분이실 줄이야. 깜짝 놀랐네요. 그런데 하라주쿠엔 어쩐 일로 오셨나요? 뭔가 다른 취재거리라도 있는건가요?” “실은 다케시타 거리에서 공연을 하는 뮤지션들을 좀 보러왔습니다.” “아~ 그 인디 밴드인가 뭐시긴가 하는 젊은이들 말이군요. 어휴~ 그거라면 전 별로 드릴 말씀이 없을 것 같군요. 안 그래도 요즘 그것 때문에 정신 사나워 죽을 지경입니다. 초저녁부터 별 노래 같지도 않는 노래나 불러 싸대며 꽥꽥 거리는데, 처음에는 그런데로 참아줄만 하더니, 요새는 아주 도를 넘어서는 것 같더군요. 도쿄 타워를 범하라니 어디서 그런 남사스런 노래를 불러 제끼는지. 그런 녀석들은 저희 하라주쿠의 수치입니다.” ‘이 아저씨... 설마 자기 딸이 거리에서 노래 부르는 걸 모르는 건가?’ 살짝 고개를 돌려 칸나씨를 바라보니,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대충 어느 정도 확신이 들었다. 나는 추가로 나온 하이볼을 한모금 삼킨 뒤 주인장에게 말했다. “사실 전 방송국 쪽 관계자는 아닙니다.” “아, 그러세요? 그럼 이곳은 유키씨가 알려 주셨나?” “아뇨. 이곳에 온건 정말 우연이에요. 단지 ‘누구’를 조금 찾다가 배가 고파서 들어온 가게입니다.” 누구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살짝 눈길을 돌려 칸나를 바라보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행주를 들고 테이블을 닦기 시작했다. “허어~ 그럼 그 분은 찾으셨습니까?” “네. 다행히 우연에 우연을 겹쳐 찾아냈네요.” “그거 잘 됐군요.” 주인장의 대답에 나는 빙긋 웃으며 하이볼을 비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계산 부탁드려요. 칸나씨.” “아, 네.” 테이블을 닦고 있던 그녀는 나의 부름에 서둘러 달려와 계산대 앞에 섰다. 다행히 계산대는 주방쪽과 거리가 좀 있던터라 나는 지갑을 열어 계산과 동시에 어제 전해주지 못한 명함을 꺼내 들었다. “펜타곤이라는 게임 회사에 다니고 있는 강준혁입니다.” “게..임 회사요??” 어라? 우리 회사를 모르는 건가? 그래도 게임 쪽에선 꽤나 알아주는 회사인데, 나는 혹시나 싶어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라온이라고 휴대용 게임기를 만든 회사인데, 잘 모르시나요?” “아~ 친구들이 하는 건 본적이 있긴한데, 제가 게임을 좋아하지 않아서...” 음... 하긴 뭐 인터넷 뉴스가 발달한 시대도 아니고, 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면 모를 수도 있지. 나는 그녀의 조그만 손에 돈과 함께 명함을 함께 쥐어 주며 말했다. “이번에 저희 회사에서 기획 중인 게임이 있는데, 그 게임에 칸나씨의 목소리가 꼭 필요합니다. 한 번 잘 생각해보시고 연락주세요.” 그리곤 슬쩍 주인장을 돌아보며 뒤에 말을 덧붙였다. “아버님에겐 절대 비밀 보장 해드릴 수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아...” & “아, 정말요!? 오늘 저녁 먹은 곳이 키시모리 라멘이었어요?” “그렇다니까. 나도 주인 아저씨한테 이야기 듣고 얼마나 놀랐는데.” “안 그래도 하라주쿠면 거기 가보라고 알려주려고 했는데, 통했네요?” 하루를 품에 앉은채 방실방실 웃어 보이는 유키는 키시모리 라멘의 국물 맛을 떠올렸는지 침을 꼴깍 삼키며 말을 덧붙였다. 나는 그런 그녀의 반응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잡지를 펼쳐 들었다. “아~ 나도 키시모리 돈코츠 라멘 먹고 싶다아~” “그러고 보니 교자도 참 맛있더라.” “허억!! 교자!! 교자도 먹고 싶다아~” “그리고 카라아게(닭 튀김)도...” “아악!! 진짜 얄미워!! 안그래도 꾹 참고 있는데~!!” “하하~ 미안.” “그런데, 준혁씨가 찾던 사람이 키시모리 라멘의 칸나씨였다니. 재밌는 우연이네요. 그 아이 제 작년에 봤을 때는 고등학생이었는데 어찌나 이쁘던지.” “그러게. 칸나도 맛있더라...” “······방금 뭐라고요?” “내가 방금 뭐라 그랬지?” 슈욱!! 퍼억!! 눈 깜빡 새에 날아온 쿠션 하나를 팔꿈치로 튕겨내자, 음속을 뛰어 넘는 이도류 타입. 쿠션 베게의 흉폭자 유키가 어느새 자신의 맹수를 바닥에 내려 놓은 뒤, 나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이래서 사람은 대화 도중에 딴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했던가? & 1994년의 12월 23일.. 칸나씨와 만나고 명함을 건네준 뒤 거의 한 달이 다되어 가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그녀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회사 전화 번호와 휴대폰 번호까지 적혀 있건만, 아직까지 연락이 없는 걸보면 역시 가수 쪽으로는 생각이 없는 건가? 모른척 키시모리 라멘집에 다시 한 번 찾아가 보고 싶었지만, 왠지 그녀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았던 나는 그냥 꾹 참기로 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해 패미통신과 인기 게임 잡지사를 통해 공개 오디션을 발표하자, 제법 많은 지원자들이 몰려들고 있어 오디션만 치루기에도 어느정도 시간이 소요 될 것만 같았다. ‘서두르지 말자. 뜻이 있으면 그녀 스스로 다가오겠지.’ 나는 초조해지는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 마시며 아키바의 거리를 둘러 보았다. 최근 일본의 게임시장은 그야말로 혼돈의 어비스라고 할 수 있다. 12월 초에 출시된 센소니의 ‘기어 스테이션’으로 콘솔 시장이 양분화 되자, 유저들은 과연 기어 스테이션과 NEGA 새턴 사이에서 어떤 기기가 나은지에 대해 갈팡질팡 망설이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게임 산업에 처음 뛰어든 센소니의 기어 스테이션은 굉장히 막강한 성능으로 무장했지만, 몇가지 불안 요소가 있었다. 과연 굴지의 대기업인 센소니가 게임 시장의 재패를 위해 얼마만큼의 투자를 할 것인가? 슈퍼 패밀리와 NEGA 드라이브가 한창 잘나가던 90년대 초반에도 새로운 콘솔을 내세운 기업이 있었지만, 서드 파티의 확보가 되지 않아 바람 같이 스러져간 기업이 많았기에 센소니 역시 초기에만 반짝하고 사업을 접어 버릴 확률을 무시할 순 없었다. 이래서 호랑이가 없는 굴엔 토끼가 왕이랬던가? 민텐도의 프로젝트 64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나오지 않자, 콘솔 시장은 신흥기업 센소니와 2인자 NEGA의 경쟁 구도로 묘하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물론 NEGA 입장에서 센소니의 기어 스테이션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그것을 뛰어 넘을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스펙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여태까지 게임을 만들어온 노하우와 더불어 리얼 파이터의 스즈키 류와 소니크의 타카 유지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NEGA 앞에 의외의 복병이 튀어 나왔으니... 그것은 민텐도를 버리고 센소니 진영으로 붙어 버린 NANCO 였다. 민텐도의 프로젝트 64가 실현 되기 전에 NEGA의 계획은 이 기회를 틈타 민텐도에 속해 있던 서드 파티를 빼내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저들에게 상당한 인지도를 가지고 있던 NANCO가 뜬금없이 기어 스테이션 발매일에 맞춰 ‘레이지 레이서’ 와 ‘아이언 피스트’라는 3D 격투 게임을 내놓았다. 안 그래도 최근 아케이드 센터에서 자주 ‘리얼 파이터’와 비교 되었던 ‘아이언 피스트’가 기어 스테이션으로 출시되자, 유저들은 너나 할거 없이 기어 스테이션 쪽으로 몰려 들었다. 소비자가 34,800엔으로 설정된 본체 가격은 경쟁사인 새턴보다 10,000엔이 저렴했기에 유저들은 주저없이 새턴보다 성능이 좋고, 가격이 저렴한 기어 스테이션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덕분에 새턴은 발매 초기부터 잡지사들의 혹평과 센소니의 시장 선점 효과로 불안한 출발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지옥과도 같은 시장 구조에서 우리 펜타곤은 천천히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입증하듯 펜타곤 프리미엄 샵 앞에는 초저녁부터 수많은 유저들로 붐비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 고객님들. 그대로 줄을 서고 계시면 순서대로 담요를 나눠 드리겠습니다~!!” 미야자키씨의 외침과 함께 수많은 직원들이 ‘신의 선물’의 일러스트가 그려진 담요를 손님들에게 나눠 주기 시작했다. 오늘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담요 500개지만... ‘이거 어째 분위기를 보아하니, 한참 모자라겠는데...?’ 내일은 1994년 12월 24일.. 그래픽 노블 with 클래식이란 장르명이 붙여진 ‘신의 선물’의 정식 발매일이다. < EP. 36 : 싱어송라이터. (3) > & 펜타곤 소프트 이사. 강준혁. ‘이사’ 라면 회사 내에서도 꽤나 높은 직위 아닌가? 침대에 누워 손 끝에 걸린 명함 한 장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책상위에 명함을 올려두었다. 그리곤 옷장 위에 올려진 숨겨진 엄마의 기타 케이스를 바라보며 혼자 중얼 거려 본다. “엄마. 나 어떻게 할까...?” & 다음 날 아침. 오전 수업을 위해 학교로 향하는 전철 안은 언제나 사람들로 많이 붐빈다. 출근하는 직장인과 등교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어렵사리 전철에 오르면 나는 숨조차 쉬기 힘들 정도인데, 다들 용케도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른들은 여전히 조그만 책을 손에 들고 보시지만, 내 나이 정도의 아이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전철에 오르자마자, 새하얀 게임기를 꺼내들었다. 민텐도에서 휴대용 겜보이라는 걸 출시했을 때부터 전철 안에서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조금씩 보이긴 했는데, 저 새하얀 게임기가 나타나고 부터는 폭발적으로 그 수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였다. 더구나 학교 내에서도 휴강 때 캠퍼스에 모여 책을 읽던 아이들 조차 최근엔 서로의 게임기에 케이블을 연결하고 함께 무언가를 즐기곤 하였다. ‘라온..’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 게임기의 이름 뿐이었다. 잠시 후. 전철이 학교가 위치한 역에 멈춰선 뒤, 겨우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온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칸나~” 전철 역 계단을 내려오니 같은 고등학교 출신인 마유미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녀의 남자 친구인 나카무라군이 오늘도 이어폰을 꽂은 채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마유미와 나는 학과는 달랐지만, 같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고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친한 친구였다. “마유미, 나카무라군. 좋은 아침~” 하지만 나카무라는 내 말을 듣지 못했는지, 열심히 게임기만 두드리고 있었다. 결국 마유미에게 등짝을 쎄게 얻어 맞은 나카무라는 비명을 내지르며 이어폰을 뽑아 내었다. “아~ 씨!! 잘되어 가고 있었는데~!! 128콤보였단 말야...” “너 진짜 아침부터 내내 그 게임기만 붙잡고 말야. 사람이 옆에서 인사 하면 들을 줄 알아야지!!” “인사 하려고 했어. 하려고 했다고~!!” 나카무라는 아쉬운 표정으로 툴툴대며 손에 들고 있던 게임기의 전원을 내렸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나카무라의 게임기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 그거 라온이지?” 나의 물음에 나카무라군과 마유미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떠보이며 나에게 되물었다. “칸나, 네가 라온을 알아?” “응. 뭐 워낙에 유명하니까. 요즘 지하철에서도 많이 보고...” “그래도 이름까지 콕 집어 언급한 건 처음이잖아. 살다보니 별일이 다 있네...” 나카무라는 가방 안에 라온을 집어 넣고는 씨익 웃어보였다. 나는 그런 나카무라군을 향해 재차 물어보았다. “나카무라군은 게임 좋아하지?” “물론이지. 말이라고~” “주로 어떤 게임을 좋아해?” “글쎄... 굳이 장르를 따지진 않지만, RPG 게임을 주로 하는 편이지. 그리고 펜타곤 게임이랄까?” “펜타곤 게임?? 그런 장르도 있어?” 그러자 나카무라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내 질문에 자세히 답해 주었다. “펜타곤 게임이란 장르명이 아니라, 말 그대로 펜타곤이란 게임 회사에서 제작한 게임들을 일컫는 말이야. 아무리 게임을 잘 모르는 너라도 파이널 프론티어. 드래곤 엠블렘 같은 게임은 들어 봤을거 아냐? 그 작품들이 전부 펜타곤에서 만들어진 작품이거든. 명작 제조기라고도 불리우는 회사인데, 팬층이 어마어마하지. 그 외로도 뉴스에도 나왔던 내가 없는 거리라던가...” 그때 나카무라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유미가 손가락을 튕기며 입을 열었다. “아~!! 내가 없는 거리!! 그 게임은 나도 그거 알아.” 나와 마찬가지로 게임에 대해 별로 흥미를 못 느끼는 마유미 조차 ‘내가 없는 거리’에 대해선 꽤나 관심을 보였다. “어라? 너도 그 게임 해봤냐?” “아니. 한창 그 게임이 출시 됐을 적에 새벽에 물 마시러 거실에 내려 갔더니, 남동생 방에서 막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그래서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살짝 문을 열어 봤더니, 게임 패드인가? 그걸 이마에 대고 펑펑 울고 있던데?” 마유미의 말에 나카무라군 역시 충분히 동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해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내가 없는 거리는 내 인생 최고의 게임이었지.” “히이익~!! 오타쿠!!” 순간 자신과 슬쩍 거리를 두는 마유미에게 나카무라는 픽 하고 웃음을 새어보였다. “그 게임은 진짜 작정하고 울리려고 만든 게임이라, 일반인들한테도 인기가 많았어. 특히 2부 부터는 웬만한 정신력으로는 버티기 힘들 걸?” “정말 그 정도야?” “빌려줄테니까, 한번 해볼래?” “아냐, 내 동생도 무슨 신주 단지 모셔놓듯 아직까지 보관하고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해볼 수 있으니까 괜찮아.” 나카무라와 마유미의 반응에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생각에 잠겼다. ‘펜타곤 소프트라는 곳이 굉장히 유명한 곳이었구나. 그런데 왜 그런 곳에서 나에게 아이돌이 되어 달라는 말을 했던 것일까?’ 강준혁이라는 사람. 인상은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던데, 더구나 정말 유키 언니의 남편이라면 믿을 만한 사람 인 것 같고... 그 날 오후. 첫 강의를 마치고 학생 식당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학생들이 식당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식권을 끊고 어디에 앉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한쪽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칸나~ 여기야~!!” “아, 마유미.” 나카무라와 식사중이었던 그녀는 손수 의자를 빼주며 나에게 권했다. 이미 식사를 마친 나카무라는 테이블에 앉아 이어폰을 꽂은 채 라온에 열중하고 있었다. “또 시작 됐다. 또 시작됐어.” 마유미는 손수 싸온 도시락 반찬을 삼키며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열심히 게임기를 두드리던 나카무라는 잠시 후. 비명을 내지르며 테이블에 엎드렸다. “으어어... 젠장 맞을 고지를 앞에 두고, 187콤보에서 무릎을 꿇다니.” 너무나 억울해하는 나카무라의 모습에 괜히 궁금해진 나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아침부터 무슨 게임을 하는 거야?” “음.. 글쎄.. 리듬 게임이라고 해야하나?” “리듬 게임?” “아침에 말한 펜타곤에서 이번에 새로 나오는 신작 게임인데, 이게 진짜 한번 해보면 헤어나올 수가 없다니까?” “그 정도야?” 그러자 나카무라는 자신의 손에 들린 라온을 나한테 내밀며 말했다. “그렇게 궁금하다면 직접 한 번 플레이 해볼래?” “한 번... 해봐도 돼?” “물론이지. 자~ 내가 알려줄게.” 나카무라는 자리를 옮겨 내 옆자리에 앉은 뒤 비교적 쉬운 곡이라며 내 손에 라온을 들려 주었다. 처음 손에 쥐어보는 라온은 왠지 부드럽게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보다 가볍네?” “그치? 자~ 그럼 여기서 A버튼을 누르고, 데모 플레이를 선택 하면...” 생각보다 간단한 조작 법에 나는 나카무라군이 알려주는 대로 고개를 끄덕인 뒤 이어폰을 꽂았다. ‘화면 위에서 내려오는 리듬 바를 하단의 타이밍 노트에 맞춰 버튼을 누른다고 했지...?’ 잠시 후. 나는 상단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붉은 색 리듬 바를 주시하며 버튼을 누르자, 맑고 청량한 피아노 소리가 내 귓가에 울렸다. 그리고 그 리듬에 맞춰 화면 안에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한 소녀의 뒷모습이 잠깐 스쳐보였다. “아...” 작게 탄성을 내지르며 이어서 내려오는 리듬 바에 맞춰 또다른 버튼을 누르자, 베이스 음악 토대로 하나의 피아노 연주곡이 귓가에 울리기 시작했다. “처음 치곤 제법인데?” 옆에서 들려온 나카무라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올 정도로 음악에 집중한 나는 이어서 내려오는 리듬 바를 타이밍 좋네 쳐내며 음악을 이어 나갔다. 연속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타이밍에 맟춰 내 손가락이 춤을 추 듯 움직이자, 이어폰 넘어로 나카무라군의 탄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지금 화면에 스쳐지나는 소녀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타이밍이 어긋나면 그녀의 모습은 다시 이전 장면으로 돌아가기에 히로인의 모습을 완벽하게 보기 위해선 기계처럼 정밀한 타이밍으로 퍼팩트 콤보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나름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지만, 음악이 중반부로 흐르자 상단에 수많은 리듬바가 빠른 속도로 쏟아져 내려와 타이밍을 맞추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내 칸나~!!” 어느새 마유미까지 내 곁에 붙어 응원해 주었지만, 결국 65콤보에서 내 플레이는 무너지고 말았다. 한 번 타이밍이 어긋나기 시작하자, 회상 게이지라는 막대 그래프가 순식간에 밑으로 떨어지더니 게임 종료를 알린 것이다. “이야... 그래도 처음 플레이에 65콤보라니, 대단한데?” 이어폰을 빼내자, 나카무라군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라온을 넘겨 받았다. “그러게 정말 처음 해본 거 맞아?” “응.. 근데 뭔가 신선했어. 내가 알던 게임은 슈퍼 마리지처럼 적을 물리치는 그런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건 뭔가 좀 특별하달까?” “그렇지? 이게 바로 내가 펜타곤 게임을 좋아하는 이유지. 뭔가 새로운 게임이 발매 될 때마다 굉장히 세련된 느낌을 주거든~” 딱 한번 플레이해 보았지만, 나카무라군이 저렇게까지 극찬하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때 칸나 재밌었어?” 마유미의 물음에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솔직한 감상을 내 놓았다. “뭔가... 슬펐어.” “으잉? 슬프다고?” “응... 뭐랄까 연주곡이 굉장히 아련하게 다가와서 플레이 하는 내내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리려 애쓰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달까? 마치 피아노 솔리스트 연주를 하고 난 느낌이 들어...” “빙고~ 아주 정확한데? 실제로 PC 통신 커뮤니티에도 애절하다고 감상평이 자주 올라오거든.” 이후에 들은 나카무라의 설명으로는 ‘신의 선물’ 이라는 제목의 이 게임은 다음 달인 12월 24일 정식버전이 발매 될 예정이라고 들었다. 내가 플레이한 것은 본편에서 플레이 가능한 연주곡 중에 4곡이 담겨 있는 플레이 데모 버전이었고, 이 체험판 게임을 통해 플레이어는 팜플렛에 그려진 히로인 뒷모습 말고 그녀의 얼굴을 확인 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나카무라 군이 풀 콤보 등급으로 클리어한 캐릭터는 생기발랄 해보이는 금발 머리의 캐릭터 유키노조 카오리와 귀여운 외모의 챌리스트 오오타니 하루카라는 캐릭터였다. 모든 리듬바를 풀콤보로 클리어 하고 나면 특전으로 언제든지 히로인의 얼굴을 볼 수 있다나 ? “이제 나머지 두 명의 얼굴을 보기 위해 데모 플레이 시간만 62시간을 플레이 중이지... 그중에 특히 주인공의 레슨 선생 역할로 나온 ‘사츠키 노리코’ 는 내가 알기론 아직까지 클리어한 사람이 없다더라...” “헉~ 그 정도야?” 마유미는 나카무라군의 설명에 호기심이 동했는지, 최고 난이도라 불리우는 사츠키 노리코 테마를 시켜달라고 졸라댔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도전이었는지는 격정적인 도입 연주와 함께 쏟아져 내리는 리듬 바를 명하니 바라보며 깨달게 되었다. “왜 내가 매일 같이 버튼을 두드리고 있는지 이제 이해가 좀 가냐?” “그럼 여태 등교할 때마다 라온으로 이걸 치고 있었던 거야?” 마유미의 물음에 나카무라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테이블 위해 올려져 있는 라온을 잠시 동안 바라보다가 나카무라군에게 물었다. “이 라온이라는 게임기. 얼마 정도면 살 수 있는 거야?” “칸나, 너 지금 이 걸 사려는 거야?” “응. 가능하면 신의 선물이라는 게임도 같이...” 나의 대답에 나카무라는 호탕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으하하하~ 좋아. 칸나 다음 달 12월 24일에 나와 함께 성지로 가자꾸나~!!” “성지...? 거기가 어딘데?” “어디긴 어디야. 전 일본 오타쿠들의 성지라면 아키하바라 밖에 더 있겠냐~!!” < EP. 36 : 싱어송라이터. (3) > 끝 < EP. 36 : 싱어송라이터. (4) > & “저기, 나카무라...?” “응?” “오늘이 무슨 날이지?” “그야 신의 선물 발매일이지.” 퍼억~!! 으음... 솔직히 이번 건 나카무라군이 조금 너무 했다고 생각한다. 마유미는 자신의 가방을 풀 스윙으로 나카무라군에게 휘두르고도 분이 안풀렸는지, 발길질까지 해대며 거리에서 외쳤다. “죽어!! 응!? 차라리 나가 죽어!!” “악!! 아악!! 그만, 아파!!” 나카무라군은 그런 소동 속에서도 대기 줄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마유미와 나카무라군 커플을 바라보다가 마유미에게 사과했다. “미안, 마유미 괜히 나 때문에...” “아니. 칸나 너는 사과할 거 없어. 어차피 이 인간은 네가 없었어도 오늘 여기 왔을 테니까.” “흥~!! 물론이지!!” “아직까지 그 입이 살아 있는 걸 보니, 네가 아직 덜 맞았지!?” “······.” “정말 크리스마스 이브에 남자 친구 게임사러 같이 와주는 여자 친구는 나밖에 없을 거야...” 그렇다. 오늘은 마유미의 말대로 연인들의 날이라고 불리는 크리스 마스 이브다. 보통 이런 날에는 연인끼리 도란도란 KFC 치킨을 같이 먹는다던가,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간다던가, 영화를 본다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게임을 좋아하는 나카무라 군에게 오늘은 지난 1년 동안 손꼽아 기다려온 게임의 발매일이었다. “그나저나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하는 거야? 아무튼 게임만 사고 나면 오후엔 같이 시부야에 쇼핑하러 가기로 한 거 잊지마.” 하지만 끝도 없이 늘어선 대기 행렬을 보아, 마유미의 계획이 잘 실행이 될지는 모르겠네... 나카무라 군의 말대로 서둘러 온다고 왔지만, 설마 게임 하나를 사기 위해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몰려들 줄이야. 펜타곤 소프트에서 새로운 게임이 출시 되는 날은 게이머들의 축제라고 하던 그의 말이 비로소 실감나기 시작했다. “이야... 적어도 천 명 가깝게 모인 거 같은데?” “어제 밤부터 기다린 사람만 500명이 넘는다던데, 천은 벌써 넘겼을 걸?” 앞에서 들려오는 게이머들의 대화에 고개를 돌리자, 이미 우리 뒤로도 어느새 긴 행렬이 늘어서 있었다. 세상에 정말 게임 하나로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건가? 나와 마유미 같은 일반인에게는 이런 상황 자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나카무라군. 혹시 신의 선물이라는 게임이 오늘만 발매하고 다시는 안 파는 거야? 어떻게 출시 당일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지?” “그야 당연히 누구보다 빨리 게임을 플레이 해보고 싶으니까. 그리고 한번 시기를 놓치면 카트리지가 재생산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거든. 뭐~ 단말기를 통해 저렴하게 다운 받을 수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게임은 뭐니뭐니 해도 카트리지로 소장하는 것이 최고야. 사정이 이렇다보니 보통 첫 카피로 나온 카트리지는 발매 하루 이틀이면 동이 나버리지. 전에도 말했었지만 여태까지 펜타곤에서 출시한 게임중에 100만장을 못넘긴 건 ‘발렌타인 데이’ 한 작품 밖에 없어. 하지만 그 작품도 53만장으로 하프 밀리언은 넘겼지.” “악!! 설마 그 학교 돌아다니는 게임!?” 발렌타인 데이라는 말에 격한 반응을 보이는 마유미의 모습에 나는 호기심 섞인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마유미도 알고 있는 게임인가 보네. 그 것도 재밌어?” “재미라고!? 동생이 사온 게임 옆에서 구경하다가 기절하는 줄 알았거든? 칸나도 오늘 라온 사도 절대 그 게임은 사지마.” 그러자 나카무라군은 마유미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어차피 하고 싶어도 그건 기종이 달라서 해 볼수도 없네요.” “음? 발렌타인 데이는 펜타곤에서 나온 게임이 아닌 거야?” “아니. 펜타곤에서 만들긴 했지만, 민텐도의 슈퍼 패밀리로 발매 되었지. 그때는 라온이 출시 되기 전이었거든.. 그래서 딱 발매 후 딱 1년 동안만 카트리지가 생산된 비운의 작품이지.” 가장 안 나갔던 게임이 1년 만에 53만장이라니... 그때 주변에 모여있던 대기자들의 눈빛이 슬금슬금 우리 쪽을 향하기 시작했다. 나카무라군 역시 주변을 의식했는지 살짝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이거... 은근히 미움 받는 모양인데?” “왜? 우리가 뭘 잘못 했길래?” 사람들의 반응에 마유미가 언짢은 반응을 보이자, 나카무라는 자신의 입가에 손가락을 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랑 칸나 때문에 그래.” “응? 우리 때문이라고?” “조용히 주변을 둘러 봐.” 나카무라군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려보니, 우리 주변에는 온통 남자들 뿐이었다. 물론 대기열 중간중간 여성 유저도 보이긴 했지만, 남자 친구와 함께 온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때 어디선가 우리를 바라보며 수근 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녀석. 아무 것도 모르는 여자 둘 데리고 겁나 아는 척 하네.” “그러게, 펜타곤의 역사 라면 우리가 훨씬 더 잘 알고 있는데. 어디서 수박 겉핧기 식으로 알고와서 잘난 척 하기는...” 나카무라군 역시 그들의 대화를 들었는지, 나와 마유미를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게임 사러 와서 너무 잘난 척 떠들었나? 여자친구를 데리고 게임 사러 오면 종종 이런 일이 있지. 사실 나도 한 때는 저랬었으니까. 나는 혼자 게임 사러왔는데, 괜히 내 앞에 알콩달콩한 커플이 서 있으면 속이 뒤틀렸었거든...” 잠시 후. 오전 10시 반. 펜타곤 프리미엄 샵의 정문이 열리고, 새하얀 유니폼을 차려 입은 직원들은 마치 백화점 안내 직원들처럼 매장 앞에 나란히 서서 정중한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한 남자가 조그만 단상에 올라 준비된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펜타곤 소프트의 본사 직원인가? 전에 본 강준혁이라는 사람은 아니네...’ “안녕하십니까. 오늘 저희 펜타곤에서 준비한 ‘신의 선물’을 구입하러 와주신 고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저는 펜타곤 소프트의 대표 이사인 카와구치 히로노부입니다. 사실 오늘 행사에는 사전에 고지해 드린대로 드래곤 엠블렘 시리즈와 내가 없는 거리의 메인 디렉터인 강준혁씨의 팬 사인회를 열 예정이었으나, 부득이 한 사정으로 오늘 행사에 참여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에에!?” “아, 사인 받으려고 소장했던 물건 다들고 왔는데...” “무슨 일이지? 디렉터에게 있어 유저와의 약속 보다 중요한 일이 있나?” 그러자 어젯밤부터 밤을 새워 기다린 덕에 펜타곤으로부터 받은 담요를 뒤집어 쓰고 있던 유저 몇몇이 외쳤다. “어라? 새벽까지만 해도 우리랑 같이 있었는데?” “그러게 말야. 직접 커피도 나눠 주면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그랬는데, 무슨 일 있습니까?” 대기열에서 들여오는 목소리에 카와구치 대표 역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사실 강준혁 디렉터도 여러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새벽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새벽 5시경 부인의 출산 소식을 듣고 부득이하게 병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부디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대기 중이던 사람들은 카와구치 대표의 말에 어느정도 납득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부인의 출산이면 할 수 없지.” “그래. 솔직히 만삭의 부인을 두고 새벽까지 이곳에 있었다는 것만 해도 나는 감동이다.” “아~ 나도 저 담요 갖고 싶다. 역시 새벽에 올 걸 그랬나...?” ‘신의 선물’이라는 제목의 게임을 출시한 당일. 정말로 신의 선물이라고 불리는 아이가 태어나다니... 나는 잠시 두 눈을 감고 유키 언니의 무사 출산을 빌어 주었다. & 신의 선물은 발매와 동시에 정말 폭발적으로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대기열에서 3분의 2 정도 지점이었지만, 여러 곳으로 분산된 계산대 덕분에 줄은 빠르게 줄어 들었다. 즐거운 미소를 띄우며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게임을 받자마자, 곧바로 개봉해 카트리지를 라온에 꽂아 넣는 이도 종종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나카무라. 저기 저 사람이 구입한 게임은 박스가 왜 저렇게 커?” 나 역시 궁금하던 차에 마유미가 나카무라군에게 먼저 물었다. 신의 선물이란 게임은 한가지 종류가 아니 었던가? 간혹 몇몇 사람은 계산대에서 커다란 패키지를 받아 들고 돌아가는 사람들도 보였는데, 어떤 이는 그 박스를 4개나 사는 사람도 있었다. “아, 저건... 한정판 패키지야.” “한정판?” “응. 미리 선불 예약한 사람만 구입할 수 있는 주문 제작품이지.” 나카무라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혹시 게임 내용이 다른 건 아니지?” “그거야 물론이지. 다른 건 게임 본편을 제외한 구성품이야. 이번 신의 선물의 한정판은 각 히로인 별로 딱 500개씩 선착순 주문으로 이루어 졌다니까. 총 2천개 정도 될걸?” “우와아... 2천개나!?” “2천개라고 해도, 여기 행사장에서 전부 판매하는 건 아니고, 전국에 있던 펜타곤 샵으로 분배 되었겠지. 그런데 저 사람 네가지 버전을 전부 샀으면 돈 장난 아니게 깨졌겠는 걸? 저게 한박스에 14,800엔이거든.”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나카무라군의 대답에 나와 마유미는 경악했다. “마.. 14,800엔 이라고!? 대체 안에 뭐가 들었길래?” 그러자,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의 나카무라군은 한정판 패키지의 구성품을 토씨 하나 빠지지 않고 기계처럼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게임 본편이 담긴 카트리지 1개. 신의 선물에 나오는 피아노 독주곡의 악보 11장. 그리고 68 페이지로 구성된 게임 속에 등장하는 각 히로인 별 콘티 일러스트집 1권. BGM OST 1장. 피아노 연주 오리지널 버전 OST 1장. 그리고 각 히로인의 테마곡을 담은 오르골. 그리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1/8 스케일로 만들어진 히로인 피규어.” “피규어라면... 그 캐릭터 인형을 말하는 거야?” 마유미의 질문에 나카무라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심하다는 듯한 말투로 중얼 거렸다. “어휴... 고작 그런 것 때문에 5,480엔이면 사는 게임을 두배를 더 주고 산다고!? 미쳤다. 미쳤어... 정말.” “그래? 하지만 게이머들은 처음에 가격 발표가 나왔을 때, 오히려 굉장히 싸다고 좋아했는데.” “15,000엔 가까이 되는 돈이 싸다고?” “응. 1/8 스케일의 피규어 제작자가 우치무라라고 불리는 피규어 장인이 직접 검수한다고 들었거든. 이미 피규어 업계 쪽에서는 신의 손이라 불리우는 사람이지. 그사람이 직접 만드는 피규어만 해도 값이 엄청 나니까.” 당찬 표정으로 설명을 마친 나카무라군은 사람들이 빠져나간 대기열 앞으로 성큼 걸어 나갔다. 마유미는 그런 나카무라의 뒤를 따르며 입을 열었다. “그냥 단순한 판매 상술 아냐?” “일반 적인 시선에는 상술이지만, 우리들에게는 일종의 축복이지.” 그 순간. 나카무라의 대답을 들은 마유미의 눈에 광채가 빛났다. 그리곤 앞서 걸어가는 나카무라의 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방금 우리라고...?” “어...?” “똑바로 대답해. 너도 저 한정판이라는 거 예약했어!?” “어.. 그게 말이지... 하하하~” & “감사합니다. 고객님. 즐거운 플레이 되세요.” 잠시 후. 펜타곤 샵에서 게임을 구입하고 나온 나카무라는 커다란 박스를 품에 안고 싱글 벙글 웃고 있었다. 비록 머리는 마유미에게 다 쥐어 뜯겨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적어도 이 순간 만큼은 행복에 보인달까? 나 역시 라온 본체 하나와 신의 선물 카트리지 하나를 구입했다. “칸나. 우리랑 같이 점심 먹을래?” 마유미는 손가락 사이에 붙어 있는 나카무라군의 머리카락을 호하고 불어내며 나에게 물었다. 나카무라군은 애절한 눈빛으로 나도 함께 가주길 바랬지만, 더 이상 그들의 데이트를 방해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던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으으응. 아냐. 오늘 저녁에 하라주쿠 거리에서 공연도 해야해서 일찍가서 연습해야 돼.” “그래. 알았어. 방학 잘 보내고, 종종 연락해~” 그러자 나카무라군은 마유미의 눈치를 살피며 나에게 말했다. “혹시 라온에 대해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해. 우리집 전화 번호 알지?” “응. 고마워. 나카무라군.” 둘과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총총 걸음으로 전철 계단을 오른 나는 전철을 타고 내리는 플렛폼에 서서 쇼핑백에 담긴 라온 박스를 바라보았다. ‘과연 잘 산걸까?’ 태어나 처음으로 게임기라는 것을 사보았다. 전자기기에 약해서 그런지 이런쪽에는 자신이 없지만, 구입하기 전에 나카무라군에게 충분히 설명을 들었으니까 괜찮겠지... 나는 쇼핑백 안에 보이는 신의 선물 패키지를 바라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그 날의 피아노 독주곡.. 이번엔 끝까지 쳐봐야지.’ 하지만 이때의 나는 정말 몰랐다. 휴대용 게임기 하나와 신의 선물이라는 카트리지 하나로 내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될 줄은 말이지... < EP. 36 : 싱어송라이터. (4) > 끝 < EP. 36 : 싱어송라이터. (5) > & 아무도 없는 집에 돌아와 쇼핑백에서 꺼내든 ‘신의 선물’은 구성품이 굉장히 단촐했다. 밀봉 패키지의 씰을 뜯어 내고 종이 박스를 열어 젖히자, 매뉴얼 하나와 게임 카트리지가 내부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겨 있었다. 게임을 실행하기 전에 도톰한 두께의 매뉴얼을 팔락거리며 살펴 보니, 신의 선물을 프롤로그 만으로도 이제까지 내가 알고 있던 기존 게임의 틀을 확실하게 넘어서는 뛰어난 스토리 라인을 가지고 있었다. 과연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명이 실감되는 순간이랄까? 이어서 4명의 히로인이 소개 된 페이지를 넘기니 게임의 간단한 조작법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매뉴얼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메인 테마곡의 악보가 적혀 있었다. 나는 나카무라군이 알려준대로 라온 본체에 건전지 2개를 넣은 뒤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이윽고 화면 한 가운데 RAON이라는 귀여운 문구가 떠오르며 초기 설정 페이지가 떠올랐다. 십자키를 움직여 날짜와 시간을 맞추고, 이후에 게임을 다운 받을 수 있는 단말기에서 사용할 ID와 패스워드를 입력하고 나니 메인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게임 카트리지를 슬롯에 넣어 주세요.- 상단에 표시된 문구에 따라 게임 카트리지를 꽂아 넣고 선택 버튼을 누르자, 제작사의 로고가 뜨기 전 메시지 창 하나가 떠올랐다. -신의 선물의 음악을 보다 선명하게 듣기 위해선 내부 스피커 보다 이어폰 사용을 추천합니다. 스테레오 사운드를 원하시면 이어폰을 꽂은 상태에서 YES 버튼을 눌러주세요.- 나는 책상 서랍에서 워크맨에 사용하던 이어폰을 꺼내어 라온의 하단부에 이어폰 잭을 연결 하고 확인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잠시 후 아름다운 피아노의 선율과 함께 ‘신의 선물’이라는 타이틀 화면이 떠올랐다. 바람에 살랑이는 커튼과 그 옆에 자리한 그랜드 피아노는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굉장히 아련한 느낌을 전해주었다. 이렇게 신의 선물의 메인 테마곡인 ‘러브 레터’을 들으며 가만히 타이틀 화면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가슴이 먹먹해져오는 느낌 마저 들었다. -NEW GAME- -PRACTICE MODE- -OPTION- 세가지 메뉴에서 나는 가장 위에 있는 뉴 게임에 커서를 두고 확인 버튼을 눌렀다. 페이드 아웃으로 타이틀 화면은 천천히 어두워지고, 이윽고 화면 한가운데에 스포트 라이트가 켜지며 게임이 시작되었다. 어느 피아노 콩쿨의 갈라쇼에서 주인공을 천천히 무대에 올라 피아노 건반위에 가볍게 손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Elohim Essaim, Elohim Essaim... 모든 것은 나의 바램대로 이루어 지리라.- 그리고 이어지는 독주(獨奏) 파트에서 나는 상단에서 내려오는 리듬 바를 타이밍에 맞춰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다. ‘신의 선물의 첫곡은 쇼팽의 녹턴 op.9 No.1...’ 창틀 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달빛을 맞으며 홀로 피아노를 친다면 이런 느낌일까? 굉장히 서정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는 이 곡은 그 음색이 지나칠 정도로 아름답다는 세간의 평가와 함께 쇼팽하면 떠오르는 명곡 중에 하나였다. ‘설마 게임을 통해 클래식 음악을 접하게 될 줄이야...’ 이윽고 나는 점점 격해지는 피아노의 선율에 집중하며 모든 리듬 바를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쳐내기 시작했다. 약 6분 30초에 달하는 연주곡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했기에 콤보수가 180까지 차오르자 점점 손가락이 굳어져가는게 느껴졌다. 쇼팽의 피아노 곡은 중간중간 끊어 치는 부분이 많았는데, 이 부분은 마치 사랑하는 연인에게 하고 싶은 말을 차마 전하지 못해 말문을 닫아 버리는 그의 성격과 매우 닮아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나도 모르게 주인공의 독주에 흠뻑 취해 손가락을 움직이다 보니, 주인공의 첫곡을 풀 콤보로 완성하며 S 랭크를 획득했다. 평소에 클래식을 좋아하고 기타 연주를 즐겨한 탓에서 일까? 손가락 끝이 조금 뻐근하긴 하지만, 너무나 감동적인 피아노 연주에 그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이렇게 조그만 카트리지 하나에 쇼팽의 감성을 그대로 옮겨 담았다는 것 자체 만으로도 이 게임을 구입한 금액이 조금도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객석에서 들려오는 힘찬 박수 소리와 함께 신의 선물의 본격적인 스토리가 시작되었다. 쇼팽의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 만큼이나 즐겁고 행복한 이야기가 될거라는 상상을 잠시나마 떠올렸지만, 그런 나의 예감은 게임 속 주인공의 사고 장면과 함께 산산히 부서져 내렸다. 이어폰 너머로 들려오는 구급차의 싸이렌 소리와 도와 달라는 한 여자의 외침. 응급실에 실려 빠르게 스쳐 지나는 전등 불빛 속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신이시여. 이대로 그를 데려가지 말아주세요.” 청하하게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네 명의 히로인 중 누구의 것인지 분간 할 수 없도록 희미하게 반복 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녀의 간절한 바램 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과연 신의 응답이었는지... 악마의 꼬임이었는지는 이 게임을 클리어 해야만 알수 있는 부분이었다. & 시간을 돌려 사고가 일어나기 1년 전으로 돌아온 주인공에게는 총 4명의 여주인공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나는 카오리라는 이름의 생기발랄한 바이올리스트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동갑내기 임에도 주인공의 우유부단한 성격을 확실히 이끌어 주는 누나 같은 면이 있었다. 주인공은 1년이란 시간 안에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었던 히로인이 누구였는지를 떠올려야 했는데, 피아노를 연주 할 때에만 그녀에 대한 기억이 단편식으로 떠오르기에 피아노를 연주하는 파트에서는 최대한 미스를 내지 않게 노력해야만 했다. 특히나 두 번째 챕터에서 카오리와의 협주 중에 떠올리는 그녀와의 추억은 카오리가 사고 당시 주인공을 구해준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련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주인공을 구해준 히로인이었으면 좋겠다...’ 기억을 잃었어도 자신을 위해 기도해준 그녀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주인공.. 자신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는다 하여도 주인공을 살리고 싶었던 그녀의 간절한 바램.. 이 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가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그 슬펐던 결말도 함께 떠올랐다. ‘결국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한 인어 공주는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습니다...’ < EP. 36 : 싱어송라이터. (5) > 끝 < EP. 37 : 불량품. (1) > &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아마 몇 시간이 흐르고나면 분명 나와 유키는 한 아이의 엄마와 아빠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명확히 실감이 나질 않았다. 유키가 구급차에 실려갔다는 어머님의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향하는 도중 머릿 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1994년 12월 24일. 새벽 5시 반. 붉은 신호등 앞에 차를 멈춰선 나는 초조함에 핸들을 두드렸다.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도로는 한적했지만, 성급한 마음에 엑셀을 밟으려 할때마다 방금전 어머님와의 통화가 귓가에 맴돌았다. ‘유키는 무사히 병원에 도착해서 분만실로 들어갔으니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와. 운전 조심하고...’ 그래. 괜히 성급하게 행동하다가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니 천천히 가자. 나는 텅빈 사거리에서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뀔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엑셀을 밟았다. & 잠시 후. 병원에 도착한 나는 서둘러 차를 주차장에 대어 놓고 건물 안으로 달렸다. 다행히 당직을 서고 있던 간호사가 곧바로 나를 분만실로 데려다 주었기에 병원 안을 해맬일은 없었다. “준혁군. 왔는가?” 분만실 앞에서 서성이던 장인 어른과 장모님은 나를 보자마자 달려와 손을 꼭 잡아 주셨다. “유키는 어때요?” “이제 한 시간 정도 됐으니, 소식이 들릴 때가 됐는데...” 어머님은 잠결에 서둘러 달려 나오셨는지 슬리퍼를 짝짝이로 신고 계셨다. 나에겐 천천히 오라고 하셨지만, 본인도 많이 당황하셨던 모양이다. “죄송해요. 일 때문에 유키 옆에 있어 주지도 못하고...” “가족이 좋다는게 뭐겠나, 이럴 때 서로 돕는 거지.” 장인 어른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애써 웃어 보이셨다. 하지만 항상 유쾌해보이던 장인 어른도 이 순간 만큼은 떨리는지 표정이 굳어진게 느껴졌다. 그나마 내가 곧바로 와준 것이 두 분에게 위안이 되는 모양이었다. 분만실에서 간간히 유키의 신음 소리가 들려 올 때마다 어머님은 두 손을 마주 쥔 채로 신께 기도를 올렸다. 장모님 입장에서는 아기도 아기지만, 유키의 건강이 가장 중요할테니까...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유키는 내가 도착한 후로도 한 시간이나 더 신음하며 나와 부모님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었다. 원래 아이가 이렇게 늦게 나오는 건가? 한 시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질 줄이야... 그때였다. 분만실 안쪽에서 작은 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유키의 신음소리가 잦아 들었다. “나왔나...?” 우리 세 사람은 너나 할거 없이 분만실 쪽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후. 녹색 수술복에 마스크를 쓰고 나온 의사선생님이 분만실의 문을 열고 나왔다. “서.. 선생님. 어떻게 산모랑 아이는 무사한가요?” 유키 어머님의 물음에 마스크를 벗은 의사 선생님은 입가에 미소를 띄운채 고개를 끄덕였다. “산모를 똑 닮은 공주님이세요. 산모도 아이도 건강하니, 한시름 놓으셔도 됩니다.” “하아... 다행이다.” 어머님은 대기실 의자에 쓰러지듯 앉으시며 이마에 손을 얹은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의사 선생님은 우리를 향해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어디론가로 사라졌고, 우리는 유키가 나올 때까지 분만실 앞을 계속 서성였다. 그나마 의사 선생님이 해준 말 덕분에 장인어른도 장모님도 표정이 한결 밝아 보였다. “준혁군.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장인 어른..” “딸이라는데 아쉽지는 않은가?” “전혀요. 오히려 아들보다 딸이라니, 더 좋은 걸요?” “자네가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우리도 고맙구만... 그런데 왜 이렇게 안 나오지? 무슨 일 있나?” 그 순간. 장인 어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분만실의 문이 열리며 간호사들이 유키를 간이 침대에 옮겨 데리고 나왔다.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분만실에서 나오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조심스레 다가가 유키의 손을 잡아 주었다. “고생 많았어...”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 유키는 침대에 몸을 뉘인 채 나를 바라보며 힘없이 웃어보였다. “준혁씨 바램대로 저랑 준혁씨를 쏙 빼닮은 딸이래요.” “의사 선생님한테 들었어. 나보다는 너를 더 닮았다던데?” “제가 보기에 눈은 준혁씨랑 똑같은거 같아요. 하하... 아.. 힘들다.” 혼자서 많이 힘들었을텐데도 기다려준 우리를 생각해 웃어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장모님은 그런 유키의 마음을 느꼈는지,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 붙은 머릿칼을 넘겨주며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어이구, 우리 딸 고생 많았네.” “엄마.. 엄마는 날 어떻게 낳았데? 나는 솔직히 둘째는 힘들 것 같아... 너무 힘들었어..” 유키는 어머니의 손길에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흐느끼듯 입을 열었다. “괜찮아. 잘했어. 우리 딸... 너도 이제 엄마인데, 아이처럼 울면 어떻게?” “응.. 그래도 엄마 손이 이렇게 따듯한 걸...” 유키는 자신의 볼에 닿은 어머니의 손을 꼭 쥔 채로 눈시울을 붉혔다. 이런게 모성애라는 것이겠지? 그때 내 곁에 서 있던 장인 어른이 내 어깨를 꽉 움겨 쥐며 말했다. “후우... 이럴 때 말야. 남자들은 어떻게 대처 해야할지 도통 감을 못잡겠다니까? 참 쓸모없네. 쓸모없어...” “그러게 말입니다...” &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것도 온 세상 사람들이 가장 즐거워하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겨울에 태어난 이 아이는 눈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여리고 순수한 존재... 그렇기에 내 일생을 바쳐 지켜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이는 엄마인 유키의 이름을 따와 눈 ‘설’자와 현명한 아이가 되어 달라는 마음에 ‘현’자를 붙여 ‘강 설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소 일본인들에게는 발음하기 힘든 이름이었지만, 유키는 설현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유리벽 너머 인큐베이터에 잠들어 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꺄르르 웃어 보였다. “솔횬아.. 아쿠, 우리 애기. 여기 봐~ 엄마 봐~ 까꿍~” 역시 일본인에겐 너무 힘든 발음이긴 한가보다. 그래도 유키는 애써 설현이라는 이름을 똑바로 발음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는 모양이다. 유리창을 톡톡 두드리며 설현이를 바라보는 유키의 모습를 바라보니, 항상 어리게만 보였던 그녀도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는 실감이 들었다. 삐리리리~ 삐리리리~ 갑자기 울린 전화 벨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째려보는 유키의 눈을 피해 황급히 자리를 옮겨 전화를 받았다. “부장.. 아니지 이사님~!! 아이는 무사히 잘 태어났나요?” 수화기 너머 하야시의 목소리 말고도 주변에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섞여 들려오고 있었다. 펜타곤 직원 모두가 유키와 아이의 소식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어, 오전 6시 52분에 태어났다.” “오오!! 왕자님입니까? 공주님입니까?” “딸이야. 이름은 강설현.” “강 솔... 뭐라구요?” “설.현.” “소..룐..?”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름을 바꿀까? 아무튼 하야시는 수화기 너머로 유키의 출산 소식을 전했고, 그와 동시에 귀가 따가울 정도로 기뻐하는 직원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나는 손목 시계로 시간을 바라보며 하야시에게 물었다. “그런데, 한창 바쁠 때 아냐? 신의 선물은 반응이 좀 어때?” “좀 어떻긴요. 준비한 카트리지는 전량 판매 되었고, 현재는 단말기를 이용한 다운로드 판매를 이용하는 유저들 뿐입니다. 하지만 소장욕 때문인지 대부분 2차 물량을 기다린다고 하고 돌아갔지만요...” “뭐...? 오후 3시 밖에 안됐는데, 초도 물량 1500개가 전부 나갔다고!?” “10월에 무료로 배포했던 체험판이 게임을 잘 모르는 일반인에게도 눈길을 끌었던 모양입니다. 오늘 라온 본체만 해도 펜타곤 샵에서만 500대가 넘게 나갔습니다.” 보통 기대작이나 어느 정도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게임 시리즈가 출시되면 대응 하드를 견인하는 역할을 수행하곤 하지만, 신의 선물은 단일 IP 치고 기록적인 판매량을 보여주고 있었다. 펜타곤 샵에서만 미리 예약을 받았던 한정판의 예약 마감까지 채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을 때부터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일단 이곳 상황 좀 정리한 후에 대표님과 함께 병원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응...? 아냐 아냐. 오늘은 유키도 안정을 취해야하니까, 나중에 직원들이랑 와 줄래?” “아,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오늘은 마음만 받을게. 고맙다. 다들 수고 했고 오늘은 일찍 들어가 쉬어.” “네. 알겠습니다. 그럼 조만간 찾아 뵙겠습니다.” 하야시와의 통화를 마친 나는 묵직한 휴대폰을 허리춤에 채워 넣고 유키에게로 돌아왔다. “회사에요?” “응. 하야시가 축하한다고 전해달래.” “설마 직원 분들 지금 병원에 오신데요? 클났네. 나 얼굴 많이 부었는데!?” “걱정 마. 안 그래도 너 신경 쓰일까봐 나중에 오라고 했으니.” “아휴~ 다행이다...” “자~ 그럼 설현이도 봤으니, 이제 들어가서 좀 쉬자. 응?” “봐도 봐도 계속 보고 싶은데, 어떡해요...” 유키는 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돌려 나와 함께 입원실로 돌아왔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그녀가 입원할 때까지 필요한 물건을 가지러 집으로 가셨기에 병실엔 나와 유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유키를 팔을 부축해 침대에 뉘이니 때마침 간호사가 간식으로 죽을 준비해주었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잠만 잔 산모를 위해 병원에서 따로 마련 해준 식단이었다. 잠시 후. 침대 위 간이 테이블에 따듯한 죽을 올려 놓은 간호사는 유키의 건강 상태를 체크한 뒤 병실은 나섰다. “마침 배 고팠는데, 잘됐다.” 유키는 죽을 보니 군침이 도는지 침을 꼴깍 삼키며 나를 향해 아~ 하고 입을 벌렸다. 그 모습이 하도 귀여워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자, 그녀는 입을 앙 다문채 새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빨리 먹여 줘요. 나 솔횬이 때문에 고생해서 숟가락 들 힘도 없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빨리 아~~” 창가에 내비치는 노을 빛 하늘... 시간은 오후 4시 밖에 안되었지만, 겨울에는 유난히 해가 빨리 떨어지는 탓에 창밖의 하늘은 황금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어린 새가 어미에게 모이를 달라 보채듯 살짝 입을 벌린채 두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개었다. 놀란 그녀가 잠시 몸을 움찔 거렸지만, 이내 유키는 내 리드에 맞춰 부드럽게 나를 끌어 안았다. “병원에서 이게 뭐하는 짓이예요.” “뭐 어때... 내 여자한테 키스하는 건데.” “나 이도 안 닦았는데...” 부끄러운지 슬쩍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볼을 잠시 어루만지던 나는 그녀의 고개를 내쪽으로 돌려 다시 한 번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아... 준혁씨.” 비음 섞인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를 끌어 안은채 잠시 그녀의 온기를 느끼던 중... 덜컥... 입원실에 문이 열리고 장인 장모님이 들어오셨다. “어이구~ 우리 사위. 급하기도 해라. 벌써 둘째 계획 중이야?” “엄마~ 노크 좀.. 하지...” “좋아 좋아~ 이렇게 둘째로 아들 한 번 도전하자~!!” 장인 장모의 놀림에 나와 유키는 서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하필 이런 타이밍에 오시다니.. 하하... “강 서방은 이제 들어가 봐. 안그래도 새벽까지 일하고 오느라 한숨도 못 잤을 텐데, 들어가서 씻고 쉬어야지. 여기는 내가 보고 있을테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옷도 꾀죄죄 해가지곤.. 가서 옷도 좀 갈아 입고, 푹 잔 다음에 내일 아침 병원으로 오게. 내일은 출근 안해도 되지?” “아, 네.. 괜찮습니다.” “그럼. 얼른 들어가 쉬어.” “장모님도 피곤 하실텐데...” “나는 여기서 유키 좀 봐주다가 눈 붙일 테니까. 내 걱정을 말고...” 그러자 유키 마저 웃으며 장모님의 말에 동의 했다. “그래요. 저는 오늘 엄마랑 할 얘기도 있으니까. 먼저 들어가 쉬어요.” “흐음.. 그래, 알았어. 대신 내일 아침 일찍 올게.” “네. 오늘 바로 와줘서 고마웠어요. 조심히 들어가요.” “응. 잘 자...” & 잠시 후. 집으로 돌아온 나는 슈트를 벗어 던지고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고양이 하루 역시 장모님 집에서 볼보고 있는터라. 혼자 있는 집안은 매우 고요했다. ‘우리집이 이렇게 조용했었나...?’ 핸드폰을 탁자에 올려 놓은채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신의 선물’을 플레이 해본 유저들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잠깐 PC 통신 커뮤니티에 접속해 볼까?” < EP. 37 : 불량품. (1) > 끝 < EP. 37 : 불량품. (2) > “잠깐 PC 통신 커뮤니티에 접속해 볼까?” 현재의 온라인 커뮤니티는 말그대로 친목의 일환으로 게임 업계의 새로운 정보 보다는 출시된 게임에 대한 리뷰를 회원들끼리 공유하는 정도에 그친 수준이었다. 지금 시기에 PC 통신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얼리어답터의 성향이 강하고 PC에 대해 어느정도 지식을 가진 사람만이 즐기는 컨텐츠였기에 아직까지는 온라인 보다 오프라인 쪽인 게임 잡지에 대해 정보의 의존도가 꽤나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뮤니티는 날이갈수록 회원수가 늘어나고 있었고, 게임에 관련한 커뮤니티도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유키가 보면 집에 오자마자 씻지도 않고 컴퓨터를 켠다고 한소리 했겠지만, 오늘은 아무도 뭐라할 사람이 없으니 이런건 편하네... 방안이 싸늘해 따듯한 녹차를 준비한 나는 잠시 후. ‘펜타곤 월드’라는 제목의 전용 커뮤니티를 찾았다. 제목에서 느껴지듯 이곳은 펜타곤에서 출시한 게임과 라온 전용 게임을 주로 다루는 커뮤니티 였기에 타회사의 게임은 비중이 적은 편이었다. “아, 역시 신의 선물에 대한 게시판이 새로 만들어졌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녹차를 홀짝이며 새롭게 생성된 신의 선물 게시판 번호를 입력하자, 관련 게시글이 주르륵 떠올랐다. [소감] 신의 선물 사왔습니다~!! 극 초반 소감. [구입기] 어제 밤부터 기다려 사왔습니다. 얼어 죽을 뻔했지만 한정수량 담요 Get 했어요~!! 발매 당일 임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생성된 게시판의 글 번호는 247번을 달리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발매 당일이기에 이토록 폭발적인 반응이 나오는 것일까? 막상 집에 돌아오니 어제 새벽부터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유저들의 플레이 소감이 궁금했던 나는 몇가지 게시글을 체크해 보았다. --- [소감] 신의 선물. 첫 도입 부분부터 감탄사를 연발했네요. 대박입니다. 진짜 오랜만에 게임을 플레이 하면서 손끝이 저릿하게 느껴질 정도로 전율을 느꼈습니다. 평소에 클래식은 잘 모르지만, 프롤로그 부분에서 주인곡의 피아노 독주는 제가 지금까지 플레이 해본 게임중에 단연 톱 클래스로 손에 꼽을 만한 명장면이었네요. 클래식 음악이라는게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랐습니다. 혹시 첫 도입 부분에 나온 클래식은 제목이 뭔가요? --- [정보] 밑에 분 보세요. 쇼팽의 녹턴(야상곡) op.9의 1번 악보입니다. 제가 이런 것에 설명하기를 좋아하는지라 간단히 알려드리면 쇼팽의 대표곡 중에 하나인 op.9는 1번, 2번, 3번으로 나뉘어져 있고, 쇼팽의 녹턴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높은 곡입니다. 저 역시 ‘신의 선물’의 프롤로그 부분에서 이 곡을 선택한 펜타곤의 강준혁 메인 디렉터와 사운드 부분을 맡으신 우에노씨의 선곡에 대해 대단히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본래 녹턴이란 교회에서 밤의 기도서를 낭독하기 전에 행하는 기도의 노래였는데, 쇼팽의 섬세하고 우수에 젖은 음색이 밤의 정취를 너무나 잘표현하고 있어 야상곡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이번 신의 노래에서 게임의 주제를 클래식으로 정한다고 했을 때, 솔직한 제 감정으론 기대보다 불안이 앞섰던 게 사실입니다. 대중 적이지도 않고, 굉장히 까다로운 이 장르를 게임과 접목 시킨다는 것 차제가 굉장히 위험한 행위라 생각했기 때문이죠. 더구나 현 라온의 사운드 성능으로는 클래식의 풍부한 음색을 전달하기에 무리가 있을거라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저의 쓰잘데기 없는 걱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첫 도입부에서 아랫님과 마찬가지로 전율이 일더군요.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펜타곤의 기술력에 또 한번 놀란 순간입니다. 이것은 약간의 스포가 될 수 있지만, 챕터 2에서 히로인 카오리와 협주하는 니콜로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24번’은 진짜 대 전율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리듬 감각이나 순발력 없으신 분들은 극한의 난이도를 맞보게 되 실 듯합니다. 저도 세 번 트라이 해서 겨우 깼네요.) 나는 쇼팽과 파가니니에 대해 알기 쉽게 풀어낸 한 유저의 설명글을 보며 피식 웃음을 삼켰다. PC 통신 시절에는 게시글 밑에 댓글을 달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기에 누군가가 질문을 하면 이렇게 다른 누군가가 답변해 주는 게시글을 달아 주었는데, 그래서 일까? ‘ㅇㅇ’ ‘ㅋㅋ’ 같은 간단한 말줄임은 거의 없고, 마치 편지를 주고 받 듯 서로 게시물을 확인 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던 중 또 다른 게시글이 내 눈에 들어 왔다. --- [질문] 프롤로그에서 주인공이 연주를 하기 전 하는 대사 뜻이 뭔가요? -Elohim Essaim, Elohim Essaim... 모든 것은 나의 바램대로 이루어 지리라.- 엘로힘 잇사임? 뭔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혼자 중얼 거리는데, 겁나 멋져 보이더군요. 이거 어디서 나오는 대사 인가요? --- [답변] 밑에 분 보세요~ -엘로힘 잇사임, 엘로힘 잇사임... 모든 것은 나의 바램로 이루어 지리라.- 저 역시 이 부분에서 살짝 놀랐습니다. 이 것은 일상적인 대사가 아니라 오컬트 요소에서 사용 되는 일종의 주문입니다. 하지만 게임의 제목처럼 ‘신’께 비는 주문이 아닌 ‘악마’에게 소원을 빌 때 사용하는 주문이죠. 제목과 상반된 악마의 주문이 게임을 여는 첫 소설이라는 것이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게시물을 보다가 생각난 건데, 챕터 2에서 카오리와의 협주곡인 카프리스 24번은 ‘악마의 바이올니스트’라 불리웠던 니콜로 파가니니의 대표곡 아닌가요? ‘신의 선물’이라는 따듯한 제목 치고는 주인공의 첫 대사라던가, 곡의 선택이 굉장히 악마와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어 소름이 돋더군요. 과연 주인공의 시간을 되돌려준 여주인공은 누구인지 굉장히 궁금해집니다. 이것도 ‘내가 없는 거리’나 ‘발렌타인 데이’ 처럼 마지막 부분에 엄청난 반전이 숨어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기대가 되는 작품입니다. --- [질문] 어라? 챕터 2에 카오리랑 협연하나요? 방금 챕터 2를 플레이 중인데, 저는 카오리랑 협연 이벤트가 없었습니다. 대신 주인공의 레슨을 담당하는 사츠키 선생님과의 피아노 협주 이벤트가 있었네요. 개인적으로는 4명의 히로인 중에 카오리가 가장 마음에 드는데, 챕터 2에서 카오리랑 협연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나요? 방법 좀 알려주세요. --- 하지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한 엉뚱한 유저의 게시글로 인해 밝혀 지게 되는데... --- [정보] 갈라쇼에서 랭크 D를 받고 게임을 시작하니, 곧바로 게임 오버가 되어 버리네요. 안녕하세요. 악기라곤 소학교때 리코더 몇 번 불어본게 다인 음치박치입니다. 음악을 소재로 한 게임이 나온다길래 솔직히 그냥 패스 할까 했는데, 다른데도 아니고 ‘펜타곤’에서 출시하는 그래픽 노블이라는 말에 혹해 구입했습니다. -사실 여주인공들의 아름다운 뒷태에 홀렸다는 건 비밀.. (웃음)- 하지만 역시나 첫 프롤로그부터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제 손가락에 문제가 있는 걸까요? 타이밍 바에 맞춰 버튼을 누른다고 눌렀는데, 꼭 한 타이밍씩 늦는 바람에 첫 도전에는 그냥 연주도중 게임 오버 당하고, 두 번째 도전에서 겨우 겨우 클리어 했습니다. 성적은 랭크 D. 메시지 창에 ‘객석의 반응이 싸늘하다.’ 라고 나온 뒤 무대를 떠납니다. 본래 스토리 대로라면 여주인공이 꽃다발을 전해주고 함께 승용차를 타고 가지 않나요? 그런데, 랭크 D를 받으니까 블라인드 처리된 여주인공이 주인공에게 실망했다면서 먼저 돌아가 버리네요. 할 수 없이 혼자 승용차를 타고 돌아오고 있는데, 갑자기 교통 사고를 당하더니 그대로 게임 오버입니다. 주인공의 시간을 돌려 줄 여주인공이 없어서 그런걸까요? --- ‘헐... 웬만한 박치가 아니고서야. 프롤로그는 조금만 신중하면 누구나 깰수 있게 만들어두었는데, 쇼팽의 녹턴은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빠른 템포를 사용하지 않기에 초심자도 반복 연습하면 얼마든지 풀 콤보 S 랭크를 획득할 수 있게 배려해 두었기 때문이다.’ --- [답변] 밑에 님. 연습모드에서 연습하고 플레이 해보세요. 님께서 작성하신 게시글로 보아 ‘신의 선물’은 단순히 대화창을 선택하는 이벤트 분기 뿐만 아니라, 피아노 연주의 완성도에 따라 스토리가 변화하는 듯 하네요. 참고로 밑에 게시물에 나오는 챕터.2 카오리와의 협연는 획득 랭크 B로 클리어 할 경우 이벤트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대학교 후배인 첼리스트 오오타니 하루카와 협연을 합니다. --- 그러자 그 게시물을 확인한 수많은 플레이어들은 게임을 다시 처음부터 해야할 거 같다며 줄줄이 게시물이 달렸다. 카오리와의 협연을 하기 위해선 쇼팽 녹턴의 풀 콤보 S 랭크를 획득해야 했기에 여간 집중하지 않고서는 힘들텐데? 그나저나 역시 우치무라와 모리타의 말대로 카오리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구만... 예판 당일에도 카오리 피규어 버전이 가장 먼저 마감 되더니, 금발의 위력인가? 나는 어느새 미지근해진 녹차를 홀짝이며 거실 한쪽 유리 전시대 안에 놓여진 4 명의 히로인들을 바라보았다. 1/8 스케일로 제작된 유키노조 카오리는 자신의 악기인 바이올린을 가슴에 품은채 특유의 발랄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연미복으로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들의 피규어 사진이 각종 잡지사를 통해 기사화 된 순간. 펜타곤의 주식 그래프가 엄청난 상승세를 보였다. 게임의 내용을 떠나 이런 식으로 히로인의 모습을 공개한 것도 ‘신의 선물’이 처음이었기에 유저들의 반응은 이루 설명하기 힘들 정도 폭발적이었다. 잡지가 발매 되자 마자, 펜타곤에 고객 상담실의 전화기가 일제히 울어 대었으니 말이다. 모든 예약은 각 도시의 프리미엄 샵에서 소량으로 진행 되었지만, 가장 많은 수주를 받을 수 있는 곳은 물론 아키하바라의 1호점과 2호점이었다. 덕분에 지방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든 탓에 일대 거리가 큰 혼잡을 이루었을 정도라 그 날 행사는 정말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바빴던 걸로 기억에 남아 있다. 모리타의 도안과 우치무라의 아이디어로 탄생한 1/8 스케일의 피규어는 히로인 별로 딱 500개 한정으로 제작 되었다. 개인적인 취향으로 순위를 매기자면, 나 역시 두 사람이 가장 공들인 캐릭터인 카오리가 최고라 생각한다. 그 다음으로는 주인공의 스승인 사츠키. 보라색 연미복 드레스 사이로 드러난 가슴이 매우 인상적이랄까? 세 번째로는 주인공의 또 다른 소꿉친구인 ‘이가와 레이’는 수줍음이 많은 그녀의 성격처럼 연한 하늘색 드레스가 매우 잘 어울렸다. 마지막으로 어떤 부류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주인공의 후배. ‘오오타니 하루카’. 자신의 머리색과 똑같은 연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귀여운 여동생 이미지를 잘 살리고 있었다. “언젠가 옵니다. 대 로리의 시대가!!” 라고 외치며 우치무라와 의기 투합한 모리타의 개인 감성이 담뿍 들어 있는 캐릭터랄까? 에휴... 이러니 아직까지 마음에 차는 마땅한 여자를 못 만나는 거 겠지... 하지만 어떤 면에선 미래를 꿰뚫어 보는 모리타의 예지력에 소름끼칠 때가 있긴하다. 그의 바램대로 90년대 후반부터 특정 게이머들에게 로리타 붐이 일어났던 시기가 존재하긴 하니까... 미지근 해진 녹차를 마저 비운 나는 슬슬 샤워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방금 올라온 한 게시물이 눈에 띄었다. [질문] 혹시 제 것만 불량인가요? 게임 도중 가끔 삐- 삐- 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그리고 그 게시물 제목을 본 순간 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벌써 저 걸 들은 사람이 있네...?’ < EP. 37 : 불량품. (3) -7권 끝- > & 버그 수정을 위한 파이널 테스트 당시 나는 사운드 디렉터인 우에노씨를 찾아가 한가지 제의를 했다. 그것은 게임을 플레이 하는 도중 들을 수 있는 간헐적인 비트음에 대한 것이었다. “준혁씨의 말대로라면 게임 안에 의도적인 비트음을 집어 넣자, 이거로군요.” “네. 하지만 너무 대놓고 정확하게 들려도 안되고, 조금은 희미하게 랄까?” “희미하게라... 그렇다면 비트음 주파수를 따로 조작해서 19kHz 정도로 조정하면 되겠군요.” “1.. 19.. 뭐요?” “신경이 굉장히 예민하거나 신체가 건강한 10대 청소년들만이 인지할 수 있는 주파수 대역 폭입니다. 보통 15kHz 정도가 일반인이 무리 없이 들을 수 있는 주파수 대역이지만, 19kHz 이상 오르게 되면 굉장히 예민한 감각을 가진 사람만이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죠.” 오~ 그런 건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의외의 수확인데? 우에노씨의 말한 것은 딱 내가 생각해 두었던 컨셉과 일치했다. 어떤 이에겐 들리지만, 어떤 이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는 소리. 마치 환청과도 같은 이 비트음은 ‘신의 선물’ 전반을 아우르는 중요한 키(key) 포인트가 될 수 있었다. 뭐. 어쩌면 이 부분으로 제품 불량의 논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는 일전에 내가 했던 예견과 99% 일치하는 게시글이 올라와 있었다. 적어도 며칠은 지나서 알려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빠르네? --- 오늘 아침에 펜타곤 샵이 열리자마자 달려가 신의 선물을 구입해온 오사카 유저입니다.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첫 도입 부분에 방금 전까지 굉장히 만족스럽게 플레이 중이 었는데요. 제가 구입한 카트리지가 불량인지, 게임 도중 묘한 비트음이 들려 옵니다. 그렇다고 계속 들려오는 것은 아니고, 플레이 중 BGM에 섞여 간헐적으로 삐- 삐- 소리가 들린 뒤 한 동안은 또 들리지 않아요. 이상하다 싶어 다시 처음부터 플레이 해보았는데, 프롤로그에서는 그런 소리가 없다가 챕터 1 주인공의 시간이 1년전으로 되돌아간 시점부터 들려 옵니다. 혹시 저와 같은 증상이 있으신 분 계신가요? --- [답변] 아랫분 카트리지 불량인가 보네요. 저는 플레이 내내 그런 비트음은 한 번도 못들어 봤는데요. 어쩌면 카트리지 제작중에 미스가 생겨 음원이 깨진 것일 수도 있으니, 한번 펜타곤 고객센터에 문의하여 카트리지를 교환 받으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 우에노씨가 설정한 비트음의 주파수 영역은 열에 하나 둘 정도 들을 수 있는 수준이라 들었다. 그래서 일까? 게임의 스토리에 관해 굉장한 힌트가 될 수 있는 이 게시물은 금새 단순한 카트리지 불량으로 단정 지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새로 올라온 게시물 중 게임 속 비트음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 올라왔다. [답변] 간헐적인 비트음 소리 저도 들었습니다. 밑에 사운드 불량에 대한 게시글을 보고 혹시 내 것도 불량인가 싶어서 이어폰을 꽂은채 주의 깊게 플레이 하던 도중. 말씀하신 삐- 삐- 소리를 저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직 거리는 음원이 찢어지는 소리가 아니고, 간결한 템포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뭔가 의도적인 느낌이 드네요. 추가 설명을 드리자면, 제 여동생에게 한쪽 이어폰을 들려 주었지만, 자기는 게임속에 나오는 배경 음악을 제외하곤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고 합니다. 따라서 문제의 비트음은 조금은 예민한 청력을 가진 사람만 들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굉장히 집중한 상태에서만 그 소리가 들리기에 확언은 못드리겠네요. 참고로 제가 사용한 이어폰은 센소니의 ‘E868’ 입니다. --- 새로 올라온 게시글에 쓰여 있는 ‘의도적’이라는 표현으로 인해 커뮤니티 회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이어폰을 동원해 비트음의 행방을 쫓기 시작했다. 샤워를 마치고 컴퓨터로 돌아오니, 비트음에 대한 게시글만 벌써 10개가 넘게 달리고 있었다. 누구는 자기도 분명히 비트음을 들었다고 주장했고, 누구는 플레이 내내 아무리 볼륨을 키워도 비트음 따윈 없었다는 소감을 남기며 혹시나 비트음을 들은 유저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이어폰의 모델명을 알려달라고 간청하는 사람도 있었다. 각양 각색 유저들의 반응에 나는 피식 웃음을 삼키며 컴퓨터의 전원을 내렸다. ‘이러다 센소니 이어폰만 신나게 나가겠는데?’ & 다음 날 오후. 유키를 만나기 위해 병원으로 향하기 전. 나는 역 근처에 위치한 대형 레코드점으로 향했다. 최근 휴대용 CD 플레이어의 등장으로 워크맨 중심이었던 휴대기기의 트렌드에 변화가 생기며 고음질 경쟁이 일어나는 추세였기에 높은 음역대를 깨끗하게 출력할 수 있는 이어폰 역시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모델은 센소니의 E848과 E868 모델이 있었는데, 이어폰 치고 제법 고가의 모델이었던 터라 일부 음향기기 매니아가 아니라면 딱히 구입하는 일이 없었다.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나 펜타곤 월드의 커뮤니티에 다시 들러보니, 모든 게시판에는 ‘신의 선물’의 비트음에 대한 글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나 있었다. 몇 개의 게시물을 둘러보다가 대화방에 들러보니 거기서도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으헝헝... 제가 막귀 였다니, 왜 저는 비트음이 안들리죠?- -이어폰을 바꿔보세요. 저도 싸구려 이어폰에서 동생이 쓰는 고급 헤드폰으로 바꿔 끼워 보니, 회원님들이 말씀하시던 비트음이 들리더군요.- -아니, 그런데 왜 갑자기 다들 비트음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건가요? 어차피 잘 들리지도 않는데, 게임은 내용이 중요한 거 아닌가요?- -그 비트음이 스토리에 연관 되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여태까지 펜타곤의 행보를 본다면 충분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회사입니다. ‘내가 없는 거리’에서 주인공이 병에 걸렸을 때 의도적으로 게임 그래픽을 깨뜨렸던거 기억하시죠? 전 그때 제 방 TV가 고장난 줄 알았습니다.- -맞아요. 저도 그때 깜짝 놀랐었습니다. 멀쩡하던 게임화면이 갑자기 와장창 깨져나가니 충분히 그럴만도 하죠.- -하다하다 이젠 유저들 청력 테스트까지 하게 하다니, 펜타곤 게임이 무섭긴 무섭네요.- -안 그래도 최근에 휴대용 CD 플레이어를 사면서 이어폰을 바꿔 볼까 고민 중이었는데, 이따가 시내에 나가면 쓸만한 걸로 하나 사와야겠네요.- -센소니 E868 완전 강추합니다. 현 시대 이어폰 중에선 해상력이 이만큼 좋은 게 없더군요. 그걸로 ‘신의 선물’을 플레이 해보시면 또다른 신세계를 맛보실 겁니다.- -그래요? 안그래도 어제 게시물 보고 센소니 E868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거 얼마 정도 하나요?- -4,800엔이요.- -아니, 무슨 이어폰 가격이...- -그만큼 값어치를 하는 이어폰입니다.- 아무튼 먼 미래에나 지금이나 이렇게 멀쩡한 사람에게 ‘뽐뿌’ 넣는 사람들이 꼭 있다니까... 아침에 본 대화 내용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레코드점 문을 열어 젖히자, 때마침 가게 내부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신의 선물 메인 테마곡인 ‘러브 레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런 대형 레코드 점에서 발매한지 하루 밖에 되지 않은 게임의 테마곡을 틀어주는 건 흔치 않을텐데? 아마도 가게 주인이 펜타곤 소프트의 팬이거나, 직원들의 추천을 받아 틀어준 거겠지...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북적이는 레코드 점을 안을 살피던 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청음대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최근 보편화된 CD 매체의 음질을 체감하기 위해 몇몇 사람들은 줄까지 서가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최근 일본의 음반 시장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뮤지션은 뭐니뭐니해도 X-JAPAN이다. 동 시대에 한국에서도 상당히 인기를 끌었던 이 그룹의 음악은 나도 어릴 적 몇 번인가 들은 기억이 있었다. X라던가, Tears, Endless Rain. 같은 대부분 유명했던 곡 위주였지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음악은 딱히 내 취향에 맞지 않았고, 오히려 Glay나 Luna sea의 노래를 더 좋아했던 기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특히 Luna sea의 Love song은 진짜 역대급이었지..’ 하지만 내가 오늘 이곳에 들른 이유는 그런 추억 때문 만은 아니었다. 사실 차후 프로젝트를 위한 시장 조사의 일환이라고 할까? 우선 어제 게임과 함께 동시 발매 된 ‘신의 선물’ OST는 현재 SOLD OUT이 걸려 있었다. 기존의 파이널 프론티어나 드래곤 엠블렘의 OST가 게이머라는 매니아들에 의해 팔려나가는 컨텐츠였다면 이번 ‘신의 선물' 은 클래식과 뉴에이지 기법의 음악들을 차용한 덕에 일반인에게도 상당한 관심을 불러 일으킨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개봉품이라도 상관 없으니, 지금 가게에서 틀고 있는 OST 좀 파실수 없나요?” “죄송합니다. 고객님. 현재 플레이 되고 있는 CD는 저희 매장 홍보용이기에 판매는 불가능합니다. 이쪽 예약자 명단에 성함과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제품 입고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신의 선물 OST를 사기 위해 레코드 점에 방문한 손님은 재고가 없다는 직원의 말에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레코드점을 나섰다. 이번 OST는 일반 BGM 음원이 담겨 있는 사운드 트랙과 주인공과 히로인들의 오리지널 연주를 담은 갈라쇼 버전이 함께 출시 되었는데, 현재 매장에 흘러 나오는 클래식은 갈라쇼 버전이었다. (일전에 유키가 우에노씨에게 선물 받았던 CD 역시 바로 이 갈라쇼 버전이다.) 둘 다 완성도가 높은 음반이었기에 어느 정도 매출이 일어날 거라 자신하고 있었지만, 설마 발매 하루 만에 OST까지 품절 사태가 일어날 줄이야... 신의 선물의 성공적인 판매량에 스스로 자축하며 걸음을 옮기던 나는 이어폰 코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방금 너 만나러 나오기 전에 집에서 PC 통신 하다가 겁나 소름 끼치는 글 봤다.” “음? 뭔데? 재밌는 글이라도 있었어?” “어제 우리가 사온 ‘신의 선물’에 대한 게시물인데, 일단 자기가 플레이 한 지점까지 있었던 이벤트들을 정리해서 올렸더라고, 겁나 심층적으로 분석해 놨는데, 완전 소름 끼치더라.” “그래? 무슨 내용이었길래. 주인공이 자기를 살려준 히로인을 찾는게 목적 아니었나?” “실은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그렇게 단순한 스토리가 아닌거 같아. 일단 그 사람은 스피드 클리어를 목적으로 어제부터 오늘 아침까지 한차례 엔딩을 봤다는데, 엔딩을 보고나니까 다시 게임속 시간이 1년 전으로 돌아왔데...” “으잉? 다시 스토리가 다시 1년 전으로? 그게 뭔 소리야? 알아 듣게 설명 좀 해봐.” “너 어제 신의 선물 커뮤니티에서 삐- 삐-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던 게시물 봤냐?” “응. 그건 나도 봤어.” “그 게시글을 보면 작성자가 2회차에 돌입한 순간 비트음이 잘 안들리는 사람들도 점점 더 자주. 그리고 확실히 그 소리를 듣게 될 거라더라. 그리고 자주 그 소리를 듣다 보면 마치 병원의 심전도 체크를 하는 기계음이랑 비슷하다게 들린 다나?” “으잉...? 그럼 설마...” “반복 되는 1년의 시간. 그리고 묘하게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비트음. 이 모든 걸 종합해 봤을 때. 주인공의 현재 상태가 ‘코마’ 상태라고 추측 된다고 하더라. 어때? 대박이지?” < EP. 37 : 불량품. (3) -7권 끝- > 끝 < EP. 37 : 불량품. (4) > & 레코드 점을 나와 병원으로 향하던 중. 우연히 이어폰 코너에서 들은 유저들의 대화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노멀 엔딩 딱 한번 보고 2회차에서 거기까지 추측해 내다니. 완전 명탐정 코난이 따로없네...’ 처음 고주파수 비트음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우에노씨에게 내 생각을 전했을 때, 벙찐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연속으로 떠올라 입가에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과연 모든 이야기의 끝을 보았을 때, 유저들은 과연 내가 만든 신의 선물이라는 작품에 대해 어떠한 평가를 내릴까?’ 하지만 그것을 알기 위해선 조금 더 시간이 걸릴 듯 하다. 나는 빨간 신호등에서 차를 멈춰 세우곤 조수석에 놓여진 레코드점 쇼핑백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컴플리트 라온’의 주요 런칭작을 담당하게 될 한 프로듀서의 음악 CD가 왕창 들어가 있었다. 그가 누구냐고? 글쎄... 아직까진 비밀이라고 해야하나? & 자연 분만인 탓일까? 생각보다 유키가 기운을 일찍차린 덕에 입원실에 도착한 나는 잠시 신생아실에서 나온 설현이를 볼 수 있었다. “설현아~ 저기, 아빠 왔다~ 아빠 왔어요~” “뭐야, 벌써 그렇게 안고 있어도 되는 거야?” 그러자 장모님께서 다소 지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말도 말아. 어젯밤부터 설현이가 보고 싶다고 얼마나 보채던지. 어젯밤 자네가 집에가고 신생아실에 12번도 더 다녀왔다니깐? 오늘 아침부터 5번이나 들락 거리니 의사 선생님도 안되겠는지 데려다 주셨어.” “설현아~ 엄마야~ 까꿍~” 어젯밤부터 그새 많이도 연습했는지, 이젠 제법 ‘설현’이라는 발음이 꽤나 자연스럽게 들렸다. 나는 그런 유키를 잠시 바라보다가 어제부터 자리를 지켜준 장인어르신과 장모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죄송합니다. 장모님. 제가 너무 늦었죠?” “아냐, 아냐. 덕분에 간만에 딸이랑 오붓한 시간도 보내고 굉장히 좋았어. 유키가 자네 자랑을 얼마나 하던지. 진짜 다른 집 딸들은 이럴 때 엄마한테 남편 흉도 보고 그러던데, 준혁군은 와이프 교육을 잘 시켰나 봐?” 어머니 등 뒤로 설현이를 품에 앉은 채 ‘브이’를 그리고 있는 귀여운 유키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유키가 어머님 닮아 워낙 착하고 이쁘잖아요. 다 어머님 덕이죠.” “어이구~ 내 사위. 말도 이쁘게 하네~ 진짜 내 딸이지만 나도 부러울 만큼 시집 잘 갔네.” 마치 옆에 있는 남편에게 보고 배우라는 듯 한 장모님의 일침에 장인어른은 헛기침을 하며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거 참... 정도 것 좀 하게나. 이러다 집에 가면 내가 얼마나 비교 당하는지 알나?” “하하.. 죄송합니다.” “우리 큰 딸도 어서 준혁군 같이 듬직한 사위를 얻어와야 할 텐데, 이것이 눈만 높아 가지고... 준혁군. 어디 우리 유코에게 소개 시켜 줄만 한 사윗감 없나?” “네? 아, 그게..” 장모님의 말에 머릿 속으로 펜타곤 직원들 중 몇몇을 떠올려 보았지만, 딱히 내가 알고 있는 돈 잘 버는 솔로 중에선 ‘로리 붐의 시대’를 기다리는 두 마리의 야수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유코씨 취향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펜타곤 직원 말고 그 외의 인물은 누가 있을까? 하고 한 사람을 떠올린 순간. 입원실 문이 벌컥 열리며 내가 생각한 그 인물이 들어왔다. “내 친구 준혁아~!! 아들이냐, 딸이냐~!! 왜 연락이 없는 것이냐~!!” 그러자 유키 품에 안겨 있던 설현이가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빼액 울어댔다. “어머? 준페이씨~” 설현이를 얼르며 반겨 주는 유키와는 다르게 장모님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감히 손녀를 울리며 요란스럽게 등장한 준페이의 행동이 영 마음에 들지 않으신 모양이다. ‘쟨 볼 것도 없이 탈락. 말 꺼내기 전이라 다행이다.’ 잠시 후. 장인 어른과 장모님은 유키와 설현이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본가로 돌아가셨다. 놀란 설현이는 유키의 품안에서 어느정도 진정이 됐는지, 금새 조그만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유키의 볼을 어루만졌다. “유키씨네 부모님. 엄청 젊어 보이시네요?” “실제로도 젊으세요. 결혼을 일찍 하셔서...” “아, 유키씨가 미인인 이유가 어머니를 닮아서 였군요. 부디 설현이도 유키씨를 닮아 이쁘게 자라길 바랍니다.” “좋은 말씀 감사해요~” 나는 유키와 이야기를 나누던 준페이에게 음료수 하나를 건네 주며 물었다. “미안하다. 나도 어제 너무 정신이 없어서 너한테 전화 준단 걸 깜빡했네. 그런데 무슨 일이야? 요즘 너희 엄청 바쁘지 않아?” “바쁘지. 바빠. 회사 창립이래 요즘이 가장 바쁜 시기인 듯 싶다. NEGA 새턴 출시에 센소니의 기어 스테이션. 거기다 너희 펜타곤에서 나온 신의 선물까지. 연말에 아주 일복이 터졌어요. 지금 우리 직원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르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니깐?” “그런 시기에 여기 와도 돼?” “야, 내가 게임 기자 짬밥이 몇 년인데, 그럼 궂은 일은 밑에 직원한테 다 시켜놓고, 고급진 일 하러왔지.” “고급진 일?” “응. 너 인터뷰 따러왔지.” “······.” “친구 와이프 순산 축하도 할 겸...” “어째 앞 뒤 순서가 바뀐거 같지 않아?” “······기분 탓일 걸?” 나는 준페이의 익살스러운 표정에 헛웃음을 삼키며 근처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와~ 재밌겠다. 설현아~ 아빠가 여기서 인터뷰한데요~” 유키는 생각지도 못한 이벤트에 함박 웃음을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 “그럼 준혁씨. 잘 다녀와요.” “응. 한 달 만에 출근하려니 좀 낮설긴 하네.” “출근하면 금새 적응 될 걸요? 설현아. 아빠 잘 다녀오세요~ 해야지.” 유키는 설현이의 조그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야외 주차장까지 마중을 나왔다. 나는 그런 두 모녀의 이마에 한차례 입을 맞춘 뒤 차에 올랐다. 브레이크를 밟은 채 시동을 걸으니, 오랜만에 신은 구두가 굉장히 딱딱하게만 느껴졌다. ‘휴~ 좋은 날도 다 갔고, 이제 다시 일 좀 해볼까?’ 그러고보니, 설현이가 태어나는 통에 그 날 이후로 칸나를 보러가지 못했네... 하지만 만약 그녀가 나의 제의에 응해 회사로 연락을 했다면 직원들이 나한테 알려주었을 텐데, 그동안 아무 연락이 없던 걸 보면 역시나 ‘아이돌 데뷔’에는 관심이 없던 것일까? 씁쓸한 기분에 입맛을 다시며 엑셀을 밟자, 미끄러지듯 주차 공간을 빠져 나오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유키가 보였다. 나는 그녀의 손짓에 마주 손을 흔드며 맨션 주차장을 빠져나와 대로로 접어 들었다. & “아~!! 부장... 아니지. 이사님~!!” 본사 건물로 들어가려는데, 등 뒤에서 카오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몬스터 디자인 팀 소속의 카오리는 신의 선물에 등장하는 ‘유키노조 카오리’랑 이름이 같아 출시 당시 직원들에게 종종 놀림을 받았으나, 워낙에 당찬 성격이라 그런지 오히려 자랑스러워 하곤 했다. 오늘 아침도 역시나 하야시와 함께 출근하는 걸 보니 최근에 이 둘의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긴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응. 너도 많이 받고, 올해는 하야시랑 결혼하렴.” 그러자 옆에서 나에게 인사를 건네려던 하야시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외쳤다. “이사님.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끄아아악!!!” 카오리의 뾰족한 하이힐에 발등을 찍힌 하야시는 눈깔을 뒤집은 채 로비에서 비명을 내질렀다. ‘이 녀석도 캐릭터가 완전 바뀌었네.’ 전에 민텐도에서 일할 땐 굉장히 차갑고, 이성적인 녀석이었는데, 펜타곤으로 넘어와서 카오리를 만난 뒤,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츤데레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베지터 같은 녀석.’ 나는 속으로 하야시를 향해 웃어보이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포기하고 그냥 데리고 살아~ 어차피 너도 카오리 좋아하잖아.” “벼.. 별로 그렇지도 않... 으어어억!!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너 진짜 부장을 뭘로 보는 거냐!!” 하야시는 자신를 향해 혀를 쏙 내밀고 달려가버리는 카오리를 바라보며 한동안 씩씩 대었다. 이거 참. 오랜만에 회사에 복귀하는 거라 굉장히 어색할 줄 알았는데, 마치 지난 주까지 회사 다니다가 주말 보내고 나온 느낌이네. 나는 카오리에게 쩔쩔 매는 하야시에게 피식 웃음을 던지며 그에게 물었다. “내가 없는 동안 회사에 별일은 없었어?” “별 일 없긴요. 어마어마했죠. 각 잡지사에서 신의 선물에 대해 기사를 쓰고 싶다고 이사님을 얼마나 찾았는데요.” “그런 것 치고는 회사에서 아무 연락도 없던데?” “뭐 그거야, 카와구치 대표님이랑, 우에노씨가 기자들의 인터뷰에 대신 응해주셨으니까요.” “아, 그렇구나. 대표님이랑 우에노 디렉터가 고생 많았겠네...” “하지만 워낙에 칭찬 일색이어서 그런지. 본인들도 즐거워 하시던데요? 특히 우에노씨는 자기가 직접 나서서 인터뷰에 응했으니...” “진짜? 우에노씨도 굉장히 조용한 성격일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봐?” “누가 아니랍니까? 그런데, 이번 달 패미통신에 실린 이사님 인터뷰는 대체 어디서 하신 겁니까? 준페이씨가 기사를 아주 잘 써주셨더라구요.” 하야시의 질문에 나는 그 날의 인터뷰가 떠올라 빙긋 웃어보였다. & 대표실 옆자리에 새로 만들어진 이사실에 들어선 나는 옷걸이에 코트를 벗어 걸어 둔채 컴퓨터 전원을 올렸다. 책상 위에는 내가 없는 동안 회사에 있었던 일들을 간략히 적어둔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컴퓨터가 켜질 동안 의자에 몸을 기댄채 보고서를 훓어 보고 있었는데, 노크가 울리며 모리타와 우치무라가 들어왔다. “이사님. 오랜만입니다. 휴가는 잘 보내셨나요?” “누가 들으면 1년 만에 복직한 줄 알겠다. 하야시도 그렇고 다들 너무 요란 떠는 거 아냐?” 그러자 모리타 옆에 있던 우치무라가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만큼 반가워서 그렇지요. 그 한 달 새에 해가 바뀌어 벌써 1995년 인 걸요.” 본래 자택에서 피규어를 만들던 우치무라는 작년에 CES를 다녀온 뒤로 모리타와 부쩍 친해져 두 달 전부터 제 2 개발팀에서 폴리곤 캐릭터를 디자인하고 있었다. 피규어를 만드는 것과 3D 캐릭터를 만드는 것에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는지. 우치무라는 로우 폴리곤을 활용해 제법 그럴 듯한 캐릭터 디자인을 만들어 내었고, 모리타는 그런 우치무라를 극찬하며 항상 자신의 곁에 데리고 다녔다. ‘정말로 잘 어울리는 스승과 제자로구나...’ 나는 잠시 보고서를 책상에 올려두며 모리타에게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아, 전에 말씀하신 각 지역의 오디션 상황을 말씀 드리려고 왔습니다.” 아차. 그러고보니, 신의 선물을 발매하기 전에 ‘컴플리트 라온’의 런칭작으로 ‘버추어 아이돌’ 프로젝트에 대해 프리젠테이션을 했었지. 복귀하자마자 처리 할 일이 산더미로구나... 하지만 누굴 탓하랴.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인 것을... “이 서류는 일단 각 지역 별로 최종 결승까지 올라온 참가자들의 프로필과 오디션장 녹화 테잎입니다.” 모리타에게서 두툼한 서류 봉투를 건네 받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그때 모리타 곁에 있던 우치무라가 잠시 내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이사님.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는데...” “응? 뭔데?” “그게... 신의 선물의 엔딩곡 테마에 대한 건데, 요즘 하라주쿠에서 신의 선물의 엔딩곡 테마에 직접 가사를 붙여 노래를 부르는 여자 아이가 있다고 합니다. 최근 커뮤니티에서 제법 화제가 되고 있더라구요. 사람들 말로는 노래 솜씨가 수준급이라고 하던데...” 하라주쿠에서 노래를 부르는 여자 아이라고... 설마...? < EP. 37 : 불량품. (4) > 끝 < EP. 38 : 샤이닝 스타. (1) > -특집 기사 : 신의 선물의 디렉터 강준혁. 그는 누구인가?- 필자. 이시모토 준페이. 본격 적으로 신의 선물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필자는 1987년 봄에 있었던 조그만 사건을 먼저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당시 패밀리 게임을 즐겨본 게이머라면 유저들 사이에서 도시 괴담처럼 떠돌던 하나의 게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드래곤 엠블렘이다. 현재 일본을 대표하는 양대 RPG 게임을 꼽으라면 누구나 드래곤 워리어와, 파이널 프론티어를 꼽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하나를 더 꼽아 3대 타이틀을 말하라면 필자는 주저없이 드래곤 엠블렘을 선택 할 것이다. 물론 드래곤 엠블렘은 정통적인 RPG 장르가 아니기에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이 게임은 그 존재 자체 만으로도 현 게임 시장에 공헌한 바가 큰 작품이다. 벌써 5, 6편까지 출시된 드래곤 워리어나 파이널 프론티어 시리즈에 비해 드래곤 엠블렘은 리메이크 작품을 제외하면 단 두 작품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기존의 게임과는 전혀 다른 신세계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어차피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 역시 펜타곤 게임의 열렬한 팬이라면 굳이 여기서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보았자, 피차 서로에게 진부한 시간이 될 것이 뻔하기에 드래곤 엠블렘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어 두도록 한다. (사실 드래곤 엠블렘 칼럼 하나로도 5페이지 이상 뽑아 낼 자신이 있지만, 그랬다간 신의 선물에 대해 알고 싶어 잡지를 구입한 독자들에게 비난의 화살이 날아올 것이 뻔하니까. 필자도 그정도 눈치는 있다.) 하지만 사실 강준혁 디렉터가 게임 업계에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게 한 것은 ‘드래곤 엠블렘’ 시리즈가 아니다. 이 글을 보는 독자들이라면 한 번에 눈치 챘겠지만, 지금의 강준혁 디렉터를... 그리고 펜타곤 소프트를 최고의 게임 제작사로 이끌어 준 작품은 다름 아닌 ‘내가 없는 거리’의 등장이었다. 그야 말로 ‘사상 초유’라는 모든 수식어를 전부 가져간 이 작품은 게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그 스토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을 정도로 엄청난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게임 뿐만 아니라, OVA까지 진행된 탓에 애니메이션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이 작품은 당시까지 게임 역사상 한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놀라운 시스템이 많이 녹아들어 있다. 의도적으로 게임 그래픽을 깨뜨려버리는 연출이라던가, 같은 제목의 게임을 히로인 별로 따로 판매한 독특한 판매 방식. 그리고 영화나 드라마에서 조차 흔히 볼 수 없던 비극 적인스토리 전개로 인해 사회적으로 많은 헤프닝을 일으켰던 이 게임은 게이머 뿐만 아니라 전 국민의 마음 속에 영원히 기억될 타이틀이 되었다. 여기서 드래곤 엠블렘과 내가 없는 거리는 둘다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이 대목에서 분명 아무 상관도 없는 장르에 무슨 공통점이 있냐고 고개를 갸웃 거리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분명 닮은 구석이 있다. 그것은 바로 두 작품 모두 강준혁 디렉터가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만든 게임이라는 것이다. 이 두 작품이 사실 그가 만들었던 것이라고 알기 전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강준혁의 작품은 ‘사이킥 배틀’ 단 하나 뿐이었으니까. 패밀리의 말기 무렵에 혜성처럼 등장한 사이킥 배틀은 당시 패밀리의 스펙을 뛰어 넘는 어마어마한 탄막 연출과 함께 게임 속에 ‘섹시’라는 코드를 처음으로 접목시킨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차후에 ‘사이킥 포스’라는 아케이드 게임으로 발전 하여 아직까지 수많은 배틀 팀을 양성하고 있으니, 디렉터로서 강준혁의 실력은 이미 신뢰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슈퍼 패밀리의 개발 팀장으로서의 경력을 밑거름 삼아 그가 만들어낸 ‘라온’은 현 시대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휴대용 게임기가 되었다. NEGA 새턴과 기어 스테이션 같은 차세대 기종이 위세를 떨치는 와중에도 라온은 휴대기기로서 자신의 포지션을 묵묵히 지켜 나가고 있다. 작년 CES에서 강준혁 디렉터는 차세대 거치기인 ‘컴플리트 라온’ 프로젝트를 활용한 새로운 드래곤 엠블렘 시리즈와 내가 없는 거리의 풀보이스 버전을 발표하며 차세대 기종 전쟁에 뛰어들 것을 예고했다. 그런 와중에 몇몇 게이머들은 출시된지 얼마 되지 않은 라온을 두고 새로운 콘솔을 발표하는 것에 대해 불안감을 표출하였지만, 현재 펜타곤 소프트의 이사직을 맡고 있는 그는 걱정하는 부분에 대해 유저들이 실망할 일은 전혀 없을 것이라, 자신감 있게 토로했다. ‘라온은 차세대 기종이 나오더라도 휴대기기로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스파2와 신검 전설. 그리고 드래곤 엠블렘에서 보여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협동‘ 모드는 거치기에서는 보여줄수 없는 매력적인 요소 이기에 절대로 이 부분을 간과해선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바로 강준혁 디렉터와 직접 라온에 대해 인터뷰를 했을 때 그가 한 대답이다. 그는 프로 디렉터로서 이미 유저가 걱정하는 부분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차후 차세대 기종이 발매된다 하더라도 라온은 최고 성능의 휴대기기로서 그 자리를 지켜나가지 않을까 싶다. 덧붙여 강준혁 디렉터 말로는 차세대 거치기와 휴대용 라온은 두 개를 동시에 가지고 있을 시에 ‘동조 효과’를 볼 수 있다니 이 부분에서도 크게 기대해 볼만하다. 자~ 그럼 길었던 서론을 마치고 이제부터 ‘신의 선물’에 대한 본격적인 리뷰를 해볼까 한다. 간단히 신의 선물에 대해 필자가 느낀 소감을 말해 보자면, 이 게임은 지금까지 게임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프롤로그를 보여주었다. 클래식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필자 조차도 플레이 직후. 근처 레코드 점에서 쇼팽의 녹턴을 직접 구입해서 들었을 정도니까. 오죽 하겠는가? 신의 선물은 그 만큼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클래식곡과 피아니스트의 삶을 단편적으로 보여줌으로서 플레이어의 지식의 영역을 넓혀줌과 동시에 게임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 수작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신의 선물 덕분일까? 레코드 점에서 신의 선물에 등장한 클래식 음반이 물량 부족 사태를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그저 적에게 미사일만 쏴대며 뿅뿅 거리는 효과음으로 모든 걸 해결 하던 게임이 이토록 대중에 가깝게 다가 왔다는 것에 대해 ‘게임 전문 기자’로서 굉장히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의 선물은 주인공 뿐만 아니라 네 명의 히로인 조차 각각의 악기를 다루는 프로 뮤지션으로서 주인공과 다양한 협연을 펼쳐 나가며 호감도에 영향을 주고 있는데, 독특한 점은 이 협연을 통해 시나리오 분기가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이후 내용에서는 게임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기 때문에 혹시나 미리 스토리를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나중에 스토리를 클리어 하고 보길 권하는 바이다. 필자 역시 이 게임이 출시 되기 전 제공된 히로인의 일러스트만을 보고 ‘내가 없는 거리’ 혹은 ‘두근두근 메모리얼’과 같은 연애물을 생각했다. 하지만... 리뷰를 작성하기까지 두 번의 엔딩을 경험하고 난 필자의 솔직한 감상은.. 이 게임은 ‘스릴러’ 물에 가깝다는 것이다. 특히나 발매 전 유저들에게 인기 투표 1위를 달린 그녀의 배신은 지금 생각해도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니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이토록 사람을 잔인하게 만들 수 있을까? 게임의 후반부로 치달을수록 내 머릿속에 한편의 영화가 떠올랐는데, 그것은 바로 소설 작가를 자신의 집에 가둬두고 강제로 글을 쓰게 만들었던 미치광이 여자를 그린 ‘미저리’ 였다. 한 사람의 광기로 인해 망가진 주인공의 삶. 그것은 게임 내내 간헐 적으로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효과음에서 시작되었다. 신의 선물 발매 이후. 통신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이 소리는 필자 역시 첫 플레이시엔 들을 수 없었으나, 두 번째로 플레이할 때는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3번째 스토리를 진행 중인 지금은 그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온다. 처음 이 소리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느낀 그 소름끼치는 감각에 나도 모르게 패드를 붙잡고 치를 떨었을 정도였으니까. -범인은 유키노조 카오리다.- 게임 속에서 연주를 하다보면 흘러나오는 주인공의 기억은... 모든 사건의 주범이 계속 그녀에게로 향하는게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필자는 고개를 내저으며 ‘아니겠지, 아닐거야’를 반복했다. 하지만 또다른 회상 이벤트를 겪을수록 그녀에 대한 내 깊은 신뢰가 산산히 부서져 감을 느꼈다. 제발 그게 아니라고 누가 말 좀 해줬으면 하는데, 3회차 플레이. 그러니까 1년이 3번째 반복된 지금까지도 ‘유키노조 카오리’에 관한 이벤트는 전부 그녀를 범인과 연관 시키고 있다. ‘이중인격자’ 아니 그녀와 같은 인물은 다중 인격자라고 해야하나? 그나마 한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그녀가 범인이냐고 강준혁 디렉터에게 직접 물어 봤을 때, 그는 그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모든 연주곡에 S 등급을 따게 되면 연주 할 수 있는 비밀의 협연을 플레이 해보면 알 수 있을 거라 말했다. (솔직히 필자는 그의 대답을 듣고 네가 한번 해보라고 라온을 면상에 집어 던지고 싶었다.) 현재 아쉽게도 패미통신 공략 담당중에 모든 연주를 S 등급으로 클리어한 사람은 없다. 혹시 이 글을 보는 독자 중에 전 곡을 S 랭크로 클리어 한 유저가 있다면 지금 당장 패미통신 편집부로 연락을 주기 바란다. 그리고 나에게 한마디만 해주길... ‘유키노조 카오리가 범인이 아니라고...’ & “어때? 재밌지?” 마유미의 아르바이트가 끝날때까지 근처 카페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나는 나카무라가 건네준 잡지를 돌려 주며 말했다. “이 리뷰를 쓰신 분도 카오리를 굉장히 좋아하시나 보구나.” “물론이지. 지금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엄청 화제라니까... ‘속지 마 X년이야.’ 라고...” 나는 나카무라의 말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걱정 마. 그녀가 아니니까.” “응...? 뭐라고?”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야 올 S랭크로 클리어 했으니까.” < EP. 38 : 샤이닝 스타. (2) >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야 올 S랭크로 클리어 했으니까.” 나카무라는 나의 대답에 잠시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다가 되물었다. “올 S 랭크로 클리어했다고? 칸나 네가? 도대체 어떻게!?” 사실 나카무라군이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나 역시 모든 연주를 전부 S랭크로 클리어 하기 위해 연습 모드를 수도 없이 반복했었으니까. 하나의 연주를 완벽히 쳐내기 위해선 반복적인 연습이 중요하다. 그것은 실제 악기를 다룰 때 역시 마찬가지로 적용 되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처음부터 하나하나 신중하게 내려오는 리듬 바를 쳐내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눈으로 리듬바를 보고 타이밍을 맞춰선 안된다.’ 눈으로 쫓아 타이밍을 쟤는 순간. 음은 조금씩 미묘하게 틀어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것은 순전히 내 예상이지만, 이 게임을 만든 강준혁 디렉터라는 사람... ‘일부러 리듬 바의 타이밍을 어긋나게 해놓았어...’ 실제로 몇몇 포인트에서 리듬 바를 아무리 타이밍 좋게 맞춘다 하더라도, Perfect 타이밍이 아닌 Good 타이밍이 뜰 때가 있었다. 조금 이상한 느낌에 감정을 담아 일 부러 조금 느슨하게 타이밍을 맞추자, 곧바로 Perfect 표시를 볼 수 있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의 연주는 단순히 타이밍 만을 맞추는 단순한 리듬 게임이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 뮤지션이 감정을 담아 건반을 두드리듯 주인공 만이 가지고 있는 ‘곡의 해석’이 따로 준비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부터 나는 될 수 있는 한 리듬 바가 내려오는 타이밍 보다 곡의 흐름과 분위기를 더 중요시 했다. 그러자 이제까지 아무리 반복 해도 A 랭크 밖에 되지 않았던 어려운 난이도의 곡이 하나씩 S랭크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처음 쇼팽의 녹턴을 쳤을 때 설레이던 그 느낌 그대로 너무 잘하려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곡을 느끼는거야...’ 그리고 나머지는 연주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에 모든 것을 맡긴다. 신기하게도 나의 손가락은 이어폰 너머로 들려오는 피아노 음에 반응하여 자연스레 움직이고 있었다. 몇 번의 반복 끝에 패턴 마저 손에 익어 버린 탓일까? 나카무라군은 유키노조 카오리가 범인이 아니라는 내 말에 그렇다면 주인공을 위기에 빠뜨린 진짜 범인이 누구인지에 대해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의 질문에 따듯한 레몬티를 홀짝이며 입을 열었다. “그건... 말하지 않을래.” “음? 왜??” “게임을 클리어 하고 나서 나카무라군이 느낄 감동을 빼앗기 싫으니까. 하지만 연주 파트에서 S 랭크를 쉽게 받을 수 있는 힌트는 알려줄 수 있어.” “그게 뭔데?” “음악을 느끼는 거야. 너무 리듬 바에만 신경쓰지 말고, 주인공의 회상씬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완벽한 연주를 위해 음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S 랭크에 도달할 수 있을 거야.” 이것 역시 제작자의 의도 일지 모르지만, 신의 선물 연주 파트에서 플레이어의 눈을 현혹시키는 장치가 너무나도 많다. 내려오는 리듬 바와 타이밍 존. 거기다 옆에서는 주인공의 회상씬까지 보여 주기에 처음에는 회상씬에 집중하다보면 음을 놓치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얼핏 보기에 음악과 함께하는 회상 씬은 굉장히 애절한 느낌을 전해주지만, 사실 조금 더 효율적으로 리듬 게임을 진행 시키기 위해선 회상씬은 연주 이후에 따로 보여주어도 되지 않았을까? 나카무라는 음악에만 집중하라는 나의 말에 알 듯 말듯한 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때 카페 문이 열리며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온 마유리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오래 기다렸어? 미안, 교대 직원이 지각 하는 바람에...” “아니, 괜찮아. 나카무라군이 사온 잡지 보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지 뭐야.” “칸나 너 요새 신의 선물인가, 그 게임에 완전 빠져 들었다며? 그게 그렇게 재밌어?” 마유리의 물음에 나는 지난 한 달 간을 주욱 돌이켜 보았다. 살짝 눈을 감은채 마지막 씬에서 주인공을 포함한 5인의 협주곡을 떠올린 나는 마유리를 향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응. 너무 즐거웠어. 그리고 한편으론 너무나 슬픈 이야기라...” 마지막 장면을 떠올린 것 만으로도 눈가에 방울방울 눈물이 맺힐 것만 같았다. 그러자 내 얼굴을 보고 있던 마유리가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얼레?? 너 지금 우는 거야?” “아, 그냥 진짜 결말에 대해 이야기 해주면 안될까? 나 정말 궁금해서 돌아가시겠다.” 나카무라는 머리를 쥐어 뜯으며 자신의 손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어떤 게임이든 올 클리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신의 선물은 당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니까? 특히 사츠키 선생이랑 협연 파트는 피아노가 두 대다 보니 손가락에 쥐가 날 지경이야...” 그런 나카무라군을 바라보던 나는 이제라도 가방 안에 있는 라온을 이용해 진 엔딩을 보여 줄까도 싶었지만, 결국에는 그를 위해 꾹 참아내기로 했다. & 그 날 저녁 마유리와 함께 저녁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는 꽤나 오랜만에 기타를 꺼내 들었다. 오늘은 가게도 쉬는 날이라 아버지도 집에 안계시니까. 침대 위에 기타 케이스를 올려둔 나는 조심스레 기타를 꺼내어 줄을 튕겨 보았다. 맑은 기타음이 좁은 방안에 울리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어릴적 아빠는 내가 가수가 꿈이라는 것에 대해 별로 탐탁치 않아 하셨다. 하지만 엄마는 달랐다. 결국 엄마는 아버지 몰래 나에게 기타를 선물해 주셨고, 아버지가 가끔 가게를 비운 날이면 엄마는 내 곁에 앉아 내가 치는 기타 소리를 들으며 기분 좋게 웃어 보이셨다. “참 신기하다. 우리 딸. 누가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한 번만 들으면 그 곡을 똑같이 칠 수 있다니. 무슨 모차르트도 아니고...” “모차르트? 그게 뭐예요?” “오스트리아의 천재적인 음악가란다. 네가 좋아하는 ‘반짝 반짝 작은별’이라는 노래도 사실은 모차르트가 작곡한 클래식 곡이야.” “아, 나 그 노래 칠 줄 알아요.” “정말...?” & “Twinkle, twinkle little star...” 엄마와의 옛 기억에 방 안에서 기타 줄을 튕기던 나는 기타를 들고 집을 나섰다. 1월의 싸늘한 겨울 바람이 내 몸을 움츠러 들게 하였지만, 나는 기타 케이스의 손잡이를 꼭 움켜쥔 채로 언제나 거리 연주를 하던 곳으로 향했다. 추운 겨울이라 그런지 작년 가을이랑은 다르게 거리에서 공연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역 근처의 상점가에 위치한 레코드 가게를 찾은 나는 유리문을 열어 젖히며 주인 아저씨에게 인사를 드렸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오~ 칸나구나, 어서오거라.” “아저씨. 오늘 혹시 가게 앞에 설치된 앰프 좀 빌릴 수 있나요?” “응...? 너 설마 이 추운 날씨에 노래하려고?” “네. 안... 되나요?” “그야 안 될 건 없지만, 그러다 감기 걸려 이 녀석아.” “조금만 부르다 갈게요. 네?” “나야 가게 홍보도 되니 좋긴 하지만, 원 녀석... 그럼 잠시만 기다려 보거라.” 아저씨는 나의 부탁에 혀를 차며 가게 안 쪽의 쪽방에 들어가시더니, 잠시 후 조그만 난로와 의자를 들고 나오셨다. “아저씨. 이렇게까지 안해주셔도 되는데...” “이거 틀어 놓고 옆에서 노래부르는게 앰프를 빌려주는 조건이다. 너 노래 부르다 감기라도 걸리면 하늘에 계신 네 엄마가 얼마나 슬퍼 하겠니?” “아... 감사합니다. 아저씨...” “고사리 같은 손 잡고 엄마랑 와서 기타 사갔던게 어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나 커가지곤...” 아저씨는 나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어 보이셨다. 잠시 후. 레코드 가게 앞에는 나만을 위한 조그만 공연장이 생겨났다. 간간히 거리에 불어오는 찬 바람은 여전 했지만, 옆에 세워둔 난로 덕분에 적어도 손가락이 굳을 일은 없어 보였다. 나는 문틀에 기댄 채 나를 바라보시는 아저씨를 향해 살짝 미소 지어보인 뒤, 부드럽게 기타줄을 튕겨 바쁘게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잠시 멈춰 세웠다. “어? 이 겨울에 거리에서 연주를?” “우리 잠깐만 구경하고 가자.” 어느새 주위로 모여드는 사람들을 향해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인채, 내 앞에 놓인 촟불에 불을 밝혔다. 조그만 유리병 안의 양초에 불을 붙이는 것은 노래를 시작하기 전에 행하는 나만의 의식이었다. “첫곡으로 직접 작사 작곡한 ‘전할 수 없는 사랑’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잠시 목을 가다듬은 나는 곧이어 기타줄을 튕기며 차가운 바람에 내 목소리를 실어 보냈다. 고독해 보이는 너의 모습에, 어째서인지 신경이 쓰여... 깨달으면 어느샌가 너에게로 향하는 내 마음. 어떻게 해야 이 마음이 너라는 거울에 비춰질까... 두 눈을 꼭 감은 채 내 모든 감정을 담아 노래하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하게만 느껴졌다. 첫 노래를 마치고 살며시 감았던 눈을 뜨자, 노래를 시작하기 전보다 두배는 더 많은 사람들이 레코드점 앞에 모여 들어 박수와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가게 아저씨 역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어느 때보다 밝게 웃고 계셨다. “노래 실력도 실력이지만, 기타도 제법 많이 늘었구나. 요새 기타 교습소라도 다니는 게냐?” “아뇨. 그저 정확하게 치는 것 보다, 곡의 분위기와 그 흐름을 이어가는 법을 깨달았다고 해야하나?” “호오...? 제법인데? 그래 확실히 정확하게만 연주하는 소리엔 아무런 감정도 실을 수 없는 법이지. 대체 그런건 누구한테 배운 거냐?” 아저씨의 질문에 나는 그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다시 기타줄을 튕겼다. 그러자 이 곡을 알아 들은 관객 중에 몇몇이 ‘어?’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이 곡... 어디서 많이 들었는데?” “그러게? 뭐지... 굉장히 익숙한데?” “자.. 잠깐 이거 설마? 게임 ‘신의 선물’의 엔딩곡?” “헉!! 진짜다!!” 게임에 대해 잘 모르는 레코드 가게 사장님은 고개를 갸웃 거렸지만, 어쨌든 음악이 마음에 드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 나셨다. 처음 그대를 본 순간... 슬픈 내 사랑을 난 알았죠... 이뤄질 수도, 이뤄져서도 안될... 혼자 만의 슬픈 마음을... & 그후로 며칠동안 나는 아빠 몰래 집을 빠져 나와 레코드 점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사장님은 내가 올 시간이면 미리 가게 앞에 난로와 작은 의자를 준비해 두시곤 했다. 신의 선물의 엔딩곡에 가사를 붙여 노래를 부른 것이 PC 통신 커뮤니티를 타고 화제가 되었는지, 날이 갈수록 레코드 점 앞에는 점점 사람들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따듯한 파카를 차려 입고 집을 나서려는데, 전화 벨이 울렸다. 기타 케이스를 둘러맨 채 전화기를 집어들자, 수화기 너머로 나카무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칸나.. 하나만 물어볼게. 혹시 네가 본 신의 선물의 진 엔딩이라는게 등장 인물 5인의 협연후에 나오는 엔딩이 맞아?” “응.. 맞아. 나카무라군도 본거야?” “어... 방금..” “어땠어...?” “이게 뭐야... 결국 히로인도 범인도 애초에 아무도 없는 거 였잖아. 다중 인격 장애로 인한 천재 뮤지션의 자살 기도라니.. 이게 무슨...” < EP. 38 : 샤이닝 스타. (2) > 끝 < EP. 38 : 샤이닝 스타. (3) > & 천재(天才) 하늘이 내린 재능. 또는 범인(凡人)들이 따라올 수 없는 천부적인 능력가진 자를 지칭 할 때 쓰는 말. 신의 선물의 주인공은 어릴 적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그 천재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도 자신이 타인과 다른 특별한 사람인줄로만 알았다. 아니, 확실히 그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는 음악을 통해 악기와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으니까.’ 그런 능력은 어쩌면 전지전능한 ‘신’ 만이 내릴 수 있는 특별한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신의 선물’은 되려 저주에 가까운 축복이었으니... 세상의 모든 악기를 거진 다룰 수 있는 주인공에게는 특별히 그가 아끼는 4개의 악기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은 어릴 적부터 자신과 함께 해온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그랬다. 사실 주인공은 피아니스트보다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어했다. 본래 활기찼던 주인공의 성격은 부모님의 강압에 의해 피아노를 연주하며 점점 내향적으로 변해갔다. 그로 인해 파생 된 캐릭터가 바로 ‘유키노조 카오리’와 ‘이가와 레이’라는 캐릭터 였다. 밝고 활기찬 성격의 ‘카오리’는 주인공이 바이올린 켰을 때와 같았고, 조용하고 내성적인 ‘레이’의 성격은 피아노를 치는 그를 닮았다. 마찬가지로 음대에 들어가 취미 삼아 배운 챌로는 ‘하루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냈고,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서 정상에 오른 순간... 그는 냉소적이고 엄격한 성격의 ‘사츠키’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내었다. 그녀들은 주인공의 삶. 바로 그 자체 였으며 언제나 그의 곁에서 함께 있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신은 그에게 모든 능력을 내려주고, 28살의 젊은 나이에 모든 걸 앗아갔다.’ 장기 기억상실증이라 불리우는 알츠하이머(Alzheimer disease)로 인해 주변 사람들은 물론. 어릴 적부터 그와 함께 했던 네 명의 여인들 마저 그의 기억에선 이미 희미해져 가고 있었으니까. 신의 선물의 진짜 엔딩은 스탭롤이 지나간후 주인공의 어린 시절부터 게임속 주요 이벤트가 실제로는 어떤 장면이었는지, 또 다른 일러스트로 보여주었다. 챕터 2에서 분기에 따라 달라졌던 히로인과의 협연이 실은 각 히로인을 대표하는 악기를 들고 있는 그의 독주(獨奏)였다는데에서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모든 것이 기억을 잃어가는 주인공의 환상이었구나...’ 챕터마다 준비된 연주 파트에서 보여지는 히로인 과의 회상 씬은 실은 아직까지 못다한 자신의 악기들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로 그려졌다. 사교성이 없던 탓에 인간 관계가 원채 좁았던 주인공에게 4명의 히로인은 평생을 함께 해온 친구이자, 동반자와 같았다. 그중에서도 어린시절의 주인공에게 가장 처음 말을 걸어온 바이올린 유키노조 카오리는 마지막 엔딩 부분에서 꽃다발을 들고 그에게 다가와 입을 맞추며 수줍게 웃어 보였다. “수고 했어...” 자신을 둘러싼 히로인들의 미소와 함께 주인공의 입가가 클로즈 업 되어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상상했던 것 만큼이나 담담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지금까지. 고마웠어...” 삐-------- & 마지막에 울린 비트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순간. 내 눈가에 걸려 있던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마치 한편의 소설에 마지막 장을 덮은 것처럼 이번에도 역시 긴 여운이 가슴에 남아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하아...”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한 숨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가득 울렸다. 나카무라군의 이야기를 듣고 마지막 챕터의 세이브 파일을 불러와 한번 더 클리어 해 보았지만, 정말 다시 봐도 매우 인상 깊은 엔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까악... 깍...” 창 밖에서 들려오는 까마귀 울음 소리에 창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주홍빛 저녁 노을이 구름과 함께 그림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아, 레코드점. 사장님 기다리시겠다.” 정신이 번쩍든 나는 서둘러 눈물을 닦아내곤 기타 케이스를 움켜 쥐었다. & 딸랑~ 레코드 점 문틀에 걸린 챠임벨의 맑은 소리와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사장님과 함께 낯익은 얼굴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칸나야 마침 잘 왔구나. 여기 이 분은...” “아뇨. 제 소개는 필요 없습니다. 벌써 세 번째 보는 걸요.” 여유 있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30대 초반의 남성은 나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죠?” “강준혁... 이사님?”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중얼 거리자, 레코드점 사장님이 나에게 다가 와 물었다. “펜타곤 소프트라는 회사에서 나왔다는구나. 요 며칠 네가 부르던 노래를 직접 들어보고 싶다고...” “아...” “칸나씨에 대한 이야기...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상당히 화제가 되고 있던데, 모르셨나요?” “네? 제 노래가요?” 그가 말하는 온라인 커뮤니티란 아마도 나카무라군이 이야기 하던 PC 통신 커뮤니티 일 것이다. 일전에 나카무라군에게서 얼핏 들은 기억이 있지만, 설마 서로 얼굴도 알지 못하는 그런 곳에서 나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확산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잠깐 들어봐도 괜찮을까요?” “아... 그게...”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 지극히 개인적으로 칸나씨의 노래를 다시 듣고 싶어서 찾아온 것이니까요.” 나는 잠시 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사장님이 마련 해준 작은 공연장 주위로 역앞을 거닐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들었다. 언제부터일까? 처음엔 4~5명정도 내 음악을 들어주던 사람들이 지금은 어디서 이야기를 듣고 왔는지 4~50명이 모여들고 있었다. 설마 이것이 나카무라군이 말했던 PC 통신의 힘이란 걸까? 기타줄을 튕기며 몇 번 목소리를 가다듬은 나는 품안에서 성냥을 꺼내 양초에 불을 붙었다. 시간은 어느새 2월 초... 아직도 거리에 찬바람이 불어오긴 하지만, 적어도 1월 만큼 매섭게 느껴지진 않았다. 작은 촛불이 유리병 안에서 일렁이며 조용히 타들어 가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목소리도 차츰 잦아 들었다. 강준혁 이사는 레코드점 사장님과 함께 가게 옆에서 대화를 나누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 만으로도 평소와는 다르게 어색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내 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곡의 분위기와 음악을 느끼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니까. 스쳐 지나는 매일매일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지만, 서로의 마음 만은 언제나 곁에 있다고 생각해 함께 하지 못 해도 괜찮다면서 강한 척 이야기 해 봐도 한숨만 섞이는걸 지나가는 계절 속에 놓아두고 온 보석 그것은 소중한 조각을 잃어 버린 미완성 된 퍼즐... 하얀 눈이 거리를 새하얗게 물들이는 것 처럼 추억으로 이 앨범을 가득 채울수 있도록~ 두 눈을 감은채 사람들에게 나의 노래를 들려 주겠다는 마음으로 입술을 때자, 거짓말처럼 긴장감에 움츠러 들었던 마음이 스르륵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 역시 전에도 들었지만, 훌륭한데요?” 강준혁 이사의 칭찬에 얼굴이 화끈 거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굳이 그를 바라보진 않았다. 그저 두 눈을 감은채 간주를 마친 나는 2절을 부르고 나서야 작게 숨을 내쉬며 기타 줄에서 손을 내려 놓았다. 그러자 주변에 모여있던 사람들에게서 환호의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우와아아~!!! 진짜 좋다.” “캬~ 목소리가 끝내주네...” “그런데 ‘그건’ 언제 나오지?” “기다려 봐. ‘그 노래’는 거의 마지막 즈음에 나오니까.” “정말 진짜로 신의 선물의 엔딩곡에 가사를 붙인거야?” “전에 한번 우연히 들어 봤는데, 듣는 순간 심장이 싸늘해 지더라니깐, 너도 한번 들어보면 깜짝 놀랄 걸?” “내가 비록 실력이 없어 올 S 랭크는 못땄지만, 커뮤니티에 나온 진 엔딩 결말... 진짜 끝내 주더라..” “아, 그건 진짜 ‘내가 없는 거리’ 이 후로 역사에 길이 남을 세컨드 임팩트였어...” “내가 없는 거리도 그렇고, 세상에 그 강준혁이란 디렉터는 주인공을 몇 번이나 죽이는 거냐? 진짜 살아 있는 악마가 따로 없다니깐?” 어디선가 들려온 청중의 대화에 나도 모르게 풋하고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억지로 꾹 참아내었다. 저들의 대화를 직접 들은 본인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잠시 헛기침으로 목을 풀은 뒤 두 번째 노래를 시작했다. 몇 번 기타줄을 튕기자, 근처에 있던 사람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어? 이건...?” “신의 노래 엔딩곡이다.” “벌써!?” “아, 잘 됐다. 나 이거 듣고 싶어서 일부러 찾아왔는데, 시간 딱 맞췄네.” 사람들의 반응에 살짝 고개를 돌려 강준혁 이사님을 바라보자, 그는 팔짝을 낀채로 나를 향해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워 보였다. 처음 그대를 본 순간... 슬픈 내 사랑을 난 알았죠... 이뤄질 수도, 이뤄져서도 안될... 혼자 만의 슬픈 마음을... 그대 만나러 가는 길... 아픈 내 사랑을 난 알았죠... 내 몸 깊숙이 전해지는 떨림은... 설레임보다 두려움이 커져요. & 총 5곡의 짧았던 거리 공연이 끝나고, 가게 안에 들어서자, 사장님께서 따듯한 코코아를 가져다 주셨다. “이것 좀 마시면서 몸 좀 녹이거라.” “고맙습니다. 사장님.” “으음~ 오히려 내가 더 고맙지. 칸나 네 덕분에 요새 가게에 손님이 많이 늘었거든~” “아, 정말요?” 사장님은 깊게 주름을 패이며 나를 향해 껄껄 웃어보이셨다. 그의 등 뒤로 강준혁 이사님 역시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노래.. 잘 들었습니다.” “어땠.. 어요...?” “잔잔한 곡에 어울리는 훌륭한 가사였습니다. 아마 유키도 들었다면 엄청 좋아했을 것 같은데요?” “아, 그러고 보니 유키 언니. 작년 12월 24일에 출산 하셨다고...?” 그러자 강준혁 이사님은 고개를 갸웃 거리며 나에게 되물었다. “어라? 그걸 어떻게?” “사실... 신의 선물의 발매일 날 저도 그걸 사러 갔었거든요. 그런데, 이사님께서 그 날 와이프의 출산으로 급히 병원에 가셨다고 들어서...” “아~ 그날 칸나씨도 오셨었군요. 미안해요. 그때 만나서 이야기했더라면 이야기가 좀 더 수월했을 텐데...” 강준혁 이사님은 괜스레 뒷머리를 긁적이며 빙긋 웃어보였다. “일전에 남겨주신 연락처로 전화를 드릴까도 싶었지만, 왠지 용기가 나지 않아서...” 부끄러운 마음에 사장님께서 가져다 주신 코코아를 삼키며 고개를 바닥에 떨구자, 강준혁 이사님은 괘념찮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혹시, 지금 시간 괜찮아요?” “네? 아, 네.. 오늘은 가게가 쉬는 날이라.” “그럼 잠깐 어디 카페라도 가서 저랑 얘기좀 할래요? 사실 칸나씨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이요?” “네. 가능하면 방금 들었던 신의 선물의 엔딩 테마곡을 라온의 다운로드 공유기로 배포 하고 싶은데, 어떠신가요?” < EP. 39 : 아이돌 프로젝트. (1) > ‘내가 없는 거리’가 도쿄의 거리와 일상의 연애 감각을 모티브로 하여 플레이어들의 이목을 끌었다면, ‘신의 선물’ 같은 경우엔 게임 속의 장치 중에 하나였던 클래식 음악을 통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래서일까? 1995년 2월 중순에 예정 되어 있는 쇼팽 피아노 콩쿠르 같은 경우엔 근례에 찾아 볼 수 없었던 전 좌석 매진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번 신의 선물 덕분에 게임도 게임이지만, 라온 본체의 판매량이 매우 늘어났다. 지난 ‘내가 없는 거리’ 명성을 등에 업고, 또하나의 그래픽 노블의 탄생에 라이트 유저가 엄청 유입된 느낌이 들었다. ‘신의 선물은 게임이라기 보다는 한편의 판타지 문학에 가깝다.’ 이번 달에 새롭게 창간한 ‘전격 라온’이라는 잡지에서 한 리뷰어가 신의 선물에 내린 최종 게임평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의 평가에 동의했다. 유키와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하며 내가 받았던 느낌은 게임을 만들기 보단 한편의 소설을 써내려나는 듯한 느낌이 강했으니까... 마지막 최종 시나리오를 검토하던 유키는 처음 스토리 의도와는 완전히 달라진 결말에 고개를 갸웃 거리며 나에게 물었었다. “마지막 엔딩은 왜 이렇게 바꾼 거예요?” “글쎄. 처음 신의 선물을 기획 했을 때 느꼈던 감정은 한편의 동화 같은 이야기를 기획 했었거든. 그런데 네가 말한 시나리오를 넣다보니, 뭔가 이야기가 점점 스릴러 장르화 되어가는 느낌이 들어서...” “흐음...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제가 괜한 이야기를 했던 걸까요?” “아냐, 오히려 이런 페이크(fake) 시나리오가 마지막 엔딩에서 더 큰 반전으로 느껴지는 장치가 될테니까.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돼.” 당시까지만 해도 설현이를 뱃속에 품고 있던 유키는 내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들으니, 방금 말한 엔딩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하지만, 확실히 유저들에게 호불호는 갈릴 거야. 이 것을 단순히 미소녀 연애 게임이라 생각하고 구매한 유저는 엔딩이후 허탈감은 느끼게 될테고, 온전히 스토리에만 집중한 유저에겐 더 할 나위 없는 감동으로 다가 오겠지.” 유키는 내 말이 이해가 잘 가지 않는지, 살짝 고개를 갸웃 거리며 두 눈을 깜빡였다. 나는 그런 유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긋 웃어보였다. “나중에 게임이 발매 되고 나면 내가 한 말에 대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 그리고 현재... 출시 전 내가 했던 말은 대부분 그대로 들어 맞았다. 체험판의 배포로 인해 신규 유저의 유입이 상당수 늘어 났고, 게임에 대한 평도 각종 커뮤니티와 잡지사에서도 극명히 갈리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이 있다면 내 예상을 훨씬 웃도는 라이트 유저의 대거 유입이었다. 이 들 같은 경우엔 ‘신의 선물’에 대한 시나리오를 순수히 받아 들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인공의 연주 파트는 스토리를 즐기는 도중에 행하는 일종의 미니 게임처럼 받아 들였는데, 오히려 기존 하드 유저보다 스토리 진행 속도가 더 빠른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라이트 유저 중에는 칸나 활약도 섞여 있었다. [정보] 오늘 하라주쿠에서 진귀한 노래를 들었습니다. 도쿄 하라주쿠에 살고 있는 라온 유저입니다. 지난 달에 구입한 펜타곤 소프트의 ‘신의 선물’을 즐겁게 플레이 중인데, 오늘 퇴근 중에 참 재밌는 풍경을 보았습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10대 후반의 여자 아이가 역 근처 레코드점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요.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몇 곡 듣다보니, 뭔가 익숙한 노래가 들려오는게 아니겠습니까?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듯 한 멜로디에 나도모르게 따라서 흥얼거리다가, 그게 무슨 곡이었는지 깨달은 순간. 무슨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후려 맞은 느낌이 들더군요. 그 곡은 다름 아닌 ‘신의 선물’의 엔딩 스탭롤에 나오는 BGM이었습니다. 본래는 가사가 없는 곡인데, 그 아이가 직접 가사를 붙였는지 굉장히 느낌이 좋더군요. 솔직히 감동 받아서 녹음 테잎라도 하나 사고 싶었는데, 따로 음반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더군요. 아무튼 그것 과는 별개로 최근 ‘신의 선물’을 즐겁게 플레이한 유저로서 굉장히 반가운 곡이었습니다. --- [소감] 밑에 분 이야기 듣고 오늘 하라주쿠에 다녀왔습니다. 오오오!!! 방금 저도 듣고 왔습니다. 헌데 노래 실력도 실력이지만, 미모가!!! 미모가 출중합니다. 굉장히 청순한 이미지더군요. 연주 시작 전에 작은 유리병 속에 촛불을 켜는데,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바라만 보았습니다. 언제까지 그녀의 연주가 계속 될지 모르지만, 진심으로 응원하며 내일도 하라주쿠에 가볼 생각입니다~!! --- 우치무라의 이야기를 듣고 PC 통신 커뮤니티에 접속해 관련 글을 살펴 본 나는 하라주쿠의 그녀가 칸나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연락이 없어서 다시 한 번 찾아가볼까 했었는데 오히려 잘됐다.’ 나는 커뮤니티의 글을 몇 번 더 살피며 그녀가 공연하는 날을 대략 살핀 뒤, 그녀를 찾기로 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처음 그대를 본 순간... 슬픈 내 사랑을 난 알았죠... 이뤄질 수도, 이뤄져서도 안 될... 혼자 만의 슬픈 마음을... 그녀의 따스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레코드 점 앞에 보여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슬그머니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나 역시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나서 그녀에 대한 한가지 확신이 생겼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분명히 사람을 끌어 당기는 힘이 있다.’ 레코드 점 사장님은 마치 손녀 딸을 바라보는 듯한 흐뭇한 미소로 칸나의 공연을 지켜보다가 나에게 말했다. “어떻습니까?” “곡의 해석도 좋고, 가사의 전달력도 좋네요. 아마 엔딩곡을 쓴 작곡가도 직접 칸나의 노래를 듣는다면 깜짝 놀랄 것 같은데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저 아이는 한번 들은 곡은 곧바로 기타로 쳐낼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어요. 처음 엄마 손을 잡고 기타를 사러 왔을 때, 간단히 기본 코드 잡는 법만 알려주었는데 그 후론 독학으로 여기까지 올라왔죠.” 한 번 들은 곡을 악보 없이 그대로 연주 할 수 있다고? 처... 천재다!! 회귀 인생에는 인복(人福)도 따라오는 건가? 유키 덕에 우연히 만나게 된 우치무라가 피규어의 장인이었다면 칸나 역시 펜타곤을 함께 이끌어 갈 다른 타입의 천재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칸나 역시 유키가 먼저 만났으니, 난 어쩌면 유키의 인복에 그냥 묻어가는 건가...? 나는 칸나의 노래가 끝날 때까지 사장님과 함께 가만히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이 정도 노래 실력이라면, 아이돌 전문 ‘Hello 프로젝트’ 프로듀서도 인정해 줄 만 하겠는데?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의 다섯 번째의 노래가 끝나갈 무렵. 내 곁에 있던 레코드 점 사장님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슬슬 끝나가는군요. 저는 안에서 따듯한 코코아라도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리고 사장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칸나는 자신의 노래를 들어준 사람들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유리병 뚜껑을 덮어 안에 있던 촛불을 꺼뜨렸다. 그것은 마치 라이브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그녀만의 의식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를 뒤로 하며 레코드 안으로 들어서자, 커피 포트에 물을 담고 있던 사장님이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칸나에겐 무슨 볼일이십니까? 비록 아비 되는 사람은 아니지만, 워낙 어릴 적부터 봐오던 아이라 그런지 궁금하군요.” 사장님의 물음에 나는 쇼윈도 밖에서 기타를 정리중인 칸나를 바라보며 답했다. “가능하면 그녀를 가수로 데뷔 시키고 싶습니다.” “네? 하지만, 당신은 펜타곤이라는 게임 소프트 회사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뭔가 음반 업계나 방송 쪽 관계자와 줄이라도 닿아 있는 겁니까?” 흐음... 줄이라. 필요하면 연줄이야 얼마든지 가져다 댈 수 있긴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프로젝트는 일반적인 데뷔와 조금 달랐다. 그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 하던 찰나. 가게 사장님의 표정이 어두워 지며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설령 데뷔한다고 해도 칸나 아버지가 반대할 겁니다.” “네? 왜요? 자기 딸이 잘 되면 좋지 않나요?” “그게... 사실 칸나의 어머니와 연관이 좀 있어요.” “칸나씨의 어머니요?” 커피 포트의 물이 끓어 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사장님은 잠시 옛 기억 떠올랐는지, 쓰게 웃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칸나의 어머니는 굉장히 유명한 엔카 가수였습니다.” 엔카라면? 아~ 한국으로 치면 트로트 풍에 속하던 장르 아냐?? 90년대 중반의 일본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음악계에 큰 변화를 맞이 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따져보면 한국 보다 조금 더 빠르달까? 거의 80년대 중반 즈음에 등장한 남성 아이돌 전문 기획사인 쟈니스의 출연과 함께 최근엔 X-JAPAN같은 메탈 그룹의 음악이 한창 성행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중에 엔카는 젊은 층보단 중장년층에 절대 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고, 가요계의 대 선배층에 군림하고 있었다. 그런데 칸나의 어머니가 유명한 엔카 가수였다니...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이런 걸 두고 나온 말인가? “혹시 칸나씨의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나의 질문에 사장님은 여전히 쓴 웃음을 지으며 끓은 물을 컵에 옮겨 담았다. “칸나의 어머니는 칸나가 10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네...?” “원래부터 몸이 건강한 편은 아니었는데, 행사를 다니며 몸을 혹사한 탓이 크죠. 더구나 칸나 아버지와 결혼하면서 집안에서도 언론에서도 반대가 심했죠. 유명한 엔카 가수가 라멘집 아들과 결혼이라니... 아마 그녀에게도 많은 스트레스로 다가왔던 모양입니다.” 가게 안에 퍼지는 은은한 코코아의 향기가 내 코 끝을 간지럽혔지만, 사장님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특히나 연예계 쪽에서 칸나 아버지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퍼뜨려 그 역시도 상처를 많이 받았죠..” “아...” “그런 그가 칸나가 가수로 데뷔 한다고 하면 순순히 승낙을 해줄지 의문입니다.” 칸나에 대해 걱정해주는 레코드점 사장님의 마음에는 진심이 묻어나 있었다. 사장님께서 어떤 점에 대해 고민하는지 충분히 알게 된 나는 그의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장님께서 걱정하시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 할 수 있습니까? 무슨 방법이라도 생각해 두고 계신게 있는 건가요?” “칸나씨가 저의 제안에 응해 가수로 데뷔한다 하여도 아마 TV에서 볼일은 없을 겁니다.” “네...?” 그때 가게 앞에서 정리를 마친 칸나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문고리에 걸어둔 차임벨이 울리자, 사장님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며 그녀에게 따듯한 코코아를 건네 주었다. “이것 좀 마시면서 몸 좀 녹이거라.” “고맙습니다. 사장님.” 칸나는 사장님 뒤에 가져진 내 눈치를 보며 따듯한 코코아를 한모금 삼켰다. “노래 잘 들었어요.” “어땠... 나요?” 잔뜩 긴장한 칸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나는 웃으며 그녀의 노래를 칭찬해 주었다. 그녀와 짧게 대화하던 도중 한가지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은 유키가 출산 했던 그 날. 칸나 역시 신의 선물을 구입하기 위해 프리미엄 샵에 들렀었다는 것이었다. 나를 찾았었다고? 이거 어쩌면 이야기가 쉽게 풀릴 수도 있겠는데? 나는 그녀에게 신의 선물의 엔딩 테마곡을 펜타곤에 넘겨줄 것을 제안했고, 그녀는 놀란 토끼 눈으로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어차피 완성된 곡에 가사만 붙인 것 뿐인 걸요.” & 하라주쿠의 레코드 점에서 칸나를 만나고 며칠 뒤. 회사에 출근한 나는 그 동안 지역별 오디션으로 선별된 아이돌 지망생들의 프로필을 챙겨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어라? 이사님 어디가세요?” 신의 선물 프로젝트를 끝내고 한숨 돌리는 중이던 모리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반갑게 인사를 걸어왔다. “잠시 만나 볼 사람이 있어서, 너도 같이 갈래?” “네? 저도 가도 됩니까? 대체 누구를 만나시길래...?” “그룹 하란Q의 보컬인 테라다씨.” “네에!? 하란Q의 테라다씨라구요!?” < EP. 39 : 아이돌 프로젝트. (1) > 끝 < EP. 39 : 아이돌 프로젝트. (2) > “네에!? 하란Q의 테라다씨라구요!?” 테라다 마츠오는 현재 일본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그룹 사운드 하란Q의 보컬겸 프로듀서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뮤지션이다. 모리타가 저렇게 깜짝 놀란 이유는 하란Q가 작년에 발표한 ‘싱글베드’ 라는 곡을 듣고 테라다의 열렬한 팬이 되었기 때문이다. 모리타가 좋아하는 ‘싱글 베드’라는 곡은 한 유명 가수가 무명 시절에 헤어진 여인에 대한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사에 담아 부른 곡으로 초반에는 별로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차츰 입소문을 타고 꽤나 오랬동안 오리콘 차트 순위에 머무른 하란Q의 대표곡 중 하나이다. 그런데말야. 생각해보니 모리타. 넌 모태 솔로 잖아? 애초에 헤어진 여인이 없는데, 어떻게 공감하는 거지...? “천천히 준비하고 와.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네. 알겠습니다~!!” 모리타는 나의 제안에 한껏 들 뜬 목소리로 개발실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음 짓던 나는 잠시 후 휴게실에 설치된 티비에 눈을 돌렸다. 끼이익... 직원들의 흡연 공간인 동시에 음료수 자판기가 설치 되어 있는 이곳에는 각종 콘솔기기들과 더불어 대형TV도 함께 설치 되어 있었다. 아직 오전 시간이라 휴게실을 이용하고 있는 직원이 없었기에 나는 리모콘을 들고 TV를 틀어 보았다. ‘이상해...’ 최근에 나는 일본에서 일어날 한 가지 사건에 대해 주목하고 있었다. 그 사건은 바로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던 ‘고베 대지진’ 사건. 본래라면 1995년 1월. 그러니까 지난 달쯤에 일어났어야 할 대지진이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재앙이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안그래도 경기 침체기인 현재 고베 대지진까지 겹쳐 버린다면 펜타곤에서 판매할 차기 콘솔의 판매량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까. 현재 컴플리트 라온의 발매 시기를 조율하고 있는 것도 사실 이 때문이다. 한신 또는 고베 대지진이라 불린 이 사건은 진도 7.2의 지진으로 단 14초만에 일본 고베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초 거대 강진이었다. 지난 10년동안 일본에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지진에는 이미 익숙해졌지만, 1995년에 벌어질 이 지진 만큼은 솔직히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6,000명 이상의 사망자. 43,000명의 부상자. 약 1,400억 달러의 재산 피해를 낸 희대의 참극. 가능하다면 지진 사실을 사전에 피해를 줄이고 싶었지만, 솔직히 이것 만큼은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개인의 힘으로 어떻게 해볼 수준이 아니었다. 매스컴에 알려봤자, 지질학 출신도 아닌 내가 대체 무슨 수로 그들을 설득 시킬 것인가? 더구나 강진이 일어난 이와지 지역은 본래 거대한 갯벌 위에 토목공사로 지반을 다져 세운 지역이기에 지반 자체가 지진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내가 알고 지내는 이들에게 당분간 오사카의 고베 지역은 될 수 있으면 가지 않기를 권하는 것 뿐이었다. ‘정확한 날짜까지는 알 수 없지만 대충 1월 중순 경으로 알고 있었는데, 왜 아직까지 조용할까?’ 오히려 내가 알고 있는 과거가 뒤틀어진 느낌에 기묘한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설마, 고베가 아니고 다른 지역에서 지진이 터진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뉴스 채널을 돌리며 사건 사고 소식을 접하던 나는 휴게실 문을 두드리는 모리타의 모습에 TV 전원을 내렸다. “가시죠. 이사님.” “그래.” 모리타는 내가 들고 있던 서류 가방을 대신 들어주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앞장서서 걸었다. “이사님께서 테라다씨를 만난 다는 것은 전에 말씀하신 아이돌 프로젝트와 관련이 있는 겁니까?” “우에노씨에게 물어보니 대중가요 쪽은 자기 전문이 아니라고 테라다씨를 추천하더라고...” “아~ 역시 우에노씨. 보는 눈이 있네요. 하란Q 저도 정말 좋아하는 그룹입니다.” “나도 알아. 너 가끔 혼자서 하란Q 노래 흥얼 거리잖아. 싱글베드라는 곡이던가...?” “네. 맞아요~!!” 모리타는 테라다씨를 볼 생각에 설레이는지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그렇게 모리타와 하란Q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회사를 빠져 나와 주차장으로 향하던 중. 순간 바닥이 꿈틀거리는 느낌에 걸음을 멈추었다. “어...?” 모리타 역시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걸음을 멈추며 주변을 둘러 보았다. 살짝 좌우로 흔들리고 있는 주차된 차들을 바라보며 나와 모리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방금 지진이지?” “네. 그런 것 같은데요?” 주변에 걸어다니던 사람들 조차 멍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는 걸로 보아, 다들 똑같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좀 쎈 것 같은데, 다행이 오래가진 않았네요.” “그러게...” 방금 전까지 지진에 대한 생각을 해서 그런지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지진이 일상 생활이나 마찬가지인 모리타는 이내 별일 아니라는 듯 걸음을 옮겼다. “어이, 그래도 이정도 지진이면 적어도 진도 4는 될거야. 그렇게 섣불리 움직이면...!!” 그때였다. 쿠우웅..!!! “어억!! 뭐야!?” 모리타는 짧은 비명과 함께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 역시 갑작스런 지진에 자세를 낮추며 재빨리 주변을 살피니 주차장에 서있던 차량들이 들썩이며 요란한 경보음을 울리기 시작했다. 삐, 삐, 삐, 삐, 삐...!!!! 끼긱!! 끼기긱!! 차도에 있는 도로 표지판까지 흔들리는 걸 보아 규모가 어마어마한 거 같은데? “어이, 모리타 괜찮아?” “아, 네. 전 괜찮습니다. 이사님은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인도에 있던 사람들 중에는 모리타처럼 중심을 잃고 넘어진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래도 간판이 떨어지는 사고는 없었기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우우웅~ 우우우웅~ 허리춤에 느껴지는 진동음에 핸드폰을 열어 전화를 받으니 유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씨. 괜찮아요? 방금 꽤나 큰 지진이 있었는데!?” “어, 괜찮아. 설현이는??” “침대가 흔들려서 놀란 거 빼곤 괜찮아요.” “그래? 휴우... 다행이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넘어진 모리타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수화기 너머로 유키의 불안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를 안심 시키며 차에 올랐다. “응. 그래. 알았어. 가능하면 오늘은 일찍 들어갈게.” 유키와 통화를 마치고 안전 밸트를 둘러 매고 있는데, 조수석에 올라탄 모리타가 자신의 핸드폰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왜 그래?” “가족이란 좋네요. 지진이 나자마자 안부 전화부터 오고... 저는 이 비싼 핸드폰을 대체 왜 샀는지 모르겠네요. 전화 오는 곳이라고 해봤자 우치무라군이랑 하야시 녀석 밖에 없는데...” “······.” 너 이 자식 파이팅... & 다행히 우리가 겪은 지진 이후에 더 이상의 여진은 없었다. 안 그래도 지진에 대해 생각하다가 갑자기 겪은 일이라 그런지 가슴이 두근 거릴 정도로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속보입니다. 금일 오전 11시 13분 경. 도쿄 해협에서 진도 4.8의 강진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번 지진으로 높이 3미터의 높은 파도가 일어나 인근 해협을 덮쳤고, 이로인해 어업 작업 중이던 42살 마츠타카씨를 비롯한 3명이 실종되어 현재 구급대원들이 수색에 나섰습니다.” “새.. 생각보다 지진 규모가 컸네요. 거의 5에 근접하다니...” 모리타 역시 많이 놀랐는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입을 열었다. “그러게 같은 4.8이었어도 이번 지진은 느낌이 확 다르더라.” “제가 보기에 바닥이 꿀렁 거리는 것을 느꼈을 정도니, 아마도 상하 떨림이 아닌가 싶던데요.” 모리타의 말대로 지진에는 두가지 타입이 존재 하는데, 좌우로 흔들리는 것과 상하로 흔들리는 것은 같은 강도라도 세로가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넓고 얇은 푸딩을 좌우로 살짝 흔들어 보는 것과 상하로 흔드는 것을 떠올려 본다면 단번에 이해가 될 것이다. “그래도 더 이상의 여진은 없어서 다행이네요.” “과연 그럴까?” “네? 그게 무슨...?” “아니, 아무 것도 아냐. 그냥 혼잣 말이었어.” 모리타는 내 말에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도쿄 외곽에서도 상당히 복잡한 동네에 위치한 터라 하란Q의 사무실을 찾기도 만만치가 않았다. ‘핸드폰은 어떻게 시간이 흘러 해결됐는데, 네비게이션 나올 때까진 또 언제 기다리냐...’ 차를 운전하다보니 어느새 긴장이 풀린 나는 근처의 공영 주차장에 차를 대고, 사무실을 찾았다. 그룹 사운드 하란Q의 사무실은 건물 외관 과는 달리 그래도 내부는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하지만 대형 기획사가 아닌 그룹 사운드 전용 사무실이었기에 약간 비좁은 감이 없잖아 있었다. “어서오세요. 펜타곤 직원 여러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갑작스런 지진이 있었는데, 몸은 괜찮으신가요??” 모리타와 함께 사무실에 들어서자, 조그만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 약간 촌티나는 얼굴의 테라다씨가 우리를 반겼다. 그런데 이 사람 벌건 대낮에 실내에서 선글라스는 왜 쓰고 있지? 안 어둡나? “안녕하세요. 우에노씨의 도움으로 찾아 뵙게 된 강준혁 이라고 합니다.” 인사와 함께 버릇처럼 테라다씨와 함께 명함을 주고 받은 뒤. 그는 나와 모리타를 사무실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응접 테이블 소파로 안내했다. “이야~ 우에노씨에게 이야기를 들었지만, 설마 강준혁 이사님이 직접 이곳을 찾아 주실 지는 몰랐네요. 지난 12월에 펜타곤에서 발매한 신의 선물. 저도 정말 재미있게 즐겼습니다. 다른 것보다. ‘클래식 장르’를 주제로 했다는 점이 굉장히 신선하더군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사실 이번에 테라다씨를 찾은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 인데요. 그것에 관해서도 우에노씨에게 이야기를 들으신게 있나요?” “네!! 그럼요. 우에노씨에게 ‘버추어 아이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뒤, 저 역시 굉장히 기대가 되더군요. 아마 게임계에서도 연예계에서도 역사에 남을 위대한 기획이라 생각합니다.” “······.” 이 사람 왜 이렇게 오버 액션이냐... 우에노씨에게 듣기론 항상 하이텐션을 유지하는 성격이라더니, 정말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 테라다씨는 이후에도 자기 PR과 함께 펜타곤과 신의 선물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아닌게 아니라, 여성 아이돌를 위한 프로듀서를 찾으신다면 정말 잘 찾아오신 겁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초대 아이돌인 키쿠치 모모코의 광팬이거든요.” 과연... 차후 여성 아이돌 전문 기획사 Hello 프로젝트의 대표가 될만한 덕심이로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자신이 원하는 아이돌 그룹이 없다면 만드는게 제격이지... 테라다씨는 나에게서 건네 받은 기획서와 오디션 통과자들의 프로필을 살피며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혹시 생각해두고 계신 곡이 있으신가요? 예를 들어 여성 아이돌 그룹이라면 첫사랑의 분위기를 강조한다던가... 조금 발랄한 느낌이 좋겠죠?” “... 그것보단 힘이 나는 응원곡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으, 응원곡이요?” “힘든 이에게 기운을 돋아주는.. 예를 들어 오늘 같은 지진으로 피해 입은 지역이 있다면 그곳에 달려가 사람들의 힘을 북 돋아 줄 만 한 그런 곡 없을까요?” “힘을 돋아줄만 한 응원곡이라. 조금 어렵군요. 뭔가 예시가 될만한 샘플곡이 있다면 좋겠는데...” 테라다씨의 대답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테이프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럴 줄 알고 아주 적절한 샘플곡 하나를 가져왔지. 테라다씨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음악 테이프을 바라보며 선글라스를 고쳐 올렸다. “이게 뭔가요?”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한국음악입니다.” “아~ 그렇군요. 제목이...?” “무한궤도의 그대에게. 라고 합니다.” “오~!! 감사합니다. 곧바로 들어보죠.” 테라다는 사무실 한켠에 있는 스테레오 박스에 테이프를 넣은 뒤 곧장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빠바바바바밤빰 빠바바바밤빠밤~ 빠바바바바밤빰 빠바바바밤빠밤~ 챙챙 빰빰빰 빠바바바밤빰 빠바바~~ 오~ 예에~!! 오오오워어~!! “허어.... 이건..” < EP. 39 : 아이돌 프로젝트. (2) > 끝 < EP. 39 : 아이돌 프로젝트. (3) > 오~ 예에~!! 오오오워어~!! “허어.... 이건..” 들을 때마다 피가 끓어오르는 전주 부분과 함께 ‘마왕’ 신해철님의 목소리가 좁은 사무실에 울려 퍼지자, 테라다씨를 비롯해 사무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저절로 스피커로 향했다. 숨 가쁘게 살아가는 순간 속에도 우린 서로 이렇게 아쉬워 하는 걸~ 아직 내게 남아있는 많은 날들을 그대와 둘이서 나누고 싶어요~ 내가 사랑한 그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해도~!! 그대를 포기할 수 없어요~!! “와... 이사님 대체 저 노래는 뭡니까? 그저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저릿저릿해지는 게 느껴질 정도인데요?” 내 옆에 앉아 있던 모리타가 감탄사를 내뱉으며 나에게 물었다. “88년도 한국에서 열린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에 입상한 곡이야.” “뭔가 엄청 좋은데요? 경쾌하면서도 애절한 느낌이 일본의 음악이랑은 전혀 다르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지?” 진심이 느껴지는 모리타의 평가에 나는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가사를 알아듣지는 못한다 하여도 상관없구나. 음악이라는 장르 자체가 이미 만국 공통어나 다름없으니까.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테라다씨 역시 스피커 앞에 그대로 얼어 붙은 채로 무한궤도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88년도에 이런 음악이 탄생했단 말입니까?” “현재는 N.EX.T 라는 그룹의 리더로 활동하고 있죠. 넥스트 역시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그룹입니다.” “한국어라 가사는 잘 모르겠지만, 전주부터 어마어마 한 몰입감이 전해지더군요.” 테라다씨는 그후로도 이어지는 노래를 몇 곡 더 들은 뒤, 나와 모리타가 앉아 있는 소파의 맞은 편에 앉았다. “이야... 솔직히 감탄했습니다. 역시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군요. 덕분에 정말 좋은 곡을 알게 되어 기쁘네요. LOVE & PEACE.” 뜬금없이 LOVE & PEACE 라니, 우에노씨 말대로 조금 특이한 사람이군. 더구나 표준어를 구사하고 있지만, 억양이나 말투 자체에 관서 지방의 사투리가 묻어나 있어 가끔 의사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은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어서 ‘버추어 아이돌’ 오디션의 본선에 오른 참가자들의 프로필을 넘겨 받은 순간. 그는 확실히 뮤지션보다 프로듀서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는 각 참가자들의 데모 비디오를 모두 챙겨 본 후에 가능성이 보이는 몇몇 소녀들의 번호를 따로 매겨 다시 한 번 테이프를 돌려 보았다. 그러던 중 우리 펜타곤 사원들에게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던 참가자 몇몇이 그의 심사 대상에서 제외 되었다. “방금 4번이랑 7번은 좋지 않았나요? 목소리도 나쁘지 않고, 고음처리도 어느 정도 가능하던데...” 그러자 테라다씨는 의외로 간단히 답은 내어 주었다. “미소가 없습니다.” “네?” “아이돌은 일반적인 가수와는 조금 다른 위치에 있는 존재입니다. 아이돌보다 노래를 잘하는 가수는 얼마든지 있지요. 하지만 인기 앨범 순위에 항상 노출이 되어 있는 것은 아이돌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왜죠...?” “대중들은 아이돌 그룹의 노래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니까요. ‘도저히 이건 못 들어 주겠다.’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면 엔간해선 그냥 넘어가 줍니다. 대신 그들이 진정으로 보고파하는 것은 따로 있죠.” “그게 뭡니까?” “외모입니다.” 뭐지? 이 광속으로 날아온 돌직구는? 그러자 내 옆에 있던 우치무라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테라다씨에게 물었다. “하지만 방금 떨어뜨린 7번이나, 아까 목소리가 별로라고 떨어뜨린 13번 같은 경우는 외모가 상당히 출중한 편이었는데요?”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떨어 뜨린 이들에게는 한가지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공통점이요? 저는 잘 모르겠던데, 이사님은 아시겠어요?” 은근슬쩍 나에게 질문을 떠넘기는 모리타의 말에 잠시 눈을 흘기던 나는 테라다씨를 향해 입을 열었다. “테라다씨가 제외한 참가자들은 카메라를 향해 웃지를 않더군요.” 그러자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테라다씨는 손가락을 튕기며 외쳤다. “바로 그겁니다~!! 역시 눈썰미가 있으시군요~!!” 아오... 시끄러. 귀청 떨어지겠네. 바로 자기 눈 앞에 있는데, 이 사람 왜 이렇게 리액션이 크냐... “아이돌이란 단어의 뜻은 ‘우상’입니다. 그리고 그 우상이란 동경(憧憬)의 의미이기도 하죠. TV에 나와 노래를 부르며 목소리로 감동을 주는 것은 가수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돌은 목소리와는 별개로 그것을 뛰어 넘는 무언가를 보여줘야 합니다. 아니, 반드시 전해줘야만 합니다. TV 바깥에서 자신을 지켜봐주는 사람들에게 두근 거림과 설레임을~!!!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미소가 중요합니다.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것이 아이돌의 첫번째 조건입니다.” 나는 마치 종교를 설파하듯 나와 모리타를 향해 침까지 튀겨가며 열변 한 그는 갑자기 목이 타는지 사무실 직원에게 냉수를 부탁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말씀 드린 취지에 가장 부합하는 이들은 여기 서류에 체크해둔 11명의 참가자들입니다.” 굉장히 자신만만 표정을 지으며 건네주는 테라다씨의 종이 쪽지를 엉겁결에 받아든 나는 잠시 눈을 돌려 그가 체크한 참가 번호들을 확인해보았다. ‘휴우... 다행이 9번인 칸나는 살아남았군. 아니 어찌보면 당연한건가?’ 칸나는 일종의 ‘와일드 카드’로 주최자인 내가 특별히 추천에 후보 대상에 영입된 상태였다. 절대로 얼굴을 내보이지 않고 목소리만을 내보인다는 조건으로 거리 공연 촬영에 대해 승낙을 받은 나는 마지막 최종 심사에 그녀에 관한 자료를 직원들에게 보여 주었고, 회의실에 모여있던 카와구치씨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의 만장일치로 칸나는 오디션 최종전에 오르게 되었다. 사실 오디션을 거치지 않더라도 이미 펜타곤 내부에서 ‘신의 선물’의 엔딩 곡에 가사를 붙여 노래 부르는 싱어송 라이터가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 있던 터라 그녀의 오디션 통과는 어쩌면 이미 따놓은 당상이었을 지도 몰랐다. 그때 함께 서류를 검토하던 모리타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사님 11명이면... 이중에서 몇명이나 캐릭터 화 하실 건가요?” 아무래도 예상보다 많은 인원에 모리타는 이제부턴 슬슬 자신의 작업량에 대해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처럼 그를 향해 따스하게 웃어주며 입을 열었다. “11명 전부.” “어억... 11명 전부 말입니까!?” 그러자 테라다씨는 나의 결정에 묵묵히 박수를 보내주었다. “매우 지당하신 선택입니다. 제가 선택한 이 11명은 정말 누구 하나 빠지지 않는 독특한 매력들의 소유자니까요.” 단지 몇 번 비디오를 돌려본 것만으로도 테라다씨의 얼굴엔 굉장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모리타는 테라다씨까지 나의 편을 들어주자, 말도 안된다는 표정으로 나와 테라다씨를 번갈아 보며 외쳤다. “아니, 11명이 한 팀으로 노래를 부르면 그게 합창단이지, 가수 입니까?” “괜찮습니다. 한 소절씩 번갈아 가며 파트를 나눠 주면 되거든요.” “허억... 노래한 곡이 보통 3~4분인데, 거기서 전주랑 간주를 빼면 한사람당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는 시간이 평균 10초 내외라는 뜻 아닙니까!? 그게 무슨 가수에요!?” “모리타씨 방금 전까지 무얼 들으신 겁니까. 대중들은 그들의 노래엔 관심 없다니까요. 3~4명으로 이루어진 평범한 그룹보다 열광할 캐릭터가 11명이나 있는 독특한 아이돌 그룹. 좋지 않습니까? 이를테면.. ‘네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전부 다 준비해 봤어..’ 같은 느낌으로 어때요?” “아니, 아이돌 그룹이 무슨 뷔페 식당도 아니고...” 모리타는 어떻게든 나를 설득해 위기를 벗어나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테라다씨의 반박에 가로 막혀 결국 11명의 일러스트를 고스란히 떠맡게 되었다. 비좁은 사무실 안에서 울려 퍼진 모리타의 절규가 어느새 해가 저무는 창 밖으로 아련하게 울려 퍼졌다. 잠시 후. 모리타를 옆자리에 태워 녀석의 집으로 바래다 주는 길. 아까부터 모리타는 창 밖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 거리고 있었다. 대체 뭔 소린가 싶어 라디오 볼륨을 줄여 보았더니, 녀석이 하는 말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히히히.. 우치무라군. 우리 죽어도 같이 죽자. 펜타곤 제 2개발 팀에 뼈를 묻는 거야...” 히이익... 결국엔 동귀어진을 선택한 거냐? 하긴 옛말에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했지... 나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지금쯤 피규어나 만들고 있을 우치무라를 생각하며 좌우로 고개를 내저었다. & 모리타를 집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오니, 유키가 설현이를 품에 안고 문을 열어 주었다. “어서 와요. 준혁씨. 설현아~ 아빠와쪄요~~” 유키가 병원에 있을때만 해도 무척이나 썰렁하게 느껴졌던 집안이 이제야 사람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를 향해 활짝 웃으며 팔을 뻗는 설현이의 조그만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어 주자,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설현이가 꺄르르 웃어보였다. “얼른 씻고 와요. 저녁 차려 뒀으니까.” “응.. 아까 오전에 났던 지진 때문에 많이 놀랐지?” “말도 마요. 진짜 설현이를 끌어 안고 지금이라도 문 밖으로 뛰쳐나가야하나, 엄청 고민했다니까요. 그나마 ‘하루’라도 없어서 다행이지. 하루까지 있었으면 양팔에 하나씩 끼우고 도망가야했을지도...” 우리집 고양이 ‘하루’는 설현이가 태어난 후로 줄 곧 장모님 댁에서 생활중이다. 의외로 놀아달라며 때를 부리는 강아지와는 달리 고양이가 아기를 해치는 경우는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모르는 일이기에 먼 장모님 댁으로 유배 아닌 유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설현이를 침대에 뉘이고 돌아온 유키는 내 슈트를 대신 받아들며 나에게 물었다. “칸나는 테라다씨가 조언 한다던 최종 오디션에 통과했나요?” “응. 물론이지.” “아~ 다행이다. 그럼 전에 준혁씨 말대로 ‘컴플리트 라온’이랑 같이 출시되는 ‘버추어 아이돌’이라는 게임에서 칸나를 모티브로 한 일러스트랑 목소리가 나오는 거에요?” “아마도 그렇겠지? 하지만 칸나 말고도 10명 정도가 더 합격 돼서 최종적으론 11명이 한 그룹이 될 것만 같아...” “여.. 열 한명이 나요...?” 유키 역시 상상을 초월하는 인원 수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잠시 쓰다듬어준 뒤 목욕탕으로 향했다. 유키가 미리 준비해둔 뜨거운 물에 몸 전체를 담그자, 온몸의 근육이 푹 퍼지는 느낌과 함께 나른한 감각이 내 몸을 휘감았다. 잠시 두 눈을 감고 ‘버추어 아이돌’ 프로젝트를 함께 꾸려나갈 펜타곤 팀원들을 머릿속에 그리던 중 오전에 일어 났던 ‘지진’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 나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확실히 인재(人災)가 아닌 자연 재해다 보니, 여러 환경적인 요소에 따라 발생 시간이 좀 틀어 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진활동도 분명 주기가 있으니 어쩌면 요 며칠 내로 고베 대지진이라는 대재앙이 일어 날지도 몰라...’ 그리고 그런 나의 예상은 다음 날 새벽 5시 28분. 정확하게 들어 맞았다. < EP. 39 : 아이돌 프로젝트. (3) > 끝 < EP. 40 : 사회적 활동. (1) > 한창 달콤한 잠에 취해 있던 새벽 5시 무렵.. 나는 마치 꿈속에서 들려오는 듯한 유키의 다급한 목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준혁씨~!! 준혁씨!!” “으음...?” “빨리 일어나봐요..!!” “뭐야? 왜 그래?” “방금 집 전체가 쿵하고 울렸는데, 아무 것도 못 느꼈어요?” 이렇게 푹신한 침대 위에서 진동을 느낀 네가 대단하다는 건 알겠는데...? 어느새 설현이를 품에 안은 채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키를 위해 나는 피곤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리모콘을 찾았다. 침대 옆 작은 탁자에 놓여진 TV 리모콘에 손을 옮기려던 그 순간.. 우우웅... 탁자 위에 리모콘이 파르르 떨리며 내 손에서 멀어졌다. “방금 또 그런 거 맞죠?” “침착해. 이런 지진 한 두 번 겪어본 거 아니잖아...” “그래도 오전에 있었던 지진이 거의 30년만에 발생한 직하형이었다고 하니까, 왠지 불안해서...”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는 유키를 안심시키기 위해 나는 TV 리모콘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틱하는 소리와 함께 TV 화면에 어스름하게 불이 들어온 순간. 나와 유키는 침대에 몸을 뉘인채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뭐...야? 저긴 어디지?” “아와지라면 고베시 근처인데?” 고베라는 말에 퍼뜩 정신이 든 나의 머릿 속에 한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고베 대지진!? 설마 이렇게 갑작스럽게? TV 화면 너머의 재난 현장은 이미 진도 7.2의 직하형 지진이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간 직후였다. 지진 당시 상황을 촬영한 방송국 내부의 CCTV가 심하게 흔들림과 동시에 사무실 내부에 있전 가재도구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까지 불과 수초에 지나지 않았다. 멍하니 TV를 바라보고 있는데, 유키의 떨리는 손이 내 손을 꼭 쥐는게 느껴졌다. “어떡해요. 저 사람들...” 곧이어 방송국이 아닌 사람들이 살고 있는 주택가를 비춰준 현장의 모습은 더욱 참혹했다. 모두가 잠든 새벽 시간. 주택가를 강타한 지진 덕분에 미쳐 피할 틈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집더미에 생매장 당해버렸기 때문이다. 거기다 업친대 덥친 격으로 집안에 설치된 가스 배관이 끊어지며 가스가 새어 나왔고, 주변에 쓰러진 전봇대에서 일어난 스파크로 주택 단지는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방송용 핼기가 날아오르며 재난 지역을 비춰주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스팩터클 한 재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그중에서도 나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기둥만 해도 어마어마한 두께로 설계된 고가 도로가 엿가락처럼 휘어져 쓰러져 있는 모습이었다. “세상에...” 방송국 핼기는 검게 피어오르는 화재 연기 속에서 더 이상 비행이 불가능했는지, 리포터가 창백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입에 대었다. “더이상 촬영이 불가능 하기에 자세한 사고 소식은 오전에 이어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한신, 아와지, 고베 지역은 보시다시피 끔찍한 지진 피해로 아직도 도시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습니다. 현재 사고 지역을 비롯해 오사카, 나라, 교토 지역의 소방관들까지 재난 피해 지점으로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소식들 전하며 이상으로 긴급 보도를 마치겠습니다.” 사고 현장 소식을 전해준 리포터의 보도는 끝이 났지만, TV에선 계속해서 피해 지역 당시의 CCTV와 핼기에서 촬영된 영상을 번갈아 보여주고 있었다. 한동안 유키와 재난 방송을 지켜보던 나는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전 6시 10분.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전화기를 들고 곧장 카와구치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신호음이 울리고, 수화기 너머로 약간 당황한 듯한 카와구치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와구치씨 혹시 방송 보셨어요” “네. 방금 일어나 뉴스를 보던 참입니다. 세상에 하루 아침에 이게 무슨 일인지...” “우선 비상 연락망을 이용해 일반 사원들에게 임시 휴무를 알리고, 팀장급 이상 중에 가능 한 인원만 오전 10시까지 회의실로 모이죠.” “네.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고베 지역에 가족이 있는 사원들도 있기에 휴무를 건의 드리려던 참인데 잘됐네요. “그럼 회의실에서 뵙겠습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유키가 설현이와 함께 거실로 나왔다. “준혁씨도... 가봐야 하는 거죠?” “응. 그래야 할 거 같아. 혹시 모르니까 며칠간 설현이랑 같이 친가에 가있는게 어때?” 본래 내가 알고 있던 과거와 상황이 같다면 도쿄는 안전 하겠지만, 오늘 일어난 대지진은 내가 알던 과거의 사건보다 시간 축이 한 달 정도 늦어졌다. 그래서 일까? 도쿄가 안전 할거라는 절대적인 확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장모님댁은 개인 주택이기에 맨션보다 상대적으로 대피하기가 쉽고, 혹시나 집이 무너진다 하여도 목재 건물이기에 매몰된다 하여도 근처에 사람만 있으면 쉽게 빠져 나올수가 있다. 하지만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고층 맨션 같은 경우에는 직하형 지진 한방에 건물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면 어마어마한 인명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방금 TV에서 거대한 고가도로가 무너져 내린 것처럼 말이지... “알았어요. 그럼 오늘 하루만 부모님 집에 가있을게요.” “별일 없을거야. 너무 걱정하지마.” 잠시 후. 나는 유키와 함께 조금 이른 아침 식사를 마친 뒤, 그녀를 처가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유키가 도착하자마자 놀란 얼굴로 뛰쳐나온 장모님은 안그래도 불안했는데, 잘 왔다며 유키와 설현이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셨다. 장인 어른 역시 오늘은 임시 휴무로 지정 되었는지, 출근을 하지 않고 자택에 대기하신 모양이었다. “오늘도 출근인가?” “일반 직원들은 임시 휴무일로 돌렸지만, 임원진은 대책 회의가 있어서요.” “대책 회의? 게임 만드는 회사에서 지진 피해에 대해 무슨 대책 회의를 한단 말인가?” 장인 어른의 물음에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떼었다. “피해 지역에서 필요한 구호 물품에 대한 것도 미리 선점해야하고, 어느정도 안정화 시기가 되면 봉사 활동에 대해서도 검토를 해봐야해서요.” “아, 하긴 그것도 그렇군. 지금 당장은 전기도 수도도 쓸수가 없을테니, 피해 지역에 많은 도움이 필요할 거야. 생각이 참 기특하군... 그래, 바쁠텐데 어서 가보게나.” “저녁 때까지 상황을 보고 유키를 데리러 오겠습니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장인 어른에게 인사를 드린 뒤, 서둘러 차에 올랐다. 그와 동시에 차안에 놓여져 있던 전화기에서 다소 촌스럽게 느껴지는 벨소리가 울리자, 나는 차에 시동을 넣으며 휴대폰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사님. 저 하야시입니다.” “어, 무슨 일이야?” “그게, 회의 소집에 대해선 이야기를 들었는데...” 평소와 달리 가늘게 떨리는 하야시의 목소리에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너 설마...?” “네. 본가가 아와지에 있는데, 현재 연락이 닿지 않아요. 잠시 본가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맞아 하야시 너 원래 관서 사람이었지, 알았어. 대표님에게는 내가 따로 이야기 할테니까. 다녀오도록 해. “네... 감사합니다.” “별일 없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운전 조심해서 가.” “네. 알겠습니다. 도착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응. 그래.” 하야시와 통화를 끊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곧장 회사로 차를 몰았다. 라디오에서는 모든 채널에서 고베 대지진의 피해 규모와 사상자에 대해 이야기 중이었고, 그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늘어 나고 있었다. 워낙에 피해 지역이 안좋았던 터라 처음 뉴스를 접했을 때와 달리 사상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있었다. 신호 대기 중이던 나는 초조함에 손 끝을 깨물며 하야시의 부모님에게 별일이 없기를 바랬다. 고베 대지진은 분명 수많은 사상자를 낸 희대의 재앙으로 피해 지역 주민들에게 어마어마한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또한 그곳에 거주하는 한국인 역시 다수 존재했기에 여러모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일본 정부는 고베 대지진이라는 위기를 오히려 경제 활성화의 기회로 삼았다. 모든 것이 피폐하게 무너진 도심을 재건축 하기 위해 수많은 일거리가 생겨 났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것에 대한 낙수 효과를 노리고 일본에 내로라 하는 기업들이 대거 일어섰다. 그중엔 민텐도와 센소니. 그리고 NEGA도 포함 되어 있었다. & 고베 지진 때문일까? 오늘 따라 유난히 휑 한 신주쿠의 중앙로를 지나 회사 주차장에 차를 세워둔 나는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본사의 회의실로 향했다. 그때 방금 회사에 도착했는지 서둘러 회의실로 향하고 있는 모리타가 보였다. “어이, 모리타.” “아, 이사님. 좋은... 아침이라고는 못하겠네요. 사실 하야시가...” “응. 나도 오면서 들었어. 그런데 모리타 너는 괜찮은거야? 너도 관서 쪽에 본가가 있잖아.” “저는 괜찮습니다. 본가는 오사카에 있는데, 오전에 통화하니 별일 없으시다고 하셔서...” “그래. 다행이다. 하야시는 도착하면 연락주기로 했으니, 기다려보자.” “디자인 부서의 카오리도 함께 갔으니, 별일 없을 거예요.” “카오리도? 맨날 하야시를 놀려대지만, 걔도 이럴땐 참 싹싹하네.” “그러게 말입니다.” 모리타와 대화를 나누며 회의실로 들어서자, 몇몇 팀장급 인원들이 나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혹시 본가가 사고 지역에 있는 분들은 가보셔도 괜찮습니다. 회의 내용이 가족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자 나와 함께 ‘신의 선물’을 기획 했던 우에노씨가 대답했다. “안그래도 오전에 미리 연락 드리고 나왔습니다. 괜찮다고 하시더군요.” “다행이네요. 그렇다면 현재 팀장급 이상중에선 하야시 팀장을 제외하고 다들 괜찮은 것으로 알겠습니다.” “카와구치 대표님. 오십니다.” 비서인 사유리씨의 말에 회의실에 모여 있던 직원 전원이 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와구치 대표는 회의실에 들어옴과 동시에 직원들에게 편히 앉으라는 말을 전한 뒤 나를 향해 살짝 눈인사를 보내었다. “우선 이 자리에 계신 직원분들은 지진으로 피해 입은 가족이 없다니 다행입니다. 부디 제 2 개발팀의 하야시 팀장에게도 별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카와구치 대표의 짧은 인사말과 함께 긴급 소집 회의가 그 시작을 알렸다. 회의의 안건은 피해 지역에서 필요한 구호 물품 목록에 대해 토의하고, 어느 기업에게 수주를 넣을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일단 전기와 가스가 막혔으니 물과 식량같은 생필품이 우선적인 구호 물품으로 배정되었고, 그 외로 담요라던가 침낭. 옷가지 등등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가 진심으로 피해지역 주민들을 걱정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그들이 말한 모든 구호 물품을 선정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때 카와구치 대표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준혁씨께서는 혹시 다른 의견이 없으십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볼펜 끝을 책상에 톡톡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생필품에 대해선 이미 좋은 의견이 너무 많이 나와 딱히 이견은 없습니다. 하지만 조금 다른 부분을 제안하고 싶은게 있네요.” “어떤 부분입니까?” “가령... 이번에 피해 입은 지역 주민을 상대로 부서진 라온과 게임 카트리지를 가져올 경우 무상 A/S를 해드린다던가?” “네? 설마 지진 피해로 부서진 콘솔을 무상으로 교환해드리자는 말입니까?”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카와구치 대표를 향해 나는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어보였다. “피해 입은 지역에도 분명 저희가 만든 게임을 좋아하는 유저분들이 있겠지요. 기업이란 그런 고객들 한분 한분의 도움으로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과거 파이널 프론티어 1, 2로 회사가 힘들었을 때 유저분들께서 저희 펜타곤 게임을 믿고 구입해 주셨듯이... 이번엔 저희 펜타곤이 그런 유저분들을 도와줄 때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응당 기업이 취해야 할 사회적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회의실에 모인 직원들은 나의 말에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던 중 모리타가 나를 향해 천천히 박수를 보내자, 직원들 하나 둘 그를 따라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구호물품도 물품이지만, 저희는 게임 회사이지 않습니까? 더구나 휴대용인 라온 같은 경우는 피해 지역 아이들을 위해서 좋은 놀이가 될 것 같습니다.” “오오.. 그거 좋네요. 지진이 일어난 지역을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하다고 하니, 차라리 대피소에 아이들을 위한 놀이 공간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요?” 다소 딱딱하게 진행되던 회의 분위기는 나의 말 한마디에 급반전을 이루기 시작했다. 나는 의자에 기댄채 직원들의 입에서 쏟아지는 아이디어를 들으며 빙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자 내 근처에 앉아 있던 카와구치 대표가 나에게 물었다. “준혁씨 말대로 진행 된다면 추진 액수가 상당할거 같은데, 괜찮을까요?” “상관없습니다. 차후에 발매 될 컴플리트 라온의 홍보비라고 생각해두죠...” < EP. 40 : 사회적 활동. (1) > 끝 < EP. 40 : 사회적 활동. (2) > & 그로부터 이틀 뒤. 여진 활동이 어느 정도 멈추고 피해 지역의 구조 활동으로 한창 일손이 모자라던 때에... 나는 자진 해서 지원한 펜타곤 직원 스무명 정도를 데리고 현장을 찾았다. 원래라면 적어도 일주일에서 10일 정도 여유를 두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을 때 오려고 했으나, ‘개인’적인 사정이 겹치는 바람에 일정이 좀 앞 당겨져 버렸다. “이사님~!! 여기에요~!!” 이번 지진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아와지 지역에 도착한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 멀리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카오리 아냐?” “와~ 모리타 팀장님도 와주셨네요~!!” 반가운 직원들이 하나 둘 차에서 내리자, 카오리는 거의 울듯한 표정으로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그런 그녀의 뒤에는 두건을 쓴 하야시가 나를 바라보며 힘겹게 웃어 보였다. “이렇게까지 서둘러 오실 필요는 없는데...” “그래도 같이 일하는 직원의 부모님이 다치셨는데, 될 수 있는 한 빨리 와야지. 어머님은 좀 어떠셔?” “무너지는 집을 빠져 나오시며 다리가 끼이셨는데, 다행히 그 외에는 별 다른 상처는 없으십니다.” “그래? 정말 다행이다...” “대신 어릴 적부터 살던 집은 아주 폭삭 무너졌지만요. 하하~” 하야시는 복구 작업을 돕던 중에 마중을 나왔는지 얼굴 여기 저기에 검은 그을음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하야시의 안내를 받아 이재민들이 모여 있는 중학교 강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애초에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집터였는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참혹한 현장은 TV에서 보던 것보다 상황이 더욱 심각해 보였다. 다른 직원들 역시 생각보다 심각한 피해 상황에 저 마다 한 마디씩 내뱉기 시작했다. “자.. 장난 아닌데?” 사고 현장 곳곳에서 무너져 내린 잔해들을 헤치며 구조 활동 중인 119 구급 대원들의 모습에 펜타곤 샵에서 지원을 나온 미야자키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괜히 저희가 와서 방해만 되는 건 아닐까요?” 그러자 그녀와 함께 걷고 있던 카오리가 대답했다. “괜찮아. 미야자키. 우리가 이곳에서 해야할 일은 구조 활동이 아니니까~” 작년에 함께 CES를 다녀온 후로 부쩍 친해진 이 둘은 최근에는 마치 친자매처럼 함께 어울려 다니곤 했다. 특히나 회사가 끝나면 펜타곤 샵으로 달려가 미야자키를 도와주며 손님 응대도 하는 편이었는데, 특유의 붙임성 덕분인지 카오리는 정식 판매직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손님들에게 꽤나 인기가 많았다. 펜타곤은 독자적인 프리미엄 샵을 운영하고 있어, 다른 게임 회사들과는 달리 상당히 개방적인 유통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 외로도 샵 내부에서 정기적으로 독특한 이벤트를 열고 있었는데, 사실 이번 지진만 아니었다면 2월 말 ‘신의 선물’를 테마로 한 갈라쇼 이벤트를 준비할 예정이었다. ‘여러모로 일정에 차질이 생겼군. 덕분에 컴플리트 라온의 출시 일을 맞추기도 애매해졌어. 전 국민이 비탄에 빠진 가운데 신났다고 신제품을 발매하면 팔리기나 하겠어? 되려 역풍 맞기 딱 좋지...’ 하지만 이런 나의 고민은 같은 시기의 다른 회사에 비하면 굉장히 가벼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컴플리트 라온’ 경우에야 미치 유저들로부터 작년부터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는 신제품이니 발매 시기를 조금 늦춘다하여도 별 다른 타격은 없으니까... 하지만 중소기업들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특히 라온을 통해 다음 달 발매로 잡혀 있던 ‘절명 도시’라는 생존 서바이벌 게임이 문제였다. ‘절명 도시’는 대 재난 속에서 생존을 목표로하는 주인공의 서바이벌 어드벤쳐 게임이었는데, 하필이면 그 테마가 ‘지진’이었다. 덕분에 카트리지 생산 직전까지 들어갔던 이 작품은 이번 고베 대지진으로 인해 발매를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CEO로서는 분명히 옳은 판단이라 생각 하지만, 회사 재정을 생각하면 상당한 리스크를 떠안아야할 판이었다. 무려 1년이나 공들여 제작한 게임이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하고 그대로 사장되어 버리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잠시 후. 하야시와 카오리 커플(?)을 따라 도착한 중학교 강당 앞에는 펜타곤에서 미리 대절한 각종 구호품이 실린 트레일러가 이미 운동장에 주차되어 있었다. 본래는 아키바에서 거리 행사에 쓰일 예정이었던 이 트레일러에는 펜타곤 소프트를 의미하는 오각형 로고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어라, 이사님~!!” 트레일러를 인도하며 다른 루트로 돌아온 후발대와 카와구치 대표를 만난 우리는 잠깐의 인사를 나누고 서둘러 이재민들에게 구호품을 배급하기 시작했다. 펜타곤에서 대량으로 주문한 담요와 함께 식수를 내리자, 강당에 있던 이재민들 몇몇이 함께 나와 우리를 도와 주었다. 그때 이재민 대표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었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식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는데...” “갑작스런 재난에 상심이 크실 듯 합니다. 일단은 당장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들만 먼저 챙겨왔는데, 혹시라도 더 필요한게 있으시면 말씀만 하세요.” “이렇게 찾아와 와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인데요. 그런데 혹시... 어디에서 오신 분들인지?” “아, 저희는 펜타곤이라는 게임 개발 업체 사람들입니다.” 그러자 이재민 대표는 살짝 고개를 갸웃 거리며 나에게 되물었다. “게임 개발이라구요? 구호단체가 아니라?” “네. 그렇습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게임을 즐기는 일본에서도 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기에 그의 그런 반응이 섭섭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때 우리 옆에서 물통을 나르던 청년 하나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우리를 향해 외쳤다. “이 보급품들이 펜타곤에서 온 것이라구요?” 그는 자신이 들고 있는 물통에 선명하게 박혀 있는 우리회사의 로고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 혹시 강준혁 디렉터세요!?” 헐... 여기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니. 하긴 최근에는 게임 잡지에도 여러번 실려서 그런지, 이제는 아키바를 돌아다닐 때면 나를 알아보는 유저들이 상당히 많아졌다. 그때 이재민 대표가 청년에게 물었다. “타쿠야. 너도 아는 회사냐?” “전에 말씀 드렸잖아요. 아버지. 대학 졸업하면 도쿄에 가서 펜타곤에 취직하고 싶다고...” “그때 네가 말했던 회사가 이분이 말 한 펜타곤이었냐!?” “네. 맞아요.” “허어~ 무슨 게임 회사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길래, 들어본 적도 없는 회사라 걱정했더니. 제법 탄탄한 회사인가 보구나.” “아버지야 게임 회사라면 민텐도 밖에 모르시니까요. 펜타곤은 지금 제 나이 또래에서 가장 가고 싶어하는 회사 중 1위라구요.” 하하... 이거 칭찬은 고맙지만, 이런 곳에서 마냥 기뻐할 수도 없고... 나는 잠시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 시키며 이재민 대표에게 말을 이었다. “아무튼 혹시라도 필요한 물품이 있으시면 저에게 말씀하시거나, 근처에 저희 직원들에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명함이라도 한 장 받을 수 있을까요?” 이재민 대표는 내게서 명함을 받아든 뒤 잠시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직급이 이사님이셨군요. 그런 이름이 좀 특이한데... 혹시 한국인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먼 타국 땅에서 이렇게 자원봉사까지 나와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다른 직원들과 함께 구호품을 내리러 가보겠습니다.” “네. 저희도 돕겠습니다.” & 오전 내내 식수와 함께 구호품을 내린 펜타곤 직원들은 이재민 아주머니들과 함께 앞치마를 두르고 점심 식사 준비를 서둘렀다. 단지 이동식 차량에 설치된 주방 설비로 이 많은 사람들에게 제대로된 식사를 배급해주기엔 무리가 있었기에, 식사는 간단한 크림 스튜와 빵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것 만으로도 강당에 모인 사람들은 두 손을 모아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식사 중인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하야시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강당을 빠져 나왔다. 때마침 구호품을 나르고 간단히 끼니를 떼우고 있던 펜타곤 직원들이 나를 보자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신경쓰지말고 식사들 해. 다들 수고 많았다.” “이사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식사는 하셨어요?” “응. 아까 빵으로 간단히 떼웠어.” 펜타곤 직원들 중에서도 제 2 개발팀 인원은 전부 자원해서 이곳에 온지라 예전부터 나와 알고 지내던 직원이 많이도 따라와 주었다. 하긴 그러고 보면 지금 제 2 개발팀은 하야시가 팀장인데, 상사가 변고를 당했으니 와보는게 당연한 것이긴 하지만... 그런데 여기에도 하야시의 얼굴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혹시 하야시 어디 있는지 알아?” “잠시 부모님을 뵈러간다고 학교로 가시던데요?” 아... 어쩐지 이재민 수용실에 환자가 하나도 안보인다 했더니, 재난으로 다친 사람들은 학교에 있었구나. 나는 식사중인 직원들에게 마저 먹으라고 말을 건넨 뒤 운동장 건너편에 있는 학교 건물로 향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학교 앞에 설치된 벤치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던 하야시와 눈이 마주친 나는 살짝 웃으며 그의 곁으로 다가가 벤치에 몸을 기대었다. “부모님은 좀 어떠셔? “괜찮으세요. 대신 알고 지내던 이웃 분들 중에 많이 다치신 분도 계시고, 돌아가신 분도 계셔서 마음이 좀 허전 하네요.” 하야시는 씁쓸한 표정으로 담배를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나는 그런 하야시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의 말을 전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도 그에겐 혼자 만의 시간이 필요해 보였으니까...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고 3일째가 되는 오늘...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을 인명(人命)을 구하기 위한 구조 대원들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이재민 대표에게 이야기를 들은 바로는 현재 강당에 있는 사람들은 이곳에 살고 있던 사람중에 10분의 1정도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강당에 붙어 있는 실종자 명단만 해도 어마어마한 수를 기록하고 있었기에 영 마음이 불편했다. 그렇게 강당 쪽으로 발길을 돌리던 중. 나는 학교 운동장에 설치된 그네에 홀로 앉아 있는 아이를 보았다. 힘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 걱정이 된 나는 가까이 다가가 아이에게 물었다. “넌 왜 혼자 여기 있니?” 나의 목소리에 빼꼼히 고개를 든 꼬마는 고개를 푹 숙이며 입을 열었다. “형이 없어졌어요...” “형...?” “지진이 일어 났을 때. 엄마 아빠가 나랑 형을 데리고 집을 나오려는데, 형이 있던 방이 갑자기 통째로 무너지는 바람에...” “아... 부모님은..?” “엄마랑 아빠는 집으로 갔어요. 형을 찾아야 한다고...” “너무 걱정하지마. 조금만 기다리면 구조대 아저씨들이 형을 꼭 찾아 줄 테니까.” 그러자, 내 말을 듣고 있던 꼬마의 어깨가 위 아래로 천천히 들썩였다. “히잉...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형이 게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양보해 주는 건데... 내가 괜히 떼를 써서...” “형이랑 싸웠니...?” 옥구슬처럼 떨어져 내리는 눈물을 팔뚝으로 닦으며 꼬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그 날은 형이 게임 하는 날인데, 내가 막 우겨서.. 흑.. 으윽...” 꼬마는 그 날의 일이 후회되는지 서럽게 눈물을 흘리며 훌쩍였다. 나는 잠시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녀석을 위로해 주었다. “너무 걱정마라. 형 아무일 없을테니까... 알았지? 혹시 오늘이라도 형을 찾으면 저기 강당에 있는 사람들한테 물어서 나한테 와. 아저씨가 너희 형제한테 좋은 선물을 줄테니. 알았지?” 겨우 울음을 그치며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에게 내 명함 한 장과 가지고 있던 빵 하나를 쥐어준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거 진짜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네...’ 나는 강당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바깥 상황을 살펴볼까 하는 마음에 학교를 나와 피해 지역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밖으로 나가기 무섭게 구급 대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반인들은 아직 학교 밖으로 나오시면 안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잠시만 둘러보고 금방 돌아갈게요.” 나는 학교 앞으로 길게 뻗어 있는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바닥엔 무너진 집들의 잔해와 더불어 누구의 것이었는지도 모를 가재도구가 산산히 흩어져 있었다. 걔중에는 액정 플라스틱이 깨진채 바닥에 나뒹둘고 있는 민텐도의 휴대용 겜보이도 섞여 있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천천히 그것을 주워든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전원 버튼을 올려 보았다. 띵~~ 헉... 작동이 되네? 비록 카트리지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찾을 수 없었지만, 기기만은 살아 있었다. 카마우치 사장이 튼튼하게 만들라고 바닥에 집어 던진게 엊그제 같은데, 아무튼 그 당시에 나랑 군페이씨가 잘 만들긴 했구나... 문득 떠오른 옛 기억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이번엔 발밑에 라온의 카트리지 케이스가 보였다. “어라...? 드래곤 엠블렘 1이잖아?” 그러고 보니 여기 근처에 잔해물은 죄다 게임 카트리지 뿐이네? 뭐지? 설마 엄청난 게임 수집가의 집이었던가? 하지만 나의 의문은 근처에 있던 남자의 한 마디에 곧바로 풀려버렸다. “하아... 망했다. 망했어... 가게 문 연지 일주일만에 이게 뭐야...” < EP. 40 : 사회적 활동. (2) > 끝 < EP. 40 : 사회적 활동. (3) > “하아... 망했다. 망했어... 가게 문 연지 일주일만에 이게 뭐야...” 참담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자연스레 내 손에 들려 있던 휴대용 겜보이로 향했다. 자칫 도둑으로 오인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서둘러 입을 떼었다. “아, 그게 저...” “됐수다. 뭐 어차피 부서진 제품 팔지도 못 할 텐데, 이제와선 쓰레기나 마찬가지니..” 남자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잠시 겜보이를 바라보다가 근처에 있던 부러진 널빤지 위에 주저 앉았다. 이거 굉장히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네... 나는 잠시 손에 쥐고 있던 겜보이를 바라보다가 그에게 다가갔다. “이곳에서 게임 가게를 하셨었나요?” 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남자는 라이터 마저 말을 듣지 않는지, 신경질 적으로 라이터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내가 가지고 있던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며 다시 한 번 물었다. “이 물건의 주인 되십니까?” 그는 내가 건넨 휴대용 겜보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시울이 붉어졌다. 누가보면 다 큰 어른이 애들처럼 훌쩍인다고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정말 가게 오픈하고 단 일주일 만에 이런 사고를 겪고 나면 누구나 황당한 현실 앞에 서글퍼질 수밖에 없으리라... 그는 인상을 찡그린채 깊게 담배를 빨아들이며 내가 건넨 겜보이를 받아 들었다. 그리곤 내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부서진 겜보이의 전원 스위치를 올려 보았다. 띵~ 비록 플라스틱 화면은 깨졌지만,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을 알리는 듯 맑은 효과음이 귀가에 울리자, 남자는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음을 삼켰다. “이 난리통을 겪고도 작동이 되다니 신기하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라는 생각으로 튼튼하게 만들었으니까요.” 그러자 남자는 멀뚱히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방금 말은 꼭 당신이 이걸 만든 사람인 것처럼 들리는데...?” “네. 맞아요. 민텐도에서 일할 당시에 군페이씨와 함께 만들었으니까요.” “어어...? 그럼 설마 민텐도 직원이십니까?” “아니요. 지금은 민텐도를 관두고 펜타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민텐도에서 마지막으로 만들었던 슈퍼 패밀리나 라온도 꽤 튼튼하게 만들었으니, 뒤져보면 멀쩡한 제품이 좀 남아 있을 수도 있어요.” “자.. 잠깐만... 민텐도에서 일하다가 펜타곤으로 넘어간 직원... 거기다 슈퍼 패밀리까지 개발했다면 혹시?” 역시 게임 가게의 사장이다보니, 어느정도 업계 소식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일까? 그는 몇가지 단서만으로 내가 누구인지 한번에 알아 맞힌 듯 해보였다. “네. 펜타곤 소프트의 강준혁입니다.” “아... 역시.. 그렇군요. 그런데 어라? 펜타곤 소프트에 계시는 분이 이곳 재난 현장에는 어쩐 일로...?” “저희 직원 중 한명이 이곳 출신이거든요. 지닌 소식 듣고 바로 달려 갔는데, 직원 걱정도 되고 피해 지역에 도움이 좀 될까 싶어 구호 물품을 들고 왔습니다.” “그럼 아까 점심때 나왔던 스프와 빵이 펜타곤에서 나온 것입니까?” “음... 딱히 자랑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긴 하네요.” “저는 정부에서 운영하는 구호 단체에서 나온 줄 알았더니. 펜타곤이었군요. 워낙 정신이 없던 터라 어디에서 구호 물품이 왔는지 확인도 안 해봤었네요.” “그렇게 신경 쓰실 건 없습니다. 아까 전에 혼잣말 하시는 걸 들었는데, 상심이 크시겠더군요. 가게 오픈 한지 얼마 안 되신 듯 하던데...” 남자는 나의 위로에 쓴 웃음을 지으며 담배 한 대를 더 꺼내 물었다. ... 줄 담배 피고 싶은 당신의 심정이야 알겠지만, 혹시 주변에 가스라도 새어 나온 곳이 있다면, 둘다 곧바로 황천길 급행 열차에 오를 것 같은데... 내심 불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사건이 발생 하고 이 정도 시간이 흘렀다면 도시 가스 배관은 전부 잠가 두었겠지... 자신의 속 만큼이나 검게 타들어가는 담배 끝을 바라보던 남자는 잠시 후 새하얀 연기를 뿜어 내며 입을 열었다. “잘 기억 안 나실 수 있겠지만, 사실 저는 그 쪽을 한번 본 적이 있습니다.” “저를요? 우리가 만난 적이 있었던가요?” “만났다기 보단 잠시 스쳤달까나. 그때 당신과 스쳤던 것도 바로 이 녀석 때문이었죠.” 담배 필터를 깨문채 휴대용 겜보이를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에 나는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대답했다. “혹시 휴대용 겜보이의 런칭 행사때 오셨었나요...?” “네. 눈발이 휘날리던 겨울 날이었는데, 전날부터 기다리는 내내 어찌나 춥던지. 입이 얼어 붙어서 말도 제대로 안나왔었죠. 그때 마침 당신이 지나가며 저에게 따듯한 커피를 준 적이 있었죠.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입이 얼어 붙어서 그만...” “아... 설마 그때 저한테 커피 받으면서 ‘감하삽니다..’ 라고 했던 분?” “어? 기억하고 계시네요?” 아~ 그야 얼굴까진 기억 못해도 그 말은 인상에 남아 기억하고 있었는데, 설마 이 사람이 그 때 그 사람일 줄이야... 내심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이 상황을 앞에 두고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물론이죠. 설마 그때 그분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강준혁씨야 그렇겠지만, 저는 그 후로도 당신의 소식을 잡지를 통해 많이 접했습니다. 최근에는 결혼하셨던데...” “아, 네. 최근에 딸이 태어났습니다.” “허허... 그거 참. 세월이 빠르군요. 저 역시 그때 당시엔 총각이었지만, 지금은 결혼해서 세 살 배기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잘다니던 회사를 때려친 뒤에 내가 좋아하는 일 해보겠답시고 가게를 차린게 불과 10일 전인데...” 남자는 무너져 내린 자신의 가게가 있던 자리를 허망한 눈으로 바라보며 한 숨 지었다. 에휴... 이야기가 돌고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군.. 그래도 이렇게 무너진 가게를 보러온 것이라면 그래도 와이프랑 아들은 무사한 모양이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없는 남자를 바라만보다가 그에게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글쎄요. 정부의 대책을 기다려봐야죠. 보상금이 얼마가 나올지 모르지만, 아마도 턱없이 부족할 듯합니다. 보상금이 나오면 가까운 지역에 집을 마련하고 다시 직장을 구해야 겠죠.” “가게는 다시 차리지 않으실 겁니까?” 그러자 또 다시 가게를 차리라는 내 말에 기가 차는지 남자는 헛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저에게 가게를 차릴만한 돈이 남아 있겠습니까?” 물론 남아 있지 않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른 기업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희 펜타곤은 이번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한신, 아와지, 고베에서 게임샵을 운영 하던 사장님들께 저희 펜타곤에서 취급하는 라온과 게임 카트리지에 한에서 100% 보상해주기로 결정했습니다.” “네...? 100% 보상해 주신다구요?” “적어도 저희 펜타곤에서 발주한 제품 만큼은 복구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단 가게를 접으시는 사장님들에게는 50%의 현금으로 돌려드릴 예정이구요.” 이 계획을 최초에 전해들은 카와구치씨는 너무나 파격적인 제안에 비명을 내지를 정도였다. 안 그래도 곧 있을 신형 콘솔의 대량 제조를 앞두고 아무런 이득도 없이 대놓고 퍼주기만 하려는 나의 제안이 확실히 도를 넘어 보이긴 했지... 하지만 카와구치씨와는 입장이 다른 내 곁에 가게 사장님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더듬거리는 말투로 내게 말했다. “저.. 정말입니까? 발주 금액의 50% 라도 돌려 주신다구요...?” “이래 보여도 펜타곤 소프트에서 이사직을 맡고 있습니다. 재난으로 피해를 입은 사장님께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내뱉을 직위는 아니죠.” “그.. 그래 주신다면 억울한 저야 한 숨 돌릴 수 있죠..” “그런데,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현금으로 보상 받으실 때는 50%인데 괜찮으시겠어요? 다시 재고를 받으시면 100% 보상 받으실 수 있는데?” “저도 마음은 그러고 싶지만, 다시 재고를 받는다고 해도 그 것을 진열하고 판매할 가게가 있어야죠...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떠나면 그곳에서 정착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텐데, 다시 가게를 얻을 정도로 여유 자금은 없습니다.” “그럼 저희가 대신 가게를 얻어 드리면요?” “네? 방금 뭐라고 말씀 하신건지...?” “저희가 대신 가게를 얻어드린다면, 저희 쪽에서 구입하신 제품을 다시 받으시겠어요?” “아니 뭐..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야 당연히 거절할 이유는 없지만... 왜 그렇게 까지...?” 남자는 나의 제안에 슬슬 불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되물었다. 하긴 아무 이유 없이 너무 잘 해줘도 의심을 사기 마련이니까. 나는 묘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가게 사장님을 향해 살짝 미소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대신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그때 학교 정문을 빠져 나온 펜타곤 유니폼을 입고 있는 직원 하나가 나를 찾는지 내 이름을 외쳤다. “강준혁 이사님~!! 어디계세요~!!” 어라? 이 목소린 카오린가? 무너진 잔해 더미위에 남자와 함께 앉아 있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카오리 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기야~!! 무슨 일 있어!?” “아~!! 이사님!! 지금 대표님께서 찾으세요~!! 방송국에서 취재 왔대요~!! 아, 그리고 패미통신 기자인 준페이씨도 오셨어요~!!” “알았어. 바로 돌아갈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카오리와 대화를 마친 나는 아직도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일단 이재민 센터로 돌아가 말씀드리죠.”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낸 나는 그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네주고 카오리가 기다리는 곳으로 달렸다. “저... 저기 감사합니다~!! 연락 드릴게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조금은 더 밝게 들려왔다. & 잠시 후. 카오리와 함께 학교 강당으로 돌아오니,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이 나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오랜만이네요. 강준혁씨.” “어라? 미사토씨? 여긴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긴요. 방송국 기자가 현장에 있는 건 당연한거 아닌가요?” “아, 맞다. 그렇지...” 뒷 머리를 긁적이며 겸연쩍게 웃어 보이자 그녀의 등 뒤로 준페이가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여~ 나도 왔다~” 하지만 나는 준페이 녀석의 인사를 가볍게 무시하며 미사토씨에게 물었다. “그럼 저희 펜타곤으로 인터뷰 요청을 하신게 미사토씨인가요?” “네. 맞아요. 바쁘시겠지만, 대표님과 함께 잠깐 시간 좀 내주실래요? 카와구치 대표님께서 꼭 준혁씨와 같이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말씀하셔서요.” “아, 뭐 상관없습니다. 그럼. 대표님이 계시는 곳으로 함께 가실까요?” “어이~ 저기요~ 나도 왔다니까?” 서로 마주본 채 웃으며 자리를 옮기는 우리를 향해 준페이가 등뒤로 계속 말을 걸어 왔다. “저기~ 모시모시~ 안들리냐~ 나도 왔다니까~” “대표님께 잠깐 이야기를 듣기론 펜타곤에서 구호품과 더불어 피해 지역 주민들을 향해 대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하던데 사실 인가요?” “물론입니다. 더불어 게임 샵이라던가 게임에 관련해 저희가 도울수 있는 부분이 있는 자영업자들에게 작게나마 그들을 지원해 줄 대비책을 마련해 보았습니다.” “오... 그것 참 흥미있는데요?” “물론 그것에 대해서도 대표님과 함께 자세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야~ 인마!! 강준혁!! 나도 왔다구~!! 아는 척 좀 해!!!” < EP. 40 : 사회적 활동. (3) > 끝 < EP. 40 : 사회적 활동. (4) > “야~ 인마!! 강준혁!! 나도 왔다구~!! 아는 척 좀 해!!!” “알았다. 알았어. 너랑 내가 하루 이틀 보냐? 오늘따라 왜 이리 칭얼거려?” 사실 이렇게 준페이가 내 옆에 붙어 있으려는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취재? 인터뷰? 뭐 그런 것들이야 내가 아니더라도 적당히 주변에 돌아다니는 펜타곤 직원에게 물으면 훨씬 수월한 인터뷰가 가능할테니까... 녀석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오랜만에 다시 만난 미사토씨와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리라... 그리고 내 예상대로 녀석은 나의 면박에 툴툴 거리면서도 나와 미사토씨 뒤를 쫄래쫄래 쫓아 오고 있었다. 나는 그런 준페이의 행동에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잠시 후 인터뷰에서 어떤 말을 해야할지 살짝 머리를 굴리던 찰나,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다들 빨리 나와봐~!! 방금 타야마씨네 큰 아들이 구조대원에게 발견됐데!!!” “뭐라고!?” 그러자 내 옆에 있던 미사토씨가 두 눈을 크게 뜨며 그에게 물었다. “거기가 어디죠?” “네...? 아 그게.. 여기서 그렇게 멀진 않은데...” “안내 좀 해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미사토씨는 자신의 카메라맨을 데리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하긴 게임 회사 인터뷰야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저런 특종감을 놓칠 순 없지.. 준페이는 혼자 남은 나를 바라보더니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무시 당한 기분이 어때?” “음... 미안하다.” “괜찮다. 친구 아이가~” 준페이는 어줍잖은 관서 사투리를 흉내내며 가볍게 내 어깨를 툭치곤 뒤에 말을 이었다. “지진이 일어나고 거의 60시간이 다 되어 구조되다니. 실로 기적이구만...” 강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타야마라는 아이가 살아있음에 안도하며 웅성이고 있었다. 그중에 평소 아이와 알고 지내던 몇몇 사람은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미사토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낯익은 꼬맹이 하나가 새빨게진 눈으로 강당을 빠져 나가는 걸 본 나는 나도 모르게 두 눈으로 녀석을 쫓았다. 그 아이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운동장에서 그네에 홀로 앉아 울고있던 꼬맹이었다. “어라...?” “왜 아는 아이야?” “설마...” “응? 뭔데? 갑자기 왜그래?” 등 뒤에서 준페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내 발은 이미 구조현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따라 걸음 달리기 시작했다. “야~!! 강준혁!! 저 자식 갑자기 왜 저래?” & 잠시 후. 폐허로 변한 골목길의 무너진 콘트리트 더미를 밟고 얼마나 달렸을까? 주황색 옷차림의 구급 대원들과 함께 미사토씨가 데리고 다니는 카메라맨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아까전의 꼬마 아이가 부모님의 손을 꼭 잡은채 구조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긴가?’ 준페이와 함께 현장에 도착하자 구급대원들이 지랫대를 이용해 콘크리트 더미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구급 대원들의 반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무전기에 대고 소리쳤다. “기중기(起重機)는 아직인가!? 대체 얼마나 걸리는거야!?” “치직!! 현재 현장으로 향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도중에 장애물이 많아 시간이 좀 걸리는 모양입니다. 치지직..” “야, 인마. 그걸 지금 보고라고 하는 거야!? 환자가 지금 탈진 상태라고!!” “칙!! 최대한 신속하게 이동해 달라고, 다시 한 번 요청 하겠습니다.” 무전 내용만 듣기로는 아직 한창 구조활동이 진행 중인 것 같은데... 무너진 콘트리트 더미 주변에는 불안한 표정으로 현장을 지켜보는 마을 사람들이 두 손 모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구조 반장은 입맛살을 찌푸리며 지랫대를 받쳐들고 있는 대원들에게 소리쳤다. “거기 절대 손 놓지마!! 그것 마저 무너지면 진짜 큰일난다!!” “네. 알겠습니다!!” 이를 악문 채 전신의 힘으로 지탱하고 있던 세명의 구조 대원은 반장을 등진 채로 힘차게 대답했다. “좋아. 그 상태로 잠시만 버텨라. 내가 들어가 볼테니.” “네? 하지만 반장님!?” “기중기가 도착 하려면 아직 멀은 것 같은데, 빨리 병원으로 옮기려면 이 방법 밖에 없어.” 옷에 걸치고 있던 장비를 풀어 헤친 구조 반장은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하여 아이가 쓰러져 있는 좁은 틈새로 향했다. 하지만, 중년치고 굉장히 다부진 체격을 가진 구조 반장이 들어가기엔 그 틈이 너무나 좁게 느껴졌다. “젠장 맞을... 조금만 더 틈을 벌릴 수 없나?” “안됩니다. 그랬다간 지랫대가 부러질 수도 있어요.” “크윽... 제기랄..” 비통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구조 반장의 모습에 사고 현장 아래 갖혀 있는 아이의 엄마가 발을 동동 구르며 울먹였다. “우리 애기 어떡해... 우리 아이 좀 살려 주세요.” 하지만 긴박한 현장에서 누구 하나 선뜻 나서기가 어려웠다. 아이의 부모님은 가능하다면 자신들이라도 대신 들어가 아이를 구하고 싶어 했지만, 두 분 다 워낙에 육중한 체격이라 저 틈새로 들어가기엔 상당히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때였다. 사람들과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현장의 긴박한 소식을 카메라를 통해 전하던 미사토씨가 마이크를 내려 놓으며 구조 반장에게로 향했다. “제가 들어 갈게요.” “네!?” “저라면 저 틈으로 들어 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니. 그래도 2차 사고 발생을 고려해 민간인의 도움을 받을 수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조금만 버텨 주신다면 제가 들어가서 아이를 먼저 꺼내 올릴게요.” 그러자 그녀의 말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끼긴 했지만, 성격 한 번 똑 부러지는구나. 내심 속으로 감탄하던 나는 잠시 콘크리트 틈새를 살펴 보다가 천천히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차라리 제가 들어 가겠습니다.” 그러자 나를 따라온 펜타곤 직원 몇몇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사님!! 너무 위험합니다.” 나는 직원들의 만류에도 슈트와 넥타이를 벗어 던지며 최대한 움직이기 편한 상태로 두었다. 어떻게 살짝 비집고 들어 가면 들어갈 것 같기도 한데... 살짝 몸을 풀어내고 현장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 “응...? 뭐냐. 준페이.” “너 인마. 유키씨랑 이제 갓 태어난 설현이 생각도 해야지. 혹시라도 지랫대가 부러지면 어떡하려고..” 준페이는 잠시 사고 현장의 틈새를 바라보다가 마른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차라리 내가 갈게.” “그래. 네가 나보다 더 말랐으니 그거 좋은 생각이다.” “어...? 아니, 잠깐만...” “후딱 들어가서 아이 올려 보내고, 너도 가볍게 빠져 나오는거야.” “아니, 잠깐 잠깐.. 나도 부모님 생각 좀...” 순간 뭔가 아니다 싶었는지 한발 뒤로 빠져 나가려는 준페이를 재빨리 끌어 안은 나는 녀석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무사히 살아 돌아 온다면... 그때 네가 갖고 싶어했던 ‘사이킥 포스’ 전시용 피규어 하나 줄게.” “두 개 줘.” ... 이런 황당한 자식. 이런 상황에서 딜을 때릴 줄이야. 결국 나는 준페이 녀석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콜.” “······ 그래. 내가 가마.” 결국 깡마른 체격의 준페이가 아이를 끌어 올리기 위해 구조 현장에 투입하기로 결정이 나고, 녀석은 두터운 파카를 벗어 던진 뒤 벌어진 콘크리트 틈새로 다리를 집어 넣었다. 나는 구급 대원들과 함께 녀석이 들어간 현장 주변에서 함께 거대한 콘크리트 벽을 받쳐 들었다. 밑으로 내려간 준페이가 손전등을 키자, 어두운 공간 너머로 쓰러져 있는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네에 있던 꼬마보다 조금 더 키가 클뿐 깡마른 체격이라 쉽게 틈새로 빠져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숨 쉬고 있어요~!! 살아 있습니다!!” 그러자 준페이의 목소리에 반응해 콘크리트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바스스 소리가 들려왔다. 구조반장은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준페이에게 말을 전했다. “너무 크게 소리치면 진동으로 내부가 울려 위험할 수 있습니다. 먼저 아이가 다치곳은 없습니까? 피가 나거나 어디가 끼어 있거나..” “그... 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그냥 매우 지쳐 보입니다.” “좋아요. 그럼 이제부터 천천히 아이를 끌어서 이 쪽으로 올려 보내세요.” “네. 알겠습니다.” 준페이는 구조 반장의 조언에 따라 아이를 천천히 끌어내 우리가 있는 근처까지 다가왔다. “좋아요. 잘하고 계십니다. 일단 아이의 머리를 위로 향하게 해서 이쪽으로 올려주세요.” 행여 아이의 머리가 콘크리트에 부딪힐까 조심스레 아이를 받쳐들고 들어 올리자 구조 반장은 아이의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집어 넣어 밖으로 끄집어 내었다. “우와아아아!!! 됐다~!! 됐어!!” 아이의 몸이 사고 현장 밖으로 나오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외치기 시작했다. 구조 현장 실황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아내고 있던 미사토씨와 카메라맨도 흥분을 감치지 못한 표정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어이, 수고했다. 멋진데?” “너 이 새끼.. 아까 나랑 한 약속 꼭 지켜라...” “알았다. 알았어. 뭐하면 디오라마 통째로 패미통신에 기증해줄까?” “아니. 그건 싫어. 그러면 내 것이 아니잖아.”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내려가더니 입은 살아가지곤.. 어둠 속에서 새하얀 이를 드러낸 채 미소지으며 나를 향해 손을 뻗는 준페이의 손을 잡은 나는 힘을 주어 그를 끌어 올려주었다. 그때였다. 파슥... 어라..? “지랫대가 부러졌습니다!!!” 다급한 구조대원의 목소리와 함께 내 키의 두배만 한 크기의 콘크리트 벽이 우리를 향해 덮쳤다. “막아!!” 쿠웅!!! 그 순간 나는 부러진 지랫대에 당황한 구급 대원들 대신 일단 어깨로 콘크리트 벽을 받쳐 세웠다. 생각보다 엄청난 콘크리트의 무게에 순간 다리가 후들거리며 주저 앉을 뻔 했지만, 구조 반장과 대원들이 서둘러 벽을 밀어 올려준 덕에 가까스로 버텨낼 수 있었다. “야, 인마. 빨리 튀어 나와~!!!” “어어억~!!” 갑작스런 사고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준페이가 네발로 기어 나오자, 나와 구조 대원들은 천천히 콘크리트를 바닥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동시에 긴장이 풀린 나는 바닥에 주저 앉으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어휴... 십년 감수했네..” “우와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어깨에 욱씬 거렸지만, 그래도 친구 하나 살렸다 생각하니 스스로에게도 굉장히 뿌듯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어깨가 왜이렇게 축축하지...? 땀을 흘린 것도 아닌데... 슬쩍 고개를 돌려 오른쪽 어깨를 바라보니 새하얀 셔츠가 피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어억!! 이사님!!” 당황한 펜타곤 직원들이 내 어깨를 보자마자 후다닥 달려왔다. 아무래도 콘크리트 속에서 튀어 나와 있던 철근에 살이 찢긴 모양이었다. 헐... 이거 조금만 각도가 틀어졌으면 팔을 관통할 뻔 했잖아...?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니었기에 찢어진 상처가 화끈 거릴뿐 팔을 못쓸 정도는 아니었기에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때 이 모든 상황을 지켜 보던 미사토씨가 나에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이거 인터뷰 거리가 더 늘어날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 펜타곤 직원들과 함께 지진 피해 지역을 다녀온지 한 달이 지나고, 뉴스를 통해 미사토씨와의 인터뷰 내용이 공개 된 뒤. 펜타곤 소프트에 대해 일본 국민이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진 것을 느꼈다. 지진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사고 현장을 찾은 기업. 구조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인명(人命)을 구해낸 강준혁 이사. 이재민들에게 꼭 필요한 구호 물품의 적극적인 지원과 더불어 재난 지역 게이머들에 한해 파손된 콘솔을 무료로 교체해주는 특별 A/S 정책으로 펜타곤이라는 기업 이미지가 대폭 상승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전에는 그저 게이머들에게만 친숙한 기업이었다면, 이번 일을 계기로 열도의 국민들에게 사랑받은 호감형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 동안 유저들에게 입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기 위해 이와 같은 정책을 펼치게 되었다는 인터뷰 내용에 각종 언론은 펜타곤에 대해 칭찬 일색의 기사를 실었고, 그에 따른 이미지 홍보 효과가 기대 이상으로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게임 잡지사를 통해 라온으로 발매된 게임의 DL 판을 구매시 자동으로 일부 수익을 이재민들을 위해 사용한다는 내용을 전파하자, 단말기를 이용한 다운로드 수익이 배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재밌는 것은 우리가 구해낸 아이였는데, 병원에서 아이가 눈을 뜨고 처음 한 말이 아주 가관이었다. “60시간 동안 어둠속에 갖혀 있었는데, 히로시군. 그 당시 가장 하고 싶었던게 무엇이었는지 물어도 될까?” “······.” “뭐든 좋으니까. 한마디만 해줄래?” “라온...” “음?” “라온이 엄청 하고 싶었어요.” < EP. 40 : 사회적 활동. (4) > 끝 < EP. 41 : D-125 (1) > “라온이 엄청 하고 싶었어요.” 구사 일생으로 살아난 아이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 덕분에 라온은 사회적으로 큰 이슈를 불러 일으켰다. ‘이거 참 예상 밖의 수확인데?’ 아침에 병원에서 가져다준 신문을 보며 피식 웃고 있던 중 옆에서 사과를 깎고 있던 유키가 입을 삐죽 내밀며 핀잔을 주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요? 나는 다치고 돌아와 속상해 죽겠는데...” 오른쪽 어깨에 감은 붕대 덕분에 목에 팔걸이를 두르고 있던 나는 유키의 말에 신문을 곱게 접어 내려두었다. 이럴 때는 괜히 그녀의 신경을 건드려서 좋을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입원까지 안해도 되는데...” “아뇨. 입원을 해야 그나마 이럴 때 좀 쉬는거죠.” “에이... 안 그래도 설현이 출산 덕분에 한 달이나 쉬었는데...” “흐응~ 회사만 안 나갔을 뿐이지 허구헌 날 롭이랑 첸드라에게 통화하던거 내가 모를 줄 알아요?” “... 귀신이네..” “진짜 옛날부터 느끼긴 했지만, 준혁씨 그정도면 일 중독인 거 알아요? 정말 누가 보면 펜타곤 대표가 카와구치씨가 아닌 당신인 줄 알겠다니까요.” 유키의 불평에 내심 속이 찔렸던 나는 헛기침을 하며 창 밖을 바라보자, 그 사이 그녀는 예쁘게 깍은 사과 조각을 접시에 올려두곤 과도를 닦아 내었다. 나는 그런 유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살짝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컴플리트 라온을 출시하고 나면 우리 둘이서 여행이나 다녀올까? 설현이는 잠시 장모님께 맡기고...” 그러자 유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웬일이에요? 먼저 여행을 가잔 소릴 다하고?” “······.” 내가 그 동안 너무 일만 하고 살았나? 하긴 신혼 여행 이후에 후쿠오카 쪽으로 온천 한 번 다녀온게 전부 였으니... 유키의 이런 반응이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었다. “생각 해보니, 네 말대로 너무 일만 하고 살아온 것 같아서 이제는 조금 여유를 가져볼까 싶네...” “흐음~ 좋은 생각이긴 한데, 그 컴플리트 라온이라는 콘솔이 출시 되면 또 엄청 바빠지는 거 아녜요?” “뭐 펜타곤도 옛날처럼 그렇게 조그만 기업은 아냐, 나 하나 없어도 쌩쌩 잘 돌아갈테니 그런 걱정 안해도 될 걸?” “피~ 준혁씨가 언제 일을 시켜서 했나요? 스스로 만들어서 하는 타입이지.” “그건 그렇네...” 유키는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게 재밌는지 기분 좋게 입꼬리를 올리며 사과 한 조각을 내손에 들려 주었다. 하지만 간만에 느끼는 이런 알콩달콩한 분위기도 잠시, 어마어마한 방해꾼이 등장했으니... “준혁아~ 몸은 좀 어떠냐?” 문병용 과일 바구니를 흔들며 나타난 녀석은 예상대로 준페이였다. “어서오세요. 준페이씨.” “유키씨도 계셨네요. 이 녀석 몸은 몸 어때요?” “의사 선생님 말로는 피부가 찢어진 것 외에도 근육이 상해서 며칠 간은 쉬는 게 좋다고 하길래 강제로 입원 시켜뒀죠.” “잘 하셨습니다. 아주 옳으신 판단입니다.” 헐... 저런 여우같은 곰을 봤나... 금세 유키의 곁에서 꼬리를 살랑 거리는 얄미운 준페이를 째려 보던 나는 툭하고 녀석에게 말을 던졌다. “너 누구 덕분에 목숨을 건진 건지 알고는 있는 거냐?” “아~ 그때 멋졌지... 쓰러지는 콘크리트 벽을 붙잡고 ‘준페이 위험해~!! 빨리 빠져 나와~!!’ 라고 외치던...” “우와~ 준혁씨가 정말 그렇게 말했어요?” ... 아니 뭔가 좀 많이 미화된 것 같은데? 준페이는 유키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향해 슬쩍 윙크를 날렸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이야?” “뭐 별일은 아니고, 너 심심할까봐 이번 달에 나온 우리 잡지 좀 가져왔지.” “어라? 발행일은 내일 아니었나?” “뭐 그렇긴 한데, 마땅히 들고 올게 없어서~ 발행 하루 전에 슬쩍 들고 나왔지.” “어이구, 자랑이다.” 꽤나 두꺼운 잡지 한권을 나에게 넘겨주는 준페이에게 유키는 미리 깍아 놓은 사과를 그에게 권했다. “아이쿠, 이거 잘 먹겠습니다.” 준페이는 마침 배가 고팠는지, 유키가 건넨 사과 한 조각을 입에 털어 넣으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때 잡지를 살펴보던 내가 그에게 물었다. “지진 이후에 업계 상황은 좀 어때?” “뭐 난리도 아니지. 지진 피해가 교토까지 이어져서 민텐도도 생산 라인에 문제가 터졌다고 하더라. 그 와중에 펜타곤이 선봉으로 구호활동에 나섰으니, 가만 있을 수도 없을테고... 이래저래 미움 많이 사겠다. 너...” “원래 인생이란게 타이밍이거든?” “그래. 바로 그 타이밍 덕분에 너랑 나랑은 뉴스에도 나오고, 아주 요 근래 겪은 일중 가장 버라이어티 했지.” “하지만 덕분에 미사토씨 연락처까지 땄으니, 너한텐 좋은 거 아냐?” “헉.. 그걸 네가 어떻게?” “어머, 준페이씨 미사토씨랑 연락처 교환하셨어요?” “아, 그게 어쩌다보니..” 피해지역에 자원 봉사를 갔던 그 날. 얼떨결에 구조 대원들과 함께 아이를 구출한 나와 준페이는 그날 밤 9시 뉴스의 대미를 장식한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덕분에 TV로 소식을 접한 유키가 깜짝 놀라 내가 있는 곳으로 당장 오겠다는 통에 난리도 아니었지만... 하지만 그때 난 분명히 보았다. 그 사건을 계기로 미사토씨와 대화를 나누던 중. 은근슬쩍 그녀와 연락처를 주고 받던 녀석의 모습을... “우와... 그때 그걸 봤어?” “차라리 귀신을 속이지? 감히 연락처만 받고 나한테는 시치미 뚝 떼더라?” “너한테는 유키씨가 있잖냐...” 묘한 뉘앙스가 풍기는 녀석의 발언에 유키의 의심스러운 시선이 스르륵 내 쪽을 향했다. “... 야. 거기서 유키가 왜 나와? 그냥 방송 관계자니까 친해두면 좋을 것 같으니 그랬지.” “흐응~ 그거 진짜예요?” 이럴땐 오히려 당당해야 뒷탈이 없다는 걸 알고 있던 나는 유키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연하지.” & 고베 대지진 이후. 일본의 경제 상황은 극심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안 그래도 90년대부터 이어지던 경기 불황에 재난 피해까지 더해지자, 사태는 더욱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특히나 고베 지역에 생산 공장을 두고 있던 일부 기업은 지진으로 공장 가동이 중지 되면서 어마어마한 적자를 보았다. 지진 피해 지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민텐도는 이재민들을 위해 3억엔의 기부금을 전달하였고, 센소니와 NEGA 역시 적지 않은 기부금을 꺼내어 펜타곤 소프트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펜타곤은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피해 지역을 찾아 봉사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또한 게임 샵을 운영하던 자영업자들의 희망에 따라 일부 재고 금액을 환불해 주거나, 새로운 샵을 열 때 보조금을 지원해 주었다. -펜타곤 소프트. 피해 지역 자영업자들의 희망이 되다.- 오늘 아침 마이니찌 신문의 1면을 장식한 기사문을 보며 카와구치 대표는 흡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대표실에 마주 앉아 사유리씨가 준비해준 커피를 한모금 삼킨 나는 그런 그의 반응을 즐기며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기사들 마다 굉장히 호의적인 내용들 뿐이군요.” “그야 당연하죠. 일반 자영업자 같은 경우엔 저희가 제시한 정책 자체가 굉장히 큰 도움이 될테니까요.” 뉴스 기사만 살펴본다면 펜타곤에서 게임 샵을 운영하던 자영업자들에게 어마어마한 지원금을 쏟아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 따지고 보면 그렇게까지 큰 금액은 아니었다. 왜냐고? 그야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지역을 따져보다면 굉장히 넓지만, 그중에 게임 샵을 운영하던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특히나 재난이 일어난 지역은 일반 주택가 단지였기에 게임을 구입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오사카의 덴덴타운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렇기에 우리가 제시한 피해 반경에는 소규모 중고 상점을 포함해 현재까지 정식으로 지원 요청서를 제출한 게임 샵은 총 8군데 정도 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두 군데는 펜타곤 제품의 환불을 요청했기에 우리가 새로운 가게 오픈을 도와 줄 곳은 단 6곳에 불과했다. 계약서에 사인을 마친 그들은 이제 곧 피해 지역을 떠나 새로운 도시로 이주하여 게임 샵을 운영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한가지 보통 게임 샵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이 취급하는 게임 자체가 전부 펜타곤에서 출시한 게임이라는 것이지... 이미 6곳의 매장에 대해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 터이기에 업주들은 순순히 우리의 의견을 따르기로 한 상태였다. 그들에게 제시한 ‘전폭적인 지원’ 그것은 차후에 컴플리트 라온이 출시할 당시 타 지역 보다 일주일 먼저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권리였다. 물론 이에 대해 펜타곤 내부에서도 너무나 편파적인 기기 공급이라는 말이 나왔지만, 피해 지역의 이재민들의 재기(再起)를 위해 단 1주일도 참지 못하고 불만을 토로하는 기업이나 업주가 있다면 그들과의 계약을 다시 재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는 나의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지난 회의에는 이번 지진을 계기로 펜타곤이라는 브랜드 네임이 일본 내에서 굉장한 신뢰를 쌓아가고 있는 중이었기에 이 흐름을 타고 단번에 ‘컴플리트 라온’을 출시하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나는 묵묵히 고개를 내저었다. “여러분이 뭔가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한가지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컴플리트 라온은 게임기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재난 지역에 사회 봉사를 한 것과는 전혀 별개라는 말입니다. 이번 센소니에서 난코를 끌어들여 기어 스테이션용 ‘아이언 피스트’를 발매하고, ‘레이지 레이서’가 큰 호평을 받고 있는 것은 그들이 만든 콘솔의 완성도가 그만큼 훌륭하고 그것을 받쳐 주는 소프트 웨어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우리 컴플리트 라온은 아직 코어 유저와 라이트 유저를 끌어들일 만한 컨텐츠가 부족하다고 볼 수 있죠. 이런 상황에서 단지 기업의 이미지만을 앞세우고 신형 콘솔을 발매한다면 큰 참패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럼.. 대체 펜타곤의 신형 콘솔 발매는 언제쯤으로 생각하고 계시는 건가요?” 회의실에 울리는 한 주주의 질문에 나는 잠시 지그시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나오는 컴플리트 라온의 마케팅은 콘솔보다 소프트 웨어를 중심으로 홍보할 예정입니다.” “음? 소프트 웨어라면 컴플리트 라온으로 출시 할 차세대 게임을 말하는 겁니까?” “아직 그것까진 자세히 말씀 드리기가 어렵네요...” 프리젠테이션 용 레이저 포인터의 스위치를 내린 나는 살작 입꼬리를 올린채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1995년 벚꽃이 만개한 4월의 어느 봄 날... 재난 피해 지역과 오사카 게임 샵들을 위주로 홍보용 컨텐츠 하나가 배포 되었다. 펜타곤 소프트 로고가 박혀 있는 CD 안에는 실루엣으로 표현된 기타를 치고 있는 소녀의 영상과 함께 그녀가 부르는 노래 한곡이 흘러나왔다. -응원가- 라는 제목의 노래는 특유의 음색과 가사의 전달력으로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기 시작했다. 그대여~ 너무나 힘든 하루였죠. 마음먹은 일 하나도 되지 않는 그런 하루. 그대의 슬픈 마음 알아요.. 그대여~ 너무 바쁜 하루였죠. 마음 편히 숨 돌릴 여유 조차 없는 그런 하루. 그대의 그런 마음 이해해요~ 꿈꿔왔던 미래와 많이 다른 현실에 점점 지쳐가고, 많이 실망했지만.. 그래도 언젠가 이루게될 그대의 세상. 나 항상 그대를 응원할게요. “뭐지...? 누구 노래야?” 통기타 하나와 목소리 만으로 사람들의 귀를 사로 잡은 그 영상의 끝에는 아무런 추가 설명 없이 단 한 줄의 문구만 적혀 있었다. [전격 데뷔 D-125.] 혹시 눈치가 빠른 사람은 바로 알아 차렸을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데뷔하는 바로 그 날이 ‘컴플리트 라온’의 출시일이었다. < EP. 41 : D-125 (1) > 끝 ⓒ 손인성# < EP. 41 : D-125 (2) > [전격 데뷔 D-125.] 혹시 눈치가 빠른 사람은 바로 알아 차렸을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데뷔하는 바로 그 날이 ‘컴플리트 라온’의 출시일이었다. & 펜타곤 직원 중에서도 상부의 몇몇만이 칸나의 존재를 알고 있는 그녀의 노래는 재난 피해지역을 시작으로 천천히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 노래가 게임인지 조차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은 단순히 한 가수가 작곡한 이재민들을 위한 ‘응원가’ 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가사에서 전달 되어 오는 곡의 느낌은 꼭 이재민들 뿐만아니라 힘든 업무를 끝낸 직장인들의 하루를 보듬어 주는 느낌이 들었다. 직접 곡을 만든 칸나의 이야기로는 하루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만든 곡이라나? 통기타의 반주와 달달한 그녀의 음성만으로도 뭔가 기가 막힌 곡이 나올거라 기대했지만, 설마 이정도로 퀄리티 높은 곡이 나올 줄이야... 칸나에게서 첫 녹음 테이프를 받은 날. 집으로 돌아와 유키와 함께 테이프에 담긴 노래를 처음 듣고 서로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던 기억이 있다. 키시모리 칸나. 그녀는 신의 선물의 엔딩곡에서 증명했듯이 싱어송 라이터로서 천재적인 센스를 지니고 있었다. 시험삼아 그녀의 녹음 테이프를 하란Q의 보컬인 테라다씨에게 들려주자, 그 역시 칸나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굉장합니다. 실로 천재에요!! 현재 제가 알고 있는 가수 중에도 그녀만큼 가사 전달력이 좋은 사람이 드물 정도니까요. 거기다 호소력 짙은 매력적인 보이스까지... 이 정도 곡이라면 발표와 동시에 거리에서 기적 같은 일 벌어 질 것입니다.” “기적 같은 일이요?” 당시에 테라다씨의 말을 들은 나는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를 못했다. 테라다씨는 관서 사람 특유의 리액션이 크고 조금 오버하는 면이 있었던지라,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흘려 들었었는데... “이것이 테라다씨가 말한 기적 같은 일인가?” 방금 전 오사카의 덴덴 타운에 위치한 제법 큰 게임 샵에 홍보용 CD를 전달해준 나와 모리타는 근처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며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 보고 있었다. 처음 가게 문을 열고 나온 점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매장 앞에 설치된 CD 플레이어에 음악을 재생 시키자, 스피커를 통해 잔잔한 통기타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칸나의 목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지자, 길을 가던 사람들의 걸음이 하나 둘씩 멈추기 시작했다. “어? 뭐지.. 처음 들어보는 노랜데?” “그러게 가수가 누구지? 노래 좋은데?”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칸나의 고운 목소리에 홀린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거 없이 게임 샵 앞으로 모여 들었다. 그러자 방금 전 CD 재생 시켰던 점원 조차 멍하니 그녀를 노래를 듣고 있다가 어느새 몰려든 사람들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사님... 이거?” “잠깐만, 조금만 더 지켜보자.”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부르는 모리타의 목소리에 나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솔직히 짜고치는 고스톱이라도 이렇게까지 무언가에 홀린 것 마냥 누군가의 음악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까? “저기, 지금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 가수가 누군가요?” “네? 아, 그게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펜타곤 소프트에서 홍보용 CD라고 가져다 준거라서...” 그러자 점원의 이야기를 들은 손님들이 추측성 대화를 내뱉기 시작했다. “펜타곤이라면 게임 회사 아냐?” “맞아. 거기다 최근에 지진 피해를 입은 고베 지역 자원 봉사로 유명하지. 그런데 왜 이런 음악을 홍보하지? 설마 연예계 사업이라도 시작하려는 건가?” “에이... 설마 그냥 신작 게임 홍보겠지. 예전에 신의 선물도 음악을 주제로 했었잖아.” “어라? 이 시기의 신작 게임이라면...? 설마...” “컴플리트 라온!?” 가게 앞에서 대화를 나누던 남자 두명은 다급한 표정으로 점원에게 물었다. “설마 저 CD. 펜타곤에서 만드는 거치형 콘솔의 신작 게임인가요?” 난처한 표정으로 뒷 머리를 긁적이던 점원은 손님의 질문에 이번에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하긴 당연히 그럴 것이 우리도 CD에 대해 별다른 설명은 하지 않았거든... 물론 ‘컴플리트 라온’과 함께 홍보한다면 그 효과가 배가 되겠지만, 그것보다 나는 사람들이 아무런 편견 없이 칸나의 노래를 들어 주기를 바랬다. 그때 모든 질문에 모른다고만 대답하던 점원이 은근슬쩍 고개를 들며 손님에게 물었다. “저기.. 혹시 CD를 원하는 고객들이 있다면 배포 해달라고, 펜타곤에서 50개 정도 주고 갔는데 필요하세요?” “······. 그런건 빨리 말씀 하셨어야죠!! 당장 주세요!!” “저도요!!” “저도 주세요~!!” 잠시 후. 순식간에 동이 난 상자를 멍하니 바라보던 점원은 살짝 고개를 갸웃 거리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차.. 내 것도 따로 챙길 걸...” 나른한 봄 햇살 아래 울려 퍼지는 칸나의 기분 좋은 목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삼키던 나는 홍보용 미니 CD를 손에 들고 돌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지그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 당신을 위한 ‘응원가’ 라는 테마로 진행된 ‘버츄어 아이돌’ 프로젝트의 그 첫 번째 신호탄이 성공적으로 궤도에 올랐다. 칸나의 노래는 이내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고베에서 오사카. 그리고 교토와 나고야를 거쳐 도쿄에 다다랐다. 약 3~4일의 간격을 두고 지역별 게임 샵에 소량으로 배포된 이 CD를 얻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을 낳고 있었다. 일반 CD 보다 3분의 1정도 크기로 제작된 홍보용 CD은 주로 1~2곡의 음악을 담기 위해 일반 가수들도 자주 사용하는 미니 디스크 였는데, 세로로 제작된 CD 커버에는 칸나를 이미지로 삼은 실루엣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었다. 일반 레코드 점에 따로 팔지도 않고 오로지 홍보용 디스크로만 제작, 배포 되었기에 ‘레어’한물건이라는 소문 때문일까? 사람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아키바의 펜타곤 샵에서도 1,2호점을 통틀어 약 500장의 CD를 뿌렸건만,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모두 동이나 버렸다. 물론 펜타곤을 찾아오는 유저를 생각한다면 훨씬 더 많은 수량을 준비해야 하는게 당연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홍보용 CD’ 니까... 오히려 넉넉한 수량을 뿌리는 것보다 모자르게 뿌려야지만, 그 효과를 배가 시킬 수 있다. 펜타곤 샵이라면 많은 수량을 뿌릴 거라 기대하고 멀리서 온 손님들도 있었지만, 무료 배포되는 CD에 클레임을 걸수도 없기에 안타까움을 토로 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혹시나 게임 매장에 남은 CD가 없나 아키하바라를 좀비처럼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나는 펜타곤 샵으로 들어오는 한 커플에 눈길을 돌렸다. “아~!! 없어!! 또 없어~!! 아무데도 없어!!” “지.. 진정해 나카무라. 응?” “그러게 내가 아침 일찍 오자고 했잖아. 내가 이럴줄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그건 내가 잘 못했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사정이 있었다고!!” 이제 갓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는 ‘버추어 아이돌’ 홍보 CD가 전부 떨어졌다는 말에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들리는 대화 내용으로 보아 아침 일찍 오려고 했는데, 여자쪽에 사정이 생겨서 늦은 모양이었다. 남자쪽 펜타곤 소프트의 광팬이었는지. 라온용 소프트를 구입할 때 지급하는 굿즈 아이템 포인트로 교환할 수 있는 드래곤 엠블렘 백팩을 둘러매고 있었다. ‘허걱... 저걸 실제로 매고 다니는 사람이 우치무라 말고 또 있었네...?’ 아무튼 남자는 굉장히 억울했는지 점장인 미야자키에게 통 사정을 해보고 있었지만, 그런 손님이 한 둘이 아니다보니 그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몇분의 실랑이 끝에 포기한 남자는 세상 모든 걸 잃은 표정으로 터벅터벅 가게 문을 나섰다. “나카무라.. 미안해. 응? 화 풀어...” “아냐. 괜찮아. 뭐 어쩔 수 없지. 내일이나 모레 쯤 사이타마 쪽 게임샵에 한 번 들러보고.. 그래도 안되면 홋카이도까지 찾아가서라도 반드시 구해내고 말겠어.” ... 홋카이도는 왕복 차비를 생각하면 좀 오버 아닌가...? “아, 진짜. 남자가 쪼잔하게... 자꾸 그럴거야? 대체 무슨 노래길래 그렇게 구하고 싶어 안달인데? 그렇게 구하고 싶으면 후쿠시마쪽에 친척 분이 살고 있으니까. 그 분께 부탁해서 구해달라고 할게. 아마 시골이라 금방 구해주실거야.” “지.. 진짜?” 남자는 여자친구의 말에 그제서야 굳어진 얼굴을 풀며 웃어보였다. 그때 때마침 펜타곤 샵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칸나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대여~ 너무나 힘든 하루였죠. 마음먹은 일 하나도 되지 않는 그런 하루. 그대의 슬픈 마음 알아요.. 그대여~ 너무 바쁜 하루였죠. 마음 편히 숨 돌릴 여유조차 없는 그런 하루. 그대의 그런 마음 이해해요~ 그 순간 남자의 표정에 생기가 돌며 스피커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곤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며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말했다. “오!! 그래. 이 노래야!!” “이 노래라고..? 어디 얼마나 좋길래..” 여자친구는 잠시 두 눈을 감은 채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노랫 소리에 집중하는 듯해 보였다. 안그래도 심심했던 나는 한 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음악을 듣고 있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때? 마유미. 노래 좋지?” 남자친구의 밝은 미소에 살짝 얼굴을 붉힌 여자친구는 짐짓 못 이긴 척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그러고 보니 저 남자 제법 잘 생겼네. 눈도 크고 코도 시원하게도 뻗었네. 전형적인 미남이라 그런지 내가 보기엔 남자보다 여자쪽이 훨씬 좋아하는 것 같은데? 대신 눈치가 좀 없어 보이긴 한다. 전형적인 우유부단 형이야... “뭐.. 괘.. 괜찮네. 응. 솔직히 나쁘지 않아. 그런데...” “그런데...? 뭐?” “목소리가 어디서 많이 들어본 거 같은데? 나카무라. 안 그래?” “글쎄... 그러고보니..” “그러고보니? 그 것 봐. 너도 그렇지?” “신의 선물.. 엔딩곡 테마를 부른 사람의 목소리랑 비슷한거 같기고 하고...” 저런 대답은 좋지 않아. 만약에 유키라면 곧 장. 퍼억!! ... 그래.. 왠지 곧 있으면 한 대 맞을거 같더라니. 그들을 지켜보던 나는 마치 시트콤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기분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야이~ 맹추야. 넌 머릿속에 든 게 게임 밖에 없니!? 그거 말고 칸나 말야. 우리 친구 키시모리 칸나!!” 어라? 방금 저 아이 칸나라고 한 거 맞지? 손에 잘 닿지도 않는 곳에 등짝 스매싱을 제대로 얻어 맞은 남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칸나? 칸나가 왜 이런 곳에서 노래를... 어라? 잠깐 네 말을 들어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한데? 확실히 목소리가 익숙해.” “그렇지? 맞지!? 이거 칸나 목소리지?” 어라..? 설마 쟤네들.. 칸나 친구인가? < EP. 41 : D-125 (2) > 끝 ⓒ 손인성# < EP. 41 : D-125 (3) > “그렇지? 맞지!? 이거 칸나 목소리지?” 어라..? 설마 쟤네들.. 칸나 친구인가? 우연한 기회로 그들이 칸나와 알고 지내는 사이라는 걸 눈치챈 나는 점장인 미야자키에게 부탁해 그들을 사무실 안으로 불러 들였다. “이사님. 말씀하신 두 분 모시고 왔습니다.” “고마워요. 미야자키씨.” 미야자키씨에게 이끌려 사무실로 들어온 남녀 커플은 어색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이쪽으로 편히 앉으세요. 미야자키씨 미안한데, 마실 것 좀 가져다 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미야자키는 나의 부탁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을 나섰다. 여전히 좌불안석(坐不安席)으로 엉덩이를 반쯤 걸터 앉아 있는 그들을 바라보던 나는 최대한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들에게 내 소개를 전했다. “갑자기 이런 곳에 불러들여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다른 고객님들의 눈이 좀 있어서 함부로 전해 드리기가 그렇거든요.” 그와 동시에 품안에서 한 장의 미니 앨범을 꺼내들자, 내 앞에 앉아 있던 남자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탄성이 새어 나왔다. “우왓~!!” 이 녀석... 보기완 다르게 굉장히 호들갑스러운 성격이네, 아니면 게임에 관해서만 그런건가? 생각보다 가벼운 그의 성격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테이블 위해 앨범을 내려 놓자, 남자의 눈이 그대로 앨범을 쫓았다. 마음 같아선 좌우로 앨범을 휘적이며 놀려보고 싶었지만, 아까부터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이거.. 상당히 구하기 힘든 앨범이라면서요? 다른 손님도 있는데, 이렇게 막 주셔도 되나요?” 역시나 홍보 앨범에 눈이 돌아간 남자보다 여자 쪽이 날카로운 질문을 날릴 줄 아는군. 나는 테이블 위해 CD를 올려둔 채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안되죠. 그래서 이렇게 ‘몰래’ 드리고 있잖아요.” “왜죠...?” 여전히 나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는 그녀를 향해 난감한 미소를 지어보이자, 그녀 곁에 앉아 있는 남자친구가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까 들어올 때 못 들었어? 이사님이라잖아. 그정도 직급이라면 이 정도야...” 그러던 중 나와 눈 마주친 남자는 잠시 할 말을 잊은채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 거렸다. “혹시 강준혁 디렉터...” “아, 그러고 보니 제 소개가 늦었네요. 방금 말씀해 주신대로 펜타곤의 강준혁입니다.” “어억!! 실물이다!! 가끔 펜타곤 샵에 들린다더니, 사실이었어!!” ... 나를 본게 그렇게까지 놀라운 일인가? 침까지 튀어가며 기겁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호들갑 떨어대던 옛날의 준페이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뻔 했다. “실례가 안된다면 잠시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그.. 나, 나카무라라고 합니다. 이 쪽은 여자친구인 마유미구요.” “반갑습니다. 나카무라씨. 그리고 마유미씨. 사실 두 분을 이곳에 부른 건 제가 본의 아니게 여러분이 나눈 대화를 엿들었기 때문입니다.” “저희 대화를요?” “아까 매장안에서 노래를 듣다가 ‘칸나’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으셨나요? 저는 분명 그렇게 들었는데...?” “헉? 그 말씀은 설마, 이 노래를 정말 칸나가 불렀다는 말씀이세요?” 마유미라는 여자의 물음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이번에 저희 펜타곤에서 기획 중인 새로운 프로젝트에서 칸나씨의 노래가 ‘첫 번째’로 공개되었습니다.” “아~ 역시... 거 봐~ 나카무라 내 말이 맞지? 나는 한 번에 알겠던데.. 이 둔팅이...” “와.. 그렇구나. 난 진짜 꿈에도 몰랐네. 어? 그럼 잠깐만... 혹시 그러면 신의 선물의 엔딩곡도 혹시?” 그제서야 눈치를 챈 나카무라의 질문에 나는 이번에도 역시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였다. “허어억.. 나 방금 소름 돋았어. 설마 그 엔딩곡을 칸나가 부른 것일 줄이야... 그런데 생각해 보니 치사하네. 친구인 우리들한테까지 비밀로 할 줄이야. 섭섭하다.” “뭔가 우리에게 말 못 할 사정이 있었겠지.” 칸나의 사정을 이해해주려는 마유미의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사실 그렇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준비하는 프로젝트는 사내에서도 비공개 프로젝트에 속하기에 직접 개발에 참여하는 팀장급 인원 말고는 그녀에 대한 정보는 철저히 비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녀의 요청이기도 하구요.” “아... 그럼 혹시 칸나의 이 노래가 성공하면 그... 데뷔도 가능한 건가요?” “그것에 대해선 확답을 드리기가 좀 힘드네요.” 그때 우리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만 있던 나카무라가 나에게 물었다. “저기 아까 전에 하신 말씀 중에... 한가지 궁금한게 있는데요.” “말씀해보세요. 제가 말할 수 있는 선에 선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새로운 프로젝트에서 칸나의 노래가 ‘첫 번째’로 공개 되었다고 하셨는데, 그 의미가 무엇인지?” 오호라...? 이 녀석은 게임에 대해선 상당히 눈치가 빠른데? 그러고 보니 나도 무의식 중에 ‘첫 번째’ 라는 말을 입에 담아 버렸군.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선 딱히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기에 나는 테이블 위의 미니 앨범을 집어들며 대답했다. “그걸 설명하기 위해선 이 앨범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먼저 설명해야겠네요. 하지만 그 전에 한가지 약속해 주실 것이 있습니다.” “네?” “이 앨범에 대해서도. 그리고 특히 칸나씨에 대해서도. 일절 외부에 알려져선 안됩니다. 여러분이 칸나씨의 친구라면 그녀를 위해서도 꼭 비밀을 지켜주세요.” 내 말을 듣고 난 커플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칸나의 대학 친구인 나카무라 커플이 다녀가고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퇴근후 사적으로 만난 술 자리에서 준페이 500cc 가득 채워진 맥주 쪼끼를 벌컥벌컥 삼키고 있었다. “푸하~!! 크으~!!” “천천히 좀 마셔라. 인마.” “야. 내가 지금 안 마시게 생겼냐?” “그쪽도 뭔가 일이 바쁘니 연락이 잘 안되는 거겠지. 미사토씨가 백수도 아니고, 연락 몇 번 씹힌 걸로 뭘 그렇게 호들갑이냐.” “씹혀? 그래. 그거 참 지금 내 상황에 딱 맞는 표현이다. 그래 씹힌 거지.. 씹힌 거야..” 지난번 지진 사건 이후로 어떻게 연락처를 주고 받아서 미사토씨와 잘되가나 싶더니, 한 10일 전부터 그녀와 연락이 끊겼다고 아까부터 얼마나 징징거리는지... 나는 카운터 너머의 마스터에게 맥주 한 잔을 더 주문한 뒤 안주로 나온 고로케를 씹었다. “이럴수록 그냥 일에만 집중해. 그래야 생각도 덜나는 법이야.” “네가 생각해도 나 까인거 맞지? 그렇지?” “······.” 물론 미사토씨 널 좋아한다면 굳이 연락을 안 기다려도 먼저 연락이 왔겠지. 나도 연애를 많이 해본 건 아니라 어떻게 조언할 처지가 못 되긴 하지만, 10일 정도 연락이 끊긴 거라면 뭐 끝났다고 볼 수 있지. 나는 가볍게 준페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위로해주었다. “생맥주 나왔습니다.” 주인장이 가져다준 맥주를 준페이 앞으로 밀어주자, 녀석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맥주잔을 집어 들었다. “야, 야, 천천히 마시라니깐~!!” “저기... 손님.” “아,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시끄러웠죠?” “아뇨. 그게 아니라 혹시 괜찮으시다면 가게 안에 음악을 좀 틀어도 되겠습니까? 최근에 아들 녀석이 선물해준 CD가 있는데, 어찌나 노래가 좋던지 자꾸만 듣게 되네요.” “네? 아, 네. 물론이죠. 저희는 상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주인장은 다른 손님들에게도 양해를 구한 뒤, 조그만 CD를 플레이어 안에 고정시켰다. “히꾹. 쳇.. 안그래도 여자한테 까여서 기분도 더러운데, 노래는 무슨...” “어이, 너 취했냐?” 빈정거리는 말투로 툴툴대는 준페이의 목소리가 혹시나 주인장 귀에 들렸을까 눈치를 살피던 중 가게 안에 놓여진 조그만 CD 플레이어에서 익숙한 기타음이 흘러 나왔다. “어라.. 이건?” “아들 녀석이 그러는데, 현재 구하기도 쉽지 않은 음반이라고 하더군요. 저야 엔카쪽이 훨씬 취향에 맞긴 하지만, 가끔은 이런 것도 좋더군요.” 그때 음악에 쫑긋 귀를 세우던 준페이가 반쯤 감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라? 이거 당신을 위한 응원가 아냐? 히꾹. 아~ 이 노래 좋지~” “그렇죠? 손님께서 뭘 좀 아시는 군요.” “암요~ 알다마다요. 하지만~!! 내 옆에 있는 이 녀석이 더 잘 알 걸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하하..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녀석 좀 취해서 그래요. 신경쓰지 마세요.” “허허.. 그런 듯 하네요. 친구분 뒤로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주세요. 저희 가게는 의자 등받이가 없어서 가끔 손님들위 뒤로 나자빠지시거든요.” “아.. 네. 알겠습니다.” “저기 마스터. 여기 생맥주 하나 더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반대편 테이블의 주문에 서둘러 자리를 옮기는 주인장을 바라보며 잠시 한 눈 판 사이. 준페이는 어느새 방금 나온 맥주 500을 단숨에 비워내고 빈 잔을 내려두고 있었다. “꿈 꿔왔던 미래와 많이 다른 현실에 점점 지쳐가고, 많이 실망했지만.. 그래도 언젠가 이루게될 그대의 세상. 나 항상 그대를 응원할게요.” 한껏 취기가 올랐는지,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던 녀석은 갑자기 빈 맥주잔을 움켜쥔채 나에게 말했다. “너. 지금 이 노래 부르는 사람 만나봤지?” “응? 아, 그거야 물론이지.” “이쁘냐?” “······.” 하여간 저 질문은 남자라면 동서양을 막론라고 한 결 같구나. 나는 잠시 기타줄을 튕기던 칸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예뻐. 좀 청순한 스타일이야.” “정말? 그럼 나 소개 좀 시켜주라. 사실 너에게는 말 안했었지만, 오래 전부터 노래 잘 부르는 여자가 내 이상형이었거든.” “아~ 그랬어? 거의 10년을 알고 지내면서도 몰랐네...” “그렇지? 내가 좀 센티한 구석도 있거든. 어때? 가능해?” “아니.” “아~ 왜~!!” “준페이 너 고등학교 1학년 때 뭐하고 살았냐?” “응? 뭐 그때 부활동하고, 친구들이랑 놀러다니고 그랬지? 그런데 갑자기 고등학교 얘긴 왜 꺼내냐?” “아.. 저 노래 부르는 아이. 그때 태어난 아이거든.” “······.” 녀석은 그 후로 다시는 칸나에 대해서 일절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 EP. 41 : D-125 (3) > 끝 ⓒ 손인성# < EP. 41 : D-125 (4) > & 1995년의 초 여름. 현재 게임 업계는 상당한 과도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실 이러한 과도기는 항상 차세대 콘솔이 등장할 때마다 나타나는 고질적인 문제이긴 했지만, 이번 만큼은 특히나 그 경우가 더욱 심한 해인 듯 싶다. 게임의 역사에 대해 조금이나마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략 눈치 챘겠지만, 바로 이 90년대 중반이 기존 2D 게임과 차세대 3D 게임의 획을 긋는 가장 중요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단순히 양 옆으로만 캐릭터를 조작했던 기존의 2D 게임들과는 달리, 가상의 공간 안에서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는 3D 게임은 유저들에게 색다른 느낌을 전해주기 충분했다. 아케이드 센터에서 처음 선보인 ‘리얼 파이터’를 시작으로 현재 3D 게임 시장을 주름 잡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콘솔 회사 중 가장 보급이 뒤쳐져 있는 NEGA 였다. 그리고 그 뒤를 바싹 따르고 있는게 NANCO 정도랄까? 둘다 오래 전부터 폴리곤을 활용한 게임을 연구해 왔기에 현재에 이르러 어느정도 선두에 서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덧붙여서 설명하자면 민텐도 역시 슈퍼 패밀리에 폴리곤 그래픽을 사용한 적이 있다. 음? 어떻게 슈퍼 패밀리에 3D 그래픽이 돌아갈 수 있는 거냐고? 뭐 폴리곤위에 덧 씌우는 텍스쳐 없이 통째로 굴린다면야 뭐 못할 것도 없긴 하지만... 솔직히 버거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슈팅 게임인 A-ZERO 라던가. 시게루씨의 ‘카린의 전설’ 타이틀 화면에서 3D로 표현된 3개의 삼각형이 모여 하나의 트라이 포스를 이루는 장면은 게이머라면 누구나 기억할 만한 순간이었으니까... 아무튼 그 당시 폴리곤이란 다루기도 까다롭고, 행여 만든다고 하여도 결과물이 결코 예쁘다고 말할 수 없던 시기었던지라 개발자들에게 외면 받는 기술에 불과했다. 바로 ‘텍스쳐’ 기술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말이지... 텍스쳐란 완성된 폴리곤 그래픽의 표면에 덧씌우는 비트맵 이미지를 말한다. 사람의 몸안에 뼈와 근육이 있고, 그 위에 피부가 있듯이 폴리곤에도 마찬가지 기술을 적용한 것이다. 마치 찰흙 인형 위에 그림을 오려 붙인 것처럼 아주 단순한 발상이지만, 당시 이런 기발한 발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업계에서도 극히 드물었다. 아니 생각을 했다하더라도 그 상상력을 뒷받침 해 줄만한 고성능 기기는 단가가 너무 비싸기도 했지만...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오락실에서나 볼 수 있었던 압도적인 그래픽을 가정용 콘솔에서도 만나볼 수 있는 때가 되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1995년이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NEGA에서 발매한 새턴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정밀한 2D 스프라이트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콘솔입니다. 예를 들어 현재 아케이드 센터에서 가장 높은 동전 회수률을 보이고 있는 SMK사의 킹 오브 시리즈나 사무라이의 투혼 시리즈를 가정에서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된 제품이죠.” “흐음...” 도쿄에 위치한 어느 대학교 강당... 며칠 전 학교장의 요청으로 이곳에서 현 게임 산업를 주제로 한 세미나 열게된 나는 미래의 게임 산업을 주도 할 학생들을 모아두고 강연 중이었다. 고맙게도 펜타곤이 이곳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취직하고 싶은 회사 No.1 이라나? 하지만 그건 그렇다치고, 천장에 매달린 프로젝터의 밝기가 왜이렇게 센거야? 용접하는 것도 아닌데, 눈에 아다리 걸리겠네.. 피로한 두 눈을 살짝 감았다 뜨며 마저 설명을 이어 나가려는데, 강당에 있던 학생 중에 한명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저기... 하지만 현재 NEGA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게임은 리얼 파이터 아닌가요? 어째서 그런 폴리곤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2D 스프라이트를 기반으로 콘솔을 제작한 겁니까?” “그에 대한 대답을 해드리기 전에 저기... 프로젝터 밝기 좀 줄여주시겠어요? 세미나 두 번만 했다간 장님 될 거 같은데?” 다소 형식적으로 진행 되었던 세미나는 나의 농담으로 조금은 분위기가 누그러 드는게 느껴졌다. 프로젝터를 담당하던 여 선생은 얼굴을 붉히며 프로젝터의 밝기를 낮춰 주었다. “이제 좀 학생분들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겠군요. 자~ 그럼 우선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리죠. 아~ 하지만 그전에 한가지 더. 이곳에서 제가 NEGA나 민텐도에 대해 하는 이야기는 모두 저라는 개인의 추측일 뿐이라는 걸 밝혀드립니다. 펜타곤에 대해선 펙트만 알려드려도 괜찮지만, 타 회사에 대해선 허위 사실 유포로 소송에 걸릴 수도 있거든요.” “하하하~” “자~ 그럼 이제 진짜로 NEGA 새턴에 대해서 소설을 한번 써보기로 하죠. 일단 방금 학생이 질문한 것처럼 현재 NEGA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게임은 ‘리얼 파이터’가 맞습니다. 혹시 여기서 최근에 출시한 리얼 파이터 2 해보신 분?” 그러자 대 강당에 모여 있던 거의 태반의 남학생들이 손을 들었다. 누가 게임 좋아하는 학생들 아니랄까봐 거의 다 해봤네... “그렇죠. 저도 어느정도 예상 했지만, 남학생들은 거의 다 해봤네요. 현재 강당 안에 성비율이 약 8:2 정도니까 거의 80%가 리얼파이터 2를 해보았다는 이야기군요.” 내 말에 다시 한 번 강당 안에 키득 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웃지들 마시라.. 나도 처음 들어오고 무슨 군대 위문 공연온 줄 알았으니까... “리얼 파이터2 전작과 비교해서 어땠나요?” “그래픽이 어마어마하게 좋아졌던데요?” “텍스처가 좋아졌어요.” “사라와 파이가 이뻐졌어요~!!” ... 방금 전 소감은 나도 동감한다. 확실히 전작에선 사람이 아니었지...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프레임이 엄청 부드러워졌던데요? 전작은 눈이 좀 아팠었는데...” 나는 마지막에 들려온 학생의 소감에 손가락을 튕기며 마이크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방금 굉장히 좋은 지적이었습니다. 프레임. 확실히 기존의 2D 게임과 현재 3D 게임 개발의 다른 점이 있다면 일정한 프레임을 유지시키는 것이니까요.” 나는 단상 위에 준비된 차가운 생수로 목을 축인 뒤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최근 어느 대학의 연구 결과에서 사람의 뇌는 참 특이하게도 2D와 3D를 인식하는 것에서 굉장한 차이를 보인다고 발표했습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여러분이 지금 TV 애니메이션인 ‘드래곤 볼’ 보고 있다고 칩시다. 혹시 드래곤 볼에서 손오공이 움직일 때의 초당 몇장의 프레임을 사용 하고 있는지 아시는 분?” “초당 약 15에서 20 프레임 내외로 알고 있습니다. 전투를 벌일 때는 10 프레임까지 떨어질 때도 있구요.” 아따. 누가 게임 전문 학과 다니는 학생 아니랄까봐 기가 막히게도 알고 있네... “네. 맞습니다. 반면 미국의 디즈니사에서 만든 ‘알라딘’이나 ‘라이온 킹’ 같은 경우엔 하나의 씬에 초당 48에서 60프레임 가까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드래곤 볼에 비해 굉장히 부드러운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죠.” 그러자 머릿속에 디즈니 사의 애니메이션을 떠올린 학생들이 묵묵히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전 드래곤 볼이 디즈니 사의 애니메이션보다 못하다는 말을 하려는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드래곤 볼을 보았을 때 혹시 프레임이 모자라 장면이 상상이 안가거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었나요? 아마 이 자리에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여기서 사람의 뇌에 대한 재밌는 사실이 드러나는데, 바로 2D로 그려진 만화에서는 사람의 뇌가 중간 중간 비워진 프레임을 알아서 상상해 준다는 것이죠. 따라서 프레임이 부족한 거친 씬에서도 여러분들이 TV를 볼 때 전혀 위화감을 느낄 수 없는 겁니다. 하지만 3D는 조금 달라요. 특이하게 사람의 뇌에서 3D 오브젝트를 하나의 물체로 인식을 하기 때문에 프레임이 떨어지는 순간. 굉장히 어색한 느낌을 받게 된다고 하더군요.” “아아....” “즉 3D 게임은 적어도 플레이 내내 28 프레임까지는 유지를 시켜주어야 만이 플레이어가 게임을 하는데 무리를 느끼지 않는 것이죠. NEGA 역시 이 점을 인지하고 리얼 파이터 2의 프레임을 전작의 두배인 60 프레임으로 고정시켰습니다.” “오오...” “어라? 그러면 NEGA의 3D 기술력이 현재 최고라는 말씀 아닌가요? 그런데 왜 새턴은 2D 기반으로 제작한 건가요?” “흐음.. 이야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는데, 방금 학생의 말대로 현재 게임 산업에선 3D 격투게임에 대한 IP를 보유하고 있는 회사만이 그 실력을 인정 받고 있는 추세입니다. NEGA와 NANCO가 그렇죠. 하지만 NEGA가 새턴을 기획할 당시엔 2D 게임이 각광을 받던 시대였습니다. 지난 세대에서 민텐도의 슈퍼 패밀리와 저희 펜타곤의 라온에 의해 입지가 낮아진 NEGA는 16비트 콘솔 사업에서 가장 먼저 손을 떼었습니다. 그리고 32비트 시장을 선 독점하기 위해 태양계 프로젝트를 시작했죠.” “태양계 프로젝트요?” “NEGA 새턴에서 ‘새턴’은 본래 프로젝트 이름이었다고 하네요. 태양계에 맞춰 순서대로 프로젝트를 준비해왔는데, 그중에 가장 반응이 좋았던게 바로 6번째 였던 새턴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러던 중 한 잡지사를 통해 NEGA에서 새로운 차세대 기종을 만들고 있다는 루머가 퍼지자, NEGA는 프로젝트명 그대로 새턴이라는 기기를 공식적으로 발표해버렸죠. 사실 어떤 프로젝트가 낙찰 되느냐에 따라 NEGA 머큐리도 될 수 있었고, 쥬피터로도 불렸을 수도 있겠네요.” “아~ 그렇구나...” “물론 최초로 새턴을 발표했을 때 유저들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새로운 차세대 기기에서는 현재 아케이드 센터 인기를 끌고 있는 대부분의 2D 격투 게임을 집에서 즐길 수 있다는 기대감이 가득했으니까요. 물론 NEGA도 정확히 그 부분을 목표로 했으니, 새로운 콘솔은 반드시 성공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죠. 하지만... 93년 말 NEGA의 간판 프로듀서인 스즈키씨가 만들어낸 ‘리얼 파이터’ 하나로 NEGA는 아케이드 센터에서 굉장한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새턴 프로젝트는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게 되었죠.” 나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세미나에 집중하는 학생들의 표정에 살짝 웃으며 NEGA 새턴의 공식 스펙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덧붙여 주었다. 그동안 게임 업계에 대한 소식을 이토록 세세하게 들어본 경험이 없던 학생들은 어느새 나의 이야기게 푹 빠져 쉬는 시간이 지난 것도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무대 왼편에서 양손을 X자로 교차하고 있는 선생의 제스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손목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라?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도 몰랐네요. 세미나 1부를 마치기 전에 새턴에 대한 저의 소설 같은 이야기의 마무리를 짓자면, 현재 새턴의 부진에 대한 가장 큰 적은 민텐도도 센소니도... 그리고 저희 펜타곤도 아닌 자사 프로듀서의 ‘전대미문의 팀킬’ 이었다. 라고 볼 수 있겠네요. 한 가지 덧붙이 자면 NEGA의 ‘리얼 파이터’로 인해 차세대 콘솔의 진로를 잡은 곳이 바로 센소니의 ‘기어 스테이션’입니다. 잠시 15분 정도 휴식을 취하고 이어지는 2부에서는 센소니의 기어 스테이션에 대한 이야기와...” 나는 잠시 마이크를 떼어 내며 한 템포 멈춘 뒤. 학생들을 향해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 펜타곤에서 제작한 차세대.. TV 거치형 콘솔의 발표가 이 자리에서 있겠습니다.” “허어어억!!!!!!! 이런 세상에.. 여기서 발표 한다고!? 계 탔다.” “미친.. 대박이다. 대박이야!!” 나의 마지막 멘트에 강당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비명과도 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순간 강당 분위기가 CES 행사 때 저리가라 할 정도로 끓어 올랐다. 하긴 이런 대학 세미나에서 신기종 발표할 줄은 아무도 생각 못했겠지... 나는 단상 위에 남아 있는 물을 마저 삼키곤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 EP. 41 : D-125 (4) > 끝 ⓒ 손인성# < EP. 41 : D-125 (5) > & 15분 간의 휴식시간이 끝나고, 강당으로 돌아온 나는 좌석에 앉아 있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마이크를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아까보다 학생이 늘어난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요?” 강당 곳곳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로 보건데, 2부에서 발표할 내용을 전해 듣고 서둘러 달려온 인원이 추가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뭐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일반 좌석을 빼곡히 채운 것도 모자라, 좌우 계단까지 점령하고 앉아 있는 학생들을 바라보니 게임에 대한 그들의 열정이 전해져오는 느낌이 들었다. 전에 준페이 녀석과 술 한잔 하면서도 느꼈지만, 더 이상 이 세계에서의 나도 마냥 젊지만은 않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 그럼 아까 말씀 드린 대로 2부 순서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단상에 설치 되어 있는 거대한 스크린에 NEGA 새턴과 기어 스테이션의 사진을 띄우며 양 기종에 대한 설명을 이어 나갔다. 나는 기어 스테이션이 생겨난 탄생 비화와 더불어 민텐도와 센소니의 협동 프로젝트가 실패하게 된 원인에 대해 추가 설명을 덧붙이자, 학생들의 표정에 놀라움이 스쳤다. 센소니와 민텐도에 대해선 일전에 잡지사 인터뷰에서도 간략하게 이유를 다루었던 부분이기에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마지막으로 기어 스테이션의 스펙에 대한 이야기로 센소니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즉 간단히 말씀 드리면 기어 스테이션은 새턴과는 달리 3D기술에 특화되어 있다는 걸 알 수있죠. 또한 개발 툴이 새턴에 비해 굉장히 쉬운 편입니다. 덕분에 센소니는 인지도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NANCO와 같은 대형 개발사를 자기편으로 끌어 들일 수 있었죠. 개발 환경이 쉬우면서도 강력한 퍼포먼스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콘솔이야 말로 개발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부분이니까요. 아마 센소니와 NEGA의 차이는 조만간 확연히 드러날 것 입니다.” 그때 맨 앞 줄에 있던 호리호리한 체형의 남학생이 나를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학생은 흘러내린 안경을 쓸어올리며 나에게 물었다. “하지만 지난 달 잡지에서 보기에 현재 새턴과 기어 프테이션의 판매량에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새턴이 조금 앞서고 있던데요? 아까 1부에서 민텐도에 대한 설명을 하실 때 보급률의 중요성을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네. 맞습니다. 하지만 이제 고작 6개월 된 콘솔의 보급률을 따지기엔 조금 이른 판단이라 할 수 있겠네요. 오히려 NEGA에선 지금 상황이 매우 치욕적인 상황이라 볼 수 있습니다. 민텐도도 아니고, 콘솔 업계에 처음 입문한 센소니에게 판매량에서 업치락 뒤치락 하고 있는 실정이니까요. 원래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치고 나가 민텐도가 없는 틈에 시장을 점령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는 걸 잊어선 안됩니다. 하지만 센소니와 NANCO의 기대 이상의 선방으로 상당히 주춤하고 있는 추세지요. 아마 ‘리얼 파이터’가 없었다면 더 힘든 싸움이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앞으로 게임 시장의 방향에 따라 두 회사의 차이가 점점 확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학생은 나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때 그 뒤에 있던 또 다른 학생이 나에게 물었다. “하지만 기어 스테이션은 3D에 중점을 둔 기기인 만큼 2D 성능이 매우 취약하던데요. 그리고 로딩도 새턴에 비해 너무 느립니다. 이에 대한 해결 방법은 없는 건가요?” “새턴과 달리 초기부터 3D 성능에 중점을 두긴 했지만, 센소니도 아마 선택을 해야했을 겁니다. 2D 성능까지 커버한다면 아마 그들이 노린 29,800엔이라는 소비자 가격은 절대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요. 모든 일에 일장일단(一長一短)이 있듯이 앞으로의 게임 산업의 방향을 읽고 선택한 결과가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두 번째 로딩에 대한 질문..” “아쉽지만 이 부분에 대해선 현재 어쩔 방법이 없습니다. 물론 프로그래머의 실력에 따라 로딩 속도를 줄일 수 있지만, 본격적으로 전 기종이 CD 매체를 사용하게 된 지금. 그들 역시 이 상황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아마 프로그래머의 실력에 따라 시간이 흐를수록 차츰 나아질거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원하는 답이 되었나요? 혹시 또 다른 질문 없으신가요?” “······.” “더 이상 질문이 없다면 이제 슬슬 저희 펜타곤의 소식을 전해드릴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그러자 좌석에 앉아 있던 학생들은 일제히 기대에 찬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오오오!!! 이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현재까지 라온의 거치기 모델인 ‘컴플리트 라온’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루머에 불과하기에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연일 화제가 되고 있었다. 자신의 친척이 펜타곤에 다니는데, ‘신형 콘솔에는 컨트롤러가 포함되어 있지 않는다고 들었다.’ 라는 말에 그게 말이 되냐는 비난이 쏟아졌고, 혹자는 컴퓨터 HDD가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게시판에 올렸다가 그렇게 되면 크기가 장난 아니게 될 거라는 말에 묵살 당했다. “작년 CES에서 ‘컴플리트 라온으로 출시하는 드래곤 엠블렘의 두 번째 에피소드와 내가 없는 거리에 대한 퍼포먼스 영상을 시연했습니다. 현지 반응은 뜨거웠고, 그것은 저희 펜타곤으로서도 굉장히 가슴 설레이는 일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가능하면 여러분들께 조금 더 빨리 소식을 전하고 싶었지만, 센소니와 NEGA에서 발표한 신기종에 결코 뒤처지지 않는 기기를 만들기 위해 다소 시간이 걸리게 되었네요. 먼저 컴플리트 라온을 발표하기 전에 여러분들께 소개 시켜드릴 개발자 분이 계십니다.”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어느새 무대 옆에서 대기중인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검은 뿔테 안경에 외소한 체구의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사인을 보내주었다. “소개 합니다. 풀 메탈 기어의 디렉터 호우지마 히데키씨입니다.” 약간 쑥쓰러운 표정으로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호우지마는 내 곁에 다가와 학생들에게 간단한 인사를 마쳤다. 그러자 학생들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호우지마 히데키...? 누구지?” “나 알어. 풀 메탈 기어라고 잠입 액션 게임 만든 사람이야. 예전에 MSX랑 패밀리로 재밌게 했었는데.” “아~ 그 뭐냐. 위에서 내려다 보는 2D 게임. 그건 나도 해봤어. 아마 2까지 나왔었던 것 같은데.. 색다른 재미가 있었지.” “맞아. 맞아.” 확실히 독특한 게임성을 인정 받았지만, 풀 메탈 기어가 출시 되었던 때는 드래곤 워리어 라던가 파이널 프론티어 같은 RPG 게임이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던 시기라 일부 매니아가 아니고서는 그가 만든 풀 메탈 기어를 해본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또한 폭스 소프트의 잘못 된 판단으로 그가 만든 풀 메탈기어를 비주류 콘솔 용으로 출시한 탓에 이름이 알려지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런 그가 이 자리에 나온 것은 바로 컴플리트 라온의 동시 발매 런칭작으로 출시될 게임 때문이었다. 호우지마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이 자리가 역시나 부담이 되는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 게임 산업에서 함께 일하게 될 여러분들에게 제가 만든 ‘풀 메탈 기어 솔리드’를 가장 먼저 소개 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에... 제가 이렇게 펜타곤 소프트의 강준혁씨와 함께 이 자리에 서기까지 준혁씨에게 참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서 제가 만든 풀 메탈 기어를 해보신 분이 있다면 손 한번만 들어 보시겠습니까?” 그러자 호우지마의 요청에 강당에 모인 학생들 중 약 절반 정도가 손을 들었다. 아무래도 게임을 전문으로 하는 학과다 보니 그의 게임을 즐겨 본 학생이 꽤나 존재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많이 계시네요. 아무래도 학과가 학과다보니, 플레이 해보신 분들이 다수 계시는 듯한데, 사실 일반적인 통계로 따지면 제가 만든 게임은 그렇게 흥행하지 못했습니다. 2 제작 이후에는 본사에서도 실망했는지, 더 이상 차기작에 대한 기획서를 받아주지 않더군요.” “아아, 난 재밌게 했었는데...”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호우지마의 이야기에 여기저기서 안타까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런 때에 여기 있는 준혁씨께서 저희 본사로 직접 전화하셔서 ‘풀 메탈 기어’의 차기작에 대한 요청을 하셨죠. 아시다시피 저희 폭스 소프트에서는 실황 축구라던가, 야구, 악마성 시리즈를 비롯해 수많은 인기 작품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준혁씨는 ‘풀 메탈 기어’의 차기작을 원하셨습니다.” 그새 조금은 긴장이 풀렸는지, 학생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는 호우지마를 바라보던 나는 양쪽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지었다. 하긴 처음 ‘풀 메탈 기어’의 후속작을 함께 런칭 하고 싶다는 나의 말에 카와구치씨 조자 깜짝 놀라 나를 말렸을 정도니까... 컴플리트 라온의 런칭일에 기왕이면 폭스 소프트의 더 유명한 작품과 연계하고 싶은 건 당연한 사실이니까. 하지만 나는 자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했던 ‘풀 메탈기어’의 세계관은 이제부터가 진짜 본격적인 시작이니까. “그런 준혁씨의 노고에 보답하기 위해... 지금까지 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게임을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와아아아~~!!” 학생들의 박수를 받으며 대강당의 조명이 천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스피커에서 내 귀에는 너무나 익숙한 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기는 스네이크. 들리는가? 중령.” 중저음 남성의 목소리는 단 몇마디 만으로 좌중의 분위기를 휘어잡기 시작했다. “아아~ 확실히 들린다. 스네이크. 아무래도 혈액속에 나노머신이 제대로 탑재가 되었나보군.” “이제부터 적 기지를 향한 단독 해일로 미션에 돌입한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스네이크. 이번 미션은 결코 적에게 들켜선 안되는 단독 잠입 미션이다. 행여 적에게 사로 잡히더라도 국가는 너의 존재를 부정할 것이야. 따라서 모든 장비 역시 현지에서 조달해야한다.” “... 총기의 루트가 역으로 추적 당할 수도 있으니까...” “맞아. 현재 연구소에는 통칭 ‘오타콘’이라 불리우는 할 에머리히 박사가 감금되어 있다. 자네의 임무는 에머리히 박사를 무사히 구출해 내는 것이야. 할 수 있겠나?” “라져...” “그럼 임무를 시작한다.” 깊은 수심 속에서 나누는 둘의 대화와 함께 수중 어뢰처럼 보이는 개인종 잠수정이 발사 되자, 화면을 바라보던 학생들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뭐.. 뭐야. 저게... 완전 영화나 다름없잖아...?” “그러게... 거기다 저기 영상에 나오는 연출... 전부 풀 폴리곤이잖아?” 학생들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놀라운 연출 화면에 입을 쩍 벌린채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호우지마 히데키. 본래 게임보다 영화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80년대에 ‘풀 메탈 기어’를 만들면서도 항상 영화같은 연출과 스토리를 염두하고 있었다. 일반 액션 게임과는 달리 심도 깊은 시나리오와 함께 최종 보스가 자신의 상관이었다는 이야기를 담아 반전 요소를 노렸으나, 워낙에 어려운 난이도와 함께 당시 액션 게임의 스토리를 눈여겨 보는 사람이 드물었기에 ‘풀 메탈 기어’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폴리곤의 등장으로 새로운 시점의 연출이 가능해진 지금. 호우지마의 ‘풀 메탈기어 솔리드’는 그 덕을 가장 톡톡히 본 게임 중에 하나였다. 본래 1998년에 기어 스테이션용으로 출시 되었을 이 게임은 몇 년에 걸친 호우지마의 끈질긴 요청으로 제작에 들어가 대박을 터뜨린 케이스였다. 그렇기에 내가 그의 작품을 차기작으로 만들고 싶다고 요청했을 때 호우지마의 머릿 속에는 이미 ‘풀 메탈기어 솔리드’가 거의 80% 정도 완성된 상태였다. 나는 단지 그가 만들어낼 게임을 컴플리트 라온으로 출시 될 수 있도록 자금적인 지원만 해줬을 뿐이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가 만들어낸 5분 짜리 해일로 데모 씬은 강당에 모인 학생들을 압도 하기 시작했다. < EP. 41 : D-125 (5) > 끝 ⓒ 손인성# < EP. 41 : D-125 (6) > & 호우지마씨가 준비한 데모 영상은 연구소 지하에 침입한 주인공 스네이크가 적들의 감시를 피해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것은 밀도 있게 보여주고 있었다. 코너에 몸을 숨긴 채 벽을 두드려 적을 유인 하거나, 환풍구에 몸을 숨긴 채 1인칭 시점을 이용해 마취총으로 적을 잠재우는 모습까지 마치 영화 007에서나 나올 법한 스타일리쉬한 연출들을 가득 선보였다. 더구나 마취총 같은 경우엔 머리나 다리등 명중한 부위에 따라 그 효과가 더디게 나타나는 세밀함까지 보여주고 있어, 지금까지의 게임과는 격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와.. 대박이다..” “저게 정말 내가 알고 있던 풀 메탈 기어 맞나...?” 게임 속 주인공 ‘솔리드 스네이크’는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까지 매번 인기 게임 캐릭터 10위 안에는 꼭 들어가는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 중의 하나였다. 반다나(머리끈) 하나를 질끈 묶고 적진에 홀로 침투하는 그의 존재감은 어딘가 외롭고, 쓸쓸하지만 솔리드 스네이크 만의 멋을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보초를 서고 있는 적 앞에 야한 잡지를 던져 두어 시선을 분산 시키거나, 종이 상자를 뒤집어 쓴채 짐짝처럼 위장 하는 부분에서는 호우지마의 타고난 유머감각이 돋보였다. 적군의 캐비넷을 열어보면 회복약인 ‘레이션’이나 탄약을 보충할수도 있지만, 인기 여배우의 섹시 브로마이드와 같은 장치는 강당에 모인 학생들의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약간의 긴장감과 위트를 즐기며 화기애애하게 진행되던 홍보 영상은 ‘오타콘’박사를 구함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사이보그 닌자’의 등장으로 최고점에 달했다. 영화에서나 사용되던 슬로우 모션 기법으로 오타콘을 밀쳐낸 스네이크가 닌자와 거리를 벌리며 권총을 난사하자. 팅~!! 팅팅팅팅~!! 새하얀 갑주의 닌자는 손에 들고 있던 카타나 하나로 주인공의 총알을 전부 튕겨내었다. “뜨헉.. 세상에...” “우와아아아!!!!” 캬... 진짜 저 장면은 다시 봐도 소름 돋네. 사이보그 닌자는 마지막에 날아오는 총알 마저 반으로 가른 뒤, 그대로 카타나를 겨드랑이 사이로 한바퀴 돌려 역수로 쥔 검 끝을 스네이크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카메라 앵글이 서서히 멀어지며 서로에게 총구와 검을 겨누고 있는 그들의 모습 사이로 새하얀 타이틀이 떠올랐다. -Full Metal gear solid- 이윽고 홍보 영상이 종료됨과 동시에 학생들에게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컴플리트 라온의 첫 번째 서드 파티 타이틀은 학생들의 굉장한 관심 속에 성공적인 데뷔를 마쳤다. “아씨... 나 소름 돋았어..” “진짜. 끝내준다.” “이렇게 되면 펜타곤의 차세대 기종도 3D에 특화된 콘솔이라는 걸까?” “당연하지. 저 그래픽 보면 모르겠냐? 저 사이보그 닌자 겁나 멋지네... 저 녀석도 플레이어블 캐릭터인가?” 총기와 카타나... 남자 게이머에게 이보다 피를 끓게 하는 장비가 또 있을까? 호우지마씨는 유저들의 반응에 감동했는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본래 영화를 좋아했던 그의 기획력은 어쩌면 시대를 너무 앞 선 경향이 있었다. 기존 2D 스프라이트 방식의 그래픽으로는 그의 머릿속에 있는 방대한 연출을 담아내기엔 무리가 있었으니까. 호우지마는 컴플리트 라온의 기기 성능과 자신의 연출 능력을 적절히 배합하여 적은 폴리곤으로 최적한 게임을 즐길수 있도록 게임의 방향을 탑 뷰 형식으로 채택하였다. 그리고 이벤트씬에서 카메라 앵글을 이용해 그만의 독특한 연출을 뽐내었는데, 이 기법은 최근 펜타곤 내부에서도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화제가 되고 있었다. 타이틀 화면이 끝나고 보너스로 준비된 쿠키 영상에서 스네이크는 환풍구를 빠져나와 근처 나무 상자에 몸을 숨겼다. 때마침 순찰을 돌고 있던 적군 병사 하나가 콧노래를 흥얼 거리며 숨어있던 그의 곁을 지나자, 본부로부터 무전이 들려왔다. “치직. 스네이크. 방금 저 병사가 부른 콧노래가 무슨 곡인지 알고 있나?” “아니. 전혀 모르겠는데. 알아야 하는가?” “적진에 홀로 침투해 있다보면 무거운 중압감에 휩싸이기 마련이지. 그럴땐 가끔 콧노래를 불러주는 것이 긴장감 완화에 도움이 된다네.” “필요없어. 그럴 땐 담배를 태우면 되니까.” “이런 스네이크. 스텔스 미션에서 개인의 DNA 흔적을 남기는 흡연은 별로 권하고 싶지않다네. 특히나 흡연은 각종 발암 물질인 나프틸아민, 니켈, 벤젠등...” “중령.. 중령!!” “음? 뭔가?” “지금 그 이야기를 하려고 무전을 걸은 것인가?” “아~ 뭐 꼭 용무가 있어 무전을 하란 법은 없지 않나. 저 병사가 부르는 콧노래를 듣다보니 옛 생각이 나서 말야.” “옛 생각?” “아~ 그래. 저 노래는 1995년. 일본의 펜타곤 소프트에서 만든 ‘버추어 아이돌’에서 나온 첫 번째 곡이야. 아마 제목이 ‘당신을 위한 응원가’ 였던가?” “관심 없어.” “이런 이런.. 스네이크. 자네 감정이 꽤나 매말랐구만.” “버추어 아이돌이라니. 내가 보기에 중령의 성향이 조금 독특한 거 같은데? 원래 저런 노래를 좋아했었나?” “스네이크. 이번 임무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온다면 꼭 한 번 플레이 해보길 추천한다네.” “후우... 기억해두지.” “그런 건투를 비네.. 스네이크. 치직!!” 솔리드 스네이크와 제로 중령의 무전 내용을 마치자, 호우지마씨는 간단한 작별인사와 함께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강당에 모인 학생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방금 뭐야...?” “당신을 위한 응원가라니... 설마 지금 풀 메탈 기어 솔리드 라는 게임을 이용해서 또 다른 게임을 홍보한건가?” “뭔가 굉장히 신선한데...?” “진지한 캐릭터들이 저런 대화를 나누니 황당하면서도 되게 웃기네.” 나는 술렁이는 학생들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며 슈트 안 주머니에 있던 한 장의 미니 앨범을 꺼내 들었다. “이곳에 모여 계신 여러분이라면 이 앨범이 무엇인지 알고 계실거라 생각합니다.” CD가 담겨 있는 세로형 종이 케이스를 위로 들어올리며 학생들에게 선보이자, 여기저기서 환호성과 함께 아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진짜 구하고 싶었는데, 결국엔 기간 안에 못구했어...” “저거 공짜로 풀었는데, 지금 중고 거래 가격이 6천엔이래...” “6천엔 주고서라도 사고싶은데, 파는 사람을 못봤다...” “저거, 구하려고 각 지역 게임샵 마다 돌아서 몇 십장 가지고 있던 사람도 있던데, PC통신에서 봤어. 장당 만엔에 판다더라...” “아, 그런 사람 보면 진짜 욕 나와..” “누가 아니래냐...” 나는 유저들의 반응에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시 어느 시대에나 ‘되팔이’는 존재 하는구나. 공짜로 풀은 걸 만엔씩 받고 팔다니... 부러운 눈길로 내 손에 들려있는 CD를 바라보는 학생들은 모습에 짠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잠시 목을 가다듬으며 마이크를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처음 이 미니 앨범이 게임 샵에서 배포 되었을 때 쓰여 있던 문구는 D-125 였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기점으로 D-DAY는 100일이 되었네요. 앞으로 100일 뒤 여러분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한 명의 ‘가상 아이돌’을 키우게 될 것입니다.” “아이돌을 키운다고? 설마... 새로운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인가?” “야, 지금 장르가 중요한 게 아냐. 방금 못 들었냐? 취향에 맞는 ‘한 명’의 가상 아이돌이래...” “한 명? 어라...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시나리온데?” “내가 없는 거리의 재림(再臨)인가..” “그럼 일단 처음 나왔던 당신을 위한 응원가 말고 다른 곡을 부르는 가수가 또 있다는 말이네? “뭐지, 뭐지? 난 뭐든 좋으니, 어서 게임 내용에 대해 공개 좀 해주었으면...” 안달 난 학생들의 표정에 간신히 웃음을 삼킨 나는 잠시 목을 가다듬으며 좌중의 분위기를 안정시켰다. “이번 컴플리트 라온의 런칭작으로 준비한 ‘버추어 아이돌’ 프로젝트는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의 게임성을 바탕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여러분은 이 게임을 통해 한 기획사 소속의 매니져가 되어 그녀를 데뷔 시키고 각종 콘서트와 이벤트 스케쥴을 맞춰 주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게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달에 발매되는 게임 잡지에 실릴 예정이며, 오늘은 그동안 베일에 쌓여있던 버추어 아이돌의 첫 번째 캐릭터 ‘카타기리 에리카’의 모습을 공개하겠습니다.” “오오!!! 드디어!!” 그동안 실루엣으로 가려져 있던 캐릭터 일러스트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운지 강당에 모인 학생들은 기대에 찬 눈으로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새하얀 스크린에 홍보용으로 제작된 2D 애니메이션이 재생 되었다. 통기타를 꺼내 어깨에 둘러맨 소녀는 이윽고 기타줄을 몇 번 튕기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벚나무 아래 놓여진 작은 벤치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카타기리 에리카입니다.” 스피커를 통해 캐릭터 배역을 맡은 칸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에리카는 자신의 앞에 놓인 마이크를 살짝 끌어 당겨 입술 끝에 마주 대었다. 화면 가득 클로즈업 된 그녀의 입술에 어디선가 꼴깍 거리는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여러분께 들려 드릴 곡은 저의 자작곡인 ‘응원가’ 라는 곡입니다. 힘든 일상 속에 지친 여러분들께 잠시 나마 위로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윽고 그녀의 고운 손이 기타 줄을 튕기자, 스크린 속에 갈색 단발의 미소녀가 모습이 비쳐졌다. 지그시 두눈을 감은 채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모습에 아무도 입도 뻥끗 하지 않고,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함께 세미나를 참관하던 교수 몇몇은 학생들의 이런 반응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 보였지만, 굳이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그대여~ 너무나 힘든 하루였죠. 마음먹은 일 하나도 되지 않는 그런 하루. 그대의 슬픈 마음 알아요.. 홍보 영상 안에 흩날리는 분홍빛 벚꽃처럼 그녀의 포근한 목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일까? 처음엔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던 교수들도 노래가 중반에 다다르자, 고개를 끄덕 거리며 옆 사람과 귓속말을 나누었다. 아마도 생각보다 노래가 괜찮다는 이야기를 전했는지, 귓속말을 듣던 교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해보였다. 갈색 단발에 한 쪽만 길게 땋은 헤어스타일로 포인트를 준 에리카는 상상했던 것 만큼이나 캐릭터 이미지 굉장히 잘 어울렸다. 중간 중간 스크린 밖의 학생들을 향해 눈 웃음을 지어보이자, 이미 몇몇은 그녀의 신봉자가 된 듯해 보였다. “아... 나 버추어 아이돌 발매 되면 무조건 에리카로 살 거야...” “나도... 다른 누가 나와도 에리카가 최고일 것 같다.” 이윽고 그녀의 응원가가 끝이 나고, 그녀가 벤치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네자 학생들은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게 나에게 하는 것인지, 에리카에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때였다. 그리고 모든게 끝난 줄만 알았던 홍보 영상에 채찍 소리가 울려 퍼지며 에리카와는 또 다른 매력적인 보이스가 회장에 울려 퍼졌다. “내 노래를 들어!!” 그와 동시에 전신이 실루엣으로 가려진 또 다른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 EP. 41 : D-125 (6) > 끝 ⓒ 손인성# < EP. 41 : D-125 (7) > “내 노래를 들어!!” 그와 동시에 또 다시 전신이 실루엣으로 가려진 당신을 위한 응원가 Vol.2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잔잔했던 에리카의 노래와는 다르게 시작부터 일렉 기타와 함께 울려퍼지는 밴드 음악은 마치 콘서트 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화려했다. 실루엣으로 가려져 있지만, 육감적인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두 번째 주인공은 확실히 에리카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캐릭터 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보일 정도였다. 중력에 반하는, 그대를 향하는 내 마음을 너는 아는지, 내 마음 속 Beating Heart. 망상의 galaxy. 미끄러진 순간 poison sea. 하지만 멈추지 않아. 시간조차 뛰어 넘는 대담한 키스로 너에게 다가갈거야. 사랑에 허기진 이 마음 너는 아는지... 조금 더 네 곁에 있고 싶은걸.. 가져가~!! 너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가사만 듣자면 굉장히 오글 거리지만, 버추어 아이돌의 두 번째 캐릭터인 칸노 셰릴은 가슴 속까지 뻥뚫리는 가창력의 소유자였다. 에리카의 노래가 따듯한 가사와 포근한 목소리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셰릴의 노래는 텅빈 고속도로 만큼 시원하게 뻗어나가는 그녀의 창법이 주를 이루었다. “우와아.. 고음 올라갈 때 소름 돋았어...” “에리카 얼굴을 공개하자마자, 또 다른 베일의 캐릭터를 등장 시키다니...” “아~ 처음 본 에리카도 좋지만, 뭔가 이번 캐릭터는 섹시한 느낌인데?” “누님..? 아니면 여왕님...?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어. 완전 내 취향이다~!!” 스크린에는 그녀의 캐릭터성을 강조하듯 매끈한 허리라인과 함께 긴 생머리가 찰랑이고, 학생들은 어느새 에리카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채 열광하기 시작했다. “우오!!! 겁나 섹시해!!” “시.. 실루엣 좀 거둬줬으면... 얼굴이 보고싶다. 대체 신의 선물 때부터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거야...” “이쁠거야. 펜타곤에는 모리타씨가 있잖아. 그 분의 여캐라면 의심할 여지없이 예쁠게 분명하다!!” 단지 모리타가 참여 했다는 것으로 이렇게까지 기대감을 갖게 할 줄이야. 역시 게이머들에게 모리타의 작화 실력은 신뢰의 아이콘이나 다름없구나... 학생들과 함께 영상을 지켜보던 나는 오색 빛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셰릴의 육감적인 몸매에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잠시 후. 버추어 아이돌의 두 번째 영상이 끝이 나고, 한 것 기대에 들 떠있는 학생들과 마주한 나는 살짝 미소지으며 그들에게 물었다. “이상. 버추어 아이돌의 두 번째 캐릭터 칸노 셰릴 대표곡 Beating Heart였습니다. 마음에 드셨나요?” “네!!” 말이 끝나 무섭게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하는 학생들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오늘 들으신 칸노 셰릴의 ‘Beating Heart’는 다음 주 월요일부터 도쿄를 중심으로 일본 전역에 퍼져나가게 될 예정이니 많은 성원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라? 이번엔 도쿄부터인가!? 나이스!!” “저번엔 오사카부터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번엔 도쿄라니 무슨 법칙이라도 있는건가?” 법칙? 물론 있지. 노래마다 지역이 다른 이유는 이 곡을 불러준 가수들의 출생지와 관련이 있으니까. 이대로라면 아마 세 번째 곡은 홋카이도 지방에서 먼저 발표될 가능성이 높았다. 여러 가지 추측성 대화가 난무하는 가운데 나는 묵묵히 마이크를 들고 세미나를 이어 나갔다. “본격적으로 컴플리트 라온의 발표에 앞서 두 편의 신작을 공개해 드렸습니다. 마음에 드셨는지 모르겠네요.” 나의 질문에 학생들은 열화와 같은 박수로 대답을 대신해 주었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펜타곤에서 만들어낸 거치형 콘솔 컴플리트 라온의 정보를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오오!!!!” 그때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환호성을 지르는 학생들 사이로 세미나 1부의 종료 직전. 휴식 타임을 알리던 선생이 나를 향해 양팔을 교차시키며 세미나의 종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렸다. 이런 2부 앞에서 센소니에 대한 이야기에 너무 시간을 끌었나...? 살짝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전자 시계를 바라본 나는 약 10분 남짓 남은 세미나 시간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후우... 이거 좀 바빠지겠는데?’ & -차세대 콘솔 컴플리트 라온. 예상외의 장소에서 충격 발표.- 지난 주. 도쿄의 한 대학에서 열린 게임 산업 세미나에서 펜타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차세대 기종 컴플리트 라온에 대한 정보를 발표했다. 이에 대해 강연자였던 강준혁 이사는 앞으로 게임 산업을 이끌어 나갈 인재들에게 가장 먼저 차세대 기종을 보이고 싶었다. 라온의 정보를 기다렸던 팬들에게 넓은 마음으로 양해를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또한 차세대 기종의 정보 뿐만 아니라, 폭스 소프트의 신작 ‘풀 메탈 기어 솔리드’ 와 현재 당신을 위한 ‘응원가’로 한껏 기대를 모으고 있는 버추어 아이돌의 첫 번째 캐릭터. 카타기리 에리카의 모습을 공개하는 한 편. 두 번째 캐릭터 칸노 셰릴 등장시키며 ‘버추어 아이돌’의 기대를 한 껏 부흥시켰다. 당일 세미나에 참석한 학생의 말을 들어보자면 3시간에 걸쳐 진행된 강연을 통해 게임 업계에 대한 비화라던가, 새로운 신작 게임의 공개로 지루할 틈이 없었던 즐거운 세미나였다고 솔직한 소감을 전해주었다. “후~ 덥다 더워. 작년에도 푹푹 찌더니, 올해는 어째 더 더운 것 같지 않아?” 나는 보고있던 잡지를 덮은 채. 아까부터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는 준페이 녀석을 뚱하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 저번에 나랑 술마실 때랑 캐릭터가 너무 다르지 않냐?” “아하하... 그래? 되도록 일관성 있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랑 비교해 티가 너무 나나?” “그때는 무슨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술을 퍼마시더니, 취해가지곤 울고 불고...” “야, 야.. 그만 해라. 창피하다.” “창피? 그래 말 한 번 잘했다. 네가 그날 너 때문에 얼마나 창피했는지 알기는 아냐? 자판기에 돈도 안 집어 넣고선 음료수가 안 나온다고, 너까지 날 무시하냐며 발로 차질 않나...” “그... 그만...” “자기는 터미네이터의 T-1000이랍시고 지나가던 커플의 옆구리에 손을 집어 넣더니, 억지로 갈라 놓질 않나...” “제발... 그만..” “거기다... 지하철 역에선 오바이트를 쏟아내 세기 말에 모세의 기적을 실현하질 않나..” “그만!! 제발.. 내가 잘못했다구. 인마...” “어쭈? 인마? 어디보자, 미사토씨 연락처가...” “알았다. 알았어. 모든 시키는 대로 할테니 그만 하자.” 혹시나 누가 볼까, 모자를 푹 눌러 쓴 준페이는 핸드폰을 집어 들려는 나를 서둘러 말렸다. 피식 웃음을 흘리며 핸드폰에서 손을 떼자, 준페이는 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그러게, 해외로 취재를 간다면 간다고 연락이나 한통 해줬으면 좀 좋아?” “거 며칠 연락 안됐다고, 그 난리를 쳐댔으니. 그날 경찰서 안 끌려간게 다행인줄 알아라.” 이자카야에서 겁나게 술을 퍼마신 이튿 날. 해외 파견을 다녀온 미사토씨에게 걸려온 전화 한통에 지옥 밑바닥에서 고통 받던 준페이의 기분은 단숨에 천국으로 향했다. 그놈의 전화 하나로 천국과 지옥을 맞 본 준페이는 그 날 이후로 다시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는 제대로 뻘쭘했는지 빨대로 커피를 삼키는 녀석을 바라보다가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전에 약속한 피규어 진짜 안 받아도 괜찮겠어?” “응. 괜찮아.” “게임 피규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더니 웬일이냐?” “그게, 미사토씨가 남자 피규어는 되도 여자 피규어는 안된다고...” “으잉? 설마 미사토씨가 너희 집에 왔었어?” “어. 지난 달에 한 번 왔었지.” “오올~ 잘되가나 본데? 혹시 둘이 같이 라면 먹었냐?” “라면...? 밖에서 사먹으면 되지, 굳이 우리집에서 라면을 왜 먹어? “······. 아냐, 그냥 그런게 있어.” 내가 지금 이 녀석한테 뭔 말을 하고 있는거냐. 아무튼 뭐든 좋은게 좋은거라고 잘됐으니 다행이지. 나는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다시 잡지를 펼쳐 들었다. 몇가지 칼럼을 살피던 중. 꽤나 흥미로운 인터뷰 기사가 내 눈길을 끌었다. 그것은 현 게임 시장에 대한 민텐도의 카마우치 사장의 인터뷰 내용이었다. 센소니와 NEGA 그리고 펜타곤 마저 차세대 거치형 콘솔 시장에 뛰어들겠다는 시점에서 카마우치 사장은 프로젝트64에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다. “유저들은 저희 민텐도가 하루 빨리 돌아오기만을 바랄 것입니다. 그전까지 어느 누가 시장을 차지하고 있던 저희는 그것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프로젝트 64... 아니 이제는 공식 명칭인 민텐도 64라고 해야겠군요. 현재 저희 간판 디렉터인 쿠마모토 시게루의 슈퍼 마리지 64는 이제까지의 마리지 시리즈.. 아니 현존하는 그 모든 게임과 격을 달리하는 3D 월드를 보여줄 겁니다.” “역시 이번에도 차세대 콘솔은 새로운 슈퍼 마리지와 함께 하는 군요.” “당연합니다. 슈퍼 마리지는 저희 민텐도의 상징적인 캐릭터니까요. 또한 이번에 새로 제작된 롬 카트리지는 기존에 비해 약 10배 가량 메모리 폭을 늘렸으며, 카트리지를 이용하는 만큼 유저들에게 로딩 없이 쾌적한 게임 플레이를 약속해 드릴겁니다.” 인터뷰 기사와 함께 사진에 실린 카마우치 사장의 머릿칼은 어느새 새하얗게 새어 있었다. ‘하.. 세월이 많이 흐르긴 흘렀구나. 흰 머리가 가득하시네...’ 하지만 인터뷰에서 내뱉은 말로 보아, 그 깐깐하고 완고한 성격은 여전해보였다. 오히려 깊게 패인 주름 덕분에 이전보다 더 고집스러워 보인다고 해야할까? 센소니와 갈라선 후. 기존 프로젝트를 완전히 폐기하고 새로운 콘솔을 개발하게 된 민텐도 64는 온전히 카마우치 사장의 고집 대로 진행된 욕망의 집약체였다. 특히나 이번에 새로 탑재된 고용량 카트리지의 라이센스 비용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기에 선뜻 민텐도와 계약에 나서는 서드파티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기존에 대비해 10배로 용량을 늘렸다고 하지만, 여전히 CD에 비해선 턱없이 부족한 용량 탓에 최근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음성 시스템을 넣기에도 여간 힘든게 아닐텐데? “어우.. 카마우치 사장님은 연세도 있으신데, 아주 정정하시더라. 목소리도 쩌렁쩌렁 하시고.. 인터뷰하는 내내 귀가 따가워 죽는 줄 알았다니깐?” “뭐, 그 완고한 성격. 어디 가시겠냐?” “그러게나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안 남긴 했지. 콘솔이란 시대를 너무 앞서가서도, 너무 뒤쳐져서도 안되거든. NEGA의 콘솔이 시대를 너무 앞서간 탓에 망했다면... 민텐도64는 시대에 너무 뒤쳐져서 망했지... 앞으로 D-80일. 펜타곤의 컴플리트 라온은 과연 시대의 흐름에 제대로 올라 탈 수 있을까? 좋든 싫든 그 날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 EP. 41 : D-125 (7) > 끝 ⓒ 손인성# < EP. 42 : 갈라쇼 (1) > & 1995년. 초여름. 버추어 아이돌의 두 번째 캐릭터인 셰릴의 ‘Beating Heart’는 에리카의 응원가와 함께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비록 정식 앨범이 아닌지라 오리콘 차트에 등재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의 노래는 차트 10위권 내의 음악과 비교해도 손색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발휘 했다. 일본의 유명 음반사인 J-레코드에서도 펜타곤에 정식으로 앨범 유통에 대해 요청을 해왔을 정도였니까. 그에 대한 설명은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될만큼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물론 앨범을 제작할 생각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정규 앨범이 발매되는 것에는 조금 더 신중을 기해야 할 것만 같다. 버추어 아이돌에 들어갈 곡을 위해 하란Q의 테라다와 유명 작곡가인 칸노 요우코를 비롯해 수 많은 작곡가 분들이 도움을 주었는데, 그래서 일까? 정말 앗 하는 순간에 버추어 아이돌의 데이터 베이스에는 수 많은 명곡들이 점점 쌓여가고 있었다. 나와 우에노 씨. 그리고 테라다씨는 오디션을 통과한 이들과 개별 면접을 통해 적절한 곡을 매칭해 주었고, 그녀들은 현재 펜타곤에서 마련해준 연습실에서 자신의 노래를 발표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 중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녀들의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위해 동분서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컴플리트 라온. ‘완전한 즐거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강력한 성능을 탑재한 펜타곤의 신모델은 지난 세미나에서 정식 발표와 동시에 유저들에게 뜨거운 관심이 쏟아졌다. 휴대용 라온과는 대비되는 묵직한 블랙 색상은 무광 처리가 되어 고급스러운 자태를 뽐내었다. 유저들은 펜타곤 샵 내부 유리관에 전시되어 있는 컴플리트 라온을 바라보며 연일 침만 꼴깍 삼키고 있었다. “아~ 진짜 갖고 싶다.” “아직도 발매까지 석달이나 남았다니, 피가 바싹 말라가는 기분이야...” “누가 아니래냐. 집에 기어 스테이션도 가지고 있는데, 머릿속에서 ‘풀 메탈 기어 솔리드’가 떠나가질 않으니...” 고등 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은 벌써 30분째 전시 중인 컴플리트 라온 앞에서 떠나질 않고 있었다. ‘저러다 망부석 되겠네...’ 간만에 펜타곤 샵에 들러 머리를 식히던 나는 미야자키가 가져다준 차를 마시며 웃음지었다. 게이머들에게 있어 새로운 콘솔의 등장 만큼이나 가슴 설레이는 일이 또 있을까? 나 역시 개발자이기 전에 한 사람의 게이머로서 그들의 마음이 십분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저 분들 말고도 거의 매일 같이 찾아오시는 손님들이 많아요. 전시되어 있는 모조품을 자기한테 팔지 않겠냐고 직원들에게 물어보신 분도 계셨구요.” “전시용 모조품을...?” 아니... 그건 대체 가져가서 뭐하려고? 어차피 플라스틱 껍데기일 뿐인데... 나는 심상치 않은 유저들의 기대 심리에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시 중인 컴플리트 라온의 양 옆에는 저번 세미나에서 공개했던 폭스 소프트의 ‘풀 메탈기어 솔리드’와 ‘버추어 아이돌’의 영상이 계속해서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두 학생은 보고 또 봐도 질리지가 않는지 홍보 영상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내 매장 밖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 세미나에서 정보를 공개한 이후. 새로운 콘솔에 대한 유저들의 기대감이 오르는 것은 좋지만, 그럴수록 다른 기업에 대한 견제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전 세대 같은 경우엔 휴대용 게임기라는 틈새 시장을 파고들어 제대로 공략했지만, 이번 만큼은 정면 승부나 다름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더구나 민텐도가 없는 지금 시장을 잡기 위해 센소니와 NEGA는 신규 유저를 끌어들이기 위해 어마어마한 마케팅을 쏟아내고 있었다. 특히나 NEGA같은 경우는 북미 지역에서 399달러였던 새턴의 가격을 기어 스테이션과 같은 299달러로 인하했다. 듀얼 CPU로 인해 399 달러에서도 큰 적자를 보고 있던 NEGA가 센소니를 잡기 위해 신의 한수를 던진 것이다. 스즈키씨 같은 경우에도 새턴의 변태같은 개발툴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는지, 리얼 파이터2 만큼은 아케이드 판에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만큼 훌륭한 퀄리티로 출시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응해 현재 3D 격투 게임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우는 아이언 피스트 2 역시 가만 있지 않았다. 물론 리얼파이터의 화려한 그래픽에 비해 다소 딱딱하지만, 기어 스테이션으로 이식된 아이언 피스트2는 가정용 콘솔 만으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모드를 추가하여 ‘초월이식’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각 캐릭터 별로 준비된 수준급 엔딩 영상으로 인해 아케이드 판과는 차원이 다른 스토리 몰입감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봤자, 절벽에서 기어올라온 아비가 아들을 타오르는 화산에 내던지는 엽기적인 시나리오였지만... 그래도 씨디 한 장에 그 많은 캐릭터의 엔딩 CG를 담아 내는 것은 쉽지 않았겠지...) 그러자 아케이드와 똑같은 허무한 엔딩에 모드라고는 달랑 VS 모드 하나 들고 나온 리얼 파이터2는 훌륭한 이식작임에도 또 한번 아이언 피스트와 비교 될 수밖에 없었다. 고고했던 민텐도와 다르게 새로히 콘솔 사업을 시작한 센소니는 방심하지 않았다. 거대한 자본으로 어떻게든 민텐도가 없는 현재 시장을 잡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고 있었다. 신중히 가드를 올리고 적이 치고 들어 올 때 마다 짜릿한 카운터를 선사하는 센소니의 마케팅은 동종 업계인 우리가 보더라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으니. 당하는 NEGA 입장에선 지금 상황이 얼마나 기가 찼을까? 하지만 그런 센소니 조차 펜타곤에서 발매하는 컴플리트 라온에 대해선 상당히 견제하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네, 그렇습니다. 제가 알기로 센소니에서 저희 폭스 소프트의 상층부를 통해 ‘풀 메탈 기어 솔리드’의 기어 스테이션 이식을 요청한 듯 합니다.” 현재 가장 이목을 얻고 있는 3D 잠입 액션 게임을 멀티로 발매 시키기 위해 센소니가 폭스 소프트에 접근한 것이다. 이미 북미와 일본 지역을 통해 100만대를 눈 앞에 두고 있었기에 폭스 소프트에서는 센소니의 제안이 굉장히 달콤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센소니에서도 간과한 부분이 있었으니, 호우지마씨의 ‘풀 메탈 기어’는 펜타곤의 자본도 대량으로 투입된 결과물 중에 하나였다. 즉 ‘풀 메탈 기어 솔리드’의 절반 이상은 우리 펜타곤의 소유나 다름 없다는 것이지.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7월 중순. 컴플리트 라온 발매를 한 달 앞둔 시점에서 펜타곤은 유저들을 위한 작은 콘서트를 열었다. 그것은 일전 고베 대지진으로 인해 무산 되었던 ‘신의 선물’의 갈라 콘서트였다. & 잡지사를 통해 추첨 방식으로 진행된 콘서트 티켓은 예상대로 유저들의 어마어마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어떤 이는 권당 한 장씩 들어있는 콘서트 신청권을 위해 5권의 잡지를 사서 응모한 유저도 있었으니까. 덕분에 불티나게 팔려나간 지난 달 잡지 판매로 인해 준페이는 며칠째 미사토씨와의 데이트도 못하고 야근 중이었다. “빌어먹을 신청권이 대체 몇장이나 날아오는거여...” “다른 잡지사에도 물어봤지만, 그정도까진 아니던데. 역시 패미통신이 게이머들에게 인기가 좋나보네..” “경쟁률에 비하면 다른 잡지사에 투고 하는게 확률이 더 높지 않았을까?” “그래도 패미통신에는 티켓 150장 뿌려줬잖아.” “잡지 많이 팔린다고 내 월급이 더 들어오는 건 아니라고 몇 번을 얘기했냐.” “그것까진 모르겠고, 이쪽도 공연 준비로 바빠서 이만 끊어야겠다. 공연 때 미사토씨랑 같이 올거지?” “좀 멀긴 하지만, 취재도 할 겸 가봐야지. 아무튼 수고해라.” “그래 알았다. 그때 보자.” 준페이와의 통화를 종료한 나는 고개를 돌려 무대 쪽을 살폈다. “어이~!! 거기 왼쪽 무대 중앙이랑 균형이 안맞으니, 좀 더 올려~!!” “네. 알겠습니다.” 습하고 더운 공기를 가득 머금은 7월... 에어컨 하나 없이 작업하는 인부들을 위해 나와 펜타곤 직원들도 열심히 작업에 매달렸다. “도시락 왔어요~!! 다들 내려오셔서 식사들 하세요!!” 돌아오는 가을. 하야시와의 결혼 발표로 회사를 충격에 빠뜨린 카오리의 목소리가 강당 안에 울리자, 작업중이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공연까지 앞으로 삼일. 목에 둘러맨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도시락을 받아든 인부들은 직원들과 함께 강당에 주저 앉아 차가운 물을 삼켰다. “푸하~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여기 생수 좀 더 갖다주소!!” 1리터 가량의 물을 단숨에 들이킨 인부 하나가 빈 페트병을 흔들어 보이자, 카오리가 웃으며 차가운 물 한 통을 더 가져다 주었다. “자 여기요. 이렇게 더울 때 차가운 물을 급히 마시면 체할 수도 있으니 천천히 마시세요.” “아따. 아가씨 싹싹하네잉. 어서 왔소?” “어이구. 이눔아. 말투 들으면 모르겄어? 도쿄 사람이잖아. 도쿄.” “하하. 네 맞아요. 도쿄에서 왔습니다.” 작고 귀여운 카오리는 특유의 붙임성 있는 성격 덕분인지, 인부 아저씨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아저씨에게 페트병을 건네준 카오리는 아저씨와 몇마디 더 나눈 뒤 나를 향해 도도도 달려왔다. “수고 했어.” “고마워요. 이사님.” 자기 몫의 도시락을 받아온 카오리는 내 옆자리에 앉아 도시락 뚜껑을 열어 젖혔다. “많이 덥지? 멀리까지 와서 고생하네.” “괜찮아요. 딱히 한 일도 없는데요. 그보다 복구가 엄청 빠르네요. 완전히 폐허였던 기억이 어제 같은데...” 하긴 카오리의 말도 무리는 아니지. 나 역시 4개월 만에 이정도까지 복구가 됐을 줄은 몰랐으니까... 현재 우리가 식사 중인 이곳은 지난 2월 고베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주민들이 베이스 캠프로 삼았던 강당이었다. 고베 대지진을 경기 회복의 기회로 삼은 일본 정부는 복구 작업에 전 일본의 건설사를 모두 투입 시켰다. 덕분에 지진 잔해는 엄청난 속도로 제거 되었고, 현재 학교 주변에는 피해 주민들의 임시 거주지가 마련되어 있었다. 건물 자체는 임대형 조립 아파트 수준의 환경이었지만, 워낙에 집을 좁게 쓰는 일본인들은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야시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텐데...” “뭐 그 사람이야 여기보단 개발실이 어울리는 사람이니까요. 결혼식이 코앞이어도 게임 개발한다고 휙 가버리는 건 아닌지.” 카오리의 말에 결혼 전에 유키가 했던 말이 떠올라 밥알이 목구멍에 걸렸다. 나도 유키랑 결혼 전까지 드래곤 엠블렘 2 때문에 엄청 바빴었으니까... “어머, 왜 그러세요? 이사님?” 고양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카오리의 눈을 피한 나는 벌컥벌컥 물을 삼켰다. 그때 강당에 들어온 펜타곤 직원이 카오리를 찾았다. “저기요 카오리씨. 식사 중에 미안한데, 잠깐만 여기 와줄래요?” “네~!! 그럼 이사님. 잠깐 제 도시락 좀 맡아주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어... 그래.” 직원을 향해 달려가는 카오리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돌려 세팅중인 행사장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프로젝터용 스크린이 팽팽하게 잡아 당겨진 무대 위... 앞으로 3일 뒤. 신의 선물의 갈라 콘서트와 함께 그녀들의 첫 무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 EP. 42 : 갈라쇼 (1) > 끝 ⓒ 손인성# < EP. 42 : 갈라쇼 (2) > 사실 갈라 콘서트의 최초 기획 안에서 재난 지역 이름이 거론 되었을 때. 회사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안 그래도 지진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 괜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갈라쇼 라는 어원 자체가 일반인들에게는 행사 마친 후 축하 공연 정도로 인식 하고 있었기에 애써 만들어낸 펜타곤의 좋은 이미지를 해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안에 이번 갈라 콘서트는 그 의미가 조금 달랐다. 단지 우리가 만들어낸 게임 소프트를 홍보하는 것 보다 지진 피해로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전국에서 몰리는 게이머들에게 재난 지역의 심각성을 알려줄 수 있는 계기로 삼고 싶었다. 그렇기에 이번 콘서트에 참가하는 유저들에겐 자발적인 모금 활동을 겸할 예정이었다. 다행히도 이런 나의 마음을 알아 주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기대 심리 때문인지 신의 선물의 갈라쇼 티켓은 굉장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신의 선물은 엔딩으로 인해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작품이긴 하지만, 리듬 게임의 완성된 틀을 스토리와 함께 즐길 수 있는 독특한 게임 임에는 분명했다. 또한 별도로 판매된 OST 역시 역대 게임 시장 중 최고의 판매량을 보여주었고, 방금 준페이와의 통화 내용을 미루어 보아, 이번 갈라 콘서트에는 코어층 유저보다 라이트 유저의 참여도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잠시 후. 직원과의 일을 마치고 돌아온 카오리에게 다시 도시락을 건네준 나는 다 먹은 도시락을 내려두고 차가운 물을 삼켰다. “오늘 저녁 쯤이면 무대 설치는 끝나겠네요.” “내일쯤 좌석 배치하고 아참 건물 외부 스크린도 점검해야하는데...” “그거 제가 방금 하고 왔어요.” “그래? 다행이네. 덕분에 할 일이 하나 줄어 들었군.” “아, 그리고 내일 팀장님도 퇴근하고 여기로 온대요.” “팀장이라면... 하야시? 곧 결혼할 사이인데, 아직까지 팀장님이라 부르는 거야?” “그게 지금까지 계속 팀장님이라고 부르다보니, 호칭 정리가 까다로워서...” 하긴 그건 유키와 나도 마찬가지였지. 다른 이는 몰라도 카오리의 마음을 십분 이해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페트병에 담긴 물을 마저 삼켰다. “그런데 이사님. 예전에 유키 언니한테 프로포즈 반 강제로 하셨죠? 그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컥!! 켈룩.. 쿨럭!!” 카오리의 황당한 질문에 물을 삼키다 사래가 들린 나는 연신 기침을 쏟아 내었다. “누구한테 들었냐?” “킥킥. 뭘 그렇게 당황하세요? 펜타곤 직원이라면 다 알고 있을 정돈데, 이사님 굉장히 유명해요~” “끄응... 알고 있으면 그냥 모른척 해주면 안될까?” “얘기 해주기 싫으세요?” “아니, 뭐... 딱히 그게 자랑 거린 아니잖아?” “왜요? 우리 직원들 사이에선 이사님 꽤나 인기 많은데? 가정적이고 그날의 프로포즈도 굉장히 멋있었다고...” 음... 그냥 단순한 추억 보정이 아닐까 싶은데...? 그날의 나는 솔직히 내가 봐도 추했으니까. 하지만 남자가 보는 입장이랑 여자가 보는 입장은 다르다니, 어쩌면 여직원들의 감상은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 카오리는 도시락에 담긴 밥알 휘적거리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갑자기 너 답지 않게 왜 그래? 하야시랑 무슨 일 있었어?” “아뇨. 딱히 그런 건 없지만...” 뭔가 하고 싶은 얘기를 빙빙 돌리는 듯한 기분에 나는 들고 있던 페트 병을 내려 놓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해 봐. 직장 상사가 아닌 결혼 선배로서 대답해줄게.” “음... 사실 그게..” 우물 쭈물거리는 카오리의 대답에 대략 상황을 눈치챈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그녀에게 말했다. “왜? 하야시가 프로포즈를 안 해줘서 삐졌냐?” “헉!! 그걸 어떻게?” “어떻게긴 무슨 얼굴에 다 쓰여있으니 하는 얘기지.” 당황한 표정으로 잠시 자기 얼굴을 만지작 거리던 카오리는 이내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카오리의 대답에 나는 속으로 ‘역시..’를 외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야시 성격 모르는 것도 아니고, 여간해선 프로포즈 받아 내기 힘들 걸?” “역시 포기하는게 좋겠죠? 그래도 유키 언니의 이야기도 그렇고 왠지 내가 너무 좋아하니까 결혼해 주는 것 같아서 섭섭해요. 이제껏 그 정도로 돌려 말했으면 눈치를 채야지. 둔해가지곤...” 그 순간 나는 카오리의 말에 피식 웃음을 던지며 대답했다. “둔하다고? 모리타도 우치무라도 아닌 내가 알고 있는 그 하야시가?” 하야시는 펜타곤... 아니 당시 민텐도 직원 중에서 누구보다 먼저 내가 드래곤 엠블렘의 개발자란 걸 알아차린 녀석이다. 더구나 개발 상황을 조율하는 능력과 스케쥴 관리에 대해 냉정하리 만큼 철저한 그는 펜타곤 내부에서도 상당히 탑 클래스의 프로그래머이며 굉장히 계산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가 자기보다 한참 어린 카오리의 말을 이해하지 못 했을리가 없다. 단순히 내가 결혼 전에 당한 수모를 자신은 겪고 싶지 않다는 것이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카오리를 바라보며 살짝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하야시가 과연 네가 한 말을 못 알아 들어서 프로포즈를 안하는 걸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설마 그럼...?” 대충 내가 한말에 의미를 눈치챈 카오리에게 슬쩍 고개를 끄덕여주자, 순간 그녀의 조그마한 손에 들려있던 나무 젓가락이 뽀직 소리와 함께 부러져 나갔다. “정말로 그런 거라면 용서하지 않겠어. 내가 어떻게든 프로포즈 받아내고 말 거야...” 두 눈을 이글거리며 전의(?)에 불 타오르는 카오리를 바라보던 나는 묵묵히 그녀의 다짐에 동의하며 입을 열었다. “카오리.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는데 한 번 들어 볼래?” “네? 뭔데요!?” “그게 말이지... 큭큭..” 잘가라... 하야시. & 그로부터 삼일 뒤. 신의 선물의 갈라콘서트에서 하야시는 곧 있을 콘서트 무대를 바라보며 나에게 말했다. “이사님. 대체 왜 저를 여기 붙잡아 두고 계시는 겁니까.” “붙잡아 두다니, 무슨 소리야? 여기에 카오리도 있고, 버추어 아이돌도 지난 주에 골든행 (개발 완료후 패키지를 생산중인 단계) 갔잖아. 가끔은 심신을 위해서라도 이런 콘서트는 봐두는게 좋아.” “... 왠지 오늘따라 굉장히 저를 생각해 주시는게 뭔가 꿍꿍이 속이 있는거 아닙니까?” ... 이 자식 눈치 하난 기가막히게 빨라 가지고... 그때 무대 건너편에 있던 카오리가 나를 바라보며 양손을 머리 위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다행히 하야시를 등지고 있던 터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하야시에게 그녀의 모습이 보일리 없었다. 나는 하야시의 눈을 피해 카오리를 향해 엄지 손가락을 세워보이곤 살짝 윙크를 날렸다. 아~ 갈라쇼도 해야하고, 곧 있을 런칭 행사도 준비해야하는데, 직원들 프로포즈까지 챙겨 줘야하다니. 진짜 바쁘다 바뻐... < EP. 42 : 갈라쇼 (2) > 끝 ⓒ 손인성# < EP. 42 : 갈라쇼 (3) > & 신의 선물의 갈라 콘서트는 오후 8시에 예정 되어 있었지만, 공연 시작을 3시간 앞둔 현재. 공연장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전부 우리 공연을 보러온 사람이냐고? 사실 그건 아니다. 때마침 운 좋게 마을의 하나비(불꽃) 축제와 갈라 콘서트가 일정이 겹치는 바람에 낳은 결과물이랄까? 아무튼 그래서인지 거리 곳곳에는 유카타 차림의 여성들과 아이들로 떠들썩했다. 마을의 중앙로에는 수많은 야타이(노점상)들이 설치 되어 아이들이 좋아하는 설탕사과라던가, 오사카의 명물 타코야끼의 향기가 풍겨왔다. 한 세 번 정도 실패하면 정줄 놓게 만드는 금붕어 낚시터에 옹기 종기 앉아 있는 5~6살짜리 꼬맹이들을 바라보니, 문득 설현이가 보고 싶어졌다. ‘이래서 딸을 가진 세상 모든 아빠들이 자연스레 딸 바보가 된다고 하는건가...?’ 속으로 피식 웃음을 삼킨 나는 천천히 마을의 공영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파워레인저 가면을 쓴 채 사람들이 북적이는 좁은 통로를 꼬맹이들 덕에 하마터면 넘어 질 뻔했지만, 딱히 화가 나진 않았다. 나도 저 나이 때는 그랬으니까... “오히려 아이들이 넘어져 다칠까봐 걱정이지. 저거 쓰면 앞은 제대로 보일라나?” 쿠당~!! “우와아아아앙~~!!!”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앞에서 달려가던 녀석이 아직 정비가 덜 된 보도블럭에 걸려 넘어졌다. 아이쿠, 내가 저럴 줄 알았다... 그때 뒤쫓아가던 아이가 넘어진 아이를 번쩍 일으켜 세워더니 망가진 가면을 벗겨 주었다. 그러자 눈물로 범벅된 익숙한 아이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어라? 저 녀석들은...? “그러니까 형이 가면 쓰고 뛰지 말랬잖아.” “그래도 형이 막 무섭게 쫓아오니까~ 히잉.. 내 파워레인저 가면이 부서졌어...” “울지마. 형꺼 줄게.” “형은 레드잖아. 난 빨간색 싫어..” “그럼 형이 노점 아저씨한테 가서 블루로 바꿔줄게. 산지 얼마 안됐으니까 아마 다른 걸로 바꿔주실 거야.” “정말?” “한번 가보자.” 먼지 묻은 동생의 바지를 털어주며 가면을 집어든 아이는 한손으론 동생의 손을 잡아주었다. 잠시 그들 형제를 지켜보던 나는 손목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나서 그들의 뒤를 따랐다. ‘아직 유키가 도착하려면 시간이 남았으니까. 잠깐 인사나 할까?’ 그렇게 형형색색으로 불이 밝혀진 노점 대로를 거닐던 형제는 이윽고 어느 가면 가게 앞에 멈춰섰다. 제법 덩치가 있는 중년의 남성은 가면을 도로 들고온 꼬맹이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저씨. 혹시 이 가면 블루로 바꿔주실 수 있나요?” “음? 왜 그러냐, 색깔이 마음에 안 들니?” “동생이 넘어져서 가면이 부서졌어요.. 그래서 제가 샀던 걸 블루로 바꾸고 싶은데...” “저런 쯧쯧... 어디 다치진 않았고?” “네. 괜찮아요...” 가게 아저씨는 새빨개진 눈으로 훌쩍이는 동생을 바라보더니 천장에 걸려있던 새 가면 하나를 꺼내 주었다. “녀석. 파워레인져가 울면 쓰나? 지구를 지키려면 강해져야지!! 자~ 아저씨가 새 걸로 바꿔줄테니 울지 말거라.” “어? 정말요?” “대신 가면 쓰고 뛰어다니면 안된다. 알았지?” “네에~!!” 친절한 가면 가게 아저씨 덕에 형제는 새 가면을 받아들고 우렁차게 대답했다. 잠시 근처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가게로 향했다. 그리곤 다른 가면들에 비해 크기가 절반 밖에 되지 않은 귀여운 여우 가면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도 가면 하나만 주실래요? 거기 있는 조그만 여우 가면으로..” 그러자 새 가면을 받아들고 신이 난 형제가 나를 빤히 올려보더니 동시에 외쳤다. “어!? 아저씨!!” “안녕~ 그동안 잘 지냈니?” “와아~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저씨도 오늘 여기에 볼일이 좀 있어서..” 그러자 형이 손뼉을 치며 외쳤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우리 학교에서 밤에 ‘칼라’ 콘서트를 한다고 하던데.” “칼라가 아니고 갈라 콘서트인데...” 뭐 초등학생한테 익숙한 이름은 아니니깐... 잠시 후. 가게 주인에게 가면 값을 지불하고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 두 형제는 오랜만에 본 내가 반가웠는지 곁에 따라 붙어 이런 저런 말을 걸어왔다. 당시 지진 잔해에 묻혀 탈진 상태였던 아이는 이제 완전히 건강을 되찾은 모습에 나 역시 흐뭇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라온 갖고 서로 싸우거나 하지 않지?” “네~ 그럼요. 아저씨 덕분에 이제는 동생이랑 저랑 하나씩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래... 다행이구나.” 당시 구조된 직 후. 병원으로 옮겨진 아이는 병원에서 깨어나자마자, 라온이 하고 싶다는 말로 신문 1면에 기재된 적이 있었다. 그 덕분에 학교에서도 별명이 ‘라온’이라나? 아무튼 그 덕분에 우리는 거의 공짜로 어마어마한 마케팅 효과를 얻어낼 수 있었기에 감사의 의미로 앞으로 펜타곤에서 출시하는 모든 기기와 게임을 무료로 제공해 주기로 약속했다.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현재까지 우리가 출시한 게임들 중에 초등학생이 할만한 게임이 거의 없다는게 문제지만...’ 그래도 나중에 커서 플레이 해보면 되겠지.. 그때 형의 손을 잡고 걸어가던 동생이 멍하니 한 가게를 바라보았다. 자연스레 눈을 돌려 보니 그곳에는 사과 반 조각을 그대로 사탕으로 코팅 해놓은 설탕 사과가 막대에 꽂힌 채 가지런히 세워져 있었다. 막상 먹어보면 엄청 달아서 다 먹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이런 축제에는 빠질수 없는 감초 같은 존재랄까? “형. 나 저거 먹고 싶어...” “응? 안 돼. 우리 아까 전에 가면 사느라 용돈 다 썼단 말야. 그래서 형이 가면 살 때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그랬지?” “그래도 먹고 싶단 말야..” 나는 두 형제를 뚱하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가 사줄까?” “우와~!! 정말요?” “야, 너 진짜..” 철없이 곧장 대답하는 동생과는 달리 형은 서둘러 동생을 말렸다. 녀석 자기도 먹고 싶었으면서 어른스러운 척 행동하긴... “아냐, 괜찮아. 아저씨가 형이 하는 말 잘 들으라고 사주는 거다.”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잘 못 알아 들은 것 같지만, 동생은 연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개당 100엔에 판매하는 설탕 사과 2개를 산 나는 아이들에게 각각 하나씩 들려주었다. 동생은 사탕 사과를 받음과 동시에 와그작 씹으며 함박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맛있냐?”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표정으로 모든 걸 말해주고 있는 동생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럼 이제 아저씬 가봐야겠다. 만날 사람이 있어서...” “이따가 엄마랑 같이 칼라 콘서트 보러 갈게요.” “콘서트장에 온다고?” “네. 엄마가 데려다 주신데요.” “그래? 흐음...” 나는 잠시동안 아이들의 파워 레인져 가면을 바라보다가 무릎을 꿇고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저기... 혹시 이따가 엄마랑 같이 콘서트 장에 오면 아저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네. 그럴게요. 근데 무슨 부탁인가요?” “음~ 파워 레인져 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 “준혁씨~!!” 잠시 후. 언니인 유코씨와 함께 차를 타고 온 유키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유코씨.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에 보는 유코씨는 굉장히 세련된 세미 정장 차림이었다. 유키와 닮은 듯하면서도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는 유코씨는 나의 인사에 살짝 머리를 넘기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안녕하세요.” “운전하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아니에요. 저도 그냥 드라이브 겸 온 거니까...” 그때 내 곁에 있던 유키가 내 귓가에 귓속말을 걸어 왔다. ‘거짓말. 우리 언니 신의 선물 광팬이에요. 올 S 랭크 플레이어거든요.’ “유키. 너 지금 뭐라 그랬어?” “응? 아무 것도 아냐~ 어!? 준혁씨 그 가면은 뭐에요?” 유코의 추궁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던 그녀는 내 손에 들린 여우 가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응? 아~ 이거 네 선물.” “아~ 귀여워~” 유키는 내손에 들린 가면을 곧장 머리 위에 얹었다. 다른 가면 보다 조금 작은 사이즈로 만들어진 여우 가면은 아까 만난 아이들의 파워레인져 가면처럼 얼굴에 쓰는게 아닌 옆 머리에 살짝 걸쳐 포인트를 주는 악세서리 가면이였다. “어때요? 어울려요?” “응. 귀엽네~” “치~ 내가 여기까지 와서 진짜... 별걸 다 본다.” “언니두 부러우면 어서 시집 가~” “흥. 됐거든~?” 어째 둘이 나누는 대화 수준이 아까 만난 형제랑 비슷해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가봐야겠는데? 곧 있으면 공연 시작이거든...” “아, 그럼 빨리 가요. 우리...” 붉게 타오르는 노을 너머로 서서히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 우리는 서둘러 공연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 유코씨와 유키를 데리고 공연 장에 입장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의 선물의 갈라 콘서트가 그 막을 올렸다. 클래식이나 오케스트라 공연을 주로 다루는 콘서트장에 비한다면야 무대 시설은 조악했지만, 신의 선물의 갈라 콘서트는 그 의미 자체로 게임의 완성과 클리어를 축하하며 게임 안에 등장했던 곡을 실제 악기 연주로 들으며 감상하는 자리였다. 두꺼운 장막이 걷히자, 무대 중앙에는 거대한 피아노와 함께 펜타곤의 사운드 디렉터인 우에노씨가 연미복 차림으로 곧장 쇼팽의 왈츠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그랜드 피아노에서 울리는 따듯한 피아노의 울림은 라온의 조그만 스피커에선 도저히 담아 낼 수 없는 감미로운 음색을 담고 있었다. 첫곡이 쇼팽의 왈츠여서 일까? 신의 선물의 갈라 콘서트는 도저히 게임 컨텐츠에 대한 행사라고 볼 수 없을 만큼 굉장히 엄숙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가져다 주었다. 모두가 숨 죽인채 무대 위의 우에노씨를 바라만 보고 있는 지금.. 무대의 맨 앞 좌석에서 내 곁에 앉아 있는 유키와 유코씨는 두 손을 모은채 황홀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큼 무대 위에서 스포트 라이트를 받고 있는 우에노씨의 연주는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 잡기에 충분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왈츠의 선율이 차츰 잦아들기 시작 할 때 즈음.. 어느새 그의 음악에 빠져든 사람들의 입에서 아쉬움의 탄성이 새어 나왔다. 다라다라다라~ 단. 깔끔한 울림으로 첫곡을 마친 우에노씨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손에 들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펜타곤에서 사운드 디렉터를 맡고 있는 우에노 사이토라고 합니다. 이렇게 먼 곳까지 저희 갈라 콘서트를 위해 방문해 주신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먼저 신의 선물은 저희 펜타곤의 간판 디렉터 인 강준혁씨의 조그마한 아이디어로 시작된 게임입니다. 단순히 지금까지 무언가를 때리고 부수고 성장 시켜나가는 RPG나 액션이 주가 되는 게임이라는 틀에서 ‘리듬 게임’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매우 기념비 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훌륭한 작품에 저의 음악을 실을 수 있게 되어 매우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우에노씨는 맨 앞줄에 앉아 있던 나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회장에서 쏟아지는 박수 속에 나 역시 그에 대한 답례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자, 그는 입가에 웃음을 띄우며 객석으로 눈을 돌렸다. “그럼 다음으로 들려 드릴 곡은 작품 중 유키노조 카오리와의 두 번째 협연곡.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슬픔입니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유코씨가 유키에게 말했다. “아~ 나는 게임에서 이 부분이 가장 좋더라...” 다시 피아노와 마주한 우에노씨는 잠시 눈을 감은채 호흡을 가다듬은 뒤. 아주 천천히 피아노 건반을 어루만지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통통 튀어오르는 듯한 피아노 소리가 콘서트 홀을 가득 메우고 객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 조차 두눈을 감은채 그의 피아노를 즐기고 있던 그때... 유키가 나에게 귓속말을 걸어 왔다. ‘준혁씨... 그런데 아까 전에 우에노씨가 이 곡은 바이올린 협연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유키의 질문에 나는 가만히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턱짓으로 무대의 스크린을 가리켰다. 그러자 잠시 후. 천장의 조명이 어두워짐과 동시에 스크린 속에서 금발 머리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 EP. 42 : 갈라쇼 (3) > 끝 ⓒ 손인성# < EP. 42 : 갈라쇼 (4) >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바이올린의 활을 움켜 쥔 채 가만히 우에노씨의 피아노를 듣고 있던 화면 속의 카오리는 이윽고 바이올린 연주가 시작되는 부분에서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들어갔다. 관객들은 잘 모르겠지만, 사실 이 부분은 스크린 속의 캐릭터와 싱크를 맞추기 위해 우에노 씨의 피나는 노력이 빗어낸 결과물이었다. 어느새 피아노 솔로에서 바이올린의 반주곡으로 바뀐 우에노씨의 ‘사랑의 슬픔’은 카오리의 바이올린과 함께 콘서트의 분위기를 한층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클래식 공연이 전해주는 기분 탓일까? 극 중에서 주인공을 이끌어주는 활기한 성격의 유키노조 카오리는 갈라 콘서트 버전에서 왠지 모를 성숙한 분위기를 자아내었고, 그것은 공연들 지켜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게임과는 다른 색다른 감정을 전해주었다. “뭔가 굉장히 어른 스러운 느낌인데?” “그러게... 내가 알고 있던 카오리랑은 조금 느낌이 달라. 뭔가 조금 세월이 흘러 그녀의 모습을 다시 보는 느낌이랄까?” 크라이슬러의 대표곡인 사랑의 기쁨과 슬픔은 분명 사랑을 노래하는 곡임에 틀림없지만, 굉장히 대조되는 곡의 분위기를 담고 있었다. 그중에 현재 연주되고 있는 사랑의 ‘슬픔’은 함께 발표된 사랑의 ‘기쁨’ 과는 달리 다소 무겁고 서정적인 느낌을 담고 있었다. 사랑의 기쁨이 이제 막 사랑을 키워나가는 연인들의 설레이는 감정을 담고 있다면 사랑의 슬픔은 뭐랄까... 사랑하는 연인이 떠나간 뒤 홀로 남아 그리워하는 느낌이랄까? 음악이라는 것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 될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슬픔은 그랬다. 그렇게 우에노씨와 카오리의 연주가 점점 하이라이트 부분으로 다가갈 때 즈음. 스크린 속의 그녀 얼굴이 클로즈업 되며 새하얀 빛에 휩싸였다. ‘나의 바이올린을 듣고 있을 당신에게...’ “어? 뭐지?” 갑자기 들려온 카오리의 목소리에 객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우에노씨의 반주는 아직 멈추지 않았고, 콘서트는 계속 해서 진행 중이었다. ‘당신과 제가 처음으로 마주했던 그 날. 당신은 기억하고 있나요? 아주 조그만 꼬마아이가 엄마의 손을 꼭 잡은 채 가만히 저를 바라 보고 있었죠...’ ‘수많은 악기장들의 손을 거쳐 처음으로 도쿄의 작은 악기점의 보관대에 놓여 있던 저에게...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당신이었습니다...’ ‘달빛이 스며 들어오는 작은 방에서 당신과 함께 올려다본 밤 하늘엔 너무나 아름다운 별이 빛났고... 처음으로 무대의 스포트 라이트를 받으며 관객과 마주했을 때, 살짝 떨려오던 당신의 손 끝을 전 아직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의 빛나는 재능에 기대어 나 역시 다시 한 번 빛 날 수 있었던 그 날. 그리고 지금. 바로 이 순간이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는 마지막 연주...!!!’ 스크린 너머 카오리의 작별 인사와 함께, 그녀와 함께 했던 추억의 나날들이 차례차례 스쳐지났다. 그와 동시에 우에노씨의 사랑의 슬픔은 더욱 격정적으로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이윽고 협주의 종반에 와서 격앙된 두 사람의 음이 동시에 끝을 맺었다.. ‘안녕... 지금까지 고마웠어..’ 마지막 인사말을 끝으로 스크린 속에서 새하얀 빛과 함께 산산히 흩어지는 카오리의 모습에 객석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굳이 멀리서 훌쩍이는 사람을 찾을 것도 없이 내 옆 자리의 유키는 이미 연주의 하이라이트 부분부터 내 손을 꼭 쥔채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와... 나는 그냥 신의 선물에 나왔던 곡을 위주로 한 클래식 콘서트인 줄만 알고 찾아왔는데... 이건 마치 엔딩 이후의 또 다른 엔딩이잖아...” 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감상평에 나는 어느 때보다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이번 갈라 콘서트는 각 히로인과의 작별을 주제로 하고 있었다. 본래 고베 대지진으로 일정이 취소 되었던 갈라 콘서트는 방금 유저의 말대로 게임에 등장했던 곡을 위주로한 평범한 콘서트로 계획 되어 있었다. 하지만 콘서트 예정 날짜가 무기한으로 연장된 탓에 나는 천천히 유저들의 피드백을 확인하며 신의 선물의 마지막 씬을 조금 손 봐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지... 삐........ 삐빗... 삐빗... 게임의 마지막 엔딩에서 주인공의 죽음을 뜻했던 비트음이 콘서트의 스피커를 통해 다시 규칙적으로 들려오자, 객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아... 그렇구나 이야기는 아직 끝난게 아니었어!!” “우와아아!! 대박...” 현실과 게임 세계관의 공유. 이번 갈라 콘서트를 기획하며 내가 생각했던 이상향과 딱 들어 맞았다. 아직 신의 선물의 마지막 씬을 기억하고 있던 유저들에게 오늘의 공연은 결코 잊혀지지 않는 추억을 안겨 주었다. 무대 위의 우에노씨 역시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객석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 신의 선물에 등장했던 4명의 히로인들과 차례로 작별의 시간을 가진 갈라 콘서트는 약 한 시간동안 객석을 눈물 바다로 만들었다. 특히나 마지막까지 주인공을 삶으로 이끌어 주었던 카오리와의 바이올린 협주는 콘서트가 끝난 후에도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전해주었다. 공연의 1부 주제였던 신의 선물의 피날레 공연이 끝난 뒤. 약 15분 간의 휴식시간이 진행 되었다. “아... 진짜 공연 내내 너무 울었나 봐요.” 잠시 바람을 쐬기 위해 밖으로 나온 유키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나에게 다가 왔다. “엔딩은 마음에 들었어?” “응.. 매우..” 빨개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유키는 나를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때 그녀의 곁에 있던 유코씨가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오늘 공연을 못본 사람들은 어떡해요? 뭔가 스토리랑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라 굉장히 서운해 할 것 같은데...” “음~ 오늘 공연을 마치면 따로 공연 실황을 비디오나 VCD로 제작해 판매할 생각입니다.” “아~ 출시 되면 저도 한 장 사야겠네요.” “그래주시면 고맙구요. 공연 실황 VCD의 수익금은 재난 피해 지역에 기부할 예정이니 될 수 있으면 많이 파는게 좋겠죠?” 그러자 유코씨는 여기 저기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찬사에 웃으며 대답했다. “흠~ 오늘 공연 보고 간 사람들의 입소문을 듣는다면, 아마 신의 선물을 플레이 해 본 사람들 전부 한 장씩은 살 것 같은데요?” “뭐 꼭 입 소문을 통하지 않아도 이런 행사에 좋은 기사를 써 줄 친구가 하나 있긴 하죠.” 그 순간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내 등 뒤에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공연 잘 봤다. 역시 멀리까지 온 보람이 있네~!!” 익숙한 준페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녀석의 곁에 지진 사건 이 후.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서있었다. 숏컷 헤어 때문일까? 예전에 만났을 때보다 조금 더 보이쉬해진 느낌이 드는 미사토씨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잘 지냈어요?” “아~ 미사토씨. 오랜만이네요. 공연은 마음에 드셨나요?” “네. 아주 즐거웠어요. 안 그래도 준페이씨가 공연을 보러 오기전에 꼭 해보는게 좋다고 신의 선물과 라온을 빌려줬었거든요.” 게임 전문 리뷰어와 방송 기자의 만남이라... 흔치 않은 조합이긴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나도 유키랑은 전혀 상관 없는 직장이었으니, 부디 잘 이어 나가길 바래야지.. 그때 건물 외부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방송 안내가 들려왔다. -잠시 후. 휴식 시간이 종료되고 2부 공연이 있을 예정이니, 자리에 착석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잠시 후....- “아, 2부 공연 시작되려나 보네. 이제 그만 들어 갈까?” “그럼 준혁씨. 나중에 공연 끝나고 봬요.” “네. 그래요. 즐거운 관람 되시길 바랍니다.” & 삐~~~ 2부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벨소리와 함께 커튼이 걷히자, 무대 정중앙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우에노씨 덕분에 1부에서는 유키와 함께 편안히 콘서트를 관람하면 되었지만, 2부에서는 내가 진행을 맡아야 했다. 기대에 찬 눈으로 무대를 바라보는 유저들과 잠시 눈을 마주친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신의 선물의 갈라 콘서트. 2부 진행을 맡게 된 펜타곤 소프트의 강준혁 이사입니다.” “우와아아아~~” 객석에서 들려오는 어마어마한 함성에 온몸이 저릿할 정도로 진동이 느껴졌다. 성난 야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너무나 절실하게 느껴져 하마터면 실소가 새어 나올뻔 했다. 이번 신의 선물의 갈라 콘서트는 신의 선물이라는 컨텐츠 자체 만으로도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지만, 사실 바로 이 두 번째 순서를 위해 콘서트 티켓을 바랬던 유저들도 결코 적지 않았던 모양이네... 첫 번째 당신을 위한 응원가가 발표된 이 후. 두 번째 곡인 Beating Heart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즈음. 이미 일본 내에서 버추어 아이돌은 발매 이전부터 엄청난 화제 거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지난 달 두 번째 캐릭터의 모습이 공개됨과 동시에 이제 껏 한마음 한 뜻으로 버추어 아이돌의 발매를 기다리던 유저들은 에리카 파와 셰릴 파로 나뉘어 졌다. 청순한 이미지의 에리카야 말로 버추어 아이돌의 메인이 되는 캐릭터라고 그녀를 지지하는 팬층이 생겨 나자, 곧바로 셰릴의 육감적인 바디라인과 섹시한 목소리를 무기로 에리카 파에 반하는 존재가 나타났다. 하지만 셰릴의 모습이 공개 되었다는 것은 바로 3번째 캐릭터가 비공개고 모습을 드러냈다는 걸 의미 했는데, 바로 오늘이 지난 달 잡지에 예고 한 3번째 캐릭터의 모습을 공개 하는 날이었다. 사람들은 벌써부터 세 번째로 등장하는 캐릭터에 대해 어마어마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3번째 캐릭터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물론 청순하고 맑은 에리카의 음색과 당차고 매혹 적인 셰릴의 목소리도 나쁘지 않았지만, 세 번째 캐릭터의 목소리에는 특유의 애교가 섞여 있었다. -첫 번째는 청순. 두 번째는 섹시... 그렇다면 남은 것은 귀여움 뿐이다!!- 라는 멘트가 벌써부터 PC통신 커뮤니티 사이에서 쇄도 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공개를 기다리는 팬들이 벌써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가려진 공개된 실루엣을 토대로 상상도를 그려 이미지 루머를 퍼뜨렸을 정도니까... 더이상 뜸을 들였다 간 폭동이라도 일어날 분위기에 나는 한 걸음 뒤로 물어 나며 마이크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자, 그럼 2부의 시작을 알리며 여러분께서 기다리셨던 버추어 아이돌의 세 번째 캐릭터 콘노 아즈사양을 소개 하겠습니다.” < EP. 42 : 갈라쇼 (4) > 끝 ⓒ 손인성# < EP. 42 : 갈라쇼 (5) > 파앗!! 환하게 비추는 스크린 속에 ‘큐티’라는 제 3의 매력을 지닌 아즈사가 등장하자, 이제까지 객석에 숨어 있던 버추어 아이돌의 진성 매니아들의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우와아!! 나왔다!!” “그래!! 이것 봐.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겁나 귀엽잖아!!” 밝은 갈색톤 머릿결에 한쪽 만 땋아 마치 사과 잎을 연상시키는 헤어스타일의 그녀는 작은 체구임에도 당당한 포즈를 취하며 한 손에는 일렉 기타를 세워 들고 있었다. 짧은 교복 치마 차림에 붉은색 일렉 기타가 굉장히 강렬한 느낌을 전해주고 있었기에 이 때까지 그녀를 기다려온 제 3세력은 기대 이상의 퀄리티에 만세를 외쳤다. “으아아!! 나오겠지!? 분명 나올 거야. 아즈사 피규어!!”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로 진행 되었던 1부와는 달리 용광로처럼 끓어오르는 버.추.아 (최근에 게이머들이 버추얼 아이돌을 이렇게 줄여서 부른다나?) 매니아들은 회장을 씹어 삼킬 정도로 환호성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제 3세력의 호응도가 장난 아닌데?’ 최초로 콘노 아즈사의 실루엣을 공개 했을 때, 옷자락과 치마의 끝 단. 그리고 ROCK을 지향하는 음악성에서 일렉 기타를 다루는 고등학생일 거라 예언한 사람이 있을 만큼 이번에 아즈사는 공개 전부터 게이머들에게 초미의 관심사를 끌어 모으고 있었다. “콘노 아즈사 18살!! 지금부터 노래 하겠습니다~!!” 특유의 애교 섞인 목소리로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드는 그녀의 모습에 3세력의 동태를 살피러 온 1,2 세력의 팬들조차 멘탈이 슬슬 흔들리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떻게 그들이 1,2 세력인 것을 알았냐고? 그야... 지난 달에 발매 한 아야카와 셰릴의 캐릭터 티셔츠를 입고 있었으니까... 게임 산업에서 게임의 본편 만으로도 어느정도 수익을 노릴 수 있긴 하지만, 사실 이런 굿즈의 판매에 따른 매출 절대 무시할 수 없다. 간단한 예로 신의 선물의 OST라던가, 내가 없는 거리의 OVA와 피규어가 본편의 순수익과 거의 비등한 매출을 일으키고 있는 실정이었으니까. ‘하지만 저 옷은 입고 다니라 만든 옷은 아니었는데...’ 보통 옷걸이에 걸쳐서 집에 걸어 두는 사람까진 생각해봤지만, 저걸 입고 외출 할 수 있는 용자들이 존재 할 줄이야.. 최근 들어 유저들 사이에 에리카와 셰릴의 세력 싸움이 거세지며 그녀들에 관한 굿즈 판매량이 인기의 척도가 되어 가고 있는 실정인지라, 저런 식으로 자신의 최애캐(최고로 애정을 쏟아 붓는 캐릭터)를 홍보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듯 해 보였다. ‘게임 산업도 나쁘지 않지만, 오타쿠 산업은 진짜 빛의 속도로 발전하고 있구나...’ 버추어 아이돌에 대한 굿즈 판매량이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데? 굿즈란 어찌보면 게임 회사의 악독한 상술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게이머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기호품 과도 같은 존재였다. 오히려 팔고 싶지 않아도 게이머들의 요청으로 어쩔 수 없이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 바로 이 굿즈 아이템이니까...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의 캐릭터 피규어를 모으고 싶다.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의 OST를 사고 싶다.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의 일러스트 집을 사고 싶다. 그것이 얼마든... 그것이 얼마나 구하기 힘든 것이든 기필코 손에 넣고 말리라. 그로인해 한 달 동안 편의점 삼각 김밥만 먹고 살아간다 하더라도.. 특히나 우치무라가 제작하는 피규어 같은 경우에는 그 수량이 극히 한정적이라, 잘 못하면 나중엔 정가의 2~3배 가량을 물고 사야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기에 돈이 없어도 일단 지르고 보는 소비 심리가 작용하는 것이 바로 이 굿즈 시장이었다. 물론 이런 경우에서 먼저 물건을 사둔 뒤, 밀봉 상태로 보관했다가 나중에 가격이 오르면 높은 가격에 되팔아 버리는 이들도 존재 했지만, 개인 소유물에 대한 가격 책정은 부르는게 값 이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굿즈는 그 희소성에서 상품의 가치가 결정 되는 부분이기에 무작정 많이 뽑을 수도 없었고, 한 가지 작품이 롱런 하는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그런 면에서 내가 없는 거리는 정말 뽑아 먹을 때까지 뽑아 먹은 케이스 이긴 하지만...’ 하긴 그러고 보니 ‘내가 없는 거리’에서도 세 명의 히로인에 대한 은근한 세력 다툼이 있었구나... 하지만 불과 몇 년 만에 게이머의 성향이 이렇게까지 바뀔 줄은 나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83년도로 회귀하기 전에 미소녀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을 좀 더 많이 보고 올 것을... 괜히 안타까워 지는 순간이었다. 1995년의 일본은 게임도 게임이지만, TV 애니메이션의 어마어마한 부흥기라 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오타쿠 문화의 최정점이라 할 수 있는 안노 히데키 감독의 에X겔리온이 올해 연말에 방영 될 예정이었고, 개그 판타지물의 최정점을 달리는 리나 인버스의 슬레이어즈. 국내에선 ‘피구왕 통키’라 불리웠던 ‘불꽃의 투구아 돗지 탄페이’등 주옥 같은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쏟아 지고 있는 시기였다. 내가 사는 맨션 주차장에서도 불꽃 무늬를 그려넣은 피구공을 들고 ‘불꽃슛’ ‘번개슛’을 외치며 볼을 던지는 꼬맹이들의 미스볼에 뒤통수를 얻어 맞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니 말 다했지. 거품 경제가 꺼지고 일본의 ‘잃어 버린 10년’이 진행 중인 불황 속에서도 이상하리 만치 게임 산업은 불황의 직격타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같은 경우에는 조금 사정이 달랐다. 생각 만큼 시청률이 나오지 않을 시에는 그것이 굿즈 판매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워낙에 황금기를 맞이 하다보니 다른 시기 였으면 괜찮았을 수작도 굉장히 저평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가장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애니메이션은 지난 4월에 TV 방영을 시작한 ‘신 기동전기 건담 Wing’ 였는데, 기존에 다소 딱딱하게만 느껴지던 건담의 세계관을 새로운 아이들이 무리 없이 받아 들일 수 있도록 일종의 리부트 역할을 하는 작품이었다. 전대물과 아이돌이 있기였던 시대 상황을 고려해 다섯 명의 미소년 파일럿과 그들이 탑승하는 화려한 색채의 건담은 기존의 건담 매니아에겐 반감을 샀지만, 새로운 세대층을 대거 끌어들이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초반엔 다소 유치했던 시나리오 역시 화를 거듭 할수록 진중한 분위기를 담고 있어 차후엔 결국 기존 건담 매니아 마저 흡수하는데 성공했지만, 사실 건담W는 앞서 말한 굿즈를 팔기 위해 모든 수단을 전부 동원한 작품이라 볼 수 있었다. 비행모드인 독수리 형태로 변신이 가능한 윙 건담부터 이건 프라모델 판매를 제대로 노리고 파고든 기체임에 틀림 없었으니까. 이제와 생각해보면 굉장히 유치한 기믹이었던 사신을 모델로 하는 데스 사이즈.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 메카닉임에도 굳이 망토를 휘감고 다니는 샌드록. 밀리터리 & 웨폰 매니아의 가슴을 설레이게 만들었던 헤비암즈. 거대한 중국 시장을 염두했는지 중국의 고대 무사를 모델로 만들어 낸 쉔롱. 그리고 기존 건담 유저를 끌어 들이기 위한 장치인 가면의 캐릭터 젝스 마키스까지.. 마치 ‘네가 무얼 좋아할지 몰라 전부 준비해 봤어’ 라고 하는 듯한 그들의 마케팅은 현재 시장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건담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차후에 발매될 ‘슈퍼로봇배틀’이라는 게임에서도 금방 차용이 되었다. 본래 애니메이션과 게임은 사실 한 식구라 볼 수도 있거든... 원 소스 멀티 유싱. 하나의 컨텐츠를 만들어 그것을 다른 사업으로 발전 시키는 이 기법은 이 시대에도 소비자들에게 곧 잘 먹히는 마케팅 중에 하나였다. ‘그렇다면 나 역시 그저 앉아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순 없지.’ 키이이잉~!! 다단!! 다다단!! 날카로운 일렉 기타의 연주음과 함께 휘몰아치는 드럼의 비트음 속에서 아즈사의 노래는 최고조로 향하고 있었다. 조그만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워풀 한 보이스는 현재 콘서트 홀에 모인 사람들을 열광 시키기에 충분했다. -중요한건 자신을 사랑하는 거야~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다른 누구 역시 사랑할 수 없어~!!- “귀... 귀여워!!” 콘노 아즈사를 처음 사람들의 반응은 모두가 한결 같았다. 마치 방과후 밴드부에 다니는 고교생을 연상케 하는 그녀의 모습은 확실히 이제까지 여러 작품에서 보았던 비현실적인 미소녀 캐릭터와는 달리 굉장히 현실적인 느낌을 가져다 주고 있었다. 같은 아파트의 옆집에 살고 있는 친근한 동생처럼... 고교시절.. 방과 후 운동장에서 한 번쯤 내 곁에 스쳤을 법 한 후배처럼.. 두 번째 아이돌인 셰릴처럼 절정의 매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수수하고 귀여운 매력을 가진 캐릭터랄까?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노래할게요~!!” 스크린 속의 콘노 아즈사는 노래를 마친 뒤, 객석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며 활짝 웃어 보였다. 인사 후에 무대에서 사라지는 도중 앰프선에 다리가 걸려 엉덩방아를 찍는 연출까지 콘노 아즈사는 성공적인 데뷔를 마치고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지금까지 콘서트홀이 떠나갈 듯 외쳐대던 유저들의 함성이 일순간에 잦아 들었다. 왜냐고? 그거야 지금까지의 정황상 한 명의 캐릭터가 모습을 공개 했다면 또 다른 캐릭터의 실루엣이 공개되었으니, 모두가 숨 죽여 스크린을 바라보는 것도 이해 갈 법하지.. 하지만 이번에 공개할 캐릭터의 목소리를 담당하게 된 그녀는 사실 나조차 처음엔 그녀의 영입을 망설일 정도였다. 노래 실력이 다른 멤버보다 떨어져서? 그건 아니다. 오히려 그녀의 목소리는 현재 참가자 중에 탑 클래스인 칸나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했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대사를 읊을 때의 연기력이 떨어져서? 그것도 아니다. 그녀는 게임의 녹음 작업을 마칠때까지 어느 누구보다 충실히 스케쥴을 소화했고, 연기력도 수준 급이었으니까... -문제는 오히려 다른 쪽에 있었다.- 이윽고 콘서트홀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잔잔한 피아노 소리가 울리며 스크린 속에 그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번에도 역시 실루엣으로 처리된 그녀의 모습은 대부분이 피아노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긴 생머리에 가냘픈 몸이라는 것 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둘 만이 있는 텅빈 플렛폼에.. 침묵하고 있는 당신의 옆 얼굴이 신경쓰여.. 어른이 되어 각자의 시간을 보내며 소중한 것을 잃어가겠지만... 나 역시 그걸 알고 있지만.. 안아주세요. 내 몸이 부서질 정도로... 이 앞에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두 사람처럼 잘 웃어 넘길 수 있을까.. 솔직한 나의 감정도 하루하루에 의미가 있다는 것도 당신이 가르쳐 주었어. 앞으로도 잊고 싶지 않아. 떨어져 있는 시간에도. 당신 곁에 있을께... “제 삶이 다 할 때까지 당신을 위해 노래하고 싶어요.” 마지막에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한 쪽 가슴이 아련하게 울려 왔다. 버추어 아이돌의 4번째 캐릭터 ‘사와노 츠바키’ 그녀는 버추어 아이돌 캐릭터 중에서 유일하게 목소리를 연기한 실제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받았다. 그것은 현재 시한부 선고로 투병 중인 츠바키씨의 간곡한 부탁에 의해서 였다.. < EP. 42 : 갈라쇼 (5) > 끝 ⓒ 손인성# < EP. 42 : 갈라쇼 (6) > & “하고 싶어요.”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눈에서 그녀의 강인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럴수록 안타까운 마음에 그녀의 눈을 피하고 싶었지만, 회피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사와노씨의 마음은 충분히 알지만...” “······.” 지그시 입술을 깨무는 츠바키씨의 눈에는 어느새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오디션 합격 통지 이후 직접 펜타곤 소프트를 찾아온 그녀는 버추어 아이돌의 메인 디렉터인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전했다. 단 둘이서 이야기 하고 싶다는 말에 사원들이 주로 사용하는 면담실로 안내한 나는 잠시 후. 그녀가 투병중이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앞으로 짧으면 6개월, 길면 1년 이내에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에 나는 커피잔을 손에 든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일본 최북단에 위치한 홋카이도 출신인 그녀는 정말로 눈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오디션 지원서에 적혀 있는 그녀의 나이는 25살. 아이돌로 데뷔하기엔 나이가 좀 있는 편이지만, 뚜렷한 이목구비에 가느다란 목선을 가진 그녀는 한 눈에 보기에도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청순한 미인이었다. 개인 면담실로 그녀를 안내하는 도중, 근무중이던 펜타곤 직원들의 눈이 저절로 그녀에게로 향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그녀의 노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이번 버추어 아이돌 프로젝트는 상당한 기간을 두고 장기적으로 끌고 갈 컨텐츠였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앞으로 병이 더 악화 되어 녹음 작업 중 사고가 일어나거나, 행여 그녀가 쓰러질 경우. 펜타곤 입장에선 너무나 큰 리스크를 감당해야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머그잔을 꼭 감싸쥔 채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목소리와 실력이라면 따로 보컬 트레이닝을 받지 않아도 칸나처럼 곧바로 투입이 가능하다. 문제는 그녀의 건강이다...’ 물론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약 녹음 기간 도중 병세가 악화되어 더 이상 노래할 수 없다면? 더 이상 아무 목소리도 낼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렇게 직접 회사까지 찾아와 자신의 병에 대해 숨기지 않고 이야기 해준 그녀가 참 고맙지만, 아무래도 이번 건은 거절을 해두는 편이... “...싶어요..” “네...?” “보여드리고 싶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제가 이 세상에 존재 했었다는 증거. 많은 사람들이 저의 노래를 사랑해 주었다는 것을... 제가 떠난 후에 남아 계실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 순간. 나 역시 먼 미래에 두고온 나의 부모님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들... 여행 잘 다녀와...’ 1983년도로 회귀 하기 전 어머니와 나눈 마지막 인사.. 왜 그때 어머니에게 사랑한다는 말한마디 못했었는지.. 아직까지 후회스러운 마음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떠난 뒤에도 그녀의 목소리를 담은 캐릭터는 영원하다. 사와노 씨는 지금 버추어 아이돌이라는 컨텐츠를 통해 자신이 이 세상에 살았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어했다. “부탁드려요. 이사님...” “후우... 이거 참.. 알겠습니다.” “저... 정말요!?” “대신 두 가지 조건이 있어요.” “뭐... 뭔데요?” “첫번째. 당신의 병에 대해 적어도 몇몇 직원은 알아야 합니다. 완전히 숨길 순 없어요. 혹시나 녹음 도중 당신이 쓰러질 수도 있고, 그럴 때 신속히 움직일 수 있는 분이 항시 당신의 곁에 있어야하니까요.” 병에 대해선 되도록 직원들에게 숨기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첫 번째 조건으로 그 부탁을 거절했다. 사와노 씨는 내 첫 번째 조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았어요.” “그럼. 두 번째 조건.” 첫 번째 조건 때문일까? 사와노 씨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내 말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최대한 편안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지금의 건강 상태를 최대한 유지 할 수 있도록 노력해 주세요.” “네? 아, 네..!! 꼭 그렇게 할게요.” “저 역시 최대한 서포트 해드리겠습니다. 혹시나 녹음 스케쥴에 문제가 생기면 사전에 연락 부탁드려요.” “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사와노 츠바키씨...” 잠시 후. 면담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사와노씨가 우물 거리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더 하실 말씀이라도...?” “그게.. 염치 없는 건 알지만, 한가지 부탁드리고 싶은게 있어서요.”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 드리겠습니다.” “혹시 제가 연기 할 캐릭터의 이름이... 벌써 정해졌나요?” “네...? 아니요. 아직까지는... 일단 오디션 통과자 분들의 목소리를 종합해 가장 적절한 이미지의 캐릭터에 배치시킬 예정입니다만...” “그렇다면, 혹시 제가 연기 할 캐릭터의 이름을 제 이름으로 할 수 있을까요?” “사와노씨 당신의 이름을요?” & ‘안아 주세요.’ 라는 제목의 노래는 콘서트 홀에 모인 수많은 청중을 그대로 얼어 붙게 만들었다. 곡의 분위기 자체는 템포가 조금 느리다는 것을 빼곤 에리카의 노래와 비슷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따듯한 느낌이 드는 당신을 위한 ‘응원가’ 와는 달리 츠바키씨의 ‘안아 주세요’는 들으면 들을수록 그녀의 애절한 목소리가 귓속에 파고들어 가슴을 쿡쿡 찔러대었다. “뭐지... 이 노래..?” 슬프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는 게 이런 걸까? 수 많은 반복 녹음 중에서도 힘든 내색 한번 하지 않고 꿋꿋히 병마와 싸워온 츠바키씨는 자신이 맡은 캐릭터의 목소리 녹음을 모두 끝 마친 뒤. 병세가 악화되어 현재는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현장의 분위기를 꼭 보고 싶다는 츠바키씨의 부탁에 무대 건너편에는 소형 캠코더를 이용해 현재 콘서트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하나씩 담고 있는 카오루의 모습이 보였다. 나 역시 고개를 돌려 무대 쪽을 바라보자. 누군가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었고, 어떤 이는 두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목소리를 가만히 느끼고 있었다. 안아주세요. 내 몸이 부서질 정도로... 앞으로 함께 하는 날에 어떠한 괴로움이 있더라도 지금의 우리처럼 잘 웃어 넘길 수 있을까..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꼭 안아 달라는 내용의 노래 가사는 츠바키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더 해지자, 무척이나 슬프게 느껴졌다. -제 삶이 다 할 때까지 당신을 위해 노래하고 싶어요.- 그녀의 마지막 말에 숨겨진 진정한 의미를 지금 이 노래를 듣고 있는 유저들은 알 수 없겠지... 그저 츠바키씨의 목소리에 흠뻑 취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홀로 쓴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윽고 그녀의 작별 인사와 함께 사와노 츠바키의 홍보 영상이 종료되자, 나는 무대 중앙으로 걸음을 옮기며 마이크를 움켜 쥐었다. “이로서 다음달 출시 예정인 버추어 아이돌 1기 연습생들의 홍보 영상이 종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사와노 츠바키의 모습은 컴플리트 라온의 출시일에 공개 될 예정이니, 많은 기대... 부탁 드립니다.” 버추어 아이돌은 총 11명의 캐릭터가 등장할 예정이었지만, 처음부터 모든 캐릭터를 등장 시키지 않고 분기별로 기수로 나누어 발매될 예정이었다. 자체 오디션을 통해 각 지역에서 충분히 역량 있는 인재들을 모으긴 했지만, 모두가 곧장 데뷔해도 될 만큼 빼어난 실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테라다씨와 함께 지금 당장 곡을 줘도 무방할 만큼의 실력을 가진 이들 4명을 선별 했고, 나머지 7명은 분기 별로 차례대로 데뷔 시키기로 결정했다. 사와노 츠바사의 건강에 대해 전해 들은 테라다씨 역시 크게 놀랐지만, 그녀를 버추어 아이돌 프로젝트에서 제 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카메라를 보며 웃을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치명적인 매력이 있습니다. 이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에게 노래를 부르지 말라고 하는 건 죄악이나 다름 없어요. 기대해주세요. 최고의 곡으로 그녀의 무대를 빛내 보이겠습니다.’ 그리고 테라다씨 예견은 정확히 들어 맞았다. “우와아아~!!!!!!” “최고다!! 난 오늘 부로 사와노 츠바키에게 올인한다!!” “콘노 아즈사도 좋았지만, 마지막 캐릭터의 노래는 진짜 인정 할 수밖에 없네..” “그러게 사실은 나. 마지막 후렴 부분에서 눈물 찔끔 흘렸다..” “아씨.. 에리카에 셰릴.. 아즈사에 츠바키라니 돈도 없어 죽겠는데, 대체 뭐 부터 사야하는 거야!!” 순식간에 그 들의 마음을 사로 잡아버린 사와노 츠바사는 아직을 모습을 공개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 정도 반응이라면 병원에 있는 츠바사씨도 만족하겠지?’ 기뻐할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며 나는 무대 옆 쪽에서 대기 중인 카오리를 바라보았다. 소형 캠코더를 들어보이며 ok 사인을 보내는 그녀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살포시 웃어 보이며 무대 뒤쪽으로 모습을 감췄다. ‘3일 전부터 나와 준비한 이벤트를 준비하러 간건가?’ 츠바키씨에 대한 생각에 우울했던 마음이 카오리의 미소에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지금 당장 사와노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자.. 지금은 콘서트 진행에 집중 해야지. 속으로 마음을 다 잡은 나는 고개를 들어 객석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그럼 이번에는 오늘 콘서트에 참석하는 유저를 대상으로 한 질의 응답에서 여러분들이 가장 궁금해 하시는 부분에 대해 몇가지 답을 드리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무대에 오르기 전 행사 스탭에게 건네 받은 질문지를 꺼내든 나는 먼저 첫 번째 질문을 읽어 보았다. “버추어 아이돌의 발매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유저입니다. 지난 번 펜타곤 샵에서 셰릴의 모습을 공개 했을 때 도도한 그녀의 분위기에 한 눈에 반해 버렸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를 연기한 분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요. 실제 가수분인가요?” 그러자 객석 여기저기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나도 그 부분이 궁금하긴 하더라. 에리카부터 오늘의 츠바키까지 네 곡 전부 무엇하나 뒤떨어지는 게 없잖아. 정말 실제 가수가 부른 건지.. 만약에 그렇다면 대체 누구인지 엄청 궁금 하더라구..” 나는 잠시 객석의 반응을 살핀 뒤 천천히 대답했다. “먼저 셰릴양에 대한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아마 그녀를 연기한 성우 분도 굉장히 좋아하실 듯하네요. 음... 유저님의 질문에 대해 답을 드리자면, 현재 버추어 아이돌의 성우분들은 단지 노래 능력만 뛰어나다고 발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게임 속 캐릭터의 표정과 느낌을 제대로 연기할 수 있도록 작년 가을부터 별도의 오디션을 거쳐 연기 연습과 보컬 트레이닝을 겸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중에서도 처음부터 무리없이 일정을 소화해 내시는 분들도 있고, 그렇지 못한 분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중에서 4분을 선별하여 이번 버추어 아이돌의 1기 성우로 발탁하게 되었습니다. 목소리를 연기하시는 분들은 오디션을 통해 선별했지만 그 중에서는 가수 지망생도 있었고, 성우 지망생도 있었습니다만, 누구나 알고 있을 정도의 유명인이 참여하진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 정도면 답이 되셨나요?” 나의 답변에 객석에 앉아 있던 몇몇 사람들의 고개가 위 아래로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비교적 가벼웠던 첫 번째 질문에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두 번째 질문지를 바라보았다. “펜타곤 최초의 거치기 콘솔인 컴플리트 라온이 출시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유저입니다. 최근 버추어 아이돌을 바라보며 문득 컴플리트 라온의 성능에 대해 궁금한 점이 생겼는데요. 잡지를 통해 얻은 정보로는 아이돌을 육성하여 무대에 세우는 것이 목표인 게임으로 알고 있는데, 그녀들의 공연 무대가 실제 콘솔기기에서 어떤 식으로 표현이 될지 굉장히 궁금합니다. 펜타곤이라면 홍보영상에서 보여주었던 애니메이션 만큼 깔끔한 폴리곤 캐릭터의 무대를 보여주실 수 있으신가요?” 어라.. 두 번째 질문은 상당히 날카로운데? 질문지를 손에 든 채로 객석을 바라보니, 이번 질문에 대해 공감하는 이가 상당히 보였다. 하긴 그도 그럴것이 NEGA의 리얼 파이터가 상당히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고, 센소니의 기어 스테이션 역시 CES에서 보여주었던 티라노 사우르스 만큼의 그래픽으로 게임을 즐긴다는 건 거짓으로 판명 났으니까.. 나는 잠시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불가능 합니다.” 그러자 나의 대답에 실망한 유저들이 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그런 그들을 위해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여러분께서 만족하실만한 답을 찾았습니다.” “음...?” < EP. 42 : 갈라쇼 (6) > 끝 ⓒ 손인성# < EP. 42 : 갈라쇼 (7) > “하지만 여러분께서도 분명 만족해 하실만한 답을 찾아내었습니다.” “음...?” 이어진 나의 대답에 객석에 있는 몇몇 유저들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사실 마음만 먹는다면 기어 스테이션의 개발자인 쿠라카기씨처럼 컴플리트 라온의 성능을 뻥튀기 시켜 순간의 위기를 모면 할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한달 후면 밝혀지게 될 어리석은 거짓말을 하기 싫었다. 나는 잠시 머릿 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후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나의 게임을 개발할 때는 항상 게임을 구동시키는 기기의 성능과 타협을 해야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개발 욕심이 많아 어떻게든 제가 생각했던 구도대로 게임을 만들고 싶어 하지만, 여러 요소로 인해 그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이번 버추어 아이돌에서도 마찬가지 였죠.” “이 자리에 계신분들 중에서 아직 학생 신분이신 분들은 차후에 저희 펜타곤이나, 아니면 민텐도, NEGA에 입사를 희망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저 역시 민텐도에 입사했을 때가 21살이었으니, 정확히 12년 정도가 흘렀군요. 그 당시에 가장 유명했던 게임이라면 여러분도 알다시피 쿠마모토 시게루씨의 슈퍼 마리지였습니다. 그때의 슈퍼 마리지와 제작년에 출시된 리얼 파이터를 비교해 본다면 여러분께서도 어렴풋이 느끼셨을 겁니다. 불과 10년 사이에 게임 시장이 어떻게 변화왔는지를...” “하긴 듣고 보니, 그렇네..” “지금이야 아무 것도 아니지만, 당시에 슈퍼 마리지의 횡스크롤 시스템 조차 충격적이였었지.” “갑자기 옛 이야기를 꺼내니 슈퍼 마리지가 하고 싶어지네... 집에 돌아가면 오랜만에 패밀리 좀 꺼내서 해볼까?” 나는 동요하는 유저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현재 게임 업계는 2D 그래픽에서 3D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습니다. 당연히 게임을 만들고 있는 제작사 마다 새로운 시도가 있을테고, 그것이 반드시 여러분들의 마음에 쏙 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저희 역시 폴리곤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적응하는 단계이니까요. 저 역시 초기에 버추어 아이돌을 기획 했을 당시 지금 보여드린 홍보 영상 그 이상의 연출을 꿈꿔보았습니다. 하지만 현 시기의 하드웨어의 성능으로는 모리타씨의 미려한 캐릭터 디자인을 표현해 내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더군요. 다음 달 발매 예정인 컴플리트 라온은 현재 시장에 유통 중인 모든 콘솔들 중에서 단연 최고의 성능을 자랑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 역시 버추어 아이돌의 콘서트 연출은 기기의 성능 부분과 어느 정도 타협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었지요. 그러던 중 저희 펜타곤 소속의 피규어 디자이너 우치무라씨의 제안으로 버추어 아이돌의 콘서트 연출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 되었습니다.” “우치무라라면, 설마 그 한정판 피규어를 만드는..” 처음 우치무라를 3D 캐릭터 디자이너로 추천한 것은 다름 아닌 모리타였다. NEGA에서 리얼파이터가 발매되고, 게임 센터에서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어갈 때 쯤. 우리 펜타곤 역시 폴리곤 기술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리타가 나를 찾아와 우치무라를 자기 밑으로 넣어줬으면 한다는 인사 요청을 해왔다. “우치무라군을 이대로 피규어 제작에만 매진하게 만드는 것은 회사에게 있어서 큰 손실입니다.” 평소 모리타의 모습과는 달리 확신에 가득찬 표정으로 자신 있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책상에 앉아 펜대를 굴리던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치무라를... 제 2 개발팀으로?” “네. 그렇습니다.” “흐음... 뭐 본인이 원한다면 인사이동을 고려해 줄 수 있긴한데, 어째서 갑자기 그러는 거야?” “우치무라군은 평범한 저와는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가진 천재이기 때문입니다.” “천재라고...?” 7년이란 시간 동안 모리타와 함께 일해오며 그가 누군가를 이토록 칭잔하는 일은 드물었기에 나는 손가락 사이로 굴리던 볼펜을 살며시 내려 놓았다. “우치무라군이 가지고 있다는 실력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 해 볼래?” 그러자 잠시 머뭇거리던 모리타는 지그시 아랫 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줄 곧 피규어를 만들어 와서 그런지,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더군요. 얼마 전 우치무라 군이 본사에 들렀을 때, 직원 교육 시간에 잠시 지도해 준적이 있었는데, 잠깐의 설명 만으로 어설프게나마 비행기 하나를 뚝딱 만들어 내더군요. 마치 가상의 공간인 모니터 안에서 프로모델을 만드는 것 같다고 좋아라 하길래, 앞으로도 교육에 참석해도 좋다고하니, 단 며칠만에 다른 직원들보다 훨씬 앞 서 나가더군요. 최근에는 마크로스의 발키리와 거의 흡사한 기체를 혼자서 완성했습니다.” 모리타를 통해 전해들은 우치무라의 실력에 나 역시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모리타는 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따로 우치무라를 만나 볼 것을 청했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우치무라를 따로 만나 그에게 한 장의 일러스트를 건네주었다. 잠시동안 나에게서 받은 일러스트를 가만히 바라보던 우치무라는 살짝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없는 거리의 하세가와 미유키군요.. 내가 없는 거리 시리즈를 만드는 건 오랜만인데, 다음에 제작 할 피규어는 미유키인가요?” “너와 내가 만나게 된 것도 바로 그 미유키 덕분이었지?” 우치무라는 잠시 옛 기억이 떠올랐는지, 가볍게 뒷 머리를 긁적이며 웃어보였다. 나는 그런 우치무라의 미소에 마주 웃으며 뒤에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 이번에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캐릭터는 내가 없는 거리의 하세가와 미유키야.” “맡겨 주세요. 시간이 좀 흐르긴 했지만, 내가 없는 거리의 히로인들이라면 자신 있습니다.” 믿음직스러운 우치무라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혹시나 잘 모르겠는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 모리타에게 물어 보도록 하고, 이번 기회에 3D 모델링에 대해 잘 배워 두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어라...?” 일러스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리던 우치무라는 대화 내용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부장님.. 혹시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이번 기회에 3D 모델링에 대해 잘 배워두라고.” “... 저기 그 말씀은 지금 이 하세가와 미유키를 폴리곤 캐릭터로 만들어 달라는 말씀 이신가요..?” 그의 질문에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여 보였다. “에에엑!!! 부.. 부장님. 그건 무리입니다. 무리 무리. 절대로 무리입니다!!” “왜지? 네가 적임자라고 추천까지 받았는데...” 너무나 간단명료한 나의 대답에 우치무라는 벙찐 표정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펄쩍 뛰었다. “네? 아니 그게 이런 고 난이도 작업은 모리타 팀장님 말고는 아무도 해낼 수 없을 거에요. 이제 막 로우 폴리곤에 발을 들인 제가 뜬금없이 캐릭터 모델링이라뇨!? 대체 누가 저를 추천한 겁니까?” “네가 존경에 마지 않는 바로 그 모리타가 너를 지명했거든.” “모리타 팀장이 저를요?” “그래. 다른 누구도 아니고, 너를 콕 집어서 이야기 하더라. 못 믿겠으면 직접 모리타에게 찾아가서 물어 봐.” “아니.. 그게.. 저..” “단, 나 역시 강요하는 건 아냐. 네가 지금 하는 일에 만족하고, 그만한 열의가 있다면 이번 인사 건은 내 선에서 없던 일로 처리해 줄 수 있어. 하지만 나와 오랫동안 함께 일 해 온 모리타가 나에게 직접 찾아와 너를 추천 했다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어서겠지. 안 그래?” 우치무라는 내 말에 손톱을 깨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에 집중할 때면 우치무라는 언제나 엄지 손톱을 물어 뜯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팔짱을 낀채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채 느긋하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우유부단한 성격인 우치무라는 아직까지 손톱을 물어 뜯으며 고심에 고심을 더하고 있었다. ‘저러다 아주 제 손톱 다 먹어 치우겠네...’ 팔짱을 낀채 팔뚝 부근을 톡톡 두드리며 나의 대답을 기다리던 나는 결국 참다 못해 내가 먼저 입을 떼었다. “이봐. 우치무라군.” “네? 아, 네...” “너무 딱딱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잘 생각해보면 모리타가 널 추천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니까. 모리타가 나에게 했던 말 중에 너는 하나의 캐릭터를 다 각도로 볼 수 있는 재능을 가졌다고 하더라. 이게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모리타의 캐릭터 일러스트는 훌륭해. 과연 여기서 더 나가갈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말야. 그런 모리타를 유명한 화가에 비유하자면, 우치무라 너는 조각가다.” “조각가요?” “그래. 모리타가 그린 캐릭터 일러스트를 바탕으로 너는 언제나 새로운 피규어를 만들어 내고 있잖아.” “그건 모리타 팀장이 제가 작업하기 쉽도록 다각도에서 세세하게 그려주었기 때문에...” 여전히 자신 없는 태도로 일관하는 우치무라의 반응에 슬슬 속에서 열이 오르는 것을 꾹 참아낸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 위에 올려진 일러스트를 집어 들었다. “그래서 할 수 없다는 거지?”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럼 할 수 있다는 거야?” “그건 확신이...” “······. 지금 나랑 장난 하니?” “아, 아뇨!! 그럴리가요.” “그럼 받아.” 내가 다시 그에게 미유키의 일러스트를 내밀자, 우치무라는 반쯤 포기한 얼굴로 내 손에 들린 일러스트를 받아 들었다. “자~ 그럼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그러자 우치무라는 마치 내 목소리에 반응하는 로봇처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로 곧장 모리타가 있는 제 2 개발팀으로 달려간다. 실시.” “시... 실시!!” 결국 미유키의 일러스트를 손에 쥔 채, 후다닥 달려나가는 우치무라의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지끈 거리는 이마를 어루만졌다. 하지만 그에 대한 보답일까? 우치무라는 모리타의 곁에서 나날히 일취월장하게 되었고, 덕분에 CES에 작품을 출품하기 한 달 전 하세가와 미유키의 3D 모델링을 여유롭게 뽑아 내었다. 내가 없는 거리 풀보이스 판에 들어가게 될 보너스 모드의 탄생에는 이러한 비화가 숨어 있었다. 덕분에 우치무라도 그때 CES에 함게 참석 했던 것이고... & 그리고 지금. 이제는 제 2 개발팀 버추어 아이돌의 3D 캐릭터 디자이너로서 한 발 더 나아간 우치무라의 작품이 스크린에 떠올랐다. “우와~ 귀여워!!” “아~ 그렇구나. 캐릭터의 모습이 전부 드러나는 건 공연 중간 중간에 일러스트로 대체하고 콘서트를 누비는 3D 캐릭터는 SD로 표현했구나.. 제법인데?” “저런 식으로 기기 성능의 과부하를 줄인건가? 과연 펜타곤 답네.. 좋은 선택이야.” 콘서트홀 내부에서도 같은 게임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몇몇 섞여 있는지 콘솔의 과부하를 운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대한 스크린에는 2등신으로 표현된 3D 캐릭터 4명이 종횡무진 무대를 휘저으며 셰릴의 Beating Heart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만족스러워 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며 우치무라를 3D 캐릭터 디자이너로 추천한 모리타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 이후 이루어진 유저들의 질문 사항은 방금 보여준 라이브 영상으로 한방에 해결되었다. 고급스러운 일러스트와 함께 귀여운 캐릭터들이 뛰어 다니는 무대는 누가 보아도 흡족한 기분이 드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2부의 순서도 종반에 이를 때 즈음.. 무대 건너편에 어느새 준비를 마치고온 카오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백의 드레스에 금색 가발을 쓰고 돌아온 카오리는 수줍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혀를 쏙 내밀었다. 그녀의 곁에는 유키가 나를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려 보였다. 대기실에서 카오리의 색조 화장과 드레스 입는 걸 도와준 유키는 카오리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며 작게 파이팅을 외쳤다. 나는 두 여자의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조명팀에게 사인을 보내었다. 그러자 멀리있던 펜타곤 직원이 천천히 콘서트 홀의 조명을 어둡게 만들었다. 객석 쪽에는 1부 때 함께 있었지만, 2부에 들어와 모습을 감춘 카오리 덕분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하야시가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런 하야시를 잠시 바라보다가 한쪽 입꼬리를 슬며시 말아 올렸다. < EP. 42 : 갈라쇼 (7) > 끝 ⓒ 손인성# < EP. 43 : 완전한 즐거움. (1) > “방금 전 질의응답을 끝으로 이번 행사에서 저희가 준비한 이벤트는 모두 종료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하게 될 이벤트는 저희 직원 중 하나가 이 자리에서 꼭 듣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여 특별히 준비해보았습니다.” 아쉬움 반 호기심 반으로 술렁이는 객석에서 한 손으로 턱을 괴인채 무덤덤하게 나를 바라보는 하야시와 눈이 마주친 나는 빙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1991년 12월. 아케이드 게임인 사이킥 포스의 발표 회장에서 저는 한 여성에게 프로포즈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그때 행사에도 참석 하셨던 분이 계신가요?” 그때 무대 근처에 있던 펜타곤 샵의 점장 미야자키가 장난 섞인 미소와 함께 슬쩍 손을 들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피식 웃음을 던지며 하야시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사실 그때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리긴 합니다. 차라리 그전에 용기를 내어 미리 프로포즈를 했었더라면 그렇게까지 창피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이죠. 아~ 물론 그때의 프로포즈가 후회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일을 계기로 이듬 해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지금은 설현이라는 이름의 딸을 갖게 되어 하루하루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까요.” 여기까지 이야기를 꺼내자, 눈치 빠른 하야시는 뭔가 불안함을 느꼈는지 고개를 두리번 거리며 카오리를 찾았다. “공교롭게도 저희 회사에는 신의 선물의 유키노조 카오리와 이름이 같은 사원이 하나 있습니다. 타마고 몬스터 공모전에서 상위에 입상하며 펜타곤에 입사한 그녀는 신검 전설 시리즈에서도 ‘랍비’라는 귀여운 몬스터 캐릭터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밝은 성격으로 사내에서도 분위기 메이커인 그녀가 용기를 내어 이 자리에 선 이유는 한 남자에게 꼭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라고 합니다.” 예전에 준페이가 유키랑 몰래 짜고 공개 프로포즈를 강요했을 때 녀석의 기분도 이렇게나 짜릿했을까? 누군가를 함정에 빠뜨린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로구나. 물론 내가 당하는 건 질색이지만...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 역시 대충 상황을 눈치 챘는지 나와 비슷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오직 하야시 만이 창백한 얼굴로 연신 무대 쪽을 바라보며 두리번 거릴 뿐... 곧이어 무대위로 스포트 라이트가 켜지자, 이대론 안되겠는지 서둘러 콘서트 홀 밖으로 빠져 나가려는 하야시 앞에 두 명의 파워 레인져가 그의 앞 길을 가로 막았다. “아저씨 어디가요?” “어디가요!?” 형이 말을 그대로 따라하며 파워 레인져의 배틀 포즈를 취하는 동생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비.. 비켜. 이 녀석들아. 어서~!!” “안돼요. 설탕 사과 사준 강준혁 아저씨가 아무도 밖으로 나가게 하지 말라고 했어요.”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의 시선을 회피하며 나는 서둘러 무대 위로 카오리를 불렀다. “그럼. 제 역할은 여기까지군요. 모두 박수로 그녀를 환영해주셨으면 합니다.” “와아~~” 짝짝짝짝~!! “휘이이익~~” 휘파람까지 불어 제끼며 많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 무대 위로 모습을 드러낸 카오리의 모습은 유키노조 카오리의 마지막 콘서트 복장과 얼추 비슷해 보였다. 게임 속의 카오리처럼 그녀 역시도 발랄한 분위기를 풍기는 귀여운 아가씨 였기에 객석에서도 반응이 제법 괜찮았다.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여러분...” 두손으로 마이크를 꼭 감싸쥔 채 살짝 볼이 붉어진 카오리의 모습이 굉장히 귀엽게 느껴졌다. 무대에서 물러나 유키의 곁에 서자, 그녀는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수고 했어요.” “이렇게 보니 옛날 생각나네..” 무대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유키가 나에게 물었다. “저기 하야시씨 앞을 가로 막은 아이들은 누구에요?” “키가 조금 더 큰 아이가 예전에 나랑 준페이가 구해낸 아이야. 아까 야시장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혹시나 이런 일이 있을까 싶어 미리 설탕 사과로 매수했지..” 하야시는 어서 자리로 돌아가라는 파워 레인저의 활약에 결국 무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오~~ 멋지다~” “휘이이이익~!!” 결국 모든 걸 포기 한 채 무대에 오르는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자, 하야시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내 손을 꽉 잡았다. “결국 이사님이 노린게 이 것이었군요.” “뭐 좋은게 좋은 거잖아. 그냥 눈 한번 질끈 감고 카오리가 원하는대로 해 줘. 이런 순간도 일생에 한 번 뿐이다.” “... 여기가 제 고향이라는 걸 잊으셨습니까? 앞으로 여길 어떻게 찾아오라구요...?” “나는 펜타곤 샵 1호점에서 했는데? 여기서 프로포즈 하기 창피하면 그쪽으로 자리를 옮겨줄까?” “······.” 하야시는 나의 대답에 할 말을 잃었는지,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카오리 쪽으로 향했다. 나는 그런 하야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키와 함께 박수를 보내 주었다. 그러고 보면 항상 신경질 적이고 깐깐했던 하야시의 성격이 변한 건 어쩌면 카오리 덕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사 초기. 덜렁거리는 성격 탓에 실수가 잦아, 언제나 하야시에게 꾸지람을 들었지만, 그녀는 해바라기처럼 꼿꼿히 고개를 들고 자신의 실수에 움츠러 들지 않았다. 오히려 회사 사람들에게 인정 받기 위해 무슨 일이든 도맡아 했었지. 덕분에 처음엔 카오리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하야시도 결국엔 그녀의 매력에 푹 빠진 걸지도? 잠시 후. 카오리 앞에 다가간 하야시는 갑작스레 그녀 앞에 무릎을 꿇으며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어라? 저 녀석 설마...? “사실 기회가 닿으면 프로포즈 하려고 전부터 들고 다니긴 했는데...” “오오오!!!!” “반지다~!! 반지!!” “멋있다!!” 생각지도 못한 그의 선물에 카오리는 깜짝 놀랐는지 입을 가린채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흐음~ 하야시씨 센스있네요. 그때 저에게 강제로 프로포즈 당했던 누구씨랑은 다르게~” “······.” ... 젠장. 역풍이다. 역풍이야... 내가 당했던 수모를 그대로 돌려줄 생각이었는데, 하야시 녀석의 치밀함이 예상보다 훨씬 더 위에 있었어. & 갈라 콘서트가 종료되고, 컴플리트 라온의 발매가 한 달 남은 상황에서 최근 비공식 오리콘 차트에 엄청난 속도로 진입하게 된 노래가 하나 있었다. 그 노래는 다름아닌 사와노 츠바키씨의 ‘안아주세요.’ 라는 곡이었다. 선 공개된 그녀의 미니 앨범을 구하기 위해 아예 펜타곤 샵 앞에 이틀전부터 진을 치고 있는 유저가 있는가 하면, 그동안 나온 세 장의 앨범을 전부 3만엔에 구입하겠다는 펫말을 들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뜨거운 여름 점점 길어져 가는 대기 줄을 바라본 나는 아무래도 이 상태로는 누구하나 더위로 쓰러지는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오쓰~!! 안녕하십니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일전에 칸나의 친구들이었던 나카무라와 마유미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중에 나카무라의 여자친구인 마유미는 나에게 시원한 음료수를 건네 주었다. “너희들이구나. 츠바키의 앨범이라면 칸나에게 미리 몇 장 건네 줬는데. 혹시 못받았니?” 그러자 나카무라군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잘 받았습니다. 오늘은 그저 아키바에 나온 김에 잠시 둘러보러 온 것 뿐이에요.” “그래?” “그나저나, 사람이 엄청 많네요. 이게 혹시 츠바키의 앨범을 구하기 위해 몰린 사람들인가요?” 나카무라의 질문에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로 목을 축였다. 그때 가만히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유미가 나에게 물었다. “이번에 나온 츠바키의 노래는 누가 불렀나요? 칸나한테 앨범을 전해 받자마자 너무 좋아서 계속 반복해서 듣고 있어요. 칸나에게 들었는데, 굉장히 착하고 잘 챙겨주는 좋은 언니라고 하더라구요. 자기 보다 훨씬 더 노래를 잘 부른다고 하던데...” “그렇구나. 다들 그렇게 느껴서 그런지 몰라도 이번 츠바키의 앨범을 노리는 사람이 엄청 많은 모양이야...” 그러자 나카무라 역시 흥분된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갈라콘서트 이후에 홋카이도 지역에 처음으로 발표 되면서부터 어마어마한 관심을 받았으니까요. 지금 버추어 아이돌 커뮤니티에서도 지역별 앨범 배포만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들이 엄청 나던데요?” 나카무라의 이야기에 나는 쓴 웃음을 지으며 대기줄을 바라보았다. 갈라 콘서트에서 자신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의 반응을 담은 캠코더 영상을 보며 눈물을 흘리던 츠바키의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시물이 뜨거워졌다. 그러자 나를 바라보던 마유미가 나에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혹시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아, 아무것도 아냐. 바빠서 이만 들어가 봐야겠다. 날도 더운데 대기 중인 사람들에게 음료수라도 돌려야지.” “그럼 저희도 이만 가볼게요. 컴플리트 라온이 출시 되는 날. 또 오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들어가렴.” 역으로 향하는 커플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돌려 조금씩 늘어가는 대기줄를 바라 보았다. 그녀의 노래를 사랑해주는 저 많은 사람들이 언젠가 그녀의 병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된다면 대체 어떤 어마어마한 일들이 벌어질까? 가능하다면 그 모습은 보고 싶지 않은데... & 그로부터 한달이 지나 1995년 8월 19일. 공개부터 현 게임 산업의 경쟁사들을 바싹 긴장하게 만들었던 컴플리트 라온의 발매일이 다가왔다. 91년 8월 라온이 출시된 이후 정확히 4년 만에 등장한 거치형 후속기 모델은 32800엔으로 경쟁 모델의 가격과 비슷한 가격에 출시가 되었다. 새하얀 박스위엔 유광으로 채색된 컴플리트 라온의 모습이 입체감 있게 그려져 있었다. 한여름의 무더운 날이지만, 잔뜩 기대 중인 사람들의 얼굴에는 연신 행복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이제는 펜타곤의 로멘스 가이로 소문난 하야시와 함께 잠시 후부터 판매될 컴플리트 라온의 판매 수량을 체크하기 위해 거리로 나서자, 나카무라와 마유미가 대기열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너희들 왔구나.” 다소 피곤한 표정의 나카무라는 한달 전과는 달리 다크 서클이 볼까지 내려와 있었다. “3일 전부터 컴플리트 라온의 발매가 너무 기대되는 바람에 잠을 한숨도 못자서...” “······.” 개발자로서 참 고마운 일이긴 한데, 아무래도 나카무라는 게임에 관해선 마인트 컨트롤이 잘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나카무라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마유미가 혀를 차며 나에게 물었다. “사와노 츠바키 캐릭터는 언제 공개 되나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10분 뒤에 공개하고, 바로 판매 시작할 거야.” 내 말에 근처에 서있던 유저들은 탄성을 내지르며 웅성 거렸다. “곧 시작하려나 보다.” “크흐~ 드디어 버추어 아이돌을 해볼 수 있겠구나.” “나는 풀 메탈 기어부터 해야지.” 콘솔 가격까지 생각하면 제법 만만치 않은 금액이었기에 사람들은 저마다 머릿 속에 한 두가지의 타이틀을 생각해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 등 뒤로 하야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사님. 그럼 슬슬 시작할까요?” “그래. 시작하자.” < EP. 43 : 완전한 즐거움. (1) > 끝 ⓒ 손인성# < EP. 43 : 완전한 즐거움. (2) > & “나카무라군. 이번 달도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이번 달 급료는 꽤나 두둑하던데? 대체 몇 시간을 일 한 거야?” “주간 야간 할 거없이 죽도록 일했거든요. 직원들 근무 땜빵도 거진 다 뛰었구요.” “돈이 급한 일이라도 있었냐?” 점장님의 질문에 나는 갈색 봉투 안에 들어 있는 지폐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큰 돈 나갈 곳이 좀 있어서...” “그렇군. 내일은 쉰다고 했지? 그동안 고생했으니 푹 쉬고 모레 보자.” “네. 점장님.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월급 봉투를 가방 깊숙이 집어 넣은 나는 점장님께 인사를 마치고 아르바이트 장소인 패밀리 레스토랑 ‘사이제리아’를 나섰다. “아~ 다행이다.” 거리에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는 초 저녁 시간이었지만, 낮 동안 뜨겁게 달궈진 공기는 여전히 습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끈적한 공기가 목덜미를 스치는 것이 딱히 유쾌하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가방 안에 들어 있는 월급 봉투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르바이트 좀 빡세게 했다고, 한달에 12만엔이라니... 최근에 프리터가 늘어나는 이유를 알 것도 같군... 조금만 지나면 곧 나아질거라던 극심한 경기 침체는 벌써 5년이나 지속되어가고 있었고, 해가 더 해 갈수록 취업의 문턱은 높아져 요새는 새로운 직종으로 프리터라는게 생겨났다고 한다. 프리터란 직장에 취직하지 않고, 각종 아르바이트를 옮겨 다니며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신조어인데, 보통 두 군데 정도 아르바이트를 뛰면 일반 직장인들의 초봉만큼 돈을 벌 수 있기에 취직을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를 뛰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하아...” 미래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취직이 힘들어 질 줄은 몰랐는데, 아직 대학교 1학년 이지만 벌써부터 졸업을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하다. 최근에는 프리터 말고도 파견직이라는 것도 생겨서 인력 조달 업체에 자신을 등록해놓으면 적합한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데려간다고 하던데, 그것마저도 정식 채용이 아닌 하나의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유지되는 단기 계약 형식이라고 들었다. 정식으로 채용된 것이 아니기에 프로젝트가 끝나면 기업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계약을 해지하고, 파견직은 또 다른 회사로 팔려나간다. 현재 대부분의 기업들은 싸게 인력을 부릴 수 있는 파견을 선호하였는데, 내가 알고 있는 게임 회사 중에선 유일하게 펜타곤 만이 파견 인력을 쓰지 않기로 유명했다. 가능하다면 나도 펜타곤에 취직하고 싶다. 아니 그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게임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칸나처럼 특출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마유미처럼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냥 펜타곤 게임을 좋아하는 평범한 대학생일 뿐이다. 이대로라면 졸업 후. 펜타곤에 들어가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다. 가끔 마유미와 함께 시부야를 걷다보면 패션 잡지 관계자랍시고 명함을 건네주곤 하는데, 그런 건 결국 얼굴로 먹고 사는 거잖아. 그쪽 업계의 끝은 거의 호스트가 되기 마련이라, 딱히 끌리지가 않았다. 사실 그러고 보면 어릴 때부터 끈기가 부족해서 인지 뭐든지 어중간했단 말야.. 공부도 그렇고, 운동도 그렇고, 지금 플레이 중인 게임 조차도 엔딩을 보기 전에 새로 출시된 다른 게임으로 휙휙 넘어가기에 가지고 있는 소프트는 많아도 정작 엔딩을 본 타이틀은 몇 개 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나란 녀석도 굉장히 어중띈 놈이었구나...’ 여기까지 자신을 인정하고 나자, 아까까지 마냥 좋았던 기분이 팍 사그러 들었다. 찌르르, 찌르르르~ 집으로 향하는 뚝방길 밑으로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라리 아무 생각 없이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스트리트 파이어2를 즐기던 고교생일 때가 그립네.. 잠시 후. 어깨를 축 늘어 뜨린 채 현관에 들어서자, 저녁을 준비 중이던 어머니가 나를 반겼다. “왔니? 저녁은?” “별로 생각이 없어요.” 방으로 올라가 침대에 드러누운 나는 머리 맡에 CD 플레이어를 조작해 츠바키씨의 ‘안아주세요.’를 재생시켰다. 기분이 울적해서 그런가? 스피커를 통해 좁은 방 안에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오늘따라 더욱 슬프게 들려왔다. 팔뚝으로 얼굴을 가린채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는데, 아래층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켄스케. 마유미 한테 전화왔다~” 마유미? 아, 그러고 보니 아르바이트 끝나면 전화 주기로 했었는데, 깜박했네... “지금 내려갈게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다시 좁은 계단을 내려간 나는 소파 옆에 놓여진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여보세요?” “켄스케군. 집에 있었네? 아직까지 연락이 없길래, 아르바이트가 아직 안 끝났나 해서.” “아, 방금 들어왔어.” 소파에 몸을 파묻으며 긴 한숨을 내뱉자, 마유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어디 아파?” “아니, 그냥 좀 우울해서..” “우울? 켄스케 네가...? 웬일이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놀리지 마라. 나름 심각하니까.” “무슨 일이길래, 우리 켄스케군이 이렇게 심각할까요~?” 아까부터 놀리는 듯한 말투로 내 신경을 자극하는 마유미의 행동에 울컥한 마음이 들기로 했지만, 한편으론 그런 식으로라도 나를 달래주려는 그녀의 마음이 고맙기도 했다. 하긴 애초에 오늘 기분은 내가 판 함정에 내가 굴러 떨어진 격이니까. 이럴 때는 또래에게 고민을 털어 놓는 게 가장 좋을 수도 있지. “그냥 미래가 안 보여서~ 이대로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고..” “전에 졸업하면 펜타곤 소프트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그거야 희망사항이었지. 아무런 특기도 없는 내가 무슨 수로 펜타곤 같은 대기업에 들어 갈 수 있겠냐?” “특기야. 지금부터 노력하면 되잖아. 켄스케군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우린 이제 겨우 대학 1년생이야. 졸업반이 아니라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남아 있는 시간 동안 노력할 생각을 해야지. 안 그래?” “그건 분명 맞는 말이긴 한데... 아~ 모르겠다.” “그래도 기특하네~ 나는 켄스케군이 그런 걱정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평소엔 맨날 게임만 해대서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줄 알았지.” “······. 너 나를 뭘로 보고...” “게임 좋아하는 오타쿠 남친.” 비... 빙고.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는 명답이다. 마유미는 자신이 이야기 하고도 웃긴기 수화기 너머로 깔깔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녀의 웃음 소리에 나 역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 방금 웃었다. 그치?” “그래~ 웃었다. 어쩔래~” “툴툴 거리는게 아무튼 아직도 어린애라니까.” “쳇! 아무튼 됐고, 오늘 전화 달라고 했던 이유가 뭐야?” “아, 그러고 보니 깜빡했네. 저기 다음 주에 ‘컴플리트 라온’ 사러 갈 때 말야. 나도 같이 갔으면 해서.” “네가 웬일이야? 같이 게임기를 사러가자고 하다니.” “남동생이 그것 때문에 며칠 전부터 부모님을 어찌나 조르는지. 내가 다 듣기 싫을 정도라니까.” “그래서 설마 동생한테 네가 하나 사주려고?” “뭐, 지난 달에 아르바이트 했던 돈이 좀 남기도 했고...” “오~ 마유미 누나. 멋진데~ 네 동생 아주 신났겠네~” “아, 아무튼 다음 주에 컴플리트 라온 출시할 때 같이 가. 알았지? 그럼 끊는다.” 창피했는지 마지막에 제 말만 쏙 해버리고 도망치듯 전화를 끊어버린 그녀의 행동에 나는 수화기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삼켰다. “켄스케. 저녁 다 됐는데, 어떻게 조금만이라도 먹을래?” “네. 그럴게요.” & 그로부터 일 주일 후. 나는 새벽에 일어나 마유미와 함께 아키하바라의 펜타곤 샵으로 향했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아키바로 향하는 전철 안에는 아침부터 나와 비슷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오늘 토요일 맞지?” 마치 평일 아침 러쉬아워를 방불케하는 전철안에서 사람들 사이에 끼인 마유미가 힘겹게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응. 토...요일. 맞아.” 그리고 잠시 후. 우리를 태운 전철이 아키바 역에 다다르자, 전철 안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밖으로 빠져 나갔다. “설마... 저 사람들이 전부?”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마유미의 손을 붙잡고 아키바 역을 빠져 나오자, 주변 사람들 모두 우리와 같은 방향을 향해 걷고 있었다. 와~ 4년 전에 휴대용 라온이 처음 출시 됐을 때만 하더라도 이정도 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깜짝 놀란 나는 서둘러 마유미의 손을 잡고 펜타곤 샵으로 달렸다. & 컴플리트 라온의 판매는 오전 9시. 아직 3시간 정도 남긴 했지만, 그래도 펜타곤 샵의 오픈 시간이 10시 반이었던 걸 감안하면 오늘은 한시간 반이나 일찍 영업을 시작하는터라 불만을 재기 할 수도 없었다. 마유미와 함께 구매 대기 마지막 줄에 서자, 채 10분도 되지 않아 우리 뒤로 기나긴 줄이 늘어서기 시작했다. “설마 우리 앞에 있는 사람들은 어제부터 기다린 거야?” “어제 뿐만이 아니라, 일주일 전부터 기다린 사람도 있다더라.” “이.. 일주일 전부터?”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마유미는 고개를 빼꼼 내밀어 대기줄 가장 앞을 보려고 하였으나, 이미 뱀처럼 꼬여 있는 대기 행렬의 머리 쪽을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우리는 교대로 편의점에 들러 아침을 해결한 뒤, 약간의 수다로 대충 시간을 떼우자. 어느새 9시가 되어 낯익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칸나의 당신을 위한 ‘응원가’ 미니 앨범 덕분에 알게된 강준혁 이사님은 펜타곤 내부에서도 굉장히 실력 있는 디렉터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우리를 보자마자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걸어왔다. 하지만 채 몇마디 나누지 못하고 ‘사와노 츠바키’라는 버추어 아이돌의 네 번째 캐릭터를 공개 하기 위해 자리를 떠나야 했다. 그때 옆에 있던 마유미가 나에게 말했다. “사실은 동생한테 컴플리트 라온을 사주려는 건 조금 핑계이기도 해.” “음? 핑계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플레이 하고 싶었던 욕심도 조금은 있었거든~” 밝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아준 마유미의 미소와 함께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알람소리가 울렸다. < EP. 43 : 완전한 즐거움. (2) > 끝 ⓒ 손인성# < EP. 43 : 완전한 즐거움. (3) > “내가 플레이 하고 싶었던 욕심도 조금은 있었거든~” 밝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아주는 그녀의 미소와 함께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알람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뒤이어 버추어 아이돌의 마지막 캐릭터인 사와노 츠바키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자, 나도 모르게 온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둘 만이 있는 텅빈 플렛폼에.. 침묵하고 있는 당신의 옆 얼굴이 신경쓰여.. 뭐지? CD를 통해 매일 들어왔던 목소리인데, 이렇게까지 심장이 떨려올 줄이야... 그때 내 곁에 있던 마유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떼었다. “이거... 라이브 잖아?” “뭐라고?” “노래 중간 중간에 호흡이 느껴지잖아. 모르겠어?” “그게..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른이 되어 각자의 시간을 보내며 소중한 것을 잃어가겠지만... 나 역시 그걸 알고 있지만.. 아... 확실히 마유미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자, 확실히 CD에서 들려오던 것과는 달리 목소리에서 현장감이 느껴졌다. 마유미의 말이 맞아. 지금 목소리의 주인공이 어딘가 숨어 노래를 부르고 있는거야. 잠시 후. 그녀와 나의 대화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통해 대기열 전체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거 라이브인거 같다는데?” “어라? 그러고 보니 CD로 듣던 거랑은 미묘하게 호흡이 달라.” “그렇지...?” “우오... 소름 돋아~!!” 내 앞에 있던 사람은 팔짱을 낀채 자신의 팔뚝을 쓸어내리며 펜타곤 샵 앞에 설치된 무대를 바라보았다. 강렬한 여름 날의 태양 빛을 고려해 천정에 암막을 설치한 스크린 안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츠바키의 모습이 공개되자. 대기열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안아주세요. 내 몸이 부서질 정도로... “아아.. 드디어..” 단아하게 흘러내린 검은 머릿결이 불어오는 바람에 하늘 거리며 공개된 그녀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슬픈 느낌을 가져다 주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새하얀 건반 위에서 춤을 추듯 날아오르자,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던 마유미가 비틀거리며 내 어깨에 몸을 기대었다. “갑자기 왜 그래?” “몰라.. 나도 모르게 멍하니 노래를 듣다보니 다리에 힘이 풀려서...” 하지만 마유미의 이야기가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 조차도 곡의 하이라이트 부분에서는 가슴이 붕 떠오르는게 느껴질 정도로 그녀의 라이브는 굉장히 매혹적이었다. 그때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그녀의 목소리에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아, 방금 절정 부분에서 살짝 정신을 놓을 뻔했어.” “감정을 싣어 노래한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난 솔직히 처음 느껴 봐..” 무엇이 그녀의 목소리를 목소리를 이토록 애절하게 만드는지 몰라도 현재 버추어 아이돌에서 그녀의 실력은 친구인 칸나에게는 미안하지만, 가희 최고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결정했다. 버추어 아이돌 타이틀은 사와노 츠바키 버전으로 선택하겠어.” “나도..” “이런 젠장. 나도 츠바키 버전으로 사고 싶은데, 혹시 앞에서 다 사가진 않겠지!?” 잔잔한 피아노 소리와 함께 그녀의 라이브가 끝이 나자, 이어서 나와 마유미에게 익숙한 칸나의 노래가 들려왔다. “오~ 에리카다!!” 버추어 아이돌의 시작을 알린 그녀의 노래는 츠바키로 인해 감상에 젖어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따듯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아~ 역시 에리카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츠바키가 애절하다면, 에리카는 뭐랄까 노래에서 상냥함이 묻어난다고 할까?” “그렇지. 직장에서 하루 종일 시달리다가 집에 돌아와 에리카의 노래를 들으면 하루의 피로가 싹 사라지는 느낌이라니까..” 이번에 츠바키의 노래에서도 느꼈듯이 이번 에리카의 ‘응원가’ 역시 라이브로 진행되었다. 최근 버추어 아이돌의 녹음 일정으로 바쁘게 지내는 탓에 나와 마유미 역시도 칸나의 라이브를 듣는 건 참 오랜만 이었다. 그녀의 노래를 듣던 도중 나는 옆에 있는 마유미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츠바키의 성우와 마찬가지로 칸나도 근처에 있나 봐.” “그러게 한동안 얼굴도 못 봤는데, 근처에 있으면 만나고 싶네...” 스크린 속에 에리카의 모습이 어딘가 칸나를 닮아 있다고 느끼긴 했었는데, 뭔가 알고 지내던 친구가 저 멀리 떠나간 느낌이 들어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꿈 꿔왔던 미래와 많이 다른 현실에 점점 지쳐가고, 많이 실망했지만.. 그래도 언젠가 이루게될 그대의 세상. 나 항상 그대를 응원할게요~ 이윽고 칸나의 노래가 끝이 나자, 자연스럽게 셰릴과 콘노 아즈사의 노래가 연이어 들려오자, 행사장의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 오르기 시작했다. 확실히 앞의 두 곡과는 다르게 강렬한 두 사람의 노래는 대기중인 사람들의 마음을 들썩이게 만들기 충분했으니까... 그럴수록 대기중인 사람들은 대체 4명 버추어 아이돌 중에서 누굴 구입해야 할지 더욱 망설이게 만들고 있었다. 토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울려 퍼지는 셰릴의 Beat Heart는 남자의 마음에 숨어 있던 열혈이란 불씨를 지피기에 충분했다. “으아!! 젠장!! 나는 모르겠다!! 그냥 다 사 버리자!!” “그래. 어차피 우리는 언젠가 다지르고 말거야!!” “그래 카드는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 진거니까!!” 여기 저기서 울려 퍼지는 유저들의 함성에 나 역시 한 마디 거들기 위해 팔을 내지르려는 순간 마유미가 내 손을 공중에서 낚아 챘다. “너 설마 이 자리에서 4장 전부 구입 한다느니, 이딴 소리만 해 봐?” “······.” 아... 역시 마유미를 데려오는게 아니었어. 결국 나는 츠바키, 마유미는 칸나 버전을 구입해 클리어 하면 서로 바꿔하기로 합의를 보았으나, 여전히 내 마음은 조금 뒤틀려 있었다. “저기.. 조용한 노래만 두곡 사긴 그러니까.. 셰릴이나 콘노 아즈사 버전중에 하나 더 사는게 어떨까?” “하나만 해. 어차피 게임기에는 소프트 한 장만 들어가 잖아.” “아니 그래도 플레이 하다가 지루하면 중간에 바꿔서 할 수도 있는거 잖아...” 하지만 째려보는 그녀의 눈빛에 나의 발언은 가볍게 묵살 당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주변에서는 감히 여자친구와 함께 게임을 사러온 나를 부러워 하거나, 혹은 질투심에 죽일 듯한 눈으로 흘겨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사실 이건 이거 대로 피곤하단 말이지...’ 내가 뭘 위해서 지난 한 달 동안 그 고생을 했던가? 배고파 쓰러질 것만 같아도 꾹 참고,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자전거를 끌고 다닌 것은 모두 오늘을 위한 투자였다. 어떻게든 머리를 써야해... 나는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흘겨보는 그녀의 눈빛을 피해 서둘러 줄이 줄어들기만을 기다렸다. & 버추어 아이돌의 축하 무대를 끝으로 본격적인 판매가 개시 되자 서서히 줄어드는 대기 줄에 설레이면서도 한편으론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슬쩍 내부를 살펴 본 결과 계산대는 모두 5곳. 그러니까 마유미와 흩어지기만 한다면 내가 원하는 타이틀을 전부 사서 쇼핑백 안에 집어 넣은 뒤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혹시나 그녀가 내용물을 보자고 할 수도 있으니, 쇼핑백에 테이핑을 해달라고 하면 어떨까? 머릿속에서 한 없이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그녀의 시선을 피할 여러 가지 방법을 구상하던 중 어느새 펜타곤 샵 내부에 입성하게 된 내 눈 앞에 다섯 개의 계산대가 눈에 들어왔다. ‘어디로 가지? 일단 마유미랑은 최대한 떨어진 곳에서 계산해야 돼.’ 만약에 그녀가 가운데 계산대로 향한다면 끝장이다. 대신 양쪽 끝으로 배치 된다면 그거야 말로 베스트 포지션이고... 일단 빠른 계산을 위해 몰래 가방에서 두둠한 봉투를 꺼내든 나는 마유미가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뒷주머니에 돈을 쑤셔 넣었다. ‘됐어. 우선 첫 번째 미션은 클리어다.’ 기다려라. 나의 컴플리트 라온..!! 마른 침을 삼키며 점점 줄어드는 대기열을 바라보던 나는 매장 내부를 살피는 척 주위를 둘러보며 계산대로 향하는 사람들의 순번을 살폈다. ‘한 사람당 기기 본체와 소프트를 구입하는 시간은 평균 3~4분. 이렇게 된다면 마유미가 배치 될 곳은 4번 캐셔다. 1번이나 5번이 아니라 아쉽지만 4번도 나름 나쁘지 않다. 적어도 1번이나 2번을 차지 한다면 마유미가 계산하는 쪽에선 내가 계산 하는 물품들이 잘 안보일 테니까.’ 아~ 내 돈 주고 게임 하나 사는데, 이렇게까지 힘들어서야.. 그나마 다행인 것은 버추어 아이돌 중에서 재고가 떨어진 히로인이 아무도 없다는 것. 하지만 대충 눈대중으로 살펴 보니 츠바키 버전이 가장 빨리 소진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 벌써 다음이 우리 차례네.” “그.. 그러게. 너는 본체랑 버추어 아이돌 에리카 버전만 구입할거지?” “응. 구입해서 칸나한테 사인해 달라고 할거야.” “그거 참 좋은 생각이다~ 나도 그래볼까~” “음? 넌 츠바키 버전으로 산다고 하지 않았어?” 헉!! 이런 멍청한.. 중요한 순간에 이런 자폭을 하다니!! 벌써부터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마유미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리자, 타이밍 좋게 뒤에서 펜타곤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 손님. 4번 계산대로 가주세요.” “아, 네~!!” 직원의 안내에 따라 4번 계산대로 향하는 마유미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느 ㄴ어서 내 차례가 다가오기 만을 기다렸다. ‘1번이든 2번이든 빨리 좀 사라.. 제발!!’ 하지만 나의 예상은 여지 없이 빗나가 버리고... “다음 손님 3번 계산대로 가주세요.” ... 제기랄 망했다. 하필이면 마유미 바로 옆 자리에 걸리다니. 혹시나 싶은 마음에 최대한 밍기적 거리며 계산대로 향하는데, 갑자기 1번 계산대에 있던 손님이 쇼핑백을 들고 자리를 떠나는게 아닌가? 그 순간 나는 잠시 스탭이 꼬인척 비틀거리며 1번 계산대로 향했다. “아, 손님 이쪽으로~!!”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3번 캐셔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재빨리 1번 캐셔로 달려가 준비된 멘트를 내뱉었다. “컴플리트 라온 1대랑, 버추어 아이돌 4가지 버전. 초회 한정판 전부!! 그리고 풀 메탈 기어 솔리드랑 내가 없는 거리 리메이크 버전 주세요!!” “아, 그러니까. 오늘 컴플리트 라온과 함께 런칭된 제품 전부 달라는 말씀이시죠?” “네!!” 나는 직원에게 제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마유미를 살피며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뒤쪽 공간에서 제품을 하나씩 꺼내들고 온 여직원은 계산대 위에 제품을 산더미처럼 쌓아 올렸다. 그리곤 옆에 있던 마이크를 후후 불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안내 방송을 알렸다. “방금 전 주문해주신 고객님을 끝으로 버추어 아이돌 사와노 츠바키를 비롯해 에리카의 한정판 패키지가 소진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나, 나이스!! 내가 구입한게 츠바키랑 에리카의 마지막 한정판이었구나~!! 어라 잠깐만 에리카라고...? 츠바키 버전만 사기로 했는데... 에리카까지 말해버리면? 불길한 느낌에 고개를 돌리자, 4번 캐셔에서 나를 바라보는 마유미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손님. 구입해주신 컴플리트 라온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드려도 될까요?” “아뇨. 제가 급한 용무가 있어서 빨리 계산해 주세요.” “그럼 플레이 하시기 전에 설명서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컴플리트 라온과 함께 구입해주신 소프트들까지 총 80,080엔입니다.” 버추어 아이돌 한정판이 개당 9,280엔이니 4개를 합치면 컴플리트 라온보다 비싸다. 하지만 마지막 한정판을 득템했다는 짜릿함 때문일까? 나는 서둘러 봉투에서 만엔짜리 지폐 8장과 100엔짜리 동전 하나를 직원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80,100엔 받았습니다. 여기 잔돈 20엔입니다.” 8장의 지폐를 건네주고 돌아온 구릿빛 동전 두 개를 바라보니 잠시 허탈감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런 기분을 느낄 때가 아니다. 거대한 쇼핑백에 묵직한 컴플리트 라온을 넣고 있는 직원을 도와 타이틀까지 한번에 담은 나는 영수증을 챙긴 뒤 서둘러 펜타곤 샵을 빠져 나왔다. “켄스케!!” 곧이어 뒤따라 매장을 나온 마유미가 나와 비슷한 크기의 쇼핑백을 손에 든 채 성큼 성큼 나에게로 걸어왔다. “너 대체 얼마나 산거야!?” “아, 아냐 나도 그냥 칸나한테 사인 받으려고 에리카 버전만 하나 더 산 것 뿐이야.” “그런데 왜 쇼핑백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지? 잠깐 이리와 봐.” “아니라니까. 진짜 딱 그거 두 개만 샀대도~!!” “그러니까 잠깐 보여 달라고!!” “아, 진짜 유치하게 왜 이래.” 어마어마한 포스를 뿜어내고 나에게 달려드는 마유미를 피해 차도 근처까지 물러난 나는 집요하게 쇼핑백을 향해 손을 뻗는 마유미를 피해 차도 쪽으로 몸을 피했다. 다행히 난간이 있어 넘어질 일은 없었기에 나는 최대한 쇼핑백을 차도쪽으로 내밀어 그녀를 저지했다. 부아아아앙~ 빵빵~!! 어디선가 들려오는 경적 소리에 마유미의 목소리가 묻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어차피 내용물을 살피려는 그녀의 수작일 것이 뻔하기에 나는 무거웠지만, 더욱 차도 쪽으로 쇼핑백을 숨기며 그녀에게서 떨어지려 애썼다. 그 순간. 탁~!! 누군가가 내 손등을 친 것만 같은데. 뭔가 손이 허전하다... “응?” 고개를 돌려 차도 쪽에 뻗어있던 손을 살피니,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커다란 쇼핑백의 손잡이 뿐이었다. “어라? 이게 뭐야?” 부아아아앙~~ 곧이어 들려오는 시끄러운 오토바이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방금 전까지 내손에 들려 있던 두툼한 쇼핑백은 오토바이 뒷 좌석에 앉아 있는 누군가의 품에 들려있었다. 이거 설마 날치기냐? < EP. 43 : 완전한 즐거움. (3) > 끝 ⓒ 손인성# < EP. 43 : 완전한 즐거움. (4) > “꺅!! 켄스케군!! 괜찮아!?” 마유미의 비명소리에 아직 구매 대기 중이었던 사람들이 눈빛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털썩...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나는 쇼핑백 손잡이만 꼭 쥔 채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아 버렸다. “괜찮아? 어디 다친데는 없어!?” “······.” 걱정이 잔뜩 묻어난 마유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뭐라고 대꾸를 못하겠다. 내 쇼핑백을 날치기한 범인들은 이미 다음 사거리에서 급하게 좌회전을 틀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고... 내 손에는 무려 8만엔 짜리 쇼핑백의 손잡이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워낙에 큰 충격을 받으면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다고 하던가? 길 잃은 어린 아이 마냥 더듬 거리는 말투로 고개를 휘적거리자, 내 몸 여기저기를 만지던 마유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내 옆에 주저 앉았다. “다친 곳은 없네. 천만 다행이다.” “천만... 다행이라구?” 어디가 천만 다행이냐... 내 돈 8만엔이 눈 앞에서 사라졌는데, 아니 그걸 떠나서 버추어 아이돌 한정판은 다시 사고 싶어도 살 수 조차 없다구~!!! 끝났다. 모조리 끝났어. 예전에 드래곤 워리어 시리즈가 출시 되었을 때, 불량 학생들이 뒷골목으로 끌고가 카트리지를 빼앗아 갔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설마 이런 식으로 날치기를 당할 줄이야. 황당하고 억울해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켄스케 지금 우는 거야?” “누, 누가 울었다고 그래.” 마유미의 목소리에 나는 눈가를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주변에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유저들의 안타까운 시선이 느껴졌다. 더 이상 이곳에 있다 하더라도 웃음 거리 밖에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 나는 서둘러 전철 역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현재 수중에 남은 돈으로는 컴플리트 라온을 다시 산다고 해도, 게임 타이틀까지 구입할 돈이 없었다. “케, 켄스케군. 같이 가.” 마유미의 목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추자, 등 뒤에서 또다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손님!!” 고개를 돌리니 방금 전 컴플리트 라온의 계산을 도와주었던 캐셔 분이 서둘러 나에게 달려와 종이 한 장을 건네 주었다. “너무 서둘러 나가시느라, 이 걸 전해드리는 걸 깜박했어요.” 숫자가 적혀 있는 티켓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에게 물었다. “이게 뭡니까?” “오후에 있을 라이브 무대의 추첨권이에요.” “추첨권?” “버추어 아이돌의 성우를 맡으신 분들께서 직접 추첨하여 선물을 드리고 있습니다.” 나는 그녀의 손에 들린 추첨권의 번호는 231번이었다. “라이브는 오후 2시에 예정 되어 있으니, 괜찮으시다면 꼭 참가해주세요.” “아, 그게...” 펜타곤 직원은 내 손에 추첨권을 들려주곤 곧바로 샵으로 돌아갔다. 아직도 길게 뻗어 있는 구매 행렬 덕분에 잠시도 자리를 비우기 힘든 모양이었다. 방금 전까지 손에 들려 있던 묵직한 컴플리트 라온 대신 추첨권 한 장이라... 솔직히 이런게 당첨 될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231번이라는 숫자가 의미 하는 것은 내 앞에 이미 230명의 사람들이 라온을 구입했다는 것이고, 현재 줄을 서있는 사람들까지 포함한다면 거의 두 배 이상으로 추첨 번호가 늘어날 수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달랑 추첨 번호 하나만 믿고, 오후의 라이브까지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지. 그때 내 옆에 있던 마유미가 나에게 물었다. “켄스케. 칸나는 안 보고 돌아갈 거야?”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칸나를 보기로 했었지...” 정신이 하나도 없던 탓에 그녀를 보기로 한 약속을 잊고 있었네... 사실 지금 기분 같아선 그냥 집으로 돌아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었지만, 마유미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대로 돌아가기엔 굉장히 아쉬워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밥이라도 먹을까?” 아침 조차 거르고 달려온 탓에 허기가 진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응. 그러자...” & 잠시 후.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테이블 한켠에 쇼핑백을 올려두고 서로 마주 앉았다. “괜찮아...?”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마유미의 목소리에 나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자기 때문에 내가 산 라온이 날치기를 당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한데... 솔직히 아까 전까지만 해도 끓어오르는 분노와 허탈감에 눈에 뵈는게 없었지만, 차분히 생각해보니 이 모든게 내 욕심에서 비롯된 잘못이라는게 느껴졌다. ‘차라리 마유미의 말을 들을 걸...’ 후회가 몰려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마유미까지 의기소침 해진 탓에 나는 짧게 숨을 들이마시며 그녀에게 말했다. “괜찮아~ 다음 달에 월급 받아서 다시 사면 되지.” “그래도 많이 기대했을 텐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마유미의 표정에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보이자, 그녀는 자신의 옆에 놓인 컴플리트 라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난 괜찮으니까. 먼저 가져가서 플레이 해볼래?” 솔직한 마음으로 방금 마유미의 제안에 귀가 솔깃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집에서 오매불망 그녀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마유미의 동생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동생 한테는 뭐라고 말하려고...” “아니, 그냥 사정이 있어서 못 샀다고 하면 되니까...” “하지만 너도 해보고 싶다고 했잖아. 버추어 아이돌...” 솔직히 마유미에게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기에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이 때까지 게임에 대해 얘기를 꺼내면 질색하던 그녀가 드디어 나의 취미 생활을 인정해 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식사를 하는 도중 우리는 컴플리트 라온을 꺼내어 실물을 구경해 보았다. 무광 플라스틱으로 마감된 고급스러운 본체는 세워서도 사용 할 수 있게 설계 되어 있었다. CD를 꽂아 넣는 트레이 부분은 기어스테이션이나 새턴과는 달리 뚜껑을 여는 방식이 아닌 트레이를 옆으로 밀어낼 수 있었다. “이걸 열고 CD를 꽂으면 되는 거지?” “방식은 CD 플레이어와 같아 가운데 구동 축 부분에 씨디를 끼워 넣고, 트레이를 닫으면 돼. 그리고 전원 버튼을 누르는 거야.” 마유미는 나의 설명에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비록 마음은 허전했지만 나의 행동 하나 하나에 귀를 기울이며 컴플리트 라온의 작동법을 배우는 그녀의 모습이 굉장히 귀엽게 느껴졌다. 뭐 케이블을 연결하는 법까지는 그녀의 동생이 잘 알고 있을테니까. 추가적인 설명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런데 켄스케 여기에 있는 구멍은 뭐야?” 마유미의 질문에 컴플리트 라온의 정면 하단부를 살피자, 컨트롤러를 장착하는 곳 바로 옆에 독특한 포트가 달려 있었다. “어라? 그러게...” 기어 스테이션 같은 경우엔 컨트롤러 포트 위에 메모리 카드를 넣을 수 있게 되어 있었지만, 컴플리트 라온은 내장 메모리를 사용하기에 따로 저장 장치를 구입할 필요는 없었다. 제법 두툼한 포트 였기에 설명서를 펼치고 작 부위의 명칭을 살피자, 이내 그 포트가 무얼 의미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휴대용 라온을 연결하는 장치야.” “휴대용 라온이라면 켄스케군이 가지고 있는 게임기를 말하는 거야?” 놀랍게도 컴플리트 라온의 본체에는 기존의 라온을 연동시킬 수가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CD를 넣고 플레이 화면에서 라온을 연동 시키면 해당 게임에 대한 미니 게임을 다운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하나의 게임을 사면 컴플리트 라온과 휴대용 라온용으로 두가지 게임을 플레이 할 수 있다는 뜻이지. 간단한 예로 버추어 아이돌의 게임 데이터를 휴대용 라온에 설치하면 밖에서도 자신의 아이돌을 육성 시킬 수 있는 간단한 미니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새로운 콘솔을 출시했다고 기존의 유저를 내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라온을 가지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컴플리트 라온을 구입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어..’ 거기다 TV 모드를 이용하면 휴대용 라온의 디스플레이에 게임 화면을 표시할 수가 있어 TV가 한 대밖에 없는 집에서도 휴대용 라온을 이용해 자유롭게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설계 되어 있었다. ‘잠깐 이런 구조는 휴대용 라온을 설계 할 때부터 이미 컴플리트 라온을 기획 중이었다는 이야기인가!?’ 새삼 느껴지는 펜타곤의 치밀한 기기연동 방식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이거 나중에 민텐도64가 발매 되더라도 이 정도 완성도라면 상당히 위험하겠는데?’ 그때 설명서 너머로 마유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켄스케. 이따가 칸나의 라이브 보러 갈거지...?” “물론이지. 아깐 내가 너무 정신 없어서 제대로 대답을 못했어.” 그러자 그제서야 마유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밝게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내가 자기 때문에 기분이 상한 탓에 그냥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나보다. “라이브는 오후니까. 카페라도 가서 시간 좀 떼우다 가자.” “응.” & 펜타곤의 컴플리트 라온은 채 12시가 되기 전에 전량 소진에 대한 피켓을 내걸렸다. 9시에 판매 개시 후. 단 3시간 만에 이뤄낸 성과였다. 펜타곤 샵 앞에 진을 치고 있던 긴 구매 행렬은 어느새 흩어져 사라지고, 아키하바라는 평상시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저마다 거대한 쇼핑백을 들고 다녔는데, 그 크기가 다들 비슷한 걸 보아 내용물이 무엇인지는 안 봐도 대충 알 것만 같았다. 하지만 현재 시간 오후 1시 55분. 최근 몇 개월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버추어 아이돌의 라이브 행사를 앞두고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 썰렁한 거 아닌가? “켄스케군. 칸나의 라이브 행사 여기서 하는게 확실해?” 맞은 편에 앉아 유심히 티켓을 살피던 마유미가 나에게 물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어느새 펜타곤 샵 앞에 설치해 두었던 조그만 무대도 사라지고 없네? 나는 주머니에 쑤셔 넣어 두었던 라이브 티켓을 꺼내서 장소를 살펴 보았다. 그리고 행사 장소에 대한 약도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아차. 하긴 이런 땡볕에서 야외 라이브를 할 리가 없지. 어쩐지 행사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길거리가 허전하더라.’ “미안, 마유미. 버추어 아이돌의 라이브 행사는 여기가 아니었어.” “뭐? 그럼 어딘데!?” “드래곤 엠블렘 샵이라고 근처에 펜타곤 샵이 하나 더 있는데, 그곳에서 공연을 하나 봐. 다행히 여기서 멀지 않으니 서두르자.” 나는 마유미 대신 컴플리트 라온 쇼핑백을 손에 들고 행사장으로 달렸다. & 잠시 후. 드래곤 엠블렘 샵에 도착한 우리는 직원에게 라이브 티켓을 보여주고 곧장 2층의 이벤트 홀로 향했다. 이미 유저들이 전부 입장했는지 2층으로 향하는 통로는 한산했다. 쿵쿵쿵쿵쿵~!! 방음 설계로 인해 극장에서나 볼법한 두꺼운 문이 설치되어 있었음에도 안에선 유저들의 어마어마한 함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래. 버추어 아이돌의 인기라면 이 정도는 되었어야지...’ 잠시 마른 침을 삼키며 굳게 닫혀진 문을 열어 젖힌 순간. 내부에서 들려오는 어마어마한 유저들의 함성 소리에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짜악~!! 그 순간 익숙한 채찍 소리와 함께 도발적인 셰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노래로 이 무대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보이겠어.” 그 순간 내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것은 4년전 라온을 출시 했을 당시 펜타곤 샵에서 보여 주었던 신작 런칭에 대한 컨퍼런스였다. '그래... 펜타곤의 런칭 행사는 아직 끝난게 아니었어...' < EP. 43 : 완전한 즐거움. (4) > 끝 ⓒ 손인성# < EP. 43 : 완전한 즐거움. (5) > & 셰릴의 등장으로 화려하게 시작한 라이브는 순식간에 라이브 홀에 모여 있는 유저들의 마음을 휘어잡는데 성공했다. 스크린 속의 캐릭터는 푸른 장교복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종아리 부분까지 채운 가죽 부츠가 묘하게 섹시한 느낌을 가져다 주고 있었다. “우와아!!! 첫 곡은 셰릴이구나~!!” 콘서트를 여는 오프닝 곡으로 셰릴의 Beating Heart는 매우 훌륭한 선곡라 볼 수 있었다. 4명의 히로인 중에 가장 강렬한 포스를 지닌 셰릴은 등장 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밝게 탈색된 그녀의 분홍빛 머릿결과 청명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내 두 눈과 마주치자, 나는 선채로 얼어붙어 버렸다. 이윽고 조그만 입술 위를 혀끝으로 살짝 훓으며 미소 지은 그녀가 입을 뗀 순간. 무대 위로 실제 가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헉!! 뭐야!?” 마치 화면 속에서 튀어 나온 것처럼 캐릭터와 똑같은 복장을 하고 나온 그녀는 시원스럽게 뻗은 자신의 다리를 스피커에 올리며 마이크를 가져다 대었다. 중력에 반하는, 그대를 향하는 내 마음을 너는 아는지, 내 마음 속 Beating Heart. 흘러내린 머릿칼 사이로 두 눈을 감은채 노래하는 그녀의 제스쳐는 버추어 아이돌의 셰릴과 똑 닮아 있었다. 아니 이 경우라면 차라리 셰릴이라는 캐릭터가 그녀를 모티브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그러고 보니 칸나가 담당한 에리카 역시 어딘지 모르게 그녀와 닮아 있었다. 망상의 galaxy. 미끄러진 순간 poison sea. 하지만 멈추지 않아. 시간조차 뛰어 넘는 대담한 키스로 너에게 다가갈거야. 유저들과 호흥하며 조금씩 라이브를 기세를 끌어 올리던 그녀는 절정 부분에서 자신을 응원하는 사람들을 향해 마이크를 뻗었다. 그러자 그녀의 타이틀곡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환호하며 Beating Heart의 절정 부분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가져가~!!! 너를 향한 내 마음을~!!” 자신의 몸짓 하나하나에 반응 하는 유저들을 바라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린 그녀는 뒤돌아 선채 겉 옷을 벗어 던졌다. “어억!!!” “헉!! 대박..” 물론 안쪽에 탱크탑을 입고 있었지만, 무대의 열기로 인해 송글송글 땀이 맺힌 그녀의 가슴 골에 저절로 눈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나의 옆구리로 파고든 마유미의 손이 갈빗뼈를 통째로 뜯어낼 기세로 깊숙이 찔러왔다. “크허어억!!!!!” 폐부를 찌르는 듯한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자, 마유미는 두 눈을 째려보며 나를 비난 했다. “아주 그냥 눈이 훽훽 돌아가지?” “아악! 잠깐만 이건 본능이었어..” “본능? 어쭈!?” “알았어. 잠깐, 잠깐만~!!” “거~ 싸울거면 나가서 싸우세요.” 안 그래도 남자들이 득실대는 버추어 아이돌의 공연 장소에서 여자 친구와 티격 대는 나의 모습이 영 못마땅 했는지 여기 저기서 한소리씩 들려왔다. ‘나카무라 켄스케. 칸나 공연 때문에 한번 봐준다.’ ‘아, 네. 알겠습니다.’ 셰릴 성우의 파격적인 연출에 라이브의 분위기는 단번에 치솟아 올랐다. 무대 위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동안 버추어 아이돌의 출시만을 기다려오며 답답했던 속을 뻥 뚫어주는 듯했다. “휘이이익~!!” “최고다!!” “크흐.. 여왕님. 당신의 패키지를 구입한데에 있어 한 치도 후회가 없습니다.” 관객들의 수 많은 박수와 함께 노래를 끝 마친 그녀는 무대한 가운데 당당히 선채 삐뚤어진 베레모를 고쳐썼다. “오늘 버추어 아이돌 라이브에 오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모두 고마워요~!!” 드디어 제대로 우리와 눈을 마주친 그녀의 얼굴은 대략 2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섹시한 골반에 한 손을 얹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쉰 그녀는 잠시 크게 숨을 고르며 라이브 진행을 이어 갔다. 간단한 자신의 소개와 더불어 버추어 아이돌을 하게 된 계기.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에 대해 간단한 토크를 이어나가던 그녀는 잠시 후. 장난끼 섞인 표정으로 객석을 향해 물었다. “혹시 이 자리에서 버추어 아이돌 셰릴 버전을 구입해주신 분이 계시다면 손 한번 들어 주시겠어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그녀의 질문에 손을 번쩍 들었다. 하지만 이내 쇼핑백 통째로 날치기를 당했던 사실을 떠올린 나는 천천히 들어 올렸던 손을 내려 놓았다. 하지만 객석 안에 3분의 1 정도 사람들이 그녀의 물음에 손을 들어 보였다. 생각보다 많은 숫자에 그녀 조차 놀랐는지, 그녀는 유저들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마지막으로 손 끝에 키스를 실어 보냈다. “사실 이 곳에 오기 전에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컴플리트 라온과 오늘 출시된 게임을 전부 구입해주신 한 유저분이 차도에서 날치기를 당했다고 하네요. 다행히 다치진 않으셨다고 하던데, 혹시 지금 이 자리에 와 계신가요?” 마이크를 손에 쥔 채 객석을 두리번 거리는 셰릴의 모습에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자,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빙긋 웃어보였다. “오늘 라이브가 끝나면 추첨식이 있어요. 그러니 마지막까지 꼭 남아 계셔야 해요.” “가.. 감사합니다.” “당신에게 행운이 있길 바라며... 그럼~ 이어서 여러분께 들려드릴 곡은 버추어 아이돌의 막내 캐릭터인 콘노 아즈사의 무대가 있겠습니다.” 셰릴을 연기한 그녀의 무대가 끝나자, 라이브 무대의 조명이 전부 꺼지며 일 순간 주변이 굉장히 어두워 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드럼의 스틱끼리 부딪히는 소리. “원, 투, 쓰리, 포.” 어둠 속에 들려오는 소녀의 긴장된 목소리와 함께 스크린 속에 콘노 아즈사의 모습이 등장했다. 그러자 내 옆에 있던 마유미가 쿡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나에게 말했다. “콘노 아즈사라는 캐릭터 굉장히 귀엽더라. 쟤도 인기 많지?” 유저들이 붙인 셰릴의 별명이 여왕이라면 아즈사의 별명은 여동생이었다. 그녀의 덜렁 거리는 성격을 대변해 주는 무릎에 붙어 있는 반창고와 한쪽으로 뾰족하게 솟아있는 헤어 스타일. 그리고 셰릴의 화려한 무대 의상과는 달리 어디서나 볼법한 교복 의상이 묘하게 친근감을 불러온 달까? 그래서 인지 그녀의 팬층은 아이들부터 어른까지 다양한 연령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한 마유미처럼 셰릴에 거부감을 느끼는 여성 유저까지도 흡수한 탓에 콘노 아즈사의 인기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만약에 버추어 아이돌이 츠바키를 제외하고 3인 체제로 등장 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큰 인기를 누렸을 것이 분명했을 것이다. ‘그만큼 마지막에 등장한 츠바키의 노래가 어마어마하긴 했지..’ -중요한건 자신을 사랑하는 거야~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다른 누구 역시 사랑할 수 없어~!!- 어느새 무대 위로 올라온 그녀의 성우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게임속 캐릭터와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역시 이번에도 얼핏 생김새가 닮아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여유있게 셰릴을 연기했던 전 무대와는 다르게 잔뜩 긴장한 그녀의 목소리에 라이브를 듣고 있던 나조차 불안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고 끝까지 노래를 마쳤다. “하아... 하아... 감사합니다.” 무대의 완성도는 셰릴 보다 못했지만, 마치 고등학생 학예회를 본 듯한 기분에 많은 사람들이 환호와 박수를 보내주었다. 하긴 저들도 어찌보면 오늘이 데뷔 무대였을 텐데, 떨리는게 당연하겠지... 연달아 두 곡이 끝나고, 다음으로 칸나의 차례가 아닐까 싶었던 찰나. 무대가 밝아지며 강준혁 디렉터가 무대에 올랐다. 버추어 아이돌의 메인 디렉터이자, 컴플리트 라온의 개발자인 그는 무대 중앙에 서서 유저들에게 인사를 마친 뒤. 여유있게 웃어 보였다. “컴플리트 라온의 구입과 더불어 버추어 아이돌의 라이브 공연에 참석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어서 공연을 보여드리기 전에 잠시 버추어 아이돌의 플레이 방식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여러분께서 구입하신 버추어 아이돌은 단순히 아이돌을 키우는 육성 시뮬레이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강준혁 디렉터의 말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무대를 향해 고개를 갸웃 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안에는 물론 나와 마유미도 마찬가지 포함되어 있었다. 마치 사람들의 반응을 즐기듯 잠시 회장의 분위기를 살피던 강준혁씨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의 뒤에 있던 스크린에 PPT 화면이 떠올랐다. 다양한 무대의상을 입고 공연을 하고 있는 히로인들의 모습 스쳐 지난 뒤, 오늘 데뷔한 4명의 캐릭터의 모습이 4분할로 차례 차례 공개 되기 시작했다. 한가지 의문점이 있다면 그녀들의 프로필 옆에 스케쥴 표로 날짜가 쓰여 있었는데, 거의 2주에서 3주 간격으로 일본 각 지역별 이름이 쓰여 있었다. “뭐지 저게?” “글쎄... 무슨 이벤트를 하는 건가?”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강준혁 디렉터는 스크린 가리키며 설명을 더했다. “간단히 설명을 드리자면, 그녀들 옆에 쓰여 있는 스케쥴은 라이브 공연이 있는 날짜입니다.” “으잉...?” 뜬금없는 그의 발언에 객석에 있는 사람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니 게임이 발매 한 뒤에도 라이브 공연을 계속 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녀들의 스케쥴표에는 같은 날짜에 모두 제 각각의 장소를 담고 있었기에 사람들의 의문은 더욱 깊어져만 가고 있었다. “방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버추어 아이돌은 단순한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이 아닙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극단적으로 설명을 드리자면, 여러분들께서 구입하신 게임 디스크는 그녀들의 정식 데뷔를 도울 수 있는 일종의 오디션 장치라고 할까요...?” “오디션이라고?” 그리고 이어진 버추어 아이돌에 대한 강준혁씨의 설명에서 나는 또 한 번 펜타곤이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게임성에 치를 떨 수 밖에 없었다. “버추어 아이돌이라는 게임은 성장형 컨텐츠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좋아하는 캐릭터를 육성시켜 얻게 되는 포인트는 굉장히 다양한 곳에 쓰이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캐릭터의 무대 의상이나, 평상복. 악세서리등 캐릭터를 꾸밀 수도 있고, 매월 업데이트 되는 신규 라이브 곡이나 새로운 무대 의상을 손에 넣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꼭 중요한 순간에 일부러 뜸을 들이는 그의 화법은 듣는 이로 하여금 숨막힐 듯한 긴장감을 전해주었다. ‘대체 뭐냐... 뭐가 가장 중요한 건데!?’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투... 투표권? 대체 무엇에 대한 투표란 말이지? 그 순간 내 머릿속에 강준혁 디렉터가 말했던 ‘오디션’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설마... 지금 저 사람이 하는 말이...? “그렇습니다. 여러분께서 구입해 주신 소중한 캐릭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선 여러분들 스스로 다른 유저들과 경쟁해야하는 거죠. 방식은 굉장히 쉽습니다. 그녀의 라이브 행사가 있는 날에 공연장에 참석해주시면 됩니다. 혹시나 거리가 너무 멀어 참석이 어렵다면 근처의 펜타곤 샵으로 달려가 휴대용 라온의 통신 단말기를 통해 포인트를 전달할 수도 있지요.” 그때 궁금함을 참지 못한 한 유저가 강준혁 디렉터에게 물었다. “호... 혹시 제가 구입한 캐릭터의 포인트가 가장 낮으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러자 강준혁 디렉터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의 물음에 답했다. “라이브 행사가 끝난 뒤 그녀에 대한 업데이트는 종료됩니다. 물론 게임 안에선 계속해서 즐길 수 있지만, 그녀에 대한 이벤트영상이나 무대의상에 대한 컨텐츠 업데이트는 완전히 종료됩니다.” “허억...” “그럼 타이틀을 두 개 이상 구입한 사람은 전부 투표할 수 있는 건가요?” 이어진 한 유저의 물음에 강준혁 디렉터는 여전히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굉장히 비효율적인 방식이라 별로 추천 드리고 싶지 않군요. 왜냐하면 보다시피 캐릭터들간에 공연이 겹쳐 있는 날이 있거든요. 만약에 에리카와 츠바키, 셰릴과 아즈사의 공연이 단 하루에 진행 된다면 여러분은 그 날 누구의 공연에 참석 하실 건가요?” 그의 대답에 객석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저... 저저... 악독한 놈 같으니... 이젠 실제로 유저들을 뺑뺑이 돌리다가 자신의 캐릭터가 탈락하는 내상까지 입으라는 거냐? < EP. 43 : 완전한 즐거움. (5) > 끝 ⓒ 손인성# < EP. 43 : 완전한 즐거움. (6) > & “라이브에 참가하기 위한 티켓은 따로 구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든 건 여러분께서 플레이 해주신 히로인의 육성 포인트로 대체 할 수 있으니까요.” 버추어 아이돌에 대한 강준혁 디렉터의 설명은 굉장히 심플 하면서도 엄청난 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게임 출시와 더불어 이런 충격적인 발표라니... 방금 전 셰릴과 아즈사의 훌륭한 라이브 무대를 보고난 뒤라 그런지, 객석에 있는 유저들에게서 너무 가혹한 정책이라는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말이다. 돌이켜 보면 강준혁 디렉터가 만들었던 모든 게임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가혹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미 그는 패밀리 시절부터 ‘드래곤 엠블렘’이라는 초 고난이도 게임으로 유저들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캐릭터 사망시에 플레이 데이터가 날아가던 그 게임은 2에서도 비슷한 시스템을 달고 나왔다. 그때도 유저들은 드래곤 엠블렘의 플레이 방식이 너무나 가혹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파티 플레이시 제대로 전술적 행동을 무시하는 플레이어 덕분에 파티 전체가 전멸하는 사례가 빈번했으니까. 언젠가 강준혁 디렉터는 패미통신 잡지에서 그러한 유저들의 피드백을 단 한 마디로 일축했다. “드래곤 엠블렘 시리즈는 본래 그렇게 즐기는 것입니다.” 전혀 유저를 배려하지 않은 그의 답변에 업계내에서는 건방지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 했다. 이미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유저들은 신뢰할 만한 플레이어를 모아 클랜을 만들었고, 함께 던전 레이드에 도전하였다. 마치 RPG 게임 속에서나 볼법 했던 동료와의 유대가 드래곤 엠블렘의 미칠듯한 난이도로 인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어떤 게임 잡지에서는 EASY, NORMAL, HARD 라는 난이도 위에 ‘강준혁’이라는 난이도가 따로 존재한다고 비유했을 정도니까. 그렇게 강준혁이라는 이름 자체가 유저들에게 전해주는 묘한 설레임. 그 기대감 때문일까? 현재까지 그가 만든 게임은 언제나 대 히트를 기록했다. 만약에 그가 유저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금이라도 쉬운길을 택했다면 이번엔 초심을 잃었다고 맹비난 했겠지... 사람의 시선이란 것이 항상 그렇다. 자신의 기준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면 일단 그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자신의 입맛에 맞추고 싶어한다. 실제로도 슈퍼 패밀리 시절에도 너무 어렵다는 유저의 피드백을 반영해 라이트 버전을 출시했다가 판매 부진으로 본작마저 덤핑이 되어버린 게임들도 존재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강준혁 디렉터는 유저들의 평가에 절대 흔들리지 않는 굉장한 뚝심을 가진 디렉터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사람이라도 설마 아이돌 육성 게임에 이토록 잔혹한 시스템을 집어 넣을 줄이야... ‘아무튼 유저를 벼랑 끝까지 옭아매는 특유의 스타일은 장르를 가리지 않는구나...’ 한편으론 정말 그의 일관성에 경의를 표할 정도이다. 그때 무대 앞쪽에 앉아있던 유저가 그에게 물었다. “방금 설명한 육성 포인트라는 것은 대체 어떻게 사용하는 건가요? 설마 라이브 회장에 컴플리트 라온을 들고 가야하는 겁니까?” 하긴 듣고 보니 그렇네? 대체 어떤 방식으로 포인트를 결제 시키는 거지? 모두의 눈길이 다시 강준혁씨에게로 향하자 그는 되려 황당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물었다. “이곳에 계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가방 속에 라온 하나씩은 들고 있지 않으신가요?” 그 순간 내 머릿 속에 아까 레스토랑에서 보았던 컴플리트 라온의 설명서가 떠올랐다. 설마.. 그럼? “버추어 아이돌의 메인 화면에서 동기화 메뉴를 선택하면 여러분의 플레이 데이터를 휴대용 라온과 연동시킬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러한 연동 기능은 펜타곤에서 출시하는 모든 게임에 반드시 들어갈 예정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우선 버추어 아이돌 같은 경우엔 라온과 연동시 외부에서 미니 게임을 즐길 수 있습니다. 또한 펜타곤 샵의 단말기를 통해 각 히로인의 포인트 수치를 실시간으로 확인 할 수 있으며 매주 업데이트 되는 새로운 무대 의상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우와아... 쩌... 쩐다.” 강준혁 디렉터의 설명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 나왔다. 그가 만들어낸 컴플리트 라온은 기존에 콘솔 게임이 가지고 있던 틀 자체를 완전히 깨부숴 버렸다. 설마 기존에 발매한 휴대용 게임기를 이용해 이렇게까지 게임의 바리에이션을 넓힐 줄이야... 단지 기존의 유저들을 배려하기 위한 장치라고만 생각했던 휴대용 라온의 연결 포트... 하지만 방금 전 강준혁 디렉터의 설명으로 내가 했던 생각이 그의 의도와 정 반대였다는 걸 단번에 알아 차렸다. ‘연결 포트를 이용해 기존에 발매한 휴대용 라온의 판매량을 더욱 늘리려는 거야...!!’ 휴대용 라온은 그 자체만으로 컴플리트 라온의 훌륭한 주변기기였다. 게임의 화면을 뿌려주는 미니 디스플레이 장치와 더불어 따로 예비 컨트롤러를 구입하지 않아도 라온 자체를 게임 패드로도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버추어 아이돌과의 연동 기능으로 인해 휴대용 라온은 그저 훌륭한 주변기기가 아닌 ‘반드시’ 필요한 주변기기로 급부상 되었다. 더구나 은근히 도발적인 그의 멘트는 아직 라온을 가지고 있지 않은 유저들의 자존심을 긁어내리기 충분했다. 마치 ‘뭐야? 당신 아직도 라온을 안가지고 있었어? 그럼 그동안 당신이 모은 포인트는 어떻게 처리할 건데?’ 라고 묻는 듯한 그의 태도는 불손함을 넘어서 고고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휴대용 라온이 한 두푼도 아니고... 미리 가지고 있던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구입 할 물건을 아닐텐데?’ 그때 강준혁 디렉터의 등 뒤에 있던 스크린에 휴대용 라온이 떠올랐다. 그곳에는 간단히 기존의 라온을 이용해 커치형 기기에서 이용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기능이 소개되고 있었다. “아~ 풀 메탈 기어 솔리드에서 휴대용 라온을 사용하면, MAP 화면이랑 무전 수신을 라온으로 받을 수 있구나...” “라온의 연동 기능은 서드 파티에서도 활용할 수 있나본데?” 단순히 무선 수신음이 휴대용 라온을 통해 들린 것 뿐인데도 굉장한 현실감이 느껴졌다. 두 개의 디스플레이가 전해주는 멀티 효과에 객석에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또 다시 탄성이 새어 나왔다. “크으... 도저희 버틸 수가 없다. 이거 끝나면 1층에 내려가서 라온도 사야할 거 같아...” “안 돼.. 여기서 라온까지 사가지고 돌아가면 와이프한테 쫓겨날 거야..” “박스를 버리고 가방에 넣고 가는 건 어떨까?” “미쳤냐. 어떻게 패키지 박스를 버리고 알맹이만 들고 갈 수 있어!?” ... 그렇지. 박스도 소중히 보관해야 모름지기 게이머라 할 수 있지. 나중에 중고로 팔때도 값을 더 받을 수 있고 말야. 하지만 왠지 같은 게임을 하더라도 휴대용 라온을 이용해 플레이하면 뭔가 더 재밌을 것 같네... 그러던 중 다음으로 등장한 ‘내가 없는 거리’의 리메이크판 영상에서 구매 심리의 끝판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컴플리트 라온과의 연동시에 나타나는 내가 없는 거리의 비밀 앨범 모드였다. 주인공이 죽기 전 히로인을 위해 남겨두었던 편지 30장여장과 더불어 그의 서랍에 보관하고 있었던 그녀들과의 추억이 담긴 앨범을 소개하자, 객석에 있던 한 유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으아아!!! 젠장~!! 지금 사러 갑니다.” 아직까지 펜타곤의 ‘내가 없는 거리’를 좋아해 주었던 유저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혹시나 모를 품절 사태를 대비해 미리 구입하고 돌아오려는 모양이었다. 그때 스피커에서 경쾌한 효과음이 들려오며 출입구로 향하던 사람들의 발목을 잡았는데, 이부분에선 나 역시 강준혁 디렉터의 치밀한 마케팅 실력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컴플리트 라온의 출시를 기념해 기존의 라온의 소비자 가격을 오늘부터 한달 간 30% 인하 합니다.- “우와아아아!!!” “젠장. 마누라한테 쫓겨나도 이건 사야겠다.” “이미 가지고 있지만, 소장용으로 하나 더 사야겠다.” “빌어먹을... 지갑이 점점 얇아진다.” 설마 이 타이밍에 가격 인하를 할 줄이야... 실로 무서운 전략이 아닐 수 없었다. 일전에 대학교에서 교양 과목으로 마케팅에 대한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교수님께서 펜타곤의 마케팅 방식에 대해 극찬한 적이 있었다. 판매량의 공개 카운트를 이용해 내가 없는 거리의 판매를 촉진 시켰던 점을 비롯해 발렌타인 데이에서 보여 주었던 독특한 코스튬 이벤트와 함께 CES의 컴퍼런스까지 강준혁 디렉터는 게임 개발 실력 말고도 마케팅 쪽에 천재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다나? 그러고 보니 민텐도 카린의 전설에서 ‘황금색 카트리지 한정판’도 사실은 그의 아이디어였다는 이야기도 얼핏 들은 적이 있다. “그럼 이상으로 버추어 아이돌을 비롯해 라온의 연동 기능에 대한 부가 설명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지는 에리카와 츠바키씨의 무대도 기대해 주세요.” 끝까지 여유를 잃지 않는 채 무대를 등지는 강준혁씨의 모습에 내 옆에 있던 마유미가 중얼 거렸다. “멋있다. 전에도 느꼈지만, 저 사람은 뭔가 행동 하나 하나에 자신감이 넘쳐 보여.” 치... 인정하기 싫지만, 나 역시 마유미의 의견에 절대적으로 동감하는 바이다. 이미 라이브 홀의 분위기는 그가 의도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잠시 후. 라이브 공연을 위해 부대의 조명이 어두워지며 강준혁 디렉터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스크린 속에 에리카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 칸나 노래다.” “쉿. 준혁씨가 칸나의 이름은 비밀이랬잖아...” “아, 맞다. 나도 모르게 그만...” 스크린 속에서 차분히 기타줄을 튕기는 에리카의 모습에 어수선했던 회장의 분위기가 차츰 가라 앉는게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에리카를 목소리를 연기한 칸나가 스포트 라이트에 비쳐 모습을 드러내자, 숨막힐 듯한 그녀의 청순한 미모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전에 마유미와 함께 만날 때도 느끼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예뻤나 의심이 들 정도로 지금 그녀의 모습은 무대위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특유의 밝은 목소리로 일상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응원하는 그녀의 노래는 주로 2~30대 연령층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물론 셰릴의 Beating Heart에 비하면 다소 임팩트가 떨어지는 감이 없진 않지만, 그녀의 노래는 츠바키의 ‘안아 주세요.’와 같이 몇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 담백함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좀 다른데... 그때 나랑 비슷한 감정을 느꼈는지 칸나를 지켜보던 마유미가 입을 열었다. "칸나한테 무슨 일 있나? 오늘따라 왜이렇게 슬퍼 보이지?" "그러게.. 확실히 잘부르고 있긴하지만, 뭐랄까 평소처럼 밝은 톤이 느껴지지 않아..." 잠시 후. 두 눈을 감은채 차분히 노래를 마친 칸나는 기타 연주를 위해 앉아 있던 의자에서 내려와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버추어 아이돌에서 카타기리 에리카를 연기하게된 키시모리 칸나입니다. 이렇게 여러분들께 처음으로 인사를 드려 무척이나 떨리지만, 조금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음...? 뭐지?” 칸나는 고개를 갸웃 거리는 사람들의 반응에 잠시 불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무대 안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전달 받은 그녀는 잠시 후. 지그시 아랫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 “저의 다음 무대였던 츠바키씨의 담당 성우가 컨디션 난조로 오늘은 노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헉... 안 돼!!” “뭐야. 이거 실망이네...” “첫 무대라 긴장했나?” “오전에 스피커를 통해 들었는 때 굉장히 느낌이 좋아서 다시 듣고 싶었는데...” “크흑.. 모습도 공개하지 못하다니..”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유저들의 불만에 무대 위의 칸나는 굉장히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여기서 라이브는 끝나는 건가?” “마지막 무대를 못보게 되니 뭔가 김새는데?” “그러게 말야..” 하긴 오늘 라이브의 클라이막스라고 여겼던 부분인데, 이렇게 되버리다니. 유저들이 실망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마유미 역시 츠바키의 무대를 볼 수 없다는 말에 굉장히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그 때 웅성거리는 객석을 가만히 바라보던 칸나가 천천히 마이크를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 혹시 여러분들께서 괜찮으시다면, 츠바키씨의 ‘안아주세요.’를 제가 대신 불러도 될까요?” < EP. 43 : 완전한 즐거움. (6) > 끝 ⓒ 손인성# < EP. 44 : 츠바키의 부탁. (1) > & “사와노 씨는 좀 어떻습니까?” 나의 물음에 나이가 지긋하신 의사 선생님은 안경을 쓸어 올리며 난색을 표했다. “일단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만, 솔직히 지금까지 버텨온 것도 기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제는 입원하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만...” 결국 여기까지인가? 아니, 오히려 의사 선생님의 말대로 오늘까지 버텨온 츠바키씨의 정신력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라이브 홀에서 나와 함께 병원으로 달려온 테라다씨는 선생님의 말을 인정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안됩니다. 선생님.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막 울려퍼지기 시작했어요!!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해야 할 일들이 잔뜩 있단 말입니다.” “테라다씨. 일단 진정하시고...” “선생님~!! 선생님!!!” 나는 흥분한 테라다씨를 이끌고 병원 앞에 꾸며진 작은 공원으로 향했다. 허망한 표정으로 벤치에 걸터 앉은 테라다씨는 와이셔츠의 포켓에 있던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 보던 나는 그의 입가에 물려 있던 담배를 가로채며 말했다. “기분은 이해하지만, 병원에서 흡연은 좋지 않아요.” “아, 하긴 그렇겠네요. 다른 환자들도 있으니...” 그는 담배갑을 도로 포켓에 집어 넣으며 네게 물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어쩌긴요. 어차피 그녀를 받아들였을 때부터 각오했던 일 아닙니까. 지금은 그저 그녀가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생각보다 침착하시네요. 하지만 저는 그러지 못하겠습니다. 병원에 오는 내내 혹시나 그녀가 잘 못 되면 어쩌나 그 생각 뿐이었으니까요.” 버추어 아이돌 프로젝트로 인해 처음으로 프로듀서라는 일을 시작한 테라다씨는 그 동안 오디션을 통과한 연습생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나 역시 음악에 대한 지식이라곤 일반인들과 비슷한 수준이었기에 연습생들에 관해선 테라다씨와 우에노씨에게 모든걸 맡긴 상태였다. 이번 4명의 데뷔 역시 테라다씨와 우에노씨의 심사숙고 끝에 결정된 일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츠바키는 두 사람이 특히나 아끼는 연습생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그녀의 병에 대한 패널티가 조금이라도 작용했냐면 그런 것도 아니다. 츠바키는 이미 자신의 목소리에 감정을 싣는 법을 알고 있었고, 수많은 곡 중에서 난이도가 가장 높아 모두가 꺼려했던 ‘안아주세요.’를 서슴 없이 선택했다고 한다. 처음 그녀가 녹음실에서 그녀의 곡을 불렀을 때 테라다씨는 물고 있던 담배가 떨어져 자신의 허벅지가 데이는 것도 모를 만큼 그녀의 목소리에 빠져든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데뷔 무대를 앞두고 무척이나 기뻐했었는데...” “타이밍이 좋지 않았네요. 드디어 모두가 처음으로 함께 무대에 오르는 날이었는데, 하필...” 그러고 보니 그녀가 병원에 실려온 이 후 무대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의 컨퍼런스가 시작됨과 동시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그녀는 밖에서 대기중이었던 구급차에 실려 곧바로 이송되었다. 혹시나 그녀의 건강이 나빠지거나, 행사 도중 일어날 수 있는 사고를 대비해 구급차 한 대를 대기 시켜 놓은게 천만 다행이었구나... 작찹한 기분에 긴 한숨을 내쉬던 중, 허리춤에 달려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네. 강준혁입니다.” “아, 이사님. 사와노씨는 좀 어때요?” “미야자키?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잘됐다. 츠바키는 괜찮아. 의사 선생님 말로는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고 하더군.” “아... 다행이다.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큰일난 줄 알았어요. 오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아무래도 무대에 오르는 부담감이 컸던 걸까요?” 미야자키는 츠바키의 병에 대해 몰랐기에 그녀가 병원에 온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나는 놀란 그녀를 다독이며 이후 행사 진행에 대해 물어 보았다. “츠바키의 무대가 취소 돼서 혼란스러웠을 텐데, 유저들에게 반발은 없었어?” “안그래도 굉장히 아쉬워했는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어요.” “기적 같은 일...?” “네. 칸나가 갑자기 그녀의 몫까지 대신 부르겠다고 나서서 사와노씨의 곡까지 연달아 불러주었거든요.” “칸나가...?” 확실히 칸나의 실력이라면 츠바키를 대신하기에 부족하지 않지. 자칫 라이브 행사 자체가 허무하게 끝맺을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 칸나가 용기를 내주었구나. “아무튼 덕분에 행사는 무사히 마쳤습니다. 아, 그리고 이사님의 컨퍼런스로 인해 어제 추가로 들어온 휴대용 라온 마저 전부 소진 되었어요. 아마 당분간 휴대용 라온의 판매가 올라갈 것을 대비해 추가로 발주해 두었습니다.” “응. 오늘 하루 수고 많았어.” “저도 매장을 정리하고 병원으로 가볼까요?” “아냐. 괜찮아. 지금 사와노씨의 부모님도 와 계시고, 우리도 있을테니까. 안 그래도 런칭 행사로 피곤했을 텐데,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아, 맞아. 오늘 런칭 행사 마지막 추첨식에서 재미난 일이 있었어요.” “재미난 일?” “1등 상품이었던 컴플리트 라온과 모든 런칭 소프트 누가 타갔는지 아세요?” “아, 그러고보니 추첨식도 있었지. 그런데 누가 타갔냐니,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야?” “그 외 예전에 칸나 친구라고 했던 나카무라 커플 있죠?” “그 커플이라면 알고 있지. 그러고 보니 오늘도 구매 대기 줄에서 만났고, 설마 걔네들이야?” “네. 맞아요. 대표님이 번호를 뽑았는데, 나카무라의 여자친구 번호가 당첨되서 둘이서 아주 신니 났더라구요. 안그래도 나카무라군이 오늘 구입한 컴플리트 라온을 날치기 당해서 풀죽어 있었는데, 다행이죠?” “설마. 펜타곤 샵 앞에서 라온을 도둑 맞았다던 유저가 나카무라 군이었어?” “그랬나 봐요. 아무리 그래도 게임기를 날치기 해갈 정도라니, 나름 이것도 뉴스거리가 되겠는 걸요?”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더니.. 참...” 그렇게나 기대하던 콘솔을 날치기 당했었다니, 오늘 하루 나카무라의 마음이 천당과 지옥 사이를 왕복했겠군...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칸나에게 들었다면 내가 어떻게든 보상해 주었겠지만, 그래도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다. “그럼. 오늘의 보고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 1995년 8월 19일. 컴플리트 라온이 출시 되었다. NEGA 새턴과 센소니의 기어 스테이션이 발매된 이후 3번째로 등장한 차세대 콘솔 컴플리트 라온은 발매와 동시에 모든게 화제 거리가 되었다. 먼저 나카무라를 당혹케 만들었던 컴플리트 라온의 날치기 사건은 아키하바라 뿐만 아니라 도쿄 곳곳의 게임 샵에서도 빈번히 일어났다. 처음에는 컴플리트 라온을 노리는 게이머들의 단순 절도인줄 알았지만, 유난히 도쿄 지역에서 라온의 강탈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는 걸 알게 된 나는 이것이 조직적인 범죄가 아닐까 하는 생각 마저 들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 예상을 뛰어 넘는 컴플리트 라온의 수요로 인해 초기 생산 물량이 모두 떨어져 나가자, 중고 거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정가의 두배에 달하는 밀봉 제품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어느정도 가격을 유지한채 ID를 바꾸어 같은 내용을 올리는 한 유저를 포착한 나는 펜타곤 직원들을 이용해 그의 컴플리트 라온을 높은 가격에 사들였다. 물론 그와 거래 할때는 매번 다른 직원을 보내었고, 그들의 거래 장소 근처에는 항상 경찰이 따라 붙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컴플리트 라온을 들고 나오는 청년은 ID가 달라도 항상 같은 사람이었고, 어디에서 구입했는지 영수증을 요구했지만 항상 말을 얼버무리는 그가 의심스러웠던 경찰은 그를 뒷조사하던 도중 친구와 함께 날치기 현장을 목격했다. 수색에 들어간 그의 방에선 수십대의 라온이 쏟아져 나왔고, 책상에선 도쿄 게임 샵들의 물건이 들어오는 시간이 체크된 장부도 튀어 나왔다. 계획된 범죄에 20대 중반의 청년은 친구와 함께 곧장 수감되는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다. 귀중품이 아닌 콘솔을 노린 이 범죄는 뉴스에 보도 되어 큰 화제가 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적잖은 마케팅 효과를 불러왔다. 본래 컴플리트 라온은 정식 발매 일주일 전. 지진 피해 지역의 게임샵에서 선 출시 되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피해 지역에서 게임 샵을 낸 업주들의 매장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던 탓에 일정이 취소 되었다. 새로운 게임기를 일주일이나 먼저 플레이 해볼 수 있다는 이야기에 거의 전국에 있는 게이머들이 대규모 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온라인 상에 퍼지며 자칫 큰 사고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었기에 업주들이 먼저 입고를 미뤄 달라 부탁했을 정도니까...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었다. 대신 나는 버추어 아이돌의 첫 번째 정식 콘서트를 고베 지역으로 지명했다. 그곳에서 최초로 라이브를 겨루는 캐릭터는 카타기리 에리카와 콘노 아즈사. 그들의 무대는 같은 날 같은 시각에 각각 별도의 회관에서 시작될 예정이다. 자신이 선택한 캐릭터가 과연 어디까지 뻗어 나갈수 있을까? 과연 버추어 아이돌은 실제로 그 들만의 유닛을 갖춰서 정식 데뷔를 할 수 있을까?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이 플레이 하는 게임 안에 담겨 있다고 하니, 게이머들 역시 흥분을 감출 수 없는 모양이었다. 거기다 첫날 라이브 아이템으로 공개된 무대 의상은 잡지에 실리자마자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다. 귀여운 연두빛 체크무늬 의상와 함께 머리 위에 씌운 귀여운 빵 모자가 유저들의 심장을 그대로 관통했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의 뒤에서 소리 없이 웃고 있는 자는 우리 회사 제 2개발실 디자인 팀장. 모리타 였지만... “크흐흐... 이거라면 게이머들에게 제대로 통할거야. 아마 다들 고베에 오지 않고는 못베길 걸?” ... 처음엔 힘들어 죽겠다고 징징 거리더니, 결국엔 자기가 빠져 들어선... 최근에는 자신과 쿵짝이 잘 맞는 우치무라와 함께 버추어 아이돌의 의상만 구상 중인 듯하다. 가끔 작업 중인 모리타의 모습을 볼 때면 눈에서 광기가 비쳐 보여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 “저기 이 꽃 얼마 인가요?” “병문 안 가시나 봐요?” 나의 물음에 꽃집 아주머니가 따듯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어떻게 아셨죠?” “그야 우리 가게가 병원 근처다 보니, 손님들이 자주 꽃을 사러 오시 거든요. 그리곤 다들 하나 같이 손님이 고른 꽃을 달라고 하죠.” 주인 아주머니의 말에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 그냥 뭔가 무난해 보여서...” “환자에게도 일종의 자극이 필요하죠. 이미 이런 꽃은 병실에 하나 가득 있을 테니, 조금 화려한 이쪽은 어떨까요?” 꽃이라곤 장미 꽃이랑 진달래만 구별할 줄 아는 나였기에 아주머니가 추천해준 꽃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파스텔 톤의 알록 달록한 느낌이 싫지 만은 않았다. “그럼, 추천 해주신 그쪽으로 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잠시 후. 예쁘게 포장된 꽃바구니를 들고 병원에 도착한 나는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건물을 올려 보았다. 쨍한 햇빛 아래 츠바키가 있는 병실 창문에는 아까 전 내가 가리켰던 새하얀 꽃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하하... 아주머니 말 듣기를 잘했네...” 그녀의 병실을 바라보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지금 수술 받으면 아마 다시는 노래하지 못할거예요. 제발... 단 한번이라도 무대에 올라 노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네...?- 츠바키가 깨어나고 곧장 수술을 권하는 의사의 말에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누구보다 무대 위에서 노래 불고 싶어 하는 그녀의 부탁에 나는 당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마 오늘은 그 답을 줘야겠지...” 비록 그녀가 나에게 실망할지 몰라도... < EP. 44 : 츠바키의 부탁. (1) > 끝 ⓒ 손인성# < EP. 44 : 츠바키의 부탁. (2) > & “반짝 반짝 작은별~ 아름답게 비치네~ 동쪽 하늘에서도~ 서쪽 하늘에서도~ 반짝 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와아~” 짝짝짝짝~ 츠바키의 병실이 위치한 특별 병동에 들어서자, 어디선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서 츠바키의 웃음 소리를 얼핏들은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이들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누나~!! 우리 한번 더 불러요. 네?” “응.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그러자 환자복을 입은 통통한 체형의 아이는 츠바키 옆에 바싹 붙은채 그녀의 팔을 흔들며 재촉 했다. “빨리요~” “저기 마사오군. 누나 팔을 놔줘야 피아노를 치지~” “아 참, 맞다.” “하하하~ 마사오는 바보래요~” “맞아, 맞아~” “애들아. 친구를 놀리면 못써. 누나가 어제 뭐랬지?” “친구들끼린 사이좋게~!!” “좋아~” 이거 참 어린이집 선생님이 따로 없네...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츠바키의 밝은 미소를 보고있자니, 이곳에 오는 내내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원래 여기 특별 병동 1층에 이런 장소가 있었나? 전에 왔을 때는 못 본 것 같은데... “아!! 수상한 아저씨가 우리를 보고 있다!!” 어이 꼬맹이. 수상한 아저씨라니, 내가 어딜 봐서...? 그때 아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츠바키와 눈이 마주친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꽃다발을 들어 보였다. “와아~ 남자 친구인가 봐~!!” “누나 남자 친구에요?” “아냐. 저 분은 이미 결혼하셨어~ 엄청 예쁜 분이랑~” “앗!! 그럼 불륜인가 보다. 불륜남~!!” 그러자 옆에 있던 여자 아이가 불륜이라고 외친 남자 아이에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저기 오빠. 불륜이 뭐야?” “응? 그게... 아, 결혼하고 나서 다른 여자랑 멀리 여행가는 거야. 티비에서 봤어.” “으음? 왜 여행을 다른 여자랑 가?” “글세? 그 것까진 잘...” ... 요즘 애들은 못하는 소리가 없군. 츠바키도 아이의 말에 당황했는지 얼굴이 붉어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녕하세요. 준혁씨.” 창가에 비쳐 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 나에게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은 도저히 환자라곤 볼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몸은 좀 어때?” 그러자 츠바키는 환자복을 걷어 올리며 팔뚝을 드러내 보인채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주 팔팔해요~”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잠시동안 바라보다가 마주 웃어 보였다. “그 꽃은 문병 선물 인가요?” “아, 맞아...” “와~ 예뻐라~ 준혁씨 센스가 좋으신데요? 유키 언니가 준혁씨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겠어요.” 꽃 바구니를 받은채 기뻐하는 츠바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꽃집 아주머니께 거듭 감사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피아노가 있던 그 방 원래부터 있었나?” “아뇨. 우에노씨가 병원 측이 얘기해서 피아노를 기부해 주셨거든요.” “으잉? 우에노씨가?” 나는 그제서야 며칠 전 우에노씨가 요청했던 피아노 구입에 대한 비품 목록에 결재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난 또 사운드 팀에 필요해서 구입하는 줄 알았더니, 병원에 대한 기부 품목이었나? “덕분에 아이들이랑도 친해지고, 피아노를 치는 감각을 잊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그래...? 그거 다행이구나.” 역시, 우에노씨는 츠바키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치 않았구나... 하지만 그럴수록 이별의 순간이 힘들어질 뿐일텐데, 우에노씨는 나보다 3살 연상으로 카와구치 대표와 동갑이지만,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 36살의 미혼이라면 지금 시대에선 상당히 노총각이지만, 아직까진 딱히 결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오신건가요?” 앞서 걷고 있던 츠바키가 병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며 나에게 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갑작스런 그녀의 물음에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냥 출근하던 중에 펜타곤 샵에 볼일이 있어서 지나가던 길이 었는데, 츠바키가 생각나서...” “아~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컴플리트 라온이 발매 된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네요. 9월이라 그런가 더위도 한풀 꺾인 것 같고...” “그러게, 그렇게 습했던 공기가 이젠 제법 상쾌해진 기분이야.” “후훗. 그렇죠?” 땡~ 벨소리와 함께 육중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휑하니 비어 있는 철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츠바키는 링거를 맞고 있었기에 그녀를 대신해 링거 팩이 걸려 있는 철제 걸이를 대신 옮겨 주었다. 이윽고 쿵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우웅 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병실이 있는 7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차라리 우리 말고 다른 누구라도 있었으면 조금은 마음이 편했을까? 사방이 막혀 있는 공간에 그녀와 단 둘이 있는 지금. 내 마음은 다시 또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그때 멍하니 엘리베이터의 문을 바라보던 츠바키가 입을 열었다. “준혁씨는 거짓말이 서투시네요.” “응?” “전에 유키씨가 병문안을 왔을 때, 준혁씨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들었어요. 만약에 정말로 펜타곤 샵에 가려던 것이라면 여기 병원은 준혁씨네 집에서 완전 반대편이 거든요?” “아, 그게...” “괜찮아요. 굳이 준혁씨를 나무라려던 것은 아니니까.” 나를 돌아보며 빼꼼히 혀를 내미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이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미안...” “괜찮아요.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녀가 잠시 망설이는 도중 어느새 엘리베이터는 7층에 도착해 벨소리를 울렸다. 복도에 깔린 따스한 햇살이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츠바키는 내 손에 들려 있던 링거 걸이를 대신 붙잡고 가만히 서있던 나를 밖으로 이끌었다. “아~ 날씨 너무 좋다. 병실은 너무 기운이 빠지니까, 우리 여기서 이야기 할래요?” “그래.. 좋을대로 해.” “유키 언니 말로는 무심한 척하다가도 어떤 때는 굉장히 섬세하다던데, 역시 언니가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나 보네요.” “유키가 그런 말을 했어?” “그럼요. 아 참. 저 설현이도 봤어요. 방실 방실 웃는 표정이 어찌나 귀엽던지...” 츠바키는 설현이를 떠올렸는지, 두 손으로 양볼을 감싸쥔 채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그런 츠바키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던졌다. “아~ 이제 웃었다. 준혁씨도 참 얼굴이 너무 굳어져 있다니까요.” “아냐. 나 잘 웃어.” “물론 잘 웃죠. 특히나 게이머들 뒤통수 때릴 때. 씨익~ 하고 짓는 냉소적인 웃음.” “뭐...?” “킥킥. 놀랬어요?” “아니. 뭐랄까? 그것 보다 내가 했던 컨퍼런스를 본적 있었구나.” “물론이죠. 지금까진 비밀로 했지만, 이래뵈도 여태까지 펜타곤에서 나온 게임들 전부 다 해봤는 걸요?” 그녀의 대답에 나는 적지 않게 놀랐다. 단지 노래를 부르고 싶어 버추어 아이돌 오디션에 참가한 줄로만 알았던 그녀가 사실은 펜타곤 게임을 좋아하는 게이머였다니... “처음에 펜타곤을 알게 된 건, 파이널 프론티어 였어요. 당시에 아버지께서 생일 선물로 패밀리를 사오셨는데, 함께 사온 게임이 파이널 프론티어였거든요. 여자 아이한테 게임기를 선물한 아버지라니, 지금 생각해도 황당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게임이란 걸 알게 됐어요.” “그랬구나...” “그러던 어느 날. 같은 반이 었던 남자 아이가 굉장히 허탈한 표정으로 등교하길래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글쎄 비싼 돈을 주고 산 게임이 마지막에 게임 오버 당했다고 얼마나 속상해 하던지. 그래서 다시 처음부터 차근 차근 플레이 해보라고 했더니, 그게 불가능 한 게임이라나...?” “드래곤 엠블렘...” “정답이에요~” 한 쪽 눈을 찡그리며 나를 향해 손가락을 뻗는 그녀의 제스쳐에서 이젠 제법 아이돌 다운 산뜻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때는 준혁씨를 잘 몰랐지만, 실은 저도 간적이 있었어요.” “음..? 어딜?” “그때, 패미통신에서 주최했던 드래곤 엠블렘 토벌 행사 때 저도 참가자 중에 하나였거든요.” “뭐!?” 당시 유키를 포함해 몇 명정도 여성 플레이어가 있었던 걸로 기억하지만 설마 그 안에 츠바키가 있었을 줄이야...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츠바키는 풋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유키 언니랑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네요?” “정말 몰랐어..” “그렇겠죠. 그때 금세 탈락하기도 했고, 워낙 어린 나이였으니까. 고등학교 1학년 때였나? 그래도 준혁씨가 드래곤 엠블렘을 클리어하는 장면은 끝까지 남아서 지켜봤어요. 행사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뭔가 아쉬운 기운이 들어 준혁씨에게 말이라도 걸어 볼까 했었는데, 그때 제 바로 앞에서 선수친 사람이 있어서 그만 포기했지 뭐예요.” “아...” 그렇다면 정말로 유키랑 처음 만났던 그 날. 어린 시절의 츠바키도 나를 보고 있었던 거구나. 마치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 맞은 듯한 충격에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츠바키는 ‘꽤나 놀랐죠?’ 라고 되물으며 따듯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고 나선 한동안 게임을 한 적이 없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서점에서 게임 잡지를 보다가 준혁씨에 대한 글을 읽게 됐어요. 사실은 당신이 드래곤 엠블렘을 만든 개발자였고, 그 후로 온 사회가 떠들썩했던 내가 없는 거리를 만들었다는 것도... 그리고 민텐도를 떠나 펜타곤 소프트란 곳으로 이직했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랬구나...” “그후로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준혁씨가 만든 게임은 전부다 해봤어요. 그러던 작년 어느 날 펜타곤에서 버추어 아이돌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되면서 오디션에 참가하게 됐죠. 그때는 이미 제가 병 중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어요. 제가 알던 준혁씨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츠바키 너...” “어때요? 이번엔 반대로 유저한테 튀통수 맞은 기분이...?” “하하.. 이거 할 말이 없네..” “재밌죠? 너무 걱정 말아요. 이건 유키씨에게 안 말했으니까.” 창틀에 턱을 괴인채 얼굴 가득 햇살을 받는 그녀의 옆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저 미소를 바라보며 버추어 아이돌을 포기하고 수술을 받으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준혁씨.” “응..?” “저기 나... 최근에 칸나의 도움으로 노래 하나를 작곡하고 있어요.” “그래..?” “그래서 부탁이 하나 있는데, 이건 조금 치사하지만, 예전에 당신을 많이 좋아했던 여자아이로서 부탁 하나만해도 될까요?” “부...탁?” “별로 어려운 건 아니니,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고개를 돌리며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이제까지 없던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 < EP. 44 : 츠바키의 부탁. (2) > 끝 ⓒ 손인성# < EP. 44 : 츠바키의 부탁. (3) > & 츠바키의 병문안을 다녀오고 10일 뒤. 버추어 아이돌의 첫번째 라이브 배틀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자, 일본 열도의 게이머들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니, 이러한 게임 방식을 처음 접한 탓일까? 게임을 별로 좋아 하지 않는 일반인들 조차 그녀들의 행보에 제법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일까? 최근 PC통신 커뮤니티에는 컴플리트 라온을 구입해 자신이 좋아하는 히로인을 응원 중이라는 소감이 자주 올라오곤 했다. “솔직히 처음 이사님께서 버추어 아이돌을 만든다고 하셨을 때는 도저히 감도 잡히지 않았었는데, 막상 발매하고 나니 인기가 어마어마 하네요.” 버추어 아이돌의 시스템을 담당했던 하야시는 옥상에서 담배를 꺼내 물며 피식 웃어보였다. 최근 펜타곤 소프트는 사무실내에서 흡연을 금하였기에 하야시를 비롯한 흡연자들은 이렇게 건물 옥상에 올라와야만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내부에 흡연실을 따로 두긴 했지만, 아무래도 너구리 소굴처럼 우글 우글 모여 있는 모습이 영 보기 안 좋았으니까... 금연에 대한 복지 정책으로 석 달이상 금연시에는 상당한 금액의 포상금을 내려주긴 하지만, 하야시는 아직까지 단 한번도 금연에 성공한 적이 없었다. 마치 풀 메탈 기어의 주인공인 스네이크처럼 날카로운 인상의 그는 펜타곤 내에서도 손꼽히는 골초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그가 오늘 아침 금연 신청서를 내었다. 사유는 ‘본인의 건강을 위해’라고 적어두긴 했지만, 이건 누가 봐도 카오리의 압박이라는 점이 너무나 확연히 느껴졌다. “그게 마지막 한 대냐?” “공교롭게 한 대 더 남긴 했는데, 어떻게 마지막으로 같이 어울려 주시겠습니까?” 텅빈 답배갑 한 구석에 놓인 돗대를 나에게 넘겨준 하야시는 손수 불까지 붙여 주었다. 깊게 담배 연기를 빨아 들인 나는 옥상 난간에 기대어 신주쿠 시내를 내려다 보았다. “민텐도를 퇴사하고 벌써 6년이라니, 시간 참 빠르네...” “그러게 말입니다. 그 6년 사이에 게임의 트렌드도 확실히 바뀌었죠. 일본은 아직 콘솔이 강세지만, 최근 미국에선 PC 게임 매출이 상당하다고 들었습니다.” 하야시의 말이 옳았다. 앞으로 게임 업계는 꽤나 장시간 동안 PC 게임과 콘솔 게임이 양분화 되어 진행 될테니까. 특히나 최근 ‘프로스트’사에서 디아블로 시리즈를 발표하고 난 뒤 쿼터뷰 방식의 핵&슬래시 게임들이 슬슬 발톱을 드러낼 시기가 다가오는게 느껴졌다. 하야시 역시 그들이 최초로 공개한 디아블로 시리즈의 게임 화면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는데, 어두침침한 던전 속에서 쉴새없이 몰려오는 적들과 상대하는 RPG 방식은 여태 것 그가 즐겨왔던 RPG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 때까지 ‘게임’이라는 컨텐츠 안에서 일본을 따라올 나라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많은 걸 느꼈습니다. 역시 세계는 넓군요.” “그래서 이 바닥이 질리지 않는 거지. 무시 무시한 포팅 능력을 가진 괴수들이 해마다 새로운 신작을 내고 있으니까.” “그런 이사님 역시 무시무시 한 괴수들 중에 하나이지 않습니까~ 발매하는 게임들마다 유저들을 벙찌게 만드는 독특한 게임성의 대가.” “그만해라~ 낯 간지럽게 왜 그래? 너 답지 않게.” “어색하신가요?” 새하얀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히죽 웃어 보이는 하야시의 모습에 나는 쓴 웃음을 지으며 좌우로 고개를 내저었다. 왠지 이런 칭찬엔 아직까지도 익숙치가 않다. 분명 세간에 대한 나의 평가는 이미 일본을 넘어 북미 지역과 유럽에도 꽤나 이름을 떨친 상태이긴 했지만, 뭐랄까... 예전에 비해서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라고 해야하나? 가끔 그런 묘한 기분에 휩싸일 때가 있다. 모든 걸 나 혼자 짊어진 채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 다녔던 10년 전의 내가 얼핏 그리워 진다고 해야하나? “이 봐. 하야시.” “네. 이사님.” “우리 모든 걸 내려 놓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그러자 하야시의 미간이 쩌억 하고 갈라지며 순간적으로 나에게서 몇 걸음 물어났다. “설마 이사님. 그거 드래곤 엠블렘 2에 대한 이야기 입니까?” 이런 내가 너무 앞뒤 생각없이 말을 내뱉었나? 그래도 그렇지. 그냥 내뱉은 말 한 마디에 저 포커 페이스가 새하얗게 얼굴이 질리다니, 사이킥 포스를 비롯해 밥 먹듯이 프로젝트를 뒤집어 엎었던 것에 대한 불신감이로군... “아냐, 아냐. 하야시. 그게 아니고...” “그럼 무슨 프로젝트 말씀이십니까?” “끄응... 아냐, 됐다.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일전에 츠바키의 병문안을 다녀온 뒤로 마음이 조금 뒤숭숭해진 건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단지 그녀가 나를 좋아했었다는 고백 때문이 아니라, 처음 1983년도로 회귀했던 10년 전에 비해 지금의 나는 확실히 그때의 열정을 잃어버린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아직도 게임을 좋아하고, 매번 독특한 시스템으로 유저들과 함께 내가 만들어낸 컨텐츠를 즐기는 것이 즐겁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왜 하필 나였을까?’ 2015년 당시엔 분명 나보다 더 뛰어난 기획자가 널리고 널렸을 때이다. 센소니는 기어 스테이션 4는 당시의 콘솔 업계를 거의 장악하다시피한 상태였고, 그들의 퍼스트 파티로는 게임 역사상 그래픽 퀄리티와 스토리 텔링에서 한 획을 그은 라스트 오브 월드를 만든 너티캣이라는 개발사가 있었고, PC 게임 쪽으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거대한 세계관을 구축한 월드 오브 워와 디아블로 시리즈를 제작한 ‘프로스트’가 있었다. 비록 민텐도는 연이은 콘솔 사업의 실패로 과거의 영광을 잃었지만, 쿠마모토 시게루씨는 게임 업계의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고, 그가 만들어낸 다양한 게임들은 그 후배 디렉터들이 이어 받아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만약에 그 안에서 꽤나 실력있는 메인 디렉터 하나가 나를 대신해 이곳에 떨어졌다면, 지금 내가 있는 이 세계는 정말 어마어마한 일들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나란 존재가 한 없이 작게만 느껴졌다. 지금의 나는 지금 게임 업계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인가... 앞으로도 내가 만드는 게임을 게이머들이 좋아해 줄까? 최근에 나는 마치 내가 만든 ‘신의 선물’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다. 내가 알고 있는 과거를 조금은 다른 형태로 다시 한번 반복해서 살아 가는 느낌이랄까? ‘이럴 때면 정말 나를 이곳에 보냈던 게임 가게 할아버지를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 만나게 된다면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참 많은데...’ 어느새 필터 끝까지 태워버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자, 한동안 말없이 나를 지켜 보던 하야시가 나에게 말했다. “이사님.” “응?” “이사님은 지금도 충분히 잘 하고 계십니다.” “응...?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기운이 없어 보이시길래. 별거 아니지만 이전부터 꼭 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 그래. 고맙다.” 한쪽 입꼬리를 올린채 싱긋 웃어보이는 하야시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건드린 나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래 어차피 이곳에 온지도 12년이 흘렀다. 나의 결혼식에 와주셨던 할아버지도 마음 껏 날뛰어 보라하였으니, 적어도 완전히 틀린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이렇게 살다보면 언젠가 그 분을 자연스럽게 보게 될 날이 오지 않겠는가. 좋든 싫든 2015년의 그 날 오게 된다면 말이다. & 1995년의 10월 초. 고베와 오사카의 라이브 장소에는 각각 어마어마한 인파가 모여 들었다. 원만한 행사 진행을 위해 따로 보안 업체까지 섭외하였지만, 라이브 회장에 모여든 관람객 수는 이미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내가 있는 이곳은 칸나의 라이브 장소인 고베 지역이었는데, 다소 불편한 교통 상황 속에서도 일본의 각 지역에서 모여든 유저들로 인해 행사장 밖은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우오오!! 오늘의 라이브를 위해 후쿠오카에서 달려왔다!!” “이 정도라면 에리카의 압승이 분명해.”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에 칸나는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살짝 움켜 쥐었다. 창가에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돌려 딱딱하게 굳어 있는 칸나에게 말을 걸었다. “너무 긴장할 필요없어. 먼저 너를 대신해 게임 캐릭터인 에리카가 신곡을 발표할 테니까. 마지막 라이브 무대에만 신경 쓰면 돼.” “네. 그런데..” “응?” “이 치마 길이. 아무래도 너무 짧은 거 같은데요?” “하하... 좀 그렇지? 다음 번 라이브 의상을 기획할 때 모리타에게 전해둘게.” “오사카 무대는 어떤가요? 콘노 아즈사를 맡고 있는 아오이양. 많이 긴장했던데..” “그쪽도 사람이 어마어마한가 봐. 아무래도 고베보단 오사카가 교통이 더 편리하기도 하고, 오히려 네가 더 긴장 해야할 걸?” “저는 괜찮아요.” 대본을 움켜쥔 채 살포시 웃어보이는 칸나의 미소에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런데 아까부터 뭘 그리 적고 있는 거야?” “아, 이건... 내일 츠바키 언니에게 드릴 곡이에요. 오늘 아침에 이곳에 오는 차 안에서 겨우 완성했거든요.” “그래? 잠깐만 봐도 될까?” 그러자 칸나는 서둘러 허리 뒷쪽으로 노래 가사가 적힌 악보를 숨기며 난처하게 웃어보였다. “죄송하지만, 츠바키 언니가 절대로 준혁씨에게 보여주지 말라고 했어요.” “으잉? 왜?” “그게, 준혁씨에게는 꼭 무대에서 처음으로 들려드리고 싶다고 하셔서... 현재는 저희랑 우에노씨. 그리고 테라다씨만 알고 있는 곡이에요.” “흐음~ 뭐 그들이 인정했다면 분명 좋은 곡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뭔가 좀 섭섭한데?” “그래도 안돼요. 언니랑 약속 했으니까. 가사는 언니가 주셨고, 곡은 제가 썼는데, 우에노씨가 둘다 굉장하다고 칭찬해 주셨어요.” “그래? 그것 참 기대 되는 걸?” “다음 주에는 츠바키 언니의 공연이니까 그때 꼭 들어보세요.” 그때 스탭실의 문이 열리며 행사 진행을 맡고 있는 펜타곤 직원이 나를 찾았다. “이사님. 이제 곧 첫 라이브가 시작됩니다. 준비해 주세요.” “그래. 바로 올라 갈게.” 직원이 물러간 뒤, 거울을 한번 살핀 나는 옷깃을 잡아 당기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럼 가볼까?” “힘내세요. 이사님.” 뒤에서 나를 응원하는 칸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인 나는 무대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칸나와 함께 작업중이라던 츠바키의 곡이 완성 됐구나... 솔직히 칸나의 공연 중에 몰래 볼수도 있지만,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숨기는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어차피 일주일 뒤에 츠바키의 공연이 있으니 조금만 참도록 하자. 나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그 날 츠바키의 부탁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준혁씨 혹시 제 건강 때문에 외부에서 공연이 힘들다면... 이 곳 병원에서 해보는 건 어떨까요. 물론 다른 환자분들에게 폐를 끼칠 수 있으니, 그들의 허락 하에 아주 작은 공연으로요..’ < EP. 44 : 츠바키의 부탁. (3) > 끝 ⓒ 손인성# < EP. 44 : 츠바키의 부탁. (4) > & 무대에 오르기 전, 객석에서 들려오는 관객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슬쩍 옆에 걸린 무대의 커튼을 들춰본 나는 이벤트홀을 가득 찬 사람들의 모습에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인데?’ 물론 현재 일본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는 ‘아무로 나미에’ 라던가 X-JAPAN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하지만, 단지 게임 캐릭터를 이용한 라이브 치고는 생각보다 많은 관람객들이 모여든 셈이다. 더구나 정식으로 컨텐츠가 시작된 것이 한달 보름 정도 밖에 흐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버추어 아이돌이 가진 잠재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단기간 내에 많은 팬을 보유하게 되었냐고 묻는다면 게임을 대하는 일본 특유의 문화 덕분이라고 답해야 할까? 하지만 잠시 생각을 해보니, 그들이 이만큼 모인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정답은 ‘컨텐츠’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의 정식 데뷔를 놓고 치루는 이른바 서바이벌 매치의 긴장감. 하지만 그보다 더 게이머들을 이끌게 하는 것은 이곳 콘서트 홀에서 얻을 수 있는 다운로드 컨텐츠였다. 이곳에 방문한 관람객들에겐 에리카와 아즈사의 최신곡을 가장 먼저 들어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보다 먼저 자신의 기기에서 새로운 캐릭터 복장과 신곡을 해금(解禁)시킬 수 있는 강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해금이라는 단어를 쓰냐고 묻는다면, 사실 두 번째 라이브에서 사용되는 곡들과 일러스트는 이미 CD 안에 데이터화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데이터를 언락(unlock) 컨텐츠라고도 하는데, 아주 작은 용량을 가진 키(Key) 데이터를 이용해 CD 안에 들어 있는 대용량 데이터를 해금 시킬 수 있어, 버추어 아이돌의 컨텐츠를 강제적으로 나마 오래도록 즐기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 기능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다른 게임 회사에서도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었는데, 대표적으로 난코의 ‘아이언 피스트2’에서 기간제 언락 방식을 주로 사용했었다. 아케이드 버전에서 100판을 플레이 하게 되면 열리는 숨겨진 캐릭터 라던가, 최종 보스를 클리어한 횟수에 따라 어느 날 갑자기 캐릭터가 툭하고 등장하는 퍼포먼스에 유저들이 열광하던 기억이 떠올랐던 나는 그 비슷한 방식을 버추어 아이돌에 차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로지 모든 컨텐츠를 언락 데이터에 의존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칸나가 츠바키를 위해 곡을 만든 것처럼 커스텀 데이터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컴플리트 라온에는 약 128메가의 하드 장치가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이 여유 공간 덕분에 컴플리트 라온은 센소니의 기어 스테이션처럼 메모리 카드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 따로 추가 비용이 들지 않았다. 센소니의 기어 스테이션은 기계만 생각하면 딱히 비싼 느낌이 들지 않았지만, 메모리 카드를 이용해야만 게임 플레이를 저장할 수 있었기에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 단점이 있었다. 더구나 데이터 저장 자체를 블록화 시켜 게임마다 차지하는 데이터 수치에 따라 2~3개 가까이 데이터를 차지 하였는데, 나중에 메모리 카드를 전부 사용하면 과거의 데이터를 꼭 지워야 했기에 조금 불편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용 콘솔 내부에 하드를 때려 박은 것은 지금 시기에선 굉장히 황당하고 파격적인 서비스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황당한 건 센소니와 NEGA 같은 경쟁 업체의 입장이었고, 파격적인 것은 두 팔 들고 환영한 유저의 입장이었지만... 하지만 신형 콘솔에 하드를 주입 시킨 것은 단지 다운로드 컨텐츠와 데이터 저장 때문만은 아니었다. ‘컴플리트 라온 안에는 OS가 들어 있거든.’ CD의 시대가 열리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복사 CD였으니까. 컴플리트 라온은 새로운 게임이 나올 때마다 내부 OS를 업데이트 시켜주는 버전 업 데이터가 들어있었다. 그로 인해 콘솔안에서 정품 CD를 인식하는 센서를 망가뜨리는 모드(MOD)칩을 사용 할 경우 CPU 클럭을 강제로 오버시켜 콘솔 내부에서 물리적으로 CPU를 망가뜨리는 기능을 포함 시켜두었다. 이런 효과에 대해서는 설명서를 비롯해 본체 뒷 부분의 봉인 씰에도 고지해 두었기에 아직까지는 복제 CD를 사용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기존 세대에 사용 되었던 카트리지는 생산 자체 만으로도 단가가 너무 비싸기에 모조품을 만들어 제 값을 받고 소비자들을 속여 파는 형태였다면, 이번 CD 같은 경우는 단가가 워낙에 저렴하고 대량 생산이 가능해 장당 500엔에서 1000엔씩만 받아도 상당히 남는 장사였다. 최근 대만에서 기어 스테이션과 NEGA 새턴용 모드칩을 개발해 강제로 콘솔 개조하는 사례가 잦아지며 현 게임 업계는 상당히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128메가의 하드는 비록 제조 단가의 상승을 불러왔지만, 복제 CD를 거를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메리트가 작용했기에 회사 내부에서도 만장 일치로 통과 되었다. 잠시 후. 이벤트 홀의 스피커에서 라이브의 시작을 알리는 벨소리가 울리자, 웅성이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차츰 잦아 들었다. 무대 옆에서 대기하던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무대 중앙에 서서 옷매무새를 정리 하였다. “시... 시작하려나 보다.” 무대 위를 걷는 내 발자국 소리를 들었나? 수많은 관객 중에서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가 얼핏 들려온 순간. 내 앞을 가로 막던 커튼이 위로 치켜 올라가며 관객들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우와아아아~!!!” 나는 객석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들을 한번 주욱 훓으며 빙긋 미소 지어보였다. “카타기리 에리카양의 신곡 발표회에 잘 오셨습니다.” 두 팔을 벌리며 관객들과 인사를 마친 나는 쏟아지는 관객들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 중앙에 세워진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올해는 여러분들과 유난히도 많이 마주치는 한 해로군요.” 그러자 내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객석 쪽에서 작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보통 1년에 한 번 정도 컨퍼런스를 진행해 왔었는데, 올해는 어쩌다보니 컴플리트 라온을 발대 하고 한 달 반 만에 또 다시 유저들의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에리카양의 라이브를 시작하기 전에 잠시동안 현재 각 히로인들의 성적을 발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버추어 아이돌은 지난 한 달 반 동안 20만 장을 출하하였고, 각 히로인 별로 5만장씩을 발매 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현재 완판을 기록하고 있는 히로인이 두 명 있는데요.” 나의 말에 객석에 앉아 있던 관객들은 마른 침을 삼키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카타기리 에리카의 팬이다 보니 그녀의 이름이 호명 되길 바랬지만, 아쉽게도 내가 들고 있는 대본에는 그녀의 이름은 없었다. “셰릴과 츠바사양입니다.” “아아...” 마치 하늘이라도 무너진 것처럼 긴 한숨을 내쉬는 유저들을 바라보니 나 역시 덩달아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버추어 아이돌의 진정한 무대는 지금부터 시작이기에 최후의 결과는 얼마든지 뒤집어 질 수 있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컴플리트 라온이 출시 되고, 판매 대수가 10만 대를 살짝 넘은 지금. 버추어 아이돌의 판매량은 이미 콘솔을 훨씬 뛰어 넘었다는 점이죠. 이 부분에서 컴플리트 라온을 즐기는 유저 당 반드시 버추어 아이돌을 한 개 이상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콘솔 시장 중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결과입니다. 그만큼 많은 분들이 버추어 아이돌의 히로인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뜻이지요.” “와아... 대박이네..” “게임기가 10만대 팔렸는데, 소프트가 그걸 초과하다니.” “하긴 나만 해도 4장 다샀으니까.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긴하네...” 나의 발표에 대해 일부 유저는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꽤나 존재 했다. 그때 무대 안쪽에서 달려온 여 직원 하나가 나에게 쪽지 하나를 전달해주고는 황급히 무대를 빠져 나갔다. 그녀가 전해준 쪽지 내용을 잠시 살핀 나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마이크를 손에 들었다. “방금 오사카의 라이브 무대에서도 관람객에 대한 집계를 마쳤나 보군요.” “오오... 어떻게 됐지?” “어떻게 되긴 당연히 에리카가 이겼을 거야.” “글쎄.. 친구한테 듣기론 오사카 쪽도 어마어마하게 모였다던데..” 나는 불안감으로 웅성이는 무대를 잠시 바라보다가 마이크를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현재 콘노 아즈사의 라이브를 보기 위해 참석한 인원은...” “으으... 제발..” “신이시여..” 불안한 표정으로 어서 빨리 결과를 알려주길 바라는 눈동자들... 그 안에서 몇몇 사람은 두 손을 모은채 기도를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조그만 쪽지를 손에 든 채로 뜸을 들이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아.. 설마..” “에리카 양이 진 거야?” “말도 안 돼!!” 나의 작은 제스처 하나에도 온몸으로 불안감을 표현하는 그들을 위해 나는 쪽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입을 열었다.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파앗~!! 동시에 나의 등 뒤에 있던 거대한 스크린에 오사카 라이브 홀이 비쳐졌다. “우와아아...!!!” “허어억!! 뭐가 저리 많아~!!” “젠장.. 아즈사 팬이 저렇게 많았나!?” 자신들과 거의 비슷한 숫자로 라이브 홀을 메우고 있는 오사카 라이브 홀의 모습에 객석에 있는 유저들의 표정에 묘한 긴장감이 서렸다. -버추어 아이돌 라이브의 이원 생중계- 나는 화면 속에서 무대 중앙에 서있는 카와구치씨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잠시 후 그 역시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보시다시피 현재 라이브는 동시에 진행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뿐만 아니라 전국의 게임 샵에 설치된 단말기를 이용해 오늘의 라이브를 멀리서 응원해 주시는 유저들도 있기에 결과는 라이브가 종료된 후에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본격 적인 라이브를 진행해볼까요?” “우오오!!!” 상대 진영에 가득차 있는 객석을 바라보니, 파이팅이 넘치는지 유저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쥔채 함성을 내지르기 시작합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여러분들에게 라이브를 즐기는 간단한 룰을 알려 드리고록하겠습니다.” “룰?” “앞으로 매회 진행 되는 라이브에서는 관객 여러분의 호응도를 체크하게 됩니다. 라이브가 종료 된 후에 여러분의 함성 소리를 데시벨로 측정 하여 그 수치 역시 히로인의 데뷔 포인트에 합산 될 예정입니다. 그러니 라이브를 즐겨 주신 만큼 에리카양을 위해 많은 응원 부탁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한가지 더. 혹시나 곡의 분위기 덕분에 함성이 낮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 준비 된 곡 중에는 서로의 곡을 바꿔 부르는 순서도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오오!!! 대박이다..” 단지 새로 발표하는 노래 한 곡 위해 유저들에게 고베까지 찾아오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유저들의 열화과 같은 박수를 받으며 무대위에서 마이크를 물리자, 거대한 스크린 속에 에리카의 모습이 나타났다. 처음에 당신을 위한 응원가를 부르던 청순한 모습의 그녀를 상상하던 유저들은 초록색 체크 무늬 치마를 입은 귀여운 에리카의 모습에 다양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커헉!!” “귀.. 귀엽다.” “내 취향이다!! 내 취향이야~!!” 그때 어느 눈치 빠른 게이머가 자신의 머리를 감싸쥔 채 소리쳤다. “설마!! 오늘 노래하는 담당 성우도 같은 복장이려나!?” “오오오!!!!” 그 순간 라이브 홀은 조금 다은 의미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군대 위문 공연을 연상 시키는 라이브 홀의 모습에 무대 한켠에 서 있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이래서 눈치 빠른 게이머는 싫다니깐...” < EP. 44 : 츠바키의 부탁. (4) > 끝 ⓒ 손인성# < EP. 44 : 츠바키의 부탁. (5) > & 에리카의 첫곡인 당신을 위한 ‘응원가’가 지친 일상을 마친 사람들을 위한 노래였다면, 그녀의 두 번째 곡은 사랑에 빠진 소녀의 설레이는 마음을 담은 가사가 굉장히 인상적인 노래였다. 비교적 잔잔했던 분위기의 첫 번째 곡과는 달리 우쿠렐레의 통통 튀어오르는 리듬과 함께 노래 부르는 그녀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미소짓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스크린 속에 클로즈업 된 그녀의 얼굴이 객석을 향해 윙크를 날리자, 순간적으로 데시벨이 100dB을 가리킬 정도로 라이브 홀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와아... 정말 어마어마한데요?” 어느새 내 곁에 다가온 칸나가 객석을 바라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게이머들의 함성으로 인해 그녀가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 조차 듣지 못했던 나는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긴장은 조금 풀렸어?” “오히려 대기실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직접 객석이 가득 찬 모습을 보니 엄청 떨리는데요? 지금쯤 오사카에서 라이브를 준비하고 있는 아오이도 저랑 비슷한 기분이겠죠?” “아마도 그렇겠지.” 콘노 아즈사를 연기하는 하마자키 아오이는 버추어 아이돌 그룹으로 선발된 연습생중에서 가장 어린 나이였다. 이제 갓 중학교 1학년에 올라온 그녀의 나이는 올해로 12살. 덕분에 연습생들 사이에서도 귀여움을 독차지 하는 존재였다. 다만 전에 런칭 행사의 라이브 때도 그랬지만, 살짝 무대 공포증이 있어 다른 히로인들 보다 조금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았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 쉬며 심호흡을 하는 칸나를 잠시 바라보다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괜찮겠어?” 그러자 칸나는 두 눈을 부릅 떠보이며 대답했다. “제 노래로 무대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보이겠어요.” “어라...? 그 말.. 어디선가 들은 거 같은데?” “나기사 언니가 런칭 행사 때 했던 말이에요.” “아~ 맞다.” 나기사는 버추어 아이돌에서 셰릴을 연기하는 성우의 이름이었다. 항상 자신감 넘치는 말투와 행동력으로 버추어 아이돌의 맏 언니 역할을 맡고 있었다. 나이는 츠바키와 같지만, 게임속 캐릭터처럼 실제로도 성숙한 이미지의 나기사는 다른 연습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사실 여기서 누구 하나를 제한다는 것도 참 가슴 아픈 일이긴 하지...’ 무대 의상을 점검하며 스스로에게 파이팅을 외치는 칸나를 바라보니, 씁쓸한 마음이 더욱 거세지는 것을 느낀 나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 애써 스크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버추어 아이돌의 첫 번째 라이브. 에리카 VS 아즈사 공연은 다행히 별 탈 없이 진행 되고 있었다. 신곡 발표 이 후. 예정대로 서로의 타이틀 곡을 바꿔 부르는 파트에서는 그 동안 거리 공연으로 대담해진 칸나의 경험이 진정으로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화려한 조명과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미소를 잃지 않고 노래한 그녀의 모습에 많은 관객은 갈채의 박수를 보내주었고, 마지막 무대인 당신을 위한 응원가를 끝으로 칸나가 관객들에게 인사를 마치자 객석 어딘가에서 조그맣게 앵콜을 원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앵콜~!! 앵콜~!! 앵콜~!! 앵콜~!!” “한 곡 더~!!” “후쿠오카에서 여기까지 왔어요. 이대로 돌아가긴 너무 아쉽습니다!!” “전 홋카이도에서 왔다니까요~!!” “이번에도 츠바키의 노래를 대신 불러 주세요!!” “아, 맞아. 그때 에리카 버전의 ‘안아주세요.’ 좋았었지..” “앵콜~ 앵콜~ 앵콜~ 앵콜~” 객석에서 끈임 없이 흘러나오는 요청에 무대 위에 있던 칸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무나 훌륭했던 그녀의 라이브에 나조차도 멍하니 그녀의 노래만 듣고 있던 터라 객석의 반응은 나로서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츠바키의 노래를 또 한 번 부르는 것은 다음 주에 있을 그녀의 라이브에 어느정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을 대비해 나는 결국 그녀가 예전에 불렀던 또 다른 곡으로 앵콜에 응할 것을 허락했다. 그러자 칸나 역시 무대 중앙에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 눈을 감은 채로 노래의 첫 소절을 떼었다. “처음 그대를 본 순간. 슬픈 내 사랑을 난 알았죠...” 그 순간 객석에서 앵콜을 외치던 유저들의 표정이 일순간에 굳어 버렸다. “어? 이 노래는... 설마?” “설마.. 설마아~!!” “헐.. 대박.” “신의 선물의 엔딩곡을 부른게 설마 저 분이었던 거야?” 올해 초. 온라인 커뮤니티를 떠들썩 하게 만들었던 ‘신의 선물’ 엔딩곡은 칸나가 직접 가사를 붙여 화제가 된 곡이었다. 하라주쿠의 거리 공연에서 들을 수 있다는 제보에 많은 이들이 역 앞의 레코드 점을 찾았지만, 나와 계약을 마친 그녀는 더 이상 그곳에서 노래하지 않았다. 대신 펜타곤 샵에 설치된 단말기를 통해 따로 그녀의 음악을 다운로드 받을 수있게 해두었는데, 현재까지 신의 노래의 엔딩곡은 다운로드 수만으로 거의 10만건에 육박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던 곡이었다. “설마 여기에서 이 노래를 들을 줄이야...” 유저들은 기대 이상의 선물을 받은 표정으로 멍하니 그녀의 노래에 빠져들고 있었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이런 내 맘이 들킬까 두려워~ 하루종일 그대의 곁을 서성이며 걷고 있어요.” 열기로 가득했던 라이브 홀을 따듯하게 감싸주는 듯한 신의 선물의 엔딩곡은 그 이름에 걸맞게 객석의 분위기를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이윽고 그녀의 마지막 노래가 끝이 나고 객석을 향해 허리숙여 인사하는 칸나의 머리 위로 라이브의 끝을 알리는 커튼이 내려오자 객석에 있던 사람들이 전원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큰 박수를 보내 주었다. 직접 노래를 부른 건 아니었지만, 이 광경을 지켜보는 것 만으로도 이렇게나 가슴이 벅차오르는데 직접 무대 위에서 노래한 칸나의 기분은 어땠을까? 나 역시 두려움을 이기고 성공적으로 라이브를 마친 그녀의 용기에 힘찬 박수를 보내 주었다. & [대박입니다. 대박!! 진짜 마지막 앵콜에선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니까요~!!] [아,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갈 걸. 설마 에리카의 성우가 신의 선물의 엔딩곡을 부른 사람이었을 줄이야.] [그러게 제가 전부터 두 곡의 음색이 비슷하다고 했었잖아요. 그 때는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엄청 까였었는데...] [제피로스님. 제가 그때 말도 안된다고 게시글 올렸던 사람들 중에 하나입니다. 이제와서 너무 늦었지만, 진심으로 사죄 드려요. 으헝헝...] 에리카의 라이브 행사가 끝나고 이틀 뒤. 버추어 아이돌의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온통 에리카의 성우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결과적으로 에리카의 라이브에서 마지막으로 선택한 신의 선물의 엔딩곡은 유저들에게 제대로 먹혀 들어갔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틀동안 에리카의 데뷔 포인트가 약 1.5배로 껑충 뛰어 오를 정도로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보여주었다. “이사님. 또 버추어 아이돌 커뮤니티 대화방에 계십니까?” “엄연히 이것도 시장 조사거든?” “암요~ 그렇고 말구요.” 옆자리에서 나를 바라보던 하야시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모니터 쪽으로 시선을 옮기던 나는 얄미운 하야시를 향해 한마디 내뱉었다. “내일 카오리랑 웨딩 드레스 보러 간댔지? 이번이 3번째였나?” “······.” “과연 내일은 그녀가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고를 수 있을까?” 아무리 깐깐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라도 버틸 수 없는게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카오리와의 쇼핑이었다. 물건 하나 사기 위해서 최소 다섯 군데 이상의 매장을 살피는 그녀 덕분에 신혼집에 들어갈 가구를 고르는데만 일주일 이상을 허비한 하야시는 이제 쇼핑의 ‘쇼’자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모양이었다. 워낙에 심플하게 사는 주의이기에 집에 가재도구가 별로 없던 하야시는 요새 신혼집을 차리는데에 모든 체력을 쏟아 붓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식장에서 입을 웨딩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카오리의 변덕으로 인해 지난 주말 내내 웨딩샵을 돌아다닌 하야시는 그것도 부족해 내일 연차까지 써서 그녀의 드레스를 함께 골라주러 가야만 했다. “이사님. 결혼이란게 이렇게 힘든 것이었습니까?” 하야시의 질문에 모니터를 응시하던 나는 턱을 쓸어 내리며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하야시. 지금 네가 하는 카오리와의 쇼핑은 말이지...” “불안하게 왜 갑자기 목소리를 깔고 그러세요..” “아주 아주 긴 이야기의 프롤로그와도 같은거야.” “허억...” “작년 내내 퇴근길에 유키한테 아이스크림 배달 했던 내 모습 아직 기억하지?” “어억...”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유키는 카오리 만큼 극성은 아니었기에 어찌보면 하야시가 조금 측은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힘내라. 하야시.. 그래도 결혼하고 나면 나름 좋을 면도 있어.’ & 에리카와 아즈사의 대결은 결과적으로 에리카의 승리로 끝이 났다. 라이브 행사에 방문한 인원수는 비슷했지만, 결과적으로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 내는데 있어선 칸나가 훨씬 우위를 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의 큰 행사를 마쳤지만, 숨돌릴 틈은 없었다. 곧바로 이번 주말에는 츠바키와 셰릴의 라이브 공연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번 공연은 나 역시도 굉장히 기대하는 바가 컸는데, 그 이유는 바로 츠바키의 신곡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미리 녹음 해두었던 두 번째 곡을 대신해 칸나와 작업한 곡을 선공개 하게 되면서 회사 내부에서도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는데, 우선 첫 번째 준비해 두었던 애니메이션 라이브 영상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병원측에서 그녀의 외출을 허락해 주지 않았기에 그녀의 라이브는 병원에 설치된 강당에서 이원 생중계로 송출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공연을 준비하는 스탭들은 츠바키가 입원한 병원측과 협의를 위해 상당히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셰릴과 츠바키의 공연 당일이 다가왔다. 먼저 츠바키의 라이브 행사는 펜타곤 샵 2호점의 이벤트홀에서 열리게 되었다. 본래라면 컴플리트 라온의 런칭 당일 예정되어 있었던 그녀의 라이브가 한달하고도 보름이 걸려 다시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츠바키에 맞서는 셰릴의 무대는 우에노 공원에 있는 이벤트 홀에서 열리게 되었는데, 둘다 게임 소프트 완판을 기록한 주인공들 답게 행사 전부터 라이브 홀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캠코더를 이용해 공연 전에 모인 수 많은 관객들의 모습을 담아내던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이 광경을 츠바키가 봤었다면 굉장히 좋아했을텐데...’ 행사장에 마련된 츠바키에 대한 굿즈 아이템을 구입하는 모습. 그리고 라온을 이용해 라이브 티켓을 인증한 팬들이 객석을 메우는 모습까지 촬영을 마치고 나자 병원 쪽에 있는 스탭에게서 공연 준비를 마쳤다는 메시지가 들어왔다. 문자 메시지를 확인한 내가 스탭들에게 지시를 내리자 라이브 홀의 스피커에서 공연 시작을 알리는 벨소리가 울려퍼졌다. “와아.. 드디어 라이브를 듣는구나.” “런칭때 공연 못봐서 아쉬웠는데, 설마 오늘도 취소 되는 건 아니겠지?” 그녀와 마주 한다는 기대감으로 가득찬 관객들의 목소리에 나는 착찹한 마음으로 공연 시작을 알리는 콜사인을 보내었다. 틱... 천장의 조명이 꺼지는 소리와 함께 주변이 어두워 지자, 거대한 스크린 속에서 무대 의상을 입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카메라를 향해 미소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어째 전보다 더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그녀는 카메라 불이 들어옴과 동시에 건너편에 있는 우리를 향해 빙긋 웃어 보인 뒤, 아무런 설명도 없이 곧장 노래를 시작했다. 그녀가 직접 가사를 쓴 두 번째 노래의 첫 소절을 듣는 순간 화면을 바라보던 내 두 눈에 나도 모르게 눈물 방울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저기, 만약에 모든 것을 내버릴 수 있다면 웃으며 살아가는게 조금은 편해질까? 또 다시 가슴이 아파 오니까. 이제 아무 것도 말하지 말아줘. 저기, 만약에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다면 울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이제 아무 것도 보여 주지 마. 아무리 너에게 다가가도 나의 심장은 하나 뿐... 너무해.. 너무해.. 내 마음은 이렇게 부숴지고, 찢어 지는데... 아직 너는 나를 안고서 놓지 않고 있어... 이제... 됐어... < EP. 44 : 츠바키의 부탁. (5) > 끝 ⓒ 손인성# < EP. 44 : 츠바키의 부탁. (6) > 스크린 속에서 노래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천사와도 같아서, 모두가 숨죽인 채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첫 번째 타이틀 곡인 ‘안아주세요.’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드는 이 곡은 마치 츠바키가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네는 듯한 느낌 마저 들정도였다. 이윽고 그녀의 노래가 끝나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관객들과 마주한 그녀는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버추어 아이돌의 사와노 츠바키 역을 맡고 있는 동명(同名)의 ‘사와노 츠바키’입니다. 먼저 저의 라이브를 보러와 주신 여러분께 이렇게 스크린을 통해 인사 드리게 된 점에 대해 사과 드립니다.” 스크린 속은 그녀는 숨이 가쁜지, 잠시 호흡을 고르며 명치를 움켜 쥐었다. “여러분께서 저희들의 공연을 보러와 주신 그 날이 후 줄 곧 병원 신세를 지고 있지만, 얼른 나아서 동료들과 함께 당당히 무대에 서고 싶습니다. 그때도 꼭 와주실 거죠?” 그녀의 물음에 나는 무대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마이크를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지금 스크린 속의 영상은 녹음이 아닌 교차 생중계이기에 여러분 들의 함성을 그대로 그녀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부디 그녀의 쾌유를 원하시는 분께서는 그녀에게 뜨거운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입니다!!” “꼭 갈게요~!!” “빨리 나아서 무대에서 보길 바랍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처음 싱글곡이 발표 되었을 때부터 팬입니다. 어서 퇴원하길 바라겠습니다!!!” 유저들의 외침이 그녀에게 닿았던 걸까? 그녀는 커다란 눈망울에 어느새 방울 방울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그녀는 객석에 앉아 있는 유저들을 향해 몇 번이고 허리 숙여 인사 한 뒤, 흘러내린 머릿결을 쓸어 올리며 웃어보였다. 하지만 단 한 곡만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볼은 이미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목덜미와 이마에 식은 땀을 흘러 내린 걸로 보아 결코 츠바키의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정말로 괜찮으려나?’ 내심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려온 츠바키의 얼굴을 떠올리니 여기서 내 마음대로 라이브를 중지 할 순 없었다. ‘만일을 대비해 의사 선생님을 대기 시켜두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곧바로 대처할 수 있겠지.’ 그때 스크린 속의 그녀가 관객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이어서 여러분들에게 들려 드릴 곡은...” 설마 츠바키.. 지금 상황에서 셰릴의 노래를 부르려는 건 아니겠지? 물론 그녀의 몸 상태가 온전했다면 분명 특별한 무대가 되겠지만, 현재 그녀의 컨디션으로 파워풀 한 셰릴의 곡을 소화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지명한 콜라보 상대는 모두의 예상을 깬 의외의 상대였다. 아니, 조금만 더 머리를 굴렸다면 어쩌면 당연한 선택일 수도 있겠구나... “제가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진 그 날. 저를 대신해 노래해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 그럼 설마?” “오오!? 이건 또 새로운 느낌인데?” 그 날 현장에 있었던 유저들은 그녀의 의도를 단번에 깨달았는지, 스크린을 향해 소리치며 환호했다. 그 순간. 츠바키의 등 뒤로 또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갈색 단발 머리의 그녀는 무대에 놓여진 의자에 앉아 자신의 통기타를 살포시 무릎 위에 걸쳐 들었다. ‘칸나...?’ 예상치 못한 그녀의 등장에 미처 관객들이 탄성을 내지르기도 전에 츠바키와 눈을 맞추친 그녀는 자신의 첫 타이틀 곡인 ‘응원가’의 기타 반주를 튕겼다. “그대여~ 너무나 힘든 하루 였죠...” 노래 도중 서로를 마주보며 웃어 보이는 두 사람의 미소에 객석에 앉아 있던 유저들 마저 따스한 눈길로 그녀들의 라이브를 즐기기 시작했다. ‘이 것 참. 히로인들의 듀엣 라이브는 나중에 시도하려고 했었는데...’ 하지만 화면 속의 두 사람을 바라보니, 연출을 위해 억지로 설정을 맞춘 것보다 굉장히 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칸나의 깜짝 등장으로 잠시 객석이 술렁였지만, 츠바키의 목소리로 듣는 당신을 위한 응원가는 에리카 버전과는 또 다른 느낌을 가져다 주었기에 유저들은 어느새 두 사람의 라이브를 즐기고 있었다. “내가 그대를... 항상 응원 할게요.” 노래의 끝마디와 함께 서로를 마주보며 노래 한 두 사람에게 객석에 앉아 있던 모두가 일어나 기립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스크린 속에 그녀들에게도 들렸는지, 칸나는 수줍게 웃으며 츠바키에게 다가와 그녀와 함께 관객들에게 인사를 마쳤다. “와아~!! 최고다!!” “휘이이익~!!!” “지금까지 라이브 중에 최고의 명장면이었어...” “츠바키와 에리카의 조합이라니...” 칸나의 등장으로 기대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준 츠바키의 무대는 내가 보아도 여태 진행해온 라이브 중 최고의 무대를 보여 주었다. 단지 츠바키의 목소리로 들려준 에리카의 타이틀곡 때문이 아니라, 그녀를 걱정해 무대까지 찾아온 칸나의 마음씨에 감동 받을 것일 수도 있었다. 객석으로 부터의 박수는 멈출줄 몰랐고, 스크린 속에 손을 맞잡고 있는 츠바키와 칸나의 볼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 버추어 아이돌의 두 번째 라이브 대결을 끝나고, 츠바키와 셰릴의 공연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게이머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칸나와 콜라보를 이룬 츠바키의 무대는 훌륭했지만, 혼자서 무대를 장학하는 강렬한 카리스마의 셰릴 역시 화려한 퍼포먼스와 가창력으로 팬심을 휘어잡는데 성공했다. “이 정도라면 버추어 아이돌은 새로운 장르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고 볼 수 있겠군요.” 회의실에서 버추어 아이돌의 판매 그래프를 살피던 카와구치 대표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달 간의 판매 추이로 예상 컨데, 현재 펜타곤 소프트에서 발매한 소프트들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반드시 들어갈 만큼 기록적인 판매 속도를 보이는 버추어 아이돌은 소프트 뿐만 아니라 컴플리트 라온과 더불어 휴대용 라온까지 충분히 견인하고도 남는 최고의 인기 타이틀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버추어 아이돌이 더욱 무서운 것은 아직도 발매할 예비 캐릭터가 7명이나 남았다는 것이지... 만약에 이대로 인기가 유지 된다면, 언젠가 아이돌 가수의 꿈의 무대라는 도쿄돔 라이브를 펼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럼 이상으로 버추어 아이돌의 판매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제 2 개발 팀장님 하야시는 회의실에 모인 직원들에게 정중히 허리숙여 인사를 마친 뒤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자 내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카와구치 대표가 하야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카오리양과 신혼 여행은 잘 다녀왔나요?” 두 번째 라이브를 마치고 카오리와 함께 일주일 동안 신혼 여행을 다녀온 하야시는 햇빛에 그을려 가무잡잡한 피부가 되어 돌아왔다. 하야시는 쑥스러웠는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고, 회의실은 잠시 동안 하야시의 결혼을 축하하는 덕담이 오고 갔다. 언제나 그렇듯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회의를 종료하고 나오는데, 카와구치 대표가 나를 따로 불러 세웠다. “준혁씨. 잠시 대표실로 와주시겠습니다.” “아, 네. 같이 가시죠.” 잠시 후. 카와구치 대표와 함께 쾌적한 전망의 대표실로 들어온 나는 소파에 몸을 기댄채 딱딱하게 굳은 목을 풀었다. “피곤이 쌓인 모양이군요.” “그러게요. 직급이 높아도 어째 일은 줄지가 않네요.” “높은 직급에 위치한 사람이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는 것은 그 만큼 회사가 공정하게 잘 돌아간다는 뜻이겠죠.” 카와구치 대표 역시 피곤했는지, 자신의 어깨를 주무르며 나의 맞은 편에 앉았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한 장의 서류가 들려 있었는데, 그는 테이블 위로 서류를 나에게 내밀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일전에 준혁씨께서 원하시던 사안이 센소니 측과 협의 하에 통과 되었습니다.” “이런, 이제 좀 한 숨 돌렸다 했더니...” “쉴 틈이 없지요?” “그래도 미국으로 장거리 출장 가는 것 보다는 낫네요.” “저 역시 그 부분에선 동감입니다.” “그런데, 민텐도 쪽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러자 카와구치 대표는 나의 질문에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어떻게든 설득해보려 애썼지만, 민텐도 측과 합의점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가요.” “역시 저보다는 준혁씨가 가는게 더 나았을지도...” “아뇨. 오히려 그 자리에 제가 가는 것은 역효과 였을 겁니다.” “그래도 게임이라는 콘텐츠를 즐기는 쇼에서 민텐도가 빠진 다는 것은 조금 아쉽군요.” “할 수 없지요. 그렇다고 앞으로 해마다 진행 될 행사인데, 첫 단추를 잘 끼워놔야 앞으로도 휘둘릴 일이 없지요.” “그 말엔 저 역시 100% 동감합니다.” “참여 의사를 밝힌 업체는 어느 정도 되나요?” “일단은 저희와 센소니, 그리고 NEGA를 비롯해 대형 서드 파티 제작사도 참여 의사를 밝혔습니다. 중소 기업들까지 합치면 약 83개의 업체가 참여할 예정입니다.” “예상보다 참여율이 나쁘지 않은데요?” “이번 행사만 잘 마무리 한다면 내년부터 참가하는 업체들도 더욱 늘어나겠죠.” 카와구치 대표를 보고 내용을 들으며 서류를 살피던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테이블에 서류를 내려 놓았다. “그럼 슬슬 준비를 시작해 볼까요? 제 1회. 도쿄 게임쇼.” “게임쇼라... 제목만 들어도 굉장히 설레이는 이름이네요.” & 1995년 12월 초에 예정된 도쿄 게임쇼는 민텐도의 불참 소식으로 수많은 게이머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다. 새로운 슈퍼 마리지 시리즈의 그래픽과 민텐도 64의 실물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을 가차 없이 배신한 민텐도는 제 1회 도쿄 게임쇼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민텐도가 없는 게임쇼는 진정한 게임쇼가 아니다.- 물론 민텐도가 패밀리와 슈퍼 패밀리를 앞세워 세계적으로 게임 업계에 부흥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그들을 왕으로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권좌를 너무 오래 비워두었지. 1995년 한해 동안 센소니와 NEGA 그리고 펜타곤이 자사의 최신 기종으로 차세대 전쟁을 벌이고 있을 무렵 민텐도는 아직까지 민텐도 64에 대한 정보를 극히 아끼고 있었다. 알려진 것이라곤 단지 CD가 아닌 롬 카트리지를 사용한다. 현재 출시된 콘솔 중에서 가장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기계가 될 것이다. 민텐도 64로 제작중인 슈퍼 마리지 64는 현재까지 게임에 대한 틀을 완전히 바꿔 놓을 것이다. 잡지에 공개된 민텐도의 선전 문구로 인해 유저들의 기대는 이미 폭발을 넘어서 불발탄이 아닌가 의심을 하는 상황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시기 적절 할 때, 터뜨릴 건 터뜨려 줘야지. 바로 이렇게 말야. 민텐도의 불참 소식이 전해진 패미통신 특집호 기사의 다음 장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드래곤 엠블렘 2 두 번째 에피소드. 제 1회 도쿄 게임쇼에서 정식 버전 최초 공개.- < EP. 44 : 츠바키의 부탁. (6) > 끝 ⓒ 손인성# < EP. 45 : Tokyo Game Show. (1) > & 1995년 11월의 둘째 주.. 세계 최초의 게임 박람회를 3주 앞두고, 게임과 관련된 온라인 커뮤니티는 온통 축제 분위기로 들끓고 있었다. 하기사 그도 그럴 것이 이번 박람회를 계기로 해마다 국제 전자제품 박람회에서 곁다리 식으로 출품하던 게임이라는 장르가 비로소 하나의 ‘문화 컨텐츠’로 인정 받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작년 미국에서 열린 가전 제품 박람회가 끝나고. 일본의 CESA(일본 컴퓨터 엔터테이먼트 협회)는 박람회에서 가장 이목을 끌었던 민텐도와 센소니. 그리고 펜타곤에게 일본의 게임 산업 확장을 위한 새로운 게임 박람회를 제안한 적이 있었다. 사실 그들의 배후에는 일본의 정부 기관 중 하나인 ‘일본 경제 산업성’이 있었는데, 외국인 관광 유치를 위해 ‘게임’이라는 콘텐츠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CESA를 후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연히 참가할 줄로 알았던 민텐도가 불참을 선언하는 바람에 도쿄 게임 쇼는 시작도 하기 전에 반쪽짜리 박람회라는 비아냥을 들어야만 했다. 지금 시기에 게임 업계의 제왕이라 불리우는 민텐도의 파급력은 실로 굉장했으니까. 그렇다고 막대한 자금이 흘러 들어간 게임 박람회를 민텐도의 불참만으로 포기 할 수 없었기에 CESA는 결국 민텐도를 제외하고 도쿄 게임쇼를 실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자 해외 언론에서도 민텐도의 불참 소식이 전해지며 세계 각국의 게이머들 역시 유감을 표했지만, 민텐도는 강경했다. 그러나 민텐도의 불참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백을 메워줄만한 회사는 얼마든지 있었다. 먼저 올해 초 혜성처럼 게임 업계에 등장해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빠른 속도로 시장을 잠식해 나가고 있는 센소니와 더불어 버추어 아이돌과 풀 메탈 기어로 게임 장르에 또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준 컴플리트 라온. 그리고 아케이드 센터에서는 최고의 입지력을 행사하고 있는 NEGA까지... 이 3개의 업체들 만으로도 도쿄 게임쇼에 대한 유저들의 기대감을 충족 시키기엔 충분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도쿄 빅사이트에서 열리는 제 1회 도쿄 게임쇼에는 위에 설명한 업체들 외에도 약 84개의 중소 기업과 서드파티가 참여할 예정이었다. 말그대로 게이머들의 축제의 한마당인 도쿄 게임 쇼는 시간이 지나 먼 미래에도 세계 3대 게임 쇼에 손꼽힐 만한 거대한 이벤트였다. 톡 톡.. 컨퍼런스 준비를 위한 직원들의 행사 기획서를 살펴본 나는 책상 끝에 가볍게 서류 뭉치를 두드려 정리한 뒤 한 부씩 가지런히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동안 펜타곤에서 진행한 수많은 컨퍼런스 덕분일까? 내 앞에 놓여 있는 행사 기획서에는 빛나는 아이디어 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특히나 최근 유저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버추어 아이돌을 이용한 행사 기획이 많았는데, 기획서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해질 정도로 재미있는 아이디어들이 넘쳐났다. 이번 컨퍼런스에서 펜타곤은 드래곤 엠블렘 말고도 각 개발팀의 신작들이 대거 발표될 예정이었는데, 거기다 컴플리트 라온으로 제작 중인 각종 서드 파티의 게임들까지 전부 TGS (Tokyo Game Show)를 위해 발표를 미뤄 두었기에 우리 측에서도 이번 행사에 거는 기대가 상당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민텐도가 없는 지금.. 어쩌면 이번 TGS가 미래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커다란 기회일테니까... & TGS의 공식적인 팜플렛이 나오기 전까지 센소니와 NEGA 그리고 펜타곤의 자리 배정은 굉장히 치열했다. CESA와 더불어 TGS의 공동 주최자인 닛케이는 3사의 자리 배정을 제비뽑기로 제안했으나, 최근 극단적인 마케팅으로 서로에게 불화가 짙은 센소니와 NEGA의 거절로 자리 배정은 미궁에 그쳤다. 따라서 센소니와 NEGA의 부스는 서로가 양극으로 떨어지길 원했는데, 그렇다고 그 가운데에 펜타곤이 들어가는건 말도 안된다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 만이 아니었다. 대형 게임 회사가 제대로 부스 자리를 잡지 못하자, 밑에 있는 서드 파티 마저 자리 배정에 시간이 걸렸고, 전체적으로 행사 진행을 굉장히 더디게 하는 결과를 만들었기에 나는 회의실에서 V자 형태로 3사의 자리 배정을 청원했다. “흐음... 할 수 없군요. 이 정도 선에서 받아 들이도록 하겠습니다.” 기어 스테이션의 아버지 쿠라카기씨는 나의 의견을 수렴하는게 못 마땅해 보였지만, 대안이 없었기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NEGA의 야마나카 사장 역시 팔짱을 낀채 고개를 돌리며 무언의 동의를 표했다. 서로가 서로를 라이벌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신경을 쓰고 있는 두 회사의 기 싸움에 나는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럼, 센소니와 NEGA는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으신거군요.” 각 기업의 부스 위치 배정 담당하는 키시모토씨의 표정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형적인 일본인 특유의 생김새를 하고 있는 그는 톡 튀어나온 앞니가 굉장히 인상적인 남자였다. 나이는 나랑 비슷한 정도? “물론이죠. NEGA에서는 항상 저희 마케팅 전략을 따라하는 경향이 있어서요.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한쪽 입꼬리를 올린채 고압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쿠라카기씨를 향해 야마나카 사장이 단번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제 막 게임 업계에 들어온 햇병아리 주제에 건방지긴...” “야마나카씨.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야마나카씨...라고? 당신 예의가 없어도 정도가 있지!!” 점점 언성이 높아지는 사무실 안에서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바엔 그냥 카와구치씨보고 오라고 할 걸 그랬나? 나는 아직까지 툭탁거리는 두 회사의 대표를 잠시동안 바라보다가 키시모토씨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펜타곤은 V자에서 꼭짓점이 맞닿는 아래쪽으로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서로를 향해 언성을 높이던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며 외쳤다. “뭐라고!?”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자리를 마음대로 정한단 말인가!?” “······.” 어이 내가 83년도로 회귀만 안 했어도 당신들이랑 거의 동년배야 이 사람들아... ... 란 생각이 들었지만, 이들 눈에 보기에 나라는 인간은 그저 젊은 나이에 제법 높은 직위를 차지한 게임 디렉터로 밖에 보이질 않겠지? 있는 힘껏 눈에 힘을 준 채로 나를 노려보는 두 사람을 지그시 바라보던 나는 뒷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저기, 방금 전 두 분께서 되도록이면 서로에게 멀리 떨어진 자리로 하고 싶으시다고 동의 하셨죠?” “그.. 그렇지.” “그럼, 이곳과 이곳 밖에 없는 걸요.” 나는 빅사이트의 박람회장의 내부 도면을 찍으며 센소니와 NEGA의 부스 자리를 짚어 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이후에 다른 업체와 미팅이 있어.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고작 자리 선정 하나로 쓸데 없이 시간을 죽이고 싶지 않거든요?” 그러자, 내 말에 둘은 벙찐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럼, 전 이만.” 예의상 둘러 맨 넥타이끈을 느슨하게 풀어내며 사무실을 나온 나는 차를 세워둔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사무실에서 키시모토씨가 나를 따라 달려 나왔다. “저.. 저기 준혁씨!! 강준혁씨~!!” “어라? 키시모토씨. 뭔가 문제가 있습니까?” “아, 그게 아니라... 그..” “음? 뭔가 다른 할 말이라도?” “그.. 저... 혹시 TGS에 버추어 아이돌의 히로인들도 참가할 예정인가요?” “그야, 물론이죠. 현재 저희 펜타곤 소프트의 대표 컨텐츠니까요.” “아~!!” “그런데, 그건 어째서?” “사실 이건 개인적이지만, 버추어 아이돌에서 에리카의 팬이거든요. 그래서 혹시 TGS에서 행사를 기획하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호오... 이건 또 생각지 못한 수확인데? 행사 담당자가 버추어 아이돌의 팬이라니... 나는 속으로 빙긋 웃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키시모토씨. 에리카의 성우도 굉장히 좋아하겠네요. 차후 행사 기획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작은 콘서트도 준비되어 있으니,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 역시...!!” 키시모토씨는 나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콘서트 기대 하겠습니다.” “아, 그런데 키시모토씨. 버추어 아이돌의 행사에 관련해 한가지 부탁 드릴게 있는데?” “네?” 잠시 동안 복도에서 버추어 아이돌의 행사 기획을 들은 키시모토씨는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그것 참 훌륭하군요. 역시 민텐도가 없어도 펜타곤이라면 반드시 멋진 기획을 내주실 거라 믿었습니다.” “어때요? 상부에 저의 의견을 전달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 하지만 저 역시 준혁씨의 제안에 확답을 드릴 만한 직위가 아닌지라. 거기다 행사장 내부에선 아무래도 다른 업체들의 부스와 관람객들로 북적일 예정이라...”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키시모토에게 나는 살짝 미소지며 대답했다. “저는 행사장에서 이벤트를 연다고는 안했는데요?” 그러자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키시모토씨가 잠시동안 입만 뻥긋 거리더니,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럼!?” “자세한 이벤트 형식은 내일 오전 중에 따로 팩스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주.. 준혁씨!! 저기.. 잠깐만요..” “그럼 키시모토상. 잘 부탁드립니다.” 키시모토씨의 손을 맞잡고 가볍게 위 아래로 흔든 나는 살짝 고개 숙여 인사를 마친 뒤, CESA 본사를 빠져 나갔다. & 잠시 후. 협회를 나와 차에 오른 나는 신주쿠 근처에 위치한 일본 전자 전문 학교의 동아리 실로 향했다. 늦게까지 나를 기다려준 학생들을 위해 커다란 빵 봉투를 손에 들고 동아리 문을 열어 젖히자, PC에서 나온 후끈한 열기에 숨이 턱하고 막혔다. “안녕하세요~!!!” PC 앞에 앉아 있던 약 10명 가량의 학생들은 나의 방문에 입을 모아 인사했다. “더우면 에어컨이라도 틀지 그랬어?” “아, 그러고 보니 엄청 덥다.” 그제서야 눈치 챘는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학생들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탁자 앞에 몰려 들었다. “이건 뭐에요, 선생님?” “슈크림 빵. 몇 명이나 있을지 몰라서 되는대로 사왔는데, 안 모자르려나?” “아, 안 그래도 배고팠었는데~ 잘 먹겠습니다~” 나는 리모콘으로 강의실 내부의 에어컨 전원을 올리며 싱긋 웃어보였다. “그나저나, 다들 과제는 마쳤어?” “컥...!!” “쿨럭..” “으윽...” 나의 한마디에 빵을 삼키던 아이들은 절로 목이 매는지 서둘러 음료수를 삼켰다. 하긴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환기를 위해 강의실 끝에 창문을 열어젖혔다. 늦 가을의 기분 좋은 바람이 코 끝에 스치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냐고? 이곳은 게임 기획 학과가 있는 일본 전자 전문 학교다. 한국으로 치자면 2년제 전문대와 같은 곳이랄까? 그리고... 펜타곤과는 다른 색깔을 가진 나의 비밀 병기들이 모여 있는 곳이지. < EP. 45 : Tokyo Game Show. (1) > 끝 ⓒ 손인성# < EP. 45 : Tokyo Game Show. (2) > & 배움의 길에 꼭 정도(正道)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말인 즉슨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와 반드시 대학교에 들어가야만 좋은 일자리를 구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나 또한 당연히 그 생각에 찬성한다. 하지만 극도의 경제 불황이 지속되자, 고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드는 학생이 줄어 들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에선 조금만 기다리면 반드시 경기가 회복 될 거라고 했지만, 그러기를 반복한 것이 벌써 6년째... 사태는 점점 심각해져만 가고 있었다. 90년대 초반 일부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은행 채권 회수로 줄줄이 도산하며 수많은 실직자가 생겨났지만, 그들을 받아들여 줄 회사는 아무데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실직자들은 대게 일용직과 아르바이트 쪽으로 몰리게 되었고, 수입이 줄어들자 자연스레 소비가 줄어들게 되었다. 한편 인원을 감축 시킨 회사는 최소한의 인력만으로 이전과 같은 성과를 내기 위해 바로 실무에 투입할 수 있는 학력과 스킬을 가진 사람을 원하였는데, 그러다보니 취직의 문턱은 높아지고 젊은이들은 안정적인 취직활동을 위해 대학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대학이라는 기관이 학문을 쌓기 위한 교육 기관보다 취직 활동의 일환으로 작용된 것은 어쩌면 지금 시기 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본의 모든 학생들이 들어갈 만큼 대학의 수가 많은 것도 아니고, 단 기간내에 취직을 위한 스펙을 쌓고자 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전문 학원’ 이라는 것이 나타났다. 일반 대학과는 달리 2년제 졸업 과정으로 실무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타이트하게 전수시키는 ‘전문 학원’은 교과 과정부터 대학의 널널한 스케쥴과 비교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9시간을 풀로 활용하여 오로지 취업을 위한 전문 기관이라는 점을 강하게 어필 하였다. 현재 내가 있는 이곳 ‘일본 전자 전문 학원’ 역시 그러한 전문 교육 기관 중 하나였다. 학교 전체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컴퓨터 공학과’ 와도 같은 이곳은 PC를 이용한 거의 모든 스킬을 학과 별로 배치해 게임이나 실무 프로그래밍, 디자인 산업등 여러 가지 교과 과정을 나뉘어 가르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이곳은 수많은 교과 과정 중 ‘게임 제작’에 대한 기술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곳으로 유명해 졸업생 중에는 펜타곤을 비롯해 각종 게임 회사에 재직 중인 직장인들도 상당한 편이다. 나는 창가에 기대어 허겁지겁 빵을 삼키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찼다. “너희 혹시 점심 굶었니...?” “아뇨. 다 챙겨 먹었는데요.” 입술위에 슈크림을 묻힌 채 안경을 쓸어 올리는 남학생은 나를 향해 베실베실 웃어보였다. 하긴 18살이면 뭐 먹어도 먹어도 돌아서면 배고플 나이긴 하지... 하지만 누가 뺏어 먹는 것도 아닌데, 참 전투적으로 식사 하는구나.. 그때 동아리 학생들 중에 몇 안되는 여학생인 스즈코가 나에게 다가와 빵 하나를 내밀었다. “선생님은 안 드세요?” “난 오는 길에 배가 고파서 먼저 먹었으니까 걱정마.”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래도 여자라고,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이 고맙긴 하네. 양 볼을 부풀리며 슈크림 빵을 한 입 베어문 그녀는 나를 향해 살포시 웃어 보였다. 사실 이곳에 있는 학생들은 전문 학원 내에 존재하는 수많은 게임 제작 학과들 중에서도 상위 그룹에 속하는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본 전자 전문 학원은 ‘게임 제작’이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도 세부 항목으로 학과를 배치 하였는데, 게임 기획, 게임 프로그래밍. 그리고 캐릭터 디자인과 더불어 작년에 신설 되었다는 3D 그래픽 학과까지 총 4개의 학과 학생들이 모인 동아리였다. 지난 5월. 이 학원의 대 강당에서 게임 업계에 대한 세미나까지 열은 이 후. 학생들의 요청과 지도 교수의 간청으로 나는 가장 재능 있는 학생들을 선출해 ‘비밀리에’ 특별 수업을 맡고 있었다. 내가 맡은 클래스의 총 인원은 20명. 그 중엔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버는 학생도 있어, 정규 수업 외에는 오늘처럼 10명 만 작업하는 변동 사항도 있긴 하지만... 각 학과에서 상위 5등 안에 들어가는 학생들 만으로 꾸려진 이 동아리는 학원에서 도쿄 게임 쇼를 대비한 프로젝트 팀이었다. 도쿄 게임쇼에서는 게임 회사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재 육성을 위해 교육 기관의 부스 신청도 따로 받았는데, 플레이 가능한 게임을 제작하면 얼마든지 게임쇼에 출품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실무 기술을 가르치는 교육 기관이라 그런지, 현업에 종사하는 선생들 위주로 학과가 운영 되는 탓에 학생 치고는 다들 어느 정도 기본기가 되어 있는 편이었다. “프로젝트 진행률은 어때?” 나의 질문에 스즈코는 입안에 있던 빵을 꿀떡 삼키며 말했다. “아직 군데군데 버그가 있긴 하지만, 나름 괜찮은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잠깐 내가 봐줄까?” 그러자 뒷편에서 다먹은 빵봉지를 정리하던 학생들이 나를 바라보며 외쳤다. “아뇨~!! 괜찮습니다. 저희가 마지막까지 해결하고 싶어요.” 쳇... 아무튼 다들 고집하고는.. 누가 가르쳤는지 제자들 잘 키웠네~ 사실 내가 이 동아리를 맡게 된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는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최근 업계에서는 모두가 게임의 판매량에만 신경을 쓰는 탓에 메이저급 게임 회사에서도 새로운 IP 대신 기존의 시리즈 물에만 집중하고 있는 추세였기에 신선함이 떨어졌다. 거기다 아직까지 센소니와 NEGA. 그리고 펜타곤 중 어느 곳 하나가 업계를 평정했다고 하기엔 부족했던 시기라, 다들 메이저급 회사들 챙기기에만 급급해서 인디 게임이 눈에 들어 올리도 만무하고... ‘하지만, 두고 봐라. 쇼가 시작 되고 나면 아마 생각이 달라질테니.’ 나는 어느새 자리로 돌아가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학생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다들 작업 하기 전에 한가지 말해줄 것이 있는데.” 나의 목소리에 학생들의 고개가 일제히 나에게로 향했다. “너희들 이번 프로젝트가 졸업 작품전을 대신 하는 건 알고 있지?” “네. 그럼요.” “그래서 말인데, 아마 내 예상으로는 이번 게임이 도쿄 게임쇼에 출품하고 나면 이곳 저곳에서 너희들에게 입사 제의가 들어올거야.” “오오... 설마 그중에 펜타곤도 있나요?” 한 학생의 질문에 나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너희에겐 미안하지만, 펜타곤에서는 너희들 중 단 한 명도 데려 가지 않을거다.” “네에!?” 나의 확언에 강의실에 있던 학생들은 모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처음 이들을 만나 자기 소개를 했을 당시 거의 모두가 펜타곤을 들어가고 싶은 회사 1지망으로 선택했기에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반응일 수 있었다. 거의 울상이 되어 가는 학생들의 표정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뒤에 말을 이어 붙였다. “나는 너희를 데리고, 조그만 게임 소프트 회사를 만들어 보려고 한다.” “네에...!?” “물론 회사 규모로 따지면 펜타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급여와 복지 수준은 동일하게 적용 될 거야.” “선생님. 하나 질문 드려도 될까요?” “물론.” “선생님은 펜타곤의 이사직에 있지 않으신가요? 따라서 저희가 만드는 게임은 대부분 펜타곤에 속하게 될텐데, 어째서 그런 피곤한 일을 하시는 건가요?” 학생의 질문에 나는 잠시 입주변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재밌으니까.” “네?” “네 말대로 어느 한 플랫폼에 안주하게 된다면 굉장히 안정적인 환경에서 일정 수준의 게임을 뽑아 낼 수 있다. 하지만 아이언 피스트의 난코라던가 스트리트 파이어의 캡코 같은 경우엔 한가지 플랫폼에 만족하지 않고 굉장히 다양한 기종으로 자신들의 게임을 출시 하지. 그러는 중에 센소니라던가 NEGA의 러브콜을 받기도 하고, 그건 우리 펜타곤의 경우도 마찬가지야. 나는 너희가 좀 더 다양한 환경에서 주목 받으며 성장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너희 스스로의 값어치를 올려주는 훌륭한 게임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번 게임 쇼가 너희들 인생에 굉장한 전환기를 가져다 줄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들 그만한 자격이 있고, 노력해 왔으니까.” “아아...” “그럼 이상으로 막바지 작업을 시작해 볼까?” “네!!” 내 조언이 어느 정도 통했는지, 학생들이 작업에 임하는 분위기가 확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사실 이에 대해선 나 역시도 오래 전부터 고민해 왔던 부분이었으니까. 내가 만드는 게임은 당연히 펜타곤의 기기로 유통이 되어 판매 된다. 그리고 카와구치씨가 만들어낸 파이널 프론티어 시리즈 역시 차기작은 컴플리트 라온으로 발매 될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펜타곤은 기존의 역사와 달리 콘솔을 만들어 내는 퍼스트 파티 업체가 되었으니까... 최근 카와구치씨와 수많은 파이널 프론티어 시리즈를 만들어 내었던 서브 디렉터 노무라씨가 새로운 파이널 프론티어 시리즈의 진두지휘를 맡으며 시리즈 7번째 작품은 게임 업계에 전례없는 ‘대격변’을 예고하고 있었다. 3D 폴리곤을 활용한 최초의 RPG게임 ‘파이널 프론티어7’은 본래 내가 알고 있는 역사에서 기어 스테이션과 NEGA 새턴의 승부에 종지부를 찍어버린 작품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컴플리트 라온이 발매된 지금. 파이널 프론티어7은 제작이 완료되면 당연히 자사의 콘솔로 출시될 것이 불보듯 뻔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토록 짜릿했던 콘솔간의 전쟁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지금 살아가는 이 시대의 게이머들에게 큰 죄를 짓는 듣한 기분이든 나는 한가지 재밌는 생각을 떠올렸다. ‘하나의 불씨가 사그라 들었다면, 또 다른 불씨를 태울 수밖에...’ & 1995년. 12월 첫째주 주말. “우와아아아!!!!!!” 일본 오다이바에 위치한 빅사이트 건물 앞에 수많은 인파가 모여 들었다. 4개의 역 피라미드형 구조물로 이루어진 이곳은 총 10개의 전시홀과 무료 전망대가 있어 국제 종합 전시장으로 자주 쓰이는 곳이었다. 곧 행사 개장을 앞두고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나는 잠시 펜타곤 부스를 벗어나 ‘일본 전자 전문 학원’ 부스로 향했다. “아, 선생님~!!” 펜타곤이나, 다른 회사들 비하면 전문 학교에 배정된 부스의 규모는 너무나 협소 했지만, 아이들은 그것조차 상관 없는 모양이었다. 공교롭게도 NEGA의 부스와 인접한 위치였기에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NEGA 쪽에서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왔지만, 그런건 아무 상관 없었다. “준비는 어때?” 나의 물음에 PC 앞에 앉아 있던 스즈코가 엄지 손가락을 세우며 빙긋 웃어 보였다. “걱정 마세요.” “그래 그럼 이따가 컨퍼런스 발표할 때 잠깐 들리마.” 그때였다. “핫! 하아앗!! 핫!! 우랴라~!!” ... 아니 여기가 무슨 격투기장도 아니고 난대 없이 기합 소리라니...? 걸걸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NEGA 새턴 부스위에 가라데 복을 입고 있는 한 남자가 무대 위에서 지르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헐... 저 사람은...” “와아~!! 대박이다!!” “네가타 산시로다!!” 일명 NEGA saturn 시로(해라!!) 라는 말장난으로 탄생한 CF의 모델인 그는 순전히 이름 덕분에 NEGA 새턴의 홍보 대사가 되었다. 하지만 단지 이름만으로 유명한게 아니라... 저 사람이 바로 일본의 초대 특촬물인 가면라이더 1호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이지. ‘아무리 경영에 서툰 NEGA 라도 이번 도쿄 게임쇼가 그들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이벤트라는 걸 인지한 거겠지.’ 앞으로의 콘솔 싸움은 게임도 게임이지만, 마케팅이 상당히 중요할 테니까... < EP. 45 : Tokyo Game Show. (2) > 끝 ⓒ 손인성# < EP. 45 : Tokyo Game Show. (3) > 몇 번인가 주먹을 내지르며 기합을 외치던 네가타씨는 잠시 후, 자신의 덩치보다 훨씬 커다란 NEGA 새턴 콘솔 모형을 짊어진 채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조그만 부스안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사뭇 진지한 그의 표정에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녀 오겠습니다.” “부탁 드립니다. 네가타씨!! 당신의 손에 저희 새턴의 미래가 달려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유카와씨. 맡겨 주십시오.” 네가타씨가 살짝 고개를 숙이자,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NEGA 부스 행사 담당자는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어라? 저 사람은?” 행사 담당자를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온 한마디에 옆에 있던 스즈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도 아시는 분이세요?” “글쎄.. 개인적으로 아는 건 아니지만, 상당히 유명한 사람이지.” “정말요?” 유카와 전무... 아니 지금은 직급이 상무쯤 되려나? NEGA 부스에서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는 저 두 사람은 각각 NEGA를 대표하는 CF 스타들이었다. 등에 짊어진 새턴 모형을 보면 알겠지만, 네가타 산시로는 자신의 이름을 이용한 말장난으로... 그리고 유카와 상무는 차후 새턴의 차세대 콘솔이자, 마지막 콘솔인 ‘일루젼 캐스트’를 위해 간부직임에도 불구하고 홍보에 전면적으로 나선 사람이었다. 일루젼 캐스트의 발매 때부터 NEGA가 콘솔 사업을 포기할 때까지, 그는 NEGA를 위해 진실 되게 일한 몇 안되는 사람중에 하나였다. 네가타 산시로가 둘러맨 NEGA 새턴에 유카와씨가 전원 버튼을 눌러주자, 이제껏 모형인 줄로만 알았던 소품에서 비장한 음악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히이익... 저거 쥬크 박스였냐?’ 마치 ‘진군가’ 떠올리게 하는 비장한 사운드와 함께 다소 황당 무게한 CF가 NEGA 부스에 설치된 각종 스크린에 떠올랐다. 오락의 길에 혼을 담은 한 명의 사나이가 오늘도 간다. 진지하게 플레이 하지 않는 녀석들에게 몸으로 깨달게 해주마!! 네가타 산시로~!! 네가타 산시로~!! 네가사탄 시로~!! (NEGA 새턴 해라~!!) “히이익!! 뭐야 저게?” “방금 날아오는 야구공을 가라데 킥으로 찬거야?” “거기다 홈런이었어...” 약을 한 사발 들이키고 만든 CF 내용에 전문 학원의 제자들의 동공이 흔들렸다. 일본 열도의 게이머들에게 바치는 진혼곡인 ‘NEGA 새턴 해라’는 2절까지 마친 후. 이어지는 간주 부분에 네가타 산시로씨의 나레이션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젊은이여! 진지하게 몰두하고 있는 것이 있느냐. 목숨을 걸로 열중하고 있는 것이 있느냐!! NEGA 새턴을 해라. 손가락이 부러질 때까지!!! “히이익... 저 말은 굶어 죽어도 손가락이 부러질 때까지 게임이나 하라는 건가?” ... 어릴 땐 중2병 버프 덕분에 굉장히 멋지다고 느껴졌었는데, 제법 세월이 흘러 이렇게 직접 눈앞에서 보니, 엄청나게 촌스러운 멘트구나.. 오글거림에 손가락이 굽어져 퇴화할 것만 같다. 하지만 나와 함께 부스에 있던 남학생들은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네가타씨를 향해 파이팅을 외쳤다. “네가타 산시로씨!! 힘내세요!!” “당신은 영원한 나의 가면 라이더 입니다!!!” 그러자 입구 쪽으로 달려가던 그가 빙글 몸을 돌려 학생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오오~!! 그래. 나를 응원해 주는 너희도 꼭 NEGA 새턴 해라~!!!” 그리고 잠시 후. 거의 침대 매트리스만 한 두께의 NEGA 새턴 쥬크 박스를 짊어진 그가 회장 밖으로 나서자,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 입에서 엄청난 함성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왓!! 가면 라이더 1호기!!” “억!! 저게 뭐야!?” “너희들~!! NEGA 새턴~ 해라!!” 그는 쥬크 박스에 함께 연결 되어 있는 거대한 새턴 패드를 바닥에 내려 놓더니, 하단 지르기로 콘트롤러의 버튼을 호쾌하게 때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행사장 입장만 지루하게 기다리던 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NEGA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오오~!! 열혈이다!! 근성이 느껴져!!” 헉... 이제 그만, 솔직히 까놓고 말해. 그가 퍼포먼스를 진행할수록 손과 발이 퇴화하는 느낌이다. NEGA의 행사 부스에 설치된 외부 중계 카메라를 바라보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렸을 때는 저 모습이 왜 그리 멋져 보였던 걸까...? 추억에 대한 보정 효과가 좀 심하게 들어갔었나?’ 스즈코에게 컨퍼런스 스케쥴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마친 나는 잠시 예전에 재밌게 보았던 일본의 CF 몇 개를 떠올려 보았다. “그러고 보니 환타 음료수 CF도 엄청 재밌었는데..” 한국이랑은 개그 코드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어린 시절에 본 CF 중에선 환타 선전이 가장 인상에 남아 있었다. 갑자기 떠오른 옛 기억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펜타곤 부스로 돌아갔다. & 그후로 한시간 정도가 흐른 뒤. 행사장 전체에 박람회 시작을 알리는 알람이 울리자, 6개의 입구에서 관람객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펜타곤 부스는 어디냐!!” “무슨 소리야, 컨퍼런스가 가장 먼저 열리는 곳으로 가서 자리 잡아야지!! 센소니... 센소니 부스로 빨리!!” “우와아... 규모가 엄청나구나.. 역시 게임 전문 박람회다보니 CES랑은 차원이 다르구나~” 행사장에 들어온 관람객들은 저마다 도쿄 게임쇼의 규모에 감탄하며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엑스포가 일반인들에게 인류의 미래 과학을 보여주는 박람회라면, 게임쇼는 차후에 출시될 모든 게임 정보를 가장 먼저 보여주는 게이머들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행사가 시작하기 전 한적하기만 했던 박람회장은 사방에서 몰려드는 관람객으로 인해 순식간에 발디딜 틈 조차 없을 정도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도 중학생 때에는 이곳 도쿄 게임쇼에 한 번이라도 와 보는게 소원이었던 적이 있었지...’ 하지만 그렇게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었던 도쿄 게임쇼에 참가한 것도 모자라 오후에는 컨퍼런스까지 준비하고 있으니,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박람회가 열리자마자 펜타곤 소프트를 찾아온 게이머들은 컨퍼런스가 열리는 오후 1시까지 새하얀 장막으로 가려진 펜타곤 에리어를 바라보며 실망감과 기대감을 동시에 비쳐보였다. “아, 드래곤 엠블렘 구경하러 왔는데. 아직 발표 시간 전이네...” 그때 펜타곤 부스 근처에 설치된 라온 단말기가 세워진 쪽에서 카오리와 미야자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버추어 아이돌. 도쿄 게임쇼 한정 코스튬을 원하시는 분들은 이쪽 단말기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 맞다. 버추어 아이돌. 특전 의상이 있었지!?” “컨퍼런스 시작하기 전에 미리 받아놓자. 이따가 줄이 길어 지면 엄청 오래 걸릴거야.” 아무런 행사도 시작하지 않은 펜타곤 행사장에 유저들의 행렬이 끝이지 않는 이유.. 그것은 다름 아닌 버추어 아이돌 히로인들의 기간 한정 특전 의상 덕분이었다. 또한 미리 방문해준 관람객을 위해 버추어 아이돌의 굿즈 아이템 중 하나인 뱃찌를 선물해 주었는데, 4명의 히로인을 모두 얻기 위해 몇 번이나 줄을 서는 유저들도 간혹 보였다. 나는 정식 컨퍼런스 전까지 행사 진행을 돕고 있는 직원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새하얀 모자를 눌러쓰고 센소니의 부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센소니의 부스로 향하는 동안에는 몇 개의 서드 파티 회사들이 있었는데, 잠시 둘러보려고 해도 관람객 수가 워낙에 많아 나는 센소니 부스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이끌려 반쯤 떠밀리듯 행사장으로 다가갔다. “우와~!! 아이언 피스트2 다!!” 막강한 3D 그래픽으로 게이머들에게 호평을 받고있는 기어 스테이션의 대표 게임은 당연히 ‘아이언 피스트’ 였다. 초기 발매 당시 리얼 파이터의 아류작이라는 평가를 받아왔지만, 두 번째 시리즈를 거듭하며 아이언 피스트는 자신만의 독특한 시스템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호쾌한 공중 콤보를 비롯해 초보자도 순서대로 버튼만 입력하면 사용할 수 있는 10단 콤보. 리얼파이터와 비교해 약 2배 가량 되어 보이는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까지... 비록 전체적인 그래픽은 리얼파이터보다 떨어지는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이번에 기어 스테이션으로 이식 된 ‘아이언 피스트 2’에는 가희 초월 이식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다양한 모드가 탑재 되어 있었다. 또한 아케이드 버전에서는 다소 빈약하게 느껴졌던 스토리 모드를 보완해 무려 전 캐릭터의 프롤로그와 엔딩 동영상을 집어 넣어 유저들의 환호성을 불러 일으켰다. “최고다!!” “풍신권 겁나 멋지지 않냐? 나는 리얼 파이터보다 아이언 피스트가 더 쉽고 재밌더라.” “그렇지? 나도 공중 콤보 제대로 한세트 넣을때의 쾌감이 장난 아니니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유저들의 호평에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역시나 RPG라던가 미소녀 게임도 좋지만, 친구가 놀러왔을 때 접대하기에는 격투 게임 만한게 없긴 하지... 그 때 나의 등뒤로 약간 짜증이 묻어난 유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왜 앞으로 안가요?” “네?” “빨리 빨리 좀 갑시다.” 응? 뭐지? 사람들의 불만에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새 사람들에게 밀려 나는 시연용 기기 앞에 서있었다. 옆자리에서 회색 패드를 들고 있는 학생과 눈이 마주친 나는 하는 수 없이 내 앞에 놓인 패드를 손에 들었다. ‘잠깐만 놀아줄까?’ 양손으로 패드를 감싸쥔 채 화면을 응시하자, 수많은 격투가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 옆의 학생은 캐릭터 화면이 등장하자마자 주인공인 카즈야를 선택했고, 나는 잠시 옛 기억 속의 주력 캐릭터를 떠올리다가 한국인 캐릭터인 ‘백두산’을 선택했다. “라운드 1 파이트!!” 퍼억!!! 시작부터 풍신권으로 호쾌하게 파고들어오는 카즈카의 일격을 막아내며 거리를 둔 나는 횡 이동으로 상대방과 거리를 재며 간격을 벌렸다. 태권도 기술을 사용하는 백두산은 비록 아이언 피스트 시리즈에서 강한 축에 속하진 않지만, 상대방을 교란하는 이지선다와 플라맹고라는 화려한 태권도 스탭이 일품인 캐릭터였다. ‘헌데 오랜만에 해서 일까? 왜 이렇게 플레이가 힘이 들지?’ 마치 엄지 손가락이 딱딱하게 굳은 느낌이다. 그래도 예전에 오락실에서 한가닥 했던 실력인데, 이렇게 무너지는 건가? 집요하게도록 파고 들어오는 카즈먀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1라운드를 넘겨준 나는 이어지는 2라운드에서 내 플레이의 문제점을 발견했다. ‘아, 맞다. 플레이는 이렇게 플레이하는 게임이 아니었지.’ 그 순간 패드를 감싸쥐고 있던 나의 오른손이 마치 초밥을 만드는 장인처럼 두 손가락을 버튼 위에 살포시 포개었다. “어라? 저사람 패드 쥐는 법이 좀 독특한데?” 뒤에서 들려오는 유저들의 목소리에 아랑곳 하지 많고 나는 두 손가락을 이용해 능숙하게 플레이를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잊어버렸던 기술이 떠오르고 횡이동 중에 플라맹고를 더하는 축이동까지 떠올린 나는 이후 두판 연속을 내리 이겨 승리를 따냈다. ‘화랑이었다면 더 손쉽게 밟아 주었을텐데..’ 나는 분해하는 상대편의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던지곤 시연장을 빠져 나왔다. 그 순간 때마침 기어 스테이션용 신작을 발표하는 외침과 함께 부스 안에 마련된 거대한 스크린 속에 컴퓨터 그래픽으로 표현된 아름다운 여성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어 지는 강렬한 브레이킹 사운드. 끼이이이이익!! 거대한 헤어핀 코너를 아웃 코스로부터 미끄러지듯 치고 들어가는 스포츠 차의 모습에 센소니 부스 앞에 모여 있던 유저들은 멍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 시기의 게임에선 부족한 폴리곤 표현을 보완하기 위해 CG 동영상을 제법 많이 사용했었는데, 지금 화면속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미모의 여성 역시 폴리곤이 아닌 CG 영상이었다. 마치 모터쇼에나 나올 법한 레이싱걸 복장으로 유저들의 시선을 사로 잡은 그녀의 이름은 ‘나가세 레이코’ 기어 스테이션으로 출시된 수많은 게임들 중에 역대급 오프닝이라 칭송 받는 ‘레이지 레이서 4’ 호쾌한 드리프트의 향연에 센소니 부스에 모여 있는 유저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캬.. 저 오프닝을 이렇게 다시 보다니. 추억이로구나..’ < EP. 45 : Tokyo Game Show. (3) > 끝 ⓒ 손인성# < EP. 45 : Tokyo Game Show. (4) > ‘캬.. 저 오프닝을 이렇게 다시 보다니. 추억이로구나..’ 사이버틱 펑크 뮤직과 함께 시작된 레이지 레이서 4의 오프닝은 나가세 레이코가 잠에서 깨어나는 것부터 시작했다. 창가로부터 들어오는 광원효과는 전반적으로 90년대의 CG 기술의 발전 가능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잠시 후. 정장을 차려 입은 그녀가 도심 속 터널로 향하는 순간, 5~6대의 스포츠 카가 거리를 누비며 호쾌한 드리프팅을 선보였는데, 가드레일에 닿을 듯 말 듯 미끄러져 들어가는 리어가 영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마조마 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 쩐다.” 최근 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사이버 포뮬러 덕분인지 몰라도, 오프닝에서 보여주는 드리프트는 막혀 있던 속을 뻥 뚫어 주는 듯한 쾌감이 있었다. 그 순간 씬이 바뀌며 터널 안을 걷고 있던 그녀는 부러진 하이힐 굽을 들어올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고, 결국 맨발로 터널을 빠져나온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스포츠 카를 히치 하이킹으로 멈춰 세우며 오프닝 영상이 끝을 맺었다. 마지막으로 운전석을 향해 싱긋 웃어보이는 그녀의 표정에 사람들은 환호의 박수를 보내주었다. 사실 조목 조목 따져들고 본다면 왜 출근길에 여성이 혼자 터널 안을 걷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 영상이 역대급 오프닝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바로 그녀의 표정 연기에 있었다. 부러진 하이힐 굽을 바라보며 한숨 지을 때의 표정. 터널을 빠져나온 뒤 그녀의 긴 한숨으로 앞머리가 팔랑 거리는 모습. 마지막으로 주인공을 향해 아랫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웃어보이는 그녀의 표정 연기는 지금까지의 게임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훌륭한 장면이었다. “나가세 레이코라...” “와아.. CG 기술이 엄청 발전했구나...” “젠장. 저건 언제 출시 하지? 빨리 해보고 싶다.” 하지만 오늘 공개 된 것은 단지 오프닝 영상 하나 뿐.. NANCO는 내년 출시를 기약하며 아이언 피스트 2를 비롯한 센소니와 함께한 신작 컨퍼런스를 종료했다. “그냥... 내년인가? 제길. 집에 돌아가는 길에 아쉬운대로 3라도 사갈까...?” 멋진 오프닝 영상으로 유저들의 기대감을 한껏 불타오르게 만든 센소니의 신작 컨퍼런스는 이후에도 다양한 게임을 선보였다. 그 중에서도 의인화 된 늑대 한 마리가 거대한 바위를 피해 달리는 ‘크래쉬 밴터’라는 3D 게임은 예상외의 긴박감을 전해주며 좋은 반응을 이끌어 내었다. 게임 회사에 대한 센소니의 파격적인 지원 정책 덕분에 단기간에 수많은 서드 파티를 거느린 그들의 신작 소개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잠시 동안 유저들과 함께 그들의 컨퍼런스 지켜보던 중 나를 찾는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고 펜타곤 부스로 걸음을 옮겼다. ‘이런 정신 놓고 보고 있었더니, 슬슬 우리 컨퍼런스도 준비해야겠구나.’ 파도처럼 일렁이는 관람객들 사이를 지나 펜타곤 부스로 돌아오니, 컨퍼런스를 30분 앞두고 수많은 유저들이 모여 있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 할 정도로 빽빽하게 둘러싸인 펜타곤 부스를 앞에 둔 나는 좁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가며 양해를 구했다. “저기, 잠시만 지나갈게요.” “아저씨. 얼렁뚱땅 새치기하지 말아요.” “으잉? 아니, 그게...” “여긴 우리 자리니까. 저기로 돌아서 가란 말예요.”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려 학생이 말한 뒤 쪽으로 향하자, 이번에는 버추어 아이돌의 특전 의상을 받기 위해 단말기에 대기중인 관람객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어이, 거기 앞에!!” “아니, 전 그냥 지나만 갈건데요.” “아까도 그 소리하다가 은근슬쩍 새치기 한 사람 때문에 싸움날 뻔했거든? 좋은 말로 할 때 얌전히 뒤로 가쇼.” 헐... 젠장. 부스로 돌아가는 길이 관람객들로 인해 막혀버리다니.. 결국 나는 펜타곤 부스를 크게 한바퀴 돌고 나서야 겨우 행사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부스 안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카오리가 앙칼지게 소리치며 나에게 다가왔다. “이사님. 대체 어딜 다녀 오신 거예요?” “아, 그게...” “행사 시작 5분도 안 남았거든요?” “그래? 다행이다. 시간 딱 맞췄네.” “······. 이사님은 정말 위기감이란 것이 없으시네요?” “위기감이라. 컨퍼런스 준비 하루 이틀 해보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래?” “그래도 오늘은...” 나는 코트를 벗어 던지고 컨퍼런스를 위한 슈트로 갈아입던 나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카오리에게 물었다. “드래곤 엠블렘은 어떻게 됐어?” “한 시간 전에 출발했데요.” “좋아, 그럼~” 스탭이 건네주는 마이크를 받아든 나는 무대를 둘러싼 휘장막을 담당하는 직원에게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시작하지.” 촤아아아아악!!! 빠르게 걷어 올라가는 장막과 동시에 무대 양쪽 끝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드래곤 엠블렘2의 테마곡이 흘러 나오자, 펜타곤 컨퍼런스를 기다려온 사람들의 함성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시작이다!!” “드래곤 엠블렘!! 두 번째 에피소드에 대한 정보가 드디어!!” 단지 행사의 시작을 알렸을 뿐인데도, 부스 안쪽 온도가 2~3도는 올라간 것처럼 후덥지근해졌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어서 드래곤 엠블렘 2에 대한 정보를 뱉어내길 원하는 게이머들의 눈빛이 성난 맹수처럼 느껴져 나는 꿀꺽 마른침을 집어 삼켰다. “인사부터 할까요? 아니면 드래곤 엠블렘에 대한 정보부터 밝힐까요?” 권투선수가 가볍게 쨉을 던지듯 나는 긴장도 풀겸 부스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향해 가볍게 멘트를 날렸다. “작년 CES부터 1년을 기다렸습니다. 컴플리트 라온도 출시되었으니, 이젠 제발 발매일 만이라도...” 드래곤 엠블렘 시리즈의 광팬으로 보이는 한 유저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뻔했다. 수많은 떡밥만 남긴채 첫 번째 에피소드를 마치고, 벌써 3년이란 시간이 흘렀으니, 그럴만도 하지... 나는 그런 유저의 외침에 빙긋 웃으며 마이크를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오랫동안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그럼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곧바로 드래곤 엠블렘2 두 번째 에피소드. 전란의 시대에 대한 프리젠 테이션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오오!!” 마이크를 내리며 부스앞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살짝 허리를 숙이자, 조명 장치가 어두워지며 무대위에 설치된 스크린 속에 한 여성이 등장했다. 어두운 신전 안에서 사제복을 걸쳐 입은 채 두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고 있는 여성은 드래곤 엠블렘의 팬이라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히로인. 대사제 카트리나 였다. “아~!! 맞아. 작년 CES 홍보 영상 마지막에 성왕 크로엘이 부활했었지.” “크흐.. 나는 전편 주인공들의 부활 때문에 더 기대 되더라. 첫 번째 에피소드에선 아무도 등장하지 않았었으니까...” 그의 말대로 CES에서 드래곤 엠블렘의 영상을 공개했을 때, 마지막 부분에서 카트리나와 크로엘의 등장은 당시 관람객들에게 엄청난 호응을 일으켰다. 그만큼 드래곤 엠블렘 1을 재밌게 즐겼던 유저들에겐 그들의 부재가 굉장히 아쉬웠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할까? 덕분에 CES에서 홍보 영상을 공개한 뒤, 두 번째 에피소드의 정보 공개를 더 풀어달라 원하는 게이머들의 요청에 잡지사들도 엄청 피곤했었다고 준페이에게 얼핏 들은 적이 있다. 어둠 속에서 신께 기도를 올리던 카트리나의 손 안에서 이내 밝은 빛이 퍼져 나가고, 그녀의 기도에 응한 신의 권능으로 빛은 이윽고 한 사람의 형태를 띄기 시작했다. 1년 전과 비교해 엄청나게 퀄리티가 올라간 홍보 영상에 관람객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탄성을 질렀다. “잠깐만, 저기 나오는 영상이 2D야 3D야...?” 분명히 눈으로 보기엔 손으로 그려진 2D인 것만 같은데, 캐릭터의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이질감에 스크린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고개가 갸웃 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여러분께서 보시는 영상은 카툰 렌더링 방식으로 제작된 셀 애니메이션입니다. 이번에 발매되는 드래곤 엠블렘의 이벤트 컷신과 엔딩 영상은 모두 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될 예정입니다.” “커헉...” “대박. 끝내준다.” 화면속에 등장한 성왕 크로엘은 드래곤 엠블렘 1편에 등장했던 젊은 시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심플한 멋이 살아있는 푸른 갑주를 걸쳐 입은 크로엘이 카트리나와 함께 신전을 나서자, 그들의 눈앞에 오래 전 함께 싸웠던 동료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아!! 폭염의 미레아!!” “저격술의 카리스!!” 영웅들이 하나씩 나타날 때마다 유저들 마저 감격에 겨워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성왕 크로엘은 오랜만에 만난 자신의 동료들을 바라보며 빙긋 웃음 지었다. “그럼. 반격을 시작하지.” 그 말을 끝으로 신전 앞에 모여 있던 모두가 푸른 빛에 휩싸이며 전장으로 날아 올랐다. 아스라히 사라지는 영웅들의 빛이 사그러 들 때 즈음. 화면 정중앙에서 드래곤 엠블렘2의 타이틀이 떠오르자, 관람객들은 비명과도 같은 함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플레이 화면에서 드래곤 엠블렘2는 거대한 판타지 세계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장대한 맵(MAP)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는 무대 중앙으로 발을 옮기며 준비된 멘트를 읊조렸다. “이번 드래곤 엠블렘2에서 여러분은 두 개의 세력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스크린 속의 전장이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물들여지며 현재의 전시 상황을 보여기 시작했다. “이것이 현재 드래곤 엠블렘 대륙의 전시 상황입니다. 여러분은 게임의 시작과 동시에 이 전쟁터 속에서 용병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물론 전작을 즐긴 유저분들께서는 라온의 데이터를 승계해 캐릭터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캐릭터 승계에 대한 건은 이번 에피소드 1에서 예고했던 부분이기에 그렇게까지 놀라는 이는 없었다. 그 만큼 다들 힘들게 키운 캐릭터였기에 에피소드 1의 주인공을 내팽겨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여기서 드래곤 엠블렘 두 번째 에피소드의 실제 구동을 해보기 전에... 여러분들게 먼저 드래곤 엠블렘의 발매일에 대해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오!! 드디어..” “벌써 12월이니, 올해 안에는 무리더라도 내년 초까진 나오겠지?”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나는 손목시계를 흘깃 살피며 입을 열었다. “현재 시간 오후 1시 15분.” 발매일을 알려준다더니 대뜸 시간을 체크하는 나를 바라보며 관람객들은 기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그런 게이머들의 반응을 즐기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흐음.. 그러니까... 약 15분 전에 도쿄 아키하바라의 펜타곤 샵에 인계가 되었겠네요.” “······.” “뭐...라고요...?” “다시 말해 오늘이 드래곤 엠블렘 두 번째 에피소드의 발매일이라는 겁니다.” “커헉!!” < EP. 45 : Tokyo Game Show. (4) > 끝 ⓒ 손인성# < EP. 45 : Tokyo Game Show. (5) > “다시 말해 오늘이 드래곤 엠블렘 두 번째 에피소드의 발매일이라는 겁니다.” “허억, 오늘!?” “오늘이라고!?” 잘해야 발매일이라도 건질줄 알았던 게이머들은 드래곤 엠블렘이 이미 출시 되었다는 사실에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현재 관람회가 열리는 빅사이트는 도쿄의 외각에 위치한 오다이바. 펜타곤 샵이 위치한 아키하바라까지 전철로 약 한 시간 정도 거리였기에 그렇게 먼거리는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부스 앞에 모여 있는 게이머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엉덩이를 들썩이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지금 당장 아키하바라로 달려가면 드래곤 엠블렘을 살 수 있을까?’ ‘그렇다고 방금 시작한 프리젠테이션을 무시하고 뛰어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마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교차하고 있을게 분명했다. “지금 이 자리에 가만히 서있는거 나만 불편한거 아니지?” “아, 진짜 돌아버리겠네...” 지금이라도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렇다고 게임쇼를 놓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표정만 봐도 엄청 망설이는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그런 그들을 안심 시키기 위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드래곤 엠블렘의 수량은 넉넉히 준비해 두었습니다. 또한 오후 7시를 기점으로 2차 수량을 입고 할 예정이니 도쿄 게임쇼의 모든 행사를 보고 가셔도 드래곤 엠블렘을 구입하시는데, 무리가 없을 겁니다.” “아... 다행이다.” “그러게, 난 진짜 펜타곤 발표회만 보고 당장 아키바로 달려갈 생각이었어.” 나는 웅성이는 유저들의 시선을 집중 시키기 위해 잠시 목을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그럼 저희 프리젠테이션을 마저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번 드래곤 엠블렘의 세계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자면...” 나의 진행에 따라 스크린 속에 거대한 지도가 떠올랐다. “드래곤 엠블렘 두 번째 에피소드는 ‘전란의 시대’ 라는 부제에 걸맞게 인간과 마족이라는 두 개의 세력이 서로 대치 중인 상태입니다. 푸른색으로 빛나는 지역은 인간들의 거점. 그리고 붉은 색으로 빛나는 지역은 마족들의 거점입니다.” “오오.. 이건 마치 거대한 땅따먹기 같은데?” 한 유저의 적절한 비유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맞습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하드코어 모드를 클리어한 유저분들은 두 가지 세력 중 한가지 세력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라온에 전작의 플레이 데이터가 있으신 분은 두 번째 에피소드를 시작하며 조금 특별한 직책을 가진 캐릭터를 생성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휘관이라는 직책입니다.” “으잉...? 지휘관 그게 뭐지?” 그러자 마치 유저의 물음에 답하듯 거대한 스크린에 2.5D로 표현된 지휘관의 모습이 떠올랐다. 순백의 갑주로 무장한채 망토를 휘날리는 기사의 모습은 척 보기에도 인간족의 지휘관이었고, 거대한 날개를 펼친 채 팔짱을 끼고 있는 악마의 모습은 마족의 지휘관을 뜻하고 있었다. “지휘관은 말 그대로 각 세력의 대장을 뜻합니다. 그들은 지휘 레벨에 따라 최대 5명까지 부하를 거느릴 수 있지요. 이들은 특이하게 적대 세력의 지역으로 수행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여러분들은 각종 무구를 비롯한 진귀한 아이템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미리 힌트를 드리자면 드래곤 엠블렘 두 번째 에피소드는 똑같은 무기라 하더라도 그에 배정된 옵션이 전혀 다릅니다. 어떤 무구에서는 치명타 율을 3% 올려주지만, 똑같은 무구에서 치명타 율을 8%까지 올려주는 아이템도 존재합니다.” 그 순간 스크린 속에 인간의 지휘관에 인벤토리가 열리며 투구와 갑주, 어깨 보호대, 팔찌. 그리고 하의와 부츠를 비롯한 어마어마한 장신구들이 스쳐 지났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헉!! 갑옷에 따라 그래픽이 달라진다!!” “우와!! 대박이다!!” 갑옷에 따라 그래픽이 바뀐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생각하기엔 당연한 사고방식이었지만, 90년대 중반만해도 장비에 따라 캐릭터 그래픽이 바뀌는 게임은 흔치 않았다. 비록 몇몇 가지는 똑같은 갑주에 색상만 바꾼 모델도 존재했지만, 이 정도만 하더라도 유저들은 새로운 갑주와 무기를 얻기 위해 눈이 뒤집힐 것이 뻔했다. 나는 스크린속에서 여러 가지 장비를 빠르게 교체해 나가는 캐릭터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안에는 약 드래곤 엠블렘의 유저중 단 1%만이 가질 수 있는 전설의 아이템도 존재합니다. 궁금해 하시는 분들을 위해 여기서 레어 등급의 장비 중에 한가지 세트를 공개해드리죠.” 파앗!! 모든 장신구 칸이 렌덤으로 돌아가던 끝에 맞춰진 전설의 세트의 모습에 사람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저격의 카리스!?” 날렵해보이는 가죽 갑주를 걸친 채 거대한 활을 들고 있는 레인저의 모습은 드래곤 엠블렘의 영웅 중 하나인 카리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옛 영웅의 장비를 맞출 수도 있는건가?” “아, 솔직히 멋지긴 한데, 한편으론 진심 토나온다. 저걸 얻으려면 대체 어떤 고생을 해야할까?” “옆에 스텟 봐라... 레벨이 몇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장비 꼈다고 전체 스텟 보정이 40씩 들어 갔어.” “그야말로 레전드템이라는거네...” “그래도 갖고 싶다. 카리스도 있다면 크로엘이나 다른 영웅 세트도 있을거 아냐. 가령 폭염술사 미레아 라던가...” “미.. 미레아!!!” “오, 그건 좋다!!” 게이머들은 자신들이 서로 좋아했던 영웅들에 대해 한명씩 이름을 거론하며 그들에 대해 웅성이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 여러분들께서 말씀하시는 영웅들의 장비는 모두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차후에 업데이트 될 예정이기도 하구요. 그럼 캐릭터에 대한 소개를 잠시 접어두고, 이번엔 실제 플레이 방식을 설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무대 양옆에 설치된 컴플리트 라온에 각각 우치무라와 하야시가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테이블 위에 놓여진 드래곤 엠블렘의 CD 케이스를 들어 유저들에게 선보인 뒤, 컴플리트 라온에 CD를 장착 시켰다. “오오!! 젠장!! 어떻게... 플레이 CD를 보니 다시 사고 싶어졌어..” “안되겠다. 게임쇼고 나발이고 이것만 끝나면 당장 아키바로 달려간다.” 우치무라와 하야시 역시 안절부절 못하는 팬들의 반응을 즐기는지 살짝 미소 지은채 게임 패드를 움켜 쥐었다. 잠시 후 양쪽 사이드에 서로 다른 프로필 화면이 떠오르자, 사람들은 연신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우치무라와 하야시의 캐릭터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우치무라의 클래스는 ‘알려지지 않은 용병’ 그리고 전신에 순백의 갑주를 걸친 하야시의 클래스는 ‘1급 지휘관’ 이었다. “그럼 곧바로 게임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 EP. 45 : Tokyo Game Show. (5) > 끝 ⓒ 손인성# < EP. 45 : Tokyo Game Show. (6) > “그럼 곧바로 게임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먼저 나와 눈이 마주친 우치무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게임을 진행시켰다. 그러자 지난 에피소드 1의 스토리를 간략하게 보여주는 오프닝 애니메이션과 함께 드래곤 엠블렘 두 번째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테마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드래곤 엠블렘의 전작은 인간들이 거대한 대륙에 끝자락까지 몰렸던 절망의 시대. 마족에게 대항해 사투를 벌인 용사들의 활약으로 두 개의 탑은 무너졌지만, 부활한 마신의 유혹에 넘어간 용사 ‘오시리스’가 새로운 마왕으로 등극하며 대륙은 새로운 전란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자칫 오시리(엉덩이)가 될 뻔했던 마왕의 이름 덕분에 플레이어에게 이름 바꿔달라고 사정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부글거리긴 하지만... 잠시 후. 전작의 배경이 되었던 지역을 비춰주던 앵글이 점점 하늘로 향하자, 드래곤 엠블렘의 거대한 대륙이 모습을 드러내며 DRAGON EMBLEM이라는 타이틀이 떠올랐다. “허억... 설마 에피소드 1에 나왔던 드넓었던 무대가 고작 저것 밖에 안되었던 거야?” “대체 에피소드 2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 되는 건지 감도 안잡히네...” 그후로 대략 4초 가량의 로딩이 흐른 뒤, 우치무라의 스크린 속에 허름한 막사의 풍경이 펼쳐졌다. 허름한 옷차림의 그가 장비 확인을 위해 인벤토리를 열자, 과연 ‘알려지지 않은 용병’ 이란 클래스 답게 낡은 망토와 찢어진 가죽 갑옷등 보기에도 안타까운 초라한 장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지고 있는 한자루의 검 마저도 ‘이가 빠진 장검’ 이라 쓰여 있어 스크린을 바라보는 유저들의 마음을 더욱 안쓰럽게 만들었다. “거지다. 완전 거지...” “제길.. 하드코어 모드 클리어 데이터가 없는 사람은 그냥 맨땅에 헤딩하라는건가?” 생각보다 참혹한 우치무라의 장비에 여기 저기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외로도 현재 세계관을 제법 이해해주는 유저들도 있었다. “어차피 초반에 무기는 버리는게 당연하게 다들 뭘 그리 겁을 먹는지. 시작부터 아이템 다가지고 시작하는 RPG 게임이 어딨냐. 드래곤 워리어 시리즈의 용자도 레벨 1때는 방망이 들고 싸우는 판에...” “하긴 그러고 보니 그렇네..” 우리무라는 유저들의 목소리에 아랑곳 하지 않고 인벤토리를 닫은 뒤, 막사 화면으로 돌아왔다. 드래곤 엠블렘에서 보여주는 기본 인터 페이스는 굉장히 심플한 편이었다. 현재 우치무라가 있는 지역은 이미 인간들의 영토였고, 따라서 전장보다는 확실히 안전하다. 따라서 플레이 방식은 수주가 가능한 퀘스트 목록을 살피고 그에 따른 보상을 확인한 뒤 뛰어 들면 그만이었다. “드래곤 엠블렘에서 용병은 자신이 속한 세력 안에서 캐릭터를 키울 수 있습니다. 되찾은 영토 주변에 던전을 탐험 할 수도 있고, 일정 레벨 이상이 되어 지휘관이 된다면 스스로 전장에 참전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과거 영웅들이 남긴 전설의 무기를 찾기 위한 장대한 여정도 준비 되어 있습니다만, 그러기 위해선 현재 인간들의 영역을 더욱 넓혀야 하겠지요? 먼저 기본 적인 던전 탐험에 대해 우치무라씨의 플레이를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나의 멘트가 끝나자 우치무라는 기본적인 탐험 준비를 마치고, 막사에서 퀘스트 하나를 수락했다. 서쪽의 동굴을 탐색해 달라는 부탁에 우치무라가 YES 버튼을 누르자, 필드 위에 말을 타고 있는 우치무라의 캐릭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동시에 필드 여기저기서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PLAYER TURN. 이동을 위해 주사위를 굴려주세요.- “으잉...?” 예상 밖의 문구에 단순한 필드 이동식 RPG인줄로 알았던 유저들의 입에서 묘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우치무라는 아랑곳 하지 않고 버튼을 누르자 육면체의 주사위가 화면안세어 튕겨지듯 구르기 시작했다. -5. 캐릭터를 어디로든 5마스 움직일 수 있습니다.- “커헉... 뭐야 이거? 완전 보드 게임이잖아?” 그렇다. 막사를 나와 퀘스트 장소로 향하는 동안 플레이어는 직접 주사위를 굴려 자신의 말을 이동시킬 수 있었다. 한번의 턴이 끝나면 주변의 적들도 주인공을 쫓아 움직였는데, 그들을 피해 퀘스트 장소로 향할 수도 있고, 필드 위에서 그들과 SRPG처럼 전투를 행할 수 있었다. 필드 곳곳에는 오색 찬란한 보물이나, 특정 아티팩트를 지키고 있는 몬스터도 존재하고 있기에 어디로 향하든 그것은 플레이어의 마음이었다. 이 시대의 게이머들에겐 익숙하지 않지만, 나에게 있어서 지금 우치무라가 서 있는 필드 화면은 마치 마이트앤 매직 시리즈의 필드 화면을 보는 것만 같았다. ‘물론 상당히 시간을 잡아 먹는 턴제 배틀 시스템은 없애 버렸지만.’ 필드에서의 전투 만큼은 단순하고 호쾌해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필드 위의 전투에 한해 일반 SRPG의 배틀 방식을 사용했다. 이동중 적과 붙은 상태에서 공격 커맨드 입력. 이 단순한 방식으로 유저들에게 필드 이동 중 적절한 긴장 요소를 전해줄 수 있었다. 우치무라는 빠르게 주사위를 굴려 퀘스트 장소로 향하려 했지만, 운이 따라 주지 않아 던전 입구를 눈앞에 두고 뒤 따라온 몬스터에게 일격을 수락했다. 시간을 더 끌다간 주변의 몬스터들이 자신을 포위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 우치무라는 다음 주사위에서 곧장 던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와... 필드 위에 돌아다니는 적들이랑 시뮬레이션 RPG처럼 싸울수도 있구나.” 약간의 로딩 화면이 지나고 다시 모습을 드러낸 우리무라의 캐릭터는 상처를 회복 시킨 후. 검을 빼들었다. 어두컴컴한 미지의 던전 속에서 우치무라는 층별로 탐색을 시작했다. 위에서 사선으로 비스듬히 내려다 보는 쿼터 뷰 시점 한가운데에는 초라한 장비의 우치무라가 달랑 검 한자루를 손에 들고 어둠 속을 걷기 시작했다. “월드맵에선 SRPG의 느낌이었는데, 이번에는 액션 RPG 느낌이 나네...” 우치무라는 관객 앞에서 몸풀기로 검을 휘둘러 보이거나 구르기로 회피 동작을 선보인 뒤 미로처럼 엉켜있는 맵을 구석 구석 살피기 시작했다. 파앗!! 순간 어둠속에서 녹색 고블린과 코볼트가 튀어나오자, 우치무라는 재빨리 구르기로 적과의 거리를 벌린 뒤 검을 휘둘렀다. 방패를 들고 있던 고블린이 우치무라의 일격을 튕겨내자, 이번엔 코볼트가 사이드에서 우치무라에게 달려 들어들었다. “엇!!” 생각보다 치밀한 적들의 연계 공격에 유저들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온 순간. 우치무라는 멋지게 앞구르기로 코볼트의 공격을 피해낸뒤 방패를 들고 있는 고블린의 뒤를 잡아 회심의 일격을 꽂아 넣었다. 퍼억!! 복부를 뚫고 나온 검을 뽑아내자 고블린 바닥에 방패를 남겨두고 사라졌고, 홀로 남은 코볼트는 숙련된 조교인 우치무라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전투를 끝낸 우치무라는 바닥에 떨어진 고블린의 방패를 착용한 뒤 다시 어둠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가지 다행인 것은 생각보다 빨리 방패를 얻었기에 적들의 순간적인 공격에 잘 대처 할 수가 있었다. “방금 고블린 죽일 때 꽤 멋지던데?” “그러게 빈틈을 노리고 찌르면 저런 모션이 나오는 건가?” 그때 우치무라의 플레이 화면에 찬란하게 빛나는 보물상자가 나타나자, 유저들이 소리쳤다. “오!! 아이템인가보다.” “뭔가 희귀한 아이템이라도 들어 있는 건가?” RPG에서 보물상자는 참 묘한 흥분을 일으킨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던 지간에 아이템이란 반가운 것이니까. 혹시나 쓸만한 검이나 장비가 들어 있을 경우엔 더욱 더... 조심스러운 성격의 우치무라가 방패를 앞세워 보물상자에 다가가자, 순간 보물상자가 흐릿해지더니 다시 저만치 멀리 떨어졌다. “뭐지?” “미믹(보물상자 형태를 한 몬스터.)인가?” 우치무라는 잠시 고개를 갸웃 거리며 다시 보물 상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이번에도 거의 다다른 순간. 보물 상자는 또다시 멀리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위에서 몬스터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었기에 우치무라는 방패를 거두고 빠른 걸음으로 보물 상자를 향해 달렸다. 슈슉!! 마치 누군가가 미끼를 던지듯 우치무라를 더욱 더 깊숙히 던전 안쪽으로 끌어 들이려는 것만 같았다. 우치무라 역시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다시 방패를 앞세우고 천천히 보물 상자로 향하자, 이번엔 눈앞에서 보물 상자가 사라지지 않았다. “어라? 이젠 안 없어지네?” 의심 많은 우치무라는 한번에 보물 상자를 열기보다 보물 상자를 크게 한바퀴 돌아 주변을 살펴 보았다. 그러자 화면 끝자락에 제법 거대한 무언가가 스쳐 지났다. 미지의 영역에 대해선 검은 안개가 끼어 있었기에 우치무라는 좀 더 자세히 그것을 살펴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간 순간... 그의 눈앞에 보인 것은 거대한 뱀의 비늘이었다. “히익...” 불길한 느낌에 방패를 앞세운채 들어온 길로 빠져 나가려던 찰나.. 쉬익!! 태앵~!! 긴장감에 잔뜩 움츠려 있던 우치무라의 방패를 튕겨 내며 거대한 아나콘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물상자를 이용해 플레이어를 유인한 몬스터는 이미 도망칠 통로를 차단하고 우치무라를 애워싸고 있었다. “망했다.” 아나콘다의 크기에서 전해져오는 위압감에 유저들의 입에서 자동으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왜 게임을 하다보면 그럴 때 있지 않은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단지 몬스터 모습에서 풍겨 오는 위압감에 ‘에이 저건 못 이기겠다.’ 라고 스스로 단정 지어 버릴 때. 나 역시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게임이 몇몇 있었다. 특히 회귀 하기 전에 재밌게 즐겼던 다X소울 시리즈에서 많이 느꼈지... 광활한 공간에서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 한 거대한 기사의 모습을 볼때면 ‘이번엔 몇 번 죽어야 저 녀석을 깰 수 있을까?’ 란 생각이 들곤 했으니까. 하지만, 우리의 숙련된 조교인 우치무라는 달랐다. 방패가 튕겨져 밸런스를 잃었지만, 그는 재빨리 구르기 동작으로 거대한 아나콘다의 공격을 피해내었다. “우와아!!” 그는 회피 동작 이후 이상과 동시에 검을 휘둘러 몬스터에게 상처를 입혔고, 그 모습은 이곳에 보인 유저들에게 탄성을 자아내었다. “컨트롤로 피할 수도 있구나!!” 다행히 아나콘다의 몸집이 워낙에 커서 그런지, 우치무라가 휘두르는 공격은 상당히 효과적이었고 비록 HP가 간당간당했지만, 그는 전투중 물약까지 삼켜가며 겨우겨우 아나콘다를 후퇴시키는데 성공했다. “오오!!” “멋지다.” 이윽고 턴빈 공간에 혼자남은 우치무라가 번쩍이는 보물 상자를 열어 젖히자, 안에서 수많은 아이템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드래곤 엠블렘의 던전에서는 보물 상자의 크기와 광채에 따라 나오는 아이템의 랭크과 갯수가 달랐는데, 이번 보상으로 우치무라는 제법 괜찮은 장비를 손에 넣었다. 잠시 후. 인벤토리에서 새로운 갑주과 검을 장착 시키자, 화면속의 캐릭터는 그런대로 봐줄만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정비를 마치고 다시 던전 속으로 걸음을 옮기는 우치무라의 모습에 그의 플레이를 지켜보던 유저들이 박수를 보내주었다. 나는 우치무라의 플레이를 그대로 진행시키며 이번에는 하야시와 눈을 마주치자,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하야시가 게임을 플레이 시켰다. “지휘관 캐릭터가 플레이를 시작한다.” 순백의 갑옷을 차려입은 화려한 기사가 검을 치켜들며 게임을 진행 시키자, 스크린 속에 주의 문구가 떠올랐다. -전장 지역에서 사망할 경우엔 장비를 잃거나, 능력치에 상당한 패널치가 가해집니다. 부디 조심하시길...- “그래, 저 문구를 보니 내가 아는 드래곤 엠블렘 맞네...” “어째 용병 모드는 튜토리얼이고, 이게 본방 같은 느낌이 든다..” 콰아아앙!! 호쾌한 폭격음과 등장한 전장 지역의 막사가 모습을 드러내자, 하야시는 신속히 패드를 움직여 자신의 캐릭터와 부하들의 장비를 동시에 정비하기 시작했다. -30초 안으로 준비를 맞춰 주십시오. 곧 전투가 시작됩니다.- “헉.. 뭐야? 시간 제한이 있어?” 두 번째 숙련된 조교인 하야시는 시스템이 제시한 30초 보다 더 빨리 정비를 마친 뒤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10초 안으로 포메이션을 정해주세요.- 하야시는 자신이 거느린 부하들을 뒤로 배치한 뒤, 스스로 최전방에 서서 탱커 포지션에 섰다. 후열에 사제 그리고 양옆에 딜러인 궁수와 마법사를 거느린 그가 포메이션 세팅을 마치자, 긴박한 사운드와 함께 곧바로 문구가 떠올랐다. -전투를 시작합니다.- 잠시 후. 거대한 스크린 속에서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눈 8명의 캐릭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FIGHT- < EP. 45 : Tokyo Game Show. (6) > 끝 ⓒ 손인성# < EP. 45 : Tokyo Game Show. (7) > -FIGHT- 카아앙!!! 전투를 알리는 메세지와 함께 네 명의 캐릭터 머리 위해 각각 컴플리트 라온의 버튼 배열인 A, B, Y, X 버튼이 떠올랐다. 마름모 형태의 포메이션과 4개의 버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게임에 대해 조금이라도 센스가 있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알아챌만한 아주 직관적인 전투 형태. 설명할 필요도 없이 선공과 후공을 정하는 동전이 튕겨져 오르고, 하야시의 선공을 알리자 그는 능숙하게 패드의 버튼을 이용해 자신의 용병들을 돌격 시켰다. 한번에 화살을 3개씩 장전해 날리는 궁수와 쉴새 없이 화염 마법을 쏟아 부어대는 데미지 딜러의 활약에 현란한 이팩트가 스크린 속에 펼쳐지자, 유저들은 벌려진 입을 다물 생각도 못한채 멍하니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야시 부대의 현란한 공격을 버텨낸 상대 진영은 턴이 개시 되자마자,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때 선봉에 서있던 탱커의 방패에서 강한 빛을 뿜어져 나오며 전장 한복판에 거대한 빛의 방어막이 세워졌다. 콰아아앙!! 상대편 마법사의 얼음 공격이 두터운 방어막을 뚫지 못하고 그대로 산산히 부서지고, 도적의 마저 공격에 실패하자, 지휘관으로 보이는 캐릭터가 거대한 검을 휘둘러 하야시의 방어막을 깨부쉈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또 다른 마법사가 하야시의 진영에 불꽃의 비를 내려 전원에게 피해를 입혔다. “와, 조작이 굉장히 심플하면서도 이팩트가 화려한데?” 4인 파티를 꾸려 계속 등장하는 적과 싸워나가는 전장에서는 치고 빠질 때를 잘 알아야한다. 전투를 거듭 할수록 명성과 진귀한 아이템을 얻을 수 있지만, 섣부른 판단으로 패배할 경우그에 대한 패널티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하야시는 다음 턴에서 사제를 이용해 피해 입은 아군의 체력을 회복 시킨 뒤, 몇 번의 공방을 거듭한 결과. 첫 번째 전투에서 어렵사리 승리를 따내었다. -연이어 전투를 진행하시겠습니까? 다음 전투에서 승리 할 경우 더욱 진귀한 아이템과 함께 1.2배의 경험치가 적용 됩니다.- 스크린에 떠오른 문구는 게이머에게 있어선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도박과도 같은 유혹이었다. 진기한 아이템과 강해질 수 있는 경험치 보너스라니... 하지만 드래곤 엠블렘의 전장에선 위에 열거한 두가지 보다 더욱 중요한 아이템이 존재 했는데... -연승을 달성해 일정치 이상의 명성이 모이면 최전방으로 향할 수 있는 지원서를 제출 할 수 있습니다.- “으음? 최전방?” “지원서라니...?” 잘 모르는 시스템의 등장에 유저들이 고개를 갸웃 거리자, 나는 하야시를 향해 다음 배틀을 진행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카아앙!! 긴장감과 스릴이 넘쳤던 던전 탐사모드와는 달리, 지휘관 모드에서는 정신없이 울려 퍼지는 전장의 폭음과 몬스터의 굉음으로 패드를 쥐고 있는 것만으로 굉장한 긴박감을 전해주고 있었다. 다음 전투에서도 주어진 시간내에 정비를 마친 하야시는 전투가 시작되기 전 지휘관 마다 가지고 있는 부러진 성검 조각을 자신의 검 안에 박아 넣었다. “아, 전작에서 얻었던 성검 조각을 여기서 사용할 수 있구나.” 전작에서 최종 무기로의 진화 재료였던 성검 조각은 이번 작에서 조금은 특별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성검 조각의 능력으로 이번 전투에서 승리할 시 적 지휘관의 장비 중 하나를 랜덤으로 습득 할 수 있습니다.- “장비를 빼앗아 오는 건가?” 그렇다. 부러진 성검조각을 장착할 시 드래곤 엠블렘은 마치 카드배틀처럼 상대편의 뒷통수를 칠 수 있는 특별한 능력들 행할 수 있었다. 간단한 예로 지금처럼 전투에서 승리할 경우 상대방의 무기하나를 빼앗을 수 있다던가, 아니면 적군 중 하나를 3턴 동안 기절 시킬 수 있다던가. 단지 AI를 상대로 이토록 전략적인 움직임을 취해야 하는 이유는 좀 더 손쉽게 전투를 운용시키기 위해서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은 바로 ‘최전방’ 시스템에서 상대편의 뒤통수를 치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다. 또 다시 화려한 이팩트와 함께 하야시가 연승을 거두자, 유저들은 환호성과 함께 박수를 보내 주었다. 한편 던전에서 몬스터들의 주의를 너무 끌은 탓에 그들에게 쫓겨 달아나는 우치무라의 플레이에 웃음을 터뜨리는 게이머들도 더러 있었다. -연승에 선공했습니다. 부러진 성검의 보상으로 적 지휘관의 장비 중 하나를 당신의 수집품함에 넣어두었습니다.- -명성 100을 달성했습니다. 당신의 동료와 함께 최전방 지역으로 참전할 수 있는 지원서 1장을 손에 넣었습니다.- “어라? 또 나왔다. 최전방 지원서.” 또 다시 등장한 의문의 메시지에 유저들은 고개를 갸웃 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쯤에서 나는 무대 중앙으로 걸음을 옮기며 우치무라에게 청했다. “우치무라씨. 잠시 플레이를 종료시켜 주시겠습니까?” “아, 네.” 나의 요청에 고개를 끄덕인 우치무라가 게임을 종료 시키자, 드래곤 엠블렘의 타이틀 화면이 떠올랐다. “그럼 잠시동안 적대 세력의 지휘관으로 플레이를 부탁드립니다.” 우치무라의 행동에 그를 지켜보던 하야시 역시 전장을 이탈해 초기 캐릭터 선택화면으로 전환시켰다. 이윽고 화려한 갑주를 차려입은 우치무라의 지휘관 캐릭터가 모습을 드러내자 두명은 지휘관의 데이터를 미리 연결해 두었던 라온으로 이동 시킨 뒤, 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지난 에피소드 1에서 여러분들은 자신의 친구 또는 커뮤니티에서 알게된 동료들과 함께 보스 레이드를 공략했습니다. 여기 두 사람이 들고 있는 휴대용 라온을 이용해 말이죠. 드래곤 엠블렘은 버추어 아이돌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휴대용 라온을 이용한 독특한 시스템을 제공합니다. 바로 PVP라는 이름의 시스템을 말이죠.” “PVP?” 생소한 단어에 유저들이 고개를 갸웃 거리자, 휴대용 라온을 들고 있던 하야시가 어느새 마이크를 손에 들고 입을 열었다. “PLAYER vs PLAYER. 즉 여러분들은 자신이 선택한 세력의 패권을 위해 최전방에서 서로 싸우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부러진 성검의 능력을 이용해...” “헉.. 그렇다면.. 아까 같은 경우엔 전투에서 지면 내 장비를 빼앗길 수도 있다는 거잖아?” “에이... 말도 안 돼. 차라리 안하고 말지.” “맞아. 그냥 안 싸우고 스토리만 즐겨도 되잖아. RPG니까.” 물론 그들의 이야기도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그들의 의견에 반하는 말들도 쏟아져 나왔다. “난 오히려 재밌을 거 같은데?” “뭐 어때 그냥 게임일 뿐인데, 캐릭터를 키워 겨루는 격투 게임 같은 건가?” 여기저기서 다양하게 쏟아져 나오는 의견에 나는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추가 설명을 이어 나갔다. “방금 드래곤 엠블렘의 코딩을 맡은 하야시씨의 플레이를 보셨다시피 드래곤 엠블렘의 전장은 굉장히 심플한 커맨트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전투가 시작하기 전 자신의 아이템을 정비하고, 전투에 돌입한 순간부터 단지 버튼을 누르는 것만으로 누구나 화려한 전투를 벌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초보자도 간단히 플레이가 가능하죠. 하지만 나중에 스킬과 공격 모션을 취득하면 이러한 공격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면 중앙의 스크린에서 드래곤 엠블렘의 전투 장면이 떠올랐다. “핫!!” 짧은 기합소리와 함께 적에게 파고든 무투가의 발차기가 상대편을 높이 띄워 올리자, 타이밍에 맞춰 스킬을 준비하던 궁수가 공중에 떠오른 적을 향해 연속으로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오오!! 동료끼리 연계기도 존재하는 건가?” 공중에 떠오른 캐릭터는 무방비 상태로 적이 쏜 화살에 클린 히트를 당한 상태에서 대마법사의 궁극기인 메테오까지 피니쉬 어택으로 허용하곤 장렬히 산화했다. “이 모든 공격은 적당한 타이밍으로 스킬을 사용해 주기만 하면 누구나 손쉬게 사용할 수 있는 연계기입니다. 사실 이것 말고도 수많은 패턴이 존재하죠. 하지만, 이런 다양한 기술을 손에 넣기 위해선 지휘관의 경험치가 중요합니다. 지휘관은 자신이 얻은 경험치를 부하들에게 배분 시킬 수가 있기 때문이죠. 지휘관의 레벨이 오를수록 전장 지역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치만으론 부족할 때가 많이 느껴질 겁니다. 보다 높은 명예와 장비. 그리고 경험치를 위해서 ‘최전방 지원서’를 필요로 하는 유저분들이 점점 늘어날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대체 그 최전방 지원서가 뭡니까?” 결국 참다 못한 유저 하나가 손을 들고 나에게 질문했다. “최전방 지원서는 일종의 도전권입니다. 자신이 키운 지휘관을 다른 플레이어와 겨룰수 있게 도와주는 티켓과도 같은 것이죠. 한번의 지원서로 도전할 수 있는 배틀은 총 5번입니다. 다시 말해 다른 유저와 싸우고 싶어도 지원서가 없다면 PVP를 즐길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너무 오랫동안 배틀을 즐기를 것에 대해 약간의 규제가 필요하다 느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PVP 시스템은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컴플리트 라온으로 플레이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내가 설명을 마치자 우치무라와 하야시는 각각 자신의 라온을 들고 무대 한쪽편에 마련된 아케이드 센터에서나 볼법한 전자기기에 라온의 데이터 케이블을 연결 시켰다. 그러자 대형 스크린에 대륙의 지도가 떠오르며 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치열한 전투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 합니다. 현재 인간과 마족의 전투가 가장 격렬해지는 지역은 6번째 국경 지역입니다. 현재 전황은 50:50으로 아직 전세가 어느쪽으로도 기울지 않았습니다. 이곳에 참전 하시겠습니까?- -YES.- -최전방 지원서가 확인 되었습니다.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그 순간 화면의 양 끝에 우치무라와 하야시의 캐릭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표회가 시작한 직 후. 마치 거대한 땅따먹기를 보는 것 같다고 하셨던 유저분이 계셨죠? 네. 정확히 보셨습니다. 드래곤 엠블렘의 두 번째 에피소드는 여러분들께서 직접 전장에 뛰어들어 승리를 거둔 만큼 각 섹터마다 전황이 달라지게 되어 있으니까요.” “헉.. 그럼 진짜 땅 따먹기였어?” “한 달에 한 번. 최전방 지역에서 벌어진 승률에 따라 드래곤 엠블렘의 지도는 계속해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점령된 지역에서 여러분은 새로운 던전을 통해 그 지역에서만 얻을 수 있는 진귀한 아이템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점령지를 도로 빼앗기지 않는다는 전제 조건에 한해서지만요.” 먼 훗날 드래곤 엠블렘2의 두 번째 이야기는 쌍방의 데이터 교환을 이용한 최초의 온라인 게임으로 인정하느냐 아니냐에 대해 많은 논란이 일었다. 1995년 말. 텍스트 형식의 온라인 게임인 머드 게임이 PC통신 커뮤니티에서 활성화 되던 시기. 하지만 일각에선 이미 캐릭터 디자인을 이용한 온라인 게임이 슬슬 발을 들여 놓은 시기가 다가 오고 있었다. 90년대 중반부터 게임을 즐겨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이름을 들어 보았을 ‘울티마 온라인’ 이라던가, 세계 최초의 온라인 게임으로 인정 받은 ‘바람의 나라’ 라던가.. 앞으로 1년 남짓한 시간 안에 등장할 이 두 개의 게임은 이후의 게임 업계를 송두리째 바꿔 놓을 어마어마한 업적을 남기게 되는데... 그런 위대한 업적의 한가운데에 나는 현재 ‘드래곤 엠블렘 온라인’이란 세계를 구축 중에 있었다. 그런 와중에 사실 에피소드 2의 PVP시스템이 최초의 온라인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별 상관이 없었다. 단지 나는 차후 유저들에게 온라인의 세계를 더욱 절실히 받아들일 수 있는 무대장치가 필요했던 것 뿐이니까... < EP. 45 : Tokyo Game Show. (7) > 끝 ⓒ 손인성# < EP. 46 : 많은 시간이 흘러. (1) > & 싸아아아... 호숫가의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 소리에 감았던 눈을 뜬 나는 잠시 후. 물속으로 퐁당 잠기는 낚시 찌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왔다!! 왔어!!!’ 손 끝에 전해지는 감각으로 보아 제법 커다란 녀석이 틀림 없다. “크윽!!!” 낚시용 의자가 뒤로 나뒹굴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지만, 나는 두 다리에 바싹 힘을 주며 팽팽하게 당겨진 낚싯줄을 서둘러 감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바닷가에서 참치라도 잡는 줄 알겠네, 호수에 사는 물고기 주제에 왜 이렇게 힘이 센거야!?’ 툭팍투팍팍~!! 어지간히도 나에게 잡히기 싫은 모양이다. 이렇게 까지 발악 하는 걸 보면... 하.지.만 나 역시 이곳에 와서 2시간째. 너라도 잡아야 내 체면이 선단 말이다!! 툭~!! 불길하게 느껴지는 손맛과 함께 위로 끌어 올려진 녀석이 허공에서 몸을 틀어 다시 호숫가에 잠겼다. “하아... 환장하겠네..” “아빠~ 물고기 놓친 거야?” 뒤에서 들려오는 설현이의 목소리에 나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다간 할아버지 올 때까지 한 마리도 못 잡을거 같은데?” “으음... 그러게나 말이다. 이거 또 장인 어른한테 한 소리 듣겠는데?” 한숨과 함께 낚시 줄을 거둬들이는 내 옆으로 설현이가 다가와 쪼그려 앉았다. “물고기 언제 잡아 줄거냐고, 엄마가 물어보래. 할아버지 거의 도착했다고 전화왔나 봐.” “그.. 그래?” 이런... 큰일이다. 한국식 매운탕 끓여 드린다고 큰소리 쳤는데, 아직까지 한 마리도 못잡았으니. 그때 양손을 턱에 괸 채 나를 바라보던 설현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음? 뭐가?” “아빠의 도쿄 게임쇼. 아까 캠핑 오는 도중에 하야시 아저씨한테 전화와서 이야기하다 말았잖아.” “아~ 맞다. 그렇지.” 나는 텅빈 낚시 바늘에 떡밥을 꽂아 넣고는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호숫가를 향해 낚싯대를 휘둘렀다. 잠시 후. 퐁당소리와 함께 수면 위로 찌가 솟아 오르자, 나는 빙긋 미소 지으며 바닥에 쓰러진 의자를 세워 설현이를 앉혔다. “어디보자, 어디까지 얘기 했었지?” “PVP 시스템까지~!!” “아, 맞다. 그랬지. 우리 설현이 기억력 좋은데?” 나의 칭찬에 설현이는 장난스런 표정으로 혀를 빼꼼 내밀며 나를 보챘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니깐?” “그때야 뭐.. 난리도 아니었지. 펜타곤 컨퍼런스가 끝나자마자 뒤도 안돌아보고, 아키하바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으니까.” “와아... 재밌었겠다.” “그때 펜타곤 컨퍼런스가 끝나고 NEGA의 컨퍼런스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새턴의 홍보 모델이었던 네가타씨는 행사장을 나가는 유저들을 하나라도 붙잡으려고 난리도 아니었어.” 아직도 그 때 일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올 정도니까. & “거기 너!! 네가새턴 해라~!!” “당신이나 많이 하쇼~!!” “뭣이!?” 터프한 컨셉으로 유저들에게 명령하듯이 소리치고 다니던 네가타 산시로씨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어린 유저의 대답에 미간을 찌푸렸다. 펜타곤의 컨퍼런스가 끝나자마자 약 4분의 1 가량의 관람객이 쑥 빠져 나간 탓에 행사장은 큰 혼란에 휩싸였다. “뭐야!? 저 사람들 대체 왜 저래?” “펜타곤에서 드래곤 엠블렘을 출시 발표를 했대!!” “뭐라고? 언제 출시한다는데?” “오늘!! 나 먼저 사러 간다~!!” “기, 기다려. 나도 같이 가!!” 어느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이렇게 무대 위에서 행사장 전체를 바라보니 관객의 수가 급속도로 줄어드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기에 나는 할말을 잃은 채 무대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 “아하하. 아빠 못됐다. 그렇게 해버리면 그 날까지 도쿄게임쇼를 기다려온 다른 제작자들에게 민폐를 끼친거 잖아.” “그렇지. 하지만 도쿄 게임쇼는 단 하루만 열리는게 아니니까. 어느 정도 이탈자가 생겨났지만, 다음날 다시 찾아오는 관람객들도 많았어.” “그렇구나...” 그때 호숫가 근처에 세워진 야영장에서 유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현아. 엄마 좀 도와줄래~” “응. 지금 갈게~ 저기 엄마. 아빠 물고기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어쩌지?” “괜찮아. 이따가 할아버지 오시면 여기 호숫가에 물고기 전부 건져 올리실테니까.” “······.” “당신도 이쪽에 와서 좀 쉬었다 해요.” “흐음.. 그럴까...” 유키의 말에 나는 낚싯대를 고정 시키곤 캠핑장으로 향했다. “아빠. 다음 주에 시험 끝나면 핸드폰 사줄꺼죠?” “핸드폰? 넌 초등학생이 무슨 핸드폰이 필요하니?” “우리반 친구들 거의 다 가지고 있단 말야~ 저번에 시험 잘 보면 사준다고 했잖아~ 그리고 나 벌써 10살인 걸~” 캠핑장으로 돌아오는 내내 내 팔을 잡아끌며 보채던 설현이는 결국 유키에게 한소리를 듣고 서야 나를 놔주었다. “설현이 너 또 아빠한테 핸드폰 사달라고 졸랐지?” “피~ 지난 번에 아빠가 약속한거 엄마도 들었잖아.” ... 그래서 침실로 들어가 호되게 등짝 스매싱을 맞았지. 애한테 무슨 핸드폰 이냐고... 도마 위에 야채를 썰고 있던 유키의 앙칼진 눈빛에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라, 라디오가 어딨거라. 차 안에 두고 나왔나?” 역시 이래서 자식 교육은 배우자와 충분한 상의가 필요하다고 했던가? 물론 핸드폰이야 요즘에도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생활 필수품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교육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유키가 반대하던터라 그녀를 설득하긴 쉽지 않았다. 화제를 돌리기 위해 얼마전에 구입한 캠핑카를 뒤적이던 나는 음악이나 들을 겸 휴대용 라디오를 꺼내 캠핑카의 처마에 달았다. 치익~!! 칙!! 안테나를 세우고 다이얼을 돌려 주파수를 맞추자, 잠시 후 익숙한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 나왔다. 저기, 만약에 모든 것을 내버릴 수 있다면 웃으며 살아가는게 조금은 편해질까? 또 다시 가슴이 아파 오니까. 이제 아무 것도 말하지 말아줘. “아...” 야채를 썰고 있던 유키 역시 그녀의 노래에 손을 멈추고 라디오를 바라 보았다. 그때 유키 옆에서 재료를 접시로 옮기던 설현이가 고개를 갸웃 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라? 이거 칸나 언니 노래 아니었나? 그런데 언니 목소리랑 완전 다르네...?” “츠바키씨 목소리... 참 오랜만이다. 준혁씨.” “그러게...” 나는 라디오를 처마에 걸어둔 채로 근처에 있던 테이블 의자에 걸터앉으며 작게 읊조렸다. “참 오랜만이다.. 츠바키...” 아직도 눈을 감으면 가끔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햇살에 눈이 부실 정도로 잘 닦인 깨끗한 병원 복도. 그곳에 창가에 기대어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미소가... 우리는 잠시동안 그대로 츠바키의 노래가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잠시만 화장실 좀...”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한 유키가 황급히 자리를 피하자, 설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엄마... 방금 운거 같은데? 어라? 아빠도 울어?” “아냐. 안 울어.” 설현이의 목소리에 황급히 손끝으로 눈물을 훔친 나는 애써 빙긋 웃어보였다. -올해로 세상을 떠난지 10주기를 맞이하고 있는 사와노 츠바키씨의 ‘만약에’ 라는 곡을 들으셨습니다. 이 곡은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버추어 아이돌이라는 게임에서 첫 선을 보인 곡인데요. 현재 라디오를 듣고 있는 분들 중 당시 버추어 아이돌을 즐기셨던 분이 계시다면 지금쯤 혼자서 몰래 눈물을 흘리고 계시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네요. 참 이렇게 보면 시간이 빨라요... 10년이라.. 저도 참 좋아했던 게임이었는데...- -어머. 사카이씨도 버추어 아이돌 해보신 적 있으세요?- -물론이죠. 제가 누굽니까. 방송 펑크내고 드래곤 워리어3 사러 아키바까지 갔던 최초의 연예인 아니겠습니까.- -아~ 맞다. 그때 소속사 사장님한테 엄청 혼났다고 들었어요.- -뭐, 그땐 정말 맞아 죽을 뻔 했죠. 방송 스케쥴 때문에 그들의 라이브까지 찾아가진 못했지만, 아무튼 10년 전 버추어 아이돌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데뷔 후 이듬해 가을에 도쿄돔에서 공연까지 했을 정도니까요.- -제 기억에 그 공연을 한 달 앞두고, 츠바키씨가 결국 세상을 떠나셨죠?- -저도 실제로 보진 못했지만, 그 날의 공연은 진짜 눈물 바다였다고 하더군요. 특히나 츠바키씨를 대신해 그녀의 곡을 이어 받은 칸나씨는 마지막 곡으로 ‘만약에’를 부르고 난 뒤 탈진으로 쓰러졌을 정도니까요.- -저도 기억나요. 그녀의 장례식장에 찾아온 팬들이 어마어마했다고...- 그녀를 추억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나는 억지로 쓴 웃음을 삼켜냈다. “실로 어마어마했었지...” 사와노 츠바키. 아직도 그녀의 이름을 생각하면 괜스레 마음이 울적해지는 기분이다. 그녀가 세상에 남긴 곡은 ‘안아주세요’와 ‘만약에’를 포함해 다섯 곡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최고로 평가 받는 곡은 칸나와 함께 만든 ‘만약에’ 라는 곡이었다. 그녀의 죽음은 당시 게이머들에게 무척이나 받아 들이기 힘든 사건 중에 하나였다.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일본 각지에서 몰려든 방문자들로 인해 장례식이 일주일이나 지연되기도 했으며 그녀를 따라가겠다며 자살 기도를 한 사건도 몇 차례나 있었다. 그중에 실제로 사망한 사람은 5명. 덕분에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어 펜타곤에서도 유저들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자제 해달라는 메시지로 공식 기자 회견까지 열 정도였으니까... 내가 펜타곤을 퇴사한 시기도 버추어 아이돌의 도쿄돔 행사를 마친 딱 그때 즈음이었다. 츠바키의 장례를 마치고, 한 동안 멍하니 시간을 보내던 나는 공식적으로 펜타곤 소프트의 이사직을 내려 놓았다. 나의 결정에 카와구치씨와 더불어 모리타와 하야시등 많은 직원들이 뜯어 말렸지만, 나의 결정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 후로 몇 년간 민텐도의 카마우치 사장이 다시 나를 끌어들이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썼지만, 나는 그 때마다 고개를 내저었다. 민텐도는 2005년인 지금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카마우치 사장은 최후엔 자신의 사장 자리까지 내주겠다며 나를 유혹 했지만, 군페이씨가 없는 민텐도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인 1997년 여름. ‘버추어 보이’라는 가상현실 게임기의 실패로 민텐도를 퇴사한 군페이씨는 얼마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내가 알고 있던 미래를 이용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교통 사고는 피할 수 있었지만, 원래부터 지병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때 나와 함께 라디오를 듣고 있던 설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할아버지~!!!” “아이쿠~ 우리 손녀 그동안 잘 지냈니?” 장인어른의 목소리에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키자, 양손 가득 먹거리를 들고온 장인 어른이 피식 웃음을 던지며 나에게 말했다. “자네. 아직 한 마리도 못 잡았다면서~” “낚시. 보기보다 어렵네요.” “그동안 게이머들은 잘도 낚아 올리더니, 쯧쯧...” 작가의 말 이번 편을 올리며 참 고민이 많았습니다. 사실은 며칠 전부터 고민하던 부분이기도 하구요. 일전에 게임 마켓의 이야기를 10권 정도로 마무리 짓겠다 말씀 드린 적이 있는데.. 한 권 더 쓰는 것은 오히려 비슷한 에피소드의 반복이 될 것 같은 기분이 자꾸 들었습니다. 저 역시 최근 에피소드를 진행하며 느끼는 부분이기도 했구요.. 정확히 몇편에 끝이 날지는 말씀드리기 곤란하지만, 조금씩 그 동안의 이야기를 추억하는 방식으로 게임 마켓 1983의 이야기를 끝내려 합니다. 아직 이야기가 끝난건 아니니 작별인사는 나중으로 미뤄 두겠습니다. 오늘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EP. 46 : 많은 시간이 흘러. (1) > 끝 ⓒ 손인성# < EP. 46 : 많은 시간이 흘러. (2) > 잠시 후. 유키와 함께 양손 가득 한보따리 짐을 들고 오신 장모님은 나를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뭘 그리 많이 싸오셨어요? 저희가 준비한 것만으로도 충분할텐데.” “이따 저녁에 회사 직원들도 놀러온다며 먹다가 부족한 것 보다야 훨씬 낫지. 그리고 자네 물고기 한 마리도 못 잡았담서?” “하하... 벌써 들으셨어요?” 그때 등 뒤에서 낚싯대를 꺼내들던 장인 어른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요 몇 년간 준혁군이랑 낚시를 다니면서 느낀 건데, 정말 끔찍할 정도로 소질이 없더군. 킥킥...” “그래도 아빠가 낚시 가고 싶어 할 때마다 같이 어울려 주는 사람 준혁씨 밖에 없지 않아요?” “뭐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자~ 그럼 준비는 끝났고 가볼까 사위~!!” “아, 네. 그러시죠.” “할아버지. 물고기 많이 잡아주세요~” “오냐~ 우리 설현이 저녁에 물고기 배터지게 먹여주마~!!” 잠시 후. 장인 어른은 캠핑장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포인트를 잡고는 호숫가를 향해 찌를 던졌다. “경치 좋구만, 한적하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문 장인 어른은 나를 향해 담배갑을 내밀었지만,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사양했다. “끊었습니다.” “에잉~ 자네. 어째 작년보다 더 재미 없어졌군.” “하하.. 그런가요?” 어색한 미소와 함께 장인 어른의 곁에 앉자, 그는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나에게 물었다. “그래, 그 동안 잘 지냈나?” “뭐 매일 똑같죠. 아침엔 설현 깨워서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에 돌아와서 집안일 좀 하다가 오후엔 한적한 공원에 나가서 책도 좀 읽고...” “... 왜? 아예 구청에서 하는 주부 동아리 모임도 나가지 그러나?” 장인 어른은 나의 대답이 영 못 마땅스러웠는지, 혀를 차며 담배를 깊게 빨아 들였다. 투명한 호수 위로 바람에 흘러가는 구름과 함께 새하얀 담배 연기가 공중에 흩어지고, 잠시 후. 휴대용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장인 어른은 목이 칼칼한지 생수로 목을 축이자, 멀리서 설현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물고기 많이 잡았어요?” “에끼~ 녀석아, 아무리 나라도 낚시 바늘 던지자마자 건져 올리겠느냐?” 요리를 준비하는 유키 곁에 있는게 심심했는지 설현이는 총총 걸음으로 달려와 내 옆에 풀썩 주저 앉았다. “너 옷 더러워지면 엄마한테 또 혼난다.” 호숫가에 낚싯대를 거치해둔 나는 조그만 의자에 설현이를 앉혀 두고 대신 풀밭에 걸터 앉았다. “아빠랑 무슨 얘기 했어요. 할아버지?” “으음? 뭐 그냥 어른들 얘기지.” “흐음~ 아까 여기로 오는 길에 아빠가 1995년에 열린 도쿄 게임쇼에 대한 얘기 해줬는데, 엄청 재밌었어요~” “그러냐? 하긴 네 아비가 그쪽에선 참 유명하긴 했지. 하지만 말이다. 사실은 도쿄 게임쇼가 끝나고 일어난 일들이 훨씬 더 재밌단다.” “네? 왜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어느새 두 눈을 반짝이며 할아버지 쪽에 붙어 앉은 설현이의 모습에 나는 그저 웃으며 두 사람을 바라만 보았다. & 드래곤 엠블렘의 두 번째 에피소드는 출시 후 한 달 만에 일본 내수에서만 100만장을 팔아치웠다. 경기 침체 이후 게임 판매량이 줄어만가던 터에 오랜만에 등장한 밀리언 셀러. 드래곤 엠블렘은 게임 시장에 큰 활력을 불어 넣었다. 유저들은 최전방 시스템이 열릴 때까지 각자의 지휘관 캐릭터와 용병들을 키워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달 뒤. 일본 전역의 아케이드 센터에는 지금까지 플레이어들이 스스로 키운 캐릭터를 이용해 상대방과 대전을 벌이는 PVP 전용 기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게이머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타지역 보다 하루 일찍 기기를 들여놓은 펜타곤 샵은 당일 날이 밝자마자 비장한 표정으로 휴대용 라온을 손에 들고 달려오는 유저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빌어먹을~!! 안 돼!!!” 전투야 단지 버튼만 누르면 공격을 시도하는 간단한 시스템이었지만, 지휘관 자신의 직업과 함께 어떤 스타일의 용병들을 배치하느냐에 따라 꽤나 심오한 전략이 필요했기에 매턴 마다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거기다 성검 조각의 특수 능력까지 더해지면 경우의 수는 한도 끝도 없이 늘어 난다. 운명의 여신을 조작해 무조건 선공 턴을 가져올 수 있는 능력. 후공을 내주는 대신 아군의 방어력을 극대화 시키는 능력. 전투 시작과 동시에 적 캐릭터 하나를 봉인 시키는 능력. 상대방의 장비를 무력화 시키는 능력등 가끔은 사기에 가까운 성검 조각의 능력으로 분통하는 유저들도 있었다. 그중에 유저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성검 조각의 능력은 ‘전투에서 승리 할 시 상대방이 착용한 장비를 빼앗아 오는 능력’ 이었다. “안 돼!! +6짜리 클레이모어가!!!” 헐... 한달 새에 +6강 대검까지 만들정도라니, 역시 유저들의 컨텐츠 소비율을 무시할 수 없구나. PVP를 즐기기 위해 찾아온 유저는 이 날 하루만 2000명에 가까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기 회전은 굉장히 빨랐다. 드래곤 엠블렘의 PVP 배틀은 단지 동전만 있다고 계속 도전할 수 있는게 아니라, 최전방 전투 지원서라는 특별 아이템이 있어야만 참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섹터에 패권을 두고 경합을 벌이는 PVP 시스템에는 ‘전장 기여도’ 라는 것이 존재했는데, 그것은 지휘관 캐릭터가 얼마 만큼 전투에 참여 했고, 또 얼마 만큼 승리를 거두었는지에 대한 정보를 기록해 차후 섹터에서 승리를 거두었을시 보상으로 전설급 아이템을 획득할 수가 있었다. 이에 대해 펜타곤은 총 16개의 전투 지역을 준비했고, 두 개의 세력은 서로 더 많은 영역과 아이템을 차지 하기 위해 끝없이 전투를 벌여왔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드래곤 엠블렘 두 번째 에피소드에 대한 전문 커뮤니티가 생겨 나기 시작했고, 따로 펜타곤에서 공지하지 않아도, 발빠른 유저들이 스스로 커뮤니티에 최전방 지역의 전황을 공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커뮤니티는 드래곤 엠블렘 유저들이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거대한 가상의 국가화 되어가고 있었다. 그곳에선 플레이어의 전장 기여도를 인증하는 것에 따라 들어갈 수 있는 게시판이 세분화되어 있었고, 상위 게시판 같은 경우엔 전쟁의 판도를 예측하는 수뇌부들이 모여 다음으로 공략할 섹터에 대해 토의하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진정으로 재미있는 온라인 게임이란 운영자가 그 권위를 이용해 마음대로 세계를 주무르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스스로 그 안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즐거움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 온전히 그 세계를 유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초창기의 온라인 게임은 그랬다. 경치가 좋은 바닷가에 말을 끌고가 그곳에서 친한 유저들끼리 도란도란 이야기만 나누어도 재미있는 게임도 분명히 존재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드래곤 엠블렘의 커뮤니티는 전투에 지친 유저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대화의 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곳의 대화방은 24시간 내내 사라질 줄은 몰랐고, 정보 게시판에는 매번 새로운 아이템을 조합시켜 얻을 수 있는 장비라던가, 성검 조각에 대한 정보들로 가득했고, 각 세력의 자유 게시판에는 일상에 대한 잡담을 나누는 플레이어들로 가득했다. 나 역시 한 동안은 플레이어를 빙자해 그 공간 안에서 유저들과 부대끼며 살았을 정도니까... 모르긴 몰라도, 나처럼 정체를 숨기고 커뮤니티를 즐기는 펜타곤 직원들도 꽤나 많았을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커뮤니티 내에서 다른 유저를 부를 때 누구누구 ‘씨’ 누구누구 ‘님’이 아닌 판타지 세계에서나 등장할 법한 ‘경’이라는 호칭을 붙였는데, 현재 전장에서 기여도 1위를 찍고 있는 유저에겐 ‘용병왕’이라는 칭호를 붙여 커뮤니티 내에서 실제 역할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드래곤 엠블렘의 두 번째 에피소드가 정말로 놀라운 부분은... & “아직까지 대륙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지.” “정말요!?” “내가 알기론 말이다. 안그런가? 준혁군?” “맞습니다. 최근에 세력이 인간쪽으로 많이 기울었다는데, 아직 마족 세력이 두섹터 정도로 버티고 있다고 하네요.” 나의 대답에 설현이는 질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10년이나 같은 게임을 계속 하고 있다는 건가요?” “음~ 엄밀히 따지면 아주 똑같지는 않아. 10년 동안 벌써 5번이나 버전 업을 했으니까...” 솔직히 처음엔 길어야 한 5년정도 갈줄 알았던 컨텐츠였는데, 버전 3에서 하야시가 온라인 시스템을 엄청 개선 하는 바람에 게임 수명이 배로 늘어났지 뭐야... 하지만 그 10년 동안 벌어들인 코인 수익은 정말로 무시할게 아니었다. PVP 시스템이 처음 열린 초반만 하더라도 일본에 있는 모든 동전이 펜타곤으로 유입되는 건 아닌가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으니까... “읏차~!! 또 한 마리 잡았다.” ... 그러나 저러나 설현이한테 이야기를 해주면서도 귀신 같이 낚아 올리시는구나... 나는 당최 아무리 봐도 찌가 수면에 흔들리는 건지, 물고기가 낚아 챈건지 감도 안잡히는구만... “우와~ 크다~!!” 어른 팔뚝 만한 굵기로 퍼덕거리는 힘좋은 물고기를 양동이에 담아 내자, 이젠 더 이상 낚아도 담을수가 없어 보였다. “준혁씨~!!!! 펜타곤 직원 분들 거의 도착했다고 연락 왔어요~!!” “응~!! 곧 갈게.” 어느새 산 넘어로 지는 타는 듯한 노을이 호숫가를 붉게 물들이고, 불빛 하나 없는 초저녁 하늘에 어스름 별들이 반짝이자, 장인 어른은 그제서야 양동이속에 물고기를 하나 둘 호숫가에 던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애써 잡은 물고기를 왜 다시 던져요?” “너무 어린 새끼들은 다시 호수로 돌려보내야지. 안그래도 네 할머니가 먹을거 엄청 싸와서 사실 물고기도 별로 필요 없을지도 몰라.” 설현이는 할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양동이에 손을 넣었다. “그럼, 너두 안녕~!!” “설현아!! 그건 방금 잡은 대어야!!” 풍덩... 어른 팔뚝만한 크기 답게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진 물고기에 장인 어른은 입을 떡벌린채 허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게임으로 치면 +9짜리 대검을 적에게 빼앗긴 유저의 기분과 엇 비슷하려나? “아하하~ 잘가아~~!!” 순식간에 사라진 물고기를 향해 손을 흔드는 설현이의 목소리만이 조용한 호숫가에 공허히 울려 퍼졌다. & “이~~사~~니이이임~~!!!” 잠시 후. 캠핑장에 도착한 버스에서 가장 먼저 내린 카오리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오랜만이에요~ 이사님!!” “뭐가 오랜만이야.. 지난 주에 유키랑 같이 시부야에서 봤었잖아.” “으이구. 예나 지금이나 정 없는 사람.” “흥~ 네 남편만 할까?” “네? 제가 뭐라구요?” 어깨에 짐을 올린채 테이블로 다가온 하야시는 먹을 거리를 바닥에 내리며 피식 웃음을 삼켰다. “그냥 빈손으로 오라니까, 뭘 또 이렇게 사왔어...” 뒤이어 카와구치 대표와 함께 모리타와 우치무라, 미야자키등을 비롯해 평소 친하게 지내왔던 직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 경치 좋은데요? 낮에 왔으면 더 좋았을 걸...” “다들 어서오세요. 배고프시죠? 방금 밥도 다 지었으니, 슬슬 파티를 시작해볼까요?” 분홍색 앞치마를 두른 유키가 펜타곤 직원을 반기자, 여직원인 카오리와 미야자키는 자기들도 돕겠다며 여분의 앞치마를 두르기 시작했다. 초저녁의 캠핑장은 펜타곤 직원들로 인해 금세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좀 놀러 온 것 같네...” 허리에 양손을 올린 채 직원들을 지켜보던 중 하야시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나에게 다가 왔다. “후우... 잘 지내셨나요?” “뭐 그냥 그렇지. 요새는 어때?” “이사님 덕분에 아주 환장하죠. 드래곤 엠블렘 온라인. 예정대로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대륙 통일이 이루어지면 공개할 예정입니다.” “한창 바쁘겠구나...” “그러니 이제 그만 돌아오셔서 저희 좀 도와 주시겠습니까?” “또 그 소리냐?” “이사님께서 최초로 내신 기획이니, 그에 대한 마무리는 지으셔야죠.” “흐음. 마무리라... 어라? 그런데, 칸나 일행은 안왔어?” “... 이거 봐. 내가 또 이렇게 말돌릴 줄 알았지. 칸나씨는 조금 늦는다고 하네요. 방송 스케쥴 때문에...” “그래?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그 노래’ 들었어요.” “아... 그거 나도 들었지.” “역시 오랜만에 들어도 좋던데요? 츠바키씨의 목소리는...” “그러게 말이다.” “이사님. 혹시 츠바키씨 마지막 라이브 공연 때. 유저들에게 했던 첫 인삿말 기억하세요?” “응.. 물론이지.” 하야시의 말에 문득 그날의 기억을 떠올린 나는 근처 나무 울타리에 몸을 기댄채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작가의말 오늘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작스런 이야기 전개로 급 완결이 아니냐는 독자님들의 말씀이 있으신데.. 절대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와는 달리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내일 제사가 있어 연재가 조금 늦을 수 있습니다..;; 허리가 아직 깔끔히 나은게 아니라 물리치료를 병행하고 있는 상태이네요..;; 아무래도 신경 쪽이다보니 회복이 좀 더딘 듯합니다. 늦더라도 일일 연재는 반드시 지킬 테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 EP. 46 : 많은 시간이 흘러. (2) > 끝 ⓒ 손인성# < EP. 46 : 많은 시간이 흘러. (3) > & “몸은 좀 어때?” “그게, 이상할 정도로 가벼워요.” 밝은 미소와 함께 두 주먹을 쥐어 보이는 츠바키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아름답게 느껴졌다. 앞으로 한 시간 뒤, 제 1회 도쿄 게임쇼는 이틀간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폐회식만을 앞두고 있었다. 비록 민텐도는 참여 하지 않았지만, 도쿄 게임쇼는 ‘게임 쇼’ 라는 이름에 걸맞게 모든 컨텐츠가 게임에 집중 되어 있었던 만큼, 유저들에게도 그리고 업계인들에게도 뜻깊었던 행사로 입지를 굳히는데 성공했다. 총 88개의 게임 관련 부스가 마련되었지만, 사실 절반 가량은 고등학생들이나 대학생들로 이루어진 아마추어 동아리였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지도를 봐준 ‘일본 전자 전문학원’에서 출품한 작품이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별 기대하지 않고 소량으로 준비해온 500개의 타이틀이 정말로 순식간에 팔려나가는 바람에 따로 예약자 명단까지 수기로 받아야 했을 정도니까... 그들이 만든 게임의 이름은 ‘퀸 오브 하트’ 마치 SMK에서 만든 탑 오브 파이터 시리즈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 작품은 사실 미소녀 캐릭터를 이용한 패러디 격투 게임이었다. “억!! 귀여워!!” “저거 설마... 내가 없는 거리의 하세가와 미유키 아냐?” 전용 무기인 분홍색 핸드백을 마치 쌍절곤처럼 휘두르는 그녀의 모습에 지나가던 관람객들은 플레이영상을 보고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어라? 거기다 상대방은 신의 선물에 나왔던 카오리잖아?” 바이올린의 활을 검처럼 휘루르던 그녀는 상대방이 거리를 두자, 바이올린을 켜서 음표를 쏘아대었다. “억!! 뭐지? 이 정신나간 캐릭터 컨셉은? 개발자가 뽕이라도 맞은 거냐...” 더구나 펜타곤에 등장했던 히로인 뿐만 아니라, 폭스 소프트의 ‘두근두근 메모리얼’에 등장했던 히로인들까지 몽땅 출동하여 난투를 벌이는 대전 게임은 플레이 화면은 도저히 지갑을 열지 않고서는 버티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이거 혹시 파는건가요?” 게임쇼 첫 날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던 한 유저의 질문에 스즈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하지만 퀸 오브 하트는 윈도우 95용으로 제작된 게임인데, 혹시 가지고 계시나요?” “네. 있어요!! 얼마죠?” “저희 졸업 작품 타이틀을 구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타이틀 금액은 2000엔입니다.” “헉.. 겁나 싸다. 2장 주세요.” “죄송하지만, 저희 졸업작품은 인당 1장씩만 판매하고 있습니다.” “아... 하나는 밀봉으로 소장하려고 했는데, 아쉽다.” 잠시 후. 첫날 판매분으로 목표했던 250장의 타이틀이 약 20분만에 팔려나가자, 생각지도 못한 흥행에 흥분한 학생들이 펜타곤 부스로 몰려와 나를 찾았다. “서.. 선생님. 퀴... 퀸 오브 하트가!! 저희가 만든 퀸 오브 하트가!!!” 방금 드래곤 엠블렘의 컴퍼런스를 마치고 내려와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던 나는 제자들을 향해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 팔렸지?” “네? 아, 네!! 판매를 시작한지 30분도 채 안되서 다 팔렸어요.” 이번 도쿄 게임쇼에서 아마추어 팀에서 출품한 게임들 중에는 유난히도 슈팅 게임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다른 장르보다 만들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등장하는 적에 따라 일정한 탄막의 궤도만 설정해 준다면 나머지는 주인공 기체의 움직임만 셋팅해주면 끝이니까. 아무래도 단 기간 안에 출품작을 만들기 가장 쉬운 장르가 아닐수 없었다. 하지만, 일본 전자 전문 학원에서 출품한 ‘퀸 오브 하트’는 여태까지 아마추어 작품의 틀을 깨고 대전 액션 게임을 선보였다. 물론 학생들을 데리고 대전 격투 게임을 만드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아무리 저 해상도의 도트 그래픽이더라도, 플레이어가 납득할만한 모션 그래픽이 필요했고, 그것은 기술 하나당 3~4장의 프레임 레이트를 소요하는 고난이도 작업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것보다 더 학생들을 더욱 곤란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었으니... “선생님. 그런데 적 캐릭터의 A.I는 어떻게 설정해야하죠?” 흔히 격투 게임을 하다보면 컴퓨터가 다루는 적 캐릭터가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여러 가지 반응을 보일 때가 있다. 간단한 예로 스트리트 파이어 시리즈에 비교해 보자면, 플레이어가 쏘아낸 장풍을 막을 것이냐 피할 것이냐, 그 후에 플레이어에게 반격을 가할 것이냐, 아니면 뒤로 물러 설 것이냐... 이 가능성 중에 하나를 선택에 시시각각 쳐들어오는 플레이어의 변칙적인 행동에 대응 하는 A.I는 학생들 수준에 맞추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그렇다고 이 시대에 개발 중 테스트 플레이를 이용해 데이터 베이스를 만드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시기이기도 하고... 아무튼 그렇기에 나는 학생들에게 초기 대전 격투 게임에서 자주 이용했던 간단한 A.I 셋팅법을 알려주었다. 그것은 바로 타이머와 체력 게이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타이머요?” 처음 나의 설명을 듣고 난 학생들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 거렸다. 사실 초기 격투 게임의 행동 패턴은 바로 이 타이머에 의해 조정되었는데, 이 타이머에 따라 캐릭터는 어느 타이밍에서 공격적으로 치고 나갈지, 아니면 방어일변도를 취할지 패턴이 정해지게 된다. 모든 격투 게임을 돌이켜 보면 배틀이 시작되자마자, 플레이어에게 미친 듯이 달려드는 캐릭터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보통 대전이 시작하고 10초 동안은 플레이어 캐릭터와 거리를 벌리며 가급적 방어자세를 취하도록 개발자가 미리 셋팅을 해두기 때문이다. 개발중에 플레이 패턴에 대한 데이터 베이스를 축적하기 이전에는 이렇게 개발자들이 일일이 타이머와 남아있는 HP 게이지를 고려해 상황별로 패턴을 변화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까... 덕분에 전문 학원 학생들이 만든 퀸 오브 하트는 잠깐 보기에도 제법 그럴 듯한 격투 게임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거기다 내가 없는 거리와 신의 선물. 마지막으로 두근두근 메모리얼에 등장하는 후지사키 시오리까지 보너스 캐릭터로 참전한 탓에 플레이 캐릭터만 해도 8명에 달하니, 퀸 오브 하트의 인기는 어쩌면 이미 예정되어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펜타곤 캐릭터 말고도 폭스 소프트의 후지사키 시오리라는 캐릭터가 참전하는 바람에 저작권에 대해 걸고 넘어지지 않을까 하는 의견도 나왔지만... 우선 퀸 오브 하트는 전문 학원의 게임 개발과 학생들이 만든 아마추어 작품이었고 딱히 폭스 소프트의 이미지를 훼손시킨 것은 아니기에 일일이 토를 달거나 하진 않았다. 어느쪽 콘솔을 특별히 지향하는 것도 아닌 윈도우 전용 게임이라 그런지, 폭스 소프트의 관계자 역시 웃고 넘어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제자들을 칭찬해주었다. & 게임쇼가 개최된 둘째 날. 오후 제자들이 만든 퀸 오브 하트는 제 1회 도쿄 게임교에서 최고의 아마추어 게임 상을 받았다. 트로피를 손에 든채 방방 뛰어 다니던 학생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나는 잠시 후, 전문 학원 부스에서 제자들과 단체 사진 촬영을 마치고 나서야 펜타곤 부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후우... 정신이 없네..” 단아한 보랏빛 무대의상을 차려 입은 츠바키는 학생들에 의해 여기저기 구겨진 나의 슈트를 바라보며 킥킥 웃어대었다.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으시네요.” “내가 사실 좀 괜찮은 선생이었거든?” 그때 회장 곳곳에서 도쿄 게임쇼의 폐막을 알리는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대기실 밖에서 아쉬움에 가득찬 유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벌써 끝인가...?” “이런 행사는 일주일 내내 해도 좋은데...” “그러게 말야. 내년 여름까지 언제 기다리지?” “어제 드래곤 엠블렘 사러 행사 도중에 나가버린 탓에 이틀이 너무 짧게만 느껴지는 구나...” “드래곤 엠블렘도 굉장했지만, 너 캡코에서 신작 발표 영상 봤냐?” “아~ 그 좀비 나오는 거? 오프닝 진짜 대박이더라...” “그치? 난 그 웅크리고 있던 장면에서부터 설마 설마 했는데, 와~ 그 얼굴 반쯤 파먹은 영상 나왔을 때 기절하는 줄 알았다니까...” “이제 더 이상 게임 그래픽이 이 이상 좋아질 것 같지가 않더라.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장면을 구현시킬 수가 있지?” 제법 게임에 일가견이 있는 유저의 대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다들 즐거웠나 봐요. 대기실에 있는 동안 사람들의 탄성 소리만 몇 번을 들었는지...” 나를 향해 살포시 웃어보이는 츠바키를 향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곧 그 목소리가 환호로 바뀌게 되겠지?” “힘내 볼게요. 하지만 그전에 준혁씨에게 먼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음? 나한테?” “오늘 라이브 무대에서 제 병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요.” “뭐라고? 갑자기 왜? 의사 선생님도 점점 경과가 좋아지고 있다고 했잖아.” “비록 경과가 좋아진다 하더라도, 길어야 내년이겠죠. 어쩌면 오늘이 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팬들 앞에 서는 날일 수도 있으니까. 제 노래를 좋아해 주셨던 분들에게 아무런 인사없이 떠나기는 싫어요.” 나를 바라보는 츠바키의 눈빛에는 단호함이 서려있었다. 지금은 나의 그 어떤 말도 그녀에게는 그저 허울 좋은 설득일 뿐이라는 것을 츠바키는 이미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렇기에 결국 나는 작은 한숨과 함께 허심탄회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 알았어...” -이어서 도쿄 게임쇼의 폐막식을 축하하는 버추어 아이돌의 공연이 오다이바 해변 공원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관람객 여러분은 팜플렛을 확인하신뒤 공연 예정 시간에 맞춰 이동을 부탁드립니다.- “아, 이제 곧 시작이에요.” “그러게, 첫 번째 무대는 에리카 부터였나?” “맞아요. 지금쯤 준비가 다 끝날을 거에요.” “그럼 가볼까?” & 릿지레이서의 오프닝으로 보여준 차세대 콘솔의 화려한 영상미.. 그리고 깜짝 발매 소식으로 일대 소란을 일으켰던 드래곤 엠블렘과 함께 이번 행사에 깜짝 등장해 초미의 관심사를 일으킨 캡코의 ‘레지던트 몬스터’ 시리즈로 인해 ‘발렌타인 데이’ 이후 게임계에 호러물의 열풍이 다시 불어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이벤트의 끝을 알리는 지금 일전에 도쿄 게임쇼 관계자인 키시모토씨와 합의하에 준비한 버추어 아이돌의 콘서트가 시작되고 있었다. “역시 이벤트의 끝은 음악이지!!” 행사 종료와 함께 도쿄 빅사이트에서 빠져나온 유저들은 버추어 아이돌의 콘서트 소식에 해변 공원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12월 초순경이라 그런지 제법 쌀쌀한 날씨였지만, 게이머들에게 추위 따위는 상관 없었다. “에리카, 아즈사아아~!!!” “츠바키씨이이~~!!!” “셰릴님~~!!!” ... 츠바키와 함께 이벤트 장소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기 전. 각자 좋아하는 캐릭터의 이름을 외치며 바삐 달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나는 마치 회귀 전에 보았던 ‘28일 후’ 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 선생님!!” 뒤에서 들여온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제자들이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 얘들아~ 부스 정리 안하고 여긴 어떻게...” 따듯한 미소와 함께 두팔을 벌리며 그들에게 다가가던 중... “우왓!! 츠바키씨!!!” 패더급 복서 현란한 풋워크처럼 내 팔을 빠져 나간 학생들은 곧이어 츠바키의 주위에 몰려 들었다. “버추어 아이돌의 츠바키씨 맞죠!?” “오오!! 실물이야!! 실물!!” ... 쥐새끼처럼 내품을 빠져나간 학생들을 대신해 스즈코가 나에게 다가와 방긋 웃어보였다. “수고하셨어요. 선생님.” “그래, 너도 수고 많았다.” “선생님 말씀대로 방금전까지 여러 게임회사에서 졸업 후에 찾아오라며 명함을 잔뜩 줬어요.” “그래? 잘됐네. 다들 취직 걱정은 한시름 덜었구나?” “하지만, 모두와 상의 한 끝에 저희는 결국 선생님 말에 따르기로 했어요.” “내가 지원하는 새로운 서드 파티 회사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이거지?” “네~ 벌써 이름도 지었는 걸요?” “벌써? 뭐라고 지었는데?” “LEVEL.3 이요.” “······.” “게임 회사 제목치고 엄청 귀엽죠?” “보통 알피지 게임에서 그나마 사람 구실 하는 레벨이 아마 30정도로 알고 있는데? 언제 클려고 그러냐?” “선생님께서 계속 도와주시면 되죠~” 은근슬쩍 내 팔을 잡아당기며 보채는 스즈코를 향해 나는 피식 웃음을 던졌다. “선생님 저희도 이 버스타고 콘서트 보러가도 되요!?” “싫다면 너희가 안탈거냐? 너희 마음대로 해라.” “와아~!!” 잠시 후. 학생들과 함께 콘서트 회장에 내린 나는 츠바키를 대기실 쪽으로 올려보낸 뒤, 무대를 바라보았다. 밤하늘 아래 설치된 거대한 스크린 속에는 버추어 아이돌의 메인 타이틀이 띄워져 있었다. 어디서들 구해온 건지, 무대 앞에 모여든 유저들의 손에는 알록달록 빛나는 형광색 막대기가 들려있었는데, 잠시 후 콘서트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리자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로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이번 콘서트는 에리카의 무대를 시작으로 처음 버추어 아이돌의 싱글 음반이 공개 되었던 순서대로 진행이 되었는데, 다들 일전에 콘서트 배틀을 경험해봐서 그런지 콘서트는 굉장히 매끄럽게 진행 되었다. 셰릴의 압도적이었던 무대와 아즈사의 귀여움이 넘치는 무대를 지나 이윽고 마지막으로 츠바키의 차례에 오르자, 그녀는 차분한 표정으로 무대 위에 올랐다. “아아... 드디어 실물을 보는구나...” 지난 라이브 배틀 때 부득이 하게 스크린으로 인사했던 때와 달리 이번에야 말로 그녀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유저들은 기대에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조용히 마이크를 입가에 가져간 츠바키는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저희 네 사람 중 한 명이 탈락하게 됩니다.” 한껏 끌어오르던 콘서트 분위기가 단 번에 가라앉았다. 이미 도쿄 게임쇼의 행사전 미리 예고했던 그 날이 오고만 것이다. 지금까지의 데이터를 종합해보면 아무래도 다른 성우들에 비해 실수가 잦았고, 화제가 되지 못했던 콘노 아즈사의 탈락이 유력했지만, 방금 전까지 보여준 그녀의 무대는 가히 최고라 할 수 있었다. 아즈사를 응원하며 환호성을 지르던 사람들은 츠바키의 말에 섭섭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어서 나온 그녀의 말에 회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표정에 경악이 스쳤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은 바로 저입니다.” < EP. 46 : 많은 시간이 흘러. (3) > 끝 ⓒ 손인성# < EP. 46 : 많은 시간이 흘러. (4) > “그리고 그 한 사람은 바로 저입니다.” “으잉...!?” “뭐지? 어째서!! 츠바키라면 결코 탈락할 정도의 판매량은 아니었을텐데?” 탈락자가 자신이라고 밝힌 츠바키의 말에 콘서트를 즐기던 관람객들은 대혼란에 빠졌다. 하기사 그도 그럴 것이 네명의 히로인들 중에서 츠바키 타이틀의 판매량은 단일 판매로 50만장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입원으로 팬들과의 교류가 전무했던 그녀의 타이틀이 하프밀리언까지 달성할 줄은 나 역시 예상치 못했으니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츠바키의 노래에는 다른 이들과는 다른 독특한 컨셉이 있었는데, 고음을 넘나드는 가여린 목소리가 그 이유냐고 묻는다면 그 것은 아니다.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청순한 외모 역시 현재 그녀가 얻고 있는 인기를 납득시키기엔 무리가 있었다. 펜타곤의 마케팅팀 마저 갈피를 못잡게 만들었던 그녀가 팬들에게 이토록 사랑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어떤 캐릭터 보다 애절했던 그녀의 노래 가사에 있었다. ‘안아주세요’와 ‘만약에’ 라는 곡은 모두 ‘여성’의 입장에서 노래한 사랑 노래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하고픈 마음을 담은 ‘안아주세요’ 그리고 반대로 아직 사랑하지만, 결국엔 헤어져야만 하는 슬픔을 담아낸 ‘만약에’라는 곡은 게임이라는 카테고리를 넘어서 현재 여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1위에 올라와 있었다. 병원에서 라이브를 생중계했던 영상이 한 TV매체에 실리며 츠바키의 인기는 현재 하늘을 찌를 만큼 치솟아 있는 상태였다. 그런 그녀가 지금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팬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저희 버추어 아이돌은... 펜타곤 소프트에서 기획한 하나의 프로젝트 팀입니다. 이미 모두가 알고 계시는 펜타곤의 강준혁 디렉터는 저 역시 버추어 아이돌에 도전 하기 전부터 굉장히 좋아했던 게임 개발자였습니다.” “······.” “그가 만든 게임을 플레이할 때마다 어느 땐 화가 나기도 하고, 힘들게 클리어를 앞둔 나에게 어째서 이런 결말을 던져 주는지 짜증이 나기도 했어요. 하지만 언제나 게임을 클리어 하고 나면 아~ 하고 인정해버리고 마는 제가 있었습니다.” 무대위엔 어느새 세 사람의 성우가 올라와 함께 츠바키의 옆에 나란히 섰다. 츠바키는 살짝 고개를 돌려 자신의 동료들을 바라본 뒤 담담한 목소리로 인사를 이어 나갔다. “저도 이곳에 계신 여러분 들과 같이 펜타곤을 좋아하는 한 사람의 팬으로서 버추어 아이돌의 오디션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디션을 담당하는 심사위원 분들께 한가지 사실을 비밀로 하였습니다.” “비밀?” “뭐지...?” “뭔가 불길한데...” 여기 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츠바키는 무대 한쪽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잠시 그녀와 눈을 마주한 채로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츠바키 역시 나의 사인에 응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관객쪽으로 눈을 돌렸다. “저는 조금 특이한 병을 앓고 있습니다. 현대 의학으로선 아직 그 원인과 치료법조차 찾아내지 못한 병이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진 저 역시 어느 학교에나 있을 법한 그저 평범한 여학생이었습니다. 부활동으로 육상부를 선택했던 만큼 운동도 곧 잘했고, 성적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평범한 학생...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 활동에 전념하던 어느 날부터 조금 어지러움을 느끼곤했는데, 그래서인지 흔히 지나던 길에서 저도 모르게 몇 번인가 넘어지곤 했습니다. 처음엔 단순히 빈혈인 줄만 알았는데,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원에 실려와 있더군요.” “의사 선생님께서는 차츰 나아지길 기대하자고 하셨지만, 모두의 기대와는 달리 제 몸은 아주 조금씩이지만 확실히 병세가 짙어지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버추어 아이돌이라는 게임에서 캐릭터의 목소리를 대신할 성우를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평소에 노래부르는 것을 좋아하던 저는 병에 대한 사실을 숨기고 오디션을 보게 되었습니다. 결과는 합격...” “처음엔 무척이나 기뻤지만 조금 시간이 흐르자, 왠지 무서워졌습니다. 제 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합격을 취소하면 어쩌나... 만약에 성우를 맡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끝까지 마칠 수 있을까?”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관객들은 그녀의 이야기 속에 내포된 의미를 하나 둘씩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설마... 츠바키씨..” “에이... 아닐거야.. 말도 안 돼.” “그러지 마요..” 그리고 그런 그들의 반응에 츠바키는 어느때 보다 담담한 표정으로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저는 현재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팬들에게 자신의 병을 밝힌 츠바키의 표정은 굉장히 후련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과 반대로 관객들의 표정은 거대한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 맞은 사람 마냥 멍하니 그녀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이번 버추어 아이돌의 첫 번째 시즌에서 제가 탈락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아...” “오디션 합격 이후. 고향인 홋카이도에서 도쿄로 올라온 저는 가장 먼저 펜타곤 본사에 들러 버추어 아이돌의 디렉터인 강준혁씨를 찾았습니다. 처음 저의 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준혁씨 역시 많이 망설이셨지만, 저는 간곡한 부탁에 결국 사와노 츠바키라는 캐릭터의 연기를 저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참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캐릭터의 대사를 녹음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순간만큼은 제가 앓고 있는 병도 잊을 만큼. 즐겁게 작업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혹시 제 병이 저절로 나은 건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로요. 그렇기에 캐릭터 연기에 대한 교육을 받고, 그들의 노래를 녹음하던 기간은 지금까지 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비록 힘들었던 순간도 있었지만, 그때 마다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츠바키는 자신의 옆에 있는 칸나의 손을 꼭 잡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 저와 함께 달려와준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버추어 아이돌은 단지 스크린 속의 캐릭터 만이 전부가 아니에요. 그녀들의 목소리 하나 하나에는 지금 무대 위에 있는 저와 동료들의 피나는 노력과 땀이 서려 있어요. 그렇기에 내년 초에 데뷔를 앞두고 있는 또 다른 동료들에게도 여러분들께서 많이 좋아해 주셨으면 합니다. 비록 정식적으로 가수가 된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의 성원으로 멋진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가능하면 조금 더 일찍 이렇게 여러분들 앞에서 서고 싶었지만...” 말을 이어갈수록 점점 울먹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그녀를 지켜보던 나 역시 가슴 한 구석이 찡하게 아려왔다. 잠시 동안 무대 위에서 말을 멈춘 츠바키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여러분 앞에 이렇게 나서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녀의 인사와 함께 무대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그녀의 데뷔곡인 ‘안아주세요’의 전주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차가운 겨울 밤에 울려퍼지는 잔잔한 피아노 소리는 어느새 바람을 타고 해변 공원에 가득 울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무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음을 옮긴 나는 무대가 내려다 보이는 육교에 올라 담배에 불을 붙였다. 붉게 타오르는 필터 끝에서 나직히 피어오른 한 줄기의 담배 연기가 밤하늘에 흩어진 순간... “아, 눈이다...? 엄마. 눈 내려.” 육교에서 츠바키의 무대를 바라보던 꼬마아이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울려 무대 위에 흩날리는 눈꽃은 마치 작은 요정들처럼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와아... 저 누나 엄청 이쁘다.. 하얀 눈이 막 춤추는 것 같아...” 츠바키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던 아이의 목소리에 곁에 있던 엄마는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 그런데 저 누나가 지금 많이 아프데.” “정말? 아프면 빨리 주사 맞아야하는데...” 시린 겨울의 추위를 녹이는 아이의 따듯한 말 한마디에 나는 빙긋 웃음을 지으며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고맙다.. 아저씨가 저 누나랑 잘 아는 사이거든, 네가 한 그 말. 나중에 꼭 누나한테 전해줄게.” “응. 고마워요. 아저씨.” & 그 날 츠바키의 무대는 단지 게임 업계 뿐만 아니라, 일반 연예계에서도 크게 회자될 만큼 커다란 화제거리가 되었다. 물론 이전부터 어느 정도 화제가 되어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 요청이 있었지만, 도쿄 게임쇼의 콘서트 무대가 끝난 직후 츠바키를 비롯한 버추어 아이돌의 인기는 그야말로 전국을 들썩이게 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일본 최고의 가요 프로그램인 홍백가합전에서도 출연 제의가 왔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신은 그녀에게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콘서트를 마칠 때까지 동료들과 함께 모든 일정을 마친 츠바키는 무대에서 내려온 직 후 정신을 잃고 쓰러져 곧장 병원으로 향해야만 했다. 또 한 번 위험한 고비를 넘긴 그녀가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밤새도록 그녀의 곁을 지켜주었던 칸나와 동료들은 그녀의 상태를 듣고 오열할 수 밖에 없었다. 전보다 악화된 츠바키의 병세은 그녀에게서 가장 먼저 ‘목소리’를 가져갔기 때문이다. 삭... 삭삭삭... 조용한 병실에 울리는 소리.. 잠시 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나에게 츠바키는 자신이 써내려간 메시지를 담은 스케치 북을 보여주었다. -고마웠어요.- “그렇게 과거형으로 말하지마.” -나... 그 날 어땠어요?- “최고였어. 더할 나위 없이...” -정말요?- “그래...” -다행이다..- 잠시 스케치북을 내려 놓은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츠바키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 방울은 잠시 후 야윈 그녀의 볼을 타고 턱 끝에 맺혔다. -다시 한 번 무대 위에 오르고 싶은데, 이젠 힘들거 같아요.- “이런 거 너 답지 않아. 힘을 내라구.”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간호사가 들어왔다. “츠바키씨. 주사 맞을 시간이에요. 죄송하지만, 잠시 후 면회시간 종료입니다.” “아, 네. 츠바키. 그럼 가볼게. 내일 유키랑 같이 올테니까...” 그때 츠바키가 서둘러 스케치 북에 무언가를 써내려 갔다. -잠깐만요.- “응...?” 잠시 후 츠바키는 배게 및에 숨겨 두었던 카세트 테이프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이거 나 주는 거야?” 양쪽 입꼬리를 올리며 따스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츠바키는 위 아래로 살펴미 고개를 끄덕이곤 스케치 북 맨 앞장을 들어 보였다. -혼자 있을 때 들어요.- “아, 응... 그럴게.”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 안에 설치된 오디오 시스템을 이용해 츠바키의 테이프를 집어 넣자, 잠시 잡음이 울리며 그녀의 목소리가 차안에 울려 퍼졌다. “아~ 아아~ 이러면 녹음이 되는건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가 굉장히 오랜만이란 기분이 들었다. “빨간 불이 들어오면 녹음 되는거라던데? 아~!! 들어왔다~!!” 녹음기 사용법을 잘 모르는지 허둥대는 그녀의 귀여운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저기 잘 들리나요? 아~ 이렇게 말해도 나는 모르지... 하하.. 일단 잘 들릴 거라 생각하고 말할게요. 오늘은 도쿄 게임쇼가 열리기 이틀 전이에요. 방금 전에 유키 언니랑 함께 다녀가신 후 이렇게 준혁씨에게 살짝 메시지를 남깁니다. 음~ 사실 이걸 제대로 전해줄 수 있을지. 그것도 걱정이에요. 유키 언니가 괜한 오해를 할 수도 있으니까.” “사실 오늘 아침 의사 선생님께서 제가 콘서트에 나가는 걸 취소하는게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하셨어요. 지금 상태에선 굉장히 위험한 선택일 수도 있다고, 만약에 고비를 넘기더라도 콘서트로 인해 성대에 무리를 가하면 깨어나도 목소리를 잃어버릴 수도 있대요... 혹시라도 그런 일이 있을 것을 대비해 이렇게 당신에게 메시지를 남깁니다.” < EP. 46 : 많은 시간이 흘러. (4) > 끝 ⓒ 손인성# < EP. 46 : 많은 시간이 흘러. (5) > “사실 오늘 아침 의사 선생님께서 제가 콘서트에 나가는 걸 취소하는게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하셨어요. 지금 상태에선 굉장히 위험한 선택일 수도 있다고, 만약에 고비를 넘기더라도 콘서트로 인해 목에 심한 무리를 하면 깨어나도 목소리를 잃어버릴 수도 있대요...” 끼이이익!!! 테이프에 녹음된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도로변에 급히 차를 멈춰 세웠다. “그래서 혹시라도 더 늦기 전에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었어요.” 녹음 테이프 안에서의 츠바키의 목소리는 아주 조금의 불안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곧있을 콘서트에 대한 설레임으로 가득했던 그녀의 메시지는 마치 소풍을 앞둔 어린 아이의 목소리처럼 맑고 순수하게만 느껴졌다. “지금까지 너무나 고마웠어요. 준혁씨 그리고 데뷔까지 함께 고생했던 동료들에게도 감사하다는 말 전하고 싶네요. 덕분에 1995년은 저에게 있어 가장 잊지 못할 추억의 해가 될 것 같아요. 이 소중한 기억은... 훗날 이 세상에 저라는 존재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끝까지 간직하겠습니다.” 탁. 지이이이...... 재생이 끝난 스피커에선 아날로그 특유의 잡음 만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 츠바키의 팬들은 하루 빨리 그녀가 나아지길 바랬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TGS 콘서트를 마친 그녀는 하루의 대부분을 병실에서 지냈는데, 병세가 점점 더 악화되어 깨어 있을 때보단 약에 취해 잠들어 있을 때가 많았다. 이따금 유키와 함께 병원에 들러 잠들어 있는 츠바키를 바라볼때면, 비록 그녀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말리는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몰려오곤 했다. 이듬해인 1996년 1월. 새로운 한해를 축하하는 메시지를 담은 버추어 아이돌의 콘서트에서 휠체어를 타고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병마와 싸우는 도중에도 팬들을 향한 따듯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단 두 곡의 노래로 반년 만에 게이머 뿐만 아니라 온 국민에게 사랑 받은 그녀는 그 무대를 끝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츠바키 부모님의 요청으로 수술을 위해 독일로 넘어간 그녀는 온 세상이 핑크 빛으로 물든 4월의 어느 날. 불어오는 봄 바람을 맞으며 편히 잠들었다고 들었다. 그것은 도쿄 돔에서 콘서트를 열게 되었다는 칸나의 편지에 답장을 하고 난 다음 날이었다. 건강해진 모습으로 꼭 공연을 보러 가겠다던 약속의 말을 남긴 채... & “하아... 하아...” 새로운 동료와 함께 도쿄 돔에서 라이브 공연을 마친 칸나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객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츠바키와 노래를 부르는 성향이 거의 비슷했던 칸나는 그녀가 남긴 곡을 모두 이어 받아 현재 버추어 아이돌 중에선 가장 독보적인 판매량을 보이고 있었다. 가수들에게 있어 꿈의 무대라 칭해지는 무대인 도쿄 돔에서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친 그들을 향해 객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스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최고다!!” “한 곡 더~!! 한 곡 더~!!” 계속 되는 관객들의 앵콜 요청에 칸나는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냐하면 방금 끝마친 곡이 벌서 두 번째 앵콜송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회장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한쪽에서 무대를 지켜보던 나는 칸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공연내내 관객을 향해 미소지어보이던 그녀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조금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드려야 할거 같습니다.” 한창 그녀를 향해 열광하던 사람들은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입을 다물었다. “실은 작년 저희들과 함께 데뷔해 여러분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사와노 츠바키씨가 지난 4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뭐라구?” “허억... 치료를 위해 해외로 떠났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결국...” 츠바키가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에 비탄에 잠긴 객석을 향해 칸나는 금세 울음섞인 목소리로 뒤에 말을 이어 나갔다. “떠나기 전, 꼭... 다시 건강해져서 여러분 곁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이제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츠바키씨를 대신해... 저희가 대신 사과 드리겠습니다. 끝까지 츠바키씨를 사랑해 주신 여러분들에게 깊히 감사드립니다.” 무대 위에 멤버들이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팬들에게 인사를 올린 순간. 나는 들고 있던 무전기를 이용해 영상팀에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침묵에 빠진 고요한 무대 위에서 낮은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 설마...?” 거대한 스크린 속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곡을 받아 들고 기뻐하는 츠바키의 모습이 등장했다.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은 밝은 미소는 보는 이 마저 따라 웃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둘 만이 있는 텅빈 플렛폼에.. 침묵하고 있는 당신의 옆 얼굴이 신경쓰여.. 어른이 되어 각자의 시간을 보내며 소중한 것을 잃어가겠지만... 나 역시 그걸 알고 있지만.. 녹음실에서 작업하던 영상을 모두 모아 만든 뮤직 비디오 안에서 생전 그녀의 다양한 일상들이 남겨져 있었다. 칸나와 함께 하라주쿠 시내에서 크레페를 나눠 먹는 모습. 피곤에 지쳐 잠든 아즈사의 성우에게 이불을 덮어 주는 모습. 셰릴의 성우와 함께 신주쿠의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 너무나 일상적인 그녀의 모습에 무대 위에 있던 성우들의 얼굴엔 어느새 눈물 방울이 뚝뚝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비록 그녀와 함게 데뷔하지 못했지만, 연습 기간 동안 함께 고생했던 새로운 멤버들 역시 그녀와의 추억에 눈물을 흘리긴 마찬가지였다. 안아주세요. 내 몸이 부서질 정도로... 우리 앞에 어떠한 시련이 기다린다 하여도 이대로 언제까지나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영상의 끝 부분에서는 녹음 작업을 마치고 스튜디오 안에서 걸어나오는 그녀는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것만 같아 스크린을 바라보는 내내 꾹참아 내었던 내 눈에서도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츠바키. 녹음 작업이 힘들지는 않아?” “힘들어요. 하지만 그걸 참고 견뎌낼 만큼 너무나 재밌는 걸요. 특히나 셰릴의 성우분은 연기를 너무 잘해서 어느 때는 실제로 게임 속 캐릭터와 대화하는 듯한 기분이 들정도라니까요.” “그래. 다행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언젠가 이 영상을 보게될 팬들에게 한 마디 한다면?” “네? 이렇게 갑자기요?” “그냥 솔직하게 지금 기분 그대로 말하면 돼.” “어... 그러니까.. 음...” 당황한 표정의 그녀는 잠시 후 새빨개진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 삶이 다 할 때까지 당신을 위해 노래하고 싶습니다...” 마지막 멘트. 그것은 츠바키의 데뷔곡인 ‘안아주세요.’의 샘플 음반에서 마지막에 흘러 나온 대사였다. & “그제서야 그 말에 의미를 깨달은 관객들 덕분에 난리도 아니었죠..” “그랬었지...” “지금 생각해도 그때 츠바키씨의 영상을 담은 뮤직 비디오는 최고였다고 생각합니다.” “미처 팬들과 작별인사를 할 수도 없이 떠났으니까.” 그녀가 독일로 떠나기 전. 나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 적혀 있던 말. -만약에 제가 돌아 오지 못할 경우엔 준혁씨가 대신 팬들에게 전해주셨으면 해요. 제 마지막 인사... 해주실 수 있으시죠?- 당시에 나는 그녀의 편지를 받아든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달리 힘내라는 말 밖에는... 저녁 준비로 웃고 떠드는 직원들을 하야시와 함께 멀리서 바라보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드래곤 엠블렘 온라인은 어때? 힘들어 죽겠다느니 앓는 소리해도 거의 마무리 단계이지 않아?” “제작 기간만 올해로 8년입니다. 공들인 만큼 멋진 작품이 될거 같습니다.” “그래? 그거 기대 되는군.” 그러자 하야시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정식으로 한 번 플레이해보시겠습니까?”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하야시는 품안에서 한 장의 디스크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접속을 위한 프로토콜 주소는 안에 적어두었습니다.” “뭐야 이건? 벌써 개발을 끝낸거야?” “아뇨. 이건 이사님을 위해 저희가 준비한 드래곤 엠블렘 온라인의 또 다른 버전입니다.” “음? 날 위해?” 영문을 알 수 없는 하야시 말에 황당한 표정으로 되묻자, 그는 먼지가 묻은 바지를 털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쉬시고 돌아오세요. 저희에겐 아직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때 테이블 쪽에서 식사 준비중이던 카오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두 사람~!! 농땡이 그만 피우고 이리 와서 수저라도 놔요~!!” “네이~ 알겠습니다.” 카오리의 호통에 곧장 그녀에게로 달려가는 하야시를 바라보니, 젊은 시절 차갑고 날카로웠던 그의 성격이 많이 유해진 것을 느꼈다. 나는 하야시에게 건네받은 디스크를 살피며 입꼬리를 올렸다. 과연 내가 만들고 떠난 기획 안으로 대체 어떤 형식의 온라인 게임이 탄생했을지 가슴이 두근 거리기 시작했다. “준혁씨. 칸나도 거의 다 왔나 봐요~!!” “어, 알았어. 지금 갈게.” & 펜타곤 직원들과의 즐거웠던 만찬을 보낸 다음 날.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곤히 잠들어 있는 설현이를 침대에 눕히고, 유키와 함께 캠핑 도구를 정리했다. “아~ 정말 재밌었어요. 여러 사람 음식 준비하는게 조금 힘들긴했지만~” “미안, 다음엔 그냥 편하게 리조트 같은 곳으로 가자.” “괜찮아요. 힘들긴했지만, 캠핑이란 것도 나름 낭만이 있던데요? 모닥불 앞에서 사람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게 그렇게 즐거운 일인지 몰랐어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아, 먼저 씻을래요?” “아니, 잠깐 할 일이 있어서 이따가 씻을게. 피곤 할 텐데, 먼저 자도록 해.” “네. 그럼 저 먼저 씻을게요.” 정리를 끝내고 유키가 욕실로 향하자 나는 가방에서 한 장의 디스크를 꺼내 들었다. 사실 어제부터 이곳에 오는 내내 이 디스크에 무엇이 담긴 건지 매우 신경이 쓰였다. 하야시를 붙잡고 물어보다고 그냥 플레이 해보면 알게 된다는 말 뿐이었으니, 목 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직접 해볼 수밖에... 딸칵. 케이스 안에 들어 있던 광디스크를 끄집어 낸 나는 작년 여름 새로 출시된 컴플리트 라온 3에 집어 넣었다. 별도의 트레이 없이 디스크를 자동으로 빨아들인 콘솔은 잠시후 디스크 구동음과 함께 콘솔 하드 안에 어마어마한 용량을 인스톨 하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디스크 하나를 통째로 설치할 셈인가?” 이럴줄 알았으면 그냥 인스톨 걸어두고 씻고 나오는게 나을 뻔했군. 그때 설치 도중인 TV 화면에서 지금까지의 줄거리를 담은 간단한 일러스트가 흐르기 시작했다. 간단한 1편 내용과 더불어 2에서 이어지는 전란의 시대에서 인간과 마족의 치열한 전투를 그려낸 일러스트를 바라보던 나는 편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에피소드 2에서 부활한 성왕 크로엘은 특수한 조건에서 플레이어를 도와주는 성령으로 등장하였는데, 워낙에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 그를 대적하기 위해선 마왕 오시리스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지금에야 전세가 뒤집어졌긴 했지만, 한때 마족의 플레이어들의 단합으로 오시리스가 먼저 등장하는 바람에 인간의 영역을 대부분 빼앗겨 그대로 게임이 종료 될 뻔한 적도 있었지... 프롤로그에서는 플레이어들끼리 서로의 영토를 뺏고 빼앗은 역사까지 치밀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인스톨이 100%를 가리킨 순간. 나는 케이스 안에 들어 있던 개발자용 프로토콜을 입력한 뒤 온라인 세계에 접속을 시도했다. 그러자 곧 TV 화면 속에 한 남자가 장대한 초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음? 뭐야. 온라인 게임인 주제에 초기 캐릭터 설정은 따로 없는건가?” 아무것도 없는 휑한 초원에 홀로 선 남자를 조작하던 나는 아날로그 스틱을 이용해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니면 이것 조차 또 하나의 프롤로그 인가? 그런데 대체 뭘 어쩌란 거야? 길이라도 알려 줘야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답답함에 슬슬 짜증이 오르려던 찰나.. 게임 속 하늘이 점점 어두워 지더니 이윽고 사방이 어둠에 잠겼다. 그 순간. TV 스피커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왕이 인간의 손에 쓰러졌다. 이 세상이 다시 성스러운 빛으로 물들기 전에 너의 세계를 되찾아라.. ‘마신’이여.- 일반적인 게이머라면 이 말을 듣는 순간. 고개를 갸웃 거렸겠지만, 드래곤 엠블렘에 대해 최초의 기획 안을 내었던 나는 이 대사를 듣는 동시에 하야시 녀석의 자신 만만했던 표정과 함게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쉬시고 돌아오세요. 저희에겐 아직 당신이 필요합니다.’ “하야시... 이자식.. 제법인데?” < EP. 46 : 많은 시간이 흘러. (5) > 끝 ⓒ 손인성# < EP. 47 : 누군가의 초대. (1) > &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것은 ‘최초’의 온라인 게임이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은 ‘최고’의 온라인 게임이다.] 내부 회의에서 정식으로 드래곤 엠블렘 온라인의 개발을 시작하며 내민 슬로건. 각 개발 팀 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실력자들이 모여 시작한 온라인 프로젝트는 하야시의 말대로 장장 8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덕분에 초기 기획에서 큰 틀을 제외하곤 많은 부분에 변경이 이루어져 있었다. NPC와 몬스터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온라인 세계 안에서 나는 마치 여행자의 기분으로 세상을 누릴 수 있었다. 이곳에서 나의 캐릭터 설정은 성왕 크로엘의 목숨을 앗아간 마신. 하지만 겉보기에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NPC에게 말을 걸어도 딱히 의심하는 듯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여행자인가? 허허~ 그것 참 좋군. 확실히 마족들을 몰아내고 나선 세상이 참 살기 좋아졌다는 걸 느낀다네. 이렇게 외지인들이 하나 둘씩 늘어난다면 우리 마을도 금방 번성 할 수 있겠지.” 마신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존재에게 다시 이 세상을 어둠에 물들이라는 명령을 받은 나는 마을 촌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마을을 다녀간 한 점쟁이가 이런 말을 했지. 앞으로 당신과 같은 외지인들이 점점 늘어날 거라고 말야. 그들은 세상의 끝에서 마왕을 멸하고 돌아오는 존재들이니 잘 대해주라고 하더군.” 온라인 세계에서 플레이어는 NPC 들에게 ‘외지인’ 또는 ‘순례자’라 불리고 있었다. 드래곤 엠블렘의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마지막 통일을 이루는 지역은 마족의 본거지인 차원의 틈 안에 있었다. 이곳에서 플레이어들은 차원의 틈에서 마왕을 멸하고 이 세계로 돌아온 영웅들로 인식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친절한 촌장의 배려심 덕에 나는 당분간 이 마을에서 지내기로 했다. 마을 근처에 마련된 개척 지역에 작은 집은 세우는데에는 현실의 시간으로 약 8시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집을 올리는 동안 달리 할 일이 없던 나는 마을로 돌아와 인벤토리 안에 들어있는 가이드 북을 살폈다. 두 시간의 낮과 두시간의 밤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에는 둘러보면 돌수록 아주 작은 곳까지 신경을 쓴 흔적이 엿보였다. 해질녘 공터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설정이라던가... 저녁 준비로 인해 마을 곳곳의 굴뚝해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효과까지... 보면 볼수록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 연출들이 곳곳에 숨어 있는 느낌이었다. 마을 전경을 보기 위해 근처 언덕에 캐릭터를 앉혀 놓은 나는 TV 화면 속에 타오르는 석양을 바라보며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설마 이 정도까지 해낼 줄은 몰랐는데. 다들 고생이 많았겠네...” 하늘을 붉게 태우던 태양이 지평선으로 가라앉고 별빛이 반짝이는 어둠이 찾아오자, 평화로운 배경음악과 함께 창문마다 따스한 불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서재 밖에서 유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씨? 아직 안 씻었어요?” “아, 응. 이제 씻을 거야.” “운전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오늘은 일찍 주무세요.” “응. 그럴게.” 이대로 끝내기 아쉬웠지만, 집을 올리는데에 제법 시간이 걸릴테니 오늘은 이만 할까?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나는 컴플리트 라온을 종료 시키고 서재를 나섰다. & 다음 날. 유키와 설현이가 집을 비우자, 나는 곧장 하야시에게 전화를 들었다. 마치 나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웃음섞인 목소리의 하야시는 전화를 받자마자, 나에게 물었다. “어떠셨나요?” “어떠긴 뭐가 어때. 진짜 잘 만들었던데? 솔직히 어제 플레이하는 내내 감탄했다.” “이사님께 그런 칭찬을 듣다니, 8년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네요.” “그놈의 이사님 소리는...” “어쩌겠습니까. 호칭이 입에 붙어 버린 것을...” “아무튼 그래서 이제부터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뭘 어떻게 합니까. 신나게 부숴주시면 되요. 엉망진창으로. 당분간은 일반 RPG 게임처럼 스토리 모드를 즐긴다는 마음으로 임해주시면 됩니다. 하시는 김에 버그가 발견 되면 곧바로 연락 주세요. 아 참. 이사님께서 플레이해주신 데이터는 저희 개발팀에서도 중요한 참고가 되니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스토리 모드라...” “기획 단계부터 이사님은 유저들 스스로 온라인 세계를 통제할 수 있는 장치를 원하셨지 않습니까.” “물론 그랬지.” “그래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당분간 이사님께서 그 중간자 역할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결국 이런 식으로 날 끌어 들이는 거냐?” “조금 치사한 방법이지만, 저희들과의 옛 정을 생각해 넘어가 주세요. 플레이 하시다 보면 분명 이사님께서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그런 부분 역시 가이드 캐릭터를 통해 기탄 없이 전달해 주세요.” “가이드 캐릭터?” “어느 정도 레벨이 오르면 수하로 등장 할 것입니다. 그럼 전 바빠서 이만...” “어이, 하야시. 잠깐...” ... 끊어졌다. 이 녀석이 말로는 이사님 어쩌고 하면서 자기 할 말만 싹 해버리고 내뺐다 이거지? 지금쯤 수화기를 내려 놓은 채로 피식 거리고 있을 펜타곤 직원들을 떠올리니,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툭하고 끊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좋아. 이왕 이렇게 된거 시스템 하나 하나까지 철저하게 분석해서 피곤하게 만들어 주마.’ 가만... 그런데 이렇게 되면 완전 쟤네들의 노림수에 빠져드는 건 아닌가? 에라~ 모르겠다. 그래.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 나는 아침을 먹으려던 것도 잊은 채 곧장 서재로 달려가 컴플리트 라온을 켜고 온라인 세계에 접속을 시도했다. [당신의 집이 완성 되었습니다.] 마을에 접속 하자마자, 떠오른 메시지 창에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집이 세워진 개척 지대로 향했다. 하지만 막 마을 입구를 벗어나려던 찰나. 긴박한 BGM과 함께 공간에 균열이 일어나며 거대한 몬스터 하나가 튀어 나왔다. “크윽!! 인간놈들... 차원의 틈까지 쫓아오다니.” 아무래도 스토리상 차원의 틈에서 도망쳐 나온 마족인 듯 싶은데... “꺅!! 괴물이다!!” “어째서 마족이 여기에!?” 갑작스런 마족의 등장에 마을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 집 좀 보러가고 싶은데... “크크크. 이 곳이라면 귀찮게 덤벼오는 녀석들도 없겠다. 잘됐군. 전부 없애주마~!!” ... 너무 대사가 진부해. 전형적인 악당 대사잖아... 좀 더 임팩트 있는 대사 좀 하지. 인간보다 덩치가 3배는 되어 보이는 녀석은 자신을 피해 도망치는 인간을 향해 괴성을 지르던 중 나의 캐릭터와 눈이 마주쳤다. “넌 뭐냐? 왜 도망치지 않지. 가장 먼저 내 손에 죽고 싶은 것이냐?” “······.” 확실히 이벤트 대사는 손을 좀 보는게 좋겠군.. 그런데 이 녀석. 마족인 주제에 마신인 나를 못 알아 보는 건가? “피하세요. 여행자님~!! 위험합니다!!” 도리어 나를 걱정하며 소리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 나는 가이드 북에서 본대로 커맨드 창 하나를 선택했다. “죽어라!! 인간!!” “꺼져라.” 콰아아앙!! 이미 타고난 능력치가 어마어마한 마신에게 이깟 마족 하나 쯤은 커맨드 기술 하나로 끝장 낼 수 있었다. [하급 데몬을 물리쳤습니다. 3800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으음... 쉽네?” “오오!! 마족을 단방에 제압하다니. 역시 여행자님은 이 땅에서 마족을 몰아내신 용사님이셨군요.” 으아~!! 손발이 퇴화하는 듯한 기분이다. 대체 이 이벤트를 만든 시나리오 담당자가 누구냐...!!! & 그 후로 나는 집에 혼자 남는 시간엔 어김없이 드래곤 엠블렘 온라인에 접속을 시도했다. 처음 방문한 마을에서 갖가지 이벤트를 겪으며 때론 손발이 오그라드는 연출에 조금 짜증이 일기도 했지만, 시스템 적으론 굉장히 높은 완성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독특한 점이 있다면 하야시가 말했던 가이드 캐릭터였는데, 레벨 3까지 올린 순간 갑작스레 등장한 녀석은 마왕 오시리스가 인간들의 손에 패했다는 소식을 전한 뒤 나의 곁에서 하수인처럼 따라 다녔다. 아무도 없는 온라인 세계에서 녀석은 나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는데, 처음엔 나의 질문에 동문 서답만 해대더니, 어느 순간부터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해졌다. 마치 대화형 프로그램인 ‘심심이’처럼 나와 주고 받는 대화 내용을 이용해 데이터 베이스를 축적하고 그에 따라 어휘력이 점점 늘어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재밌는 것은 이 녀석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 만큼 일반 NPC도 데이터 베이스의 축적량에 따라 굉장히 자연스러운 화법으로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오늘은 어디로 사냥을 가볼까?” “마신이시여. 대체 언제까지 이 평화로 가득한 세계를 두고만 보실 작정입니까?” “왜? 느긋하고 좋잖아.” “저희는 마족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저희들의 신이십니다. 차원의 틈새에서 쓰러진 마왕 오시리스의 절규가 들이지 않으십니까?” “오시.. 리.. 아무튼 그 녀석 이름은 입에도 올리지마.” “마신이시여.” “그 얘기도 그만해!! 마을 사람들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정신없이 키보드를 두들기던 나는 가이드 캐릭터의 쩔쩔매는 대사에 피식 웃음을 던졌다. 플레이어의 대사와 행동에 따라 굉장히 유연하게 대처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누군가가 실제로 움직이는 플레이어 캐릭터인 것만 같았다. 덕분에 나는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면서도 녀석 덕분에 심심하지가 않았다. 때로는 전투의 보조를 맞춰 주기도 하고, 인적이 없는 외딴 섬에서는 모닥 불을 피운 채 게임안에서 날이 새도록 이야기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키와 설현이를 각각 방송국과 학교에 보내고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서재로 발을 옮기던 중 하야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식사는 제때 하시는 겁니까? 지난 10일 동안 플레이 시간이 어마어마 하신데요?” “내가 할 땐 또 확실하게 하는 성격이니까. 두고 봐. 조만간 가이드 녀석을 통해 보고서 잔뜩 올려줄테니까. 그나저나 그 녀석 진짜 물건이던데? 대체 어떻게 프로그래밍 한 거야? 가끔은 대화하다가 나도 깜짝 놀란다니까?” “아하하.. 그러네요. 이제 레벨 10이니 슬슬 저희가 준비한 가이드 캐릭터를 만나셨겠군요.” “음? 뭔 소리야. 레벨 10이라니. 레벨 3에 등장시켜 놓고선 요즘 바빠서 깜박 잊은거냐?” “네? 그럴리가요. 이사님도 제 성격 깐깐한거 아시지 않습니까? 가이드 캐릭터는 첫 번째 마을 이벤트가 모두 끝내고 레벨 10에서 등장하게 되어 있는데요?” “뭐라고? 하야시 잠깐 끊어 봐. 내가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 “아, 네. 알겠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 레벨 10에 튀어 나올 녀석이 레벨 3에 등장해서 나를 도와 주다니? 단순한 버그 일수도 있지만, 설마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를 하야시가 아닌데? 묘한 기분과 함께 서재로 들어온 나는 컴플리트 라온에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잠시 후. 타이틀 화면이 떠오르고 아이디와 비번을 이용해 개발자용 프로토콜로 접속을 시도한 순간. 삐삐삐삐삐삐삐삐. 어라...? 이게 뭔 소리지? TV에서 나는 소리는 아닌데? 서재안에서 들려오는 정체 불명의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운 나는 소리의 원인을 찾아 책상 서랍을 차례차례 열어 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소음의 원인인 물건 하나를 서랍안에서 조심스레 꺼내들었다. 그것은 나와함께 미래에서 함께 날아온 게임 & 워치였다. “뭐지? 이런 소리가 들린 적은 처음인데...” 고개를 갸웃 거리며 게임 & 워치의 경첩을 열자, 상단 디스플레이 쪽에 배터리가 떨어졌는지 희미한 문자가 떠올랐다. “초대에 응하시겠습니까?” < EP. 47 : 누군가의 초대. (1) > 끝 ⓒ 손인성# < EP. 47 : 누군가의 초대. (2) > “초대에 응하시겠습니까?” 뜬금없이 초대라니? 대체 누가? 어디로? 아니 애초에 이 모델 자체가 메시지 통신 기능이 되는 거였나? 뜬금없는 초대 메시지에 나는 게임 & 워치를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미래에서 처음 가져왔을 때랑 별반 다를게 없는 형태. 하지만 이렇게 서랍에서 꺼내어 본건 나 역시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CEO 게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업데이트는 없었는데? 아직 뭔가 더 남아 있는건가? ‘하지만 쌩뚱맞게 초대에 응하겠냐니. 뭐가 어떻게 되는지는 알려줘야지?’ 설마 여기서 YES 버튼을 누르면 원래 내가 살던 2015년으로 돌아가거나 그런건 아니겠지? 아직 약속 기한이 10년이나 남았는 걸... 나는 게임 & 워치를 손에 든채 그대로 주방으로 가 냉장고에서 차가운 물을 유리잔에 따랐다.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아마도 이 초대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분명 게임 가게의 할아버지일 것이다. 나에게 전할 말이 있으신거겠지?’ 하지만 그런 거라면 유키와의 결혼식 때처럼 홀연히 나타나시면 되실 것을 사람 불안하게 왜 이런 메시지를 보내신걸까? “아... 모르겠다.” 차가운 물을 벌컥 벌컥 삼킨 나는 좌우로 세차게 고개를 내저은 뒤 게임 & 워치를 집어 들었다. 일단 뭐가 됐든 이야기나 한번 들어보자. 예전부터 묻고 싶은 것도 있었으니. 하지만 게임 & 워치의 스크린을 본 나는 깜짝 놀라 삼켰던 물을 도로 뱉어 낼 뻔했다. [컴플리트 라온 3와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근처로 이동해주세요.] “무슨 블루투스도 아니고, 주변 기기까지 인식을 하는거냐?” 아무래도 초대 메시지는 컴플리트 라온이 있는 서재에서만 응할 수 있는 모양이었기에 하는수 없이 나는 게임 & 워치를 들고 서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초대에 응하시겠습니까?] 스크린에 떠오른 초대 메시지에 나는 잠시 컴플리트 라온과 게임 & 워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곤 잠시 후. 바보 같은 생각을 떠올린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타임 슬립이야 영화나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클리셰이긴 하지만, 적어도 이건 너무 판타지스럽잖아... 그때 어느새 나의 등뒤로 다가온 하루가 펄쩍 뛰어 오르며 내 허리를 툭쳤다. “이 자식 아침 먹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서 밥타령을... 응...?” “어억!! 누... 눌러버렸다!!!!!” [초대에 응하셨습니다. 접속을 시도합니다.] 접속!? 대체 어디로? 하지만 때는 늦었다. 쿠웅. 마치 중력이 늘어난 것처럼 온몸을 짓누르는 중압감에 TV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드래곤 엠블렘 온라인이 자동으로 실행되며 서버에 접속을 시도 하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부옇게 흐려진 시야는 마치 1983년도로 회귀 했을 때와 같았고, 잠시 후 서재안에 있던 모든 사물들이 조각조각 폴리곤화 되어 먼지처럼 흩날리기 시작했다. “냐아앙~~~~~” 나와 함께 서재에 있던 고양이 하루는 깜짝 놀라 방을 빠져 나가려 했지만, 포동포동 살이 오른 꼬리부터 한줌의 흙처럼 내 주위를 맴돌았다. 순식간에 폴리곤 소용돌이에 갖혀 버린 나는 서둘러 빠져나갈 곳을 찾았지만, 그 순간 내 발 밑이 푹 꺼지며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으아아아~!!!!” & “주군이시여...” “으음...?” “주군이시여...” “뭐지...?” “이미 해가 중천입니다. 이제 그만 일어나시지요.” 아니. 잠깐만 이 목소리는? 왠지 감고 있는 눈을 뜨기가 무서워진다. “설마. 아누비스... 너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불안한 마음에 한쪽 눈을 살짝 떠보자, 그럭저럭 봐줄만한 텍스쳐가 입혀진 미남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으아~!! 진짜 와버렸어!!” “주, 주군이시여.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망할... 이건 가도 너무 가버렸잖아~!! 완전 판타지라고!!” “냐앙...” 음? 익숙한 울음소리에 고개를 돌린 나는 한심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고양이 하루와 눈이 마주쳤다. 현실에서 유키의 정성어린 냥빨(냥이빨래)과 털말림으로 항상 뽀송함을 유지하던 녀석의 털은 각진 폴리곤 덩어리로 바뀌어 있었다. “너도 끌려 와 버린거냐...?” “미천한 축생이 감히 마신을 바라보는 그 한심한 눈은 무엇이냐!!” 촤앙!! “워어어!!! 안 돼!! 비록 게임이라도 그건 안 돼!! 이 녀석은 우리 가족이나 다름 없다고!!” “가족...?” 난데없이 검부터 뽑아드는 아누비스를 뜯어말린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자, 이곳은 내가 어젯 밤 세이브를 해두었던 이벤트 던전 앞이었다. 밤새 타오른 모닥불은 이미 새하얀 재로 가득했고, 나의 충신 아누비스는 던전 탐험을 대비해 장비를 손보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나는 지끈 거리는 관자놀이를 꾸욱 누르며 내 옆에서 하품과 동시에 식빵자세를 취하는 하루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야, 인마. 넌 이 상황에 잠이 오냐?” “니양...” 올해로 11살인 이 녀석도 인간으로 따지면 중년에 접어든 나이였다. 어릴땐 유키와 나 사이를 오가며 재롱을 피우던 아깽이였는데, 어느새 하루종일 먹고 잠만 자는 훌륭한 돼냥이가 되어 있었다. “준비는 모두 마쳤습니다. 던전으로 출발하시겠습니까?” “그... 그래. 가자.” 나의 충실한 종이자, 가이드 캐릭터인 ‘아누비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춤에 검을 꽂아 넣었다. 이집트 신화에서 죽은자의 영혼을 배웅한다는 사신. 아누비스.. 서열 높은 마족이라면 그 정도 이름은 붙여주는게 좋을 듯 싶어 얼마 전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본인은 제법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오늘 던전은 전보다 조금 힘들 듯 합니다. 이곳은 베히모스라는 거미형 보스 몬스터가 서식하는 곳인데, 거미줄에 한번 휘감기면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들다고 하니, 부디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어? 아, 그래.” “그런데 아까부터 왜 주변을 자꾸 둘러보시는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응? 내가 그랬었나?” “아니시라면 제 성격이 너무 예민한 탓이겠지요. 죄송합니다. 주군이시여.” 나는 먼저 걸음을 옮기는 아누비스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러자 바위 위에서 햇살을 받으며 식빵자세를 취하고 있던 하루는 마치 잘 다녀오라는 것 마냥 길게 울음 소리를 내었다. “인마. 너도 따라 와.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데, 너 찾으러 내가 여기까지 와야겠냐.” 대충 하루를 집어 들어 한쪽 어깨에 걸쳐두자, 발톱을 세운 녀석이 등을 긁어 대었다. 팍팍팍팍!!! 요란한 소리에 귀가 거슬렸지만, 하루의 발톱 공격은 나에게 아무런 해가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에휴... 어제 마을을 떠날 때, 거금들여 가죽 갑옷을 입어두길 잘했군.” 아누비스는 아까부터 건방진 하루 녀석이 신경이 쓰이는지 가는 눈으로 흘겨보았다. “너무 그러지마. 이 녀석 나름의 애정 표현이니까.” “알겠습니다.” ...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말이야. 초대에 응했으면 당연히 마중을 나와줘야하는거 아닌가? 부르기만 해놓고 이게 뭐하는 짓이야? 곧 있으면 아누비스랑 던전에 들어가야 할 판인데. 날 부른 할아버지는 대체 어디 계신거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계속 해서 주위를 둘러보던 중, 결국 내 눈 앞에 한 눈에 보기에도 굉장히 기분 나빠보이는 해골 모양의 동굴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 결국 도착해 버렸어...” “주군이시여. 무슨 문제라도?” “아니다. 그냥 혼잣말이다.” 잠시 후. 던전에 발을 들이자, 축축한 습기와 함께 고기 썩은내가 코끝을 자극했다. ‘가상현실이라고 말만 들었지. 이런식으로 체험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비록 군데 군데 그래픽이 깨져 있거나 저질 텍스쳐가 보이긴 했지만, 던전 구성 만큼은 굉장히 깔끔하게 배치 되어 있었다. 앞장서서 걸음을 옮기던 아누비스는 갑작스런 전투에 대비할 수 있도록 검을 뽑아 들었고, 다른 한 손에는 횃불을 움켜 쥐었다. 사실 사기 캐릭터나 마찬가지인 마신은 검술보다 흑마법의 위력이 제법 괜찮았기에 나는 하루를 품에 안은채 천천히 아누비스의 뒤를 따랐다. 스스스스....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분 나쁜 소리. 하지만 난 이 소리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게임을 플레이 하면서 몇 번인가 들어본 소리였으니까... 그것은 한 무리의 거미들이 바닥을 기어다니는 소리였다. “곧 녀석들과 맞붙을 듯 합니다. 마신이시여 뒤로 물러나 계시면 소인이 처리하겠습니다.” 스스스스!!! 파앗!! 아누비스의 말이 끝나자 마자 사방에서 몰려오는 거대한 거미의 모습에 전신에 소름이 쫙 끼쳤다. 이래선 뒤로 물러 나고 말 것도 없잖아!! “태워라!!” 다황한 기색이 묻어난 나의 목소리가 좁은 통로에 울리자, 순간 내 몸안에서 무언가가 훅하고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화아아악!!! “끼이!!! 끼기기긱.....” 뜨거운 불길에 몸을 발랑 뒤집으며 8개의 다리를 오므리는 거미들의 모습에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지만, 끝없이 밀려 오는 거미들 때문에라도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태워라!!! 태워!!!” 후와아아악!!! “끼이이익!!!” 숯처럼 검게 그을린 거미들은 전신을 바들 거리며 차례차례 무너져 내렸다. “피래미를 상대로 너무나 큰힘을 쏟으시는 건 아니신지. 베히모스를 상대할 때까지 힘을 아껴두셔야 합니다.” 첫 번째 전투가 끝나고 MP(Magic Point)를 채우기 위해 쓰디쓴 풀떼기를 씹어 삼키던 나는 또 다시 잠드려는 고양이 하루를 집어들어 내 어깨에 걸쳤다. ‘이왕 게임 속까지 들어온거 한번 즐겨보라 이건가?’ 나는 더 이상 할아버지를 찾는 걸 포기하고 일단 던전을 클리어 하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다행히 게임 속에 들어왔어도 전투 자체가 그렇게 어려운 편은 아니었기에 평점심을 되찾은 나는 아누비스를 서포트 하며 빠른 속도로 던전을 클리어 해나가기 시작했다. 아누비스는 검에 묻어난 끈적한 채액을 닦아내며 얼마나 더 진행했을까? 보스전을 앞두고 세이브 포인트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여기 들어온지 얼마나 됐지?” “글쎄요. 마신께서 너무 늦게 일어난 탓에 오후 쯤 들어왔으니, 지금쯤 초저녁이 되었겠군요.” 초저녁이라... 그럼 현실에선 플레이하고 두시간 정도가 지났다는 이야긴가. 할아버지를 만나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면 어떻게든 빨리 클리어 해야겠는 걸... 대충 정리를 끝내고 하루를 안아든채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누비스가 내 앞에 섰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후딱 끝내버리자고.” “맡겨 두십시오.” & “젠장!! 아누비스. 야, 인마!! 너한테 맡겨 두라며!!!”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를 가진 거미. 베히모스의 일격에 처참하게 나가 떨어진 아누비스는 움직이질 않았다. “우와악!!” 한번 휘두를 때마다 풍압에 온몸이 뜯겨져 나가는 듯한 착각 마저든 나는 재빨리 고양이 하루를 내던지고 거미를 노려보며 외쳤다. “태워라!!!” 화르륵!! 콰아아앙!! 제법 묵직한 불기둥이 치솟으며 베히모스에게 데미지를 입혔지만, 뭐악 덩치가 커서일까? 잠시 공격의 흐름을 멈추게 했을 뿐 치명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으아아아~!!!” 퍼엉~!! 마치 전쟁 영화에서 폭격이라도 얻어 맞은 것처럼 깊게 패인 땅을 해집으며 달리던 나는 순이 턱까지 차오른 상태에서 뒤를 돌아 보며 외쳤다. “모조리 태워버려라!!” 쿠와아아앙!! 4개의 불기둥이 나와 베히모스 사이를 가로 막자 나는 재빨리 아누비스에게 달려갔다. “주... 주군이시여.” 자신을 향해 서둘러 달려오는 내 모습에 감동 받았는지. 훈훈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를 향해 나는... 거센 발길질을 날렸다. 퍼억!! “커헉!!!” “이 자식 정신 차리고 있었네. 빨리 일어나서 안 싸워? 이게 어디서 농땡이를..” 슈슉!! 콰아아앙!! “우와아악!!” 녀석은 우리와 함게 죽기로 작정했는지 8개의 다리를 정신 없이 휘두르며 천장을 무너 뜨리기 시작했다. “쟤 좀 어떻게 해 봐!!” “잠시만 시간을 벌어 주신 다면 소인의 필살검을 보여 드리겠....” 퍼어억!! “으아아아아~~” ... 쟤가 원래 저런 허접한 캐릭터였나...? 이름을 다시 지어줘야겠는데?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나를 향해 날아오는 베히모스의 날카로운 공격에 이제는 아누비스의 뒤를 따라 날아오를 차례란 것을 직감했다. “젠장!! 설마 겁나 아프고 그런건 아니겠지!?” 슈우우우욱!!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두 눈을 꼭 감았다. 공포심에 잔뜩 몸에 힘을 주었으나 금방이라도 나를 후려 갈길 것만 같았던 베히모스의 공격은 아무리 기다려도 충격이 오지 않았다. “허허허. 이제 그만 눈 좀 뜨지 그러나?” “어...?” 갑자기 들려온 노인의 목소리에 슬며시 눈을 뜨자, 나는 고양이 하루와 함께 별빛이 반짝이는 마을 언덕에 앉아 있었다. “어라? 여긴...” “그래? 자네가 만든 세계에 이렇게 들어와 있으니 기분이 어떤가?” “네? 아니.. 그게 저는 대체..” 갑자기 게임 속에 들어온 것도 황당한데, 어쩌 좀 익숙해 질려는 찰나에 이렇게 노인을 보게 되니 황당한 기분 마저 들었다. “색다른 경험이었지?” 그제서야 얼추 사태를 파악한 나는 식은 땀을 닦아내며 바닥에 주저 앉았다. “아~ 십년 감수했습니다. 하하...” “그래도 제법 잘 적응 하던 걸?” “어르신. 장난이 너무 심하셨습니다. 진짜 죽는 줄알았다구요.” “에끼. 자네가 죽으면 자네 와이프랑 딸은 어쩌라구. 내가 그렇게 까지 하겠나?” “하하... 아이고.. 다리에 힘이 안들어가네요. 그냥 이상태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어르신.” “녀석. 아직도 예의는 바르구나... 하긴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 눈 주위와 입가에 잔뜩 주름을 패이며 웃어보이는 어르신은 2015년에 만났던 그때와 별반 다를게 없어보였다. “아니, 그런데 대체 무슨 일로 이런 황당한 일을 벌이신 겁니까?” “음.. 자네라면 좋아해 줄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군.” “그런게 아니라.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아직 2015년이 된 것도 아닌데...” 그러자 노인은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자네. 이제 게임 만드는 것은 그만 두었나?” < EP. 47 : 누군가의 초대. (2) > 끝 ⓒ 손인성# < EP. 47 : 누군가의 초대. (3) > “자네. 이제 게임 만드는 것은 그만 두었나?” 노인의 질문에 나는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침묵이 불러오는 고요한 정적 속에서 어디선가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냥?” 벌레 우는 소리에 쫑긋 귀를 세우는 하루의 등을 쓰다듬던 나는 어둠이 내린 마을을 내려다보며 노인의 질문에 답했다. “게임 개발이 싫어지거나, 아이디어 자체에 한계를 느낀 것은 아닙니다.” “음...? 그렇다면 어째서?” “제가 만든 게임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0여년 전 자네가 만들었던 버추어 아이돌이라는 게임 말인가?” “역시 알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그건 자네 탓이 아니지 않는가?” 물론 노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도쿄돔 공연 이후 츠바키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일주일 동안 일본 전역에서 7건의 자살 사건이 일어났다. 그중 2건은 미수에 그쳤지만, 나머지 5건의 사고는 막을 수가 없었다. 안타까운 사고였고, 그것이 펜타곤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나는 츠바키를 받아들인 순간부터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어느정도 예측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에 관한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나름 팬들과의 작별을 위한 이벤트를 준비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 일으킨 꼴이 되었다. 도쿄돔 공연에 참석한 팬들에게 선공개한 그녀의 뮤직 비디오는 곧이어 PC 통신과 인터넷을 타고 추모 물결이 일었다. 비록 그녀가 떠나고 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팬들을 위해 도쿄의 우에노 공원에서 그녀를 위한 작은 추모식이 열렸다. 공식적으론 한 달간 추모식을 거행할 예정이었지만, 워낙에 방문자가 많아 추모식이 일주일 연장 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추모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겐 도쿄돔에서 공개 되었던 뮤직비디오가 담긴 CD를 무상으로 배포해 주었는데, 아무리 CD를 찍어내어도 당일 수량이 모자라 추모기간 내내 상당히 고생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추모식이 종료된 후에 그녀는 위패는 고향이었던 홋카이도의 어느 절에 모셔졌는데, 지금도 간간히 추모객들이 방문할 만큼 아직도 그녀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고 들었다.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때 그녀를 받아들이는 것이 옳았던 선택이었는지.” “그렇게 후회 되는가?” “후회라기보단 조금 더 나은 방향은 없었을까 고민한 적은 있었죠. 만약에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랄까?? 하지만 게임 & 워치를 아무리 살펴봐도 두 번의 기회는 없더군요.” “그렇게 몇 번이나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이미 기적이 아니지. 기적이란 아무리 간절한 사람에게도 단 한번의 기회가 올까 말까 한 것이거든?” 잔잔한 미소와 함께 나를 바라보는 노인의 눈에는 세월을 알 수 없는 깊이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 눈을 통해 그동안 어렴풋이 느껴왔던 노인에 대한 의문이 조금씩 풀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구나. 역시 이 분은... “자네. 일반적인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랑 비교해 게임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함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글쎄요. 아무래도 유저가 간접적으로나마 이야기를 체험해 볼 수 있다는 것 아닐까요?” “그렇지. 스스로 자신의 캐릭터를 움직여 디렉터가 만들어둔 스토리 라인을 쭈욱 따라가는 RPG가 일반적인 게임의 형태이지.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일세. 하나의 세계를 통 째로 창조한다는 점이지.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바위 라던가. 저 앞에 보이는 어두운 숲 속. 그안에 풀 한포기까지 아예 가상의 공간을 사실 적으로 구현해 낸다는 것이야. 그것은 단지 상상력을 토대로 하는 소설과는 조금 다른 형태라네.” “아...” “한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 절대적인 세계관.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직원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그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야. 마치 예전에 내가 그랬듯이...” “노인께서도 게임을 만들어 보셨단 말씀입니까?” “물론.” “그것은 현재 자네의 상상력을 훨씬 뛰어넘는 그 무언가 였지.” “대체 그 게임이 어떤 게임입니까” 나의 질문에 노인은 잠시 말을 아끼며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가장 처음으로 프로그램 한 작품은... ‘인생(人生)’ 이라네.” “······.” 역시 내 생각대로 이 분은 단지 게임이란 영역만을 관장하는 신(神)이 아니었어. 그보다 훨씬 더 멀고먼 최상위의 존재다. 하지만 그런 존재가 대체 어째서 날? “하지만 아무리 나라도 혼자서 수십억에 달하는 인간의 일생을 창조해내는 건 불가능 했지.” “그럼 어떤 방식으로...?” “자네들 같은 경우에 게임을 보다 쉽게 만들기 위해 가장 먼저 무얼 만드는가?” “설마 지금 게임 엔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게임 엔진이란 소위 그래픽 엔진과 동일시 하는 사람이 있는데, 사실 게임 엔진은 그래픽을 포함해 물리 효과, 사운드, 인공지능, 시나리오, 애니메이션과 같은 효과적인 게임 개발에 필요한 모든 것은 한대 모아둔 일종의 ‘도구 상자’ 와도 같은 것이다. 보다 쉽게 설명하자면 요리사가 요리를 하기위해 재료와 조리 도구를 준비하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맞아. 보다 효율적이고, 수십 억의 인구가 제 각기 다른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선 그 장치가 꼭 필요했다네. 가끔 우수한 두뇌를 타고 태어나는 자들에게 어느 정도 정체가 발각되긴 했지만, 자네도 한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야... 아카식 레코드(Akashic Records) 라고... 동양 쪽에선 삼라만상(森羅萬象)이라 하던가?” 히이익!!! 그게 실제로 존재하는 거였냐!? 너무나 충격적인 폭탄 발언에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은 몰랐다. 노인은 그런 나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던지며 품안에서 연초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나머진 쉬웠지. 아카식 레코드는 다양한 캐릭터의 운명을 끝도 없이 쏟아내는 거대한 연산장치나 다름 없으니까. 물론 그 안에서도 기적적인 확률로 끗발나는 운명을 타고 태어나는 이들이 있어. 구세주.. 혹은 성자라 불리우는 이들이 바로 그런 이들이지.” “그러니까 그 말씀은... 인생이란 아카식 레코드에서 뽑기로 터져나오는 확률 게임이라는 말씀이십니까...?” “비약이 심하지만, 뭐 반박은 못하겠군. 원래 불규칙 속에서 질서가 확립되는 것이니까. 모든 이가 똑같은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 보다 소름끼치는 삶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래도 그건...” “왜? 너무 허무하게 느껴지나? 그럼 자네가 만드는 게임 속 캐릭터들은 어떤가? 게임의 스토리를 만들어 내며 그 속에서 살아갈 주인공과 악역들의 운명. 그들 역시 자네의 머릿속에서 이미 확정 되어 나온 형태가 아니던가?” “······.” “그것에 비하면 아카식은 훌륭한 시스템이지... 적어도 탄생과 함께 그 결말을 확정 지어 버리진 않거든. 왜냐하면 운명을 만들어 내는 아카식 시스템조차도 예측이 불가능한 영역이 있으니까.” “예측 불가능한 영역? 그게 뭡니까?” “의지(意志)라는 영역이라네. 의지란 단순히 ‘희망’이나 ‘꿈’ 같은 불확정 요소가 아냐. 자신이 타고난 운명의 형태 마저 바꿔 버릴 정도로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지.” “어르신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어렴풋이나마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1983년으로 회귀한 것에 대해선 어떤 연관이 있는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니. 그것이야 말로 자네 의지가 빚어낸 기적 같은 순간이라 할 수 있지.” “네? 아니 전 게임 & 워치가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인데...” “하하하~ 바로 그거라네. 자네가 게임 & 워치에서 선택한 회귀 방식은 아카식 시스템 조차 예상치 못했던 ‘버그’였으니까.” “네? 버그라구요?” 버그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두눈이 저절로 찌푸려지느 걸 보니, 이것도 어지간한 직업병인 모양이다. 하지만 노인은 너털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보통은 말야. 한 사람의 인생을 되돌려 준다면. 자신이 과거에 실수를 저질렀던 기점이라던가, 아니면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자신의 인생을 다시 설계하기 위해 애를 쓰지. 헌데 자네는 어땠나?” “아...!?” “자네는 1983년이란 시대에 아예 새로운 인간 하나를 만들어 버렸지. 마치 온라인 게임처럼 말이야. 그로인해 자네는 어린 시절의 자네와 조우하는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었지. 그리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 그 안에서 설현이라는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 시킬 수도 있었고 말이야. 자네로부터 시작되는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아카식 시스템 역시 조금 애를 먹긴했지만...” 회귀 후 현재까지 살아오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의문들이 어르신과의 대화를 통해 조금씩 풀려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1983년부터 살아온 저의 인생은 어르신께서 만든 아카식 시스템에서 완전히 벗어나 버린 것이군요.”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나름 즐거웠다네. 자신의 성공 만을 목표로 두지 않고, 여러 사람과 함께 결과를 창출해 게이머들을 열광하게 하는 자네의 리더쉽을 지켜보며 희열을 느끼곤했지. 나에게 있어 유희란 자네 같은 사람을 지켜보는 것 정도니까.” “그렇다면 최근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저를 보며 많이 실망하셨겠군요.” “딱히 그렇지도 않아. 자네가 느끼는 10년과 내가 느끼는 10년은 아주 큰 차이가 있거든? 굳이 자네가 아니더라도 내가 보살피고 지켜봐야할 자들이 수두룩하니까. 마치 외장 하드에 드라마와 영화 수백편을 넣어두고 간간히 생각날 때마다 꺼내보는 격이랄까?” “어째 비유를 하면 하실수록 저라는 존재가 한도 끝도없이 작아지는 느낌입니다.” “허허허~ 미안하군. 하지만 이것만큼은 알아두게. 내가 이렇게까지 따로 불러내어 긴 시간을 보내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라는 것을 말이야.” “사실은 저도 그 점이 궁금했습니다. 어째서 지금 저를 불러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아차차...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못했군.” “가장 중요한 이야기라면?” “그건 바로 자네가 만들어낸 이 세계에 대해서라네.” “드래곤 엠블렘에 대해서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지난 며칠동안 자네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이 세계를 돌아 다니며 어떤 기분을 느꼈나?” “저에게 있어선 모든 것들이 감동이기만 한 세상이긴 하지만...” “하지만...?” “조금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디테일을 살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부분도 있고...” “자네의 결혼식 때도 이야기 했지만, 자네가 만든 드래곤 엠블렘이란 게임에 대해 나 역시 굉장히 흥미를 가지고 있다네. 그러고보니 언제였더라...? 드래곤 엠블렘을 구하고 싶다는 초월적인 의지로 나를 만났던 한 소년이 있었지. 그 의지에 감탄해 나는 그 녀석을 자네와는 정 반대인 미래로 보낼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 그런데 말야. 그 녀석이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 알나?” “그... 글쎄요?” “드래곤 엠블렘 해야한다고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달려가더군.” “아..하하.. 설마요..” “아마 그때부터 였을거야. 자네가 만들어낸 드래곤 엠블렘이라는 세계에 제법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 이곳은 가상공간에 불과하지만 수많은 인간들의 탐욕과 고뇌가 집약된 곳이기도 하니까. 아마 정식으로 오픈하게 되면 더 많은 감정들이 모여들 것이야. 그렇게 하나의 세계관을 둘러싸고 의지를 담은 수많은 감정들이 폭발하는 순간. 그 세상은 먼 우주의 별이 되지...” “제가 생각했던 세계가 실제로 우주에 존재하게 된다구요?” “자네의 상상력은 아직은 하나의 별이 되기엔 부족하지만, 어느 절대 영역을 뛰어넘은 훌륭한 상상력은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 판타지 세계의 기틀을 만들어낸 J.R.R 톨킨과도 같이 말야..” 내가 만들어낸 세상이 실체가 되는 세상이라... “어때 구미가 당기나? 하지만 그러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기반을 단단히 다져야 할 것이야.” “몇번이 되어서라도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도 도전하겠습니다. 누구나 플레이 해보면 깜짝 놀랄만한 온라인 게임을 꼭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기대하지. 그럼 이제 원래 세계로 돌아가 보게나.” 노인과의 인사를 마친 나는 그의 옆에 당당히 서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 “······.” “자네 지금 뭐하나?” “돌려 보내 주신다면서요.” “Log OUT 모르나? 이건 게임이잖아. 연결은 자네가 끊어야지.” “아... 그렇구나.” “이런 이런... 쯧쯧.”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조금 있으면 설현이 학교에 마중 나갈 시간이라.” “그래 조심히 가게나.” “아, 저기 어르신...” “음?” “지금처럼 이 공간에 또 들어와도 괜찮을까요? 여행하듯 이 세상을 살피며 하나씩 고쳐나가고 싶습니다.” “허허~ 자네가 만든 세상이니, 마음대로 들락거리게.”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럼 이만...” 어르신에게서 발길을 돌린 내가 설정창에서 로그 아웃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등 뒤에서 어르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런데 하나 궁금한게 있는데 말이야.” “네?” “어째서 내가 준 게임 & 워치를 별로 쓰지 않았지? 그것만 있다면 좀 더 손쉽게 살아갈 수 있었을텐데..” 노인의 물음에 나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 EP. 47 : 누군가의 초대. (3) > 끝 ⓒ 손인성# < 에필로그. (마지막 부분 조금 추가했습니다.) > “어째서 내가 준 게임 & 워치를 별로 쓰지 않았지? 그것만 있다면 좀 더 손쉽게 살아갈 수 있었을텐데..” 노인의 물음에 나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반칙이잖아요.” “반칙?” “저 역시 혼자서 모든 걸 독점하는 삶에 대해 생각을 안해 본 것은 아닙니다. 당시 제가 가진 돈과 미래에 대한 예측만 있으면 땅 짚고 헤엄치는 것 만큼이나 쉬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어째서 그러지 않았지?” “모든 걸 독점한 다음엔 무얼 할까요? 그리고 그 왕좌에서 저는 결코 자만하지 않았을까요? 저의 회귀는... 처음부터 제 자신의 성공만을 목적에 두지 않았거든요.” “그럼 대체 무얼 위한 회귀였는가?” “그저 그리웠던 레트로 게임의 향수를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유명한 디렉터들을 직접 만나보기도 하고, 제가 만든 게임과 경쟁하며 그저 순수한 게임 디렉터로서 살아보고 싶었거든요.” “그 선택에 후회한 적은 없는가?” “그렇습니다.” “그렇군. 자네의 마음은 잘 알겠네... 이만 가보게나.” “네. 어르신 또 뵙게 될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 “이사님. 이번에 진행되는 11차 마신 토벌단에 대해 들으셨습니까?” 직원 식당에서 직원들과 함께 간단히 끼니를 떼우던 중 하야시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음? 왜?” “이번엔 유저들도 아주 작정하고 나선 모양입니다. 지난 10차 전쟁에서 아쉽게 패배한 뒤로 전장에 참여하는 플레이어가 배로 늘어났더군요. 이번에야 말로 승리할 수 있다면서...” “어차피 전장에 참여할 수 있는 유저들이야 앞으로도 점점 늘어날테니, 우리가 수세에 몰리는 건 어쩔수 없지.” “이사님의 마신 행세도 이제 거의 끝이 보이네요.” “그러게... 뭐 이번에 쓰러지면 적당한 랭커의 플레이어에게 인계하고 나도 이젠 느긋하게 전장이나 지켜볼란다.” 그러자 하야시의 옆자리에 있던 카오리가 피식 웃음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이사님. 지난 8차 토벌전에서도 9차에서도 그런 말씀하시곤 절대 안 쓰러지셨잖아요.” “하하... 내가 그랬었나?” 카오리의 핀잔에 나는 젓가락을 놀리던 손을 멈추고 빙긋 웃어보였다. 드래곤 엠블렘 온라인의 최대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마신 토벌전. 드래곤 엠블렘의 명성에 걸맞게 설계된 환장하는 난이도 덕분에 달마다 한번 열리는 토벌전도 벌써 11번째가 되어가고 있었다. 드래곤 엠블렘 온라인의 오픈 1주년을 맞아 업데이트 된 마신의 성. 그곳을 정복하기 위해 수많은 상위 랭커들이 치명적인 패널티를 무릅쓰고 도전 하였으나 근 1년간 번번히 실패를 반복하고 있었다. 마신 토벌대는 드래곤 엠블렘 온라인에서 가장 랭크가 높은 플레이어 10명 만이 참여 할 수 있었는데, 단순히 자신의 캐릭터 만을 가지고 레이드를 뛰는 것이 아닌 전략 시뮬레이션처럼 하나의 군단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군단의 병사들은 마신 토벌대에 지원한 하위 랭크의 플레이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명 커맨더 베팅 시스템이라 불리우는 이것은 자신의 캐릭터를 부려줄 지휘관에게 토벌기간중 입대시키는 시스템이었다. 예를들어 프로스트사의 스타 크래프트와 비교하자면 프로게이머인 임요한씨나 홍진호씨같은 유명한 커맨더 플레이어의 소속으로 입대시켜 그들이 부리는 ‘마린’이 되는 것이다. 당연히 플레이어 캐릭터는 콩알 만한 그래픽으로 너프되긴 하지만, 웅장한 전장의 흐름을 잘 보여줄 수 있어 10차 토벌전까지의 게임 영상들은 유튜브에서 1억뷰를 우습게 넘기고 있었다. 마신 토벌대는 개개인의 전투력이 모여 군단 전체의 전투력을 상향 시킬 수 있었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유저들에게 유리한 전투이다. 하지만 마신인 내 곁을 지키는 아누비스를 비롯해 거대한 성을 지키는 블랙 드래곤까지 수비를 위한 방편은 충분히 구현해 두었다. ‘뭐 1차 토벌대는 성 앞을 지키는 블랙 드래곤의 꼬리만 슬쩍 보고 전멸 했을정도니까.’ 그때 입안에서 밥알을 굴리던 하야시가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정말 비결이 뭡니까?” “뭐가?” “이사님께서 프로그래밍 하신 아누비스 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대처를 잘하죠? 완전 실시간으로 전황을 꿰고 있던데요? 솔직히 지난 10차 토벌전에서 전 글렀다고 생각했는데...” “아, 그 녀석이야...” ... 토벌대의 플레이어 데이터를 토대로 스스로 전략을 만들어 가는 녀석이니까. 스스로의 의지를 가진 최초의 NPC 캐릭터. 가끔 허당 짓도 하지만, 절대로 같은 실수는 번복하지 않는 나의 든든한 참모다. 아마 드래곤 엠블렘의 세계에서 아카식 시스템에 가장 근접한 녀석이랄까? “가장 공을 들인 캐릭터지. 덕분에 나도 이때까지 전장에 나설 필요가 없었으니까.” 나는 아누비스에 관해 대충 말을 얼버무리며 마저 식사를 마쳤다. & 그로부터 보름 후. 펜타곤 샵 이벤트 홀에서 열린 제 11차 마신 토벌대를 맞이한 나는 상당히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번엔 정말 장난 아닌데?” 무대 뒤편에 마련된 나를 위한 개인 플레이룸에서 나는 성안을 완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4명의 군단과 난전을 펼치고 있었다. “좋아!! 이번엔 할 수 있다!!” “오오오!!! 제발!!” “조금만 더~!!” 밖에서 울리는 유저들의 함성이 이곳까지 들려올 정도로 스크린 속의 전장은 현재 나에게 굉장히 불리한 상태였다. “주군이시여!! 내 등 뒤로!!” 다듭한 아누비스의 메시지에 나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무대위를 비추는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아~!! 한국인 플레이어 윤수현 선수와 홍만호 선수!! 굉장히 움직임이 좋습니다!! 아누비스의 친위대가 두 사람의 공격에 옴짝 달싹을 못하고 있습니다!! 과연 드래곤 엠블렘 최초로 마신을 물리칠 수 있을까요!?” 제 11차 토벌전의 해설과 진행을 맡은 준페이 녀석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굉장히 얄밉게만 들려왔다. 흥분한 녀석의 목소리를 들으니 패밀리 때 패미통신에서 진행했던 드래곤 엠블렘 이벤트가 떠오르네... 그 때도 이름이 드래곤 엠블렘 토벌대 였었지? ... 아니 저 사람들은 여기까지 원정와서 꼭 내 목을 따야 속이 시원할까? 빌어먹을 이번엔 진짜로 위험하다. [주군. 아무래도 전 틀린 것 같습니다. 자리를 피하십시오.] [시끄럽고, 딱 2분만 버텨!!] 아누비스에게 메시지를 전송한 나는 패드를 던져두고 서둘러 개인 플레이 룸의 문을 안에서 잠갔다. 그리곤 가방안에서 꺼내든 게임 & 워치를 꺼내 들었다. [드래곤 엠블렘 온라인의 세계에 접속을 시도 합니다.] [YES.]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모든 집기가 폴리곤 화되며 잠시 머리가 핑 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눈을 뜨자마자 나를 향해 날아오는 마법사의 파이어볼을 한손으로 쳐내며 재빨리 반대편 손을 적들에게 뻗었다. “태워라!!!” 쿠오오오오오!!!!! 내 손에서 뻗어나간 불기둥이 적들을 태우자, 아누비스는 재빨리 내 곁으로 달려와 등을 맞대었다. [주군을 이곳으로 불러드리다니, 면목 없습니다.] [괜찮다. 신경쓰지 말고 전투에 집중하라.] [네. 알겠습니다.] 장장 두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속에 마신의 성은 거의 절반이 반파되고, 수많은 병사를 잃었다. 나를 쓰러뜨리겠다는 플레이어들의 의지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아누비스와의 협력으로 수세몰렸던 전황을 간신히 뒤집은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옥좌에 몸을 맡겼다. 뭐 이정도까지 했으면 나머진 아누비스를 비롯한 수하들과 블랙 드래곤이 알아서 해주겠지. 그때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마신의 방에서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게임 가게 어르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도 용케 버텼군. 그래.” “그러게요. 하지만 다음 토벌전은 정말 자신이 없네요.” “그런가? 하지만 고작 2년새에 플레이어가 어마어마하게 늘었군.” “저도 두려울 지경입니다. 적어도 1년은 더 버틸 줄 알았는데...” “그렇게 아쉬우면 게임 & 워치를 조작해 플레이어 데이터를 너프 시키면 되지 않나~” 깊게 패인 주름과 함께 하얀이를 드러낸 노인의 미소에 나는 좌우로 고개를 내저었다. “원 녀석. 고집하고는...” “예전에 같은 질문에서도 한 번 말씀 드렸지만, 그건 반칙이잖아요.” “반칙이라. 하긴 자네 말대로 반칙에 가까운 능력을 가진 물건이긴 하다만, 그대로 썩혀두긴 아깝진 않은가?” “전혀요~ 덕분에 이렇게 멋진 세상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 녀석은 도저히 욕심이 없군.” “에고~ 전 이만 현실로 돌아가 대회를 마무리 지어야겠네요. 수고한 직원들과 함께 뒷풀이도 해야하고...” “또 보세나.” “네. 어르신. 그럼 가보겠습니다.” 옥좌에서 일어난 나는 옷깃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시스템 창을 불러 내었다. [드래곤 엠블렘 온라인의 세상에서 로그 아웃 하시겠습니까?] [YES.] 욕심이 없다는 어르신의 말..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그의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다. 사람에겐 누구나 욕심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도 마찬가지지.. 게임이란 컨텐츠가 생겨난 이래 모든 개발자들을 비롯해 유저들에겐 단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가상현실의 실현이겠지. 1983년으로 회기 하기 전 2015년에도 VR 기술에 대해 실험적인 장치가 많이 등장했었으니까. 가능하다면 게임 & 워치를 이용해 드래곤 엠블렘의 세상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이 짜릿한 느낌을 일반 유저들에게도 전달하고 싶은게 나의 욕심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게임 & 워치와 어르신이 말씀하신 아카식 레코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겠지... 그런데 이거 죽기 전에 깨달을 수 있긴 하려나? 자신은 없지만 해보는데까진 해볼 수 밖에...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인류가 달의 표면에 발자국을 남겼듯이. 언젠가 전 세계의 게이머들이 게임이라는 미지의 세상에 발을 들이는 그 날이 오기를 바라며... < 에필로그. (마지막 부분 조금 추가했습니다.) > 끝 ⓒ 손인성# < 후기. > 안녕하세요. 게임 마켓 1983의 손인성입니다. 음... 우선은 한편의 글을 끝냈다는 감사의 인사보다는 죄송하다는 사과의 말씀을 드리는게 순서일듯 합니다. 저는 게임 마켓 1983 이전에 고양시의 마법사를 집필하였고, 유료 연재 도중 게임 마켓 1983을 연재해 독자님들에게 많은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저는 글을 쓰는 속도가 많이 느린 편입니다. 정해진 스토리의 어느 흐름을 탔을 때는 휙휙 써지기도 하지만, 대부분 한편을 써내려 가는 시간이 참으로 더딘 녀석 입니다. 가급적 독자님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으나, 번번히 연재시간이 늦어 실망을 안겨드리기 일쑤였죠. 그런 주제에 감히 유료 연재를 두 개나 한다는 것은 제 욕심이었습니다. 이번 일로 크게 반성하였고, 두 번 다시 이런 선택은 하지 않겠다 다짐했습니다. 이제 연재중이던 게임 마켓1983이 종료 되었으니, 다음주 월요일부터 ‘고양시의 마법사’ 마무리에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고양시의 마법사는 7월 말에서 8월 초순경으로 완결을 약속 드립니다. 다음 신작은 고양시의 마법사의 집필이 끝난 뒤, 조금은 느긋하게 많은 비축분을 쌓아둔 상태에서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작의 이야기를 제대로 끝내지도 못한 반쪽짜리 글쟁이의 글에 너무 많은 독자님들께서 즐겨주셔서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개인적으로 고양시의 마법사는 판매직이나 자영업에 종사하시는 독자님들께... 그리고 게임 마켓 1983은 30대 중후반의 올드 게임을 즐겨 보셨던 독자님들께 공감대를 불러 일으키는 소재로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다음으로 이어갈 신작 역시 여러분들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새롭고 독특한 소재를 준비중에 있습니다. 다가오는 8월경 새로운 신작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후기. > 끝 ⓒ 손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