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검은머리 황녀님. =================================================== by엘리아냥 ================================ # 1편 # 소제목 : prologue. ================================ 나의 사랑하는 그대여, 제발 나를 위해 그 입을 닥쳐줘요. 나의 사랑하는 그대여, 제발 나를 위해 그 면상을 치워줘요. 나의 사랑하는 그대여, 제발 나를 위해 그 눈알을 깔아줘요. 나의 사랑하는 그대여 제발 나를 위해……. “ 꺼져 줘요. 이 짜증나는 사람.” 마치 강아지의 눈망울과 같이 검고 커다란 눈동자는 한없이 순수해 보였고,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의 흑발과 새하얀 피부는 소녀의 이미지를 무척 청순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붉은 입술이 달싹이며 흘러나온 말의 종류는 무려…비속어였다. 그런 소녀를 바라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또 다른 소녀. 웨이브 진 금발머리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소녀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눈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 그게…정말 시야?” “ 물론! 너도 한 번 읊어봐. 이 시의 매력에 풍덩 빠져들 테니까.” “ …글쎄…….” 테라스의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기댄 채, 방금 자신이 지어 낸 시를 읊고는 만족스럽게 웃음 짓는 흑발의 소녀. 겉모습은 마치 여신이 환생한 것마냥 청초하며 아름다운 모습을 한 주제에, 거리낌 없이 비속어를 읊어대는 소녀의 정체는 놀랍게도 이 나라의 단 하나뿐인 '황녀'였다. 그녀의 권유대로 시를 읊어볼 의사따위는 전혀 없는 금발머리 소녀는, 그저 다소 난감한 표정을 유지하며 차를 홀짝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어느새 다 식어버린 미지근한 홍차에서는 살짝 씁쓰레한 맛이 났다. “ 유리엔, 정말 그 시를 읊어 줄 거야? 그 사람에게?” 풀 네임 '유리시엔 헤자르 드 카르나'. 애칭인 '유리엔'으로 불리운 소녀는, 매우 어릴 적부터 친해온 소꿉친구인 금발머리 소녀의 말에 우흐흐-하고 음흉하게 웃어보였다. 그 웃음에서 그녀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 당연한 걸 왜 물어? 기대해. 맨 날 입에 발린 말이나 하고 다니는 그 버터 줄줄 흐르는 느끼한 자식에게, 진정으로 마음을 담은 시란 무엇인지 꺠닫게 해줄테니까. 후후후.” “ 하아…….” 소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소녀에게 ‘그 사람’이라고 불리어지지만 유리엔 에게는 ‘그 녀석’으로 통하는 인물의 신분은 무려 공작가의 자제였다. 물론 둘째인 데다, 황녀에 비하면 다소 낮은 신분임이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해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평소에 그가 얼마나 유리엔에게 집적댔는지, 그리고 그 집적댐을 그녀가 얼마나 싫어해왔는지 잘 아는 소녀로서는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금발머리 소녀의 이름은 '카레니아 하르셈'. 하르셈 백작가의 장녀인 소녀는 어릴 적부터 사고치는 것이 취미인 듯한 유리엔을 소꼽친구의 의무로서 열심히 뜯어말리는 역할을 해왔지만, 지금까지 유리엔이 소녀의 말을 들은 적은 그다지 없었다. 그리고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 일 터였다. 카레이나 하르셈, 애칭 ‘카린’는 유리엔에게 시간낭비임이 분명한 설교나 설명을 늘어놓는 대신에, 이렇게 티타임을 가진 목적을 재빨리 털어놓는 것을 선택했다. “ 유리엔. 실은…….” 뭔가 말을 꺼내려던 카린이 다시 입을 닫았다. 꼭 말해야 하는 것이지만 저절로 망설여졌다. -아아, 대체 이걸 어떻게 말한다지. 그녀는 새삼, 자신에게 이런 막중한 임무를 떠넘긴 아버지를 원망했다. 분명 황제폐하의 은근한 압력때문이었겠지만…이 말을 전한 뒤 그 뒷감당을 어찌 하라는 건지……. 아, 모르겠다. 일단, 말하고 보자. 결심을 굳힌 카리나는 궁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리엔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어렵사리 입술을 떼었다. “ 뭐?!!” 같은 시각, 뮤리엔 제국. 그곳에, 수건으로 얼굴을 닦다 말고 고함을 지르는 한 소년이 있었다. “ 결혼-?! 무슨 소리야, 난 이제 겨우 열여섯이라고!” 타오르는 듯 붉은 머리카락에 같은 색의 눈동자를 지닌 소년은, 언뜻 보기엔 남자다웠지만 아직은 살짝 앳된 티가 보였다. 마치 조각 같은 외모인지라 2~3년 뒤를 기대하게 만드는 소년은 자신의 인간 같지 않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말을 내뱉었다. 그런 소년의 말에 대답한 것은, 그의 호위기사로 보이는 한 사내였다. “ 어쩔 수 없습니다. 상대방도 올해 열여섯이고, 게다가 황족의 경우 솔직히 말해 빠른 결혼은 아니지 않습니까?” “ 젠장! 얼굴도 모르는 여자 따위랑 어떻게 결혼을 해? 싫어!” “ 얼굴 보면 됩니다.” “ 여자가 싫다고!” “ 그럼 남자랑 하실 생각이셨습니까?” “ 그런 뜻이 아니잖아!” 이 인간이 지금 농담하는 건가, 소년은 자신의 호위기사인 제론의 짙은 남색 눈동자를 마구 쏘아보았다. “ 황태자전하, 국가 간의 약속이니 싫으셔도 그냥 하셔야 됩니다.” 소년의 이름은 ‘카류엘 네이시스 드 뮤리엔’, 애칭은 ‘카엘’. 뮤리엔 제국의 황태자였다. 카엘은 여러모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뮤리엔 제국은 물론 근처의 수많은 왕국과 제국들까지도 그의 이름을 알고있을 정도였다. 카엘은 대제국의 황태자로 유명했고, 인간 같지 않은 외모로 유명했으며, 최연소 소드마스터가 기대되는 빼어난 검술 실력으로 유명했고, 사교계에 얼굴을 잘 비치지 않는 신비성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또한… …심각한 여성혐오증으로 유명했다. 평소 입버릇으로 ‘결혼을 하느니 차라리 독신으로 살겠어’라는 황실의 대를 이어야 하는 황태자로서의 책임감따위는 개뿔도 없는 소리를 지껄여대던 그가, 두 제국 간의 정략결혼으로 인해 피치 못할 희생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왜 하필 카엘이냐고 따진다면, 상대 제국인 카르나 제국에는 황녀가 단 한 명뿐이고, 뮤리엘 제국에는 2황자와 3황자가 각각 10살 안팎이니 자연스레 나이가 맞는 둘이 맺어질 수밖에 없었다. “ 후우…좋아…까짓 거, 결혼은 하되 이혼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 …….” 제론은 눈앞의 이 어린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꿸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엘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이혼 하게 만들어주겠어. 그 여자가 먼저 나한테 이혼하자고 말하게 할 거라고!!” 최대한 괴롭혀서 쫓아낼 테다, 따위의 각오를 다지고 있는 카엘을 바라보다 제론은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이 알기로…카르나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는, 가만히 앉아서 괴롭힘을 당해주는 성격이 ‘절대’아니었다. 같이 싸워대면 모를까……. 제론은 약간이지만 황태자가 걱정되었다. ================================ # 2편 # 소제목 : 지금 결혼하러 갑니다. (1) ================================ 홍차가 날아다녔다. 과자, 접시, 찻잔…어쨌든 날아다녔다. 정략결혼 이라는 말 한마디에, 멀쩡하던 인간이 저렇게까지 괴물이 되다니. 자신의 소꿉친구에게 두려움을 느끼며, 카린은 결국 치맛자락에 붉은 홍자자국을 남긴 채 저택으로 돌아와야 했다. 왜 자신이 하필이면 다과를 준비했을까 후회하면서……. “ 이 꽃다운 나이에 결혼이라니!! 말이 안 되잖아요!!” 카르나의 황제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외치는 눈앞의 철없는 딸과 눈을 마주쳤다. …아비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 예쁘긴 더럽게 예쁜 얼굴이었다. 하긴, 그러니 성격이 이 모양 이 꼴이라도 매일같이 연서와 선물들이 날아드는 거겠지만.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그는 입을 열었다. “ 딸아.” “ 왜요.” “ 아버지라서 하는 말이 아니고, 넌 쫌 심각하게 예쁜 것 같다.” “ 나도 아는데요?” 저것 좀 보게. 일반적으로 저런 말을 들으면 좀 쑥스러워하거나, 좀 빼는 게 정상 아니던가? 그런데 저 ‘당연한 걸 왜 말 하나’는 듯한 반응은 대체……. “ 딸아.” “ 또 왜요.” “ 그냥 닥치고 시집가라.” “ …돌았어요?” 저 입 험한 것 좀 보게. 황제는 잠시, 자신의 딸에 대한 고찰을 시작했다. 일국의 황녀라는 것이, 입만 열었다 하면 비속어가 튀어나오질 않나…단지 느끼하다는 이유만으로 귀족의 자제를 발로 까버리질 않나…자신을 놀렸다는 녀석이랑 그대로 몸싸움을 하질 않나… 산책이라는 이름으로 밖에 나가 정원을 쑥대밭으로 만들질 않나…평민 문화 체험을 하겠다며 밖에 나갔다가 건달들을 쓸어버리려하질 않나…보다 못해 외출금지를 시켰더니 시녀 분장을 하고 가출을 해버리질 않나……. 생각 할수록 암울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자고 이런 걸 낳아서 애지중지 길렀는지…그나마 다행인건 바보는 아니라는 점이다. 아무튼, 베르덴은 결심을 굳혔다. 자신의 딸과 정략 결혼할 상대는 뮤리엔 제국의 황태자. 이 나라와 함께 양대 산맥으로도 불리는 뮤리엔 제국과는 일단 관계를 맺어두면 여러모로 좋았고, 무엇보다 뮤리엔의 황제와 그는 상당한 친분이 있었다. 황태자라는 녀석도 예전에 몇 번 봤었는데 썩 마음에 들었으니 그야말로 나쁠 것 하나 없는 금상첨화였다. 물론 그것은 자신의 딸 에게까지는 통하지 않은 모양인지 유리엔은 별 헛소리를 다 들어보겠다는 표정으로 난리를 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으로 이 결혼이 유리엔에게 득이 되면 득이 됐지 해가 될 일은 결코 없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해서, 그는 어차피 논리적으로 설명해봤자 쓸데없는 시간낭비라는 근거 하에 그냥 막무가내로 몰아붙이기로 결정했다. “ 하라면 해. 그리고 열여섯이면 딱 적당한 나이구만. 상대방도 너랑 동갑이다. 그냥 해!” “ 싫어요!!” “ 싫어도 상관없다. 이미 다 말해놨고, 출발 준비까지 다 해놨어. 내일 당장이라도 뮤리엔 제국으로 출발 할 거다.” “ 뭐, 뭐요?!” 기가 찬다. 유리엔은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부터 자신의 전속 하녀들이 뭔가 커다란 짐 덩어리를 열심히 싸는 것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때는 그냥 ‘뭐 단체로 야반도주 아니면 사랑의 도피라도 하나보지’라고 간단히 치부해버렸었건만, 전말을 듣고 나니 어이가 없었다. “ 이…더럽고 치사해서…….” “ 그래그래. 더럽고 치사하니까 그냥 얌전히 시집가라.” 제 아버지의 담담한 말에, 유리엔이 치켜뜬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고, 팽팽한 눈싸움이 시작 된지 얼마나 흘렀을까, 유리엔이 돌연 씨익 웃었다. “ …뭐냐?” 황제는 그 웃음에 잠깐 주춤했다.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이 뇌리를 관통하고 지나간다. “ 할게요, 결혼. 사실 별 것도 아닌데…하죠, 뭐.”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딸아이와 하루 종일, 심지어는 내일 출발 직전까지 버럭버럭 말싸움이라도 할 각오였던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간단히 승낙을 해버리는 딸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이럴 녀석이 아닌데? 아니나 다를까, 유리엔은 속으로 한껏 다짐하고 있었다. ‘ 결혼식 올리자마자 이혼 해 버리겠어. 황태자? 알게 뭐야. 얼굴 보자마자 헤어지게 해 주지. 그렇게 깨지면 아버지도 앞으로 몇 년 동안은 결혼 얘기 안 꺼내시겠지?’ -아마 그녀는 모를 것이다. 자신과 자신의 정략결혼 상대자가 서로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사실은……. “ 뭐? 내 결혼 상대라는 녀석을 알고 있어?” “ 음…아마도 거의 다 알 걸.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해.” 카린는 항상 들고 다니는 자주 빛의 작은 빗으로 유리엔의 흑단 같은 머릿결을 곱게 빗어주었다. 그리고 방금 화제가 된 ‘카류엘’황태자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 아무래도 유명하니까. 나도 저번에 초상화를 본 적이 있는데, 그럴 만한 외모 던걸. 웬만한 귀족가의 영애들도 카류엘 황태자에게 시집가게 된다면 신데렐라가 되는 거라고 생각한대. 외모, 지위, 능력…다 완벽하니까. 아마 표현은 안 해도, 여기저기서 널 부러워하거나 시기하는 무리들이 꽤 될 걸?” “ 흐음-.” 유리엔은 눈을 감았다. 글쎄, 딱히 부러워 할 필요는 없을 텐데…왜냐하면 자신은 가자마자 다시 돌아올 테니까. 후후후. “ 뭘 그렇게 웃어?” “ 아무것도 아냐. 후훗.” 과연 유리엔의 생각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그 날 오후, 그녀를 태운 호화로운 마차는 뮤리엔 제국을 향해 출발했다. ================================ # 3편 # 소제목 : 지금 결혼하러 갑니다. (2) ================================ 뮤리엔 제국까지 가는 길은 매우 평온했다. 워낙 돈을 처바른 마차라 그런지 빠른 속도임에도 승차감이 무척 아늑했고, 가는 도중에 그 흔하다는 산적 비스 무리한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덕분에 유리엔은 아주 편안하게, 조금은 지루하게 뮤리엔 제국에 도착했다. 제국은 유리엔을 무척 반갑게 맞이했다. 솔직히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집안끼리 원해서 하는 결혼인데다, 유리엔이 시집살이 따위를 할 만한 지위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직 결혼 통보만을 받았을 뿐이니, 상당히 혼란스러울 기분인 그녀를 배려해야했다. 물론 일반적인 황족의 경우 정략결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평소 카르나 제국와 친분이 있는 뮤리엔 제국으로서는 유리엔의 성격 또한 익히 들은바있었기에 자연히 조심스러워 질 수밖에 없었다. “ 내리시지요.” 호위를 맡아 온 기사의 도움을 받아 유리엔이 마차에서 내렸다. 며칠 간 마차 안에서만 지낸 유리엔은 솔직히 전부 귀찮은 기분이었다. 앞으로 만나게 될 남편에 대한 설렘? 두려움? 그딴 건 없었다. 원래 없었으니 이제 와서 생길리가 없었다. 다만 변화는 귀찮아졌다는 거다. 남편의 얼굴 뭐 이런 건 궁금하지도 않았다. 유리엔은 마차에서 내린 뒤 황성으로 안내되었다. 그리고 식을 올리기 전까지 사용 될 그녀의 거처로 들어갔다. 넓고 화려한 방이었다. 황족이 쓰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을 만큼. “ 저녁 식사?” 드레스를 갈아입고, 침대에 앉아 하녀들의 안마에 몸을 맡기고 있던 유리엔이 말했다. 얼굴에 있는 주근깨가 인상적인 하녀는 넋 놓고 유리엔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리곤 급히 대답했다. “ 네, 네. 오늘 황태자전하와 황제폐하, 황비님과 함께 저녁식사가 있습니다. 우선 오늘은 안면을 익히고, 내일이나 모래 즈음에 환영회를 위해 파티를 연다고…들었습니다.” “ 그래? 아 젠장. 또 얼굴에 잔뜩 찍어 바르고 뿌려대고 몸에 주렁주렁 무거운 걸 매달고 엄청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질질 끌며 식사에 가야 되겠네. 그래가지고 음식이 넘어가겠어, 어디?” 하녀의 대답에, 유리엔이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불만스레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하녀는 다시 한 번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외모가 너무 아름다운 사람이구나, 싶었다. 공을 들여 꾸민 것도 아닌데 저절로 빛이 나는 사람이었다. 조금 지나자 목소리도 아름다운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방금은? 당황스러웠다. 화장하고 꾸미는 것을 저렇게 얘기 할 줄은 몰랐다. 모름지기 아름다운 외모의 귀족영애, 하물며 황녀씩이나 되는 사람들은 자신을 꾸미는 것을 몹시 즐기는 것이 기본이었다. 심지어 어떤 여성은 자신의 하루를 거울 앞에서 드레스를 갈아입는 것에 다 투자하기까지 했다. 아름다운 여성일수록 자신의 미모를 뽐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20년간의 하녀생활을 통해 터득했었건만, 눈앞의 이 여성은 대체 뭐란 말인가? 오히려 귀찮아한다. 하녀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유리엔을 바라보았다. 이런 사람…처음이야. “ -뭘 봐?” 하녀의 의미심장한 눈길을 느낀 유리엔이 툭 말했다. 시비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화들짝 놀란 하녀가 급히 변명을 늘어놓으려했지만,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유리엔은 이미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긴 뒤였다. 유리엔의 시선은 별 의미 없이 방 안을 떠돌았지만, 그녀는 속으로 열심히 고심 중이었다. ‘ 지금이 점심 무렵이니까, 준비하려면 정말 시간이 빠듯하겠네. 까짓 거 어차피 식사나 같이 하는 건데 대충 입고 맨얼굴로 가면 안 되나? 아침도 못 먹었는데 점심까지 건너뛰고 저녁마저 소심하게 먹으면 난 정말 굶어죽고 말텐데?’ 실은 아프다는 이유로 식사에 불참할까도 생각해봤지만, 그래도 남편이 될 녀석의 얼굴은 봐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편해지니 다시 결의가 솟아올랐다. 상대방을 철저히 파악해서 최단시간에 이혼을 해야 한다! ‘ …그건 그거고, 어쨌든 난 굶어죽기 싫다니까.’ 그냥 뒹굴 거리다가 편한 차림으로 가자, 하고 결정내린 유리엔이 자신의 의사를 밝히려는데, 그 순간 방문이 벌컥 열리며 열 몇 명의 하녀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 에?” 난데없는 습격에 유리엔이 순간 멈칫했다. 잘 살펴보니 그 많은 하녀들은 모두 빈손이 아니었다. 한 명 한 명 드레스라든지 장신구 따위를 들고 있었다. …오, 젠장. 유리엔의 표정이 변했다. “ 안녕하세요? 황녀님. 저희들은 황태자전하께서 직접, 황녀님을 아름답게 꾸며드리기 위해 보내셔서 왔습니다.” 가장 연륜이 있어 보이는 하녀가 앞으로 나와 자기들이 온 목적을 소개했다. 물론 이미 눈치 깠던 유리엔은 황태자가 직접 보냈다는 말에만 약간 놀랐다. 얼굴도 안 본 사이에 왜 벌써 느끼하게 신경을 쓰지? …하고 잠깐 생각하는 사이에 어느새 하녀들은 유리엔을 둘러쌌다. “ 아…소문은 들었지만 정말 너무 아름다우세요!” “ 이 검은 머릿결이라니! 빠져 들것만 같아!” “ 어쩜 이렇게 피부가 좋을까?” “ 하아…정말…피가 끓어오르게 하시는 분이야!” 직업정신으로 똘똘 뭉친 듯한 하녀들은 저마다 감탄을 하며 분주히 움직였다. 저녁식사 시간에 맞춰야 하는데 벌써 점심때였으니 시간이 없었다.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듯, 거의 프로급의 솜씨를 보이며 단장을 하는 하녀들의 손길에 얼굴이며 몸이며 반강제로 내맡겨진 유리엔은 얼굴을 두드리는 분가루에 결국 눈을 감았다. 속으로 황태자를 씹으며. 뮤리엔 제국의 황제는, 흔한 짙은 갈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닌 40대의 남자였다. 그러나 겉보기엔 30이나 넘을까 싶은 외모와, 역시 제국의 황제다운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만했다. 그런 그가 오늘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 …아버지, 제가 결혼 하는 것이 그렇게나 마음에 드십니까?” 카엘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황제를 향해 말했다. 자신의 아버지는, 여성혐오자인 자신을 정략결혼의 희생자로 밀어 넣은 것이 못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이에 황제는, 그러니까 사실 황태자의 이름을 팔아 하녀들을 유리엔의 방에 보낸 장본인인 그는, 그저 여전히 웃을 뿐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리 없었다. 이 결혼으로 인해, 카엘에게 여성혐오증이 있다는 이유로 그를 황태자의 자리에서 폐위시켜야한다는 몇몇 귀족들의 입을 완전 닥치게 할 수 있지 않은가. 게다가 자신이 알기로, 카르나제국의 하나뿐인 황녀는 마치 여신과도 같은 외모라 했다. 물론 소문이란 으레 과장되기 마련이지만, 황제는 믿었다. 제 아들 카일이 남자새끼가 맞다면, 며느리의 아름다움에 반할 것이라고. “ 슬슬 시간이 되었구나.” 약속한 저녁시간이었다. 황제와 황비, 황태자는 이미 도착하여 마지막으로 등장 할 유리엔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 후…좋아, 어떤 여자인지 얼굴이나 봐주지.’ 아름답다? 그런 여자들은 수없이 봐왔다. 그러나 자신의 눈엔 전부 비슷한 얼굴로 비춰질 뿐이었다. 차라리 카엘은 자신의 아내가 얼굴은 예쁘되 사치가 심한 골 빈 여자이길 바랬다. 자신의 매끈한 생김새만 보고 빠져든다면 더욱 상처주기 쉬울뿐더러, 그런 여자라면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 할리 없으니 버리기도 편할테니까. 끼익-. 길지 않은 기다림이 끝났다. 하녀들이 호화로운 문을 열었고, 그 사이로 한 인영이 사뿐사뿐 걸어 들어왔다. ================================ # 4편 # 소제목 : 지금 결혼하러 갑니다. (3) ================================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곱게 땋아 늘어뜨리고, 어깨가 살짝 파인 흰 드레스를 입은 유리엔의 모습은 마치 천사처럼 보였다. 흰 피부에 대조되는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그리고 보석들은 유리엔을 더욱 돋보이게 했고, 수수하면서도 은은한 아름다움이 엿보이는 흰 드레스는 그녀를 한없이 청초하게 만들었다. 황제와 황비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유리엔을 바라보았다. 이건 정말이지, 기대 이상의 아름다움이 아닌가. 소문이 오히려 부족할 지경이었다. ‘ 흠…베르덴 그 인간이 딸 하나는 잘 낳았군.’ 그렇게 생각하며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의 며느리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샤방샤방. 대륙에서 내가 제일 예뻐요, 라고 해도 차마 돌을 던지지 못할 미모의 유리엔이 살포시 미소 지었다. 순간, 황제는 남자라면 누구든지 저 미소를 위해 간이라도 빼어 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슬쩍 시선을 돌려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후후후. 녀석, 역시 너도 어쩔 수 없군.’ 카엘은 유리엔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름다움에 넋이 나간 그런 모습과는 좀 거리가 있었지만, 황제는 아들이 며느리에게 한 눈에 반했다고 단정 지었다. “ 이리 앉거라.” 유리엔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황제가 권한 자리에 앉았다. 황태자의 바로 맞은 편 자리. 유리엔은 정면을 바라보았다. ‘ …오호? 얘가 내 남편?’ 그녀의 표정에 흥미가 스쳐지나갔다. 자신의 결혼을 부러워하는 여자들이 있다더니, 황태자 녀석의 면상을 보니 조금 이해가 되기도 했다. 외모에 영향을 받는 타입은 아니지만, 시력은 정상인 그녀가 보기에 황태자는 지금껏 봐온 사람들 중에 단연 돋보이는 생김새였다. 카엘과 유리엔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뭔가 묘한 기류가 흐르는 가운데, 황제가 입을 열었다. “ 서로 인사들 하거라. 결혼식이 아직 일뿐 부부사이인데….”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으나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였다. 카엘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티나지 않게 황제를 째려보곤 말했다. “ ‘카류엘 네이시스 드 뮤리엔’입니다.” 감정이라고는 개뿔도 안 담긴 목소리였다. 아니, 감정이 있기는 하다. 귀찮음. 게다가 자신과 눈은 마주치고 있되, 눈동자에 담지 않았다. 분명 딴생각을 하고 있음이다. 거기다 인사하랬다고 딸랑 이름만 말해? 저런 개매너를 봤나? 당장이라도 다가가 뒤통수를 후려친 뒤 멱살을 잡고 ‘ 어디서 감히 아름다운 부인을 앞에 놔두고 딴 생각을 해?!’라며 외쳐주고 싶은 기분을 참고, 유리엔은 생긋 웃었다. “ 전 ‘유리시엔 헤자르 드 카르나’입니다.” “ 그렇군요.” “ 네, 그렇지요.” “ …….” “ …….” 대화 단절. 무슨 강제로 선보러 나온 사람마냥 둘은 서로의 얼굴만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보다 못한 황제가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지만, 딱히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결국 음식이 나오고, 유리엔과 황제, 황비 사이에만 간간히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가며 저녁식사가 끝났다.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카엘은 생각에 잠겼다. 방금 전까지 함께 식사를 한, 곧 자신의 아내가 될 황녀를 떠올려보았다. 엄청 연약해보이고, 가녀린 모습을 한 여자였다. 속까지는 모르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살짝만 건드려도 쓰러질 것 같았다. 카엘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별 거 아니잖아?’ 조금만 심하게 대하면 알아서 도망갈 것 같았다. 일단 내일 환영파티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무시해서 창피를 줄 생각이었다. 그로 인해 소문이라도 퍼지면 더 좋다…그래, 타도 결혼이다. 붉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 린.” 유리엔은 처소에 도착하자마자 린이라는 하녀를 불렀다. 자신의 전속 하녀들 중에 가장 어린 아이로, 자신과 같은 나이었다. 분홍색 머릿결이 눈에 확 들어오는 귀여운 하녀였는데, 웬 철없는 귀족아들에게 청소년관람불가의 일을 당할 뻔한 것을 유리엔이 구해준 뒤로, 그녀에게 푹 빠져서 정성껏 받들어 모시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하녀들 중에서는 유리엔과 가장 친하다고 할 수 있었다. “ 네, 황녀님- 부르셨어요?” “ 응. 나 배고파, 밥 좀 줘.” “ 에에-?” 린은 예상외의 요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이 황녀님이 정상적인 요구를 한 적은 별로 없었지만. “ 그렇지만, 황녀님. 방금 저녁식사하고 오신 거 아녜요?” “ 맞아.” “ 그런데 왜 배가 고프세요?” “ 내숭떨면서 먹는다고 조금만 깨작거렸거든. 린-나 배고파서 쓰러질 것 같아.” “ 앗! 쓰러지시면 안 되죠! 제가 금방 차려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린은 바쁘게 유리엔의 처소를 나갔다. 유리엔은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곧 린이 가지고 올 음식들을 기대하며 넓은 침대위에서 뒹굴었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으로 한 녀석이 스쳐지나갔다. 이 나라의 황태자이자 자신의 남편인 카류엘. 그를 떠올린 유리엔이 미간을 좁혔다. 자신과 시선을 마주했던 그의 붉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 재수라고는 지나가는 개미다리털 만큼도 없는 놈.’ 첫인상이었다. 잘 됐잖아? 어차피 이혼 할 녀석인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유리엔은 몸을 돌려 엎드렸다. 피곤했다. 내일 있을 파티가 생각나자 더 머리가 아팠다. …이러다 린이 먹을 걸 가지고 오기도 전에 잠들어버리면 어떡하지…이러다 정말 굶어죽겠어…하지만 피곤해. 결국, 침대 위에 엎드린 채로 유리엔은 눈을 감아버렸다. ================================ # 5편 # 소제목 : 환영 파티. (1) ================================ 다음날, 반쯤 몽롱한 상태로 눈을 뜬 유리엔은 아침부터 자신을 주물러대는 낯선 손길에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몸 여기저기를 주물러대는 낯선 손길?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이, 이것은 설마?! “ 아, 깨어나셨군요, 황녀님.” “ 기침하셨나요?” …아니나 다를까. 하녀들이 정성껏 온 몸을 마사지 중이었다. 저녁에나 있을 파티 때문에 아침부터 이 난리를 쳐야 하다니. 유리엔은 한숨을 내쉬었다. “ 마사지가 끝나면 장미와 허브 잎을 띄운 욕조에서 몸을 씻으시면 됩니다.” “ 알겠어. 그런데…아침은?” “ 어머, 아침이라니요? 무슨 말씀을? 파티를 위해 날씬한 몸을 유지하셔야 하기 때문에 오늘은 아무것도 드시면 안 됩니다.” “ …….” 유리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날 굶어죽일 속셈이야?” “ 어머. 무슨 소리세요? 호호.” “ 감히 제국의 황녀를 죽이려 하다니. 지금 그만두면 없던 일로 하고 넘어가 주겠어. 그러니…아침을 줘.” “ 호호호. 안돼요, 황녀님. 이게 모두 황녀님의 아름다움을 위한 일이니까요.” “ 젠장. 이런 거 안 해도 난 원래 예쁘니까 괜찮아.” “ 그건 인정하겠지만…그래도 이왕이면 여신처럼 아름다우면 좋잖아요? 파티에서 모두가 황녀님을 보고 넋이 나가도록! 하아…생각만 해도 피가 끓네요.” …위험한 아줌마다. 이미 30줄에 들어선 그녀는 하녀답지 않은 요염함을 보이며 호호 웃었다. 유리엔은 나중에라도 몰래 린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먹을 것을 가져오도록……. 하녀인생 어언 20여년. 이젠 어엿한 직업인이 되어 하루 일과를 화장으로 시작하여 화장으로 끝내게 되었다. 투철한 직업정신마저 지니게 되어, 아무리 박색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손만 거치면 아름다운 귀족영애로 탈바꿈 되는 특수스킬도 생겼으며, 절친한 동료들 또한 존재한다. 드레스 고르기의 외길인생, 피부마사지의 외길인생, 보석장신구 고르기의 외길인생, 코르셋의 외길인생 등등……. 아무튼 우리들의 손길이 스치고 지나가면 남은 것은 파티에서의 주목 뿐! 호호호, 오늘 밤 그대를 신데렐라로 만들어 드리겠어요! …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찬 하녀계의 왕언니인 그녀들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열심히 살아가던 어느 날의 저녁.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러나 전혀 사라지지도 달라지지도 않는 눈앞의 아름다움에, 결국 감격에 찬 표정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 세상에!” “ 너무 아름다워요!” “ 마치 여신 같아!” 유리엔에게는 밥 먹는 것보다 익숙한 미모에 대한 예찬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녀들은, 정말이지 살면서 다시없을 감격의 도가니탕을 헤엄치고 있었다. 자신들의 손을 거쳐, 오늘 저녁 파티에 모습을 드러낼 한명의 여신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 뿌듯함에 그녀들은 기꺼이 눈물이라도 흘려줄 판이었다. “ …배고파…….” 그런 심정들 따위 알길 없는 유리엔은 현재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다. 근 이틀간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해 창백해진 얼굴은 고도의 화장술로 이미 커버되었다. 아, 이러다 내가 정말 죽지, 죽어. “ 호호호! 황녀님, 파티에 있는 어떤 영애도 황녀님의 아름다움에는 고개를 숙일 거예요.” “ 맞아요. 오늘 파티의 완벽한 주인공이 되시는 거죠!” 굶어죽는 주인공 따위는 개나 줘버려-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낼 힘도 없었다. 유리엔은 몰래 자신에게 줄 비스킷을 들고 오다가 하필이면 하녀장에게 딱 걸린 안타까운 린을 떠올렸다.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서, 죄 없는 비스킷을 구출해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아무리 유리엔이라도 그렇게 막나갈 수는 없었다(이곳에 카르나 제국이었다면 얘기가 다르지만). -똑똑. “ 누구시죠?” “ 황녀님을 모시러왔습니다.” 문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 찰스’, 함께 온 호위기사의 목소리였다. 파티는 아까 시작되었지만, 주인공은 조금 늦게 등장하는 것이 극적인 효과를 불러온다며 시간을 질질 끌고 있었던 것이다. 슬슬 갈 때가 되었다. 더 지체했다간 황제보다도 늦게 생겼으니. “ 가시죠.” 유리엔이 문 밖으로 나오자 찰스는 바로 허리를 숙였다. 유리엔의 틀어 올린 머리스타일로 인해 드러나는 새하얀 목덜미에 시선을 빼앗기는 것은 불경죄였다. 그는 최대한 화려한 드레스자락만을 보며 걸으며 노력해야했다. 파티장은 소란스러웠다. 은은하게 들리던 감미로운 음악소리가 귀족들의 얘기소리에 파묻힐 정도였다. 눈살을 찌푸리거나 뭐라고 하는 귀족은 없었다. 즐길 맛이 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파티 분위기는 오히려 실례였으니까. 그러나 오늘은 파티의 분위기를 위해 쓸데없는 날씨 얘기까지 꺼내서 애써 대화를 이어가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그들 사이엔 하루 종일 얘기해도 마르지 않을 대화의 주제가 있었으니까. 바로- “ 기대되는군요. 얼마나 아름다울지.” “ 솔직히, 저는 소문이 상당히 부풀려졌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카르나제국의 체면 때문에, 일부러 퍼뜨린 것이 아닐까요?” “ 하긴.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답니다.” “ 과연 황태자비가 될 자격이나 있을 여자일지…….” 유리엔 대한 이야기였다. 뒷담화에 가까운 비호의적인 말들로 보아, 그녀들에게는 유리엔의 존재가 아니꼽게 다가왔을 터였다. “ 분해! 지가 제국의 황녀면 다야? 감히 황태자님을…….” “ 흑! 억울해.” “ 분명 별 것 아닌 여자일거야. 권력만 믿고 나대는!” 이쪽은 치기어린 10대 소녀들의 대화였다. 질투가 지나치면 악의가 된다고 했던가. 얼굴도 못 본 유리엔을 마치 집안의 원수라도 되는 듯 씹어대고 있었다. “ 큰일이군요. 그 능구렁이가 이렇게 빨리 일을 벌일 줄이야.” “ 흥. 하지만 아직 괜찮습니다. 여성혐오증인 황태자 보다야 2황자님께서 더욱 빨리 후사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혹시라도 낌새가 보이면 그때 가서 손을 써도 늦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유능한 암살길드가 있으니까요…….” “ 쉿! 조심합시다.” 그리고 반(叛)황태자파, 소위 2황자파인 늙은 귀족들의 속닥거림이었다. 어느 쪽으로나, 유리엔은 딱히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타국의 황녀 따위, 그들에게 이익이 될 이유가 없었다. …어찌됐든, 분위기는 무르익어갔다. 황제의 명령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귀족들은 황태자비가 될 유리시엔 황녀의 얼굴을 보기위해 파티에 참석한 상황이었다. 슬슬 주인공이 등장할 타이밍을 느낀 것일까, 일순 파티의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 때. “ 카르나 제국의 제 1황녀님, ‘유리시엔 헤자르 드 카르나’님께서 드십니다!” 하인의 목소리가 크게 울림과 동시에, 귀족들의 시선이 전부 한 곳으로 쏠렸다. ================================ # 6편 # 소제목 : 환영 파티. (2) ================================ 그곳에는 한 인영이 파티장 안으로 모습을 막 드러낸 참이었다. 위로 틀어 올린 흑단 같은 검은머리, 연분홍빛 진주로 장식한 검은빛 드레스. 그리고 유독 돋보이는 새하얀 피부……. 자칫하면 천박하게 보일 수 있는 검은 드레스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청초하고 아름답게 소화해낸 한 여인에게서 그들은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신들이 보고 있는 존재가 정녕 사람이던가? 미의 화신이라는 엘프의 싸다구를 백대쯤 후려친대도 할 말이 없을법한 미모에 그들은 넋을 잃었다. “ 저분이…황태자비가 되실…유리시엔 황녀전하……?” “ 이럴 수가…….” 귀족들은 남녀 할 것 없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나, 자기들끼리 열심히 유리엔을 씹어댔던 귀족여성들은 자신들이 방금 전 내뱉었던 말들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혀야했다. “ 세상에. 난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봐.” “ 으윽! 분하지만…졌다.” 10대 소녀들은 애꿎은 손수건을 쥐어뜯으며 쓰라린 패배감을 느끼고 있었고, “ 흠흠, 이것 참, 위험하게 됐군요.” “ 제 아무리 여성혐오증인 황태자라도 흔들릴법한 외모입니다.” 1황자파의 늙은 귀족들은 위기의식을 느끼며 말을 내뱉었다. 이렇게, 유리엔의 등장은 순식간에 파티의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다들 그녀의 모습을 쫓았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 아아…위장 쓰라려.’ 유리엔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입구를 응시했다. 제발 황제와 가족들이 최대한 빨리 등장해주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황제가 등장하기 전에 자리를 뜨는 것은 커다란 결례였기 때문에, 유리엔은 본의 아니게 그들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럴수록 황태자를 향한 반감도 커져만 갔다. ‘ 감히 미적대고 있단 말이지? 배짱도 좋구나, 카라멜.’ 유리엔은 오늘 아침에 지어준 황태자의 깜찍한(?)별명을 마음속으로 읊조리며 투지와 분노를 불태웠다. 그러다가 그녀가 ‘으드득’하고 이빨이라도 갈 때면 주변 귀족들이 제 귀를 의심하며 흠칫할 무렵, “ 황제폐하께서 드십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말이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유리엔의 표정이 어찌나 눈 녹듯이 사르르 풀리는지, 지켜보던 귀족들 중 젊은 남자들 몇몇이 심장을 부여잡으며 비틀거렸을 정도였다. 어쨌든 황제와 함께 그의 아내인 황비, 두 명의 후궁, 황태자, 1황자와 2황자…황실 식구들이 줄줄이 갈비 엮듯 파티장안으로 들어섰다. 순식간에 넓은 홀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 -오늘…짐이 파티를 열어 그대들을 불러 모은 목적은 다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오.” 단상에 앉은 황제가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으로 좌중을 압도하며 얘기했다.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귀족들의 모습이, 이 나라의 황제의 위용과 권위를 말해주는 듯 했다. ‘ 마치 아버지를 보는 것 같네.’ 유리엔은 속으로 자신의 아버지와 눈앞의 황제를 비교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흠잡을 데가 없었다. 역시, 제국의 황제는 아무나 해먹는 것이 아니었음이다. “ 소개하겠소. 카르나 제국의 황녀이자 우리 황태자녀석의 배필이 될 아이요.” “ …‘유리시엔 헤자르 드 카르나’입니다. 다들 반가워요.” 황제의 소개로 인해 시선이 집중되자, 유리엔은 곧바로 드레스 끝자락을 잡아 올리고 왼손을 가슴에 올린 채 상체와 고개를 살짝 숙여, 우아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인사를 하며 말한 뒤 살짝 웃었다. 그 모습에, 인상을 찡그리며 이를 갈아대던 장면은 다 잊었는지 귀족들은 마치 천사를 보는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흐뭇해지는 황제의 표정. “ 그럼 다들 잘 즐겨주길 바라오. 카류엘.” “ …예.” “ 어서 가보지 않고 뭘 하느냐? 유리엔이 널 기다리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찌하려고.” …그리되면 저야 좋지요, 하는 대답을 속으로만 삼킨 카류엘은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차갑게 무시하면 그만이다. 부부사이가 되더라도 정략결혼일 뿐이니, 결국 지천에 널린 다른 여자들처럼 내겐 조금도 특별할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유리엔에게 다가간 카엘은 약간 놀란 표정이 되고 말았다. 멀리서 볼 땐 몰랐는데 유리엔은 정말로 쓰러지기 일보직전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하얀 분칠로 가린 창백한 얼굴을 날카롭게 캐치해냈다. “ 설마 정말로 날 기다리느라 그리 됐소?” “ -네?” 장난처럼 내뱉었던 아버지의 말이 떠오른 카엘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해버리고는 곧바로 후회했다. 뭘 잘못 먹었냐는 듯한 유리엔의 표정을 보아하니 잘못 짚은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 …아니오. 잠시 실언을 했소.” 카엘은 다소 뻘줌한 표정으로 말을 정정했다. 유리엔은 왠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 괜찮습니다. 그보다, 입이 참 근질거리시겠어요?” “ ?” “ 원치 않는 정략결혼이라 제가 참 마음에 들지 않으실 텐데, 독설을 퍼부어 주고 싶어도 차마 주변의 눈이 있어서 그러지 못하실 테니 말입니다. 아니면, 혹시 저의 미모에 새삼스레 반하기라도 하셨습니까?” “ …….” “ 정색하시긴…농담입니다. 저도 딱히 그쪽이 마음에 들진 않는지라, 어서 꺼져드리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파티의 주인공이라서 그러긴 좀 힘들 것 같군요. 얼굴 보기 싫으니 먼저 꺼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눈웃음 한방. 반쯤 돌이 되어버린 황태자를 뒤로하고 유리엔은 자리를 옮겼다. 역시 싸움은 선빵이야, 그녀는 씨익 웃었다. 한편, 황태자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방금 들은 말들을 되새겨보자 그의 앳된 포커페이스가 처참히 깨졌다. 으드득! 흠칫. 황태자의 잘생긴 얼굴을 구경하려 모인 귀족아가씨들이 움찔거렸다. 어이없음도 잠시, 카엘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 하! 이게 선빵을 날려?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군?’ 겉보기엔 너무도 가녀리고 연약하게만 생겨서 방심하고 있던 것이 실책이었다. 카엘이 눈을 빛냈다. ‘ 싸우자 이거지. 그래, 어디 한번 누가 이기나 해 보자!’ 투지가 불타올랐다. 유리엔을 어떻게 물 먹일 것인가를 계획하기에 앞서, 일단 머리를 식히기 위한 장소로 그는 테라스를 택했다. ================================ # 7편 # 소제목 : 환영 파티. (3) ================================ “ 린!” 귀족들의 끈덕진 시선을 피해 테라스로 나온 유리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테라스에는 조그마한 바구니 하나를 들고 서있는 린이 있었다. 아, 이렇게 반가울 수가! 유리엔은 단숨에 달려가 린을 폭 껴안으며 말했다. “ 기다린 거야?” “ 네. 황녀님은 파티가 있을 때마다 항상 테라스로 오시잖아요. 그래서 미리 여기로 와서 기다렸어요.” “ 흠…나의 피난처를 잘 알고 있구나. 그럼, 그 바구니는…혹시?” “ 헤헤. 비스킷이랑 샌드위치에요~ 몰래 쌔볐죠!” “ 역시! 아유, 이 이쁜 것!” 유리엔은 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생글생글 웃으며 바구니를 열었다. 너희들…정말 그리웠어! 감격에 젖은 손길로 샌드위치를 집어 드는 유리엔에게 린이 물었다. “ 그런데…황녀님!” “ 응?” “ 카류엘 황태자전하, 어떠세요? 하녀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엄청나던데…저와 비슷한 나이의 애들 중에서 황태자전하를 사모하지 않는 애가 없어요.” “ 그래? 우물우물.” “ 네! 어떠셨어요?” “ 잘생겼더라.” “ 꺄~그럼, 마음에 드셨겠네요?” “ 아니.” “ 엑? 왜요?!” 우물거리던 샌드위치 조각을 꿀꺽 삼킨 유리엔이 고개까지 저으며 부정하자, 린이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 별로야.” “ 왜요? 마음에 드셔야죠, 남편인데!” “ 알게 뭐야. 걔 싫어.” “ 흐음…설마, 황태자전하께서 황녀님한테 막 막말하고 그런 거예요?!” “ 막말한건 그쪽이지.” 린은 갑자기 들려온 낮은 미성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붉은 머리의 조각 같은 미남자가 삐딱하게 서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어머…조각상이…말을 하네.” “ 정신 차려, 린. 저건 네가 방금 전까지 대화의 주제로 올렸던 황태자야.” “ 에…꺄악! 정말요?!” …‘저건’? 마치 물건처럼 취급받은 카엘이 미간을 좁혔다. “ 그런데, 막말한 게 이쪽이라뇨? 그게 무슨 뜻이에요, 황녀님?” “ 별거 아냐.” “ 별게 아니라니? 황녀께서는 그 기품이라고는 눈을 씻어도 찾아볼 수 없었던 모욕적인 언사들이 마치 일상대화처럼 자연스러운 모양이오?” 카엘이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빈정대듯 말했다. 붉은 눈동자는 활활 타오르며 유리엔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에 결국 들고 있던 비스킷을 놓아둔 유리엔이 그와 눈을 마주쳤다. “ 넌 아직도 나한테 반 존대를 할 마음이 남아있어? 생각보다 인내심이 넓구나?” “ …! …그래, 말 편하게 하자? 내 인내심이 좀 넓지, 적어도 너 보다는.” 유리엔과 카엘, 둘 사이를 흉흉한 기운이 감싸 돌았다. 린은 그저 너무 놀라 딸꾹질이라도 나올까 싶어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 호오? 지금 한판 뜨자 이거야?” “ 누가 먼저 시작했는데?!” “ 너.” “ 허! 얼굴에 화장으로 얼마나 떡칠을 했으면 그렇게 얼굴이 두꺼우실까? 화장품에 철가루라도 섞어서 바르셨나?” “ …지금 내가 철판이라도 뒤집어쓰고 있다는 거야?” “ 머리가 잘 안돌아 가나보군, 당연한 걸 되묻는 거 보니.” “ 네 언어구사능력이 딸려서 제대로 표현을 못한 거겠지. 그리고 난 철가루 같은 싸구려는 취급 안 하거든? 금가루나 잔뜩 섞어서 처발랐다, 왜?” “ 웃기고 있군.” “ 너야말로.” 파지직! 서로의 이마에 빠직 마크가 생성되었다. 눈에 힘을 주고 서로를 노려보는 가운데, 린 혼자만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 대고 있었다. “ 야! 카라멜! 너 때문에 린이 난감해하잖아!” “ …카, 카라멜? 누가 카라멜이야?!” “ 듣고도 몰라? 너잖아, 너, 카라멜!” “ 허! 내가 카라멜이면 넌- 유, 유…젠장!” “ 할 거 없지? 할 말 없지? 내 이름처럼 고귀한 이름으로 별명을 짓는 건 너한텐 무리거든!” “ 시끄러워, 이 검둥아!” “ -검둥이?! 너 방금 내 아름다운 흑발을 모욕했어?!” “ 아름다운 거 좋아하시네. 너보다는 내 붉은 머리가 훨씬 낫다, 검둥아!” “ 자뻑은 집어치우시지, 카라멜!” “ 아…저기…….” 린은 쩔쩔맸다. 말리긴 말려야 할 것 같은데 이 둘을 어떻게 자신의 힘으로 뜯어말린다지? 그리고 대체 왜 이렇게 싸워대는 걸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맞긴 맞아? 사실 철천지원수, 또는 평생의 숙적인 게 아닐까? 아아, 혼란스러워! …머리가 팽팽 돌기 시작하는 린의 목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유리엔이었다. “ 왜 불렀어, 린?” “ 아뇨, 그게…싸우시면 안 되니까…….” 안 말리면 황녀님이 기꺼이 육탄전이라도 벌이실 것 같은 기세라서요, 하는 외침은 마음속으로만 외치고, 린은 어색하게 웃으며 우물쭈물 말했다. 그 때, “ 황태자전하! 여기에 계셨습니까?” 공교롭게도 완벽한 타이밍에 이름 모를 귀족이 하나 등장했다. 동안인지 나이가 어린 건지 꽤나 젊은 얼굴의 귀족은 서로 담소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기에는 묘한 대치구도를 이루고 있는 카엘과 유리엔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퍼뜩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하고는 카엘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 날 찾았나? 무슨 일이지?” 방금 전까지 바락바락 싸워대던 모습은 다 어디 갔는지, 어느새 무표정을 되찾은 카엘이 나름 황태자의 위엄을 보이며 말했다. 그러자 현직 기사였던지 귀족은 바로 황태자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존경을 한껏 담은 모습이었다. 이에 유리엔은 내색은 안했지만 살짝 놀란 상태였다. 카라멜 녀석이 저렇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존경 받을 만한 녀석이었다니? 사실 그녀는 몰랐지만, 카엘은 검술에 있어서 타고난 천재였다. 게다가 여성혐오증 덕에 남들이라면 뻔질나게 사교계에 드나들 시간에 그는 검을 휘둘렀고,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물론 눈앞에 두었다고는 해도 2,3년은 걸릴 것이었지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20살 이전에 소드마스터가 된다는 뜻이었으니 카엘은 기사들의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또한 시간이 나면 직접 지도까지 해주는 탓에, 기사단과는 어느 정도 친분도 쌓여 있었다. 그러니 현재 황궁 기사단의 신입인 이 귀족의 모습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 아버지께서…?” 어째서? 의문이 일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다만 왠지 모를 불안감이 뇌리를 스쳐지나갔지만 설마 별 일이야 있겠냐 싶어 무시해버린 카엘은 유리엔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복해있는 귀족 탓에 바로 말투가 변했다. 유리엔도 마찬가지였다. “ 그럼 다녀오겠소.” “ 호호. 그러세요.” ‘다시 올 필요 없거든?’이라는 뜻을 강하게 담아 노려보는 유리엔을 담담히 무시한 카엘이 몸을 돌려 귀족과 함께 테라스를 빠져나갔다. 그러니까, 둘다 내숭200%. “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 그래.” 황제는 따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엘은 표정에 의문을 담아 황제와 눈을 마주쳤다. “ …?” “ 아들아.” “ 예.” “ 네가 눈이 있으면 보일 것이오, 귀가 있다면 들릴 것이다.” “ …무슨?”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린가. 난데없는 얘기에 카엘이 미간을 좁히자 그는 턱짓으로 파티장의 홀을 가리켰다. 카엘은 그 턱짓에 따라 시선을 돌려 홀을 바라보았고, 이내 황제가 원하는 것을 알아채고는 …굳어버렸다. “ …설마.” “ 굳이 입 아프게 말해야 알겠느냐?” 파티의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무르익다 못해 터질 지경이다. 홀을 감도는 감미로운 왈츠와 함께 어우러지는 귀족들의 ‘춤’! “ 보니까 며늘아기도 한 춤 하게 생겼더구나. 흠흠.” “ …….” 그렇다. 귀족들은 각자 맘에 드는 이성과 함께 왈츠를 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 한산하지 않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홀의 정 가운데는 비어있었다. 마치 오늘의 주인공을 위한 스테이지처럼! 뜻하지 않게 그 주인공 중 한명이 되어버린 카엘은 딱딱한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망했구나. 밤새도록 이 파티를 끝내지 않는 한이 있어도 자신과 유리시엔 황녀의 춤을 보고야 말 인간이었다. “ 아버지.” “ 명령으로 내리기 전에 닥치고 춤춰라.” “ …….” 좀 더 빼다가는 어명으로 춤을 춰야하는 상황이 올 지경이었다. …그 여자와 춤을 추라고? 과연 제대로 된 춤을 출 수 있을까? 카엘은 어쩔 수없이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테라스로 향했다. ================================ # 8편 # 소제목 : 환영 파티. (4) ================================ 테라스에는, 유리엔이 마치 풍경을 감상하는 듯한 포즈로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희고 고운 손가락으로 흑단 같은 머릿결을 사르륵-귀 뒤로 넘기는 그녀의 모습은 파티장에서 나오는 은은한 불빛과 함께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졌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테라스 문 너머의 음악으로 인한 부드러운 분위기를 느끼고 있던 유리엔은, 갑자기 문이 열림과 동시에 다시보기 싫은 불청객을 맞이해야했다. “ 검둥이.” “ …죽고 싶니?” 린은 방금 돌려보냈기에 현재 이 장소에는 방금 난입한 카라멜과 자신 단 둘뿐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드럽던 분위기가 지금은 싸늘하다 못해 험악하다. 적대적인 유리엔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 2차전하러 오셨나?” “ 글쎄…피할 이유는 없지만 그전에.” 유리엔의 말에 대꾸하며 카엘이 테라스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벌컥-화려한 홀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 뭐하자는 거야?” “ 춤추자고.” “ …하아?” 유리엔은 카엘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반문하며 홀을 바라보았다. 노골적이게 비어있는 홀의 정 가운데를 발견한 그녀가 피식 웃었다. “ 명당자리 맡아두셨네?” “ 알면 한곡 추지?” “ 춤 신청이 너무 건방져.” “ …….” 카엘의 어이없는 눈빛을 무시한 유리엔이 파티장으로 걸어 나갔다. 춤? 까짓 거 못 춰줄 이유가 없었다. 유리엔은 여유가 가득한 표정으로 멈춰서 몸을 돌려 카엘을 바라보았다. 이에 헛웃음을 지은 그 또한 긴 다리를 자랑하듯 성큼성큼 걸어가 유리엔의 앞에 섰다. “ 한 곡 추시겠소, 아름다운 레이디?” 배울 땐 신물 나게 들었지만, 실제로 입밖에 내뱉는 것은 처음인 카엘이 스스로 말했지만 너무도 느끼한 멘트에 속으로 인상을 썼다. 반대로 유리엔은 마음속으로나마 쿡쿡 웃으며 카엘의 춤 신청을 받아들였다. “ 저야 영광이지요.” 살포시 미소 지은 유리엔이 카엘의 손을 잡고 마주섰다. 잠깐 멈췄던 음악이 여느 때보다 감미롭게 흘러나오며 둘이 춤을 추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 아아-너무 아름다워…!” “ 세상에…너무 잘 어울려!” 부드러운 왈츠에 몸을 맡기는 그들은 겉으로 보기엔 환상의 호흡, 완벽한 한 쌍이었다. 여신을 떠올리게 하는 유리엔과 조각 같은 외모의 카엘이 함께 있으니 이 이상 아름답고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또한 춤은 둘 다 어찌나 잘 추는지, 마치 물이 흐르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 하아…….” 둘을 바라보는 몇몇 어린 귀족들은 이미 눈이 풀리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른 귀족들에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쪽 입 꼬리를 살짝 올린 유리엔이 밀착한 틈을 타 작게 속삭였다. “ 난 지금까지 싫어하는 녀석의 춤을 거부한 역사가 없어.” “ …그래서?” “ 왜 그랬을까? 궁금하지 않아? 재수 없는 녀석이 춤을 신청하면 꼭 받아줬거든~왜냐면…….” 유리엔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이 봤다면 아름답다고 난리를 칠 미소였지만 카엘에게는 그저 불길한 느낌으로만 다가왔다. -아니나 다를까. 콱! “ …….” “ 어라? 빗나갔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내리친 유리엔의 굽은 애꿎은 바닥을 찍고 있었다. 목표로 삼은 카엘의 발등은 이미 간격에서 벗어난 뒤였다. 쳇, 실패군. 바닥을 쓸 정도로 펑퍼짐한 치마였기에 그녀의 암행은 전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카엘이 뭔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유리엔이 다시금 눈을 빛내며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뚝! “ …어머?” 유리엔의 얼굴에 英?기색이 스쳐지나갔다. 이번에도 실패해 바닥을 찍은 그녀의 굽이 그만 뎅강 부러진 것이다. 덕분에 순간 휘청거리는 유리엔을 카엘이 붙잡았다. “ 쯧. 바보냐?” 비웃듯이 말을 내뱉었지만 내심 질린 상태였다. 카엘은 맨 처음 유리엔의 발이 번개처럼 움직이는 것을 보고 살짝 놀랐었다. 저 절묘한 타이밍과 속도라니! 춤을 출 때마다 상대방 발 밟는 연습을 하지 않는 이상 저 정도 경지에 이르기는 힘들어 보였다. 물론 검술로 단련된 카엘은 수월하게 유리엔의 공격을 피했지만, 실패하자마자 재차 기회를 잡아 날린 유리엔의 공격의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물론 피했지만, 바닥을 찍자마자 처참하게 부러지는 구두굽이 그 파괴력을 말해주었다. 세상에, 얼마나 무식하게 내리찍었으면 굽이 부러질까! “ 뭐? 바보? 야, 이게 다 네가 피했기 때문이잖아!” “ 무식하게 힘만 센 네 탓이 아니고?” “ 웃기네! 세상에 나처럼 가녀린 여성이 어디 있다고 그러시나.” 겉으로 보이는 표정은 부드럽게 유지하며 서로에게만 들릴 크기의 목소리로 말싸움을 벌이다, 유리엔이 다시금 비틀거렸다. 구두굽이 부러져 균형이 맞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다소의 의도적인 부분도 엿보였다. 그러나 그 모습은 이미 콩깍지들이 씐 귀족들의 눈에는 발을 헛디딘 것이 아니라 빈혈과도 같은 증세로 비춰진 모양인지, 군데군데에서 안타까운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유리엔이 다시금 몸을 바로하며 ‘봤지?’라는 의미가 명백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카엘은 작게 실소했다. “ 가녀린 여성이라…요즘은 가녀린 여성이 멀쩡한 사람을 절름발이로 만들려고 막 덤비는 모양이지?” “ 어머? 그것 좀 밟혔다고 절름발이가 될 정도면 대체 얼마나 허약하시 길래…쯧쯧.” …하여간 한마디를 안 진다. 카엘은 춤동작의 하나인 스텝을 밟으며 한 바퀴를 빙글 돌았다. 구두 굽 때문에 균형이 맞지 않아서 다소 어려운 동작은 힘들겠지 싶었는데, 의외로 유리엔은 수월하게 잘 따라오고 있었다. 어깨의 높이가 일정한 것을 보니 한쪽은 까치발이라도 들고 있나보다. 그렇게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한 곡이 끝났다. 동시에 둘의 춤도 끝이 났다. 정중히 인사를 하고 서로 물러서자, 주변에서 아쉬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느새 자신들이 추던 춤도 잊고 둘에게 몰입해있던 귀족들은 카엘과 유리엔이 몇 곡 더 추기를 바랐지만 둘 모두 앙코르요청을 받아들일 마음은 전혀 없었다. 유리엔의 경우, 구두굽이 부러지지만 않았다면 좀 더 시도 해보는 건데, 하는 아쉬움은 약간 남아있었지만. ================================ # 9편 # 소제목 : 환영 파티. (5) ================================ 유리엔은 파티장의 구석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귀찮은 파리들이 꼬이는 것도 싫거니와, 내색은 안했지만 구두굽 때문에 서있는 것이 약간 힘들었기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대로 있을 생각이었다. 헌데 그런 유리엔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 저, 유리시엔 황녀님…?” 조심스러운 음성에 고개를 돌리자 대략 1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갈색머리. 하지만 자르르 윤기가 흐르는 것이 마치 린의 머리카락이 생각나, 유리엔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 네. 제게 무슨 할 말이라도?” “ 아, 저…….” 상당히 수줍음을 잘 타는 성격인지, 소녀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유리엔을 바라보았다. 몇 번 망설이는가 싶더니, 이내 결심한 듯 작은 입술을 열어 말했다. “ 황녀님은 너무…아름다우세요.” “ 고마워요.” “ 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아름다워 질 수 있죠?” 나름 용기를 낸 질문인 듯, 말을 마친 소녀는 자신의 드레스를 꼭 붙잡았다. 그러나 표정을 보아하니 홧김에 한 자신의 질문을 후회하고 있는 듯 했다. 아, 어쩌자고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을 했을까. 아름다움에 무슨 방법이나 비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유리엔이 작게 웃었다. 그 웃음에 소녀는 시선을 빼앗겼다. …정말 아름다운 사람.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면. “ 후후. 아, 미안해요. 비웃은 것이 아니라, 그저…흠, 이름이 뭐죠?” “ 저, 전 ‘루네 드아이스’라고 해요.” “ 드아이스?” “ 네…별 볼일 없는 지방의 남작 가이지만 그래도 아버님은 정말 좋으신 영주님이시고…아니, 내가 무슨 말을.” 루네는 눈앞의 이 사람도 자신의 가문이 힘이 없는 것을 업신여길까봐서, 자신도 모르게 말을 하다가 깜짝 놀라 입을 막았다. 유리엔이 더욱 맑게 웃었다.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 귀엽네요.” “ …네, 네?” “ 루네. 몇 살이죠?” “ 열다섯…요.” 누가 보면 작업이라도 거는 줄 알겠다. 하지만 유리엔은 진심이었다. 이 소녀는 정말이지 귀여웠다. 내심 그녀는 루네가 자신보다 어리기를 바랐고 실제로 한살이 어린 나이에 속으로 나이스-를 외쳤다. “ 그래? 나보다 어리네. 말 놔도 되지?” “ 에? 그, 물론….” “ 루네. 언니라고 불러봐. 안될까?” “ 네?” 유리엔의 말에 놀란 듯 루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이 마치 토끼 같아서, 유리엔은 금방이라도 껴안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했다. 루네는 이 황녀님의 말이 의미하는 것을 머릿속으로 생각해보다가 이내 파악이 끝났는지 볼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그리고는 겨우겨우 짜낸 듯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 언…니.” 굿! 유리엔에게 루네의 모습은 한없이 귀엽게만 보였다. 충동을 못 이겨 루네를 숨이 막히게 꼭 껴안아버리…지는 못하고,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살짝 껴안았다. “ 루네.” “ …네?” “ 난 예전부터 너처럼 귀여운 동생이 있었으면 했거든. 갑작스럽겠지만 내 동생이 되지 않겠니?” “ 도, 동생이요?” “ 그래.” 루네는 유리엔의 품에서 눈알만 데록데록 굴리다가, 금방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 물론이죠. 고마워요, …언니.” 루네는 기뻤다. 다가가고 싶었던 사람이다. 자신도 남몰래 황태자를 사모하기는 했지만 좋아한다기보다는 동경에 가까운 감정이었고, 그 동경을 처음 본 유리엔에게서도 느꼈다. 빛이 나는 사람이었다. 멀리서도 그 빛이 너무 눈부셔서 눈에 띄었다. 그것이 결코 아름다운 외모 때문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일까? 간신히 용기를 내어 다가갔지만 숫기도 없고 소극적인 자신을 비웃거나 냉대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컸었다. 하지만. “ 파티장에만 있으니 향수냄새에 코가 마비될 것 같아. 밖으로 나가자.” “ 풋. 좋아요.” 왠지…엄청 따뜻한 사람일 것만 같다. 루네는 환하게 웃었다. 어느새 달이 떴다. 그것도 보름달. 은은한 달빛이 비추는 정원은 마음에 드는 이성끼리의 데이트 장소로 최적의 분위기였다. 물론 한밤의 산책도 어느 정도 즐길만했다. “ 아, 잠깐만.” 유리엔은 잠시 멈췄다. 루네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신고 있던 불편한 구두 한 짝을 훌렁 벗었다. “ ……?” “ 어디 보자-.” 기본적으로 푹신한 정원인지라 딱히 구두를 내리찍을 만한 곳이 없었다. 그래도 찾아야 했다. 이쪽 구두도 굽을 부러뜨려야 걷는 게 불편하지 않으니까. 이리저리 장소를 물색하던 유리엔은 나름 커다란 바위를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 바위의 근처로 다가간 유리엔이 구두를 손에 들고 높이 들어올렸다. 그러나 그녀가 스스로의 괴력을 깨닫지 못했음인가, 아니면 구두의 재질이 보기와 다르게 연약했던가. 퍽! 바위에 힘껏 내리 찍힌 구두는 단말마의 효과음과 함께 처절히 명을 달리했다. 굽뿐만이 아니라 구두 전체도 조각이 나 버렸다. “ …….” “ …….” …이거, 재질이 유리였던가? 하는 표정으로 유리엔이 어색하게 웃었다. 설명을 필요로 하는 루네의 눈빛에 유리엔은 굽이 부러졌던 구두 한쪽을 벗어 보여주었다. “ 아까 춤추다가 이 꼴이 됐거든.” “ 아.” 양쪽의 균형을 맞추려 했었던가. 납득한 루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런데 납득 하고말고 간에 이 처참한 몰골이 되어버린 구두를 어찌할 건가. 한 쪽만 신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유리엔은 나머지 한쪽 구두마저 어딘가로 던져버렸다. “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데, 맨발로 산책이나 해볼까?” 자신의 하얀 맨발을 기다란 드레스자락으로 덮으며 생긋 웃는데, 갑자기 한쪽에서 ‘악’하는 작은 비명이 들렸다. …저쪽은 구두가 날아간 방향이 아니던가? 혹시나 하는 가정에 사색이 되는 르네를 이끌며 정작 유리엔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 웬 멍청이가 넘어지기라도 했나보지.’ …과연? 비명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었다. 한편, 기분전환 겸 산책이나 할까 하다가 날벼락을 맞은 기사A는 자신의 머리통을 장렬하게 때리고 바닥으로 떨어진 누군가의 구두를 허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 있던 카엘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 뭐지?” “ 구두…입니다만.” “ 그건 알겠는데, 왜 이 구두가 저 방향에서 날아와 네 뒤통수를 때리느냔 말이지.” “ …….” 자신도 모를 일이다. 기사A는 억울한 표정으로 구두를 주워들었다. 예쁜 구두. 여성의 파티용 구두이다. 대체 이게 왜? “ 게다가, 넌 그것 하나도 못 피해서 그대로 맞아?” “ 그것이…긴장을 풀고 있었던 데다가, 이 구두가 광속의 스피드로 날아오는 바람에.” …광속의 스피드? 구두가? 카엘은 미간을 좁혔다. 그리곤 어이없는 변명을 늘어놓는 기사A에게 가차 없이 말했다. “ 웃기는군. 만약 이것이 구두가 아니라 암기였으면 어쩔 뻔했지? 그대로 죽을 생각이었나? “ ……. 죄송합니다.” “ 후우. 파티가 끝나는 대로 개인별 훈련코스B에 들어간다. 각오하고 있도록.” “ 헉! 그, 그것만은!” 기사A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훈련코스B. 그것은 일명 최단시간에 겁나 강해지기. 쉽게 말해 지옥 같은 기초 체력 훈련이었다. 그는 절망을 맛보았다. 괜히 산책을 나왔다가 이게 무슨 꼴인가. 보름달 따위 나중에라도 보러 나오면 되었을 것을……. 기사A가 절망하든 말든, 카엘은 기사가 다시금 바닥에 떨어뜨린 구두를 주워들었다. 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던진 것일까. 설마 자신을 노렸나? 의아한 눈빛으로 구두를 살피던 카엘은 구두의 굽이 부러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 음?” 왜 굽이? 혹시 기사의 머리에 맞을 때 부러진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 …설마?” 설마라고는 했지만 확신에 가까웠다. 카엘은 자신의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검은머리의 여성을 떠올렸다. 굽이 부러진 구두. …하. “ -검둥이.” “ 예?” 기사A는 갑작스런 카엘의 중얼거림에 눈을 크게 떴다. 검둥이라니? 황태자가 애완견도 키웠었던가? 기사A가 눈에 의혹을 담아 카엘을 쳐다봤지만, 그의 시선은 구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 쿡.” “ ……?” “ 푸하하하하!” …뭐, 뭐지? 기사A는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리는 카엘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머리를 맞은 것 난데 왜 황태자가…? 기사A가 자신을 맛이 간 상태로 치부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엘은 여전히 즐겁다는 듯 웃었다. 자신도 왜 웃음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어이가 없어서? 화가 나서? 아니면 우스워서? 어째서 자신이 이토록 웃어대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하리만큼 기분이 즐거웠다. 왜일까. 전혀 즐거울만한 상황이 아닌데도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은. 어쨌든-아아, 보름달처럼 맑은 웃음이다. 기사A는 생각했다. ================================ # 10편 # 소제목 : 환영 파티. (6) ================================ 맨발로 뛰댕기는 유리엔이 뭐가 좋아 보였던지, 루네 또한 자신의 분홍빛 구두를 거침없이 벗어던지고 맨발로 정원을 거닐었다. 물론 상당히 아끼는 구두였으므로 유리엔처럼 아무 곳으로나 내던지는 과감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 루네.” “ 네?” “ 우린…맨발의 청춘이야!” “ 어머!” …뭐라는 거야? 일반인이라면 그렇게 받아들였을 유리엔의 헛소리마저 루네의 귀에는 천상의 울림으로 들렸음인가. 마치 유리엔교의 충실한 교도인 마냥 두 손을 모으고 눈동자는 초롱초롱 빛내는 모습이라니. 유리엔은 그만 푸훗 웃으며 루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굽이 높은 구두를 벗어서인지 안 그래도 작은 키였던 루네가 한층 더 아담해져서 이젠 그다지 큰 키가 아닌 유리엔에게도 폭 안길 정도가 되었다. 오~이 아담함, 만족스러워. 유리엔이 고개를 끄덕 끄덕거리며 말했다. “ 훗…아담함이 장난이 아닌데?” “ 어머. 구두 하나 벗었을 뿐인데…….” …잘 들논다. 초딩커플마냥 유치하게 유리엔과 말장난을 주고받으며 웃던 루네가 순간 흠칫했다. “ 아-.” 어린아이처럼 순수해 보이던 눈동자가 어느 한곳에 고정되어 움직일 줄 몰랐다.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온 탄성. 대체 뭘 보는 걸까 싶어 루네의 시선을 따라간 유리엔도 약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타오르는 불길마냥 흘러내리는 붉은 머리카락. 달빛 아래여서인지 몽환적인 느낌마저 주는 그 머릿결 아래로 자리 잡은 붉은 눈동자. …그것에 감탄할 틈도 없이 조각 같은 외모에 시선을 빼앗긴다. 황태자다. ‘ …하여간 면상 하나는 잘났단 말이지.’ 확실히 잘생겼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어스름한 저녁, 은은한 보름달. 그 달빛아래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제국 제일의 미남자. 분위기 탓일지는 몰라도, 그의 모습은 유리엔의 눈길을 잡아두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물론 면상이 어떻든 간에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지만, 적어도 카엘을 열렬히 사모하는 다른 귀족자녀들의 마음을 아주 약간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아, 카라멜 주제에. 마침 카엘과 눈이 마주친 루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본 유리엔이 켁 하는 소리를 냈다. 이런, 우리 귀여운 루네가 카라멜의 마수(?)에 빠지려 하다니! “ -야! 괜히 달빛 받으면서 분위기 잡지 말지?” “ …하?”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길래 신데렐라를 찾은 왕자인 마냥 구두를 던져주려 왔더니, 이게 웬걸 유리엔의 곁에 생소한 소녀가 있어 정중하게 나가야하나 생각했는데 유리엔이 알아서 막나간다. -오냐, 막장이다 이거지. 카엘이 무표정을 버리고 오른쪽 입 꼬리를 슬며시 말아 올렸다. “ 분위기라…왜? 새삼 반하셨나?” “ 돌았구나, 카라멜. 난 그저 나와 우리 루네의 눈 건강을 생각했을 뿐이야.” “ 루네?” 미묘한 억양. 마치 자신의 이름을 아는 듯한 카엘의 반응에, 둘의 막나가는 대화에 놀라 넋을 놓고 있던 루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둘의 눈이 마주치고, 루네의 얼굴이 또 새빨개졌다. 유리엔은 다시금 켁-. “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 …저, 저를요?” “ 흐음-.” 어디서 들었더라. 같잖은 작업 걸지 말라고 날뛰는 유리엔을 무시하고 카엘이 생각에 잠겼다. 정치나 사교계 쪽은 아니고, 분명히 들었는데…아! “ 루젠.” “ 네?” “ 네 오라버니 이름-맞나? 루젠 드아이스.” “ 아, 네!” 역시 그렇군. 루네와 꼭 닮은 갈색머리의 기사를 한명 떠올리며 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그마하고 귀여운 여동생이 있다고 툭하면 자랑하던 황궁 기사단의 신입. 자질과 근성이 제법 좋아서 직접 지도대련을 해준 적이 몇 번 있었다. “ 아직 신입이지만 괜찮은 기사지.” “ 아…감사합니다!” 카엘의 칭찬에 루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기뻤다. 한때는 사모했던, 그러나 동경하는 마음이 더 큰 황태자가 제 오라버니를 칭찬해주다니. 듣던 만큼 차갑고 냉정한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저절로 나오는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데, 유리엔이 도저히 눈꼴셔서 못 봐주겠다는 표정을 한 채 입을 열었다. “ 쑈 그만하고 특별한 볼일이 없으면 꺼지시지.” “ 물론 볼일이야…있지.” 그렇게 말하며 카엘이 뭔가를 가볍게 던졌다. 자신에게로 날아드는 물체를 받아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유리엔이 살짝 놀랐다. “ …내 구두잖아. 이게 왜 너한테 있어?” “ 글쎄? 그저 길 가는데 갑자기 엄청난 괴력을 담은 구두가 날아오길래 잡았을 뿐이라서. 역시 네 거였군.” “ …그럼 설마 내 구두에 맞아 비명 지른 얼간이가 바로 너?” 유리엔이 얼굴에 일말의 기대감을 담아 말했다. 이 착한 구두가 춤출 때 밟아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알아서 카라멜을 때려주었단 말인가?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왕이면 얼굴이나 머리통을. 그러나 틀렸다. 유리엔의 구두에 맞은 것은 작가가 귀찮아서 이름도 지어주지 않은 비운의 기사A였으므로. 카엘이 대답했다. “ 유감이겠지만 아냐. 네 구두에 맞아주기엔 내 실력이 너무 뛰어나서 말이지.” “ 오, 그러셔?” 다시 한번 던져줄까. 이번엔 풀스윙으로. 짐짓 심각하게 고민하는 유리엔을 향해 달빛이 비쳤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밤하늘을 닮은 머리카락. 아아, 왜 나는 흔해빠진 갈색 머리일까. 은은함이 아름다운 달빛 아래에서, 루네는 다분히 사춘기적인 고뇌를 맞이했다. 늦은 시간이었다. 슬슬 체력에 한계를 느낀 귀족들이 하나둘 파티장을 떠날 정도로. 황제 또한 카엘과 유리엔의 춤을 본 후 미련 없는 표정으로 ‘잘들 즐겨주시오’라는 말을 남긴 채 진즉에 떠났으니, 눈치 보일 것이 없었다. 산책을 끝내고 파티홀로 돌아온 유리엔은 드디어 퇴장할 타이밍이 왔음을 느끼고 살며시 사라지려 했다. 그런데 이때, 그런 유리엔의 드레스 소매를 잡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 # 11편 # 소제목 : 환영 파티. (7) ================================ “ ……?” 의아함을 담아 유리엔이 몸을 돌렸다. 자신보다 높은 지위의 사람에게, 신체의 일부(드레스자락포함)에 손을 대어 고의로 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은 약간의 실례였다. 설마 황족인가? 하는 생각에 자신을 잡은 사람을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눈앞에 서있는 것은 아직 10대로 보이는 한 여성이었다. 그 여성은 유리엔을 마주하자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유리시엔 황녀님.” “ 아아, 그래요.” 유리엔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용건이 있으면 얼른 말하고 꺼지라는 눈빛으로 여성을 바라보았다. 이런 유리엔의 반응이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는지 여성은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 설마 그 말 하려고 잡아 세운건가요? 날?” “ 아, 아니…….” 예상치 못한 냉대에 여성의 낯빛이 변했다. 세상 그 누가 자신에게 이리 차갑게 대할 수 있단 말인가? 설사 여성혐오증인 황태자라도 자신에게는 살짝 접어주고 들어가야 할 터였다.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서 이러는 것일 게다. 여성은 다시금 웃음을 지으며 제 풀 네임을 밝혔다. “ 전 ‘에델리아 폰 다르히네’라고 합니다.” “ 그래서요?” “ ……예?” 유리엔의 표정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속으로 대충 예상했던 터다. 이토록 자만심과 오만함으로 똘똘 뭉친 여인의 신분이 ‘공녀’보다 낮다면 그것이 더 이상할 테니까. 다르히네 공작가. 공작이라는 지위는 뮤리엔 제국을 통틀어 단 세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공작가들 중 황실과 외척을 맺어 제법 권력을 행사하는 가문이 있는데, 그 가문이 바로 다르히네 공작가였다. 게다가 현재 뮤리엔 제국 안에 있는 ‘공녀’는 단 한명뿐이었다. 그것이 에델리아라는 여성을 한없이 오만하고 싸가지없게 만들었다. “ 내가 자기소개라도 하기를 바라는 건가요? 나에 대헤서는 이미 알고 있을 텐데요. 그게 아니면…내가 당신의 신분에 놀라서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기라도 하나요?” “ ……!” 유리엔은 일부러 반 존칭에 가깝도록 상대방을 낮추고 자신을 올렸다. 우스운 여인이다. 고작 공녀의 지위로 무엇을 믿고 황녀인 자신에게 개기려 했단 말인가? 유리엔은 입가에 조소를 매달았다. 그것을 알아차린 에델리아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 상당히…예의가 없으시군요.” “ 그쪽이 상관할일은 아니죠. 바쁜 나를 붙잡고 자기소개를 해대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미 이뤘군요. 그럼 이만.” “ 잠깐!!” 돌아서는 유리엔을 향해 에델리아가 외쳤다. 이미 처음의 자신만만한 미소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든 말든 그녀는 씹어뱉듯이 유리엔을 향해 말했다. “ 감히…나에게 이따위로 대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 나 에델리아 폰 다르히네를?” “ 대단한 오만이군요. 놀랄 만큼.” “ 뭐야?! …하, 당신이…언제까지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 두고 보겠어. 조만간 황태자전하께 비참하게 버림받고 내 앞에 바짝 엎드리게 될 거야. 곧!” 오기로 가득 찬 에델리아는 이까지 갈았다. 유리엔은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황족모독죄로 처형당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 보이는 여인과 말을 섞느니 어서 방으로 돌아가서 린이 준비해줄 야참을 먹는 것이 백만 배는 더 가치 있는 일이었다. ‘ 아아-귀찮아.’ 어쩌면 저런 정신 나간 여자가 앞으로 줄줄이 굴비 엮듯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매일매일 그런 것들을 밟으며 지내다보면 그 나름대로 심심하지는 않겠지만 상당히 귀찮은 것이 사실이다. ‘ 내일은 파티에 나가지 말고 산책이나 해야겠어.’ 일반적으로 환영파티라 함은 며칠동안 지속되는 것이 관례였다. 짧게는 3일, 길게는 일주일정도. 하지만 황제의 품성이 사치를 즐기는 것 같지 않으니 3일이면 끝날 터였다. 그 동안 뭘 하고 놀까……. 물론 파티에 참석할 생각은 개미 눈물만큼도 없는 유리엔이다. ================================ # 12편 # 소제목 : 납치 미수. (1) ================================ 환영 파티가 끝났다. 한동안 뒹굴 거리자 한결 편안해진 유리엔은 심신의 여유를 가지고 루네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린의 부탁으로 보내게 된 것인데, 하다보니 이것 나름대로 재미가 쏠쏠했다. 유리엔은 루네에게 보낼 편지를 쓰는 김에 넓은 아량을 베풀어 카엘의 것도 함께 쓰기로 했다. “ 흠…뭐라고 쓸까나…….” 화려한 공작새의 깃이 달린 비싸기로 유명한 펜을 까딱거리며, 곱게 빗어진 긴 머리카락의 일부를 손가락으로 돌돌 말았다. 즐거운 고민이다. “ 친애하는 카라멜에게? 아아, 아니야. 모름지기 솔직하게 써야지-.” 잠시 동안의 고민을 끝내고, 이내 유리엔은 씨익 웃으며 펜을 움직였다. 예쁜 무늬의 깃이 움직일 때마다 종이에 아기자기한 글씨가 채워졌다. “ …다 썼다.” 드디어 편지를 완성한 유리엔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편지를 눈으로 한번 흩었다. 됐어! 이제 보내야지. 그녀는 편지를 돌돌 말아 끈으로 묶은 뒤 린을 불렀다. “ 편지가 도착했습니다만.” “ …편지?” 카엘은 자신에게 돌돌말린 종이를 건네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편지라니? 요 근래에 이런 걸 받아본 적이 있던가. 설마 연서는 아니겠지. 누가 보낸 것일까 생각하며 카엘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 알았으니 이만 나가보도록.” “ 예.” 카엘은 앉은 자세를 편하게 바꾸며 편지의 끈을 풀었다. 모양을 보아하니 새의 발에 묶어 보낸 모양이었다. 무슨 전보도 아니고. 뭐 나름 귀엽군. 편지를 펼치자 아기자기하게 적혀있는 예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친애하지 않는 카라멜에게. 하고 싶은 말은 있지만 얼굴보기는 귀찮아서 이렇게 편지로 씁니다. 저번 파티때에는 정말 힘들었답니다. 아침부터 일어나 꽃단장을 해야 한답시고 반신 욕에 마사지에 화장떡칠을 하는 고문을 받았답니다. 더 힘든 것은 날씬하게 보여야 한다고 아침부터 쭉 굶기는 가혹한 처사였지요. 덕분에 그때는 진심으로 쓰러지는 줄 알았습니다. 너는 이런 기분 모를 테지요. 한번 겪어볼래요. 아 짜증. 아무튼 알다시피 난 안 꾸며도 충분히 예쁘므로, 쓸데없이 파티를 위한답시고 하녀들을 보내지 말아주세요. 재수 없어요. 보냈다간 파티 내내 애교를 떨어서 그날 먹은 것을 모조리 토해내게 만들어줄 테니까. 그리고 파티 같은 건 절대 열지 말아주세요. 만약에라도 폐하께서 열려고 하시면 온몸을 던져서라도 막으세요. 그렇지 못하면 내 손에 죽습니다. 지금도 네 발을 밟기 위해서 열심히 연습 중입니다. 발등을 무사히 보존하고 싶다면 알아서 파티가 열리는 것을 막으시길 바랍니다. P. S 파티를 열지 말랬다고 무도회를 열었다간 넌 진짜로 뒤집니다. 유리시엔 헤자르 드 카르나가.- “ -쿡.” 카엘은 처음 발신인을 확인하자마자 피식, 웃고 말았다. 의외로 예쁘장한 글씨에 약간 놀랐다가, 내용을 읽고는 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어색한 존댓말 하고는. 누가 보면 협박편지라도 쓴 줄 알거다. 참 검둥이다운 편지라는 생각에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 파티라…….” 파티를 싫어하는 것도 약간 의외다. 물론 자신도 그런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싫어하는 편이다. 권력의구도상, 파티에 참석이라도 했다간 수없이 많은 귀족들에게 시달려야 하니까. 때문에 사교계와도 최대한 거리를 두고 차라리 검을 휘둘러왔다. 유리시엔-그녀의 등장으로 인해 도움이 된 것은 더 이상 연서나 고백, 그리고 은근한 중매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녀 또한 앞으로 상당히 시달리게 될 것이다. 질시에 가득 찬 눈길들 속에서. ‘ …내가 알바는 아니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그런 시달림에 못 이겨 파혼이라도 요구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않은가. …이상하게 머리가 아파왔다. 그는 이 어처구니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실소가 흘러나오게 만드는 편지에 대한 답장을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유리엔은 한가롭게 햇빛을 받으며 린과 함께 다과를 즐기고 있었다. 이럴 때면 한없이 우아해 보이건만. ‘ …괘씸한 카라멜. 답장을 안 보낸다 이거지?’ 아작아작. 카라멜 맛이 나는 달콤한 과자를 분노를 담아 씹으면서 그녀는 뜨거운 홍차를 홀짝였다. 편지를 보낸 지 벌써 이틀이나 지났건만 카엘에게서는 그에 대한 답장이 없었다. 아아, 열 받아. 왠지 그 답장을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더욱 짜증이 난다. “ 린.” “ 와작와작. 네?” “ 만약 녀석으로부터 답장이 오거든, 바로 불쏘시개로 써버려.” “ 홀짝. 우물우물. …네.” 쿠키의 맛을 음미하며 대답한 린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싸워대더니 혹시 편지에 욕이라도 써서 보낸 걸까? 아님 저주라도. 그런데 은근히 답장을 기다리는 것 같은 느낌은…착각이려나? 린은 여전히 의문을 가진 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후우. 역시 이 맛이야. 그녀는 차를 끓인 자신의 실력을 자화자찬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 # 13편 # 소제목 : 납치 미수. (2) ================================ 다르히네 공작가의 햇살 좋은 정원에서는 현재 티타임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주최자는 공작의 하나뿐인 딸내미인 에델리아 공녀. 사교계를 뛰어다니며 만든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그녀는 타지에서 수입해왔다는 완전 명품 허브티를 품위 있게 홀짝였다. “ 향기가 정말…끝내줘요.” “ 흥. 당연하죠. 이 허브티가 얼마짜리인줄 알기나 해요? 제 덕분에 여러분 모두 이런 고급 차를 마실 수 있는 거죠.” 에델리아는 한껏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 난 공녀야. 뮤리엔 제국의 하나뿐인 공녀. 그 누구도 날 함부로 하지는 못해. 그런 생각에 똘똘 뭉친 에델리아는 말 한마디는 물론이고 손짓 하나까지도 거만하게 움직였다. 그 모습에 추종자들이 몰래 우웩 거렸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 제가 오늘 이렇게 티타임을 마려한 것은, 여러분께 할 말이 있어서예요. 얼마 전에 있었던 유리시엔 황녀의 환영파티…예의상 참석해줬더니 그곳에서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지요.” 그 ‘어처구니없는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이들 모두 사교계에 잘 나타나지 않는 황태자의 잘난 면상을 구경하고자 파티에 참석했었으니까. 그리고 보았다. 에델리아가 황녀에게 괜히 들이대다가 처절하게 발리는 것을. 물론 그 사실 그대로 에델리아의 입에서 튀어나올 리는 없었다. 제 맘대로 각색하고 뜯어고쳐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바뀌어 내뱉어질 것이다. 주제는 ‘유리시엔 황녀는 재수 없어’정도?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며 에델리아의 입에서 격양된 어조의 말이 내뱉어졌다. “ 유리시엔 황녀. 그 얼굴만 반반하고 나머지는 볼 것 하나 없는 년이, 감히 나를 모욕하더군요. 품위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말을 내뱉어대며 말이지요!” “ 저런-!” “ 어찌 그런 일이!” 에델리아의 말에 답하여 좌측에 있던 추종자 소녀A가 이 이상 안타까울 수 없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에 질세라 우측에 있던 소녀B또한 혼신의 힘을 담아 자신의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 감히 에델리아 공녀님을 모욕하다니! 정말 어이가 없는 여자네요!” “ 맞아요. 알아서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에델리아의 추가 설명이 이어지기도 전에 알아서 유리엔을 씹어줌으로써 에델리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리는 성과까지 이루어냈다. 역시 에델리아의 오른팔과 왼팔! 속으로는 고소하다 못해 바닥을 뒹굴면서 웃어도 모자랄 지경이면서 겉으로는 저토록 완벽한 타이밍에 제대로 비위를 맞추는 둘의 모습에 알파벳 이름도 받지 못한 나머지 엑스트라 소녀들이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도 열심히 노력해서 소녀C, D등등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 그녀들의 눈동자에 혼을 불사른 투지가 솟아올랐다. 렛츠 어 뒷담화 타임. 이제 본격적으로 유리엔의 뒷담화를 까댈 시간이었다.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소녀A를 시작으로 너도나도 자신의 화려한 담화스킬을 꺼내들기 시작했다. “ 솔직히 얼굴을 빼면 볼 것이 하나도 없지요.” “ 싸가지는 또 어떻고요.” “ 지가 제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줄 알지요.” “ 공녀님에 비하면 쨉도 안 되는 것이.” “ 발가락의 때만도 못한 것이.” “ 공중의 먼지만한 것이.” “ 왜 나대냐고?” “ 내 말이.” “ 재수 없어.” “ 이쁘면 다야?” “ 아 짜증.” 왠지 갈수록 현대판 뒷담화로 변모되는 것 같지만 그런 것은 대충 제쳐두고, 어쨌든 에델리아와 아이들은 김이 모락모락 나던 뜨거운 차가 미지근하게 식을 때까지 실컷 유리엔을 씹어댔다. 원하던 말들은 모두 들은 에델리아는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이제 자신이 하고자 했던 ‘진짜’ 얘기를 꺼내기로 했다. 이런 단순한 담화나 하자고 티타임을 연 것이 아니니까. 잠시 목을 가다듬은 그녀가 다소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 제 생각에는…유리시엔 황녀를 이대로 둬서는 안 될 것 같군요. 이제 곧 황태자전하와 결혼식을 올릴 텐데, 그렇게 되면 고것이 황궁의 안주인이라도 된 마냥 더욱 나대겠지요. 그 꼴을 어찌 가만 두고 보겠어요?” 에델리아의 입가에 음침한 미소가 번졌다. “ 손을 좀 봐주고 싶은데, 좋은 생각이 없나요?” “ 저요.” 이때까지 조용하게 차향만 음미하고 있던 구석자리의 한 소녀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무슨 프레젠테이션이냐. 에델리아가 기대를 담아 소녀를 바라보았다. “ 말해 봐요.” “ 납치하는 건 어떨까요?” “ 납치?” 소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생각보다 극단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괜찮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더 우위에 있음을 알려주고 어느 정도의 공포심을 심어주면서 경고와 협박을 하기에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단 증거만 잡히지 않는다면. “ 하지만 어떻게 납치할 생각이죠?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려면 쉽지 않을 텐데요.” “ 편지로 불러내는 거죠.” “ 편지라니……?” “ 지금 유리시엔 황녀는 자신의 외모를 과신하여 기고만장해 있을 거예요. 더욱이 황태자전하와는 파티에서 춤도 추었으니, 어쩌면 황태자전하가 자기에게 홀딱 빠졌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 우습군요. 전하에 관한 소문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 외모를 지나치게 과신했거나, 아니면 자기는 특별하다고 생각하겠죠. 이런 점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유리시엔 황녀를 납치할 수 있어요.” 엑스트라치고는 어째 대사가 상당한 소녀C는 에델리아와 눈을 마주치고 씨익 웃었다. 한차례의 눈빛교환 뒤 소녀는 나머지를 설명했다. “ 일단 황태자전하께서 보낸 연서인 것처럼 가장하여 편지를 보내는 거죠.” “ 흐음.” “ 단 둘이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니 어느 장소로 혼자 와 달라는 정도의 내용이면 되겠지요. 장소는…….” “ 우리 다르히네 가의 정원으로 하죠. 미로처럼 가꾸어놓은 상당히 분위기 좋은 장소가 있는데, 사람이 한둘 없어져도 모르는 곳이니까.” “ 좋아요. 그럼 제가 돈으로 하류용병을 몇 사겠어요. 그들을 시켜서 이곳으로 불러낸 유리시엔 황녀를 납치하고…혹시라도 발설의 위험이 있는 용병들은 일이 끝난 뒤에 처리하면 그만이니까요.” 소녀C는 제법 살벌한 말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태연하게 내뱉었다. 이에 티타임에 모인 소녀들 중 몇몇이 움찔했다. 아직 그녀들은 일국의 황녀를 납치 한다던가 아무리 용병이라지만 쓰레기 버리듯 쉽게 목숨을 처리하는 그런 일에 전혀 경험이 없었다. 그럼 소녀C는 대체 뭐란 말인가. 딱 봐도 자신들과 동년배인 듯한데, 이런 일이 익숙해 보이는 저 살벌한 모습은……. “ 납치한 뒤에는 일단 팔다리라도 몇 개 부러뜨려놓으면 되겠죠. 운신도 힘들 테고, 결혼식도 몇 달은 족히 미뤄질 테니까.” “ -.” “ 여기까지는 경고지요. 황태자전하와 뮤리엔 제국에서 떨어져나가라는 의미의. 하지만 이 경고를 무시한다면, 다음에는 불구로라도 만들어서 강제로 내쳐지게 만들어주겠어…….” 마지막에는 혼잣말인지 모를 말을 내뱉으며 소녀C가 더없이 차가운 눈동자를 했다. 에델리아도 내심 놀라버렸다. 급조한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계획한 듯했고 마치 유리시엔 황녀를 진심으로 증오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 평소엔 늘 조용하기만 해서 몰랐는데 이런 애였었나?’ 그녀는 약간이지만 불안해졌다. 영락없이 추종자들 중 하나인줄만 알았었는데 지금에 와 생각해보니 이 상황만 기다려온 것 같았다. 저런 순진한 얼굴을 한 주제에 속으로는 대체 뭘 품고 있는 건지! ‘ 설마 황태자를 욕심내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안 된다. 어디까지나 황태자비의 자리는 자신의 것이었다. 더 나아가 예비 황비의 자리도! ================================ # 14편 # 소제목 : 납치 미수. (3) ================================ 소녀와 마주친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하고 눈싸움이라도 하듯 들여다보았지만 딱히 읽히는 것이 없었다. 에델리아는 애써 속내를 감추고 겉으로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 그럼, 믿고 맡기겠어요.” “ 네.” 어느새 주도권을 잡아버린 소녀C와 에델리아의 다정(?)한 모습에 에델리아의 측근인 소녀A는 자신의 위치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휩싸였지만, 이내 털어버렸다. 이름도 모르는 별 볼일 없는 가문의 여식 따위야-. 질투하는 것이 우습다. 그러나 소녀A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 정도로 어떤 것에 집착해버린 여인이 얼마나 추악해지고 무서워지는지. 그리고 순진한 외모와 상반되는 수십 마리의 구렁이가 내면에서 자라고 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것도. “ …이만. 티타임은 여기서 끝내겠어요.” 에델리아는 소녀C가 중심이 된 프레젠테이션에 가까웠던 티타임을 이만 접었다. 가식이 가득한 웃는 낯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이들을 돌려보낸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지듯 굳었다. ‘ 뒷조사를 해봐야겠어.’ 습관적으로 손톱을 깨물어 모양을 망가뜨리던 에델리아가 재빠르게 저택으로 들어갔다. 마주하고 있자니 무서울 정도의 집착이 약간이나마 느껴지던 갈색 눈동자. 그 집착이 무엇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짐작이 갔다. 소녀의 존재감을 더욱 없게 만들었던 흔해빠진 갈색 머리카락이 왠지 어디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을 주며 머리에서 아른거렸다. “ 라랄~. 오늘도 편지는 산더미처럼~.”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아가는 활기찬 소녀 린은 유리엔의 앞으로 잔뜩 온 편지들을 마치 자신에게 온 것 같은 자부심을 느끼며 차곡차곡 정리했다. 정성들여 밀봉한 깔끔한 편지들의 발신인을 한장 한장 확인하던 린이 어느 편지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 누가 보냈는지가 없네?” 발신인이 비어있는 편지였다. 해선 안 되는 걸 알지만 호기심을 주체 못한 린은 조심스레 편지의 밀봉을 뜯었다. “ 협박편지일지도 모르니까. 에헴. 어디보자-.” 혹시 자신이 누구인지 밝힐 용기가 없는 수줍은 기사1의 연서이려나. 눈동자 한가득 기대감을 담아 초롱거리며 편지를 펼친 린에게서 켁,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 황태자전하한테서 온 거잖아?” 혹시나 잘못 본 것일까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편지의 마지막부분을 응시했지만 여전히 ‘카류엘 네이시스 드 뮤리엔’이라는, 황태자의 풀 네임이 또박또박 읽힐 뿐이었다. 정말로 며칠 전에 보낸 편지의 답장인가? 왜 이제 와서? 차마 내용을 읽어볼 용기가 나지 않은 린은 다시 원상태로 편지를 접어 앞치마의 주머니에 대충 집어넣었다. 불쏘시개로 쓰라고 했으니까. 소녀C가 고민해서 쓴 닭살적인 연서는 린의 공로로 인해 결국 유리엔의 발치에도 못 가본 채 화로에 던져졌다. 그날 유리엔의 거처는 참으로 따끈따끈했다는 여담이……? 한편, 편지에 적힌 약속장소에서 혼자 올 유리엔을 기다리던 소녀C와 건달 몇은 그대로 바람을 맞고 입술을 깨물어야했다. ‘ 설마 수상함을 눈치 채고 나오지 않은 건가? 아냐, 그럴 리가 없는데.’ 1차 시도에 실패한 소녀C는 자신의 방 침대에 앉아 표정을 찡그리고 생각에 잠겨있었다. 편지의 내용이 어색하지는 않았을 거다. 전문 카사노바까지 섭외해서 쓴 연서의 내용인데! ‘ 혹시…전달에 문제가 생겼을지도. 그래. 틀림없이 그런 거야!’ 최근에 유리시엔 황녀와 황태자가 만났다는 정보는 없으니, 계획을 눈치 챘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아무리 유리엔이라지만 아직 거의 시작도 못한 음모를 황녀의 초 직감으로 미연에 알아내고 박살내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만약 가능했다면 제국의 온 국민들이 유리엔을 추앙하고 있었을지도. 결국 소녀C는 가장 진실에 가까운 가정을 생각해냈다. 그리고 대책을 세웠다. ‘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다니…손을 써야겠어. 편지가 확실히 유리시엔 황녀에게 전해지도록.’ 2차 시도에 보완할 것은 바로 돈질이었다. 하녀들 중 적당한 한명에게 돈을 쥐어주고 편지를 전달하도록 시키면 그만. 소녀C는 확실한 성공을 예감했다. “ …유리시엔 황녀…감히, 카류엘 황태자전하를 넘봐……?” 누가 들으면 화들짝 놀랄 말을 중얼거리며 소녀C가 이를 갈았다. 갈색 눈동자에 어린 소녀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증오와 집착이 솟아났다. 쥐어짜듯 낮게 내뱉는 목소리는 원한으로 똘똘 뭉친 사람마냥 갈라져 나왔다. 카류엘 황태자를 언급할 때만 그녀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사랑인지 집착인지 모를 것이 한데 뭉쳐 소녀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따스한 오후. 결혼식을 올려야 하는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평화로운 나날에서 벗어나기 위해 예비신부 유리엔은 열심히 허우적거리는 중이었다. 이혼이고 뭐고 이왕이면 결혼 자체를 막는 것이 가장 해피할텐데. 아직 미성년이라는 것을 들먹여 약혼정도까지 타협해볼 생각을 하고 있던 그녀에게 편지가 날아온 것은 그때였다. “ …꼭 좀 읽어달라고?” “ 네.” 유리엔에게 편지를 건네고 강아지처럼 눈을 초롱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시녀는 왠지 린을 닮아있었다. 오, 분명 은근히 발이 넓은 린의 친구임과 동시에 그녀에게 교육(?)받은 유리엔 신봉자 제2호임이 틀림없었다. 시녀는 착하게도 ‘모르는 사람이 돈 주면서 이 편지좀 전해달라고 꼬셨어요’라고 유리엔에게 곧이곧대로 일러바쳤다. 어쩐지 웃음이 나온 유리엔은 시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고 ‘그 돈은 심부름 값해’라는 말과 함께 돌려보냈다. “ 안 읽으면 큰일이라도 나려나.” 대체 누가 돈까지 써가며 편지를 보낸 건지. 이런 생산성 없는 짓을 하는 바보가 과연 누구일까 추측해보며 유리엔이 편지를 펼쳤다. 은근히 내용이 궁금했기에 깨알 같은 글씨에 시선을 고정했지만 곧 헛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혀를 차야 했다. -한 떨기 꽃 마냥 사랑스러운 유리시엔 황녀에게. …시작부터 제대로 진상이었다. ================================ # 15편 # 소제목 : 납치 미수. (4) ================================ 손에 버터를 바르고 글씨를 썼을까 싶을 만큼 느끼함이 줄줄 흘러내리는 시작이라니. 유리엔은 모국인 카르나 제국에서 온갖 연서들에 파묻혀 지내던 때를 떠올리며 편지를 읽어나갔다. -유리시엔 황녀. 그대의 아름다움은 미의 화신이라는 엘프가 고개를 숙일 정도이며 화사한 장미꽃마저 그 빛을 읽고 시들어버릴 정도요. 내 그대를 처음 보았을 때 마치 여신이 강림한 것 같았다오. 푸핫. 유리엔은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제 곧 유부녀가 되어야 할 운명인 자신에게 이토록 낯 뜨거운 연서를 보낸 누군가의 용기에 속으로 박수를 보내며. -며칠 전의 환영파티 때, 난 그대에게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소. 특히나 그대와 춤을 추었을 때는 깃털처럼 가벼운 천사가 내 품안에 날아 들어온 것만 같았지. 하아? 한참 열중에서 편지를 읽던 유리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용이 조금 이상한데. 파티에서 춤을 춘 녀석이 카라멜을 제외하고 또 있었던가? -파티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 그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소. 이런 감정은 처음이라 많은 고민을 해야 했소. 그러다 결국, 내가 그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오. 난 바보같이 그대에게 한눈에 반해버린 모양이오. 쯧쯧. 점점 심각해지는 내용에 유리엔이 혀를 찼다. 이건 뭐 타국에서 시집온 아름다운 황녀님과의 불륜로맨스를 꿈꾸는 기사1 정도랄까. 아무래도 정략결혼으로 팔려온 황녀나 공주와 그런 그녀를 지키는 용맹한 기사와의 러브스토리를 다룬 3류 로맨스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모양이었다. 편지에다 소설을 쓰고 앉아있으니 원. -이런 내 마음을 꼭 전하고 싶소. 내일 저녁 일곱 시까지 다르히네 저택의 장미정원으로 혼자 와주길 바라오. 그럼 그때를 기다리겠소. 얼레? 이젠 구체적인 약속장소까지? 그나저나 다르히네 저택이라니, 공작가에서 일하는 기사1인가? -카류엘 네이시스 드 뮤리엔. “ …….” 툭. 믿을 수 없는 무언가를 읽고 그대로 굳어져버린 유리엔의 손에서 떨어진 편지가 푹신한 양탄자가 깔린 바닥으로 착지했다. “ …호호호. 이상하네. 방금 헛것을 본 것 같은데.” 이내 석화상태에서 풀려난 유리엔이 어색하게 웃으며 편지를 주워들고는 다시금 발신인을 확인했다. 혹시 요즘 몸이 허해져서 눈에 이상이 온 건가 싶어 몇 번이나 눈을 깜박이고 비벼도 보았지만 발신인에 적힌 충격적인 이름은 좀처럼 바뀔 줄을 몰라 그녀를 충격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었다. 카류엘 네이시스 드 뮤리엔. 뮤리엔 제국의 황태자. 카라멜. “ …미쳤네.” 유리엔이 비속어를 내뱉으며 아무런 망설임 없이 편지를 뒤로 던져버렸다. 아, 눈 배렸다. 찝찝한 느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던 유리엔의 시선이 바닥에 안착되어있는 편지에 머물렀다. 순간 그 편지 위로 뺀질거리는 카라멜의 면상이 떠오르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편지를 발로 밟아버렸다. “ -제법이네, 카라멜. 이런 고난도의 정신공격을 하다니…….” 편지를 걸레짝으로 만든 유리엔이 마음을 가라앉히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정신적 타격이 좀 심했다. 잠시 동안 이따위 답장을 보내어 자신을 공격한 카라멜에게 어떻게 가장 효과적인 복수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유리엔이 미간을 찌푸렸다. ‘ 잠깐. 다르히네 공작가의 저택에서 만나자고……?’ 떠올려보니 그 부분이 상당히 눈에 거슬렸다. 이것이 정말로 카라멜이 보낸 편지라면, 그런 곳에서 만나자는 내용이 들어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 뒷수작이네.” 유리엔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자신이 혼자 편지의 장소에 나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누군가가 카라멜의 이름을 빌려 보낸 편지였다. 쯧. 바보로군. 자신이 이런 허접한 함정에 속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적어도 저번에 환영 파티에서 본 허영덩어리 공녀정도는 되어야 아무 생각 없이 속아서 좋다고 약속장소로 나가지. 유리엔은 창가너머로 내리쬐는 햇빛을 바라보았다. 오후의 햇살이었다. 따스하고 아늑하지만 지루하고 따분한 오후의. “ …속아 줄까나?” 린이 알았다면 뒤로 넘어갈만한 생각을 하며 유리엔이 생긋 웃었다. ================================ # 16편 # 소제목 : 납치 미수. (5) ================================ 그것은 결혼식이 다가오는 현실에서 도피하고자하는 욕망과 허접한 엑스트라가 그래도 제법 악역이 되어보겠다고 머리 쥐어짜서 애써 만들어낸 함정에 한번쯤은 걸려주자는 자비와 왠지 햇살이 너무 따스해서 지루하다는 심심함이 한데 뭉쳐져 만들어낸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런 함정 따위에 당하지 않는다는 스스로를 향한 자신감도 있었다. 그것은 그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작정 나오는 자만심과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충분한 생각과 추리에 의한 근거에서부터 나오는 확신에 가까웠다. 유리엔의 여유가 가득 묻어나는 웃음이 한동안 그녀의 입가에 머물렀다. 이쪽에서는 붉은 머리의 잘생긴 소년이 애꿎은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호위기사 제론이 입을 열었다. “ 걱정되면 솔직하게 가서 말하시는 게.” “ 누가?!” 카엘이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팩 들었다. 카엘과 눈동자를 마주한 제론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아야했다. 자신의 주인은 역시 아직 어린 모습이 있었다. 열여섯이라는 나이 때문일까.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좌중을 압도하고 끝없는 무력으로 기사들을 승복시키는가하면 때때로 치기어린 모습을 보여준다. 앞으로 이년정도만 지나면 없어질 이 모습이 그는 못내 귀여웠다. “ 걱정되시잖습니까.” “ 참내. 검둥이 따위를 누가?” “ 쯧쯧. 츤데렙니까?” “ …뭐, 뭐?! 너 그 말은 어디서 들은 거야?” 카엘이 어이없음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제론을 쏘아보았다. 이 인간이 지금 자신을 놀리고 있다니. “ 하긴. 아직은 괜찮겠군요.” “ …….” “ 결혼식을 올린 뒤가 더 문제지요. 1황자파와 2황자파의 늙은이들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 “ 죽이지는 못할 거잖아.” “ 죽을 만큼 괴롭히겠지요.” “ 잘됐네! 이혼당하기 딱 좋은 이유 아니야?” “ …흐음.” 정말로 방관할 생각인가. 물론 어린 아이처럼 앞장서서 유리시엔 황녀를 괴롭힌다거나하는 것은 없었지만 카엘은 유리엔을 아내로 인정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아, 그것은 상대방도 마찬가지이려나. ‘ 갈 길이 멀군.’ 올해 스물여덟인 제론은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어린 것들. 미운정이라도 잔뜩 들어버리면 좋으련만. “ 어? 어디가세요, 황녀님?” 오늘도 여지없이 오후까지 늘어져라 퍼 자다가 점심때가 지나서야 늘그막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당연히 방콕이겠구나, 생각했는데 웬걸 유리엔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린은 빨래더미를 잔뜩 실어 나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약속 있거든.” 무려 약속? 몸이 짜부등해서 산책이나 하러 나가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와 만날 약속이 있단다. 귀찮다는 이유로 티타임이나 다과회, 파티 등 어떤 초대장도 시큰둥하게 무시했던 유리엔이 약속 장소로 나가기 위해 외출복을 차려입는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린이 여전히 산더미 같은 빨래더미에 파묻힌 듯 하며 물었다. “ 몇 시까진데요?” “ 일곱 시.” “ …네? 지금 여섯시 오십분인데요?” “ 그래?” 일곱 시가 눈앞인데도 불구하고 유리엔은 여전히 준비에 열중하고 있었다. 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아씨. 이놈의 외출복은 뭐 이리 안 입어져? 코르셋만 안한다 뿐이지 드레스랑 똑같네, 아주.” “ 아! 도와드릴게요.” 널려있는 시녀들을 내버려두고 손수 외출복을 입고 있는 유리엔에게 황급히 다가가 린이 옷시중을 도왔다. “ 그런데 어디서 만나기로 하셨어요?” “ 다르히네 저택의 장미공원.” “ 아, 그렇구나…네에?!” 어깨의 끈을 묶던 린이 유리엔의 태연한 말에 멈칫했다. 방금 어디라고? “ 설마 공작가의-.” “ 맞아.” “ 세상에! 황녀님, 거기는 마차를 타고 가도 한 시간은 걸려요!” “ 그래? 알았어.” “ 늦었어요!” “ 괜찮아. 자기가 먼저 만나자고 한거니까 알아서 기다리겠지. 숙녀가 약속시간에 약간 늦어주는 건 애교야.” “ 헤에에? 누구랑 만나기로 하셨는데요?” “ 그건 비밀.” 외출복을 다 입은 유리엔이 빙글 돌며 린의 질문에 답했다. 사실 누군지 모르니까. 카라멜이라고 말 할 수는 없지 않은가. “ 마차를 따로 준비할 필요는 없어. 알아서 갈게.” “ 호위는요?! 찰스 씨가 있잖아요!” “ 그거 말인데. 찰스가 따라오면 귀찮으니까 같이 좀 놀고 있어. 난 그 사이에 몰래 탈출할테니까.” “ 설마 가출이세요?!” 린이 뜨악한 표정으로 외쳤다. 모국인 카르나 제국에서야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설마 타국에 와서까지 가출을? 유리엔이 작게 웃으며 마지막으로 외투를 걸쳤다. 저녁에는 추우니까. “ 틀렸어, 린. 약속이 맞다니까. 그럼 믿어-.” “ 으앗!” 눈 깜짝할 새에 밖으로 나가버린 유리엔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린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믿는다니! 찰스 씨를 대체 무슨 이야기로 잡아둔단 말이야! 린은 울상을 지으며 바닥에 떨어져있는 산더미 같은 빨래를 바라보았다. …이건 또 언제 한다지. ‘ 빨리 돌아오세요오!’ 그리고 설마, 별일이야 없겠지. 황녀님이 함정에나 덜컥 빠질 정도로 바보도 아니시고. 린은 슬그머니 솟아오르려는 걱정을 지워버리며 빨래더미를 안아들었다. …하지만 20분이나 채 지났을까, 유리엔이 한참 마차에 몸을 맡기고 약속장소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만한 무렵에 린은 무언가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 편지잖아?” 발에 밟혔는지 상당히 너덜너덜한 상태이기는 했지만 분명 편지였다. “ 누구한테 온 거지…응?” 린이 깜짝 놀라 눈을 깜박였다. 발신인에 적힌 것은 분명, 자신이 얼마 전에 불쏘시개로 쓰기위해 화로에 넣어버렸던 편지와 동일인물 이었다. 카류엘 황태자! “ 황태자전하를 만나러 가신건가? 그런데 왜 굳이 다르히네 저택으로…….” 그냥 여기에서 만나도 됐을 텐데. 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분노의 발길질이 상당히 가해졌는지 손상된 부분이 있어 읽기 힘들었지만 그럭저럭 알아들을만했다. 적어도 저녁 일곱 시에 다르히네 저택에서 만나자고 쓰여 있는 것은 분명했다. “ 언제 따로 만나는 사이까지 발전 했담~?” 태평한 말을 중얼거리며 린이 다시 정리를 시작했다. 그때 때마침 누군가가 유리엔의 거처를 방문했다. ================================ # 17편 # 소제목 : 납치 미수. (6) ================================ “ …젠장, 이게 뭐하는 짓인지.” 카엘이 자조 섞인 말을 내뱉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결국에는 ‘조심해라’는 정도의 말이나 해줄까 싶어서 이곳까지 찾아온 자신의 행동이 우스웠다. …걱정 되서라기보다는 그냥, 정략결혼 상대를 향한 약간의 예의일 뿐이니까. 카엘이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을 납득시키는데, 누군가가 급히 접객실로 들어오며 그를 불렀다. “ 황태자전하!” 그 누군가는 한번 보면 쉽사리 잊혀지지 않을 만한 탐스러운 분홍색 머리칼을 소유하고 있었다. 전력으로 달려왔는지 머리카락은 엉켜있었고 치마는 구겨진 시녀를 카엘은 약간 크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기억에 있는 탓이다. “ 넌-?” “ 화, 황태자 전하…….” 린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애써 말문을 열었다. “ 이, 이 편지-.” “ 편지?” 카엘이 린이 내미는 편지를 받아들었다. 여지껏 손에 쥐고 달려왔는지 상당히 구겨져 있었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카엘은 린의 눈동자에 비치는 절박함에 의아해하며 그것을 펼쳤다. “ …이건?”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카엘의 표정이 굳었다. 발신인이 자신이었다. …이런 것을 보낸 기억은 없는데? 더군다나 내용이 가관이다. 사랑에 눈이 먼 사춘기 소년이거나 3류 제비가 아니라면 쓰지 않을 느끼한 말들을 줄줄 사용하며 써댄 연서의 내용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이것에는 약속장소까지 적혀 있었다. 그것도 단 둘이 만나자는! “ 미친 편지로군. 난 이런 걸 보낸 적이 없다.” “ 저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그, 그런데-.” “ 그런데?” “ 황녀님께서 약속장소로 나가셨어요!” “ 뭐?” 카엘의 입에서 저절로 반문이 튀어나왔다. 나갔다고? 편지에 적힌 장소로? 이 시간에 다르히네 저택으로 혼자? “ 설마-호위기사는? 정말로 혼자 나간건가?” “ 따돌리시고…….” “ 하!” 말문이 막혔다. 카엘의 얼굴에 황당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런 수상한 편지를 덜컥 믿고 혼자 나가다니? 유리엔이 정말로 속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이 보기에는 이 정도에 속을 만큼 생각이 없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럼 대체 왜? 이유야 어쨌든 일단은 위험한 상황이었다. 카엘이 접객실을 나서며 말했다. “ 마차를 준비해라!” …말해두지만 걱정이 되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잘못되었을 경우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온다면 성가시니까. 단지 그뿐이었다. 도중에 시장바닥에서 싸게 구입한 후드를 뒤집어쓴 유리엔이 마차에서 내렸다. 마부에게 돈을 건네주고 다르히네 저택으로 들어가던 그녀가 문득 작게 웃었다. 저택을 지키는 경비병이 없었던 탓이다. ‘ 경비병까지 매수하고-애쓴다.’ 하긴 자신이 다르히네 저택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목격자가 있으면 곤란하니까. 그 장단에 맞춰주기 위해서 마차도 멀찍이 세우고 걸어왔다. ‘ 누구려나-.’ 그리고 무슨 짓을 하려나. 유리엔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장미공원을 찾았다. 붉고 흰 장미가 가득한, 마치 미로처럼 되어있는 공원이었다. 그 가운데 서서 향기롭게 장미향을 음미한 유리엔이 즐거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어 말했다. “ 한적하고 분위기 좋네. 그만 나오지?” 옥구슬 같은 목소리가 울리자 구석에서 두 명의 덩치가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왔다. 똑같이 험악한 인상에 제법 굵은 팔뚝을 가지고 있는 건달 둘이었다. “ 이쁜이. 목소리가 아주 죽여주네?” “ 크크큭. 만나서 반가워~?” 대체 며칠이나 씻지 않은 건지 건달 하나가 입을 열어 말할 때마다 악취가 풍겼다. 나머지 한명도 마찬가지였다. 유리엔이 미소를 잃지 않으며 그런 둘을 바라보았다. 아아, 예상대로였다. 자신을 불러낸 상대는 아마도 자신에게 해코지를 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인원이면 자연스레 눈에 띄기 때문에 남의 이목을 속일 수 있는 적은 수일 것이고, 이 일에 동참한 자들은 아무래도 발설의 위험이 있으니 일이 끝난 뒤에 처리하기 쉬운 하급 용병이나 건달정도의 무력일 것이다. 또한 상대방이 보기에 자신은 아무런 힘도 없는 연약한 소녀일 뿐이니 혼자 나왔을 경우 제압하는 것은 뒷골목에서 굴러먹는 건달들 두세 명이면 충분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 결과가 눈앞에 있었다. “ 어디 얼굴도 그 목소리만큼이나 고운지 한번 볼까?” “ 못생겼으면 각오해, 이쁜이. 이쁜이 기다린다고 우리가 여기서 한 시간이나 죽치고 있었거든.” 사내가 바닥에 침을 퉤 뱉고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유리엔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 왼손으로 후드를 뒤로 젖혔다. “ ……!” “ 와우, 완전 죽여주는-” 퍼억. “ !!” 사내의 표정이 창백해지며 움직임이 그대로 굳었다. 후드가 젖혀지며 갑작스레 드러난 유리엔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김과 동시에 하체에 어마어마한 고통이 전해진 탓이다. 사내의 눈이 뒤집히며 그가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 죽여주지? 있는 힘을 다한 발차기였는데. 어때?” 그 앞에서 유리엔이 생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오른발을 흔들었다. 남은 건달은 보았다. 유리엔의 치마가 펄럭이며 오른쪽 다리가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것과-이내 저 붉은 색의 뾰족구두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사내의 가랑이사이를 걷어차는 것을. 건달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준비해온 온갖 건들거리는 대사들과 협박은 빛을 발하기도 전에 바닥으로 파묻혔다. “ 잘 가.” 퍽! 알을 깬 것도 모자라 확실하게 기절시키기 위해 유리엔이 구두 굽으로 쓰러진 사내의 머리통을 내려찍었다. 사내가 움찔하며 완전히 정신을 놓자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먼지가 뭍은 치마를 탁탁 털어 정리한 유리엔이 고개를 들어 다른 건달을 바라보며 말했다. “ 자. 이제 너밖에 없네? 일대일로 뜨자.” …안 뜨면 안될까요? 건달의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저 귀한 집 아가씨 하나를 가볍게 손봐줘서 기절시킨 다음 어딘가로 끌고 오기만 하면 된다고 해서 덜컥 수락한 일인데, 이건 얘기가 달랐다. 그는 단 두 방으로 정신을 놓은 제 동료를 바라보았다. …대체 뭐란 말인가, 저 괴력은?! 게다가 남의 알을 망설임 없이 깰 만큼 무자비하고 확인사살을 할 만큼 잔인하기까지! 건달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가, 이내 아무리 봐도 연약하게만 보이는 유리엔의 겉모습에 이를 악물고 주먹을 날렸다. 빠악! “ 어…언제……?” 주먹을 뻗으려는 순간 뾰족한 굽에 발을 밟혔다. 그것도 새끼발가락을! 그 아픔에 순간적으로 자세가 무너지자 뒤이어 머리통에 커다란 충격이 전해졌다. 시원한 효과음과 함께 커다란 돌덩이에 머리를 격타당한 건달이 비틀거리며 말했다. 눈앞의 소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분명 한눈에 넋이 나갈 만큼 아름다운 미소이건만 그에게는 그저 저승사자의 웃음으로만 비춰졌다. 유리엔이 건달에게 말했다. “ 야.” “ 네, 네?” 건달은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 너도 알 깨지고 싶어?” “ 아, 아닙니다.” “ 맞고 기절하고 싶어?” “ 저, 절대 아닙니다. 살려주세요.” “ 그럼 꿇어.” “ 넵.” 바로 꿇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알은 정말 소중했다. 공손한 자세로 무릎 꿇은 건달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유리엔이 대뜸 물었다. “ 어디 있냐?” “ 네?” “ 이 일 시킨 놈 말이야. 의뢰인. 근처에 있을 것 같은데?” “ 아, 그건 말입니다. 바로 저깁니다.” 건달이 바로 손가락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커다란 나무였다. 그 나무 뒤에서 무언가가 움찔했다. 유리엔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덩이를 들어올렸다. “ 그럼 너도 잘 가.” “ 네, 네?!” 퍼억. 건달이 힘없이 쓰러지자 돌덩이를 던져버리고 유리엔이 손을 탁탁 털었다. …잔인한 것. 나무 뒤에 숨어있던 소녀C가 몸을 떨었다. 자신에게까지 저런 무식한 짓거리를 하면 어쩌나 하고 겁이 밀려왔다. 꼼짝없이 굳어있는데 유리엔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 튀어나와.” “ …….” “ 내가 직접 거기까지 움직이게 만들면 넌 뒤진단다?” 움찔. 그 협박에 소녀C가 슬그머니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런 소녀를 바라보는 유리엔의 눈동자가 커졌다. “ …!!” 허리까지 내려오는 평범한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동자. 약간은 동글한 얼굴에 순진해 보이는 커다란 눈을 지닌 소녀의 얼굴은 유리엔에게있어 무척이나 낯익은 사람의 것이었다. “ …루네?” 미세한 떨림이 섞인 목소리가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쨍그랑! “ 어이구! 이걸 어째…아가씨, 괜찮으세요?” 접시가 깨졌다. 평범한 드레스를 입고 제 방에 앉아있는 소녀가 떨어뜨린 탓이다. 바닥에 흩어진 접시의 파편과 호들갑을 떠는 유모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소녀가 말했다. “ 누가…왔다고요?” “ 루제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 …언니가?” 루네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 # 18편 # 소제목 : 납치 미수. (7) ================================ 루제 드아이스- 드아이스 가문의 장녀로, 루네의 쌍둥이 언니였다. 타 지역으로 유학 삼아 떠난 지 몇 달 되지 않았는데, 벌써 돌아오다니……? 루네가 급히 물었다. “ 언제 돌아왔나요?” “ 열흘쯤 되었습니다.” “ 열흘이나-!” 루네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열흘전이라면, 분명 황제폐하께서 황태자의 정혼사실을 발표했을 즈음이다. “ 언니가…왔다는 사실을 제게 말하지 말라고 했나요?” “ 그건 아닙니다만 남작님께도 알리지 않으시고 몰래 돌아오신 터라, 저도 얼마 전에 알게 되었습니다.” “ …언니는 지금 어디 있나요? 당장 만나고 싶은데.” “ 약속이 있으시다며 나가셨습니다.” “ 하아…….” 저절로 한숨이 내쉬어졌다. 실수였다. 이렇게 시기를 딱 맞춰서 돌아올 줄은 몰랐기에 유리엔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루네는 자신의 쌍둥이 언니 루제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금세 자신과 완전히 똑같은 얼굴과 체형의 소녀가 그려졌지만 겉모습과는 달리 성격은 완전히 정반대였다. 무슨 짓을 저지를지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게다가 가장 불안한 점은 그녀가 무서울 정도로 카류엘 황태자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유학을 빌미로 해서 타 지역까지 보낸 거였는데-하필 이 때에 돌아오다니. 루네는 마음속으로 루제가 적어도 기본적인 생각정도는 숙지하고 있기를 바랐다. 황태자의 정혼소식에 눈이 뒤집히지 않았기를-. 그랬다가는 정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으니까. 자신을 향한 ‘루네’라는 호칭과, 미세하지만 떨리는 유리엔의 목소리에 루제가 속으로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쌍둥이동생이 우습게도 이 황녀와 언니동생 하는 사이라지. 그 주제에 어떻게 가능했을까? 기왕 이렇게 된 것 이대로 루네인척 해서 유리엔에게 충격을 줄 생각에 속으로 즐거워하던 루제는, 잠깐의 뜸을 들이다 곧바로 이어지는 유리엔의 말에 멈칫했다. “ …가 아니구나?” “ -뭐?” “ 루네는 대략이나마 내 괴력과 성격을 알고 있을 텐데, 설마하니 이런 허접한 계획을 세웠을까.” “ 뭐, 뭐가 어째?” 유리엔의 ‘허접한 계획’이라는 말에 루제의 얼굴이 붉어졌다. 허접하다니! 비록 실패했지만 얼마나 머리를 굴려서 생각해낸 건데 허접이라고 막말하다니! 루제는 그것에 신경 쓰며 분해하느라 유리엔의 말이 담고 있는 의미를 제때에 파악하지 못했다. “ 어쩌긴. 그리고 너 루네랑 무슨 사이야?” “ …뭐라고?” “ 네 정체 듣고 나서 어떻게 조져놓을지 결정할거니까, 빨랑 불어라.” 유리엔의 밤하늘같이 검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한 루제가 입술을 깨물었다. 눈동자가 자신은 절대 루네가 아니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어째서! 루네가 입을 열었다. 일그러진 표정을 애써 펴 입가에 웃음을 지어보이며. “ -웃기네? 처음엔 좀 놀라는 것 같더니. 내가 루네가 아니라는 확신이라도 들었나봐?” “ 넌 이런 허접한 계획이나 세울 정도로 지능이 모자라니 알아듣기 힘들겠지만 원래 겉모습이 똑같다고 다 같은 사람인건 아니거든.” “ 지, 지능이 모자라…? 이, 이게…하, 여유만만하시네. 헛소리도 지껄이시고.” “ 그럼-. 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헛소리라고 치부해버리는 네게 하찮은 동정심마저 느껴질 정도로 지금 여유가 넘치네. 누군가가 계획을 너무 허접하고 허술하게 만들어줘서 내게 개미 코털만큼의 피해도 입히지 못해서 말이지.” “ 이이익!” 결국 루제의 표정이 다시금 일그러졌다. 열 받아, 열 받아, 열 받아! 괜히 빈정거렸다가 본전도 못 찾고 발린 그녀가 악문 이빨사이로 악 소리를 내며 화를 삭였다. 너무 열 받은 나머지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유리엔의 머리카락을 죄다 뽑아놓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자꾸만 바닥에 널브러져 아직까지 깨어날 줄 모르는 건달의 모습이 떠올라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애꿎은 이를 갈며 참아야만 했다. 한편 유리엔은 여전히 느긋했다. 조금 전에는 잠깐 놀랐었지만, 이내 눈앞의 소녀와 루네의 명확하게 다른 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바로 눈동자. 유리엔은 신기할 정도로 눈치가 좋았다. 눈동자를 지긋이 바라보면 그 사람의 성품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정도로. 때문에 유리엔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그 사람과 눈동자를 마주치는 것만으로 상대를 파악하여 스스럼없이 친분을 쌓았다. 루네 또한 그런 경우였다. 유리엔은 아주 잠깐이지만 덜컥거렸던 심정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여전히 분을 삭이고 있는 루제에게 말했다. “ 대충 알 것 같네. 네가 루네의 광 팬이라서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얼굴도 마법으로 똑같이 바꾸고 스타일까지 따라한 게 아니라면, 답은 하나밖에 없으니까.” “ …….” “ 쌍둥이. 맞지?” “ -쳇!” “ 아무래도 루네의 언니-이려나?” “ 잘도 맞추네. 맞아, 내가 바로 루네의 쌍둥이 언니, ‘루제 드아이스’야.” 유리엔은 루제의 대답에 헛웃음을 지었다. 말하는 것이 마치 제가 제법 유명인사라도 되는 듯한 말투였기 때문이다. 루네와 쌍둥이라면 나이도 어릴 텐데 벌써 상태가 심각하군? “ 열다섯밖에 안된 게 말하는 싸가지도 참 없고. 쯧.” “ 참나, 겨우 한살차이이면서 몇 살이나 차이 나는 것처럼 말하긴-.” “ 정신연령의 수준이 다르잖니, 아가야? 닥치고 일단 너 좀 맞고 시작하자.” “ …뭐? 뭐가 어째…아니-자, 잠깐!” 코웃음 치던 루제가 유리엔의 살벌한 미소와 함께 들어올려지는 주먹에 표정이 창백해졌다. 이 여자라면 정말로 때릴 지도 몰라, 아니 잔뜩 패서 병신을 만들지도! 순간적으로 맞기 싫다, 라는 생각에 뇌를 점령당한 루제가 황급히 팔을 휘저었다. “ 기, 기다려!” “ 왜?” “ 나, 난 루네의 쌍둥이 언니라고. 걔랑 친하잖아? 난 걔가 끔찍이 사랑하는 언니라서, 내가 조금이라도 다치면 루네가 엄청 슬퍼할걸!” 거짓말이다. 끔찍이 사랑하기는커녕 끔찍이 사이가 좋지 못했다. 어쩌다 만나기라도하면 루제가 일방적으로 루네를 깎아내리는 말을 서슴지 않고 퍼부어댔으니까. 그 정도로 루제는 제 쌍둥이여동생을 싫어했다. 아무튼 거짓말이든 아니든 일단은 이 위기를 벗어나고 봐야했다. 일단 이 상황을 피하기만 하면 어떻게든지 소문을 퍼뜨려 유리엔의 본성을 까발릴 생각이었다. “ 그래?” “ 그래!” “ 뭐, 사이좋은 쌍둥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네가 루네와 가족이라서 많이 봐주려고 하던 참이야.” “ 그, 그렇지. 당연하지.” “ 그러니까 일단 맞자.” “ 봐준다면서?!” “ 응. 봐준다니까? 원래는 황족모독죄로 처형시키려고 했는데 그렇게 하면 루네의 가문에 피해가 가니까 그냥 너 좀 패고 말려고.” “ 그, 그런…!!” 루제는 말문이 막혔다. 황족모독죄에, 처형이라니? 그런 것은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납치 계획을 세울 정도로 악랄했지만 아무래도 아직 어린 나이 탓에 현실적인 문제는 제쳐두고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었다. “ 황족모독죄라니, 어째서…!” “ 맞잖아? 일국의 황녀를 해코지할 계획을 세웠고, 싸가지 없는 말투에, 지금도 이렇게나 지위가 차이 나는데 잘도 반말을 찍찍 써대고 있네?” “ 이익……!” “ 맞기 싫어? 그래도 닥치고 맞아. 네가 나한테 하려던 짓을 돌려받는 건데 죗값을 치른다고 생각해야지.” 유리엔의 말에 루제가 흠칫했다. 자신이 하려던 짓을 돌려받는다고? 그녀는 잠시 자신이 유리엔을 어떻게 하려고 했었는지 떠올렸다. 분명 납치하고, 감금해서, 팔다리를 하나씩 부러뜨려주려고 했었-. “ 아, 안돼! 절대 안돼!” “ 안되긴 무슨. 자자, 티 안 나게 얼굴은 빼고 때려줄게.” “ …이, 이 지독한…너 같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야하는 카엘 황태자전하가 불쌍해!” “ 뭐?” 유리엔이 휘두르려던 주먹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뭐라고? …누가 불쌍해? “ 뭐라고?” “ 카엘 황태자전하가 불쌍하다고! 싫어도 어쩔 수없이 너 따위와 강제로 결혼하시게 생겼잖아! 흐흑…우리 불쌍한 전하…….” “ 누구?” “ 뭐야?! 못 알아들어?!” “ 카엘이 뭔데?” 유리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태자는 알겠는데 카엘은-. “ …황태자가 둘 일리는 없고, 내 정략결혼 상대자가 둘 일리도 없으니-설마 카류엘 녀석의 애칭?” “ 전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 “ 하아? 그러는 너는 애칭을 막 불러대네? 내가 알기로 상당히 친한 사이가 아니면 애칭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데?” 게다가 카라멜은 좀 까칠해 보이니까 정말로 각별히 친하거나 가족에게나 허락할 것 같았는데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유리엔이 루제를 바라보았다. 루제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리고 있었다. 카엘을 떠올리는 듯 그녀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다. “ 애칭을 부르는 것이 어때서…? 난 이미 몸도 마음도 카엘 황태자전하의 것이니까 상관없어. 당연히 전하도 나의 것이고! 아아, 전하-.” “ 하아?” “ 그러니 내가 카엘 황태자전하가 정략결혼 따위에 희생되도록 가만히 놔둘 것 같아? 이번일도 전부 전하를 위한 사랑에서 비롯된 거야!” “ 헤에?” “ 전하가 너를 내치기 전에 알아서 물러나는 게 좋을걸! 카엘 전하에게는 나뿐이야. 너 따위가 비집고 들어올 틈 따위는 없다고!” 루제가 자신만의 착각에 허우적거리며 소리치고, 그런 루제를 유리엔이 황당함과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기를 계속 하고있을때, 작은 이변이 일어났다. 쓰러진 건달 한명이 비틀거리며 깨어난 것이다. 그래도 덩치가 그냥 폼은 아니었는지 돌로 확인사살까지 당하고도 정신을 차린 사내였다. 그는 자신의 알이 깨졌다는 사실에 이성을 잃을 정도로 열 받아 있었다. “ 쿡-.” “ ……?” “ -죽어!!” 유리엔이 갑자기 밝아지는 루제의 표정에 의아해하며 뒤를 돌아봤을 때는 이미 그 사내가 잔뜩 흥분한 채로 괴성을 지르며 그녀에게 달려들고있었다. ================================ # 19편 # 소제목 : 납치 미수. (8) ================================ 아주 잠시 동안 유리엔은 상황이 인식되지 않을 정도로 당황했다. 이내 어떻게든 대항해야 한다는 이성적인 생각이 들었을 때는, 벌써 늦었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사내의 거친 얼굴이 바로 눈앞에 다가와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이런, 늦었-. 부웅! 순식간에 휘두른 사내의 솥뚜껑 같은 손이 유리엔을 향해 날아들었다. 바로 지척에 있던 루제의 웃던 얼굴이 파랗게 질릴 정도로 위협적인 휘두름이었다. 무지막지하게도 바로 얼굴 앞으로 날아오는 주먹에 반사적으로 이를 악물고 저도 모르게 새어나오려는 소녀틱한(가령 꺄악, 이라든지)비명을 억지로 내리누르는 순간- 퍼억! 멈칫. 둔탁한 타격 음이 들렸다. 순간적으로 루제와 유리엔은 그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다만 분명한 것은 유리엔이 사내에게 얻어맞는 소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유리엔은 말끔한 모습이었고 사내의 움직임은 그대로 멈춰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몇 초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리엔에게는 그 찰나가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사내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유리엔을 때리려던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며 동시에 그의 등에 꽂힌 기다란 검이 발견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그녀에게는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다가왔다. “ …꺄,” 짧은 적막을 깨고 루제가 운을 띄웠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녀는 이성이라기보다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 꺄아악!!” 루제의 입에서 높은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아, 시끄러워. 유리엔은 이 상황에서도 하이 톤의 비명에 질색하며 손가락으로 귀를 막았다.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은 유리엔이 숨이 멎은 사내의 시체를 보며 중얼거렸다. “ 다행이야. 하마터면 내가 저런 비명을 지를 뻔 했…아니 그보다, 누가-” “ 야!!” 다소 다급한, 하지만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귓등을 때렸다. 너무도 낯익은 목소리에 유리엔이 놀란 표정으로 루제와 함께 목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 말 그대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려오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확인한 유리엔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인해 커졌다. “ 검둥이, 괜찮냐?!” “ -카라멜?” 검둥이라는 친숙하다 못해 기분 나쁜 별명으로 부르며 눈앞에 도착한 붉은 머리 남자는 틀림없는 카엘이었다. 크게 뜬 유리엔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대체 여긴 어떻게 알고? 아니 그보다, 그녀는 맹세코 지금처럼 이 붉은 머리 녀석이 반가웠던 적이 없었다. 카엘은 정말로 위기에 빠진 공주님을 구하러 온 백마 탄 왕자님처럼 멋지게 나타났다. 물론 백마는 없으니 감점. “ 아냐, 원래 이런 때는 남몰래 사모하는 마음을 키우던 기사1이 나타나는 것이 더 소녀의 감수성을 자극하니까 또 감점.” “ …뭐?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괜찮나보군.” 카엘은 유리엔의 뜻을 알 수없는 말에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속으로는 금방이라도 터질듯이 두근거리는 심정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웬 넝마 꼴을 한 건달 같은 남자가 유리엔에게 달려들고 있던 상황에 그녀를 발견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그놈이 유리엔을 때리기 직전에 간발의 차이로 검을 던져 놈의 등짝에 꽂아 넣을 수 있었으니까. 만약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그런 가정을 해보자 이유를 모르게 기분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전혀 다친 곳 없이, 하다못해 먼지 한 톨 묻지 않고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는 유리엔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는 아직도 이성적인 생각에 앞서 일단 검을 던지고 보았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생각 따위를 하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늦었을 테지만, 그때 마음을 가득 채웠던 다급함은 설명할 길이 없었다. ‘ …다치면 성가시니까.’ 그는 이번에도 같은 이유로 자신을 납득시켰다. “ 야, 검둥이. 네가 아직 멍멍이라서 사리판단이 힘든 건 알겠는데 왜 자꾸 사람을 성가시게 만들어?” “ …뭣이?” “ 지금도. 내가 안 왔으면 대체 어쩔 뻔했어? 저런 거한테 맞고 비명횡사나 하려고?” “ 야! 지금 이 상황이 내 탓이라는 거야?” “ 그럼? 네가 그딴 편지에 홀라당 속아 넘어가서 이런 데로 칠레 팔레 나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잖아!” “ 속아준거거든?! 그리고 이 상황 따지고 보면 다 너 때문이야!” “ 나 참, 떠넘길 사람이 없어서 구해주러 온 은인한테 책임전가를 시켜?” “ 은인 좋아하시네! 넌 은인이 아니라 원흉이야, 원흉! 내가 왜 저런 건달 따위한테 얻어맞을 위기에 처했었지 알아?” “ 당연히 네 철없는 행동 때문이지.” “ 틀렸다, 바보야! 지 몸과 마음이 전부 네 거라고 주장하는 특S급 스토커인 여자애가 나와 결혼해야하는 너의 불쌍한 운명을 바꾸어주기 위해 몸소 나를 처리하러 나서주셨더라?! 이 지나가는 개미 다리털에 붙은 이 같은 녀석, 네 팬클럽회원 정도는 알아서 좀 관리 못 해?!” “ 이 바보가 지금 누구한테 바보라고…뭐?” 그들에게는 이미 익숙해진, ‘(유치한)말다툼’이라는 일과로 시간을 보내던 카엘이 유리엔의 바보라는 말에 발끈 해서 뭐라 쏘아붙이려다가 멈칫했다. -방금, 뭐라고? 그때, 여전히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멍하니 둘의 하는 짓을 바라보고만 있던 루제가 이때다 싶어 작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 화-황태자 전하……!” 그 목소리에 카엘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보자마자 얼굴에 발그스레한 홍조가 퍼지는 소녀를 발견한 그가 약간 놀란 듯 어, 하는 단말마의 소리를 냈다. 그리고 이내 그의 입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툭 튀어나왔다. “ 루네?” “ …….” 그 순간 바로 소녀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루제의 얼굴은 어느새 마음 깊이 사모하던 황태자를 눈앞에서 마주했다는 것에 대한 기쁨보다, 자신이 보잘것없는 쌍둥이 여동생 따위에게 밀렸다는 수치심과 모욕감이 한데 뒤엉켜 분노와 함께 뒤덮여있었다. 그러나 아주 잠깐이었다. 다시금 루제의 표정은 사랑에 빠진 수줍은 소녀의 그것처럼 바뀌었다. “ 제 이름은…루네가 아니에요, 전하.” “ 그래? 내 기억에는 분명-아아, 혹시 다른 사람인가?” “ 물론이지! 딱 보면 몰라?!” 카엘의 말에 대답한 것은 루제가 아니라 눈을 번쩍이고 있는 유리엔이었다. 그녀는 카엘을 바로 제 지척까지 끌어당겨 얼굴이 닿으려는 거리에서 미간을 좁힌 채 루제를 가리키며 말했다. “ 얘의 정체는-! 지금 상황의 배후이자 동시에 악의 총본산인 네 스토커 A양 이거든?” “ A양이 아니라 루제야!” 곧바로 루제가 유리엔의 말을 정정했지만 그녀는 가볍게 그것을 무시했다. 그것에 굴하지 않고 루네가 나머지 말을 이었다. “ 그리고, 이왕이면 여친 이라고 해줘. 스토커가 아니라.” “ 아, 그러셔?” 유리엔은 루제에게 0.1%의 성의를 담아 대답해주고는 카엘에게 휙 고개를 돌렸다. 눈을 마주친 그녀가 입을 열었다. “ 입력됐지?” “ -.” 카엘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 쟤가 범인이니까, 난 피해자로서 지금부터 쟤를 족쳐야할 권리가 있다는-야!” “ …사실인가?” 유리엔이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선을 돌려버리는 카엘을 불러 세웠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루제에게로 고정되어있었다. 보석처럼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를 마주한 루제의 입가에 발그레한 미소가 지어졌다. 분위기 파악은 전혀 하지 못하고-말이다. “ 사실이냐고 물었다.” 루제에게서 대답이 없자 카엘이 재차 말했다. 그제 서야 그 질문이 자신에게 향했음을 알아차린 루제가 여전히 분위기 파악은 전무한 채 대답했다. “ 네, 맞아요. 악의 총본산 따위는 아니지만요.” “ …가짜 편지를 보내 유리시엔 황녀를 여기까지 불러내고-.” “ 네.” “ 손봐주기 위해 건달을 고용했나.” “ 네. 두 명이나요. 돈을 좀 쥐어줬죠.” “ …정확히 뭘 하려고 했지?” “ 납치를 하려고 했어요. 으슥한 곳에 가두어 둔 다음, 몸의 중요한 뼈를 몇 개쯤 부러뜨려주는 거죠. 그럼 그 공포와 고통에 반쯤 미쳐버릴지도 모르니까요.” “ 그래?” “ 네.” “ 그러니까…지금 벌어진 이 일의 전부가 네 계획이고, 행동이란 말이지.” “ 그래요. 하지만 전부 전하를 위한 거였어요! 아쉽게 실패하긴 했지만-.” 그것도 마지막에 전하가 구해줘서 말이죠. 여기에 생각이 미친 루제의 표정에 언뜻 불안감이 스쳐지나갔다. 이상하다. 전하께서 저런 괴팍하고 끔찍한 여자를 좋아하실 리 없는데. 이 여자가 처리된다면, 틀림없이 기뻐하실 거라 생각했는데-그렇다면, 대체 왜 그 절묘한 타이밍에 다급히 유리시엔 황녀를 구해낸 걸까. 루제는 카엘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화는 나는데 그 화가 왜 나는지 전혀 모르겠는 것처럼. ================================ # 20편 # 소제목 : 납치 미수. (9) ================================ “ 전하.” “ …….” 루제의 부름을 무시하고 카엘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등에 검이 꽂힌 건달의 시체 바로 옆이었다. “ 카엘 전하!” “ 지금.” 카엘이 자신의 검을 사내의 등에서 힘주어 뽑았다. 그때서야 채 식지도 않은 시체의 등에서 검붉은 피가 물컹물컹 쏟아져 나왔다. “ 제국의 법에 따라 즉결처분으로 베어버리기전에, 그 입에 내 애칭을 함부로 올리지 마라.” “ 저, 전하.” 루제의 당황스러움이 목소리에 그대로 묻어 떨려나왔다. 루제는 바로 눈앞에서 자신에게 겨누어진 카엘의 검을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검은 정말로 금방이라도 자신을 벨 것만 같았다. “ 검둥이.” “ 왜?” “ 어떡할까.” “ 뭘?” “ 처분.” “ 아아-.” 유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왼데? 생각보다 반응이 열렬하다. 자신이 베라고 하면 진짜로 내리그을 모양새였다. “ 법대로-” “ 법대로?” “ -하면 죽겠지?” “ 말이라고 하냐.” 유리엔이 피식 웃음 지었다. 권선징악의 시간인가. 그녀는 그냥 나오는 대로 말을 이었다. “ 되돌려주지 뭐. 쟤가 나한테 하려고 했던 그대로.” “ 건달을 시켜서 납치한 다음, 뼈를 몇 개 부러뜨리기?” “ 음. 빙고.” “ …어째서!” 둘의 대화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루제다. 그녀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소리였다. “ 왜 저딴 여자의 말을 들어주세요? 왜 저딴 여자를 위해주세요? 왜 제게는 검을 겨누세요? 왜? 왜? 대체 왜?! 어째서 저를 버리시고 저런 난폭하고 이상한 여자를 선택하세요?!” 루제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날카롭게 외쳤다. 그것은 마치 발악처럼 들려와서 둘의 표정을 찌푸리게 했다. “ 사실 난 알고 있어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잖아요. 그렇죠? 당연해요. 우린 연인이니까. 목숨보다 서로를 더 사랑하는 연인이니까. 사실 방금 전에 검을 던진 것도 저를 구하기 위해서였잖아요?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유리시엔 황녀로부터 저를 구하기 위해서였잖아요? 난 다 알고 있어요. 왜냐면 우린 서로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당신은 내가 없으면 안 되잖아요?” 카엘을 향한 루제의 호칭이 어느새 ‘전하’에서 ‘당신’으로 바뀌었다. 사실 그것은 엄청난 무례였으나 이미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루제는 아예 인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애처로울 정도로 떠는 루제를 바라보는 카엘의 눈동자는 더없이 무심했다. 루제의 눈동자에도 카엘의 굳은 표정이 비쳐 그녀를 더욱 불안감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잠시 동안 아무행동 없이 루제를 응시하던 카엘이 마침내 입술을 뗐다. “ 정말-.” “ …….” “ -미쳤군.” “ 나도 동감.” “ 왜!!” 카엘의 신랄한 말에 동의하고 나서는 유리엔에게 루제가 빽 소리를 질렀다. 표정을 찌푸리며 한쪽 귀를 막은 유리엔이 루제를 쳐다보았다. “ 내 순수한 사랑이 어때서? 대체 어디가 어때서?!” “ 얘가 뭐래. 일단 순수함은 일개미 입술에 뭍은 여왕개미의 립스틱만큼도 없고, 네 행동은 절대 사랑이라기보다…….” 말하다가 도중 유리엔이 뜸을 드렸다. 뒷말을 기다리는지 일순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그 속에서 나름 짐작을 한 카엘이 ‘집착’이라는 말을 꺼내려는데, “ 병신 짓이지.” 유리엔의 담백한 말이 조금 더 빨랐다. 병신 짓이라니, 참 말도 곱게 쓴다. 그러나 그런 유리엔의 과격한 언변에 충격받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루제는 이미 이번 납치사건의 실패로 인해 유리엔의 성격을 깨우쳤고, 카엘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 속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카엘이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 역시 검둥이는 검둥이 인가봐. 말도 참 검둥이답게 하네?” “ 카라멜은 단지 네모난 갈색 덩어리일 뿐이라서 고등생물인 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겠지. 이해해.” 그리고 그 말에 유리엔이 곧바로 지지 않으며 대꾸했다. 그런 둘의 행동이 루제에게는 더없이 다정한 한 쌍으로만 보였다. 물론 당사자들은 결단코 부인하겠지만 그 둘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본다면 썩 어울린다고 할 법한 모습이었다. 한 마디로 잘 논다, 싶었다. 이때 얼굴이 벌게진 채 질투로 인해 몸을 부들부들 떠는 루제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죽여, 버릴 거야.” “ 누굴?” 씹어뱉듯이 말을 내뱉은 루제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유리엔이 갑작스럽게 루제에게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들이 밀은 탓이었다. 그런 묘한 구도에서 유리엔은 대뜸 말했다. “ 어이, 카라멜.” “ 왜.” “ 화났냐?” “ 조금.” “ 얘 싫지?” “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 마음 같아서는 엄청 때려주고 싶지만 차마 체면이 있어서 직접 손은 못 대겠지?” “ 잘도 아네.” “ 그럼, 좋아.” 카엘의 대답에 유리엔이 씨익 웃었다. 아름다운 미소였다. 하지만 루제는 이 미소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데자뷰 현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봤더라? “ 내가 한참 순수할 적에 들은 말인데,” “ 퍽이나.” “ 좀 빠져봐라, 카라멜.” 카엘의 비아냥에 신랄하게 대꾸하고 유리엔은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쯤 루네의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저 미소, 생각났다. “ 아무튼. 옛날에 한 성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 루제의 표정이 급속도록 창백해지고, 유리엔이 손목과 팔을 돌리며 가볍게 준비운동을 했다. “ 주위의 누군가가 병신 짓을 하거든,” 이제는 식은땀마저 났다. 몇 십분 전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유리엔에게 달려들던 건달이 결국은 구두 굽에 찍히고, 걷어차이고, 알이 깨지고, 그것도 모자라 돌덩이로 머리에 내리 찍히던 장면이 속사포처럼 눈앞에 쉭쉭 지나갔다. 분명히, 그때 지었던 것이다. …눈앞의 이 미소는. “ 일단 패고 보라. 운이 좋다면 제정신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 …시, 싫어! 안 돼, 하지 마! 꺄악, 사람 살려!” 루제가 반항했지만 턱도 없었다. 유리엔의 괴력이 빛을 발했다. “ 꺄아아아아악-!!” 저택을 뒤흔들 만한 루제의 비명소리가 정원을 가득 채웠다. 한참동안 복날 개 패듯 패는 소리가 울려 퍼진 뒤, 루제는 거의 넝마같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있었다. 너덜너덜해진 루제에게 유리엔이 손을 탁탁 털며 말했다. “ 일어나.” “ 네.” 유리엔의 명령에 루제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 모습은 어찌 보면 마치 좀비와도 같았다. “ 꿇어.” “ 네.” 스스럼없이 루제가 무릎을 꿇었다. 유리엔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꺼져.” “ 네.” 비틀거리면서도 빠른 속도로 후다닥 사라지는 루제의 뒷모습에 유리엔은 손까지 흔들어주었다. 그 광경을 처음부터 지켜본 카엘은 넋이 빠진 표정이었다. 루제의 모습이 사라지자 카엘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 대단하군.” “ 고마워.” 유리엔이 가볍게 받아넘기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빈말이 아니었다. 카엘은 정말로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유리엔은 단지 루제를 패기만 한 것이 아니라 틈틈이 심문은 물론 세뇌까지 시켰다. 맞고 맞고 또 맞고 계속해서 맞고 끝없이 맞으며 삶과 죽음을 왔다갔다 거리는 사이 어느새 루제는 유리엔의 충실한 종이 되어있었다. “ 그보다…….” “ 어?” “ …안.” 카엘이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하지만 아쉽게도 유리엔은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고작해야 끝의 ‘안’이라는 글자를 들었을 뿐이다. “ 뭐? 안? 안이 뭔데?” “ …있어, 그런 게. 더 알려고 하지 마. 다쳐.” 괜스레 카엘은 고개를 돌리며 유리엔의 말을 피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유리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뭐야? 설마-미안하다고?” “ 시끄러, 아니야!” “ 너, 푸핫!” 유리엔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다른 손의 검지손가락으로 카엘을 가리키며 유리엔은 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 너! 수줍음 타는구나! 푸하핫!” “ 뭐……!” “ 진짜 안 어울려! 수줍음 타는 카라멜이라니, 푸하하하!” “ 야!” 카엘이 소리를 질렀지만 유리엔은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그를 놀려대었다. 결국 카엘의 얼굴이 귀까지 달아올랐다. “ 아니라고!” “ 그래그래, 다 이해해. 너의 그 수줍음을 난 이해할 수 있어. 푸하하!” “ 너 진짜!” 뭐라고 하던 도저히 그칠 줄 모르는 유리엔의 웃음에 결국 카엘이 입을 다물었다. 잠시 달아오른 얼굴을 식힌 카엘이 빈정거리는 어투로 말했다. “ 그래, 미안. 이거 정말 미안해서 어쩌나? 날 너무 열렬히 사랑하는 소녀들이 너무 많아서 앞으로는 이번 같은 비일비재할 텐데 말이야. 이래서 사람이 너무 잘나도 피곤하다니까.” 그 말에 유리엔의 웃음이 뚝 멈췄다. 카엘과 눈을 마주친 유리엔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 그러셔?” “ 그렇지.” “ 이거 어쩌나? 만약에 카르나 제국에 가게 될 일이 생긴다면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곳 백성들과 귀족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부 내 팬이라서, 널 보면 홧김에 그만 밟아죽일지도 모르거든. 바닥에 납작하게 붙은 벌레처럼 안 되게 조심해!” “ 이런, 불필요한 염려 고마워.” “ 뭐 이런 당연한 걸 가지고.” 치지직. 둘 사이에 익숙한 번개가 튀었다. 갑자기 정면으로 불어온 바람에 유리엔의 검은 머리카락이 휘날렸고, 그만 유리엔은 눈을 한차례 깜박이고 말았다. 눈싸움에 졌다는 생각에 흥, 하며 고개를 돌려버린 유리엔이 여전히 머리칼을 휘날리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 어디가?” “ 당연히, 내 거처에!” “ 뭐 타고?” “ 네가 타고 온 마차.” “ 그럼 나는?” “ 걸어와!” “ 하하.” 카엘이 기분 좋게 웃었다. 쟤가 왜 갑자기 쪼개고 난리람-하고 생각하며 유리엔이 걸음을 더 빨리했다. 뒤에서 카엘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나 빠르게 걷는데 점점 더 좁혀지는 거리라니. 유리엔은 뛰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건 너무 모양새가 우스우니 패스. 아, 하고 유리엔이 작게 내뱉었다. 어느새 카엘의 붉은 머리카락이 바로 눈앞에서 바람에 의해 찰랑거리고 있었다. 결국 추월당했구나. 그녀는 작게 투덜거렸다. “ 불공평해.” “ 뭐가?” “ 넌 키가 너무 커.” “ …내가 여자가 아닌 이상 이정도 키는 당연하잖아?” “ 카라멜에게는 너무 과분해.” “ 그건 내가 할 소리다, 검둥이.” “ 뭐래.” 유리엔이 툴툴 거리며 시야를 막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카엘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까만 밤하늘에 별이 총총 박혀있었다. 카엘이 무심결에 말을 내뱉었다. “ 예쁘네.” “ 나처럼?” “ …….” “ 정색하기는. 농담이야.” 유리엔이 카엘의 뭐 씹은 듯한 표정을 보며 손사래를 쳤다. 둘은 그렇게 걷는 동안 어느새 다르히네 저택의 정원을 빠져나왔다. 마부 대신 기사가 말을 모는 제법 넓은 마차에 탄 유리엔이 자세를 편하게 늘어뜨렸다. 그걸 보고 카엘이 한마디 했다. “ 아주 늘어지겠네.” “ 잔뜩 녹아서 후물거리는 카라멜만큼은 아니니까 걱정 마.” “ 누가 후물거린다는 거야?” “ 내 주머니의 땅콩 카라멜.” “ …아, 그래.” ‘하여튼 쉬어’라며 카엘이 마차의 문을 닫았다. 카엘은 마부 석에 올라탔고, 슬슬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싼 마차인지 길이 덜컹거리는데도 푹신한 카펫 덕에 전혀 엉덩이가 아프지 않았다. 유리엔은 아예 그 위에 드러누웠다. 조금씩 잠이 오기 시작했다. 유리엔은 무겁게 느껴지는 눈꺼풀을 감으며 오늘 일을 떠올렸다. 솔직히 말해 고마웠다. 그때 카엘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짐승처럼 달려들던 사내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뭐 결국은 죽었지만. ‘ 고맙다고 해야 하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차마 얼굴을 마주보고 말로 내뱉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결국 편지를 쓰기로 결심하고 잠을 청하려는 순간, 갑자기 카엘의 괘씸함(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은)이 떠오른 유리엔이 으드득 이를 갈며 마차를 발로 걷어찼다. 쾅! “ -?! 뭐, 뭐지?” 한참 말을 몰던 기사A가 돌연 마차에서 들린 소리에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설마 습격? 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차는 언제 그런 소리를 냈었냐는 듯 아주 말짱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말고삐를 조종했고, 카엘은 혹시 잠꼬대인가 싶어 피식 웃음을 지었다. ================================ # 21편 # 소제목 : 납치 미수. (10) ================================ 늦은 시각이었다. 잠에서 반쯤 깬 상태의 유리엔은 무려 카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려 무사히 거처에 도착했다. 아직까지 잠들지 않고 기다린 린의 말을 들어보니, 루네가 찾아와 계속해서 자신을 기다리다가 조금 전 돌아갔다고 했다. 유리엔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씻지도 않은 채 그대로 침대에 다이빙하려다가 린의 적극적인 만류에 의하여 결국 욕탕으로 걸음을 옮겼다. 찬물로 세수를 하자 몽롱했던 정신이 조금은 맑아지는 듯 했으나 여전히 잠이 오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시녀들의 정성스런 손길에 몸을 내맡긴 유리엔은 향긋한 장미꽃잎을 띄운 욕조에서의 목욕과 마사지 때문에 더욱 노곤해진 몸이 어서 눈꺼풀을 감고 잠에 취하라며 내리는 명령을 거부하기위해 눈에 힘을 줘야 했다. 그렇게 길고도 짧은 목욕이 끝나고 유리엔은 말 그대로 침대에 철퍽, 엎어졌다. 그러자 재빠르게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린이 뭐라 뭐라 종알거렸지만, 안타깝게도 잠에 빠진 유리엔의 귀는 이미 닫혀있었다. 린은 아쉬운 얼굴을 하면서도 유리엔이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말렸다. 완전히 잠에 빠지기 바로 직전, 유리엔은 내일 오전에 루네를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야 늘그막이 일어나서 오후가 훨씬 넘은 시각에 만나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열두시도 전에 루네가 먼저 찾아올 것 같았다. 마침내 유리엔은 완전히 잠에 빠졌다. 조용한 가운데에서 유리엔의 고른 숨소리와 린이 탁-하고 불을 끄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어느 배불뚝이 40대 백작의 벗겨진 대머리보다도 밝게 빛나는 해가 채 중천에 뜨기도 전에, 풍성한 분홍머리를 휘날리며 린이 부산스럽게 유리엔을 깨웠다. “ 이제 그만 일어나세요!” “ 으…린, 나한테 감정 있어? 새벽부터 사람을 깨우다니 어쩜 이렇게 잔인한 짓을…….” 린의 발랄한 하이 톤의 목소리에, 늘 그렇듯 유리엔이 일어나기 싫다는 의사를 간접적으로 밝히며 슬로우 모션마냥 느릿하게 움직여 부드러운 비단 천으로 된 이불을 머리 위로 덮자, 린이 재빠르게 그 이불을 다시금 휙 내리면서 동그란 눈을 나름 치켜뜨곤 말했다. “ 새벽 아니에요! 해가 하늘에 버젓이 떠 있는데 무슨!” “ 나한텐 그게 새벽이잖아-.” “ 루네 아가씨께서 찾아오셨다구요-기다리고 계시니까 얼른 씻고 준비하세요.” “ 루네가?” 루네가 찾아왔다는 말에 그때서야 유리엔의 감겨있던 눈이 반쯤 떠졌다. 그리고 아침이면 여지없이 움직임이 둔화되는 특수스킬을 지닌 유리엔답게 스물 거린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느릿하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린은 순간적으로 좀비를 떠올렸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일찍 올 줄은 알았지만 너무 빠르잖아, 라고 중얼거리며 유리엔이 욕실로 향했다. 그러자 얌전히 대기하고 있던 시녀 둘이 쏜살같이 달려와 유리엔의 시중을 들었다. 잠시 후 말 그대로 대충 씻고 대충 입고 아침까지 대충 챙겨먹은 유리엔이 응접실에서 루네를 맞이했다. “ 좋은 아침이야, 루네~.” “ 어, 언니!” 유리엔을 발견하자마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루네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안절부절 못했다. 뭐라고 할 말은 많은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루네의 표정은 여러 가지 감정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는데 대부분이 자책감 비슷한 미안함에 가까웠다. 결국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는 루네에게 유리엔이 먼저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 우리 차나 한잔 할까?” 뜨거운 수입산 홍차에서 더 이상 김이 나지 않을 때까지, 유리엔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루네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일가족이 몰살당해도 할 말 없는 루제의 엄청난 짓거리에 경악하면서 백번 사죄하다가도, 유리엔이 적(?)들을 일격에 모두 때려눕히고 당당하게 탈출했다는 대목에서는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유리엔은 일부러 카엘이 나타나 도와주었다는 부분은 쏙 빼고 얘기했다. 왠지 그 녀석에게 도움을 받았다는(어쩌면 목숨까지 빚진 것 일수도 있는)사실을 쉽사리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딱히 이런 일로 자존심을 내세우겠다는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카엘이 나타나던 순간에 힘이 풀릴 만큼 안도해버렸던 자신이 떠올라 조금쯤은 그 녀석에게 의존했던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튼 어쩔까 하다가 결국은 송두리째 빼버리자, 자연스럽게 위기였던 상황도 함께 빠졌다. 결국 루네가 들은 내용은, 전부 유리엔의 화려한 응징들이었다. 주먹 한방에 건달이 뒤로 나자빠졌다는 부분에서는 조금 웃음이 나왔지만 루네는 끝까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제 쌍둥이언니가 벌인 사건이 어디 다른 곳에 흘러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자신의 가문과 가족들은 완전히 끝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눈앞이 깜깜해졌고 그런 큰 사건을 간단히 넘겨준 유리엔에게 너무도 미안하고 고마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 정말 고마워요, 언니. 그리고 정말 죄송해요.” “ 그만-. 그 말 또 하면 벌써 열한 번째야.” “ 그래도요. 아, 그런데…….” “ 응?” “ 저희 언니…….” 루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무슨 얘기인지 약간 망설이며 말끝을 흐리자 유리엔은 루네를 재촉하는 대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루네가 마침내 말을 꺼냈다. 작은 목소리였다. “ …원래부터 그렇게 못된 사람은 아니었어요.” “ 응. …루제가?” “ 네.” 이것 참. 유리엔은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착해도 너무 착했다. 어제 루제가 말하던 투를 떠올리니 루네를 좋아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에 가까운-심지어 자신을 싫어하기까지 하는 제 언니를 두둔하는 루네의 무른 성격은 아무래도 천성인 듯싶었다. 루네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무래도 자칫하면 납치를 당했을 번한 유리엔에게 가해자(물론 결과적으로만 보면 루제는 피해자에 가까웠지만 일단 과정상)를 두둔하는 말을 꺼내자니 민망하기도하고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결국 유리엔은 쿡, 하고 웃고 말았다. “ 그래. 그럼 루제는 언제, 어쩌다가 카라멜을 좋아하게 된 거야?” “ 아, 그게 그러니까…….” 루네는 ‘카라멜’이라는 독특한 호칭에 익숙해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한편으로 카엘을 처음 봤던 때의 기억을 더듬었다. ================================ # 22편 # 소제목 : 납치 미수. (11) ================================ 그 때는 황실에서 정기적으로 주최하는 사냥대회가 열린 날이었다. 축제와 더불어 가벼운 여흥삼아 즐기는 것이었는데, 참가자격은 기사작위이상의 남성이었다. 몰이 식으로 잡기도 했지만 장소를 지정해 야생 동물들을 풀어놓기로 했다. 간혹 곰이나 호랑이, 멧돼지와 같은 크기가 크고 사나운 짐승을 잡기라도 하면 황제가 직접 약소하나마 상금을 내렸다. 대다수의 귀족들이 사냥에 뛰어들었다. 여흥도 여흥이지만 운이 좋아 집채만 한 짐승이라도 잡는 날에는 황제의 눈에 들지 모른다는 욕심에 눈이 번뜩였다. 그리고 그런 귀족들 휘하의 기사들이 상당수 투입되었다. 루네와 루제는 황실의 축제에는 매년 꼬박꼬박 참가해왔지만, 사냥대회는 전혀 구경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에 참가하는 친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패기가 펄펄 넘치는 첫째오라비 ‘루젠’이 기사의 작위도 수여받았고 해서 당당히 올해 사냥대회에 덜컥 참가해버리고 말았다. 결국 둘은 아침부터 반드시 커다란 짐승을 잡겠다며 투지에 불타올랐던 제 오라비를 응원 겸 구경하기 위해 대회가 열리는 장소로 오게 되었다. 귀족영애들을 위한 자리는 마련되어 있었지만, 당연히 사냥장소와는 멀찍이 떨어져있었다. 시끌벅적한 사냥터와는 정반대로 한적하고 조용한 장소였다. “ 하아. 이건 구경이 아니라, 그저 사냥나간 낭군님 기다리기잖아.” “ 응. 하긴 그래.” 루제가 구겨진 치맛자락을 펴며 투덜대자, 그런 루제에게 루네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꾸했다. 아직 열네 살밖에 되지 않은 쌍둥이 자매는 제법 사이가 좋아보였다. 그리고 놀랍도록 닮은 둘의 얼굴에 드러나는 표정은 서로 다른 성격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었다. 결국 채 삼십분을 못 견디고 루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가자.” “ 어딜?” “ 지겹잖아. 루젠 오빠가 뭐가 예쁘다고 우리가 여기서 낭군님마냥 하염없이 기다려줘야 돼? 오빠가 호랑이를 잡아서 상을 받던 토끼도 못 잡아서 허탕을 치던 우리랑은 상관도 없는데.” “ 그렇지만…….” “ 그럼, 우리 이렇게 하자.” 루네가 망설이자 루제는 손가락을 하나 펴서 내밀며 제안을 걸었다. 루네는 그녀의 눈에서 반짝이는 장난기를 발견했다. 아, 뭔가 일을 치려는 속셈이구나. 제 쌍둥이언니인 루제는 평소에는 그럭저럭 조용한데 가끔가다 한번씩 사고를 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대체로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는 수습하기 힘든 대형 사고였다. 이번에도 비슷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루제의 입이 열리며 루네를 난감하게 만드는 말이 튀어나왔다. “ 사냥구경을 가는 거야, 어때?” “ 응? …대회를?” “ 그렇지.” “ 하지만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잖아. 그것도 기사 이상이 되야-.” “ 시종들도 있던데?” “ 남자잖아.” “ 우리가 남장하면 되지!” “ 에에?” 남장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말에 루네가 입을 떡 벌렸다. 하지만 루제는 이미 뜻을 굽힌 듯 결연한 표정으로 사냥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루네가 반대하면 혼자서라도 뛰어들겠다는 표시였다. 결국 루네는 이번에도 끌려가다시피 루제의 계획에 동참하고 말았다. 어디서 구한건지 정말로 시종들이나 입을법한 옷 두벌을 갖춰 입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편한 신발을 신고 온 것이 다행이라고 웃으며 루제는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옷 안으로 감췄다. 루네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감추기 위해 까만 숯을 군데군데 바르자 겉보기에는 정말 감쪽같았다. 둘은 조심스레 사냥터 안으로 들어갔다. 루네는 혹여 들키면 어쩌나하는 걱정에 조마조마했지만 한편으로는 생전처음 보는 넓은 사냥터와 그곳에서 분주히 뛰어나는 사람들과 동물들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루제가 씨익 웃었다. “ 안으로 들어가면 위험하니까. 이 부근에서 돌아다니자.” “ 응-.” 그렇게 둘은 사냥터의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며 이것저것을 구경했다. 하지만 사람이란 무릇 조심해야지 하다가도 다른 것에 정신이 팔리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마는 습성이 있었다. 어느새 루네와 루제는 자칫하면 맹수나 혹은 맹수보다도 더 무서운, 여느 기사가 잘못 던진 창이나 화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사냥터의 안쪽으로 이동하고 말았다. 결국 짐승의 울음소리를 듣고 난 뒤에야 루네가 새파랗게 질려서 말했다. “ 어, 언니. 우리 너무 깊이 들어온 것 같아.” “ 응…내 생각에도 그래.” 루제의 표정에 당황이 어렸다.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 전에 어서 되돌아가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하며 루제가 루네를 이끌고 몸을 돌리는 순간, 정면으로 돌진해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루제는 자신들이 있는 방향으로 힘차게 달려오는 검고 커다란 물체를 굳은 상태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물체의 정체가 자신들을 덮치려는 멧돼지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꺄악!” 반사적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루제가 몸을 움츠렸다. 바로 다음순간 닥쳐올 끔찍한 상황을 상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으나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하며 눈을 뜨자 꾸엑 소리를 내며 몸부림치는 멧돼지가 눈에 들어왔다. …쟤가 왜 저러고 있어? 하는 상황파악 제로의 의문도 잠시, 이내 멧돼지의 허리부근에 기다란 창이 하나 더 날아와 박힘으로써 멧돼지의 몸부림이 잠잠해졌다. “ 괜찮나?” 히히힝!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멧돼지에게 창을 날린 장본인이 분명한 사람이 말을 타고 있었다. 아, 높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루제와 루네에게 말까지 타고 있는 사람은 너무 높은 곳에 있었다. 목이 아프도록 고개를 올리자 드디어 구세주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자 그 순간 루제는 어떠한 말도 할 수없었다. 머릿속이 빈 것처럼 멍해지고 말았다. 세상에, 자신들은 구해준 사람은 무려 이 나라의 하나뿐인 황태자였다! 단 한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에 보석 같은 눈동자를 지닌 황태자가 조각상이 울고 갈 정도로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라는 것은 제국 내에 무성한 소문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눈앞의 사람은 정말로 그 소문에 모자라지 않은, 아니 오히려 소문이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하고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둘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치 넋을 빼앗긴 것처럼 가만히 있자 혹시 공포로 얼어버린 건가싶어 황태자가 다시 말을 걸려는 찰나, 때마침 기사들이 몰려왔고 그는 전리품인 멧돼지와 함께 사라졌다. 황태자가 사라지고 한참 후에야 루제와 루네는 정신을 차리고 위험장소를 벗어났다. 사냥대회가 끝나서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에서 둘은 오늘 있었던 사건으로 이야기의 꽃을 피워나갔다. “ 정말 멋있었어. 최고야…왜 그런 소문이 퍼졌는지 알 것 같더라.” “ 응, 진짜로 깜짝 놀랐어.” “ -있잖아.” “ 왜, 언니?” 루제의 눈동자는 몽롱하게 풀려있었다. 마주잡은 손을 풀지 않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루제가 말했다. “ 아무래도 이건 운명인 것 같아.” “ 뭐?” “ 전하랑 나는…사랑에 빠질 운명이라구.” 루제의 말은 허무맹랑했다. 때문에 루네는 그 말을 단지 농담으로 치부하고 웃어넘겼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한눈에 반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황태자와의 신분 차이를 생각하면 자연스레 동경으로 머무는 것이 보통이었다. 루네도 그랬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조각 같은 외모가 아른거렸지만 그것이 사랑에 빠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루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다. 그날부터 루제는 카류엘 황태자에 관해 무서울 정도로 집착했다. 그에 관한 모든 소문(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은 전부 긁어모았고 이틀이 꼬박 걸리는 거리임에도 황궁의 파티나 무도회에는 카엘의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반드시 참석했다. 물론 이루어질 확률이 희박하다는 사실 정도는 루제도 알고 있었기에, 카엘이 여성혐오증이라는 소문에 오히려 기뻐했다. 자신이 가질 수 없다면 남에게도 소유를 허락할 수없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버릇처럼 ‘전하는 나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의 곁에도 있을 수없어’라는 말을 루네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중얼거렸다. 루제는 온갖 상상에 빠진 것도 모자라 여러 가지 주술에도 매달렸고, 주변에 카엘을 조금이라도 사모하는 여성이 보이면 거리낌 없이 뒤에서 욕을 퍼붓고 익명으로 협박하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보다 못한 루네가 말렸지만 루제는 자신을 질투하는 거냐며 그것을 뿌리쳤다. 루네는 더욱 열심히 그녀를 붙들고 설득했지만 그럴수록 둘의 사이는 나빠져만 갔다. 결국에는 아버지인 드아이스 남작이 루제를 완전한 구석 지방의 영지로 유학 삼아 보내버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 황태자전하께서 비를 맞이하시게 되면 그 후에 데려오려고 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몰래 올라온 거예요.” 루네는 이야기를 끝내고 한숨을 쉬었다. 루제의 첫사랑은 너무도 삐뚤어져있었다. 때문에 결국 궤도를 이탈해 집착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안타까워 열심히 말렸지만 갈수록 사이만 나빠졌고 지금에 와서는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도록 내버려두고 말았다. 자신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래서 한숨을 내쉬는데, 이야기를 다 들은 유리엔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 사냥 대회? 그렇게 재밌는 걸 한단 말이야?” “ 네. 폐하께서 사냥을 즐기시거든요. 그래서 매년 황실에서 개최했었…잠깐, 언니. 요지는 그게 아니잖아요!” “ 그랬어?” 유리엔은 생글거리며 이미 식어버렸지만 향은 남아있는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루제가 왜 카라멜을 좋아했느냐, 가 아니고 사냥대회는 언제 열릴까-이 쪽이었다. 어떻게 하면 참가할 수 있을까. 잘하면 남장으로 기사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을까? 그게 안 되면 몰래 숨어드는 방법도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유리엔이 작게 웃었다. 루네를 돌려보내고 거처로 돌아온 유리엔은 곧바로 옆에 찰싹 달라붙어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하는 린을 달래야했다. 얼마나 걱정했다느니, 그럴 수 있냐느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둥 숨 가쁘게 이어지는 질문들에 유리엔은 긴 이야기를 다시 풀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아직 카라멜에게 나름의 고마움을 담은 편지도 보내야 하고, 저번에 파티장에서 자신에게 들이댔던 에델리아라는 공녀도 물먹여줘야 하는데. 유리엔은 그것들을 전부 다음날로 미뤘다. 납치미수 사건은, 그렇게 조용히 덮이는 듯싶었다. ================================ # 23편 # 소제목 : 사냥대회의 레이디. (1) ================================ 데굴. 또 한 장의 편지지가 처참히 구겨져 바닥을 굴렀다. 유리엔의 고운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긴 손가락은 화려한 깃털이 달린 가느다란 펜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 …젠장.” 결국 붉은 입술이 열리며 자주 애용하는 비속어중 하나가 튀어나왔다. 결국 유리엔은 ‘탁’소리가 나도록 펜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두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그렇다. 유리엔은 지금 카엘에게 보낼 편지를 쓰기 위해서 편지지와 열심히 고군분투 중이었다. 고맙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야 하는데, 이상하게 말이 꽉 막혀버린 것 마냥 글이 써지지 않았다. 이런 낯간지러운 내용을 줄줄이 장문으로 쓰는 짓거리는 도저히 할 게 못 된다 싶어서 깔끔하게 한줄 정도로 요약해서 보내려고 했건만 생각만큼 원하는 내용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한차례 심호흡과 함께 다시금 글을 써내려가기 위해 펜을 들었다. 처음에는 ‘고마워’라는 말만 딱 적어서 보낼까도 생각해 보았었는데 막상 그 세 글자가 도무지 순조롭게 쓰이지가 않아서 포기하고 말았다. 아, 정녕 내가 이리도 나약한(?)인간이었단 말인가. 유리엔은 급기야 두 눈동자에서 보이기 않는 투지를 쏟아내며 힘주어 잡은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 자나 적었을까? 드디어 그녀의 표정이 풀렸다. 썩 만족스러운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정도면 나쁘지 않다는 평가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발신인을 휘갈긴 유리엔이 편지를 둘둘 말며 린을 불렀다. 서류더미에 파묻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러대는 것은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하지만 카엘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파묻힐 정도로 서류가 쌓인 것도 그때그때 처리를 하지 않은 자신의 탓이니까…이게 다 유리시엔, 그 검둥이 때문이다. 괜히 사람을 신경 쓰이게 만들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게 하다니 이게 무슨 경우-. 막 절반 째 서류에 서명을 휘갈긴 카엘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는 피곤한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긴 속눈썹이 두드러졌다. 검사임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흰 피부는 전혀 그을리지 않아 애기처럼 깨끗했으며-그런 흰 피부와 저절로 눈길을 앗아가는 붉은색의 머리카락, 그리고 눈동자의 조화는 보는 사람에게 짜증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완벽하게 어울렸다. 새삼 조각 같은 외모가 인식되는 가운데, 그의 시선이 어느 한곳으로 향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서류더미의 근처에는 돌돌 말려 리본달린 끈으로 밀봉된 형태의 편지가 다소곳이 놓여있었다. 아직 펼쳐보지는 않았지만 저번에 한번 받았던 기억으로 추측해 보건데 십중팔구 유리엔의 편지였다. …아무래도 저것 때문에 더 집중이 안 되는 걸지도. 결국 카엘은 밀봉하고 있는 끈을 풀고 편지를 펼쳤다. 편지의 수신인은 예상대로 유리엔이었지만 저번처럼 안 어울리는 존대를 섞었다던가 내용이 길거나 하지는 않았다. 편지에 적힌 글은 수신인과 발신인의 이름을 제외하면 단 한 줄이었다. -전혀 고맙지 않은 건 아니야. 또박또박. 의외라고 생각했던 여성스러운 글씨체가 편지의 정 가운데에 말끔하게 쓰여있었다. 편지의 내용은 그게 다였다. “ 쿡.”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카엘의 입술이 저절로 상승 곡선을 타고 매끄럽게 올라갔다. 웬 편지인가 했다니,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했던 거로군. 이 한 줄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을지,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물인 휴지조각마냥 구겨져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을 편지지들의 모습이 저절로 눈에 본듯 떠올랐다. 그는 여전히 피식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펜을 집었다. 너무 화려하지도 단조롭지도 않은 검정색 깃털의 끝부분이 살짝 팔랑거렸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받은 편지는 답장을 미루다가 결국 못했었지-이번에는 기꺼이 써 주지. 부드러운 글씨체로 순식간에 답장을 써내려가는 카엘의 모습은 어쩐지 즐거운 듯 보였다. 이리저리, 요리저리-방향을 계속 바꾸며 왔다갔다 거리던 유리엔이 결국에는 넓은 방을 한 바퀴 다 돌고 나서야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애꿎은 베개를 짓밟으며 말했다. “ …이러니까 꼭 내가 기다리는 것 같잖아!” 뭘? 마음속으로 한껏 ‘아니거든!’을 외쳐준 유리엔은 여전히 푹신푹신한 하얀 베개를 지근지근 밟았다. 아, 저거 비싼 건데. 린이 연민과 아까움을 담은 눈길로 바라보았지만 그러든 말든 유리엔은 기어코 지금까지 자신의 잠자리파트너(?)였던 레이스 달린 소녀취향 베개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아, 조금 후련하다. 그런 표정으로 유리엔은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당장 뒹굴다가 잠이 들어도 괜찮을 않을 만큼 편하고 간단한 옷차림이었다. 유리엔이 늘어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린이 대뜸 말했다. “ 황녀님.” “ 응?” “ 편지 보낸 지 반나절도 안 지났어요.” “ …신경 안 쓰거든!” 린의 말에 흥, 하고 대답하며 유리엔은 반 바퀴 돌아 뒤집어 누웠다. 하지만의 린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 집나간 낭군님 기다리는 것 같아요.” “ 야!” 급기야 유리엔이 늘어져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방금 이상한 세글자를 들은 것 같은데? 뭘 기다려? 검은 눈동자가 속눈썹에 가리도록 게슴츠레 눈을 뜬 그녀가 린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 -그 편지쪼가리가 내 낭군님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 아뇨. 그 편지쪼가리를 보낼 사람이요.” “ 악!” 린의 대답에 유리엔이 반사적으로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누구 맘대로? 낭군님? 누가? 마치 무슨 지나가는 개미 뒷다리 구워먹는 소리냐는 듯 그녀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 토 나와, 린.” “ 저는 특정 인물을 말하지 않았어요.” “ 편지 쓸 사람이라며.” “ 황녀님께 남몰래 타오르는 연심을 품고 있다가 오늘밤 익명으로 편지를 끄적일 남자들은 널렸지요. 예를 들어 기사1이라던가, 2라던가, 3이라던가…….” 그만. 태연한 표정으로 기사1,2,3…등등을 읊어나가는 린에게 유리엔이 손을 내저었다. 주인을 닮아가는 건지, 갈수록 말솜씨만 늘어가지고는.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아무렇게나 빗어 넘기며 유리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한심해. 카라멜 따위의 답장을 기다리는 자신이라니. 그녀는 집착을 깔쌈하게 버리기로 했다. 답장 따위 오거나 말거나…다만 편지를 씹은 것에 대한 아주 자그마한 응징정도는 해줄 수도 있겠지. 가령 실제로 편지쪼가리를 먹여버린다거나, 하는 정도의.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는데 때마침 조작된 타이밍처럼 한 시녀가 유리엔의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들어와, 라는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문이 열리며 나타난 시녀가 들고 들어온 것은 하얗고 직사각형 모양의 편지봉투였다. 에? 저건 혹시? 하는 사이 시녀는 ‘황녀님께로 온 편지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공손한 인사와 함께 총총총 사라졌다. “ …….” 잠깐동안 린과 함께 침묵을 만들어내던 유리엔은 봉투의 발신인에 떡하니 적힌 카엘의 풀네임을 보고는 멍때리기를 그만 두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딱 그 짝이랄까. 그보다 정말로 초스피드로 날아온 답장을 보고있자니 편지를 보낸 보람이 약간정도는 느껴질랑 말랑 했다. 린의 묘한 기대어린 눈빛을 받으며, 유리엔도 약간의 호기심을 가지고 답장으로 추정되는 편지를 슬그머니 펼쳤다. 눈에는 눈, 이에는 눈 모토인건지-편지의 내용은 단 한 줄이었다. 한 줄. -쑥스러워 하긴. …끝. “ ……흠.” 린이 조용히 침음성을 흘렸다. 그 한 줄로 답장의 내용은 끝이었다. 아니 뭐, 애초에 편지를 보내기를 한 줄짜리로 보냈으니 불평할 입장은 아니지만, 그전에 카엘이 줄줄이 장문으로 된 편지를 쓴다는 것이 더 안 어울리는 일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 답장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심히……. “ …훗.” 짜증난다. 이건 뭐랄까, 편지의 내용이 상당히-아주 상당히 거슬린다. 마치 데자뷰 같은 느낌. 아주 가까운 과거에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것 같은 재수 없는 느낌. “ 호호호.” 유리엔은 생글생글 웃으며 편지를 반으로 이등분했다. 두고 보자, 땅콩카라멜. ================================ # 24편 # 소제목 : 사냥대회의 레이디. (2) ================================ 유리엔이 카엘에게 사소한 복수의 칼날을 간 다음날, 아침부터 린이 그녀를 기쁘게 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소식을 안고 왔다. 잠에 취한 상태의 유리엔을 흔들어 깨운 행동정도는 충분히 용서받을 수 있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내용이었다. “ 사냥대회?” “ 네!” 유리엔은 달콤한 아침잠을 포기하며 슬금슬금 침대에서 일어났다.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장황하게 늘어놓는 린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해마다 비슷한 시기에 황실에서 열리는 축제가 있는데 그 축제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 바로 사냥대회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냥대회가 열리는 날짜가 바로 코앞이라는 것도! 설명을 들은 유리엔이 호오, 하는 즐거움의 휘파람소리를 내며 칭찬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린의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 사냥대회가 끝나면 일주일동안 화려한 축제가 있는데…….” “ 있는데?” “ 별로 관심 없으시죠?” “ 응. 당연하지.” 귀족들의 축제라고 해봐야, 주를 이루는 것은 어디까지나 파티나 무도회 따위니까. 유리엔은 애초부터 축제니 뭐니 하는 그럴싸한 명분에 얽혀서 파티에 참석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거짓으로 앓아누운 척을 해서라도 피해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모국에서는 그렇게 참석을 거부하는 유리엔과 그런 유리엔의 거짓말을 간파하고 강제로라도 파티에 참가시키려는 그녀의 아버지(즉 황제)와의 웃지 못 할 해프닝까지 벌어진 적이 있었다. 어쨌든 황실에서의 축제 같은 것은 질색인 유리엔이었지만, 사냥대회라고하면 이야기가 달랐다. 사냥! 이 얼마나 매력적인 단어란 말인가. 대회! 이 얼마나 사람의 투쟁심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단어란 말인가. 루네에게서도 들었던 이야기지만, 이렇게 코앞에 다가와 있을 줄은 몰랐다. 유리엔의 입가가 완연한 곡선을 그렸다. 같은 시각, 다르히네 공작가에서는 그 집의 하나뿐인 딸내미가 넘쳐나는 히스테리를 주체 못해 자기 방 물건을 마구 집어던지고 있었다. 챙그랑! 시가 100골드의 어여쁜 도자기가 처참히 깨져나가는 안타까운 소리가 들렸다. 시녀들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 구석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아, 오늘 일진 제대로 잡쳤구나-하는 생각이 그녀들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쟤가 저렇게 맛이 가서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을 때면 조용히 구석에 찌그러져있는 것이 상책이었다. 재수 없게 걸리기라도 하면 사정없이 집어던지는 물건들을 몸으로 받아내야 할지도 몰랐다. “ 하아, 하아.” 온갖 도자기, 컵, 조각품등을 던지며 체력을 소진한 에딜리아가 지쳐 숨을 골랐다. 마치 한바탕 운동을 끝낸 것처럼 그녀의 금발머리는 몇 가닥이 이마에 달라붙어있었다. 널따란 방은 무슨 돌풍이라도 휩쓸고 간 건지 여기저기에 날카롭게 깨진 파편들이 없는 공간이 없었다. 잠시 그녀의 히스테리가 체력고갈로 인해 소강상태에 들어선 듯하자 구석에서 떨고 있던 시녀들이 재빠르게 튀어나와 난장판이 된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파편들을 대강 치운 시녀들이 일단 방을 나갔다. 그간의 경험으로 보건데 이때는 에델리아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했다. 괜히 눈앞에서 얼쩡댔다가는 애꿎은 희생자가 발생하기 십상이었다. 방이 조용해지자 제 침대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은 에델리아가 씹어뱉듯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 이…하찮은 년이 감히…….” 그녀의 말에서 지칭하는 ‘하찮은 년’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에델리아는 지금 그 상대를 떠올리며 모욕감에 몸을 떨고 있었다. 입술을 잘근거리며 말이 이어졌다. “ 고작 지방 남작가의 딸 주제에!” 호흡이 충분히 돌아온 듯 한결 수월하고 정확해진 발음이었다. 에델리아는 미간을 구기며 얼마 전에 보았던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를 떠올렸다. 뭔가를 향한 집착에 몸부림치던 갈색 눈동자. 기분 나쁘면서도 이상하게 낯이 익다고 생각했더니, 저번 파티에서 유리시엔황녀와 붙어있던 드아이스 가문의 여식과 놀랍도록 똑같은 생김새였다. 뒷조사를 해보니 역시나 그 가문의 첫째 딸이었다. 그리고 기본적인 신원에 관한 정보 외에도 쓸 만한 것들이 굴러들어왔었다. 여기저기서 수집한 정보들을 종합해서 살펴보았을 때, 드아이스 남작가의 장녀인 루제라는 소녀는 말 그대로 카류엘 황태자의 스토커였다. 광팬도 그런 광팬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생각이 모자란 건지 황태자와 관계된 연적들을 이런저런 뒷수작으로 밟아대기까지 한 전적이 있었다. 그때 느낀 집착에 가까운 감정은 분명 황태자를 향한 것임이 틀림없었다. 물론 그것뿐이라면 딱히 신경 쓰일 것이 없었다. 약간 괘씸하긴 했지만 일단은 유리시엔 황녀라는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었으니, 자신에게 잘만 보인다면 나중에 황태자비가 되었을 때 어떻게 손을 써서 황태자의 첩 정도는 되게 만들어줄 의향까지도 있었다. 그런데- “ 감히, 감히 내게 그따위 망발을 지껄여?!” 치미는 분노에 에델리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불과 방금 전 자신을 찾아왔던 루제 드아이스는 유리시엔 황녀를 손봐주는 일이 잘 되었냐는 자신의 물음에 이렇게 말했다. ‘ 안타깝게도…….’ 분명히 소녀의 표정은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착각이겠지만 마치 자신을 비웃는 듯한 느낌에 화를 내기도 전에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말이 곧바로 이어졌다. ‘ 황녀님께서는 누구처럼 골이 빈 바보가 아니시더군요. 그래서 실패했어요.’ 훗-하는 비웃음과 ‘황녀님께서는’이라는 존칭에 에델리아는 잠깐 동안 상황을 제대로 인식 할 수 없었다. 그러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지금 네까짓 게 감히 제국의 공녀인 자신을 모욕하느냐, 정녕 죽고싶으냐’라는 분노에 찬 외침을 내뱉자 루제는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뻔뻔하게 맞받아쳤다. ‘ 제국의 황녀한테도 개겼는데 공녀라고 못 개길 이유라도 있을까요?’ 루제의 태도에 거의 이성을 잃을 정도의 충격과 모욕감에 부들부들 떨던 에델리아가 직접 뺨이라도 올려붙일 기세로 팔을 치켜들었으나, 그런 상황에서도 루제는 조소를 지우지 않으며 오히려 에델리아에게 ‘지금 당장이라도 유리시엔 황녀님을 납치하려했던 사건이 들통 나 황족모독죄와 하극상으로 끌려가게 되면 망설임 없이 당신을 배후로 지목 하겠다’는 협박까지했다. 도자기로 루제의 머리통을 찍으려던 에델리아가 순간적으로 멈칫 했을 정도의 당당함이었다. 결국 주춤하는 사이 그녀는 마지막 크리티컬을 날리고 돌아섰다. ‘ 이틀 후에 있을 사냥대회는 알고 있겠죠? 괜히 나대다가 물 먹는 일이 없기를 바라죠.’ 쨍그랑! 그릇 하나가 더 깨졌다. 화를 참지 못한 에델리아가 다시금 씩씩거렸다. “ 그 주제에…그 주제에 어딜……!” 몇 번이나 깨물어댄 입술에는 미약하게 피가 맺혀있었지만 그 쓰라림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에델리아는 여전히 머릿속으로 루제가 했던 행동과 말을 되씹었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고 열이 올랐다. 지금 당장이라도 찢어죽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급기야 그녀는 자신이 앉아있는 침대를 제외한 나머지 전부를 발 디딜 틈도 없이 엉망진창으로 만들 때까지 다시금 히스테리를 부렸다. 간간히 분노에 의해 떨리는 외침소리와, 뭔가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 부서지는 소리들이 연달아서 들리더니 마침내 거친 숨소리와 함께 잔잔해졌다. 금색 실 같은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엉킨 부분이 많았다. 더 이상 일그러뜨리기도 힘들어 보일 정도로 구겼던 표정을 조금 핀 에델리아가 혼잣말인지, 다짐인지 쥐어짜듯 말을 내뱉었다. “ 사냥대회의 레이디…기필코 내가 되어야만 해.” 반드시, 반드시 말이다. 그렇게 해서 같잖은 두 년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주고 자신에게 함부로 대든 죗값을 치르게 해줄 것이다. 무조건 그래야만 했다. 그 어떠한 방법을 쓰게 된다 하더라도! 에델리아의 눈동자가 표독스럽게 빛났다. ================================ # 25편 # 소제목 : 사냥대회의 레이디. (3) ================================ 그것은 어떻게 보면 황제가 직접 개최하는 사냥대회의 특별한 룰이었다. 특이하게도 이 대회에서는 ‘대회’라는 명칭이 무색하게도 우승자를 따로 뽑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리 사냥터의 동물들을 싹쓸이 한다거나 장난 아니게 거대하고 희귀한 짐승을 잡아온다고 하더라도 황제가 약간의 포상을 내려줄 뿐 우승자라는 명예를 획득할 수는 없었다. 황제는 우승자 대신, ‘레이디’를 뽑아왔다. 일명 ‘사냥대회의 레이디’라고 공공연하게 알려진 이것은 쉽게 말해 황실에서 열리는 성대한 축제를 여는 서막인 사냥대회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여성을 뽑는 것이었다. 레이디로 뽑힌 여성은 명예는 물론 그 후 며칠간 계속되는 축제에서 당연시하게 주목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사교계에도 이름이 확 알려지기 때문에 사교계의 화려한 데뷔를 꿈꾸는 귀족 소녀들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매번 치열할 경쟁률을 자랑하는 ‘사냥대회의 레이디’는 또한 매번 뽑는 기준이 달랐다. 평범하게 미모로만 뽑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훨씬 더 기상천외한 방법들이 주를 이뤘다. 실제로 여성들에게 사냥을 시키는가 하면 한번은 누가 더 어떻게 대회장에 잘 숨어들어서, 가장 많은 위기에 처해서, 제일 극적인 상황에 기사에게 구해지는 것을 기준으로 삼기도 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황제의 기분과 생각에 달린 것이라서, 아무리 뒤집어질만한 것이라도 그 누구도 불만을 표하지 못했다. 다만 ‘이번에는 어떤 기준일까’하고 궁금증을 표하는 것이 다였다. 그래, 과연 이번에는? 누가 어떤 방법으로 ‘레이디’가 될 것인가-? 축제가 이틀 앞으로 다가온 지금, 그것은 공공연하게 모두의 화재거리였다. 시간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다. 평소에도 이틀이라는 시간은 딱히 긴 것이 아니었지만 어떤 특정한 것을 기다리고 있을 때에는 특히나 짧았다. 어느새 황실 축제는 성큼 다가왔고 시녀들은 여느 때보다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바쁨에는 린을 포함한 유리엔의 전용 시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 뷰리풀!” “ 환상적이에요!” 입으로 꾸미는 건지, 손으로 꾸미는 건지. 그녀들은 단 1초도 쉬지 않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면서도 착실히 유리엔을 점점 더 반짝거리게 만드는 것을 보니 확실히 실력파는 실력파였다. 사냥대회의 시간에 맞추느라고 거의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난리를 피우는 것임에도 그녀들의 얼굴은 쌩쌩했다. 이미 생활화 된 모양이랄까. 이와는 반대로 거의 도망가려다가 붙잡힌 신세의 유리엔은 피곤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 …뷰리풀이고 뭐고…난 이렇게 아침부터 꽃단장에 열중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린.” “ 너무 그러지 마세요. 이게 다 ‘사냥대회의 레이디’를 위한 거니까-.” “ 사냥대회의 레이디?” 생소한 말에 유리엔이 고개를 갸웃했다. 덕분에 화장이 삐끗, 눈빛이 날카로워진 시녀가 그 부분을 완전히 지우고 분칠부터 다시 시작하자 유리엔은 속으로 1미리도 움직이면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저러나 유리엔에게 입힐 드레스를 신중한 눈길로 고르고 있던 린이 대답했다. “ 네. 정말 영광스러운 자리죠! 제 생각에는, 아니 모두의 생각도 틀림없이 황녀님께서 레이디에 뽑힐 것을 인정하고 있을 거예요.” “ …난 지금 레이딘지 뭔지 하는 걸 처음 들어봐.” “ 괜찮아요. 아! 이거 예쁘다. 아니, 이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 린?” “ 이렇게 눈짐작으로 고르느니 차라리 다 한 번씩 입어보는 것이-.” “ 절대 기각.” 린의 무시무시한 말에 유리엔이 바로 손을 내저었다. 어림잡아도 수십 벌은 되어 보이는 드레스들이라니…아, 현기증 나. 유리엔은 미간 주위를 톡톡 두드리는 화장품에 눈을 감았다. 대체 얼마나 분칠을 해대는 건지. 어차피 자신은 사냥대회에서 마음껏 날뛸 계획이니 이런 치장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은가? 치렁치렁한 장신구와 드레스, 그리고 화장은 남장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 후후후.’ 그렇다. 유리엔은 남장을 할 계획이었다. 그것도 무려 ‘기사’로! 까짓 거 가발 좀 쓰고 옷 좀 주워 입고 갑옷만 갖춰 입으면 안 될 것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아, 검도 필수로군. ‘ 훗. 사냥대회에는 당연히 사냥을 해야지!’ 멀찌감치 마련된 자리에 살포시 앉아 직접 수놓은 손수건을 흔들면서 응원? 개소리다. 적어도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였다. 어차피 응원해주고픈 인간도 없는 것을. “ 황태자전하는요?” 유리엔의 생각을 읽은 건지 린이 곧바로 말했다. 덕분에 순간 마음을 읽히고 뜨끔한 소녀1같은 심정이 된 유리엔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린을 바라보았다. “ 걔가 뭐?” “ 응원 안 해주실 거예요?” “ 누가 안 해준데?” “ 그럼 해주시게요?” “ 글쎄.” 기도는 해줄지도 모른다. ‘말 타다가 넘어져라!’ 정도라면. 침대 위에 늘어놓은 드레스를 한번, 유리엔을 한번 씩 번갈아 돌아보며 린이 속으로 혀를 찼다. 하긴, 응원 같은 걸 해줄 리가 있나.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말이다. 오히려 저주나 안하면 다행이었다. “ 에휴. 그나저나 드레스가 다 예뻐 보여서 큰일이네. 황녀님이 보기엔 어떠세요?” “ 다 비슷해.” “ 그럼 고를 수가 없잖아요.” “ 안 입지, 뭐.” 뭐래. 린이 유리엔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장인정신이 철철 흐르는 눈빛으로 드레스들을 하나하나 분석하기 시작했다. 저 윤기 흐르는 검은 드레스는? 탈락이다. 아름답긴 하지만 저번 파티 때 입었던 드레스와 검정색이라는 점이 겹치니 새로운 느낌을 줄 수 없었다. 그럼 저 붉은색 드레스는? 쯧. 탈락. 청순미를 강조한 메이크업과 어울리지 않는다. 어디 보자, 그럼 연보라색? …넘쳐나는 프릴들로 추정하건데 철없는 귀족 소녀들이 우르르 입고 나올 가능성이 높다. 그럼, 뭔가 눈에 확 띄면서도 식상하지 않은 것은-. “ 후엥. 어려워어-.” 초스피드로 완성되어가는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을 바라보며 린이 울상을 지었다. 유리엔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 도와줘?” “ 앗. 직접 고르시게요?” “ 봐. 저 드레스-.” “ 어디-헉! 너무 야해요!” “ -랑 그 옆 드레스.” “ 네?” 유리엔이 고른 드레스를 바라보며 린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하늘거리는 프릴이 인상적인 ‘엄청 파인’데다가 너무 얇아서 속이 ‘비치는’ 장난 아니게 야한 드레스(인지 잠옷인지 구분도 안 가는)와, 색은 예쁘지만 너무 단조로워서 상당히 수수해 보이는 진주 빛의 드레스였다. 자신이 일부러 선택의 범위에 넣지 않았던 드레스 두 벌이라니, 설마 놀리는 건가 싶어 린이 뭔가 말하려는데 유리엔이 그 말을 막았다. “ 둘이 같이 입지 뭐.” “ 에?” “ 저건 프릴이랑 겉감이 예쁘니까 겉에 걸치듯이 입고…그 옆 드레스를 기본 베이스로 입으면 될 것 같은데? 어색한 부분은 대충 리본이나 장신구로 가리면 잘 모를-.” “ -굿! 굿 잡! 베리 베리 굿! 당장 그렇게 해요!” 유리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뜻을 이해한 린이 두 손을 맞잡으며 감탄사를 외쳤다. 그녀의 눈동자가 더없이 반짝거리며 다시금 장인정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 아니, 오히려 그냥 같이 입는 것 보다는 아예 두 벌을 합쳐서 개조를 해버리면…여기는 이렇게 해서 저기는 저렇게…오오!” 아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냥 가만히 있을 걸 그랬나? 유리엔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런 린을 바라보았다. ================================ # 26편 # 소제목 : 사냥대회의 레이디. (4) ================================ 대회는 제법 이른 시간에 열린다. 해가 지기 전에 끝내야 했으니 자연스레 정오를 넘길 수는 없었다. 준비를 끝낸 유리엔이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점검했다. 전신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윽한 눈길로 응시한 유리엔이 바로 옆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찬양이 가득담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린 외 시녀들에게 상큼한 미소를 한번 날려주었다. “ 아! 이 소녀,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사옵니다…….” 쓰러진다. 유리엔의 미소를 받은 즉시 가슴 언저리를 부여잡고 이리저리로 픽픽 쓰러지는 시녀들을 뒤로하자 린이 쏜살같이 달려와서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유리엔을 사냥대회가 열리는 장소까지 에스코트하는 역할을 맡은 그녀의 호위기사 찰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 참, 황녀님.” 린이 동글동글한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 원래 이럴 때는 황태자전하께서 에스코트를 하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명색이 남편인데 말이다. 물론 꼭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었지만 그래도 예의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린의 질문에 유리엔이 대답이 코웃음과 함께 날아왔다. “ 안 그래도 올까봐 무서워서 미리 오지 말라고 했지. 에스코트는 무슨, 카라멜이랑 나랑 연애중도 아니고 느끼하게 웬 에스코트?” “ 부부잖아요.” “ 아직 남남이야.” 유리엔은 냉정하게 말했다. 실제로 그녀는 시녀를 통해 데리러 올 필요 없다는 말을 예전에 전달했다. 누가 알아? 카라멜이 그 말을 전해 듣고 기쁨의 댄스를 추었을지. 물론 실제로 그랬을 리는 없지만 비유가 그렇다는 거다. 유리엔은 한껏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린을 돌아보았다. “ 쳇. 아쉬워라.” “ 왜?” “ 넋 나간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말예요.” “ 누구의? 카라멜의?” “ 당연하죠. 황녀님이 너무 눈부셔서 깜짝! 놀라는 거예요.” “ 퍽이나.” 꿈이 너무 크다. 유리엔은 저도 모르게 카엘의 넋 나간 모습을 상상해봤다. …딱히 상상이 안 되는데. 물론 실제로 지금 유리엔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 증거로 어느 정도 그녀의 미모에 면역이 되어있는 호위기사 찰스도 넋이 나가다 못해 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상태였다. 그러나 딱히 그녀는 카엘이 사람의 외모에 연연해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미인계 따위가 통하지 않는 그런 타입 말이다. ‘ 하긴, 얼굴에 신경 쓸 것 같으면 아침마다 거울에서 헤어 나올 수나 있겠나.’ 유리엔은 순간 자신이 카엘에 대해 칭찬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 아무튼, 어서 가야지. 늦기 전에.” “ 네-.” 린이 쫄랑쫄랑 네모난 바구니를 들고 따라 나왔다. 이번 사냥대회의 장소는 조금 특이했다. 늘 하던 황실의 숲이 아닌 일부러 특정한 영지에 속해있는 숲을 빌린 것이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만 서도 그것은 황제만 알고 있을 터였다. 사냥에 참가하는 기사들과 대회의 레이디를 노리는 영애들을 비롯해 귀족들이 삼삼오오 서로 모여 있었다. 이제 시간도 되었고 하니 주요 인물들만 등장하면 되는 것이다. 이 대회에서 만큼은 황제가 이미 단상에 앉아 카리스마 있는 표정으로 귀족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여보.” “ 음?” 황비가 지극히 사적인 자리에서만 쓰는 호칭으로 그를 불렀다. 작은 목소리였다. “ 이번에는 또 무슨 꿍꿍이에요? 데일 백작의 영지의 숲에 굳이 올 필요가 없잖아요?” “ 조금 있으면 다 알게 될 테니 걱정 마오.” “ 혹시라도 새아가에게 해가 되는 일이면 가만 안두겠어요.” “ 허허.” 의외로 권위 넘치는 황제의 정체는 사랑하는 자신의 아내에게 한없이 약한 애처가이자 공처가였다. “ 힘들게 키운 잘난 아들을 내어주는데 약간의 심술 정도는….” “ 안돼요! 그리고 카엘을 다 키워놓은 건 나예요.” “ 흠흠.” 그는 아내에게 이기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황비는 생각보다 너무 새아가를 마음에 들어 하고 말이다. 어찌됐든 이때 황태자가 등장했다. 모든 이목이 붉은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등장한 카엘에게 몰렸다. 탄력 넘치는 갈기가 매력적인 백마에 올라탄 카엘은 머리와 눈동자 색과 어울리는 붉은 빛 갑옷을 입고 있었다. 나쁘게 표현한다면 온통 핏빛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좀 더 밝은 마치 불꽃같은 느낌이었다. “ 아아-.” “ 어쩜…나 쓰러질 것 같아.” 귀족 영애들이 단체로 빈혈이라도 도진 것처럼 비틀거렸다. 눈이 호강하고 있었다. 연미복을 입고 있지 않아도 충분히 빛나는 카엘의 외모는 그녀들의 가슴을 온통 진탕시켰다. 오히려 갑옷에 의한 늠름한 모습에 넋이 빠질 지경이었다. 이렇게 단체로 카엘의 외모를 감상하느라 눈알이 빠지고 있을 때, 유리엔이 도착했다. “ 헙!” “ 오오…….” 일단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심장에 무리가 온 듯 가슴께를 부여잡은 사람도 있었다. 이젠 기사들이 단체로 눈알이 튀어나올 시간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이 움직임에 따라 자연스럽게 물결을 쳤다. 밤하늘을 연상시키는 머릿결은 손가락으로 빗으면 사르륵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빠져나갈 것 같았다. 검고 큰 눈동자는 마치 흑진주를 갈아서 뿌려놓은 듯 반짝였다. 그리고 넓게 퍼진 비취색의 드레스는 우아함과 청순함을 동시에 강조했고 그 드레스를 감아올리고 있는 하늘색의 프릴들은 발랄함을 보여 둘이 어우러져 신비함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드레스 밑자락과 목둘레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진주 또한 그녀의 분위기에 환상적으로 어울렸다. 누군가는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고 말했고, 그 옆 사람은 요정 같다고 말했으며, 그 앞 사람은 여신 같다고 이야기했다. 카엘과 유리엔이 형식적인 인사라도 해줄까 싶어서 서로에게 다가갔다. 둘이 함께 있으니 이젠 아예 집단으로 눈이 멀 지경이었다. 카엘이 말에서 내렸다. “ 왔냐?” “ 그래, 오셨다.” 둘이 어떤 인사를 주고받는지 까지는 들리지 않는 귀족 소녀들이 그저 다정하게만 보이는 둘의 모습에 꽃무늬 손수건을 물어뜯었다. 카엘과 유리엔은 서로 형식적인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빈정거렸다. “ 그 느끼한 웃음 좀 치우는 게 어때, 카라멜?” “ 그쪽이야말로 가식적인 입 꼬리 좀 내리지 그래, 검둥이?” “ 어쭈?” “ 호오?” 일반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겼다. 가깝지 않은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비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 둘이 참 사이가 좋은가 봐요. 보기 좋네요.” 때론 진실을 모르는 것이 더 좋은 법이다. 마찬가지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 자, 이제 다들 도착하였는가?” “ …….” 좌중을 둘러보는 황제의 눈에 언제 황비에게 잡혀 살았었냐는 듯 위엄이 넘쳐흘렀다. 명령에 의해 억지로 참가한 카엘과 어쩌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잔뜩 꾸미고 온 유리엔 또한 황제와 눈이 마주치자 인사를 올렸다. 그에 황제의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가 짙어졌다. 사실 그에게는 꿍꿍이가 있었다. “ 우선 대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간단한 설명을 하나 하도록 하겠소. 모두들 짐이 왜 이 숲을 사냥터로 결정했는지 의아해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그 이유는 바로…….” 귀족 영애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녀들은 직감적으로 그 이유가 바로 자신들과 관련된 성질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어떤 식으로든 사냥대회의 레이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맞아떨어졌다. “ 이 숲에서 골드 피그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오.” ================================ # 27편 # 소제목 : 사냥대회의 레이디. (5) ================================ “ …골드 피그?” “ 골드 피그라면-.”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고개를 돌려가며 서로 눈을 마주치는 그들은 뭔가를 아는 눈치였다. 그것을 바라보던 황제가 재차 말했다. “ 그렇소. 꼬리가 황금색인 변종 멧돼지요. 일반 멧돼지에 비해 크기가 다섯 배는 더 크고 그만큼 흉폭 하다고 하지.” “ ……!” 들은 기억이 났다. 분명 꼬리가 황금색인 집채만 한 멧돼지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하지만 벌써 한 달이나 지난 일이었고 그간 잠잠했기에 헛소문으로 치부해버렸는데, 실제로 존재한다니? “ 짐은 골드 피그를 실제로 보고 싶소. 해서…그것을 잡아오는 기사에게 특별히 상을 수여함은 물론, 레이디를 선출할 수 있는 권한을 그 기사에게 주려 하오. 다시 말해, 골드 피그를 잡은 기사에게 맹세의 키스를 받은 여성이 이번 사냥대회의 레이디가 된다는 뜻이오.” “ !!” 술렁. 귀족소녀들, 그리고 기사들에게서 동요가 일었다. 이번 대회는 그저 죽자사자 골드 피그라는 멧돼지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것이 목표인 것이다. 그리고 소녀들은 자신의 호위 기사를 마구 닦달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운이 좋아 골드 피그를 발견한다 하더라도 실력이 모자란다면 사냥은커녕 반대로 목숨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무시무시한 크기에 흉폭함까지 갖춘 골드 피그는 웬만한 몬스터는 간식으로 잡아먹을 정도라고 하니 그런 것을 상처 없이 안전하게 잡으려면 적어도… ‘ 카엘 녀석 정도는 되어야지, 암.’ 열여섯의 나이임에도 제국의 빛나는 샛별이자 모든 기사가 우러러보는 검술계의 신동인 제 아들을 바라보며 황제가 속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애초에 목적자체가 카엘과 유리엔을 더욱 친밀하게 만들려는 것이었으니 골드 피그는 참 적절한 시기에 등장해준 셈이다. 그는 카엘이 골드 피그를 잡기위해 바쁘게 뛰어다닐 것과 그런 카엘을 유리엔이 따스함과 걱정이 담긴 눈길로 응원할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 제론.” “ 예.” “ 골드 피그인지 황금돼지인지 꼭 잡으러 들어가야 할 필요는 없겠지?” “ 그래도 가만히 놀고 계시면 폐하께서 화내십니다.” “ 그럼 잡아서 지나가는 기사1에게 던져주지 뭐. 아니면 제론, 네가 가질래?” “ 됐습니다.” 그러면 제가 혼나거든요, 하고 카엘의 호위기사인 제론이 덧붙였다. 정작 잡으러 뛰쳐나가야 할 이쪽은 전혀 무관심에 의욕제로인 상황에- “ 들었어, 린? 골드 피그래!” “ 네, 황금돼지네요…황녀님 설마 잡으러 가실 생각은 아니죠?” “ 호호호. 내가 아니라 이름 모를 기사B가 잡으러 갈 거야.” “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에 대륙제일미모인 기사B가요?” “ 너무 많은 걸 알려 고는 하지 마.” “ 황녀님!” 정작 직접 수놓은 어여쁜 손수건을 흔들며 응원해야 할 이쪽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기세다. 린이 찰스 씨가 있잖아요, 라고 덧붙였지만 돌아온 유리엔의 대답은 알게 뭐야, 였다. 어차피 사냥대회의 레이디가 욕심나는 것이 아니었으니 누가 골드 피그를 잡아서 누구에게 맹세의 키스를 하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만 살아있는 골드 피그를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것이다. 린은 안절부절 못했다. 말린다고 들을 성격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마음먹은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고야 말 황녀님이었다. 결국 이리저리 유리엔의 말에 휘둘리다가 린은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 …그냥 남장만 하고 사냥하세요. 갑옷은 무거워서 오히려 방해만 될 거에요.” “ 알았어.” 충고까지 해주고 말이다. 그래도 승마 실력은 수준급이니 말에서 떨어질 위험은 없겠지, 하고 린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호위기사인 찰스는 몰래 라도 무조건 딸려 보내야 할 터였다. 그리고 이왕이면……. ‘ …SOS?’ 린이 카엘이 있는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잘근 잘근. 차마 입술을 깨물지는 못하고 죄 없는 손수건을 물어뜯는 여인네가 있었다. 윤기는커녕 푸석함이 느껴지는 금발머리를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리고 화장을 떡칠한 에델리아는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유리엔을 노려보다가 카엘에게로 이내 시선을 돌렸다. ‘ 잘 먹혔어야 할 텐데…….’ 근 이틀간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원래부터 카엘의 마음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했었지만 요 며칠간은 특히나 심했다. 최대한 눈도장을 찍기 위해 곁을 맴돌고 선물공세는 물론 은근히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황태자의 반응이 전에 없이 싸늘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가문 때문이라도 못이기는 척 받아주었던 것들을 전부 차갑게 거절하는 것은 물론 자신에게도 노골적인 무관심을 보여주었다. ‘ 제길…역시 다 저년 때문이겠지?’ 팩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려 유리엔을 응시하는 에델리아의 표정이 더욱 표독스럽게 일그러졌다.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주제에 꽤 반반한 얼굴을 보니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 절대 너 따위가 레이디가 되도록 놔두지 않겠어!’ 이미 대부분의 귀족들은 가문의 힘으로 매수를 끝냈다. 그 휘하의 기사들이 상당수이니 자신이 레이디가 될 확률은 매우 높았다. 하지만 변수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처 자신에게로 끌어들이지 못한 소수의 기사가 운 빨로 골드 피그를 잡는다든지 하는. 그 변수가 황태자만 아니라면 괜찮았다. 뒤늦게라도 유혹하면 그만이니까. 아니, 황태자일지라도 몸으로라도 부딪힐 것이다. ‘ 어디 두고 보자!’ 장미꽃 무늬가 아름다운 손수건이 엉망으로 망가졌다. 한편, 에델리아와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앉은 루네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유리엔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네의 옆에는 어째서인지 납치사건 이후로 조금 조금씩 예전의 관계를 회복해나가고 있는 루제가 앉아 함께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녀들의 머릿속에는 작년 이맘때가 떠오르고 있었다. 루네가 입을 열었다. “ 설마…” “ …아니겠지?” 루제가 말을 받았다. 작년, 그녀들의 만행이 재현되는 순간이었다. ================================ # 28편 # 소제목 : 사냥대회의 레이디. (6) ================================ 대회가 시작되자마자 유리엔은 슬그머니, 소리 없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제 아비인 황제와 한차례 눈빛교환 후 불가항력으로 사냥에 참가한 카엘은 유리엔과 그 호위기사의 부재를 딱히 신경 쓰지 않았지만, 왠지 모를 찝찝한 느낌에 미간을 좁혔다. ‘ 뭐…별 일이야 있으려고.’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숲 안으로 천천히 말을 몰았다. 뒤따라 함께 말을 몰던 기사A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 전하.” “ 음?” “ 아무래도 골드 피그는 전하께서 잡으시겠지요?” “ 글쎄…….” 이왕이면 골드 피그 따위 애초에 발견조차 안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것 잡으려고 해봐야 힘만 들 뿐이고 잡아봐야 맹세의 키스 때문에 성가시기만 할 뿐이다. 어느 정도 숲의 안쪽으로 들어오자 사냥하기에 좋은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먼 곳에서, 또는 제법 가까운 곳에서 다른 이들의 투혼어린 소리들의 들려왔다. 의욕제로인 카엘과는 달리 그들은 골드 피그를 잡기 위해 눈에 불을 키고 있었다. 퍽! 사슴 한 마리가 목에 정통으로 화살을 맞고 나뒹굴었다. 카엘의 솜씨였다. 깔끔하고 빠르게 날아가, 정확하고 강하게 목표물을 명중시키는 모습에 기사A가 저절로 박수를 쳤다. 기사A또한 수풀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사슴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활시위를 당겼다. 이왕 대회에 참가한 것 웬만한 짐승 한 마리 정도는 기념으로 가져가야 체면이 살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가 미처 당긴 시위를 놓기도 전에 다른 곳에서 날아온 화살이 정확히 사슴의 다리 쪽을 명중했다. “ ?!” 이내 다리 때문에 순간적으로 도망가지 못하고 주춤하는 사슴의 목을 향해 곧바로 날아온 또 다른 화살이 그대로 사슴을 절명시켰다. 쉽게 보기 힘든 반듯한 솜씨에 기사A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대편의 나무들 사이에서 말을 탄 두 인영이 작게나마 시야에 잡혔다. 어쨌거나 졸지에 사냥하려던 것을 빼앗긴 기사A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들을 응시했다. “ …괜찮은 솜씬데요…그런데 상당히 낯선 것을 보면 적어도 황궁 기사단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 지방 귀족 가에 속해있는 기사인가, 하고 생각하며 기사A는 바라보던 시선을 뗐다. 딱히 큰 관심을 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카엘은 계속해서 두 인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 전하? 혹시 아시는 기사들입니까?” 기사A의 질문에 카엘이 고개를 저었다. 한쪽은 완전히 갑옷을 입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특이하게도 평상복이었다. 하지만 머리카락 때문인지 얼굴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약간 짙은 다갈색의 머리는 분명히 주변에 널리고 널렸는데도 이상하게 낯익은 느낌이 들자 카엘이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잠시 동안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금세 작년의 이때를 떠올렸다. 저 기사처럼 시종인 마냥 옷을 입고 있던 두 소년을 멧돼지로부터 구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는 그저 길을 잘못 들은 귀족가의 하인이거니 하고 생각했었다. 혹시 그 때문에 이런 익숙함이 드는 건가 싶어 여전히 갈색머리 쪽을 유심히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것을 알아내지는 못했다. 카엘은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 얼굴을 봤으면 좋겠군.” “ 예? 그럼 가까이 부르는 것이…….” 기사A가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카엘이 유심히 보던 인영이 말머리를 돌렸다. ‘어어?’하는 사이에 다각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그 두 명이 등을 보이며 멀어져갔다. 어찌 보면 튄 것이다. 기사A는 어이없음을 표정에 그대로 나타내며 멍 때리고 있다가 결국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자 입을 열었다. “ 저, 전하를 알아보지 못한 모양입니다.” 일반적으로 황태자를 만나면 십중팔구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러 온다. 자신보다 당연히 위계급인 황족에게 그것은 당연한 예의였다. 하지만 방금 전의 둘은 당당하게 쌩까고 튀었다. 기사A는 못 알아보았다는 가정을 세우며 변명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와 그에 맞은 붉은 갑옷을 입은 사람은 이번 대회에서 황태자 외에는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 눈에 확 들어오는 적색 머리카락이 흔하지도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 기사들은 황태자라는 것을 알아보았음에도 그냥 갔다는 얘기였다.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황족을 향한 노골적인 무시로도 비춰질 수 있는 행동이었다. 기사A는 속으로 그들의 배짱에 박수를 보냈다. 카엘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다만 왠지 그 다갈색 머리의 기사의 정체를 알아내야겠다는 오기가 조금 생겼을 뿐이다. 대체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하고 짧은 갈색 머리카락이 미풍보다는 좀 더 강한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이마를 전부 덮어버리는 머리카락 밑으로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흔하디흔한 갈색과는 어쩐지 대비되는 검정색 눈동자는 묘한 매력을 한껏 머금고 있었다. 균형 있게 쌍커풀이 진 커다란 눈은 남자의 것이라기에는 어쩐지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풍성한 속눈썹이 길게 드리워져 눈을 내리깔 때면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는 보통의 남성복을 차려입고 말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소년인지 소녀인지 애매모호한 중성적인 모습의 그는 주변이 환하게 빛날 정도로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 좋아! 기다려라, 골드 피그!” 그렇다.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남장에 성공한 유리엔이었다. 유리엔은 기사까지는 몰라도 제법 소년다운 모습을 한껏 뽐내며 숲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혹시나 사고를 치거나 위험에 처하는 일이 없도록 철썩 같은 보좌를 맡은 그녀의 호위기사 찰스가 그 뒤를 따라다녔다. 찰스는 조금 전 우연히 황태자와 마주쳤던 일을 떠올렸다. 비록 얼굴을 확인하기 힘든 먼 거리였지만 한눈에 황태자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들킬지도 모르는 상황에 심장이 다 철렁거렸지만 제 주인인 유리엔이 얼마나 태평한지 얼떨결에 그 태평함에 동화되어 아무렇지 않게 그 장소를 벗어나버리고 말았다. 유리엔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저 사슴의 다리를 제대로 명중시킨 활의 성능이 만족스러운 뿐이었다. “ 저, 그런데 황녀전하.” “ 스톱! 난 그저 골드 피그에 도전하러 온 이름 모를 기사B라니까?” “ 아, 예…기사 B님…물어볼 것이 있습니다만, 만약 골드 피그를 잡는 것에 성공하신다면, 정말로 대회의 레이디를 뽑으실 겁니까?” “ 에…….” 찰스의 말에 유리엔이 눈동자를 굴렸다. 살짝 고민해봐야 할 문제였다. 재미있을 것도 같지만,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부작용들도 생각을 해야 했다. 예를 들어 화재의 중심이 되어버린 기사B라던가, 그러다 결국 정체가 밝혀져 버린 기사B라던가. 또 그럴 경우에 누구를 레이디로 고르느냐도 고민거리였다. 무난하게 루네를 고를 수도 있겠지만 극적인 장면을 위해 카엘을 뽑을 수도 있었다. 남자라도 괜찮다는 조건하에 말이다. 유리엔은 그저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때였다. 쿵! “ 골드 피그다!” “ !!” 땅을 울리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어수선한 외침이 들려왔다. ================================ # 29편 # 소제목 : 사냥대회의 레이디. (7) ================================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집채만 하다는 표현이 전혀 과장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그것은 성난 송곳니를 들썩이고 있었다. 골드 피그의 커다란 그림자 안으로 몇 명의 기사가 보였다. 그들은 그래봤자 조금 특이한 보통 멧돼지를 상상하고 있다가 예상을 뛰어넘는 크기에 당황한 듯싶었다. 바보들. 황제의 말을 콧구멍으로 들었는가? 유리엔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놀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갑작스레 세차게 두근거리는 심장이 여실히 느껴졌다. 놀라움, 즐거움, 흥미. 검정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 황녀전하, 안됩니다!” 유리엔이 급하게 자신을 말리는 호위기사 찰스를 돌아보았다. 얼떨결에 ‘황녀’라는 호칭을 사용해 버렸지만 다행인지 골드피그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후라 다른 기사들은 그것을 듣지 못했다. 찰스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는 무시무시한 송곳니를 뽐내고 있는 골드피그를 슬쩍 바라보았다. …사기다, 이건. 꼬리의 털이 조금 누런색이라고 어떻게 골드피그 따위의 깜찍한 이름을 붙여줄 수가 있는 거지? 사실 찰스가 느끼기에 골드피그는 단순한 짐승, 멧돼지보다는 거대한 몬스터에 가까웠다. 저걸 잡아? 말도 안 된다. “ 불가능합니다. 저 몬스터…그러니까 골드피그는 웬만큼 실력이 뛰어난 기사라도 혼자서는 힘든 정도입니다. 위험합니다!” 찰스는 나름 위기감을 일깨워주려 절박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말에 마음이 움직인다면 이미 유리엔이 아니었다. 그녀는 벌써 화살을 날릴 준비 중이었다. 찰스의 얼굴이 사색이 되든 말든 간에, 잡히든 안 잡히든 간에 이미 달려들고 보자는 결심을 끝낸 뒤였다. 맨 처음 장렬한 외침과 함께 골드피그에게 달려들었다가 처참하게 앞발로 까이고 저 멀리 날아간 어떤 기사에게 다른 이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갑작스런 소란, 땅이 울리는 소리, 그리고 골드피그가 나타났다는 외침에 의해 점점 유리엔이 있는 장소 근처로 모이는 기사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섣불리 달려들지는 못했다. 미친척하고 달려들었다가 골드피그에게 쳐 맞은 누운 다른 기사의 최후를 받기 때문이다.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는 것은 역시 무리였다. 몇몇은 그런 그 기사를 보호해주고 나머지들은 슬슬 서로 뭉치기 시작했다. 혼자서는 힘들 테니 다수가 함께 공격하자는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리엔이 다짜고짜 장전한 화살을 골드피그에게 날렸다. 퍽! “ !!” 찰스는 저도 모르게 ‘나이스 샷’이라고 내뱉을 뻔했다. 골드피그의 시선이 모여든 다른 기사들에게로 집중되어있었기 때문인지, 다름 사각지대였던 유리엔이 쏜 화살은 정확히 골드피그의 오른쪽 눈을 명중시켰다. 노린 곳을 제대로 맞춘 셈이었다. 여느 멧돼지와 다름없이 멱따는 소리를 내며 고통을 호소하는 골드피그를 유리엔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띠고 바라보고 있었지만 반대로 찰스의 표정은 더욱 핏기를 잃어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더욱 흉폭해진 저 거대 멧돼지가 이성을 잃고 이쪽으로 달려드는 일 밖에 남지 않았다-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 …황녀전하.” “ 여기에 황녀도 있었어? 누구? 혹시 기사B를 잘못 불렀다거나?” “ …지금이 농담할 상황으로 보이십니까?” “ 어쭈?” 유리엔은 갑자기 반항기라도 찾아온 듯한 찰스를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감히 말대꾸는커녕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숫기가 없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가 판단하기로 이제 자신은 목숨을 걸어야 했다. 생사의 기로에 놓여있는데 반항이고 뭐고 알게 뭔가. 멧돼지 서너마리가 합체해서 다시 태어난 듯한 덩치를 자랑하는 골드피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을 멈추고 슬슬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여든 기사들이 우르르 덤벼들었지만 골드피그를 완전히 잡기에는 영 부실해보였다. 온갖 효과음과 비명이 난무하는 전투의 현장으로 당장이라도 뛰어들려는 유리엔을 말리기 위해, 찰스는 차마 유리엔이 몸에는 손을 대지 못하고 대신 말을 잡아끌었다. 덕분에 전진에 방해받은 그녀의 눈썹이 휙 들어 올려졌다. “ 안 놔?” “ 위험합니다!” “ 그냥 가서 몇 대 때리다가 안 되면 튈게.” “ 더 위험합니다! 그러다 죽으면요? 깔리면 그냥 꽥입니다, 꽥! 바로 찍! 지난번에 황녀전하께서 밟으신 개미처럼요!” “ …내가 개미도 밟았어?” “ 밟으셨잖습니까. 그래놓고 그 죽음을 애도한다며 아예 몇 번 더 눌러 밟아서 아주 땅에 묻어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저번에.” “ 몰라. 기억 안나.” “ 정말 그 개미가 불쌍……아니 이게 아니라, 어쨌든 골드피그는 위험합니다!” 도중에 잠시 딴 길로 빠졌다가 간신히 원점으로 돌아온 찰스가 결연하게 외쳤다. 하지만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던 유리엔은 아예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버렸다. “ 황녀전하!” 기겁한 찰스의 외침을 뒤로하고 유리엔이 가벼운 몸으로 달렸다. 그러나 이번엔 정말로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유리엔을 뒤쫓아 가려던 찰스가 미처 말을 뛰기도 전에 골드피그에게 이변이 일어났다. 푸욱! “ 꾸에엑-!” 유리엔이 큰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쳐다보기에 목이 아플 정도로 거대한 골드피그의 몸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의 눈과 눈 사이, 미간에 깊숙이 박힌 검 한 자루가 눈에 띄었다.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던 골드피그가 쿵하는 소리와 함께 한쪽으로 쓰러졌다. 땅이 울렸다. ……어라? 순간 유리엔의 얼굴에 황당함이 스쳐지나갔다. 설마? 단 한방에? 이렇게 허무하게? 휙 소리가 날정도로 고개를 돌려서 유리엔이 뒤를 돌아보았다. 여럿의 기사들을 고전하게 만든 골드피그를 겨우 검 한번 날려서 잡은 영예의 망할 녀석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몇 초 후 그녀는 뒤를 돌아봤던 속도 그대로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이럴 줄 알았다. 예상했던 인물이었다. 유리엔은 그 인물이 골드피그가 제대로 잡혔나 확인하러 오기 전에 잽싸게 꼬리만 잘라서 도망칠까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카엘은 좀 전에 골드피그를 발견했다. 무시하고 지나치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녀석은 황금색 꼬리고 뭐고 그전에 거대한 몸집부터가 모든 시선을 잡아끌었다. “ 쯧.” 나직하게 혀를 찬 카엘이 귀찮지만 말을 몰아 골드피그에게로 향했다. 자신은 조금 귀찮으면 될 일이었지만 그 사이에 애꿎은 일반 기사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때 카엘은 누군가의 화살이 골드피그의 눈에 명중하는 것을 보았다. “ 앗! 저 기사는-.” 기사A의 손가락이 낯익은 뒷모습을 가리켰다. 불과 방금 전에 보았던 갈색머리의 기사였다. 아니, 솔직히 겉보기에는 기사인지 아닌지 확실치 않았다. 단지 평민소년이나 시종처럼 보였으나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솜씨가 너무 깔끔했다. ‘ …어쩌면 세작일수도 있겠군.’ 만에 하나이지만, 시종인척 가장한 스파이나 암살자일 가능성도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자신의 눈에 띈 것은 실수한 것이다. 카엘의 붉은색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무슨 저의로 사냥대회에 참가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잡아서 전부 캐낼 작정이었다. 어쨌든 그전에 골드피그를 처리해야 했다. 예상대로 여럿의 기사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대충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다짜고짜 카엘이 검을 뽑아 날렸다. 푸욱! “ 꾸에엑-!” 검은 간단하게 명중했다. 딱히 골드피그가 카엘과 대치하고 있던 상황이 아니라 기습에 가까웠기 때문에 더욱 수월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미간을 정확히 명중시켰으니 죽었을 것이다. 카엘은 곧바로 말을 몰았다. 그리고 그새 갈색머리의 기사가 자신을 슬쩍 바라보는가싶더니 바로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았다. 마치 피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 모습에 카엘의 의혹이 더욱 짙어졌다. 막 뛰려는 갈색머리의 기사를 카엘이 바로 붙잡았다. 하지만 붙잡히는 그 순간 갈색머리의 기사가 카엘이 타고 있는 말의 옆구리를 칼로 찌르는 바람에 순간 놀란 말이 펄쩍 뛰면서 몸부림쳤다. 덕분에 말을 진정시키고 추스르는 사이 갈색머리의 기사는 이미 카엘에게서 도망친 뒤였다. 카엘이 미간 사이를 좁혔다. 순간적으로 화살을 쏘아서라도 잡을까 생각했었지만 왠지 내키지 않아 그만두기로 했다. 다만 세작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거의 확신으로 굳어졌다. “ …추적할까요?” 기사 A가 물었다. 이쪽은 말이다. 아무리 숲이라지만 뒤따른다면 금방 잡을 수 있을 터였다. 카엘은 고개를 저었다. “ 아니. 내가 직접 한다.” 카엘의 백마가 다각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기사A는 멀뚱히 서서 골드피그에 대한 처리를 고민해야했다. ================================ # 30편 # 소제목 : 사냥대회의 레이디. (8) ================================ 딱히 특별한 이유랄 것도 없이 유리엔은 카엘에게서 도망쳤다. 그저 카엘에게 들킨다면 자신의 이 재미가 물 건너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쫓아오니까 도망간다, 는 본능적인 심리가 더 강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정도로 달리던 유리엔이 불연 듯 머릿속을 강타하는 생각에 멈칫했다. ‘ 잠깐…설마 이거…….’ …나 잡아봐라……? 닭살의 절정을 달리는 핑크빛 모드의 연인들만이 구사할 수 있다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에 유리엔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달리던 것을 멈추고 가파른 숨을 고르면서 그녀는 뒤를 바라보았다. “ -쫓아올까?” 작게 중얼거리고는 이내 스스로 비웃음을 흘렸다. 안 오는 게 바보지. 아니면 정체도 모르는 녀석에게 모욕당해도 괜찮아 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부처 같은 마음씨던가. 카라멜이 부처 같은 마음씨를 지녔을 가능성은 길가던 개미가 팔씨름으로 오우거를 이길 확률보다 희박할 테니 기각. 유리엔은 다시 몸을 움직였다. 이왕 도망치게 된 것 잡히고 안 잡히고는 자존심 문제였으니, 쉽게 잡혀줄 마음은 전혀 없다. 그리고 이곳이 평지가 아닌 숲이라는 점은 도망자인 자신에게 상당한 이점인 것이다. 어디 잡아보시지, 하는 마음으로 달리기 시작한 유리엔이었으나…어디서나 변수는 존재하는 법. 예기치 못하게 유리엔은 어느 한 장소에서 장렬하게 주르륵 미끄러졌다. “ -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유리엔은 느닷없이 몸이 푹 꺼지는 느낌을 받으며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지기 시작했다. 구르기 시작한 부분에서 벗겨진 가발로 인해 그녀의 검고 긴 머리카락이 이리저리로 흩어졌다. 얼마나 굴렀는지, 아니, 나중에는 낙하하는 느낌이 들어서 유리엔은 가까스로 발에 힘을 주고 제대로 착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온몸이 욱신거려 좀처럼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공중에 붕 떴다가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부딪히는 느낌을 받으며 유리엔이 가까스로 저 멀리 아득히 날아가려는 정신을 추슬렀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앉아 주변을 둘러본 직후, 유리엔은 입술을 열어 저절로 흘러나오는 매끄러운 비속어를 뱉어냈다. “ …망할.” 현재 지점은 즉-절벽 아래였다. 갈색머리의 기사를 쫓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카엘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정체모를 가발을 발견했다. 길이라던가, 색이라던가 아무래도 자신이 쫓고 있던 자가 쓰고 있었을 확률이 무척 높게 느껴지는 이 가발은 땅바닥으로 마구 내동댕이라도 쳐진 듯 이곳저곳 흙이 잔뜩 묻어있는 상당히 엉망인 상태였다. 카엘은 왜 이 가발이 여기에 떨어져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게 정말로 그자가 쓰고 있었던 가발이라면, 왜 갑자기 벗은 것일까? 자신에게 들키지 않기 위함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건 제법 현명한 선택이었다. 자신은 현재 쫓고 있는 대상에 대헤서 대략적인 옷차림과 체구, 가발이었을 가능성이 높은-아니, 이젠 거의 위장용 가발이라고 확정지어진 머리색 외에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이렇게 가발을 버렸으니, 옷차림만 남모르게 바꿔 버린다면 잡기보다는 놓칠 확률이 더욱 컸다. 설마 이렇게 눈앞에서 놓쳐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표정을 미약하게 찌푸리던 카엘은 곧 골드피그(정확히는 시체)가 있는 장소에서 보았던, 분명 세작의 일행일 기사한명을 떠올렸다. 일단 그자라도 심문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이대로 말을 돌일 것인가 아니면 좀 더 뒤쫓아볼 것인가를 고민하던 때에 카엘의 눈에 무엇인가가 잡혔다. 그것은 절벽이었다. 가발이 떨어져있던 부근에서부터 시작된 급경사가 어느 순간 아래로 뚝 떨어지는 절벽과도 같은 지형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숲이다 보니 암석으로 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갑작스레 떨어진다면 중상은 아니어도 멀쩡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때마침 가발이 있던 장소와, 그 절벽의 위치가 왠지 미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혹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카엘이 절벽으로 가까이 가는 순간-때마침 절벽 아래에서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망할.” -라고 말이다. 어째서인지 결코 낯설지 않은, 오히려 익숙하기까지 한 미성은 결코 남성의 것이 아니었다. 다짜고짜 욕부터 뱉어낸 그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아래로 숙인 카엘은 그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했다. “ ……너?!” …이건 대체. 카엘은 잠깐 동안 이성적인 생각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로 흠칫 굳어버렸다. 절벽 아래에는, 자신이 쫓고 있던 세작 대신 여기저기 잔뜩 먼지투성이가 되어 검은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흩뜨려놓은 소녀가 주저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력이 맛이 간 것이 아니라면 저 소녀의 정체는 유리엔임이 틀림없다. 그러니까…카르나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이자 자신의 정략결혼 상대인 ‘유리시엔 헤자르 드 카르나’라는 말이다. 절벽 아래에 나동그라져있는 저 주인공이. “ 너, 설마-” ‘ 설마 떨어진거냐’라는 말을 삼키며 카엘이 절벽 아래로 훌쩍 내려왔다. 가까이에서 본 유리엔은 절벽 위에서부터 장렬하게 굴러 떨어졌다는 것을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처참한 몰골이었다. 덕분에 그는 잠깐 동안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있었다. “ -뭘 봐?” 결국 그 침묵은, 안도감과 티꺼움이 동시에 담긴 눈빛으로 카엘을 바라보던 유리엔의 말 한마디로 인해 깨졌다. 몇 톤쯤 되는 해머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강렬한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카엘이 띄엄띄엄 말을 내뱉었다. “ 너…도대체 왜 이런 곳에…….” “ 묻지 마. 다쳐.” 온 몸이 쑤셨지만 유리엔은 무리해서 고개를 홱 돌렸다. …붉어진 얼굴을 보여주느니 차라리 이게 나았다. 솔직히 지금 심정을 얘기하자면- 쪽팔려 죽을 것 같다는 표현이 딱 알맞은 정도랄까. 아아, 바보같이 발을 헛디뎌서 카라멜 앞에서 절벽 아래에나 자빠져있는 자신이라니. 그런 유리엔의 반응에 어이없음을 담은 카엘의 눈길이 콕 박혔다. “ …다쳐? 그런데 너 옷이-잠깐, 옷?!” 혹시 부러지거나 크게 다친 곳이 있을까 싶어 이리저리 유리엔을 살피던 카엘이, 처음에는 너무 당황해서 미처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유리엔의 옷차림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러니까, 이 옷-?! “ …흠흠.” 아무래도 이 상황에서까지 마냥 당당하기는 힘든 유리엔이 ‘먼 산 바라보기’스킬 사용을 위해 슬그머니 절벽 건너편 숲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자신의 생각에 아주 쐐기를 박아주는 유리엔의 행동에 카엘은 아주 잠깐이지만 현기증까지 느끼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자신이 세작 따위라 생각하고 쫓았던 상대의 정체가 유리엔이었다니! 그럼, 남장을 하고 말까지 공수해서 몰래 사냥터에 숨어들었다는 말이 아닌가? 카엘은 극도의 어처구니없음과 황당함, 그리고…하마터면 그 뒷모습을 향해 화살을 날렸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가슴이 철렁한 것을 느끼며 유리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머리의 생각보다도 먼저 튀어나가는 말을 막을 수 없었다. “ …이게 무슨 짓이야.” “ 어?” “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고.” 마치 화를 참는 듯, 씹어뱉듯이 말하는 카엘로 인해 당황한 유리엔이 그와 시선을 맞추고 눈만 끔벅끔벅 떴다. ================================ # 31편 # 소제목 : 사냥대회의 레이디. (9) ================================ …화를 참듯이? …왜? 잠시 동안, 둘은 눈빛교환을 하면서 서로의 당황함을 느꼈다. 카엘의 경우, 생각지도 못하게 튀어나간 말과, 밀려오는 화에 자신도 모르게 멈칫해버렸다. 그리고 화가 나는 이유가 ‘걱정’이라는 낯간지러운 감정에 근거해 밀려나왔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더더욱 자신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것은 유리엔 또한 마찬가지로, 카엘이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 그것에 맞서기보다는 순순하게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이 비록 잠깐이지만 스쳐지나갔다. …왜? 다시금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번의 침묵을 깬 것은 굳은 표정이 풀리지 않은 카엘이었다. “ 잘못, 했지?” “ …….”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 고민이 머릿속에서 맴돌며 유리엔을 어지럽게 했다. 이상하다. 어째서일까? 절벽 아래에서, 그 암담한 순간에 마침 나타난 카엘에게 스스로도 놀랄 만큼의 반가움과 안도감을 느껴버린 것부터, 자신은 평소의 자신과는 약간 다른 반응을 하고 있었다. 애써 평소의 자신을 떠올리며, 유리엔이 말을 뱉었다. “ 뭘?” 표정은 침착하게, 당당하게. 그래, 주눅 들 필요 없는 거다. 카라멜이 화를 내면 자신도 맞받아서 화를 낸다. 그게 올바른 공식 아니었어? 유리엔은 그렇게 생각하며 맞받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곧바로 카엘의 약간 높아진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 -뭘 잘못했냐고? 정말 몰라서 물어?” “ 응. 진심으로 몰라서 물어. 내가 한 일이라고는 그냥 잠시 취향대로 논 것뿐이야.” “ 취향대로 놀아? 넌 목숨을 걸고 노는 게 취향인가 봐-?” “ 목숨 건 적 없어. 내가 바보야? 내 몸 하나는 내가 지켜.” “ 오호. 그래? 그렇게 잘나서 골드피그에게 밟힐 뻔하고 이런 데에 자빠져 있는 건가?” “ …윽. 네가 아니었어도 안 밟힐 수 있었어! 그리고, 여기에 이러고 있는 건…그러니까…자빠진 게 아니라 놀이의 재미를 더해줄 해프닝이야! 넌 괜히 끼어든 불청객이고!” “ …그래?” 카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 잘 있는 사람 걷어차고 도망가서 쫓아오게 만드는 것도 네 취향의 놀인가보지?” “ …네가 먼저 날 잡으려고 했잖아?” “ 수상한 인물의 정체를 확인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 그래서 수상한 인물이 아닌 내가 수상한 인물 취급을 피해서 도망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지.” 역시나 어떤 말에도 순순히 지는 법이 없다. 어느새 둘은 평소처럼 말싸움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순간 유리엔은 문득 자신이 추하게 엎어진 포즈로 서 있는 카엘의 말을 받아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 쪽팔려! 세상에, 제3자가 봤으면 어이없는 개그 장면이었을지도. 그녀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몸을 일으키려 힘을 주면서 입을 열었다. “ 아무튼! 난 잘못 한 거 없어. 넌 화낼 이유 없고.” “ …화를 내든 말든 내 마음이지?” “ 어쭈? 그래봤자 내가 그 화를 받아줄 거라는 생각은 버리…악!” 어찌어찌 몸을 일으켜 앉고, 상당히 넝마가 된 옷의 먼지를 털며 다리에 힘을 줘 일어서려는 순간 유리엔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그것에 제가 더 놀라 흠칫한 카엘이 당황하며 물었다. “ 왜 그래? 어디 다쳤어?” “ 으…아무래도……발목.” 급작스레 밀려오는 고통에 미간을 찌푸리며 유리엔이 카엘의 말에 답했다. 내려다보니, 긁힌 상처가 몇 군데 있는 그녀의 발목은 완전히 퉁퉁 부은 상태였다. …이런, 하고 말을 내뱉으며 카엘이 유리엔의 가까이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 부러진 것 같지는 않고…아마 접질린 것 같은데. 아니면 근육을 다쳤거나.” “ 으…….” “ 걸을 수 있겠어?” “ 그-” ‘그걸 말이라고 하냐, 카라멜아’-하고 쏘아주려던 유리엔은 카엘의 붉은 눈동자에 담긴 걱정의 빛을 읽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 # 32편 # 소제목 : 사냥대회의 레이디. (10) ================================ …얘 좀 보게? 순간 고통도 잊고 유리엔이 멀뚱히 눈만 껌벅껌벅 거렸다. 갑자기 이런 진심어린 걱정이라니. 유리엔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카엘이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 많이 아프냐? 역시 못 걷겠지…업힐래?” “ …에?” “ 아니면 부축해줄까? 한 쪽만 접질린 거면 부축으로도 그럭저럭 걸을…….” “ -너.” 유리엔이 카엘의 말을 끊으며 그를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제법 진지했다. “ 분명 절벽에서 떨어진 건 난데, 왜 네가 머리를 다쳤지?” “ …….” “ 아, 혹시 나 잡으러 오는 길에 낙마라도 했다거나?” “ …맞고 싶지?” 카엘의 한쪽 입가가 씰룩거리며 올라갔다. 기껏 걱정해줬더니 맛이 갔냐고 물어오는 유리엔을 ‘이걸 어째 때릴 수도 없고’ 하는 심정으로 바라보던 카엘이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업히기 싫으면 말고.” “ 누가 싫대?” ‘네 등판 따위는 필요 없어’ 하고 되알지게 받아치려던 유리엔은 또다시 신경을 치고 올라오는 발목의 지끈거리는 통증에 바로 말을 바꿨다. 뭐, 한번쯤 튕겨줄까도 생각해봤지만 그랬다가는 뒤도 안돌아보고 버리고 갈 것 같아서 그만두고. 유리엔은 떡하니 내밀어진 카엘의 등짝에 냉큼 업혔다. 인정사정없이 팔로 목을 확 감자 카엘에게서 ‘켁’하고 목 졸리는 소리가 났지만 유리엔은 모른 척 매달렸다. 엉거주춤할 줄 알았던 카엘은 의외로 유리엔을 안정적이고 단단하게 잘 업었다. 딱히 엄청나게 아담하거나 하지 않은 자신을 업고도 가파른 절벽을 가볍게 이것저것 디뎌 올라가는 카엘에게 유리엔은 속으로 ‘호오-’하고 감탄 섞인 탄성을 내뱉었다. 게다가, 이 녀석 등판이…어색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편하다. 유리엔은 몸에서 힘을 빼 완전히 카엘에게 기대면서 중얼거렸다. “ 땀 냄새나.” “ …….” 사실 거짓말이다. ‘내가 땀을 흘렸던가’하고 고민하는 카엘을 내버려두고 유리엔이 피식 웃었다. 땀은 몰라도 먼지 냄새 같은 건 날 줄 알았는데(말 타고 달렸으니까)어떻게 된 건지 비누 향에 가까운 기분 좋은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킁킁대면 변태 갔겠지? “ -말 탈 수 있겠어?” “ 음. 달리지만 않으면.” 카엘이 타고 달려왔던 늘씬한 말을 바라보며 유리엔이 말했다. 그 말에 카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유리엔을 말 안장위에 앉혔다. 흔히 드레스를 입은 레이디가 연인의 에스코트로 말을 타듯,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자세로 앉은 유리엔의 뒤에 카엘이 앉아 고삐를 잡고 말을 몰았다. 다소 천천히, 다각거리며 말이 숲을 가로질렀다. “ 흐음…….” “ 왜?” “ 노는 것 같네.” “ …그러냐?” 선선한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사냥터로 선택 된 숲은 이러고 있자니 제법 평화롭게 느껴졌다. 물론 아득히 들려오는 짐승들의 잡고 잡히는 사냥소리를 무시해야하지만. 어쨌든 잡쳤었던 기분이 어느 정도 좋아진 유리엔이 기분 좋은 미소를 매달고 눈을 감았다. 카엘도 조용히 말이 없었다. 둘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 줄까?” “ -어?”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카엘의 말이 툭 튀어나왔다. 줄까, 라니-뭘? 의아함에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유리엔에게 카엘이 말을 덧붙였다. “ 맹세의 키스.” “ 에…….” “ 사냥대회의 레이디, 말야.” “ 어-아, 그랬지, 참.” 깜박했다는 말투로 유리엔이 대답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잊고 있었으니. 유리엔은 ‘흐-음’하고 생각에 잠겼다. 왜 갑자기 카라멜이 이러는지에 대한 이유는 일단 제쳐두고, ‘사냥대회의 레이디’라는 자리가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재미와 이득에 대해 이리저리 고민해보던 도중, 문득 에델리아가 떠올랐다. 에델리아를 물먹여야한다-라는, 어느 샌가 기억 저편으로 묻혀있던 애초의 계획을 끄집어낸 유리엔이 약간 엉켜서 지저분한 머리카락을 뒤로 빗어 넘기며 말했다. “ 야. 카라멜.” “ 왜, 검둥이.” “ 대회에서 꼭 우승하고 싶어?” “ …뭐, 그다지.” “ 잘됐네, 그럼. 우승자가 레이디를 뽑는 거 맞지?” “ 그래.” “ 그 역할-네 밑의 기사들 중에 그럭저럭 괜찮은 애한테 넘겨줘.” “ -왜?” “ 그 기사가, 내가 원하는 애를 레이디로 뽑아줬으면 하거든.” “ 그거야…….” ‘문제없지’라고 중얼거리듯 카엘이 대답했다.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건가 싶지만, 어련히 알아서 할까라는 생각에 굳이 묻지 않았다. 유리엔은 계획성사의 만족스러움에 속으로 씨익 웃었다. ‘ 어디-네가 평소에 보잘 것 없다고 깔보던 애한테 밀려 봐, 에델리아.’ ================================ # 33편 # 소제목 : 사냥대회의 레이디. (11) ================================ 얼결에 우승자가 되어버린 제론은 결 좋은 남색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황태자는 가끔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저질렀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에서인지, 대뜸 사냥에 성공했다는 증거인 골드피그의 잘린 꼬리를 자신에게 내밀며 반강제로 사냥대회의 우승을 떠넘기는데…설마 레이디를 뽑는 것이 싫어서 그러는가 싶어 정혼자인 유리시엔 황녀도 있는데 그러면 안 된다고 따졌더니 그런 게 아니라며 코웃음 치고는 결국 자신을 우승자로 만들어버렸다. 솔직히 아직도 손에 들고 있는 황금색 꼬리에는 현실감이 없었다. 제론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예법에 따라 한 쪽 무릎을 꿇고 황제에게 골드피그의 꼬리를 바쳤다. 마치 도금을 해 놓은 것 같은 꼬리를 흥미로운 듯 바라보며 황제가 입을 열었다. “ 호오, 이것이 바로 그 흉폭한 골드피그의 꼬리란 말이지?” “ 그렇습니다.” “ 그래, 그 돌연변이 짐승을 직접 보니 어떻던가? 정말 소문대로 거대하고 사납던가?” “ …예…덕분에…힘들었습니다.” 카엘 덕분에 황제 앞에서 팔자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게 된 제론이 속으로 쯧, 하고 혀를 찼다. 어차피 이왕 하는 거짓말, 좀 더 제대로 해볼까. “ …황태자전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잡지 못했을 겁니다.” “ 호오?” 황제의 눈이 찰나의 순간이나마 반짝였고, 귀족들이 술렁거렸다. 황제는 정말이냐는 뜻을 담아 카엘을 쳐다보았고, 카엘은 긍정의 뜻으로 살짝 끄덕였다. 그제야 황제의 표정에 있던 의혹이 어느 정도 가셨다. 어쩐지, 골드피그를 잡은 것 치고는 너무 멀쩡하다 했더니 제 아들의 원조가 있었다는 말이다. 충분히 제가 잡을 수 있었음에도 눈앞의 이 제론이라는 기사에게 도움까지 주면서 기회를 줘버린 카엘의 생각은 알 수 없었지만, 혹시나 유리시엔 황녀가 몸이 안 좋아 대회도중에 먼저 황궁으로 돌아갔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짐작을 하며 몰래 흐뭇해했다. 아무래도 제 아들은 유리시엔 황녀가 아닌 다른 여인에게 맹세의 키스를 하는 것이 싫어 피한 것이리라. 비록 그것은 우유를 집구석에 한 달간 방치하면 썩어서 치즈로 변한다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착각이었지만 황제는 알지 못했다. 대회의 우승자를 향한 의례적인 치하의 말을 들으며 제론은 생각에 잠겼다. 곧 자신에게 주어진 황태자의 명령을 수행해야 할 때다. 제론의 짙은 남색 눈동자가 슬쩍 주변을 흩으며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를 지닌 순한 인상의 15살 된 귀족소녀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찾았다. 비록 바로 옆에 쌍둥이로 추정되는 소녀가 한명 더 있었지만, 제론은 직감적으로 둘을 헷갈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왠지 그랬다. “ -해서, 제론 트아로민경을 이번 사냥대회의 우승자로 인정하겠소. -트아로민 경?” “ 하명하십시오.” 황제의 형식적인 치하의 말이 끝났다. 이제 완전히 대회의 우승자가 된 제론은 레이디를 뽑아야했다. “ 이제, ‘레이디’를 선정해도 좋네.” “ 예.” 대답과 함께 제론은 몸을 일으켰다. 느긋하게 자신들을 둘러보는 제론의 눈에 들기 위해 귀족여인들은 저마다 잽싸게 고친 화장으로 다소곳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제발, 내가 되기를! -그녀들의 눈동자에 자리 잡은 강한 열망이 하나같이 제론을 향했다. 그가 어서 자신과 우연처럼 눈이 마주치기를 바라면서. 제론은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갈색머리의 귀족 소녀가 있는 방향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머리를 풀어헤친 그럭저럭한 미녀가 자신감에 그득 찬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표정이 마치 ‘자, 이 하찮은 것. 주제에 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영광으로 알거라’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는 살짝 기분이 나빠졌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 …이 자리에서.” “ …….” “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여성분이, 레이디가 되실 겁니다.” 제론의 말에 에델리아의 자신감이 한층 짙어졌다. 이 자리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여성? 두 말 할 것도 없이 자신이다. 그녀는 자기가 사냥대회의 레이디가 될 것임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저벅, 저벅. 균형 잡힌 걸음걸이로 한걸음씩 걸을 때마다 제론의 남색 머리카락이 조금씩 바람을 타고 찰랑였다. 단정한 이목구비는 어쩐지 다정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제론이 점점 자신과 가까워질수록 에델리아의 오만한 미소가 짙어졌다. 제론은 속으로나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주변 사람들 모두가 에델리아의 퍼져나가는 자신감을 느꼈고,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있었다. 그 착각들이 되도록 화려하게 부서지기를 바라며, 이젠 거만하게 손등까지 내밀고 키스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에델리아를 제론이 그대로 지나쳤다. “ ……?!” 에델리아의 표정이 의아함을 담고 일그러졌다. 주변의 여인들 또한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걸음을 멈추지 않는 제론을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론의 시선은 단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제 서야 사람들은 제론이 에델리아를 향해 다가가되 한번 그녀에게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 챘다. 당혹감에 찌푸려진 표정으로 에델리아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제론의 걸음이 멈췄다. 눈앞에 마주한 갈색 눈동자가 당황과 의아함을 담고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며 제론이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 ……!!” “ 어머……!” 루네의 오른손 손등이 제론의 손에 이끌려 그의 입술에 닿는 순간, 주변에서 경악과 부러움 섞인 탄성이 흘러나왔다. 제론의 입이 열렸다. “ -드아이스양. 그대가…이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 !!” 갈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졌다. 대체, 지금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거지……? 느닷없는 혼란스러움에 휩싸인 루네가 그대로 멍하게 굳어버렸고, 그런 루네를 대신해서 에델리아가 경악에 가까운 외침을 내뱉었다. “ 말도 안 돼!!” 절대 믿을 수 없다는 부정의 의미가 담긴 눈동자를, 제론은 문득 비웃어주고 싶었다. 아무래도 제 주인인 황태자가 하도 에델리아 공녀를 싫어하다보니 자신까지 그것이 옮았나보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델리아의 외침은 계속되었다. “ 어떻게, 이 나를 두고 저런 하찮은 것을 레이디로 뽑을 수 있는 거지?!” “ …….” “ 감히…감히 너 따위가 나를 무시하다니!!” 에델리아는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채로 소리 질렀다. 자신이 겨우 저런 것에게 무시당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고개를 조아리며 잘못을 빌고, 자신을 숭배해야만 이치에 맞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론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하게 발악하는 에델리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 이…이 무례한-!!” “ -그만.” 따귀라도 올려붙일 기세의 에델리아를 진정시킨 것은 카엘이었다. 어느새 지척으로 다가온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에델리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화, 황태자 전하.” “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 저, 저는 그저…….” “ 폐하의 앞에서 이런 소란을 피우다니- 생각이 있는 겁니까, 공녀?” “ 읏…….” 카엘의 사슬파란 말에 에델리아가 억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분함으로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 하, 하지만 이유가 있습니다. 저 하찮은 것이 감히 분수도 모르고 저를 무시하였습니다!” ================================ # 34편 # 소제목 : 사냥대회의 레이디. (12) ================================ “ …하찮은? 설마, 트아로민경을 지칭하는 말입니까?” “ 그렇습니다! 주제도 모르고 감히 저를 무시하여서……!” “ -무시? 궁금하군요. 대체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트아로민경이 공녀를 무시한 건지.” “ 그건…….”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에델리아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 틈을 비집고, 다소 뾰족하게 날이 선 소녀의 목소리가 사이를 파고들었다. “ -실례지만, 황태자전하.” 멋모르고 보면 순진해 보일 법한 갈색 눈동자를 도도하게 치켜뜨며 루제가 입을 열었다. “ 혹시 증인 신청, 받아주실 수 있나요?” “ ……?!” 갑작스레 나섰지만, 제법 당당한 어조에 에델리아와 카엘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시선이 루제에게로 몰렸다. 그러나 순식간에 쏠린 시선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듯 그녀의 도도한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 루제를 보며, 불과 며칠 전에 있었던 납치미수 사건을 떠올린 카엘의 표정이 약간 오묘해졌다. 왠지 그때랑 느낌이 조금 달라진 듯싶은 것은, 설마 세뇌의 영향인가. 아무튼 가까운 과거에 그런 안 좋은 일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지저분한 감정을 남기지 않고 끝 난데다가 오히려 그 일의 배후가 눈앞에서 뻔뻔하게 나대고 있는 상황에서 딱히 루제를 처벌할 생각이 없어진 카엘은 루제의 말에 대한 응답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무슨! 전하, 저 버러지 같은 것이 증언이랍시고 어떤 헛소리를 지껄일지 모릅…….” “ 시끄럽군, 공녀.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듣고 나서 내가 판단할 문제라는 것을 모르는 건가?” “ ……!” 순식간에 존대에서 하대로 바뀐 카엘의 말투에 에델리아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나마 약간은 공녀라는 직책 때문에 에델리아를 배려해주는 듯하던 모습이 그새 사라져있었다. 그대로 쫄아버린 에델리아를 속으로 마음껏 비웃어대며 루제가 말을 내뱉었다. “ 그럼, 제가 증인으로서 지금 상황의 원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 …….” “ 우선 우승자로 인정받은 트아로민경께서 이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여인은 레이디로 뽑겠다고 선언하셨고, 곧이어 말씀대로 레이디를 뽑았습니다. 헌데 레이디가 뽑힌 직후 어째서인지 불만이 생기신 듯한 공녀께서 갑작스레 트아로민경께 소리를 치셨고, 트아로민경은 그에 대해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공녀께서 더욱 목소리를 높이셨고, 그로 인해 소란이 야기되자 황태자전하께서 나서셨습니다. -여기까지입니다. 이의 있으신 분?” 또박또박,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읊은 루제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거의 모든 이들이 본 것은 루제가 말한 것과 한 치도 다름없었기에, 눈이나 귀가 멀지 않고서야 루제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설 사람은 없었다. 암묵적으로 루제의 말이 전부 사실임을 입증해주는 조용한 좌중의 반응에 만족한 듯 웃음을 지으며 루제가 카엘을 향해 고개를 한번 숙여보였다. ‘제 증언이 부디 도움이 되셨기를’하는 말과 함께 그녀는 다시 루네의 곁으로 물러났다. 카엘의 듣기 좋은 울림을 지닌 중저음이 다시 에델리아를 향했다. “ 들었습니까, 공녀?” 재차 존대로 바뀌었지만, 왠지 그것은 존중이나 배려라기보다는 마치 비꼬는 듯한 느낌이 강했다. 에델리아 또한 그렇게 느꼈는지 순간 그녀의 얼굴이 티 나게 붉어졌다. “ 무, 물론 들었습니다만.” “ 그럼 어디 말씀해주겠습니까? 왜 트아로민경이 공녀를 무시했다고 느낀 건지.” “ …제…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 분명 의도적으로 감히 저를 무시한 겁니다.” “ 트아로민경이 공녀의 말을 무시했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제론.” “ 예.” 자신을 부르자 곧바로 앞으로 나서며 제론이 대답했다. 그리고 카엘이 아무렇지 않게 제론이라는 이름을 익숙히 부른 것에 에델리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는 사이였나……? “ 네게 묻겠다.” “ 하명하십시오.” “ 네가 공녀의 말을 무시하겠다는 것이 사실인가?” “ 아닙니다. 단지 공녀께서 소리치신 말이 순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을 뿐입니다.” 차분히 대답하면서 제론은 속으로 혀를 찼다. 실은 이 소란의 근본적인 원인제공자인 눈앞의 황태자는, 표정은 심각하게 굳힌 주제에 눈동자에는 모순되는 즐거움을 담고 있었다. …즐기냐, 너? 주변에서 구경꾼 역할을 하고 있는 귀족들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한쪽 입 꼬리를 올려 대놓고 비웃으며 사정 봐주지 않고 에델리아를 몰아붙였으리라는 생각을 어째 부정할 수 없었다. “ 그런가? 공녀가 뭐라고 소리쳤는지 궁금하군.” 카엘의 대답에 제론의 눈이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지도 다 듣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 하긴. 못이긴 척 대충 설명해주려는데, 때마침 누군가의 손이 번쩍 들렸다. 마치 발표를 해도 되냐고 묻는 학생처럼 손을 든 루제가 카엘을 향해 ‘재차 실례합니다만’으로 말문을 텄다. “ 제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기억합니다. 원하신다면 재연해드려도 될까요?” “ 흠-그래.” “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막 연기에 들어가는 배우처럼 잠시 숨을 고른 루제가, 제론을 향해 몸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는 표정까지 바꾸어 말을 내뱉었다. “ -말도 안 돼!! 어떻게, 이 나를 두고 저런 하찮은 것을 레이디로 뽑을 수 있는 거지?! 감히…감히 너 따위가 나를 무시하다니!! 이…이 무례한-!!” “ …….” “ …….” ……똑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살짝 눈이 뒤집혀서 주변 생각안하고 발악하는 모습까지 완전히 똑같았다. 특히 제론은 순간 박수갈채를 보낼 뻔했다. “ …어떤가, 제론? 공녀가 했던 말과 똑같은가?” “ 완벽합니다. 연기대상을 수여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제론의 말에 주변이들 중 몇몇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루네는 생각지 못한 루제의 활약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하고 있었다. 다만, 에델리아 혼자 파랗게 질려 갈 뿐이었다. “ 결론 났군. 공녀?” “ 저, 전하.” “ 자신이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여성이라는 자만심에 사로잡혀, 트아로민경에게 다짜고짜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음에 따라 그를 호위기사로 두고 있는 나를 모욕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소란을 피워 황제폐하에게까지 무례를 저지른 그대에 대한 처벌은…….” 잠시 말을 끊은 카엘이 황제를 향해 몸을 돌려 재차 덧붙였다. “ 폐하께서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 -그래서 어떻게 됐어?” 쿠키를 한입 베어 물자 오독거리며 아몬드가 씹혔다. 달달한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유리엔이 린의 말을 재촉했다. “ 그러니까…근신 처벌을 받았죠.” 린이 좌중을 압도하던 황제의 포스를 기억해내며 대답했다. 결국 에델리아의 처벌은 한동안 자택에서 근신하는 것으로 끝났다. 사냥대회가 끝나고 황실로 돌아와 제일 처음 유리엔의 거처로 들어오자마자 눈에 띤 그녀의 몰골(발목은 붕대를 감고 있고 여기저기 자잘한 생채기가 있는)에 순간적으로 거의 기절직전까지 갔던 린은, 유리엔의 닦달에 의해 얼떨결에 입을 열었고, 어느새 이것저것을 재잘재잘 설명하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려서 처벌을 받던 에델리아가 생각났다. 얼마나 부들부들 떨던지,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약간 불쌍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린의 대답에 유리엔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 황태자에 황제까지, 덤으로 같이 계시던 황비전하까지 셋을 삼종세트로 묶어서 욕 먹인 것 치고는 경미하네?” “ 공녀니까요. 하지만 근신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한동안 사교계에서 찌발려있어야 한 대요.” “ 찌발려있어? 린, 너 그 말 누구한테 배운 거야?” “ 루제 아가씨요.” …아가씨? 그보다도, 언제 그런 말까지 배울 정도로 둘이 친해졌나 싶어 의문을 담고 바라보자 린이 수줍게 웃으며 ‘황녀님의 전용 시녀니까 특별히 친하게 지내준대요’라고 대답해 유리엔을 황당하게 만들었다. 유리엔은 설마 린마저 이중인격으로 되어버리진 않겠지, 하는 떨떠름한 생각을 쿠키와 함께 삼켰다. “ …그나저나, 루네에게 맹세의 키스를 한 기사는 어땠어?” “ 트아로민 경이요? 으음-뭐랄까…잘생기고, 단정하고, 부드럽고, 늠름하고…뭐 그 정도예요.” “ …헤에?” 특히 미소가 환상이죠, 하고 린이 덧붙였다. 그렇게 괜찮은 녀석이라고? 유리엔은 분명히 키스를 받은 그 순간부터 완전히 멍 때렸을 루네를 잠시 떠올렸다. ‘ …흐음…….’ 왠지 애지중지하던 여동생이 갑자기 밥상머리에서 ‘언니, 나 남친생겼어’하고 고백한 듯한 기분에 휩싸인 유리엔이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내일 카라멜에게 연락해서 트아로민이라는 기사의 나이를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유리엔이 남은 홍차를 홀짝 비웠다. ================================ # 35편 # 소제목 : [깜짝외전] 동화패러디 #1: 인어공주-上 ================================ -기분전환 슬럼프탈출 깜짝(막장)외전- 동화패러디 #1 : 인어공주. 上 배역소개 인어공주: 유리엔. 왕자: 카엘. 그외 대충 아무나. start. . . . . D-7!! 인어공주는 몹시 들떠있었습니다. 머메이드 왕국의 막내공주인 그녀는 올해로 열여섯 살이 되어, 정식적으로 바다 위 육지로 구경을 나갈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운명의 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상황이었습니다. “ 아니, 별로 들뜨진 않았는데. 육지보다야 바다가 훨씬 더 재밌…….” 시끄러워요! 토 달지 마! 주연이면 주연답게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하란 말이야! …흠흠, 잠깐 흥분했군요. 아무튼 너무 들뜬 나머지 바다가 더 좋다는 헛소리를 내뱉어대는 인어공주는 고개를 들어 그윽한 눈빛으로 태양의 그림자가 비치는 수면을 바라보았습니다. 어서 빨리 아름다운 육지를 보고 싶다는 생각에 휩싸인 인어공주는, 아직 허락된 날짜가 아니었음에도 그만 수면으로 헤엄쳐 올라갔습니다. “ 아, 귀찮은데…그냥 일주일 뒤에 가서 구경하면 되잖아?” 앞서 말했다시피 너무 들떠서 헛소리를 좀 하고 있답니다. 바다 위로 올라간 인어공주는 이내 무척이나 크고 호화로운 배 한척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눈길을 빼앗은 것은 배의 엄청난 크기라든가 호화스러움이 아닌, 그 갑판 위에 서 있는 한 미남자였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어지럽게 치장한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시종일관 무심했습니다. 그리고 홀로 빛났습니다. 인어공주는 그 아름다운 남자에게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 미남자? 어디? 누구? 안 보이는데? 내 눈에는 그저 모서리가 각진 작고 네모난 갈색덩어리의 모습밖에 안 보이네. 일명 카라멜이라고도 하지.” 제발 좀 닥쳐줘요. 너 인어공주야, 인어공주라고. 쟤한테 한눈에 반해야 된다고. 번쩍! 콰르릉. 그 순간,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며 천둥과 벼락이 내리쳤습니다. 거센 파도가 위태롭게 휘몰아치며 배를 흔들었습니다. 커다란 배는 그만 물살에 휩쓸려 여기저기가 부서지면서 침몰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 아싸! 잘한다! 뒤집어! 오-뒤집힌다!” …아예 팝콘 들고 구경하지 그래요? 아무튼, 배가 완전히 뒤집히며 침몰하자 그곳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바다에 풍덩 빠졌습니다. 방금 전까지 인어공주가 눈길을 빼앗겼던 남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어공주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구하기 위해서 빠르게 헤엄쳐갔습니다. “ 싫은데? 내가 왜?” 아악! 가! 가란말이야! 제발 가버려! 너 때문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 그래그래, 가줄게. 뭐 일단 배역이 왕자니까 옷에 보석 같은 거 주렁주렁 매달고 있겠지? 죄다 털어주겠어, 호호호.” 그렇게 말하며 특출한 헤엄솜씨로 순식간에 왕자의 근처로 다가간 인어공주는 눈 깜짝할 새에 그의 옷에 붙어있던 보석을 죄다 털었습니다…가 아니잖아! 아악, 저 망할 인어공주 때문에 이젠 말까지 헛나오네요. 흑흑. 아무튼, 인어공주는 왕자를 성공적으로 구해냈습니다. 파도가 닿지 않는 육지까지 데려가 그를 내려놓은 인어공주가 남자의 잘생긴 얼굴을 빤히 응시했습니다. “ 때릴까? 저번에 발 못 밟아준 것도 아쉬운데 지금 때려줄까?” 오, 제발. 지금 왕자의 얼굴을 찐빵으로 만들어 놓을 생각인가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자중하세요. 어쨌든 그가 창백한 표정으로 숨을 쉬지 못하자 인어공주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인공호흡을…… “ 지금 당장 카라멜을 목 졸라 죽이고 베드엔딩으로 동화 끝내기 싫으면 그 말 취소해.” …하기도 전에 남자가 알아서 숨을 쉬었습니다. 그에게 정체를 들키면 안 되었기에, 그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인어공주는 바다 속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자꾸만 쓰러져있는 남자가 눈에 밟혀 그녀는 차마 그곳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대신의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커다란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그를 관찰했습니다. “ 관음증 걸린 변태였구나? 인어공주 원래 이런 애였어?” …그 순수한 걱정과 사랑의 마음을 관음증으로 멋대로 바꿔버리지 말아줘요……. 각설하고, 때마침 해변에서 나타난 이웃나라 공주가 왕자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며 왕자에게 다가가 그를 깨웠습니다. “ …엥? 에델리아? 쟤 배역이 이웃나라 공주였어?” 악역이니까요. “ 이웃나라 공주가 악역이었던가? 동화책에서는 딱히…….” 그냥 하세요. 그렇게 따지면 댁이 인어공주인건 말이 된다고 생각…… “ 맞고 싶지?” …합니다. 물론 말이 되지요. 완벽한 캐스팅이지요, 암. 자자, 해설이나 계속합시다. 정신을 차린 왕자는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지 이웃나라 공주가 자신을 구해줬다고 착각했습니다. 생명의 은인을 눈앞에 둔 왕자는 이웃나라 공주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바보냐? 바보야 너?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이웃나라 공주가 물에 빠진 널 어떻게 구하니? 지금 바다에 폭풍우 치는 거 안 보이니? 이웃나라 공주가 무슨 수영 국가대표 선수니? 응? 생각을 좀 해봐 에잇 요 무뇌아야. “ 오오. 그렇게 해설 막 해도 돼?” 그야 당연히 안 되죠. 그래도 막 할 거예요. 제대로 해설 할 때마다 자꾸 태클을 걸어대는 짜증나는 누구씨 때문에요. 게다가 주제에 주인공이에요. “ 그렇구나. 힘들었겠네. 그런데 좀 맞자?”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착하고 아름답고 마음씨 곱고 천사 같고 완벽한 인어공주는, 착각에 빠진 왕자를 뒤로하고 머메이드 왕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인어와 인간은 종족이 달랐기 때문에 그녀는 왕자의 앞에 당당히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인어공주는 바다로 돌아왔습니다. to be continue.... ================================ # 36편 # 소제목 : [깜짝외전] 동화패러디 #1: 인어공주-中 ================================ -기분전환 슬럼프탈출 깜짝(막장)외전- 동화패러디 #1 : 인어공주. 中 전편(上)줄거리: 머메이드 왕국의 일곱째 인어공주인 막내 인어공주는 어느날 육지를 구경나갔다가 때마침 폭풍우로 인해 뒤집힌 배에 타고 있던 어느 왕자를 구하게 되고, 이웃나라 공주가 자신을 구했다고 착각하는 왕자를 두고 바다로 돌아오는데..... start. . . . . 바다로 돌아온 인어공주는 그때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체력 빼면 시체인 인어공주의 어울리지 않는 약한 모습에 걱정이 된 그녀의 아빠, 즉 인어왕은 바다에서 가장 유명한 명의를 불러 인어공주를 진찰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밝혀진 그녀의 병명은 그 유명하고도 유명한 ‘상사병’이었습니다. “ -뭐라?! 눈에 넣으면 쬐끔 아플 것도 같지만 안 아픈 척 할 수 있을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사랑하는 내 막내딸이 상사병에 걸려?!” “ 어머나!” “ 그게 정말이여요, 아버지?” 인어왕은 물론, 그의 딸들인 첫째 인어공주와 둘째 인어공주와 셋째 인어공주…(중략)…여섯째 인어공주까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왕은 명의에게 물었습니다. “ 아니 그렇다면, 어찌해야 우리 막내 인어공주가 상사병을 이겨낼 수 있단 말인가?” 명의는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습니다. “ 아무래도, 상사병을 걸리게 한 당사자와 맺어주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 허! 정녕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단 말인가?” “ 그렇습니다.” 왕과 그의 딸들은 당황했습니다. 인어공주가 상사병에 빠진 상대는 육지에 사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맺어질 수 없었습니다. 결국 왕은 독한 결심을 했습니다. 바로, 바다 저 깊은 곳 심해저평원에 서식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마녀를 찾아가 인어공주와 육지의 왕자가 맺어질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를 꼬박 걸려 찾아가자, 마녀는 갈색 눈동자를 번쩍이며 말했습니다. “ 오호호홋! 그거야 아주 쉬운 일이지요! 막내 인어공주님…이 아니라 인어공주에게 인간의 다리를 준다면 육지로 올라갈 수 있을게 아닙니까?” 그러나 쉬운 일이라고 말한 주제에 마녀는 당당히 대가를 요구했습니다. 마녀가 요구한 대가는 무려 인어공주의 아름다운 목소리였습니다. 마녀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조마조마했지만 딸 걱정에 눈이 먼 왕은 자기 목소리도 아니면서 지 맘대로 주겠다고 덜컥 말해버렸습니다. 그렇게 계약이 체결되고 마법의 묘약을 얻어서 돌아가려는 왕에게 마녀가 말했습니다. “ 그 약을 마시고 육지로 올라가서 일주일 이내에 왕자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왕자에게 사랑의 키스를 받는다면 평생도록 그 왕자와 행복하게 살 수 있지만, 반대로 그렇지 못한다면 인어공주는 그대로 물거품이 되어 사라질 것입니다. 호호호!” “ 잠깐, 일주일은 너무 짧은 것 아닌가? 적어도 한 달은 되어야 좀 해볼 만하지!” “ 작가가 그렇게 긴 이야기 쓰기 싫다 네요.” “ 아니, 그냥 ‘한 달 후’ 이 세 글자면 끝나는 거 아닌가? 뭐가 길어?” “ 아무리 막장 외전이라지만 그렇게 성의 없이 쓰면 안 된대요.” “ 거참. 그래봤자 ‘일주일 후’라고 할 거면서.” “ 그야 작가가 알겠죠. 어쨌든 어서 가세요.” 아무튼 어찌어찌해서 인어공주는 목소리를 대가로 얻게 된 마법의 묘약을 들고 육지로 나갔습니다. 아참, 원래는 인어공주가 직접 마녀에게 찾아갔어야 하지 않으냐고 이의를 제기하지는 말아주세요. 솔직히 인어공주가 직접 갔으면 목소리를 대가로 달라는 말에 피식 하고 코웃음 치고 마녀를 반쯤 죽을 때까지 두들겨 팬 다음 강제로 묘약을 가지고 나왔을 게 아닙니까. 그러면 이야기 진행이 안 되니까 기각. 이리하여 왕이 대신 받아온 묘약을 마신 인어공주는 왕자를 구했던 해변에서 그대로 풀썩 쓰러졌습니다. 약기운이 도나 봅니다. 그럼 여기서 잠깐 왕자의 시점으로 가 볼까요. 주인공 시켜준다고 해서 덜컥 수락했더니 첫 등장부터 죽을 위기에 처했었던 왕자는 속으로 열심히 작가를 씹으며 이웃나라 공주와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왕자님과 함께 마시니 이 씁쓸한 차가 너무도 달콤하게 느껴지옵니다.” “ 혀 맛 갔습니까?” “ …….” 로맨틱한 대화를 시도했다가 그대로 발린 이웃나라 공주를 밖으로 내보내고, 왕자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혼란스러운 한숨을 내뱉었습니다. 죽을 번하다 살아난 지 어느덧 이틀. 이웃나라 공주와는 어느덧 국혼까지 얘기가 나오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는 그것이 탐탁지 않았습니다. 이웃나라 공주가 자신을 구했다는 사실에 약간의 의문이 생긴 것입니다. 그는 날카로운 직감으로 자신을 구한 존재가 따로 있을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 언제는 나보고 무뇌아라며?” 그거야 당연히 농담이었죠. 하하. 아무튼 갑자기 기분전환 삼아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했었던 해변을 산책하고 싶어진 왕자는 채비를 마치고 성 밖으로 나왔습니다. “ 어떻게 자기가 죽을 뻔했던 곳에 한가롭게 산책을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이 왕자 살짝 머리가 이상한 거 아냐?” 닥치고 산책 가라면 그냥 가세요. 부부는 닮는다더니 인어공주 같은 말 할래, 너? 어찌됐든 산책을 나온 왕자는 해변에 힘없이 쓰러져 있는 인어공주를 발견했습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인어공주는 놀랍게도 인간의 두 다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인어공주를 보자마자 왕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 -악! 뭐야?! 왜 아무것도 안 입었는데? 원작에서도 원래 이래?!” 음. 동화의 삽화를 보니까 머리카락으로 다 가려져 있긴 했죠. “ 그게 현실에서 가능하다고 보냐?! 얼른 뭐로 좀 가려!” 어차피 이것도 현실이 아니라 소설…네, 알았어요. 뭐라도 입힐 테니까 그 검 좀 내려놓아 주시겠어요? 에, 그러니까, 어디서 났는지 모를 모포를 뒤집어쓴 인어공주를 발견한 왕자는 왠지 모를 이끌림에 그녀를 성 안으로 데려왔습니다. 인어공주의 신비로운 흑발과 이 세상사람 같지 않은 아름다운 외모에 성 안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어쩌다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 인어공주가 정신을 차린 것은 바로 다음날이었습니다. ================================ # 37편 # 소제목 : [깜짝외전] 동화패러디 #1: 인어공주-下 ================================ -기분전환 슬럼프탈출 깜짝(막장)외전- 동화패러디 #1 : 인어공주. 下 지난 줄거리: 육지로 놀러나갔다가 우연찮게 왕자를 구한 인어공주는 바다로 돌아와서 상사병에 걸리고, 그런 인어공주를 위해 인어왕은 마녀에게서 직접 사람의 다리를 가질 수 있는 묘약을 얻어오지만 그 묘약을 마신 후 일주일내에 왕자에게서 키스를 받지 못하면 인어공주는 물거품이 되고 마는데.... start. . . . . 눈을 뜬 인어공주가 가장 처음으로 한 일은, 그녀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막 찾아온 왕자를 향해 상큼한 미소를 날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왕자 또한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에게 답했습니다. “ …….” “ …….”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서로에게 첫눈에 반한 둘은 순조롭게 사랑에 빠져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라고 진행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대로 해피엔드, 깔끔하고 좋지 말입니다. 하지만 둘은 사랑에 빠질 준비가 아니라 싸움을 준비하는 듯 서로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습니다.(알고 보니 둘의 미소는 썩소였던 것입니다) 아, 그런데 원작 인어공주에서는 여기서 어떻게 됐었죠? 기억이 안 나는군요. 이런 낭패가. 정말로 ‘일주일 후’를 써야만 하는 것인가요. 이때 왕자가 입을 열어 인어공주에게 말했습니다. “ 야.” “ …….” “ …….” 잠깐만요, 왕자. 너 그러면 안 되잖아요? 제 생각에는 동화책의 왕자님이 아름다운 인어공주를 ‘야’라고 부른다는 것은 이미 동화이기를 포기했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요, 뭐 사실 이미 이 외전은 작정하고 포기한 것 같지만 그래도 우리 최대한 동화에 가깝게 스토리를 이어가려는 노력이라도 해봐요. 인어공주는 왕자의 부름에 가볍게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녀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이 답답한지 표정을 찌푸렸다가 이내 입모양으로 ‘왜’라고 대답했습니다. 왕자가 말했습니다. “ 이대로 일주일만 지나면 넌 물거품이 되는 건가?” “ …….” 그렇게 말하는 왕자는 왠지 즐거운 듯 보여서 인어공주로 하여금 살인충동이 일게끔 만들었습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말을 못하는 상태의 인어공주는 치밀어 오르는 살인충동을 바로 행동으로 옮겼습…응? 이봐요? 당신 벽에 걸려있는 관상용 레이피어는 왜 뽑아드는 건가요? 잠깐만요, 휘두르지는 말아주세…그렇다고 던집니까?! 저기요 왕자 너는 그렇게 얄밉게 피하지마! 결국 칼부림이 났습니다. 아아, 왜 이렇게 전개되는 겁니까? 망할, 역시 캐스팅을 잘못했어. 그렇게 인어공주는 왕자와 사이좋게 싸움질을 하며 둘째 날을 보냈습니다. 어찌어찌 시간이 흘러 다음날. 악역으로서 완전히 입지를 굳히기로 마음먹은 이웃나라 공주는 인어공주를 티타임에 초대했습니다. 딱히 할 일이 없어 흔쾌히 수락한 인어공주와 함께 차를 마시면서 이웃나라 공주가 말을 꺼냈습니다. “ 당신.” “ …….” “ 대체 정체가 뭐죠?” 그렇게 물어본다고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바보야. 하지만 딱히 대답을 바랐던 것은 아닌지 이웃나라 공주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대체 무슨 속셈으로 왕자님께 접근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치기 전에 알아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좋을 거예요. 난 왕자님의 생명의 은인이고, 곧 결혼할 사이예요. 당신 따위가 끼어들 틈은 없어요.” “ …….” “ 당장 왕자님과 내 앞에서 꺼지세요.” 그러자 인어공주가 불연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리고는 이웃나라 공주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바닥을 마치 손금이라도 봐주듯 잡아 올려 손가락으로 글을 써내려갔습니다. ‘ 닥쳐.’ “ 무, 무슨……!” ‘ 화창한날 곰팡이가 피도록 한번 맞아볼래? 이 무개념과 영혼의 맹약을 맺은 것 같은 아이야.’ “ 아니 지금 뭐라고……!” 촤악-! “ 꺄악!” 인어공주가 써내려간 글의 내용에 당황한 이웃나라 공주가 미처 화를 내기도 전에, 뜨거운 찻물이 그녀의 얼굴로 끼얹어졌습니다. 반투명한 갈색 액체로 얼굴과 드레스자락을 물들인 이웃나라 공주를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본 인어공주가 이내 몸을 돌려 티타임 장소를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마주친 왕자에게 그대로 돌려차기를 날렸…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요? 과연 저래서 일주일 안에 왕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있을 런지. 왕자가 ‘날 때린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라면서 인어공주에게 반할 가능성은 아마 없겠지요. 엄밀히 따지자면 ‘날 죽이려고 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라던가 ‘내게 검은 휘두른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가 맞는 말일 텐데 그럼 왕자 너 암살자를 죄다 사랑할건가요. 설마. 어쨌든 시간은 술술 잘도 흘러, 어느덧 일주일째의 밤. 인어공주가 물거품이 될 것을 염려한 그녀의 언니들이 몰래 인어공주를 찾아왔습니다. 그녀들은 마녀에게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잘라주고 대신 받아온 단검을 인어공주에게 내밀었습니다. “ 그걸로 찌르면 끝이야!” “ 한방에 골로 간대!” “ 파이팅!” 응원의 메시지를 남기고 그녀들은 바다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니까, 이 단검으로 왕자의 심장을 찔러버리면 인어공주는 물거품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시니컬하게 웃은 인어공주는 망설임 없이 왕자의 방으로 가 잠겨있지 않은 문을 활짝 열어젖혔습니다. ‘ 바이바이. 잘 죽어.’ 입모양으로 마지막 인사를 날려준 인어공주는 그대로 왕자의 침대를 향해 단검을 내리꽂았습니다. 그러나 왕자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잠들어 있지 않았던 듯 오히려 단검을 쳐내고 빠르게 반격을 해왔습니다. 챙, 챙! 달빛이 은은하게 퍼지는 아름다운 밤에 날카로운 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청명하게 울렸…이건 동화가 아니잖아! 누가 봐도 이건 동화도 아니고 로맨스도 아니고…그럼 뭐죠? 암살 판타지인가요? 네? 인어공주 넌 또 언제 그렇게 전투력이 올라갔습니까? 왕자와 막상막하로 싸우는 건 대체 뭐하자는 플레이? 그렇게 둘이 열나게 싸워대는 동안 밤은 점점 깊어갔습니다. 어느덧 열두시가 되어 종이치기 시작…이봐요 이거 신데렐라 아니거든요?! 네. 좋아요. 막장이 되어가고 있군요. 이때, 갑자기 등장한 이웃나라 공주가 둘의 살벌한 칼질에 놀라서 허둥대다가 카펫을 밟고 미끄러졌는데 그만 구두의 굽에 카펫이 걸려 주욱 미끄러지면서, 그에 따라 갑작스레 당겨진 카펫 위에 있던 커다란 조각품이 흔들려 옆으로 쓰러지면서 건드린 또 다른 조각품이 함께 도미노처럼, 하필이면 한참 싸우느라 주변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던 왕자와 인어공주를 덮쳐버리는 전개가 이루어졌습니다. 오, 그런데 맙소사! “ …….” “ …….” “ …….” 뎅~뎅~.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묵을 지키는 세 사람 위로 종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네, 축하드립니다. 완벽한 우연 때문이기는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왕자와 인어공주의 입술을 맞닿아있으니까요. 설명하자면 조각품들과 함께 넘어져 뒹굴면서 어쩌다가 우연찮게 왕자와 인어공주의 위로 엎드린 자세가 되어버렸고 그대로 둘의 입술이 겹쳐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원인이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인어공주는 왕자와의 키스에 성공했습니다. 사랑의 키스라고 했었던 것도 같지만 뭐 그냥 넘어갑시다. 정 안되면 츤데레라고 하면 되니까요. “ …뭐, 뭐, 뭐, 뭐, 뭐야 이건?!” “ 그, 그,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멍하니 굳어있던 왕자와 인어공주는 동시에 정신을 차리고 화들짝 서로에게서 떨어졌습니다. 마녀의 조건에서 이긴 인어공주는 목소리를 되찾았습니다. 훗. 이제 둘이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 일만 남은건가요? “ 웃기지마!!” “ 누가?!” 시끄러워요. 주인공이면 주인공답게 시키는 대로 행복하게 살 것이지 어디서 앙탈이야? [ 잠깐!] 이때 느닷없이 거대한 포스를 풍기며 인어왕이 등장했습니다. …아니 왜? [ 내 금쪽같은 딸을 육지의 왕자에게 줄 수는 없다!] 아니, 마녀한테 찾아서 약까지 받아온 게 누군데 이제 와서 큰소립니까? [ 내 맘이다. 아무튼 내 딸을 시집보낼 수는 없으니, 육지의 왕자여 네가 데릴사위로 오거라!] “ 뭐?!” [ 반항은 용납하지 않는다. 가자! 머메이드 왕국으로! 행복의 나라로!] “ 행복의 나라는 무슨 개뿔…자, 잠깐 기다-!” 풍덩. …누가 인어공주 친아빠 아니랄까봐 역시 정상이 아닌듯한 모습을 보여주며 인어왕은 그대로 왕자와 인어공주를 데리고 바다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비록 하는 짓은 저렇지만 명색이 인어왕인지라 그의 권능은 제법 무시무시했습니다. 결국 왕자가 납치(?)당했음에도 육지의 사람들은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왕자는 머메이드 왕국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인어공주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대체 뭡니까, 이 동화? 뭐 길래 이딴 식으로 끝나는 겁니까? 어쨌든 해피엔딩이라 이겁니까? 네. 해피엔딩맞군요. 어찌됐든 왕자와 인어공주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으니까요. -끝(happy end). +보너스. 새드엔딩과 배드엔딩에 관한 간략한 설명. -sad. 결국 물거품이 되어버린 인어공주는 물거품이 되어가면서까지 마지막으로 육지의 왕국에 저주를 걸었고, 그로 인해 결국 왕국은 멸망합니다. the end. -bad. 인어공주는 단검으로 왕자를 찔러 죽이는 것에 성공하고 바다속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단검에 왕자의 피가 스며들면서 저주가 걸리게 되고 그로 인해 머메이드 왕국이 멸망하게 됩니다. the end. ================================ # 38편 # 소제목 : 도망치면 당연히 쫓아갑니다. (1) ================================ 사냥대회가 끝났다. 그것은 즉 황실축제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고, 그때부터 귀족들과 시녀들은 이리저리 분주하게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막 준비를 하던 때보다야 시녀들은 덜 바빴지만, 귀족들은 자신의 인맥을 최대한 넓혀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었기에 이리저리 움직이는 발을 멈출 새가 없었다. 귀족영애들 특유의 화장품과 향수의 강한 향기가 뭉게뭉게 거리는 넓은 홀에서 반들거리는 정장을 차려입은 말쑥한 귀족자제들(혹은 귀족)은 잘 보여야 하는 이성에게 열심히 추파를 던져대는 중이었다. “ 안녕하십니까, 레이디. 전 덴쟈민 포레스트, 남작입니다. 부디 저와 춤이라도 한곡…….” “ 반갑습니다, 레이디. 부디 제 춤 신청을…….” “ 레이디, 저와 춤을…….” “ 아니, 저와 한곡…….” “ 저와…….” 그리고 여기에, 도무지 이 상황이 익숙해지지 않아 오들오들 떨고 있는 가녀린 어린양이 하나. 사냥대회의 레이디로 뽑히면서 일약 스타로 떠오른 루네는 갑작스레 접근해오는 수많은 남자들에 의해 당황에 당황을 거듭하고 있었다. 느끼한 사탕발림으로 말문을 트기 시작하더니 요지는 항상 ‘춤 한곡 땡기자’로 끝나는 이 접근들이 루네로서는 그저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대체, 왜 자신이 레이디로 뽑힌 건지-. 계속되는 루네의 거절에 오만과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있던 귀족 자제들의 표정이 점차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사건이 하나 터져버렸다. “ 꺅!” “ 튕기는 것도 정도껏 해야 귀엽지! 감히 백작가의 자제인 날 거부해?!” 갑작스레 손목이 잡힌 루네가 비명을 터뜨렸다. 상대방은 도브리 백작가의 막내아들로, 사교계에서는 이미 난봉꾼으로 유명한 작자였다. 그는 자신의 반반한 외모와 가문의 힘을 믿고 루네에게 당당히 춤을 신청했다가 그대로 거절당한 것에 화가 나있었다. “ 레이디로 뽑히지 않았다면 이 내가 너 같은 걸 거들떠나 봤을 것 같아?” “ 이, 이것 놔 주세요-.” 남자는 인상을 썼다. 루네의 반응이 마치 자신을 치한취급 하는 것 같아 기분이 더욱 나빠진 그가 뭐라고 더 말하려는 순간, 앙칼진 목소리가 그것을 막았다. “ 야!!” …‘야’? 갑자기 들려온 외마디 호칭에 남자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막 달려온 루제가 양 손을 허리에 얹은 채 고양이 같은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루제는 간만에 옛 친구들을 만나 제법 즐겁게 떠들고 놀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제 쌍둥이 동생의 비명소리가 들렸고, 깜짝 놀라서 한달음에 달려왔더니 웬 느끼한 녀석이 강제로 루네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게 아닌가. 루제의 눈썹이 홱 치켜 올라갔다. “ 뭐, 뭐야. 쌍둥이?” 루제는 갑작스런 자신의 등장에 당황하는 남자에게 코웃음 치며 말했다. “ 보면 몰라? 그리고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싫다는데 왜 강제로 밀어붙여? 변태니, 너?” “ 아, 아니 뭐가 어째?!” 루제의 신랄한 입담에 남자의 얼굴이 당황과 분노로 얼룩졌다. 순식간에 파티홀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홀의 가장자리에서 조용히 와인의 맛을 음미하던 카엘은 소란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 루네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곁에 있던 제론의 등을 떠밀었다. “ 가서 수습하고 와.” “ …왜 하필 접니까?” “ 네가 뽑았잖아, 레이디.” 아니, 시킨 게 누군데?! 어처구니가 없어진 제론은 카엘의 뻔뻔한 얼굴을 쳐다보면서 잠시 반항해볼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그까짓 수습, 하라면 해야지. 제론이 뚜벅거리는 걸음으로 소란의 진원지로 다가갈 때, 루제와 남자의 감정싸움은 더욱 격해지고 있었다. “ 이게 감히 백작가의 자제인 나에게 반말을 지껄이다니!!” “ 니가 백작이니? 니가 백작이야? 나도 귀족가의 자제거든?!” 둘은 거의 자기들만의 세상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들의 지척까지 다가온 제론을 처음 발견한 것은 루네였다. “ 아, 저, 트아로민 경…….” 루네가 주춤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때 사냥대회에서 맹세의 키스를 받을 때에도 생각했었지만, 정말 근사한 남자였다. 딱히 얼굴뿐만이 아니라, 분위기가 그랬다. 어른스럽고 차분하면서도 강인한 느낌을 주는 분위기는 왠지 그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제론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무슨 일입니까?” “ 아, 그러니까…….” 루네는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했다. 짧은 자초지종을 들은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별거 아니었다. 인격이 덜 자란 어린애가 분수에 맞지 않는 배경을 지니고 있는 일은 흔했다. 그런 만큼 이런 소란도 파티에서 어쩌다 한번씩은 일어나곤 했다. 제론은 이젠 거의 무아지경에 빠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싸우느라 서로가 서로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아마 이대로 자신이 루네를 대피시켜도 모를 거다. 그는 속으로 살짝 한숨을 내쉬고는 열심히 싸워대는 두 애송이 사이로 끼어들었다. “ 이봐요.” 말로만 해서는 들리지 않을 것 같아 팔을 뻗어 둘을 떼어놓으며 말했다. 귀족 자제와 루제의 눈이 제론에게로 향했다. 둘의 시선을 받으며 제론이 입을 열었다. “ 시끄럽습니다.” “ …….” “ 싸우려면 둘이 사이좋게 밖에 나가서 싸우세요.” 그렇게 말하는 제론은 얼굴 가득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목소리 또한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 …아, 네.” 얼결에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자, 은근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실은 루네를 레이디로 뽑게 만든 일등공신, 그 주모자인 유리엔은 긴 흑발을 바람에 나부끼며 잘도 놀러 다니고 있었다. 발이 아프다는 이유로 구두를 내팽개치고 편한 슬리퍼를 끌며 그녀는 이곳저곳 기웃대고 있었다. 그런 유리엔과 어쩌다 마주치는 사람들은 그저 지나친 미모에 멍하니 넋을 놓기만 할 뿐 그녀는 제재하지는 않았다. 축제덕분에 풀어진 분위기를 느끼며 유리엔은 정원을 마음껏 거닐었다. 그러나 그런 유리엔의 자유는 얼마가지 않았다. 묻혔다고 생각했던 사건이 살포시 수면위로 떠오름과 동시에, 그것은 그녀의 발을 묶었다. ================================ # 39편 # 소제목 : 엘리아냥 이(가) 김고삼 (으)로 전직했다! ================================ ================================ # 40편 # 소제목 : 도망치면 당연히 쫓아갑니다. (2) ================================ “ …네?” 아침나절부터 불려나온 유리엔은 답지 않은 얼빠진 표정으로 눈앞의 황제, 즉 시아버지를 응시하고 있었다. 방금, 자신의 귀가 제대로 활동을 한 게 맞는 건가? 그런 의문이 들 정도로 충격적인 말을 황제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뱉고 있었다. “ 비상령이다.” 비상령? 왓? 그게 뭔데? 그러나 유리엔은 차마 묻지 못했다. 알아서 황제가 리플레이를 해주었기 때문에. “ 결혼식전까지 외출금지다.” …뭣이 어째?! 유리엔은 정확히 졸도 직전까지 표정이 창백해졌다. 유리엔의 발목을 묶은 사건은, 그녀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사소한 것이었다. 조용히 시작했다가 제대로 뜻을 펼치지도 못하고 조용히 묻힌 그 사건. 이른바 에델리아 주도하의 유리엔 납치 미수 사건! 그러나 아무리 자신의 입장에서는 별것 아니었다 해도, 제3자가 보기에는 충분히 경악할 만할 터였다. 단지 직접적인 피해자였던 유리엔뿐만이 아니라 그녀를 퍼스트레이디로 맞이하려는 왕실까지 싸잡아서 욕을 먹이고 우습게 보는 짓거리였으니까. 물론 당시 개념과 생각이 사이좋게 손잡고 뇌에서 가출을 한 상황이었던 루제는 그저 타오르는 질투심에서 벌인 짓거리였지만 말이다. 유리엔 본인은 아직 어린 소녀의 치기어린 실수였다고 여겨주며 가볍게 넘어갔지만, 하필이면 그 사건이 황제의 귀에 들어갔다. 당연하게도 그는 노발대발 화를 내었고-공식적으로 문제화하지는 않았지만 카엘이 황제에게 불려가 된통 깨졌다. 그리고 유리엔에게 내려진 외출금지령. 그녀는 힘차게 방문을 열어젖혔다. “ 야! 카라멜!!” 과년한 처자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중의 하나, 외간 남정네의 방 무단으로 침입하기를 당당하게 저지르며 유리엔이 외쳤다. 그에 의해 깜찍한(?)별명이 대놓고 불리어진 카엘이 검토하던 서류를 내려놓고 시선을 맞췄다. “ 왜?” “ 너!! …헤에?” 뭔가 장렬하게 외칠 준비를 하던 유리엔이 그대로 멈칫하고, 시선을 카엘의 얼굴로 고정시켰다. 흰 피부위에 선명하게 자리 잡은 생채기는 결코 넘어져서 생긴 게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파악하자마자 그녀는 웃어젖혔다. “ 푸하하하! 제대로 맞았구나, 너!” “ 시끄러워.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 푸후…뭐로 맞았는데? 도자기? 접시?” “ …촛대. 장식용 촛대가 그렇게 맹렬히 날아오는 거, 나 태어나서 처음 봤다.” “ 푸하하!” 진심으로 고소했다. 촛대로 얻어터지는 카엘의 모습을 상상한 유리엔은 아예 바닥을 굴러다녔다. 그와 반대로 카엘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자신이 얻어터진 원흉이 눈앞에서 웃겨죽으려고 하면서 굴러다니는데 짜증이 날 법도 했다. 진짜, 이걸 밟을 수도 없고. “ 아, 너무 웃어서 배 아파.” 결국 유리엔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웃음을 멈췄다. 카엘은 순간 방금 굴러다닐 때 밟아줄걸 하고 진심으로 후회했다. “ 아주 평생 웃도록 입을 귀까지 째주랴?” “ 됐거든. 아, 나 그보다 따질 거 있어서 온 거야.” “ 뭔데?” “ 나, 외출금지령 내려졌거든.” “ 들었어.” “ 결혼식을 올리기 전까지는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어딜 나가더라도 반드시 너랑 같이 다니래. 그래서 말인데…….” “ ?” “ 나랑 가출할래?” “ 뭐?” 얘 뭐래? 카엘은 잠깐이지만 못들을 것을 들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헛소리를 내뱉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유리엔의 얼굴은 진지했다. “ 너랑 산책 간다고 구라치고 튀려고.” “ 그게 대체 뭔…….” 개념을 시장에 내다 팔은 소리야, 라고 말해주려던 카엘은 이내 ‘나 진심이야’를 팍팍 외치는 유리엔의 눈동자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새삼 깨달았다. 얘 헛소리를 진담으로 내뱉는 애였지. 현실적으로 카엘은 고개를 저었다. “ 사양할게.” “ 왜?” “ 왜라니? 넌 몰라도 난 목숨을 담보로 가출해야 돼. 그런데 너 그렇게까지 피하고 싶은 게 결혼식이냐, 외출금지냐?” “ 둘 다.” “ …내가 타협안을 마련해볼 테니까 이왕이면 현실적으로 생각해봐라.” 결혼식이든 외출금지든. 어떻게든 미룰 수도 있고 타협점을 찾아볼 수도 있을 거다. 그러는 도중에 다시 한 번 깨지겠지만 말이다. 이번에는 촛대가 아니라 의자라도 날아오겠다고 생각하던 카엘이 문득 의문을 가졌다. 왜 자신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 그러다가 이유를 찾아서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자신 또한 결혼식이 싫기 때문이라고. “ 흐음…….” 유리엔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카엘의 말에 긍정을 표했다. 하지만 유리엔은 가출계획을 전혀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카엘에게 같이 가자고 한 것은 그냥 떠 본거고, 사실은 처음부터 혼자서 튈 생각이었다. 자유와 재미를 찾아서. 그녀가 가출을 결심한 이유였다. 일주일간 진행되는 황실축제가 막바지에 다다랐다. 애초에 황제가 유리엔에게 외출금지령을 내렸을 때의 결정대로라면 축제가 끝나는 다음날 유리엔와 카엘의 결혼식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너무 성급하다는 이유로 카엘이 협상을 시작했다. 어차피 납치미수사건 처럼 치기어린 질투로 인한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둘의 사이를 귀족들에게 확고하게 각인시키려는 목적이었으니 형식적으로 간단하게 반지교환만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의견을 제시했고, 그것이 먹혀들었다. 유리엔또한 갑자기 성대한 결혼식을 아무런 준비 없이 치른다면 큰 부담이 될 것이라고 옆에서 열심히 내숭을 떤 결과였다. 그리하여 이루어진 반지교환 식. 둘은 어김없이 각자의 얼굴에 철판을 깔고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반지를 교환하는 것에 성공했다. 유리엔은 금으로 된 얇은 테의 정 가운데에 박혀있는 반짝거리는 보석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 …눈치 깠구나?” 카엘은 생각보다 유리엔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것이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어쨌든 그는 유리엔이 기어코 가출을 감행할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반지에는 마법이팩트가 걸려있었다. ================================ # 41편 # 소제목 : 도망치면 당연히 쫓아갑니다. (3) ================================ 반지에 박혀서 영롱한 빛을 뽐내는 것은 보석이 아니라 마나석이었다. 같은 크기와 순도일 때 보석과 비교해 수십 배의 가격 차이를 우습게 넘나든다는 그 마나석. 고작 일주일 만에 이런 마법반지를 구한 카라멜의 능력에 새삼 감탄이 나왔다. 역시 인맥과 돈질이면 뭐든 되는 건가. 반지는 화염계의 공격마법을 쓸 수 있는 이팩트가 걸려있었다. 일회용 스크롤도 아니고, 겉보기에는 그저 장신구처럼 보이는 반지의 정체가 사실은 강력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마법아이템이라니! 과연 가격이 얼마정도나 할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하여간, 제대로 비싼 결혼반지다. 유리엔은 다시 반지를 왼손 약지에 끼워 넣으며 중얼거렸다. “ 뭐…이런 반지를 그냥 덜컥 예물로 줬을 리는 없겠지.” 분명 그에 따른 패널티가 있을 것이다. 그 패널티가 무엇일지 대충 예상이 가기는 하지만, 뭐 상관없겠지. “ 어쨌든, 땡큐!” 차곡차곡 가출준비를 하며 유리엔이 생긋 웃었다. 그녀 혼자뿐인 방, 현재 곁에 없는 상대를 향해 그녀는 감사의 인사를 날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반지는 자신에게 들러붙는 놈팽이들을 처리하는데 상당히 유용하게 쓰일 것 같으니 말이다. 가발이 잘 씌워 졌나 확인하며, 유리엔은 옷매무새를 점검하기위해 거울 앞에 섰다. 평범한 하녀 복에 흔하디흔한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동자. 린을 통해 공수한 옷과, 염색하려다가 머릿결이 상할 것을 염려해 뒤집어쓴 가발은 그녀의 수집품인 렌즈와 함께 어우러져 순식간에 그녀를 평범한 하녀로 보이게 만들었다. 물론 유리엔의 미모가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설사 얼굴을 보더라도 쉽사리 그녀를 유추해내기는 힘들 듯했다. “ 훗. 퍼펙트.” 거울 속의 자신을 향해 칭찬을 한방 날려준 유리엔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당연한 말이지만, 다음날 황실은 왈칵 뒤집혔다. 비록 반지교환뿐이기는 하지만 일단은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는 증표이니 공식적인 의미로 어제는 무려 첫날밤이었다. 그리고 그 첫날밤 신부가 도망쳤다. 카엘은 제 머리통을 노리고 날아오는 의자를 가뿐히 피하며 혀를 찼다. 이 영감이 지금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건가. “ 재차 말씀드리지만 아버지, 이건 제 탓이 아닙니다.” “ 시끄러워! 신부가 도망갔으면 그건 당연히 남편에게 문제가 있다는 말이 아니냐?!” “ 아닙니다. 제 생각에는 충분히 신부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만.” 급소를 노리고 날아드는 흉기들을 잘도 피하며 얄밉게 지껄이는 카엘을 보며 황제의 혈압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마침내 그는 탁자를 뒤엎으며 소리쳤다. “ 당장 쫓아가!!” 그렇게 첫날밤을 소박맞은(?)신랑은 도망친 신부를 잡으러 가야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럴 줄 알았다고 생각하며 카엘이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말이 나온 김에 가야지. 생각이 끝나면 바로 실천에 옮기는 바람직한 성격을 지닌 카엘은 그대로 자신의 집무실에서 짐을 챙겼다. 대충 휴가라 생각하고 다녀와야겠다는 가벼운 마음에 휩싸인 카엘에게 제론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 정말 가십니까?” “ 왕명이잖아.” 글쎄. 자신이 보기에는 충분히 자의로 출발하는 것 같은데 말이다. 제론의 눈이 가늘어졌다. “ 혼자 다녀오시는겁니까?” “ 그러려고. 아, 그런데.” 문득 무언가 생각난 카엘이 제론을 뒤돌아보았다. 반지를 준비하느라 바빠서 깜박 잊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일주일쯤 전 유리엔이 제론의 나이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대답해주기는 했는데 혹시 틀리지는 않았겠지. “ 올해 스물여덟이 맞나, 제론?” “ 맞긴 합니다만…갑자기 그건 왜……?” “ 유리시엔 황녀가 물어 본적이 있어서.” “ 예? 황녀전하께서 말씀입니까?” “ 그래. 보아하니 그 루네라는 드아이스 가문의 둘째딸과 이어주려는 것 같던데.” “ …예?” 제론은 그만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들었다는 듯한 반응에 오히려 카엘이 의아해졌다. “ 무슨 그런 멍청한 표정이야? 보니까 루네는 이미 네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던데.” “ 아니, 하지만…….” “ 하지만?” “ …그녀는 너무 어립니다.” “ 뭐?” “ 루네양과 저는 열세 살이나 차이가 난단 말입니다. 말도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제론의 어조는 제법 단호했다. 이 남자, 생각보다 도덕적이다. 카엘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 너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는데?” “ 그것과 이건 별개입니다. 서로에게 호감이 있다면 오빠동생사이로 지내면 됩니다. 열세 살이라니, 제가 만약 아주 어렸을 때 사고를 쳤으면 지금쯤 그녀만한 딸이 있을 겁니다.” “ 글쎄…….” 카엘은 말끝을 흐렸다. 자신이 보기에는 그렇게 문제인 것 같지 않았다. 루네가 아주 어린것도 아니고, 열다섯이면 귀족가의 여식으로서는 혼인적령기라고 볼 수도 있는데 그깟 나이차가 그렇게 중요한 건가? 하지만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오지랖도 정도껏, 어디까지나 그건 당사자끼리의 문제일 테니까. 다만 생각보다 제론이 상당히 고지식한 덕에 루네가 약간 마음고생을 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막 움직이려는 카엘에게 제론이 말했다. “ 지금 출발하시는 겁니까?” “ 그래야지.” “ 그보다 하루 쉬시고 내일 느긋하게 출발하시죠?” “ 됐어. 어차피 천천히 갈 거니까. 짐도 별로 없고.” 말 그대로였다. 짐은 고작해야 돈과 검, 눈에 띄지 않기 위한 후드 정도였고 카엘은 진심으로 느긋하게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휴가래도, 이건. 제론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한 카엘이 걸음을 내딛었다. 한편 같은 시각, 유리엔은 여유롭게 마을에 도착했다. 마차를 너무 오랜 시간 타서인지 약간 짜부등한 몸을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풀어주며 그녀는 시야를 널리 둘러보았다. “ 호오-.” 외마디 감탄사. 유리엔의 눈동자가 즐거움을 담고 반짝거렸다. “ 수도로구나-.” 거리 곳곳이 활기로 가득찬 상큼발랄 대도시 레듀르. 뮤리엔 제국의 수도였다. ================================ # 42편 # 소제목 : 도망치면 당연히 쫓아갑니다. (4) ================================ 유리엔이 빠져나온 통로는 대부분 시녀나 시종들이 이용하는 구석의 뒷문이었다. 비록 작은 통로지만 엄연히 성의 출입구였기에 경비병 한둘이 보초를 서고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별 의심도 없이 통과시켜준 시녀의 정체가 유리엔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을 터였다. 경비병의 입장에서는 단지 황실축제에서 실수를 하는 바람에 궁에서 쫓겨나게 된 가녀린 시녀의 눈물 섞인 부탁을 들어 준 것뿐이었다. 시녀로 분장한 유리엔의 명연기라는 것은 전혀 짐작도 못한 채 그들은 그녀의 애절한 눈빛과 미인계에 홀라당 넘어가 수도로 곧장 가는 마차를 구해다주기까지 했다. 덕분에 유리엔은 어렵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편하고 쉽게 수도인 레듀르에 당도할 수 있었다. 널따란 길에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빽빽하지만 혼잡하지는 않게 들어선 오밀조밀한 상점과 여관들이 지닌 활기를 보니 레듀르가 유명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제 모국의 수도와 비교해도 썩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이랄까. 사람들을 스치며 거리를 걷는 유리엔에게서 만족스러움이 스쳐갔다. 그녀가 가장먼저 향한 곳은 옷가게였다. 갈아입을 수 있는 다른 옷을 사기 위해서였는데, 유리엔은 여전히 시녀복을 입고 있었는데 때문에 후드를 벗기가 약간은 곤란했다. 자의라면 상관없지만, 타의에 의해 시녀로 취급되는 것은 역시나 불쾌한 일이니까. 아무래도 처음으로 구경나온 타국의 수도이니만큼 이런저런 사고에 휘말리기보다는 나름 평화롭게 돌아다니는 것이 낫겠다고 내린 판단 하에서였다. -딸랑. “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손님?” “ 간편한 평상복을 찾고 있는데…단조롭지만 재질은 좋은 걸로 부탁해요.” 어느 가게이든 문을 열면 공통적으로 울리는 방울소리와 함께, 거의 조건반사에 가까운 가게주인의 반가운 목소리가 유리엔을 향했다. 후드로 감춰진 유리엔에게서 흘러나온 가는 미성에 순간적으로 가게주인이 흥미의 빛을 띠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손님은 어디까지나 손님일 뿐, 지나치게 관심을 가졌다가는 피 보는 수가 있으니 알아서 찌그러져야한다. 유리엔은 가게주인이 재빨리 눈앞에 대령한 옷을 눈대중으로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이기 편한 디자인에 부드러운 재질이 제법 괜찮았다. 평민들이 입은 옷치고는 약간 비싼 값을 지불하고 옷을 받아든 유리엔의 다음 목적지는 당연하게도 여관이었다. 대충 눈에 보이는 곳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그녀는 마침 지나가는 행인1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 ……?” “ 뭣 좀 물어봐도 될까?” “ 네, 그러세요.” 길가다가 수상한사람(?)에게 다짜고짜 붙잡혀서 반말까지 들었음에도 행인1은 예의바르게 미소와 존댓말로 대답했다. 스무 살에 가까워 보이는 처녀였다. 유리엔은 역시 자신의 보는 눈이란, 하고 속으로 자화자찬을 하며 행인1에게 물었다. “ 이 근처에서 가장 유명한 여관이 어디야?” “ 유명한 여관이요?” “ 응. 비싸도 상관없으니까.” “ 아하. 그거라면 저쪽 사거리로 돌아가면 바로 눈에 띄는 여관이 있어요. 이름이 아마…‘거기 지나가는 행인이여 지금당장 이리로 컴온 베이붸’일거예요. 워낙 비싸긴 한데 제일 크고 좋은 여관이에요.” “ 아하. 고마워.” 유리엔은 순순히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비록 여관 이름이 조금 거지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제일 좋다고 하니 가볼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유리엔이 친절한 행인1과 손을 흔들며 헤어지기도 전에 웬 놈팽이들이 갑작스레 행인1을 둘러싸며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당연히 유리엔 또한 덩달아 포위되고 말았다. “ 뭐, 뭐예요?!” 행인 1에게서 가녀린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그런 행인1을 둘러싼 사내들은 길가다 부딪히면 일단 사과부터하고 보아야 할 정도로 험상궂은 얼굴과 우락부락한 덩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 중 한명이 보는 사람의 정신건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느끼한 웃음을 지으며 면상을 들이밀었다. “ 아가씨. 나 모르겠어? 엉?”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유리엔에게서 나왔다. “ 알겠어. 네가 마지막으로 이빨을 닦은 게 적어도 한 달은 더 지났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겠어. 너 혹시 앞으로 입 냄새를 더욱 갈고닦아서 대륙정복을 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는 거니? 응? 그래? 그런 거야?” “ …잉?”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우락부락한 덩치A뿐만 아니라 행인1까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리엔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작 유리엔은 심각했다. 후드로 가려진 그녀의 고운 얼굴은 한껏 찌푸려져 있었고 한 손으로는 코를 막은 상태였다. 그 정도로 고약한 입 냄새였다. 하긴 정말로 심하긴 심하다. 다만 이런 상황에서 그것을 지적할 만한 성격의 사람이 지금까지 없었을 뿐. 유리엔은 벙 찐 상대방을 향해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 역시 그랬군. 그런 원대한 야망을 가지고 있었던 거야. 어쩐지 평범한 입 냄새치고는 너무 살상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어. 대륙정복이라니…아주 야심차네.” “ 지금 무슨-.” “ 하지만 여기서 포기해야겠어. 내 정의의 결혼반지가 네 사악한 야망을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네 입 냄새가 더욱 더 큰 힘을 지니기 전에 여기서 끝장을 내야겠어. 너와 네 입 냄새를 동시에 태워주마. 이 개미뒷다리를 맛있게 먹을 것 같은 야만인아.” “ 아니야!” ‘난 개미뒷다리를 맛있게 먹지 않아!’하고 덩치A가 외쳤지만 유리엔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그녀의 말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 시끄러워. 감히 절륜한 일개미의 목숨을 고작 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 희생시키다니. 여왕개미의 분노를 보여주마.” ‘개미 뒷다리 하나가지고 허기진 배를 채우다니, 절대 무리거든요?! 그리고 여왕개미는 또 왜 분노하는데?!’하고 너무 기가 차 말마저 나오지 않는 덩치A의 눈빛이 외쳤으나 역시나 씹혔다. 유리엔은 어느새 이펙트가 걸린 결혼반지로 파이어 볼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샌 가부터 구석에서 다른 덩치들과 함께 이 상황을 구경중인 행인1은 당황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저 후드를 쓴 사람도 사람이지만 거기에 은근히 말려들고 있는 저 우락부락한 사내는 또 뭐란 말인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상황을 지켜보는 그들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렇게 묘한 대치상태가 지속되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 이봐! 지금 연약한 레이디를 상대로 뭘 하는 짓이지?!” 마치 글로 쓴 듯 전형적인 대사를 읊으며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미청년이었다. 진지한 표정을 하고, 물 흐르는 듯 부드러워 보이는 하늘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남자는 타이밍만 보자면 적절한 때에 등장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대사에는 어폐가 있었다. 애초에 쩔쩔매며 희롱당하고 있었어야할 여인인 행인1은 다른 덩치들과 함께 덩치A와 유리엔을 구경하고 있었고, 유리엔은 현재 후드에 거의 파묻혀있었기 때문에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남자로도 착각 될 수 있었다. 게다가 뭔가를 당하는 입장에 처해있던 쪽은 오히려 덩치A였다. 그런데 웃긴 것은 그 청년이 등장하자마자, 그의 대사에 맞춰서 덩치들이 자세를 잡았다는 사실이었다. 어느새 그들은 유리엔을 내버려두고 행인1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특히 우락부락한 덩치 하나가 청년에게 비아냥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 엉~? 뭐야, 지금 정의의 기사 흉내라도 내겠다는 거야~?” “ …! 여기까진 참아주겠다…당장 레이디에게 손대지 말고 꺼져라!” “ 어쭈? 안 참아주면 어쩔 건데? 손대면 어쩔 건데?” “ 꺄악!” 입가에 비웃음을 걸친 사내가 행인1의 손목을 거칠게 휘어잡자, 그녀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청년의 표정이 굳어지며 이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 으드득…감히, 네놈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너무 전형적이라 지루할 정도의 대사와 함께 청년이 덩치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호리호리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제법 힘이 있는 모양인지 허무할 정도로 덩치들이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마지막 남은 덩치가 신음을 내뱉으며 바닥으로 털푸덕 널브러지자 청년이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는가싶더니 이내 손을 탁탁 털고 행인1에게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 괜찮습니까, 레이디?” “ 아…네, 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천만의 말씀. 이토록 아름다운 레이디께서 곤경에 처해있는데 돕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내가 아니지요.” “ 어머나…….” 청년의 말에 행인1의 뺨이 수줍게 붉어졌다. 역시 외모지상주의의 폐단. 만약 평범하거나 그보다 못생긴 사람이 했다면 바로 살인충동이 격하게 일었을법한 느끼한 말과 눈빛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미남인 청년이 주체가 되니 바로 여심을 뒤흔드는 행동이 되어버렸다. 급진적으로 핑크빛 분위기를 풍겨대는 두 사람을 유리엔은 팔짱을 끼고 떨떠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석연치 않았고 덩치들이 청년에게 맞아 쓰러질 때의 리액션이 심각할 정도로 어색했지만 딱히 상관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해서 유리엔은 반지의 마법을 사용해보지 못한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목적지인 여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이때는 몰랐다. 이 수상한 청년을 머지않아 또 만나게 될 줄은. ================================ # 43편 # 소제목 : 도망치면 당연히 쫓아갑니다. (5) ================================ 한편, 카엘은 정말 느긋하게 레듀르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근심걱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 가벼운 걸음걸이는 마치 휴가 나온 공무원을 떠올리게 했다. 표정 진짜 평온 하구나, 너? 어찌나 여유로운 발걸음인지 만약 유리엔이 옆에 있었다면 바로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싶어 했을 정도였다. 물론, 첫날밤에 도망친 신부를 잡아와야하는 막중한 임무를 지닌 신랑답지 않은 그의 여유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결혼반지. 카엘의 왼손 약지에도 살포시 끼워져 있는 이 결혼반지는 사실 결혼반지를 빙자한 반영구적인 마법아이템임과 동시에, 추적마법 또한 걸려있는 것이었다. 때문에 카엘은 유리엔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전혀 힘들일 필요가 없었다. 물론 그것을 이용해서 유리엔이 카엘을 엿 먹이기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말이다. 가령 반지를 버린다든지, 지나가는 여행자에게 줘버린다던지 하는. 그래서 화염 계 공격마법의 이펙트를 선택한 거였다. 남다른 파괴력을 자랑하는 공격마법을 반지 하나로 날려대는 재미로 인해 반지를 포기하지 않도록. ‘ 그러고 보니, 레듀르의 달 축제가 이 때쯤이던가…….’ 카엘은 뮤리엔의 수도 레듀르를 더욱 유명하게 만드는 달 축제를 떠올렸다. 두 개의 달이 만월이 되는 날의 밤, 두 보름달의 모습을 가장 아름답고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레듀르의 달 축제였다. 항상 똑같지는 않지만 대부분 황실축제가 끝나는 날을 기점으로 달 축제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황실축제에 참가했던 귀족들이 바로 영지로 돌아가지 않고 달 축제를 구경하기 위해 레듀르에 잠깐 머무르는 경우가 잦았다. 간혹 지방에서 일부러 올라오는 경우까지도 있었다. ‘ 타이밍이 좋다고 해야 하나, 나쁘다고 해야 하나?’ 가출과 휴가타이밍으로는 과연 어떨 런지. 제법 고민해볼 만한 문제였다. ‘거기 지나가는 행인이여 지금당장 이리로 컴온 베이붸’여관에 도착한 유리엔은 방을 잡고 옷을 갈아입었다. 얼굴만 가린다면 그럭저럭 평범한 소녀처럼 보이게 된 유리엔은 간단한 요기나 할 겸 식당인 1층으로 가기위해 계단을 내려왔다. “ 하하하! 그래서 내가 그 녀석을 아주…….” “ 자네가 직접 봤어야하는 건데 말일세! 푸하하!” 여러 사람의 말소리가 시끌벅적하게 식당을 매우고 있었다. 그래그래 이런 분위기 아주 좋아, 하고 평가를 내린 유리엔은 순간 이 소란스러움을 깨야할지 그대로 둬야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건 즉 후드를 쓰느냐, 마느냐의 문제. 그러다가 이내 유리엔은 후드를 쓰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뭐, 하루정도는 평화롭게 있는 것도 좋겠지. 그러나 유리엔이 대충 창가에 가까운 자리에 앉아 여관에서 가자 유명한 음식을 막 시켰을 때쯤, 그런 그녀의 결정이 무색하게끔 식당에 정적이 쫘악 내려앉았다. “ …?” 갑자기 뭘까. 식당에 앉은 사람들의 눈은 모두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여관의 입구로 고개를 돌린 유리엔의 표정이 일순 놀라움을 담았다. ‘ 왠 귀족들?’ 귀족도 아니고 귀족‘들’이었다. 한껏 우아한 걸음걸이로 들어온 그들은 마치 한 가족인 듯 서로 비슷비슷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는데, 어디 파티라도 다녀온 건지 잔뜩 꾸민 티가 역력했다. “ 주인장. 여기에 일인 실 두 개와 이인 실 하나, 그리고 육인 실이 하나 있나?” “ 네, 네.” “ 그럼 그걸로 하지.” “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여관주인이 손수 안내를 위해 귀족들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갔다. 아빠귀족인 듯 제법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하던 중년의 남자와 그의 식솔로 보이는 나머지 귀족들, 그리고 그를 따라 호위의 목적으로 보이는 기사들까지 전부 2층으로 사라지자 마침내 1층 식당 여기저기서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 하여간, 매년 겪는 일이지만 도통 적응이 안 돼.” “ 내 말이. 축제를 보러오는 건 좋다지만, 꼭 저렇게 귀족인 티를 내야 되겠어?” “ 후우. 괜히 축제라고 들떠 있다가 저런 귀족이랑 시비라도 휘말리면 황천구경도 순식간이지.” “ 그렇게 되지 않게 조심하라고, 자네!” “ 그건 내가 할 소리지! 하하!” 침체되는가 싶었던 분위기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천성인 듯 시끄럽게 떠드는 이들 덕에 의외의 정보를 접수하게 된 유리엔의 눈동자가 흥미를 담았다. ‘ 호오? 축제?’ 축제는 환영이었다. 이런 상큼 발랄한 수도에서의 축제라니, 얼마나 재미있을까! 파티나 무도회 따위를 싫어할 뿐이지, 편한 차림으로 자유분방하게 즐길 수 있는 이런 서민축제는 예전부터 유리엔의 성격에 딱 맞았다. 모국인 카리나 제국에서도 온갖 축제란 축제는 모두 섭렵하고 다닌 그녀였다. ‘ 정보나 수집하러 나가볼까나.’ 금세 나온 따끈한 요리를 한입 먹으며 유리엔은 거리를 돌아다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노점상을 공략하면 자신이 원하는 정보정도야 쉽게 나올 테니까. 그러나 요리를 대충 다 먹은 유리엔이 막 앉은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을 때, 사단이 일어났다. 휘청. “ 꺄악!” “ !” “ 어, 어머나! 이걸 어째!” 유리엔이 앉아있던 자리의 근처에서 주문한 음식을 들고 걸어오던 종업원이 순간 자세가 무너지며 넘어질 듯 비틀거렸고, 그로인해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뜨거운 요리가 그대로 유리엔을 덮쳤다. 먹음직스러워보였던 하얀 닭죽이 유리엔의 후드에서 뚝뚝 흘러내렸다. “ 괘, 괜찮으세요 손님? 어쩜 좋아!” “ …….” 어쩔 줄 몰라 하는 종업원 뒤로 성공했다는 즐거운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가 얼핏 보였다. 종업원이 넘어지기 직전, 남자가 그녀에게 몰래 다리를 거는 것을 유리엔은 정확히 목격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건만 왜 이런 짓을 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됐어요.” 허리를 굽히며 사과하는 종업을 만류하고 유리엔은 그대로 후드를 벗었다. “ ……!” 술렁. 그리고, 유리엔의 얼굴이 드러남과 동시에 좀 전까지의 시끄러움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른 종류의 술렁거림이 식당에 퍼져나갔다. ================================ # 44편 # 소제목 : 도망치면 당연히 쫓아갑니다. (6) ================================ 그것은 놀라움과 동시에 감탄이었다. 비록 눈동자 색을 감추기 위한 렌즈와 흔한 머리색의 가발을 쓰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유리엔의 미모가 빛을 바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식당안의 모든 사람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멍하니 입이 벌어졌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토록 아름다운 외모를 본적이 있던가? 미의 종족이라는 엘프도 이 소녀의 옆에 선다면 그저 그런 귀가 긴 이 종족에 불과할 터였다. 그 정도로 방금 후드를 벗어재낀 소녀의 미모는 뛰어났다. 유리엔이 식당을 한번 넓게 둘러보자 우연히 그녀와 시선을 마주친 남정네들이 순간적으로 심장에 무리가 온 듯 ‘으윽’하며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그런 그들을, 상대적으로 먼저 넋 나간 상태에서 풀려난 여성들이 한껏 째리며 ‘하여튼 남자들이란’말을 덧붙이며 후려쳤다. 지나친 미모에 정신이 팔린 남자들을 파트너인 여성들이 후려치던 하이킥을 날리던,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며 유리엔이 시선을 한명에게 고정시켰다. 종업원에게 발을 건 남자A. 그 남자A를 바라보는 유리엔의 입가에 보는 사람이 다 아찔할 정도로 눈부신 미소가 맺혔다. 넌 뒤졌어. 그런 뜻이었다. 그러나 그 깊은 의미를 알 길 없는 다른 이들은 거센 질투의 불길로 타올랐다. “ 아, 아니 저자식이 감히 여신님의 미소를?!” “ 주제에 감히 여신님의 미소를 받다니!” “ 죽여 버려!” 어느새 유리엔은 여신님이 되어있었다. 잘만하면 종교까지도 그 자리에서 만들어질 것 같은 분위기에서 유리엔은 남자A에게 말했다. “ 야.” “ 예, 예?” “ 죽고 싶어?” “ 네?” “ 뻗고 싶어?” “ 네?” “ 그만 살고 싶어?” “ 네?” “ 인생 끝내고 싶어?” “ 네?” “ 삶을 마감하고 싶어?” “ 네?” “ 어디서 감히 발을 걸어?” “ 아.” 속사포처럼 이어지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반문하던 남자A는 유리엔의 마지막 말에 찔리는 것이 있는지 움찔했다. 남자의 얼굴이 당황으로 얼룩지는 것을 보며 유리엔이 한발자국 가까이 다가갔다. 유리엔이 자신에게로 가까이 오자 앞으로 다가올 운명은 생각지도 못한 채 남자A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 아니! 저게 어디서 수줍게 얼굴을 붉히고 지랄이야?!” “ 여신님의 신성한 시력이 훼손되게 생겼어!” “ 밟아 버려!” 관중들에게서 격한 반응이 뿜어져 나왔다. 이도저도 못하고 쩔쩔대는 남자A를 보며 유리엔이 입을 열었다. “ 옛 성언이 남긴 말 중에 이런 게 있어.” “ ……?” “ 음식을 가지고 장난치면-.” “ …….” “ 그 음식으로 맞는다.” “ …헐.” “ 명언이지.” 어디가요?! 아니 그보다 그 성인이 대체 누군데요?! 차마 그렇게 반박하지는 못하고, 남자A는 입을 다물었다. 왠지 본능적으로 무시무시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만 같았다. 유리엔이 말을 이었다. “ 명언은 따르라고 있는 거지, 안 그래?” “ 안 그렇습니다!” “ 난 그래.” “ 네? 헉!” 찰싹! 아니나 다를까, 남자A는 순간적으로 반짝 하고 눈앞에 노란색별이 스쳐지나가는 환각을 보았다. ‘찰싹’하는 명쾌한 효과음을 내며 자신의 뺨을 치고 지나간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순간 남자A의 표정이 충격으로 굳어졌다. 남자의 뺨을 올려붙인 것은 그가 예상했던 유리엔의 섬섬옥수가 아니었다. 바로 흰색 죽이 덕지덕지 묻은 후드의 소매였던 것이다. 그는 멍하니 자신의 뺨에 엉겨 붙은 죽의 잔재를 음미하며 패닉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봐주지 않고 한 번 더 찰싹. 이번엔 반대편 뺨을 죽 범벅인 후드소매로 후려쳤다. 찰 지게 달라붙는 맛이 있었다. “ …….” “ …….” 방금 전까지 ‘타도 남자A’를 외치던 관중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들의 눈은 부릅떠져있었다. 툭 치면 쓰러질 것만 같은 가녀린 여신님이 남자A에게 날린 닭죽 싸다구를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것도 웃으면서 때리지 않았는가. 찰싹 하는 느낌이 아주 제대로야 하는 표정이지 않았는가. 그들은 여전히 청순가련 세계최고미모를 지닌 채 살포시 미소 짓고 있는 여신님을 바라보며 혹여 자신들이 환각을 본건 아닐까 진지한 고민에 들어갔다. 그러나 남자A의 최후는 고작 닭죽 싸다구로 끝이 아니었다. “ 어머. 아깝게 음식을 흘렸네?” 유리엔이 중얼거리듯이, 그러나 주변에서 충분히 들을 수 있을만한 큰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바닥에 떨어져있는 죽들과 엎어진 죽 그릇으로 향해있었다. “ 자, 잠깐.” 유리엔이 뭘 하려는지 깨달은 남자A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는 필사적인 거부의 몸짓으로 팔을 내저었지만 이미 숟가락을 이용해 그릇에 죽을 주워 담은 유리엔이 더없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 자. 흘렸으면 다시 먹어야지?” 살려줘! 남자A는 눈빛으로 그렇게 외쳤다. 그러나 주변 이들은 모두 그의 SOS를 외면했다. 그는 아무리 저항해도 먹히지 않는 믿을 수 없는 유리엔의 괴력에 의해 점점 강제로 벌어지는 입과, 그런 입으로 슬슬 다가오는 죽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아무리 친한 친구의 부탁이라도 눈앞의 이 사람에게 죽을 끼얹지 않으리. 그러나 이미 늦었다. 이 소설은 SF가 아니다. 엑스트라 주제에 시간 따위 되돌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바이바이.” 지켜보던 관중들 중 누군가가 말했다. 차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광경에 어느 여인네는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종업원은 자신의 실수로 발을 헛디뎌 넘어진 게 아니라는 것을 진심으로 감사했다. “ 끄아아아아아악-!!” 처절하다 못해 심금을 울리는 남자A의 비명이 널리널리 퍼져나갔다. 여신님께 개기지 말자. 그들은 암묵적으로 서로 동의했다. 찰랑거리며 어깨를 스치는 푸른색 머리카락과, 좀 더 짙은 파란색의 눈동자를 지닌 청년은 지나가다 다들 한 번씩은 돌아볼 만한 미남이었다. 반듯한 콧대와 깨끗한 피부는 아직 왕자님과의 로맨스를 꿈꾸는 소녀들에게 충분히 어필했고, 웃을 때 접히는 눈가는 그녀들의 수줍은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의 이름은 노바카사. 타오르는 청춘의 스무 살, 그는 이름 때문인지 못 말릴 바람기를 자랑하며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여인들을 만나고 다녔고, 그로인해 얼굴 좀 예쁘고 주변에 이름 좀 알려졌다 싶은 아가씨들은 모조리 그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밤마다 그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짓는 여인들이 한 트럭은 된다는 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외모와 작업 실력을 찰떡같이 믿고 있었다. 실제로 그가 마음먹고 들이대서 넘어오지 않은 여자가 없었으니 그런 자신감이 생길만도 했다. 게다가 그는 마음에 드는 여성을 꼬시기 위해서라면 삼류 건달을 돈으로 매수하는 짓마저 거리낌 없이 행하는 성격이었다. 더욱 악취미인 것은 그는 꼭 자신에게 무관심하거나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여성만 끈질기게 유혹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결국 그 여인이 자신에게 홀딱 빠지면 이젠 볼 일없다는 듯이 바로 뒤돌아서는 것이다. 레듀르 내에서 그런 노바카사의 소문은 무성했고 그에 따른 안티들도 무척 많았지만, 우스운것은 그의 바람기를 대놓고 욕하던 여자들도 막상 노바카사가 유혹을 하면 홀딱 넘어가고 만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들은 항상 ‘나만은 다르겠지’하는 심리에 넘어가고 말았다. 결국 레듀르 전설의 카사노바로 자리 잡은 노바카사. 그는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작업을 걸 여인을 물색하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들어간 어느 식당에서 ‘노바카사 따위가 아무리 꼬셔도 난 절대 안 넘어가’라는 당돌한(어디까지나 그의 입장에서)말을 내뱉는 여성을 발견한 노바카사는 곧바로 그녀를 그날의 작업 대상으로 삼고 바로 물밑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작은 이변이 발생했다. 전형적인 패턴 ‘위기에 처한 여인을 구해주는 정의의 기사’버전으로 작업을 거는데, 자신의 작업 대상 옆에 있던 후드를 뒤집어쓴 수상한 사람이 한명 눈에 띈 것이다. 인맥으로 매수했던 건달들의 말을 들어보니 목소리로 추정하건데 여성일거라고 했다. 그는 문득 그 후드를 쓴 사람에게 흥미가 일었다. 해서 그 후드를 쓴 이가 ‘거기 지나가는…(중략)…베이붸’여관에 머무른다는 정보를(자신이 꼬신 행인1을 통해)입수하고 마침 그곳에서 밥을 먹으려는 예정이 있던 제 절친 에게 꼼수를 부려 그 사람이 후드를 벗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후드가 벗겨지며 드러난 얼굴이 어느 정도 미인이기만 한다면 노바카사는 당장 작업을 걸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부탁한 일이 행해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소문이 쫘악 퍼졌다. 세상에 다시없을 엄청난 미인이라고. ‘빙고!’를 외친 노바카사는 스피드하게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더없는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신의 절친을 이해하지 못했다. ================================ # 45편 # 소제목 : 도망치면 당연히 쫓아갑니다. (7) ================================ “ 이봐~거기 이쁜 아가씨.” 건들거리며 다가오는 서넛의 덩치들을 유리엔은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받자 막상 외모에 넋이 빠져버리는 덩치들을 유심히 쳐다보던 유리엔이 가운데에 있는 덩치를 알아보고는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아! 넌 입 냄새!” “ 아, 아냐! 내 이름은 입 냄새가 아니라 바로-.” “ 됐거든. 안 궁금하니까 말하지 마.” 쿠궁. 덩치는 좌절에 빠졌다. 구석에 처박혀서 ‘그래 어차피 난 엑스트라’니까 하며 왕따 포즈로 우울모드에 들어가는 덩치를 잠깐 동안 황당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그 옆의 다른 덩치들은, 이내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며 원래의 목적에 집중했다. 그들은 나름 위협적으로 보이려는 듯 얼굴근육을 씰룩거리며 유리엔을 에워쌌다. “ 예쁜 아가씨가 겁 없이 혼자 돌아다니면 쓰나~.” “ 오빠들이랑 어디 으슥한데 가서 얘기나 할까? 앙?” 뒷골목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건달틱한 말을 내뱉는 덩치들을 향해, 유리엔은 성모마리아마냥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에 뭔가 본능적인 위험을 느낀 그들이 순간적으로 흠칫거렸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상황에서 왜 이 여자가 갑자기 웃는가 하는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이에 덩치들은 뭔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의아함을 담아 유리엔을 쳐다보았다. 유리엔은 그런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잠자코 왼손을 들어올렸다. 약지에 끼워진 얇은 테의 반지가 유독 가운데에 박힌 붉은 원석을 돋보이게 하며 빛나고 있었다. 가자, 정의의 결혼반지. 네가 출동할 때가 왔구나. 유리엔은 여전히 입가에 머무르는 자비로운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말했다. “ 나 사실 마법사야.” “ …엥?” 멀뚱히 서있던 덩치들은 갑작스런 유리엔의 말에 더없이 황당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 아가씨가 지금 뭐래? 하는 얼굴로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유리엔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 안 믿어?” “ 나 참, 아가씨. 말이 되는 얘기를 해야지. 그러면 우리가 바로 넙죽 엎드리면서 ‘아이고, 마법사님, 못알아뵈서 죄송합니다’하고 빌 줄 알았어? 응?” “ 그래? 그런데 너희 장님은 아니지?” “ 그런 당연한 걸 왜-” “ 자, 눈감지 말고 잘 보렴.” 반지가 끼워진 유리엔의 왼손이 벽을 향했다. 처음 사용하는 것이니만큼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몰랐고, 완급을 조절할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하니 일단은 사상자를 내지 않기 위해 무난한 담벼락을 선택한 것이다. 유리엔이 씨익 웃으며 시동어를 외쳤다. “ 파이어볼(fire-ball)!” 화르르륵! 콰앙! “ !!” “ ?!” 눈 깜짝할 새 만들어진 사람 머리통만한 불덩이가 엄청난 굉음을 내며 벽에 충돌했다. 거의 전체가 검게 그을리고 미세하게 금까지 간 벽의 모습을 바라보는 덩치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주위로 퍼져나가는 연기와 먼지사이로 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서있는 유리엔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진짜 마법사였어?! 그들의 입이 파리가 들어갈 만큼 떡 벌어짐과 동시에 안색이 시체마냥 창백해졌다. “ 맞지? 나 마법사야. 정말 너희말대로 어디 으슥한데 가서 얘기나 할까?” “ 아, 아니요! 아니요! 죄송했습니다! 살려주세요!” 그들은 유리엔의 말에 정색을 했다. 말이 되는 거짓말을 치라며 비웃던 것은 언제고 덩치들은 0.1초만에 하나같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 빌기태세에 들어갔다. 묻기만 한다면 ‘사실 마법사님께 껄떡댄 건 노바카사가 시켜서 한 겁니다’하고 줄줄이 불 마음가짐까지 먹은 상태였다. 살려만 주신다면 뭐든 할게요, 라는 의지를 온몸으로 표출하는 덩치들을 바라보며 이것들을 어떻게 요리할까 고민하던 유리엔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손가락을 탁 튕겼다. 써먹을 데가 있잖아? “ 너희들.” “ 네, 네!” “ 조금 있으면 축제 열리는 거 알지?” “ 아, 예!” “ 그 축제에 관한 정보는 사소한 것 하나도 빼지 말고 전부 가져와. 기한은 내일 아침까지, 내가 묶고 있는 여관으로.” “ 알겠습니다!” “ 도망치면 그대로 황천 가는 거 알지?” “ 아, 압니다!” “ 그럼 가봐. 잘 알아오면 살려줄게.” “ 가, 감사합니다, 마법사님!” 엎드린 채로 벌벌 떨며 굽신거리던 그들이 ‘가봐’라는 유리엔의 한마디에 번개같이 일어섰다. 유리엔은 앞 다투어 달려 나가는 덩치들을 향해 수고하라는 의미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싸. 노동력 겟. 유리엔은 뜻하지 않게 부려먹기 쉬운 하인 세명을 얻었다. 한편, 이 상황을 멀찍이 숨어서 다 지켜보고 있던 노바카사. 그의 눈동자는 반쯤 풀려있었다. “ 세상에…….” 그는 떨리는 목소리를 추슬렀다. “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마법사였다니……!” 그 옆에서 함께 상황을 구경한 그의 절친, 남자A는 그나마 자신이 저 무지막지한 파이어볼에 맞아 숯댕이가 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비록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닭죽 형벌을 당했다지만). 노바카사의 말이 이어졌다. “ 역시 최고야!” “ …엉?” “ 원래 아름다운 장미에는 가시가 있는 법이지!” “ 미친 거 아냐? 찔리면 즉사거든?” “ 하하, 기다려요, 장미! 내 곧 그대를 꺾으러 갈 터이니!” “ 저기, 노바카사. 우리 오늘부로 친구 그만두지 않을래?” 남자A는 친구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며 진심으로 제안했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노바카사에게는 제 친구의 진심어린 말이 두뇌까지 전달될 정도의 제정신이 남아있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는 연신 자신감이 넘치는 눈빛으로 ‘오, 아름다운 그대여! 내 반드시 그대를 나의 매력에 퐁당 빠지게 하고 말겠소!’ 따위의 만약 생각이 제대로 박혀있다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이나 마구 지껄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한동안 멀리하는 게 좋겠다고, 남자A는 냉정하게 판단내렸다. ================================ # 46편 # 소제목 : 도망치면 당연히 쫓아갑니다. (8) ================================ 노바카사는 작업을 향해 열정과 투지를 불태우며 몰래 유리엔의 뒤를 밟았다. 태평한 얼굴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과일꼬지를 사먹거나 하는 유리엔에게 뭇사람들의 시선을 집중되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노바카사는 그런 유리엔의 무덤덤한 표정에 더욱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 이건 운명이 분명하오. 당신이라면 나의 진정한 연인이 될 자격이 충분하니 어서 나의 품에 안기시오, 베이비.’ 담벼락 같은 것에 몸을 숨겨 몰래 뒤를 밟으며 가끔씩 흐흐흐 웃기까지 하는 노바카사의 모습은 누가 보기에도 진정 변태스러웠다. 그의 이런 변태틱한 스토커짓거리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여인들의 마음을 취해온 경력과 눈치로 봐서, 그는 최대한 상대가 운명적으로 느낄 만한 상황과 때가 어련히 존재함을 알고 있었다. 물론 위기의 상황에 처했을 때 정의의 용사마냥 짜잔 하고 나타나서 구해주는 것이 가장 호감을 얻기 쉬운 방법이기는 했지만, 유리엔은 쉽사리 위기해 처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니(우선 마법을 사용하기도 하고)다른 방법으로 접근을 해야 했다. 때마침 유리엔이 길거리에서 파는 꽃에 시선이 붙잡혔다. 만개한 꽃들은 저마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소녀의 감수성을 마구 자극하고 있었다. 좋아. 바로 이때다. 가자, 노바카사! 그는 최대한 기척을 죽여 유리엔의 근처로 다가갔다. 그녀는 여전히 꽃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던 우선 겉보기에는 청초한 미소녀가 꽃의 아름다움에 눈을 떼지 못하는 상황처럼 보였다. 어느새 그는 유리엔의 바로 옆까지 다가와 섰다. 가까이에서 본 유리엔의 미모에 저절로 넋이 빠지려는 자신을 제어하며 노바카사가 입을 열었다. “ 아름답군요.” “ …….” 뜬금없는 내용의 말과 낯선 목소리에 유리엔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노바카사는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자신의 최대 매력 포인트라고 생각하는 살인미소를 날렸다. 하늘색 눈동자가 가늘게 접히며 나름 매력적인 눈웃음을 만들어냈다. “ 누구든 활짝 핀 꽃의 아름다움 앞에서는 말을 잃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노바카사는 끝말을 흘리며 유리엔과 눈동자를 마주했다. 밤하늘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깊은 눈동자에 그의 모습이 비쳤다. “ 그대의 아름다움 앞에서는 제아무리 만개한 꽃들이라 하여도 고개를 숙여야 할 듯하군요. 레이디, 부디 그대의 이름을 알 수 있는 영광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말을 마치고 노바카사는 그윽한 눈빛으로 유리엔을 응시했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잘난 자신의 외모와 부드러운 목소리를 거부한 여자는 이제껏 없었다. 노바카사는 유리엔이 틀림없이 자신에게 호감을 보일 것임을 확신했다. “ …….” “ …….” 정적이 오갔다. 노바카사는 속으로 유리엔이 자신의 출중한 외모에 넋을 빼앗겼거나 부끄러워하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실제로 유리엔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상태였다. 유리엔은 별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꽃이 진열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생 깐 것이다. 노바카사는 대놓고 무시당하고도 잠시 동안 착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자신의 작업이 무참히 씹혔다는 현재 상황을 받아들이기에는 그의 근거 없는 자신감의 두께가 너무도 두터웠다. 유리엔은 잠시 동안 이리저리 꽃들의 종류를 둘러보더니 흰색에 가까운 꽃을 한 송이 사들었다. 그리고는 노바카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노바카사는 유리엔이 손에 한 송이의 꽃을 들고 자신을 바라보자 수줍은 마음을 꽃으로 표현하려나보다 하고 지레짐작했다. 그와 동시에 역시 자신의 외모가 먹혔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유리엔이 그 꽃을 노바카사의 귀 위쪽에 살포시 꽂아주는 순간 쨍 하고 금이 갔다. 그는 찰랑이는 하늘색 머리카락을 배경삼아 화사한 흰색의 꽃을 왼쪽 귀에 꽂고 있었다. 노바카사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 저…레이디, 이것은 대체 무슨 의미의-.” “ 잘 어울리네.” 노바카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리엔이 말을 던졌다. 그녀의 입가가 위로 향하는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 정신병자는 정신병자처럼 하고 다녀야 모르는 사람들이 안 헷갈리지. 앞으로는 꼭 그러고 다녀?”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아름다운 목소리가 노바카사에게 속삭였다. 정신병자. 미친녀석. 돌아이. 머리에 꽃 꽂은 사람. 그게 너야. 쇼크에 의해 돌처럼 굳어버린 노바카사가 충격에서 벗어나 유리엔의 말을 머릿속으로 인지하기 까지는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다. 느끼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의 얼굴이 당황으로 미세하게 떨렸다. “ 흐, 흠흠. 레이디?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 “ 너 나한테 작업거니?” “ 네, 네?” 직설적인 유리엔의 말에 노바카사가 순간 당황했다. 말을 더듬는 노바카사를 멀뚱히 바라보던 유리엔이 갑자기 떠오르는 낯익음에 ‘아’하고 내뱉었다. “ 넌 그때 걔?” 행인1과 함께 웬 덩치들의 추파에 휘말렸을 때, 그때 웬 정의의 용사마냥 나타나 어설프게 건달을 때려눞히던 파란머리의 청년의 모습이 문득 기억났다. 그땐 쟤 뭐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게 너구나? 유리엔이 자신을 알아보는 이유를 짐작한 노바카사가 빠르게 표정을 수습하며 말했다. “ 하하. 기억해주신다니 영광입니다, 아름다운 레이디. 그때는 경황이 없어 묻지 못했는데 혹시 다치신 곳은 없는지…….” “ 그때 구해준 애랑 잘되고 있어?” “ 네?” “ 그때 너랑 뜨거운 눈빛을 주고받았던 행인1과는 잘 되가?” “ 아, 그건-.” 그는 예상치 못한 방해요소에 멈칫했다. 분명 그때는 그 여인에게 환심을 사느라고 후드를 쓰고 있던 유리엔은 거들떠도 안 봤었다. 유리엔은 없는 사람 취급하고 그 여인과 둘이 핑크빛 분위기를 만들었었으니. ‘ 그야 이렇게 예쁠 줄 몰랐으니까.’ 이토록 눈이 빠지게 아름다운 외모일 줄 알았더라면 그때 바로 작업에 들어갔을 거다. 노바카사는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속으로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입을 열었다. 그 여인과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는 것을 납득시켜야 할 텐데. “ 그때의 그 여인과는…잘 되고 말고 할 사이가 아닙니다. 그저 우연히 구해주게 되었을 뿐, 비록 그녀는 제게 연정을 품고 있는 것 같으나 저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레이디에게 심장이 격하게 뛰고 있군요. 아무래도 저는 그대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 같습니다.” 말을 끝내며 그는 속으로 제법 성공적인 멘트였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말을 들은 유리엔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자 그는 속으로 나이스를 외치며 누가봐도 진심이구나 싶을 정도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내게 완전히 넘어올 일만 남았어, 베이비. 그러나 유리엔의 표정이 변한 것은 노바카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웃겨서. 유리엔이 보기에 귀에 꽃을 꽂은 상태로 진지한 눈빛을 날리는 노바카사의 모습은 제법 개그였다. 게다가 그녀는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남자들을 처음 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대개 자신의 외모나 배경에 자신이 있는 타입이었고, 따라서 자신이 거절당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유리엔은 어렵지 않게 노바카사가 엄청난 바람둥이라는 것과, 제가 먼저 꼬신 행인1을 아무렇지 않게 버릴 거라는 사실을 짐작했다. ‘ 악질이네.’ 그녀는 여자의 직감으로 지금껏 노바카사에 의해 눈물을 흘린 여성들이 수도 없이 많음을 알았다. 분명 그때 건달들과의 상황도 짜고 친 연극이었을 거다. 이런 녀석은 정신을 차릴 때까지 밟아줘야 한다. 자기가 지금껏 아무렇지 않게 상처를 주고 장난감처럼 가볍게 생각한 여자들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 야.” “ 부르셨습니까, 아름다운 레이디?” “ 우리, 잠깐 사람들이 별로 없는 곳으로 갈까?” “ 예?” 노바카사는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입이 귀에 걸렸다. 유리엔의 말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그는 좋아서 입이 찢어졌다. 앞장서서 유리엔은 으슥한 곳으로 안내한 노바카사는 속으로 오만가지 상상을 하며 유리엔을 응시했다. 유리엔은 빙긋 웃었다. “ 네 머리카락이 홀라당 타서 대머리가 되면 앞으로 네 수작질에 넘어가는 여자가 없어질 거야. 그렇지?” “ 예? 그게 무슨…….” “ 앞으론 네가 여자들 때문에 울게 만들어줄게.” 노바카사의 착각과는 반대로 유리엔이 으슥한 곳을 찾은 이유는 그를 손봐주기 위해서였다. 회생이 불가능 할 정도로 자근자근 밟아줘야 하니까. 유리엔은 타고난 머릿결인지 부드럽게 찰랑거리는 노바카사의 하늘색 머리카락을 진심으로 죄다 태워줄 생각이었다. 그녀는 이제 주 무기가 된 결혼반지를 들어올렸다. 반지에 박힌 마나석이 영롱한 빛을 뿜었다. 준비완료다. 유리엔의 노바카사를 조준한 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마법의 시동어를 외쳤다. “ 파이어 볼!” “ 자, 잠깐 이게 무슨 짓…으악!” 유리엔이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불과 몇 십 분전 눈으로 직접 본 경험이 있는 노바카사는 그녀의 외침에 삽시간에 공포에 질려 허둥댔다.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가 자신에게로 날아오려 하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던 그는 파이어 볼이 시전되는 순간 기적적으로 발이 엉켜 넘어졌다. 비록 우연이지만 그 넘어짐으로 인해 파이어 볼은 주저앉은 노바카사의 머리 위를 스쳐지나갔다. 졸지에 피한 것이다. “ 얼레?” 유리엔은 멈칫했다. 계산미스다. 게다가 노바카사를 명중시키지 못한 파이어 볼은 그의 뒤쪽에 있던 애꿎은 사람을 향해 기세 좋게 날아가고 있었다. 예상 못한 상황에 그녀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방금 나타난 듯 보이는 후드를 쓴 행인은 순식간에 통구이가 될 위기에 처했다. 죄 없는 희생자가 생겨나게 될 판이었지만 이미 행인을 명중시키기 일보직전인 파이어 볼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불덩이는 가차 없이 행인을 덮쳤다. 화륵! “ ……!” “ !!” 노바카사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후드를 쓴 행인은 파이어 볼에 의해 통구이가 되지 않았다. 불덩이가 아슬아슬하게 그에게 닿기 직전에 공중에서 강제로 연소된 것이다. 행인은 후드자락하나 그을리지 않은 멀쩡한 모습이었다. 어느새 그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검은 그가 눈 깜짝할 새에 파이어 볼을 베어버렸다는 믿기힘든 사실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 와…….” 노바카사가 저도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파이어 볼 정도의 마법을 베어서 없애려면 웬만한 실력으로는 택도 없었으니, 그것은 결국 저 행인의 검 실력이 무척이나 높다는 소리였다. 자고로 뛰어난 기사란 모든 남성의 우상이 아니던가. 마찬가지로 놀란 표정으로 행인을 바라보고 있던 유리엔은 문득 순간적으로 뭔가 집히는 것이 있어 눈을 가늘게 떴다. 유심히 행인의 모습을 살피던 유리엔은 마침 그의 왼손 약지에 걸린 얇은 금테의 비싸보이는 반지를 발견했다. 유부남 또는 약혼남인가보다. 그런데 자꾸만 자신의 시선이 반지쪽으로 쏠린다. 저 반지…왠지 낯익은데? 하고 생각하는 순간,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추측에 유리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너…설마?” 혹시나 하는 목소리가 점차 확신으로 변해갔다. ================================ # 47편 # 소제목 : 달빛아래에서 블루스. (1) ================================ 카엘이 유리엔을 발견한 것은 조금 전이었다. 탁월한 성능의 추적마법 덕에 손쉽게 다소 낯 설은 갈색머리의 유리엔의 모습을 찾았을 때, 웬 하늘색 머리의 청년이 유리엔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순간이었지만 탁월한 시력으로 청년의 헤벌레한 표정을 캐치한 카엘은 본능적으로 어서 뒤따라가야 함을 느꼈다. 그렇지 않으면 인적이 드문 음습한 골목에서 저 청년은 분명 백골이 되어 사라지리라. 그렇게 골목으로 들어선 카엘을 덮친 것은 갑작스런 파이어볼이었고,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검을 꺼내 휘둘렀다. 뛰어난 실력 덕에 간단히 소멸시켰지만, 본의 아니게 신부가 날린 파이어볼에 의해 한줌의 재로 변할 뻔했던 카엘은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너…설마?” “ 그래, 설마.” 카엘은 검을 다시 허리춤에 차며 유리엔의 말에 대답했다. 놀라움은 잠시였다. 유리엔이 눈썹을 위로 치켜 올렸다. “ 너 엄청 빨리 쫓아왔다?” “ 이정도야. 그보다 만나자마자 공격을 감행할 줄은 몰랐는데, 검둥이?” “ 나야말로 실패할 줄은 몰랐네, 카라멜?” “ 언제는 성공한 적이 있었던가?” “ 앞으로 셀 수도 없이 많을 전망이야.” “ 틀린 전망이라 안됐군.” 만나자마자 화기애애함과는 백만 광년정도 떨어진 대화를 자연스레 나누는 두 사람을 구경하는 노바카사의 표정이 멍청하게 변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노바카사가 돌연 ‘아’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 서로 아는 사이?” 뭔가 대단한 것을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누구나 알 수 있는 당연한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는 노바카사에게 유리엔이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이 바보에 대한 처분을 어떻게 내려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리엔의 뜨거운(?)시선에 노바카사의 얼굴이 수줍음으로 붉어질 무렵, 고운 미성으로 유리엔이 냅다 물었다. “ 야.” “ 네?” “ 너 지금까지 여자 몇 명이나 울렸어?” “ 그거야 물론 셀 수도 없을 만큼…이 아니라!” 뜬금없는 유리엔의 물음에 자기도 모르게 솔직하게 대답해버린 노바카사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황급히 말을 돌리는 노바카사에게 들을 말 다 들은 유리엔이 피식 웃어주었다. “ 너 진짜 나쁜 놈이구나?” “ 그, 그건…오해입니다, 레이디.” “ 아닌 것 같은데?” “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사랑에 빠져 본 적이 없습니다.” “ 사랑?” “ 네, 사랑…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레이디, 그대를 만나기 전까지는…….” …얘 뭐래? 어느새 꼴사납게 넘어져있던 자세를 순식간에 연인에게 구애하는 기사처럼 한쪽 무릎을 꿇은 포즈로 바꾼 노바카사가 또다시 진지한 눈빛을 쏘아대며 대사를 날렸다. 누가 현직 카사노바 아니랄까봐 그의 느끼한 작업성 멘트는 때와 장소와 분위기를 가리지 않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유리엔의 곁에 서있는 카엘의 존재마저 잊은 듯했다. 그 덕에 어쩌다 관람자1이 되어버린 카엘은 뭔가 제법 묘한 표정으로 둘을 구경하고 있었다. 비록 후드에 가려져 그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유리엔은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몇 분 전 자신의 목숨을 위협했던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작업의 의지가 바뀌지 않는 노바카사의 정신력은 그녀로 하여금 저절로 박수를 치고 싶게 만들었다. 이렇게까지 병신이라니. 유리엔의 평소 지론에 따르면, 이런 애는 그저 패는 게 정답이었다. 해서 평소 자신의 지론을 충실히 따라온 유리엔이 결국 노바카사를 손수 밟아주기로 결정을 내리고 손맛이 왠지 착착 감길 거라 생각하며 노바카사에게 다가가려는 때, 카엘이 대뜸 말했다. “ 죽이지는 마.” “ 안 죽여. 그 직전까지만 팰 거야.” “ 그럼 다행이고. 어쨌든 살인은 안 돼. 이제 곧 행사인데 레듀르 민심이 흉흉해지잖아.” “ 누가 제 나라 수도 아니랄까봐 생색은…. 숨은 붙여놓을 거니까 걱정 마셔.” “ 자, 잠깐!!” 둘의 살벌한 대화에 노바카사가 사색이 되어 외쳤다. 그는 자칭 완벽 완소남인 자신의 얼굴과 몸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주장을 피력했다. “ 전 동의할 수 없습니다!” “ 동의하는 게 바보지.” “ 그, 그러니까 제 몸은 제겁니다!” “ 그래, 네 거해. 누가 가지고 싶대? 웬 덮침 당하는 소녀 같은 대사야?” “ 소, 손대면 안 됩니다!” “ 손 안댈 거야. 발 대려고.” “ 헉!” 이, 이게 아닌데. 주장을 피력하는 것에 실패한 노바카사가 식은땀을 삐질 거리며 말없이 구경중인 카엘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유리엔을 돌아본다. 한명은 엄청난 실력의 검사에, 한명은 마법사였다. …나 오늘 죽나요? 점점 파랗게 질려가던 노바카사의 머릿속으로 순간 의문점 하나가 떠올랐다. 이 여자, 왜 자신의 매력이 먹히지 않는가?! 스스로를 초 절정 꽃미남이자 매력의 화신으로 생각하는 그로서는 도저히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노바카사는 직접 묻기로 하고 유리엔을 향해 말을 던졌다. “ 저기,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 뭔데?” “ 혹시 제가 마음에 안 듭니까?” 더없이 당연한 질문에 유리엔이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눈빛을 날렸다. 마음에 안 드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짜증난다고 말해주는 그녀의 표정에 노바카사가 데미지를 입고 비틀거렸다. 여성에게 이렇게 정면으로 거부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죽기 전까지 맞을 위기에 처한 것도 처음이지만. “ 어째서입니까? 왜 제가 마음에 안 들죠?” 그는 이유라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말했다. 유리엔은 직설적인 노바카사의 물음에 뭐라고 대답해줘야 할지 잠깐 고심했다. 솔직히 말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죄다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좀 더 충격을 줄 수 있는 대답이 있을 거다. 그게 뭘까 생각하다가 유리엔은 노바카사가 지닌 제 외모를 향한 끝없는 자신감을 떠올렸다. 아, 그걸 깨줄까. 유리엔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 못생겨서.” “ …네?” “ 너 못생겨서 싫다고.” ================================ # 48편 # 소제목 : 달빛아래에서 블루스. (2) ================================ 못생겨서. 못생겨서. 못생겨서……. 유리엔의 상큼한 대답은 그대로 메아리가 되어 노바카사를 강타했다. 너 못생겼어. 사실 이 말은 노바카사에게 제법 친숙한 말이었다. 많이 해봤으니까. 가령 그 얼굴로 어딜 들이대, 오크주제에 꺼져줄래 등등등. 하는 대사로 수많은 못난이들을 좌절시킨 전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반대로 상대방에게서 듣는 경우는 처음이다. 때문에 너무도 생소한 경험에 노바카사는 순간적으로 사고가 정지하는 것을 느꼈다. “ 어…음…저, 레이디. 제가 방금 뭘 잘못들은 것 같습니다.” “ 너 못생겼다는 말이면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쿠궁. 친절한 확인사살까지. 노바카사는 비틀거렸다. 데미지가 너무 컸다. 그리고 카엘은 묘한 눈빛으로 유리엔을 바라보았다. 대체 의중이 뭘까. 사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노바카사는 분명 보기 드문 미남이었으니 그런 얼굴에 대고 직접적으로 못생겼다고 말한 의도를 알기 어려웠다. 아니면 혹시 진심인걸까. 조금 느끼하게 생기긴 했다만. “ …레…레이디, 뭔가 잘못 말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모, 못생겼다니요?” “ 못생겼어. 대체 넌 왜 그렇게 못생겼니? 지금 그 얼굴로 나한테 들이댔어? 그 못생긴 얼굴로? 옆집 오크 절친 같은 얼굴로? 못난이의 못난이의 못난이 같은 얼굴로? 길다가 얼굴부터 엎어진 것 같은 얼굴로? 얼굴부터 엎어졌는데 마침 지나가던 마차가 밟고 지나간 얼굴로? 그렇게 못생기고 못생기고 못생기고 못생긴 얼굴로?” 밟은데 또 밟기. 밟은데 또 밟히고 또 밟힌데 어게인으로 밟혀서 회생이 불가능한 상태의 직전까지 몰린 노바카사는 잠시 쿨럭거리는 기침을 쏟아냈다. 심적 데미지 크리티컬 상태. 그러나 노바카사는 인정할 수 없었다. 누가 뭐래도 자신은 완소남, 레듀르 제일의 꽃미남인 것이다. 저런 대사는 자기 얼굴을 생각안하고 무조건 반했다며 달려드는 촌스러운 여자들에게 자신이 사용했던 대사일 뿐이었다. 그런데 말할 때는 몰랐는데 직접 들으니 이거 참 충격이 장난이 아니다. “ 쿨럭…아,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난 잘생겼어, 난 멋있어, 난 조각미남, 신이내린 외모입니다!” …돌았나요? 혼신의 힘을 다해 ‘난 미남이에요’를 외치는 노바카사의 모습을 바라보는 카엘과 유리엔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마치 노숙자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 병자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 환자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 어쨌든 사실 유리엔도 진심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도 자신의 미적 시력은 지극히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그녀였기에 일반적으로 잘생겼다고 일컬어지는 외모를 보면 그녀도 잘생겼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게다가 유리엔은 딱히 사람의 외모에 좌지우지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노바카사가 못생겨서 마음에 들지 않다는 말은 어불성설이었다. 단지 타고나길 남들보다 조금 우수하게 타고난 얼굴가죽 하나만 믿고 멋대로 여성들을 장난처럼 울리는 짓거리가 재수 없을 뿐이었다. 모든 여자들과 남자들의 적이자 공공의 적에게 심적인 충격을 주기 위해 일부러 심하게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노바카사는 정신분열증 초기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유리엔은 여기서 쐐기를 박기로 했다. “ 너 안생겼다니까? 그리고 너보다 백만 배는 잘생긴 사람도 알아.” “ 거짓말! 훗, 정말 있다면 어디 한번 보여주시죠?” 노바카사는 콧대를 세웠다. 백만 배라니 말도 안 되는 말씀. 그전에 자신보다 잘생겼다는 것 자체를 믿기 힘들었다. 유리엔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동시에 카엘은 당황했다. 눈을 빛내며 카엘의 후드자락을 잡은 유리엔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카엘에게 작게 속삭였다. “ 신부에게 들러붙는 거머리를 쇼크사 시키는 건 남편의 의무-.” “ …이럴 때만 남편이지?” “ 빙고.” 펄럭. 생긋 웃으면서 유리엔이 후드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카엘의 얼굴을 대부분 가리고 있던 어두운 색의 후드가 소리를 내며 벗겨지자 곧바로 흐르는 타는 듯한 붉은색이 그 자리를 메웠다. 붉은 눈동자와 머리카락이 노바카사의 눈앞에 그대로 드러났다. “ ……!” 오 마이 갓. 노바카사는 순간 호흡곤란을 호소했다. 사람의 눈길을 확 휘어잡는 붉은 머리카락은 강렬하게 못해 매혹적이었으며 눈동자는 마치 빨려 들어갈듯 아름다웠다. 환상적인 이목구비의 조합은 인간의 외모라고 칭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을 정도였다. 세상에. 어찌 이런 얼굴이. 이건 말도 아니 되옵니다. 사기야……. 노바카사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완전 상대가 안 된다. 이건 뭐 헬 파이어 앞에서 파이어 볼이 좀 나댄 격이었다. 제 외모를 향한 높디높던 자신감이 한번에 꺾였다. 절망과 좌절과 쇼크의 세계로 빠져드는 노바카사를 보며 유리엔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끝났군.” “ 완전 끝났냐?” “ 완전 끝났어.” “ 그럼 이제 가자.” “ 그래, 이제 가…엉?” 가다니 어딜? 하는 표정으로 유리엔이 카엘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에 카엘이 뭘 묻냐는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집에.” “ 너희 집?” “ 그래.” “ …그러니까 황성?” “ 당연하잖아. 챙길 거 있으면 얼른 챙겨.” “ 잠깐!!” 유리엔이 손바닥을 앞으로 쫙 내밀며 타임을 외쳤다. 저기 말이지, 우리 조금 여유를 가지고 차근차근 이야기해볼까, 하는 유리엔의 말에 카엘이 잠자코 후드를 뒤집어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 좋아. 그럼 일단…안가면 안돼?” “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 네. 질문입니다. 안가면 안 됩니까? 카라멜씨.” “ 네. 당연히 안 됩니다, 검둥이양.” “ 왜!!” 유리엔은 마치 세상의 종말을 들은 듯 외쳤다. 자유와 재미를 찾아 떠난 이 여행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기껏 가출까지 해서 나왔는데 한거라고는 고작 노바카사 쇼크사시키기라니 그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 그런 이유로 난 안 가, 못 가. 솔직히 너도 자유와 재미의 행복의 도시를 버리고 억압과 지루함이 가득한 감옥 같은 황성으로 가고 싶지는 않을 거 아냐?” “ 뭐, 그렇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동의했다. 카엘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자신도 휴가처럼 생각하고 느긋하게 나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오냐 그럼 돌아가지 말고 여기서 놀자,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단은 잡으러 나왔으니까. 그러한 카엘의 고뇌를 눈치 챈 유리엔이 재빠르게 말했다. “ 좋아. 그럼 내기하자.” “ 내기?” “ 내기해서 내가 이기면 여기서 좀 놀다가는 거고, 네가 이기면 바로 황성으로 출발하는 거지.” 유리엔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런 유리엔을 보며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벌일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간만에 일이고 뭐고 다 잊고 편안하게 놀아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기에 결국 카엘은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49편 # 소제목 : 달빛아래에서 블루스. (3) ================================ ‘거기 지나가는 행인이여 지금당장 이리로 컴온 베이붸’여관은 때 아닌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물론 달 축제 기간인 만큼 평소보다 많은 이들이 여관을 찾는 것은 으레 있었던 일이지만, 레듀르에서 가장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여관인 만큼 귀족이거나 어지간한 재력가가 아닌 이상은 숙박까지 이용하기는 힘들었기에 항상 여분의 방이 조금씩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방이 남기는커녕 수요에 맞추지 못해 모자람을 호소하는 상황이었다. 발 디딜 틈도 없어 보이는 여관을 슬쩍 바라보며 카엘이 입을 열었다. “ 디멜 자작, 로트네 남작…오, 마티안 백작까지 있군?” “ …….” 입소문은 빨랐다. 얼마나 빨랐느냐 하면은 퍼지기 시작한지 만 하루도 안 되어 ‘거기…(중략)…베이붸’여관으로 사람들이 몰릴 만큼 빨랐다. 게다가 그 뿐만 아니라 이리저리 살도 더해지고 부풀려지고 한건지 달 축제 때문에 레듀르를 찾은 귀족들까지 소문을 듣고 흥미를 보여 여관을 찾았을 정도였다. 유리엔은 여관의 1층에서 남다른 화려함을 자랑하여 앉아있는 몇몇 귀족들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 카라멜아.” “ 왜.” “ 어쩌다 실수로라도 여관 안에서 네 후드가 홀라당 벗겨졌다간, 끝나겠지?” “ 끝나겠지.” “ …나도 이대로 들어갔다간 디엔드지?” “ 디엔드지.” 망할, 하고 유리엔이 애꿎은 개미를 발로 밟아 압사시켰다. 귀족들이 카엘의 얼굴을 아는 것은 당연지사고, 아마 이번 황실의 축제에 참가했던 귀족이라면 유리엔의 얼굴도 알아볼 터였다. 잘했다간 내기고 뭐고 이대로 황실로 후송되게 생겼다. “ 가면이라도 하나 살까.” “ 수상해보일걸.” “ 후드도 만만치 않네요.” 결국 근처의 가게에 들러 가면을 구입한 유리엔은 바로 그것을 얼굴에 썼다. 가면으로 얼굴의 반을 가리자 그저 갈색머리에 갈색눈동자를 지닌 평범한 소녀처럼 보여 유리엔은 만족했다. “ 자, 이제 들어가자.” “ 들어가는 건 좋은데…너 지금 나더러 이 여관에 머물라는 거냐?” “ 당연하지. 내가 제안하려는 내기는 약간의 정보를 필요로 하거든? 그런데 그 정보다 내일 아침이면 알아서 나한테 기어올 거란 말이야. 내기에서 지던 이기던 오늘 하루정도는 머물러 줘야지.” “ …여기에 남는 방이 있을 것 같아?” “ 헉.” 새삼스레 당연한 사실을 깨달은 유리엔이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 그럼 넌 다른 여관에서 자.” “ 내일이면 달 축제야. 레듀르에 있는 웬만한 여관은 죄다 방이 꽉 찼을걸.” “ 엄청 꾸질꾸질하고 허름하고 다 쓰러져가는 폐가에 흉가같은 여관이라면 하나쯤은 자리가 있지 않을까?” “ 그런 꾸질꾸질하고 허름하고 다 쓰러져가는 페가에 흉가같은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내느니 당장 너를 끌고 황궁으로 가겠네.” “ 윽.” ‘하긴 나라도 싫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버린 유리엔이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며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가 눈에 보인 진풍경에 그녀는 그대로 발을 멈췄다. “ 세 배를 주지.” “ 시, 싫습니다.” “ 좋아, 그럼 다섯 배는 어때?” “ 그, 그래도 아니 됩니다!” “ 뭐야? 대체 얼마면 돼? 얼마면 되냐고!” “ 이, 이러지 마세요! 저 그렇게 쉬운 남자 아니에요!” …뭐지? 여관주인은 웬 중년남자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중년남자는 얼굴에서 기름기가 흐르고 배는 살짝 튀어나와 있었는데, 그것에서 넘치는 부유함과 거만함을 읽을 수 있었다. 돈이 아주 많은 상인이거나 혹은 귀족으로 보이는 남자와 유약하게 생긴 젊은 여관주인을 번갈아 쳐다보던 유리엔이 입을 열었다. “ 지금 수청을 들라고 꼬시는 건가요?” “ 아닙니다!” 여관주인이 사색이 되어 외쳤다. 중년남자 또한 크흠 하고 헛기침을 내뱉는 것이 심기가 좋지 않아보였다. 유리엔이 에이, 하고 아쉬운 소리를 냈다. “ 사랑싸움이 제일 재미있는데.” “ 남이 사랑싸움을 하던 살인싸움을 하던 우리 문제가 더 급하지 않냐, 검둥아?” 여관 안으로 들어서는 카엘에게 여관주인과 중년남자의 시선이 잠깐 모였다가 다시 사라졌다. 중년남자는 커험 하고 다시 목을 다듬더니 잠깐 끊겼던 실랑이를 이어갔다. “ 이보게, 다섯 배도 싫다하면 열 배면 되겠는가?” “ 아, 아무리 돈을 많이 주셔도…안 되는 건 안 됩니다. 이미 방이 꽉 차서…….” 여관주인의 말에 유리엔과 카엘은 저 둘이 무엇 때문에 실랑이를 벌이는지 눈치 챘다. 유리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역시 이 몸의 인기란.” “ 헛소리 그만하고, 방 구하긴 틀린 것 같은데 대책을 좀 세워보지?” “ 대책? 훗. 그런 게 있을 것 같아?” “ 아니.” “ 알면서 뭘.” “ 지금이라도 좀 생각해봐라.” “ 너도 좀 생각해봐.” 투닥거리긴 했지만 정말로 딱히 대책이 없는지라 유리엔은 으음 하고 고민에 빠졌다. 아무래도 가장 좋은 방법은 카라멜 제거-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실천으로 옮기기에는 좀 힘들 것 같으니 기각.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던 유리엔이 아하, 하고 손바닥을 쳤다. “ 방법이 하나 있긴 하네.” “ 어떤?” “ 내 방에서 같이 자면 되지.” “ …….” “ 비싼 여관이라 그런지 침대가 좀 크더라.” 정말 진심인가 싶어 카엘이 눈을 가늘게 뜨고 유리엔을 응시했다. 유리엔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 왜? 걱정 마. 내가 설마 널 잡아먹겠냐?” …그건 남자가 할 대사가 아니던가. 카엘은 떨떠름해졌다. 물론 둘은 형식적으로나마 결혼까지 한 부부사이였으니 한 침대에서 같이 잔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었다. 게다가 둘이 같이 잔다고 해서 뭔 일을 치를만한 사이도 아니고. 결국 카엘은 유리엔이 잡은 1인실에서 머무는 것에 동의했다. ================================ # 50편 # 소제목 : 달빛아래에서 블루스. (4) ================================ 여관의 1인실은 호화스럽지는 않지만 충분히 넓고 깨끗했다. 방의 한 켠 에는 유리엔의 짐으로 추정되는 갈색의 보따리가 나뒹굴고 있었다. “ 뭘 챙겨온 거냐?” “ 돈.” 촤르르륵. 허름한 겉모습의 보따리와는 다르게 그것에서 쏟아져 나와 바닥에 흩어지는 것은 번쩍거리는 보석이었다.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양에 카엘이 혀를 찼다. “ 많기도 하네. 이것들 중에 하나만 주머니에 넣어왔어도 충분했을걸.” “ 그건 아는데…왜 그런 거 있잖아. 경매.” “ 경매?” “ 응. 거기에서 항상 하이라이트는 맨 마지막에 나오잖아? 관중들의 눈은 번쩍이고 금액은 천문학적으로 치솟고 사회자는 좋아하고…여기저기에서 기름이 좔좔 흐르는 돼지들이 그 경매물품을 놓고 경쟁을 하지. 막 5골드 10골드씩 찔끔거리며 올리면서.” “ …그런데?” “ 시간은 흐르고 슬슬 승리자가 결정되려는 그때, 잠자코 지켜보던 한 신비스러운 가면의 소녀가 외치는 거야. 천 골드! 돼지들은 놀라고 관중들은 경악하고 사회자는 입이 찢어지는 가운데 가면의 소녀는 훗 하고 한번 비웃어주고 여유롭게 천 골드를 내놓고 경매물품과 함께 사라지는 거지. 그 뒤로 경매장에서는 그 신비스런 가면 쓴 소녀의 전설이 대물 물려 내려오기 시작하고…….” “ 진심이야?” “ 그냥 해본 소리야.” 그렇게 날리기엔 천 골드는 너무 많잖아? 하고 유리엔은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카엘은 한번 피식 웃고는 의자에 앉아 여관 종업원에게 팁을 주고 따로 타오게 한 차를 한 모금 훌쩍 마셨다. 역시 크고 비싼 여관이라 그런지 차 맛도 제법 깔끔하다. “ 야.” “ ?” “ 그러고 보니 우리 첫날밤이다?” 푸웁!! 카엘은 장렬하게 마시던 차를 뿜었다. 아름답게 공중을 수놓는 물방울들을 바라보며 유리엔이 노골적으로 더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 …쿨럭쿨럭!” “ 왜이래?” 너 때문이잖아! 마음속에서 맴도는 말을 미처 내뱉지도 못하고 카엘은 단단히 사레들린 목을 추슬렀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카엘이 찻잔을 대충 바닥 아무 곳에나 내려놓으며 말했다. “ 너 첫날밤에 튀었잖아.” “ 그랬나?” “ 그랬어.” “ 뭐 어때. 그럼 난 유부녀가 된 건가.” “ 이제 알았냐.” 그리고 자신은 유부남이고 말이다. 비록 정식결혼식은 아직 이었지만, 사실상 둘은 부부사이였다. 단지 당사자들이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하며 카엘은 왜인지 잊고 지냈던 사실을 하나 떠올렸다. 처음 정략결혼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땠던가. 상대가 누구든지 괴롭혀서 쫓아내겠다고 길길이 날뛰었지- 하루라도 빨리 이혼을 해버리겠다고 다짐했었다. 카엘은 잠자코 유리엔을 바라보았다. 분명 첫인상은 그저 그랬고, 두 번째 만남에서는 최악이었던 것 같은데. 그새 미운정이라도 들어버린 건지 싫지가 않다. “ 뭘 봐?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 …아냐.” “ 아님 새삼 나한테 반했니?” “ 돌았구나?” 이렇게 말장난을 주고받는 것이 어느 샌가 자연스럽게 되어버렸다. 이게 익숙해진다는 건가싶어 카엘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에 유리엔이 의미를 알아내려는 듯 미간을 슬쩍 좁혔다가 폈다. “ 그런데 너 여성혐오증인가 뭔가 있는 거 아니었어?” “ 뭐, 대충 맞는데.” “ 나랑 같이 자도 괜찮아?” “ 상관없어. 생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냥 기분 상으로 싫은 거거든.” “ 흐음.” “ 가면이 아닐까 의심 될 정도로 떡칠한 화장에 코가 아플 정도로 뿌린 향수에 귀찮을 정도로 들러붙는 게 싫으니까.” “ 그건 나도 싫어.” “ 어쨌든 내가 여자만 보면 질색을 한다느니 하는 소문은 대부분 일부러 퍼뜨린 거야. 그럼 적어도 대놓고 접근하지는 않으니까.” “ 헤에.” 아이디어 좋은데? 유리엔익 고개를 끄덕거리며 침대를 굴러다녔다. 더럽게 비싼 방값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지 1인실의 침대임에도 그녀가 두 바퀴나 구를 만큼 넓었다. 잠버릇이 험하지만 않다면야 두 명이서 잔다 해도 딱히 불편하지는 않으리라. 구르는 것을 뚝 멈추고 유리엔이 침대에서 자신의 옆을 팡팡 쳤다. “ 자, 이리와!” “ …뭐냐, 그 거만함은?” 마치 명령이라도 하는듯한 포즈에 카엘이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유리엔이 씨익 웃었다. “ 이런 걸까. 첫날밤을 맞이한 수줍은 새색시를 침대로 부르는 남편의 마음이란.” “ 글쎄. 그보다 수줍은 새색시 따위는 여기에 없거든?” “ 하여튼. 왠지 손만 잡고 잘 테니까 오빠만 믿으라고 말하는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해.” “ 그런 건 몰라도 돼.” 전혀 알 필요 없는 것을 깨달아가는 유리엔을 만류하며 카엘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후드를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카엘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 갑자기 귀족들이 방으로 들어 닥친다던가하는 전개는 없겠지?” “ 설마.” 대충 대답하며 침대에 누운 카엘은 갑자기 몸에서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좀 피곤했던가. 비록 유리엔이 바로 옆에 누워있었지만 카엘은 전혀 긴장감 없이 눈을 감았다. 그것이 실책이었다. 퍽! “ …윽?!” 뭔가 푹신한 것에 기습적으로 얻어맞은 카엘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홱 고개를 돌리자 옆에는 유리엔이 그 이름도 유명한 베개를 들고 눈을 빛내고 있었다. “ 베개싸움하자.” “ 뭐?” “ 콜.” “ 야, 잠깐!” 당연한 듯 카엘의 의견을 무시하며 유리엔이 베개를 들고 날뛰었다. 광속의 스피드로 날아드는 베개를 이리저리 피하며 카엘이 외쳤다. “ 내 베개가 없잖아!” “ 그건 네 사정!” “ 뭐라?” 불공평하잖아, 하고 말했지만 먹힐 리가 없다. 카엘은 속으로 고개를 몇 번 내젓고는 결국 유리엔의 베개를 빼앗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자, 이제 몸싸움 들어갑니다. 몇 분지나지 않아 둘은 얽히고 섥혔다. “ 앗! 내 베개!” “ 이젠 내 껀데?” “ 뺏길 것 같냐!” “ 윽?!” 둘은 유치하게 투닥거리며 잘도 굴러다녔다. 침대에서 떨어지고 바닥을 구르기도 하면서 진행된 베개싸움은 기어코 하나뿐이던 베개가 희생적으로 깃털을 휘날리며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할 때까지 계속됐다. 베개의 장렬한 전사와 함께 녹초가 된 유리엔이 벌러덩 침대에 드러누웠다. “ 야, 힘들다.” “ 내가 더 힘들어.” “ 웃기시네. 그나저나 베개 물어줘야겠다.” “ 그래야겠지.” “ 네가 물어줘.” “ 왜?!” “ 네가 잡아당겨서 저렇게 된 거잖아.” “ 애초에 잡고 놓지를 않은 네 탓이지.” 쓸데없는 말싸움 끝에 유리엔이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아 졸리다. 갑자기 방 안이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체력소모 했더니 피곤해.” “ 그럼 자.” “ 너도 자.” “ 너 먼저 자.” “ 먼저자세요.” “ 너 자면.” “ 나도 너 자면.” “ 지금 한번 뜨자는 거냐?” “ 너야말로?” “ 자라니까.” “ 너나 자.” 그러다 결국 둘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금세 새근거리며 유리엔이 고른 숨소리를 내뱉었고, 그것을 멀뚱히 바라보던 카엘도 이내 눈을 감았다. 뭐랄까. 평화롭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다. ================================ # 51편 # 소제목 : 달빛아래에서 블루스. (5) ================================ 눈을 뜬 것은 아침이었다. 피곤한 기미가 전혀 없는 눈이며 개운한 느낌에 어지간히 푹 잤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카엘은, 자신이 이토록 편하고 깊게 숙면을 취한 것이 얼마만인지 세기도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대부분 자신은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에서 잠을 잤다. 그러니 당연히 얕은 잠이었고 수시로 새벽이나 한밤중에 잠에서 깨는 일이 잦았다. 그는 제국의 황태자였고, 그런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반 황태자파의 적들은 제법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편하게 잠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게도 거의 불가능했다. 카엘은 모든 경우에 있어서 아주 약간이라도 수상한 인기척이 느껴진다면 바로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상태까지 자신을 긴장시켜왔다. 그런데 이런 안전성도 떨어지는 여관에서 이토록 세상모르게 잠들다니. 카엘은 자신의 맑은 시야와 개운한 머리를 거의 믿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너무 잘 잤다. “ 으음…….” 그러다 그는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뒤척임에 흠칫했다. 유리엔은 카엘과 거의 밀착하다시피 가까이 누워있었다. 그뿐 아니라 자면서 정말 구르기라도 한건지 둘은 침대에서 벽 쪽으로 바짝 붙어있었는데, 특히 카엘은 벽과 유리엔 사이에 갇혀있었다. 어느새 벗겨져 침대 구석에서 뒹구는 가발에 의해 폭포수처럼 흘러내린 유리엔의 흑발을 가만히 응시하며 카엘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깨워야하나 고민하는데 갑작스레 유리엔이 눈을 번쩍 떴다. “ …….” “ …….” 눈만 떴다 뿐이지 아직 잠결인지 멍한 기운이 가시지 않은 눈동자로 유리엔이 카엘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 좋은 아침.” …뭐라고 대답해줘야 하는 걸까. 어정쩡하게 ‘그래’라고 답해주자 유리엔이 침대에서 부시럭 부시럭 몸을 일으키더니 쭈욱 기지개를 켰다. 목도 좀 돌려주고 팔도 돌려주며 간단한 스트레칭을 마치더니 한결 또렷해진 눈동자로 그녀는 침대를 빠져나왔다. 이내 조금 추운지 팔을 삭삭 문지르더니 그대로 씻으러 들어가 버린다. “ …….” 카엘은 분명 처음 보는 것이 틀림없는 유리엔의 무방비하고 멍한 모습에 또 한번 돌로 굳어졌다. “ 아, 그러니까, 마법사님을 뵈어야 한다니까.” “ 누차 말씀드리지만 현재 저희 여관에 묵고계시는 마법사님은 없습니다.” “ 있다니까 그러네?! 이 아저씨가 왜 이렇게 사람 말을 못 알아들어?” “ 말이 되는 말씀을 해주셔야 알아듣죠!” “ 말 되거든?!” “ 말 안되거든?!” “ 이게 어디서 반말이야!” “ 네가 먼저 했잖아! 그리고 나 아저씨 아니거든?!” “ 노총각이 자랑이냐?!” “ 지는?! 오크 뒷다리에 밟힌 빈대떡처럼 생겨먹은 게!” “ 뭐 임마?!” 아침이나 먹을까싶어 카엘과 함께 여관1층으로 내려온 유리엔은 뜻하지 않게 말싸움에 접어든 두 남자를 구경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뭔가 이유가 있어 실랑이를 벌이는 것 같더니 결국에는 감정싸움으로 번진 사내와 여관주인은 서로 핏대까지 세우며 바락바락 소리치기 시작했다. “ 드래곤이 먹다 남긴 오크 찌꺼기같이 생긴 게!” “ 그러는 넌 오우거한테 개기다가 얻어터진 찌질이 오크 콧구멍처럼 생긴 게!” “ 뭐야?! 이 소드맛스타한테 썰린 오크 발가락의 때 같은 게!” “ 뭐가 어째?! 트롤한테 고백했다 차이고 비관자살하려고 마탑에서 번지점프한 병신 오크 같은 게!” “ 뭐야 임마?!” “ 뭐 짜샤?!” 어째서 주제가 전부 오크인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둘의 말싸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격해졌다. 이러다 자칫해서 2층의 귀족들이라도 깨워버린다면 여관 전체가 소란스러워질 염려가 있었기에 유리엔은 귀찮음을 감수하고 둘에게 다가갔다. “ 야, 너네.” “ 뭐야? 누구…헉!” 유리엔의 부름에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린 사내는 그 순간 시간이라도 정지한 듯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런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고 유리엔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 넌?” “ 마, 마법사님!” 대경실색을 하며 사내가 그대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여관주인은 갑자기 닥친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어리벙벙한 얼굴이었고, 때마침 곁으로 다가온 카엘은 유리엔에게 얜 뭐냐고 묻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유리엔이 생긋 웃었다. “ 왔네?” “ 네, 넵!” 대답하는 것이 시키기만 한다면 당장 바닥에 머리라도 박을 기세였다. 미심쩍은 표정의 카엘에게 ‘하인’이라고 대답해준 유리엔은 여관주인에게 그만 가보라는 손짓을 보냈다. 유리엔의 손짓에 슬금슬금 카운터로 돌아가면서도 여관주인은 이쪽을 힐긋거렸다. 카엘이 입을 열었다. “ 하인이라니?” “ 어제 운 좋게 습득했지.” 그렇게 말하며 유리엔이 후후 웃자 엎드린 채 사내가 움찔했다. 사내의 정체는 바로, 하루 전 노바카사의 부탁을 받아 유리엔에게 찝쩍댔던 세 명의 덩치들 중 한명이었다. 그들은 유리엔이 보여준 강렬한 파이어볼 하나로 그녀가 무슨 대마법사인 것처럼 믿고 있었다. 물론 그들 나름대로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었을 테니 무리도 아니지만. 어쨌든 사내는 덩치들 셋을 대표해서 유리엔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여관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 가면 쓰고 있는데도 용케 바로 알아봤네?” “ 네, 네.” “ 시킨 건 잘 알아왔어?” “ 물론입니다!” 유리엔이 오늘 아침까지로 기한을 주고 시켰던 것은 레듀르 달 축제에 관한 대부분의 정보를 알아오는 거였다. 축제 자체는 무척 유명했지만 타국의 것이니만큼 유리엔은 거의 모르는 게 많았다. “ 어디 읊어봐.” “ 넵! 우선 달 축제는 레디니아 여신께서 지상에 첫 신탁을 내리신 것을 기념으로 처음 시작되었지만, 제국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보름달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해서 달 축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축제기간은 총 일주일이지만 둘째 날이 하이라이트로 달의 모습도 최고로 아름답습니다. 축제는 광장에서 열리며 달빛이 가장 밝을 때는 마음에 드는 이성 혹은 함께 온 파트너와 춤을 추는 전통적인 풍습이 있습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행사가 열리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첫째 날의 ‘달의 여신’을 뽑는 대회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달의 여신처럼 아름답고 매력 있는 여인을 뽑는 대회인데 미모뿐 아니라 여러 가지 재주로 인해 뽑히기도 합니다. 또한…….” “ 이제 됐어.” “ 넵.” 숨도 안 쉬고 말하는 사내에게서 대충 원하는 정보를 모두 들은 유리엔이 가도 좋다고 손짓했다. 사내는 벌떡 일어나 ‘감사합니다! 이제 똑바로 살겠습니다!’하고 넙죽 인사하더니 밖으로 총알같이 튀어나갔다. 카엘은 황당해졌다. “ 뭐냐?” “ 하인이라니까. 아무튼 너도 들었지?” “ 뭘?” “ 달의 여신을 뽑는다는 행사.” “ 그게 왜?” “ 내가 제안할 내기가 그거거든.” 유리엔이 씨익 웃었다.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 내가 그 대회에서 일등을 할 수 있을지 못할지…어때?” ================================ # 52편 # 소제목 : 달빛아래에서 블루스. (6) ================================ “ 내가 그 대회에서 일등을 할 수 있을지 못할지…어때?”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도 자신이 넘치나보다. 잠깐 생각하다가 카엘이 답했다. “ 쉽지 않을 텐데?” 달 축제 경험자로서의 솔직한 대답이었다. 축제 자체는 레듀르에서 열리지만 참가자들은 레듀르의 시민들에 한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리엔이 말한 대회는 보기보다 제법 수준이 높았다. 유명세를 타는 음유시인이 참가하는가하면 얼굴 하나로 귀족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운 미인도 있었다. 물론 외모라고 한다면야 유리엔보다 뛰어난 여인이 있을 리 없겠지만, 그녀에게는 가면을 쓰고 참가해야하는 핸디캡이 있었다. 참가하자마자 내기고 뭐고 귀족들에게 붙들려 황궁으로 이송되고 싶지 않다면 얼굴을 가리는 것은 필수였으므로. 결국 유리엔의 강력한 무기인 여신 뺨치는 미모는 사용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 그러니까 내기하자는 거지. 난 내가 달의 여신이 된다는 쪽에 걸고, 넌 안 된다는 쪽에 걸면 되잖아?” “ 흐음.” 유리엔의 말에 카엘이 침음성을 흘렸다. 왠지 저렇게 자신하니 정말로 되어버릴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카엘은 결국 내기에 응하는 쪽으로 생각을 기울였다. 딱히 진다고 해서 자신이 손해 보는 것도 없었고, 게다가 확실히 이길지 질지 결과는 모르는 거였다. 무엇보다 대회에서 과연 무엇을 보여줄지 궁금하기도 했다. “ 좋아.” “ 그럼 내기성립!” 카엘의 승낙에 유리엔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럭저럭 이와 비슷한 행사가 있을거라 예상은 했었지만 생각보다 달의 여신을 뽑는 대회가 내기에 안성맞춤이라 마음에 들었다. 가면을 써야 하는 핸디캡따위, 그녀는 한 방에 날려줄 자신이 있었다. “ 참, 카라멜.” “ 왜.” “ 이런 건 라이벌이 있어야 더 재미있는데 말야.” “ ?” “ 그런 의미에서, 너도 참가하는 건 어때?” “ …참고로 달의 여신은 여자다?” “ 후훗. 걱정 마, 카라멜. 우리에게는 그런 것 따위 가뿐하게 극복할 수 있는 기술이 있잖아? 일명 여장이라고….” “ 절대 싫어.” 문득 재미있을 것 같아 싱글거리며 꺼낸 말에 카엘이 대번에 정색을 하며 거부하자, 유리엔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 쳇. 괜찮을 것 같은데.” “ 전혀. 네버. 조금도 괜찮지 않거든?” 도끼눈을 번쩍 뜨는 카엘로 인해 유리엔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려던 것을 포기해야했다. 아, 하지만 너무 아쉽단 말이지. 카엘의 여장한 모습에 반한 수많은 남자들이 상사병이라도 앓는 다면 그 얼마나 웃기는 시추에이션이란 말인가. 개중에 권세 높은 귀족가의 자제라도 있어봐라, 그대로 웃겨 쓰러지는 건데. 지금은 자신이 조금 불리한 상황(어쨌거나 가출한 상태이니)이라 물러나지만 다음에는 기필코 여장을 시키고 말겠다-는 카엘이 알았다면 기겁 할 다짐을 속으로 불태우는데, 그런 유리엔의 머릿속으로 갑자기 누군가의 얼굴이 쉭 하고 스쳐지나갔다. “ 아!” 그러고보니 걔가 있었구나? 찰랑거리는 하늘색 머리카락이 떠올랐다. 굿. 당첨이었다. 달 축제. 그리고 그것의 시작을 알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달의 여신을 뽑는 대회가 레듀르 광장의 야외무대에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 무대 주위의 특별 귀빈석에 앉은 귀족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비웃듯 말을 내뱉었다. “ 달의 여신이라? 흥, 이름만 그럴싸하지 천박한 대회로군. 평민들 주제에 무슨 재주를 내보이겠다는 건지.” “ 하하. 남작께서는 달 축제에 처음 오시나 보오? 이래 뵈도 꽤나 볼만하다오, 이 대회.” 대회를 완전히 무시하는 발언에 옆자리에 앉아있던 또 다른 귀족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을 받았다. 그 말에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그래도 남작이라 불린 귀족은 여전히 대회를 비웃고 있었다. 그래봤자 평민 대회인 것을. 제까짓 것들이 매력이 있으면 얼마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이딴 대회를 보기위해 발 디딜 틈도 없게 몰려와서는 눈을 빛내고 있는 북적거리는 저 서민들도 한심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그의 이런 생각은 대회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사삭 하고 깨져나갔다. “ 자, 여러분-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달의 여신 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 와아아아아!” “ 우어어어어!” “ 워우워어어어!” 순식간에 광장의 무대는 관람객들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시작을 알리는 사회자의 말에 대부분이 남자로 이루어진 그들은 몬스터를 연상케 하는 괴성을 내질렀다. 반응 좋고-를 외친 사회자가 첫 번째 참가자를 소개했다. “ 자, 첫 번째 달의 여신 후보입니다!” “ 호호. 여러분 반가워요. 레리엘이라고 합니다.” 사회자의 소개와 함께 무대로 사뿐히 걸어 나온 여인은 대략 스무 살 정도로 보이는 금발의 미녀였다. 여인은 나풀거리는 흰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청순한 분위기가 아름다운 외모가 무척 돋보였다. 자신을 레리엘이라고 소개한 여인이 관람객들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보이자 곧바로 뜨거운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 우오오오오! 예쁘다!” “ 최고다! 워우어어!” “ 레리엘 짱! 레리엘 최고!!” “ 알러뷰 쏘머춰!!” “ 결혼해줘!!” 제법 이름이 알려진 여인이었는지 여기저기서 팬클럽으로 추정되는 남자들도 속속들이 보였다. 그들의 열렬한 외침에 레리엘이라는 여인이 쪽 하고 손 키스를 날려주고는(여기서 몇몇은 호흡곤란을 일으켰다)무대 안쪽으로 들어갔다. 딱히 뭔가를 선보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워낙에 미모자체가 뛰어났기 때문에 호응이 꽤나 좋은 편이었다. 대회를 비웃었던 귀족은 아예 넋이 가출한 상태였다. “ 하하, 다들 첫 번째 후보의 아름다움에 벌써 취하셨군요! 자, 진정들 하시고-그럼 두 번째 달의 여신 후보입니다!” 두 번째로 나온 참가자 또한 무척 아름다운 여인이었는데, 그 미모가 앞서 나온 여인보다는 조금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화려하고 돋보이는 춤 실력을 뽐냄으로써 더욱 뜨거운 반응을 받을 수 있었다. “ 크어어어! 죽인다!” “ 쿠워어어! 섹시하다!” “ 결혼해줘!!” “ 내 아를 낳아도!!” 관객들은 슬슬 이성을 잃어갔다. 그 외에도 수많은 참가자들이 등장해 자신들의 매력을 마음껏 드러내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여인도 있었고, 노래를 부르는 여인도 있었다. 그때마다 무대와 객석의 열기는 차츰 높아져 이제는 슬슬 최고조에 다다르고 있었다. 카엘은 미쳐날뛰는 수많은 관중들의 사이에 슬며시 섞인 채 간간히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언제 봐도 이들의 활기는 재미있었다. “ 자, 다음은 열 번째 후보입니다!” 사회자의 외침과 동시에, 수수하지만 단아한 매력이 엿보이는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카락을 살짝살짝 흩날리며 무대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카엘의 시선이 무대로 고정되었다. 열 번째 참가자는 바로 유리엔이었다. ================================ # 53편 # 소제목 : 달빛아래에서 블루스. (7) ================================ “ 엥?” “ 뭐지?” 광적인 열기에 몸을 맡기던 관중들은 유리엔의 등장과 동시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바로 유리엔의 가면 때문이었다. 코와 입 주변을 제외하고는 전부 가려버린 흰색 가면에 관객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남작은 코웃음을 쳤다. “ 어지간히도 못생긴 얼굴인가 보군.” 앞서나온 여인들의 수준이 워낙 높아 기대치와 눈높이가 저절로 올라간 그였다. 저렇게 얼굴을 가리고서야 뭘 보여주던지 딱히 좋은 반응은 얻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남작은 어서 다음 참가자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런 남작의 인식이 살짝 변한 것은 유리엔이 입을 연 다음이었다. “ 반가워요. 엔이라고 합니다.” “ 오오…!” 술렁. 엔이라는 가명으로 간단히 자신을 소개하는 유리엔의 목소리는 대단한 미성이었다. 옥구슬이 굴러간다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하며 관객들이 감탄했다. 남작 또한 웬만한 음유시인 뺨치는 목소리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기대가 높아지는 분위기에서 무대 위에 커다란 물건이 등장했다. 우락부락한 덩치의 장정 셋이서 끙끙대며 들고 나오는 그것은 바로, 흰색의 피아노였다. 관객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저게 뭐지?” “ 난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그대는 알고 있나?” “ 나도 모르겠는데. 그나저나 특이하게도 생겼군.” 평민들은 대다수가 피아노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워낙 고가의 악기인 탓이었다. 관객석에 앉아있는 몇몇 귀족들만이 피아노를 알아보고 눈을 빛냈다. “ 호오. 이런 데서 피아노를 보게 될 줄은 몰랐군요.” “ 그러게 말입니다. 귀족 영애들 중에서도 피아노를 익히고 있는 영애는 극히 드물지 않습니까?” “ 제법 이군요, 저 평민.” 귀족들은 유리엔에게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남작 또한 쉽게 볼 수 없는 피아노의 등장에 살짝 놀란 상태였다. 그리고 약간 다른 의미로 카엘 또한 놀랐다. ‘ 언제 저걸 산거야?’ 분명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그는 유리엔의 행동력에 혀를 내둘렀다. 피아노를 무대의 중앙에 내려놓고 덩치들은 잽싸게 퇴장했다. 주변의 모든 이목이 무대 중앙의 고급스러워 보이는 피아노로 집중되었다. 수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유리엔이 사뿐히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그런 유리엔이 여성스러운 몸짓에 카엘의 표정이 묘하게 구겨졌다. 띵-.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흰 건반을 가볍게 누르자, 맑고 아름다운 소리가 무대에 퍼져나갔다. 유리엔의 양손이 모두 피아노의 건반위에 올라가고- 연주가 시작되었다. “ ……!” “ 오오…!” 천상의 음악이었다. 부드러운 선율이 사람들의 귀를 자극했다. 바로 근처에서 소리를 듣는 사회자의 표정은 점점 넋이 나가고 있었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유리엔이 입을 열어 노래를 시작했다.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공주님이 살았다네 험한 가시밭길로 둘러싸인 높고 단단한 성 그 꼭대기에 공주님은 꽁꽁 숨겨졌네 공주님의 미모를 질투한 마녀는 말하였네 붉은 장미도 아니 되고 흰 장미도 아니 되고 검은 장미도 아니 되니 오로지 푸른 장미를 구해오너라 세상에 단 한 송이만 존재하는 푸른색 장미를 구해온다면 내 공주를 둘러싼 가시밭길을 치워 주리라 수많은 사람들이 마녀의 말에 혹하였네 아름다운 공주님을 얻기 위하여 모든 이들이 마녀에게 푸른 장미를 찾았다 말하였네 그러나 이것은 붉은 장미요 이것은 단지 시든 장미요 이것은 단지 덜 여문 장미이니 공주는 평생이고 가시로 둘러싸인 성에서 살아야겠구나 마녀는 그들을 비웃었네 헌데 두 개의 달이 하늘에 뜬 날밤 가난한 옷차림을 한 여행자가 마녀를 찾았네 이것이 바로 세상에 단 하나뿐인 푸른 장미요 그러나 여행자가 내민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네 마녀가 노하자 여행자가 말하였네 푸른 장미는 내 눈외에는 보이지 않소 이 장미는 바로 나의 심장이기 때문이오 탑의 공주님을 처음 본 순간 빼앗겼던 나의 심장이기 때문이오 그러자 마녀는 감동하고 말았다네 여행자의 말은 시기에 사로잡혀있던 마녀의 마음마저 움직였네 꽁꽁 언 마음이 녹자 마녀는 공주를 풀어주었네 험한 가시덩굴은 감쪽같이 사라졌고 여행자는 공주님에게 자신의 푸른 장미를 전하였네 아름다운 공주님은 그의 심장을 받아들고 미소 지었고 공주님의 미소에 정말로 푸른 장미가 피어났네 두 사람의 사랑을 축복하듯 푸른 장미가 피어났다네 두 사람의 영원을 축복하듯 푸른 장미가 피어났다네 유리엔이 부른 노래는 ‘푸른 장미’라는 이름을 지닌 곡이었다. 푸른 장미는 로맨틱한 가사와 아름다운 음률로 음유시인들 사이에서 무척이나 유명한 노래였는데, 유명한 만큼 다들 한번쯤은 들어본 곡이었다. 특히 여성의 감수성을 마구 자극했으므로 레이디를 꼬셔 본 남자라면 누구나 다들 불러본 적이 있을 거였다. 유리엔의 미성은 지금까지 들어온 그 어떤 음유시인보다도 아름답고 훌륭하게 푸른 장미를 소화해내었다. 게다가 피아노의 맑은 선율에 유리엔의 목소리가 더해져 서로 어우러져 환상적인 조합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완벽했다. 퍼펙트! 음악이 무엇인가를 아는 귀족들은 당장 눈물이라도 쏟을 태세였다. 간간히 특별관객석에 섞여있는 귀족 영애들은 이미 손수건을 꺼내들고 훌쩍이고 있었다. 너무도 아름답다. 과연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토록 아름다운 음역대의 노래와 연주를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그들은 하나같이 감동에 젖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곡이 끝나고, 유리엔의 연주가 멈출 때까지 그 누구도 입을 열 생각을 하지 못했다. 대부분 넋이 나가 멍한 모습이었다. 코웃음 쳤던 남작은 아예 인간 턱의 유연성이 과연 어디까지 되는가를 시험하는 것처럼 입을 떡 벌린 상태였다. 건반위에 얹어져있던 손을 내리고 유리엔이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섰다. 정적이 계속되고 있었다. 입가가 살짝 올라가며 미소 짓는 유리엔의 모습에 관객들 중 누군가가 말했다. “ …여신이다…….”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그 말을 시작으로, 무대 주변에서 미친 듯한 열기가 쏟아져 나왔다. 관중들은 상기된 얼굴로 열렬한 환희를 보냈다. “ 우와아아아아!!” “ 최고다!! 여신님 최고!!” “ 여신님 만세-! 와아아아!!” “ 여신님 사랑해요!!” 그 어느 참가자보다 뜨거운 반응이었다. 어느새 유리엔은 여신님이 되어있었다. 그 호응에 답하듯 유리엔이 살짝 손을 흔들어주자 관객들은 미쳐 날뛰었다. 처음에는 거슬리던 가면도 이제는 그저 신비롭게만 보였다. 엄청난 유리엔 열풍의 사이에서, 카엘은 멀뚱히 서있었다. 약간이지만 넋이 나간 채로. 아직도 그의 귓가에서는 온 사물을 감싸듯 청명하고 부드러운 선율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어떠한 화려한 궁중연회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아름다운 소리였다.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유리엔을 바라보는 카엘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 # 54편 # 소제목 : 달빛아래에서 블루스. (8) ================================ 무대가 들썩일 정도의 환호와 함께 유리엔이 이전 참가자들을 위한 자리로 가 앉았다. 관중들의 환호성과 박수는 무대중앙에서 유리엔이 퇴장했음에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자리에 앉아있던 먼젓번 참가자들도 멍하니 입을 벌리고 유리엔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미처 몰랐는데, 이제 보니 무시할 수 없는 기품과 우아함이 느껴진다. 얼굴이 못생겨서 가렸을 거라 생각했던 가면마저 이제는 신비감을 연출하기 위한 도구로 생각될 정도다. 사라지지 않고 울렁거리는 감동의 파도를 느끼며 그녀들은 조용히 패배를 인정하듯 고개를 숙였다. 한편 바람처럼 재등장한 덩치들이 피아노를 무대에서 치우는 동안, 귀족들은 저마다 감탄하며 연주에 대한 평을 내놓기에 바빴다. “ 허어…대단 하군요.” “ 놀랍습니다. 피아노를 저토록 완벽하게 연주하다니…게다가 노래 또한 수준급이더군요.” “ 대단한 미성이지요. 이것 참, 평민들이 여신이니 어쩌니 난리피우는 것도 이해가 가는군요.” “ 헌데 평민에게는 너무 과분한 재주인 듯싶기도 합니다.” “ 글쎄요. 어쩌면 평민이 아닐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 허허. 설마 그럴 리가요.” ‘귀족가의 여식이 어찌 저런 저속한 대회에 참가한단 말입니까’라고 말하며 살짝 배가 튀어나온 귀족A가 웃었고 그에 ‘하긴 자칫하여 달의 여신을 평민에게 빼앗기기라도 한다면 그 얼마나 안면이 판매되는 일이겠습니까’라고 답하며 머리가 살짝 벗겨진 귀족B가 껄껄댔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근처에 앉은 튀어나온 배와 벗겨진 머리를 빠짐없이 소유한 남작은 막 흘러내리려던 침을 급하게 닦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 베리 굿!!’ 남작의 눈동자가 개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이마만큼이나 탐욕으로 반들거렸다. 그는 속으로 몹시 만족하고 있었다. 그저 고만고만한 평민들이 등장해 매력을 뽐내는 것이라 생각했던 대회에서 예상치 못한 진주를 발견한 탓이다. 물론 앞서 나온 후보들도 무척 괜찮았지만 방금 피아노 연주를 보여줬던 열 번째 후보만큼은 못했다. 심금을 울리던 노랫소리와 피아노의 선율에 그는 통째로 마음을 사로잡힌 기분이었다. “ 딱 걸렸어. 넌 내꺼야.” 남작이 유리엔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리며 중얼거렸다. 가면으로 가린 얼굴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느낌상 그렇게 못생긴 얼굴은 아닐 듯싶었다. 아니, 솔직히 목소리로 추정하건데 꽤 미인일 것이다. 아주 금상첨화다. 절대 놓칠 수 없었다. ‘ 대회만 끝나면 슬쩍 납치해서…흐흐흐.’ 남작이 그렇게 속으로 음흉한 계획을 세우는 사이, 사회자가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고는 마이크를 잡았다. “ 자자, 다들 넋이 나가셨군요? 어서어서 정신들 챙기시고! 그렇게 함부로 정신이 가출하게 놔두시면 애 버릇 나빠집니다.” “ 와하하하하!” “ 자 그럼 드디어, 마지막 달의 여신 후보입니다!” 이미 유리엔에게 푸욱 빠져 다음 참가자는 안중에도 없던 관중들은 사회자의 입담에 한바탕 웃고는 마지막이라는 말에 무대 위로 이목을 집중했다. 이 화려한 대회의 마지막을 장식할 여인은 과연 누구일지에 대한 궁금증이 일은 탓이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대 안쪽으로부터 누군가가 사뿐사뿐 걸어 나오기 시작하자, 다른 후보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있던 유리엔이 피식거리다 이내 폭소를 터뜨렸다. “ 풋…푸하핫!” 다른 후보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든 말든 유리엔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마지막 참가자는 역시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풍성한 드레스는 바로 눈길을 사로잡았고 곱게 화장한 얼굴은 화사하면서도 무척 예뻤다. 특히나 그 여인의 매력 포인트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머릿결을 자랑하는 하늘색의 긴 생머리였다. 여인이 한 걸음씩 무대 앞으로 걸어 나올 때마다 하늘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찰랑였다. 이 때 유리엔은 웃겨서 거의 넘어가기 직전에 이르렀다. “ 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아름다운 여인입니…큽, 푸흐흐흡!” 마침내 마지막 참가자가 미모를 뽐내며 무대 앞까지 다다르자, 마이크를 들고 소개를 시작하려던 사회자는 그만 격하게 터져 나오는 웃음에 입을 막았다. 사회자와 마지막 참가자는 무척 가까운 거리였고 가까운 만큼 얼굴 생김새가 자세히 보였다. 그리고 그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사회자는 도저히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 뭐야?” “ 뭐지?” 갑작스레 사회자가 몸까지 부들부들 떨어가며 웃음을 참는 모습을 보이자 영문을 모르는 다른 관객들은 서로 의문을 담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관객들을 향해 찰랑이는 하늘색 머리의 여인이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 안녕하세요?” “ ……! 큽!” “ 푸헉!” “ 크흡!” “ 서, 설마!” 관중들 중 몇몇의 눈이 부릅떠졌다. 무대와 가까운 앞쪽에 자리 잡은 이들은 슬슬 깨닫고 웃음이 터지기 직전의 상태가 되었고, 뒤쪽에서 아직 상황파악이 안되어 어리둥절해 있던 이들은 여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표정이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여인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 레듀르 최고의 미녀, 로바카샤에요.” 그리고, 그녀의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관객들 중 레듀르의 시민인 사람들은 바닥을 굴렀다. “ 푸하하하하하하하하!!” “ 끄하하하하하하하!!” “ 꺄하하하하하하!!” “ 푸헤헤헤헤헤!!” 그들은 배를 부여잡고 눈꼬리에 맺히는 눈물을 닦으며 웃어댔다. 폭소의 도가니탕. 사회자 또한 마이크를 집어던지고 웃기 시작했다. “ 대체 뭐지?” “ 뭐하는 거야?” 하지만 나머지 관객들은 이 격렬한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그 나머지 관객들은 대부분 타 도시에서 왔거나 귀족들이었다. 그렇다. 마지막 참가자의 정체는 바로 노바카사였다. 그는 유리엔의 부탁 아닌 부탁(‘만약 이렇게 부탁하는데 들어주지 않는다면 나는 너무도 슬퍼서 정말 실수로, 고의 아니게, 나도 모르게 파이어 볼을 생성시켜 그 하늘색 머리카락을 태워버릴지도 몰라’라는)에 의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여장을 하고 대회에 나오게 된 것이다. ‘로바카샤’는 유리엔이 손수 지어준 이름이었다. “ 푸하하하하! 너, 너 노바카사 그 꼬라지가 대체…푸흐흐흡!” “ 파하하하하!!” “ 큭큭큭큭. 푸하하하하!” 레듀르 제일의 카사노바답게 노바카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는 생각보다 발이 넓었던 것이다. 게다가 특히나 노바카사와 무척 가까운 사이거나 혹은 철전지 원수인 이들은 웃다 못해 바닥에 쓰러져 부들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노바카사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어리둥절할 상황이었다. 그들의 눈에 노바카사는 그저 키가 조금 큰 ‘로바카샤’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레이디였으니까. 어찌나 위화감이 없는지 요모조모 뜯어봐도 그저 여인으로 보였다. 대박. 그게 더 웃겼다. 웃다 지친 사람들이 숨을 골랐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보며 유리엔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아무렴 대회의 마지막-하이라이트라면 이 정도는 웃겨줘야지. 유리엔은 자화자찬하듯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너무 웃어서 실신 직전까지 갔던 사람들은 이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거나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 휘익~! 이쁘다, 로바카샤!” “ 로바카샤짱! 로바카샤 최고!” “ 너무 예쁘다!” 그들의 환호에 노바카사는 도도하게 머리카락을 한번 찰랑여주고 뒤돌아 걸어 나갔다. 그 전에 살짝 몸을 틀어 관중들을 향해 손 키스를 날려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손 키스에 사람들이 다시 한 번 자지러진 것은 당연한 사실. 노바카사는 그렇게 대회의 마지막을 큰 웃음으로 장식하는 것에 성공했다. 한편, 남작은 다시금 멍하니 넋이 나가있었다. 노바카사가 퇴장한 뒤에도 그의 눈길은 무대로 머물렀다. 그의 눈앞으로 노바카사가 하늘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휘날리며 아름답고도 청초한 미소를 짓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남작은 두 손을 꼬옥 쥐었다. ‘ 소싯적 내 첫사랑과 꼭 닮았구나!’ 달의 여신 대회의 마지막 참가자인 로바카샤양은 젊었을 적 남작을 사랑의 열병으로 쓰러지게 만들었던 첫사랑의 그녀를 완전히 빼닮아있었다. 두근두근. 남작은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 # 55편 # 소제목 : 달빛아래에서 블루스. (9) ================================ “ 내가 이겼지?” “ …그래.” 팔짱을 끼고 씨익 웃으며 유리엔이 당당히 내뱉은 말에 카엘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혹시나 했지만 정말로 우승을 차지해 버리다니. 내기는 유리엔의 승리였다. 노바카사의 퇴장 직후, 영광의 이름인 달의 여신은 당연한 수순을 밟듯 유리엔에게 돌아갔다. 그에 따른 물질적인 상품으로 유리엔은 사회자로부터 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크기의 꽃다발과 넉넉한 양의 돈까지 받을 수 있었다. 돈이야 물론 신혼 첫날밤에 가출 할 때 보따리에 몰래 챙겨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못해 철철 넘쳤지만, 대부분이 보석이었으므로 사용을 위해서는 환전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그 귀찮음을 줄였다는 기쁨으로 유리엔은 기꺼이 상금을 받아 챙겼다. 그리고 노바카사는 전례 없는 특별상을 수여받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한 공로를 그냥 넘길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유리엔은 내심 뿌듯했다. “ 그런데 너.” “ 응?” “ 피아노라니, 엄청 의외다?” 카엘은 툭 던지듯 말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사실 그는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처음 유리엔이 무대 위로 피아노를 끌고 나왔을 때는 쟤가 저런 것도 칠 줄 알고 웬일이래, 라는 생각이었는데 실제로 연주를 들고나니 이건 뭐 사기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실력이 아니던가. 게다가 노래는 또 어떻고? 그 녹아내릴 듯한 로맨틱한 소녀취향의 곡이라니 아무래 애써 봐도 평소의 유리엔과 잘 매치가 되지 않았다. 세상 모든 음유시인들을 좌절시킬 목소리와 노래실력에 감탄이 절로 나오는 피아노 연주라니. 뭐랄까 카엘은 살짝 속은 듯한 기분이었다. 분명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단 말이지. 유리엔은 카엘의 말에 피식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 이래 뵈도 명색이 황녀잖아? 어렸을 때 스파르타식으로 좀 배웠지.” “ 어렸을 때?” “ 배우긴 그때 배웠는데 치는 건 최근까지 계속 쳤어.” 특히 황실에서 무슨 연회라도 열리면 반강제로 끌려 나가서 치곤했었다. 그럴 때면 항상 쾅쾅거리는 장엄한 멜로디가 압권인 공포의 전주곡을 심취해서 연주했었지. 귀족들의 표정이 참 볼 만했는데 말야. 그때를 떠올리며 유리엔은 잠깐 동안 향수에 젖어들었다. “ 흐음. 근데 피아노보다 더 의외인건.” “ ?” “ 푸른 장미라니…너 그런 노래도 부를 줄 알았냐?” 푸른 장미를 입에 담는 카멜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이 곡은 정말이지 유명하기는 장난 아니게 유명하지만 도통 그의 성격상 좋아하기는 힘든 가사의 노래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에 대한 로맨틱한 환상에 휩싸인 소녀들의 입맛에 맞춘 내용이었으니까. 솔직히 유리엔의 평소 성격으로 볼 때 이런 곡을 부를 줄은 몰랐다. 유리엔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 아아, 그거? 어쩌다 주워들었는데 멜로디가 엄청 좋아서.” “ 멜로디는 확실히 괜찮지.” “ 가사는 병신이지만.” “ 그래, 병신…뭐?” 툭 내뱉어진 푸른 장미 가사에 대한 신랄한 평에 카엘이 멈칫했다. 뭐라, 병신? “ 로맨틱이 아니라?” “ 로맨틱? 그건 또 무슨 개풀 뜯어먹다 목에 걸려 객사하는 소리래.” “ 그럼?” “ 그건 그냥 병신 가사야. 내용도 봐, 혓바닥 하나로 공주는 물론 마녀까지 구워삶는 희대의 카사노바에 대한 이야기잖아.” …그런 거냐? 그 이상 쌈박할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한 유리엔의 푸른 장미 내용해석에 카엘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 게다가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걸 대표적으로 보여주지. 실제로 그렇게 해서 공주와 마녀를 꼬실 수 있을 것 같아? 택도 없어.” “ 그럼 왜 푸른 장미를 부른 건데?” “ 말했잖아. 멜로디가 좋아서.” “ 끝?” “ 끝.” 아하. 카엘은 자연스럽게 납득해버렸다. 하긴 이럴 줄 알았지. 어디 유리엔이 그런 곡에 대해 로맨틱을 느낄 만한 성격이던가. 그 정도로 소녀틱한 감수성을 지니려면 아예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 저게 본 모습인 거다. 딱히 따로 할 말이 없어 카엘은 따로 생각에 잠길 겸 입을 다물었다. 그가 조용해지자 유리엔도 이내 상금으로 받은 돈의 액수를 세는 작업으로 신경을 돌렸다. 여관이 아닌지라 촤르륵 하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돈을 바닥으로 쏟는 행동은 하지 못했지만 대신 눈대중으로 약간 작다싶은 주머니 안의 돈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런 유리엔을 카엘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신이 보기엔 가면과 갈색머리가 영 어색하다. 대회에 참가하느라 사 입었던 소박하면서도 깔끔한 드레스는 아직 갈아입지 않았는데 어쩐지 입고 있으니 다소 언벨런스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그는 아까 자신이 저 모습에 넋을 잃었었다는 떠올렸다. 물론 넋을 잃었다는 사실 자체가 딱히 놀랍거나 하지는 않았다. 너무 충격을 받거나 놀라운 일을 겪어도 충분히 사람은 넋이 나가지 않는가. 자신도 검둥이의 평소와는 전혀 다른 너무 의외의 모습에 놀라서 넋이 나간 거였을 뿐이니까. 카엘은 일부러 자각하려하지 않았다. 그때 분명, 제 심장이 평소보다 빠른 박동 수를 띠었던 것의 이유를. 이때- 카엘과 유리엔이 나름 평화롭고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로, 노바카사는 위기에 처해있었다. ================================ # 56편 # 소제목 : 달빛아래에서 블루스. (10) ================================ “ 으, 으아악! 왜 이러세요!” 남작은 일을 저질렀다. 그가 고용한 용병들이 양 옆에서 아직 여장도 지우지 못한 노바카사를 붙잡고 있었다. 분을 잔뜩 칠해 새하얘진 노바카사의 얼굴이 한층 더 하얗게 변했다. “ 후후. 너무 겁내지마, 나의 아기고양이.” “ 허억!” 남작이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부들부들 떠는 노바카사의 턱을 손가락으로 받쳐 올렸다. 노바카사는 진심으로 토기가 쏠리는 것을 느꼈다. “ 저, 저, 저, 저기요.” “ 으음?” “ 저, 저는 남자거든요?” “ 하하, 웬 말도 안 되는 농담인가, 나의 천사?” “ 지, 지, 진짠데요.” “ 이런 이런. 계속 그런 말 하면 혼내줄 거야. 응?” “ 사…사람 살려.” 노바카사는 제대로 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정말로 인정하기 싫지만, 이 남작은 자신에게 완전히 꽂혀버린 듯싶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어쩜 이런 미친 상황이. 게다가 아무리 봐도 이 남작 상변태에 또라이다. 노바카사는 마구 소리쳤다. “ 사람 살려! 도와주세요!” “ 입 막아.” “ 읍-우으읍!” 우락부락한 용병의 거친 손에 입이 막힌 노바카사는 그대로 들쳐 업혔다. 화들짝 놀란 노바카사가 온 힘을 다해 버둥거리자 기절시키려는지 용병들 중 하나가 주먹으로 배를 세게 올려쳤다. “ ……!”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통증이 엄습하면서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흐려지는 눈앞에 노바카사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어머니 저 이렇게 가나요. “ 그러게 반항하지 말았어야지. 자, 어서 내 저택으로 가자고. 얼른 가서 예뻐해 줄 테니까…흐흐흐.” 오 마이 갓. 노바카사는 당장이라도 신께 빌고 싶은 기분이었다. 제발 구해주세요. 누구든 이 상황에 짠하고 나타나서 자신을 구출해준다면 당장이라도 엎으려 감사할 텐데. 그런 노바카사의 간절한 소망이 먹히기라도 한 건지, 때마침 누군가가 남작과 용병들을 막아섰다. 새하얀 가면. 그것을 발견한 남작이 입이 큼지막하게 벌어졌다. “ 오오, 너는!” “ 뭐야, 이 길가다 개미를 밟아 죽인 것보다 더 저질스러운 시추에이션은?” 나타난 이는 유리엔이었다. 물론 옆에는 후드를 쓴 카엘도 함께였다. 막 들쳐 업힌 채로 어딘가로 이송되려던 참의 노바카사를 발견한 유리엔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 나 참. 드레스 회수하려고 찾았더니만 이건 뭐래.” “ 읍! 으읍!” 노바카사는 다시금 힘껏 꿈틀거렸다. 유리엔이 나타나자마자 그는 용기가 마구 솟구쳐 올랐다. 그가 알기로 유리엔은 시동어만으로 파이어 볼을 날려대는 뛰어난 마법사였다. 덤으로 옆의 카엘은 더 뛰어난 검사. 절대 이깟 용병 몇 명을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노바카사의 희망을 꿈에도 모르는 남작은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 안 그래도 잡으러 가려 했더니 알아서 굴러들어오는구나. 흐흐.” “ 넌 뭐야?” “ 말버릇이 형편없구나. 뭐, 그거야 대충 교육시키면 될 일이지. 자아, 다치기 전에 순순히 이리로 오거라.” 미간을 찌푸리는 유리엔에게 남작이 이리로 오라며 손짓했다. 그런 남작의 곁으로 용병들이 험악한 인상을 뽐내며 모였다. 협박용이다. 유리엔은 코웃음을 쳤다. “ 제정신과 개념이 나란히 손잡고 가출했니? 야, 헛소리 말고 당장 그 하늘색 머리 내려놓고 꺼져.” “ 뭐라고?” “ 머리 벗겨지고 배 나온 돼지야. 귀 안 들려? 꿀꿀대지 말고 걔 내려놓고 꺼지라고.” “ 뭐, 뭐가 어째? 감히…!” 남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에게 있어 이렇게 신랄한 말을 듣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것도 고작 천한 평민에게 모욕을 받았다 생각하니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남작이 침을 튀기며 외쳤다. “ 당장 잡아서 무릎 꿇려! 감히 고귀하고 위대한 대 귀족인 나에게 그런 말을 지껄이다니, 울며 사죄하게 만들어주마!” “ 얼씨구.” 남작이 소리치자 주변에 있던 용병들 몇 명이 유리엔에게 달려들었다. 유리엔은 몸을 날리는 용병들을 바라보며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고는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 쯧쯧. 덤빈다 이거지? 파이어 볼!” “ 피식, 무슨 마법사 흉내를…으어억!” 화르르륵! 유리엔이 시동어를 외치자 피식 하고 비웃던 선두의 용병은 곧바로 어른 머리통만한 불덩이에 집어삼켜졌다. 뿐만 아니라 순식간에 옆으로 번지는 불길에 주변의 몇몇 용병들도 화상을 입고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당황한 표정이었고, 특히 남작은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렸다. “ 너, 너 이 계집-마법사였나?” “ 비슷하지.” “ …호오, 그렇단 말이지?” 놀라는가 싶던 남작은 이내 여유로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남작은 씨익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 믿는 구석이 있었단 말이지. 만약을 대비해서 직속 호위 기사를 데려오길 잘했어.” 물러난 남작의 앞으로 정식 갑옷을 차려입은 두 명의 기사가 나타났다.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은 두 기사는 제법 장신이었는데 척 보기에도 한가락 하는 듯한 포스가 풍겨 나왔다. 남작은 거만하게 팔짱을 꼈다. “ 기이사, 그리고 기사임!” “ 예.” “ 저번에 특별히 마련해준 갑옷은 잘 챙겨 입었겠지?” “ 물론입니다.” “ 흐흐흐! 아주 좋아.” 남작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얼마 전, 왠지 모르게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남작은 원래는 뇌물로 바치려 준비했던 엄청난 거금을 들여 뛰어난 기사를 둘 영입한 적이 있었다. 그 둘이 바로 방금 앞으로 나선 기이사와 기사임이라는 이름의 두 기사였다. 게다가 남작은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아 특별한 루트를 통해 세트로 갑옷까지 구입해 그들에게 입혔다. 그 갑옷으로 말할 것 같으면, 더럽게 비싸고 겁나게 귀했지만 그만큼 뛰어난 성능을 지니고 있는 고급 플레이트 메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바로 웬만한 철검은 물론 마법까지 막아낸다는 엄청난 방어력이다. “ 잘 봐라. 이 둘이 입은 갑옷은 무려 이펙트가 걸려있어서 어지간한 마법은 죄다 막아내지. 크크, 계집! 네가 얼마나 잘난 마법사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둘은 절대 이길 수 없을 거다. 흐흐!” 남작의 자신만만한 말에 덜컥 겁을 집어먹은 것은 노바카사였다. 여전히 입이 막혀있는 노바카사의 표정이 급속히 창백해졌다. 자신이 보기에도 나타난 두 기사는 너무나 강해보였다. 희망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 # 57편 # 소제목 : 달빛아래에서 블루스. (11) ================================ 그러나 유리엔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유리엔은 남작의 말에 ‘아, 그래?’하고 대답하며 손짓으로 파이어 볼을 날렸다. “ 파이어 볼!” 화르륵. “ -호오?” 불덩이는 처음에는 두 기사를 정면에서 집어삼키는가 싶더니, 아주 잠깐 동안 타오르다 곧바로 맥없이 꺼져버렸다. 둘은 검도 뽑지 않은 채였다. 순전히 갑옷의 효과다. “ 진짜였네?” “ 훗, 당연하지. 그 갑옷이 얼마짜린데 이 정도쯤이야. 흐흐!” 파이어 볼이 통하지 않자 노바카사의 눈동자에 절망이 차올랐다. 안돼! 자신의 가엾은 운명은 어찌하라고! 그는 마음속으로 울부짖었다. 유리엔은 마법이 막혔음에도 여전히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 참, 그런데 일단 하늘색 머리는 좀 내려놓지? 여잔 줄 알고 납치하려고 한 것 같은데 걔 남자야.” “ 뭐라? 웃기는 소리. 어딜 봐서 이게 남자란 거냐?” 남작은 유리엔의 말을 비웃으며 노바카사를 바라보았다. 이리저리 아무리 뜯어봐도 예쁘장한 생김새다. 게다가 자신의 첫사랑을 쏘옥 빼닮지 않았는가. 아주 어여쁘다. 노바카사를 끈쩍한 눈길로 바라보기 시작한 남작에게 유리엔이 한심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 남자 맞거든? 걔가 좀 이상한 취미가 있는 변태라서 여장을 한 것뿐이야.” “ 으으읍! 으으으읍!” 이상한 취미에다 변태라는 말까지 들은 노바카사가 있는 힘을 다해 부정했지만 유리엔은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 정 의심되면 확인해보든가. 걔 가슴 그거 찐빵 두개 넣은 거거든.” “ …정말이냐?” 남작이 슬슬 의심의 기색을 내비쳤다. 사실 내심으론 조금 흔들리던 차였다. 솔직히 여자보다 예쁜 외모의 남자를 아예 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더해서 노바카사의 목소리가 여성의 것치고는 좀 지나치게 굵었기에 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었던 것이다. 정말로 남자인가? 진실로 저 가슴은 찐빵일 뿐인 것일까? 남작은 은근히 떨려오는 마음을 추스르며 결정을 내렸다. “ 확인해봐라.” “ 그러죠, 남작나으리-.” 찌이익-. “ !” 남작의 명령에 노바카사를 들쳐 업고 있던 용병이 그대로 노바카사가 입고있던 드레스의 가슴부근을 손으로 잡아 찢어 내렸다. 노바카사는 떨리는 눈동자로 연약하게 찢겨나가는 드레스자락을 응시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둥글둥글한 모양의 찐빵 두 개. 푹신하고 심지어 따끈해 보이는 그것은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천에 묶여 노바카사의 납작한 가슴에 고정되어 있었다. “ …….” “ …….” 침묵이 흘렀다. 남작은 멍하니 그 찐빵을 바라보았다. 순간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마치 배신을 당한 기분이다. 옷을 찢은 용병은 노바카사가 남자라는 것을 알자마자 쓰레기 씹은 표정으로 들고 있던 노바카사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철푸덕, 하고 바닥에 엎어진 노바카사는 두 팔로 가슴의 찐빵을 수줍게 가렸다. 실로 가녀린 모습이었다. “ 이제 남잔 거 알았어? 그럼 걔 이리로 보내.” 진정 충격받은 듯한 그들의 반응에 피식 웃은 유리엔이 손가락을 까딱하며 말했다. 남작은 대답이 없었다. “ 어떡할깝쇼, 남작나으리?” “ …….” 손을 탁탁 털며 용병이 남작에게 물었다. 남작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첫사랑을 닮은 그녀라 생각했는데…어여쁜 여인이라고 여겼는데…알고 보니 여장한 남자였다니.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한동안 멍한 상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남작은 그로부터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입을 뗐다. “ …후우-어쩔 수 없군. 난 남색에는 영 취미가 없으니.” 안타깝지만 자신에게 남자라는 생물은 아웃 오브 안중의 존재다. 아쉬운 듯한 남작의 말에 노바카사의 얼굴에 급작스럽게 화색이 돌았다. 새롭게 비치는 구원의 빛에 노바카사의 눈동자가 희망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어진 남작의 말은 다시금 노바카사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처박기에 충분했다. “ 좀 아깝긴 하지만 별 수 없지. 내 윗선들 중 남색을 밝히는 귀족에게로 넘겨야겠군. 도망치지 못하게 잘 붙잡고 있거라.” “ 아, 안돼!!” 노바카사가 처절하게 외쳤다. 누구한테 누굴 넘겨? 뭘 밝혀? 그럴 순 없다. 자신의 청춘이 그리도 허무하게 팔려갈 수는 없었다. 그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미인박명이라더니. 노바카사가 너무도 아리따운 나머지 화를 부른 자신의 미모를 한탄하는 동안 남작은 유리엔을 향해 말을 내뱉었다. “ 참, 그리고 가면 쓴 계집아. 네년은 사로잡아 그 버릇없이 함부로 놀려대는 혀를 잘라버리고 싶지만-노래를 잘 부르니 그럴 수는 없지. 대신 이리저리 굴려서 성질과 입버릇을 고친다음 노예로 삼아주겠다. 큭큭. 어디 가면을 벗겨보고 얼굴이 썩 괜찮으면 침실노예로도 써주마.” 남작의 막말에 유리엔이 눈썹을 찌푸렸다. 당장 사형이라는 즉결처분을 내려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엄청난 막말을 내뱉는 남작에게 유리엔이 뭐라 한소리 해주려는 찰나, 그런 유리엔의 팔을 잡아 제 뒤로 끌어당기며 카엘이 입을 열었다. “ 다친다.” “ 뭐?” “ 보니까 슬슬 저 기사 둘을 나서게 할 것 같은데.” “ 괜찮아!” “ 안 괜찮을 걸. 방금 마법 안 통했던 거 잊었어?” “ 윽…그러니까 좀더 강한 마법이펙트가 걸린 반지를 줬어야 될 거 아냐?” “ 이것 봐라. 검둥아, 너 그게 얼마짜리인 줄은 아냐?” “ 모르네요.” “ 엄청 힘들게 구한 거라고, 그 반지.” “ 내 알바 아니네요.” “ 그러셔? 그럼 다시 회수.” “ 야! 지금 치사한 거 자랑해?” “ 그럼 불평하지 말고 쓰든가?” 어느새 둘은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일상의 한 장면처럼 자연스럽게 둘의 투닥거림이 진행되자, 남작은 그 순간 자신의 존재가 잊혀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왠지 무시당한다는 느낌과 소외감을 이기지 못한 남작이 둘을 향해 소리쳤다. “ 뭐하는 거냐! 천한 것들, 죽고 싶지 않다면 당장 내 앞에 무릎을 꿇거라!” “ 야, 개기름돼지.” “ 뭐, 뭐?!” 남작의 외침에 카엘이 짜증스런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유리엔은 여전히 제 등 뒤로 끌은 채였다. “ 아까부터 듣자듣자 하니까 뭐? 누구를 어떻게 해? 뭐로 써? 돼지야, 하늘나라가 얼마나 포근하고 안락한지 궁금해? 어디한번 산채로 삼겹살과 등심과 족발로 나누어져 볼래? 응? 어디 부위별로 썰려볼래?” 그렇게 말하는 카엘의 얼굴은 후드로 가려져서 남작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상당히 기분 나쁜 오오라를 발산하고 있었다. 남작은 유리엔의 화법을 닮아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온 카엘의 말에 잠깐 동안 당황한 듯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내 버럭 화를 냈다. “ 뭐가 어째! 네 이놈, 말 버릇이 그 가면 쓴 계집과 똑같구나. 당장 뼈를 발라 버리겠다! 기이사, 기사임!” “ 예.” “ 당장 저놈을 잡아다 내 앞으로 끌고와라!” “ 알겠습니다.” 남작의 명령에 기사 둘이 고개를 숙이며 부복했다. 그들은 검을 뽑아들더니 카엘에게로 어슬렁 거리며 다가왔다. 마치 별거 아닌 삼류를 상대하는 듯한 태도다. 나름 검술로서 잘나간다고 자부하는 그들의 눈에 카엘은 그저 후드를 뒤집어쓴 수상한 놈팽이일 뿐이었다. 그들은 카엘을 그저 지나가는 행인에 불과하다고 여겼기에 그저 칼질 한 번이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카엘이 비웃었다. “ 하는 꼬라지을 보니 딱 알 만한 수준이군. 하긴, 저런 쓰레기 같은 귀족의 호위기사에게 기대를 하는 것도 우습지.” “ 뭐라고?”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에 순간적으로 멈칫한 기사 둘이 표정을 굳히며 살기를 내뿜었다. 주변을 압박해오는 살기에도 카엘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오히려 한술 더 떠 유리엔에게는 살기가 미치지 못하도록 알아서 반경을 조절해 막기까지했다. 완전 여유. 먼저 공격 할 필요도, 검은 뽑을 필요도 없다. 기사 둘의 검이 지척까지 다가온다 해도 카엘은 충분히 그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 정도의 실력이 있으니까. 때문에 카엘은 단지 그들의 살기를 흩트려버릴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 카엘을 겁을 먹어 움직이지 못한다고 멋대로 판단내린 기이사와 기사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역시 입만 산 놈이었군.” “ 순순히 끌려온다면 팔 하나로 봐주마.” 카엘과 약 3미터 정도를 남기고 선 기사 둘이 천천히 허리춤의 검을 뽑으며 말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카엘이 피식 웃었다. “ 돌았냐?” “ …! 감히!” 기이사보다는 참을성이 조금 부족한 기사임이 발끈하며 단숨에 검을 뽑았다. 매끈한 검신이 날카롭게 빛났다. “ 두 팔을 전부 못쓰게 만들어주마!” 그렇게 외치며 기사임이 달려들었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상대를 두 쪽 낼 것 같은 기세였다. 순식간에 카엘의 지척에 도달한 기사임이 그대로 카엘의 오른쪽 어깨를 노리고 비스듬히 검을 내리쳤다. 잘린다. 확신한 기사임이 입가에 비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챙! ================================ # 58편 # 소제목 : 달빛아래에서 블루스. (12) ================================ 챙! “ ?!” 기사임의 눈이 부릅떠졌다. 마찬가지로 뒤에서 검을 뽑다만 자세로 구경하고 있던 기이사 또한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챙, 이라니? 그것은 결단코 그들이 기대하던 소리가 아니었다. 살이 베어지는 것이 아닌, 같은 금속과 금속이 마찰해야지만 나는 날카로운 울림 따위는 조금도 예상하지 않았다. “ …….” 기사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검이 막혔다. 어떻게? “ 두 팔을 못 쓰게 만들어 준다고?” 기사임의 검을 막은 자세 그대로 카엘이 중얼거렸다. 놀란 나머지 기사임은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카엘과 검을 마주하고 있었다. 카엘은 기사임의 검이 막 어깨부근에 명중하기 직전 팔을 움직였다. 기사임의 실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뽑힌 카엘의 검은 너무도 손쉽게 기사임의 검을 막아냈다. 허공에 두 개의 검이 얽힌 채 멈춰있었다. 기사임이 힘겹게 마른침을 삼켰다. “ 어디보자, 그럼 나는.” “ …….” “ 두 다리를 못 쓰게 만들어 주면되나?” “ 자, 잠깐!” 기사임은 황급히 소리쳤다. 분명 보이지 않지만, 이상하게 후드 안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느낌이 들었다. 등줄기가 오싹해지며 식은땀이 솟기 시작했다. “ 이얍!” 그때 기이사가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그 또한 카엘이 검을 뽑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너무 빨라서가 아닌 단지 자신이 방심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렇지 않고서는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카엘은 아무렇지 않게 기사임과 맞대고 있던 검에 힘을 주어 횡으로 그었다. 서걱. “ ?!” “ !!” 무 잘리듯 두 기사의 검이 깔끔한 단면을 남기고 잘려나갔다. 두 동강 나는 자신들의 검을 바라보며 기이사와 기사임의 눈이 거의 튀어나올 듯 커졌다. 카엘의 등 뒤에서 몇 발자국 떨어져 팔짱을 낀 채 구경하던 유리엔이 호오, 하고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 소드마스터를 눈앞에 둔 실력이라더니 진짜였네?’ 검술을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구경이야 질릴 정도로 해본 그녀였다. 눈썰미만큼은 제법 있다고 자부하는 유리엔의 눈에 잠깐이지만 카엘의 검을 둘러싼 새하얀 마나가 잡혔다. 고작 열여섯의 나이인데 벌써 저 정도라니.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더욱 놀라웠다. 카엘의 검술 솜씨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검에 마나를 두르는 것은 처음 보았다. 저 정도의 실력은 강대국인 제 모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수준이었다. “ 이럴 수가.” “ 마, 말도 안돼.” 마찬가지로 그것을 목격한 기이사와 기사임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들은 이미 싸울 의지를 잃은 상태였다. 눈앞의 상대는 도저히 자신들의 실력으로 어찌 해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검도 잘린 상태인데 뭘 어쩔 건가. 덤볐다가는 바로 황천 행일 것이 자명했으니 기이사와 기사임은 알아서 몸을 사려야 했다. “ 뭐하는 거냐!? 당장 저 천한 것을 이리로 끌고 오지 않고!” 그러나 상황파악 못한 남작은 여전히 위풍당당했다. 그의 외침에 기이사와 기사임이 어처구니없는 눈빛으로 남작은 응시했다. 저건 눈이 없나? 우리 지금 검 잘렸거든요? “ 바보 같은 것들! 어서 움직이지 않고 뭘 멍청하게 있는 거냐!” “ 거 참 시끄럽네.” 카엘이 표정을 찌푸렸다. 남작의 외침은 상당한 소음공해였다. 시끄럽게 소리쳐대지 못하도록 기절을 시키려 남작에게 다가가려던 카엘은 미처 검만 잘렸을 뿐이지 사지육신은 멀쩡한 두 기사에게로 생각이 미쳤다. 자신이 남작을 입 닥치게 하는 사이 저 둘이 유리엔에게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카엘이 가볍게 검을 움직였다. 퍽! 퍼억! “ 꺽…!” 칼등으로 정확히 명치부근을 가격당한 기이사와 기사임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눈을 허옇게 뒤집고 널브러진 둘을 잠시 힐끗 내려다본 카엘이 남작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 자, 자자자잠깐 기다려라!” 기사 둘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은 남작이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뒷걸음쳤다. 물론 기다리랬다고 순순히 기다려줄 카엘이 아니었으므로 남작과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져갔다. 그러자 당황한 남작이 용병들을 향해 소리쳤다. “ 너, 너희들이라도 어서 막아! 당장 공격해라!” 그러나 용병들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오히려 그들은 남작에게서 슬슬 멀어지며 알아서 카엘에게 길을 비켜주기까지 했다. 그들도 눈이 있는데 카엘의 압도적인 실력을 똑똑히 보고도 겁 없이 달려들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남작은 새파랗게 질렸다. 이젠 이판사판. 남작은 품에서 화려한 장식이 되어있는 단검을 꺼내들었다. “ 제, 젠장. 다가오지마라!” “ ?!” “ …….” 카엘이 발을 멈췄다. 남작의 외침 때문이 아니라, 그의 두툼한 손아귀에 잡혀 목에 칼이 들이대어진 노바카사 때문이었다. 드레스가 다 찢어져 너덜거리는 모습으로 가슴에는 뭉개진 찐빵을 달고 있는 웃지 못 할 꼴의 노바카사는 현재 남작의 인질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남작이 다짜고짜 노바카사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당겨 그의 목에 꺼내든 단검을 들이밀은 탓이다. 악당이라면 꼭 한 번씩은 저지르는 흔한 인질극이 벌어지자, 카엘은 몸을 돌려 유리엔을 쳐다봤다. 어떻게 할지를 묻는 거다. 유리엔은 오른손을 들어 깔끔하게 목을 긋는 시늉을 해보였다. 인질 따위 알게 뭐야. “ 안 돼! 살려줘요!” 노바카사가 절박하게 외쳤다. 자연스레 몸이 흔들리면서 피부에 단검이 닿는다. 식은땀이 흘렀다. 카엘이 그것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 레듀르에서 살인 따위가 일어나게 할 것 같냐.” “ 네?” “ 이봐, 돼지.” “ 뭐, 뭐라고!” “ 인질놀이 재밌어?” “ …….” “ 재미있냐고 묻잖아.” “ 다, 다가오지 마라!” 말을 하면서 성큼성큼 앞으로 내딛은 카엘 덕분에 이제 둘의 거리는 거의 지척에 다다른 상황이었다. 남작이 단검에 힘을 주어 노바카사에게 바짝 들이대며 외치자 카엘의 움직임이 멈췄다. 남작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조, 좋아. 그럼 이제 검을 버리고 무릎을 꿇어라. 그러지 않으면 이놈을 죽여 버리겠다!” “ 그어봐.” “ 뭐, 뭐?” “ 어디 그어보라고, 그 단검.” “ …!” 예상하지 못한 카엘의 말에 남작이 흠칫했다. 그사이 카엘의 검이 바람같이 움직였다. 퍼억! “ 끄아악!” 단검을 들고 있던 손목을 칼등이 그대로 후려쳤다. 콰득, 하고 뼈가 부러지는 듯한 느낌이 들며 어마어마한 고통이 신경계를 타고 올라오자 남작은 곧바로 몸을 웅크리며 비명을 질렀다. 단검은 주인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노바카사는 죽을힘을 다해 후다닥 남작의 곁에서 떨어졌다. 최대한 멀찍이 도망가 쭈그려 앉은 노바카사는 죽다 살아난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며 심호흡을 내쉬었다. “ 자, 이제 어쩔까?” “ 끄으윽.” “ 네가 하려던 짓의 대가를 치러야지?” “ 이, 이 천한 것이 감히 내게….” “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 끄아악!” 눈에 독기를 품고 이를 갈던 남작이 정강이를 무자비하게 얻어맞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분명 우득, 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번에도 틀림없이 뼈가 부러졌음이다. 카엘이 그런 남작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이 자가 감히 저지르려던 짓이 무엇이었는지가 떠올랐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가볍게 넘어갈 수는 없는 문제였다. 그때 유리엔이 카엘의 곁으로 다가왔다. 딱 봐도 남작을 한대 팰 준비를 하고 있는 유리엔에게 카엘이 한마디 했다. “ 죽이려고?” “ 안 죽여.” 생긋 웃은 유리엔이 준비운동을 시작했다. 뭔가 거창하게 밟으려는 듯한 제스처에 고통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한 남작이 벌벌 떨었다. “ 돼지야. 너 아까 나한테 뭐라고 했더라?” “ 제, 제발 살려주십….” “ 침실노예로 삼아준다고? 얼굴이 반반하면?” “ 자, 잘못했….” “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거든. 그렇지?” “ 죄, 죄송합니….” “ 괜찮아. 어차피 다신 못 할 테니까.” 퍼어억!! “ ……!!” 남작이 눈을 부릅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부분에서 느껴졌다. 입에서 흰 거품이 올라왔다. “ …….” “ …….” 카엘과 노바카사, 그 외 몇몇 용병들은 침묵을 지켰다. 그들은 똑똑히 보았다. 유리엔의 발이 풀 스윙을 그리며 남작의 그곳을 정확히 걷어차는 것을. 그곳. 차마 걷어차이는 모습을 두 눈 뜨고 지켜볼 수 없는 그곳. 걷어차이는 순간 잔인하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는 바로 그곳. 게다가 유리엔의 발차기는 실로 엄청난 속도였다. 분명 바람을 갈랐다. 남작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엎어졌다. 자신의 그곳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바닥에 엎드린 자세로 남작은 간혈적으로 몸을 떨었다. 남작은 그 자세로 저 멀리 아득히 사라지려는 의식의 끊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왜 저를 남자로 낳으셨나요……. 남작은 세상을 원망하며 눈을 감았다. “ …크흠.” “ 어흠.” 용병들은 헛기침을 하며 눈을 돌렸다. 차마 남작의 불쌍한 모습을 더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같은 남자로서 폭풍처럼 연민이 솟구쳤지만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런 이들을 뒤로하고 유리엔은 몹시 개운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후련하다. 유리엔은 처참한 꼴의 남작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이제 다시는 애꿎은 여자를 건드릴 생각은 못할 거다. 뿌듯하다. 저절로 환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그러한 유리엔을 바라보며 노바카사는 생각했다. 평생 섬기자. 그래야 산다. 그는 굳게 결심했다. ================================ # 59편 # 소제목 : 달빛아래에서 블루스. (13) ================================ “ 꺄악!” 한 소녀가 골목을 지나다가 갑작스런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손으로 입을 가린 소녀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얼룩졌다. 소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웬 40대 정도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 수줍은 팬티 하나만을 걸친 차림으로 기름기 넘치는 두툼한 살집을 그대로 내놓은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모습은 진정 변태 같았기에 소녀는 폭풍처럼 밀려오는 혐오감을 느끼며 뒤돌아 그 장소를 뛰쳐나왔다. 중년인의 근처에는 갑옷을 입은 두 명의 장정도 함께 쓰러져 있었지만 소녀에게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기억에 남는 것은 유독 뱃살의 두께가 뛰어나던 변태 중년인뿐이었다. 조금씩 시간이 흘러 어느새 소녀의 뒤를 이어 점차 하나 둘 새로운 목격자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골목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기에 이르렀다. 변태. 폭풍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노출증 변태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기사에 대한 소문은 순식간에 레듀르전체로 퍼져나갔다. “ …잔인해.” “ 뭐라고?” “ 여관 음식이 참 맛있다고요. 하하하하.” 어색한 웃음과 함께 슬그머니 유리엔의 시선을 피한 노바카사가 급히 자르고 있던 돼지고기를 입 안에 쑤셔 넣었다. 식은땀. 그는 재빨리 남몰래 그것을 손등으로 닦았다. 현재 노바카사는 유리엔, 카엘 일행과 함께 유리엔이 묵고 있는 여관에서 한가로이 점심을 해결하는 중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말로 터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람으로 미어터지던 여관은 이제는 제법 숨은 쉴 수 있을 정도까지 나아졌다. 아마도 달 축제로 일부 신경이 분산되었기 때문이리라. 접시위에서 칼질을 하던 노바카사의 오른손이 일순 미세하게 떨렸다. ‘ 잔인해!’ 그는 조금 전부터 그 말을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외치고 있었다. 방금 전에는 그만 입 밖으로 내뱉는 끔찍한 실수를 저질러 생명의 위협을 맛봤지만 어쨌든 노바카사는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들은 한 소문 탓이다. 레듀르에 변태 등장. 알고 보니 귀족. 시민들은 경악! …라고 요약되는 이 소문을 듣자마자 노바카사는 마시던 물을 뿜어야만 했다. 유리엔이 남작을 정의의 회오리차기로 응징하고 난 이후 하루가 지났다. 그때 도저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그곳에 격한 응징을 당하고 정신을 잃은 남작의 가엾은 운명은 안타깝게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남작은 노바카사가 입고 있었던 제법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무려 찢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었다. 당연히 그냥 넘어갈 유리엔이 아니다. 그녀는 찢어져 못쓰게 되어버린 드레스를 보상받아야겠다는 철혈의 의지 하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남작의 옷을 벗겼다. 그 상황을 상상한 노바카사의 손이 덜덜 경련을 일으켰다. 이해할 수는 있었다. 실제로 남작의 옷은 무척이나 고급스러운 비단으로 되어있었고 겉에는 주렁주렁 보석까지 매달려있었으니 충분히 찢긴 드레스의 값을 채우고도 남을 거였다. 자신이 입었던 드레스의 가격이 대충이나마 얼마인지 아는 노바카사로서는 그 무지막지한 가격을 보상받겠다는 취지를 감히 반박하고 나설 수 없었다. 뭐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때 노바카사는 진심으로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발하고 싶었다. 유리엔이 그 옷을 직접 벗겼으면 말도 안한다. ‘ 왜 하필! 왜 하필이면! 으흐흑!’ 노바카사가 벗겼다. 유리엔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남작의 옷을 벗기는 작업에 노바카사를 투입했다. 노바카사는 도저히 맨 정신으로 남작의 옷을 팬티만 남기고 모조리 벗겨내는 끔찍한 짓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유리엔에게 개길 수도 없었다. 개겼다가 죽으면 어쩔. 게다가 이미 충성의 맹세를 끝낸 뒤다. 그는 결국 눈물을 삼키고 손을 부들부들 떨며 남작의 출렁이는 속살을 두 눈으로 확인하며 옷을 죄다 벗겨냈다. 차라리 값으로 따지면 갑옷이 더 비싸지 않겠느냐고 살짝 항의해봤지만 무겁다는 이유로 기각당한 노바카사는 작업을 끝낸 뒤 한동안 정신적인 후유증에 시달려야했다. “ …저, 그런데요.” “ 왜?” 식사를 끝낸 유리엔이 입가심삼아 시킨 포도주를 홀짝거리며 노바카사의 물음에 대답했다. 살짝 핏기가 가신 표정으로 노바카사가 조심스레 문득 떠오른 물음을 꺼냈다. “ 그 남작 말입니다.” “ 응.” “ …과연 가만히 있을까요?” 노바카사는 유리엔 덕분에 졸지에 레듀르의 대표적인 변태(맞긴 하지만)가 되어버린 남작을 떠올렸다. 일반적으로 그런 치욕을 당하면 귀족들은 미친 듯이 분노하기 마련이다. 비록 쪽도 못쓰고 된통 당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귀족이니 과연 그런 소문을 듣고도 얌전히 짱 박혀 있을 지는 미지수였다. 보복을 하겠답시고 군대라도 이끌고 오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슬쩍 든 노바카사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노바카사를 보며 유리엔이 피식 웃었다. “ 자기가 가만 안 있으면 어쩔 건데?” “ 네?” “ 뭐든 해보라고 해, 뭐든.” 그렇게 말하며 유리엔은 남은 포도주스를 마셨다. 카엘이고 유리엔이고 노바카사의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당연하다. 남작이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둘의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것을 모르는 노바카사가 너무도 태연한 그들의 반응에 멍 때리고 있을 때, 유리엔이 갑자기 앉아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음식이 담겨있던 접시와 포도주가 있던 컵은 깨끗이 비워진 채였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두 사람에게 시원스런 미소를 지으며 유리엔이 말했다. “ 배도 채웠겠다, 그럼 이제 구경 좀 나가볼까?” 그리고 그 말과 동시에 두 남자의 낯빛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바야흐로 쇼핑의 시간이었다. 축제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거리는 가득 늘어선 노점상들과 몸 둘 틈 없이 북적거리는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더없이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한 거리곳곳을 유리엔은 물 만난 고기처럼 쏘다니기 시작했다. 먹을 것을 팔면 항상 사먹었고 행사를 하면 꼭 참가했으며 공연을 하면 반드시 구경했다. 처음 한 시간 정도야 셋 모두 즐겁게 놀았다. 두 시간 쯤 되니 노바카사가 슬슬 예전에 제 여친에게 마구 끌려 다녔던 기억을 상기시키며 표정이 어두워졌다. 세 시간이 흐르니 노바카사는 정신적으로 지쳤고 카엘은 슬쩍 타격이 왔다. 네 시간이 되니 노바카사는 몸과 마음 모두 녹초가 되어버렸고 카엘은 안색이 파래졌다. 그리고 해가졌다. 노바카사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해가 지다니. 어떻게 점심 먹고 바로 뛰쳐나왔는데 해가 질수 있단 말인가. 어두워지자 유리엔은 오히려 야경이 환상이라며 더욱 이곳저곳을 팔짝팔짝 뛰어다녔다. 절대 지치는 법이 없다. 지치기는커녕 힘들어 보이는 기색 따위도 전혀 없었다. 어떻게 저것이 인간의 체력인가. 저대로 놔 두면 밤을 새서라도 놀 듯한 기세다. 두려웠다. “ 뭐야? 완전 시체네, 시체. 그렇게 체력이 약해빠져서 어디 쓰겠어?”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 이제는 거의 의무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는 노바카사에게 유리엔이 혀를 츳츳 찼다. 억울했지만 뭐라 반박할 말이 없어 입술만 뻐끔거리던 노바카사는 이내 유리엔이 자신의 눈앞으로 불쑥 내미는 어떤 것을 보고는 입을 딱 다물었다. “ 이거라도 먹고 좀비에서 벗어나라. 자, 카라멜 너도.” “ …이건.” “ 다, 닭 꼬치!” 유리엔의 손에 들린 것은 기다란 닭 꼬치였다. 군데군데 피망과 같은 야채와 함께 꼬치에 끼워진 살코기들이 노릇하게 구워져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새빨간 양념으로 칠해진 모습은 정말로 맛있게만 보였다. 그러나 노바카사는 눈물이 나려는 것을 느꼈다. 카엘 또한 그닥 좋지 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리엔이 내민 것은 정확히 스물두 번째 닭 꼬치였다. 결국 카엘이 한 마디 했다. “ 제정신이냐?” “ 뭐라?” “ 어떻게 사람이 닭 꼬치가 스무 개를 넘게 먹어? 넌 똑같은 걸 그렇게 계속해서 먹으면 안 질려?” “ 이게 왜 똑같은 건데? 다 다르거든? 각자 다 다른 노점상에서 샀는데 똑같긴 뭐가 똑같아.” “ 닭 꼬치가 다 거기서 거기지.” “ 헐! 웃기시네. 각기 다른 장인이 저마다의 특별한 솜씨를 발휘해서 정성스레 만든 전부 개별적인 닭 꼬치들인데 거기서 거기라니! 하나 하나 섬세하게 서로 다른 맛들을 비교하고 음미하며 감사하게 먹지는 못할망정 뭐가 어째? 네가 지금 닭을 모욕했어?” “ 모욕? 닭에 대한 모욕은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거거든? 적당히 먹으면 맛있을 닭 꼬치를 계속해서 쉴 새 없이 퍼 먹이고 또 퍼 먹이니깐 이젠 완전히 질려서 아예 닭고기 혐오자가 되려는 지경까지 왔잖아! 왜 멀쩡한 사람을 닭 혐오자로 만들어? 너 닭한테 감정 있냐?” “ 뭐가 어째? 카라멜, 말 다했냐?” “ 왜, 다 안했으면 대신 해주려고?” 파지직! 스파크가 튀겼다. 둘은 거리 한복판에서 싸우고 있었다. 노바카사는 진심으로 울고 싶어졌다. 달 축제 덕에 제법 유명인이 되어버린 유리엔을 알아보고 여기저기서 힐끗거리는 사람들이 늘어가자 노바카사는 일단 둘의 싸움을 멈추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둘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다른 것을 찾아 정신을 헤맸다. 이리저리 고개까지 돌려가며 뭔가 눈에 확 띄는 것을 찾던 노바카사 순간 아, 하고 탄성을 내뱉으며 움직임을 멈췄다. 노바카사의 고개는 위로 들려져 있었고 눈동자는 하늘의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노바카사가 손가락을 들어 그것을 가리켰다. “ 달입니다! 달이 떴네요!” 레듀르의 달 축제가 자랑하는, 둘째 날에 가장 아름답다는 보름달이 검은 밤하늘을 배경삼아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 # 60편 # 소제목 : 달빛아래에서 블루스. (14) ================================ “ 호오-.” 달이라는 말에 반응해 노바카사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긴 유리엔이 작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잠깐이지만 넋을 놓고 시선을 빼앗길 만큼, 밤하늘에 뜬 달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 에헴. 어때요, 아름답죠? 저게 바로 레듀르의 명물 아니겠습니까. 하하핫.” 유리엔의 반응에 괜히 뿌듯해진 노바카사가 콧대를 세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리엔은 달의 매혹적인 자태를 감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카엘은 달을 바라보는 대신 유리엔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검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발끈해서 언성을 높여가며 했던 말싸움은 이미 달을 구경하는 몇 분 사이에 새까맣게 잊혀졌을 것이다. 그는 피식 웃음을 매달았다. 어느 샌가부터 카엘은 스스로가 유리엔과의 말싸움에서 어느 정도 태연해졌다는 것을 인지 할 수 있었다. 너무 빈번하게 일어나서 결국 익숙해져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더 이상 카엘은 유리엔의 말에 발끈하거나 빈정이 상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많이 싸웠고, 많이 들었으며 스스로가 유리엔에 대해 상당한 부분을 인정해버렸다. 그럼에도 카엘이 유리엔과의 말싸움에서 순순히 져주지 않고 일일이 맞받아치는 것은, 또 왜인지 모를 이유였다. “ 참, 그러고 보니 곧 춤출 시간이네요?” 안 그래도 많던 사람들이 더욱 모이는 것을 보며 노바카사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수수한 평상복애서 화려한 드레스와 정장까지, 각양각색으로 차려입은 사람들은 대부분 넓게 트인 광장으로 모이고 있었는데 그것은 단지 그곳에서 달이 잘 보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 춤?” “ 네. 둘째 날 밤에 달이 가장 환하게 빛난다고 말씀드렸었죠? 그리고 그 달빛을 가장 잘 받는 곳이 바로 광장이거든요. 그 때문에 달 축제의 둘째 날 밤에는 사람들이 전부 광장으로 모여 서로 춤을 추는 것이 거의 관례처럼 굳어지게 됐달까요.” “ 헤에?” “ 멋지지 않습니까? 은은한 달빛을 받으며 연인과 함께 낭만적으로 춤을 추는 거죠. 이른바 달빛아래에서 블루스!” 감격적인 듯 노바카사가 주먹을 치켜 올리며 말을 끝맺었다. 아무래도 그에게는 지금이 달 축제에서 가장 기대하던 시간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 에헴헴. 그럼 저는 잠시 아리따운 아가씨를 찾아서.” 슬쩍 유리엔의 눈치를 살핀 노바카사가 뒷걸음질치며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어갔다. 어서 미모의 여인을 찾아 함께 춤을 출 생각에 휩싸인 노바카사의 움직임은 언제 축 늘어졌었냐는 듯 매우 쌩쌩했다. 유리엔은 광장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몇몇 사람들이 이미 서로 짝을 이루어 마주보고 있었다. 즉석 만남인지 원래부터 함께 온 파트너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짝은 맺은 남녀들은 천천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민이 대부분인 만큼 전부가 부드럽고 격식 있게 춤을 추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두 개의 달이 자기들의 빛으로 그러한 연인들을 비춰주고 있었다. 은은한 달빛은 노바카사의 말 그대로 광장 전체를 더없이 낭만적인 분위기로 만들었다. 누구든지 곁에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면 함께 춤을 추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유리엔은 아낌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환한 보름달을 응시했다. 누가 그랬던가? 달빛에는 마력이 있다고. “ 한 곡 출까?” 갑작스런 목소리에 유리엔은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카엘이 그녀를 향해 한쪽 손을 내밀고 있었다. 달빛 때문에 짙게 음영이 드리워진 카엘의 모습은, 분명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넋을 놓게 만드는 무언의 매력이 있었다. 유리엔은 눈을 깜박였다. “ …뭐야?” “ 춤추자고.” “ 진심으로?” “ 그럼.” 당연하지, 하고 중얼거리며 카엘이 더욱 유리엔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 너 설마 취했니?” “ 술 마신 기억은 없는데.” “ 아니, 달빛에.” “ 그건 그럴지도.” 달빛에도 취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말하며 카엘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마치 너는 어때? 하고 물어오는 듯해 유리엔은 자신도 모르게 나도,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유리엔은 카엘의 손위에 제 손을 얹었다. 춤추는 것을 허락한다는 의미였다. 카엘은 어느새 손을 맞잡은 채로 유리엔을 광장의 중앙으로 이끌었다. 비치는 달빛이 더욱 환해졌다. 선명하게 드러난 카엘의 얼굴에 자리잡은 미소가 더욱 짙어지면서, 유리엔은 놀랍게도 아주잠깐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신이 이와 같은 낭만적인 분위기에 약했던가? 의아해하면서도 유리엔은 카엘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몸을 움직여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맞잡은 손을 타고 온기가 흘렀다. 유리엔이 입을 열었다. “ 음악도 없이 춤을 춰보네.” “ 감상은?” “ 그럭저럭.” “ 괜찮은 편인데.” “ 꼭 음악이 있어야만 춤을 출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흠, 솔직히 음악이 춤의 필요조건은 아니잖아?” “ 그럼?” “ 느낌이지.” “ 느낌이라….” “ 춤은 느낌으로 추는거야.” 그렇게 말하는 유리엔의 얼굴에도 미소가 맺혔다. 마주대한 온기가 더욱 따뜻하게 느껴졌다. 정말로 사람이 달빛에 취할 수 있다면, 아마 자신은 지금 만취상태일 것이다. …두근. 두근. 그리고 카엘은, 갑작스레 들리기 시작한 것이 자신의 심장소리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 # 61편 # 소제목 : 달빛아래에서 블루스. (15) ================================ 카엘의 손을 잡고 유리엔이 한바퀴 돌았다. 수수한 원피스의 끝이 팔락이며 동그랗게 원을 그렸다. “ 그러고 보니 아쉽네.” “ 뭐가?” “ 다음에 너랑 춤추게 되면, 꼭 발을 밟아주려고 연습까지 했었는데.” “ …언제 적 얘기야, 그건?” “ 새삼 옛날얘기 같아? 최근이네요.” 검은 머리카락이 어둠에 드리운 달빛의 영향을 받아 마치 은발처럼 보였다. 은색 실이 바람을 타듯 공중에서 찰랑이며 유리엔의 동작을 따라 움직였다. “ 한달쯤 됐나?” “ 환영파티 이후로?” “ 내가 여기에 온 이후로.” “ 그것밖에 안됐었나?” “ 그럼? 더 오래된 것 같아?” “ 조금.” “ 왜?” 유리엔이 질문하듯 말을 던졌다.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느낄 수 있었지만 카엘은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건, 글쎄. 한달도 채 안됐다기에는 너무도 익숙해서일지 모른다. 하지만 어째서 쉽게 익숙해진 것인지는 또 글쎄. “ 묻지 마. 미궁에 빠져들어.” “ 미궁이라- 그게 어때서?” “ 복잡한 걸 싫어하는 주의라.” “ 단순한 건 막 좋아하겠네?” “ 중간은 없는 거냐.” 유리엔이 킥킥 웃으며 뒤로 길게 허리를 몸을 젖혔다가 다시 카엘의 손을 잡고 앞으로 몸을 당겼다.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둘의 발이 서로 이동경로를 비슷하게 맞추며 같은 속도로 경쾌하게 움직였다. “ 참. 이건 탱고잖아.” “ 그렇지.” “ 달빛 아래에서 출만 한건 아닌데?” “ 신난다고 잘 춰놓고는.” “ 이걸 추면서 떠들지는 몰랐네. 호흡 안 딸려?” “ 너야말로?” “ 사실은 아주 약간. 넌 엄청 멀쩡하다?” “ …명색이 기사입니다, 레이디.” “ 아하.” “ 힘들면 이건 어때?” “ 응?” 카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갑자기 리듬이 느려졌다. 가볍게 손을 맞잡았던 한 손이 유리엔의 얇은 허리를 감싸 안으며 둘의 몸이 서로에게 바짝 가까워졌다. 눈앞에서 보이는 카엘의 얼굴을 마주하며 유리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뭐야. 블루스 추자고?” “ 그거 말고 더 있냐.” “ 엑. 그런 느끼하고 닭살 돋는 춤을? 그것도 너랑 나랑?” “ 왜? 봐, 주변에서 전부 그런 춤만 추고 있는데.” 그 말에 유리엔이 슬쩍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카엘의 말대로, 광장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서로 찰싹 붙어서 느릿하게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어색하지만 블루스. “ …그래서 우리도 저러자고?” “ 못할 건 없지.” “ 너 솔직히 제정신 아니지?” “ 취했다고 말 안했었나.” 달빛에, 잔뜩. 그 말을 듣고 유리엔이 소리 없이 웃었다. 아, 맞다. 취했었지? 자신도. “ 잊고 있었네.” “ 취한사람 맞아?” “ 그러게.” 주변의 사람들처럼 유리엔과 카엘도 느긋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서로에게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선 자세로 둘은 몸을 움직였다. 분명 아무 음악도 없는데도, 이유 없이 귓가에 잔잔하고 낭만적인 선율이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참…어디서 들은 적이 있거든.” “ 뭘?” “ 달에는 마력이 있다고, 누가 그랬던 것도 같고.” “ 맞는 것 같아?” “ 확실히.” 걔는 천잰 가봐, 하고 유리엔이 중얼거렸다. 마력이 있어서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거지. 살짝 맛이 갈 정도로. 그리고 그 중얼거림에 화답하듯, 카엘이 낮게 웃었다. 한참 부비부비에 열중하고 있던 노바카사가 불연 듯 춤추던 것을 멈췄다. 그가 헬렐레하며 눈을 빛내고 찾았던 미모의 레이디인 상대방 여성이 갑작스레 춤을 멈춘 노바카사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자신의 아름다운 피앙세가 의아하게 쳐다보던 말던 노바카사는 멍한 표정으로 시선을 광장 한가운데로 고정한 채 점차 넋을 놓고 있었다. “ 왜 그래, 자기야?” 빛의 빠르기를 방불케 하는 노바카사의 작업속도 덕에, 만난 지 5분 만에 ‘자기야’라는 닭살스럽다 못해 온몸이 버터로 뒤덮이는 것 같은 호칭을 쓰게 된 여성이 왜 그러나 싶어 노바카사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막 춤을 추기 시작한 유리엔과 카엘이 있었다. “ 어머…….” 화려하다. 그녀는 그렇게 느꼈다. 말 그대로 둘의 춤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딱딱 맞춰 끊어지는 격식 있는 기품마저 느껴졌다. 마치 귀족가의 파티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러한 둘의 춤은 얼마안가 멈췄다. 대신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천천히 블루스를 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바카사는 여전히 그 둘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비록 그가 직접 눈으로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유리엔과 카엘의 얼굴이 인간을 뛰어넘는 수준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지만, 둘은 현재 각각 가면과 후드로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저 평범한 남녀이상으로는 비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노바카사는 둘의 모습에 넋을 빼앗겼다. 그 넋은,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는 노바카사에게 화가나 여성이 구두 굽으로 그의 발을 힘껏 밟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축제는 겨우 둘째 날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남은 오일동안 레듀르 전체를 구경 다니며 마음껏 달 축제를 즐기겠다는 유리엔의 결심은 그만 그 블루스를 마지막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결국 사건이 터져버린 탓이다. 노바카사를 납치하려다 걸려 유리엔에게 처절한 응징을 당한 남작이 급기야 모욕이니 어쩌니 하며 사병들을 이끌고 아침부터 여관으로 쳐들어왔다. 게다가 그 전날 새벽에는 돈을 주고 고용한 것으로 보이는 암살자들까지 몰래 투입되어 한바탕 일을 벌였다. 어쨌든 쳐들어온 남작을 폭력으로 잘 타일러서 돌려보냈더니만 잠시 후에는 귀족 모독죄니 어쩌니 하며 공적인 힘까지 끌어들여 유리엔 등을 체포하려 나서버리고 말았다. 여기까지면 몰라도, 사건들은 중첩되어 연달아 일어났다. 제법 높은 직위의 귀족집안의 망나니 아들네미가 그만 달의 여신을 뽑는 대회에서 유리엔을 보고 한눈에 반해버린 것이다. 아버지의 권력을 등에 업고 여관으로 쳐들어온 망나니 귀족아들은 다짜고짜 유리엔을 데려가려고 난동을 피웠다. 게다가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확 퍼졌었던 ‘여신 등장’ 소문의 그 여신이 달 축제에서 달의 여신으로 뽑힌 여인과 동일인물이라는 얘기까지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면서 여러 가지 호기심과 욕심으로 다수의 귀족들을 끌어들이고 말았다. 개중에는 가볍게 무시하기에는 상당히 힘든 유명한 귀족까지 있었기에, 결국 참지 못해 죄다 엎어버리려는 유리엔을 간신히 말려 붙들고 카엘은 황성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와중에 시켜만 주시면 뭐든 하겠다며 들러붙은 노바카사는 덤으로 함께 황성으로 들어갔다. ================================ # 62편 # 소제목 : 봄날이 왔습니다. (1) ================================ 당연하지만, 황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유리엔은 카엘과 함께 나란히 앉아서 황제부부의 걱정 어린 잔소리에 장시간 시달려야했다.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잔소리에 결국 참다못한 유리엔이 이마를 짚고 가녀리게 쓰러지는 연기를 펼쳐 보인 다음에야 둘은 이런저런 설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황태자비의 가출이라는,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것이 틀림없는 사건이 일어났었음에도 황성이 아무런 변화 없이 조용한 이유는, 알아서 황제가 철저히 입단속을 시켜 소문으로 퍼져나가지 않았기 때문일 터였다. 덕분에 평소와 다름없는 분위기로 성 안의 시간은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유리엔은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 생일파티?” “ 네.” 루네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보름 뒤 드아이스 저택에서 루네의 열다섯 번째 탄생일을 기념하는 파티가 열릴 예정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루제와 루네의 공동 생일파티겠지만. 유리엔의 눈동자가 흥미로 반짝였다. “ 흐음.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생일선물을 준비해야겠는데?” “ 아, 아녜요, 언니. 언니는 그저 파티에 와주시기만 해도 기뻐요.” “ 후후. 말은 고맙지만 그럴 수야 없지. 아주 멋진 걸로 준비해줄 테니 기대하렴.” “ 어, 언니.” 반짝반짝. 도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지, 검은 눈동자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빛을 반짝였다. 잠시 뒤 루네를 돌려보내고 유리엔이 다짜고짜 급습한 곳은 바로 카엘의 집무실이었다. 벌컥! “ 야, 카라멜!” 왠지 며칠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을 겪은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며 카엘이 읽던 서류에서 눈을 떼고 유리엔을 쳐다보았다. 다짜고짜 예고도 없이 남의 일하는 곳에 쳐들어온 아녀자치고는 무척이나 당당한 모습의 유리엔을 향해 카엘이 한숨과 함께 말을 뱉었다. “ 넌 왜 항상 노크는 어디다 팔아먹고 이런 비매너냐.” “ 됐고. 너 저번에 내가 물어봤던 거 기억해?” “ 뭐?” “ 트아로민 경이던가…네 호위기사 나이.” “ 아, 제론? 제론이라면…올해로 스물여덟이지.” “ 스물여덟?!” 생각보다 많은 나이에 유리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뭘 그렇게 놀래? 그럼 명색이 황태자의 호위기사인데 새파랗게 어린애일 거라고 생각했냐.” “ 암만 그래도…그럼 내후년이면 서른?!” “ 그렇지.” “ 헐.” 이럴 수가. 유리엔은 루네를 떠올렸다. 루네의 나이가 열다섯이니 무려 띠 동갑을 넘어서는 나이차이가 난다. 유리엔은 살포시 당황했다. 린의 설명에 따르면 멋있고 잘생겼고 늠름하고 하여튼 기타등등 장점만 가득한 괜찮은 남자라길래 대충 나이가 맞으면 루네와 슬그머니 이어주려던 생각을 하던 차였다. 그런데 열세 살 차이. 이건 좀 벽이 높다. “ 잠깐. 그런데 스물여덟이면 혹시 유부남…일지도?” “ 그럴 리가.” “ 아니면 결혼을 약속한 상대가 있다던가.” “ 아닐걸.” “ 혼자만의 사랑을 하고 있다던가.” “ 그건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것도 아니…그런데 너.” “ 응?” “ 뉘앙스가 은근히…….” “ 내가 뭘?” “ 제론이 유부남이거나 아니면 애인이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짝사랑하는 상대라도 있기를 바라는 것 같다?” “ …크흠.” 카엘의 말에 어색한 헛기침과 함께 유리엔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정곡을 찔렸을 때 나타나는 반응의 표본을 보여주는 것 같은 유리엔의 행동에 카엘이 낮은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 너 말이다. 제론과 그 루네라는 드아이스 남작의 딸을 이어주려는 거 아니었냐?” “ 음…그랬었지.” “ 그랬었지? 어째 과거형이다?” “ 알고 나니 둘이 나이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급 고민 중 이랄까.” “ 흐음. 나이차야 좀 나긴 하지만…뭐 어차피 그건 당사자가 결정할 일이니까. 괜히 사윗감이 마음에 안 드는 시어머니처럼 훼방 놓을 생각은 마.” “ 안 그럴 거야.” 유리엔이 눈을 가늘게 뜨며 대꾸했다. 모를 일이지, 하고 중얼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난 카엘이 서류를 한쪽으로 치워놓고 굳은 어깨를 풀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꺼낸 카엘의 말에 유리엔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루네와 제론에 대한 고민이 순간이지만 단번에 날아가 버렸다. “ 참. 너 그거 아냐.” “ ?” “ 아버지께서 우리더러 한방 쓰랜다.” “ 어, 그래…뭐?” “ 같은 방에서 굿나잇 하라시네.” “ …어…에에에?!” 그러니까, 당장 시급한 건 이 문제라는 얘기였다. 드아이스 저택에서는 초대장 준비가 한참이었다. 제1순위 VIP인 유리엔에게 보낼 특별 초대장을 정성스레 접는 루네를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루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 동생아.” “ 응?” “ 우리 가문에서 돌리는 것 말고 네가 따로 직접 만들어서 보내는 초대장은 황녀전하께 보낼 것 외에는 없니?” “ 응. 그렇지 뭐. 왜 언니?” “ 흐으음…….” 루제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자고로 직접 초대장을 만들어 보내는 것은 우선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요, 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님 혼자 특별하다는 얘기다. 당연히 대부분의 경우 초대하는 곳에 진심으로 와줬으면 하는 소중한 사람에게만 그런 초대장을 전달한다. 그걸 따져봤을 때 분명 유리엔은 루네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고작 지방 남작가의 딸과 일국의 하나뿐인 황녀라는 어마어마한 신분의 격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럼없이 언니동생 하는 각별한 사이이기도 하다. 루네가 유리엔에게 손수 만든 초대장을 보내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소중한 사람. 꼭 와줬으면 하는 사람이라……. “ 루네야?” “ 응?” “ 그 초대장을 보낼 사람, 황녀전하 말고도 한명 더 있지 않아?” “ 으응?” 그게 누구냐는 의미를 담은 표정으로 루네가 루제를 쳐다보았다. 루제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 이런이런. 네 ‘사랑하는 기사님’께서 섭섭하시겠네.” “ 에…? 에? 어, 언니!” “ 이것 참. 은근히 기다리고 계시면 어쩌나?” “ 아, 아이참! 아니라니까, 언니!” 루네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부정했지만 루제는 그만두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걸린 미소에 장난기가 더욱 짙어졌다. “ 왜? 맞잖아. 네 사랑하는 트아로민경이 오매불망 네 초대장을 기다리고 계실지 어찌 알…” “ 언니이!” 루네로서는 드물게 소리까지 질렀지만 루제는 그저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완전히 토마토처럼 달아오른 얼굴로 루네가 그런 루제에게 눈을 흘겼다. “ 자꾸 그러지 말라니깐. 아, 아니란 말야.” “ 뭐가 아닌데?” “ 히잉.” 루네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휙 돌렸다. 아예 말을 않겠다는 의사표시였다. 결국 루제는 웃음을 터뜨렸다. 루제가 짓궂게 루네를 놀리기 시작한 것은 사냥대회에서 루네가 레이디로 뽑힌 이후부터였다. 루네를 레이디로 뽑은 기사는 바로 카엘의 호위기사인 제론 트아로민이었는데 그는 루제가 보기에 제법 보기드믄 괜찮은 남자였다. 외모는 훈남이고 성격은 자상한듯하며 능력도 나쁘지 않다. 레이디로 뽑힐 때, 그 부드러운 미소에 루네가 넋을 놓았던 것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나이야 아버지뻘만 아니면 괜찮다고 여기는 루제에게 제론은 제 쌍둥이 동생을 넘기기에 썩 아깝지 않은 조건을 지닌 상대였다. 게다가 당사자인 루네 또한 제론의 얘기만 나오면 얼굴을 붉히기 바쁜게 아무리 봐도 마음이 있어 보이지 않는가. 남은 것은 단지 제론의 마음이었다. ‘ 후후후. 동생아. 이 언니가 꼭 네 사랑이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만들어주마.’ 생일파티까지 앞으로 보름. 루제는 본격적인 사랑의 큐피드가 되기 위한 계획 작성에 돌입했다. ================================ # 63편 # 소제목 : 봄날이 왔습니다. (2) ================================ 카엘의 아버지이자 뮤리엔 제국의 황제인 중년인이 그 희귀하고도 희귀하다는 38년산 화이트미레시니안 와인을 잔에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같은 것을 조금씩 홀짝이고 있는 여인은 바로 뮤리엔 제국의 황비인 그의 아내였다. 서른을 훌쩍 넘겼음에도 아직 스무 살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는 여인은 와인이 담긴 잔을 들며 다소 걱정이 어린 표정을 해보였다. “ 여보,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 음?” “ 합방이라니…그러기엔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황비가 대화의 주제로 올린 것은 바로 카엘과 유리엔이었다. 불과 조금 전, 황제는 카엘에게 앞으로는 유리엔과 같은 방을 사용하라는 경악스러운 명령을 내렸다. 쉽게 말해 합방을 하라는 얘기다. 하지만 황비는 그 결정에 다소 동의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부부사이라고는 해도 합방까지 하기에는 둘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것이다. 황제는 슬쩍 웃으며 빈 와인잔을 호화스러운 탁자위에 내려놓았다. “ 하하. 너무 걱정 마시오.” “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여보, 손주를 어서 보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 그런 게 아니라오.” “ 네?” “ 둘이 같은 방을 쓰도록 한건, 사실 카엘을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었소.” “ 시험이라니요?” 황제는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의 머릿속으로 합방하라는 말을 듣고는 묘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던 카엘의 얼굴이 떠올랐다. “ 당신의 말대로 카엘은 아직 어리지. 이제 겨우 열여섯이니 말이오. 그런 만큼 젊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할 수도 있소.” “ 제 말이 그거예요.” “ 하지만 난 내 아들을 믿는다오. 분명 제 욕심보다는 새아가의 의견을 존중해줄 거라 생각하오.” “ 유리엔 황녀의 의견을 말인가요?” “ 그렇소. 내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조심스럽게 새아가에게 전달을 해놓았다오. 카엘이 밤에 부부의 연을 맺기를 원한다면 단호히 거절을 하라고 말이오.” “ 여보, 그럼…….” “ 이번 합방은 단지 카엘에게 책임감과 배려심을 더욱 기를 수 있도록 해주는 시험일뿐이라오.” “ 어머…여보!” “ 하하. 나라고 어찌 둘의 나이를 신경 쓰지 않았겠소? 둘의 진정한 합방은 성인식 뒤로 미뤄도 충분하니 말이오. 그러니 걱정 따위는 저 멀리 집어치워 버리시오, 나의 천사.” 황제의 느끼한 마지막 멘트가 끝나자 황비는 무한히 감동한 얼굴로 황제의 품에 뛰어들었다. 가녀리게 제 품에 안긴 황비를 꼬옥 껴안은 황제가 뜨거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 그럼 우린…밤도 늦었는데 이만 침대로 가는 게 어떻소?” “ 여보….” “ 이것 참, 그러고 보니 둘만 있을 때는 달링이라고 불러주기로 하지않았소? 자, 어서 불러보시오.” “ 어머, 몰라요.” “ 아하하. 당신은 정말 언제 봐도 사랑스럽구려.” “ 아이참…부끄러워요.” “ 부끄럽기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잖소. 하하!” 황비의 얼굴이 홍조로 물들었다. 어느새 황제의 눈빛은 뜨겁다 못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결혼 한지 20년 가까이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둘의 사랑은 카엘에게 셋째동생 탄생의 불길함을 안겨줄 정도로 식지 않고 불타올랐다. “ 푸하하하하핫! 푸하하하흐하핫하하하흐흐흣킥킥푸핫!” 괴상하다는 말 외에는 표현하기 어려운 웃음소리를 내며 유리엔이 제 방의 바닥을 마구 굴러다녔다.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란 린이 재빨리 유리엔을 말렸다. “ 황녀님! 바닥 말고 침대에서 구르셔야죠! 바닥은 딱딱해서 몸에 좋지 않단 말예요.” 린의 정성어린 충고를 수용한 유리엔이 가까스로 웃음을 멈추고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인 유리엔은 다시금 배를 잡고 침대 위를 뒹굴기 시작했다. “ 어휴, 참. 대체 뭐가 그렇게 웃기신 거예요.” “ 푸흐흐흣…아니, 별건 아니야. 쿡쿡쿡. 푸흐하하하하!” 유리엔을 그토록 폭소의 도가니로 밀어 넣은 것은 바로 조금 전 황제로부터 몰래 받은 전서였다. 쪽지 비스무리한 것에 적혀있던 내용을 읽은 유리엔은 그 순간 차마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전서에는, 짧게 요약해서 카엘과 같은 방을 쓰되 단순히 잠만 자라는 말이 적혀있었다. 혹여 카엘의 그 이상의 것을 원한다 해도 아직 이르다는 뜻을 밝혀 거절의 의사를 펼치라는 내용이었다. 웃다 지친 유리엔이 숨을 골랐다. “ 아, 힘들어. 웃겨 죽는 줄 알았네.” “ 황녀님?” “ 린.” “ 네?” “ 나랑 카엘이 한방을 쓰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 그거라면….” 고개를 갸웃한 린이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런저런 상상들이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부부사이에 한방을 사용한다. 그 말인 즉. 이렇고 저렇고 요렇고 조렇고 그렇고 그런 이런 저런 일들이……. “ …안돼요!” “ 응?” 갑자기 소리친 린이 유리엔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린의 분홍색 눈동자에는 굳은 결의가 서려있었다. “ 황녀님은 제가! 기필코 지킬 거예요!” “ 에?” 린의 갑작스런 격렬한 반응에 유리엔이 잠깐동안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곧 린의 외침을 이해한 유리엔은 다시 침대를 구르기 시작했다. “ 황녀님, 왜 웃으세요. 제가 꼭 지켜드린다니까요!” “ 큼큼. 아냐아냐. 린이 너무 믿음직스러워서 그만 웃음이…푸후후후후후.” 어떻게 그런 상상이 가능한 건지. 유리엔은 몸을 떨며 웃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자신과 카라멜의 자세한 사이를 모르기 때문인지 어째 같은 방을 쓴다는 것에 너무나 앞서간 상상들을 하고 있었다. 물론 자신도 처음 한방을 써야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상당히 놀라긴 했으나, 그런 의미로는 아니었다. 자신과 카엘이라니. 솔직히 말해 전혀 상상도 되지 않았다. ‘ 하긴. 어쨌든 형식상으로는 부부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유리엔은 문득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 …부부였지?’ 둘은 부부였다. ‘ 그러니까…부부라 함은.’ 부부라는 관계가 꼭 사랑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단 부부가 된 이상 자연히 따라오는 의무와 책임은 분명 존재했다. 지금은 아니라도 먼 훗날, 둘의 사이가 부부인 이상 반드시 그 책임과 의무를 실행해야 할 때가 온다는 얘기였다. ‘ 헐.’ 그것을 깨닫자마자, 유리엔은 그대로 충격에 휩싸인 채 굳어버렸다. ================================ # 64편 # 소제목 : 봄날이 왔습니다. (3) ================================ 카엘의 눈이 집무실에 있는 시계로 향했다. 열두 시. 평소라면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 제법 긴 시간동안 업무에 매달린 카엘이 아픈 미간을 문질렀다. 잡생각을 잊으려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일에만 집중하고 말았다. 아니면 저도 모르게 자는 것을 피해버린 건가. “ 어느 쪽이든 간에…….” 뭐랄까, 조금 한심하다. 카엘은 결국 떨떠름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일부러 인지 여기서 유리엔의 거처까지는 상당히 가까웠다. 천천히 걸어간다 해도 눈 깜짝 할 새면 도착할 것이다. 이래저래 탁자위의 남은 서류들을 정리하고, 잉크와 펜을 한쪽으로 치우던 도중 왠지 눈에 거슬리는 펜대의 깃털을 새것으로 바꾸고 난 카엘은 갑자기 결제가 끝난 서류들이 약간 비뚤게 포개어져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와 그것마저 차례대로 깔끔히 정리했다. 그러고 나자 바닥에 떨어진 미결제 서류가 몇 장 보여 전부 주워서 한쪽에 포개놓았다. 그것을 끝내자 갑자기 의자의 위치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것까지 해결하자 이제는 탁자위의 미세한 먼지가 신경을 거슬렸다. 그 먼지를 닦을까 말까 고민하던 카엘은 이내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이마를 손으로 감쌌다. “ …뭐하는 거냐, 진짜.” 정말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자신은 지금 늦장을 부리고 있었다. 일부러 시간을 질질 끄는 것이다. 이유는 아마도 유리엔의 거처로 가는 것이 껄끄러워서. 껄끄럽다니. 왜? 낮게 한숨을 내쉰 카엘이 이윽고 집무실을 나왔다. 대기 중이던 병사가 깍듯이 인사하는 것을 가벼운 고갯짓으로 응수한 카엘은 이상하게 비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거처까지 향하는 그 짧은 시간동안 카엘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어째서 자신이 지금 유리엔의 거처로 향하는 것을 껄끄럽게 여기는 것인지 그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고민해 봐도 좀처럼 해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카엘은 문득 저번에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도 결국 끝없이 이어지는 ‘왜’ 혹은 ‘어째서’의 물음들만 줄줄이 매달고는 전혀 답을 찾지 못했었다. 그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카엘은 고개를 내저었다. -똑똑. 거처에 도착한 것은 정말로 순식간이었다. 노크를 하고 잠시 동안 기다리자 슬그머니 문이 열리며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은 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표정의 출처를 찾던 카엘의 눈에 침대 위에서 곤히 잠든 상태의 유리엔이 들어왔다. “ 에…방금 잠드셨어요.”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린이 고개를 한번 꾸벅 숙이고는 문을 닫으며 방 밖으로 나갔다. 덕분에 잠이 든 유리엔과 단둘이 방안에 남아버린 카엘의 표정에 설핏 당황이 스쳐지나갔다. 뭘 어쩌라고. 한동안 그렇게 서있던 카엘은 가까스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니까 잠을 자려면 우선 씻어야겠지. 하는 생각에 욕실로 향하던 카엘의 걸음을 그대로 붙잡은 것은 갑자기 들려온 유리엔의 목소리였다. “ …겠어…….” ‘ 뭐?’ 잠꼬대인지 정확하지 못한 발음으로 띄엄띄엄 흘러나온 말은 제대로 알아듣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약간 뒤척이는가싶던 유리엔은 좀 더 명확하게 같은 말을 다시 반복했다. “ …제거 해야겠어…….” ‘ 제거?’ 제거한다니. 대체 뭘 말인가. 집먼지 진드기? 설마하니 사람은 아니겠지. 뭔가 불안하면서도 궁금한 마음에 카엘은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유리엔의 잠꼬대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새근거리는 고른 숨소리가 그 적막을 채웠다. 욕실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돌린 카엘이 물끄러미 잠든 유리엔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깊게 잠든 건지 편안한 표정을 하고 있는 유리엔의 얼굴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평소와는 다르게 마냥 착하고 순수해 보이는 표정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카엘이 문득 며칠 전을 회상했다. 이게 두 번째던가? 잠든 모습을 보는 것은. 그러고 보니 단순히 함께 잠드는 것에 자신은 지금 이상하리만큼 긴장을 하고 있었다. 같은 침대에서 잠든 경험은 이미 달 축제 때 여관에서 한번 겪지 않았던가. 그것도 무려 최근 일이었다. 생각해보니 이제 와서 새삼 긴장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다. 하지만 의지와는 다르게 몸은 여전히 뻣뻣했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카엘이 다시 유리엔을 바라보았다. 예쁘게 생겼다. 카엘은 갑자기 객관적인 감상평에 들어갔다. 딱히 다른 사람의 외모에 연연해 본 기억은 없지만 기본적으로 남들 다 달려있는 눈이 마찬가지로 달려있는 정상인 중의 한명으로서 냉정한 평가정도는 내려줄 수 있었다. 한참동안 유리엔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본 카엘이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 유리엔은 상당히 예쁜 얼굴이었다. 아니, 상당히 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적어도 지금까지 카엘이 봐온 사람들 중에서는 단연 가장 뛰어난 외모였다. 당연히 사교계에 널려있는 그럭저럭한 귀족영애들과는 비교조차 하기 힘들었다. 잠깐 잊고 있었지만 사실 유리엔은 엄청난 미인이었다. 카엘은 새삼 그것을 상기했다. 그리고 또 다른 사실도 인정했다. 유리엔은 자신이 봐온 사람들 중 가장 이상한 여자이기도 했다. 아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가장 특이하고 독특하고 이상했다. 뭔가 일반적인 황녀와는 궤를 달리하는 성격 덕에 저지르는 일마다 정상적인 차원을 벗어나는 일이 허다했고, 생각하는 것도 대부분 사람을 어처구니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말하는 것은 또 어떤가. 타고난 건지 입만 열었다하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수준급 독설은 듣는 상대방의 얼을 빠지게 만들었다. 이래저래 카엘로서는 처음 겪어보는 타입이었다. 아니, 아마 앞으로도 이러한 성격을 다시 겪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 하여간 특이하다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는 카엘은,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65편 # 소제목 : 봄날이 왔습니다. (4) ================================ 갑자기 머릿속에 들이닥친 ‘부부의 의무’에 대한 문제 때문에 한참이 넘는 시간동안 꼬박 굳어있던 유리엔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그 의무를 피할 수 있는 방법으로 ‘카라멜 제거’따위를 떠올리고는 내심 만족하며 그대로 골아 떨어져버렸다. 실은 이대로 자는 척해서 카엘의 방심을 유도한 뒤 몰래 암살할까라는 현실력 제로인 계획도 짜고 있었으나, 오랜 심력의 소비 탓인지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를 만큼 순식간에 잠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유리엔은 그렇게까지 고민하면서도 가장 쉬운 해결책인 ‘이혼’은 정작 떠올리지 않고 있었다. “ …….” 깜박깜박. 그리고 아침. 해가 중천에 떠오르고 나서야 느지막이 졸린 눈을 뜨던 평소와 달리, 이제 막 해가 떠오른 이른 시간임에도 번쩍하고 눈을 떠버린 유리엔은 멍하니 뜬 눈을 깜박거렸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밝게 갠 시야에 확 들어온, 부드러워 보이는 붉은 머리카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잠시 동안 상황파악에 들어갔다. …어제, 카라멜이 들어오는 걸 본 기억은 없는데? 갑자기 제 눈앞에서 곤히 자고 있는 카엘의 존재에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느낀 유리엔이 가만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자신이 잠이 든 다음에 온 모양이었다. ‘ …린. 지켜준다며?’ 막아서기는커녕 오히려 등을 떠밀었을 것만 같은 불안감은 대체 뭘까. 어찌됐든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것 같기는 하지만 더 이상 잠이 오지는 않아 유리엔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느라 출렁거린 침대의 움직임 때문인지 갑자기 카엘이 눈을 떴다. “ …….” “ …….” 눈이 마주쳤다. 이유도 없이 굳어버린 유리엔과 카엘이 가만히 눈동자를 마주했다. 흑요석 같은 검은 눈동자에 제 모습이 비치는 것을 말없이 응시하던 카엘이 피식 웃음 지으며 말을 내뱉었다. “ 좋은 아침.” 묘하게 달콤해 보이는 미소에, 얼결에 유리엔은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엔의 호출을 받고 방으로 들어온 린은 척 보기에도 간밤에 아무 일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둘의 모습에 안도감과 실망감이 뒤섞인 이상한 표정을 보여주었다. 안도감이야 그렇다 치지만 얼핏 보이는 실망이라는 수상한 감정에 유리엔이 린을 향해 도끼눈을 떴다. 어쨌거나 시간이 좀 더 지나고 카엘은 제 할 일을 위해 방을 나갔다. 여유롭게 이른 아침을 먹고 수입산 고급 홍차까지 한잔한 유리엔이 이제 뭘 할까 고민하던 때 마침 루제가 찾아왔다. 루제는 유리엔을 만나자마자 바닥에 무릎부터 꿇었다. “ …왜이래?” “ 황녀님!” “ 왜.” “ 부탁드릴게 있는데요…….” 답지 않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서두를 연 루제가 흘끔 유리엔의 눈치를 살폈다. 뭔데? 유리엔의 표정을 읽은 루제가 재빨리 말을 꺼냈다. “ 아시다시피 루네가 조금…아니 많이 쑥맥이라서요.” “ 그런데?” “ 가만히 놔두면 좋아하는 사람한테 제대로 말도 못 걸고 쩔쩔매다가 그대로 놓쳐버릴 것 같아서.” “ 좋아하는 사람?” “ 제론 트아로민경요.” 역시나. 유리엔은 루제가 하려는 나머지 말이 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 그래서 이어주자고?” “ 네!” 루제가 힘차게 대답했다. 갈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유리엔은 대체 언제부터 루제가 이렇게 제 동생을 위하는 착한 녀석이었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루제가 제론이라는 기사를 좋아하는 건 확실해?” “ 확실해요.” “ 어떻게 알고?” “ 저희가 괜히 쌍둥이겠어요? 척 보면 딱, 딱 보면 척이죠.” “ 흐음…….” 그렇다면야. 유리엔은 결정을 내렸다. 솔직히 제론의 나이가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루네가 이미 푹 빠졌다니 별 수 없는 일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잘되는 건 아무래도 행복하지 않겠는가. “ 뭐, 좋아.” “ 협력해주시는 거예요? “ 그래.” “ 예에!” 든든한 아군이자 뒷빽을 얻은 루제가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유리엔을 끌어들임으로써 이제 계획의 한계는 없어진 것이다. 그 어떠한 짓을 저질러도 유리엔과 함께라면 만사오케이. “ 믿습니다!” “ 뭐?” 유리엔교의 충실한 신자인 루제가 두 손을 맞잡고 무한한 신뢰의 눈빛으로 유리엔을 응시했다. 그 눈빛에 유리엔이 순간적으로 루제의 정신감정을 의뢰할까 고민했든 말든 간에. ‘ 일단 중요한 건 트아로민경이 생일파티에 참석해 줘야한다는 거죠.’ “ 카라멜!” 첫 번째 임무. 제론을 루네의 생파에 참석시켜라-를 실행하기 위해 오늘도 유리엔은 카엘의 집무실을 급습했다. 물론 루네가 직접 제론에게 초대장을 보내는 게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그것을 기대하기에는 루네가 지나치게 수줍음이 많았다. 결국 유리엔은 카엘을 생일파티로 끌고 감으로서 제론도 함께 딸려오게 만드는 방법을 택했다. “ …없네?” 문을 지키던 기사가 저지할 새도 없이 당당하게 집무실의 문을 열어젖힌 유리엔은, 예상과는 다르게 텅 비어있는 안을 보고는 김샌 표정을 지었다. 얜 어딜 간 거야. “ 화…황녀전하?” 얼이 빠진 기사가 조심스레 유리엔을 불렀다. 그 부름에 유리엔이 돌아보자 그는 숨을 삼켰다. 한발자국밖에 안 되는 거리에서 마주보기에는 유리엔의 미모가 너무 뛰어났다. “ 아, 저, 저, 저기.” “ 어디 갔나요?” “ 네, 네?” “ 카라…황태자전하가 어디에 계시는지 아나요?” “ 아, 황태자전하 말씀이십니까. 이 시간이라면 아마도 연무장에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만…….” “ 그렇군요. 고마워요.” “ 아, 아닙니다.” 꾸벅 허리를 숙인 기사가 어느새 저 멀리 사라져가는 유리엔의 뒷모습을 홀린듯 멍하니 응시했다. “ 천사다…….” 평소에도 무럭무럭 존경심이 솟아나는 인물인 카엘이건만, 기사는 평소보다 유독 부러움의 홍수에서 허덕여야했다. 휘익! 휙! 공기의 저항에 따른 날카로운 소리들이 연무장에서 잇따라 울려 퍼졌다. 수십 명의 기사들이 마치 한 몸처럼 같은 자세로 검을 내지르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위축되게 만드는 기세를 지니고 있었다. 카엘은 팔짱을 끼고 선채 그러한 기사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을 발견했는지 카엘의 한쪽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 그만.” “ …?” “ 다시 검을 잡아봐라.” 카엘의 지적을 받은 기사A가 잔뜩 긴장한 채 검은 고쳐 쥐었다. 카엘이 고개를 저었다. “ 너무 힘이 들어갔어. 손목에서 조금만 힘을 빼라. 손바닥이 아닌 손목.” “ 아…이렇게 말입니까?” “ 그래.” 카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사A가 자세를 고친 상태로 재차 검을 휘둘렀다. 아까보다 눈에 띄게 깔끔해진 검의 동선에 카엘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른 이들을 향해 눈을 돌렸다. 잠시 후 검 끝이 흔들리는 몇몇을 잡아낸 카엘이 그들에게 자세를 잡아주려는 순간, 연무장 안으로 불청객이 나타났다. 다른 이들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카엘의 입장에서는 분명 불청객이었다. “ 어머, 정말 둘러봐도 괜찮을까요?” “ 물론입니다!” “ 폐가 되면 어쩌죠?” “ 그럴 리가요! 절대 없습니다!” 부드러운 미성이 연무장의 입구에서부터 천천히 들려오고 있었다. 먼 거리 탓에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가벼운 외출용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얼핏 보기에도 귀족가의 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연무장까지 손수 나서서 여인을 안내한 것으로 보이는 한명의 기사가 척척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기사들은 어느새 검을 휘두르던 것을 멈추고 입구에서부터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여인과 기사에게로 이목을 집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누군가 싶어 바라보던 시선이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멍하니 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육안으로 자세한 이목구비까지 보일 정도로 여인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들은 일제히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헤벌레한 표정을 짓기에 이르렀다. 여인의 정체는 당연하게도 유리엔이었다. ================================ # 66편 # 소제목 : 봄날이 왔습니다. (5) ================================ 목소리는 마치 옥이 굴러가는 듯 하였으며, 머릿결은 말 그대로 비단결이라. 눈송이 같은 새하얀 피부에 자리 잡은 이목구비는 세상에 이토록 완벽한 조화가 따로 없으며, 그러한 미모에 사람들의 가슴을 녹이는 부드러운 미소까지 어우러지니 어쩜 이럴 수가 눈이 부셔 시야를 가늠할 수가 없더라. 자체발광. 여신강림. 온갖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기사들은 유리엔을 바라보았다. 이건 뭐랄까. 바라볼수록 빠져드는 느낌? 지금껏 사교계나 황실에서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는 여인들들 몇 번 봐온 경험이 있는 그들이었지만, 유리엔의 외모는 그런 여인들과는 분명히 격이 달랐다. 바라보는 순간 지금까지 아름답다고 생각해왔었던 여인들의 외모는 그대로 빛을 잃어 바닥 저 아래로 죄다 곤두박질쳐버렸다. ‘ 와우.’ ‘ 사람이 저렇게 생길 수도 있구나.’ ‘ 여신인 듯?’ 본 적은 없지만 아름다움의 화신이라고 일컬어지는 엘프라면 과연 저 정도 미모가 아닐까 싶었다. 아니, 엘프중에서도 손꼽히는 얼짱엘프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넋이 다른 세상으로 가출하기 시작하는 기사들과는 대조적으로, 카엘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안 반갑다. 안 반갑다. 안 반갑다. 제대로 된 불청객이었다. 카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아무리 좋게 봐줘도 내숭용 그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천사표미소를 입가에 매달고 있는 유리엔을 마주보았다. 대체 무슨 꿍꿍이로 옆에 길안내 꾼까지 매달고 연무장을 직접 찾아온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저의를 알 수가 없었다. 평소의 말투대로 ‘뭐냐’라고 내뱉으려던 카엘은, 한순간 제 3자이자 아무것도 모르는 기사들이 아주 가까이에 존재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곧바로 말을 바꿨다. “ 무슨…일이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팔에 와락 돋는 것은 닭살이라. 서로 잘 몰랐던 처음 때가 오히려 내숭을 떨기에는 쉬웠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서로에게 지나칠 정도로 허물이 없어진 둘이 이제 와서 하하호호 웃는 낯으로 생판 처음 보는 사이처럼 격식을 차린다는 것은 비록 내숭에 인한 것이라도 역시 쉬운 일은 못되는 것이다. 덕분에 다소 부자연스럽게 굳어져버린 목소리였지만, 어쨌든 카엘은 대인용으로 말투를 바꾸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파장은 유리엔이 아닌 근처에 모여서 멍하니 넋이 나가있던 기사들에게서 나왔다. “ …황태자 전하?!” “ 아시는 사이?” “ 그렇다면, 저 분은 역시 전하를 뵙기 위해 찾아오신…….” “ 그, 그럼 혹시!?” 기사들은 놀라움과 감탄과 의혹이 뒤섞인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카엘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분명 좀 전까지 단체로 유리엔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던 시선들이 느닷없이 순식간에 자신을 향하자 카엘은 순간이지만 당황함을 느꼈다. 기사들의 강렬한 눈빛에 대한 대답을 대신 해주듯, 유리엔이 입을 열었다. 단 한마디. 그러나 엄청난 영향력을 자랑하는 단어 하나가 유리엔의 입술 사이를 타고 흘러나왔다. “ -여보.” “ ……!” “ ……!!” “ ……!!!” 경악한 기사들이 동시에 약속이나 한 듯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경악한 카엘은 마치 하나의 돌상이라도 되어버린 듯 움직임 없이 굳어버렸다. 갑작스런 대 파란을 예고하는 한줄기 바람이 사뿐하게 연무장을 스쳐지나갔다. “ 도브린 백작가?” 유리엔과 헤어지고 나서 시간이 남은 루제는 곧 열릴 생일파티 때 초대할 귀족들의 명단을 주르륵 펼쳐놓은 채 그것을 훑어보는 작업에 열심이었다. 위에서부터 차례로 읽어 내려가던 도중 눈에 익은 가문을 발견한 루제가 고개를 갸웃했다. 도브린. 분명 기억 속에 있기는 한데, 어디서 들었더라-하고 머릿속을 더듬어보다가 이내 뭔가가 떠올랐는지 ‘아’라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루제가 검지손가락을 튕겼다. 도브린 백작가. 도브린 백작가의 망나니 셋째 아들! 그것까지 떠올린 루제가 윽, 하고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루네가 사냥대회의 레이디로 뽑힌 다음의 황실 무도회 날, 루네에게 집적댔다가 거절당하고 파티장에서 소란을 피웠던 철없는 귀족 자제. 물론 그렇게 커다란 소란은 아니었고 그때 같은 장소에 있던 제론이 직접 나서준 덕에 금세 해결되었지만, 루제는 내심 한자락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따로 그 귀족자제에 대해 알아봤었다. 딱 보기에도 하등 쓸모없어 보이는 망나니였지만 그 하늘을 찌르는 오만함과 넘쳐나는 자신감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혹시 만에 하나라도 이름 높은 가문의 자제라면 조금 곤란하게 될지 모르니까. 그리고 조사결과 밝혀진 것은 그 귀족자제가 바로 도브린 백작가의 셋째 아들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최악이게도 도브린 백작가는 제법 권세가 높았다. 지방의 귀족들은 감히 명함도 못 내미는 중앙의 권력가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 아들과는 다르게 도브린 백작은 상당히 괜찮은 인품을 지닌 귀족이었다. 게다가 셋째아들은 비록 친자이기는 하나 허구한 날 망나니짓만 일삼는 행동거지가 이미 백작의 귀에 들어가 거의 내놓은 자식에 가깝다고 들었다. 그 덕에 힘없는 지방의 남작가문이 중앙의 권세 있는 백작가문에게 짓눌려 절절매는 상황은 피해 갈 수 있었다. 루제는 뚫어져라 초청장 명단을 바라보았다. 마치 도브린 백작가라는 글자가 지워지기라도 바라듯. 물론 그런다고 해서 종이에 적힌 글자가 지워질 리는 없었다. 루제가 고심하듯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 괜히 난동을 피우면 어떡하지?’ 걱정하는 것은 바로 그거였다. 그때처럼 막무가내로 말썽을 피우지 말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만약 그런다면 말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생일파티는 저번처럼 화려한 황실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남작가의 작은 저택에서 열리는 것이니까. ‘ 어쩌지…응?’ 고민을 거듭하던 루제가 문득 뭔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쩜 그걸 잊고 있었냐는 듯 자책하듯이 이마를 치는 루제의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났다. 소란을 일으켜주면 오히려 좋다. 아니, 반드시 일으켜줬으면 한다. 그것도 꼭 루네와 관련된 일로! 그리고 그렇게 도브린 백작가의 셋째아들이 루네를 곤란하게 만들면 분명 제론이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전에 카엘이 나설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것은 유리엔에게 맡기면 해결 될 문제였다. 그러니 자연스레 제론은 또 한 번 루네를 도와주게 된다. 그렇게만 된다면 완벽한 일석이조였다. 제론으로 하여금 루네를 챙겨주게 만들고 파티동안 둘만의 시간을 갖게 해주기에도 편하다. 그리고 두 번이나 루네를 도와준 것을 핑계 삼아 저택에 잠시 동안이라도 머무르게 할 수 있었다. ‘ …좋아! 꼭 와라, 너!’ 그리고 루네한테 들러붙어라. 루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백작 자제에게 염원을 담아 속으로 외쳤다. 꼭 루네와 제론을 이어주는 큐피트 역할을 해주기를 고대하며. ================================ # 67편 # 소제목 : 봄날이 왔습니다. (6) ================================ 여보란 무엇인가. 분명 친숙하고 낯익은 호칭이건만 왜이토록 저 먼 별나라의 언어처럼 낯설게 느껴지는가. 기사들은 먼 옛날에 굳어버린 머리를 다시 매끄럽게 굴리기 위해 노력했다. 분명 ‘여보’라는 단어는 그들의 뇌 어딘가에 저장되어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어서 찾아야 한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그들의 머릿속으로 동시에 사전이 펼쳐졌다. 여보. [명사] 1. 어른이 가까이 있는 자기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사람을 부를 때 쓰는 말. 2. 부부사이에 서로 상대편을 부르는 말. “ …2번이겠지?” “ 그럼, 당연히 2번이지.” “ 와우?” 그리고 훌륭하게 ‘여보’의 의미를 찾아낸 기사들은 다음으로 현재 상황에 대한 분석에 들어갔다. “ 천사님께서 연무장에 찾아오셨고, 태자전하와 마주보셨지.” 끄덕끄덕. 리더 격인 기사A의 생생한 상황설명에 나머지 기사들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엔의 호칭은 어느새 ‘천사님’으로 굳어진 뒤였다. “ 그리고 ‘여보’라고 말씀하셨어. 이 말을 하셨을 당시 천사님께서는 태자전하와 마주보고 계신 상태였으니, 아무리 봐도 전하를 향한 호칭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지.” “ 음.” “ 그렇지.” “ 그렇다면 지금까지 펼쳐진 이 모든 상황들을 조합해서 결론을 도출해 보건데, 분명 태자전하와 천사님은…….” “ …….” “ 서로 부부이신 것이 틀림없다!” “ 오오!” “ 과연 그렇군!” 눈에 보이다 못해 생각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결론을 도출해내고 또 그것에 열광하며 수긍하는 기사들을 카엘은 썩은 표정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들을 바라보는 카엘의 표정이 썩어가던 말던 그들의 관심은 다른 것으로 불타올랐다. “ 오오…부부사이.” “ 부부사이셨어.” “ 그렇다면 태자전하는 유부남이셨던 것인가!” “ 품절남이셨던 거군.” “ 쯧쯧, 신데렐라를 꿈꾸던 하녀들은 지금까지 그냥 뻘짓한거였어.” “ 하녀들뿐인가? 육탄공세마저 마다하지 않으려 했던 귀족영애a, b, c등등은 이제 끝난 거야.” “ 어쩐지 수십 장에 달하는 편지를 죄다 읽지도 않고 종이접기나 하라고 주시더니…….” “ 다 이유가 있었던 거야.” 기사들의 수준급 주접에 카엘은 ‘여보’라는 부름이 주는 충격에 미처 빠질 새도 없이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분노를 느껴야 했다. 저것들이 정녕 황실을 주름잡는다는 블루마린 기사단인가. “ 여성혐오증이라는 것도 사실 연막작전이었을지 모르….” “ 그만.” “ …헙!” 이를 갈며 카엘이 내뱉은 그만, 이라는 말에는 전혀 숨기지 않은 분노가 살기가 살포시 담겨있었다. 그것은 온몸으로 느낀 기사들이 순간적으로 떠들던 것을 멈추고 몸을 경직시켰다. 불안감을 느끼며 슬며시 바라본 카엘의 얼굴은 시선을 피하고 싶을 정도로 흉흉했다. 슬며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하는 기사단을 향해 카엘이 높낮이가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 지금부터 연무장을 돈다.” “ …….” “ 중무장은 일체 해제하지 않는다. 한바퀴 도는 것을 완료할 때마다 기본지르기와 휘두르기 서른 번을 완료한 다음 다시 돈다. 그걸 반복으로 100바퀴다.” “ ……헉.” “ 잔말은 듣지 않는다. 시작.” 죽기 싫으면 뛰어. 카엘의 눈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기사들은 입을 다물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얌전히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기사들을 처리하는 것에 성공한 카엘은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유리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연무장을 뛰기 시작한 기사들은 어느새 둘에게서 까마득히 멀어져 있었다. “ 무슨 속셈이야?” “ 뭐가?” 아니나 다를까 부드러운 미소 따위는 집어친 유리엔은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에이, 계획실패-라고 중얼거리며 유리엔은 멀어져만 가는 기사들을 잠깐 쳐다보았다. “ 다짜고짜 여보라니…대체 뭐냐?” “ 틀린 말은 아니잖아?”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당사자들이 그 호칭이 틀렸기를 바라는 사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태연하게 말하는 유리엔을 향해 카엘이 헛웃음을 지었다. “ 그렇다고 우리가 다정하게 여보, 당신 할 사이도 아니지.” “ 알아. 다신 안 해.” 사실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유리엔의 팔에도 이미 닭살이 돋은 후였다. 카엘을 마주보며 여보, 라는 호칭을 내뱉었을 때의 그녀의 표정은 진정 천사처럼 부드러웠으나 실상 속으로는 온갖 욕을 동원하던 중이었다. 조금 골려주려고 했었는데 아무래도 여보는 살짝 무리였나, 하고 생각하며 유리엔이 습관처럼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그녀는 연무장까지 찾아온 본론을 꺼냈다. “ 실은, 이주 뒤에 드아이스 저택에서 루네의 생일파티가 열리거든.” “ 그런데?” “ 필수 참석.” “ 네가?” “ 너도.” “ …왜?” 이주 뒤의 드아이스 저택에서의 파티. 그러고 보니 얼핏 들은 기억이 나는 것도 같지만, 카엘은 딱히 일부러 참석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초대장이 온다면 모르지만 지금껏 지방의 작은 가문에서 열리는 조촐한 파티에 수도의 황족에게까지 초대장이 도착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보낸다고 하더라도 대개가 불참이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연줄이 닿아있거나 하지 않은 이상 제 가문보다 지나치게 직위가 높은 귀족에게는 초대장을 잘 보내지 않았다. 형식적으로 초대의 의사를 밝힐 수는 있지만 말이다. 게다가 생일파티라면 단연 파티의 주인공은 생일인 당사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옳다. 지나치게 권세 있는 귀족이나 황족을 파티에 초대해 버린다면 그들이 참석했을 경우 파티의 중심이 누가 될 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 가서 놀자는 게 아니라, 그냥 참석만 하자는 거야.” “ 뭐 때문에?” “ 혹시 모를 찌꺼기 제거, 막강한 뒷빽 암시,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렇게 말하며 유리엔이 짝, 하고 손바닥을 쳤다. “ 루네에게 생일선물을 전해주기 위해서지.” “ …하?”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싶어 카엘이 미간을 좁혔다. 선물이라면 따로 전해주거나해도 괜찮을 텐데. 무엇보다 선물을 줄 당사자만 파티에 참석하면 될 것이 아닌가. 자신은 왜? “ 어쨌든 참석하는 거다? 참, 그리고 호위기사는 필수 대동이야.” “ 정말로 속셈이 뭐냐?” 카엘의 말에, 유리엔이 씨익 웃었다. “ 화창한 봄날, 사랑의 씨앗은 활짝 꽃을 피울지니!” 뭔 소리야. 대답은 미소만큼이나 의미심장했다. 그리고, 한참동안이나 연무장을 돌고 난 기사들이 여보파문을 일으킨 천사님의 정체가 바로 얼마 전 우호국에서 황태자비로 시집을 온 ‘유리시엔 헤자르 드 카르나’첫째황녀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었다. ================================ # 68편 # 소제목 : 봄날이 왔습니다. (7) ================================ 이주는 평화롭고도 빠르게 지나갔다. 그날 뒤로도 유리엔이 연무장을 예고 없이 찾아와 카엘과 그 외 기사들을 종종 당황시킨 것 외에는 유리엔에게나 카엘에게나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던 생일파티가 막을 올렸다. “ 음식들은 전부 준비됐지? 아, 그건 좀더 오른쪽에 배치하고…….” “ 붉은색 꽃은 피해주세요! 헤잇레드 자작부인께서 붉은색을 싫어하는 건 이미 유명하다구요.” “ 얼마 안 남았으니까 빨리빨리 움직여!” 드아이스 저택의 하녀들은 저마다 바쁘게 손과 발을 놀렸다. 곧 해가 질 시간이었다. 그때가 되면 파티가 시작될 테니 그전까지 최대한 완벽하게 마무리를 해야 했다. 하녀장의 지시에 따르며 그녀들은 눈코뜰새 없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저택의 파티 홀은 그렇게 넓지는 않았지만 그녀들의 노력으로 무척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이곳저곳에 장식된 오색의 꽃들이 저마다의 은은한 향기를 풍기며 제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깔끔하게 정렬된 식탁에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온갖 음식들이 가득했다. 드아이스 남작은 사치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성품인 만큼 저택에서 파티를 여는 일은 무척 드물었지만, 그런 만큼 한번 파티가 열릴 때에는 최대한 공을 들였다. 게다가 이번에 여는 파티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스러운 두 딸의 생일파티였으니 그 어떠한 공을 쏟아 부어도 아깝지 않았다. 파티의 시작이 가까워올수록 바쁜 것은 시녀들뿐만이 아니었다. 파티의 주인공인 루제와 루네또한 마찬가지였다. 루제는 연신 전신거울 앞에 서있는 루네를 훑어보았다. “ 이상해!” “ 에에? 정말?” “ 응. 아무래도 붉은색은 너무 어른스러워. 프릴이 달리지 않은 건 괜찮지만 아무래도 네게 어울리지는 않는 색이야.” “ 그치만 언니, 아까는 예쁘다고 했잖아.” “ 그랬는데 지금 보니까 아무래도 어색해. 안되겠다, 바꾸자.” “ 에엑!” 붉은 드레스에 찰랑이는 갈색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루네가 비명을 질렀다. 반대로 루제는 옅은 하늘색 드레스에 긴 머리를 하나로 틀어 올린 차림이었다. 루제는 엄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 귀걸이가 자주색이니까 그건 그대로 두고, 분홍색 드레스로하자. 프릴은 가슴부분이랑 치마 끝단에만 몇 겹으로 달린 게 괜찮겠어. 역시 루네 넌 귀여움 컨셉이 제일이야.” “ 꼭 갈아입어야 돼?” “ 잔말 말고 입어.” 결국 루제의 강경한 의지로 루네는 드레스를 갈아입어야했다. 특별한 장식이 없는 붉은색 드레스에서 나풀거리는 프릴이 달린 풍성한 분홍색 드레스로 갈아입은 루네는 조금 부담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런 루네를 한바퀴 돌려가며 위아래로 훑어본 루제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데 언니…너무 나만 신경써주는 거 아냐?” “ 응?” “ 아까부터 계속 나만 이리저리 살피고 고치고 있잖아. 언니는?” “ 난 됐어. 네가 더 문제지. 뭣보다 넌 잘 보여야 할 사람이 있잖아?” “ 에?” “ 다 그런 게 있으니까 어서 좀더 예쁘게 보이는 거에만 신경 써.” 조금의 용서도 없는 루제 탓에 그 뒤로도 이리저리 머리며 장신구며 조금씩 손을 보는 사이, 어느덧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은 흘러 파티는 시작을 앞두게 되었다. 루제와 루네는 너무 급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늦지도 않게 파티홀로 향했다. 제론은 의아함을 숨길 수 없었다. 그는 현재 유리엔과 그녀의 호위기사, 그리고 시종 몇몇과 카엘이 함께 있는 커다란 마차에 몸을 싣고 드아이스 저택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제 주군인 카엘이 ‘드아이스 저택의 생일파티에 참석하게 됐다’라고 했을 때는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함께 간다는 말을 듣고는 그야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단순한 생일파티이기는 하지만 장소가 그닥 가깝지 못한 만큼 혹시 모를 사건에 대비에 호위기사인 자신이 의무적으로 함께 가는 것은 물론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지극히 당연한 그 일에 제론이 의문을 품게 된 것은, 갑옷이 아닌 연미복을 착용하라는 명령을 듣고 나서였다. 남청색의 바탕에 은색의 용이 수놓아진 연미복은 무척이나 고급스러웠는데 놀랍게도 이 연미복을 직접 던져준 사람은 무려 유리엔이었다. 일단 거절 할 수는 없어 입었지만 아무래도 경호를 목적으로 한 차림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제론은 혼란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신의 역할이 경호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유리엔의 호위기사인 찰스의 경우 분명 기사임을 나타내는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으니 제론의 혼란은 더욱 가증되어만 갔다. 그리고 그러한 혼란을 느끼는 인물이 마차 안에 한명 더 있었으니, 바로 노바카사였다. 달 축제 이후로 황성에 들어온 이후로 곧바로 하인으로 취직되어 열심히 일하는 나날을 보내던 노바카사는 갑작스레 영문도 모른 채 드아이스 저택의 생일파티로 향하는 마차에 탑승하게 되었다. 그냥 시종으로서 동행한다고 생각하기에는 뭔가가 직감적으로 걸렸다. 혼란스러움과 동시에 노바카사는 이유모를 불안감마저 함께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이 혼란과 불안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릴 때쯤, 하루 종일 달린 마차는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 생일 축하해.” “ 생일 축하한다.” “ 고맙습니다.” 파티가 시작되고 난후, 파티 홀에서는 루제와 루네를 향한 축하행렬이 한참 진행됐다. 대개가 엇비슷하거나 이쪽보다 지위가 높은 귀족들이었기에 눈에 보이는 선물을 공개적으로 전달하지는 않았으나, 축하인사만큼은 아끼지 않았다. 악수를 하고 인사를 하며 루제와 루네는 그 인사들을 전부 받았다. 정신없이 축하행렬을 지나보내고 나자 둘은 간신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 어지럽다.” “ 작년보다 사람들이 많이 오셨지?” “ 응. 아마 훨씬.” “ 헤헷, 기쁘다.” “ 네 덕분이지, 뭐.” “ 응?” 파티 홀은 예상보다 많이 찾은 귀족들로 인해 시끌벅적했다. 특히나 한참 파티와 같은 문화를 즐길 나이인 젊은 귀족자제들이 상당수 방문한 덕분에 파티의 분위기는 확실히 활기를 띄고 있었다. 루제는 이것이 전부 루네가 사냥대회의 레이디로 뽑혔던 것의 여파라고 생각했다. “ 그나저나 황녀님께서 오시는 걸 비밀에 부쳤는데도 이렇게 사람이 많다니. 만약 알려졌으면 미어터졌겠다, 그치?” “ 황녀님뿐이니? 남편분도 함께 오셔.” “ 에? 황태자전하께서도?” “ 응.” “ 우와.” “ 모두 놀라 자빠질걸.” 루제의 말에 루네는 두 손을 맞잡으며 탄성을 질렀다. 그녀의 상상 속에서 파티에 참석한 유리엔과 카엘이 서로 다정하게 춤을 추는 모습이 그려졌다. 아마 두 사람의 주변은 반짝반짝 빛이 날것이다. 정말 그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루네가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때마침, 입구를 지키는 시종이 커다란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 들려왔다. “ 유리시엔 황녀전하와 카류엘 황태자전하께서 드십니다!” ================================ # 69편 # 소제목 : 봄날이 왔습니다. (8) ================================ 시종은 드아이스 가의 사람이었다. 그의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가 미세한 떨림을 감추고 우렁차게 파티장안을 울렸다. 그 외침에 파티를 즐기던 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놀란 눈을 파티장의 입구로 돌렸다. “ ……!” “ 세상에.” 그들은 하나같이 놀라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귀족의 체면이니 뭐니 하는 것은 죄다 까맣게 잊어버린 채 멍하니 넋을 놓은 사람들은 막 등장한 이들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움직일 줄 몰랐다. 유리엔은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얌전히 땋아 내린 머리스타일에 비취색의 드레스를 갖춰 입고 있었다. 비슷한 색의 귀걸이와 머리장식으로 코디를 마무리한 유리엔은 전체적으로 푸른색의 스타일이었는데 마치 물의 요정처럼 보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카엘은 제 머리색에 맞춘 붉은색의 연미복을 차려입고 있었는데, 그 전체적인 모습이 붉은색을 싫어하기로 유명한 헤잇레드 부인마저 매료시킬 만큼 아름다웠다. 붉은색과 푸른색의 오묘한 조화를 이루며 등장한 두 사람은 순식간에 파티홀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귀족들은 그 둘이 그대로 파티장을 가로질러 마찬가지로 넋을 놓고 있는 루제와 루네의 앞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루네와 루제를 향해 유리엔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 생일 축하해, 루네. 그리고 루제.” “ 아…….” 루네의 표정이 환해졌다. 반가움이 역력한 얼굴로 감사의 인사를 하는 루네를 향해 유리엔이 뭔가를 건넸다. “ 생일선물이야.” 그때서야 귀족들은 정신을 차린 듯 웅성대기 시작했다. 제각기 다른 반응이었는데 대부분은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완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황태자와 그 약혼녀인 타국의 황녀가 이런 보잘것없는 작은 귀족의 파티에 참석한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거기에 황녀가 손수 생일선물을 건네고 있다. 그것도 고작 이름 없는 남작가의 딸에게. 그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소수의 귀족영애들은, 온갖 사교파티를 발에 땀나게 뛰어다녀도 만나기 어렵다는 황태자를 눈앞에서 만났다는 것에 감격스러워하며 어째서 좀 더 아름답게 꾸미고 오지 않았는지를 후회했다. 그렇게 여러 사람을 경악에 빠뜨리며 유리엔이 건넨 생일선물은, 바로 반지였다. “ 우와…….” 루네가 순수하게 감탄을 터뜨렸다. 금으로 둘러진 테에 새끼손톱의 반만 한 크기로 동그랗게 장식되어 있는 보석은 은은한 분홍색을 띠는 다이아몬드였다. 무척이나 아름다웠으나 척 보기에도 흔치않은 값비싼 보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봄의 축복…….” 따로 이름이 있는 반지였는지 비교적 가까이서 지켜보던 귀족 중 한명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은 곧바로 주변의 몇몇 귀족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 봄의 축복?” “ 저 반지가 바로?” 또 다른 술렁거림이 귀족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봄의 축복. 그것은 반지가 지니고 있는 이름이었는데, 그 이름을 가지게 된 데에는 그 반지에 필수처럼 따라다니는 마치 한편의 로맨스소설 같은 배경설화가 한 몫을 하고 있었다. 뭇 소녀들의 가슴의 설레게 하는 이야기를 가진 봄의 축복은 귀족영애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로망이었다. 알고 보니 엄청난 유명세를 지닌 반지를 받아든 루네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는 반지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히고, 그 다음에는 주변의 반응에 놀라느라 괜찮다고 사양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얼떨결에 반지를 얻은 루네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이 이번에는 루제에게 유리엔이 생일선물을 건넸다. “ …! 저건!” “ 봄의 눈물!” 이번에 등장한 것은 비슷한 디자인의 목걸이였는데, 마찬가지로 유명세를 타고 있던 모양인지 곧바로 알아본 귀족 몇몇이 놀라움을 터뜨렸다. 봄의 눈물이라는 목걸이는 봄의 축복의 배경설화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목걸이였다. “ 말도 안 돼.” “ 이게 꿈이야, 생시야?” 귀족영애들은 부러움과 질투심이 섞인 시선으로 루네와 루제를 응시했다. 루제는 루네와 마찬가지로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생각 못했던 유리엔의 선물을 받아들었다. “ 감사…합니다.” “ 앗, 고맙습니다.” 루제의 인사에 루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곧바로 꾸벅 인사했다. 그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루네는 감격에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런 루네에게 잠자코 웃어준 유리엔은 곧바로 멍하니 부인과 함께 서있는 드아이스 남작에게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 반갑습니다. 카르나제국의 일황녀이자 황태자전하의 약혼녀인 유리시엔 헤자르 드 카르나입니다.” “ 아, 저…화, 황녀전하를 뵙습니다.” “ 가장먼저 인사를 드렸어야하는데, 실례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 아, 아니, 전혀 아닙니다.” 놀라고 당황하며 드아이스 남작부부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카엘을 향해서는 넙죽 절이라도 하려는 것을 유리엔이 말렸다.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유리엔이 카엘과 함께 슬쩍 파티장을 빠져나간 뒤에도 드아이스 남작은 얼떨떨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놀람이 가득한 얼굴로 연신 제 두 딸과 막 사라진 유리엔을 번갈아 바라보던 남작부부의 표정이 곧 뿌듯함으로 차올랐다. 유리엔은 처음부터 파티를 즐길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파티라는 걸 좋아하지도 않을 뿐더러 루네의 생일파티에 자신이 주인공처럼 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기에 일부러 선물을 전해주자마자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저택의 정원이었다. 앉으라고 마련해둔 것이 분명한 나무의자는 보이지도 않는지 평평한 바위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유리엔이 말을 내뱉었다. “ 아, 숨 쉴 것 같다.” 내친김에 발을 불편하게 하는 구두까지 벗어던지는 유리엔의 행동을 보며 오래되지 않은 어떤 기억의 데자뷰를 느낀 카엘이 피식 웃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하며 카엘이 말문을 텄다. “ 네 호위기사는?” “ 린이랑…그외 등등과 함께 잘 있겠지.” “ 경호를 목적으로 데려온 게 아니었냐?” “ 아냐.” 저택에 도착한 후 유리엔과 카엘을 제외한 나머지는 따로 쉴 방을 배정받았다. 제론도 마찬가지였다. 둘과 함께 등장하면 자연스레 존재감이 약해질 수밖에 없으니 조금 뒤에 따로 파티에 참석시키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를 제외한 나머지는 또한 그 각자 용도가 있었다. “ 게다가 네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유리엔이 툭 내뱉은 말에 카엘이 멈칫했다. 카엘은 묘한 기분이었다. 의식하고 말한 건 아니겠지만, 저 말은 유리엔이 카엘을 믿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약간 의외라고 생각하며 카엘이 화재를 돌렸다. “ 참, 그런데 봄의 축복과 눈물이라니…그런 걸 준비했을 줄은 몰랐는데.” “ 아아, 그거?” 봄의 축복, 봄의 눈물. 그 둘은 유리엔이 모국에서 생일선물로 받은 것이었다. 흔히들 낭만적이라고 일컬어지는 배경설화를 듣고도 유치하다며 비웃음을 날린 유리엔은 지금껏 그 둘을 합쳐 ‘봄날세트’라고 불러왔다. 딱히 쓸 일도 없고 해서 린에게 맡겨놓았던 것인데 생각 외로 유용하게 사용하게 됐달까. 그렇게 말하며 유리엔이 후후 웃었다. 딱 보기에도 뭔가 속셈이 가득 들은 웃음이었다. 그리고 그 속셈이 뭔지 대충이나마 추측한 카엘은 그저 고개만 내저었다. 유리엔의 ‘진짜’ 생일선물은 이제 슬슬 등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 # 70편 # 소제목 : 봄날이 왔습니다. (9) ================================ 제론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명령에 가까운 말에 의해 카엘과 떨어져 다른 이들과 함께 남게 되었을 때, 자신이 이 저택에 온 목적이 적어도 호위는 아니라는 것이 명확하게 판명되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가능성을 꼽아보던 와중 시간차를 두고 파티에 참석하라는 말과 자신이 입고 있는 연미복이 문득 눈에 들어오면서 그의 생각은 하나로 압축되었다. ‘ 파티 참석이라…….’ 드아이스 저택에서 열리는 생일파티의 주인공이 남작의 두 딸이라는 사실은 알게 된 것은 불과 방금 전이었다. 어째서 몰랐을까 싶기도 하지만 드아이스 남작이나 그 부인 혹은 아들일수도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단순히 생일파티라는 것 하나로 루네와 루제를 떠올리기는 힘든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충분히 추측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 따져보면 드아이스 남작이나 그 아들의 경우는 딱히 일부러 시간을 내어 파티에 참석할 만큼 유리엔이나 카엘과 안면이 있지는 않으니 자연스레 루네와 루제로 가능성이 좁혀질 수 있었다. ‘ 우습군.’ 멈춰선 제론은 자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지금 아주 별것 아닌 일로 명령수행을 망설일 정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생일선물을 준비 못했다. 아예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대놓고 참석하면서도 선물을 주지 못한다는 아주 사소하다 못해 비웃고 싶어지는 이유로 제론은 번뇌에 휩싸인 것이다. 카엘이 알았다면 두고두고 놀려먹었을 게 분명한 제론의 동요는 그 후로도 잠시 동안 계속되었다. 파티에 참석한 귀족영애들은 하나같이 손수건을 쥐어뜯었다. 죄 없는 꽃무늬 손수건을 앞니로 잘근 씹으며 그녀들은 번뜩이는 시선을 한곳으로 고정했다. 시선이 향한 곳에는 봄의 축복과 봄의 눈물이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분홍색 다이아몬드를 아름답게 뽐내고 있었다. 부럽다. 완전 부럽다. 제대로 부럽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부러움에 몸부림치는 그녀들의 눈빛이 더욱 형형하게 빛났다. 그 시선들에 흠칫 놀라며 루네가 신기한 표정으로 제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바라보았다. 이를 갈며 쳐다보는 여인들이 한둘이 아닌지라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부러움과 질투를 한 몸에 받는다는 것은 역시 조금 가슴이 벅차오르는 일이었다. “ 그런데 언니.” “ 왜?” “ 봄의 축복과 봄의 눈물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해서 생긴 거야?” “ …….” 사실 루네는 그 두 보석의 배경설화를 알지 못했다. 들어본 적이 없으니 당연했다. 다만 봄의 눈물이나 축복이라는 보석의 이름만 어쩌다 간간히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이었다. 루제는 순진한 눈망울을 깜박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동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 내가 받은 목걸이와 네가 받은 반지에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어떤 이야기가 있어.” “ 응.” “ 한 아름다운 여인과 그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 그리고 그 여인의 절친한 친구…이렇게 세 명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야.” “ 우와.” “ 잘 들어. 옛날 어느 마을에 부잣집 저택이 있었어. 그 저택은 돈이 많은 유명한 상인의 집이었는데, 상인에게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딸이 있었지. 그리고 그 딸에게는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냈던 한 친구가 있었는데…아니, 잠깐.” “ ?”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도입부에 눈을 빛내던 루네는 갑작스레 말을 끊어버린 루제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루제는 잊고 있었던 뭔가가 갑자기 떠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 그러고 보니…봄의 축복은 한 쌍일 텐데?” “ 응?” “ 그 반지, 내가 알기로는 똑같은 게 하나 더 있을-.” “ 제론 트아로민경께서 드십니다!” 때마침 시종의 목소리가 루제의 말을 막았다. 시종은 제론의 등장을 알리고 있었다. 깜짝 놀란 루네와 드디어 기다리던 때를 맞이한 루제가 동시에 빠른 속도로 파티장의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아!” 루네는 그대로 시선을 멈췄다. 가슴이 콩닥거리며 뛰기 시작하고, 눈동자는 입구에서부터 천천히 걸어오는 한 미남자에게서부터 떨어질 줄을 몰랐다. 머리색에 맞춘 남청색의 연미복을 차려입은 제론은 어느 모로 보나 흠잡을 곳 없는 모습이었다. 평소 계속해서 몸을 단련하는 기사이기 때문인지 적당한 근육에 균형이 잡힌 몸은 고급스러운 연미복을 막힘없이 소화해내고 있었고, 보통보다 큰 키는 제론을 무척 늠름하게 보이게 했다. 카엘처럼 보는 이의 넋을 빼앗아버리는 엄청난 미남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이성으로서의 매력을 어필하기에 충분한 제론이었기에 몇몇 소녀들이 얼굴을 붉히며 제론을 흘끔거렸다. 그 모습에 이유 없는 뿌듯함을 느끼며 루제가 꼼짝없이 얼어있는 루네를 슬쩍 머리부터 훑어보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은 공들인 관리 덕에 윤기가 흘렀고 새하얀 피부는 잡티가 없이 깨끗했다. 밝은 분홍색의 드레스는 밑단의 풍성한 프릴이 발랄함을 한층 강조해주었고 리본모양으로 조각된 브로치는 루네의 풋풋한 소녀다움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아주 귀여웠다. 역시 아침부터 부산을 떨며 공을 들인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며 루제가 슬쩍 빠질 타이밍을 잡으려는 순간, 때마침 그녀의 눈에 뭔가가 제론의 오른손에서 미세하게 반짝하고 빛나는 것이 보였다. 순간 빠른 두뇌회전과 비상한 눈치로 그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에 따른 유리엔의 의도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차린 루제는 곧바로 루네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성공을 기원하는 미소와 함께 자리를 피하기전 마지막 대사를 날렸다. “ 이야기의 나머지는 제론 경께 들어. 아마 알고계실거야.” “ 으응?” “ 행운을 빌어, 동생.” “ 어, 언니?” 의미심장한 루제의 말에 당황한 루네가 옆을 돌아보는 순간, 진정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놀라운 속도로 루제가 다른 귀족들 사이로 몸을 감췄다. 어안이 벙벙해진 루네를 깨운 것은 주변 귀족들의 갑작스런 술렁임이었다. “ 어머나!” “ 저것 좀 봐.” 루네는 귀족들이 쳐다보며 웅성거리는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드레스나 머리카락 등을 살폈지만 특별히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도중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에 낀 반지를 내려다본 루네가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지의 다이아몬드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분명 반지를 처음 받았을 때나 방금 전까지도 전혀 없었던 현상이었다. 게다가 그 빛은 미약하게나마 어딘가를 가리키듯 향하고 있었다. 그곳으로 자연스레 시선을 돌린 루네가 처음 빛을 발견했을 때보다 더욱 깜짝 놀라 움직임을 멈췄다. 그 빛은 바로 제론을 향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제론이 오른손에 끼고 있는 반지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루네의 것과 무척이나 똑같이 생긴 반지는 마찬가지로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어서, 누가 보더라도 그 두 개가 한 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상황인 것은 제론 또한 마찬가지인지라 그는 당황한 얼굴로 제 오른손에 끼워진 반지를 응시했다. 유리엔과 카엘이 파티장으로 먼저 향하기 전, 손가락에서 빼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며 명령으로 착용하게 된 반지였다. ‘ 설마…….’ 그 순간 제론의 머릿속으로 봄의 축복이라는 이름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뿐인 여동생이 로맨스 광임과 동시에 보석 광이었던지라 제론은 봄의 축복에 대해 반지와 목걸이의 효과를 비롯해서 배경설화까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0.3초간의 생각 끝에 서로를 이어주기라도 하려는 듯한 이 빛이 봄의 축복의 효과라는 것을 깨달은 제론의 표정이 난처함으로 일그러졌다. 이것은 백퍼센트 계획된 상황이었다. ================================ # 71편 # 소제목 : 봄날이 왔습니다. (10) ================================ “ 난 몰라…어쩜 좋아!” 정말로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과 괜히 드레스자락을 움켜쥐는 수줍은 몸짓. 그에 더불어 난처함을 드러내듯 살풋 떨리는 말투는 분명 루네의 것이건만, 그 말을 내뱉는 옥구슬 굴러가듯 아름다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유리엔이었다. 그녀와 마주보는 위치에 있는 평평한 바위에 앉은 카엘은 난데없이 루네의 흉내를(그것도 꽤나 완벽하게)내는 유리엔을 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한 명뿐인 관객의 일그러진 반응은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으며 유리엔이 말을 이었다. “ -라고 생각하겠지. 지금쯤이면.” “ …아아, 그렇겠군.” 부연설명이라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는 유리엔의 말에 카엘이 난데없는 그녀의 돌발행동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말을 내뱉었다. 카엘은 방금 전 유리엔으로부터 어렴풋이 짐작했던 ‘봄날세트를 이용한 계획’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은 상태였다. 그것을 바탕으로 추측하건데 분명 루네의 성격이라면 지금쯤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거다. 그리고 제론이 움직이겠지. 카엘은 눈앞에 뻔히 펼쳐지는 상황에 작게 실소를 흘렸다. 띠 동갑이 넘는 나이차이 에도 불구하고 둘이 이어진다면 아마 상당히 풋풋한 커플이 될 것이다. 아마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훈훈한 표정을 짓게 만드는 산뜻한 커플이 되지 않을까. 유리엔도 비슷한 상상으로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이때. ‘ 난 몰라…어쩜 좋아!’ 둘의 예상 그대로 루네는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빨개졌다 파래졌다하는 그녀의 얼굴이 지금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루네가 이렇게 당황해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주변 귀족들의 의혹 섞인 시선들. 한 둘이 아닌 귀족들의 시선은 지금 온통 루네와 제론에게로 쏠려있었다. 유리엔에게 반지를 받았을 때에도 온갖 시선들을 받았지만 그때는 그나마 처음에만 주목이 강렬했고 그 뒤로는 대부분 귀족영애들에 국한되었기에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남녀노소를 불문한 모든 이들의 강렬하다 못해 타오를 것 같은 살짝 음흉한 시선은 내성적이고 수줍음 많은 루네로서는 상당히 견디기 힘들었다. 두 번째로는 미안함이었다. 루네는 자신 때문에 제론까지 이런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했다. 고문과도 가까운 이 엄청난 시선들을 자기 때문에 제론이 받아야한다고 생각하니 그저 물밀듯 미안함이 몰려왔다. 게다가 이렇게 이목을 모아버린 이상 이런 상황에서 파티를 즐기기란 솔직히 불가능했다. 결과적으로 제론은 파티마저 제대로 즐기지 못하게 된 것이다. 루네는 미안함과 부끄러움에 할 수만 있다면 어디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쩔쩔매는 루네의 모습에 제론은 계획에 끌려가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을 결정내릴 수밖에 없었다. 우선 이 무서울 정도로 집중된 이목을 끄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끼고 있는 반지의 빛이 사라지는 방법뿐이었는데, 그러기 위해선 둘 중 한명이라도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야했다. 그러나 루네의 성격상 유리엔이 직접 선물로 준 반지를(게다가 눈앞에서 손가락에 끼는 걸 보고 돌아갔다)이런 공식석상에서 멋대로 빼버린다는 것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해도 행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제론이 먼저 반지를 빼자니 루네와 반지의 연인으로 엮이는 것을 이 많은 귀족들 앞에서 대놓고 거절해버리는 것으로 비춰질까 조심스러워지는 것이다. 실제로 본인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이 상황에서 누군가 먼저 반지를 빼서 빛을 멈춰버린다면 그 소문이 어찌 퍼질지는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러한 연유로, 지금당장 제론이 취할 수 있는 적절한 조치는 한가지였다. 뚜벅뚜벅.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순식간에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힌 제론이, 루네와 딱 반걸음정도의 거리를 남겨놓고 멈춰섰다. 놀라 눈을 토끼처럼 동글게 뜨는 루네를 향해 정중히 손을 내밀며 제론이 입을 열었다. “ 함께 바람이라도 쐬시겠습니까? 루네양.” 둘이서 나란히 도피. 한쪽이 상대방을 거절했다는 소문도 차단하고, 시선들의 압박에 루네가 말라죽는 것 또한 동시에 막기 위한 제론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유리엔의 함정이기도 했다. 결국 꼼짝없이 그 함정에 걸려든 두 명의 주인공은 정해진 수순을 밟듯 테라스로 향했다. 테라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제 갓 파티가 시작된 무렵이었기에 테라스에 누군가가 있기에는 사실 이른 시간인 탓이다. 덕분에 환상적인 밤하늘을 배경삼은 테라스는 제론과 루네 단 두 사람의 차지가 되었다. 유리엔이 멀쩡한 테라스를 버려두고 정원으로 간 것은 이 둘에게 이러한 명당자리와 분위기를 양보하기 위해서였다. 없던 사랑도 싹튼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테라스는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사람의 감수성을 평소보다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아름다운 밤하늘에 잠깐 시선을 빼앗겼던 루네가 이내 여전히 제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로 눈을 내렸다. 시야에 제일처음 들어오는 것은 역시나 반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백색의 빛. 그러나 의외로 둘이 바짝 가까워지자 반지의 빛은 아까보다 훨씬 약해졌다. 이제는 그저 은은한 불빛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 신기해.’ 마법이라도 부리는 듯한 반지의 행동에 루네는 신기함을 느꼈다. 아까는 워낙에 당황해서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지만 조금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나니 반지의 빛은 신기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무척 아름다웠다. 가만히 빛을 바라보던 루네가 고개를 들어 제론을 힐끗 보았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난간에 가까이 서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제론의 옆모습에 절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다잡으며 루네가 말을 열었다. “ 많이 당황…하셨죠?” 그리고 그 말에 자신을 응시해오는 제론의 얼굴을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루네는 고개를 밑으로 푹 숙였다. 제론은 마치 제 치마 끝이라도 바라보듯 고개를 숙인 루네를 향해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잠시 고민했다. 괜찮다? 아니면 신경 쓸 필요 없다? 결국 입 밖으로 튀어나간 말은 이거였다. “ 아닙니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그에 맞는 다정한 미소는 그의 말이 꾸며낸 것이 아닌 진심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지만 루네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문득 바라본 루네의 귓가는 새빨갰다. 그나마 루네는 반지를 오른손에 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왼손이었다면 꼼짝없이 연인이나 부부를 나타내는 증표처럼 되어버리지 않았겠는가. 자신은 몰라도 제론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 뻔했다. 그러나 그것은 루네의 착각이었다. 어찌나 제국 내의 여성들이 로맨스 만들어 내기를 좋아하는 지, 봄의 축복을 오른손에 낀다는 것은 또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바로 ‘봄의 여신이 축복할 정도로 잘 어울리는 커플이 되고 싶다’는 뜻이다. 즉 당신이 마음에 든다는 의미였다. 그것을 죄다 알고 있는 제론으로서는 계획의 치밀함에 그저 치를 떨 뿐이었다. 제론이 앞으로 이걸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하나 고민하느라 내려앉은 침묵이 계속해서 이어질 무렵, 머뭇머뭇하다 마침내 결심한 루네가 조심스럽게 제론을 불렀다. “ 저-트, 트아로민 경.” “ …?” 갑작스런 부름에 대한 이유를 묻듯 루네를 돌아본 제론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눈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새빨개지는 얼굴을 애써 감추며 루네가 말했다. “ 봄의 축복에 얽힌 이야기…혹시 알고 계세요?” “ 음. 완전히 자세히는 아니지만 알고 있습니다.” “ 그렇구나.” 그러면서 입을 다문 루네가 또 뭔가를 이어 말하려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그만두었다. 분명 뭔가를 부탁하려는 듯한 뉘앙스이긴 한데 좀처럼 입 밖으로 꺼내기가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 부탁이 무엇인지 눈치 챈 제론이 먼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 해드릴까요?” “ 네?” “ 봄의 축복과 눈물에 얽힌 이야기.” 멍하니 동그란 눈만 깜박이다 루네가 배시시 웃으며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루네를 향해 보일듯 말듯 옅은 미소를 덧그린 제론이 제 여동생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낭만적인 사랑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서두를 꺼냈다. “ 옛날에…….” ================================ # 72편 # 소제목 : 봄날이 왔습니다. (11) ================================ 옛날 어느 마을에, 한 부자 상인의 커다란 저택이 있었다. 그 저택에는 상인의 하나뿐인 딸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그녀에게는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온 절친한 친구와, 얼굴도 모르는 약혼자가 있었다. 그녀는 낯설기만 한 약혼자와 결혼하기 전에 단 한번이라도 저택 밖으로 나가 자유롭게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결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하루하루를 저택 안에서 외롭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서 성대한 축제가 열렸다. 일 년에 한번 구경하기도 힘든 화려하고 큰 축제였기 때문에 그녀는 굳은 결심을 하고 몰래 저택을 빠져나왔다. 친구의 도움을 받아 축제에 참가한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 겪는 축제라는 것에 놀라고 신기해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와중 그녀의 빼어난 미모에 눈독을 들인 질 나쁜 건달들과 부딪히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때 마침 다행이도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한 기사가 그녀를 건달들로부터 구해주었다. 출중한 검술실력에 준수한 외모를 지닌 기사에게 그녀는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기사 또한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첫눈에 마음을 사로잡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집안에서 정해준 약혼자가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기사에 대해 이름도 나이도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이루어 질 수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매일 기사를 그리워하다 결국 시름시름 앓게 되었다. 하나뿐인 딸이 병을 얻은 듯 아프기 시작하자 상인은 당장 온 마을을 수소문하여 유명한 의원들에게 진맥을 부탁했다. 그러나 의사들은 하나같이 이유를 알 수 없다며 고치기 힘들다는 말만 늘어놓았다. 상인이 시름에 빠져있던 어느 날, 한 마법사가 저택을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봄의 여신의 전령이라고 밝히며 상인의 딸이 앓고 있는 병은 마음의 병이라고 말했다. 상인은 무엇이든 내놓을 테니 제발 딸을 고쳐달라고 빌었고 마법사는 그에게 반지를 하나 건네주고 사라졌다. 상인은 영문을 몰랐지만 우선 그 반지를 제 딸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반지를 끼고 나자 그녀의 병세는 거짓말처럼 조금씩 호전되어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마을에서는 봄의 여신을 기원하는 또 다른 축제가 열렸다. 그녀는 어쩌면 다시 한 번 그 기사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상인의 반대를 뿌리치고 축제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그를 만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그녀는 그만 길마저 잃고 말았다. 지친 그녀가 그만 힘을 잃고 쓰러지려는 순간, 반지에서 갑자기 빛이 나기 시작했다. 환하고 아름다운 빛은 그녀를 이끌듯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깜짝 놀랐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 빛이 향하는 곳을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놀랍게도 그 빛의 마지막에는 그녀가 그토록 애타게 찾던 기사가 서 있었다. 그 눈부신 빛은 두 사람을 연결해주듯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둘은 감격에 겨워 사랑하는 서로를 꼭 껴안았다. 그 순간 서로를 잇던 빛은 더욱 밝아져 두 사람을 감싸듯 하며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저 빛은 모두 사랑하는 두 사람을 위한 봄의 여신의 축복임에 틀림없다고 입을 모았다. “ 그렇게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가 온 마을을 뒤덮어 상인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상인은 불같이 화를내며 반대했으나 딸의 완고한 의지를 꺾지 못했고 결국 둘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이야기의 끝입니다.” 조근 조근, 낮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이어오던 이야기를 끝맺었다. 그 특유의 어조는 어째서인지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재주라도 타고난 듯 몸에서 긴장을 빼고 힘이 탁 풀리게 만들었다. “ …….” “ 루네 양?” “ 아, 네!” 멍하니 그 목소리에 취해있던 루네가 저를 부르는 말에 깜짝 놀라 크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그것에 자기가 놀라서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그 모습을 보며, 제론은 저도 모르게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 아, 흠흠. 저어…….”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며 루네가 뜸을 들였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루네는 분명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 아쉬움은 단순히 가슴 뭉클한 로맨스이야기가 끝나서가 아닌 제론의 목소리가 멈췄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야기라도 좋으니까 좀 더 듣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루네가 말을 꺼냈다. “ 봄의 눈물…에 관한 이야기는 없나요?” 그리고 자기가 한 말에 루네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왜 이걸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제론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을 때 루네는 반사적으로 만세를 외칠 뻔했다.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론은 여전히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로 입을 열었다. “ 봄의 눈물은 그녀의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이 얘기는 종종 생략하기도 합니다만…사실 그녀가 몸져누웠을 때, 그 기사는 상인의 저택을 찾아왔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으나 아프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말았지요. 그는 그 후로도 몇 번 저택을 찾아왔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습니다. 결국 마을에 더 이상 머무를 시간이 없게 된 기사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와중 우연히 그녀의 친구인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어느새 루네는 다시금 이야기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이야기 중간 중간 타이밍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는 루네의 눈을 바라보며 제론이 얘기를 이어나갔다. “ 기사는 여인에게 부탁하게 됩니다. 자신은 지금 부득이하게 돌아가야 하지만 나중에라도 사랑하는 그녀를 다시 한 번 꼭 만나고 싶다고. 그러니 다음에 열리는 축제에 반드시 참가할 테니 그날 자신이 기다리고 있을 장소로 와 달라는 말을 대신 전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여인은 알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고 기사는 여인에게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었습니다.” 루네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루네의 눈앞에 저절로 이야기 속 여인과 기사의 모습이 그려졌다. “ 그러나 여인은 상인의 딸과 기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상인의 딸에게 있는 얼굴도 모르는 약혼자는 사실 여인이 옛날부터 사랑해온 남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약혼녀인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기에 그녀가 기사와 이루어짐으로써 약혼이 깨져버린다면 분명 무척이나 괴로워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여인은 자신이 마음깊이 사랑하는 남자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코끝이 찡해진 루네가 눈가를 붉혔다. 남자를 향한 여인의 사랑이 안타까웠다. “ 고민을 거듭하던 여인은 결국 기사가 말하고 간 시간과 장소를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가까스로 병상에서 일어난 뒤에도 끝없이 기사를 그리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여인은 일순 마음이 흔들렸지만, 오랫동안 사랑해온 남자의 행복을 생각하며 모질게 마음먹었습니다. 여인은 기사가 몇 번이나 찾아왔었다는 사실마저 그녀에게 숨겼습니다.” 제론은 테라스의 난간 밖 경치를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계속 해나갔다. 이야기에 풍덩 빠진 루네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제론은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 그러나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무작정 기사를 만나기 위해 축제로 나갔고, 고생 끝에 기사를 만나게 되었지요. 결국 사랑하는 연인과 행복하게 살게 된 그녀를 보며 여인은 자신의 부질없는 짓을 한탄했습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뒤에도 그녀는 변함없이 여인을 가장 친한 친구로 대했고, 한없는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낀 여인은 눈물로 두 사람의 사랑을 축하해주었습니다. 그와 함께 여인이 선물로 준 목걸이가 바로 지금의 ‘봄의 눈물’입니다.”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며 제론은 예전 카엘이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이 설화를 두고 서로 내기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과연 이 설화는 실제로 있었던 일인가 아닌가. 두 사람 모두 ‘99%의 뻥과 1%정도의 실화로 만들어졌을 것이다’에 10골드쯤 걸어 내기가 무산되었던 기억이다. 그 생각을 하며 작게 실소를 흘리는데 순간 희미하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제론이 시선을 휙 돌리자 루네가 두 눈 가득 차오른 눈물을 소리 없이 뚝뚝 흘리고 있었다. 놀랐다. 제론은 너무 놀란 나머지 그대로 굳어버렸다. 울 줄 몰랐다. 이야기의 끝이 무슨 셋이 나란히 절벽 밑으로 뛰어내리는 슬픔의 새드엔딩도 아니고, 그렇다고 감동받기에는 내용이 너무 진부하고, 인물의 감정에 몰입하자니 그러기엔 사건이 너무 급 전개였다. 솔직히 제론이 판단하기에 ‘봄 시리즈 배경설화’는 그 유명세에 비해서 군데군데 찌질함이 엿보였다. 그것도 좀 많이. 그런데 루네는 그 이야기를 듣고 울고 있었다. 남들보다 감수성이 풍부할 거라고 대충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그 예상을 뛰어넘는 상황에 제론은 어떻게 할 지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28년의 인생을 나름 젠틀맨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그다. 때문에 여성을 울려본 기억은 딱히 없었다. 따라서 위로해본 경험도 많지 않다. 어떻게 해야 하지. 뭐라고 말해야 할까. 어른의 여유 따위 뚝뚝 떨어지며 드레스자락을 물들이는 맑은 눈물방울에 이미 저 멀리 날아가버린지 오래다. 애를 써 봐도 굳어진 채 움직이지 않는 안면근육이 그가 느끼는 당혹감의 크기를 말해주고 있었다. 쩔쩔매던 제론은 기어코 가장 극단적이자 보편적이며 단순함이 돋보이는 위로를 몸으로 날렸다. “ ……!” 단단한 팔이 등 뒤를 둘러 감쌌다. 뺨을 적시며 흐르던 눈물은 누군가의 단단한 가슴팍에 대여 그 옷자락을 젖게 만들었다. 당황하며 멍하니 깜박이는 갈색의 순진한 눈동자위로 다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 …왜 웁니까.” “ …….” “ 그렇게 우니까…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눈물은 더 이상 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지금 좋아하는 사람의 가슴에 안겨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었다. 우느라 하얗게 질렸던 루네의 얼굴이 금세 새빨갛게 타올랐다. 루네는 한참을 더 제론의 품에 안겨있었다. 굳이 떨어지려면 떨어질 수 있었고 밀어내려면 밀어낼 수 있었지만 두 사람 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세상이 빙글빙글. 루네는 제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이 무슨 행복한 상황이란 말인가. 테라스에는 제론이 루네를 껴안은 시점부터 침묵이 내려앉고 있었지만 침묵이고 뭐고 루네의 귀에는 제 시끄러운 심장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더 그렇게 있었을까. 댄스타임이라도 맞이한 듯 느끼하고 니글거리는 음악이 파티 홀에서부터 미약하게 들려왔다. 아니, 저딴 음악을 선정한건 대체 누구지. 그런 실없는 고민을 하며 제론이 입을 열었다. “ 루네양.” “ …네?” “ 한 곡, 추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순간, 루네는 머릿속에서 퍼엉 하고 폭죽이 터진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몸소 체험했다. 떨리고 기쁘고 긴장되고 행복하고 여하튼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헤집고 돌아다니는 와중에 루네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을 끄집어냈다. “ 저야 물론…기꺼이.” 한 밤, 테라스의 경치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 # 73편 # 소제목 : 외전-휘영청 밝은 달에. 上 ================================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다. 술에 취하면 평소와는 인간 자체가 달라지는 사람들. 예를 들어 부끄러움 많고 수줍던 사람이 술을 들이키는 순간 갑자기 개차반 상단 돌려차기 같은 미친 광인이 된다던가, 쑥 맥에 아무것도 모르던 순진한 사람이 술에 만취하자 갑자기 전 세계 모든 이들의 뜨거운 하트를 노리는 밤의 황제처럼 변해버린다던가. 사실 그런 경우가 그리 흔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드물거나 하지도 않다. 그냥 주변에 어쩌다 한명 정도는 있을 가능성도 있는 그 정도. 그리고 여기에도 있다. #외전-휘영청 밝은 달에. 上 (부제 : 그들의 술버릇 탐구) “ 이건 뭐야?” “ 술이에요, 황녀님!” “ 그건 나도 알아.” 왜냐면 눈이 달렸으니까, 하고 대꾸하며 유리엔은 자신에게로 내밀어지는 반투명한 재질의 기다란 유리병을 받아들었다. 혹시 유리가 아닌 다이아몬드나 크리스탈을 깎아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이 들 정도로 반짝반짝 광택을 내뿜고 있는 병은 척 보기에도 고급임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것도 고급 중의 고급-이름하야 최고급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아 보인다. 그 정도로 값비싼 병에 담아놓은 것이 고작 물이나 음료수일리는 없었으므로 대충 어림짐작으로도 안에 든 것이 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술이라-. 유리엔은 지금껏 ‘술’이라는 이름을 지닌 알콜액체와는 그다지 친분을 쌓아 본 기억이 없었다. 어릴 적 우연한 기회로 한 모금 마셨던 술이 하필이면 지독하게 쓰고 독한 종류였던 탓에 어린나이의 유리엔은 쓴 맛에 켁켁거리며 근 하루를 꼬박 앓아야했다. 그런 아름다운 추억이 있으니 자연히 유리엔은 알콜기피증이 아닐까싶을 정도로 술을 멀리하는 걸 자연시해왔다. 그런데 이것은 웬 술이란 말인가. 의아함을 담은 눈빛으로 유리엔이 린을 바라보자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 첫날밤을 무사히 치른 기념으로 준비했습니다!” …무사히 뭘 치러? 지나치게 밝은 목소리에 유리엔은 순간 자신이 헛것을 들은 건 아닌지 의심해야했다. 귀에 들린 말이 순간적으로 살인충동을 불러일으킬 만큼 어처구니없는 내용인 것에 비해 린의 표정은 더없이 화사했으니 그 어울리지 않는 언밸런스에 유리엔은 그만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자신의 청력과 시력에 아무런 이상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유리엔이 표정을 파삭 하고 찌푸렸다. 게 누구 없느냐. 내 당장 이년을 끌어내어 주리를 틀고 말겠다. …라고 외치는 듯한 유리엔의 불타는 눈빛에 린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 넵.” “ 갑자기 웬 술이야?” “ 그게 말이죠….” 실은 받았어요, 하고 털어놓는 린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비싸고 비싸고 비쌀 것 같은 술을 하사한 사람은 바로 국왕폐하란다. 난데없이 제 며느리에게 술을 선물로 내리면서 황제는 그 이유를 함구했다. 사실 황제는 몰래 숨겨둔 하녀와 병사 외 몇몇 첩자들로부터 카엘과 유리엔이 함께 밤을 지새우긴 했으나 므흣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는 보고와, 유리엔이 보낸 간단한 서신(내용-푹 잤습니다)를 받고 ‘우리 카엘이 이로서 진정한 남자로 한발 더 다가가게 되었구려 허허허허’하며 황비와 얼싸안고 좋아하다가 홧김에 축하라도 할 겸 평소에 아끼던 술을 한 병 유리엔에게로 충동적으로 보내준 것이었다. 따라서 린의 ‘첫날밤을 무사히 치른 기념’이라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닌 셈이다. 물론 그 것을 알 길 없는 유리엔은 그저 제법 묵직한 유리병을 이리저리 돌리며 살펴볼 뿐이었다. “ 있잖아, 린.” “ 네?” “ 술 좋아해?” “ 비싼 거라면 원더풀!” “ …….” 내가 혹시 이 아이를 거지로 키워왔던가, 하는 고뇌에 휩싸이는 유리엔을 보며 린이 황급히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 아니 그러니까, 술은 비쌀수록 맛있다는 얘기였어요.” “ 맛있다고?” “ 네. 비싼 술일수록 오래됐다고들 하는데, 대부분 부드럽고 달콤하던걸요?” “ 달콤해?” 유리엔은 린의 설명에 반문하며 슬쩍 기억을 더듬었다. 언제인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 식도를 타고 넘어가던 술의 맛은 분명 뇌가 마비될 정도로 썼으며 삼키는 순간에는 목구멍을 지나 오장육부를 전부 녹여 내릴 것처럼 강렬했다. 그것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원초적 공포를 담은 최악의 맛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게 무려 달다니. 부드럽다니. 맛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 어렸을 적의 기억 이후 술에 대한 불신이 생겨 파티에 흔히 나오는 칵테일마저 마셔보지 않은 그녀였기에 린의 말은 더욱 신빙성을 느끼기가 힘들었다. “ 정말 맛있어?” “ 네! 그 달짝지근하며 새콤한 것이 부드럽게 입안을 맴돌다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에는 스무스한게 아주 그냥…아, 물론 싸구려 술은 제외구요.” “ 흐음…….” 고민된다. 저렇게까지 열성적으로 극찬을 하니 한번 먹어보고 싶기는 한데, 그래도 역시 살짝 불안한 마음이 떨쳐지질 않는다. 결국 이래저래 생각을 하던 유리엔은 결단을 내렸다. “ 린.” “ 네.” “ 가서 카라멜 좀 호출해줘.” 먹여보고 결정하자. 린은 살아있는 인간실험체를 데려오기 위해 바삐 방을 나섰다. 기사단 지도를 끝낸 카엘의 일과는 잠자리에 들기 전의 간단한 티타임과 반신욕이었다. 그리고 그 후에 낮에 검토했던 서류들을 마무리한다. 그렇게 끝맺음을 지어야 할 시간표이건만 갑작스런 호출로 인해 그 일과는 깨지고 말았다. “ 왜 불렀냐?” 널따란 방에는 드레스 룸과 화장대 등을 따로 배치하고도 공간이 남아 화려한 침대와 그 침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두 사람이 앉기에 모자람이 없는 크기의 탁자가 따로 구비되어있었다. 종종 티타임을 위한 용도로 쓰이는 그 탁자에 앉아 유리엔은 막 들어오는 카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 여어.” “ …뭐야 그건?” 들어오다 말고 멈칫한 카엘이 척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광채를 뿜어내는 반투명한 유리병으로 시선을 던졌다. 탁자 위에는 유리병 외에도 반짝이는 술잔 두 잔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 술 마시려고?” “ 받았거든. 폐하한테.” “ 아버지께서?” 뭔가 이상한데,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카엘이 유리엔의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범상치 않은 유리병의 자태에 카엘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나름 애주가인 자신의 아버지가 이런 고급술을 이유도 없이 보낼 리가 없는데…무슨 꿍꿍이인 건지. “ 그래서, 같이 마시자고?” “ 반드시 너한테도 술을 들이부어 주라는 명이셔.” 눈 하나 깜짝 안하고 거짓말을 내뱉으며 유리엔이 입구를 따기 위해 유리병을 들었다. 어디 보자, 손으로 바로 따기는 어려우니 이 뾰족한 걸로 찌른 다음 빼라고 했던 것 같은데-. “ 아, 그거 힘이 제법 드는-” 퐁~ “ …….” 악력과 팔 힘을 동시에 필요로 함으로서 가녀린 여성들에게는 상당한 난이도를 요구하는(해서 대부분 시종이나 파트너인 남성이 대신 함)병마개 따기를 마치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 짓이기듯 손쉽게 해치운 유리엔을 보며 카엘은 유리병을 받으려 들었던 무안해진 손을 밑으로 내렸다. 하여간 누가 괴력 아니랄까봐서. “ 오…냄새 좋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마개가 제거되자, 열린 유리병의 입구에서부터 술의 향긋한 냄새가 주변으로 확 퍼져나갔다. 말 그대로 새콤한 듯 하면서도 달짝지근한 향기에 유리엔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냄새만 맡으면 정말로 맛있을 것도 같은데. 유리엔은 조심스레 들고 있던 병을 기울여 두 유리잔에 반씩 채웠다. 초르륵-소리를 내며 채워지는 액체는 생각보다 맑은 초록색이었다. 카엘이 먼저 잔을 들었다. 이건 그로서는 제법 익숙한 술이었다. 이름은 확실하게 기억이 안 나지만 남부지방의 어떤 열매가 주재료인 과실주. 새콤달콤한 맛과 부담 없이 목으로 물처럼 넘어가는 느낌 덕에 남자보다는 여성에게 더 인기가 많았다. 물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한번쯤 맛보고 싶어 하는 술이기도 하다. 잔을 입가에 대고 기울인 카엘이 먼저 맛보듯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르듯 입가심을 한 뒤에 다시 한 모금. 교육인지 천성인지 몸에 배인 격식과 우아함으로 술을 꼴깍꼴깍 잘도 마시는 카엘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유리엔이 대뜸 물었다. “ 어때?” “ 뭐가?” “ 술 말야.” “ 아아. 뭐 그럭저럭.” 말 그대로 그럭저럭 이었다. 카엘에게는 말이다. 맛도 그럭저럭 보통이고, 알딸딸한 정도로 봐서 도수도 중간정도로 그럭저럭하다. 썩 나쁘지도 엄청 좋지도 않은 그저 무난히 ‘괜찮다’정도. 물끄러미 남이 마시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유리엔이 마침내 제 앞에 놓인 잔을 집어 들었다. 안에 들은 맑은 액체가 어서 자신을 마셔달라는 듯 유혹적으로 찰랑였다.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과실주가 담긴 잔을 노려보는 유리엔의 모습에 카엘이 피식 웃었다. “ 뭐냐? 설마 처음 마시는 것도 아닐 테고.” “ 맞아.” “ 뭐?” 놀라는 카엘을 뒤로하고 유리엔은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향긋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자 그녀는 눈 딱 감고 그것을 그대로 원샷했다. 꿀꺽꿀꺽. 탁. “ …….” “ …….” 잠깐의 침묵 뒤, 유리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팔을 뻗어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초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잔이 채워지자 유리엔은 다시 그것을 한 번에 마셨다. 잠시 후 또다시 원 샷, 원 샷, 원 샷. 갑작스런 유리엔의 과실주 원 샷 퍼레이드에 놀란 카엘이 막 한 모금 마시려던 잔을 내려놓았다. 처음 마셔 본다더니 저 무식한 원 샷은 대체 뭐란 말인가. 다시 잔을 채우는 유리엔을 말리기 위해 카엘이 손을 뻗었다. 아마 자기 주량도 제대로 모를 텐데 너무 많이 마시는 듯해서였다. 뭐, 얼굴에 열도 안 오르고 겉보기엔 조금도 변화 없는 것을 보아 아직 취하지는 않은 듯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유리엔이 배시시-웃음 지었다. …배시시? 씨익, 도 아니고 피식, 도 아닌 너무나도 낯선 의태어에 카엘이 당황하는 사이 유리엔이 입을 열었다. “ 술…맛있네요오.” ================================ # 74편 # 소제목 : 외전-휘영청 밝은 달에. 下 ================================ …존댓말? 아니 그보다, 말꼬리를 길게 늘이는 것이 마치……. “ ……!” 당황과 의혹이 섞인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엘에게 유리엔은 마치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살짝 갸웃해보였다. 그 고갯짓은 분명 지나가던 남정네가 당장 간이라도 빼어줄 만큼 초 절정으로 귀여웠으나 분명 평소의 유리엔과 어울리는 몸짓은 아니었다. 목운동이라도 하겠답시고 이리저리 과격하게 목을 젖히면 모를까, 무려 귀엽게 고개를 갸웃하다니? 소름이 돋는다. 카엘은 자기도 모르게 언제든 뒤로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카엘을 향해 몇 번 의문스런 시선을 보내던 유리엔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 우웅. 안 맛있나아?” 쿠궁. 마치 눈앞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듯한 충격이 카엘을 덮쳤다. 애교…애교다. 저건 분명히 애교였다. 카엘은 딱히 애교라는 것과 담을 쌓고 지내지는 않았다. 남자라면 모두 귀여운 것에 약할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과 자신감에 휩싸인 여성들이 카엘만 만났다하면 앞뒤 안 재고 필살애교부터 선보인 덕분에 자연스럽게 그것에 익숙해지게 된 것이다. 그런 만큼 카엘은 애교라는 것에 무덤덤해왔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도저히 무덤덤하게 넘길 수도 태연할 수도 없었다. 세상에, 애교? 애교라니? 저 유리시엔 헤자르 드 카르나 황녀가 애교라니! 다른 사람도 아닌 유리엔의 갑작스런 애교에 카엘은 육체 밖으로 탈출하려는 넋을 간신히 붙잡았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머리를 열심히 굴려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해냈다. 취했구나! 카엘은 단정 지었다. 유리엔은 틀림없이 만취했다. 물론 겉보기에는 얼굴색도 그대로고 눈동자도 똘망똘망한 것이 제법 멀쩡해 보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취한 상태가 분명했다. “ 헤헷-.” 그 외에는 저 이상상태를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눈동자를 반달로 접으며 귀엽게 웃는 유리엔을 보며 카엘은 갈등에 휩싸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술에 취한 사람을 제정신으로 돌려놓는 방법에는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지 생각해봤지만 딱히 지금과 같은 상황에 처했던 경험이 없었던 만큼 쓸 만한 방법이 떠오를 리는 만무했다. 졸지에 시련의 길에 선 카엘은 생각 끝에 유리엔을 재우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자고로 술 취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전에 잽싸게 재워야한다는 이름 모를 누군가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카엘은 유리엔을 잠들게 할 방법을 모색했다. 물론 괜찮은 방법이 퍼뜩 떠오를 리는 없었다. “ 후…차라리 마법이라도 쓸 수 있었다면 편할 텐데.” “ 마법?” 슬립(sleep)으로 단번에 재워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 하에 내뱉어진 카엘의 중얼거림을 들은 유리엔이 마법이라는 단어에 반응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에 카엘이 왠지 모를 불안을 감지하기도 전에 유리엔이 밝은 어조로 외쳤다. “ 나아, 나! 마법 쓸 수 있어요. 왜냐면 마법사니까-헤헷, 마법 보여줄게요오.” “ …!” 설마! 카엘은 혹시 하는 심정으로 유리엔을 바라보았다. 설마하니, 여기는 방 안이다. 그것도 유리엔 자신의 방이었다. 잠을 잘 푹신한 침대가 바로 곁에 놓여있는 아득한 공간이란 말이다. 게다가 무려 황성의 내부다. 아무리 취했어도 사람인 이상 생각이라는 게 있다면야. 그러나 그러한 카엘의 부정은 유리엔이 제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들어 올리며 입을 여는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 파이어-읍!” 카엘은 말 그대로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몸을 날려 유리엔의 입을 막았다. 어정쩡하게 들려진 유리엔의 왼손은 카엘의 오른손이 감아쥐고 밑으로 내렸다. 간발의 차로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막은 카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이 방을 홀라당 날려먹을 뻔했다. 자신이 막지 않았다면 유리엔이 그대로 방안에 파이어 볼을 난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말 위험했다. 카엘은 유리엔을 내려다보았다. 급하게 일어나느라 카엘이 앉아있던 의자는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카엘에게 잡혀있는 왼손과 강제로 손바닥에 의해 막혀있는 입의 상태를 인지한 유리엔이 검고 커다란 눈동자를 도르륵 굴려서 카엘을 쳐다보았다. “ …….” 왠지 순진한 여자아이를 힘으로 납치해서 어떻게 해 보려는 인간말종 변태범죄자가 된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을 느끼며 카엘이 슬그머니 손을 치웠다. 입과 왼손이 자유로워진 유리엔은 그대로 가만히 의자에 앉아있었다. 술을 잔에 채우거나, 다시 마법을 보여주겠다고 파이어 볼 날리기를 시도하거나 하는 행동은 일체 없이 유리엔은 잠자코 앉아있는 것을 고수했다. 그 모습이 마치 말잘 듣는 어린아이 같아서 카엘은 삐죽 튀어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 쿡.” “ …와아.” 카엘의 웃음에 어린아이버전(카엘은 그렇게 정의 내렸다)유리엔이 탄성을 내뱉었다. 의문을 담아 바라보는 카엘에게 유리엔이 말했다. “ 더 웃어 봐요.” “ 뭐?” “ 너무 예쁘다.” “ …….” 카엘은 침묵을 삼켰다. 예쁘다니-그건 아무래도 칭찬인걸까. 썩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아마 칭찬이 맞겠지. 갈팡질팡 거리는 카엘의 고민이 멈춘 것은 유리엔이 그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댔을 때였다. “ !” “ 쉿-가만히.”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피하려는 카엘을 단단히 붙잡아 고정시킨 유리엔이 그 얼굴을 자신에게로 향하게 만들었다. 마주보는 각도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얽히자 유리엔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대로 굳어버린 카엘을 향해 유리엔의 입술이 열렸다. “ 카엘.” 쿵. 카엘의 귓가로 갑자기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어쩌면 머릿속에서 울린 듯도 한 그 소리는 그러나 물리적인 물체가 바닥과 마찰함으로써 빚어낸 효과음은 분명 아니었다. 카엘과 유리엔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서로를 애칭으로 불러본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이름으로 부르지도 않았다. 비아냥거리듯 풀 네임을 읊조리거나 주변의 눈을 의식해서 형식적인 명칭을 쓴다면 모를까, 애칭으로 서로를 부를 만큼 살가운 사이가 아니라는 것이 둘 모두의 의견이었다. 그런 만큼 유리엔의 입에서 내뱉어지는 그의 애칭은 카엘이 스스로 느끼기에 무척 생소했다. 그러나 그 생소함과 낯설음을 내리누르고 뭔가 낯간지러운 감정이 스물스물 안에서부터 타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뭔가 이렇다라고 딱 정의내릴 수 없는 간지러운 느낌이 속을 가득 채웠다. 카엘은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유리엔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갑자기 바짝바짝 목이 탄다고 느끼는 그의 눈에 마침 들어온 것은 과실주가 담긴 술병이었다. 내용물이 반 이상이나 남은 그것을 카엘은 별 생각도 없이 집어 들어 그대로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술은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가며 이유모를 갈증을 씻은 듯이 해결해주었다. 그렇게 벌컥벌컥 들이키던 과실주가 거의 바닥을 드러냈을 무렵이 되어서야 카엘은 자신이 평소의 주량을 넘겼음을 감지했다. 머리가 살짝 어지러운 것도 같았다. 그는 항상 적절하게 음주의 양을 조절해왔기에 단 한 번도 술에 취하거나 한 적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검을 잡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신체를 함께 단련하게 되기에 어느 정도의 경지에 접어들면 웬만한 것들에는 전부 내성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이 술이라고 해서 예외는 못되었다. 게다가 카엘은 이미 오러를 능숙하게 다루는데다 검의 끝이라고 일컬어지는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거의 근접한 상태였다. 그런 카엘이니만큼 술에 취했다고 한들 마음만 먹으면 곧바로 정신을 멀쩡하게 되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카엘은 일부러 스스로의 몸이 알아서 취하도록 무방비하게 방치했다. 그러한 의지대로 순식간에 카엘의 머리에는 취기가 올랐고 자신도 모르던 술버릇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정신이 가물가물했다. 그런 순간에 잔뜩 무거워진 몸이 원하는 것은 단지 푹신한 침대위에 어서 누워 숙면을 취하는 것이었다. 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그 순간 걸리는 것은 유리엔이었다. 여전히 의자에 얌전히 앉아있는 유리엔이 어째서인지 그는 눈에 거슬렸다. 그리고 그는 유리엔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워 제 품으로 이끌었다. 이젠 잘 시간이었다. 침대에 누워야한다. 그렇지만 그전에 해야 하는 행동이 뭔가 있는 듯도 싶다. 아! 카엘의 머릿속은 금방 그것을 찾아내었다. 떠올린 것은 바로 굿나잇 인사였다. 굿모닝 인사가 있으면 굿나잇 인사도 있는 법. 카엘은 유리엔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굿모닝이든 굿나잇이든 대부분은 항상 가벼운 키스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는 키스의 위치가 갑자기 생각나지 않았다. 입술? 뺨이었던가? 조심조심 카엘의 입술이 내려앉은 곳은 바로 이마였다. 아주 잠깐의 맞닿음이 이루어지자마자 카엘은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었다. 키스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만큼 찰나의 시간이었으나 그 여운은 생각보다 크게 남았다. 유리엔은 저도 모르게 마치 감촉이 남아있는 듯한 이마를 쓰다듬었다. 열이라도 있는 건지 그곳은 이유모르게 뜨거웠다. “ 굿나잇.” 그녀를 끌어당겨 함께 침대에 누우면서 카엘이 밤인사를 건넸다. 어울리지 않는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보다는 제론이나 혹은 작업모드의 노바카사에게나 어울릴법한. 그러나 이미 취해버린 둘은 그 목소리가 이상하네 아니네를 따지기도 전에 수면의 늪으로 깊이 잠겨들고 말았다. “ 황녀님! 일어나실 시간이예…어라?” 전속시녀라고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황녀의 침실을 허락도 없이 벌컥벌컥 열어젖히는 것은 엄연히 중죄에 해당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깡그리 무시한 린이 방의 문을 활짝 열며 들어섰다. 유리엔을 깨우기 위해 침대로 다가가다 말고 린이 걸음을 멈췄다. 쏟아지는 햇살을 벗 삼아 널따란 침대위에서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이는 한사람이 아니었다. 서로를 마주보는 상태로 나란히 누운 둘은 평소에는 보기 힘든 포근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는 얼굴이 천사 같다는 말은 과연 이럴 때 쓰는 걸 거라고 생각하며 린은 조용히 백스텝을 밟았다. 유리엔은 몰라도 카엘이 이렇게 늦도록 잠을 자는 일은 드물다 못해 거의 없었다. 방을 나오며 린은 깨웠어야하나 하고 고민했지만 이내 안 깨우기를 잘했다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다. 강제로 깨우기에는, 두 사람 다 너무도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안 그런 척 하시더니 역시 친밀한 사이였어.” 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그렇게 내뱉었다. 아무리 봐도 저 둘은 완벽한 한 쌍이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질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게 만드는 눈이 부신 커플. 저렇게 서로를 의지한 채 편안히 잠든 모습을 보니 역시나 퍼펙트커플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린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왠지 자신이 배송해온 술이 적잖은 역할을 한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깊게 잠들었던 카엘과 유리엔이 깨어난 것은 린이 다녀간 이후로도 제법 시간이 흐른 뒤였다. 오랜만에 푹 잤다는 개운함을 느끼며 몸을 비트는 두 사람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간밤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뇌리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그 기억에 뭔가 큰 사건이라도 벌어졌었던 건지, 원인모를 찜찜함과 함께 약간의 오한을 느꼈을 뿐이었다. ================================ # 75편 # 소제목 : 봄날이 왔습니다. (12) ================================ 알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그건 바로 테라스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행동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손꼽히는 예로는 두 사람만의 부비부비가 전혀 관계없는 제3자에 의해 관찰되어질 가능성이 은근히 높다는 것을 들 수 있었다. 이유인 즉 테라스가 제법 높은 곳에 위치하기는 하나 장소가 실내가 아닌 건물 바깥이므로 마음만 먹는다면 아래에서 몰래 관찰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몇몇 사람들에 의해 입증된 그 사실이 지금 드아이스 저택의 정원에서 열심히 실천되고 있었다. “ 후후후후후.” 낮은 웃음을 흘리는 루제의 표정은 만족감으로 그득 차 있었다. 은은한 별빛이 쏟아지는 낭만의 장소 테라스에서 두 남녀가 서로를 맞잡고 부드러운 춤을 추기 시작했을 때 루제는 차오르는 격한 뿌듯함에 몸을 떨었다. 당장 둘이 사귄다고 사교계에 소문을 퍼뜨리고 다녀도 이상 없을 만큼 가까워진 두 남녀, 즉 제론와 루네의 훈훈한 모습은 루제의 계획이 성공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둘이 맺어지도록 확실하게 도움을 준 사람은 비록 유리엔이었지만 자신 또한 마음만은 그에 지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루제로서는 벅차오르는 감동에 그저 하늘을 바라보며 감탄사를 흘릴 뿐이었다. 별이 촘촘한 밤하늘을 눈에 담으며 루제는, 생일파티가 끝나면 곧 약혼파티를-그리고 이어 결혼파티를 열어야겠다는 한참이나 앞서나간 생각을 했다. 과연 반지의 파워인건지 하룻밤 새에 부쩍 연인분위기를 풍기는 제론과 루네의 모습에 유리엔은 무척 흡족해했다. 그리고 카엘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제론을 훑었다. 나이차가 어쩌니 하며 도덕적인 말이나 늘어놓을 때는 언제고 그새 홀라당 넘어가버리다니. 이것을 분위기의 승리라고 해야 할 것인지 그는 작은 고뇌에 휩싸였다. 어찌됐든 초기의 목적이자 파티에 참석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던 제론 루네 이어주기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유리엔은 더 이상 생일파티에 참석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카엘 또한 마찬가지로, 둘은 당장이라도 황성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그것을 조금 뒤로 연기시킬 수밖에 없었다. 노바카사에게 급 역할이 주어진 탓이다. 애초 노바카사의 쓰임은 바로 질투심 유발이었다. 끝까지 루네가 다가가지 못하고 미적거려 제론과의 관계가 진척되지 않았을 경우, 루네를 자극할 최후의 수단으로 여장모드의 노바카사를 투입시킬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고 자연히 노바카사를 파티 장에 내보내게 될 일도 없어졌다. 아니, 그런 듯했다. 사건은 파티 둘째 날 터졌다. “ 개망나니가 온다고요?” “ 그렇습니다.” 개망나니라는 표현을 부정하지 않으며 드아이스 저택의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전해온 소식은 이랬다. 도브린 백작가의 막내아들이 막 저택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그때서야 루제는 잊고 있었던 초대장의 주요인물 리스트를 떠올렸다. 도브린 백작 가에도 초대장을 보내기는 했다. 그러나 물론 올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예상에 맞게 어제 파티를 열었을 무렵 참석한 귀족들 중에 도브린 백작 가는 없었고 당연히 그대로 오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정작 생일인 날짜가 지나서야 파티에 도착했다니? 루제는 표정을 찡그렸다. 다른 파티라면 모를까 다름 아닌 생일파티에 날이 지나서 참석한다는 것은 솔직히 실례였다. 날짜를 미처 잘못 알았거나 다른 사정이 있었다면 모를까, 하지만 루제는 그 망나니 백작자제가 일부러 하루 늦게 도착했을 거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장담하건데 파티에 참석하는 이유 또한 단순히 모욕을 주기 위해서라든가 그럴 것이다. 다른 가족들은 전혀 없이 자기 혼자만 달랑 온 것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 네이시온 도브린님께서 드십니다!” 루제가 급히 파티 장에 들어서자마자 시종의 커다란 외침이 망나니 귀족자제의 등장을 알려주었다. 그의 참석에 귀족들은 약간의 술렁임을 보였는데, 의외로 귀족영애들의 반응이 밝은 편인 것을 보고 루제는 적잖이 놀랐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네이시온이라는 백작가의 셋째아들은 그 망나니 기질만 고친다면 틀림없는 매력적인 신랑감후보였던 것이다. 외모 잘났지, 배경 잘났지. 그놈의 여성편력만 좀 고친다면. ‘ 역시 이 세상은 외모지상주의의 폐단에서 벗어나는 건 포기해야 돼. 저 봐, 아무리 망나니여도 잘생겼으면 용서된다는 저 시선들을. 에라 무뇌아들.’ 자신이 한때 홀딱 빠졌었던 카엘은 외모도 외모지만 인간성 또한(그녀의 기준에서)훌륭했기에 당연히 좋아할 만 했었다며 스스로를 합리화시킨 루제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백작자제를 잠자코 쏘아보았다. 뭐랄까, 인정하기는 실지만 확실히 평균 이상의 외모였다. 꿀 같은 금발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는 특히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요즘 들어 너무도 빼어난 미모들에 익숙해지지 않았더라면 살짝 흔들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루제의 평가를 알 리 없는 네이시온은 루제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점차 불만으로 기분이 하락하는 것을 느꼈다. 기껏 공들여 꾸미기까지 하고 왔는데 저 볼 것 없는 갈색머리 계집애는 황홀함에 눈이 풀리기는커녕 힘을 잔뜩 주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지 않는가. 어처구니가 없다. 그는 혹시나 해서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역시나 호감에 가득 찬 소녀들의 눈빛이 저를 쫓고 있다. 그것에 그럼 그렇지 하는 자신감을 되찾은 네르시온의 기분은 루제를 바라보는 순간 다시 바닥을 쳤다. 루제는 여전히 눈을 치뜨고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정말 밥맛 떨어진다. 그때 황실파티에서도 느꼈지만 역시나 재수 없는 계집애라고 생각하며 네르시온은 루제의 앞에 멈춰 섰다. “ …저와 제 동생 루네의 생일파티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 합니다.” 루제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말을 딱딱 쏘아 뱉었다. 쥐뿔만큼도 환영하지 않으니 어서 꺼져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은 반어적 표현이었다.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 네이시온이 대답했다. “ 루네는? 안 보이는데.” …이 개미뒷다리훈제만도 못한 놈이 지금 지껄인 게 반말이라고 불리는 언어체계가 맞나요? 초면(엄밀히 따지면 아니지만)에 찍찍 짧은 말을 내뱉는 네이시온을 향해 이성의 한 가닥이 끊어진 루제가 생글거리며 말을 뱉었다. “ 언제 봤다고 친근하게 이름을 쳐부르세요 이 백작가 자제놈아?” “ 내 가문이 백작가라는 걸 알면서도 제법 당당하네? 그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지?” “ 너야말로 그 헛소리는 어디서 튀어나오는지 정말 궁금하구나?” “ 이것 봐라? 흐음…….” 말끝을 흐리며 위아래로 훑어보는 네이시온의 시선에 루제가 미간을 팍 찡그렸다. 그 징그러운 시선을 당장 치우라고 루제가 소리치기 직전 네이시온의 입이 열렸다. “ 별로 볼 것도 없는 게.” 그 말은 피식 하는 비웃음과 함께 내뱉어졌다. “ -뭐가 어째 이 노란똥 같은 놈아?!” 발끈한 루제의 외침이 널리널리 파티 장 안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루제는 생각했다. 짜증나짜증나짜증나짜증나짜증나짜증나-라고. ================================ # 76편 # 소제목 : 봄날이 왔습니다. (13) ================================ 턱! “ 왜, 왜 이러세요.” 느닷없이 흉흉한 기세로 노바카사가 묵고 있던 방의 문을 열어젖히고 등장한 루제는, 성큼성큼 노바카사의 앞까지 걸어와 그를 벽으로 밀쳤다. 졸지에 자기보다 머리하나는 작은 소녀에게 벽치기를 당한 노바카사가 당황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뱉었지만 그대로 씹혔다. 고개를 치켜들고 노바카사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본 루제가 오른손의 검지손가락으로 그의 턱을 받쳐 올리며 말했다. “ 너 말야.” “ 네, 네?” “ 꽤 예쁜데?” “ 네?!” 갑자기 외모에 대한 칭찬, 그러나 잘생겼다가 아닌 예쁘다는 말은 들은 노바카사가 혼란스러움에 표정을 굳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찰랑거리는 머릿결이라든지 잡티 없는 피부라든지 하는 것들을 세세히 살핀 루제가 이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 합격.” “ …대체 뭐가요?” “ 저기, 린.”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노바카사의 말을 깔끔히 무시한 루제가 곁에 서 있던 린을 불렀다. 동그란 눈을 깜박이고 서 있던 린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 네, 언니!” “ 세 시간이면 되겠어?” “ 네? 저…뭘 하면 되는데요?” 린의 질문에 루제가 손가락으로 노카바사를 가리켰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루제가 환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 얘 여장 좀 시켜봐.” “ ?!” “ !” “ 최대한 예쁘고 청초하고 귀엽고, 어쨌든 누가 보더라도 헬렐레할만큼 아리따운 레이디로 좀 만들어줘. 아무쪼록 댄스타임 전까지 부탁해.” “ 아, 네. 저 그런데 왜요?” 의아함을 담은 린의 물음에 루제가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주먹은 누군가의 면상을 힘껏 후려치고 싶은 것을 참기라도 하듯 곱게 쥐어져있었다. 그 주먹이 살짝 떨리나 싶더니 루제의 입이 열렸다. “ 물 먹여줄 놈이 하나 있거든.” 그리고 번뜩이는 그녀의 눈빛에 린 이하 두 명은 흠칫 몸을 떨었다. ‘ 저기 그런데.’ 린은 바삐 신의 화장술에 들어갔다. 세안을 하고 장미기름으로 마사지를 한 뒤 기본크림을 바른 후 시작된 숨 막히는 분가루의 행진에 기침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노바카사가 속으로 외쳤다. ‘ 제 인권은 없는 건가요?!’ 없었다. 노바카사의 거부의사 따위 처음부터 루제에게는 안중에도 없었다. 중요한 건 노예가 아닌 주인의 의사다. 이미 루제는 유리엔에게 허락을 받은 뒤였다. 루제는 약속한 세 시간이 다되었을 때쯤 귀빈실 의자에 앉아 아름다운 레이디로 바뀌어 나타날 노바카사를 여유롭게 기다렸다. 마음을 안정시킬 겸 지나가는 시녀에게 부탁한 아밀렌꽃잎차가 그녀의 심신을 차분히 가라앉혀주었다. 루제는 잔잔해진 감정으로 재수 없는 노란똥을 떠올렸다. 뿌득. 그저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가 갈렸다. 애써 평온하게 가라앉힌 기분이 다시금 분노로 날뛰는 것을 느끼며 루제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 별로 볼 것도 없는 게.’ 없는 게 없는 게 없는 게 없는 게……. 얄미운 표정을 한 네이시온이 피식 입가에 조소를 띠우며 내뱉은 그 굴욕적이고 치욕적인 말이 계속해서 귓가에 남아 맴돌았다. 루제는 그 반반한 얼굴이 좌절로 일그러지는 것을 상상하며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디 두고 보자 노란똥. 루제가 그렇게 치미는 화를 잠재우고 있을 무렵, 드디어 여장을 끝낸 노바카사가 풍성한 드레스자락을 끌며 밖으로 나왔다. 가녀리고 아리따운 여인, 로바카샤로 변모한 그의 모습에 루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짜잔-! 어때요, 언니?” “ 뷰리풀! 퍼펙트! 얘 진짜 남자 맞아?” 기대이상의 모습에 루제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 정도로 변신한 노바카사의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다. 조금 짧긴 하지만 워낙에 좋은 머릿결로 커버하며 자연스레 늘어뜨린 하늘색 머리, 린의 화장술로 인해 한층 풍성해진 속눈썹과 흰 피부의 불그스름한 홍조와 키스를 부르는 분홍빛 입술. 그리고 시선을 확 잡아끄는 화려한 드레스에 반짝거리는 보석들로 장식한 노바카사의 모습은 진정 밤의 늑대들을 유혹하는 아름다운 한 마리의 어린양과 같았다. 비록 키가 조금 큰 것이 흠이었지만 그런 것쯤은 단번에 커버할 만큼 빼어난 미모였다. 완벽했다. 확실한 작전성공의 예감을 느끼며 루제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좋았어. 가자, 로샤!” 어느새 애칭까지 지어진 노바카사가 루제의 손에 이끌려 파티장으로 향했다. 마침 댄스타임을 맞이한 파티장에서는 은은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루제의 작전이란 아주 간단했다. 여장한 노바카사를 이용해 네이시온을 꼬셔서, 아주 홀딱 빠지게 만든 다음 노바카사가 남자라는 사실을 눈앞에서 밝히는 것이었다. 아주 신랄하게 비웃으면서 말이다. 이름하야 재수똥같은 네이시온 물먹이기. 예상보다 훨씬 노바카사의 미모가 뛰어나준 덕에, 루제는 마치 성공을 바로 눈앞에 둔 듯 마음이 가벼워졌다. 자, 어서어서 노바카사에게 홀딱 빠지렴 노란똥아. “ 어머…! 처음 보는 영애인데, 대체 어느 가문 여식이죠?” “ 저 우아한 자태 좀 보세요. 세상에, 저 드레스 좀 봐. 구하기 힘든 건데.” “ 흥! 얼굴 하나는 제법 반반하군요.” 노바카사가 파티장에 나타나자 순간적으로 시선이 집중되며 곳곳에서 술렁임이 터져 나왔다. 여인들은 대부분 경계심에 찬 눈빛을, 남자들은 대개 넋이 빠진 시선을 보내는 것을 확인한 루제가 속으로 마음껏 웃음을 터뜨렸다. 마침 주변에서 막 칵테일을 마시려는 네이시온의 모습을 발견한 루제가 노바카사의 귀에 속닥거렸다. “ 야, 잘 봐. 쟤가 목표물이야. 저 노란머리 보이지?” “ 아, 네.” “ 넌 그냥 다른 잡것들이 던지는 추파를 걷어차면서 도도하게 있으면 돼. 알겠어? 도도하게. 그리고 쟤가 너한테 접근해도 적당히 눈치껏 튕겨주고.” “ …….” 같은 남자를 꼬셔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문득 서글퍼졌지만 노바카사는 권력 앞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도도한 여인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루제는 그런 노바카사를 홀 중앙쯤에 내버려두고 슬그머니 구석으로 빠졌다. 루제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네이시온을 살폈다. 노바카사는 꼬여드는 파리들의 춤 신청을 도도하게 잘 거절하고 있었다. 이제 슬슬 쓸데없이 콧대만 높은 저 노란똥이 정복욕을 느끼고 노바카사에게 접근할 때였다. ‘ 어서 접근해! 어서!’ 루제의 강렬한 염원을 느낀 건지 묵묵히 칵테일만 마시던 네이시온의 시선이 파티의 소란을 따라 노바카사에게로 향했다. 주변의 이목을 단번에 이끄는 미모의 여인이 도도하게 남자들의 추파를 뿌리치며 서 있었다. 마치 자신에게 어울리는 수준의 남자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마침내 네이시온이 몸을 움직였다. 힐끗거리며 그를 살피고 있던 노바카사의 몸이 티 나지 않게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루제가 속으로 아싸를 외치려던 순간. “ 저, 네이시온님!” “ …?” “ …!” 주황빛에 가까운 웨이브진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한 귀족영애가 네이시온을 불렀다. 그의 가까이 다가온 귀족영애는 겨우 용기를 낸 듯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입을 열었다. “ 저와…한 곡 추시지 않겠어요?” “ !!” 루제가 눈을 부릅떴다. 성공을 눈앞에 둔 계획에 갑자기 방해꾼이 나타났다. 루제는 마주치는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눈빛으로 네이시온을 응시하며 속으로 외쳤다. ‘ 거절해 거절해 거절해 거절해 거절해 거절해!’ 그러나 네이시온은 그러한 루제의 바람을 무참히 깨부수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매달았다. 긍정적인 그 미소에 귀족영애의 표정이 활짝 피는 순간 네이시온이 말했다. “ 아름다운 영애와 함께라면, 기꺼이.” “ 야-!!” 순간 루제는 참지 못하고 외쳤다. 저 바보자식이 어디서 눈앞에 저 아리따운 로샤를 놔두고 웬 이쁘지도 않은 듣보잡한테 넘어가?! “ 누구 맘대로 쟤랑 춤을 춰? 안 돼, 못 춰!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 안 돼!” 추려면 차라리 로샤랑 추란말이야-까지 외쳐주려던 루제는 순간 조용해진 주변의 분위기와 현재의 상황을 깨닫고 하려던 것을 멈췄다.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네이시온 외 몇몇을 가만히 바라보던 루제의 안색이 뭔가를 깨닫고 돌연 흙빛으로 변했다. 그러니까 결코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절대 아니지만, 방금 자신의 행동은 마치……. “ 저어…설마, 루제양?” 남몰래 좋아하던 사람의 결혼식장에 난입에 ‘이 결혼은 무효야!’라고 소리치며 파토내는 행동과 매우 흡사한. “ 너, 언제부터 날 좋아했었냐?” “ -아니야!!” 황당한 표정으로 내뱉은 네이시온의 말에 루제가 빽 소리 질렀다. 망했다. 고개까지 흔들며 부정하고 있건만 믿어주지 않는 주변의 야리꾸리한 눈빛들이 루제를 점차 절망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뒷목을 부여잡고 쓰러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 # 77편 # 소제목 : 봄날이 왔습니다. (14) ================================ 그러나 그러한 루제의 심정을 알아주는 이는 현재 파티장 내에 많아봐야 노바카사가 유일했다. 아니, 그마저도 지금 적응 안 되는 상류사회의 파티에 내버려진 상태라 잔뜩 얼어있으므로 기각. “ 진짜 아냐! 아니라니까?” “ 좋아하는 상대에게는 일부러 틱틱대는 스타일인가? 조금 의왼데.” “ 아악!” 따라서 현재 루제의 진실한 외침을 믿어 줄 사람은 그녀의 근처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네이시온에게 꼬리치던 주황색 머리의 귀족영애마저 경계심에 찬 눈빛으로 루제를 표독스레 노려보자 그녀는 억울함과 황당함에 머리가 폭발할 것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루제는 견디지 못하고 도주를 감행했다. “ 어? 야! 잠깐만 기다려봐! 왜 그렇게 쑥스러워 하는 건데?” “ 안 들려 안 들려 안 들려―!” 네이시온의 부름을 무시하며 루제는 풍성한 드레스자락과 굽 높은 구두가 무색하게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파티 장을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점이 되는가 싶더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리는 루제의 모습에 파티 장 안은 일순 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멈췄던 음악이 다시 울리고, 이내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긴 몇몇 귀족들이 추던 춤을 다시 추거나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기 시작하자 파티 장은 다시 원래의 분위기를 되찾았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게 루제의 행동에(비록 오해이지만)용기를 얻은 귀족영애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대시를 시작했고 그에 필을 받은 남자들이 눈에 띄는 예쁜이들에게 춤을 신청하거나 하며 들이대자 파티의 분위기는 오히려 더욱 활발해졌다. 활발해졌다 뿐이랴, 갑자기 여기저기서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잘하면 오늘밤에 커플이 수십 쌍은 나올 듯싶었다. 절대 의도치는 않았지만 루제의 행동으로 인한 후폭풍이 파티 장을 러블리 홈으로 바꿔놓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러한 파티분위기의 변화에 그저 절망과 좌절로 인해 절규하는 이가 있었으니. 그 이름하야 바로 노바카사였다. “ 아름다운 영애. 이름을 말해주시겠습니까?” “ 당신을 본 순간 저는 곧바로 사랑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부디 오늘 밤은 저와 함께…….” “ 전 레우만 웨이튼이라고 합니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 영애. 저는 그대를 보는 순간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온 몸의 혈맥이 역류하며 걷잡을 수 없는 당신이라는 늪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러니 저를…….” “ 첫 눈에 반했습니다. 부디 저와 어쩌구….” “ 저쩌구….” “ 등등등.” 적극적으로 변모한 남자들은 더욱 강렬한 눈빛과 몸짓으로 노바카사를 향한 열렬한 구애를 시작했고, 그럴수록 두터운 화장아래 감추어진 노바카사의 얼굴빛은 더더욱 창백하게 변했다. 하나같이 번쩍거리는 옷을 입고 개기름으로 반짝거리는 얼굴을 하고서 귀족의 포스를 풍기며 느끼한 말을 술술 쉬지도 않고 내뱉는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노바카사는 제발 도망치고 싶었으나 방법이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의 유일한 구세주 루제는 이미 아까 전에 울분의 비명과 함께 도망친 지 오래였다. 그는 혼자였다. 버림받았다. ‘ 살려줘!’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리며 노바카사는 소리 없는 구원요청을 토해냈다. 파티 장을 뛰쳐나온 루제가 머리를 식히기 위해 선택한 곳은 정원이었다. 저녁때를 지난 시간 탓에 내려앉은 어둠은 환한 달빛이 다소 은은하게 비춰주면서 정원을 나름 로맨틱한 분위기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물론 그러한 분위기 따위야 현재 루제의 눈에는 들어올 리 없었다. 그녀에게는 이대로 두면 펑 하고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가라앉히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온갖 나무와 풀들이 함께 공생하고 있는 정원의 경치를 바라보며 차분히 대자연의 공기를 호흡하기 시작하자, 루제는 점차 들끓었던 격한 분노가 자연의 힘으로 승화되는 것을 느꼈다. 그래, 바로 이 느낌이야. 충분히 감정이 순화되었다고 느낌 루제가 이젠 흥분하지 않고 차분히 해명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순간-. “ 야! 거기 갈색머리!” “ …!” 루제는 무척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것을 들었지만,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저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일부러 고민해보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기에 그녀는 죽어도 대답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아주 상대도 하기 싫다. 해서 루제는 그 부름을 생 까고 정원의 깊은 곳으로 달려나가려했다. “ 어라? 씹네. 야! 방금 전에 나 좋아한다고 엄청 크게 고백해서 지금 무지막지하게 부끄러워하고 있는 중인 갈색머리!” “ 고백 아니라고 이 바보 등신 머저리야!!” 이런 젠장.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고 바락바락 외친 루제가 순간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표정을 굳혔다. 세상에 이런 낭패가 있나. “ 고단수 노란 똥 자식…생 깔수 있었는데!” “ 어쭈? 너 감히 나를 생 까려고 했냐? 이것 참, 좋아하는 사람에게 너무 까칠 하잖아?” “ 아니래도!!” 좋아하는 거 아니라니까! 하고 루제는 피를 토하는 음성으로 외쳤지만 네이시온은 연신 대충 고개만 끄덕여주며 그녀의 모든 외침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렸다. 답답해서 가슴이 터지려고 하는 루제를 보며 네이시온이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 갈색 머리. 너 몰랐는데 지금 보니까…….” “ 뭐?” “ 꽤 귀엽다?” “ …….” …미, 미친놈. 루제는 본능적으로 뒤로 살짝 뒷걸음질 쳤다. 엄마야 변태다. 변태에 바보다. 지 멋대로 오해하더니 이젠 자기한테 버럭버럭 욕하는 애를 보며 귀엽다고 느끼는 상 또라이가 여기에 있어요. 그러나 루제의 반응이 어떻든 간에 네이시온은 연신 싱글거리는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사실 그는 진심으로 루제가 귀엽다고 느끼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자신을 보고 감히 건방진 태도를 취하는데다가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기에 재수 없고 당돌한 계집애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다 자신을 좋아해서 쑥쓰러운 마음을 감추기 위해 그런 거였다니 정말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물론 전부 택도 없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 저기, 우리 진지하게 얘기 좀 해볼까? 네 맛이 간 두뇌와 잘 들리지 않는 듯한 귀는 심히 유감이지만 말야. 제발 귓구녕 파고 제대로 들어줬으면 하는데 난 너를 절대 좋아하는 게 아니거든? 이봐 듣고 있어 노란 똥?” “ 이런 이런. 너무 쑥쓰러워 하지 말라니까? 막상 고백하고 나니 자신이 없어져서 뒤늦게 감추려는 건 알겠는데 난 네가 싫지만은 않으니까 조금은 자신감을 가져도 괜찮아. 참, 그런데 그 노란 똥이란 건 좋아하는 사람에게 붙이는 애칭치고는 좀 귀여움이 떨어지지 않나?” “ 아악! 야! 다 필요 없고 너 그냥 나랑 계급장 떼고 일대일로 맞장이나 한번 뜨―.” “ 으아악!” “ …응?” 차라리 육탄전으로 돌입하는 게 낫겠다 싶어 직접 소매를 걷어붙이던 루제가 순간 근처에서 들려온 난데없는 비명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네이시온 또한 들었는지 정원의 어느 구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웬 남자의 비명소리가…? “ 살려주세요! 사람 살려!” “ 가만히 있어! 그냥 잠깐 재미만 보겠다는 게 왜 이렇게 앙탈이야?” “ 그런데 이년 왜 이렇게 목소리가 걸걸해? 기분 나쁘게 시리. 얼굴이랑은 완전 딴판으로 노는 구만. 차라리 몇 대 패서 조용히 시킬까?” “ 이러지 마세요! 엄마야!” 대충 듣기에도 무슨 상황인지 훤히 보이는 대화소리에 루제가 뻣뻣하게 굳은 고개를 돌렸다. 상황 자체의 충격보다도, 왜인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피해자 쪽의 목소리가 더 마음에 걸렸다. 아니길 바라지만, 설마 설마 설마 설마……. “ 목소리를 들어보니까 최소 두 명 이상이서 한 명을 어떻게 하려는 것 같은데? 인간쓰레기들이군…어? 야!” 네이시온을 버려두고 루제는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이었던 모양인지 몇 개의 수풀만 헤치자 금방 문제의 모습이 드러났다. “ …!” 두터운 손에 의해 입을 막힌 채 읍읍 거리며 발버둥치고 있던 피해자는 마치 정의의 사도처럼 짠하고 수풀을 해치며 등장한 루제를 발견하자마자 미칠듯한 반가움의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루제는 설마 하는 예상이 맞았음과 동시에 차오르는 분노에 높게 소리 질렀다. “ 로샤!” “ 읍으읍! 읍읍읍!” 귀족으로 보이는 두 명의 건장한 사내에게 깔려 애절하게 삶의 의지를 꿈틀대고 있는 이는 바로 노바카사였다. ================================ # 78편 # 소제목 : 봄날이 왔습니다. (15) ================================ 엄청나게 절박한 표정과 눈물방울이 그렁그렁한 눈동자, 그리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엎어진 채 엉망이 된 몰골은 루제로 하여금 저절로 분노가 차오르게 만들었다. 이를 갈며 노바카사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루제가 뭔가를 발견하고는 느닷없이 비명을 질렀다. “ 아악!” 높은 목소리로 터져 나온 처절한 비명에 노바카사를 덮치려던 사내들이 하던 동작을 멈추고 루제를 돌아보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루제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어느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 내 드레스-!” 저항하는 노바카사와 그 저항을 잠재우려는 사내들의 거친 행동이 서로 어우러져 엎치락뒤치락 한바탕 굴렀기 때문인지, 그 과정에서 이리저리 짓밟힌 듯 보이는 노바카사의 드레스는 말도 못하게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고급 수입 원단으로 맞춘 풍성한 자락은 사내들의 구두 굽에 사정없이 짓이겨져 이미 걸레나 다름없이 변해있었고 가슴과 허리께에 달려있던 보석들은 뜯긴 자국만 남아있을 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돈을 좀 들여서 최고급 실크 원단을 사용해 나풀나풀 아름답던 프릴들은 죄다 본래의 형태가 어땠는지도 알아볼 수 없게 뜯어지고 구겨지고 흙이나 풀이 묻은 상태였다. 저 드레스가 대체 얼마짜린데. 가지고 있는 드레스들 중 가장 예쁘고 고급이고 값비싼, 그래서 일 년에 두세 번 중요한 행사 때에나 입을까말까 하던 드레스이건만. 완벽한 계획의 성공을 위해 노바카사에게 입혀놨더니 저 드레스를 저 멍멍이 눈알만도 못한 것들이 감히……! “ 용서 못해!” “ …뭐야? 저건.” 귀족 사내들은 난데없이 나타나 자신들에게 버럭 비명을 지르는 루제를 어처구니없는 눈길로 바라보았으나, 이내 루제가 제법 귀여운 외모라는 것을 깨닫고는 표정이 바뀌었다.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사내 중 한명이 몸을 일으켰다. “ 오호, 그러고 보니 이거 드아이스 가의 딸내미 중 한 명 아냐? 둘 중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귀엽게 생겼는데?” 사내가 뭐라고 지껄이던 간에 루제의 머릿속에는 온통 드레스에 관한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활화산 같이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사내들을 노려보며 루제는 이를 악물었다. 주여, 부디 저 잡것들을 처단 할 수 있도록 제게 힘을 내려주시옵소서. 루제는 기도를 위해 두 손을 맞잡고 눈을 감았다. 갑작스런 그 행동에 사내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은 루제는 마음속으로 중얼중얼하며 긴 기도문을 읊었다. 그리고 잠시 후 번쩍 눈을 뜨며 그녀는 기도의 마지막 문장을 내뱉었다. “ 황녀님의 이름으로 저 개미 입 냄새만도 못한 악의 중추들을 처단할지니! 믿습니다!” “ 뭐, 뭐야?” 마치 어느 사이비 교의 광신교도와도 같은 모습에 사내들이 흠칫했다. 노바카사도 조금 다른 의미로 흠칫했다. 그 순간 기합과 함께 루제가 땅을 박찼다. “ 으라차차차-!!” “ ?!” 놀라운 스피드로 가까이에 있던 사내에게로 접근한 루제는 사내가 미처 어떤 액션을 취하기도 전에 힘껏 오른쪽 다리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다리는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있던 사내의 다리사이를 그대로 가격했다. 퍼억! “ ……!” 방심했다. 사내는 그대로 눈을 부릅떴다. 설마 여기를 고의적으로 걷어찰 줄은 몰랐다. 고통이 해일처럼 밀려오자 사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식은땀만 흘렸다. “ 이, 이 잔인한…….” 끝이 아니다. 여기서 안심해서는 안 된다. 루제는 자신의 구두 한 짝을 벗어 손에 단단히 쥐었다. 허리를 푹 숙인 채 부들부들 떨며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사내를 향해 루제는 구두를 세차게 휘둘렀다. 빠악! 나이스 타격음. 단단한 구두 굽에 직빵으로 대가리를 얻어맞은 사내가 부릅뜬 눈에 흰자를 드러내며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 쿵-하고 우락부락한 몸이 바닥을 찧자 루제는 한숨 돌리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긴장으로 잔뜩 힘이 들어갔던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다. 나름 열심히 따라한다고 했으나 역시 유리엔만큼 태연하게 해내기에는 힘이 들었다. 어찌됐든 성공적으로 한명을 처치한 루제가 숨을 고르는 사이, 방금 전에 장소에 도착했던 네이시온은 놀란 표정 그대로 굳어있었다. 깜짝 놀랐다. 갑자기 힘껏 달려 수풀사이로 사라지는 루제를 쫓아 도착하자, 마침 루제는 웬 건장한 사내와 묘한 대치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나 저질 쓰레기임’이라고 외치는 듯한 사내의 외양에 네이시온이 막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느닷없이 루제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말릴 새도 없이 그렇게 돌진하더니 다음 순간, 사내는 처참히 K.O를 당했다. 네이시온은 말을 잃었다. 처음 봤다. 기껏해야 가슴팍정도밖에 오지 않는 작은 체구의 소녀가 허리께까지 기른 갈색머리를 바람에 휘날리며 자기보다 두 배는 될 법한 덩치의 사내를 그대로 박살내는 장면은, 너무도 생소해서 그로 하여금 도저히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네이시온은 못박힌 듯 제자리에 서서 루제를 바라보았다. “ 무, 무슨 콩알만 한 게…니년이 정말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아주 갈아 마셔주마!” 분노와 황당함이 뒤섞여 잔뜩 붉어진 얼굴을 한 다른 사내가 패닉에서 벗어나 이를 갈며 외쳤다. 금방이라도 덤벼들 듯한 모습에, 써먹을 편법은 전부 써먹은 루제는 잔뜩 긴장했다. 그러나 그 순간. “ 지금 누굴 갈아 마신다고 지껄였니 개미 더듬이에 붙은 먼지만도 못한 아가야?”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간다는 게 바로 이런 것임을 보여주듯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밤하늘을 갈랐다. 너나할 것 없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인세에 다시없을 미인이 눈이 부신 미소를 짓고 있었다. “ 뒤질래?” “ 황녀님!” 루제가 곧바로 반색하며 외쳤다. 유리엔의 등장이었다. 게다가 그 곁에는 카엘과 찰스도 함께 있었다. 사실 유리엔은 노바카사가 여장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애초에 그런 상황이 왔을 때 불미스러운 일이 터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호위 역을 시키려 데려온 찰스를 노바카사에게로 보냈다. 그러나 찰스가 도착했을 때에는 안타깝게도 한끝 차이로 노바카사가 웬 귀족들에게 붙잡혀 끌려 나간 뒤였다. 다행히 정원으로 간 것 같다는 목격자의 진술을 통해 찰스는 유리엔, 카엘과 함께 노바카사를 구하러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사내는, 그러니까 사실 어느 듣보잡 자작가의 둘째 아들인 그는 처음에는 유리엔의 엄청난 외모에 헤벌래 하며 넋을 놓았으나 이내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가를 깨닫고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지금 이것은 가정조차 해보지 않은 매우 최악의 상황으로, 자신이 건드리려 했던 여인이 유리시엔 황녀와 연줄이 닿아있을 경우였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확실해보였다. “ 황녀전하! 으헝어엉….” 유리엔이 등장하자마자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하는 노바카사의 행동 또한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점점 더 파랗게 질리는 얼굴빛으로,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사내를 쳐다보며 유리엔이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 찰스?” “ 예.” “ 조져.” “ 예!” “ ……!” 그리고 자근자근 밟히기 시작한 사내는 처음에는 가문의 이름을 들먹이며 좀 뻗대보고는 전혀 통하지 않자, 뒤늦게 잘못했다고 삭삭 빌었으나 당연히 선처는 베풀어지지 않았다. 처절한 비명소리가 연달아 어두운 정원을 울렸다. 어느새 노바카사 또한 슬그머니 찰스의 옆에 끼어서 함께 사내를 열심히 밟고 있었다. “ 음?” 만족스런 표정으로 사내가 밟히는 것을 응시하던 유리엔이 문득 눈에 익지 않은 얼굴을 루제의 근처에서 발견하고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금발머리의 제법 반듯하게 생긴 청년이 아까부터 움직이지 않고 루제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등장했음에도 그 시선은 변하지 않았다. 뭔가를 감지한 유리엔이 씨익 웃었다. “ 오호라.” “ …왜?” 음흉함이 묻어나는 웃음에 카엘이 이유를 물었다. 유리엔은 루제를 슬쩍 쳐다보고는 중얼거렸다. “ 루네한테만 봄이 오는 줄 알았더니….” “ ?” “ 후후후후.” 그러고보니 달빛이 내려앉은 정원 또한 테라스 못지않게 분위기가 괜찮을 지도. 풋풋한 봄날이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맞아서 반쯤 정신을 잃은 사내와 루제로 인해 골로 간 다른 한 사내를 질질 끌며 유리엔 및 다른 이들이 정원을 빠져나갔다. 루제 또한 유리엔을 따라 저택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자꾸만 드는 어떠한 생각에 쉽사리 발걸음이 가볍게 떨어지지가 않았다. 내 드레스. 루제는 고개를 푹 숙이며 쭈그려 앉았다. 자꾸만 너덜너덜 걸레가 된 드레스의 모습이 머릿속에 남아서 그녀를 괴롭혔다. 언제 산 드레스더라? 제 작년? 작년? 몇 번이나 입어봤었지? 무지막지하게 비싼 가격 때문에 다시 살 생각은 꿈에도 못 꿀 처지였다. 자꾸만 드레스의 잔상이 눈앞에 아른거리자 루제는 참지 못하고 차오른 눈물을 뚝뚝 흘렸다. “ …!” 그리고 네이시온은 화들짝 놀랐다. 갑자기 주저앉기에 어디가 아픈가 싶어서 다가가 봤더니 갈색의 커다란 눈동자에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맑은 물방울이 계속해서 바닥으로 낙하하는 것을 꼼짝없이 얼어서 바라보던 네이시온이 잔뜩 당황한 채로 말했다. “ 야, 야. 왜 우냐?” “ …….” “ 그만 울고…대체 왜 우는데?” 어림짐작으로 갑자기 긴장이 풀리면서 사실은 무서웠던 감정이 폭발한 건 아닐까 하고, 강한 척 했지만 사실은 여린 애구나 하며 네이시온이 속으로 지레짐작할 무렵. “ 드레스….” “ 뭐?” “ 아까 걔가 입고 있던 그 드레스 내 건데…비싼 건데…진짜 비싼 건데…완전 비싼 건데…그게 걸레로….” 그러면서 또 눈물을 뚝뚝 흘린다. 루제가 우는 이유를 제대로 알게 된 네이시온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뭐라고 해야 하지. 그런 이유로 울 수도 있는 건가. 드레스 때문이라니, 뭔가 허탈하다. 하지만 루제의 눈물은 그칠 생각을 안했다. 이러나저러나 루제의 닭똥같은 눈물에 마음에 답답해진 네이시온은 결국 울고 있는 루제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그리고 한 손으론 턱을 받쳐 올려 얼굴을 마주보며 말했다. “ 얼마면 돼?” “ …?” “ 얼마면 되냐고, 그 드레스!” “ …….” 루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느닷없이 드레스의 가격을 묻는 네이시온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무안한지 고개를 돌리며 버럭 말을 내뱉는다. “ 아씨, 사주면 될 거 아냐! 그러니까 그만 울어! 네가 울면 기분이 좀…아무튼 그렇다고!” 네이시온의 말에 루제의 눈물이 뚝 그쳤다. 말해놓고는 귓가가 새빨개져서는 딴 곳을 쳐다보는 네이시온을 향해 루제는 입을 열었다. “ 정말 사줄 거야?” “ 그, 그래.” “ 진짜?” “ 그렇다니까! 얼만데?” “ 50골드.” 망설이지 않고 루제는 드레스의 가격을 내뱉었다. 일반 귀족여인들의 드레스 가격이 15골드 정도를 호가하니 3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물론 네이시온에게 부담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이래 뵈도 권세 있는 가문의 아들내미였으니. “ 별 거 아니네. 사줄 테니까 걱정 마.” “ 헤에…….” 네이시온은 아무렇지 않게 50골드짜리 드레스를 사주겠다고 장담했다. 돈지랄이긴 하지만, 루제는 새삼스레 그 모습이 듬직하게 다가왔다. 바닥을 기던 호감도가 갑자기 수직상승을 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노란 똥이라고는 안 불러야겠다. 루제는 마음속으로 슬그머니 다짐했다. ================================ # 79편 # 소제목 : 로드웬 왕국 사절단. (1) ================================ 황성으로 돌아온 유리엔은 축 늘어진 채로 뒹굴뒹굴 굴러다니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몸소 보여주듯 실천에 들어갔다. 정작 한 것은 없음에도 왠지 커플 탄생에 모든 기를 쏟아주고 온 것 같다는 변명 아래에 유리엔은 끊임없이 빈둥빈둥을 지속했다.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느지막이 기상한 유리엔은 광활한 넓이의 침대를 가볍게 아침운동 삼아 구르기 시작했다. 오른쪽 끝에서 왼쪽 끝까지, 데구르르 하고 구른 유리엔은 침대를 벗어나 바닥으로 떨어지기 직전 움직임을 멈췄다. 아슬아슬하게 침대 끝에 반쯤 걸쳐 엎드린 듯한 모양새로, 그녀는 뭔가를 생각했다. 결 좋은 붉은색 머리카락이 눈앞에 잠깐 환상처럼 스쳤다가 사라졌다. 붉은 색 눈동자는 옵션으로 떠오른 듯도 싶다. 유리엔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 카라멜 주제에.” 분명한 뜻도 없이 그저 주절거린 말이 허공에 잠깐 떠올랐다가 흩어졌다. 순간 기우뚱, 하고 몸이 왼쪽으로 쏠리자 유리엔은 재빨리 오른쪽으로 몸을 반 바퀴 굴렸다. 빙글, 하고 시야가 움직이며 엎드린 자세에서 반듯이 누운 자세로 몸이 뉘어졌다. 그 포즈 그대로 팔을 양옆으로 뻗은 유리엔이 의미 없이 침대를 팡팡 두드리고는 이내 침묵을 지켰다. 말없이 누워 유리엔이 떠올린 것은 카엘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 할 수밖에 없는 사실도 함께 떠올렸다. 바로, 처음 만난 이후부터 그녀가 카엘에게 도움을 받지 않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가장 처음 루제가 반쯤 미쳐서 유리엔을 납치하려 했을 때,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도움을 준 것은 카엘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사냥대회가 있던 날, 남장한 채로 대회에 참가해 놀다가 그만 실수로 낮은 절벽 아래로 떨어졌을 때에도 뒤쫓아 오던 카엘이 발견하고 구해줬다. 또 그 다음에는 몰래 구경나간 레듀르의 달빛 축제에서 변태 남작을 만나 위기에 처한 것을 곁에 있던 카엘이 물리쳤다. …짱난다. 하나하나 곱씹어보던 유리엔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 왜 허구한 날 도움만 받냐 이거다. 길가다가 갑자기 ‘어머낫 빈혈’하며 풀썩 쓰러지는 가녀린 귀족영애도 아닌데 말이다. 왠지 자존심 상한다. “ …그런데 왜 갑자기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중얼거리고 나서야 문득 깨닫고 유리엔은 애꿎은 침대천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카엘에 관해 고민하는 것은 침대천장과 눈싸움을 벌이는 것만큼이나 쓸모없는 시간낭비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녀는 침대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목과 어깨를 돌려가며 간단히 스트레칭을 하던 유리엔은 갑자기 산책이 땡기는 것을 느꼈다. 별 이유는 없지만 아침 산책이나 갈까. 시간상으로는 전혀 아침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유리엔은 간만의 외출을 결정했다. 황궁은 분주했다. 마치 축제나 연회를 준비할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린에게 대충 듣기는 했지만 확실히 눈으로 보니 정말 바쁘구나, 하는 느낌이다. 부지런한 발걸음들이 멀리서도 눈에 들어왔다. 유리엔은 정원으로 나가는 김에 황궁을 한번 가볍게 둘러보았다. 이리저리 들고 나르고 왔다갔다 거리던 시녀 및 시종들이 근처를 스쳐지나가는 유리엔을 보고는 전부 걸음을 멈췄다. 일부는 완전히 넋을 놓는 바람에 들고 있던 물건이 그대로 바닥에 낙하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유리엔이 지나가는 곳마다 하나같이 하던 동작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는 바람에 바쁘게 진행되던 일이 잠시동안 마비되는 일마저 일어났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일처리에 피해를 주며 황궁을 돌아본 유리엔은 느긋한 발걸음을 정원으로 돌렸다. 황궁을 둘러본 것만으로도 대충의 산책은 된 듯싶었지만 왠지 진정한 산책이라 하면 햇살이 내리쬐는 정원을 한 바퀴 도는 것이 제대로 된 정석이 아니겠나 싶었다. 그렇게 정원을 향해 걷던 유리엔은 문득 앞에서 걸어오던 이와 마주쳤다. “ 어.” 카라멜이다. 마주 걸어오는 이는 카엘이었다. 황성이 바쁘면 카엘 또한 일이 많아지는 모양인지 그는 척 보기에도 평소보다 조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실 카엘은 요 며칠 새에 잠까지 설쳐가며 일에 치이는 상황이었다. 햇빛도 쏟아지고 날씨도 워낙 따뜻한 오후인지라 자연적으로 쏟아지는 잠을 물리치기 위해 카엘은 일을 잠시 멈추고 산책을 나온 길이었다. 카엘 또한 우연히 마주친 유리엔을 발견하고 걷던 것을 멈췄다. 이유 없이 반가웠다. “ 좋은 아침, 카라멜.” “ 좋은 오후, 검둥이.” 늘 상 해서 이제는 익숙한 호칭을 서로 주고받으며 둘은 마주섰다. 카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어디 가냐?” “ 산책. 너는?” “ 마찬가지. 어디로 산책 나가게?” “ 당연히 정원이지. 산책의 정석코스는 정원인거 몰라?” “ 아아, 잘 알지. 나도 정원으로 가려는 참이니까.” “ 그래?” 그럼 같은 곳에 가던 길이네, 하고 대답하려던 유리엔은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어라? 서로 같은 곳을 가고 있던 거라면 복도에서 정면으로 마주칠 리가 없는데. 한 명이 극악의 길치라서 아예 반대편 방향으로 가고 있던 것이 아니라면. 유리엔이 곧바로 말했다. “ 난 길치 아님.” 이어서 방향치도 아님, 하고 덧붙인 유리엔은 물끄러미 카엘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의미하는 바가 ‘네가 길치야!’라는 것을 읽은 카엘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 웃음에 유리엔이 눈썹을 위로 치켜 올렸다. “ 왜 웃어? 이쪽길이 정원으로 가는 길 맞다니까?” 레알. 유리엔은 스스로의 기억력을 믿었고, 그 기억에 따르면 분명히 이쪽 방향으로 쭉 가야 그녀의 방에서 내려다보이는 넓은 정원이 나왔다. 원한다면 길가는 시녀라도 한명 잡아서 인증해줄 기세에 카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아. 그쪽 길 맞아.” 순순히 긍정하자 그건 또 그것대로 이상하게 느껴진 유리엔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틀림없이 한바탕 말싸움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카엘이 말했다. “ 성의 정원은 두 군데거든.” “ 아하?” 그건 몰랐다. 허를 찔린 표정의 유리엔을 보며 카엘이 설명을 덧붙였다. “ 네가 가려는 곳이 대외적으로 알려진 정원이고, 내가 가는 방향에 있는 정원은 아는 사람이 극소수인 또 다른 정원이지. 주로 황족들 이외에는 이용하지 못하는 곳이야.” “ 호오.” 좋은 정보를 입수했다 싶어 유리엔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눈길로 카엘을 쳐다보았다. 뭔가 평소와 다르게 순순하다. 이상하게도. 원래라면 지금쯤 비꼬는 말이 튀어나와 자신을 열 받게 했어야 하는데 말이다. 유리엔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상했나? 유리엔은 날카롭게 내리쬐는 햇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카라멜은 음식물이니까 햇볕에 상했을지도. 그러한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카엘이 말을 이었다. “ 커다란 저택이나 성은 대부분 그런 식으로 작은 정원을 하나 더 만드는 경우가 많아. 설마-.” “ ?” “ 설마 몰랐냐?” 비스듬하게 경사를 타는 어조와 한쪽 끝만 교묘하게 올라간 입술은 딱 보기에도 그것이 비웃음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순간 발끈했지만 유리엔은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을 맞받아쳤다. “ 몰랐을 리가 있겠어? 다만 네가 하도 아.는.척을 하고 싶어 하는 게 안.쓰.러.워.서 내가 잠깐 모르는 척 좀 해준 거지.” “ 그러냐? 난 또 황족쯤 되면 누.구.나 다 아는 기.본.상.식인데 정말 모르는 줄 알고 깜짝 놀랐네.” “ 내 연기가 좀 뛰어나야지. 안 그래 카라멜?” “ 너무 뛰어나서 진짜랑 구분이 안 갈 정도다, 검둥아.” 언제나처럼 스파크가 튀겼다. 평소와 똑같다. 그리고 유리엔은 그것에 이유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카라멜은 전혀 상하지 않고 멀쩡했다. 이왕이면 계속해서 상하지 않기를 바랐다. ================================ # 80편 # 소제목 : 로드웬 왕국 사절단. (2) ================================ 티격태격하면서도 유리엔은 카엘과 같은 목적지를 선택했다. 황족들만 주로 이용한다는 작은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유리엔은 문득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 그런데. 오면서 보니까 황성이 상당히 바쁘더라?” 긍정의 의미로 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바쁨을 누구보다 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자신이 아니던가. 오죽했으면 잠기운을 물리치기 위해 산책을 택했을 정도로 말이다. 유리엔은 뒤이어 질문을 던졌다. “ 왜 그렇게 바쁜 거야?”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실 얼마 전 린에게 들었던 듯도 했지만 워낙에 관심도 없었고 또한 지나가는 말투였던지라 잊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생각난 김에 다시 물은 것이다. 카엘이 대답했다. “ 곧 탄생일이거든.” “ 누구의?” 물으면서도 대충 폭은 잡히고 있었다. 생일파티. 그 때문에 황성 전체가 분주해질 정도라면 최소한 황족 중의 한명은 될 것이다.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며 카엘의 대답이 뒤따랐다. “ 어머니.” “ 아하.” “ 그리고 나.” “ …응?” 유리엔이 걷던 것을 우뚝 멈췄다. 뭔가 상당히 예상 못한 대답을 들어 순간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리엔을 뒤돌아보며 카엘이 말했다. “ 날짜가 겹치거든.” 헤에? 유리엔은 멀뚱히 카엘과 눈을 마주했다. 이녀석의 생일이라니, 어째선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이내 카엘의 무덤덤한 눈동자를 보며 유리엔은 순간 사소하지만 결정하기는 어려운 고민을 떠올렸다. 선물은? 줄까 말까. 만약 준다면 뭘? 그 생각이 표정에 드러나기라도 한 건지 카엘이 피식 웃으며 몸을 바로 했다. 그리고 말을 던졌다. “ 대수롭지 않은 날이니까 신경 쓸 거 없어.” “ …누가 신경 쓴대?” 반사적으로 맞받아쳤지만 사실 유리엔의 머릿속은 복잡미묘했다. 생일 생일 생일 선물 선물 선물. 그리고 또 이상한 의문에 사로잡힌다. 왜 고민하는 거지? ‘ 알게 뭐야.’ 이내 유리엔은 잡생각을 털어버리듯 살짝 고개를 흔들고는 걸음을 빨리했다. 느긋한 마음으로 산책이라도 하다보면 뭐라도 떠오르긴 떠오르겠지, 하는 마인드로 척척 앞질러 걷기 시작하는 유리엔의 뒷모습을 향해 카엘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 그쪽 길 아니다, 검둥아.” 그리고 유리엔은, 카엘의 생일선물 리스트에 진심으로 ‘짱돌’을 제 1순위로 올렸다. 호화로운 마차가 곱게 포장된 길을 달리고 있었다. 한 대가 아닌 줄줄이 이어지는 여러 대의 마차와, 그 주변을 철통같이 호위하고 있는 무장된 병사들을 보아하니 대충 짐작하기에도 평범한 인물의 나들이로 치부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해주듯, 가장 크고 화려한 마차는 순백색을 띠고 있었는데 그 표면에는 어떤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로드웬 왕가. 로드웬 왕국의 왕족이 타고 있음을 나타내주는 고유의 문양이었다. 그리고 그 마차의 안에는, 왕국의 공주와 왕자가 서로를 마주본 채 말없이 앉아있었다. 가끔 창밖을 내다보기도 하는 둘의 표정은 약간의 긴장감과 설렘을 동시에 안고 있었다. 이윽고 소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오라버니.” “ 응?” “ 저 정말 떨려요. 오라버니는 어때요?” 가는 목소리로 수줍게 말하는 소녀는 결 좋은 하늘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린세니오스 레인 드 로드웬. 애칭은 린세스였다. 린세스의 물음에 마주앉은 소년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 나도 마찬가지야. 뮤리엔 제국에 방문하는 것은 어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이니까.” “ 맞아요.” 소년의 이름은 리온스 이안 드 로드웬. 애칭은 린스였다. 그는 여동생과 마찬가지로 하늘색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는데, 두 남매 모두 주변의 시선을 잡아끄는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각각 로드웬 왕국의 2왕자와 3공주인 둘은 뮤리엔 제국으로 가는 이번 사절단의 주 멤버였다. 본래는 1왕자와 1공주가 대신했어야 하는 자리였지만 어쩐 일인지 다들 급한 일이 생기거나 몸이 아픈 사정이 생기는 바람에 그들에게까지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둘은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사절단으로 가는 것을 승낙했다. 그들에게 뮤리엔 제국은 자신의 왕국과는 도저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커다란 강대국이었다. 그런 강대국의 문화를 직접 겪고 그 나라의 지배자들과 인사를 나눈다는 것은 분명 귀중한 체험이 될 것이다. 린세스는 흰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였다. “ 카류엘 황태자님 말예요. 실제로 뵐 수 있다니 꿈만 같아요.” “ 네 방에 걸려있는 초상화의 주인공 말이지?” “ 네에. 그치만 오라버니는 조금 아쉬우시겠어요.” “ 뭐가?” “ 젤디아 공녀님이 안계시잖아요.” “ 하하….” 린스는 조금 멋쩍게 웃었다. 젤디아 공녀는 뮤리엔 제국의 세 공작가중 페듀린 공작가의 외동딸로서, 한때 제국제일미라고 칭송받았던 무척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러나 제 작년 겨울쯤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요양 차 다른 곳에 머물고 있다고 들었다. 아니면 유학이었던가. 어쨌든 현재 뮤리엔 제국 내에 없는 것은 사실이었으니 아닌 척 하면서도 은근 기대해왔던 린스에게는 안타까운 소식인 셈이다. 린스는 짓궂은 제 여동생의 장난을 피해 마차 밖의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지런히 달린 마차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하고 있었다. ================================ # 81편 # 소제목 : 로드웬 왕국 사절단. (3) ================================ 린스와 린세스는 황성에 도착하자마자 각자 머물 곳으로 안내되었다. 넓고 화려한 방을 한차례 둘러본 린세스는 이내 침대의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 어떤 분이실까?’ 그리고 머릿속으로는 카엘에 대한 생각이 둥둥 떠다닌다. 초상화를 통해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었다. 사랑보다는 동경에 좀 더 가까운 감정이었지만, 그리고 자신과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실물을 만난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연회의 시작은 아직 이틀이나 남았다. 린세스는 몸을 일으켜 창밖으로 보이는 경치를 내려다보았다. 정원이다. “ 우와, 예쁘다….”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린 린세스는 순간 정원을 둘러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녀를 고민하게 만든 것은 과연 저 드넓은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매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사실 린세스는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상 초유의 길치였던 것이다. 고심하던 그녀는 이내 결단을 내렸다. ‘ 가자!’ 헤맬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걱정보다 정원을 보고 싶다는 의지가 더 앞선 결과였다. 조심하면 괜찮을 거야, 라는 긍정적인 마인드 하에 린세스는 조심스레 방 밖으로 나왔다. 정원까지 가는 길은 멀지 않았지만 황성 안은 역시 무시 못 할 만큼 넓었다. 커다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복도를 걷는 린세스에게 마침 누군가가 다가왔다. “ 안녕하십니까, 아름다운 레이디?” 접근해온 것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띤 미남자였다.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는 것에 놀라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 린세스를 향해 남자는 재차 말했다. “ 실례지만 어디를 가시는지 물어도 될까요?” “ 아…정원을 둘러보려 하는데요.” 정원이라는 말에 남자가 더욱 짙게 미소 지었다. 린세스를 위아래로 슬쩍 훑은 그는 은근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 그렇군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안내해드려도 괜찮겠습니까?” “ 네? 그래주시면 저야 감사하긴 한데….” “ 그럼 어서 가죠, 레이디.” 린세스는 얼떨결에 생판 처음 보는 사내를 뒤따라 걷게 되었다. 남자가 접근한 의도라든지, 느끼한 눈빛이라든지 여러 가지로 묘하게 수상한 점이 많았지만 그런 것에 익숙하지 않은 린세는 그저 호의를 베풀어주려는 착한 사람인가보다 하고 생각 할 뿐이었다. 이리저리 한참을 걸어 마침내 정원에 도착했다고 생각되었을 때쯤 남자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덩달아 걷던 것을 멈춘 린세스를 뒤돌아보며 남자가 말했다. “ 그런데, 혹시 황성에는 처음 오시는 겁니까?” “ 아, 네.” “ 잘됐군요.” “ …?” 뭐가 잘됐다는 건지를 묻기도 전에 남자는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부지런히 남자를 쫓아 걸음을 놀린 린세스가 완전히 몸을 멈춘 것은 그로부터도 장시간을 걷고 난 다음이었다. 넓은 정원에서도 제법 구석진 곳인지 햇살이 많이 비추지 않아 조금 어두운 곳이었다. 이제 안내가 끝난 건가 싶어 린세스가 감사의 인사를 하려는데 갑자기 남자가 그녀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느닷없는 행동에 깜짝 놀란 린세스가 황급히 손을 빼려 했지만 남자의 악력은 제법 강했다. “ 저기…이, 이 손 좀 놔주시면.” “ 가만히 있어. 휘유-역시 다시 봐도 예쁘군.” “ …?!” 갑작스런 말투의 변화에 린세스가 흠칫했다. 남녀의 일에는 아직 둔하고 순진한 그녀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 상황은 뭔가가 이상했다. 남자의 행동은 단지 고맙다는 인사를 받기 위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 저, 저기요.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건지….” “ 뭐야? 순진한 척 따라나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빼고 그래?” “ 네, 네?” “ 처음 보는 얼굴이라 어디 지방에서 올라온 건가 했는데 제법 생긴 게 예쁘장하단 말야.” 린세스는 꼼짝없이 굳어졌다. 남자의 노골적인 말에 이제야 제대로 상황을 이해한 것이다. 호의는 개뿔,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거다. 황성에 처음 왔다는 이유로 제멋대로 지방의 이름 없는 가문의 딸이라고 생각하고는 건드려도 뒤탈이 없을 거라 여긴 것이 분명하다. 린세스는 붙잡힌 손을 빼려 노력하면서 외쳤다. “ 이, 이러시면 후회할 거예요! 전 이번에 로드웬 왕국에서 축하 사절단으로 온….” “ 그래서 네가 무슨 공주라도 된다고? 거짓말 하고는. 로드웬에서 온 사절단이라면 작년에도 봤지만 전혀 다른 얼굴이었는데?” “ 저는…!” “ 시끄러워.” ‘작년에 온 건 제 언니인 1공주였고 전 3공주예요’라는 해명을 미처 내뱉기도 전에 남자가 몸을 바짝 붙여왔다. 온통 자신을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으로 가득 찬 듯 보이는 남자의 모습에 겁에 질린 린세스가 비명이라도 내지르려는 순간. 뻐억! “ 끄악!” 갑자기 남자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고통에 찬 비명이다. 린세스는 멍한 표정으로 방금 전 남자의 뒤통수를 가격하고 바닥으로 떨어진 물체를 쳐다보았다. 구두다. 그것도 굽이 높은 여성용 구두. 이게 왜 갑자기? “ 야, 너!” 그 순간 수풀을 헤치며 누군가가 등장했다. 구두의 주인인 듯 보이는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유리엔이었다. 생각할 게 좀 있어서 혼자 있을 만한 장소를 찾던 와중에 우연찮게 상황을 목격한 것이다. 겁에 질린 가련한 소녀를 발견하자마자 유리엔의 검은 눈동자는 분노로 타올랐다. 그녀는 눈 깜짝할 새에 다른 쪽 구두마저 벗어 손에 들고는 번개처럼 남자의 앞에 나타났다. “ 맞을래? 뒤질래? 죽을래? 끝날래?” “ 악! 으악! 크억! 끄아!” 그리고 구타가 시작되었다. 뾰족한 구두 굽은 어디든 봐 주지 않았다. 일정한 리듬을 타고 일정한 속도로 남자의 몸 여기저기에 내려꽂히는 구두는 분명 무시무시한 파워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남자의 처절한 비명소리만 들어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 황천 갈래? 저승 갈래? 숨 멎을래? 송장 될래?” “ 으억! 컥! 끄악! 으어악!” 한참을 때렸음에도 구두에 실린 파워와 스피드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별로 힘들어 보이지도 않는다. 엄청난 체력이었다. 다만 저렇게 맞다가는 남자가 정말로 죽는 건 아닌가 싶어 린세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저…기요.” “ 응?” 린세스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유리엔은 너덜너덜해진 남자를 휙 집어던졌다. 바람 빠진 풍선마냥 힘없이 쓰러지는 반 시체 상태의 남자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구타도구로 사용했던 구두를 얌전히 신는 유리엔의 모습을 번갈아보던 린세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 정말 고맙습니다!” 진심을 담은 인사였다. 린세스는 정말로 유리엔이 고마웠다. 사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직까지도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지만, 만약 도움을 받지 못했으면 어떻게 됐을까를 상상하니 머리끝까지 소름이 끼쳐 저절로 감사의 인사가 터져나왔다. 마치 바닥에 엎드리기라도 할 기세에 유리엔이 살짝 웃었다. 린세스의 모습은 린이나 루제를 떠올리게 했다. “ 뭘 이정도로.” 목소리가 정말 예쁘다고 생각하며 린세스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유리엔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순간 린세스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사람이다. 린세스는 말도 넋도 잃고 멍하니 유리엔만 쳐다보았다. 미소가 눈이 부셨다. 아니,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 빛이 나는 것 같다. 가슴이 뛰었다. “ 앞으론 이런 일이 없게 조심해, 귀여운 아가씨.” 토 나올 정도로 느끼한 말이었지만 유리엔이 하니 달랐다. 마치 무슨 희대의 명언처럼 들려왔다. 린세스는 무의식중에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근두근 콩닥콩닥. 자꾸만 심장이 뛴다. 이상하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볼이 빨갛게 물든다. 린세스는 몽롱한 눈빛으로 멀어져가는 유리엔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 # 82편 # 소제목 : 로드웬 왕국 사절단. (4) ================================ 벌컥. “ 오라버니!” 노크도 없이 기습적으로 문이 활짝 열렸다. 문을 열어젖히며 등장한 주인공인 린세스는 사실 타고난 요조숙녀로서 평소였다면 이런 돌발행동을 저지르지 않았겠지만, 현재 심리상태가 끝없는 상승기류를 타고 구름을 넘을 기세였기 때문에 평소 때와 같은 이성적인 행동을 기대하기가 힘든 상태였다. 린세스는 두 눈을 별처럼 반짝이며 빨갛게 상기된 얼굴빛을 한 채 제 오라버니를 찾았다. 그러나 그러한 린세스의 기습에 혼비백산하며 무슨 일이나 캐물어야 할 린스가 무슨 연유에선지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다만 고개를 돌려 린세스의 얼굴을 한번 확인했을 뿐이다. 말하자면 린스는 넋이 나가있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린세스는 의문을 가졌다. 오라버니가 이상하다. 왜? 혹시 자신처럼 우연한 만남을 가지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젤디아 공녀는 지금 제국에 없다고 들었는데? 린세스는 의심스러운 눈동자로 제 오라비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눈동자 이상 유, 흐리멍텅함. 얼굴색 이상 유, 볼이 붉게 물듦. 결론. 멀쩡한 상태가 아니다. “ …오라버니?” 린세스가 조심스런 어조로 재차 부르자 그때서야 린스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시선을 돌렸다. 린세스와 마주친 하늘색 눈동자에는 다시 선명한 초점이 돌아와 있었으나 왠지 금방이라도 다시 풀려버릴 듯 불안정하게 느껴졌다. 린세스는 얼굴을 가까이했다. “ 무슨 일 있었어요?” “ 아….” 걱정이 서린 제 여동생의 표정에 린스가 다소 난감하게 미소 지었다. 자신도 지금 스스로의 상태를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계속해서 머릿속이 멍해지고, 한사람의 모습이 떠오를 뿐이었다. 복잡한 마음이 담긴 낮은 한숨과 함께 린스가 입을 열었다. “ 그게 말이지.” 때는 바야흐로 제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린세스가 막 정원에 나가려 마음먹었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린스의 특기는 검술이었다. 비록 겉보기에는 약간 마른 체형에 유약하게 자란 도련님 같은 인상을 풍기지만, 실은 웬만한 기사정도는 쉽게 제압할 만한 실력자인 것이다. 또한 그런 만큼 검술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런 린스가 대륙의 기둥 중 하나라고까지 불리는 강대국의 황실 기사단에 호기심을 가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은 무료할까 싶어서 잠깐 황궁을 둘러볼 예정이었을 뿐이다. 목적지 없이 이곳저것 기웃거리다가 연무장을 발견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함부로 구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만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막는 사람도 없는데 잠깐만 슬쩍 보고 나오면 되지 않을까 하는 안이한 생각이었다. 마침 연무장에는 황실 기사단 중 하나인 블루마린 기사단이 늘 하던 훈련코스를 밟고 있었다. 기초체력단련을 끝낸 뒤 막 대련을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챙! 행운인지 불행인지 그날의 대련은 목검이 아닌 진검을 사용하는 실전이었다. 린스는 기사들의 날카로운 검에 속으로 연신 감탄을 거듭했다. 그 광경은 린스의 발목을 붙잡기에 충분했다. “ 누구냐!” 그러다 그만 들켜버렸다. 나름 잘 숨어있었다고 생각했으나 딱 걸려버린 린스에게는 딱히 변명거리가 없었다. 그저 당황하다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사실대로 얘기하는 것이 다였다. 우연히 지나가다 보게 되었는데 차마 눈을 뗄 수 없었다는 말에 기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비웃음이 아닌 호의가 담겼다는 것을 알고 안심하며 린스는 슬쩍 원하던 말을 꺼냈다. “ 저…혹시 저도 대련을 해볼 수 있겠습니까?” “ 뭐?” 린스의 요청에 근처에 있던 기사가 놀란 표정을 해보였다. 척 보기에도 십오륙세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데다 검술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생김새였기에 의외라고 생각한 것이다. 기사는 진지한 표정의 린스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잠깐 훑어보고는 다소 떨어진 곳에서 한 참 대련 중이던 기사 한명을 불렀다. “ 이봐, 트나이!!” “ 갑자기 왜 부릅니까? 바쁘구만.” “ 봉급 깎아버리기 전에 삼초내로 튀어와라.” “ 예썰.” 무거운 갑옷을 입고도 빛의 속도로 날아온 트나이라는 기사는 제법 젊었다. 많아야 이십대를 갓 넘겼을까? 그러나 분명히 만만치 않은 실력을 지녔을 것이다. 린스는 눈앞의 이 기사가 방금 전까지 맹렬한 기세로 진검대련을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트나이가 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 대결하라고요? 이 꼬맹…아니지, 어린 도련님이랑?” “ 그래.” “ 아 예. 저야 뭐 까라면 까야죠. 그런데 목검도 없잖습니까? 설마 진검으로 하라는 건 아닐 테고.” “ 괜찮습니다!” 린스가 갑자기 끼어들어 외쳤다. 트나이가 돌아보자 린스는 단호한 눈빛으로 못을 박았다. “ 진검으로 하고 싶습니다.” “ 에? 정말이야?” “ 네.” “ 다칠 수도 있는데.” “ 괜찮습니다.” 사실 린스는 방금 전 ‘어린 도련님’이라고 칭해진 것에 대해서 살짝 오기가 생긴 상태였다. 자신의 외양이 부드러운 도련님 타입이라는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상대방에게서 직접적으로 들으니 역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진검대련이라도 얼마든지 괜찮으니 실력을 보여주겠다고, 린스는 속으로 다짐했다. 결국 트나이는 두 손을 들었다. “ 그렇다면야. 그럼 한판 할까? 어이, 거기 검 하나만 넘겨주라.” “ 받으삼.” “ 땡큐!” 트나이는 동료기사가 던져준 검을 받아 린스에게 건넸다. 평소에 쓰던 것보다 조금 길었지만 그런대로 손에 익힐 수 있을 것 같다. 검을 들고 자세를 잡는 린스에게 마찬가지로 검을 고쳐 잡으며 트나이가 마지막으로 재 당부했다. “ 다쳐도 내 책임 아니다.” “ 괜찮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쏘아주고 싶은 것을 참으며 린스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막상 검을 들고 상대와 마주하니 기분이 편안하게 가라앉았다. 둘은 침착하게 서로를 응시했다. “ 그럼, 간다.” 챙! 말과 동시였다. 검 두 개가 서로 부딪혔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얇은 검신이 허공에서 연달아 충돌하기를 반복했다. 지켜보는 이들의 표정에 놀라움이 서렸다. 트나이는 비록 기사단에 입단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이었지만 실력은 제법 알아주는 축에 속했다. 다른 단원들에 비해서 전혀 떨어지는 수준이 아니란 소리다. 그런데 그런 트나이를 상대로 어려보이는 소년이 막상막하의 양상을 보여주니 충분히 놀랄 만도 했다. 처음에는 장난스럽게 시작했던 트나이도 어느새 진지한 자세로 바뀌어있었다. 단 몇 번 검을 부딪혀봤을 뿐이지만 눈앞의 소년이 자신보다 크게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방심은 금물이다. 린스는 린스 나름대로 충격을 맛보고 있었다. 모국에서 그의 검술실력은 유명했다. 따라올 기사가 몇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색은 안했지만 나름 린스는 이 대련에서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예상보다 트나이의 실력이 훨씬 뛰어났던 것이다. 둘의 실력은 아주 근소한 차이만 존재할 뿐 거의 비슷했기 때문에 대련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치열해졌다. 매서운 검 끝이 연달아 린스를 노리고 날아들었고 린스는 매번 그것들을 피하거나 맞부딪혔다. 트나이는 주로 공격을 위주로 하는 타입이었는데, 파워보다는 스피드에 치중하고 있었다. 나름 빠르다고 자부하고 있던 검이 번번이 린스의 방어에 막히자 조급함이 일었다. 검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린스는 재빠르게 그것들을 눈으로 쫓으며 검으로 막아나갔다. 둘의 눈 뜰새 없는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일은 예상치 못하게 터졌다. “ …?!” “ 어, 어이!” 순간적으로 린스의 팔이 굳었다. 몸에 익지 않은 무게와 길이의 검을 너무 무리해서 휘둘렀기 때문인가, 아주 찰나였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증상에 대해서 린스는 익숙하지 못했다. 당황한 나머지 덩달아 몸의 균형도 깨져버렸다. 때문에 목을 노리고 찔러오는 트나이의 검을 뻔히 바라보면서도 막을 수가 없었다. 트나이도 마찬가지로 당황했다. 그는 린스가 당연히 막을 것임을 염두에 두고 한 공격이었다. 때문에 손에 전혀 사정을 두지 않은 것이다. 도중에 멈추기에는 늦은 상황이었다. 검 끝이 린스의 목에 거의 다다랐을 때 그는 이를 악물었다. 린스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채앵! “ ……!” “ !!” 예상치 못한 금속음에 린스가 감았던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방금 전까지 자신의 목을 노렸던 검이 허공을 부유하는 것. 그리고 저를 구해준 다른 이의 검신이었다. 찰나의 순간에 끼어들어 트나이의 검을 날려 보낸 이는 바로 카엘이었다. 잠깐 자리를 비운사이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카엘은 상당히 화가 나있었다. 트나이는 카엘의 굳은 표정에 찔끔하면서도 자신의 검을 막아준 것에 적잖이 안도했다. “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트나이는 진심으로 고개 숙여 말을 뱉어냈다. 그 정중한 모습에 카엘이 마음속으로 결정했던 처벌의 강도를 조금 낮추었을 때,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던 린스가 말했다. “ 부탁합니다!” 뒤를 돌아본 카엘은 다짜고짜 허리부터 숙이는 린스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숙인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며 린스가 외쳤다. “ 저랑,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대련 부탁드립니다!” 린스의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트나이의 검은 실제로 자신의 목에 거의 닿을 정도까지 가까이 와 있었다. 그리고 트나이 스스로도 방향을 꺾거나 멈추기 힘든 힘과 스피드를 담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찰나의 시간에, 방향을 비트는 것도 아니고 날려 보내다니? 어떻게 한 것일까. 다만 확실한 것은, 눈앞의 이 사람이 자신이 그동안 꿈꿔왔던 이상에 가장 적합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카엘은 사뭇 비장하게 외친 린스를 잠시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허락해주지 않으면 무릎이라도 꿇을 자세였지만 카엘은 방금 전 대련에서 린스의 어깨가 굳는 것을 똑똑히 보았기에 내릴 수 있는 선택은 한가지뿐이었다. 카엘은 린스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 유감이지만 들어줄 수 없군요.” “ 어째서…앗!” 린스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몸을 일으키자 정면으로 눈에 들어온 카엘의 얼굴은 분명 낯이 익은 것이었다. 바로 제 여동생의 방에 걸려있는 초상화의 주인공이 아닌가. 카류엘 황태자. 린스는 저도 모르게 넋을 놓았다. 초상화까지 걸어놓을 정도로 여동생이 극성을 부릴 때에는 솔직히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황태자의 얼굴은 차라리 사기에 가까웠다. 초상화 따위가 어떻게 이 외모를 담아낼 수 있었을까. 이렇게 생긴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다. 카엘은 화로 굳혔던 얼굴표정을 부드럽게 풀며 말을 이었다. “ 지금은 근육이 조금 말을 듣지 않을 겁니다. 무시하고 대련을 강행했다가는 자칫 손상을 입게 될 지도 모르니, 오늘은 그만 쉬고 다음에 기회를 잡도록 하죠. 리온스 왕자.” “ …! 저를 아십니까?” 카엘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제 이름에 린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분명 자신은 먼저 이름을 말한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 축하사절단의 주요 멤버를 미리 알아두는 것 정도는 기본 소양이죠. 그럼 연회까지 별 탈 없이 편히 쉬시기를 바랍니다.” “ 아…!” 그리고 카엘은 몸을 돌려 기사단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오오라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니 단체처벌은 기본으로 따놨구나 싶어 기사들의 낯빛이 단체로 창백해졌다. 그런 와중에도 몇몇은 린스에게로 눈을 돌렸다. 린스는 카엘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멀어짐에도 눈을 떼지 못한다. 하늘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것을 포착한 기사들 중 유달리 감이 좋은 두 명이 서로 속닥거렸다. “ …아니겠지?” “ 야, 설마. 아무리 전하께서 마성의 매력이라지만.” “ 정말 아니겠지? 하긴.” “ …그런데 조금 위험해보이기는 함.” “ 헐.” “ 헐2人.” 둘의 표정은 매우 떫었다. ================================ # 83편 # 소제목 : 로드웬 왕국 사절단. (5) ================================ 장장 한 편에 걸친 린스의 긴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말없이 제 오라버니를 토닥여 주던 린세스는 이내 입을 열어 자신의 얘기를 조근조근 풀어놓았다. 웬 인간말종 변태에게 걸려 순결의 위협을 받았단 대목에서 주먹을 움켜쥐었던 린스는 곧바로 이어진 유리엔의 등장 부분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 검은색머리?” “ 네! 그 흑단 같던 머릿결이란…아아, 전 그때 정말 꿈을 꾸는 기분이었죠.” “ 잠깐만.” 린스는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묘사에 으음, 하는 침음성을 흘리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여신 같은 외모에 검은색머리. 여신? 검은머리? “ 아! 혹시….” “ 네?” “ 알겠다. 카르나 제국의 유리시엔 황녀전하가 아닐까?” “ 에? …아!” 린세스도 뭔가가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심심찮게 들었던 얘기였다. 카르나 제국의 유일한 황녀인 유리시엔황녀가 검은 눈동자에 검은색 머리카락을 지녔는데, 그 미모가 대륙제일이라고 칭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소문. 린세스는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 어쩐지…그렇게 소문이 날 만해요. 그 눈이 멀 것 같은 아름다움이라니.” “ 그런데 왜 유리시엔황녀전하께서 여기 뮤리엔 제국에 계시는 걸까?” “ 으음, 글쎄요? 우리와 마찬가지로 축하사절단으로 오신 게 아닐까요?” “ 그런가?” 린스와 린세스는 아직 유리엔과 카엘의 관계를 모르고 있었다. 둘의 결혼은 엄밀히 말하자면 아직 제대로 식도 치루지 않았고, 예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해온 것이 아닌 모종의 사정 때문에 급하게 결정지은 거라 아직까지 주변 나라들에 정식으로 정해질 시간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다만 뮤리엔 제국의 황실과 귀족들 사이에서만 공공연히 둘을 부부로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어쨌거나 그러한 사실은 까맣게 모르는 두 남매는 각자 저마다의 다짐에 불타올랐다. “ 오라버니, 전 말이죠. 피하지 않겠어요. 당당하게 부딪히겠어요! 이 감정은 분명 사랑이니까요!” “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저 시도조차 하지 않고 포기해 버리기엔, 사랑의 힘이 너무도 강하구나!” “ 오라버니!” “ 린세스!” 서로를 마주보며 ‘힘내세요’ ,‘힘내렴’의 눈빛을 주고받은 둘은 다시 한 번 굳은 의지를 불태웠다. 만약 유리엔이나 카엘이 보았다면 흠칫 몸을 떨었을 장면이었다. 하늘을 향해 치솟는 그 의지를 먼저 행동에 옮긴 것은, 바로 린스였다. 때는 바야흐로 생일파티 하루전날 오전, 장소는 카엘의 집무실. 유리엔은 구겨지는 드레스에도 아랑곳 않고 배를 부여잡은 자세로 바닥을 굴렀다. “ 푸하하하하하하하핳하! 푸하하하으핫하하학하하꺄하하하!” “ …….” 아무리 자신이 조금 전 ‘참지 말고 그냥 웃어’라고 했기로서니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저렇게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뒹굴 수 있단 말인가. 카엘의 손에 잡힌 서류가 와스락 하고 구겨졌다. 숨이 차면 잠깐 쉬었다가 다시 웃고 쉬었다가 다시 웃고를 반복하던 유리엔이 그러한 폭풍 웃음을 멈춘 것은 여러 장의 서류가 카엘의 손에서 운명을 달리했을 때쯤이었다. 눈꼬리에 맺힌 눈을 닦으며 유리엔이 몸을 일으켰다. “ 다 웃었냐?” “ 아니, 아직 남았는데 배가 아파서. 나중에 린이랑 같이 웃어야지.” “ …….” 카엘의 굳어진 표정에 금이 갔다. 뭐라고 말을 하려 달싹이던 입이 이내 다시 다물어진다. 쪽팔림 외 여러 가지의 복잡다양한 감정들을 느끼며 카엘은 애써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유리엔이 저렇게 웃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자신만 해도, 당사자만 아니었다면 책상을 치며 웃었을지 모른다. “ 하아….” 카엘의 한숨이 허공을 타고 흩어졌다. 사건은 대략 한 시간 전쯤 일어났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하루 앞둔 연회 때문에 잔뜩 쌓인 일거리들을 미리 밤을 새가며 처리하던 도중, 누군가 카엘을 찾아왔다. 노크부터 하는 것을 보니 십중팔구 유리엔은 아니겠다고 생각하며 들어오라고 하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로드웬 왕국에서 올해 사절단으로 온 리온스 왕자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보니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혹시 어제 다음기회로 미룬 검술대련을 요청하려는 건가싶어 물어보니 아니라고 고개를 젓더라. 그래서 잠자코 얘기를 꺼낼 때까지 기다려주니 이래저래 망설이다 하는 말이, ‘ 반했습니다!’ …? 여기서 카엘의 두뇌는 열심히 회전하여 저 말을 ‘검술에 반했습니다’로 자체 필터링 시켰다. 그리고 웃으며 열심히 노력하면 당신도 나처럼 검을 쓸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주려는 순간. ‘ 좋아합니다!’ 2차 폭격이었다. 카엘의 두뇌에서 입력오류 바이러스가 발생했다. 자체 필터링에 실패했습니다. ‘ 진심입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린스는 초롱거리는 눈동자로 카엘을 올려다보았다. 당연히 카엘은 말문이 막혔다. 방금 들은 말을 이해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따랐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신관을 불러 제 귀의 이상여부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린스의 묘하게 상기된 표정이 자꾸만 눈앞의 진실을 외면하지 말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말하자면 이때 카엘은 탄생이후 최대로 당황했다. 침묵이 흐르고 급기야 린스가 ‘부디 제 마음을 받’까지 말했을 때 카엘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 유감이지만 난 유부남입니다!’ 라고. 이 말을 뱉음과 동시에 급격히 어두워지는 표정의 린스를 밖으로 내보내고, 카엘은 한동안 아무것도 못 한 채 패닉상태에 사로잡혀있었다. 방금 뭐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때에 타이밍 맞춰 유리엔이 놀러왔다. 그리고 이상증후를 보이는 카엘에게 캐물어 사정을 알게 된 유리엔은 그 즉시 온몸을 떨며 웃기 시작했다. 그 후 지금에 이른 것이다. 카엘은 다시 생각해봐도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사실 어제 연무장에서 자신에게 진심으로 대련을 요청하던 모습에서 린스에게 상당한 호감을 느꼈던 카엘이었다. 그런 만큼 지금 상황이 더욱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다. “ 헤이, 인기남.” “ 시끄러워.” 유리엔은 빙글빙글 웃으며 연신 카엘을 놀릴 뿐이었다. 그녀로서도 남자가 남자한테 고백 받는 건 처음 봤다. 그것도 상대가 대놓고 거절하기 힘든 축하사절단의 왕자니 진심 코메디가 따로 없었다. 쯧쯧, 불쌍한 놈. 그러게 조금만 덜 생기지 그랬냐, 그렇게 생각하며 유리엔은 앞으로 일주일정도는 폭소할만한 거리가 생겼음에 기뻐했다. 그러나 유리엔은 채 몇 시간도 지나기 전에 자신이 이렇게 카엘을 비웃을만한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일은 모르고 있었다. ================================ # 84편 # 소제목 : 로드웬 왕국 사절단. (6) ================================ 때는 바야흐로 생일파티 하루전날 오후, 즉 대망의 몇 시간 뒤. 모처럼 유리엔의 방을 찾은 카엘은 입가에 통쾌한 비웃음을 띠고 있었다. 큭, 하는 웃음소리를 내뱉기 무섭게 엄청난 스피드로 베개가 날아왔지만 카엘은 당연한 듯 가뿐히 막아냈다. 이를 갈며 유리엔이 애꿎은 다른 베개를 퍽퍽 밟았다. 불과 한시간정도 전, 유리엔은 살아오면서 그다지 인연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패닉나라의 식구들과 소개팅을 가져야만 했다. 원인인즉 아무 생각 없이 놀러나갔던 정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린세스 때문이었는데, 사실 그녀에게서 린이나 루네와 닮은 모습을 얼핏 봤던 유리엔으로서는 그 만남이 처음에는 상당히 반가웠다. 그래서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필살 여신미소도 날려주었더랬다. 그러나 부끄부끄 수줍수줍하는 모습으로 유리엔을 흐뭇하게 만들었던 린세스가 화끈하게 뒤통수를 날린 건 바로 그 다음의 일이었다. ‘ 조, 좋아해요!’ 약한 떨림을 타고 정원을 울린 맑은 목소리에 유리엔은 그 즉시 사고를 멈췄다. 돌아가지 않으려는 고개를 끼긱 거리며 가까스로 움직여 린세스를 쳐다보자 그녀는 얼굴을 온통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 그때, 구해주셨을 때 첫눈에 반했어요. 진심이에요.’ 미소를 짓고 있던 유리엔의 입가가 굳었다. 그녀는 방금 들은 말과 지금의 상황을 최대한 이성적이고 냉철하며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그에 따른 최선의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유리엔은 꿈에서 깨어나기 스킬을 사용했다. 실패했습니다. 유리엔은 공간 텔레포트 스킬을 사용했다. 실패했습니다. ‘ …저기 말야.’ ‘ 제발 제 마음을 받아주세요!’ 식은땀이 흐를 정도의 이러한 당황스러움은 과연 몇 백년만인가를 헤아리며 유리엔이 뭔가 말하기 위해 입을 달싹였다. 그런데 뭐라고 말하지? 고민하는 순간 떠오르는 말은 딱 한가지였다. ‘ 미안하지만…난 유부녀야.’ ‘ !!’ 왠지 카엘을 따라하는 듯도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니. 충격과 상처를 동시에 받은 표정의 린세스를 보며 유리엔은 스스로의 너무도 뛰어난 매력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자신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토록 살인적으로 아름답게 태어나 저 귀여운 소녀를 울려야만 한단 말인가. 하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받아줄 수는 없으니 될 수 있으면 부드럽게 거절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금방이라도 소설 속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눈물을 흩뿌리며 달려 나갈 것 같던 린세스는 의외로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 큰 눈동자에서 눈물을 한 방울 두 방울 흘리며 유리엔의 죄책감에 대못을 쾅쾅 박더니 이내 인사와 함께 조용히 물러갔다. 그리고 남은 유리엔은 패닉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살아온 세월 동안 귀여운 여자아이를 상처 준 기억은 한 번도 없다 자부하는 그녀였건만, 그 프라이드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폭풍과도 같은 여운을 남기고 간 린세스와의 잠깐의 만남 후에, 멍한 상태가 되어 거처로 돌아온 유리엔이 패닉나라 왕과의 긴긴 대화를 끝내고 막 작별인사를 하려는 즈음에 린이 나타났다. 마침 잘됐다싶어 유리엔은 안으로 들어온 린이 미처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붙잡고 복잡한 머릿속을 싸그리 꺼내놓았다. 그렇게 숨 돌릴 틈도 없이 한참을 이야기를 듣다가 마지막부분에 이르러 숨을 돌리자 그때서야 처음으로 린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하는 말이, ‘ 저 실은, 황녀님. 황태자전하께서 오셨어요.’ 라서 유리엔은 이 부분에서 잠시 동안 굳었다. 그 석화상태를 풀어준 것은 다음순간 친히 문을 열고 등장한 카엘이었다. ‘ 다 들었다, 검둥아?’ 들어오자마자 저딴 얄미운 말이나 지껄이는 카라멜을 마음 같아선 곱게 다져주고 싶은 유리엔이었으나, 고작 몇 시간 전에 숨이 넘어갈 정도로 카엘의 일을 비웃어준 죄가 있으니 그저 참는 것 외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다만 간간히 ‘피식’하는 비웃음을 날리는 시원한 표정의 카엘에게로 향하는 분노를 죄 없는 베개를 팡팡 밟으며 분풀이를 할 뿐이다. 어쨌든 그리하여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다. 유리엔에게 전후사정을 모두 들은 린은 묘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다 대뜸 말을 뱉었다. “ 역시 부부는 사소한 것까지 닮는다더니, 와아!” 그리고 린은 직후 날아오는 베개를 피하지 못했다. 연회 때문에 바삐 황궁으로 올라온 루네 및 식구들은 곧바로 유리엔과 카엘을 찾았다. 그리고 어떻게 알았는지-라기 보단 십중팔구 린이 말해주었겠지만, 가장 먼저 린스와 린세스의 얘기를 꺼냈다. 옆에 파트너로 네이시온을 달고 온 루제가 눈을 반짝거리며 흥미를 보였다. “ 리온스 왕자와 린세니오스 공주라…들어본 적 있는 것 같아요. 각 2왕자와 3공주던가?” “ 자세하게 알고 있네?” “ 응. 걔네도 나름 유명할걸? 왜냐면 예쁘거든, 둘 다.” “ 그래? 하지만 내 눈엔 역시 네가 제일 예뻐 보이는데…….” “ 야아, 부끄럽게!” “ 후후.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 “ 몰라몰라~.” “ …….” 마주앉은 유리엔의 표정이 썩어갔다. …오호라, 이것들 봐라? 분명히 전에 루네의 생일파티 때 막 두근두근이 싹트는 분위기였건만 그 뒤로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이런 미칠 듯한 닭살이란 말인가. 거참 진도 빠른 커플이다. “ 참, 황녀전하! 린세니오스공주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 뭘?” “ 고백했잖아요. 꺄!” …사랑의 힘인가? 아무래도 잠깐 새에 애가 좀 많이 변한 것 같다고 느끼며 유리엔이 대충 대답했다. “ 몰라. 알아서 포기하겠지.” “ 흐음, 그래요?” 유리엔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린세스에게 고백을 받던 그 순간에야 무척이나 당황했었다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단순한 해프닝정도로 여겨졌다. 게다가 직접적으로 ‘유부녀’라는 말까지 했으니 일반적으로는 포기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유리엔은 물론 제론과 함께 비슷한 양상을 펼치고 있는 카엘 또한 몰랐다. 유부녀와 유부남이라는 엄청난 단어에 충격 받아 포기직전까지 갔던 린스와 린세스를, 다시금 적극적으로 타오르게 만드는 누군가의 편지가 그날 밤 발송될 것을 말이다. ================================ # 85편 # 소제목 : 로드웬 왕국 사절단. (7) ================================ 아침이 밝아왔다. 지난 며칠 동안 카엘을 일의 바다 속에서 헤엄치게 만든 주원인인 생일연회가 드디어 시작을 알리며 동이 터왔다. 모두가 파티참석을 위해 꽃단장에 아낌없이 시간을 투자하고 있을 무렵, 웬일인지 유리엔이 그녀에겐 꼭두새벽이나 다름없을 이른 시간에 눈을 떴다. 멍하니 잠이 덜 깬 눈으로 세수를 하고 이도 닦고 옷까지 주섬주섬 챙겨입은 유리엔은 그대로, 튀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다이어트가 전혀 필요 없는 몸매에 밥을 굶을 생각도, 개미허리에 코르셋을 한계까지 조여 호흡곤란에 직면하거나 잡티하나 없는 뽀송뽀송한 피부에 흰 분을 덕지덕지 펴 바를 의사도 마음도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유리엔은 하녀군단이 도착하기 직전에 방에서 도망쳤다. 다행히 도망에 성공한 유리엔은 이내 루제와 루네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 으아앙!” “ ……?” 문을 열자마자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루네가 유리엔을 맞이했다. 루네는 유리엔을 발견함과 동시에 그렁거리던 눈물을 흩뿌리며 그녀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얼떨결에 아담한 체구의 루네를 폭 안게 된 유리엔은 당연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시선을 들자 어깨를 으쓱하는 루제가 보였다. “ 조금 놀렸을 뿐인데.” “ 조, 조금이 아니잖아!” 루네가 새빨개진 얼굴로 외쳤다. 유추 가능한 상황이었다. 다만 그 놀림의 내용을 몰라 막 유리엔이 물으려던 차에 루제가 먼저 터뜨렸다. “ 하지만 잘 생각해봐, 루네. 제론 경은 몇년만 더 지나면 서른이야. 충분히 급할 나이라고! 손잡는 것부터 천천히 시작할 시간이 없으니까 그냥 확!” “ 루제야.” “ 네?” “ 맞고 싶니.” “ 잘못했습니다.” 루제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 그런데 여긴 웬일이세요?” “ 아아, 그냥.” 루네의 물음에 유리엔은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오전부터 저녁까지 풀코스로 몸단장을 해야 하는 게 싫어서 튀었다고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아주잠깐 고민하는 사이 루제가 눈치를 챘다. 슬그머니 곁으로 다가온 루제가 말했다. “ 파티에는 참석하실 거죠?” “ 그래야겠지.” “ 혹시 선물은 준비하셨어요?” “ 응.” “ …네?! 호, 혹시 돌이라던가 압정이라던가 독약이라던가-.” “ 뭐? 내가 황비전하께 그런 걸 왜 드려?” “ 아.” 말한 대상이 서로 달랐다. 루제는 머쓱하게 웃으며 재 질문했다. “ 황태자전하께 드릴 생일선물은요?” “ 글쎄? 딱히 생각해 본적이 없어서.” 여기서 유리엔은 거짓말을 했다. 사실 선물순위 1위에다가 짱돌만 올려놓고 그 뒤로 머리 터지게 고민했던 것이 사실인데 묘하게 그녀는 그것을 인정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관심도 없었다는 척 구라를 치자 그걸 그대로 믿은 루제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 그럼 안 돼요! 벌써 오늘이 탄생일인데. 이제 와서 준비하기도 좀 늦고…아! 그럼 축하기념 노래라도 한곡 불러드리는 건 어때요?” “ 노래?” “ 네!” “ 생일축하합니다, 로 시작하는 그런 노래 말이야?” “ 아뇨, 다른 노래예요. 들어보실래요?” 하고 그녀는 동의도 얻지 않은 채 흠흠 목을 가다듬고 노래를 시작했다. 높은 톤의 목소리가 발랄하게 울렸다. “ 왜 태어났니~왜 태어났니~.” 오, 퍼펙트. 유리엔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첫 소절을 들었을 뿐인데 정말 완벽한 노래라는 것을 곧바로 알 수 해주는 저 가사라니. 아주 멋진 노래였다. 유리엔은 노래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나중에 카엘에게 꼭 들려주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그 다짐이 파작 하고 사라진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 그 이유를 알겠구나, 날 만나기 위해~” “ …….” 초록색 감을 아흔여덟개쯤 갈아서 원샷한 표정으로 유리엔은 막 노래를 끝낸 루제를 응시했다. 단 두 소절뿐인 노래주제에 저런 폭풍반전은 대체 뭐지. “ 좋죠? 바로 우리 자기가 저한테 불러준 노래에요~꺄~” “ 루제야.” “ 네?” “ 네 자기랑 둘이 사이좋게 같이 맞을래?” “ 잘못했습니다. x2” 루제는 다시 조용해졌다. “ 우리! 카사모는!” “ 카사모는!” “ 결코 인정할 수 없다!” “ 인정할 수 없다!” “ 그는 절대 한 사람의 것일 수 없으며, 만인의 연인이다!” “ 만인의 연인이다!” “ 와아아아!” “ 와아아아아아!” 파티홀로 가는 길목이었다. 린스에게 에스코트를 받으며 조신하게 걸음을 내딛던 린세스는 우연히 보게 된 장면에 동그랗게 뜬 눈을 깜박였다. 저게 뭔가요? 눈으로 물어오는 린세스에게 린스는 다만 자신도 모른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어 줄 뿐이었다. 좁지 않은 복도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귀족영애들은 많아야 스물을 넘기지 않아보였다. 저마다 각양각색으로 차려입은 화려한 드레스를 뽐내며 무리를 형성한 그녀들을 이끄는 것은 마찬가지로 어려보이는 소녀였다. “ 다짐한다, 첫 번째! 반드시 마음을 담은 선물을 전한다!” “ 선물을 전한다!” “ 두 번째! 정략결혼일 뿐인 것을 명심한다!” “ 명심한다!” “ 세 번째! 얼굴에 흔들리지 않는다!” “ 흔들리지 않는다!” “ 네 번-.” “ …저기요?” 막 네 번째 다짐을 외치려던 소녀는 린세스의 목소리에 말을 멈췄다. 소녀는 좋지 않은 기색으로 린세를 돌아보았다. “ 저, 궁금해서 그러는데 여러분 지금 뭘 하시는 건가요?” “ 정말 몰라서 물어보나요?” “ 네?” 린세스의 당황한 표정을 잠시 쳐다본 소녀는 이내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다시 말했다. “ 다른데서 왔나 봐요?” “ 아, 네.” “ 축하사절인가보네. 뭐, 그럼 정말 모르는 것 같으니 특별히 말해줄게요.” 그러더니 소녀는 긴 머리카락을 한번 찰랑 하고 쓸어 넘겼다. 그리고 사뭇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정중히 가슴에 손을 얹고 상체를 숙이며 말했다. “ 반가워요. 전 카류엘 황태자 전하를 사모하는 모임, 즉 카사모를 이끌고 있는 카사모 회장 레드러브리 다웨넨 입니다.” “ 아! 그렇군요. 저도 반가워요, 레드러브리양. 전 이번에 로드웬 왕국에서 축하사절로 온 린세니오스 레인 드 로드웬입니다. 이쪽은 저희 오라버니세요.” “ 반갑습니다. 리온스 이안 드 로드웬입니다.” 린세스와 린스의 소개에 레드러브리 외 귀족영애들은 놀란 표정을 해보였다. 생각보다 눈앞의 이 미남미녀의 신분이 높았던 탓이다. “ 공주님이셨군요.” “ 작은 나라일 뿐입니다.” 겸손히 대답하며 린세스가 살짝 웃었다. 그리고 레드러브리는 두 번째 놀랐다. 예쁘다!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았을 뿐이지 상당한 미모를 지닌 소녀였다. 만약 젤디아 공녀가 지금도 제국에 있었다면 순간 라이벌의식을 느꼈을지 모른다. 레드러브리는 문득 물었다. “ 혹시, 린세니오스양도 황태자전하께 마음이 있나요?” 견제의 눈빛이다. 린세스는 깜짝 놀랐다. 한때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는 부정의 의미로 고개를 저으며 제 옆의 오라버니를 가리켰다. “ 저보단, 오라버니쪽이.” “ 예?” “ …….” 어쩌지 못하고 서있는 린스의 얼굴이 차츰 붉어졌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레드러브리 외 카사모 회원들은 서로 고개를 맞대고 의견을 교환했다. “ 혹시 bl?” “ 과연 bl?” “ 역시 bl?” “ 정말 bl?” “ 우와 bl?” 분명 린스는 견제의 대상이자 적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그녀들은 왠지 모르게 그에게 이상야릇한 호감의 감정이 싹트는 것을 느꼈다. 린스는 식은땀을 슬며시 훔쳤다. ================================ # 86편 # 소제목 : 로드웬 왕국 사절단. (8) ================================ (공지 + 본편입니다.) *알림* 6/30 ~ 7/3. 2차고사 날짜입니다. .....ㅜㅜ..네...공부크리가 닥쳤어요prz 원래는 공지만 띄울 생각이었는데 돌 맞을 까봐(...) 적지만 저번에 써두었던 분량 올립니다. 그럼, 시험 끝나고 만나요. 아듀! -------절취. 가까스로 카사모 회원들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외면하고 린스와 린세스가 도망치듯 들어선 파티홀은, 많은 귀족들이 모여 있었지만 아직은 제법 한산했다. 화려하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 넓은 홀은 감탄하며 둘러보던 린세스는 이번엔 홀의 구석에서 방금 전과 비슷한 양상을 발견했다. “ 명심해라, 우리의 목표는 단 하나!” “ 우리의 목표는 단 하나!” “ 카사모에게 지지 않는 것!” “ 지지 않는 것!” “ 오오오오!” “ 우오오오오오!” 이쪽도 제법 신기하다. 이번에는 귀족영애들이 아닌 오로지 전부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모임이었다. 린세스는 호기심어린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 저기요.” “ 음? 오홋!” 가운데 있던 남자는 린세스의 부름에 뒤를 돌아보고는 눈동자를 빛냈다. 미인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무슨 일이신지?’하고 무엇이든 물어 보세요의 자세로 들어갔다. 린세스는 망설이지 않고 물었다. “ 여러분께서는 혹시 유사모이신가요?” “ 네, 맞습니다! 저희가 바로 그 유명한 유리시엔 황녀전하를 사모하는 사람들의 모임, 즉 유사모입니다. 카사모회원들에게 결코 지지 않는!” 지지 않는, 을 강조하면서 남자가 말했다. 린세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만난 사람들이 카사모(카류엘 황태자 전하를 사모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길래 혹시 여기는 비슷하게 유사모(유리시엔 황녀전하를 사모하는 사람들의 모임)는 아닐까 싶어서 대강 짚어본 것이었다. 그런데 맞았다. 게다가 카사모를 언급하는 걸 보니 둘이 서로 라이벌 격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 전 유사모를 대표하는 레이즈블 랙프입니다. 저 그런데 영애께서는 혹시, 유사모에 관심이 있으신 건…?” “ 아, 네. 여러분들처럼 단체로 활동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유리시엔 황녀전하를 사모하는 것은 맞습니다.” “ !!” 유사모 회원들은 린세스의 말에 저마다 놀란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이내 자기들끼리 작게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 이건 혹시…….” “ 백합인가?” “ 백합이지?” “ 백합이군.” “ 백합이야.” “ 하악하악.” …? 뭔가 마지막에 무척 거슬리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고 생각하며, 린세스는 그들의 곁에서 슬금슬금 멀어졌다. 왠지 가까이 가면 안 될것 같은 여자의 느낌. 부인을 파티 홀까지 에스코트하라는 어명을 받고 카엘은 제론과 함께 긴 복도를 가로질러 유리엔의 거처로 향했다. 곧 있을 파티를 위해 연미복을 흠 없이 차려입은 카엘의 모습은 멀리서 보기에도 단연 눈에 뛸 만큼 빛이 났기 때문에, 카엘을 우연찮게 스쳐지나가며 한 번씩 본 여성들은 저마다 가슴을 움켜쥐기에 바빴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몇 명의 영애들에게 심장병을 남기며 유리엔의 거처로 도착한 카엘은, 온 길이 무색하게 다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 어디로 갔을지는 뻔하지.” 유리엔의 부재를 알자마자 카엘은 망설임 없이 드아이스 자매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사라졌다고 하니 유리엔이 갈만한 장소는 십중팔구 루네에게 뿐일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짐작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 어라?” 마침 나오려던 참이었는지 문이 벌컥 열리며 유리엔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론은 그렇다 치고 생각 못한 인물인 카엘을 발견하자 유리엔이 곧장 삿대질을 했다. “ 네가 여긴 왜 있어?” “ 홀까지 에스코트하러왔지.” “ 헐.” 순간 오늘 카라멜의 점심식사에 독이 들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고민하던 유리엔은 이내 황제가 명령을 내렸을 수도 있겠다는 것에 생각이 미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되묻기를. “ 그런데 내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고?” ‘나름 잘 튀었다고 생각했는데!’라는 외침이 담긴 질문이었다. 카엘은 뭘 새삼스럽게 그런 걸 묻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태연히 대답했다. “ 네가 날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듣기에 따라서 충분한 러브러브의 오해의 소지가 담겨있는 발언이었다. 다만 문제라면 그 말을 뱉은 당사자도 듣고 있는 상대방도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에 있었지만. 비명은 애꿎은 데서 터졌다. “ 꺄악!” “ …?” “ ?” 왠지 뒤에 하트를 붙여야만 할 것 같은 부끄한 비명소리에 카엘과 유리엔이 동시에 루제를 돌아보았다. 양 뺨에 손을 얹은 루제는 두 명의 의아함이 가득담긴 시선을 받으면서도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옆의 루네를 붙잡고 소리쳤다. “ 로맨틱해! 어쩜 좋아! 넌 나를 평생 벗어날 수 없어, 왜냐면 나라는 감옥에 평생 가두어 둘 테니까! 꺄아-.” “ …….” “ …….” 알림. 루제의 상태가 심각해졌습니다. 주의를 요망합니다. 곧 제론이 루네를 에스코트하고, 조금 뒤에 찾아온 네이시온이 루제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둘이 오붓하게 사라질 때까지 유리엔과 카엘은 침묵을 지켰다. ================================ # 87편 # 소제목 : 유리엔 외전) 그림자 ================================ (유리엔 외전) 그림자 눈이 잔뜩 쌓인 겨울의 낮이었다. 온통 새하얀 길에 뽀득뽀득 발자국소리와 그 자국을 남기며 걷는 어린 소녀가 있었다. 열두 살 정도나 되었음직한 작은 체구와 젖살이 덜 빠진 얼굴을 한 채 소녀는 산책이라도 하듯 차분하게 발자국 수를 늘려갔다. 그때 마침 눈밭 위에 쓰러져있던 소년 너댓명을, 소녀는 충분히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소녀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들의 곁에 쭈그려 앉아 반쯤은 죽어있는 상태들을 요모조모 관찰 한 뒤, 제 시종을 불러 그들을 살렸다. 절제절명의 위기에서 소녀의 도움을 받고 살아난 소년들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소녀를 찾아가 자신들을 후원해줄 것을 부탁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열두 살 여자아이가 들을 법한 말은 아니었지만(비록 그 여자아이가 어떤 신분이던 간에)소녀는 의외로 조금의 망설임이나 고민도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혹시 너무나 어린 나이 탓에 그 뜻을 제대로 모르는 건 아닐까? 소년들은 순간 걱정했지만 얼마안가 그것이 부질없는 생각이었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그들의 막연한 짐작보다도 소녀의 신분이 어마무시하게 높았고, 덧붙여 소녀의 잔머리(그것도 특히나 남을 괴롭히는 쪽으로 돌아가는)는 특히나 두려울 정도였다. 소년들은 음지에서 소녀의 손가락 짓 하나에 밤낮없이 굴려졌고, 이를 갈고 치를 떨면서도 그 결과 그들은 목표로 하던 도둑길드를 창립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들이 훌륭하게 독립하자 소녀는 지금까지 애정을 담아 굴려준 것은 그저 어린아이의 장난이었다는 듯 깔끔하게 원조를 끊었다. 그 후 길드를 점점 더 크게 번창시키고 인원수를 늘려 나간 소년들은 마침내 자신들이 직접 자리에 앉아 휘두르지 않아도 안정적으로 길드가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쯤 일을 때려 치고 스스로 그림자가 되었다. 음지에서 활동하는 소녀의 직속 호위대가 된 것이다. 비록 수는 적지만 하나같이 뛰어난 엘리트들이었기에, 항상 아찔할 정도로 위험한 사고를 치고 다니는 소녀를 그들은 항상 무사히 보필하는 것에 성공했다. 사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호위보다는 뒷수습 부대라고 칭하는 게 맞겠다. 이 소녀가 바로 카르나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 유리시엔 헤자르 드 카르나 황녀이고, 뒷수습 부대는 현재 카르나 제국의 음지 길드 중 제법 유명한 에르지옌의 가장 상위멤버 넷 top 4 이다. “ 수고해요.” “ 아, 네!” 경비병A는 한참 지루하게 근무시간을 지키던 도중, 곁을 스쳐지나가는 어린 하녀가 맑고 앳된 목소리로 지나가듯 건넨 인사에 반사적으로 퍼뜩 대답하며 정신이 들었다. 자기보다 한참은 어린 소녀에게 저도 모르게 존댓말로 대답해버린 스스로가 우스워서 피식거리던 그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소녀는 까마득히 멀어져있었다. 분명 옷은 하녀들이 입는 작업복인데 머리카락과 얼굴을 천 같은 것으로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외모는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뭔가가 께름칙하다. 뭐지? 그리고 그 의문은 얼마안가 풀렸다. “ 으아아아! 경비병 A님!” “ 어? 넌 시종B…갑자기 왜 그래?” “ 큰일 났어요! 황녀전하께서 성 밖으로 튀셨…아니, 사라지셨어요!” “ 뭐?!” 그는 갑작스런 핫뉴스에 입을 떡 벌렸다. 황녀전하라고 한다면 분명 얼마 전에 대형 사고를 제대로 터뜨려 폐하로부터 외출금지령을 받은 상태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성 밖으로 나갔다니- 그렇다면 설마. “ 호, 혹시 하녀분장을 하셨다던가…….” “ 어떻게 아셨어요?” “ 헐!” 경비병A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서 황녀전하를 놓치다니 이 무슨 바보 같은-. 그는 다급하게 아까의 그 황녀로 추정되는 소녀가 사라진 길을 눈으로 쫓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이미 흔적도 보이지 않게 된 뒤였다. 오마나 큰일 났네. “ 이럴 때가 아니에요. 분명히 축제를 구경하러 가신 걸 테니까 마을로 내려가서 뒤져보면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어서 가요!” “ 어, 그, 그래!” 얼마 전 황녀가 마을에서 열리는 평민들의 축제에 가고 싶다고 중얼댔던 것을 기억해낸 시종B가 옆집 할아버지의 이름을 건 뛰어난 추리력으로 황녀의 동선을 예측해내고 후다닥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 뒤를 경비병A가 급히 뒤따라 부지런히 달렸다. 같은 시각, 마을 한복판의 시장에 도착한 황녀-즉 유리엔은 시끌벅적한 거리의 분위기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조용하고 지루한 황궁과는 전혀 다른 색다른 느낌! 역시 이런 게 좋다. 마침 축제이기도 해서 평소보다 더욱 많은 행상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하나하나 빠짐없이 들려가며 이것저것 먹어 보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 모으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던 유리엔이 마침 웬 골목길을 지나칠 때였다. “ 이것 놔요!” “ 히히히, 앙탈 부리기는.” 유리엔의 고개가 자동적으로 그쪽을 향해 돌아갔다. 윤기 흐르는 갈색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날씬한 미녀가 추잡하게 생긴 듣보잡 건달에게 가녀린 손목이 잡혀 있었다. 누런 이를 드러내며 건달이 씨익 웃었다. “ 정말 아무 짓도 안한다니까 그러네? 응? 그냥 어디 가서 차나 한 잔 마시자니까.” “ 아무 짓도 안 한다고요? 하! 차라리 지나가던 개미가 트위스트를 춘다고 말하지 그래요!” “ 지나가는 개미가 트위스트를 추고 있군.” “ …….” “ 테크토닉은 어때?” “ 돌았어요? 닥치고 이거 놔요.” 생각보다 더한 건달의 정신병자스러움에 낯빛이 창백하게 질린 여자가 본능적으로 건달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단단하게 잡힌 손목이 조금도 꿈적하지 않자 당황한 여자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때, 유리엔이 나섰다. “ 어이, 거기 이빨 탈색한 아저씨.” “ …? 뭐야?” 건달이 눈썹을 찡그리며 유리엔을 돌아보았다. 단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폭풍혐오를 선사해주는 건달의 외모를 마주하자마자 유리엔은 어서 빨리 저 불쌍한 아가씨를 구해주어야겠다는 정의감이 몇 배는 상승했다. 유리엔은 스스로의 외모가 얼마나 타인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건달을 방심의 세계로 이끌기 위해 얼굴과 머리를 가리고 있던 천을 아래로 잡아끌며 특급 살인미소를 지어보였다. “ !!” 건달은 물론 그 옆의 여성 또한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과 그 어떤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가 드러나며 단번에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와 함께 진정 완벽한 이목구비라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천상의 미모에 그들은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저 소녀가 과연 사람이 맞는 걸까? 완전히 넋이 빠진 건달에게로 유리엔이 여전히 생긋거리는 미소를 유지한 채 가까이 다가갔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더욱 정신을 못 차리는 건달과 어느새 한발자국 정도의 간격만 남겨놓은 유리엔은 눈동자를 빛내며 가식이 아닌 진심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눈앞의 이 사회악 건달에게 정의의 응징을 내려줄 순간이 온 것이다. 상체를 약간 낮추며 자세를 잡은 유리엔이 온 힘을 다해 뒤로 빼고 있던 오른쪽 다리를 건달의 다리사이를 향해 휘두를 때까지도 건달과 여인은 그 심각한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뻐억-!! “ ……?!” “ ……!!” 실핏줄이 터질 정도로 눈을 부릅뜬 건달이 미동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졌다. 여인 또한 유리엔의 오른 발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강타한 건달의 신체부위가 상당히 미묘한 곳이라는 데에 놀라 숨을 삼켰다. 보는 사람이 다 안쓰러울 정도로 온 몸에서 잔 경련을 일으키던 건달은 일분을 채 견디지 못하고 민망한 자세로 풀썩 쓰러지며 정신을 놓았다. 그렇게 건달은 유리엔의 고to the자 킥 앞에 힘없이 무너졌다. “ …가, 감사합니다.” 어딘지 모르게 떨떠름한 목소리의 감사인사를 뒤로한 채 유리엔이 홀가분하게 그 골목길을 벗어났다. 다만 그녀가 한 가지 실수로 깜박한 것이 있다면 건달에게 킥을 날릴 때 외모 가리개로 사용해왔던 천을 떨어뜨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다시 거리구경을 시작한 유리엔의 미모가 불러온 파장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그러잖아도 축제 때문에 인파가 잔뜩 몰린 상황이었는데 그 인파 중 우연인지 필연인지 노예상인이 특히 많았을 건 또 뭐란 말인가. 그러나 그들은 십 수차례나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납치를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리엔의 근처에도 다가갈 수 없었다. 전부 그녀의 그림자인 에르지옌 top 4의 활약 덕분이었다. 사실 top 4 들은 나름대로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활동 해왔다고 자부했기에 자신들이 그림자가 된 것을 유리엔은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제대로 된 오판이었고, 지금에 와서는 혹시 유리엔이 자기들을 이리저리 똥개처럼 바쁘게 뛰어다니도록 만들기 위해 일부러 사고를 치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곤 했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그들이 직접 선택한 인생인 것을. 그들은 충실하게 그림자로서의 일을 수행해야 했다. 해서 유리엔이 열네 살이던 해 가을 마침내 고to the자 킥을 완벽히 마스터한 그녀가 몰래 황궁을 빠져나와 마을 여기저기를 싸돌아다니며 일으키는 후폭풍의 수습마저 모두 그들의 일이 되었다. 그 뿐이랴, 저번에는 멀쩡히 길을 가다가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갑자기 손바닥을 두 번 치며 그들을 불러내기에 순순히 눈앞에 등장해주었더니, 세상에 발이 아파 울퉁불퉁한 길은 걷기가 힘드니 그녀가 걸어가야 할 길에 있는 모든 돌멩이들을 치우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겠는가. top 4 들은 그야말로 기함을 토했으나 뭐 별수 있나 까라면 가야 하는 인생인데…그냥 얌전히 다 치웠다. 그렇게 에르지옌의 top 4는 유리엔의 음지의 그림자로서, 열여섯 살의 여름을 맞이한 그녀가 타 제국으로 시집을 가게되기 전까지 열심히 몸을 바쳐 일했다. 그들의 눈물겨운 활약 덕분에 유리엔은 더욱 편하게 카르나 제국의 이곳저곳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가 있었던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걍 발닦개였다는 소리다. ================================ # 88편 # 소제목 : 로드웬 왕국 사절단. (9) ================================ 그 넓던 파티 홀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평소에 열리던 연회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뮤리엔 제국의 귀족들 뿐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에서부터 온 귀족이나 왕족들도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타국의 고위간부들과 최대한 많은 친분을 쌓기 위해 홀 안을 두루 돌아다는 데 시간을 쏟는 중이었다. 그런 그들의 행동을 멈추게 한 것은 연회의 분위기가 적당히 무르익었을 때쯤 등장한 주인공들이었다. “ ―어머나…….” “ 세상에.” 걸을 때의 미세한 흔들림에 따라 비단 같은 결을 자랑하며 찰랑이는 검은 머리카락이라든지, 우아하게 뻗은 길고 풍성한 속눈썹과 그 아래 블랙홀처럼 깊은 눈동자라든지 하여튼 열거하자면 끝이 없는 유리엔의 미모에, 반경 수 십 미터 안의 귀족들이 입을 떡 벌렸다. “ 아름다워…….” “ 여신레벨이란 이런 것이었군.” “ 누, 눈이 부셔!” 안구라이트증을 호소하는 등 남자귀족들은 단체로 뒤로 넘어갈 기세였다. 그에 지지 않고, 유리엔을 옆에서 에스코트하며 함께 걸어오는 카엘 또한 사람 같지 않은 우월한 외모를 뽐내어 귀족영애들의 가슴에 거센 불을 지폈다. 카엘이 한발자국씩 걸을 때마다 그녀들은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 어머 어머 저 용암처럼 강렬한 눈동자 좀 봐.” “ 나 녹아 버릴 것 같아…아이 수줍어.” “ 대―박.” 린스와 린세스 또한 귀족들 사이에 끼어서 함께 넋을 놓았다. 역시나 몇 번을 보아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외모다. 쿵쾅쿵쾅 다시금 심장이 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슴이 먹먹해질 만큼의 절망감 또한 함께 밀려왔다. 유리엔와 카엘이 누가 보아도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 만큼 잘 어울리는 한 쌍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라이벌이 너무 잘났다. “ …그래도 부딪혀 보는 거야.” “ 맞아요, 그 편지를 생각해서 라도!” 둘은 포기하지 않고 결의를 불태웠다. “ 와우, 부들부들부들 매끈매끈매끈해- 푹신푹신푹신하고.” “ 그렇게 좋으면 너 가지던가.” “ 진심?” “ 진심.” 어느 왕국 무슨 가문의 어떤 이름을 가진 귀족이 바치고 간 생일선물 제 73호인 하늘색 비단 베개는 유리엔의 품으로 폭 안겼다. 조국의 특산품인 비단 천으로 만든 베개라는데 다른 것들보다 특히나 부드러운 감촉이 썩 마음에 들어 그녀의 입가에 만족의 미소가 걸렸다. “ 고마운 마음을 담아 밤마다 밟고 잘게.” “ 그것 참 영광이네.” 그 뒤로도 선물 증정식은 꽤나 오랫동안 진행되었다. 저마다 비슷비슷한 선물구경에 질린 유리엔이 밟고 자겠다던 베개를 품에 안고 꾸벅꾸벅 졸 무렵이 되어서야 드디어 선물 퍼레이드는 끝이 났다. “ 야, 눈 떠.” “ …끝났어?” “ 그래.” “ 그럼 이제 그만 집으로 갈까.” “ 튀지 마.” 도망치려던 시도는 기각되었다. “ 왜? 어차피 오늘은 네 생일이니까 주인공은 너잖아. 나만 갈 테니깐 넌 여기 얌전히 연회가 끝날 때까지 앉아 있으련." “ 혼자는 심심해서 안 돼.” “ 그럼 저기 가서 여자들이나 꼬시면서 놀던지.” “ 이런. 어찌 멀쩡한 아내를 놔두고 제가 감히 다른 영애에게로 눈을 돌리겠습니까, 부인.” “ …썩을 카라멜.” “ 감사.” 유리엔은 애꿎은 베개의 목을 졸랐다. “ 참, 그러고 보니 루네들은? 아까 너 선물 받을 때만 해도 근처에서 본 것 같은데.” “ 글쎄. 아무래도 지금쯤이면 각자 커플들의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 그래? 그럼 당연히 놀려주러 가야지.” 루제는 방해하고 루네는 놀려주겠다는 목표로 유리엔은 카엘과 함께 파티 홀을 나섰다. 아니, 나서려 했다. 문 바로 근처에서 누군가에게 붙들리지만 않았다면. “ 황녀전하!” …이 낯설지 않은 목소리는. 유리엔이 흠칫 멈췄다. “ 황태자전하.” …이 잊을 수 없는 목소리는. 카엘이 흠칫 멈췄다. “ 안녕하세요.” “ 안녕하십니까.” 하늘색 머리의 남매가 나란히 서서 동시에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그런 린스와 린세스를 바라보는 카엘과 유리엔의 표정은 뭔가 이렇다 정의내릴 수 없는 묘한 일그러짐을 담고 있었다. 중요한 건 그닥 안 반갑다는 사실이다. “ 전하, 오늘 탄생일을 맞이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고맙군요.” “ 아, 아닙니다.” 아무한테나 하는 답례인사를 듣고 린스가 쑥스러워 했다. 유리엔은 순간 빵 터지려는 웃음을 초인적인 인내로 참아 눌렀다. “ 황녀전하.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우세요.” “ …그래? 고마워.” 오늘따라 가장 후줄근하게 아무거나 주워 입고(루네 옷)화장도 대충하고(루제 솜씨) 굶는 일 없이 밥도 빵빵하게 먹고 나왔는데 저런 말을 들으니 유리엔은 기분이 묘해졌다. “ 뭘요. 아이, 부끄럽게.” 린세스도 쑥스러워한다. …얘네들 쌍으로 왜 이래? 이쯤 되면 당연히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젠 대체 무슨 말을 하러 왔을까 조마조마해지는 무렵에 린세스가 본론을 꺼냈다. ================================ # 89편 # 소제목 : 로드웬 왕국 사절단. (10) ================================ “ 염치없지만…제 마음을 거절하신 이유를 듣고 싶어 왔습니다.” 그건 당연히 네가 싫어서. …라고 말해야 솔직한 대답이겠지만 말했다시피 유리엔은 귀여운 소녀에게는 거의 무조건적이다시피 약했다. 그런고로 최소한의 상처만 주기 위해 그녀는 그럴 듯한 변명을 리플레이했다. “ 그거야 저번에도 말했듯이 내가 유부녀이기 때문이야. 보다시피 난 지금 옆에 배우자도 함께 있고 하니까 당연히 안타깝지만 네 마음을 받을 수 없단다.” 저번보다 길게 말했고 은근히 옆에 있는 카엘도 끌어들였다. 이정도면 됐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왠지 린세스가 저번처럼 상처받은 기색도 물러나려는 낌새도 전혀 내비치지 않는다. 유리엔은 왠지 약간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 하지만…정략혼이라고 들었어요.” “ 그래 정략-뭐?” “ 정략혼은 단지 이해관계가 얽혔을 뿐 사랑이라는 감정은 전혀 없는 관계가 아닌가요? 단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함께 하는 배우자라면, 곁에 두어도 괜찮으니 제 마음을 받아주세요.” 음……. 그러니까. 지금 뭐라고? 왓? “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두 분께서 함께하셔도 좋으니 부디 저희들의 마음만이라도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린스까지 나섰다. 둘이 쌍으로 들이댄다. 카엘과 유리엔을 감싼 기류는 패닉 오브 패닉 상태로 돌입했다. 두 남매가 꺼낸 것은 진정 폭탄 오브 폭탄의 발언이 아니던가. 설마 이런 말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설마 누가 얘네 들을 부추기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유리엔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이번엔 좀 세게 나가기로 했다. 보자보자 하니까 어디서 조그만 나라의 공주와 왕자 주제에 제국의 황족에게 정략혼이니 어쩌니 하며 대놓고 들이댄단 말인가. 엉덩이를 걷어차여도 모자랄 무례를 저지르고도 태연하니 아무래도 좀 혼나봐야 정신을 차릴 성 싶다. 그러나 그러한 유리엔의 다짐은 린세스가 초조한 듯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올려다보는 순간 그대로 박살났다. 안 돼. 도저히 혼낼 수 없어. 너무도 귀여운 생물체다. 결국 유리엔은 차선책을 택했다. “ (소근)카라멜, 협력 좀 해줘야겠어. 나로선 도저히 저 귀여운 소녀에게 대놓고 싫다는 말을 할 수가 없음. 역시 내 자존심은 저토록 작고 연약한 소녀를 아프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 (소근)무슨 자존심이…아저씨냐?” “ (소근)닥쳐. 어쨌든 알아서 장단 맞춰줘.” 린세스는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유리엔이 말을 꺼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린스도 마찬가지였는데 둘에게서는 마치 판사의 선고만을 남겨둔 피고인과도 같은 긴장감이 느껴졌다. 이윽고 머릿속으로 대본을 완성시킨 유리엔이 연기의 어색함을 감춰줄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띠우며 얘길 꺼냈다. “ 미안하지만 린세스, 사실 우리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의무로만 엮인 사이가 아냐. 우린 진심으로 서로를 사…흠흠. 사…” 사망시키려고 노력하는 사이. “ …아무튼 그런 사이란다.” “ 네? 무슨 사이요?” “ 그러니까 서로를 깊게 사-” 사층 건물 위에서 아래로 밀어버리고 싶은 사이. “ …하는 사이란다.” “ 죄송한데 잘 못 들었어요.” “ 그럼 이번엔 꼭 잘 들으렴. 우린 진심으로 깊게 온 마음을 다해 서로를 사…” 사륜마차를 전속력으로 몰아서 받아버리고 싶은 사이. “ …그런 사이란다.” “ 제 귀가 이상한가 봐요. 왜 계속 안 들리지…?” “ 좋아.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말해줄게. 우린 진심으로 깊게 온 마음을 다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서로를 사-” 사미터 내로 접근하면 헥토파스칼 킥과 고to the자 킥을 날려줘야만 할 것 같은 사이. “ …그만…….” “ 네?” “ 아냐.” 유리엔은 자꾸만 본심을 토해내는 제 영특한 뇌를 원망했다. “ 마음을 비우고 머리도 비우고…후우, 됐어. 그러니까 우리 사이는-.” “ 사랑하는 사이.” “ 그래 바로 그거…어?” 유리엔이 놀라 옆을 돌아봤다. 카엘이 조금의 표정변화도 없는 태연한 얼굴로 유리엔이 지금까지 몇 번이나 더듬거렸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어내고 있었다. “ 우린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입니다. 린세스 공주, 린스 왕자. 그러니 유감이지만 그대들의 마음은 받아줄 수 없군요.” “ ……!” 린스와 린세스가 충격 받은 얼굴로 카엘을 올려다보았다. 충격 먹은 1人, 2人 그리고 충격 먹은 제 3人에 속한 유리엔이 멍하니 카엘을 쳐다보았다. 정말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입술에 경련한번 일으키지 않고 매끄럽게 말했다. ‘사탕하는’도 아니고 ‘사망하는’도 아닌 무려 ‘사랑하는’을. 너무도 당연한 것을 말하는 듯한 카엘의 태도는 린스와 린세스로 하여금 그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로인해 카엘와 유리엔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철썩 같이 믿게 된 린스와 린세스의 표정에 상처와 부끄러움을 비롯한 여러 가지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섞여 드러났다.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다. 누가 보나 완벽히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데 무슨 염치로 더 미련을 내보일 것인가. 쓰린 마음을 안고, 두 남매는 지금까지 죄송했다는 말을 남기고 물러나야만 했다. 반면. 유리엔은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뚫어질 듯한 시선은 이윽고 부담을 느낀 카엘이 손바닥을 펼쳐 유리엔의 눈앞을 막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 헐, 대박―.” “ 왜 또 뭐가?” “ 너 진짜 책 내도되겠다. 제목은 세상에서 연기가 제일 쉬웠어요.” “ …….” “ 정말 태연하게 말했…어?” 유리엔이 말을 멈췄다. 그녀는 카엘이 고개를 반대쪽으로 휙 돌렸을 때 그만 목격하고야 말았다. 빨갛다. 귀가. 카엘의 귀가 새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설마. 지금 쑥스러워하는 건가, 자네. 혹시 방금 고개를 돌린 것도 얼굴이 빨개져서-. “ ―.” 기분이 묘해진다. 그러니까 뭐랄까, 전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동요되는 기분. 솔직히 사랑하는 사이니 어쩌니 하고 말은 했지만 전혀 진심도 사실도 아니었으니 그 말에 어떠한 당황함이나 그런 것들은 조금도 느끼게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방금 전까지 그랬으니까. 카엘의 동요를 보기 전까지는. ‘ 뭐야, 잠깐. 설마 나―.’ 발달한 청각이 예리하게 캐치해냈다. 평소보다 심장소리가 크게 울렸다. 쿵쿵-하고, 자기가 뛰고 있다는 것을 평상시보다 더 강하게 어필해오고 있었다. ‘ 설마…….’ 유리엔은 눈치가 빠른 편이다. 어떨 땐 간혹 빠른 수준을 넘어서서 남의 속마음을 읽는 수준까지 도달하고는 했다. 그런 예민한 신경이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고 있던 감정 하나를 슬며시 건드리려 했다. “ 심장질환이구나!” “ …뭐?” “ 이런, 이 창창한 나이에 벌써부터 심장이 안 좋다니…역시 평소에 산타기 같은 운동을 꾸준히 해두어야 했어. 좋아, 내일부터 특훈이다!” “ 갑자기 왜이래?” “ 심장은 중요한 거야. 소홀히 관리하다간 젊은 날에 한방에 가버리는 수가 있어.” “ …부탁인데 앞으론 길가에서 아무거나 주서먹지마라. 얘가 맛이 갔네.” “ 죽는다?” 사실 예리한 눈치고 뭐고 아무것도 쓸모없다. 본인이 인정하려고 하기 전까지는 그게 뭐든지 간에 모르는 법이었다. ================================ # 90편 # 소제목 : 로드웬 왕국 사절단. (11) ================================ 어쨌든 간에 린스와 린세스가 순순히 납득하고 돌아간 것으로 유리엔과 카엘은 한시름 놓았다. 그러고 나자 역시나 딱히 할 일이 없어진 둘은 좀 전에 실행에 옮기려다 멈췄던 ‘루네 등등 찾기’를 다시 시작했다. “ 응? 잠깐만, 왠지 밖이 아니라 테라스에 있을 것 같아.” 파티 홀을 나가기 직전 문 앞에서 유리엔이 한 소리였다. 여자의 직감을 근거로 들며 유리엔은 테라스로 목적지를 바꿨고, 그 결과. “ 어? 황녀전하-.” 별빛이라도 구경하는지 테라스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루네 외 세 명을 성공적으로 찾았다. “ 오…역시, 사람은 멍멍이가 잘 찾는다더니.” “ 맞을래?” 갑작스런 둘의 등장에 당황한 것은 루제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뿐이었다. 어째선지 루제는 놀라기보다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표정이 환해지는 변화를 보였다. 원래 혼자만 튀면 수상해 보이는 법이다. 그런고로 루제는 뭔가 수상한 스멜을 풍겼고, 그걸 눈치 채지 못할 유리엔이 아니었다. 유리엔은 떡밥을 던졌다. “ 아, 피곤해.” “ 피곤하세요? 혹시 무슨 일 있으셨어요?” “ 응. 신경을 좀 썼더니 그러네.” “ 네? 아~혹시 그 로드웬 왕국에서 왔다는 린세니오스공주랑 리온스왕자라도 만나신거예요?” 던진 보람이 있게 떡밥을 덥석 문다. “ 맞아. 어떻게 알았어?” “ 그냥 찍어본 거죠. 설마 그 둘이 아직도 포기 못하고 귀찮게 해요?” “ 그래, 이젠 정략결혼까지 들먹이면서 마음을 받아달라고 매달리는데 정말 방법이 없더라.” “ 어머, 어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카엘이 이상함을 느끼고 끼어들려했다. 린스와 린세스가 정략결혼을 핑계대면서 들이댔던 것은 맞지만 그 당시에 곧바로 훌륭히 물리치지(?)않았는가. 이미 정리됐다고 봐도 무방한 일을 아직까지도 문제라는 듯이 얘기할 이유가 없었다. “ 잠….” “ 쉿.” 그러나 채 한마디도 꺼내기 전에 카엘은, 무서운 속도로 고개를 돌리며 손가락으로 제 입을 막는 유리엔에 의해 저지되고 말았다. 셧 업 보이. 유리엔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황녀전하?” “ 아무것도 아냐. 그나저나 난감하네. 그 둘을 좀 효과적으로 떨어뜨려놓고 싶은데 무슨 방법이라도…….” “ 제가 도와드릴게요! 저한테 나이스한 방법이 있습니다!” 유리엔이 말끝을 흐리기가 무섭게 그것만 기다렸다는 듯 루제가 눈을 빛내며 외쳤다. 루네를 비롯한 나머지 세 사람은 왜 그러나 싶어 동그랗게 된 눈으로 그런 루제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 한사람 추가. 카엘도 의아함을 담고 유리엔과 루제를 응시했다. “ 호오~뭔지 궁금한데?” “ 훗- 별 거 아니지만 확실하게 그 남매를 포기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죠. 바로 눈앞에서 ‘아,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끼어들 자리는 전혀 없구나’를 느끼게 만드는 거예요!” “ 그래? 어떻게?” “ 제가 보여드릴게요. 시온?” “ 응?” 제 애칭을 부르는 목소리에 네이시온이 반응했다. 유리엔의 곁에서 얘기하느라 조금 떨어져있던 루제와 네이시온의 거리가, 부름 하나에 강아지처럼 후다닥 달려온 네이시온에 의해 곧바로 좁혀졌다. “ 왜 불렀어?” “ 자기, 들어봐. 우리의 불타는 사랑을 의심하는 누군가를 티파티에 초대했다고 쳐. 그럼 그 티파티에서 우린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 당연히 이렇게 해야지.” 말이 끝나자마자 네이시온의 금빛 눈동자가 느끼함으로 타올랐다.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루제를 바라보며 네이시온이 있지도 않은 찻잔을 들어 올리는 리액션을 펼쳤다. “ 차가 무척 향기로워-하지만 달링의 향긋함보다는 못하군.” “ 몰라, 부끄럽게~.” 이번엔 한 모금 맛보는 연기를 한다. “ 맛이 달콤해. 그래도 역시 허니의 달콤함은 조금도 따라가지 못하는군.” “ 아잉 몰라몰라~.” “ 훗. 이 차가 그냥 고급차라면…넌 세상에 하나뿐인 티오피 차야.” “ 어쩜 자기…사랑해!” 환상의 호흡. 그건 둘째치고서라도, 우선 둘의 대사는 멀쩡한 표정으로 들어주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는 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변인들의 안색이 굳어갔다. “ 자, 보셨죠? 이렇게 하시면 되요! 그냥 눈 딱 감고 그 공주와 왕자 앞에서 딱 한번만 하시면 바로 그 둘을 포기시킬 수 있을 걸요? 어때요?” 쉽죠? 괜찮죠? 라고 하면서 루제가 초롱거리는 눈동자로 유리엔을 응시했다. 저 대사를 유리엔과 카엘이? 저도 모르게 상상해버린 제론이 먹던 과자를 뿜었다. 사레가 들리자 루네가 옆에서 등을 두들겨 주었다. “ …….” 유리엔은 말이 없었다. 단지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근처에 있던 카엘은 이상한 기류를 느끼고 흠칫하며 뒤로 한발자국 물러났다. “ 역시 너였구나.” “ 네?” 폭풍전야. 루제의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황녀전하?” “ 네가 범인이었어.” “ 무, 무슨 말씀을…….” 찔리는 게 있는 루제가 말을 더듬었다. 유리엔의 확신은 더욱 굳어졌다. “ 로드웬 왕국 공주와 왕자에게 정략결혼이라는 말을 흘려서 부추긴 범인 말야.” “ 헉.” 들켰다. 루제는, 그러니까 실은 린스와 린세스에게 ‘걱정마세요. 유리시엔 황녀전화 카류엘 황태자전하께서 부부이신 것은 맞지만 그건 단지 정략결혼일 뿐…서로 사랑해서가 아니랍니다. 그러니 아직 당신들에게도 기회가 있어요, 포기하지 말아요. 사랑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은 아름답답니다! 파이팅!’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장본인인 그녀는, 사실 평생가도 절대 볼 수 없을 것 같은 유리엔과 카엘의 닭살스런 모습(비록 연기라 할지라도)을 이번 기회를 이용해 한번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명색이 부부인데 만나면 싸우기나 하고 대체 언제쯤이나 연인다운 모습을 보여줄 건지 하는 답답한 심정도 조금은 있었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웃길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기대했던 폭풍웃음은 물 건너갔다. 이제 남은 것은 공포의 응징뿐. 루제는 마치 베테랑 농부 앞의 잡초풀떼기같은, 돌 든 어린아이 앞의 개구리같은, 소드맛스타 앞의 가련한 오크 한 마리같은 신세가 되었다. “ 안됩니다! 차라리 저를 치세요!” 그때 사랑에 눈먼 귀족청년 네이시온이 연인의 죽음(?)을 막기 위해 장렬하게 몸을 날려 외쳤다. “ ㅡ좋아.” 유리엔은 그 사랑에 감동하여 “ 같이 맞자.” 함께 패기로 했다. “ !!” 루네는 잠자코 제 언니와 형부의 명복을 빌었다. 경사스러운 뮤리엔 황실의 생일 연회 날 밤, 복날도 아닌데 개잡는 소리가 테라스를 타고 울려 퍼졌다. ================================ # 91편 # 소제목 : 로드웬 왕국 사절단. (12) ================================ 한참 패고 난 뒤. “ 나도 이제 약해졌나 봐.” “ 왜?” “ 손맛이 예전 같지가 않아.” “ …….” 너덜너덜하게 변해 구석에 널브러진 두 명이 들었다면 피눈물을 흘렸을 소리였다. 같은 시각 파티 홀. 사랑의 쓴맛을 알게 된 하늘색 머리 남매, 린스와 린세스는 서로의 실연에 대한 위로주를 구석에서 한잔씩 하고 있었다. 비록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구석이라지만 원래 빼어난 미모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법. 둘의 모습은 충분히 귀족들의 이목을 끌었다. “ 하아…사랑이 다 뭐야? 전부 부질없는 거야.” 배경으로 비워진 술병 여러 개가 굴러다녀야 할 것만 같은 대사를 중얼거리며 린스가 와인 잔을 기울였다. “ 맞아요…다 쓸데없어요.” 린스의 말에 응수하며 린세스도 함께 잔 안의 액체를 조금씩 홀짝이며 비워나갔다. 도수가 거의 없어 음료수로 취급되는 샴페인을 마치 독한 양주 마시듯 들이키는 두 남매를 향해, 웬 여성들로 이루어진 단체와 남성들로 이루어진 단체가 조심스레 접근했다. “ 린세니오스 공주님.” “ 리온스 왕자님.”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린스와 린세스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옮긴 곳에는, 분명 어디서 만난 듯 낯익은 얼굴의 귀족이 각각 이끄는 단체와 함께 서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둘은 이내 각자 상대방을 알아보았다. “ 유사모 회장님…?” “ 카사모 회장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신 임팩트가 강했던 단체의 이름과 그 직함이 쉽게 떠올랐다. 놀람과 약간의 반가움을 느끼는 린스와 린세스에게 카사모 회장 레드러브리와 유사모 회장 레이즈블이 그들을 찾아온 이유를 미소와 함께 꺼냈다. “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저희 카사모에 가입하지 않으시겠어요?” “ 긴말 않겠습니다. 저희 유사모의 회원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레드러브리는 린스에게, 레이즈블은 린세스에게 각자 카사모와 유사모에 가입할 것을 권유했다. 그 제안을 들은 린스와 린세스는 갑작스런 말에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론 흔들리는 자신을 느꼈다. 공식 팬클럽. 과연 가입 할 것인가. 연인의 사랑은 포기했지만 팬으로서의 러브는 괜찮은 것일까. 그러면서도 약간 의심이 든다. 왜 하필 자신일까. 일부러 찾아오기까지 해서 직접적으로 제의할만한 이유가 과연 있을까. 묘한 혼란스러움에 머리가 빙빙. 그러한 속내를 읽기라도 한 건지 레드러브리와 레이즈블이 설명을 덧붙였다. “ 물론 저희가 굳이 찾아와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어요.” “ 그렇습니다. 저희가 원하는 것은 바로…….” 바로? 왠지 모르게 긴장감이 든다. 린스와 린세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 저희 카사모가,” “ 저희 유사모가,” “ -로드웬 왕국으로 진출하는 것입니다!” “ …!!”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목소리에서 린스와 린세스는 두 팬클럽 대표의 진심을 느끼고 흠칫했다. 그리고 동시에 로드웬 왕국까지 진출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로드웬 왕국은 이곳 뮤리엔 제국과는 꽤 거리가 멀다. 유리엔의 모국인 카르나 제국과는 더 멀다. 그렇기 때문에 유리엔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카엘에 대해서도 몇 장의 초상화나 떠도는 소문 같은 것이 정보의 다였다. 두 대표는 이것을 용납하기 힘든 것이다. “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아마도 로드웬 왕국에서는, 레이들의 영원한 단골 토론주제 ‘대륙 제일의 미녀는 누구인가’에 유리시엔황녀전하께서 거론되지 않으시겠죠. 정말 충격적인 일입니다!” “ 어둠의 루트를 통해 로드웬 왕국 내에서 거래되고 있다는 카류엘황태자전하의 초상화를 입수해봤습니다. 실물의 반의반의반도 표현해내지 못한 졸작이더군요! 세상에 그곳의 영애들이 그 허접한 초상화를 태자전하의 외모라고 알고 있을 걸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요!” 모름지기 자기가 좋아하는 건 남들도 좋아하게 만들어야 속이 편해지는 법. 그 심리가 레드러브리와 레이즈블을 저토록 열정에 타오르도록 만들었다. 자기도 모르는 새 그 열정에 이끌려버린 린스와 린세스는 어느새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고 있었다. “ 맞아요. 그 마음 이해할 수 있어요. 저희 왕국의 영애들 중 몇몇이 간혹 자기 미모를 뛰어넘는 사람은 없다며 큰소리를 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영애들에게 황녀전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 그렇습니다. 자기들끼리 최고의 미남은 누구니 하며 논쟁을 펼치고는 하는데 나참 지금 생각해보니 태자전하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사람들이 참 근자감만 폭발이었습니다.” “ 이해하시는군요! 자, 그렇다면 어서 우리의 회원이 되세요. 힘을 모아 그 우매한 중생들에게 진정한 남신, 여신이 누구인지 알려주도록 해요!” “ 그들에게도 눈 정화의 기회를 주도록 합시다!” “ 카사모 만세!” “ 유사모 만세!” “ 오오오오!” 그렇게 유사모와 카사모는 원거리라는 장벽을 뛰어넘고 신입회원을 영입하는 것에 성공했다. 연회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루네는 루제를, 제론은 네이시온을 들쳐 업고 각자 퇴장했다. 그러고 나니 자연스럽게 테라스에 남은 것은 카엘과 유리엔 둘뿐이었다. 새까만 하늘에는 아까부터 달이 떠 있었다. 보름달도 아닌데 환한 빛을 내는 게 신기하다. 샘나기는 하지만 확실히 달만큼은 모국보다 이곳에서 보는 것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유리엔이 운동 삼아 목을 뒤로 쭉 젖혔다. 아, 그러고 보니. 뚫어져라 달을 쳐다보고 있자니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었다. ‘ 생일선물-.’ 결국 준비 못했다. 안한 건지 못한 건지 스스로도 잘 확신할 수가 없었다. 다만 중요한 건 고민은 했다는 사실, 그리고 확실한 건 지금 유리엔은 카엘에게 건네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 정말 돌멩이라도 주워서 줄까.’ 반들반들한 걸로 주워서 빨간색으로 맞춤 색깔을 입히면 나름 괜찮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 자.” “ ……?” “ 받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그만 물체 하나가 허공을 날아서 유리엔의 손에 안착했다. 얼떨결에 받긴 받았는데 뭔가 싶어 보니, 이게 웬 반지. “ 이게 뭐야?” “ 반지. 그냥 장신구는 아니고 내가 저번에 준 아티팩트 반지처럼 마법을 쓸 수 있는 건데…웃기더라. 오른손에 껴야지만 효과가 발동해.” “ 헐? 반지주제에 까다롭긴. 어떤 마법인데?” “ 큐어.” “ 오오~.” 백금으로 된 반지는 가운데에 언뜻 보면 루비처럼도 보이는 붉은 보석이 조그맣게 박혀있었다. 마법효과를 제외하고 보더라도 제법 깔끔하고 예쁜 외양이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는 꽤나 인기일 듯한 디자인이었다. ================================ # 92편 # 소제목 : 로드웬 왕국 사절단. (13) ================================ 백금으로 된 반지는 가운데에 언뜻 보면 루비처럼도 보이는 붉은 보석이 조그맣게 박혀있었다. 마법효과를 제외하고 보더라도 제법 깔끔하고 예쁜 외양이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는 꽤나 인기일 듯한 디자인이었다. 이리저리 돌려가며 반지를 살피다가 유리엔은 그것을 오른손 네 번째 손가락에 쏙 끼웠다. 딱 맞는다. 희고 가는 손가락을 감싼 얇은 백금의 링과 그 가운데에서 눈길을 끄는 붉은 보석이 반짝거리며 마치 맞춤제작이라도 한 것 같은 효과를 자아냈다. “ 딱 맞네. 근데 이거…나 하라고?” “ 그래.” “ 왜? 네 선물이잖아.”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기 생일도 아닌 남의 생일에 그 당사자가 받은 선물을 냉큼 받아 챙기는 건 아무리 유리엔이라지만 조금 염치가 없긴 했다. 유리엔의 물음에 카엘이 조금 의외라는 듯 답했다. “ 뭘 답지 않게 빼고 그러냐.” “ 안 받는다고 한 적은 없거든.” “ …그럼 그렇지.” 유리엔이 기댄 난간 곁으로 카엘이 다가왔다. 마찬가지로 난간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위로 젖히며 카엘이 말했다. “ 어차피 난 검을 쓰니까 오른손에 반지 같은 걸 끼면 걸리적거리잖아. 그렇다고 왼손에 끼면 평범한 장신구가 되버리니까.” “ 헤에.” 하긴 그럴지도. 나름 납득 가는 이유에 유리엔이 고개를 끄덕이며 반지를 낀 오른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흰 손과 붉은 보석이 대비를 이루며 더욱 시선을 끈다. 확실히 예쁘긴 했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얼마안가 오늘이 지나버릴지도 모른다. 왠지 그렇게 되기 전에 카엘에게 뭐라도 하나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유리엔을 덮쳤다. 그것이 짱돌던지기든 허리케인 킥이든 뭐든 간에. “ 반지까지 받은 마당에 입 싹 닦기도 뭐하고…….” “ 응?” “ 아냐.” 유리엔은 달을 보고 있던 고개를 앞으로 내려 정면을 응시했다. 유리로 된 테라스 문 너머로 파티홀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서로 대화를 나누거나 춤을 추는 귀족들, 그리고 그들이 그럴 수 있도록 홀 안의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 사이로 보이는……. “ 아!” 피아노. “ 왜 저걸 생각 못했을까.” “ ?” “ 후후.” 그러고 보니 저번에 달빛 축제에서도 피아노를 쳤었다. 딱히 여러 가지 악기에 능통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피아노만큼은 자신이 있는 그녀였다. 교양 과목 개인수업을 들을 때 유일하게 웃으며 배웠던 것이기도 하니까. “ 자, 가자.” “ 어딜?” “ 그냥 따라와.” 그러더니 어느새 테라스 문을 열고 홀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잠시 황당해하던 카엘은 이내 긴 다리로 성큼성큼 유리엔을 뒤좇았다. 유리엔은 악단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갑작스런 그녀의 등장에 놀라느라 악기를 연주하던 그들의 손이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중단했다. 음악이 끊기자 자연스레 귀족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리엔은 눈을 가늘게 뜨고 피아노만 유심히 관찰했다. 그 바람에 피아노 연주자는 어쩔 줄 몰라 하다 뒤이어 카엘까지 등장하자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졌다. “ 뭐하는 거야?” “ 아직 자정 안 지났지?” “ 그렇긴 한데 얼마 안 남았어.” “ 역시. 굳이 멀리 갈 시간도 없고 잘됐네.” “ 뭐?” 유리엔이 피아노로 가까이 가자 굳어있던 연주자가 화들짝 놀라며 알아서 자리를 비켰다. 빈 피아노 의자에 앉아 유리엔이 건반 하나를 살짝 눌렀다. 띵- 예상대로 맑은 소리가 꽤나 만족스러웠다. 역시 황실 피아노는 다르달까. 원산지 직수입인가. “ 카라멜. 혹시 원하는 곡 있어?” “ …연주하려고?” “ 물론이지.” 어떤 곡이라도 자신 만땅. 손가락을 풀며 유리엔이 생긋 웃었다. 그 미소에 상대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던 악기 연주자들이 하나같이 넋을 놓았다. “ 원하는 곡은 딱히…없는데.” “ 그래?” 뭘 칠까나. 잠깐 고민하며 유리엔이 두 손을 피아노 위에 올렸다. 검고 흰 피아노 건반 위에 가지런하게 뻗은 손가락들이 자리를 잡았다. 이런 때는 잔잔한 곡도-괜찮겠지. 띠잉- 건반 세 개가 화음을 이루며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그걸 시작으로 유리엔의 손이 건반 위에서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귀족들의 소음이 전부 멈췄다. 그 조용한 공기를 타고 맑은 피아노 소리가 홀 전체로 퍼져나갔다. “ ……!” “ 이건….” “ 로데아체의 밤의 이슬-이군요.” “ 밤의 이슬 이라면…천재 음악가인 로데아체가 불면증에 걸린 아내를 위해 만들었다고 알려진…?” “ 네, 맞아요.” “ 아름다워…….” 유리엔이 선택한 곡은 여인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한 곡이었다. 천재음악가라고 불렸던 청년 로데아체, 그는 25살에 사랑하던 아내와 전쟁 때문에 잠시 동안 헤어졌었는데, 몇 년 뒤에 다시 만난 아내는 그간의 그리움 때문에 불면증에 걸린 상태였다.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하는 자신의 아내가 안타까워 어서 빨리 잠에 들 수 있기를 바라며 작곡한 감미롭고 잔잔한 피아노곡이 바로 밤의 이슬이었다. “ 전하를 위해 연주하시나 봐요.” “ 어머나…….” 아름다운 멜로디가 홀 안을 가득 채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귀족들은 저마다 하던 행동을 멈추고 연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피아노소리를 밥 먹듯이 들어온 악단마저 넋을 읽고 집중하고 있었다. 유리엔의 손가락은 매우 익숙하게 피아노 위를 움직였다. 손가락이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건반들은 마치 스스로 춤을 추듯 움직이며 선율을 만들어냈다. 연주에 빠져든 귀족들 중 특히나 피아노에 조예가 깊은 몇몇은 놀람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정신을 차린 것은 유리엔의 연주가 전부 끝난 다음이었다. “ 어때?” 유리엔의 능청스런 물음에 카엘이 피식 웃었다. 저번 연주 때에도 놀랐었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솜씨였다. “ 멋있는데.” “ 내가 좀 한 멋짐 하지. 참, 혹시 열두시 지났어?” “ 아직까진.” “ 그래?” 어쩔까, 하다가 유리엔은 그냥 말하기로 했다. 왠지 낯간지럽지만 오늘정도는 뭐. “ 생일 축하해.” 말을 꺼내자마자 바로 뒤이어 시계가 자정을 넘겼다. 그 기막한 타이밍에 유리엔과 카엘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동시에 웃어버렸다. 밤이 저물고 있었다. ================================ # 93편 # 소제목 : 갑자기라는 건 원래 예고가 없어 (1). ================================ “ 얼마나 됐지?” “ 글쎄…한 육 개월쯤 됐나?” “ 출발하셨을 때부터 정확히 176일 11시간 36분 지났어.” “ 으악! 벌써 그렇게 됐단 말야? 랄까 넌 왜 그렇게 자세한 거냐.” “ 아냐, 방금 1분 지났으니까 37분.” “ …어쨌든 진짜 의외다. 솔직히 난 출발하자마자 리턴에서 돌아오실 줄 알았거든.” “ 난 일주일.” “ 가서 얼굴은 비출 거 생각해서 보름.” “ 난 가서 상대방 좀 물먹여줄 거 생각해서 한 달.” “ 그런데 벌써 반년이나 지났다는 거야?” “ 와우…대박.” 태평하게 주고받는 대화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네 사내가 다리를 굽히고 앉아있었다. 그들이 앉아있는 장소는 대체 왜 저런 곳에 올라갔을까 싶을 만큼 커다랗고 높은 저택의 맨 꼭대기였다. 날이 저물어 어두워진 뒤라 쉽게 구분하기엔 힘들었지만, 가장 왼쪽에 앉아있는 사내는 새빨간 색의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는 그보다 연한 오렌지색, 그 옆에는 금발이었고 마지막 네 번째 사내는 초록색의 머리카락이었다. 쭈그려 앉은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한 탓인지 저릿저릿함이 느껴지는 다리를 쭉 피며 빨간색 머리의 사내가 말을 뱉었다. “ 그런데…이제 슬슬 오실 때가 된 것 같지?” “ 응. 아무래도.” “ 그분이 위독하시니까.” 다른 사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답을 했다. 그렇게 한마디씩 하는 그들의 표정은 어째서인지 그닥 밝지 못했다. “ 어쩌면 돌아가실지도 모르는 일이고…….” “ …….” 최악의 가정을 떠올린 넷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더 안타까운 것은 자신들이 이번에는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평소처럼 티격태격 거리면서, 그러다가도 아주 가끔은 안 어울리게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하면서 유리엔과 카엘은 시간을 보냈다. 자잘한 사건이야 일주일이 멀다하고 투닥거리며 일어났지만, 황성 전체가 뒤집어지거나 사람들의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커다란 사건은 전혀 없이 잔잔했다. 평온하고 또 평온한 지난 시간들 중에 그나마 최근에 터진 한 가지 놀랄만한 사건을 얘기하자면, “ 풉! …정말요?” 바로 루제가 불과 며칠 전 네이시온에게 청혼을 받았다는 것이다. 워낙 망나니였던지라 가문에서도 거의 내 놓은 자식이었던 네이시온은 루제와 사랑에 빠지면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그리고 웬만한 바른생활귀족청년 못지않게 건실한 모습을 보이며 노력한 결과 마침내 사 개월째에 접어드는 날 그는 아버지인 백작에게 정식으로 인정받았고, 그 결과 완전히 백작가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하는 쾌거를 이룩해냈다. 그리고 그 후 정확히 일주일 뒤 네이시온이 루제에게 화려하게 프러포즈를 한 것이다. 린은 유리엔에게 그 소식을 전해 들으며 먹던 과자를 뿜었다. “ 앗, 과자가…아무튼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 흠…그 자리에서 바로 대답하지는 않고, 가족들과도 얘기해 보겠다며 시간을 좀 달라고 했다더라. 그런데 내가 보기엔 마음은 이미 덥석 승낙인데 일부러 좀 튕겨주는 것 같달까. 조만간 결혼식에 참석해달라는 청첩장이라도 날아오지 않을까 싶네.” “ 루제 언니가 결혼이라니…왠지 신기해요. 그럼 나중에는 백작부인이 되겠네요?” “ 그렇겠지.” “ 우와!” 린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먹던 것도 내팽개치고 두 손을 곱게 맞잡는 것을 보니 백작부인에 대한 소녀적인 망상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유리엔은 약간 쓴 듯한 맛이 매력적인 수입산 초콜릿을 한 조각 입으로 가져가며 오른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로 시선을 내렸다. 오른손에 껴야만 사용이 가능하다는, ‘큐어’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 아티팩트. 받은 건 벌써 몇 달 전이건만 지금까지 한 번도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물론 큐어는 독 등에 의한 중독증상을 치유하는 효과의 마법이니 사용할 기회가 있는 게 더 문제겠지만 말이다. 저번에는 호기심에 허공에 대고 큐어를 외친 적이 있었는데 하얀 빛무리라도 일어날 줄 알았더니 아무런 변화도 없어서 조금 김이 새는 경험도 했다. 티타임에 누군가가 독이 든 차라도 보내주지 않으려나…안티가 제법 많은 걸로 아는데 왜 잠잠한 건지. 유리엔은 잠자코 지난 몇 달간을 떠올렸다. 딱히 기억에 남는 큰 사건은 발생한 기억이 없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온지도 어느새 반년가까이나 지났다. 제법 길다면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초반에 몇몇 바보 같은 사건을 제외하고는 위험에 처한 일도 거의 없었다. 지금처럼 과자나 초콜렛을 먹으며 잡담거리로 늘어놓을 만한 소소한 일들이 종종 일어날 뿐이다. 익숙한 평화였지만 어째서인지 유리엔은 요즘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잔잔함인데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질적인 느낌이 그 잔잔함 속에 섞여있는 듯한 기분이다. 마치 폭풍 전의 고요함과도 같은. ‘ 그냥 내가 예민한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이제 슬슬 가을이 지고 곧 겨울이 올 때가 다 됐으니, 추운 것을 질색하는 고로 겨울을 악마의 계절이라 매도하는 유리엔에게는 어쩌면 충분히 신경이 예민해질 만한 때일 수도 있는 것이다. 유리엔은 막 망상에서 벗어난 린이 집으려던 마지막 쿠키를 빛의 속도로 낚아채어 한입에 넣으며 잡생각을 털어냈다. “ …예? 그게 무슨.” 카엘로서는 오랜만에 짓는 굳은 표정이었다. 요즘 별달리 사건도 없었고 유리엔과 투닥거리는 게 은근히 즐거워지는 바람에 살살 풀어지는 얼굴근육을 자제 못했던 탓이다. 그 풀어졌던 얼굴이 단번에 딱딱하게 굳었다. “ 정말입니까?” “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느냐. 곧 그 아이에게도 소식이 갈게다.” “ 하지만…이건 너무 갑작스럽지 않습니까.” “ 원래 이런 일은 예고를 동반하지 않는 법이지. …나로서도 안타깝지만 어찌 할 수가 없구나.” 카엘과 마주하고 있는, 카엘의 아버지이자 뮤리엔 제국의 황제인 그 또한 안색이 어두웠다. 누구에게든지 결코 좋은 일은 될 수 없는 소식이었다. 뮤리엔 제국의 황제에게는 상당한 친분을 쌓은 마치 지기와도 같은 이이고, 카엘에게는 장인이 되는, 그리고 유리엔의 아버지기이기도 한 카르나 제국의 황제- 베르덴 로테리엄 드 카르나. 그의 상태가,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할 만큼 위중했다. ================================ # 94편 # 소제목 : 갑자기라는 건 원래 예고가 없어 (2). ================================ 흰 분가루를 묻힌 솜이 루네의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 피부가 도화지마냥 하얗게 되어서야 분을 두드리던 손이 멈췄다. “ 아웃.” 볼 것도 없다는 듯 루제가 단칼에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노바카사가 절망적인 자세로 바닥에 엎어졌다. “ 왜! 어째서! 반나절동안 분가루 칠만 연습했는데…!” “ 진짜 모르겠니? 얘 얼굴을 좀 봐. 피부를 우유처럼 희게 만드는 거랑 그냥 우유로 만들어버리는 거랑은 완전히 다른 거야 멍청아.” 날카로운 혹평에 노바카사의 좌절이 더욱 깊어졌다. 노바카사가 유리엔을 따라 성에 들어와 이런저런 잡일을 도맡아하기 시작한지 어느덧 백 일이 훌쩍 넘었다. 시키는 대로 열심히 잡일을 하던 노바카사가 문득 노후자금도 걱정되고 하니 투잡을 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약 한달 전, 그리고 린을 통해 루제에게 본격적으로 화장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일주일쯤 전이었다. 매일 혹은 이틀에 한번 꼴로 루네를 모델삼아 열심히 실습을 하고 있지만 어찌된 게 매번 욕만 얻어먹고 실력은 나아질 생각을 않는다. 갈수록 더해지는 절망과 좌절의 무게로 인해 노바카사가 열심히 땅굴을 파며 아래로 처박힐 무렵이었다. 벌컥! “ 큰일 났어요!!” 갑자기 문이 열리며 다급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귀족가의 영애가 머무는 방의 문을 노크도 없이 여는 것은 대단한 무례였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루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지만, 곧 문을 연 사람이 린이라는 것을 알고 표정을 풀었다. “ 무슨 일이야?” “ 그게 지금…….” 린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 린에게서 얘기를 듣는 세 사람의 표정 또한 점차 그녀와 마찬가지로 굳어져갔다. “ 거짓말 치지 마.” “ 거짓말 아니야.” “ 뻥 치지 마.” “ 뻥도 아니야.” “ 구라 치지 마.” “ 구라도 아니야.” “ 이빨 까지마.” “ 이빨도 아니…너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자기도 모르게 유리엔의 페이스에 말려든 카엘이 잠시 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잠깐 쉬었다가 카엘은 다시 하던 말을 이었다. “ 어쨌든 진짜야. 거짓말도 뻥도 구라도 이빨 까는 것도 다 아냐.” “ 개미 심장을 걸고?” “ …개미 심장…그래. 개미 심장을 걸고.” “ 여왕개미의 내연남 꿀벌A군도 걸고?” “ …내연…그래, 그것도 걸고.” “ 꿀벌A군의 참한 부인과 똘망똘망한 자식들도 걸고?” “ …….” 마주보고 있는 유리엔의 표정은 진지했다. 카엘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 그래. 걸고.” “ 야, 네 거 아니라고 그렇게 아무거나 함부로 막 걸지 마라.” “ …….” 카엘은 순간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시련에 들었다. 높아지려는 혈압을 가다듬고 다시 차분한 마음으로 카엘이 막 입을 열려던 참이었다. 쾅! “ 언니!”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응접실의 문이 활짝 열리며 네 사람이 들이닥쳤다. 박살 낼 기세로 문을 열어젖힌 것은 루제, 안으로 들어오면서 유리엔을 부른 것은 루네였다. 그리고 그 뒤로 린와 노바카사가 따라 들어왔다. 루네는 한달음에 유리엔의 바로 앞까지 달려왔다. 눈물이 그렁그렁 한 채로 유리엔와 얼굴을 마주한 루네는 금방이라도 펑펑 눈물을 쏟을 기세로 두서없이 말을 시작했다. “ 어, 언니…괜찮아요? 모국에…흐엉-아프시면 가셔야 하는…걱정이 너무…허엉-.” 순서도 안 맞고 발음까지 뭉개져 도통 알아듣기 힘든 말을 늘어놓으며 결국 루네는 그렁그렁하던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난데없는 상황에 당황하던 유리엔은 루네를 똑바로 쳐다보자마자, 빵 터졌다. “ 풉-푸하하하하하!” “ …?” 루네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유리엔을 영문을 모르겠다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루네를 제외한 나머지 전부는 어째서 유리엔이 빵 터졌는지 무척 쉽게 알 수 있었다. 루네는 노바카사에 의해 실패한 메이크업을 받은 직후였다. 분이 잔뜩 칠해져 얼굴만 눈처럼 흰 색이었는데, 눈물이 계속 흐르자 그 부위만 화장이 지워져 원래의 피부색이 나타났고, 거기에다 우느라 표정을 찡그려 생겼던 주름에 분가루가 뭉쳐서 차마 멀쩡하다고는 할 수 없는 모습이 된 것이다. 유리엔은 계속해서 몸을 떨며 웃고, 카엘 외 나머지는 루네에게 얼굴 상태를 말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다시 한 번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좀 전보다는 훨씬 더 부드럽고 천천히 열린 문이었으나, 응접실 안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방금 전 보다 백 배 정도는 훨씬 충격적인 사람이었다. “ …!!” “ 아버님?” “ 폐하?!” 각자에게서 놀람과 경악의 외침이 튀어나왔다. 응접실을 찾아온 손님은 다름 아닌 무려 황제였다. “ 위, 위대하신 황제폐하를 뵙습….” “ 됐다.” 바닥에 닿을 기세로 급히 고개를 숙이는 루제 외 나머지를 황제가 저지했다. 황제의 시선은 정확히 유리엔을 향했다. “ …아까 카엘 이 녀석이 한달음에 뛰어나가는 걸 봤으니 이미 들었을 거라 생각은 한다만-그래도 짐과 얘기 좀 하겠느냐.” 그것은, 유리엔이 장난으로 넘어가거나 모르는 척 피하려고 했던 어떤 사실에 대한 직접적인 마주침이었다. 더 이상은 그 어떤 회피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은. ================================ # 95편 # 소제목 : 갑자기라는 건 원래 예고가 없어 (3). ================================ “ 춥다.” 각양각생의 머리색을 지닌 네 명의 사내가 동시에 말했다. 카르나 제국의 겨울은 뮤리엔 제국보다 훨씬 빨리 찾아온다. 게다가 더 추웠다. 뮤리엔 제국은 이제 갓 가을이 지나고 약간의 쌀쌀한 기운이 다가오기 시작했을 뿐이지만 이곳은 벌써 거리마다 하얀 눈이 소복이 싸여간다. 유독 추위에 약한 네 남자는 머리와 어깨에 송이송이 떨어져 내리는 눈을 맞으며 길 한복판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 그, 그런데 우리가 왜 이러고 있어야 되는 거지?” “ 안하면 죽으니까.” “ 아…맞다.” 슬픈 이유였다. 네 남자는 손에 입김을 불거나 팔을 문지르며 어서 빨리 자신들이 마중 나온 사람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렇다. 그들은 바로 예르지엔 top4였고, 그들이 기다리는 사람은 바로 유리엔이었다. 뮤리엔 제국에서 유리엔이 마차를 타고 출발한 지 꼬박 일주일이 지났다. 마차가 기어오는 것만 아니라면 오늘 중에는 분명히 도착할 것이다. 게다가 조금 전 길드로부터 유리엔이 국경 안으로 들어섰다는 전보를 받았으니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날 거였다. 거의 반년 만에 돌아오는 유리엔을 이렇게 미리 기다렸다가 마중하는 것은 발닦개…아니 그림자로서의 당연한 의리였다. 그 의리를 지키기 위해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추위마저 견디며 밖에 서 있는 것이다. 물론 춥다고 안 나왔다가 나중에 유리엔에게 걸려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조금 더 큰 이유였지만 말이다. “ 아직 멀었어?” “ 으…얼어 죽겠다. 이대로 얼어서 동상이 되면 어쩌지?” “ 오크동상 하나 탄생하는 거지.” “ 죽는다.” “ 죽여 봐.” “ 그만들 해라, 유치하게.” “ 리더인척 하지 마셈.” “ 뭐 임마?” “ 어쩔.” 도저히 스물을 넘겼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유치한 내용으로 티격태격거리던 네 사람이 이내 동시에 하던 것을 멈췄다. 그들의 시선은 정면에서 다가오는 커다랗고 화려한 흰 마차에 고정되었다. “ …있잖아.” “ 왜?” “ 갑자기 생각난 건데 말야. 이렇게 기껏 덜덜 떨면서 마중 나왔는데 황녀님이 우리더러 ‘웬 길막이야 꺼져 이것들아’라고 하면 어쩌지?” “ …X되는 거지.” “ 아니다. 아예 그런 말도 없이 그냥 마차로 치고 지나가버리면?” “ 오 갓.” 갖가지 상상들에 의해 떨려오는 심장을 그들은 진정시키려 애썼으나, 마차가 점점 가까이 올수록 표정이 긴장으로 물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다행히 최악의 예상인 마차로 들이받기와는 다르게 가까이 다가온 마차는 점점 속력이 느려지더니 곧 그들의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이내 마차의 문이 열리더니 호위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무척이나 아름다운 아가씨가 눈 위로 내려섰다. 새하얀 눈과 대조되는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공중에 나부끼는 모습은 누가 봐도 넋을 잃을 만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예르지엔들의 시야에는 그저 ‘이제부터 지옥으로 온 것을 환영 한다’라고 말하는 저승사자의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유리엔이 잔뜩 얼어있는 네 명의 남자들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왼쪽에서부터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초록색머리들이 간만에 보니 참 정겨웠다.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리엔이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긴장타고 있던 네 명은 유리엔이 길막 말고 꺼지라는 말도 하지 않고 오히려 금방이라도 겨울을 녹여버릴 듯한 봄 햇살 같은 미소를 짓자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마음이 풀리고 나니 제법 오랫동안 못 본 것에 대한 반가움도 약간은 일었고 거기다 몇 시간 동안 추위에 떨며 기다리던 고생이 드디어 끝났다는 기쁨이 한데 어우러져 넷은 아예 정신 줄을 놓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저마다 두 팔을 벌리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유리엔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황녀전하~!” “ 마스터~!” “ 주인님~!” “ 유리엔님~!” 함박웃음과 함께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예르지엔들의 훈훈한 모습에 유리엔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네 사람이 거의 근처까지 왔을 때 유리엔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 내가…….” 드레스를 펄럭이며 이번에는 유리엔이 그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 호칭 하나로 통일하랬지 이 잡것들아!” 빠악! 스피드를 실은 헥토파스칼 킥에 정통으로 얻어맞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발닦개와 주인님은 반년 만에 정겨운 상봉을 맞이했다. “ …지금쯤이면 도착하셨겠지?” “ 아마도.” 루네의 힘없는 물음에 루제가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일주일 전, 응접실에서 황제와 이야기를 나누고 유리엔은 곧바로 모국으로 갈 출발준비를 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준비했기 때문에 그들은 유리엔을 잡고 어쩌고 인사를 나누니 어쩌니 할 시간조차 없었다. 마차까지 준비된 마당에 그저 멍하니 유리엔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그들에게 그나마 남은 유일한 희망은 바로, 린이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린은 유리엔을 따라 모국으로 가지 않고 이곳에 남았다. ‘황녀님이 다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이유였다. 만약 이대로 떠나서 다신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내심 걱정하고 있던 그들에겐 진심으로 한줄기 빛과 같은 말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리는 일 뿐이다. 사실 유리엔이 반드시 뮤리엔 제국으로 돌아와야 할 의무는 없었다. 물론 유리엔과 카엘이 반지까지 교환한 부부나 다름없는 사이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름없는’이지 엄연히 말해 실제로 결혼식을 올린 것은 아니니 발목을 잡기에는 힘들었다. 그나마 그러한 이유라도 대서 돌아오게 만들 수 있는 권력자인 황제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보였으니 그것마저도 글렀다. 결국 유리엔이 나중에라도 돌아오느냐 마느냐는 순전히 그녀의 자유의지에 달린 상태였다. “ 있잖아, 언니.” “ 응.” “ 나 벌써 보고 싶어…….” “ …나도.” 유리엔이 루네들의 곁에 있었던 시간은 길다면 길지만 짧다면 짧다고도 할 수 있는 기간이었다. 비록 짧을 수도 있는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동안 유리엔이 그들에게 끼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다. 유리엔이 있음으로서 변한 것들도 많았기에, 그들이 유리엔을 잊는 다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기다려보겠다고 그녀들은 마음먹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집안에 일이 생겨 한동안 지방에 다녀오느라 유리엔이 떠난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된 제론이 카엘을 타박했다. “ 아니, 왜 안 붙잡으신겁니까 대체?” “ 내가 잡아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 …장난합니까? 이런 때까지 츤츤거리지 좀 마십시오. 그러다 나중에 피똥 싸면서 후회합니다.” “ 뭐? 츤츤…그런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 게다가 황제께서 서거하실 지도 모르는 일인데 황녀로서 모국으로 가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정말로 잡을 이유가 없지.” “ …….” 어휴. 제론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직 어려서 그렇다고는 생각하지만 역시 솔직하지 못한 것도 병이었다. ================================ # 96편 # 소제목 : 갑자기라는 건 원래 예고가 없어 (4). ================================ 방 안에 사람은 몇 없었다. 혈육을 제외한 이들을 전부 밖으로 물린 탓이다. 남은 사람들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이 깨어진 것은 갑작스레 방문이 열리며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였다. 벌컥! “ …! 누님!” 특유의 흑단 같은 검고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등장한 이는 다름 아닌 유리엔이었다. 놀란 제 동생의 부름도 무시하고 유리엔은 한걸음에 국왕 베르덴이 누워있는 침대의 옆으로 와 섰다. 베르덴은 눈을 감고 누워있던 자세 그대로 입만 움직여 말했다. “ 왔느냐….” “ …….” 반년 만에 돌아왔다. 하나뿐인 딸을 꼬박 육 개월 만에 만나는 아버지는 반응은 마치 요 앞 정원에 나무라도 심으러 다녀 온 일꾼에게 건네는 인사와 별 다를 것이 없어 보였으나, 그것에 대해 서운함을 느끼기에는 그의 얼굴이 너무나 수척했다. 게다가 유리엔은 과연 제 아버지가 눈을 뜨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뜨지 못하는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저 뚫어져라 아버지의 얼굴만을 바라보던 유리엔이 한참 만에 말을 꺼냈다. “ …왜 갑자기 아프고 그래요, 안 어울리게.” “ …….” “ 칠칠맞게 뭐 잘못 주워 먹기라도 했어요?” 마치 투정이라도 부리듯 툭툭 뱉어내는 말에 베르덴이 실소를 흘렸다. 표현은 저렇지만 어떤 뜻을 담고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혹시 독은 아니냐고 묻고 있는 게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저었다고 해봐야 그의 입장에서일 뿐이지 타인이 보기에는 정말로 미세한 뒤척임에 불과했지만, 유리엔은 그 고갯짓에 입을 앙다물었다. 사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던져본 말이었다. 차라리 독이라면, 그렇다면 어떻게든 방법은 있지 않았을까. “ 아버지…아니, 아빠.” “ …….” “ 뭐 하나 물어봐도 되요?” “ 안 된다고 해도 물어볼 것 아니냐.” “ 체-입은 멀쩡하네.” 피식 웃으며 유리엔이 무릎을 굽혀 침대 옆에 앉았다. 베르덴의 감긴 눈은 여전히 떠지지 않았지만, 유리엔은 계속해서 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치 눈이라도 마주치고 있는 것처럼. “ 있잖아요.” 조금 뜸을 들인다. 물어볼 말을 한 문장으로 매끄럽게 정리한다거나, 혹은 정말 물어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거나 하는 듯이. 그러다가 유리엔이 입술을 뗐다. “ 나…왜 뮤리엔 제국으로 보냈어요?” 묘한 질문이다. 내뱉고 나서도 유리엔은 그 생각을 했다. “ …딸아.” “ 네.” “ 답을 아는 질문은…하는 게 아니다.” “ …….” 말없이 유리엔은 제 고개를 침대에 뉘였다. 썩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대충이나마 하고 있던 짐작을 확신으로 만들어주는 답이었다. 그와 동시에 유리엔은 아주 조금 울적해졌다. “ …나만 몰랐던 거예요?” “ 아니…나만 알고 있었단다. 굳이 더 추가한다면 내 영혼의 반려…정도겠지.” “ 여보-.” 굵은 눈물방울이 침대위로 툭툭 떨어졌다. 베르덴이 앓아눕던 바로 그 날부터 망부석처럼 같은 자리에서 그를 지켜온 그의 아내, 황비의 얼굴은 온통 슬픔으로 얼룩져 있었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베르덴은 닦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었다. 그 말에 그녀가 더욱 펑펑 울었음은 말 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 나참, 이런 때까지도 팔불출이라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유리엔은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 …안되겠어.” 오렌지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불연 듯 벌떡 일어섰다. 뭔가를 결심한 듯 주먹까지 꽉 쥔 모습에 바로 옆에 있던 금발의 사내가 깜짝 놀라며 학을 뗐다. “ 돌았냐!” “ 내가 뭘! 솔직히 말해서 지금쯤 정말 장난 아니게 힘드실 거 아냐. 우리가 누구야? 발닦개든 뭐든 우선은 황녀전하 전속이잖아. 이럴 땐 당장 달려가서…….” “ 그만 둬라.” 붉은 머리의 사내가 무게를 잡으며 말했다. 있어 보이는 포스에 잠시 멈칫했던 오랜지색 머리의 사내는 이내 코웃음을 날리며 말을 맞받아쳤다. “ 웃겨.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되는데? 그리고 내가 리더인 척 하지 말랬지.” “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얌전히 들어.” “ 왜? 왜 가면 안 되는데? 가서 위로해 드리자니까!” “ 후우…….” 사내는 인상을 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것 같은 기세의 저 모자란 저능아는 지금 가장 중대한 사실을 한 가지 잊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우매한 자에게 고귀한 가르침을 내리기로 했다. “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봐라. 과연 황녀님께서 너한테 약한 모습을 보이실 것 같냐?” “ 그, 그건…….” “ 내 생각엔 말야, 눈물을 흘린다던가 하는 약한 모습을 네게 보여줄 바에는 황녀님께선 차라리…….” “ 차라리?” 세 사람 모두의 이목이 붉은 머리의 사내에게로 집중됐다. 사내는 검지손가락을 가볍게 흔들며 말을 이었다. “ 네 눈깔을 파버리실 걸.” “ …….” “ …….” “ …….” 사내들은 입을 다물었다. 현실감 만땅. 도저히 반박 할 수 없는 가설이었다. “ …누님.” 유리엔은 제 친동생이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열 살을 갓 넘긴 남동생은 어느새 제 옆자리에 와서 앉아있었다. “ 아…버님께서…….” 그러고 보니 작은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다. 유리엔은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어머니는 오열하고 있었다. “ …아버지.” “ …….” “ 아빠?” “ …….” 왜 이럴 때 주무시고 그러세요…그것도 그렇게나 깊게. 그러지 마세요. 사람 착각하잖아요. 괜히 오해하게 되잖아요. 그냥 주무시는 건데, 그냥 그것 뿐인데 이상한 생각이 든단 말이에요. 왜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게 만들고 그러세요. 정말 단지 주무시는 건데…왜 그런 터무니없고 허무맹랑한 착각을…자꾸만. “ 누님.” “ …….” “ 누님-.” 품에 안겨오는 작은 체구를 유리엔은 반사적으로 힘주어 껴안았다. 팔로 감싼 어깨와 등이 덜덜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아니…사실은 잘 모르겠다. 과연 안겨있는 녀석의 몸이 떨리는 건지 아니면 껴안고 있는 자신의 팔이 떨리는 건지. 확실하게 아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의 기분마저도 알 길이 없었다. 단지 심장이 좀 내려앉고, 팔에 이유모를 경련이 일어나는 것뿐이다. 요즘 운동을 좀 소홀히 해서인지 아니면 너무 장시간 마차에 있었기 때문인지 갑자기 원인을 알 수 없는 신체변화가 의아하게 느껴진다. 그대로 조금 더 지나자 이제는 숨까지 잘 쉬어지지 않고 어지러움까지 동반하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심지어는 눈까지 따갑다. “ …아빠.” 단지 허공에 떴다가 다시 자신의 귀로 돌아온다. 그 울림은,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때서야 유리엔은 처음으로 눈물을 터뜨렸다. ================================ # 97편 # 소제목 : 갑자기라는 건 원래 예고가 없어 (5). ================================ “ 서거하셨답니다.” “ …….” 여전히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이로부터는 딱히 어떠한 대답의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좌에서 우로 빠르게 움직이던 눈동자가 순간 제자리에 멈춘 것만으로도 제론은 그가 제 말을 집중하여 들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마침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한 장의 서류에서 카엘이 눈을 떼자, 제론은 기다렸다는 듯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 독은 아닙니다. 타살도 아니고, 사고로 인한 것도 아니랍니다.” “ …….” 카엘은 놓았던 서류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여전히 눈동자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반사적으로 몇 자를 읽기는 했지만 단순히 눈으로만 인식했을 뿐 머리까지 전달되지는 못했다. 결국 카엘은 마저 업무를 보는 것을 포기했다. 의자까지 돌려 서류더미에서 완전히 등을 진 그는 베르덴 국왕의 서거 이유가 독이 아니라는 말에 묘하게 안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자조적으로 웃었다. 불과 조금 전 자신이 했던 생각이 다시금 선명하게 떠올랐다. 단순한 가정이지만 만에 하나 독이었다면, 반 황제파가 운 좋게도 국왕을 독살하는 것에 성공한 것이었다면 지금 모국에 있는 유리엔은 과연 안전할 수 있었을까. 물론 이것이 기우에 불과하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카엘은 쓸데없는 걱정에 손끝을 떨 정도로 긴장했던 자신이 우습기까지 했다. “ …단순한 병사인건가.” “ 그렇습니다. 하지만 후천적으로 얻어진 병 또한 아니랍니다. 즉 다시 말해서-.” “ 유전이죠.” 라고 말한 뒤 초록색 머리의 사내는 슬쩍 유리엔의 눈치를 살폈다. 유리엔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 계속 읊어봐.” “ 예. 그러니까…전대-아니, 지금은 전전대인가, 무튼 할아버님이셨던 선황께서도 약 이십년 전에 별세하신 거 기억하시죠?” “ 응.” “ 대외적으로 알려진 이유는 단순한 병마인데…병은 맞지만 고칠 수 있는 종류는 아니었습니다. 대물림 되어온 거였으니까요. 그냥 쉽게 유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 흐음.” 고풍스러운 의자나 하다못해 카펫 위도 아닌, 황실 소유의 넓은 정원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넓고 펑퍼짐한 모양의 바윗돌 위에 걸터앉아 유리엔은 생각에 잠겼다. 심히 내추럴한 장소와 포즈였으나 유리엔은 언벨런스하게도 격식을 갖춘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고(비록 본인의 의지는 아니었더라도)있었는데, 그 둘은 전혀 안 어울리는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왠지 모르게 조화를 이루는 듯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한 겨울의 정원은 역시나 춥다. 으슬거리는 몸을 느끼며 붉은 머리의 사내-레윈이 입을 열었다. “ 그나저나 이젠 어떻게 하실 겁니까?” “ 뭐가?” 밑도 끝도 없는 레윈의 질문에 유리엔이 반문했다. 그는 유리엔의 가녀린 거의 몸을 칭칭 감다시피 하고 있는, 드레스 밖으로 걸친 두툼한 털 코트를 이 이상 부러울 수 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잠깐 응시하고는 재차 말을 더했다. “ 황제가 되실 겁니까?” “ …….” 사실 유리엔은 현재 명백한 황위계승서열 1위였다. 막 서거한 전대 국왕의 분명한 직계 핏줄인데다 엄연한 장녀, 그러니 남녀의 성별에 따른 모든 차별을 폐지해온 국가인 카르나 제국에서 유리엔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이도 어린 남동생에게 계승서열에서 밀릴 이유는 전혀 없었다. 명분도 완벽하고, 사실 그만한 힘도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의지였다. 찬바람을 쐬면서 유리엔은 피식 웃었다. “ 글쎄, 황제라. 솔직히 말하면…좀 귀찮지.” “ …….” “ 그리고 아무래도 왕위에는 나보다 아딘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니까.” “ ……!” 예르지엔들은 유리엔의 말에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딘은 그녀가 제 남동생을 부르는 애칭이었다. 그렇다면 유리엔은 양보라는 것을 행할 수 있는 생명체였단 말인가! 믿기 힘든 사실이 그들을 덮쳤다. 그나마 가장 정신이 제대로 박힌 금발의 사내, 옐윈이 별 같잖은 이유로 충격과 공포를 맛보고 있는 세 사내들을 뒤로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문을 텄다. “ 쉽지 않으실 텐데요.” “ 그렇겠지?” “ 당연합니다. 비록 황녀전하께서는 황위에 뜻이 없으시다지만 그래도 분명히 뒤에서 지지하는 세력들이 생겨날 겁니다. 그럼 남은 일은 황자전하를 지지하는 세력들과 그들이 박 터지게 싸우는 것 밖에 없게 되겠죠.” 그렇다. 옐윈의 말은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유리엔 본인이 그럴 마음이 없다고 해서 그녀를 뒤따르는 모든 귀족세력들까지 그럴 거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오히려 조금의 여지만 주어져도 금세 커다랗게 부풀어 결국 분란의 씨앗이 만들어버릴 가능성이 훨씬 더 다분했다. 그러나 유리엔은 죽었다 깨어나도 자신의 하나뿐인 남동생과 그런 식으로 권력다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둘 중 하나가 완전히 왕위에 오르게 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죽거나 모국 바깥으로 아예 떠나버리지 않는 다음에야,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른 한명은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취급 될 것이다. “ 그래서 난 튀려고.” “ …예?” “ 그게 더 나은 것 같으니까.” 그녀에게는 도피처가 있다. 지금은 서거한 카르나 제국의 황제, 베르덴은 자신에게 유전적인 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걸 알게 된 뒤에 그는 수명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대신, 차라리 자신이 죽고 난 뒤의 상황에 대한 안배를 까는 것에 주력하기를 택했다. 유리엔을 정략결혼이라는 핑계를 삼아 뮤리엔제국으로 보내버린 것 또한 그러한 안배들 중 하나였다. 다만 사소한 오차는, 그가 생각보다는 일찍 숨을 거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리엔의 남동생 아딘은 이제 겨우 열 한 살의 겨울을 지내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너무 어리다.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면 빠른 시일 내에 황위는 계승받을 수 있겠지만, 그와 동시에 선황이 남긴 여러 가지 안배와 권력들까지 전부 흡수하기에는 확실히 벅찼다. 여리디 여린 성품의 황비가 열심히 돕는 다고해도 딱히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때문에 최소한 향후 몇 년간은 아딘을 위하여 유리엔이 필요했다. 다만 그 몇 년, 어떻게 보면 길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짧은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유리엔에게 남는 선택지는 한가지 뿐이었다. ================================ # 98편 # 소제목 : 갑자기라는 건 원래 예고가 없어 (6). ================================ 튀기. 지금 당장은 못하지만 몇 년 뒤에 유리엔은 반드시, 만약 누군가 막기라도 한다면 막아선 이에게 사정없이 고자킥을 날려서라도 떼어놓고 튀겠다는 확고한 계획을 마음에 잡아넣었다. 그리고 그때 찜찜한 뒤끝 따위 남기지 않고 후련하게 튀기 위한-아마도 금방 끝나지는 않을 작업을 향해 그녀는 한발씩 뛰어들기 시작했다. “ 카르나 제국에는, 귀족 등의 권력을 지닌 가장이 예기치 못하게 갑자기 사망했을 경우 후계자의 동의를 얻어 그 가장의 부인이 정해진 기간 동안 대리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법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귀족의 경우는 반년에서 일 년, 황권의 경우는 일 년에서 최대 삼년정도였습니다만 작년 베르딘 국왕께서 집권할 당시에 오년까지로 수정되었습니다.” “ 알고 있어.” “ 이웃나라 정치에도 관심 없던 사람이 대체 언제 그걸 다 공부하셨답니까. 과연 이것이 그 무섭다는 사랑파워.” “ 뭐?” “ 아닙니다. 아무튼 베르덴 국왕께서 서거하신 직후 유리시엔 황녀전하와 아르딘 황자전하의 전적인 동의에 따라 현재 카르나 제국의 황권은 두 분의 모친께 위임된 상황이라고 합니다.” “ …그렇군.” 볼 일 다 끝났다는 듯 다시 늘상 보던 서류로 시선을 돌리는 카엘을 제론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요즘 카엘은 미묘한 허전함과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느낌. 물론 딱 집어서 님 지금 허전하죠? 라고 물어본다면야 당연히 아닌 척 딱 잡아떼겠지만 제론이 누군가. 카엘돌보기가 벌써 몇 년 차인데 그 정도쯤 척 보면 착이다. 제론 심심하기도한데 한번 찔러보기로 했다. “ 걱정 안 되십니까?” “ …….” 씹혔다. 그러나 제론은 굴하지 않았다. 괜히 쿨가이인척 일에 집중하느라 안 들리는 척 하고 있지만 실은 아닌 척 하면서 카엘이 다 듣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인간이 들을 수 있다는 최소치의 소리의 한계를 넘어서 길 가던 일개미가 자신이 남몰래 짝사랑하는 여왕개미를 떠올리며 두근거리는 그 격한 심장소리마저 들을 수 있는 정도까지 귀의 감각을 예민하게 긴장시키고 있다는 것을 제론은 날카롭게 캐치해냈다. 해서 그는 재차 말했다. “ 과연 황제가 되는 길을 택하실지…….” 떠보기 위한 말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진심이 섞인 것이기도 했다. 만약 정말로 유리엔이 여황제가 되어버린다면 앞으로 뮤리엔 제국으로 다시 오게 될 일도, 카엘과 엮이게 될 가능성도 전무해지는 것이다. 카엘이 황태자 자리를 때려 치고 카르나 제국으로 가서 여황의 부군이 된다면 모를까-물론 그런 돌아이스러운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도록 자신이 온 힘을 다해 막을 테지만. “ …….” 이번에도 카엘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러나 제론은 순간 똑똑히 목격했다. 서류의 하단에 흔들림 없는 필체로 매끄럽게 휘갈기던 사인이 중간에 삐끗하는 것을 말이다. 마침내 침묵으로 일관하던 것을 그만두려는지 카엘이 서류에서 눈을 떼고 제론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한숨 섞인 한마디를 내뱉었다. “ 나가 있어.” “ …….” 심심하면 가서 개미나 세. 네. 앞으로는 정말 바빠질 테니까 미리 실컷 놀다와야겠어, 라는 핑계 하에 유리엔은 훌훌 단신으로 마을에 나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마침 마을은 소소한 기념일로 인해 축제분위기였다. 외출 시 필수 아이템인 특수제작 후드를 뒤집어쓰고 그녀는 사방팔방 뛰어다녔는데, 너무 자주 겪어서 이제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 변태 치한 저질 양아치와의 우연한 만남이라는 해프닝이 막 해가 질 무렵 일어났다. “ 어이~아가씨, 예쁜데?” 먹던 닭 꼬치의 닭이 업신여길 정도로 진부한 대사를 치며 특유의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양아치1이 다가왔다. 아 젠장 닭 꼬치 마저 먹어야 하는데. 저 공기만도 못한 놈은 왜 하필 이때 나타난 건지에 대한 짜증을 느끼며 유리엔이 아련한 눈길로 오른손에 든 닭 꼬치를 내려다보았다. 그 사이 어느새 양아치1이 입 냄새의 상중하를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접근했다. “ 후드가 아주 매력적이야. 아주 광택이 죽이는 걸? 나도 하나 구입하고 싶어지는데?” 의외로 남자는 후드광이었던건지 아니면 그냥 비싸 보이는 천 쪼가리가 보이니까 뺏고 싶었던 건지 어쨌든 유리엔이 뒤집어쓰고 있는 후드에 관심을 보였다. 유리엔은 피식 웃으며 반사적으로 받아쳤다. “ 니가?” “ …….” 업신. 양아치1은 왠지 빡쳤다. 유리엔의 업신돋는 표정이 그의 분노세포를 자극했다. “ 이 년이 좋게 좋게 말하려니까 어디서!” 양아치1의 우람한 팔이 위로 휙 들렸다. 금방이라도 눈앞의 유리엔을 내려칠 기세였다. 당연하지만 유리엔은 송충이 눈썹만큼도 겁먹지 않으며 이 뻔한 상황에 대해 진부함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 쪽 다리를 뒤에 빼는, 이젠 몸에 밴 익숙한 준비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삼초 뒤. 빠악!!! “ …!!!” 안녕 파이어 에그. 그동안 즐거웠다. 바이. 나 없이도 잘 지내. 시밤. 양아치1은 가슴이 넝마가 될 것 같은 슬픈 이별을 맞이했다. “ 헐 반전.” 그렇지 않니 닭 꼬치야? 유리엔이 아홉 번째 닭 꼬치의 첫 부분을 크게 베어 물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정의의 킥을 쳐 맞고 그로인해 파이어 에그에게 실연당한 양아치1의 친구들 양아치 2,3,4,5등등이 우르르 몰려와 앞을 막아선 것이다. 그 양아치 군단을 보며 유리엔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왕따인 줄 알았는데 친구가 많네. “ 이 겁 없는 년 좀 보게. 어디서 감히 우리들의 친구 치일이를 고자로 만드냐잉?” “ 함 디져볼텨?” 양아치2,3이 불량스러운 자세로 위협하듯 바닥에 침을 찍 뱉으며 말했다. 상대적으로 수도 많고 덩치도 우락부락한 것들이라 딱 봐도 전적으로 유리엔이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여차하면 마법을 펑펑 날려댈 수 있는 반지도 있고, 설령 반지가 없다고 해도 눈앞의 이 쓰레기군단은 어차피 곧 처치 될 운명일 테니까. “ 끄웍!”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괴상한 비명과 함께 양아치7이 바닥으로 엎어졌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6,8,4,2…등등 순서 없이 마구잡이로 바닥으로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양아치들이 죄다 정신을 잃고 거꾸러지는 데에는 채 몇 분 걸리지도 않았다. 발닦개는 오늘도 훌륭히 임무를 완수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유리엔은 순간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뭔가 미세한 위화감. 그게 뭘까 깊게 생각해보기도 전에 머릿속에서 타는 듯한 붉은 머리를 한 누군가의 모습이 휙 스쳐지나갔다. “ 어…?” 유리엔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눈만 껌벅였다. 방금 깨달은 사실이 스스로를 놀라게 한 탓이다. 그러니까 방금 그녀는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즉 무언가 ‘평소와 다르다’고 생각했다는 거다. 그 말은 그림자로서 늘 몰래 따라다니는 예르지엔들로부터 신변을 보호받는 것보다 위기의 순간에 적절하게 카엘이 나타나 도와주는 것을 ‘평소’로 두었다는 소리였다. 다시 말해 몇 년이나 당연한 것처럼 반복됐던 일보다 고작 반년 간 일어났던 일을 자기도 모르는 새 더욱 익숙하게 여겼다는 거다. 왜? 뭐 때문에? 답을 찾을 수 없어서 유리엔은 멍하니 굳어졌다. ================================ # 99편 # 소제목 : 100회 공지 ================================ (※타 사이트에 올린 글을 그대로 복사해왔습니다. 그러고보니 다술도 공지포함 100회는 100회네요<...) 검.황이 드디어 100회를 맞이했습니다. ;ㅁ; 럴수.......... 신기합니다. 검황의 편수가 세자리가 되다니. 50회 넘겼을 때만 해도 와우 기적이닿ㅎㅎㅎㅎ이렇게 길게 연재하다닣ㅎㅎ역사닿ㅎㅎ 하면서 좋아했던 게 기억이 나는데 이젠 100회라니 와웅 기쁨의 옆돌기가 절로 나오겠어요ㅛㅛㅛㅛ< 사실 1편씩 올릴때마다 아 붂흐러워 재미ㅇ벗어 허to the접이야 이 소설의 장르가대체뭐야 병sin 아놔눈뜨고못봐주게썹베이베 그러면서 몸을 배배 꼬아놓고 100편이나 쓴 저도 참 용자() 랄까 실은, 오늘 본편과 공지를 함께 올릴 생각이었는데 학교 논술수업을 마치고 여섯시쯤에 집에 기어들어오니 웬걸 서울사는(전 지방人이라능)이종사촌꼬맹이들이 우르르 놀러와있지 뭡니까. 1박 하고 가신답니다요 꼬맹이님들께서... orz 하루종일 시달리느라 레알 소설은 한글자도 못 썼습니닿ㅎㅎㅎ ㅎㅎㅎ망할것들ㅎㅎㅎ우리집햄스터배누르지마개샛키들아ㅎㅎㅎㅎㅎ 무튼 그런 연유로 (지금은 놈들에게 티비를 붙여주었습니다 도라에몽특집이나봐라이것들아) 이렇게 공지만 올리게 되었네요 ㅜㅜㅜ사죄를 드리옵니다(굽신굽신) ㅋ 잡소리가 넘 긴데? 이제(드디어)본론으로 들어가서 검황이 감격스러운 100회도 맞이했고 하니 그 기념으로 100회맞이 초호화 대형 스펙터클 두구두구 이벤트!! 같은 걸 사실 하고는 싶었지만 희망만으로 끝냈습니다. <... 엉어ㅓ엉 할 시간도 체력도 아무것도 없어요 엉엉ㅇ어 하지만 또 그냥 넘어가기는 아쉬워요. 해서 간단한(정말 간단)것 세가지정도만 하기로 했습니다. 1. 동화패러디 외전 신데렐라 or 백설공주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둘이 섞일 수도 있어요< 2. 같은 상황 다른 버전 지금까지 연재되었던 검황의 내용중 한 부분을 정해서 같은 내용 그대로 시점만 바꾸기 (ex- 1인칭 유리엔or카엘or다른 등장인물or지나가던행인1의 시점으로 변환) 또는 같은 상황 그대로 성격만 바꾸기 (ex- 유리엔의 성격이 천사였다면or 카엘이 차가운 성격이었다면 등) 를 해서 써보려고 합니다. 어느 부분을 어떤 시점 혹은 어떤 성격 변환으로 보고 싶으신지 여러분들께서 댓글로 달아주시면 제가 그 중에서 랜덤으로 뽑아서 쓰도록 하겠습니다/ㅅ/ 3. If 만약 이랬다면? 가정적인 설정을 잡아서 그에 따른 검황의 스토리를 토막으로 써 보려 합니다. 예를 들어 만약 카엘이 게이였다면 (뭐야 이 병sin같은 가정은) 만약 유리엔이 못생겼다면 (둥) 만약 카엘이 오덕이었다면 (이건 또 뭐냐능...) 등등 위의 2번과 마찬가지로 원하시는 가정을 댓글에 써 주시면 랜덤으로 뽑아서 토막글을 쓰겠사옵니다/ㅅ/ 여, 여러분들의 참여가 생명이에요 하앍< 사탕합니다♡ <치워 + 이 공지는 다음주에 위의 세가지 이벤트를 담은 편이 올라오기 직전 삭제 될 예정입니다. * 아직 댓글 오류가 고쳐지지 않은 것 같네요orz 혹시라도 참여해주실 분들은 작한마 or 쪽지 편한 대로 골라서 참여해주세요/ㅅ/~ ================================ # 100편 # 소제목 : 검황 100회 특집. ================================ <검황 100회 특집> ※주의: 병맛의 종결자 이벤트 첫 번째: 동화패러디. 작품-신데렐라. 배역-왕자: 카엘 신데렐라: 유리엔 그 외 조연 시작합니다. * 옛날 옛적 어느 시대의 어느 나라의 어느 마을의 어느 광장의 어느 저택에, 마음씨도 곱고 얼굴도 예쁜 유리엔렐라라는 소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릴 적 어머니를 여윈 유리엔렐라는 못된 새엄마와 더 못된 새언니들에게 하녀취급을 받으며 힘든 부엌데기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새언니들은 툭하면 유리엔렐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언제 봐도 유리엔렐라님은 너무 예쁘다능 하악” “ 그렇다능.” …? 잠깐. 잠깐잠깐잠깐만. 대사가 틀렸잖아요. 그녕 틀린 정도가 아니라 확 맛이 갔잖아요. 대사의 범위에 넣을 수도 없는 말을 지껄였잖아요. 그게 뭐예요 대체 오덕거리지 말고 대본에 있는 대사를 치란 말예요 대사를. “ 아, 참. 흠흠. 유리엔렐라 어서 청소하지 못해? 집 꼴이 이게 뭐야!” “ 맞아! 집이 너무 더럽잖아!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니?!” 새언니들의 격한 구박에 가녀리고 착한 유리엔렐라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새로 사.” 자 여러분 방금 대사는 ‘미안해요 언니들 어서 빨리 청소할게요 흑흑’을 줄인 표현이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보이지 않으셨다면 모니터에 이상이 있는 것이니 신속히 점검 하시길 바랍니다. 어쨌든 시간은 흘러 흘러 어느 날, 황궁으로부터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내용인 즉 왕자가 스무번 째 생일을 맞이하여 평생을 함께 할 배필을 찾고자 하니 모든 귀족가의 아녀자들은 오늘 밤 있을 황궁무도회에 반드시 참석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신붓감 배틀 할 거니까 당장 튀어오라는 얘기에 새엄마와 언니들은 어서 빨리 황궁으로 갈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특히나 새언니들은 자기들이 왕자의 신부로 뽑힐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들떠 아름다운 드레스로 자신들을 꾸미는 것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 내 드레스 어떠니?” “ 거지 같다 얘 호호호.” “ 어맛 고마워 네 드레스는 네가 입으니 마치 걸레조각 같단다 호호” “ 어머나 얘도 참 호호” 새언니들은 서로 사이좋게 담소를 나누며 새엄마와 함께 황궁으로 출발했습니다. 혼자만 저택에 남겨진 유리엔렐라는 자기도 무도회에 참가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 너무나 슬펐습니다. 그래서 유리엔렐라는 그만 부엌에서 청소하다 말고 주저앉아 서글프게 울고 말았습니다. “ 뚝뚝뚝뚝뚝뚝뚝뚝뚝뚝뚝뚝뚝뚝뚝뚝뚝뚝뚝뚝뚝뚝뚝” …입으로 눈물 떨어지는 효과음 내지 말아요 그리고 너무 길어 아니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요? 유리엔렐라가 슬프게 울자 갑자기 부엌에서 요정이 나타나는 것 아니겠어요? 화사한 빛을 뿌리며 나타난 요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짠! 요정 등장! 하하하하하하 그런데 이 요정역 여자역이네요? 여자역이에요 그렇죠? 하하하 난 무슨 인생이 이따위죠 어딜 가나 여장이나 쳐하고 나참 이 따위 더러운 세상 알 게 뭐야 마법이나 잔뜩 쓸 테다! 난 대마법사니까 하하하하하하하 세상 모든 여자들을 마법으로 꼬실 테다 하하하하하하하아나 슬퍼 흐흑” 요정님? “ 흐흐흑흐흐흡흑흑어헝엉어…네? 훌쩍.” 꺼지세요. “ 헉 너무해!” 유리엔렐라는 너무 잘났기 때문에 요정의 도움 없이도 알아서 착착 준비를 끝내고 무도회장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수제 드레스를 입고 수제 유리구두를 신은 유리엔렐라는 수제 마차를 타고 황궁에 도착했습니다. 유리엔렐라는 여신포스를 사방에 풍기며 황궁의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섰고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왕자 또한 유리엔렐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습니다. 왕자는 아름다운 유리엔렐라에게 다가가 정중히 춤을 신청했습니다. “ 댄스 배틀 한판 어때?” “ 황궁을 건다면 하겠어.” “ 좋아, 승낙하지.” 그렇게 황궁을 건 역대 최고 스케일의 박진감 넘치는 사상 최대의 댄스 배틀이 시작되었습니…가 아니잖아요 이것들아 좀 정상적인 대사를 치지 못하겠니?! 앗, 그때 12시를 알리는 종이 치기 시작했습니다. 유리엔렐라가 타고 온 수제 마차와 입고 있는 수제 옷은 초보자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밤 열두시가 지나면 각각 호박과 누더기로 변해버리는 단점이 있었습니다라니 뭐야 이 병신 같은 설정은. 어쨌든 유리엔렐라는 아쉽지만 왕자를 뒤로 하고 무도회장을 빠져 나왔습니다. 유리엔렐라는 육상선수와도 같은 스피드로 뛰기 시작 했…잠깐만요 멈춰 봐요 그대로 나가면 어떡해요 유리구두 한 짝을 왕자에게 주고 가야죠! “ 아, 그랬었나?” 뛰던 것을 멈춘 유리엔렐라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섬주섬 유리구두 한 짝을 벗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유리구두를 맞은편에 있는 왕자를 향해 있는 힘껏 던졌습니…저기요 꼭 던져야만 했나요? 곱게 주면 손목뼈가 뒤틀립니까? 어째서 부드럽게 건네주지 못하니 어째서. 유리구두는 공기를 가르며 무서운 속도로 날아갔지만 반사 신경이 뛰어난 왕자는 아주 같잖은 듯 가볍게 그것을 피했습니다. 왕자를 지나쳐 계속 날아가던 유리구두는 이내 화려한 장식이 되어있는 벽과 충돌했습니다. 그리고 유리구두는 파멸……. ……. 유리구두야아아아아-!! “ 어쭈, 피해?” 잠깐, 잠깐! 너 나머지 한쪽도 마저 벗지 마요! 손에 들지 마요! 던지지 말란 말이야! 왕자 이 자식아 피할 준비 하지 말라고요! 꺄아악! 챙그랑. 두 번째 유리구두께서 문명하셨습니다. …망했습니다. 망했어요. 대박 망했습니다 이 이상 망할 수가 없어요 아주 완벽해요 유리구두를 두 쪽 다 산산조각으로 만들다니 하하 아주 멋지군요 이런 돌아버리겠네. 이제 왕자는 뭘 들고 유리엔렐라를 찾아간답니까 예? 왕자랑 유리엔렐라랑 이루어져야 동화가 끝나는데 어떡할 거예요. 둘이 이어져서 로맨스가 꽃피어야 되는데 둘의 매개체가 완전히 사라졌어요 박살났어요 형체도 안 남았어요 어쩔 거예요 이제! “ …어이, 왕자.” “ 왜?” “ 내 구두를 연속으로 피한 건 네가 처음이야. 나랑 사귀자.” “ …….” ……. …왕자와 유리엔렐라는 그렇게 서로 사귀게 되어 알콩달콩 잘 지내다가 결혼에까지 골인하여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끗!! 하하 이제 나도 몰라요 다 때려쳐 이 따위 개막장 스토리병신 동심파괴의 종결자스러운 패러디 같으니라고! 시작부터 알아봤어요 애초에 캐스팅부터가 파괴의 절정으로 가는 지름길이었… “ 야. 뭐라고?” 누가 했는지 몰라도 정말 최고의 캐스팅입니다. 신데렐라는 당신을 위한 배역이었던 것 같아요. 어쩜 연기를 그렇게 완벽하게 잘하시는지, 특히나 애드리브는 정말 환상이었습니다. 너무 환상이어서 토할 뻔 했어요 하하. 정말 끝. 특집 두 번째는 카엘과 루제의 시점을 다루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 해 본 결과 나중에 검황이 완결난 뒤에 외전으로 한편 길~게 쓰는 게 더 낫다 싶어서 빼게 되었습니다. 대신 그만큼 세번째로 분량 돌렸습니다/ㅅ/ 특집 세 번째: 만약 ~다면? 신청 내역 리스트- 만약… 1. 카엘이 미인계에 약했다면? (자기 외모는 호박이라고 착각) 2. 카엘이 오덕이었다면? 3. 유리엔의 성격이 천사였다면? 4. 카엘과 유리엔의 성격이 정반대였다면? 5. 카엘이 플레이보이였다면? 6. 유리엔에게 첫사랑이 있었다면? 7. 카엘이 어둡고 시크하고 비뚤어진 성격이었다면? 8. 카엘이 여리여리한 성격이었다면? 9. 카엘이 게2였다면? (+유리엔이 남자였다면) 10. 카엘이 고to the자 였다면? 11. 카엘과 유리엔의 성별이 반대였다면? 12. 유리엔이 못생겼다면? 13. 카엘이 차도남이었다면? 14. 카엘의 성격이 천사였다면? 15. 카엘이 소심했다면? 16. 카엘과 유리엔이 남매였다면? 17. 유리엔 차도녀 + 카엘 아방미소년이었다면? 18. 유리엔 완전성실규칙소녀 + 카엘 불량아였다면? 19. 유리엔이 고자킥을 마스터하지 못했다면? 20. 유리엔이 상상임신을 했다면? (헉) 21. 유리엔 소심or츤데레데레 였다면? 22. 유리엔이 바람만 불면 날아갈 것 같이 여리여리한 여자였다면? 23. 카엘과 유리엔이 서로 첫눈에 반했다면? 24. 노바카사가 희대의 꽃미남이라서 카엘을 뛰어넘었다면? 25. 카엘이 못생겼지만 자상남이었다면? 26. 카엘과 유리엔이 서로에게 집착한다면? 27. 카엘과 유리엔이 닭살커플이었다면? 28. 카엘이 의처증 걸린 집착남이었다면? 29. 카엘이 능글거리는 성격이었다면? 30. 카엘과 유리엔이 21세기 고등학생이었다면? 31. 카엘이 남자여자였다면? 32. 카엘이 자상에 집착하는 성격이었다면? 33. 유리엔이 카사노바에게 반했다면? 34. 유리엔이 진심으로 카엘을 좋아했다면? 35. 루네가 유리엔을 넘어서는 독설가였다면? …이상입니다(헉헉). 우선 4번. 카엘과 유리엔의 성격이 정반대였다면? 시작합니다. * “ 전하-!!” 제론은 울부짖었다. 그의 나이 방년 28세. 그러나 어딜 가면 꼭 꼬마 애들에게 아저씨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분명 이 지긋지긋한 스트레스로부터 오는 겉늙음 때문일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올해 16살 생일이 지난 자신의 주군은 현재 뮤리엔 제국의 황위계승서열1위인 황태자 카엘이었다. 제론은 그를 거의 10년간 곁에서 모셔왔다. 즉 카엘이 꼬꼬마이던 시절부터 옆에서 계속 봐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카엘은 그 어렸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제론을 엿 먹였다. “ 또 튀시다니-!!” 그는 텅 빈 카엘의 집무실을 보며 절망적으로 외쳤다. 탁자 위로 서류들이 고운 자태를 간직한 채 여전히 높게 쌓여있었다. 그 서류들은 이번 주 내까지 카엘이 처리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하나도 안하고 튀었다. 보나마나 뻔하다. 대충 변장하고 바깥으로 놀러나갔을 것이다. 이 인간이 천부적인 재능과 후천적인 노력으로 갈고닦은 뛰어난 신체능력을 황궁 밖으로 도망치는 용도로나 사용해대고 있었다. 카엘이 한번 마음만 먹으면 눈 깜짝 할 새에 이목을 따돌리고 사라지는 건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제론은 나름 주의를 기울이고 또 기울였음에도 번번이 카엘을 놓쳐야만했다. 카엘이 서류들에 손도 안대고 바깥으로 놀러나가 버리는 일은 한 두 번이 아니었고, 그 때마다 어김없이 제론은 카엘의 아버지인 황제에게 불려가 직무태만이라는 죄목 하에 깨져야했다. 가슴이 아프다. 더 열 받는 건 이 망할 인간이 또 한 번 마음잡고 집중했다 하면 순식간에 서류처리를 끝내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안하다니 이거슨 나를 엿 먹이려는 것인가 그런 것인가. 제론은 월급쟁이 신세인 자신이 문득 처량해졌다. 카엘은 마을에 나오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장날이거나 축제라도 열리는 날에는 빠짐없이 꼬박꼬박 황궁을 탈출해서 마을로 내려오고는 했다. 오늘은 주마다 열리는 장날이었다. “ 어디를 먼저 갈까나~.” 눈에 확 띄는 붉은색 머리카락과 외모를 감추기 위해 카엘은 갈색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겉모양은 수수하면서도 잘 보면 무척이나 고급 천으로 만들어진 외국 직수입제 명품이었기 때문에, 간혹 안목이 뛰어난 뒷골목 불량배들이 알아보고는 종종 시비를 걸곤 했다. 그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 어이, 거기 형씨. 우리 좀 볼까?” 카엘은 좀 전부터 두세 명이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그래서 찜찜하게 계속 데리고 다니기 보다는 그냥 바로 처리해버리자 싶어서 일부러 인적이 없는 골목으로 들어갔고, 아니나 다를까 그 즉시 뒤를 따라오던 불량배들이 카엘을 둘러쌌다. 다만 의외인 것은 대기타고 있던 다른 동료들이 있었는지 골목 안에서 몇 명이 더 건들거리며 나타나 인원이 배가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카엘의 입장에서는 건달들이 두세 명이던 열 명이 넘던 그닥 차이가 없었다. 일곱 명의 건달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카엘이 여유롭게 말했다. “ 그래그래, 무슨 볼일이야?” 그들은 자신들이 나름 위협적이게 에워쌌다고 생각했는데도 정작 카엘이 조금도 쫀 기색을 보이지 않자 조금 당황한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어차피 한 놈이고 딱히 덩치가 우락부락하거나 검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데 어떠냐는 생각을 했는지 한 놈이 인상을 험상궂게 찌푸리며 앞으로 나서서 카엘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쳤다. 아니, 치려고 했다. “ 이 새끼가 지금 상황파악이 안되나 본데…어라?” 건달은 분명 눈앞에 있던 이를 치려고 내뻗었던 손이 허공을 휘젓자 순간 놀라서 하던 말을 멈췄다. 카엘은 어느새 그의 뒤쪽으로 가있었다. “ 쯧-귀찮은데 빨리 처리하고 내 사랑 감자튀김이나 사먹으러 가야지.” “ 뭐…!” “ 개미 쌍커풀만도 못한 잉여야 바이바이.” 빠악! “ 컥!”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건달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동료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본 것을 믿을 수 없어서 작은 눈알을 커 보이게 부릅떴다. 카엘의 오른손이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건달의 뒷목을 쳐서 기절시킨 것이다. 그 스피드와 놀라움에 잠깐 굳어버린 사이, 카엘의 손이 차례차례 나머지들을 마저 기절시켰다. 털썩. 마지막 한 놈까지 바닥에 널브러뜨리고 카엘은 손을 탁탁 털었다. “ 식전 운동했네. 자 그럼 감튀를 먹으러 가 볼까나-.” 카엘이 골목을 빠져나가자, 남은 것은 기절한 건달들 일곱 명 뿐이었다. “ 예?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 카르나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인 유리엔은 간만에 가진 제 아버지와의 티타임에서 마시던 차를 뿜을 정도의 폭탄선언을 듣고 말았다. 그녀의 아버지인 황제는 태연한 표정으로 했던 말을 반복했다. “ 음? 이해가 안 가느냐? 그러니까 이제 넌 몸만 들고 출발만 하면 된다. 이미 준비는 다 해두었으니 말이다.” “ 아버지!” 찻잔을 든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방금 들은 말을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황제는 그녀에게 내일 당장 뮤리엔 제국으로 출발하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그것도 무려 뮤리엔 제국 황태자와 자신의 정략결혼을 위해서! “ 말도 안돼요! 전 남자가 싫습니다. 그런데 정략결혼이라니요!” “ 어차피 해야 할 결혼이다. 차일피일 미루면서 노처녀로 늙어죽을 생각이 아니면 잠자코 가거라.” “ 차라리 노처녀로 늙어죽겠어요! 제게 남성혐오증이 있다는 건 아버지께서도 아시지 않으세요? 전 절대 못 갑니다! 안 가요!” “ 시끄럽다. 잔말 말고 가라면 가!” “ ……!” 유리엔은 입을 다물었다. 이미 제 아버지가 마음을 먹었다면 자신으로서는 돌릴 수 없었다. 이상한 데에서 절대 꺾이지 않는 고집을 지닌 자신의 아버지였다. 결국 유리엔은 한수 접기로 했다. “ …좋아요. 내일 아침에 출발인가요?” “ 그래. 가는 데 시간이 제법 걸릴 테니까 피곤하지 않도록 충분히 쉬어두도록 해라.” “ …알겠습니다.” 그녀는 다른 쪽으로 이 난관을 타개하기로 했다. 파혼이든 이혼이든 자신이 정략결혼 상대 쪽에서 먼저 자신을 거부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뮤리엔 제국의 황태자가 어떤 남자인지는 모르지만 창피를 주던 진상을 떨던 어느 쪽이든 해서 반드시 자신과는 절대 결혼할 수 없다는 말을 내뱉도록 만들고야 말 것이다. 유리엔은 결심을 다졌다. “ …뭐? 정략결혼?” “ 그렇습니다.” “ 흐음-.” 제론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카엘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나 서류를 찢어 버릴까봐 미리 한쪽으로 치워두었고, 주변에 던지거나 부술만한 물건은 없는지 사전에 점검을 한 뒤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었다. 안 그래도 성격 더러운 이 인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서 심장이 막 두근거리는 게 터질 지경이었다. 카엘은 동시대에 다시없을 거라고 찬사 받는 희대의 꽃미남이었다. 게다가 황태자라는 지위에 천재적인 검술에 대한 재능마저 가지고 태어난 그야말로 엄친아인지라, 당연히 여자들이 끝없이 줄을 섰다. 그러나 나풀거리는 드레스를 입고 보석을 주렁주렁 단 채 화장을 떡칠하고는 예쁜 척 착한 척 온갖 내숭을 떨며 앵겨오는 귀족영애들은 카엘에게있어서 단지 귀찮음의 대상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래서 카엘에게 접근한 귀족영애들이 자연스럽게 하나둘 그의 직설적인 화법에 모욕감으로 얼굴을 붉히며 떨어져 나간 것이 어느덧 수십이 훌쩍 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놈의 스펙이란 게 뭔지 매번 카엘에게로 전해지는 연서는 하루에도 몇 통씩 줄을 있는 상황이었다. 자신을 향해 마음을 끓이는 여인네들이 넘쳐나던 말던 정작 카엘 본인은 전혀 여인을 곁에 둘 생각이 없었다. 그런 카엘이 방금 자신이 얘기한 ‘카르나 제국 유일한 황녀인 유리엔 황녀전하께서 정략결혼 때문에 곧 이곳으로 오신답니다’라는 말을 듣고도 생각보다 잠잠한 것에 제론은 슬슬 의문을 가졌다. “ …난동 안 피우십니까? 웬일로 조용하신지.” “ 뭐?” “ 혹시 유리엔 황녀전하가 마음에 드시는 겁니까? 하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주변 여러 나라들에게까지 소문이 나신 분이니 그 정도면 전하의 배필로도 어느 정도 괜찮…….” “ 무슨 헛소리야? 내가 지금 난리 피운다고 달라질 게 없으니까 가만히 있는 거지. 이미 출발했고 오늘 중에 도착이라며?” “ 아, 네. 그렇죠.” “ 흠-이왕이면 되게 가녀리고 마음이 여린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 헐. 그런 타입이 취향이셨습니까?” 카엘은 제론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어떻게 골려주면 그 여자 쪽에서 먼저 절대 결혼 못하겠다고 나오려나?’ 자신이 좋다고 엉겨 붙던 여자들마저 말 몇 마디로 떨궈낸 카엘이었다. 하물며 정략결혼 때문에 오는 여자쯤이야. 자신이 싫어서 도저히 이 결혼 진행시킬 수 없다고 말하게 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다. 카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어떻게 될 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었다. “ 뮤리엔 제국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런데…….” “ -?” 제론은 진땀을 삐질거리며 흘렸다. 처음에 유리엔의 눈부신 외모에 깜짝 놀랐던 것도 잠시, 몇 시간 전에 카엘이 또다시 바깥으로 증발해버렸다는 사실이 떠올라서였다. 카엘은 적절하게 유리엔이 도착하기 직전에 도망쳤다. 유리엔이 도착하면 곧바로 서로 인사시키려 했던 황제의 계획은 그야말로 거품이 되어 흩어져버린 셈이다. 카엘의 행동은 어떻게 보면 유리엔에 대한 명백한 무시였기 때문에 제론은 좀처럼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그러다 그는 불쑥 충동적으로 이런 말을 뱉어버리고 말았다. “ 수, 수도를 구경하러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 네?” 이런 병신. 이게 무슨 헛말이냐. 제론은 자신의 입을 때리고 싶어졌다. 며칠간의 여정 때문에 지쳤을 사람에게 다짜고짜 수도 구경이라니? 당장 쉴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다고 말을 정정하려는데, 유리엔이 한발 빨랐다. “ 좋군요.” “ …예?” “ 안 그래도 뮤리엔의 수도는 아름답고 번화하기가 유명하다고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한동안 마차에만 있느라 답답했는데 직접 구경해보는 것도 괜찮겠네요. 지금 가죠.” “ 아, 네.” 얼떨결에 제론은 유리엔과 그녀의 호위기사와 함께 수도 구경을 가게 되었다. 그냥 가기에는 유리엔의 외모가 너무 눈에 뛰어서 후드까지 급히 공수했다. 제론은 멍한 기분으로 앞장섰다. ‘ …이렇게 된 거 어차피 황태자전하도 마을에 계실 것 같은데 둘이 우연히 만나기라도 하면 재밌겠네.’ 별 기대없이 한 생각이었다. 설마 그 넓은 데에서 무슨 끈으로 이어진 사이도 아니고 우연찮게 덜컥 만나랴 싶었다. 그런데 진짜로 만났다. 일의 시작은 수도에 도착해서 시장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구경하던 도중에 일어났다. “ 아오, 목이야…넌 괜찮냐?” “ 말도 마라. 누가 목 뽑았다가 다시 끼워놓은 것 같다. 어떻게 아직도 아프냐? 하필 재수 없게 그런 놈에게 걸려서…….” “ 젠장 할, 생긴 건 후드나 푹 눌러써가지고 음침하게 생긴 녀석이-.” “ 어? 얌마 잠깐 저것 좀 봐봐.” 욱신거리는지 목 근처를 두드리며 걷던 한 무리의 건달들이 우연찮게 유리엔을 발견했다. 그들은 바로 얼마 전 겁도 없이 카엘을 털려고 했다가 도리어 자기들이 한 대씩 얻어맞고 뻗었던 장본인들이었다. 한 건달이 눈살을 팍 찌푸리며 유리엔을, 정확히는 그녀가 쓰고 있는 후드를 가리켰다. “ 저 후드 낯익지 않냐?” “ 그러고 보니 그때 그 놈 거랑 비슷한데.” “ 아놔! 후드만 봐도 열 받네? 막 열 받네? 몸집을 보니까 여자인 것 같은데 가서 쟤라도 좀 패줘야겠다.” “ 기다려봐.” “ 왜 임마!” “ 옆에 서 있는 놈 두 명 보이지? 허리에 검차고 있다. 아무래도 호위기사거나 그런 것 같은데.” “ 헐. 망할…괜히 건드리려고 했다간 개털렸겠구만. 칵, 퉤. 재수가 없으려니.” 그러면서도 영 미련을 버리지 못하겠는지 그들은 유리엔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어슬렁거렸다. 그 낌새가 유리엔에게도 보였다. 그녀는 약자만 골라서 괴롭히는 저런 무리들을 꽤나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게다가 그런 놈들이 자신을 노리기까지 하니 몇 배는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서 그녀는 제론이나 아니면 제 호위기사를 시킬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손으로 직접 훈계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 제론 경, 그리고 찰스 경.” “ 예?” “ 부탁이 하나 있어요. 저쪽 가게에 가서 닭꼬지를 하나 사와주실 수 있나요? 갑자기 땡기네요.” “ …예?” “ 어서요.” “ 아, 알겠습니다.” 둘은 갑작스런 유리엔의 부탁에 황당해하면서도 순순히 꼬지를 사기 위해 가게로 갔다. 바로 근처에 있는 노점상이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그녀를 두고 간 것이다. 계속해서 유리엔이 있는 쪽을 힐끔거리던 제론과 호위기사가 꼬지를 주문하고 값을 지불하기 위해 완전히 고개를 돌린 순간 그녀는 재빠르게 가장 가까이 있던 좁은 골목으로 빠졌다. 마침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건달들은 마침 기회다 싶어 분주하게 유리엔을 뒤따라 골목으로 들어섰다. “ 어이, 거기 후드 쓴 아가씨~아가씨 맞지?” “ 크크. 이 골목이라면 진짜 아무도 안 오지.” 조금만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높은 벽이 나타나면서 길이 막혔다. 유리엔이 뒤를 돌자 서너 명의 건달이 음침한 미소를 지으면서 어슬렁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후드 안에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혹시나 해서 가져 온 작은 사이즈의 검이 제자리에 잘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검은 멀쩡히 있었다. 유리엔은 다른 일반 귀족 영애들과는 조금 달랐다. 우선 남자와 엮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때문에 공공연히 남성혐오증이라고 주변에 알리면서 일부러 사교계에는 잘 나가지 않았다. 그 대신 남는 시간에 그녀는 독서나 티타임 같은 시간을 갖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검술을 연마하는 것에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단순히 체력단련을 위해 시작하게 되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예상 외로 특출난 재능을 보인 탓에 갈수록 더욱 심취하여 배우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유리엔의 실력은 어느덧 무기도 없는 삼류 건달 서넛 정도는 가볍게 이길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그런 것을 알 리 없는 건달들은 유리엔이 가만히 있는 것이 여유로움에서 나오는 차분함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한 채, 단순히 그녀가 겁에 질려서 굳었다고만 믿고 있었다. 만약 후드를 벗겨서 얼굴이 예쁘다면 이런 짓 저런 짓 심의에 걸리는 행동까지 하려고 계획 하면서 그들은 희희낙락 유리엔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허리춤에 있는 검을 단단히 손에 쥔 유리엔이 막 후드를 벗은 때였다. “ 어이, 잉여들-.” “ ?!” 낯선 목소리는 위에서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위로 고개를 치켜들자, 높다랗게 솟은 벽 위에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이의 모습이 보였다. 유리엔과 비슷한 후드를 쓰고 있는 그는 바로 카엘이었다. 건달들이 뜨악한 표정으로 위를 삿대질했다. “ 헉!” “ 넌 그때 그…!” 탁! 카엘이 가볍게 아래로 뛰어내려 유리엔과 건달들의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건달들이 반사적으로 주춤 뒤로 한발자국 물러서자 카엘이 그만큼 앞으로 한발자국 걸어서 다시 거리를 좁혔다. “ 우와, 이런 데에서 다 만나고 우리 수도 참 좁다 그치?” “ 제, 젠장.” “ 그런데 잉여들아, 방금 보니까 또 그때처럼 삥 좀 뜯으려고 하는 것 같더라? 응? 내가 쓰고 있는 거랑 비슷한 후드를 썼던데 에이 설마 그때 나한테 좀 맞는 거에 대한 보복 심리는 아니었지? 그렇지? 에이 아니지?” “ 그, 그렇다! 오해다! 우린 그저 길을 물어보려…….” “ 길 물어보려 막다른 골목으로 어슬렁 어슬렁 음흉한 스멜을 풍기면서 기어들어오냐? 아니냐고 물어봤다고 곧바로 아니라고 구라를 치다니 거 양심도 없는 것들이네. 역시 그때 맞은 걸로는 많이 부족했지?” “ 아니…!” 빠악-! 카엘은 건달들이 더 이상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곧바로 엄청난 스피드로 가장 앞에 있던 놈을 후려쳤다. 그런데, 저번과는 좀 다른 것에 이번에는 손이 아닌 발을 사용했다. 그리고 얻어맞은 건달의 포즈도 그때와는 틀렸다. “ ……!” “ ……!?” “ ……!!” 동료 건달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들의 눈이 차마 방금 본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사정없이 흔들렸다. 카엘의 바로 맞은편에 있는, 방금 전 울려 퍼졌던 빠악 소리의 주인공인 건달1은 어정쩡하게 등을 구부린 채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중요부위를 두 손으로 감싼 채. “ 서, 설마…….” “ 이럴 수가…!” 동료 건달들의 경악을 뒤로 하고 건달1은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털썩. 그가 바닥에 눕자마자 장내는 적막이라도 해도 좋을 정도의 침묵으로 가득 찼다. 충격과 공포로 꼼짝없이 굳어있는 다른 건달들을 보며 카엘이 쓰고 있던 후드를 휙 뒤로 젖혔다. 그리고 동시에 씨익 웃으며 말했다. “ 너네 나 모르냐?” 건달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기존의 경악에 또 다른 경악이 덧씌워졌다. 게다가 후자의 경악은 앞의 것보다 몇 배는 더 컸다. 마치 타오르는 불길을 보듯 강렬한 붉은 색의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그리고 같은 남자마저 심장이 떨리게 만드는 인간이 아닌 듯이 아름다운 외모. 거기다 가장 중요한, 보는 이의 시선을 빼앗는 현란한 고자킥 기술까지. “ 아, 아니!! 그렇다면…!” “ 너는! 아니 다, 당신은…!!” 건달들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니 믿고 싶지 않다는 듯. 그들은 마침내 자신들이 누구를 건드렸던 것인지 깨달았다. 뒷골목 건달들 사이에서는 이미 전설이 된 존재. ‘그.’ 바로, “ 마, 마성의…” “ 에그브레이커!!” 마성의 에그브레이커. 그가 후드를 벗는 순간 당신들의 에그와 작별을 고하라. 유행어처럼 떠도는 그 말이 건달들의 뇌리에 섬광처럼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카엘의 신형이 흐릿해진다싶더니 순간 그들의 눈앞에 벼락이 내리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아… 안녕…나의 에그……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 털썩, 털썩. 건달들은 차례로 문명했다. “ …우와.” 건달들을 단죄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골목을 벗어나려던 카엘은 문득 뒤에서 조그맣게 들려온 감탄사에 걸음을 멈췄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미성이었다. 그러나 무심코 뒤를 돌아본 카엘의 눈을 붙잡은 것은 그 아름다운 목소리도 눈부신 외모도 아닌, 바로 유리엔이 들고 있던 검이었다. 딱 봐도 곱게 자란 티가 나는 여인이 검을 들고 있는 것은 처음 봤다. 게다가 자세를 보니 영 익숙한 것이 그걸 일상처럼 휘둘러왔다는 소리였다. 어쩐지 비명을 지르지 않더라니 저런 건달 몇 놈은 문제도 없다는 뜻이었나. 카엘은 뜻밖의 상황에 피식 웃었다. 유리엔은 유리엔 나름대로 놀라서 카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수려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건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시선을 끈 것은 불과 조금 전 보았던, 현란하다 못해 아름답기까지 하던 고자킥의 기술. 그것은 마치 예술과도 같았다. 짱 잔인하다. 남자주제에 같은 남자들의 에그를 문명시키다니 진정 이시대의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었다. 저런 사람 처음 본다. 하지만 그 기술만큼은 배우고 싶었다. “ …아, 저기. 일단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됐어. 보니까 필요도 없는 일을 한 것 같네.” “ 아닙니다.” 카엘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딱히 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괜히 자리를 뜨고 싶지 않은 이 괴상한 심리는 대체 뭐란 말인가. 이건 자신답지 않다. “ 뭐…앞으로는 저런 놈들 만나면 그 검으로 잘 찔러 주라고. 아니면 방금 내가 한 것처럼 끝장내던가.” “ 아, 저기…!” 갔다. 유리엔이 뭔가 말을 꺼내려했을 때는 카엘은 이미 휙 뛰어서 골목을 빠져나간 뒤였다. 그러나 유리엔은 묘하게 남아있는 여운 때문에 여전히 그곳에 서 있었다.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둘이었다. 그 둘이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만나서 깜짝 놀라며 서로를 삿대질 하게 되리라는 건, 그때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끝. 짧게 하나 더 19번. 유리엔이 고자킥을 마스터하지 못했다면? * 휙! 길게 뻗은 다리가 허공을 갈랐다. 충분히 빠른 속도와 각도, 그리고 끝부분에서의 절묘한 꺾어짐과 가속. 그 모든 것들이 완벽해 보였으나 막상 그 발차기를 날린 소녀의 표정은 그닥 밝지 못했다. 뭔가가 부족했다. 단순히 겉보기에는 완전한 듯 보이지만 그녀의 예민한 감각은 이것이 다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완성해야 한다. 이 기술, 반드시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것이다. “ 유리엔, 딸아! 너 뮤리엔 제국으로 정략결혼 갈 준비해라!” “ 이 기술을 마스터하기 전 까지는 절대 그 어디에도 갈 수 없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그녀의 강경한 태도에 황제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마치 그 완고한 목표를 위해서라면 심지어 목숨이라도 내걸 만큼 확고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황제는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그녀의 뜻을 위해주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소녀는 그 어떤 이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만의 공간에서 그 기술을 연마할 수 있었다. 휙! 휙! “ 아냐…이게 아니야! 대체 뭐지? 뭐가 부족한 거지?!” 밤이고 낮이고, 봄이고 여름이고, 낙엽이 쏟아져도 폭우가 내리쳐도 소녀는 끊임없이 기술을 연마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도 보답해주지 않는 무정한 기술은 매번 그녀에게 미묘한 아쉬운 감각만을 남겨줄 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녀는 지쳐갔고 처음의 그 타오르던 열정을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소녀는 도저히 이대로 무너지는 나약한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마침내 참지 못한 소녀는 무작정 황궁 밖의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해답을 얻었다. 그녀에게 부족했던 것은 실전이었다. 매번 기계적으로 같은 강도와 같은 각도로만 연습해오던 소녀는 막상 실전에는 각기 다른 각도에서 올려 차기를 해야 최적의 효과를 얻게 된다는 단순한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간단한 진리를 깨달은 소녀는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진정으로 원하던 경지를 손에 넣게 되었다. 오랜 시간 소망하고, 갈망해온…꿈에 그리던 고자킥 마스터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 난 이제 여한이 없어.” 그녀의 마지막 말은 그것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소녀는 더 이상 속세에 얽매여 있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렇게 소녀는 사라졌고, 그 뒤로 그녀를 보았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검은머리황녀님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 ================================ # 101편 # 소제목 : 갑자기라는 건 원래 예고가 없어. (7) ================================ 하르셈 백작가의 장녀이자 유리엔의 유일무이한 소꿉친구인 카레니아 하르셈(이하 카린)의 간덩이는 커진 지 오래다. 게다가 그녀의 저택은 유리엔에게 있어 항상 오픈 된 공간으로 취급되어왔다. 따라서 카린은 아무런 사전연락도 없이 반년 만에 절친이 불쑥 저택으로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당황하여 소금을 뿌리거나 욕하며 대문을 잠가버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며 차분하게 그녀를 맞아주었다. 어차피 유리엔의 갑툭튀는 이미 익숙하다. 향기로운 차를 포함한 맛있어 보이는 다과가 준비된 탁자를 사이에 두고 카린과 마주앉자마자, 유리엔은 의자에서 흐물흐물 몸을 늘어뜨렸다. 누운 건지 앉은 건지 구분이 안 가는 그녀의 자세에 카린이 픽 웃었다. “ 생각보다 잘 지내다 왔나보네. 뮤리엔 제국에서.” “ 뭐가? 왜?” “ 예상을 훨씬 넘어서 이제야 돌아왔잖아.” “ 음…….” 벌써 반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지났다. 사실 유리엔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의 상식 내에서, 유리엔은 뮤리엔 제국에 도착하자마자 그 나라 황태자를 엿 먹이고 길어도 일주일 안에 파혼했다는 소식을 들고 기뻐하며 고국으로 돌아왔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그 자연스러운 전개를 깨고 이렇게 오랫동안이나 눌러 붙어있다 오다니. 게다가 어쩌면 지금 돌아온 것도 자의지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아무래도 그 나라의 황태자가 만만찮은 사람이었으려나. “ 게다가 또 갈 거잖아?” “ 지금은 아냐.” “ 알아. 오년 쯤 뒤에나 가겠지.” “ …뭘 그렇게 잘 알아?” 한 마디도 먼저 말해준 것이 없는데도 카린은 속속들이 유리엔을 꿰고 있었다. 하긴 그래서 소꿉친구이고, 그 때문에 유리엔은 생각이 복잡하거나 할 때 이곳을 찾는다. 모국의 전통 차를 한 모금 들이키며 유리엔이 늘어뜨린 자세를 바로 했다. “ 오년…길기도 하네. 아빠가 고생 좀 했겠고만.” 오년이라는 기간은 현재 카르나 제국 황제의 권력을 유리엔의 모친이 서거한 황제 대신 대리 행사할 수 있는 최대 한계치의 기간이었다. 기존에는 3년이었던 것이 얼마 전 5년으로 수정되었다. 유리엔은 아주 미세한 것에서 제법 큰 것까지, 조금씩 드러나는 제 아버지의 안배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저를 위한 것인지 동생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제국을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유리엔은 그것에 만족했다. 자신이 할 일은 이제부터 길 다면 긴 오년이란 시간동안 열심히 뛰어다니는 것뿐이다. 자신이 원하는 평화로운 삶과 제국의 안녕과 사랑하는 동생을 위해서. “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어두고 튈 거지?” “ 당연. 도와줄 거지?” “ 물론.” 당연한 일이지만, 하르셈 백작가는 유리엔의 편이 되었다. 그녀는 쓸데없이 유리엔에게 왕이 되라거나 하는 권유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친구로서, 유리엔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여 선택한 길에 최대한 도움을 주고 싶을 뿐이다. 카린은 준비해 놓은 다과를 하나 집어먹었다. 바삭거리며 과자가 달콤한 맛을 냈다. 약간의 정적이 흐르는 동안 카린은 유리엔의 표정을 살폈다. 분명 유리엔은 할 말이 더 남아있었다. 다만 할까 말까를 망설이고 있었다. 눈에 훤히 보인다. 카린은 재촉하기보단 기다리는 것을 택했다. 인내심만큼은 발군인 그녀가 아니던가.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유리엔이 드디어 입을 연 것은 탁자 위의 차가 식어서 미지근한 맛을 낼쯤이었다. “ 카린.” “ 응?” “ 그…있잖아. 뭐라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그런 게 있는데, 그게 있잖아.” 뭐 임마. 답답함에 빡칠 만도 하건만, 카린은 여전히 차분한 표정과 미소로 유리엔의 말이 제대로 된 내용을 포함 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미리 언급했듯 카린의 인내심은 무척 뛰어났다. “ 그러니까…옆에 뭐가 있었어. 뭐 그냥 개미나 빵셔틀처럼 같잖은 건데 아무튼 옆에 계속 붙어있었다고 쳐. 그런데 그렇게 오랫동안 있었던 건 아냐.” “ 응.” “ 그러다가 걔가 없어졌어. 원래 없었으니까 그냥 원 상태로 돌아왔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그렇게 여겼는데 이상하게 갑자기 뭔가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느껴지는 거야.” “ 음.” “ 좀 어색하다고 해야 하나? 왜 그럴까? 그냥…원래 다 그런가?” “ 흠…….” 카린은 웃음을 참았다. 일단 놀람과 신기함과 웃김과 재미로 빵 터지려는 자신을 억눌렀다. 쳐 웃었다간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우선 진정을 하자. 마음의 평화를 찾은 카린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유리엔의 고민상담 비슷한 것에 대한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 러브러브네.” “ …뭐?” “ 좋아하는 거네.” “ 아냐!!” 유리엔이 벌떡 일어나며 다과를 엎었다. 아무리 난폭한 그녀라지만 먹을 것만큼은 평소에 소중히 다루던 유리엔의 돌발행동에, 카린은 약간 놀라며 나는 과자들의 사정거리 밖으로 잽싸게 몸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카린은 말을 이었다. “ 지금 왠지 어딘가가 허전하잖아? 평소랑 다른 것 같다고 느껴지고. 그건 다 걔가 없어서 그런 거 아냐?” “ 그래도!!” “ 좀 들어봐. 없으니까 이상하잖아. 그래서 곁에 있었으면 좋겠고. 그게 좋아하는 거야. 주변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좋아하는 게 바로 그런 느낌이야.” “ …헐. 거짓말.” 당황해한다.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면서 조금씩 넘어오고 있었다. 카린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경험을 하는 중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유리엔이, 고자킥 같은 거나 마스터하고 아무리 잘난 인간이 들이대도 발로 까기나 해왔던 유리엔이 무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사실 확실한 건 아니었다. 옆에 있다가 갑자기 없어져서 허전함을 느낀다고 무조건 좋아한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카린은 이왕이면 좋아하는 쪽으로 밀고 싶었다. ‘ 재밌잖아.’ 그렇다. 재밌으니까. 살면서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유리엔이 사랑문제로 고민하는 걸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기회였다. 카린은 신뢰감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유리엔에게 쐐기를 박았다. “ 사실 나도 얼마 전에 사귀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깨닫게 된 계기가 너랑 비슷해. 확실해. 넌 걔를 좋아하는 거야.” 쿵.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유리엔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저건 아무리 들어도 개소리 같다. 그런데 왜 한편으론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어차피 지금까지 누군가를 손톱 갈라진 틈새만큼이라도 좋아해본 경험이 없으니 저 말이 맞는 건지 틀린 건지 그녀가 알 턱이 없었다. 결국 유리엔은 설득 당했다. 마치 주변에 운석이 떨어지는 것 같은 거대한 충격과 함께. ================================ # 102편 # 소제목 : 갑자기라는 건 원래 예고가 없어. (8) ================================ -기사와 아가씨- “ …….” 유리엔은 왠지 제목을 읽는 것만으로도 손발이 없어져버릴 것만 같은 두꺼운 로맨스 책의 겉표지와 몇 초간 눈싸움을 한 뒤 그것을 조심스레 펼쳤다. 자 이제 새로운 세계로 출발할 시간인가. 등장인물은 잘생기고 뛰어난 실력의 기사와 아름답고 상냥한 마음씨의 귀족 아가씨였다. 게다가 둘은 무려 소꿉친구라는 설정. 유리엔은 심호흡을 한 뒤 책을 집중해서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궁금한 게 있어. -뭔데? 로젤라는 마주앉아있는 미하엘의 눈을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는 올곧아 보였다. -왜…항상 날 도와주는 거야? 미하엘은 로젤라가 크고 작은 위험에 처했을 때, 언제나 우연처럼 나타나 그녀를 도와주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미하엘은 로젤라에게 없어선 안 되는 존재가 되어있었다. 만약 이제 와서 그가 떠난다면 로젤라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질문에 미하엘은 웃었다. 그는 그것이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어째서 당연한 걸 묻는 거야. -당연하다니? -왜 몰라? 널 좋아하기 때문인걸. -뭐…? -널 좋아해, 로젤라. 그렇기 때문에 난 널 도울 수밖에 없는 거야. 네가 위험에 처하거나 곤란에 빠지는 건 싫으니까. 너를…정말로 좋아하거든. “ 끄아앙아악와악!!” 쫘악. 흠칫. 린이 뮤리엔 제국에 남은 관계로 새로이 유리엔의 전속이 된 시녀는 깜짝 놀랐다. 소녀의 감성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각국에 출판된 유명한 로맨스소설을 읽다말고 유리엔은 갑자기 괴상한 비명소리와 함께 그것을 찢었다. 그 페이지만 뜯어낸 것이 아니라 무려 책을 찢었다. 얇지도 않은 책이 단지 악력만으로 두 동강이 났다. 시녀는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유리엔 또한 그에 못지않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 못 읽겠어!’ 차마 못 읽겠다. 저걸 다 읽었다가는 자신은 죽었을 것이다. 그녀는 생존본능에 입각하여 살기위해 책을 찢었다. 좋아한다는 게 저런 개토나오는 거라니 우와 상상이상이다. ‘ 설마 다른 책도 다 저럴까.’ 생전 로맨스라고는 읽어본 적이 없으니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막연히 다 저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근거는 전혀 없이. 결국 유리엔은 고민 끝에 도전해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왜 인류의 발전은 그들의 무한한 도전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유리엔은 굳게 마음먹고 시녀에게 말했다. “ 책을 몇 권 더 가져다줄래?” “ 네, 네?” “ 이거랑 비슷한 장르의 책이 좀 더 필요해서.” “ 아, 네.” ‘ 근력운동이라도 하시려는 걸까.’ 과연 유리엔은 오늘 밤 몇 권의 책을 끝장낼 것인가. 그리고 밤늦도록 방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 어쩐지 오늘따라 상당히 초췌한 듯 보이십니다, 황녀전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는지.” 눈 밑의 거뭇거뭇한 다크써클이 그대로 보인다. 화장을 극도로 싫어하는 유리엔이었기에 흰 피부에 자리 잡은 거뭇한 그것은 조금도 감추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예르지엔 top 4중 그나마 가장 머리가 개념이 탑재되었다고 여겨지는 금발머리의 사내, 옐윈은 걱정스러운 어조로 유리엔의 안부를 걱정하는 말을 던졌다. 그의 말에 유리엔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 입 닥쳐.” “ 네.” 옐윈은 까라면 깔 줄 아는 사나이다. 그 때문에 예전에 유리엔으로부터 오래 살 놈이라는 칭찬을 들은 적도 있었다. 어째 자랑은 아닌 것 같지만 어찌됐든 옐윈은 입을 다물었다. 그 대신에 붉은 머리의 사내, 레윈이 나섰다. “ 황녀전하.” “ 너 지금 보니 머리색 왜 이렇게 짱나냐. 케찹이냐.” “ 예?” “ -아냐.” “ …….” 황녀전하가 이상하다. 아니 물론 평소에도 그닥 정상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지금은 그 성격파탄의 정도가 더 심해졌다. 레윈 또한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다음 타자로 나온 것은 오렌지색 머리카락을 지닌 사내, 오윈이었다. “ 황녀 전…….” “ 그러고 보니 카라멜 중에는 오렌지 맛도 있다지? 색도 주황색이라며.” “ 예?” “ 왜 하필 카라멜이야. 짱나게.” “ 저, 전하?” “ -아냐.” “ …….” 오윈은 유리엔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오늘따라 왜 저러신다냐. 우리도 모름. 마지막 타자는 초록색 머리의 사내, 그윈이었다. 앞서 줄줄이 입 닫고 꺼지는 모습들을 전부 봐왔기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차례가 돌아왔을 때 저절로 긴장을 탔다. 그러나 유리엔은 이번에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다만 애초에 하려고 했던 질문을 꺼냈을 뿐이다. “ 아버지가 서거하시면서 군권을 실질적으로 쥐게 된 게 누구야? 그 둘인가?” “ 아, 네. 리밀리터 공작과 로텍트백작입니다.” “ 둘이 손을 잡아 반역을 일으킬 확률은?” “ 없습니다.” “ 왜?” “ 황제께서 서거하시기전 그들이 보였던 충성심이 하늘을 찌르는 수준입니다.” “ 여전한 아저씨들이네. 그럼, 아무래도 내가 둘에게 밉보이는 쪽이 더 빠르겠지?” 리밀리터 공작과 로텍트 백작은 높은 지위에 앉은 귀족이면서도 또한 뼛속까지 기사였다. 그들에겐 새로운 주군이 필요했고, 유리엔은 그것이 반드시 아딘이 되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현재 그 둘에게 있는 선택지는 유리엔과 아딘, 두 가지였다. 그렇다면 그 중 하나의 선택지와의 관계를 완전히 틀어지게 해버리면 자연히 그들은 남는 선택지로 움직일 것이다. 유리엔의 말에 옐윈이 고개를 내저으며 앞으로 나섰다. “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아딘전하께서 그 두 사람과 지닌 친분이 매우 높은 수준입니다.” “ 헤에? 아아, 아버지가 활약하셨겠네.” “ 그렇습니다. 지난 반년 간 정말로 부지런히 엮으셨습니다.” “ 바쁘셨겠네. 흠…그럼 혹시 중립에 설 만한 여지가 다분했던 귀족들도?” “ 예. 그들 또한 대부분이 아딘전하와 안면이 있습니다.” 유리엔은 작게 웃었다. 애쓴 아버지 덕에 딸자식 덜 고생하게 생겼다. “ 5년이나 걸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아냐, 걸려. 아딘이 아직 준비가 안 되어있거든.” 그녀의 남동생은 너무 어렸다. 게다가 알게 모르게 유리엔에게 많은 것을 기대고 있었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독립시켜야만 했다. 그것은 앞으로 유리엔이 해야 할 많은 일들 중 하나였다. “ 하긴 그렇군요. 앞으로는 살면서 최고로 바쁘시겠습니다.” “ 너희도.” “ 저흰 원래부터 항상 바빴습니다. 구르느라 정신이 없었거든요. 무슨 놈의 일이 휴가도 하루 없고 말입니다. 휴가만 며칠 있었어도 지금 저희들이 이렇게 외롭게 솔로로 지내지는 않았을…….” “ 그래서? 싫다고? 꺼지겠다고?” “ 일과 연애하겠습니다.” 노동월드 5년 자유이용권을 성인 네 분께서 끊으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레츠 고. 바람이 차가워졌다. 뮤리엔 제국의 겨울은 카르나 제국 보다는 조금 늦게 찾아온다. 그러나 그렇다고 보다 덜 춥거나 하지는 않았다. 뿌연 성에가 유리창을 덮었다. 하얗게 눈이 쌓인 정원을 창을 통해 쳐다보다가 제론이 시선을 돌렸다. “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 그래.” 카엘은 요즘 들어 집무실에서 살았다. 한 달? 그쯤 지났을까. 카엘은 마치 서류더미와 결혼한 사람 같았다. 여가시간 따위는 없었고 그나마 쉴 때라고는 이 날씨에 연무장에서 기사들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 제론은 괜히 코끝이 찡했다. 님 왜 그러세여…마치 실연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 왜 안 잡으셨던 겁니까? 정말로 그때 말씀하셨던 이유입니까?” 주어도 없고 목적어도 없다. 그러나 카엘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제론은 유리엔 얘기를 하고 있었다. “ …꼭 알고 싶냐.” “ 사실 반쯤은 짐작하고 있습니다.” “ 근데 왜 물어.” “ 나머지 반이 궁금합니다.” “ …….” “ 못 잡으신 겁니까?” 안 잡은 게 아니라. 카엘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침묵의 뜻은 긍정이었다. 유리엔이 모국으로 떠날 당시 카엘은 유리엔을 잡지 않았다. 잡기는커녕 그 시늉도 하지 않았다. 예의상이라도 잡는 척 정도는 할 수 있는 건데도 한 마디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당시에는 이유를 잘 몰랐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알 것 같았다. “ 무서웠거든. 아마도.” 거절이 무서웠다. 어차피 자신이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받는 게 두려웠다. 고작 그런 게 무서웠다는 건, 상대방이 갖는 의미가 그만큼 크다는 소리다. 크흡. 제론은 다시 코끝이 찡해져왔다. 아니 이젠 눈가도 시큰거린다. 카엘은 내버려두고 자신 혼자만 루네와 알콩달콩 잘 사귀고 있는 것이 아주 약간 미안했다. 힘내세요. 그래도 완전 실연은 아닐 거예요. 제론은 마음으로 카엘을 응원했다. 그리고 겨울이 지났다. 봄이 지나고 너무 더워서 사람 여럿 빡치게 하는 여름도 지났다. 미친 날씨가 가을을 건너뛰고 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 # 103편 # 소제목 : 아직도 멀었네요. (1) ================================ * “ 어이쿠야.” 시녀는 형형색색의 편지더미를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선물까지 차곡차곡 쌓아놓고 나니 앞이 안 보일 지경이다. 어차피 편지들은 땔감대용으로, 선물들은 황궁의 시녀들에게 랜덤으로 뿌려질 텐데 과연 저걸 보내는 놈들은 그걸 알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처음 3년 동안은 이러지 않았다. 선황의 서거 후 한동안 주변국들은 하나같이 눈치를 보듯 조용했다. 그들이 보기에 카르나 제국은 남매간의 권력다툼이 극에 달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고 따라서 누가 왕이 될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가능한 한 정보를 수집하며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던 중 하나 둘 편지와 선물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시간이 제법 흘러 황제의 자리에 유리엔이 아닌 그녀의 남동생이 앉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은연중에 퍼져나갔을 때부터였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웠던 편지의 내용과 선물이 갈수록 과감해지더니 요즘 들어서는 아예 대놓고 노골적인 낯을 띠었다. 시녀는 저번 주 즈음에 왔었던 편지를 호기심에 읽어보고는 넌더리를 쳤던 기억을 떠올렸다. “ 황녀전하를 무슨 물건 취급하고 있어요. 이 미친놈들이.” 시녀는 작게 투덜거리며 조심스레 찻잔을 내려놓았다. 반년쯤 전부터 유리엔은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는 시간이 되면 꼭 한잔씩 차를 마시는 습관이 생겼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 인내심을 기르기 위한 시간일지도 모르겠다고 시녀는 생각했다. 넓게 난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던 유리엔이 시선을 돌렸다. “ 읽어봤어?” “ 이번에 온 건 아직요. 그치만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을 테니까요.” “ 그런 작자들이니까.” “ 아오 진짜 짱나요. 확 찾아가서 그냥 다 고자로 만들어버리고 싶네.” 시녀의 말투는 약 5년 전의 유리엔을 떠올리게 했다. 유리엔은 웃으면서 찻잔을 들었다. 몇 년 사이에 유리엔의 참을성은 전과 비하면 마치 바다와 같이 넓어졌다. 예전이었다면 읽자마자 전쟁을 선포했을만한 편지의 내용에도 지금은 그저 편지를 곱게 찢는 것으로 넘어갔다. 상상도 못할 변화였다. 요즘 들어 차곡차곡 쌓여가는 편지들의 내용은 하나같이 사람을 열 받게 하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뉘앙스는 하나같이 비슷했는데, 요약하자면 이제 곧 갈 곳도 없는 처지가 될 유리엔을 자신이 받아주겠으니 얌전히 시집오라는 뜻이었다. 그나마 처음에는 사랑하니 어쩌니 하는 말들로 포장하기라도 했었으나 슬슬 즉위식이 가까워지자 이젠 아예 막장이었다. 심한 것은 대놓고 ‘귀족들의 등쌀에 떠밀려서 어디 변두리 왕국의 늙은 왕에게 후궁으로 팔려가기 전에 젊고 지위도 높은 자기에게 오라’는 말을 담고 있었다. 거기에 덧붙여 얼굴이 아름다우니 특별히 예물은 받지 않겠다는 추신까지 있었다. 시녀로 하여금 순간적으로 빡돌아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편지였다. “ 참나 이쁜 건 알아지고 별 멍멍이들이…뭐 그래도 개중 아주 가끔씩은 멀쩡한 인간들이 있긴 하니까…황녀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즉위식은 이제 일주일을 앞두고 있었다. 유리엔의 남동생인 아딘이 황제가 된다는 것은 이제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시녀의 말은 다소 걱정을 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리엔의 미모는 몇 년 전보다 더 아름다워졌다. 이젠 예뻐도 너무 예쁘다. 그래서 더 걱정이었다. 고르고 골라서 환상의 원더랜드로 시집가도 모자랄 판에 온갖 잡것들이 너무 많이 꼬이고 들이대는 중이었다. 그러나 막상 당사자인 유리엔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이 편했다. 이제 갈 때가 된 것이다. “ 괜찮아. 갈 곳 있어.” “ 네?” 유리엔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겨울 내내 내렸던 눈은 벌써 거의 다 녹아있었다. 다른 어떤 때보다도 이번 봄은 빨리 찾아오고 있었다. “ 아참, 그러고 보니 벌써 정원에 눈이 다 녹았네요. 이번 겨울은 참 특이하게도 금방 지나간 것 같아요.” “ 그러게.” 어쩌면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건지도 모른다. 남은 일주일은 아무래도 무척 빠르게 흘러갈 것 같았다. 페듀린 공작가의 외동딸인 젤디아 폰 페듀린은 무려 6년 만에 모국 땅을 다시 밟았다. 어릴 적부터 제국 제일의 미모라고 칭송받았던 곳에 다시 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물론 어디에 있으나 외모에 관한 찬사는 항상 따라다녔지만 개중에서도 모국인 뮤리엔 제국은 특히나 더 의미가 깊었다. “ 카엘 오라버니는 여전하시겠지? 호호.” 그녀의 아버지인 공작은 황제와 친분이 제법 깊었다. 덕분에 젤디아는 어릴 적부터 자주 황궁에 드나들었는데, 그 과정에서 카엘과도 몇 번 사적인 만남을 갖게 되었다. 그때 느꼈던 충격을 젤디아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 아무리 찾아봐도 카엘 오라버니처럼 잘생긴 남자가 없단 말이야….” 젤디아는 곱게 정리한 손톱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듯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지난 6년간 그녀는 요양이라는 명목 하에 이곳저곳 나라를 건너다니며 괜찮다고 소문난 남자들은 전부 다 한번 씩 만나보았다. 그 결과 내린 결론은 역시 카엘 만한 인물이 없다는 것이다. 황태자라는 지위도, 주변의 기대를 한 번에 받고 있는 빼어난 검 솜씨에 조각 같은 외모까지 과연 지금 생각해봐도 자신의 배우자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카엘이 여자를 상당히 멀리한다고 알려진 점이다. 물론 그것에 대해서 젤디아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타고난 미모가 상당히 뛰어났고, 거기다 지난 6년 동안 끊임없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가꾸어왔기 때문에 지금은 완전히 아름다움이 꽃이 핀 상태였다. 남자라면 누구나 자신에게 넘어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젤디아는 시녀를 불러 머리를 다시 손질했다. 그녀의 청색 눈동자가 기대감에 반짝거렸다. ================================ # 104편 # 소제목 : 아직도 멀었네요. (2) ================================ 곧 카르나 제국의 황제가 되는 아딘 디메이스 드 카르나는 역시나 유리엔을 닮아 수려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어린 나이답게 조금은 앳되어 보이는 얼굴로 아딘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 삐질 겁니다.” “ 그러든가.” “ 너무해요!” 으헝. 유리엔의 야멸찬 대답에 아딘이 마치 우는 시늉을 하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상처받은 가녀린 영혼의 모습을 표현하듯 앉은 자세를 적절한 각도로 비트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물론 유리엔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 …왜 안 된다는 겁니까, 누님!” “ 외교는 중요한 거야.” “ 그딴 병신들하고는 외교 따위 하고 싶지 않습니다!” “ 그건 니 생각.” “ 누님~!” 아딘은 조금 전부터 유리엔을 찾아와서 떼를 쓰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이 정식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나면 지금까지 유리엔에게 뭣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낸 왕국들을 죄다 적대국으로 선포해 버리겠다는 것이다. 그다지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님에도 아딘은 의지로 불타고 있었다. 그렇게 활활 타오르는 채로 유리엔의 거처로 찾아와 얘기를 꺼냈건만 의외로 단번에 반대에 부딪힌 것이다. 그러나 누나사랑이 넘쳐흐르는 십육세 열혈소년 아딘은 그것을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다. “ 누님, 들어보세요. 솔직히 어이가 없잖아요? 아니 지네가 무슨 잘나가는 제국의 능력 있는 미혼의 황제나 황태자쯤 되어도 봐줄까 말까인데 이건 웬 코딱지만한 왕국의 찌질한 몇왕자나 귀족들이 감히 주제도 모르고 누님께 막 들이대다니! 그것도 싸가지 없고 무례한 태도로 말입니다! 아니 이게 대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예전에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는 누님 얼굴도 똑바로 못 쳐다보고 굽신거리던 것들이 몇 년이나 지났다고 이렇게 나대다니 와나 완전 어이없어!” 흥분으로 인해 점점 말이 빨라지더니 마지막은 거의 속사포로 내뱉은 아딘이 화에 못 이겨 앉아있는 의자의 팔걸이를 거의 으깨다시피 망가뜨렸다. 죄 없는 의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제 동생을 바라보는 유리엔의 표정은 여전히 태연했다. 아딘의 말대로, 매일같이 오는 산더미 같은 편지공세와 선물공세에는 몇몇의 상습범이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힘없는 약소국의 왕자나 귀족의 신분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유리엔을 넘볼 수 없는 위치였으나 지금은 유리엔이 황권다툼에서 진 오갈 데 없는 외톨이 신세가 되었다고 멋대로 짐작하고는 대놓고 들이대온 것이다. 그들은 황위계승서열 1위와 2위가 서로 화기애애한 사이 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 그래도 적대국 선포는 안 돼. 뭐, 정 못 참겠다면 대신.” “ 네?” 유리엔이 미소 지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엄마미소였다. 그리고 아딘은 반사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 있잖아, 아딘. 리데반이라고 알고 있니?” “ 아, 네.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마법에, 그것도 특히 독 관련 분야에서 특히 뛰어남을 보이고 있는 인재 중의 인재 천재마법사 아닙니까.” “ 맞아. 걔가 최근에 새로운 독을 하나 만들었다고 엄청 좋아하더라고. 그래서 샘플로 좀 받아왔거든.” “ 오, 새로운 독이요? 어떤 건데요?” “ 마시거나 혹은 상처를 통해서 체내로 흡수되는 독인데, 독이 퍼지는 순간 반영구적으로 특정부위의 신경을 마비시켜서 남성의 경우 자손을 볼 수 없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다고 하더라.” “ 네? 그, 그 말은…….” “ 이름은 고자메이커.” “ 헙!” 고자 메이커! 쉽게 말해 고자 되는 독. 무시무시한 독의 이름과 효과에 아딘은 숨을 들이켰다. “ 물론 어느 정도 몸 안에 마나가 축적 된 사람이라면 효과가 없다는데, 보통 사람과 비슷하다면 얘기가 다르지. 몇 개월 전부터 쓸모도 없는 편지와 선물을 꾸준히 보내온 잉여들 중에 과연 몇이나 일정 수준이상의 마나를 축적하고 있을까?” “ 으음…….” “ 독이 퍼지게 하는 방법이야 간단하지. 그 잉여들에게 편지만 한 통씩 보내주면 끝. 걔네들은 지금까지 한 짓이 있으니까 답장이라도 온 줄 알고 좋아죽을 거야. 자기가 직접 열어서 읽어보려고 하겠지. 얇고 날카로운 칼 조각이 교묘하게 숨어있어서 편지를 뜯을 때 손가락을 베였는데 하필이면 그 칼날에 독이 뭍어있었더라는 수법은 고전적이고 단순하지만 제법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어. 아니면 독을 좀 첨가한 음식 같은 걸 선물로 함께 동봉해도 괜찮겠지. 결혼 제안에 대한 승낙의 뜻인 것처럼 꾸며서 보내면 지들이 좋아서 안 처먹고 배겨? 후후후.” “ 그, 그렇군요.” “ 쓸데없이 적대국선포 같은 거 하지 마. 귀찮고 괜히 공포분위기 조성되고 좋을 게 뭐가 있어? 간단한 게 제일이야. 쉽고 간편한 거.” 쉽고 간편하게 고자 만들기. 유리엔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아딘은 분명 몇분 전까지만 해도 조져버리고 싶었던 인간들에게 갑자기 동정심이 물씬 피어오르는 걸 느끼며 어색하게 마주 미소지었다. 역시 사람 성격은 쉽게 어디로 가는 게 아니다. 사각거리는 거리가 조용한 집무실 안을 맴돌았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펜을 멈추고 카엘은 붉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예전에는 어깨에 스칠 정도의 길이였던 것이 지금은 짧게 잘라 약간 곱슬처럼 보이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아 카엘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이 이상 억지로 일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조금이라도 쉬는 시간을 갖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카엘이 의자에 길게 몸을 뉘였다. 딱 그때였다. 똑똑. “ 황태자전하, 실례합니다만 어느 여성분께서 지금 응접실에서 전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종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전혀 예고 없는 손님의 방문에 카엘이 의아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달칵. “ 응접실이라고?” “ 예.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니 몇 년 만에 제국으로 다시 오신 것 같았습니다. 다만 제가 황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누구신지는 잘 모르겠던 터라…. 전하와 비슷한 나이의 무척 아름다운 외모의 여성분이셨…전하?” 시종은 당황했다. 말하던 도중에 카엘이 갑자기 등을 돌려 뛰기 시작한 것이다. 카엘이 들은 것은 단 두 가지 였다. 몇 년 만에 다시 뮤리엔 제국으로 왔으며 게다가 외모가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성. 카엘의 몸은 자기도 모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응접실이 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멀어지는 카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시종이 중얼거렸다. “ 아직 말 다 안 끝났는데. 녹색 눈에 금발이라고…….” ================================ # 105편 # 소제목 : 아직도 멀었네요. (3) ================================ 나이가 들어 이제는 아저씨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게 된 제론이 간만에 카엘을 찾았다. 호위기사직은 몇 년 전 카엘이 소드마스터에 올랐을 때 그만두었고 지금 제론은 새로운 직책을 맡고 있었다. 호위기사를 때려치웠다고는 하지만 스스럼없이 사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는 친분은 여전했고, 때문에 얼마 전 카엘이 알아보기를 원했던 정보를 들고 막 카엘의 집무실로 향하던 길이었다. 복도를 가로지르던 제론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눈에 익은 화사한 금발을 발견했다. 그리고 멈춰 섰다. 금발에 녹안을 지닌 미녀가 살갑게 웃으며 아는 척을 해오는 순간 제론은 반사적으로 생각했다. 아 오늘 일진 더러. 제론은 억지웃음을 지었다. “ 무척 오랜만에 뵙니다, 공녀님.” “ 제론 경도 오랜만이에요. 못 본 새에 더욱 훤칠해 진 것 같네요.” “ 감사합니다. 공녀님께서도 더욱 아름다워지셨습니다.” “ 호호, 뭘요.” 아오 이 가식덩어리. 제론은 속으로 짜증의 한숨을 삼켰다. 젤디아 폰 페듀린 공녀. 곧 온다고는 들었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다. 이 여자 보나마나 도착하자마자 폐하나 제 부모님께 인사드릴 생각은 안하고 황태자부터 보겠다고 부랴부랴 찾아왔을 것이다. 과거 젤디아가 요양이라는 핑계로 제국을 떠나기 전, 그녀는 밥 먹듯이 황궁을 찾고는 했는데 그 이유가 항상 카엘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때에도 제론은 카엘의 호위기사직을 맡고 있었는데, 그걸 몰랐던 젤디아가 초기에 제론에게 엄청나게 싸가지 없게 굴었었다. 도저히 어린 소녀의 애교로는 봐줄 수 없는 도가 지나친 모욕과 무시와 그 외 등등 싸가지의 존재유무가 의심되는 행동을 일삼던 젤디아는, 제론이 카엘의 호위기사라는 것을 알자마자 태도를 싹 바꿨다. 천한 어쩌고 벌래 같은 어쩌고 하던 호칭은 순식간에 ‘제론 경’으로 살갑게 바뀌었고, 막말과 반말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존대로 탈바꿈했다. 그때 느꼈던 어처구니없음을 제론은 아직까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토록 뻔뻔한데다 가식과 내숭이 달인급인 젤디아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카엘에게는 본 성격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카엘의 앞에만 서면 언제나 얌전하고 애교가 많은 순진한 아가씨로 변신했다. 와 진짜 아니꼽다 무슨 변신괴물인 줄. “ 전하를 만나러 오신 겁니까?” 제론은 다 알면서 그냥 예의상 물었다. 젤디아가 수줍은 듯 미소 지었다. “ 네. 간만이니 인사라도 드릴까 하고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싶은데 혹시 안내해주실 수 있나요?” “ 아, 예. 물론입니다.” 예전에 그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드나들었는데 그 몇 년 새에 길을 잊어 버렸을 리가 없다. 제론은 이 여자가 과연 지금 자신을 일부러 셔틀시키기 위해 이러는 건지 아니면 전 황궁을 혼자 활보할 만큼 뻔뻔하지 못하답니다하는 순진하고 가녀린 척을 하는 건지 분석하며 응접실로 향했다.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우연찮게 시종 한 명을 만났다.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 별 생각 없이 걸어가던 시종은 젤디아를 슬쩍 보고는 그대로 걷던 것을 멈췄다. 그리고 젤디아가 가까이 올수록 점점 넋을 놓았다. 생전 처음 보는 미녀였기 때문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젤디아가 시종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 마침 잘 됐네요. 부탁 하나 할 수 있을까요?” “ 아, 예, 예. 뭐든지 말씀하십쇼.” “ 고마워요. 다름이 아니라 태자전하를 좀 불러주었으면 해요.” “ 전하를 말씀이십니까?” “ 그래요. 응접실에서 기다린다고 전해주세요.” “ 예, 알겠습니다.” 얼마나 긴장하고 넋을 놓았던지 시종은 젤디아가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부랴부랴 걸어 나갔다. 눈치로 봐서는 젤디아의 신분을 모르는 듯싶다. 제론은 고개를 저었고 젤디아는 입가에 미소를 띠운 채 응접실을 둘러보았다. “ 몇 년 만에 오다 보니 이런저런 것들이 많이 새롭네요.” “ 아, 네.” 제론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기다리던 사람이 응접실로 들이닥친 것은 몇 분 뒤였다. 시종이 카엘의 집무실까지 가서 말을 전한 시간까지 고려한다면 무지막지하게 빠른 속도가 아닐 수 없었다. 뛰어오기라도 한 듯 응접실로 들어온 이의 매무새는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 ‘ 아, 저런.’ 제론이 작게 혀를 찼다. 눈치 백단에 다다른 제론은 카엘이 뭘 기대하고 저렇게 서둘러 왔는지 금방 눈치 챌 수 있었다. “ 카엘 오라버니!” 젤디아의 목소리가 감추지 못한 기쁨을 담고 울렸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기대를 훨씬 웃도는 카엘의 모습에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6년 전에도 참 조각 같은 외모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보는 순간 사람임을 의심해야 할 정도였다. 그것에 기뻐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젤디아는 미처 카엘의 표정에 드러난 커다란 실망감을 발견하지 못했다. “ 누님.” “ 잘 있어. 어머니 잘 챙겨드리고. 아내는 꼭 참한 여자를 만나야 된다?” “ 누님…으허엉~!” “ 쳐 울지 마. 뚝.” “ 훌쩍.” 아딘의 배웅을 받으며 유리엔이 황궁을 떠났다. 아딘은 마지막까지 섭섭한 눈치였지만 자기 멋대로 유리엔을 잡아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신 뮤리엔 제국까지 최대한 편안하게 갈 수 있도록 신경을 쓰는 것이 다였다. 마차는 지나칠 정도로 크고 호화로웠다. 사람 한명 태우는 마차에 그렇게까지 공을 들이는 것을 쓸데없는 낭비로 여기는 유리엔이었지만, 이번엔 굳이 아딘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다각 다각. 말발굽 소리가 규칙적인 패턴으로 울렸다. 마차는 어느새 카르나 제국을 벗어나 인적이 없는 길을 지나고 있었다. 마차는 단 한 대였다. 유리엔이 개인적인 시종을 들 하녀를 데리고 오지 않은 탓이다. 심지어 유리엔은 마차를 지킬 호위병들조차 동반하지 않았다. 예정에 없던 떨거지 네 명이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 오~ 경치 좋고!” 첫 번째 떨거지가 말했다. “ 역시 숲에 난 길이 운치 있다니까. 캬.” 두 번째 떨거지가 말을 받았다. “ 그런데 정말 뮤리엔 제국에 미인들이 많아?” 세 번째 떨거지가 물었다. “ 그렇다니까? 우리도 이제 긴 솔로생활을 청산해야지. 음핫핫.” 네 번째 떨거지가 답했다. 떨거지들의 정체는 예르지엔 top 4, 즉 유리엔의 발닦개들이었다. 유리엔은 처음에 예르지엔들을 데려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너넨 앞으로 나 대신 아딘의 발을 닦으렴, 하는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떠나려 했다. 그런데 출발 하루 전 날, 네 명이 동시에 유리엔에게로 들이닥쳤다. 꺼지라는 말을 무시하고 그들은 하나같이 유리엔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이미 길드는 후계자를 다 뽑아서 넘겨주고 왔다느니 자기들도 새로운 세계로 나가보고 싶다느니 뮤리엔 제국에는 미녀들이 많다는 소문을 이미 다 들었다는 등 이런저런 이유를 수도 없이 대며 넷은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결국 예전에 비해 놀랄 만큼 관대해진 유리엔이 동행을 허락하면서 예르지엔들은 함께 출발하게 되었다. 보기보다 실력이 몹시 뛰어난 넷 덕분에 호위병들은 필요가 없었다. 마차 위에 앉아 가면서 그들이 도란도란 떠드는 동안, 유리엔은 마차 안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마차의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고정되어 있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며칠만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자신은 뮤리엔 제국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그리운 사람들이 생겨버린 곳이었다. 문득 유리엔은 오른손에 끼고 있는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전에, 고국으로 돌아오기 전 카엘의 생일 때 받은 마법반지였다. 특이하게도 왼손에 낀 채로는 마법이 발동되지 않아서, 검을 쓰는 자신에게는 쓸모없는 물건이기 때문에 준다고 했던 거다. 그때는 정말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했었는데. “ …레윈.” “ 이렇게 앉아가도 춥지도 않고 캬, 벌써 봄 날씨가 제대로…네?” 레윈은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떠들다말고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밑을 내려다보자 유리엔이 잠깐 내려와 보라고 손짓하는 게 보였다. “ 뭐, 뭐야! 왜 너만 부르시는 거지?” “ 혼자 계시니까 심심한 거 아닐까?” “ 근데 왜 하필 너임?” “ 내가 제일…잘 생겨서?” “ 꺼져 병신아.” 어쨌든 레윈은 시키는 대로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레윈이 나타나자마자 유리엔은 다짜고짜 “ 자해 좀 해봐.” 라고 시켰다. “ 네?!” 당연한 얘기지만 레윈은 기겁했다. 다시 마차 밖으로 튀어나갈 준비를 하는 레윈에게 유리엔이 차분하게 다시 말했다. “ 치료해 줄 테니까 손등 같은 데에 작게 생채기 좀 내봐. 바로 치료해 줄 테니까.” “ 으음…….” “ 빨리.” “ 네.” 노예근성이 몸에 배어있는 것에 슬퍼하며 레윈이 손등에 상처를 냈다. 아주 살짝 힘을 줘서 그은 덕분에 피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상처였다. 소심한 놈이라는 유리엔의 핀잔에 눈물을 머금고 조금 더 눈에 띠는 상처를 그 옆에 만들었다. 유리엔은 오른손에 있던 반지를 빼서 왼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작게 읊조렸다. “ 큐어(cure).” 반지에서 빛이 일었다. 밝고 새하얀 빛 무리였다. 눈 깜짝 할 새에 레윈의 상처가 흔적도 없이 아물었다. 유리엔이 말없이 반지를 응시했다. 분명 왼손에 끼고 시동어를 외쳤다. 마법이 발현되는데 그 어떠한 장애도 일어나지 않았다. “ 어라? 우와! 황녀 전하 마법도 쓸 줄 아셨어요?” “ …등신.” “ 네?!” 진짜 등신. 역시 카엘은 솔직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 # 106편 # 소제목 : 아직도 멀었네요. (4) ================================ 젤디아는 카엘에게 간단한 안부인사만을 남기고 돌아갔다. 기껏 찾아와서 별다른 둘만의 시간도 갖지 않고 곧바로 떠나는 이유로, 젤디아는 ‘몸이 좋지 않아서’를 핑계 삼았다. 굳이 그것을 언급한 까닭은 ‘난 이렇게 몸이 아픈데도 일부러 널 만나러 왔어’라는 의미를 내포하여 은근히 자신이 상대방에서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고, 몸이 안 좋다는 것을 어필함으로써 지켜주고 싶은 연약한 레이디의 이미지를 남기려는 의도에서였다. 젤디아는 카엘이 예의상 던진 괜찮으냐는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속으로 기뻐하며 사라졌다. 카엘은 그런 젤디아까지 신경 쓸 만한 정신머리가 없었다. 곁에서 십수년간 모셔온 경력이 있는 제론이 보기에 요즘 카엘은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진 사람 같았다. 이유는 짐작이 된다. 카르나 제국에서 즉위식이 거행되었다는 소식은 제론도 들었다. 티는 내려하지 않지만 지금 꽤나 속이 타 들어갈 것이다. 유리엔이 제국 밖으로 떠났다는 것까지는 그 나라에 숨겨둔 정보원을 통해 어찌어찌 캐냈지만 그 목적지는 아직까지 베일에 싸여 있다. 그녀의 모국에서도 이제 황제가 된 그녀의 남동생이라던가 하는 핵심인물이 아니면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제론은 카엘은 바라보았다. 제대로 똥줄이 탈거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흘러 갑자기 유리엔이 웬 변두리의 이름 없는 왕국에서 쨘 하고 나타났다는 소식이라도 들어 봐라. 사랑에 빠진 남자의 섬세한 하트는 그날로 산산조각이 나게 될 것이다. 제론은 자기도 모르게 갈가리 찢긴 심장을 부여잡고 절규하는 카엘의 안타까운 모습을 상상했다. 처절하고 슬픈 장면이었다. 아…그런데 왜 웃기지. 슬픈데 웃기고 불쌍한데 웃기다. 그런 무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제론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카엘을 향해 말했다. “ 그러고 보니, 전하.” “ ―?” “ 저번에 알아보길 원하셨던 것 말입니다.” “ 그래.” “ 굳이 손을 쓸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 …? 어째서지?” “ 전부 고자가 됐답니다.” “ 뭐?” 며칠이 지났다. 종종 마을에 들러 묵을 때마다 유리엔은 얼굴을 가리기 위해 가면을 썼다. 호화로운 마차를 타고 가면을 쓴 그녀를 마을주민들은 그저 심심해서 유람이나 나온 귀족아가씨로 여겼다. 당연히 소문이 날 이유도 없었다. “ 일부러 그런 겁니까?” “ 뭐가?” “ 가면 말이죠.” 다그닥 다그닥 거리는 마차의 소리가 그들의 목소리에 묻혔다. 유리엔은 심심하다는 이유로 현재 예르지엔들과 함께 마차 위에 앉아서 가고 있었다. 일반적인 귀족아가씨, 아니 귀족이 아니더라도 보통의 여성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행동에 처음에는 마부의 입이 떡 벌어졌으나, 이제는 익숙해진 탓에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다만 전보다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 마차를 몰 뿐이었다. “ 그냥, 귀찮으니까.” “ 그렇기도 하지만요. 그런데 그 덕분에 저희 행방이 아주 묘연하다는 소문이 돌더만요.” 유리엔이 탄 마차는 화려하지만 단 한 대였다. 눈에 띌 만하지는 않았다. 목적지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명인 아딘은 자기가 더 나서서 주변인들의 입을 막아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막았다. 딱히 유리엔이 의도하거나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알아서 상황이 그녀의 행적을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었다. “ 오, 그럼 거의 도착하기 직전까지 그쪽에서도 우리가 간다는 걸 모른다는 얘기네?” “ 그렇지! 잘하면 도착하는 순간까지 모를 수도 있어.” “ 와우, 이거 재밌는데?” 넷은 활기차게 떠들기 시작했다. 자기들의 행방을 다른 곳에서는 대부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를 끈 듯했다. 옐윈이 손가락을 튕겼다. “ 이걸 노렸군!” “ 응?” “ 자고로 남녀 간의 만남은 결코 평범해서는 안 돼. 어느 정도는 신비감과 갑작스러움을 갖추고 있어야 하지. 다들 생각해봐. 미리 다 알고 기다리고 있던 상대와 만나는 거랑, 전혀 예상도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만나는 상대랑 어느 쪽이 더 인상이 강하겠냐?” “ 후자!” “ 바로 그거야! 뮤리엔 제국도 분명 그럴 테지. 어디로 향했는지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대륙최고의 미녀가 갑자기 자기 앞에 뿅 하고 나타났다? 이야, 그 나라 황태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빠져드는 거야!” “ 오오!” “ 안 그렇습니까, 황녀전하?” 옐윈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르지엔의 나머지 멤버 셋이 동조하며 환호했다. 유리엔은 묘한 표정이었다. …정말 그런 거임? 페듀린 공작가는 부산스러웠다. 잔뜩 꿈에 부푼 젤디아 때문이다. 오랜 기간 자신을 못 봐왔던 카엘에게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 보이고 싶었다. 좀 더 자기를 받쳐줄 들러리가 많은 곳에서, 자신의 미모를 부각시킬 수 있는 장소에서 카엘의 앞에 서고 싶었다. 눈을 떼지 못하게 할 자신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 장인을 불러서 내 드레스를 맞춤 제작하도록 해. 파티를 열 테니까.” 측근이나 다름없는 하녀가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6년 만에 사교계의 꽃이 돌아왔다. 당연히 환영파티를 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공작가에서 파티를 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무대는 황궁이었다. 아버지를 조를 생각이다. 뮤리엔 제국의 황제는 연회를 딱히 좋아하는 성미는 아니었지만 칠분이 깊은 제 아버지의 부탁이라면 들어줄 것이다. 엄청나게 성대한 규모로 벌일 생각은 아니었다. 카엘로 하여금 자신의 미모를 제대로 인식하게 만들고, 뒤따르는 수많은 추종자들을 은연중에 드러냄으로써 은근한 경쟁 심리를 부추기는 것이 목적의 다였다.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보며 젤디아가 미소 지었다. 머지않아 이 나라는 대륙제일의 미모를 지닌 황태자비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 # 107편 # 소제목 : 아직도 멀었네요. (5) ================================ 풍경 구경도 슬슬 질려간다. 하나 둘 뻗기 시작한 예르지엔들은 급기야 마차위의 그 협소한 공간에서 넷이 부대끼며 드러눕기에 이르렀다. 자는 건지 마는 건지 그들은 아주 가끔씩 꿈틀거릴 뿐 그 외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다각다각. 덜컹덜컹. 짹짹. 들리는 소리라고는 저게 다였다. 그나마 산길로 왔더니 새소리가 참 정겹다. 이처럼 평화롭고 고요한 분위기에서 오랫동안 마차를 몰아온 마부가 지루함에 막 하품을 하려던 때였다. “ 크하하하~멈춰라!” “ 죽기 싫으면 당장 마차를 세우시지!” 갑자기 시커먼 것들이 잔뜩 나타나더니 앞을 막는다. 마부는 깜짝 놀라서, 퍽! “ 끄어억?!” 가속했다. 놀라서 가속을 밟았다. 말들이 단단한 발굽으로 시커먼 놈들 몇을 밟아 뭉갰다. 눈 깜짝할 새에 길이 뚫리고 마차가 달려 나갔다. “ …….” 방금 무슨 일이. 산적으로 추정되는 시커먼 사내들은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마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 …응? 뭐야, 뭔 일 있었나?” “ 좀 덜컹덜컹 거렸던 것 같은데.” “ 아, 아닙니다. 그냥 돌덩이 하나를 못보고 밟고 지나갔는데 좀 커서 그랬습니다.” “ 그래? 별 거 아니네. 얘들아 다시 자자~.” 마부는 식은땀을 훔쳤다. 챙강. “ 죄…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젤디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녀 하나가 지나가다 실수로 물이 든 항아리를 놓쳐 그것을 깨뜨렸는데, 문제는 그 안에 있던 물이 하필이면 옆을 지나가던 젤디아의 드레스 끝에 튀었다는 것에 있었다. 끝자락이긴 하지만 축축하다. 그녀는 뭐든지 젖어서 늘어지는 것을 싫어했다. 하녀는 잔뜩 겁에 질려서 허리를 굽히고 또 굽혔다. 젤디아는 그런 하녀의 얼굴을 기억했다. 아주 예전에도 이 저택에서 일을 하던 하녀다. 당연히 젤디아의 천사같은 외모와는 다른 포악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요 천한 계집애의 목을 어떻게 비틀어놓을까 하다가, 젤디아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곧 있으면 황궁에서 자기를 위한 파티가 열린다. 지금은 한창 기분이 좋은 시기였다. 그 좋은 기분을 일부러 망가뜨릴 필요는 없다. “ 다음부턴 조심…….” 간단한 경고로 넘어가려던 젤디아의 시야에 무언가가 잡혔다. 하녀의 왼손 약지 손가락에 끼워진 금테의 반지였다. 척 봐도 하녀 일을 하는 형편에는 구하기 힘들어 보이는 것이, 최소한 약혼예물 혹은 결혼예물 정도는 되어 보였다. 젤디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 건방져.’ 얼굴도 전혀 예쁘지 않고, 신분도 미천한 주제에 결혼반지라? 젤디아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그녀의 모난 성격이 모습을 드러냈다. “ 죄송한 걸 알면 그에 맞는 대가를 치러야지?” “ 저, 정말 죄송…….” “ 네 손가락, 쓸모도 없어 보이니 자르는 건 어때?” “ …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젤디아의 시선이 제 왼쪽 손가락을 향해 있다는 것을 지각하자마자 하녀는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부들부들 떠는 그녀의 얼굴에는 핏기가 전혀 없었다. “ 사, 살려주세요 공녀님.” “ 어머? 누가 널 죽인다니. 고작 손가락 하나 자르는 걸로 사람이 죽을 리가 없잖아?” “ 제, 제발…….” 하녀는 안쓰러울 정도로 떨고 있었다. 공포 때문에 눈물이 났다. 제 손가락을 안으로 감추며 필사적으로 비는 하녀를 당장 끌고 가라는 명령을 내리기 위해 젤디아가 경비병을 부르려는데, 마침 멀리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같은 하녀이거나 귀족 여성이라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나 유감이게도 나타난 이는 제법 수려한 외모의 청년이었다. 게다가 입은 옷을 보니 가난하지 않은 귀족가의 자제이거나 혹은 그 본인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젤디아는 표정을 바꾸고 무릎을 꿇어 엎드린 하녀를 일으키려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 무슨 일입니까?” “ 아….” 예상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귀족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조금 전까지 짓고 있던 비웃음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젤디아는 난처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금 수줍은 듯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젤디아가 말했다. “ 이 하녀가 사소한 잘못을 하나 했는데, 작은 실수니 괜찮다고 해도 이렇게 엎드려서 일어날 생각을 않네요. 아무래도 제가 무섭게 보였나 봐요.” “ 예? 하하, 그럴 리가요.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레이디를 보고 무섭다고 생각하겠습니까?” “ 어머나, 아니에요.” 그러면서 젤디아는 배시시 웃었다. 눈앞의 귀족 청년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큰 키와 수려한 외모도 그렇거니와 웃을 때 보이는 새하얀 치아가 특히 매력적이다. 카엘이 아니었다면 한번쯤 만나 볼 생각을 했을 거다. “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 네에, 살펴가세요.” 청년이 사라지고 젤디아는 다시 하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하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순간 찾아내어 족칠까 고민하다가 그녀는 딱히 그럴 필요까지는 없겠다는 결론은 내렸다. 젤디아는 주문한 드레스를 확인하려던 애초의 목적을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젤디아가 마음에 들어 했던 귀족청년, 네이시온은 볼일이 있어서 잠깐 페듀린 공작가에 들렀던 차였다. 일을 끝내고 저택으로 돌아가자 얼마 전까지 약혼만 하고 있다가 최근에 결혼식을 올린 루제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둘은 지금 깨가 쏟아지는 신혼이다. 단숨에 달려가 루제를 껴안은 네이시온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5년 전보다 키가 훌쩍 자란 네이시온에 비해 여전히 작은 키 그대로인 루제는 이젠 정말로 품에 쏙 들어갈 만큼 아담해졌다. 루제는 못마땅했지만 그는 몹시 만족스러웠다. “ 참, 그러고 보니 자기야.” “ 응? 왜?” 호칭은 예전과 그대로였다. 이젠 결혼도 했으니 ‘여보’라고도 불러보고 싶은 네이시온이었지만, 너무 늙어 보인다는 루제의 반대에 부딪혀 단념해야했다. 네이시온이 부비부비를 멈추지 않으며 말했다. “ 오늘 페듀린 공작가에 갔었는데, 젤디아 공녀가 있더라고. 소문은 많이 들었는데 직접 본 건 처음이었어.” “ 그래? 어때, 많이 예뻐?” “ 응. 뭐 어차피 나한텐 자기뿐이지만~.” “ 그래그래. 흠…젤디아 공녀라.” 루제는 젤디아에 관한 소문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녀는 사교계에서의 소문과 남자 귀족들 사이에서의 소문, 그리고 귀족 영애들과 하녀들 사이에서의 소문이 각각 다 달랐다. 그러나 가장 믿을 만 하다는 하녀들 사이에서의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인 쪽에 치우쳐 있었다. 성격이 더럽다는 증거다. 물론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루제는 생각했다. “ 그런 것 보다…황녀전하는 대체 언제쯤 돌아오실까?” 지금. 5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유리엔을 잊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뮤리엔 제국에는 많았다. 대표로 과거에는 츤츤거렸지만 이제는 나이 좀 먹었다고 좀 들이대려나 싶은 빨간 머리의 잘생긴 남정네가 한 명, 그리고 그 뒤로 줄줄이. 여기서 조금 놀랄 만도 한 것이, 그 줄줄이 안에 뮤리엔 제국의 황제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 잘 왔네.” 황제의 인사에는 진심이 느껴졌다. “ 감사합니다.” 도착하자마자 예의바르게 황제에게 인사부터 하러 온 유리엔이 미소를 지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온 터라 머리고 옷이고 가다듬을 시간도 없었지만, 안 꾸며도 자체발광 여신미모인 유리엔의 아름다움은 고작 그 정도로 가려지지 않았다. 반짝반짝. 이거 너무 예쁜데…? 이러다 혹시 우리 아들 차이는 거 아님? 황제의 눈이 재빨리 유리엔의 왼손을 스캔했다. 네 번째 손가락에 자리 잡은 반지가 여전히 반짝거리며 빛을 내고 있었다. 척 봐도 지난 5년간 대충 방치해온 것 같지는 않다. 휴, 다행. 아들 차일 걱정은 좀 덜었다. 흡족함을 느끼던 황제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그러고 보니, 하며 입을 열었다. “ 아들 녀석이 이리로 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 네?” 벌컥.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다. ================================ # 108편 # 소제목 : 아직도 멀었네요. (6) ================================ 폼도 안 나게 문 앞 복도에 쭈그려 앉아, 예르지엔들은 언제 나올지 모르는 유리엔을 멀뚱멀뚱 기다렸다. 성격상 오래 걸릴 것 같진 않지만 혹시 또 모른다. 알고 보니 이 나라 황제가 설교 종결자이더라 하는 반전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놔 그럼 망하는 건데? “ 9분 17초 경과임.” “ 또 그걸 세고 있냐?” “ 9분 21초.” “ 말을 말자.” “ 말을 말고 김밥을 말고 돗자리를 말고…….” “ 뒤질래?” “ 아니.” 할 짓이 없다. 어디 개미라도 한 마리 지나가면 잡아서 생체실험이라도 하겠는데 역시 황궁 아니랄까봐 겁나 깨끗하다. 그딴 미생물 따위 더듬이도 보이지 않는다. 그뿐이랴 손가락으로 바닥에 원을 그려가며 왕따 놀이를 해봐도 손끝에 먼지가 묻지 않는…줄 알았더니 아니 조금 묻는군. “ 우리 좀 병맛 같다.” “ 음…….” 부정할 수 없는 게 너무 슬프다. 저벅저벅. “ 어?” 넷의 고개가 한꺼번에 복도 끝을 향해 돌아갔다. 이 무슨 가뭄에 단비 같은 발자국 소리란 말인가. 그리고 그들은 고개를 돌리자마자 그 자세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 우와?” “ 뭐야 저게.” “ 사람임?” “ 말도 안 돼.” 조각상이 걸어온다. 다리도 길어서 성큼성큼 걸어온다. 조각상이라니 이딴 소설책에서 나올 것 같은 오글거리는 단어 사람에게 쓰게 될 줄은 몰랐건만 정말 진심 레알 조각상이다. 아니 오히려 조각상 머리통을 후려쳐도 용서될 것 같은 미친 외모의 청년이다. “ 누가 좀 내 눈이 잘못됐다고 말해줘.” “ 니 눈알 병신이야.” “ 고마워.” 옐윈과 그윈이 서로 훈훈한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그 미친 외모의 조각상남은 빠른 속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눈치로 보건데 황제를 만나는 것이 목표인 듯했다. 미친 외모 종결자 조각상남이 성큼성큼 걷던 도중 눈을 어지럽히는 형형색색의 머리색을 한 네 명의 남자들에게 무심코 시선을 주었을 때,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오윈이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 …….” 조각상남의 표정이 굳어진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굳어지는 것 같다. 아마도 굳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오윈은 왠지 그 순간 자신은 절대 게이가 아니라고 해명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휙. 예르지엔들을 그대로 지나친 조각상남이 커다랗고 화려한 문 앞에 가 섰다. 안에는 황제가 있다. 문을 지키는 기사들이 막을 생각은 안하고 고개부터 숙이는 것을 보니 최소한 황족이상은 되는 듯하다. 뭐가 그리 급한 건지 조각상남은 인사하는 기사들마저 씹고 곧장 문을 벌컥, 하고 열어젖혔다. “ 아버지!” 그러더니 첫 대사가 저거다. “ …….” “ …….” 넷은 침묵했다. 그들은 천천히 닫히는 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랜다. 저 안에 누가 있더라? 자기들이 알기로는 황제와 유리엔 이 둘 뿐이다. 설마 어떤 정신 나간 녀석이 유리엔을 아버지라고 부를 리는 없고 그렇다면 남는 건 황제가 자기 아빠라는 것뿐인데. “ …황태자?” “ 바로…그?” “ 그 유명한?” “ 카류엘 네이시스 드 뮤리엔 황태자?” 얼떨떨한 목소리로 예르지엔들이 한마디씩 내뱉었다. 보통 사람이라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뮤리엔 제국 황태자에 관한 소문이 있다. 바로 괜히 지나가는 사람 눈멀게 하는 엄청난 외모와 괜히 앞날 창창한 젊은 기사 슬럼프에 빠지게 하는 천재적인 검술실력과 괜히 수많은 예쁜 여성들 눈물짓게 하는 여성혐오증을 지닌 엄친아라는 사실이다. 물론 처음 이 소문을 들었을 때 예르지엔들은 뭐 이딴 거지같은 소문이 겁나 부풀려져서 떠돌아다니고 난리냐 라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었지만, 지금은 자연스럽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따 저 인간 심하게 잘났네. “ 여성혐오증은 몇 년 전 소문이라 지금은 잘 모르겠고…듣자하니 이젠 소드마스터라며?” “ 와, 쩐다. 역시 세상은 불공평하네.” 투덜투덜 그들이 한마디씩 할 때였다. “ -크윽!” “ 왜 그래?” 갑자기 레윈이 두 손으로 땅을 짚었다. 그의 표정은 괴로움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바로 옆에 앉아있던 옐윈이 무슨 일이냐며 물어오자 레윈이 입을 열었다. “ 난 왜…하필이면 빨간 머리인 걸까.” “ -!!” 레윈을 제외한 나머지 예르지엔들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럴 수가. 그렇다. 지금 그 누구보다도 가장 커다란 정신적 고통을 느끼고 있는 사람은 바로 레윈이었다. 어쩌다 빨간 머리로 태어나서. 왜 엄청나게 잘난 저 황태자 녀석은 세상에 하나뿐인 무지개색같은 머리를 하지 않고 나름 군데군데에서 많이 보이는 붉은색 머리를 하고 태어나서 다른 빨간머리 사내들을 열등감에 빠뜨리는가. 위로하자. 레윈을 위로해야한다. 옐윈이 떨리는 손을 들어 열등감 폭발중인 레윈의 어깨에 얹었다. 그리고 탁탁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 괜찮아. 걱정하지 마. 비교된다고 생각할 것 없어. 왜냐하면 넌 빨간색 머리고 카류엘 황태자는 붉은색 머리니까.” “ …….” 둘이 뭐가 다른 거지? “ 고마워.”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미묘하게 다른 것도 같다. 그래 우선 글자 모양이 다르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힘이 나는 것 같다. 레윈은 감사의 인사를 꺼냈고 예르지엔들 사이에서는 훈훈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들이 그러는 사이. 문 안에서는 또 그 나름대로의 폭풍이 형성되고 있었다. 카엘은 굳었다. 돌처럼 굳어있었다. 태풍처럼 들이닥쳐서 ‘아버지’에 이어 뭔가 말을 내뱉으려던 찰나 황제의 옆에 있던 유리엔을 발견하고는 꼼짝없이 굳어졌다. 누가 보면 님 혹시 숨은 쉬고 있나여하고 물어보고 싶을 만큼 움직임이 없었다. “ 왔냐.” 카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제는 태평하게 굳어있는 아들놈게 인사를 건넸다. 당연히 카엘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지 애비 말을 씹는 불효자식에 대한 미세한 분노로 황제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카엘은 유리엔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유리엔 또한 말없이 카엘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뭐라고 해야 할까,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가. 사실 눈앞에서 보고 있는 데에도 현실감이 조금 떨어진다. “ 거참, 뭘 멀뚱히 보고만 선 게냐. 인사 안 하냐?” 보다 못해 황제가 나섰다. 그제서야 카엘은 정신을 좀 차렸다. 워낙 사람 면상에 관심이 없는 카엘이 보기에도 유리엔이 전보다 더욱 예뻐졌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유리엔은 돌아왔다. 5년이 걸려서 다시 여기로 온 것이다. 이제 완전히 이곳에 못을 박는다. 이제야 좀 현실처럼 느껴진다. 카엘이 웃었다.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번져 나왔다. “ 오랜만이다.” 5년 만에 처음 만나서 하는 첫 대사였다. 유리엔이 받아쳤다. 그녀 역시 웃고 있었다. “ 오랜만이야.” 그러고 나서 둘은 계속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뭐지 저건. 서로 얼굴 구경이라도 하는 건가. 유리엔과 카엘을 각각 응시한 황제가 실망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 …그게 끝이냐? 뭐 감격의 폭풍포옹같은 건 없고?” 물론 대답은 없었다. ================================ # 109편 # 소제목 : 아직도 멀었네요. (7) ================================ “ 됐다, 내가 너희에게 뭘 바라겠냐.” 황제는 포기가 빨랐다. “ 거처는 카엘 네가 안내해 주거라.” “ 아, 네.”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고 카엘과 유리엔은 함께 문 밖으로 나갔다. 턱을 괸 채로 그런 둘의 모습을 바라보자니, 거참 붙여놓으니 무척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불쑥 든다. 다시금 적막이 찾아온 집무실에서 황제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 …나도 슬슬 손자를 볼 나이가 됐지.” 격하게 앞서간다. 카엘과 유리엔이 나란히 앞서 걸어가고, 그 뒤를 멀찌감치 예르지엔들이 뒤따랐다. 아니 무슨 쟤네는 뒷모습에서도 후광이 난대요? 세상에 사기스펙도 저런 사기스펙이 없다며 예르지엔들이 투덜거렸다. “ 완전 부부사기단.” “ 부부얼굴사기단.” “ 부부얼굴스펙사기단.” “ 부부얼굴스펙…흠.” 한창 떠드는데 유리엔이 뒤를 돌아본다. 비록 말은 없지만 보석처럼 빛나는 검은 눈동자가 ‘입 닥쳐 이 병신들아’라고 친절하게 얘기해주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예르지엔들은 조용해졌다. 조용해진 것뿐만 아니라 어딘가 건방지던 걸음걸이마저 조신하게 바뀌었다. 유리엔이 다시 앞을 보았다. “ …키가 더 컸네.” 불쑥 말했다. 실제로 카엘은 전보다 더욱 키가 자라있었다. 그때에도 꽤 큰 편이었기 때문에 옆에 서면 차이가 많이 났었는데, 지금은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유리엔이 덧붙였다. “ 좀 줄여.” “ 뭐?” “ 널 쳐다보느라 내 연약한 목이 부러질 것 같잖아. 누가 더 크래?” 카엘은 벙한 표정이었다. 말하는 게, 말투와 어조가 5년 전과 너무 똑같아서 순간적으로 카엘을 벙찌게 했다. 과연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더니 그렇다면 방금 전까지 황제의 앞에서 보여준 그 얌전한 모습은 죄다 연기인가. 웃음이 저도 모르게 카엘의 입가를 비집고 나왔다. 나 참, 이러면 너무 반갑지 않은가. “ 아아, 미안. 그만 길어지래도 내 다리가 좀처럼 말을 안 들어서.” “ 응? 뭐라고? 깔창 꼈다고?” “ 큭.” “ 요즘 그거 가격 꽤나 한다던데 너무 무리하진 마. 다리가 짧은 건 죄가 아니에요.” “ 푸하하.” 뭘 쳐 웃어. 유리엔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나 카엘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지난 5년간 어디 머리라도 잘못 맞아서 실성했냐고 타박하던 유리엔도 나중에는 같이 피식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그런 둘의 모습에 예르지엔들이 아니꼽다 못해 비틀린 표정으로 저마다 감상평을 하나씩 꺼냈다. “ 아주 좋아 죽으시네.” “ 바라만 봐도 그냥 입이 째짐?” “ 하…누구는 지금 청춘을 다 바쳐서 일이랑 연애했는데 누구는, 하…….” “ 하…….” “ 그만 쳐다보자. 부러우니까.” “ 귀도 막자.” “ 그냥 우리 뒤로 걸을까?” “ 그거 좋네.” 앞에선 선남선녀 두 명이 웃으면서 걸어가고, 그 뒤를 우중충한 분위기를 풍기며 네 남자가 뒤로 걸으면서 뒤따르는 그 묘한 풍경은 유리엔이 거처에 도착하고 나서야 끝을 맺었다. “ 언니!” 소문은 빨랐다. 언제 듣고 온 건지 루네가 두 눈에 눈물방울을 그렁그렁 달고 득달같이 달려든다. 이제 20살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여전히 작은 몸집인 루네는 유리엔의 품에 예전처럼 폭 안겨서 눈물콧물을 펑펑 쏟아냈다. 뭐라 뭐라 말은 하는데 울음에 묻혀서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녀전하.” 루네보다 조금 늦게 제론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다. 팔에 뭔가를 안고 있었다. 루네와 제론을 반반씩 닮은 작은 생명체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 생명체의 정체를 알아차린 유리엔이 놀란 표정으로 제론과 루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 흠흠.” 제론이 헛기침을 했다.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유리엔이 못 참고 웃음을 터뜨렸고 루네는 울음을 멈췄다. “ 훌쩍…응? 왜 웃으세요?” “ 아니…쿡쿡, 몇 살이야?” “ 작년 여름에 태어났습니다.” “ 아하.” 세상을 만난 지 1년도 채 안된 갓난애였다. 하얗고 포동포동한 것이 나중에 깨어나서 꼬물거리면 엄청 귀여울 것 같다. 유리엔이 유심히 아기를 바라보자 루네가 그제야 유리엔의 관심사가 어디에 가 있는지 알아차리고 베시시 웃음을 지었다. “ 우리 딸이에요. 헤헤.” “ 귀엽네. 이름이 뭔데?” “ 미네예요. 예쁘죠? 딸이거든요.” “ 흐음…5년이 길긴 길구나. 네가 엄마가 되다니.” 유리엔이 손가락으로 아기의 볼을 살짝 눌렀다. 말랑말랑. 신기하다. 헤어질 때만 해도 영락없이 어린애처럼 보였는데, 물론 지금도 겉보기엔 여전하지만 그래도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니 새삼 루네가 많이 자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루네의 엄마라도 된 것처럼 묘한 기분에 싸여있는데, 또 다른 커플이 문을 열고 난입했다. “ 황녀님!” 영원한 유리엔교도인 루제의 등장이었다. 옆에는 남편인 네이시온을 매달고 있었다. 네이시온이 고개를 숙여 유리엔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 오랜만이야.” 유리엔이 한마디 내뱉기 무섭게 루제가 달려들었다. 루네의 옆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매달린 루제가 큰 소리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유리엔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루네라면 몰라도 루제까지 이럴 줄은 생각 못했기 때문이다. “ 제가, 훌쩍, 지금까지, 훌쩍, 얼마나, 훌쩍, 기다린 줄, 훌쩍, 아세요? 흐엉-.” “ 으헝-.” 덩달아 루네까지도 옆에서 다시 울음을 터뜨린다. 난감하다.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유리엔은 가슴 한 켠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조금, 아니 아마도 조금 많이 뭉클하다. 고작 반년 간 곁에 있었을 뿐인데, 어느새 자신이 이들에게 이렇게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을까. “ …미안.” 유리엔은 작게 중얼거리듯 사과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잊었대도 할 말이 없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잊기는커녕 이렇게까지 그리워했을 줄은, 솔직히 몰랐다. 정말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든다. “ 참, 황녀전하. 린은…….” 문득 꺼낸 제론의 말은 채 완성되지 못하고 묻혔다. 갑자기 문이 열려서다. 나타난 이는 카엘이었다. “ …….” 여럿이 우르르 몰려있는 것은 둘째 치고 루네와 루제는 유리엔을 붙잡고 서럽게 울고 있다. 방안 풍경에 순간 놀란 듯 멈춰 서 있던 카엘이 이내 픽 웃었다. “ 그놈의 인기 하고는.” 그 말에 또 웃음이 난다. 유리엔은 어깨를 떨었다. 도착하고부터 너무 많이 웃는다. 그런데 또 안 웃을 수가 없었다. 이곳은 도피처가 아니라, 안식처였다. ================================ # 110편 # 소제목 : 아직도 멀었네요. (8) ================================ 황권다툼에서 밀려난 카르나 제국의 유리시엔 황녀. 며칠간의 불투명한 행적 끝에 뮤리엔 제국에서 모습을 드러내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그 소문을 접한 것은 젤디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 유리시엔황녀?” 화장기로 인해 진한 붉은 빛을 띠는 입술이 비틀렸다.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몇 가닥 손가락으로 감아 내리며 젤디아가 중얼거렸다. “ 스물한 살이나 먹은 늙은 년이 황자들을 노리고 왔을 리가 없고…….” 낮게 가라앉는 젤디아의 목소리에 시중을 들던 하녀가 움찔했다. 하녀의 손놀림이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실수라도 했다간 어떤 꼴을 겪을 지 알 수 없다. 특히나 지금처럼 기분이 좋지 않을 경우에는 더더욱. “ 재미있네.” 젤디아의 입술 끝이 곡선을 그렸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기분이 좋아서 짓는 미소와는 거리가 멀었다. 젤디아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하녀를 향해 말했다. “ 드레스를 준비해. 한 번 더 입어봐야겠어.” “ 네.” 황실에서 열리는 무도회는 하루를 앞두고 있었다. “ 애기 때문에…….” 아무래도 미네를 다른 사람의 품에 맡겨놓으면 마음이 안 놓여서요, 하고 루네가 설명을 덧붙였다.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못내 아쉬운 표정이다. 그런 루네를 루제가 옆에서 토닥거렸다. “ 뭐 어쩌겠어. 대신 내가 네 몫까지 참석해서 마음껏 놀다 올게.” “ 언니, 다 좋은데 저번처럼 모르는 귀족영애랑 머리끄댕이 잡고 싸우지만 마.” “ 걱정도. 설마 내가 황궁에서까지 그러겠어?” “ 언니라면 왠지…….” “ 뭐?” “ 아냐.” 루네와 루제는 조금 있으면 열리는 황실에서의 무도회에는 원래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미 배우자도 다 있는 마당에 딱히 사교계를 전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과, 이런 저런 속물들만 모여서 서로 띄워주거니 받거니 하며 가식적으로 노는 그룹 사이에 껴서 함께 호호 깔깔 거리는 것은 영 맞지 않는 적성에서였다. 그러나 유리엔이 돌아오면서 루제는 생각을 바꿨다. “ 자, 그렇다면 이번 무도회의 명실상부한 주인공! 황녀님, 참석하실 거죠?” “ 글쎄.” 유리엔은 바삭거리는 과자를 한입 베어 물었다. 무도회보다 눈앞의 다과가 더 중요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유리엔이 도착한 당일 날 황궁에 들이닥친 루네와 루제는 그날 돌아가지 않고 하루 더 궁에 머물렀다. 그러더니 다음날 아침부터 유리엔의 거처로 찾아와서는 지금처럼 부산을 떨고 있는 것이다. 루제가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두 손을 마주잡았다. “ 몇 시간 남지 않았어요. 황녀님께서 폭풍미모로 무도회를 휩쓰실 바로 그 때가!” 유리엔은 지금 막 일어나 부스스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각하게 예쁘다. 이 미모에 꾸미기까지 하고 무도회에 참석한다면? 유리엔을 본 귀족들이 하나같이 놀라느라 턱뼈가 빠져 골절상을 입는대도 무리가 아니다. 루제는 상상만으로도 뿌듯해졌다. 물론 당사자인 유리엔은 별 관심이 없었다. “ 귀찮은데…….” “ 귀찮다뇨! 황녀님, 이번 황실 무도회는 황녀님의 미모를 만천하에 알리는 것 말고도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구요!” “ 중요한 의미?” “ 네. 바로바로-.” “ 바로바로?” “ 황태자전하와 황녀님의 찐~한 사이를 귀족들에게 공개하는 거죠!” “ 풉-.” 뿜었다. 먹던 과자가 목에 걸려서 유리엔은 재빨리 반쯤 남아있던 홍차를 단번에 들이켰다. 다행히 어느 정도 식어있어서 그닥 뜨겁지는 않았다. “ 괜찮으세요?” “ 괜찮긴 한데, 아니…찐한 사이라니? 카엘이랑 내가?” 유리엔은 무척 자연스럽게 카엘이란 애칭을 입에 올렸다.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말한 당사자도 듣는 이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 네!” “ 아닌데.” “ 네? 아직 아니에요?” “ 응.” 루제는 ‘아직’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그리고 유리엔은 굳이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뭔가 미묘했지만 이번에도 말하는 당사자와 듣는 이는 깨닫지 못하고 넘겼다. 유리엔은 빈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왠지 이름을 들으니까 문득 카엘 생각이 난다. 가만히 생각하니 조금 보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뭐 어차피 남아도는 게 시간인데, 라는 이유 하에 유리엔이 나갈 준비를 했다. 루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어디 가시게요?” “ 음, 얼굴이라도 볼까 하고.” “ 네? 누구 얼굴을…아, 흠흠.” “ 같이 갈래?” “ 아뇨. 다녀오세요!” 두 분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외치며 루네는 루제와 함께 방을 지키기로 했다. 유리엔이 피식 웃으며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목적지도 없이 걸으며 중얼거렸다. “ 어디에 있으려나.” 막가파다. 일단 저지르고 보는 행동 지향적 성향은 여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정해진 목적지가 없는 사람치고는 너무도 태연하게 유리엔이 황궁 안을 쏘다녔다. 그러다보니 맞은편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게 보인다. 얼씨구야 봉이다. 유리엔이 냉큼 그 누군가를 붙잡았다. “ 저기.” “ 네네네네?” 좀 심하게 더듬는다. 자기도 느꼈는지 대답하고 나서 얼굴을 붉혔다. 유리엔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 지금 연무장엔 누가 있을까요?” “ 예? 아, 오늘은 황태자전하께서 기사단과 아침 대련을 해주시는 날입니다. 지금쯤이면 아직 연무장에서 한참 대련을…….” 이놈의 직감. 그냥 찔러봤는데 연무장에 있는 게 맞댄다. 유리엔이 회심의 미소를 짓자 누군가, 즉 지나가던 기사의 심장이 쿵덕쿵덕 뛰었다. “ 연무장이 어디쯤 있는지 모르겠네….” “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 한 몸 불살라 길안내에 바치겠다며 기사가 의지를 불태웠다. 덕분에 유리엔은 기사의 안내를 받으며 편하게 연무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챙! 연무장은 멀지 않았다. 가까이 가자 이전에 몇 번 들었던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바쁘게 움직이는 기사들의 열기로 인해 연무장의 공기는 다소 덥게 느껴졌다. “ 안내해줘서 고마워요.” “ 아아아아닙니다!” 살포시 웃어주자 또 얼굴을 잔뜩 붉히며 말을 더듬는다. 더듬으면서도 대답은 참 우렁차서 그 소리에 대련 중이던 기사들 중 몇몇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유리엔을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움직임을 멈췄다. “ 으악! 미친놈아, 갑자기 멈추면 어떡해! 찌를 뻔 했잖아!” “ …….” “ 어이? 뭘 그렇게 보는 거…….” “ …….” “ …….” 한 놈이 넋을 놓으면 곧 둘이 쌍으로 넋을 놓는다. 여기저기서 기사들이 단체로 대련을 멈추자 카엘 또한 검을 멈췄다. 갑자기 왜 그러는가 싶어 기사들의 시선을 따라가는 순간 카엘은 연무장에 입구에 멀뚱히 서있던 유리엔과 눈을 마주쳤다. “ ?!” 놀라서 굳어있자니 저쪽에서는 웃으며 손까지 흔든다. 무의식적으로 같이 마주 흔들다가 카엘은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유리엔은 바로 근처까지 와 있었다. “ 너…….” “ 응?” “ 갑자기 여긴 어쩐 일이야?” 카엘의 목소리에는 당황이 묻어났다. 어쩐지 저번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 데자뷰가 스쳐지나간다. 유리엔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 그냥 구경이나 좀 할까 해서. 신경 쓰지 말고 계속 대련 해.” 신경 쓰지 말고? 계속 대련? 그게 가능할까. 카엘은 고개를 내저었다. “ 눈 없냐. 주변 좀 봐라.” “ 흠? 아하.” 연무장에 있던 대부분의 기사들이 넋을 빼고 있다. 계속 유리엔이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상, 그들이 멀쩡히 대련을 지속하기란 어려워 보였다. 유리엔은 납득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인사만 한 채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 가면이라도 하나 가져 올 걸.” “ 그렇게 구경하고 싶냐?” “ 응?” “ 받아.” 펄럭, 하고 어깨 위로 뭔가 내려앉는다. 뭔가 싶어 보니 보송보송한 새 수건이다. “ 네가 써. 어차피 난 땀 흘릴 일 거의 없으니까.” “ 오오-.” 유리엔은 수건을 이용해 눈만 내놓고 나머지를 전부 가렸다. 머리부터 칭칭 동여맨 느낌이라 우스운 모습이긴 하지만 워낙 예쁘다보니 그마저도 귀여운 느낌이 든다. 카엘은 한번 픽 웃고는 몸을 돌려 기사들에게 다시 대련 시작을 알렸다. 검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돌덩이들 위에 대충 자리를 잡고 앉은 유리엔은 턱을 괸 채로 카엘을 관찰했다. 건장한 체구의 기사 서넛을 동시에 상대하는 카엘의 움직임은 빠르면서 또한 깔끔했다. ‘ 잘 하네.’ 상대하는 기사들은 쩔쩔매는데 오히려 카엘은 여유가 넘친다. 가볍게 휘두르는 것 같은데 맞부딪힌 상대방은 잔뜩 뒤로 물러났다. 좀 신기해 보이기도 하고. 이래저래 관찰하다보니 카엘의 머리카락이 예전에 비해 상당히 짧아진 것 또한 눈에 들어온다. 전에는 분명 어깨를 스치는 정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목을 대부분 드러내는 길이였다. 어울리긴 하지만 움직일 때의 찰랑거리는 느낌이 사라져서 약간 아쉬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빤히 쳐다보며 감상하다보니 어느새 끝난 건지, 아니면 쉬는 시간인지 카엘이 검을 늘어뜨리는 게 보인다. 방금까지 대련한 기사들에게 몇 마디 충고를 해 주더니 이내 이쪽으로 다가온다. 카엘은 유리엔의 옆에 걸터앉았다. “ 감상은?” “ 뭐가?” “ 구경하고 싶었다며. 감상 없어?” “ 카라멜이 생각보다 움직이는 게 빠르네.” “ 뭐냐, 그게.” 이를 드러내며 하하 웃는다. 유리엔은 그런 카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웃음을 멈춘 카엘이 왜 그렇게 쳐다보냐는 표정으로 유리엔을 마주 쳐다보았다. “ …….”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본 채로 시간이 흘렀다. 분명히 멀지 않은 거리에서 기사들이 대련에 열중하고 있었기에 챙챙 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울 만도 한데, 이상하게 조용한 것처럼 느껴졌다. 주변에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서로의 눈동자만이 시야에 있었다. 먼저 얼굴을 돌린 것은 카엘이었다. “ 아, 너무 오래 쉬었나.” 그러면서 좀 전까지 대련을 하던 장소로 성큼성큼 걸어 돌아간다. 유리엔이 놀란 표정을 했다. “ 야, 너…….” 여기에 검 두고 갔어. 아니나 다를까 카엘이 당황한 기색으로 이쪽을 돌아본다. 유리엔은 웃음을 터뜨렸다. 둘의 귓가가 붉은 기를 띠는 것은 연무장의 공기가 덥기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 # 111편 # 소제목 : 아직도 멀었네요. (9) ================================ 방으로 돌아온 유리엔은 뺨에 손등을 대 보았다. 약간 뜨거운가? 그런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고. 아까 전 상황이 의식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떠오른다. 눈빛교환을 그렇게 진지하게 해 보기란 적어도 카엘과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당황스러운 건 카엘의 반응. 왜 그렇게 의식하는 건지. 그러면 이쪽까지 덩달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잖아! “ 괜찮으세요?” “ …응? 아, 괜찮아.” 답지 않게 멍하니 서있던 유리엔에게 루네가 걱정스러운 듯 물어왔고 곧바로 유리엔이 미소로 화답했다. 좀 전까지의 생각은 고개를 살짝 흔듦으로써 떨쳐버리고 유리엔은 의자 위에 앉았다. “ 흠…혹시 무슨 일 있으셨어요? 예를 들면 황태자전하와의 므흣한,” “ 없었어.” “ 쳇.” 말을 자르며 칼같이 튀어나온 부정에 루제가 아쉬운 듯 입술을 삐죽였다. 아니, 말은 없었다고 하지만 분명 뭔가가 있었을 거다. 날카로운 직감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다만 물고 늘어진다고 해서 대답해주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에 루제는 입을 다물었다. 루네가 손뼉을 마주치며 말을 꺼냈다. “ 아! 벌써 시간이 점심때가 다 됐네요?” 듣는 순간 루제가 눈을 빛냈다. “ 아니 어느새! 그렇다면 이제 슬슬 준비에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 준비라니?” “ 무도회 참석 준비요!” “ 아아.” 귀찮대도. 유리엔의 심드렁한 표정은 ‘관심 없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헛, 이러면 아니 된다. 루제는 어떻게 해서든 유리엔의 반짝반짝 무도회 꾸밈 버전을 보고 싶었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네. 보고 싶단 말여! 눈앞에서 볼 거란 말이여! 고민 끝에 루제는 얼굴도 모르는 젤디아 공녀를 팔기로 했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뭐든 던지고 보는 거다. “ 그러고 보니 갑자기 생각이 나네요. 얼마 전에 젤디아라는 공녀가 돌아왔는데 말예요.” “ ?” “ 아니 그 공녀가 글쎄!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닌 다네요? 감히 황녀님이 계신데 말이죠!” “ 응.” “ 이번 무도회에서 자기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겠다고 그랬데요. 누구든지 저를 보기만 하면 대륙제일의 미녀라고 인정할 거라면서요!” “ 그렇구나.” “ …안 짱나세요?” “ 별로?” 이럴 수. 먹히지 않는다. 지난 공백 기간 동안 유리엔은 진정으로 하해와 같은 넓이의 아량을 지니게 된 것인가.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루제는 나오는 대로 말을 던졌다. “ 알고 보니 황녀님을 뒤에서 대놓고 깐다는 말도 있어요. 자기는 날개 없는 천사처럼 예뻐서 황녀님은 쨉도 안 된다면서요.” “ 그래.” “ 막 나댄대요. 세상의 모든 게 지 발밑에 다 있대요.” “ 아하.” “ 콧대가 하늘을 찌르다 못해 뚫고 나갈 지경이래요. 그런데 남자 앞에서는 착한 척 순진한 척 온갖 내숭 다 떤데요.” “ 오호.” 루제는 사실무근 근거제로로 그냥 떠오르는 대로 내뱉는 말들이었지만, 놀랍게도 대부분이 사실과 맞아떨어졌다. 물론 그걸 아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지만. “ 음…그리고…또, 무도회에 참석하는 모든 남자들은 자기를 보고 포로가 될 거라네요.” “ 아아.” “ 자기가 여신중의 여신이라고 했다고도 해요.” “ 오오.” “ 황태자전하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넘어오게 할 수 있대요. 이번 무도회에서 아예 자기 걸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 뭐?” “ 네?” “ 방금 뭐?” 에라 모르겠다 이제 아무거나 내뱉자 싶어 이것저것 줄줄 말하던 루제는 드디어 유리엔이 반응을 보이자 기쁜 마음에 절로 두 손을 맞잡았다. 그런데 자기가 좀 전에 어떤 드립을 쳤더라? 너무 생각 없이 내뱉다보니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루제가 더듬더듬 기억을 되짚어가며 말했다. “ 어…모든 남자들이 포로?” “ 말고.” “ 여신중의 여신?” “ 그것도 말고.” “ …아! 황태자 전하를 자기 걸로.” “ 그래, 그거.” 유리엔이 웃었다.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이 살기는 대체 무엇이냐. “ 건방지네.” “ 그, 그렇죠?” 루제가 침을 꼴깍 삼켰다. 기대보다 더 반응이 강한 느낌이다. 이러다 혹시 그 공녀 죽는 건 아녀? 살살 눈치를 살피며 루제가 물었다. “ 음, 무도회 참석 준비 하실 거죠?” “ 일단 식사부터 하고.” “ -네!” 어찌됐든 초기의 목표는 달성했기에 루제는 싱글벙글했다. 한편 마음씨 고운 루네는 식사를 들기 전, 젤디아인지 젤리인지 하는 모르는 공녀를 위해 묵념의 기도를 올렸다. 시간이 되었다. 슬슬 출발하면 타이밍이 딱 맞는다. 유리엔이 거울 앞에서 마지막 점검을 했다. 검고 긴 생머리를 가지런하게 아래로 늘어뜨리고 순백색의 드레스를 맞춰 입었다. 루제는 유리엔의 모습의 마치 눈의 요정 같다고 표현했다. “ 아아…….” 이것이 과연 몇 년 만에 느껴보는 현기증인고. 루제는 손등으로 이마를 짚었다. 장신구라고는 유리엔이 본래 끼고 있던 반지 뿐 이었지만 소박하거나 아쉽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청초함을 더욱 부각시킨다. 머리장식을 전혀 하지 않고 그저 늘어뜨린 검은 머리는 그 머릿결 때문에 마치 펼쳐진 비단 같았다. 이제 출발할까 싶어 유리엔이 거울에서 몸을 돌렸다. 그때 미리 맞춘 듯 노크소리가 울렸다. 똑똑. “ 제가 열게요.” 한달음에 문 앞으로 달려간 루제가 닫힌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카엘과 네이시온이 준비가 끝난 채로 서 있었다. 남편에게 사랑의 윙크를 한 번 날려준 루제가 유리엔을 불렀다. “ 황녀님! 에스코트하러 오셨어요!” “ 어?” 누가, 라고 물을 필요도 없이 단번에 카엘의 모습이 시선을 휘어잡는다. 검은 바탕에 루비 빛 수가 놓인 연미복을 차려입은 카엘은 누가 보나 넋을 잃을 만큼 근사했다. 새삼 잘생기긴 했다고 생각하며 유리엔이 문가로 향했다. 이때 루제는 유리엔에게서 등을 돌린 자세로 카엘과 마주보고 있었다. 티 나지 않게 카엘을 콕 찌른다 싶더니, 카엘이 시선을 주자 곧바로 뭔가를 건네주고는 모른척한다. 일단 숨기라는 뉘앙스라서 받자마자 품속에 숨기기는 했다. 손에 쥐었던 순간 느껴진 감촉으로는, 아마도 목걸이인데. 카엘은 다가오는 유리엔을 바라보았다. 희고 가느다란 목에는 아무것도 장식 된 것이 없었다. 루제의 의도를 눈치 채고 카엘이 피식 웃었다. 금세 유리엔은 카엘의 앞에 마주 섰다. 카엘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 위에 유리엔이 가는 손을 얹었다. “ 갈까?” “ 좋지.” 완벽한 한 쌍의 커플이 무도회를 향해 나란히 걸음을 내딛었다. ================================ # 112편 # 소제목 : 리리플 ================================ ================================ # 113편 # 소제목 : 아직도 멀었네요. (10) ================================ 벼르던 날을 맞이한 젤디아는 잔뜩 신경을 쓴 머리와 옷차림으로 연회장에 나타났다. 붉은 장미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드레스의 풍성한 밑자락이 원을 그리며 바닥을 쓸었고, 탐스런 금발은 전부 위로 틀어 올린 모양새였다. 거기에 온갖 고가의 보석들이 저마다 빛을 내며 그녀를 장식하고 있었다. 틀어 올린 머리와 넓게 파인 드레스 덕에 드러난 목부터 쇄골까지 이어지는 선이, 본능에 이끌리는 사내들의 시선을 저절로 끌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따가운 시선들을 느끼며 젤디아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기다리는 주인공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황이다. 그녀는 몇몇 작위가 높은 귀족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홀의 입구를 쳐다보았다. 외모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한 기대감이 젤디아를 감쌌다. 어서 카엘이 이곳에 도착했으면 하는 바람이 넘실거렸다. 사교계의 모든 영애들이 흠모한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만큼 잘난 남자가, 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빠져드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극히 달콤했다. 원하던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녀가 포도주로 마른 목을 조금 축인 바로 후였다. “ 카류엘 황태자전하와 유리시엔 황녀전하께서 드십니다!” 시종의 힘 있는 외침과 함께, 연회장의 모든 소란이 일시에 멈췄다. 뭔가 허전하다. 유리엔은 카엘과 함께 복도를 가로지르며 줄곧 그 생각을 했다. 분명 아까 전에 떠올렸던 것 같은데 그새 다른 생각들 때문에 다시 잊어버리고만 그런 느낌이었다. 대체 그게 뭘까 목적지에 다다르도록 고민을 거듭하다 유리엔이 문득 탄성을 내뱉었다. “ -아!” “ 왜?” “ 린은?” 카엘은 유리엔이 전에 그녀의 전속 시녀였던 소녀의 행방을 묻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진작 얘기해준다는 걸 깜박했던 카엘이 막 대답하려 입을 여는 순간, 그들은 목적지인 연회장의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 서있던 시종은 넋을 빼고 둘을 쳐다보다가 루제가 콕 찌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흠흠 목청을 가다듬었다. 타이밍이 참 잘도 맞는다고 생각하며 카엘이 유리엔에게 속삭였다. “ 들어가서 얘기해줄게.” “ 좋아.” 이내 명단을 확인한 시종이 커다랗게 외쳤다. “ 카류엘 황태자전하와 유리시엔 황녀전하께서 드십니다!” 그리고 뒤이어 루제와 네이시온을 연달아 소개했다. 넷은 둘씩 커플을 지어 홀 안으로 들어섰다. 앞에 선 카엘과 유리엔에게로 순식간에 홀 안의 모든 시선이 쏠렸다. “ 아……!” “ 저분이 바로 그…….” 몇몇이 낮은 탄성을 흘렸다. 카엘과 유리엔에게 한번 시선을 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단지 눈동자와 고개만이 움직이며 둘의 모습을 좇을 뿐이었다. 흑색의 연미복과 흰 드레스가 마치 원래부터 한 쌍인 듯 잘 어울렸다. 유리엔의 결 좋은 흑발이 조금씩 찰랑일 때마다 남자들의 갈 곳을 잃은 입이 더욱 벌어졌다. 카엘의 길게 뻗은 다리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딛을 때마다 영애들이 손수건을 쥐어짰다. 신이 내린 가장 완벽한 피조물이 나란히 서서 연회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 과연…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요.” “ 저희의 기다림은 헛되지 않았던 겁니다.” “ 그래요. 어떻습니까,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정화되지 않습니까? 모든 더러운 해악의 찌꺼기들의 성스러운 아름다움에 의해 소멸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 안구정화 커플입니다.” “ 그렇습니다.” “ 더 이상의 대립은 이제 의미가 없을 듯합니다. 우리, 연합합시다.” “ 옳습니다.” 연회장의 한쪽에서는 무리를 지어 모여 있던 ‘유리엔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하 유사모)과 ‘카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카사모)의 회원들이 서로 연합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여러 사람들이 넋을 잃거나 혹은 감격에 겨워하거나 또는 서로의 세력을 합쳐버리는 가운데, 젤디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치뜨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 ……!”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사실상 그녀였다. 젤디아는 카엘과 유리엔이 등장했을 때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넋을 잃었다. 그리고 뚫어져라 두 사람을 쳐다봤다. 둘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고 뒷모습이 보이게 되고 나서야 제 넋을 찾은 젤디아가 처음으로 느낀 감정은 끝도 없는 패배감이었다. 카엘을 넋을 잃고 쳐다봤다. 이건 괜찮다. 그만큼 잘생겼으니 어쩔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택한 남자가 이 정도라는 사실에 뿌듯해야 할 지경이었다. 유리엔을 넋을 잃고 쳐다봤다. 이게 문제다. 이건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다. 살면서 이런 굴욕감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 설마, 그럴 리가. 내 눈이 순간 잘못됐던 거야. 그래, 카엘 오라버니의 곁에 있었으니 덩달아 빛나 보였던 거겠지.’ 그래야 하는데.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사람들의 시선이 좀처럼 저에게로 다시 돌아오질 않는다. 자신을 쳐다보며 침을 흘릴 기세이던 남자들이 그새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전부 다 일심동체라도 되는지 한 결 같이 유리엔을 좇고 있다. 결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며 젤디아가 유리엔과 카엘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눈앞에서 직접 다시 확인하지 않고서는 방금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젤디아를 먼저 발견한 것은 카엘이었다. “ 안녕하세요, 카엘 오라버니?” 일부러 목소리에 평소보다 더 애교를 담은 채로, 눈웃음을 살살 쳐가며 젤디아가 인사해왔다. 카엘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나자, 낯선 목소리에 유리엔이 고개를 돌렸다. 유리엔의 시선이 젤디아를 향했고 둘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젤디아는 두 번째 충격을 받았다. 막상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상식을 넘어서는 미인이다. 상상도 해본 적 없는 미모였다. 살면서 이렇게 생긴 사람 처음 본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녀는 말문마저 막혔다. 자기가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을 거라는 근거 없던 믿음이 산산이 조각나서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젤디아의 주먹 쥔 손의 손톱이 연한 손바닥의 살을 파고들었다. ================================ # 114편 # 소제목 : 아직도 멀었네요. (11) ================================ 얜 뭐지. 저를 마주하자마자 혼자 충격에 빠져드는 젤디아를 유리엔은 위부터 아래로 한번 간단히 스캔했다. 그리고 지난날의 갖은 경험과 타고난 눈썰미로 그녀는 단번에 젤디아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님 떨거지네여? 미모도로 판단한다면 떨거지들 중에서는 가장 위쪽에 랭크될만한 수준이다. 떨거지들의 서열1위 쯤 되는 모양이었다. 다시 말해 대장떨거지. 유리엔이 대강이지만 제법 정확한 결론을 내렸다. 왠지 대장떨거지라는 어감이 마음에 들어서 묘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을 무렵이었다. “ …안녕하세요?” 그새 충격에서 벗어났는지 대장떨거지가 인사를 건네어온다. 헌데 그것은 제대로 된 인사라기에는 상당히 예의가 없었다. 우선 엄연히 따지자면 서열상 저보다 윗줄인 황녀에게 공녀가, 서로 초면인 상태에서 자기소개도 없이 저 한마디만 딸랑 던지는 것에서부터 아웃이다. 거기다 말 할 때 고개도 안 숙였으니 투아웃. 그리고 마지막으로, 젤디아는 길가다 오크 똥을 밟고 미끄러져 넘어진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주 건방진 표정이네요 그런고로 님 쓰리아웃요. 유리엔은 인사 한번으로 예의 면에서 쓰리아웃당한 대장떨거지에게 모든 흥미가 뚝 떨어졌다. 나름 기대했는데 그저 지금까지 겪어온 그냥저냥한 떨거지들과 하는 짓이 똑같다니 실망이다. 내심 속마음 꼭 감추고 꼬리를 살랑거리면서 애교를 떨어 친한 척 접근해 방심을 유도한 뒤, 내부의 인물들과 접촉하여 갈등을 조장해 내분을 일으키고 결정적인 순간에 뒤통수를 후려치는 악랄하고도 악독한 수법을 구사하는 고단수쯤은 되길 바랐는데 말이다. 알고 보니 기대와는 달리 제 감정을 적 앞에서 그대로 드러내는 새파란 애송이라니 에이, 대장이라면서 고작 그 정도라니 영 별로다. 딱히 상대할 가치가 없어 뵌다. 얘랑 기 싸움할 시간에 차라리 과자 하나를 더 씹는 게 훨씬 생산적인 일이라고 판단한 유리엔이 젤디아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그녀가 몸을 돌려 향한 곳은 연회를 위한 음식이 준비 된 곳이었다. 결과적으로 젤디아는 무시당했다. 완전히 쌩까였다. “ ……!? 하?”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황당함 등의 복합적인 감정을 담은 짧은 숨이 단말마의 소리와 함께 내뱉어졌다. 좀 전에는 외모로써 밀린다는 충격에 몸이 굳어졌다면, 이번엔 어이없음과 분노 때문에 꼼짝 할 수 없었다. 무시를 당해? 살아오면서 처음이다. 정말로 저를 무시해? 믿을 수가 없다.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오던 무심한 흑색의 눈동자가 저절로 뇌리에 각인되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떠올랐다. 분이 차오른다. 그러나 그것을 표출하기 전 그녀는 흘끗 눈동자를 굴렸다. 카엘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공을 들여 좋은 인상만을 심어준 이들이 곳곳에서 심심잖게 보인다. 이곳은 화를 내기에는 좋지 못한 장소였다. 참자, 일단 지금은 참아야 한다. 심호흡을 하고 젤디아는 바삐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 자기야, 아~ 해봐.” “ 아~오물오물. 꺄아! 너무 맛있다. 자기도 아~해봐.” “ 아~.” “ 어때?” “ 음…자기가 사랑의 손길로 먹여줘서 그런지 평소보다 훨씬 맛있는 걸?” “ 아잉, 자기도 참. 몰라 몰라!” “ …….” “ …….” 미처 생각지 못한 복병이다. 연회 음식이 준비된 곳에는 옆 사람을 석상으로 만드는 스킬을 구사하며 서로의 오붓함을 과시하는 한 쌍의 바퀴벌레와도 같은 커플이 있었다. 음식 앞에서 펼쳐지는 그들의 애정행각에 근처의 귀족들이 짜게 식어갔다. 밥 먹으면서 저게 대체 뭐하는 짓들이래. 유리엔의 입가가 씰룩였다. 그런 그녀와 곁의 카엘을 발견하고, 음식 앞 극강 커플의 주인공인 루제가 반가운 표정을 지어왔다. “ 황녀님! 오셨네요. 여기 음식 정말 맛있으니 한번 드셔보세요. 특히 방금 전 저희가 한 것처럼 서로 먹여주시면 훨씬 더-” “ 루제야.” “ 네?” “ 점심 때 먹은 것까지 도로 뱉게 만들어주면 다신 그런 짓을 안 할까?” “ …얌전히 안하겠습니다.” “ 그래.” 잘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유리엔이 음식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포크로 적당한 크기의 먹을 것을 찍어 서로의 입에 넣어주던 루제커플의 모습이 문득 떠올라버린 유리엔은, 순간 저도 모르게 카엘과 자신을 그 장면에 대입했다가 이내 빠르게 돋아오는 소름에 팔을 삭삭 문질렀다. 포크로 음식을 찍어서 손수 먹여주기라니, 역시 무리다. 그것 보다는 차라리 그냥 포크로 상대방을 찍어버리는 게 더 쉽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유리엔이 고급스러운 외양을 뽐내는 요리들을 접시에 덜었다. 카엘도 덩달아 유리엔의 곁에서 접시에 먹을 것들을 덜었고, 곧 어느 정도 채워진 접시를 들고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으려던 참이었다. “ 앗, 잠깐! 여기서 드시게요?” “ 그럼?” “ 맛있는 음식은 조용한 곳에서 즐기라는 옛 말이 있지요!” 어디서 주서들은 건지 듣도 보도 못한 잡옛말을 들먹이며 루제가 특정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 방향을 따라가니 보이는 것은 테라스. “ 여기서 제법 가깝죠? 소란스럽지도 않을 테고 얼마나 좋아요.” “ 흐음.” 따져보니 괜찮은 것도 같다. 루제의 의견에 동의한 유리엔은 테라스에서 식사를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고, 카엘도 딱히 싫은 기색은 없었다. 그렇게 테라스로 향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향해 루제가 들릴 듯 말듯 말했다. “ 오붓한 식사 되세요~.” 아싸, 둘만 보내기 성공. 흐뭇한 미소였다. 테라스의 분위기는 최상이었다. 먼저 나와 있는 사람도 없는 데다, 연회장의 불빛과 은은히 내리비추는 달빛이 적당히 어우러져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게다가 루제의 말대로 소음 또한 전혀 없었다. 들려오는 것은 그저 문 너머에서 연주하는 악단의 부드러운 음악소리뿐이다. 이보다 더 좋은 분위기가 어디에 있을까. 이런 곳에서 이성과 단둘이 함께 있는다? 없던 마음도 생겨나고 시든 사랑도 다시 꽃피어날 정도다. 이것이 바로 청춘기에 접어든 남녀를 위한 사랑의 테라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테라스를 찾은 주인공이 유리엔과 카엘이라는 콤비가 아닐 때의 얘기다. “ 맛 괜찮네.” “ 그러게.” 좀 전부터 순전히 식사만 계속해서 하고 있던 두 사람의 대화였다. 위 상황을 좀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다음의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저녁을 넘긴 시간 두 남녀가 분위기가 끝내주는 장소에서 단 둘이 서로를 마주보고 앉아 오붓하게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것을 줄여서 뭐라고 할까요? 정답은 데이트. 고민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답이다. 그럼 여기서 문제를 아주 약간 바꿔본다. 저녁을 넘긴 시간 카엘과 유리엔이 분위기가 끝내주는 장소에서 단 둘이 서로를 마주보고 앉아 오붓하게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것을 줄여서 뭐라고 할까요? 정답은 외식. 둘은 잃어버린 낭만을 찾아 함께 여행이라도 다녀와야 할 필요가 있었다. “ 맞다!” “ ?” “ 린 얘기 해줘야지.” “ 아아.” 접시를 비우고 포크를 내려놓는 순간 생각이 났다. 그런 유리엔의 맞은편에서, 접시를 옆으로 치운 카엘이 턱을 괬다. 딱히 진지해질 필요는 없는 내용이었기에 쉽게 말를 꺼냈다. “ 간단히 말하자면 린은 지금 여기 없어.” “ 여기? 황성에 없다는 얘기야?” “ 그래. 정확히는 수도에도 없고. 어딜 좀 갔거든.” “ 그게 어딘데?” “ 글쎄, 작은 영작령으로 갔다던데 좀 멀지 아마. 물론 제국 밖이라는 건 아냐.” “ 아하. 왜 간거야?” “ 남친 따라서.” “ 그렇구나. 남친 따라서…남친 따라…뭐?” 상대방이 워낙 대수롭지 않게 말해서 듣는 이인 유리엔도 덩달아 대수롭지 않게 듣던 도중, 그녀는 왠지 대충 넘겨서는 안 될 것 같은 단어 하나를 잡아냈다. 뭣이라, 남친? “ 남친? 누구한테, 린한테?” “ 작년부터 생겼더라고.” “ 헐? 누구야 그게?” 유리엔은 톡톡 튀어 오르듯 반응했다. 왠지 린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건 그 상대가 누구든 죄다 도둑놈으로 보일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의외로 금방 말해줄 것 같았던 카엘이 답지 않게 뜸을 들인다. “ 흠…….” “ 왜? 누구 길래. 내가 아는 사람이야?” “ 그렇기도 한데, 직접 보는 게 아무래도 훨씬 좋을 것 같아서.” ================================ # 115편 # 소제목 : 아직도 멀었네요. (12) ================================ “ 그게 뭔 소리야.” “ 말 그대로.” “ 둘이 언제 돌아오는데?” “ 곧.” 흐음, 하고 생각에 잠기듯 유리엔은 턱을 쓰다듬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직접 보는 게 훨씬 낫다고? 귀로 먼저 듣는 것 보다는 그냥 모르다가 눈으로 보는 게 더 낫다는 뜻인가? 왜? “ 그냥 말 해봐.” “ 직접 보는 게 훨씬 낫다니까.” “ 듣고 나서 보면 되잖아?” “ 안 듣고 보는 쪽이 더 나아.” 그렇게 말하면 더 궁금해지잖아 카라멜아. “ 정말 누군데? 내가 아는 사람이라며.” “ 그냥 눈으로 보래도.” “ 먼저 듣고 싶대도.” “ 그냥 보는 게 낫대도. “ 그래도 듣고 싶대도!” 끝도 없을 것 같은 논쟁을 지속하다가, 유리엔은 문득 어렴풋이 기억나는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뺀질거리는 면상이 휙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진다. …에이, 아니겠지. 설마 그 놈 일리가. 절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그 누군가 말고는 적당한 사람이 없는 것 같기도 하면서, 아니 그래도 안되는데 그 놈은. “ 카라멜.” “ 왜?” “ 설마.” “ 설마 뭐?” “ 노바카사는 아니지?” “ …….” 카엘은 슬쩍 유리엔의 시선을 피했다. 야경이 참 멋지네 라던가 오늘따라 달빛이 참 괜찮네 등의 실없는 소리가 막 카엘의 입에서 튀어나오려는데, 유리엔이 한발 빨랐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유리엔은 거의 멱살을 잡아챌 기세였다. 그녀는 카엘에게로 얼굴을 바짝 붙였다. “ 자 빨리 입을 여세요 카라멜군. 그리고 빨리 그게 무슨 소리니 절대 아니지 하하 라고 말하세요 어서.” “ 저기 잠깐, 검둥아.” “ 노바카사가 대체 뭐니 린 남자친구의 이름은 그런 집먼지 진드기의 한 종류일 것 같은 이름과 조금도 비슷하지 않단다 하하하 라고 당장 말하지 못하겠나요 카라멜군?” “ 저기, 잠깐만.” 당황스럽다, 는게 지금 카엘의 심정이다. 유리엔은 지금 린의 남친의 정체가 노바카사일지도 모른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흥분한 채라 그 외의 다른 것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상태였으나, 유감이게도 카엘은 아니었다. 그의 이성은 멀쩡했고, 따라서 지금 유리엔과 저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했다. 약간만 잘못 움직였다간 입술이 닿을 것 같은 거리다. 조금 많이 당황스럽다. “ 얼굴 좀,” “ 얼굴 뭐! 참 생각해보니 노바카사 그 집먼지 진드기 녀석이 얼굴은 좀 뺀질뺀질했었지. 그런데 사람은 얼굴이 다가 아니잖아, 설마 린이 그 반질거리는 면상에 넘어갔다는 건 아니지? 그렇지? 아니지?” “ 그게 아니라,” “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야. 노바카사라니, 노바카사라니!” 그런 카엘의 심정은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엔은 오히려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댔다. 이젠 정말로 가깝다. 코가 스치는 건 문제도 아니고 중요한 건 숨결이 느껴진다는 거다. 당황스럽다. 난감하다. 신경 쓰인다. 의식된다. 대체 뭘 믿고 이 여자는 이렇게 둔한가? 이리저리 눈을 돌려가며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다 결국, 카엘은 유리엔과 눈을 맞췄다. “ 저기.” “ 아아 린 내가 없는 사이 시력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남친으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노바카사를!” “ 이봐?” “ 내가 린 너를 그렇게 키운 거니? 그런 거니?” “ 유리엔.” “ 정말 안타깝……어?” 유리엔이 말을 멈췄다. 카엘의 입에서 처음 흘러나오는 제 애칭에 갑자기 정신을 차린 유리엔이 긴 속눈썹을 깜박거렸다. 방금 뭐라고? 검은 눈동자에 초점이 명확히 맺히며 카엘을 응시한다. 어? 그런데 왜 이렇게 가깝지. “ 너 말야.” “ …….” “ 지금 나 덮치냐.” 이해하기까지 약 1초. 눈 깜짝할 새에 유리엔이 얼굴을 뗐다. 둘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잔뜩 벌어졌다. 뒤로 물러나다 못해 가장 끝인 테라스 난간에까지 가서 붙는 그녀의 모습에 카엘이 묘한 표정을 했다. “ 왜 니가 도망쳐?” “ 어? 아니, 저기, 이건, 어?” 딱히 도망친 건 아닌데. 그러고 보니 너무 멀리 떨어졌다. 왜 여기까지나 왔을까 잠시 생각하며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유리엔은 슬금슬금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속도가 너무 느려서, 지켜보던 카엘이 웃음을 터뜨렸다. “ …왜 웃어.” “ 아니, 그냥.” “ 너 얼굴 빨개졌다.” “ …….” “ …….” 급 조용해진다. 유리엔은 입을 다물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던져본 건데. 어? 하고 놀라거나 뭔 소리야, 하고 부정하는 반응이 나오면 곧장 뻥이었다며 놀려먹으려고 한 말이었는데. 진짜로 얼굴에 열이 올랐다. 흰 피부위에 붉은 기가 여과 없이 드러난다. “ …….” “ …….” 이건 대체 뭐하는 분위기야. 동시에 든 생각이었다. ================================ # 116편 # 소제목 : 아직도 멀었네요. (13) ================================ 네이시온은 루제의 은밀한 움직임을 감지했다. 루제는 바닥에 끌리는 드레스의 끝을 살짝 든 채로, 정원으로 나가는 문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가고 있었다. 아니 그냥 장군처럼 걸어가도 될 것을 뭐하러 살금살금? 깨끗이 비운 접시를 시종에게 건넨 네이시온이 루제를 향해 의아한 눈빛을 던졌다. 그 시선을 느낀 루제가 이쪽을 흘끗 쳐다보더니 이내 제 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한다.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네이시온은 순순히 루제의 옆으로 뚜벅뚜벅 걸어 다가갔다. “ 어딜 가는 거야?” “ 쉿. 그냥 따라와.” “ ?” 호기심을 안고서 네이시온은 루제를 따라 정원으로 나섰다. 밤이 내려앉은 정원은 제법 어두웠지만, 달도 밝거니와 연회장에서 비치는 불빛이 어느 정도 시야를 트게 해주었다. 정원을 걸으면서도 루제는 여전히 살금살금이었다. “ 저기 자기, 그런데 자기 폼이 마치…….” “ 응?” “ 딱 뭐 훔쳐보러 가는 사람 같은데, 설마 아니겠.” “ 어머! 어떻게 알았어?” “ …….” 그래도 되는 겨? 네이시온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저는 지금 이 밤에 부인과 함께 뭔지 모르는 어떤 것을 훔쳐보러 정원을 거닐고 있단 말인가. 이 시간에? 이 야심한 시간에? 대체 뭘 훔쳐보러? 그리고 왜? 말려야 하나 라는 고민이 이내 제 힘으로 말릴 수 있을까 라는 고민으로 바뀐다. 그렇게 갈등하면서도 네이시온의 발은 부인을 따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 다 왔다. 이젠 정말 쉿!” 얼결에 손가락으로 입술을 막은 네이시온이 루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약간 위를 쳐다보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연회장과 바로 통해있는 그 장소. “ 테라스?” 작게 중얼거리자 루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핏 웃는다. 그러면서 소곤거려오는 말이 이렇다. “ 던져놓은 떡밥의 결실을 봐야 하거든.” “ 에?” 네이시온은 그 떡밥이 뭔지 모른다. 그저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루제의 눈동자를 보며, 이 여자가 또 뭔 일을 벌여놨구나 할 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훔쳐봐도 되는 거냐며. 남녀 둘이, 그것도 둘만 있는 장소에서 서로를 의식하기 시작하면 분위기는 자동으로 급 뻘쭘해진다. 뻘쭘해진 분위기를 수습하려면 첫째로 그 장소를 피하거나, 둘째로 갑자기 제삼자가 들이닥치거나, 세 번째로 의식 중인 남녀 서로가 급 진도를 빼는 방법 등이 있다. 사실 도망치는 것이 가장 쉬웠다. 그냥 몇 발자국 걸어서 문만 열고 나가면 끝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 튀는 것 같잖아!’ 튀는 거 맞다. ‘ 그럼 지는 거잖아!’ 이런 결론이 나온다. 사람마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어쨌든 유리엔은 그렇게 여겼다. 도망치는 건 곧 지는 거다. 그런 공식의 성립 하에 유리엔은 차라리 어색 어색한 분위기의 한가운데에 놓여있을 망정 다른 장소로 튀는 선택지는 우선 배제시키는 걸 택했다. 게다가 이런 상태에서 도망이라 함은 즉 ‘나 지금 님 폭풍의식 중이에요 부끄부끄’라고 대놓고 티를 내는 것과 다를 게 없기도 하다. 헐 그건 더 싫음. “ …….” 그래. 안 어색한 척 하자.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이 그거였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태연한 척 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유리엔이 입술 끝에 여유 있어 보이는 미소를 매달았다. 그 미소가 누군가의 하트에 불을 지펴 놓은 것도 모르고. “ …….” 혈액순환이 너무 잘된 나머지 얼굴에까지 피가 몰린 카엘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 쟤는 또 왜 갑자기 웃고 난리래 심장 뛰게. 열이나 식히자 싶어 밤경치를 바라보는데, 앞에서 또각 거리는 구두소리가 들린다. 무심코 돌아봤더니 유리엔이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멀지 않은 거리가 금방 가까워진다. 카엘에게 다가가면서 유리엔이 자기암시를 걸었다. 자, 난 태연함. 태연하니까 상대방을 놀리면서도 태연할 수 있음. 의자에 앉은 채로 저를 올려다보는 카엘을 마주보며, 유리엔이 두 팔로 난간을 탁 소리가 나게 짚었다. 아주 박력 있다. 길게 뻗은 두 팔 사이에 갇힌 카엘이 유리엔의 그런 넘치는 박력에 당황했다. 유리엔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어이, 카라멜.” “ …….”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죠. 아무리 저는 앉아있고 상대방은 서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키 차이가 한참 나는 상대에게 벽치기…아니 난간치기를 당한 카엘의 기분은 몹시 복잡미묘했다. 게다가 왠지 지나가던 건달이 가녀린 아녀자를 희롱할 때나 쓸 것 같은 느낌의 저 대사는 또 뭐. 그저 입만 다물고 있자 유리엔이 더욱 바짝 다가온다. “ 쫄지 말렴. 그냥 이 누님에게 모든 걸 맡기면 돼.” 누가 누님임? 것보다 뭘 맡겨. “ 어머나, 얼굴 좀 그만 붉히렴. 녹아 없어지겠다, 카라멜.” 아니 이 여자가. 어이가 없어서 카엘이 손을 들었다. 비키라고 말로 한다고 해서 순순히 비킬 것 같지 않았기에 살짝 힘을 줘 밀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막상 밀려고 보니 어디에 손을 대야 할지 몰라서 당황해하다가 다시 손을 내리게 된다. 무슨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이게 뭔 짓이래……. 위를 쳐다보니 유리엔이 웃음을 참는 게 보인다. 아 그래 참 재미있으시겠죠. 난감하고도 허탈해진 카엘이 헛웃음을 짓고 있는데, 문득 유리엔의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품에 넣어둔 목걸이 생각이 난다. 그러고 보니 걸어준다는 게 좀체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 지금 걸어줄까.’ 드러난 목이 어쩐지 허전해 보인다.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카엘이 입을 열었다. “ 유리엔.” “ …어?” 유리엔이 멈칫했다. 또, 애칭. 자기는 아직까지 ‘카라멜’이 입에서 떨어지질 않는데 상대는 참 태연하게도 남의 애칭을 불쑥불쑥 입에 담는다. 그게 왠지 미묘한 느낌이라, 의도하지 않게 반응이 조금씩 느리게 튀어나온다. 그런 동요를 아는지 모르는지 카엘은 여전히 목걸이 생각이었다. 자연스럽게 걸어줄 방법을 찾는 중인데, 좀처럼 떠오르는 게 없다. 결국 고전적이고 고전적이며 고전적인 뻔한 수법을 쓰기로 했다. 에라 어쩔 수 없지. “ 너 말야, 머리카락이 좀 엉킨 것 같다. 풀어줄게.” “ 에?” 갑자기 뭔 소리야, 라고 받아치기도 전에 카엘이 불쑥 몸을 일으켰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팔을 내리게 된 유리엔이 제 앞에 우뚝 선 카엘을 올려다보았다. 요즘 자주 드는 생각인데 키가 참 크다. 그런데 그보다 중요한건 얘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거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랬더니 한 발짝 가까이 다가온다. 또 물러나자 또 다가온다. 두 사람의 보폭은 차이가 난다. 당연히 서로간의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유리엔이 다시 그 테라스 끝의 난간에 붙었을 때는, 정말로 가까운 거리였다. 정작 자기가 들이밀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막상 상대 쪽에서 다가오니 이게 참 생각보다 훨씬 더 당황스럽게 된다. 결국 유리엔이 손바닥을 펼쳐 앞으로 내밀었다. “ 그, 그만 못와?” “ 왜? 머리카락 엉켰대도.” “ 니가 언제부터 엉킨 머리카락까지 풀어주는 자상한 남자였다고?” “ 지금부터.” 진심으로 왜 이러나 싶다. 설마 좀 전에 자기가 놀린 것 때문에 그 복수라도 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제대로 속 좁고 쪼잔한 네모네모 카라멜이라고 생각하며 유리엔이 말을 던졌다. 손바닥은 여전히 앞으로 뻗은 채였다. “ 그 자상 이쪽에서 사양할게.” “ 사양할 필요 없는데.” “ 난 필요하거든.” “ 그냥 엉킨 것만 풀어준다니까?” “ 내가 풀면 될 거 아냐.” “ 힘들 텐데.” “ 나한텐 뭐든 쉬워.” 한마디도 안 진다. 결국 설득은 포기한 카엘이 그냥 저를 막고 있는 유리엔의 팔을 잡고 옆으로 밀었다. 목걸이를 걸어줘야겠다는 알 수 없는 의지가 카엘을 대범하게 만들었다. 카엘이 팔을 잡아 옆으로 치우자 깜짝 놀란 것은 유리엔이었다. “ 어딜 손대!” “ …내가 세균이냐? 그리고 너 아까 에스코트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아했으면서.” “ 그야!” 그땐 지금처럼 머쓱머쓱 어색어색 의식의식 뭐지뭐지 돋네돋네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으니까. 잠깐 주춤하는 사이에 카엘이 유리엔의 팔을 잡아 내린 쪽의 반대편 손을 그녀를 향해 뻗었다. 다가오려는 손의 방향이 묘하다. 어디? 목? 드레스로 가려져 있지 않은 유일한 노출부위인 목? 정말 목? 닿기 직전 유리엔은 저도 모르게 외쳤다. “ 야! 손 안 치우기만 해, 그날로 네 주니어랑 영원히 작별이니까!!” “ …….” 주니어랑 영원히 작별. 카엘이 손을 멈췄다. 그리고 좀 전까지 자못 진지하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싶더니, 이내 몸을 부들부들 떤다. 아무래도 그 떨림이 하마터면 고자가 될 뻔했다는 공포에서 우러나온 것은 절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 카엘이 말했다. “ 나…잠깐만 웃을게.” 그러더니 빵 터진다. 배를 잡고 웃는데, 웃다가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다. 유리엔의 입가가 씰룩였다. 물론 자기가 뱉어놓고도 이게 뭔가 싶은 대사였지만 그렇다고 저 정도로 웃을 것까지야. 물론 웃는 걸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에 면전에 있는데 예의가 아닌 듯도 한데 아 왜 하필 튀어나온 게 그딴 말이어서는. 그저 싸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한참을 그렇게 웃은 카엘이 웃느라 접었던 허리를 폈다. 눈꼬리에 맺힌 물방울의 자태를 발견하고는 더욱 표정이 싸해지는 유리엔을 향해 카엘이 입을 열었다. 웃음기가 약간 남아있는 목소리였다. “ 야.” “ 왜.” “ 춤추자.” 갑자기 무슨 춤 드립인가. 물론 마침 연회장을 타고 흘러나오는 음악은 두 사람에게 당장 춤을 추라고 일러주는 듯 감미로웠지만, 그것만으로 이 상황에서 대뜸 춤을 추자고 하는 것은 역시 뜬금없었다. 하지만 카엘은 진심인 듯 유리엔에게 손을 내밀었다. “ …진심?” “ 당연하지.” “ 여기서?” “ 그래. 왜, 좋은데.” 그야, 확실히 춤을 추기에 나쁜 장소는 아니지만. 머뭇거리다 유리엔이 카엘에게 제 손을 얹었다. 멀뚱히 서있느니 차라리 춤이라도 추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싶다. 춤을 추기 위해 불가피하게 한 접촉이 좀 전만큼 신경 쓰이고 불편하지는 않다. 어느새 분위기가 평소처럼 편하게 풀어져있었다. 역시 이런 게 편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카엘이 춤을 멈췄다. “ 잠깐만.” “ ?” “ 이거.” 눈앞에 나타난 것은 목걸이였다. 백색의, 유리엔의 드레스와 무척 잘 어울릴 듯한. “ 걸어줄게.”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목걸이의 흰색 줄이 유리엔의 가는 목을 둘렀다. 마치 카엘의 품에 안기기 직전과도 같은 자세에 굳어 눈만 깜박이는 사이, 카엘의 손은 부지런히 목걸이의 체인을 걸었다. 그 와중에 살짝 닿은 손가락에 흠칫 몸이 놀란다. 목걸이는 금방 유리엔의 목에 걸렸다. 마치 맞춤인 듯 드레스의 색과 어울린다. 카엘이 씩 웃었다. “ 예쁘네.” 아직도 유리엔은 가만히 서서 눈만 깜박였다. 방금 왠지 연인사이에나 있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난 것 같은 건 저의 착각인가. 그런데 왜 얼굴에 열이 오르지? “ …카라멜.” “ 응?” “ 밤공기가 참 차네.” 하지만 얼굴에 오른 열은 왜 안 식을까. “ 그래? 혹시 추워?” “ 아냐.” 손을 올려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져본다. 생각해보니 아무런 장신구도 걸치지 않은 목이 좀 허전했던 듯도 하다. 방금 전에 슬쩍 봤던 모양을 떠올리자니 제법 저의 취향에 맞는 목걸이였던 것도 같고, 음. “ …고마워.”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였지만 못 들었을 리 없다. 그 증거로,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실은 좀 쑥쓰러워 하는 기색이 눈에 다 보인다. 문득 웃음이 난다. 유리엔이 미소를 지었다. “ 자기…봤어?” 난데없이 심각해진다. 네이시온이 옆을 돌아보자 루제는 마치 뭔가에 충격이라도 받은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 뭘?” “ 목걸이 걸어줬잖아. 분명 목걸이를 걸어주는 자세였지?” “ 그랬지. 근데 그게 왜?” “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어, 자기야.” 갑자기 왜? 뭐가? 이유는 금방 나왔다. “ 감동의 키스는? 하다못해 감사의 포옹은?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거지?” “ …….” “ 저 분위기에서! 심지어 둘만 있는데! 목걸이까지 걸어줬는데! 자기, 만약 자기라면 저런 상황에서 므흣한 마음이 들겠어 안 들겠어?” “ 아니 뭐…들겠지, 나야.” “ 그런데 왜! 저 두 사람은 왜! 어째서 왜! 떡밥의 결실이 개뿔도 없는 이유는 대체 왜!” 손수건이라도 쥐어뜯을 기세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정말로 루제가 손수건을 꺼냈다. 네이시온이 깜짝 놀랐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쥐어뜯거나 물어뜯지는 않고 다만, 마치 상처받은 가녀린 레이디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듯 손수건의 모서리로 눈 밑을 살포시 두드릴 뿐이다. “ 아직도 멀었어…아 완전…….” 탄식 섞인 목소리였다. ================================ # 117편 # 소제목 : 악역의 본분. (1) ================================ 며칠간 계속된 연회는 어제 밤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유리엔과 카엘은 첫날을 제외하고는 참석하지 않았다. 루제와 루네는 이왕 황궁까지 올라온 것 이대로 곧장 내려가기는 아쉽다며 연회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유리엔의 근처에 머물기로 했다. 둘은 대부분 유리엔의 거처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루네의 딸 미네도 함께였다. “ 미네야?” “ 꺄륵.” “ 아…….” 어쩜 이렇게 귀여울 수가. 미네가 유리엔의 얼굴과 목소리를 익히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목소리를 익힌 뒤로 미네는 유리엔이 제 이름을 부를 때마다 작은 몸을 꼼지락거리며 나름의 반응을 보였다. 아기 스스로는 어떤 의미의 표현인지 알 수 없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필살 애교로만 보이는, 갓난애의 꿈틀거림은 금세 유리엔을 사로잡았다. 덕분에 유리엔의 하루일과는 대부분이 미네와의 놀이시간으로 탈바꿈했다. “ 마, 망.” “ 어? 말하네? 우리 미네 말도 하네?” “ 마마…마망!” 조그만 입이 오물오물 움직임을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꺄륵 웃으며 옹알이를 한다. 그 살인적인 귀여움을 이기지 못하고 유리엔이 제 손등으로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그 어울리지 않는 귀여움에 루네와 루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 아기에 약하셨구나.” “ 의외.” “ 응, 좀 의외.” 작고 귀여운 것에 약한 유리엔의 성미가 그대로 드러난다. 아기도 저를 좋아해주는 것은 알아보는지 유독 유리엔에게는 낯을 가리는 법이 없었다. 사랑스러움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미네를 잠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유리엔이 통통한 아기의 볼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콕 찔렀다. 말랑말랑하니 찌르는 대로 들어가는 쏙 흰 피부를 만지작거리며 가지고 놀다가 유리엔이 문득 말했다. “ 이럴 게 아니라 우리 나갈까?” “ 네? 밖으로요?” “ 응. 미네 데리고 산책이라도 좀 하게.” “ 아, 좋죠.” 미네를 포함한 그녀들의 외출은 그렇게 간단히 결정 났다. 멀리 갈 것도 아닌데 굳이 준비라는 게 필요하겠냐며 유리엔이 간단한 차림으로 앞장섰다. 팔에 안은 미네만이 갓난애이니 혹시 감기라도 걸릴까 싶어 천으로 둘둘 말은 차림이었다. 루네와 루제가 그 뒤를 따랐다. 문을 지키는 병사에게는 잠시 외출을 다녀오겠다 일렀다. 그리고 정원으로 곧장 나가기 위해 넓은 복도를 지나 걷는데, 우연찮게도 맞은편에서 이쪽을 향해 오다가 정면으로 마주친 이가 있었다. 유리엔을 발견하자마자 걸음을 멈춘 미녀는 공교롭게도 다름 아닌 젤디아였다. 윤기 흐르는 금발을 가지런히 빗어내린 젤디아는 유리엔을 향해 표독스레 녹색 눈을 치켜떴다. 시선에 담긴 적대심이 저절로 읽혔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딱히 일부러 상대해줄 만큼 상대에게 관심이 있지도 않았으며 현재 유리엔은 대왕떨거지야 어떻든 정원에서 나가서 미네와 노는 것이 훨씬 중요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런 우연한 만남쯤이야 그다지 놀랍지도 반갑지도 않은 유리엔이 그대로 젤디아를 지나치려 할 때였다. “ 또 뵙네요. 그것도…이런 곳에서.” 젤디아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뒷말을 은근히 강조하는 것이 그 의도가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황궁을 마음껏 드나들 수 있는 저를 자랑함과 더불어 넌 왜 남의 제국에 그리 당당하게 눌러 붙어 있느냐는 비아냥거림이었다. 열 좀 받으라고 던진 말이었겠지만 정작 유리엔은 별 감흥 없이 시큰둥했다. 오히려 반응한 것은 뒤에 있던 루제였다. 보자마자 젤디아가 누구인지 알아본 루제가 아주 살짝 눈썹을 꿈틀거렸다. “ 유리…시엔 황녀님? 맞으시죠? 아, 혹시 틀렸다면 죄송해요. 제가 중요한 게 아니면 좀체 기억을 잘 못하는 성격이라, 부디 실례했다면 용서하세요.” 그러면서 젤디아가 눈꼬리를 반달로 휘며 웃는다. 아무리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 바보 멍청이라도 단번에 알 수 있을 만큼 직접적인 말이었다. 너 하찮아. 유리엔은 여전히 가소로울 뿐이었지만 루제는 아니었다. 화나고 짱난다. 열 받는다. 뭐라고 쏘아주고 싶은데 신분의 상하도 신경이 쓰이고 당사자인 유리엔이 가만히 있는데 제가 나서도 되는가 싶고 이래저래 너무 주제넘지 않으면서 적당한 말이 없을까 고민하는 차에, 루네가 조용히 속삭여왔다. “ 근데 언니.” “ 응?” “ 누구야? 저 사람.” “ …….” 루네가 말하는 ‘저 사람’이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너무도 뻔했다. 그리고 루네로서는 나름 작게 속삭인다고 속삭였겠지만 솔직히 이 조용한 분위기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유리엔은 물론 젤디아에게까지 충분히 들릴 만한 크기였다. 게다가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걸 알기에 루제는 순간적으로 터지려는 웃음을 참아야했다. 젤디아의 웃는 표정에 살짝 금이 간 것을 포착한 루제가 속으로 제 동생을 칭찬하며 루네의 귀에 작은 목소리로 낮게, 그러나 실상은 일부러 다 들리도록 속삭였다. “ 몰라도 돼. 안중요하니까.” 말이 뱉어지자마자 젤디아의 표정이 즉각 반응을 보였다. 자기가 한말을 그대로 되돌려 받은 그녀의 얼굴에는 좀 전까지 짓고 있던 미소가 어느새 지워져있었다. 유리엔이 피식 웃었다. 통쾌함이 겉으로 다 드러나는 루제를 보니 귀엽기도 하고 제법 대견하기도하고, 해서 호응이나 좀 해주자싶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 그러면 안 되지, 루제야.” “ 네?” “ 아는 건 곧 힘이라는 말도 있지 않니? 아무리 하찮고 쓸모없는 것처럼 보여도 모르는 것보단 알아두는 게 더 나을 때도 있단다. 비록 그게 지나가던 개미를 밟은 구둣발에 붙은 먼지보다 더 같잖은 거라도 말이지.” “ 아…!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죄송해요.” “ 다음부턴 그러지 말고 그 어떤 병신 같고 무가치한 알아봤자 아까운 뇌용량이나 버릴 것 같은 말하는데 드는 에너지가 더 아까운 그런 거라도 친절히 알려주도록 해.” “ 알았어요.” 루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으로 깊은 가르침을 얻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런 루제에게 빙긋 웃어주고 유리엔이 이만 가자며 발걸음을 뗐다. 그 뒤를 따라 젤디아를 지나치기 직전 루제가 루네에게 말했다. “ 생각해보니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 같아. 가령 지나가는 길에 눈에 보이면 인사를 해준다던지.” “ 그렇구나.” 막 젤디아를 스쳐지나갈 때였다. 루네가 생긋 미소를 지으며 젤디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 평안한 하루되시길…….” 무난한 작별인사다. 인사 후 루네는 유리엔을 따라 젤디아로부터 멀어졌다. 불과 몇 초전에 배운 것을 곧바로 실천하는 루네가 무척이나 대견스러워 루제가 함박웃음을 지은 채 제 동생의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어주었다. 앞서가면서 유리엔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 # 118편 # 소제목 : 악역의 본분. (2) ================================ 와장창!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찬란히 흩뿌려지는 유리조각들은 남의 야속한 마음도 몰라주고, 빛을 받아 반짝이기만 할 뿐. 손발을 베여가며 허리를 굽혀가며 힘겨워 치워야하는 우리들의 노고를 알지 못하는 유리잔을 던지는 공녀님의 팔뚝은 비록 근육은 없으나 분노라는 파워에 힘입어 불끈거립니다. 오늘도 유리조각이 카펫에 스치웁니다. 하녀A는 경건히 자작시를 읊던 것을 멈췄다. 젤디아의 히스테리가 끝나서다. 무슨 연유에선지 거처에 돌아오자마자 길길이 날뛰며 이것저것 벽을 향해 집어던진 젤디아 덕에, 방의 꼴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자기니 그릇이니 장식품이니 유리잔이니, 당장 눈에 보이는 큼직한 파편들은 오히려 같잖다. 문제는 여기저기에 어둠의 손길을 뻗쳤을 게 분명한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미세한 조각들이다. 하녀A는 저도 모르게 눈물지었다. 언제 다 치워 썩을. 그녀들의 고생 따위 알바 없는 젤디아는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침대위에 걸터앉았다. 그나마 좀 진정이 된 듯한 모습에 젤디아의 측근이 조심스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 괜찮으십니까?” 대답대신 젤디아는 애꿎은 입술만 잘근 물었다. 붉게 부어오른 입술을 연 것은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였다. “ …알아볼 게 있어.” “ 예.” “ 유리시엔황녀에 대해 조사해와. 과거도 현재도 주변의 사소한 인간관계까지 전부 다.” “ 알겠습니다.” 측근이 물러간 뒤 젤디아는 가슴부근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좀처럼 통제할 수 없던 분노가 이제야 조금이나마 가라앉는 느낌이다. 단언하건데 살면서 지금처럼 엿을 먹어 본 적이 없다. 젤디아를 싫어한 사람은 많았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앞에서 대놓고 표현하지 못했다. 그녀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아까와 같은 일은 상상도 못했다. “ 감히…….” 비틀리며 열린 입술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주제도 모르고 자신에게 그따위로 군것을 후회하게 해주리라. 앞으로의 일이 제 뜻대로 될 것이라 여긴 그녀의 표정이 싸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 소문 다 들었습니다.” “ 간만이군. 그건 그렇고 갑자기 웬 소문?” 유부남 제론의 느닷없는 방문과 첫말에 카엘이 의아함을 표했다. 제론은 웃음기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능글맞아 보이기도 했다. “ 며칠 전 파티에서 유리엔 황녀전하와 함께 둘만의 므흣한 시간을 가지셨다고.” “ …….” 카엘은 자신이 식사중이 아니었음을 감사히 여겼다. 만약 그랬다면 분명히 삼키던 것이 목에 걸렸을 것이다. “ 무슨 소리를.” “ 장소는 테라스였다고.” “ 잠깐.” “ 선물은 목걸이였다고.” “ …….” 자세한 의도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놀리러 온 듯싶다. 서른이 넘은 아저씨의 주책에 카엘은 왼손을 이마 위에 얹었다. “ 어디서 들은 거야, 그런 걸.” “ 황녀님께 들었습니다. “ 뭐?!” “ 농담입니다.” “ …….” 아저씨를 이기기에 카엘의 내공은 아직 부족했다. 카엘의 눈가가 가늘어지자 제론이 즐거운 듯 웃었다. “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 그럴 거 없어. 틀렸으니까.” “ 틀렸다니요?” “ 므흣함 따위 없었다고.” “ 이런!” 제론이 과장된 탄식을 내뱉었다. 카엘은 이미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본래 하던 일로 눈을 돌린 뒤였다. “ 아쉬우셨겠습니다.” “ 딱히.” 대답은 하지만 카엘의 눈은 서류를 읽어 내리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랑곳 않고 제론이 말을 이었다. “ 목걸이까지 걸어주셨으면서 왜 므흣함이 없었습니까.” “ 글쎄.” “ 춤도 추셨다면서요? 분위기를 봐서 찐한 키스라도 날리시지 그랬습니까.” 이번에도 대충 대꾸하려던 카엘이 행동을 멈췄다. 그때의 유리엔의 말과 행동이 문득 생각나서다. 서류를 내려놓은 카엘의 입가가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 아니. 그건 절대로 옳지 못한 선택이었을 것 같은데, 제론.” “ 예?” “ 고자가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그렇게 말하고 카엘은 어깨를 떨며 웃었다. 영문을 모르는 제론의 표정은 의아함을 담아낼 뿐이었다. 한가로운 오후. 티타임을 갖는 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유리엔을 놀라게 한 것은 제안을 한 상대방의 신원이었다. “ 누구라고?” “ 젤디아 폰 페듀린 공녀님께서…….” “ 흠.” 유리엔은 잠깐 고민했다. 무슨 이유로 고상하게 서로 티타임을 갖자는 건지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불과 얼마 전에 그렇게 엿을 먹었는데 설마 정말로 함께 차를 마시고 싶어서는 아닐 거고. 딱히 바쁠 것도 없었기에 유리엔은 대장 떨거지의 제안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다. 해서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유리엔은 경치 좋은 정원의 야외 세트장에서 젤디아와 얼굴을 마주보고 앉게 되었다. “ 차 맛이 좋군요. 안 그런가요?” “ 향이 괜찮네.”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유리엔은 젤디아가 본론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몇 마디의 간단한 인사가 오가고 난 직후, 젤디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 예상은 했지만 정말 뻔뻔하네요.” 뻔뻔하다는 그 주체가 누구인지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별다른 대꾸가 없는 유리엔을 향해 젤디아가 말을 이었다. “ 듣자하니, 5년 전 일이라지만…정략혼?” 오, 저 소재를 꺼내나. 뭐라고 지껄일지 궁금하기도 해서 유리엔은 잠자코 상대의 말을 청취했다. “ 풋.” 젤디아가 노골적인 비웃음을 흘렸다. 충분히 상대를 자극할 만한 웃음이었으나 유리엔은 담담했다. “ 고작 그거였나요? 이거 참, 기대했던 제가 다 실망스러워지네요. 뭘 믿고 염치도 없이 이곳에 끈질기게 붙어있나 했더니…그런 이유라뇨, 쿡.” 아 재미없다. 별 감흥도 없고 감동도 없고. 도리어 이쪽이 더 실망이라며 유리엔이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 정식으로 식도 올리지 않은, 그것도 5년이나 지난 일을 지금까지 핑계 삼고 있다는 게 놀랍네요. 차라리 서로를 사랑해서 혼인하려던 사이였다면 또 몰라도 정략이라니…설마 바보도 아니고 그게 아직까지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차 맛이 참 좋네. 쟤 할 말 다 끝나면 이 차 종이나 물어봐야겠다고 유리엔은 생각했다. “ 정략혼이라는 건 당연히 서로의 조건이 엇비슷할 때나 통용되는 거죠. 당신이 아직도 제국의 황녀의 위치에 있다고 여기고 있진 않겠죠? 그럴 리가.” 상대의 시큰둥한 반응은 보이지도 않는 건지 젤디아는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가만 놔두면 혼자서 책 한권을 쓸 기세. 유리엔은 슬슬 제제가 필요함을 인식했다. “ 황권다툼에서 밀려나 이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빈털터리의 패배자 신세가 된 주제에…말이에요.” “ 야.” “ ‘야’? 하…그 천박한 입버릇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 너 점심으로 뭐 먹고 왔어?” “ 갑자기 그게 무슨.” “ 앞니에 고춧가루 꼈네.” “ ?!” 진지한 표정으로 날린 유리엔의 말에 젤디아가 깜짝 놀라 사색이 되어 손거울을 막 찾을 때였다. 유리엔이 픽 웃으며 말했다. “ 뻥이야.” “ ……·.” “ 그걸 믿다니.” “ …….” “ 생각보다 제법 지능이 저렴한데?” “ ……!” ================================ # 119편 # 소제목 : 악역의 본분. (3) ================================ 그때 그 순간 젤디아가 받은 충격을 글로 써 표현한다면, ‘내 인생 통틀어 최고로 엿 먹은 순간’이라는 제목의 인생수기를 책으로 집필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막 찾아낸 손거울을 손에 집어든 채로 그녀는 마치 스턴에라도 걸린 듯 굳어졌다. 솜씨 좋은 장인이 손수 공을 들여 만들어낸 값비싼 손거울이 어서 자기를 얼굴 앞으로 가져가 사용하질 않고 뭐하냐는 듯 젤디아를 응시하며 그녀의 오른 손에 들려 있었다. 굳어있던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엿을 먹었다. 아주 달달하다. 어느 정도냐면 그냥 지금당장 토할 정도로 달짝지근하다. 당연한 수순으로, 젤디아는 냠냠 맛있게 처먹은 엿에 따른 결과로써 온 몸이 떨릴 정도의 ‘격렬한 분노’에 휩싸였다. “ …이……!” 손거울을 내팽개치고 젤디아의 흰 손이 잡아챈 것은 바로 찻잔이었다. 뜨겁던 차가 약간 따뜻한 정도로 식을 때까지, 처음 한 모금을 제외하고는 입에 대지 않던 거였다. 식상할 정도로 뻔하게, 젤디아는 유리엔을 향해 힘껏 찻물을 뿌렸다. 촤악! “ !!” 그러나 당연히 유리엔을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만들어 놓을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찻물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애꿎은 의자와 바닥의 풀만 적셨을 뿐 정작 목표인 유리엔은 멀쩡했다. 무려 피한 거다. 젤디아는 당황했다. “ 피, 피했어?” “ 나 참.” 유리엔은 고개를 저었다. 한심하다는 표정이었다. 남들 다 하는 찻물 끼얹기도 제대로 못하는 네 행동능력수준이 의심된다는 태도였다. 젤디아는 발끈했지만 뭐라 대꾸해줄 적절한 말을 찾지 못했다. 아니, 사실 마음 같아서는 어떻게 피했냐고 묻고 싶었다. 생각이라도 읽은 건지 유리엔이 친히 대답을 꺼냈다. “ 몸 부들부들 떨면서 찻잔으로 손을 뻗는데…당연히 저걸 나한테 뿌리겠구나, 하고 생각하지 어떤 바보가 아 화나서 목이 마르구나, 하고 생각할까?” “ …….” 아무리 미리 예상했대도 그걸 피했다는 건 역시 놀라운 일이다. 비록 드레스가 찻물에 좀 물들긴 했대도. ‘ 뭐 저딴 여자가…!’ 젤디아의 어이는 이미 집을 나갔다. 지금까지 상대한 상대들과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사람의 뒤통수를 후려칠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이건 거의 새로운 유형의 사람 수준이다. 유리엔은 젤디아의 반응 따위야 아랑곳 않고 남아있던 제 차를 마저 마셨다. 그리고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 할 말 더 없지? 있어도 그냥 하지 말고. 듣기 귀찮으니까.” 라는 상큼한 작별인사를 던지고 말이다. “ …하!” 어이없다. 화난다. 열 받는다. 짜증난다. 젤디아는 이를 갈았지만, 할 수 있는 건 그저 유리엔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화를 실어 죄 없는 테이틀을 걷어차는 것뿐이었다. 거처로 돌아가던 길에 유리엔은 문득 좀 전의 티타임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황권다툼에서 밀려나 거지신세가 된 패배자…라고 했었나. 대왕 떨거지 따위에게 루저라는 말을 들은 게 좀 웃기긴 하지만 딱히 별 신경은 안 쓰인다. 어차피 사실도 아니고. 남들은 사실로 알고 있겠지만 남들 생각이야 알 바 아니니까.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갑자기 유리엔은 카엘을 떠올렸다. 왜 느닷없이 떠오른 건지는 모를 일이지만, 만약 카엘도 그 ‘남들’에 들어갈지 모른다는 가정은 그녀의 기분을 좀 가라앉혔다. “ 어.” 유리엔은 걸음을 멈췄다. 바로 앞에서 들린 목소리는 무척 낯익었다. 우연이다. “ 어디 다녀오는가 봐?” “ 아…….” 카라멜이다. 방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상대를 갑자기 눈앞에서 마주치는 우연은 생각보다 더욱 사람을 놀라게 했다. 보통 말 두어 마디가 오갈 정도의 시간동안 눈만 깜박이던 유리엔이, 이내 카엘의 어깨 위에 손을 턱 하고 올리며 입을 열었다. “ 하나 묻자.” “ …?” “ 내가…왜 온 것 같아? 여기로.” 예고도 없이 이게 갑자기 뭔 바보 같은 질문이지. 내뱉은 직후 유리엔은 그렇게 느꼈으나 그렇다고 다시 주워 담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속으론 당황했으나, 티내지는 않고 태연한 척 어깨 위에 손을 얹은 자세 그대로 카엘의 대답을 기다렸다. 예상을 넘어, 잠깐의 고민이나 주저함도 없이 카엘은 곧장 대답했다. “ 당연한 걸 묻고 그러냐?” “ ?” “ 오고 싶으니까 왔겠지.” “ 아.” 그렇네? 하고 유리엔은 멍해졌다. 상대의 어깨에 걸쳐있던 손이 스르륵 제자리를 찾아 돌아왔다. 내가 왜 여기로 왔을까? 그야 달리 갈 곳이 없어서. 이딴 젤디아 버전의 대답을 자기도 모르게 생각했던 걸까. 왠지 우스워지려는데, 카엘이 불쑥 말했다. “ 괜찮아?” “ 뭐가?” “ 심란해 보였는데.” “ …그랬나?” “ 이젠 멀쩡해 보이니까 다행이네.” “ 잠깐. 그 말은 방금 전 까진 안 멀쩡해 보였다는 얘기로 들리는데.” “ 오, 예리한데?” “ 카라멜아, 납작하게 눌려서 바닥 문양의 일부를 이루고 싶니?” “ 나로 이루어진 바닥 문양이라니…아무도 밟지 못하는 성지가 되겠군.” “ 그건 걱정 마. 이 몸이 친히 밟아줄 테니까. 그 위에서 텝 댄스도 춰주지.” “ 그거 영광인데.” “ 뭘.” 어느새 둘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서로 간에 오가는 건 늘 그렇듯 간단한 말장난이다. 자연스럽고 편하다. ‘ 괜히 대왕 떨거지 때문에 별 이상한 질문이나 했네.’ 무시해야지, 그런 건. 그러나 의외인 건 보기보다 대왕 떨거지의 생명력이 높다는 점이었다. ================================ # 120편 # 소제목 : 악역의 본분. (4) ================================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분노는 날카로운 구두 굽을 통해 표출되고 있었다. 대리석으로 된 바닥을 콱콱 찍으며 젤디아는 살벌한 기세로 걸어 나갔다. 그녀의 목적지는 제 아버지인 페듀린 공작이 있는 곳이었다. 일국의 공작이 일을 처리하는 집무실에, 젤디아는 그의 하나뿐인 딸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예고도 없이 불쑥 문을 열고 들어설 수 있었다. “ 아니…젤디아 아니냐?” “ 아버지!” 갑작스런 딸의 출현에 놀라워하는 공작에게로, 젤디아가 곧장 달려가 안겼다. 목소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괜히 눈물을 찍어낸다. 그런 젤디아의 모습에 공작은 한층 더 놀란 표정이었다. “ 왜 그러느냐?” “ 흑…아버지, 아버지도 아시죠? 유리시엔이라는… 카르나 제국의 전 황녀.” 젤디아는 일부러 ‘전’을 강조했다. 지금은 황녀도 뭣도 아닌 그저 얼굴만 예쁜 여자란 뜻이다. 그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그런데 그 분이 왜? 혹시 네가 이러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거냐?” 분이라는 존칭을 붙인다. 함부로 말을 놓을 수 없다는 얘기였다. 유리엔이 황권다툼에서 밀렸든 안 밀렸든 지금 현재 황녀가 맞든 아니든 그건 공작에게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다만 그가 신경 쓰는 것은 국법상 그가 평생 모셔야 할 주인인 황제와 머지않아 그 자리에 오르게 될 황태자가 그녀에게 어느 정도의 관심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작이라는 지위에 걸맞게 최소한 바보는 아닌지라, 그는 황제나 황태자나 유리엔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다는 것 정도는 쉽게 알아챘다. 황제 혹은 황태자의 마음이 갑자기 바뀐다거나 하는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황태자비는 아마도 정해진 순번처럼 유리엔이 될 것이다. 물론 속은 좀 쓰리다. 내심 저의 딸을 황태자비로 들일 욕심을 지니고 있던 그였으니까. 그러나 그 욕심 하나 때문에, 절대 권력을 지닌 황제의 앞에서 무모할 정도로 자기주장을 피력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행동이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젤디아의 눈치는 빠른 편이었다. 그녀는 공작의 태도에서 그가 자신의 아군이 되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곧장 파악해냈다. ‘ 쳇.’ 아쉽긴 하지만 괜찮다. 그럼 다른 곳을 찌르면 되니까. “ …제가 여기까지 온 건 다름이 아니라…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 부탁이라? 어디 말해 보거라.” 공작은 자상하게 웃으며 말했다. 능력이 되는 한도 내에서 무엇이든지 들어 줄 생각이었다. 유리시엔 황녀가 관련된 일에서 무조건적인 딸의 편이 되어줄 수 없다는 게 아버지로서 조금 미안했기 때문이다. 젤디아가 주저 없이 말을 꺼냈다. “ 폐하를 뵙고 싶어요.” “ 폐하를? 너 혼자 말이냐?” “ 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 흠…….” 어떤 것이든 흔쾌히 승낙해주려 했던 좀 전의 생각과는 다르게 공작은 고민에 빠졌다. 침음성을 흘리는 그의 머릿속은 나름 복잡했다. 황제의 앞에서 과연 제 딸이 무슨 말을 할지, 그리고 그것이 저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쉽사리 판단내리기가 어려웠다. “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께 해가 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제가 누구 딸인데 그렇게 걱정을 다 하세요?” “ 음…알겠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공작은 제 딸을 믿어보기로 했다. 어린애도 아니고 상황판단정도는 어련히 잘 하면서 행동하지 않을까. 결국 젤디아는 가능한 가장 빠른 시간 내에 황제를 알현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공작의 집무실을 나왔다. ‘ 흥, 보나마나 폐하와 카엘 오라버니를 믿고 기고만장했겠지.’ 공작인 제 아버지가 유리엔을 높이는 것에서, 젤디아는 그 이유를 황제와 황태자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다른 이유를 찾기 어려워서였다. 제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그녀는 당장 그 두 사람을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 얼마나 여우같이 꼬리를 쳤었는지 모르지만…그래봤자 5년이나 지난 일. 어디 두고 보자, 이년.’ 주변에서 예쁘다고 칭송이 자자했던 금빛 눈동자가 독기로 차오른다. 젤디아는 제 거처로 걸음을 바삐 했다. “ 누구?” “ 젤디아 공녀님이요.” “ 헐?” 이건 좀 의외다. 물론 티타임 때 그 엿을 먹고도 얌전히 포기할거라 생각했던 건 아니다. 또 만나자고 찔러올 거라 예상은 했다. 그런데 이건 좀. 티타임 이후로 아직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 이번엔 또 뭐래?” “ 다과를…….” “ 과자가 추가됐네.” 유리엔 앞에 두 개의 선택지가 놓였다. 무시하느냐 받아들이느냐. 풍파 없이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고 싶다면 당연히 전자를 택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나자고 하는 걸 보면 분명 뭔가 깔아놓은 게 있다는 소리니까. 그러나 한편으론 과연 얼마나 훌륭한 계략을 깔아 놨을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대왕 떨거지는 과연 어떤 준비를 해 놨을 것인가. 호기심이 동한다. 유리엔은 쿨하게 승낙했다. “ 좋아, 만나지 뭐. 장소가 어디라고?” 멀지 않은 곳이었다. 유리엔은 대충대충 나갈 채비를 했다. 이번에도 차는 꽤나 맛이 좋았다. 과자도 합격. 여유롭게 다과를 즐기는 유리엔을 마주본 채로 젤디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 왜 보자고 한 건지 감은 좀 잡히나요?” “ 글쎄. 그때 버린 옷 세탁비 주러?” “ 네?” “ 어제 네가 뿌린 찻물이 옷에 좀 묻었잖아. 세탁비 주려고 보자고 한 거 아니야? 흠, 아님 아예 새로 한 벌 사 주려고?” “ …….” 젤디아는 기가 차다는 표정이었다. 아랑곳 않고 유리엔은 과자하나를 더 입에 가져갔다. “ 여유가…넘치는군요.” “ 딱히 안 넘칠만한 자리도 아닌데 뭘.” “ …하.” 재수 없는 년. 더 얘기를 나누다간 얻는 것도 없이 혈압만 오를 게 분명하다. 젤디아는 입을 닫았다. 그리고 제 앞에 놓인 찻잔으로 손을 가져갔다. 설마 하루 전날 실패한 걸 재도전하려나 싶던 순간 젤디아는 그것을 탁자 옆으로 밀어 떨어뜨렸다. 챙그랑! 바닥과 맞닿은 찻잔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졌다. 잠깐 사이에 찻잔의 파편들과 찻물로 바닥이 더러워졌다. 처참히 즉사한 찻잔에게로 유리엔이 잠깐 시선을 준 순간, 어느새 의자에서 일어난 젤디아가 유리엔의 앞에 놓여 있던 찻잔마저 떨어뜨려 깨 버렸다. 얘가 뭘 하나 싶어 유리엔이 황당한 표정을 짓기가 무섭게 젤디아는 지금까지보다 더 황당한 짓을 저질렀다. 철썩!! 지가 지 뺨을 때린다. 소리도 제법 크게 났다. 실감나는 자해였다. 유리엔와 젤디아가 마주앉아있는 장소는 응접실이었다. 소리가 잘 울린다는 멋진 장점이 있는 공간이다. 미처 유리엔이 어떤 반응을 보일 새도 없이, 젤디아가 흐느낌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뱉어냈다. “ 미, 미안해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그것은 벌컥, 하고 누군가가 응접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직후였다. 예상 못했을 광경에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이는 바로 “ …유리엔?” 카엘이었다. 젤디아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 마침 비는 시간이 있었기에 카엘은 그것을 수락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직무가 없이 비는 시간은 자주 생기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귀족영애가 만나자는 요청이나 들어주는 데 쓰기에는 아까운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다만 과거의 정이나 현재 젤디아의 아비인 공작이 지닌 위치를 생각해서 이번만은 들어 주자고 판단한 것이다. 카엘이 젤디아와 만나기로 한 시각은 점심을 지나 저녁으로 가까워지는 그 중간쯤이었다. 응접실에서 보자고 했던 것을 상기하며 카엘이 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 다다를 정도로 가까워 진 순간 갑자기 뭔가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챙그랑! ‘ 음? 뭐지?’ 유리병 따위를 잘못 건드려서 떨어뜨린 건가하는 추측을 하며 카엘이 문고리를 잡아 열었을 때였다. 철썩!! 사람을 놀라게 하는 소리였다. 궁내 폭력사건이라도 일어나나싶어 카엘이 벌컥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몸을 들일 때였다. “ 미, 미안해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응접실 안에는 카엘보다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두 명의 여인이 있었다. 뺨이 빨갛게 부어오른 채 용서를 비는 것은 젤디아였고, 그 앞에 앉아있는 이는 다름 아닌 유리엔이었다. 누가 봐도 유리엔이 젤디아를 때린 것 같은 상황이다. 그녀들의 근처 바닥은 산산이 깨진 파편들과 투명한 액체로 인해 엉망이었다. “ …유리엔?” “ 오, 오라버니!” 젤디아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이쪽을 응시해온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쳐다본 카엘은 깜짝 놀랐다. 그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너무 멀쩡한데?’ 유리엔에게 맞았다고 가정하기에 젤디아의 뺨은 몹시 멀쩡했다. ================================ # 121편 # 소제목 : 악역의 본분. (5) ================================ 카엘이 놀란 이유를 멋대로 잘못 해석한 젤디아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혼신의 연기를 펼치는 것을 잊지 않는다. “ 오, 오라버니!” 당황한 표정으로 카엘과 유리엔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카엘에게로 시선을 던진 젤디아는 풍성한 금발머리가 찰랑이도록 고개를 저으며 말을 내뱉었다. “ 아니에요, 이건, 그러니까…절대 유리시엔 황녀님께선 바닥에 찻잔을 던지지도, 제 뺨을 때리지도 않으셨어요. 다, 다 제 잘못한 거예요, 오라버니.” 녹색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오른 채, 빨갛게 부어오른 왼쪽 뺨을 제 손으로 애써 가리는 젤디아의 모습은 너무도 애처로워보였다. 영락없이 가냘픈 피해자의 모습이다. 반면 조금 뒤로 뺀 의자에 앉아 어느새 다리까지 꼰 유리엔은 어디로 보나 때렸으면 때렸지 맞았을 것 같지는 않은 가해자의 풍채였다. 카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파악한 젤디아가 더욱 힘을 다해 실감나는 연기를 펼쳤다. “ 저, 전 괜찮아요. 다 그냥 제 잘못이니까, 정말 괜찮…흑, 흐윽…….” 괜히 슬프고 억울해 죽겠는데 억지로 웃는다는 티를 팍팍 내며 안쓰럽게 애써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던 젤디아는, 허리를 숙여 덜덜 떨리는 손으로 깨진 찻잔의 파편들을 치우는 듯 하다 결국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낮고 구슬픈 흐느낌을 터뜨렸다. 누가 봐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비련의 여주인공, 착한 여주인공, 불행에 처한 여주인공, 연약하고 가녀린 여주인공, 지켜줘야 할 것 같은 여주인공 등등의 온갖 수식어를 휩쓸어도 부족함이 없을 듯한 멋진 연기였다. 가늘게 어깨를 떨며 젤디아는 카엘의 반응을 기다리며 최대한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나 곧이어 카엘에게서 나온 말은 그녀가 상상하고 기대한 것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 봐준다고 살살 때렸나?” “ …?” 순간적으로 뇌에서 해석을 거부할 만큼 뜻밖이고 예상 못한 말에 젤디아가 우는 연기를 멈췄다. 한 손을 턱 아래에 받친 카엘은 제법 진지한 얼굴이었다. “ 에이, 설마. 그렇게 미지근하게 했을 리가 없지.” “ …무슨…?” 젤디아의 표정에 연기가 아닌 진짜 당황이 번졌다. “ 카엘 오라버니?” “ 음…그렇군. 좋아.” 저를 부르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던 카엘이 이내 생각을 끝낸 듯 크게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렸다. 어떤 미해결 과제라도 풀어낸 듯한 만족스러움이 담긴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려있었다. 오른쪽 팔을 앞으로 쭉 뻗은 카엘이 손바닥을 펼친 자세로 말을 던졌다. “ 범인은 바로! 이 안에 있다.” “ …….” 황당한 나머지 젤디아는 말을 잃었다. 그와 상관없이 카엘의 말은 이어졌다. “ 쨍그랑거리며 뭔가가 산산이 깨지는 소리와 직후 들려온 뺨을 내리치는 소리. 그리고 그 소리가 들린 다음에 보인 풍경은 엉망으로 흩어져있는 바닥의 파편들과, 뺨이 부어오른 A가 B에게 용서를 빌고 있는 장면이야. 그럼 여기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B가 A의 뺨을 찰지게 후려치고 바닥에 찻잔을 내던져 무자비하게 깨뜨렸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기엔 두 가지 오류가 있어.” 갑자기 카엘은 소설의 장르를 헷갈리게 만드는 장황한 설명을 시작했다. “ 첫째로 B는 여타의 연약한 여인들과 전혀 다르다는 점. 만약 B가 정말로 A의 뺨을 때렸다면 적어도 입술정도는 터졌어야 되는데, A의 뺨은 조금 붉게 달아오른 것 외에는 별다른 외상이 없어. 여기서부터 의심이 시작되지. 만약 B가 일부러 살살 때렸다는 가정을 할 수도 있지만 B의 성격상 그건 거의 가능성이 없어. 그렇다면 혹시 B가 의자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뺨을 때리기 위한 스윙이 부족해서 였을까? 이것도 확률은 희박해. 만약 정말 그랬다면 손이 아니라 발로 깠을 테니까.” 또박또박 설명을 이어나가며 카엘은 젤디아와 유리엔에게로 천천히 가까이 걸어 다가왔다. “ 그리고 두 번째 오류. 바닥에 널려있던 건 깨진 찻잔의 파편뿐 아니라 찻물도 함께였어. 그 말은 즉 찻잔을 탁자 아래로 내던질 때 다 마시지 않은 찻물이 남아있었단 얘기지. 하지만 B는 마실 것 포함 음식이라면 상당히 존중하는 성격이라 어지간히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가 나지 않은 다음에야 차가 든 찻잔을 함부로 집어던졌을 리 없어. 만약 그 정도로 화가 났다면 살짝 부을 정도로 약하게 뺨을 때리진 않았을 테니 또 모순이 생기지.” 젤디아를 지나치기 직전에 카엘이 걸음을 멈췄다. “ 따라서, 이 사건의 범인은 바로.” 붉은 눈동자가 젤디아를 향했다. “ 너 밖에 없군. 젤디아 폰 페듀린 공녀.” 반쯤 장난스럽게 걸쳐져있던 웃음이 입가에서 사라졌다. 온기 없는 무표정이 그녀를 향했고 젤디아는 순간 몸을 굳혔다. “ 할 짓이 없어 심심한 어린애의 장난치고는 상당히 버릇없는 일을 벌였어. 모함이라…. 공녀, 이번 일을 그냥 넘겨주는 건 아버지인 공작의 얼굴을 봐서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군.” 웃음기라고는 씻어낸 듯 없는 낮은 목소리였다. 꼼짝없이 굳어진 젤디아를 지나쳐 카엘은 유리엔의 앞에 섰다. 그러더니 손을 앞으로 내민다. “ 가실까?” 언제 낮게 깔았었냐는 듯 가벼운 목소리였다. 웃음기가 번져있는 카엘의 얼굴을 마주한 유리엔 또한 피식 웃으며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 출발해, 김기사.” “ 김기사라니…‘출발해줘요, 멋진 왕자님’ 정도는 되어야지.” “ 뭐래.” 그렇게 투닥거리며 두 사람이 응접실을 나갈 때까지, 젤디아는 굳은 표정으로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 # 122편 # 소제목 : 악역의 본분. (6) ================================ 유리엔은 고개를 돌려 카엘의 옆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 왜?” “ 아니…….” 태연한 얼굴이다. 좀 전에 뭔 일이 있긴 했었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색은 안했지만 사실 유리엔은 좀 놀랐다. 방금 전의 그 각본 젤디아 연출 젤디아 배우 젤디아 감독 젤디아 협찬 젤디아로 이루어졌던 잠깐의 허접한 연극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카엘이 홀라당 속아 넘어갈 거라 생각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카엘이 그런 식으로 대응할 거라는 것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녀의 생각보다 카엘의 떨거지 발라버리기 스킬은 제법 그 수준이 높았다. 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과연 사람은 여러 가지 방면에서 다양한 발전을 이룩한다. 유리엔은 솔직하게 칭찬했다. “ 제법인데?” “ 음? 아아…뭐, 딱히.” 카엘은 피식 웃었다. 자신이 그런 식으로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으며 젤디아를 약 올릴 수 있었던 것에는 사실 지금 제 옆에서 걸어가고 있는 한 사람의 영향이 컸다. “ 내가 아는 누구였다면 어떤 식으로 말했을지 한번 생각해봤던 것뿐이야.” “ 호오?” 그러니까 흉내를 낸 거란 소리다. 언급된 ‘내가 아는 누구’의 정체를 유리엔은 왠지 단번에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것 참. 약간 묘한 기분이다. “ 어때, 좀 비슷했나?” “ 점수를 줄게. 10점 만점에-” “ 10점?” “ 욕심이 과하군, 카라멜. 그 자만심을 태도점수에 반영해 최종결과 4점을 주겠어.” “ 4점이라…황송한데.” “ 그렇지?” 말장난이 즐거운 듯 카엘이 큭큭 웃음을 흘렸다. 뭘 쪼개냐고 타박하는 유리엔의 얼굴도 평소보다 풀린 표정이었다. 둘은 여전히 손을 잡은 채였다. 젤디아가 받은 심적 데미지는 현재 과포화상태. 얼마나 되는지 수치상으로는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높이 올라간 상태였다. 솟구치는 혈압을 느끼며 쓰러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일 정도다. “ 이게…대체 무슨…….” 목소리가 덜덜 떨려나왔다. 젤디아는 내심 카엘을 믿고 있었다. 현재 자신은 미모가 한참 꽃을 피운 상태인데다 가문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을 만큼 좋다. 이정도만해도 충분히 없던 관심이 생겨날 판인데 거기다 과거에 쌓아두었던 정마저 있으니 당연히 카엘이 저에게 관심을 갖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당연히 자기편을 들어주며 유리엔을 나쁜년으로 매도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현실은 시궁창. “ 아아아악!” 젤디아는 비명을 내질렀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살면서 남에게 모욕 비슷한 것도 받아본 적 없는(주는 건 많이 해봤지만) 이 공녀 젤디아가 남녀 한 쌍에게 돌아가며 엿을 먹다니? 미치겠다. 너무 화가 나서 돌 것 같다. “ 이건 다 그년 때문이다…그년 때문이야…….” 모든 책임전가는 유리엔에게 돌아갔다. 젤디아는 지금 카엘이 다소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일 거라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그건 분명 짜증날 정도로 몹쓸 어떤 년에게 홀려있기 때문이다. 당장 그 빌어먹을 얼굴만 반반한 잔망스러운 계집을 처단 해야만 할 시기였다. 젤디아는 바닥에 흩어져있는 찻잔의 파편들에 시선을 고정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 …눈에 거슬리는 게 생각처럼 잘 안 잡힐 때는, 우선은 주변부터 하나씩 제거해야지.” 좀처럼 꺼지지 않는 독기가 재차 녹색 눈동자에서 빛을 드러냈다. 별 생각 없이 유리엔은 저녁식사도중의 담소에서 가볍게 그날 하루 일과를 얘기했고, 그 안에는 젤디아의 안타까운 헛고생과 카엘의 활약이 포함되어있었다. 역시라고 해야 할지 루제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 꺄악, 어쩜 좋아! 너무 낭만적이잖아요!” “ …낭만적…?” 혼자서 열심히 연기하던 대왕 떨거지를 카라멜이 장황한 말로 발랐다, 라고 한 줄 요약이 가능한 위의 사건의 대체 어디에 낭만이 숨어있다는 말이더냐. 그 의문은 이어지는 루제의 설명으로 인해 곧바로 해소되었다. “ 황태자전하께서는 이미 황녀님에 대해서 구석구석 낱낱이 다 알고 계신다는 거니까요. 아아, 로맨틱해~!” “ …….” 유리엔은 순간 멍해져서 눈만 말없이 깜박거렸다. 어? 그러고 보니 생각 못했던 부분이다. 카엘의 그 장황한 대사에 나왔던 디테일한 설명도 그렇고, 무엇보다 그렇게 흉내를 낼 정도면 어지간히 그 사람에 대해 잘 안다는 소리인데, 잘 알기 위해서는 관찰이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대개 그 관찰은 상대방에게 관심이 있을 경우에만 이루어지는 게 일반적이다. 그 말인즉. “ 사랑인거죠!” “ …지나친 추측은 때때로 진실에 도달하는 것을 가로막곤 하지, 루제야.” 라고 입으로 말은 하지만 유리엔의 얼굴빛은 어느새 평소보다 좀 더 붉어져있었다. 괜히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며 부드러운 양고기를 마저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간다. 하지만 하루 중 가장 집중도가 높은 시간인 식사시간에, 그것도 맛있는 음식을 냠냠 씹는 와중인데도 유리엔의 머릿속에서는 루제의 말이 빙빙 돌고 있었다. ‘ 뭐지…완전 사소하고 또 어떻게 보면 아무의미도 없는 거에 뭘 또 신경 쓰고 앉은 거야, 나.’ 어쩌면 자신이 카엘을 좋아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자각한 그 몇 년 전부터, 유리엔은 카엘을 대하는 것이 16살 적의 그때와 마냥 똑같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건방지게도 카라멜은 간혹 유리엔을 설레게 만드는 것이다. ‘ 큼.’ 유리엔은 괜히 양고기를 더욱 힘주어 씹었다. ================================ # 123편 # 소제목 : 악역의 본분. (7) ================================ 충신의 하나뿐인 외동딸이며 어렸을 적 황궁에도 자주 다녀갔던 젤디아는 황제에게 타인보다는 가까운 존재였다. 그런 젤디아가 가타부타 말도 없이 갑자기 울기 시작하자 황제는 약간이지만 당황했다. 왜 우는 겨. 아빠가 때렸나? “ 아, 그것이…생각할수록 서러워 저도 모르게 그만…흑흑.” “ 무슨 일이 있은 모양이구나. 울지만 말고 말해 보거라.” “ 제가 감히 말씀을 드려도 될지…으흑흑.” “ 어허. 괜찮으니 어서 말해보래도.” 역시나 모든 악역들의 공통점이라고 해야 할지 젤디아의 우는 연기는 일품이었다. 자꾸 눈물만 쏟는 것이 답답해 황제는 얼른 말해보라며 젤디아를 채근했다. 왜 말을 못하니, 입이 붙어있는데 왜 말하질 못해? 그제야 간신히 울음을 그친 젤디아가 마지못해 말을 꺼낸다는 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폐하, 사실은 얼마 전…….” 조심스럽게 얘기할래요. 용기 내볼래요. 나 지금부터 유리엔 폭풍 까기 할게요. 겉으로 지어낸 침울한 표정과는 정반대로 속마음으로는 싱글싱글 웃으며 젤디아는 최대한 가녀린 척 황제의 앞에 유리엔에 대한 얘기를, 있는 건 각색해서 없는 건 지어내서 장황하게 쏟아내었다.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황제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고 젤디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험담이 끝났을 때 잠깐의 시간을 침묵으로 흘려보낸 뒤 황제는 입을 열었다. 쾅! 하고 무서운 기세로 문이 열렸다. 움찔 놀란 시녀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뱉었다. “ 다, 다녀오셨어요?” 대답이 없었다. 슬쩍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예쁜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망했다. 황제를 만나러 간다 하더니 결국 뜻하던 일이 잘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보나마다 이제 곧 분노의 미친 짓이 시작되겠지. 시녀는 슬금슬금 널따란 방의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 …….” 쨍그랑 거리며 온갖 장식품들이 깨져나가는 소리를 기대하며 귀를 막고 있던 시녀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주변이 조용하자 의아한 생각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귀에 대고 있던 손도 밑으로 내리며 젤디아를 쳐다보자 그녀는 그저 저의 침대에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이게 웬일인가 싶었다. 그에 놀라 시녀는 그만 안 해도 될 말을 내뱉고 말았다. “ 저기…물건 안 던지세요?” “ 뭐?” “ 헉.” 시녀 또한 내뱉고 나서야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황급히 입을 막는 시녀에게로 젤디아의 날이 선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 그래, 던졌으면 좋겠느냐?” “ 아, 아, 아니요.” “ 참, 그러고 보니 벽에 던지는 건 별로 재미가 없었지? 뭐든 과녁이 있어야 맞추는 재미가 있는데 말이야.” “ 제, 제발, 공녀님.” 젤디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챈 시녀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며 애원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젤디아의 차가운 냉소뿐이었다. 어느새 유리 식기를 집어든 그녀의 입가는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 난 움직이는 표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 제가 자, 잘못…….” 쨍! “ 꺄악!” 사정 봐주지 않고 던진 유리컵은 시녀의 이마에 정확히 명중하며 조각나 깨어졌다. 저절로 비명이 튀어나오는 아픔에 시녀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마에서 흐른 피가 바닥에 얼룩을 만들었다. 그 끔찍한 모습에도 젤디아는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그녀의 손은 다른 식기를 찾아들고 있었다. “ 사, 살려주세…꺄악!” 시녀의 비명을 마치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젤디아는 어디로 보나 반쯤 미친 상태로 보였다. 녹색 눈동자는 정상인보다는 미친 사람에 가까운 빛을 띠고 있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들을 시녀에게 집어던지는 젤디아의 머릿속에 조금 전 황제의 말과 표정이 떠올랐다. ‘ 소설을 쓰려면 좀 그럴듯하게 쓰거라. 실력이 영 형편없어.’ “ 감히,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 같은 여자로서 질투가 나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이러는 모습은 많이 추하구나. 그리고 너도 눈이 있고 생각이 있다면 알 텐데? 카엘도 보는 눈이 있단다.’ “ 이 젤디아한테! 이 나한테 감히!” ‘ 이럴 때 뭐라고 하더라…그래그래, 루저. 루저구나 젤디아야.’ “ 아아아아악! 죽여 버릴 거야!” 사람이 너무 생각지 못한 일을 당해서 지나치게 화가 치밀어 오르면 결국은 훼까닥 돌게 된다. 젤디아의 상태가 딱 그랬다. 그녀의 광기어린 행동은 시녀가 피를 철철 흘리며 거의 반죽음 상태로 기절하고 나서야 겨우 소강상태에 들어섰다. “ 하아, 하아.” 소리를 질러가며 물건을 집어던졌더니 체력소모가 심했다. 숨을 고르며 젤디아는 시녀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걸레짝처럼 널브러진 시녀의 모습에 유리엔의 얼굴을 겹쳐놓고 보니 그나마 기분이 좀 풀리는 듯했다. “ 후우…마리?” “ 예.” 이름이 불리자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젤디아의 측근이 총알처럼 튀어나와 곁에 섰다. 젤디아는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 저번에 내가 유리시엔 황녀에 관해 조사하라고 했던 거 기억하고 있지?” “ 물론입니다, 공녀님.” “ 주변 인물들에 관한 자료 지금 넘겨봐.” “ 여기…….” 말이 나오자마자 그녀는 곧바로 여러 장의 종이뭉치를 젤디아에게 건넸다. 눈치 하나로 측근 자리를 꿰찬 그녀다. 혹시 필요할까싶어 항상 준비해놓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측근의 행동이 마음에 든 젤디아가 가볍게 종이뭉치를 건네받았다. 위의 몇 장을 넘겨가며 읽던 젤디아는 순간 원하는 걸 찾아낸 듯 눈동자를 빛냈다. “ …호호, 조금만 기다리렴. 유리시엔 이 빌어먹을 계집아.” 지칠 줄 모르는 대왕떨거지의 새로운 몸부림이 막 시작을 알려오고 있어다. ================================ # 124편 # 소제목 : 악역의 본분. (8) ================================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바보가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조심해야 할 바보는, 바로 생각하는 바보다. “ 생각하는 바보는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에 기인하여 끝없이 연성되는 바보짓을 토해낸다. 종종 생각하는 바보는 자기가 바보라는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들이 주변에 피해가 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했던 짓을 또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한다. 그러다보면 결국 그 행동들에 의해 자기 자신까지 자멸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바보의 정점인 ‘킹 오브 바보’에 다다른 모습이다. 혹자은 줄여서 바보킹 이라고도 일컫는다…라고 하네.” “ 무슨 책이에요, 그거?” “ 바보학개론. 저자는 엘리아티나 냥트리체스. 그럭저럭 괜찮은 책이야.” 어디서 구해왔는지 얄팍한 두께의 책을 들고 유리엔은 오전부터 독서삼매경 이었다. 루제가 보기에는 제목부터 내용까지 듣도 보도 못한 잡책이었지만 유리엔은 의외로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어느새 그녀는 마지막장을 읽어 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다급하게 안으로 들이닥친 것은 유리엔이 다 읽은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은 직후였다. 벌컥! “ 어, 언니…!” 루네였다. 갈색 풍성한 머리는 혼신의 힘을 다해 뛰어왔는지 엉망이었고 작은 얼굴은 온통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그 옆에서 마찬가지로 흐트러진 차림과 잔뜩 굳은 얼굴을 한 채로 서 있는 이는 바로 그녀의 남편인 제론이었다. “ 무슨 일이야?” 가벼운 일이 아님을 눈치 챈 유리엔이 표정을 굳히며 몸을 일으켰다. 연신 차오르는 울음 때문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루네를 대신해 제론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 또한 차분하지 못하고 떨림을 담아내고 있었다. “ …미네가 사라졌습니다.” 잠깐의 정적 후 먼저 비명을 지른 것은 루제였다. 저번에 딸 미네를 데리고 루네가 가족 산책을 나갔을 때, 우연히 애들로나 백작부인을 만났다. 루네와 마찬가지로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있던 백작부인은 마치 예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정겨이 인사를 건네왔고 사람 의심할 줄 모르는 루네는 그저 웃으며 받아주었다. 이래저래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쪽도 이쪽도 첫아이이며 딸인 것까지 똑같아 대화가 끝난 뒤에는 막역한 친근감을 느꼈고 그러다가 얼마 전 혹 시간이 난다면 차나 한잔 같이 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었다. 그쪽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온다고 했으니 그럼 이쪽도 미네와 함께 가야겠다싶어 루네와 미네 단 둘이서 외출한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 이 사람이…그러니까 루네가 차를 마신 뒤 저도 모르게 잠깐 정신을 잃었다고 합니다. 깨어났을 때는 이미 미네는 사라진 뒤였고요. 처음에는 백작부인을 의심했는데 그녀 또한 루네와 마찬가지로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아이가 사라진 상황이었습니다.” “ 차를 내어왔던 시종은?” “ 알아봤지만…이름은 사칭이었고 그 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 계획적인 범죄네.” 유리엔은 차게 웃었다. 티타임 도중 미네가 사라졌다. 정황상 백작부인 또한 피해자라곤 하지만 범인과 사전에 짜고 쳤을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었다. 그리고 유리엔은 후자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 어디 가십니까?” “ 금방 올 거야. 루네 좀 돌봐줘.” 방을 나선 그녀는 빠르게 복도를 가로질렀다. 한 번 더 긴 복도를 꺾어 안으로 들어가면 수십 개의 방이 나오는데, 사람이 많을 때는 손님방으로 이용하지만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곳들이었다. 그 중 가장 앞쪽에 있는 방의 문을 느닷없이 벌컥 열어젖혔다. “ 꺄악!” 기별도 없이 들이닥친 유리엔의 모습을 보고 놀란 남자가 굵은 목소리로 가녀린 비명을 내질렀다. 상체탈의의 모습으로 보건데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던 듯했다. “ 황녀님? 갑자기 여긴 어쩐 일로…….” “ 노크도 없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이 야만인! 책임져! 내 몸 어쩔 거야!” 다소 놀란 표정으로 용건을 묻는 레윈의 뒤로 마치 사춘기 소녀인 마냥 수줍게 두 팔로 벗은 상체를 가린 옐윈이 말을 끊으며 냅다 소리쳤다. 그 진상 짓에 유리엔의 시선이 옐윈을 향했다. 당장에라도 그 노란 머리털을 죄다 뽑아서 단백질이나 추출할까 하는 표정을 읽은 옐윈이 비굴하게 웃으며 입을 닫았다. 며칠 간 방치되어있던 예르지엔들과 주인님의 간만의 만남이었다. 방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던 인원은 유리엔을 발견하자마자 잽싸게 레윈을 중심으로 한군데에 모여 섰다. 이번엔 갑자기 무슨 일로 발닦개를 찾았나 싶어 저절로 긴장이 되었다. 유리엔은 문득 말했다. “ 요즘 할 일 없어서 많이 심심하지?” “ 예?” 네 남자들은 순간 자기들이 뭔가를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심심하냐니? 그럴 리가. 뮤리엔 제국에 온 뒤로 방치되었던 며칠간은 솔직히 그들에겐 천국 중의 천국이었다. 그만한 행복이 없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솔직하게 대답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넷의 머릿속에 동시에 들었다. “ 그게…….” “ 심심하잖아?” “ 네, 그렇습니다. 몹시 심심합니다. 지금 당장 일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막내라 그런지 가장 눈치가 빠른 초록머리의 사내 그윈이 당장 대답했다. 왠지 안 심심하다고 대답하면 심심해질 때까지 유리엔에게 처 맞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불현듯 들어서였다. 그건 나머지 세 사람도 마찬가지인지 그윈의 말에 동조하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한 듯 유리엔이 명령을 내렸다. “ 잘 들어. 애들로나 백작부인이 최근에 사적인 만남을 가진 상대의 명단을 전부 조사해와. 그리고 남의 눈을 피해 누군가를 몰래 만나거나 하는지 철저히 감시해. 할 수 있지?” “ 물론입니다.” 넷을 대표해 대답한 레윈이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며 슬쩍 유리엔의 얼굴을 쳐다보곤 흠칫 놀랬다. 그녀의 표정은 전에 없이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무슨 일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대충 짐작은 가능했다. ‘ 누군 진 모르겠지만 하필 건드릴 사람이 없어서…쯧쯧.’ 안녕. 부디 지금까지 이승에서의 삶이 즐거웠길. 그는 이름도 모르는 상대를 향해 작별을 고했다. ================================ # 125편 # 소제목 : 악역의 본분. (9) ================================ 애들로나 백작부인이 최근에 단 둘이 만난 이들 중 젤디아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심증 100%로 젤디아 범인 확정이다. 젤디아는 며칠 전 제 처소 밖으로 외출한 뒤부터 행적이 묘연했다. 패듀린 공작가로 보낸 예르지엔들로부터 들어온 정보였다. 애들로나 백작부인에게도 사람을 붙여 놨지만 아직까지 남몰래 누군가를 만난다거나 혼자 은밀히 외출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아마 미네는 젤디아가 직접 데리고 있을 것이다. 즉 젤디아를 찾아내면 동시에 미네도 찾을 수 있다는 말인데. “ 미친년.” 대뜸 루제가 욕설을 내뱉었다. 유리엔으로부터 젤디아가 이번 유괴사건의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길 들은 직후부터, 루제는 범인을 향해 솟구치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는 듯했다. “ 병신. 또라이. 무뇌아. 무개념. 말미잘. 삼엽충. 박테리아. 짚신벌레. 아메바, 또 뭐가 있더라…….” “ 진정해, 자기.” 루제의 호출을 받고 달려온 남편 네이시온이 곁에서 그녀를 말렸다. 네이시온에 품에 안긴 채로 씩씩거리며 루제는 이를 갈았다. 당장이라도 젤디아를 잡아서 바닥에 엎어놓고 그 위에서 칼침 박은 신발을 신고 탭댄스를 춰도 기분이 풀리지 않을 만큼 화가 치밀었다.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치졸하게 갓난애나 유괴하는지 참 기가 찬다. 루네는 울다가 울다가 결국 혼절한 뒤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아직 어머니가 아니라 그 아픔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괜히 쌍둥이가 아니라고 루제에게까지 일부나마 그 고통이 전해져왔다. 눈앞에서 아이를 잃었는데 그 심정이 오죽할까. 어머니로서 제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나약한 루네를 무자비하게 짓누르고 있을 것이다. “ …대왕떨거지인줄만 알았더니, 바보킹이었네.” 벽에 몸을 기댄 채로 서있던 유리엔이 중얼거렸다. 이쪽도 만만찮게 열 받았다. 이 정도까지 진심으로 화가 난 건 오랜만이었다. 그동안 해대는 짓이 워낙 허접이라서 별 생각 않고 있었는데 이번 발악은 생각보다 제법이다. 그리고 앞으론 발악은커녕 꿈틀거림도 못할 정도로 밟아줘야 할 터다. 하지만 이번에는 안타깝게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젤디아가 완전히 모습을 감춘 게 가장 의외였다. 뻔뻔하게 눈앞에 나타나서 도발할 줄 알았는데 어디에 숨은 건지 아무리 감시를 해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당장 젤디아를 잡아서 족칠 수가 없게 된다. 아마 곧 범인 쪽에서 이쪽으로 연락이 올 테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애들로나 백작부인을 잡아와서 고문을 통해서든 뭐든 증인으로 만든 뒤 패듀린 공작가로 쳐들어갈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유리엔에게로 초대장이 왔다. “ 자정. 애들로나 백작 소유의 저택. 조건은 혼자 올 것. 안 오면 알…지?” “ …이거 찢어도 되죠?” 청첩장에나 쓰일 것처럼 고급스러운 무늬의 카드는 유리엔더러 야심한 시각에 혼자 애들로나 백작의 저택으로 올 것을 명령하고 있었다. 안 오면 알지, 라고 쓰인 짧은 한 문장을 읽은 루제는 당장이라도 카드를 백조각 퍼즐로 만들어 버릴 기세였다. “ 누가 이걸 전해줬지?” “ 그…복장은 하녀였는데 처음 보는 얼굴의…….” “ 찾아봤자 소용없겠네. 가봐.” “ 네, 네.” 유리엔은 무표정으로 카드를 내려다봤다. 인질범이 오라고 하면 가야지, 별 수 있나. 다만 뭔가가 약간 불길하다. 혼자 오라곤 되어있지만 그쪽도 설마 정말 혼자서 오길 기대하진 않을 텐데. 예감이 좋지 않다. “ 몰래가야겠어.” “ 네?” “ 조금 있다가 다 같이 산책을 나갈 거야. 난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게 꽁꽁 싸매고 나갈 거고, 돌아올 때는 루제 네가 나대신 꽁꽁 싸매고 돌아오는 거야. 호위병이 말을 시키면 무시하고 만약 끈질기게 굴면 제론이나 네이시온을 시켜 무엄하다고 호통이라도 쳐. 만약 한명이 비는 걸 트집 잡으면 대충 핑계를 대.” “ 제가…황녀님인 척 하라는 말씀이세요? 애들로나 백작의 저택에 갔다가 돌아오실 때까지?” “ 맞아.” “ 하지만 왜…….” “ 느낌이 별로라서 그래. 좌우간 내가 자정을 넘은 시간에 이 밖으로 나간 적이 있어서는 안 돼. 알겠어?” “ 네. 알았어요.” 루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도 알아들었다는 표정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유리엔은 머리카락을 전부 옷을 칭칭 감아서 감추고, 얼굴은 알아볼 수 없도록 짙은 베일을 썼다. 그리고 조금 뒤에 그 차림은 루제에게로 넘어갔다. 루제일행과 적당히 타이밍 맞춰 헤어진 뒤 유리엔은 은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예르지엔들 중 막내인 초록머리 사내 그윈이 그곳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 오셨어요?” “ 시킨 건?” “ 여기…….” 그윈이 내민 것은 하녀복과 후드였다. 유리엔은 입고 있던 옷 위에 하녀복을 걸치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둘은 황궁에서 근무하는 귀족의 철없는 아들래미와 그 전속 시녀로 위장하고 성문을 빠져나왔다. 성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유리엔이 먼저 앞서가고 그윈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몰래 뒤따르기로 했다. 초대장에서 가리키고 있던 애들로나 백작의 저택은 보기보다 가까웠다. 마차를 잡아타니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저택의 정원과 통해있는 정문을 지키는 호위병은 두 명이 있었는데, 둘 모두 기절한 듯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그걸 발견한 유리엔이 미세하게 표정을 찌푸렸다. 추상적으로 느껴지던 좋지 못한 예감이 조금씩 구체적인 틀을 잡아갔다. ‘ 설마.’ 혹시 하는 가능성이 유리엔을 잡아챘다. 저택은 온통 불이 꺼져있어 몹시 어두운 상태였다. 유리엔은 잠시 망설였지만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결과는 비슷할 거란 생각에 정문 안으로 몸을 들였다. “ …….” 조용하다.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게다가 인기척 또한 느껴지지 않는다. “ 초대장에 시킨 대로 순순히 왔다는 걸 확인해야 되지 않겠어? 대왕떨거지야.” 유리엔이 그렇게 혼잣말을 한 직후였다. 갑자기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크진 않지만 적막한 주변 덕에 뚜렷이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바로 지척까지 왔다고 느꼈을 무렵 유리엔이 몸을 돌렸다. 일단 고자킥이라도 날려주고 안 먹히면 얼굴에 대고 파이어볼을 쏴줄 계획이었다. 탁! “ 어?” 그러나 뒤돌자마자 유리엔은 순간 놀랐다. 뭔가 반응을 하기도 전에 손목을 잡혀서이기도 했지만 그전에 눈앞에 서있는 이의 분위기가 상당히 낯익었던 탓이다. 체격으로 보건데 남자로 추정되는 이는 제법 장신이었다. 후드를 쓴 덕에 얼굴은 안 보였지만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유리엔은 곧바로 상대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 너 지금 제정신이냐?” “ …카라멜?”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첫마디를 꺼낸 그는 다름 아닌 카엘이었다. ================================ # 126편 # 소제목 : 악역의 본분. (10) ================================ 멀뚱멀뚱. 카엘을 응시하는 유리엔은 딱 그 모양새였다. 약간의 당황과 놀람과 멍함이 섞인 시선으로 물끄러미 카엘을 올려다보던 유리엔은 이내 툭 말했다. “ 여긴 어쩐 일이야?” “ …….” 대답이 없다. 그런 카엘에게서 유리엔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후드 속에 가려진 얼굴이 왠지 평소보다 찌푸려져 있을 듯하다. 그러니까 이건 마치- “ 화났어?” 딱 그런 분위기였다. 카엘은 곧바로 긍정했다. “ 그래.” “ 왜?” 그렇게 물으면서 유리엔은 전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것 같은 기시감을 받았다. 그게 언제였더라. “ 정말 몰라서 물어? 넌 어떻게 된 게 사람이 위기감이 없냐? 예전에 사냥대회 때도 그렇고, 위험한 데란 위험한 데는 뭘 그렇게 죄다 찾아서 기어들어가!” 아, 맞다. 그때였지. 그때도 지금과 비슷하게 화를 냈다. 그때도 왜 화내냐고 물어봤던 것 같다. 대답이 뭐였는지는 가물가물하지만. 위기감이 없냐는 말에 유리엔은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사실 어릴 때부터 그런 증세가 파릇파릇 싹을 틔우기는 했었다. 모험심도 남다르고 호기심도 남다른데 정작 가장 중요한 자기 몸 보호는 그보다 살짝 뒷전인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그간 절묘한 순간에 숫하게 도움도 받아왔으니 뭐라 할 말이 없다. 대신 유리엔은 다른 곳을 찔렀다. “ 그건 그렇다 치고, 그렇다고 네가 왜 화내는데?” “ 걱정되니까!” “ 어?” 잠깐의 주저도 없이 바로 당연하다는 듯 튀어나온 대답에 유리엔이 멈칫했다. 방금, 단어가 왠지 좀 간질간질하지 않았나. “ 이번에도 봐, 여기 뭐가 있을 줄 알고 이 시간에 말도 없이 쫄래쫄래 여길 와, 오긴! 이러니까 내가 걱정을 안 하게 생겼냐! 그래, 말 나온 김에 얘기하자. 너 왜 나한테 말 안했어?” “ 뭘?” “ 미네가 유괴된 거. 그리고 유괴범이 초대장 따위로 널 여기로 불러낸 거. 왜 얘기 안했어?” “ …말할 필요를 못 느꼈으니까.” “ 왜? 너랑 내가 남이냐? 진작 말했으면 내가 지금까지 손 놓고 구경만 했을 것 같아? 네 일인데!” 유리엔은 또 잠깐 동안 말을 잃었다. 저 봐, 대사가 또 간질간질하다. 뭘 저렇게 간질거리는 말을 자연스럽게 한 대, 오늘따라? “ 네가 언제부터 주변사람한테 도움 받는 걸 불편하게 여겼다고! ‘당연히 날 도와야지 이 발닦개들아’ 이거 아니었냐?” “ 아니, 그치만! 너한테 도움 받으면!” 신경 쓰인다고. 말하려다 유리엔은 멈칫했다. 너한테 도움 받으면 신경 쓰여. 자꾸 신경 쓰여서 이왕이면 도움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거, 뉘앙스가 어째…. “ …그게, 그러니까 너한테 도움 받고 나면 계속 니가!” 생각나. 생각나서 짱난다.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안 떠나고 뒹굴거리니까.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구해주기라도 한 날엔 끊임없이 그 잘난 면상이 여기서 툭, 저기서 툭, 계속해서 떠오른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리 몸 바쳐 저를 살려내든 말든 전혀 그런 게 없었는데 유독 카엘에게만 그렇다. 유리엔은 입을 다물었다. 뭐지, 이 달달한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다. 그렇게 유리엔이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음으로써 잠시나마 둘의 사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순간적으로 대화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조용히 인기척도 없이 한쪽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그윈이 이때다 싶어 말을 던졌다. “ 저…기요?” “ …….” “ 사랑싸움 끝나셨으면 여기도 좀 봐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사랑싸움이라는 단어에 태클을 걸려던 유리엔은 그윈이 가리킨 곳을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카엘도 마찬가지였다. 언제 내려온 건지 이쪽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한 여성이 원피스 차림으로 서있었다. “ 애들로나 백작부인?” 어두워서 생김새는 잘 보이지 않는데다 원래 얼굴도 모르는 사이였지만, 유리엔은 직감적으로 여성의 정체가 애들로나 백작부인임을 알아챘다. 그에 응수하듯 백작부인이 상체를 살짝 숙이며 인사해왔다. “ …미안해요.” 안녕하세요도 아닌 밑도 끝도 없는 사과에 뭐가 미안하냐고 물어볼 틈도 없이, 다음으로 그녀가 내뱉은 것은 찢어질 듯한 비명이었다. “ 꺄아아아악-!” “ ?!” “ 침입자다! 잡아라!” “ 백작부인께서 당하셨다! 어서 침입자를 잡아라!” “ …이런.” 비명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저택 여기저기에서 불이 켜지며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사전에 짜기라도 한 듯 절묘한 타이밍이다. 낮게 중얼거린 카엘은 어느새 팔로 유리엔의 허리를 감고 있었다. “ 꽉 잡아.” 그리고 휙! 하니 몸이 공중으로 솟구친다. 눈 깜짝할 새에 담장을 넘는가 싶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저택에서 멀어진다. 유리엔은 카엘에게 안긴 자세였다. 잠깐 사이에 저택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졌다. 따라잡힐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유리엔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카엘을 쳐다보았다. “ 엄청 빠르네…카라멜.” “ 뭐, 이 정도야.” 카엘은 보통사람은 상상도 못할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다리에 마나를 활성화시킨 덕이다. 괜히 인간의 한계를 넘었네 어쩌네 하는 소드마스터가 아니었다. 간신히 둘을 따라잡은 그윈이 괴물 보듯 한 시선으로 카엘을 응시했다. 보아하니 이대로 황궁까지 달려갈 심산이다. 유리엔은 이만 내려달라고 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빠르기도 하고, 편하기도 하다. 바람 때문에 후드가 벗겨지면서 드러난 카엘의 얼굴을 힐끗 올려다본 유리엔이 아까 대답을 듣지 못했던 질문을 다시 입에 담았다. “ 그런데 정말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애들로나 백작 저택에.” “ 네가 말도 안했는데 어떻게 알았냐고?” “ …응.” “ 제론한테 들었어.” 아무래도 걱정이 된 루제가 늦은 시각에 카엘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이인 제론에게 부탁을 했다. 안 그래도 제론 또한 은근히 걱정이 되던 차에 잘됐다싶어 곧장 카엘에게로 달려와 얘기한 것이다. 처음 말을 전해 듣고 카엘이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그 다음으로 느낀 것은 화였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말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화. 거기에는 저에게 의지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섭섭함도 조금 섞여있었다. “ 아무튼 이번일은 너 혼자서 해결하게 두지 않을 거니까 그렇게 알아.” 카엘이 이렇게 일침을 놓고, 유리엔이 괜히 투덜대는 사이 황궁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황궁은 발칵 뒤집혔다. 중앙에서 힘깨나 쓰는 귀족인 애들로나 백작의 저택이 습격을 받았다. 백작이 제 영지관리를 위해 잠깐 저택을 비운사이 야밤에 발생한 일이었고 피해자는 백작부인이었다. 칼에 찔렸는데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고 알려진 백작부인은 범인으로 유리엔을 지목했다. 백작부인은 ‘그날따라 잠이 안와 잠시 정원을 산책하던 도중 습격을 받았다’고 말하며 ‘습격한 자들은 여인 한명에 사내 둘이었다. 후드로 모습을 감추고 있어 처음에는 누구인지 몰랐는데 칼에 찔릴 때 우연히 후드가 벗겨져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다름 아닌 유리시엔 황녀였다’고 증언했다. 그 즉시 때마침 황궁에 머무르고 있던 귀족 몇몇이 무리지어 유리엔을 공격했다. 득달같이 달려들어 유리엔을 범인으로 확정짓고 몰아붙이는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패듀린 공작가에 연줄을 대고 있는 가문이라는 점이었다. 어찌된 일인지는 뻔하다. 유리엔도 어제 밤 애들로나 백작의 저택을 방문했던 순간부터 짐작하고 있던 거였다. “ 백작부인께서는 하마터면 숨을 거둘 뻔 하셨소!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모르겠소?” “ 타국에서 이런 범죄라니,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외다!” “ 당장 이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할 것이오!” 백작부인의 증언은 새빨간 거짓말에, 아무리 뜯어봐도 유리엔이 애들로나 백작부인을 습격할 이유 따윈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지만 그들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뭐든 명분만 있으면 족했다. 유리엔을 끌어내리고 대신 젤디아를 황태자비의 자리에 앉힐 명분 말이다. 물론 유리엔도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는 않았다. 이쪽에도 반박할 구실이 있었다. “ 유감이지만 황녀님께서는 범인이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젯밤에는 줄곧 저희와 함께 계셨거든요.” “ 그래요. 몸이 좋지 않으셔서 저희가 밤새 간병을 해드렸어요.” “ 애들로나 백작부인께서 습격당하셨다는 시간에 황녀전하께선 방 바깥으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으셨습니다. 그건 방문을 지키던 호위병들이 증언을 해줄 겁니다.” 안 좋은 예감을 느꼈던 유리엔의 조치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 흥! 전부 황녀 쪽 사람인 자네들의 말을 어떻게 믿소? 호위병이야 돈으로 매수하면 그만일 테고!” “ 그러는 저희야말로 백작부인의 증언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만.” “ 뭐요?!” 양측이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대립이었다. 눈에 확 드러나는 물증은 없는데다 증인은 양쪽 다 보유하고 있으니 어느 한쪽이 밀리기엔 힘든 구도였다. 이 끝없이 계속될 것 같던 대치의 막을 내린 것은 카엘이었다. “ 그쯤 하죠. 유리시엔 황녀의 결백은 내가 책임지고 증언할 테니.” “ 전하!” “ 황태자전하!” “ 하, 하오나 분명 애들로나 백작부인께선…….” “ 그럼 신들은 지금 내가 거짓증언을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 그, 그건.” 카엘은 웃고 있었지만 무시 못 할 위압감이 이쪽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귀족들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 로우텐 자작, 알비에트 남작, 렌시어스 백작, 갈튼 자작.” 차례로 이름을 불린 귀족들이 움찔했다. 카엘은 하나하나 천천히 시선을 준 뒤 말했다. “ 내가 신들의 이름을 계속해서 기억하길 바랍니까? 황위에 오른 뒤에도 말입니다.” 찍히고 싶냐는 말이었다. 귀족들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자칫 하단 간신히 발을 들여놓은 중앙에서 순식간에 쫓겨날 지도 모르는 판이다. 그들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못하고 얌전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제론 등이 카엘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잘했다는 의미로 박수라도 쳐줘야 하나 고민하는 유리엔을 향해 카엘이 말을 던졌다. “ 가자.” “ 어딜?”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유리엔에게 카엘이 씩 웃음 지었다. “ 미네 찾으러.” ================================ # 127편 # 소제목 : 악역의 본분. (11) ================================ “ 여기는…….” 흰색의 매끈한 벽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저택은 제법 근사해보였다. 번쩍이는 외관은 마치 지나가던 저택애호가로 하여금 ‘얼마면 돼? 얼마면 되냐고!’라고 소리치며 소유욕을 불태우게끔 할 정도로 매력적이었지만, 방금 막 마차에서 내려서 저택을 올려다보는 이들에겐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저택이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 갑자기 아침부터 적의 소굴을 급습?” “ 그래.” ‘미네 찾으러 가자’고 자신감 넘치게 말한 카엘이 그 직후 곧장 유리엔 외 네 명을 이끌고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페듀린 공작가였다. 잘 나가는 중앙귀족의 저택임을 자랑이라도 하듯 위풍당당한 크기의 저택을 한번 힐끗 올려다본 카엘이 이내 거침없이 정문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섰다. 카엘의 얼굴과, 그들이 타고 온 마차에 새겨진 황가의 문양을 본 경비병들은 유리엔일행이 정문을 지나치는 걸 막지 못했다. 장신의 키와 빼어난 외모로 남다른 존재감을 사방에 뿌리며 여유 있게 옆을 지나치는 카엘과, 그 못지않게 눈에 확 들어오는 미모를 뽐내며 그 뒤를 따라 옆을 스쳐지나가는 유리엔의 모습에 삼십대 노총각 경비병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헤렐레 넋을 놓았다. 멀어지는 둘(과 나머지 일행 네 명)을 바라보며 경비병이 탄식처럼 말했다. “ 난 있잖아…지금까지 페듀린 공작가의 아가씨가 세상에서 가장 예쁜 줄 알았거든.” “ 응, 나도…저번에 저택을 방문했던 이웃나라 공작 뭐시기가 가장 잘생긴 줄 알았어.” “ 역시 세상은 넓고,” “ 미인은 많구나.” “ 둘이 정말 잘 어울린다.” “ 그치?” “ 하…부럽다.” “ 정말. 우리도 슬슬 결혼이나 할까?” “ 그래, 우리들 결혼하자.” “ 날짜는 언제로 할까?” “ 뭐 그게 내 맘대로 정한다고 정해지나…잠깐, 지금 뭐라고?” “ 왜?” “ 그러니까 우리 둘이 결혼하자고? 너랑 나?” “ 응.” “ 이런 미친…….” “ 싫어?” “ 그럼 넌 좋아?” “ 난 좋은데.” “ 정말? 생각해보니 나도 좋은 것 같아.” “ 게이바~” “ 게이바~” 일행이 다함께 움직인 것은 페듀린 공작의 집무실 바로 앞까지 만이었다.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것은 카엘 혼자뿐이었다. 탁, 하고 문이 닫히자마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공작이 황족을 향한 예를 올린 뒤 입을 열었다. “ 하하, 이거 기별도 없이 갑자기 찾아오셔서 놀랐습니다, 황태자전하. 무슨 일로 여까지 직접 오셨는지…?” “ 공작.” “ ?” “ 난 공작을 제법 똑똑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하고 공작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그 전에 순간적으로 낯을 스쳐지나간 동요를 놓치기엔 카엘의 눈썰미가 너무 뛰어났다. “ 최근 며칠간 공녀가 저택에 나타나지 않았다 하더군요.” “ 아, 하하. 젤디아 말씀이십니까. 제 여식이지만 워낙 제멋대로인 아이라 예전부터 종종 말없이 사라지곤 했었지요. 지금도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도통…….” “ 모른단 말입니까?” “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공작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슬쩍 드러낸 표정은 마치 딸의 안위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얼굴이었지만, 카엘은 차게 비웃었다. “ 이런…실망입니다, 공작.” “ 예?” “ 공작은 내가 바보로 보입니까?” “ 갑자기 무슨 말씀을….” “ 아버지가 딸의 행방을 모른다라.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작이? 최근에 황실을 자주 방문하고 타국의 황녀와도 몇 차례 마찰을 일으킨 공녀에게 그간 감시 하나도 제대로 붙여놓지 않았다?” “ 그건…….” 페듀린 공작은 말문이 막혔다. 카엘의 말이 맞았다. 공작은 진즉부터 젤디아에게 감시를 붙여두고 있었고 그녀가 얼마 전에 저지른 짓부터 지금 머무르는 장소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다만 그래도 아비된 입장으로서 딸의 편을 들어주고자 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젠 별 수 없게 되었다. 카엘은 의심이 아닌 확신을 하고 찾아왔다. 권력이냐 아님 딸이냐 하는 것은 사실 페듀린 공작에겐 고민조차 필요없는 선택지였다. “ 송구하옵니다, 전하.” “ 됐습니다.” “ 며칠만 시간을 주시면 제가 당장 그 아이더러 돌아오라 이르겠…,” “ 그럴 필요 없습니다. 지금 당장 찾아갈 테니까. 준비하시죠, 공작.” “ 예?” 공작은 깜짝 놀랐다. 이건 미처 예상 못한 요구였다. 지금 당장이라면 젤디아에게 미리 연락을 취할 겨를도 없게 된다. “ 지금…당장 말씀이십니까?” “ 꼭 두 번 말해야합니까.” “ 아, 아니, 그것이 송구하오나 지금 당장은 좀 어렵습니다.” “ 안되겠다는 말입니까?” “ 급하게 처리 중인 직무도 있고 하여 힘들겠습니다. 하다못해 하루정도라도 시간을 주시면-.” “ 공작, 잘 들어요.” “ ……?” “ 지금 내가 이대로 돌아가면 말입니다, 가장 먼저 아버님을 뵈어 말씀을 드리고 허가를 받아 황실의 인력을 동원할 겁니다. 아무리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었다고 해도 타국으로 나가지 않은 이상 황실이 움직이면 공녀를 찾는 건 시간문제가 될 테고, 그렇게 해서 공녀를 찾으면 난 이번 일의 책임을 공녀에게만 물을 순 없게 될 겁니다.” “ ……!” “ 어쩔 겁니까, 공작. 내가 지금 이대로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 …지금 당장…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명실상부한 협박이었지만, 달리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권력에 대항하기엔 페듀렌 공작은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을 추구하는 타입이었다. 결국 공작은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 # 128편 # 소제목 : 악역의 본분. (12) ================================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공작과 카엘이 함께 걸어 나왔다. 바깥으로 나온 공작은 문 바깥에 서있던 유리엔과 루네일행을 보고 흠칫 놀랐다. 유리엔은 말할 것도 없고 제론과 네이시온 또한 공작이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그들과 함께 있는 갈색머리 여인 둘의 신분은 굳이 묻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 …전하, 저 자-아니, 저분들은?” ‘저 자들’로 지칭하려다 아무래도 유리엔이 걸려 ‘저 분들’로 말을 높였다. 사실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카엘의 대답은 공작의 예상을 빗겨가지 않았다. “ 공녀가 유괴한 아이의 가족들입니다. 동행할 자격으로 부족하진 않을 텐데요.” “ 아, 예…물론입니다.” ‘ 역시.’ 공작은 미미하게 표정을 굳혔다. 카엘 혼자였다면 젤디아가 연약한 여자라는 점을 들먹여서라도 말로 훈계하는 정도로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는 약조와 가벼운 근신정도로 좋게 마무리 지을 수도 있겠다 여겼건만. ‘ 다 틀렸군.’ 유리엔을 비롯한 일행들의 눈빛은 무시무시했다. 저절로 솟아나는 딸 걱정에 한숨을 삼키며 공작이 시종에게 명령했다. “ 이분들이 타실 마차를 준비해라.” “ 아니, 괜찮아요.” 만류한 것은 유리엔이었다. 맑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공작의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카엘의 시선 또한 유리엔을 향했다. “ 그럴 필요 없어요. 우리가 여기까지 타고 온 마차가 있으니까.” 그들이 타고 온 것은 누가 봐도 황실의 것임을 알 수 있는 크고 호화로운(거기에 황가의 문양까지 새겨진)마차였다. 그 마차를 끌고 간다면 어느 길로 가든 남의 이목을 속일 수는 없다. 오히려 한 두명의 목격자만으로도 순식간에 소문이 돌 것이다. 그만큼 보기 귀한 마차였다. 공작의 표정이 굳어지자 유리엔이 싱긋 웃었다. “ 착각하지 말았으면 해요, 공작. 난 이번 일을 남들 모르게 조용히 끝낼 생각이 전혀 없어요. 폐하께 말씀드리지 않고 직접 공작을 찾아온 건 단순히 공녀를 찾는데 드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예요.” 공작은 당황했다. 속을 읽힌 건 둘째 치고, 웃으며 말하는 유리엔에게서 은근히 느껴지는 위엄은 공작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얼굴만 예쁜 그저 그런 황녀인 줄 알았더니 그 평가를 달리해야 할 듯 싶었다. 사실 좀 전까지만 해도 공작은 카엘이 유일한 변수라고 생각했다. 카엘만 이렇게 나서지 않았다면 젤디아는 충분히 계획한대로 뜻하는 것을 이룰 수 있었을 거라 여겼었다. 그런데 그 생각이 바뀌었다. “ 생각이 모자란 공녀가 추잡한 질투로 인해 벌인 일을, 일국의 공작이 감히 황태자의 사람을 건드림으로써 황실을 능멸한 사건으로 만들지 않길 바라죠, 공작.” 젤디아가 어떤 죗값을 치루든 공작은 나서지 말라는 얘기였다. 일을 키워서 싸잡아 당하고 싶지 않으면 말이다. ‘ …젤디아, 이 바보 같은 것.’ 공작은 속으로 못난 딸을 질책했다. 이제 보니 상대의 역량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일을 벌였다. 이젠 공작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되도록 심한 꼴은 겪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젤디아는 가문이 소유한 별장 중 한 채에 머물고 있었다. 그녀의 계획은 대충 이랬다. 우선 미네를 유괴해서 그것을 빌미로 유리엔을 함정에 빠뜨린다. 그리고 제 가문에 연줄을 댄 귀족들을 이용해 감히 타국에서 죄를 저질렀으니 황태자비가 될 자격이 없다며 끌어내린다. 그리고 그렇게 끌어내려진 유리엔을 찾아가 아이를 돌려받고 싶다면 어디 무릎 꿇고 빌어보라며 실컷 조롱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이의 부모를 찾아가 유리엔만 아니었다면 네 딸이 유괴당할 일도 없었다는 식으로 말하며 유리엔을 배신하도록 종용한다. 종내에는 비참한 처지가 된 유리엔이 모국으로 돌아가고 자신은 황태자비가 되는 것이 그녀가 짠 시나리오의 마지막이었다. 그 계획이 첫 단추부터 어긋났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젤디아는 망상에 빠져 있었다. “ 그 건방진 계집이 잘못했다고 빌면 가장 먼저 뭐부터 시킬까? 그래, 그 짜증나게 반반한 외모를 망쳐놓는 것도 좋겠지. 머리카락은 짧게 자르도록 하고 더러운 색으로 염색을…….” “ 공녀님!” “ …뭐야?” 갑자기 들이닥친 시녀를 향해 젤디아가 도끼눈을 치떴다. 감히 주인의 방에 노크도 없이 함부로 들어온 것에 대해 매질을 할까 생각하는 젤디아에게 시녀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 공작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 그런데-.” “ …?” “ 뭐야, 별로 멀지도 않은 곳에 숨어있었네?” 잔뜩 당황한 시녀의 모습에 젤디아가 의문을 품는 순간, 문밖으로 낯익지만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맑고 청아하지만 그녀로서는 듣기 싫은 목소리였다. 설마 하는 순간 문이 열렸다. “ !!” 한눈에 마음을 뺏길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 검고 긴 머리를 찰랑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입가에 미소를 띠운 유리엔이 바로 지척으로 다가올 때까지 젤디아는 눈만 크게 뜬 채로 굳어있었다. “ 너…?!” “ 안녕? 대왕떨거지, 아니 바보킹아. 이게 며칠만이야?” “ 뭐, 뭐야? 네가 어떻게 여길!” “ 그러게. 내가 어떻게 여기 있을까? 상품은 없지만 한번 맞춰볼래? 그런데 한 가지 알려주자면 지금 중요한 건 내가 여길 어떻게 왔냐가 아니라 지금부터 네가 여기서 어떻게 될지 거든.”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어준 유리엔은 바로 근처에 숨죽이고 서있던 시녀를 불러 미네를 데려오도록 했다. 움찔한 시녀는 이내 순순히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함께 방에 들어왔지만 젤디아가 유리엔에게만 정신이 팔려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루네가 시녀로부터 미네를 받아들었다. 엄마 품을 떨어져있는 동안 많이 운 듯 눈가가 빨갰지만 그 외에는 별달리 외상이 없었다. 다행이라고,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수없이 반복해 중얼거리며 루네가 미네를 꼭 품에 안았다. 안도감에 눈물이 저절로 쏟아졌다. 그 모습을 애틋하게 바라본 유리엔이 그 다음으로 공작에게 시선을 주었다. 공작과 더불어 유리엔, 카엘, 루네, 루제, 제론, 네이시온까지 일곱 명이 전부 방안으로 들어온 채였다. 바깥으로 나가있는 게 좋지 않겠냐는 눈짓을 알아들은 공작은 순순히 자리를 떴다. 아무리 잘못을 한 딸이라지만 눈앞에서 얻어맞는 걸 보는 게 편하지만은 않을 터였다. 시녀까지 바깥으로 내보냄으로써 안에는 젤디아와 유리엔 일행밖에 남지 않았다. 상황파악이 덜 된 듯 반쯤 얼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는 젤디아를 향해 유리엔이 말했다. “ 빵 줄까?” “ …뭐?” “ 선빵.” 퍼억! “ 꺅!” 젤디아가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넘어졌다. 도저히 저 희고 가녀린 팔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는 힘으로 얻어맞은 젤디아의 충격은 상당했다. 살면서 이런 힘으로 맞아본 적이 없었다. 잠시 동안 멍하니 넋이 나가있던 젤디아가 이내 표독스럽게 눈을 치켜떴다. “ 이게 무슨 짓이야! 가, 감히 날 때려?!” “ 뭐라고? 아직 배고프다고? 그럼 이 빵도 먹어.” 퍽! “ 꺄악!” “ 죽빵.” 반쯤 엎어진 자세였던 젤디아는 이번엔 반대편으로 넘어졌다. 맞는 순간의 충격이 너무 커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생애 최초의 폭력이었다. “ 아프지? 그러게 왜 이런 짓을 했니. 지금까지 엿먹고 물먹고 했으면 됐지 뭐 하러 빵까지 먹으려 유괴 따위를 해.” “ 가, 가, 가, 감히…! 이, 이런 짓을 나한테 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 “ 그럼?” “ 다, 당장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개처럼 잘못했다고 빌어! 죄송하다고 빌란 말이야! 그러지 않으면 당장 아버님께 말씀드려서 널 죽여 버릴 거야! 페듀린 공작가의 힘을 총동원해서 네년의 사지를 절단하고 돼지우리에 던져놓을 거라고! 가, 감히 나한테! 이 나한테 이딴 짓을 해?!” 몸에 힘이 풀려 일어나지도 못하는 처지로 젤디아는 바락바락 악을 썼다. 내용은 제법 살벌했지만 당연히 유리엔은 코웃음을 쳤다. “ 너 진짜 바보구나. 니 빽은 고작 공작가. 내 빽은 황태자. 황태자 빽은 황제. 즉 내 빽은 황제. 빽끼리 한번 싸워볼까? 반역죄 뒤집어쓰고 삼대가 몰살당해도 괜찮으면 어디 한번 해볼래?” “ …!!” “ 물론 빽은 둘째 치고 내가 아무 이유 없이 널 이렇게 때린 거면 문제가 되겠지. 그런데 넌 잘못을 했잖아? 그것도 현장검거로 우리한테 잡혔네? 증거도 있는데 어쩌나. 뭐, 아무튼 난 여기까지.” 그렇게 말하고 유리엔은 물러났다. 대신 앞으로 나선 것은 루네였다. 제론에게 안고 있던 미네를 맡긴 루네가 팔을 걷어 올렸다. 약한 근력을 대신해줄 대걸래자루를 닮은 무기까지 어느새 한손에 들고 있는 듯했다. “ 한순간이나마 아이를 잃었던 어미의 고통을 당신 따위가 알 리 없겠죠. 대신 이렇게나마 그 고통의 일부를 체험해 보기 바랍니다. 지금껏 사람을 때려본 적은 없지만, 왠지 오늘은 될 것 같네요.” “ 지치면 나한테 맡겨, 루네야.” “ 응, 언니.” 딸을 납치했던 유괴범을 눈앞에 둔 루네의 눈은 활활 타올랐다. 옆에 덩달아 루제까지 살기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런 둘을 향해 애정 어린 눈길을 보낸 유리엔이 자기는 그동안 산책이나 해야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그런 유리엔을 카엘이 뒤따랐다. 별장답게 주변의 경관은 좋았다. 정원은 무려 꽃밭이었다. 그 한가운데에 선 유리엔과 카엘은 마치 그림 같았다. 알록달록 갖가지 색채를 뽐내며 활짝 피어있는 꽃들을 보며 유리엔이 탄식했다. “ 하아, 이 아름다운 미모에 꽃들마저 빛을 바라는 구나.” “ 꽃이 들으면 욕할 소리를 잘도 하는구만.” “ 저 꽃은 널 닮았네, 카라멜. 꽃잎이 네모에다 갈색이잖아.” “ 뭐? 나 참, 그럼 저기 저 꽃은 너냐? 꽃잎이 마치 검은 강아지 꼬리 같긴 한데.” “ 내가 잘못 봤네. 넌 흙덩이랑 가장 닮았어. 흙덩이도 갈색이잖아.” “ 나도 정정하지. 저기 반쯤 깨진 검은색 돌덩이 보여? 딱 너네.” 유치한 말싸움 도중이었다. 루제가 한결 시원한 얼굴로 유리엔을 찾았다. “ 황녀님!” “ 응?” “ 루네가 젤디아 공녀를 반쯤 죽여 놨어요.” 살벌하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 루제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유리엔은 놀라며 말했다. “ 반이나 살아있어?” “ …….” “ 가서 더 죽여. 십분의 일만 살려놔.” “ 네!” 루제는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달려가는 루제를 유리엔이 인자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그런 유리엔을 카엘이 질린 표정으로 쳐다봤다. “ 뭘 그렇게 봐? …아, 참.” 문득 유리엔이 뭔가를 잊었다는 듯 갑자기 다리를 굽혀 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뭘 열심히 하나 싶더니 다시 벌떡 일어나 카엘에게 불쑥 내밀었다. “ …이게 뭐야?” “ 딱 보면 몰라? 고개 좀 숙여봐.” 순순히 고개를 숙이자 그 위에 방금까지 열심히 만들던 것을 턱 하니 씌운다. 붉은 색을 띠는 꽃끼리 엮여 원모양을 이룬 띠가 카엘의 머리 위에 화관처럼 얹혔다. 자세를 바로 한 카엘의 머리 위를 보며 유리엔이 만족한 듯 웃었다. “ 예쁘네.” “ 갑자기 이건 왜?” “ 그냥, 고맙다고. 도와줘서.” 카엘이 없었다고 해서 미네를 찾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분명 카엘이 나서줬기 때문에 훨씬 쉽고 간단하게 끝낼 수 있었다. 전에는 틱틱 거렸지만 도움을 받았다면 고맙다고 인사하는 게 맞다는 것 정도는 유리엔도 알고 있었다. “ 굳이 인사할 필요 없어. 내가 돕고 싶어서 도운 거니까. 저번에도 말했잖아? 네 일인데 어떻게 가만히 있냐고.” “ 어, 그랬지.” “ 이건 잘 만들었네.” 머리 위에 놓인 유리엔표 즉석 화관을 툭 건드리며 카엘이 피식 웃었다. 기분 좋아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런 카엘을 쳐다보며 유리엔은 문득 생각에 빠졌다. ‘ 내 일인데 어떻게 가만히 있냐고?’ 이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묘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니까’ 무조건 도와주겠다는 말이 아닌가. 이런 걸 대체로 아무감정도 없는 사람한테 하나? 이런 말은 보통-. 여기까지 생각이 닿는 순간 유리엔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 카라멜, 너 말이야.” “ ?” “ 나 조…….” 조, 까지 말한 유리엔이 화들짝 놀라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방금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 아니, 세상에, 잠깐만. 좋아하냐고 물어볼 뻔했다. 너 나 좋아해? 라고.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눈만 크게 뜨고 유리엔이 카엘을 올려다봤다. 카엘은 갑자기 나오려다 끊긴 말에 의아한 표정이었다. 잠깐의 침묵 후 어색하게 웃으며 유리엔이 입에서 손을 떼어냈다. “ 조?” “ …조미료는 몸에 안 좋아. 조미료를 쓰지 말고 몸에 좋은 건강음식을 만들어 먹도록 합시다. 자고로 건강을 위해서라면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운동도 빠질 수 없죠. 추천하는 운동은 매일 한 시간 이상 걷기…….” “ 갑자기 뭔 소리야.” “ 아냐. 아무것도.” 고개를 돌린 유리엔은 다시 바닥에 쭈그려 앉아 뭔가를 열심히 만드는 척했다. 하지만 기계적으로 꽃을 꺾어 한손에 모으는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좋아한다? 카라멜이 나를 좋아한다? 꽃을 꺾던 흰 손이 우뚝 멈췄다. 어느새 열 송이는 넘게 모인 손안의 꽃들을 보며 유리엔이 길게 속눈썹 진 검은 눈동자를 느리게 깜박였다. 사람의 손에 꺾였음에도 꽃들은 특유의 향기로운 내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살랑살랑, 갑자기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도 같았다. ================================ # 129편 # 소제목 : 그만 밀고 이젠 당길 때. (1) ================================ 찰지게 얻어맞아 떡이 된 젤디아의 만행은 사교계를 비롯해 온 귀족들 사이에서 입방아에 오르내렸고, 젤디아는 요양을 핑계 삼아 수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방의 별채로 보내졌다. 더불어 애들로나 백작저택 습격사건은 가짜임이 밝혀졌으며, 젤디아의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는 백작부인은 직접 유리엔을 찾아와 고개 숙여 사죄했다. 젤디아가 성공적으로 퇴치되면서 다시금 찾아온 평화로운 어느 날의 오후였다. 유리엔은 답지 않게 고민에 빠져있었다. 카라멜은 저를 좋아하는가 좋아하지 않는가. 예스 오알 노. 어느 쪽? 열여섯 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얼마 전 재회해서 지금까지, 카엘의 행적과 행동들을 유리엔은 머릿속으로 한번 시간순서로 주욱 나열해보았다. 가만 생각해보니 카엘은 항상 어떻게 알았는지 타이밍 좋게 유리엔이 있는 곳에 나타나곤 했다. 그리곤 도와준다. 걱정한다. 선물도 준다. 그 외 이런저런 말과 태도들 종합. “ …좋아하는 구나?” 라고 유리엔은 결론 내렸다.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갑자기 명확해지는 느낌이다. 좀 전까진 긴가민가하던 것이 소리 내어 말하고 나니 문득 확실해졌다. 카엘은 저를 좋아한다.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왜 지금껏 몰랐을까? 알고 나니 오히려 이제 와서 알아챈 게 더 이상했다. 스스로가 결코 둔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사실 유리엔은 사람을 파악하는 데에 있어선 남들보다 훨씬 예리한 편이었다. 그런데 왜 눈에 뻔히 보이는 걸 이제까지 몰랐는지. 이것도 저것도. ‘좋아한다’는 말로 전부 설명이 된다. “ …….” 유리엔은 두 손을 들어 양 뺨에 착 갖다 붙였다.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과 함께 평소보다 좀 더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져왔다. 저절로 입가가 허물어진다. 베실베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좋아한다. 좋아하는구나? 아무렴, 누가 이 치명적인 매력에 빠져들지 않고 버틸 수 있겠냐만은. 풀썩. 앉아있던 자세 그대로 유리엔이 몸을 뉘였다. 긴 흑발이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누운 자세에서 천장을 가만 쳐다보며 유리엔이 눈을 깜박였다. “ …아, 정말. 이 몸의 인기란.” 너무 넘쳐도 피곤하다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는 유리엔의 표정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과자와 홍차를 눈앞에 두기라도 한 듯 기분 좋게 풀려있었다. 사람은 변한다. 그것이 나쁜 쪽이든 좋은 쪽이든, 진화든 퇴화든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더러는 아예 모르는 사람으로 바뀌기도 한다.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몇 년 만에 만나는 친인에게 ‘으아니! 당신은 대체 누구요? 내가 아는 김아무개는 이렇지 않아! 내 김아무개짜응을 돌려내!’라고 외치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유리엔은 눈을 의심했다. “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녀전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차분한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낮은 울림은 듣기 좋았다. 부드러운 말의 어조는 듣는 이를 저절로 편안하게 했다. “ 황녀님! 돌아오실 줄 알았어요!” 그에 반해 이쪽은 여전히 톡톡 튀는 발랄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 온다. 눈을 초롱초롱 빛내기에 잠자코 두 팔을 벌려주었더니 단번에 달려와 품에 안긴다. 품에 안긴 분홍머리 여인과, 그 옆에 곧은 자세로 서있는 하늘색 머리의 사내를 번갈아 쳐다보는 유리엔의 얼굴이 이내 놀라움으로 물들어갔다. 아니, 이럴 수가? “ 린? 그리고 넌…로바카샤?” “ 노바카사입니다.” 틀린 이름을 담담히 정정하는 노바카사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자연스레 맺혀있었다. 5년 만에 만나는 두 사람 중 한명의 변화는 말 그대로 엄청났다. 반가운 재회를 맞은 이는 비단 유리엔 뿐만은 아니었다. “ 형님!” “ 로웬?”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띤 소년이 짙은 파란색 머리를 흩날리며 카엘에게 달려들었다. 익숙한 자세로 소년을 안아든 카엘은 놀란 표정으로 소년과 눈을 마주했다. 소년의 이름은 로웬 네이타 드 뮤리엔. 카엘의 둘째 동생이자 제국의 3황자였다. “ 여긴 어쩐 일이냐?” “ 어라! 소식 못 들으셨어요? 아카데미 여름방학이잖아요. 방학 맞아 집 나들이! 으헤헤헤.” 어릴 적부터 맏형인 카엘을 퍽이나 잘 따르던 로웬은 올해 15살로, 로열 아카데미 재학생이었다. 전교생이 황족(과 왕족)또는 고위귀족의 자제들로 이루어진 아카데미는 로웬 뿐만 아니라 카엘도 익히 졸업한 곳이었다. 카엘에겐 잊을 수 없는 곳이다. 죽어라 검을 휘두르고 밤낮으로 학문을 닦아 조기 졸업한 그곳은 소년 시절부터 남달리 키가 크고 외모가 빼어났던 카엘에게 여성혐오증을 선사해준 주범이었다. 딱히 좋지 못했던 3년간의 기억을 떠올린 카엘의 입가가 잠시 동안 미세한 경련을 일으켰다. “ 참, 그나저나 저번에 아카데미에 잠깐 들르셨을 때 기억나세요?” “ 시간도 난 겸 네 시합을 본다고 한번 갔었지.” “ 그때 형님이 돌아가고 나서 한동안 난리도 아니었어요. 제 친구들이야 말 할 필요도 없고, 평소엔 그렇게 깐깐한 척 하던 선생들까지 완전히 넋이 풀려서는…으헤헤, 다음에 또 언제 들르냐면서 물어보는데 완전 단체로 상사병에라도 걸린 기세였다니까요?” “ 오호, 그래?” “ 게다가, 언제는 크면 꼭 나한테 시집온다고 약속이니 다짐이니 하던 벨리 그 기집애는 형님이랑 인사한번 해보더니 마음이 홀랑 바뀌어서, 갑자기 형님은 결혼했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나 참, 안했어도 너 같은 코흘리개는 관심 없을 거라고 한소리 해줬죠. 하여간 여자마음은 갈대라니까.” “ 하하하.”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로웬은 전혀 밉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스러웠다. 로웬을 바닥에 내려준 카엘이 못 본새 꽤나 키가 자랐다 말하며 바다 빛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 그럼, 간만에 왔으니 형이랑 식사라도 같이 할까?” “ 네!” 형제간의 즐거운 상봉이었다. ================================ # 130편 # 소제목 : 그만 밀고 이젠 당길 때. (2) ================================ 유리엔에게 안긴 채로 한참을 부비적거리던 린은 더우니 떨어지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품에서 벗어나 유리엔의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그 옆에 노바카사가 단정한 자세로 나란히 앉고 나니, 그 모습이 마치 장모님을 앞에 둔 딸과 사위 같았다. 유리엔은 여전히 신기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 그래, 노 사위…가 아니라. 노바카사랑 린, 둘 다 오랜만이네. 그간 잘 지냈어?” “ 네! 저흰 아주 잘 지냈어요. 알콩달콩.” “ 오호라?” 알콩달콩이라. 린의 밝은 어조에 유리엔이 유심히 노바카사를 응시했다. 렛츠 관찰 타임. 우선 키가 좀 큰 것 같다. 체격이 좋아졌다고 해야 하나? 예전엔 여장시키기 딱 좋은 몸매였는데 몇 년 새에 근육이 제법 잡히고 어깨가 벌어졌다. 게다가 얼굴도 전에 비하면 훨씬 남자다워져서 더 이상 여장으로 남들을 낚는 것은 힘들듯했다. 흐음, 하고 유리엔이 엄지와 검지로 턱을 받쳤다. 노바카사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은 어느새 가늘게 뜨여 있었다. 그 시선이 좀 부담스럽긴 한 듯 노바카사가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유리엔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둘이 사귀니?” “ 작년부터…….” 린이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쑥스러운 듯 두 뺨에 홍조가 피어났다. 그런 린의 모습에 유리엔은 뭔가 말하기 힘든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마치 첫딸(루네)을 시집보내놨더니 둘째딸이 집에 남자친구를 데리고 온 느낌이라고 할까. 부끄러워하는 린을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본 노바카사가 불쑥 말했다. “ 제가 먼저 고백했습니다.” “ 그래?” “ 3년을 쫓아다녔죠. 하하.” “ …3년?” 예상치 못한 긴 시간에 유리엔이 멈칫했다. 그 정도면 거의 스토커……. “ 변변찮은 놈이었으니까요. 직업도 없고, 가진 것도 전무했는데 어쩌다 한눈에 반해서 고백했었습니다. 멋진 남자가 돼서 돌아오라며 화끈하게 차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죠.” “ 지금은 엄청 노력해서 기사가 됐어요. 황태자전하께서 도움을 주시긴 했지만, 그래도 정말 대단하죠!” 5년 전, 유리엔이 떠나고 난 뒤 노바카사는 황궁에서 잡일이나 도맡아하는 신세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철이 덜 들었던 노바카사는 여전히 버릇을 못 고치고 예쁘장한 하녀란 하녀에겐 죄다 추파를 던지곤 했다. 좋다고 세다리 네다리 걸치다 그만 치정사건에 휘말렸고, 사랑이 눈이 먼 웬 병사에게 맞아죽을 번한 걸 우연찮게 린에게 발견되어 도움을 받았다. 작은 체구와 귀여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당참으로 노바카사를 구해낸 린은, 도와주는 건 이번 한번뿐이니 앞으로 또 이런 일에 휘말려서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으면 정신 차리고 똑바로 살라고 따끔하게 훈계했다. 웬일인지 그 모습에 한눈에 반해버린 노바카사가 열심히 준비해 한 첫 고백의 결과는 무참했다. 단칼에 고백을 거절한 린은 ‘나를 책임일 수 있을 만큼 괜찮은 남자가 돼서 돌아오면 생각해 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도도하게 뒤돌아섰다. 정신 차리고 지금부터 달라져야겠다고 노바카사가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 꼬박 3년이 걸리더군요. 하하,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재능이 없지는 않은 편이라 잠을 아껴가며 열심히 했더니 지금에 이르게 되더군요. 린에게는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린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제가 있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 에이, 뭘.” “ …….” 유리엔은 말을 잃었다. 이건 뭐…이래서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나오는 건가. 문득 유리엔은 루제의 경우를 떠올렸다. 지금 결혼해서 잘 잡고살고 있는 남편인 네이시온도 과거엔 알아주는 망나니였는데, 루제를 만나면서 개과천선하지 않았나. 한쪽은 망나니에서 반듯한 백작가 후계자로, 다른 한쪽은 여장변태 찌질남에서 멋지고 능력 있는 남자로. 절로 웃음이 나온다. 참 바람직한 커플들이었다. 적당히 익힌 부드러운 양고기를 썰어 입으로 가져가는 로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는 음식이 아닌 맞은편의 카엘에게로 향해있었다. “ 형님!” “ 음?” “ 형님은 역시 언제 봐도 멋있으세요! 잘생겼지, 키 크지, 그 힘들다는 소드마스터에, 이렇게 완벽한데 그 흔한 스캔들 하나 없잖아요. 형님은 저의 우상이에요!” “ 하하, 고맙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닌 듯 로웬의 두 뺨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좀 더 어릴 적에는 카엘의 붉은 머리가 너무 근사하다며 제 머리를 당장 같은 색으로 염색해 달라 졸랐던 일이 있을 정도로 로웬은 카엘의 열혈 팬이었다. 전에는 그런 막무가내식의 애정이 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로웬이 그저 귀엽게만 보이는 카엘이었다. “ 아, 맞다. 형님. 혹시 킹디엄 왕국의 1왕녀, 아세요?” “ 들어본 적은 있다만…….” “ 아카데미졸업생인데 얼마 전에 축하연설을 한다고 왔었거든요. 그런데 엄청 예쁘더라구요. 게다가 말도 나긋나긋하게 잘하고, 주변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성격도 좋고 총명하다는 평이 많았는데 직접 말을 나눠보니 맞는 것 같았고요.” “ 녀석, 마음에 든 모양이구나.” “ 형님은 어때요?” “ 응?” “ 형님 아직 결혼 안하셨죠? 형님의 짝으로 어떤 것 같으세요? 제가보기엔 그럭저럭 조건은 만족하는 것 같은데. 소개시켜드릴테니 한번 만나보실래요? 넌지시 말했더니 그쪽은 엄청 좋아하던데. 하여큰 형님의 인기란.” “ 뭐? 하하하.” 카엘은 나이프를 내려놓고 크게 웃었다. 갑자기 여인을 칭찬하기에 마음에 둔 상대인가 싶었더니 로웬이 아니라 저의 결혼상대로 물색한 모양이었다. 카엘의 웃음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로웬이 재차 말을 덧붙였다. “ 괜찮죠? 아니면 엠피르 왕국의 2왕녀는 어때요? 좀 멀긴 하지만 엠피르는 항구도시가 많아 무역이 발달한 곳이니 관계를 맺어두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거기 2왕녀가 워낙 아름답고 능력이 뛰어나서 1왕녀는 나설 생각도 못한다고 하더라구요. 마음에 안 드시면 공작가의 딸도 있는데, 목소리가 은쟁반에 옥구슬 저리가라에다 노래를 무척 잘해요. 무엇보다 제가 지금까지 말한 세 명중 얼굴이 가장 예쁜데, 어떠세요?” “ 하하하하.” “ 웃지만 말구요, 형님!” 언제 저런 걸 다 봐놨는지. 공부하라고 보낸 아카데미에서 형님 신붓감만 찾고 있었나 싶어 카엘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로웬이 진심으로 삐져 볼에 바람을 잔뜩 넣고 입을 딱 다물었을 때야 카엘은 웃는 걸 그만두고 입을 열었다. “ 미안, 미안. 그리고 신경써준 건 고마운데 형은 필요 없을 것 같다, 로웬.” “ 네? 왜요? 아, 혹시!” 카엘은 내려놓았던 나이프를 들어 눈앞의 양고기를 다시 썰기 시작했다. 본의 아니게 잠시 멈췄던 식사를 이어나가는 카엘을 향해 로웰이 말했다. “ 마음에 둔 분이라도 있으세요, 형님?” 먹기 좋게 한입크기로 썰린 고기를 막 포크로 찍어든 참이었다. 로웬의 말에 카엘이 시원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 그래.” “ -!” 로웬의 유일하게 카엘을 닮은 붉은색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먹기 편하도록 썰어놓은 눈앞의 음식도 잊고 로웬은 뚫어져라 카엘을 응시하며 그저 눈만 깜박였다. 형님께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로웬의 눈동자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 # 131편 # 소제목 : 그만 밀고 이젠 당길 때. (3) ================================ “ 형님이 마음에 둔 사람이라…누굴까? 역시 완벽하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로웬이 황실의 정원을 거닐었다. 카엘과의 식사를 끝낸 후부터 로웬은 잔뜩 기대에 부풀어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로웬의 눈엔 한없이 완벽하게만 보이는 카엘이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도 형님을 좋아할까? 그렇겠지? 어떤 사람일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로웰이 걸음을 내딛었다. 사실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카엘에게 직접 가 묻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일 테지만, 왠지 로웬은 스스로 알아내고 싶었다. 대충 머릿속으로 형님과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미모의 여성을 그려보며 정원의 안쪽으로 향했을 때였다. “ …해서, …잖아요! 호호.” “ …해. 하여간…다니까.” “ -말소리? 누가 있나?” 멀지 않은 곳에서 여러 명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크지 않아서 말의 내용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사람 수는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세 명? 정도 되는 듯했다. ‘ 황실의 정원에서 마주칠 정도면 내가 모르는 사람은 아닐 텐데?’ 왠지 전혀 낯선 목소리가 섞여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하며 로웬이 걸음을 옮겼다. 나무와 수풀을 좀 지나자 점점 더 이야기소리가 커진다 싶더니 어느 순간 불쑥 눈앞에 사람이 나타났다. “ 어? 3황자전하?” 이번에 들린 건 전에 한번 들어본 목소리다. 로웬 자신보다 좀 더 낮은 눈높이에 풍성한 분홍색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인이라기 보단 소녀에 가까워 보이는 얼굴이 보였다. 린이었다. 그 뒤로 노바카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 3황자전하를 뵙습니다.” “ 아아.” 얼굴을 발견하자마자 곧장 예를 취하는 노바카사는 로웬이 익히 기억하고 있는 인물 중 하나였다. 평민출신임에도 제법 뛰어난 실력을 지닌 기사라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카엘이 직접 기사단에 입단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는 사실 때문에 잊지 않고 있었다. 린도 함께 예를 취했다. “ 미천한 소녀가 3황자전하를 뵈옵니다.” “ 3황자?” 그 자리에 반쯤 꿇어앉아 인사를 올리는 두 사람에게 미처 일어나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낯선 목소리가 로웬의 시선을 끌었다. 낯설긴 하지만 지금껏 들어본 그 누구보다 맑고 투명한 느낌의 목소리였다. 이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의 생김새는 과연 어떨까하는 궁금증에 절로 고개를 들어 정면을 응시하는 순간, 로웬은 좀 전까지 하던 모든 생각을 그대로 멈췄다. 흑요석과 같이 검은 눈동자가 이쪽을 향한다. 그 순간 로웬은 마치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환상적인 비율로 자리 잡은 이목구비는 감히 그 어떤 조각상과도 비교당하길 거부하고 있었고, 폭포수처럼 물결치는 검은 머리카락은 현존하는 가장 부드러운 비단보다 고와보였다. 백옥처럼 흰 피부는 흡사 눈이 내려앉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로 찬미하는 것에 한계를 느낄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였다. 로웬은 지금껏 제가 보아온 미녀들이 사실은 죄다 생기다 만 얼굴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로 ‘아름답다’는 걸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뛴다. 저절로 얼굴에 열이 올랐다. 형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니 어떤 인물이니 하는 건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지금 로웬에게 그보다 중요한 건 눈앞에 있는 현실감 없는 미모의 여인이었다. 로웬 네이타 드 뮤리엔. 15세. 유리엔과 처음 마주하는 순간, 사랑에 빠지다. 이름은 유리시엔 헤자르 드 카르나. 카르나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 나이는 올해로 21살. 첫눈에 반한 상대의 대략적인 신상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는 로웬의 얼굴에는 연신 웃음기가 머물러 있었다. 사실 로웬은 아직까지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렇게나 아름다운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니?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상상 속에서나 나오는 천사라면 그와 비슷한 외모가 아닐까. 유리엔에 대해 조사는 했지만 자세한 걸 알아내기엔 시간이 영 부족했다. 때문에 로웬은 카엘과 유리엔의 사이라던가, 유리엔이 왜 이곳 뮤리엔에 왔는지에 관해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해서 현재 로웬은 유리엔이 모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잡아야겠다는 그 일념 하나뿐이었다. “ 형님.” 가족들이 모여 함께하는 식사자리였다. 사정이 있어 다른 나라에 가있는 2황자의 자리가 빈 것이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화목한 분위기였다. 갑작스레 저를 부르는 것에 카엘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주자 로웰이 대뜸 말했다. “ 저 잘생겼나요?” “ …음?” “ 신랑감으로 어떤 것 같아요?” 이건 또 갑자기 무슨 소린가. 예고 없이 터져 나온 질문에 카엘이 순간적으로 대답을 찾지 못하는 사이, 황비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대신 입을 열었다. “ 우리 로웬 정도라면 신랑감으론 완벽하지. 무척 잘생겼고, 총명하고.” “ 정말요?” “ 그럼. 왜, 어디 마음에 둔 아가씨라도 있는 거니?” “ 그건…에헤헤.” 로웬의 수상쩍은 태도에 황비가 어서 말해보라며 채근하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고민하는가싶더니 이내 ‘비밀이에요’라며 빼고 만다. 그 행동에 카엘이 피식 웃었다. “ 이제 보니 내 신붓감만 물색한 게 아니라 로웬 네 신붓감을 찾는 것에도 게을리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 으하하, 그게 어쩌다 보니.” “ 은근히 눈이 높은 널 사로잡은 걸 보니 보통 아가씨는 아닌 모양이다.” “ 크흠, 당연하죠.” “ 누군진 모르겠다만 응원하마. 잘 되면 형에게도 소개시켜 주어야 한다?” “ 네!” 식사가 끝날 때까지 로웬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빠지긴 단단히 빠진 모양이다. 누구인지 몰래 알아보고 될 수 있다면 도움을 좀 줘야겠다고, 카엘은 생각했다. “ 3황자면, 카라멜의 동생이지?” “ 네.” 유리엔의 물음에 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뮤리엔 제국의 현 황제가 두 명의 후궁을 두기는 했지만, 그녀들에게서 자식을 보았다는 말은 없었으니 아마도 친동생일 것이다. 유리엔은 어제 낮에 본 로웬의 얼굴을 떠올렸다. ‘ 안 닮았던데…….’ 반듯하니 곱게 생긴 얼굴이었지만, 카엘과 닮은 것은 아니었다. 바다를 연상시키는 짙은 파란색 머리카락도 그랬다. 그나마 닮은 점을 꼽자면 붉은 색 눈동자 정도였다. ‘ 한 배에서 태어난다고 꼭 닮는 건 아니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 3황자전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 에?” 갑자기 왜? 유리엔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짚이는 게 없는데. 그쪽에서 저를 만나고 싶어 할 이유가 있나?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거절하지는 않았다. 대강 옷만 걸치고 응접실로 향하니 어쩐지 잔뜩 뻣뻣한 자세로 3황자가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는 유리엔을 발견하자 곧바로 일어나 인사를 한다. “ 인사가 늦었습니다. 3황자 로웬 네이타 드 뮤리엔입니다.” “ 유리시엔 헤자르 드 카르나예요.” 형식적인 인사가 끝나자 유리엔은 더 할 말이 없었다. 해서 멀뚱히 상대를 쳐다보고만 있자니, 시선을 받은 로웬이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뭔가를 앞으로 꺼낸다. 반으로 갈라져 열 수 있도록 되어있는 네모나고 작은 상자였다. 왠지 익숙한 상자의 생김새에 유리엔이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는 사이, 남몰래 마른침을 한번 꼴까닥 삼킨 로웬이 딸칵 하고 그것을 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위풍당당 귀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백색의 동그란 그것은 바로- “ 실례지만…첫눈에 반했습니다.” 고가의 보석이 동그라니 가운데에 세공된 반지였다. “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아직은 좀 앳된 로웬의 목소리를 들으며, 유리엔은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 # 132편 # 소제목 : 그만 밀고 이젠 당길 때. (4) ================================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생판 모르는 남에게 가장 많이들은 말은? 일위부터 순서대로 나열해주세요! 이런 질문을 유리엔이 받아 대답한다면, 방금 전 로웬이 굳은 각오와 함께 내뱉은 ‘첫눈에 반했습니다 결혼해주세요’는 아마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순위권 안에 들 것이다. 즉 너무 많이 들어서 별 감흥이 없을 정도의 대사가 바로 방금과 같은 프러포즈란 얘기였다. 평소였다면 눈 하나 깜짝 않고 태연히 상대방의 불타는 마음을 거절했을 유리엔이었다. 하여간 이놈의 인기는 무슨 용광로도 아니고 도통 식지를 않아요 라며 탄식 섞인 한마디 정도는 중얼거려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같은 말이라도 말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충분히 다르게 느껴질 수 있는 법. 로웬의 프러포즈에 유리엔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당황했다. 안타깝게도, 키가 엇비슷한 눈앞의 이 귀여운 황자전하는 장래 유리엔과 인척을 맺게 될지도 모르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상대방이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다는 정도랄까. 사실, 좀 전까지만 해도 유리엔은 로웬이 저와 카엘의 사이를 다 알고 있을 거라 짐작했었다. 느낌상 애교가 많을 것 같은 인상이었고 그렇담 나이차가 제법 있는 큰형을 오냐오냐 잘 따를 터이니, 카엘에게 저의 얘기를 들었다고 해서 놀라울 게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해서 과연 미래에 형의 부인이 될 여자는 어떤 사람일까 싶어 요목조목 살펴보러 온 것이 아니겠나 싶던 차였다. 그런데 결과는…. 유리엔은 마음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탄식을 흘렸다. ‘ 내가 이 몸의 치명적인 매력을 그만 깜박했구나.’ 이래저래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 프러포즈를 어떤 대사로 거절해야하나 고민하니 또 생각이 많아진다. 그러느라 유리엔이 침묵을 지키는 사이, 그 반응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로웬이 양 볼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용기 내어 말을 이어갔다. “ 놀라셨을 걸 압니다. 하지만 얼마 전 정원에서 우연히 뵈었던 때부터 그만 사, 사랑에 빠지게 되어 그간의 고민 끝에 내린 결정입니다. 지금 당장이 부담스러우시다면 약혼만이라도 괜찮습니다. 그것도 안 된다면 앞으로 결혼을 전제로 한 진지한 만남을 갖고 싶습니다.” “ 음…….” 이런 걸 두고 난처하다고 하나보다. 상대를 보니 초롱거리는 붉은색 눈동자로 이쪽을 빤히 응시해오고 있다. 저 올곧은 시선에 상처를 줘야 하다니 유리엔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왕이면 확실한 납득을 위해, 유리엔은 강렬한 한마디를 준비했다. “ 미리 양해를 구할게요. 실례지만 반말을 좀 쓸 거라서.” “ ?” 갑자기 무슨 소린가 싶다. 유리엔을 담은 로웬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비쳤다. 그런 로웬을 바라보며 살풋 인자한 미소와 함께, 유리엔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 내가…….” 로웬은 얌전히 기다렸다. 과연 저 입에서 나오는 말이 이루게 될 문장은 어떤 것일까? 불과 몇 분전 생애 처음으로 마음을 담은 고백을 날리고 이제 그 대답을 기다리는 열다섯 순수소년 로웬의 가슴은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낭랑한 목소리가 로웬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 내가 니 형수다.” 아임 유어……형수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막내아들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통통 뛰어다니던 한껏 밝고 명랑한 모습은 어디가고 도통 침대에 누워 일어날 생각을 않는 것에, 어머니의 근심은 말이 아니었다. “ 괜찮은 거니, 로웬? 갑자기 어디가 그렇게 아픈 거니.” “ 아…괜찮아요, 어머니.” 말로는 괜찮다 하지만 그 몰골은 과히 말이 아니었다. 귀엽던 볼 살이 며칠 새에 쑥 사라져 있는 것이 누가 봐도 지금껏 끙끙 앓은 것이 한눈에 보였다. 어의도 불러 보았으나 갸우뚱한 얼굴로 마음의 병이라고 할 뿐이었다. 대체 무엇이 이리 몸져누울 만큼 널 힘들게 하는 거냐며 시시때때로 채근해 봐도 로웬은 도통 입을 열지 않았다. 묻는 이가 아버지든, 어머니든, 형이든 마찬가지였다. 그건 로웬으로선 당연한 것이었다. 솔직히 어떻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나 지금 사랑 때문에 아파요! 여기까진 그나마 무난하다고 치자. 살면서 상사병으로 한번쯤 드러눕는 것이 뭐 그리 대수겠냐만은.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 형 부인 될 사람이래요! 이건 진짜 정신이 확 나가버리지 않는 다음에야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로웬을 병든 닭 마냥 시름거리게 만든 주원인인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가혹한 지고……. 로웬은 힘없이 감고 있던 눈을 반쯤 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제 형 카엘을 슬쩍 응시했다. 보는 이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붉은색 눈동자와 마주치자 절로 한숨이 삼켜졌다. 왜 저렇게 잘생긴 건지 모르겠다. 뭘 믿고 저리 잘난 건지. 친형이지만 가끔 손에 닿지 않을 정도로 멀리 있다 생각될 정도로 잘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충격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물론 나쁜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뭐든 저에게 양보해주려 할 정도로 끔찍이 자신을 위하는 형이니 어쩌면 떼를 쓸 수 있지 않을까 떠올려보기도 했다. 단단히 사랑에 빠져서 도저히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고, 이대로 시름시름 앓다가 덜컥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고 반 협박조로 응석이라도 부린다면 될 수 있지 않을까 순간적으로 혹했다. 하지만 이내 로웬은 그 선택지를 접었다. 그러기엔 카엘과 유리엔 두 사람이 너무도 잘 어울렸다. ‘ 이씨…조금만 덜 어울렸어도!’ 다 큰 남자가 추레하게 다른 사람 앞에서 징징 짤 수는 없다. 로웬은 재빨리 눈물을 훔쳤다. 쓱쓱 힘주어 눈가를 닦는 로웬의 몸짓에는 이제 곧 이 슬픔을 꿋꿋이 털고 일어나겠다는 다짐이 어느 정도 담겨있었다. 아픈 만큼 성숙하는 거야. 로웬은 약간이지만 자기가 자란 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 # 133편 # 소제목 : 그만 밀고 이젠 당길 때. (5) ================================ 한손으로 턱을 괸 카엘은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귀염둥이 막내 동생이 며칠째 몸져누워있으니 평소에 그리 잘 챙겨주던 맏형으로서 걱정이 되는 건 당연했다. 궁중의원은 마음의 병이라는 말 외에 가타부타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극악의 둔치거나 혹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싱글벙글 행복에 차있던 녀석이 한순간에 저리 아프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상사병! 그 작고 어리게만 보이던 막내가 벌써 그럴 나이가 되었나싶어 은근히 대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좀 괘씸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몸져누운 것을 보면 사랑하는 그녀에게 거절을 당해도 곱게는 당하지 않은 모양인데, 대체 뭐 하는 여자인가 싶었다. 제 동생이라 그러는 게 아니라, 솔직히 말해 로웬은 어딜 보나 부족한 점이 없지 않는가. 얼굴 잘생겼지(아직은 좀 귀여운 편이긴 하다만 몇 년이 지나면 분명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남자다운 훈남으로 성장할 거라고 카엘은 확신했다), 성격 좋지, 지위도 높지, 게다가 아직 열다섯이니 앞으로 성장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까지 한데! 굴러들어온 호박을 뻥 차? 이렇게 되니 그래 얼마나 잘난 영애인지 한번 보자 하는 생각이 은연중에 드는 것이다. 똑똑. “ 들어와.” 로웬이 사랑에 빠진 그녀,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를 향해 지 멋대로 괘씸죄를 적용하고 있던 카엘은 마침 들어오는 이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표정을 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정중히 예부터 올리는 이는 다름 아닌 얼마 전 카엘이 로웬의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라고 시켰던 그의 수하인 것이다. “ 그래, 알아냈나?” “ 우선은…그렇습니다.” “ 누구던가?” 즉각 답이 나올 줄로만 알았건만 웬일인지 그의 수하는 답지 않게 뜸을 들였다. 다소 주저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잠시나마 펴졌던 카엘의 표정이 다시금 굳어졌다. 그닥 좋지 못한 몇 가지 가정들이 카엘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 설마, 이미 정혼자가 있는 여인인가?” 혹시라도 유부녀는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카엘은 몇 년 전 있었던 노바카사 여장사건을 떠올렸다. 이건 심각하게 희귀한 확률이긴 한데 설마하니 웬 의문의 아름다운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는데 알고 보니 여장한 남자였다거나 하는 건. 어느 쪽이든 일단은 이름이라도 듣고 봐야겠다는 생각에 카엘이 제 수하를 채근했다. 이대로 계속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명령불복종이다 싶어 수하가 마침내 누군가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냈다. “ …….” 카엘은 아주 잠깐이지만 순간적으로 자기가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생각했다. “ …누구라고?” 잘 되도록 밀어줘야겠다. 아니 감히 울 귀염둥이 로웬을 차? 괘씸한 것 등등. 지금까지 떠올렸었던 몇 가지 생각들이 한순간에 파사삭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순간이었다. 유리엔의 문병은 반쯤은 충동적인 것이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귀여운 것에 약했고, 로웬은 귀여웠으니까. 문병의 정석 과일바구니를 들고 나타난 유리엔을 보며 로웬은 한동안 눈만 동그라니 뜨고 있었다. “ 몸은 좀 괜찮아요?” 유리엔이 먼저 웃으면서 말문을 텄다. 천사의 미소에 다시금 제 심장이 주제로 모르고 쿵덕쿵덕 뛰는 것을 느끼며 로웬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 아, 네, 저기…저…….”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고민하는 눈치다. 유리엔이 부드럽게 말했다. “ 편한 데로 불러요.” “ 아, 저, 그럼…혀, 형수님.” 유리엔은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어쩜 이리 귀여운지. 실행에 옮겨선 안 되겠지만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로웬의 귀여움은 진심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어차피 앞으로 자주 보게 될 사이인데다 귀엽기까지 하니 미리 손을 뻗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로웬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 저…말…놓으셔도 되요.” 말하고 나니 문득 로웬은 유리엔이 ‘누나’처럼 느껴졌다. 어차피 형의 부인 될 사람이란 걸 안 후부터는 이루어지지 않을 게 확실한 사랑은 접은 뒤였다. 그리고 나중엔 결국 가족이 될 거라 생각하니 어째 막연한 친근감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로웬은 위로 형만 둘이었다. 어쩐지 누나가 생기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 그래, 로웬.” 말을 놓으라는 것을 유리엔은 절대 사양하지 않았다. 이참에 이름도 막 부른다. 로웬도 은근히 호칭을 바꿨다. “ 저, 누님.” “ 응?” 오고가는 한마디에 말들에서 싹트는 남매애. 로웬은 왠지 가슴이 벅찼다. 누님! 입에 담고 나니 알겠다. 이 얼마나 숭고한 단어인가. 유리엔은 반짝이는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로웬이 마치 강아지 같다고 생각했다. “ 뭐 좀 물어봐도 되나요?” “ 물론.” 기왕 누님 동생 하게 된 김에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로웬은 우선 간단한 질문으로 운을 텄다. “ 형님을 처음 만난 게 언제였어요?” “ 흠, 카라멜을 처음 본 지는…꽤 됐지. 16살 때니까.” 순간 로웬은 카라멜이 누군가 싶었지만 이내 문맥상 그 단어가 제 형님 카엘을 지칭한다는 것을 쉽게 파악해냈다. 왜 하필 카라멜인가 갸우뚱하기도 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연인들 사이에서 부르는 애칭쯤 되나보지, 뭐. “ 우와. 첫 만남은 어땠어요?” “ 첫 맛남은…….” 병맛 같았어. 라고 어찌 솔직히 대답할 수 있단 말인가. 눈앞의 이 어린양의 순수에 상처를 낼 것을 뻔히 알면서 말이다. 유리엔은 그날의 기억들을 아주 살짝 각색하기로 했다. “ 아주…인상 깊었지. 강렬한 만남이었거든.” “ 와아.” “ 하필이면 내 주위에 악의 무리들이 참 많았는데 그 때문에 종종 위험에 빠지곤 했단다. 그 때마다 혜성처럼 나타나 구해준 게 바로 카라멜이었지.” “ 아하, 그러면서 사랑에 빠지게 된 거군요?” 그런가? 유리엔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쩌다 좋아하게 됐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곁에 있는 게 편안했고, 그러니 계속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루네나 린 등에게 느끼는 감정과는 좀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게 바로 사랑이잖아, 우후훗!’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상당히 놀라고 당황스러웠던 것 같지만, 지금은 익숙해졌다. 계기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좋아하는 게 맞는가보다. 유리엔은 대답대신 미소 지었고, 로웬은 다음 질문을 준비했다. ================================ # 134편 # 소제목 : 그만 밀고 이젠 당길 때. (6) ================================ “ 연인들 사이에는 주로 서로를 부르는 애칭이 하나씩은 있잖아요. 가령 누님이 방금 형님을 카라멜이라고 부르셨던 것처럼.” 로웬의 말을 듣고 유리엔은 아차 했다. 그녀에게 있어 카라멜이란 호칭은 거의 습관이었다. 입에 착 붙어서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그런. 어쩌다보니 그게 연인들 사이의 살가운 애칭이 되어버렸다. 그저 어색하게 웃고 있자니 로웬이 말을 잇는다. “ 형님은 평소에 누님을 어떻게 부르세요?” “ …응?” “ 사랑을 담은 애칭이 있겠죠? 왜, 소설을 보면 이것저것 많이 나오던데.” 글쎄다. 유리엔은 사소하지만 난관에 봉착했다. 사랑을 담은 애칭이라니, 그런 게 있을 턱이 있나. 유리엔은 어물쩍 대답했다. “ 그냥, 흔하지 뭐.” “ 보통의 연인들이 쓰는 그런 거요?” “ 그래, 그런 거.” “ 우리 귀염둥이~라거나 애기야?” “ -푸훕!!” 유리엔은 좀 전부터 가져온 과일을 깎아 로웬도 한입씩 주면서 먹을까 하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걸 실행에 옮기고 있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입에 뭔가를 넣고 있었다면 지금 이 순간 틀림없이 밖으로 뿜었을 테니까. 로웬은 갑자기 유리엔이 이상한 소리를 내자 하던 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리엔은 고개를 돌리고 있었는데,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였다. 가만 보니 간간히 어깨가 들썩인다. 저도 모르게 상상을 해버린 탓이었다. 기름기 흐르는 느끼한 버터 웃음을 지으며, 녹인 마가린 같은 목소리로 햇살을 받으며 카엘이 말하는 것이다. 애기야, 가자! 라고. 순간 미친 사람처럼 웃을 번한 걸 참고 유리엔은 간신히 평소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되돌렸다. “ 누님? 괜찮으세요?” “ 그럼.” “ 아참, 이것도 궁금했었는데.” “ ?” 유리엔이 뭐든 말해보라는 눈빛을 던졌다. 로웬이 해맑게 웃으며 순수 궁금증으로 가득 찬 질문을 던졌다. “ 고백은 누가 먼저 했어요?” “ …….” “ 에헤헤, 물어보나마나 당연히 형님이 했겠죠? 언제 했어요? 멘트는 뭐였어요? 장소는요?” “ …….” “ 괜히 궁금해서요. 아무래도 형님은 첫 고백이었을 테니까, 어떤 식으로 했을 지 궁금…….” “ …….” “ …누님?” 계속되는 침묵에 로웬이 슬슬 이상함을 느꼈다. 로웬은 저도 모르게 유리엔의 표정을 살폈다. 여전히 웃고 있기는 했지만, 왠지 이런 느낌이었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혹시? “ 설마, 아직?” “ 과일 먹을래 로웬? 깎아줄까?” 진짜구나! 로웬은 적지 않은 충격에 휩싸였다. 이게 뭔가요, 형님! 아무리 첫 연애라 이래저래 늦다지만 고백이 아직 이라니, 열여섯 살 때 처음 만났다면서! 유리엔을 보니 정말로 과일을 깎고 있었다. 칼은 언제 준비한 거지? 그나저나 과일로부터 껍질을 벗겨내는 예사롭지 않은 손놀림을 보건데 왠지 요리도 잘 할 것처럼 보인다. 내 형수님은 요리왕…이 아니라. “ 저, 흠흠. …누님?” “ 사과가 좋니 복숭아가 좋니?” “ 사과 토끼 모양으로 깎은 거 완전 좋아해요! …가 아니라 누님, 저희 형님이 좀 숫기가 없죠, 하하하.” 유리엔은 저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하나 싶었다. 맞장구를 쳐줘야하나 그냥 말없이 사과조각으로 로웬의 입을 막아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에 로웬이 재차 말했다. “ 걱정 마세요, 누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숫기 없는 남자를 자극하는 건 뭐니뭐니해도 질투!” “ 응?” ‘ 위기의식이 부족하다구요, 형님.’ 로웬은 방긋 웃었다. 비단 저뿐만이 아니라도 유리엔의 미모와 매력에 푹 빠질 남정네들의 수가 길가에 떨어뜨린 빵조각에 모여들 개미 정도는 될 터인데, 아니 그런 사람을 곁에 두고도 아직 도장을 안 찍었다 이 말씀이렷다? 가만있을 순 없지. 내 직접 형님을 각성시키리라! 불타오르는 소년이여, 그의 이름은 로웬이었다. 동생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카엘은 로웬이 뻥 차여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 한 여자를 두고 다투는 형제의 이야기라니, 그거 참 재미없지 않나. 로웬이 지금 겪는 아픔은 자라나면서 누구나 겪는 과도기의 과정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잘 이겨낼 것이라 믿는다. 암, 그렇고말고. 누구 동생인데? 자 어서 훌훌 털어내고 멀쩡한 모습으로 침대를 박차는 거다, 로웬. 미련 따위는 절대 남기지 말고. 새로운 사랑은 언제든 다시 찾아오기 마련이니.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카엘은 로웬을 보러 잠깐 들르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카엘이 로웬의 처소 바로 근처에서 만난 이는 전혀 의외의 사람이었다. 성큼성큼 잘 걷던 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 어? 카라멜?” “ 너…….” “ 이렇게 또 만나네.” 유리엔은 밝은 목소리였다. 안 그래도 여기까지 온 김에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갈까 싶던 차였는데 마침 생각하던 얼굴에 눈앞에 딱 나타나다니, 우연이란 게 참 괜찮다. 반면 카엘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여긴 로웬의 방 바로 앞인데, 왜 유리엔이? 그 의문은 이어지는 말이 풀어주었다. “ 로웬 보러 온 거지? 볼 살이 쏙 빠진 게 좀 안타깝긴 하지만 기운은 차린 것 같더라. 문병 오는데 빈손은 좀 그래서 들고 온 과일도 주는 대로 잘 먹고.” 그리고 카엘은 더 큰 혼란에 빠졌다. “ 로웬…이라고?” “ 왜?” “ 아니, 언제 그렇게 친해 졌나 해서.” 스스럼없이 이름을 부르는 사이라니? 문병도 오고, 과일도 손수 먹여주고? 틀림없다고 생각했는데, 뻥 차인 게 아닌 건가? “ 뭐 그야 어쩌다보니. 들어갈 거지?” “ 아, 그래.” “ 잘 해줘. 귀엽던데.” 그 말에 카엘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리엔은 귀여운 것에 약하다. 그리고 로웬은 귀엽다. 아하. 당황이 가시지 않은 채 얼떨결에 멀어지는 유리엔에게 잘 가라고 인사하고 카엘은 로웬의 처소 안으로 들어섰다. 유리엔의 말대로 이젠 기운을 차린 듯 로웬은 쌩쌩했다. 괜찮으냐고 묻는 카엘을 향해 로웬이 다짜고짜 날린 말은 참으로 생뚱맞았다. “ 형님, 파티해요!” ================================ # 135편 # 소제목 : 그만 밀고 이젠 당길 때. (7) ================================ 카엘이 기억하기로 제 막내 동생은 파티광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파티를 하자니, 헛소리 말고 그간 앓느라 약해졌을 게 분명한 몸이나 챙기라고 타박을 했다. 그랬더니 이번엔 식사자리에서 대뜸 제 부친을 조르는 게 아닌가. “ 파티요! 네?” “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 그렇게 길거나 성대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저 되게 오랜만에 집에 왔잖아요, 좀 놀고 싶어서 그래요.” “ 로웬 네가 다 이런 떼를 쓰고, 웬일이니?” “ 맛있는 것도 먹고 춤도 추고 하면 좋잖아요. …좋아하는 사람이랑.” 뒷말은 일부러 작은 소리로, 그러나 다 들리게 말했다. 그에 황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황제 또한 짐짓 놀란 얼굴이었다. “ 허허. 그건 또 무슨 소리냐. 그 좋아한다는 사람과 잘될 가능성이라도 잡은 게냐?” “ 에헤헤, 네.” 애교 섞인 웃음을 지으며 로웬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 대답에 가장 놀란 이는 다름 아닌 바로 카엘이었다. 로웬이 말하는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카엘이니 그야말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잘될 가능성? 누구랑? 유리엔이랑?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카엘은 로웬이 현재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수하의 보고를 들었을 때 제 귀가 살짝 맛이 갔었을지 모른다는 가설을 세웠다. 그래, 혹시 모를 일이다. 수하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유리시엔이 아니라 유리시엥, 또는 우리시엔 이었는데 그만 제 귀가 멋대로 잘못 알아들었던 걸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들의 애교를 못이긴 황제의 입에서 결국 허락의 말이 떨어졌다. 파티가 열릴 날짜는 제법 가까웠다. 카엘은 어쩐지 상당히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 형님, 파티에 참석해주실 거죠?” 카엘은 뜸을 들였다. 처음에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어쨌거나 그는 연회를 즐기는 성미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계속해서 로엔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 그 좋아한다는 사람과 잘 될 가능성이라도 잡은 게냐?’ ‘ 에헤헤, 네.’ 이 두 문장이 시도 때도 없이 불쑥 떠올라 머릿속에서 빙빙 도는 것이다. 사람 미칠 노릇이다. 심지어 가끔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그 강도가 심했다. 급기야는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을 해봐야 되지 않겠냐고 마음의 속삭임까지 들려오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과연 파티 당일, 헤실헤실 만연에 웃음을 띤 로웬과 손을 마주잡고 정답게 춤을 출 상대방이 누구일지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괜찮겠냐며 끊임없는 유혹의 말이 언저리에서 맴돌기 시작한다. 잠깐의 망설임과 속으로 삼킨 짧은 한숨. 그리고 카엘은 대답했다. “ 그래.” “ 와!” 로웬은 숨김없이 기뻐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정말 영락없는 어린애인데 말이다. 그런데 벌써 사랑 운운할 나이가 되었다니. 게다가, 그 대상이 무려……. ‘ …아니겠지.’ 유리엔일지도 모른다니. 혼돈에 빠진 카엘의 앞으로 파티 날짜는 차곡차곡 다가왔다. 결국 마주한 그날. 봄을 연상시키는 풋풋한 연노랑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유리엔은 에스코트를 하러 왔다며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제 앞에 서있는 로웬을 향해 나름 복잡한 시선을 던졌다. 질투라. 사실을 말하자면 유리엔은 로웬의 계획 아닌 계획에 약간은 회의적이었다. 말이 쉽지, 과연 이 귀여운 녀석과 제가 둘이서 하하호호 정답게 붙어 다닌다고 그 카라멜이 순순히 불타는 질투를 보여줄까 말이다. ‘ …아니, 뭐, 안하면 또 어때.’ 아쉽다는 건 아니다. 절대. 흥. “ 우와아…눈이 멀 것 같아요, 누님.” “ 너도 엄청 귀여워, 로웬.” 로웬은 파티에 맞춰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이곳저곳 꽤나 공들여 꾸민 티가 역력했다. 그 모습이 근사하거나 멋지다기보다는 귀엽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뭐 아무렴 어떠랴. 그저 카엘만 감쪽같이 속여 넘기면 그만인 것을. “ 그럼, 아름다운 레이디. 가실까요?” 어쩜 저리 느끼한 말을 해도 귀여울까. 보면 볼수록 귀여움으로 똘똘 뭉친 것 같은 귀염둥이와 누님 동생 사이로 친해진 스스로에게 대견함을 느끼며 유리엔이 로웬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유리엔의 처소에서 파티가 열리는 홀까지는 그닥 멀지 않았다. 간단한 얘기라도 서로 몇 개 주고받고 나니 어느새 둘은 홀 안으로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순식간에 모두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둘에게로 쏠렸다. 순간적으로 적막이 내려앉는가 싶더니 이내 곳곳에서 수군거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 표정들 좀 봐요. 다들 아주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깜짝 놀라네. 몇몇은 아예 기절하기 직전인데요?” 로웬의 익살스런 말에 유리엔이 미소를 그렸다. 로웬의 말대로 파티에 참석해있던 귀족들은 상당수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특히나 반응이 강한 것은 가십에 목숨 거는 귀족부인들 쪽이었다. 물론 영애들도 만만치 않았다. 유리엔과 로웬의 등장 후부터 그들의 대화는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 세상에!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맞기는 한 건가요?” “ 로웬 삼황자전하가 틀림없는데…왜 저 둘이 같이 있는 거죠?” “ 맙소사, 딱 봐도 다정해 보이는 모습이라니, 아니 어떻게 저 둘이…….” 속닥거리는 목소리들은 갈수록 커졌다. 심지어 어떤 말들은 높아진 목소리를 주체 못해 간간히 유리엔과 로웬의 귀에까지 들려올 정도였다. 생각보다 뜨거운 반응들에 유리엔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 여기서 춤까지 딱 추면 대박이겠다, 그죠?” “ 확실히 난리 나겠네.” “ 저기 봐요, 당장이라도 여기저기 말을 퍼뜨리고 싶어서 안달 난 표정들을. 자고로 스캔들이란 이렇게 터지는 거죠.” “ 그리고 난 하루아침에 형제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친 천하의 망할년으로 탈바꿈하겠구나.” “ 에헤헤.” 유리엔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도(남들의 눈에는 다정하게 속삭이는 걸로 보였다)로웬은 재빨리 홀 안을 구석구석 스캔했다. 결과, 형님은 아직 안 왔음. 빨리 좀 오라고 기도라도 하려던 찰나였다. 때마침 시종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카엘의 잘난 얼굴이 홀 안을 밝히며 등장했다. ‘ 좋아!’ 로웬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 # 136편 # 소제목 : 그만 밀고 이젠 당길 때. (8) ================================ 카엘의 주변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은 홀의 조명이 너무 밝기 때문인가 아니면 저 스스로가 현실감 없는 외모로 자체발광을 하고 있기 때문인가. 모를 일이다. 여하튼 남다른 존재감을 과시하며 카엘은 등장했다. 홀에 들어서자마자 가장먼저 나란히 붙어있는 로웬과 유리엔의 작태가 눈에 들어온 카엘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설마 했더니 정말로……. 당장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근처에 있던 영애들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 보셨어요? 삼황자전하께서 유리시엔 황녀전하께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걸?” “ 물론이죠. 아까부터 두 분께서 딱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않으시잖아요.” “ 좀 전엔 손등에 키스도 하지 않았었나요?” “ 어머어머, 정말 어쩜 저리 잘 어울릴까!” “ 사랑에 빠진 모습이 눈에 훤히 보이네요. 완벽한 커플이죠?” 없는 말까지 지어내며 그녀들이 호들갑을 떠는 이유는 뻔했다. 하나같이 카엘의 추종자였던 탓이다.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들으라는 듯 떠드는 그들 중, 지난날 유리엔과 카엘 커플이 잘되어가는 듯한 모습에 땅을 치며 배 아파하지 않은 영애가 없었다. ‘ 깨져라!’ ‘ 갈라서라!’ 그녀들의 염원이 하나로 모아지는 순간이었다. 로웬 또한 지지 않고 기도를 날렸다. ‘ 질투해라! 질투!’ 타고나길 좋은 시력으로 관찰하건데, 카엘의 표정은 분명 평소보다 좀 더 굳어있었다. 보아하니 근처의 영애들이 알아서 쓸데없는 소리를 떠드는 것 같기도 하고, 무튼 오예! 잘한다! 더 더! 로웬의 눈썰미대로 카엘의 표정은 평소와 비교해 제법 굳은 채였다.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순진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전부 허구라 쳐도 말의 내용 자체가 어이가 없었다. 뭐? 사랑의 밀어? 손등에 키스? 나 참, 요즘은 개소리도 참신해요. 카엘의 속은 그리 평안하지 못했다. 어째 좀 부글부글 끓는 것 같기도 하다. 제삼자의 눈으로 보기에도 다소 과하게 밀착해있는 둘에게 다가가기 위해 카엘 제 긴 다리를 성큼성큼 움직인 때였다. 이쪽에선 로웬의 주도하에 또 다른 공작이 펼쳐지고 있었다. “ 누님, 연기 잘하죠? 왠지 끝내주게 잘 할 것 같은데.” “ 그건 왜?” “ 자빠지는 연기 좀 해줘요. 내가 누님을 멋지게 탁! 하고 붙잡아서 형님의 마음에 불길이 치솟게 만들 테니까요. 자자, 얼른!” “ 글쎄….” 카엘의 눈썰미가 얼만데 과연 그런 뻔히 보이는 연기에 속아줄까. 내심 고개를 내젓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상한 로웬의 노력을 봐서 유리엔은 그 잠깐의 연극에 동참해주기로 했다. 뭐 이 정도 쯤이야, 데친 브로콜리 먹기지. 의도적으로 드레스자락을 밟고 삐끗한 유리엔이 한눈에도 위태로운 자세로 뒤로 넘어갔다. “ 꺄악!” 오히려 근처에서 유리엔과 로웬을 지켜보느라 넋이 팔려있던 다른 귀족영애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허나 새기를 아우르는 등신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미리 짜고 치는 연극에서 실수를 하랴. 사전에 계획한대로, 로웬은 딱 적절한 타이밍에 유리엔을 낚아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로웬은 검사라기 보단 학자타입이었지만 그렇다고 어릴 적부터 받아온 훈련이 어디 가겠는가. 키에 비해 마른 탓에 그닥 무겁지도 않은 유리엔은 보기보다 센 힘에 이끌려 로웬에게 반쯤 안긴 자세로 제 자리를 찾았다. “ 누님 왜 이렇게 가벼워요? 밥 좀 많이 드세요.” 어디 다친데 없냐는 듯 여기저기 살피는 연기와 함께 로웬이 그리 속삭였다. 평소 유리엔이 먹는 양을 알게 된다면 기절할 만한 소리였다. 유리엔은 그 말을 대충 넘기며 대신 다른 것에 관심을 보였다. “ 로웬, 의외로 힘이 센 편이구나?” “ 그런 말 많이 들어요. 에헤헤, 좀 남자다워요?” “ 나랑 나중에 팔씨름 한번 안 할래?” “ 에이, 누님이랑 무슨 팔씨름을 해요? 이 가녀린 팔로? 농담도~.” 척 보기에도 가느다란 팔을 보며 로웬이 픽 웃었다. 그러나 유리엔의 팔씨름제안이 농담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로웬이 깨닫게 되는 건 좀 더 나중의 일이었다. “ 아무튼 어디보자!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형님의 모습을 감상해 볼…엥?” 안 타올라?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카엘을 힐끗 응시한 로웬의 표정이 곧장 의아하게 바뀌었다. 당연히 활활 타오르는 강렬한 눈동자로 이쪽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오고 있을 줄 알았건만, 이게 웬걸? 질투에 찬 폭풍걸음은커녕 카엘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있었다. “ 에엥? 보긴 확실히 본 것 같은데…….” 로웬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예상 밖이었다. 유리엔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 이상하네. 다시 할까요?” “ 나더러 제자리에서 갑자기 그것도 같은 자세로 두 번이나 넘어지는 얼간이가 되란 말이니?” “ 어? 듣고 보니 그러네요.” 로웬이 베실 웃었다. 그 능청에 피식 웃은 유리엔이 타박을 그만뒀다. 한편 카엘은 제자리에 멈춰선 그대로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가 이렇듯 갑자기 걸음을 멈춘 것은 다름이 아니라 갑자기 그를 덮친 충격 탓이었다. 로웬의 의도대로, 카엘은 하마터면 넘어져 다칠 번한 유리엔을 적절한 타이밍에 잡아채 안전하게 보호하는 로웬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실 카엘은 지금껏 은연중에 로웬을 어린애로만 취급하고 있었다. 키부터도 겨우 유리엔과 비슷한 수준인데다 나이도 훨씬 어렸고, 유리엔 또한 로웬더러 귀엽다고 했으니 그저 귀여운 것에 유달리 약한 유리엔이 어린애에게 좀 잘해주는 것이겠거니 하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인식이 바탕에 깔려있다보니 로웬이 유리엔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나서도 좀 당황스럽거나 놀랍다 정도였을 뿐 위기의식이 생겨날 턱이 없었다. 당연히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헌데 방금 전 로웬이 보여준 행동은 마치 그런 카엘에게 시위라도 하는 듯했다.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어린애가 아니라고. 좋아하는 여자 정도는 충분히 보호해낼 수 있는, 애가 아니라 어엿한 ‘남자’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느끼자마자, 카엘은 흡사 해머로 뒷머리를 후려치는 것 같은 충격을 받고야 말았다. ================================ # 137편 # 소제목 : 그만 밀고 이젠 당길 때. (9) ================================ “ 어? 온다온다!” 가만 서있던 카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조금 뒤였다. 로웬은 오버해서 호들갑을 떨었다. “ 누님, 튑시다!” “ 뭐?” “ 형님 애 태워야죠. 와아 도망치자~.” 그러면서 유리엔의 손을 붙잡은 채로 냅다 달리기 시작한다. 입가엔 미소를 띤 채였다. 얼떨결에 이끌려 함께 뛰다보니 어느새 정원으로 통하는 문에 가까워져 있었다. 문득 유리엔이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거리가 멀어 카엘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 이게 정말 잘 하는 짓인가.’ 어째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뭐 기왕 여기까지 왔다. 그저 지금 유리엔은 로웬의 재롱을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 질투하는 카라멜이라…….’ 아주 조금, 그러니까 정말 조금 궁금하기도 하다. 은근히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물론 약간, 아주아주 약간이긴 하지만. 흠흠.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둘은 홀을 벗어나 계단을 내려와 정원을 달리고 있었다. 파티라는 것이 주로 저녁시간이나 그 이후를 이용하다보니 바깥은 제법 어둑했다. 그나저나 아직도 뛰나싶어 유리엔이 로웬의 얼굴로 시선을 주었다. 시선을 받은 로웬은 사실 내심 당황하는 중이었다. 어디까지 달릴까 하다가 그냥 유리엔이 숨차하면 그만 뛰어야지하고 간단히 결정 내렸는데, 아니 이게 웬일 유리엔이 지치질 않는 것이다. 뛰어도 뛰어도 멀쩡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전혀 안 어울리는 엄청난 체력이었다. 결국 로웬은 알아서 적당히 뛰던 것을 멈췄다. 그러면서 슬쩍 물었다. “ …숨 안차요?” “ 조금.” 태연히 대답하는 유리엔의 얼굴에서 힘든 기색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다. 로웬은 반사적으로 생각했다. …괴물. 그러나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는 멍청한 실수는 하지 않았다. 왠지 처 맞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불쑥 들었기 때문이다. 어째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에 멋대로 상상했던 청순가련하고 차분한 요조숙녀의 이미지가 서서히 퇴색되는 듯한 기분이 새록새록 든다. 물론 겉모습이야 지금도 그래 보이긴 한다만. 어찌됐든 열심히 약을 올려놨으니 이제 카엘이 쫓아오는 일만 남았다. 질투의 화신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모습을 아직 못 본 게 아쉽지만 뭐 그거야 지금부터라도 이렇게 저렇게 자극하면 분명 머잖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로웬은 어쩐지 즐거웠다. 이건 절대 자기가 사랑에 빠진 여자를 앞서서 채어간 형님에 대한 복수가 아니다. 저절로 흘러나오는 웃음에 로웬이 입꼬리를 한가득 위로 끌어올린 참이었다. 탁! “ 엉?” 이 소리는 뭔가. 그리고 좀 전까지만 해도 없던 인기척이 갑자기 생겨난듯한 느낌을 받은 로웬이 재빨리 유리엔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곧바로 으억?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 형님?!” 카엘이었다. 뛰느라 평소보다 조금 흐트러진 머리를 한 채로 카엘은 한 손으로 유리엔의 팔목을 잡고 있었다. 좀 전의 탁 소리는 아마도 팔목을 잡아챌 때 들린 의성어였듯 싶다. 헐? 그런데 잠깐 이 인간은 대체 언제 나타난 거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로웬은 갑작스레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달았다. 제 형이 인간 같지 않게 빼어난 것은 비단 외모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쳇, 이렇게 쉽게 잡히는 건 계획에 없었는데. 로웬은 불퉁하니 삐진 사람처럼 입을 내밀었다. “ 기척을 숨기고 쫓아오다니, 거 반칙일세. 안 그래요?” “ 시끄럽다.” 입으로는 투덜투덜 대면서도 행여나 맞을까싶어 진즉 멀찍이 물러난 로웬이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인지 씨익 웃음을 그리며 유리엔을 향해 손짓을 해댄다. “ ?” “ 이리와요, 누님! 그리고 형님은 잡고 있는 누님 팔이나 얼른 놔줘요. 누님이 이쪽으로 너무너무 오고 싶은데 형님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있는 거 안 보이세요?” “ 뭐?” 로웬은 뻔뻔하고 또 당당했다. 허리에 떡하니 손을 얹은 채로 태연히 말하는데 모르는 사람이라면 진짜처럼 들을 듯했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반문하는 카엘을 향해 로웬이 재차 말했다. “ 어허! 못 믿겠으면 누님께 직접 물어 보든지요. 그죠, 누님? 저랑 노는 게 정말 신나고 즐겁고 가슴이 쿵쾅쿵쾅 뛴다고 했잖아요. 앞으로도 계속 저랑 데이트하고 싶으시죠? 형님이 아니라! 저랑요.” ‘형님이 아니라’부분에 은근히 세게 들어가는 악센트가 도드라졌다. 형님 말고 나! 너 말고 나! 낫 유 벗 아이!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는 뻔했다. 불편해진 심기로 인해 한차례 눈썹을 꿈틀거린 카엘이 유리엔에게 시선을 주었다. 저 말이 사실이냐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잠깐을 틈타 로웬이 열심히 소리 없는 신호를 보내왔다. ‘ 질-투! 질--투! 질---투!’ 입모양을 읽어보니 딱 저 짝이다. 여기까지 절절히 느껴지는 로웬의 간절한 신호에 유리엔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카엘의 질투를 위해서라면 제 한 몸마저 아끼지 않고 불 싸질러버릴 기세였다. 카엘이 자길 질투하는 순간 하늘에서 빵이라도 잔뜩 쏟아지나? 저 열정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할 정도다. 유리엔은 얼떨결에 로웬의 말을 긍정했다. “ 어, 그래.” “ 거 봐요! 들었죠? 들었죠? 형님은 싫고 내가 좋다잖아요. 어서 그 팔 놔줘요. 싫다는 사람 계속 붙잡고 있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누가 말했었는데?” “ …….” 하지만 유리엔의 왼팔을 붙잡은 카엘의 오른손은 전혀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로웬이 무슨 말을 하든 요지부동이었다. 로웬은 좀체 볼 수 없던 제 형님의 고집에 속으로 좀 놀라고 있었다. 유리엔은 아까부터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제 왼팔을 내려다보았다. 참 단단히도 잡혀있다. 카엘은 딱히 가타부타 말은 없었지만 저를 놓아줄 생각은 좀처럼 없어보였다. 로웬까지 입을 다물자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 요상한 대치상태가 마냥 편하지만은 않은 유리엔이 마치 카엘의 손을 뿌리치듯 팔을 움직였다.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다. 그냥 이러면 잡고 있는 손이 좀 느슨해지려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팔을 붙잡은 카엘의 손에 전보다 더 힘이 들어갔다. ================================ # 138편 # 소제목 : 그만 밀고 이젠 당길 때. (10) ================================ ‘ 얘 왜이래?’ 당황한 것은 유리엔이었다. 얼마나 힘을 주는지 방금은 피가 통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물론 진심으로 뿌리치려고 한다면야 얼마든지 그럴 수 있긴 하다. 가령 고자킥을 날린다던지 정강이를 걷어찬다던지. 그런데 그러지 않는 이유는, 글쎄. ‘ …설마 이게 질투?’ 위와 같은 생각이 은연중에 들었기 때문이다. 얘 지금 질투하나? 제가 로웬이랑 있는 게 싫어서 샘내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지금의 행동이 귀엽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카엘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붙잡은 팔은 그대로였다. “ 사람이 인간적으로 양심이 있어야지.” 엥? 갑자기 이건 무슨 소리? 곧장 뜻이 파악되지 않는 말에 유리엔이 멀뚱히 쳐다보니 카엘이 재차 말을 이었다. “ 앞날이 창창한 열다섯 살짜리 애를 어디서 날로 먹으려 들어?” “ 뭐?” 아니 이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이놈 말은 지금……. “ 솔직히 말해봐. 양심이 콕콕 찔리지? 나이 차이가 대체 몇 살이야?” “ 야, 카라멜 너?” “ 네가 황궁을 이리저리 누비며 이런 사고치고 저런 사고치고 하면서 주변을 뒤집어놓을 때 로웬은 응애응애 하면서 태어났다고. 이 얼마나 극심한 차이야?” 제가 5살 무렵에 황궁을 누비며 사고를 치고 다녔던 건 대체 어떻게 알았대? 아니 근데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 유리엔은 기가 찼다. “ 어이 카라멜, 양심을 떠나서 내가 무슨 로웬을….” “ 사랑에 나이는 숫자일 뿐이에요!” 자기는 절대 로웬을 어떻게 해 볼 생각이 없다, 라는 대사를 유리엔이 칠 것을 어찌 알았는지 로웬이 선수를 쳤다. 그녀의 말을 중도에 자르고 로웬의 외침이 밤하늘을 갈랐다. 유리엔의 시선이 로웬을 향했다. 하지만 카엘은 눈꺼풀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 커다란 외침이 마치 풀벌레소리보다 못하다는 듯 로웬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유리엔의 눈동자가 다시 저를 향하자 카엘이 잠깐 끊겼던 대화를 다시 이어나갔다. “ 뭐 느끼는 거 없어? 열다섯 살짜리 애의 앞날을 기어코 막겠다고?” “ 야, 내가 뭐 움직이는 장애물이니? 무슨 앞날을 막아!” “ 부정하지 말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 뜨끔하지?” “ 뭘 뜨끔해…네 정강이가 뜨끔하게 해주랴?” “ 그 힘으로? 아서라, 가렵지도 않겠다.” “ 정강이뼈가 동강나봐야 정신을 차리지?” 로웬은 당황했다. 저 둘이 지금 대화를 나누는 건지 싸움을 하는 건지 갈피가 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단단히 잡고 놓치질 않는 팔을 보면 분명 질투로 타올라서 저러는 것 같긴 한데, 아니 형님 그러다가 정말로 정강이뼈 부서지겠어요. 말려? 말릴까? 그런데 뭐라고 하면서 말리지? 로웬은 혼란에 빠졌다. 질투나면 그냥 카리스마 있게 벽으로 탁! 밀어붙이고 그윽한 눈빛을 쏴주며 넌 내 여자야! 하고 한마디 날려주면 되는 거 아니었나? 저 둘은 무슨 서로 좋아하면서 저렇게 답답하게…. 그쯤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 네가 무슨 상관인데!” 헉. 로웬은 숨을 삼켰다. 엄청나게 진부하지만 파급력은 장난 아닌 대사가 등장했다. “ 로웬이 갓난애도 아니고 자기 앞길은 자기가 챙겨. 네 말대로 나이 차이 잔뜩 나는 내가 옆에 붙어서 장애물이 되든 말든 그건 로웬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야. 왜 네가 감 놔라 배 놔라야? 억울하면 너도 지나가던 풋풋한 열다섯 짜리 하나 낚아채서 딴따단 하던가!” 으악! 누님! 로웬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게 무슨 일이래. 홧김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는 유리엔 때문에 로웬이 다 조마조마했다. 그가 이번 질투작전을 계획한 것은 카엘더러 애 좀 끓어봐라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둘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추진한 일이었다. 지금처럼 살벌한 기세로 서로 상처주면서 싸우라는 게 아니라! “ …진심이야?” “ 왜, 농담 같아? 너 능력 좋잖아. 슬쩍 손만 내밀어도 감격에 겨워 매달릴 애들이 어디 한 둘이야?” “ 그래서 날 그런 애들 중 하나랑 붙여놓고 넌 로웬이랑 둘이서 알콩달콩하시겠다?” “ 못 할 거 있어?” 사실 조마조마한 건 로웬만이 아니었다. 정작 말을 하는 유리엔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왜 지금 자기가 이런 말을 뱉어대는 건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배은망덕한 입이 자기 멋대로 움직인 결과물이 위의 저 대사들이었다. 야, 너 그만 좀 떠들어. 유리엔은 자기 입한테 말을 걸고 싶은 심정이었다. 카엘은 대답이 없었다. 대신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아플 정도로 제 팔을 붙잡고 있던 카엘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감이 느껴지자 이번엔 유리엔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니, 그냥 반박을 해. 싫어서 못하겠다고 말을 하라고. 그때 결국 보다 못한 로웬이 소리쳤다. “ 형님, 형수님!! 둘 다 그만 좀 해요!” 강조를 둔건 형수님 쪽이었다. 유달리 그 단어에 힘을 실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엘이 움찔 하며 반응을 보였다. 속으로 나이스를 외치며 로웬이 마저 외쳤다. “ 사랑싸움도 정도껏 하고 이만 둘이 화해하세요! 그럼 전 배가고파서 밥이나 먹으러 이만!” 하고 부리나케 달렸다. 자기가 없어져야 둘만의 시간을 갖고 서로 지지든 볶든 할 테니까. 하여튼 장난 한 번 치다가 간 떨어지겠다고 생각하며 로웬이 열심히 뛰었다. 그리고 남겨진 카엘과 유리엔은, 적막 속에 놓였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지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로웬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던 질투작전은 방금의 대사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카엘은 조용했다. 유리엔의 팔을 놓지도 않았다. 자기가 먼저 뭐라도 말을 해야 하나 유리엔이 고민에 휩싸일 무렵 카엘의 입이 열렸다. “ 춤추자.” 유리엔의 귓가로 내려앉은 목소리는 뜬금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건 또 뭐하는 말이지. 예상 못한 말에 유리엔이 눈만 동그랗게 뜬 채 깜박이고 있자니 어느새 단단한 팔이 등을 받쳐온다. “ 춤추자. 나랑.” “ …지금? 여기서?” “ 그래.” 유리엔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딱히 운치 있는 풍경은 아니다. 달은 떴지만 빛이 약했다. 대체 뭘 보고 갑자기 춤출 생각이 든 건지 알 수가 없다. “ 왜?” “ 추고 싶어.” “ …….” 이유를 찾기 힘든 고집이었지만 지은 죄도 있고 하니 유리엔은 순순히 그에 응해주기로 했다.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잡고 있던 팔을 놓고 대신 손을 잡아온다. 그 손길이 너무도 부드러워 유리엔은 왠지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약하다고 생각했던 달빛이 둘 사이로 내려앉았다. 카엘이 한발, 그러면 그에 따라 유리엔이 한발. 둘은 천천히 움직였다. 어쩐지 잔잔한 음악이 근처에서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시선이 마주치고 둘 다 서로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등을 받친 손이 이내 허리를 감싸고 둘의 몸이 좀 더 가까워졌다. 반쯤은 속으로 삼킨 듯한 낮은 한숨. 그리고 카엘이 말했다. “ 로웬이랑은 어떻게 된 거야.” “ 그냥, 음…작은 장난?” “ 둘이 어쩌다 알게 됐는데?” “ 고백 받았는데, 뻥 찼지.” “ …….” “ 질투했어?” 사실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었다. 알면서 그냥 물었다. 카엘은 그 말에 답하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 …아까 같은 말, 농담이라도 다신 하지 마.” “ 아까? 아―.” 유리엔은 카엘이 언급하는 말이 어떤 것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마음에도 없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게 내뱉었던 그 말.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이었다. 마치 손잡이가 없는 양날의 칼 같았다. 다시 하라고 누군가가 옆에서 부추긴대도 싫을 것이다. 저절로 솟아나는 후회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유리엔에게 카엘이 속삭였다. “ …불안하니까.” 작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답지 않게 미세한 떨림을 담고 있었다. 진심이 담긴 말인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불안하단다. 뭐가? 그리고 유리엔은 퍼뜩 어떤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카엘이 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안다. 나름 확신도 갖고 있다. 하지만 카엘은? 카엘도 그런 식으로 제 감정을 알고 있나? 카엘에겐 확신이 없었다. 붉은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그것을 마주보는 유리엔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 녀석이 불안해하고 있다. 확신이 없으니까. 유리엔의 입이 열렸다. 그것은 명백히 충동이었다. “ 불안해할 필요 없어.” “ …?” “ 좋아하니까. 나도.” 그리고 말을 내뱉는 순간 유리엔은 깨달았다. 홧김에. 이거 생각보다 무서운 단어구나. ================================ # 139편 # 소제목 : 그만 밀고 이젠 당길 때. (11) ================================ 카엘이 손끝부터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유리엔도 덩달아 굳어졌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에 가까스로 힘을 줬다. 유리엔은 간신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도망. 끝내주는 체력에 힘입어 유리엔이 밤길을 질주했다. 머릿속이 온통 백지였다. 방금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인식이 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러기 싫었다. 그냥 이대로 까먹어버리고 싶다. 왜냐면 쪽팔려 죽겠으니까. 저에게 시간을 다루는 능력이 있다면 당장 몇 분전으로 되돌려버릴 텐데. “ 하아, 하아.” 전속력으로 뛰다보니 제 아무리 유리엔이라도 숨이 찼다. 여긴 어디야. 정신을 차리니 예의 그 연회 홀의 입구가 눈앞에 보였다. 문득 목이 말라진 유리엔이 그곳으로 향했다. 장시간 그것도 죽어라 뛰느라 머리며 드레스가 엉망이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쏟아지는 시선을 즐길 정신도 없었기에 유리엔은 재빨리 마실 것만 캐치하고 예의 그곳 테라스로 향했다. 종종 드는 생각인데 이런 종류의 연회에는 은근한 불문율 같은 것이 몇 가지 존재하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가령 테라스는 그날 열리는 연회의 주인공이 전용으로 쓸 수 있도록 양보를 해둔다던가 등등의. 과연 잔잔하니 쾌적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테라스에는 아무도 없었다. 유리엔은 손에 든 유리잔에 담긴 액체를 단숨에 들이켰다. 깨끗이 비운 잔을 대충 근처 테이블에 내려놓고, 유리엔은 탁 트인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난간을 향해 한걸음 나아가는 순간. “ ―어?” 언제 찢어졌는지 모를 드레스끝자락이 그만 유리엔의 발뒤꿈치에 밟혔다. 아니 이게 무엇이야. 예상 못한 기습에 평소의 그 좋은 운동신경은 다 어디가고 유리엔의 몸이 볼썽사납게 앞으로 거꾸러졌다. 카엘의 정신이 온전히 돌아오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표정은 여전히 반쯤 얼이 빠진 상태였지만 몸은 알아서 척척 잘도 움직인다. 유리엔을 찾아 정원 한 바퀴를 거의 다 돌았지만 느껴지는 기척이 없자, 그럼 이쪽인가 싶어 카엘이 연회홀로 향했다. “ 싸우셨어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질문이 위와 같았다. 저를 똑바로 마주보아오는 낯익은 갈색 눈동자가 어째 활활 타오르기라도 하는듯한 느낌을 받으며 카엘이 대꾸했다. “ 누구랑?” “ 황녀님이랑요.” “ 그럴 리가.” 아까는 몰라도 지금은 아니지. 천연덕스러운 카엘의 대답에 잔뜩 심각하던 루제의 표정이 스르륵 풀렸다. 마치 겨우내 쌓여있던 눈이 봄을 맞아 한 번에 녹아내리는 것 같은 변화였다. “ 전 또…다행이다. 괜히 착각했네요. 그럼 이만, 결례했습니다.” 꾸벅 나름 우아하니 인사를 올리는 루제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상쾌해져있었다. 파티 잘 즐기라며 예의상의 멘트로 인사를 되받아준 카엘이 막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 헛소문을 그렇게나 뻔뻔히 지껄였다 이 말이지…강냉이 잘 간수해라, 이년들.” 얼굴도 모르는 여인네들을 향해 기도라도 올려줘야 될 것 같은 살벌한 중얼거림이었다. 마무리로 으드득 하며 이까지 가는 것에 카엘이 속으로 허허 난감한 웃음을 흘렸다. 매번 드는 생각이지만 쌍둥이인데 어쩜 저리 성격이 다를까 싶었다. …아니, 꼭 그런 것도 아닌가? 아무튼 부지런한 걸음걸이로 카엘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테라스였다. 홀에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려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유리엔이 홀 안에 없음을 간파해낸 그였다. 처소로 돌아간 게 아니라면 남은 장소는 테라스뿐이었으니 그곳으로 곧장 향하는 카엘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 …….” 문은 일체의 소음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그리고 안의 풍경에 시선을 두자마자 카엘은 잠시 동안 움직임을 멈췄다. 붉은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 유리엔?” 지금껏 그리 찾은 유리엔이 다른 곳도 아니고 맨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순간 당황한 카엘의 시야로 테이블 위에 놓인 빈 유리잔 하나가 들어왔다. 혹시나 싶어 냄새를 맡아본 카엘이 피식하고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 술이잖아.” 유리잔에서는 미약하긴 해도 술 냄새가 났다. 이걸 마시고 뻗은 건가? 하긴 목이 마른 상태에서 그대로 들이켰다면 그럴 수도 있을 테다. 카엘은 천천히 유리엔의 곁으로 가 앉았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를 하고 테라스 바닥이 마치 제집 침대인양 편한 자세로 자빠져있는 유리엔을, 카엘은 잠자코 내려다보기만 했는데 그 눈빛이 참으로 달달했다. 만약 유리엔이 멀쩡한 상태에서 마주했다면 당장 그 느끼한 눈알을 집어치우라며 말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문득 카엘이 손을 뻗었다. 제멋대로 흩어져있음에도 용케 엉키지 않은 결 좋은 검은머리가 카엘의 손에 얽혀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긴 머리카락만 빗어 내리다, 돌연 카엘이 다른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드러난 귀가 언제부턴지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이윽고 손을 내리자 드러난 표정은 잔뜩 풀린 채였다. 주체하지 못하고 허물어진 입가로 보건데 좀 전에 홧김에 고백을 날리고 부리나케 도망치던 유리엔의 모습을 떠올린 것이 틀림없다. 온 얼굴로 사랑에 빠진 팔푼이의 모습을 보여주던 카엘이 불쑥 말했다. “ 너 말이다.” 시선은 당연히도 유리엔을 향한 채였다. 물론 대답이 들려올 리는 만무했다. 혼잣말이라도 하듯 카엘이 재차 입을 열었다. “ 경계심이 너무 없는 거 아니냐.” 하면서 푹 내쉬는 한숨은 이래저래 복잡한 심경을 담고 있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던 카엘의 얼굴이 잠깐의 텀을 두고 서서히 유리엔을 향해 기울었다. “ 남자는 다 늑대라는 말이, 그냥 있는 게 아니거든.” 그렇게 속삭이는 카엘의 코끝이 유리엔의 오뚝한 코를 가볍게 스쳤다. 슬며시 반달로 접히는 카엘의 눈은 웃음기를 담고 있었다. “ …유리엔.” 각자의 숨결이 서로를 간질이는 거리에서, 카엘의 입술이 미약하게 달싹였다. “ 결혼하자.” 들릴 리 없는 고백이 감미롭게 유리엔의 귓가를 맴돌다가 흩어졌다. 사실 카엘이라고 지금껏 아무것도 안하고 멍청하게 시간만 보낸 것은 아니다. 내로라하는 장인을 불러 며칠에 걸쳐 손수 디자인하고 제작을 맡긴 반지가 지금 카엘의 처소에 고이 놓여있었다. 안 그래도 이걸 언제 어떻게 전해주고 고백하나가 주 고민이었는데 로웬이 참 공교로운 타이밍에 일을 벌인 셈이다. “ 이 말 하려고 열심히 찾았더니, 이렇게 취해서 뻗어있으면 어떡하냐.” 하고, 말하며 카엘은 웃었다. 그리고 이내 그의 붉은 머리카락이 유리엔의 이마를 간질이듯 스쳤다. 그러면서, 동시에 느린 속도로 입술이 맞닿았다. 꽃에 나비가 내려앉듯 조심스러운, 그리고 미세한 떨림을 담은 입맞춤이었다. 카엘이 미처 알지 못한 사실이 두 가지 있었다. 우선 유리엔은 술에 취하지 않았다. 급히 들이켰던 그 액체가 알코올을 포함하고 있었던 건 맞지만, 그녀를 취하게 할 정도로 도수가 높진 않았다. 따라서 유리엔의 정신은 멀쩡했다. 그리고 심지어 그녀는 잠든 것도 아니었다. 그럼 기절했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잠들거나 기절한 ‘척’ 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랬나? 제 드레스자락을 밟고 장렬하게 넘어진 유리엔이 막 엄습하는 고통에 낑낑댈 무렵 때마침 카엘이 테라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순간 밀려오는 민망함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자는 척이라도 했는데 그러다 그만 눈을 뜰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이다. 결국 고백이며 도둑키스며 이런저런 짓(?)을 당할 당시 유리엔은 그저 눈만 감고 있었을 뿐 완전 생생한 제정신이었다. 덕분에 카엘이 직접 공주님안기로 처소까지 데려다준 그날 밤, 유리엔은 잠을 설쳤다. 다음날 유리엔과 로웬을 주인공으로 한 불미스러운 스캔들이 시끄럽게 성안을 들썩였지만, 이내 로웬이 직접 해명을 함으로써 잠잠히 사그라졌다. 그럼에도 상황파악 못하고 계속 소문을 들먹이는 몇몇 귀족영애들은 루제가 직접 나서서 하나하나 타진해나갔다. 그런 그녀의 곁을 연합으로 다시 태어난 유사모와 카사모 회장 및 그 외 회원들이 좌우를 차지하며 함께하곤 했다. 마침내 유리엔와 카엘이 그리 바라마지않던 도장을 서로에게 찍었다는 사실에 눈물까지 흩뿌린 루제가 루네를 이끌고 밤새 축하파티를 벌인 일이나, 얼마 뒤 있은 성대한 결혼식에서 유리엔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의 자태를 보여주며 수많은 남정네들을 상사병으로 앓도록 만든 일, 그리고 우연인지 고의인지 부케를 받은 로웬이 그 후 얼마 뒤 방학이 끝나고 아카데미로 돌아가자마자 약혼하고 싶은 상대가 생겼다며 편지를 보내온 일 등은 아직 나중의 일이었다. 그리고 신혼여행은 어디가 좋겠냐는 말에 대륙을 한 바퀴 돌자고 답한 유리엔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카엘이 알게 되는 것은 그보다 더 뒤의 일이다. ===================== 완결입니다^^ 밋밋하시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죄송...() 못다한 둘의 알콩달콩을 담은 에필로그 및 외전들은 앞으로 차근차근 연재될 예정입니다:D 감사합니다!